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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Islamic Societies

Part III. The Modern Transformation: Muslim Peoples in the 19th and 20th Centuries

Introduction (pp. 551-570)

- 18세기 들어서 무슬림 글로벌시스템이 자리를 잡게 됐으며 이는 18-19세기에 유럽


의 침략에 의해 이들 사회의 발전은 크게 왜곡되기 시작했다. 18세기 말부터 러시
아, 네덜란드, 영국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등지에서 식민지 또는 보호령을
수립했고 유럽의 상업·외교적 개입 또한 상당한 정도 진척됐다. 19-20세기에 유럽
국가들은 천연자원과 시장 확보를 위해, 그리고 서로간의 정치경제적 경쟁 목적으
로 이들 지역에 제국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 예를 들어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정복을 완성했고 러시아는(정도는 덜하지만 중국
도 마찬가지) 중앙아시아를 차지했으며, 영국은 인도와 말라야에서 대영제국을 확립
하고 중동 일부, 동아프리아, 나이지리아, 서아프리카 일부도 정복했다. 프랑스는 북
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을 자국 통치하에 넣고 중동 일부와 다른 지역
에도 영향력을 뻗쳤다. 독일과 이탈리아도 그 규모는 적지만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 비록 20세기 들어 유럽 열강들이 무슬림 세계 대부분을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넣긴
했지만 각 나라마다 그 지배 영향과 양상은 달랐고 각 피지배국의 제도적, 문화적
차이에 따라 오늘날의 각기 다른 이슬람 사회 형성을 가져왔다. 이 3부(22-31장)에
서는 유럽의 개입이 각기 다른 무슬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 이들 사
회를 형성하는데 그런 개입이 어떻게 달리 작용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근대화 개념

-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은 많은 경우 “근대화”를 보편적인 발전과정으로 파악해왔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근대화 과정은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되긴 했지만 다른 나라에
도 점차 확산되어 이들도 서구 사회와 유사한 형태로 발전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또 모든 사회는 다 동일하고 다만 다른 점이라고는 단선적인 발전과정에서
어느 단계에 와 있느냐에 따라 선진적 또는 후진적인 사회의 차이만 있다고 봤다.
서구인들과 마찬가지로 제3세계 사람들 또한 최근까지만 해도 이런 관점을 무비판
적으로 수용해서 유럽의 근대문화가 인류발전의 최고형태라고 봤고 유럽문화의 특
성이야말로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모델이라고 파악했던 것이다.
- 그러나 이런 역사적 관점은 이제 거부된 지 오래고 오늘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개념으로 대체된 바 있다. 그 첫 번째 관점은 세계자본주의경제를 비유럽 사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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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경제적·기술적·계급적 변화의 원천이라고 보며, 경제·기술적 변화를 근대화의 가
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는 반면 국가조직형태나 문화는 부차적 중요성만을 가졌다
고 본다. 따라서 전세계의 모든 사회는 경제적 측면에서 공통적인 특성을 갖는 한
편 문화적·정치적(“상부구조”) 측면에서만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 한편 두 번째 새로운 관점은 보편적인 유럽적 근대화 모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비록 근대화 개념은 유럽에서 유래한 것이긴 하지만 이는 차용, 채택, 타의에
의한 강요를 통해서 다른 사회로 확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유럽의 다른 지
역에 대한 영향은 경우에 따라 다 다르며 그 차이의 정도는 해당 사회 내부의 엘리
트들과 제도,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근대화는 복수적인 개념이며 이는 제3
세계 토착 엘리트들이 유럽의 도전에 대응하여 자신의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나가느
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 여기서 발전 패턴을 결정하는 요인으로서 토착 엘리트, 제도, 문화의 역할을 강조해
야 하는 이유는 무슬림 사회와 유럽 사회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즉 19-20세기
유럽 사회는 많은 경우 경제적인 측면에서 사회계급이 결정됐던 바 있다. 이들 사
회에서 부르주아 엘리트들은 경제발전, 국가형성, 세계정복에 나서는 선봉이었다.
반면에 무슬림 사회에서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사회계급은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
지 못했다. 이들 사회에서 경제란 부족·커뮤니티·길드·국가구조 하에 복속되어 규제
를 받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국가 엘리트와 부족·종교 지도자들이 모든 토지와 교
역통제권을 쥐고 있었다.
-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토착 엘리트, 제도, 문화는 무슬림 사회에서 유럽의 제국주의
침략만큼이나 중요한 결정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들 지역에서 유럽의
영향은 무슬림 사회 내부 토착 엘리트들의 저항과 협력을 통해 매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 어떤 경제적 영향이 닥쳤든 관계없이 무슬림 사회의 엘리트들은
유럽의 개입을 경제적인 것보다는 정치·문화적 측면에서 파악했고 경제적 영향은
이들 엘리트들로부터의 정치·문화적 대응을 초래했다.
- 그런 이유 때문에 앞으로 3부 전체에서는 무슬림 사회에 대한 유럽의 영향과 대응을
해당 사회 내부의 연속성과 근대적 변화과정에서의 그 역할에 초점을 두고 서술하도
록 하겠다. 따라서 경제·기술적 변화는 부차적인 중요성만을 갖게 될 것이고 이들 사
회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엘리트, 제도, 문화의 연속성에 더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무슬림 근대사의 세 시기

- 무슬림 사회의 근대사는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누어 서술되곤 한다. 그 첫 번째 시기


는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로서 무슬림 국가시스템이 붕괴되고 유럽의 상업
적·영토적 지배체제가 완성되는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기에 무슬림 사회의 정치·종
교·부족 엘리트들은 이념적·종교적 측면에서 새로운 접근법을 통해 유럽의 개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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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응하려 시도했다. 두 번째 시기는 20세기 민족국가 형성기로서, 무슬림 엘리트들
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 근대적 개념의 정치적 아이덴티티를 부여하고 경제발전과
사회변화를 추구하려 했다. 민족국가 형성기는 1차대전 이후부터 시작됐으며 많은
경우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민족국가 형성에 따라 대부분의 무슬림 국가에서
는 어떤 방향으로 사회를 발전시켜야 할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슬람이 어떤 역
할을 해야 할지에 대한 논란과 갈등이 일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시기
라 할 수 있다.

p. 557. Islamic Modernism and Islamic Reformism

- 유럽 열강들에 의한 무슬림 사회의 식민지지배는 전근대 무슬림 사회의 기본제도를


뒤흔들어 놓고 전세계에 걸친 무슬림 정치파워의 쇠퇴와 일부 지역에서의 무슬림
지배를 약화시켰다. 예를 들어 오토만제국은 발칸반도 영토를 잃고 중앙아시아 무
슬림 국가들도 러시아와 중국 영향하에 들어갔다. 또 남아시아에서도 인도가 분할
됨에 따라 파키스탄(동·서파키스탄)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힌두교 영향하에 들어
갔다. 아프리카에서도 무슬림 지하드 국가*들이 대부분 패배했다.
„ 여기서 아프리카의 “무슬림 지하드 국가”란 아마 19세기 초 하우자랜드(오늘
날 북부 나이지리아)에서 우스만 단 포디오(Usman dan Fodio)가 주도한 지하
드(1804-08), 수단에서의 마흐디 반란(1881-98, The Battle of Omdurman 참
조) 등을 지칭하는 것 같다.
- 대부분 무슬림 국가에서 식민지지배는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부상을 초래했다. 구체
제 하의 엘리트들 대신에 이제 군부·관료계층·지주출신 인텔리계층들로부터 새로운
엘리트들이 대두했고 나중에는 근대교육을 받은 중산층·하층 출신의 인텔리, 기술자
집단, 군인집단 등이 득세했다. 한정된 범위 내에서긴 했지만 상인, 대농장주, 산업
노동자 계급들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들 엘리트는 각 무슬림 사회에서 근대화의
전위 역할을 했다.
- 무슬림 국가 엘리트들은 유럽의 압력에 대응하여 대체로 다음 두 가지 반응을 보였
다. 첫째는 서구 선진 과학기술과 문화에 매료된 엘리트·인텔리 계층에 의해 주도된
근대적·세속적 민족주의 개념 정립이었다. 이들은 이슬람 종교 자체도 유럽식 국가
경제형태에 맞춰 재구성돼야 한다고 봤다. 두 번째 반응은 울라마와 수피 지도자들
이 주도하고 부족지도자, 상인, 대농장주 등에 의해 실행에 옮겨진 무슬림 커뮤니티
의 개혁과 이슬람 원리에 근거한 모든 사회제도의 재구성이었다.

터키, 이집트, 이라크·시리아·레바논, 튀니지

- 물론 무슬림들의 대응 양상은 지역에 따라 매우 달랐다. 터키, 이집트, 이라크·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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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바논(fertile crescent), 튀니지 등 오토만 국가들에서는 한결같이 기존 정치엘
리트들과 정치·기술·문학 분야의 인텔리들에 의해 주도됐다. 이들 지역에서 유럽의
개입(정치·외교·상업·제조업·교육 등 분야에서)은 무슬림 토착 부르주아들을 약화시
켰고 경제력을 국가 엘리트들에 몰아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경제적 변화는 생산수
준 향상과 소득분배에만 한정됐을 뿐 경제나 계급구조의 구조적 변화에는 큰 영향
을 미치지 못했다.
- 이 지역에서 정치엘리트와 인텔리들의 대응은 수 세대에 걸쳐 일어났다. 18세기 말
팔레스타인, 19세기 초 오토만제국 및 이집트, 19세기 중반 튀니지 등지에서 정치엘
리트들은 군대 정비, 관료행정의 중앙집중화, 세수(稅收) 증대를 위한 경제활동 장
려 등 각종 개혁을 시도했다. 이들은 또 차세대 전문가집단 및 행정관료 양성을 위
해 근대적 학교 수립에도 신경을 썼다.
- 이런 국가 개혁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인텔리겐차 계층이 형성됐으나 그 형성과
정은 각 나라에 따라 다르다. 오토만의 경우 국내 전문학교와 유럽 유학을 통해 양
성된 의사, 엔지니어, 군장교, 행정가 집단이 생겨났다. 이들 서구 교육 혜택을 받은
엘리트들은 일부가 국가 관료로 흡수됐지만 대다수는 법률, 언론, 문학 분야에서 활
동을 했고 때로 기존 엘리트들에 대항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기도 한다.
- 이집트에서는 새로운 인텔리겐차 계층의 형성과정이 좀 달랐다. 이집트에선 국가가
경제를 완전히 통제했다는 면에서 이 나라 개혁 프로그램은 다른 지역의 것과 구분
된다. 무하마드 알리(1805-48)는 관개를 개선하고 면화생산을 장려했으며, 무역의
국가독점을 시도했으며, 군수품 생산을 위해 각종 공장을 설립했다. 이집트에서는
급격한 경제적 변화를 통해 새로운 지주계급과 관료계급이 생겨났으며, 이들의 자
녀들이 19세기 말에 정부관료, 변호사, 언론인, 정치인으로 나서게 된다. 1882년 영
국 식민지 확립으로 이집트 국내 엘리트는 권력에서 쫓겨나고 하급 관료직에 머물
거나 자유업, 언론업 등에 종사하면서 반제국주의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 아랍의 fertile crescent 국가들에서 유럽의 정치적·상업적 영향력은 1차대전 이후까
지도 구조적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다만 19세기 중후반에 걸쳐 교육·문학적 영
향은 아랍 문화의 르네상스를 가져오고 아랍 문학상의 민족주의를 불러일으켰다.
레바논과 시리아에서 새로운 인텔리겐차는 유럽과 오토만 후기 근대교육의 직접적
결과로서 생겨났다. 1920년대에 식민지화는 서구교육을 받은 장교, 지주, 종교지도
자, 그리고 때로는 부족지도자와 상인계층들까지 합세한 반제국주의 인텔리 세력을
형성했다. 또 1930-40년대 들어 중하류 계급 출신의 장교, 기술관료, 언론인들은
그런 민족주의 운동에 박차를 가하는데 기여했다.
- 튀니지에서도 유사한 발전의 단계를 밟았다. 1881년 프랑스 보호령 수립 전까지 유
럽의 침략에 대한 대응은 주로 국가 관료들로부터 나왔다. 즉 이들은 튀니지 국가
체제를 개혁하고 근대화함으로써 외침(外侵)에 대항하려고 했던 것이다. 프랑스 보
호령 수립 이후 서구 교육 또는 근대적 무슬림 교육을 받은 튀니지 엘리트들은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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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의 지배에 맞서고 정치적 자유 확보를 위해 투쟁했다. 대체로 1890년에서 1920
년 사이에 튀니지 국내의 리더십은 주로 정부 관료, 개혁성향의 울라마, 프랑스에서
교육 받은 명망가들로 구성됐었다. 1930년대 들어서 아랍-프랑스 교육을 받은 지방
도시 중하류계급 출신의 새로운 인텔리 계층이 부상하면서 튀니지 독립운동의 주도
권을 잡게 됐다(하비브 부르기바).
- 위의 세 지역 모두에서 울라마와 상인계급은 부차적 역할을 담당하는데 그쳤다. 울
라마들은 이집트, 시리아, 튀니지에서 민족주의 운동 초기단계에서 소극적인 참여자
역할을 하긴 했으나 나중에 가서 서구 교육을 받은 인텔리겐차들에 모두 밀려나갔
다. 1930년대 들어서부터야 경제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고 상인계층 및 노동자층
이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이들의 역할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인텔리겐차들의 주도권은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 다른 무슬림 지역에서도 인텔리겐차들은 구체제 국가 엘리트나 개혁 프로그램의 지
원 없이도 생겨났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서는 유럽 열강의 직접 통치에 따라 과거
정치엘리트들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중하급 식민지 행정관료로서의 지위에 만
족해야 했다.
- 예를 들어 인도에서 영국의 직접 통치에 따라 무슬림 엘리트들은 정치고위직에서
쫓겨나고 무슬림 대지주들 또한 자신들의 지위 약화를 경험해야 했다. 이에 대응해
서 무슬림 정치엘리트들은 근대적인 인텔리겐차로 탈바꿈해야 했고 이들을 주도한
인물은 사이드 아흐메드 칸(1817-98)이었다. 칸을 중심으로 이들은 알리가르흐 대
학(Aligarh Muslim University; 그 전신 前身은 Muhammedan Anglo-Oriental
College)을 설립하고 근대적 이슬람 교육의 개념을 확립했다. 20세기 초에 들어 알
리가르흐는 영국제국주의에 대한 인도 무슬림 저항의 중심이 됐고 나중에는 파키스
탄 독립의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산실이 됐다.
-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지배는 전통적 지배계급인 “프리야이”를 네덜란드 식민지
배의 주구(走狗)로 만들었다. 네덜란드 식민당국은 서구적 교육을 확대했지만 이는
주로 전통 엘리트들을 지배 도구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식민지하에 설립된 각
종 의대, 법대, 기술전문대학 등은 식민지배를 위한 관료들을 배출하는 한편 후에
민족독립을 위한 인텔리겐차 층을 양성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슬람 근대주의와 세속적 민족주의

-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유럽의 지배를 받은 무슬림 국가에서 서구적 교육을 받은 엘


리트들은 독립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정치 이데올로기 정립에 노력했다. 이
들은 이슬람 근대주의(Islamic modernism), 세속적 민족주의(secular nationalism),
때로는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채택하기도 했다.
- 이슬람 근대주의는 19세기를 통틀어 무슬림 엘리트들의 지배원리였으며 이는 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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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이 내세우던 이슬람 개혁주의(Islamic reformism)와는 구분되어야 하는 개념이
다. 이슬람 근대주의의 핵심 아이디어는 유럽 열강에 대한 무슬림의 패배는 자신들
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고 따라서 유럽의 군사기술을 도입하고
국가 권력을 집중시키며, 경제 근대화에 주력하며, 근대적 교육을 확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즉 이는 중세적 이슬람 문명의 껍질을 벗어버리긴 하되 이슬
람 종교 자체를 버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슬람 가치 가운데 지
금까지 경시되어 왔던 합리성, 도덕적 행동주의, 애국심 등이 재강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 이런 이슬람 근대주의는 최초로 1860-70년대 Young Ottomans들이 내세웠었다.
이들은 이슬람 기본원리에 충실하면서 오토만 체제를 헌정제로 변화시키고 사회도
덕성을 새롭게 세우며, 터키어 간소화를 통한 문화적 부흥을 꾀했다. 인도에서도 사
이드 아흐메드 칸은 영국 식민지배 하에서 인도 무슬림들이 생존하기 위해선 차세
대 무슬림 지도자 양성이 필요하고 이들은 이슬람 원리에 충실한 동시에 근대세계
의 정치적·과학적 문화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한편 자말 알딘 알아프가
니(Jamal al-Din al-Afghani, 1839-97)는 그런 지역적 한계에서 벗어나 이슬람의
근대화에 노력하는 전세계 무슬림들의 국제적 연대를 주장했다. 즉 이슬람 근대주
의란 국가권력의 회복을 위해 투쟁하되 토착 사회·문화에 기반하는 엘리트들의 정
치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 이슬람 근대주의는 곧 세속적 민족주의로 넘어갔다. 오토만제국의 경우 Young
Ottomans는 Young Turks로 대체됐다. 튀니지의 경우 제1세대 근대화주의 엘리트
들은 이슬람 근대주의와 세속 민족주의 중간입장에 서 있었지만 1930년대 들어 그
주도권은 세속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독립운동가들 손으로 넘어갔다. 아랍국가의
경우 1차대전 말엽부터 다마스커스 명망가들은 이슬람에서 아랍민족주의 쪽으로 그
초점을 옮겨갔다. 이집트에서 제1세대 근대화론자들은 세속적 자유주의성향의 정치
정당에 의해 대체됐다. 인도의 경우 알리가르흐 대학 졸업생들은 라이프스타일에선
근대화주의적인 반면 개인 종교성향으로는 이슬람적이었지만 인도의 독특한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무슬림 민족국가 형성이라는 단일 목표 하에 통일전선을 구성했다.
다만 인도네시아에서만 프리야이 전통 지배계급은 이슬람 근대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장 세속적 민족주의로 넘어갔다. 이는 어쩌면 이슬람 가치가 이들 정신세계
속에 완전 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고도 설명될 수 있다.
- 각국의 엘리트들이 세속적 민족주의를 채택한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
으나 전술적인 면에서도 설명될 수 있다. 즉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기존 엘리트들
의 이데올로기와 분명히 달리 하고 그럼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던 것이
다. 예를 들어 오토만의 Young Turks들은 술탄과 보수적 관료들이 범이슬람 연대
를 주장하는데 대항하여 민족주의를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 채택했던 것이고 레바
논·시리아의 민족주의는 무슬림 인구가 대부분인 이 지역에서 기독교 엘리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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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 지(枝)였다. 튀니지의 경우 기존의 개혁주의적 성향
의 지배 엘리트들에 대항하여 아랍-프랑스 교육을 받은 신흥 지식인들이 민족주의
를 강조했던 것이고 인도네시아에선 프리야이 민족주의가 무슬림 상인계층의 개혁
주의 운동에 반대하여 고개를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울라마들의 이슬람 개혁주의 운동

- 정치 엘리트들과 인텔리들이 이슬람 근대주의와 세속적 민족주의에 관심을 기울이


는 한편 울라마들과 이에 편승한 상인, 장인, 부족지도계층들도 별도의 정치운동을
벌였다. 다수의 무슬림 국가들에서 울라마들은 식민지배와 국가 지배 인텔리겐차들
에 반대를 했다. 이란과 인도네시아에서 그런 반대운동은 주로 전통적 학자 계층들
에 의해 주도됐다.
- 이란의 경우 러시아의 영토확장과 러시아·영국에 의한 경제적 침탈(국가독점 양허,
천연자원 채취·관개·은행 등에 대한 투자, 샤에게 주어진 막대한 차관 등)은 시아
울라마들로부터 맹렬한 반대를 초래했다. 이들은 러시아의 군사적 팽창과 외국자본
의 침탈, 샤 왕가가 주도하는 군사·행정·교육 분야의 개혁에 모두 반대했다. 20세기
초에 울라마가 주도하고 상인, 장인, 인텔리들이 가담한 혁명세력이 왕가(王家)를
전복하고 짧은 시기에 불과하지만 헌정체제를 수립했다. 이는 이란에서만 볼 수 있
는 약체 국가와 강성 울라마·부족·길드라는 특성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 인도네시아의 경우 정치엘리트가 네덜란드 식민당국에 협력세력이 된지 오랜 상황
에서 반식민 저항운동은 주로 농촌의 울라마들에 의해 주도되고 수피 브라더후드를
통해 조직된 단체들에 의해 이뤄졌다. 서부 자바에 위치한 반텐에서 이들은 농민반
란을 일으켜 네덜란드 식민지배 당국과 프리야이 엘리트들에 저항했다. 오토만제국
의 경우 울라마들은 국가 엘리트 밑에 복속되어 저항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
하지 못했던 반면 인도네시아에선 울라마 주도의 저항이 주된 반식민운동을 이뤘다.
- 많은 경우 울라마 주도 운동은 개혁주의라는 성격을 띤다. 이슬람 개혁주의 운동은
원래 17-18세기 유럽 침략 이전부터 있어왔던 것으로, 예를 들어 아라비아와 카이
로에서 국가에서 임명되지 않은 울라마들과 수피 학습그룹들은 이슬람 순화(純化)
를 부르짖고 코란과 하디스, 수피 이슬람 전통에 근거한 신앙과 관행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 이들 개혁주의자들은 무슬림 국가가 비신도들에 대해 너무 관용을 베풀고 있다며
이를 비판하고 수피 성인 숭배에 반대하고, 보다 엄격한 종교관행을 지키며, 미신
또는 마술에 근거한 관행에도 반대했다. 이들은 종교의식의 엄수, 도덕적 책임의 강
조, 보편적 무슬림 사회 실현의 추구 등을 주장했다.
- 아라비아와 카이로에서 떠돌이 학자들과 학생, 수피들은 이런 개혁주의적 원리를
인도, 인도네시아,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등지로 전파했다. 이런 개혁주의 원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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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두 가지 시대상황에 적절하게 맞아떨어졌다. 즉 첫째로 개혁주의는 단일 이념
을 갖지 못하고 통일되지 못한 사회나 농촌마을로 구성된 지역에서 통일 이데올로
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즉 이런 개혁주의 원리는 정복을 위한 군사동원이나 새로
운 국가 형성, 반식민주의 저항운동 등을 위한 좋은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었던 것
이다.
- 그런 개혁주의 운동의 초기 사례는 아라비아에서의 와하비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개혁주의 전도자와 사우디 왕가 간의 연합으로부터 생겨난 이 종교운동은 아라비아
반도의 수많은 부족들을 통합시켜 단일 왕가를 탄생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 것 말고도 서아프리카 세네감비아에서의 개혁운동, 알제리아, 모로코, 서아프리
카에서의 티자니 파(Tijani order) 득세, 리비아에서의 사누시(Sanusi)에 의한 부족
통일, 나크시반디 파(Naqshbandi order)에 의한 코카서스, 중앙아시아 반식민지배
저항운동, 인도 북서부에서 일어난 사이드 아흐마드 바렐위 주도 파탄 족(族) 저항
운동 등도 모두 이슬람 개혁주의 운동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두 번째로 개혁주의는 유럽의 정치적 개입과 새로운 경제적 계급의 부상을 가져오
는 경제적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서 농촌·도시 상인계급 속에서 주로 일어났던 것이
다. 예를 들어 벵갈(오늘날 방글라데시 및 인도령 웨스트 벵갈)에서 “파라이
디”(Fara’idi) 개혁주의 운동은 영국 지배가 시작되고 힌두계 및 영국인 지주들이
늘어남에 따라 그에 대한 저항으로 생겨났다. 인도 북부에서 영국 식민지배와 무갈
제국 붕괴로 인해 소위 “디오반드”(Deoband) 개혁 울라마 운동이 대·소도시 중산
층 사이에서 고개를 들었다.
- 동남아시아의 경우 19세기 초 수마트라를 중심으로 한 파드리(Padri) 운동은 수출
용 커피생산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메카·메디나 순례를 마치고 온 개혁주의 성
향의 학자들은 커피 재배농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들은 농촌마을 이슬람화 운동을
펼쳤다. 19세기 말 들어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말레이, 싱가포르 등 주요 항구도시의
상인 커뮤니티에는 개혁주의 신앙이 거의 지배적으로 됐다. 이후 커피에 더해 고무·
담배·후추·설탕·파인애플·팜오일 등 농산물 수출이 늘어나고 이에 따라 노동자층 증
대, 도시화, 상업활동 증대 등으로 인해 인도네시아·말라야는 20세기 초 무하마디야
운동(인도네시아)과 카움 무다 운동(말라야)의 주요 무대가 됐다.
- 이슬람 개혁주의는 때로 이슬람 근대주의와도 결합되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이집트 학자인 무하마드 압두(1849-1905)는 개혁주의 원리(코란과 모하멧 가르침
으로의 회귀, 종교적 문제에 대한 독자적인 판단의 여지, 낡은 전통에의 집착 버리
기, 컬트에 가까운 수피 관행에의 반대 등)와 근대주의적 사고방식을 적절하게 배합
했다. 이런 새로운 사상은 추후 이집트·아랍·북아프리카에서 살라피야 운동의 근간
을 이뤘다.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이 운동은 1920년대 페즈와 다른 주요 모로코 도
시에서 상인 부르주아들의 핵심 이념이 됐으며, 알제리에선 도시 소자산가들과 농
촌출신 빈곤층에 크게 어필했다. 모로코·알제리에서 개혁주의는 계급한계를 뛰어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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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프랑스 식민지배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이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 따라서 무슬림 사회의 붕괴와 유럽의 침략에 대한 내부적 대응 방식은 크게 두 가
지로 나뉘어질 수 있다. 즉 하나는 정치 인텔리들로부터이고 다른 하나는 울라마
계층으로부터 였던 것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이슬람 사회가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성을 유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오토만제국 같이 울라마를 국가가 철저하게 복속시킨 경우에 개혁과 민족독립을 거
의 단독으로 주도한 계층은 정치 인텔리들이었던 반면, 양자가 거의 대등한 세력을
유지했던 다른 무슬림 사회에서는 유럽 식민지배 이후 이슬람 근대주의자·세속적
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무슬림 전통분자·무슬림 개혁주의자들이 각기 각축을 벌이면
서 식민지배자들과 투쟁을 벌이는 양상을 보였다. 이런 복수 전선(戰線) 형성 양상
과 그에 따른 복잡한 반식민투쟁, 독립 이후 민족국가 형성 과정은 이란·인도·인도
네시아·알제리 등지에서 모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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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2. Iran: State and Religion in the Modern Era (pp. 571-591)

- 근대 이란은 사파비드 왕조(1501-1722)로부터 국가경영 패턴과 종교·부족(uymaq


우이마크) 제도 등을 승계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자르 왕조(1779-1925)
또한 약체 중앙정부가 강력한 지방 부족장들과 맞서고 종교집단과도 끊임없는 충돌
을 한다는 점에서 사파비드와 상당히 닮은 점이 있다. 19세기에 유럽 침략과 문화
적 영향, 경제적 침탈 등은 국가권력과 사회간의 갈등을 첨예화시키고 결국엔 1905
년 헌정혁명을 초래했다. 이 혁명에서 울라마들은 인텔리·상인·장인들과 연합세력을
구성하여 의회주의 체제를 수립하려 시도했다.
- 팔레비 왕정(1925-79)는 그 이전의 역사를 그대로 반복했다고 할 수 있다. 팔레비
샤들은 국가권력 집중화에 전념하고 이란 경제와 사회 근대화에 주력했으나 마찬가
지로 울라마들과 충돌하여 전국적인 저항운동에 부닥쳐야 했다. 따라서 지난 200년
에 걸친 이란 역사는 국가와 울라마 간의 대투쟁이라고 요약해도 될 것이다.
- 이란의 근대사는 카자르 왕조로부터 시작된다. 카자르 군주들은 사파비드 왕조 말
기 대혼란과 우이마크 군벌들의 패권 다툼 속에서 권력을 장악했으나 그 후 한번도
제대로 국가 전체를 효과적으로 통치한 적이 없다. 카자르 군대는 주로 소수의 투
르코만 계 친위대와 조지아 출신 노예들로 채워졌고 중앙정부 행정은 국세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했다. 카자르 통치하의 지방 주(州)들은 수많은
부족들과 타민족들로 채워져 있었고 이들은 자체적 지방 지도자(칸 Khan, 일칸
Ilkhan)들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 카자르 왕조가 이렇듯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종교계의 파
워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18-19세기 사이 이란의 울라마(무즈타히드, 또는
종교법의 해석자)들은 유례없이 강력한 자율성을 갖게 됐다. 종교학자들의 권위는
이맘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가장 신앙심이 깊은 사람만이 무슬림 커뮤니티의 진정
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통해서 더욱 커져만 갔다. 울라마는 또 일상적인
법률행정 처리와 신탁기금 관리, 자선활동, 아이탄생·장례·혼례 등에서 주례를 봄으
로써 평민들과의 연대를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다. 특히 이들은 바자에서 일하는 장
인, 노동자, 상인들과 유난히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다.
- IDEA; 로버트 카플란(The Ends of the Earth, 1996, see Ch. 12 “Bazaar States”)
같은 저자는 1979년 이란 혁명의 핵심세력이 다름 아닌 종교지도자들과 이들 바자
리(Bazaaris)들간의 결탁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전통(국가와 울라마
간의 갈등, 울라마와 바자리 간의 결탁)은 이란의 오랜 역사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 바자리들은 종교단체에 후한 헌금을 하고 여기에 더해 국가소유 토지까지 소유함으
로써 재단이 설립될 수 있었다. 이런 재단을 통한 종교활동은 종교 커뮤니티가 국
가와는 분리된 상태에서 독립적인 존재를 유지하고 정치활동까지 벌일 수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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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요인이었다.

영국·러시아 간의 “그레이트 게임”

- 유럽의 개입은 카자르 왕조의 위치를 크게 뒤흔들어놓고 중앙정부와 울라마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유럽 열강의 이란 침략은 맨 처음 18-19세기
러시아의 진출로부터 시작됐다. 러시아는 이란 북서부를 장악하고 1813년 굴리스탄
조약을 통해 조지아, 다르반드, 바쿠에 더해 시르반을 포함한 아르메니아 일부 영토
를 이란으로부터 빼앗아갔다. 1826년에 러시아는 타브리즈를 강탈하고 1828년 투
르만차이 조약에서 아르메니아 전역과 카스피해 제해권을 빼앗고, 대 이란 무역상
의 각종 특권을 차지했다. 이후 1864-85년 사이에 러시아는 이란의 중앙아시아 영
토를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 이때부터 러시아의 이란 진출은 영국으로부터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고 있었고 인도 방어를 위해 러시아의 남진(南進)을 막으려
고 무력에서 스파이 공작에 이르기까지 온갖 수단(The Great Game)을 다 썼다. 결
국 러시아와 영국은 일종의 타협을 봐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를, 영국
은 아프가니스탄을 각각 차지한 후 이란은 중립지대로 두고 영국이나 러시아 어느
쪽에서든 직접 식민지화를 하지 않기로 했다.
- 1857년 이후 영국·러시아의 대 이란 침략은 대부분이 경제적인 것이었다. 1872년
이란 정부는 폴 로이터(Baron de Reuter)에게 막대한 양허권을 제공하여, 그는 24
년간 이란 관세수입 수취권을 얻고 철도·전차 건설 독점권, 각종 광산 독점채굴권,
운하·관개수로 건설권, 샤에 로열티 일부를 공여하는 조건으로 국영은행·도로·전신
망·섬유공장 설립권까지 얻었다. 1889년 페르샤제국은행(Imperial Bank of Persia)
이 영국 후원 하에 세워지고 1890년 이란 연초산업에 영국업체가 진출하여 독점
영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공여받았다.
- 러시아 또한 영국과 유사한 경제 양허권을 얻었다. 카스피해 조업권이 러시아에 넘
어갔고(1888년) 페르샤할인은행이 러시아 후원 하에 설립(1891년)됐으며, 1890년
대를 통틀어 수많은 러시아 정부 차관이 샤에게 주어졌다. 결국 1907년 들어 영국
과 러시아 간의 협정을 통해 이란은 남북으로 갈려서 남쪽은 영국, 북쪽은 러시아
의 영향권(sphere of influence)에 들어가서 그 중간지대는 중립지대로 남게 됐다.

울라마의 반외세·반정부 투쟁

- 이런 상황에서 국가 엘리트나 인텔리 개혁주의자들은 이란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


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란 같이 중앙정부가 약한 나라에서 정부 개혁을 아무리 해
봤자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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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집단에서는 군사력 집중화에 반대했고 울라마들 또한 정부조직의 세속화를 원치
않았다. 러시아 또한 철로 건설에 사사건건 방해를 놓았다. 이런 사방에 걸친 장애
물 속에 카자르 왕조의 개혁은 국가파워 중앙집중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
라 외침(外侵)에 대한 대항에도 효과적이지 못했다.
- 반면 외세에 대한 저항은 다른 곳에서 시작됐다. 즉 서구교육을 받은 인텔리들은
체제의 부패에 반기를 들고 권력으로부터의 소외에 대해서도 불만을 터뜨렸다. 유
럽의 경제침탈과 국가 독점사업으로 인해 손해를 입던 상인들과 장인들 또한 울라
마들과 결탁하여 카자르 체제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났다. 울라마들은 외세와 외세
의 주구 노릇을 하는 국가에 대해 반대를 하는 주도세력이 됐다.
- 일찌감치 1826년부터 오토만 군대를 모방하여 서구식의 군대편제를 하려 드는 정
부에 반대하여 울라마들은 운동을 벌였고 1828년 러시아의 코카서스 점령 이후 이
들은 전국에 걸친 지하드를 펼쳤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들어 울라마들은 갈수록
적대화되는 정부권력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새롭게 부상하는 종교운동으로 인해서도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사이드 알리 무하마드가 주도하는 이 시아의 일파는 울라마
권위를 무시하고 이들을 정부권력에 기생하는 부패한 세력이라고 공격했다. 그는
1844년 자신을 히든 이맘이라고 선언하고 때로 벱(Bab, gateway)이라고 자칭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코란과는 별도의 새로운 경전인 “바얀”을 펴내기도 했다.
- 결국 사이드 알리 무하마드가 주도한 운동은 정부 토벌군에 의해 격파되고 자신은
1852년(1850년?) 정부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한편으로는
아잘리스(Azalis)로 갈라지고 다른 편은 후에 바하이(Baha’i) 신앙으로 발전되어 지
금까지도 이란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성하게 된다.
- 국가와 울라마 간의 긴장관계는 1872년 로이터 양허권 제공 당시에 충돌상태로 발
전된다. 정부에 의한 이런 이권 양허는 울라마들로부터 매국노적 행위로 비난받고
결국 이듬해 결정이 취소되기에 이른다. 이런 전례는 1890년 연초독점 양허 때도
똑같이 적용되어 또 다시 울라마들의 맹렬한 저항이 일어난다. 1891-92년에 울라
마들은 상인,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연초독점에 대항한 전국적인
보이콧을 펼친다. 이 운동은 결국 성공을 거둬 연초독점도 취소된다.
- 1892년에서 1905년 사이는 국가와 울라마 간의 한판 대결(1905-11년의 헌정위기)
을 준비하는 폭풍전야의 시기나 다름없었다. 이 시기에 전통적인 종교세력들은 헌
정체제 수립 운동과 조용히 결합을 시도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러시아에서의 의회
수립(1905년), 오토만제국과 이집트의 근대화 움직임 등은 자국에서의 헌정 정부
수립의 욕구를 더욱 자극했다.
- 아르메니아 계로서 후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빠리에서 교육을 받은 말쿰 칸
(Malkum Khan, 1833-1908) 같은 인물은 런던에서 신문 발행을 하면서 이슬람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든지 이란 근대화를 이룰 수 있음을 역설했다. 그는 강력한 입헌
군주제를 옹호하면서 의회제 도입과 서구화, 근대교육 확산을 주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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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정주의자들과 근대화 개혁론자들은 범이슬람 사상가들과도 연합세력을 구성했다.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Jamal al-Din al-Afghani)와 미르자 아카 칸 케르마니(Mirza
Aqa Khan Kermani)는 이슬람에서 정치적 측면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반제국주의 운
동을 벌이고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했다. 사이드 무하마드 타바타바이 같은 자
유주의 성향의 울라마들도 서구적·세속적 정부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헌정제의
정부조직에 대한 서구 대 이슬람 개념의 차이, 세속법과 이슬람법 간의 갈등, 비무슬
림에 대한 무슬림의 우위, 언론의 자유 대 종교의 전파 같은 핵심적 이슈는 자유주의
적 울라마들의 관심사 바깥에 있었다. 어쩌면 이들은 헌정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무지
의 소치였든지 아니면 부분적으로 전술적인 양보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1905-11년 헌정위기

- 헌정주의 채택을 둘러싼 투쟁은 1905-06년에 절정에 이른다. 샤의 대 러시아 부채


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러시아가 바하이(Baha’i) 교도들을 지원하고 우정·전신부
장관에 벨기에인을 임명한 일 등은 갈등을 첨예화시켜 급기야는 바자에서의 시위를
촉발한다. 1906년 대중들의 제헌의회 구성 요구에 굴복한 정부는 의회 구성을 하긴
했으나 이는 대부분이 “바자리” 세력들에 의해 독점되어 버렸다(장인 지도자 26%,
상인출신 15%, 울라마 20%). 의회는 공식적으로 1979년까지 존재하게 된다.
- 새롭게 제정된 헌법에 따르면 샤는 의회 정부에 복속되는 것이고 이슬람이 이란의
공식 국교로 정해졌다. 또 정부는 샤리아법을 따르게 되어 있으며 울라마들로 구성
된 심의위원회는 모든 새로운 입법안이 이슬람 법에 저촉되는지 여부를 심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 새로운 헌법의 제정은 장장 6년에 걸친 투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헌정주의자 세력은
다수의 울라마·상인·장인·바크티야리(이란 남서부) 부족민들로 구성되었고 주로 타브
리즈와 이스파한 시민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 세력은 샤·보수적
울라마·대지주·지주계층의 하수인들과 적대관계에 놓였다. 결국 이 두 세력은 대투쟁
에 접어들어 1907-08년에 샤는 코사크 군대를 동원하여 의회를 폐쇄했다. 그러나 헌
정주의자들은 1909-11년에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제2차 헌정시기에 자유주의적 개
혁론자들과 울라마 간의 연합은 점차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다. 개혁론자들이 이슬람
원리를 격하시키고 토지개혁을 포함한 폭넓은 개혁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세속적 교육
을 확산시키려 하자 울라마들은 반대에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1911년 러시아가 개
입하여 새로운 체제를 붕괴시키고 샤 정부를 복귀시키는데 성공한다.

팔레비 왕조의 창건

- 근대 이란 국가체제는 1911-25년 반(半)무정부 상태로부터 형성된다. 이 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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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外侵)은 절정에 이르고 1차대전 중에 러시아 군대는 이란 북부에, 영국군은 남
부에 기지를 세우고 주둔한다. 1917년 러시아 짜르체제의 붕괴 이후 이란 전역은
영국의 지배하에 떨어지게 된다. 1919년 영-페르샤 조약(The Anglo-Persian
treaty)으로 이란은 영국의 실질적 보호령이 되고 이 조약에 따라 영국은 이란군대
훈련 책임을 맡게 되고 경제발전을 위한 자본투자에 힘쓰며, 기술·경영 자문관을 파
견하기로 되었다.
- 이와 동시에 소련은 질란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주의 운동을 후원하고 타브리즈와
테헤란의 공산당에 각종 지원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란과 소련은 1921년에 조약을
맺고, 이를 통해 소련이 질란에서 손을 완전히 떼고 이란에 제공했던 모든 부채를 탕
감하고 이권도 포기하기로 했다. 다만 소련은 카스피해 조업권을 계속 갖기로 하고
이란이 다른 외세에 위협 받을 경우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 이런 유리
한 조약 체결로 이란은 영국과 맺은 굴욕적인 1919년 조약을 일방 파기했다.
- 과거 코사크 군대 장교에 불과했던 레자 칸은 맨 처음 육군사령관에 국방장관에 들
어섰다가 정부 혼란을 틈타 군과 경찰을 장악하고 부족 및 지방 호족 세력들을 무
마한 후 1925년 스스로 샤(Reza Shah)를 자칭하고 입헌군주제 팔레비 왕조(1925-
79)를 창건했다. 팔레비 왕조는 이란 역사상 처음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세웠고 야심적인 경제근대화 프로그램을 단행하고 서구화에 전념했다. 국가는 부족
사회에 대해 철저한 통제를 가하고 일정기간에 걸친 한정된 것이 지나지 않았지만
울라마들에 대해서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세속적 학교의 설립과 동시에 종교학교
의 규제, 울라마 판사들의 기능 제한 등을 통해).
- 레자 샤가 맨 처음 손을 쓴 부분은 군대조직의 근대화였다. 그는 새로운 장교단을
프랑스에서 교육시키고 징병제를 실시했다. 그는 서구화된 군대를 만들어 이란 전
국을 통제하는데 성공하긴 했으나 1941년 러시아와 영국으로부터의 개입을 막을
만큼 강력하진 못했다.
- 레자 샤 치하에서 경제개혁은 눈부시게 이뤄졌다. 외국자본을 통한 인프라 투자(철
도, 우정·전신통신, 항공, 면화·모직·실크·설탕정제 등 소비재 수입대체산업 등)도 속
속 이뤄졌고 영국과 러시아의 영향이 줄어드는 반면 독일의 경제·문화·연구 분야에
서의 영향력이 커져갔다.
- 석유는 이란 정부의 중요한 세수(稅收)원이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란에서 최초로 석유가 발견된 것은 1908년 마스지드 이 술래이만에서였고 이듬
해 앵글로-페르샤 오일컴퍼니가 설립되어 석유 채굴에 나섰고 영국정부는 1914년
이 회사의 지배지분을 사들였다. 아바단에는 1915년 정유공장이 설립됐다. 석유생
산은 이란에서 수익성 높은 사업이었음에는 분명했지만 외국기업들이 로열티 조작
에 회사 내 주요직(기술·관리·행정직)에 내국인 채용을 꺼리는 것 때문에 두고두고
원망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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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레자 팔레비 시대

- 2차대전은 이 같은 이란의 정부권력 집중화 및 경제발전 실험을 끝장 내는 계기가


됐다. 이란-러시아를 통하는 병참통로를 유지하고 이란 석유 확보에만 관심을 뒀던
영국과 러시아는 맨 처음 독일인들의 추방을 요구했다. 그런 다음 이들은 이란을
점령하고 레자 샤의 사임을 강요한 후 그의 아들 무하마드 레자 팔레비를 꼭두각시
왕으로 추대했다. 1941-53년 사이에 이란은 외국 열강들간의 각축전에 국내 정당
들간의 권력투쟁 시기를 거치게 된다.
- 같은 시기에 미국의 영향력은 점차 커져서 영국과 러시아를 제치고 이란의 가장 중
요한 보호자 역할을 맡게 된다. 1940년대 말에서 50년대 초까지 이란은 앵글로-페
르샤 오일컴퍼니에 대한 지배 지분을 확보하려고 노력을 한다. 1951년에 국민전선
의 지도자 무하마드 모사데크는 지주·부족지도자·좌익 인텔리겐차·상인계급·울라마
등의 지지 속에 동 석유회사 국유화 법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이후 3년에 걸친 치
열한 투쟁 끝에 미국은 이란 지지를 철회하고 서구열강들은 이란 석유 보이콧에 나
섰다. 이란 경제는 거의 붕괴상태에 빠지고 모사데크 연립정부 또한 균열을 보였다.
이런 속에서 CIA는 이란 군부와 샤를 부추겨서 모사데크 해임을 초래하고(1953년
쿠데타) 결국 권위주의 정부 복귀를 가져오게 된다.
- 결국 1954년 이란국영석유회사(National Iranian Oil Company)를 설립하고 앵글
로-이라니안(나중엔 British Petroleum; 지금은 BP)을 포함한 외국계 석유회사들은
컨소시엄을 형성하여 생산된 석유를 판매하고 그 대금을 이란 회사와 나누는 방식
으로 타협을 맺는다. 이로써 외국 석유회사들은 국유화를 피하고 석유 가격결정과
판매에서 일정한 통제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 1953년 쿠데타 이후 무하마드 레자 샤는 이론적으로만 헌정군주였지만 실제론 절
대군주처럼 행세해서 군과 비밀경찰(SAVAK)을 개인 수하에 부리듯이 했고 장관
임명, 상원의원 절반 임명, 의회선거 조작 등을 통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샤 정권은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의 군사력 및 재정적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
- 국가 주도의 근대화 프로그램(The white revolution)은 1960-77년 사이에 중요한
변화를 초래한다. 이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속적·민족주의적 체제를 공고
화하고 서구화를 가속화하는 것이었다. 이에 더해 경제개발을 위한 농업·제조업 부
문 개혁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토지개혁은 1970년대 이농과 도시인구 급증
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1962-64년과 68년 두 차례에 걸친 지주에게 유리
한 토지개혁으로 수많은 빈농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와 함께 실시한 대규모 기
계화 농장 프로그램 또한 실패로 돌아가 이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일자리를 잃고
도시로 몰려갔다(예를 들어 테헤란 인구는 오늘날 1400만, 1966년 450만).
- IDEA: 이란에서 도시비대화가 진행되고 빈농들이 도시로 와서 빈곤층을 형성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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됨에 따라 과거 농촌 마을에서는 요구되지 않았던 엄격한 이슬람 율법(예를 들어
여성들의 히잡·부르카 착용)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닌가? 다시 말하면 이슬람 근
본주의는 이슬람 사회 도시화와 연관된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는가?
- 산업부문에서 이란은 눈부신 발전을 이뤄서 철강·고무·화학·건설자재·자동차조립 등
분야에서 높은 성장을 거둔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석유수입의 급증으로 이란의
GDP는 크게 늘긴 했지만 이란 국내 산업의 효율성이 너무 낮고 급증하는 수입 소
비재와 무기로 인플레이션이 높아져 근대적 산업부문에 직접 연관되는 사람들 말고
는 오히려 생활수준이 떨어지게 됐다.
- 샤의 근대화 프로그램은 이란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근대화 정책에 따라
서구교육을 받은 인텔리, 관료, 군인, 기업매니저, 숙련노동자 등의 수가 크게 늘어
나고 근대적 경제부문의 규모가 증가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근대
화 혜택에서 소외받은 계층에게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특히 울라마와 장인·상인 등
바자리들의 불만을 샀다. 이들은 샤가 외세에 의존하고 농민과 중하류 계층 사람들
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킨 것에 대해 특히 문제를 제기했다.
- 그러나 1940-70년대에 걸쳐 울라마들의 입장은 불투명했다. 모사데크 실각 이후
이들은 정치적으로 조용한 시기에 접어들고 정부에 대해 암묵적인 협조를 꺼리지
않았다. 1950년-60년대에 전국에 걸친 통신망이 발달하고 콤(Qom)이 시아 종교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됐다. 1960년대에 정부의 경제·사회 정책은 울라마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닥치기 시작했고 이들은 특히 새로운 토지개혁법에 반대를 제기했다. 이
들은 또 여성 참정권 부여나 미국·이스라엘에의 외교적 접근에도 반대했다. 정부와
울라마들 간의 갈등은 1963년 샤가 토지개혁에 대해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제안을
내놓고부터 첨예화됐다. 경찰은 콤에서 울라마들의 시위를 강력 진압하고 그 지도
자인 아야툴라 호메이니를 체포하여 1964년 해외 망명을 보내기까지 했다.
- 호메이니는 시아 중심지인 이라크 나자프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이란 왕정 반대파의
대변인 노릇을 했다. 그는 1971년 저서 Islamic Government를 통해 종교지도자들
이 전제주의 정부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며, 울라마가 직접 나서서 정권탈취를 하는
데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울라마가 왕정의 권력 남용에 반대하는 것은
이란의 오랜 전통이긴 하지만 울라마가 정권탈취를 해야 한다는 것은 호메이니만의
독특한 주장으로 새로운 전통의 탄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이런 상황에서 혁명의 단초는 사바크 비밀경찰의 암살공작을 규탄하는 콤의 종교학
교 학생들에 의한 시위였다. 이에 대응해서 경찰은 시위대에 총을 쐈고 이를 계기
로 매 40일마다 대규모 시위를 벌여 1978년 가을(the month of Muharram) 시위대
규모가 수백만이 넘을 때까지 갈수록 커져만 갔다. 샤는 결국 망명에 나섰고 호메
이니가 이끄는 새로운 신정(神政) 체제가 들어서게 됐다.
- 이란의 이슬람혁명은 이란 국가권력과 종교기구 간의 독특한 역관계 속에서 나타난
현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슬람 사회를 통틀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중요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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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할 수 있다. 이란혁명은 200년에 걸친 이란 국가와 울라마들 간 대결의 절
정이라고 볼 수 있다. 양자는 1891-92년 연초독점 반대운동에서 맞붙었고 1905-
11년 헌정위기 시기에도 투쟁을 벌었다. 특히 레자 샤 시대에 부족 세력을 크게 약
화시킴으로써 대결 양상은 국가 대 울라마 양자간의 대결로 압축됐고 이는 결국
1979년 이란혁명을 결과하게 된 것이다.
- 이란혁명은 전세계적인 의미를 갖는다. 근대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지도자가 정
치체제에 반기를 들어 정권을 탈취했다. 그리고 사상최초로 이슬람이 근대 산업사
회의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국가권력과 종교운동 간의 관계에 대한
기존 관념을 깼고 향후 이란뿐만 아니라 전세계 이슬람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지에 대해 근본적 의문을 제기했다.
- IDEA: 이란혁명은 울라마가 주도하고 소상공인 바자리 세력들이 가담하여 친서방·
세속화 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이다. 그런 한편 대중적 지지는 주로 농촌 빈농, 농촌
에서 갓 올라온 빈민층, 샤 왕정의 경제정책을 통해 피해를 입던 중하류층 도시민
들로부터 받은 바 있다. 반면에 혁명 이후 피해를 입게 된 계층은 수 세대에 걸쳐
도시에 거주하고 세련된 문화를 구가하던 전문가집단·엘리트층들이다. 그런 면에서
이란혁명의 가장 중요한 계급적 경계선(fault line)은 도-농 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을 떠받쳐주던 이데올로기는 다름 아닌 이슬람 근본주의가 아니었던가 싶다.
따라서 혁명 지지세력을 대표하는 문화 또한 조악한데 머물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싶다. 이런 이란혁명의 사례와 한국사회의 발전과정(박정희 개발독재 시대에 농민과
도시거주 이농들이 주도한 경제개발과 지배적 문화, 물질지상주의, 이들의 정신세계
를 떠받쳐주던 종교는 다름 아닌 기복신앙에 가까운 버전의 기독교)을 비교하는 것
도 흥미로운 연구과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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