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판소리, 계급을 넘어서 인간으로...

8.1.서론
모든 인간은 개인적으로 삶을 영위하면서 희노애락을 느낀다.
인간 개인은 사회속에서 살아간다.

사회는 인간 개인이 자유를

펼칠 수 있는 장이면서 인간 개인을 구속하는 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의 이중성은 오랫동안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중요
한 문제였다.
모든 민족은 개인의 슬픔과 민족의 슬픔을 극복하는 지혜를
지니고 있다.

기쁨을 나누는 방법도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개인과 사회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
오래전 인간은 개인을 희생하고 사회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
다.

그것이 인간 개인에게 삶과 행복의 가능성을 더 높여 주었

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개인을 보호하는 기능을 했다.

하지만

점차 개인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조선시대 후기는 한국의 민중들에게 매우 괴로운
시기였다.

사회구조적 모순이 해결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고,

국제관계에서 새로운 서양세력들의 침략이 이어졌다.

왕과 관리

들은 속수무책이었고, 진보적 지식인들은 고민했다.

그동안 개

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던 것으로 여겨지던 봉건왕조는 힘을 잃
었다.

개인들은 조선이라는 사회속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오히

려 사회가 개인의 보호를 받으며 연명하게 되었다.
은 왕과 관료들이었다.

사회의 주인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회의 주

인은 더 이상 왕과 관료들이 아닌 것이 판명되었다.

문제는 그

럼에도 불구하여 여전히 사회의 주인계층에 왕과 관료들이 위치
하고 있는 것이었고, 일반 사람들은 불만이었다.
이런 가치관의 혼란한 시기, 한국의 인민들은 어떻게 자신들
의 삶을 유지했는가.
다.

그것이 이 장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이

민란을 비롯한 다양한 무력투쟁과 계급투쟁 이외에 인민들

은 사회계층간의 통합을 위한 노래를 불렀다.

이 사회계층간의

통합과 화합의 노래는 계급중에서 가장 낮은 천민계층에서 비롯
되었고, 향유계층은 천민에서 양반관리를 비롯한 왕에 이르기까
지 다양했다.
이 노래를 ‘판소리’라고 부른다.

판소리는 한국의 불교음

악인 ‘영산재’와 신라시대 처용설화를 담고 있는 ‘처용무’,
그리고 제주도를 찾아오는 바람의 여신을 맞이하고 보내는 ‘영
등굿’등과 함께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중 하나이다.
한국의 판소리는 한국적 정서로서의 비극과 희극이 동시에 자
아내는 대립이 팽팽하게 조화되어 있다.

슬픔이 기쁨을 향하고,

기쁨이 다시 슬픔을 향하는 그런 과정속에서 역동적인 인민의 삶
이 팽팽하게 드러난다.
그러면 그 가슴 깊은 곳에 위치한, 한국인의 정서는 무엇인
가?
렵다.

흔히 우리가 정서라 할때 그 느낌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
한국인은 매우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만, 한국인은 자신의 느낌을 말로 표현한느 것을 매우 어려워한
다.

다른 차원에서 본다면 복잡한 마음속의 정서를 표현하기 위

해 다양한 언어들이 복잡하게 발달했다.
판소리에 담긴 자유와 저항정신은 왕으로부터 하층민까지 모
두 공감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봉건제도에서 오는 구조적 문제
임을 인정하고 그 제도를 바꾸려 하지는 못했다.
터도 다른 대안이 모색되지 않았다.

지식인들로부

서민들은 무엇인가 잘못되

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확실하게 인식할 수 없었다.
모두들 봉건제도 상황의 ‘왕’과 관리계층을 그대로 둔 채로 개
혁만을 일삼으려 했다.

하지만 역사적 발전은 봉건제도를 넘어

설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가장 뛰어난 임금인 영조와 정조였지만 봉건
제도를 넘어선 혁명을 왕 스스로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여전히

이들 왕에게 개혁은 왕권의 강화를 통한 굳건한 봉건사회를 건설
한다는 의미였다.

종종 인민들이 혁명을 외치며 봉기했지만, 그

것은 모두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역적의 행위로 취급되었다.
그런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에서 판소리는 저잣거리에서 터져
나왔다.

왕은 왕대로, 인민들은 인민대로,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판소리를 들으면서 ‘무엇인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함께 인
식했다.

하지만 무엇을 바꿔야만 했을까?

그리고 무엇을 바꿀

수 있었을까?
그러한 모순에서 빚어지는 ‘비극’을 노래한 것이 바로 판소
리였다.

그래서 판소리에는 한민족의 전통적 미의식과 더불어

현실적 모순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극적 요소가 휘감기면서 역동
적으로 미래로 전해진 것이었다.
괴로움속에서야 비로소 인간 정신은 시험을 받는다.

하나의

민족이 민족적 괴로움을 겪을 때 그 민족의 혼은 시험을 받는 것
이다.

오늘날 살아남은 민족들은 대부분 위대한 민족적 정신을

지니고 수천년, 수만년동안 살아왔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민족

들은 전지구적 상황과 자본주의의 확산속에서 민족적 정신을 지
키고 발전하기 위해, 그리고 생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8.2.판소리 발생 시기의 시대상황
1754년에 유진한(柳振漢)이라는 사람이 호남 지방을 여행하다
가 춘향가를 듣고 한시 이백구(二百句)로 춘향가의 사설 내용을
적은 것이 그의 문집인 『만화집(晩華集)』에 수록되어 있다.
이것이 오늘날 기록문헌으로 확인가능한 판소리에 관한 가장 오
래된 기록이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 판소리가 발생하여 유행한

- 3 -

당이 없고 편이 없이 왕 도는 평평하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라는 구절에서 각각 ‘탕(湯)’자와 ‘평(平)’자를 인용한 것 이다. 들을 상대로 파업을 선언한 것이다. 영조의 어머니는 궁궐에서 나인들의 잔심부름을 하는 무수리 출신이다.것이다.4 - . 한국의 조선왕조는 왕의 권력이 약하고 신하들의 권력이 많았다. 물론 자신의 당을 위해 정치적 다툼 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왕권이 그만큼 약해져 있었 다. 어쩌면 그보다 유학적 가치와 이상이 가장 높았고 그에 따라서 왕과 신하는 논쟁을 거치면서 정치를 이끌어갔다. 봉건왕조가 무너지 거나 새로운 변혁을 맞을 때였다. 영조는 탕평책을 통해 관리들의 소모적 당쟁을 끝내려 했다. . 즉 왕이 신하 영조는 이런 긴장된 분위기 를 잘 이용하여 탕평책1)으로 신하들을 이끌고자 했다. 더구나 임금의 계급은 더욱 중요하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의 출신을 문제 삼으면서 양반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시기는 17세기말에서 18세기 즉 영조(1694~1776)와 정조 (1777~1800)의 시기이다. 그러나 당시의 치열한 당쟁의 이면에는 양반들의 경제적 생존 문 1) 탕평이란 「서경」 ‘홍범구주(洪範九疇)’편에 “편이 없고 당이 없이 왕도는 탕탕하며. 영조는 1694년 아버지인 숙종과 어머니인 무수리 사 이에서 태어났다. 영조 즉위 5년인 ‘기유처분’은 영조가 신료들의 접견 을 거부하고 모든 정무를 거부한다는 결정이었다. 신하들끼리의 당파싸움과 더불어 영조의 즉위에 반대하는 이인좌의 난과 이석효의 역모사 건이 일어나자 영조는 ‘기유처분’을 내렸다. 엄격한 신분제사회였던 조선시대에서 출신성 분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권력을 잃은 양반들은 영조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1729년에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아무 리 신하의 힘이 강하다 하더라도 왕은 왕이었다. 이 시기는 한국의 조선시대만이 아니 라 전세계적으로 혁명과 개혁의 시기였으며. 게 여겨졌다. 탕평책을 처음 제기한 인물은 숙종 20년 때의 학자인 박세채였다.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시기부터 조선조의 당쟁은 명분과 의리 를 잃고 당리당략을 일삼게 되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잘못된 현실정치를 비판 하다가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 정조는 자신이 왕위 에 오르기 전까지 현실정치에 대해 발언을 하지 않았다. . 학식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얼 이라는 이유 때문에 벼슬길에 나서지 못하는 폐쇄적인 사회 체제 를 개선하려는 정조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훗날 이들은 모두 유명한 실학자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당쟁의 폐단이 심해지고.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할 때 부유한 양반 지주들보다는 가난 한 농민들을 보호하는데 힘을 쏟았다.5 - . 정조는 기 존의 관료들로는 기형적인 정치 구조와 뿌리깊은 부패를 제거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다. 정치는 온갖 부정부패가 자행되었다. 당시의 과거제도는 부정부패가 심해 이미 새로운 관료를 선발하는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정조는 즉위년 9월에 규장각(奎章閣)을 개편했다. 영조는 뛰어난 임금이었지만 당시 사회경제발전 단계가 요구 하는 근본적 신분제의 개혁과 왕정의 폐지등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세자였지만 대역죄인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정조는 1776년 24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즉시 거론하고 나섰다. 봉건왕조체제에서 왕과 관리들이 사회발전과정에 따 라 자신들의 왕위와 관직을 내놓고 공화제로 전환된 경우는 없 다.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에 등용된 이덕무ㆍ유득공ㆍ박제가등은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가 왕위에 올랐다. 빈궁민을 수탈하는 환곡 제의 폐단을 시정하고 대동미와 군포 징수에 따르는 부패를 근절 시키려 노력했다. 정조는 당파간의 권력투쟁에서 빚어진 모함으로 영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다. 인민들에게 왕조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제가 결부되어 있었다. 조선왕조는 급격하게 몰락해갔다.

반면 양반은 오로지 관직에 오를 경우에만 경제적으로 몰락하 지 않을 수 있었다. 시장경제가 활성화되어 상공업이 매우 발전하였다.6 - .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달리 사회경제 상황은 매우 역동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 이후로 부유한 농민층이 출현하고. 인민 들은 스스로 의병을 만들어 스스로의 국가를 위해 싸웠다. 하지만 부정부패를 일삼는 관리들의 착취는 어느 시기보다 심했다. 이제 피 동적으로 기대면 누군가가 자신들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었다.왕은 힘이 없었고. 주변의 권력자가 쉽게 왕을 움직였다. 그 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왕과 관리들은 매우 무력했다. 임진왜란 이전에만 해도 왕과 양반관리들은 매우 뛰어난 지 도자들이었고. 인민 들은 주체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경제적으로 는 초기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등장하여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불러오고 있었다. 왜냐하면 양반계급은 생산노동에 종사할 수 즉 이들이 생존하기 위한 수단은 오로지 관직 에 진출하여 왕조로부터 토지를 하사받거나 녹봉을 받는 것 뿐이 었다. 물론 왕과 양반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회경 제 상황은 매우 우려할 수준으로 발전하는 것이었다. 괴리되었다. 정치권력에서 벗어난 양반들은 고향에 토지가 있어서 .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매우 뛰어난 지도자로 자처했다. 정치와 사회경제는 함께 갈 수 없이 이 시기의 역사발전단계는 이미 조선의 계급사회에 대한 개혁과 대대적인 발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점차 개인주의가 확산되었다. 이런 절망스러운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사회경제적 상황도 봉건제도의 붕괴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제 사회 는 더 이상 왕과 양반관리들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 엄숙한 유학적 군자의 상으로 인민들에게 여겨졌 다. 따라서 필사적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를 해 야 했다.

들에게 양반계급은 자랑이 아니라. 이렇게 조선의 신분계급제는 막다른 골목까지 와 있었다. 이 시기 조선에 영향을 끼친 커다란 국외상황의 변화는 명나 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한 일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 세계의 중심인 중화는 이제 조 선이었다. 종교등에 대한 관심도 늘어만 갔다. 하지만 고향으로 내려가도 땅이 없는 양반들은 도시 주변에서 평민처럼 몰락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러한 지식인들의 각성은 한편으로는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방향으로. 정조에 의해 발탁되어 첫발을 내딛은 차세대 정치지도자들은 해양통상에 대한 의지가 강하고 서학과 천주교에 대한 관심도 지 대했다. 1785년에 정조는 전통적인 유교질서를 혼란에 빠뜨릴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금지령을 내린 다. 그 계기는 천주교에서 빚어졌다. 한편으로는 외국 오랑캐에 대한 거부감 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조선은 더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돌아섰다.7 - . 바다를 통한 무역의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이 먹고 살아 가는데 양반계급이라는 것은 도움이 되기 보다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천주교에 대한 조직적 탄압은 정조 대에 일어나지 . 18세기에 들어서 서양문물에 대한 관심도 크게 확산되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오 랑캐에 대한 적대적 감정과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명이 청에 의해 멸망하자 조선의 대외 정책은 대폭 수정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조선은 스스로 이상적 국 가인 중화로서의 ‘조선’을 건설해야 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해금정책은 점차 사라지고 개국 통상정책이 열릴 것처 럼 보였다. 서양의 기술과 학문. 오랑캐로 보았던 청이 중국의 명을 멸망시키 자 조선의 유학자들은 결심했다. 하나의 족쇄였다.내려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 사건은 황사영이란 천주교 신자가 북 경에 있는 프랑스인 주교에게 백서(帛書)를 보내려다 발각된 것 이다. 보 이 사건으로 황사 영 개인은 물론 주문모ㆍ이가환ㆍ이승훈 등 300여 명의 천주교도 들이 집단 처형되었다. 조선 은 소수의 부패한 권력자들의 전횡으로 적극적이고 자주적인 상 태로 외국의 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 수파는 이 기회에 개혁파를 몰아내기로 했다. 순 조ㆍ헌종ㆍ철종으로 이어지는 19세기 전반 60여 년간은 어리고 나약한 왕들과 이들을 이용해서 권세를 누리는 외척가문들이 번 갈아가며 권력을 독점하는 파행적 세도정치가 횡행하였다. 그의 형제인 정약종은 처형되었으며. 백서의 내용은 무력으로 조선을 위협하여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정조 시기에 천주교의 교세는 오히려 확산되어 갔다. 하지만 정조가 갑자기 죽고 1801년에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 하자 조선은 완전한 몰락의 길로 접어 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황사영 백서 사건’은 매 우 심각한 사건이었다. 버렸다. 이때 수원화성을 건설하고 조선의 실학 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었고.8 - 그에 따 . 천주교를 위해 국가를 배 반한다는 생각은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영조 와 정조가 기울였던 조선왕조의 자기발전적인 노력은 하루 아침 에 물거품이 되었다. 1791년에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였지만 신주를 불사르 고 천주교 의식으로 장례를 행하였다. 이렇게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 해양통상론을 실천에 옮기 려던 신진세력이 사라져버렸다.않았다. 정조에 의해 성장한 개혁파는 천주교와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때에도 정조는 윤지충 개인만을 처형하 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하지 않았다. 왕은 허수아비였 으며 수렴청정을 하는 대비와 외척들이 실권을 장악했다. 더불어 정파의 세력도 붕괴되어 이런 상황에서 보수파에 대한 견제세력은 사라지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

작 곡가 한 사람에 의해 작곡된 작품이 아니라. 양반계급과 같은 신분상승을 이룩하려 하였다. 정조는 예술과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9 - . 판 소리와 풍속화는 그 이전 시기에는 없었던 것으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 가장 두각을 보인 계급은 중인이다. 중인이란 역관과 의관등의 전문직 종사자를 일컫는다. 영조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정조는 탁월한 정치적 수완으로 조선의 문화를 보다 발전시켰다.3. 판소리와 풍속화에는 당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역 사문화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날카롭게 담겨 있다. 이런 경제발전과 더불어 영조와 정조와 같은 뛰어난 임금이 등장했다. 하층의 인민들의 고충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학자적 기질과 취향은 조선 왕조 역대 임금 중 유일하게 『홍재 전서(弘齋全書)』라는 방대한 문집을 남긴 점과. 수많은 책의 간 행 및 우수한 인재 문신들의 양성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시서화에도 영조는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정치와 사회 문화 체계를 혁신시켰다. 판소리의 특징 8. 이들 중 인 계층은 전문직의 장점을 이용하여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향유 했고.판소리의 한국 성악적 특징 조선 후기에 발달한 판소리는 완전히 자생적인 음악이다. 오랜 세월 동안 많 .1. 8. 판소리와 풍속화는 당대의 새로운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른 괴로움은 모두 인민들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들은 상 층의 양반계급의 문화에 대한 동경과 비판을 동시에 수행했고. 영조는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는 왕세자 시절 사옹원도 제조(司饔院都提調)로 있었는데.3. 이때 비롯된 도자 분원에 대한 관심은 조선 특유의 고유색이 발현된 백자(白磁)문화를 발전시켰 다. 그 시 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사상이 종합되어 담겨 있는 것이다.

<문묘제례악>과 <종묘제례악>은 다같이 세종 때 만들어서 지금까지 사용하는 것이지만. 노래는 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문묘에서는 중국식 아악 을 쓰고 종묘에서는 한국식 아악을 쓰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 판소리 는 한국어의 풍부한 언어적 감수성을 그 안에 품고 있는 것이다. 궁중음악에는 제례악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문묘제례악(文 廟祭禮樂)>과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이 있다. 따라서 판소리에는 그 지역의 사투리는 물론 의성어와 의태어가 풍부하게 곁들여져 해학과 풍자가 질펀해진다. 게다가 상황을 매우 사실적으로 눈에 보이듯이 말로 묘사한다. .10 - . <문묘제례악> 은 공자와 그 제자들의 신위를 모신 성균관(成均館) 대성전(大成 殿)에서 석전(釋奠)을 베풀 때 사용하는 음악이다. 다르다. 한반도는 면적은 크지 않 지만 산과 강이 촘촘하게 형성되어 있어서 각 지역별로 다양한 특징들이 존재한다. 음악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발달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 랫동안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어떤 공통된 음악관이 흐르고 있어 야 가능한 일이다. 음식과 풍습도 각각 다르고 사투리도 각각 언어가 다르면 노래도 달라진다. 중국의 유교음악을 받아들인 후 그 사상은 그대로 수용 하면서 음악 표현방법은 한국식을 쓰는 한국식의 유교음악을 창 조한 셈이다. <응안지악 (凝安之樂)>이라고도 하는 이 음악은 세종 때에 임우(林宇)가 쓴 『대성악보(大晟樂譜)』를 참고하여 만든 것으로서. 이러한 ‘다름’을 잘 활용하여 언어를 음악으로 표현해낸 것이 성악으로서의 판소 리이다.은 명창광대들에 의해서 계속 첨삭ㆍ보완되면서 발달해 왔다. 중국의 주대음악(周代音樂)과 같은 중국식 음악어법의 유교음악을 우리나라에서 만들고 낸 것 이었다. 하지만 악기는 그동안에 전통음악에 수용된 모든 악기 를 쓰고. 중국 고대의 제례악을 본뜬 중국식 아악이다. 장단이나 음계ㆍ선율법(旋律法)등은 다 한국식으로 되 어있다.

판소리가 남도 민요인 「육자배기」와 같 은 음악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육자배기토리기원설’이라고 한 . 대개의 경우 민속악은 처음에는 느린 속도로 시작하지만. 대부분 판소리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하나의 설화가 바로 노래 되었다기 보다는 여러가지 설화들이 적절히 하나의 이야기로 맞 추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8. 또 판소리 창자들은 거의가 다 남도 지역의 무당 가계에서 나왔다. 민속악은 민요를 바탕으로 하여 발달하는 잡가(雜歌)ㆍ무악 (巫樂)ㆍ시나위ㆍ산조(散調)ㆍ판소리 등과 악기로 연주하는 농악 (農樂)ㆍ삼현육각(三絃六角)등을 가리킨다.3. 민속악은 서민대중 이 선호하던 음악이고 또 직접 가꾸어 온 음악이어서 누구나 쉽 게 받아들일 수 있고 흥겹게 어울릴 수 있는 음악이다. 흥이 고조됨에 따라 차츰 속도를 빨리해 가고.2. 따라서 판소리가 공연되기 이전에 먼저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판소리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슬픈 가락인 계면조는 「육자 배기」와 거의 같다.판소리의 형식적 특징 판소리는 긴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는 형식을 가진다. 여러 이야기가 섞여 하나로 되면서 복잡하고 긴 이야기가 된 것이다.11 - . 나중에는 신바람이 나서 무아지 경에 이르도록 구성된 음악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노래되어 공감을 이룰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하며 그 이유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노래로 부르 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를 들어 판소리가 무가에서 나왔다고 하는 주장을 ‘무가기 원설’이라고 한다.종묘란 조선의 역대 왕과 조상들을 모신 곳이다. 판소리는 무가와 장단이나 발성법이 거의 같다.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어쩌면 당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오로지 인간밖에 없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토리’는 민요 선율이 가지는 지역적 특색을 가리키는 말 이다. 그래 ‘소리’는 우리가 들을 뿐만 아니라 들으면서 감동할 수 있 고 심금을 울릴 수 있어야 특별히 ‘소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 이다. 즉 전통의 현재화가 매우 적절 하게 이루어진 것이다.다. 인간의 성대를 가장 훌륭한 악기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의 목소리가 악기를 사용해서 내는 소리보다 아름답다거나 정확해서가 아니라. 판소리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 부터로 알려져 있다. 인간에게 인간보다 소중한 것은 있을 수 없다.12 - 그러므 . 김제 만경 출 신으로 해방 직후 월북한 정노식이라는 사람이 1940년에 <조선일 보사> 출판부에서 낸 『조선창극사』라는 책이다. 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따라서 판소리의 ‘소리’는 판소리가 성악 의 일종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판소리는 민족적으로 매우 오래된 정서적 기원을 가 지고 있으면서. 이렇게 볼 때 판소리가 인간의 목소리를 통해 전통을 현재화 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태도이다. 즉 단순히 청각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 부분이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 판소리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문헌은. ‘판’은 어떤 특별한 일이 벌어지는 장소를 말한다. 인간적이기 때 문이다. . 목소리는 인간의 육체에서 호흡과 그러기 때문에 그만큼 인간적인 표현에 뛰어나 음악에서 성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판소리’라는 말은 ‘판’과 ‘소리’로 나누어 볼 수 있 다. 더불어 나온다. 당시의 복잡한 상황이 결합하여 새로운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니리’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현상이 추임새이다. “아먼” 등등의 말을 한다. . 소리 꾼은 또 연기도 하는데 슬플 때는 우는 시늉을 하기도 하고. 공동 체의 구성원은 동질성을 느낀다. 판소리의 구성을 보자. 이것을 ‘추임새’라 고수는 이 추임새를 잘해야 한다. 그런데 북만 치는게 아니라. 똑같은 소리를 듣고. 고 한다. 고수는 소리꾼의 왼쪽에 창자를 바라보고 앉아서 북을 친다. 말을 한다. 말은 그러니까 판소리는 ‘창과 아니리의 교체 반복 구조’로 되어 있다. 판소리 공연에서 청중은 참여할 때 비로소 청중이 된다. 청 중은 소비자이다. 체의 집단 즉흥의 현상이다. 판소리는 1차적으로 청중을 위해서 존재하고. 판 소리의 모든 청중은 추임새를 통하여 공연에 참여할 수 있다. 우선 소리를 하는 소리꾼이 서 있고 그 옆에 북을 놓고 앉은 사람이 있으며 소리를 듣고 추임새를 하 는 청중이 있다. ‘창’에는 장단이 있다. 소리꾼은 우선 노래를 하고. 다. “잘헌다”. “좋다”. 그러면서 노래와 말 노래는 ‘창’. 즉흥적으로 똑같은 추임새를 하면서. 그런데 판소리 청중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다. 그리고 다수이 사람들은 집단으로 있을 때와 개인으로 있을 때는 행동 양 식이 다르다.13 - . 창자와 고수는 판소리 음악의 공급자이고. 그리고 그 추임새는 판소리가 불리는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튀어 나온다. 곧 즉흥성을 띠게 된다. 우리 민족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그렇지”. 흥 겨울 때는 춤을 추기도 한다.로 판소리에서 소리꾼의 소리는 악기와 자연의 소리들을 모두 담 아 내려 하고 있다. 이런 동작을 ‘너름새’라고 한 다. 추임새는 또 공동 판소리 청중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 우를 제외하면. 청중 때문에 존재한다. “얼씨구”. 을 잘 섞어 내면서 소리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구전 과정에 참여한 수많은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 작자를 알 수 없으며. 우리가 판소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집단의 정서와 가치이다. 「가신선타령」대신에 「숙영낭자전」을 넣기도 한 다. 예술음악에서 천재성의 징표로 내세우는 개성이라는 것 도 찾아볼 수 없다. 두 바탕은 판소리 열 「춘향가」ㆍ「심청가」ㆍ「흥보가」ㆍ「수궁가」ㆍ 「 적벽가 」ㆍ「 변강쇠가 」ㆍ「 옹고집타령 」ㆍ「 배비장타령 」ㆍ 「 강릉매화타령 」ㆍ「 무숙이타령 」ㆍ「 장끼타령 」ㆍ「 가신선타 령」이다. 20세기로 넘어오는 시기에 일곱 바탕이 전승에서 탈락하고 다섯 바탕만이 남게 되었는데. 사람의 공동 창작품이다. 구전되는 과정에서 갈고 닦여져 남은 것이다. 나머 지 일곱 바탕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시기에 전승에서 탈락했다. 판소리를 진 정한 민족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이 다. 민속음악의 집단적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이 중에서 「춘향가」ㆍ「심청가」ㆍ「흥보가」ㆍ「수궁가」 ㆍ「적벽가」 다섯바탕은 현재까지 잘 전승이 되고 있으나. 이렇게 민속음악은 사회에 의해 선택되어야 살아남기 때문에. 판소리는 처음에 열 두 바탕이 있었다고 전한다. 결과적으로 는 민중이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4 - . 이렇게 해서 민속음악 속에는 민중이라는 집단의 정서와 가치가 담겨지게 된다. 따라서 민속음악에는 개성이 녹아 없어지고. 집단의 기 .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으나. 판소리는 본래 열두 바탕이었다가.뛰어난 청중은 제대로 된 추임새를 할 수 있는 청중이다. 자연히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정서와 기호를 반영하는 것만이 선 택된다.

변하는 기호와 감성 은 민속음악의 변화를 유도하게 된다.호와 정서만이 남게 된다. 되지 않는다. 하나여야 한 한국인은 무엇이든지 한결같은 것을 좋아한다. 편하고 즐거운 삶을 살면서 목소리만으로 희노애락을 부르며 민중들의 마음을 달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민중예술이며.15 - . 판소리에서 요구되는 소리가 일차적으로 거친 소리라고 해서 무조건 거칠고 탁하기만 한 소리면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 판소리에 등장하는 소리는 매우 독특하다. 판소리에서 사용하는 목소리는 일단 보 통의 소리가 아니라 목쉰 소리이다. 거칠고 투박한듯 하면서도 애절함이 섞 인 목소리를 사용한다. 수리성은 좀 더 탁하고 거친 소리를 말하고. 그러나 거칠고 탁한 소리는 상대적으로 맑고 깨끗한 소리가 있을 때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한 결같은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미적 기준으로 삼는 것은 당연하 다. 천 구성은 보다 맑고 깨끗한 소리를 말한다. 그런데 사회 구성원인 인간의 감성과 기호는 고정된 채로 있는 게 아니라 역사적 조건이 변함에 따라 당연히 인간의 기호와 감성도 변하게 된다. 그러면 일체감이 형성 예술가는 반드시 예술을 향유하는 민중들과 일체가 되어야만 한다. 거칠기만 하면 ‘떡목’이라고 해서 좋지 않은 소리로 친다. . 그러나 이는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데가 있 어야 한다. 판소리가 기본적으로 목쉰 소리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 에서 서양의 성악과는 확연히 다른 미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중들의 정서와 생명성을 담고 있는 예술이다. 아름다움으로 감 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너무 탁 하면서도 맑은 맛이 있어야 하고. 삶과 예술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렇지만 같은 거칠고 탁한 목쉰 소리라고 할지라도 이를 다시 크게 수리성과 천구성의 두 가지로 나뉜다.

‘목’ 혹은 ‘목재치’ 라고 부르는 발성 기교와 이에 따른 음색까지도 포함하는 것이 다. 곰삭은 소리에는 슬픔이 깃들게 된다. 구 체적인 세부에 있어서는 일일이 예를 들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차 이를 보인다. 나를 슬프게 만든 상대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는 그런 분노는 더욱 아니다. ‘목’이란 판소리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발성 기교를 이르는 데.판소리에서 요구하는 것은 ‘발효’와 같은 것이다. 이는 대체로 소리를 떨거나 꺾는 방법인데. 애원성이 참맛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씩씩하고 웅장한 우조 성 음이 있어야만 한다. 씩씩하고 웅장한 우조 성음과 대조적으로 어울릴 수 있을 때 애원성은 참으로 애원성으로서의 진가를 발휘 할 수 있다. 판소리에서는 창자마다 독특한 자기만의 기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슬픔이 배인 소리를 판소리에서는 ‘애원성’이라고 하여. 처음부터 끝까 지 변화가 없다면 이는 좋은 소리라고 할 수 없다. 그러한 소리를 판소리에서는 ‘곰삭은 소리’. 시시각각 변 화하는 모습으로 청중에게 제시될 때 참다운 가치가 발휘될 수 있다.16 - . 그래서 그러한 상대마저도 이제는 용서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함께 껴안을 수 있는 너그러움이 깃든 슬픔이 다. 판소리 발성의 기초는 목에 변화를 주지 않고 뱃속에서 바로 . 슬픔이면서도 그런 슬픔을 야기한 대상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다 가셔진. 장단이나 조(調)ㆍ가락ㆍ리듬은 말할 것도 없고.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 혹은 ‘목’이라고 하여도. 즉 충분히 잘 익은 소리 라고 한다. 그러나 그 슬픔은 인간을 깜깜한 절망으로 이끌어가는 슬픔도 아니요. 판소리의 예술성은 성음의 다양한 변화에서 최고로 발휘된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에는 여러가지가 포함된다.

젖힌목 등등 40여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8. 중중모리장단은 중모리장단을 약간 빨리 하는 것으로 춤추는 듯 흥겹고 경쾌하 다. 특히 어금니 근처를 울 려서 내는 아성은 ‘아귀성’이라 하여 매우 중요시한다. 서술 자의 목소리 속에 인물의 목소리가 침투하기도 하고. 중중모리장단. . 빠르게 몰아가는 자진모리장단은 명랑하고 상쾌하다. 엮는목. 한 인물의 목소리 속에 다른 인물의 목소리가 침투하기도 하며. 찍는목. 최하성까지 7옥타브나 된다. 자 진모리장단을 기본으로 하여 그밖에 휘모리장단.위로 뽑는 ‘통성’이다. 튀는목.3. 당시대의 어 지러운 상황이 극복되고 조화되는 양상이 예술로 드러난다고 할 만 하다. 마는목. 그리고 어조의 미세한 차이까지 모두 감안하면 판소리는 그야말 로 온갖 이질적인 목소리들의 집합이라 할 만하다. 떼는목.17 - . 중모리장단.3. 감는목. 엇 중모리장단 등이 있다. 통성을 바탕으로 하여 양성(미는 목) 과 음성(당기는 목)을 정확히 구분해 써야 한다. 끊는목. 기본발성을 바탕으로 해서 판소리의 목 성음의 변화는 푸는 목. 방울목. 같은 인물 의 앞에 나온 목소리와 뒤에 나온 목소리가 서로 다르기도 하다. 하성. 판소리의 장단은 진양조장단. 또 아설순치후의 발성기관의 기능을 잘 살려 5성을 분명히 해 야 하며 모음의 발음도 뚜렷해야 한다. 진양조장단은 가장 느린 장단으로 보통 슬픈 기운이 깃들어 있어 애절한 느낌을 준다. 줍는목. 중모리장단은 판소리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장단으로 담담한 맛과 안정감을 준다. 중하성. 엇모리장단.판소리의 내용적 특징 판소리에 보이는 다성적 목소리는 그 양태가 갖가지다. 판소 리의 음역은 서양 음악보다 훨씬 넓어 최성성에서 중상성. 상성. 평성.

권위적인 지배 메커니즘에 억압당해왔던 사람들의 개혁 욕망 내지는 자유주의적 상상력이 여기 개재되어 있으리라 고 판단된다. 시점이 복합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본다 는 것을 의미한다. 혼자 모든 인물들의 역 할 뿐 아니라 서술자의 역할도 수행해야 하고. 확산과 종합의 원심적 운 동에 의해 발랄한 생명력이 표출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다중시점의 설정은 당시 사회의 발랄한 생명력과도 관계가 깊다. 부채로 지팡이나 편지 등의 소도구적 역할 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것은 청중의 정서적 감응을 유발할 수 없으며. 미리 정해진 법도와 질서에 따라 엄숙 . 광대는 새소리 를 흉내내기도 하고. 단일 시점의 화면 이나 장면은 질서정연한 구심적 운동에 의해 개체들이 중심으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여주지만. 그리고 얼굴 모습 등까지를 모조리 흉내내려 한다. 판소리 광대는 등장인물의 대화나 내적 독백을 표현할 때. 판소리 광대는 일인다역의 연출자다. 이에 따라 전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대상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게 되기도 하고.판소리의 연행 현장에서 판소리 광대가 심리적으로 겪어야 하 고. 다중 시점은 시선이 여러 방향으로 퍼져나가게 됨으로써 대상이 역동적인 생명력을 부여받게 된다.18 - . 또 수행해야 하는 각종 연행적 관습에서 연유한다고 보는 것 이 옳다. 인물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까 지도 포착하여 흉내내는 것이 판소리 공연의 기본이다. 나아가 효과음이 나 소도구를 운용하는 역할까지 수행해야 한다. 판소리에서 묘사되는 인물들은 유색유취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실제 인간으로 느껴진다. 그 인물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그 인물이 처한 정황이나 억양과 음 색. 그렇다면 공연은 실패할 수밖에 없게 된다. 등장인 물과의 감정적 동일화에 이르지 못하면 생동하는 연기가 될 수 없고.

이런 인간중심주의적 태도는 판소리에서 인물의 모습이나 행위에 대한 우스꽝스럽고 장난기 어린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 이러한 실용주의 정신은 인간중심주의와 맞닿아 있다. 삶의 의의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에서 구 할 게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의 주변에서 구해야 한다는 실용주의 정신이다. 장되게 열거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희화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습 그대로 를 인정하고 존숭하지 못하면서 우리의 산하와 인간들에 대한 사 실주의적 정밀 묘사가 이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가 중요하다는 사 실주의 정신이고. 판소리와 풍속화에서 볼 수 있는 사실주의적 정밀 묘사는 조 선 후기. 인간 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기 위해 사실주의적 묘사방식을 선호 하고 일상적인 것들을 꼼꼼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영ㆍ정조 당시에 성행한 표현법이다. 그러한 표현 방식은 우리의 산하와 인간들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진경 문화의 바탕 정신과 연관될 뿐 아니라 당시 여러 분야에서 나타 난 실학의 정신과도 그 맥을 같이한다. 또 현실세계 에서 보고 느낀 그대로의 모습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세밀하게 묘사하려는 성향은 또한 중요하지 않 은 시시콜콜한 일까지 장황하게 그려내는 경향을 동반한다. 전체 서사 진행에서 이런 부분들은 무시해도 상관이 없는 매 우 사소한 이야깃거리지만 판소리는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맛나고 재치있게 함으로써 판소리를 음악적으로 풍성하게 할 뿐 아니라 당대에 새롭게 등장한 사유체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다.19 - 다소 과 . 소설이 아닌 판소리의 본질적 성격으로 볼 때 사소한 데까지 장황하게 섭렵하는 묘사 부분은 판소리의 진정한 묘미를 내는 곳 이기도 하다. 당대인들이 실제로 그렇게 행했고.하고 정연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질서없이 삐뚤빼뚤 하게 행위하는.

조선 왕조의 지배 권력자들은 파벌과 당쟁으로 국력을 낭비하 였고. 판소리가 연행을 중시하면 할수록 청중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방법 마련에 골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전대의 일반 고소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인물 유형은 오로 지 대의를 위해 온몸을 희생하고. 여성 같으면 요조숙녀요 현모양처며 현철부 인들뿐이다. 서민 층뿐 아니라 지배계급 자체 내에서도 자성과 비판의 목소리가 거 세지면서 현실 세계의 잘못된 점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게 . 열정을 다 바쳐 연인을 사랑하고. 그러나 판소리에 등장하는 인물 유형은 제멋대로 이랬다저랬 다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바보열전을 펼쳐놓은 듯 바보들이 우글거 린다. 관리들의 부정부 패와 제도적 부조리가 맞물려 정치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또 그것은 비판정신과 합치되기도 한다. 비판과 풍자의 기운을 함유하는 골계의 중요한 또 다른 축이 바로 해학적 웃음이기 때 문이다.20 - . 중인과 서얼들은 통청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권익을 확 장하고. 그런데 해학을 지향하는 과장적 묘사는 청중의 즉각적인 웃음을 불러 일으키는 기제가 된다는 점에서 연창자의 주목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의 축적을 통해 경제적 우위를 과시하였다. 그리하여 무능과 부패에 빠져 국가를 파탄으로 몰고 간 지배 계급에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근엄한 상층 계급으로 행세한 바로 뒷장면에서는 어느새 바보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농락당하기 일쑤다. 하인과 동료에게 는 신의와 우애로 대하는 등 한마디로 규범적 질서 속에서 행위 하는 인물들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의 각 계층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었다. 농지제도 의 모순으로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가문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 살 신성인하며. 대외 전쟁에서 계속 패배를 맛보았으며. 서민층은 당시의 급변하는 세상에서 자아의식에 눈뜨게 되었 고.

그것은 질서정연한 정태적인 체계가 아니라 구성 요소들간의 빈 번한 대립과 충돌에 의해 변증법적이고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존 재였던 것이다. 관리들은 위 아래 할것없이 대다수가 부정을 일삼았고. 이러한 위선적 사 회지도층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성과 욕설을 통해 현실적 울분 을 토해내는 탈출구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동안 엄숙한 겉모습을 보여 주던 양반들의 뒷모습에서는 인민들보다 더 심각하게 썩은 성적 인 유흥과 당쟁적 욕설들이 난무했던 것이다. 그리고 농민 반란 등으로 국가 체 제와 권위가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었다. 규범에서 이 탈된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중세적 세계관으로 보자면 현실 세계란 정태적인 가운데 우주만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자리를 지키면서 질서정연하 게 흘러가는 것으로서. . 당시 사회는 대외 전쟁에서 의 패배와 극도의 국정 문란. 이런 시각의 전환이 인물을 묘사하는 데 있어 희 화화 방식을 확산시킨 배경이 된 것이다. 또한 답답한 신분제사 회에 갇힌 자유로운 개인들이 신음하는 퇴락한 비상구였던 것이 다. 모든 사물의 이치는 이미 하늘로부터 정 해져 있고 운명적인 것으로 사유되었다. 특히 그동안 국가를 유 지시킨 중심 뼈대인 유교 이념에 대한 심각한 회의와 도전이 행 해졌다. 이러한 희화화와 더불어 일상성에 대한 솔직함은 성적인 것과 욕설에 대한 긍정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인간의 이중적인 면모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이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사유의 틀을 약 간 수정하자 현실 세계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사회는 규범과 권위와 같은 중세적 체계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의 일탈과 반작용에 의해 움직이 는 측면이 오히려 더 많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되었다. 판소리와 풍속화에서 나타나는 성적 노출의 성행은 당대의 사 회적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상의 희화화는 현실 세계를 역동적으로 인식한 결과이기도 하다.21 - .

흥보가. .일반 백성들은 국가의 명령이나 제도.4. 판소리는 이러한 숨겼던 공간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서. 한국에 전하는 판소리 다섯마당 중에서 가장 한국인들이 사랑 하는 작품은 심청가.판소리의 줄거리와 민중의식 「춘향가」에서는 암행어사가 등장하고. 이 세 판소리의 줄거 리와 그 내용에 담긴 민중의식을 조명해보자. 지방 수령이나 서리 배들이 가렴주구를 일삼으며. 그리고 거기에는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인물군상과 사건 들이 모두 있다. 운 명과 도전. 일상생활에 일터와 장터 그리고 그런 일상적 공간이 꾸밈없이 해학적으로 전개된다. 사건들의 성격은 들쭉날쭉하고. 판소리에 등장하는 공간은 한마디로 세속적이다. 신분 이동이 손쉽게 이루어지고. 서 언제나 부딪치게 되는 공간이 등장한다. 8. 골목길이 주 무대다. 운영 방식 등에 총체적으 로 저항했다. 「흥보가」에는 당 대의 부농층과 빈농층의 분화 현상과 빈곤의 문제가 첨예하게 제 기되어 있으며. 춘향가이다.22 - . 지배 계층에 대한 비판정신이 고조되어 있음을 보면 그 시대적 배경과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알 수 있다. 판소리는 당대의 역사적인 문 제들과 당대인들이 살아가면서 피부로 느끼던 현실 문제들이 드 러나 있다. 인간 개인과 사회가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모 색한다. 인물들의 성격 은 천태만상이다.3. 사회와 개인의 조화를 통해 천태만상의 인간세상이 당연한 것임을 긍정하고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인간 개인에게 해 방구를 마련해주고. 「심청가」에도 빈곤의 문제와 더불어 신체 불구 의 처절한 삶의 문제가 표출된다.

이몽룡이 장원급제하여 남원으로 내려와 월매와 옥중의 춘향을 만나는 대목까지. 둘째. 사회적 관습을 존중하는 사람이 볼 때 춘향은 기생이다. 춘 결국 죽음이냐 자신의 신분을 인정하 . 다섯째. 변학도는 춘향에게 폭력을 사용해서 기생이라는 것을 인정하 라고 강요한다. 이몽룡과 춘향이 이별하 넷째. 기생인 춘향이 어사또의 정실부인이 된다는 사실은 봉건적인 신분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 하는 것이다. 는 대목. 포악한 변사또의 등장과 춘향이 옥중가를 부르 는 대목까지. 변사또의 생일 잔치와 어사출도에서 뒤풀이까지. 이 춘향과 사랑을 나누는 대목. 그러나 우리는 기생이 아닌 인간 춘향이가 되고자 온갖 고초 를 견디는 모습에 감동한다. 여섯째.<춘향가> 춘향가 줄거리: 춘향가는 겉으로는 열녀의 이야기지만 속으로는 계급의식에 대한 목숨을 건 저항정신이 담겨 있다. 이몽룡 셋째. 인간적 해방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은 작품 속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춘향가는 판소리 다섯마당중 가장 길다. 광한루에서 이몽룡과 춘향이 만나는 대목. 그러면 사회적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사회적 관습이나 법을 들어 춘향에게 동침을 요구한다. 향은 그 폭력에 저항한다. 다.23 - . 춘향가는 줄거리의 전개나 음악적 짜임으로 보아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 차이 때문에 작품마다 춘향의 성격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신분적 제약을 깨뜨리고 인간적 해 방을 이루고자 하는 강한 소망을 가지고 몸부림치는 춘향으로부 터 우리는 감동을 받는 것이다. 춘향가에는 진실을 갈구하며 인간해방을 희구하는 서민들의 강한 욕구가 짙게 깔려 있다. 첫째. 그 러나 진보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에게 춘향은 기생으로 대접받 는 것이 부당하다.

춘향가의 비장한 아름다움은 거대한 사회제도의 폭력에 나약 한 한 여인이 목숨을 걸고 대결하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발생한 다. 겉으로는 현실을 생각해서 적절하 게 타협을 하려고 했다. 춘향의 신분이 낮을수록 인간해방이라는 극적 효과는 더 욱 커진다. 함께 웃고 즐기면서 신분제도를 떠나 모두가 하 나의 민족이라는 동질성을 강하게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24 - . 그리고 판소리를 모든 사회 계층 이 함께 즐긴 것도 비판보다는 조화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이끌었 을 것이다. 음악은 근본적으로 갈등을 조장하는 양식이 아니라.느냐를 선택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당시대를 조화롭게 하고 화합시키려 하는데 기여하려 했다는 것 이 드러난다. 혁명가로서의 춘향이 등장하여 대결구도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에 화해와 화합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속 과 겉이 다른 양식이 되었고. 판소리 청중은 계층적으로 다양하기 때문에 일방적 으로 어느 계층의 이해만을 반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사출도를 통하여 축복 속에서 춘향의 꿈을 실현시키게 한다. 여 기서 판소리의 성격이 당시대를 비판하는데 노력하는게 아니라. 인간적 해방을 염원하는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판소리에서는 기생으로 대접받기를 거부하는 춘향의 주장은. 사회통합에 기여하는 양식으로 작동한다. 즉 한편으로는 계급제도에 반대하여 인간해방을 요구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유학적 교양인 열녀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판소리가 음악이기 때문에 더욱 적절하다. 그럼에도 춘향은 한편으로 봉건사회의 열녀적 모습을 그대로 추구한다. 춘향가는 파격적 인간해방 을 주장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전형적인 열녀로 춘향을 포장하 는 이상한 태도를 보이며 모든 사회계층이 함께 웃고 즐길 수 있 도록 전개된다. 신분제는 조선조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제도 중의 하나이다.

25 - 심청의 아버지 . 다섯째 부분은 심봉사가 음탕한 뺑덕이네를 얻어 황성에서 열 리는 맹인 잔치에 참석하러 가는 대목에서 심청을 만나 눈을 뜨 는 마지막 대목까지. 셋째 부분은 심청가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심청이 기도하는 대목부터 남경선인이 등장해 심청이 몸을 팔고 인당수 에 빠지는 대목까지. 슬 픈 것을 좋아한다는 말은 불행을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라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넷째 부분은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 죽지 않고 용궁으로 들어 갔다가 황후가 되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대목까지. 한민족은 웃는 것보다 슬픈 것을 좋아하고 잘 표현한다. . 둘째 부분은 심봉사가 젖을 얻으러 다니는 대목에서 몽은사 화주승에게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기로 약속하고 심청에게 그 사 실을 말하는 대목까지. 슬픔 속에서 가치를 찾는 성향이 강하 다는 말이다. 첫째 부분은 곽 씨 부인의 어진 행실을 그린 대목서부터 곽씨부인 출상하는 대목 까지. 소리꾼들이 춘향가나 심청가를 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청가에 들어 있는 슬픔은 심청이가 감당하고 있는 현실적 고통이 어떤 것들인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심청가> 심청가 줄거리: 심청가는 판소리 다섯마당 중 가장 비장하다고 할 만큼 전체 적으로 슬프고 비통한 내용이 많아 가락 또한 무겁고 어두운 계 면조 가락이 주를 이룬다. 특히 판소리 청중들의 경우 이런 경향이 심하다. 심청가는 구성상 보통 다섯부분으로 나눈다.

심청가 초반의 슬픔은 어린 딸과 눈 먼 아비만을 남겨두고. 슬픈 장 면에 신나는 가락을 쓰는 판소리의 멋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 기초위에서 방탕함을 통해 답답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역설이기도 하다. 진양조 장 단의 ‘곽씨 유언’ 대목은 슬픈 계면조를 진하게 많이 쓰는 까 닭에 부르기가 매우 힘들기로 이름이 나 있다.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가야 하기 때문일 이어서 나오는 심봉사가 동냥 나가는 대목은 구슬픈 계면조 가 아니라 일명 호걸제라고도 하는 호쾌한 설렁제이다. 이는 한국적 윤리사상의 표본을 보여준다. 어머니 곽씨는 어질고 착했지 만. 목청을 떨거나 꺾는 등의 시김새가 정교해 역시 부르기가 쉽지 않다. 나 그런데 심청에게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위해 제사 의 희생 제물로 몸을 판 것이다. 가장 극단적 상황에 내몰리면서도 윤리적 인간성을 목숨과 맞바꾸려는 결연한 의지가 드러난다.26 - . 동냥으로 겨우겨우 자라난다. 눈 먼 남편과 갓난아기를 두고 가는 곽씨 부인의 안타까운 마 음이 절절이 배어 있는 대목이다. 어머니 곽씨가 죽는 데서 시작된다. 가난 때문에 심청을 낳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죽고 만다. 심청이는 눈 먼 아비의 젖 절망에 빠져 하룻밤을 지샌 후 심 청의 젖을 얻어 먹이러 나가는 ‘젖동냥’대목은 뜻밖에도 자진 모리장단으로 활기차다. 이가 들자 아비 부양의 책임을 져야 한다. 심청이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팔았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는 심봉사의 모습이 빠른 중중모리장 . 이어지는 ‘곽씨 죽음’ 대목 또한 슬프기 그지없어 명창들도 부르다 자칫 목이 메고는 한다. 춘향가의 ‘농부가’와 마찬가지로 판소리에 삽 입됨으로써 민요의 예술성이 심화된 예이다. 이러한 의지가 표출되는 것은 당시의 윤리의식 이 여전히 전통적이었으며. 까. 곽씨부인의 출상장면에 나오는 ‘상두소리’는 유명한 남도민 요이기도 하다. 또 죽을 일이 생긴다.심학규는 가난한데다가 장님이다.

자신을 희생한다. 나중에는 가운이 기울어 가 난해지고. 여성들이 집안일에만 전념하지 못하고 생활 현장으로 내몰리는 일이 흔하게 나타났다. 그리하여 남성들 중에는 생계를 여성에 의지하여 얹혀 살다시 피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곽씨는 자기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게 아니고.27 - . 것이다. 곽씨와 심청의 죽음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가부장제에 의한 희 생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심봉사가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심봉사 가 돈푼이나 있을 때는 심봉사를 따르지만. 눈까지 멀게 되었다. 뺑덕어미의 악덕은 성의 쾌락을 추구하고. 몰락 양반들은 의식상으로는 양반이지만. 매품이라 도 팔아서 자식들을 먹여야 하는 흥부의 신세가 이를 잘 보여준 다. 자 기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정 도로 요약할 수 있다. 19세기에는 흥부와 같이 가족마저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하 는. 심청이 물에 빠지는 대목은 휘모리장단으로 그야말로 숨가쁘게 몰아간다. 품을 팔아서 빌어서 먹고 산다. 곽씨는 놀지 않고 부지런히 일을 하여 돈을 모아 가장을 봉양 한다. 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고 소비에만 힘을 쓰며. 현실적으로는 오히 려 일반 인민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성들이 양산되어. 재물을 아끼지 않고 함부로 쓰며. 인당수에 당도한 심청이 물에 빠지기까지의 대목은 자주 쓰지 않는 엇모리장단과 빠른 중중모리장단으로 처리해 죽음을 향해 가는 발걸음의 긴박감을 전해준다. 돈이 떨어지자 심봉 . 곽씨는 가부장제의 윤리에 순종하는 인물인 그러나 뺑덕어미는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심봉사는 본래 명문거족이었으나. 심청이가 자라면 역시 열심히 몰락한 양반가문의 최대 희생자 가 된 것이다.단에 슬픈 계면조 가락으로 불려 비애를 더욱 크게 한다.

심봉사가 두눈을 ‘번쩍’ 뜨는 대목을 얼마나 실감 나게 잘하느냐에 따라 그날 공연의 성공여부가 가늠될 정도니까 말이다. 곧 비 현실적 공간을 설정하지 않고서는 심청이가 살아날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이렇듯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여오지 않을 수 없었다 는 것 자체가 이미 유교 윤리의 허구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 다. 인간의 죽음. 심청이가 몸을 팔아야 할 정도로 피폐해진 유교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 인간의 온 갖 슬픔이 그야말로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짝 허드니 모두 눈을 떠 버리는구나. 조선조 후기 사회가 도저히 문제 해결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심청이는 바로 그 모든 인간적 슬픔들의 한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다. 청이 죽는다. 심청가 속에는 가난과 가부장제의 모순만이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용궁이 등장한다. 짝. ‘효’라는 유교 이데올로기로 포장을 해놓긴 했지만. 이 봉건체제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 는 방법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심청이는 봉건체제가 안고 있는 모순을 다 감당하고 있는 인 물이다.28 - . 심청가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심봉사 눈 뜨는 대 목’이다. 전라도 순창 담양 새갈모 떼는 소리라. 짝. 그렇지만 용궁은 현실적인 공간이 아니다. 뺑덕어미는 가 부장제의 윤리에 순종하지 않고 이에 도전하거나 이를 무시하는 인물이다.사를 버리고 젊은 황봉사를 따라 도망해 버린다.ㆍㆍㆍ가다 뜨고 오다 뜨고 서서 뜨고 앉어 뜨고ㆍㆍ ㆍ”하면서 시작되는 축제분위기속에서 심청가는 엇중모리장단 . 그래서 별 수 없이 심 심청의 죽음은 봉건체제의 모순이 누적된 결과물 이며. 해결의 가능성조차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내의 죽음. 이런 공간. 심봉사의 뒤를 이어 “만좌 맹인이 눈을 뜬다. 그리고 가난 그 자체의 슬픔과 불구의 한도 같이 표현되어 있어서. 자식의 죽음.

흥보가는 심술이 많은 놀보와 착한 흥보의 이야기다.뒤풀이로 막을 내린다. 심청이 마을 사람들의 젖을 동냥으로 얻어 먹으면서 어렵게 자라는 것도 상징하는 의미가 크다. 그런데 놀보는 온갖 못된 짓을 하면서도 경제적으로 부 유하다. 흥보가는 중국고사나 시구를 인용한 어려운 한문사설이 많지 않고 서민들의 삶을 그린 대목이 풍부해 가장 토속성이 짙 은 작품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흥보는 양 반이라고는 하지만. . 흥보가의 맨 처음에 나오는 소리가 유명한 ‘놀보 심술’이 다. 또 폭소를 자아내는 희극적인 재담이 많아 청중들이 제일 재미있어 하는 판소리이기도 하다. 심청가와 함께 3대 판소리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한 계기는 가녀린 심청이라는 희생이 뒤따 른 이후에라야 가능하다. <흥보가> 흥보가 줄거리: 판소리 흥보가는 춘향가. 흥보는 착하게 살지만 매품(죄를 지은 다른 사람 대신 매를 맞아주고 삯을 받는 일)을 팔아서 쌀을 얻을 정도로 가난한 다. 토막소리로도 잘 불리는 대목이다. 자진모리장단으로 빠르게 엮어나가는 놀부의 심술은 익살스 러우면서도 생기에 넘친다. 품팔이마저 해야 할 형편이다. 민중의식에 모든 장님들이 전국에서 눈을 뜨듯이 민중의식은 눈을 뜨게 된다. 그러다 부러진 제비의 다리를 고쳐주고 박씨를 얻어 심은 흥보는 박에서 나온 금은보화로 금새 부자가 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는 내용이다.29 - 매 . 둘은 형제다. 우선 흥보는 분명히 양반으로 되어 있다. 그에 걸맞는 경제적 기초가 전혀 없다.

흥보가 전래적인 윤리적 인간형이라면. 아비의 눈을 뜨 게 하기 위해 거친 바닷물에 몸을 던지는 심청. 삼국지에서 이야기를 가져 온 적벽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민담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때로는 비윤리적인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조 선조 후기는 이렇게 빈부의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한 사회였다. 그러나 판소리 다섯 마당의 고난은 뜻밖에도 해학과 한 데 어우러지면서 해결되고 극복된다. 고난을 겪는 주인공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함께 분노하는 것이 다.30 - . 별주부에게 속아 .몰락양반은 조선조 후기에 많이 생겼다. 덧 붙여지는 복잡하고 장황한 내용속에는 서민들의 삶이 담겨있다. 설사 더 가난해지지는 않더라도 상대적 빈곤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조선조 후기에는 농업기술과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신분 이 낮은 사람들 중에서도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조선조 후기에 새로이 생겨난 인간형이 다. 사또의 명을 거역해 억울한 매를 맞는 춘향. 이 두 인간형은 조선조 후기의 가장 전형적이고 특징적인 인간형이다. 놀보는 새로운 경제적 인간형이다. 몰락양반을 대표하는 흥보는 비록 돈은 없지만 윤리적인 태도 를 끝까지 견지한다. 판소리 다섯마당은 제각기 훌륭한 음악세계를 구축하고 있지 만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신흥 부민이라고 할 수 있는 놀보는 부자 이지만 경제적 가치를 무엇보다도 우선시한다. 면서도 돈이 많다. 첫째. 한편 놀보는 천민이 그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는 온갖 구두쇠짓을 다하고. 「흥보가」는 무엇보다도 당대의 두 가지 전형적인 인물을 생동 감 있게 표현해 냈다는 데 그 가치가 있다. 둘째. 그럼에도 흥보가에서는 이 두 인물의 갈등보다는 조화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부자가 생기면 가난해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판소리 다섯 마당의 겉 으로 드러난 주제는 정절. 인민은 좀 .3시간씩이나 걸린다. 그것은 판소리가 등장한 18세기 조선의 사회변화를 반영한 것이라 하겠 다. 또 개작을 할 때도 부분적 으로 하다 보니 자연히 부분이 독자성을 갖는 특징을 갖게 되었 다. 즉 임금과 인민은 같은 김치를 먹지만. 판소리 다섯마당의 고난은 고난이되 자포자기로 빠지는 허무 한 고난이 아니다. 우애 등이지만 그 밑바탕에 깔린 것은 양반과 양반사회에 대한 서민층의 저항의식이다. 터 끝까지 다 부르는 완창을 하기란 예삿일이 아니다. 판소리 한 마당을 다 부 르려면 길게는 8시간에서 짧아야 2.31 - . 그 김치에 들 어가는 재료의 차이는 당연히 존재한다. 같은 백자로 된 도자기 그릇을 사용하지만 임금은 좀 더 잘 빚어진 것으로. 효. 판소리 다섯마당의 각 대목은 명창들의 더늠 으로 더욱 발전되고 세련되어졌다. 싸움터에 끌 려와 죽고 다치는 군사들.배를 갈라 간을 꺼내주어야 할 처지에 빠지는 토끼. 상층부의 문화와 하층부의 문화가 따로 떨어져서 발전하는 것 이 아니라 뒤섞여서 발전하는 것이다. 고난인 것이다. 넷째. 셋째. 어느 것 하나 절박하지 않은 고난이 없으나 어느 것 하나 시종 눈물속에 그려지지는 않는다. 각 부분이 독자성을 갖는다. 부분의 독자성이라는 판소리의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 이 ‘더늠’이다. 건강한 웃음의 힘으로 극복되고 떨쳐버려질 여기서 우리는 고난에 찬 삶을 끈질기게 이어오 면서 우리 역사 발전의 밑바탕을 이룬 서민들의 숨겨진 힘을 느 낀다. 처음부 그러다보 니 부를 때 보통 부분적으로 부르고. 한국문화에서는 따로 상 류층만이 즐기던 문화와 인민층이 즐기던 문화라는 명확한 구분 이 없다. 주제의 이중성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한’은 모든 감정을 넘어선 경지를 말한다. 개인에게 주 어진 운명적이며 결정론적인 삶의 흐름과. 이것은 엄격한 조선의 계급사회에서도 유지되는 한국 적 전통들이다.4. 그러므로 판소리는 광대의 삶 자체가 예 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의 삶은 한 맺힌 삶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윤리의식으로 보면 비윤 리적인 사회일지도 모르지만. 즉 소리 자체에 한이 맺혀 있는 것이다. 신라시대 초중기에도 한국인들은 오늘날과 전혀 다른 윤리의 식으로 삶을 살았다. ‘한’이란 이렇게 시대적 상황에서 오는 개인과 사회의 충돌을 넘어서서 조화를 이루는데서 생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 로 흔히 ‘한국적 영웅’이라는 인물이 빚어내는 영웅적 행위는 ‘한’을 넘어선 경지를 나타낸다. 세련된 종교인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에 의해 옷입혀진 것이다.32 - . 판소리에서는 그늘이 낀 소리를 최고로 친다. 그래서 ‘한’이 생긴다. 판소리는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인간중심주의적 태도를 뚜렷 하게 보여주고 있다. 수리성이니 천 구성이니 하는 그늘진 소리는 그들 광대 개인이 삶과 사회적 질 곡 사이에서 빚어진 아픔이 승화되어 한으로 맺어져서야 나오는 소리이다.더 세련된 것으로 쓸 뿐 조선백자를 쓰는 것은 임금이나 인민이 나 같다. 그 사회 구성원들은 매우 역동적이 . 판소리를 예술로 끌어 올리는데 기울인 개인적인 고통도 컸다.결론 판소리는 무속적이다. 무속은 우리가 오늘날 판단하는 윤리 의식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8. 주체적이고 자유론적 인 개인의지의 신선한 결합과 조화를 ‘한’이라 하는 것이다. 판소리 광대들 천민이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겪어야 했던 괴로움이 컸으며. 오늘날 우리의 윤리의식은 수 만년전부터 내려오는 고유한 어떤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따로 소리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 구든지 소리꾼이고 누구든지 청중이 될 수 있다. 만약 다양성을 하나로 조화시키는 통일성이 결여되면 그 사회는 분열되었다. 마음에 맺힌 어떤 것을 풀어내는 것이다. 한국의 음악은 소리판이 따로 있어서 노래가 불려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에 담긴 답답함이 사라진 진솔한 사회 가 만들어내는 역동성이었다. 죽은 사람 장사 치르면 서 소리하고. 일하면서 소리하고. 생활현장이 바로 소리판이었다. 민중이 자신들 스스로 슬픔을 노래하지만 기쁨과 신명을 돋구기도 하며. 소리는 놀고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사상사에서는 다양성을 ‘하나’로 조화시 키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동양과 서양이 하나로 조화되려는 노력이며. 분 열된 민족이 다시 하나로 통일되려는 노력이다. 비윤리적 요소에서 역동성이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사회는 이질적인 문화와 민족들이 함께 모여 하나로 융합되면서 발전했다. 이다. 소수민족들이 자신들만의 윤리의 식으로 활기차게 삶을 영위하는 것과도 닮은 것이다. 소리하면서 일하고. 무대 예술로서의 소리 가 아니라. 노래와 소리는 한국인에게 조금 다른 느낌의 개념이다. 그러면서 민족의 의식도 발전해야 했다. 이러한 민족적 음악성과 기능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더불어 소 멸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근대화와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서구 . 이런 소리들은 강한 향토성과 함께 민중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이때의 하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하나로 조화되 려는 노력이며.33 - . 그러므로 이 둘을 융합시켜 ‘하나’가 되려는 사상 적 발전이 이 시대가 한국의 사상가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삶의 애끓음과 서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풍년을 빌면서 소리하고 마을의 단합을 위해 소리 한다. 삶의 노래로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것이다.고 활기차게 살아갔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남북한이 서로 이념으로 나뉘어 극과 극의 상황에서 대치 하고 있다.

한국의 현실에서 이러한 비합리적인 현상 은 음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만큼 판소리가 벌어지는 곳에서의 소리꾼과 고수와 청중들은 그 아픔을 나누어 가지고 보듬었다. 사상사에서도 한국의 것이 아 닌 서구의 사상사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고 연구해왔다. 따라서 지금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한국 음악에서 느껴지는 민중적 보편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 래도 민족적 정서는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서 느 껴지는 울림은 있다. 단점도 크다. 이것은 전 형적인 굿 의식과도 같은 효과를 담당한다. 사회 에서 권력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신이 나 는 것이다. 사회를 벗어나서 살아가 는 사람들까지 판소리로 하나가 됨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 인들은 이 장단을 곁들인 응원 구호인 ‘대~한 민국’을 몇시간 동안 지침 없이 소리칠 수 있다. 이 단순해 보이는 ‘대~한 민국’ 이라는 구호속에는 한국 특유의 장단이 담겨 있다.적 모델을 발전된 것으로 파악하고 음악교육조차 민족음악에 대 한 교육이 아닌 서구의 민요나 음악들만을 교육시켜왔기 때문이 다. 하나의 문화적 유대감을 형성시킨 경우는 찾아보기 . 사회의 구석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태도의 장점도 있겠지만. 민족이 향유하는 음악이 가장 아래 계층에서부터 왕에 이르기까 지 유행하고. 이해를 그 존재론적 의미에서 드러내는 원초적 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쉽게 이 구호를 외치면서 하나된 의식을 느낄 수 있다. 축구경기를 할 때 한국인들은 특유의 장단을 곁들인 ‘대~한 민국’을 외치면서 응원한다. 그런 한국의 전통 거의 전반 에 걸쳐 전통이 단절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판소리도 그랬다.34 - . 예술이란 자연의 원초와 근원적 생명력. 판소리는 전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예술 형태이다. 인민들 은 판소리를 통해 맺혀서 사회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닫힌 마음을 열었다.

힘들다. 그는 기생의 딸로서 인간의 존엄을 사회적으로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천민입니다. 성적 자기결정권. 사랑의 자기 결정권을 갖지 못한 사람이 자유 인일 수는 없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자기가 몸은 노예상태에서 묶여 있지만 그의 정신은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주 었습니다. 노예가 아니라 오직 자유인에게 합 당한 용기가 춘향을 더욱 불행하게 만듭니다. 말-언어에 담긴 정서를 극대화시켜 음악화시키는 것 그러므로 판소리에는 한국어의 정서적 특성이 가장 잘 드 러나고 있다. 바로 이런 용기. . 이는 베트남 말-언어의 예술성이 꽌호나 까쭈에서 잘 드러나는 것과도 같다. 수많은 사회 구성원들간의 차이들에 대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수긍과 인정을 통해 사회적 동질성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한국의 판소리는 한국인의 말-언어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예술이다. 그 러나 그렇게 외적으로는 노예적으로 사로잡힌 상태에서 춘향은 어떻게 대처했던가요? 그는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기존 질서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사로잡힌 노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춘향에게 변 사또가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춘향이 묶인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김상봉 교수의 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편 지 13’중에 춘향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춘향은 불의한 사회제도 아래 묶여 있는 여인입니다. 그는 막강한 권력 에 저항함으로써 보복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판소리에 담긴 한국사상의 흐 름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도 인민들 사이에서 살아 흐르고 있다. 그러나 우 리가 춘향에게서 느끼는 정신의 크기와 숭고는 그가 보여주는 바 로 그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변 사또는 수청을 들라는 명령을 통해 이런 춘향의 노예상태를 확인하려 합니다. 그러기는커녕 춘향은 너무도 당당하게. 이다.35 - .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변 사또의 불의함을 탄핵합니다.

편지 13 중 에서> . 았습니다. 춘향은 신분으로는 노예였으나 마음으로는 결코 노예가 아니었던 것입니 다.36 - . <춘향전>은 똑같이 봉건질서의 한계 속에서 만 들어진 작품이지만 인간의 보편적인 긍지를 보여줍니다.우리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 자유인의 비극이냐 노예의 비극이 냐 하는 구분이 단순히 기존의 사회질서에 기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따지고 보면 오이디푸스 역시 운명 앞에서 어쩔 수 없는 노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의한 운명에 굴종하지 않 그런 의미에서 춘향이든 오이디푸스든 모두 같은 자 유인들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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