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essional Documents
Culture Documents
3.
초점 ; 촛불민심과 친일매국세력의 대결구도를 이해함으로써 출발해야
4.
촛불민심이 지향해야 할 방향과 원칙
5.
친일 본류에 대한 공략 이론과 현실
친일 본류에 대한 공략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한다. 이것은 각 주제가 이론이 아
닌 현실적인 접근으로만 가능한 부분이다. 그래서 이것은 질의와 답변형식으로
구성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제 현상을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토대로 중요한
네 가지만 우선 톺아 보자.
첫째 , 가장 자주 우선적으로 그들에게서 거론되는 주제는 ‘친일과 친북’
이다 .
뉴라이트와 일본기획자가 끌어들인 이 소재는 한반도의 분단역사와 어울리면서
주제 자체가 난해함마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의외로 간단한 구석도 있다. 즉, ‘
친일이 좋은가? 친북이 좋은가? ‘ 라고 묻는 것이 그들의 일차 접근법이기 때문
이다.
왜 이렇게 접근하는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친일을 해서 손
해 본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일본에 의존하는 경제개발을 했고 당연히 오늘 한
국경제의 발전에는 일본이 기여한 바가 있다는 논리에서 이들은 ‘한일동맹론’이
민족우선의 남북한 협력보다 우선된다는 것이 입증된 지난 60년이라고 주장하
게 된다. 이 논리로 ‘건국60주년’ 테제가 성립되며, 대한민국의 발전에는 일정
수준 ‘일본의 지분’이 들어있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친일을 하는
것이 ‘경제살리기’에 적합하며, 나아가 이것을 새로운 단계인 한일 양국 간의 ‘
과거를 잊고 미래로 가는’ 길로 끌어올리려는 시도가 구성 중이다.
상대적으로 친북 즉, 민족우선의 테제를 통해서 지난 60년간 해결된 것이 없다
는 걸 내세운다. 여전한 분단과 대립, 그리고 북한의 현실에서 장기적으로 자본
주의 시장경제를 통한 민주주의 우선 통일을 위해서는 한일동맹을 강화한 상태
에서 흡수통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한다. 모두 연결되는 주제들이다.
그래서 이를 상대적인 개념으로 올려 놓는다. 영악한 접근방식이다.
그런데 여기는 결정적 결함 하나가 도사린다. 즉, 역사와 평가다.
역사 속에서 일본이 가진 제국주의적 근성과 침략 유전인자는 지금도 그대로 존
재한다. 그러므로 과거 역사 자체에 대한 ‘사과’(謝過)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해법 자체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해자(加害者)에 의한 여전한 침탈 시도가 이어
지는 상태에서 한일 양국은 근본적으로 과거청산 자체가 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
이 타당하다. 이것은 독도문제에서 역사교과서 기술, 나아가 일본기획자가 오늘
까지 시도해온 암묵적인 침략 시도 등과도 연결된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 역사
이며, 미래역사이기도 한 이 주제가 간단하게 지워질 이유가 불분명한 상태다.
또한 여기에는 평가문제가 있다. 당연히 안병직 류의 접근법에서 ‘일본도 주장
할 근거가 있는’ 위안부, 독도 문제 등처럼 친일매국세력의 사냥개들은 일본도
당사자로써 그들 나름의 변명이 있다는 수준이 아니라 서로가 주장할 경계선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즉, 평가에 대한 모호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차적
인 시도이자 일종의 프로파겐다로써 드러난 것인데, 여기에는 아주 음흉한 의
도 하나가 숨겨져 있다 . 즉, 본질 자체를 다른 쪽으로 유도하는 술수다 .
일본이 주장 가능한 것은 과거일지 모르지만, 지금부터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이자 미래다. 다시 말해서 일본은 평가문제에 연연하기 보다는 앞으로 새로
운 평가를 받으면 되지 않는가 하는 재 평가론을 이들을 통해 흘리고 있는 것이
다.
왜 이 시도가 진행 되는가 ? 한반도의 남부에 수립된 정부인 대한민국을 일본
이 생각하는 그들 식의 괴뢰정부로 만들고자 하는 방식은 과거 만주국 정부를
수립하던 때와 흡사한 접근법을 가졌다. 당시 그들은 만주국 수립 전반을 관리
하면서도 철저하게 괴뢰를 앞세운 통치를 진행했다. 거꾸로 보자면 한국이 괴뢰
정부인 만주국정부가 되고 나서야 북한에 대한 접근법이 나온다는 과거 전례에
서 베껴온 단계론을 구사한다. 그러므로 괴뢰정부에게 정통성이 부여되는
건 대단히 모순이 발생한다 . 정체성과 정통성은 매우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 ‘건국 60주년’이라는 의미는 곧 한반도에 있어서의 역사 정통성
과 정체성을 모조리 포기하는 셈이 된다. 그렇게 만들고 난 이후, 동일하게 정통
성과 역사성을 삭제하지 않고 있는 북한에 대한 공략을 하는 방식인 셈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친일과 친북’이란 테제는 애당초 꺼낼 의미 자체가 연
결되지 않는 대립적 상대적 주제 이지만 이들은 줄기차게 이 주제를 꺼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주제를 사냥개들이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남남갈등 그
가운데서도 ‘보수’와 ‘우익’이라는 관점을 취득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 보면, 이 속에서 ‘친일’에 대한 일정수준의 입지와 당위성을 확보하
려는 의지도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주제는 상대 가치를 부여하는 것
조차도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 ‘ 경제’ 우선론에 대한 병적 집착이다 .
‘경제살리기’라는 테제를 통해 집권을 했고, 그 배후에서 친일매국세력이 기생
하게 된 데는 한국경제의 위기론이 도사린다. 이것은 급기야 한국의 경제발전
자체로 근현대사를 재편성하는 시도로까지 연결되었다.
왜 이 시도가 진행되었는가?
한나라당이 대선 총선기간 내세운 주제에서 ‘경제’는 살려야 할 대상이기도 했
지만 한편으로는 ‘죽어 있다’는 전제가 붙었던 것이다. 성장과 분배라는 관점에
서 지난 십 년 정책적으로 사용된 신자유주의 기조는 IMF환경의 산물이기도 했
지만 보다 본질로 들어가보면, 국제주의, 국제화(세계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이 더 심각하게 자리한다. 그 과정을 지켜보고 느낀 국민들의 입장
에서 성장을 통한 기회분배가 오히려 분배를 통한 성장기회의 상실보다 낫다는
측면에서 한나라당의 ‘경제살리기’를 선택하게 된다. 즉, 죽었다는 평가에 국민
이 동감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경제가 죽었다는 말보다는 기회가 죽었다는 것에 대한 착시 (錯視 )
였다 . 그걸 조중동 등 보수 친일매국세력의 언론들이 여론을 조장해 가는 일련
의 과정이 있었다. 일단 성공한 것이다. 물론 지난 십 년에도 공과는 존재하고,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신자유주의 자체가 가진 결함은 곳곳에서 노출되었지만
정책과정에 있어서의 일정한 수준의 기득권의 상실감이 배가된 상태에서 이제
는 기득권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급진화가 진행되는 단계로 돌입하는 중이
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나타난다. 과거 십 년의 경제가 죽은 것이 아니라면
죽여야 한다는 당위다. 죽는 과정에도 국제경제환경이 나타나야 하고, 그 과정
에서 누군가 개입을 할 여지가 남겨져야 한다.
나는 이 점이 가장 두렵게 보였다. IMF에서 한국이 직접 차입하고 집행한 금액
은 195억불에 불과했지만 지난 십 년 경제적 결함과 MB정권의 등장 이후 반 년
동안 결함의 구조적인 덫은 더 확대되는 추세다. 즉, 이제는 ‘무너진다’에 방점
이 찍히고, 나아가 무너지는 단계에서 일본이 개입 가능한 여지가 활짝 열려 있
다는 사실이다. 그 규모도 과거에 비해 크다.
이렇게 보면, 친일매국세력이 200 4년 이후 꾸준하게 ‘일본역할론’을 펴는
데는 이러한 시기에 대한 준비작업이었다 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에 협
조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 정권이라면, 그것은 다시 국민들을 과거 경제
적 환경에서의 좌절감 상실감을 극대화 했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일본역할론은 일본 찬양론으로까지 번져가는 수순을 밟게 될 공산도 커진다. 단
순히 일제강점 찬양파 수준이 아니며, 일본역할론의 단계도 뛰어 넘어 마침내
일본은 찬양 받을 역할을 했고, 또한 앞으로도 하게 될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과거 역사에 대한, 또한 평가에 대한 몫은 모두 슬그머니 그들의 의
도대로 가고 만다. 이것이 노림수다.
셋째 , 왜 촛불민심이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방해물로 인지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
촛불은 신기하게도 테제를 알아서 확산하는 현상을 보여왔다. 쇠고기 파동에서
서서히 경제정책 전반에 걸쳐, 그리고 조중동이라는 페이퍼 매체로부터 방송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국가 전반의 순기능 역할을 해온 공기업, 산하단체 등의 능
력과는 다른 낙하산 인사, 회전문인사, 친일매국세력에 대한 직접적 평가와 이
사태의 원인을 찾는 작업까지 일련의 작업들이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집단지성
이란 이름으로 정보가 취합되고 판단되며, 오프라인의 저항 행위로까지 이어졌
다. 촛불은 이미 초기의 중고등학생의 촛불문화제가 아니라 정권과 정책, 숨겨
진 의도까지 모두 까발리는 폭로자면서 견제기능을 갖추기 시작했다.
더욱 그들을 경악하게 한 것은 바로 ‘의도(意圖)에 대한 평가’ 부분이다. 촛불 내
부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있지만, 다양한 인물들이 참여한다. 그러니까 단순한
전문성이 아니라 온라인 상에서 비밀준수의 경계가 무너지는 현상이 드러난 것
이다. 이것은 심각하다. 정책 결정과정이나 혹은 정책의 단계적이며 심리적인
접근법까지 노출되는 상태는 기획자의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현상이다.
그러므로 제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냥 내버려둘 경우, 과거 사회 등 민간단
체들이 가진 일정한 기능과 폭로가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현실상황과 정보
가 공급되는 현상에서는 기획의 융통성을 발휘할 재간이 없다. 벌써 공기업 민
영화가 선진화란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그 또한 초기의 ‘거짓’으로 우선 정책의
신뢰를 상실한 상태에서 출발한다. 즉, 기획보다는 현실적인 사안 하나 하나의
대응에 급급하게 되면서 그들 스스로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쫓기는 상태가 조
성된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병존하다. 기획의 안정성도 떨어진다.
이 상태에서 꺼내는 카드는 두 가지 밖에는 없다.
하나는 공권력에 의한 철저한 강압 , 다른 하나는 빠른 속도로 여론을 장
악하는 것뿐 이다. 그러나 이들은 인터넷이 가진 온라인에서의 위력이 과거의
수준이 아니라 아메바의 진화처럼 빠르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이것은
단순한 변형이 아니라 그 형식 자체를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 구성하는 자기복제
와 변형복제의 기능까지 가지고 있다. 한 마디로 통제가 불가능하다. 오히려 통
제하려 한다면 변용과 변체까지 가능해진다. 당연히 그들 방식에서는 첫 번째의
수순을 꺼낼 수밖에는 없다.
촛불이 그렇다고 이런 기획환경에서 무조건 승자가 되는 건 아니다. 공권력은
두 가지의 강력한 힘이 있다. 먼저 건드릴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집단이고 또한
언제든지 조작(造作)이 가능하다. 집권 세력을 위해서는 공평한 집단임을 포기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 상태에서 이의 진위(眞僞)를 증명하는 것, 증명된 사
실을 알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한계를 가진다. 이것이 바로 통제(統制)다. 지금은
바로 그 국면에 와 있다.
넷째 , 친일 본류에 대한 공략도 필요하다 .
일본기획자가 사냥개를 앞세운 한국 사회 국가 시대와 역사에 대한 공격은 전쟁
과 다름이 없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공격받은 자는 수비만을 해야 하는가 라는
과제가 주어진다. 때로는 공격이 최선의 수비가 될 수 있다. 그 공격의 열쇠는
어디에 있는가?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지금 공격 당하고 있는 경로(經路)와 현상(現狀)
은 일본이 아직도 제국주의의 망령을 떨치지 않고 있으며 나아가 일본 극우가
재편코자 하는 동북아시아의 미래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이들에겐 과거 역사의
반성은 추호도 없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의지를 불태운다. 침략본성이
다.
국제사회는 힘(power)을 우선하는 매우 냉혹한 사회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
간사회가 그러하듯 ‘명분’은 몹시 중요하다. 실용주의를 아무리 내건다고 해도
외교에는 원칙과 방향이 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이 하고 있는 행위는 단순히
힘의 우위에서 벌이는 외교전이 아니라 실질적인 침탈 행위라고 판단해
야 한다 . 이 점은 앞선 제1부에서 상세히 설명한 바와 같다. 이것은 공개적인
해명요구를 가능하게 한다. 과연 그들의 입장에서 이것 또한 그저 외교전의 일
환이며, 수단으로 간주한다면 국제사회는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민족주의를 포기해야 한다’는 안병직 류의 이야기는 거꾸
로 짚어보면 민족주의가 살아나는 순간, 일본의 시도는 좌절된다는 것을 의미한
다. 물론 이것은 남북한 양측 모두가 현 상황에 대한 평가에 냉철함이 가미되어
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 점에서는 오히려 친일매국세력을 친위로 해서 세워진 MB정권 자체가 이를
실천할만한 역량이나 의사가 있는가에 더 중요점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회분위기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것으로 지난 십 년
이어져온 남남갈등의 고리를 푸는 계기로 삼아야 할 정도로 상황은 시급하다.
그러므로 이 사실이 남과 북 모두에 공유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일본기획
자의 남과 북에 대한 순차적인 혹은 단계적이거나 병행된 침탈의지 자체를 분쇄
하게 된다. 중장기적으로 보면, 이것은 그들이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움직여지
는 많은 허점들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친일 본류’는 일본 기획자를 가리킨다 . 일본 그 자체다 . 단순히 일본 우익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국가가 바로 그 상대자가 된다. 이들은 일
단 과거에 대한 반성보다는 제국주의 부활을 꿈꾼다. ‘친한파’라고 하지만 그들
의 본질이 제국주의 시대 조선 병탄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
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는 그들에게 반드시 정복(征服)해야 할 ‘먹이’이고 잘 다
루어야 할 ‘대상’이다.
일본이란 나라가 가진 복잡한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서 친일 본류와 일본기획자
를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들은 자신들이 나서지 않고도 그들의
사냥개와 촉수 (觸手 )를 활용하는 데 익숙하다 . 이미 침략전쟁 , 그 가운데
서도 괴뢰정부까지 수립하면서 공략을 감행해본 경험도 있다 . 이것이 경
계할 부분이다 . 직접 경험은 분석 대상이 아니라 대응할 대상이 된다. 공격을
해본 수비, 수비를 하면서도 공격하는 법을 알고 있다는 의미기 때문에, 그런 직
접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는 오판하기 딱 쉽다.
본질적으로 일본기획자 본류를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친일의 재구성 상태에
서 완벽하게 상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추후 따로 상세하게 따로 떼내어 정리해보는 것이 좋
을 것 같다.
6.
마치며 ; 극복의 당위가 깊어진다 .
급한 대로 제1부에 이은 <속편>으로 자료와 생각들을 정리해보았다. 무엇이 올
바른 선택이 될는지 혼란이 생길 수 있는 시점이다. 흔들림 속에서 굳건한 중심
을 잡는 것이 무척 요구된다.
8월 15일, 촛불민심이 100번째에 걸쳐 ‘소통’을 요구한다 해도 정권과 정부는
들을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MB-박희태 간 8월 12일 당청(黨靑) 회동에서
조차 ‘경제지상주의를 천명해야 한다’는 한나라당의 목소리에 대통령은 ‘공감’
했다고 한다. ‘경제’가 역사와 시대 , 아니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이유처럼
비춰진다 . 이런 대목에서는 촛불민심을 수용하지 않는 이유로 또 ‘경제’가 등장
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그 이면에서 웃고 있는 ‘친일’이 있다. 일단 친일매국세
력, 그 가운데서도 뉴라이트와 같은 ‘간, 쓸개까지도 친일에 젖은’ 자들이 사라
지지 않는 한, 그들이 이 정권의 중추(中樞)라고 스스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한, 대화와 소통은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정권과 정부는 촛불민심을 ‘적’ (敵)으로 , ‘방해꾼’으로 확실히 규정했다 .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 신 공안정국의 깃발이 벌써부터 오른 것에 대해
모두 눈치를 챈다. 이 수준으로 그칠 요량도 아니게 보인다. 잃을 것이 없는 지
지도 낮은 정권, 신뢰를 잃은 정부가 취할 조치는 철저하게 공권력을 통한 통제
와 민간 독재의 유형을 띨 수밖에 없다. 이는 군사독재와도 성격을 달리 한다.
직접민주주의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그 사실 한 가지만으로 촛불민심은 대화와
소통 자체를 거부당했다. 곳곳에서 법리적 원칙에 따른 대응이란 말로 포장된
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정권 시기에만 지속될 과제가 아니다. 일본기획자의
입장에서는 이 정권 초기 시점에서부터 강력하게 그들의 의도를 일차 마무리하
려는 의지가 더욱 강해지는 추세다. 어차피 그들의 목표는 정해져 있다.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해, 그들은 국경일로 다시 삼고자 하는 내밀한 기획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은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있다. 대다수 지식인들은
이 상황에 외면하고 회피하면서 무책임을 자기방어의 수단으로 여긴다. 지금은
이들이 현실을 깨우치게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공감대가 넓게 형성되었다는 촛
불 내부의 자신감도 아직 보이지 않는다. 초조해 하고 위태롭게 보인다. ‘질기게
간다’와 ‘그래서는 못 이긴다’는 팽팽한 대립적 시각도 적전 분열과도 흡사하다.
모호한 성격을 가진 대책위(광우병대책위)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것도 큰일이
다. 정권과 정부의 거침없는 강압의 밀어붙이기도 더 극심해진다. 친일매국세력
의 목소리는 건국 60주년의 간판을 걸고 더욱 거세지고, 이를 한국 사회의 미래
에 해당하는 우리 아이들의 교육까지 전파하려는 시도, 즉, 우중화(愚衆化) 시킨
가운데 어느 방향으론가 몰고 가고자 하는 의도가 빤히 들여다 보이는 시점이다.
그런 차에 8.15가 다가온다. 성격도 모호한 ‘건국절’, ‘정부 주도의 건국60주년’
이란 간판이 역사에 뭔가 덫 칠한 듯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을 때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될 그런 절체절명의 시기가 왔다 . 안타
깝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여기에서는 좌절하기 보다는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가
몹시도 절실한 그런 시간이다. 쉽지 않지만 그래도 가야 할 길이고 정신이며, 그
바탕에서 시대와 역사를 지켜보는 눈이 많아지길 바라고 바랄 뿐이다.
(2008.8.12)
5.
8월 15일. 비가 온다.
시대 이야기를 하면 눈물이 난다고 누군가 말했다. 어느 시대이건 그렇지만 지
난 60년은 기쁘기 보다는 안타까움이 넘쳤다. 분단역사는 정리되지 않았고, 시
대 속의 부조화는 이어졌다. 지난 60년을 ‘기적의 역사’로 단언하기에는 청산되
지 못한 과거가 너무 많다. 앞으로 갈 길도 더 멀다.
촛불민심은 오늘을 경계로 새로운 단계로 돌입하게 될 것이다 . 100일. 길
었던 시간이었지만 끝내 MB정권과의 소통은 실패했다. 마타도어와 신 매카시
즘 정국은 민주주의의 20년 후퇴라는 평가에 잇닿아 있다. 앞서 MB정권이 가진
속성을 감안할 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분석이 옳다. 밀어붙이기는 극심해
질 것이다.
종교계가 이에 합세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들에게도 분명 한계는 있다. ‘이
익 집단’이라는 관점이 있는 탓이다. 촛불민심을 앞서 이끌었던 이른바 진보단
체의 한계도 존재한다. 촛불민심의 본질이 진보 보수와 같은 것이 아니라 보다
깊숙한 ‘친일매국세력’과의 대결에서 출발한다는 사실, 그것을 각인한 상태에서
출발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에라도 그 바탕으로 접근해가는 움직임은 보
인다. 그러나 약하다. 지난 100일 동안 이 문제를 소홀히 했던 대가는 마타도어
와 신 매카시즘에 철저히 당한 형상이다.
스러지게 되면 촛불이 지는 것일까 ?
그렇지 않다.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 정권이 친일매국세력을 스스로 정리하
려는 노력을 하고, 일본기획자의 의도를 스스로 분쇄 가능한 몸짓을 보이는 경
우. 둘째, 국익(國益) 속에서 소통을 통해서 사회 국가를 무난하게 이끌어가려는
중용(中庸)의 심리를 선보일 때. 이 두 가지 경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촛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촛불민심의 기본은 집단지성이다 . 알기에 반응하는 것이다 . 몰랐다면 촛
불에 불이 붙을 이유가 없었다. 마타도어는 바로 거기서 비롯된다. 촛불과 집단
지성을 연결시키지 않으려는 친일매국세력과 그에 동조하는 언론의 반발은 치
열했다. 단순한 기세 싸움 수준이 아니라 거의 혈투(血鬪)였다. 여전히 이 전쟁
은 이어진다. 그러나 정권, 공권력, 그리고 선전도구를 지닌 세력은 확실히 힘이
세다는 걸 증명했던 100여 일이기도 하다.
지켜보아야 할 부분은 우중화(愚衆化)를 시도할 정권의 움직임이다. 이른바 다
양한 선동술이 동원된다. ‘물타기’로부터 ‘모호한 접근’(물에 물타기), ‘밀어붙이
기’, ‘강력한 여론 장악’,’반대세력에 대한 철저한 불이익 부여’(차별화 대우), ‘좌
파 우파론’(좌파 매도) 등 방법도 다양하다. 이 모든 것이 시행될 것이다.
이 사이를 뚜벅뚜벅 일본기획자는 걸어오게 될 터이다. 친일매국세력의 목소리
한 마디 한 마디마다 그들의 의도(意圖)가 더 짙게 깔릴 것이다. 그에 반발하지
못하는 사회 국가는 그 자체로 이미 ‘죽은 사회 , 죽어 버린 나라’가 된다 .
그를 옹호하는 사람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그가 설혹 회색의 지대에 서 있다 하
더라도, 일상의 소시민적 삶을 앞세운다 해도 ‘시대의 미아(迷兒)’라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과거 60년의 어두운 기억이나 산업화 시대 미처 챙기지 못한 불편했던 진
실을 지금 다시 떠올리자는 것이 아니다. 오늘 대한민국이란 사회 국가의 눈 앞
에 나타난 현재의 친일과 미래의 일본 팽창주의가 나타나는 현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당면(當面)한 과제이고 그야 말로 미래를 말하는 것이다.
극복하지 못한다면 , 그건 시대를 버린 사람들만 사는 땅에서 내가 살았
다는 회한 (悔恨 )만 그득하게 될 듯하다 .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
피눈물 같은 비가 내린다. 눈물 이후에 다시 생각을 가다듬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그것이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 주어진 소명(召命)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008.8.15 止月 山庄에서 쓰다.)
촛불민심이 집단지성인가?
어쩌면 우리 시대에서 다시 켜진 촛불이 의미하는 바를 지금 당장 찾아
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 그러나 촛불은 광우병대책위나 천주교정의구현사제
단이나 범불교도대회가 의미를 가지는 것도 아니다. 시대가 가진다. 이 시대에
일본기획자와 친일매국세력의 준동(蠢動)을 정확하게 감지한 능력과 그들에 대
처하는 첫 발걸음이 바로 촛불민심이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러나 약하다. 오래 전에 친일에 포섭된 대학생 그룹들이나 IMF 이후 신자유
주의 정책 하에서 개인주의 각자주의에만 익숙한 대학생, 젊은이들의 종합된 의
기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연세 드신 양반들이 가세했다. 깨어있는 지성이다.
민주화를 위해 ‘잃어버린 시대’를 살았던 386들은 생활인이자 소시민으로 움츠
러들어 있다. IMF가 준 고통스런 장면이다.
정권은 인정사정 없이 촛불민심을 탄압한다. 그들의 갈 길을 막는 장애물이다.
마치 철인경기를 하듯이 넘고 치고 헤쳐 나간다. 방해물은 제거한다는 신념이
그들의 눈빛에 선연히 보인다. 공권력이 가동되고, 조직적인 마타도어, 거센 공
안정국, 난립하는 메카시즘에다 이제는 언로(言路)마저도 법과 질서라는 명분을
끌어대어 통제를 시작하려고 한다. 여론을 이끄는 조중동 등 친정권 매체들의
행태도 여전하다. 매너리즘에 빠진 다수 국민들은 아직도 이 사태의 진실을 알
지 못한다. 흐름을 놓쳤기 때문이다. 그에 외면 회피나 무관심한 것도 있다. 그
런데 피해는 고스란히 그들에게도 돌아가게 되어 있다. 직접 당사자다.
‘취약계층은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라는 이한구 국회 예결특위원장의 말
은 허언이 아니게 들린다 . 중산층이 사정없이 무너진 지금 취약한 사람들은
이 땅에 넘쳐 있다. 그들에게 ‘경제살리기’라는 달콤한 언약은 통했고, MB정권
이 태어났지만 그 속 깊은 곳에서 친일과 일본기획자가 꿈틀대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몇 사람이 안 된다. 시작되고서야 정체를 짐작하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그
들을 모두 다는 모른다.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으니 드러내놓고 ‘한국을 접수하
려고 합니다만…’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 터이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영토가 그
들 손에 들어간 것도 사실이다. 정권이 그러니 당연한 일이다.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정도 수준이면 한국 사회가 요동을 쳐야 정상이다.
그런데 촛불민심은 자꾸만 압박 속에서, 다시 형성된 무관심이나 이상한 기대감
속에서 다른 형태로 투쟁이 진화되는 양상이다. 110회가 넘는 와중에 지쳤다는
표현이 옳다. 소통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 MB정권은 이제 박재완의 입을 통해 ‘
소통하려 않은 것은 촛불이다’라고 말한다. 뻔뻔하다. 후안무치(厚顔無恥)하다
는 표현이 적절하다.
약간 감정적으로 말하자면, ‘힘이 있으니 눈에 뵈는 게 없다’는 식이다. 전혀 인
간냄새를 풍기지 않는 ‘건조한 교활함’ 같다. 거기에 모두 진력을 낸다.
일본의 ‘다시 백 년’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 이 자료의 공개로 인해
그들이 오지 않는다면 그 또한 다행스럽겠지만 나의 예상으로는 오히려 더 강력
하게 밀고 들어올 것이라 판단된다.
그 순간까지 참는다면 그것도 방법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피부로 느끼는 바로
그 순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일본의 사냥개’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내가 살아가는 시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질 것이다.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이 무슨 의미로 생을 이어갈 것인가?
그래서 말한다.
“개로 살 것인가 , 사람으로 살 것인가 ?”
지금은 이 질문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그 외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시점이다.
11.
‘시대’는 결코 너희의 의도대로 흐르지 않는다 .
20.
4. 독재시대의 개막과 혈투
5. 존재감 없는 정치권의 화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