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 철 학 회

60주년 기념 춘계학술대회

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과학기술과 기독교철학>

◆ 일

시 : 2013년 6월 1일(토) 오전 10시~12시

◆ 장

소 : 인제대학교 본관 대강당 / 성산관

◆ 주

최 : 사단법인 한국철학회

◆ 주

관 : 인제대학교 인간환경미래연구원

◆ 후

원 : (재)플라톤 아카데미

◆ 발표학회 : 한 국 기 독 교 철 학 회

◆ 이 발표 자료집은 2013년도 (사)한국철학회의 지원을 받아 발간되었음 ◆

한 국 철 학 회
60주년 기념 춘계학술대회

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과학기술과 기독교철학>

◆ 일

시 : 2013년 6월 1일(토) 오전 10시~12시

◆ 장

소 : 인제대학교 본관 대강당 / 성산관

◆ 주

최 : 사단법인 한국철학회

◆ 주

관 : 인제대학교 인간환경미래연구원

◆ 후

원 : (재)플라톤 아카데미

◆ 발표학회 : 한 국 기 독 교 철 학 회

◆ 이 발표 자료집은 2013년도 (사)한국철학회의 지원을 받아 발간되었음 ◆

[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일정]

2013년 6월 1일 토요일
오전 9:40
10:00
10:30
11:00
11:30
12:00

개 회 인 사

김성진 교수

양자시대와 신에 대한 믿음

김유신 교수

정일권 교수

질 의 응 답

다 함 께

자끄 엘륄의 기술철학과 기독교 사상:
‘변증법’ 개념을 중심으로

손화철 교수

류의근 교수

질 의 응 답

다 함 께

전 체 토 론 및 친 교

이경직 교수

[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목차]
논문제목 및 발표자
제1발표 좌 장

이경직 교수 (백석대)

양자시대와 신에 대한 믿음

김유신 교수 (부산대)

1

논 평

정일권 교수 (한동대)

16

제2발표 좌 장

강학순 교수 (안양대)

자끄 엘륄의 기술철학과 기독교 사상:
‘변증법’ 개념을 중심으로

손화철 교수 (한동대)

22

논 평

류의근 교수 (신라대)

40

양자시대와 신에 대한 믿음

김유신 교수 (부산대)

양자시대와 신에 대한 믿음1)
김유신 교수 (부산대, 과학철학)

1. 서론
2. 신 존재증명
1) 존재론적 증명
2) 우주론적 증명

3. 과학과 신앙의 관계
4. 양자물리학과 신 존재 논변: 양자역학의 특징과 신의 속성과의 유비
1)
2)
3)
4)

에너지 양자화 가설과 물질의 입자-파동의 이중성
보어의 상보성
확률적 해석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의 함축

5. 결론

1. 서론
과학과 종교, 신학은 세계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는 대표적 분야며 활동이다. 자연과학은
자연에 관한 진리를 추구하지만, 신학은 종교적 측면의 진리를 추구한다. 진리란 실재의 구조
에 관한 진리이고 과학이나 신학은 실재의 구조를 밝히려는 학문이다.
이 과학과 신학 두 학문은 서로 다른 영역의 진리를 추구하면서도 역사적으로는 서로 깊
은 관계를 맺어왔다. 관계의 형태는 크게 3가지로 나누인다. 서로를 비판하고 자신의 영역만
을 옳다고 하는 환원주의의 경우, 서로를 인정하되 간섭하지 않는 경우, 서로의 영역이 상보
적이라고 받아들여서 서로 자극을 주어 같이 올바르게 발전하도록 기여하는 경우이다.
과학이 없다면 종교는 미신과 구별하기 힘들고 신학은 주술 체계와 구별하기 힘들었을 지
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계몽주의 이후 과학은 급격히 발달해왔다. 그리고 과학에 대한 경험주
1) 이 논문은 원래 한국철학회 기독교 철학 분과에서 발표하는 것으로 의도되었으나, 2013년 5월
24-25일 한동대에서 개최하는 창조에 대한 학술회의에서도 발표하게 되어 자연히 그 내용과 유사하
다.

- 1 -

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의 관점이 발흥하기 시작하자, 점점 신 존재에 대한 믿음이 퇴색해졌다. 신학은 이러한 지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신의 존재를 이성의 한계내로 가두려 한 적도 있다. 그 결과 신학에서 탐
구하는 신, 죄, 영혼, 부활 등의 주요한 종교적 신학적 개념을 실재론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구성주의적이거나 도구적으로 해석했다. 즉 종교는 인간의 도덕적 고양을 위한 것이 주요 목
적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서구 신학사에서 구자유주의 신학이 주로 그러했다. 필자는 슐라이
에르마하에서 하르낙에 이르는 구 자유주의 신학의 경향은 그리고 불트만으로 대표되는 실존
론적 신학은 과학에 대한 어떠한 해석 즉 경험주의적 해석을 수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과학을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받아들이면, 자연히 과학 바깥에 존재하게 된다고 생각되는
신의 존재, 기적의 존재, 성령, 성육신

같은 중요 신학적 개념을 실재론적으로 해석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신의 존재는 실존론적인, 구성주의적인, 도구주의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수밖
에 없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신에 대한 믿음은 객관세계의 영역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사적
영역으로 제한되고, 공적인 요소가 있다면 오직 도덕적 고양이 그 목적이 될 뿐이다.
최근 과학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관점이 등장하면서 신에 대한 믿음을 다루는 신학은 도
덕의 영역에 탐구를 제한시키기 보다는 더 깊은 자신의 본질적 영역을 인정하고 찾아가려 한
다. 즉 신학도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Nancy Murphy, 1990)
과학혁명이 일어나고 고전역학이 출현하는 데 종교개혁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뉴턴은 자
신의 제자 벤틀리(Bentley)에게 만유인력의 내용이 담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저술
한 목적은 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자연철학자 보일
(R. Boyle) 케플러(Kepler)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과학을 탐구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신에 관한 믿음은 많이 퇴색되었다. 그리고 고전역학의 발전으로 이신론(Deism)
이 강화되었다. 진화론이 발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연주의를 받아들이고 창조론을 부인하
면서 신앙을 잃게 되었다. 특히 최근 많은 젊은 젊은이들이 신앙을 떠나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떤 면에서는 주관적인 영역에 있지만, 객관세계에 관한 진리이기 때문에,
공적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현대과학의 발달을 잘못 이해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객
관세계의 주장이라기보다는 주관영역으로 제한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과학시대에 특히 첨단과학인 양자물리 시대는 신에 대한 믿음은 어떤
영향을 줄까라는 것을 살펴보려한다. 실재론적 입장에서 양자이론과 신에 대한 믿음, 신학 사
이에 어떤 유비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신의 속성에 대한 역설적인 모습이 더 잘 이해되도록
도움을 주어 신학이 실재에 대한 진리라는 것을 옹호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과학과 신앙의 관계보다 더 넓은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해당되는 신존
재 증명을 다룬다. 이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논의를 통해 양자물리학 이 신에 대한 믿음을 강
화시킨다는 단초를 끌어온다. 그리고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다루고 새로운 과학인 이성적으로
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특징을 지닌 양자물리학을 간단히 살펴보고, 양자물리학과 신에 대
한 믿음을 다루는 신학적 주장과 유비시켜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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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시대와 신에 대한 믿음

김유신 교수 (부산대)

2. 신 존재증명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라면, 신 존재에 관한 어떤 형태의 증명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할만하다. 합리성이 지성의 책무라면, 신 존재 증명은 지성인의 중요한
책무일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증명이 타당하다면 지성을 가진 인간은 신을 믿는 방향으로 가
야 할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보면, 신 존재 증명은 신앙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
없고, 신학자나 철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신학적 철학적 활동임에 틀림없다. 물론 어떠한 신
이냐라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만, 여러 철학자나 신학자들이 신 존재 증명에 몰두한 것은 당연
한 일이다.

1) 존재론적 증명
신존재 증명의 방식에 따라 크게 묶으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존재론적 증명, 우주론
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 도덕적 증명 등으로 분류된다.(마이클 피터슨 외, 하종호 역, 종교의
철학적 의미, pp. 139-187) 존재론적 증명의 특징은 세계에 대한 가정이 다른 어떤 증명보
다 최소한의 가정을 갖고 있다. 즉 세계의 존재 방식은 여러 가지 있지만, 거기에 대해 한마
디도 하지 않는다.
신의 존재 방식의 특징은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존재자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존재론적 증명은 이점을 착안하여 신의 존재는 외부세계의 특징이나 이론에 의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세계에 댛나 가정을 하지 않는다.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으로 흥미있고 유명한
것은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이다. 이 증명은 철저히 세계의 속성에 대한 언급을 배제하고
사유를 통해서만 증명을 수행하려 한 것이다.
이것은 귀류법적 논증으로 아래와 같다.(마이클 피터슨 외, 하종호역, 종교의 철학적 의미,
p143)
1) 사람들은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에 대한 관념을 갖는다.
2) 가장 위대한 존재자가 마음 속의 관념으로서만 존재하다고 가정해보자
3) 실재하는 존재자는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위대하다.
4)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보다 더 위대한 존재자, 즉 실재하는 존재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5) 하지만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보다 더 위대한 존재자는 없다
6) 따라서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는 실제로 존재한다.( 4)와 5)에서 )

이 증명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은 존재자에 대한 관념에서 존재자의 실재를 끄집어내는 것
이 비약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증명이 맞다면, 우리가 황금산이란 관념을 가지고 있으니
까 황금산이 존재하고, 우리가 가장 위대한 섬이라는 관념을 가질 수 있으니까, 가장 위대한
섬이 존재한다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이다. 필자는 존재론적 증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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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그대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깊은 의미를 가진 증명으로 생각하여 존재론적 증명
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그렇게 타당한 것 같지도 않고, 도한 비판에 대한 대해 답변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은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다른 존재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어떠한 가정도 하지 않는 안젤무스의 존재론적 증명은 오직 신에게만 해당될 수 있다. 앞에서
든 예들은 타자에 의존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예로 존재론적 증명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다.
안젤무스에게는 신에 대해서는 관념에서 실재로 가는 것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같다. 아마도 가장 위대한 존재자의 관념과 신을 결부시킨 것은 더 이상의 위대함을 생각할
수 없는 한계 개념이 적용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논리와 존재함이라는 사실이 일치할 수밖
에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필자는 이 문제는 보다 깊은 성찰을 요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2)
그러나 존재 즉 “있음”이 존재자의 속성이냐가 문제가 된다. 칸트는 이 “있음” 곧 존
재라는 것은 속성이라기보다는 한 사물을 상정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존재자에서
이미 존재를 가정한 것이지 존재자에 덧붙여진 존재라는 속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칸트의 이
말에 동의하더라도 존재 자체는 속성이 아니더라도 필연적 존재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신
존재가 우연적이라면 우연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존재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신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거나 아니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신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으므로 필연적이다. 이것은 하트손(Hartshone, C.)의 견해
이다.(피터슨 외, 종교의 철학적 의미, 하종호 옮김, p. 148에서 재인용) 이러한 주장에 대해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하는 것이지 신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진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즉 무한자이고 더 이상 위대한 존재자 없는
그러한 존재라는 관념을 가진다는 것에서 신의 실재함으로 가는 추론을 부정하려는 근거는
어디에서 오는가? 비판을 위한 위의 예는 적합한 것이 아니다. 부정의 근거를 찾는 것이 오
히려 증명보다 더 어려울 수 있는지 모른다.

필자는 신의 존재는 다른 존재의 도움이 필요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연적일 수가 없으며,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다. 이 논리적 필연이 사
실적 필연성이 되지 않으려면, 신의 존재는 다른 어떤 존재자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
른 유한한 존재에 대해서는 논리적 필연이 사실적 필연으로 가는 것을 부정할만한 예들은 앞
에서 보여준 것처럼 많다. 신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라면 바로 사실적으로 필연적이라
는 것이 부정보다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어느 존재자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증명을 위해 다른 존재자의 도움이 필요
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존재는 자기 자신에게서 확보하기 때문에 그

2) 데카르트는 이러한 관념의 원인을 추구하여 신이라고 했다. 안젤무스는 원인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
다. 원인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가정을 아직 채용하기 전의 단계를 사용하였다. 칼빈도 우리 속에 있
는 종교성의 원인을 신의 존재의 근거로 사용했다. 이 점에서는 데카르트와 유사하다. 안젤무스의 존
재론적 논증은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다음 기회에 이를 다루려고 한다.

- 4 -

양자시대와 신에 대한 믿음

김유신 교수 (부산대)

것은 생겨나지도 않거니와 사라지지도 않는다.(Hick, John, “A critque of the 'second
argument',” in The many faced argument, ed. Hick and McGill, pp.345-5, 하종호
역 종교의 철학적 의미, p. 145-149에서 재인용) 그렇다면 논리와 사실의 구별이 신에게 적
용될 때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경험만이 인식의 원천이라는 세계에서는 이러한 존재론적 논변은 어떤 형태든지 의심스러
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논변은 경험에서 실재를 끄집어내지 않고 개념을 통해서
실재하는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것이다.
“가장 위대한 존재라는 관념”이 일관된 관념인가? 이것은 곧 어떤 경험이 가장 위대한 존
재라는 관념을 갖게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경험이 존재론에 우선적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라
가면 어떤 경험이 가장 위대한 다른 사물들이란 관념을 주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면서 그러한
관념을 사용하여 그 사물의 실재를 끄집어낸다면, 임의의 관념에서 그 관념이 말하는 실재를
끄집어 낼 수 있기 때문에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 추론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점을 가진다.
첫째는 존재론적 증명의 세계는 세계의 어떤 특징도 말하고 있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가장
적은 가정으로 존재에 관한 증명을 하는 방식이란 것을 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존재론적
증명을 비판하기 위해 다른 가정을 도입한다는 것은 존재론적 본성에 대해 오해한 데에서 기
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로 경험만이 인식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귀납적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귀납의 증명이 불가능한 애매한 상황에서 귀납을 받아들여
경험주의적 세계의 특징을 기반으로 삼아 신 존재에 관한 존재론적 증명을 비판하는 것은 존
재론적 증명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의심스럽다. 경험적 세계의 특징을 받아들이는 것
은 존재론적 증명이 가정하는 것보다 더 의심스러운 가정을 근거 없이 두는 것이 아닌가? 오
히려 신 존재가 귀납을 보증해 줄 수 있다. 존재론적 증명은 앞으로 더 깊이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다음에 한번 다루고자 한다.

2) 우주론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은 존재론적 증명보다는 좀 더 많은 가정을 하고 있다. 즉 개념만이 아닌 사
실을 끌어들여서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려는 시도이다. 여기서 사실이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는 관계적 사실이다.
이 우주론적 증명에는 두 가지가 형태가 있다. 하나는 논리적인 제 일 원인의 논증이고 다
른 하나는 시간상의 제일 원인의 논증이다. 아퀴나스, 클락, 코플스톤, 테일러는 전자에 속한
다. 이 증명은 주로 설명적인 인과조건들을 고찰할 때, 결과에 대한 시간적인 관계보다는 논
리적인 관계이다. 그래서 그 논변의 귀착점은 제일 원인은 반드시 시간상의 최초의 원인이 될
필요는 없지만, 다른 모든 것이 지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의존해야 하는 원인이다.(마이클
피터슨외, 종교의 철학적 의미, p. 150-151)
우주론적 증명의 또 다른 형태는 아랍철학자들이 제안했고, 크레이그(Craig)가 옹호하고
나온 것으로 시간상에서 제일 원인을 논증한다. 차이가 있다면, 후자가 보다 더 경험에 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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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운 것을(이론적이든 실제적이든 관계없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칼람이라는 논증이 대표적인
것이다.(칼람이란 말은 19세기에 시작한 이슬람 정교를 옹호하기 위해 사용된 논쟁적 유신론
에 적용되었다.)((마이클 피터슨외, 종교의 철학적 의미, p. 151) 여기서는 칼람의 우주론적
논변을 다룬다.
칼람의 우주론적 논변
1) 존재하기 시작한 모든 것은 그의 존재원인을 갖는다.
2) 우주는 존재하기 시작했다.
3) 그러므로 우주는 그것의 존재 원인을 갖는다.(재인용 마이클 피터슨외 p.151, originally
Craig, William, The Kalam Cosmological Argument, New York: Barnes & Noble,
1979, p.63)

이것은 직관적으로 매우 그럴듯하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일상 경험에서는 존재 원인이 없
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 기초하여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즉 우연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전역학 시대에는 원인이 없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양자역학 시대에는 문제가 다르다. 우주론적 증명을 양자시대에 적용해보자. 빅뱅의 발견은
양자이론을 사용을 통해서 가능하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빅뱅의 원인이 반드시 있을 필요가
없다. 양자물리학은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빅뱅은 우연히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불확정성 원리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에 의존하는 인식론적 의미에서 불확정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의미에서의 불확정이다. 불확정의 범위 안에서는 모든 가능성이 있고, 어떤
가능성이 현실태로 출연하는지를 제약하는 아무런 조건도 없다. 현실태의 출현은 전적인
우연이다. 원인이 없다. 이는 양자역학의 특성에 의한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한 양자요동은 전적으로 우연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양자요동에 의해
빅뱅이 일어날 만큼의 에너지가 형성되려면, 계속 에너지가 무한히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관되
게 양자요동이 우연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확률적으로 본다면, 정말로 무한히 작다. 그러나
우주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작은 확률도 아무리 작더라도 영이 아니니까 가능하다는 주장
이다.
이 이론의 문제점은 양자요동이 그렇게 일관되게 일어날 수 있다는 가정이 너무 의심스럽
다. 왜냐하면 양자요동이 에너지가 어느 한쪽에서 무한이 되도록 양자요동이 일관되게 반복적
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바로 원인이 있다는 것과 동등하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 없
다. 오히려 원인 곧 신의 개입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내가 고함을 질러서 전
지구가 무너져 내리는 확률보다 작은 일관된 우연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어느 것이 더 쉬울
까? 우연의 정의가 일관된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 그야말로 일관성이 없
다는 것이 우연인데, 우연히 일관되게 일어나는 우연, 그것을 우리는 우연이라고 안 부르고
필연이라고 혹은 법칙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 우연성에 의한 세계의 출현은 받아들이기 쉽
지 않다. 그럼에도 우연에 의한 발생은 많은 사람에게 유혹적이다.

- 6 -

양자시대와 신에 대한 믿음

김유신 교수 (부산대)

러셀은 우주의 원인에 관해 질문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단지 “있을 뿐이고 그게
전부다” 우주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우연적이므로 우주 자체도 우연적임에 틀림없다. 곧 우
연히 발생했다.(종교 철학의 의미) 이것은 논증이라기 보다는 신은 없다는 전제로 하고 끌어
내는 기이한 주장이 아닐까? 일관된 우연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증명은 럿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져야 할 부담일 것이다.
우연이란 것이 있다는 것은 인과 질서를 벗어난 어떤 것의 개입이다. 개별자 자체가 우연
적인 운동을 하는데, 그것들이 결합되어 인과질서를 만드는 셈이다. 필연성이란 우연의 집적
에 의해 형성된 결과에서 온다는 셈이 아닐까? 이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양자 역학에 의하면
미시세계의 개별자의 기술은 확률적이다. 거시세계는 이 확률을 통계적으로 처리하면 거의 결
정론인 것처럼 보인다. 우연이 개입되는 미시세계의 결합이 결정론적인 거시세계가 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렇다면 거시세계는 미시세계에서 창발적 속성이 나오는 것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 창발성은 어디서 오는가? 우연인가? 불확정성 원리에 의한 우연을 가지고 칼람의 논변을
비판하기는 쉽지 않다. 차라리 우연성 보다는 신적인 개입에 의한 질서가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우연에 의한 세계의 발생을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불합리한 것이 아닐까?

3. 과학과 신앙의 관계
신이 만약 과학에 의해 증명되는 존재이거나 설명이 된다고 한다면, 그러한 신은 신이 아
닐 것이다. 신은 자유의지가 있는 존재고 우리를 초월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가 과
학에 의해 신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면, 신의 행동을 일으키는 인과구조를 파악할 수 있고,
신의 행동은 우리에 의하여 원리적으로 통제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신이라고 할 수 없
다. 따라서 신과 과학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신을 예측할 수
는 없으나 과학의 발달이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한다. 예를 들어 진화론이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신이 생명체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의심하여, 믿음을 잃었다. 그리고 물리학이나 지질학 천문학 등의 발달로 인해 세계에 대한
신의 창조를 더 강력히 믿게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세계가 우연히 생겼다는 견해
를 갖게 되어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경우 또한 많다. 이는 과학과 신앙은 서로 영향
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에서는 어떤 명제나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려면 그것이 반드시 합리적이 되어
야 하고, 합리적이라는 것은 증거에 의해 지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증거가 없으면 어떤 믿
음이든지 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는 증거주의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증거주
의를 적용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신에 대한 믿음에도 이 증거주의를 적용해야 할 것인
가? 증거주의를 사용할 때, 증거의 범위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 증거의
등등이 문제가 된다.

- 7 -

기준이 무엇인가?

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현대철학자들은 증거주의를 정초주의 혹은 토대주의(foundationalism)라고 알려진 인식론
적 관점과 연결시키고 있다. 정초론자들은 믿음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추론된 믿음과
기초적 믿음이다. 추론적 믿음은 이미 받아들여진 다른 믿음을 토대로 하여 거기서 추론하여
받아들여진 믿음이다. 다른 믿음으로부터 지지가 없어도 받아들여진 믿음을 기초적 믿음이라
고 부른다. 곧 이 기초적 믿음이란 증거없이 믿어도 합당한 믿음을 일컫는 셈이다.(마이클 피
터슨 외, p.193)
무엇이 기초적 믿음인가? 강한 정초주의자들은 “우리가 어떤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
리적이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자명하거나, 아니면 교정이 불가능한 믿음에서 논리적으로 추론
되든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역학의 시대에는 고전역학적 사유가 합리성의 기준 역할을 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자연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에, 결정론적 사상을 수용한다. 여기서는 교정 불
가능한 믿음의 존재 가능성은 매우 높다. 엄격한 법칙과 인과연쇄에 의해 경험적 사건이 발생
하는 세계에서는 합리성이란 엄격하고 기초적 믿음의 기준도 엄격할 것이다. 고전역학의 형이
상학은 소위 입자철학이었다. 따라서 원자론적 의미론이 주류가 된다. 결정론으로 인해 자유
의지조차 의심이 된다. 그리고 신은 단지 초기의 원인 이상의 역할을 하기가 힘들었다.
고전과학에 충실하면, 모든 거시 현상은 미시현상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고, 미시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찾아내면, 거시현상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 지배
적이기 되었다. 그러면 교정 불가능한 믿음은 무엇인가? 고전역학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이것
이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소위 자명한 믿음, 원자적 명제, 프로토콜 명제 같은 것이 무
엇인지를 많은 학자들이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경험주의가 쇠퇴하면서, 콰인에 의하면 분석명제와 종합명제 사이에 구별이 힘들고, 또한
전체론적 의미론에 의하면 경험에 정합적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떠한 믿음도 교정이 가능하
다. 따라서 강한 정초주의가 설 자리는 매우 좁은 것 같다. 최근에는 양자역학으로 말미암아
결정론적인 추론보다는 확률론적 추론의 시대가 되었다. 양자역학은 논리학에서도 배중률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논리학의 분배법칙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강한
정초주의가 더욱 설자리를 찾기 힘들게 되었다. 강한 정초주의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좀 더 넓
은 범위에서 기초적인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넓은 의미에서 기초적인 믿음은 과학에서
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종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가? 플란팅가나 알스톤 같은 철학자들
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과학자들이 과학 공동체가 오랫동안 형성해온 세계에 대한 기본
개념 믿음들을 기초로 하여 경험을 해석하기 위한 모델을 만들고, 이를 적용하여 검증하고 새
로운 경험을 예측하고 모순이생기면 다시 모델을 수정하는 작업을 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광범위하게 지지를 얻는 기초적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과학의 핵심적인 사유 방식이 드
러나는 믿음들이다.
신학에서도 공동체의 신앙이 주는 기초 믿음들을 토대로 종교적 실재에 관한 개념이나 모
델을 형성한다. 이 개념과 모델을 가지고 종교적 경험, 그리고 성경과 교회전통이나 신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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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시대와 신에 대한 믿음

김유신 교수 (부산대)

자료들을 해석한다. 여기서 신의 속성, 신의 뜻 계획 등에 대한 모델을 만들고 이를 가지고
종교적 경험과 성서의 주장들을 해석한다. 이 해석은 다시금 종교적 경험을 검증하고 평가한
다. 이러한 순환적 구조를 통해서 신학은 과학처럼 체계를 형성하고 스스로 해석하고 검증하
는 구조를 만든다. 이것은 과학의 이론 형성과 유사하다. 비록 실험을 하기 힘들지만, 그것은
과학도 실험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볼 때, 신앙공동체가 가지고 있고 신학을 위한
토대 역학을 하는 기초적 믿음들이 있다. 즉 우리의 삶에서 오랫동안 받아들여진 믿음들, 그
들과 양립 가능한 믿음들, 나아가서 종교적 공동체에 의해 오랫동안 받아들여지고 지켜온 믿
음들, 이들을 거부할 때, 수많은 다른 믿음들을 거부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는 그러한 믿음
들을 기초적인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의 특징은 결정적으로 반증이 불가능한 믿음들이다. 신에 대한 믿음도 이러한
의미에서 기초적인 믿음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믿음은 여러 증거에 의해서 반증되기 보다는
수용하는 정도가 약화되고 의심이 증가되었다가 줄어들었다가 하는 믿음이다. 신에 대한 믿음
은 주로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과학은 신앙에 영향을 주지만 결정적으로 거부하는 증거를 제공하지도 못하고 결정
적으로 인정하는 증거도 제공하지 못하고 그 믿음을 약화시키거나 강화시키는 증거들을 제공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믿음은 모든 사람들이 자명한 믿음이라는 일치를 기대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그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날 과학철학은 이러한 태도를 지
지하는 경향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철학자들은 의심할 수없는 완전히 참인 믿음에 도달하려
했지만, 실제로 아무도 자신들이 추구해온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데카르트가 그랬고 플라
톤이 그러했다. 철학자들이 아무리 전제 없는 믿음이라고 하지만 선 이해에 기초해 있는 믿음
들이기 때문에, “보편적 합리성”의 기준을 만들지 못했다.
기초적인 믿음을 신앙공동체가 가지고 있고 신학이 이들을 사용하여 신학을 형성한다. 그
렇다면 신학은 과학처럼 조직적 체계와 검증구조를 가지는 학문으로 과학과 같이 인식론적
위력도 지닌다. 그렇다면 과학의 성과가 신에 대한 믿음에 도전할 때, 신에 대한 믿음도 기초
적인 믿음이기 때문에 결코 약화시킬 수가 없다. 과학이 실제로 신에 대한 믿음에 영향을 줄
수는 있으나 그 때 신학에서도 반박할 수 있는 기초적 믿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근의 진화론이 많은 사람에게 신에 대한 믿을 잃게 했다. 진화론과 신에 대한 믿음은 양
립가능하고 진화론이 자연주의와 결합하면 이미 형이상학이라는 사실을 놓쳤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생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진화론 자체도 반박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따라서 포
퍼의 과학철학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에 가깝다. 신학은 이러한 과학에 대한 올
바른 신학적 철학적 반성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또한 과학의 발달이 바로 신의
부재 가능성을 높인다거나, 신의 속성을 보고 신의 존재가 모순적이라고 말하는 것 등을 제시
할 때, 신학은 여기에 적절히 대응할만한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 다음의 논의는 이러한 신학,
기독교철학의 대응방식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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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양자물리학과 신 존재 논변: 양자역학의 특징과 신의 속성과의 유비3)
신의 존재에 관한 부정적 시각의 원천 중 하나는 신의 속성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즉 직
관에 너무나 맞지 않다는 생각이다. 불합리성은 논리적 불합리성, 과학적 불합리성 등이 있
다. 이 문제에 대해 특히 우리가 논리적 불합리성이라고 여기는 것은 신의 속성이 고전역학적
직관에 맞지 않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고정역학적인 관점에서 과학적 불합리성인데, 우리가
거기에 너무 적응한 탓으로 논리적 불합리성으로 보였을 뿐이다. 그 외 삼위일체론, 신의 전
능성과 자유의지 등은 직관적으로 맞지 않는 논리적 불합리성의 결과로 보인다. 양자 물리학
시대에 신 존재의 논변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불합리성은 제외된다.

1) 에너지 양자화 가설과 물질의 입자-파동의 이중성
1900년 막스 플랑크는 양자 현상이란 텅빈 상자에서 열 복사 에너지의 전달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덩어리로 전달된다는 가설을 제창했다.(Planck, M., 1967a[1900], “On
an improvement of Wien’s Equation for the spectrum”, The Old Quantum
Theory, by D. Terr Haar, Pergamon Press, 1967, pp. 79~81[1900년에 발표된 독일어
원문은

“Über

eine

Verbesserung

der

Wienschen

Spektralgleichung”,

Verhandlungen der Deutschen Physikalischen Gesellschaft 2: 202~204).
기본 에너지가 hν라면 2hν, 3hν. . 이렇게 전달된다. 이것은 복사에너지는 분명히 파
동인데 텅빈 상자 안에서 입자처럼 행동한다. 이것은 흑체복사의 에저지 스펙트럼을 통해 증
명되었다. 일반적으로 상식적인 관점에서 입자라도 에너지의 전달은 그 입자가 다른 입자에
결합하여 자신의 에너지를 다 준다고 할 때, 시간에 따라 에너지 전달이 0hν, 0.1 v. 0.2h
ν. . 1hν에서 점차로 1.2hν, 1.5hν . . 이렇게 전달될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 그러한
중간 과정이 없는 불연속적 전달이다. 도저히 우리의 상식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다.
이것이 유명한 플랑크의 에너지 양자화 가설이다. 플랑크는 에너지양자화를 제안했지만, 에너
지양자화가 단순히 흑체복사를 설명하기 위한 우연적인 도구에 불과한지, 아니면 어떤 필연성
을 갖고 있는지 그 자신도 몰랐다. 그는 이것을 어떤 발견적인 것으로 보고 고전역학적 틀
내부에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양자혁명은 시작되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몰랐
다. 5년 후 1905년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의 복사법칙radiation law의 중요성에 관심을 가지
기 시작했고 광전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빛이 입자라는 소위 광양자가설을 그해에 제안했다.
이 가설은 고전역학에서, 특히 전자기 이론에서 보는 빛이 파동이라는 이론과 정면으로 배치
되므로 당시의 물리학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3) 이러한 유비는 John Polkinghorn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필자도 이런 생각을 했지만, 용기가 없어
쓰지를 못했는데, 폴킹혼의 양자물리학과 신학이란 책을 읽으면서 용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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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시대와 신에 대한 믿음

김유신 교수 (부산대)

연속적인 공간적 함수를 갖는 빛의 파동 이론은 순수하게 광학적인 현상의 표상 속에서 잘 작
동해왔다. … 그것이 빛의 방출과 변환에 적용될 때는 경험과 모순된다. … 흑체복사, 형광
fluorescence 복사파, 자외선에 의한 음극선의 산출과, 빛의 방출 혹은 변환과 연결된 다른
현상과 연관된associated 관찰은 만약 빛의 에너지가 불연속적으로 공간에 분포되어 있다고
가정하면, 더 잘 이해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가정을 따르면, 점광원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광
선의 에너지는 공간에 연속적으로 분포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짐 없이 움직이고, 완전한 단
위로서 흡수되고 방출되는 공간에서 점으로 국소화되는 유한한 수의 에너지양자로 구성된다
(Einstein, 1965: 368, originally Einstein, A., 1905, “Über einen Erzeugung und
Verwandlung des Lichtes betreffenden heuristishcen Gesichtspunkt”, Ann. Physik
17)

아인슈타인 광양자 가설이란 빛은 파동이면서 입자라는 주장이다. 파동 전 공간에 퍼져있
고 입자는 어느 지점에 국소적으로 존재한다. 한 존재자가 모순되는 두 가지 성질을 가진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중에 드브로이가 물질파를 제안했다. 물질인 전자도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이중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입자 파동의 이중성이다.
이 모순을 처음에는 휴리스틱한 것으로 받아들여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 환원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지금은 여러 실험적 증거로 인하여 이중성을 받아들인
다. 이 이중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직관적으로 모순되는 논리적으로 모
순되는 도구인 이중성을 가지고 경험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이상한 일을 하는 셈이 아닌가?
신을 받아들이고 싶어도 신이 지니는 속성으로 인해 신을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의 직관에 너무나도 모순되기 때문에 그러한 경우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이 악한 신이라든지, 신이 변덕스럽다든지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성경은 예수를 완전한 인간이요 완전한 신이라고 이야기 한다. 한 존재자가 이 모순되는 두
성질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존재가능 메커니즘에 관한 질문이기 보다는 우리의 인식
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가깝다. 우리가 세계를 다 알지 못하는 이상 우
리와 독립된 존재가 어떤 형태의 메커니즘을 지니든 간에 아무리 모순되는 성질인 것이더라
도 세계는 우리와 독립적이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오히려 지나
치게 불합리한 인식을 가져다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철학을 가질 수도 있다. 이 관점에
는 그러한 신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일한 존재자가 입자도 되고 파동
도 된다는 것은 모순이다. 물리현상을 훌륭히 설명해 낸다는 이유로 이러한 모순을 받아들이
면서, 그것도 우리에게 익숙한 물질의 성질로서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에게는 초월적인 신에
관한 것은 왜 못받아들이는가? 즉 신이면서 인간인 예수를 통해 구원의 진리가 구현되는 모
습을 잘 설명하고 오랫 역사와 공동체에서 잘 성립하는 신의 속성을 거부한다는 것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전제해 놓고 괜히 불합리성을 끌어들이는 종교에 대한 편견
을 반복하는데 불과하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은 신이면서 인간인 예수와 유비될 뿐 아니라,
삼위일체가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물리적 사실만큼 불합리 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
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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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2) 보어의 상보성
고전역학에서는 인과적 기술과 시공간 기술을 동시에 적용할 수 있어 입자의 궤적이
존재한다. 그러나 양자역학에는 입자의 궤적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리하여 원자내의
전자의 궤적은 없다. 하이젠베르크가 원자내부에서는 전자에 대한 시공간 기술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만든 것이 매트릭스 버전의 양자역학이다. 그 이유는 인과적 기술과 시공간
기술을 동시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어는 이것을 해명하기 위하여, 시공간 기술과 인과적
기술은

상보적이라고

제안했다.

입자성과

파동성도

서로

상보적이라고

하여

전자의

입자-파동 이중성을 설명했다.
상보성은 양자 이론의 역설을 해결하기 위하여 보어가 처음으로 발견한 물리학의
산물이다. 보어 이 상보성을 확장시켜 생물학과 물리학의 관계에도 적용했다. 이 상보성은
신학적 사고에도 적용할 수 있다. 신의 전능성과 인간의 자유 의지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다는 사실은 신의 전능성과 배치된다. 자유 의지는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외적 정보로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신의 전능성은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받아들이면, 신의 전능성을 거부해야
한다. 나아가서 신의 존재를 거부해야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부하면 인간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거부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신의 전능성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상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물리적 사건에도 존재한다고 받아들이는 상보성을 우리가 왜
신앙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가? 신적 속성이나, 신앙의 특징 같은 것은 비합리적이 아니라,
물질계에서도 합리적으로 성립된다고 받아들이는 것을 왜 신앙에서 거부할 것인가?

3) 확률적 해석
양자역학에서는 개별자의 행위를 예측할 수 없다. 오직 확률로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이
확률은 무지의 해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실재가 확률적이다. 한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높아도

개별자에게

일어날

수가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을

우리는

비결정론이라고 부른다. 역사에 대한 신의 개입을 생각해보자. 자연법칙이 결정론적이면 신이
어느 한 곳에 개입하면, 그 파장은 우주의 전 사건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확률적
해석에서는 신의 개입은 전 사건에 미치지 않고 차단될 수가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부인할
수가 없다. 물리적 가능성도 부정할 수가 없다. 양자이론의 확률성은 신의 역사적 개입이 전
사건에 바로 영향을 준다는 그 것 대문에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답변이 될 수 있다. .

4)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의 함축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우주와 우리 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과학을 가지고
우리는 세계를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해답은 과학은 확실한 지식을
제공해주며, 과학이 밝히는 자연의 법칙은 세계의 모든 현상을 결정한다는 결정론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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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시대와 신에 대한 믿음

김유신 교수 (부산대)

과학 철학자이면서, 시학의 대가인 불란서의 바슐라르는 결정론 사상은 바로 별들의 정확한
움직임이 수학적으로 기술된다는 천문학적 사실에 의해 기인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자 현상에서는,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로 인해 원자들의 정확한 움직임이
기술되지 않는다. 이 불확정성 원리는 전자의 위치의 오차와 운동량의 오차의 곱은 일정한 값
보다 크다는 엄밀하게 유도된 수식이다. 따라서 이 원리에 의하면, 전자의 정확한 위치를 측
정하면, 자동적으로 운동량의 오차는 무한히 커지게 되어 이 둘 모두를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다.
이 불확정성 원리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심지어 보어와 그의 제자 하이젠베르크
조차 서로 의견이 달랐다. 하이젠베르크는 다음의 사고 실험을 통해 불확정성 원리를 지지한
다.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알기 위해 파장이 짧은 빛을 사용하면, 전자의 운동량에 있어서
더 큰 변화가 일어난다. 전자의 위치를 결정하면, 전자의 운동량은 그 불연속적 변화에 대응
되는 범위 내에서만 알 수가 있다.” 이것은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상호작용의 한 특징을 보
여준다. ‘불확정성 원리’란 용어는 마치 전자의 확정적인 위치와 운동량이 이미 있으며, 다
만 우리가 갖고 있는 측정 기술의 한계로 인해 그것을 정확히 모른다는 것뿐이라는 것을 함
축하고 있다. 따라서 하이젠베르크의 이 용어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
은 전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이란 동시적 개념 자체가 실재하지 않고, 오직 추상에 불과하
다고 주장하고, ‘불확정성 원리’ 보다 ‘미결정 원리’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어떻게
해석을 하든, 전자는 원자 내부에서 정확한 위치와 속도를 갖지 않기 때문에 국소화되지 않고
구름처럼 퍼져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단지 공간의 어떤 범위에 전자가 있을 확률만을 기술
할 수 있다.
과학 기술시대에 이 불확정성 원리는 우리에게 다음 두 가지의 중요한 철학적 시사점을
준다. 하나는 우리 세계의 미래는 현재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열려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
계의 존재적 개방성은 종교, 예술, 인간의 자유의지, 윤리가 과학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위
치를 찾는데 기여한다. 열려 있음은 미래는 과거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신의
개입이나 인간 자유의 개입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관찰 대상은 관찰자를 떠나서 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주관에 독립적인 객관을 부정하고, 주관과 객관은 통전적적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통전성, 또는 전일성은 신과의 연합, 성경에 나오는 주님과 연합한 자, 성
령의 내주 등을 이해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 너와 나의 분리로
고통 받는 우리 사회에 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통전성을 받아들여
사회에 대한 좋은 치유의 길을 제시할 수 있다. 이 통전성은 결국 신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
이는 좋은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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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5. 결론
양자 역학에 의하면 미시세계의 개별자의 기술은 확률적이다. 거시세계는 이 확률을 통계
적으로 처리하면 거의 결정론인 것처럼 보인다. 우연이 개입되는 미시세계의 결합이 결정론적
인 거시세계가 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렇다면 거시세계는 미시세계의 성질에다 창발적 속성
을 통해서 그렇다면 그 창발성은 어디서 오는가? 우연인가? 아니면 신의 존재의 표현인가?
차라리 우연성 보다는 신적인 개입에 의한 질서가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신이 우리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계시한다면, 우리는 신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 때 그 알 수 있음은 신이 주신 계시 내용을 증거로 하여 신에 대
한 해석을 통해 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 해석과정에서
신이 우리에게 내린 특수 은총이 바로 말씀과 성령이다. 나아가서 교회라는 공동체이다. 일반
은총으로 인간 공동체로서의 사회와 자연이고 자연과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이
다.
바울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반은총이 우
리가 보다 공평한 입장에 선다면 하나님에 대해 더 가깝게 갈 수 있으리라는 것과 그리고 말
씀에 대한 회의를 가져다주는 세상적 요소들을

차단하는 데에 아니면 반박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추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논증에 의해서는 일관된 우연이
냐 아니면, 신의 개입이냐 하는 것 중 어느 것을 받아들이느냐를 결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증거는 증거주의자의 관점에거는 발견하기 힘들다. 그것은 무엇을 기초적 믿음으로 택하는가
에 달려 있다. 이 선택은 증거에 의하기 보다는 결국 믿음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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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시대와 신에 대한 믿음

김유신 교수 (부산대)

(부록) 보어의 상보성의 구조
보어의 의미에서 상보성은 2개 이상의 어떤 개념, 진술, 개념 틀에도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어떤 개념 틀 A, B, C 등이 상보적이라면, 다음 네 가지를 만족한다.
(1) 그들은 서로 의미하는 바가 다르거나 혹은 서로 다른 속성을 서술한다.
(2) 그들은 합쳐서 혹은 연합하여 사물에 대한 완전한 기술이나 표상을 형성한다.
(3) 그들은 각각 논리적인 의미에서나 경험적인 의미에서 배타적이다.
(4) 그들은 공시적으로synchronically가 아닌 통시적으로diachronically 적용되어야 한다.

보어가 의미하는 상보적인 개념들은 각각 서로 다른 개념 틀에 속하고, 이 개념 틀은 서로
공시적으로는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 물리적인 한 대상이 입자로 기술될 수도 있고
파동으로 기술될 수도 있을 때, 우리는 그 대상이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이때 이중성의 의미는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인과적으로 변형되는
실제적 이중성이고, 두 번째는 실재와 관계없는 설명하기 위한 관점의 이중성이며, 세 번째는
그 둘의 어떤 중간이다.
일반적인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어떤 대상이 둥글다는 것을 측정하는 상황에서는 둥근
모양이고, 네모를 측정하는 상황에서는 네모난 모양이라고 하자. 이 두 성질은 공시적으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다. 그런데 통시적으로는 양립 가능하다. 첫 번째 견해, 즉 실제적
이중성에 따르면 그때는 네모에서 등근 것으로 가는 변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실재론적 해석이 타당하려면 그 변화 과정에 대한 인과적 기술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아마
네모난 모양이 둥근 모양으로 되는 변화 과정을 인과적으로 추적하려 할 것이다. 이것을
입자-파동 이중성에 적용하여보자. 한 상황에서는 입자이고 다른 상황에서는 파동이라면 첫
번째 견해에서는 그 사이에 변화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고, 적어도 실재론적 입장을 취한다면
그 변화 과정을 인과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입자-파동의 이중성에 대한 보어의 견해와 맞지 않다. 왜냐하면 두 개념
틀이 서로 상보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그림에서는 입자로 기술되고 다른 그림에서는 파동으로
기술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존재적으로 대상의 물리적 변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화 과정의 인과적 기술을 반드시 요청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두 번째의 견해처럼 그 틀이란 우리가 사물을 보기 위한 관점들로서 우리가
구성한 틀인가? 보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상보성은 동일한 대상에 모순된 두 성질을
부여하면서, 도구주의나 경험주의, 구성주의 등의 반실재론을 피하려는 형이상학이다. 보어의
상보적 틀은 우리가 구성한 관점이 아니라 세계에 내재하는 형식적 틀이다. 곧 상보성은 양자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세계의 모습이다. 우리 세계는 서로 다른 관점에 의해서 표현되고
이 둘의 통합으로 세계를 온전히 설명한다. 그런데 그 틀은 세계에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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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논 평 : “양자시대와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 양자역학, 진화론, 최근의 God-debate 그리고 붓다와 희생양 -

정일권 교수 (한동대, 글로벌 리더쉽 학부)

1. 현대 자연과학의 모태로서의 유대-기독교적 세계관
김유신 교수님께서는 현대 자연과학의 탄생의 모체로서의 유대-기독교적 세계관의 업적에
대해서 바르게 지적해 주셨다. 특히 종교개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학혁명이 일어나고
고전역학이

출현하는

종교개혁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뉴턴은

자신의

제자

벤틀리(Bentley)에게 만유인력의 내용이 담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저술 한 목적은
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자연철학자 보일(R. Boyle)
케플러(Kepler)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과학을 탐구했다.
왜 현대 자연과학이 인도 혹은 중국 문화권에서 탄생하지 못했는가 ?

이것은 그 유명한

“니담의 위대한 질문”(Needham’s Grand Question)에서 나타난다. 중국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소유한 Joseph Needham은 서구보다 일찍 각종 발명을 많이 한 중국이 왜
서구 기독교 문화에 추월을 당했는지에 대해서 큰 질문을 던졌다. 유교적이고 도교적인
세계관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 자연과학이 탄생하기에 힘들었다. 불교 문화권에서는
더욱 더 자연과학이 발생하기가 힘들었다. “창조주의와 진화론의 논쟁에 비추어 본 불자의
과학관 - 다윈의 진화론 150주년에 부쳐”라는 논문에서 정윤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4) 불자의 과학관 정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도 최근에 증가된 불교학자들과 불자
과학자들에 의한 ‘불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 몇가지 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이들 연구의 기저에는 많은 경우 공통적으로 ‘불교는 과학과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 내지는 ‘불교는 과학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증명이
되거나 적어도 설명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전제될 것이 아니다.”자주 언급되는 아인슈타인과
토인비의 인용에 대해서도 이들이 이미 수십 년 전에, 그것도 과학적 근거를 제시함이 없이
‘감’으로 말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유대―기독교 문화권”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윤선 교수는 적어도 소위 프로테스탄트 불교(Protestant Buddhism)가 말하는 과학적
불교라는 논증의 연약함을 알고 있는 듯하다. 유대-기독교 전통과는 달리 불교전통은
자연과학적 합리성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과학적 불교를 화두라하는 많은 담론들은 사실상 그
기반이 약한 서구 기독교 전통에 대한 모방욕망의 산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저자는
지라르의 모방욕망이론을 통해서 프로테스탄트 불교의 모방욕망에 대해서 논의한 바 있다.5)
4) 불교평론 40호, 2009년.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73
5) Ilkwaen Chung, Paradoxie der weltgestaltenden Weltentsagung im Buddhismus. 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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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평 : “양자시대와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정일권 교수 (한동대)

불교의 공(公) 을 현대 물리학적 법칙과 무리하게 비교하는 것은 마치 성경 전도서에
등장하는 구절,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구절을 양자역학, 아인스타인의
상대성 이론, 불확정성의 원리와 유사학문적으로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헛된 시도라고 자신의
“과학적 불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논의에서 어느 불교학자는 바르게 지적하고 있다.6)

2. 붓다와 희생양과 만들어진 신들(gods delusion)
정윤선 교수는 나아가 “불교에는 ‘6,000년 지구 역사’ 같은 ‘경솔’한 주장은 없다.
부처님의 판정승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틀린’
창조론을 ‘맞게’ 설명해 보려는 신학자들의 부단한 노력에서 20세기 과학이 나올 수
있었음을, 사실 종교와는 상관이 없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인드라망임을 상기하자”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르네 지라르의 미메시스 이론의 빛으로 일견 판정승을 했다는 그
붓다(들)이 신화적 희생양 메커니즘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들(gods delusion), 곧 은폐된
희생양(들)이라고 논증하였고, 이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논평자는 저서 붓다와 희생양: 르네 지라르와 불교문화의 기원 (서울: SFC 출판부,
2013)에서 이 현대 프로테스탄트 불교의 모방적 시도를 학문이론적으로 분석해 보았다.7)
논평자의 저서 붓다와 희생양은 붓다를 은폐된 희생양으로 파악하는 최초의 연구로서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논평자의 논평은 부분적으로 2013년 한동대학교에서
개최되는 창조과학 국제학술대회 때 발표했던 논평자의 논문 “도킨스의 망상과 만들어진
신들(gods

delusion)

-

르네

지라르와

최근의

God-debate

-

”에서

부분적으로

옮겨왔다.8)
김유신 교수님께서는 이 논문에서 과학시대에 특히 첨단과학인 양자물리 시대는 신에 대한
믿음은 어떤 영향을 줄까라는 것을 살펴보려한다. 실재론적 입장에서 양자이론과 신에 대한
믿음, 신학 사이에 어떤 유비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신의 속성에 대한 역설적인 모습이 더 잘
이해되도록 도움을 주어 신학이 실재에 대한 진리라는 것을 옹호하려는 것이 목적이다고
하셨다. 이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논의를 통해 양자물리학 이 신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킨다는
단초를 끌어온다고 주장하셨다.
빅뱅의 발견은 양자이론을 사용을 통해서 가능하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빅뱅의 원인이
반드시 있을 필요가 없다. 양자물리학은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빅뱅은 우연히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한 양자요동은 전적으로 우연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양자요동에 의해 빅뱅이 일어날 만큼의 에너지가 형성되려면, 계속 에너지가 무한히 증가하는
Zugang aus der Sicht der mimetischen Theorie Renée Girards, Beiträage zur mimetischen
Theorie 28 (Müunster, Germany: Lit Verlag, 2010), p. 109.
Winston L. King, A Thousand Lives Away. Buddhism in Contemporary
(Berkeley: Asian Humanities Press. 1964), p. 145.
7) 정일권, 붓다와 희생양: 르네 지라르와 불교문화의 기원 (서울: SFC 출판부, 2013).
8) 2013년 한국창조과학회 국제학술대회 논문집, 한국창조과학회, 2013, pp. 213-22.
6)

- 17 -

Burma

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방향으로 일관되게 양자요동이 우연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확률적으로 본다면, 정말로 무한히
작다. 그러나 우주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작은 확률도 아무리 작더라도 영이 아니니까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의 문제점은 양자요동이 그렇게 일관되게 일어날 수 있다는 가정이 너무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양자요동이 에너지가 어느 한쪽에서 무한이 되도록 양자요동이
일관되게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바로 원인이 있다는 것과 동등하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원인 곧 신의 개입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내가 고함을 질러서 전 지구가 무너져 내리는 확률보다 작은 일관된 우연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어느 것이 더 쉬울까? 차라리 우연성 보다는 신적인 개입에 의한 질서가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우연에 의한 세계의 발생을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불합리한 것이
아닐까?
김유신 교수님에 의하면, 최근의 진화론이 많은 사람에게 신에 대한 믿을 잃게 했다.
진화론과 신에 대한 믿음은 양립가능하고 진화론이 자연주의와 결합하면 이미 형이상학이라는
사실을 놓쳤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생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진화론 자체도 반박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따라서 포퍼의 과학철학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연구 프로그램에
가깝다.
논평자는 앞에서 언급한 논문 “도킨스의 망상과 만들어진 신들(gods delusion) - 르네
지라르와 최근의 God-debate - ”에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은
종교를 비판하지만, 사실상 주된 비판대상은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론이다.
도킨스

자신이

말하듯이

특히

9.11테러

이후

그는

과격화되어서

유일신론을

주된

공격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과학의 이름으로 종교, 특히 유일신론과 유대-기독교 전통과의
문화전쟁에 동참할 것을 외치는 도킨스의 공격적이고 선교적 무신론은 정당한 자연과학의
범위를 넘어서 유사-종교적 과학주의에 근접하고 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해서
플란팅가는 “도킨스의 혼동. 극단으로 치닫은 자연주의”(The Dawkins Confusion.
Naturalism 'ad absurdum')라는 제목으로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플란팅가는 도킨스가
유대-기독교

전통의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그가

지나치게

구약의

하나님을 폭력적인 신으로 묘사하는 것을 지적함으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만들어진 신은
거의 자연과학에 대해서는 논의를 하지 않고 주로 철학과 신학을 다룬다고 플란팅가는
지적한다.9) 옥스퍼드 대학의 수학교수 존 C. 레녹스(John Lennox)과 진행된“과학은
하나님을 매장했는가?”라는 제목의 논쟁에서는 도킨스는 비록 자기 자신은 수용하지
않지만, 일종의 이신론적 신, 일종의 물리학자의 신, 물리학의 법칙들을 고안한 어떤 신
그리고 수학자로서의 신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존중할 수 있다고 했다. 대체적으로
유대-기독교적 세계관의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병적이고 해로운 망상으로
치부하다가, 어느 정도 이신론적 의미에서의 인격적 창조주의 가능성에 대해서 존중할
9)

Alvin

Plantinga,

"The

Dawkins

Confusion.

Today, March/April 2007.March/April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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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uralism 'ad absurdum,'" Christianity

논 평 : “양자시대와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정일권 교수 (한동대)

가능성을 열어놓게 된 것이다.
또한 김유신 교수님께서는 4. 양자물리학과 신 존재 논변: 양자역학의 특징과 신의
속성과의 유비에서 아래와 같이 주장하셨다. 신의 존재에 관한 부정적 시각의 원천 중 하나는
신의 속성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즉 직관에 너무나 맞지 않다는 생각이다. 불합리성은
논리적 불합리성, 과학적 불합리성 등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 특히 우리가 논리적
불합리성이라고 여기는 것은 신의 속성이 고전역학적 직관에 맞지 않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고정역학적인 관점에서 과학적 불합리성인데, 우리가 거기에 너무 적응한 탓으로 논리적
불합리성으로 보였을 뿐이다. 그 외 삼위일체론, 신의 전능성과 자유의지 등은 직관적으로
맞지 않는 논리적 불합리성의 결과로 보인다. 양자 물리학 시대에 신 존재의 논변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불합리성은 제외된다. 입자 파동의 이중성이라는 의미에서 김교수님께서는
신이면서 인간인 예수와 유비될 뿐 아니라, 삼위일체가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물리적
사실만큼 불합리 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김교수님께서 언급하고 계시는 폴킹혼의 입장에도 물질의 양자물리학적 구조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삶의 구조와 유비적이라는 주장이 존재한다.

3. 삼위일체론적 영감과 현대물리학의 탄생
논평자는 이미 오래전 20대 중반 석사과정 논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와 현대
물리학의 패러다임 전환 사이의 관련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논문을 적은 바 있다.10)
기독교적인 창조론은 근대과학의 발흥을 위한 필연적인 조건이었다는 R. Hooykass 등의
주장을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는 나아가 군톤의 주장과 같이 기독교적 창조론은 헬라철학의
정적인 우주론에 물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후의 우주론을 역동적이고 관계적인 존재론으로
물들인 삼위일체론적 창조론이었다. 즉 고대의 삼위일체론적 개념과 근대의 과학적 개념
사이에는 일종의 상응점이 있다. 관계, 자유, 에너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에 관계되는
개념들이지만 이것이 근대의 과학적 우주론에서도 발견된다고 군톤은 말한다. 19세기의
기계론적 원자론자들처럼 우주를 상호적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부분들의 병치로서가
아니라 점차적으로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원자를 이산된 물질들로 보다는 힘의 장(場)으로
이해하여 원자들의 상호침투성 이론의 발전에서 우리는 삼위일체론과 현대 물리학 사이의
상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내주(perichoresis)와 같이 물리학적인 물질에도 상호침투와
내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perichoresis and interpenetration of matter). 아인스타인이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Faraday와 Clerk Maxwell의 현대의 장(場)이론과 현대물리학의
상대성 이론과 카오스 이론, 나비효과(Butterfly Effect)에서 삼위일체론적 신학의 개념적

10) 정일권, “성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분의 세계 - 삼위일체론적 송영의 회복과 삼위일체론적 세계관
을 시도하며”,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논문, 1996. 특히 4) 현대물리학과 삼위일체론,
pp.32-34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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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메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군톤은 주장한다. 기계론적으로 결정되고 예측가능한 뉴톤적
고전물리학에 대해 현대물리학은 불확정성, 예측불가능성, 특히 생물계에서의 복잡성, 우연과
통계학적 차원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며, 자연질서를 본질적으로 완성되고, 불변하며, 닫힌
체계로서 정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미완성되어서 완성을 향해 역동적으로
열려있는 체계로 이해한다. 이러한 20세기 현대물리학이 우주를 상호연관된 역동적 체계의
페리코레시스(상호내주와 상호침투)로 또한 상호적으로 구성적인 관계 속에 있는 에너지 장의
역동적 구조로 이해하는 것은 삼위일체론적 존재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아인스타인은 Clerk Maxwell의 어깨 위에 서 있고, Clerk Maxwell은 Michael
Faraday 어깨 위에 서 있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현대물리학의 거장 아인스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과 특수 상대성 이론은 그 이전의 Michael Faraday, Clerk Maxwell이
주장한 전기자기장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인스타인은 그들의 전기자기장 이론을
뉴톤 이후의 최고의 혁명적인 발견이라고 말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가 낳은 20세기 최고의
개혁주의 신학자 Thomas F. Torrance에 의하면 Cleark Maxwell은 경건했던 크리스챤
과학자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삶 속에서 물질의 신비로운 구조를 해명하는 단서를
발견했다. 영국 개혁주의 신학자 Colin Gunton은 기독교 신앙이 독실했던 M. Faraday도
물질의 구조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침투(perichoresis)’와 닮은 유사한 구조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삼위일체론적

개념인

‘상호침투(perichoresis)’가

그의

새로운

과학적인 발견에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할찌라도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위한 유비적인
착상과 영감을 제공한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은 현대 물리학의 초기과정에서
물질의 구조를 이해하는 새로운 영감으로 작용했다. 물질의 궁극적인 구조가 종전의 고전
물리학에서처럼 기계적으로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롭고 영원한
내적인 삶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침투하고, 서로 공유하는 ‘관계’의 장(場)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John Polkinghorne은 양자역학에서 볼 수 있는 물질의 구조, 즉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나인 구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삶 속에서 그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연과학으로 거룩하시고 영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반대로 성경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삶을 통해서 우리는 우주와
물질의 궁극적인 구조에 대해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논문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근본적인 전제하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물리학적인 세계관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현대
물리학을 오용해서 힌두교, 동양사상, 뉴에이지 운동의 발흥과 서구 기독교의 몰락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정당하지 못한 비약인지 논증할줄 것이다. 서구 자연과학의 발흥
초기처럼 현대 물리학의 발전도 히브리-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김유신 교수님에 의하면, 양자역학에서는 개별자의 행위를 예측할 수 없다. 오직 확률로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이 확률은 무지의 해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실재가 확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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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평 : “양자시대와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정일권 교수 (한동대)

한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높아도 개별자에게 일어날 수가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을 우리는 비결정론이라고 부른다. 역사에 대한 신의 개입을 생각해보자. 자연법칙이
결정론적이면 신이 어느 한 곳에 개입하면, 그 파장은 우주의 전 사건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확률적 해석에서는 신의 개입은 전 사건에 미치지 않고 차단될 수가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부인할 수가 없다. 물리적 가능성도 부정할 수가 없다. 양자이론의 확률성은 신의
역사적 개입이 전 사건에 바로 영향을 준다는 그 것 대문에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답변이 될 수 있다. 또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의 함축에 대한 논의에서

과학

기술시대에 이 불확정성 원리는 우리에게 다음 두 가지의 중요한 철학적 시사점을 준다고
바르게 지적하셨다. 하나는 우리 세계의 미래는 현재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열려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의 존재적 개방성은 종교, 예술, 인간의 자유의지, 윤리가 과학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찾는데 기여한다. 열려 있음은 미래는 과거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신의 개입이나 인간 자유의 개입을 인정하는 것이다.
양자 역학에 의하면 미시세계의 개별자의 기술은 확률적이다. 거시세계는 이 확률을
통계적으로 처리하면 거의 결정론인 것처럼 보인다. 우연이 개입되는 미시세계의 결합이
결정론적인 거시세계가 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렇다면 거시세계는 미시세계의 성질에다
창발적 속성을 통해서 그렇다면 그 창발성은 어디서 오는가? 우연인가? 아니면 신의 존재의
표현인가? 차라리 우연성 보다는 신적인 개입에 의한 질서가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나은
대안이라고 바르게 주장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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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자끄 엘륄의 기술철학과 기독교 사상:
‘변증법’ 개념을 중심으로
손화철 교수 (한동대, 글로벌 리더쉽 학부)

1. 서론
2. 두 만남: 예수와 마르크스
3. 엘륄 해석의 다양성: 기술철학자 vs. 기독교사상가
1) 기술철학에서 엘륄의 자리
2) 기독교 사상가 엘륄

4. 엘륄의 변증법
1)
2)
3)
4)

현실을 서술하는 수단
사회학적 저술과 신학적 저술의 대위법
성경의 변증법
부정의 긍정성

5. 엘륄의 기술철학과 변증법
1) 기술의 정의
2) 기술의 자율성
3) 효율성의 법칙

6. 기술비관론과 대안으로서의 변증법
1) 엘륄은 기술비관론자인가?
2) 대안으로서의 변증법

7. 결론

1. 서론
프랑스의 사상가 엘륄의 탄생 100주기를 맞으면서 법학, 사회학, 철학, 신학, 미디어
학 등에서 아직까지도 인용되고 있는 그의 통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1) 그
1) 2011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엘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학회가 열려 그 결과물을 단행본
으로 출간했고(Jerónimo, Garcia and Mitcham 2013), 미국의 휘튼 칼리지(Wheaten
College)에서도 2012년 엘륄 학회가 개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도서출판 대장간이 엘륄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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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의 기술철학과 기독교 사상: ‘변증법’ 개념을 중심으로

손화철 교수 (한동대)

러나 54권의 저작, 100여 편의 논문 등 방대한 저술을 남긴 엘륄을 총체적으로 이해하
기란 쉽지 않다. 다양한 주제 뿐 아니라 마르크스, 바르트, 키에르케고어를 넘나드는 그
의 학문적 넓이를 따라가는 것도 벅차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엘륄이 기독교 저술가로 알려져 있다. 1990년 대 뒤틀려진 기독교,
하나님이냐 돈이냐등으로 널리 알려진 이후, 국내에서 엘륄에 대한 연구는 주로 그의
기독교 사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엘륄을 세계적인 학자로 발돋움하게 된 계기는
기술사회(The Technological Society)가 미국에서 번역 출판된 것이었다. 이후 엘륄
은 현대기술 중심의 새로운 문명에 대한 비판가로 널리 알려졌고, 프랑스 안에서도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도 미국의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닷컴에서 엘륄의 이름으로
검색을 해 보면 기독교 관련 서적보다는 기술사회나 프로퍼갠더(Propaganda) 같은
현대기술에 관련된 책들이 더 많이 팔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여러 여건에 따라 엘륄의 연구 분야 중 일부분만 선별적으로 소개되거나 알려
지게 된 데는 엘륄 자신의 저술 방식도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엘륄은 현대기술에
관한 사회학적 저작과 기독교 저작을 철저하게 분리하여 저술했다. 기술에 대한 저작들
에서는 신학적 언급이 없으며, 기독교 저작에서는 기술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 없거나
최소화되어 있다. 본인이 두 분야의 저작을 의도적으로 분리했기 때문에 각각의 저술들
이 독립적으로 읽히고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의 일차적인
이유는 종교적인 확신이 없이도 엄밀한 사회학적 분석에 근거해서 자신의 입장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Ellul 1981/1982: vi-vii). 다른 식으로 이해하자면
자신의 종교적 입장 때문에 사회학적 분석의 엄밀성이 의심받거나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2)
그런데 이와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 엘륄의 사회학과 신학의 변증법적인 관계에 대한
설명이다.3) 그에 따르면, 신학과 사회학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지 않는다. 사회학은
엄밀한 과학적 방법론을 따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것이고 신학은 초월적 진리
를 다루지만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학적 연구
가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신학적 접근이 배제되어야 하다. 그러나 신학은 반드시 구
체적 현실과 연결되어야 하기에(Ellul 1981: 306) 사회학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이
집을 번역·출간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 많은 이들이 엘륄의 사상을 접할
기회가 열리게 되었다.
2) 데이비드 질(David W. Gill)은 이에 더하여 그가 정교분리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국립대학의
교수였음을 상기시킨다(Ellul, 1981/1982: vii).
3) 엘륄의 ‘사회학’과 ‘철학’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엘륄은 자신의 기술에 대
한 분석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다룬다는 점에서 사회학으로 분류하고, 본인은 철학자가 아님을
매우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현실과 무관하게 마음 속으로 이런저런 사상들을 가지고 즐
기는 유희일 뿐이다(Ellul 1981/1982: 202; Ellul and Trude-Chastenet 1992:54, cf.
Vanderburg 2004/2010: 173). 그러나 그의 기술에 대한 분석들을 주로 다루어 온 것은 사회
학자들이 아니라 기술철학자들이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엘륄이 사회학에 포함시키는 기술
에 대한 그의 사상을 필요에 따라 ‘기술철학’으로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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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렇듯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섞일 수는 없는 두 학문 분야의 관계를 엘륄은 변증법적 관
계라고 부르며 자신의 연구가 두 방향으로 진행되는 이유로 삼는다.
본 논문은 그의 사상을 좀 더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한 시도로, 바로 이 ‘변증
법’ 개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개념을 중심으로 엘륄 사상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반성과 기독교 사상을 어떻게 함께 이해할 것인지를 모색하고, 이를 통해
특히 기술철학의 관점에서 엘륄을 재해석할 수 있는 계기를 찾아볼 것이다.
먼저 1절에서는 예수와 마르크스가 엘륄의 삶과 학문의 여정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
고, 그가 설명하는 신학과 사회학의 변증법적 관계를 간단히 알아볼 것이다. 이어서 엘
륄의 변증법이 기술철학자들과 그의 신학에 관심을 둔 학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
지를 비교할 것이다. 3절에서 엘륄 자신이 설명하는 변증법을 보다 상세하게 알아보도록
한다. 이어서 4절에서는 변증법에 대한 이해가 엘륄의 기술철학을 이해하는데 어떤 도움
을 주는지를 살펴보고, 5절에서는 그의 기술비관론에 대한 비판과 변증법의 관계를 따로
떼어 고찰할 것이다. 결론으로는 엘륄의 사상을 이해하고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
해서는 그의 변증법이 가지는 중요성을 좀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제출할 것이
다.

2. 두 만남: 예수와 마르크스
엘륄은 자신의 인생과 학문의 여정에서 예수와 마르크스를 만난 것을 가장 중요한 계
기로 꼽는다. 그는 18세에(1930년) 자본론을 통해 만나게 된 마르크스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게

되었고,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한

후에도

마르크스에게

‘돌아왔

다’(Vanderburg 2004/2010: 33, 41). 마르크스는 그에게 역사의 모든 시기에 끊임없
이 변화, 혁명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과 현실에 천착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가난한 자들
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Vanderburg 2004/2010: 41-43).
그는 비기독교인인 아버지와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독실했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성경을 읽었고, 20세가 되던 1932년 “상당히 순진하고 급작스러운 회심”을 경험한
다.4) 성경은 삶과 죽음의 문제와 같은 실존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제공했다
(Vanderburg 2004/2010: 45).
각각 전체성을 주장하는 두 세계관과의 만남 중에서 엘륄은 하나를 택하지 않았고,
그는 그 자신 ‘분열적인(schizophrenic) 상태’라고까지 표현한 (Ellul 1981/1982:
174) 지적인 긴장 속에서 그의 신앙과 학문 활동을 이어갔다.
4) 그러나 다른 인터뷰에서 엘륄은 마르크스를 읽은 시점이 1929년이며, 회심의 시점이 그 이전
이라고 말하기도 한다(Ellul and Troude-Chastenet 1994/2005: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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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의 기술철학과 기독교 사상: ‘변증법’ 개념을 중심으로

손화철 교수 (한동대)

그 순간부터 나는 나의 삶의 중심이 된 이러한 신앙과, 마르크스에 관하여 알고 있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과 모순 사이에서 살아왔다. 왜냐하면,
나는 마르크스가 사회에 대하여 언급한 것과 세계의 경제와 불의에 대하여 설명한 것들
을 왜 포기해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
에 그러한 요소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Vanderburg 2004/2010:
45).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 현재의 역사적 상황을 관찰하고 그에
대응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하여 엘륄은 마르크스의 시대를 주도한 것이 자본이었다면,
오늘

우리의

(Vanderburg

시대를 관통하며

지배하는 요소는 기술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2004/2010: 71). 그리하여 그는 평생 기술의 문제를 자기 연구의 주제

로 삼았다.
엘륄이 이해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그 혁명성이다.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종
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혁명적일 수밖에 없다. 혁명이란 기존의 틀 자체를 문제 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순간이

종말인

것처럼

살아야

하기

때문에(Ellul

1948/2008: 41), 이 혁명은 세상의 다른 혁명들처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악한 질서에 대한 거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우리시대의 근본적인 틀을 비판
적으로 검토해야 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하고, 그 다른 삶을 사는 공동체를 이루
어야 한다(Ellul 1948/2008: 62-63).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현실을 직시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일 뿐,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궁극의 해결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3. 엘륄 해석의 다양성: 기술철학자 vs. 기독교사상가
엘륄 연구자가 부딪히는 문제들 중 하나는 그가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는 많은 저작
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법학, 신학, 기술철학, 미디어 학자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엘륄
의 다른 저작을 읽어낼 수 있고, 그 안에서 충분한 논의가 가능하기 때문에 엘륄의 사상
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힘들거나,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엘륄 자신이 나
름대로의 큰 그림을 가지고 학문 활동을 해 왔음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기 때문에, 그
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본 논문은 이
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엘륄의 기술 철학과 기독교 사상의 관계에 주목하는데, 이 두 분

야에서 이루어진 엘륄에 대한 연구들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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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1) 기술철학에서 엘륄의 자리
미국에 엘륄을 소개한 사람은 유명한 무신론자인 알더스 헉슬리였다. 그는 엘륄의 기
술 분석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하면서 그의 기술 사회(1954/1964)
를 영어로 번역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Ellul 1981/1982: v). 이 책을 통해서 엘륄이 미
국에 널리 알려졌으며, 엘륄 자신이 말한 것처럼 프랑스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큰 반향을
얻게 되었다(Ellul 1981/1982: 228-229).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엘륄이 자신의 사회학적 엄밀성으로만 승부하기 위해 기독교
에 대한 언급을 피한 것은 성공적인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개 기술철학 영역에서
나온 엘륄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그의 기술 비판을 기독교와 전혀 연관시키지 않고 그
자체로 연구한다. 이는 미디어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술철학계에서 엘륄의 기술철학에 대한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흔히 엘륄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함께 대표적인 기술 비관론자이자 기술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을 시도한 고전적 기술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이들의 사상은
수많은 개별기술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와 분석이 없이 추상적인 기술 일반에 대한 분
석을 시도했다는 비판과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기술사회의 현실을 도저히 빠
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 진단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1980년대 이후 기술철학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고전적 소위 ‘경험으로의 전환(Empirical Turn)’을 주도한 학자
들이다.5) 이들은 고전적 기술철학의 추상성을 비판하면서 기술철학이 개별 기술들에 대
한 구체적인 경험 연구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기술사회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
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기술의 사회적 구성, 기술의 민
주화 같은 주제들이나, 나노 기술, 로봇 기술에 대한 인식론적․윤리적 물음들을 다룬다.
이러한 시도는 엘륄이 주장했던 현대 기술의 총체성이나 자율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현대 기술철학에서 1980년 대 이후 엘륄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시들어 버렸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엘륄이 자신의 현대 기술 분석에 이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 기술의 현실에 대한 엘륄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은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지만, 대안 없는 비판으로 치부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나름대로의 사명감과 확신을 가지고 왕성한 저술활동을 해 온 학자에 대한 평가로
는 부당할 뿐 아니라 무성의하다.

2) 기독교 사상가 엘륄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엘륄 연구는 그의 기독교 사상을 중심으로 이루어
5) 고전적 기술철학에서 경험으로의 전환으로 이어지는 기술철학의 흐름에 대해서는 손화철
2006a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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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의 기술철학과 기독교 사상: ‘변증법’ 개념을 중심으로

손화철 교수 (한동대)

졌다. 이미 70년대에 엘륄에 대한 짧은 소개가 이루어진 기록이 있지만(최종고 1974)6),
엘륄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980년대에 번역된 그의 기독교 관련 저작들을 통해서
였고, 엘륄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해 온 학자들도 대부분 신학자들이었다.7) 오늘날까지
도 많은 사람들이 엘륄을 기독교 사상가로 알고 있으며, 최근 번역된 책들도 아직은 기
독교 관련 저술이 주를 이룬다.
엘륄의 기독교 사상에 대한 연구들에게서는 엘륄의 변증법이 비교적 잘 수용되고 있
다. 우리나라에서 엘륄 연구를 선도적으로 수행한 이들이 함께 만든 엘륄에 관한 본격적
인 연구서인 자끄 엘륄 사상 입문(박건택 외 2003)은 신학을 중심으로 한 엘륄 연구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네 명의 저자들은 기술에 대한 엘륄의 연구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논의의 중심을 기독교와 교회에 분명히 맞추고 있다.
2010년에 나온 신광은의 자끄 엘륄 입문은 책 전체의 구도를 엘륄의 변증법적 방
법론에 맞추어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엘륄의 변증법적 방법론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 뒤
각 장의 제목을 ‘돈 vs. 하나님’, ‘기술체계 vs. 자유의 나라’, ‘리바이어던 vs.
그리스도’, ‘기독교 vs. 'X'’ 등으로 잡아 엘륄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엘륄
자신의 방법론을 최대한 존중하는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엘륄의 신학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엘륄의 사회학, 혹은 기술철학적
연구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들은 엘륄이 말한 신학적 연구와
사회학적 연구의 개별성을 끝까지 밀고가기보다는 그가 사회학적 연구를 현대기술의 문
제를 밝혀낸 뒤 그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서 엘륄이 엄밀한 사회학적 연구를 위해서 신학적 요소를 배제한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기술이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타락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요소라는 데에 초점
을 맞추는 것이다. 신광은은 기술사회에 대한 엘륄의 비관적인 서술을 언급하면서 이와
같은 글쓰기가 자신의 위기의식을 동료 크리스천들과 나누는 것을 통해 기술사회의 판세
를 조금이라도 바꾸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판세를 바꾸기] 위해
서는 강고한 기술 체계를 힘껏 후려칠 혁명이 필요하다. 이 혁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의 능력으로만 사는 자들을 통해서 가능하다”(신광은 2010: 144). 베네만
(D. Wennemann)은 신광은과 같이 엘륄이 기술의 필연성을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변증
법적으로 대칭시켰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엘륄의 기술사회만 읽으면 엘륄
이 기술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비관론자라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는 기술사회와 대칭이 되는 신학적 저술들과 비교하는 것을 통해 균형을 찾아야 한
다”(Wennemann 1990: 188).
이렇게 사회학의 비관론과 신학의 대안론을 대칭시키는 입장을 임재원(2005)은 그의
논문 제목 “자크 엘륄의 기술 문명 비판: 사회학적 불가능성과 신학적 가능성”으로 명
6) 최종고는 1974년 엘륄의 폭력을 현대와 사상사에서 번역․출간했다.
7) 여기서 중요한 예외라 할 수 있는 것이 강성화(2001, 2002)의 연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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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료하게 표현했다. 물론 엘륄이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분명하
게 밝혔다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은 큰 틀에서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것이다. 그러나 엘
륄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했
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회학적 불가능성’은 다소 성급한, 혹은 엘륄 사상의 미묘함을
놓치는 결론이라 하겠다. 또한 결과적으로, 엘륄에 대한 신학적인 연구에서도 사회학에
대한 연구에서와 만찬가지로 엘륄의 현대 기술에 대한 분석은 부정적이며 비관적이라는
동일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4. 엘륄의 변증법
엘륄은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의 사유가 변증법의 원리를 따른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자신의 사회학과 신학이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고 있
으며, 자신이 의식적으로 사회학적 연구와 신학적 연구를 분리해서 수행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엘륄의 변증법이 가지는 함의가 충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여기
서는 미국 학자들이 쓴 자신에 대한 논문들에 대한 답변으로 엘륄이 쓴 짧은 글(Ellul
1981)을 중심으로 그의 변증법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1) 현실을 서술하는 수단
엘륄의 변증법은 정신이 스스로를 확장시켜 가는 운동형식, 혹은 진리에 가까워지는
사상들의 추론과정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현실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기술(記述)하는 수
단이다. 엘륄은 널리 알려진 ‘정립, 반정립, 종합’으로 변증법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변증법이 단지 널리 알려진 정, 반, 합의 고전적인 틀에 따라 작동하는 사유 놀이인가?
플라톤에서

우리는

이미

이것보다

넓은

입장을

발견하게

된다.

“변증가

(dialectician)는 전체를 보는 사람이다”(국가 7권). 그렇다면 변증법은 질문과 대답을
통한 추론의 방식만이 아닌 현실을 파악하는 지적인 방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때 현
실이란 긍정과 부정, 흑과 백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관찰도 흥미롭다.
“논리학이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변증법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다루게 가르
친다.” (방법서설, Burgman과의 대화) 다시 말해서 변증법은 겉으로 드러나는 추론이
나 사고를 전개하는 형식적인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현실과의 관련성을 주장하
며, 현실에 대한 설명의 수단이기를 주장한다. 그런데 현실은 긍정과 부정의 요소들, 서
로 모순되지만 서로를 없애버리지 않고 공존하는 요인들을 모두 포괄한다. 따라서 강력
한 사유 체계는 ‘예’와 ‘아니오’ 중 하나를 배재하거나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하지
않고 그 둘 모두를 설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선택은 현실의 일부를 배제하는 것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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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의 기술철학과 기독교 사상: ‘변증법’ 개념을 중심으로

손화철 교수 (한동대)

기 때문이다(Ellul 1981: 293-294).

여기에서 정립과 반정립으로 인해 생긴 모순은 진리 추구의 과정에서 종합을 통해 어
떤 방식으로 해소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 모순이 바로 현실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이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의 모순은 해소될 수 없고 해소하려 노력해서도 안 된다.
“엘륄에게 있어 지적인 종합은 이데올로기적은 결단의 역할을 한다. 그 결단은 우리에
게 거짓 안정감을 준다. 그것은 우리 사진을 정당화하고 삶의 상황에 만족하게 만든다.
그 삶의 상황은 사실 항상 모호하고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데도 말이다”(Wennemann
1990: 183). 그래서 베네만은 엘륄의 변증법이 전체(totality)를 설명하려 하지만, 엘륄
에게 있어서는 그 전체가 두 개라고 말하기도 한다(Wenneman 1990: 182).

2) 사회학적 저술과 신학적 저술의 대위법
가장 자주 언급되는 엘륄의 변증법은 역시 사회학과 신학 사이의 변증법이다. 엘륄은
인간의 현실 전체를 이해하기 원한다면, 기독교와 세상을 단 한 권의 책으로 결합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사회학과 기독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대한 총체
적인 설명을 제시하는데, 이는 하나로 합쳐질 수 없다.8)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적 정치,
기독교적 경제, 기독교적 학문은 불가능하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면서 유능한 정치가,
기업가, 학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사회학자이자 신학자로서 엘륄은 자신의 저술을 통
해 이 두 가지 정체성을 독립적으로 유지한다.
그리하여 나는 현대 사회 분석의 독립성과 신학의 특수성,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일관성 및 중요성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의 비교할 수 없는 진리를 동시에 긍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상반된 요소들은 서로 이질적이면서도 서로 뗄 수 없게 연결되
어 있다. 따라서 그 관계는 변증법적이고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Ellul 1981: 306).

이러한 이해에 기반을 두고 엘륄은 자신의 저작들을 음악에서의 대위법처럼 배치했다
고 설명한다. 각각의 저작들은 서로 완전히 독립적인 내용을 가지지만 서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환상과 하나님의 정치, 사람의 정치가 서로 대위를 이
루고, 자유의 윤리가 기술사회, 기술체계와 대위를 이룬다(Ellul 1981: 306).9)
8) 엘륄은 라인홀드 니버가 예수와 문화가 만나는 방식으로 제시한 다섯 가지 유형 중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 유형(Niebuhr 1951/2007)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
광은은 니버의 역설 모형은 예수와 문화 사이에서 분열적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상황을
설명하지만 실천적 원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이와는 달리 엘륄의 변증법적 입장은 그
리스도인이 그 둘 사이의 긴장과 모순을 온 몸으로 감내해야 한다는 명백한 지침을 제공한다는
것이다(신광은 2010: 30-33).
9) 박건택은 엘륄이 자유의 윤리와 기술사회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내려 했으나 방대한 양
때문에 출판사가 거부하여 따로 나오게 되었다고 보고하는데, 이에 대한 전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박건택 외 2003: 31, 284). 이는 사회학과 신학을 철저히 구별하려 했다는 엘륄 자신의
말과 약간 어긋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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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이들의 상호 연관성이 있지만, 이들을 무리하게 합치려는 생각은 부질없다.

3) 성경의 변증법
엘륄은 현실의 총체적 파악으로서의 변증법을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면
서 다섯 가지 예를 제시한다.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이 사람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것이
다. 명령-불복종-심판-화해로 이어지는 기독교의 역사관은 완벽하게 변증법적이다. 무
소부재, 전지전능의 하나님이 한계로 가득 찬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에 들어오신다. 이
과정은 서로 화해할 수 없지만 양립하는 모순, 즉 신과 인간이 새로운 방식의 관계로 연
결되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모순이라고? 정확히 그렇다. 논리로는 해결할 수 없지만, 이 모순은 성경적 변증법을 만
들어낸다. 이 변증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복, 고정됨, 의식, 주의 깊은 복종이 아닌
영구적인 발명, 서로를 다시 창조함, 도전, 연애, 모험으로 만든다. 그 결과는 누구도 미
리 알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유 안에 세워진 인간의 자유에 대한 믿을 수 없이 엄
청난 계시다. 이 계시 안에서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는 서로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그 관계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여준다(Ellul 1981: 299).

성경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의 두 번째 예는 언약과 성취의 변증법이다(Ellul 1981:
300). 언약은 성취를 기다리게 하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 성취이다. 엘륄은 이것을 성경
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미 그러나 아직’의 구도와 연결시킨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모순이 만들어내는 긴장 속에서 지속되는 것이며, 언약의 성취를 통한 완벽한 화해의 순
간은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와 남은 자의 관계 역시 변증법적이다. 구속의 역사는 전 인류에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이스라엘 민족에서 남은 자로, 남은 자에서 한 사람 예수로 그 선택의 폭을
줄여간다. 그러나 그 선택은 언제나 전체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전
인류 구원을 위한 것이고 남은 자의 선택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예수의 선
택은 남은 자의 구원을 위함이다(Ellul 1981: 301). 여기서 엘륄은 예수를 하나님과 사
람을 화해하는 중보자로서만 이해하지 않고, 이스라엘과 전 인류, 나아가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상징하는 분으로 이해한다(Ellul 1981: 302; cf. Ellul 1981/1982: 211).
위의 세 가지가 구약에서 찾을 수 있는 변증법의 예라면, 나머지 두 예는 신약에서
찾을 수 있다. 그 하나는 은혜와 행위의 변증법이다. 바울이 강조하는 은혜로 인한 구원
은 “그러므로. . .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권면과 모순을 이룬다. 엘륄
은 이 모순을 일관성 있게 해석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바로 그 모순이 예수 안에서의 삶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의지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도록 하실 때, 우리는 마치 우리에게 하나님
이 안 계신 것처럼, 그리고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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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의 기술철학과 기독교 사상: ‘변증법’ 개념을 중심으로

손화철 교수 (한동대)

임을 져야 한다. … 우리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며 불가능한 일들을 하
지만, 마지막에 가서 우리는 우리를 이미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따름
이다(Ellul 1981: 302-303).

마지막 예는 역사와 파루시아(Parousia)의 변증법이다(Ellul 1981: 303-304). 엘륄
은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나라로 이어질 것이라는 해방신학 등의 견해나, 인간의 역사
는 재림과 마지막 심판으로 완전히 소멸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이라는 견해를
모두 거부한다. 인간의 역사가 단절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자신의 능
력과 잠재력으로 이룩한 역사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엘륄은 재림의 때에 인간 역
사의 모든 결과물이 질적으로 바뀌어 그대로 새 예루살렘에 포함될 것이라고 주장하면
서, 이 과정 역시 변증법이라고 한다.

4) 부정의 긍정성
성경의 변증법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변증법적 흐름의 강한 운동력과 예측
불가능성이다. 성경의 변증법은 막다른 처지에 처한 인간에게 질적으로 다른 해결책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변증법은 현실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을 이루는 현실의 모순들은 변화를 추동하
는 힘이며 변화의 결과다. 만약 부정성과 모순이 없다면 역사는 정체될 것이다. 변증법
에서 시간과 역사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순을 유발하는
부정성은 긍정적 의미를 가진다(Ellul 1981: 294-295; 1981/1982: 207-208). 엘륄은
자신이 마르크스의 저작에 끌렸던 이유가 변증법이 가지는 시간의 요소였다고 말한다
(Ellul and Troude- Chastenet: 55).
그렇다고 해서 엘륄이 역사의 진보를 믿은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변증법적인 역
사를 진보의 역사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Ellul 1981: 296). 모순으로 촉발되는 변화
는 예측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그가 변증법적 역사의 흐름을 정체되거나 반복되는 상황
보다 낫다고 여기는 이유는 변화가 없이는 인간 존재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긍정성과
부정성의 모순에 직면하여 새로운 균형을 찾아나가는 일은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여기에 인간의 책임, 선택과 결정의 자유
가 결부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첫 번째 사명은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Ellul 1981: 297).
여기서 주목할 점은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사실과 사태 뿐 아니라, 그 사실과 사
태에 대한 평가를 포함한다는 것이다(Ellul 1981: 296). 엘륄은 사실과 사태가 정립의
자리에, 그 사실과 사태를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말이 반정립의 자리에 설 수 있다고 본
셈이다. 상황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통해 변증법의 모순적 상황이 만들어지고, 역사는
정체를 면하게 된다. 엘륄이 말하는 인간의 자유는 필연성을 조장하는 기술에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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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요”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확인된다. “아니요” 뒤에 무엇이 뒤따를 것인지에 대해서
엘륄은 열려 있다. 그의 역할은 모순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고, 모순은 이론적 종합이 아
닌 실존적 선택을 요구한다. “변증법을 통해 엘륄은 진정한 실존적 선택으로 이어지는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려 하는 것이다”(Wennemann 1990: 183). “나는 본능적으로
(viscerally) 모든 일원성에 반대한다”(Ellul 1981/1982: 203).
현대 기술의 문제는 모든 것을 필연성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다는데 있다. 변증법적
모순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일원화되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엘륄은 현대기술사회가
필연으로의 줄기차게 행진하는 것에 제동을 건다. 변증법적 모순과 긴장이 지속되는 것
만이 희망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결국 변증법 속에 엘륄이 제시하는 해결이 있다. 변증
법적 모순이 불어오는 새로운 역동은 어차피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엘륄은 확실한
설명을 제시하거나 종합을 이루는 시스템을 구축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5. 엘륄의 기술철학과 변증법
엘륄 기술철학의 개요와 그에 대한 비판들은 이미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는데(손화
철 2006b; 2009), 기술에 대한 다소 폭넓은 정의와 전통적 기술과 현대기술의 현저한
구분, 현대 기술의 자율성, 그리고 효율성의 법칙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엘륄은 각 소
주제에 대하여 완결된 설명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의 변증법적 방법론을 중심에 두고 나
면 각각을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게 된다.

1) 기술의 정의
엘륄의 유명한 기술정의는 다음과 같다. “기술(technique)은 기계나 기술담론
(technology), 혹은 목적의 달성을 위한 이런 저런 절차들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기술사회에서 기술은 모든 인간 활동 영역에서 합리적으로 도달된, 그리고 주어진 발전
단계에서) 절대적 효율성을 가진 방법들의 총체이다”(Ellul 1954/1964: xxv). 이렇게
폭넓은 정의에 따라 엘륄은 기계를 중심으로 한 기술 이해를 벗어나 미디어와 경제 영역
에서의 여러 인간 활동들을 기술로 보고 분석한다. 그는 기술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보고 현대기술의 특징들이 무엇인지를 서술한다. 현대 기술은 전통적 기술
과는 달리 합리성과 인공성을 기반으로 하여 여섯 가지 특징, 즉 기술 선택의 자동성,
자기 확장성, 일원주의, 개별기술의 필연적 결합, 보편성, 자율성 등을 가진다(Ellul
1954/1964: 79-147). 이 중 자율성은 나머지 특징들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엘륄이 합리적인 방법론으로서의 현대기술을 문제 삼는 이유는 현대기술이 모순을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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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의 기술철학과 기독교 사상: ‘변증법’ 개념을 중심으로

손화철 교수 (한동대)

제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엘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선택의 가
능성, 즉 자유이다. 그러나 방금 제시한 현대기술의 여섯 가지 특징들은 모두 인간이 누
려왔던 선택의 폭과 자유가 줄어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측면에
기술이 스며듦으로써 모순, 긴장, 선택은 사라져간다.

2) 기술의 자율성
엘륄은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기술이 기존의 규범들을 모두 능가하게 되었
으므로 현대 기술이 자율적이 되었다고 주장하여 많은 비판을 불어 일으켰다. 인간만이
자율성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이 주장을 거부하거나, 엘륄이 현대 사회의 문제를 과장했
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랭던 위너는 현대기술의 자율성이라는 엘
륄의 주장이 기술이 자율성의 주체가 된다는 주장이기보다는 인간의 자율성 상실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라 설명한 바 있다(Winner 1977: 43).
변증법과 모순에 대한 강조를 염두에 두면 인간의 자율성 상실은 곧 모순을 상정할
수 있는 능력의 소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은 체계 중에서도 자기규제 혹은 부정적인
피드백 시스템이 없는 체계다(Vanderburg 2004/2010: 108-109). 기술이 계속해서 규
제 없이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동안 기술에 매몰된 인간들은 기술체계의 일부가 되어 반
정립의 가능성 자체를 반납하게 된다. 기술의 자율성과 인간의 자율성 상실은, 누가 어
떤 의지의 주체인가의 문제이기보다는 변증법적 운동이 가능한가의 문제일 수 있겠다.

3) 효율성의 법칙
효율성의 법칙은 기술 자율성을 추동하는 원칙이다. 효율성은 기술과 관련한 모든 결
정을 내리는데 기준으로 작용한다. 엘륄은 현대 기술이 유일하게 목적으로 삼는 것이 효
율성이고, 기술에 대한 평가의 기준도 효율성이라고 주장한다(Ellul 1954/1064: 21,
110).
그런데 이 효율성의 개념이 모호하다. 투입과 산출로 효율성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하
지만, 어디까지를 투입으로 보고 얼마만큼을 산출로 보느냐에 따라 같은 활동이 효율적
으로도 비효율적으로도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핵발전소는 단기적으로는 매
우 효율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환경오염, 방사능
유출의 가능성과 폐기물 보관 비용, 미래 세대의 부담 등도 효율성 계산에 들어갈 수 있
으니 말이다. 이것들을 고려하면 효율성의 법칙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고, 이 판단은 사람에게 맡겨져 있으니 굳이 기술의 자율성을 주장할 근거가 없어
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엘륄의 효율성 법칙은 단순히 효율성의 추구에서 끝나지 않는다. 기술담론의
허세(The Technological Bluff)(1988/1990)에서 엘륄은 기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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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된 기술사회가 모든 영역에 기술의 원리를 주입하는 기술체계에 의해 점령되는 과정
에서 기술담론의 허세가 퍼져가는 과정을 서술한다. 기술담론의 허세는 기술에 대한 근
거 없는 믿음과 신뢰로 요약할 수 있는데, 기술담론의 허세가 일반화되고 나면 실제 효
율성 자체는 그 중요성을 잃고 ‘효율성의 이름으로’ 판단이 내려지게 된다. 다시 말해
서,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정당화를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어떤 방식
으로든 증명하기만 하면 되고, 그 실제의 내용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10)
기술담론의 확산은 기술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이상 기술에 대해 어떤 의문이
나 심지어 환상까지도 가지지 않은 채 기술의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귀결
된다. 효율성의 법칙은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신화에 빠져 버리는 것
이다. 일원적인 효율성에 일단 빠지게 되면, 비판적 시각과 반대를 통해 변증법적 모순
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은 소멸된다.

6. 기술비관론과 대안으로서의 변증법
1) 엘륄은 기술비관론자인가?
엘륄의 현대기술에 대한 서술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다. 그는 현대기술은 자율적이
되었고, 기술체계가 기술사회를 점령해 가고 있으며, 기술담론이 기술에 대한 사유의 자
유까지 빼앗아갈 정도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엘륄은 이러한 상황에 대처할 방
안으로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자유를 표현하는 것 정도를
제시한다(Ellul, 1988/1990: 411). 그러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라
면, 도대체 그의 분석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많은 학자들이 엘륄을 기술혐오주의자나
기술결정론자,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비관론자로 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엘륄 자신의 입장에 부합한다고 할 수 없다. 엘륄 자신은 곳곳
에서 자신이 기술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한 것이 아니며, 비관론자도 아님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그에게 기술비관론자의 낙인을 받게 만든 기술사회 서문에서도
발견된다.
나는 본성적으로나 교리적으로나 비관주의자가 아니며, 비관주의적인 편견도 가지고 있
지 않다. 나는 사태가 그러한가 아닌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나에게 비관주의자의 명
찰을 붙이고 싶은 독자는 그 자신의 양심을 점검하고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된 원인이 무
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판단의 이면에 “인간은 자유롭다” “인
간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다” “인간은 항상 도전을 극복한다” “인간은 선하다”
10) 엘륄의 효율성 법칙에 대한 이 같은 해석과 그 함의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Son 2013이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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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의 기술철학과 기독교 사상: ‘변증법’ 개념을 중심으로

손화철 교수 (한동대)

“진보는 언제나 긍정적이다”와 같은 형이상학적 가치 판단들이 이미 깔려 있음을 발견
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Ellul 1954/1964: xxvii-xxviii).

요컨대, 엘륄은 자신이 사태의 그러함을 기술(記述)하고 있을 뿐, 가치판단을 내리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도리어 자신을 비관주의자라고 하는 이들이 낙관주의라는 편견에
빠져 사태를 바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엘륄 자신의 항변이 그가 비관주의자가 아니라
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현대 기술의 문제에 대한 그의 상세한 설명과는
달리 이러한 입장 표명들은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스쳐 지나가듯이 언급된다는 사실이
다. 많은 학자들이 엘륄의 통찰이 탁월함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
여주고 있을 따름”이라는 그의 설명에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더구나 이러한 설명에 기대어 그가 ‘사회학적 불가능성’을 보여주었고 가능성은 기
독교 신앙에서 찾으려 했다고 하게 되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기술사회의 대안을 기독교
신앙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그가 믿었다면, 그는 비기독교인들에게 종교적 회심을 권하
기 위해서 기술에 대한 저작들을 저술한 것인가?
이와 같은 해석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반박될 수 있다. 하나는 그가 기독교적 맥락을
떠나서도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했다는 것이다(Son 2004: 170-172). 예를 들어 엘륄
은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소규모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만약 현재와 같은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면 모든 형태의 독임형정치제제(monocracy), 예
를 들어 군주제나 독재는 궁극적으로 기술적 기능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이다. 모든 형태
의 귀족주의, 예를 들어 관료제나 노멘클라투라11)는 기술관료주의(technocracy)로 전환
될 것이다. 권력은 꾸준히 우리 시대의 진정한 귀족인 기술관료(technocrat)들에게로 이
동할 것이다. 그 때부터 선택지는 분명해진다. 기술이냐, 민주주의냐(Ellul 1992: 38).

또 엘륄은 기술사회에 대한 저항이 초월적인 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그 저항 자체가 새로운 동력을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비행청소년들의 자활을 돕는 일이나 환경운동에 헌신한 것(Ellul 1981/1982: 117-138;
Vanderburg 2004/2010: 59, 127)은 아마도 이런 신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몇몇 도전들, 반대들, 토대에 대한 기본적인 비판들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기술이 그 경
향성을 버리고 우리가 새로운 역사적 시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시대를 시작하게 할 수 있
을지도 모른다. 그 시대에 기술은 목적에 종속된 수단이라는 적절한 자리에 있게 될 것
이다(Ellul 1981/1982: 208).

나아가 그의 기독교적인 대안조차 기술사회의 암울한 상황을 해결할 것이라는 기대를
의식적으로 부인하는 가운데 제시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도시의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자신 본성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그에게는
11) Nomenklatura. 구 소련 등에서 공산당의 승인으로 임명된 지위 일람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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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사탄이 그를 위해 선택하고 지어놓은 환경을 바꿀 능력이 없다. 하나님의 결정적 행위로
족하다”(Ellul 1970: 170). 기독교인은 기술사회를 궁극적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지
배에 공개적으로 저항하는 ‘적극적 비관주의’(active pessimism)의 태도를 가져야 한
다(Ellul 1970: 181). 따라서 “사회학은 문제를 보여주고 신학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는 해석은 정확하지 않다.

2) 대안으로서의 변증법
무엇보다도, 사회학적 분석은 문제만을 보여주고 기독교에 해답이 있다는 해석은 그
의 변증법 방법론과 일관성이 없다. 기술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독교의 대안은 오직
기독교인을 위한 것으로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현실을 인지한 사람에게는 별 도움이 되
지 않는다. 만약 기독교적 저술들과 기술에 대한 사회학적 저술들이 변증법적 긴장 관계
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 것이라면, 사회학적 저술들 안에서도 변증법적인 대안들이 제시
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엘륄이 자신의 저작을 통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유의
미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변증법적 방법론은 엘륄의 기술철학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현대기술 비판을 현대 기술사회에 대한 반정립으로 보면 변증법적 운동의 가능성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앞서 변증법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순의 양 쪽을 모두 포괄하는
데, 이 모순은 사실 및 사태들 사이에서 일어날 뿐 아니라, 사실 및 사태에 대한 서술에
의해서도 일어난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엘륄은 기술사회의 불가능성을 서술함으로써
기술을 통한 무한한 가능성을 기대하는 현실에 모순을 만들어낸 것이다.
모순이 파악되고 나면, 변증법은 역사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역동성, 변화를 일으키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합쳐질 수 없지만 공존하는 모순은 변화와 혁명의 계기가 된다.
그 변화와 혁명의 결과가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는 알 수 없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되지만
그러한 계기가 만들어지는 것 자체는 긍정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술사회에 대한 엘륄
의 비관적 입장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게 된다. 그가 자신의 이론으로 반정립을 시도한
것은 비관적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매우 적극적인 노력인
것이다. 앞서 말한 “자유롭지 않음을 인정하는 자유”가 바로 변증법의 가능성이며, 예
측이 불가능한 변화를 예고하는 희망의 씨앗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엘륄은 진정한 역사적 발전은 급진적으로 새로운 무엇이 등장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무엇이 발전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면
에서 현실은 잠겨져 있거나 닫혀져 있다. 따라서 역사적 발전에는 일종의 비합리성이 있
다(Wenneman 1991: 68).

이렇게 엘륄의 변증법에 주목하면, 기술사회에 대안이 오로지 기독교적 입장에서만
제시될 수 있다거나, 그가 말하는 자유를 ‘그리스도인의 자유’로만 해석해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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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의 기술철학과 기독교 사상: ‘변증법’ 개념을 중심으로

손화철 교수 (한동대)

는 없다. 변증법의 모순이 파악되는 이상, 전혀 다른 미래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 안에서 변증법적 역사의 흐름이 발견되는 것처럼, 기술사회 안에서도 기술에 대한
비판을 통해 반정립의 계기를 만들고 희망의 씨앗을 뿌릴 수 있다. 이렇게 사회학의 가
능성을 인정할 때에만 엘륄의 변증법을 보다 일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
적 모순과 갈등의 존재가 바로 자유라면, 그 자유는 어느 영역에서건 구현될 수 있다.
엘륄은 여러 곳에서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그는 마르크스가 그의 추종자들과
달랐던 점이 구체화된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았던 데 있다고 설명하면서 역사에
불명확성, 예측불가능성이 있음을 강조한다(Ellul 1981/1982: 202). 또 기술사회가 막
다른 곳에 왔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면서도 새로운 해법이 나타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12) 변증법적 모순이 있는 한 새로운 전진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결국 기술철학에서의 엘륄에 대한 비판은 유효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셈이다.
엘륄이 기술사회의 비판에서 더 이상 나아가려 노력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대
안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유효하다. 그러나 그가 대안이 없다고 주장한 것이 대안
의 가능성을 부인한 것이 아니며, 그 자체로 대안이었다는 점에서 기술비관론의 비판은
부당하다.

7. 결론
엘륄은 자신의 기술에 대한 연구와 성경 연구가 변증법적인 관계에 있으며, 성경 안
에서도 변증법적 운동이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이 두 주장이 모두 타당하기 위해서는 기
술에 대한 연구가 비관론에서 그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그의 신학과 사회학 사이의 변
증법도 같이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엘륄은 막다른 골목에 우리를 밀어 넣고, 대답을
촉구한다. 그 대답은 엘륄 자신이 제시할 수 없다. 진정한 대화(dialogue)는 장기를 두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장기를 둘 때에는 상대의 반응을 예측하며 나의 수를 두지만,
진정한 대화에서는 상대방의 대응을 예측할 수 없고, 예측해서도 안 된다. 나는 진심을
담고 최선을 다해 나의 생각을 제시하지만, 그에 대해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모른다. 엘
륄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지만, 대안을 묻는다. 그리고 그 물음은 기독교인에게나 비기독
교인에게나 동일하게 제기된다.

12) 엘륄은 1968년의 학생운동과 미국의 히피 운동, 그리고 그 즈음에 시작된 컴퓨터 혁명에 접하
여 자신의 비관적 시각이 좀 옅어졌다고 고백한다(Vanderburg 2004/2010: 96). 그러나 새
기술과 함께 기술사회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었던 시기는 지나가버렸다(1988/19990: x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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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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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의 기술철학과 기독교 사상: ‘변증법’ 개념을 중심으로

Politics,

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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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철 교수 (한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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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

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논 평 : “자끄 엘륄13)의 기술철학과 기독교 사상:
‘변증법’ 개념을 중심으로 ”에 대하여
류의근 교수 (신라대, 철학과)

1. 글쓴이 또는 엘륄의 입장
글쓴이(손화철 교수)는 이 글에서 엘륄의 기술 철학 사상의 전체적 모습을 대략적으로
구성하면서도 핵심을 담아 체계적으로 잘 해설하고 있으며 우호적 입장에서 그의 기술
철학을 평가하고 있다. 논평자는 읽고 난 후 엘륄의 기술 철학 사상의 근간을 잘 보여주
고 있다는 점에서 학습한 바가 적지 않았음을 감사히 여긴다.
글쓴이의 입장에 따르면, 엘륄은 현대 기술이 총체성, 자율성, 자동성, 확장성, 보편
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현대 사회가 자본의 논리에 종속된 것처럼 기술의 논리에 구속되
어 통제되고 있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지시키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사회학자로서 기술 사회에 대한 현실적 분석의 결과로 말해지는 것이며 이 점에서 그것
은 실재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 자체가 근본적으로 또는 본질적으로 기술
또는 기술적 사회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것은 기술이 사회와 인간에 대해서 자율성 또는
자동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기술은 내재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유
비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에 대한 예술 또는 교육의

자율성 정립처럼 기술이 그러한 류의

자율성을 가지고 자기 논리로 발전하며 확장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엘륄의 기술 자율성 테제는 그의 철학 사상의 등뼈라고 말해도 무리
는 없을 듯하다. 또 이러한 정립을 가지고 기술이 인간의 삶의 제반 영역 이를테면 경
제, 국가, 인간 대중 문화 생활 등에서 주권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현실태들을 기술하고
분석한다. 이러한 작업이 기술의 역사(자크 엘루, 박광덕 옮김, 한울, 프랑스어판
1954/ 영어판 1964/ 한국어판 1996)에서 상세화․세분화되어 서술되고 있다. 그리고 결
론적으로 현대의 기술 사회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덧붙이고 있다.14)
글쓴이 역시도 현대 기술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관하여 엘륄이 제시하는 대
응 또는 대안을 언급하고 또 평가한다. 기술 사회는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13) 자끄 엘륄(Jacque Ellul)은 음역한 표기인데, 프랑스 이름의 영어식 발음인지 프랑스식 발음인
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학회에 참석한 사람들만이라도 우리말 표준에 맞는 음역으로 통일하는 것
이 좋겠다는 공감대가 있기를 바라고 싶다. 시중에서 쉽게 접하는 음역으로는 자끄 엘룰을 위시
해서 자끄 엘륄, 자크 엘루 등이 있다.
14) 이 논평문에서는 현대 기술 사회의 분석과 진단과 처방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고 개념과 표현
과 진술의 일관성, 분명성, 진리성 등에 관한 이를테면 사회학적 불가능성의 개념적 규정의 문
제, 성경의 변증법과 사회학적 변증법의 유비성의 동질성과 이질성의 문제, 기술 자율성의 실재
성과 주관성의 문제, 기술 사회의 기계화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문제, 변증법적 역사의 진보성
여부 문제 등에 관한 세부 문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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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평 : “자끄 엘륄의 기술철학과 기독교 사상: ‘변증법’ 개념을 중심으로”에 대하여 류의근 교수 (신라대)

자동적 자기 확장함으로써 인간의 자율성 상실 내지 인간 폐지 시대로 흘러갈 것으로 예
기되므로15) 엘륄은 현대 기술의 중대한 위험에 대해 사회학적 견지에서 아니면 신학적
견지에서 어떤 답변을 내놓고자 했다. 그 답변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기술 사회의 현실과 문제와 그 부정성에 대처하기 위해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
하다.
2) 현대 기술의 필연성과 효율성의 지배적 주도권에 대한 부정의 선택과 자유가 요구된
다.
3) 기술 발달과 기술 체계의 일원론적 독재 또는 독점에 저항하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2. 글쓴이 또는 엘륄과의 대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술 사회 또는 기술 체계에 대해 순응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기
술의 논리나 체계가 사회 집단적으로 구현하는 의식화 작업에 대해서 날카로운 저항의식
이나 부정적 의지를 가지기란 매우 어렵다. 기껏해야 인간의 자유는 기술 논리와 체계에
매몰되어있기에 “우리가 자유롭게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논문, 10쪽)을
고백하고 표현하는 정도의 자유이다. 급기야 기술은 자신의 내재적 논리로 인간의 자유
로부터 “기술에 대한 사유의 자유까지도” 빼앗아간다. 인간의 현실을 통제하고 조작하
는 다양한 형태의 기술적 가능성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가 더 이상 의미 없게 되어버리
는 지점으로 향한다. 인간 기술 즉 인간을 다루는 기술은 인간이 인간 자신을 원하는 방
향으로 제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은 인간이 인간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력
이며 이것은 어떤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어떤 인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내는
조작적 힘이다. 이 단계에서는 인간의 자유조차도 기술화되고 기계화된다. 인간의 인간성
도 조작될 수 있고 인간의 도덕적 선과 악도 주조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오늘날 철학의
지위를 대신하는 것은 자동 기계라고 말한 바 있고 바꾸어 말하면 인공 지능이 체스하는
시대에 자동 기계가 철학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인간과 그 자유의 위기에 대한 엘륄의 대책은 자신의 답변이 보여주는 대로
역시 인간의 자유에서 찾아져야 한다. 기술 사회 속에서 직면하는 바, 자유의 구속과 해
방이라는 모순과 긴장 속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강령이 그 해답이다. 기술의
힘과 법칙의 지배적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가능적 선택은 기술의 논리와 방향에 저항하는
인간의 혁명적 의지뿐이다. 엘륄은 “다른 가능한 것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인간
을 위한 혁명, 하태환 옮김, 대장간, 프랑스어판 1982/ 한국어판 2012, 326쪽). 이러
한 실존적 선택은 변증법적 성격을 가진다. 엘륄에게 변증법이란 현실의 모순과 갈등,
긍정과 부정의 모순 속에서 새로운 균형, 해법, 진전을 찾아가는 창조 행위이다. 이러한
15) 이러한 전망은 루이스(C. S. Lewis)도 인간 폐지 제3장에서 엘륄보다 10년 정도 빠르게 예
상한 바 있다. 루이스는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과학의 갱신 또는 회심을 주장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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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철/학/회 분/과/발/표/회

변증법적 실천은 실존적인 것과 사회조직적인 것 또는 구조적인 것과의 통합을 추구함으
로써 기술 사회나 역사적 현실에 혁명적으로 개입하고 간섭하는 의지의 실천이요 자유의
투쟁이다. 여기에는 강철 같은 의지와 믿음이 필요하다. 기술 사회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 실천하는 데는 그것 말고는 없다. 신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
게는 자신의 실존적 선택과 결단이 필요하고 신을 믿는 이들에게는 예수의 인간성에 대
한 신뢰와 신에 대한 충성이 필요하다. 엘륄의 표현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속에 보인 인
간성은 이러한 투쟁과 실천의 “지렛대”이고 전적 타자로서 존재하는 신에 대한 의존과
충실성은 그 “버팀목”이다(인간을 위한 혁명, 325쪽). 여기서 기술 사회에 대한 엘
륄의 사회학적 분석은 신학적 또는 신앙적 실천과 만나고 통합된다. 기술 사회의 변화를
위한 사회학적 가능성은 신학적 가능성 없이는 맹목이고 신학적 가능성은 사회학적 연구
나 분석 없이는 공허하다.
기술의 발전이나 체계 내부로부터는 그러한 통합의 가능성을 위한 실천이 나올 수 없
으므로 인간 의지의 외적 개입이 필요하고 이는 극단적인 동기를 필요로 한다. 이 길은
“무척 어렵지만 실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유토피아가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적인 유일
한 길”(인간을 위한 혁명, 324쪽)이다. 엘륄의 판단으로는, 이 길은 현대 사회와 과
학이 제공해 줄 수 있는 길은 아니라고 한다. 엘륄은 기술 사회의 내적 발전과 운명과
미래에 대한 대안에서 기독교 신과 인간이 버팀목과 지렛대로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물
론 스스로의 고백처럼 이러한 확신은 사적 확신이요 증언이요 제안이다(인간을 위한 혁
명, 325쪽). 그것은 신앙 고백적이다. 인간은 해방자 신과 함께 기술 사회의 마지막 위
험 속으로 진정성을 가지고 대결한다면 희망이 있다(인간을 위한 혁명, 327쪽). 엘륄
은 기독교 신앙은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기술의 특성과 법칙에 굴복해 가고 있지만 “언
제나 그렇게 되라는 법은 없다”고 믿기에 새로운 현실을 살 수 있는 희망은 있다고 말
한다(인간을 위한 혁명, 326쪽).

3. 대화에 대한 리뷰
우선, 엘륄의 기독교적 대안은 기술 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과 연구의 결과로부터
나오는 필연적 선택과 조처이지 기술 사회의 문제와 그 대응을 단순히 신학적 대안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그렇다고 판단하기 쉽다.
하지만 기술 사회의 변화와 혁명에 대한 사회학적 가능성이 불가하다는 주장이 기술 사
회의 현실 그대로를 서술하고 보여주는 것인 한에서라는 조건 아래서라면 엘륄이 제시하
는 기독교적 대안은 그 자체로 정당한 자기 권리를 가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
면 인공적인 기술로 둘러싸인 인간은 탈출구가 없기 때문이다(기술의 역사, 448쪽).
그렇다면 출기술(出技術)의 운명은 오로지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실천적으로 행동하는 것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엘륄의 신학적 대안은 자신의 사회학적 연구 내용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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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평 : “자끄 엘륄의 기술철학과 기독교 사상: ‘변증법’ 개념을 중심으로”에 대하여 류의근 교수 (신라대)

성과를 잘 인지하며 그에 따라 내놓은 처방으로서 일관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 점에서
는 납득할 수 있다. 또한 그 방법은 개개인의 실존에게 기술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강력하게 일깨운다는 점에서 숭고한 면도 있다.
하지만 그 방법만 유일하고 다른 방법은 없는지 하는 의문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난다.
문제 상황에 대한 인간의 주체적 각성과 실천은 문제 해결의 불가피한 요소이다. 이 요
소를 강렬하게 지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엘륄의 기술 사회 분석과 기술과 처방은 멀
리는 50년 가까이는 30년이 지난 지금 과연 어떤 실정에 놓여 있는가? 기술 사회와 체
계의 운명적 벽에 개입하고 저항하는 인간의 주체적 의지와 실천적 행동은 개선되었는
가? 인간 실존의 변증법적 의지와 실천은 기술 사회의 문제는 악화되고 있는 상황인데
그러한 현실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한 채 주체적 역량을 기르고 세력화는 데는 제자리
걸음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아무리 역량을
강화하고 세력화하는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어쩔 수 없는 파국의 길로 향하도록 운명지어
져 있으므로 시지푸스의 신화를 반복하는 것으로 끝날 것인가? 엘륄의 대안과 방법은 기
술의 위험에 대해 신을 기다리는 기회로 대처하려는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보다 덜 허무
주의적인가? 그래서 하이데거의 대안보다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인가? 주
체적 싸움 면에서는 낫다고 보여지지만 기술의 현실을 개혁하기에 모자라는 것은 피차일
반이 아닌가? 기술 사회 속의 인간 실존과 기술 사회의 조직과 구조 간의 대립과 갈등
구조가 인간의 주체성 요소로만 통합되기에는 너무 벅찬 현실이 아닌가? 기술 사회의 희
망이 기독교적 진리의 가치 추구에 있으며 기독교 신앙의 투쟁이 언제나 소수자로 남으
란 법은 없다고 믿고 싸운다고 해서 그 희망과 투쟁이 박해 받던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의 공인 사건과 같은 기적으로 변환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어야 하는가?
현대 기술 사회에 대한 엘륄 이후의 구체적 경험적 실증적 연구는 엘륄의 비관적 전
망과 달리 엘륄의 길을 따르지 않는 다른 길을 시사할 수 없는가? 그러한 연구의 결과와
인간의 주체적 의지 사이의 통합 방법이 엘륄의 변증법적 방법에만 의거해야 하고 변형
되어 달리 구상화될 수 없는 길은 없는가? 엘륄의 사회학과 신학의 변증법적 방법은 기
술의 경험적 실증적 성과와 그 귀결에 너무 비관적 부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닌가?
제2의 통합 방법은 인간과 사물이 원래 그러한 존재이기에 즉 원죄의 상태에 처해 있기
에 어떻게 해도 불가능한가? 엘륄의 기술 사회에 대한 분석과 진단과 대안에 관한 논문
을 리뷰하면서, 나는 기술 사회의 역사적 위기와 기회의 문제 앞에서 과학기술공학의 찬
란한 경험적 성과를 긍정적으로 분석하고 수용하면서 기술 사회․권력․관료의 인간화를 지
향하는 혁명적 의지를 동기 유발(motivation) 또는 임파워링(empowering)하고 인간의
실존적 자유와 기술 사회구조 및 조직을 상호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프레임(frame)을
꿈꾸어본다. 이러한 학습의 기회를 제공해 준 글과 글쓴이에게 거듭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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