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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

]

바빙크의 중보자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 이해

1. 서론
헤르만 바빙크는 성경의 교리들과 교리사 뿐만 아니라 철학에 있어서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학적 체계를 변호함에 있어서 어떤 철학적 변증
도 행할 의향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신학 전체를 소위 계시의 원리(principia

revelationis) 혹은 신학의 원리(principia theologiae)에 정초시켰기 때문이다.1)
계시의 원리는 하나님의 지식으로서 계시는 그 자체로(in se 혹은 per se) 존재한
다는 존재의 원리(principium essendi)와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었으며 오직 성령의 조명과
감화로 수납된다는 인식의 원리(principium cognoscendi)를 포함한다.

2)

바빙크는 이러한

원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여긴다: “It is the Father who,
through the Son as Logos, imparts himself to his creatures in the Spirit.”3)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계시도 비밀이다.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는 육체로 계시된 “하나님의 비밀”이시다(골 2:2). 곧 계시된 하나님의 비밀
이 “그리스도의 비밀”이다(골 4:3). 그리스도는 스스로 비밀이시며 계시이시다. 그리하여 계
시의 “climax, crown, and completion”이 성육신이다: “All revelation tends toward and
groups around the incarnation as the highest, richest, and most perfect act of
self-revelation.”4)
성육신은 이 땅에 오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 가운데 연
합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제2위 성자 하나님이 전혀 동일하신
채로 사람이 되셨다. 이러한 성육신의 비밀에 창조와 계시와 경건의 비밀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론은 모든 신학의 중심이 된다고 바빙크는 말한다.5)
1) Cf. Donald Macleod, “Bavinck’s Prolegomena: Fresh Light on Amsterdam, Old Princeton, and
Cornelius Van Til,”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68(2006), 261-82.
2) Cf. Abraham Kuyper, Principles of Sacred Theology, tr. J. Hendrik De Vries (Grand Rapids:
Eerdmans, 1980), 341 ff.
3)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1, Prolegomena, ed. John Bolt, tr. John Vriend
(Grand Rapids: Baker, 2003), 207-214, quotation(214).
4)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3, Sin and Salvation in Christ, ed. John Bolt, tr.
John Vriend (Grand Rapids: Baker, 2006), 278. Cf. Bavinck, Reformed Dogmatics, 379-80:
“The center of that[the] revelation is the person of Christ. And Christ is a historical person;
his incarnation, his suffering and death, its resurrection and ascension to heaven are not
susceptible of repetition. Indeed it is integral to the incarnation that he enter history and live
in the form(s) of time.”
5) These following theologians, although their views are various, are in agreement to find the
centrality of Christology in the doctrine of the two natures of Christ. Cf. G. C. Berkouwer,
The Person of Christ (Grand Rapids: Eerdmans, 1954), 21-56; Donald G. Bloesch, Jesus
Christ: Savior and Lord (Downers Grove, IL: IVP, 1997), 11-24; Donald Macleod, The
Person of Christ (Downers Grove, IL: IVP, 1997), 181-203; Chirley C. Guthrie, Jr., Christian
Doctrine (Atlanta: John Knox, 1986), 223-225; Bernard L. Ramm, An Evangelical
Christology: Ecumenic and Historic (New York: Thomas Nelson Publishers, 1985),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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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rine of Christ is not the starting point, but it certainly is the central
point of the whole system of dogmatics. All other dogmas either prepare for it
or are inferred from it. In it, as the heart of dogmatics, pulses the whole of
the religious-ethical life of Christianity. It is “the mystery of godliness” (1
Tim. 3:16). From this mystery all Christology has to proceed. If, however,
Christ is the incarnate Word, then the incarnation is the central fact of the
entire history of the world: then, too, it must have been prepared from before
the ages and have its effects throughout eternity.6)
바빙크는 칼빈이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 기독론을 다루었던
순서를 좇아서7) 자신의 주저 Reformed Dogmatics(Gereformeerde Dogmatiek)와 Our

Reasonable Faith(Magnalia Dei)에서 기독론을 “the covenant of grace,” “the person of
Christ,” “the work of Christ”―“Christ’s humiliation”과 “Christ’s exaltation”으로 다룬다.8)
이러한 the order of teaching(ordo docendi)은 Francis Turretin, Heinrich Heppe, Charles
Hodge의 조직신학 책에 의해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9) 이러한 순서를 통하여 우리는 개혁
주의 기독론이 계시론과 구원론을 역동적으로 함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10)
본고에서 우리는 이러한 개혁주의 기독론의 특성이 바빙크의 신학에 있어서중보자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 교리에 의해서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는 사실을 논구하
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제2장에서는 위격적 연합의 역사적 사건으로서 성육신이 가지는 의
의를 삼위일체론, 창조론, 계시론적 관점에서 살핀다. 이어서 제3장에서는 위격적 연합의 비
밀인 성령잉태와 더불어 그 주체와 양성의 교통에 대해서 다룬다. 그리고 4장에서는 이러한
위격적 연합에 따른 중보가 모든 언약의 성취라는 점과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그분과 교
제에 이르는 길을 여는 연합의 중보라는 점을 먼저 다루고 이어서 이러한 중보가 비하와 승
귀에 어떻게 전개되며 그것이 어떤 속죄론적인 의미를 가지는지를 고찰한다. 그리고 제5장
에서는 결론적으로 바빙크의 위격적 연합의 특징을 정리한다.
2. 성육신의 세 가지 의의
6)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74.
7)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in libros quatuor nunc primum digesta, certisque distincta

capitibus, ad aptissimam methodum:aucta etiam tam magna accessione ut propemodum opus
novum haberi possit, 1559. 기독교 강요에서 기독론에 해당하는 부분은 2권 6장에서 17장까지이
다. 여기에서 칼빈은 중보자의 필연성(2.6)을 먼저 언급한 후 그리스도의 인격(2.12-14)과 사역
(2.15-17)을 다루기 전에 율법/복음 그리고 구약/신약에 대해서 논하는데(2.7-11), 이 부분이 바
빙크에게 있어서 “은혜언약”에 해당한다.
8) Bavinck, Reformed Dogmatics, 3.193-482. Herman Bavinck, Our Reasonable Faith, tr. Henry
Zylstra (Grand Rapids: Eerdmans, 1956), 260-385.
9)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ed. James T. Dennison, tr. George
Musgrave Giger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1994), 2.169-500.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3 vols., rep (Grand Rapids: Eerdmans, 1995),
2.354-638.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tics, Set out and Illustrated from the Sources,
tr. G. T. Thomson, rev. ed.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50), 371-509.
10) Cf. Cornelius Van Til, “Bavinck the Theologian,”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1961(24/1), 1-17. 본고는 다음 작품에 대한 논평으로 집필되었다. R. H. Bremmer, Herman
Bavinck als Dogmaticus (Kampen: J. H. Kok,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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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Trinity
바빙크는 우리가 진정 “scriptual and Christian”이기 위하여서 성육신의 신비를 붙
들어야 하며, 이를 놓치게 되면 “the riches of Scripture and the honor of Christ”를 잃어
버리게 된다고 강조한다.11) 바빙크는 성육신의 비밀은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역사적으로 성취된 사건이라는 점에 있다고 본다.
As subject, as “I,” he did not descend from Adam but was the Son of the
Father, chosen from eternity to be the head of a new covenant. Not Adam but
God was his father. As a person he was not the product of humankind but
himself came to humankind from without and entered into its ranks.12)
이러한 측면에서 바빙크는 “the presupposition and foundation of the incarnation”
lies in the trinitarian being of God에 있다는 점에서 첫째 의의를 찾는다.13) 성육신의 주
체는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대속의 의
를 다 이루셨다. 이는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eternal counsel) 즉 pactum salutis에 따
른 것이었다. 성자의 중보로 말미암아 성부는 자녀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성령은 보혜사가
되신다.14)
바빙크는 성육신에 있어서 “the divine nature in the person of the Son became
human”라고 보는 루터란들의 입장을 거부하고 성육신의 주체를 제2위 하나님의 인격이라고
보는 the Reformed formulation that “the person of the Son was immediately united
with the human nature, and the divine nature was [therefore] mediately united with
it.”을 분명히 견지한다. 성육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essence)이나 본성(divinity)이
흘러나와서 피조물을 형성하는 범신론적 유출이 아니다. 그것은 제2위 하나님의 “personal
operation(opus personale)”이다. The hypostatic union between the divine and human
natures is “mediate” in that it is through the “immediate” assumption of the human
nature into the person of the Son.15)
성육신의 비밀은 하나님이 자신을 더하거나(pantheism) 뺌이(Deism) 없이 사람이
되셨다는 점에 있다. 성육신의 비밀은 삼위일체의 비밀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한 분으로 계
시며(esse) 또한 세 위격으로 위격적으로 계신다(subsistere). 세 위격(hypostasis)

혹은

인격(persona)의 위격적 존재(subsistentia)는 그 특성에 있어서 서로 구별되나, 그 본질 즉
신성에 있어서는 항상 동일하다. 그러므로 성자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
의 중보자가 되신다. 바빙크는 이러한 신비한 성육신의 가능성(possibility)을 삼위일체 하

1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04. Cf. B. B. Warfield, “The ‘Two Natures’ and Recent
Christological Speculation,” in Christology and Critic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32), 259: “The doctrine of the Incarnation is the hinge on which the Christian system
turns.”
1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94.
13)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74.
14)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76.
15)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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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의 본질(essence)에서 찾고 그 역사적 경륜을 그들의 영원한 구원협약(pactum salutis)
에서 찾는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질에 따른 것이나 오직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으로 말미
암는다. 그것은 범신론자들이 말하듯이 필연적이지 않으며 이신론자들이 말하듯 우연적이지
않다.16)
성육신은 제2위격 성자 하나님께 고유한 사역이다. 바빙크는 the sixth Synod of
Toledo(AD 638)의 선언으로 자신의 입장을 확인한다. “Only [the Son] assumes human
nature in the singularity of the person, not in the unity of the divine nature: in what
is peculiar to the Son, not what is common to the Trinity.”17) 그러나 성육신은 하나님
의 모든 사역이 그러하듯이 삼위 하나님의 공동사역이다.18) 성육신에 관한 바빙크의 다음
과 같은 언급은 경륜적 삼위일체론의 원리적 진술에 부합한다: “Yet though subjectively
and as it pertains to its end, the incarnation is peculiar only to the Son, still with
respect to its origin, beginning, and effectiveness, it is a work of the whole Trinity
.”19)
2.2. Creation
둘째, 바빙크는 성자의 성부로부터의 영원한 출생에서 인간 창조의 가능성을 말하
고 이로부터 성육신의 가능성을 다룬다. 창조론을 다루면서 바빙크는 나심(generatio)과 나
오심(출래, processio)으로 표현되는 삼위 하나님의 내적 사역(opus ad intra)은 창조의 외

사역(opus

ad

extra)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특히

“삼위일체의

흔적들(vestigia

trinitatis)”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삼위일체의 형상(imago trinitatis)”으로 불리는 인간
의 창조라고 하였다.20)
바빙크는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성육신을 전제하고 마련된 것이라고 보았다. 아
담은 이미 “a type of Christ”이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바빙크는 타락이 없어도 성육신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 오시안더(Andreas Osiander)와 같은 입장에 서 있었는가? 그리하여 성
육신은 불완전한 인성을 초자연적으로 완성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던가?21)
이러한 질문은 바빙크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중보와 창조의 중보를 긴밀하게 연결시
키는데서 생긴다. 바빙크는 성육신이 인간의 창조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통하여 구
속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논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
신 이(prwtotokoj pashj ktisewj)”시며(골 1:15)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avrch thj ktisewj tou
qeou)”(계 3:14)이시라는 말씀 등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가 재창조의 중보자라는 점을 부각
시킨다.22) 그렇다면 과연 바빙크는 이러한 재창조가 죄에 무관하게 초자연적인 신적인 본
16)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74-275, 277.
1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76.
18) This refers to the principle that “all the outward works of God are common and
indivisible(opera ad extra communia et indivisa).”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2, God and Creation, ed. John Bolt, tr. John Vriend (Grand Rapids: Baker, 2004), 318.
19)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76. Calvin, Inst. 1.13.18(CO 2.105): “patri principium
agendi, rerumque omnium fons et scaturigo attribuitur; filio sapientia, consilium, ipsaque in
rebus agendis dispensatio; at spiritui virtus et efficacia assignatur actionis.”
20) Bavinck, Reformed Dogmatics, 2.332-333, 420-423.
2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77-278.
22) Bavinck, Reformed Dogmatics, 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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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취하는 사건으로 여기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바빙크의 답은 단호히 부정적이다.23) 아담의 창조에서 이미
그리스도를 염두에 둔 것은 그를 구속자로 삼아서 행위언약이 파기된 후 언약언약을 수행하
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적시한다.24) 그리고 “the finite is not capable of the
infinite(finitum non est capax infiniti)” 라는 개혁주의의 원리를 천명하고 “humans are
capable of the divine nature(homo divinae naturae capax)” 라는 잘못된 루터란의 속성교
통론을 분명하게 배격한다.25) 또한 성육신은 창조에 따른 필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God’s good pleasure)”에 달려 있다고 하였
다.26)
바빙크는 기본적으로 타락 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의 입장에 서서 영원한 창
조 중보를 구속 중보와 함께 다룸으로써 그리스도가 타락의 전후와 무관하게 “연합의 중보
자(mediator unionis)”시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바빙크는 성육신은 인간의 구원
즉 재창조의 경륜이나 이미 창조의 경륜에 새겨진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창조를 통하여 인
간이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듯이 재창조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삼위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게 된다고 보았다.27) 이렇듯 바빙크는 성육신을 그리
스도의 삼위 내적 사역으로부터 창조와 재창조라는 외적 사역에 이르는 영원한 작정으로 여
긴다. 그리하여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구원은 인격적일 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의미를 함께
지니게 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입장은 기본적으로 타락 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에
서 있었던 칼빈에 있어서도 강조된다.28) 이 부분에서 우리는 바빙크가 창조와 구원의 경륜
을 아우르기 위하여 infralapsarianism과 supralapsarianism을 아우르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
음을 발견할 수 있다.29) 사실 많은 경우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관점
의 차이 혹은 강조점의 차이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30)
2.3. Revelation
셋째, 바빙크는 the presupposition and preparation으로서 또한 계시를 덧붙인다.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빛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요한복음은
그 서두에서부터 이를 확정하고 있다(요 1:1, 5, 9). 성육신이 없다면 창조와 구원의 계시
가 모두 쓰러진다. 왜냐하면 이 땅에 오신 아들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어졌기 때문이다(요
1:4).31)

23) On the other hand the following author will give an affirmative answer to this. Since he
regards the knowledge of creation and the incarnation of Christ as precedent to that of God
the Trinity. Colin E. Gunton, Christ and Crea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2), 71-79.
24)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78.
25)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77.
26)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79.
2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32-333.
28) Calvin, Inst. 2.12.4-6.
29) J. Mark Beach, “Introductory Essay,” in Herman Bavinck, The Holy Spirit’s Work in Calling
and Regeneration, tr. Nelson D. Kloosterman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2008),
xvi-xx.
30) Heppe, Reformed Dogmatics, Set out and Illustrated from the Sources, 133-149.
3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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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carnation links up with the preceding revelation, both the general and
the special. It stands and falls with them. For if God was able to reveal
himself in the way Scripture testifies with respect both to the Gentile world
and to Israel, then the possibility of the incarnation is inherently included in
that revelation; and if the incarnation were not possible, then neither could the
revelation be maintained. Revelation, after all, is based on the same idea as
the incarnation: on the communicability of God, both in his being to the
Son(generation) and outside his being to creatures(creation).32)
이러한 관점에서 바빙크는 성육신을 성경 전체의 계시와 관련시킨다. 성육신 가운
데서의 신인 양성의 연합은 태초의 창조가 범신론적 유출이 아니라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것
을 말해 준다. 그리고 구원의 중보자는 제3의 존재가 아니라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유일하신 그리스도시라는 사실도 계시한다.33) 성육신은 그리스도 자신이 “the content of
Christianity”라는 사실을 계시한다.34) That is, God’s revelation in creation contains his
love in Christ.35)
바빙크는 하나님의 내적 지식인 archetypal revelation(revelatio archetypa)이 우리
에게 맞추어져 계시됨으로 ectypal revelation(revelatio ectypa)으로서 성경에 기록되어 성
령의 감동으로 수납되는 과정에서―즉 계시의 원리를 다룸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
합의 신학(theologia unionis)”을 강조한다.36) 동일한 맥락에서 성경의 기록에 있어서의 저
자의 유기적 영감을 성육신과 관련시키기도 한다.37) 그리고 성육신 가운데 구속을 이루신
사건을 “the last and supreme revelation”이라고 보고 이로부터 성경의 충족성을 주장한
다.38)
3. 한 위격 양성의 위격적 연합
3.1. The Mystery of the Union: the Conception by the Holy Spirit
성육신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셨다. 성령은 아들의 인성
을 조성하셨다. Mary’s impregnation was from the supernatural conception by the Holy
Spirit. 그리하여 거룩한 인성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과 연합하게 되었다. 성육신
은 또한 사람이 되신 성자 자신의 사역이다. “He was himself the acting subject who by
the Holy Spirit prepared a body for himself in Mary’s body.”39) Christ, though sent by
3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80-281.
33)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82-286.
34)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84.
35) Cf. Herman Bavinck, The Philosophy of Revelation (New York: Longmans, 1909), 170-202.
36) Bavinck, Reformed Dogmatics, 1.210-214.
37) Bavinck, Reformed Dogmatics, 1.434-435, 442-443.
38) Bavinck, Reformed Dogmatics, 1.490-491. The three significances introduced here illuminate
overarching principles of Bavinck’s Christology. Notably, Charles Hodge does not mention
them at all in dealing with the person of Christ. Hodge, Systematic Theology, 2.378 ff., 610
ff.
39)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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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ther, came by his own will and deed.40)
바빙크는 위격적 연합의 비밀을 성령의 초자연적인 잉태가 지닌 고유한 특성에서
찾는다.

성령은

단지

도구적인

원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efficient

cause(causa

efficiens)”로서 작용한다. 창조와 재창조에 역사한 성령의 능력이41) 때가 차매 마리아의 몸
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거룩하게 조성하셨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것이 성령으로 조성되
었으므로 그리스도의 인격에 연합한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this special union이 신인
양성의 중보자의 인격을 이루고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중보를 행하게 하신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잉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과 교제(union and
communion)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의 일이 하나님의 일로 돌려지
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가 예수의 전 생애 심지어 승귀의 상태(state of exaltation)에 까지
계속되었다.42)
여기에서 바빙크는 성령의 삼위일체 내적인 경륜을 반영하여 성자가 주체가 되어
인성이 신성과 연합하는 성육신의 비밀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그가 삼위일체론을
다루면서 성령의 위격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연합과 교제라는 관점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43)
Without the personality and deity of the Spirit there can be no true oneness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Those who deny the deity of the Holy Spirit
cannot maintain that of the Son. The Trinity only completes itself in the
divine person of the Holy Spirit. Only through that person does the unity of
being in the “threeness” of the persons and the “threeness” of persons in the
unity of being, come into being. The entire dogma of the Trinity, the mystery
of Christianity, the heart of religion, the true and genuine communion of our
souls with God―they all stand or fall with the deity of the Holy Spirit.44)
성육신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들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났다. 성육신은 아
들 안에서 뿐만 아니라, 아들에 의해서 일어났다. 성육신은 아들의 사역이었다. 창조에 있어
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의 사역을 감당하셨던 아들이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 구속의
중보를 행하셨다. 아들의 인성은 조성되면서 그리스도의 위격에 취해졌다. 그리하여 동시에
그분의 신성과 연합되었다. 이러한 신비는 성령의 “a very special activity on the part of
the Holy Spirit”로 인하였다.45) 초자연적인 잉태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은 단지 외적 창
조의 연장으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내적 경륜 가운데 일어났다. 아들의 인성
을 조성하신 성령은 영원한 아들의 영이시다. 성육신에 있어서 성령은 아들 안에서 역사하
지만 그것은 곧 아들의 일이다.46) 아들의 인격(person)은 자신의 일로 말미암아 어떤 변화
4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90.
41) Bavinck, Reformed Dogmatics, 2.261-264.
4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91-292.
43) Concerning our union with Christ grounded on Christ’s union with us through the incarnation,
Robert Letham, The Work of Christ (Downers Grove, IL: IVP, 1993), 77-87, 184-186.
44) Bavinck, Reformed Dogmatics, 2.312.
45)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92.
46) In this respect Bavinck’s position should be differentiated from that of Spirit-Christology
that are deployed most significantly in these works. Roger Haight S. J. “The Case for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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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겪지 않는다. 바빙크는 이렇듯 삼위일체의 경륜으로부터 성육신의 비밀을 읽고 있다.
Conception by the Holy Spirit was not the deepest ground and final cause of
Jesus’ sinlessness, as many theologians say, but it was the only way in which
he who already existed as a person and was appointed head of a new
covenant could now also in a human way―in the flesh―be and remain who he
was: the Christ, Son of God the Most High.47)
3.2. Christless Christology
바빙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의 중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는 기독교 신앙
이 존재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 “Arian Christology, the moral Christology of rationalism,
the symbolic Christology of Kant, the ideal Christology of Hegel, the aesthetic
Christology of De Wette, the anthropological Christology of Feuerbach”의 신학에는 사람
예수만이 있을 뿐이다.48)
그리고

그리스도의

(God-consciousness)과

신성을

동일시하는

인정한다고는

하나

슐라이어마허에게는

그것을
단지

그분의

“the

신의식

archetype

of

humankind”가 남을 뿐이다. 슐라이어마허는 “God’s being in Christ”는 말했으나 Christ is
God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성육신이

아니라

the

divinizing

of

the

human(qewsij)만이 남게 된다.49)
슐라이어마허 이후 추구된 서구신학은 그 대상을 하나님(God)으로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사람(God-man)으로 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그리스도의 인격을 다룸에 있
어서 존재(being)보다 형성(becoming)을 강조하였다. 이는 윤리적 전형을 강조한 Ritschl,
Herrmann, Kaftan, Häring, 인성의 고양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함께 자라간다고 본
Rothe, Dorner, 그리고 이와 유사하지만 신성이 형상적으로나마 존재하는 가운데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본 Kenosis doctrine에 공통된 경향이었다.50)
이러한 시대적 경향은 소위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극단적 분파를 낳게 되었다. 이
들에게 있어서 결국 이 땅의 예수는 아버지를 소개한 아들로 남을 뿐이었다. Harnack의 경
우에서 보듯이, 복음은 성자가 아니라 성부에 관한 성자의 소식이었다. 우리가 믿는 바는
예수 자신이 아니다. 우리에게 관계되는 것이 예수 자신이 아니라 예수의 믿음이다. 하르낙
에 의하면 예수는 없고 예수의 종교적 경험 혹은 관점만이 남을 뿐이다.51) 이러한 측면에
서, “To Carlyle he was a hero, to Strauss a religious genius, to Renan a liberal
reformer and preacher of humanity, to Schopenhauer a herald of the negation of the
Christology” Theological Studies 53(1992), 257-287; Ralph Del Colle, Christ and the Spirit:
Spirit-Christology in a Trinitarian Perspective (Oxford: Oxford University, 1994); Jurgen
Moltmann, The Way of Christ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4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94-295.
48)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84.
49)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62-263. Cf. Byung-Ho Moon, “A Criticism of
Schleiermacher’s Mystical and Pantheistic Christology,” Chongshin Theological Journal
16/1(2011), 64-69.
5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63-266. Cf. Hodge, Systematic Theology, 2.430-440.
5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67-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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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 to live, to Proudhon a social reformer.”52)
바빙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의 위격을 도외시한 이러한 그리스도 연구는
Christless Christology을 추구할 뿐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the doctrine of Christ” should
be based on and occur “within the boundaries of the Chalcedon symbol.”53) 예수의 역사
성은 오직 그분이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에서 추구될 때 기독교적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삼위일체론과 구별되는 기독론의 고유함은 그가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
을 간과하고는 논의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오직 삼위일체론적-기독론만이 참되다.
비록 바빙크가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아래에서 보듯이 이와 관련된
그의 입장은 확고하다.
If he[Christ] is going to be not the subject but the object and center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if this Christian religion is to preserve its uniqueness
and not degenerate into an idolatrous Jesus cult, it is not enough for Christ to
be in God(evnqeoj), but he must himself be God(qeoj), the only begotten of the
Father.54)
칼케돈 신경이 수립한 중보자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가르침은 삼위일체론적-기
독론의 핵심을 제시한다. 그리스도는 신앙의 대상이지 단지 우리와 같은 주체가 아니다. 그
는 하나님으로서 사람이시다. 그러므로 언제라도 우리는 사람인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바
라보아서는 안 된다.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은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 자신이
길이요 생명으로서 믿음의 대상이 되신다는 것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사람은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론”을 추구할 뿐이다.55)
3.3. Unity in Union
Chalcedon에서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the same
perfect in Godhead, the same perfect in humanhood, truly God and truly man ... one
and the same Christ, Son, Lord, Only-begotten, made known in two natures, without
confusion(avsugcutoj),

without

separation(avcwristoj).”56)

change(avtreptoj),

동방신학자들은

without

division(avdiairetoj),

divinization(qewsij)를

강조하여

without
“in

two

5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69.
53)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59. 칼빈으로부터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에 이르는 정통 기독
론이 칼케돈 신경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 대해서, 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 Macleod, The Person of Christ, 181-203.
54)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73.
55) 같은 이름의 논문에서 워필드는 바빙크의 글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정곡을 찔렀다. B. B.
Warfield, “Christless Christianity,” in Christology and Critic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32), 367: “A Christianity to which Christ is indifferent is, as a mere matter of fact,
no Christianity at all. For Christianity, in the core of the matter, consists in just, ‘Jesus
Christ and Him as crucified.’ Can he be of the body who no longer holds to the Head? What
is, after all, the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Christianity and other ‘positive’ religions?
Does it not turn just on this―that the founders of the other religions point out the way to
God while Christ presents Himself as that Way?”
56)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55,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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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ures(evn duo fusein)”를 “out of two natures(evk duo fusewn)”로 바꾸어 번역하기를 선호하
였다.57) 이러한 영향으로 동방신학자 John of Damascus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신성의
인성에로의 permeation(pericwrhsij)과 인성의 신성에로의 divinization(qewsij)를 강조하였
다.58)
한 인격(una persona)과 양성(duae naturae)에 대한 칼케돈의 규정은 위격적 연합
의 비밀을 함축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를 고수하였다.59) 이 연합의 비밀은 철학
적으로 추구될 수 없다.60) 그것은 오직 성경적이며, 소극적으로만(av―, in―61)) 진술될 수
있다. 칼케돈은 성육신하신 주님은 한 인격이시다. 이 경우 중성 “e`n”이 아니라 남성 “e`ij”을
사용해야 한다.62) 왜냐하면 성자의 substance가 아니라 subsistence가 우리의 본성을 취했
기 때문이다. 즉 삼위 하나님의 divinity가 아니라 성자의 person이 성육신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는 이러한 입장을 철저하게 고수하였다.63)
개혁주의자들과는 달리 루터란들은 위격을 주체로 하지 않는 양성 상호간의 연합과
결합을 말하였다. 그들은 성육신 자체가 아니라 신성과 교통한 인성이 그것을 사용하지 않
는 것을 비하로 여겼다. 그들은 the assumption of flesh와 the conception in the womb을
구별한다. 전자는 성육신으로서 그 주체가 성자이시나, 후자는 비우심(the exinanition)으로
서 그 주체가 God-man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이 둘을 “not temporally but logically” 구별
한다.64)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성육신은 주체가 God으로부터 God-man으로 바뀌는 사
건이 된다. God and man이 단지 공존한다면 그것은 네스토리우스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며,
그것이 혼합된다면 그것은 유티케스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65) 그것은 네스토리우스와
같이 a union(e`nwsij)을 a conjuction(sunafeia)로 대체하거나66) 유티케스와 같이 그것을
mixture(mixij) 혹은 mingling(avnakrasij)을 통하여 “a third kind being(tertium genus)”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주장하게 된다.67)
5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55.
58)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56-257.
59) Cf.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8.2: “So that two whole, perfect, and distinct
natures, the Godhead and the manhood, were inseparably(indissolubili) joined together in one
person, without conversion, composition, or confusion(sine conversione, compositione, aut
confusione). Which person is very God and very man, yet one Christ, the only mediator
between God and man.”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rev. (Grand Rapids: Baker, 1983),
619-620.
60) The following author the Chalcedon’s formula as a product of Aristotelian philosophy. John
McIntyre, The Shape of Christology: Studies in the Doctrine of the Person of Christ
(Edinburgh: T&T Clark, 1997), 87-89.
61) “inconfuse, immutabiliter, indivise, inseperabiliter.” Cf.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2, The Greek and Latin Creeds with
Translations, rev. (Grand Rapids: Baker, 1983), 63.
6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54.
63)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59. 여기에서 substance(substantia)는 문자 그대로 “the
underlying reality”를 의미한다. 반면 subsistence(subsistentia)는 “the particular being”을 뜻한다.
64)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57-258.
65)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01-303. 그러므로 우리는 성육신으로 인하여 주체가 아니라
동일한 주체의 경륜이 바뀌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Cf. Heppe, Reformed Dogmatics, Set out
and Illustrated from the Sources, 410: “Christ is considered here not kata qeologian as the
logoj, but as the qeanqrwpoj.
66)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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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았듯이 중보자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은 그분이 “the same perfect in
humanhood, truly God and truly man”이라는 사실에 확고하게 기초해 있다. 성육신에 있어
서 성령에 의하여 마리아의 몸에서 조성된 인성은 한 실체로서68) 조성되면서 위격에 취하
여져 신성과 연합하였다. 그러므로 오직 연합된 인성만이 있다. It is always the true and
perfect human nature. 그러므로 헬라의 이원론에 젖어서 고급한 신성은 저급한 인성을 취
할 수 없다고 본 아리우스(Arius)나, 나아가서 이를 범신론적으로 추구하여 주님의 인성은
이미 신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s)에게는 위격적 연합의 비밀이
인정될 여지가 없다.69) 이들의 사상은 주님의 육체를 a heavenly body 혹은 a phantom
body로 보아 그분의 참 인성을 부인한 영지주의자들과 본질적으로 그 궤를 같이 한다.70)
이들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경륜에 따른 인류와의 union과 communion이
부인된다. 그러나 성자가 인성을 취할 수 없으시다면 인간의 창조도 그것에 대한 구원의 재
창조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For what is unassumable is incurable.”71) 이와 관련하여 우
리는 바빙크가 위격적 연합을 다루는 신학적 차원이 전체 기독교 계시와 구속사에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포함하며 창조와 구속을 아우른다.
바빙크가 위격적 연합교리를 통하여 기독론 중심성(centrality)을 강조한 일차적인
이유는 그리스도가 하나님(qeoj)이심을 부인하고 단지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evnqeoj)을
거론하여 주관적 감화로 신성을 대체하고자 했던 동시대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여 정통신
학을 변증하는데 있었다. 그리하여 “new theology”를 내세우며 “Humanity is divinity
viewed from below; divinity is humanity viewed from above.”라고 주장했던 R. J.
Cambell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그리고 “prototypical humanity and ectypical divinity”는
동일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72)
성육신은 단지 인성의 고양을 통한 신성의 계시나 형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것은 신성 혹은 인성을 우상화할 뿐이다. 성육신은 창조주가 피조물과 교제하고 교통하는
방식의 절정이다. 조물주의 자존성(independence)과 피조물의 의존성(dependence)이 the
same personal subject에게 곧 성자의 위격에 돌려진다. The Word became flesh(John
1:14), therefore fullness of deity dwells in him bodily(swmatikwj, Col. 2:9).73) 말씀이
말씀인 채로 육체가 되셨으므로 하나님의 신성이 fully, bodily 임하게 되었다. “fully”와
“bodily”라는 두 단어는 서로 제한하지 않는다. 이는 그 주체가 한분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
들이시기 때문이다.

6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54, 303.
68) Cf.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8.2 signifies definitely the conception by the
Holy Spirit “in the womb of the Virgin Mary, of her substance(in utero eque substantia
Mariae Virginis).” Schaff, ed.,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619(bold emphasis is
mine).
69) 아리우스와 아폴리나리우스는 비록 방식은 다르지만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부인한 점에서
는 일치한다. 아리우스는 주님의 신성은 인성과 연합해 있다는 자체로 완전하지 않으며 주님의 인
성은 신성과 연합해 있다는 자체로 우리의 인성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님의 신성과 연
합한 인성을 영혼에 제한하였다. 아리우스와는 달리 아폴리나리우스는 자신이 주님의 신성을 인정
한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인성의 일부 즉 영(pneuma)에 해당한다고 본 점에서 이미 그것
을 제한하고 있다. 한편 그에게 있어서 인성은 영을 제외한 혼(yuch)과 육(sarx)을 포함할 뿐이다.
7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95-298.
7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97-298. 이는 John of Damascus로부터의 인용이다.
7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99.
73) Cf.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98-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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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의 비밀은 그 주체가 성자시라는 사실에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삼위일체 하
나님의 존재와 경륜의 비밀을 비추어 준다. 바빙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Scripture ascribes all kinds of and very different predicates to Christ but
always to one and the same subject, the one undivided “I” who dwells in him
speaks out of him. It also specifically says, not that the Logos dwelt in a
human being, but that the Logos became flesh(John 1:14). A person is what
he or she has become. If the Son of God became a human being, he is himself
human. Many things can be predicated of a person but never another person.
A husband and a wife are one flesh, but the husband is never the wife or
vice-versa. Therefore, if the human subject in Christ was another than the
Logos, Scripture could never have said that the Logos became, and therefore
is, flesh.74)
주체는 다양한 본성들을 지닌다. 성육신의 비밀은 하나님의 본성으로 계신 성자가
사람의 본성을 취하신다는 사실에 있다. 사람은 신성을 취할 수 없으나 성자는 인성을 취하
실 수 있다. 성자가 인성을 취하심은 삼위의 만세전 작정에 따른 것이었다. 영원한 작정에
따라서

오직

성자가

성육신하셨다.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신

삼위

하나님은

본성상

(naturally) 인성을 취하실 수 없다. 신성과 인성은 위격적으로(personally) 오직 성자 안에
서만 연합될 수 있으며, 연합되어야 했다.
In God, there is one nature and three persons: in Christ there is one person
and two natures. The unity of the three persons in the divine being is in the
full

natural(naturalis),

sense

coessential(coessentialis);

the

unity

of

consubstantial(sunousiwdhj),
the

two

natures

in

Christ

is

personal(personalis).75)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교제
(communion with God)의 길이 열렸다. 이러한 신비한 연합(a mystical union)은 영원한
구원협약에 따라서 체결된 역사적 언약의 성취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 자신의 일을 수행하심으로 성취되었다.76) 성육신은 “a union of
the person of the Son with an impersonal human nature.” 그것은 “a union of natures in
the person of the Son, not a natural but personal union.” “It is not a union of persons;
it is a personal and substantial union.”77)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러하듯이 인성도 본성이
“the substratum(suppositum) by which a thing is what is”라는 측면에서 실체적
(substantialis)이다.78) Bavink here confirms that the human nature is not a concrete
subject but an abstract substance of which union with the divine nature constitutes in
74)
75)
76)
77)
78)

Bavinck,
Bavinck,
Bavinck,
Bavinck,
Bavinck,

Reformed
Reformed
Reformed
Reformed
Reformed

Dogmatics,
Dogmatics,
Dogmatics,
Dogmatics,
Dogmatics,

3.302.
3.306.
3.304-305.
3.305-306.
3.306. Cf. Hodge, Systematic Theology, 2.387,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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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ternal person of Christ.7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은 항상 위격과 연합하여 신성과 함께 있다. 그러므로 the
human nature is not in itself “an independent self” but “from the start personal in the
Logos, who as subject lived, thought, willed, acted, suffered, died, and so on in and
through it with all its constituents, capacities, and energies.” the human nature does
not constitute “a personality of its own but subordinated to the Logos.”
요약해서 두 본성은avlloj kai avlloj(one person and another)가 아니라 avllo kai
avllo(one thing and another)로 연합한다. 이러한 연합의 비밀에 성도의 경건의 비밀
(musthrion euvsebeiaj)이 있다.80) Bavinck firmly sustains Chalcedon’s position of unity in
union—the fact that the human nature, like the divine nature, is not person(avnupostasij)
but belongs to it(evnupostasij).81)
3.4. Communication of Properties
인성은 an independent self도 personality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위격
과 연합하여 위격적으로(personally), 실체적으로(substantially) 작용한다. 신인양성의 중보
는 “effects of the union(effecta unionis)”에 부합한다: “the communication of proper
qualities(communicatio idiomatum),” “the completion of a work(apotelesmatum),” and
“the charismata(charismatum).”82)
첫째 형태의 교통은 양성에 속한 모든 속성들(attributes, qualities)이 “the one
person and the one subject”에 돌려짐으로 서로 교통함을 뜻한다. 이러한 개혁주의의 입장
에 서서 바빙크는 신성이 인성에 직접적으로 전달된다고 본 루터파의 입장이나 이를 거부하
지만 양성의 교통이 “intrinsic and substantial”하여 성육신을 통하여 God in Christ is
humanized and the human nature is deified라고 주장한 로마 가톨릭은 모두 a docetic
element가 있다고 비판하였다.83)
개혁주의에 따르면 신인양성은 성자의 인격 가운데 함께 존재한다는 측면에서만 서
로 교통하고 있다. The attributes of the two natures are ascribed as predicates to one
and the same subject. 이러한 교통은 본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 위격에 따른 것이다. 그 비
79) Even though Bavinck does not use such terms as “concretum” and “abstractum,” as Reformed
theologians do, he shares the same view with them. Cf. Peter Martyr Vermigli, Dialogue on
the Two in Christ, tr. & ed. John Patrick Donnelly, S. J., The Peter Martyr Library Series
One (Kirksville, MO: Sixteenth Century Essays & Studies, 1995), 50-51, 74-75; Heppe,
Reformed Dogmatics, Set out and Illustrated from the Sources, 441-445;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2.316-317, 322.
8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07.
81) Also in this case, although Bavinck does not use such terms as “enhypostatia” and
“anhypostatia,” as Reformed theologians do, he shares the same view with them. Cf. Heppe,
Reformed Dogmatics, Set out and Illustrated from the Sources, 416-419, 427-429;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2.328. This issue has been raised significantly with reference
to the doctrine of Leontius of Byzantium. Concerning his view, Herbert M. Relton, A Study in

Christology: The Problem of the Relation of the Two Natures in the Person of Christ
(London: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1917), 226-235.
82) Cf. Heppe, Reformed Dogmatics, Set out and Illustrated from the Sources, 434-447; Hodge,
Systematic Theology, 2.392-397;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2.321-332.
83)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08-309, 426-427, 43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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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은 오직 성자의 위격 자체로부터 나온다. 그분은 신성으로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성
을 취하신 신-인(God-man)이시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과 사람(God and man)이 아니시
다.84) 신성과 인성에 속한 속성들을 표현하는 어휘들이 동시에 함께 사용되어 표현되실 수
있다.
하나님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 영광의 하나님이
우리와 동등한 혈육으로 나셨다(히 1:3; 2:14). 하나님이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자신의 피로
성도를 깨끗하게 하시고 교회를 사셨다(빌 2:7; 행 20:28; 요일 1:7). 만물을 있게 하신 창
조주가 먼저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셨다(골 1:13-18). 하나님의 신성이 육체로 충만히 거했
다(골 2:9). 이러한 표현들은 신성에 관련된 주어에 인성에 관련된 술어가 사용되었다. 그
역도 가능하니, 그가 육신으로 오셨으나 영원히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고(요 1:18), 하늘에
계시고(요 3:13),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계시고(요 5:58), 다윗의 자손일지라도 다윗의 주
가 되시며(마 22:43),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는(롬 9:5) 말씀들이 있다.85)
둘째 형태의 교통은 중보자의 모든 사역들이 한 위격 가운데서의 양성의 공동협력
과 “a double working(evnergeia)”에 의한 것으로 “a divine human character”을 가진다는 것
이다. 물론 그것들의 유일한 주체는 성자며 그것들의 “their efficient cause”가 되신다.86)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와 관련하여 다룬다.
셋째 형태의 교통은 성자의 위격에 연합한 인성이 신성과 위격적으로 교통함으로
누리는 성령의 은사들을 다룬다.87) 그것은 루터파와 이후 케노시스 기독론이 주장하는 본
성에 따른 속성교통(communicatio idiomatum)에 따르면 은사의 교통 자체가 무의미하
다.88) 로마 가톨릭은 이와 관련하여 루터파의 극단은 피했지만 동방신학의 pericwrhsij와
qewsij의 영향을 받아서 예수가 모든 은사를 단번에 받았으며 그는 인성에 따라서 이 땅에
서 pilgrim(viator)였지만 충만한 은사로 말미암아 이미 지복직관자(comprehensor)였다. 그
리하여 그의 지식과 지혜는 성육신 때부터 완전하였으며 더 이상 자람이 없었다. 그는 the
blessed knowledge(scientia beata)가 충만하여 the beatific vision of God(visio Dei)을 가
졌다. 그러므로 그의 인성은 신격화되어 경배의 대상이 된다고 보았다.89)
바빙크는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입장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개혁주의 입장에서만
the true and genuine humanity을 견지하는 가운데 은사의 교통을 합당하게 다룰 수 있다

강조하였다.

바빙크는

예수님이

취하신

인성이

오히려

아담이

the

state

of

integrity(status integritatis)에 있을 때에는 가지지 않았던 subject to suffering and death
그리고 anger, sadness, pity, compassion 등의 the abounding world of the mind를 가졌음
을 말하면서 오히려 성육신이 “the assumption of a weak human nature”라는 점을 들어 그
것이 a state of humiliation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90)
바빙크는 주님의 이러한 연약함이 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는 길이라
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신성에 따른 거룩성과 인성에 따른 거룩성은 분명히 구별되지만,
84) Cf. John Murry, “The Person of Christ,”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y (Edinburgh:
Banner of Truth, 1977), 2.138.
85)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98, 308.
86)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08.
8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08.
88)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57-258.
89)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56-257. 309. Concerning the Roman Catholic Church’s
position on this, Berkouwer, The Person of Christ, 213-223.
9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10-311.

- 14 -

주님에게는

“the

possibility

of

sinning

and

falling”이

없다.

그는

“an

empirical

sinlessness” 뿐만 아니라 “a necessary sinlessness”도 가졌다.91) 주님의 인성은 위격과 연
합되므로 즉시 beatific knowledge(scientia beata)을 가지신 것은 아니었다.
The human consciousness in him, though having the same subject as the divine
consciousness, only to a small degree knew that subject, that “I,” indeed knew
it as a whole but not exhaustively. Just as behind our limited consciousness
there also lies within us a world of being, so behind the human consciousness
of Christ there lay the depths of God, which could only very gradually and to
a limited degree shine through that human consciousness. From this, one may
not infer, however, that in various domains Jesus could err.92)
바빙크는 주님의 인성의 고유한 은사를 그것이 신성과 교통한다는 사실 자체로부터
추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죄를 용서하며, 성령을 파송하시고,
영생을 수여하는 일, 나아가서 영광을 받으심도 그분의 신성뿐만 아니라 인성에도 속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역은 신성에 따른 것이나 그것이 위격에 돌려짐으로 그 은사가 인성에도
미친다는 것이다.93) 이러한 관점에서 중보자가 “the proper object of worship”이지만 “the
ground” 혹은 “the foundation”은 오직 신성에 있다고 하였다.94) 이렇듯 은사의 교통을 다루
면서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연약함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위격의 하나임을 강조하여
그것이 성도들에게는 은혜의 길이 됨을 역설하고 있다. 비하와 승귀의 주님의 중보사역은
이러한 은사의 교통에 기초해 있다. The following confession of Westminster is
embracing the whole aspects of the communication of both the natures deployed by
Bavinck.
Christ, in the work of mediation, acteth according to both natures; by each
nature doing that which is proper to itself; yet, by reason of the unity of the
person, that which is proper to one nature is sometimes, in Scripture,
attributed to the person denominated by the other nature.95)
4. Mediation in Hypostatic Union
4.1. 연합의 중보: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의 영
바빙크는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 가운데서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그와 신비
한 연합에 이르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와 교통을 통한 영화에 이름을 구속
9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14. Cf. B. B. Warfield, “Jesus’ Alleged Confession of Sin,”
in Christology and Critic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32), 97-145.
9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12-313.
93)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15-316.
94)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17-319.
95)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8.7. Schaff, ed.,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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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핵심으로 여긴다. 이를 위하여 창세전에 삼위 하나님의 the pact of salvation(pactum

salutis)이 있었다. 아들의 vicarious satisfaction(satisfactio vicaria) 즉 그의 순종을 질료인
(material cause)으로 하고 이를 믿는 성도의 믿음을 형상적 혹은 도구적 원인(formal or
instrumental cause)으로 한 the covenant of grace의 토대가 미리 창조와 타락 전에 놓였
다고 보았다.96)
첫 언약은 아담의 순종을 조건으로 하였다. 아담은 “the representative of
humankind”였다. 새 언약은 타락 이후 체결된 다양한 종류의 은혜언약을 성취한 것으로서
이 경우 그리스도는 “the substitute of humankind”였다.97) 새 언약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
어진다. 한 요소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아들의 순종이다. 이는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는
순종(obedientia activa)과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하여 당하는 순종(obedientia passiva)를 포
함하는 것이어야 했다. 다른 요소는 아들의 의를 은혜로 전가해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다.
바빙크는 이에 대한 성부와 성자 사이의 협약을 the covenant of redemption이라고 불렀
다.98)
그리스도는
(guarantor)”이

자신의
뿐만

신인양성의

아니라

위격

“당사자(the

가운데

언약의

key

party)”가

“머리(head)”로서
되었다.

그는

“보증
“중보자

(mediator)”였다(히 7:22; 8:6; 12:24).99) 그가 아버지를 향하여는 행위언약을 다 이루었고
우리를 향하여는 은혜언약을 다 이루었다. 새 언약은 순종과 전가를 함께 포함하는 “a
better covenant” “an evangelical covenant”이었다. 그것의 superiority와 mystery는 “the
mystical Christ(Christus mysticus)”--곧 그분의 신인양성의 위격에 있었다.100)
그리스도는 위격적 연합 가운데 “연합의 중보(the mediatorship of union)”을 이루
셨다. 그의 직분이 영원하듯 그의 왕국 또한 영원하다. 그의 통치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는
역사로 말미암아 인격적, 교회적, 우주적으로 작용한다.101) 이러한 성령의 통치는 그 본질
상 the believers’ communion with God 곧 a mystical union에 있다고 간파했다.102) 이러
한 신비한 연합은 오직 성령의 은밀한 역사로 말미암는다. 이러한 성령의 구원사역은 그리
스도의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의 비밀을 이루는데 있다. 바빙크는 그리스도에 임한 성령을
단지 신성과 동일시하거나 인성에 주입된 것으로만 보지 않고 신인양성의 위격 가운데 다룬
다. 특히 Romans 1:3의 “according to the Spirit of holiness(kata pneuma avgiwsuvhj)” 존귀하
게 되신 주님에 관한 해석에는 이러한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바빙크는 이와 관련하여 주
님께서 인성에 따라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며(눅 1:36), 성령의 충만했으며(눅 4:1), 성령
을 한량없이 받았다는 사실(요 3:34) 뿐만 아니라 그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되고(행 17:31), 이전의 영광을 받았으며(요 17:2), 영광의 주요(고전 2:8), 하
나님의 능력이 되셨다(고전 1:24)는 사실을 함께 다룬다.103)
바빙크는 성육신으로부터 작용한 성령이 고난과 순종에서 뿐만 아니라 부활과 승천
과 재위 등 주님의 중보의 전체 과정에 위격적으로 미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부활로 인하

96)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05.
9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06.
98) Bavinck, Reformed Dogmatics, 3.
99)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27-228, 405.
10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25, 228
10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79-482.
10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04.
103)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3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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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주님의 몸이 “a spiritual body(swma pneumatikon)”가 되고 그분 자신이 “the Spirit of
life(pneuma zwhj)”로서(Rom. 8:11) “a life-giving Spirit(pneuma zwopoioun)”(1 Cor. 15:45)
라는 사실도 이러한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빙크가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
합의 비밀을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
혹은 주의 영으로 부각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The Holy Spirit is the Spirit of Christ because he dwells in Christ himself and
because through him Christ communicates himself to his own(2 Cor. 3:18).
And thus Christ is now he in whom all the “fullness of deity dwells
bodily”(Col. 2:9; 1:19). He is the visible image of the invisible God(Col.
1:15). The divine glory is now manifest in his human nature and radiates from
his face(2 Cor. 3:18; 4:4, 6).104)

4.2. Double States (Status Duplex): 위격적 연합 가운데서의 사역
바빙크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humiliation과 exaltation의 고유한 의미를 위격적 연
합에 대한 창세전 pactum salutis의 according to dispensation(kat oivkonomian) 것이었다고
여긴다.105) 비하와 승귀는 신성 자체 혹은 인성 자체의 속성이나 품위(dignity)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비하와 승귀는 동일한 위격 가운데서 양성이 교통하는 다양한 양상과 관
계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본성적이지 않으며 위격적이다. 비하와 승귀의 주체는 성자의
위격이다. 그러므로 비하와 승귀를 신성의 포기와 인성의 고양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었던 루
터란들이나 로마 가톨릭, 그것들을 하나님을 담지한 사람인 예수(evnqeoj)가 하나님(qeoj)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본 슐라이어마허를 필두로 한 내재우의 신학자들, 그것들 전체를 신성이
인성으로 체화되는 성육신의 과정이라고 본 Dorner와 Rothe 등 점진적 성육신론자들, 그것
들을 신적인 계시를 받아서 신적인 기적을 이룬 한 사람 예수의 삶의 과정이라고 본 소시누
스주의자들은 이를 단지 신화의 과정이거나 이상적인 관념을 다룰 뿐이라고 본다.106)
바빙크는 성자의 위격 가운데 인성을 취한 성육신을 비우심(kenwsij, exinanitio)이
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낮추심(tapeinwsij, humiliatio)의 시작이라고 다루었다. 비하는
이러한 비우심과 낮추심을 포함한다. 그것은 동일하신 인격의 성자가 “the divine mode of
existence(morfh qeou)”를 버리고 “the human mode of existence” 즉 “the form of a
servant(morfh doulou)”를 취하신 것이다. 이러한 존재방식의 변화는 본성에 따른 것이 아니
며 위격에 따른 것이다.107) 성자가 참되고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다. 루터란들은 성자가 취
한 인성은 신적 속성들이 포함된 인성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비하는 취하심 자체가 아니
라 인성이 그 신적인 속성들을 사용하지 않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이렇듯 성육신과 비
우심과 낮추심으로 표현되는 비하를 구별하였다.108) 한편 로마 가톨릭은 비록 성자가 취하
104)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36.
105)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64.
106)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06-407, 426-433. Cf. Cf. B. B. Warfield, “The
Humanitarian Christ,” in The Person and Work of Christ, ed. Samuel G. Craig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1950), 189-208.
10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07-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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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인성은 참되고 완전하나 그것은 특별한 은사로 그 순간부터 영화롭게 된다고 보았다. 그
리하여 성육신의 비하는 관념상 연합의 순간에 머물고 즉시 중보자의 인격은 인성에 있어서
조차 고귀하게 되어 경배의 대상이 된다고 보았다.109)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비하가 성자의 위격에 참되고 완전한 인성이 연합하는 성육신
과 그 가운데 당하고 행하신 모든 순종을 포함한다고 보았다. 예수가 취한 인성은 타락 이
후의 여러 조건에 부합하는 것이었다.110) 세례는 이러한 인성이 신성과 연합한 위격 가운데
모든 것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가 그 의를 전가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communion)
하는 자리로 세우고자 하는 표식과 인(sign and seal)이었다.111) 그리스도의 지옥강하도 이
러한 관점에서 이해된다. 그것은 실제적이지 않으면 장소적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
은 위격적 연합 가운데 인성에 따라서 당하신 극심한 영혼의 고통―즉 죽으심과 장사되심―
과 신성에 따라서 그 권세의 선포를 뜻한다. 대체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 둘 중 하나의
의미만을 취하지만 바빙크는 위격적 연합에 따라서 이 둘이 동시에 한 위격에 귀속됨을 강
조하였다.112) 지옥강하에 대한 로마 가톨릭과 루터란들의 그릇된 이해는 위격적 연합에 대
한 그들의 오류로부터 기인한다. 루터란들은 지옥강하의 주체를 영혼이라고 보는 로마 가톨
릭과 부활 전에 “vivification(reviviscentia, vivificatio)”을 통하여 고양된 모종의 존재하고
보았던 것이었다.113)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승귀를 다루면서 그것이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 가운데서의
중보였다는 점을 다시금 부각시킨다. 단지 신성에 따른 중보만을 주장하는 오시안더
(Osiander), 단지 인성에 따른 중보만을 주장하는 스탕카로(Stancaro), 그리고 두 본성이
“the principle that performed the works of the mediator”이지만 인성만이 “the principle
by which the works were accomplished by the mediator”라고 본 로마 가톨릭과 루터란들
이 모두 비판되었다.114)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승귀는 양성에 모두 미친다고 보았다.115) 신성에 따라서는 비
로소 신적인 능력을 행하여 신적인 영광을 각 사람의 눈에 비추게 되었고, 인성에 따라서는
그 신적인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다. 다만 인성의 속성상 “수용 가능한 범위에서(to the
extent it was capable of it)” 그리하였다. 이러한 신인양성의 사역이 위격적으로 행하여짐
으로 부활 후 그리스도는 인성에 따라서는 “신령한 몸” 가운데 신성에 따라서 “살리는 영”이
되셨다.116) 오직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의 관점에서만 초자연적인 기독교는 유일한 역사적
인 기독교가 된다.117) Exaltation does not mean to form a divinity by the enhanced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31. Concerning Luther’s and Lutheran views of
communicatio idiomatum, Berkouwer, The Person of Christ, 272-281.
109)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26-427.
11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10-311. 이에 대해서는 본고 3.4. 참조.
11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08.
11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15-417. Cf. Calvin, Inst. 2.16.8-12;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356-361; Hodge, Systematic Theology, 2.616-621.
113)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27-428. 루터란들은 resurrection을 “external
resurrection(resurrectio externa)”로
부르고 이를 그들이 “internal resurrection(resurrectio
interna)”라고 부른 vivification와 구별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vivification이 승귀의 시작이다. Cf.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14-415.
114)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30.
115) Cf.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2.334, 348, 352, 364, 366, 368, 370-372;
Hodge, Systematic Theology, 2.629-631.
116)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32, 434-436.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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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king of the Holy Spirit.118)
바빙크는 자신이 견지하는 이러한 입장은 개혁주의의 전통에 서 있는 것으로서 그
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의 전체 과정을 동일한 인격 가운데 파악하는 장점이 있다고 보았
다.119) 이러한 측면에서 성경에서 부활과 승천을 신성에 따라서는 능동태로, 인성에 따라서
는 수동태로 표현하고 있으며,120) 신성에 따라서는 동시에 모든 곳에 계시는 주님을 인성에
따라서는 어느 시점에 어느 곳에―즉 보좌 우편에―계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음을 주목한
다.121)
4.3. Vicarious Satisfaction(Satisfactio Vicaria): 위격적 연합의 열매
그리스도의

승귀는

비하에

대한

상급(a

reward)이었다.

“the

meritorious

connection between Christ’s humiliation and exaltation”에 따라서 부활, 승천, 재위, 재림
으로 나타나는 “중보자적인 영광(the mediatorial glory)”이 승귀의 실체이다.122) 승귀는 신
인양성의 위격에 돌려진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합한 성도의 특별한 구
원의 은혜를 드러낸다. 그 은혜를 전가하므로 부활한 그리스도는 살리는 영이 되신다. 그러
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따라서 그와 교제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성도의 구
원의 어떠함을 알기 위해서는 중보자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이 어떤 의 혹은 공
로가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123)
이와 관련하여 바빙크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가 passive obedience(obedientia

passiva)과 행하신 순종(obedience activa)에124) 모두 미친다는 사실을 특히 강조한다. 죄
(sin, peccatum)를 사함 받기 위해서는 죄책(guilt, reatus)에 따른 형벌(punishment,
poena)을 치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the satisfaction of God-man”이 필수적이다. 신인
양성의 중보를 통한 의의 언약적인 전가가 없이는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125) 이러한
경륜이 창세전에 작정되었다.126) 그리스도의 죽음이 순종의 완성(the consummation of his
obedience)이 되는 것은 그분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127)
117) Cf. B. B. Warfield, “Jesus Christ,” in Christology and Critic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32), 165: “Supernaturalistic Christianity is the only historical
Christianity.”
118) So this following theory cannot be accepted. Wolfhart Pannenberg, Jesus God and Man, tr.
Lewis L. Wilkins and Duane A. Priebe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8), 323: “But
Jesus as this man, as man in this particular, unique situation, with this particular historical
mission and this particular fate―as this man Jesus is not just man, but from the perspective
of his resurrection from the dead(kata pneuma―“according to the Spriti”) he is one with God
and thus is himself God.”
119)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31. Cf.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2.379-384.
12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36-437, 444-445.
12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46-447.
12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33-434.
123) Cf. Hodge, Systematic Theology, 2.470-473.
124) 우리는 이를 라틴어의 의미대로 이해함이 합당하다. obedientia activa는 행하신 순종을,
obedientia passiva는 당하신 순종을 의미한다. 양자는 모두 주님의 자원적인 순종을 뜻한다. 다만
그 양상이 다를 뿐이다.
125)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45.
126)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64-366.
12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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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순종은 대리적 무름(satisfactio vicaria)의 값이다.128) 그것은 단지 죄
와 허물을 사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의를 전가하여 성도가 “신앙 안에서(in
faith)”

“non

posse

peccare(the

not-being-able

to

sin)”와

“non

posse

mori(the

not-being-able to die)”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의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는 순종과 율
법을 지켜 행하는 순종을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행하는 순종과 당하는 순종이 분리되지 않
는다. 왜냐하면 행하는 순종이 없이 당하는 순종이 없기 때문이다. 행하는 순종으로 말미암
아 자신을 흠과 티가 없이 준비한 주님이 준비된 양으로 죽음을 당하시기 때문이다.129) 그
러므로 행하는 순종은 잉여적인 공로가 아니라 마땅한 공로이다. 대속의 공로는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그 값을 찾아야 한다. 대속의 원리는 “a quantitative calculation”으로 헤아릴 수
없다.130)
그리하여 바빙크는 “Christ’s entire life and work, from his conception to his
death, was substitutionary in nature.” 라고 단언한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단지 죄의 값을
치르는데 그치지 않고 행위언약의 조건인 모든 율법을 준수하는 순종을 포함한다. 당하는
순종과 행하는 순종은 하나이다. 그것들은 한 위격 가운데 한 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구원의 의를 전체적으로 이루기 때문이다.131)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의 중보로 말미암아 성도는 그분과의 신비한 연합을 통
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연합의 중보를 이루셨다. 그분이 화목제물
(offering,

i`rasmoj,

katallagh)이

i`rasthrion)이

되셨다.

제물을

되셔서

하나님과

드리는(i`raskesqai)

우리

주체는

사이의
성자시나

화목(reconciliation,
화목하게

하시는

(katallassein) 분은 하나님이시다. 화목(Versühnung)에 이르기 위하여는 속죄(Versöhnung)
가 요구된다. 그런데 그 속죄의 값을 아들로 삼으셨기 때문에 비록 화목케 하시는 분은 아
버지시나 화목의 주는 아들이시다. 이는 아들이 아버지와 우리 사이를 삼위의 협약에 따라
서 중보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격적 연합의 교리를 부인하게 되면 대속교리가 무익해
지며 성경에 제시된 속죄의 모든 유익이 단지 허상이 될 뿐이다.132)
5. Conclusion
본고에서는 우리는 바빙크가 자신의 신학의 centrality를 기독론에 둔 것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 교리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바빙크의 신학은 시대의
산물임에 분명하다. 그는 당시의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
과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는다는 두 가지를 변증하기에 힘썼다. 그리하여
그는 칼빈 이후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추구된 계시의 원리에 자신의 신학을 인식론적
으로 정초시켰고 오직 구원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이 땅에 오신 중보자 하나님의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 가운데서 행하신 사역의 공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바빙크는 우리가 뚤레틴이나 헤페나 차알스 홧지에서 볼 수 있는 위격적 연합 교리
를 다루는데 사용되는 전문적인 용어들을 발견할 수는 없다. 예컨대 한 위격 가운데서의 양

128) Cf.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426-433.
129)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94-396.
13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02.
13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78-380.
13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47-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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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존재와 관련하여 enhypostatis, anhypostatia, abstratum, concretum 등의 용어를 바빙
크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양성의 연합을 영혼과 육체의 연합으로 유비하는 방법
도 사용하지 않는다.133) 오히려 그는 정통적인 계시의 원리를 좇아서 기독론의 교리를 변증
할 뿐이다. 다만 초대교회 이후 전개된 다양한 교리들을 심오하게 분석함으로 그 공과를 논
하고 결론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는데 주력한다. 이런 점이 바빙크 신학의 고유함이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신학은 철학적이며 윤리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추구한 것은 성경적 신학이었다.134)
바빙크는 위격적 연합 교리를 전체 신학을 꿰뚫는 맥과 같이 여겼다. 이상 우리가
살펴 본 바를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바빙크는 위격적 연합교리를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다룬다. 무엇보다 그는
창세전의 하나님의 구원협약(pactum salutis)에 따라서 역사적으로 수립된 언약들이 그리스
도의

성육신과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신인

(qeanqrwpoj)으로서의 아들의 위격에 따른 사역의 필연성을 삼위의 경륜에서 찾는다.
둘째, 바빙크는 성육신의 비밀이 잉태에 머물지 않고 중보자의 비하와 승귀에 이르
는 중보자의 전 생애에 미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를 성령의 역사에 돌린다. 그리하여
은사의 교통과 함께 사역의 교통을 밀접하게 관련시킨다. 속성의 교통은 이러한 교통의 다
양한 양상을 드러낸다고 본다. 성령으로 조성된 그리스도의 인성에 따라서 당하신 고난과
행하신 고난이 위격적인 의미를 갖게 되어 살리는 영으로서 부활의 권능을 행하게 된다.
셋째, 바빙크는 위격적 연합 교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 그분과의 신비
한 연합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통하는 길을 열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이를 삼위의 연합의 비밀로부터 추구한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로부터 신인의 위격의
신비가 논해지고 또한 이로부터 성도가 하나님과 연합하는 비밀이 논해진다. 오직 그 비밀
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위격 자체로부터 기인한다.
넷째, 그리하여 바빙크는 대속의 무름(satiafactio vicaria)을 중보자의 인격에서 찾
는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타락 전 아담의 그것보다 더욱 풍성하여 대속의 은혜도 더욱 부요
하다. 그는 우리의 죄를 속죄, 용서,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 구원론은 이러한 대속의
의를 성도에게 적용하는 질서 혹은 경륜을 다룬다.135)
다섯째, 전체적으로 바빙크는 위격적 연합 교리를 다룸에 있어서 중보자 그리스도
가 영원하신 하나님(qeoj)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교리의 비밀은 성자의 위격 자체에 있
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 속에는 단지 하나님이 계
실 뿐이라고 본(evnqeoj) 내재주의, 윤리주의를 추구한 자유주의는 모두 거부된다.
아래의 문단은 바빙크가 추구한 중보자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 교리에 나타나는
이러한 특징들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It is one single work that the Father assigned to him and that he finished in
his death(John 4:34; 17:4; 19:30). His ministry was completed in the giving of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Matt. 20:28). Even Paul, who powerfully
133) Charles Hodge frequently uses this analogy. Systematic Theology, 2.378, 380, 389, 390,
392, 394, 397, 409 etc.
134) Cf. John Bolt, “Christ and the Law in the Ethics of Herman Bavinck,” Calvin Theological
Journal 28(1993), 45-73.
135) Bavinck, Reformed Dogmatics, 3.504-506, 522-528.

- 21 -

emphasizes the cross of Christ, regards his death, not as the whole, but as
the consummation of his obedience. He was born under the law(Gal. 4:4), in
the likeness of sinful flesh(Rom. 8:3), did not live to please himself(Rom.
15:3); at his incarnation he already emptied himself and assumed the form of
a servant; he continually humbled himself and became obedient even to
death(Phil. 2:7-8; 2 Cor. 8:9). So it is one single ministry and one obedience,
which gives “life-giving justification”() to many(Rom. 5:18-19).

- 22 -

제 5 장 구원중보자(Mediator Salutis)

5.1. 구원중보자
삼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하나님이 없는, 단지 공허하고
무가치한 하나님이라는 이름만이 우리 머리 속에 떠 다닐 것이다(nudum et inane
duntaxat Dei nomen since vero Deo in cerebro nostro volitat)”(Inst. 1.13.2, CO 2.90).
왜냐하면 아버지는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서 일하시기 때문이다(Pater agit per
Filium in Spiritu Sancto).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땅에

나타나시기

전에

“영원

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말씀(sermonem ante saecula ex patre genitum)”이었다. “스스로
영원하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말씀인 아들의 질서 혹은 명령(verbum pro nutu vel
mandato filii accipi, qui ipse aeternus et essentialis est patris sermo)”이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짓기 전에 가지신 “지혜(sapientia)”였으며(잠 8:22 ff), 하나님은 “말씀을
중보자(sermonem illum intermedium)”로 천지를 창조하였다(창 1장).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시고,” “만물을 붙드시며”(히 1:2-3), 선지자들은 이
말씀의 가르침대로, 즉 “그리스도의 영(spiritus Christi)”으로 말했다(벧전 1:10-11; cf.
벧후 1:21) [이상 Inst. 1.13.7, CO 2.94-95]. 말씀은 빛이 있으라(창 1:3)는 하나님의
말씀 전에 있었으며, 창세전에 “영광(gloria)”을 하나님과 함께 했다(요 17:5) [이상
Inst. 1.13.8, CO 2.96].
창조 중보자 그리스도는 그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에 이미 구속
중보자로서 예언되었다. 구약 시대 때 그는 “임마누엘(사 9:6)”로서,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5-6, 33:15-16)”로서 선포되었다. “그리스도는 의가 흘러 나오는 참다운
여호와로 증거되었다(Christum esse verum Iehovah testatus esset, unde fluit iustitia)”
[이상 Inst. 1.13.9, CO 2.96-97]. 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 때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사자의 모습으로 야곱에게, 모세에게,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에게 나타났는데,
“교회의 정통적인 학자들은 여호와의 사자를 일종의 전조로서 이미 그 당시에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이루어 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합당하고 지혜롭게
해석했다(Recte autem prudenter orthodoxi ecclesiae doctores sermonem Dei esse
interpretati sunt principem illum angelum, qui iam tunc praeludio quodam fungi coepit
mediatoris officio)”[이상 Inst. 1.13.10, CO 2.97-98].
신약 시대 사도들은 구속 중보자로 오신 그리스도가 영원한 하나님의

- 23 -

아들이신 창조 중보자라는 것을 증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격을 선포한다 [기독교
Inst. 1.13.11-13]. 칼빈은 이상을 삼위일체론에서 다루고 구속 중보자의 오심의
필연성과 그의 인격과 사역의 실재는 Inst. 2.6, 12-17에서 다룬다.

[칼빈의 삼위일체론(내재적이며 경륜적)과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양성의
연합 가운데 하나임)의 역동적 이해]

A. 삼위일체론

a. 창조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아들: Inst. 1.13.7-8
b. 구속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현현(구약): Inst. 1.13.9-10
c.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과 사역(신약): Inst. 1.13.11-13

B. 기독론

a.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당위성: Inst. 2.6
b. 중보자의 인격과 사역: Inst. 2.12-17

초대 교회의 영지주의자들과 말씨온주의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물질계와
관계되고 쉽게 진노하는 열등한 신으로 보고, 그리스도는 구속주 하나님으로서
최고신의 계시로 봄으로써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분리했다. 그러나
우리가 초대 교부 이그나티오스(Ignatios)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아들에 의해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이 말씀이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실재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 주장되었다(서철원
교리사 참조).
하나님의 창조를 로고스가 이루시므로 그리스도는 창조 중보자이시다(요
1:1-3; 히 1:2; 골 1:16-17; 롬 11:36). 이 창조로 인하여 그리스도는 만물의 상속자가
되셨다(히 1:2; 골 1:17).

이 창조 중보자를 하나님은 구속 중보자로 세우셨다.
1)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pactum

salutis)에

의해서

말씀이

구속

중보자(Mediator redemptionis)가 되시기로 되었다. 그리스도가 구속주 되심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decretum aeternum) 외에 어떤 필연성(necessitas)도 없다(Inst.

- 24 -

136

2.12.1, 5).

2)

세례(마

3:16-17;

1:10-11;

통하여서

3:21-22)를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선포되셨다[여기서 특히 칼빈의 공관복음 주석 참조].
a. 그리스도는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한 준비로서 세례를 받으셨고, 성령의
능력을 받으셨다. 이 성령을 다른 사람을 위한 구속 사역을 완성하기 위한
능력으로 받으셨다. 이는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께서 읽으신 이사야 61장에서
드러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evcrisen)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려하심이라”(눅 4:18).
b. 세례를 통하여서 “내 사랑하는 아들”로서 선포되심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으로서 세워짐을 의미한다(단 9:25, 26; 시 2:6-8).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특심하게 베푸신 솔로몬을 “아들”로 불렀다(삼하 7:14; 대상 28:6).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가 그리스도가 되셨다(요 1:41-안드레; 4:25-수가성 여인). 메시아는 지상 사역
동안

왕직을

수행하셨고

죽음으로써

사역을

이루셨으며

부활

승천

하심으로써 왕으로서 등극하셨다.
c.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서 그리스도는 또한 세례를 통하여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o` avmnoj tou qeou o` a`irwn thn a`martian tou kosmou)”으로
선포되었다(요 1:29, 36). 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의 몸을 성결케 하심으로써 예수는
그 세례를 우리와 함께 나누게 되었다. 이는 십자가에서 몸을 찢으심으로 성찬시
떡을 통하여서 그의 몸을 우리와 나누게 됨과 같다. 죄과의 전가가 공식적으로
세례 받을 때 이루어졌다(언약적 죄의 전가).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고 죄의
본성도 없으시지만 우리의 죄과를 전가 받고 단번에 죽으심으로(히 9:26; 롬 6:10)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고(마 3:15)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셨다”(고후 5:21).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죄를 전가 받고 예수는 저주 받은
죄인으로 죽게 되었다(신 21:23; 갈 3:13; 행 5:30; 10:39).
d.

이상에서

바와

같이

왕으로서의

사역은

제사장적

죽음으로써

완성되고, 단번에 드려진 제사로 자신의 사역을 다 이룬 그리스도는 왕으로
등극하고 새로운 백성을 조성한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이 자신을 제물로 드린 것이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마

2:2-6;

1:33;

9:6-7;

32:1;

12:5),

세례를

통해서

136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협약을 온전히 인식했으며 미래의 성취를 온전히 예견했다.
이에 대해서 B. B. Warfield, “The Foresight of Christ,” 2.71-97.

- 25 -

임직되시고(마 3:17; 막 1:11; 눅 3:21-22),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그 사역을 다
이루시고(계 1:5; 5:9-10), 보좌 우편에서 다스리신다(히 10:12). 구속된 백성이
그리스도의

나라이다(마

1:21;

1:5-6;

5:9-10).

만민이

만방이

나라로

몰려든다(미 4:1; 사 2:2-4).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리로다”(계 11:15).

5.2. 중보자의 인격
그리스도는 중보자로 세워져서 여러 이름을 가진다. 이 이름들은

중보자의

직임(officium)에 따라서 나타내는 그의 인격(persona)을 뜻한다. 직임은 인격과
분리되지 않고 인격을 계시한다. 따라서 이름은 실재를 뜻한다(nomina sunt realia).

1) 예수( jIjhsou'V)

a. 예수는 인간적 호칭으로 천사를 통해 준 것이지만 그 뜻은 구원주로서(마
1:21; 눅 2:11; 행 4:12; 5:31; 13:23, 38) 메시아와 같다. 즉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는 인간의 이름으로 주어졌지만 이 이름이 인성을 지시하고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신성을 지시한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b. 예수가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를 주라고 칭하게 되었다(고전 12:3; 1:21;
2:36; 7: 59-60; 8:16; 16:31; 19:18; 고후 4:5; 히 13:20; 고후 1:1-2). 그러므로 교회
최초의 신앙 고백은 주 예수(KuvrioVj jIjhsou'V)였다(롬 1:4, 7; 4:24; 5:1, 11, 21; 6:23;
7:25; 8:39; 10:9; 13:14; 15:6, 30; 고전 1:2-3, 7-8, 9; 12:3; 행 1:21; 2:36; 벧후 1:2
등).
c. 예수는 구약에서 예표(typus, tuvpoV)를 갖는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백성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고 토지를 배분하여 삶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예수를
예표하나,

여전히

땅을

모두

정복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예수를

대망한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슥 3:1-10; 6:11-15)는 제사장으로서 예수를
예표하며, 성전 건축을 통해서 성전 제사를 회복해서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했다.

2) 그리스도(oJ Kristo;V)

- 26 -

a.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x;yvim'의 번역어(Messiaj, 요 1:41;
4:25)이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아 메시아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다윗의 가문에서 오실 구원자로서 메시아라는 이름이 명확히 제시된
곳은 구약에서 오직 세 군데이다(시 2:2; 단 9:25, 26).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선언은(시 2:7)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임직명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이스라엘의 왕이자(행 17:7; 마 3:16-17; 막 1:9-11; 눅 3:21-22) 만국의
왕이다(사 42:1-4; 61:1-3). 그는 때가 이르면 오실 “만국의 보배”시다(학 2:7).

42:1,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사 61:1,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b.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왕, 곧 하나님의 아들이요(마 26:63-64; 막 14:61-62;
눅 22:67-70) 제사장이다(고전 1:23; 5:7; 15:3). 즉 제사장 왕이다. 이면에서 기름
부음 받은 왕은 제사장이며, 그리스도는 예수와 일치한다(요 1:41; 눅 2:11).
c. 구약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기름 부음을 받은
사울, 다윗, 솔로몬과 같은 왕들과,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들, 그리고 엘리사에서
대표적으로 보는 바와 같은 기름 부음 받은 선지자들은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원한

왕조를

허락하셔서(삼하 7:11-17) 그리스도의 왕권을 연결시켰으며 혈통으로도 조상이 되게
하셨다(참고. 시 2:7-9, 89:3-4, 132:10-12). 한편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대
제사장이 되었다. 자기 몸을 제물(sacrificium)로 삼아 완전한 속죄 제사를 이룬
제사장(sacerdos)이

되었다(히

9:11-15,

26-28; 10:10-14).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자신보다 먼저 계신 분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137

불렀음은 이를 증거하기 위해서였다(요 1:29-30).

d. 주님께서 직접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지시한 곳은 많지 않다(요 4:25-26;
17:3; 막 14:62 (마 26:64; 눅 22:67-69)). 뿐만 아니라 베드로(마 16:16 (막 8:29; 눅
19:20))와

마르다의

고백(요

11:25-27)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간접적으로

그리스도이심이 계시된 곳도 많지 않다. 예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로 드러내신

137 Anthony Hoekema는 구약의 메시아 환상을 다음 7가지로 분류한다. 1) 오실
구세주의 대망(창 3:15; 49:10; 삼하 7:12-13). 그는 인자로서(단 7:13-14)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사 42:1-4; 49:5-7; 52:13-53:12) 선지자직(신 18:15), 제사장직(시 110:4), 그리고
왕직(슥 9:9)을 이룬다. 2) 이스라엘과 전 세계의 하나님의 왕국의 예기(단 2:44-45). 3)
하나님이 그의 백성의 죄와 우상숭배를 용서하시는 새언약의 수립(렘 31:31-34). 4) 포로
생활로부터 이스라엘의 회복(사 11:11; 렘 23:3; 겔 36:24-28). 5)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심(욜 2:28-32). 6)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과 믿는 자들에 대한 구원을 이루는
주의 날의 도래(옵 15-16; 욜 1:15; 2:1-17; 사 13; 암 5:18-20; 습 1:7, 14-16; 말 4:5). 7)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창조 (사 11:6-69; 32:15; 35:7; 65:17; 66:22). The Bible and the
Future (Rep. Grand Rapids: Eerdmans, 1979), 3-12.

- 27 -

것은 그의 주장이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을 때나 그의 제자들과의
은밀한 대화 다운데서나 은밀한 기도의 때에 그리고 산헤드린의 심판의 때였다.
e. 이 명칭에 대해서 후대첨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으며(불트만, 쿨만)
편집비평을 주장해서 막 8:30-32를 빼고 바로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책망을
연결해서 그가 그리스로 불리기를 싫어하셨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Reginald H.
138

Fuller).

3) 인자(oJ uiJo;V tou' ajnqrwvpou, Xwn rb in Aramic)
a. 이 명칭은 공관복음서에서 50여회(Ur-Markus, Q, M, L을 합하면 69회)
요한복음에 13회 나온다. 요 12:34(두 번)과 눅 24:7를 제외하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이 호칭이 나온다. 그리고 행 7:56에서 스데반이 한번
사용한 것을 제외하고는 예수의 전유적 호칭이었다. 예수는 이 삼인칭 명사를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했다. 이 호칭은 예수의 이상적인 인성이나 반대로
인성의 연약성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이 호칭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자신을
이해하신 존귀성을 표현한다.
비평학자들은

b.

칭호가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거나(E.

Käsemann)

예수와는 다른 종말론적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 본다(R. Bultmann,
G. Bornkamm, F. Hahn, R. H. Fuller).
c. 이 칭호는 크게 네 가지로 사용된다.
ㄱ.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 즉 성육신의 신비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 eg.
요 3:13-“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6:62-“너희가 인자가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 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ㄴ. 예수의 사역과 관련된 말씀들: eg. 막 2:10-“죄 사하는 권세,” 막
2:28-“안식일의 주인,” 눅 7:34-“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눅 9:58-“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눅 19:10-“인자의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ㄷ. 수난과 부활을 지칭: eg. 막 10:45-“대속물,” 눅 22:48-“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24:7-“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요 3: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138

The Foundation of New Testament Theology (London: Lutterworth, 1965), 109-110.
- 28 -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6:53-“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8:28-“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줄을 알고,” 12:23-“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3:31-“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ㄹ. 그의 미래에 오심을 지칭: eg. 막 8:38-“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 막 13:26-“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막 14:62-“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눅 12:8-10-“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 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 . .,” 눅 12:40-“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눅
17:22-30-“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 . .,” 눅
18:8-“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마 10:23-“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마 19:28-“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 . .,” 24:30-“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 . .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
25: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c. 구약 시대의 인자의 사용례는 천사보다 더한 인자의 권위(시 8:4,

~d'ªa'÷-!b,W)) , 하늘에 계셔서 온갖 지혜가 그 속에 있으며 심판주가 되시는 인자의
임재(겔 1:26; 2:1, 3, 6, 8; 3:1, 3, 4, 10, 17, 25; 4:1 등), 그리고 구속주의 오심(단
7:13-14)을 나타내는데 예수는 이를 더욱 폭 넓게 사용하였다.
d. 인자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를 함의하며 하나님의 아들의
비하와 승귀를 인격적, 사역적으로 표현하며 궁극적으로 최후의 강림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이 칭호는 신적이다.
e. 다니엘 7:9-14의 환상에서 “인자 같은 이(vn"ßa/ rb:ïK.))”로 나타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위임받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는 9:15-28의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의 나라” 곧 “성도의 나라”의 대표임을 나타낸다.

4) 하나님의 아들(oJ uiJovV tou' qeou')

a. 구약 시대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신약시대 이 칭호는 인자라는 칭호와 성령의 임함(눅 24:49; 행 2:33; 요

- 29 -

20:21-22)과

세례와

연관되어

주로

사용된다.

무엇보다도

단어는

아빠

아버지(abba oJ pathvr)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와 성부의 친숙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다(예, 막 14:36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b. 이 칭호는 예수의 탄생(눅 1:35), 세례 받으실 때(막 1:11; 눅 3;22),
유혹받으실 때(눅 4:9; 마 4:3, 6), 변화 되셨을 때(막 9:7; 마 17:5; 눅 :35)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 자신과

관계되는 일들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된다. 특히

요한은 예수의 성육신과(요 1:1-2, 14, 18) 대제사장적 기도(요 17:1-5, 24)를
기록하면서 성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계신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서 이 호칭을 쓴다.
c. 바울의 서신서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이 호칭은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5) 주(KuvrioV)

a. 교회의 최초 신앙 고백은 KuvrioV jIjhsou'V 였다.
b.

신약의

KuvrioV는

구약시대

야웨를

호칭한

아도나이의

70인경

번역이다(6,000번 이상 여호와가 주로 번역).
c.

요한은

“ejgwv

eijmi”를

사용함으로써(현재형)

여호와의

신분을

확인했다(요 8:24-“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 8:28-“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줄을 알고. . . .”)
d. 예수는 주로서 천지의 대권을 부활로 받고(마 28:18; 행 2:36; 롬 14:9;
고전 15:25-27; 엡 1:10, 21-22; 빌 2:9-11; 골 2:10; 히 1:2; 10; 2:8; 벧전 3:22; 계
17:14) 교회의 주가 되셨다(골 1:18-20). 창조의 중보자(골 1:16-17)가 교회의 주가
되었다.
e. 주라는 호칭은 영원한 구원협약에 의해서 인류를 구원하고 창조물을
회복하셔서 새로운 피조계를 수립하실 그리스도의 주권이 표현된다.

6) 하나님(qeovV)

a.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고백된 것은 부활 후이다. 도마의 고백은 전체
제자들의 고백으로 보아야 한다(oJ kuvriovV mou kaiJ oJ qeovV mou, 요 20:28).

- 30 -

b. 요 1:1- 아들의 hypostasis는 아버지와 다르나 아버지와 같은 essentia를
가짐(Comm. 요 1/9, CO 46.3), 요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a genuine hypostasis in the essence of God(veram in essentia Dei hypostasin)”(Comm.

1/19,

CO

46.13).

1:18-“아버지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심”이란 말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 2위격 하나님이 “the express
image of God(expressa Dei imago)”로 나타나심을 말한다(Comm. 요 1/25, CO
139

46.19).

c. 요 12:38-41에서는 이사야 6의 여호와 환상을 예수에게 적용해서 예수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요한은

이사야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으며

그의

가르침을 미래의 그리스도의 왕국에 적용한다고 증거한다고 칼빈은 주석한다(Com.
요 2/48, CO 46.299).
d. 요일 5:20의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은 그리스도가 “진실하고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하나님

아버지께

감추어진

영생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져서 우리가 영생의 동참자(participes)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Comm. 요일 315, CO 55.376).
e. 행 20:28에서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지목함. 칼빈은 이 부분을 교리적으로 해석해서 그리스도의 양성의 위격적 연합을
강조한다. 그는 “바울이 이 피를 하나님에게 돌린 것은 우리를 위한 피를 흘리신
사람 예수는 또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라고 주석한다. 이것은 루터란적인 속성
교통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네스토리우스와 같이 양성을 양
위격으로 보거나 유티키스나 셀베투스와 같이 양성이 혼합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the unity of the person of Christ(in Christo unitatem personae)를 명확히 보여
준다 (Comm. 행 2/184, CO 48.469).
f. 롬 9:5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토록 찬양 받으실
분으로 묘사한다. 칼빈은 이를 “육신으로는 유대인으로 난 그리스도가 영원히
송축받는 하나님(Christus ex Iudaeis secundum carnem qui Deus est in saecula
benedictus)”이심을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광”을

노래한다고 주석한다(Comm. 롬 196, CO 49.174).
g. 딛 2:13에서는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칭한다.
아리안주의자들은 이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크신 하나님(성부)와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하나, 교회의 정통적 이해는 이를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칭하는
139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 3:16; 요일 4:9)에 대해서는 Macleod, 73-74 참조.

- 31 -

것으로 본다. 특히 후자의 해석이 이어지는 14절의 문맥과도 맞다(Comm. 딛
374-375, CO 52.424).
h. 롬 11:36의 창조주의 공식이 고전 8:6에서는 성자에게 적용되었다. 롬
11:36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미한다(Comm. 롬 261, CO 49.232). 고전 8:6은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경륜적인 삼위일체를 보여 준다고 칼빈은 해석한다(Comm.
고전 175, CO 49.432).
i. 니케아 신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Deum ex Deo, lumen ex lumine, Deum
verum de Deo vero라고 표현한다.

7) 제 2 아담

a. 이는 호칭되거나 고백된 이름이 아니고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붙인
이름이다(롬 5:14; 고전 15:45). 예수는 맏아들이 되어서(롬 8:29)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한 자들로(롬 6:5) 그와 형제들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히
2:11-18).
b. 예수는 신령한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고전 10:45). 그리스도는 영으로 출생하고(마 1:18; 눅 1:35) 살려 주는
영이 되어서 영으로써 새 인류를 조성한다(요 3:5-6; 딛 3:5-7; 벧전 1:2-3).

8) 종(pai'§)

a. 구약 시대의 고난의 종(db,[,) 사상은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해서 공의를
행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위해서도 공의를 베푸는 자(사 42:1-4),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할

뿐만

아니라

세상

죄과를

담당하시는(사

53:1-12)

자로서

고난

받음으로써 백성들을 회복하고 구원하시는 메시아에 관한 사상이다(사 52:13-15;
61:1-3). 예수는 고난의 종으로 오셔서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셨다(막 10:45; 요
11:51-52).
b. 주의 종의 칭호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를 지목한 칭호이다(행 3:13;
4:27, 30).
c. 주의 종의 칭호는 종의 형상 곧 피조물을 입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빌 2:7).

9) 임마누엘(la WnM[, vEmmanouhl)

- 32 -

이 호칭은 고유명사로서 세 번 사용되었다(사 7:14; 8:8; 마 1:23).
a.

임마누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표현하는

경우에

주로

사용되었다(창 17:5, 15-16; 27:36; 출 3:13-14; 6:2-3; 삼상 25:25; 삼하 12:25;
마 1:21).
b. 임마누엘의 이름은 이스라엘의 땅을 다스릴 왕을 의미한다(사 8:8, 19).
c.

호칭이

예수라는

이름과

함께

사용됨으로써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는(마 1:20) 하나님이 육신으로(evn sarki)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심을 계시한다(마 18:20; 28:20).
d.
하나님이라,

동일한

선지자가

영존하시는

오실

아버지라,

메시아를
평강의

“기묘자라,

왕이라”고

부른

모사라,
것은

전능하신
임마누엘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을 뜻함을 계시한다.

5.3.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주장과 수행
예수는 요단강에서 세례 받아 구주 곧 그리스도로 세워지고, 성령 세례
받아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세워졌다. 그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 실재가
되었고 그의 옴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1) 예수의 자기 증거
a. 자신을 메시아로 선포: 자기의 메시아 직임을 선포(눅 4:16-21; 사
61:1-2)하고 이를 보는 자와 듣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여서 메시아가 오심을
확실하게 하고(마 13:16-17),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그의 주라고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성육신을 밝히며(마 22:42-45), 그의 사역 마지막에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밝혔다(마 26:62-65).
b.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계시한다고 선포(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c. 구약의 ‘아도나이’(ynda) 칭호를 자신에게 적용: “주가 쓰시겠다 하라”(마
21:3), “나를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다 천국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마 7:21),
그리고 자신이 단순히 다윗의 후손인 예수가 아니라 다윗의 주라고 하심(막
12:35-37; 마 22:42-45).

- 33 -

d. 구약 야웨(hwhy)의 헬라형인 ejgwv eijmi를 사용하므로 자신의 구약의
여호와임을 간접 지시. 요 8: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 8: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그리고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성육신이 자신임을 지시하기 위하여 인자라는 호칭을 자신에게 전유적으로 사용(막
2:10, 28; 10:33, 45; 13:26, 29; 14:21, 62와 공관복음의 병행절들).
e.

자신을

성전보다

이라고

해서

자신이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심(마 12:6).
f.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라고 스스로 말함으로(verba ipssima)
죽음에 이름(마 14:61ff, …찬송 받은 자의 아들…).

2) 예수의 전권 주장
a. 메시아 주장: 율법의 완성자요 해석자로서 전권 주장 “…옛 사람에게
말한 바…를 너희가 들었거니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VHkousate o`ti . . .evgw de
u,mi o`ti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b.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사죄 선언(마 9:2-6)
c. 죄와 율법의 멍에에서 해방(마 11:28-30)
d.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함으로써 창조주이시고 안식일을 제정한 분이심을
나타내심(마 12:8)
e. 메시아로서 내 백성을 세움(마 10:2-7): 산상수훈을 통해서 새로운 백성의
법을 선포하시고 제자도를 가르치심.
f. 성전을 헐라고 함으로써 새로운 백성을 세우실 것을 보임(요 2:19):
성전은 세 백성의 교회를 가르침.
g. 인자 칭호 사용: 이 칭호로서(단 7:13)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죽음에 속할 수 없으나 고난 당하고 죽음에로(요 12:34)
들어가는

하나님이자

사람으로서

자신을

표현한다.

12: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h. 유일하신 아들(o monogenhV)이 하나님으로 하나님 편에 속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전유적으로 abba라고 불렀다(막 14:36, “kai evlegen abba o` pathr, panta dunata
soi”).

- 34 -

i.

예수는

유일신

신앙(신

6:4)을

강조하면서도

자신을

하나님

편에

세우셨다.

3) 메시아직 수행
a. 메시아 직임: 자신의 죽음으로 구원을 이룸(막 10:45, 대속물, lutron; 요
10:11-15).
b. 부활함으로서 자신의 죽음이 대속적인 죽음(속죄 제물)이었음을 밝힘(마
28:1-20).
c. 메시아로서 백성들을 먹이고(마 14:17-21; 15:34-38) 고치심(마 8:14-17)

- 35 -

제 6 장 그리스도의 비하(humiliatio Christi)

제 2 신 위격(hypostasis)으로 존재(subsistentia)하시는 로고스 하나님(deitas)이
인성을 취하사 그 신성(divinitas)과 인성(humanitas)의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을
통하여 참 하나님과 참 사람(Deus verus et Homo verus)의 인격(persona)을 이루심과
그 인격으로 사심과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과 장사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감추시고

죄인인

인간의

형체로

유례없는

고난과

치욕을

받으심이

그리스도의 비하이다.
그리스도의 비하는 그리스도가 중보자로서 만세 전의 구원협약(pactum
salutis)에 따라서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심이다. 이 죽음을 죽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죄는 없으시되 사람과 같이 세례 받고 시험 받았으며, 율법의
수여자(혹은 율법 수여의 중보자)로서 율법에 복종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구속법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고(사 53:4),
우리의 허물을 인해 몸이 찔리었고, 우리의 죄악을 위해 몸이 상하였으며, 우리의
평화를 위해 징계를 당하였고, 우리의 나음을 위해 채찍에 맞으셨다(사 53:5).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시사(사 53:6) “속건
제물(mva)이 되어서 그[여호와]의 뜻을 성취”하게 하셨다(사 53:10). 하나님은 그의
독생하신 아들이 “의로운 종”이 되어서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게 하시고(사
53:11)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셨다(사 53:12).
그리스도가 아담 이후로 인류에게 전가된 죄과를 전가 받으시고 죽음으로
그 죄를 속하시고(remissio peccatorum) 다시 사심으로 의를 이루사 그의 의를
인류에게 전가하신다(imputatio meriti Christi)(롬 4:25). 비하가 없이는 승귀가 없다.
죽음이

없이는

다시

사심이

없다.

해방하시므로(롬

8:2-4)

우리를

자신과

아들의
화목케

죽으심으로
하시사

우리를

죄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시고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3:25; 5:8-10;
요일 4:10).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비하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의 스스로
이루심이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의 비하를 독생하신 아들이 “자기를 비어(ejkevnwsen)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7), “자기를 낮추시고(ejtapeivnwsen)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빌

2:8)으로

말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비하는 하나님의 본체를 지니신 하나님이신 아들이 종의 형체로 인성을
취하신 케노시스(虛己=exinanitio)와 율법의 요구와 저주에 굴복하여 전 생애를

- 36 -

통하여서

자기를

낮추신

고난의

종의

삶을

산(행

4:27)

타페이노시스(卑己=humiliatio)를 포함한다.

[소요리 문답 27]
Q. 27. Wherein did Christ’s humiliation consist?
A. Christ’s humiliation consisted in his being born, and that in a low condition,
made under the law, undergoing the miseries of this life, the wrath of God, and the
cursed death of the cross; in being buried, and continuing under the power of death for
a time.
Q. 28. Wherein consisteth Christ’s exaltation?
A. Christ’s exaltation consisteth in his rising again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in ascending up into heaven, in sitting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nd in
coming to judge the world at the last day.

6.1. 성육신(incarnatio): 비하의 시작(initium humiliationis)
빌립보서 2:6-7의 말씀을 통하여서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참 하나님이 참
사람이 되신 위격적 연합이 비하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그는 하나님이시자
140

사람이시다. 하나님은 인성을 취함으로써 자신을 비우셨다.

그는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망이 그로 말미암은 것과 같이 부활도 그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전 15:21; 롬 5:21; 행 17:31).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 못하는 자로 죄를 삼으셨고(“a`marti,an evpoi,hsen”)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pe,myaj evn o`moiw,mati sarko.j a`marti,aj”) (고후 5:21; 롬 8:3). 그는
육신으로 마리아에게서 오셨으나 위로부터 오셨다(고전 15:47; 엡 4:9; 요 3:13).
그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 나셨다”(evk spe,rmatoj Daui.d kata. sa,rka)”(롬 1:3; 롬
9:5 전). 그러나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o` w'n
evpi. pa,ntwn qeo.j euvloghto.j eivj tou.j aivw/naj)”(롬 9:5 후). 그리스도 예수는 참
사람이었으나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evn auvtw/| katoikei/ pa/n
to.

plh,rwma

th/j

qeo,thtoj

swmatikw/j)”(골

2:9).

그러므로

예수는

“육신으로

나타난(evfanerw,qh evn sarki,)” 하나님이셨다(딤전 3:16). “우리의 크신 하나님(tou/
mega,lou
140

qeou/)”이

사람으로

오셨다(딛

2:13).

“우리

B. B. Warfield, “The Person of Christ,” 2.176-182.
- 37 -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dia. th/j evpifanei,aj tou/ swth/roj h`mw/n Cristou/ VIhsou/)”(딤후
1:10) 구원이 나타났으니 비하가 구원의 길이었다.

6.1.1. 부정적인 견해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이미 초대 교회 유대인들과 에비온주의자들,
영지주의자들,

이신론자들과

18세기

이성주의자들,

19세기

소위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과 하르낙, 그리고 신정통주의자 브룬너 등에 의해서 대표적으로 부인되어
왔다. 그들은 영원히 선재하신 로고스 하나님 즉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을 믿지
않았다.
1)

말씨온(Marcion)은 빌립보서

2:7-8을 해석하면서 그리스도가 인간의

형상으로 인간과 유사하게 만들어 졌다고 보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은 단지
환영(phantasm)과

같은

것이라고

함으로써

육체

가운데

오심을

부인하였다.

말씨온은 영지주의적인 이원성에 기반해서 창조 중보자와 구속 중보자를 구별하는
가운데서 구약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는 우월한 신의 사자로서 신으로부터 내려 온
빛이라고 보았다(Inst. 2.13.1, 2).
2) 한편 마니(Mani, Manichaeus)는 고전 15:47을 문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로부터 난 것으로서 하늘의 육체를 가졌다고 보았다(Inst. 2.13,1, 2).
이들 이론에 의하면 성육신은 비하가 아니다.
3) 한편 셀베투스는 마니와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셀베투스는
“아들”이라는 말은 창세기 2:7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음에 다름 없다고 보았다. “사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의 본성과 관련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났기
때문이다”라고 셀베투스는 주장한다. 이 그리스도가 구약 시대에는 그림자로
형상적으로만 표상되어 있었고(figuratively represented), 마침내 성육신에 의해서
“[사람]

그리스도의

육체가

하나님의

본질(essence)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으로

변하였다”고 주장한다. 셀베투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육체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essence)을

지니고

있으며(oJmoousivon) 육체가 하나님으로 변함에 의해서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 라는
사실을 주장한다. 셀베투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가 부인되고 성육신은
하나님의 씨앗이 하나님이 되심이다(Inst. 2.14.8).
4) 오시안델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좇아서 닮아 가도록 하기 위해서
오실 메시아가 육신을 옷 입도록 미리 작정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담이

- 38 -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그리스도는

관련해서

오시안델에

의하면

문제된다(Inst.

2.12.6).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의

인격에

오셨을

것이라고

중보보다

인간의

관한

말한다.

구원과

신화(deificatio)가

오시안더(Osiander)의

입장은

하나님의 본질은 인성을 취할 수 없다는 가정에 기초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를

성육신

전·후를

통하여서

불변하는

하나님의

본질의

영원한

현존으로 이해한다. 오시안더는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으로 창조된 인류는
원래적인 의(iustitia essentialis)를 지녔으며 하나님의 본질을 주입(infusa)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 간다고 말하면서, 비록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시안더에 의하면 중보자 그리스도의 대속의
필연성은 부인되는데, 그는 우리의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의롭다(nos una cum Deo iustos
esse)”는 사실에 기반한다고 본다(Inst. 3.11.5-12, 인용. 3.11.11, CO 2.541).
5) 쏘시니안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지정하는 곳은 극히 적고(예컨대
요 1:1; 20:28; 롬 9:5) 그 경우에도 신격이 아니라 그의 품위나 규율을 의미하는데
그친다고 본다. 그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람에게는 합당하지 않다고 보아서
성육신을 부인한다.
6) 루터란의 속성교통론에 의하면 신성과 인성이 서로 교통하기 때문에
성육신 자체는 비하가 아니다. 다만 인성이 교통된 신성을 사용하지 않음이
비하라고 본다. 비하의 주체는 신격(deitas)이 아니라 인성(humanitas)이다. 비하는
케노시스(虛己=exinanitio)에

해당하지

않으며

지상존재인

그리스도에

국한해서

타페이노시스(卑己=humiliatio)만을 의미한다.
7)

케노시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비하는

성육신

하실

하나님(Deus

incarnandus)이 속성의 일부나 전부를 버리심이기 때문에 성육신 자체를 부인하는데
이른다.
8) 리츨과 그의 제자들은 성경과 그리스도의 교회가 사용하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본질이 아니라 사역을 지칭한다고 본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내적 도덕성과 외적 사역의 성취—이것이 곧 계시이다—를 표현하는
이름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이 경우 성육신은 자리할 곳이 없다.

6.1.2. 비하의 양상

1) 창조주가 피조물을 입으심으로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주님의 종이
되었다(행 4:27, 30).

- 39 -

2) 성육신을 통하여서 무한자가 유한자의 방식을 취택하셨다. 무한자가
시간 속으로 들어 오셔서 사람의 존재 방식, 사고 방식, 행동 방식을 가졌다.
3) 하나님이 피조물을 입고 신적 품성을 제약하심이 바로 비하이다.
루터란의 속성교통론이 아니라 개혁주의적인 속성교통론에 의해서 양성간의 연합과
작용을 이해함이다.
4) 율법에 복종(守法)
a. 율법의 수여자인 창조주가 율법의 수납자가 되었으며, 율법의 중보자가
율법에 종속되었다. 그리스도는 신적 존재 방식을 계속 지녀서 어떤 외부적
필연성(necessitas)에도 매이지 않으나, 피조물의 존재 방식인 율법 아래 나셔서(갈
4:4),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지고(갈 5:3), 율법의 저주에 매인 바 되어서(u`po
nomon) 율법의 저주로부터 인류를 속량하셨다(갈 3:13). 마치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율법에 매임의 징표가 되듯이 세례를 통하여서 그리스도는 죄인의
자리에 섬으로써 전체 율법에 자신을 매었다(마 3:15; 갈 5:3).
b. 그리스도가 율법 아래에 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구속하기
위함이었다(갈 4:4, 5). 율법이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라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다(요 6:38; 히 5:8). 그의 순종으로 우리에게 의가 되셨다(롬
5:19).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순종은 자원적이었으며 대리적이었다.
c. 복음서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율법을 지키는데 충실했다. 그는 유대인들의
141

절기들과 안식일을 지켰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두 증인이 필요하다는 요한복음

8장 17-18절의 말씀을 통해서 보듯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율법에 모순되는 것이
142

아니라 율법에 기반하고 있다.

6.1.3. 비하의 주체

141

Jesus’ positive attitude towards the law is presented characteristically in the following
narratives of the Synoptic Gospels: the story of the leper healed by Jesus (Matt. 8:1-4; Lk.
5:12-14), violation of the laws of defilement (Lk 7:14, 8:54, 10:28-37), Jesus’ desire to observe
the Passover feast in Jerusalem (Mk 14:12-16), and the strict observance of the Sabbath during
flight from Jerusalem in the last days (Matt. 24:20). For reference, see Robert Banks, Jesus and
the Law in the Synoptic Traditi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 Calvin
frequently points out the soteriological significance of Christ’s obedience to the law. Cf. Comm.
Jn. 5:1 (1.116 [altered], CO 47.104): “He [Christ] must be subject to the Law in order to
redeem us all from its bondage.”
142 Christ frequently appeals to the authority of the law in the Gospel of John,
particularly in defense of his Sabbath work (7:21-24), in defense of his claim to be the Son of
God (10:34-36), and in defense of the authority of his teaching (5:31-47, 6:45, 8:12-20). For
Christ and the law in the Gospel of John, see Severino Pancaro, The Law in the Fourth Gospel:
The Torah and the Gospel, Moses and Jesus, Judaism and Christianity according to John
(Leiden: E. J. Brill, 1975).
- 40 -

a. 성경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의 신격(qeothj, deitas) 곧 위격이 성육신의
주체임을 가르친다(요 1:14; 빌 2:6; 히 2:14-15). 그에게는 신성의 충만함이 육체
가운데 거하신다는 표현은(골 2:9) 성육신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표현한다. 루터
교회에 의하면 비하의 주체는 인성으로서 신적 속성들을 쓰지 않고 감추인 것을
비하라고 본다. 개혁 신학의 비하의 주체는 신적 위격이다. 영원 성자이신 제 2 위
하나님 로고스(말씀)이 인성을 취하심이 성육신이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ejgevneto) 것이다. 이는 말씀이 변화되어 육신이 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의 본성에는 아무 변화를 받음이 없이 추가적으로 한 본성을
입으셨다. 그는 여전히 무한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남아 있었다.
b.

그렇다면

신성의

고난에

대한

비수난성(impassibilitas)과

비감지성(ineffabilitas)은 그리스도의 비하를 부인하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비하는
인성적인 비하가 아니라 육신이 되신 말씀인 그리스도의 (양성) 위격적인 비하이다.
그러므로 인성의 고난과 신성의 참으심은 동시에 한가지로 위격적인 감수가 된다.
그리스도의 양성적인 중보는 이와 같이 일어나며, 이런 관점에서만 속성교통이
인정된다. 즉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속성 교통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양성적 사역에
관련된다.

6.2. 고난의 생: 비하의 두 번째 단계
6.2.1. 수난

a. 주님의 전 생애가 고난의 생애였다.
b. 그리스도는 신체와 영혼을 포함하는 전인으로 수난 당하셨다. “그의
수난의 본질을 구성한 것은 맹목적 고초가 아니라 영혼의 고민과 중보적 죄의식이
따르는 고초였다”(박형룡, 4.162).
c.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당하시는

통상적

고난과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심으로 당하는 비상적 고난을 당하셨다(사 5:3-12; 행 8:32-33).

6.2.2. 수난의 필연성(구속 경륜에 따른 수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 41 -

24:26). 수난의 필연성은 성자가 거룩하신 성부의 뜻에 복종하여 의를 이루심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에 있어서 불의의 손도 secondary causality로 사용하신다.
주님은 수난을 예고하시고(마 16:21-막 8:31-눅 9:22; 마 17:22-23; 마 20:18-19; 눅
17:25; 24:7), 수난이 구약의 말씀의 성취라고 전하시며(마 26:31; 26:54, 56; 눅
24:44; 요 3:14), 이러한 고난의 필연성이 사도에 의해서 가르쳐 졌다(행 17:3).

6.2.3.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심

소요리

문답에서와

마찬가지로

홧지도

C.

이를

그리스도의

비하로

다루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고(고후 5:21),

“범죄자

하나로

헤아”렸다(사

53:12).

하나님의

진노는

공의의

표현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순교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이루심이다.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인류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였다. 이 버림의 극치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외침에 메아리 친다(마 27:46; 시 22).

6.2.4. 인간의 모든 죄악 아래 사심: homo doloris

1) 외로움을 당함(homo solitarius): 이로써 인류가 하나님과 절연함으로써
야기한 외로움을 회복함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신다.
a. 백성들과 지도자들로부터 박해 받음(막 5:1-20; 마 8:28-34; 눅 8:26-39).
b. 겟세마네의 기도(막 14:32-42; 마 26:36-46)
c. 가야바의 법정과 빌라도의 법정(딤전 6:13; 요 18:33-37)
d. 십자가상에서 (마 27:46-막 15:34-시 22:1)
e. 하나님 아버지도 예수의 죽음을 작정하사 겟세마네에서의 그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고 그를 죽음으로 넘기셨다(롬 4:25). 그는 세상 죄를 다 지고 홀로
당해야 했다(요일 2:2).

2) 수치를 당함: 수치는 하나님의 법을 어겨 자기의 자리에 서지 못함을
깨닫는 인간의 자기 가치 판단이다. 그리스도는 수치를 당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고 회복하여 수치를 제거하였다.
a. 나사렛에서 배척당함(눅 4:16-30)
b. 지도자들로부터 배척당함(요 11:54-57)
c.

백성들로부터

배척당함(마

27:20-26;

- 42 -

15:11-15;

23:18-25;

19:28-40)

6.2.5. 그리스도의 세례 받음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에 대한 다음 주석에서 칼빈은 중보자의 사역을
이루기 위한 자신의 자발적인 복종을 강조한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아버지께 전적으로 복종하기 위함이다. 좀더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자면, 예수님은
세례를 자신의 몸 안에서 성스럽게 해서 그것이 자신과 우리 사이에 공통되게 하기
143

위함이다.”

144

같은 맥락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할례,

그리스도의 복종과 관련된 구절들을

146

145

광야의 시험,

율법에 대한

주석한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알았다(요 1:27). 그러나 그는
예수를 구속주(속죄주)로는 알지 못했는데(요 1:31, 33),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세상 죄를 전가 받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머문 것을 보고(요 1:33) 비로서
예수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영”임을 깨닫게 되었다(요 1:29).
예수는 세례 받으시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눅 3:21; 마 3:16; 막
1:10). 그는 이를 이사야 61:1-2의 약속이 오늘날 응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나사렛의 회당에서 친히 증거했다(눅 1:17-18, 21).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o` uioj mou o` avgaphtoj)”(마 3:17; 막 1:11; 눅
3:22):

하나님은

나단을

통하여서

다윗의

“집”과

그의

“위”에

대한

약속을

주심으로써 오실 메시아의 왕조를 여셨다. 이제 다윗 왕계의 아들은 모두 왕이
된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아들”로 불렀다(삼하 7:14; 대상 28:6). 아들이 왕이 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아들”은 왕직에 대한 선포, 곧 왕 임직을 뜻한다.

143

Comm. Matt. 3:13 (1.130, CO 45.125): “. . . baptismi ratio fuit Christo, ut plenam
obedientiam praestaret patri: specialis autem, ut baptismum consecraret in suo ipsius corpore, ut
nobis communis cum eo esset.”
144 Comm. Lk. 2:21 (1.81, CO 45.80). Calvin points out the twofold meaning of Christ’s
circumcision, which is related to Christ’s obedience to the law—“God wished His Son to be
circumcised that He might come under the Law, for circumcision was a solemn symbol by
which Jews were initiated into the observance of the Law”—and Christ’s abrogation or fulfilment
of the law— “Though its [the law’s] abrogation depends on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Christ,
this was something of a preliminary, that God’s Son underwent circumcision.”
145 Comm. Matt. 4:1-2 (1.133-136, CO 45.128-131). Calvin, commenting on the
temptation, emphasizes Christ’s intervention for us: “Christ was tempted as the Representative
(persona) of all the faithful” (135, CO 45.130).
146 Cf. Comm. Lk. 2:22-24 (1.89-90, CO 45.87-89); Lk. 2:49 (1.109, CO 45.106-107);
Lk. 4:16-22 (1.146-147, CO 45.140-143); Matt. 8:1-4 (1.242-246, CO 45.230-233). For Christ’s
observance of the law, see Max Dominicé, L’humanité de Jésus d’après Calvin (Paris: Éditions
“Je Sers,” 1933), 159-174.
- 43 -

“내 기뻐하는 자(w` euvdokhsa)”(마 3:17; 막 1:11; 눅 3:22):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이루는 것이다.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는 것이다. 그로므로 이
선포는 구속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선언이다.
성령이 예수께 임하셔서 항속적으로 머물렀고(emeinen, 요 1:32),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다(Ou gar metrou didwsin to peuma, 요 3:34). 이리하여
예수는 성령의 담지자가 되셨으며, 부활 후 성령 파송자, 곧 성령 세례자가
되셨다(요 1:33). 성령 세례(눅 3:16; 막 1:8)는 성령을 부어주심과 같다(행 2:17-18;
10:45). 또 성령 세례는 성령 받음(행 10:47; 19:2), 성령을 주심(행 11:17; 15:8),
성령이 임함(1:8)과 그 뜻이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갈 3:14) 기름 부음 받은 공동체가
된다(요일 2:27; 3:24; 4:13). 구원사역을 이루신 성자는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시고”(롬 1:4) 승천하셔서
아버지가 약속한 것(행 1:4; 눅 24:49; 행 2:33)인 보혜사 성령을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도록 하신다(요 14:16; 14:26; 16:7).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는 보혜사 성령(요
15:26)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것(그의 인격과 사역)(요 16:14-15)을 받게
되는데, 이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교회를
수립한다.

6.2.6. 시험(peirasmoj)을 받음

그리스도께서 만난 시험들은(눅 22:28) 그의 수난의 중요 부분이었다.
* 눅 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a. 광야에서 시험 받음(마 4:1-11; 막 1:12-13; 눅 4:1-13): 예수 그리스도는
제 2 아담으로서 시험받고 이김으로써 구세주로 확고하게 세워짐.
b. 감람 동산에서의 시험(눅 22:39-46; 마 26:36-46; 막 14:32-42):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면(롬 5:12, 17), 예수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함으로써 의를 이루었다(롬 5:17-19).

6.2.7. 율법의 성취

a. 예수는 모든 율법의 요구에 자기를 종속시켰다(율법 아래 나게 하심, 갈
4:4).

- 44 -

b.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를

이룸으로써(롬

2:13)—율법을

행하는

자(“poihthj”)라야 의인이다—인류의 죄를 속량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셨다(갈
4:5). 이를 능동적 순종(oboedientia activa)라고 한다.
c. 법의 위배에 대한 값을 치르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죽음을 죽으셨다.
하나님의 법을 범함에 대한 형벌이 사망인데(롬 6:23; 창 2:17), 일체 죄책과 오염이
없는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그 형벌을 받았다는 것은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공의에 복종하고 그 공의를 이루심의 극치를 보여 주심이다(롬 5:18-21). 이를
피동적 순종(oboedientia passiva)이라고 한다. *이 피동적 순종도 그리스도의 자원적
순종이라는 면에서 능동적이 된다.

- 45 -

제 7 장 새언약(foedus novum)의 체결

7.1 언약의 의의와 발전
구약에서 언약을 표현하는 tyrIB] 라는 단어는 280여 차례 나와 있고 때때로
율법, 성향(disposition) 그리고 협정(arrangement)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둘 혹은 그
이상 다수간의 상호 계약이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된다(창 21:27; 수 24:25; 삼상
18:3; 삼상 20:16; 왕상 20:34 등).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언약에도 이
단어는 사용된다(창 15:18; 17:13의 아브라함의 언약과 이삭, 야곱 그리고 시내산
147

언약).


148

적용되는데,

단어는

33장과

6:7에서

유추되는

창조의

질서에도

특히 율법서, 예언서, 시가서를 통하여서 반복해서 사용되는 문구인

언약을 자른다(tyrIB] tr''K;, o`rkia temnein, foedus ferire, cf. 창 15:8 ff.; 렘 34:19
ff.)는 표현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효시(嚆矢)된 바 언약이 피로 세운 생명의
149

약정(레 17:11; 히 9:22)임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창 21:22ff., 26:26ff., 31:44ff.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tyrIB] tr''K;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합의된 규율을 포함한 맹세 혹은 약속; 둘째, 언약의 위반자에
대해서 가해지는 형벌; 셋째, 이 형벌의 저주를 표상하는 제의적 의식. 언약은
상호합의에 기초하나 약자를 향한 은혜로운 수여의 경우에는 베푸는 자의 일방적인
규율(qxo)을 의미한다(출 34:10; 사 59:21; 렘 33:20 [cf. 31:36]; 34:13). 하나님은
스스로 언약에 자신을 묶으신다(tyrIB]의 앗수르 어간은 묶는다는 뜻이 있다).
언약의 시행에 신실하신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 약속은 변개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항상 이루어진다. 은혜 언약에 있어서 쌍방적(bilateral) 약속은
일방적(unilateral)

은혜에

기초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m[)

혹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yb) 맺어진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l)
맺으신 것이다. 은혜 언약의 인간 당사자는 그 약속의 수혜자로 선다. 그는 조건을
성취함으로써 은혜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은혜 가운데 조건의 성취를
맛본다(창 17:1-2; 출 19:5-6, 8; 24:3, 7; 레 26:14ff.; 신 5:29; 27:10ff.;
28:1ff.; 30:1ff. 등). 은혜 언약이 닻을 내리는 곳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레

147

Cf. O. Palmer Robertson, The Christ of the Covenants, p. 13, n. 3, 4.
Robertson, Ibid., 25-34.
149 Robertson은 언약을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이라고 정의한다. Ibid.,
11-24. 사실 tyrIB를 자체적으로 자르다(hrb)라는 동사에서 어원을 찾는 언어학자도 있다.
Cf. Bavinck, RD. 3.203.
148

- 46 -

26:40-44; 신 4:31; 30:1ff.; 32:36ff.; 삿 2:1; 왕하 13:23; 시 81:8, 11; 89:1-5;
105:8-10; 106:45; 111:5; 사 1:3; 5:13; 54:10; 렘 18:5-10; 겔 33:10-16; 호
6:1-3; 11:7-9; 14:2-9; 욜 2:12-14).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
150

6:17), 자기 자신과 목숨을 두고 하셨다(창 22:16; 렘 51:14; 암 6:8).

신약 70인경에서는 구약의 tyrIB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sunqhkh 대신에
diaqhvkh를 33번 사용한다. diaqhvkh는 동사 diativqhmi(to arrange)에서 나온 단어로서
어원상

성향(disposition)

혹은

협정(arrangement)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약에서는 70인경의 번역 과정에서 예외 없이 구약시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의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과 신약 시대 신자들과의 언약을
표현하는데 사용하였다. 이 단어의 고전적 의미는 foedus 혹은 pactum 보다
testamentum에

가까웠는데

번역자들은

70인경

은혜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고 유언자가 죽어야 유언이 효력이 발하듯이
그리스도가 죽어야 그 언약이 성취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와 그 안에서의 충만한 은사를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미를

가진

sunqhkh

대신에

사용하였다고

diaqhvkh를

언약이라는 원래의

보여진다.

diaqhvkh가

testamentum으로 확정적으로 사용되는 용례는 오직 히 9:16-17에서 나타난다(갈
3:17-18에서도 이런 뉘앙스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유언이라는 뜻이 약함은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언약의 성취로 확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명심할 것은
신약에서 이 단어가 성부와 성자 사이의 구원 협약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된 곳은
없다는 사실이다.
행위의 공로를 구원의 요소로 보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은혜 언약을
아담과

맺은

언약과

언약에서조차

순종이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본질적으로
영생의
공유한다.

다른

조건이
다만

것으로

보지

된다고

한다.

않는다.
이와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그들은
같은

타락한

은혜
견해를

인류에게

초자연적인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믿음(fides obsequiosa)이 조건이
된다고 한다. 이상의 견해들은 모두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편에 어떤 것을
요구한다는

조건성(conditionality)을

전제한다.

루터가

믿음을

언약의

조건으로

말했을 때에도 이러한 조건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반면에 어거스틴과 칼빈과
칼빈의

맥을

잇는

조건(conditio)으로

개혁주의자들은
보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언약의

대한

신앙을

상호성(mutuality)은

언약의
인정하나

조건성(conditionality)은 인정하지 않는다. 즉 믿음은 언약의 조건이 되나, 믿음은
150

Bavinck, RD. 3.203-204.
- 47 -

오직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므로 언약을 쌍무계약으로
151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신구약의 경륜(oeconomia, dispensation, administratio)에서의 차이는 인정하나
실체(substantia)에
개혁주의자들은

152

있어서의

일치와

연속성(unitas

et

continuitas)를

주장하는

신구약을 분리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신구약을 전혀 동일하게 보는

유대주의자들과는 다른 입장을 개진한다. 개혁주의의 입장은 카톨릭신학자들과도
다른 바, 구약의 언약은 지상의 복을 추구하나 신약의 언약은 천상의 복을
추구한다거나(롬바르드) 구약의 언약은 성도들이 조상림보에 이르는 복을 약속할
뿐이라는(아퀴나스) 주장은 수용되지 않는다. 한편 루터란 신학자들은 구약 모세의
언약을 법률적 언약으로 보고 그것이 신약 시대에는 폐지되었다고 보는데, 그들은
모세 언약도 은혜 언약이라는 측면과 그 언약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완성된
것이라는 측면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개혁주의 언약관은 쯔빙글리에 의해서 기초가 놓여지고 칼빈과 불링거에
의해서

수립되고

독일의

얼시누스(Ursinus)와

올레비아누스(Olevianus)—이들의

사상은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에 반영—영국의 펄킨스(Perkins)와 존 볼(John Ball)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토마스 보스톤(Thomas Boston)—이들의 사상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제 7장)에 반영—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언약신학을 신학의 중심 주제로
부각시킨 신학자는 콕체우스라고 할 것이다. 콕체우스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음에
있어서 구속사를 강조했는데 그의 이론은 이후 세대주의적 편견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발견된다. 그는 구약시대의 언약은 죄사함(avfesij)이 아니라 죄를 옆으로
밀쳐두는 것(paresij)이라고 보았다. 이런 측면에서 구약의 역사는 언약의 은혜로
행위언약을 폐지해 가는 과정을 계시한다. 구약의 칭의는 불안전하므로 성도들에게
평강을

주지못한다.

구약의

은혜는

임시적이고

단지

모형과

표상으로서만

이상 C. Hodge. 2.354-357.
Bavinck, RD. 3.223. “The Old and the New Testaments are in essence one
covenant(Luke 1:68-79; Acts 2:39; 3:25). They have one gospel(Rom. 1:2; Gal. 3:8; Hed. 4:2;
6:2; 2 Tim. 3:15); one mediator, namely Christ, who existed also in the days of the Old
Testament(John 1:1, 14; 8:58; Rom. 8:3; 2 Cor. 8:9; Gal. 4:4; Phil. 2:6 etc.), exercised his office
of mediator(John 8:56; 1 Cor. 10:4; 1 Pet. 1:11; 3:19; Heb. 13:8), and is the only mediator for
all humans and in all times(John 14:6; Acts 4:12; 1 Tim. 2:5). It included one faith as the way
of salvation(Matt. 13:17; Acts 10:43; 15:11; Rom. 4:11; Gal. 3:6-7; Heb. 11); the same promises
and benefits of God’s communion(2 Cor. 6:16; Rev. 21:3), forgiveness, justification(Acts 10:43;
Rom. 4:22), and eternal life(Matt. 22:32; Gal. 3:18; Heb. 9:15; 11:10, etc.). The road was the
same on which believers in the Old and the New Testaments walked, but the light in which
they walked was different.” “The Old and the New Tesatments as different dispensations of the
same covenant of grace are related as promise and fulfillment(Acts 13:32; Rom. 1:2), as shadow
and substance(Col. 2:17), as the letter that kills and the Spirit that makes alive(2 Cor. 3:6ff.), as
servitude and freedom(Rom. 8:15; Gal. 4:1ff., 22ff.; Col. 2:20; Heb. 12:18ff.), as particular and
universal(John 4:21; Acts 10:35; 14:16; Gal. 4:4-5; 6:15; Eph. 2:14; 3:6).
151
152

- 48 -

임재하므로 신구약의 약속은 실체에 있어서도 다르다. 결국 콕체우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새언약은 첫언약의 성취로서 제시되지 못한다. 언약의 역사적
현재성(現在性)을 부각시킨 콕체우스의 공은 마땅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의 언약관은 구속사에 있어서 약속과 성취의 유비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는
각각의 언약을 배열했을 뿐—심지어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협약을 구속계약(pactum
salutis)이라고 부를 정도로 언약관을 극단화 했지만—언약의 실체이자 완성이신
153

그리스도와 그의 다 이루신 사역을 온전히 보지 못했다.

[칼빈의 언약관]

초대

교회의 교부들과

중세 신학자들은 언약을 교리로

발전시키지는

않았으나 언약의 제 요소인 시험적 명령, 선택의 자유, 죄와 죽음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관심을

공유하고

있었다.

특히

중세

말기의

via

moderna에

속한

유명론자들은 Duns Scotus의 주의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언약(pactum)이라는 개념을
하나님의 의지(potentia Dei, voluntas Dei)의 주권성을 설명하는 도구로서 신학적으로
다루었다. 다만 그들은 facientibus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이라는
synergism의 원리에 치중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공로(meritum Christi)와 언약이
요구하는 계명의 규범성을 합당하게 연결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decretum)에

계시된

은혜를

강조했으나
154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이를

언약의

은혜

혹은

은혜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구원의 방법을

다룬 최초의 신학자는 쯔빙글리와 그의 영향을 받은 불링거였으며, 나아가서 언약
신학의 체계를 최초로 세운 신학자는 칼빈의 영향을 받은 독일 개혁주의자
155

Olevianus였다.

종교개혁
theologians)은
기초로서

이후의

그들의

칼빈의

법정적(forensic)인,

개혁주의

언약(foedus,

율법사상을
그러나,

신학자들(the
pactum,

다루었다.

현저히

post-Reformation

testamentum)교리를
특히

그들은

규범적인(normative)

세우는

칼빈의

특징을

Reformed
신학적
율법관의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이라는 언약 신학의 중심주제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칼빈과 언약 신학자들의 연속성(continuity)을 다룸에 있어서 학자들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행위

언약과

153

은혜

언약을

영원한

하나님의

Bavinck, RD. 3.210-211.
Cf. Moon, “Lex Dei Regula Vivendi et Vivificandi.”
155 Cf. Lyle D. Bierma, German Calvinism in the Confessional Age: The Covenant
Theology of Caspar Olevianus (Grand Rapids: Baker, 1996).
154

- 49 -

작정(decretum)교리와 함께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atonement)와 율법의 계속적인 사역(officium)을 모순 없이 다룰 것인가, 어떻게
율법에 따른 선행(bona opera legis)의 가치를 개혁주의적 칭의론과 성화론의
156

관점에서 신학적으로 조명해 볼 것인가 라는 질문들에 집중되어 왔다.

칼빈과 불링거(Bullinger)의 언약 이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논의하는
가운데 제기된 종교개혁 시대에 이미 “두 가지 개혁주의 전통(two Reformed
traditions)”이 존재했었는가에 대한 최근의 논쟁은 어떻게 율법이 은혜 언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작용하는가와 어떻게 sola gratia의 원리가 행위 언약이라는
개념과 상치되지 않고 전체 구원 과정에 적용되는가에 대한 문제들을 핵심적으로
157

다루어 왔다.
칼빈과

두 가지 전통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인하는 학자들의 대부분은

불링거의

연속성과

더불어서

그들과

후대

언약

신학자들(federal

theologians)과의 연속성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칼빈과 불링거는 언약의
편무계약(片務契約)적 특성(the unilateral feature of the covenant)을 부각시킴으로써
구약의 법률적 언약(foedus legale)이 사실은 은혜 언약(foedus gratiae)을 통한
158

구약적인 법치(法治, legal administration)를 말함에 다름 아님을 강조한다고 본다.
한편

가지

전통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칼빈은

언약의

상호성(mutuality)은

알았으나 조건성(conditionality)에 대한 인식을 결여했으며 따라서 불링거와는 달리
은혜

언약

외에

행위

언약이라는

개념을

독립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고

159

주장한다.

언약 신학의 발전에 대해서는 구원 협약(pactum salutis) 부분 참조.
The issue of “the two traditions” is suggested by J. Wayne Baker in his book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The Other Reformed Tradition (Athens, Ohio: Ohio
University Press, 1980), and “Heinrich Bullinger, the Covenant, and the Reformed Tradition in
Retrospect,” SCJ 29/2 (1998), 359-376. Concerning the position opposed to Baker’s, see Lyle D.
Bierma, “Federal Theology in the Sixteenth Century: Two Traditions?” WTJ 45 (1983), 304-321.
158 Cf. Lyle D. Bierma, German Calvinism in the Confessional Age: The Covenant
Theology of Caspar Olevianus (Grand Rapids: Baker, 1996), 150-153; Muller, “The Covenant of
Works and the Stability of Divine Law in Seventeenth-Century Reformed Orthodoxy,” 97.
159 Cf. Baker, Heinrich Bullinger and the Covenant, 34-39, 193-215; Robert Letham,
“Faith and Assurance in Early Calvinism: A Model of Continuity and Diversity,” in Later
Calvinism, 355-384. Letham says, “A conditional covenant of grace may be the major single
factor in precipitating a separation between faith and assurance. A line exists from Bullinger via
Musculus and Ursinus to Rollock and Perkins” (383). As Richard A. Muller notes, Baker,
treating this agenda, does not take proper consideration of Calvin’s exegetical works. The
Unaccommodated Calvi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155. 유사한 주제가 폴
헬름(Paul Helm)의 책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Calvin and the Calvinists)에서 깊이 있게
다루어 졌다. 헬름은 이 책에서 “윌리엄 펄킨스(William Perkins)와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와 같은 청교도주의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은 그들의 신학을 칼빈이 아니라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에 정초시켰다”고 주장하는 R. T. 켄달(Kendall)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헬름에 의하면, 켄달의 오류는 청교도 신학자들은 언약을 다룸에 있어서 “복음
전(前)의 율법(the law before the gospel)”을 강조한 반면에 칼빈은 “율법 전(前)의 복음(the
156
157

- 50 -

개혁주의적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에 속한 언약 신학자들이 타락
전의

율법,

불연속성과

신자들에게
같은

있어서

매우

율법의

중요한

규범적인

주제들에

대한

기능,

신·구약의

개념을

연속성과

정립하고

이들을

정치(精緻)하게 다룸에 있어서 복음을 율법에 전치(前置)하는 것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이러한 사상의 기원을 “율법이 서 있는 기반이 믿음”이라고 주장하면서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복음의 선재성(precedence)을 강조한 쯔빙글리(Zwingli)의
160

입장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sola gratia 라는 원리를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에

공히 적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작정(decretum)에 나타난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하는
칼빈의

신학에서

161

찾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관심사는

복음과

율법에

관한

루터란들의 16세기의 논쟁들—즉 회개(poenitentia)에 있어서 율법의 역할(1537-1540),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범위(1548-1552), 율법의 제 삼 용법이라고 불리는 규범적인
162

용법(1556-1557)에 관한 논쟁들—에 나타난 관심사 와는 다른 것이었다.

언약

신학자들이 복음과 관련하여 율법의 은혜적인 측면을 다룰 때 전체 하나님의
경륜(the

whole

divine

구속사(Heilsgeschichte)와

oeconomia)을

주로

개인구원(personal

문제

삼았다면,

salvation)에

루터란
있어서

신학자들은
복음의

전(前)과정으로서 복음과는 구별되게 작용하는 율법의 예비적, 정죄적 기능에
163

중점을 두었다.

gospel before the law)”을 강조했다고 보는 잘못된 이분법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Paul
Helm, Calvin and the Calvinists (Edinburgh: Banner of Truth, 1982), 5-6, 9, 61-70, and “Calvin
and the Covenant: Unity and Continuity,” Evangelical Quarterly 55/2 (1983), 65-81.
160 W. P. Stephens, Zwingli: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Oxford: Clarendon Press,
1992), 71. For details, see id., The Theology of Huldrych Zwingli (Oxford: Clarendon Press,
1986), 154-69. Concerning the gospel-law order in Zwingli’s De vera et falsa religione
commentarius and its influence on Calvin’s theology, Muller, The Unaccommodated Calvin,
124-127.
161 By referring to their concept of the absolute and ordained will of God, the late
medieval nominalists, who followed the Franciscan theological tradition, tried to explain the
compatibility between the covenantal (or conditional) acceptance of God and the principle of sola
gratia. Cf. Heiko A. Oberman, “Wir Sein Pettler. Hoc Est Verum. Covenant and Grace in the
Theology of the Middle Ages and Reformation,” in The Reformation: Roots and Ramifications,
tr. Andrew Colin Gow (Grand Rapids: Eerdmans, 1994), 91-115; Alister E. McGrath, The
Intellectual Origins of the European Reformation (Grand Rapids: Baker, 1987), 75-85.
162 For the Lutherans’ controversies over the law and the formation of their concept of
the third use of the law, see Wilfred Joest, Gesetz und Freiheit: Das Problem des ‘tertius usus
legis’ bei Luther und in der neutestamentlichen Paranese, fourth ed.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68), 45-55; Gerhard Ebeling, “On the Doctrine of the Triplex Usus Legis in the
Theology of the Reformation,” in Word and Faith, tr. James W. Leitch (London: SCM Press,
1963), 62-78; Timothy J. Wengert, Law and Gospel: Philip Melanchthon’s Debate with John
Agricola of Eisleben over Poenitentia (Grand Rapids: Baker, 1997), 177-210.
163 For the formation and influence of Luther’s law-gospel doctrine, see Thomas A.
McDonough, The Law and the Gospel in Luther: A Study of Martin Luther’s Confessional
Writing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3), 26-38.
- 51 -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속

경륜은

역사

속에

계시된

중보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다름 아니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중보자로서 인류의 타락
전에도 현재(praesentia)했었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영원한 로고스(λόγος)는 이미
태초로부터, 아담의 타락 전부터, 즉 인류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분리되기
전부터 중보자였다.”

164

“만약 사람이 어떤 흠도 없이 남아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위치는 너무나 낮아서 중보자 없이 하나님께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 (Inst. 2.12.1,
CO

165

2.340).

칼빈은

그의

신학적

작품들과

성경

그리스도의 중보가 전체 역사에 미침을 주장한다:

166

주해

작품들을

통하여서

“중보자가 없다면 하나님은

인류를 향해서 자비를 보일 수가 없다. 율법 아래에 산 믿음의 조상들에게도
그리스도는 그들이 그들의 믿음을 두어야 할 목표(obiectum)였다” (Inst. 2.6.2, CO
2.250).
첫 언약은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것이 중보자 그리스도의
은혜와 무관한 절대적인 언약의 조건성을 표상하지는 않는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167

하와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삶의 규범을 주셨는데,
의의

“경건과

완전한

가르침”을

세상에

전체 도덕법의 기록인 십계명은

공포한

168

것이다.

칼빈은

도덕법을

의식법이나 정치법과 구분한다. 그러나 그는 첫째 돌판에 특징적으로 규정된
“영적인 예배”에 대한 명령은 의식법으로서 경건한 삶의 규범을 보충하고, 둘째
돌판의 계명들과 관련된 정치법은 우리가 “선하고 흠결없는 삶의 규범”에 따라서
169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삶의 규범인 율법의 진리는 영원하나, 타락 이후로 사람들은 그 진리에
순종하며 살아 갈 능력을 잃어 버렸다. 본래(originaliter) 율법은 선하고 완전한
164 “Second Reply to Stancaro,” 147 (CO 9.350): “[Nam] certe λόγος aeternus iam ab
initio ante lapsum Adae, et alienationem ac dissidium humani generis a Deo, fuit mediator.”
165 “Quamvis ab omni labe integer stetisset homo, humilior tamen erat eius conditio
quam ut sine mediatore ad Deum penetraret.” 참고. Tylenda, “First Response to Sancaro,” 12
(CO 9.338): “Unde colligimus non modo post Adae lapsum fungi coepisse mediatoris officio, sed
quatenus aeternus Dei sermo est, eius gratia coniunctos fuisse Deo tam angelos quam homines, ut
integri perstarent.”
166 참고. Comm. Gen. 18:13 (1.475, CO 23.254); Ex. 3:2 (1.61, CO 24.35-36); Isa.
19:20 (2.75, CO 36.344); Isa. 63:17 (4.359, CO 37.405); Matt. 1:23 (1.69, CO 45.69); Jn. 5:46
(1.143, CO 47.129); Jn. 16:23-24 (2.125-128, CO 47.367-369); Jn. 16:26 (2.129-130, CO 47,371);
Heb. 8:5 (107, CO 55.99); Serm. Matt. 26:36-39 (65, CO 46.846); Matt. 26:67-27:10 (114, CO
46.886); Gal. 3:13-14 (407-408, 412, CO 50.515, 518); Gal. 3:15-18 (423-437, CO 525-534).
167

Comm. Gen. 2:16 (125, CO 23.44): “. . . the only rule of living well and rationally
(unica bene et cum ratione vivendi regula), that men should exercise themselves in obeying
God.”
168 Comm. Ex. 19:1-2 (1.313, CO 24.192).
169 “The Preface,” CTS 2/1.xvi-xvii. Calvin tends to equate the law of God with the
moral law, e.g., Inst. 4.20.16 (CO2.1106).
- 52 -

것이었으나 범죄로 인하여 “우연히(accidentale)[즉 하나님의 본래적-적극적 작정
없이] 죽음의 사자(ministram mortis)가 되었다.”

170

죄가 세상에 들어 옴으로써 비록

lex vivendi로서 율법의 본질(natura)은 변한 것이 없으나 율법의 사역(officium)은
변형되어서 이제 규범적인 역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신학적인
역할까지 감당하게 되었다. 칼빈이 그의 에베소서 설교에서 말하듯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믿음(첫째 돌판)과 사랑(둘째 돌판)으로 살아 가는 기독교인의 삶의
요약이자 완성으로서 십계명은 삶의 길이 될 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171

형상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생명의 길이 된다.
공관복음서

설교에서

칼빈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은혜를

같은 맥락의

확신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규범으로서 십계명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고
말하면서

율법의

진리와

실체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통해서

계시되며

172

구현된다고 주장한다.

신약과 구약의 일치를 다루면서 칼빈은 “세상의 시작부터(ab initio mundi)”
하나님은 그가 선택하여 자녀 삼으신 백성들과 “동일한 율법과 우리를 매고 있는
동일한 교리의 띠로 언약을 맺으셨다(eadem lege atque doctrinae eiusdem quae inter
nos viget vinculo fuisse ei foederatos)”는 사실로부터 시작하면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동일한 중보자의 은혜(eiusdem mediatoris gratia)”을 강조한다(Inst. 2.10.1, CO
2.313). 특히 “실체와 실재(substantia et re ipsa)”에 있어서의 일치를 다루면서 칼빈은
신약과 구약의 백성 모두 영생의 소망 가운데서 살았으며,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sola

Dei

vocantis

misericordia)”

“언약(foedus)”을 믿었으며,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알았다는 사실을 적시한다(Inst.
2.10.2,

CO

2.314).

아브라함이

이미

그리스도의

때를

바라보고

기뻐했다는

사실과(요 8:56)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는 사실을(히 13:8)
지적하면서 칼빈은 “구약이 하나님의 자비 위에 세워졌으며, 그리스도의 중재로
확증되었다(gratuita

Dei

misercordia

constitisse

et

Christi

intercessione

fuisse

confirmatum)”고 단언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묻는다. 누가 감히 유대인들을
스스로 기초가 되셔서 “복음의 언약(evangelii foedus)”을 세우신 그리스도로부터
분리하겠는가?( Inst. 2.10.4, CO 2.315).
칼빈은 아담에게 주어진 “구원의 첫 약속(prima salutis promissio)”은 연약한
불꽃같이 희미했지만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과 맺은 언약들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170
171
172

Comm. Gen. 2:16 (126, CO 23.45); Gen. 3:8 (161, CO 23.65).
Serm. Eph. 1:15 (84-87, CO 51.312-315).
Serm. Lk. 1:75 (CO 46.189-190). Cf. Serm. Isa. 32:6 (SC 3.120-122).
- 53 -

통하여서 “자비의 언약(misercordiae foedere)”은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의 충만한
계시의 때가 다가옴에 따라서 점점 더 명료하게 드러났다는 점을 지적한다(Inst.
2.10.7-22, 인용 2.10.20, CO 2.326).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칼빈은 신약과 구약의
일치를 언약의 일치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데 구약 백성들도 그리스도를 “그들의
언약의 보증(foederis sui pignus)”으로 믿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에 대한 모든
소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증한다(Inst. 2.10.23, CO 2.328).
칼빈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이 “실체(substantia)”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륜(administratio)”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Inst. 2.11.1, CO 2.329). 적용의
대상과

범위와

경륜과

관련해서

“율법적인

언약(foedus

legale)”과

“복음적인

언약(foedus evangelicum)”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모세에 의해서 수립된 영원하고
소멸되지

않는

언약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며

확증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Foedus ergo quod aeternum et nunquam interiturum semel sancivit, in medio
statuamus. Illius complementum, unde tandem habet ut statum ratumque sit, Christus
est”) (Inst. 2.11.4, CO 2.332).
칼빈의 복음과 율법의 관계와 신약과 구약의 관계와 더불어서 신약의
언약과 구약의 언약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설명한다. 칼빈이 행위 언약이라는
개념을 특별히 주장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는 아담을 통해서 삶의 규범으로서
하나님의 법이 수여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며 타락은 이 법에 대한 반역이며 이로
인한 결과로 하나님과의 단절이 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칼빈은 언약의 은혜와
관련해서 foedus misercordiae(Inst. 2.10.20; 2.11.11)와 foedus gratiae(Inst. 2.11.11, CO
2.337)라는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 용어들이 구체적으로 신약의 언약에
한정되어서 사용되지는 않는다.
칼빈에게 있어서 언약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은혜가 하나님의 약속 있는
경륜으로서 나타난 것이며 언약의 요구는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역사하는
율법의 규범성에서 유래하는 약속의 조건에 다르지 않다. 실체적으로 언약은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광스런
약속의 자리로 들어 가는 것이며 그 표는 중보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대속의 원리에 따른 계명 준수의 의를 전가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 언약과 첫
언약에 대한 성취로서의 새 언약이 있을 뿐이다. 첫 언약은 행위를 요구하는 행위
언약이며 새 언약은 믿음으로 긍휼을 약속하는 대속의 피 언약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은 첫 언약의 실체의 드러남이며 완성이다. 첫 언약의 실패를 전제로 새
언약의 필연성이 내신적 필연성에 의해서 수립되나, 구속을 위한 삼위 하나님의
경륜은 영원해서 타락에 앞선다. 언약은 계명에의 순종을 조건으로 하나 율법의

- 54 -

실체이자 완성인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다. 첫 언약이 새 언약을
예표함은 첫 언약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원시 규범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바라보게끔
하기 때문이며(실제로 아담의 삼중직은 그리스도의 중보직을 예표한다), 아브라함
언약으로 대표되는 이후의 언약들이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해서 완성됨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하는 언약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promissio-perfectio analogia와 umbra-substantia analogia가 동시에
적용된다. 칼빈은 모세의 율법이 은혜를 제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조상들과
맺은 “값없이 주신 언약(gratuitum foedus)”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Inst.
2.7.1, CO 2.253). 율법은 처음 언약의 계명—하나님 백성의 praeceptum—과 새
언약의 계명—하나님 백성의 promissio—을 함의한다. 그리스도의 율법의 중보를
통해서 성취된 의를 전가 받는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며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이룸과 됨이 언약의 목표이다.

7.2. 개혁주의 언약관
7.2.1. 행위 언약(pactum operum)

개혁주의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신앙고백서와

대체로
소요리

행위
문답

언약

교리를

그리고

스위스

173

Consensus Helvetica)에서도 이 교리가 발견된다.

인정한다.
일치

그리고

신조(Formula

행위 언약 교리는 아담을 언약의

머리로 보고 그의 죄책과 오염이 전체적이며 전인격적으로 인류에게 전가되었다고
보는

개혁주의의

실재설(로마

원죄

카톨릭,

이해에

의해서만

루터란)과

간접

합리주의)을 지지하는 신학자들은

174

합당하게

주장될

전가설(뉴잉글란드

있기

신학이

때문에
받아들인

이를 받지 않는다. 행위 언약 교리는 화란에서

웨스터민스터 신앙 고백서 7.3: “Man, by his fall, having made himself incapable of
life by that covenant [i.e., by the covenant of works], the Lord was pleased to make a second,
commonly called the covenant of grace; wherein He freely offereth unto sinners life and
salvation by Jesus Christ, requiring of them faith in Him, that they may be saved, and promising
to give unto all those that are ordained unto life, his Holy Spirit, to make them willing and able
to believe.” 소요리 문답 20: “God having out of his mere good pleasure, from all eternity,
elected some to everlasting life, did enter into a covenant of grace, to deliver them out of the
estate of sin and misery, and to bring them into an estate of salvation by a Redeemer.”
174 간접전가론은 죄책은 전가 받지 않고 오염만을 전가 받아서 죄를 짓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Saumur의 교수 Joshua Placeus에 의해서 주창되었으며 New England Root
Theory로 발전했다. 특히 Jonathan Edwards의 원리는 이를 반영한다. “마음의 성벽들의
173

- 55 -

카이퍼와 바빙크의 영향 아래 흥기했으며 오늘날도 그 영향이 깊게 남아 있다.
인류는 창조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나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연적인
관계를 가졌다. 이 관계에 덧붙여서 하나님은 적극적인 명령을 세우심으로써
언약관계를 확립시키셨다. 하나님은 인간과 법적인 계약을 맺으셨다. 여기에는
인간의 피조성에 암시된 모든 요구와 의무가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요소도 첨가 되었다. 1) 아담은 인류의 대표적인 머리로서 모든 후손을 위해서
행동할 수 있다(롬 5:12-21). 2) 그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가를 결정
짓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시험을 받았다. 3) 그는 순종할 경우에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약속을 보장 받았다.
아담은 적극적인 거룩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죽음의 법칙에 종속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실수하고 범죄하고 죽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가장 높은 수준의 거룩함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삶을 완전히 향유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행위 언약은 순종을 통하여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영생과 최고의
175

특권을 수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세우신 것으로서

이를 어긴 사람은

죽음의 형벌을 받게 하신 것이었다. 행위 언약은 계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절대적
순종을 요구하는데 만약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 계명은 살리는 법이 되었을
것이다(롬 7:10; 롬 10:5; 갈 3:13).
행위언약에 관해서 율법의 요구가 있고 조건적인 약속이 있는 한 여전히
유효하다는 입장과(레 18:5; 롬 10:5; 갈 3:12), 타락한 이후에는 영생을 얻는
수단으로서 그 효력을 상실했다거나 중보자 그리스도가 첫 언약의 요구 조건을
176

충족시켰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제

이론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견지해야 할 확고한 진리는 하나님은 구속사에 있어서
행위에

대한

영생의

약속의

언약을

한번도

폐기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을 은혜로 이루심에 대한 약속이며 새언약은 은혜언약의
약속의 수행으로서 행위언약의 성취이다.

7.2.2. 구속 언약(pactum salutis)

구속 언약은 성자를 선택 받은 자의 머리와 구주로 주시는 성부와,
덕이나 악의 본질은 그 원인에 놓여있지 않고 그 성질에 놓여 있다.” [하지 조직신학],
2.137-139.
175 Bavinck, RD 3.225. “. . . the covenant of grace. . . . It was his condescending
goodness, and thus also grace in a general sense, that prompted him to grant this covenant to
human beings.”
176 Cf. Chul-won Suh, “A New Thought on Covenant Doctrine,” CTJ(1997), 98-127.
- 56 -

성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자원하여 대신하시는 성자 사이에 맺어진 영원한
협정이다(엡 1:3-14; 3:11; 살후 2:13; 딤후 1:9; 약 2:5; 벧전 1:2). 콕체우스는 성부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머리인 성자 사이에 체결된 구속 언약을 이 언약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은혜 언약과 구분한다. 콕체우스의 견해는
툴레틴,

헤페,

C.

홧지,

A.

A.

홧지,

보스,

바빙크

등의

지지를

177

받는다.

웨스터민스터 대요리 문답은 구속 언약 개념을 인정한 문답(31)을 포함하고 있다.
“With whom was the covenant of grace made?” “The covenant of grace was made with
Christ as the second Adam, and in Him with all the elect as his seed.”
구속 언약은 성자를 선택 받은 자의 머리와 구주로 주시는 성부와,
성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자원하여

대신하시는

성자

사이에

맺어진

협정이다. 이 협정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행할 일을 주셨고(눅 2:49; 요 17:4), 그
일을 수행하도록 세상에 보내셨으며(요 17:18; 갈 4:4; 요일 4:9-10), 그 일이
이루어졌을 때 큰 상급을 약속하셨다는 사실(롬 5:15-21; 히 10:10)로 정리된다.
아들이 행할 일은 성육신과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며 그 의를 완전히 이루는 능동적
순종과 십자가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통한 수동적 순종으로 논해진다(C. 홧지,
2.361-362). 구속 언약에서 그리스도는 보증(e;gguoj, 히 7:22)과 언약의 머리(롬
5:12-21; 고전 15:22)가 된다. 구속 언약은 은혜 언약의 영원한 기초이며, 죄인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은혜 언약의 영원한 원형이지만,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은혜
언약이라기보다는 행위 언약이다. 궁극적으로 구속 언약은 은혜 언약을 유효하게
만든다. 구속 언약 가운데 구속주와 구속 방법과 택한 백성들의 예정이 계시되기
때문이다.

7.2.3. 은혜 언약(foedus gratiae)

은혜 언약은 진노하신 하나님과 죄를 범했으나 택함을 받은 죄인 사이에(갈
3:15-18) 맺어진 은혜로운 협정이며 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구원을 약속하시며 죄인은 믿음으로써 이 약속을 받아들이고 신앙과
177 Turrettin: “Prius pactum est, quod inter Patrem et Filium intercedit, ad opus
redemptionis exequendum. Posterius est, quod Deus cum electis in Christo contrahit, de illis per
et propter Christum salvandis sub conditione fidei et resipiscentiae. Prius fit cum Sponsore et
capite ad salutem membrorum: Posterius fit cum membris in capite et sponsore.” Witsius: “Ut
foederis gratiae natura penitius perspecta sit, duo imprimis distincte consideranda sunt. (1.)
Pactum, quod inter Deum Patrem et mediatorem Christum intercedit. (2.) Testamentaria illa
dispositio, qua Deus electis salutem aeternam, et omnia eo pertinentia, immutabili foedere addicit.
Prior convention Dei cum mediatore est: posterior Dei cum electis. Haec illam supponit, et in
illa fundatur.” C. Hodge, 2.359.

- 57 -

순종의 삶을 살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은혜 언약은 무조건적이다. 다만 믿음이
그리스도와 생명의 교제를 나눔에 있어서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다(conditio sine qua
non).
은혜 언약은 조건적인 언약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신실성에만 의지한다는
측면에서 행위 언약과 다르다. 행위 언약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면

은혜

언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생명길이다.

행위

언약에서의 인간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원피조물로서의 인간인 반면,
은혜 언약에서의 인간은 새언약의 머리로서 구원의 보증이 되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언약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죄인으로 나타난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지은

즉시

나타났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죄의식과

부끄러움과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들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여 그들이
자신의 무능과 부패를 바라보게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의 윤리적인
삶에 대한 열망을 여전히 속에 품게 하셨다는 사실, 즉 하나님의 진노와 더불어서
은혜가 동시에 작용하였다는 사실을 계시한다. 육체적 사망의 형벌도 은혜가 없지
아니하니, 비록 일시적 사망이 형벌로 주어졌지만 이는 영생에 이를 자로 영원히
178

죄의 지배에 있게 하지 않도록 하심이었다.

아브라함의 언약 가운데서 알 수 있듯이 은혜 언약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과 맺은 언약이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은혜

언약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중보자(mesi,thj, 70인경 욥 9:33에 한번 나옴, “양측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와
보증이 된다. 그리스도는 구속 언약의 당사자이며 은혜 언약의 중보자이다.
은혜

언약의

핵심은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본질적인 내용인(창 17:1) 동시에, 시내
언약(출 19:5; 20:1), 모압 광야에서의 언약(신 29:13), 다윗 언약(삼하 7:14), 그리고
새 언약(렘 31:33; 히 8:10)의 본질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언약의 중보자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히 13:8). 이 언약 외에 다른 곳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요
14:6).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씨는 그리스도이다(갈 3:16).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된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롬 8:17; 갈 3:29; 4:1, 7; 딛 3:7; 히
6:17; 11:7; 약 2:5). 후사가 받는 상급은 중보자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영광이다(롬
8:17).
은혜 언약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구원은 예수를 믿는 모든
178

Bavinck, RD 3.198, 200. Cf. Irenaeus, Against Heresies, III.23.6. God instituted death so that
sin would not be immortal.
- 58 -

사람에게 주어진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다. 복음은 은혜
언약에 기반한 구원의 소식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179

주신다.

둘째로,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에 따라서 은혜 언약은 오직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관련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만 성령을 약속해서 믿음을 갖게하며
약속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만 속하게 하신다. 은혜 언약으로서 새 언약은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받은 것이다(롬 3:21).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이다(갈 3:28). 곧 믿음은 예수가 오기 전이나
후나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조건으로 하나님은 언약의 약속을 이루신다. 이
약속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구약 시대부터 신약 시대까지 계속된 교회이다.

7.3 개혁주의 언약관
7.3.1. 첫 언약과 후속 언약들

개혁 신학에 의하면 행위 언약은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에 도달함에 대한
언약이며 은혜 언약은 타락 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순종을 하나님이 대신
하시고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은혜를 받음에 대한 언약이라고 분류하나, 첫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 됨의 체결이고 은혜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 됨의 근본인
하나님의 계명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대신 지켜 의(iustitia) 곧 생존의 권리를
선사하심으로써 백성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하는 언약으로 보아야 함이
바르다.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은 별개인 것이 아니라 은혜 언약은 첫 행위 언약의
회복과 성취로 보아야 한다.
첫 언약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담을 창조 하셔서 지식과 의와 거룩과
의지와 정서와 영장권이 있는 삶을 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 혹은 말씀을 삶의
법칙으로 삼고 살게 하심으로써 그의 영광과 생명에 동참하게 하시사 그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하나님 되시고 피조물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179 Turrettin: “Foedus hoc gratiae est pactum gratuitum inter Deum offensum et hominem
offendentem in Christo initum, in quo Deus homini gratis propter Christum remissionem
peccatorum et salutem pollicetur, homo vero eadem gratia fretus pollicetur fidem et obedientiam.”
Westminster Confession 7.3: “Man, by his fall, having made himself incapable of life by that
covenant [namely, by the covenant of works], the Lord was pleased to make a second,
commonly called the covenant of grace: wherein He freely offereth unto sinners [and all sinners]
life and salvation by Jesus Christ, requiring of them faith in Him, that they may be saved, and
promising to give unto all those that are ordained unto life, his Holy Spirit, to make them able
and willing to believe.” C. 홧지, 2.363.

- 59 -

한 약정이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언약이다. 통상 언약 사상에 의하면 아담은
완성을 필요로 하는 불완전한 존재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하늘의
영생에 이르게 작정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언약 체결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며 영생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섬김에 대한 보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첫 언약 이후의 후속 언약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킴을 목표로
한다: 노아의 언약(창 9:8-11); 아브라함의 언약(창 12:1-3; 17:2, 4-8); 시내산 언약(출
19:5-6; 레 26:9); 여호수아가 체결한 언약(수 24:21-25); 여호야다의 언약(왕하
11:17-18; 대하 23:16-17); 요시아의 언약(왕하 23:2-3; 대하 34:30-32); 새 언약의
약속(렘 31:31-33).
노아의 언약은 하나님-세상의 관계(the God-world relation)가 창조주-피조물의
관계(the Creator-creature relation)의 은혜 가운데 지지됨을 확정한다. 비이성적인
피조물 전체도 하나님의 언약에 정초한 은혜의 규율대로 보존되고 운행된다. 구름
가운데 드리운 무지개가 그 언약의 표징이다(창 8:21-22; 9:9-17). 아브라함의 언약은
오직

전부

모리아에

하나님으로부터
있는

지시된

오는

땅에서의

은혜의

절대성을

번제사는

계시한다.

하나님의

이삭의

출생과

창조주(Creator)되심과

재창조주(Re-creator)되심을 함께 계시한다. 하나님을 사람이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찾음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예비한 제물을 드림에 대한
계시, 약속하시는 분이 이루시는 분이라는 은혜의 계시가 아브라함의 언약의
교훈이다.
모세와 맺은 시내산 언약은 전적인 은혜로 홍해의 물을 걸어서 건넌 백성이
이제는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주로 섬기며 살아가는 올바르고
경건한 삶의 규범(regula vivendi pie et iuste)을 수여하신 것이다. 우리가 속함으로
그 분이 주가 되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주 되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속하게
되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좇은 거룩—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여전히 명하시되 친히 회복하실 것을 미리 계시하신다. 율법의 규범을
복음

가운데

성취될

약속을

이미

계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죄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이 영원한 언약은 깨어지지 않는다(신 4:31; 32:26ff.; 사 2:1;
시 89:1-5; 105:8; 111:5; 사 54:10; 롬 11:1-2; 고후 1:20).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이 은혜의 언약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함에 있다. “The law of Moses is
not antithetical to grace but subservient to it and was also thus understood and praised
in every age by Israel’s pious men and women. . . . the law was subservient to the

- 60 -

covenant of grace; it was not a covenant of works in disguise and did not intend that
humans would obtain justification by their own works.”

180

언약 체결로 이루어지고 또 생산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말씀을 생명의 법으로 삼고 사는 백성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됨은
그의 말씀과 계명을 그들의 생명의 법으로 삼고 사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처음 언약과 후속 언약에서 계명을 주사 그 계명을 지키고 살게 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죽게 하신 것이다: 첫 언약(창 2:16-17);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창 18:19);
출애굽 후 시내산 언약(출 19:4-6); 다윗(삼하 7:8-16; 대상 17:7-14); 솔로몬(왕상
9:3-5); 새 언약(렘 31:31-33).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의(iustitia)를 성취하고 하나님
앞에서 생존권을 갖게 된다.

7.3.2. 새언약(foedus novum)

a. 새 언약(렘 31:31-33)은 첫 언약과 모든 후속 언약들의 성취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과 그의 피로 세우신 언약이다(마 26:26-28; 막 14:22-24; 눅
22:15-20; 히 7:21; 8:6-13; 9:11-15; 12:24). 새 언약은 대제사장이 스스로 제물이
되셔서

자신을

드림으로써

언약의

보증(pignus)이

되시사

영원한

언약을

수립하셨다(히 8:6-13; 12:24; 13:20).
b. 개혁 신학자들이 은혜 언약이라고 부른 언약들은 모두 새 언약을
예표한다. 영원한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대표이자 새 인류의 대표인
제자들과 세운 언약 뿐이며 성육신 하실 아들(Filius incarnandus)과 세운 언약은
없다. 그러므로 유일한 은혜 언약은 새 언약으로 이해함이 바르다.
c.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언약(Testamentum)을

체결하심이므로

언약의

중보자이시다(히 8:6; 9:15; 12:24).
d.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죄과가 용서되어(히 10:10-18; 9:15)
완전한

구원을

이루었다.

중보자

그리스도의

피가

시간에

역행해서

그리스도의

율법

구약

백성들에게 적용되었다(히 11:40).
e.

언약은

성령의

임재로

성취되었다.

준수와

속죄제사로 의가 세워지고 죄과가 게거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었다. 성령에
의한 믿음과 회개로 하나님의 자녀됨(adoptio filii)을 누려 영생에 이른다. 성령이
부활의 보증이 되어(고후 5:5; 엡 1:13-14)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사 영생을
얻게 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의를 전가 하셔서(remissio peccatorum et imputatio
180

Bavinck, RD 3.222.
- 61 -

iustitiae Christi) 신형상 회복에 이르고 영생에 이르게 하신다. 믿음이 계속해서
머무름(perseverantia in fide finalis)이 곧 은혜이다.
f.

언약은

아담

안의

인성(humanity

in

Adam)을

그리스도

안의

인성(humanity in Christ)으로 변화시키는 약속이다. 이제 죄로부터 해방된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영생의 백성이 되는 약속이다. 아들이 행위 언약을
이루셨기 때문에 그와 함께 자녀되어 후사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산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산다. 단지 주님은 우리의
181

머리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중보자 되신다.

f. 하나님의 백성의 선택은 전적으로 공로 없는 은혜(gratia immerita)에 의한
것이며 믿음 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엡 2:8-9) 예지 예정론은 부정된다.
새 언약의 성례는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가담인 세례와 존속인 성찬의 두
가지이다.
g. 새 언약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모든 택자들의 구원의 창시자(auctor salutis)
되심에 있다.
h. 우리는 콕체우스가 구원 언약(pactum salutis)이라고 부른 것을 삼위간의
구원협약으로

이해하고

은혜

언약이라는

말을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한

언약이라는 말로 쓴다(히 7:21; 8:6-13; 9:11-15; 12:24). 주님이 친히 자신이 세운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부르셨다(눅 22:20).

[결론]

1) 서철원 교수님께서 발견한 새로운 관점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최초
언약을 하나님의 백성 됨의 언약으로 본다.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육체적 영적인
사망에 이르고 영적인 사망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이라고 볼 때, 아담의 순종이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삶을 약속한 것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모든 후속 언약들과 그것들의 이룸으로서의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인 영생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원한 삶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새 언약의 당사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논한 점이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과 피로 세운 언약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언약의 당사자로서 중보한다. 즉
언약의 중보자(diaqh,khj mesi,thj)이다.
2) 서교수님의 입장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작정을 구원언약(foedus
redemptionis)으로서가
181

아니라

구원협약(consilium

Bavinck, RD 3.226-227.
- 62 -

redemptionis)으로

보는

관점에

기반한다. 구원협약은 구원자와 구원방식 그리고 구원받을 자들을 정하신 작정이다.
이것은 영원한 작정이지 역사적인 언약이 아니다. 이것은 언약의 조건과 약속을
지정하신 것이지 언약을 체결하신 것이 아니다.
3)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들을 개혁주의에서는
은혜언약이라고 부른다. 타락한 백성들은 더 이상 선을 행할 의지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이들 언약들은 행위언약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적극적 순종과
소극적 순종을 통하여서 행위 언약의 조건을 다 이루어서 택한 백성들을 의롭게
하신다는 새 언약을 믿는 조건으로 은혜를 약속한다는 측면에서 이들 언약들은
은혜언약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은혜언약은 첫 언약의 약속과 이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절대 은혜를 믿는 믿음을 조건으로 하는 언약이다. 예컨데 노아와의
언약에 나타난 자연적 축복(창 8:20-9:17)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말미암은
창조물의 회복을 예표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로고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은혜 언약에 속한 모든 은총을 내리시는 바 인류에게 뿐 아니라 자연에도
182

미친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과 그 흥왕함과 그들의

기업에 대한 약속은 택함 받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의 영생의 축복을
예표한다(창 15; 17). 시내산의 언약도 엄격한 율법준수에 기반하고 있지만(레 18:5;

27:26;

고후

3:7,

8),

율법은

실체인

그리스도의

현재(praesentia)와

예표(repraesentatio)를 계시했다.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한 백성들의[칭의] 마땅히 살
바를[성화] 규정한 것으로 tota gratia에 대한 예표였다. 그러므로 행위언약과
행위언약의 성취로서의 새 언약뿐만이 아니라 새 언약의 약속으로서 은혜언약이
합당하게 존재한다.
은혜

언약은

vis”(어거스틴)라고

절망과

기도하는

소망

가운데서

“Da

백성의

언약이다.

예수는

quod

iubes

et

iubes

제사장(sacerdos)이시자

제물(sacrificium)로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요 19:30) 다 이루신 자신의 영을
자신의 언약 백성들에게 부어주심으로써 영생에 이르게 하신다.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죄로

말미암아

전가(bv'j;,

logizomaii)된

죄책(poena)과

오염(corruptio)으로 사망에 이른 많은 사람들이 참 사람이자 참 하나님이신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죄사함(remissio peccatorum)과 의의 전가을 받아서
구원에 이르게 됨이 언약의 완성이었다.
4) 서 교수님께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맺은 언약을 제한해서 새
언약으로 본 것은 언약과 그 이룸(십자가)을 잘 설명한다. 기존 이론들이 새
언약(렘 31:31; 히 8:8; 13)을 마치 이신칭의의 원리와 동등한 것으로 다룬 것에는(예
182

Bavinck, RD 3.225.
- 63 -

롬 4; 갈 3) 잘못이 있다. 구원 혹은 구원의 과정은 언약의 결과이지 언약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새 언약은 구약 언약의 완성으로 나타난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다윗의 언약)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모세의 언약)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아브라함의 언약)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새 언약)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언약의 약속)” (겔 37:24-28).

- 64 -

[보론]

언약의 실체 그리스도(Christus Substantia Foederis):
프란시스 뚤레틴의 은혜 언약의 일체성 이해

1. 은혜 언약의 실체에 있어서 하나임

신약 신학자 제임스 던(James Dunn)은 근래 성공회 주체로 개최된 한 강좌에서 은
혜 언약의 일체성에 관한 “하나의 새로운 관점(a new perspective)”을 제시하고 있다. 던은 이
전 학자들이 구약과 신약을 율법 대 복음으로서 파악함으로써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단절시
켰음을 지적하고 유대주의적 관점에서 구약을 읽고 또한 그 관점에서 신약 시대의 언약의
성취를 파악함으로써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특면에
서 신약을 구약의 “더욱 효과적인 판(a more effective version)”이라고 부른다.

183

던이 전제하

고 또한 그 전제에 따라서 결론에 이른 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의 언약을
비롯한 구약의 모든 언약은 율법의 이행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예레미야가 말한 새 언약은
이러한 율법의 이행이 이제 내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예언 했음에 불과하다; 이는 유대주의
의 가르침으로 발전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신약의 새 언약 사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던의
입장은 유대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monism)에 기초하여 바울의 신학을—특히 구
원론과 관련하여—세우고자 했던 샌더스(E. P. Sanders) 이후의 “소위 바울 신학의 새로운 관
점”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184

신학자들이 율법과 복음을 대립시킴으로써 구약과 신약을 분리해서 다루어 왔다고
지적하는 제임스 던의 비판은 최소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는 적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개
혁주의 신학자들은 복음/율법 그리고 구약/신약의 경륜적 다양성이 실체적 일체성—그리스
도—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는 칼빈의 입장을 그들의 언약 신학의 확고한 기초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185

던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판했어야 할 것이다. 그 자신이야말로 비성경적인

183

James D. G. Dunn, “Judaism and Christianity: One Covenant or Two?” in Mark J.
Cartledge and David Mills, ed., Covenant Theology: Contemporary Approaches (Carlisle, UK:
Paternoster, 2001), 1988Milt Dunn, 33-55, 인용 53.
184 샌더스에 기초하여 던이 전개한 소위 바울 신학의 새로운 관점에 의하면 바울은
유대주의 율법관을 견지했으며 그가 갈라디아서(특히 2장)에서 이신칭의를 강조한 것은
회심 직후 교리적 정립 없이 단지 이방인의 전도를 위해서 그렇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행위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 함은 전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단지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켜 온 할례, 음식 규례들, 안식일 등 만을 의미한다고
본다. 던은 이러한 입장에 기초하여 은혜 언약의 일체성을 주장하고 있다. Cf. Seyoon Kim,
Paul and the New Perspective: Second Thoughts on the Origin of Paul’s Gospel (Grand Rapids:
Eerdmans, 2002), 1-84, 특히 3, 34-35.
185 Cf. Eugene M. Osterhaven, “Calvin and Federal Theology,” in Donald K. McKim,
ed., Readings in Calvin’s 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84), 89-90, 98-106; Anthony A.
- 65 -

유대주의에 신학을 정초시킴으로써 구약(율법)의 실체를 그리스도로 파악하는 길을 스스로
차단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유대주의의 다리가 없이는 구약과 신약의 간극을 넘나들 수
없다고 주장하여 세대주의적 편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오히려 던 자신이었기 때문
이다. 칼빈과 이후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그리스도가 은혜 언약의 실체이심을 오직 그 조건
이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에 있다는 인식 가운데서 주장함을 고려해 볼 때, 은혜 언약의 실
체적 일체성을 그리스도에게서가 아니라 율법의 규범과 그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찾고자 하
는 던을 위시한 소위 새로운 관점을 추구하는 신학자들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곡해하게 됨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것이다.

186

본고에서는 이렇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의가 활발한 구약과 신약의 일체성에 대
한 문제를 은혜 언약의 일체성이라는 관점에서 프란시스 뚤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
이 어떻게 전개했는지 살펴본다.

187

뚤레틴은 칼빈의 신학을 체계적이며 학문적(scholastic)으

로 정리한 제네바의 마지막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알려져 있다.

188

그의 신학의 결정체(結晶

體) Institutio theologiae elenticae는 차알스 홧지의 조직신학 책이 나오기 까지 프린스턴 신학
교의 교제였으며 그 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9

뚤레틴은 그 책에서 당시 흥기했던 자연

신학의 단초를 오히려 칼빈의 자연법 사상을 깊이 고찰하고 전개함으로써 잘라 내고자 했
다.

190

또한 그는 당대 싹트기 시작한 성경 비평학적 방법을 지양하고 성경의 문자적 영감을

지지했다.

191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개혁주의 인식론의 폭을 넓혔는데 그 중심 주제(locus)로

Hoekema, “The Covenant of Grace in Calvin’s Teaching,” Calvin Theological Journal 2 (1967),
136. 칼빈은 기독교 강요의 기독론 부분에서 중보자의 필연성(2.6)을 다룬 후 율법을
논하고(2.7-8) 이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다루기(2.12-17) 전에 율법/복음 그리고
구약/신약의 일체성과 차이성에 대해서 다룬다. 이와 같은 ordo docendi 가운데서 은혜 언약
전체의 실체에 있어서의 하나임(unitas) 경륜에 있어서의 다양함을 주장한다.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 . . , 1559를 인용함에 있어서 다음 번역본을 참고한다.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l, tr. Ford Lewis Battles,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s. 20-21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2.9-11, Calvini Opera 2.309-340.
186 어거스틴, 루터, 칼빈을 잇는 신학자들의 믿음이나 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행위를 배제하는 것은 당시 팔레스틴의 유대주의의 가르침과 다르고 이 가르침의 제자
바울의 교리에도 배치된다고 주장한 아래의 책 참조. Stephen Westerholm, Perspectives Old
and New on Paul: The “Lutheran” Paul and His Critics (Grand Rapids: Eerdmans, 2004).
187 은혜 언약의 일체성에 대한 최근의 논의에 대해서, Robert L. Reymond, A New
nd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2 ed. (Nashville: Thomas Nelson, 1998), 503-544
(“The Unity of the Covenant of Grace”).
188 Richard C. Gamble, “Switzerland: Triumph and Decline,” in W. Stanford Reid, ed.,
John Calvin: His Influence in the Western World (Grand Rapids: Zondervan, 1982), 70.
189 특히 이와 관련해서, Earl W. Kennedy, “An Historical Analysis of Charles Hodge’s
Doctrines of Sin and Particular Grace,” Ph. D. dissertation, Princeton Seminary, 1969; John
Walter Beardslee III, “Theological Development at Geneva under Francis and Jean-Alphonse
Turretin (1648-1737),” Ph. D. dissertation, Vanderbilt University, 1986.
190 Stephen R. Spencer, “Francis Turretin’s Concept of the Covenant of Nature,” in Later
Calvinism: International Perspectives, ed. W. Fred Graham (Kirksville, Mo.: Sixteenth Century
Essays & Studies, 1994), 71-91; Stephen J. Grabill, Rediscovering the Natural Law in Reformed
Theological Ethics (Grand Rapids: Eerdmans, 2006), 151-174.
191 Martin
I. Klauber, Between Reformed Scholasticism and Pan-Protestantism:
Jean-Alphonse Turretin(1671-1737) and Enlightened Orthodoxy at the Academy of Geneva
- 66 -

서 언약을 다루었다.

192

뚤레틴 신학의 중심 교리는 그가 일생을 통하여서 정치하게 수립한

속죄론에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3

그런데 그의 속죄론의 기독론적 기초를 제공

하며 그 부요함과 심오함을 더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은혜 언약 교리였다.
은혜 언약이 그 실체(substantia) 혹은 본질(essentia)에 있어서는 하나이나 시기와 방
식에 따른 고유한 경륜(oeconomia)에 있어서는 다양하다고 천명한 대표적인 학자로서 우리
는 뚤레틴과 동시대인으로서 화란의 언약신학을 대표하며 불후의 명저 De oeconomia
foederum Dei cum hominibus를 저술한 윗시우스(Herman Witsius, 1636-1708)를 들 수 있다. 그
는 은혜 언약이 동일성을 다음 세 가지로 지적한다: 첫째, 하나이며 동일한 영생이 약속되
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저자시며 수여자시다; 셋째, 오직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
으로만 구원에 이른다.

194

이로부터 윗시우스는 은혜 언약의 실체적 일체성을 그리스도가 언

약의 약속이라는 사실, 그가 언약의 조건인 믿음의 대상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언약의 완
성이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기독론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본고에서 필자는 뚤레틴이 기본적으로 윗시우스의 이해를 공유했음을 고찰할 것이
다. 즉 그리스도가 언약의 실체임과 언약의 효과에 이르는 믿음의 대상임을 파악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언약적 의미를 또한 기독론적 의미에서 파악할 것이
다. 이하 필자는 그리스도가 은혜 언약의 유일하고 동일한 실체라는 뚤레틴의 이해를 다음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 본다: “그리스도를” 믿음—언약의 질료(materia); 그리스도를 “믿음”—
언약의 도구(instrument);

195

“그리스도를 믿음”—언약의 작용(efficacia) 혹은 감화(persuasio,

affectus). 이러한 논의 가운데 우리는 뚤레틴이 언약의 일체성을 기독론적이며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역동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충실하게 교리화 했음을 논증하게 될 것이다.

196

(London: Associated University Presses, 1994), 25-28.
192 Stephen Strehle, Calvinism, Federalism, and Scholasticism: A Study of the Reformed
Doctrine of Covenant (New York: Peter Lang, 1988), 301-314.
193 뚤레틴의 속죄론에 관한 글은 다음에 광범위하게 수록되어 있다. Francisci
Turrettini, De satisfactione Christi disputationes, Genevae, 1667. 이 책은 다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De satisfactionis Christi necessitate,” pars i-ii, 1-59; “De satisfactionis Christi
veritate,” pars i-ix, 60-303; “De satisfactionis Christi perfectione,” 305-361.
194 Herman Witsius, The Economy of the Covenants between God and Man:
Comprehending A Complete Body of Divinity, 2 vols., tr. William Crookshank (London: R.
Baynes, 1990), 3.2.1-2.
195 칼빈은 구원의 네 가지 원인은 동력인(하나님의 사랑), 형상인 혹은 도구인(믿음),
질료인(그리스도의 공로), 그리고 목적인(하나님께 영광 돌림)으로 파악한다. 주지되는 바와
같이 칼빈은 철학적 개념을 신학에 도입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였다. 다만 이 경에
구원의 전체 역사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사용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뚤레틴이 사용한 materia라는 단어를 “질료”로서 해석한다. Cf. Inst. 3.14.17,
21 (CO 2.575, 579). 칼빈은 이를 또한 그의 로마서 3:24 주석(CO 49.61)에서도 말한다.
그리고 로마서 5:19의 주석(CO 49.101)에서는 구원의 의(iustitia)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고유한 것(proprium)”임을 나타내는 동인 causa materialis임을 지적한다.
196 뚤레틴의 언약 신학을 다룬 다음 작품에서 저자는 은혜 언약의 일체성을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대상이라는 측면에 집중해서 다루는 경향이 있다. J. Mark Beach,
Christ and the Covenant: Francis Turretin’s Federal Theology as a Defense of the Doctrine of
Grace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07), 216-224.
- 67 -

2. “그리스도”를 믿음—언약의 질료

뚤레틴은 은혜 언약을 “그리스도 안에서 범법함을 당한 하나님과 범법한 사람 사이
에 도입된 값없는 계약”이라고 정의한다. “은혜 언약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
미암아 사람에게 값없이 죄사함과 구원을 약속한다; 그러나, 사람은, 동일한 은혜에 의지하
여 믿음과 순종을 약속한다.”

197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말미암아, 은총을 베푸시고 사람

이, 말미암아, 은혜를 입는 은혜 언약의 “질료(materia)”시다.

198

그런데 은혜 언약의 질료가 되

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하지 않으면 언약은 유효하
게 체결될 수 없다. 첫 번째 행위 언약에서는 중보자가 없이도 아담은 자유의지를 좇아서
언약의 조건을 성취할 수 있음으로 그 자체로 가능한 계약이었지만 은혜 언약은 중보자가
없이는 불능하였다. 하나님에 관하여서는 아들의 중보만이 무름이 되었으며 사람의 편에서
는 아들의 중보만이 속죄가 되었기 때문이다.

199

그리스도의 무름(satisfactio)는 삼중적이었다.

첫째, 그것은 일(res)과 관련해서 죄의 값 자체를 민사적으로 치르는 것이었다. 둘째, 그것은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것이었다. 셋째, 그것은 인격(persona)과 관련
해서 죄의 값 자체를 형사적으로 치르는 것이었다.

200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는 단지 우리의

죄를 사함에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음에 미친다. 은혜 언약은 죄 사
함과 영생의 선물을 포함한다.

201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것은 단지 우리가 그를 달았기 때문도

아니며 그가 특별한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심도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의가 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사안에 합당하게(occasionaliter)” 혹은 “목적에 합당하게
(finaliter)” 라기 보다 “공로에 합당하게(meritorie)” 수행되었다.
공로를 취하셨고 공로를 취하심으로써 무르셨다.”

202

“그 분께서는 무르심으로써

203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를 향하여서는 공로를 취하셔야 하셨으며 우리를 향하여는
무르셔야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육체와 영혼의 고통을 당하셨으므로 우
리가 죄사함을 얻는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셨기 때문
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전한 삶 즉 영생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속
197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tr. George Musgrave Giger, ed.
James T. Dennison, Jr. 3 vols.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1994), 12.2.5.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New York: University Press, 1847), 2.156. 이하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2.5 (2.156)와 같이 표기: “Foedus hoc gratiae est pactum gratuitum inter Deum
offensum et hominem offendentem in Christo initum, in quo Deus homini gratis propter Christum
remissionem peccatorum et salutem pollicetur, homo vero eadem gratia fretus pollicetur fidem et
obedientiam.” .
198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2.7 (2.156).
199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2.11 (2.157).
200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10.6-12 (2.368-371).
201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13.10-11 (2.393-394).
202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11.13 (2.379).
203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13.12 (2.394): “Meruit ergo satisfaciendo,
et merendo satisfecit.”
- 68 -

상적이며 공로적(satisfactoriam et meritoriam)”이다.

204

속상적이라 함은 무죄함에 이르는 그리

스도의 의의 전가를 뜻하며 공로적이라 함은 영생의 의를 이루는 하나님의 뜻을 좇은 전체
삶의 의를 이룸을 뜻한다. 이러한 이중적 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수
동적인 순종(obedientia passiva)과 능동적인 순종(obedientia activa)에 해당한다.

205

뚤레틴이 인

용하듯이 이러한 이중적 의에 대한 인식은 그리스도의 전 생애의 공로가 우리를 위한 의로
서 전가 된다고 보는 칼빈에 의해서 부각되었다.

206

뚤레틴은 그리스도의 이중적인 의를 “무

죄함의 의(iustitia innocentiae)”와 “견인의 의(perseverantiae)”라고 부르며 이를 율법의 이중적
인 측면에서 읽어 낸다.

207

즉 그리스도의 의는 율법의 형벌에 대한 값으로 뿐만 아니라 율법

의 규범을 준수함에 있어서 역사한다고 본다.

208

이러한 공로는 구원의 전체 과정을 통하여서

역사한다. 그 역사는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언약
의 제 삼의 당사자로 불린다. 세 당사자가 있다: “범법함을 당한 하나님, 범법한 사람, 그리
고 범법한 사람을 범법함을 입고 진노한 하나님에게로 화목하게 하는 중보자 그리스도.”

209

뚤레틴은 그리스도를 은혜 언약의 유일한 실체로서 파악함으로써 신약과 구약의 연
속성과 일체성을 추구한다. 그리스도가 은혜 언약의 실체(substantia foederis gratiae)가 됨은
은혜 언약을 행위 언약(foedus operum)과 구별하는 표지가 된다. 은혜 언약은 그 당사자로서
중보자 그리스도를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그 분의 인격과 순종에 기반하며, 그 분의 은혜를
약속으로, 그 분을 믿는 믿음을 조건으로, 그 분께 속한 선택된 사람들에게 작용한다.

210

“언

약적 실체(substantiam federalem)”—그리스도—는 동일하다. 다만 그 “경륜의 방식(modum
dispensationis)”이 다양할 뿐이다.

211

새 언약과 옛 언약의 실체적 동일성을 설명하면서 뚤레틴

은 중보자의 한 분이시라는 사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같다는 사실, 영적이며 천상적인
은총에 대한 약속이 동일하다는 사실, 화목과 구속의 방식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거론한다.

212

이로써 뚤레틴은 은혜 언약의 실체가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 더불어서
그 분께서 다 이루신 공로 자체와 그 가치 그리고 그것의 전가에 까지 미침을 천명하고 있
다. 뚤레틴이 구약의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은혜가 “단지 기술되었을 뿐만 아니라 약속
되었다는” 사실을 적시하면서 그 약속에 기초하여 그들이 오실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그 믿
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고 단언하게 되는 것은 은혜 언약의 일체성

204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13.10 (2.393).
cf.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대해서,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3, Sin and Salvation in Christ, ed. John Bolt, tr. John Vriend (Grand Rapids: Baker, 2006),
345;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2, rep. (Grand Rapids: Eerdmans, 1995), 489-496.
206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13.32 (2.399).
207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13.28 (2.398).
208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13.29 (2.398-399).
209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2.9 (2.157).
210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4.2-10 (2.169-179).
211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5.26 (2.178-179).
212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5.5 (2.172). 이러한 사실들을 뚤레틴은
“언약의 핵심 부분들(partes essentiales foederis)”라고 부른다.
205

- 69 -

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 기초해서이다.

213

육체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과

그 분의 중보의 은총을 맛 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별개라는 점이 지적된다. 그리고 비록 그
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분의 죽음의 능력은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
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작용(efficaciam)”을 했다는 점이 명확하게 제시된다.

214

그리고 이어서 구약 백성들의 구원은 그들이 신약 백성들과 동일한 언약의 실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음이 적시된다.

215

이상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뚤레틴이 신약과 구약

의 실체에 있어서의 일체성을 중보자 그리스도의 한 분이심(unitas)과 동일하심(continuitas)에
문의하면서 전개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은혜 언약의 일체성에 대한 진술
은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중보자 그리스도는 한 분 이시다; 다만 그 분의 중보는 경륜
(oeconomia, administratio, dispensatio)에 있어서 다양하다.

216

이하 뚤레틴이 언약의 “정체성(identitas, 正體性)”을 설명하면서 제시하는 다양한 관
점들은 모두 그 실체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 공로에 연관되어 있다. 첫째, 성경이 전하
는 아브라함 이후의 모든 후속 언약들을 통해서 그에게 계시하셨던 약속이 반복되었음을 지
적된다. 갈 3:17를 인용하면서 뚤레틴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향
하여 확정된 이전의 언약 (diaqhkhn procecurwmenhn u`po tou Qeou eivj Kriston)”이라고 부른
다.

217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후손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언약의 은혜가 신약과 구
약을 통하여서 동일하게 선포되었음을 지적한다. 특히 주님께서 자신의 부활을 가르치시면
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을
(마 22:32) 인용함으로써 뚤레틴은 이러한 약속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것
이라고 자신이 이해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218

셋째, “중보자의 정체성(identitas)”이 부각된다. 중보자 그리스도가 예언된 여자의 후
손이자 아브라함의 씨앗에 나실 복의 근원으로서 구약 시대에 현재(顯在, praesentia)하셨음이
강조된다. 그 분께서 어제나 지금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분으로서 새 언약의 주이심이 확정
된다. 이러한 진리가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은혜 언약의 중보자가 아니셨다면 논의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구원 받을 유일한 이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은(행 4:12) 신약와 구약
에 공히 적용된다.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구원에 이르는 바,
그것은 구약 시대의 백성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219

넷째, 중보자의 한 분이심으로부터 그 분을 믿는 믿음이 동일함이 제시된다. 믿음의

213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5.6 (2.172-173).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5.28 (2.179).
215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5.5 (2.179).
216 뚤레틴에 있어서 경륜은 이상의 세 단어로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다. Cf.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5.5 (2.172), 12.5.26 (2.178-179).
217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5.7 (2.173): “foedus primo ratificatum a
Deo in Christo.”
218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5.8 (2.174).
219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5.9-13 (2.173-175).
214

- 70 -

교리는 의의 전가에 기초하는 바,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말미암는다. 신약과
구약 백성 모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음으로 그들의 믿음은 유일하신
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동일하다.

220

다섯째, 언약의 약속이 동일함이 제시된다.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행 13:32)”이 신
약에서 전부 성취되었다. 아브라함 이후 주어진 은혜 언약의 약속들은 신약에서 성취된 것
들을 망라함이 주장된다. 구약 시대에도 중보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요함이 있었음과 그의 의의 전가로 말미암은 구원과 중생과 성화가 계시되었음이 지적된
다. 욥은 구속주가 살아 계심을 노래했으며(욥 19:25) 다윗과 다니엘은 부활과 영생의 가르
침에 감화 받아서 말씀을 기록했음이 함께 지적된다.

221

여섯째, 신약과 구약의 성례들의 실체(substantia)가 동일함이 제시된다. 모든 성경의
성례들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 분의 은혜들을 표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뚤레틴은 성례들을
“언약의 징표들(sigilla foederis)”이라고 부른다. 특히 성례들이 “믿음의 의의 징표(sigillum
iustitiae fidei)”로서 주어졌음이 할례가 무할례시의 믿음을 인친 것이라는 사실로부터(롬
4:11) 설명된다. 광야 시대 만나와 물의 표징들이 신약의 성례들과 실체상 동일한 뜻을 가지
고 있음이 지적되고 물이 나온 광야의 반석이 예수께서 바위로 시험 받으신 사건과 관련되
어 설명된다. 이렇듯 뚤레틴은 성례의 의미(significatio)를 그리스도 인격과 사역이라는 관점
에서 함께 파악하고 있다.

222

일곱째, 모세의 율법이 은혜 언약에 관해서 가르쳤으며 그 은혜를 누리도록 준비시
켰으며 자극했음이 제시된다. 율법이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몽학선생이라는 말씀과(갈 3:24)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씀이(갈 3:24) 세 가지 관점에서 논의된다. “도덕적 관점
에서(ex morali)” 율법은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저주를 깨닫게 했으며 그리하여서 그리스
도 안에서 죄 사함과 용서를 구하게 했다. “법정적 관점에서(ex forensi)” 율법은 이스라엘 국
가를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무질서로부터 지켰다. 그리하여서 그 분께서 오실 준비를 하게
했다. “의식적 관점에서(ex coeremoniali)” 율법은 그리스도의 모범(typus)이자 형상(forma)으로
서 그 분의 희생 제사를 예표했다.

223

뚤레틴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맺은 시내산 언약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경륜에
있어서는 다르나 실체—혹은 본질(essentia)—에 있어서는 동일했다고 간파한다.

224

시내산 언

약은 그리스도를 예표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분의 현재(顯在)를 증거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세워졌으며 그 피로 인증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시내산 언약으로 수여된
율법의 “주요한 목표이자 영(scopus praecipuus et anima)”이 된다.

225

시내산 언약은 그 안에

그리스도를 “목적물(objectum)”로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언약의 율법은 죄를 깨닫게

220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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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224
225

Turretin,
Turretin,
Turretin,
Turretin,
Turretin,
Turretin,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 71 -

12.5.14 (2.175).
12.5.15-20 (2.175-177).
12.5.21-22 (2.177-178).
12.5.23 (2.178).
12.12.5 (2.232); 12.12.18-19(2.235).
12.12.20 (2.235-236).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찾도록 하는 작용을 한다.

226

하나님께서는 은혜

언약에 기초하여 율법—그 요약으로서 십계명—을 통하여서 자신의 백성에게 순종과 거룩함
을 명령하신다.

227

은혜 언약 가운데 율법은 법적인(legalis) 명령과 “더욱 달콤함(suavior)” 복

음적인(evangelica) 약속을 포함한다.

228

구약의 언약은 외부적으로 “율법적인 가르침의 경륜

(oeconomiam paedagogiae legalis)”을 내부적으로 “복음적인 약속의 진리(veratatem promissionis
Evangelicae)”를 포함한다.
다.

229

언약의 율법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구원 은혜의 약속을 포함한

230

따라서 행위 언약에서 우리에게 요구되었던 것들이 무엇이든지 은혜 언약 가운데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칭의가, 이러한 방식으로, 행위와 믿음에 의해서 일
어난다고—그리스도의 행위에 의해서 그리고 우리의 믿음에 의해서—말하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 이렇듯 율법과 복음이 달콤한 조화로 이 언약 가운데 만난다. 율
법은 복음 없이 역사하지 않는다; 복음도 율법 없이 역사하지 않는다. 마치 그것은
율법적 복음 그리고 복음적 율법—순종으로 가득한 복음 그리고 믿음으로 가득한
율법—이 만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복음은 율법을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
리에게 그것을 완전히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줌으로써, 그것을 세운다(롬 3:31). 율법
은 복음과 배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을 자체의 목적으로 삼으며 우리
를 그것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231

3. 그리스도를 “믿음”—언약의 도구

뚤레틴에게 있어서 새 언약(신약)과 옛 언약(구약)의 일체성이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은혜 언약의 실체로서 한 분이시라는 사실로부터 개진됨을 지금까지 살펴 보았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은혜 언약의 질료(materia)가 되는 조건을 다 이루심으로써 이제는 그 분을 믿
기만 하면 그 분의 공로(의)를 전가 받아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복된 소식이다. 은혜 언약

226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12.21 (2.236).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7.30 (2.200-201).
228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7.31 (2.201).
229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7.32 (2.201).
230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12.25 (2.237).
231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12.22 (2.236): “. . . atque ita quod
exigebatur a nobis in foedere operum, impletur per Christum in foedere gratiae. Nec absurdum
est hoc pacto iustificationem fieri per opera et per fidem, per opera Christi, et per fidem
nostram. Atque ita suavi harmonia Lex et Evangelium simul concurrunt in hoc foedere; Lex non
administratur sine Evangelio, nec Evangelium sine Lege, ut sit veluti Legale Evangelium, et Lex
Evangelica Evangelium plenum obedientia, et Lex plena fide. Sic Evangelium non destruit
Legem, sed eam stabilit, Rom. Iii. 31, dando nobis Christum, qui perfecte eam implevit. Et Lex
non est contra Evangelium, cum ad illud ut ad fidem suum respiciat et nos manuducat.
227

- 72 -

이 복음으로 역사함은 그리스도의 공로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전가됨에 있다. 그러
므로 그리스도께서 은혜 언약의 실체임은 오직 그 분을 구주로서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
는 약속을 전제한다. 새 언약과 옛 언약이 공히 그리스도를 실체로 함은 양자 모두 그 분을
믿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정체성(identitas)은 그 “대상(objectus)”이 중보
자 그리스도이심에 있다.

232

구약 시대에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언약의 은혜가 역사

함이 구체적으로 계시되었다(출 23:20, 21; 신 18:18, 19; 시 2:12; 사 5:1, 5). 신약 시대 백성
들에게는 이러한 구약 시대의 백성들의 믿음이 따라야 할 본으로 제시되었다(히 12:1, 2; 롬
4:12).
한다.

233

복음의 영원성(perpetuitas)은 그 분을 믿는 “믿음의 항구성(fidei constantiam)”에 기인

234

뚤레틴은 믿음의 작용을 삼중적으로 파악한다. 첫째,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사
함을 받게 되리라는 믿음의 “보장(寶藏)적 작용(actus dispositorius)”이 있다. 둘째, 믿는 자에
게 죄사함이 실제로 부여되는 믿음의 “칭의적 작용(iustificatorius)”이 있다. 셋째, 믿음 가운
데 그리스도의 은혜가 현재 역사함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는 믿음의 “위로적 작용
(consolatorius)”이 있다. 이러한 삼중적 작용은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은 의의 성취와 그
적용과 계속적 작용에 상응한다. 이렇듯 뚤레틴은 믿음의 작용을 중보자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의 역동성에 기초하여 파악하고 있다.

235

믿음은 칭의의 “도구인(causa instrumentalis)”이

다. 믿음은 언약의 백성이 그 실체인 “그리스도의 공로(meritum Christi)”를 수납하는 유일한
도구이다. 믿음의 요소로서 “확신(fiducia)”은 “완전히 충만한 그리스도의 무름에 대한 감화에
(in persuasione de Satisfactione plenissima Christi)” 있다. 그리스도의 무름이 구원의 질료인이
며 믿음이 그 도구인이다.

236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도구가 될 뿐만 아니라 경건에 대한 열망을 갖게 하
고 거룩해 지는 훈련을 받도록 성도를 이끈다.
역사한다.

238

237

이 때 성령은 양자의 영과 성화의 영으로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믿음의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보증(vas)”과 “머

리(caput)”로서 성도의 구원을 위하여 중보하심에 상응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증으로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머리로서 거룩하게 하신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게 되지 않는다면 그 분의 사심과 죽으심의 공로는 무익하다. 믿음은 객관
적인 주님의 공로가 나의 것으로 여겨 지는 유일한 도구임이 강조된다.

239

성부는, 오직 믿음

을 조건으로, 이러한 성자의 공로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칭의와 성화 과정에 적용하신
다.

240

칭의가 믿음을 도구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음이라면 그것은 성화의 “뿌리이며 원리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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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Turretin,
Turretin,
Turretin,
Turretin,
Turretin,
Turretin,
Turretin,
Turretin,
Turretin,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 73 -

12.5.10
12.5.14
12.5.10
15.12.4
15.12.6
17.1.19
17.1.18
17.1.17
17.1.16

(2.174).
(2.175).
(2.174).
(2.507).
(2.508).
(2.612).
(2.612).
(2.612).
(2.611-612).

(radix et principium)”가 된다. 칭의는 성화와 관련해서 “목적에 이르는 수단(medium ad
finem)”이 된다. 그러므로 “은혜의 전체 경륜(tota oeconomia Gratiae)”이 믿음에 놓여 있다.

241

비록 의롭다 함을 받은 백성도 죄를 짓지만 성화는 칭의와 분리되지 않는다. 언약의 실체이
신 그리스도의 공로가 구원의 전체 과정을 통하여서 역사함에 있어서 “믿음의 견인
(Perseverantia fidei)”이 작용한다.

242

언약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듯이 그 분을 믿
는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은혜도 신약이나 구약을 통하여서 동일하다.

243

믿음으로 말미

암는 은혜는 그 “정도와 지각에 있어서는(quoad gradum et sensum)” 다양하나 “실체에 있어
서는(quoad substantiam)” 동일하다.
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였다.

245

244

실체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구약 백성에

은혜 언약의 조건(conditio)으로서 믿음은 그 의를 사전에(a

priori) 이루는 공로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적으로(a posteriori)—“부수적이자 결과적으
로(concomitanter et consequenter)” 역사한다. 오직 은혜 언약이 “조건 되어진(conditionatum)”
것으로서 여겨 지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 따라서 믿음을 조건으로 삼기 때문이다.

246

이렇듯 믿음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은혜를 성도의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에 기초하여 역사한다. 은혜 언약 가운데 역사하는 믿음은 행위 언약에 있어서 행위의
자리를 차지한다. 다만 그것은 사전적이 아니라 사후적으로서, 원인으로서가 아니라 결과로
서 그러하다. 믿음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화(persuasio)로서 그 자체 복음
의 약속 가운데 수여된다. 믿음은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무름의 의를 전가 받게
되는 도구로서 작용한다.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만이 그 분의 의를 믿음으로써 전가
받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에 이르는 도구로서 역사한다. 믿음은 “연합의
믿음(fides unionis)”이라고 할 것이다.

247

믿음이 그리스도와의 교제(communio)에 이르게 하는

도구로 역사함으로 그 작용은 칭의와 성화의 전체 과정에 미친다.

248

언약의 약속은 칭의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로 전체를 전가 받음에 미친다. 언약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 외에 행위를 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그리
스도와 연합한 성도에게 열매로 나타난다.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서 작용해야 한다(fides
debet esse per charitatem efficax)”(갈 5:6).

249

4. “그리스도를 믿음”—언약의 성취와 효과(affectus)

241
242
243
244
245
246
247
248
249

Turretin,
Turretin,
Turretin,
Turretin,
Turretin,
Turretin,
Turretin,
Turretin,
Turretin,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Institutio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Theologi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Elencticae
- 74 -

17.1.19 (2.612).
17.1.21 (2.612).
16.10.2 (2.603).
17.10.4 (2.603).
15.2.19 (2.447).
12.3.2 (2.165).
12.3.11-13 (2.166-167), 인용 12.3.13 (2.167).
12.3.14 (2.167-168).
12.3.15-17 (2.168-169).

우리는 지금까지 뚤레틴이 은혜 언약의 조건인 믿음이 그리스도를 믿음이며 그 조
건에 대한 약속이 다름 아닌 믿음의 대상인 그 분의 공로로 말미암은 의라는 것을 기독론적
이며 구원론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기독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은 성육
신한 그리스도의 전체 공로에 미침이 파악된다. 그것은 그 분의 고난과 순종을 함께 아우른
다. 그리스도께서 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의를 전가하시기 위하여 다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구원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은 칭의와 성화를 포함한
전 과정에 역사함이 파악된다. 성도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 말미암은 의의 전
가로서 열매를 맺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음”은 단지 “그리스도를” “믿음” 이상의 의
미가 있다.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obiectus)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그 분께서 중보자로서 다
이루셨음 뿐만 아니라 지금 중보하심으로써 그 다 이루신 의를 전가하심을 믿는 믿음을 포
함한다. 주관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은 객관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그의 의를 전
가 받음으로 설명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혜 언약의 약속으로서 하나님의 완전한 백성 됨
의 어떠함에 대한 인식에 이르게 된다.
뚤레틴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의 재위(sessio)를 대체로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하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그 분의 다 이루심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
기 위한 충분한 무름이 됨을 의미함을 강조한다.

250

그리스도의 승귀는 자신의 공로를 자신의

영 가운데 자신의 백성에게 전가하심으로써 다스리심에 다르지 않음이 부각된다.

251

둘째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 가운데 중보하심이 강조된다. 내려
오신 분으로서 올라가신 분께서는 “본성이 아니라 인격에 있어서(quoad personam, sed non
quoad naturam)” 그러하심이 천명된다:

252

재위는 “양성에 따른 그리스도의 인격에 고유하게

속한다(proprie Personae Christi competere secundum utramque naturam).”

253

그리스도의 승귀는

한 인격 양성 가운데서의 아들의 “중보자직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Officii
Mediatorii administratio)”이 돌려졌음에 대한 선포로서 다루어 진다.

254

그리스도의 승귀에 있어서의 중보를 다루면서 뚤레틴은 그 분의 비하가 그러하듯이
승귀 역시 인성과 관련해서 “주관적으로(subiective)”가 아니라 “주체적으로(denominative)”으
로 파악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255

신성과 관련해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

다. 이는 언제나 동일하다. 이러한 신성 가운데 제 2위 로고스 하나님은 영원히 중보직을 감
당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성육신

hypostatica)” 가운데 역사하지 않았다.
그 분의 왕국도 없다.

257

전의
256

중보직은

“위격적

연합에

의해서(ab

unione

그리스도의 비하와 죽음이 없이는 그 분의 중보도,

오직 “경륜에 따라서(oeconomice)” 그리스도는 이제 우리를 위한 중

250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3.17.7 (2.321): “. . .
iustificationem, ut testatur sibi plene satisfactum esse per ipsum.”
251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3.18.7, 8; 19.2, 3 (2.321, 322).
252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3.18.9 (2.323).
253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3.19.4 (2.324).
254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3.19.5 (2.324).
255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3.19.7 (2.325).
256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3.19.12 (2.325-326).
- 75 -

ad

nostri

보자가 되셨다.

258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오직 신인 양성의 중보 가운데서만 역사한다.

259

그리

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ta proj ton Qeon)”
역사하시며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와 함께(ta proj h`maj)” 역사하신다.

26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길(via, 제사장)이요 진리(veritas, 선지자)요 생명(vita, 왕)이” 되심으로

261

을 위한 모든 의를 “선포, 획득, 적용(Annunciatio, Acquisitio, Applicatio)” 하셨다.

우리의 구원
262

에도 이러한 중보자의 사역이 있었다. 다만 그것은 경륜상 그림자에 해당하였다.

263

구약 시대
여기에서

툴레틴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다 이루신 공로를 전가 받아서 사는 신약 시대 성도들의 나음
은 바로 그 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친히 중보하심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언약의 실체로서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동일하시니 그 분의 왕국도 “실체 자체에
있어서는(quoad substantiam ipsam)” 동일하나 “경륜의 형상과 방식에 있어서는(formam et
modum administrationis)” 다양하다는 입장이 여기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뚤레틴은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다루면서

대부분의

264

논의를

그리스도의

무름

(satisfactio)에 할애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해당한다. 그런데 뚤레틴은 그리
스도의 무름을 다시금 협의의 그리스도의 무름과 중재(intercessio)로 나누어서 이해하고 있
다. 전자는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미하고 후자는 지금도 천상에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미한다고 천명한다.

265

전자는 구원의 의의 획득(acquisitio)과

적용(applicatio)에, 후자는 그것의 보존(conservatio)에 관련시킨다.

266

그리스도의 천상에서의

대제상적 중보는 단순히 “탄원의 방식(per modum suffragii)”이 아니라 “사법적인 방식으로
(per modum iurisdictionis)” 역사한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중재를 통해서 한 번 흘리신 자신의
피의 “능력과 작용(vi et efficacia)”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의롭게 하실 것을 간구하
신다.

267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의 중재는 단지 계속적인 제사장 직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선지자직과 왕직과 함께 역사함이 지적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단번에 영원한 제사로 구
속의 의를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것을 적용하심이 자신의 지식으로 새롭게 하심과
더불어서 교회의 머리로서 다스리심과 분리되지 않음이 지적된다.

268

이러한 그리스도의 계속

적 중보로 말미암아 “우리의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perpetuae nostrae communionis cum
Deo)”가 있게 되는데

269

이는 오직 우리가 지체들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있기

257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3.19.11 (2.325).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3.19.8 (2.325).
259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2 (2.334-339).
260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5.10 (2.347).
261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5.7 (2.346).
262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5.9 (2.347).
263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5.2 (2.344-345).
264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17.3 (2.431).
265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15.2 (2.424). Cf. John Murray,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y, Vol. 2, The Claims of Truth (Carlisle, PE: Banner of Truth, 1977),
62-76. 머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재를 하늘에서의 대제사장적 중보라고 부른다.
266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17.4 (2.431); 14.15.2 (2.424).
267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15.11 (2.425).
268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17.7 (2.432).
258

- 76 -

때문이다. 이렇듯이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서 보증되며, 그리스도의 계속
적 중보는 “성도들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로부터 확증된다(confirmatur ex natura unionis
fidelium cum Christo).”

270

5. 결론: 칼빈-개혁주의 언약관의 수립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이라는 개념으로 은혜 언약의 조건, 약속, 성취
를 살펴 봄으로써 뚤레틴이 어떻게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실체적으로 동일하게 파악했는지
고찰했다. 뚤레틴은 그리스도께서 은혜 언약의 실체라는 사실은 은혜 언약의 유일한 조건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질료인(causa materialis)으로서 믿는 믿음을 도구인(causa instrumenti)
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 있음을 강조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의 연합한 성
도들은 그 분의 계속적 중보로 말미암아 그 분의 의를 계속적으로, 전체적으로 전가 받게
된다. 뚤레틴은 이러한 논지를 특히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교리에서 깊게 전개하고 있음을
보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이러한 대리적 무름이 이미 만세 전에 작정되었으며
구약과 신약의 시대를 통하여서 경륜적으로 역사해 왔다는 사실을 뚤레틴이 강조하고 있다
는 사실이다: 은혜 언약의 약속이 경륜으로서 드러난 것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복음으로서 이는 신약과 구약에 공히 역사한다.

271

뚤레틴은 구약을 “약속된 복음으로서(pro Evangelio promissio),” 신약을 “성취된 복
음(pro Evangelio completo)”로서 부른다. 우리가 evpagglia라고 부를 때 이는 전자를, euvagglion
이라고 부를 때 이는 후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구별 가운데, 세례 요한과 예수
의 사역을 복음의 시작이라고 부를 때,

272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

(principium doctrinae de gratia Dei in Christo)”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한다.

273

이러한 은

혜의 시작은 이미 구약 시대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뚤레틴은,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
를 새 언약의 보증(evgguoj)이라고 부를 때와(히 7:22) 마찬가지로,

274

구약 시대의 예수 그리스

도의 보증(sponsio)은 그 분께서 단지 담보자(fideiussor)가 된다는 사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이행자(expromissor)가 된다는 사실에 미친다고 강조한다.

275

구약 시대의 할례가 “믿음

으로 된 의를 인친 것”(롬 4:11)으로서 불리고 그 시대의 조상들이 마친 신령한 음료가 “신
령한 반석”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왔다고 전해지는 것은(고전 10:4) 그 당시에도 주님께서는
단지 그들의 구원의 담보자가 될 뿐만 아니라 전체 약속의 이행자가 되셨음을 보여 주었다

269
270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4.17.8 (2.432).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5.16.16-18 (2.527-528). 인용, 15.16.17

(2.527).
271 Cf. Strehle, Calvinism, Federalism, and Scholasticism: A Study of the Reformed
Doctrine of Covenant, 310-313.
272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5.24 (2.178).
273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5.25 (2.178).
274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9.18 (2.218).
275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9.4 (2.213).

- 77 -

고 논증한다.

276

구약 시대에는 아직 그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지만 그 요구는 마찬가지였으며

그들 역시 우리와 마찬 가지로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그들이 살게 될 것을(고후
5:15, 21) 믿었다는 사실이 적시된다.

277

뚤레틴은 신약과 구약을 통한 중보자 그리스도의 약

속이 동일했음을 설명함에 있어서 영원 전에 있었던 성부와 성자 사이의 구원의 협약에 문
의한다. 심지어 그는 콕체우스를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의 전가에 대한 작정이 없
었다면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전가되지 않았으리라고 말한다.

278

이러한 입장에 서서,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뚤레틴은 승귀하신 그리스
도의 신인 양성 가운데서의 계속적 중재(intercessio)가 구약시대에 단지 예표(repraesentatio)되
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역사했음을 강조한다. 다만 구약 시대의 그리스도의 중재는 아직은
몸(corpus)이 아니라 그림자(umbra)로서 그 분의 현재(顯在, praesentia)를 계시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뚤레틴은 성육신 전에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제 2위 로고스 하나님께서
는 중보자의 사역을 감당하셨음을 지적한다. 다만 그 사역은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
로를 그 분과의 연합 가운데서 인격적으로 전가하시는 것은 아니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공히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실체로 삼는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다만 그 분의 계속
적 중보 사역에 있어서 경륜상 차이가 있다.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이제 그리스도
께서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신 성도들을 위하여 친히 중보하심으로써 구원의 전체 과정을 주
장하신다. 구약 시대 백성에게 있어서는 이 점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를
약속 가운데 믿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던이 말하듯이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율법의 규범을
어떻게 이행했는가에 있지 않고 구속사적으로 어떤 경륜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었는가에 있
다.
학자들 가운데는 개혁신학의 연속성을 다룸에 있어서 칼빈의 언약관이 16 세기와
17 세기의 언약 신학자들에 의해서 순수하게 보존된 가운데 교리화 되고 심화되었다고 보거
나 역으로 그들이 그것을 왜곡시켰다거나 부패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불연속성을 주장
하는 후자에 속한 신학자들은 칼빈의 언약관에는 조건성이 없으나 후에 칼빈주의자들에 위
해서 그것이 강조되었다고 보거나,

279

칼빈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른 행위를 강조한 반면 이후

의 언약 신학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와 같이 인간의 의지에 따른 행위에 중점
을 두어서 회개가 믿음에 앞선다고 보았다고 하거나,

280

이와는 반대로 칼빈과는 달리 언약신

학자들이 중세의 실재론과 유명론을 혼합해서 현상적(유명론적)이며 주의주의적인 언약관을

276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9.20 (2.218).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9.14 (2.216-217).
278 Turretin,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12.9.5-11 (2.214-216). 특히 콕체우스의
인용, 12.9.9 (2.215).
279 Cf. James B. Torrance, “The Concept of Federal Theology—Was Calvin a Federal
Theologian?” in Calvinus Sacrae Scripturae Professor: Calvin as Confessor of Holy Scripture, ed.
Wilhelm H. Neuser (Grand Rapids: Eerdmans, 1994), 15-40.
280
R. T. Kendall,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 (New York:
HarperSanFrancisco, 1978), 201-204. 켄달의 이론은 헬름에 의해서 반박된다. Paul Helm,
Calvin and the Calvinists (Edinburgh: Banner of Truth, 1982), 5-6, 9, 61-70, and “Calvin and
the Covenant: Unity and Continuity,” Evangelical Quarterly 55/2 (1983), 65-81.
277

- 78 -

전개했다고 보는 견해가

281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윗시우스와 뚤레틴의 경우를 통하여서 보듯

이, 은혜 언약의 조건으로서의 믿음 조차도 은혜로 보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를
강조하는 칼빈의 입장은 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도 기본적으로 계승되었으며 오히려 더
욱 심화되어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282

개혁주의 신학을 언약의 토대 위에 세우고자 하는 노력은 최근에도 계속되고 있다.
마이클 홀튼(Michael S. Horton)의 저작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언
약의 궁극적 성취를,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적 관점에서 언약의 구속사적 성취를, 구원론적 관
점에서 그 성취된 의의 적용을 다룬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적 전통에 서서 원형계시와 모형
계시를 구별하고 후자의 역사 가운데 오직 낯선 분으로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언약이라고
보았다. 언약의 존재론적 의미는 우리를 만나시는 그 분 자신의 존재가 아니라 그 분께서
우리를 향하신 존재라는 측면에서만 추구된다고 본다.

283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와

의 연합 교리를 언약 교리의 핵심으로 제시한다. 그리스도의 연합에 있어서 중보자의 인격
이 강조되고, 이러한 연합이 의의 전가에 기초함을 합당하게 지적한다.

284

홀튼의 일련의 언

약에 관한 작품들은 주요한 신학적 주제들에 따른 언약신학적 의미를 추구함에 유익하다.
다만 그는 칼빈의 신학을 수시로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단지 개인
구원 과정으로서 강조했을 뿐 그 분께서 언약의 유일한 실체가 되심을 통하여서 신약과 구
약의 연속성을 다룸에 있어서는 미진했다.

285

언약의 일체성을 다룸에 있어서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에 대한 문제 의식을 새롭게
환기시킨 공이 “소위 바울 신학의 새로운 관점”을 주장하는 신약 신학자들에게 있음은 인정
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결론은 물론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 우리가 뚤레틴에게서 보았
듯이 칼빈과 그 이후 개혁신학자들은 은혜 언약의 하나임(unitas)을 그 실체가 되신 중보자

281 Stephen Strehle, “Calvinism, Augustinianism, and the Will of God,” Theologische
Zeitschrift 48/2 (1992), 221-237.
282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학자들은 대체로 개혁주의 언약의 전통이 칼빈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소위 “단일 전통설”을 주장한다. Cf. Lyle D. Bierma, German Calvinism in the
Confessional Age: The Covenant Theology of Caspar Olevianus (Grand Rapids: Baker, 1996),
150-153; “Federal Theology in the Sixteenth Century: Two Tradition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45 (1983), 317-321; Richard A. Muller, “The Covenant of Works and the Stability of
Divine Law in Seventeenth-Century Reformed Orthodoxy: A Study in the Theology of Herman
Witsius and Wilhelmus à Brakel,” Calvin Theological Journal 29 (1994), 93-95. 언약의
일체성의 교리에 대한 칼빈과 이전 신학자들의 견해에 대해서, 김영규, “칼빈에게 있어서
신구약 실체의 통일성,” 개혁주의 학술원, 편, [칼빈과 성경] (부산: 고신대학교 출판부,
2008), 89-126.
283 Michael S. Horton, Lord and Servant: A Covenant Christolog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onx, 2005), 3-13, 16-17.
284 Michael S. Horton, Covenant and Salvation: Union with Christ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onx, 2007), 특히 143 ff., 183 ff., 267 ff.
285 Michael S. Horton, Covenant and Eschatology: The Divine Drama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onx, 2002), 특히 181-219. 여기서는 신약과 구약을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파악은 하되 단지 그 역사성을 강조하는데 그치는 보스의 영향이 느껴진다. Cf. Geerhaedus
Vos, Biblical Theology: Old and New Testaments (Grand Rapids: Eerdmans, 1948), 14, 16,
19-26.

- 79 -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그로써 이신칭의 교리를 수립했다. 이러한 은혜 언약에 대한 기독론적
이며 구원론적인 이해가 함께 전개된 가르침이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로서 제시되
었다. 칼빈은 오직 성령의 은밀한 감화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286

그 분의 몸에 접붙임 되며 그 분의 모든 은혜와 그 자신에게 참여하여서 하나되기 까지 자
287

람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언약 신학을 대표하는 윗시우스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

도를 받음이 믿음이라고 간파했다.

288

개혁주의 신학의 열매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은

혜 언약이 실체—그리스도—에 있어서는 하나이나 경륜에 있어서는 다양함을 분명히 선포하
고 있다. 그리고 구약 시대의 성도의 칭의도 신약 시대의 성도와 하나며 동일함을 천명하고
있다.

289

그러므로 칼빈과 그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심화시킨 개혁신학자들이 복음보다 율법의

우위를 강조하면서 언약 신학을 발전시켰다는 이론은 마땅히 수정되어야 한다.

290

뚤레틴의 언약의 실체에 대한 기독론적 이해를 통하여서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 교리(locus)인 sola Scriptura 원리가 tota Scriptura 원리와 궤를 같이하며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뚤레틴의 언약 이해는 대체로 전통적인 주제들에 집중되어 있다.
그의 논의는 만세 전의 삼위 하나님의 구원 협약(pactum salutis)과 그 성취로서의 그리스도
의 비하와 승귀에 집중되어 있다. 칼빈과는 달리 뚤레틴은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
보 자체에 대해서는 깊이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학적 토대가 되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전가에 대한 교리는 충분히 전개하고 있다. 뚤레틴은 칼빈의 신학을 철학화한 것이 아니
라, 다만 학문적 열의와 방법론으로 그것을 정치하게 기술했다.

291

뚤레틴은 언약을 옛 언약

(신약)과 구약(새 언약)으로 파악하고 그것의 실체로서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체
계적으로 고찰함으로써 객관적 속죄론의 이해에 이르고 그 기초 위에 구원론과 교회론를 전
개했다는 측면에서 칼빈의 언약관을 합당하게 전개한 칼빈신학자라고 평가할 만하다.

286

292

Inst. 3.11.5 (CO 2.536-537); 3.17.12 (CO 2.600).
Inst. 3.2.24 (CO 2.418): “. . . quia Christus non eatra nos est, sed in nobis habitat,
nec solum individuo societatis nexu nobis adhaeret, sed mirabili quadam communione in unum
corpus nobiscum coalescit in dies magis ac magis, donec unum penitus nobiscum fiat.”
288 Witsius, The Economy of the Covenants between God and Man, 3.7.25-26.
289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 in Philip Schaff, ed.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Rep.
(Grand Rapids: Baker, 1996), 618 (7.6): “Under the Gospel, when Christ the substance was
exhibited, . . . There are not, therefore, two covenants of grace differing in substance, but one
and the same under various dispensations”; 628 (11.6): “The justification of believers under the
Old Testament was, in all these respects, one the same with the justification of believers under
the New Testament.”
290 이러한 입장을 주장하는 견해에 대해서, James B. Torrence, “Strengths and
Weaknesses of the Westminster Theology,” in Alasdair I. C. Heron, ed. The Westminster
Confession in the Church Today (Edinburgh: Saint Andrew Press, 1982), 49.
291 Richard Muller, “Scholasticism Protestant and Catholic: Francis Turretin on the Object
and Principles of Theology,” in After Calvin: Studies in the Development of a Theological
Tradi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144.
292 Cf. Beach, Christ and the Covenant: Francis Turretin’s Federal Theology as a
Defense of the Doctrine of Grace, 332-333.
287

- 80 -

제 8 장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293

8.1. 두 방면의 구속(redemptio)
a. 첫째 팔리운 어떤 것을 그것을 산 사람에게 그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는
것이다(레 25:23-28; 27:13-31). 즉 팔리운 것을 무르는 것을 뜻한다(룻 3:9-13;
14:1-12).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ai`ma w`j
avmnon)”(벧전 1:19)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evxagorazw, 贖良-여기서
良은 그냥 의미 없는 접미사임) 곧 되샀다(갈 3:13, 4:5). 그의 십자가의 피로
사람들을

사내셔서

“구속(th.n

avpolu,trwsin)

죄사함(th.n

a;fesin

tw/n

paraptwma,twn)을 받”게 하시고(엡 1:7) “화평을 이루사(eivrhnopoih,saj) . . . . .
[하나님과]

화목케(avpokatalla,xai)”

드리시고”(계

5:9)”

“구속의

하셨으며(골

날까지(eivj

h`meran

1:20),

이로써

avpolutrwsewj)

“하나님께

인치심을

받”게

하시며(엡 4:30) “영원한 속죄(lu,trwsin)”를 이루고(히 9:12) “영원한 기업의 약속(thj
aivwniou klhronomiaj)”을 얻게 하신다(히 9:15). 즉 예수 그리스도가 “새언약의
중보자(diaqhkhj kainhj mesithj)”로서 무르는 자(laeG, klhronomoj)이다.
b. 구속 곧 속량은 원수들에 포로된 자들을 구출하고 그 속박에서 해방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우리를 해방했다(계 1:5; 요 8:32-36; 롬
6:18, 22; 갈 5:1).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갈 4:1-5).
c.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피흘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다.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기 때문이다(히 9:22, “cwri.j ai`matekcusi,aj ouv gi,netai
a;fesij”). 생명이 피에 있은즉 피가 생명을 속한다(레 17:11, “rPek'y_ vp,N<B' aWh !D;h'AyKi]”).

8.2. 십자가상의 죽음
a.

예수

그리스도는

법정적인

선고를

받아서

형벌로

죽임

당하셨다.

빌라도의 선고는 비록 사람의 전횡에 의해서 내린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선고였다.
무죄한 자로서 정죄의 선고를 받음으로써 우리를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엄준한
293Cf. B. B. Warfield, “The New Testament Terminology of ‘Redemption’”(2.327-372),
“‘Redeemer’ and ‘Redemption’”(2.375-398), “Christ Our Sacrifice”(2.401-435). C. Hodge, 2.
469-470, 478-479, 501-523. 이 작품들을 통하여서 저자는 구원자와 구원에 관한 용어들을 잘
정리하고 있다.

- 81 -

심판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게 함이다. 재판관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함을 공언하고
그를 죽음에 넘김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적 죽음임을 보여 주었다. 이
294

죽음은 속죄(expiatio)이지만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킨 유화(宥和, propitiatio)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셨다(요
11:51-52).
예수의 죄목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자기증거이다(마 26:62-64; 막
14:61-62; 눅 22:67-70). 유대인들은 예수가 로마에 반항하는 “유대인의 왕”이 되고자
했다고 증언했으나(마 27:11, 22, 37; 막 15:2, 9, 26; 눅 23:2-3, 38; 요 18:33-38),
예수는 자신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임을 분명하게 했다(요
18:33-38).
b. 십자가 형벌.
예수는 가장 수치스러운 저주의 형벌인 십자가에 매달림을 당했다.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인데(신 21:23) 우리의 죄를 속량(“ejxhgovrasen”)하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다(갈 3:13).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므로(롬 6:23)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그리스도는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죄과와 짐 아래 죽게
되었다(고후 5:14-“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u`per pantwn)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dikaiosuvnh qeou)가 되게”하려 하심이다(고후 5:21).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
c. 십자가 처형(말씀을 이루심)
십자가

죽음은

죽음이어야

나무에

했고(히

달린

9:22)

저주의

뼈의

죽음이었다(신

꺽이움이

없고(요

21:23).
19:36)

이는
매장이

흘리는

따라야

것이었다(요 19:36). 십자가의 죽음은 이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성격—화해, 속죄, 대리 속죄]

“그가 희생 제물(victima)이 되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속,
294 “Expiation and propitiation are correlative terms. The sinner, or his guilt is expiated;
God, or justice, is propitiated. 속죄(expiatio)와 유화(propitiatio)는 “to cover sin”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rPeK;'와 “to reconcile oneself to any one by expiation”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iJlavskomai(propitium facio)와 “to reconcilie”이라는 뜻을 가진 katallavssw라는 동사와 모두
관련된다. 구약의 ac;n;(to remove or bear away)와 신약의 lutrovw, ajgoravzw(to purchase)와
ejxagoravzw(to purchase from) 라는 동사들은 모두 이와 같은 뜻을 함의한다. cf. C. Hodge, 2.
469-470, 478-479, 50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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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전, 그리고 용서(ajpolmvtrwsin kai; ajntilutron kai; iJlasthvrion)시라는 사실을 확신
가운데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구속의 방식을 말할 때마다 피가
언급된다. 그리스도의 피 흘림은 무름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의 부패를
씻어내는 대야로서였다(non modo ad litationem valuit effusus Christi sanguis, sed
lavacri etiam vice fuit, ad sordes nostras purgandas)[cf. Eph. 5:26; Titus 3:5; Rev. 1:5]”
(Inst. 2.16.6).

8.3. 십자가의 죽음=화해 제사
a.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해하심이다(롬 3:25; 5:8-10; 고후
5:18-19; 골 1:20-21; 요일 2:2; 4:10).
예수를 “화목제물(iJlasthvrion)”로 삼으시사(롬 3:25) 그 죽음으로 우리와
“화해하셨다(kathllavghmen)”(롬
“화목제물(iJlasmo;n)”로

5:10).

보내사(요일

하나님은

4:8-10)

사랑이시기

우리를

대신해서

때문에
죽게

아들을

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정하셨다(롬 5:8-11). 이로써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우리를 화목케 하사(“avpokatallaxai”)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며,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고자 하셨다(골 1:20-22).
b.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하였다.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을 예수의 피가 진정시키시고 화해시켰다(요일 2:2; 4:19; 롬
3:25; 고후 5:18-19; 엡 2:16; 골 1:20, 22).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벧전 1:19)로 속전(ajntilutron)을 삼아(딤전 2:6)
범죄의 자리에 의를 세우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해하셨다(롬 3:25; 5:9; 고후
5:19-21; 골 1:14; 롬 3:3-24; 벧전 2:22-24).

8.4. 십자가의 죽음=속죄 제사(expiatio)
a.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속죄 제사로 작정하셨다(사 53:7-12)
삼위 하나님의 구원 협약(pactum salutis)에 의해서 구원의 방식은 아들을
대속물로 바침으로 정해졌는데, 이를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r;z,)”(창 21:12) 이삭을
바치게 하심으로 계시하셨다(창 22:1-18). 이로써 아브라함의 “자손” “씨”인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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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세상 구속주로서 속죄 제물이 될 것임을 미리 알리셨다(갈 3:16; 행
3:25-26; 13:23; 롬 9:7; 히 11:18).
아브라함을 통해서 계시된 속죄 제사를 유월절 제사로 세우고 이스라엘에서
지키게

하셨다(출

12:1-28;

23:5-14;

그리고

16:1-8).

성막과

성전에서

속죄제사를 드리게 했다(레위기에 나타난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는
전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 헌신, 사랑에 나타난 중보를 의미한다. 레 1-7).
b.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담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 죽었다.
유월절 제사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36; 고전 5:7; 벧전 1:19; 계 5:6,
9-10, 12-13; 13:8)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예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avfapax)”(히

7:27;

9:12,

14,

26,

28;

10:10)

“영원한(dihnekhj)”(히 10:12) 제사를 드려서 죄를 완전히 제거 하셔서 더 이상의
속죄 제사가 필요 없게 하셨다(히 10:18).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skia)요 참 형상(eivkwn)이 아니므로” 그것에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케 할 수(teleiwsai) 없”으며(히 10:1) 다만 죄를 깨닫게 해서(히 10:2)
생각나게 할 뿐이며(히 10:3)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이하지 못한다(히 10:4,
11). 오직 온전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심으로 받는 제사로 예비한 것이 그리스도의 피
제사이다(히 10:5-7-시 40:6-8). 따라서 우리의 구원으로 구약 백성들의 구원이
성취되었다(히 11:40)
c. 예수의 피가(벧전 1:18-19; 딤전 2:6; 히 9:12-14; 10:19; 12:24; 계 1:5)
속량(贖良)하는 속전(贖錢)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 양으로 죽어 피흘림으로 그 피로 사람들을 죄에서
사냈다(벧전 1:18-19; 딤전 2:6; 계 5:9). 그리스도의 피가 사람들을 죄에서 사내는
속전(antilutro§ uper pantwn, 딤전 2:6)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물로 바쳐서 “여호와의 뜻을 성취”(사 53:10)하셨는데,
그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며 그들의 죄악을 친히 감당”하셨다(사
53:12). 그는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서 희생이 되셨다(고전 5:7). 이는 “오직 흠
없고

없는

어린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것이(timivw/ ai{mati wJ" ajmnou' ajmwvmou kai; ajspivlou Cristou)”다(벧전 1:19).
죄는 생명으로 속해지는데 피에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다(레 17:11; 히 9:22).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피다(히 9:14). 이 피가 속전이 되어서(계 5:9)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 1:5)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시고 “땅에서 왕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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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하신다(계 5:10).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여 하심이니라”(고후 5:21).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하나님은 우리와 만물이 하나님과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셨다(고후 5:19-20).
c. 예수는 대제사장으로서 죄를 속하였다(히 2:17; 4:14; 5:5, 10; 6:20; 7:17,
24-28; 8:1-2; 9:11-15, 24-28).
구약의 제사에 의하면 제사장(sacerdos)은 제물(sacrificium)일 수 없다. 오직
이삭만이 첫 제사에서는 제물이 되었고 두 번째 제사에서는 제사장이 됨으로써(창
22:9-13)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예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몸으로 제물이 됨과 동시에 그의 인격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히 2:17)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기
위해서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함으로써 온전한 제물이 되셨다(히 2:10, 18). 이로써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하셨다(히 1:3).
히 5:8-10,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제물과
제사장이 되시는 주님께서 구원의 근원이 되심을 잘 말해 주고 있다.
ㄱ)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히 1:2-3; 2:10; 3:3-6;
4:14)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히 5:6; 6:20; 7:16, 21).
그러므로

그의

제사

직분은

갈리지

아니하고

항존한다(히

7:24).

ㄴ) 예수 그리스도는 한번의 제사로 죄를 완전히 속하셨다. 그리스도는
레위 제사장들과는 달리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히 7:26)로서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히 9:14), 하나님께서 예비한 “한 몸”(히 10:5)을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셔”서(히 9:26)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사(히 10:12)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히 10:14).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제 보좌 앞에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 갈 수
있게 되었다(히 4:16; 10:19).
ㄷ)

그리스도는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크고

온전한”

장막이요

성소인(히 9:11-12)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tw
proswpw tou qeou)” 제사를 드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휘장 곧 저의 육체”를

- 85 -

찢으시고

“피”로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길(oJdo;n provsfaton kai; zw'san)”이 되심으로(히 10:19-20) 우리의 인성으로서 그곳에
나아가게 하셨다.

8.5. 십자가의 죽음=대리적 속죄(satisfactio vicaria)
a. 한 의인 그리스도가 죄인을 대신하여 죄 때문에 죽었으므로 모두가 죽은
것이 된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한 사람의 의인(벧전 3:18)을 죄로
정하여(고후 5:21) 만인의 속전으로(딤전 2:6) 죽게 하셨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롬
6:23)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고후
5:14).
b. 모든 택자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대신 죽었다.
웨슬리(John Wesley)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만민의 죄를 제거한다.
이 가르침을 로마 교회와 알미니안 신학이 다 수납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2:9의
예수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uJpe;r panto;")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전체
인류를 구원의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이하의 구절에서 보듯이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그의 “백성,”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예수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히 2:9-18).
c.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값을 지불함이어서 죄의 세력이 궤멸되므로 사망이
물러가고 생명이 도입된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그의 몸을 드리므로(갈 1:4)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시고(요일 3:5), 의롭게 하셔서 진노에서 구원하시고(롬 5:9),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셨다(딛 2:14).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살림과 동시에 우리를 살리셨다(엡 2:5; 골 2:12-15; 3:1; 요일 4:9).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는데(요일 2:25),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이 우리의 죽을
몸을 살리는 능력이자 보증이다(롬 8:11; 고후 5:5). 한 사람의 의인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부활에 이르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롬
5:18-21; 고전 15:21-22).

8.6. 구속에 대한 그릇된 현대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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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슐라이엘마허: 예수가 가진 무한한 신의식에 성도들을 수납하는 것이
구속이다. 그리고 구속주의 자기 행복(Seligkeit)에 신자들을 수납하는 것을 화해라고
본다. 구속은 죄사함이 아니라 사람인 예수의 가히 신적이라고 할만한 신의식에
신비적으로 동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b. 릿츨: 구원은 죄의식을 제거하고 사랑이신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 객관적인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죄인의 주관적인 변화로
왜곡된다.
c. 발트: 구원을 하나님의 존재에의 동참으로 본다.
d. 라아너: 구원을 하나님의 존재를 통보받아 신화하는 것으로 본다.

- 87 -

제 9장 그리스도의 죽음과 지옥강하

9.1. 그리스도의 사망과 장사 지냄
칼빈은 사도신경의 “죽으시고 장사한지(mortuus et sepultus)”라는 구절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구원의 값을 지불한 것”과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예함으로써

그것이

우리의

세상적인

지체들을

죽이게

한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와 “우리 육신의 죽음”의 이중적인 은혜가
있다고 한다(Inst. 2.16.7).
a. 죽음에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었다. 그러므로 완전한 육체의 사망이다.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단순히 영적인 죽음이라거나 육신이 잠시 의식을
잃었던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다(요
10:17-18). 그 죽음은 성경에 응한 예언된 죽음이었다(요 19:31-37).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o{te ou\n e[laben to; o[xo" (oJ) !Ihsou'" ei\pen, Tetevlestai, kai; klivna" th;n kefalh;n parevdw
ken to; pneu'ma” (요 19:30).
b. 몸과 영혼이 분리된 상태에서도 로고스의 인격은 그가 취택한 인성과
인격적 연합(unio personalis, hypostatic union)을 계속하였다. 이 인격적 연합이
해소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양성적 중보를 통한 의의 전가가 불가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협약(consilium salutis)에 기반한 구속 역사가 성취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실체(substantia)를 영혼으로 볼진대 그리스도의 양성적 연합(unio) 가운데 한
인격(persona)이

위격(hypostasis)으로

존재(subsistentia)하심(unitas)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해소되지 않았다.
c. 예수는 죽음의 상태에 삼일간 머무르므로 죽은 자들의 세계에 속하였다.
그러므로 무덤의 저주를 우리에게서 제거하여, 휴식의 처소가 되게하였다.
d. 그리스도의 신격은 자기의 영혼과 함께 하늘에 있었고(눅 23:43), 그의
몸은 무덤에 있었다.
e. 장례되어(마 27:57-66; 막 15:42-47; 눅 23:50-56; 요 19:38-42) 부자의
무덤에 묻히므로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였다(사 53:9).
f. 장례되어 삼일간 무덤에 유하였다. 삼일간 무덤에 장사함은 예수 자신의
예언(마 12:40; 16:4)대로 이루어졌고, 요나가 예표한 대로였다(욘 1:17). 이 사실을
바울은

성경대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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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예언의

성취(호

6:2)로

확정하였다(고전 15:3-4).
g. 하나님의 거룩한 자는 해체와 부패를 보지 않았다(시 16:10; 행 2:27, 31;
13:34-37).

[장사의 비하성]

a. 사람이 흙으로 돌아 가는 것은 형벌의 한 부분이다(창 3:19).
b. 죽음으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됨은 죄의 결과이다.
c. 성경은 장례가 비하임을 말한다(시 16:10; 행 2:27, 31; 13:34-37).
d.

우리의

죽음을

죽으시므로

우리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됨으로써 우리가 죽음(mortificatio)으로 생명(vivificatio)에 이르게 하신다. 이것이
비하이다(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eiv ga.r su,mfutoi gego,namen tw/| o`moiw,mati tou/
qana,tou auvtou/( avlla. kai. th/j avnasta,sewj evso,meqa).”

9.2. 지옥강하(descensus ad inferos)
a.

사도신경의

초기형인

루피누스형과

예루살렘의

구절만

“장사되시고(sepultus,tafenta)”라는

씨릴의

나타난다.

본문에는
지옥강화는

로마교회형(Aquileian, 390)에 “descendit ad inferna(inferos)”로 나타난다. 헬라인들은
여기서

inferna를

a{/dh§(지옥,

하계)로

번역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로마교회형을 받되 지옥 강화 부분은 뺀 것이다.

b. 칼빈의 이해
ㄱ. 예수 그리스도가 죽고 장사되시고 지옥에 내려 가셨다(mortuus et
sepultus et descensus ad inferos)는 표현은 몇 몇 예외를(예컨대 니케아 신경은
장사에 관해서만 말하고 아다나시우스 신경은 지옥에 내려 가심에 대해서만 말하며
어거스틴은

De

symbolo

ad

catechumenos에서

이를

다루지

않음)

제외하고는

교부들에 의해서 다루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칼빈은 지옥강하가 구원을
위해서 유용하고 경멸치 못할 신비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전체 구원(summa
redemptionis)에 대한 이 고백의 중요성이 명백함으로 만약 신경에서 이 고백을
제하여 버리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한 많은 은혜를 잃게 된다고 말한다(Inst.

- 89 -

2.16.8, CO 2.375).
ㄴ. 지옥강하를 그리스도가 율법 아래 죽은 선조들에게 구원의 완성을
선포하고 그들을 조상림보(Limbus patrum)로부터 구출해 내는 것으로 보는 카톨릭의
교리(특히 아퀴나스)를 반박하면서, 칼빈은 벧전 3:19(“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를 그리스도가 그의 영의 능력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여태껏 소망 가운데서만 맛보았던 은혜가 이루어졌음을 선포했다고 해석한다(Inst.
2.16.9).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지옥에서의 복음의 전파라거나 사단의 압제로 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심의 극치와 그로 말미암은 궁극적인 구속사적
성취와 그 권세의 지배를 의미한다.
ㄷ. 그러므로 지옥강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사망에 매여
있지 않음을 제외한(행 2:24) 모든 육체적이며 영적인 고통(spiritual pangs)을
당하심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비하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구속의 값으로 자신의 육체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하게 저주받고
버려진 사람이 영혼의 고통 가운데 겪는 무서운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강조된다(Inst. 2.16.10).
ㄹ. 지옥강하 고백의 요체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죽음을 삼키심이다.
그리스도가 심한 통곡과 눈물 가운데 기도한 것은 죽음을 면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가진 분으로서 죄인과 같이 죽음에 삼킴을 당하지 않고자 함에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좇아 죽음에 삼키움을 당하고 구원을
이루었다. 즉 죽으심으로 죽음의 공포를 가져 가셨다. 힐라리(Hilary)가 말했듯이
“십자가, 죽음, 지옥—이것들이 우리의 생명이다(crux, mors, inferi, nostra vita sunt).”
“하나님의 아들은 지옥에 있으며 사람은 천당으로 이끌려 간다(filius Dei in infernis
est; sed homo refertur ad coelum)”(Inst. 2.16.11, CO 2.377). 암부로스(Ambrose)가
말했듯이
고백할

십자가를
것이다.

부끄러워하지

만약

그리스도가

않는다면
그의

그리스도의

가운데

슬픔(Christi
우리의

tristitia)을

고통을

함께

나누어가지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중보는 육체에만 머물고 말
것이다(Inst. 2.16.12, CO 2.378).
ㅁ. 결론적으로 칼빈은 지옥강하를 신경에 포함시키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다만 이를 지옥의 영들을 지배하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주님의 영적 고난
당하심으로 이해한다. 예컨데 롬 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을 지옥 강하 교리로 설명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저
육체의 죽음만 죽으셨다면, 그것은 효력이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보응의

- 90 -

처절함을 그대로 받으셔야 했고, 그의 진노를 가라 앉히시고 그의 공의로운 심판을
만족시켜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또한 지옥의 군대들과 영원한 죽음의
쓰라림을 친히 당하셔야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 53:5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를 “그리스도께서 행악자들을 대신하여 보증물과 담보물이
되셨고 그들이 받아야 할 모든 형벌들을 친히 다 당하셨다”고 해석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 구속의 값으로 드려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으로도 정죄
받고 버림 받은 사람의 처절한 고통을 당하셨다는 지옥 강하의 영적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c. 희랍교회는 지옥강하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과 영혼이 함께 음부에
가서 거룩한 조상들의 영혼들을 해방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눅 23:40-43)와
함께 그들을 낙원으로 옮겼다고 가르친다.

d.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영혼으로 구약성도들이
구속의 계시와 적용을 고대하고 있는 조상림보(Limbus patrum)로 가서 경건하게
죽은 성도들의 영혼을 죽음의 상태에서 구출하여 천당에 들여 보내셨다고 한다.
희랍교회와 로마교회에 의하면 구약 시대 백성들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 된다.

e. 루터 교회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으로 소생한 후 부활 전 사이의 짧은
시간 동안에 그의 육체와 영혼으로 지옥에 가서 거기서 사단을 정복하고 승리를
선포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승귀의 출발이다.

295

[결론]

1. 웨스터민스터 대요리문답서(50)에서 보듯이 지옥강하는 죽음 혹은 죽음의
상태에 있음과 다르지 않다. “Christ’s humiliation after his death consisted in his being
buried, and continuing in the state of the dead, and under the power of death till the
third day, which hath been otherwise expressed in these words, He descended into hell.”
2. 구약의 l/av]이라는 단어(헬라어 a{/dh§, 라틴어 orcus rapax 혹은 inferna에
295 Form of Concord 9.2: “Simpliciter credimus, quod tota persona (Christi), Deus et
homo, post sepulturam, ad inferos descenderit, Satanam devicerit, potestatem inferorum everterit,
et Diabolo omnem vim et potentiam eripuerit. Quomodo vero Christus id effecerit, non est ut
argutis et sublimibus imaginationibus scrutemur.”

- 91 -

해당)는 단지 죽음을 뜻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예컨데 창 37:35의 “내가 음부에
내려(hl;aov] drea,e, 70인경 번역은 katabhvvsomai eij§ a{/dou, 불게이트 번역은 descendam
in infernum)”에서와 시 30:3(원어 30:4)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서 나를 살리사(ynIt'yYIji yvip]n" l/av]A@mi t;yli[>h, hw:hy_)”에서 l/av은 모든 사람이 죽는
죽음을

의미한다.

이는

시편

16:10의

말씀에서도

동일하다(인용

2:27-31,

13:34-35):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3. 엡 4: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는

말씀은

지옥

강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비하로서의 육신으로 오심과 승귀를 말한다.
딤전

4.

3:16의

“.

.

.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보이시고(ejdikaiwvqh ejn pneuvmati, w[fqh ajggevloi") . . .”는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Deus
manifestatus in carne)의 신성의 증거를 표현하는 것이지 지옥의 악한 영들에게
보였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천사(ajggevlo")는 다른 수식어 없이 그냥 ‘악한 천사’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5. 벧전 3:18-19 “. . .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qanatwqei;" me;n sarki; zw/opoihqei;" de; pneuvmati ejn w|/ kai;
toi'" ejn fulakh'/ pneuvmasin poreuqei;" ejkhvruxen).” 본 구절은 칼빈과 개혁주의 전통을
따라서 지옥과 같은 고통과 쓰라림과 관련된 말로 해석하거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으로 무덤에 누워있는 동안의 죽음의 상태와 관련지음이 합당하다. 본 구절의
sarki;와 pneuvmati를 해석함에 논란이 있다. 대체로 이를 인간의 구성 요소로서의
savrx와

pneu'ma로

읽는

사람들은

본문을

육체는

죽었으나

영혼은

살아

있어서(zw/opoihqei;"를 being preserved alive로 해석) 지옥에 내려갔다는 실제적인
해석을 한다. 반면에 롬 1:3에서와 같이 sarki;를 인성에 관하여(kata; savrka)로
pneuvmati를 신성에 관하여(kata; pneu'ma)로 읽는 사람들은 본문을 그리스도가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셔서(zw/opoihqei;"를 being quickened로 해석) 지옥의 영들에게
까지 속죄의 권세가 미친다는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에 기반한 영적인 해석을
한다. 이들은 복음의 전파(khruvssein)는 산 자들에게만 해당한다는 의미에서 본문을
통하여서 지옥강하라는 개념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결국 지옥강하는 죽음에
머무심이며, 이 비하로부터 죽음의 죽음으로서의 죽음인 부활의 권세가 나온다는
296

면이 부각된다.
296

Beza, Novum Testamentum, 1 Pet. 3:19. (Geneva? 1565), 570. “Christus, inquit
- 92 -

결론적으로, 바빙크가 언급하듯이,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복종한 시간은
대적의 때요 어둠의 권세자의 때였다(눅 22:53). 그리스도는 이 시간이 가까이옴을
알았고 자신을 자발적으로 넘겨 주셨다(요 8:20; 12:23, 27; 13:1; 17:1). 그의 사랑과
순종의 가장 높은 영적인 권세를 나타냈던 그 시간에(요 10:17-18) 그는 전혀
무기력하게 보였다. 대적들은 그들이 좋아하는대로 그에게 행하였다. 어둠이 그
위에 영광을 얻었다.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참으로 그는
지옥으로 내려갔다.”

297

[apostolus], quem dixi virtute vivificatum, jam olim diebus Noe, quum appararetur arca, profectus
sive adveniens, e coelo videlicet, ne nunc primum putemus illum ecclesiae curam et
administrationem suscepisse adveniens, inquam, non corpore (quod nondum assumpserat), sed ea
ipsa virtute, per quam postea resurrexit, praedicavit spiritibus illis, qui nunc in carcere meritas
dant poenas, utpote qui recta monenti Noe . . . . parere olim recusarint.”
297 Bavinck, Magnalia Dei, 381.
- 93 -

제 10 장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Resurrectio et ascensio
Christi)

본성의

교통(communicatio

naturarum)을

속성교통(communicatio

idiomatum)으로 이해하는 루터파에 의하면 인성을 비하와 승귀의 주체로 본다.
승귀는 인성이 일찍 성육신에서 전달되었으되 감추었거나(kruvyis) 포기했던(kevnwsi§)
신적 속성들의 완전한 행사를 얻은 것으로 해석한다. 개혁파의 견해에 의하면
승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 위격이 존귀와 영광으로 관 쓰고 높임을 받아서
율법의 저주를 깨고 그 요구를 만족하여 통치하는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10.1. 부활(resurrectio Christi)
a. 의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며(고전
15:17) 복음 전파도 믿음도 모두 헛것이 될 것이다(고전 15:14, 17). “It is the
resurrection event that forms the hinge between the Jesus of history and the Christ of
faith.”

298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o]j paredo,qh dia. ta. paraptw,mata h`mw/n kai. hvge,rqh dia. th.n
dikai,wsin h`mw/n)”(롬 4:25).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형벌이 다 치르짐으로써 심판이 만족되고
저주가 사라지며 온전한 화해로 구원이 완성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지워지고 죽음이 소멸된다; 부활을 통하여서 의가 회복되고 생명이 일어난다.
부활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안에서 “능력과 효력”을 갖게 된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Euvloghto.j o` qeo.j kai. path.r tou/ kuri,ou h`mw/n VIhsou/ Cristou/( o` kata. to. polu.
auvtou/ e;leoj avnagennh,saj h`ma/j eivj evlpi,da zw/san diV avnasta,sewj VIhsou/ Cristou/ evk
nekrw/n)”(벧전 1:3). 부활로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을 비취는 명확한 거울이며
우리의

믿음을
298

견고하게

붙드는

지주(支柱)인

F. F. Bruce, Jesus: Lord & Savior, 126.
- 94 -

하늘의

권능”을

선포한다.

약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행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부활이 함께 언급되며,
부활에는 또한 죽음이 함께 언급된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라”(롬 8:34)(Inst. 2.16.13).
부활은 창조중보자가 구속중보자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행 9:1-19; 빌 2:6;

1:15-17;

확정되었다.

9:5).

부활은

부활이

구속이

이루어지므로

성취되었음에

그리스도의

대한

죽음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으로

선포이시다.

부활은

십자가에서 버림 받았던 아들이 만세 전의 구원협약을 이룰 것으로 작정되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이었음을 선포한 것이다(마 1:11; 행 13:33).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부활로 하나님은 예수를 인류의

구속을

위한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행 2:36).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죄사함을 얻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행 2:38). 그리하여 타락한 인류가 새
인류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계 1:5),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이 장막을 치고
머무는 거소가 된다(계 7:15). 새 인류의 대표가 부활함으로써 생명의 새 세상이
창조된다. 그러므로 부활은 재창조의 시작이다.

b. 부활의 근거와 능력

무죄한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써

인류의

죄값을

치르고

죄를

제거하심으로(골 1:14) 사망을 물리치고 생명을 도입하였다(딤후 2:11). 이러한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롬 5:18)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살리셨고(행 2:24, 31-32; 3:15;
4:10; 5:30-31; 10:40; 13:30, 33-34, 37; 17:31; 롬 4:24-25; 8:11; 10:9; 고전 6:14; 15:15;
갈 1:1; 엡 1:20; 골 2:12; 살전 1:10; 벧전 1:21), 그리스도 스스로 자신의 권한과
299

자신의 능력으로 일어나셨다(요 11:25; 롬 1:4; 14:9; 고전 15:20-21; 살전 4:14).

죽음의 고통은 참으로 새로운 생명을 낳는 진통이었다(행 2:24). 그리스도는
죽음에서도

완전한

자기부정과

절대적인

사랑과

순종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정복하였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가 정한 때 곧 어둠의 권세의 때에(요 7:30; 8:20;
19:11) 죽음을 죽음으로써 죽음을 죽이는 죽음을 이루셨다. 그리고 그 사심으로
299

루터란들에 의하면 이는 인성에 교통된 신성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 곧 인성이

주체이다.

- 95 -

우리를 살리셨다(롬 5:18-19; 4:25). 따라서 사실 원리적으로 사단이 죽음의 권세와
죽음의 지배권을 가진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수단을 통하여 그에게
300

승리하였다(히 2:14).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이제 그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므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해야 한다(골 3:1-5; 롬 6:4). 이
가르침은 다음 세 가지의 은혜를 제시한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본을 좇아서
생명의 새로움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을 통하여서 의롭게 거듭난다.
그리고 그의 부활로 실체적으로 보증된 우리의 부활을 확신하게 된다(Inst. 2.16.13).
부활은

아들의

성취에

대한

아버지의

아멘이다.

부활은

구원협약을

이룸으로써 이룬 의를 택한 백성에게 전가하는 아들의 권능을 선포함이다. 이는
또한,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의 전가을 받아서 죽을 수 밖에 없으므로(죄책)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한(오염) 인류가 그리스도의 모든 율법을 일점
일획도 어김 없이 지킨 적극적 순종과 고난당하심과 십자가의 죽으심의 소극적
순종을 통하여서 이루신 완전 절대한 공로로 말미암아 죄를 사함받고 의를
전가받는 자리에 서게 됨이 부활의 권능이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보를 보증하고 선포한다.
ㄱ. 칭의. 부활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무죄에 대한 공적 선포이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자로 여길찌어다(o] ga.r avpe,qanen( th/| a`marti,a| avpe,qanen
evfa,pax\ o] de. zh/|( zh/| tw/| qew/|Å ou[twj kai. u`mei/j logi,zesqe e`autou.j Îei=naiÐ nekrou.j me.n th/|
a`marti,a| zw/ntaj de. tw/| qew/| evn Cristw/| VIhsou/)”(롬 6:10-11).
ㄴ. 성화. 의롭다함을 받은 백성마다 이제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
2:20).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kai. u`pe.r pa,ntwn avpe,qanen( i[na oi` zw/ntej mhke,ti e`autoi/j zw/sin avlla. tw/|
u`pe.r auvtw/n avpoqano,nti kai. evgerqe,nti)”(고후 5:15). 이제 죄에 죽은 자는 다시 죄
가운데 살지 않는다(롬 6:1 이하).
ㄷ. 영화.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에 대한 “산 소망(eivj evlpi,da
zw/san)”이 있게 하신다(벧전 1:3-5). 이 소망은 우리의 낮은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su,mmorfon tw/| sw,mati th/j do,xhj auvtou/)”로 변하여(빌 3:21) 얼굴과
300

Bavinck, Magnalia Dei, 384.
- 96 -

얼굴을

대하여

대언자로서

주를

아버지와

봄에(고전

13:12)

있다.

더불어서

역사하실

그리스도가

것이다(롬

구원의

6:8-10).

완성

부활의

까지

권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중보자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의 부활과 중생, 하늘과 땅
위의 승리를 가져올 것이다(행 4:2; 롬 6:5; 8:11; 고전 15:12 이하). “그는 새 언약의
중보(diaqh,khj kainh/j mesi,thj)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4-15).

c. 부활자

ㄱ. 그리스도의 영혼과 육체가 그의 신적 인격에 합쳐져서 천상 곧
하나님의 영광 앞에 살 수 있는 영체로 부활하였다. 그는 생명의 주로서 “살려
주는 영(yuch.n zw/san)”(고전 15:45)이 되셨다.
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물질적이고 진정한 신체(눅 24:39)를 가졌으나,
그것은 놀랄만한 변화를 받은 결과로 쉽게 인식되지 아니하였고 돌연 출몰하는
양태를 나타냈다(눅 24:31, 36; 요 20:13, 19; 21:7). 그리스도는 “육의 몸(sw/ma
yuciko,n)”이
형체”로

아니라

다시

“신령한

사셨다(빌

몸(sw/ma

3:31).

pneumatiko,n)”(고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의

15:44)—“영광의
정신으로부터

인성에

비본질적인 요소들인 연약함과 타락으로 인한 제 양상들이 제거되고 그는 새로운
천계환경에 완전히 조절될 새로운 성질을 갖추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성의
소생(蘇生)만이 아니라 영화를 포함한다.
부활자는 피조물이 이를 수 있는 최상의 단계에 도달해서 그의 인성은
하나님의 현시기관이 되었다(계 1:13-18). 그는 동일한 인격으로 부활했다(계 1:13,
18; 요 20:15-17, 20; 21:1-7, 12; 막 16:9; 마 28:9). 부활은 새 창조(creatio nova)가
아니라 재창조(recreatio)이다.
ㄷ.

그리스도는

부활자로서

“잠자는

자들의

열매(avparch.

tw/n

kekoimhme,nwn)”가 되시고(고전 15:20) 인류의 부활을 결정하고 보장한다(롬 8:34;
고전 15:22-24; 고후 4:14; 골 2:12-13; 3:1; 엡 2:5-6). 이 부활의 보증(ajrrabwn)으로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로 확신케 하신다(고후 1:22; 5:5; 엡
1:13-14; 4:30; 롬 8:11).
ㄹ.

그리스도는

자기의

부활로

사망을

이기고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시어 우리가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하며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생명의 주가 되셨다(계 1:5; 행 2:31; 롬 5:17, 21; 6:23; 8:2; 고전 15:22; 고후

- 97 -

4:10-11; 골 3:3-4; 딤후 1:1, 20; 요일 5:11-12; 5:20). 그가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계 1:17-18).
ㅁ. 부활로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의 대권을 받은 주가 되셨다(마 28:18; 골
1:17-18; 행 2:33, 36; 5:31; 10:42; 롬 14:9; 고후 4:5; 빌 2:9-11; 벧전 3:22). 이로부터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구약의

여호와

칭호인

주(Adonai,

Kurio§,

Dominus)로 불렀다(행 1:6, 21, 24; 2:36, 47; 4:33, 등).
ㅂ. 그리스도는 부활의 권세로 인류를 새 인류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마침내 모든 창조를 변화시킬 것이다(벧후 3:4-7; 행 3:21; 롬 8:21; 고후 5:17; 계
21:5). 벧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행 3:21,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롬 8:21,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고후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계 21:5,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d. 부활에 대한 성경 증언

베드로는 오순절에 그리스도가 사망의 고통에 매여 있을 수 없음을 구약
시편을 인용함으로써 설교했다(시 16:10, 행 2:24-31). 바울도 소아시아 비시디아
안디옥을 전도하며 동일한 시편 본문으로 다윗과 달리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임을 당하지 않는다고 설교했다(행 13:34-37). 주님께서도 친히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셨다(16:21; 20:19; 요 10:17-18).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 사도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행 1:3). 베드로가 설교했듯이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tou/ton to.n VIhsou/n
avne,sthsen o` qeo,j( ou- pa,ntej h`mei/j evsmen ma,rturej\ th/| dexia/| ou=n tou/ qeou/ u`ywqei,j( th,n te
evpaggeli,an tou/ pneu,matoj tou/ a`gi,ou labw.n para. tou/ patro,j( evxe,ceen tou/to o] u`mei/j Îkai.Ð
ble,pete kai. avkou,ete)”(행 2:32-33).
복음서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 다른 여인들, 베드로,
여덟 제자들, 도마와 다른 제자 모임시,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요한과 야고보의 두 제자 등 일곱명의 제자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주님의 부활은 크게 육체적 현현과 빈 무덤으로 증거되는데, 증인들은
무덤이 비었다고 외치기 보다는 살아계신 주님을 보았다고 외쳤다. 그들은 주님의

- 98 -

육체의 부활을 증거했다. 특히 요한복음은 이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20-21장).
사도 바울은 그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한다. 그는 최초
작품인 갈라디아서(AD 48년경)의 인사말에서 자신을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로 소개한다(1:1). 그리고 자신의 복음의 기원을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천명하고 이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다메섹 사건과(AD 33년경)
더불어서 전한다(1:11 이하). 그리고 이어서 집필된 데살로니가 전서(AD 50)에서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아들의 강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1:10). 부활에 대한 가장 주목할만한 증거는 고린도 전서 15:1-8의 말씀이다.
여기서 바울은 복음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로 보고, 특히 부활의
증거에 초점을 맞춘다. 같은 서신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문의하면서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ouvci. VIhsou/n to.n ku,rion h`mw/n e`o,raka)”고 반문한다(9:1).
본다는 개념은 동일서신 13:12에서 정점에 이른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ble,pomen ga.r a;rti diV
evso,ptrou evn aivni,gmati( to,te de. pro,swpon pro.j pro,swpon\ a;rti ginw,skw evk me,rouj( to,te
de. evpignw,somai kaqw.j kai. evpegnw,sqhn).” 바울은 이 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겠노라고 말했는데(2:2), 전체의
맥락상 이는 부활의 메시지를 기반한 지식을 의미한다고 볼 것이다. 즉 십자가의
선포는 부활의 선포를 담고 있다.

e. 부활에 대한 반대 의견

ㄱ. 슐라이엘마허: 하나님의 보좌 우편 앉으심은 비교 불가능한 존엄성의
표현이지 가시적인 부활과 승천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ㄴ. 릿츨: 부활은 그리스도의 우수성에 대한 표현이다.
ㄷ. 불트만: 부활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의 생애에 역투사한 것이다.
부활은 부활의 선포에 대한 믿음이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ㄹ. 몰트만: 부활은 묵시론적인 소망의 상징을 취택한 것일 뿐이다.
ㅁ. 라아너: 예수의 부활은 그의 인격의 항속적 타당성 곧 자기를 절대적
구주로 주장한 것의 승리를 뜻한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그의 생의 타당성을
획득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제자들의 믿음에로 부활하였다.
ㅂ. 발트: 부활은 사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앉힘이다. 부활은 십자가의

- 99 -

힘이고 영원한 현존을 시간 속에서 획득함을 의미한다. 인류의 구원은 하나님의
존재에의 동참인데, 이는 영원한 작정이며 경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 존재 동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순전히 역사적인 인물로 구원을 이루었기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 로고스라는 개념과 연결시킬 수 없다.

10.2. 승천(ascensio Christi)
승천은 마가에 의해서 기록되었으며(“ajnelhvmfqh eij" to;n oujrano;n”, 16:19),
누가는 이를 이중으로 전한다(“ajnefevreto eij" to;n oujranovn”, 눅 24:51; “ejphvrqh”, 행
1:9;

“ajnalhmfqei;"”,

1:11).

올라감(ajnabavinw)

혹은

감(poreuvomai,

uJJpavgw,

e[[rcomai)이라는 표현이 요한복음에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요 6:62; 14:2, 12;
16:5, 10, 17, 28; 17:11, 13; 20:17), 히브리서에서는 참 하늘에 들어감(“eijsh'lqen. .
.eij" aujto;n to;n oujranovn, 히 9:24)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사도들은 우리가
믿는

생명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ajrciereva mevgan dielhluqovta tou;" oujranouv",”

승천하신
4:14)으로

계신다는

것으로부터 가르침을 진행한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높아지심과 더불어서 승천을 강조한다(행 2:32-35). 지옥 강하를 영적으로 이해하면
벧전 3:19의 “가서(poreuqei;")” 라는 말과(이는 우리 성경에서 번역되지 않음) 벧전
3:22의 “오르사(poreuqei;")” 라는 말은 모두 승천을 의미한다. 승천으로 그리스도는
부활 후 이 땅에서는 보이시지 않았던 영광을 현시하셨다(계 1:13-17; 행 9:3-8).
참으로 승천하심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왕국의 왕으로 등극하셨다.
승천으로 완전한 영광을 받으셨으며(요 7:39) 성령을 파송하셨다(요 7:39). 위로
오르셔서 그리스도는 만물을 충만케 하셨다(엡 4:10). “승천하심으로 그리스도는
세상의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의 약속을 성취하셨다. 그의 몸이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심에 따라서 그의 권능과 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경계 너머로
퍼지고 전파되었다”(Inst. 2.16.14).

a. 그리스도의 승천은 신인 위격이 하나님으로서만이 아니고 인성을 가짐,
곧 몸으로 하나님의 신적 영광 곧 하나님의 보좌로 장소적 이동을 해 가심을
의미한다(서철원). 그리스도 전위의 문자적, 유형적, 경역적(境域的), 성질적, 천계적
과도(過渡)였다(박형룡).
ㄱ. 전위격의 과도

- 100 -

ㄴ. 문자적이었으니 하늘로 올리우신 것이며(행 1:11) 위로 올라 가신
것이다(엡 4:8, 10).
ㄷ. 유형적이었으니 올라감을 제자들이 바라봄(행 1:9-10).
ㄹ.

경역적이었으니

떠나

“세상을

아버지께로

가노라”고

말씀하셨다(요16:28). 루터파는 승천을 경역의 변화가 없는 상태의 변화로 본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떠나셨다(눅 24:50)는 것을 인정치 않고 신성과 인성이 모두
땅에 남아서 인성이 성육신 때 전달받은 신성을 충분히 누리며 편재되었다고
301

본다.

302

그리하여 루터란에 의하면 보좌 우편은 도처에 있는 것으로 사유된다.

ㅁ. 경역적일 뿐만 아니라 성질적이었으니 그의 인성이 영광이 충만한
천당의 생활에 조절되었다.
ㅂ.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백성들과

천사들이

있는

천당으로

가셔서

하나님의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행 7:55-56; 롬 8:34; 엡 1:20; 골 3:1; 히 1:3;
8:1; 10:12; 12:2; 벧전 3:22; 계 3:21).
b.

승천은

속죄제사의

완성이며

통치의

시작이다.

승천은

성부께서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을 충족하다고 인정하시고 그를 하늘 영광 중에 맞아
들이셨다는

선언의

행위였다.

그의

구속

사역에

대한

인치심은

부활에서

시행되었으나 승천에서 강화된 것이었다. 승천은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로서의 통치
선포이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행 2:33) “그리스도께서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얼굴]앞에(tw proswpw tou qeou) 나타나시고”(히 9:24)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th'/ dexia'/ ou\n tou' qeou' uJywqeiv", thvn te ejpaggelivan tou' pneuvmato" tou' aJgivo
u labw;n para; tou' patrov", ejx evceen tou'to o~ uJmei'" ((kai;)) blevp ete kai; ajkouvete)”(행
2:33)는 말씀이 승천이 속죄제사의 완성임과 통치의 시작임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301

Form of Concord, 8.26: “Ex hac unione et naturarum communione humana natura
habet illam exaltationem, post resurrectionem a mortuis, super omnes creaturas in coelo et in
terra, quae revera nihil aliud est, quam quod Christus formam servi prorsus deposuit; humanam
vero naturam non deposuit, sed in omnem aeternitatem retinet, et ad plenam possessinem et
divinae majestatis usurpationem secundam assumptam humanam naturam evectus est. Eam vero
majestatem statim in sua conceptione, etiam in utero matris habuit: sed ut Apostolus Phil. ii. 8
[7], loquitur, seipsum exinanivit, eamque, ut D. Lutherus docet, in statu suae humiliationis secreto
habuit, neque eam semper, sed quoties ipsi visum fuit, usurpavit. Jam vero, postquam non
communi ratione, ut alius quispiam sanctus in coelos ascendit, sed ut Apostolus, Eph. iv. 10,
testator, super omnes coelos ascendit, revera omnia implet, et ubique non tantum ut Deus, verum
etiam ut homo, praesens dominator et regnat a mari ad mare et usque ad terminus terrae.”
302 Form of Concord, 8.28: “[Dextera Dei] non est certus aliquis . . . . locus, sed nihil
alius est, nisi omnipotens Dei virtus, quae coelum et terram implet.”
- 101 -

표이다. 구속을 이루셔서 획득하신 성령을(요 7:37-39) 통하여서 구속을 실시하기
위해서 승천은 필요했다(요 16:7). 이제 성령이 오시는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지신 신인 위격이다.
c. 승천으로 그리스도의 신위 위격의 인성이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감에
따라서 그의 육체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길로 우리의 육체가 참 성소에 이를 길이
열리고(히 10:19-20), 그의 육체로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고(계 7:15; 8:4) 인류와
하나님의 연합이 이루어진다(계 21:7-9; 21:3).
d.

주의

승천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당에

앉은

자들과

(“sunhvgeiren kai; sunekavqisen ejn toi'" ejpouranivoi" ejn Cristw'/ !Ihsou”, 엡 2:6) 영원히
그와 함께 있기로 정해진 자들(요 17:24), 즉 사도가 천국 시민이라고 부른
자들의(“to; polivteuma ejn oujranoi'"”, 빌 3:20) 부활 후 승천을 예시한다. 또한 이는
첫 열매 되신 그리스도(고전 15:20)가 통치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원래적
영장권을 회복함을 예시한다(히 2:7-9).

10.3. 보좌에 앉으심(하나님 우편에 재위, sessio): 왕으로 다스림
벧전

3:22의

“저는

하늘에

오르사

계시니(o{" ejstin ejn dexia'/ tou' qeou' poreuqei;" eij" oujranovn)”라는

하나님

우편에

구절에서

보듯이

오르심과 보좌 우편에 앉으심을 성경은 구별한다(cf. 웨스터민스터 표준문서). 보좌
우편에 앉으심은 시편 110편 1절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교회와 우주의
통치권을 받으시고 그것에 해당하는 영광에 참여 하시는 사실의 상징”(박형룡)임에
틀림없다. 재위는 신인양성에 따라서 중보자 그리스도가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통치를 행하심으로 신적인 영광과 영예를 드러내심이다. 이는 구약에 이미 예언된
메시아의 통치를 의미한다(시편 2, 45, 72, 110; 사 9:67; 단 7:14 등).
칼빈은 재위가 “그리스도의 육체의 어떠함이 아니라 그의 권위의 위엄”를
뜻하므로 “앉는다”는 것은 “하늘의 심판좌를 주재하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리스도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사 세상과 세상의 정사와
권세와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엡 1:20-22; 빌 2:9)이 보좌의 우편에 앉으심의 의미라고 말한다(Inst.
2.16.15).
a. 그리스도의 권위와 영광이 재위를 통하여 나타남은 그가 신적 속성들을
소유하셔서 그의 중보사역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 102 -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종의 형상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이루심으로써
부활 승천하여 보좌우편에서 다스림이 빌 2:5-11에 노래된다.
b. 재위 중에 그리스도는 선지자로서 그의 영을 보내사 개개인의 마음을
조명(illuminatio Spiritus)해서 진리를 가르치시고(요 14:26; 16:7-15),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구속사역을 죄인들의 칭의와 성화를
위해서 계속 적용하시며(슥 6:13-15; 히 4:4; 7:24, 25; 8:1-6; 9:11-15; 10:19-22; 요일
2:2), 왕으로서 교회를 다스리사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게 하시며(마 16:18)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벧전 3:22)과 만물과 인류세계와 역사를 다스릴 권세를
가지고(마 11:27; 28:18; 단 7:13-14; 요 3:35; 13:3; 17:2; 고전 15:27; 엡 1:10; 빌
2:9-11;히 2:8) “정사와 권세의 머리”(골 2:10)가 되시고 “만유의 후사”(히 1:2)로서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계 17:14)이며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롬 14:9)가
되신다. 그리하여 세상나라들이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게 하신다(계11:15).
c.
교통하심과

재위는
교회와

개인

구원과정에서

천사의

머리(caput

의를

전가하심으로서

ecclesiae

et

성도와

교제하며

angelorum)되심에

있어서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왕직과 특징적으로 연관된다.

[승천과 재위의 은총]

칼빈은 이를 셋으로 말한다. 1) 주님은 하늘에 오르심으로 아담에 의해서
닫혔던 천국에 이르는 문을 여셨다(요 14:3). 2) 그리스도는 참 성소에 들어 가셔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거주하시면서 우리의 옹호자요 중재자로서 사역하심으로
아버지가 우리의 죄로부터 눈을 돌리셔서 그의 대속하는 의를 바라보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아버지의 보좌에 나아가게 하신다. 3)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
부와 영광이 그리스도의 권능 가운데 있음을 본다. 그는 중보사역을 계속하심으로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하고 그의 교회를 세우시고 은혜로 채우신다(Inst. 2.16.16).

10.4. 재림(parousia)
재림을 통한 최종심판에 의하여 참된 승귀의 실상이 나타난다고 보는

- 103 -

견해가 유력하다(박형룡, 사도신경,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 그러나 구원주의 구원
완성이요 통치 완성으로 봄이 타당하다(서철원).
재림을 나타내는 말로는 오심을 의미하는 parousia(마 24:3, 27, 37, 39;
고전 15:23, 살전 2:19; 3:13; 4:15; 5:23; 살후 2:1; 약 5:7, 8; 벧후 3:14), 예수
그리스도의 재위 중에 숨었던 영광과 위엄의 드러남을 뜻하는 apokaluyi§(살후 1:7;
벧전 1:7, 13; 4:13), 그리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강조하는 epifaneia(살후
2:8; 딤전 6:14; 딤후 4:1-8; 딛 2:13)이 있다. 그리스도는 올라간 모습으로(행 1:11;
마 24:30) 왕국의 엄위와 불멸의 광채와 무한한 신성의 능력으로 천사와 함께
오신다(Inst. 2.16.17). 성경에서는 두번째 오신다는 의미로서 재림을 표현하고 있지
않고 다만 히브리서 9:28에서 이를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오시리라(ou[twj kai. o` Cristo.j a[pax
prosenecqei.j eivj to. pollw/n avnenegkei/n a`marti,aj evk deute,rou cwri.j a`marti,aj ovfqh,setai
toi/j auvto.n avpekdecome,noij eivj swthri,an).”
재림은 중보자의 통치의 완성이다(고전 15:24-28). 이는 은혜의 통치에서
직접적인 신적 통치에로의 전이이다. 통치의 완성은 심판을 통해서 택한 자들를
모으고 악을 소제함으로써 이룬다(마 24:30-31; 25:31-46). 그리하여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을 바라보게 한다. 재림으로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도입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친히 함께 계시고(계 21:3)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
재림은 기독교적 소망의 핵심이다. 그가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살전 4:16; 참고 고전 15:52)할 때 이것은 “복스러운
소망”이며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이다(딛
2:13).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면(히 11:1) 소망이 없는 믿음은 세상적
믿음에 다름 아닐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롬 8:24)
라고 말했다. 주의 강림에 대한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사람은(벧후 3:4)
소망이 없는 사람이다(살전 4:13).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말씀 가운데 구속이라는 용어가 몸의 부활을 가르키는데 사용된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참고 눅 21:28; 롬 8:23; 고전 1:30; 엡 1:14). 영생을 얻음은 부활이
부여하는 불멸이다(참고 롬 8:11). 그러므로 구원의 완성에 그리스도의 강림이 있다.

죽은

자들이

일으켜질

것이요,

살아

- 104 -

있는

자들이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참고 고전 15:52). 따라서 우리는 바울과 같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재림의 가장 큰 특징은 피조물의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303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로의 해방이다(롬 8:21).

303

Murray, 1.106-116.
- 105 -

제 11 장 그리스도의 삼중직
304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칼빈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Inst. 2.15.1-6).

그리스도는 구원을 이루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고후
5:18-19; 골 1:20; 엡 2:16) 그로 말미암은 창조(요 1:3; 골 1:16-17)를 새롭게
305

하셨다.

십자가에서

영화롭게

되셔서

구원을

여전히

이루시고

중보자로서

부활
그의

승천하심으로
사역을

죽음을

삼중적으로

이기시고
306

감당하신다.

그리스도는 여전히 삼중적 사역을 감당하셔서 성도의 구원을 이루시고 지식을
새롭게 하시며 친히 중재하신다. 이 모든 것을 그의 의의 계속적 전가를 통해서
307

수행하신다.

뚤레틴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Tria ista officia, ita in Christo
conjunguntur, ut non solum eorum operationes distinctas exerat, sed eadem actio a tribus
simul prodeat, quod rei admirabilitatem non parum auget. Sic Crux Christi, quae est
Altare sacerdotis, in quo se in victimam Deo obtulit, unde Evangelium vocatur verbum
crucis, et Trophaeum regis, in qua scil. triumphavit de principatibus et potestatibus. Col
ii. 15. Evangelium est lex prophetae, Is. ii. 2, 3, Sceptrum regis Ps. cx. 2, Gladius
sacerdotis, quo penetrat ad intimas cordis divisiones, Heb. iv. 12, et Altare, cui imponi
debet sacrificium fidei nostrae. Ita Spiritus, qui ut Spiritus, sapientiae est effectus
prophetiae, ut Spiritus consolationis est fructus sacerdotii, ut Spiritus roboris et gloriae
308

est regis donum.”

11.1. 그리스도의 선지자직(prophetia Christi)
a. 성육신 하신 말씀으로서 그리스도는 선지직을 감당하셨다. 그리스도는

304 McNeill, Inst. 2.15.1, n. 2. 칼빈의 중보자의 삼중직 사상에 미친 부써의 영향에
관해서, McNeill, Inst. 2.15.2, n. 7.
305 “God’s reconciling way with his world in Christ presupposes nonetheless an
unbreakable bond between creation and redemption.” Gordon J. Spykman, Reformational
Theology: A New Paradigm for Doing Theology, 406.
306 삼중직에 관한 개혁주의의 견해에 대해서, Spykman, Reformational Theology,
408-416. 저자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다룬 후 바로 이어서 그리스도의 영에 대해서
논함으로써(418-429)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와 천상에서의 계속적 중보에 초점을 맞춘다.
307 Cf. Bavinck, 3.475-482.
308 Locus XIV. quaest. v. 13, edit. Edinburgh, 1847, vol. ii. pp. 347-348. Quoted in C.
Hodge 2.461.

- 106 -

나사렛 회당에서 읽은 이사야서 61:1-2를 통해서 자신이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로서
선지자 직분을 감당하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할
것임을 선포했다(눅 4:18).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는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고 말한다(골 2:3). 그리스도가 주신 “전체 교리 안에는(in
summa doctrinae)” 모든 지식의 완전이 포함되어 있다 (Inst. 2.15.2, CO 2.363).
b. 그리스도는 신 18:15에서 선지자로 예언되셨고 이것이 행 3:22-23에서
응용되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선지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며(눅 4:24; 13:33),
자신의 가르침이 위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이며 온 것임을 주장하셨다(요
8:26-28;

12:49-50;

14:10,

24;

15:15;

17:8,

17-20).

그리스도는

미래

일을

예언하셨으며(마 24:3-35; 눅 19:41-44), 독특한 권위로 가르친다(마 7:29). 지상에서의
가르치시고 선포하신 사역을 지금도 중보자로서 계속 하신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ejp! ejscavtou tw'n hJmerw'n touvtwn ejlavlhsen hJmi'n ejn uiJw'/)”(히 1:2).
c. 선지자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뿐만 아니라(요 7:16-17)
그의 뜻을 행하며 그의 사역을 온전히 이룬다(요 4:34). 성자는 성부께서 하신 일을
본 것만 행한다(요 5:19). 성자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성부 자신이시다(요 14:10).
d.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지 않은 참 지식은 없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 (hJ marturiva !Ihsou' ejstin to; pneu'ma th'" profhteiva")”이다(계 19:10). 그리스도의
영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에게 작용하여 계시하셨으며(벧전 1:11) 영광중에 있는
그의 성도들에게 성부의 최종 계시를 주신다(요 16:25; 17:24-26; 고전 13:12; 사
64:4). 그리스도의 선지적 사역은 계속될 것이니 그가 계시하는 성부가 무한하신
때문이다.
요 16: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사 64:4, “주 외에는

)/}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yhil{a)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e. 그리스도가 말씀 자체(Verbum Dei ipsum)이시다. 그는 모든 신계시의
원천이시며, 성육신으로 신현(theophania)하셔서 계시 자체가 되셨다.
f. 그리스도는 해석자(interpres)로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해석(interpretatio)하셨으며

구원주(salvator)로서

구원의

길(via

salutis)을

가르치셨고 이루셨다.
g.

그리스도는

구원

사역을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파송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조명하여(illuminatio mentis hominum per Spiritum

- 107 -

Sanctum) 지성과 심장으로 진리의 가르침을 바라고 그 가르침에 순복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계시는 구원지식(cognitio salutis) 뿐만 아니라 일반 지식을 포함한다.
h.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경계시는 완성 되었으나, 그의 선지자적 중보사역은
계속된다.
i. 유대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적 가르침을 조롱했다(마 26:67-68).
그들이 모욕한 것은 예수 자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진리였다(마 27:39-44; 눅
11:35-37; 12:39). Klass Schilder가 전하듯이 “[십자가에서] 선지자의 동산 위에 선
대선지자는 버림 받은 모든 선지자들의 깊은 심연 가운데 존재하는 지옥과 같은
공포를 맛보았다.”

11.2. 그리스도의 왕직(regium munus Christi)
a. 칼빈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권을 다루면서 그의 능력으로 “교회의
영구성(ecclesiae

perpetuitas)”이

세워지고

이것이

개개인의

“영생의

은혜(beata

immortalitas)”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Inst. 2.15.3, CO 2.363). 중보자 그리스도의
“통치의 원리는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나눈다는데 있다.
지금 그는 그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갑옷을 입히시고 병기를 들려 주시며 그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으로 우리를 장식하시고 그의 부요함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다”(Inst. 2.15.4, CO 2.364).
b. 구약 시대 메시아 예언들은 메시아를 왕으로 그 판도를 왕국으로
말하였다(민 24:17,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삼하 7:16,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사 9:6-7; 시 2:6,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시 45:1-17; 시 72:1-19; 시 110:1-7; 단 7:13-14; 미 5:2; 슥 9:9).
c. 그리스도의 왕권은 하나님의 신적 왕권과 중보적 왕권으로 구별된다.
신적 왕권은 삼위 하나님으로서 가지시는 왕권으로서 본질적, 비인출적, 절대적,
영원적, 불변적이다(시 103:19,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는도다”). 중보적 왕권은 중보자 그리스도가 백성의 구원과 은혜
언약과 관계해서 갖는 특별한 왕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천지만물을 통치하는 직권이라고 할 수 있다. 중보적
왕권은 전 우주에 미치는 바(마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빌 2:9-11; 엡 1:17-23), 이는 다시 교회의 머리로서 다스리시는 영적 왕권과 우주를
다시리는 왕권으로 나눌 수 있다. 중보적 왕권은 지상의 예수의 사역 가운데

- 108 -

계속되었는데,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소경의 눈을 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시며 가난한 자를 돌보셨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사역들을 통해서
예수께서 오실 왕 메시아인줄 알았다(마 11:3-5). 예수는 또한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냄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제자들 안에 임하였음을 선포하심으로
자신의

왕되심을

아들이시요
1:49)으로

계시하셨다(눅

(“oJ uiJo;" tou' qeou'”)
알았으나,

유대인의

11:20;

사람들은

17:20-21).

이스라엘의

예수를

하나님의

임금(“basileu;" tou' !Israhvl)”(요

왕(“basileu;" tw'n !Ioudaivwn”)(요

19:19)이라는

이름으로 죽였다.
d. 영적 왕권은 교회의 머리로서(엡 1:22; 4:15; 5:23; 골 1:18; 2:19)
그리스도가 왕의 권위를 가지고 자신과 유기적으로 연합된 지체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말한다. 이 왕국은 구속의 은혜에 기초한 영적인 왕국이며 현재적이며
미래적(내세적)이다. 이 왕권은 그리스도의 중보직에 근거하는데 그리스도는 중보적
왕권의 임명을 영원에서 받으시고 그것의 실현을 타락 직후부터 했다(잠 8:23,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시 2:6, “내가
나의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참으로 이스라엘은 구약의
교회였고 그 영적 본질에 있어서 신약의 교회와 더불어 통일체를 구성한다(행 7:38;
롬 11:11-24; 갈 3:7-9, 29; 엡 2:11-15).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적 왕권은 무형 교회,
유형 교회에 모두 미친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또한 신랑과 신부의 관계(요
3:29; 계 21:2), 아내와 남편의 관계(엡 5:25; 계 21:9), 맏아들과 다른 형제들과의
관계(롬 8:29; 히 2:11), 머릿돌과 건물과의 관계(마 21:42; 행 4:11; 벧전 2:4-8),
309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요 15:1-2) 등으로 묘사된다.

e. 우주적 왕권(시 8: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공표하셨고(마 28:18)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을 때 정식으로 부여 받으셨다(시 28:9,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마 28:18; 엡 1:20-22; 빌 2:9-11; 히 1:13; 2:6-9). 이 왕권은 원수에 대한 승리가
선포되고 사망이 폐지될 때까지 계속된다(히 10:12; 고전 15:24-28). 바빙크는 영적
왕권을 은혜의 왕권, 우주적 왕권을 권세의 왕권이라고 부른다.
f. 그리스도가 선포하고 이루신 하나님의 나라는 그가 피흘려 자기 백성을
사서 나라를 삼으심(계 1:5-6; 5:9-10)을 의미한다.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백성들이 흑암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짐(마 12:28,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309

졸고 “칼빈의 기독론적 교회론” 참고.
- 109 -

17:21-22,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 . .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이며, 내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그의 통치가 유형하고 위엄스러운 주권으로 나타난다(마 7:21; 19:23;
22:2-14; 25:1-13, 34; 눅 22:29-30; 고전 6:9; 15:50; 갈 5:21; 엡 5:5; 살전 2:12; 딤후
4:18; 히 12:28; 벧후 1:11).
g. 하나님의 나라는 수세시 기름부음 받아 왕으로 임직됨으로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영원한 왕권이다(눅 1:33, “그가 야곱의 집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단 2:44; 7:14, 18, 27; 히 1:8; 계 11:15).
마지막 때에는 “아들 자신도 만물을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는데(계
15:28) 이는 그리스도의 통치권의 중단을 말함이 아니라 은혜의 통치가 직접적
신적(삼위일체적) 통치로 바뀜을 뜻한다.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그의 나라는 끝이
없다(Cujus regni non erit finis)”라고 확정했다.
h.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권은 성령이 구속된 백성에게 오사 내주하심으로서
행해진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오셨다(요 7:37-39).
한번 오신 성령이 새 인류와 영원히 함께 계신다(요 14:16). 그리스도의 통치는
영으로 다스림이다. 영적 임재가 다스림이며 자신을 주시고 은사를 내리심이
다스림이다. 교회의 다스림(gubernatio)과 보호(defensio)는 성령의 충만히 내주함을
받아서 진리와 생명과 법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리스도에게 전권적으로 속하여
있다.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왕권은 영원하다(Marcellus of Ancyra 반박).
i.

중보자

이전으로부터(from

예수

그리스도의

before):

“주

왕권은

하나님께서

다음

가지로

고찰된다.

조상

다윗의

위를

1)

저에게

주시리니”(눅 1:32). 2) 아래로부터(from below):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 1:48). 3)
위로부터(from above): “내가 나의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시
2:6). 4) 이후로부터(from ahead):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계 1:15).

11.3. 그리스도의 제사장직(sacerdotale Christi munus)
a. 흠 없고 티 없는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는 그의 거룩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적인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 110 -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시고

제사장이

되셔서

그의

그의

생명을

진노를
우리에게

누그러뜨리신다.
주셨다.

오직

“영원하신

그리스도만이
중재자(aeternus

deprecator)”로서 그리스도는 “제사장인 제물(hostia qui sacerdos)”이 되셨다. 제사장
그리스도는 성부께서 “영원한 화해의 법칙에 따라서 (aeterna reconciliationis lege)”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와 화목케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제사장과 나라가 되게 하신다(계 1:6) (Inst. 2.15.6, CO 2.366-367).
b. 선지자가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대표라면 제사장은 하나님에게 대한
백성의 대표였다. 1)제사장은 제사드리는 일(히 5:1,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히 9:26,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히 10:12,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사 53:10,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요일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아니요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과

2)백성을

위하여

간구(중재기도)하는 일을 감당했다(히 7:25,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요일 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스리스도시라”; 사 53:12,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c. 히브리서는 제자장직의 첫번째 측면인 대제사장으로서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린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다(히
5:1-10; 7:1-28; 9:11-15, 24-28; 10:11-14, 19-22; 12:24).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그리스도가 “화목제물로 세우”신 바 되었고(롬 3:25)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희생이 되셨”고(고전 5:7) “우리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고 한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즉
“우리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었다”(요일 2:2; 4:10)고 하며 광야에서 놋뱀이 들린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고 전했다(요 3:14). 베드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벧전 3:18).
d.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 사역은 그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시며 왕-제사장이라는 성격에서 두드리진다(히 7:3; 시 110:4). 그리스도는
땅에서도 중재대언 사역을 행하셨으나(눅 23:34; 요 17:20; 히 5:7) 이것의 본격적인
시행은 하늘에서 승귀 중에 있게 되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 111 -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성경은

3:12).

파라클레토스(paravklhto§, 보혜사 혹은 대언자로 번역)라는 명사를 그리스도에
적용해서

중재대언의

사역을

설명한다(요 14:26,

26; 15:26; 16:7; 요일

2:1).

우리에게는 두 대언자가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언자로서 참소자 사단에
대항하여 성부에게 신자들의 사건을 변소하시고(슥 3:1; 히 7:25; 요일 2:1; 계
12:10), 성령은 세상에 대하여 신자들의 사건을 변소하실 뿐 아니라(요 16:8) 또한
신자에게 그리스도 사건을 변소하시며 지혜로운 조언으로 그들에게 봉사한다(요
14:16; 15:16; 16:14). 그리스도의 중재 대언 사역은 자신의 뿌린 피가 있는(히 12:24)
참 하늘의 지성소(히 9:24)에서 우리의 죄를 송사하시기 위해서(롬 8:33-34) “항상
살아서” 간구하시고(히 7:25) 우리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도록 우리와 우리의 제물을 성화시키신다(벧전 2:4-5; 계 8:3-5).

[그리스도의 삼중적 사역과 삼중적 중보]

아래에 인용한 갈라디아서 3장 19절 주석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mediator reconciliationis(화해의 중보자), mediator patrocinii(중재의 중보자),
mediator doctrinae(가르침의 중보자)로 분류한다.

화해의 중보자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 주시고 중재의 중보자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버지께 호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심과 같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가르침의 중보자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310

계시하신다.

1542년 제네바 신앙교육서에서 칼빈은 처음 두 형태의 중보를 제사장
311

직분으로서 그리고 세 번째 형태의 중보를 선지자 직분으로 다룬다.
기독교

강요로부터

칼빈은

그리스도의

삼중적

310

직분(Christi

munus

1539년

triplex)을

Comm. Gal.3:19 (62, CO 50.216-217): “Sicuti ergo mediator est reconciliationis, per
quem accepti sumus Deo, mediator patrocinii, per quem accessus nobis patet ad patrem
invocandum: ita mediator semper fuit omnis doctrinae: quia per ipsum semper Deus se hominibus
patefecit.”
311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tr., intro., and notes by J. K. S. Reid, in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 22 (Philadelphia: Westminster, 1954), 96 (CO 6.21-22). 1536년 기독교
강요 (2.14, CO 1.69) 와 1537/8 의 제 일차 신앙교육서(22, CO 5.338)에서 칼빈은 왕직과
제사장직의 이중직만을 가르친다.

- 112 -

다루었으나 (4.2, CO 1.513-514), 그리스도의 직분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는 1559년
312

기독교 강요에서 첨가된 것이다.

1559년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을 가르침의 중보와 연관시킨다: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존엄성이

우리로

하여금

그가

우리에게

주신

교리의

대요(summa

doctrinae)에 모든 부분의 완전한 지혜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 이르게
한다” (Inst. 2.15.2, CO 2.363).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제사장(sacerdos)과
제사제물(sacrificium)은 하나가 된다는 통찰력을 가지고 칼빈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직분을 중보자 그리스도의 화해와 중재를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Inst. 2.15.6,
CO 2.366-377).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왕직을 다루면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전체
교회의

몸과

개개인의

지체들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교회의

영원성(ecclesiae perpetuitatem)”과 성도들의 “은혜로운 영생(beatae immortalitatis)”을
강조한다 (Inst. 2.15.3, CO 2.363-364). 특히 그리스도의 왕직을 다루면서 칼빈은
기독교인의 경건하고 올바른 삶을 위해서 계속적으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깊은 관심을 표한다 (Inst. 2.5.14, CO 2.364-365). 그리스도의 왕직은 그가
313

천사들과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머리라는 점에서 그 특성이 명료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왕의 직분은 특별한 종류의 중보직에만 속한 것이 아니라 전체 중보과정에
314

연관된다.

갈라디아서 3장 19-20절의 주석과 설교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중보가

율법의 전체과정, 즉 율법의 형성, 발행, 해석, 용법에 모두 작용한다고 본다. 뿐만
315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의 중보가 구원의 전체 과정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그리스도의

삼중적

율법

중보를

이런

전체적으로

316

포괄하는 것이다.

312 중보자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관해서, Klauspeter Blaser, Calvins Lehre von den drei
Ämtern Christi, Theologische Studien 105 (Zürich: EVZ Verlag, 1970), 7-23.
313 칼빈은 타락 전의 그리스도의 중보를 설명하기 위해서 천사들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의 직분을 강조한다. 참고. “First Response to Stancaro,” 13 (CO 9.338); “Second
Response to Stancaro,” 147 (CO 9.350).
314 세 번째 형태의 중보는 윌리스(Willis)가 “mediation as sustenance”라고 부른 것과
상응한다. 왜냐하면 “계속되는 중보 사역을 수행한다는 것은 영원하신 아들의 전체 본성이
아버지와 동등하다는 것이 단지 아버지가 아들을 통하여서 우주의 창조와 운행을 명한다는
사실로 감소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Calvin’s Catholic Christology, 70.
315 칼빈의 Gal. 3:19-20 (448-455, CO 50.539-544)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율법의
중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강조된다: “유일한 중보자”는 그리스도가 구약 시대
때 주의 사자(Angelus)로서 나타났기 때문에 모세보다는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화해 사역 뿐만 아니라 율법을 자원해서 순종하고자 하는
성도의 삶 전체에 미친다. “계속적인 그리스도의 중보”는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방인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리스도의 율법의 중보의 범위는 율법의 발행,
가르침, 완성 모두에 미친다.
316 블라젤(Blaser)에 의하면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다음과

- 113 -

1) Christus Mediator Reconciliationis(화해의 중보자)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을 제사장 직분의 일부로서 다룰 때 칼빈은 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공로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화해의

중보는

구약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구약

백성들도 죄를 용서 받지 못하면 율법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보자의

필연성을

깨닫고

있었다.

하나님의

시은소(施恩所)가 중보자의 은혜를 계시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믿고 있었다. “하나님의 면전에 율법을 세우는 한 율법은 우리를 그의 진노와
저주에 묶어 놓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 하시기 위해서는 죄를
도말함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317

만약 조상들이 희생제사를 드릴 때 “중보자를

향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화해의 중재자”를 바라보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지 추한
318

도살(屠殺)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고 칼빈은 주석한다.
칼빈은

아벨을

그의

에서로부터

구별시킨

유일한

공로는

그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확신한 사실에 있다고 말한다: “경건한 사람으로서 잘했다 칭찬
받는 요점은 중보자 그리스도와 그가 값 없이 주시는 화해를 의지하는 것이다.”

319

중보자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그의 손을 통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다. 임마누엘(Immanuel)이라는 이름을 그리스도에게
주시면서 성부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 대한 그의 영원한 뜻,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겠다는 뜻을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의 중보직으로 말미암아
320

임마누엘이라고 합당하게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은 율법의 본질과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서 반복해서 율법 수여자의
본성(natura legislatoris)에 대한 언급을 한다. 대체로 이 같은 경우에 그리스도의
같이 세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진리로 우리를 자유케 하는 말씀(Wort)을 지시하는
자유의 직분(das Freiheitsamt), 자신 자신을 낮추어서 우리와 같이 되시고 죽음에 까지
복종함으로써 하나님과 우리를 중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Wesen)을 지시하는 복종의
직분(das Gehorsamsamt), 그리고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전가하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받으시고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Werk)을 지시하는 생명의 직분(das
Lebensamt). Calvins Lehre von den drei Ämtern Christi, 24-44.
317 Comm. Ex. 25:17 (2.156, CO 24.406).
318 Comm. Ex. 29:38-41 (2.293-295, CO 24.489-491). 그리스도의 피 제사를 예표하는
제물들에 관해서, Comm. Lev. 1:1-17 (2.323-326, CO 24.506-508); Lev. 17:1 (2.260, CO
24.468); Gen. 8:20 (1.281, CO 23.138); Ps. 119:108 (4.482, CO 32.261): “의식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것은 의식과 더불어서 드려지는 기도를 통하여서 사람들의 마음을
희생제물에다 묶고 그들의 마음을 중보자를 향하고자 함에 있다.”
319 Comm. Gen. 4:7 (1.201, CO 23.89).
320 Comm. Isa. 8:10 (1.274. CO 36.173); Matt. 1:23 (1.68-69, CO 45.68-69).
- 114 -

321

화해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된다.

율법은 성자를 통해서 이루실 율법의

완성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계시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율법의 완성의 계시를
포함한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의 독생자를 중간에
322

두셔서 그 자신을 우리와 화해시키신다”는 사실을 시종일관 계시한다.

2) Christus Mediator Patrocinii(중재의 중보자)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323

그리스도를 율법의 진리이며 실체로서 예표하는 모든 율법의 규례들과 관련된다.

그리스도의 중재가 없다면 어떤 의식도 무가치하기 때문에 만약 어떤 의식이
그리스도를 바람이 없이 드려진다면 그것은 단지 “은혜 없는 표시 자체(nudo
324

symbolo)” 에 불과하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피가

영혼을

구속하는

방법,

성례적인

방법(sacramentali modo)에 대해서 살펴본 바 있다. 이와 같은 이해 가운데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만

고유하게

속한

것이

형상들(figuras)과

표상들(symbola)로 환유(換喩, metonomy)되어 나타나지만 이 같은 표현들이
참고. Inst. 2.8.51, 59; Comm. Deut. 26:17-19 (1.361, CO 24.224); Deut. 13:5 (2.75,
CO 24.356); Ex. 20:4-6 (2.107, CO 24.376); Ex. 34:17, et al. (2.117, CO 24.283); Deut. 4:12-18
(2.120, CO 24.384-386); Ex. 25:8-15 (2.150-155, CO 24.403-405); Ex. 25:31-39 (2.163-165, CO
24.409-411); Ex. 26:31-37 (2.175, CO 24.417); Ex. 20:13, et al. (3.21, CO 24.612-613); Deut.
24:16 (3.50-51, CO 24.631); Deut. 24:14-15 (3.114, CO 24.671); Deut. 10:17-19 (3.118, CO
24.674); Ex. 20:17, et al. (3.187, CO 24.718); Deut. 29:22-28 (3.280, CO 25.51).
322 Comm. I Jn. 4:10 (292, CO 55.354): “[F]ilium suum interposuit Deus, ad se nobis
reconciliandum, quia nos amabat.”
323 모세의 마지막 사경에 나타난 그림자와 진리 혹은 실체의 유비(umbra-veritas vel
substantia analogia)에 관해서, Ex.12: 46 (1.467, CO 24.292, 유월절에 관해서); Ex. 27:20-21,
et al. (2.167, CO 24. 411-412, 촛대 위의 등들에 관해서); Ex. 26: 1-37 (2.171-176, CO
24.414-417, 장막에 관해서); Ex. 27:1-8 (2.177-178, CO 24.418-419, 번제에 관해서); Ex.
28:42-43 (2.205-206, CO 24.435-436,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에 관해서); Ex. 30:25-33 (2.224,
CO 24.446-447, 기름 부음에 사용되는 기름에 관해서); Lev. 21:1-12 (2.227-230, CO
24.448-450, 제사장의 정결에 관해서); Ex. 29.38-41 (2.296-297, CO 24.490-491, 번제에
관해서); Lev. 16: 7-11 (2.316-317, CO 24.502-503, 제사에 바쳐진 두 염소에 관해서); Lev.
16:16 (2.318-319, CO 24.503-504, 성스러운 장소를 위한 속죄에 관해서); Lev. 1:1-17
(2.323-326, CO 24. 506-508, 제사에 관해서); Lev. 2:1-10 (2.328-329, CO 24.509-510, 소제와
희생제에 대해서); Lev. 6:1-7 (2.356-362, CO 24.525-529, 화해에 관해서); Lev. 22:17-21
(2.378-381, CO 24.540-541, 서원제와 자원제에 관해서); Ex. 20:8 (2.435, CO 24.577,
그리스도와 안식일에 관해서); Ex. 31:13-17 (2.442-444, CO 24.583-584, 안식일과 할례에
관해서); Lev. 23:10-23, 34-35 (2.456-458, 462-463, CO 24.591-592, 594-595, 희년에 관해서).
신약에 나타난 동일한 유비에 관해서, Inst. 2.7.16 (CO 2.264); Comm. Col. 2:17 (337-338, CO
52.110-111); Matt. 5:17 (1.180, CO 45.171); Heb. 9:6-12 (117-120, CO 55.107-110).
324 Comm. Ex. 30:1-9 (2.182, CO 24.421).
321

- 115 -

전혀 공허하거나 무가치한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믿음의 조상들이
제물을 외부적으로 드리는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때, 그 제물에
그리스도의

속죄함이

진실로

드러

났기

때문이다

(quatenus

in

externis
325

sacrificiis Christum apprehenderunt patres, illic vere exhibita fuit expiatio).

중재자로서 그리스도의 중보는 칼빈이 구약시대의 희생제사들과 연관해서
자주 사용하는 성례적인 개념인 “우리의 마음을 높인다 (sursum corda)”라는 말에
326

잘 드러난다 (Inst. 4.17.36, CO 2.1039, cf. 4.17.18, CO 2.1016-1017).
327

그리스도의 기도의 중보에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 개념은

칼빈은 기도를 “신실한 사람이

하나님과 나누는 친밀한 대화”라고 정의하고, 기도를 통해서 “순수하고 정결한
찬미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높여야 한다(tollendas esse sursum
mentes)”고 말한다 (Inst. 3.20.16, CO 2.642). 이 때 중보자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모든 선한 것들을
328

주신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중재자(deprecatorem)”로서의 중보는 죄를 씻어 정결케
하고 영혼을 양육시킴으로써 삶의 완전함에 이르게 하는 제사장의 직분에도 잘
나타난다. 칼빈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영원한 복락의 기초라고 보고 (Inst. 2.15.6, CO
329

2.367),

중보자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나타난 중재와 왕직에 나타난 하나님의

맞추심(accommodatio)을 동시에 고려함으로써 신자들의 sursum corda (cf. Inst.
2.15.5)를 성례를 넘어서서 중보자 그리스도의 전체 사역으로 확장시킨 것은 칼빈의
기독론의 역동성이 어떻게 그의 율법 이해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325

Comm. Lev. 17:10-14 (3.31, CO 24.619-620).
참고. Inst. 2.7.1, CO 2.253: “그러나 바로 그 표상이 보여 주는 바는 하나님은
그를 예배하는 사람들이 세상적인 의식들로 분주해 하는 것을 보시려고 제사를 명하셨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위로 들어 올리기 위해서(altius
erigeret eorum mentes) 그렇게 하셨다”; Comm. Ex. 12:21-22 (1.221, CO 24.221): “우리는 다른
곳에서 유월절 어린 양이 그리스도의 표상이라는 것을 논했다. . . . 하나님께서는 가시적인
이 징표로 우리의 마음을 들어 올리셔서 천상에 계신 진실하신 모범을 향하도록 하셨다는
것은(extulerit ad verum et coeleste exemplar) 의심할 바가 없다. 이 모범으로부터 분리된다면
율법에 명한 의식들은 불합리하고 불결하게 될 것이다.”
327
“John Calvin’s Response to the Questions of Giorgio Biandrata,” 59-60, 62
(CO 9.329-330). 참고. Comm. Ps. 50:14-15 (2.269-274, CO 31.500-503); Dan. 9:23 (2.194, CO
41.166); Matt. 6:9 (206, CO 45.196); Serm. Isa. 53:12 (140-152, CO 35.679-687); Deut. 11:26-32
(482a-488b, CO 27.135-149); Forms of Prayer for the Church, in Tracts and Treatises, 2.101
(CO 6.175); Catechism of the Church of Geneva, in Tracts and Treatises, 2.73 (CO 6.89-90).
328 참고. Inst. 3.20.1 (CO 2.625); First Catechism 27 (CO 5.343).
329 참고. Comm. Ex. 28:1-43 (2.191-193, CO 24.426-427); Ex. 30:23-24 (2.222-224, CO
24.445-446); Lev. 21:17-21 (2.239-240, CO 24.456); Lev. 16:3-6 (2.315-316, CO 24.501-502);
Hos. 8:4 (283, CO 42.364).
326

- 116 -

3) Christus Mediator Doctrinae(가르침의 중보자)

그리스도의 선지자 사역과 밀접하게 연관된 이와 같은 중보의 형태는
“그리스도 밖에서는(extra Christum)” 어떠한 하나님의 지식도 가질 수 없다는
330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야곱의 꿈에 나타난 사다리의 꼭대기를 오르락 내리락한

하나님의 사자는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표상(signum)을 계시했다는 칼빈의 창세기
28장 12절 주석은 이와 같은 중보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이
모든 만물에 편만하기 때문에 그의 육체가 유한하다는 사실이 천상을 가득 채우는
그의 존재를 제한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칼빈은 육체 밖에(etiam extra carnem)
거하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현재(praesentia)를 the so-called extra Calvinisticum에
기반해서 설명한다. 성육신 전·후의 그리스도의 중보를 이와 같은 그림자-실체의
구조로 설명하면서 칼빈은 심지어 구약 백성들에게도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331

형상(aeterna imago)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다고 주장한다.
고린도

후서

4장

4절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는

부분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일컬어

아니라—왜냐하면

지는

그가

것은

하나님과

단지
동일

그의

본질(essentia)과

본질(coessentialis)이기

관련해서만

때문에—오히려

우리를 향한(ad nos) 그의 의미와 관련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332

여기서 칼빈은 내재적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본 삼위

참고. Comm. Jn. 5:27 (1.132, CO 46.118); Jn. 6:45 (1.165, CO 46.150); Jn. 10:7
(1.260, CO 46.238); Jn. 10:15 (1.266, CO 46.243); Jn. 17:3 (2.136-137, CO 46.376-377); Jn.
17:8 (2.139-140, CO 46.379-380). 윌리스(Willis)는 the so-called extra Calvinisticum에 기반한
totus-totum 이론에 따라서 “칼빈은 이 육체를 초월해서(extra hanc carnem)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지식도 가질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떠나서(extra Christum)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런 관점에서
칼빈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교리의 특징은 “인성을 넘어서 신성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Calvin’s Catholic Christology, 109, 114. 어거스틴(Augustine) 또한 중보자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을 방법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참고. Robert E. Cushman, “Faith
and Reason,” in A Companion to the Study of St. Augustine, ed. Roy W. Battenhous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6), 304-310.
331 Comm. Gen. 28:12 (2.112, CO 23.391). Cf. Comm. Col. 1:15 (308-309, CO
46.84-85); Jn. 1:18 (1.25, CO 46.19); Jn. 14:10 (2.78, CO 46.326); Heb. 1:5 (10-12, CO 55.14);
Isa. 6:1 (1.201, CO 36.126).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칼빈의 기독론적 이해에 관해서, Hans
Helmut Esser, “Zur Anthtopologie Calvins Menschenwürde—Imago dei Zwischen Humanistischem
und Theologischem Ansatz,” Hervormde Theologiese Studies 35/1-2 (1979), 33-34, 38-39; J.
Faber, “Imago Dei in Calvin: Calvin’s Doctrine of Man as the Image of God in Connection with
Sin and Restoration,” tr. J. D. Wielenga, in Essays in Reformed Doctrine (Alberta, Canada:
Inheritance Publications, 1990), 264-267; Randall C. Zachman, “Jesus Christ as the Ima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Calvin Theological Jounal 15/1 (1990), 45-62.
332 Comm. II Cor. 4:4 (55-56, CO 50.51). 참고. Serm. Deut. 5:17 (165, CO 26.333).
330

- 117 -

하나님의 co-essentia보다 성자 하나님의 중보자로서의 인격(persona)에 중점을 두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살아

계신

본질(essentia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divina)과

성자의

사실을

해석해

신성(divinitas)을

간다.

그러므로

구별하지

아니하고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질이 인성(humanitas)에 주입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시안더를
반박하면서, 칼빈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333

그리스도의 중보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한다 (Inst. 2.12.6-7, CO 2.344-347).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중보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사자이며 동시에
율법을

풀어서
334

제시된다.

백성들에게

알리는

해석자인

제사장의

사역에

특징적으로

이하에서 칼빈은 어떻게 레위 제사장이 진정한 중보자의 표상이

되는지를 잘 논증하고 있다.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과 관련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와

야만성에(ruditati)
사자이시고

같이

자신을

모든

계시의

하나님은
양보해

자신이
주셨다.

원천이며

밝히

택하신
하나님의
드러난

구약시대
전능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륜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으며 제사장들이
그의

장식으로

꾸민

의복을

입고

말씀의

사자(internuncius)이신

예표된

제사장(umbratilis sacerdos)의 사역을 본받아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는
일을 감당했다. 이와 같이 심지어 그때에도 신자들은 형상(figura)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이며 아버지의 신비한 가슴(arcano patris
칼빈은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 졌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세상 가운데서의 어떤 사람들과의 연합보다 더 긴밀하고 신성한
연합이 우리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333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오시안더(Osiander)의 입장은 하나님의 본질은 인성을
취할 수 없다는 가정에 기초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를 성육신 전·후를
통하여서 불변하는 하나님의 본질의 영원한 현존으로 이해한다. 오시안더는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으로 창조된 인류는 원래적인 의(iustitia essentialis)를 지녔으며 하나님의
본질을 주입(infusa)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 간다고 말하면서, 비록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시안더에 의하면 중보자
그리스도의 대속의 필연성은 부인되는데, 그는 우리의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의롭다(nos una cum Deo
iustos esse)”는 사실에 기반한다고 본다(Inst. 3.11.5-12, 인용. 3.11.11, CO 2.541).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칼빈과 오시안더의 논쟁에 대해서, J. Faber, “Imago Dei in Calvin: Calvin’s
Doctrine of Man as the Image of God by Virtue of Creation,” in Essays in Reformed Doctrine,
234-239; Peter Wyatt, Jesus Christ and Creation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Allison Park,
Pa.: Pickwick Publications, 1996), 39.
334 Comm. Deut. 17:8-11 (2.262-265, CO 24.470-471, 인용. 262, CO 24.470).
그리스도가 율법의 해석자(interpres legis) 라는 사실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중보가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참고. Lev. 10:9-11 (2.235, CO 24.453); Num. 35:1-3 (2.249, CO 24.462);
Jn. 3:13 (1.71-72, CO 47.62).
- 118 -

sinu)으로부터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라는
335

것을 배워서 알고 있었다.

336

[John Murray의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대제사장적 활동]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히 5:1) “흠 없는 자기를”(히 8:3) 제물로
“단번에” 드렸다(히 9:12, 25, 26).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히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히 7:17)으로서 “하늘의 위엄의 보좌 우편”(히 8:1)에서 제사장 직임과
직능을

계속

수행한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히 8:1). Murray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보 사역을 하늘에서의
대사장적 활동이라고 부르며 이를 대체로 네 가지로 파악한다.
1)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롬 8:34)로서 중보 기도를 하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중보기도는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기초한다.

제사장적

직능의

중보적

측면은

화목제물이라는 측면과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중보기도는 엄밀하게 말해서
구원의 효력의 영역 안에 있다. 그 대상은 구원의 후사들이다(요 17:20-21).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다 이루어졌지만 그 구속 과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그렇게 때문에 그 경륜의 질서는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구속 과정이 그 완성에
도달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의 각각의 구별되는 역할의 성취에
의해서이다. 그리스도는 그와 함께 한 후사들이(롬 8:17) 자신의 영광을 보기
원하며(요 17:24)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다른 보혜사 성령을 주셔서(요 14:16)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게끔 하신다(요 16:26). 중보기도는 비하와 승귀를 통하여서 지상에서
이루신 구원 사역을 하나님의 후사에게 온전하게 적용시키는 구속 과정이다.
하늘에서의 중보기도는 화목 제사와 마찬가지로 메시야적 직능이다. 그로므로
그것은 구원의 경륜을 따라 수행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읠 뿐 아니라 다시
살아 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2) 그리스도는 또한 “대언자”로서(요일 2:1)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 나신다”(히 9:24). 그가 우리를 위하여 시험을 받아서 고난 당하셨기
335
336

Comm. Ex. 28:4-8 (2.198, CO 24.430-431).
John Murray, 1.62-76.
- 119 -

때문에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히 2:17-18; 4:14-15). 그가 우리의 화목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의
피에 힙입어 우리는 담대한 믿음과 온전한 마음으로 주의 성소에 들어 간다(히
10:19-22).
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이시다(히 10:21). 하나님의
집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은 하나님의 백성(히 3:1-6),
신자들(벧전 2:5), 교회를 의미한다.
4) 그리스도는 더 나은 언약의 보증이시며 영원한 중보자(제사장)이시다(히
7:20-22; 9:15).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인 그리스도가 영속적인 언약인 새
언약의 중보자이며 보증이라면, 이것은 그의 제사장적 직능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최종적이며

완전하게

열매

맺는

종말적

행위에서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주님의 지상에서의 사역과 하늘에서의 사역의 연속성과 상호
의존성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승귀된 상태에서 행하는 그의 사역과 그의 비하를
분리해서는 안된다. 하늘에서의 그의 인성의 실재를 고백하면서 우리의 믿는
도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 우리와 똑같이 모든 점에서 시험받았으며 겪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으며 그 가운데 우리를 체휼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고서
어떻게 소망 가운데 영혼의 닻을 내리고 담대히 산길로 나갈 것인가?

- 120 -

제 12 장 그리스도의 구원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을 삼기
위함이다.
1) 죄용서
오직 피흘림으로(레 17:11) 죄를 용서하셔서 해방하시고 화해하신다.
2) 의의 전가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의가

되어서

이를

전가받은

백성에게

생명이

된다.

그리스도는 의를 전가하시기 위해서 승귀하셔야 했다.
3) 영생의 선사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요 3:16) 영생 자체로 오셨다(요일 5:20).
영생은 십자가에서 새 언약을 다 이루심으로써 구약 언약의 약속을 전부 성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됨의 전체이다.
4) 아들들이 됨
아들의 영(그리스도의 영)을 주셔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반열에 세운다. 아들이
만물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받아야 한다(히
1:2; 엡 3:6; 롬 8:9, 15, 17; 갈 4:4-5).
5) 부활을 보장함
부활의 주님께서 그의 영으로 부활을 보증하신다(고후 1:22; 5:5; 엡 1:14).
6) 창조의 변환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아서 부패와 해체에 굴복했던(창 3:17; 롬 8:20) 창조가
정화되고 구속된다(롬 8:21-22; 계 21:5; 골 1:20). 그리스도의 구원은 인류 뿐만
아니라 인류의 거소도 구원함으로 완성된다.

- 121 -

제 13 장 그리스도의 속죄
13.1. 개설
속죄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초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객관적인 면에서 주관적인 면으로의 전이점이며 이로부터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 자신(in se)으로부터 우리를 향한(ad nos) 그리하여서 우리를
위한(pro nobis) 그의 사역으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속죄 교리는 칭의 교리의
중심적이며 근본적인 요소이고 중생과 성화를 설명함에 있어서 중보자 그리스도의
공로를 논함에 있어서 신학적인 기반이 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능력이 된다(고전 1:18).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기쁘하신 뜻에 따라서 우리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셨다(사

원인(moving

cause)을

53:10;

그리스도의

2:14;

사랑이

1:4;
아니라

속죄의

동력적

절대적인

주권적

1:19-20).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음이 합당한 것은 아들의 희생이 아버지의 뜻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며
아버지는 아들의 희생을 대가로 형벌을 요구하는 무자비한 분이라는 오해를 막기
위함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의지는 만물의 최고·제일

원인이다.

왜냐하면 그가

명령하거나 허용하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Inst. 1.16.8,
CO

2.152)라고

말한다.

쏘씨누스(Socinus)에게

답하는

글에서(1555)

칼빈은

주의주의(主意主義)의 영향을 반영하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한다: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게 하시는 것 외에 어떤 다른 공로도 그리스도에게는 없다 (nam Christus non
337

nisi ex Dei beneplacito quidquam mereri potuit)” (Inst. 2.17.1, CO 2.387).

1559년에

첨가된 새로운 절에서 칼빈은 이러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고려함에 있어서 우리는 공로의 시작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보지 않으며,
제일 원인인 하나님의 작정으로 되돌아 간다.” (Inst. 2.17.1, CO 2.387).
그리스도의 속죄는 하나님의 사랑(요 3:16)과 공의(롬 3:26)의 연합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337 Responsio ad aliquot Laelii Socini senensis quaestiones, CO 10/1.160. David Willis,
“The Influence of Laelius Socinus on Calvin’s Doctrines of the Merits of Christ and the
Assurance of Faith,” in Italian Reformation Studies in Honor of Laelius Socinus, ed. John A.
Tedeschi (Firenze: F. Le Monnier, 1965), 235; McGrath, The Intellectual Origins of the
European Reformation, 104-105. In dealing with the office of the law in his book Beneficio di
Christo, Socinus does not mention its normative use at all. Tedeschi ed., ibid., 49-50.

- 122 -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려 하심이”다(롬 3:24-25). 하나님의
존영을

위한

안셈의

만족설과

이를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으로

대체한

종교개혁자들의 속죄론이 공의를 강조했다면 아벨라드와 호라스 부스웰은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강조했는데, 이 둘을 모두 포함하여 다룸이 합당하다.

13.2. 속죄의 필요성
a. 불필요설: 스코투스는 속죄는 고유하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횡적인 의지에 의해서 결정된 것으로서 하나님이 그것을 받아 들이기를 기뻐하는
만큼

유효하다고

한다.

그로티우스(Hugo

Grotius)는

율법이

신적

의지의

산물이었는데 하나님은 율법의 요구를 이완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서 받아
들였다고

한다.

그로티우스를

요구함이

없이

죄를

용서할

좇아

알미니우스는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근대

법정적인

만족을

내재신학의

선구자

슐라이엘마허과 그의 계승자 릿츨도 객관적 속죄를 부정하고 주관적이며 도덕적인
감화를 강조한다.
b. (신적 작정에 기초한) 상대적 혹은 가설적 필요설: 하나님은 능히
속죄없이 구원하실 수 있었으나 오히려 그의 주권적인 작정에 의해서 현실적으로
속죄없이 구원하지 않으신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죄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질에나 사죄의 성질에나 피흘림을 부득이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다나시우스, 어거스틴, 아퀴나스와 루터, 쯔빙글리, 칼빈은 이 입장을 따른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It was of the greatest importance for us that he who
was to be our Mediator be both true God and true man. If someone asks why this is
necessary, there has been no simple (to use the common expression) or absolute
necessity. Rather, it has stemmed from a heavenly decree, on which men’s salvation
depended. Our most merciful Father decreed what was best for us”(Inst. 2.12.1).
c. 결과적 절대적 필요설: 하나님께서 타락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 자체는
필연적이지 않고 기쁘하신 뜻에 의한 것이었으나 하나님의 속성상 이 일을
이루심에

있어서

아들의

희생은

필연적이었다고

초대

교회의

이레네우스와

중세기의 안셈을 거쳐 베자와 툴레틴을 위시한 개혁자들은 주장했다. 상대적 혹은
가설적

필요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구원경륜

전체(구원주/구원방법/예정)가

하나님의 기쁘하신 뜻에 있다고 본 반면에 결과적 절대적 필요설을 주장하는

- 123 -

사람들은 예정을 기쁘하신 뜻에 의하나 구원주와 구원 방법에 대한 작정은
절대적임을 주장함에서 구별된다.

12.3. 속죄의 성격
a.

제사(sacrificium):

속상적인(expiatio)

그리스도의

제사이다.

그리스도의

피제사는
피제사는

원형적이며(히
제사장이

제물이

9:23)
되는

자기제사였다(히 5:1-10; 7-10장).
b. 유화(宥和, propitiatio): 유화를 의미하는 헬라어 iJlasmo§는 죄를 가리움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카파르(rp'K:)에서 유래한다. 이는 구약에서 속량(신 21:8) 속죄(레
4:35; 16:30) 속함(레 10:17) 등으로 나타나고 신약에서 화목제물(롬 3:25; 요일 2:2),
화목제(요일 4:10), 구속(히 2:17) 등으로 나타난다. 이는 죄로 인한 진노를 무마하고,
가라 앉히고, 가린다는 뜻이다.
c. 화목(reconciliatio): 속죄를 가르치는 다른 하나의 성경적 명사는 화목이니
katallavssw(화목시킨다)와 katallaghvv(화목)에서 유래한 말이다. 유화성이 하나님이
진노를 가라 앉히는 것과 관계된다면 화목성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해진
것을 돌이켜서 하나님의 총애를 회복하는 것과 관계된다(롬 5:8-11; 고후 5:18-21; 골
1:20-21; 엡 2:16).
d. 구속성(redemptio): 구속은 좁은 의미로는 속죄와 동치되나 일반적으로
구원의

전과정을

표현하는

말이다.

구약

시대에

구속이라는

개념은

토지를

무르거나 속하는 경우(hL:aUGÒ, 레 25:24, 51-52; 룻 4:7), 하나님 백성의 구속(시 111:9;
130:7),

처음난

사람의

속전(민

3:49),

생명의

구속(시

49:9)

등을

의미하고,

신약에서는 신자들의 구속(ajpoluvtrwsi§, 눅 21:28; 롬 3:24; 8:23; 고전 1:30; 엡
4:30)과 예루살렘의 구속(luvtrwsi§, 눅 2:38)을 말할 때 사용된다. 특히 속죄의
구속성은 대속물(luvtron, 마 20:28)과 속전(ajntiluvtron, 딤전 2:6)이라는 단어에 잘
나타난다.
e. 대리성: 쉐드(Schedd)는 대리적 속죄를 자신적 속죄와 대조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자신적 속죄는 가해자가 행할 것이나 대리적 속죄는 피해자가
행하였다. 2) 자신적 속죄는 긍휼의 요소를 제외하였을 것이나 대리적 속죄는
최고한 형식의 긍휼을 대표하였다. 3) 자신적 속죄는 영구히 진행중에 있고 구속을
결과하지 못하였을 것이나 대리적 속죄는 화목과 영생에 인도한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되는

먼저는

대제사장의

- 124 -

대리성이며

다음으로는

제물의

대리성이다.
ㄱ. 대제사장은 백성 중에서 대표자로 취한 바 된 사람이다(히 5:1). 그는
속죄제사를 드리고 백성을 위해서 대신 기도하는 자였다(히 5:1-3, 민 6:22-27).
백성들은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접근하였다(민 16:5). 그는 12지파를 새긴 호마노
둘을 에봇 두 견대에 붙이고 판결 흉패를 달고 있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했다(출 28:9-29). 그의 죄는 백성의 죄로 간주되었다(레 16:15-21). 무엇보다도
그는 속죄 산양에게 안수하고 백성의 죄를 고백했다(레 16:15-21).
ㄴ.

제물의

피에

속죄함이

있다(레

17:11).

제주의

죄가

제물에게

이전된다(레 1:4).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사 53:6, 12; 요 1:29; 고후
5:21; 갈 3:13; 히 9:28; 벧전 2:24). 우리의 죄가 제물되신 그리스도에게 전가된다.
ㄷ. 용어상 peri는 “인하여” “위하여”로 해석되어 죄를 제거 혹은 속량하기
위하여(롬 8:3; 갈 1:4; 벧전 3:18; 요일 2:2);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uJper는 peri와
마찬가지로 “인하여”라고도 사용되나(고전 15:3; 갈 1:4)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을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위하여”와 “대신해서”라는 뜻으로 사용된다(눅 22:19,
20; 요 15:13; 고후 5:14, 15, 20, 21; 딤전 2:6; 벧전 3:18). 그리고 ajnti 역시
그리스도의 대신(substitution)을 의미한다(마 20:28-“많은 사람의 대속물(luvtron ajnti
;pollw'n)”; 막 10:45).
ㄹ. 그리스도의 속죄의 대리성은 그의 순종에서 확증된다(히 5:8-9; 롬 5:19;
빌 2:8).
f. 완전성: 그리스도의 피제사는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히 1:3; 9:12; 25-28)
온전하게(히 5:9) 드려서 그의 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온전케 하셨다(히 10:14).
ㄱ. 성경은 죄 사함을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에만 관련시키고 있다. 신자들의
수난은 공로있는 고난이 아니라 다만 경건의 훈련에 불과하다(롬 8:1-34; 히
12:5-11).
ㄴ. 단번에 드려진 그리스도의 제사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는다(골
2:10; 히 10:12-14; 요일 1:7).
ㄷ.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엡 2:7-10).

결론적으로 속죄는 satisfactio vicaria로서 표현된다. 먼저 객관적인 만족이
있어야 한다(이 부분은 안셈과 일치). 그리고 속죄의 대리성이 있어야 한다(안셈은
이 대리성을 바로 궁구하지 못했다).

- 125 -

[보론]

Expiatio, Propitiatio, Reconciliatio (속죄, 용서, 화목):
바빙크의 그리스도의 무름 이해
1. 속죄론,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를 아우르는 자리

헤르만 바빙크의 opus magnum [개혁 교의학(Gereformeerde Dogmatiek)]이 최근에 영
어로 완역되어 출판되어 감으로써 많은 독자들이 그의 신학의 정수를 용이하게 맛 볼 수 있
게 되었다.

338

이렇듯 번역이 늦어 진 이유는 일찍이 번역된 그의 작품 [하나님의 큰 일

(Magnalia Dei)]이 그의 신학의 요체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해 주었으며,

339

무엇보다도 게할더

스 보스, 루이 뻘코프, 차영배 교수 등 화란 개혁주의 신학의 맥을 잇는 후예들이 그들의 작
품들을 통하여서 바빙크의 신학을 여러모로 소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작품도—바
빙크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심오한 교리 진술과 풍부한 성경 인용 그리고 변증적이
면서도 교훈적인 논리 전개에 있어서 [개혁 교의학]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 대작을 직접 읽고자 하는 여망에 부응하여 분책의 형식으로나마 신론과 종말론이 이미
이전에 순차적으로 번역되어 왔었다.

340

이러한 번역서들과 함께 기존에 번역되어 단행본으로

출판된 [계시 철학], [신앙의 확신] 등을 통하여서 독자들은 바빙크의 신학의 대강(大綱)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채로 남아 있었다.

341

342

다만 그의 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기독론 부분은 번역되지 않은
그러나 금번 번역으로 바빙크의 기독론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하고

그의 신학을 재조명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바빙크 자신이 말하였듯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원론 교리에 이르는 “통상의 문”으
로 여기며 신학의 체계를 세웠던 사람은 칼빈이었다.

343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대체로 칼빈이

338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1, Prolegomena, vol. 2, God and
Creation, ed. vol. 3, Sin and Salvation in Christ, ed. John Bolt, tr. John Vriend (Grand Rapids:
Baker, 2003, 2004, 2006). 앞으로 출간될 마지막 제 4권에는 이미 번역되어 출간된 종말론
부분이 수록될 것이다. 이 부분은 Gereformeerde Dogmatiek의 제 4권 중 후반부에 해당한다.
Herman Bavinck, The Last Things: Hope for This World and the Next, ed. John Bolt, tr. John
Vriend (Grand Rapids: Baker, 1996).
339 Herman Bavinck, Our Reasonable Faith, tr. Henry Zylstra (Grand Rapids: Eerdmans,
1956).
340 Herman Bavinck, The Doctrine of God, ed. & tr. W. Hendriksen (Grand Rapids:
****, 1951). 종말론에 관한 책은 위에서 언급했음.
341 Herman Bavinck, The Philosophy of Revelation (New York: Longmans, Green, and
Co., 1909); The Certainty of Faith, tr. Harry der Netherlanden (Ontario, Canada: Paideia, 1980).
342 바빙크는 구원론 뿐만 아니라 인식론에 있어서도 기독론에 정초한 신학을
전개했음에 대하여, Cornelius Van Til, “Bavinck the Theologian,”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1961(24/1). rep., 1-17. 본고는 다음 작품에 대한 논평으로 집필되었다. R. H.
Bremmer, Herman Bavinck als Dogmaticus (Kampen: J. H. Kok, 1961).
343 Bavinck, Our Reasonable Faith, 332.

- 126 -

기독교 강요에서 전개한 가르침의 순서(ordo docendi)에 영향을 받아서 기독론을 은혜 언약그리스도의 인격-그리스도의 사역-속죄론의 순서로 다룬다. 칼빈에게 있어서 은혜 언약은 타
락 후 하나님께서 인류와 맺은 모든 언약들을 의미했다. 그것은 복음과 율법, 신약과 구약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개념이었다. 은혜 언약이 하나임은 성경이 그 실체(substantia)에 있어서
하나임과 다르게 여겨 지지 않았다. 그 실체가 그리스도로서 제시되었다.

344

칼빈의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가 언약의 실체임을 구속사적 관
점에서 더욱 깊이 전개하여 그것이 만세 전에 삼위 하나님 사이의—특히 성부와 성자 사이
의—구원 협약(pactum salutis)에 의해서 작정되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345

구원 협약은 구속자

로서 그리스도, 구속 방식으로서 신인 양성의 중보를 통한 대속, 그리고 구원의 수에 드는
백성에 대한 예정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다루어 졌다. 이러한 구원 협약의 세 가지 요소는
기독론의 핵심 주제인 그리스도의 인격, 사역, 그리고 속죄론에 부합한다.

346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입장이 바빙크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그는 [개혁 교의
학]에서 은혜 언약,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사역이라는 제하의 세 장을 기독론에 할애
한다. 동일한 주제들이 [하나님의 큰 일]에서는 다섯 장으로 좀 더 세분되어 논의된다.

347

체적으로 [개혁 교의학]은 상당히 조직적이고 변증적인 교리 진술을 추구하는 반면에 [하나
님의 큰 일]은 주요 교리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348

이러한 경향은 기독론 부분에서 더욱 현저하다. 바빙크가 전개한 기독론의 핵심인 은혜 언
약에 기초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대한 이해의 심오함과 역동성이 [하나님의 큰 일]에서
는 그 자체로서 제시되지 않는다.

344 Cf. 칼빈은 기독교 강요의 기독론 부분에서 중보자의 필연성(2.6)을 다룬 후
율법을 논하고(2.7-8) 이어서 그리스도의 인격(2.12-14)과 사역(2.15-16) 그리고 속죄론(2.17)을
다루기전에 율법/복음 그리고 구약/신약의 일체성과 차이성에 대해서 다룬다.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 . . , 1559를 인용함에 있어서 다음 번역본을 참고한다.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l, tr. Ford Lewis Battles,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s. 20-21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2.9-11. 이러한 체계는 뚤레틴과 홧지에
의해서 계승된다.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ed. James T. Dennison, tr.
George Musgrave Giger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1994), 169-500.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3 vols., rep (Grand Rapids: Eerdmans, 1995), 2.354-638.
345 Hodge, Systematic Theology, 2.358-362;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174,
177-178.
346 구원 협약이 삼위 하나님 사이의 구원의 작정이라면 구원의 계획(the plan of
salvation)은 하나님의 경륜(an economy of redemption, 엡 1:9-10; 3:9). Charles Hodge는 타락
전 예정설(supralapasarianism)과 타락 후 예정설(infralapsarianism)의 논쟁을 구원의 계획이라는
제하에 기독론을 다루기 직전에 논의하는 한편 뻘코프는 이를 예정론에서 다룬다(118-125).
Hodge, Systematic Theology, 2.313-324; 루이스 뻘코프, [조직 신학], 권수경, 이상원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1), 118-125. 워필드는 구원의 계획이라는 제하에 개혁주의
구원론의 초자연주의-복음주의-제한구원론에 기초해서 전택설과 후택설의 당위성을
설명한다. Benjamin B. Warfield, The Plan of Salvation (Grand Rapids: Eerdmans, 1977).
347 Bavinck, Our Reasonable Faith, XIV. “The Covenant of Grace”(260-279); XV. “The
Mediator of the Covenant”(280-307); XVI. “The Divine and Human Nature of Christ”(308-329);
XVII. “The Work of Christ in His Humiliation”(330-356); XVIII. “The Work of Christ in His
Exaltation”(357-385).
348 Henry Zylstra, in Bavinck, Our Reasonable Faith, “Preface,” 6.

- 127 -

[개혁 교의학]에서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속죄론을 그 분의 비하와 승귀 사역에 나
누어서 광범위하게 다룬다. 이는 동일한 주제를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국한해서 다루는
뚤레틴과 홧지와는 전혀 궤를 달리한다.

349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비하에 대한 논의의 대부분

을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대한 속죄론적 의미를 추구함에 할애한다. 먼저 그리스도의 제
사장이심과 제물이심이 대한 자신의 입장이 개진된다.
삼중적 직분이 논의된다.

351

350

이어서 그리스도의 중보자 이심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이곳에

서는 그리스도의 무름이 고난 당하심과 함께 순종하심을 포함한다는 측면이 강조된다.

352

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나심과 죽으심을 포함한 비하의 여러 양상들에 대한 논의가 많
지 않은 분량으로 다루어 진다.

353

속죄론에 대한 바빙크의 강조는 그리스도의 승귀를 다루는 부분에서도 현저하다.
그는 이 부분의 서론에서 “승귀의 상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본성이 아니라 그의 중보
사역의 영광에 관계된다” 라고 천명한다.

354

어 진다. “죽음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승귀의 길이었음이 먼저 다루
355

이러한 논의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여전히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중보자이심에 기초하여 설명된다. 그가 중보자로서 그의
영을 통하여서 교통하신다는 사실이 구원론의 기초가 됨을 이곳에서 지적한다.

356

그리고 승

귀의 양상으로서 부활과 승천과 재위가 논의된다. 여기에서도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인
격이 중점적으로 언급된다.

357

이어서 죄사함과 용서와 화목을 아우르는 개념으로서 그리스도

의 대속적 공로의 가치를 논하는 속죄론이 다루어 진다. 여기에서는 사람 편에서의 화목과
하나님 편에서의 화목이라는 양면성을 강조하며 그러한 관점에서 속죄론에 관한 다양한 견
해들을 비판한다.

358

그리고 속죄의 범위로서 개혁주의의 제한 속죄론을 다룬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가 보편적으로 만인에게 적용되지 않음을 공로 없는 은혜(gratia immerita)를 전
적으로 전가 받아서 구원에 이르게 됨을 가르치는 전적 은혜의 교리와 결부시킨다.

359

그리고

마지막으로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를 삼중직에 따라서 고찰한다. 이로써 성도에
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단지 칭의에만 머물지 않고 성화와 성화의 완성으로서 영화
에 까지 미침이 간접적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리로서의 중보가 영원함
을 지적함으로써 그것이 확정된다.

349

360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417-482; Hodge, Systematic Theology,

2.480-591.
350
351
352
353
354
355
356
357
358
359
360

Bavinck,
Bavinck,
Bavinck,
Bavinck,
Bavinck,
Bavinck,
Bavinck,
Bavinck,
Bavinck,
Bavinck,
Bavinck,

Reformed
Reformed
Reformed
Reformed
Reformed
Reformed
Reformed
Reformed
Reformed
Reformed
Reformed

Dogmatics,
Dogmatics,
Dogmatics,
Dogmatics,
Dogmatics,
Dogmatics,
Dogmatics,
Dogmatics,
Dogmatics,
Dogmatics,
Dogmatics,

3.327-361.
3.361-368.
3.368-406.
3.406-417.
3.419.
3.421-424, 인용 421.
3.424-436.
3.436-447.
3.447-455.
3.455-475.
3.475-482.
- 128 -

이렇듯이 바빙크의 속죄론 교리는 그의 기독론의 중심 주제일 뿐만 아니라 구원론
의 핵심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계시론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사역 전체
를 아우르는 바빙크의 속죄론을 일의적으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먼저 우리는 그가 사용
한 속죄론에 관한 용어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바빙크의 속죄론이 기초하고 있는
언약 사상에 대해서 일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선(先) 이해 가운데 그리스도의 공로의 어
떠함과 계속적 중보를 통한 전가가 논의되어야 한다. 본고에서 필자는 도식적인 속죄론 논
쟁을 소개하고자 하는 뜻이 없다. 단지 바빙크의 속죄론 이해를 그 자체로 조명함으로써 그
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의의 가치와 그것의 전가를 논하고자 한다.

2. 그리스도의 무름의 다의성: 대제사장으로서 제물을 드리심의 공로

바빙크는 스스로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높아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연
합한 백성들에게 전가해 주시는 공로 전체를 다음과 같이 성경을 인용하면서 총체적으로 기
술한다.

참으로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은총들, 구원(swthria, 마 1:21; 눅 2:11; 요 3:17;
12:47)의 전체가 흘러 나온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죄 용서(마 26:28; 엡
1:7); 죄를 없애심(요 1:29; 요일 3:5); 나쁜 양심을 씻으심 혹은 구원하심(히
10:22); 칭의(롬 4:25); 의(고전 1:30); 아들 됨(갈 3:26; 4:5-6; 엡 1:5); 하나님께
이르는 확신(엡 2:18; 3:12);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즉 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께서 진노를 거두심(롬 3:25; 요일 2:2; 4:10; 히 2:17); 하나님 안에서 이전의 사
악함을 화목으로 바꾸어서 세상에 대하여 화목(katallagh, 롬 5: 10 f.; 고후
5:18-20)의 직분을 감당하고자 하는 성향; 하나님으로 더불어 누리고자 하는 성향
(롬 5:1); 나아가서, 성령의 은사(요 15:26; 행 2; 갈 4:6); 중생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요 1:12-13); 성화(고전 1:30); 그리스도의 죽음에의 참여(롬
6:3 f.); 죄에 대해서 죽음(롬 6:6 f.; 갈 2:20); 세상에 대해서 못 박힘(갈 6:14);
정결하게 됨(엡 5:26; 요일 1:7, 9)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히 9:22;
12:24; 벧전 1:2) 말미암은 죄 씻음(고전 6:11; 계 1:5; 7:14); 성령으로 행하고 새
삶을 사는 것(롬 6:4);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에의 참여(롬 6:5; 엡 2:6; 빌
3:20); 그리스도를 본 받음(마 10:38; 벧전 2:21 f.);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를
더함(롬 6:14; 7:1-6; 갈 3:13; 골 2:14); 옛 언약의 성취와 새 언약의 출발(막
14:24; 히 7:22; 9:15; 12:24); 사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속(눅 11:22; 요 14:30;
골 2:15; 요일 3:8; 골 1:13); 세상을 이김(요 16:33; 요일 4:4; 5:4); 죽음과 죽음
의 공포로부터의 구원(롬 5:12 f.; 고전 15:55 f.; 히 2:15); 심판을 벗어남(히
10:27-28);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지막 날의 부활(요 11:25; 고전 15:21); 승천
(엡 2:6); 영화(요 17:24); 하늘의 유업(요 14:2; 벧전 1:4); 이곳에서 믿음을 품음

- 129 -

과 더불어서 함께 이곳에서 이미 시작되며(요 3:15, 36) 언젠가 영광 가운데 충만
하게 드러나는(막 10:30; 롬 6:22) 영생; 새로운 하늘과 땅(벧후 3:13; 계 21:1,
361

5); 그리고 모든 것들의 회복(행 3:21; 고전 15:24-28).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제사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러한 은총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
게 전체적으로 전가 된다는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속죄의 객관성을 부각시킨다. 그리스도께
서는 많은 일들이 아니라 한 일(evrgon)을 이루셨으니, 자신의 피를 새 언약의 피로서 쏟으셨
다. 그 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qusia, xb;z), 과 예물(prosfora, dwron, !B'r.q' hx'n.m)i 이
되셨다. 그리하여 자신을 드려서 우리를 위한 속전(lutron, avntilutron, hL'aug,. ~yiW.dP., rp,K)o 을 지
불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친히 죄를 전가 받으셔서 그 값(timh)
치루셨다. 그는 유월절 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다. 그 분께서 죄용서
를 위한 제물(i`lasthrion)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저주(katara)를 친히 감당하셨다. 우리가 죽
362

어야 하는데, 그 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u`per sou) 속죄제물(quma)이 되셨다.

“그리스도께

363

여기에서 바빙

서 전한 교훈의 기원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 영감이 아니라 성육신이다.”

크는 그리스도의 생애 자체를 단번에 영원한 제물로서 드려 지는 전체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 분께서 자신의 생애 가운데서 베풀어 주신 가르침 조차 말씀을 그대로 이루어 가
심 즉 제물로 드려짐의 한 양상으로 본다.
바빙크는 제사라는 개념 속에서 만세 전의 구원협약에 따른 성자의 대속(redemptio)
과 이로 말미암은 성부의 화목(reconciliatio)를 함께 고찰한다. 대속의 제물을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하나님 앞에서 깨뜨림으로써 돌려 드림에 다름 아니다. 제사를
이르는

이름들은(hx'n.m,i

hl'[,o hb;z,, hV,a;i dwron,

i`ereion, prosfora, qusia, teleth;

oblatio,

sacrificium) 대체로 이러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제사에는 죄사함이라는 소극적 요소
와 의의 전가라는 적극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364

제물은 죄사함(expiatio)을 바라며 드려진

다. 죄사함은 객관적 보상 혹은 배상의 등가성(等價性)에 기초한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은
아버지의 영예(honor)의 손상은 원상회복될 수 없다. 죄사함은 갚음 그 자체로 되지 않고 갚
음을 받아들이는 용서(propitiatio)가 있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순종하시
고 대속적 죽음을 죽음으로 죄값을 치름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죄사함을 받아서 원형상을
회복할 뿐만 용서를 받아서 첫 언약의 상급인 영생에 이르게 하셨다. 용서는 온전한 하나님
의 백성 삼으심 곧 영생을 수여하심을 의미한다. 빛이 들어옴으로써 어둠이 물러가듯이 주
님께서는 자신의 대속 사역을 통한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성도가 죄사함을 받게 하셨다. 이

36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39-34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37-339.
363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37.
364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28. 바빙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구약의 제사
전체를 그리스도의 피 제사가 함의함을 제시하고 있다: hl'A[(봉헌제물), ~ymil'v.(화목제),
hx'n.m(i 서원제), taP'x;(속죄제), ~v'a'(속건제).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38, n. 27. Franz
Delitzsch, Biblical Commentary on the Prophecies of Isaiah, tr. James Martin, 2 vols. (Grand
Rapids: Eerdmans, 1949), 2.299에서 재인용.
362

- 130 -

러한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교통하며 교제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계속적으로 전가받게 된다. 칭의의 의
를 한번 받아서 법정적 칭의에 이르고 성화의 의를 계속 전가받아서 영화의 길로 나아간다.
이렇듯이 제사에는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성례적 측면이 있다.

365

바빙크는 어거스틴이 제사를 “하나님과의 거룩한 연합 가운데 우리를 그와 하나가
되게 하는 모든 일”이라고 정의한 것을 인용하면서 제사의 기원을 감사와 용서와 연합에서
찾는다. 여기에서 연합은 화목(reconciliatio)의 또 다른 표현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호
의를 베푸사 우리를 아들과 연합하게 하셔서 함께 자녀 삼으셨다. 죄사함이 대속을 전제하
366

듯이 대속의 은혜는 하나님의 호의로 말미암은 용서 즉 화목으로 시혜(施惠)된다.

제사장

(!heK,o i`ereuj, sacerdos)이 드리는 제물은 스스로 준비 될 수 없는 것으로서 선물(hx'n.m)i 이라고
불렸다. 바빙크는 이러한 선물로서 주어진 제물을 되돌려 드리는 제사는 언약의 약속이 전
제된 하나님과의 교제에의 회복과 감사를 목적으로 삼았다고 강조한다. 제물은 단지 형벌을
치름에 머물지 않고 완전한 속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지향했다. 그리하여서
단순히 드린 것이 아니라 피를 뿌려서 생명을 속하게 했다는 것이다(레 17:11). 단순히 속
죄제 뿐만 아니라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에도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은 모든 제물이
속죄의 무름에 기초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바빙크는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대속죄
일의 제사가 모든 제사를 아우른다고 본다. 그 날에 대제사장이 민족과 자신의 죄를 전가시
킨 제물의 피를 뿌리고 각을 떠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면전에 서게 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대제사장을 대리인으로 드려 진 제물을 대속물(rp,K,o lutron)로 받으시고 그의 면전에
서(rPek)i 그들의 죄를 가리워 주실 뿐 아니라 스스로 그 죄를 뒤집어쓰심을 의미한다고 지적
367

한다.

마치 모든 제사가 대속죄일의 제물에 포함되고 그것으로부터 기원하듯이 예수님의
전 생애는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드림에 다름 아니라고 바빙크는 본다. 그리하여서 그리스
도의 삼중직도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 제물을 드리심으로 그리고 이제 그 다
이루신 의를 자신의 중보를 통하여서 전가해 주심으로 이해한다.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대제
사장 되심은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 되심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분의 제사는 중
보직을 완수하셨음을 의미한다. 대제사장 그리스도의 제사에는 죄사함과 용서와 화목이 포
함된다. 바빙크는 이러한 세 가지 양상이 성자의 대속 사역의 성취, 그 사역의 대속성에 대
한 성부의 인정, 그리고 아들의 영을 부어 주심으로써 이루시는 그 사역의 공로의 전가에
각각 부합하는 것으로서 파악한다.

365
366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29-33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31-332, 334. 어거스틴의 인용, De civitate Dei

X.6(331).
36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33-334. 그리스도의 속죄와 관련된 용어들에
대해서 특히 다음 글들을 참조하라. Benjamin B. Warfield, “The New Testament Terminology
of ‘Redemption’,” “ ‘Redeemer’ and ‘Redemption’,” “Christ Our Sacrifice,” in The Works of
Benjamin B. Warfield, vol. 2, Biblical Doctrin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32),
327-372, 375-398, 401-435; Hodge, Systematic Theology, 2. 469-470, 478-479, 501-523.

- 131 -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승귀를 그 분께서 자신을 화목제물(i`lasthrion, i`lasmoj)로서
드려 우리의 죄 값을 치름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자리에 서게 하시는 권능으
로 본다.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의 무름(katallagh)을 받으시고 그 값을 우리의 것으로 삼으
368

심이 곧 화목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나 죄에 대하여서는 진노하신다. 하나님의

진노와 그의 의는 서로 상반되지 않고 그의 지고한 사랑으로 조화된다. 피조물들의 죄에 대
한 진노는 그들을 향한 사랑과 부합한다. 여기에서 바빙크는 칼빈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는 죄 때문에 우리에게 진노하시지만 스스로 사랑이시므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강조한다.
성부께서는 오직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을 이루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
과 화목하게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속전을 정하시고 제공하시는 분이 곧 그리스도 안에
서 그 속전을 취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빙크는 화목을 “하나님의 생의 내재적
과정(an immanent process in the life of God)”이라고 부른다.

369

바빙크는 화목제물(i`rasmoj)이 그렇듯이 그것으로 말미암은 무름 (katallagh)도 객관
적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i`raskesqai는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자신을 제물로 드려 성도들
의 죄를 속량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킴으로써 자신의 공로를 그들에게 전가하시는 주체
가 됨을 말하는 반면에 katallassen은 하나님 자신께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려서
370

자기 자신과 세상 사이에 화목한 관계를 수립함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무름이

삼위일체론적-기독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소이이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와 같이 바빙크는 무름(katallagh)이라는 단어를 죄사함(expiatio)
과 용서(propitiatio)로 말미암은 화목(reconcilatio)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
리적 무름의 전 과정—예수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의 전 생애 혹은 그 분의 삼중적 사역
전체—이 아론의 반차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피 제사
의 공로로써 역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피 제사의 효력은 그리스도의 과거적이며 현
재적인 삼중적 중보 사역에 공히 미친다.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피 제사의 공로를 화목—즉
무름—으로 보고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다의적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1) 사법적이다. 무름
의 공로로 죄 용서, 칭의, 수양, 그리고 구속(avpolutrwsij)에 이른다; 2) 신비적이다. 무름의
공로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고, 죽고, 부활하고, 우편에 앉는다; 3) 윤리적이다.
무름의 공로로 거듭나고 거룩하게 된다; 4) 도덕적이다. 무름의 공로로 그리스도를 모범으
로 바라보며 산다; 5) 경륜적이다. 새 언약의 성취로 말미암은 무름의 공로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구원에 이른다; 6) 실체적이다. 무름의 공로로 세상, 죽음, 지옥, 그리고 사단에 대
해서 승리한다. 그리하여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신다.

3. 속죄론의 언약적 기초

368
369
370
371

Bavinck,
Bavinck,
Bavinck,
Bavinck,

Reformed
Reformed
Reformed
Reformed

Dogmatics,
Dogmatics,
Dogmatics,
Dogmatics,

3.447-448.
3.448-449, 인용 449.
3.450.
3.451.
- 132 -

371

위에서

보았듯이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무름을

대제사장의

제사라는

개념에

기초하여 포괄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러한 입장은 은혜 언약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이해에

정초한다.

바빙크는

은혜

언약을

전체

구속사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작정이

이루어지는 경륜이라고 본다. 그는 “은혜 언약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 협약에 위해서 영원
전에 이미 작정되었다. 그리고 타락이 일어난 순간부터 그리스도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372

라고 주장한다.

언약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육신 이전 창조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인류의 타락 후에 그 중보가 대리적 속죄를 이루는 은혜 언약에 기초하게
373

되었다고 본다.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은혜 언약의 일방성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함으
로써 그 분의 대속의 구속사적이며 구원론적인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한다. 언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 자체와 그 관계에 따른 종교의 양식(forma religionis)을 제시하는 총
체적인 개념이다. 다만 이러한 언약의 개념이 은혜라는 질료(materia)와 믿음이라는 도구
(instrumenta)로서 한정적으로 파악될 때 은혜 언약이라고 불린다.

374

바빙크는 은혜 언약을 관

계 자체와 그것의 현상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본다. 그것은 단지 특정-사안적 계약이 아니
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은혜 언약이 타락 후 즉시 시작되었다고 단언한다. 더불어서 그
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수치를 느끼게 되었음이 이미 하나님의 성령의 작용으로 말미
암았다고 지적한다. 참으로 바빙크는 “하나님의 진노와 은혜” 혹은 “의와 자비”는 타락과
375

함께 계시되었으며 역사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바빙크는 언약(tyrb)이 어원상 쌍방의 의무에 대한 맹세 혹은 약속, 이를 어겼을 때
내려지는 형벌을 환기시키는 저주, 그리고 이러한 저주를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의식이라는
376

세 요소를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은혜 언약은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대표와의

계약이라는 측면에서 이미 일방적이다. 왜냐하면 타락 후 사람은, 일방적 긍휼이 없다면, 하
나님과 도무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듯이 중심
을 보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죄인인 채로 두시고 죄인에게서 무엇을 요구하시
는 계약을 맺을 수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락 후 모든 언약은 상호적인 계약
(sunqhkh)이나 전적 은혜로 말미암은 구속을 전제하는 일방적인 계약(diaqhkh)으로서 해석되
377

어야 한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모세와 맺은 언약도 타락 전 아담과 맺었던 행위 언약이

37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15.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 Bavinck, Our Reasonable Faith, 280-307.
374 이러한 바빙크의 견해는 화란의 언약신학을 대표하는 윗시우스(1636-1708)에게서
효시적으로 발견된다. 윗시우스는 그의 저서 De oeconomia foederum Dei cum hominibus에서
은혜 언약이 그 실체(substantia) 혹은 본질(essentia)에 있어서 하나임을 다음 세 가지로
지적한다: 첫째, 하나이며 동일한 영생이 약속되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저자시며
수여자시다; 셋째, 오직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 Herman Witsius, The
Economy of the Covenants between God and Man: Comprehending A Complete Body of Divinity,
2 vols., tr. William Crookshank (London: R. Baynes, 1990), 3.2.1-2.
375 Bavinck, Reformed Dogmatics, 3.196-200, 인용 200.
376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03.
37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03-206.
373

- 133 -

모양을 바꾸어 새롭게 제시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율법을 다 지킴으로써 의를
이루어 구원에 이른다는 모세 언약의 본질은 오히려 오직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
은 구원의 길을 명확하게 계시한다.

378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인 부어 주심을 내용으로 하는 언약을 타락한 인
류를 상대로 상호간에 맺으셨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어떠하심을 드러내심으
로써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큰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겠다
는 만세 전의 구원 협약을 타락한 인류와 맺은 언약의 약속대로 이루심으로써 자신의 공의
와 사랑을 함께 계시하시기 위함이셨다. 바빙크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 협약(pactum salutis)을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보기는 하되 다만 그것 자체로써 어떠한 은혜가 선취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려서 첫 언약의 약속을 성취한 것이지
이미 만세 전에 지불한 보증금에 더하여서 십자가에서 잔금을 지불한 것이 아니었다고 본
다. 구약의 믿음의 백성들은 “보증금을 지불하는 자(fideiussor)”로서 이미 만세 전에 구속 사
역을 시작하신 그리스도께서 “잔금을 지불하는 자(expromissor)”로서 오실 것을 믿은 것은 아
니었다.

379

그들의 믿음은 구속사적 성취를 바라보는 믿음이었다는 측면에서 그 성취를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서 믿는 신약 백성의 믿음과 구별될 뿐이다. 오직 십자가의 대속 사역만이
은혜 언약의 유일하며 전체적인 성취이다.

380

만세 전의 구원 협약을 이와 같이 이해할 때에만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
애 전체가 우리 구원의 값이라는 이해에 이를 수 있다고 바빙크는 말한다. 우리를 위한 예
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성육신으로부터 시작되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써 끝이 난
다. 그 분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대속의 값을 다 지불하셨다. 그 분의 비하의 삶
전체가 우리 구원의 값이다. 그 값이 우리의 것으로서 지불되는 길이 열렸는데 그것이 그
381

분의 승귀이다. 그리스도의 다 이루신 공로의 영광이 승귀라고 바빙크는 말한다.

우리의

구원의 의가 이 땅에 오신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으로써 성취되었
다. 그 분은 그러한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 가운데 위격적으로 고난을 감수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속죄의 값은 오신 그 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전체 진리와 일
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진리의 계시가 복음이다. 속죄는 죄값을 지불함에 머물지 않는
다. 그것은 그 값을 받아들이는 용서를 필히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의 사역 자체
를 통하여서 아들의 죄값 지불(expiatio)과 아버지의 용서(propitiatio)가 함께 무름(satisfactio)의
값이 된다. 이것이 타락 후 즉시 작용하기 시작한 은혜 언약의 약속이었다. 그리스도의 무름
은 그 약속의 성취였다. 바빙크는 이러한 무름을 화목(reconcilatio)과 동일하게 파악하고 있
다.

382

378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20-22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12-216.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논의에 대해서,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240-247.
38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24.
38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34.
382 Bavinck, Our Reasonable Faith, 357-359.
379

- 134 -

4. 무름의 값

지금까지 우리는 바빙크가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의 의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 그리스도의 피 제사의 공로—혹은 값—와 동일시 하고 그 의가 단순히 아론의 반
차를 좇는 제사장의 직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포함한 전체 중보자직에 관련된
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바빙크는 속죄론에 있어서의 “속죄” 개념을 그리스도의
죽음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 분의 비하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것으로 본다. 그 전체를 그
는 그리스도의 피 제사로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것으로서 우리에게 전가되는 의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제시된 많은 견해들을 비판하면서 바빙크는 다 이루신 의 전체가 모
두 전가되는 의라고 보는 자신의 입장을 뚜렷하게 피력한다. 안셈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무름이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이라는 것을 천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의 객관적인 전가를
합당하게 주장한 공은 있으나, 무름을 죄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한 영예의 회복으로 봄으로
써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을 단지 그의 죽음에만 한정한 잘못을 범했다고 비판 받는다.

383

이러한 안셈의 견해와는 달리 아퀴나스는 무름을 그리스도의 죽음에 국한하지 않고 그의 고
난과 율법에의 순종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보았다는 측면에서는 합당하나 객관적인 의의 전
가를 말하지 않고 대속의 공로를 단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덕과 겸손의 모범으로 제시하시
384

면서 우리를 감동해서 그를 닮도록 하시는 은혜 정도로 보았다는 점에서 비판된다.

바빙

크의 알미니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에서도 이러한 안셈과 아퀴나스의 오류가 지적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의 전가를 부인했으며 만인 구원설을 주장하여 결국 죽음의 의
385

의 전가 조차 부인하기에 이르렀다고 비판한다.

한편 바빙크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 안의 그리스도가 기독교의 핵
심이라고 주장하면서 대속을 그리스도의 영원하고 본질적인 신적 의가 성도들에게 주입되는
386

것으로 본 오시안더(Osiander)와 경건주의자들의 견해를 비판한다.

이들이 하나님과 개인

과의 신비적인 화해를 우선시 하고 대속은 단지 그러한 내적 화해의 열매 정도로 생각했다
387

는 측면에서는 슐라이엘마허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슐라이엘

마허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단지 도덕적 모범으로서 공동체의 가치를 제시하는 전형

383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43-344.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43-344. 결국 아퀴나스는 죄의 용서와 화해의
공로를 분리해서 다루는 안셈을 좇아서 대속의 역사와 그로 말미암은 열매를 나눈 것이다.
다만 안셈과는 달리 아퀴나스는 화해보다 대속을 강조했다.
385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49-350.
386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45-347.
38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53-354. 슐라이엘마허에 의하면 객관적 속죄론은
성립할 수 없다. 그는 단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가운데서 그 분의 본질에 동참으로써
우리 속에서 구속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서 구원 과정을 파악한다. 그러므로 구속이 먼저고
화해는 그 결과로서 제시된다. 결국 슐라이엘마허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가 그를
닮는다는 효과에 다름 아니다.
384

- 135 -

정도로 여기는 리츨과 그리스도의 속죄의 필연성을 부인하고 단지 오염의 전가만을 받은 인
류가 나아갈 길을 그리스도께서 제시했다는 측면에서만 구원을 논하는 사설적 보편주의자들
388

을 비판한다.

이러한 입장의 극단은 쏘시누스주의자들에게서 발견된다. 바빙크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만을 인정했으며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그 자체로 모범이 되는 것
389

이 아니라 단지 그러한 지식의 도입이나 준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여러 견해들을 비판하는 가운데 바빙크는 자신의 입장을 개혁주의 교리 특
히 칼빈의 교리에 정초시킨다. 죽음의 형벌로서의 죄책과 하나님의 영예를 훼손하는 죄를
나누고 무름을 후자에 국한시킨 안셈과는 달리 바빙크는 죄를 죄책을 포함하는 것으로 여김
으로써 무름의 교리를 전체 죄 현상에 적용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전가되는 의는
수동적이고 능동적인 순종(obedientia activa et passiva)의 공로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또한 이러한 입장이 그리스도의 삼중적 중보직에 대한 개혁주의적인 이해로
말미암아 더욱 확고하게 견지됨을 적시한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객관적 측면과
390

주관적 측면이 구별은 되나 동시에 함께 추구되고 강조되어야 함이 주장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의의 객관적, 전체적, 인격적 전가 교리의 기초에는 그리스도의 중보가 “경륜에
의해서(by dispensation)” 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formally)”도 양성에 따라서 수행된다
391

는 진리가 놓여 있다.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중보의 유일성을 강조하며 “그 분께서는 양편
392

사이에 계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인격 가운데 양편이시다” 라고 강의적으로 말한다.

리스도께서는 양성적 중보 가운데 의를 이루신다. 그러므로 그 분께서 의를 이루심이 아버
지의 사랑과 배치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해 가운데 바빙크는 쏘시누스주의자들이 성부의 사
393

랑과 성자의 은총을 분리하려는 것을 경계한다.

안셈과 기본적으로 그를 추종하는 카톨릭 신학자들과 루터란들은 우리에게 전가되
는 그리스도의 의를 오직 수동적 고난 당하심과 죽음에 국한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율
394

법에 순종하신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견해를 반박하며 바빙크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고 선포하신 것은 잉태로부터
죽음에 이르기 까지 전체적인 순종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
아 “생명에 이름(dikaiwsij zwhj)(롬 5:18-19)”은 “생명의 순종(obedientia vitae)”과 “죽음

388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54-36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47-349.
39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45.
39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63-364. 카톨릭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중보는
공식적으로는 인성에 속하며 다만 경륜적으로만 신성에도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39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63.
393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74-377. 칼빈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공로만
강조하고 하나님의 뜻(voluntas)은 등한히 여긴다고 비판하는 쏘씨누스(Laelius Socinus)에
대해서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이 아들의 대속적 공로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랑의 시작은 의이다(principium amoris est iustitia)” 라고 말한다. Inst. 2.17.1-2(CO
2.386-388), 인용 2.17.2(CO 2.387).
394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77-378.
389

- 136 -

의 순종(obedientia mortis)”이라는 하나의 전체적인 사역의 열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죽으심을 전하는 말씀들은 그 분의 죽음만이 무름의 질료가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자원하여 순종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영생을 얻고자 하심이었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소극적이며 적극적인 순종의 의가 성도의 구원과
정 전체를 보증해 준다고 말한다.

395

여기서 바빙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공로

로 말미암아 이제는 오히려 율법을 좇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그 분께서 성도의 삶을 여전히 중보하신다는 측면이 부각된다.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러한 순종의 완성으로 본다. 그리고 그 죽음의 은혜
는 “잠재적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역사한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지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높은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실제”를 이루었다. 죽음으로써 그 분께서는 우리
의 죄를 “있는 그대로 두고 치유하시는(solidaristic-reparatory)” 은혜가 아니라 “대신해서
396

사하여 주시는(substitutionary-expiatory)” 은혜를 베푸신다.
397

서 하늘 지성소에서 여전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그 죽음의 공로로 그 분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순종

하심으로써 성취하신 모든 의가 우리를 위한 대리적 무름의 공로로 역사함을 믿지 않는 사
람들은 그 분의 계속적 중보를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보는 오직 칭의를 위하여서만
398

단회적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죄와 저주가 되셨다. 그 분께서는 단지 인류의 고난
에 동참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난을 죄로 말미암은 형벌로 알고 겪으셨다. 그 분께서
는 죄의 값을 “객관적으로” 지불하셨으며 “주관적으로” 죄의 권세를 물리치고 성도와 그리
399

스도가 연합되게 하셨다.

바빙크는 이러한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그 분께서 계속적

으로 중보 사역을 수행하심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늘에서 중
보 사역을 계속 감당하시며 그 분께서는 여전히 동일한 그리스도, 중보자, 선지자, 제사장,
왕이심을 천명한다.

400

선지자로서의 중보를 계속하심과 관련해서 바빙크는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40일간 가르치셨음과 또 다른 보혜사이신 진리의 성령을 내려 주
401

셔서 교회와 성도가 모든 지식과 지혜의 부요함에 이르도록 하심을 강조한다.

제사장 직

분에 문의하면서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은 천상에서의 중보사역의 준비라고 말한

395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78-38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85-386.
397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84.
398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99-402.
399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04-405.
400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73-475. 존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를 “하늘에서의 대제사장적 활동”이라고 부르며 우리를 위하여 드리시는 중보의 기도,
우리를 위한 대언자가 되심, 성도와 교회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심, 언약의 보증이며
영원하신 중보자이심으로 설명한다. 주님의 대제사장이심으로 모든 중보를 설명한 것은
바빙크와 흡사하다. John Murray,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y, Vol. 1, The Claims of
Truth (Carlisle, PE: Banner of Truth, 1976), 62-76.
40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75-476.
396

- 137 -

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맺으신 새 언약은 스스로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면전에
서 친히 간구하심으로써 성도의 구원을 이루심에 대한 약속으로서 제시된다. 주님께서는 단
순히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늘의 참 성소에 들어가셔서 한 번 그 피를 드리신 것이 아니
라 그 “피를 통하여서” 그곳에 들어가셔서 그 공로로 계속적으로 중보하심으로써 다 이루신
그 의를 성도들에게 전가하심을 강조한다. 바빙크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역사적이며 또
402

한 초역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직이 논의된다. 주님께서는 영원하신 왕으로서 승귀하심으로써 비로서 그 직을 수행하신
403

다. 특히 왕직과 관련해서 주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교회를 다스림이 적시된다.

이러한 그

리스도의 중보직은 영원하다. 다만 역사적으로 심판 전에 무름의 공로를 전가하시는 사역은
마지막 날에 끝이 나지만 그 다 이루신 공로로 말미암은 제 2위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의
머리로서의 중보 사역은 계속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하다. 즉 그 분
404

의 대리적 속죄의 값은 영원히 역사한다. 무름의 값은 시간적으로도 영원하다.

5. 결론: 바빙크의 총체적, 역동적 이해

바빙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세 전의 구원 협약에 따라
서 친히 우리를 위한 언약의 머리로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 되셔서 단번에
드리신 영원한 피 제사를 그 분의 사심(obedientia activa)과 죽으심(obedientia passiva)의 무름
의 공로의 총화로 본다.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한 인류의 죄책과 오염을 다 전가 받으시고 언

402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76-479.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79-481.
404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81-482. 이러한 영원한 중보를 바빙크는
삼위일체론적으로 “하나임의 중보직(the mediatorship of union)”이라고 부른다. 이 부분에
대한 각주에서 John Bolt 교수는 칼빈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성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고
지적한다(3.482, n. 165). 칼빈의 견해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유한하며 “심판 때 하나님
아버지에게 로고스가 나라를 넘겨준다”고 주장하는 안키라의 마르켈로스(Marcellus of
Ancyra)의 입장과는 현격히 구별됨은 다음의 진술에서 밝혀지는 바이다. Inst. 2.14.3 (CO
2.356): “Sit igitur nobis haec rectae intelligentiae clavis, neque de natura divina, neque de
humana simpliciter dici, quae ad mediatoris officium spectant. Regnabit ergo Christus donec
prodierit mundi iudex, quatenus pro infirmitatis nostrae modulo patri nos coniungit. Ubi autem
consortes coelestis gloriae Deum videbimus qualis est, tunc perfunctus mediatoris officio, desinet
patris legatus esse, et ea gloria contentus erit, qua potiebatur ante mundum conditum. Nec alio
respectu peculiariter in Christi personam competit Domini nomen, nisi quatenus medium gradum
statuit inter Deum et nos. Quo pertinet illud Pauli: unus Deus ex quo omnia, et unus Dominus
per quem omnia (I Cor. 8:6); nempe cui temporale imperium a patre mandatum est, donec facie
ad faciem conspicua sit divina eius maiestas; cui adeo nihil decedet, imperium patri reddendo, ut
longe clarior emineat. Nam et tunc desinet caput Christi esse Deus, quia Christi ipsius deitas ex
se ipsa fulgebit, quum adhuc velo quodam sit obtecta.” 마르켈로스의 입장은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을 가졌음을 부인하는 근거가 됨으로써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정죄되었는데 반하여 칼빈은 오히려 삼위 하나님의 영원하신 다스림을 이
부분에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켈로스의 입장에 관해서, 서철원, [교리사] (서울:
총신대학교 출판부, 2003), 289-298, 인용 296.
403

- 138 -

약의 피를 쏟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다 무르셨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마다 옛 사람이
죽을 뿐만 아니라 새 사람이 산다. 구원은 단지 죄사함을 받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의
의 전가로 말미암아 새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삶은 오직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만 가능하다.
대리적 무름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은혜는 아버지의 뜻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
히려 그것을 이루심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계시가 아들의 무름이다.”

405

행위 언약(첫 언약)

의 약속에 대한 성취가 은혜 언약의 약속이다. 은혜 언약의 성취는 새 언약—피 언약—을
이루심이다. 은혜 언약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며 그의 중보로 말미암아 구원의
백성으로 사는 은혜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은혜 언약은 행위 언약을 능가한다. 은혜 언약의
약속은 단지 그리스도의 피 값을 나의 것으로 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피를 쏟으
신 그리스도께서 계속적으로, 영원히, 중보하심을 포함한다.

“은혜 언약이 행위 언약을 능가하는 만큼 복음이 율법을 능가하고, 그만큼 그리스
도가 아담을 능가한다.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은 행위 언약의 기초에서는 이해되
지 않는다. 그것은 율법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율법을 능가한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사고와 관념을 넘어선다. 대리적 속죄는 흔들리지 않는 삼위 하나님의 협약에 기초
한다. 그것은 최상의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을 계시한다.”

406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을 그 분이 대제사장이시자 제물이시라는 성경적
가르침에 기초해서 전개했다. 바빙크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필연성을 인류 일반의 보편
적 요구로부터 찾은 것은 사실이다.

407

그러나 그는 비록 창조를 구속의 준비라고 했으나 타

락이 없어도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필요하다고 본 오시안더와 중세 스콜라 신학의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오직 타락을 전제로 할 때에만 그리스도가 아담의 모범이라는 진
술이 가능하다고 본다.

408

또한 그는 특별 은총으로 구원 받은 백성에게 일반 은총이 부어 진

다는 의미에서 일반 은총이 특별 은총에 봉사한다는 것이지 일반 은총이 특별 은총에 앞선
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409

바빙크가 그리스도의 속죄를 불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의 창조로부터 완전한 하나님
의 형상으로 나아가는 완성으로 본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영생을 수여하심으
로써 그 본성대로 이루심으로 보았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무름의 값을 죄사함(expiatio) 뿐
405

Bavinck, Reformed Dogmatics, 3.391.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05-406.
407 Cf.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3, Sin and Salvation in Christ, “Editor’s
Introduction,” 17-19. 서철원 교수님께서는 바빙크가 창조의 완성으로서 구원을 바라봄으로써
창조 중보자와 구속 중보자를 바르게 연결하지 못한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하신 바 있다.
Chul-won Suh, The Creation-Mediatordship of Jesus Christ (Amsterdam: Rodopi, 1982), 194-197
(Cf.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1:352; 2.532; 4.667).
408 Bavinck, Reformed Dogmatics, 3.277-280. Cf. Andreas Osiander, An Filius Dei fuerit
incarnandus . . ., 1550.
409 Bavinck, Reformed Dogmatics, 3.470-473.
406

- 139 -

만 아니라 의의 전가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바라보고 이러한 객관적 의가 아버지 편으로부터
는 그의 백성들에 대한 용서(propitiatio)와 화목(reconciliatio)으로 계시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점을 고려할 때—즉 그의 속죄론의 고유한 특성을 고려할 때—그는 전적 타락과 전적 은혜
의 교리에 충실하게 서 있었던 신학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바빙크는 당대 리츨 학파 신학
자들을 비롯한 자유주의 신학자들과의 논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아브라함 카위퍼와 더불어서
일반 계시론을 심화하면서 일종의 자연신학적인 경향성을 드러냈지만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과 그 은혜의 적용인 구원론의 연결 고리가 되는 속죄론에 있어서는 어김 없이 칼빈의 입장
에 서서 신학을 전개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바빙크의 신학에 대한
평가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은총에 대한 그의 총체적이며 역동적인 이해에도 적실하다. “칼
빈이 그의 사상들을 성경으로부터 모았다면 바빙크는 항상 성경에 깊이 잠겨서 자신의 사상
들을 추구했으며 성경의 지도를 받아 그것들을 체계화했다.”

410

410 다음으로부터 Landwehr의 말을 재인용. Zylstra, in Bavinck, Our Reasonable Faith,
“Preface,” 6-7.

- 140 -

13.4. 속죄론 개관
13.4.1. 초대 교부의 이론

초대 교부의 이론은 오히려 순수한 대속적 요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성육신하신 로고스의 죽음은 사람의 죄와 사망의 사망을 위한
배상이다”고 갈파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사망의 권세를 가진 자를 이겼다는
사상(오늘날 아울렌의 승리자 그리스도에서 다시 나타남)을 전개함에 있어서
사단배성설이 등장했다.

a.

사단 배상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그의 백성을 위한 배상으로 사단에게
헌납하셨다는 이론이다. 오리겐을 필두로 이레네우스, 닛사의 그레고리 같은
많은 교부들이 이를 따랐다. 속죄의 원인은 하나님의 공의에 있는 것이지
사단에게 빚진 부채에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이 이론은 비판을 받는다.

b.

요점재현설(recaptitulation theory): 사단배상설을 주장한 이레네우스는 일종의
비전적(esoteric)

이론으로서

이를

제시했는데,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인생의 모든 단계들을 요점 재현하시되 죄인으로서 우리의 상태에 속하는
계단들까지 포함했다고 본다.

13.4.2. 주관적 이론

a.

도덕적 감화설(moral influence theory) 혹은 신애설(神愛說):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아희생의

모범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내는

효과라는

측면에서 파악한다. 하나님의 속성은 죄인편의 만족을 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죄인을 감동시켜 회개케하는 것과 맞는다고 본다. 이
이론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에

나타난

신적인

차원이

강조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의 주된 효과는 하나님의 편에 있다기 보다 사람 편에
있다는 면이 부각된다. P. Abelard이 주장했으며 영국의 Hastings Rashdall과
이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Horace Bushnell에 의해서 계승 발전되었다.
부스넬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니라 이 땅에 오신
결과라고 말한다.

- 141 -

b.

모범설(the example theory) 혹은 순교설(殉敎說):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이
가르치신 교훈의 확실성을 인쳐서 확증하는 순교로 보는 이론이다. Laelius
Socinus(1525-1562)와 Fautus Socinus(1539-1604)에 의해서 주창되었다. 이들이
근거하는 성구는 벧전 2:21,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이다. 이 이론은
펠라기우스적인 관점에 기초하고 예수가 단지 인간일 뿐이라는 입장에
터잡고 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지만 실제로는
제사장적 기능을 두 방면에서 무효화했다. 첫째로 그들은 예수의 지상 생애
동안의 사역이 제사장적이라기 보다는 선지자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둘째로
그들은 그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은 하늘에 있는 그의 보좌에서의 왕적
기능과 구별되기 보다는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c.

신비설: 신비설은 속죄가 사람에게 감화를 일으켜서 변화를 가져 온다는
측면에서는 도덕적 감화설과 일맥상통하나 이 이론은 단순한 윤리적인
변화보다

구별된다.

John

Scotus

Eerigena,

슐라이엘마허의

이론과

다르지

문의하지

깊은

않고

하나님과의

죄의

신비적인

연합을

Osiander,
않다.

오염의

제거에만

강조했다는

Swenkfeld

등이

신비설은

죄책에

관심을

측면에서
주장했으며

갖는다.

대해서는
우리가

오시안더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이들은 인간이 그리스도와 같이 신화되어
감을 강조한다. 이 이론이 고조하는 하나님 의식은 하나님과 사람의 본질적
융합을 극치로 한 범신론을 가정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다. 이와 같은
면에서 신비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위 안에 인성의 주관적 정화는 그의
속죄를 구성하니 사람들은 어떤 객관적 속상에 의해서 구원되지 않고 오직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의

참여자

411

된다는

Edward

Irving(1792-1834)의 패괴점차근절설(theory of gradually extirpated depravity)과
통한다. *패괴점차근절설은 그리스도에게 유전적 패괴가 있었다는 것을
가정하는 오류가 있다.

13.4.3. 객관적 이론

411 Cur Deus Homo, 1.11: “Nec sufficit solummodo reddere quod ablatum est, sed pro
contumelia illata plus debet reddere quam abstulit. . . . Sic ergo debet omnis qui peccat,
honorem deo quem rapuit solvere; et haec est <satisfaction>, quam omnis peccator deo debet
facere.” 2.6: “. . . satisfaction, quam nec potest facere nisi dues nec debet nisi homo; necesse
est ut eam faciat dues-homo.”

- 142 -

a.

안셈의 만족설(satisfaction theory): Cur Deus Homo라는 책에서 속죄의 절대적
필연성을 하나님의 존영에서 찾는다.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써 직무 밖의
여분의

사역을

감당했으며

공로에

대한

대가를

받으셔야

하는데

그리스도는 아무것도 수요치 않음으로써 이 공로를 복음을 좇아 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죄와 축복을 위해서 베풀어 주셨다고 한다. 이 설은
속죄의

근거를

하나님의

공의에서

찾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존영에서

찾음으로써 대리적 고난을 설명하는데 난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설은
그리스도의 의의 내적 전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속죄를 적극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죄사함으로만 국한한 오류가 있다.

b.

정치설(governmental theory): 이 이론은 Hugo Grotius(1583-1645)에 의해서
주창되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어 논리적 필연에 의해서 죄를 미워하시며
그 자신의 성질에 의해서 죄를 반드시 형벌하신다는 것이 부정된다. 필요한
것 전부는 공적공의—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존엄—를 받들어 올림이라고
한다. 이 이론은 대리적 속죄의 엄격함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는
보수적(報讐的)적이지 않고 백성들의 일반적인 안녕을 고려한 일반적 정치적
공정이라고 본다. 죄란 법에 대한 위반이다. 죄에 대해서 형벌이 과해짐은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용서하실 수 있다. 다만 죄를 용서하실 수
있지만 도덕적 통치를 고려해야 했다. 형벌은 절대 전가되거나 이양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들의 형벌을 담당하신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공포를 우리 안에서 야기시키려고 의도된 설명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에게 죄의 위험성을 인상지움으로 죄를 억제하도록 한다. 그래서
우리가 죄에서 돌이킴으로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들에게
형벌을 주어야 할 필요성이 제거되면서 동시에 도덕적인 통치와 율법의
권위도 지지되는 것이다.

c.

대신통회설(theory of vicarious penitence): 이 이론은 Jonathan Edwards의
제안에서 단서를 취하여 J. McLeod Campbell(1800-1872)과 R. C. Mobely주장
한 것으로서 예수를 구원의 중보자로 만든 것은 그의 형벌적인 수난도
아니요 그의 형벌적 예증도 아니라 오직 그의 완전한 통회였으니 통회란
철저히 혹 자신적인 행위 혹은 행위들의 연속이다. 그리스도가 사람으로서

- 143 -

우리와 동일한 연약함 가운데서 죄를 자백하고 뉘우쳤다면 동시에 이것이
어떻게 인류를 대신하는 것인지가 설명이 안된다. 이 이론은 객관적 속죄를
412

주관적 속죄로 설명하려는 모순을 안고 있다.

412 Daniel L. Migliore의 고찰은 일고를 요한다. 그는 속죄론을 크게 승리자
그리스도론(우주적 갈등론), 만족설, 도덕감화설로 삼분하고 칼빈의 중보자의 삼중직을 이에
맞추어 해석한다. “예언자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함으로
우리에게 그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권면한다(도덕감화설).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완전한 사랑과 순종의 제사를 드린다(만족설).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왕의 세력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를 다스리며,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의
다스림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을 약속하신다(승리자 그리스도). Faith Seeking Understanding: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Theology, [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227-228.

- 144 -

[보론]

그리스도의 무름(satisfactio Christi): 개혁주의 속죄론의 형성
1. 무름: 속죄의 실체

속죄론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가 성도에게 전가되는 과정과 그
413

결과로서의 구원의 가치와 의의를 다룬다.

속죄론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서 인구에

회자되어

구속사(historia

것은

교리가

객관적

salvifica)와

주관적

개인

구원론(doctrina salutis)의 접점이자 전이점에 놓여 있으며 그리스도의 인격 자체(persona
in se)와 그 자신의 우리를 위한 사역(officium ipsius ad nos)을 동시에 파악하기
때문이다.
속죄론은 기독론과 구원론의 연결 교리(nexus)로서 작용한다.기독론에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의 순종이 부활과 승천과 재위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대속의
실체를, 구원론에서는 그렇게 다 이루신 공로가 보혜사 성령의 임재로 우리의 의로서
교제되며(칭의의 의의 전가) 교통되는(성화의 의의 전가) 대속의 실제를 다룬다. 속죄론은
구원의 필연성(그렇게 되어야 함, ratio)과 구원의 성취(그렇게 되었음, res)를 함유한다.
그러므로 오직 기독론적 구원론에 터잡은 신학만이 속죄론을 합당하게 논할 수 있다.
속죄론의 의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공로의 가치와 적용을 살펴보는데
있다. 속죄론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 자체나 보좌 우편에 재위하심으로
행하시는 전가 자체가 아니라, 의의 전가-가치를 다룬다.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은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심이다. 속죄론은
제물 자체나 제사 자체가 아니라 제사의 대상인 제물의 가치 즉 제물의 제사-가치를
414

범주(scopus)로 삼는다.

다만 제사장으로서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 말미암는 계속적 의의 전가의 대상이 자신의 공로여야 한다는
측면에서, 전가되는 칭의와 성화의 의를 살펴보는 것은 속죄론의 실체로서 다 이루신 의를
다룸에 있어서 시금석(試金石)이 된다. 전가의 대상이 되는 의를 통해서, 즉 이미 전가 받은
칭의의 의와 지금 전가 받고 있는 성화의 의를 통해서, 성도에게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413

414

속죄론에 대한 제반 이론들을 개관하기 위해서 다음 책들을 참조하라. George Smeaton, Christ’s Doctrine
of Atonement, originally in 1870 (Edinburgh: Banner of Truth, 1991); J. McLeod Campbell, The
Nature of the Atonement, originally in 1856 (Grand Rapids: Eerdmans, 1996); Thomas Hywel
Hughes, The Atonement: Modern Theories of the Doctrine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49);
Archibald Alexander Hodge, The Atonement (Grand Rapids: Eerdmans, 1953); Gustaf Aulén, Christus
Victor: An Historical Study of the Three Main Types of the Idea of the Atonement (New York:
Macmillan, 1969); Colin Gunton, The Actuality of Atonement: A Study of Metaphor, Rationality and
the Christian Tradition (Edinburgh: T & T Clark, 1988); Charles E. Hill and Frank A. James III, ed.,
The Glory of Atonement: Biblical, Historical & Practical Perspectives, ed. (Downers Grove, IL: IVP,
2004).
의의 전가-가치는 “의의 전가의” 가치가 아니라 의의 “전가의 가치”를 의미한다. 이는 제물의 제사-가치와
같은 말이다.

- 145 -

속죄의 가치를 역으로 헤아리는 것은 다 이루신 의의 전가-가치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와

전가(imputatio

같이

속죄의

iustitiae)로부터

실체를
전가된

구원론적

관점에서

의(iustitia

파악할

imputata)를

때,

그것은

바라본다는

의의

측면에서

대리적이며 죄에 대한 배상이라는 측면에서 무름(satisfactio)이다.
무름은 죄의 값 자체를 지불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무름은 죄를 짓지 않았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언약의 약속이었던 영생의 상태로 고양시키는
것이다(elevatio).

415

무름은 죄가 없는 둘째 아담의 언약 이행으로 말미암은 공로를 전가

받는 것이므로, 도무지 죄인인 채로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의의 전가에는 죄사함이
선행한다. 구원론적 관점에서의 무름은 기독론적 관점에서 다 이루심으로 나타난다. 참
하나님이시자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순종의

값이

무름이다.

언약의

중보자(mediator foederis)로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의 값 자체 혹은 그것의
작용과 그로 말미암은 효과가 총체적으로 무름으로 표현된다.

416

무름은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사역의 공로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다 이루심을
전제하고 전가를 지향한다. 그것은 대리적이며, 죄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상응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기뻐하신 뜻에 따라서 우리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셨다(사 53:10; 눅 2:14; 갈 1:4; 골 1:19-20). 속죄의 동력적 원인(moving cause)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사랑에 있다. 그리스도의 무름은 영원 전의 삼위 하나님의
협약(pactum salutis)에 따른 작정에 기초한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참으로
417

기쁘게 하시는 것 외에 어떤 다른 공로도 그리스도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여기에서 elevatio는 의의 전가에 기반을 둔 것으로서 오늘날 바르트(Karl Barth)의 존재의 통보에 영향을
받아서 라너(Karl Rhaner)가 주장한 자질의 고양에 기초한 신화(deificatio)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다. 초대 교
부 아다나시우스는 신화(qeopoihsij)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우리가 신적으로 될 수 있도록 로고스는 사람이
되셨다고 말했는데, 이로써 타락한 인류를 회복하는 로고스 사역을 강조한 것이지 구원 받은 인류가 신과 같
이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Cf. Frances Young, From Nicaea to Chalcedon: A Guide to the
Literature and Its Backgroun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73-76, 82.
416 Cf. 헤페(Heinrich Heppe)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무름에 대한 입장을 설명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소
극적 순종(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으로 말미암는 소극적 의의 전가(죄사함)와 적극적 순종(율법 준수)으로 말미
암는 적극적 의의 전가(거룩한 삶)를 함께 강조한다. Reformed Dogmatics: Set out and Illustrated from
the Sources, rev. and ed. Ernst Bizer, tr. G. T. Thomson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50),
458-459, 463.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작품 원문들은 본서의 독일어 원판을 보라. Die Dogmatik der
evangelisch-reformirten Kirche (Elberfeld: Verlag von R. L. Friderichs, 1861).
415

417

“. . . nam Christus non nisi ex Dei beneplacito quidquam mereri potuit.”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in libros quatuor nunc primum digesta, certisque distincta capitibus, ad aptissimam
methodum: aucta etiam tam magna accessione ut propemodum opus novum haberi possit, 1559,
2.17.1, CO 2.387. 이를 인용함에 있어서 다음 번역본을 참고한다.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l, tr. Ford Lewis Battles,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s. 20-21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이하 Inst. 권.장.절 순으로 표기. 이하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는 CO로 표기. 칼빈은 본인이 하나님의 의지(voluntas Dei)를 무시한 그리스도의 공로(meritum
Christi)만을 강조한다고 주장한 쏘시누스를 반박하며 위와 같이 말했다. Cf. Responsio ad aliquot Laelii
Socini senensis quaestiones, CO 10/1.160. David Willis, "The Influence of Laelius Socinus on Calvin’s
Doctrines of the Merits of Christ and the Assurance of Faith," in Italian Reformation Studies in
Honor of Laelius Socinus, ed. John A. Tedeschi (Firenze: F. Le Monnier, 1965), 235.

- 146 -

속죄의 객관성은 하나님의 사랑(요 3:16)과 공의(롬 3:26)에 따른 무름에 자리한다. 그것은
죄사함(expiatio)과 용서(propitiatio)로 화목(reconciliatio)에 이르는 대속이다(redemptio).

2. 어의(語義)

속죄(atonement, at-one-ment)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죄의 값을 치루고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satisfacere로 그리고
속죄의 의의와 가치를 satisfactio로 표현해 온 것은 속죄의 실체를 대리적 배상으로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동사형 satisfacere는 satis(충분히)+facere(행하다)에서 나온 말로서
일반적으로 “만족시키다” 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빚을 지불하다 혹은 갚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다 혹은 사죄하다” 라는 의미로 특수하게 사용된다. 이 동사로부터 나온
명사형 satisfactio는 “만족”이라는 일반적 뜻 외에 “빚 갚기, 보석금 내기” 그리고 “사죄,
418

사과, 탄원”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믿음으로 수납된 계시에 의존하는 신학에 있어서, [신학적] 용어는 [성경적]
의미를 제한할 수 없으며 그것에 앞설 수 없다. 속죄의 성경적 어의는 포괄적이다. 그것은
속죄제-물(物)에 머무르지 아니하며 속죄제-사(祀)를 아우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제사장이 제물로서 제사됨으로써 제사의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어 더 이상의 제사가 없게
됨, 곧 다 이루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제물만을 열납하셨으나 이제는 제물이 된
제사장을 제물과 함께 열납하셔서 그와 연합한 자마다 산 제물로서 열납되게 하셨다.
신학자들은 이렇듯 광의적이고 신비한 대속의 비밀을 satisfacere, satisfactio로 묘사하고자
419

했으니, 이들을 성경적 어의(laG)에 충실한 “무르다,” “무름”으로 번역함이 합당하다.

속죄(atonement)를 총체적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무름(satisfactio)으로 보고 신학을
전개한

뚜렷한

효시(嚆矢)는

칼빈과

베자

이후

계몽주의의

도전을

받던

제네바의

개혁신학을 사수했던 프란시스 뚤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에게서 발견된다.
그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무름과

계속적

중보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무름의

필연성(necessity), 진리(truth), 완성(perfection), 대상(matter), 목적(object)이라는 제하에
속죄론을

다루었다.

420

대체로

뚤레틴의

입장은

다른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공유되었다. 그들은 제사장직을 무름과 계속적 중보로 보고 전자를 율법 준수라는 적극적
순종(obedientia activa)와 고난 당하심의 소극적 순종(obedientia passiva)로 나누어서
살폈다. 그들은 칼빈의 신학을 계승해서 무름을 예수의 전 생애를 통한 순종의 값으로
이해했다.
418

421

뚤레틴의 영향을 가장 지대하게 받았던 차알스 홧지(Charles Hodge)는 그의

Charlton T. Lewis, A Latin Dictionary, Founded on Andrews' Edition of Freund’s Latin Dictionary,
Revised, Enlarged, and in Great Part Rewritten (Oxford: Clarendon Press, 1998), 1634.

지금까지 satisfactio를 지금까지 만족, 배상, 보상 등으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어떤 말로도 이 단어의 어의
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서 “대리적 배상”이라고 풀어쓰기도 하였다.
420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2, Eleventh through Seventeenth Topics, tr.
George Musgrave Giger, ed. James T. Denniso, Jr.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1992), 417-482.
421 Heppe, Reformed Dogmatics, 458-479, 특히 459.
419

- 147 -

조직신학 책에서 뚤레틴과 전혀 동일한 가르침의 순서(ordo docendi)에 따라서 속죄론을
다루고 있다. 다만 무름의 목적을 “누구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죽었는가?(For Whom did
Christ die?)”라는 제하의 독립된 장으로 다루고 학자들의 속죄 이론들을 다룬 장을 첨가한
422

것만이 다르다.

칼빈의 신학이 뚤레틴을 거쳐서 차알스 홧지에 의해서 조직신학적으로 체계화되는
과정에

있어서

속죄론은

무름(satisfactio)이라는

개념

하에

정립되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속죄론을 표현함에 있어서 satisfaction을 대체하고 atonement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된 것은 차알스 홧지의 아들인 A. A. 홧지가 동명의 단행본(Atonment)을 출판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아들 홧지는 아버지의 신학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으며
atonement라는

단어를

실상

satisfaction이라는

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atonement가 모호하며 제한적인 반면에 satisfaction은 모호하지도 않으며 흠결이 없이
포괄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satisfaction는 소극적 순종인 그리스도의 고난과 적극적인
율법에의

순종을

포함하며

속성상

금전적일(pecuniary)

뿐만

아니라

형벌적(penal)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satisfaction은 죄의 값 자체(ipso facto) 뿐만 아니라
“누가” 지불하는 가에 대한 것에도 문의하며, 속상(贖償, substitution)이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423

한다.

대리적(vicarious)이어서

죄사함(expiation)과

용서(propitiation)를

내포한다고

이러한 입장은 B. B. 워필드에 의해서 다시금 천명된다.

본성상

죄인들을

“무름(satisfaction)”이라는

구원하는
단어를

현재

그리스도의
더욱

사역을

통상적으로

지적하는

사용되고

있는

“속죄(atonement)”라는 단어로 대체하는 것은 유감이 없지 않다. “무름”은 동시에
더욱

포괄적이며,

더욱

명확하며,

모호하고,

더욱

정확한

단어이다.

“대속”이라는 단어는 영어 신약 성경(롬 5:11, 개역이 아니라 흠정역)에 오직 한번
사용된다.

경우

단어는

“화목(reconciliation)”이라는

고대적

의미로

사용되며, 그와 같이 헬라어 katallagē에 대한 번역이 된다. 그러나 영어 구약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2, rep. (Grand Rapids: Eerdmans, 1995), 480-591. 중보자
의 직분(munus mediatori)을 다룬 부분에 있어서 차알스 홧지는 거의 그대로 뚤레틴을 따른다. 뚤레띤은 먼
저 중보자의 사역을 개관하고, 선지자직을 다룬 후, 제사장직을 다룬다. 그리고 위에서 제시한 그리스도의 무
름을 제사장직의 일부로서 다루고 이어서 그리스도의 중재(intercession)를 논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직을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원성에 중점을 두고 다룬다(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2.375-500). 홧지도 위에
서 언급한 차이점을 제외하고는 전혀 동일한 순서를 따른다(Ibid., 455-609).
423 A. A. Hodge, The Atonement, 33-41.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meritum과 satisfactio를 구
별해서 전자는 penal obedience에, 후자는 holy obedience에 관한 것으로 본다. Ibid., 43-44. 대체로 스트
롱(Augustus H. Strong)도 속죄(atonement)의 실체로서 무름(satisfaction)을 말하는데, 그는 이것을 속상
(substitution)과 더불어서 속죄의 한 요소에 불과한 것으로서 다룬다. Systematic Theology, A
Compendium Designed for the Use of Theological Students, Three volumes in one (Old Tappan, NJ:
Fleming H. Revell, 1907), 713-771. 스토롱은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부패와 함께 인성을 취한 인류의 전형
(archetype)이자 대표(representative)로서 대속 제물이 되었음을 강조함으로써 “동일화(identification)” 이론
을 주장했으며 이로부터 “윤리적 일원론(Ethical Monism)”에 이르렀다고 그의 제자였던 올리버 부스웰
(James Oliver Buswell)은 비판한다. A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Religion, vol. 2 (Grand
Rapids: Zondervan, 1963), 97-102.
422

- 148 -

성경에서는

“용서(propitiation)”와

“죄사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kipper,

kippurim에 대한 번역으로서 아주 자주 발견된다. 이 단어는 후자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으며 그것의 본질적인 속성상 속죄제로서 하나님을 진노하게 했던
것을 용서 받고 사람이 그와 화해하게 되는 것으로 묘사되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적용되고 있다.

424

대체로 A. A. 홧지와 워필드와 동시대이거나 이후 학자들은 atonement 라는
단어의 뜻을 넓게 이해하고 satisfaction 이라는 개념을 그것의 본질로 보는 경향이 있다.
미국 남부 장로교의 거두 답니(Robert L. Dabney)는 satisfaction을 “대리적 속죄(a
vicarious atonement)”라고 부름으로써 그것이 속죄의 실체임을 말한다.
대리적

속죄와

영향으로서

세상적인

참회가

아니라

대속적인

425

그리스도의

회개를

강조한

쉐드(William G. T. Shedd) 역시 atonement를 광의로 보아서 satisfaction과 통하는
426

것으로서 이해한다.

이후의 신학자 존 머리(John Murray)는 속죄(atonement)를 죄사함에

국한하지 아니하고 나아가서 사랑으로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고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427

함으로써 사랑의 법에 매이게 하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강조한다.

한편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속죄(atonement)를 화목(reconciliation,
kattalagh)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죄사함(i,lasthrion, 롬 3:25)과 화목제(i,lasmoj, 요일 2:2;
4:10)가 되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유화하고 그와 화목에 이르게 하는 그리스도의 공로(롬
5:9-10; 고후 5:18-19; 갈 3:13)를 강조한다. 이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죄를 지은 자들이
그것의 가림을 받음으로써(rpk, 레 1:3; 6:7; 10:17; 15:15, 30; 19:22; 신 15:28; 31:50)
그가 진노를 돌이키시고(민 8:19; 16:46) 용서하신다(i`laskesqai)는 구약의 속죄 제사의
의의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428

바빙크 신학을 미국에 소개하고 그의 신학에 기초해서 조직신학 체계를 세웠던
루이스 뻘콥(Louis Berkhof)은 자신의 책에서 뚤레틴과 홧지와 매우 유사한 순서로
속죄(atonement)를 다루고 있다. 뻘콥 역시 경제적 의미의 속상(substitution)뿐만 아니라
대리-형벌적인(vicarious-penal)

속죄의

본질을

함께

429

강조한다.

오늘날

신학자들은

그루뎀(Wayne Grudem)이 정의하듯이 속죄(atonement)를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
430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으로 포괄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특히 성경 신학에 기초한

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Atonement,” in Studies in Theology, rep. (Grand Rapids: Baker,
2003), 261.
425 Robert L. Dabney, Lectures in Systematic Theology, rep. (Grand Rapids: Zondervan, 1980),
485-535.
426 William G. T. Shedd, Dogmatic Theology, 3rd ed. ed. Alan W. Gomes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2003), 690-760.
427 John Murray, Redemption Accoomplished and Applied (Grand Rapids: Eerdmans, 1955), 9-78.
428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2, Sin and Salvation in Christ, ed. John Bolt, tr. John
Vriend (Grand Rapids: Baker, 2003), 447-451.
429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New Edition containing the full text of Systematic Theology
and the original Introductory Volume to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6),
373-391.
424

- 149 -

조직신학을 전개하는 레이몽드(Robert L. Reymond)는 속죄(atonement)라는 말을 피하고
431

이에 해당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적인 주제들을 망라해서 다룬다.

3. “우리를 위하여(pro nobis)”: 무름의 교리화

이상의 고찰을 통하여서 개관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 말미암아
전가되는 그의 의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리적 무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대리적 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초대 교회의 신앙의 규범(regula fidei)이나
신조(symbolum)를 찾기는 쉽지 않다. 이는 당시 이단들이 주로 헬라 철학이나 영지주의에
기초한 그릇된 창조관에 터 잡고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사역을 공격했으며, 따라서 교부들의
변증도 창조 중보자에 더욱 집중해 있었기 때문이다. 대속에 관한 신약과 구약 성경의
가르침의

실체로서

제시되는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이

초대

교회에서

가르쳐지고

고백되었다는 단초(端初)는 그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나셨으며 고난당하셨다는 조목에서
발견된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사람들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div h`maj touj a,nqrwpouj kai dia thn h`meteran swterian, propter nos homines et
propter nostram salutem)” 성육신하셨으며 “우리를 위해서(u`per h`mwn, pro nobis)”
432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고백한다.
소위

칼케돈

거의 유사한 표현이 칼케돈 신조에 위격적 연합에 대한

공식(formula, monogenh,(

e,k duo fusewn(

a,sugcutwj(

a,treptwj(

a,diairetwj(

a,cwristwj)을 포함하는 성육신의 고백 가운데 나타난다(“div h`maj touj a,nqrwpouj kai dia thn
433

h`meteran swterian”).

아다나시우스 신조(Symbolum Quicunque)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 당하셨다(passus est pro nostra salute)”고 선언함으로써 사도신경의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에 대한 고백 부분을 대신한다.

434

신앙의 규범은 성경으로부터 공회의로 넘어가는 시기에 저명한 신학자들에 의해서
저술된

초대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이라고

435

것이다.

널리

알려진

신앙의

규범으로서 이그나티우스, 이레네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키프리안, 예루살렘의 시릴 등의
것을 꼽을 수 있다. 신앙의 규범은 진리의 규범(regula veritatis)이라고도 불렸는데, 대체로
편별과 내용에 있어서 사도신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교훈적(pedagogical)이라기보다는
고백적(credal)이었다. 이들 중 오직 이레네우스만이 예수님의 나심과 관련해서 “우리의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Leicester, UK: IVP, 1994), 568.
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Nashville: Thomas Nelson,
1998), 623-669.
432 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2, The Greek and
Latin Creeds, originally 1931 (Grand Rapids: Baker, 1983), 57-59.
433 Ibid., 2.62.
434 Ibid., 2.69.
435 터툴리안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Regula quidem fidei una omnino est, sola, immobilis, et
irreformabilis, credendi scilicet.” Ibid., 2.17.
430
431

- 150 -

구원을 위해서(u`per thj h`meteraj swthriaj)”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대속에 대한 성육신적
436

전망을 제시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레네우스는 또 다른 신양규범에서 위의

구절을 “그의 피조물을 향한 자신의 놀라운 사랑으로 말미암아(propter eminentissimam
erga

figmentum

suum

dilectionem)”라는

구절로

바꾸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가

성육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비하의 공로와 승귀의 권능을 죄사함(expitiatio)과
437

용서(propitiatio)라는 측면에서 파악하였음을 보여준다.

초대 신경을 충실히 물러 받은 종교 개혁자들은 그들의 신앙고백들을 통하여서
속죄론을 더욱 구체적으로 교리화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원죄 뿐만 아니라
모든

자범죄를

위해서

제물이

되셔서
438

고백되었으며(아우구스부르그 신조 3),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셨다고

그리스도의 절대 순종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영생에 이르게 되니 그가 우리의 의라고 고백되었다(루터란 일치신조 3).

439

오직 그리스도의 무름(satisfactio)으로 말미암은 의의 전가(imputatio)로 구원이 성취됨이
440

고백되었다(벨직 신앙 고백 21-23).

그리스도의 완전한(소극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순종으로 말미암은 대리적 속죄의 배상으로 우리가 의를 전가 받아서 하나님과 화목함에
대한 고백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주 예수는 그의 완전한
순종과 영원하신 영을 통하여 단번에 드리신 자기 제사에 의하여 그의 아버지의 공의를
충분히 만족시키시고, 화목만 아니라 천국(天國)의 영원한 기업을 성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매수(買收)하셨다.”

441

이상 개신교 신조들에서 보듯이 속죄론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과 함께 다루어지며 양성적 중보와 함께 강조되었다.

4. 칼빈, 다 이루신 의의 계속적 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물과 피

루터는 satisfactio라는 단어가 중세 신학자들의 단선적(單線的) 이해로 말미암아
너무나 빈약한 개념으로 곡해되었으며 이로부터 모든 혐오스러운 이론들이 난무하게
되었다고 본다. 루터의 대리적 무름에 대한 역동적이며 실제적인 이해는 성육신을 통하여서

Ibid., 2.13.
Ibid., 2.15.
438 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The Evangelical
Protestant Creeds, originally in 1931 (Grand Rapids: Baker, 1983), 9. Confessio Augustana, 1.3. “. . .
ut reconciliaret nobis Patrem, et hostia esset non tantum pro culpa originis, sed etiam pro omnibus
actualibus hominum peccatis.”
439 Ibid., 3.115. Formula Concordiae. “. . . Christus vere sit nostra iustitia . . . in sola videlicet
obedientia sua, quam Patri ad mortem usque absolutissimam Deus et homo praestitit, eaque nobis
peccatorum omnium remissionem et vitam aeternam promeruit.”
440 Ibid., 3.406-410. “Nous croyons que Jésus-Christ . . . s’est présenté en notre nom devant son Père,
pour apaiser sa colère avec pleine satisfaction . . .”(406). “. . . è qui[homme] Dieu alloue justice
sans oevres”(409).
441 [헌법]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992), 282. Schaff, Ibid., 3.621: “Dominus Jesus obedientia sua
perfecta, suique ipsius sacrificio; quod per aeternum Spiritum Deo semel obtulit, justitiae Patris plene
satisfecit, ac omnibus ei a Patre datis non modo reconciliationem; verum etiam aeternum
haereditatem in regno caelorum acquisivit.”
436
437

- 151 -

무한하신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에 매이셔서 자신에 대한 부정(否定)인 죄의 형벌을 받는
생소한 사역(opus alienum)을 이룸으로써 만유의 주재로서 본래적 사역(opus proprium)을
행하셨다는 십자가 신학에 정초한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것은 그의 백성이 단지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이 자신을 기뻐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진정한 무름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저주가 되셔서 자신을 세계와 화목케 하신데 있다고
본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주심으로써 자신의 것을 삼으신 백성들에게 단지 진노를
거두실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되셔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대리적

무름을

자신의

속성
442

성찬론에서 특징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교통론(communicatio

idiomatum)에

기초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무르셨음으로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서 값없이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의 호의를 얻었으며 죄를 용서
받았다”는 아우구스부르그 신조는 이러한 루터의 기독론 가운데 이해되어져야 한다.

443

칼빈은 대리적 속죄에 대한 루터의 이론이 그리스도의 양성의 속성간의 “위격적
교통(a

hypostatic

communication)”이

아니라

“실제적
445

기초함으로써 오류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간파했다.

교환(a

real

exchange)”에

444

칼빈은 초대 교회의 이그나티우스와

같이 중보자 그리스도는 육신 안에 오신 하나님(Deus [manifestatus] in carne)이심을
강조했다. 무름의 값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으시고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되셔서 자신을 전체적으로 드리신 공로이지, 단지 자신의 속성을 서로 교환 혹은
변형시킴으로써

비하와

승귀에

이른

대가가

아니라고

본다.

칼빈은

초대

교회

아다나시우스와 중세의 안셈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육신을 통한 대속의 필연성을
통하여서 대리적 무름이 대속의 실체라는 이해에 이른다.
[따라서] 우리 주님은 아담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복종하시기 위해서 참 사람으로
나타나셨고, 아담의 인격을 입으셨고, 그의 이름을 취하셨다. 이는 우리의 육체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위한 무름의 값으로 제시하시면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 값을 육체 가운데서 지불하고자 하심이었다. 요약해서, 하나님으로서 홀로
죽음을 느낄 수 없고, 사람으로서 홀로 그것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인간의 본성에 하나님의 본성을 결합하셔서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인성의 약함을

Cf. Gerhard O. Forde, “The Work of Christ,” in Christian Dogmatics, ed. Carl E. Braaten etc. vol. 2
(Philadelphia: Fortess Press, 1984), 47-99; Walter von Loewenich, Luther’s Theology of the Cross,
tr. Herbert J. A. Bouman (Minneapolis: Augsburg Publishing House, 1976), 17-24; Timothy George,
“The Atonment in Martin Luther’s Theology,” in The Glory of Atonement: Biblical, Historical &
Practical Perspectives, ed. Charles E. Hill and Frank A. James III (Downers Grove, IL: IVP, 2004),
263-278.
443 Schaff, Ibid., 3.10, Confessio Augustana, 1.4. “. . . sed gratis justificentur propter Christum per
fidem, cum credunt se in gratiam recipi, et peccatu remitti propter Christum, qui sua morte pro
nostris peccatis satisfecit.”
444 Forde, “The Work of Christ,” 53.
445 Cf. Robert A. Peterson, Calvin’s Doctrine of Atonement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1983), 11-26; Henri Blocher, “The Atonement in John Calvin’s Theology,” in The Glory
of Atonement: Biblical, Historical & Practical Perspectives, 279-303.
442

- 152 -

죽음에 내어 주고자 했으며, 신성의 능력으로는 우리를 위해서 승리를 얻고자
446

하셨다(Inst. 2.12.3. CO 2.341-342).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위한 무름의 값(satisfactionis pretium iusto Dei iudicio)”은
447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드리심에 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으로서 하나님이셨다.

비록 말씀이 그 자신의 측량할 수 없는 실체 가운데 사람의 본성과 한 인격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가 그 가운데 제한되었다고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놀라운 무엇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로부터 이와 같이
내려오셨으니, 하늘을 떠나지 않으시고, 동정녀의 자궁에서 잉태되시고, 지상을
다니시며, 십자가에 달리시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그가 태초부터
448

그렇게 하셨던 것과 같이 세상을 채우셨다!(Inst. 2.13.4. CO 2.352).

여기에서

칼빈의

Calvinisticum)가

성례

신학에서

특징적으로

유래하는
449

묘사되는데,

소위
이는

초칼빈주의(the
속죄론이

so-called

인격적일

뿐만

extra
아니라

“Prodiit ergo verus homo, Dominus noster, Adae personam induit, nomen assumpsit, ut eius vices
subiret patri obediendo, ut carnem nostrum in satisfactionis pretium iusto Dei iudicio sisteret; ac in
eadem carne poenam quam meriti eramus persolveret. Quum denique mortem nec solus Deus sentire,
nec solus homo superare posset, humanam naturam cum divina sociavit, ut atrerius imbecillitatem
morti subiiceret, ad expianda, peccata alterius virtute luctam cum morte suscipiens nobis victoriam
acquireret.” 이상 성육신의 필연성에 대한 칼빈의 언급은 안셈의 논법을 연상하게 한다. Anselm, Cur Deus
Homo, 1.11: “Nec sufficit solummodo reddere quod ablatum est, sed pro contumelia illata plus debet
reddere quam abstulit. . . . Sic ergo debet omnis qui peccat, honorem deo quem rapuit solvere; et
haec est <satisfactio>, quam omnis peccator deo debet facere.” 2.6: “. . . satisfaction, quam nec
potest facere nisi deus nec debet nisi homo; necesse est ut eam faciat deus-homo.” 성육신으로부터
속죄론에 대한 관점을 전개하여 구원론에 이fms 안셈의 신학에 대해서 다음을 보라. Jasper Hopkins, A
Comparison to the Study of St. Anselm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72), 187-212.
안셈의 작품의 편별은 아다나시우스의 작품 De Incarnatione Verbi Dei와 매우 흡사하다. 아다나시우스는 이
작품에서 성육신을 창조-구원론적 관점에서 파악해서, 타락한 인류 가운데 로고스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로고
스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성육신에 대한 이러한 이해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다룬다. On the Incarnation of the Word in St. Athanasius: Select Works and Letters,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second series, vol. IV, rep. (Edinburgh: T & T Clark,
1991), 36-67.
447 Cf. Philip Walker Butin, Revelation, Redemption, & Response: Calvin’s Trinitarian Understanding of
the Divine-Human Relationship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62-75.
448 “. . . quia, etsi in unam personam coaluit immense verbi essentia cum natura hominis, nullam tamen
inclusionem fingimus. Mirabiliter enim e coelo descendit filius Dei, ut coelum tamen non relinqueret;
mirabiliter in utero virginis gestari, in terris versari, et in cruce pendere voluit, ut semper mundum
impleret, sicut ab initio.”
449 소위 초칼빈주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루터란들의 성찬 교리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생겨난 개념이다. 루터
란들은 칼빈의 성찬 교리가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를 육체적인 임재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속성 교통
(communicatio idiomatum)에 관한 이론과 배치(背馳)됨을 지적하면서 이를 “초칼빈주의(extra
Calvinisticum)”라고 폄하하였다. 소위 초칼빈주의는 이와 같은 비난을 받았던 칼빈의 성례 신학이 기독론과
관련하여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이론이다. 소위 초칼빈주의는 승천 후에도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양성적
중보를 설명하면서 etiam extra carnem(순전히 초육체적인) 영역에 영적인 그러나 실제적인(spiritualis sed
realis) 임재를 신학적으로 적용한다는 측면에서 그 정당성이 인정되어 왔다. Cf. 졸저, Byung-Ho Moon,
446

Christ the Mediator of the Law: Calvin’s Christological Understanding of the Law as the Rule of

- 153 -

450

우주적(cosmic)임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성육신 이해에 기초해서 칼빈은 무름을 성도의
451

중보자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으로 풀어 간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임마누엘이 되심은 그의 신성과 우리의 인성이 서로 연결되어 함께 자라가게 하기
위함이다”(Inst. 2.12.1, CO 2.340).

452

“그는 기꺼이 인류에게 고유한 특성을 취하셔서 그가

가진 고유한 것을 우리에게 속하게 하셨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Inst. 2.12.2, CO 2.341).

453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오직 자신에게만 속한 것(quod proprium
ipse)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속한 것(quod proprium nobis)을 취하셨다! 주님의 공로는
등가적

배상이나

단순히

하나님의

존영의

회복을

넘어선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대리인(vicar)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무르심으로 우리를 그와 함께 후사된 자로서 삼으셨다.
이는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위해서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다(롬 8:17; 엡 3:6).
속성의 교통에서 유비되는 자질의 주입(infusa qualitatis)이 아니라 이러한 “함께(sun,
cum)”에 칼빈의 속죄론이 놓여 있는 것이다.

454

교회는 무름을 받은 백성들의 모임으로서
455

“그리스도와의 함께”를 통하여서 “우리의 함께”를 이루어 가는 곳이다.

세례는 “함께”에

들어가는 교제의 표이며 성찬은 계속적 “함께”의 교통의 표이다. 세례와 성찬의 지고한

Living and Life-Giving (Carlisle, UK: Paternoster Press, 2006), 105-111.
칼빈의 속죄론의 범위는 다음과 같은 성경적 이해에 기초한다. 육신으로 오신 성자는 참 하나님이시고(롬
9:5; 요일 5:20; 요 20:28; 행 20:28; 딛 2:13) 창조주시고(요 1:3; 골 1:16) 창조중보자시다(롬 11:36). “우리에게
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avllV h`mi/n ei-j qeo.j o` path.r evx ou- ta. pa,nta kai. h`mei/j
eivj auvto,n( kai. ei-j ku,rioj VIhsou/j Cristo.j diV ou- ta. pa,nta kai. h`mei/j diV auvtou/)”(고전 8:6). 성육신의 우주적인 의
의는 구속적 의의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우주적이며, 교회적이고 개인적인 구원의 중심에 성
육신이 존재한다(엡 1:7, 10, 22).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kai. diV auvtou/ avpokatalla,xai ta. pa,nta eivj auvto,n(
eivrhnopoih,saj dia. tou/ ai[matoj tou/ staurou/ auvtou/( ÎdiV auvtou/Ð ei;te ta. evpi. th/j gh/j ei;te ta. evn toi/j ouvranoi/jÅ)”(골
1:20).
451 중보자의 오심이 필연적임을 설명하기 위해서 칼빈은 지식과 의지로 이루어진 인간의 영적인 능력을 철학적
이거나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구원론적으로 다룬다. Cf. Richard A. Muller, “Fides and Cognitio in Relation
to the Problem of Intellect and Will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Calvin Theological Journal 25/2
(1990), 215-216.
452 “Ita filium Dei fieri nobis Immanuel oportuit, id est nobiscum Deum: et hac quidem lege, ut nutua
coniuctione eius divinitas et hominum natura inter se coalescerent.”
453 “Quod nobis proprium erat suscipere gravatus non est, ut vicissim ad nos pertineret quod proprium ipse habebat;
atque ita in commune ipse nobiscum et filius Dei esset et filius hominis.”
454 칼빈에게 있어서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편재(遍在)는 그의 실체의 편재이며, 이러한 실체의 편재를 통해서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성례적인 연합이 신학적으로 설명된다. 승천 후 중보자의 인격적인 현존에는 어떤 변형
(transformatio)도 일어나지 않는다. 여전히 양성적 중보를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적이나 실제적인 임재는
소위 초칼빈주의에 심오하게 해석된다. 이러한 이해에 근거해서, 교회의 연속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통해서
계속되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중보의 연속으로 설명된다. John Calvin, Sermons on the Epistle to
the Ephesians, tr. Arthur Golding (London, 1577), rev. tr. Leslie Rawlinson and S. M. Houghton
(Edinburgh: Banner of Truth, 1973), Eph. 4:10 (353-360, CO 51.546-554). 이하 설교는 Serm. 성경 장.
절로 표기.
455 칼빈은 “교회의 교제(communio ecclesiae)”는 “온전한 교리에의 일치와 형제적인 사랑(consensio sanae
doctrinae et fraterna caratias)”이라는 두 고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에 의하여서(in Christo
vel secundum Christum)”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본다(Inst. 4.2.5, CO 2.771-772).
450

- 154 -

신비(musthrion)는 그리스도께서 옆구리로 물과 피를 흘리신 십자가에 있다!(Inst. 4.14.22,

CO 2.958).

456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를 기독론의 마지막에 그리고
구원론이 시작되기 바로 앞에 한 장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다(2.17). 비록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칼빈의

속죄론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제사장(sacerdos)으로서 제물(sacrificium, hostia)과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서
그의 진노(ira)를 누그러뜨리고(implere) 그의 호의(favor)를 얻어서 그의 백성을 그와
화목케하는(conciliare) 직분(munus)을 맡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pro nobis)
유일하신

제사장이

되심은

분께서

“우리의

죄를

무르시기

위해서(satisfecit)”

속죄제(piaculum)가 되셨기 때문이다. 오직 독생자 그리스도만이 제사장이시자 제물로서
우리의 “무름(satisfactio)”이 되신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화목의 법에 의해서(aeterna
reconciliationis lege)” 우리가 그로부터 용서를 받고 그와 화해했다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제사장 직분을 그와 함께 감당함을 의미한다. 칼빈은 이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2.366-368).

457

“한

몸이(in

societatem)”

된다고

표현한다(Inst.

2.15.6,

CO

그리고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서 그와 함께 제사장 직분을

감당함으로써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과정으로 본다(Inst. 2.16.1, CO 2.377-368).
제사장이 제물이 되실 때, 그 제물은 무름이 된다. 오직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을 드려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릴 수 있으신 분으로서, 드리셨다. 유일하신
화목주가

그리스도시듯,

유일한

“화해의

방식(placandi

modus)”은

그리스도의

“무름(satisfactio)”이다(Inst. 2.16.1, CO 2.368). 예수님은 자신을 “죄를 무르는 속죄의
제물(satisfactoriam

peccati

hostiam,

~Xa)”로서

드려서(사

53:10)

우리의

죄를

“전가(imputatio)” 받으시고 저주 가운데 놓였으나 승리(triumphum) 하셔서 우리의 “구속,
458

속전, 죄사함(a,polutrwsin kai a,ntilutron kai i`lasthrion)”이 되셨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죄값을 치르는 제물로서(ad litationem)” 뿐만 아니라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씻는
“대야(lacacri)”로서 작용했다. 여기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무름이 죄의 유전으로 말미암은
죄책(죽음)을

면하게

뿐만

말한다(Inst. 2.16.6, CO 2.374).

아니라

타락한

본성(전적

무능과

오염)에도

미침을

459

이제 칼빈이 기독교 강요의 속죄의 장에서 무름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그리스도의 무름은 하나님의 작정(ordinatio Dei)에 기초하고 있다.

“Sublime istud mysterium praeclare nobis in Christi cruce ostensum est, quum aqua et sanguis
effluxerunt ex sacro eius latere(Ioann. 19, 34).”
457 “. . . diversa et nova in Christo fuit ratio, ut idem esset hostia qui sacerdos. Quia nex alia pro
peccatis idonea satisfactio reperiri poterat . . . Iam sacerdotis personam sustinet Christus, non modo
ut aeterna reconciliationis lege patrem asciscat in societatem tanti honoris (Apoc. 1, 6)” (CO 2.368).
458 A. A. 홧지는 i`lascesqai를 속죄(expiation)와 용서(propiation)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 이에 비
추어 i`lasthrion도 양자를 포함하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The Atonement, 39-40.
459 배틀즈는 litatio를 satisfactio와 동일하게 satisfaction으로 번역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칼빈은 여기에서
“satisfactoria hostia"라는 개념을 통해서 satisfactio를 광의로 이해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litatio는 satisfactio의 한 측면으로 여기는 것이 합당하다.
456

- 155 -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원의

공로(meritum)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기뻐하심(beneplacitum)으로 인한 자비(misercordia Dei)에 의지한다(Inst. 2.17.1, CO
2.386-7). 칼빈은 철학자들의 논법을 빌어 영생의 네 가지 원인을 설명함에 있어서,
동력인(causa formalis)을 우리를 향한 성부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dilectio gratuita)으로,
질료인(materialis)을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obedientia)으로,

형상인(formalis)을 믿음(fides)으로, 그리고 목적인(finalis)을 하나님의 선하심(bonitas)에
대한 영광(gloria)으로 본다(Inst. 3.14.17, 21 (CO 2.575, 578).

460

하나님께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ineffabili quodam modo) 그의 자녀들의 구원을 만세 전에 협약하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놀라운 방식으로(miro et divino modo) 우리를 먼저 사랑하심으로
그렇게 하셨다. 아버지의 뜻(voluntas)은 아들을 희생 제물로 삼아서 택한 백성들을 자녀
삼는 것이었다(Inst. 2.16.4, CO 2.370). 이를 칼빈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
461

안에서의 화목을 예기한다고 표현한다(Inst. 2.16.3, CO 2.506).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바쳐서 스스로 거두셔야만 하셨는가? 무름의 두
번째 속성은 이 질문에 대한 답과 관련된다. 이 질문은 왜 독생하신 아들이 육신을
취하시고 속죄제요 화목제(i`lasmoj, katalaggh)가 되셔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통한다(요일
2:2; 4:10). 칼빈은 이를 표현할 수 없는 신비(mysterium ineffabile)에 속한 것으로 보고,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아들 안에서 우리와 화목하시기 전에는 여전히 우리를
향한 화를(infensus) 거두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직 아들의 피 가운데서만 죄인인 우리와
화목하신다(reconciliatus est). 그러므로 “사랑의 시작은 의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462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호의(favor)를 얻어서 그와 화목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iustitia Dei)이다(엡
1:4-6; 고후 5:19; 골 1:19-20). 하나님의 의는 아들의 제물을 받으셔서 그것을 우리의
공로(meritum)으로 삼아 주심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죽음은 보복의
원인이 아니라 화목의 질료가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의이다(Inst. 2.17.2, CO
2.387-8). 하나님은 무름을 의의 법칙으로 삼으셨다.
셋째,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아들의 의가 생명의 실체(substantia vitae)로서
무름의 질료(materia)가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받은 것은 “그의 아들
안에서”였다(골 1:14).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죄를 방면하시기 위해서
463

아들의 피를 우리를 위한 무름으로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네 가지 원인에 대해서, Comm. Rom. 3:24(75, CO 49.61), 5:19(117-118, CO 49.101-102). 주석
표기는 전체적으로 Comm. 성경 장.절로 표기. 이하 구약주석은 The Commentaries of John Calvin, 46
vols., Calvin Translation Society Edition (Grand Rapids: Eerdmans, 1948-1950)을 사용(vols.1-15). 그
리고 신약주석은 John Calvin, New Testament Commentaries, ed., D. W. Torrance and T. F. Torrance
(Grand Rapids: Eerdmans, 1960-1972)를 사용.
461 “Proinde sua dilectione praevenit ac antevertit Deus pater nostram in Christo reconciliationem.”
462 “Quare principium amoris est iustitia, qualis a Paulo describitur (2 Cor. 5, 21), eum qui peccatum
non fecerat, pro nobis peccatum fecit, ut essemus iustitia Dei in ipso.”
463 “Ideo idem apostolus redemptionem in sanguine Christi definit remissioem peccatorum (Col. 1, 14),
460

- 156 -

구속의 값(pretium redemptionis)을 지불하셨다(고전 6:20; 벧전 1:18-19; 롬 3:24-25).
유일하신 중보자께서 자신을 속전(a,ntilutron)으로 죄를 무르셨다(딤전 2:15-16). 그는
단번에(a`pax)

제사를

통하여서(dia

thj

qusiaj)

영원한

속죄(ai,wnian

lutrwsij)를

이루셨다(히 9:12, 28). 칼빈은 그리스도의 피제사의 공로를 무름, 용서, 죄사함으로 보고
이들을 점강적으로
사실을

464

수사적으로

혹은 점층적으로
강조한다(Inst.

465

표현함으로써 무름이 모든 공로를 아우른다는

2.17.3-5,

CO

2.388-90).

성령의

역사로

오직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될 때 성도가 의롭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무름이 구원의 질료가
된다(Inst. 3.11.21-23, CO 2.550-2). 무름의 범위는 복음의 범위와 일치한다. “완전한
구원의 전체”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포괄한다(Inst. 2.16.5, CO 2.370-1).
넷째, 그리스도의 무름의 공로가 택한 백성에게 작용하는 것은 보혜사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의와의 교제(communio)와 교통(communicatio)에서 비롯된다.
칼빈은 성화를 칭의의 의를 전가 받은 성도들이 계속적으로 성화의 의를 받아서 거룩해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통하여서 자신과의
연합에 이르기를 원하셨다(Inst. 3.14.1-6, 9-11, CO 2.564-8, 570-2). 속죄론을 다룬 장
서두에서 칼빈은 그리스도가 그의 지체들(membra) 각각에게 그들의 분량에 따라서 자신의
은혜를 나눠주시는 머리(caput)가 되심을 강조한다(Inst. 2.17.1, CO 2.386). 속죄의 은혜는
그리스도가

성취한

것이지만

아버지의

부각시킨다(Inst. 2.17.2, CO 2.387).

466

것이며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이로써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항상

함께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리스도의 무름의 언약적 성격을 제시한다.
그리스도가 언약의 머리되심은 무름의 결과이자 계속적 작용의 보증이 된다.
아들에게 속한 것이 아버지께 속한 것이며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성도가 받은
은혜가 아들과 함께 자녀가 되어서 아들의 음성을 듣고 아들의 일을 행하는데 까지
미친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무름의 공로는 아버지의 자녀의 자리에 세우는 의에 그치지
아니하고 자녀로서 살아가는 의에 까지 확장된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격을 의롭다 하시고 우리의 부족한 행위조차 의로운 것으로
삼아 주신다는 이중적 의의 전가(duplex imputatio)가 문의(問議)된다(Inst. 3.17.3, 10, CO
467

2.591-2, 597-8).

ac si diceret, iustificari nos vel absolvi coram Deo, quia sanquis ille in satisfactionem respondet.” 여
기서 absolvere는 헬라어 a,fihmi와 같은 뜻으로 읽힌다.
464 “. . . si pro peccatis nostris Christus satisfecit, si poenam nobis debitam persolvit, si obedientia sua
Deum placavit . . . ”
465 “ . . . nimis extenuari Christi gratiam nisi eius sacrificio vim expiandi, placandi et satisfaciendi
concedimus . . . ”
466 “. . . quoties Dei caritati adiungitur Christi gratia, unde sequitur, eum de suo quod acquisivit, nobis
largiri; quia non aliter quadraret seorsum a patre ei adscribi hanc laudem, quod gratia eius sit, et ab
ipso proveniat.”
467 칼빈은 칭의(iustificatio)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 iustitiae Christi)”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정의한다(Inst. 3.11.2, CO 2.534). 칭의는 “그리스도와 교제(communio)하는 자리로
받아들여지고”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vestitus)” 사람의 상태를 말한다(Inst. 3.17.8, CO 2.596). 이와 같
은 이해 하에 하나님이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까지 받아 주신다는 이중적인 은혜(이중적인 의의
전가)가 논의된다. 이 교리는 칼빈의 첫 번째 신앙교육서(Catechismus)에서 선포되었으며(Catechismus, sive

- 157 -

그리스도의 대속적 무름의 공로로 말미암아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칼빈은
믿음(fides)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시어 들여서 그의 의와 교통할 수 있게끔 하는
도구”로 정의하면서, 우리가 칭의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성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단지 “불구(不具)가 된 믿음(mutila fide)”만을 가지게 된다고
468

말한다.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교통할
469

수 있도록 이끌기 때문이다”(Inst. 3.11.20, CO 20.550).
칭의는 없다(Inst. 3.16.1, CO 2.586).
통한

의의

전가에

미치기

470

때문이다.

성화의 의의 전가가 없는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무름은 그의 계속적 중보를

471

그러므로

총화(總和)”라고 부른다(Inst. 3.15.7, CO 2.586).

칼빈은

이신칭의를

“모든

경건의

472

그리스도의 무름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합하는 성도에게 주시는 “형용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은혜”는 끝날 까지 전체 구원 과정을 통하여서 역사한다(Inst. 2.16.14, CO
2.382). 주님께서는 죄를 사하시고 의를 전가하시기 위해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
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그리스도의 계속적 공로는 그의 무름이 단지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 . ., CO 5.336-337), 1535년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는 “행위는 그 자체로
서 가치가 있어서가(merentur)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것을 가치있게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시
고 기뻐하실 만한 것이 된다”고 한다(CO 1.53). 1543년 기독교 강요에서 “오직 믿음에 의해서 우리 자신 뿐
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의롭게 된다(sola fide non tantum nos, sed opera etiam nostra iustificari)”고 재
천명되었다(1543 Inst. 10.70, CO 1.787, Inst 3.17.10, CO 2.598). 필자는 이중적 의의 전가와 관련해서 수
사학적 하나님의 맞추심 뿐만 아니라 신학적 하나님의 맞추심을 고려한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교사, 의사시라는 측면이 강조되는 반면, 후자는 하나님은 성도를 의롭다 하시고 그 수준에 다시금 자신을 낮
추셔서 맞추어 주셔서 거룩하다 하신다 라는 측면이 부각된다. 이중적 의의 전가에 대해서, Comm. Rom.
4:6-8(85-87, CO 49.71-73), 5:16(116, CO 49.99), 5:17(116-117, CO 49.99-100), 6:14(130-131, CO
49.112-113).
468 칼빈의 구원론—혹은 구원서정(ordo salutis)—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하고 있음은 그의 로마서 주석에
서 더욱 상론된다. Comm. Rom. 3:22 (73, CO 49.60); Rom. 8:13 (167, CO 49.147).
469 “. . . quia in communicationem iustitiae Christi nos inducit.”
470 칼빈은 칭의를 “중생의 시작으로부터 영생의 삶에 동참하는 때까지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그리
스도와의 교제(communionis cum morte Christi)”라고 구체적으로 정의한다. Comm. Rom. 6:7 (126, CO
49.108). Cf. Comm. Rom. 6:3 (122, CO 49.105). 칭의를 또한 “우리 자신과 구속주 사이에 서로 유사한 것
을 찾고 이에 응답하는 (mutua similitude respondeat)” 과정이라고 한다. Comm. Rom. 6:10 (127,
CO49.109). 칭의의 선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질(qualitatem)이 아니라,” “그저 주신 의의 전가”라고
말한다. Comm. Rom. 5:17 (117, CO 49.100). 하나님의 의는 주입된 것(infusa, transfusa)이 아니라 전가된
은혜(gratia imputata)에 기초한다(Inst. 3.11.5, 10, CO 2.536-537, 540-541); Contra Osiandrum (CO
10/1.166).
471 우리의 공로를 보지 않고 값없이 주시는 의의 전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의의 교통
(communicatio)이라는 개념에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에게 날마다 새로운 삶을 나누
어 준다. Cf. Comm. Rom. 6:1 (121, CO 49.103): “그리스도께서 아무 공로 없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되 새
로운 삶은 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를 갈가리 찢는 것이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
가 우리에게 교통된다(communicatur)는 사실을 확신하게 한다. Comm. Rom. 1:17 (28, CO 49.20); Rom.
3:21 (70, CO 49.57); Rom. 3:22 (73, CO 49.60).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로써 칼빈은 그리스도가 하나
님과 그의 백성을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서 중보한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의(iustitia)는 오직 그리스도의
“특성(qualitatem)”이며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고유하게(proprium)” 속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Comm. Rom.
5:19 (118, CO49.10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 접붙임을 받지 아니하면 의의 열매—성화와 영생—를
찾을 길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Comm. Rom. 6:22-23 (136, CO 49.118). 이와 같이 칼빈의 경건의
뿌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찾을 수 있다. Cf. Joel R. Beeke, “Calvin on Piety,”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John Calvin, ed. Donad K. McKi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127-128.
472 “. . . iustificationem fidei, quae pietatis est totius summa . . . ”

- 158 -

그리스도의 비하에만 연결되지 않고 승귀에 까지 미치는데, 칼빈은 이를 승천의 은총으로
다룬다(Inst. 2.16.16, CO 2.383): 첫째, 주님께서는 하늘 왕국에 이르는 길을 여셨다(요
14:3);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하신 중보자와 중재자로서(히 7:25; 9:11-12; 롬
8:34) 아버지의 눈을 우리 자신의 죄들로부터 그 자신의 의로 향하게 하셔서 우리를 위한
면류관을 마련하시게 하셨다; 셋째, 우리의 모든 힘과 능력과 부와 영광을 그리스도께
맡기게

하셨다(Inst.

재위하셔서(sessio)

2.16.16;
우리에게

CO 2.383). 주님께서는 승천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영을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보좌

우편에

계속적으로

473

중보하시기를 원하셨다.

칼빈은 주님의 고난에 대한 복음서 설교 서두에서 구원의 세 가지 목적을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지식,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는 겸손, 그리고 세상에 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유업을 아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전하면서 이것이 주님의 고난의 값이라고 했는데 이는
그가 기독교 강요에서 말했던 승천의 은총과 밀접하게 연관됨을 알 수 있다.

474

칼빈은

이사야 52장 후반부로부터 53장에 걸친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설교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속죄론에 대한 이해를 포괄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설교는 그리스도의 무름(la
satisfaction)을 다룬 52:13-53:11과 중재(l’intercession)을 다룬 53:12로 나누어져 있다.
개혁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이 두 가지로 본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는데, 그
효시가 이미 칼빈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설교에서 칼빈은 ~va(사 53:10)을
무름으로 번역하고, 무름은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죄 값을 무를 뿐만 아니라
475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하는 자리에 세운다는 것을 계속해서 부각시킨다.

특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한 은혜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을 주시고 계속적으로
중보하심으로 말미암아

476

우리가 그의 의의 동참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477

이상에서 고찰한 바, 그리스도의 무름의 공로는 그의 다 이루심의 중보와 다
이루신대로 이루어 가심의 중보를 포함한다. 무름은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어서 생명에 이르는 언약에 기초한다(롬 5:19) (Inst, 2.17.3, CO 2.388).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diaqhkhj kainhj mesithj) 되심으로(히 9:15), 언약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죄를 사하시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의 보호자 되심에
보좌 우편에서의 그리스도의 중보를 설명함에 있어서 칼빈은 성령을 그리스도로부터 출래하는 성령 즉 그리
스도의 영이라고 구체적으로 지정해서 자주 언급한다. Cf. Inst. 1.13.7, 2.7.2, 2.8.57, 3.1.2 (CO 2.94-95,
254, 307, 394-395); Comm. Jn. 14:16 (2.82, CO 47.329); Rom.1:4 (16-17, CO 49.10-11); II Cor. 3:6
(41-43, CO 50.39-41).
474 John Calvin’s Sermons on the Deity of Christ, tr. Leroy Nixon (Grand Rapids: Eerdmans, 1950), 2nd
ed. (Audubon, N. J.: Old Paths Publications, 1997), Matt. 26:36-39(51, CO 46.833). 칼빈은 사도 행전
설교 가운데서 승천의 은총을 다루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강조하고 보혜사 성령의 임재를 “주님께
서 그의 손을 펼치신다”고 반복해서 묘사한다. Ibid., Acts 1:9-11 (232-242, CO 48.613-622).
475 John Calvin’s Sermons on Isaiah’s Prophecy of the Death and Passion of Jesus Christ, tr. T. H. L.
Parker (London: James Clarke, 1956), 53:4-6 (69, 74, CO 35.623, 627), 53:9-10 (110, 112, CO
35.654, 656), 53:11 (122, 132, CO 35.664, 673).
476 Ibid., 53:4-6(83, 이 부분은 CO에 나타나지 않음). 계속적 중보에 관해서, Ibid., 53:12 (137-152, CO
35.675-688).
477 Ibid., 53:11 (134, CO 35.674): “. . . que maintenant il fait encores office de Mediateur: et qu’il nous
veut faire tellement participans de sa iustice . . .”
473

- 159 -

이른다. 하나님의 약속은 죄를 사하고 의를 전가해서 우리의 속사람까지 새롭게 함으로써
마지막 날 완전한 백성 삼으시는 것이다. 이렇게 완전한 백성 삼으심이 곧 영생의
열매이다.

478

무름의 범위는 만세 전의 구원협약에 따른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 곧 새

언약의 은총과 다르지 않다.
칼빈에게 있어서 무름은 죄사함과 용서와 화목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성도에게
전가되고,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와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의 공로 자체가
새로운 공로가 아니라 다 이루신 공로의 적용이라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전체 중보가
우리를 위한 무름이 된다. 하나님의 대속의 의가 무름에 있다. 제사장이 제물이 되신
구원의 정점(culmen salutis)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름이다. 이러한 무름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개혁주의 속죄론의 기초가 되며 후에 뚤레틴을 위시한 개혁주의 신학자들

479

그리고 C. 홧지에 의해서 뚜렷이 계승된다.
칼빈은 사도신경에 고백된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을 다음과 같이 노래함으로 대리적
무름의 공로를 찬미한다.

우리는 전체 구원과 그것의 모든 부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행 4:12).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작은 한 부분이라도 다른 곳으로부터
끌어오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구한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서 그것이 “그의 안에” 있음을 배우게 될 것이다(고전 1:30).
만약 우리가 성령의 다른 은사들을 구한다면, 그것들은 그의 기름부음 가운데
발견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능력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주권에; 순결함을
구한다면, 그의 잉태에; 온유함을 구한다면, 그의 나심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심으로 그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셔서(히 2:17) 우리의 고난을 느끼셨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수난에 있다; 형벌로부터
방면(放免)을

구한다면,

그의

징계에;

저주로부터

사함을

구한다면,

그의

십자가에(갈 3:13); 무름을 구한다면, 그의 희생 제물에; 정결함을 구한다면, 그의
피에; 화목을

480

구한다면, 그의 지옥 강하에; 육신의 죽음을 구한다면, 그의

무덤에; 삶의 새로움을 구한다면, 그의 부활에; 영생을 구한다면, 역시 그곳에;
하늘 왕국의 유업을 구한다면, 그의 하늘로 들어가심에; 만약 보호, 안전, 모든
축복의 부요함을 구한다면, 그의 왕국에; 떨림 없는 심판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능력에 있다. 요약하면, 모든 종류의 선함으로 부요한 곳간이
그에게 있으니, 다른 곳이 아니라, 이 샘으로부터 우리를 가득 채우자(Inst.
2.16.19, CO 2.385-6).
Comm. Heb. 8:10 (110-112, CO 55.103): “Hic fructus est foederis, quod nos Deus in populum
cooptat, seque salutis nostrae fore praesidem asserit.”
479 Heppe, Reformed Dogmatics, 457-481.
480 칼빈은 지옥강하(descensus ad inferos)를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사망에 매여 있지 않음(행 2:24)을 제외한 모든 육체적이며 영적인 고난을 당하신 비하라고 해석한다(Inst.
2.16.10, CO 2.376-377). 그러므로 화목을 구하거든 그리스도의 지옥강하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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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기업을

무를

자(laG)

후사(klhronomoj)가

함께한-후사(sunklhronomoj) 삼으셨다(히 1:2; 롬 8:17).

481

되셔서

무르심으로써

우리를

이것이 은혜 위의 은혜이다. 만약

무름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 분의 희생제물에서(si satisfactio, in eius sacrificio)!

영원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립니다(Soli Deo Gloria in Aeternum)

481

klhronomoj는 광의로 제비뽑아서 선택된 자, 기업 무를 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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