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
Abhidharma-nyāyānusāra
아비달마순정리론 제1권
존자 중현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변본사품(辯本事品) ①
서 설
1. 서분(序分)-귀경게
일체종(一切種)의 어둠과 온갖 어둠을 멸하시고
중생을 건져 올려 생사의 늪에서 나오게 하신 모든 이
이와 같은 참다운 스승[如理師]께 공경 예배하고서
나는 이제 마땅히 대법장론(對法藏論)을 설하리라.

諸一切種諸冥滅 拔衆生出生死泥
敬禮如是如理師 對法藏論我當說
  論曰。諸欲造論。必有宗承。於所奉尊。理先歸敬。所以經主觀諸世
間。皆爲邪師異論所惑。自師永離一切諸冥。立教不虛。處大師位。成就
尊勝不共功德。爲緣引發殷淨信心。欲正流通彼所立教。故先贊禮佛薄伽
梵自利利他圓滿功德。用標嘉瑞。許發論端。此中世尊智斷二德皆具足
故。自利圓滿。恩德備故。利他圓滿。所以者何。一切種冥皆永滅故。智
德圓滿。諸境界冥亦永滅故。斷德圓滿。授正教手拔眾生出生死泥故。恩
德圓滿。聲聞獨覺。雖破諸冥。而猶未能滅一切種。故不成就一切種智。

未得所有無知差別。不行智故。意樂隨眠智等故。不能如理濟拔有情。
自利利他德未滿故。雖有聖德而不名師。唯佛世尊二德圓滿。無倒濟拔一
切有情。成就希奇廣大名稱。位居尊極。獨號大師。故先贊禮大師功德。
以開所說對法藏論。對法者何。頌曰。
논하여 말하겠다.
어떤 종의(宗義)를 계승하여 논(論)을 짓고자 하는 모든 이들은 반드시 받들
어 모셔야 할 분께 먼저 귀의하고 공경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경주(經主,
『구사론』의 작자 세친을 말함)도, 온 세상이 모두 그릇된 스승의 이론(異論)에
현혹되어 있지만 자신의 스승만은 일체의 모든 어둠에서 영원히 떠나셨기에
설하
신 말씀이 허망하지 않으며, 위대한 스승[大師]으로서 존귀하고도 뛰어난 불공
(不共)의 공덕을 성취하시었으며,1) 이를 인연으로 하여 크고도 청정한 신심을
일으키게 하신다는 것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그 분이 설하신 말씀을 올바로 유
통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먼저 불(佛) 박가범(薄伽梵, 즉 세존)의 자리이타
(自利利他)의 원만한 공덕에 대해 찬탄 예배함으로써 뛰어난 상서로움을 나타
내고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곧 세존께서는 지덕(智德)과 단덕(斷德)이라는 두 가지 공덕을 모두 갖추었
기 때문에 자리의 공덕이 원만하였으며, 은덕(恩德)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타의
공덕이 원만하였던 것이다.2)
어째서 그러하였던 것인가?
‘일체종(一切種)의 어둠’을 모두 영원히 멸하셨기 때문에 지덕이 원만하였으
며, ‘온갖 경계의 어둠’도 역시 영원히 멸하셨기 때문에 단덕이 원만하였다.3)
1)

2)

3)

불공(不共)의 공덕이란, 성문ㆍ독각 등 다른 뭇 성자와 공통되지 않는 불타
만이 지닌 공덕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10력(力)과 4무외(無畏)와 3념주
(念住)와 대비(大悲) 등 18가지가 있다. 본론 제75권에서 자세하게 논의한
다.
지덕(智德)은 일체법을 두루 비추어 아는 지혜의 공덕, 단덕(斷德)은 그것에
의해 일체의 번뇌를 단멸한 공덕, 은덕(恩德)은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비의 공덕. 본론 제75권에는 인원덕(因圓德)ㆍ과원덕(果圓德)ㆍ은원
덕(恩圓德)의 3덕이 설해지고 있는데, 지덕과 단덕은 과원덕의 하나이다.
‘일체종의 어둠’은 불염오무지(不染汚無知)를, ‘온갖 경계의 어둠’은 염오무
지(染汚無知)를 말한다. 여기서 염오무지(kliṣṭa-ajñāna)란, 법의 실상을 능
히 알지 못하여 망견(妄見)을 일으켜 생사 윤회하게 하는 번뇌성의 무지(즉
煩惱障)를 말하는 것이라면, 불염오무지는 비번뇌성의 무지(즉 解脫障)를 말
한다. 곧 성문 독각은, 염오무지는 끊었지만 불염오무지는 끊지 못하였기 때

또한 올바른 가르침의 손길을 뻗쳐 중생을 생사의 늪에서 건져 올려 빠져 나
오게 하셨기 때문에 은덕이 원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문(聲聞)과 독각(獨覺)의 경우, 비록 온갖 어둠은 깨트렸을지라도
아직 일체종의 어둠을 능히 멸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
취하지는 못하였다. 즉 존재하는 모든 무지(染汚無知와 不染汚無知)의 차별을
알지 못하고 지혜를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요(意樂) 수면(隨眠)의 지혜 등
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참답게 유정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4) 이같이 [성문
과 독각은] 자리이타의 공덕이 원만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거룩한 공덕(즉 단
덕)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참다운] 스승이라고 이름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불세존만이 두 가지 공덕이 원만하여 전도됨이 없이 일체의 유정을
구제하므로 희기(希奇)하고도 광대한 명칭을 성취하니, 그 지위가 지극히 존귀
하므로 그 분만을 ‘위대한 스승[大師]’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먼저 이
같이 위대한 스승의 공덕에 대해 찬양 예배하고서 설하고자 하는 『대법장론(對
法藏論)』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5)
2. 대법(對法), 즉 아비달마의 본질
‘대법(對法)’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정혜(淨慧)와 이에 수반되는 행(行)을 대법이라 이름하며
아울러 능히 이를 획득하게 하는 온갖 ‘혜’와 ‘논’을 말한다.

淨慧隨行名對法 及能得此諸慧論
  論曰。慧者擇法義。淨者無漏義。諸漏名垢。擇法離垢故名淨慧。何
緣得知此無漏慧名爲對法。以佛世尊恣天帝等所請問故。如契經言。我有

4)

5)

문에 단덕만을 갖추었을 뿐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지덕은 갖추지 못하였다.
(후술) 따라서 지덕과 단덕, 나아가 은덕을 갖춘 이는 오로지 불세존뿐이다.
의요(āśaya, 보통은 阿世耶로 한역)란 뭔가를 하고자 하는 목적 의식. 수면
(anuśaya)은 번뇌의 이명(異名). 즉 의요수면의 지혜란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유위의 지혜를 말한다.
『대법장론』은 『아비달마구사론(Abhidharmakośa-śāstra)』의 의역어(意譯
語). 곧 『순정리론』은 세친의 『구사론』을 비판하고 유부의 정의(正義) 즉 정
리(正理)를 밝히는 논이기 때문에 『구사론』의 체제와 내용에 따르면서 그것
을 하나하나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甚深阿毗達磨及毗奈耶。恣汝請問。此以聖道及聖道果。恣天帝釋隨意請
問。恣筏蹉類請問亦爾。複以何緣唯無漏慧名爲對法。由此現觀諸法相
已。不重迷故。豈不現觀非唯慧能。是則對法應非唯慧。實非唯慧。謂及
隨行。何謂隨行。謂慧隨轉色受想等諸心所法。生等及心。此則總說淨慧
隨行。無漏五蘊名爲對法。何故不說受等隨行名爲對法。慧於見等三現觀
中。皆有能故。生等及色有事非餘。受等唯通緣事現觀。受等各有領納等
用。如慧能見應名對法。受等如盲。豈名對法。不能簡別四聖諦故。以於
現覺苦等相中其見現觀最爲殊勝。於諸諦中。簡擇轉故。受等雖與淨慧俱
行。而慧力持趣彼彼境。故現觀中非爲最勝。是故成就無漏慧根。說爲勝
義阿毗達磨。爲有世俗阿毗達磨觀彼說此爲勝義耶。有謂能得此諸慧論。
此謂所得無漏慧根能得諸慧。謂彼世間殊勝修慧思慧聞慧及彼隨行。非離
如是慧及隨行無漏慧根可能證得。彼是能得此方便故。同無漏慧受對法
名。如慈方便亦名慈等。能得諸論。謂彼根本阿毗達磨。是無漏慧勝資糧
故。亦名對法。如業異熟。漏等資糧亦名業等。前諸慧言。亦說生得。離
生得慧無能誦持對法教者。唯生得慧能正誦持契經等法。故彼亦名阿毗達
磨。豈不此論是無漏慧勝資糧故亦名對法。何故乃名對法。俱舍頌曰。

논하여 말하겠다.
‘혜(慧)’란 택법(擇法)의 뜻이며, ‘정(淨)’이란 무루(無漏)의 뜻이다. 곧 온갖
누(漏)는 번뇌[垢]를 말하니, 택법으로서 번뇌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정혜’, 즉
청정한 지혜라고 이름한 것이다.6) ‘이러한 무루의 지혜를 일컬어 대법이라고
한다’는 사실은 어떠한 근거에서 알 수 있는 것인가?
불세존께서 천제석(天帝釋) 등에게 마음대로 청하여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나에게는 매우 심오한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論)와 비나야(毘那耶, vinaya, 律)가 있으니, 그대 마음대로 청하여 물어라”고
설한 바와 같다.7) 이는 즉 성도(聖道)라든지 이러한 성도에 의해 증득되는 과
6)

7)

택법(dharmavicaya)이란 법(존재)을 간택(簡擇, 분별 판단)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이해 판단력이 필요한데, 이것이 혜(jññna)이다. 이러한 판단력에
는 다시 번뇌[漏]를 수반하는 유루혜와 더 이상 어떠한 번뇌도 수반하지 않
는 무루혜가 있는데, 무루혜는 번뇌를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정혜(淨慧), 즉
청정한 지혜이다. 이는 다름 아닌 불지(佛智)로서, 이것이 바로 대법, 즉 아
비달마의 본질이다.
『장아함경』 제10권 「석제환인문경(釋帝桓因問經)」.

보에 관해 천제석이 묻고 싶은 대로 청하여 물으라는 말이다. 벌차(伐蹉,
Vatsa) 종족들에 대해 마음대로 청하여 묻게 하였던 말씀도 역시 그러한 것이
었다.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무루의 지혜만을 일컬어 ‘대법’이라
고 하는 것인가?
이것에 의해 제법(諸法, 모든 존재)의 실상을 현관(現觀)하는 경우 다시는 미
혹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제법실상에 대한] 현관이 오직 ‘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
겠는가? 그러한즉 대법은 오로지 ‘혜’만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로 오로지 ‘혜’에 의해서만 현관되지 않으니, 이를테면 이와 아울러 이에
수반되는 행(行), 즉 수행(隨行)에 의해 현관된다.8)
무엇을 수행이라 한 것인가?
이를테면 ‘혜’와 함께 일어나는 색[隨轉色]과 수(受)ㆍ상(想) 등의 온갖 심소
법(心所法)과 생(生) 등과 심(心)을 말하니,9) 이를 모두 청정한 지혜에 수반되
는 행, 즉 수행(隨行)이라고 한다.
무루의 5온을 일컬어 대법이라고 한다면,10) 어째서 ‘수’ 등의 수행을 일컬어
대법이라고 설하지 않는 것인가?
‘혜’는 견현관(見現觀) 등의 세 가지 현관 모두에 대해 공능(功能)이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생(生) 등과 색(色, 즉 무루의 무표색인 도생률의)은 사현관(事
現觀)의 공능은 있을지라도 그 밖의 현관에 대해서는 공능이 없으며, 수(受)

현관(abhīsamaya)이란 진리대상(즉 4諦)에 대한 즉각적인 관찰 판단을 말하
는 것으로, 이러한 현관의 본질은 ‘혜’이지만, 이는 지각[受]이나 표상[想] 등
여타의 의식 작용[心所] 내지 생성[生] 등의 마음과 관계하지 않는 힘[不相
應行法] 따위와 동시에 생겨난다. 따라서 무루혜에 수반되는 상응ㆍ불상응의
행법(이를 隨行이라 함) 또한 아비달마의 부수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러한 온갖 존재[諸法]의 종류와 동시 구기(俱起)의 관계는 매우 복잡한데,
본론 제10권~18권에 걸쳐 논의되고 있다.
9) ‘혜와 함께 일어나는 색’은 무표색으로, 여기서는 무루의 무표색인 도생률의
(道生律儀, 혹은 無漏律儀, 혹은 道共戒,무루성도를 획득할 때 생겨나는 힘)
를 말한다. 행(samskṛta)이란 유위세간을 조작하게 하는 힘으로, 여기에는
마음[心]과 관계하는 상응행법(즉 심소법)과 관계하지 않는 불상응행법(‘생’
등 14가지)이 있다.
10) 무루의 5온이란 더 이상 번뇌를 수반하지 않는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
(行)ㆍ식(識)의 5온으로, 여기서는 무루 정혜(淨慧)와 이에 수반되는 수행(隨
行)의 법을 말한다.
8)

그러나 ‘수’ 등은 비록 이러한 청정한 ‘혜’와 동시에 작 용하는 것일지라도 ‘혜’의 힘(즉 판단력)에 의해 유지되어 진리의 대상으로 나 아가기 때문에 현관 중의 가장 뛰어난 것이 아니다. 12)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고제(苦諦)의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의 4상 등 이른바 4 제(諦) 16행상(行相)에 대한 현관(즉각적인 통찰)에 의해 열반이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것’이란 획득해야 할 무루의 혜근 을 말하며. 즉 11) . 그러나 ‘수’ 등은 맹인과도 같아 능히 4성제를 간택 분별할 수 없는데. 사현관 (kṛyābhīsamaya)은 무루혜를 중심으로 하여 심ㆍ심소와 도생률의(道生律 儀. 즉 聞所成慧]. 3현관에 대해서는 본론 제63권 에서 자세하게 논의한다. 이에 수반되는 심과 심소법은 ‘연’과 ‘사’ 두 현관에 대해.13) 이와 현관에는 견현관(見現觀)ㆍ연현관(緣現觀)ㆍ사현관(事現觀) 세 가지가 있다.12) 모든 진리(즉 4제)를 간택 판단할 때 일어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설하여 승의(勝義)의 아비달마라고 한다. 따라서 무루혜는 세 현관 모두에 대해. 연현관(ālamvanābhīsamaya)은 무루혜와 그 상응법인 심ㆍ심소가 동일한 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아 관찰하는 것이며. ‘생’ 등의 불상응행법 은 다만 사현관에 대해서만 공능을 갖는다. “능히 이것을 획득하게 하는 온갖 혜(慧)와 논(論)이 [세속의 아비달마]이다”고 하였다.11) 즉 ‘수’ 등은 각 기 영납(領納. 그럴 때 이러한 통찰의 주체는 ‘혜’이며. 그렇다면 세속(世俗)의 아비달마도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것(세속의 아 비달마)에 근거하여 이를 ‘승의’라고 설한 것인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능히 획득하게 하는 온갖 혜’란 세간의 뛰어난 지혜인 수혜(修慧) ㆍ사혜(思慧)ㆍ문혜(聞慧)와 이에 수반되는 수행(隨行)의 법을 말한다. 13) 아비달마는 무루혜를 본질로 하지만 이는 사실상 불타 진지(眞智)이기 때문 에 이생 범부로서는 이를 획득하기 위해 세간의 지혜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 다. 즉 아비달마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이 다. 이러한 세간의 지혜에는 스승이나 친구의 말을 듣고서 획득하는 지혜[聞 慧. 그 밖의 수행법(隨行法) 은 통찰의 근거[緣]나 부수적인 작용[事]만을 수행한다.등은 다만 연현관(緣現觀)과 사현관 두 가지에 통할 뿐이다. 곧 아비달마의 본질 은 바로 그 같은 무루혜이며. 견현관(darśanābhīsamaya)이란 오로지 무루혜만으로써 4성제를 관찰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루의 혜 근(慧根)을 성취하는 것. 지각) 등의 작용을 가질 뿐이지만. 이는 승의(勝義)의 아비달마로서. 불타의 진지 (眞智)이다. 그것을 주체적으로 사유함으로써 획득하는 지혜[思慧.(후술) 4제 16행상에 대해서는 본론 제61권에서 상론된다. 번뇌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저절로 허물이나 악을 방지함)와 생(生) 등의 4상(相) 등이 동일한 성제를 대상으로 하여 그 작용 [事業]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어찌 대법이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고(苦) 등의 실상을 바로 깨닫는 데에는 견현관이 가장 뛰어나니. ‘혜’와 같은 법은 능히 관(觀)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대법(對法).

이는 바로 그 같은 무루혜근을 능히 획득하는 뛰어난 방편이 되기 때문 에 무루혜와 마찬가지로 대법(對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으로. ‘능히 [무루혜근을] 획득하게 하는 논’이란 바로 근본 아비달마를 말한다.같은 ‘혜’와 이에 수반되는 수행의 법을 떠나서는 무루혜근을 능히 증득할 수 없다. 자비의 방 편도 역시 자비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14) 이는 바로 무루혜의 뛰어난 자량(資糧.15) 그리고 앞서 언급한 ‘온갖 혜’라는 말에는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지혜 [生得慧]도 포함된다. 즉 우리 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아비달마 논서이다. 혹은 여인은 그 자체 더러움(즉 탐ㆍ진 등의 번뇌)은 아니지만 더러움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라고 하듯이 아비달마 제론(諸論) 역시 무루혜(즉 승의의 아비달마)의 조건 혹은 방편이 되는 혜(慧)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라고 한다”고 하였다. 대법장(對法藏. p. 한글대장경118.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지혜가 없다면 능히 대법의 가르 침을 외워 전하는 자도 없을 것을 것이니.29-31) . 이를테면 업의 이숙(異熟)과 같은 번뇌[漏]의 자량도 역 시 업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자재와 식량)이 되기 때문에 역시 대법 (對法)이라 이름하니. 오로지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지혜 가 있어야 계경 등의 법도 능히 올바로 외워 전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 역시 아비달마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15) ‘업의 이숙’이란 선업 또는 악업에 의해 낳아진 결과를 말하는 것으로. 이 는 또 다른 번뇌의 근거(자량)가 되지만. 다시 선정을 통해 반복적으로 익힘으로써 체득하는 지혜[修慧. 이 것이 바로 ‘세속(世俗)의 아비달마’로 일컬어지는 협의의 아비달마.(『대 비바사론』 제1권. 그리고 이에 대한 광박한 주석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을 말한 다.(후술) 14)‘근본 아비달마(혹은 本論)’란 유부 아비달마의 기초가 되는 『품류족론(品類 足論)』ㆍ『식신족론(識身足論)』ㆍ『법온족론(法蘊足論)』ㆍ『시설족론(施設足論)』 ㆍ『계신족론(界身足論)』ㆍ『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의 6족론과 『발지론(發智 論)』. 아비달마코샤)의 의미 그렇다면 이 논(즉 『구사론』)도 바로 무루혜의 뛰어난 자량이 되는 것인데. 즉 修所成慧]가 있으며. 혹은 “음 식이나 의복은 그 자체 즐거움[樂受]은 아니지만 즐거움의 조건이 되기 때문 에 ‘즐거운 것’이라고 하듯이. 역시 ‘업’으로 불리듯이. 이러한 세 가지 지혜를 낳을 수 있게 하는 타고난 지혜[生得慧] 등 네 가지가 있다. 어찌 역시 대법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 思所成慧]. 3. 그러나 이는 모두 선천적 혹은 후천적 실 천에 의한 것이므로 여기에는 그 근거가 되는 또 다른 방편이 필요하다.

즉 대법론 중의 온갖 핵심적인 뜻이 모두 여기에 포섭되어 들어있어 이것(『구사론』)이 그러한 대법의 장(藏)이 되기 때문에 ‘대법장’이라 고 이름한 것으로. 그것은 ‘대법을 근거로 한 것’이라는 뜻이 16) . 세친 (世親)의 『구사론』 역시 아비달마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반문에 대해 중현은 세친의 게송을 빌려 『구사론』은 아비달마가 아니라 아비달마를 간추 린 것(정요). 거기서의 내 용과 말을 인용하여 이 논을 지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명사로 구성된 복합어의 경우 뒤의 명사는 반드시 앞의 명사를 한정한다는 격한정복합어[依主釋]로 해석할 때. 이는 바로 ‘대법 을 근거로 삼았다’는 뜻이다. 그것은 ‘대법을 포섭한 핵심(藏)’의 뜻이므로 『구사론』은 아비달마의 정 요[堅實]를 간추린 것일 뿐이다. 그리고 온갖 논(論)이 승의 아비달 마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역시 아비달마[對法]라고 이름할 수 있다면. 이는 바로 ‘대법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俱舍)’이란 핵심[堅實]을 말하니. 즉 그러한 대법이 이 논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니. 혹은 ‘장’이란 근거[所依]의 뜻이니. 이는 의주석(依主釋)과 다재석(多財釋)으로 해석한 것이다. 마치 수장(樹藏) 즉 ‘나무의 속 줄기’라 고 하는 것과 같다. 아비달마에 근거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장(藏. 혹은 앞의 명사는 형용사적인 수식어라는 소유복합어[有財釋]로 해석할 때. 다시 말해 이 논은 그 같은 대 법을 장(藏)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법장’이라 이름한 것으로. 마치 도장(刀藏) 즉 ‘칼의 집’이라고 하 는 것과 같다. 그것(대법)의 승의를 포섭하고 그것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법구사(對法俱舍)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17) 세간의 세 가지 지혜와 생득혜(生得慧).어떻게 대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16) 『구사론』의 게송으로 말하겠다. kośa. 17) ‘아비달마(對法)코샤(藏)’라는 말을. 攝彼勝義依彼故 此立對法俱舍名   論曰。此就依主及多財釋。藏謂堅實。猶如樹藏。對法論中諸堅實義 皆入此攝。是彼藏故名對法藏。即是對法之堅實義。藏或所依。猶如刀 藏。謂彼對法是此所依。引彼義言造此論故。此論以彼對法爲藏。名對法 藏。即是對法爲所依義。此論所依阿毗達磨。何因故說。誰複先說。雖不 應問說對法人。佛教依法不依人故。而欲必以人爲量者。此及前問。今當 總答。頌曰。 논하여 말하겠다.

혹은 그것을 근거로 하여 저 술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아비달마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중현의 생각이 었다. 그러나 비록 그러 할지라도 굳이 아비달마를 설한 이에 대해 헤아려 보고자 한다면. 아비달마의 목적과 설자(說者) 그렇다면 이 논(『구사론』)의 근거가 되는 아비달마는 어떠한 이유에서 설하 게 된 것이며.4. 부처님께서는 법 에 의지하지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온갖 번뇌를 능히 소멸할 만한 뛰어난 방편으로 택법을 떠나서는 그 무엇도 결정코 존재하지 않으니 번뇌로 말미암아 세간은 존재의 바다를 떠도는 것 이로 인해 부처님은 대법을 설하였다고 전(傳)한다. 이것과 앞의 물음(아비달마를 설한 이유)에 대해 이제 마땅히 함께 대답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若離擇法定無餘 能滅諸惑勝方便 由惑世間漂有海 因此傳佛說對法   論曰。由離擇法無勝方便。能滅世間引苦諸惑。故世尊言。若於一法 未達未知。我終不說能正盡苦。世間未滅諸煩惱故。於三有海生死輪回。 爲令世間修習擇法滅諸煩惱。故言因此佛說對法。佛若不說。舍利子等諸 大聲聞。亦無有能於諸法相如理簡擇。是故此論所依根本。阿毗達磨定是 佛說。經主稱傳顯已不信。阿毗達磨是佛所說。何緣不信。傳聞尊者迦多 衍尼子等造故。不說對法爲所依故。如世尊告阿難陀言。汝等從今當依經 量。諸部對法義宗異故。此皆不然。諸大聲聞。隨佛聖教而結集故。阿毗 達磨是佛所許。亦名佛說。能順遍知雜染清淨因果智故。如諸契經。若佛 所許不名佛說。便應棄舍。無量契經若不說依非佛語者。毗柰耶藏應非佛 說。臨涅槃時不勸依故。若言亦勸苾芻當依別解脫經無斯過者。是則應許 므로 『구사론』은 아비달마에 근거한 이차적인 논일 뿐이다. 즉 『구사론』은 근본 아비달마(주14 참조)의 요점을 정리한 것. . 또한 누가 가장 먼저 설한 것인가? 마땅히 대법을 설한 이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야 할 것이니.

廣毗柰耶非佛所說。便非定量。若毗柰耶即是廣釋戒經本故是佛說者。阿 毗達磨廣釋契經。何故偏疑非佛所說。又即慧蘊。及與隨行。並勝資糧。 名爲對法四依中說智是所依。不說依言。有不成過又彼唯說經非定依。而 竟不言阿毗達磨及毗柰耶依有差別。又定應許阿毗達磨是經差別。故成所 依。或應頌等亦非所依。世尊唯勸依經量故。又今言依。欲顯何義。若顯 量義。理未必然。如何世尊先說四量。而今但說經爲量耶。或應先時依唯 說一。以法等三經所攝故。或即於彼已遮依人。亦即勸依經之差別。而今 複說有唐捐過。故今言依。應顯別義謂汝昔來心屬於我。是則依仗補特伽 羅。自今以往無別所依。應唯仗經勿令忘失。又今言經。總說一切如來聖 教。若不爾者。應頌等教應非所依。而複勸依別解脫者。爲令於戒起尊重 心。以彼戒經不應求義。唯當恭敬如說而行。毀重戒者不可修治。故重勸 依令堅持戒。是故言依非唯量義。又勸阿難依經量者。正爲勸依阿毗達 磨。是經之量故名經量。即是眾經所有定義。阿毗達磨能決眾經。判經了 義不了義故。阿毗達磨名能總攝。不違一切聖教理言。故順此理名了義 經。與此理違名不了義。不了義者恐違法性。依正理教應求意旨。若異此 者如先但說。依了義經。今亦應爾。唯勸依經。不應言量。所言諸部阿毗 達磨義宗異故。非佛說者。經亦應爾。諸部經中。現見文義有差別故。由 經有別。宗義不同。謂有諸部。誦七有經。彼對法中建立中有。如是建立 漸現觀等。贊學根本異門等經。說一切有部中不誦。撫掌喻等眾多契經。 於餘部中曾所未誦。雖有眾經諸部同誦。然其名句互有差別。謂有經說汝 阿氏多。於當來世成等正覺。非黑非白。非黑非白異熟業等。無量名句諸 部不同。是故不應由義宗異。阿毗達磨便非佛說。阿毗達磨定是佛說。由 佛攝受三藏教故。如世尊說。老耄出家持吾三藏甚爲難得。若謂此言依雜 藏說。理必不然。以彼即是經差別故。曾無處說。別持彼故。唯有處說。 持素怛纜及毗柰耶摩怛理迦。而無別處言持雜藏。亦不可說雜藏即是摩怛 理迦。由別釋故。如大尊者迦葉波言。摩怛理迦。名目何等。謂四念住。 廣說乃至八支聖道。四正行四法跡四無礙解。空空無願無願無相無相。諸 現觀邊。諸世俗智。雜修靜慮。無諍願智。邊際定智。止觀等法。及集異 門法蘊施設。如是等類。一切總謂摩怛理迦。非雜藏中此等諸法具足可 得。故說雜藏。即是第三非爲善說。又契經說。於阿毗達磨阿毗毗柰耶應 勤修學。故知佛說阿毗達磨。若爾阿毗毗柰耶藏。應爲第四。不爾由許毗 .

이로 인해 부처님께서 대법을 설하였다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만약 대법을 설하지 않았더라면 사리자(舍利子) 등의 여러 위대한 성문(聲聞) 들 역시 제법의 실상에 대해 참답게 사택(思擇)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택법(擇法. 세간의 사람들은 아직 온갖 번뇌를 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 가지 존재(有. 법의 간택 분별)을 떠나서는 세간의 괴로움을 초래하는 온갖 번 뇌[諸惑]를 능히 소멸할 만한 그 어떤 뛰어난 방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존께서도 말씀하시기를. . 곧 [아비달마를 설한 것은] 세간의 사람들로 하여금 택법을 닦고 익히어 온갖 번뇌를 소멸하게 하기 위함이니. 욕유ㆍ색유ㆍ무색유)의 바다에서 태어나고 죽으며 윤회한다. “만약 아직 통달하지 못하였거나 알지 못하는 법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나는 괴로움을 바로 멸진(滅盡)하였다’고 끝내 설할 수 없 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의 근거가 되는 근본 아비달마는 결정코 부처님께서 설한 불설(佛 說)이다.柰耶藏即是阿毗毗柰耶故。所有最勝增上屍羅相應論道。以能現對毗柰耶 故。名阿毗毗柰耶。所有甚深諸法性相相應論道。以能現對法性相故。名 阿毗達磨。或諸契經名爲達磨。論能現前決擇其義。名阿毗達磨別解脫。 本名毗柰耶律。唯現前廣辯緣起。名阿毗毗柰耶。是故所言。不成疑難。 又佛聖教三蘊所收。猶如契經。毗柰耶藏阿毗達磨定應量攝。正法滅經。 亦作是說。  阿毗達磨毗柰耶  阿笈摩中要文義  當有不傳諸弟子  恐聞齊己有輕陵   又說此法此毗柰耶。此大師教法即對法。現見經中。有前句事。或時 彼事。離前句說。如正等覺或但言覺。增上屍羅唯說屍羅。諸欲貪等但說 貪等。故知此法即是對法。世尊有處。亦以法聲方便說有。阿毗達磨。謂 若有說隨順契經。顯毗柰耶不違法性。應隨此等理教信知。阿毗達磨真是 佛說。謗正法罪深爲可怖。勿自愛人習語惡行訕謗對法言非佛說。謗論已 了。如上所言。爲令世間修習擇法。因此佛說阿毗達磨。何等名爲彼所擇 法。頌曰。 논하여 말하겠다.

세친이 어째서 중현에 의해 ‘경주’로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지만.19) [부처님께서] 대법에 의지하라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 다. 곧 아비달마에서의 존재의 실상(法相)은 4제이며(『구사론』 제1권. [아비달마는] 여러 위대한 성문들 께서 부처님의 성교(聖敎)에 따라 결집(結集)한 것이기 때문이다.4). p.21) 예컨대 온갖 계경(契經)의 경우에 있어서도 만약 부처님께서 인정하신 바이 『구사론』 제1권(권오민 역. 다만 제10권(앞의 책. ‘전설(傳說. 여러 부파의 대법은 그 종의 가 다르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슈미르의 유부 비바사사(毘 婆沙師)들의 정설을 소개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인 용어이다. kila)에 의하면’. 본론상에서 세친이 ‘경주’로 불린 것은 168회이 며.(1) 아비달마의 설자에 관한 세친의 불신 비판 그런데 경주(經主)는 ‘전(傳)한다’ 하고 말하여 ‘아비달마는 바로 불설(佛說) 이다’는 사실에 대해 불신(不信)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을 파괴한다 한들 무슨 허물이 되겠는 가? 그래서 세존께서도 ‘마땅히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아 의지하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고 언급하고 있다. 경주(sūtrakāra)는 『구사론』의 작자 세친을 말한다. 『발지론』 20권을 지어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교학을 확립 함으로써 이 부파의 비조가 되었다. 2002). p. p.20)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은 모두 옳지 않으니. 즉 세친은 『구사론』의 본송(本頌)이나 장행 의 주석 상에서는 ‘전(傳)하는 바에 따르면’. 아마도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는다[經量]’는 경량부의 사유에 근거하여 『구사론』을 저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앞의 책.5-6. 아비달마는 바로 부처님께서 인정하신 바로서 역시 불설(佛說)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동국역경원.18) 그는 어떠한 이유에서 [아비달마가 불설임을] 믿지 않은 것인가? 그는 ‘존자(尊者)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등이 지었다고 전해 들었기 때문 에. 특히 법승(法 勝)의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이후의 아비달마 제론은 이러한 4제를 논의 의 체제로 삼고 있다. 21) 잡염과 청정의 인과란 고ㆍ집과 멸ㆍ도의 4제를 말한다. 즉 세존께서 아난타(阿難陀)에게 “그대들은 지금부터 마땅히 경(經)을 지식 의 근거[量]로 삼아 그것에 의지해야 할 것이니. 18) . 그가 경량부의 설을 최선설(最善說)이라고 함으로써 비판된 것은 36회이 다 19) 가다연니자(Kātyāyanīputra)는 불멸(佛滅) 300년 무렵 서북인도에서 출세 한 대논사로서. 20) 현존 『구사론』상에서는 이 내용이 언급되고 있지 않다.471)에서 “우리(경부)는 계경을 지식의 근거[量]로 삼을 뿐 본론(本論) 을 지식의 근거로 삼지 않으니. ‘~하였다고 전한다’ 혹은 ‘~라고 인정한다’거나 혹은 ‘허락[許]한다’는 등의 말은 모두 세친 자신은 이에 동의하지 않지만. 능히 잡염(雜染)과 청정(淸淨)의 인과를 두루 아는 지혜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 다.

“여래는 교단의 통솔자가 아니며. 이를 經이라 하기도 한다)을 말한다. 비나야장(毘奈耶藏. 즉 율장)도 마땅 히 불설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jñāna]에 의지해야 한다는 4의(依)로 정리된다. 그러므로 [‘경(즉 불타 말씀)에 의지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아비달마는 불설이 아니라는 주장은] 불성(不成)의 허물을 범하는 것이다. 즉 미확정의 오류에 대해서는 『인명입정리론(因明 入正理論)』(대정장32. 또한 만약 ‘의지하라’는 말을 설하지 않았기 때 문에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면. dharma] 에 의지할 것이며. khandhaka)」. 열반을 앞두고서 거기에 ‘의지하라’고 권 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마땅히 광(廣)비나야는 불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 하는 것이므로 결정적인 논거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22) 만약 필추(苾芻. 이는 이후 스승의 인격[人.23) 만약 비나야는 바로 『계경본(戒經本. 그리고 뛰어난 자량(세간 4혜와 세속의 아비달마)을 일컬어 대법(對法)이라고 하였으며.지만 [그것에 대해] 불설이라 말하지 않았다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 은 계경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대들은 오로지 그대 자신과 ‘법에 의지하라’”고 말하였다. 혹은 學處. 교단 또한 나(인격)에게 의지해 서는 안 된다. 즉 隨行). 불성의 허물[不成過]. 아비달마는 계경(契經)을 널리 해석한 것인데 어째서 이것만을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 아니라고 편협하게 의심하는 것인가? 또한 [앞에서] 혜온(慧蘊)과 이에 수반되는 행(行. 그리고 부록인 「부수(付隨)」로 이루어진 광률(廣律)을 말한다. p. 즉 계율의 조문을 모은 계본(戒本. vijñāna]이 아니라 절대적인 통찰 직관지[智. 밖으로 드러난 말[語. vyañjana]이 아니라 뜻[義. neyārtha)가 아니라 요의 (nītārtha)에. 즉 불타법문 (즉 經)에 대한 해석인 아비달마가 불설이 아니라고 한다면 계본에 대한 해 석인 「경분별」의 광률 또한 불설이 아니어야 한다는 뜻이다. pudgala]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法. 열반을 앞두고 아난이 “우리는 이제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라 고 묻자. 4의 (依) 중에서도 ‘지혜[智]에 의지하라’고 설하였지 ‘말에 의지하라’고는 설하지 않았다. artha] 에. 24) 불성(不成. 혹은 波羅提木叉). 즉 별해탈경)』을 널리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불설이라고 한다 면.(후술) 23) 『별해탈경(別解脫經)』이란 별해탈률의(혹은 별해탈계. 22) . 비구의 구역)들에게 또한 역시 ‘『별해탈경(別解脫經)』에 의지하라’고 권유하여 말하였기 때문에 그 같은 허물 이 없다고 한다면. asiddha)의 허물이란 미확정의 오류. 그리고 일상의 상대적 인식[識.2하) 참조.24) 또한 거기(4 의)서는 오로지 경(經)에 대해서만 결정적으로 의지할 바가 아니라고 설하고 불타는. 그 뜻이 애매하거나 부실한 불요의(不了義. 즉 ‘경에 의지하라’는 불타 의 말씀을 논거로 하여 아비달마가 불설이 아님을 논증하는 것은 경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유명제의 불확정의 오류를 범한 것이 다. 이에 대해 ‘광비나야’란 계본이 성립하게 된 인연 등을 해설한 「경 분별(經分別)」과 출가 교단의 운영 규칙인 「건도부(犍度部.

이는 곧 보특가라(補特伽羅. 25) . 즉 불타가 아난타에게 ‘경에 의지하라’고 할 때의 ‘경’의 뜻은 넓은 의미 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고 경을 협의의 경. [만약 부처님께서 ‘아비달마에 의지하라’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응송(應頌) 등에도 역시 의지해서는 안 될 것이니. 또한 여기서 ‘경’이라고 하는 말은 일체의 여래의 성교(聖敎)를 총괄하여 설 아비달마는 계경(契經. 응송(혹은 重頌. 설해진 계경의 내용을 운문의 형식으로 정리한 것) 등도 경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뜻.27) 따라서 지금 여기서의 ‘의지 하라’는 말은 [지식의 근거. 그러나 지 금 [열반에 든 이후]부터 별도의 의지할 바가 없으니. 마땅히 경에 의지하여 망실(忘失)됨이 없게 하라”는 뜻으로 말하였던 것이다. 법(法)ㆍ의(義)ㆍ지(智)라는 세 가지 의지해야 할 바를 더 설한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뜻이다. 인격)에 의지하였다는 말이다. 그것은 의미 없는 동어반 복의 오류[唐損過]를 범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즉 12분교 (分敎) 중의 계경으로만 해석하여 오로지 그것에 의지해야 한다고 할 것 같 으면. sūtra)을 널리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불설이 다. 26) ‘마땅히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아 그것에 의지하라(當依經量)’에서 ‘의지해 야 할 것’이 바로 ‘지식의 근거[量]’라고 한다면 요의경(了義經) 한 가지만으 로도 충분한 것인데.26) 혹은 거기(4依)서 이미 ‘인격에 의지하지 말고 경의 차별(즉 法)에 의지하라’고 권유하였으면서 지금 다시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아 그것에 의지하라’고] 설하였다면.있을 뿐 아비달마와 비나야에 의지함에 있어 그 같은 차별이 있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세존께서는] “그대의 마음은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에게 속해 있었다. 이는 쓸데없 는 중설(重說)의 허물[唐損過]을 범하는 것이다. 법 등의 세 가지는 경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세존께서는 일찍이 네 가지 지식의 근거(즉 4依)를 설하였으면 서 지금 여기서는 단지 경만을 지식의 근거로 설하고 있는 것인가? 그럴 경우 앞에서의 ‘의지하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한 가지에 대한 것이라고 설해야 할 것이니. geya. 27) 4의(依)에서 이미 ‘스승의 인격에 의지하지 말고 법(경의 차별)에 의지하라’ 고 하였으면서 지금 다시 ‘경에 의지하라’고 하면.25) 또한 지금 여기서 ‘의지하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인 가? 만약 지식의 근거[量]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 으니. 즉 ‘양’과는] 다른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또한 아비달마는 바로 경의 차별(해석 분별)이기 때문에 결정코 마땅히 의지 해야 하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세존께서는 오로지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아 그것 에만 의지해야 한다’고 권고하였기 때문이다.

한 것이니. 따라서 이러한 이 치에 부합하는 것은 요의경이라 할 수 있으며. [다시 말해 이 같은 사실을 인 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앞서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고] 요의경에 의지하라’ 고 설한 것처럼 지금 여기서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즉 점현관(漸現觀) 역시 설일체유부의 학설로서. 그들의 대법(對法) 중에서는 중유(中有)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별해탈(別解脫. 왜냐하면 여러 부파에서 전하는 경 가운데에도 문장의 의미상의 차별이 있 기 때문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응송 등의 가르침에도 마땅히 의지해서 는 안 되는 것이다. 아비달마는 바로 경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경량(經量)이라 일컬은 것으로. 이러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불요의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면. 불요의란 진리 법성(法性)에 어긋나는 것이니. 4제에 대한 28) . 즉 아비달마는 능히 온갖 경을 결택(決擇)하고. 이에 대해서는 『구사론』 제8권(앞의 책. 즉 중계(重戒)를 범하는 자는 번뇌를 다스리고 도를 닦을 수 없기 때문에 거듭하여 그것에 의지하기를 권유하여 계를 굳건히 지키도록 하 였던 것이다. 29) 『칠유경』을 전승하고.30) 『찬학근본이문경(讚學根本異門經)』 등의 ‘당의경량(當依經量)’에서 ‘경량’을 세친은 경이 지식의 근거라는 의미로. 그렇기 때문에 ‘의지하라’는 말은 오로지 지식의 근거[量]만을 의 미하는 것이 아니다. 중유를 주장하는 부파는 바로 설일체유부로서. 올바른 이치[正理]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마땅히 [불타의] 의도를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즉 戒經)에 의지하라’고 권유한 것 은 계(戒)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같은 계경 (戒經)은 뜻을 탐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공경하고 설한 바대로 행해 야 하는 것이다.28) 이는 바로 온갖 경의 결 정적인 뜻이다.29)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부파에서는] 점 진적인 현관(現觀)을 주장하지만. 경의 요의(了 義)와 불요의(不了義)를 판별하기 때문이다. 경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 다. 또한 아난(阿難)에게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아 그것에 의지하라’고 권유한 것은 바로 아비달마에 의지하기를 권유하기 위해서였다. 30) 점진적 현관. 아비달마는 일체 성교(聖敎)에 어 긋남이 없는 이치의 말씀을 모두 포섭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 종의가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경에 의지하라’고 권유한 것을 오로지 지식의 근거[量]인 경에 의지하라는 뜻 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374)을 참조할 것. 또한 [경주 세친은] “여러 부파의 아비달마는 그 종의가 다르기 때문에 불설 (佛說)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를테면 어떤 부 파에서는 『칠유경(七有經)』을 외워 전하고 있으며. p. 중 현은 각기 다른 형식과 내용으로 시설된 여러 경을 해석하는 근거. 즉 아비 달마로 이해하였다.

35) 4무애해(無礙解). 아비달마는 결정코 바로 불설이니. 그러나 어떤 경에서는 아씨다를 미륵과 혼동하여 그에게 성불의 수기를 주었다고 설하고 있는 등 각기 전승한 경의 내용이 동일하지 않다는 뜻이 다. 그대는 마 땅히 내세에 정등각(正等覺)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고 설하고 있으며. 31) 이에 반해 『중아함경』 제13권 제66경 「설본경(說本經)」에서는 아씨다 (Ajita. 論)를 수지하였다고 설한 곳은 있어도 잡장을 수지하였다고 말한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불타 입멸 후 제1결집 을 주도하였다. sūtra. 부처님께서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인정 하였기 때문이다. [마달리가는 잡장과는 다른] 별도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vinaya. 예컨대 세존께서는 “노인이 출가하여 삼장을 수지하기란 매 우 어려운 일이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33) “마달리가라는 말은 무엇을 일컫는 것인가? 이를테면 4념주(念住) 내지 8지 성도(支聖道). 그러나 설일체유부에서는 이처럼 잡장 을 경의 또 다른 형태(차별)로 이해하여 3장만을 인정할 뿐이다. 즉 經)과 비나야(毘奈 耶. 보통은 마하가섭(摩訶迦葉)으로 불린다. 34) 4념주 내지 8지성도(혹은 8正道)란 4념주ㆍ4정단(正斷)ㆍ4신족(神足)ㆍ5근 .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종의가 다르기 때문에 아비달마는 불설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33) 가섭파(Kāśyapa)는 불타의 10대 제자 중 일인으로. mātṛka. 즉 律)와 마달리가(摩怛理迦. 예컨대 위대한 존자 가섭파(迦葉波)는 다음 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해 대중부에서는 단박에 관찰하는 돈현관(頓現觀)을 주장한다. 일찍이 그것만을 별도로 수지(受持)하였다고 설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32) 오로지 소달람(素怛纜. 나아가 비록 여러 경을 여러 부파에서 함께 외워 전하고 있을지라도 단어나 문장상의 차별이 있다. 32) 잡장은 경ㆍ율ㆍ논 이외의 문헌으로.31) 또한 [어떤 경에서는] 비흑비백(非黑非白)이라 설하고. [어떤 경에서는] 비흑비백의 이숙업(異熟業)이라고 설하는 등 여러 부파에 있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의 단어나 문장이 동일하지 않다. 그것(즉 잡장)은 바로 경의 차별이기 때문이며. 이를테면 어떤 경에서는 “아씨다(阿氏多)여. 혹은 阿逸多)에게 미래세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고 수기(授記)하고 있 다. 역시 또한 잡장이 바로 마달리가라고도 할 수 없으니.34) 4정행(正行)ㆍ4법적(法迹). 『무장유경(撫掌喩 經)』 등과 같은 다수의 계경은 그 밖의 다른 부파에서 일찍이 외워 전한 일이 없었던 경이다. 만약 이 말이 잡장(雜藏)에 근거하 여 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을 것이니.경을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외워 전하지 않으며.36) 공공(空空)ㆍ 즉각적인 관찰을 16찰나에 걸쳐 점진적으로 행한다는 주장이다. 대중부에서는 3장과 더불어 잡장ㆍ범 주장(梵呪藏) 등의 5장을 주장하였다. 인용한 경은 불명(不明).

무쟁 은 자신으로 인해 더 이상 다른 유정들로 하여금 탐(貪)ㆍ진(瞋) 등의 번뇌 를 낳지 않게 되는 것을.무원무원(無願無願)ㆍ무상무상(無相無相). 공삼 마지를 공(空)으로.42) 그리고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ㆍ 『법온족론(法蘊足論)』ㆍ『시설족론(施設足論)』 따위와 같은 것을 모두 통틀어 마달리가라고 한다. 43) 『집이문족론』ㆍ『법온족론』ㆍ『시설족론』은 설일체유부에서 근본 아비달마로 간주하는 6족론의 하나로서. śamatha)ㆍ관(觀. 41) 변제정은 궁극의 선정(변제 prāntakoṭika는 無越極의 뜻).nā)은 선정과 지혜의 뜻이다. 비상(非常)의 무원삼마지를 무원(無願)으로.39) 무쟁(無諍)과 원지(願智).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5권에서 상론한다. 즉 제4정려를 말하는 것으로. 가다연니자가 지었다 고 전한다. 유부에 의하면 견도 16찰나 중 상(上) 2계의 고(苦)ㆍ 집(集)ㆍ멸제(滅諦)를 관찰하는 세 가지 유지(類智:이는 法智에 대해 後邊이 며.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1권에서 상론한다.”43) (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정도의 37보리분법(菩提分法)을 말하는 것으 로. 온갖 경계 대상을 지 각하고 깨닫고 설하는 등에 대해 어떠한 장애도 없는 법(法)ㆍ의(義)ㆍ사(詞) ㆍ변(辯)무애해이다. 순서대로 사리불.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6권에서 상론한다.37) 여러 현관변(現觀邊)의 온갖 세속 지(世俗智). 즉 그들 은 지금 바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37) 공공ㆍ무원무원ㆍ무상무상은 3중(重) 삼마지(三摩地. 원지는 원하는 대로 아는 지혜를 말한다. 4법적은 법의 근본이 되는 무탐법적(無貪法迹)ㆍ무진법적(無瞋法迹)ㆍ정념법적(正念法迹)ㆍ정정법적(正 定法迹)을 말한다.41) 지(智)와 지(止)ㆍ관(觀) 등의 법. 정려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거기서 물 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정려를 잡수한다. 그래서 ‘현관변’이라고 한 것임)에서는 미래의 세속지를 함께 닦아 획득 한다. 35) 4정행은 4제에 통달하여 열반으로 나아가는 방식인 고지통행(苦遲通行)ㆍ고 속통행(苦速通行)ㆍ낙지통행(樂遲通行)ㆍ낙속통행(樂速通行)의 4통행(通行)을 말하며(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1권에서 상론함). 정(靜)의 무 상삼마지를 무상으로 관하는 삼마지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9권 에서 상론한다. 39) 무루와 유루의 정려를 번갈아 가며 닦는 것을 ‘잡수’라고 하는데. 40) 무쟁과 원지는 4무애해와 더불어 성자와도 공통되는 불타의 공덕으로. 이것에 의해 무쟁과 원지 등의 공덕이 획득된다. 이에 대 해서는 본론 제75권에서 상론한다. 이에 대해 서는 본론 제76권에서 상론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4권에서 상론한다.38) 잡수정려(雜修靜慮). 36) 4무애해는 다른 성자와도 공통되는 불타의 공덕으로.40) 변제정(邊際 定). 지(止. 이는 오 로지 욕계의 번뇌를 떠난 불환(不還)과 아라한만이 닦는 선정이다. vipaśya. . 38) 현관변의 세속지란 4제 각각을 즉각적으로 통찰할 때 함께 닦게 되는 세속 지를 말하는 것으로. 42) ‘지(智)’에는 10지가 있으며(본론 제73권). 또는 等持)로서. 목건련.

44)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의심과 힐난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22)에 의하면. [마찬가지로] 별해탈본(別解脫本)을 일컬어 비나야 율(毘奈耶律)이라고 하니.45) 『정법멸경(正法滅經)』에서도 역시 이같이 설하고 있다. 혹은 온갖 계경을 일컬어 달마(達磨. 아비달마는 증상 혜(增上慧)에 근거한 논의이다. 비나야장(즉 율장)이 바로 아비비나야라고 인정할 수 있기 때 문이다. 논(論)은 바로 능히 직접적으로 그것의 의미를 결택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고 이름하였다.46) 이를 광률(廣律)이라 한다. 그렇지 않다.즉 잡장 중에는 이러한 온갖 법에 대해 설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잡장이 바 로 세 번째 장(藏. 44) . 주 23) 참조. 아비달마와 비나야와 아급마(阿笈摩) 중의 중요한 글의 뜻으로서 여러 제자들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니 듣고서 가벼이 여길까 염려하여서라네. 일반적으로 소승경전의 총명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아비달마 비나야와 더불어 수트라. p. 또한 경에서 설한 것처럼 부처님의 성교는 3온(蘊:戒ㆍ定ㆍ慧蘊)으로 정리될 수 있으므로 비나야장과 아비달마도 결정코 지식의 근거[量]에 포함되어야 한 다. śila. 바로 직접적으로 존재[法]의 본성과 양상에 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비달마’라고 이름하였다. 비나야는 증상계(增上 戒)에 근거한 논의이며.dharma. 45) 『대비바사론』 제1권(한글대장경118. 오로지 그것이 성립하게 된 연기(緣起)를 널리 분별 한 것을 ‘아비비나야’라고 이름하였다. 戒)와 상응하는 논의로서. 46) 아급마(Āgama.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아비비나야장(阿毘毘奈耶藏)을 마땅히 네 번째 장이라 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법)라고 하니. [마찬가지로] 매우 심오한 온갖 존재의 본성과 양상[諸法性相]과 상응하는 논 의로서. 또한 계경에서 “아비달마와 아비비나야(阿毘毘奈耶)에 대해 마땅히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할 것이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아비달마를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阿含)는 ‘전승’의 뜻으로. 즉 가장 뛰어난 시라(尸羅. 즉 논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설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직접 적으로 비나야에 대향(對向)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비비나야’라고 이름하였다. 수트라 즉 경은 증상심(增上心)에. 즉 경(經)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세간 사람들이 간택 분별해야 할 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자신을 애호(愛護)하는 이라면 말의 악행을 익혀 대법 (對法)을 비방하여 불설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뛰어난 戒)를 다만 ‘시라’로 설하기도 하며. ‘이러한 [법]’이란 위대한 스 승[大師]의 교법. 즉 대법(對法)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법’이란 바로 대법(즉 아비달마)임을 알아야 한다. 有漏無漏法 除道餘有爲 於彼漏隨增 故說名有漏 .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법이 있으니 도제(道諦)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에는 누(漏)라는 번뇌가 따라 생겨나므로 그래서 유루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지금 바로 경을 살펴보더라도 접두 사[前句]가 있는 경우도 있고. 그러므로 마땅히 이 같은 이치와 가르침에 따라 아비달마는 진실로 바로 불 설(佛說)임을 믿고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만약 어떤 이가 계 경에 따라 설하였다면 비나야는 법의 본성[法性]에 어긋나지 않음을 나타내었 던 것이다. 증상시라(增上尸羅. ‘이러한 비나야’라고 설할 때. 유위와 무위 1. 이상 [아비달마가 불설이라는] 부수적인 논의[傍論]를 마친다. 이를테면 정등각(正等覺)을 혹 어떤 때에는 단지 ‘각’이라고 말하 기도 하고. Ⅰ. 온 갖 욕탐 등을 다만 ‘탐’ 등이라고 설하기도 한다. 제법분별(1)―유루와 무루. 정법을 비방하는 죄는 깊어 가히 두려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존께서도 어떤 경우에 역시 아비달마를 법이라는 말로써 방편적으로 설한 경우가 있으니. 혹 어떤 때는 거기서 접두사를 빼고서 설하는 경우도 있다.또한 ‘이러한 법’. 총설 앞서 말하였듯이 부처님께서는 세간 사람들로 하여금 택법(擇法)을 닦고 익 히게 하기 위해 아비달마를 설하였다.

擇滅謂離繫 隨繫事各別 畢竟碍當生 別得非擇滅   論曰。說一切法略有二種。一者有漏。二者無漏。是則總說。次當別 解。除道聖諦。餘有爲法。是名有漏。此複雲何。謂五取蘊。色乃至識。 如說雲何名色取蘊。謂有漏色隨順諸取。廣說乃至。識亦如是。何緣取蘊 名爲有漏。以於彼中漏隨增故。有身見等諸煩惱中立漏名想。令染汙心常 漏泄故。與漏相應。及漏境界。隨增漏故。名漏隨增。隨增眠義後當廣 辯。由此已遮不同界地及無漏緣。煩惱境界隨眠有漏。彼此展轉不隨增 故。非相對立如是二名。有漏無漏複有何相。如世尊言。有漏法者。謂所 有色隨順諸取。是能增益諸有取義。廣說乃至。識亦如是。與此相違。是 無漏法。有漏無漏略相如是。爲廣分別。複作是言。謂於過去未來現在。 諸所有色生長現貪或瞋或癡。或隨一一餘隨煩惱諸心所法。乃至廣說。複 爲何義作如是說。爲別分別順諸取義。若爾唯應說能生長貪等煩惱。或隨 一一餘隨煩惱。非總相說。能別了知。爲令一切別知義故。以非一切一切 煩惱皆可現行。故唯總說。或隨一一餘隨煩惱。又諸隨眠行相微細。彼現 行位有不能知。忿等行相粗顯易知。故唯總說。餘隨煩惱或墮世間。名爲 有漏世間所攝。名墮世間。謂處世間不出爲義。依苦諦體立世間名。故契 經言。吾當爲汝宣說世間及世間集。又作是言。觀世間集於世間無。是爲 非有乃至廣說。複雲何知。諸墮世間皆名有漏。如契經言。吾當爲汝說有 漏法及無漏法。有漏法者。謂諸所有眼。諸所有色。諸所有眼識。諸所有 眼觸。諸所有眼觸爲緣內所生。或樂受或苦受或不苦不樂受。如是乃至。 .무루는 말하자면 도제와 아울러 세 가지의 무위 이를테면 허공과 두 가지 멸(滅)이니 이 중의 허공은 장애를 갖지 않는 것이다. 無漏謂道諦 及三種無爲 謂虛空二滅 此中空無碍 택멸(擇滅)은 말하자면 이계(離繫)로서 계박(繫縛)하는 것에 따라 각기 다르며 마땅히 생겨나야 할 법이 끝내 장애되면 [택멸과는] 다른 비택멸을 획득한다.

墮世間意。墮世間法。墮世間意識。墮世間意觸。廣說乃至。名有漏法。 無漏法者。謂出世間意。出世間法。出世間意識。廣說乃至。名無漏法。 依此聖言。及由正理。有漏無漏法相成立。無法自制。譬喻論師違理背 經。妄作是說。非有情數離過身中所有色等。名無漏法。此必不然。違契 經故。如契經言。謂於過去未來現在諸所有色。生長現貪或瞋或癡。乃至 廣說。非有情數。離過身中所有色等。既能生長有情貪等。雲何無漏。所 以者何。無比指鬘烏盧頻螺迦葉波等。緣世尊身生長貪瞋癡等漏故。彼計 於言。非境第七。是依第七。如油於麻爲漏所依。故名有漏。此不應理。 以於去來說起現故。未曾依去來起現在貪等。是故彼計決定非善。又上經 言。或隨一一餘隨煩惱諸心所法非隨煩惱。有非心所。爲簡彼故複言心 所。故知複言心所法者。爲顯於言是境第七。又應滅道是無智依。如言無 明以於苦等無智爲性。此中於言第七聲故。若此於言非許依者。因何固 執。彼定是依。故於色等生長癡等。非定漏依方名有漏。又一切聲皆應無 漏。以聲定非漏所依故。不應執聲定是無漏。經言聲體是雜染故。非說無 漏名爲雜染。是應理言。又諸異生身中善識應成無漏。非漏依故。若言漏 分隨逐故者。學位諸識皆應有漏。又顯色等糞穢酒等非漏依故。應皆無 漏。又阿羅漢身是無漏。不應正理。故契經說。諸所有苦皆取爲緣。然阿 羅漢身定是苦。故契經言。  阿羅漢壽終  深生大歡喜  其猶舍毒器  亦如眾病除   譬喻者說。先業所引六處名壽。此若無漏。聖不應觀如毒器等。如契 經言。諸阿羅漢常自羞厭訶毀己身。聖者不應羞厭訶毀諸無漏法。故阿羅 漢身定有漏。由契經言。無明所蔽。貪愛所縛。愚夫智者同感有身。若謂 無明所感身滅。餘明所引身複續生。智者應無無明貪愛所感有身。便違經 說。又諸覺分應成有果。若阿羅漢身非有者。如病如毒可厭毀身。而言非 彼三有所攝。除譬喻師。誰爲此計。又眼等法有過離過。體相同故。不應 別執。又譬喻部。異生身中眼等亦非諸漏依止。彼執五識無染汙故。若阿 羅漢無諸取蘊豈不違經。如說彼觀自五取蘊如癰病等。又彼傳執。非有情 數外法是苦而非苦諦。應執有貪非貪隨眠。眼非眼界。受非受蘊。如契經 .

言觸俱生受名爲受蘊。故應諸苦皆是苦諦。由契經言。若於諸苦。或於苦 集。迷惑猶預。是於苦諦集諦生疑。如是已辯。譬喻論宗於至理。爲有 至教證彼執耶。彼謂亦有。故契經言。離貪瞋癡則離諸漏。又說有六心栽 覆事。所謂有漏有取諸色心栽覆事。聲等亦爾。彼謂此中心栽覆事。既說 有漏有取諸色。故知別有無漏諸色。廣說乃至。觸亦如是。彼依義准妄爲 是計。然聖教中。不應依此義准理門起諸戲論。如契經說。我諸所有觸所 生受。一切皆滅。亦應義准。別有諸受。非觸所生。而不應許。又契經 說。大迦葉波。於施主家心無系著。亦應義准餘阿羅漢。於施主家心有系 著。又彼經中非容義准。無若聲故。由彼不言。謂若有漏有取諸色心栽覆 事。但言有漏有取諸色心栽覆事。此顯色過。非爲簡色。是故彼宗亦無至 教。雖彼上座誤引經言。若諸苾芻。有漏有取。彼於現法不般涅槃。又引 經言。  真梵離諸漏  不染於世間  謂獨覺世尊  自在離諸漏   此於彼義都不相應。我亦不許阿羅漢等有漏取故。眼等雖名有漏順 取。而非取漏。經亦不言阿羅漢等無順取法離諸有漏。言亦不染者。謂於 世間一切境界煩惱斷。故由契經。說貪等名。染謂於世間所攝受事及一切 趣。永離貪等。故名不染。由此即釋餘契經言。佛告苾芻。阿羅漢等於諸 世間已得離系。雖行世間而能摧伏。不爲世間之所染汙。謂於世間諸有漏 事。不爲一切煩惱所縛。是故說言。阿羅漢等於諸世間已得離系。雖行世 間而能摧伏。不爲世間所染汙者。此經意說。阿羅漢等雖處世間。亦複成 就而於世間得對治故。摧伏世間煩惱染汙。是故彼宗都無至教。又彼起執 依訓詞門。謂與漏俱名爲有漏。此釋非理。立相異故。如契經言。謂於過 去未來現在諸有色等。生長現愛或恚或慢。乃至廣說。如何去來與現俱 起。又譬喻者。唐攪虛空。十八界中前十五界一向有漏。經所說故。謂契 經言。有漏法者。諸所有眼諸所有色。諸所有眼識。如是乃至。身觸身識 諸所有言。顯無餘義。彼言我等不誦此經。非不誦經能成所樂。欲成所樂 當勤誦經。又彼不以一切契經皆爲定量。豈名經部。謂見契經。與自所執 宗義相違。即便誹撥。或隨自執改作異文。言本經文傳誦者失。或複一切 .

47) 47) 온갖 존재[諸法]가 인연 화합하여 드러난 무상의 세계를 유위(有爲)라고 하 며. 이 때 온갖 존재를 유위법이라고 한다. 일체의 법을 설함에 있어 간략하게 말하면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도성제(道聖諦)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有爲法). 첫째는 유루(有漏)이고. 이것을 유루라고 이름한다. 다음으로 마땅히 개별적으로 해석해 보면. 유위(samskṛta)란 다수의 요소 가 함께 작용된 것. 조작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혹은 존재 본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 무상하고 괴로운 유위세간의 원동 력이 되는 무지와 탐욕 등의 번뇌가 소멸된 세계를 무위라 하고. 이는 전체적으로 설한 것이다. 그러한 존 . 이에 반해 조작되지 않은 세 계.皆不信受。如順別處等經皆言非聖教攝。是對法者實愛自宗。制造安置阿 笈摩內。彼由此故背無量經。違越聖言多興異執。我此論中漸當顯示。已 辯有漏及有漏因。雲何無漏。謂道聖諦及三無爲。有異釋言。與漏等類故 名有漏。如有種族。複有釋言。爲漏所汙故名有漏。如有毒食。或有釋 言。與漏俱斷故名有漏。如天帝釋有怛策迦與彼俱墮。如是等類訓釋眾 多。與彼相違名無漏法。道聖諦者。謂非有漏色等五蘊。三無爲者。虛空 二滅所謂擇滅及非擇滅。此虛空等三種無爲。及道聖諦。由是因緣名爲無 漏。次前已說其道聖諦。後當廣辯。於略所說三無爲中。虛空但以無礙爲 性。於中諸法最極顯現。故名虛空。是則無障以爲其相。所有大種及造色 聚。一切不能遍覆障故。或非所障。亦非能障是故說言無障爲相。已說虛 空。擇滅即以離系爲性。於四聖諦各別簡擇。故名爲擇。即是善慧差別爲 性離系涅槃是此果故。名爲擇滅。有作是言。諸所斷法同一擇滅。對法者 言。隨系事別。若諸所斷同一擇滅。證得苦法智忍所斷煩惱滅時。餘煩惱 滅爲證得不若證得者。修餘對治則爲無用。若不證得。是則一物證少非 餘。與理相違。有分過故。由是定應計離系事。隨系事量。不違正理。已 說擇滅。永礙當生得非擇滅。擇謂如理勤所成慧。不由此慧。有法永礙未 來法生。名非擇滅。如眼與意專一色時。於所餘色及一切聲香味觸等。念 念滅中對彼少分。意處法處得非擇滅。以五識身及與一分意識身等。於已 滅境終不能生。緣俱境故。由彼生用系屬同時。所依緣故。若法能礙。彼 法生用。此法離慧定礙彼法。令住未來。永不生故。得非擇滅。此法實有 後當成立。隨順本文次第理故。前說除道餘有爲法。是名有漏。何謂有 爲。應當辯說頌曰。 논하여 말하겠다. 둘째는 무루(無漏)이다.

나아가 식취온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고 [계경에서] 설하 고 있는 바와 같다. 유부에서는 이 가운데 ‘수면’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의 번뇌론을 전개시키는데. . 그것으로 부터 항상 염오(染汚)한 마음이 누설(漏泄).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등 번뇌에 따라 생겨난 유루의 5온으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도정인 도(道)는 유위이고 무루이 다.즉 번뇌)’가 따라 생겨나기[隨增] 때문이다. 깨달음의 이상인 멸(滅)은 무위이고 무루이며. 49) ‘누(漏.48) 즉 “무엇을 일컬어 색취온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번뇌[取]에 따라 일어나는 유 루의 색을 말하며. 번뇌의 수증 관계에 대해서는 본론 제49권에서 상론한다.50) 다시 말해 ‘누’와 상응하고. 이상의 유위ㆍ무위. ‘취(upādāna)’는 번뇌 취착(取著)의 뜻.(후술) 유위법은 다시 번뇌가 수반되는 유루법(有漏 法)과 수반되지 않는 무루법(無漏法)으로 나뉜다. 즉 번뇌(누)가 따라 생겨나고. 어떠한 이유에서 취온을 일컬어 유루라고 하는 것인가? 그것을 근거로 하여 ‘누(漏. 미혹한 현실과 그 원인인 고(苦)와 집(集)은 유위이고 유루이며. 또한 번뇌에 따라 생겨나는 법을 일컬어 ‘유루’라고 한다. 그러나 청정한 법(滅諦와 道諦)을 대상[緣]으 로 하여 번뇌가 생겨나는 일은 있어도 그것에 따라 생겨나지는 않기 때문에 청정한 법은 유루가 아니라 무루이다. 50) 설일체유부에 의하는 한 번뇌(kleśa)란 그 자체 개별적으로 실재하면서 마 음을 오염시키는 의식 작용을 총칭한 말로서. 여기서 ‘따라 생겨난다’는 말을 전통 적으로 ‘수증(隨增. 유부 번뇌론상에 중요 한 술어이다. 그래서 유루이다. 48) 5취온이란. 유루ㆍ 무루를 아비달마교학의 기본구도인 4성제에 대입시켜 보면.(후 설) 5온에 대해서는 본론 제1권~3권에 걸쳐 자세하게 해설한다. 더 이상 번뇌를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무루이다. 여섯 감관(6根)으로부터 누설된 것. 또는 薩迦耶見)은 10가지 수면 중의 첫 번째이다. ‘누’에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본송 재를 무위법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47권에서 상론한다. 隨順增益의 준말)’이라고 하는데.49) 즉 유신견(有身見) 등의 온갖 번뇌를 ‘누’라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으로. 즉 깨달음에 이르는 도정은 온갖 존재가 인연화합하여 드러난 현실에서 의 경험이기에 유위이지만. 즉 번뇌를 말한다. 유루법과 유루의 의미 이(유루)는 다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5취온(取蘊)을 말하니.2.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 전(纏)ㆍ누(漏)ㆍ폭류(瀑流)ㆍ액(軛)ㆍ취(取)ㆍ신계(身繫)ㆍ개(蓋)ㆍ수번뇌(隨煩 惱) 등의 각각의 명칭으로 분류되고 있다.āsrava)’란 누설의 뜻으로. ‘5취온은 나[我]도 나의 것[我 所]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그것이 실재한다는 그릇된 지식 작용’인 유 신견(satkāyadṛṣṭi. 색(色) 내지 식(識)이 바로 그것이다. ‘누’의 경계가 되며. 또한 반대로 이 같 은 5온을 근거로 하여 번뇌가 따라 생겨나기도 한다. 즉 새어나오기 때문이다.

일 체 번뇌의 뜻을 개별적으로 알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51) 유루와 무루는 다시 어떠한 특징을 갖는가? 이를테면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리고 ‘따라 생겨나는 번뇌[隨眠]’의 뜻에 대해서는 마땅히 뒤(본론 「변수면품(辯隨眠品)」 제45권 이 하)에서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 52) 수번뇌(upakleśa)란.52)……(이 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혹은 그러한 각각의 번뇌에 따라 일어나 는 그 밖의 다른 수번뇌(隨煩惱)나 온갖 심소법을 낳는 것을 말한다. “과거ㆍ현재ㆍ미래에 존재하는 온갖 색(色)에 대해 즉각적으로 탐욕[貪]이나 혹은 미워함[瞋]. 그러나 보다 널리 분별하기 위해 [경에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피 차간에는 서로 관계하면서 따라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두 가지의 명칭(번뇌의 경계와 수면)을 서로 대립시켜 [유루로]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어리석음[癡].에서] ‘누라는 번뇌가 따라 생겨난다’고 말한 것이다. 유루와 무루의 간략한 특징은 이와 같다. 그 같은 법에 따라 번뇌가 생겨나는 일이 없다. 여기에는 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악작(惡作)ㆍ수면(睡眠)ㆍ도거(掉擧)ㆍ혼침 (惛沈)ㆍ분(忿)ㆍ부(覆)ㆍ질(嫉)ㆍ간(慳)의 10전(纏)과 뇌(惱)ㆍ해(害)ㆍ한(恨) ㆍ첨(諂)ㆍ광(誑)ㆍ교(憍)의 6번뇌구(煩惱垢)가 있다. 이는 바로 온갖 존재에 대 한 집착을 낳는다는 뜻이다. 본론 제54권에서 상론 한다. ‘혹은 그러한 각각의 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그 밖의 다른 수번뇌--를 낳는 것’이라고 전체적으로 설하여서는 능히 개별적인 뜻을 알 수 없을 것이니. 모든 때에 일체의 번뇌가 모두 현행(現行)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혹은 그 이를테면 욕계에서는 색계의 5취온이나 혹은 무루법을 대상으로 하여 번뇌 를 일으키는 일은 있어도. 동일한 단계[地]에 속하지 않았거나 무루를 근거 로 하는 번뇌의 경계(대상)와 수면이 유루라는 사실은 이미 부정된 셈이니.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탐욕 등의 [근본]번뇌를 능히 낳는다고만 설해야 한 다. 따라서 그것을 유루라고도 하지 않는다. 탐ㆍ진ㆍ치 등의 근본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번뇌로서.”53) 어떠한 뜻에서 이와 같이 설하게 된 것인가? 온갖 번뇌[取]에 수반되는 법[義]을 개별적으로 분별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이 무루법이다. 53) 과거ㆍ현재ㆍ미래에 존재하는 온갖 수ㆍ상ㆍ행ㆍ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 다는 뜻 51) . 즉 세계를 달리하는 법이나 무루법에 따라서는 번뇌가 수증(隨增)하지 않으 며. “유루법이란 존재하는 모든 색(色)으로서 집착이라는 온갖 번뇌[取]에 수반되는 것을 말하니. 이에 따라 동일한 세계[界]. 나아가 식(識)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고 하였 다.

……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기도 하였다. 혹은 고수(苦受).55) 여기서 ‘세간’이라는 말은 고제(苦諦)에 근거하여 설정되었다. (1) 유루에 관한 비유사의 이설 비판 그런데 비유논사(譬喩論師)는 이치에도 어긋나고 경에도 위배된 다음과 같은 분노는 근본번뇌(유부에서는 이를 隨眠이라고 함)인 미워함[瞋]에서 일어나 는 수번뇌(10纏의 하나임)이다. 56) 고제(苦諦)란 비상(非常)ㆍ고(苦)ㆍ공(空)ㆍ비아(非我)의 4상(相)을 말하는 것 으로.(후 술) 54) . 타세간 의 의촉(意觸)……(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등을 유루법이라고 이름한 다. 55) 이에 반해 출세간(出世間). 아울러 올바른 이치에 의해 유루와 무루 의 법상(法相)을 성립시킨 것이지 자의에 따라 지은 것은 어떠한 법도 없다. 이러한 4상이야말로 현실 세간의 참다운 실상이기 때문에 ‘고제’이다. 존재하는 모든 안촉(眼觸). 분노(忿) 등의 행상은 거칠게 나타나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오로지 그 밖의 다른 수번뇌와 함께 전체적으로 설하게 된 것이다. 즉 세간에서 벗어난 것을 무루라고 한다. 또한 온갖 수면(隨眠. 이를 비유(非有)라고 한다. 즉 인연)에 대해 널리 설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즉 근본 번뇌)의 행상(行 相)은 너무나 미세하여 그것이 현행하는 상태에서도 능히 알지 못하는 일이 있 지만. 존재하는 모든 색(色).……나아가 타세간의 의(意)와 타세간의 법(法)과 타세간의 의식(意識). 존재하는 모든 안식(眼 識). 곧 세 간은 탐욕 등의 번뇌의 산실이며. 그리고 무루법이란 말하자면 출세간의 ‘의’와 출세간의 ‘법’과 출세간의 의 식……(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등을 무루법이라고 이름한다.러한 각각의 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그 밖의 다른 수번뇌--’라고 하여 오로지 전체적으로 설하게 된 것이다. ‘고’도 모두 유루의 이명(異名)이다. 참고로 ‘세간’도. “나는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세간과 세간의 집 (集. 유루법이란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안(眼). 혹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다 .” 곧 이러한 성교(聖敎)에 근거하여. 존재하는 모든 안촉을 조건[緣]으로 하여 내적 으로 생겨난 낙수(樂受). 그로 인해 생사윤회하기 때문이다.54) 혹은 타세간(墮世間)을 일컬어 ‘유루’라고 하니. “나는 마땅히 너희들을 위해 유루법과 무루법에 대해 설하리라.56) 그 래서 계경에서도 말하기를. 온갖 타세간이 모두 유루법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계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이는 말하자면 세간에 처하여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세간에 포섭되는 것을 타세 간이라고 이름하였다. 본론 제61권 참조. 또한 “세간의 집을 관 찰하면 세간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니.

즉 비유논사 는 ‘~에 대해 번뇌를 일으킨다’는 말을 ‘~에 의해 번뇌를 일으킨다’는 말 로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이 삼자는 다 같이 경량부와 관계하는 이들로서. 央掘摩羅)은 그 릇된 스승을 만나 천 명을 죽여야 해탈한다는 말을 믿고 악행을 저지르다가 부처님에 의해 구제되었다.59) 즉 그들(비유논사)은 “[‘과거ㆍ현재ㆍ미래에 존재하는 온갖 색에 대해’에서] ‘~ 에 대해[於]’라는 말은 경계 대상[境]을 의미하는 제7격(格)이 아니라 바로 ‘~에 의해[依]’를 의미하는 제7격이다. 세부적인 사상적 차 이는 아직 알려지고 있지 않다. 그것을 어떻게 무루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무비(無比)나 지만(指鬘). 57) . 譬喩師)란 세간적 사실인 비유[現喩. 계경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지만(Aṇgulimālya. 오로빈라가섭파(烏盧頻螺迦葉波) 등은 세존의 몸을 연(緣.57) “비유정수(非有情數)와 [번뇌의] 허물을 떠난 몸 가운데 존재하는 색 등을 무루법이라고 한다. 우전왕(優塡王)의 비(妃). 본론에서도 『구사론』의 작자인 경주(經主) 세친과 경량사 (經部師)인 상좌(上座) 스리라타(Śrīlāta)와 더불어 중요한 비판 대상이 되고 있다. 60) ‘~에[於] 대해’라는 말은 제7 처격(處格)이지만 사실상 원인 이유를 나타내 는 제4 구격(具格)으로 사용되어 ‘~에 의해’를 의미한다는 뜻. 58) 비유정수란 감각을 갖지 않는 무생물을. 59) 무비(Anupamā)는 비할 바 없는 절세미인으로 본명은 마간디야 (Māgandiyā). 이들은 불타에 게 귀의하기 전에 각기 순서대로 불타에 대해 애탐과 진에와 우치의 번뇌를 낳았다. 오로빈라가섭파(Uruvela Kāśyapa)는 원래 불을 섬기는 외도로 500명의 제자를 이끌고 불타에게 귀의하였다. [번뇌의] 허물을 떠난 몸이란 성자 의 소의신(所依身)을 말한다. “과거ㆍ현재ㆍ미래에 존재하는 온갖 색에 대해 즉각적으로 탐욕[貪]이나 혹 은 미워함[瞋]. 또는 譬喩者.……(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즉 비유정수와 [번뇌의] 허물을 떠난 몸 가운데 존재하는 색 등이 이미 유정 의 탐욕 등을 낳았는데. 『대비바사론』에서는 이들의 주장이 90여 회에 걸쳐 언급되고 있으며. 조건)으로 하여 탐(貪)ㆍ진(瞋)ㆍ치(癡) 등의 번뇌를 낳았기 때문이다.”58) 그러나 이는 필시 그렇지 않으니.60) 이를테면 ‘참깨에서 (다시 말해 참깨에 의 해) 참기름이 생겨난다[油於麻]’고 하듯이 번뇌[漏]의 소의(所依)가 되기 때문에 비유논사(Dārṣṭāntika. 혹은 어리석음[癡]을 낳는 것을 말한다. 경량부(經量部)의 선구로 알려지고 있다. 계경에서는 이 같이 말하고 있다. dṛṣtānta]로써 법을 설명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으로.그릇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또한 [그렇다면] 모든 이생(異生)의 몸 가운데 선(善)한 의식도 마땅히 무루 가 되어야 할 것이니. 또한 번뇌의 소의를 유루라고 하였지만. 5취 등 각기 다른 생(生)을 받기 때문에 이생이라 하였다. 이는 이를테면 ‘무명(無明)은 고(苦) 등에 대해 무지함을 자성 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소리는 결코 번뇌 의 소의(所依)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에 대해’라는 말은 제7성(聲.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 은 결정코 옳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에 대해’라는 말을 ‘근거’의 의 미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무슨 이유에서 그것이 결정코 ‘~에 의해’라고 고집하 는 것인가? 따라서 ‘색 등에 대해 어리석음 등을 낳는다’고 할 때. 즉 번뇌가 수증(隨增)하는 법을 말하지 번뇌의 근거를 말하는 것이 아 니다.61) 또한 [그렇다면] 일체의 소리는 모두 무루여야 할 것이니. 즉 감각을 갖지 않는 무생물을 무루라고 하였 고.62) 그러나 소리를 결코 무루라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니. 62) 앞서 비유논사는 비유정수. 또한 마땅히 멸(滅)ㆍ도(道)는 바로 무지(無智)의 [원인이 아니라] 근거라고 해야 할 것이니. 63) 이생(pṛthagjana. 또한 앞서 인용한 경에서 “혹은 그러한 각각의 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그 밖 의 다른 수번뇌나 온갖 심소법을 낳는다”고 말하였는데.유루라고 이름한다”고 생각하였다. 곧 처격)이기 때문이다. ‘번뇌[漏]에 따라 생겨나는 것’. 따라서 다시 심소법을 말한 것은 ‘[존재하는 온갖 색]에 대해’라는 말이 바로 경계 대상을 의미하는 제7격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는 凡夫)은 무루의 성법(聖法)을 획득하지 못한 유정으 로. 경에서 소리의 본질은 바로 잡염(雜染.63) 그러나 만약 번뇌의 원인[漏分]에 수반되기 때문에 [이생의 선한 의식을 유루라고] 한다면. 혹은 ‘그것에 따라 번뇌가 생겨나는 것’. 더러움)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멸(滅. 유학위 (有學位)의 선한 의식도 모두 유루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주 49) 참조.64) 유루란. 64) 유학위란 견도(見道)로부터 아라한에 이르기 전까지 단계의 성자를 말한다. 유부에 의하는 한 번뇌의 근거 가 유루는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ㆍ미 래에 대해 현재의 탐욕 등을 일으킨다고 말하지 과거ㆍ미래에 의해 현재의 탐 욕 등을 일으킨다고 말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열반)이나 성도(聖道)는 번뇌의 근거나 조건은 될 수 있을지라도 그것에 따라 (혹은 그것에 의해) 번뇌가 생겨나지는 않는 것이 다. 번뇌의 근 거(즉 색 등)를 바야흐로 ‘유루’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61) . [수 번뇌로서의] 심소도 아닌 것이 있어 이를 간택 분별하기 위해 다시 심소를 말 한 것이다. 즉 무루를 설하여 잡염이라고 함은 이치에 맞는 말이 아닌 것이다. 번뇌의 소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번뇌도 아니며.

따 라서 만약 ‘무명에 의해 초래된 몸이 멸하면 명(明)에 인기된 몸이 다시 상속 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선행한 업에 의해 인기(引起)된 6처(處)를 목숨 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곧 성자라면 마땅히 모든 무루법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고 싫어하여 꾸짖거나 훼손하지 않을 것 이니. 또한 [그들은 번뇌의 허물을 떠난 몸 가운데 존재하는 색 등을 무루법이라고 하였지만] 아라한의 몸이 바로 무루라고 하는 것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이는 바로 병과 같고 독과 같아 가히 싫어하여 훼손해야 할 몸이라 하면서 그것이 3유(有:욕유ㆍ색유ㆍ무색유) 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또한 현색(顯色. 계경 에서 “모든 아라한은 항상 스스로 자신의 몸을 부끄럽게 여기고 싫어하여 꾸 짖고 훼손한다”고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색채) 등으로 이루어진 똥이나 더러운 술 따위도 번뇌의 소 의가 아니기 때문에 그 모두를 무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菩提分法)은 마땅히 어떤 과보를 성취해야 한다. 계경의 말씀에 의하면. 비유사(譬喩師)를 제외하고서 누가 이같 이 생각하겠는가? 또한 안(眼) 등의 법은 허물(번뇌)를 갖거나 허물을 떠났거나 그 자체의 양 유부교학에 따르면. ‘무명에 덮이고 탐 애(貪愛)에 묶이면 범부도 지자(智者)도 다 같이 몸을 낳게 된다’고 하였다. 아라한은 목숨이 다하게 되면 깊고도 큰 환희를 낳으니 그것은 독을 담는 그릇을 버리는 것과 같고 역시 또한 온갖 병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즉 계경에서 “존재하는 모든 괴로움은 다 번뇌[取]를 근거로 한다”고 설하고 있는 데. 그렇기 때문 에 아라한의 몸은 결정코 유루이다. 아라한의 몸도 결정코 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아라한의 몸이 유루가 아니라면. 그런데 이것(아라한의 몸)이 만약 무루라면 성자는 마 땅히 [목숨을] 독을 담는 그릇 따위와 같다고 관찰해서는 안 될 것이니. 마음은 항상 대상에 수반되는 것(識有必境)이기 때문에 대상을 번뇌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이생의 선한 의식뿐 아니라 성자위의 선 한 의식도 유루가 되어야 한다는 뜻. 비유자(譬喩者)는 말하기를. 지자의 경우 무명과 탐애에 의해 초래되는 몸은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다시 말해 명에 의해 인기된 무루의 몸을 갖는다고 하면). 이는 곧 경설에 위배되는 것이다. .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한 모든 각분(覺分.

66) 그렇지만 성교(聖敎) 중에서는 마땅히 이러한 의준량의 이치에 근거하여 주 69) 참조. 곧 그들은 의준량(義准量)에 의거하여 이같이 그릇되게 생각하였던 것이 다. 66) 의준량(arthāpatti)이란. 계경에서 말하기를 “촉(觸)과 함께 생겨나는 ‘수’를 수온이라 한다”고 하였다. ‘요청’. 수(受)는 수온(受蘊)이 아니라고 주장해야 할 것이지만. 그들은 5식(識)에 염오함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65) . ‘가정’이라 할 만하다. 이 를테면 ‘데바닷타는 뚱뚱하지만 낮에는 식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관찰될 경우. 즉 계경에서 “탐ㆍ진ㆍ치를 떠나면 온갖 번뇌 [漏]에서 떠나게 된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인식 방법으 로 인정하지 않는다.65) 또한 비유부 (譬喩部)는 [그러면서] 이생의 몸 중의 안 등도 역시 온갖 번뇌의 의지처가 아 니라고 하니. 밤 동안의 식사를 요청 가정하지 않고서는 뚱뚱하다는 사실을 합리적 으로 설명할 수 없다. 여기서도 경에서 유루의 색이 설해지고 있으므로 이 를 통해 무루의 색을 요청 가정하였다는 뜻. 또한 “여섯 가지의 마음을 가려 덮는 것[心栽覆事. 지금 알려진 사태에 근거하여 다른 어떤 사실을 내 함적(內含的)으로 이해하는 인식 방법으로.상이 동일하기 때문에 마땅히 분별하여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즉 6境]이 있으니. 혹은 괴로움의 원인[苦集]에 대해 미혹하여 의심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고제와 집제에 대해 의심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그들은 ‘여기서 마음을 가려 덮는 것을 이미 유루ㆍ유취의 온갖 색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이와는 별도로 무루의 온 갖 색이 존재함을 알아야 하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촉(觸)의 경 우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聖敎] 이 있다고 하였던가? 그들은 역시 있다고 말한다. 그럴 경우 마땅히 유탐(有 貪)은 탐수면이 아니며. 이른바 유루(有漏)ㆍ유취(有取)의 온갖 색(色)이 마음을 가려 덮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온갖 괴로움은 모두 고제라고 해야 한다. 또한 그들(비유부)은 전통적으로 ‘비유정수와 같은 외적 존재는 바로 괴로움 [苦]이지만 고제(苦諦)는 아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 아 라한이 온갖 취온(取蘊)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찌 경에 위배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경에서 “그(아라한)는 자신의 5취온을 옴이나 병 따위와 같 이 관찰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 “온갖 괴로움[苦]에 대해. 안(眼)은 안계(眼界)가 아니며.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논증할 만한 지극한 가르침[至敎. 성(聲) 등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고 설하 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 비유부가 논의하는 종의에 지극한 이치가 결여되었음을 분별하였다.

此名執勝. 또한 그 경(앞서 비유논사가 인용한 경문)에서는 의준량을 결코 허용하지 않 고 있으니. 나 역시 아라한 등이 유루(有漏)이고 유취(有取)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세친보다 약간 앞선 시기의 인물로.67) 또한 다음과 같은 경의 말씀을 인용하였을지라도 이는 그들의 종의에 도무지 상응하지 않는다. 단지 “유루ㆍ유취 의 온갖 색이 마음을 가리워 덮는다”고만 말하고 있으므로 이는 색의 허물을 나타낸 것이지 색을 [유루ㆍ무루 등으로] 간택 분별한 것이 아니다. 室利羅多). 즉 거기서는 “만약 유루ㆍ유취의 온갖 색이 마음을 가리워 덮는다면”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비록 그들(譬喩部)의 상좌(上座)가 “만약 어떤 필추(苾芻. 正理呼爲上座. ‘만약’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이 를테면 『구사론기(俱舍論記)』 제9권(대정장41. p. 이 경우도 역시 의준량에 근거하여 ‘촉에서 생겨나지 않은 별도의 온갖 수가 있다’고 해야 하겠지만. 진실의 범행은 온갖 번뇌[漏]를 떠나 세간에 물들지 않으니 이를테면 독각(獨覺)과 세존께서는 자재하여 온갖 번뇌[漏]를 떠나셨다네. 이 경우도 역시 의준량에 근거하여 ‘그 이외 다른 아라한들은 시주의 집에 대해 마음으로 얽매이거나 집착함이 있다’ 해야 하는 것이다. 본론 제25권에서는 세친 과 사제지간으로 언급하고 있다.68) 안(眼) 등을 비록 유루(有漏)ㆍ순취(順取)라고 일컬을지라도 [그 자 여기서 상좌(Sthavira)란 경부사(經部師) 스리라타(Śrīlāta. ‘此是經部中室利羅 多解. 68) 즉 아라한 등의 성자가 번뇌[漏]를 갖지 않는다는 경설(經說)로써 무루의 색 등을 논증할 수 없다는 뜻. 또한 계경에서 “대가섭파(마하가섭)는 시주(施主)의 집에 대해 마음으로 얽매이거나 집착함이 없다”고 설하고 있는데. 『경부비바사론(經部毘婆沙論)』를 지었다고 전하며. 비구)가 유루ㆍ유취라면(즉 번뇌를 갖는다 면) 그는 현법(現法)에 반열반하지 못한다”는 경의 말씀을 그릇되게 인용하 고. 마땅히 이를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컨대 계경에서 “나는 존재 하는 모든 촉(觸)에서 생겨난 수(受)--일체를 모두 다 멸하였다”고 설하고 있 는데. 후대 의 주석가들은 한결같이 스리라타를 본론의 상좌(上座)로 평석하고 있다.168상).온갖 희론(戱論)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67) .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종의는 [지극한 이치가 결여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지극한 가르침에 의해서도 역시 논증되지 않는 것이다.

즉 “부처님께서 필 추들에게 고하시기를. 이에 대해 비유사(경부)는 ‘번뇌에 의 해 생겨나는 것’ 또는 ‘번뇌를 낳는 것’을 유루라고 하였다. 그러니 어 순취(upādānīya)란 취착을 일으키는 것으로. 69) . 또한 역시 세간을 성취할지라도 세간을 극복[對治]할 만한 힘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세간의 번뇌와 더러움을 물리쳐 항 복 받았다’는 뜻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종의는 도무지 [불타의] 지극한 가르침에 의해서도 논증되지 않는 것이다. 70) 유루(sāsrava)는 sa와 āsrava의 합성어로서.체는] 누(漏)나 취(取)가 아니다. 이에 따라 그 밖의 다른 경에서 설한 다음과 같은 말씀. 다시 말해 유부 에서는 실유(實有)의 번뇌가 안근 등을 근거로 하여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유루라고 한 반면. 계경에서도 “탐 등을 물듦. 취(取)와 순취의 관계는 누 (漏)와 유루의 관계와 같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한 바와 같다. 이 같은 논쟁은 궁 극적으로 제법의 실유론(實有論)과 가유론(假有論)에 의한 것으로. 유정이 업에 따라 나아가는 일체의 세계[趣]에 대해 탐욕 등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물들지 않는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 때 sa는 saha.70)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이치에 맞지 않으 니. 계경에서 “과거ㆍ미래 ㆍ현재에 존재하는 온갖 색 등에 대해 즉각적으로 갈애. 어원)에 근거하여 ‘누(漏)와 함께하는 것을 일컬 어 유루라고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들은 훈사문(訓詞門. 혹은 아만 을 낳는다. 즉 안근 등은 그 자체 취착이나 번뇌가 아니며. 또한 번뇌를 근 거로 하여 그것이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혹은 미움. 징표[相. ‘아라한 등은 모든 세간에 대해 이미 이계(離繫)를 획득 하였기 때문에 비록 세간의 일을 행할지라도 능히 항복 받아 세간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고 하였다”는 말씀을 ‘세간의 모든 유루의 일들을 행함에 있어 일체의 번뇌에 속박되지 않는다’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세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이 같은 입장에서 비유사는 다만 번뇌불생(煩惱不生)을 택멸열반으로 이해한 데 반해 유부에서는 번뇌영단(煩惱永斷)으로 이해하였다. 그것을 근거로 하여 번뇌(取ㆍ漏)가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비유사는 안근 등은 번뇌를 낳기 때문에 유루라고 하였 다.69) 경에서도 역시 ‘아라한 등은 순취의 법이 없으며. 그러나 그럴 경우 안근 자체는 유루가 되어야 한다. 온갖 유루를 떠났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라한 등 은 모든 세간에 대해 이미 이계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비록 세간의 일을 행할 지라도 능히 항복 받아 세간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고 설한 이 경을 ‘아라 한 등은 비록 세간에 처해 있을지라도. 다시 말해 수증(隨增)하기 때문에 유루ㆍ순취(혹은 有取)라고 한다는 뜻. 즉 염(染)이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즉 함께하 다[俱]는 뜻이기 때문에 유루를 ‘누와 함께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논거]를 설정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으로. 그리고 ‘물들지 않는다[不染]’ 고 하는 말은 말하자면 세간의 일체의 경계에 대한 번뇌를 끊었기 때문으로.

나아가 신(身)과 촉(觸)과 신식(身識)이다”고 말하고 있 는 것이다. 3. 그들은 “우리는 이 경을 외워 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무루(無漏)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도성제(道聖諦)와 세 가지 무위(無爲)이다. . 이를테면 『순별처경(順別處經)』 등과 같은 경은 모두 성교(聖敎) 중에 포함되지 않으며. 미래의 어떤 사실은 현재의 번뇌와 함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번뇌를 낳게 하는 근거가 된다. “누(漏)와 동등한 71) 즉 미래의 어떤 사실에 대해 현재 갈망할 때. 그런데 어떤 이는 [유루에 대해] 달리 해석하여 말하기를. 그래서 sa-āsrava의 sa는 구기(俱起)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에 따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경을 등지고.떻게 과거ㆍ미래가 현재와 함께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71) 또한 비유자(譬喩者)는 허황되게 [잡을 수 없는] 허공을 흔들고 있으니. [불타의] 거룩한 말 씀에서 멀어진 채 수많은 이단의 주장을 펼치고 있으니.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한 다면 마땅히 부지런히 경을 외워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일체의 계경을 모두 지식의 결정적 근거로 삼지도 않았으면서 어찌 경부(經部)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그들은 이를테면 계경을 보고서 자신들 이 주장하는 종의와 서로 다를 경우 바로 그 경을 비방하거나 부정한다. 여기서 ‘존재하는 모든’이라고 하는 말은 그 밖의 다른 것이 없음 을 나타낸다. 나(중현)는 바야흐로 이 논(『순정리론』)에서 마땅히 그것들을 하나하나 지적하여 드러낼 것이다. 이것들은 바로 대법자(對法者. 아비달마 논사를 말함)가 실로 자신의 종의를 애호하여 지어 『아급마(阿笈摩)』 속에 포함시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무루법과 무루의 의미 1) 무루법의 종류 유루와 유루의 근거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경에 서 18계(界) 중 앞의 15계는 한결같이 유루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을 외우지 않고서는 능히 원하는 바를 이룰 수가 없다. 이를테 면 계경에서 “유루법이란 존재하는 모든 안(眼)과 존재하는 모든 색(色)과 존재 하는 모든 안식(眼識). 혹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라 [경문(經文)을] 고쳐 다른 글을 짓고서 본래의 경문은 전승하여 외운 자의 과실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종 의와는 다른] 일체의 모든 경을 신수(信受)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혹은 어떤 이는 “누(漏)와 함께 끊어지기 때문에 ‘유루’라고 이름한 것 이니.72) 이처럼 [유루에 대한] 어원적 해석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곧 이러한 허공 등의 세 종류의 무위와 도성제를 이 같은 인연에서 무루라고 이름한 것이다. 독이 섞인 음식)의 경우처럼 ‘더럽혀졌다’는 뜻 으로. 공 간은 그 자신 공간적 점유성 혹은 장애성을 지니지 않아[無礙] 공간적 점유 성을 지닌 물질로 하여금 나타나게 하는 근거로서. 地ㆍ水ㆍ火ㆍ風이라는 근원적 물질)과 대종으로 이루어진 색취(色 이상은 유루(sa-āsrava)에 대한 여러 다른 해석으로. 이와 반대되는 것을 무루법이라고 이름한다. 거기에 온갖 존재[諸法]가 [장애됨이 없이] 가장 잘 나타나기 때문에 ‘허공’이라 이름하였 다. 즉 유부에 의하면 시간(kāla 혹은 adhvan. 곧 [천제석은] 그것과 더불어 함께 떨어지기 때문이다”고 해석하고 있다. 세 번째는 유달책가(satakṣaka)의 경우처럼 ‘함께 끊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말하자면 절대공간으로 일체의 물질적 변화를 제거할 때 남는 존재이다. 유종족(有種族)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 자체 불생불멸이기 때문에 무위라고 한 것이다.종류이기 때문에 ‘유루’라고 이름한 것이니. 두 번째 는 유독식(saviṣa bhojana.73) 2) 세 가지 무위 앞에서 간략히 설한 세 가지 무위 중에서 허공(虛空)은 다만 무애(無礙. 도성제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잠시 설한 바 있지만 뒤에서 마땅히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 공 간적 점유성 혹은 장애성을 갖지 않은 것)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이른바 택멸(擇滅)과 비택멸(非 擇滅)이 바로 그것이다. 世路)은 유위제 법의 변화 상태를 이름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개념에 지나지 않지만. 72) . 천제석(天帝釋)을 유달책가(有怛策迦)라고 하는 것과 같다. 존재하는 모든 대종(大種. 세 가지 무 위란 허공(虛空)과 두 가지의 멸(滅)을 말하니. 달책가는 용왕의 이름이지만. 73) 앞서 아비달마의 작자에 대해 논설하면서 4념주 내지 8지성도 등을 언급하 였다. 74) 허공(ākāśa)이란.74) 이것은 바로 어떠한 장애도 갖지 않음을 특징으로 하니. 첫 번째는 접두어 sa 를 ‘같은 종족(sakula)’에서처럼 ‘동등한 종류(sadisa)’라는 뜻으로. 천제석이 그것과 함께 떨어진 다는 것은 의미 불명. “누(漏)로 인해 더럽혀졌 기 때문에 ‘유루’라고 이름한 것이니. 유독식(有毒食)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도성제란 유루가 아닌 (즉 무루의) 색 등 5온을 말하며.(p. 다시 어떤 이는 해석하여 말하기를.9) 이에 대해서는 본론 「변현성품(辯賢聖品)」(제71권)에서 구체적으 로 상론한다.

75)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에 따라 욕계 고제에 미혹 하여 생겨난 번뇌가 끊어진다. 즉 般涅槃이라 함). 이것에 의해 고제의 진리성을 확증하는 고법지(苦法智)가 획득되며. 4성제 각각에 대해 개별적으로 간택 (簡擇. 78) 만약 무위택멸의 열반이 단일하다면.聚) 등 일체의 물질적 존재를 능히 두루 가리거나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즉 단일한 택멸을 놓고서 일부만을 증득하고 나머지는 증득하지 않는다는 것 으로.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장애도 갖지 않음을 특징으로 한다’고 설 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2권에서 상론한다.78) 택멸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것은 무루혜의 첫 번째 단계인 고법 지인(苦法智忍)에 의해 증득될 것이므로 그 후 또 다른 실천도를 닦을 필요 가 없게 된다. 아비달마의 논사)는 “[택멸은] 계 박하는 것(즉 번뇌)에 따라 각기 다르다”고 말한다. 이는 바로 선한 지혜 [善慧]의 차별을 본질로 한다. 허공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왜냐하면 [단일한 것에 다수의] 부분이 있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계의 열반(즉 滅)은 바로 이러한 지혜 의 결과이기 때문에 ‘택멸’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것은 바로 단일한 무위택멸에 다수의 부분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다는 뜻. 택멸(擇滅)은 이계(離繫)를 본질로 한다. 그 밖의 다른 대치도(對治道) 를 닦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만다. 만약 증득하지 않는다고 하면. 혹 은 [다른 어떤 존재에 의해] 장애되는 것도 아니고. 견도(見道) 16찰나 중 첫 번째 찰나로.8)에 의하면. 4제 중 고제(苦諦)의 진리성(非常ㆍ苦ㆍ空ㆍ非我)을 인가하는 단계의 수행도. 75) . 간택력(지혜의 힘. 소에 멍에를 멘 수레[牛所駕車]를 줄여 ‘우차(牛車)’라고 하듯이.76) 그러나 대법자(對法者. “단멸(斷滅)되는 모든 법은 다 같이 동일한 택 멸이다”고 하였다. 76) 상식적으로 수많은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류의 번뇌는 각기 개별적으 로 끊어지기 때문에 택멸(즉 열반)에도 그만큼의 수가 있어야 하지만(그래서 일체의 번뇌가 모두 끊어진 것을 완전한 열반. 만약 단멸되는 모든 법이 동일한 택멸이라면. 택멸에는 동류(同類)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이는 ‘단멸되는 모든 법은 단일한 하나의 택멸이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또한 역시 능히 장애하는 것도 아니니. 『구사론』 제1권(앞의 책. 77) 고법지인이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나아가 고법지인에 의해 그 일부만을 증득하는 것이라면.77)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증득한다고 하면. 분별 판단)하기 때문에 ‘택’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고법지인(苦法智忍)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의 멸을 증득(證 得)할 때 그 밖의 나머지 번뇌의 멸도 증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p. 즉 판단력)에 의해 획득된 멸(즉 열반)[擇力所得滅]을 줄여 ‘택멸’이라 이름하였다.

일체의 존재는 과거ㆍ현 재ㆍ미래 3세에 걸쳐 실재하며. 즉 5식신(識身)과 의식신(意識身)의 일부 등은 이미 소멸해 버린 경계 대상에 대해 끝내 생겨날 수 없으니. 미래법은 일정한 때 일정한 조건 하에서 생 기 현현(현재)하지만. 이러한 법의 실유(實 有)에 대해서는 이후(본론 제50권~52권)에 마땅히 분별하게 될 것이다. . 이것은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소멸하지도 않 는다.79) 그러나 만약 어떤 법이 있어 능히 그 같은 법이 작용을 낳는 것을 장애한다 면. 그것들은 동시 존재하는 대상[俱境]을 조 건으로 삼아서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택멸무위가 무루혜의 간택 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라면. 또한 온갖 유위의 법은 말하자면 색 등의 5온(蘊)으로 79) 이를테면 꽃을 보고 있을 때 작용하는 것은 눈과 의근(意根)이며. 이는 法處에 포섭 됨]은 현현(顯現)하지 않고 그대로 소멸한다. 이것을 유루라고 한다’고 설하였는데. ‘택’은 참 다운 노력에 의해 성취하는 지혜인데. 대상)과 관계[繫屬]할 때 비로소 그 작용을 낳기 때문이다.미래에 생겨날 것을 영원히 장애하면 비택멸(非擇滅)을 획득한다. 그 밖의 다른 색과 일체의 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등은 찰나찰나에 걸쳐 [현현하지 않고] 그대로 소멸해 버려 그것에 대한 일부의 의처(意處)와 법처(法處)는 비택멸을 획득하 게 된다. 따라서 불생불멸인 이것도 일종의 무위법으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유위법과 그 이명(異名) 본문(本文)의 순서에 따라 설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이러한 지혜에 의하지 않고 미래법의 생 기를 영원히 장애하는 어떤 법을 비택멸이라고 한다. 그 같은 조건을 결여한 그것은 잠세태(潛勢態)로서 영 원히 미래에 머물게 된다. 감관)와 소연(所緣. 예컨대 안근(眼根)과 의 근(意根)이 어떤 하나의 색(色)에 대해 전념할 때. 비택멸무위는 간택력에 의하지 않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무위를 말한다. 무엇을 일컬어 유 위라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영원히 생겨나지 않게 하기 때문에 비택멸을 획득한다. 그 순간 그 밖의 색이나 소리 등의 대상을 조건으로 하는 전5식(識)과 꽃에 대한 의 식을 제외한 그 밖의 의식과 이에 따른 의식 작용[心所. 유부의 이론에 따르면. 이를 연결불생법(緣缺不生法). 앞에서 ‘도성제를 제 외한 그 밖의 유위법. 이 법은 지혜와는 관계없이 그 같은 법을 장애하여 미래세에 머물게 하고. 다시 말해 그것들은 동시에 존재하 는 소의(所依. 혹은 필경불생법 (畢竟不生法)이라고 하는데. 4.

又諸有爲法 謂色等五蘊 亦世路言依 有離有事等   論曰。老病死等災橫差別。隱積損伏。故名爲蘊。爲別戒等故言色 等。戒等五蘊。不能具攝一切有爲。色等五蘊具攝有爲故此偏說。言有爲 者。眾緣聚集共所生故。未來未起。何謂有爲。是彼類故。亦名有爲。如 所燒薪。於未燒位是彼類故亦名爲薪。或據曾當立名無失。如琴瑟等名爲 有聲。亦如乳房蓮花池等。諸不生法不越彼類。故名有爲。此有爲法。彼 彼經中。世尊隨義名世路等。彼複雲何。謂諸有爲亦名世路。色等五蘊生 滅法故。未來現在過去路中而流轉故。諸不生法眾緣故。雖複不生是彼 類故立名無失。有說。無常之所吞食故名世路。或名言依。言謂言音。或 謂能說。此則語聲相續差別。依謂名俱義。即具攝五蘊。如契經說。言依 有三。無四無五。由此善通品類足論。彼說言依五蘊所攝。豈不亦依無爲 起說。何故彼義不立言依。彼義與名無俱理故。如說言依。謂名俱義。若 義與名可俱說者。立爲言依。以無爲義與有爲名不可俱說。無俱義故不立 言依。墮世離世無俱理故。或此滅故建立無爲。故契經言。蘊滅名滅。滅 非言依。言依是蘊。複有釋言。若於是處三分可得。立爲言依。謂依義 語。無爲唯義。故非言依。有說。亦依而於語。或名有離。諸趣輪回沉 溺生死。涅槃永舍故名爲離。是息諸趣恒流轉義。若已至得定不還來。此 有離故說名有離。如有財者名爲有財。即是有爲有出離義。一切有爲皆同 船筏。是故聖道亦應舍離。如契經言。法尚應斷。何況非法。或名有事。 事謂所依。或是所住。即是因義。果依於因。從因生故。如子依母。或果 住因。能覆因故。如人住床。是因爲果所映蔽義。因果前後故。及細粗性 故此有事故。說名有事。喻如前說。此唯有爲。如是等類。說有爲法諸名 差別。於此所說有爲法中。頌曰。 논하여 말하겠다.80) 즉 계 등의 5온은 일체 .역시 또한 세로(世路)ㆍ언의(言依) 유리(有離)ㆍ유사(有事) 등이라고도 한다. [유위의 법은] 늙고 병들고 죽는 등의 온갖 재횡(災橫)을 감추어 쌓아두었거 나[隱積] 손상시켜 제압하는 것[損伏]이기 때문에 ‘온’이라고 한 것이며. 계(戒) 따위와는 다르기 때문에 ‘색 등’이라고 말한 것이다.

82) 땔감은 불에 타지 않는 한 땔감이 아니지만.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을 미래법이라고 한다. 예컨대 싹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씨앗과 온도. 색 등의 5온은 유위법을 모두 포섭 한다. 81) 유위(samskṛta)란 함께 조작된 것[共所作]이란 뜻으로. 그래서 유위법을 색 등의 5온으로만 설하게 된 것이다. 이미 생겨나 소멸한 것을 과거법. 그리고 ‘유위’라고 말한 것은 여러 조건[緣]이 집합[聚集]하여 그것들 공동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언젠가 는 탈 것이기 때문에 땔감이라고 하듯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미래법 역시 언젠가는 여러 인연에 의해 조작되어 생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유위라 고 할 수 있다는 뜻. adhvan) 등이라고 이름하였다. 수 분. 83) 거문고나 비파는 제 소리를 내어야 거문고이고 비파이지만. 미래법]에 근거하여 [유위를] 설정 하여도 아무런 과실이 없으니. 미래ㆍ현재ㆍ과거(즉 世)라는 길[路] 가운데 있 으면서 유전하기 때문이다. 어찌 유위라고 하겠는가? 이것(미래법)은 바로 그러한 [현재법의] 종류이기 때문에 역시 유위라고 이름 한다. 이 때의 각각의 존재를 유위법이라고 한다.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의 무 루의 5온을 말한다. 즉 모든 유위법은 3세의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은 것으로. 예컨대 불에 태워질 땔감이 아직 타지 않은 상태에 있어도 이것은 바로 그러한 종류이기 때문에 ‘땔감’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거문고는 현재 존재하는 것 이 아니다. 그는 다시 어떻게 말하였던 것인가? 이를테면 모든 유위법을 역시 ‘세로’라고도 이름하였으니. 앞으로 생겨날 것[當.83) 또한 역시 유방이나 연화지(蓮花池) 등의 경우와 마찬 가지로 아직 생겨나지 않은 모든 법(즉 미래법)도 그러한 종류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유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84) 세로(adhvan)란 과정(過程)의 뜻이다. 과거법]. 태워질 가능성이 있고. 색 등의 5온은 생 성 소멸하는 법이기 때문이며. 이른바 ‘법’이 아 80) . 광선 등이 동시에 함께 작용해야 한다. 다수의 존재[諸法] 가 원인과 조건[因緣]으로써 화합하여 생겨난 것을 말하며. 예컨 대 ‘거문고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할 때. 이러한 유위법을 세존께서는 이러저러한 경 중에서 그것이 뜻하는 바에 따 라 세로(世路. 유 부교학상에 있어 시간(kāla)이란 객관적으로 독립된 실체. 이미 소리를 내 었던 것이나 앞으로 소리를 낼 그것도 역시 거문고나 비파라고 한다.81) 그렇다면 미래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는데. 거문고나 비파 등을 일컬어 ‘소리를 갖는 것’이 라고 하는 것과 같다. 지금 생겨나 있는 것을 현재법.84)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온갖 법(즉 미래법) ‘계 따위’란.의 유위법을 능히 다 포섭하지 못하지만.82) 혹은 일찍이 생 겨난 것[曾.

말의 근거가 되는 단어[名]와 문장[句]과 단어를 구성하 는 음소[文]를 말한다. 혹은 능히 설하는 것[能說]으로. ‘言依事十八界ㆍ十二處ㆍ 五蘊攝.85) 5온(즉 일체의 유위제법)을 모 두 포섭하니. 87) 『품류족론(品類足論)』 제9권(대정장26. 이를테면 계경에서 “언의에는 세 가지만이 있을 뿐 네 가지가 있 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어떤 이는 “[유위법은] 무상(無常)에 의해 집어 삼켜지는 것이기 때 문에 ‘세로’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nāma)은 책상ㆍ하늘과 같은 명사적 단어를 말하는 것으로.혹은 世路)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 즉 ‘언의(言依)가 유루의 이명으로. 그리고 ‘의(즉 말의 근거)’란 명사적 단어[名] 와 이와 함께하는 의미[義]를 말하는 것으로. 변 천 변이의 뜻인 adhvan(世.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4권를 참조 바람. 말의 근 거는 이 같은 단어 그 자체(전통술어로 能詮의 名)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 드러나는 의미(所詮의 法)이다. 여기서 ‘언’이란 말[言音]을 말한다. 무위택멸은 불가설이다. 이에 따르 면.728상). 말소리와 단어[名]ㆍ문장[句]ㆍ음소[文]와 의미의 관계에 대해서는 본론 제14권에서 상론한다. 곧 언의는 오로지 유위만을 의미하기 때문 에 ‘『품류족론』을 잘 해석해야 한다’고 설한 것이다. 거기서는 ‘언의는 5온에 포섭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86) 이에 따 라 『품류족론(品類足論)』을 잘 해석해야 할 것이니. 따라서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실재적 시간을 의미하는 kāla(時)라는 말을 피하고. 시 간은 바로 유위의 이명(異名)일 뿐이다. 5온을 포섭한다’고 할 경우. 이를테면 택멸(열반) 역시 말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혹은 [세존께서는 온갖 유위법을] ‘언의(言依. 18계 등은 무위도 포함하므로 ‘언의’는 유위 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kathāvastu)’라고도 이름하였 다. 다섯 가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고 설한 바와 같다.은 여러 조건[緣]을 결여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생겨나지 않은 것일지라도 바 로 그러한 [현재법의] 종류이기 때문에 ‘세로’라고 이름하여도 아무런 과실이 없는 것이다.87) 어찌 [명사적 단어가 유위뿐만 아니라] 역시 또한 무위에 근거하여서도 생겨 나는 것이라고 설하지 않을 것인가? 어떠한 까닭에서 그 같은 무위의 의미는 언의로 설정되지 않는 것인가? 그것(무위)의 의미는 명사적 단어와 함께할 리가 없기 때문이니. 그러나 유부에 의하면 말의 대상으로서 드러난 택멸은 다만 유위일 뿐이며. 이를테면 니라 다만 생멸변천하는 유위제법을 근거로 설정된 개념일 뿐이다. ‘언 의는 18계ㆍ12처에도 포섭된다’고 설한 『품류족론』에 위배된다. 바로 말의 상속(相續) 차별을 말한다. 85) 명(名. 즉 유위법은 무상 변천하여 시간[世]의 근거[路]가 되기 때문에 ‘세로’라고 한 것으로. p. 5온은 오로지 유위이지만. 86) 여기서 세 가지란. 즉 일체의 유위법은 언어적인 의미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언의’이다.

혹은 [세존께서는 유위법을] ‘유리(有離. 이는 곧 유위법은 출리(出離)를 갖는다. 아울러 세밀하 고 거친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언의가 아니다]”고 설하 고 있다. 이는 곧 원인이 결과에 의해 은폐된다는 뜻이다. 열 반은 온갖 세계[趣]로 윤회하며 생사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영원히 벗어난 것 이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리’라고 하니. 혹은 이것(5온)의 멸을 무위(택멸)라고 설정하였기 때문으로. 마치 재산을 갖은 이를 ‘유산자’라고 하는 것 과 같다. . 즉 결과는 원인에 근거하고 원인으로부터 생 겨나기 때문으로. 혹은 머물게 되는 것[所住]을 말 하니. 혹은 결과는 원인에 머무르며 능히 원인을 가리기 때문으로. 만약 의미와 명사적 단어를 함께 설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출리해야 한다)는 뜻으로. 만약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 열반을 획득하 였다면 결정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뗏목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의미뿐만 아니라] 또한 역시 ‘근거’도 되지만 말이 부재 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근거[依]와 의미[義]와 말[語]이 바로 그것이다. 즉 유위법은 바로 이러한 ‘리’를 갖기 때문에 ‘유리’라고 이름하였으니. 타세(墮世. 또한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그것은 ‘언 의’로 설정할 수 있다. 유루의 이명)와 이세(離世. 이는 바로 온갖 세계로 끊임없이 유 전하는 것을 종식시켰다는 뜻이다. saniḥsāra)’라고도 이름하였다. 그러나 무위는 오로지 의미만을 갖기 때문에 언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聖道) 도 역시 마땅히 버려야 할 것으로. 계경에서도 “법조차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인 데. 계경에서도 “온 의 멸을 일컬어 ‘멸(즉 택멸열반)’이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명사적 단어와] 함께하는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에 [무위를] ‘언의’로 설정할 수 없으니. 무루의 이 명)는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원인의 뜻이다. 여 기서 ‘사’란 이를테면 근거가 되는 것[所依]. 혹은 [세존께서는 유위법을] ‘유사(有事. “만약 여기에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으면 그것을 ‘언의’라고 하니. 그렇지만 무위의 의미는 유위인 명사적 단어와 함께 설 할 수 없으며. 하물며 어찌 비법을 끊지 않을 것인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온의] ‘멸’은 언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는 시간적인 전후의 관계이기 때문이며.[계경에서] “언의란 명사적 단어[名]와 함께하는 의미[義]를 말한다”고 설한 바 와 같다. 마치 자식이 어머니를 근거로 하는 것과 같다. 마치 사람이 침상에 머무는 것 과 같다. savastuka)’라고도 이름하였다. 언의는 바로 온이다.

비유하자면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有漏名取蘊 亦說爲有諍 及苦集世間 見處三有等   論曰。豈不前說。除道聖諦。餘有爲法。名爲有漏。何故此中複重說 耶。雖前已說。而欲顯彼差別名想。或爲顯彼名想定義。故複重說。前說 一切有爲名蘊。今說有漏名爲取蘊。義准無漏但名爲蘊。即諸漏中立取名 想。以能執取三有生故。或能執持引後有業。故名爲取。蘊從取生。或能 生取。故名取蘊。如草糠火。如花果樹。即有漏法亦名有諍。謂煩惱中立 諍名想。觸動善品故。損害自他故。蘊與諍俱。或諍蘊俱而得生起。故名 有諍。此中意顯蘊之與諍非隨一。餘可得生。及者顯餘有漏名想。謂或 名苦。即五取蘊。是諸逼迫所依處故。自性粗重不安隱故。或名爲集。即 彼種類能爲因故。能集成故。或名世間。可毀壞故。如世尊說。性可毀壞 故名世間。若爾道諦應是世間。不爾第二毀壞無故。道諦毀壞性不定故。 世間毀壞性決定故。或名見處。薩迦耶等五見住中。隨增眠故。豈不有漏 一切煩惱皆隨增耶。豈不諸見漏取諍攝前已說耶。雖有此理。而彼諸見。 88) 세친은 이상의 내용을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전하는 설[傳說]로 언급하여 불신을 나타내고 있다.88) 5. 앞의 책. .(『구사론』 제1권. 유루의 이명(異名) 여기서 설하고 있는 유위법 중에서 [유루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루를 취온(取蘊)이라고도 이름하며 역시 또한 유쟁(有諍)이라고도 설하며 아울러 고(苦)ㆍ집(集)ㆍ세간(世間)ㆍ 견처(見處)ㆍ3유(有) 등이라고도 한다. p.12) 왜냐하면 이상의 논 의도 이미 소멸하였거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과거ㆍ미래법조차도 실재한다 는 제법의 3세실유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곧 유위는 바로 이러한 ‘사(원인)’를 갖기 때문에 ‘유사’라고 이름하였으니. 유위란 오로지 이러한 것이니. 이상과 같은 따위의 종류가 바로 유위법을 차 별 짓는 여러 명칭들이다.

혹은 그것의 결정적인 뜻을 나타내기 위해 다시 거듭하여 설하려는 것이 다. 그리고 온은 이러한 ‘취’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89) 바로 앞의 본송에서 ‘온갖 유위의 법은 말하자면 색 등의 5온(蘊)이다(又諸 有爲法 謂色等五蘊)’고 규정하였다. 유루법을 역시 유쟁(有諍. 그것은 능히 3유(有:欲有ㆍ色有ㆍ無色 有)의 생에 집착하여 취[執取]하기 때문에. 혹은 능히 ‘취’를 낳기 때문에 ‘취온’이라고 이름 하였으니. 말하자면 번뇌에 대해 ‘쟁(諍)’이라고 하는 개념을 설정한 것으로.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duḥkha)’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즉 온갖 번뇌[漏]에 대해 ‘취(取. 이를테면 혹 어떤 경우 [유루를] ‘고(苦. 이러한 의미는 곧 온과 ‘쟁’ 중의 어느 하나라도 결여될 경우 또 다른 생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於有漏法一切種時相無差別。堅執無動隨增眠故。體用增盛。爲顯有漏是 能生長。此諸見處。故應重說。貪等癡疑則不如是。以彼貪等有一切種無 一切時。癡一切時非無差別。疑無差別而不堅執。是故有漏不說彼處。或 名三有。有因有依。三有攝故。等言爲攝名有染等。如是等類是有漏法。 隨義別名。如上所言。色等五蘊名有爲法。色蘊者何。頌曰。 논하여 말하겠다. 왜냐하면 5취온은 바로 온갖 핍박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며. 무루는 다만 ‘온’이라고 이름할 따름이다. . 혹은 ‘쟁’은 온과 더불어 생겨나기 때문에 [유루법을] ‘유쟁’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꽃과 과실을 낳는 나무를] 화과수(花果樹)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 본성이 거칠고 무거워 안온(安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능히 후유(後有)를 초래하는 업에 집착하여 지니기[執持] 때문에 ‘취’라고 이름하였다. 앞에서 ‘도성제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을 유루라고 한다’고 이미 설하지 않았던가? 어떠한 까닭에서 여기서 [유루에 대해] 다시 거듭하여 설하려는 것 인가?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을지라도 그것의 개념[名想]을 차별적으로 나타내고자 하여. upādāna)’라는 개념을 설정한 것으로. saraṇā)이라고도 이름한다. 앞에서 ‘일체의 유위를 온(蘊)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는데. [본송에서] ‘아울러’라고 하는 말은 그 밖의 다른 유루의 개념을 나타내는 것 으로. 또한 온은 ‘쟁’과 함께하 기 때문에.89) 지금 여기서는 ‘유루를 일컬어 취온(取蘊)이라 한다’고 설하였다. 이는 마치 [풀이나 겨로부터 생겨난 불을] 초강화(草糠火)라고 하는 것과 같고. 번뇌는 선한 품성을 동요시키기 때 문이며. 자신과 타인을 해치고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그러한 종류(즉 5취온)는 능히 괴로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유루를 그러한 번뇌의 토대라고는 설하지 않은 것 이다. 그러나 세간의 허물어지는 성질은 결정 적이다. 일단 버리고 나면 다시는 버려야 할 것이 없지만.91) 어찌 유루가 일체의 번뇌를 모두 수증시키지 않을 것인가? 온갖 ‘견’은 누 (漏)와 취(取)와 쟁(諍)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이미 앞에서 설하지 않았던가? 비록 그러한 이치가 있을지라도 그러한 온갖 ‘견’은 유루법에 대해 일체의 모든 종류. 또한 ‘의’는 무차별적으로 집착할지라도 견고하게 집착하 지는 않는다. 유루법은 이러한 번뇌가 생기 하는 주처(住處). 피안에 이르면 뗏목도 버려야 하듯이 열반에 이르면 무루의 성도도 버려야 하지만. 91) 5견이란. samudaya)’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즉 유루는 능히 이러한 온갖 ‘견’을 생장(生長)시키는 토대[處]가 된다는 사실 을 나타내기 위해 거듭하여 설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허물어질 수 있기 때문으로. 왜냐하면 [유루는] 존재[有]의 원인. 혹은 [유루를] ‘견처(見處. 혹은 [유루를] ‘세간(loka)’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90) . 두 번째의 허물어짐이 없기 때문이며. 즉 토대가 되기 때문에 견처이다. 5견에 대해서는 본론 제 47권에서 상론한다. 세 가지의 존재(欲有ㆍ色有ㆍ無色有)에 포섭되기 때문 이다. 왜냐하면 살 가야(薩迦耶) 등의 5견(見)이 여기에 머물면서 수면을 수증(隨增)하기 때문이 다. 존재의 근거로서. 모든 특성에 관계없이 무차별적으로 견고히 집착하여 동 요 없이 수면을 수증하기 때문에 그 자체의 작용이 더욱 왕성하게 증가한다. satkāya-dṛṣṭi)ㆍ변집견(邊執見) ㆍ사견(邪見)ㆍ계금취(戒禁取)ㆍ견취(見取)로.90) 도제의 허물어지 는 성질은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는 않으니. 능히 집 합하여 이루어지기[集成] 때문이다. “존재[性]는 허물어질 수 있기 때문에 ‘세간’이라 이름한다”고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다. dṛṣṭisthāna)’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유루의 법은 그렇 지 않다. 살가야견(薩迦耶見 혹은 有身見. 모든 때. 만약 그렇다면 도제(道諦)도 마땅히 ‘세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치’는 모든 때에 집착할지라도 무차 별적인 것은 아니다.혹은 어떤 경우 [유루를] ‘집(集. 즉 ‘탐’ 등은 일체의 모든 종류의 유루법에 대해 집착 할지라도 모든 때에 집착하지는 않으며. 그러나 탐(貪) 등과 치(癡)와 의 (疑)는 이와 같지 않다. 혹은 [유루를] ‘3유(有)’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5근’이라 함은 이른바 안(眼) 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근(身根)이 바로 그것이다.그리고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유염(有染)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는 등의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무표(無表)이다.5온ㆍ12처ㆍ18계 1. 나아가 ‘오로지’ 라고 함은 오로지 여기서 언급된 10처(處)와 1처의 일부를 일컬어 색온이라 한다는 말이다. 이상과 같은 등등의 종류가 바로 뜻에 따른 유루법의 또 다른 명칭들이다. 色者唯五根 五境及無表   論曰。色謂色蘊。言五根者所謂眼耳鼻舌身根。言五境者。所謂色聲 香味所觸境。謂眼等所攝所行。及無表者。謂法處色。唯者唯此所顯。十 處一處少分。名爲色蘊。如是諸色其相雲何。頌曰。 논하여 말하겠다. ‘그리고 무표’라고 함은 법처(法處)에 포섭되는 색을 말한다. 제법분별(2) -. 색온(色蘊)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색 등의 5온을 유위법이라고 한다. [본송에서] ‘색’이라 함은 색온(色蘊)을 말한다. Ⅱ.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권와 제18권에서 상론한다. 안 등에 포섭되고 그것 에 의해 작용되는 것[所行]을 말한다. . 1처의 일 부는 법처에 포섭되는 무표색. 색이란 오로지 5근(根)과 5경(境). 무표색(혹은 무표업)은 신체적 형태(즉 身業) 와 말소리(즉 語業)를 근거로 하여 생겨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 세력을 말한다. 그렇다면 색 등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5경’이라 함은 색(色) 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경(觸境)이 바로 그것이니.92) 92) 10처는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의 5근과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의 5경.

彼識依淨色 名眼等五根   論曰。彼謂前說眼等五根。識即眼耳鼻舌身識。依者眼等五識所依。 如是所依淨色爲體。即此淨色名眼等根。故薄伽梵於契經中說眼等根淨色 爲相。本論亦說。雲何眼根。眼識所依淨色爲性。如是廣說。諸聖教中以 根別識。不以境界。故知彼言顯根非境。有說。彼者是境非根而無意識緣 色等故。名色等識。彼識所依名眼等過由淨色言所簡別故。若爾色言應成 無用。彼識依淨名眼等根。義已成故。無識所依淨而非色。爲簡彼故。應 用色言。若謂色言是契經說。契經可爾。不說識依差別言故。若謂此言是 本論說。彼亦同疑應俱思擇。如是釋者爲遣疑難。須置色言。若識依言就 有財釋。則應淨信名眼等根。故置色言。爲簡此釋。無有一法以識爲依色 而是淨。可爲此釋。是故色言甚爲有用。由此即釋本論所言。又於此中前 言爲簡耳等四根。彼雖皆用淨色爲性。而彼非爲眼識所依。故彼四根非眼 根攝。後言爲簡無間滅依。彼雖亦爲眼識所依。而彼非用淨色爲性。故彼 意根非眼根攝。或複前言。顯同分眼。後言爲顯彼同分眼。餘根亦爾。若 爾淨色相無別故。應不成五。不爾。功能有差別故。如何得知功能別者。 不共境識所依定故。又因別故。現見別因果有差別。猶如琴瑟簫笛等聲。 然眼耳等所因四大各有差別。因差別故。眼等淨色體有差別。體雖有別因 無異故。其果淨色應無別者。此難不然。雖同一相。現見異故。猶如內外 大種差別。若言如聲。因雖有別而相一故。同一處攝眼等五根亦應爾者。 無如是過。聲雖因別而與一識爲境界故。一處所攝。眼等五根。別類境識 所依性故。又是別依用所顯故。不應諸根同一處攝。又如識受。雖同了別 領納一相。由因別故。而有六識三受差別。此亦如是。如彼識受。雖六三 異而相同故一處所攝。眼等亦應一處攝者。受與無爲。何因同處。故非一 處攝。顯自相同有。自相雖異。同處攝故。已辯眼等相。色等今當說。頌 . 그러한 식(識)의 근거가 되는 정색(淨色)을 이름하여 안(眼) 등의 5근(根)이라고 한다.1) 5근(根) 이와 같은 온갖 색의 특성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식의 근거를 차별 정색(rūpa prasāda)이란 광명이 차단됨이 없는 맑고 투명한 색이라는 정 도의 의미이다. p. p. 그는 『구사론』 제1권(앞의 책. 이를테면 앞에서 논설한 안 등의 5근을 말 하며.14)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근거’라고 함은 안 등 5식의 소의(所依)를 말하니. ‘정색’이라는 말에 의해 간택 분별[簡別]되었기 때문이 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앞에서 논설한 색 등의 5경을 말하며.95)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정색의] ‘색’이라는 말은 마땅히 아무런 쓸모 가 없어야 할 것이니. 이처럼 모든 성교(聖敎) 중에서는 근으로써 식을 분별하지 경계(즉 대상)로 써 분별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품류족론』 제1권(한글대 장경117. 그럼에도 어떤 이는 설하기를.18). 94) 이하 ‘본론’은 본 『현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비달마의 근본이 되는 논(즉 6족론과 『발지론』)이라는 뜻으로.曰。 논하여 말하겠다. 그러한 식의 소의를 안근 등이라고 이름하여도 아무 런 허물이 없을 것이니. [본송에서] ‘그러한’이라고 함은. 만약 ‘색’이라는 말은 계경 에서 설한 바라고 한다면.” 그는 『품류족론』에 따른 앞의 유부 의 정설을 이설(異說)로 전하고 있을 뿐이다. 95) 이는 세친의 주장으로. 그래서 박가범(薄伽梵)께서도 계경 중에서 “안 등의 근은 정색을 특징으로 한다”고 설하였으며. 본론(本論)에서도94) 역시 “무엇을 일컬어 안근이라고 하는가? 안식의 소의로서. 즉 ‘그러 한 식’의 소의(所依)가 되는 5가지 종류의 정색(淨色)을 그 순서대로 바로 안 등의 5근이라고 함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본송에서] ‘그러한’이라고 하는 말은 근(根)을 나 타내는 것이지 경(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93) 곧 이러한 [안 등 5식의 소의가 되는] 정색을 안 근 등이라고 이름하였다. 93) . ‘식(識)’이란 바로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식(身識)을 말한다. 이와 같은 소의는 정색(淨色)을 본질로 한다. 즉 식의 소의는 ‘청정한 것’이지 ‘색’이 아니므로 이를 분별하기 위해 마땅 히 ‘색’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색 등에 대한] 식(識)의 근거가 되는 청정한 것 [淨]을 이름하여 안(眼) 등의 근(根)이라 한다’고 하여도 뜻이 성립하기 때문이 다. 정색을 본질로 하는 것이다”고 설하고 있는 등 [여러 경론에서] 이와 같이 널리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의식은 색 등을 소연(所緣)으로 하기 때문에 색 등에 대한 의식이라 이름하고. 계경에서는 가히 그럴 수 있으니. “‘그러한’이라고 함은. “‘그러한’이란 바로 경(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근(根)을 의미하 는 것이 아니다. ‘식’이란 바로 색ㆍ성ㆍ향ㆍ미ㆍ촉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그것(의근) 역시 비 록 안식의 소의는 될지라도 정색을 본질로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식이 근거로 하는 것’이라는 말을 유재 석(有財釋)으로 해석할 경우. 이에 반해 피동분(tat-sabhāga)은 아직 자신의 작용을 행하지 않는 가능태로서의 존재. 근(根)ㆍ경(境)ㆍ식(識)이 화합[交涉]하여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존재. 의근을 의미한다. 그것에 대해서는 역시 다 같이 함께 의심하여 생 각해 보아야 한다. 또한 여기서 앞의 말은 이(耳) 등의 4근(이ㆍ비ㆍ설ㆍ신근)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니. ‘식의 근거가 되는 청정함(vijñānāśraya prasāda)’은 바로 믿음[信.97) 혹은 또한 앞의 말은 동분(同分)의 안(眼)을 나타내고. 그러나 만약 이러한 [정색이라는] 말을 본론(本 論)에서 설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大善地 法의 하나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의식임]이기 때문에 5근을 의미하지 않 게 된다. 따라서 식의 근거가 되는 ‘청정함’이라고 하는 말에는 반드시 ‘색’ 이라는 말을 붙여 ‘식의 근거가 되는 청정한 색(vijñānāśraya rūpaprasāda)’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 즉 앞의 명사를 형용사적인 수 식어로 해석할 경우. 따라서 ‘그러한 식의 근거 가 되는 정색’이라는 본송에서의 말은 앞의 5근의 차별을 나타내는 동시에 안 등의 5근과 의근의 차별도 나타내고 있다는 뜻. 여기서 무간멸이란 전 찰나와 후 찰나 사이에 1찰나의 간격도 갖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식의 근거[識依. 즉 이상과 같은 해석상의 의문과 난점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정’에] ‘색’이 라는 말을 붙여 써야 할 것이니. vijñānāśraya]’라는 말이 되며. 그리고 뒤의 말은 무간멸(無間滅)의 근거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니. 곧 그러한 네 가지 근은 안근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정색을 본질로 할지라도 안식의 소의가 되는 것은 아니 기 때문이다. 98) 동분(sabhāga)이란.하여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색과 그에 따른 안식과 관계하는 찰나의 안(眼)이 동분의 안이라면. 색을 보지 않고 소멸한(혹은 소멸할) 눈은 피동분의 눈이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권에서 상론함) 곧 ‘그러한 식’은 현재 작용하고 있는 안근에 근거한 말이며. 뒤의 말인 ‘정색’은 무간멸하는 의근과 안근 등의 관계를 분별하기 위한 말 이라는 뜻.96) 곧 [‘정’에] ‘색’이라는 말을 붙여 쓰는 것은 이러한 해석을 고려하여서였다. 곧 그 러한 의근(意根)은 안근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97) 앞의 본송.98) 그 밖의 다른 근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 ‘식이 근거로 하는 것’이라는 말을 유재석. ‘정색’은 작용하고 있지 않는 안 96) . 즉 ‘그러한 식의 근거가 되는 정색(彼識依淨色)’ 중에서 ‘근거가 되는’이라는 말[‘依’]을 중심으로 하여 앞의 말인 ‘그러한 식’은 안식 내지 신식의 근거가 되는 안근과 그 밖의 4근의 관계를 분별하기 위한 말이고. 마땅히 청정한 믿음[淨信]을 안근 등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본론(本論)에서 말한 바도 이에 따라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색’이라는 말은 매우 유용하다고 할 수 있으 며. 뒤의 말은 피동분(彼 同分)의 안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이것(5근) 역시 이와 같다. 안 등의 5근도 역시 마 땅히 동일한 범주에 포섭되어야 할 것이다’고 한다면.99) 그렇지만 안(眼)ㆍ이(耳) 등의 원인이 되는 4대(大) 각각에 차별이 있으니. 苦ㆍ樂ㆍ不 苦不樂)의 차별이 있으니. 자상은 비록 다를지라도 동일한 범주에 포섭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 99) 즉 거문고와 비파(원인)에 의해 낳아진 소리(결과)가 각기 다르듯이. 또한 각기 개별적인 소의의 작용에 의해 나타나기 때 문에 온갖 근은 동일한 범주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100) 근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뜻. 공능(功能. 그렇지 않으니. 즉 소리는 비록 그 원인은 다를지라도 동일한 식(識)의 경계 대상이 되기 때문 에 동일한 범주에 포섭되지만. 마치 내외(內 外)의 대종(大種)에 차별이 있는 것과 같다. 비록 [정색이라는] 동일한 특성[相]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지금 바로 다르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으로. 공능상에 차별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공통되지 않은 대상에 대한 인식의 소의(즉 감관)는 각기 정해져 있기 때문 이다. 만약 ‘소리[聲]는. 안식 내지 의식)과 3수(受. 비록 그 원인이 다를지라도 그 특성이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한 범주[處]에 포섭되는 것처럼 안 등의 5근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고 한다면. 그와 같은 과실은 없다. 정색 자체(즉 5근)에 차별이 있다 할지라도 원인(즉 4대)상에는 어떠한 차이 도 없기 때문에 결과인 정색에도 마땅히 차별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는 원인이 다르기 때문이다. 작용)상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원인이 다를 경우 결과에도 차별이 있 다는 것은 지금 바로 관찰되는 사실로서. 또한 식(識)이나 수(受) 는 비록 다 같이 요별(了別)이나 영납(領納)이라는 하나의 단일한 특성을 지닐 지라도 원인이 다르기 때문에 6식(識. 정색 역시 원인(대상)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의 근으로 낳아지게 된다는 뜻. 마치 거문고와 비파와 피리의 소리가 다른 것과 같다.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안 등의 5근은 각기 종류가 다른 대상에 대한 인식의 소의이기 때문에. ‘수’와 무위는 어떠한 근 거에서 동일한 범주라고 하겠는가? 따라서 동일한 범주에 포섭된다고 함은 자 상(自相)의 동일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니.다. 원인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안 등의 정색 자체에도 차별이 있 는 것이다. 정색 [그 자체]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에 마땅 히 5근으로 분별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식(識)과 수(受)에 비록 6식과 3수로서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특성 은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한 범주에 포섭되는 것처럼.

향(香)에는 네 종류가 촉(觸)은 열한 가지를 자성으로 한다. 색(色)에는 두 가지. 이제 마땅히 색(色) 등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하리라.2) 5경(境) 안(眼) 등의 특성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色二或二十 聲唯有八種 味六香四種 觸十一爲性   論曰。言色二者。是二種義。謂顯與形。此中顯色有十二種形色有 八。故或二十。顯十二者。謂青黃赤白雲煙塵霧影光明闇。於十二中青等 四種是正顯色。雲等八種是此差別。其義隱者今當略釋。地水氣騰說之爲 霧。障光明起。於中餘色可見名影。翻此爲闇。日焰名光。月星火藥寶珠 電等諸焰名明。形色八者。謂長短方圓高下正不正。此中正者。謂平等 形。不平等形名爲不正。餘色易了故今不釋。有說。色有二十一種。空一 顯色第二十一。此即空界色之差別。於顯色中青黃赤白影光明闇。唯顯可 知。於形色中身表業性。唯形可了。餘色形顯俱可了知。如何一事有二體 者。非宗所許。故無此過。辯業品中當更思擇。已說色處。當說聲處。能 有呼召故名爲聲。或唯音響說之爲聲。善逝聖教鹹作是言。聲是耳根所取 境界。是四大種所造色性。此聲八種。謂有執受或無執受大種爲因及有情 數非有情數差別爲四。此複可意及不可意差別成八。執受大種。謂現在世 有情數攝。長養等流異熟地等。與此相違名無執受。此中執受大種爲因。 聲有二種。謂有情類加行所生。及餘不待加行所起。其有情類加行所生。 複有二種。一者手等加行所生。二者語表業爲自性。此語表業複有二種。 ‘수’와 무위는 다 같이 법처(法處)에 포섭되지만. 게송으로 말하겠다. 혹은 스무 가지가 있고 성(聲)에는 오로지 여덟 가지 종류가 있으며 미(味)에는 여섯 가지. 자상이 동일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안근 내지 신근 역시 비록 자상은 다르지만 다 같이 ‘정색’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뜻. 100) .

謂依名起。及不待名。依名起者複有二種。一者有記。二者無記。不待名 者二種亦然。是有執受大種爲因聲相差別。其無執受大種爲因聲亦二種。 一者有情加行所起。二者諸界擾動所生。初謂螺貝鍾鼓等聲。後謂風林河 等所發有情數者語手等聲。餘聲即是非有情數。如是諸聲聞生悅者。名可 意聲與此相違。名不可意。八中唯有初二應理。以有情數非有情數。即有 執受及無執受大種爲因。聲所攝故。於色等中亦應可說可意等異。何獨在 聲。色等亦應說有執受及無執受大種爲因。理實應說。然由聲處自性難 知。故但就因說有二種。色等不爾。是故不說。本論所攝聲相無異。故不 應立此八種聲。豈不有聲用有執受及無執受大種爲因而得生起。如手鼓等 合所生聲無如是聲。二具四大各別果故。非二四大同得一果爲俱有因。成 過失故。雖有執受與無執受二四大種共相扣擊而俱爲因。各別發聲彼聲各 據自所依故。不成三體。雖有執受與無執受手鼓大種相擊爲因發生二聲。 而相映奪隨取一種。其差別相不易可知。是故聲處唯有二種。已說聲處。 當說味處。越次說者。顯彼境識生無定故。味謂所啖。是可嘗義。此有六 種。甘酢鹹辛苦淡別故。已說味處。當說香處。香謂所嗅。此有四種。好 香惡香等不等香有差別故。等不等者。增益損減。依身別故。有說。微弱 增盛異故。本論中說。香有三種。好香惡香及平等香。若能長養諸根大 種。名爲好香。與此相違。名爲惡香。無前二用。名平等香。或諸福業增 上所生。名爲好香。若諸罪業增上所生。名爲惡香。唯四大種勢力所生。 名平等香。此雖增上果而亦有差別。故唯大種勢力所生。亦是有情增上果 攝。已說香處。當說觸處。觸謂所觸。十一爲性。即十一實以爲體義。謂 四大種及七造觸。滑性澀性重性輕性及冷饑渴。若爾身根應成所觸。此既 能觸彼彼定觸。此故有說。身根唯能觸非所觸。譬如眼根唯能見非所見。 複有說者。無有少法能觸少法。所依所緣無間生時。立觸名想。若依此識 能得彼境。此於彼境假說能觸。境非識依故非能觸。即由此因唯說地等名 爲所觸。依彼色等定非所觸。此中意顯依身根識。不緣彼境而生起故。若 彼色等非所觸者。如何華等由身觸時色等變壞。由彼所依被損壞故。現見 所依有損益故能依損益。非此相違。如地方所甘澤潤沃稼穡叢林鮮榮滋 茂。烈日所迫。與此相違。故知所依大種被損。能依色等變壞非餘。如是 義言後當廣辯。此中大種至次當說。今應略釋滑澀等相。滑即是性故言滑 性。如別即性故言別性。訓釋詞者。可相逼觸。故名爲滑。即是軟暖堪執 .

형색의 여덟 종류란 장(長)ㆍ단(短)ㆍ방(方)ㆍ원(圓)ㆍ고(高)ㆍ하(下)ㆍ정(正)ㆍ .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ㆍ연기[煙]ㆍ구름[雲]ㆍ먼 지[塵]ㆍ안개[霧]ㆍ그림자[影]ㆍ빛[光]ㆍ밝음[明]ㆍ어두움[闇]을 말한다. 광명을 장애하여 생겨난 것으로서 그 가운데로 여타의 다른 색을 볼 수 있는 것을 ‘그림자’라고 하며. [이러한 열두 가지 현색 중] 그 뜻이 애매한 것에 대해 마땅히 간략히 해석 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말하자면 현색(顯色)과 형색(形色)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것을 ‘어둠’이라고 한다. 땅으로부터 물의 기운이 비등한 것을 설하여 ‘안개’라고 한다. 형색에는 여덟 종류가 있다. 달이나 별. 이 중 현색에는 다시 열두 종류가 있으며. 보주(寶珠). ‘색에는 두 가지’라고 하는 말은 바로 두 종류가 있다는 뜻으로. 이러한 열두 종류 가운데 청색 등의 네 가지는 바로 현색이고. 현색의 열두 종류란. 번개 등 의 온갖 번쩍임을 일컬어 ‘밝음’이라고 한다. 화약. 구름 등의 여덟 가지는 바로 이것들이 차별되어 나타난 것이다.持義此有澀用。故名有澀。如有毛者說爲有毛。澀即是性故言澀性。是力 粗燥堅硬異名。能爲鎮壓。故名爲重。是能成辦摧伏他義。重即是性故言 重性。毗婆沙說。令稱權升故名爲重。易可移轉故名爲輕。現見世間。物 形雖大。而有輕故。易令遷動。輕即是性故言輕性。毗婆沙說。不令稱首 墜故名輕。由彼所逼希暖欲生。故名爲冷。又令凝結及易了知。故名爲 冷。是彼損益疾可知義。食欲名饑。飲欲名渴。豈不欲是心所法故違觸相 耶。以於因中立果名故。無相違失。如言河樂階隥亦樂。食爲人命。草爲 畜命。餘所未說。悶力劣等攝在此中。故不別說。悶不離滑。力即澀重劣 在軟暖。輕性中攝。如是其餘所觸種類。隨其所應十一中攝。何緣滑等展 轉差別。所依大種增微別故。水火界增故生滑性。地風界增故生澀性。地 水界增故生重性。火風界增故生輕性。故死身內重性偏增。水風界增故生 於冷。由是亦說此所生悶。若爾雲何言不離滑。隨一一增。此有無過。或 複悶者。是滑差別。非唯滑性。應知此因亦有差別。是故滑性。或因水風 界增故起。或因水火界增故生。所以二言無相違失。風界增故生饑。火界 增故生渴餘隨所應皆當配釋。如是所造。離大種外。別有體性。後當廣 辯。 논하여 말하겠다. 그래서 [본송에서] ‘혹은 스무 가지가 있 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태양의 불꽃을 일컬어 ‘빛’이라고 하며.

능히 부르는 말[呼召]을 일컬어 ‘성’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권 말미에서 상론한다. the sense of to know]에서 현색과 형색 은 동시에 알려지기 때문에 안처소섭색(眼處所攝色)은 현색과 형색을 본질 로 한다고 말한 것일 뿐으로. 공계는 방안 콧구멍과 같은 공간을 말한다. 이에 반해 경량부에서는 현색만이 실재할 뿐 형색은 그것에 의해 일시 설정된 언어적 가설일 뿐이며. 형태의 평등하지 않음을 일컬어 ‘부정’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3권~34권에 서 상론한다. eka dravya]에 어떻게 두 가지 본질 (현색과 형색)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은 [유부의] 종의에서도 인정하 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다. 혹은 오로지 음향을 설하여 ‘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서(善逝. p. p.102) 그 밖의 색은 형색과 현색 모두에 의해 알려질 수 있다. paramāṇu. 형색 가운데 신표업(身表業)은 오로지 형색(즉 형태) 으로서만 알려질 뿐이지만.부정(不正)을 말한다. [이에 관해] ‘하나의 실체[一事. 즉 형색이다. 여기서 실체[事. the sense of to exist]에서 가 아니라 인식론적 의미[有智義. 이것의 본질은 바로 신체적 형태. 공계의 색을 안아가색 (隣阿伽色)이라고 하는데.104) 색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부처님의 異名)의 성교(聖敎)에서는 모두 무한의 허공이 무위법이라면. 이는 바로 공계(空界) 색의 차별이다. 그 밖의 다른 색의 경우는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더 이상 해석하지 않는다. 공(空)도 하나의 현색으 로. 102) 신표업이란 수족(手足)의 굴신(屈伸) 등 몸으로 짓는 업[身業]으로.478중)에 의하면 경부(經部)의 난문(難問).16)에서의 힐난으로.101) 현색 가운데 청ㆍ황ㆍ적ㆍ백ㆍ그림자ㆍ빛ㆍ밝음ㆍ어두움은 오로지 현색(즉 색채)으로서만 알려지고. “색에는 스물한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식유필경(識有必境)의 전제에서 출발한 유부는 존재론적 의미[有境義. 신표업이란 다 만 의지[思]가 신체를 통해 나타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dravya]는 극미(極微.(본론 제34권 참조) 104) 본론 제34권 ‘경주의 형색(형색) 가유론 비판’ 참조 101) . 5근 5경 등의 물질을 분 할하여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최소 단위)를 말한다. 따라서 경량부의 힐난은 유부에 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 중에서 ‘정’이란 형태가 평등함(즉 평평함)을 말하며. 이는 곧 12현색 중 밝음과 어둠[明暗]을 본질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부에 서는 별도의 색경(色境)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마땅히 성처(聲處)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103) 이에 대해서는 「변업 품(辯業品)」 중에서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스물한 번째이다”고 하였는데. 법보(法寶)의 『구사 론소』제1권 여(餘)(대정장41. 이를테면 ‘흰 손이 때리고 검은 발이 찬다’고 할지라도 그 때 손의 현 색(즉 흰색)은 신업의 본질이 될 수 없으며. 103) 이는 『구사론』 제1권(앞의 책. 신표업의 본질은 오로지 형색이지 현색이 아 니다.

비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장단에 맞춘 손뼉 소리). 그리고 유정수(『구사론』에서는 有情名)의 소리란 의미를 지닌 언어적인 소리를. “성(聲)이란 바로 이근(耳根)이 취하는 경계로서. 선악을 분명하게 기표할 수 있는 소 리를 말한다. 언어적인 불쾌한 소리(변화인의 꾸짖는 소리). 말하자면 현재의 유정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장양(長養) ㆍ등류(等流)ㆍ이숙지(異熟地) 등의 대종을 말하며. 소리가 만약 이숙생 이라면 현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겨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의미를 지닌 말[名]에 근거하여 일어난 소리와 의미를 지닌 말에 근거하지 않은 소리가 바로 그것이 다.107) 둘째는 무기(無記)이다. 107) 여기서 ‘유기’란 무기(無記)의 반대로. 즉 등류과 로서의 대종을 말한다. 의미를 지닌 말에 근거하지 않은 소리의 두 종류도 역시 그러하다. 비언어적인 불쾌한 소리(주위를 환기시키는 손뼉 소리)가 있으며. 첫째는 유기(有記)이며. 106) 여기서 장양(완전한 명칭은 所長養)은 음식 등에 의해 길러진 후천적인 대 종을. 가 의성의 소리는 듣기에 즐거운 소리이다. 따라서 성처의 8종이란 유집수 대 종에 근거한 소리로서 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이를테면 노랫소리). 이를테면 유집수(有執 受) 혹은 무집수(無執受)의 대종에 근거하고.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권를 참조할 것. 이상이 바로 유집수 대종을 여기서 유집수 대종(大種)이란 감각이 있는 유정의 지ㆍ수ㆍ화ㆍ풍 4대종 을 말하며. 첫째는 손 등의 가행에 의 해 생겨나는 소리이며. 그 같은 유정류의 가행에 의 해 생겨나는 소리에도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등류성이란 원인과 동류의 성질을 지닌 결과. 그리고 의미를 지닌 말에 근거하여 일어난 소리에도 또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말)을 본질로 하는 소리이다. 아울러 유정수(有情數)와 비(非)유 정수의 차별에 따라 네 가지가 되며. 노력)에 의해 생겨나는 것과 가 행에 의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성’. 105) . 이는 바로 4대종(大種)에 의해 조작된 색의 존재[色性]이다. 비언어적인 불쾌한 소리(천둥소리)가 있다. 참고로 소리는 이숙생이 아니다. 이 러한 어표업에는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둘째는 어표업(語表業. 이 중 유집수 대종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소리에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숙(완전한 명칭은 異熟生)은 전생의 선악업에 의해 초래되는 선천적 인 대종을 말하며. 무집수 대종이란 감각이 없는 무정물의 4대종을 말한다. 언어적인 불쾌한 소리(꾸짖는 소리).105) 유집수의 대종이란. 여기에 가의성(可意性)과 불가의성의 차 별에 따라 여덟 가지를 성취하게 된 것이다. 즉 소리에는 여덟 가지 종류가 있으니. 비언어적인 즐거운 소 리(악기 소리). 무집수의 대종에 근거한 소리로서 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이를테면 변화인의 부드러운 소리).이렇게 설하고 있는 것이다.106) 이와 반대되는 것을 무 집수의 대종이라고 한다. 유정류의 가행(加行.

어떠한 까닭에서 소리[聲處]에 대해서만 그렇게 설할 것인가? [그렇다면 소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색처 등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유집 수의 대종과 무집수의 대종을 근거로 하는 것이 있다고 설해야 할 것이다. 이치상 실로 마땅히 그렇게 설해야 하지만.109) 비록 유집수와 무집수의 『구사론』상에서는 앞서와 같이 소리[聲處]를 여덟 가지로 분별하지만. 이상의 여덟 가지 분별 중 오직 앞의 두 가지 소리(유집수와 무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만이 이치에 부합하니. 그 밖의 소리는 바로 비유정수의 소리이다. 둘째는 온갖 사물이 요동하면서 생겨나는 소 리이다. 손뼉 소리 등을 말하며. 또한 유정수의 소리란 말소리. 그리고 [소리를 두 가지로 분별하는 것 은] 본론(本論)에서 설하고 있는 성처의 특성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이 같이 소리를 여덟 종류로 분별하여 설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리는 여덟 가지 이상으로 분별 될 수 있어 그 자상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색 처 등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가의성(즉 보기 좋은 것) 등의 차별을 설할 수 있을 것인데. 즉 전자는 고둥이나 종 혹은 북 등의 소리를 말하며. 후자는 바람이나 숲 강물 등이 내는 소리를 말한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불가의성의 소리(즉 듣기 좋지 않은 소리)이다.근거로 하여 일어난 소리의 차별이다. 양자의 4대종은 각기 다른 결과를 갖기 때문이다. 어찌 유집수 대종과 무집수 대종 모두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소리가 없다고 하겠는가? 예컨대 손과 북 등이 결합하여 생겨난 소리가 그러하지 않는가? 그와 같은 소리(유집수 대종과 무집수 대종을 근거로 하여 생겨난 소리)는 존재하지 않으니. 즉 두 가 지 4대종이 동일한 결과를 함께 획득하는 경우.108) 유정수와 비유정수의 소리는 바로 유집 수와 무집수 대종을 근거로 하여 생겨나는 소리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리의 경우처럼 두 가지로 분별하여] 설하지 않은 것이다. [둘 중 하나는] 구유인(俱有因) 이 되지 않는다는 과실을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무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에도 역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유정의 가행에 의해 일어나는 소리이며. 성처의 경우 그 자성을 알기 어 렵기 때문에 다만 그 같은 근거에 따라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한 것일 뿐 이다. 유집수 대종과 무집수 대종 108) .(후술) 109) 구유인이란 결과와 동시에 존재하는 원인으로. 그리고 이와 같은 온갖 소리를 듣고서 기쁨을 낳게 되는 것이 가의성의 소 리(즉 듣기 좋은 소리)이며. 그러나 색처 등은 그렇지 않으니. 왜냐하면 유정수 등과 가의성 등에 의한 분 별은 문제가 있으며. 중 현은 다만 유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와 무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 등 두 가지로 분별하고 있을 뿐이다.

111) 곧 능히 제근(諸根)의 대종을 장양(長養)하는 것을 일컬어 호향이라고 하고. 혹은 온갖 복업(福業)의 증상력(增上力)에 의해 생겨난 것을 일컬어 호향이 이라는 두 가지 원인에 의해 어떤 하나의 소리가 산출되었다고 한다면. 호향과 오향. 여기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여기서 등향과 부등향이라고 함은 소의신(所依身)을 이익되게 하고 감손(減損) 시키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달고[甘]. ‘미’란 말하자면 씹혀지는 것에 대해 맛본다 는 뜻이다. 그리고 평등향이 그것이다”고 하였다.18). 이 때 소리의 원인은 손바닥인가. 시고[酢]. 둘 중의 하나는 구유인이 아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처에는 오로지 두 가지 종류만이 있을 뿐이다. 이제 마땅히 향처(香處)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짜고[鹹]. ‘향’이란 말하자면 냄새맡아지는 것으로. 유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와 무집수 대종에 근거 한 소리. 그리고 양자 모두에 근거한 소리를 말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성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런데 본론(本論)에서는 설하기를. 이렇듯 소리의 차별상은 쉽게 알 수 없으니. 이를 근거로 하여 두 가지의 소리가 발생할지라도 서로에 덮여 가려짐에 따라 한가지 소리 (북소리)로만 들리게 되는 것이다. 앞의 두 작용을 갖지 않는 것을 평등향이라고 하였다.두 4대종이 서로가 서로를 치고 두드렸다고 할지라도 다 같이 [자신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되어 각기 별도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것을 일컬어 오 향이라고 하였으며.(후술) 110) 여기서 세 가지 소리란. 111) 『품류족론』 제1권(한글대장경117. 그러한 대상(즉 맛과 향)에 대한 인식이 낳아지는 것은 결정된 것이 아니 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제 마땅히 미처(味處)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미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쓰고[苦]. 예컨대 손바닥(유집수 대종)으로 북(무 집수 대종)을 쳤을 경우. 여기에는 여섯 종류가 있으니. “미약(微弱)함과 증 성(增盛)함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등향과 부등향으로 분별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향처를 먼저 설하지 않고] 차례를 건너뛰어 [미처를 먼저] 설하는 것 은.110) 비 록 유집수인 손의 대종과 무집수인 북의 대종이 서로 부딪치고. “향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담백함[淡]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p. 즉 그들의 소리는 각기 자신의 소의(所依)에 근거하기 때문에 세 가지 소리는 생겨날 수 없다. 북인가? 이 경우 사실상 각기 자신의 소리를 내지만 북의 소리만 들리는 것은 손바닥의 소리 가 북의 소리에 흡수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호향(好香)ㆍ오향(惡香)ㆍ등향(等香)ㆍ부등향(不等香)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맵고 [辛]. .

112) 향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 경우 대상(촉경)은 식 증상과란 능작인(결과의 생기를 방해하지 않는 소극적인 원인)의 결과로서. ‘열한 가지를 자성으로 한다. 물질적 존재(5근과 5경)의 접촉과 불접촉의 문제에 대해서는 본론 제7권~8권에 걸쳐 상론된다. ‘이러한 근이 그 대상과 능히 접촉하였다’고 일시 가설하는 것으로. 무거운 성질[重性]. 유부의 인과관계(6因ㆍ4緣ㆍ5果)에 대해서는 본론 제15권~20권에 걸쳐 상론되고 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113) 무간(無間. ‘증상(adhipati)’이란 ‘뛰어난 힘’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즉 촉 경)이 무간(無間)에 생겨날 때. 말하자면 4대종과 일곱 가지의 조작된 촉[所造觸]―미끄러운 성질[滑性]. 오로지 4대종의 세력에 의해 생겨난 것을 이름하여 평등향이라고 하 였다. 따라서 극미의 접촉은 절대적 근접인 무간을 일시 가설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어떤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작은 것[少法. 온갖 죄업(罪業)의 증상력에 의해 생겨난 것을 일컬어 오향이라고 하 였으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신근(身根)도 접촉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 같은 향은 비록 증상과(增上果)일지라도 역시 차별이 있으니. 그래서 오로지 대종의 세력에 의해 생겨난 것(평등향)도 역시 유정의 증상과에 포섭되 는 것이다. 그것도 결정코 이것과 접촉하기 때문 이다. 즉 극미]이 능 히 작은 것과 접촉하는 일은 없으니. “신근은 오로지 능히 접촉하는 것일 뿐 접촉되는 것이 아니니. 이 것(신근)은 능히 그것(촉처)과 접촉하고. 소의(所依. 그것을 일시 ‘접촉되는 것’과 ‘능히 접촉하는 것’으로 가설할 뿐이다. 허기짐[飢]. 유부에 의하면 물질(색법)의 극소인 극미가 다른 극 미와 결합하기 위해 접촉한다면 그것은 면을 지니게 되어 더 이상 극미가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차가움[冷]. 가벼운 성질[輕性].라 하고. ‘촉’이라고 하는 개념을 설정하였다”고 설하였 다. 목마름[渴]이 바 로 그것이다. 즉 신근)와 소연(所緣. 곧 평등향은 선악 의 행위와 관계없이 다만 4대종에 의해 생겨난 것이지만.’ 이는 곧 열한 가지의 실체를 그것의 본질로 삼는다는 뜻이니. 극미로 이루어진 신근과 촉경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 여 다만 서로 지극히 가까이하는 경우[隣近]. 껄끄러운 성질[澁性]. 그 자체 제근을 증장시키고 감손시키는 힘을 갖기 때문에 호향 등처럼 증상과에 포섭된다는 것이다. 이제 마땅히 촉처(觸處)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비유하자면 안근은 오로지 보는 것이지 보여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 다”고 하였다. 112) . ‘촉’이란 말하자면 접촉되는 것으로.nirantaratva)은 근과 경 사이에 어떠한 간격도 없이 절대적으 로 근접한다는 뜻이다.113) 즉 이러한 근에 근거하여 식(識)이 그 대상을 획득할 때.

미끄러움이 바로 이것(촉처)의 특성이기 때문에 ‘미끄러운 성질’이라고 하였 으니. . 세간에서도 물체의 형태가 비록 클지라도 가벼움 을 갖기 때문에 쉽게 옮길 수 있는 것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의 소의가 아니기 때문에 ‘능히 접촉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이유에서 오로지 지(地) 등의 대종을 ‘접촉되는 것’이라고 말할 뿐 그것에 근거하는 색 등은 결정코 ‘접촉되는 것’이 아니다. 이 를 어원적으로 해석하면 서로 핍박하면서 접촉[逼觸]하기 때문에 ‘미끄러운 성 질’이라 일컬은 것이니. 이러한 [촉처의 열한 가지] 가운데 대종에 대해서는 마땅히 뒤(본론 제2권) 에서 널리 논설할 것이므로 지금 여기서는 미끄러움과 껄끄러움 등의 특성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해석하리라. “저울의 추를 올 라가게 하기 때문에 ‘무거움’이라 일컬은 것이며. 옮기가 쉽기 때문에 ‘가벼움’ 이라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어떤 존재의 근거가 되는 것)가 손상되거나 증익(增益)될 때 능의(能依.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서는 말하기를. 만약 그러한 색 등이 ‘접촉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바로 유연하고 따뜻하여 잡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어찌하여 꽃 등이 몸에 닿을 때 색 따위가 변괴(變壞)하는 것인가? 그것의 소의(즉 4대종)가 손상되어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이러 한 힘은 ‘거칠고 바짝 마름[麤燥]’. 이러한 촉처는 껄끄러움의 작용을 갖기 때문에 ‘유삽(有澁)’이라 이름한 것 으로. 능히 누르는 것[鎭壓]을 일컬어 ‘무거움’이라고 하니. 즉 껄끄러움 바로 이것이 특성이기 때문에 ‘껄끄러운 성질’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다른 것을 성취하 여 억누른다는 뜻이다. 마치 개별을 특성으로 하기 때문에 ‘개별성’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가뭄이 들어] 햇볕만 내리쬐면 이와는 반대가 되는 것과 같다. ‘굳고 딱딱함[堅便]’의 다른 명칭이다. 이를테면 털을 지닌 자를 일컬어 ‘유모(有毛)’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지금 바로 관찰하 건대 소의(所依. 따라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접촉에 관한] 논의는 뒤(본론 제7권 이하)에서 마땅히 널리 분 별하게 될 것이다. 어떤 존재에 능히 의지하는 것) 또한 손상되거나 증익되는 것으로. 소의인 대종 이 손상되어 능의인 [꽃의] 색 등이 변괴하는 것이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 다. 이 말은 곧 신근에 근거하는 식(즉 신식)은 그러한 대상(즉 색 등)을 조건[緣]으로 삼아서는 생기 하지 않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지방에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하면 농사도 풍요롭고 수풀도 무성하지만. 양자는 서로 모순되는 관계가 아니다. 즉 무거움이 바로 이것의 특성이기 때문에 ‘무거운 성 질’이라고 하였다.

『대비바사론』에서는 “저울의 머리를 떨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가벼움’이라 이름하였다”고 설하고 있다. p. 또한 [그것(촉처)을] 얼게 하여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차가움’이라 일컬은 것이니.18)에서는 칭량(稱量)할 수 있는 것을 ‘무거움’ 이라 하였고. 이에 따라 어지러움 역시 이것에 의해 생겨난 다고 설하는 것이다.115) 그 밖의 아직 설하지 않은 어지러움[悶]ㆍ강력함[力]ㆍ연약함[劣] 등은 이(열 한 가지) 중에 포함되기 때문에 별도로 설하지 않은 것이다. 허기짐)을 결과(즐거운 것. 밥은 사람의 목숨이 아니지만 능 히 목숨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숨이라 말할 수 있다는 뜻으로. 마시기를 바라 는 것을 일컬어 ‘목마름’이라고 하였다. 또한 수ㆍ풍의 요소가 증대하였기 때문에 차가움이 생겨난 것으로. 연약함은 유연하고 따뜻 함(즉 미끄러움)이 있는 가벼운 성질 중에 포섭된다. ‘바란다[欲]’는 것은 심소법(心所法)이니. 먹기를 바라는 것)로 설정할 수 있다는 사실의 예증이다. 밥을 사람의 목숨. 114) .가벼움이 바로 이것의 특성이기 때문에 ‘가벼운 성질’이라고 말한 것이니. 이는 바로 그것의 손해와 이익을 신속하게 알 수 있다는 뜻이 다. 화ㆍ풍 의 요소가 증대하였기 때문에 가벼운 성질이 생겨난 것이니. 어찌 ‘촉’의 특성과 어긋나는 것이 라 하지 않겠는가? 이는 원인에 대해 결과의 명칭을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촉’의 특성과 서로 모순되는 허물이 없으니. 어떠한 인연에서 미끄러움 등의 차별이 있게 된 것인가? [촉처의] 근거가 되는 대종이 증대하거나 미약해지는 등의 차별 때문이다. 이렇듯 그 밖의 접촉되는 것의 여러 종류들은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열한 가지 중에 포섭된다. 115) 강 자체는 즐거움이 아니지만 그것을 이용해 여행하면 능히 즐거움을 낳 기 때문에 강을 즐거움이라 할 수 있으며. 강력함은 거침과 무거움에. 마치 강을 즐거운 것이라고 하고. 지ㆍ수의 요소가 증대하였기 때문에 무거운 성질이 생겨난 것이며. 지(地)ㆍ풍(風)의 요소가 증대하였기 때문에 껄끄러운 성질이 생겨난 것이 며. 그리고 먹기 바라는 것을 일컬어 ‘허기짐’이라고 하였으며. 즉 어지러움은 미 끄러움과 관계가 있으며. 계단을 오르는 것 을 역시 또한 즐거운 것이라고 하며.114) 그것에 핍박되어 따뜻하기를 바라는 욕망을 낳기 때문에 ‘차가움’이라 이름 하였다. 즉 수(水)ㆍ화(火)의 요소가 증대하였기 때문에 미끄러운 성질이 생겨난 것이 며. 풀을 가축의 목숨이라 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반대를 ‘가벼움’이라 하였다. 그래서 죽은 이의 몸 안에는 무거운 성질이 증가하는 것이다. 『구사론』 제1권(앞의 책. 이는 곧 원인(강.

그 밖의 경우에 대해서는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배당하 여 해석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화’의 요소가 증가하면 목마름이 생겨난다. 그 런 까닭에 두 말이 서로 모순되는 과실은 없는 것이다.116) 그리고 ‘풍’의 요소가 증가하면 배고픔이 생겨나고. 116) . 117) 본론 제4권~5권에 걸쳐 ‘촉계는 오로지 대종성(大種性)이라는 상좌(上座)의 설’을 비판하면서 소조촉에 대해 상론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수ㆍ화의 요소가 증대함에 따라 생겨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소조촉(所造觸)은 대종과는 관계없이 별도의 존재 본성[體性]을 지니니. 혹은 다시 어지러움은 바로 미끄러움의 차별이지 오로지 미끄러운 성질이라는 것은 아니다. 어지러움은 미끄러움(수ㆍ화의 증대)과 관계가 있다는 말과 수ㆍ풍(차가움)의 요소가 증대하여 생겨난다는 두 말.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어지러움이 미끄러움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 것인가? 각각의 요소가 증대함에 따라 이것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허물도 없다. 즉 이것들의 원인에도 역시 차별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117) 여기서 두 말이란. 그렇기 때문에 미끄러운 성질은 어떤 경우 수ㆍ풍의 요소가 증대함에 따라 생 겨나지만.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