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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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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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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정했습니다. 헌법 제 127조 제 2항에는 ‘국가는 국가표준제도를 확립한다’


라고 명기되어 있으며, 1999년에 제정된 국가표준기본법과 그 시행령은
국제단위계에 대한 제반 사항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 전반의 국제단위계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부족한 편
입니다. 일상생활이나 일부 산업 현장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잘못된 단위
를 사용하고 있거나 국제단위계에서 벗어나는 오래된 단위들을 쓰고 있습
니다.
국가측정표준대표기관인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국제단위와 측정의 중
요성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단위의 올바른 사용을 돕기 위해 이 책을 발
간하게 되었습니다.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는 단위가 어떻게 만들어
져 사용되고 있는지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또한 단위에 얽힌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소개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일상생활과 최첨단 과학기
술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단위와 측정의 중요성과 관련 노벨상 수상자들
도 간략하게 다루었습니다.
이 책이 과학에 흥미를 두고 있는 학생과 일선에서 과학교육을 담당하
고 있는 교사, 그리고 평소 단위와 측정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신 모든 분
들에게 유익한 지침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2009년 12월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원장 김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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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간 사

우리는 일상 속에서 측정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시


계를 보고, 자동차를 운전하며 속도를 살펴봅니다. 또 옷을 살 때는 몸에
맞는지 치수를 확인하고, 채소나 과일을 사면서는 저울에 무게를 달아봅
니다.
과학기술은 그 자체가 측정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의 과학 실험은 측정을 통해 결과를 얻게 되므로, 정확한 측정은 과학기술
의 기초이자 필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통치자들의 업적을 살펴보면 ‘도량형의 통일을
이루었다’는 대목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도량형의 통일은 국
가 통치의 근간이 되는 조세를 공평하게 거둬들이기 위해 이루어졌습니
다. 이뿐만 아니라 건축, 제조, 상거래 등 일상 속 갖가지 활동들이 원활하
게 이뤄지기 위해서도 도량형의 통일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이 같은 필
요성은 다른 나라들과 무역을 시작하게 되면서 국제적으로 확대되었고,
과학기술과 산업이 발달하면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됐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1875년 미터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협약으로 인해
미터법은 국제 사회에서 통일된 도량형 제도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또
한 1960년에 열린 국제도량형총회에서는 전 세계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국제단위계(SI)’가 채택되어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61년 계량법을 제정하여 국제단위계만을 사용하도록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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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의 기원과 역사
차 례

발간사 ………………………………………………………………………………… 4

제1장 단위의 기원과 역사 ………………………………………………………… 8


단위는 왜 태어났을까? ………………………………………………………………… 10
고대 도량형 기술의 백미, 피라미드 …………………………………………………… 12
“짐이 곧 길이의 기준이니라” …………………………………………………………… 14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 도량형도 통일하다 …………………………………………… 16
‘한 줌’은 넓이의 단위일까, 부피의 단위일까? ………………………………………… 18
암행어사가 들고 다닌 ‘유척’의 정체는? ……………………………………………… 20
프랑스 혁명 속에 피어난 도량형 개혁 ………………………………………………… 22
모두를 위한 척도는 자연에서…………………………………………………………… 24
미터, 모든 단위의 기초가 되다 ………………………………………………………… 26
구사일생으로 얻은 미터 ………………………………………………………………… 28
나폴레옹과 운명을 함께 한 미터법 …………………………………………………… 30
미터법의 부활, 모두를 위한 도량형으로 ……………………………………………… 32
대한제국에 상륙한 미터법 ……………………………………………………………… 34

제2장 전 세계의 약속, SI 단위 ………………………………………………… 36


국제단위계(SI)의 탄생부터 성장까지 ………………………………………………… 38
미터의 기준은 무엇일까? ……………………………………………………………… 40
1 킬로그램 금속 덩어리가 최고의 보물? ……………………………………………… 42
들쭉날쭉 ‘초’가 세슘원자를 만나기까지 ……………………………………………… 44
옴, 볼트 누르고 전기 분야 대표가 된 단위는? ……………………………………… 46
얼음과 물, 수증기가 만나는 곳 : 273.16 K …………………………………………… 48
밝기를 재는 기준의 변천사……………………………………………………………… 50
탄소 원자 6.022×1023개가 갖는 의미 ………………………………………………… 52
기본단위를 재료로 유도단위를 만들다………………………………………………… 54
기가, 메가, 나노 - 접두어가 생긴 이유 ……………………………………………… 56
단위 기호는 세계인이 함께 쓰는 만국공통어 ………………………………………… 58
단위의 정의는 바뀔 수 있다? …………………………………………………………… 60
절대적이고 영원한 표준, 지구에는 없다? …………………………………………… 62
레이저가 미터의 정의를 바꾸다………………………………………………………… 64
원자가 내는 빛의 진동수, 시간을 점령하다 …………………………………………… 66
우리는 얼마나 정확한 시계가 필요할까? ……………………………………………… 68
국제킬로그램원기가 못마땅한 과학자들 ……………………………………………… 70
국제킬로그램원기 더는 믿을 수 없다? …………………………………………………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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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단위의 기원과 역사

단위는 왜 태어났을까?

인류는 언제부터 단위를 사용했을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단위가 인류


와 오랜 역사를 함께 해왔다는 점은 분명하다. 단위의 출현은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이었다. 한정된 지역에서 집단생활을 하던 인류가 점차 지배
영역을 넓혀가고 그에 맞게 사회 규모가 성장하면서 단위의 필요성도 커졌다.
사람들은 집단으로 농지를 경작하며 농작물을 재배하고 이를 분배해야 했다.
더 나아가 농기구를 개량하고 소나 말과 같은 가축의 힘을 빌어 효율적으로 농사
를 짓게 되면서 여유 작물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이 작물들을 다른 부락에서 생산
한 물건과 물물교환의 형태로 맞바꾸게 되고 이에 따라 물건의 가치를 정확히 매
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물건의 크기와 길이, 무게 등을 비교한 것을 수치로 표
시할 기준이 필요했다.
도량형(度量衡)은 길이를 재는 자와 부피를 재는 되, 그리고 무게를 재는 저
울을 총칭하는 말이다. 통일된 도량형이 없었다면 물건의 교환 즉, 상거래 역
시 원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위의 시작은 도량형의 기준을 만든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인류 최초의 도량형은 어디에서 탄생했을까? 도량형의 기원지로는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언급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는 서아시아 티그
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지역으로 고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단위는 ‘큐빗(cubit)’이라는 길이 단위다.
팔을 구부렸을 때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 중지 끝까지의 길이로, 고대 이집트 시
기에만 사용된 게 아니라 근대까지도 쓰였을 만큼 서양에서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단위이다. 큐빗은 1 야드(91.44 cm)의 원형으로 1 큐빗은
약 45.8 cm의 길이이다.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큐빗

큐빗 :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된 길이로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

사과 10 kg을
주시오. 사과 10 kg이면
비단 1 필이오.
1장 단위의 기원과 역사

고대 도량형 기술의 백미, 피라미드

역사적으로 무게와 길이에 관한 수많은 단위들이 존재해왔다. 그런데 이런 단


위에 대한 정의는 종종 모호하고 부정확해서 상당수 단위들은 그 뿌리가 같았
지만 단위의 실제값은 나라마다 혹은 시대마다 제각기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 단위들이 모두 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부정확했던 건 아니
다. 어떤 시대에는 단위가 상당히 정밀한 수준으로 정의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물들이 현대 우리의 기준에서 봐도 매우 정교한 경우도 있다. 대표
적인 사례가 이집트 기자(Giza) 지방의 대(大)피라미드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이 피라미드는 기자의 3대 피라미드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쿠
푸(Khufu) 왕의 피라미드이다.
기원전 2500년 무렵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피라미드의 높이는 146.60
미터에 이른다. 영국의 링컨대성당 첨탑이 1300년 경 완성되기 전까지 380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위용을 자랑했다.
대피라미드는 그 규모를 측정하는 기간만 수세기가 걸렸을 만큼 거대하다.
이 피라미드에 사용된 2.5 톤짜리 돌덩어리는 무려 230만개. 그 무게를 다 합
치면 575만 톤에 달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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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에 참여했던 수학자 몽즈는 대피라미드의 부피


가 260만 ㎥이며, 이는 프랑스 국경을 따라 높이
3 미터짜리의 성벽을 쌓을 수 있는 규모라고 계
산했다. 이집트 정부는 1925년에야 대피라미드의
규모에 관한 최종 보고서를 내놓을 수 있었다. 이
보고서는 대피라미드가 얼마나 정확한 수치로 지
어졌는지 말해준다. 예를 들어 피라미드의 정사각
기자의 대피라미드 형 모양의 밑면에서 각 변의 길이를 살펴보면, 남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피라미드가
북 230.25 m 동 230.45 m 정교하게 만들어진 건
‘로열 큐빗 마스터’
덕분이지!

서 230.38 m
남 230.40 m

로열 이집트 큐빗 =
(당시 통치하던 파라오의) 팔꿈치에서부터
가운데 손가락까지의 길이 + 손바닥 폭의 길이

쪽은 230.40 미터, 동쪽 230.45 미터, 서쪽 230.38 미터, 북쪽 230.25 미터이


다. 이들 간의 길이 차가 고작 20 센티미터밖에 나지 않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이렇게 정밀하게 피라미드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정확
한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는 바로 ‘로열 이집트 큐빗’이다. 이는 당시 통
치하던 파라오의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에 손바닥 폭의 길이
를 더한 길이다. 이렇게 정의된 로열 이집트 큐빗의 길이는 화강암에 새겨졌는
데 이를 ‘로열 큐빗 마스터’라고 했다. 로열 큐빗 마스터는 피라미드 건축에 매
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피라미드 건축자들은 로열 큐빗 마스터를 바탕으로 나
무나 화강석 재질의 자를 만들어 건축 현장에서 사용했다.
당시에는 매달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특별한 의식을 치렀다. 왕실 건축가나
감독관들이 사용하던 자를 로열 큐빗 마스터와 비교하는 의식이었다. 이는 자
의 정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이 일을 소홀히 하는 이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
다. 이런 엄격한 측정표준 덕분에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0.1 %의 정밀도를 가지
고 건축될 수 있었다.
1장 단위의 기원과 역사

“짐이 곧 길이의 기준이니라”

가장 오래된 길이 단위 중 하나인 큐빗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팔을 구부렸


을 때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 중지 끝까지의 길이를 말한다. 도량형이 처음 만
들어질 때는 이처럼 신체의 일부분을 기준으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신체를 사용한 사례는 서양의 길이 단위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큐
빗의 반은 ‘스팬(span)’이라고 하는데, 스팬은 손가락을 짝 벌렸을 때 엄지손
가락 끝에서부터 새끼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다. 그리고 스팬의 3분의 1을 ‘팜
(palm)’이라고 했고, 이는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네 손가락의 너비였다. 그리고
팜을 다시 4로 나눈 것을 ‘디지트’라고 했는데, 1 디지트는 손가락 1개의 폭과
같았다. 또한 발뒤꿈치에서 발가락 끝까지의 길이에 해당하는 ‘피트(feet)’이라
는 단위도 있다. 이는 16 디지트에 해당하고 12 인치와 거의 일치하는 길이다.
이같은 서양의 길이 단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비트루비우스
의 인체 비례’라는 유명한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대 로마시대 건축가인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의 문헌에 기록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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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바탕으로 인체를 기학학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여기에는 큐빗, 팜, 디지트, 피트 등
여러 길이 단위들 간의 관계가 표현돼 있다.
이처럼 서양에서는 몸 그 자체가 자였던 셈
이다. 특별히 자를 휴대하고 다닐 필요가 없
어 편리했을지도 모르지만 몸의 크기가 다르
다보니 길이 역시 제각각이었다. 단위는 있지
만 표준은 없었던 셈이다. 이는 다툼의 빌미
가 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옷감을 사고팔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 때 누구의 몸을 기준으로 삼느냐를 두고 다툼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1 큐빗 = 2 스팬

n
spa
큐빗(cubit)
1 스팬 = 3 팜

palm
n
spa

palm
palm
팜(palm) 디지트(digit) 스팬(span)

1 피트(feet) ≒ 16 디지트 ≒ 12 인치

1 인치 = 엄지손가락 폭 = 2.54 cm
1 큐빗 = 1.5 피트 = 45.72 cm
2 큐빗 = 3 피트 = 12 팜 = 36 인치 = 48 디지트 = 91.44 cm

이 벌어질 수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권력자의 신


체 부분을 표준으로 삼는 것이었다.
영국 노르만 왕조의 정복왕 윌리엄 1세의 막내아들인 헨리 1세(재위기간
1100~1135)는 “이제부터 내 코에서 손가락까지의 거리를 ‘1 야드(yard)’로 한
다”라고 선포했다. 자신의 코끝에서 팔을 뻗어 엄지손가락을 세운 곳까지의 길
이를 야드로 정의한 것이다. 이 길이는 약 91 cm이다.
1장 단위의 기원과 역사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


도량형도 통일하다

그렇다면 동양은 어떠했을까? 먼저 중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 역시 단위를 중요하게 여겼다. 진시황은 도량형 제도를
만들어 공표하고, 표준이 되는 자와 저울, 되를 대량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
눠주었다. 당시 지역마다 제각각이었던 도량형을 이처럼 하나로 통일시킨 것
이다.
진시황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인 도량형의 통일은 당시에도 단위가 매우 중
요했음을 말해준다. 당시에는 비단이나 모시 같은 천으로 세금을 내는 게 일반
적이어서 이를 재기 위한 정확한 척도가 필요했다.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으면 백성의 자로는 분명 맞는 길이인데 관리의 자로 재
면 부족하게 측정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들쑥날쑥한 도량형이 백성
을 수탈하기 위해 악용될 여지가 많았던 것이다.
진시황은 비록 약 6500 km의 만리장성을 쌓느라 백성들을 동원해 많은 목숨을
앗아갔지만, 한편으로는 도량형을 통일시킴으로써 지방 관리의 부정부패로부터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었다.
기록에 의한 중국 도량형제도의 체계적인 정비는 한나라 시대에 와서야 이뤄
졌다. 중국의 측정 기술은 기원전 3~4세기 무렵 황하 유역에 이주해 온 한족이
최초로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발전한 측정 기술은 훗날 우리나
라와 일본 등으로 전파되었다.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이 자로 재보니
비단이 턱없이
부족하구나!

지역마다
제각각인
이 나라의
도량형을
반드시
노라!
통일하겠

진시황
1장 단위의 기원과 역사

‘한 줌’은 넓이의 단위일까,


부피의 단위일까?

우리말에 ‘한 줌의 재’, ‘한 줌의 흙’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은 한 주먹으로 쥘


수 있을 만큼 적은 분량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줌이란 게 우리나라 고유의 단
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우리나라는 중국 도량형 제도의 영향을 받았지만 우리만의 독자적인 도량형
도 사용해 왔다. 우리나라는 단군조선 때부터 고유의 도량형 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약 4000년 동안 ‘결부속파법(結負束巴法)’이라는 고유의 단위체
계를 사용했다. 줌이란 단위도 결부속파법에서 비롯됐다.
한 줌은 적은 분량을 의미해 부피의 단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넓이의
단위였다. 결부속파법에 따르면 우리나라만의 전통 면적 단위에는 먹, 짐, 단
을 비롯해 줌이 있었다. 그런데 왜 넓이의 단위인 줌이 부피의 단위처럼 오인
된 걸까?
1430년 조선시대 세종대왕은 지역마다 달랐던 길이, 넓이, 부피, 무게에 대
한 전통 단위들을 정비했다. 이 외에도 시간을 재기 위한 해시계와 강수량을 측
정하기 위한 측우기와 같은 도량형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당시 1 줌은 가로 1 자, 세로 1 자의 넓이라고 정리했다. 당시 1 자에 해당하는
길이는 38.86 cm. 따라서 1 줌의 넓이는 0.15 ㎡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 줌은
상당히 작은 넓이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한 줌의 땅에서 나온 곡식의 양은 얼마
쯤 될까? 한 주먹 수준밖에 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옛날 사람들 입장에선 줌
이라는 면적단위를 이해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일정 면적에서
수확한 곡식의 양으로 설명했다고 한다. 줌이 부피의 단위로 오해받는 건 여기
에서 출발했다.
‘한 짐 지고 간다’는 우리말이 있다. 한 줌과 달리 한 짐은 등에 짊어지기에는
꽤 무거운 양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 짐도 한 줌과 마찬가지로 부피 단위가 아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1430년 조선 세종대왕 때 우리나라의 전통 단위 체계인 ‘결부속파법’을 제정비했다.

면적 단위
1 줌 가로 1 자, 세로 1 자의 넓이 (1 자 = 38.86 cm, 1 줌 = 0.15 m2)
1 단 10 줌
1 짐 100 줌 (한 짐의 땅에서 수확된 곡식을 한 짐으로 지고 갈 수 있는 양)
1 먹 10000 줌

옛날 사람들은 면적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정 면적에서


수확한 곡식의 양으로 면적(넓이)을 따졌다.

니라 넓이의 단위이다. 세종대왕 때 재정비한 전통단위 체계에 따르면 10 줌은


한 단, 100 줌은 한 짐, 10000 줌은 1 먹이었다. 이렇게 정한 뒤 백성들에게 토
지를 1 먹씩 나눠주었다. 한 짐, 곧 100 줌의 땅에서 수확된 곡식의 양은 등에
한 짐 지고 갈 수 있을 만큼의 양이었던 것이다.
1장 단위의 기원과 역사

암행어사가 들고 다닌 ‘유척’의 정체는?

왕의 특명을 받고 신분을 감추기 위해 비렁뱅이나 나그네처

위키피디아
럼 변장하고 지방에 몰래 파견되었던 조선시대의 암행어사.
암행어사 하면 지방의 탐관오리를 적발하고 동헌에 쳐들어
갈 때 “암행어사 출두야!”라고 외치는 게 떠오를 것이다. 이
때 암행어사는 마패를 손에 쥐고 등장한다. 마패는 한자어,
馬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암행어사는 이 마패만 보여주면
어디서든 역졸과 역마를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암행어사가 지니고 다녔던 건 마패 뿐만이 아니었
다. 왕이 암행어사를 임명할 때 하사하는 것은 모두 네 가지
로 봉서(封書)와 사목(事目), 마패, 유척(鍮尺)이다. 봉서는
암행어사에 임명되었음을 알리는 문서이고, 사목은 암행어
사의 직무를 규정한 책이다.
그렇다면 유척은 무엇일까? 유척은 놋쇠로 만든 자로,
조선시대 도량형 제도에서 일종의 표준 역할을 했다. 세종
대왕은 박연을 시켜 아악을 정리하면서 악기의 기본음을
내는 황종률관을 만들고, 이것을 기준으로 황종척이라는
자를 만들었다. 이 황종척이 모태가 돼서 탄생한 자가 바로
유척이다.
그런데 암행어사는 왜 이런 자를 가지고 다녔을까? 당시
지방 수령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백성들로부터 각종 세
를 거둬 조정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세금은 오
늘날처럼 화폐로 거두어들이지 않고 한 해 동안 농사 지은
곡식, 옷감, 지역 특산품과 같은 물품으로 바쳐졌다. 암행어사의 유척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암행어사 출두야!

이 때 중요한 건 지방 수령이 사용하는 자가 과연 정확한지의 여부였다. 지방


유척이란?
수령이 몰래 빼돌리려고 자의 눈금을 늘인다면 백성은 정해진 양보다 더 많은 암행어사가 지방 관청의
도량형을 검사할 때
세를 부담해야 하므로 삶이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조정 입장에서도 그
기준이 되는 자.
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암행어사는 놋쇠로 만든
유척으로 지방 관리들이
왕은 암행어사에게 유척을 하사하면서 지방 관청의 도량형을 확인하도록 했 되나 자를 속이는지
판별했다.
다. 유척은 지방관청의 도량형이 얼마나 정확한지 판별하는 표준자의 역할을 했
던 셈이다. 유척은 세금 징수에 관한 목적 외에 형벌에 사용하는 도구의 크기가
규정에 맞는지 알아보는 용도로도 쓰였다.
1장 단위의 기원과 역사

프랑스 혁명 속에 피어난 도량형 개혁

ironorchild.com
1789년 프랑스는 혁명의 도가니 속에 있었다. 성
난 군중들이 왕의 폭정을 상징하는 바스티유 감
옥을 점거하고, 농민들은 지주에 맞서 봉기를 일
으켰다. 당시 프랑스 왕이 자유와 평등을 내용으
로 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승인하지 않
자, 파리의 군중들은 왕이 사는 베르사유로 진격
해 왕의 가족들을 파리로 데려와 감금했다.
이렇게 프랑스 혁명이 절정에 달했던 그 해 또
앙투안 라부아지에
다른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로운 도량형 질서를 세우는 혁명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도량형 체계는 꽤 혼란스러웠다. 프랑스 혁명 전 프랑스를
다녀간 아서 영이란 영국인은 프랑스에 존재하는 다양한 도량형을 보고 놀라
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 “프랑스에는 납득하기 힘들 만큼 무수
히 많은 도량형이 있다. 지방마다, 교구마다, 마을마다 모두 제각각이다”라고
기록했다.
프랑스 도량형 개혁을 시도할 당시 그 중심부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가
앙투안 라부아지에
(1743~1794) 있었다. 아카데미는 1635년경부터 데카르트, 파스칼 등 저명한 철학자와 과학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의
자들이 모임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화학자. 라부아지에는 아카데미가 도량형 개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 프랑
화학반응에서의
질량보존의 법칙을 스 과학의 발전 덕분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측정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었고,
세웠으며, 원소와
화합물을 구분하여
여러 측정 장치들이 개발되고 개선되었다. 과학자들은 이전보다 훨씬 정확하
화합물에 이름을 붙이는 게 길이를 측정하는 측량도구와 시각을 측정하는 시계를 갖고 있었다. 또한 미
법을 만드는 바탕을
마련했다. 세한 질량 차이도 측정할 수 있는 저울도 갖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과학자들은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로운 도량형을
만들 것이다.

데카르트 파스칼

과학의 발달이 국가 발전에 유익하게 쓰이기를 원했다. 그것이 바로 도량형의


개혁이었다.
당시 아카데미에는 오늘날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앙투안 라부아지에
(1743~1794)가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도량형 개혁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1790
년 라부아지에는 전 프랑스 지역의 도량형을 통일하기 위한 과학 아카데미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왕은 라부아지에를 비롯해 아카데미 학자들에게 도량형 통일의 장점을 검토
하라고 지시했다.
1장 단위의 기원과 역사

모두를 위한 척도는 자연에서

도량형 개혁에 나선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학자와 시민들의 의견을 모았다.


일부에선 프랑스 국내로 범위를 좁혀 파리의 도량형을 표준으로 삼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만약 당시 분위기가 프랑스의 국내 도량형 통일을 목표로 했다면 파
리를 기준으로 하자는 이 같은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랑스 과학자들은 이보다 훨씬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합리적인 도량형
체계를 제대로 만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도량형은 인류 전체의 공통 유산인 ‘자연’에서 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
기됐다. 새로운 질량과 길이의 표준은 어느 한 시대나 권력자에 속해서는 안 되
며, 어느 누구에게도 특별히 이로우면 안 되는 것이었다. 또 오랜 시간이 지나
도 변하지 않는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당시 학자들은 오직 자연에서 구한 표준
만이 영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중 무엇을 표준으로 삼아야할까? 당시 이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 갑론을박으로 논의됐던 핵심적인 사안이었다. 프랑스 과
학자들은 오랜 고심 끝에 지구의 크기에서 표준을 얻기로 결정했다. 지구의 둘
레를 바탕으로 길이의 단위를 정하자는 주장이었다. 지구의 자오선을 기준으로
삼고, ‘지구의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거리’의 1000만분의 1을 길이의 단위로 삼
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표준을
제쳐두고 그렇게 멀리서 찾을 필요가 있냐는 비판이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
람들을 위한 척도를 세상의 크기에서 구하는 것만큼 적절한 게 없어보였다. 그
것은 프랑스 혁명의 대의와도 잘 들어맞았다.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도량형의 표준은
인류 전체의
공통 유산인 ‘자연’에서!
1장 단위의 기원과 역사

미터, 모든 단위의 기초가 되다

도량형을 개혁하던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학자들은 새 도량형에 적합한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1790년 길이의 기본단위를 ‘미터’로 부르자는
한 시민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새 이름으로 결정됐다. 미터는 ‘잰다’는 뜻의 그리
스어 메트론(metron) 혹은 라틴어 메트룸(metrum)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데 미터는 단순히 새로운 길이 단위의 명칭으로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도량형의 명칭이 바로 ‘미터법’이었으니 말이다. 왜 하필 길이 단위를 그대로 전
체 도량형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일까? 이유는 길이의 단위인 미터가 모든 단위
의 기초 역할을 하도록 정해졌기 때문이다. 길이, 넓이, 부피, 질량 등 다양한
단위가 체계적으로 상호 연결되어야 한다는 게 당시 도량형 체계를 논의하던
학자들의 생각이었다.
가령 넓이의 기본 단위인 아르(are)와 부피의 단위인 리터(L)는 길이의 단위
인 1 미터로부터 정해졌다. 아르는 변의 길이가 10 m인 정사각형의 넓이이고,
리터는 1 m3 부피의 1000분의 1로 정해졌다.
질량의 경우는 어땠을까. 오늘날 질량의 기본단위가 킬로그램(kg)이지만 당
시에는 그램(g)이었다. 그램은 0 ℃ 때 순수한 물의 부피 1 cm3의 질량으로 정
의되었다.
1793년 라부아지에는 결정학자 르네쥐스트 아위(1743~1822)와 함께 질량의
기본단위를 ‘그라브(grave)’로 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두 사람은 1 그라브
를 ‘물 세제곱 데시미터의 질량’으로 정의했다. 이 때 데시미터(dm)는 10 cm를
말한다. 훗날 그라브는 킬로그램(kilogram)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넓이, 부피, 질량이 길이에서 정의됐기 때문에 우선 길이의 기준인
‘미터’를 구해야 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길이 단위인 미터는 어떻게 구했을까?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물 1 dm3

질량

넓이

부피

100 m2 = 1 아르(are)

1 m3 = 1000 리터(L)
1장 단위의 기원과 역사

구사일생으로 얻은 미터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가 1 미터를 ‘지구의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거리의 1000만


분의 1로 하자’라고 정의했지만, 실제 1 미터의 길이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지구의 북극과 적도까지의 거리를 실제로 재야했다.
프랑스 학자들은 이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파리를 지나가는 자오선을 이용했
다. 그리고 측량 작업을 간소화하기 위해 지구 자오선의 일부분을 측정해 전체
를 계산하기로 했다. 바로 프랑스 북쪽 국경지역인 덩케르크에서 출발해 파리
를 거쳐 바르셀로나까지 이어지는 자오선의 길이를 측정하기로 한 것이다. 이
자오선의 길이를 측정하고 위도를 재면, 파리를 지나가는 자오선의 총 길이를
구할 수 있다. 또 이 자오선 길이를 통해 북극과 적도까지의 거리를 계산해낼
수 있었다.
지구 자오선을 측정하기 위해 프랑스의 유명한 천문학자인 장 밥티스트 들랑
브르(1749~1822)와 피에르 메생(1744~1804)이 나섰다. 한 사람이 덩케르크
부터 로데즈까지의 북쪽 지역을 측정하고, 다른 한 사람이 로데즈에서 바르셀
로나까지의 남쪽 지역을 측정하기로 결정했다.

메생은 낮에는 정부에서 1792년 6월 들랑브르는 당대의 최신 과학기구를 마차에 싣고 파리의 북쪽으
지도 제작자로 일했고,
로, 메생은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라부아지에는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모든
밤에는 천문학에 전념해
11개의 혜성을 발견했다. 힘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임무를 그만둬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이런 공로로 그는 1782년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1년 정도 걸릴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 달리 들랑브르와 메생의 자오선 원정은
되었다. 6년이 넘게 걸려 1798년 말에 마무리됐다. 프랑스는 대혁명으로 혼란스러웠고,
들랑브르는 3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원정 도중에는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북쪽에는 프로이센-오스
천문학을 시작한 늦깎이
천문학자였다.
트리아 군이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노리며 공격해왔고, 남쪽에서는 프랑스와 스
그는 1792년 자오선 원정 페인 간의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임무를 맡기 몇 달 전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들랑브르와 메생이 겪은 고초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1 미터의 길이를 ‘지구의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거리’를 기준으로


정의했기 때문에 이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내야 했다.
당시 학자들은 이 거리의 일부분을
직접 측정하여 전체 거리로 환산하려고 했다.
로데즈에서
덩케르크까지의
거리는 내가・・・

그럼 난 로데즈에서
바르셀로나까지의
거리를…

자오선
1 미터 = 지구의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거리 × 1/1000만

도였다. 어수선한 시국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의심스러


운 눈길을 받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도구들을 짊어지고 산이나 종탑에 올라가서 주위를 관찰
하며 기록하는 그들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는 건 당연한 얘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부상을 당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목숨을 잃
을 뻔도 했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 두 학자는 1798년 10월 프랑스 남부의
도시 카르카손에서 만났다. 이후 파리로 돌아온 두 학자는 세계 최초의 국제 과학
협회인 국제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에 측정 자료를 제출했다. 그 결과
1799년 당시 최고의 과학기술을 동원해 만든 ‘미터원기’가 탄생하게 된다.
1장 단위의 기원과 역사

나폴레옹과 운명을 함께 한 미터법

“정복은 순간이지만, 미터법은 영원하리라.”


들랑브르와 메생의 오랜 원정으로 최초의 미터원기가 제작된 1799년. 그
해 말에는 미터원기를 이용해 백금으로 된 최초의 ‘킬로그램원기’도 만들어졌
다. 초기 질량의 기본단위였던 그램이 킬로그램으로 바뀐 것이다. 이유는 그
램이 너무 작아 정밀한 측정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편 킬로그램의 정의도 애초 라부아지에가 정했던 것과 달라졌다. ‘4 ℃일
때 물 1 세제곱데시미터(dm3) 부피에 해당하는 질량’으로 킬로그램의 정의가 바
뀐 것이다. 이는 물의 밀도가 최대가 되는 온도가 섭씨 4 도임을 밝힌 당시의
과학 성과가 반영된 것이다.
이처럼 미터원기와 킬로그램원기가 만들어지면서 미터법은 1799년 파리 주변
지역에서부터 강제 시행되었다. 그리고 1801년 당시 프랑스 최고 지도자이자 곧
황제가 될 나폴레옹이 프랑스 전역에 미터법의 사
동아일보

용을 의무화시켰다. 그는 과학자들의 미터법에 대


한 업적을 드높여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생각이나 제도가 처음부터 무난
하게 받아들여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미터법
또한 그랬다. 습관과 버릇은 쉽게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량형 또한 관습과도 같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새로운 도량형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서 이런 일도 벌어졌다. 당시 프랑스에는 영국의
파운드와 비슷한 질량 단위인 ‘리브르(livre)’가
나폴레옹 있었다. 상인들이 새로 등장한 질량 단위인 킬로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정복은 순간이지만,
미터법은 영원하리라!

그램을 리브르와 같은 단위라고 잘못 얘기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리브르는


500 그램이 채 안 되는 질량이다. 따라서 킬로그램을 리브르라고 속이면 상인
들은 2배 이상의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처음엔 미터법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던 나폴레옹도 자신의 처지가 위태로워
지자 마음을 바꿨다. 러시아 침공이 실패로 돌아간 1812년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이 약화되자, 미터법을 철회하고 예전의 낡은 도량형 제도를 쓰게 했다. 또
한 과학자에 대한 그의 태도도 돌변했다. 그는 “이 나라 4000만 명도 만족시키
지 못하면서 과학자들은 감히 전 세계인의 동의를 얻길 바랐다”고 조롱하기까
지 했다. 그 후 1814년 4월 나폴레옹은 지중해의 엘바 섬으로 추방당했다. 이렇
게 초기 미터법의 역사는 나폴레옹과 운명을 함께 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미터법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다.
1장 단위의 기원과 역사

미터법의 부활, 모두를 위한 도량형으로

미터법은 프랑스에서 탄생했지만, 제일 먼저 프랑스에서 거부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터법은 다시 부활했다. 1840년 1월 1일 프랑스 정부는 국내와 식민지
에 미터법 사용을 의무화했던 것이다. 미터법 제정에 돌입한 지 40여년 만에 미
터법이 프랑스에서 자리를 잡게 된 셈이다.
이는 그 사이 일어난 많은 국제적인 변화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무역의 대상
과 제국의 영토를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넓혀 나갔다. 또한 많은 나라들은 통
일된 도량형을 사용하면 무역에 이롭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더구나 이 당시
1840년은 주변 국가인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미터법 사용을 의무
화한지 20년이 지난 상황이었다. 이미 미터법은 프랑스를 넘어 세계로 나아가
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더욱 확산되었다. 사람들은 18세기 중엽
전 세계로 확산된 산업혁명의 성과를 한 자리에서 보기를 원했다. 정치, 경제, 산
업,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만국박람회는 이런 요구에 부응하는 국제 행사였다.
1867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0개국
의 학자들이 참석했다. 학자들은 국제 통상이 늘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국제적
으로 통일된 도량형 제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같이했다. 그 결과 1872년 세계
각국의 ‘미터 국제위윈회’ 위원들이 프랑스 파리에 다시 모여 세계의 여러 도량
형을 비교해 보았다. 그리하여 미터법은 실용적이면서도 학술적으로 편리한 체
계로 인정받았고, 28개국 위원들은 미터법에 따를 것을 결정했다.
이러한 노력은 1875년 ‘미터협약(Meter Convention)’이라는 결실로 이어졌
다. 그 해 5월 20일 세계 17개국이 미터협약을 체결하면서 미터법은 이제 명실
상부한 국제 단위체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로써 ‘모든 시대, 만인을 위한’ 도
량형을 만들고자 한 과학자들의 꿈이 현실로 이뤄진 것이다.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1867년

1875년

모든 시대, 만인을 위한 도량형!


1장 단위의 기원과 역사

대한제국에 상륙한 미터법

우리나라가 미터법을 처음으로 도입한 시기는 1세기 전 대한제국 시절이다. 구


한말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감안하면 예상보다 일찍 미터법을 받아들인 셈이다.
1902년 왕실에 관한 모든 업무를 일괄적으로 담당하는 궁내부(宮內府)에 ‘평
식원(平式院)’이라는 관청이 설치됐다. 평식원은 도량형 업무를 관장하였는데,
‘도량형 규칙’을 제정해 도량형 제도를 법제화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시기 우리 고유의 단위인 ‘결부속파법’에 미터법을 적용했
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1 줌(把)은 1 ㎡, 1 단(束)은 10 ㎡, 1 짐(負)은 100 ㎡, 1 목
(結)은 10000 ㎡로 정하는 식이었다. 이는 10진법 단위인 미터 단위와 일치하는
단위체계를 갖추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거리 측정에서도 1 주척(周尺)은 0.2
m, 1 보(步, 6 주척)는 1.2 m, 1 칸(間, 10 주척)은 2 m로 정하는 등 우리 고유단위
를 미터로 정의해 그 값을 나타내었다. 1905년에는 이런 내용의 도량형 규칙들이
대한제국 법률 1호가 되었다. 도량형 체계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노력은 조선시대
말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의 하나였던 셈이다. 당시 우리나라
는 여러 선진국과 비슷한 시기에 국가의 표준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하
지만 한일합방으로 이 모든 일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는 1959년 미터협약에 가입하고 1961년 국제단위계를 사
용하는 계량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1963년부터 국제표준인 국제단위계를 정
착시키기 위해 법정 계량단위로 채택하면서, 거래와 증명에는 국제단위계 이
외의 다른 단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이후 신발 치수를 나타내는 ‘문
(文)’이 밀리미터(mm)로 대체되었다.
1983년에는 건물과 토지를 거래할 때 ‘평’을 사용하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평・돈・근 등의 비(非)법정 계량단위는 이후에도 여전히 실생활에서 광범위하
게 사용되었다. 그러다 2007년 7월 1일에 이르러서야 비법정 계량단위의 사용
단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금 열 돈!
땅 백 평!

대한제국 법률 1호, 도량형법


우리 고유의 ‘결부속파법’에
미터법을 적용하여, 10진법 단위인
미터 단위와 일치시켰다.

넓이
1 줌(把) 1 m2
1 단(束) 10 m2
1 짐(負) 100 m2 (= 1 아르)
1 목(結) 10000 m2 (= 1 헥타아르)
거리
1 주척(周尺) 0.2 미터
1 보(步) 1.2 미터 (= 6 주척)
1 칸(間) 2 미터 (= 10 주척)

평, 돈을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
평과 돈은 현재도 널리 쓰이고 있는 단위다. 그래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용한
단위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단위는 우리나라 고유의 단위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남긴 잔재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0년 일본의 측량부대가 비밀리에 우리나라 국토를 그들만의
단위인 자로 재서 그 면적을 ‘평’으로 계산했다. 그런 다음 지적등본에 땅의 면적을
평으로 기재했던 것이다. ‘돈’은 일본의 진주양식업자들이 썼던 무게의 단위였다.

이 전면 금지됐다. 그동안 토지나 아파트, 건물 등의 넓이에 쓰던 ‘평’ 대신 ‘제


곱미터(m2)’를, 귀금속이나 육류, 곡물 등의 무게에 쓰던 ‘돈’이나 ‘근’ 대신 ‘그
램(g)’이나 ‘킬로그램(kg)’을 반드시 쓰도록 바뀐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파트나 에어컨 광고에는 18형, 25형, 32형이라는 말로 평
의 잔재가 남아있다. 평이라는 단위를 직접 쓸 수 없으니 이와 비슷한 ‘형’이
란 말로 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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