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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머리카락은 열려진 창문을 통해서 밀어닥친 바람을 따라 어지러이 흩 날리고 있었다. 소녀의 기다
란 머리카락은 오렌지에 가까운 금빛으로, 바람이 불 때면 부드럽게 사방으로 번지면서 흔히 볼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하곤 했다.
"……아버지."
침묵만이 감돌던 소녀의 방안에서 무기력한 한마디가 튀어나옴과 동시에 소녀 의 밝은 오렌지색 눈동자에
서 흰 구체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눈동자에서 부풀 어 오른 은빛의 구슬은 이윽고 또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녀의 눈가로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소녀는 갑자기 떨어진 그 물줄기에 약간 당황한 듯 눈가로 손
을 가져가 양 볼을 촉촉이 적신 눈물을 조심스럽게 훔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 녀는 잠시 후 손을 스르르
내리고 말았다. 손가락으로 가리기엔 눈물이 너무나 도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손가락의
움직임만으로는 도저히 그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소녀의 눈물은 매혹적이었다. 가느다란 턱선을 타고 내리는 그것은 너무도 맑 고 깨끗한 성수. 의자를 적
실 것 같이 흐르는 그 눈물은 정말로 맑고 깨끗했다.
그 엄청난 고함소리.
듣고 있던 사람이 어이없어 질 정도의 커다란 목소리로 소녀는 발악하듯 고함 을 쳤다. 어찌나 그녀가 고
함을 세게 쳤는지, 그녀가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그 녀가 기대 앉아있던 의자가 다 삐걱거릴 정도였다.
방금 전, 너무나도 청초한 분위기로 주르륵 주르륵 눈물을 짜내고 있던 모습과 는 완벽히 대비되는 모습이
었다. 눈물에 젖은 볼을 훔치던 아리따운 모습은 이 제 소녀에게 없었다. 소녀는 무서운 걸음걸이로 저벅
저벅 문 쪽으로 걸어갔다.
오렌지 빛 눈동자에 맺혀 있던 눈물은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눈동자가 번 뜩, 얼음을 머금은 듯 차갑
게 빛난다.
소녀는 그 말과 함께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소녀는 큰 소리로 외치더니 마루를 쿵쿵 울리며 요란스럽게 걸어 나가기 시작 했다. 눈물이 떨어졌던 그녀
의 금빛 머리카락은 요란스러운 움직임에 의해 뒤 쪽으로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휘날리고 있었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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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4 :: 오! 나의 주인님 - PART 1 : 빚대신 끌려가는 금발 소년(1)
"어떻게든 갚을 테니 걱정 마."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뭐라고 그녀의 말 에 반박하려는 순간, 프리나
의 고운 입술이 스륵 벌어졌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지라고."
프리나와 사이좋게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던 갈색 머리칼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래도 여태까지는
신사와 숙녀의 대화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말을 나누고 있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프리나가 목소
리를 쫙 깔면서 조금 듣기 껄끄러운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웃기는 군."
하지만 프리나는 너무나도 간단히 그의 말을 일축시켜 버리고는 오른손을 움 직였다. 남자의 시선이 꿈틀
했다. 햇빛이 번뜩한다고 느낀 순간, 프리나가 말 을 하다말고 손을 밑쪽으로 가져가더니 검 집에 걸려
있던 검을 놀라운 속도로 휙 하고 빼들었다.
신속한 발도!
그녀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향한 순간, 흰빛으로 번뜩이는 날카로운 광택의 검 한 자루가 완연한 햇살을
반사하면서 턱하니 그 모습을 드러냈다. 프리나의 손에 들린 그 검은 살인을 위한 흉기라고 보기엔 아름다
운 선을 가지고 있었는 데, 그 검이 뿜어내는 예리하고도 섬뜩한 광택에 남자는 얼어버리는 수밖에 없 었
다.
남자는 속으로 욕지기를 뱉어내면서 프리나를 향해 물었다. 프리나는 당연하 지 않냐는 어조로 말했다.
순간,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프리나를 올려다보았다. 문득 그의 얼
굴 위로 차가운 공포감이 흘러갔다.
그런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프리나는 검을 더더욱 낮추었다. 프리나의 입 꼬리가 쓱 올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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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프리텐 가의 저택을 나서는 남자의 발걸음은 상당히 무거웠다. 그는 프레틴 가 문의 저택의 정원으로 파랗
게 돋아난 잔디를 밟으면서 거친 욕을 뱉어냈다.
남자는 프리나의 험담이란 험담은 모조리 늘어놓으면서 프레틴 저택을 빠져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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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프리나 가문의 집사장이자 프리나에게는 언제나 가장 큰 의지가 되는 노인은 프리나
를 향해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시했고 프리나는 그런 그를 약간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
는 한참동안 노인의 얼 굴을 바라보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프리나가 소리를 높이며 외치자, 여태껏 그녀의 말에 인자하게 대꾸를 해주고 있던 집사의 얼굴이 얼핏 굳
더니 곧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 다.
집사는 프리나를 바라보면서 자부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애써 이렇게 말했지 만 프리나의 얼굴은 굳은 채로
풀릴 줄을 몰랐다.
"……."
"핫핫, 집사?"
"예."
"7000 만 케트입니다."
집사가 나직하게 대꾸하자 프리나가 눈썹을 찌푸렸다. 하아, 하고 한숨을 내 쉰 그녀는 두통으로 어질거
리는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일린 가(家).
"…제길."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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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5 :: 오! 나의 주인님- PART 1 : 빚대신 끌려가는 금발 소년(2)
프레틴 저택이라는, 세이피안에서도 알아주는 대저택을 팔아치우고 집안에 쌓 여 있던 갖가지 보석과 보물,
값나가는 것이라면 숟가락 하나도 빠지지 않고 거 의 다 팔았건만 프리나에게 돌아온 것은 빚의 10 분의
1 도 채 되지 않는 액수뿐 이었다.
"자아, 내일인가? 그 엄청난 해결사 집단이 찾아올 날이. 좋아, 마지막이 될지 도 모르니까 좀 놀아봐야
지."
"집사! 어딨어!"
"사람들은 다 보내줬어?"
"네, 다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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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가 외쳤다. 아일린 가문, 프레틴 가가 7000 만 케트라는 엄청난 빚을 진 그 가문의 잔혹무도한 해결
사들이 올 때까지 만이라도 이 여린 소녀와 함께 있어 주고 싶은 것이 집사의 심정이었다.
함께 있고 싶었다.
앞으로, 프리나가 행복해 질 때까지 함께…… 어릴 때부터 너무나도 많은 고생을 해왔던 이 소녀와 함께,
끝까지 함께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행복… 하십시오, 프레틴… 아가씨."
"항상 집사, 집사, 그렇게 불렀는데… 집사는 이름이 뭐야? 십 년이나 함께 있 었으면서 이것도 몰랐다니,
나 정말 한심하지?"
"그럼, 어서 가!"
프리나는 재촉했고 집사는 슬픈 얼굴로 다시 되돌아서서 저택을 나가기 시작 했다. 프리나는 집사가 저택
에서 나가자말자 바로 이층으로 뛰어올라가 창문 을 통해 누군가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누군가, 집사가
사라지는 모습을. 프리나 는 그의 백발이 아예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오랫동안… 눈물을 끊
임없이 흘리며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 해 준 그의 뒷모습을 훔쳐보며 작게 말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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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들어와요!"
"우와? 많이도 왔군요? 그런데 어쩌지? 우리 집엔 이만한 사람들 다 먹일만한 음식은 없는데?"
"뭐라고?"
"내가 이 집의 주인이라고."
프리나는 당당히 외쳤다. 그들은 놀란 눈으로 프리나를 찬찬히 훑었다. 상당 히 가녀린 모습의 소년이 그
들의 앞에 당당한 얼굴로 서 있었다.
머리카락을 그렇게 처리한 그녀는 푸,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가
져온 기다란 천을 좌악하고 펼쳤다. 그녀는 천천히 상의를 벗고 거울을 보며 천으로 자신의 가슴 부분을
꽁꽁 묶어 나가기 시작했 다.
〈남장〉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이 모두 끝난 후, 그녀는 거울 앞에서 조금은 어설픈 미 소년이 된 모습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여튼 들어오겠어?"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구!'
프란은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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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일주일전에 아무도 모르게 자살했지 뭐야? 그것도 할복으로 말이 야. 핫핫, 정말 도움도 안 되
는 아버지를 뒀다니까."
집안을 뒤지기 시작한 세 명과는 달리 두목인 듯 보이는 갈색머리 남자와 그 의 옆에선 또 다른 남자는 움
직이지 않은 채로 프란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 다.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 중 하나가 차가운 목
소리로 입을 열었다.
"죽었어."
프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여자한테 사기 당했다더군."
"아일린 가에 빚을 진 것은 어쩔 셈이지?"
"글세."
"뭐야!"
"……."
남자의 질문에 프란은 어쨌든 자신이 유도한 바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그 녀는 몇 대 얻어맞아 욱씬거
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일어나선 1 층에 남아있 는 유일한 물건인 장롱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왔다. 그리
고 그것을 그들 앞에 내 밀었다.
"……."
"이게 누굴 놀리나!"
남자는 움찔했다.
"하? 뭐라고?"
"……그래서 말인데……."
"……?"
금발의 남자는 갈색 머리의 남자보다 말소리가 현저히 낮고 조용조용할 뿐만 아니라 차분한 인상이 강했다.
그는 또박또박, 마치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말 을 걸 듯 낮게 말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프란에게는 공포
감을 주었다.
그러나……
"헛소리라니!"
프란의 목소리는 매우 당당했기에 위축된 것은 오히려 여태껏 대화의 주도권 을 잡아왔던 두 남자였다. 그
들은 조금 멍청한 시선으로 프란을 바라보았고 한 참 후에 금발의 남자는 품속에서 가느다란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더니 말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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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이야."
침울하게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비켈린들 사이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들이 막 여정을 시작한
직후였다.
"웃기네. 도망갈 거라면 당신들 오기 전에 벌써 도망갔어. 그리고 도망가 봤 자 아일린 가문에서 수배만
하면 그 날로 바로 잡혀 들어오는데 왜 도망을 가?
난 그렇게 멍청하지 않단 말이야! 당신 바보야?"
"……그래도 잔말 말고 묶여 있어."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프란의 말에 대꾸할만한 찬란한 말솜씨를 가지지 못했 고 그래서 그다지 설득력
없는 말을 하는 수밖에 말았다. 프란은 인상을 있는 대로 없는 대로 다 구기면서 뱉어냈다.
"쳇."
"시끄럽군."
"……."
금발의 남자는 아예 프란의 말을 무시하기로 작정을 했는지 이번에는 대꾸조 차 해주지 않았다. 프란은 자
신의 뒤에 앉아 묵묵히 말을 몰고 있는 그의 얼굴 을 마주보려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
그러나 금발의 남자는 또 프란의 말을 무시했다. 아니, 오히려 말의 속도를 갑 자기 높임으로서 프란의
입을 저절로 닫히게 만들었다. 갑자기 말이 달리는 바 람에 프란은 깜짝 놀라 크게 소리를 쳤다.
"크아아아악!"
프란이 막 고함을 치는 그 순간, 말의 속도가 딱하고 멈추었다. 명백히 자신을 놀리는 이 행위에 프란의
머리 위로 천천히 김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프란은 머 리끝까지 화가 차올라 그대로 터져 버릴 것 같은 기
분을 느꼈으나 자신의 입장 상 뭐라고 떠들어 봤자 죽도 밥도 안 될 것이 뻔하기에 억지로 입을 다물며 씩
씩 거렸다. 프란이 조용해질 기미를 보이자 금발의 청년이 천천히 말에 속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프란은 금발 청년의 뒤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남자들을 향해서 내던지듯 물 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원망에 찬 그들의 시선뿐이었기에 프란은 한숨과 함께 시선을 거두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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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비켈린을 잘 구슬려서 자신을 아일린 가문으로 데려가게 한다. 여기까지 는 성공.
둘째, 아일린 가문의 주인을 만나서 최대한 잘 보인다…… 어떻게 잘 보일지 는 미지수.
넷째, 결과.
작전이 안 먹히면?
"죽어야지 뭘 어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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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6 :: 오! 나의 주인님- PART 2 : 아일린 가의 주인과 카르멘 가의 가주(1)
"흐음, 그렇게 남의 말을 무시했다간 인기 없을걸? 젠장, 그렇게 굴다간 평생 총각으로 늙을지도 모른다
구. 나 같이 사교성이 많아야 여자들이 좋아하지. 그 렇다고 나처럼 외모가 출중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하지만 케인으로부터의 대꾸는 여전히, 정말로 여전히 없었다. 한참만에야 자 신의 말이 맛있게 씹혔다는
것을 깨달은 프란의 얼굴 위로는 불쾌감이 스쳤지 만, 역시 그는 꾹 하고 참았다. 아니, 참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표현이 옳다.
"흐, 흠. 어, 어쨌든! 집에서 출발한지도 이틀이 지났으니 이제 아일린 가까지 는 하루 정도면 되겠지?"
"어? 어째서?"
프란의 질문에 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프란은 저 입에는 자물쇠라도 채웠나, 라고 투덜거렸지만 그런
말을 고스란히 듣고 있는 케인은 그 말에 관해서도 일 절 언급이 없었다.
"3 일이 걸린다구?"
프란이 듣기로는 아일린 가문의 저택은 세이피안 남부지방 샤롯 마을에 있는 프리텐가의 저택에서 삼일 거
리에 있는 세이피안 동부 헬리언 영지에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맞다면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에서 떠난 지도 이틀이 지났으니 내일이면 도착해야하는데 앞으로도 3 일이 더 걸린다는 말은 뭔가 이
상했다.
케인, 이 무뚝뚝한 금발의 남자는 반복해서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면 귀찮아져 서라도 언젠가는 대답을 해
준다는 것을 말이다.
"왜 그런데?"
"……시끄럽군."
"에이, 왜 그러냐니까."
"……."
"……."
"이상하네. 말을 해보라니까."
이런 식으로 한참이나 끈덕지게, 약 1 시간이나 귀찮게 그를 들들들 볶아대던 프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체력의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더 이상 참 지 못하고 지쳐 떨어지려 하는데, 그 때서야 케인이
입술이 열릴 기미를 보였 다.
'
무섭군, 무서워. 이제야 얘기를 하냐! 당신이 그러고도 인간이야!?'
프란은 순간 당황했다. 케인의 대답은 그녀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을 달
리고 있는 케인의 등에 자신의 머리를 쾅, 박으면서 외쳤다.
"윽!!"
허리에 엄청난 속도로 프란의 머리가 부딪히자 케인은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 한 비명소리를 냈다. 여태까
지 차분한 분위기로 시종일관 프란의 말을 무시해 오던 그답지 않게,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내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란의 머리는 여간 단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통증 이
허리 쪽으로부터 찌르르, 머리까지 밀려왔다.
여태까지 그가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프란을 대함으로서 프란이 얼마나 답답해 했는지를 고려한다면 이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바꿔 말한다면, 프란의 머리가 얼마나 단단한지 입증해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프란은 케인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느새 프란의 머리에 부딪힌 허리의 충격을 극복하고 말
에 채찍질을 가하고 있던 케인이 무감정한 목소리 로 말했다.
"하긴."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럼 도대체…?"
프란이 한참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데 어떤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들려왔 다. 프란은 자신의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하면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꺾 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케신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말해오자 프란은 하마터면 그래, 라 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려 했는지 를 깨달은 프란은 버럭 고함을 쳤다.
"그건……."
프란은 바짝 긴장하며 케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케신은 프란의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더니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웃음 에 황당해진 프란이 그를 바라보는데, 그는 갑자기
표정을 무덤하게 바꾸더니 말고삐를 고쳐 쥐곤 말했다.
"가보면 알게 되겠지."
"젠장맞을."
"뭐? 왜?"
"제길! 뭐라구!"
"시끄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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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이 차낸 먼지가 자욱하게 앞을 뒤덮는다. 부지런한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흔들고, 안개처럼 깔리는
희뿌연 먼지가 사정없이 콧속으로 스며든다. 말들이 튕겨 내는 고운 모래가 인위적인 안개와 뒤섞여 호흡
을 압박해 들어온다.
"다 왔군."
"……이, 이봐?"
"뭐냐."
"여기 말이야."
프란은 말을 하다 말고 침을 꿀꺽 삼켰다.
카르멘 가.
아일린 가문이 제계를 쥐고 흔드는 황제의 가문이라면, 카르멘 가는 대륙의 무 예를 휘어잡고 있는 최고의
가문이다.
검을 제대로 배우려면 카세타의 카르멘가로 가라는 말조차 있을 만큼, 카르멘 가는 유명한 집안이었다.
가로세로 약 12 휴나에 달하는 이 엄청난 크기의 조각상은 대륙 어디를 찾아봐 도 오로지 카르멘 가문의
저택에서밖에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대체 왜 여기로 온 건데? 내가 만나는 사람은 카르멘 가문의 주인이 아니라 아일린 가문의 주인이란 말이
야!"
케인은 말없이 먼저 말에서 내리더니 프란의 허리를 잡아 거의 강제로 말에서 끌어내렸다. 줄을 풀어준 지
얼마 되지 않아 얼얼한 손을 케인이 붙들자 프란 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비틀었다. 케인
은 아랑곳 않고 프란을 땅으로 내려놓았다. 며칠동안 말 위에서 달렸던지라 프란에게 발이 맞닿는 땅 의
감촉은 매우 낯설었다.
프란은 눈을 크게 떴다.
"왜? 아일린 가문의 주인이 왜 여기 있는데? 아일린 가문의 장이 카르멘 가주 하고 친구라도 되는 거야?"
험상궂은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다가오자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자신을 몇 대 때렸
던 남자에 대한 은연중의 공포도 프란에게 어느 정 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프란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케신의 말에 프란은 굳었 던 몸을 스르르 풀고 말았다.
'살아남길' 이라는 단어가 프란의 가슴에 와서 그대로 박혔다. 프란은 오른손 의 주먹을 꽉하고 쥐었다.
피가 새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꼭 쥔 프란의 몸이 살 짝 떨렸다. 그녀는 낮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케신을
향해 말했다.
"고마워."
프란이 눈을 멀뚱하게 뜨는데, 케인을 제외한 나머지 남자들이 갑자기 말에 훌 쩍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프란은 더더욱 눈을 크게 떴다. 왜 저 자들이 다시 말을 타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만 들어가지."
'살아남길.'
'물론이야.'
"우, 우왓!"
그리고 아일린 가문의 해결사라는 작자들의 손에 이끌려 아일린 가문의 장을 만나러 몇 일동안 말 위에서
만 힘들게 생활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오늘도 또 황당한 사실에 직면했었다. 자신이 아일린 가문이 아닌
카르멘 가문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시끄러워."
듣다 못한 케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옆에서 눈치를 줬지만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프란의 입을 다물게 하
지는 못했다.
'……재목이 될 것 같긴 하군.'
케신이 했던 말을 회상하면서 케인은 프란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프란의 뻔뻔스러움 정도라면 전 대륙의
그 어떤 상인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케인이었다. 단, 그것은 어디까지나 뻔뻔스러
움에 한해서만 해당하는 사항이지만.
물론 비켈린들 사이에서 [다섯 마디의 냉혈 대장]으로 통하는 자신에게 바락바락 대들면서 대화의 주도권
을 쟁탈해버린 베짱도 어느 정도는 인정해줘야 했다.
"우오오오오오오옷!!!!"
"시끄럽군."
"시끄럽군."
"……."
그렇게 프란이 계속 감탄성 어린 비명을 지르고 케인이 핀잔을 주는 가운데에 그들의 발걸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팡, 팡, 팡.
숨이 막혀서 계속 자신의 가슴을 쳐대고 있는 프란을 보며 케인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프란은 대답했
다.
"……."
케인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그리고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고 그의 말없는 긍정에 프란은
잠시 다리가 휘청임을 느꼈다.
"노, 노, 놀랍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성이 있어도 되는 거야? 궁성보다 큰 성이 있다면 그것도 처형감
이라구!! ……정말 너무하잖앗!!!"
"케인님!"
"수고하는군."
케인은 자신의 이름을 부른 남자를 향해 사무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3 일 동안 같이 다녀서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케인이 무뚝뚝하다고 생각하는 프
란이었다.
문지기가 손으로 프란을 가리켰다. 프란은 순간 몸을 흠칫 굳혔다. 그녀는 살짝 다가가 케인의 옷깃을 슬
며시 움켜쥐었다. 그저 긴장감에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상황을 이상하게 오해한 문지기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아, 케인님의 신부감인건가요? 하긴, 가주님은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죠. [케인, 신부감이
생기면 나한텐 반드시 보여줘], 라고요. 인사 가는 길이신가 보죠?"
"……."
"……."
경국지색의 미모라고 말하긴 뭣했지만, 귓가에서 단정하게 빛나는 백금발이라던가 당당함이 가득 베어나는
오렌지빛의 커다란 눈망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꼭 다문 입매나 치켜올려진 눈썹이 약간 중성적인 느낌
을 풍겼지만, 전체적으로 [그]보다는 [그녀]에 가까운 외모다. 하지만 프란을 살펴보던 문지기의 시선이
가슴에 맞닿은 순간, 문지기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죄, 죄송합니다."
'들키는 줄 알았잖아…….'
"문 열어."
"오란 말이다!"
▷◀▷◀▷◀▷◀▷◀▷◀▷◀▷◀▷◀▷◀
"오, 오오오오오옷!"
"……."
명품임이 틀림없는 그림들이 무서울 정도로 화려하게 복도를 꾸며놓고 있었다. 제법 집안이 잘 되는 편이
었던, 어디서나 당당한 프란도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 정도로.
"정말로 대단하군! 젠장맞을, 누구는 돈 없어서 이렇게 끌려왔는데 누구는 편하게 발뻗고 앉아서 이런거
나 구경하고 있단 말야? 제길제길제길!!!"
"……."
"……알았어."
하지만 케인은 또다시 프란의 말을 무시함으로서 그녀를 혼자서 발악한 황당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렸고 프
란은 입술을 꾹 깨물며 부들 떨었다.
막 다시 발을 옮기려다 말고, 프란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했다.
"말도 안 돼!"
"허어……"
프란은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걷고 있는 케인쪽으로 타다닥
뛰어가 그의 옆에 서며 물었다.
케인은 프란의 질문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케인이 고개를 돌리더니 옆에 있던 프란
을 보았다. 프란은 잘 가던 케인이 갑자기 멈춰서 자 약간 의아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뭐? 왜?"
케인은 머리를 긁으며 말하는 프란을 향해 조금은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프란은 모르고 있었지만, 케
인은 그 누구에게도 웃음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 딱딱한 사내였다. 거의 몇 년만에 얼굴에서 무표정함
을 털어내며, 케인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둘은 동일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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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8 :: 오! 나의 주인님- PART 2 : 아일린 가의 주인과 카르멘 가의 가주(3)
케인은 방안에 들어서며 말하고 있었다. 프란에게 검을 들이댄 남자는 잠시 케인을 바라보더니 검을 뽑았
던 것처럼 재빠른 속도로 검을 거두어 들였다. 그가 들어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프란은 그 자를
쏘아보면서 서둘지 않고 천천히 케인에게로 달려갔다. 그자의 눈매는 매서웠다. 그의 눈과 끝까지 경쟁하
며 방에 들어섰을 때, 문이 닫혔다.
"……."
정말 죽여버릴 것 같았던 그 남자의 검을 받았던 프란의 원망이 섞인 눈을 마주한 케인은 차가운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프란은 그런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고, 케인은 그 바람에 상당히 머쓱해졌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런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해, 프란은 케인이 얼굴 위로 살짝 떠
오른 미안함이라는 감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한참동안 씩씩거리던 프란은 잠시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따라와라."
"뭐, 뭐야!"
또 한번 내질러지는 비명.
프란은 자신이 오늘 정말로 심장발작으로 죽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다음 순간 드러난 것은 자신이 검술
훈련을 하던 검술장이라고 해도 믿어줄 만한 크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발을 들여놓은 그 방안
은 무척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엄청나게 큰 바닥을 그대로 덮어주고 있는 고풍스러운 카펫과 그 위에
놓여진 무수한 의자들, 탁자를 비롯해서 싱싱한 화초 몇 개가 그 방을 꾸미고 있는 전부였다.
"비켈린인가?"
"그렇다."
"……케인?"
프란이 연신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을 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소년의 주위에 서 있던 험상궂게 생긴
남자 중 하나가 케인을 바라보며 갑작스럽게 물어왔다. 프란은 자기 집안의 이야기가 나오자 소년을 정신
없이 훔쳐보던 시선을 거두곤 몸을 움찔했다.
케인의 미간이 잠시 좁혀졌다.
"…죄송합니다."
"정말이냐?"
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척 엄숙하면서도 차가운, 그리고 도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프란은
속으로 살짝 놀랐다.
오늘 자신이 만나야하는 가주의 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소년의 나이가 자신과 비슷하게
보이는 걸로 봐서 가능성이 있을 것도 같았다.
"……그렇습니다, 가주님."
"한심한 녀석."
▷◀▷◀▷◀▷◀▷◀▷◀▷◀▷◀▷◀▷◀
[뭐……?]
[그리고 신체적 요건도 다른걸. 힘부터가 다르다고! 넌 아무리 해봤자 나한테 이길 수가 없어. 여자애니
까.]
지금이라면 분명 '그런 성차별 적인 발언을 하다니!!!' 라면서 헤냔의 머리카락을 반쯤 뽑아주고 '검이란
힘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잘 갈아두었던 날카로운 검을 꺼내들었고 매서운 눈을 했겠지만 불행히도 그
당시의 프란은 지금처럼 굳세고 단단한 녀석은 아니었다.
그 때 처음으로 느꼈었다.
절대 수긍할 수 없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을.
그 때 처음으로 현실을 직면했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
그리고 오늘.
한참의 정적이 주위를 휩쓸었다고 생각한 순간,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
"……."
"헉!"
이 소년이 가주라는 것을 알았으면 당연히 존대가 튀어나오고, 살려달라고 빌어야 마땅한데 갑작스러운 반
말로 저렇게 지껄여대는 소년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당황한 것은 프란을 내려다보고 있는 보랏빛 머리카락의 소년, 아일린 가문의 주인이
자 카르멘 가주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이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훗."
갑자기 정적을 깨고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올려다본 그 곳에는 그 싸늘한 눈동자를 가진 가주가 매서운 눈으로 프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프란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뭐·든·지·라, 재미있군."
가주의 싸늘한 눈초리와 마주하는 그 순간, 온 몸의 세포가 하나하나 경직하고 뼈가 으스스, 하는 소리를
내며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면 프란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살아온 프란이었고, 굽힘이 없으며 두려움이 없었던 프란이었다.
검술교단의 검술교사들과 검을 섞었을 때. 그 실력의 열등함이 여지없이 드러났던 그 때조차 눈빛만은 흔
들리지 않았던 그녀였다.
당당히 쳐든 고개로 누구에게나 굽힘이 없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프란은 저 눈빛을 피할 어떤 곳이 있다면, 숨는 것이 가능하다면 숨고 싶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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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9 :: 오! 나의 주인님- PART 3 : 고생문이 열리다!(1)
"운이 좋았어."
한없이 아름답고, 한없이 깊고, 한없이 빛나는 보랏빛의 신비한 눈동자를 가진 가주의 눈동자에서 그렇게
살벌한 빛이 뿜어져 나올 수가 있다는 게 프란으로서는 너무나 너무 놀라웠다. 온 몸을 얼려버리는 그 완
벽한 압도감에 숨조차 막힐 지경이었다.
"……알았나?"
"으, 응?"
한참을 골똘히 방금 전의 일을 멍하게 회상하는 프란의 귀에, 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인은 특유의
차분한 표정으로 프란을 한차례 바라보더니 잠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프란의 눈동자를 또렷이 바
라본 후 입을 열었다.
"……몇 살이야?"
"지난달 1 일, 19 살이 되셨다."
"열 아홉?!"
프란은 경악하듯 외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케인을 삿대질했다.
▷◀▷◀▷◀▷◀▷◀▷◀▷◀▷◀▷◀▷◀
"흐응∼"
"흐으으응∼∼"
프란의 여기저기를 찔러보고 있던 여인은 프란이 가만히 있자 이번에는 프란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갔다.
닭살이 와르르, 더 이상 참지 못할 만큼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느낌에, 프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쳤다.
"어머?"
여인은 프란이 냅다 고함을 치자 입을 막으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프란이 숨을 쌕쌕 내쉬면서
노려보자 여인은 생긋 웃었다. 프란이 이를 부득부득 갈아도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
선을 돌려 프란의 뒤에서 이 모든 황당한 일을 초연한 시선으로 보고 있던 케인 쪽을 보았다.
"어머, 케인? 이거 상당히 여리여리한 도련님이네? 후훗, 살결이 너무 부들부들한 게 잡아먹기 좋겠어.
볼이 발그스름한게 귀엽고……"
"그만두지 못햇!!"
"케인, 살려줘!"
"훗, 귀엽게 굴긴∼. 빼지 말라구! 원래 남자란 말이야, 연상의 여인을 상대할 수 있어야 하는거야. 그
게 진짜 남자지."
금발의 여인, 카르멘 가문의 모든 하인을 관장하고 있는 마린은 프란의 반응을 즐기면서 다시 한 번 베시
시 웃었다. 그녀는 볼을 한 번 콕 찌르며 웃었고, 프란은 다시 한 번 몸에 닭살이 스멀스멀 돋아나는 것
을 느끼곤 팔을 벅벅벅벅!!! 긁었다.
보통의 남자라면 20 대 후반의 여인이 섹시한 자세를 취하며 여기 저기를 건드리면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하겠지만, 프란은 남자가 아닌 엄연한 여자다. 지금은 비록 남장을 하고 있다지만, 본질이 변하는 것
은 아니지 않은가.
프란이 마린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한 케인이 프란을 위해 한마디를 배어냈다. 그러자 프란의 양
볼을 잡아늘이며 즐거워 하고 있던 마린이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케인을 향해 눈을 찡긋하고는 힘껏 잡아 늘였었던 프란의 볼을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한참 프란을 슥하고 훑어보던 마린이 뭔가를 발견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표정에 프란이 살짝 기
분이 나빠져 몸을 틀려는데, 갑자기 마린이 살짝 웃더니 물었다.
"프란 프리텐."
"아야야!!"
"……!!!"
프란이 외쳤다.
"어머, 그래?"
"주방이 좋아!!"
"어머?"
오늘 처음 봤지만 차가움밖에 느껴지지 않았던 가주의 그 싸늘한 시선을 받으면서 그의 곁에서 시중을 든
다는 것은 정말이지 거절하고 싶은 일이었다.
대충 케인으로부터 사정을 들었던 터라, 마린은 부드러운 눈길으로 프란을 몇 번 훑어본 후에 피식 웃었다.
"그건 안 돼."
"왜?"
"가주님의 시중을 들어줄 사람하고 주방에서 일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잘만하면 프란 혼자서 그걸 다
할 수 있을 거야."
▷◀▷◀▷◀▷◀▷◀▷◀▷◀▷◀▷◀▷◀
"……젠장."
'들키면 안 돼, 절대로.'
"그런데 케인."
"……."
저 편에서 마린이 재미있다는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란이 묻자 케인은 언제
나처럼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는 비켈린이다."
"……다시는 오지 않냐?"
"가끔은 오겠지."
케인의 대답에 프란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그녀는 생글 웃으면서 케인에게 한 쪽 팔을 내밀어보였다.
"……."
'후우.'
문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알고 있을까, 프란은.
이 집안이 어떤 곳인지.
어떤 곳인지…….
그건 두고 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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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10 :: 오! 나의 주인님- PART 3 : 고생문이 열리다(2)
케인이 그렇게 가버리고 나자 마린은 천천히 프란의 손을 이끌어 어떤 장소로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냉혈남?"
방까지 이동하는 가운데 그녀를 따라 걸으며 그 싸늘한 소년 가주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던 프란이 마린의
말 중 한 군데를 잡아 되물었다.
"어떤 면이?"
마린이 정의하는 냉혈함의 기준을 몰라 프란이 묻자, 마린은 그 목소리도 가볍고 경쾌하게 대답했다.
"또?"
"음, 그리고 굉장히 당당한 분이지. 예를 들자면…. 일국의 사신에게조차 너무나 당당한 분이야. 그 당
당함이 지나칠 정도지."
"자자, 다왔네."
마린이 발길을 멈추자 그녀의 가슴에 파묻힌 채로 거의 끌려가고 있던 프란(아무리 바둥거려도 마린의 힘
이 워낙 엄청나 벗어날 수 없었다.)의 발 역시 멈췄다.
"여기가 내 방인가?"
"응."
프란은 의아해졌다.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보통의 하인들은 남자하인이 큰 방을 하나, 여자 하인이 큰 방
을 하나 차지하고 쓰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이다. 개인방 따위는 없다.
"나 혼자 써?"
▷◀▷◀▷◀▷◀▷◀▷◀▷◀▷◀▷◀▷◀
쾅쾅쾅쾅쾅!
침대 쪽으로 총총이 다가가자 오늘 그녀가 깨워야 할 상대가 보였다. 그를 한참동안 빤히 내려보던 소녀의
얼굴 위로 황당함이 스쳤다.
"얼씨구?"
"어머나? 잘 생겼네……."
그리고 얼굴을 발견함과 동시에, 핑크빛 머리칼 소녀의 얼굴이 확하고 붉어졌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조금 더 가까이 프란 쪽으로 다가와 그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조
금더 그 얼굴을 살펴보려고 고개를 깊히 숙였던 소녀는 그러나 어느 순간 몸을 굳히고 말았다.
"누구냐."
금빛 머리카락의 소년.
말할 것도 없이 프란 프리텐, 그녀다.
무의식적으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자 벌떡 일어섰던 프란은 슬쩍 입매로 웃어보이며 자신의 실수를 무마
하는 미소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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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11 :: 오! 나의 주인님- PART 4 : 나는 가주가 싫다!(1)
"네가 프란 프리텐인가?"
"……."
"엑엑!! 뭐, 뭐야!!"
"……."
"주방만 말이야."
한참의 푸닥거림이 끝나고, 그 튀김이 어떻게 처리가 되었는지 눈매가 올라간 주방장이 다시 다가왔다.
여기저기서 음식을 튀기고, 굽고, 찌는 가운데 주방장은 다시 프란을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지켜보기 시
작했다. 프란의 가느다란 팔다리며 목선을 지켜보던 주방장은 어느 순간 고함을 버럭쳤다.
"그게 아니고, 지금 일거리 가지러 가신 것 같아. 아침에 주방이 얼마나 분주한데 일을 안 시키겠니?"
프란은 지나치게 자신에게 달라붙는 뮤의 태도가 불편했지만 워낙 하하호호 거리며 그녀에게 잘 해주는 뮤
에게 뭐라고 싫은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마린이라는 여자는 자신에게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기에 닭살이 돋는다느니 소름이 돋는다느
니 하면서 떼어낼 수 있지만, 이 뮤라는 여자애는 진심 어린 눈으로 프란을 보고 있어 그런 짓도 할 수 없
었다.
'젠장.'
지금 뮤의 눈빛 역시 같은 종류의 것.
'미치겠군.'
자신을 향해 똘망똘망 빛나는 눈동자를 들이대는 뮤를 바라보며 프란이 속아로 나직하게 중얼거리는데, 바
로 그 순간 저 멀리로 나갔던 그 주방장이 들어섰다.
"자."
주방장은 갑자기 프란 쪽으로 터벅터벅 들어오더니 프란의 손위로 뭔가를 턱하고 올려놓았다. 프란은 입을
떡 벌리곤 자신의 품 안으로 안겨들어온 것을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근육이지. 프레인 열매 한 자루를 오늘 다 깎고, 내일도 또 깎고, 그 다음날도 깎으면 근육이 생
길거다."
프란에게 건네진 것은 프레인 열매 한 자루(10KG 포대에 담긴)와 커다란 부엌칼이었다. 프란이 그것을
들고 멀뚱하게 서 있었다. 프레인 열매는 겉은 북실북실한 털 같은 것으로 뒤덮여 있고, 안은 노란 진물
이 나오는 달달한 과일이라는 것을 프란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프레인 열매는 그녀의 모국인
세이피아에서는 재배되지 않는 것이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참 감탄 어린 시선으로 프레인 열
매를 보던 프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것은 자신의 오른손에 쥐어진 부엌칼을 의식한 직후였다.
"이걸…… 나 혼자 다 깎아요?"
"이걸…… 나 혼자서?"
프란은 혼자서 넋두리 같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내뱉은 후 구석에 가서 처량하게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부엌칼을 번쩍 들어 열심히 프레인 열매를 깎기 시작했다.
신참인 그녀에게 프레인 자루를 맡겼던 주방장은 프란이 열매를 깎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로 프란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에는 황당함이 빼곡이 새겨져 있었다.
그럴만했다.
프란은 프레인 열매 하나를 손에 든 채로 엄청난 속도로 그것의 껍질을 벗겨가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신기
하기 짝이 없는 속도였다.
"후우, 다 했습니다."
프란이 멀뚱한 눈으로 그들을 마주 봐주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주방장이 척척 걸어오더니 냅
다 고함을 쳤다.
"신참, 지금 뭐하는거냐!!"
프란이 이해를 하지 못해 눈을 둥그렇게 뜨자, 그는 프란이 열심히 벗겨놓은 껍질을 들어올리더니 하나하
나 주워담기 시작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고함을 쳤다.
"프레인 열매는 껍질을 먹는단 말이다!! 그런데 이걸 다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이게 얼만줄이나 알아?"
"……에?"
"정리는 내가 할게."
"잘 했다!"
"뭘요, 평소 실력이죠!"
"……."
▷◀▷◀▷◀▷◀▷◀▷◀▷◀▷◀▷◀▷◀
"가주님, 식사시간입니다."
"……들어와."
"배 안 고파?"
정말 수수하기 짝이 없는 방이었다.
"……."
벽 하나를 완전히 창문으로 낸터라 아침의 햇살은 방 전체를 비추고 있었고, 가주는 그 햇살을 등지고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가주의 눈은 기묘한 연보랏빛을 내고 있었는데, 프란이 음식을 갖
고 들어오자 미세하게 그 눈동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프란은 침을 꿀꺽꿀꺽 삼키면서 크레인을 이끌고 가주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뭐가 부러워? 난…… 난 그 가주란 사람이 무섭단 말이다!! 사람을 노려보는 그 눈하며!! 그게 인간이
야?'
'식사시중?'
'응. 식사시중.'
'…….'
'제길맞을…….'
"……시, 시, 시, 시, 식사 하십시오."
"……말병신인가?"
어느 순간, 가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프란은 그 말에 울컥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하기엔 가주의 눈이
너무 싸늘했기에 잠자코 있었다.
"……몇 살인가."
프란은 낮게 대답했다.
"열여덟……입니다."
"……먹어라."
"에?"
프레인 열매로 만든 달콤한 파이, 소스를 잔뜩 끼얹어 쪄낸 거위 구이,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뮤레인 잎새
등 웬만한 귀족가에서도 맛보기 힘든 진미가 앞에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도도한 눈빛으로 가주는 말하고 있었다.
"어디서 눈을 치켜 뜨는 거냐."
'잘났다, 젠장.'
"먹어."
"……."
"저걸 먹어라."
"……?"
"이것도."
다시 가주가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뮤레인 잎새였다.
원래 달짝지근한 것을 좋아하는 프란은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먹었다.
"이것도."
"이것도."
'……왜 저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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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12 :: 오! 나의 주인님- PART 4 : 나는 가주가 싫다(2)
"……."
6 시 30 분에 기상.
7 시에 아침 식사.
8 시 30 분부터 12 시까지 가볍게 산책, 그리고 검술훈련.
12 시부터 1 시까지 티타임.
2 시부터 3 시까지 점심식사.
3 시부터 6 시까지 가문의 일에 관한 서류전담.
6 시부터 9 시까지 손님과 면담 및 일가와의 면담.
9 시부터 10 시까지 저녁식사.
10 시부터 12 시까지 검술훈련.
"무, 무슨 말을……."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남자가 진지하게 자세를 잡을 무렵, 갑자기 가주는 검을 옆으로 틀더니 자신의 옆에서 얌전히 구경할 준비
를 시작하는 프란에게 건넸다.
'네가 비무해라.'
"대, 대체 왜 제가……"
엉겁결에 검을 받아든 프란이 어이없다는 듯이 외쳤다. 가주가 소유한 검이라서 그런지 검은 기괴한 빛을
내뿜고 있는 명검이었다.
찬란하게 반사되는 푸른빛의 검신이 프란에게는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문득 그 자가 입을 열었다.
프란의 몸이 곧게 섰다.
"난 프란 프리텐."
"너는 어디 소속이지?"
"……?"
그 말과 함께 가볍게 허리 쪽을 노리고 들어온 공격에 프란은 깜짝 놀라 뒤로 몸을 성급하게 뺐다. 남자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는 듯이 검을 돌려서 이번에는 옆구리를 내리 찍으려고 했다. 프란은 아슬아슬하게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 그의 검을 피한 후 빠르게 몸을 뒤쪽으로 움직였다.
프란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케이온 기사단?"
챙!!!
퍼벅!!
"난……. 소속 같은 거 없다."
끼기기기긱.
챙캉!!
'질 수 없지!'
그 말과 함께 프란이 날아들었다.
치카카카카칵!!
'젠장!'
프란은 몸을 뒤로 길게 보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프란은 풀밭을 뒹굴면서 검을 들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는 프란이 쓰러진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와 검을
뻗은 후, 누워 있는 프란을 향해 검을 찍어 누르는 자세를 취했다.
챙캉! 챙 챙 챙 챙!!
"쿨럭."
"안 된다."
"검을 버려라."
"네?"
"검을 놔라."
"……."
"헉!"
▷◀▷◀▷◀▷◀▷◀▷◀▷◀▷◀▷◀▷◀
"헉, 헉헉헉……"
"지금 나를 기만하는가?"
가주의 그 싸늘한 말에 런스는 다시 프란에게 달려드는 수밖에 없었고, 그녀를 두들겨 패는 수밖에 없었다.
프란의 체력은 이미 한계였다. 프란은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차각에 잠시 다리를 떨었다. 몇 번 꿈
틀꿈틀 거리며 런스 쪽으로 다가오던 프란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런스는 순간 당황해 프란을 받쳐 주
려고 했지만, 등뒤에서 쏘는 듯한 시선을 느껴져 몸을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읏……."
런스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던 프란은 어느순간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앞으로 푹 꼬꾸
라졌다.
"……가주님."
"……한심하군."
"가자, 런스."
"내버려둬."
가주는 싸늘하게 말해놓고 등을 돌려 버렸고, 남자는 당황한 눈으로 한참 프란과 가주의 뒷모습을 바라보
았다. 그러자 가주가 싸늘하게 말해왔다.
"아, 아닙니다……."
▷◀▷◀▷◀▷◀▷◀▷◀▷◀▷◀▷◀▷◀
차련하게 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가주의 얼굴에는 한가득 씁쓸한 미소만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화려한 은백색의 커튼을 꽉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그의 표정은 더욱더 어두워
보였다.
「괜찮은 아이입니다, 가주님.」 노을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노을과 너무나도 닮은 한 사람이 가주의 머릿
속에 그려졌다.
노을을 그대로 빼다박은 머리색과 그것보다 좀 더 짙은 오렌지의 눈동자.
방금 전까지 자신의 명령에 따라 검을 들고 싸웠고, 그 검이 상대에 비해 너무나도 형편 없어 결국엔 맨
몸으로 상대에게 두들겨 맞아야만 했던 그 녀석.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시종이 바뀐다해도 일주일을 가지 못한다는 것을.
그의 까탈스럽고 깐깐하며 조금은 더럽기까지 한, 그리고 변덕스러운 성격을 견뎌내는 시종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문득 가주가 중얼거렸다.
그는 프란의 그 계집애 같이 곱상한 얼굴선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차였다.
어딘지 모르게 냉소가 끼인 말을 내뱉는 가주의 얼굴에는 가느다란 씁쓸함이 머물고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는 뚫어지도록 노을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커튼을 쥔 하얀 손이 부르르 떨리는 걸로 봐서는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이제 그만 가보겠다며 자신의 앞에 묵묵히 무릎을 꿇었던 금발의 사내가 머릿속에 잔상이 되어 떠오름과
동시에, 가주는 입에 더더욱 짙은 씁쓸함을 머금으며 웃었다.
바로 어제, 이 곳에서 자신에게 공손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던 그 남자의 이름은 케인.
케인 칼슈비도.
자신의 수하.
깊은 속내를 드러내놓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부하 중 하나인 것이 비켈린 중의 한명인 케인이었다.
카르멘 가에 머물 때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래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불만일 정도로, 가주는 케인을
아끼는 편이었다.
"후회한다라……."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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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13 :: 오! 나의 주인님- PART 4 : 나는 가주가 싫다!(3)
"진정해라."
뮤가 다시 버럭 고함을 쳤다.
프란은 오늘 아침 처음 만났던 저 핑크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지나치게 흥분을 한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긁
적였다.
"크윽!"
"프란!"
"프란!!"
프란이 상반신을 구부리기가 무섭게 뮤가 득달같이 달려와서 프란을 부축했고, 여태껏 뮤와 투닥거리고 있
던 마린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침대 쪽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대범함!
"프란."
그런데…… 그 빌어먹을 가주란 놈은 자신을 [검의 기본도 모르는 바보] 취급한 것도 모자라 검을 도로 뺏
어가버리기까지 했다.
여리디여린 여자의 몸으로서 그런 거구의 사내를 검도 없이 맨몸으로 상대하라고?
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로서는 당연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오늘 처음 봤긴 하지만, 처음 보는 순간 그 외모에 놀라고 그 다음 순간 그녀의 날카로운 표정에 또 한 번
감탄했던 뮤였다.
나름대로 현실감각이 있다고 자부하는 뮤였지만(주위 사람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프란을 보고는 그대
로 반해버리고 말았다. 첫눈에 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코웃음쳤었지만, 프란을 보고 한 눈에 뻑
하고 맛이 가버린 뮤였다.
"사실 말이야……. 여태까지 가주님의 시중을 봐왔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 주일은 못 견디고 나가버렸어.
왜 그런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만……. 그 분은 조금 까다로우시잖아."
"아니."
▷◀▷◀▷◀▷◀▷◀▷◀▷◀▷◀▷◀▷◀
"그녀석은."
문득 가주가 입을 열어 말했다. 뮤는 순간 깜짝 놀라서 음식이 가득 담겨 있는 크레인을 끌던 손을 멈칫했
다. 은빛의 크레인을 잡은 뮤의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뮤는 잠시 입술을 살짝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뮤는 속으로는 열심히 설명과 책망을 번갈아가며 가주에게 퍼붓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데려와."
"네? 네?"
"가, 가주님!"
오싹…….
온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짙은 무엇인가에 뮤의 핑크빛 눈동자에 공포의 기색이 물들기 시작했다. 사시나
무 떨 듯 벌벌 떨리기 시작하는 뮤의 가느다란 몸.
"……가주……님, 프란은……."
▷◀▷◀▷◀▷◀▷◀▷◀▷◀▷◀▷◀▷◀
"프란 프리텐……입니다."
프란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쉴 새 없는 비지땀이 몸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창백한 입술과
벌건 얼굴은 기묘할 정도로 대조되고 있었다.
억지로 힘을 내기 위해 꼭 쥔 주먹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피가 흘러나올 것처럼 보인다.
"……들어와라."
"이봐, 넌 눈치챘나?"
"뭘?"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반백의 남자가 문을 손가락을 살짝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푸른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 팔팔 꼬마?"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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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14 :: 오! 나의 주인님- PART 4: 나는 가주가 싫다!(4)
"……."
"……."
"형편 없는 검이었다."
'호오? 그러셔? 그래도 난 나름대로 검을 쓰는 몸이다, 이거다!! 그런 식으로 검사의 자존심을 짓밟아도
되는거야!!!'
"먹어라."
▷◀▷◀▷◀▷◀▷◀▷◀▷◀▷◀▷◀▷◀
챙그랑.
"닦아라."
"가주님, 천이 없습……."
'저걸 진짜 확!!'
"……네."
어찌하겠는가.
죽어라면 죽어야지.
"가주님."
"……뭐냐."
"그래서?"
"그냥 그렇다구요."
"……죽고 싶은 거냐."
"네? 아, 아닙니다만?"
깊은 은빛을 띄고 있는 검 한자루였다.
"우와∼∼."
차랑.
'엄청나게 빠른 발도!'
검을 만져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
지금 소년이 휘두르고 있는 검은 지나치게 빨랐다, 프란은 놀라움에 눈을 가늘게 떴다.
가주는 검무를 추고 있었다.
'저게…… 인간이 휘두르는 검인가? 말도 안 돼!! 세이피아 황실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유네온님도 저렇게
까지 검을 빨리 휘두르진 않는다고!! 게다가…… 숨소리조차 흔들리지 않았어! 말도 안 돼! 나보다 겨우
한 살 많다면서……. 이게 뭐야!! 단순한 검무라지만…… 실전이 아닌 검무라지만 이건 너무 완벽해!! 동
작에 건덕지가 전혀 없단 말이야!!'
"그 검은 네가 갖도록."
프란 프리텐.
카르멘 가문의 저택에 온지 하루만에, 가주로부터 검을 하사받는 영광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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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15 :: 오! 나의 주인님- PART 5 : 은발 소년과 가주의 관계?(1)
"후아∼."
"……음."
▷◀▷◀▷◀▷◀▷◀▷◀▷◀▷◀▷◀▷◀
"……빌어먹을."
"미치겠군."
그 방이 그 방 같고, 또 그 방이 그 방 같았다.
하지만 사실, 프란이 자신의 방을 한밤중에 나올 때마다 이러한 결과는 정해져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이지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프란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왠지 모르게 오싹한 한기가 도는 복도
를 계속 걸었다. 복도가 워낙 넓고 커서 마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는데, 기묘한 음영이
맴도는 그 복도는 음산했다.
프란은 검을 한 번 쉭, 하고 흔들며 씩하고 웃었다.
"휘유∼."
억지로, 그래도 가주란 놈의 인간성을 한가닥이라고 믿으려고 애쓰면서 프란은 코너를 돌았다.
달그락.
'도둑인가? 아, 아님 호, 혹시 정말 귀신?'
바스락.
바스락.
프란은 다시 침을 삼켰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두근거림이 시장을 뒤흔들고 있었다.
한참 그렇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몸을 움직이고 있던 프란은 어느 순간 움찔하고 다리를 멈췄다.
달그락.
달그락.
"……우걱우걱…… 쩝쩝……."
"여기 주방 아냐?"
확실히, 주방이다.
프란은 왠지 허탈함과 어이없음을 느끼면서 한 발자국을 더 앞으로 내딛었다.
부들거리는 손 끝이 문을 열었다.
"……?"
"하."
프란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한밤중에 부엌을 찾은 누군가가 음식을 먹는 소리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프란의 그 나즉한 웃음소리에 한참 게걸스럽게 뭔가를 먹어 치우고 있던 그림자가 프란의 기척을 그제서야
눈치챘는지 흠칫했다.
"……."
프란은 입을 떡 벌렸다.
"가주…… 님?"
"혹시 가주님이십니까?"
프란이 기억하는 가주의 머리카락은 보랏빛이었고, 눈은 은은한 은색이 맴도는 신비한 은빛이었다. 조각
품같이 섬세한 얼굴 선과 성깔 있게 생긴 눈매가 차갑고 도도한 인상을 풍기기에 충분한 것이 가주의 인상
이라면.
그리고 눈동자.
초록색이었다.
이른 새벽 이슬이 영롱하게 맺힌 풀잎 빛깔의 눈동자, 신비로운 느낌에 초점이 흐릿해 보이는 눈동자를 소
년은 가지고 있었다.
"나?"
"뭐야? 너, 하인이야?"
"그런데?"
자신이 하인이라고 무시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프란은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몰라!"
"어디에다 손을 대는 거냐."
프란은 자신의 이름을 얘기하기 싫어 이렇게 말했지만, 소년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술술 말하기 시작했
다.
"첫째, 나도 말해줬다. 둘째, 내가 궁금해하고 있다. 셋째, 이름을 얘기하지 않으면 내 이름만 들은 것
이 되니 넌 비겁자가 된다. 어때?"
"……."
프란은 어이가 없었다. 검 연습을 하려고 방에서 빠져 나왔다고 달그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 들린 주방에서
이런 황당한 놈을 만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프란 프리텐."
"……?"
'뭐가.'
혼자서만 말하고 혼자서만 이해하는 눈앞의 소녀늘 보며 프란은 뭐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소년은 검을 이리저리 바라보다가 다시 프란을 향해 미소지었다. 한참 프란을 바라보던 소년이 갑자기 피
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
"……."
"……."
그런데, 이 소년도 또!
"아아, 그런 표정 짓지마."
"프란 프리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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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16 :: 오! 나의 주인님- PART 5: 은발 소년과 가주의 관계?(2)
"우욱!"
단숨에 손목을 낚아채인 시온은 인상을 확 쓰며 프란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내려 애썼다.
'네가 감히 나를 기만해?'
"거짓말."
"……남자라고 하잖아, 이 자식아! 속고만 살았냐? 내가 아무리 잘 생겼어도 난 남자란 말이다, 이 자식아!
네녀석 눈깔은 해태 눈깔이냐? 눈 있으면 똑바로 치켜 뜨고 보란 말이다!"
결국 화가 난 프란은 평소의 습관대로 말을 막 해버리고 말았다. 프란의 입에서 쏟아져나온 막말에 소년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여전히 손목이 비틀린 채라서 고통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입가에는 희미하게 미소
가 머문다.
"거짓말. 여자잖아?"
"……남자다."
"거짓말하지마."
프란이 버럭 고함을 치자, 시온이 그 틈을 노려 손목을 휙하고 빼냈다. 자신의 손목을 들여다보던 시온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헉…… 손가락 자국이 시퍼렇게 났군. 이봐, 여자라면 좀 조신하게 행동을 하란 말야!"
"……."
"……."
프란은 이제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프란이 입술을 크게 벌리는데, 시온이 살짝 웃었
다.
"하하하하핫……."
시온은 멋쩍게 웃으며 뒷통수를 긁었다. 그것을 보면서 그러나, 프란은 오히려 안심하고 있었다. 들키지
않은 거다. 그저 장난이었더거다. 들키지 않은 거다. 장난이었던거다…….
"……."
▷◀▷◀▷◀▷◀▷◀▷◀▷◀▷◀▷◀▷◀
"안 돼."
"가주님, 그럼 아일린가는……."
"가주님! 역시! 아일린 가에 머물고 있는 수하들 모두 기뻐할 겁니다! 모두들 가주님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특히 비켈린과 제 수하의 룬 기사단은 말입니다!"
이럴 때는 조금 힘들어진다.
"……나는 결코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지금은 카르멘 가에서도, 아일린 가에서도 내 말을 무시하고
「그들」을 옹호하는 자가 있는 모양이지만……."
두 가문을 모두 책임지는 것은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었고, 그렇기에 가주의 두 집안, 즉 아일린 가문과
카르멘 가문에서는 끝도 없이 반란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가문의 주인을 뒤엎으려 하는 움직임이.
여태껏 무슨 말을 해도 전혀 흔들림이 없던 가주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었
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가주의 옆얼굴로는 미세한 선이 가 있었다. 뭔가 고민이 있는 듯한 얼굴이기도
했고, 뭔가 상당한 불만이 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흠."
"가주님. 식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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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17 :: 오! 나의 주인님- PART 5: 은발 소년과 가주의 관계?(3)
"가주님, 식사입니다."
언제나 씩씩한, 뭐라고 뭐라고 협박을 하면 처음에는 기가 죽지만 결국 팔팔해지는 한 소년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온다.
"……가주님……?"
"……들어와라."
가주는 그런 남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밖을 향해 차갑게 말해놓고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만 나가보도록."
"……알고 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쾅!!!
"……."
남자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미간을 만졌다. 단단
한 파리페인(강도와 경도가 오르하르콘 다음으로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금속. 불에 타지 않고, 쉽게 부서
지지도 않는다.)과 부딪힌 그의 이마에는 처절하리만치 붉은 액체가 줄줄줄 흐르고 있었다. 남자는 멍한
눈으로 터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히익!"
프란은 넋나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보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는 문
과 그의 얼빠진 얼굴을 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아, 아하하……."
남자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이 황당한 범인(자신의 이마에 상처를 낸 범인)을 보면서 잡아 찢어 죽이
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이고, 하고 외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크레인을 끌고 들어온 소년을
노려 보았다.
소년은 오렌지색 눈동자에 금색 머리카락을 하고, 조금 귀여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남자는 잠시 소년, 프
란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궁시렁 궁시렁 프란을 향해 욕지거리를 한 후 가주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가주는 남자가
문에 머리를 박은 순간부터 어이가 없다는 눈초리로 그들을 보고 있었는데, 남자는 그런 가주의 얼굴을 보
고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그가 날 듯이 문 밖으로 뛰어 나가자, 프란은 머쓱한 얼굴을 하고는 다시 크
레인을 끌고 가주 쪽으로 다가왔다.
이제 가주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해도 걱정이 되는 프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주는 프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너무나 농밀해서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한발자국 몸을 뒤로
가져갔다.
"왜……. 그러시는지요?"
"검은 어찌했나."
"……."
"……."
가주는 그 이상 말이 없었고, 프란은 천천히 음식을 차려 놓기 시작했다. 프란이 죽도록 깎았던 감자로
만든 스튜와 감자로 장식한 화려한 퓨아가 나왔다. 가주는 아무 말 없이 프란을 올려다보았다. 프란은 곧
그 의미를 눈치채고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은 경악으로 커져 있었고, 입술은 떡 벌어져 있었다. 기괴하게 벌어진 오렌지색 눈동자에는 광
기라도 넘쳐흐르는 듯 했다. 그녀의 입은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 곳에 침이
라도 한 방울 흐른다면 정말 완벽한 [바보]의 형상이 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란은 그 표정을 변
화시키지 못한 채로 앞을 보았다.
"……오랜만이군."
프란은 경악으로 커진 눈동자로, 갑자기 달려와 가주의 어깨를 감싸안는 소년을 보고 있었다. 은색으로
날리는 길다란 머리카락, 진초록의 공허한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다.
프란은 멍청한 눈오르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소년을 보았다. 정말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주의 어깨를
끌어안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소년의 은빛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
한참 후에 소년이 가주의 어깨를 풀어주자 가주는 언제나와 다름없는 차가운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가주
는 소년을 향해 말했다.
'저, 저 자식은?'
▷◀▷◀▷◀▷◀▷◀▷◀▷◀▷◀▷◀▷◀
"어라?"
"……."
"……."
"예? 지금요?"
"……."
"예."
"훗, 꽤 재미있는 시종이군요. 형님 앞에서 가볍게나마 의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시종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요. 보통은 형님 앞에서 벌벌 떨기만 하는데."
[실버 블레이드]는 가주가 언제나 들고 다니는 카르멘 가의 상징인 [루니아 블레이드]에 조금 못 미치는
검으로, 역대 가주들을 평생동안 모셔왔던 자에게만 내려졌던 검이었다.
"형님."
장미 정원에 놓여진 흰색 티 테이블에 앉은 시온이 피식 웃으면서 가주를 불렀다. 가주는 의자에 앉은 채
로 붉은 장미 정원 주위를 보고 있다가 시선을 돌려 시온을 보았다.
"……그러시겠죠."
시온은 다시 한 번 쓰게 웃었다.
"……."
시온은 씩 웃었다.
"……."
"……가주님. 차요."
"잘 마실게."
"에?"
'뭐야……. 난 형님이 시켜서 남장한 줄 알았는데……. 형님 성격에 「여자는 불편하니 남장해. 그리고
들키면 넌 죽어」라고 해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한게 아니었나? 하하, 이거 놀라운걸? 설마 형님
은 모르는 건가? 어허? 그럴 수가? ……이렇게 분명하게 여자 냄새가 나는데 말이야.'
"바로 서."
"헤헤."
그런 프란을 향해 시온은 싱긋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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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18 :: 오! 나의 주인님- PART 5: 은발 소년과 가주의 관계?(4)
▷◀▷◀▷◀▷◀▷◀▷◀▷◀▷◀▷◀▷◀
똑똑.
똑똑똑똑…….
혼자서 발악하듯 말하는 마린의 말을 문밖에서 고스란히 듣고 있던 프란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그녀
는 쓴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마린의 방 밖에서 말했다.
"난 당신 상대를 하러 온 잘생긴 남자도 아니고 가주도 아니지만 지금은 꼭 들어가고 싶은데, 어떻게 들어
갈 수 없을까?"
열심히 서류를 끌어안으면서 끙끙대던 마린은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튀기듯 일어섰다. 그녀는 반가운
미소를 입에 가득 머문 채로 문을 확 하고 열어 젖혔다.
"당신, 돈 많지?"
물론 돈이 많긴 많았다.
카르멘 가는 현 가주가 주인이 되면서부터 엄청난 재력을 소유할게 되었다 아일린 가문과 카르멘 가문은
하나나 마찬가지게 됐으니 아일린 가문의 그 엄청난 재산의 일부분이 카르멘 가로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었
다. 그 바람에 카르멘 가의 거의 모든 하인들과 납입품들을 점검하는 마린은 꽤나 짭짤하게 수입을 올리고
있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물론 많지."
"……."
마린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마린의 팔을 가볍게 밀고, 프란은 마린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맨 처음 케인과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방 안은 단촐하고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무더기로 놓여져 있는
엄청난 서류더미만 아니라면 여성의 방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수 있는 방이었다.
마린은 잘게 실소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마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란은 마린의 방에 아무
렇게나 앉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마린."
"왜?"
"맞아."
"무슨 말이지?"
마린은 피식 웃었다.
"제법 맞는 추리인걸? 맞아, 그 분은 가주님의 친동생은 아니야. 음……. 차분히 설명을 해볼까?"
"뭔데?"
프란은 마린의 그 문제라는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린은 개구쟁이 어린애같은 표정을 지으
며 말했다.
"아버지."
"에?"
프란은 잠시 혼란해지는 정신을 느꼈지만, 여자도 검술 가문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는 않았다. 프란은 설명을 촉구하는 눈을 마린에게 보냈다.
"헤이튼??"
"응. 전대에 가주를 결정할 때, 루이사님과 헤이튼님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검으로 승부를 가리는데, 루
이사님이 이기셨어. 정말 멋진 승부였지!"
"헤에."
"흐음."
이진느……. 어딘지 모르게 발음이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하면서 프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린은 다시 한
번 웃어 보였다.
즉.
"둘이 그럼 고종사촌간인거야?"
뮤가 본다면 '당장 떨어져, 아줌마!'라고 외칠 자세를 취하면서 마린이 프란에게 엉겨붙었다. 프란의 얼
굴을 자신의 가슴에 파묻은 채로 부비적거리자 프란이 그녀를 확 밀쳐냈다.
귓등까지 새빨개진 프란은 버럭 고함을 쳤다.
"어머? 나하고 말 안하면 어떻게 살아갈 건데? 궁금한 게 있으면 누구한테 물을 거야?"
"뮤한테 물으면 돼!!!"
"……."
'그 분이 오셨다는 건…… 아일린 가에서 슬슬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인가. 이거 또, 가주님이 조
금 피곤해지시겠군. 하여튼 가주님 괴롭히는데는 뭐 있는 자식들이라니까."
"최악이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마린은 내심 웃음을 지었다. 여태까지 가주를 모시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던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물론, 초기에 가주를 모시게 됐던 몇몇 철모르는 어린 시녀들은 행복한 표정들을 하긴 했었다.
그들은 도저히 가주특유의 그 존재감을 견뎌내지 못했고, 가주가 강요하는 검을 들 힘도 가지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가주의 그 싸늘한 눈초리를 너무나 공포스러워했다.
"얼굴이 잘 생기셨잖아!"
"……."
▷◀▷◀▷◀▷◀▷◀▷◀▷◀▷◀▷◀▷◀
"꺼져."
"너 남색가냐?"
"엑??"
그렇게 외친 프란의 싸한 눈에 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살짝 삼켰다. 번뜩이는 오렌지 눈동자는 매서웠
다.
시온이 한 발 물러서는 것을 확인한 프란은 시온에게 한 번 눈을 흘긴 후 검을 들고 총총총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한 편에 기대선 채로 그런 프란을 보고 있던 시온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뱉었다.
시온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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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0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가주, 분노하다(1)
"프란."
"……."
"뭐……."
"조심해, 프란."
"……?"
"에?"
"……."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만."
역시 프란은 뮤가 좋았다.
이렇게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다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는 사실에 왠지 안도감을 느낀다. 가슴이 훈훈해진
다.
외로웠던가?
어쩌면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웃어주는 뮤를 보면서 행복해하는 건지도 모른다. 자신을 남자로 알고 있고, 그래서 자신
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마저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모르는 척 해야한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오셨으니까 지금 아침을 드시지 않는다고 하셨어. 이 차나 갖다드리면 될거야."
▷◀▷◀▷◀▷◀▷◀▷◀▷◀▷◀▷◀▷◀
'흐음, 그러면 그렇지. 저 인간이 가볍게 네네, 하면서 따를 이유가 없지. 상대가 왕실이든 국가든 아무
런 상관도 하지 않는 제잘난 맛에서 사는 인간인데, 암 그렇고 말고.'
남자는 가주의 살인적인 눈빛을 마주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국가에 반하겠냐'라는 질문까지 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질문을 받은 가주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소년…… 아니, 소년이 맡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직책인 한 가문의 가주라는 명예를 가진 가주는 똑 부러
지는 목소리로, 그러나 아까보다 약간 힘주어 말했다.
"……폐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예쁘장해 웬만한 여자보다 훨씬 곱상하게 생겨먹은 소년이 카세타 왕국, 아니 라니아 대륙 최고
를 자랑하는 검술가문인 카르멘의 가주라는 것도 놀라운 사실인데 그 소년이 왕의 부탁을 가지고 온 자신
의 말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가볍게 거절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터였기에.
프란은 바르르 떨고 있는 사신을 동정하는 마음에 혀끝을 끌끌하고 차냈다. 그녀로서는 참 불쌍하게 느껴
졌던 것이다.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저 피도 눈물도 없는 가주에게 그런 부탁을 하러 온 저 사
신이.
"그래서라니요!! 당신도 카세타 왕국의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폐하의 말에 따르시는 것이 당연한
이치……"
"넷, 가주님!"
사신은 두 명의 남자에게 얌전히 모셔지는 것인지 끌려가는 것인지 애매한 상황에서도(하지만 아무리 봐도
끌려가는 듯 했다)끝까지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가주는 특유의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였
을 뿐이다.
"프란 프리텐."
"응?"
"방을 좀 치워라."
'윽!'
그 차갑도 못해 냉정하고 냉정하다못해 냉철하며 냉철하다못해 떡같은 성격을 몰랐다면 저 웃음에 한방에
뻑 갈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프란은 성격은 그렇게나 더러우면서 얼굴은 왜 저렇게 곱상한 거야?, 라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귀족집
안의 자제들은 대부분 곱상하게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저렇게 곱상하게 생긴 사내
자식은 본적이 없는 프란이었다.
"차는 줘야지?"
가주는 그 말과 함께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프란이 들고 왔던 차 중 하나를 들고서 문 바깥으로 멀리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차가 한 잔 남았다.
프란은 아무 생각 없이 차를 들어올렸다.
그 말과 함께 프란은 차를 들이마셨다.
"음?"
하지만 약간 식은 그 차를 마신 순간, 프란은 인상을 찌푸리며 무릎을 꿇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
기 시작했다. 속이 울렁거렸고, 가슴이 쥐어 뜯기는 듯 했다. 구토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무엇인가가 몸
을 세차게 찌르는 것 같았다. 프란은 심장 부위를 부여잡은 채로 상반신을 구부렸다.
"……으…… 으윽?"
'이거……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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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1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가주, 분노하다(2)
자신의 방에 그 더러운 황실의 사신이 앉아 있었다는 생각만 해도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가주였다.
"……."
가주는 차를 들었다.
"……!"
"가주님?"
"가주님!!"
가주가 난데없이 손을 목 안으로 집어넣는 모습에 놀란 그들이 뭐라고 하려는데, 가주가 입술을 벌린 채
무엇인가를 올리기 시작했다.
"우욱! 퉤!"
"……크루레티나……?"
"가주님! 대체 무슨……."
"내가 마실 차에 말이야."
▷◀▷◀▷◀▷◀▷◀▷◀▷◀▷◀▷◀▷◀
"그, 그럴 리가……!"
마린은 이 집안의 하인을 총괄하는 여자이니 이런 상황에서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치고, 스웬이란 남자
는 카르멘 가의 전용의사이니 저 독약이 성분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필요하다지만 시온은 어째서 불러오라
는 것일까.
"……."
동요해서는 안 된다.
놀라는 모습이라던가 두려움에 떠는 모습 따위를 보여서도 절대 안 된다.
지나치게 흥분해서 화를 내서도 안된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순간 진다.
보여서는 안된다.
독약이 자신의 음식에 섞여 나온 이후, 가주는 자신의 시종에게 언제나 먼저 음식을 먹여서 음식의 독약
첨부 여부를 검토했다.
프란에게 먼저 음식을 먹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고보니 이상했다.
"……."
언제나와 다름 없는 풍경들.
언제나와 다름 없는 것들.
"……!"
"……."
"……."
"……."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을 뻗어 금빛의 소년을 들어올렸다.
들어올려진 소년의 안색은 창백하다.
"……."
▷◀▷◀▷◀▷◀▷◀▷◀▷◀▷◀▷◀▷◀
마린보다 열 살이나 어린 주제에 시온은 반말 비슷한 말투를 구사하며 껄렁껄렁한 자세로 마린에게 물었다.
마린은 잠시 그런 그의 태도에 발끈했다. 그녀로서는 시온이 예쁘게 보일 리가 없었다. 왔다 하면 카르
멘 가의 하녀란 하녀는 다 홀리고 다니는 저 천하의 바람둥이가 곱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세상에!! 프란!?"
가주의 양팔에 들린 채 축 늘어진 프란의 모습을 발견한 마린은 기겁해서 고함을 쳤다.
"프란!!"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손대지 마라."
"……스웬."
"치료해라."
스웬은 떨리는 손을 들어 프란의 코끝에 갖다댔다. 일단 살아만 있으면 자신의 의술로 어떻게든 극복이 될
것이라는 얄팍한 믿음으로 그는 프란이 살아있는지 어떤지 여부만이라도 알아내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은 팍하고 굳었다.
프란은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가, 가주님!!!"
"독약을 먹었다."
"맥박이 완전히 정지된 후 다시 뛴다는 건…… 크루레티나나 혼수, 루키엔 세가지 중에 하나에 중독된 것
같은데…… 맞습니까?"
"명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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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2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가주, 분노하다(3)
"마린."
"네? 네?"
자신을 갑자기 부르는 가주의 호명에 마린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바짝 긴장을 해서인
지 쥐어진 주먹에 땀이 새어들었다.
"가주님……."
마린은 애원하는 듯한 눈으로 가주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표정없는 가면같은 표정의 소년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위압적이고 절대적이며 오만한 눈빛.
"지금 당장."
▷◀▷◀▷◀▷◀▷◀▷◀▷◀▷◀▷◀▷◀
온 몸이 불덩이 같다.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더듬더듬 프란은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스웬은 헛소리를 계속해대는 프란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락케이드라는 이름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걸 보면 이 금빛머리칼 소년에게 그 이름을
가진 자가 매우 소중한 것 같았다.
사람은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면 가장 소중한 자의 이름을 연달아 부른다고 하지 않던가.
스웬은 프란의 상체를 천천히 일으킨 후 프란의 벌어진 입 속으로 해열제와 해독제를 넣었다. 하지만 프란
의 입 속으로 해열제를 먼저 집어 넣었던 곧 그는 곤란한 사태에 직면했다.
시간과 의지.
그것이 얼마나 중독자에게 많은 여유를 베푸는 가에 따라서 모든 것은 달라진다.
"자, 잠깐!!"
마린과 가주가 주방에서 일하는 하인들을 보러 간 후, 시온은 당연하다는 듯이 스웬의 방으로 달려와 프란
을 보고 있던 차였다.
시온은 잔뜩 굳은 얼굴로 다가오더니 스웬이 씹던 푸뤼를 갑작스레 뺏어 들었다.
스웬은 이 황당한 사태에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고, 다음 순간 시온의 턱이 움직이는 것을 본 스웬의 눈이
커다래졌다.
"……시, 시온 도련님?"
프뤼를 잘근잘근 씹어 즙 상태로 만든 시온의 입술이 프란의 입술에 닿이고, 프란의 부드러운 혀가 그의
혀와 닿였다.
"……아."
프란은 남자로 인식되고 있었고, 자신은 지금 프란에게 약을 투여하려한 의사를 밀치고 프란에게 대신 약
을 먹인 셈이 되버렸다는 것.
그 말인 즉…….
시온은 머리를 감싸쥐며 고뇌했다. 스웬과 레니의 경악어린 눈은 아직도 그의 앞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
"마린."
"……가주님, 정말 화나셨어요."
"……."
"……그렇군. 지금 형님은?"
"……그래……. 사신이……."
"증거라도……?"
"형님은 밖으로 나와서 차를 드셨고, 프란은 안에서 남은 차를 마신 거라고 형님이 그러셨잖아!! 형님이
차를 드셨는지 어땠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범인이라면 저 빌어먹을 독차를 마셨을 것 같아??"
"가주님을 죽이려는 시도를 하고 난 뒤 자신도 죽을 생각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
마린의 비명소리에 가까운 그 소리에 시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
시온은 결국 숨을 쌕쌕대며 자리에 앉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스웬은 파들파들 떨면서 그런 그들의 이야
기를 듣고 있다가 다시 프란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말없이 프란을 치료하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는 것
을 알아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웬."
스웬이 프란을 바라보며 열심히 치료하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안 마린이 피식 웃으면서 스웬의 이름을 불
렀고 스웬이 돌아보았다.
"만약 가주님을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 했다면 절대로 크루레티나는 먹지 않아. 크루레티나를 먹고 나면 얼
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뿐더러, 만에 하나 죽지 않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크루레티나를 먹겠어? 안 그래?
죽으려면 확실하게 죽지, 크루레티나로 죽진 않아."
"……."
그녀는 살짝 몸을 뒤로 눕혔다.
문득 시온의 목소리가 스웬을 향했다.
"프란……. 안 죽겠지?"
"정신착란?"
"……네."
가주는 말했다.
'살려 놓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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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3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가주, 분노하다(4)
"젠장할."
프란은 투덜거렸다.
온 몸에서 땀이 나고 있다. 찝찝했다. 검을 휘두르고 난 후의 개운함 따위는 몸에 없었다. 그냥 찝찝하기
만 했다. 짜증이 났다.
프란이 생긋 웃는다.
'프리나 아가씨…….'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울림은 너무나 따뜻해서 눈물이 난다. 너무나 따뜻해서 숨을 쉴수가 없을
지경이다. 따뜻한 무엇가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샘솟는다. 포근하고 포근하고 포근한 느낌. 태초의 모든
것이 그녀를 감싸고, 죽음으로 향하는 손짓에서 그녀를 구출한다. 온 몸을 감싸오는 따뜻한 추억들.
눈물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프란은 락케이드의 노쇠한 얼굴과 하얀 수염을 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지금은 자신도 걸치고 있는 하인들의 그 까만 옷.
그 옷을 락케이드는 언제나 입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있어주었던 유일한 존재.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유일한 존재.
정을 주었던 유일한 존재가 아니던가.
의지.
의지.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죽지 않아.
죽지 않아.
죽지 않아.
죽지 않아…….
"난 안 죽어……."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가주가 징징대며 우는 얼굴, 상상만해도 쿡 하고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다.
프란은 천천히 의식의 끝에 섰다. 무엇인가 저 끝에서 그녀에게 사신의 칼날을 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
"난 안 죽어…… 걱정마……."
주르륵.
"땀이 너무 많이 나는군."
바로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마린과 시온의 안색이 퍼렇게 변했다.
"아, 자, 잠깐!"
"잠깐만!"
"에?"
"응?"
하지만.
"잠깐, 잠깐!!!"
"잠깐만요, 스웬!!"
'쳇, 역시 알고 있는 건가?'
▷◀▷◀▷◀▷◀▷◀▷◀▷◀▷◀▷◀▷◀
"……가주님이 그렇게 화내시는 거 처음 봤어. 물론…… 평소에도 무서운 분이시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예쁘신 분이니 차가운 표정도 아, 예쁘다…… 이렇게 생각하고 좀 두려운 마음 뿐이었는데…… 오늘
은…… 정말 너무너무 무서웠어."
"나도."
"나도."
▷◀▷◀▷◀▷◀▷◀▷◀▷◀▷◀▷◀▷◀
"……."
"……헉…… 하아……."
"……."
말없는 그림자는 천천히 프란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달빛에 반사된 그의 얼굴은 꽤나 앳되어 보인다.
그림자는 천천히 프란 쪽으로 다가와 프란의 바로 앞에 앉았다. 삐그덕,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프란의 바로 앞에 앉는다.
"……."
"……."
"……."
▷◀▷◀▷◀▷◀▷◀▷◀▷◀▷◀▷◀▷◀
"알고 있지?"
"프란에 대해서."
시온의 진지한 말투는 그러나 다음 순간 튀어나온 마린의 발랄한 어투에 묻혀 진지하게 어필되지 못했다.
"흐음? 프란 프리텐. 나이는 열여덟. 오렌지색 눈동자와 금색의 머리카락등 상당한 미모를 소유했고 내
이 분석적인 눈으로 보자면 스물 두 세 살쯤 되면 그 외모가 활짝 꽃펴 상당한 미인이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음.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섹시한 여자인 내 대쉬를 아무렇지도 않게 씹어버리는 대단한
신경의 소유자이며 현재는 가주님의 시종임. 무척 귀여워서 잡아먹기 좋아 보이고 피부가 보들보들해서 만
지면 촉감이 좋음. 나, 마린이 관심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더 궁금한 거 있으세요?"
"……이봐, 마린."
"그럼 궁금한 게 뭐였던가요? 최근에 시온 도련님이 프란에게 지나칠 만큼 관심을 보이고 계셔서 시온님께
목매고 있던 하녀들이 잔뜩 실망하신 건 알고 계세요? 남색가를 좋아할만한 어린 소녀는 없다구요."
"척 보면 알아."
'……바람둥이의 권한인가.'
"그러는 당신은?"
'역시 여우.'
마린이 말했다. 시온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런 시온을 향해 마린이 말했다.
"……?"
시온은 의아한 표정으로 마린을 보았다. 마린은 그런 시온을 향해 나즉한 목소리로 하나한 끊어가며 말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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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4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가주, 분노하다(5)
짙은 금색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있다.
이상했다.
왜 이런 것을 가슴에 감고 있는 것일까.
작게 중얼거리던 가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번에는 프란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완전히 메말라 물기라곤 남지 않은 프란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가느다란 한숨소리를 들으며 가주는
저 한편에 누워 있는 스웬을 쏘아보았다. 자신이 들어오는지 어떤지도 모른 채 잠이 들어버린 저 따위 의
사를 보고 있자니 또다시 화가 났다.
아침에 찾아온 것도 모자라 또 다시 자신을 찾아왔던 카세타 왕국의 사신의 일이 갑자기 가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사신이란 놈을 반 죽여 자신이 그리 녹녹한 자가 아님을 황실에 확실히 알려둘까 하다가 그래도 황실에
밑 보여 좋을 것이 없다고 당부하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던 침착한 케인의 얼굴이 생각나서 억지로 눌러 참
았던 가주였다.
"윽……."
"……."
"……웃……"
"헉……."
너무 땀을 많이 흘려 거의 탈진 직전에 갔던 프란의 눈이 천천히 뜨이는 것이 보였다.
의식을 찾긴 찾았는데, 심한 고통이 밀려와서인지 인상을 확하고 찌푸린다.
"헉……. 아악!"
"으응……?"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던 프란의 눈이 번쩍 뜨인 것은.
"……."
▷◀▷◀▷◀▷◀▷◀▷◀▷◀▷◀▷◀▷◀
그런데…….
달빛이 내뿜는 매혹적인 빛이 비춰지는 눈앞의 인간은 그러나 프란의 눈에 그다지 잘 보이지는 않았다. 프
란은 더더욱 눈살을 찌푸려 눈앞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
"누구……?"
"……."
'사신' 에 '천사' 라.
말하세요.
말해보세요.
말하세요.
말하세요.
"반."
"반……?"
"……."
가주는 침묵했다.
"반……."
▷◀▷◀▷◀▷◀▷◀▷◀▷◀▷◀▷◀▷◀
「오늘 여기서 날 봤다는 말을 한다면 네놈의 머리는 몸과 분리되어 저택 바깥을 떠돌게 될 거다.」 자신
을 발견하자마자 바들바들 떨기 시작한 스웬에게 몇 번이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난 후, 가주는 미련 없
이 등을 돌리고 스웬의 방에서 나왔다.
탁, 하고 스웬의 방의 문이 닫혔다.
"……."
그 이름을 방금 말했다.
그것도 저 웃기지도 않는 시종 나부랭이에게.
그의 이름이다.
반이라는 이름은 어렸을 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철없는 어린 시절, 아름답지만 강했던 어머니와 냉철해 보이지만 다정했던 아버지는 늘 그를 그렇
게 불렀다.
「반」이라고.
처음으로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을 베던 날.
부모님이 주었던 반이라는 이름을 버렸다.
"미쳤군."
순간.
"……나다."
"시즈 아일린이다."
"부름을 받습니다."
"부탁이라니, 당치않은 말씀이십니다. 비켈린 중 하나로서, 언제나 당신만을 따릅니다. 명령을 내리십시
오."
켈리라는 이름의 여인은 송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가주는 표정 하나도 얼굴에 띄우지 않
은 채로 켈리라는 여인을 향해 말했다.
"……가주님?"
"……."
가주는 천천히 입을 열어 몇 가지를 알아 봐 주길 부탁했고, 켈리는 고개를 숙였다.
곧, 흐릿한 잔광을 남기며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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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5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가주, 분노하다(6)
「이봐요, 마린.
내가 당신한테 말을 못하고 간 건데 말이야…….
형님은 프란을 죽이진 않을 거야.
뭘 믿고 이렇게 장담하냐고 묻는다면…….
뭐, 나 같은 매력적인 남자가 빠진 여자니 그렇다고 해두지.
그리고 걱정마.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형님한테 일부러 말하겠어?
아……. 하나 더 덧붙이지.
당신은 자는 모습이 깨어있는 모습보다 백 배는 낫군.」 마린은 아침 일찍 일어난 뒤 자신의 머리맡에 놓
여있는 쪽지 하나를 발견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어린애 같은 이 글씨체는 자신에게도 무척 익숙한 것이었
다.
▷◀▷◀▷◀▷◀▷◀▷◀▷◀▷◀▷◀▷◀
프란은 그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어젯밤 내내 고통에 몸부림친 덕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프란은 인상을
팍 써가며 스웬을 보았지만 스웬은 이미 프란의 그런 시선 따위는 의식하고 있지도 않았다.
금색의 눈동자를 빛내는 눈앞의 소년은 멀뚱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는데, 도대체 그 맹독을 가진 크루레
티나를 먹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맑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낚아채진 손목의 맥박은 정상이었고 체온도 안정적이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 하며 정확한 의사 전달은 그
녀가 백치가 되지 않았다는 것도 증명하고 있었다.
"……뭐라는 거야?"
"욱?"
그렇게 프란이 끙끙거리고 스웬이 그녀를 관찰하고 있을 때, 문이 가볍게 열리면서 근심스러운 얼굴을 한
여자가 들어왔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던 그녀는 그러나 프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표정이 완전히
굳은 채로 멈춰버렸다.
"……프란?"
"여어, 마린."
"놔."
"괜찮아?"
"응."
"……정말 괜찮아?"
"괜찮아."
"……머리 아프지 않아?"
"응."
"없어."
어째서일까.
크루레티나의 독이 하루만에 중화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스웬이 의아함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득 프란이 고개를 들며 마린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마린."
"응?"
"나……."
꿈을 꾼 것 같다.
프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착각인지도 모른다.
환상인지도 모른다.
역시 확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천사를 만났다.
천사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천사인 것 같다.
"나……."
프란은 매우 궁금했다.
게다가 다시 의식을 잃기 전에 한 마디 들은 것도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있다.
소년의 이름.
프란이 눈을 살짝 뜨며 물었다.
"빈??"
'그건 정말 천사였나봐…….'
"없다잖아."
"……파."
"뭐? 아프다구?"
"……배고파."
프란의 말에 경악한 것은 비단 마린뿐만이 아니었다.
▷◀▷◀▷◀▷◀▷◀▷◀▷◀▷◀▷◀▷◀
프란은 마구잡이로 음식을 퍼담고 있었고 스웬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런 프란을 보고 있었다.
"……조금만 먹을거다."
"안 돼!"
"안 돼."
스웬도 동조했다.
빈속에 저렇게 기름기가 더글거리는 닭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프란의 위장상태가 궁금했다.
"쫀쫀하기는……."
프란은 투덜거렸다.
▷◀▷◀▷◀▷◀▷◀▷◀▷◀▷◀▷◀▷◀
이른 아침.
"프란은 어떨까……."
시온은 일어나자마자 여자를 생각하는 자신이 한심해 한참을 웃다말고 옷을 대충 정리한 후 침대에서 일어
섰다.
"……형님?"
"형님?"
시온이 다시 한 번 반을 불렀을 때.
그가 말했다.
"……시온."
반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특유의 차분함이 깃들어져 있었다. 시온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순순히 대
답했다.
"예?"
"따라와라."
"……형님?"
"형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
침묵으로 일관하는 반의 태도에 시온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반의 걸음은 묵직하고 품위가
있었다. 한참 걷던 반은 저택 밖으로 나섰고, 그 순간 시온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반이 한발자국 나서기가 무섭게, 한 남자가 그렇게 외치며 무릎을 꿇었고, 그와 동시에 그들의 뒤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무릎을 굽히며 외쳤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반은 무릎을 꿇는 사람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한 번 바라본 후 그대로 시선을 거두었다. 사람들이 천천히
일어서 다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던 시온의 시선이 어느 순간 탁하고 굳어졌다.
"……형님?"
반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 반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풀어라."
"가주님! 억울합니다!"
"누가 시켰나."
'저 애가 범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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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6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가주, 분노하다(7)
"누가 시켰나."
처컥.
손가락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집고 들어간 반의 검이 반짝이고 있었다. 소녀는 떨리는 눈 끝으로 반을 올
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새하얀 것이 아니라 새파랗게 변한 소녀의 안색은 차마 눈뜨고 봐주기 어려울 정도
였다.
"억울……. 억울합니다……."
"끄아아악!"
"우욱!"
"아악!"
"아아악!! 아아악!!"
"시끄럽게 굴지 마라."
"형님!"
반이 움찔한다 싶었다.
"형님답지 않습니다."
"……누가 시켰지?"
"꺄아아아아악!!"
▷◀▷◀▷◀▷◀▷◀▷◀▷◀▷◀▷◀▷◀
"마린."
프란의 오렌지 색 눈동자에 뭔가 이상하다는 기색이 떠올라 있음을 깨달은 마린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바
로 그 순간, 프란이 먹고 있던 그릇을 밑에 내려놓았다.
"응?"
똑똑하게 방으로 전해지는 냄새에 프란은 손가락을 만지작 거렸다. 나풀거리는 하얀 커튼 사이로 흐릿하게
번지는 혈향을 맡으며 프란은 들고 있던 스푼마저 내려놓았다.
프란은 비틀거리는 움직임으로 침대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마린은 프란이 일어서려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말리려 했지만, 프란은 이미 침대에서 일어선 후였다. 마린
의 생각보다 훨씬 간단히 침대에서 일어선 프란은 비틀거리는 움직임으로 천천히 창문 가 쪽으로 가기 시
작했다.
마린과 프란이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 있었던 스웬은 그런 프란을 유심하게 관찰했다. 걷는데도 무리가 없
어진 것인지, 고통을 동반하지 않은 채로 프란은 몸을 움직여 나가고 있었다. 스웬의 눈동자가 반짝, 하
고 빛을 발했다.
"……."
잘 보이지 않았다.
원래 장미정원은 온통 나무로 둘러 쌓여 있고, 그 나무 안 쪽으로 아름다운 장미가 몇 겹이나 둘러 쌓여져
있기에 창가에 선 채로 그 안을 들여다본다는 것 자체가 본디 불가능했다. 프란은 결국 뻐근해진 어깨를
몇 번 두드린 다음 창문가쪽에서 벗어났다.
마린은 웃어버렸다.
"……내가 왜 아줌마야?"
마린은 새삼스럽게 프란의 말 속에서 찾아낸 기분 나쁜 한마디에 대해 물었고, 프란은 늘 그럿듯이 당당한
어조로 대답해주었다.
"……나 아직 결혼 안 했어."
"알았어, 노처녀."
마린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튀어나오는 그 노처녀란 단어에 발끈했지만 역시 오랜 연륜으로 꾹하고 누르며
호호, 하고 웃었다. 속으로 칼날을 마음껏 갈면서 마린이 일어섰다. 방 안 쪽으로 걷는 프란에게 다가가
그녀를 막 부축하려고 하는데, 프란이 조금 이상한 행동을 했다.
"……프란?"
▷◀▷◀▷◀▷◀▷◀▷◀▷◀▷◀▷◀▷◀
"누가 시켰나."
콰직!
"우욱! 아악!"
커다란 목소리에 사람들은 천천히 다시 반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무덤덤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표정조차 없는 소년이 보인다. 마치 짚단 썰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녀의 몸 여기저기
에 검으로 고문을 행하고 있는 반의 얼굴을 보던 그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고통에서일까.
억울함에서일까.
이도저도 아니면…… 단순한 공포감에서일까.
소녀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형님!"
"헤이튼……?"
그리고.
자신을 향해 있는 한쌍의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반의 시선을 받은 시온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얌전히 있으시오!"
"……경고?"
"가주님에게 중요한 것은 '범인을 찾아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범인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과 '지금 자
리에 방해가 되는 자'에게 본보기를 보여주는 겁니다. '내게 위해를 가하려 한다면 이렇게 만들어 주겠
다' ……그런 것을 보여주려 한다는 말이오. 왜 가주님이 아침에 굳이 당신을 데리러 갔는지 생각이나 해보
셨소?"
"……잔인한 분."
"유니!!"
"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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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7 :: 오! 나의 주인님- PART 7: 시온과 반(1)
자욱한 피냄새를 맡고 정원에 들어섰던 프란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확장되었다가 한참만에 가라앉았다. 어제 저녁 내도록 올랐던 열 때문에 흘렀던 것과
다른 종류의 땀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렀다.
차갑게 식은 땀.
프란은 턱 끝에 고였다가 찬찬히 떨어지는 땀을 손으로 훔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게 눈을 뜨고 앞을
보고 있었다.
저 검을 보는 것은 이번으로 세 번째였다.
저 검을 자신이 잡아본 적도 있었다.
완연한 푸른빛을 띄고 있는 아름다운 검.
가주의 상징이라는 검.
"……."
하지만, 반이 프란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과는 달리, 프란은 반에게 조금의 눈길조차 주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반의 검앞에서 온 몸의 살점이 떨어져 나간 듯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시녀를 향해 눈빛
을 주고 있었다. 프란의 오렌지빛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리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프란은 한발한발, 천
천히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반은 그런 프란을 본 후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한 발을 뒤로 물러섰다. 물러 선 순간, 반은 의구심
을 가졌다.
내가 왜 물러선 것일까?
"……뭐……."
프란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뭡니까…… 이건."
프란은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대체 자신이 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온몸에 피를 철철철 흘리고 있는
소녀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내밀어졌다. 소녀는 갑자기 내밀어진
프란의 손을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프란은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어서 잡으라는 듯이, 프란의 굳은살 가득박힌 손이 내밀어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차랑.
"멈춰라."
"……."
"'독을 탔을지도 모르는 자' 라구요? 어째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독을 탔을지
도 모르는 자' 라는 말은 독을 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여기 있는 사람 모두를 죽이실 작정입
니까!!"
"프란……."
"……."
사락.
"……뭔가."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
"……그러니, 검을 치워주십시오."
"……만약 잡지 못한다면."
▷◀▷◀▷◀▷◀▷◀▷◀▷◀▷◀▷◀▷◀
"됐어."
마린은 의식을 잃은 듯 축 늘어지는 유니를 우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시온을 보았다.
▷◀▷◀▷◀▷◀▷◀▷◀▷◀▷◀▷◀▷◀
기묘한 음영이 늘어진 소년의 얼굴은 아름다웠고, 그 얼굴을 보며 프란은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 얼굴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 빌어먹을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외
모다.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는, 불빛이 얼굴살을 희미한 주홍빛으로 물들어 내리고 있는 반의 얼굴은
역시 사내 녀석의 그것치고는 너무 곱상했다.
프란은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반이 한참동안 시선의 미동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그 투덜거림을
멈추고 똑바로 섰다.
'때린다!'
프란의 눈이 질끈 감겼다.
'저도 찔러 보시지요'
라고 했을 때,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검을 들어올렸던 저 소년이 아무도 없는 이 곳에서 자신을 때린다
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프란이 눈을 감음과 동시에, 반의 손가락이 프란의 얼굴 쪽으로 올라왔고 프란은 눈을 더더욱 세게 감았다.
차가운 오른손이 자신의 뺨을 불게 물들일 것이라 생각하며 프란은 있는 힘껏 이빨을 깨물었다. 입안이
터지지 않을 것을 빌면서.
하지만.
다음 순간, 프란의 귀를 두드린 것은 자신의 뺨을 울리는 반의 얼얼한 손바닥 소리가 아니라, 조용히 메
아리치는 반의 목소리였다.
"……가주님."
"……혹시."
"……?"
1 초, 2 초…… 마음의 초시계가 따각거리며 그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울리는 그 소리를 열심히
재고 있던 프란은 반의 입술이 열릴 기미를 보이는 것을 보며 눈을 들었다.
"……."
'쳇, 그럴 줄 알았어.'
"……."
반은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조금 이상하다는 눈으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네가 더 이상하다.'
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도대체가 이 녀석의 머릿속은 종잡을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찔러보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온갖 난리를 떨어댔던 주제에, 저택으로 돌아서
는 자신을 줄레줄레 따라온 것도 내심 황당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까 전의 일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맹한 얼굴로 뭔가를 질문하는 듯한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잘났어, 정말.'
"가봐라."
반은 그 말과 함께 돌아섰다.
프란은 말 없이 돌아서 버렸다. 가주가 돌아가라고 말한다면 돌아서서 나가기 전에 당연히 고개를 숙여 뭐
라고 인사의 말을 했어야 했으나 프란에게 그런 예의가 있을 리가 없었다.
"프란 프리텐."
프란은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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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8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시온과 반(2)
"나도 모르겠어."
"……매력적이라는 거 취소."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예요."
▷◀▷◀▷◀▷◀▷◀▷◀▷◀▷◀▷◀▷◀
프란은 낮게 윽박질렀다.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진단해보고 있는 스웬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에?"
"……칫."
프란은 아직도 끙끙거리고 있는 유니 쪽으로 다가갔다. 유니는 프란을 보고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너
무나도 기운이 없는 그 웃음을 보고 있던 프란이 말했다.
"유니."
"……하아하아…… ……응?"
"힘내."
땀에 젖어 있던 유니가 눈을 뜬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웬님."
유니는 웃었다.
오늘 죽을 뻔했다.
하지만, 지금 유니는 웃고 있었다.
'이제 됐어……'
유니는 웃었다.
"시즈-아일린. 저스티스-카르멘……."
"그리고……"
스웬은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반의 앞에서 잔뜩 위축되어 쩔쩔맸던 한심한 의사의 모습은 그곳에
없었다.
▷◀▷◀▷◀▷◀▷◀▷◀▷◀▷◀▷◀▷◀
반은 히죽 웃음을 지었다.
평소처럼 냉소적인 웃음.
반은 잠시 다시 술잔을 들었다.
고개를 젖혀 술을 들이킨다.
"누구냐."
척.
"……가주님."
익숙한 목소리다.
반은 움찔하며 그 그림자를 보았다.
"……케인……?"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는 달의 모습과, 검은 옷을 입은 채로 허리를 굽히는 남자의 모습은 기묘할 정도로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 것'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내 찻잔에 독약 따위를 타는 놈들이 저택에 있는 한…… 다가오는
그 날, 날짜에 맞춰서 '그 것'을 하겠다. ……'진짜 가주'로 인정받으려면…… 역시 '그 것' 을 하는 수밖
에 없어."
"……수행하겠습니다."
"……수고해라."
반이 입술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케인은 낮게 말했고 반은 천천히 그런 케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마린과 시종 몇몇만 데리고 간다. 내가 가기 직전까지, 아일린 가에는 알리지 말도록. 습격은 의미가 있
지."
"……네."
반의 몸이 일어섰다.
케인은 반의 한참동안 보고 있다가 문득 말했다.
"가주님."
반은 대답 없이 케인을 돌아보았다.
한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케인은 반을 향해 천천히 말했다.
"……저번의……."
말을 할 때는 되도록 간단히.
그것이 케인의 신조였다.
말을 아끼지 않으면 실수를 할 확률이 높아지고, 자신의 실수는 저 보라색 머리카락의 미소년의 흠으로 직
결된다. 그것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 케인은 철저하게 말을 아끼는 남자다.
"……저번의 그……."
"가주님."
"뭔가."
"훗."
순간, 반이 약간 비웃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 냉소적인 반응에도 케인은 흔들리지 않았다.
케이온 기사단장 런스는 카르멘 가에서 손꼽히는 검사였고, 그 이름이 카세타 왕국의 전역에 자자할 만큼
그의 검술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남자와 프란 같은 애송이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니겠는가.
"……제가 갈고 닦겠습니다."
반은 침묵했다.
케인은 반의 침묵을 반 긍정이라고 알아들었다. 왜냐하면 이 무뚝뚝한 가주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침묵으
로 긍정을 나타내곤 했기 때문이다.
"안 돼."
반이 긍정의 반응을 나타낼 것이라 믿었기에, 케인은 반의 거절에 속으로 당황했다. 표정으론 조금도 들
어나지 않았지만.
반의 얼굴이 차가운 가면 같다면, 케인의 얼굴은 그야말로 얼음조각 같다. 둘은 서로의 속마음은 조금도
알지 못한 채로 서로를 주시했다.
"……특별한 이유라도?"
"……더 이상 시종을 바꾸는 것도 짜증이 난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면 너에게 줄테니, 그렇게 알던가."
그 말과 함께 반은 일어섰다.
케인은 반을 빤히 보았다.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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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9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시온과 반(3)
여느 때와 마찬가지인 아침.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새벽이었다.
어제의 그 공포스러운 일은 기억 속에서 깨끗이 지워낸 듯, 카르멘 가의 새벽은 평소 때와 다를 것이 전혀
없어 보였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저 주방장이 힘겹게 들고와서 내려 놓았을 정도니 그 양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프란은 그 감자 포대를 한참동안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헤헤, 하고 웃었다.
"지금은 멀쩡하지?"
"……그렇죠."
"그럼 깎아야지."
"……네."
뮤가 살짝 윙크를 했다.
"훗."
프란은 작게 웃었다.
뮤는 다시 부지런히 당근에만 몰입했고 프란 또한 이 살인적인 양의 감자깎기에 몰입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뮤가 당근을 다 깎았다. 그녀는 프란을 도와 주려는 듯 손을 뻗어 감자에 손을 가져갔다.
"고마워."
"뭘, 넌 바쁘잖아."
프란은 감동했다.
이 곳에 와서 제대로 된 사람이라곤 몇 명 사귀지 못한 프란으로서는 뮤의 배려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프란의 입장에서 보면 마린은 좋은 사람이긴 했지만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하긴 뭣했고, 시온 역시 나쁘진
않은 녀석이었지만 그 느끼함 때문에 프란에겐 경계의 대상이었다. 반은…… ……말할 것도 없이 반은 프
란의 블랙 리스트 1 위였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뭘?"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고 그 대가로 주위에서 쏠리는 사람들의 말없는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다.
"……조용히 좀 하자고."
"흥, 입은 살았다니까."
▷◀▷◀▷◀▷◀▷◀▷◀▷◀▷◀▷◀▷◀
'케인이 돌아왔다.'
"가주님, 식사입니다."
"……."
철컥, 하고 문이 닫혔다. 프란은 주위를 쉭하고 훑어보았다. 언제나 쇼파에 앉은 거만한 자세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프란은 잠시 이 재수 없는 인간이 밖으로 나갔나, 라고 생
각을 했지만 이 이른 아침에 반이 나갈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프란은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크레인을 죽 밀어 식탁 앞에 가져갔다. 식탁의 맞은 편에는 부드러운 천을 늘어뜨린 침대가 있었다. 프란
은 무심한 얼굴로 그 침대를 보았다. 그것은 정말로 무심한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그녀가 침대를 바라보
았던 것은 우연의 일치로 가능한 일이었다.
"으응……"
"헉!"
하지만, 우연의 일치로 침대를 바라본 프란은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프란은 입을 헤 벌린 채로 계속 앞을 보았다.
"……."
"……미쳤군."
프란은 '천사 같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자신의 이마를 세게, 아주 세게 두드림으로서 망상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가주……."
"힉!"
"……."
"우왁!"
평소라면 운동으로 다져진 완벽한 균형감각 때문에 심하게 몸이 흔들린 뒤에도 균형을 잡고 설 수 있었을
테지만, 눈앞에 있는 인물의 성질머리 때문에 잔뜩 긴장해 있던 프란은 몸이 흔들리자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말았다.
"음……"
"악!"
프란은 얼떨결에 포옹하는 자세가 되어버린 이 이상한 상황에 당황하며 비명을 쳤다.
어쩡쩡하게 반의 두 팔에 목만이 안긴 자세로 프란은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아무리 밀
어내려고 애를 써도 그 가늘가늘해 보이는 몸과는 달리, 반의 팔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헉!"
프란은 이 민망하고도 민망하며 또 민망한 사태에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우물 쭈물거렸다. 잽싸게
침대 바깥에 선 프란이 머리를 긁적이는데, 설상가상으로 밖에서 소리가 울려왔다.
"가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언제나 반의 방 앞에서 보초를 서는 그들은 갑자기 가주의 비명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며 방문을 쳤다.
바로 몇 일전에 독약사건이 일어났었기에 그들의 긴장감은 극도에 달해 있었고, 그래서 반의 비명소리에
날카롭게 반응한 듯 했다.
"……."
놀라운 일이었다.
언제나 냉정하던 반이 조금 당황한 듯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프란은 그 모습이 조금이나마 귀여워 보였다.
반은 한참동안 그 상태로 있다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평정을 되찾았다.
갑자기 찾아든 침착한 얼굴로, 반이 말했다.
"괜찮다고 하지 않는가."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큰 보폭걸음으로 그들이 다시 제자리에 서는 소리가 들렸고, 프란과 반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장막을 드
리웠다. 가주는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프란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얼마나 인상깊던지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시, 식사하셔야죠?"
"시, 십년 감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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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30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시온과 반(4)
"……후우."
"……술기운인가……."
반은 천천히 중얼거렸다.
아직도 머리가 띵하게 아파 오는 것이, 과음을 하긴 했던 모양이다.
반은 고개를 바짝 들었다.
문득, 아까 전 당황하던 프란의 얼굴이 떠올랐다. 반은 무안한지 자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한 번 넘기며
살짝 헛기침을 했다. 잠시 프란을 안았던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몇 년 만에 꾼 꿈이었을까……."
문득 반이 중얼거렸다.
눈을 감고 생각한다.
정말 그건 얼마 만에 꾼 꿈이었을까.
"……어머니."
반은 작게 입술을 움직였다.
작고, 조금은 어색하게 그렇게 뱉어낸 반은 그리고 잠시 후,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로 어째서였을까.
반의 눈동자가 다시 흐릿해졌다.
"……나답지 않군."
"……나답지 않아."
'반, 이리오렴.'
그리운 어감이다.
그 이름을 들어본 것도……. 언제적의 이야기일까.
'반, 이리오렴.'
'반, 이리……'
'반…….'
"……나 답지 않아……."
"……."
"……미치겠군."
반은 중얼거렸다.
민망함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
"왜, 왜 안 나오는 거야, 이 놈……."
철컥.
"식사는."
반이 차갑게 물었다.
프란은 평소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반의 태도를 보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여기에 있습니다."
▷◀▷◀▷◀▷◀▷◀▷◀▷◀▷◀▷◀▷◀
"그럴 필욘 없으시겠죠?"
반은 다시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프란은 인상을 찡그린 채로 그런 반의 뒤를 따랐다.
보통 때라면, 식사를 끝났으니 다음 행선지는 당연히 정원이어야 했다.
그가 걷고 있는 곳은 프란에게는 낯선 길이었다.
하긴, 프란에게 낯익은 길이 있을 리가 없었다.
프란은 인상을 구길 만큼 구긴 채로 반의 뒤를 줄줄줄 따라갔다.
간간히 반과 마주치는 시녀들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해왔지만, 반은 찬바람이 씽씽 부는 태도로 불쑥 앞
으로 지나갈 뿐이다.
프란은 가볍게 머리카락을 흔들며 앞으로 나서는 반을 보며 생각했다. 반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흩어지는
바람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프란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 더더욱이나 알 수가 없어졌다. 프란
은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훑어보았다. 화려하게 조각된 샹드리에와 벽면 전체를 장식하는 커다란 그림 하
나가 있는 것이 보였다. 프란으로서는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
"형님!"
"시온."
"……그렇군."
시온은 생글 웃더니 앞쪽에 있던 시녀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시녀들은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문을 을 활짝
열었다. 반은 말없이 안으로 들어섰고, 시온은 그런 반을 잠시 본 후 프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
"프란 프리텐."
▷◀▷◀▷◀▷◀▷◀▷◀▷◀▷◀▷◀▷◀
자고 싶었다.
정말 자고 싶었다.
미칠만큼 자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바닥에 드러누워 한 숨 잘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무슨 짓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가. 카세타 황실에 이 집안의 사람을 보내주란 말인가. 그것도 아무런 댓가도 없
이? ……웃기는군."
지금 프란의 앞에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널찍하게 떨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반을 중심으로 해서 커다란 원
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가주님. 생각해 보십시오. 어찌됐든 우리는 카세타의 사람입니다. 게다가, 저희 가문에는
기사도 여럿 있습니다."
"나에게도 카세타의 기사가 카세타에 충성하는 것을 막을 권리는 없다. 난 다만, 내 휘하에 있는 친위대
와 사병은 보낼 수 없다고 했을 뿐이다."
파츠츠츠츠.
괴상한 음을 내며 자신의 온몸에 내려 꽂히는 그 시선을 본 프란의 온 몸으로 두드러기가 쫙하고 돋아났다.
프란은 자신을 보는 반의 눈을 보고 움찔하며 굳었다.
만약 여기서 '카세타 왕국' 사람이란 말을 한다면 반은 황실에 사람을 보내야 한다. 하지만 카세타 왕국
사람이 아니라 아일린 가문의 본가가 있고, 아버지인 로웬 아일린의 고국인 세이피아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면 이것도 문제가 심각해진다.
"……나도 하나 묻지."
"쿡쿡."
문득 들려온 웃음소리에 좌중의 시선이 모조리 시온에게로 쏠렸다. 왜 갑자기 이런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
리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들은 시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프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온은 그런 그들의 눈빛에 조금 민망해진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아, 이 쪽은 보지 마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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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31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시온과 반(5)
"헤헤."
쥐가 난 다리를 억지로 억지로 움직이며 시선은 밑으로 떨어뜨리고, 눈물을 찔끔대고 있던 프란의 몸이 움
찔하고 굳는 듯 싶었다. 프란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살짝 웃어 보이는 은색 머리카락의 미소년이 눈앞에 보였다.
흔하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머리 색깔과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한 저 가늘어진 눈매.
"……웃지마."
카세타 황실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라는 의제를 가지고 시작되었던 이 지루하
고도 지루하며 또 지루한 회의는 결국 반의 패배로 끝났다. 아무리 가주라 해도, 만장일치로 밀고 들어오
는 이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반은 쓰디쓴 패배감을 맛보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밖으로 걸어나왔다.
프란은 자신의 옆을 스치는 반의 어깨에 몸이 닿이자 잠시 움찔했다.
"형님, 힘내쇼."
"……형님."
"……무슨 일로."
"그런데."
"……."
어이가 없어진 프란이 그래도 반을 따라가려고 한 발을 옮기는 찰나, 시온이 갑자기 프란의 손을 덥썩 잡
았다.
"크아아악!"
"헤헤, 뭐, 뭘?"
▷◀▷◀▷◀▷◀▷◀▷◀▷◀▷◀▷◀▷◀
"오∼."
시온은 프란의 손을 질질 잡아끌었고, 그다지 유쾌하진 않지만 프란은 그 손에 이끌려 오고야 말았다. 카
르멘 가의 사람들이 두 필의 말을 내주었지만, 시온은 그것을 웃으며 거절했다. 프란과 함께 운치있게 걷
고 싶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프란은 그렇게 말하는 시온을 가볍게 주물러 주었다.
"어때? 좋지?"
흑맥주를 높게 든 채로 경쾌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도 보였고, 광소라 부를만한 웃음을 터뜨리며 얘
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카르멘 가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그 발랄하고도 즐거운 광경에 프
란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 거리는 완벽한 축제의 분위기에 감싸여 있다.
시끌시끌한 사람들의 소리가 저 하늘 위로 번지고 있고, 오색 빛깔의 선들이 온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속닥속닥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래서인지 프란은 약간의 의구심을 가졌
다.
"굉장하군!"
"아아, 잠깐 잠깐!"
"글세올시다. 허허……"
점성술사 특유의 희디흰 옷과, 그 옷 위에 조그맣게 박혀진 붉은 구슬들은 햇빛을 받아 마음껏 반짝이고
있었다.
"호오?"
프란은 뭐냐는 듯한 눈으로 노인을 보았고, 노인은 호기심에 반짝이는 얼굴로 피식 하고 웃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오."
퍼벅!
순간, 프란의 팔뚝이 벼락같은 속도로 들어올려지더니 그대로 시온의 머리를 강타했다. 시온은 꽥, 하는
소리를 내며 저 멀리로 날아갔지만 곧 비틀거리며 다시 다가왔다. 그는 최대한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
다.
"자아, 어서요."
드리비아 레키슈안.
한 떨기의 릴리아나 꽃과 같았다는 그녀, 레이니아는 철혈의 군주라는 드리비아와는 180 도 다른 인물로,
남편의 모자라는 모든 점을 커버해준 대단한 여인이었다. 별점을 쳐서 남편의 군대를 위험으로부터 건져내
었다는 설화도 있고, 부드러운 연설로 병사들의 투지를 최고조까지 끌어올렸다는 설화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유일한 연인이자 단 하나의 아내였던 레이니아와의 만남을 계기로 조금씩 변하기 시작
했고, 그녀의 도움을 받아 레키슈안을 건국하는 대 업적을 이룰 수가 있었다. 역대 대륙에서 가장 운 좋
은 남자를 뽑을 때면 언제나 열 손가락에 꼽히는 남자가 바로 이 드리비아 레키슈안이라는 것을 고려해 본
다면…… 시온과 프란의 궁합은 거의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헤에."
시온은 정말로 감탄한듯, 가볍게 소리쳤다.
"뭐, 그런 편이지."
시온이 웃었다.
하지만 프란의 말을 듣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노인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왼쪽에 놓여있던 카드를 휙하
고 뒤집었다. 그이 눈 위로 미미한 감탄이 스치고 지나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으음? 이것도 괜찮구려. 크슈아 레닌! ……고귀한 여성상이라. 여인에게 있어서 상대 남자는 그야말로 왕
자님이라고 할 수 있소. 뭐, 신분 상승을 원한다면 이 남자가 무척이나 좋다고 말해주고 싶군요. 좋은 애
인을 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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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32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시온과 반(6)
반면, 시온은 날아갈 듯한 발걸음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시온이 말
을 꺼냈다.
"프란, 배고프지? 내가 따끈하고 맛있는 거 사줄까? 카르멘 가로 온 이후로 제대로 된 음식도 먹어본 적
이 없을 텐데… 어때? 내가 죽이게 맛있는 걸 사주지."
"필요 없……."
꼬르르르륵.
"킥킥."
이 솔직함.
이 당당함.
"그런 면이 좋아……."
프란은 투덜댔다.
▷◀▷◀▷◀▷◀▷◀▷◀▷◀▷◀▷◀▷◀
시온은 식당으로 프란을 안내했다. '식당'이라는 이름의 식당이었다. 정말이지 개성이 없어도 그렇게 없
을 수가 없는 식당의 이름을 보고 있던 프란은 그 안으로 들어서고 조금은 놀랐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빽
빽하게 사람들이 차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소란스러운 음성이 들려와 프란의 머릿속에 빙글빙
글 돌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이것저것 잡담을 주고받는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경쾌했다. 어디를 봐도
평민임이 틀림없는 자들이다. 프란은 이 시온이라는 인물이 예상보다 더 특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귀족 주제에, 게다가 아일린 가문의 일족인 주제에……. 이런 평민들의 식당에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불쑥 들어오다니.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손을 끌어당기는 시온을 뿌리치며 프란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이상한 일
이었다. 붐비는 이 식당을 보고 있는데 얼핏 그 차가운 얼굴이 생각나는 것은 도대체가 무슨 이유란 말인
가.
순간, 시온이 갑자기 두 손을 꽉하고 모아 쥐더니 프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당황한 프란이
한 발 물러서는데, 시온이 샥하고 웃으며 말했다.
빠악!
▷◀▷◀▷◀▷◀▷◀▷◀▷◀▷◀▷◀▷◀
"……어이."
"응?"
"응? 뭐가?"
"……사라졌어."
프란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있던 시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정신을 최대한 집중해서 주위를 살펴보
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발견되는 것은 없었다. 시온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앞에 놓여져 있던 음식을
한 스푼 떠서 먹었다. 프란은 열심히 음식을 먹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방금 전에 느껴졌던 그 이상한 것
을 신경쓰고 있었다.
▷◀▷◀▷◀▷◀▷◀▷◀▷◀▷◀▷◀▷◀
"프란……."
"왜."
"……형님은 좋아하지마."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프란이 매섭게 물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 친절히 주물러 주겠다는 의지가 온 몸에
서 끓고 있었다. 시온은 피식 웃으며 한발자국 물러섰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술기운에 젖어 거리에서 흥
분한 소리를 높이고 있는 사람들의 틈새를 빠져 나가면서 시온은 입술을 가만히 열었다.
"왜 그래?"
프란의 경악한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프란은 그런 시온의 태연
한 얼굴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큰소리를 쳤다.
퍼억! 말할 것도 없이 프란의 강렬한 펀치가 날아들었다. 시온은 부드럽게 고개를 움직여 프란의 주먹을
피했다. 프란은 의외로 자신의 주먹을 가볍게 피하는 시온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시온은 다시 한 번
생긋 웃었다.
생글생글 웃더대던 시온의 얼굴이 그 말을 끝낸 순간 확하고 굳었다. 프란은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찌푸려
지는 시온의 얼굴을 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시온이 씹어뱉듯 한마디 한 것은 그 순간이었으리라.
단 한마디.
그 단 한마디뿐이었지만, 순간 프란은 놀라 걸음조차 멈출 지경이었다.
말을 하는 시온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지면서 마치 평소의 반과 비슷한 표정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언제
나 빙글거리던 시온이 그런 표정을 하자, 이건 또 새로운 공포로 다가온다. 프란은 당황한 눈을 깜빡이며
다시 한 번 시온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왜?"
프란이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시온이 웃으며 말했다. 시온의 표정은 한없이 부드
러웠고, 그 얼굴 위에 떠오른 것은 평소 때의 시온이 짓는 그 능글맞은 웃음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프란
은 방금 전 자신이 보았던 그 차가웠던 얼굴은 자신이 순간적으로 뭔가를 잘못 본 것이라고 억지로 생각하
기로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방금 전에 본 시온의 표정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프란의 입에서 가볍게 하품이 나올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시온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왔다.
시온은 프란을 향해 손을 까딱여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해보였다.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다가가 보니, 여
러 가지 모양의 보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프란은 귀금속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
는 사람이었기에 무관심한 얼굴을 했다.
프리텐 가문이 건재할 그 때조차 귀금속이라곤 보지도 않았던 그녀였지 않은가. 검만 있으면 되었던 특이
한 여인은 그녀에게, 이런 귀금속은 그저 우습게 보일 뿐이었다.
'귀족가의 다른 여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돌맹이 따위를 보고 뭘 그렇게 좋아하고 있는 걸까.'
옛날엔 그런 생각조차 했었던 그녀였다. 이런 보석을 본다해도 역시 돌맹이로군, 이라는 생각 이상은 들
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반면, 시온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저어, 손님……."
시온은 그 작은 동전 하나를 상인에게 내밀었다. 상인은 쭈뼛거리며 뭐냐는 듯한 태도로 그 동전을 받아들
었다. 하지만 못마땅한 태도로 동전을 받아들였던 그는 그것을 만져본 순간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그는
갑자기 눈을 부비더니, 한참동안 동전을 보고 보고 또 보고를 반복했다.
프란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 가게는 아일린 가 소속의 상단이었고 방금 전에 시온이 보여준 그 작은 물건은
아일린의 모든 혈족에게 하나씩 주어지는 동전이었다. 아일린 가의 혈족은 아일린 가에서 세운 모든 상단
에서 자유롭게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 상인이 벌벌 떨었던 까닭역시 간단하지 않은가. 자신의 상단 쯤은
언제든지 가볍게 갈아치울 수 있는 사람이 왔었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이렇게 할 셈이지."
그 말과 함께 시온은 안에서 커다란 물방울 모양의 보석을 꺼내, 프란의 손에 척하고 쥐어 주었다. 프란
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에, 시온은 주머니에서 하나하나 무엇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선물."
"……."
'이거 다 팔면 정말 얼마 나올까…….'
▷◀▷◀▷◀▷◀▷◀▷◀▷◀▷◀▷◀▷◀
"왜 그러지?"
"…신경꺼."
스르릉.
"거기.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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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33 :: 오! 나의 주인님- PART 6: 시온과 반(7)
"……아는 사람인가?"
"아아, 조금."
"아아, 못 나올 건 또 뭘까나."
"이익!"
시온을 향해 말한 것이 틀림없었다.
시온은 피식 웃었다.
"아아, 내 연인이야."
"닥쳐, 네 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남자는 얼빠진 듯한 음색으로 중얼거리듯이 말하다가 프란이 갑작스레 휘둘러운 검에 얼핏 정신을 차렸다.
프란은 남자의 얼굴을 향해 검을 한 번 휘두르며 낮게 뱉어냈다.
"……헛소리에 장단 맞춰 주지마."
남자는 입 꼬리를 부들 떨며 시온을 보더니 프란 쪽으로 휙하고 고개를 돌렸다. 오만한 눈으로 자신을 보
고 있는 오렌지색 눈동자의 소년은 당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투기로 살짝 틀어올려진 그
소년의 눈동자를 보면서, 남자는 한 자 한 자 짧게 뱉어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저 개망나니를 발견한 것은 방금 전의 일이다."
"내가 왜?"
"프란, 신경 쓰지 말고 이만 가자."
"빌어먹을 자식!!"
남자의 과격한 말과 함께 곧바로 올려진 검은 그대로 시온을 두토막 낼 듯이 가까워졌다. 시온은 가볍게
한발자국 물러섰고, 그 사이로 프란이 끼여들었다. 프란은 퍼렇게 날이 선 검을 똑바로 세운 채로 남자의
검에 맞서곤 눈을 빛냈다.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보이는 프란을 보며 시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자
신의 앞을 막는 프란을 보고 있다가 뒤로 흠칫 물러섰다. 남자의 얼굴에 희미하게 비웃음이 어렸다.
프란은 대꾸 없이 휭, 하고 검을 휘둘렀다.
남자의 무지막지한 검 앞에서 프란은 조금의 굽힘도 없이 몸을 움직였다.
침묵의 여신이 숨어산다는 저 비나룬의 빛이 프란의 검 끝에서 조각조각, 유치조각처럼 미세하게 부서져
희미하디 희미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가늘가늘한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조그마한 땀방울들이 프란의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프란은 검을 살짝 옆으로 누였다. 남자는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프란은 두 발을 살짝 벌린 채로 검을 더욱 세게 쥐었다.
삐죽한 직선을 그리고 있는 검이 바람같이 움직였다.
"……네가 졌어."
그 말과 함께 프란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발을 들어 남자의 검을 차내렸다. 찰캉,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땅을 뒹굴었다. 프란은
검을 순식간에 거두곤 남자를 밀어냈다. 남자는 휘청, 하며 뒤로 물러섰다가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졌다.
"……별 것 아닌 일이야."
프란은 어찌됐든 검을 계속 세운 채였다. 시온은 척척, 다가가더니 남자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리고 웃었다.
시온은 피식 웃었다.
"아아, 글세."
"뭐야, 벌써 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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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34 :: 오! 나의 주인님- PART 8: 카세타 왕궁 무도회(1)
"초대장이라……."
키네온 L. K. 카세타-
「카르멘 경.
오는 3 일, 짐의 셋째 딸인 키네세스의 17 번째 생일을 맞이해 황실에서 무도회를 개최하오.
카르멘경이 반드시, 반드시 참석해 주었으면 하오.
그대가 무도회를 기피한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이번만큼은 반드시 참석해 주시길 요청하는 바요. 중요한
의논건이 있소. 그대가 참석할 것이라 믿고…….」
카세타, 이 나라의 지존인 그 국왕을 '빌어먹을 영감' 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반의 얼굴은 가득한 냉소로
뒤틀려 있었다. 반은 입술을 꽉하고 깨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짙은 것이 떠올라
있다. 과거의 잔해를 읽어 내리는 반의 얼굴 위로 어느 순간 가벼운 경련이 스쳐 나갔다.
"……설마……?"
▷◀▷◀▷◀▷◀▷◀▷◀▷◀▷◀▷◀▷◀
"미친놈."
"미친놈이라니, 그건 너무하잖아."
"연인이라……. 글세."
멋쩍은지 뒷통수를 슬슬 긁으며 시온은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확실히, 그 비엘이라는 아가씨는 시온
의 일방적인 이별 선언을 받았던 여인이기는 했다. 하지만…… 시온에게도 이별의 이유 정도는 존재했다.
시온은 피식 웃었다. 프란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입가로 조용히 중얼거려본다. 시온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프란의 무시무시한 눈빛으로부터 벗어
나고자 했다.
▷◀▷◀▷◀▷◀▷◀▷◀▷◀▷◀▷◀▷◀
"……적당히 좀 해라."
"그럴 수 없습니다."
혼자서 중얼거리던 프란은 힐끔 옆을 보았다. 그녀의 옆에는 느긋하게 웃고 있는 금발의 여인, 마린이 있
었다. 마린은 피식피식 웃으면서 반을 향해 가득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말했다. 반은 그의 표정을 억지로 외면 했다. 하지만 남자는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마린의 말에 프란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고, 반의 얼굴에도 희미한 파란이 스치고 지나갔다. 반이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훗, 하고 웃었다.
어제, 카세타 왕실에서 초대장이 왔을 때…… 마린에게 아무 말도 하지말고 조용히 혼자서 준비를 하고 떠
났어야 하는 거였다. 반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마구 한탄했다. 마린에게 황실에 가야하니 말을 준비하라고
말을 꺼낸 것부터가 실수의 시작이었다. 왜 말을 준비해야 하냐고 마린은 물었고, 반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확실히 그랬었다.
'그렇게 되었군.'
"……마린."
전혀 쑥스러워하고 있지 않은 반이었다.
"오∼ 호호호호호홋!!"
"오오오오옷!!"
"뭐, 뭐야?"
자신도 모르게 검을 뽑아든 프란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순간, 프란의 눈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프란은
검을 슥슥, 안으로 밀어넣곤 헤∼ 하고 입을 벌렸다.
"에……"
프란이 반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 마린이 살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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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35 :: 오! 나의 주인님- PART 8: 카세타 왕궁 무도회(2)
안녕하세요, 카르멘 경?
오늘도 날씨가 참 좋군요.
다음 티타임의 주제로는 역시 세이피아와의 무역건이 어떨까요?
-키네세스 L. K. 카세타
▷◀▷◀▷◀▷◀▷◀▷◀▷◀▷◀▷◀▷◀
아름다운 장미의 향기가 독하도록 아름다운 것처럼, 반의 아름다운 외모에서는 지나치리만큼 독한 매력이
있다.
아름다운 장미에 숨은 가시가 있는 것처럼, 저 아름다운 외모에는 무섭도록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다.
"예?"
"……마린에게 옷을 달라고 해라."
프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꼬리가 가볍게 치켜 올려졌
다 내려왔다. 프란은 반의 눈이 싸늘하게 굳어진 것을 보고 핫, 하고 입술을 다물긴 했지만 역시 깜짝 놀
랐던 프란의 눈은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최근에 목이 두 개로 늘어났나?"
반의 말이 자연스럽게 번역이 되어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프란은 언제나 그렇듯이 속으로는 열심히 투덜거
리면서도 겉으로는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아뇨."
"죽이시겠다구요?"
반은 말 없이 프란을 보고 있었다.
그 따가운 시선에 프란은 조금 민망해서인지 머리를 슬슬 긁어버렸다.
자신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프란이 고개를 끝까지 숙였을 때 반은 후,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옷자락을 돌렸다. 그의 머리카락
을 따라 땀이 흐르고 있다. 그의 몸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란이 멀뚱히 서 있는데, 반의 목소리
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10 분이다."
"젠장하아아아알!!"
▷◀▷◀▷◀▷◀▷◀▷◀▷◀▷◀▷◀▷◀
"웬일이야?"
마린은 투덜거리는 얼굴로 자신의 방에 들어온 프란을 보며 생각했다. 프란은 툴툴대면서 마린에게로 오더
니 이빨을 악물곤 한마디 했다.
"옷!!"
"엥?"
마린은 갑자기 튀어나온 그 옷이라는 말에 황당하다는 어조로 되물었다. 프란의 눈 꼬리가 확하고 위로 치
솟았다.
"왜 웃는 거야?"
"아, 아무것도."
"크악!!"
"아아, 예쁘지?"
프란이 갑자기 등장한 그 드레스를 보며 침을 꼴깍 흘리며 긴장하고 있는데, 마린은 휙하고 프란에게서 도
로 드레스를 뺏아 간 후 보란듯이 그 드레스를 촥하고 들어 보였다.
치마 아랫단부터 달려진 자잘한 프릴은 조그마한 꼬마가 불어넣은 비누방울처럼 달랑달랑그 올마다 반짝인
다 치렁치렁하게 달린 프릴을 어깨부터 허리 끝까지 달아놓은 이 푸른빛의 실크 드레스는 눈이 부시리만치
반짝인다.
"프라아안, 혹시 이 옷 입고 싶지 않아?"
"……절대로 입고 싶지 않다."
장미 정원에서 갓 꺾어온 물기 머금은 흰장미가 크리스탈 물병위에 수줍은 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살포시
미소짓는 장미 앞에서, 마린은 드레스를 펼쳐 놓았다.
프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을 보고 있는데, 마린은 다시 방 안 쪽으로 들어가더니 한참만에 손에 뭔가를
잔뜩 들고 나타났다.
"뭐, 뭐냐 그건."
마린은 보란듯이 드레스를 가볍게 접더니 포장을 하기 시작했다. 커다랗고 붉은 리본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커다란 상자 안에 깔끔하게 접힌 드레스가 들어갔고, 마린의 손이 그 리본을 따라 움직였다.
"뭐?"
저 마린이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였다. 프란이 마린의 눈치를 계속 힐끔대는데, 문득 마린이 말했다.
"프란."
"뭐야?"
"아니야, 아무 것도."
그녀는 푸른 실크 드레스와 함께 준비된 수많은 선물용 드레스를 보며 씨익, 하고 웃었다. 그것은 언제나
의 마린이 짓는 사악한 미소였다.
▷◀▷◀▷◀▷◀▷◀▷◀▷◀▷◀▷◀▷◀
저 성질머리 더러운 가주의 손에서 멀쩡하게 설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프
란은 속으로 자신에게 말했다. 그렇다. 그것이 중요하다.
"도착했습니다!"
황실에서 개최하는 파티에 처음 참여하는 만큼, 확실한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고 남몰래 생각했던 마린이었
다. 마린은 감탄하는 귀족들을 마차 안에서 내려다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누구지?"
이 마차의 주인은 아무리 봐도 10 대 후반의 소년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 화려한 마차를 힐끔대고 있던 그
들로서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누구인가요?"
부채로 입을 살짝 가리며 퓌브린 백작 부인이 네프렌 후작 영애에게 물었다. 네프렌 후작 영애는 사교계
모임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이였기에 그녀가 모르는 귀족은 거의 없었다. 특히나 저렇게 화려한 마차를 몰
고 나타난 이가 시시한 가문의 사람일 리가 없으리라 생각한 퓌브린 백작은 잔뜩 기대가 섞인 얼굴로 네프
렌 후작 영애에게 묻고 있었다.
하지만 네프렌 후작 영애의 입에서 나온 말은 퓌브린 백작 부인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네프렌
후작 영애는 조금 달아오른 얼굴로 부끄럽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순간이었다.
철컹!
큰 소리와 함께 반의 앞을 가로 막는 것이 있었다.
"……."
"신분을 밝히시오!"
"……저스티스 카르멘."
▷◀▷◀▷◀▷◀▷◀▷◀▷◀▷◀▷◀▷◀
카르멘 가!!
"……증거가 필요한가."
반은 아무 말 없이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아까 전에 자신이 받아뒀던 초대장을 문지기에게 내밀었고 문지기는 그것을 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
다.
그는 문에 들이댔던 창을 모조리 걷으라고 명령한 뒤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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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36 :: 오! 나의 주인님- PART 8: 카세타 왕궁 무도회(3)
황금빛 휘창의 한 가운데로 걸어오는 한 소년의 발걸음이 주위사람들의 눈 속으로 파고 들고 있다. 여태껏
수많은 귀족들의 이름이 저기 휘창에서 불려졌지만, 이만큼이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들어온 이는 여태
껏 없었다.
"카르멘 가의 저스티스경입니다!"
다시 한 번 울리는 목소리.
이미 정원에서의 한바탕 난리가 있었기에, 귀족들의 동요는 아까 전처럼 격렬하진 않았다. 하지만, 여태
까지 카르멘 가의 가주가 이 파티에 등장했다는 것을 반신반의하고 있던 귀족들은 소년의 등장에 입가에서
놀라움을 지워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 가문의 주인이라는 자, 그것도 이 카세타 왕국에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저 명문가의 주인이 여태껏 단
한 번도 사교계에 참여하지 않아 사교계에서는그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었다.
화려한 여인들의 드레스 자락과 경쾌한 웃음소리, 끝도 없이 높은 천장에 매달린 채로 화려한 조명을 발하
고 있는 불빛의 번쩍거림이 프란의 눈을 어지럽게 했다. 프란은 아직까지도 반의 등장에 감탄을 터뜨리고
있는 귀족들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뭐라구요!"
귀족들은 한참동안이나 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반이 자리를 잡는데, 여태껏 귀족들과 더불어 술렁
이던 그 곳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감히 반에게 접근해 인사를 하지 못하
던 가운데 한 남자가 다가가자, 귀족들은 다시금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반 역시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남자를 보았다.
갑자기 말을 걸어온 그는 기름이 덕지덕지 묻은 퉁퉁한 얼굴에, 어딘지 모르게 귀족틱하게 생긴 청년으로,
온 몸에 기름이 흐르는 듯한 느끼함을 달고 있는 남자였다.
"고맙군."
"그 어떤 파티도 거부하던 당신이 키네세스 공주님의 생일 파티에 왔다는 것을, 저는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레이나님?"
그의 입에서 뭔가 알 수 없는 말이 튀어 나왔다.
프란은 자신을 향해 멍한 얼굴로 갑자기 말을 내뱉는 그 자를 보며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담소를 나누던
귀족들은 이 쪽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시선이 쏠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모양이
었다. 그들은 열심히 옆사람과 떠드는 척 하는 한 편 이 쪽으로 계속해서 시선을 내던지고 있었다.
"……이스티네 보일린."
반의 얼굴 위로 작게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미소이되 미소가 아닌 것.
"추, 충고 감사하군요."
"저기요, 가주님."
"……뭔가."
"뭔가."
이미 세상 다 산 것 같은 생각을 하는 프란이었다.
프란은 다시 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작게 물었다.
"세이피아에선, 여성이 원하지 않는 경우 남자가 추파를 던지는 경우……. 그러니까 뭐랄까, 찝적거리는
경우 있잖아요. 음, 이 찝쩍거림 속에는 기분 나쁜 시선도 포함되요. 하여튼 그런 경우, 손해 배상 청구
를 할 수 있는데. 카세타는 어때요?"
"카세타에는 그런 법이 없다."
'쳇,'
만약 그런 법이 있다면 당장에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저 보일린이란 남자를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고
말겠다고 이빨을 부득부득 갈아대던 프란이었기에 그녀는 실망하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자신의 얼굴을 향
해 따갑게 쏟아지고 있는 그 느끼한 시선 때문에 정말이지 졸도하고 싶을 정도다.
반은 와인 한 잔을 다 비우자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목적지는 파티장 한 곳에 있는 발코니였다.
"가주님. 왜 그러시는지……?"
"……아무것도."
반은 짧게 일축해버렸다.
프란은 뒷머리를 살짝 긁었다.
▷◀▷◀▷◀▷◀▷◀▷◀▷◀▷◀▷◀▷◀
"레이나님을 닮은 시종……."
보일린의 팔을 두드린 남자는 근사한 백의를 입고 콧수염을 옆으로 기르고 있는 중년의 남자였다. 보일린
은 남자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듯 고개를 숙였다.
"하리나스 백작!"
하리나스 백작은 발코니로 돌아서는 반의 모습을 끝끝내 눈으로 좇다가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
지자 천천히 입술을 떼어 말했다.
"하리나스 백작님."
"음? 왜 그러 는가."
"음."
하리나스 백작의 얼굴 위로 순간 기괴한 광채가 떠올랐다. 보일린은 이빨을 뿌득, 하고 갈더니 천천히 입
술을 열었다.
"……역시, 난 그 자를 도와야겠소."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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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37 :: 오! 나의 주인님- PART 8: 카세타 왕궁 무도회(4)
파티장에서 느껴지는 한 순간의 유희를 원한다면 차라리 집 안에서 사랑하는 남자와 두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편이 낫다.
"하나 묻지."
"……?"
"가주님."
반은 아무 말 없이 돌아보았다.
"에, 저, 그러니까……."
"저어……."
여성적인 그 목소리는 털털한 프란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맛을 가지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간드러지지
만 천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목소리다. 시쳇말로 옥구슬 굴러간다는 말을 쓰곤 하는데, 그 표현이 잘
어울리는 목소리라는 생각도 든다.
반은 그 목소리에 거의 무의식 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귀족의 영양인 듯 보이는 여자가 그의 눈가에 맺혔
다. 화려한 금빛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인은 반을 향해 간드러지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앵두같이 앙증맞은 입술이 말했다.
설마 승낙하진 않겠지?
그러나.
반의 입은 정말 인정사정이 없었다.
아름답게 내뻗은 콧날과 위엄을 가득 담은 차가운 보랏빛의 눈동자. 끝없는 심연을 품고 있는 보랏빛의 그
눈동자는 마력에 가까운 매력을 분출해 낸다. 너무나 하얗고 깨끗해 여성의 것처럼 느껴지는 피부와 그 피
부를 살포시 덮으며 내려오는 보랏빛의 장막은 소년을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기 만든다.
"실례했습니다."
"못 추는 건 아니 구요?"
"뭐?"
반의 반문에 프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
'그러는 댁도 19 살이야!'
"……."
생각해보라.
자신의 생일에 남자에게 용기를 내어 청한 춤이 무자비하게 거절당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 것인가.
"카르멘 경……."
키네세스 L. K. 카세타.
"……."
키네세스는 계속해서 반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붙이고 있었지만 반은 대꾸를 해주지도 않는지 입술의 움직
임이 없었다.
반의 스텝은 훌륭했다.
자신이 아까 전에 춤을 못추니 어쩌느니 했던 것이 바보 같이 느껴져서 그만 훗, 하고 웃어버렸다.
프란은 한참이나 음식을 먹어댔다. 귓가에서 녹아드는 화려한 음악들이 프란의 귓가를 간질이고 있었다.
그런데 프란이 한참 무엇인가를 먹고 있을 때, 그것을 방해하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이 있었
다.
"……?"
"프란에겐 무슨 볼일이지?"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그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자신의 뒤에서 누군가가 지금이라도 뽑혀질
듯한 검을 지그시 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프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쿵짝짝 쿵짝짝…….
귓가에서 정확히 3 박자로 나뉘어 울리는 왈츠의 경쾌한 음과 잘 어울리는 미소를 짓고 있는 은빛 머리카락
을 가진 소년은 어느 순간 생긋하고 웃어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시온이었다. 프란은 자신이 검을
뽑으려고 한 순간 정확하게 알고 나타나 발검(拔劍)을 저지하는 시온을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댁은 누구요?"
갑작스레 정신이 든 프란이 손을 비틀어 시온의 어깨를 확하고 꺾었고, 시온은 비명소리를 냈다.
▷◀▷◀▷◀▷◀▷◀▷◀▷◀▷◀▷◀▷◀
"카르멘 경."
"……."
"당신은 내가 싫은 가요?"
▷◀▷◀▷◀▷◀▷◀▷◀▷◀▷◀▷◀▷◀
"헉, 헉, 헉……."
프란이 길길이 날뛰며 다시 파티장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시온이 다시 헉헉대면서 프란의 손을 움켜쥐었
다.
"이보라구, 프란. 형님은 지금 키네세스 공주님과 춤을 추고 있잖아. 잠깐 정도는 자리를 비워도 좋다구,
응?"
"시끄러워!"
"뭘 진정해!!"
"……."
시온의 간청에 프란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시온은 그녀의 한숨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곤 생긋 하고 웃으면서 프란의 손을 이끌었다.
그런 시온의 얼굴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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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38 :: 오! 나의 주인님- PART 9: 10 초 간의 신데렐라(1)
한 편에선 최근의 정치판이 어떻다느니, 국왕의 저번 무역건은 어쨌다느니 하는 정치적인 문제가 오가는
반면, 한 쪽에서는 사교적인 모임에서 의례 빠지지 않는 이야기들 역시 오가고 있었다. 둥글게 서서 저마
다 질세라 입을 삐죽거리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오늘의 주인공 키네세스가 너무나 아름다워 보인다느니, 부인의 옷이 화려해 보이는데 어디서 맞췄냐느니,
보석의 세공이 참 잘 되었다느니…….
하지만, 무엇보다도 말하기 좋아하는 그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며 저녁 만찬의 맛있는 반찬거리가 되어 주고
있는 이가 있었다.
여인들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그를 보는데 반하여, 사내들은 조금 긴장한 눈빛, 내지는 냉냉한 눈빛으
로 그를 보고 있었다. 조금의 호기심이 동반한 그들은 새로 나타난 '경쟁자'를 관찰하느라 분주하게 움직
이고 있다.
"……카르멘 경."
벌써 몇 분 동안 줄기차게 스텝을 밟고 있느라 조금씩 지치기 시작한 키네세스는 그러나 피로한 기색을 보
이면서도 잡고 있는 반의 손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 물빛의 레이디 키네세스는 자신이 손을 내밀기 시작한 시점부터, 아니, 정확히 말
하자면 등장한 시점부터 계속해서 일련의 시선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던 한 남자를 지금 자신이 완전히
독점하고 있다는데 완연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약간은 무덤한 태도로 자신과의 댄스에 임하고 있다고는 하나, 지금 이 손을 붙잡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도 이렇게나 행복한 자신을 느낀다.
그러나, 불행히도 키네세스의 상대는 '웬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마왕' 내지는 '얼
음' 으로 지칭하는 저 카르멘 가의 소년 가주다. 이 냉묵한 소년의 입에서는 보통 남자들의 입에서 튀어
나와야 할 화려한 미사여구는커녕 최소한의 말조차 튀어나오지 않는다.
물결치는 드레스 자락, 출렁이는 바다빛의 머리카락, 귓가에 매달린 사파이어 귀걸이가 빠르게 회전한다.
"……."
▷◀▷◀▷◀▷◀▷◀▷◀▷◀▷◀▷◀▷◀
"……정말로 닮았다."
"레이나님……."
보일린은 낮게 중얼거렸다.
이스티네 보일린은 황금빛의 소년과, 그 소년을 데리고 사라진 은빛의 소년이 있었던 자리에 그렇게 한참
동안 굳은 듯이 서 있었다.
허공을 향한 보일린의 시선이 흐릿하다. 그렇게 보일린이 서 있는데, 저 멀리서 한 소년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소년을 발견한 순간 무엇인가 아련한 것을 좇고 있던 보일린의 눈이 얼핏 굳었다.
다가오고 있는 소년은 이제 겨우 16 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보이는 외모였다.
보일린 쪽을 향해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빠르게 걸어오고 있는 그 소년은 꽤나 깔끔한 외모의 소유자
로, 빛나는 초록색의 머리카락과 차분하고 따뜻해 뵈는 적갈색의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좀 특이한 것은 소년의 복장이었는데, 파티장에 참가한 다른 귀족들의 화려한 예복과는 달리, 소년은 딱
딱한 갑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중무장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 차림은 분명 파티장과는 조금 이질적인
성분의 것이었다.
▷◀▷◀▷◀▷◀▷◀▷◀▷◀▷◀▷◀▷◀
케이온 기사단장, 대 카르멘 가문의 일족인 그는 나즈막하게 중얼거리며 파티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무리 일국의 공주인 키네세스의 생일이라고는 하나, 저 가주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런스였다.
여태까지 파티장 외부의 경비대들과 파티장 내외부를 지키고 선 기사들에게 이 것 저 것 명령을 내리느라
고 몸이 열 개 라도 모자랄 만큼 바빴던 런스였기에, 카르멘 가의 가주가 파티에 참가했다는 소식을 듣는
것도 무척 늦었다. 그는 저벅저벅,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언제나 오만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황실의 소속 기사단 중 하나인 케이온 기사단, 그 기사단의 단장인 자신
을 압도해버리는 소년이다.
경험으로 보아도, 무엇으로 보아도 분명 그가 앞서야 마땅했다. 그러나, 소년과 비무가 끝난 후 런스가
돌아서는 소년을 보며 느낀 것은 자신보다 한참 나이 어린 저 소년에게 형편없이 졌다는 사실도, 자신은
소년의 등만을 평생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굴욕감도 아니었다.
소년은 자신의 요청을 거절했었다. 그리고 가주를 대신해서 자신의 상대를 했던 금색 머리카락의 그 소년.
"이름이…… 이름이?"
런스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런스는 갑자기 앞에서 터지듯이 들려온 그 커다란 목소리에 거의 무
의식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의 온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시, 시온님?"
그리고, 이윽고 들려온 그 목소리에 런스는 청각을 곤두 세웠다. 분명 시온의 목소리 뒤에 들려랴 할 목
소리는 간드러진 여성의 목소리라 생각했던 런스였는데, 이건 자신의 짐작이 조금 틀렸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
방글방글 거리는 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런스는 조금 더 고개를 길게 뺐다. 언제나 눈에 확하고 튀는
은색의 머리카락의 뒷 쪽으로 살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역시 눈에 띄는 금빛이 보인다.
런스는 경악했다.
런스의 호기심과 궁금증이 깊어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온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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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39 :: 오! 나의 주인님- PART 9: 10 초 간의 신데렐라(2)
반이 옆에 붙어 있어야 마땅하다.
오늘은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온은 프란과는 생각이 영 다른 듯 했다.
프란은 힐끔 시온을 올려다보았다.
"뭐냐?"
프란이 쏘는 듯이 물었다.
"너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야?"
제일 하고 싶은 거라니? 제일 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거 없어?"
"……이, 있다."
"뭔데?"
"그, 그건……."
생각이 나질 않는다.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니? 프란의 머릿속은 다시 어지러워 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 지
금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은 일.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렇게나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
하고, 프란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거, 검 닦고 싶다!"
"풋!"
프란 역시 자신이 한 말에 당황했다.
자신이 왜 그런 대답을 했단 말인가.
"쿡쿡쿡…… 하하하핫!"
"젠장할! 왜 웃는 거냐!"
프란은 발끈해서 말해놓고 시온을 향해 공포의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여차하면 처버리겠다는 의지가 가득
한 그녀의 손바닥을 본 시온이 히익,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키려고 했다. 시온이 막 몸을 오른쪽으로
트는 순간, 프란의 몸이 움찔하고 멈췄다.
다음 순간 당연히 날아와야 할 프란의 손바닥 내지는 주먹에 단단히 대비하고 있던 시온은 그러나 프란의
주먹이 날아와 자신을 두드리지 않자 조금 의아한 얼굴로 바로 섰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프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선지 알 수 없지만,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분명한
시선이었다. 프란은 최근 들어 기분 나쁜 시선을 많이 받게 되었다고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러던 프란의
눈은 한참이 지나서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뭐?"
▷◀▷◀▷◀▷◀▷◀▷◀▷◀▷◀▷◀▷◀
▷◀▷◀▷◀▷◀▷◀▷◀▷◀▷◀▷◀▷◀
하지만, 있는 힘껏 폼을 잡으며 '신데렐라의 하룻밤 꿈' 을 연출하려고 애쓰는 시온과는 달리, 프란은 시
온의 말에 그다지 동참하고 싶어하지 않는 듯 하다.
"너를."
"자자자, 프, 프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숫자를 세기 시작하는 프란의 태도에 아연한 시온이 얼른 프란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런 시온의 태도에 프란의 눈꼬리가 다시금 들어올려졌다. 시온은 눈꼬리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는 프
란의 태도가 어째 반과 닮아 간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겉으로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너, 그 이야기 알지? 세이피아의 3 대 명작 중에 하나, 음유시인 고 안덴의 신데렐라 이야기 말이야."
"……여자를 한낱 남자의 전속물로 취급할뿐더러, 여성이 노력도 없이 남자의 지위로 신분이 향상되는 그
진부한 스토리. 현재 세이피아의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씹히는 그 신데렐라 이야기를 말하는 거
라면 알고는 있다."
"너 정말 죽을……!"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드레스와 소녀들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시온."
"왜에?
"대체 무슨 꿍꿍이냐?"
시온은 씨익 웃더니 검지를 척하고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밤에 활동하는 야생 고양이의 그 것처럼 반짝,
하고 빛났다.
프란은 즐거운 듯 입술을 놀리는 시온을 한참동안 빤하게 노려보다가 휙하고 몸을 돌려 마차 밖으로 나가
려고 했다. 하지만 프란이 막 마차 밖으로 몸을 빼내는 순간, 시온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턱하고 부여잡
았다.
"프란."
"그래서?"
"입어줘."
그녀의 미간에 가느다란 줄이 생겼다. 프란은 어느 순간 피식, 하고 김빠지는 웃음을 흘리더니 시온이 부
여잡고 있는 오른손을 휙하고 뿌리쳤다.
"프란."
"……이 드레스…… 엄청나게 비싼 거야……. 팔면……. 프란이 빚 갚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몰라."
"……프란."
잠시 시온이 숨을 골랐다.
"딱 한 번만 입어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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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40 :: 오! 나의 주인님- PART 9: 10 초 간의 신데렐라(3)
반은 잘끈 입술을 물며 중얼거렸다.
파티장에 들어설 때부터 자신의 옆에 있으라고 그토록 경고를 했건만.
그렇잖아도 이따위 불쾌한 파티에 참여한 것이 못내 짜증스러웠던 반은 자신의 시종인 프란이 자신의 앞에
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진 것이, 그것도 자신의 사촌인 시온과 함께 사라진 것이 무척이나 불쾌한지 아까
부터 잔뜩 찌푸려졌었던 인상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말에 런스의 몸이 또 한 번 크게 움찔했다.
이 소년의 마음을 자신이 헤아리지 못하고 경솔하게 굴었던 것 같아 낯이 화끈거렸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단장님."
런스를 향해 다가온 것은 초록색 머리카락에 적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소년으로, 런스와 비슷한 종류의 갑
옷을 입고 있었다. 런스의 바로 앞에 다가온 그 소년은 다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잔뜩 긴장한 표증으로 런
스를 향해 뭐라고 속삭였다.
"……확실한가?"
뜨거운 술의 도수가 목구멍을 텁텁하게 덥힌다. 약간의 취기는 오히려 머리를 맑게 한다.
반은 발걸음을 움직여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소년과 런스에게로 다가섰다.
"무슨 일인가?"
"유쾌하지 않은 손님……?"
"……."
"나도 함께 가지."
"예?"
"앞장서라."
"가주님!"
▷◀▷◀▷◀▷◀▷◀▷◀▷◀▷◀▷◀▷◀
등뒤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 그 중에서도 특히 키네세스를 비롯한 여인들의 안타까운 시선을 절절이 느
끼면서도 반은 가차없이 몸을 움직여 소년의 뒤를 따랐다.
"이름이 무엇인가?"
키에르라.
그런 성을 가진 귀족이 있었던가?
'신흥 귀족인가?'
반의 옅은 호기심을 뒤로 하고 다시 발이 움직인다.
초록색 머리칼의 소년, 자신을 헤냔 키에르라 소개한 그는 자신에게 이름을 물어 본 소년을 향해 보일 듯
말 듯한 불쾌한 시선을 내비쳤다. 헤냔은 입술을 살짝 물면서 자신의 뒤를 따르는 소년을 힐끔 보았다.
케이온 기사단에 입단한 이후로, 기사단장인 런스의 옆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 검을 닦아왔던 헤냔은 여
태까지 '카르멘 가의 수장' 이란 작자에 대해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상관으로 모시며 존경해 마지않는 기사단장 런스가 반에 대해서는 오로지 찬탄에 가득한 미사여구로
일관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고 보면 카르멘 가 가주의 나이에 대해 물을 때만은, 런스가 난색을 표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곤란한 듯한 얼굴로 웃으며 헤냔을 향해 말했던 런스가 생각났고, 헤냔은 휙하고 고개를 돌려 런스에게 외
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이건 조금 젊은 게 아니잖습니까!'
헤냔이 울컥거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있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그의 생각을 반토막 내면서 런스의 입이 벌
어졌다.
"……유니온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격납고 쪽에서 이상한 움직임을 발견했다고 하는군요. 그의 연락을 받고
세 차례 경비원들을 보냈는데, 그들로부터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몇 일 전, 격납고에서 분실사고가 있었
기에 격납고 부분은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다는 것은 런스님도 잘 아실 겁니다.
오늘은 키네세스 공주님의 생일인 만큼, 높으신 분들이 많이 행차를 하셨고, 그 분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일에 얽혀 계신 분들입니다. 격납고 옆 부근은 파티장과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곳에 무슨 일이 생겼다
면 위험과 직결될 수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반동분자들도 난동을 피우니 조그마한 위험의 가능성이 있더라
도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주님."
반은 대꾸 없이 런스를 보았다.
▷◀▷◀▷◀▷◀▷◀▷◀▷◀▷◀▷◀▷◀
그들은 자신의 피조물이 자신의 의지대로 그려질 때, 자신이 의도하는 바대로 그 모습을 갖춰갈 때 이루
말 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
"피부가 참 고우시네요."
"……."
숙녀는 그러나 대답없이 앉아 있을 뿐이다.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약간의, 아주 미약한 감정이 떠올
라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것은 곧 가라앉아 버린다.
화가들이 자신의 붓끝이 만들어나가는 그림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지금 이 숙녀의 얼
굴을 만지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손끝이 만들어내는 '사람'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
도 모른다.
"이 드레스를 봐요! 아아, 너무나 잘 어울려요! 시온님이 그렇게나 신경을 써서 만든 드레스인만큼! 정
말로 너무 잘 어울리세요!"
옅은 푸른빛의 드레스.
어깨까지 살포시 파인 그 드레스는 심할 정도로 화려한 디자인을 갖고 있진 않지만, A 라인을 잔뜩 강조해
서 치마 자락부터 박혀나간 프릴때문에 어디를 보아도 수수해 보이지는 않는다.
소녀 셋은 마차 안에서 그다지 단정하지 못한 자세로 앉아서 무표정하나 조금은 뿔퉁한 기색이 숨기지 않
고 들어나기 시작하는 숙녀를 감탄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세 소녀의 눈은 감동으로 동그래져 있다.
"아아! 화장이 좀 잘 못된 것 같은데... 아무래도 분홍색 계열로 조금더 다듬어야 겠어요. 이 쪽으로 와
주세요!"
절대로 안가! 라는 염원이 온 몸으로 방출되는 자세로 숙녀는 고개를 저었다. 주홍색 머리의 소녀는 약간
아쉽다는 눈으로 물러났다. 이번에 나서는 것은 옅은 금색 머리의 소녀다. 소녀는 방긋 웃으며 소녀를 향
해 말을 건다.
"……작작 좀 해."
그 말에, 드디어 숙녀의 입에서 조그마한 제지의 소리가 들려왔다. 조개처럼 벌어졌다 다물리는 그녀의
입술은 옅은 핑크빛을 띄고 있다. 반짝이는 핑크색 입술 사이로 가지런하게 난 깨끗한 미백의 치아가 돋보
인다.
금방이라도 화를 버럭 낼 것 같은 숙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 모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허리깨에서 작게 흔들리는 금색의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웨이브가 져서 살짝 밑으로 늘
어 뜨렸다. 푸른빛의 드레스 위로 조심스레 흔들리는 금색의 머리칼은 손을 대면 그대로 미끄러지리라 생
각될만큼 부드러워 보인다.
"크악!! 그만!!"
프란이 아니라 프리나일 때조차 겪어본 적 없는 기묘한 경험을 하고 있는 프란은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 아랫단을 북 찢어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검을 찾으려고 했다.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다.
"내가 미쳤지……."
프란의 이런저런 회상을 부서 뜨리면서, 주홍빛 머리칼의 소녀가 시온을 불렀다. 프란은 퍼뜩 정신을 차
렸다.
"헤에? 다 된거야?"
".....하."
소년은 눈 앞에 선 소녀에게,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초록색 머리카락과 적갈빛의 따뜻해뵈는
눈동자를 가진 그 소년의 목소리는 긴장 때문인지 조금은 굳어져 있었다.
수줍음을 가득 머금은 그의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다. 하얗게 얼어붙은 주변의 경관들과는 다르게 유일하
게 화끈 열이 오른 모습으로, 소년은 자신의 앞에 선 소녀에게 더듬더듬 물었다.
한 발, 또 한 발.
소년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아니, 마치 무시한 것처럼 한 발 한 발 발을 앞으로 내딛어 검을 휘두르는 소
녀의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이 진지해 보였다.
전에도 말했듯이 어차피 여자인 몸, 지금은 모르지만 세월이 흐르고 서로의 몸이 성장해 가는 그 때가 오
면 너는 점점 더 초라해 질 거야. 지금도 그렇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체격의 조건이 다른걸. 너는 나
를 이걸 수가 없어.
"프……!"
"나는……."
소년이 다시 한 번 소녀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검을 휘두르던 소녀의 손이 멎더니 천천히 한마디가 튀
어나왔다. 소년은 바짝 긴장해서 소녀의 열리는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검을 휘두르던 소녀가 갑자
기 눈을 들어 소년을 바라본다. 소녀는 두 볼이 화끈, 하는 느낌에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 소녀가 다시
입을 연다.
"나는……. 결혼 따위 안 할건데?"
"그런 게 어딨어! 넌 여자란 말이야! 나하고 결혼해! 난 너하고 결혼할거야! 명심해! 19 살이 되면, 난
널 찾으러 올거다! '널' 찾아 올거라구! 그 때가 되면, 나하고……!"
"웃기지 마."
"난 세이피안 최고의 기사가 될 거야. 폐하의 옆에서 이 나라를 수호하는 당당한 여전사. 그걸 위해서 난
결혼 같은 건 안 해, 절대로."
"아니! 난 할 거야!"
소녀는 다시 검을 휘두른다.
소녀의 그 차가운 표정을 보고 있던 소년이……. 드디어는 눈물을 떨군다.
소년의 눈물 섞인 외침에도, 소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소년은 그 담담한 표정에 울컥해 버럭
고함을 질러 버린다.
"하지만 난 다시 돌아 올 거다! 돌아와서……."
"돌아와서?"
"쿡."
소녀는 웃는다. 그저 웃는다. 거짓말 하지마, 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소년은 가슴이 아릿하다.
"두고 봐."
"두고 봐."
질끈 감은 눈을 따라 눈물이 흐른다.
▷◀▷◀▷◀▷◀▷◀▷◀▷◀▷◀▷◀▷◀
프란은 마차에서 내리려고 하는 순간, 휘익하고 마차 모서리에 휘감겨 버린 자신의 드레스자락을 뽑아내려
애쓰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흐엑!"
그러나 휘감겨 버린 드레스자락은 워낙 단단해서, 프란은 자신의 푸른 드레스 자락에 엉켜 번이나 휘청거
렸다. 익숙치 못한 옷을 입어 전혀 몸에 맞지 않는 듯한 느낌으로, 프란은 온갖 인상을 쓰며 휘청 휘청
시온을 향해 몸을 움직여 나오고 있었다. 그런 프란의 얼굴을 보고 있는 시온의 얼굴에는 어찌할 바를 모
르는 가득한 즐거움이 묻어 나오고 있다. 시온은 푸른 드레스 자락을 이끄는 프란을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
다가 한참만에 하핫, 하고 다시 한 번 짧게 웃었다.
말려올라간 금발과, 하얀 얼굴과, 분홍빛으로 칠해진 입술선, 새초롬하게 들려진 눈가에는 핑크빛 화장,
지금이라도 날아갈듯 날렵한 드레스의 맵시는 도저히 무지막지하게 검을 휘두르는 여자의 모습이라고는 상
상을 할 수가 없다.
"......"
프란은 깨끗하게 무시하고 안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프란이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가려 한 순간,
시온의 손은 얄밉게도 오른손을 뻗어 그런 프란의 앞을 당연하다는 듯 저지해 버렸다. 앞이 막히자 프란이
입술을 뿌득, 하고 갈았다.
"귀여워 죽겠지?"
쿵짝짝…… 쿵짝짝…….
시온에게는 고맙게도, 때를 같이해서 마침 3 박자의 왈츠풍 미뉴에트가 깔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카세타
의 작곡가가 아닌 세이피안의 작곡가, 저 이름도 유명한 리에느가 몇 날밤을 세워 자신의 연인 미야를 위
해 지었다는 '사랑하는 연인이여' 라는 이름의 왈츠가. 조용한 그 왈츠가 이 곳 정원까지 뻗어나와 주위
를 감돌고 있다.
"……치워."
"헤헤. 싫어?"
"싫다!"
"……흐응."
그러나 발을 들어 시온을 때리려 했든 프란의 움직임은 허사로 돌아갔다. 어엇, 하는 소리와 함께 드레스
자락에 발이 휘감길 줄이야! 무엇이든 다 말썽인 것이다, 이 기다란 옷따위는.
'이... 이따위... 이... 이런 옷을 입고…… 갑자기 남자가 엉큼한 생각이라도 할라치면 어떻게 방어를
할 셈인거야!'
"너는……."
문득 프란이 입을 열었다.
"내가 재밌냐?"
"뭐……?"
"내가 재미있느냐고."
다시 한 번 움직인 프란의 입술에, 시온의 미간에 엷은 줄이 생겼다. 시온은 한참동안 뚫어지게 프란을
보았다. 뭔가 정리가 안된다는 표정이었던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문득 말했다.
"무슨 뜻이야?"
프란은 그런 시온을 마주하며 덤덤하게 말했다. 순간, 시온의 눈매가 어그러졌다. 마치 뭔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불쾌한 그의 얼굴 위로 찬찬히 분노 비슷한 기운이 어렸다. 그는 프란의 허리를 휘어 감은
오른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가 프란의 눈을 한참동안 응시한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프란을 보는 시온
의 눈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너, 지금……."
퍼버버버버버버벙!
퍼버버버버버버버벙!
무엇인가가 찢기는 소리, 무엇인가가 터지는 소리, 모여 있던 무엇인가가 어그러지면서 한참만에 자신을
방출해내는 소리. 찢어질듯한 굉음이 그녀의 귓속을 소용돌이쳐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동안 눈을
꿈뻑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입술을 악 물고 미친 듯이 앞으로 뛰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봐, 프...!"
시온이 채 말릴 틈도 없이, 과격한 움직임으로 뛰어 나가는 프란의 입에서 조그마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 이런 제길……!"
그녀가 뛰어가는 뒤편에서, 시온은 한참동안 망연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달은
듯 버럭 고함을 쳤다.
▷◀▷◀▷◀▷◀▷◀▷◀▷◀▷◀▷◀▷◀
퍼버버버버벙!
"뭐……?"
갑자기 볼 끝에서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튀기듯 뒤에 있던 사람이 움직임을 보였다. 헤냔
의 볼 끝에 스치는 것은 보랏빛의 신비로운 머리카락. 대체 언제 뽑혔는지 조차 알 수 없는 기다란 푸른
빛의 검 한 자루가 소년의 손 안에 들려 있었다.
"격납고다. 뛰어라!"
▷◀▷◀▷◀▷◀▷◀▷◀▷◀▷◀▷◀▷◀
뭐였을까. 방금 전의 그 소리는.
가주.
그 성격 더러운 가주.
그 가주가 있는 곳은 무사할까.
"제엔자아아앙!"
프란은 뛰고 또 뛰었다.
▷◀▷◀▷◀▷◀▷◀▷◀▷◀▷◀▷◀▷◀
어딜 가나 반동분자는 존재하는 법.
"가주님."
"알았다."
반은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
"젠장!!"
계속해서 넘어지고, 계속해서 나뭇가지에 걸리면서 그녀의 발은 움직인다.
▷◀▷◀▷◀▷◀▷◀▷◀▷◀▷◀▷◀▷◀
"이 쪽입니다!"
바쁘게 재촉하는 그의 발이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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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43 :: 오! 나의 주인님- PART 9 : 10 초 간의 신데렐라(5)
"불이……?"
"시끄럽군."
"가지 마십시오."
"놔라."
마치 거짓말처럼.
마치 신기루처럼.
▷◀▷◀▷◀▷◀▷◀▷◀▷◀▷◀▷◀▷◀
반과 한 여인의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익히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
"……!"
"……!"
째깍.
째깍.
째깍…….
째깍…….
그리고, 하얗게 분을 바른 깨끗한 피부, 핑크빛으로 빛나는 단정한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매끈하게 내뻗
은 콧날과 무언가에 놀란 듯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
그 눈동자는 신비로운 오렌지빛이다.
째깍…….
시선이 움직인다.
밑으로 움직인다.
째깍…….
째깍…….
째깍…….
그건 그런데.
아까 그 얼굴.
반은 잠시 얼굴을 굳혔다.
'낯익은…… 얼굴...?'
째깍…….
째깍…….
"……."
한 번만 더 보면 기억이 날 것 같다.
얼핏 스친 것 같은 그 얼굴, 지금 다시 한 번 보면 기억이 날 것 같다.
하지만.
"읏……?"
그가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앞쪽에서 올라온 화끈한 열기가 그의 얼굴을 때렸고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
로 웃,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을 들어 불길을 막았다. 아차, 싶었다.
"런스……!"
"가주님!"
"……."
런스는 고개를 돌려 헤냔의 이름을 불렀다. 불을 끌 사람을 모아와라, 라고 말하려던 런스의 말은 그러나,
헤냔의 얼굴을 발견한 순간 딱 멈춰버렸다.
언제나 충실하게 자신의 말을 따르던 초록색 머리칼의 소년. 그 소년은 깜짝 놀란 듯, 아니…… 경악한
듯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정원을 보고 있었다. 무엇인가에 경악한 소년의 두 눈동자가 가라앉은 것은 한
참 후.
"프……리나?"
------------------------------
기억하십니까?
오! 나의 주인님- part 2: 아일린 가의 주인과 카르멘 가의 가주 편에 나왔던 한 소년을...
힌트를 드리자면, 프리나에겐 '남녀 차별주의자' 였지요.
띄워쓰기 하기가 매우 귀찮아서;; 죄송하지만, 집에 있는 컴퓨터에 있는 것 대신 라니안에 펌되었던 글을
썼습니다.
다시 기회되면 차근차근 수정본으로 옮기겠습니다.
분량이 제법 남았군요.
시간이 늦은 관계로;; 내일 계속할게요-
_-;=+=+=+=+=+=+=+=+=+=+=+=+=+=+=+=+=+=+=+=+=+=+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44 :: 오! 나의 주인님- PART 10: 청혼(1)
"프리나……."
낮게 중얼거려 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입 안에서 맴도는 그 이름을, 헤냔은 나지막하게 되풀이했다.
몇 년이나 지난 모습이다.
그도 자랐고, 그녀도 자랐다.
함께하고 싶었던 소녀, 그러나 너무 어릴 때 했던 '청혼'이었기에 조금은 그것을 가벼히 생각했던 자신.
"프리나……."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나 가슴이 뛰는 것인가.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한순간에 알아보았다는 말인가.
바보 같았던 어린 시절.
바보 같았던 풋사랑.
바보 같았던 자신.
바보 같았던 눈물.
바보 같았던 다짐.
그러나 바보 같기에 희미하게나마 언제까지고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그 강인한 소녀. 그 소녀를 언
젠가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프리나……."
▷◀▷◀▷◀▷◀▷◀▷◀▷◀▷◀▷◀▷◀
"제, 제길……!"
멍울지듯 내걸린 저 위의 달빛, 저 유폐된 여신이 산다는 녹빛의 비나룬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프란은
생각했다. 저 달빛 속으로, 이대로 달려나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달빛 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다시는 가주의 얼굴과 마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허억…… 헉……."
"쿡쿡……."
손으로 머리카락을 받쳐들고 한참동안, 프란은 웃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금빛을 띄고
있다. 한참동안 그렇게 웃던 프란은, 갑자기 손을 들어 머리를 휙 하고 잡았다. 손가락 끝에 가느다란 머
리카락의 감촉이 느껴지자마자, 프란은 그것을 그대로 팽개쳐 밑으로 집어 던졌다.
"……그래, 난 이제 죽은 거다."
"……!"
쏴아아아아아…….
쏴아아아아아아…….
그런데 그 때.
순간적으로.
그녀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큭....!!"
"....당신은?"
목젖에 임박한 검을 느끼면서 프란이 말했다. 겁이 없는 것인지 베짱이 센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정신
이 좀 어떻게 된 것인지 검 앞에 선 프란의 태도에는 긴장이라곤 묻어 있지 않았다. 프란의 목덜미에 들이
댄 검이 조금 더 다가왔다. 프란은 입술을 물었다.
프란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그 말에, 프란의 목덜미로 조금씩 더 근접하고 있던 검의 움직임이 슬쩍 멈추었
다. 프란은 슬쩍 눈가를 들어올리며 살짝 뒤를 보았다. 희미하게 어린 그림자가 그녀의 바로 뒤에 임박해
있다.
그녀에게는 지금 검이 없었다.
▷◀▷◀▷◀▷◀▷◀▷◀▷◀▷◀▷◀▷◀
검을 쥔 자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소리에, 몸을 돌리던 프란의 인상이 확하고 굳어졌다. 그녀의 귓가에
서 살짝 부서지듯 들려온 그 목소리는 굉장히 가녀리고 여려서, 아무리 생각해도 남성의 것은 아닌 듯 했
다. 거칠게 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 여성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지?"
"프라아아안!"
재빠른 그 움직임에 괴한은 채 대비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뒤를 공허하게 노출시켰다. 프란은 짧은 미소와
함께 무방비 상태인 괴한의 뒤에서 휙, 하고 그의 팔을 꺾었다. 욱, 하는 소리와 함께 괴한의 몸이 순식
간에 아래로 굽혀졌다. 괴한의 검이 밑으로 떨어진다.
"……크윽."
이상한 소리를 내며 괴한이 몸을 굽힘과 동시에, 뭔가가 휙하고 프란의 앞을 날았다. 프란은 오른손으로
는 괴한의 팔을 굽힌 손에 힘을 주고, 동시에 왼손을 뻗어 자신을 향해 날아온 그 것을 받아들였다. 프란
의 눈이 반짝였다.
실버 블레이드.
프란의 손에 들려온 것은 가주가 하사한 바로 그 검이었다.
"……넌 뭐냐?"
"날 왜 노린 거지?"
"프란, 조심……!"
시온의 커다란 목소리에 프란이 눈을 찌푸리는데, 괴한의 손에서 뭔가 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그 갑작스러운 소리에 움찔하며 크게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 그녀의 발이 풀 위를 두텁게 밟음과 동시에,
괴한의 손에서 뭔가가 번뜩였다.
"쿠욱!"
프란이 몸을 뒤틀었다.
괴한의 손에서 들려나온 이상한 것을 본 시온도 얼른 두발자국을 크게 물러섰다. 괴한의 손에 들린 것은
검은 색의 구체로, 괴한이 입 속으로 뭐라고 중얼거리자마자 곧 그것에서 커다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매캐한 은회색의 그것이 주위를 한바탕 휘감으며 호흡을 압박한다.
"쿨럭!"
"……."
"……세…… 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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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45 :: 오! 나의 주인님- PART 10: 청혼(2)
케이온 기사단장 런스가 파티장의 분위기를 정돈하느라 현재 자리를 뜬 터라, 반의 옆에는 헤냔만이 서 있
는 채였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끊임없이 '프리나' 라는 이름을 외쳐대던 헤냔은 아까 와는 다르게 조금
은 굳은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문 채로 서 있었다. 헤냔은 고개를 돌려 반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
"후욱후욱……."
정말로 들켰으면?
그렇다면 프란이 어떻게될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은 시온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설사 들켰다해도 설마 죽이진 않을 거라고 시온은 자위했다.
"젠장할……."
그러나, 소녀들의 기대와는 달리 시온의 손은 프란의 어깨를 감싸거나 두드리지 않고 그녀의 어깨쯤에서
흠칫하고 멈추어 버렸다. 시온은 한참동안 프란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내가 재미있냐?'
프란의 앞에 가만히 서서 시온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말하는 시온의 눈에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하얗게 드
러난 프란의 목덜미가 들어왔다. 심장이 가늘게 뛰다가 어느 순간 가라앉았다. 시온은 터덜거리는 발걸음
으로 마차 밖에 나왔다. 세 명의 소녀들이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온은 마차밖에 기대어 섰다.
저 아름다운 여신의 유일한 보금자리, 유폐된 여신의 눈물이 녹아 있기에 더욱 아름다운 비나룬을, 시온
은 한참동안 씁쓸한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시온은 자신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둥근 감촉이 그의 손에 전해져오자, 시온의 입가가 어느 순간 부들거리며 낮게 들어올려졌다.
그는 입술을 앙 다물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
폭발음에 대한 공포로 침전되어 있다가 기사들의 노력으로 한참만에야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한 파티장의
한 가운데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금빛머리카락.
"공주님, 어디 가시는……?"
▷◀▷◀▷◀▷◀▷◀▷◀▷◀▷◀▷◀▷◀
그러나 사람들이 이렇게나 활기에 차서 움직이는 걸로 보면, 화재 따위는 이미 진압된 듯 싶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이렇게나 기분 좋게 먹고 마시고 춤을 추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생명의 위협을 받으
면서 말이다.
"……어디에 간 거지?"
"누구를 찾는 건가요?"
"아……!"
키네세스 L. K. 카세타.
"에?"
프란은 얼빠진 소리를 냈고, 키네세스는 부채를 꺼내 자신의 입을 가리며 후훗, 하고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뒤에 시립해 있는 시종 중 하나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시종 중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옆에 서자, 키네세스는 손을 뻗어 프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
다.
"예."
"안 가는가?"
"엑?"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시녀의 반말에 프란이 얼빠진 소리를 내자, 시녀가 뭐냐는 눈빛으로 보았다.
"왜 그러는가?"
"아…… 아무것도."
시녀가 자신에게 반말을 했다는 사실에 일순 움찔했던 프란은 표정을 풀며 씨익하고 웃어버렸다. 아마도
이 시녀는 프란을 자신과 같은 시종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반말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럼 가지."
프란은 낮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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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46 :: 오! 나의 주인님- PART 10: 청혼(3)
"저스티스 경."
"생각을 해주게."
그러나 반은 자신의 행동에 조금의 껄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표정으로 국왕을 보고 있었다. 그는 한참동
안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훗, 하고 짧게 웃었다.
"제가 거절한다면?"
장기전으로 나갈 경우, 만일 아일린 가문이 카세타 쪽으로 향하는 모든 무역을 끊는 손치면, 조금의 무력
만으로도 이 카세타를 함락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저스티스경."
"……."
"그리고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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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47 :: 오! 나의 주인님- PART 11: 월광(1)
"……그, 글세?"
"내가 듣기로, 키네세스 공주님이 사모해 마지않는 카르멘 가의 가주님은 굉장히 이지적인 분이고, 학식
도 넓으시고, 검술은 누구와 비견한다는 것조차 어리석을 만큼 뛰어나며 동시에 차가워보이는 외양과는 달
리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
"……그만."
'그 인간 성격 하루만 겪어보면 파악이 되는데 모르긴 뭘 몰라!! 크아아악!! 그 놈은 악마야, 악마! 아
니, 대마왕!!!'
자기가 한 말에 자신이 고소를 금치 못하면서 프란은 중얼거렸다. 시녀는 아쉬운 듯 고개를 휘젓더니 하늘
을 올려다보았다. 프란은 그런 시녀를 향해 어느 순간 입술을 열었다.
"……키네세스 공주님은……."
"음?"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그 질문을 하면서 시녀를 보았다. 시녀는 조금 당황한 듯, 한참동안 눈을
깜빡이다가 어느 순간 핫, 하고 웃었다.
"눈빛부터 확 바뀐다고 해야하나……. 그 병약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갑자기 단단한 여전사
를 뵙는 기분이라고도 할 수 있지. 국왕 폐하 앞에서 자신의 소견을 말씀하실 때를 보면……. 이 분이 내
가 아는 그 분인가, 싶기도 해."
프란은 음, 하고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얼굴의 병약 미소녀. 하지만, 자신의 주어진 자신의 역할 앞에서
는 태도가 휙 하고 바뀌는 여인. 아름답지만, 강하기도 한 소녀라.
▷◀▷◀▷◀▷◀▷◀▷◀▷◀▷◀▷◀▷◀
순간이었다.
의도적으로 자신이 화났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는 컸다. 뒤에서 들
려오는 그 소리에 프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속으로 셋을 센 후 천천히 고개를 돌
려 뒤를 확인했다. 그리고, 뒤를 확인함과 동시에 그녀의 목에선 굵은 침이 꿀꺽,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뒤로 넘겨졌다.
"……가주님."
입술 끝에 매달린 가느다란 무엇인가가 보인다. 그것은 냉소인가, 아니면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함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분노인가.
아직 정원에는 아무도 없어, 날카롭게 그 잔광을 반사하는 달만이 두 사람의 얼굴 위로 고고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이대로 애잔하게 피리 소리라도 번진다면, 그리고 만약 프란과 반이 다정한 연인이었더라면 이
런 배경에서는 키스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 받았을런지도 모른다. 모든 연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
는 밤의 분위기.
프란의 금색 머리카락, 오렌지색 눈동자, 하얀 피부, 단정한 귓불, 오똑한 콧날, 반듯한 입술선, 섬세한
턱선, 좁은 어깨, 가녀린 실루엣을 반은 한참동안 보았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 한 가득 차 오르는 것은 오로지 프란, 그녀 밖에는 없다.
그것을 제외하곤 숨이 막힐 듯이 오로지 정적, 정적, 정적, 정적.
"어딜 갔었나."
"……에?"
"어딜 갔었나."
"……가자."
▷◀▷◀▷◀▷◀▷◀▷◀▷◀▷◀▷◀▷◀
바람조차 머금지 않는 저 푸른빛의 눈동자는 언제나 고고하고, 언제나 고귀한 여인의 상징.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궁중의 복도를 걷고 있는 여인의 귓등으로 찰랑거리는 귀걸이는 짜랑, 하는 소리마저
내지 않는다.
"들라하라."
시종장은 키네세스의 물음에 황공하다는 듯 허리를 굽혔다. 아름다운 카세타의 물빛 공주, 고귀하고 고귀
하며 아름다움으로는 이 카세타 내 귀부인들 사이에서 상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라는 아가씨.
그러나, 가끔은 무서운 집착성향도 보이는 여인을 보며 시종장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키네세스는 정말
로 한 분야에 빠지면 그것에 몰입하는 성격의 아가씨. 과히 편집증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의 집착성향
을 갖고 있는 여인이었다.
"30 분 전 쯤에 나가셨습니다."
"그래……."
▷◀▷◀▷◀▷◀▷◀▷◀▷◀▷◀▷◀▷◀
키네세스는 고개를 가볍게 들며 조금은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국왕이 싱긋 웃으며 의자를 가리
켰다. 키네세스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그 곳으로 다가가 앉았다. 하얀 얼굴 위로 홍조가 피어나는 가운데
서 국왕의 입술이 열렸다.
"예."
"……일단 네 말대로 해놓았다. 두 가지 조건을 걸었는데……. 내 생각엔, 아무래도 너와의 결혼은 받아들
이지 않을 것 같구나. 그는 이상하리만치 여인에게 관심이 없는 남자가 아니던가."
"저도 알고 있어요."
"달이 아름답군요."
국왕의 말에 키네세스는 쑥스러운 듯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그녀는 검지 손가락의 손톱으로 탁자를 몇 번
가볍게 두드린 후에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일어섰다.
"……그리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내 것이 될 남자니까.'
▷◀▷◀▷◀▷◀▷◀▷◀▷◀▷◀▷◀▷◀
오늘은 이상한 사건이 많은 하루였다.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화재가 발생하지를 않나, 저 도도한
공주 키네세스가 반에게 춤을 신청하지를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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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48 :: 오! 나의 주인님- PART 11: 월광(2)
가네트(uznian) 03-11-24 :: :: 13664
간드러지는 남자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여인을 향해 말하는 그의 눈빛은 잔잔한 파도를 연상시
키리 만치 안정되어 보인다. 따사로워 보이는 그의 눈이 향하는 곳은 그의 앞에 있는 여인을 향해서다.
시온의 눈길이 자신에게 와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프란은 다시 한 차례 고함을 질렀다. 시온은 귀를
틀어 막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지만, 그랬다간 무사히 이 방을 걸어 나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어설픈 웃음과
함께 충동을 상쇄시켜 버렸다. 그는 허허, 하는 어설픈 웃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프란이 다시 한 번 지른 고함소리에 시온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처음엔 자신의 큰 소리에 놀라서 말문을
닫은 거라고 지례짐작했던 프란은 그러나 잠시 후 움찔하고 말았다. 시온이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던 것이
다. 자신의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떨구고 앉은 시온의 눈은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의 입
술은 꾹 잠긴 채로 한 단어도 뱉어내지 않고 있었다. 프란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시온의 폼은 전형적인
'울기를 준비하는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나가죽어."
"쳇, 너무 하는군."
'가자.'
라고 한마디했던 반은 정말이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카르멘 가의 마차가 세워졌던 왕성 출입구로 걷기
시작했었고, 프란은 긴장으로 입술을 깨물며 그런 반을 따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말없이 그들은 마
차에 올랐고, 모두를 탑승시킨 대 카르멘 가의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수백번은 저 목덜미를 잡고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프란은 그러지를 못했다. 목을 죄어오는 갑갑한 침묵
이 미친듯한 맹수처럼 그목 언저리를 콱하고 내리누르는, 그런 느낌.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프란은, 주먹만 꾹 쥐었다.
정말 이 가주는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태도를 보아하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짓기엔 뭔가 찜찜한 기분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어, 프란은 한참동안 손톱을 물
어뜯으며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가주님!!!"
"……."
▷◀▷◀▷◀▷◀▷◀▷◀▷◀▷◀▷◀▷◀
그리고, 그렇게 반과 헤어져 힘없이 방으로 들어온 프란은 경악했다. 허락도 없이 어떤 남정네가 문을 벌
컥 열고 들어왔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의 방에 무단으로 쳐들어온 주제에, 시온은 꽤나
편안한 자세로 프란의 방안에서 뒹굴거리고 있었고, 심지어는 프란이 들어오자마자 싱글 웃으며
"쳇, 정말 너무 하는군."
"……꺼져."
"쿡쿡."
낮게 웃음을 짓고, 시온은 문을 나섰다. 하지만 웃던 모습과는 달리, 프란의 방문을 닫자마자 시온의 얼
굴은 어둡게 변했다. 그의 얼굴 위로 깊은 낭패감이 서린 것은 한 순간이었다. 그는 갑자기 오른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시온의 왼손은 하의의 주머니를 더듬고 있었다. 검은 원형이 까끌하게 만져진다. 시온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저었다.
▷◀▷◀▷◀▷◀▷◀▷◀▷◀▷◀▷◀▷◀
"결혼…… 이라."
"결혼……."
"……."
"……."
아름다운 달이여!
빛나는 그대의 이름의 위해 건배!
유폐의 여신이여!
그대가 깨어나는 그 날을 위해 또 한 번 건배!
"…… 결혼은……."
반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훅, 하고 낮게 숨을 뱉었다.
이윽고 이어진 그의 목소리는, 달빛에 취한 밤이 물어 놓고 뱉어 주질 않았다.
▷◀▷◀▷◀▷◀▷◀▷◀▷◀▷◀▷◀▷◀
"우아아아아아암∼."
프란은 방문 손잡이를 당겼다. 문이 열리자 드러난 깨끗한 복도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프란은
다시 한 번 눈을 부비고 주방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젠장. 오늘은 하루 종일 감자만 깎아도 좋으니까, 가주의 얼굴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되도록이면 그
놈 얼굴도 안 보면 좋겠고."
▷◀▷◀▷◀▷◀▷◀▷◀▷◀▷◀▷◀▷◀
프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감자 포대를 받았다. 주방장은 프란에게 감자 포대를 내밀면서 씨익, 하고 웃
어 보여 주방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늑장을 부려 가주의 방으로 천천히 들어가리라 결심한 프란의 의지와는 달리 감자들
은 프란에게 너무나 쉽게 속살을 내보였다.
이미 감자깎기 입신의 경지에 다다른 손이 닿자마자, 감자들은 쓱싹쓱싹 너무나 가볍게 옷을 벗어주었다.
아무리 천천히 깎으려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곧, 프란의 손에는 잘 깎여진 감자만이 수북히 남았다.
프란은 너무나 빠르게 깎여버린 감자의 껍질을 허무하게 바라보았다.
"괜찮대두!!"
"……눈 밑에 기미. 눈곱이 낀 충혈된 눈, 푸석푸석한 얼굴, 기름끼 낀 머리카락!!! 전형적인 페인의 모습
이잖아!!"
그 순간, 이 순진스러운 핑크빛 머리칼의 소녀가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앞치마에 손가락을 비벼댔다는 것
을 나는지 모르는지, 프란은 그것도 모자라 찡긋하고 윙크까지 해보였다.
"괜찮아, 뮤. 난 까딱 없다고!"
뮤는 프란이 들었으면 당장에 게거품 물고 쓰러졌음이 분명한 말을 입안으로 삼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차
분하게 웃어 보였다. 프란은 그런 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아, 역시! 난 프란이 너무 좋아. 혹시 프란도 나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닐까? 아아! 분명해! 안 그러면
나한테 윙크를 했을리가 없지! 암!!"
핑크빛 머리칼의 소녀에게 어떤 망상을 품게 했는지는 꿈에도 모르는 채로, 프란은 크레인을 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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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챕터 말입니다, 월광.
월광(月光)이 아니라 월광(月狂)입니다. 달의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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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49 :: 오! 나의 주인님- PART 11: 월광(3)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이긴 하지만 언제나 당당한 태도로 문 앞을 지키고 섰던 두 무사의 표정이 오늘 아
침에는 조금 이상해 보이는 것이 바로 그 것이다.
"별 거……아니다."
"……별 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별 거 아니라니까!"
프란은 흐응, 하는 소리와 함께 크레인을 밀며 그들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들은 프란은 장난기 가
득한 얼굴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있으면 가주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 덕택에 잔뜩 긴장해 있던 프란은 웃자는 마음에 농담조
로 물었다.
긴장에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한 번 크게 웃고 싶은 심정이라 더더욱 그들에게 끈질기게
물어보는 프란이었다.
"가주님, 식사입니다."
"……가주……."
"어이."
"……오늘은 그냥 들어가라."
"에?"
"……."
"가주님!!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나, 역시 대답은 없었다.
▷◀▷◀▷◀▷◀▷◀▷◀▷◀▷◀▷◀▷◀
"하아?"
황당했다.
"……가주님?"
정말로 황당했다.
"……."
"……어떻게 된 일……."
"……내려놔라."
난장판.
단 세 마디로 압축될 수 있는, 방안의 풍경이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거대한 벽면 전체를 뚫어 만든 커다란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은 반쯤 찢겨진 상태다.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
며 찬찬히 바람에 몸을 맡겼던 그 커튼은 뜯겨진 상태로 지저분하게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
'젠장, 정말로 성격 더러운 놈!! 장미꽃병을 다 깨뜨려 놨잖아!! 게다가 책이!! 우욱, 커튼이이이이!
저거 치우려며어어어어어언!'
'쿠, 쿨럭.'
"먹어라."
뭐랄까.
가슴 한구석이 불안으로 가득차서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는 느낌이랄까.
▷◀▷◀▷◀▷◀▷◀▷◀▷◀▷◀▷◀▷◀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그러나, 프란의 예상과는 달리 오후 늦도록 불길한 종류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일상이다.
"……."
"후우."
그런데, 이상했다.
들어서자마자 검을 뽑아야 마땅했다.
저 미친 듯한 달빛 속에 날카롭게 잔광을 반사할 그 아름다운 푸른 검을 지금이라도 당장 뽑아야 마땅했다.
그런데, 아니다.
검은 뽑지도 않고, 반의 시선이 움직였다.
프란을 향했다.
프란은 움찔했다.
"……왜 그러시……."
"검을 뽑아라."
"뭐, 뭐라구요?"
"상대라면 여기 있지 않나."
고어체의 말투.
반은 그 검을 든 채로, 차갑게.
아주 차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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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50 :: 오! 나의 주인님- PART 11: 월광(4)
그래. 잠이 들려 했을 때, 갑자기 자신과 마주친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시종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깨
달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태까지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너무나도 화가나 그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을지도 모
른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지금.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건지도.
검을 뽑아야 하나?
저 사람을 상대로?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자신이 반과 싸웠을 때의 결과? 그런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죽을
것이다, 단 칼에.
"가주님, 저는……."
미친 달빛을 받고 있는 미친 가주.
그 미친 가주의 손에 들린 미친 검.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섞여 들어와 호흡을 압박한다.
"……뽑으라고 했다."
반은 낮고 짧게 한마디했다.
반은 그 말과 함께 프란의 말을 막아 버렸다.
프란은 다시 한 번 침을 삼켰다.
심장이 세게 방망이질 친다.
미칠듯한 파동이 몸을 삼켜버릴 것 같아서, 이대로 침식당할까 염려된다.
프란은 깊은 한숨과 함께 천천히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스르릉.
작은 마찰음과 함께 이윽고 미끈한 검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반의 푸른검과 대조를 이루는 은색의 검은 프란의 두근거림을 다 안다는 듯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반은 잠시 그런 프란을 보았다.
그의 눈매가 살짝 가라앉았다.
프란은 긴장하듯 몸을 낮추었다.
그 순간이었다.
프란은 순간, 온 몸을 압박해 들어오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우웃!!"
챙캉!
"윽!"
"……내가 하는 일에 토를 달지 마라."
손이 떨리고 있다.
그리고, 온 몸을 마비시켜 버릴 것 같은 이 느낌은 단순히 공포는 아니다.
프란은 손 끝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압박해 들어오는 반의 검을 막기 위해 애썼다.
반은 그런 프란의 눈을 보며 몸을 움직였다.
불필요한 건덕지라곤 조금도 없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찔러 들어오는 공격을 막다보면 어느새 막다른 벽까지 몰리게 된다. 프란은
몇 번이고 주의를 기울여 반의 공격을 피해내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는다.
"헉, 헉……."
다시 한 번 검이 움직인다.
"흐읍!"
"헉, 헉, 헉……."
분했다.
그녀 자신을 이렇게나 땀을 쏟고, 이렇게나 힘들어 하고 있는데 자신의 앞에 선 저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다는 그 사실이.
발끝만을 움직여 공격해 들어오는 그의 검을, 프란은 온 몸을 던져 방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면서
도, 반은 절대절명의 순간에 가면 자신의 공격을 그대로 와해시켜 버렸다. 마치, 놀이처럼.
"……."
"……하악! 흐욱!"
"하아…… 흐으……."
그러나.
샤락.
검은 막을 틈도 없이, 마치 빛처럼 움직였다.
"……!"
"……하아……."
"……."
"……후우."
프란은 감정조차 묻지 않은, 그래서 노골적으로 비꼬는 것보다 훨씬 냉소적으로 들리는 그 목소리에 발끈
했다.
"나를 공격해라."
"……예?"
"……."
"……."
"정말……. 입니까?"
"……."
대체 이유가 뭔가요?
라는 질문은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1000 케트라는 말 앞에, 그녀는 완전히 넋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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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51 :: 오! 나의 주인님-PART 12: 순수의 상실(1)
그러나 그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 것이 누구인지를 추정해 내는데에는 아무런 무리도 없다. 반은
망설임없이 그 벽 쪽으로 다가섰다.
"……."
"……너는."
시온의 입술이 어느 순간 부르르 떨렸다. 그들 사이에 살짝 침묵의 어두운 그림자가 머물렀다. 시온은 말
을 잇지 못하고 부르르 떨다가 한참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는 감탄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다. 가득한 미소가 물린 시온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거기선 손을 떼라."
"……무슨 뜻이지?"
시온은 크게 외쳤다.
그리고 외친 바로 그 순간, 시온은 보았다.
반이 낮게 고개를 숙이고 웃는 모습을.
시온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그건 그렇고."
한 번, 반이 호흡을 한다.
"……."
시온은 자신의 곁을 스치듯 지나가는 은보랏빛 머리카락을 보며 피식, 자신도 모르게 길게 웃어버렸다.
반은 자신의 뒤로 거침없이 발을 옮겨 나간다. 시온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
때마침 헤냔의 앞을 지나가고 있던 한 남자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는 헤냔을 발견하곤 소리쳐 그를 불
렀다. 그러나 너무나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나머지, 헤냔은 자신을 부르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입술
만을 질근질근 깨물면서 헤냔은 그 때 보았던 환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봐, 헤냔!"
머―엉.
그러나 아무리 이름을 소리쳐 불러봐도 헤냔의 상태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던 사
람은 아무리 불러도 상대가 대답이 없자 짜증이 난 듯 더 큰 소리로 헤냔을 불렀다. 그러나, 그래도 상대
는 묵묵부답이다.
결국 헤냔의 이름을 부르다 못해, 그는 고성과 함께 부다닷 달려와 멍하니 앉아 있던 헤냔의 머리를 한 대
갈기고야 말았다. 입을 약간 벌린 채 멍하니 하늘만을 올려다보고 있던 헤냔의 머리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당장에 밑을 향했다.
"윽!"
"무슨 일이십니까?"
런스는 단 번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헤냔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달아오른 헤냔의 얼굴을
즐기듯이 한 번 바라보더니 호오,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씨익 웃으며 헤냔의 옆구리릎 푸욱 찔렀다.
헤냔이 놀라서 외친 그 소리에 런스는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실소를 터뜨려 버렸다. 역시 이 소년에게선
보통의 기사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풋풋함을 느낄 수 있다. 소년다운 수줍음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그
런 것이.
헤냔은 자신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스스로가 느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뭔가 좀 민망해진 까닭이다. 헤
냔은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런스를 보았다. 런스가 빙글빙
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헤냔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그는 살며시 입술
을 열었다.
"별로, 그런 것은 아니네만."
헤냔은 똑바른 목소리로 말하곤 런스를 바라보았다. 런스는 그런 헤냔을 아래 위로 한 번 죽하고 훑어본
후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봐, 헤냔."
"말씀하십시오."
"……."
"키에르으으으구우우운?"
"본래 대장님은 저를 '헤냔' 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성을 부르시는 건지? 그리고…… 부르
시려면 제대로 불러 주십시오. 저는 키에르지 키에르으으으으가 아닙니다."
헤냔이 또 한 번 딱딱 떨어지는 어조로 말했고, 런스는 미간을 좁히며 격하게 기침을 했다.
"험험! 험험험험험!"
"왜 갑자기 기침을 하시는 지요? 감기에 걸리셨다면 빨리 안정을 취하는 편이 좋습니다만."
헤냔은 얄미울 정도로 똑바르게 말했다. 런스는 하아? 하는 표정을 지으며 헤냔을 한참도안 바라보다가
기다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헤냔."
"말씀하십시오."
"……."
런스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뚫어지게, 정말로 뚫어지게 헤냔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헤냔은 뭐냐, 라
는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다. 런스는 머리를 슬슬 긁으며 말했다.
"글세……. 그게 다 인가?"
"……."
감정을 숨기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소년. '똑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주인 소년이다. 하고 있는 모양새
를 보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휘는 것보다는 부러지는 것을 택할 것 같은 이 소년은 대쪽같은 성미를 갖
고 있어서 정말이지 '기사' 외의 직업을 가졌으면 어떡할 뻔했나, 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 정도이다.
"그·게·다·인·가·헤냔?"
헤냔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런스는 속으로 훗, 하고 가볍게 웃었다. 그렇겠지. 그게
다 일리가 없다.
"……무엇을 말입니까?"
"응? 헤냔."
「제가…… 당신을 찾아간다면 박대하실 겁니까?」 「그건 나와 검을 섞으러 온다는 뜻인가?」 보랏빛 머
리카락의 소년의 눈동자에서 뿜어 나오던 매서운 기운을 생각하면서 헤냔은 입술을 질끈질끈 물었다.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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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52 :: 오! 나의 주인님- PART 12: 순수의 상실(2)
그렇다.
"……."
"……가주님."
프란의 자그마한 부름에 묵묵히 발걸음을 재촉해 나가고 있던 반이 돌아보았다. 프란과 시선을 부딪힌 반
은 프란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웃을 뻔했다.
"뭔가."
"……그거, 어떤 수를 써도 상관 없는 겁니까?"
프란의 목소리는 굴곡이 심했다. 뭔가 떨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반은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프란의 표정이 변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싹…….
오늘은 황실에서 사람이 오기로 했다. 반은 지금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차였다. 평소라면 황실
사람이라는 단어에 발끈해서 녀석들을 반쯤 페인으로 만들어서 성 밖으로 내보냈을지도 모르나, 오늘은 조
금 달랐다. 오늘은 황실에서 사람이 올 분명한 이유가 잇는 것이다.
문득 떠오른 카세타 왕국 국왕의 말들이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의 영상이
그의 눈앞을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키네세스의 얼굴이었다.
반은 가만히 앉은 채였다.
그들이 이 방에 앉은지 몇 분쯤 지났을 때, 밖에 있던 하녀가 자그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주님, 런스님이십니다."
반의 눈썹이 꿈틀했다.
"들여보내."
▷◀▷◀▷◀▷◀▷◀▷◀▷◀▷◀▷◀▷◀▷◀
"런스님."
헤냔은 카르멘 가주의 집무실로 가는 복도에서 런스의 이름을 불렀다. 살짝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런스가 돌아보자, 헤냔은 눈을 치켜 뜨며 말했다.
런스가 헤냔의 뒷말을 눈치채로 선수를 쳤다. 헤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뭔가 잔뜩 불만인 듯한 헤냔의 표정에 런스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헤냔의 볼은 퉁퉁 부어 있었다. 런스는 만약 자신이 좀 더 일찍 결혼을 했다면 헤냔 또래의 아이 정도는
생기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며 살짝 웃어 버렸다.
만약 헤냔이 자신의 아들이라면 정마롤 마음껏 귀여워했을 거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런스는 다시 한 번
속으로 실소했다. 헤냔은 그런 런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뾰로통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헤냔으로서는 발을 옮길 때마다 드러나는 엄청난 고가의 골동품이라던가 그림, 그리고 황금문, 엄청난 크
기의 장미정원, 복도를 지나가면 수시로 튀어나오는 그 무수한 수의 하인들, 문 하나 열 때마다 사람 간
떨어뜨리기로 작정한 것도 아니고 불쑥불쑥 검을 내미는 검사들 등등이 마음에 들리가 없었다.
"하지만 말입니다, 이건 곤란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카르멘 가는 카세타에 귀속된 가문이고, 그렇다면 당
연히 궁성보다 큰 성을 가질 수는 없습……."
"카르멘 가는 이미 카세타를 뒤엎을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을 갖추고 있다. 헤냔, 어린애가 아니라면 그런
볼멘 소리는 거둬라. 그래, 보통의 가문이 황성보다 더 큰 성을 짓고 있으면 뭔가 응징이 내려질지도 모
르지. 그러나."
"카르멘 가에는 그런 응징이 내려진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카세타가 카르멘 가에게
검을 들이대면서 '너, 마음에 안 든다. 저 성 좀 더 작게 만들어라.' 라고 말할만한 처지가 된다고 생각
하는가?"
"하지만, 단장님……!"
"자네는 너무 고지식한 게 문제야. 때로는 '법 외의 인간' 도 생기는 법이다. 그리고, 카르멘 가는 카세
타에서 그 법외의 인간 중 하나야. 아니, '법 외 인간'의 정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예?"
"……헉!"
그러고보니 그랬다.
런스 카르멘.
그것이 바로 자신의 옆에서 웃음 짓고 있는 남자의 이름이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자신은 지금 카르멘 가 사람한테 카르멘 가가 부당하다느니, 그 가문은 사라져야한다느니
어쩌느니 불평을 늘어놓은 꼴이 된다.
헤냔의 얼굴이 또 다시 달아올랐다. 이번에는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섞인 듯 하다. 금새 또 얼굴이 달아올
라 어쩔 줄 몰라하는 소년을 보면서 런스는 또 한 번 속으로 크게 웃어 버렸다.
그들은 그렇게 심각한 토론(?)을 나누면서 한참만에 반의 응접실 앞에 섰다. 런스는 집무실 앞에 선 하인
에게 가볍게 눈짓을 해보였다. 하인은 허리를 굽혀서 런스에게 인사한 후,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주님, 런스님이십니다."
"들여보내."
헤냔은 침을 꼴깍 삼켰다.
▷◀▷◀▷◀▷◀▷◀▷◀▷◀▷◀▷◀▷◀▷◀
"앉아라."
반은 차갑게 한마디했다.
런스는 반을 향해 다시 한 번 인사한 후 헤냔의 허리를 가볍게 쳤다. 그러나 헤냔은 자신의 허리를 가볍게
치면서 자신에게도 반에게 인사를 할 것을 종용하는 런스의 의도에 따르지 않았다. 런스는 굳은 듯이 자리
에 선 헤냔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순간, 헤냔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헤냔은 훗, 하고 가볍게 웃은 후 눈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반을
노려보았다. 그의 입술이 벌어지더니 그 사이로 딱딱한 말들이 튀어 나왔다.
"저는 폐하의 기사. 폐하와 그 근친, 혹은 제가 인정한 사람을 제외한 이들 외엔 허리를 굽히지 않습니
다."
헤냔의 목소리는 탁탁 끊어지고 있어서 굉장히 메말랐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런스는 헤냔의 그러한 대
답에 움찔해서 반을 보았다.
"……."
'그렇군. 그래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이 그들의 앞에 놓여졌다. 런스는 웃으면서 잔을 들어올렸다. 헤냔은
여전히 경계의 눈으로 반을 보고 있었다. 반은 가볍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곤 힐끔 뒤를 보았다.
"……폐하로부터 온 서찰입니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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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53 :: 오! 나의 주인님- PART 12: 순수의 상실(3)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하는 그의 눈에는 일말의 거짓도, 동요도 없다. 흠칫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말갛게 개인 반의 보랏빛 눈동자는 헤냔의 마음 속을 그대로 관통하고 들어와, 아무 말도 할 수 없
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갖고 있었다.
"가주님, 무슨 말이 신지…?"
'뭐라고?'
"그렇다."
"가, 가주님!"
놀란 런스가 버럭 고함을 쳤으나 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반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헤냔이 앉은 바로 그
곳 뿐, 런스를 향해서는 미동도 않는다. 그 시선을 눈치챈 런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옆자리에 앉은 헤냔
에게로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직은 안 돼, 헤냔! 자네의 실력으론 어림도 없어. 자네는 상처를 받을 거다. 바로 몇 년 전의 나조차
도 이 분의 검 앞에……'
"좋습니다."
'헤냔!!'
"손목쯤은, 바칠 수 있습니다!"
◀▷◀▷◀▷◀▷◀▷◀▷◀▷◀▷◀▷◀▷
언제나 가주가 혼자서 검을 휘두르곤 하던 곳에, 다른 사람이 서 있다는 것이 묘하게 어색해 보인다고 생
각하면서, 프란은 초조한 한숨을 삼켰다. 프란은 천천히 검 손잡이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천천히, 검에
감기는 손가락의 감촉을 느끼며 프란은 심호흡을 했다.
'기회야.'
반은 천천히 앞쪽으로 나서서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올려 헤냔을 한차례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뒤에서
말 없이 기회를 엿 보고 있을 시종을 생각하며 속으로 가볍게 미소지었다.
"검을, 뽑으십시오."
"……."
어째서인가.
어찌되었든 다른 것은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눈앞의 상대.
그 뿐이다.
"선제 공격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챙!
"……흐읏."
챙!
다시 한 번 울리는 금속성이 헤냔의 신경줄을 자극한다.
헤냔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아, 라고 낮게 중얼거린 후 검을 양 사방으로 휘둘러 반의 검 속에 틈을 찾으려
했다.
'읏!'
"읏!"
"그만두십시오! 헤냔, 자네가 졌네! 가주님이 원했다면 자네의 검은 지금이라도 당장 바닥으로 떨어졌을
거야! 이젠 그만 둬!"
"싫습니다!"
런스의 말에, 순간 반이 차갑게 입술을 들어올려 웃었다. 그 웃음에 오싹한 기운을 느낄 세도 없이, 입술
을 들어 올린 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그 웃음보다도 더욱 잔인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의 가슴
을 죄는 힘이 있었다.
"싫다."
런스가 움찔했다.
어째서? 라고 물어볼 틈도 없이, 반의 말이 이어졌다.
"……정말로 갖고 싶어졌다."
◀▷◀▷◀▷◀▷◀▷◀▷◀▷◀▷◀▷◀▷
"가주님!!"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발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상대가 그 누구도 아닌 '카르멘의 가주' 저스티
스 카르멘이기 때문이다. 저 소년에게 반항한다고? 말도 안돼, 라는 대답을 이끌어내는 스스로가 있는데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할 수 있으면."
"……뺏어 보시지요."
"그럴 생각이다."
챙!
휘익!
"크윽!"
뚝. 뚝. 뚝.
거짓말처럼.
가면을 뒤집어 쓴 듯 차가운 그 얼굴에.
……소름이 돋는다.
반의 몸이 천천히 다시 다가섰다.
헤냔은 다시 검을 곧추 들고, 외쳤다.
"당신은 분명 강합니다!"
그 잔인한 헤냔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왔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속에서 솟구치는 분노를 억누른 다음,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반의 검이 다시 호선을 그렸다.
"크윽!"
헤냔은 입술을 물었다. 솔직히 이 지경까지 저 남자가 자신을 공격하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했었다. 보통
기사들끼리의 경우에, 상대가 검을 떨어뜨릴 때까지 검투를 하는 한은 있어도, 누군가가 피를 흘릴 때까
지 검투를 지속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으윽!"
바로 그 순간.
아마도 그 순간이었으리라.
헤냔은 더욱 눈을 크게 떴다. 존재감 없이, 정말로 존재가 없이 뒤에서 움직이는 자그마한 그림자를 발견
했기 때문이다. 마치 거짓말처럼 사뿐사뿐, 보지 않는 한은 그 기척조차 느낄 수 없으리 만치 조용히 누
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거짓말같이 가뿐한 태도로, 마치 평소부터 준비했다는 듯, 신발이 내는 자그마한 마찰소리마저 줄이기 위
해 신발마저 벗어 던진 금색 머리칼의 시종이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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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54 :: 오! 나의 주인님- PART 12: 순수의 상실(4)
휘익!
"하앗!"
그러나 옷자락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 번 움직이는 그녀의 손목은 제어를 듣지 않고 반 쪽으로 날아
들었다.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크게 내둘러진 그녀의 검이 반 쪽을 향해 움직이는 순간, 들어올려진 반
의 검이 그녀의 실버 블레이드를 막았다.
챙캉!
'설마?'
쉬익!
이잉.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났다고 느꼈을 때, 프란의 검이 돌아선 반의 망토를 겨낭하고 향해졌다. 아무리 해도
몸을 벨 수 없다면, 반의 어깨에 걸쳐진 저 휘날리는 망토를 베어도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검이 움직인 그 순간, 반의 몸이 거짓말처럼 뒤로 꺾이지 않았다면 프란이나 헤냔의 공격은 성공했을 터였
다.
멍청한 눈으로 자신의 뒷쪽으로 몸을 움직인 반의 뒷모습을 천천히 뒤돌아 확인한 헤냔의 동공이 크게 확
장되었을 때, 반은 가차 없이 손을 휘둘러 그런 헤냔의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퍼억!
커다란 소리와 함께 천천히 헤냔의 몸이 쓰러졌다. 피를 흘리는 그의 온 몸에서 헉헉, 하는 소리가 났다.
반은 프란은 한차례 본 후 입 꼬리를 천천히 치켜올려졌다. 프란이 온 몸에 돋아난 닭살을 주체하지 못하
고 '으아악! 저 대 마왕이 웃었어~~' 라고 고함을 치는 가운데, 반은 훗, 하고 다시 한 번 가볍게 웃은
후 헤냔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순간.
런스는 보았다.
"……어째서?"
"데려가라, 런스."
"가주님. 왜……?"
저 소년 가주의 사전엔 '적당히' 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극히도 간단하고 간단한 그 사실을.
아무리 그에게 소중한 제자이자 후배라고 해도, 그 따위 것에는 상관하지 않을 남자임을.
"데려가라고 했다."
완벽한 패배.
"엥?"
"그, 그건?"
"네가 벤 거다."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반이 그렇게 말했다. 프란은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로 반이 내미는 그 청색의 옷
자락을 받았다. 자신의 검이 무엇도 베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베어졌다는 것인가?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어린 날의 사랑.
어린 날, 유일하게 맘에 두었던 소녀.
어린 날의 그 바보 같았던 고백속에 언제나 서 있는 금색 머리칼의 소녀.
알고 있어, 프리나?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바랬던 것은…….
언젠가 반드시 기사가 되는 것이었어.
그리고…….
"……나?"
그리고…….
"……리나?"
심장이 빨라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한참 동안 말이 헛 나왔다. 헤냔은 떨리는 입술로 눈앞에 선 사람의 이
름을 부르려 했다.
그 소녀.
그 소녀…….
그 소녀가 바로 지금 여기 있다.
"프리나!!"
◀▷◀▷◀▷◀▷◀▷◀▷◀▷◀▷◀▷◀▷
내가 정말로 성공 한 거야?
'정말? 우와아아앗!!'
"……나?"
"……리나?"
텁텁하게 갈라진 헤냔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시종은 푸른색 옷자락을 소중히 옷주머니에
넣고 돌아서다가 갑자기 들려온 그 목소리에 움찔한 듯 싶었다. 프란도 그제서야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
는 헤냔의 시선을 눈치챈 모양이다.
"프리나!!"
◀▷◀▷◀▷◀▷◀▷◀▷◀▷◀▷◀▷◀▷
"……."
"헤냔! 왜 이러나?"
헤냔.
헤냔 드 키에르.
"프…… 리나……."
그리고.
지금 저 쪽에.
어린 날의 기억 중 한 부분이 소년이 있다.
"…프리나가 누구냐."
그것은, 반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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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55 :: 오! 나의 주인님- PART 12: 순수의 상실(5)
"프리나라뇨? 하, 하하하."
프란은 어깨를 으쓱하며 반을 향해 반문하듯 말했다. 고개를 갸웃해가면서,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알아먹
지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프란의 뒤통수로는 그러나 채 숨기지 못한 당혹감으로 인해 셀 수 없는
무수한 땀이 샘솟고 있었다. 프란은 어정어정 뒤로 발걸음을 옮겨가며 반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하려고 애
썼다. 사실을 말하는 순간 바로 교수형이야!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뒤로 빼내는 프란의 얼굴
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
"…아…… 하하하."
다시 한 번 어설프게 웃어본다.
"……."
"하, 하하하하하……."
"……."
"하……."
"……."
"……험, 험험."
"……프리나가 누구냐."
'제, 젠장할!'
"전 모릅니다."
"모른다고?"
"정말 모릅니다!!"
"몰라요."
헤냔 드 키에르.
"정말로……모릅니다."
"……."
반은 프란의 답에도 여전히 그 포커 페이스를 바꾸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볼 뿐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도 빠져버릴 것 같은, 그의 입에 머물린 작은 미소.
"……헤냔 드 키에르……."
'마, 망했다!'
◀▷◀▷◀▷◀▷◀▷◀▷◀▷◀▷◀▷◀▷
"……아아."
언제나 함께 하는 기사들의 공간, 다치거나 치료받을 일이 있으면 언제나 이 공간을 찾았다. 런스와 처음
검을 섞은 날, 주체할 수 없어 날뛰다가 무릎을 다친 날에도, 의견의 마찰이 심했던 동료와 검투를 했던
날 어깨에 여린 검상을 입었던 때에도, 그는 늘 이 곳을 찾았었다.
기사들이 찾는 작은 쉼터 같은 곳.
"괜찮아, 키에르군?"
그 공기에 안심한 헤냔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데, 저 멀리서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누워있
던 헤냔의 몸이 굳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 아나?"
"……너야말로."
헤냔은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방금 전의 일처럼 선명하게 떠
오른다. 착각이 아니었다면, 환상이 아니었다면 그가 그 자리에서 본 건 분명히 그녀였다. 프리나, 프리
나 프리텐! 아아, 보고 싶었어. 하지만…… 왜 그 자리에 있었을까?
미칠 듯이 부르고 부르고 부르고……. 이름만을 죽도록 부르다가 그만 푹 쓰러져 버렸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에는 그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어 그만 이름만 죽도록 부르다가 푹 쓰러져 버렸지. 헤
냔은 씨익, 쓴웃음을 머금으며 베게에 머리를 기댔다. 그 순간 떠오른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저스티
스 카르멘의 얼굴. 그 얼굴을 떠올린 순간,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늘로.
그의 내부에 있던 하나의 순수가 깨졌다.
'등 뒤에 있는 상대는 찌르지 않는다.'
헤냔은 자신의 머리맡에서 멀뚱히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푸른색도, 초록색도 아닌.
그 두 가지가 절반 정도 섞인 듯한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언제나 지겹도록 봐오지만, 꽤나 수수하게 차
려입고 다녀서인지 잘 눈에 띄지 않는 사람.
"……이봐, 아나."
케이온 기사대원이 레이디에 목숨을 걸고 레이디! 오오, 레이디! 라면서 가끔은 보기 싫은 추태도 부려대
지만 절대로 이 여자, 아나이스 폰 그란젤 앞에서만은 조용하다. 아나이스는 결코 기사단에서 '여자' 라
고 불릴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시끄러워! 그런 거 아냐!"
"흐응, 꼬맹이한테도 짝사랑 상대가 생겼다 이거냐? 호오, 몇 살? 동갑? 아니면 연하?"
순간, 헤냔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헤냔은 이불을 푹 뒤집어 쓰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나이스는
어린애, 하는 말과 함께 쯧, 하고 혀를 찬 후 헤냔을 몇 번 쿡쿡 찔러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
"아니야, 아나이스."
그는 베개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잔상처럼, 거짓말처럼 떠오르는 사람의 얼굴이 있다. 왜 그 자리에 있
었을까? 아마도 그 것은 '시종' 이 서 있었던 자리인 것 같은데. 옷도 분명 평범한 귀족자제의 옷이 아니
었다. 무엇보다도, 왜 프리나가 카세타에 있는 것일까. 세이피안도 아닌, 카세타에.
"아나이스,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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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56 :: 오! 나의 주인님- PART 12: 순수의 상실(6)
퍼억!
"……."
"……상대의 뒤를 치지 않는 정당함."
시온은 힐끔, 말하는 프란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은 우리 자기 기분이 어때∼' 라는 말을 하면서 프란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안 그래도 기분 더럽던 프란의 기분을 더더욱 더럽게 만들어 놓은 이 은색 머리
카락의 소년은, 오렌지색 머리칼의 소녀가 오늘따라 영 기분이 저조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녀의 눈치를
더더욱 슬금슬금 보았다.
프란은 피식, 김빠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이 그녀의 입가에
한 가득 번져나간다고 생각했을 때, 프란이 다시 입술을 열었다.
시온은 여전히 말 해 나가는 프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를 알아야 자신이 도움을 줄텐
데, 이 고집센 소녀는 도무지 자신에게말 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늘 문제다.
프란은 눈을 들어 시온을 보았다. 시온이 움찔하는데, 프란의 말이 가만히 이어졌다.
시온은 '에엑? 거짓말!' 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프란의 눈이 너무 진지했다. 프란은 입술을 살
짝 들어올려 짧게 미소지었다.
'아샤?'
그 말에 프란이 크카카칵,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우웨, 하는 소리를 내며 시온을 보았다.
말하려다 말고 프란이 움찔했다. 그녀는 갑자기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시온을 뚫어지게 보았다. 놀란
시온이 흠칫하자, 프란의 입술이 가볍게 움직였다.
"아마도? 으응, 괜찮을 거야. ……뭐, 괜찮지 않아도 황궁에는 '그 여자' 가 있으니까 나를 문전박대하진
않겠지."
"그래그래!"
프란은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정도는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시온의 입으로 그 말을 들
으니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프란은 쳇,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후 시온의 입을 빤히 보며 말을 재촉했
다.
"그래서?"
"흐응, 그런 건가?"
"그런 거다. 아마도 내가 그 여자랑 만난 횟수가 형님이 그 여자를 만나는 횟수보다 많을 거야. 아마도,
지만. 형님은 그 여자한테 별로 관심 없거든."
"……."
"너."
"응?"
"……."
'젠장, 난 정말 이 녀석한테는 너무 약하단 말야! 이래선 남자로서 매력이 없잖아! 바람둥이 시온의 이미
지가 이렇게 망가지누나. 이래서 한 여자한테 매이면 꼴 사납게 된다는 건가.'
스스로를 책망하며 시온이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진지한 눈으로 시온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헤냔 드 키에르."
"엥?"
"그래."
"그래, 전할 말은 뭔데?"
"……모른 척 해."
"에?"
프란의 말에, 시온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그는 웃는 얼굴로 프란의 어깨를 툭툭 치며 활짝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환하게 개어 있었다. 그런 시온을 향해, 프란이 중얼거리듯 한마디 더했다.
"……프리나가."
"에?"
"그렇게 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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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여어."
"누구시죠?"
헤냔이 딱딱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정체불명의 방문객, 시온 아일린은 훗, 하는 가벼운 웃음과 함께
자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자신은 나름대로 멋있어 보이려고 한 행동이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으윽, 느끼해! 라는 반응 이상을 이끌어내기는 불가능했다.
일부러 풀 네임으로 설명하지 않은 시온이 히죽 웃었다. 헤냔은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인상을 찌푸렸다.
"……?"
"뭐, 뭐라고?"
"분명히 전했다."
"프리나…… 왜?"
"키르!"
팡!
"윽?"
"뭐야?"
"……속보다."
"뭐가?"
"반란."
"……뭐라고?"
순식간에 헤냔의 눈꼬리가 차갑게 굳었다. 아나이스는 헤냔을 향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발악인 모양이지. 저번에 격납고 사건도 그렇고 저번부터 심상치 않았잖아. 서남부에서 크게 한
번 무리가 일어났다는군. 지난 새벽에 난리도 아니었대. 오늘, 최종 진압에 들어갈 모양이야. 일주일 내
로 결판을 봐야지, 썩을."
아나이스의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헤냔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카세타 내에서 반 카세타 세
력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 아니던가. 제 3 공주 키네세스의 생일 날 격납고에 불을 지르
는 둥 이만저만 대담한 놈들이 아니라는 것도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짜증이 날 정도로 조심히, 그리고
조용히 움직여서 그리 눈에 띄지는 않았던 놈들이다. 그런데 그 놈들이 본격적으로 들고일어났다?
"……."
"……."
"……동감이다."
◀▷◀▷◀▷◀▷◀▷◀▷◀▷◀▷◀▷◀▷
「그대가 승인할 거라 믿고 있소. 아무래도 반란군의 움직임이 심상찮소. 내일 중으로 입궁해 주시구려.
그리고 두 번째 제안 역시 그대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거라고 믿겠소.
키네온 L. K. 카세타- 」 어제, 런스가 전해준 편지를 다시 한 번 읽은 반의 얼굴 위로 짧은 미소가 걸
렸다. 그는 비공식적으로, 오늘 아침 누군가가 전해온 다른 편지 한 장을 들어올려 그것도 한 번 훑었다.
「그대 역시 소식은 들었을 거라 믿소. 그대의 힘이 필요하오. 오늘 아침, 빠른 시간 내에 입궁 해 주길
바라오. 그대가 내 가신인 이상, 나를 배반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키네온 L. K. 카세타-」 반은 흥, 하고 낮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가볍게 일어선 후, 곧 이 방으로 들어
설 자신의 시종을 기다렸다. 그는 가볍게 눈을 치켜 뜨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들어와."
"아주아주아주아주 많은 걸 느꼈죠."
물론 마음은 따로 논다.
"구체적으로."
"그래?"
"좋다, 너도 데려 가주지."
"어딜요?"
"즐거운 곳에."
"나다."
문은 금세 열렸다.
자신의 조카.
헤이튼에게 반은, 누나가 남긴 유일한 한 점의 혈육인 셈이다. 반에게 있어서도, 헤이튼은 외삼촌. 둘의
관계는 어찌보면 가장 가까울 수도 있는 친족이나, 헤이튼을 보는 반의 눈에는 일말의 애정도 담겨 있지
않았고 반을 보는 헤이튼의 시선도 역시 조카를 보는 외삼촌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니요?"
헤이튼은 애써 냉정을 가장하며 물었다. 반은 입술끝을 비틀어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것은 평소의 그가
짓는 냉소보다 훨씬 더 농도가 짙은,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반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마치 비밀을
속삭이는 듯 얘기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으악, 9 분 늦어버렸다;
ㅁ;=+=+=+=+=+=+=+=+=+=+=+=+=+=+=+=+=+=+=+=+=+=+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58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2)
"……세상에."
카세타의 왕궁.
"왕궁엔 왜요?"
프란은 옆에 있는 반을 향해 물었다.
"시끄럽다."
"왜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조금의 틈새도 없이 키스를 퍼붓는 햇빛의 사랑에, 카세타의 왕궁이 화려하게 반
짝이고 있다.
기사단은 언제나 그녀의 로망. 어릴 때부터 기사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검을 닦았던 프란이었기에, 지
금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기사단을 향해 일단 침부터 질질 흐르는 그녀였다. 뭔가에 홀린 듯 여기저기를 훑
어보던 프란은 갑자기 아아, 하고 감탄어린 비명을 질렀다. 저 쪽 어귀에서 긴 머리채를 휘날리는 여기사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풍성한 머리카락을 뒤로 휘날리며 선 여성.
"멋지다!"
프란의 눈길을 빼앗은 대단한 여기사님, 풍성한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고 있던 그녀는 살짝 옆을 보며 입
술을 움직였다.
"그 설마야."
모른 척 해달라고?
"으아, 말도 안돼. 너무 젊잖아? 아니, 저건 젊은 게 아니라 어리지! 너보다 기껏해야 두세살 위겠는
데?"
"……."
"왜 때려!"
눈물이 날만큼 아픈 한 방이었으나, 진중한 분위기를 깨뜨릴까봐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헤냔이 소리를
쳤다. 그런 헤냔의 오른쪽 눈꼬리에 눈물이 한 방울 달려 있었다. 아나이스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헤
냔을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끊어서 이야기를 했다.
퍼어어억!
그러나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강한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힌 헤냔 드 키에르군.
"왜 그래!"
"윽."
◀▷◀▷◀▷◀▷◀▷◀▷◀▷◀▷◀▷◀▷
"기사단이랑 같이 뭘 하는 겁니까?"
"반란군을 토벌한다."
"반란군요?"
아까 전부터 갑자기 나타난 보라색 머리칼의 소년 때문에, 기사단은 조용한 가운데 긴장하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유쾌해진다.
"국왕 폐하시다."
"가주님!"
"……뭔가."
갑작스러운 옆구리 공격에 자신도 모르게 당황할 뻔한 반은 얼른 정신을 추스르곤 물었다. 프란은 동그래
진 눈으로 말했다.
"무릎을 꿇지 마라."
"……에?"
반의 대답에 프란은 헤에, 하고 낮게 속으로 중얼댔다. 하기야, 하고 속으로 묘하게 납득하며 프란은 고
개를 주억거린다.
"폐하를 뵙습니다."
반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키네온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그 태도는 예의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격식
에서 벗어나지 않았을지는 모르나, 고개를 숙이는 그 순간에조차 눈은 내리깔지 않고 키네온을 쏘아보는
반에게선 현 국왕에 대한 존경심이라곤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옆에 있는 프란에게까지 느껴질 정도
로.
카세타의 모든 병사들은 현재 북쪽의 로이네트, 동쪽의 세이피안, 서쪽의 레키슈안과 맞대고 있는 경계지
점으로 흩어져 배치되어 있었다. 세 개의 국가들 사이에 끼여 있는 국가인 카세타에게는 병사를 움직이는
데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한참동안 반란군의 존재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멘 가 아래에 있는 병력만 빼 올 수 있다면 굉장한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카르멘의 가주가 데리고 왔어야 할 병력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딱 한 사람 보이긴 한
다. 금색 머리카락을 한 시종 복장의 소년. 그것이 전부다.
"알고 있습니다."
"저와 제 시종 뿐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미안함도 담겨 있지 않다. 당연하지 않냐는 그 어조에 키네온의 얼굴에 당황과 분
노가 떠올랐음은 당연한 일.
"걱정 마십시오."
키네온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찰나 반이 말했다. 그는 싸늘한 은보랏빛 눈으로 차분히 말한다.
"……자신이 있으신가요?"
◀▷◀▷◀▷◀▷◀▷◀▷◀▷◀▷◀▷◀▷
두 번째 이유는, 그랬다. 토벌대의 기수가 케이온 기사단장 런스나 디센 기사단 단장 메이스가 아니라 저
저스티스 카르멘이라는 것.
"이봐, 헤냔."
런스는 조금은 질린 듯한 표정으로 헤냔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 헤냔의 옆에는 아나이스 폰 그란젤 양께서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서 있다.
"말씀하십시오."
"도대체 뭐가 불만인거야?"
그 순간이었다.
거봐, 이 대마왕아. 네가 얼마나 성격이 더러우면 등장만으로 세 사람 얼굴이 저렇게 얼어붙은 동태마냥
변하냐고. 그러면서 프란은 힐끗 헤냔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문득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순간, 헤냔
은 지금의 상황을 잊고 프리나! 하고 부를 뻔 했다. 반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정말 그랬을 것이
다.
순간적으로 굴욕적인 그 때가 생각난 것이다. 정말로 손목을 베어버릴 듯이 다가왔던 그 차가운 은보랏빛
의 눈이 지금은 훨씬 더 차분하게 가라앉아 그를 마주한다. 새하얀 그의 얼굴에 맴돌던 냉소적인 표정이
그 때와 겹쳐지면서 더더욱 기분이 가라앉는 헤냔이었다. 헤냔은 나는 굽힐 이유가 없다, 라고 생각했다.
그는 당당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아나이스는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는 중이었다. 세 사람은 동시에 헤냔의 입을 꿰매 버
리고 싶은 강인한 충동을 느꼈으나 무엇보다 반이 앞에 있기 때문에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조목조목 말을 해나가는 헤냔이었다.
"네. 둘째는 당신이 혈혈단신으로 왔다는 겁니다. 분명 폐하께서는 부탁하셨겠지요.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입니다. 현재 움직일 수 있는 병력에는 한계가 있고 또 국방에 배치한 병력이 제 때에
오기도 힘들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당신이 적어도 폐하를 받드는 신하라면 성의를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 반이 말한다.
"내가 온 것 이상의 성의 표현이 있나."
'그래, 너 잘났다니까.'
"안된다고 생각하는가?"
아나이스는 헤냔이 살기 등등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옆에 런스 카르멘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따라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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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59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3)
반란군이 왜 일어났을까.
반란은 최근 석 달 사이에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상한 것은 도저히 그 명분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왕가를 갈아엎고 싶은 것일까. 런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
뭐랄까. 지금 프란은 묘한 긴장감을 느끼고 있다. 무언가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진득한 예감. 이
런 예감을 가졌을 때 그것이 비켜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프란은 문득, 락케이드를 떠올렸다.
행복하십시오, 아가씨.
나직하게 말하며 돌아서던 그 등. 조용하고 차분한 백발의 집사. 언젠가 자유로워지면 꼭 만나러 갈게.
저 빌어먹을 놈의 대마왕이나 느끼 버터 이야기도 해줄게. 프란은 하아, 하고 공기 중으로 숨을 뿜었다.
흰 입김이 공기 중에 동그라미를 남긴다. 그 때였다.
"음?"
"……잘해라."
"엉?"
"꼭 살아 돌아와라."
"엉? 어? 어?"
◀▷◀▷◀▷◀▷◀▷◀▷◀▷◀▷◀▷◀▷
막사 안에 남겨진 반은 미간을 검지로 문질렀다.
반란 진입이라.
"넵!"
반의 주위에서 진지한 얼굴로 프란의 대답을 기다리며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싸하게 굳어졌다. 이
런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저게 무슨 말인가.
"제 피, 가주님 검에조차 묻히기 싫으신 겁니까? 그래서 이런 식으로 죽이려는 겁니까?"
"그런가. 디센 기사단에서는?"
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아나, 나 말이야."
햇빛이 음영을 드리웠다. 아직은 환하지만, 부드러운 햇살은 사라지고 얼굴들마다 각각의 그림자가 살포
시 내려앉았다. 헤냔은 막사에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런 헤냔의 얼굴이 마치 무엇을 훔쳐
먹다 들킨 아이마냥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아나이스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헤냔의 볼을 콕, 하
고 찔렀다. 물론 그 손가락을 헤냔이 콱 깨물었음은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왜, 우리 키르?"
"웃기고 있네. 나도 아나가 아냐. 아나이스 폰 그란젤이라고 불러. 네 녀석은 아름다운 레이디에 대한 예
의도 없냐? 그러고도 네가 기사야?"
"왜? 무슨 일인데?"
도대체가 지금 반란군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긴장감이라곤 조금도 없이, 오로지 동료 기사의 연애얘기에
만 관심을 보이는 아나이스의 호들갑에, 헤냔은 관자놀이를 타고 또르르 흘러내리는 땀을 스윽 닦을 수밖
에 없었다.
헤냔은 자신의 동료이자, 그다지 남자에게 인기가 없음에도 인기가 있다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신의 첫사
랑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가여운 아나이스를 향해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있지, 아나."
'이제 시작인데요!'
아나이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런스는 대충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이 실력파 기사의 얼굴에서 자
그마한 땀방울이 미끄러졌다. 그는 자신을 반짝이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한 명의 여기사와, 뭔가 이상한
일로 고민하고 있음이 분명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한 명의 소년 기사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단장님!"
런스는 천천히 입을 열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나이스와 헤냔은 처음에는 진지한 얼굴로 런스의 주위
에 붙어 앉아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처음, 런스가 입을 뗄 때는 두 사람 모두 조금 긴장한 채였다. 하
지만 런스가 말을 끝냈을 때, 런스는 돌이 되어 있는 두 인형(人形)을 발견하고 허허, 하고 속으로 웃는
수밖에 없었다.
"……저기, 단장님."
헤냔이 말에, 런스는 음,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 런스를 향해, 헤냔이 다시금 묻는다.
"대체 누가 합니까?"
"……종."
"예?"
런스의 말이 워낙에 작았던지라, 아나이스와 헤냔이 되묻는다. 그러자 런스는 머리를 슬슬 긁으며 조금
곤란하다는 듯, 대답했다.
▷◀▷◀▷◀▷◀▷◀▷◀
"가주님."
"......"
'이, 이이이이이익!'
"너는 다 했다."
그러나 헤냔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헤냔은 정말 무섭기 그지없는 눈으로, 아나이스가 기억하
고 있는 그 어떤 모습보다도 가장 살벌한 눈을 한 채 반을 노려보고 있었다. 반 역시 사람이라면 헤냔의
시선을 못 느꼈을 리가 없었으리라. 그것도 이렇게나 가감 없이 반을 향해 똑바로 날아드는 시선인데. 그
러나 반은 돌아보지 않았다.
"헤냔, 대체 왜 그래?"
"프리나를……."
"어?"
중얼거리듯 내뱉은 헤냔의 한마디를 슬쩍 놓치고 만 아나이스가 다시금 물었다. 헤냔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프리나를……."
▷◀▷◀▷◀▷◀▷◀▷◀
이스티네 보일린.
역시, 믿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자금줄을 대준다며 웃던 그 얼굴이 믿음직스러웠다 해도. 백작이 아무 염려 말라며, 그에게 '세라
딘' 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해도. 웃는 입가와는 다르게 싸늘하게 굳어진 눈이 경멸의 빛을 띠며, 분명한
지배자의 기색을 보여주었다 해도.
"……시온 아일린."
갑자기 떠오르는 반의 얼굴에, 여태껏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던 보일린이 입가에 비틀린 웃음을 걸었
다. 그 도도하고 건방진 남자를 무릎 꿇리고, 그리고 잔인하게 비웃어 주리라. 여자보다 더 고운 그 얼굴,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차가운 은 보라색 눈동자를 뽑아 더 없는 고통을 안겨 줄 것이다.
보일린의 비틀린 입가에서 비죽이 웃음이 새어나왔다. 보일린은 미간을 한참 문질렀다. 그러다가 그의 눈
이, 문득 음흉하게 빛났다.
"레이나님을 닮은 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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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61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5)
못할 것은 없어.
헤냔과 아나이스, 그리고 디센 기사단에서 차출된 샤운과 시엔크라는 자가 프란의 곁으로 다가왔다. 프란
은 흐읍, 하고 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막 그녀가 주먹을 쥐려는 찰나, 스치듯 프란의 옆을 지나며
헤냔이 멈춰 섰다.
그리고, 불렀다.
"……프리나."
"프리나……. 괜찮겠어?"
"……아마도."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따뜻한 기분이 드는 걸까? 프란은 갑자기 뭔가 그리운 것들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헤냔 드 키에르라는 이름을 가진, 옛날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의 소년이 이 앞에서, 그녀
를 걱정하며 서 있는 것이다. 헤냔은 복잡한 눈으로 프란을 보았다. 그 눈에 얽힌 수많은 감정을, 물론
프란은 읽어내지 못했다.
프란은 잔뜩 긴장한 채 헤냔을 버려두고 반을 향해 달려갔다. 반은, 왼손을 오른쪽 팔꿈치에 대고 프란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다 반은 한 쌍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붉은색, 헤냔의 눈동자다. 무섭게 반을
쏘아보는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분명한 적의(敵意)였다.
"들어라."
"확실히 해라."
"예."
"방심하지 마라."
'방심할 틈도 없을 텐데, 뭘.'
"……살아서 와라."
"에?"
갑자기 들려온 그 말에, 프란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반은 등을 돌려서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아
니, 잠깐. 잠깐만 있어 보라고. 프란은 고함을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니, 이봐. 방금 그거, 저 대마
왕 입에서 나온 말 맞는 거야?
프란은 당황하여 붕어처럼 입을 뻐끔뻐끔 거렸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지금 반은, 무려 자신에
게 '그로써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다정하게 대해준' 것이다. 이런 맙소사, 세상에, 하고 프란은 생
각했다. 저벅저벅 멀어지는 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프란은 당혹감에 한참동안 그 자리에서 발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
"괜찮을까?"
아나이스가 그럴 때면, 헤냔은 한없이 불안해지곤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나이스 폰 그란젤은 카세타
의 여기사라는, 얼핏 듣기에 굉장히 매력적이며 멋있어 보이는 한편 조금 딱딱하게 들리는 직위에도 불구
하고, 그 정도가 지나친 낭만가인 것이다.
그녀의 특기는 검술이지만 취미는 공상이다. 여태껏 아나이스가 만들어낸 공상 소설이며 연애 소설을 읽기
를 강요당한 헤냔으로써는(헤냔은 물론 소설 읽기를 강요당할 때마다 너에게는 작가적 재능이 형편없으니
그만두라고 수십 번 말했지만 그 때마다 번번이 구타를 당할 뿐, 헤냔의 진심어린 충고는 아나이스에게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지금 아나이스의 심각한 표정이 두려울 뿐이었다.
"……."
"왜?"
"난 네 편이야."
"뭐가?"
"성공할까?"
'그럴까?'
'……넌 날 이길 수 없어.'
오렌지색 눈동자를 빛내며 프리나가 다가오던 그 순간, 조금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거칠게 검을 휘둘러 그
녀와 맞섰다. 처음 검이 부딪치던 날, 프리나의 눈에서 일어나던 작은 놀라움을 기억한다.
프리텐 가문의 버려졌던 아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버려져서, 저 추운 야만인의 나라인
북부 로이네트에서 길거리를 구르며 생활했다고 했다. 프리텐 가문의 정통 승계자가 생기지 않아, 결국
수소문해 데려왔다는 그 아이.
어디서 어떻게 자랐든, 여자이든 남자이든, 아마 '프리나 프리텐' 이 아니라 그저 '프리나' 이기만 했어
도, 아마 그녀는 사랑받았을 것이다.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검을 들었을 때,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다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그 어린 눈동자에서 뿜어 나오는 의지가, 주위사람에게 전해져 그 몸
을 떨게 만들었다. 그런 것들이, 그저 '프리나' 이기 때문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좋아져 버렸다. ―어
린 날이지만, 그 감정만은 변함없는 진실.
헤냔은 앞에서 달리고 있는 프란을 눈으로 좇는다. 프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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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62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6)
500 만 케트를 제할만한 일을 주겠다는 반의 말에, 프란은 굉장히 흥분해 있었다. 그런 프란을 향해, 반
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책사를 죽여라."
"……농담이시죠?"
"말이 많아졌군."
"……네가 책사를 죽이고 소동을 피우면 마을의 방책(防柵)에 불을 지를 거다. 샤로테는 마을 뒤켠이 숲이
라 들짐승을 막기 위해 방책을 세워 두었지."
"가주님."
"……."
"……죽고 싶나?"
"아뇨."
'어떻게 한다?'
프란은 한참을 고민했다. 거의 눈물이 날 정도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프란은, 드디어 결론을 내리고
자신의 무르팍을 퍽, 하고 쳤다. 누가보면 대단한 결론을 내렸다가 판단할 움직임이었다.
▷◀▷◀▷◀▷◀▷◀▷◀
그러다, 프란은 마을의 붉은 지붕들과 그 지붕들 전체를 빙 돌아 에워싼 방책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멈추었
다. 프란은 방책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넝쿨이 수십 개 엉켜지고 이끼가 끼어 그 사이로 공간조차 제대
로 보이지 않는 고목 뒤로 몸을 숨겼다.
살짝 고개만 낸 채로, 프란은 길게 이어진 방책을 따라 움직이는 병사들을 또렷한 눈망울로 훑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들짐승들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방책은 얼핏봐도 높고 견고했다. 다
가서서 보면 프란의 가슴 정도까지 너끈히 닿을 듯한 그 방책은, 방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벽이라
고 불러도 좋을 듯 했다.
오늘밤은 구름마저 약간 끼인 탓에, 유폐된 여신을 안은 비나룬의 녹빛이 흐릿하다. 비나룬의 주위에서
가닥가닥 드리운 별들만이, 물 묻은 은색과 파란색으로 반짝일 뿐.
사방이 완전히 새카매졌다. 프란은 어둠이 주는 한 장의 검은 망토에 조금은 안도했다. 프란은 후욱, 하
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쯤이면 되겠지, 하고 생각한 그녀가 검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였다.
"잠깐만."
저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굵직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다. 어두운 밤인지라, 조그마한 소리
도 몇 배로 커져서 울려온다.
'설마?'
'……눈치 챘나?'
등줄기를 타고 싸늘한 땀방울이 흘렀다. 목울대가 출렁였다. 프란은 천천히 일어섰다. 걸어온 반란군 대
원 중 한 명은, 프란이 숨어 있는 나무 바로 앞에서 멈춰서더니 주위를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프란
은 온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서서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 했다.
'어서 가! 가란 말이다!'
철컥철컥.
'이, 이게 무슨 소리냐.'
나무를 감은 넝쿨의 사이로 눈을 갖다대었던 프란은, 흠칫하고 말았다.
"……."
"어~어~"
"……."
퍼억!
프란은 자신을 놀라게 한데 대한 분노를 꾹꾹 응축해 검집에 담은 뒤, 남자의 머리를 검집째 거세게 내리
갈겼다.
▷◀▷◀▷◀▷◀▷◀▷◀
"뭐라고 하셨습니까?"
"프란을 보냈다."
"……혼자, 보낸 겁니까?"
노처녀 집사장 마린은 반이 떠나면서 엄청나게 쌓아놓고 간 서류들을 신경질적으로 훑어보며 '카세타 왕궁
으로 가셨어요. 반란 진입을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네요.' 하고, 시온을 향해 건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마린의 대답에, 시온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이 반란
토벌에 카르멘가가 움직일 거라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 반란군의 목적 중 일부는 거기
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궁극적인 목적에 그것이 끼여 있었던 것이다.
옳다, 시온도 그것은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반이 프란을 혼자 적장에 보내는 극단적일을 할 거라곤 생
각도 못했던 차였다.
"네가 무슨 상관인가."
얼음과 불.
"너와는 상관없다."
"상관있습니다."
"……내 시종이다."
"그래도 전 들어야겠습니다!"
시온이 버럭 고함을 쳤다. 기사단 모두는, 갑작스럽게 나타나 가주를 향해 고함을 질러대는 아일린 가의
도련님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반은 그런 시온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본 후, 낮게 말
했다.
"……가라. 베고 싶지 않다."
"시온님."
"……런스."
"……형님."
"예?"
프란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남자의 옷을 벗겼다. 그러나 곧, 프란은 최초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그
옷을 입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옷을 입기에는, 남자의 덩치가 너무 컸던 것이다. 이리 저리 둘러보고 어
깨에 대보고 해봐도, 역시 입지 못할 옷은 입지 못할 옷이었다.
프란은 넝쿨을 이용해 기절한 상태인 반란군 남자를 꽁꽁 묶었다. 방금 전 자신이 시원하게 내갈겼던 오줌
자국이 그대로 남은 나무에 묶이게 된 남자의 가련한 처지 따위는 전혀 고려치 않고, 오히려 한 술 더 떠
프란은 남자의 입에 무작위로 나뭇잎을 가득가득 채워 넣은 뒤 넝쿨로 남자의 입을 다시 한 번 더 막았다.
남자의 머리를 검집으로 친 후, 그대로 남자의 목둘레를 팔으로 휘어감아 목을 졸랐던 프란이었다.
"책사가 있는 곳이 어디냐?"
낮은 목소리로, 남자의 귓가에 대고 프란이 물었다.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이대로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고 다정하게 속삭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 별 수 없는 건가.'
사방을 살펴보던 프란은, 결국 그 방책을 타넘기로 결심했다. 가슴까지 오는 높이, 결코 만만한 높이가
아니다. 다시 한 번 '이 대마왕' 하고 중얼거리던 프란의 눈이 어느 순간 확, 하고 타올랐다. 그리고 다
음 순간.
'헤에, 아직 내 실력 건재하잖아.'
'좋아.'
프란은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사방은 죽은 듯 조용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어둡다. 횃불이 있다
고는 하지만, 사방을 환히 비추는 것은 무리다. 소리만내지 않는다면, 존재를 들키지 않을 수도 있다. 여
기서 돌 하나라도 밟으면 끝장이겠군, 하고 중얼거리며 프란은 살금살금 걸었다.
발걸음이 가볍다. 하기야, 저스티스 카르멘이라는 작자에게서 옷깃을 베어내기 위해 살기와 발걸음 죽이
는 연습을 내도록 해야 했던 프란이다. 프란은 다시금 반의 용의주도함에 치를 떨면서 발걸음을 움직여 나
갔다. 이어, 그녀는 자신이 잡았던 남자가 말했던 '책사가 머물고 있는 작은 집' 앞에 당도했다.
▷◀▷◀▷◀▷◀▷◀▷◀
"……잘 할까?"
"잘하겠지, 뭐."
"반란군은 우리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덮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을걸. 쉬지도 않고 수도에서 말로 달
려왔으니 말이야. ……반 수 이상이 보병인 녀석들이 낼 수 있는 속도와는 차원이 다르단 말이지. ……요는,
정작 문제가 죽인 다음이라는 거야."
아나이스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헤냔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 헤냔을 부드러
운 시선을 바라보며, 아나이스는 자신의 긴 머리를 대충 한 번 쓸었다.
▷◀▷◀▷◀▷◀▷◀▷◀
다행히도 벽이 낮고 지붕이 길게 이어진 구조라 지붕으로 올라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가벼운 몸과 유연성이 지붕으로 오르는데 적절했기에, 그녀는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지붕으로 올라설 수가
있었다.
'으아아아, 굴뚝 청소 좀 하고 살란 말이다!'
굴뚝 안에서 사지를 대 자로 뻗은 채 더듬더듬 내려가며 프란은 속으로만 소리를 질러댔다. 그렇게 내려가
기를 한참, 그녀는 부엌의 좁기 그지없는 화덕에서 새카맣게 된 모습으로 빠져 나왔다.
베야한다.
"……."
프란은 멍한 눈으로 눈앞의 소녀를 보았다. 부드러운 갈색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소녀는 프란의 존재를
감지했는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누구세요?"
소녀의 목소리에 프란의 움켜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뼈마디가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며
프란은 굵은 침을 삼킨다.
맙소사.
프란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거짓말.
"……누구, 세요?"
설마, 그럴 리가.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프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럴 리가 없다, 이렇게 어린 소녀가 무슨 책사란 말인가. 철저한 농담이지.
"……."
……공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저번에 가주의 옷깃을 베는 일로 기사단의 순수가 깨졌고, 자신이 더 이상 세이피안의 견습기사가
아니라고 해도.
그래도, 이건 아니잖은가.
프란이 멍하니 멈춰 있는 사이, 비나룬을 감싸고 있던 구름이 일부 벗겨져 나갔다. 곧, 은은한 녹색의 달
빛을 어깨에 숄처럼 두르고 머리카락마다 드리운 채, 소녀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로 프란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공허하게 빈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한 눈에도 눈이 멀었음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정확히 프란의 앞에 멈춰 섰다. 굳어 있는 프란 앞에서, 소녀가 입술만을 벌려서 조그맣게 속삭
였다.
이렇게 가늘어지듯 은밀한 목소리는 작은 소녀가 냈다고 하기엔 너무 부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스륵, 하고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건 자그마한 단검. 프란은 아차, 싶었다.
챙!
막사에서의 검 소리.
지금은 새벽. 날카로운 잔광을 반사하는 검의 소리가 이 순간을 어떻게 뒤흔들지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소녀는 그것도 모자라 소리까지 버럭 지르는 것이 아닌가.
"어쌔신이에요!"
'확실히 하고 돌아와라.'
'방심하지 마라.'
그랬다. 방심하지 말라니, 이런 상황을 예측이라도 한 걸까.
'……살아 돌아 와라.'
프란은 울컥 다시 검을 휘둘렀다.
살아 돌아 와라, 라고 했다.
프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
피를 뒤집어쓴다는 게, 이런 것인가.
그러다 우직, 하는 요란한 소리에 프란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문이 요란스레 열리며 한 무리가 뛰어들었
다. 프란의 눈은 여전히 멍하게 굳은 채였으나, 문이 열린 순간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달려 나간 그
녀는 반대쪽의 창문을 깨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유나!"
소녀의 이름인가, 하고 프란은 멍하게 생각했다.
"저 쪽이다!"
큰 소리가 뒤를 잇는다. 프란의 코끝에 싸한 바람이 닿는다. 프란은 뛰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적인 움
직임이었을 뿐이다. 기사 견습시절, 그토록 뛰고 또 뛰었던 훈련이 이때만큼 도움이 된 적은 없으리라.
물론 처음은 아니었다.
"저기다!"
……빌어먹을, 들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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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64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8)
"……우리 차례군."
▷◀▷◀▷◀▷◀▷◀
이런 제기랄.
프란은 욱씬거리는 어깨에 손을 올렸다. 피가 흥건히 어깨를 적시고 있다. 미끈미끈, 불쾌한 느낌으로 젖
은 어깨를 동여맬 생각도 하지 못하고 프란은 뛴다.
'아파…….'
프란은 상의의 아래쪽에서부터 배꼽 부분까지를 지익, 하고 찢어 어깨에 동여맸다. 질끈, 천으로 상처를
단단히 감아 막 지혈을 끝냈을 때다.
쉭, 하고 화살이 한 대 날카롭게 날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 근처를 노리고 조준한 것으로 미루어, 꽤
나 가까운 곳에서 쏜 활이다. 프란은 깜짝 놀라 오른쪽으로 잽싸게 고개를 비틀었다. 화살은 퍽, 하고 바
로 옆에 있는 나무에 꽂혔다.
"이 쪽이다!"
프란은 잔뜩 긴장해서 곧추세운 검으로 단박에 달려들어 남자의 겨드랑이 윗부분을 찔렀다. 남자는 아랑곳
않고 검을 마주 휘둘러온다.
챙캉!
검소리가 프란의 땀을 타고 흐른다. 남자가 잽싸게 달려들어 프란의 상처 입은 어깨를 찌르려는 찰나, 프
란은 크게 몸을 앞으로 젖히며 남자가 만들어놓은 옆구리 옆쪽의 빈 공간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푸악!
이번엔 타격이 꽤 컸다. 베어진 상처에 못이긴 남자가 휘청, 하고 기우는 사이 프란이 얼른 그 옆쪽으로
몸을 틀어 빠져 나간다. 그러나 얼마 못가 와악, 하고 여러 사람들이 몰려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횃.불.에. 들.켰.다.
상대의 얼굴마저 뚜렷이 보인다. 프란은 순간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횃불이 꺾여져 자신에게 점점 다
가올 때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프란 주위로 천천히 다가오는 동시에 소리를 질러 흩어져 있는 동료들을 불렀다. 프란은 이를 악
물었다.
바람소리가 잉잉잉잉,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프란의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프란은 검을 한 번 휘둘
러 비스듬하게 들었다.
"……안녕?"
"……?"
"으아아아아악!"
남자가 내지르는 비명소리와 자욱한 피내음을 느낄 찰나도 없이, 프란은 뚫린 그 공간을 향해 전력질주 했
다. 오른팔을 베인 남자의 비명소리가 프란의 뒤에 그림자처럼 매달렸다.
프란은 아찔한 마음으로 달린다. 이미 드러난 자신의 움직임.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지금 도망가
지 못하면 죽는다.
추격은 미친 듯이 쫓아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는 것 같다고, 프란은 생각했
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마치 영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가시밭길을 맨발로 달리는 기분이었던 프란은 어
느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타고 왔던 말이 드디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프란은 으하하, 하고
웃으며 화살 맞은 몸의 고통조차 잊고 달려나갔다.
젠장, 살았잖아!
커헉, 하고 등이 휘었다.
어떻게 해볼 사이도 없이 한 번 휘청거린 프란은, 곧장 낙마했다.
퍼벅!
"윽!"
말이 높은 탓에, 그리고 갑자기 날아든 화살로 인해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했던 프란은 그만 다리를 삐고
말았다. 프란을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일단 등에 꽂힌 화살부터 뽑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화살을 뽑기 위해 손을 뒤로 보낸 순간, 날카로운 검 한자루가 그녀의 손을 막아섰다.
"일어서라."
"일어서라."
상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하자, 프란은 느릿한 움직임으로 일어섰다. 여섯의 남자가 그녀
를 빙 둘러쌌다. 프란은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내렸다. 프란은 여섯 남자의 얼굴에 짙게 드
리워져 있는 분노와 경계를 읽었다.
프란이 순순히 자신의 말에 따르자 검을 드리우고 있던 남자의 얼굴에 약간의 안도감이 묻어났다. 바로 그
순간, 프란은 있는 힘을 다해 재빠르게 자신의 등에 꽂힌 화살을 뽑아내곤 엇, 하는 망설임도 없이 그것
을 그대로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던 남자의 오른쪽 가슴에 찔러 넣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지금 망설이면 죽는다.
프란은 바람 같은 움직임으로 화살을 맞은 남자를 베었다. 프란의 그 과격한 행동에, 그녀를 둘러싸고 있
던 자들은 무의식중에 한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기회다!'
프란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자신이 벤 남자를 담장타 듯 그대로 타고 넘었다.
프란이 남자를 타고 넘은 후에야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다시 우르르, 프란의 뒤를 쫓는다.
갑자기 무언가가 눈앞으로 스쳐 흐르기 시작했다. 험하게 지냈던 어린시절이, 견습 기사였던 그 무렵이,
락케이드와의 기억이, 카르멘 가에 처음 오던 날이. 한 장의 파노라마처럼, 그 짧은 순간에 인생을 거쳐
수많은 기억들이 되살아나 프란에게로 달려들었다.
죽기 적진에,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찰나의 순간을 가진다고 했다. 프란의 눈이, 처음으로 완전한
포기를 결심한 채 질끈 감겼다.
쐐액!
퍼억!!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멍하게 생각하는 프란을 향해 다가닥 다가닥, 가까운 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프란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베어난 땀이 등을 모두 적셨다. 크게 뜨여진 프란의 눈으로,
백마가 들어왔다.
프란은 땀으로 흐릿해진 눈가를 닦아내며 다시 검을 곧추세웠다. 그 눈에선 격렬한 투지는 읽을 수 없지만,
분명히 전해지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프란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세우고 입술을 물었다.
포기할 마음 따위는 없다.
"나야."
"……시, 온?"
시온이 다시금 고함을 쳤고, 프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내밀어져 있는 시온의 손을 잡았다. 시온은 프
란을 잡아당겨 곧바로 자신의 뒤에 앉혔다.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온 시온의 백마는 갑자기 더해진 한
사람 분의 무게에 잠시 휘청인다 싶었지만, 시온이 가볍게 목 언저리를 두드려주자 곧바로 다시 달리기 시
작했다.
다가닥 다가닥.
백마의 흰 갈기가 날렸다. 프란의 머리칼이, 시온의 머리칼이 길게 날린다. 프란은 떨리는 손으로 앞에
있는 사람의 옷깃을 잡았다.
"그럼 내가 뭐겠어?"
프란의 당혹을 지우며, 풀섶을 스치면서 말이 달린다. 솨악솨악, 두 사람의 몸에 마찰하며 풀들이 소리를
냈다. 잠시 주춤했던 횃불이 방금 전 프란과 시온이 있었던 자리로 우르르 몰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
었다.
프란은 시온의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을 주려 애썼다. 그러지 않았다간 그대로 졸도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
다. 긴장감이 풀리자 이제 살았다 싶은지 몸이 아까보다 몇 배는 더 격렬한 통증을 호소했다. 땀이 비처
럼 내려 덮이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뜨려 애쓰며, 프란은 몸을 떨었다.
시온은 속으로 자조한다. 정말이다. 정말 단단히 빠져버린 것이다. 위험에 처해 있다는 걸 알고 이렇게
앞뒤 생각 못하고 달려올 만큼. 이대로라면 위험한데, 정말. 시온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매일참.........
별로 많이 한 것도 아닌데=_=
슬슬........
..........힘들어지려고 합니다;;;(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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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65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9)
"……아파, 젠장."
"조금만 참아."
펑! 펑!
저 멀리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프란은 눈을 번쩍 뜨고는 시온에게 기대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늘에 수놓아지는, 신호탄이 분명한 불꽃들.
"빌어먹게 굼뜨네."
▷◀▷◀▷◀▷◀▷◀▷◀
"신호탄입니다."
"출격."
▷◀▷◀▷◀▷◀▷◀▷◀
"프란. 괜찮겠어?"
시온은 달리던 말을 천천히 멈췄다. 이대로 달리다가는 프란이 낙마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온의 옷깃을 움켜잡은 프란의 손에서는 점점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위태위태하게,
방금이라도 옷깃을 잡은 그 손을 놓아버릴 듯이.
뒤에 앉은 프란을 슬쩍 돌아본 순간, 시온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란의 얼굴이 밀가루를 뒤집어 쓴
듯 하얗게 질려 있다.
반군(叛軍)과 진압군.
그러나 시온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 마법사인 자신의 능력을 굳이 빌려주지 않아도 자신의 사촌형이
잘 해낼 거라는 믿음과는 조금 동떨어진, 비뚤어진 무언가.
시온은 일단 프란을 말에서 내리게 했다. 프란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 무섭게 떨어져 시온의 얼굴로 비처
럼 내렸다. 시온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 프란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시온이 놀라서 버럭 고함을 쳤다. 설마 이렇게까지 피를 흘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처음부터 지혈해야 된다고 말해주지 않은 건가!
입김이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시온은 일단 프란의 상처에 마법을 써주려고 다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막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 시온은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시온 아일린.
공격계 마법은 보통, 방어계 마법에 있어서는 특출난 실력을 자랑하는 시온 아일린이라는 마법사는, 그러
나 불행하게도 치유계통의 마법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아니, 소질이 없는 정도가 아니였다. 영 젬병인
것이다.
이러저러한 까닭으로, 도저히 힐링을 쓸만한 용기가 안 나는 시온이었다. 고사한 식물을 위해서는 작은
묵념을, 하늘로 날려 보낸 암소 대신엔 돈이면 되었지만 프란이 잘못되면 어쩐단 말인가.
"프란."
시온의 나직한 부름에 고통을 참기 위해 눈을 감고 있던 프란이 다시 눈을 뜬다. 땀에 젖은 눈꺼풀이 부르
르, 한 번 떨렸다.
"……느끼 버터."
"왜?"
뭐라고 부르든, 다정하게 대답해주는 시온이다. 으이구, 정말 느끼한 놈.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프란은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게 아파."
아프긴 정말 아픈 모양이다. 시온은 창백한 땀을 흘리는 프란의 얼굴을, 바싹바싹 말라가는 프란의 입술
을 빤히 보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작게 입을 열었다.
"여기 있지."
"됐다. 내가 감을게."
그러나 시온이 뭐라고 하기 전에, 프란은 시온의 손에서 붕대를 뺏어버린다. 그리고서 그녀는, 떨리는 손
으로 옷 위에다 그대로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피를 닦아내지도 않은 상태로 말이다. 그렇게 어설프게 묶
으면 출혈과다로 죽는다고, 하고 경악하는 시온의 표정은 물론 쳐다보지도 않았다.
▷◀▷◀▷◀▷◀▷◀▷◀
열여섯.
마을에 남겨둘 것을, 어리석은 자신의 욕심으로 데려와 버렸다. 센은 소녀의 잠든 볼에 자신의 뺨을 갖다
대고 한 번 부볐다. 딸 같은 아이였는데. 정말 아껴주고 싶었는데. 이 일이 잘 끝나면, 양녀로라도 맞을
참이었다.
"알겠다."
▷◀▷◀▷◀▷◀▷◀▷◀
그러나.
말이라.
샤로테의 앞쪽 길은, 빠져나가기에 너무나 위험한 구도를 가지고 있다. 샤로테의 입장에서 본다면 좁디좁
은 길에서 갑자기 사방이 확 트이는 넓은 길로 나가는 구조인 것이다. 미리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면,
그 길을 빠져나갈 수 있는 수단은 없다. 게다가 수백의 말까지 있다면.
센은 입안으로 낮게 신음했다.
숲을 택한다.
……어쩐지,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다.
"으아아아아아악!"
센의 예감을 옳았다.
모든 상황의 부자연스러움을 찢어 내린 것은 벼락같은 비명소리였다.
속았다!!
======================================
가넷입니다.
어제 연재를 못한 이유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변명이겠지만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돈까스집 아르바이틉니다.
어제 사장과 싸웠습니다-_- 정말 대판 싸웠지요.
세상에 11 시 30 분까지 붙잡아두는 게 어딨습니까.
오늘도 싸웠고... 앞으로 3 일간 안 나오면 돈도 안주겠답니다.
-_-화납니다, 화나죽겠습니다.
'세키에님! 옛날에 단장님 뒤에서 욕하다 걸린 거, 그거 어떻게 단장님 기억 속에서 지워주실 수 없습니
까?'
기사단원들은 반군들과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와중에도 절절한 심정으로 저마다 단장에게 저질렀던 만행
을 상기하고 있었다. 그 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연은 단장이 누구의 짓인지 모르는 채로 넘겨버린 일들
이 제발 영원히 비밀로 묻혀버리길 기원하는 것이다.
촤악!
챙캉!
챙캉!
그러다가, 누구보다 깊숙이 반란군 쪽으로 침투해 들어가 싸우던 런스가 어느 순간 흠칫하고 자리에서 멈
춰 섰다.
쉬익!
런스는 다시, 방금 전 자신을 경악하게 한 지점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물론 이번에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다.
런스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기사들을 무자비하게 상대하고 있는 센의 모습이 있었다. 웬만한 기사들의 공
격을 단번에 간파해내는 예리한 검날. 30 대 초반? 어쩌면 그보다 더 나이가 들었을지도 모른다. 휘두르
는 검은 무척이나 훌륭했다. 자신이 상대한다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적의
검이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검은, 분명.
"……카, 르멘 가의 검……?"
분명했다. 아무리 확인하고 확인해 봐도, 그것은 카르멘 가의 검법이다. 경악한 런스는, 자신을 향해 달
려드는 수많은 반란군을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일단 소리를 높여 고함부터 질렀다.
"뭐라고 했나."
"적장수가, 카르멘 가의 검을! 카르멘 가의 검을 쓰고 있습니다!"
런스는 다시 소리 높여 뱉어냈다.
믿을 수 없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
반란군 우두머리가 휘두르는 검이 카르멘 가의 검이라니.
촤악!
"저스티스 카르멘인가?"
"……누구냐."
.....위 험 해.
"센이라고 한다."
"네 이름 따위 알 바 없다."
센이 쳐다보자, 반이 검을 가로로 눕혔다. 표정의 변화도, 눈매의 변화도, 무엇도 없이. 그러나 반의 검
끝은 누구보다 더 분노해 있었다.
챙! 챙! 챙!
검의 소리가 마치 타악기의 맑은 소리처럼, 너무나 청명하다. 기사단과 반란군 모두, 숨을 죽이고 있다.
"단장님. 잘 안 보이는데요."
챙캉!
"다시 묻지."
그리고, 센은 놀랐다.
어째서 목소리가.
챙!!!
"가르쳐줄 것 같으냐."
"……본가(本家)의 검이더군."
솨악!
'유나…….'
검은 똑바로 직선을 그리며 아래로 그어졌다. 피는 요란스레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반은, 쏟아지는 피의
비를 피할 수 있음에도, 굳이 피하지 않았다.
▷◀▷◀▷◀▷◀▷◀▷◀
프란과 시온이 기사단과 합류하기로 한 가르디아 평야에 도착한 것은 아침 무렵이었다. 원래라면 프란이
가장 먼저 도착해야 했으나, 시온의 말이 도중에 쓰러져 버리는 바람에 도착이 무척이나 지연되었다. 시
온은 그가 자신 소유의 말을 얼마나 혹사시켰는지는 생각도 않고, 불쌍하기가 그지없는 그 백마를 발로 차
는 것으로 여태까지의 말의 노고에 답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시온일지라도 양심은 있는 탓에, 그리고 행동은 그래보여도 어머니 이진느가 주었던
이 백마를 꽤나 아꼈던 탓에, 그는 말을 버리고 가는 무책임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프란."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가르디아 평원에서 기사단을 발견한 시온은, 나직하게 프란을 불렀다. 깜빡 잠이
들었던 걸까.
"이거 네가 한 짓이냐?"
"……."
프란은 상대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몸이 아프지만 않다면 마음껏 구타라도 했을 텐데. 사실은 검을
뽑을 힘도 없었기에, 프란은 오늘만은 넘어가주기로 한다.
"됐다. 나 혼자 가도 충분해."
프란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사실은 이 바람둥이 버터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숨기려 했을 뿐이다. 시온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순간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그녀다.
프란은 '왜 어제 나를 구하러 왔냐.' 같은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질문을 해봤자 돌아오는 답이
야 뻔한 것이고 정말 오랜만에 시온에게 생긴 이 고마운 감정을 망쳐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마워."
프란의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시온은 한참 멍하게 그녀를 보았다. 대체 얼마 만에 들어보는 감사의 말인가?
아니, 처음 듣는 것인가? 그렇게 오랫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시온은 한참만에야 씩, 하고 웃는 여유
를 부릴 수 있었다. 오랫동안 굳었던 주제에 마지막에 지어보인 웃음은 마치 '이 정도쯤이야.' 라고 말하
는 듯해서, 프란은 비웃음의 뜻으로 그의 등을 퍽 하고 한 방 쳐주었다.
죽어버리는 줄 알았다. 아니, 한발만 늦었어도 죽었을 거다. 시온은 자신이 마법사라서 다행이라는 생각
을 아주 오랜만에 했다.
"흠, 역시 난 멋진 남자라니까."
어깨를 으쓱하는 시온이었다.
프란은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일단은 저 가주에게 귀환을 알려야 한다.
아아, 잊고 있었구나.
죽였지.
내가.
이 손으로.
허리에 걸고 있는 이 검으로.
……심장을 찔러서.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 때, 프란이 움찔하고 멈춰 섰다. 그녀를 저 쪽으로부터 똑바로 주시하고 있는 한
쌍의 눈동자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반이다. 반은, 어찌된 일인지 기사단의 앞에 서 있다. 기사들이 어제 새벽에 있었던 전투로 인해 입은 피
해를 정리하고 있는 사이, 반은, 그 자리에 선 채로 가만히 있었다. 마치 '무언가' 를 기다리는 듯한 자
세로.
"……늦었군."
'미, 미친 거 아냐?'
"……."
반은, 시선을 어디로 둬야할지 몰라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자신의 시종의 상처
를 관찰한다. 무사하다. 다쳤을 뿐. 가장 먼저 오거나 아니면 조금 늦었어야 할 시종은, 상당히 많이 늦
었다. 반은 그런 프란에게 뭔가, 말을 해줘야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그렇게 말한 반은, 순간적으로, 프란의 눈이 멈칫하고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프란의 오렌지색 눈동자는
그 순간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담뿍 담은 채로 한 차례 떨렸는데, 그 것은 놀라움 같기도 했고
다른 무언가 같기도 했다.
반은 얼른 그런 프란에게로부터 등을 돌렸다.
"……따라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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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입니다.
-_-폐인대전의 시작으로..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있는 가넷입니다;ㅁ; 카페에 글 올리기는.. 어째... 점점 거짓말처럼 되어가고 있
는...
꼭 올리겠습니다..(엉엉- 그래도 일단 가넷 백문백답은 올렸다는;ㅁ; ...아무도 그런 거 원하지 않아,
퍽!!)
오 나의 주인님을 쓰고 있는 요즘.
제가 모터를 달고 글쓰는 것 같습니다.;; 옛날 연재와 함께 호흡하셨던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한 편 분
량이 짧고-_- 연참도 잘 안하는 녀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무조건 11KB 가 넘어요;ㅁ; (이편은 17 이나...ㅠ_ㅠ)
..........-_-요점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67 :: 오! 나의 주인님- PART 13: 반란군(11)
"벗어라."
"……?"
갑자기 튀어나온 벗어라, 라는 말을 물론 프란은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나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이었고,
그래서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그러나 멀뚱한 표정으로 반을 쳐다보다가, 반의 입술 모양을
토대로, 그리고 얼핏 들렸던 그 소리를 토대로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말들을 조합해본 프란은, 움찔하고
몸을 틀었다.
"예?"
"……상처를 봐야겠다."
반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프란은 한참동안 반을 바라보다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머릿속은 수백 개의 실이 어떻게 손써볼 수 없을 정도로 꼬인 광경과 비슷한 형태로 마구 엉
망이 되어 있었다. 상처를 봐야겠다니. 혹시 지금 자신을 걱정해서 그러는 건가. 아니면…….
반은 말없이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다시금 얼어붙는다. 이 빌어먹을 대마왕의 눈은, 정말이지 한 번 보
고 있으면 반항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어쩌면 저런 눈으로 사람을 봐서, 이렇게까지 움츠러들게 하는 건
지. 지금 벗지 않으면, 또 검이라도 뽑을 셈인가?
"벗어라."
빌어먹을. 반이 탁하고 내뱉는 말에, 프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쩔까? 그래, 일단 상의를 벗은 다음 재
빨리 앞을 가리자. 가슴팍에 붕대를 단단히 감은 건, 어제 다쳤기 때문이라고 하자. 그런데…… 통할까?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 아아, 정말 단단히 감아졌을까? 그래도 표시가 날거다. 프란은 옷을 벗는 동작과
가슴 부분을 팔꿈치로 가리는 동작을 거의 동시에 하고 있어서, 아주 미적미적 힘들게 옷을 벗는다는 인상
이 강했다.
언제나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을 때마다 불쑥불쑥 얼굴을 내밀어 꼭 한 대 얻어맞곤
하던 시온 아일린이 이렇게까지 아쉬운 적은 없었다.
'헉.'
프란은, 갑자기 튀어 들어온 목소리에 얼른 옷을 내렸다. 정면에서, 갑자기 뛰어든 사람은 헤냔이었다.
가슴 부분이 거의 보일 만큼 옷을 벗고 있던 프란과 딱 시선이 마주친 헤냔의 얼굴이 한가을 홍시처럼 빨
갛게 물들었다.
"무슨 일인가."
지나칠 정도로 당황하며 시선을 둘 때를 모르는 헤냔을 향해, 반이 물었다. 헤냔은 아직도 수습되지 않은
얼굴색을 억지로 숨기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
"……."
"……."
얼마만의 재회던가.
헤냔은 이 뜻하지 않은 행운에 멍하게 프란의 얼굴 이모저모를 훑는다.
"……오랜만이지?"
"기사가 되었군?"
프란은 조금 질투가 났다. 자신과 다투던 그 소년이 어엿한 기사가 되어 있는 모습에 질투가 나지 않을 리
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 그 기색을 감지해내지 못한 채, 헤냔은 부드럽게 웃어보였을
뿐이다. 여전히 조금 홍조 띤 얼굴로. 언제나의 첫사랑인 소녀를 향해, 헤냔은 웃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바보같이 피식피식 웃던 헤냔은, 어느 순간 멈칫하고 표정을 굳혀 프란을 보았다.
드디어 물어보았다.
"……빚을 졌어."
"뭐?"
"그래서, 그 대가로. ……시종이 되기로 했어. 지금은 보다시피 남장 중이지. ……여태껏 그랬듯이, 나를
좀 모른 척 해라."
헤냔은, 갑자기 머릿속이 곤죽이 되어 버린다. 남장? 시종? 빚을 져? 게다가 7000 만 케트? 무슨 그런
천문학적인 숫자를!
"너의 아버지는!"
"죽었어."
덤덤하게 나오는 프란의 대꾸에, 헤냔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패닉 상태였던 헤냔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닫고 프란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프리나?"
"……프란이야."
"응."
"그런데 어째서……."
▷◀▷◀▷◀▷◀▷◀▷◀
"센이 죽어?"
남자는 놀란 얼굴로 소리를 쳤다. 탁자를 쾅, 하고 내리치며 한 그 질문에, 그에게 소식을 전하러 왔던
푸른 옷의 소년은 고개를 떨구는 수밖에 없었다.
"센이 죽다니?!"
남자는 믿고 싶지 않았다.
센은, 그가 검을 가르친 자였다. 원래 센은 용병으로 떠돌며 격식도 무엇도 없는 검을 구사했다. 수많은
검이 섞여서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러나 수많은 실전을 경험했기에 제대로 된 검을 가르치면 흡수
가 빠를 거라고 생각했고 그의 예상은 옳았다.
"……저스티스, 카르멘에게."
남자는 흠칫 몸을 굳힌다.
▷◀▷◀▷◀▷◀▷◀▷◀
그래서 프란은 말했다. 두 사람이 친구고, 그래서 아일린 가의 가주가 자신을 카르멘 가의 가주에게 넘겼
다는. 그러나 그 말만으로도 이 정직하고 곧은 소년 기사를 경악시키기엔 충분했다.
검의 가문과 상업의 가문. 무력과 재력. 그 두 가지가 결탁되었을 때 일어나는 피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
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 두 가문 중 한 가주가 저런 냉혈한이라면. 헤냔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그 순간, 헤냔은 흠칫하고 멈춰 선다.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불쾌한 소리로 들려온 것이다. 애
송이, 라고 불릴만한 사람은, 분하지만 자신밖에 없다. 뭔가 싶어서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리던 헤
냔은 저 멀리에 있는 은발의 소년을 보고 다시 한 번 미간을 좁혔다.
"당신이 왜 여기 있지?"
특유의 능글능글함으로 시온은 헤냔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는, 자신보다 조금은 작은 헤냔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시온은 삐딱하게 말했다.
"뭘?"
헤냔은, 순진한 어조로 멍하게 되물었다. 시온은 속으로 순진하긴, 하고 비웃으면서도, 또박또박한 어조
로 말했다.
"뭐라고?"
헤냔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어져, 시온을 향해 인상을 긋는다. 시온은 훗, 하고 웃으며 몸을 돌렸다.
"……뭐야, 저건."
▷◀▷◀▷◀▷◀▷◀▷◀
깃발이 휘날린다.
이 정도 날씨면 피크닉가기 딱 좋겠군, 하고 런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는 뒤쫓고
있던 반군 하나를 베었다.
"벌써요?"
"벌써 출발 하시려구요?"
그래서, 기사단은 점심이 속에서 채 소화되기도 전에 말을 타고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반군이 도망은 하
였으나 거의 대부분이 보병이었고, 그나마 기마병이었던 자들도 지난 샤로테 전투 때 말을 잃은지라 기동
성은 현저하게 떨어진 상태였다. 거기에 부상까지 입었으니 더 말해야 무엇하랴. 그러나 반은 지체하길
원하지 않았고, 나머지는 반을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어이, 키르. 웬일로 이번엔 잔소리가 없어?"
"……."
"무, 무, 무슨 소리야?"
"키르으으으응."
헤냔의 야유에도, 아나이스는 아랑곳 않았다. 그녀는 역시, 이 소년 기사를 놀리는 가장 큰 주범이었던
것이다.
"그 날, 샤로테에서."
"……."
그래, 보았다.
그, 휘날리는 머리카락도. 휘둘리는 검 끝도. 냉정한 눈동자도. 그 움직임도.
직접 겪어봐서 그가 대단한 작자라는 것, 몰랐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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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68 :: 오! 나의 주인님- PART 14: 비밀(1)
PART 14 : 비밀
"수고했네!"
키네온은, 기사단의 앞에 선 보라색 머리칼의 소년을 흐뭇한 눈으로 한 번 보았다. 오만하긴 하지만, 정
말 실력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내다. 이러니, 내가 딸을 주고 싶을 만도 하지.
"망극합니다."
"망극합니다."
기사단 전체가 무릎을 꿇으며 한 말에, 국왕은 입에 미소를 건다. 그리고서 국왕은, 반을 향해 '자, 들
어가세.' 하고 말했다. 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프란을 돌아보며 가자, 라고 말했다.
"저도요?"
"……."
반은 껄걸 웃으며 자신을 칭찬하는 카세타의 국왕을 보며 속으로 차갑게 냉소했다. 이렇게 기뻐하는 것도,
어디까지일까.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뭘 주시겠습니까."
"무얼, 주시겠습니까."
키네온은 당황한다. 반의 눈빛은 낮게 깔려 있었고, 목소리 역시 낮다. 농담이 아니다. 정말로 '요구'
하고 있는 것이다. 반란군을 소통하는 대가로. 순간, 키네온은 흠칫하고 놀란다. 원래, 그가 반에게 바
랐던 것은 '5 일 동안만 반란군을 붙잡아 놓는 것' 이었다.
"……카르멘 경."
키네세스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녀로써는 아버지인 키네온의 심정도,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심기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름다운 물빛의 레이디. 반은 자신을 바라보는 17 세 소녀의 조심스러운 눈빛을 무덤덤하게 한차례 본 후,
말했다.
"……아일린 가로 갈 때."
흠칫, 하고 키네온이 놀란다. 키네세스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노릇. 카르멘 가의 가주와 아일린 가
의 가주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은, 카세타 왕족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또한 이 일은
전적으로 비밀로 부쳐져,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가 입 밖으로 내니 두 사람은
당황하는 것도 당연한 일.
"알겠소."
▷◀▷◀▷◀▷◀▷◀▷◀
"카르멘 경."
"……."
"카르멘 경."
"……."
키네세스는 조금 웃었다.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일어나라."
"……."
음냐음냐, 하는 소리를 내가며 프란이 칭얼거리듯 말했다. 더더욱 어이가 없어진 반은, 이번에는 조금 더
소리를 높여서 입을 연다.
"일어나라!"
"집사……?"
조심스레 눈을 떴던 프란은,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집사는 백발인데, 어째서 보라색 머리카
락이 보이는 걸까. 그녀는 눈을 조금 비벼보았다. 잘못 보았나 했는데, 역시나 백발이 아니라 보라색 머
리카락이다. ……보라색 머리카락. 흐음, 보라색. ……보라색?
"으아아아악! 가주님!"
"가자."
"예!"
▷◀▷◀▷◀▷◀▷◀▷◀
"어쩌겠소?"
백작의 말에, 보일린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덜미가 잡힌다. 이미 반쯤은 들통났을지도
모르는 일.
"……알겠소."
"어디, 한 번 해보십시다."
▷◀▷◀▷◀▷◀▷◀▷◀
"프라아아안!"
프란은 방문을 열자말자 갑자기 튀어나온 소녀의 진한 포옹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어찌나 세게 껴안았는
지 물컹, 하고 소녀의 가슴이 그대로 와 닿았다. 프란은 깜짝 놀라 붉어진 얼굴로 소녀의 몸을 떼어 냈다.
"프라아아아안."
안다. 이건 정말, 기만이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기만.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이 마음을, 이
따뜻함을. 절대 잃고 싶지 않은 이 '애정'의 느낌을. 사랑받는다는 이 말도 안될 만큼 포근한 느낌을, 어
떻게 감히 포기하겠는가. 그것이 거짓된 자신에게 향하는 것일지라도.
"괜찮아, 뮤."
프란이 씨익 웃으며 한 말에, 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프란은 뮤의 작은 어깨를 가만히 안아 토닥
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프란은, 모든 일이 끝난 줄 알고 있었다. 이제 모든 반란은 진압되었고, 다시금
평화로운(사실은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다지 평화롭지 않지만) 일상이 돌아올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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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69 :: 오! 나의 주인님- PART 14: 비밀(2)
제발, 플리즈!!
올라가라 제발-_ㅠ 띄워쓰기를 몇번했는지 이젠 기억도 안난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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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 카르멘이 돌아온 저녁인지라, 카르멘 가는 오랜만에 찾아온 안심이 깃들인 고요 속에 휩싸여 아
무소리도 내지 않고 있다.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편지를 다 읽은 후,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산통이 다 깨졌군."
백작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구실일 뿐. 숨겨져 온, 아니, 왕은 존
재도 모를 '왕자' 인 자신을 위해서라는 뻔한 거짓말로 속이려 들지만, 실상 자신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백작은 권력의 앞잡이. 오직 권력이 갖고 싶어서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둔하지는 않다
는 말이다. ……그러나, 이왕 이용하기로 했으니,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용해주지.
몰락한 귀족 집안의 영애로 태어나, 그래도 귀족의 후예라고 왕실에 팔려갔던 어머니. 딱 한 번의 승은으
로 자신을 배었으나 그 사실을 알리기도 전에 왕비의 모함으로 갖은 고초 끝에 궁에서 쫓겨났던 어머니.
결국은 저 먼 곳으로 팔리고 팔려 다녔던 어머니.
창녀로, 노예로, 노리개로, 온갖 곳에서 굴려 더럽혀졌던 어머니. 그러나 끝까지 자신이 귀족이라는 긍지
하나만은 잃지 않던 어머니. 그에게 언제나 '너는 국왕의 첫 번째 아들이다.'라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
던 어머니. ……왕비가 보낸 자객에 의해, 도망 다니던 삶을 비참하게 끝냈지만, 허나 자신만은 살려주기
위해 애썼던, 그런, 자신의 어머니.
아, 그 전에.
그는 다시금 웃었다.
▷◀▷◀▷◀▷◀▷◀▷◀
마린은 시온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오오, 몸매 좋은데. 여자가 따를 법도 해.'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동시에 말했다.
"범인?"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뭐가 이럴 줄 알았다는 거야, 마린? 당신 같은 미인이 나한테 안기기 위해서 찾아온 거라면 꽤 기쁘긴
하지만, 알다시피 난 요즘 한사람에게 집중하고 있는 중이라서 말이야. 후훗, 그래도 약간의 서비스라면
해줄 의향도 있는데."
……맙소사.
"앗, 생각났다."
"……그, 그게 언제 얘기지?"
맙소사, 정말로 맙소사다. 시온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런 젠장할. 언제나 느긋하게 미루는 자신의 생
활태도가 문제였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사촌형과 한 약속을, 도대체!
"……이제 4 일 남았군요."
마린의 낮고도 차분한 목소리에, 시온은 정말로 얼어버렸다. 그리고 쩍 얼어붙은 이 아일린가의 도련님을
향해, 시온의 영원한 숙적이지만 한편으론 은근히 그를 매력 있는 도련님이라고 생각하는 노처녀 집사장은,
노련한 여우답게 카운트펀치를 날렸다.
"……으아아아악!"
▷◀▷◀▷◀▷◀▷◀▷◀
칭칭 감은 붕대며 상처를 보여주며 주방장에게 애원해도, 언제나 그랬듯 주방장은 싱긋싱긋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프란은 자진해서 감자포대를 안고서 무지막지한 속도로 감자를 벗겨내는 수밖에 없었다. 프란이 없는 한동
안 감자 깎을 사람이 모자라 눈물을 삼켰던 주방장은, 드디어 짐을 덜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가슴을 쓸어내
렸다. 그런 주방장을 향해, 보조 요리사가 슬그머니 물어왔다.
▷◀▷◀▷◀▷◀▷◀▷◀
"어이들."
"오, 팔팔 꼬마!"
그들은 다가오는 프란을 향해 반가운 기색을 했다. 어젯밤, 반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쭈뼛쭈뼛 반을 불렀
다. 저, 저기 가주님, 하고 일단 반을 불러 세운 그들은 그러나, 반이 무슨 일이지, 하는 눈으로 돌아보
는 순간 손을 휘휘 저으며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그들도 조금 궁금했던 것이다. 팔팔거리며 뛰어다니는 이 금색 머리칼의 소년이 무사한지 아닌지를.
그래서 반이 돌아오는 날, 그들은 시종의 행방을 물으려 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살아있다면 다치지는
않았는지. 그러나 반의 싸늘함에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묻지 못한 어제 저녁, 그들
은 가주의 앞에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들의 소심함을 원망하며 바닥을 긁는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었구나!"
"가주님! 식삽니다!"
"들어와라."
"저기 말이야."
"뭘?"
"뭐라고 해야 하나. ……잘은 모르겠는데, 남자의 직감이라고 해둬. 그냥, 저 팔팔 꼬마가 가주님에게, 뭔
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뭔가를 가져다 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고."
▷◀▷◀▷◀▷◀▷◀▷◀
"……."
"왜, 왜 그러십니까?"
"밖으로 간다."
▷◀▷◀▷◀▷◀▷◀▷◀
달리는 마차 안에서, 반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종은 답답하기 짝이 없는지 하품을 하려다가, 자신이
내뿜는 무시무시한 시선에 뚝하고 입을 닫아버린다. 이놈의 대마왕, 너는 하품 안하냐? 엉? 넌 하품 안하
냐고! 프란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든지 말든지 상관 않고, 반은 가만히 정신을 집중한다.
"……가주님."
시종이 입술을 뗐다. 반짝이는 오렌지색 눈동자. 가끔씩 저 눈을 바라보면, 무언가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어디의 무엇에도 놀라지 않는 자신을, 가끔 당혹시키는 저 눈동자. 그리고 저 시종이 가끔씩 툭툭 뱉어
내는 어이없는 말들.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알 것 없다."
'오냐. 그렇겠지.'
흥, 하고 속으로 프란은 속으로 투덜댄다. 반은 마차의 등받이에 깊이 기댔다. 카세타 왕족이 어떻게 되
던, 그와는 상관없다. 자신이 알 바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일에 카르멘 가 일부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카르멘 가의 누군가가 반란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 자가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반은 속에서부터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분노를 조용히 갈무리 했다. 또렷한 증거가 잡
히는 날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겠다. 그러나 증거가 잡히는 날, 너는 커다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나를, 카르멘 가의 가주인 나를 기만한 벌을.
그러기 위해서 카세타 왕궁에 협력한다. 카세타가 한바탕 뒤집혀서 자신에게 유리할 것도 없고, 반란군이
성공해 '카르멘 가의 누군가' 가 힘을 얻는 것은 더더욱 곤란한 일이다. 반은 저 멀리를 보았다. 하리나
스 백작가의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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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70 :: 오! 나의 주인님- PART 14: 비밀(3)
"이런 미친!"
하리나스 백작은 그러나, 온갖 추측과 긴장으로 떨리는 마음을 일단 가라앉힌다. 한 꺼풀의 가면을 쓰는
건 어렵지 않은 일. 아무리 대단한 작자라고는 하나 아직 어린애다. 무언가 냄새를 맡고 온 것이라면 세
월의 두께만큼 두껍고 견고하게 쌓여온 자신의 교활한 연기로 속일 수 있을 것이다.
"어서 뫼시어라!"
"아, 어서 오십시오!"
"혼자 오셨습니까?"
"시종은 밖에."
반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하리나스 백작을 본다. 교활한 놈. 어릴 때, 자신을 무릎에 앉히며 어머니가
얘기해준 적이 있었다. 믿어서는 안 될 사람 중 하나인, 하리나스 백작에 대해서, 권력욕이 너무나 강하
여 언젠가 한 번은 큰 사고를 치고 말 거라며 장난삼아 얘기하던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가 문득 리플레이
된다.
아무리 시종이라고 해도, 반란이며 가문의 존폐여부(반역에 가담한 가문은 삼대가 멸족 당한다.)가 달린
일에 데려올 수는 없는 일. 반은 마차에 내리자마자 프란을 정원에 세워두었던 참이었다. 이렇게 세워둘
거면 왜 데려왔습니까! 하고 뻔뻔스럽게도 자신을 향해 대드는 시종을 향해 '말이 많군.' 하고 말했던 자
신.
언제나 혼나고도, 언제나 자신의 싸늘한 눈동자를 받고도 그 이상한 시종은 멈추지 않고 온갖 소리를 다
해댄다. 아주 맞먹자는 건지, 가끔은 정말 미친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백작의 너스레에, 반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백작은 그 시선이, 자신을 찌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아니, 도대체가 인간이 말이야. 정원에 세워둘 거였으면 차라리 저택에 남아 있으라고 하면 될 거 아냐?
하여튼 웃긴 인간이라니까. 남은 아파 죽겠구만."
욱씬 욱씬 쑤셔대는 어깨를 마사지하듯 어루만지며 프란은 정원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두리번두리번
사방을 살폈다. 카르멘 가의 장미정원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꽤나 훌륭하게 꾸며진 정원이다. 백작가라고
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프란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빌어먹게도 졸리다. 하기야, 언제나 상처가 벌어졌을 때는 죽은 듯이
잠을 자는 습관이 있긴 했다. 그렇게 며칠씩 푹 자야 상처가 빨리 아문다는, 수련 기사단 단장 아샤의 충
고 때문이기도 했고, 또 그것이 제일 좋다는 스스로의 경험 때문이기도 했다.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에라, 잠이나 자자, 하고 중얼거리며 프란은 카세타 왕궁에서처럼 또 잠이 들고 말았다.
▷◀▷◀▷◀▷◀▷◀▷◀
오늘 백작 가(家)는 손님이 많다. 대낮부터 카르멘가의 가주가 찾아온데 이어, 귀족의 마차치고는 조금
수수한 갈색의 마차가 백작가의 앞에 섰다. 마차에 그려진 것은 붉은색의 작은 말. 이스티네 가문의 상징
이다.
이윽고 마차가 멈춰서고, 이스티네 보일린이 그곳에서 내렸다. 그는 백작을 만나러 온 모양이었다. 그러
다가 그는, 우뚝하고 정원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그를 뒤따라오던 한 남자도 보일린을 따라 멈춰 섰다.
보일린은 눈을 의심했다.
거기에 '있었다.'
보일린은 얼른 주위를 훑어보았다. 시종이 있다면 주인이 있을 터. 혹시 하리나스 백작을 만나러 온 건가?
……뭔가 낌새를 맡고 왔는지도 모른다. 보일린은 그러나, 그 이상의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보일린에게 속삭였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할까? 지금 여기에서 내가 이 시종을 데려가는 건. 아니, 그렇지 않을 거다.
어차피 저 저스티스 카르멘은 시종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을 냉철한 남자. 어디론가 도망갔다고 여길지도
모르지. 무엇보다 보일린은, 이 뜻밖의 행운을 놓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보일린은 명했다.
"……데려와라."
▷◀▷◀▷◀▷◀▷◀▷◀
'정말 말이 없는 남자군.'
백작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는 조금은 식은 아이리엔 차(카세타의 서부에서만 자라는 아이리엔으로
만든 차. 멜진과 섞어서 단맛을 낸다.)를 억지로 목구멍으로 넘기며 말했다. 반이 대답이 없자, 백작이
웃는 얼굴로 말을 잇는다.
"……그대의 딸은?"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럴 리가……."
"……한 사람에게 줄기차게 오는 편지. 너무나 자주 오기에 한 장을 가로챘다. 똑같은 글씨체를 몰라볼 만
큼, 나는 바보가 아니지."
"무슨 소린지……."
온갖 귀족 남자들의 속삭임, 선물, 편지를 독차지 했던 아름다운 여인. 그러나 철저히 검에 매진할 뿐 그
모든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래서 더더욱 빛이 났던 그녀.
그런 루이사 카르멘에게, 하리나스 역시 연서를 보냈던 적이 있었다. 불타는 연정의 마음은 그러나, 그녀
가 이름 모를 남자와 결혼하고(아일린가의 결합과 카르멘 가의 결합은 철저히 비밀리에 부쳐졌다.)난 뒤
야망에 묻혀 점점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설마하니! 저 어린 가주가, 자신이 보냈던 그 낯 뜨거운 프로포즈의 편지라도 읽었단 말인가.
어린 날에, 어머니가 속삭여준 말. 이 남자, 이 남자, 이 남자는 위험해. 언젠가 일을 칠거거든. 어머니
가 가르쳐준 야심만만한 남자들. 어렸기에 어렴풋하지만, 어머니가 유독 강조했기에 알고 있다.
어머니의 말들.
하리나스 백작이 당황해서 뱉어냈다. 반은, 차갑게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 싸늘한 미소에, 하리나스 백
작은 심장이 다 섬뜩해진다. 저건 주도권을 쥔 사람의 얼굴이다.
"……그렇군."
반은 하리나스 백작을 유심히 보았다. 하리나스 백작은, 필사적으로 머릿속에서 여러 단어를 쥐어짜내어
말했다.
"하리나스."
"……말씀하시지요."
"광대놀음은 그만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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됩니다, 되는것입니다.
아주 감동의 눈물이..(운다)
아, 파트 13, 14 가 제일 밉습니다.
^ㅡ^; 서버의 장애를 보니, 이젠 조금 일찍 연재해야하나, 라는 생각도 듭니다.
(생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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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71 :: 오! 나의 주인님- PART 14: 비밀(4)
시온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투덜거리는 한편, 고개를 숙인 채 냉철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달
리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인 시온은, 일단 이 분야의 전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아 자문
을 구하기로 했다.
"웬일이십니까?"
약품을 제조하고 있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스웬이 멀뚱하게 눈알을 굴리며 묻자, 시온은 음, 하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털썩 방 한 켠에 놓여 있는 침대에 털썩하고 주저앉
았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나 왠지 저 설명, 묘하게 거슬린다. 이상한데. 크루레티나가, 그것이
다였던가? 그리고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가 어색해. 설명의 어딘가가 틀린 듯한 느낌이 든다. 어딘
가가 불편하게 간지럽다. 시온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다야?"
"뭔가 더 있습니까?"
시온은 곧바로 일어서더니 빙글, 돌아섰다. 스웬의 방문을 재빠르게 닫은 시은 머리를 긁적이며 여러모로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앞으로 4 일. 어떻게든 이 과제를 풀어야 한다. 시온은 입술을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겼다.
▷◀▷◀▷◀▷◀▷◀▷◀
하리나스 백작은 핏발선 눈으로 돌아서는 반을 노려보았다. 광대놀음은 그만둬라.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
지만, 다음에 이어질 말이 조그맣게 들려온 것 같은 착각을 받는다.
하리나스 백작은 문을 열고 나가는 카르멘 가의 가주를 배웅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끝까지 시치미를 떼
고 웃는 낯으로 저 어린 녀석을 보내야 했는데. 개자식, 하고 하리나스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내가 너무
우습게 봤어, 빌어먹을.
하리나스의 조용한 욕설을 뒤로한 채 반은 하리나스 저택을 빠져나온다. 복도를 걸어 나오며 그는, 다음
에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 하리나스. 이젠 어떻게 나올 거냐. 내가 너와 헤이튼, 둘의 모종의 관
계를 알고 있다고 밝힌 뒤에도 헤이튼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할거냐.
"어디 있나."
"시종은?"
최대한 가주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며 마부가 말했다. 반은 잠시간 침묵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
르는 것이 있었다.
……도망간 건가.
순간, 반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주먹을 꾹 쥐었다. 도망? 도망이라고? 감히 누구에게서 말인가. 빚을
갚는 대신 하인으로 써달라고 했던 것은 그 녀석이었다. 그런데 도망? 도망이라고!
반은 고개를 저으며 냉철하게 생각해보려고 했다. 평소라면 쉬웠을 일이다. 반은 잠시 긴 심호흡을 했다.
시종이 문을 통해 빠져나왔다면 마부도 봤을 터. 그렇다면 혹시 담을 넘어 도망간 것은 아닐까.
반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마차였나."
이스티네 가의 문장!
▷◀▷◀▷◀▷◀▷◀▷◀
공기는 탁하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호흡을 압박할 정도로 내리 앉은 공기가 폐로 스미는 느낌에, 프
란은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이 갑갑했다. 무언가에 묶여 있는 듯이. 프란은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허, 꿈을 꾸는 모양이군.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한참동안 고개를 젓던 프란은 자신의
시야가 어둠에 점점 익어가는 것을 느끼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혼란이 폭풍처럼 머리를 엄습한다. 여기가 어디야, 도대체. 나는 분명히 잠이 들었을 뿐이라
고.
그녀가 그렇게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거기 누구야!"
"일어났군."
들려온 것은, 어딘지 모르게 거부감이 드는 목소리였다. 달칵, 달칵, 하고 몇 개의 등불이 더 켜졌다.
그제야 어둡던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들어선 사람은 두 명인 듯 했다. 프란은 그 중 한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았고, 경악했다.
"……너……!"
▷◀▷◀▷◀▷◀▷◀▷◀
너무나 추웠기에, 드리비아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추위가 아니고선 이렇게 강할 리가 없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드리비아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
다. 꿈틀대는 자신의 손가락이 보인 것이다. 온 몸을 뒤덮는 추위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
긴 하지만, 아직은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북쪽의 경계선은 넘은 모양이었다. 더 이상
뒤쫓는 자가 없었다.
살려줘! 의지와는 다르게 목소리는 기어들어가듯, 한숨쉬듯 작게 나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목소리
를 들었는지, 저 멀리에 있던 사람은 날듯이 가까이 왔다. 그러나 사람이 가까이 온 순간 드리비아는, 자
신이 정말 죽었다고 생각했다. 다가온 것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였기 때문이다. 드리비아는 훗날 그렇게
회상했다. '다가온 것은 사람일 수 없는 이였다. 나는 그녀가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중략
…… 드리비아는 눈을 떴다. 눈에 들어온 것은 얼기설기 얽은 오두막의 천장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하고
그는 멍하게 생각했다.
'……이름이 뭐요?'
드리비아가 물었다. 여인은 웃었다.
'레이나라고 합니다.'
프란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보일린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오른손으로 프란의
얼굴을 가만히 한 번 쓰다듬었다. 프란은 그 손을 깨물려는 시도까지 했으나 시도는 시도로 끝났을 뿐이다.
보일린은 마치 꿈꾸는 듯한 눈동자로 프란을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프란은 속이 다 뒤집힐 지경이다.
"레이나님, 레이나님."
드리비아 레키슈안의 경우, 레이니아가 없었다면 레키슈안 건국이라는 대 역사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후세의 평가다. 레이니아는 두고두고 영웅들 사이의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평가받아왔다. 그러나
'릴리아나처럼 아름다운' 이라는 수식어가 처음으로 붙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후손들은 불행히도 확인할
수단이 없었다. 드리비아 레키슈안의 초상화는 많이 남아 있었던 것에 반해 레이니아의 초상화는 한 점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이나님……."
보일린은 프란의 차가운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의 온 몸 구석구석에 떨리는 손을 갖다대고 있었다. 무
릎에, 어깨에, 얼굴에, 손에. 그 때마다 징그러운 뱀이 온 몸을 스물스물 기어 다니는 것 같아 프란은 비
명을 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에리 베로니카는 베로니카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였다. 그녀는 카세타 왕국의 이스티네라는 이름을 가진 남
자와 사랑에 빠졌고, 그럼으로써 베로니카 가는 그녀의 대에서 완전히 끝이 났다.
에리 베로니카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녀는 죽음의 순간, 자신의 아들을 불러들여 그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낮게 아들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들아, 3 층에 있는 내 방 알지? 그 방을 샅샅이 뒤져보
려무나. ……열쇠는 보석함 맨 밑에 있단다.' 그리고 열네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은 이스티네 보일린은,
어머니의 유언대로 그 방을 샅샅이 뒤졌다. 누구에게도 그 방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던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일기장에는 소상히 기록이 되어 있었다. 그 옛날, 레키슈안이 건국될 당시 베로니카 가문의 시
조는 화가였다. 드리비아 레키슈안은 부인의 아름다움이 후세에 길이길이 전해지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
녀의 아름다움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할 화가를 찾았다.
왕비님의 아름다움을 기록하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라고 말했던 베로니카 가의 화가는 그러나 레이니아 왕
비를 마주한 순간 깜짝 놀라고 만다. 젊은 화가는 불행히도 그 순간 왕비를 향한 죽음 같은 사랑에 빠져버
린 것이다. 화가는 자신이 이 사랑스러운 왕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미친 듯 그림을
그렸다. 수십 폭을 그렸다.
그러나 정작 드리비아 레키슈안이 그림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화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
다, 폐하. 단 한 장도 완성할 수 없었습니다. 왕비님의 빛나는 미모는 도저히 제가 화폭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폐하, 왕비님은 폐하의 연인이십니다. 후세 사람들이 왕비님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그 어떤 그림도 그리지 마십시오. 왕비님은 폐하만의 연인이십니다.
왕비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드리비아 레키슈안은 화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레이니아의 아름다움을 간
직한 그림은 그래서, 그 어디에도 비밀인 채 베로니카 가에서만 대대로 전승되고 있었다.
왕비를 향한 타오르는 사랑을 간직한 채 죽은 화가의 피를 이어서일까. 그 수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베로니카 가의 그림은 단 한 장도 외부에 유출되지 않은 채 간직되어 왔다. 그리고 그 그림은, 마침내 현
재의 보일린에게서 멈췄다.
"레이나님."
빌어먹을, 빌어먹을!
"……보일린님."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일린은 움찔하며 돌아섰다. 프란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외양은 남자이다. 그런데 목소리가, 너무나 가늘고 곱다. 마치 여자의 그것처럼. 아니, 억지로 남자인
듯한 목소리를 내는 듯 보이지만 분명 여성의 것과 같은 목소리.
"너, 죽는다."
"레이나님, 잠시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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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님, 이거 가주님 방으로 들어온 선물이에요. 그런데 조금 무겁군요. 조금만 거들어 주시겠어요?"
"……무슨 일이죠?"
"마린."
"예, 가주님."
마린은 잔뜩 긴장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말은 마린의 상상을 뛰어넘는 종류의 것
이었다.
"예?"
"가주님!"
"가주님!"
▷◀▷◀▷◀▷◀▷◀▷◀
시온은 장미정원 티 테이블에 앉아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뭔가 의심이 났던 시온은 자료를
찾아보려다가, 그 방대하기 짝이 없는 독약에 대한 자료 중에서 4 일 만에 크루레티나에 대한 정보를 발견
해내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하고 말았다. 그는 늘씬한 다리를 사뿐히 꼬고 앉아서
머릿속으로 수많은 것들을 굴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시온은, 저 너머에서 누군가가 오는 것을 보았다.
시온은 한참 그 그림자가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앗, 하는 소리를 냈다.
"오, 공주님!?"
▷◀▷◀▷◀▷◀▷◀▷◀
끼이이이이익.
그 순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프란은 엄청난 긴장을 하며 앞을 보았지만, 뜻밖에도 들어선
것은 보일린이 아니라 그와 함께 서 있던 남자였다.
"……."
"……."
남자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프란의 말을 철저히 무시했다. 네놈이 케인이라도 되냐! 프란은 남자의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속으로 발악했다. 남자는 접시 위에 엎여 있던 천을 걷었다. 갓
구워진 듯한 빵 두 덩이와 달콤한 냄새의 주황색 잼, 바삭바삭한 파이가 간소하게 놓여 있었다. 남자는
먼저 빵을 집어 들었다.
"누가 안 먹을 줄 알아?"
그래서 그런지, 남자에게 프란의 저 눈빛이며 저 얼굴은, 굉장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자애로우면서도 다
정하고 유려한 동시에 어딘지 의지가 깃든 초상화 속의 레이니아의 부드러운 얼굴과는, 사뭇 다르다. 물
론 비슷하게 생기긴 했다. 하지만 뭐랄까, 덜 여문 느낌이랄까. 조금만 더 자라면 비슷해질 것도 같다고
할까.
프란은 뒤돌아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를 탈출하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보일린이 찾아오면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 프란은 온 몸이 오싹해
지는 느낌에 부르르 떨었다.
▷◀▷◀▷◀▷◀▷◀▷◀
"여전하시네요, 시온님은."
"그 말, 여전히 제가 섹시하고 멋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됩니까? 고맙습니다, 공주님. 공주님도 여전
히 아름답고 귀여우세요."
"저기, 공주님."
"예? 말씀하세요."
시온이 눈웃음까지 쳐가며 한 말에 키네세스는 후훗, 하고 웃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사랑하는 그
남자의 사촌 동생은 꽤 유쾌한 사람이다. 굳이 '마음에 드는 척' 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말이다.
"제가 아는 범위에서라면."
"왜 그러시죠?"
잠시 후, 하녀가 차를 두 잔 들고 왔다. 하녀는 시온이 사라진 자리를 의아한 눈으로 보다가, 곧 자신의
앞에 앉은 여인의 신분을 상기하고는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에 차를 놓았다. 향이 좋은 차를 담은 작고
아름다운 찻잔을 곱게 그러쥐며, 키네세스는 카르멘의 가주를, 아니,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이리엔 차가 서서히 식어갈 즈음, 키네세스는 문 앞에서 멈춰서는 발소리를
들었다. 키네세스는 그 순간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당신은 모르겠지. 나는 사실, 당신의 발소리만 들어
도 당신을 알 수가 있지요. 이건, 당신이군요.
"……돌아가 주십시오."
그 순간, 반이 입술을 열었다. 키네세스는 네? 하고, 조금은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돌아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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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입니다.
오늘도 아슬아슬 세이프가 되겠군요;ㅁ;(죄송해요,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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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73 :: 오! 나의 주인님-PART 14: 비밀(6)
▷◀▷◀▷◀▷◀▷◀▷◀
"……좋아, 모든 것은 이틀 후에."
이스티네 보일린은 남자에게 말한 후 희미하게 웃었다. 남자는 입가에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
였다.
"뭔가."
보일린은 연신 좋아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방싯대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보일린을 향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첩?"
▷◀▷◀▷◀▷◀▷◀▷◀
꽃향기를 온 몸에 휘어감은 바람의 정령이 키네세스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아름답게 흩어지는 푸
른색의 머리카락. 붉은색의 단아한 입술을 움직여, 키네세스는 반을 향해 묻는다. 반은 키네세스를 저택
밖까지 배웅하는 중이었다.
"……곧."
프란이 들었으면 '그것도 대답이냐! 묻는 사람 생각도 좀 하란 말이다!' 따위를 외치게 만들었을 짧은 대
답에도, 키네세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미소를 짓는다. 물빛의 레이디는 가주의 이 낮은 미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행복을 느끼는 모양이다.
"카르멘 경."
"……."
아아. 그러십니까.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 행복한 분이십니다, 정도의 대답은 해줄 법도 하건만. 아니,
그 정도가 예의건만. 반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뚜벅뚜벅 걸을 뿐이다. 키네세스는 조금 마음이 상
했으나 그래, 그것이 당신답지 하고 자위한다.
키네세스는 반을 곁눈질했다.
"……."
이윽고 카르멘 가의 장미정원이 끝날 즈음이 되자, 키네세스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공주의 외출은 그리
쉽게 허락되는 것이 아니다. 아일린 가로 돌아가기 전에, 또 한 번 만나기야 하겠지만. 그렇지만 단 둘이
있을 기회는, 어쩌면 이 것이 마지막-.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네? 네?"
……잠깐만요, 카르멘 경?
▷◀▷◀▷◀▷◀▷◀▷◀
▷◀▷◀▷◀▷◀▷◀▷◀
"모든 것을 다줘!"
시온은 빨갛게 달아오른 아린의 얼굴을 보며,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는 자신이 커다란 말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큰 두려움에 떨며 얼른 정정했다.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시온을 바라보던 아린의 시선이 차갑게 굳어졌다. 깐깐하기로는 마린조차 두 손 두
발 다 드는 아린이다. 그녀는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시온은 애걸하듯 말하고 아린에게 다가갔다. 키네세스에게 실례의 말을 전하고 곧장 그 걸음으로 달려왔던
시온이다. 그의 예상이 옳다면 분명 범인은.
▷◀▷◀▷◀▷◀▷◀▷◀
프란은 일단 고개를 꺾어 오른쪽 팔부분의 옷깃을 물었다. 혹시나 옷깃을 위로 끌어올리면 거기에 쓸려서
밧줄이 조금이나마 헐거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취한 행동이었다. 물론 밧줄이 워낙 단단하게 묶인
탓에 밧줄이 헐거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옷이 찢어졌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프란은 아등바등 몸을 비틀며 온갖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간간히 지켜보는 문밖의 남자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일단 저기서 풀려난다고 쳐도 도대체 문은 어떻게 뚫을 것이며 자신은 어떻게 상
대할 거란 말인가. 게다가 저렇게 노골적으로 탈출시도를 하는 모습을 광고하면서. 한참 숨을 헉헉 몰아
쉬던 프란이 소리를 빽 질렀다.
"물! 물 내놔!"
"……."
"……."
정말.
............어이가 없다.
……내참, 제정신인지. 자신이 납치되어 있다는 자각조차 없는 듯 했다. 그러나 보일린이 '우리 레이나님
에게 정성을 다해라' 라는, 남자가 들어도 정말 이성적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갔던 터
라 남자는 프란에게 나름대로 잘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몸을 때린다거나 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퍼억!
'으윽!'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의자가 옆으로 넘어졌다. 온 몸이 찌릿찌릿하다. 그러나 프란은 그 고통에도 개의치
않았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프란은 꾸물꾸물 기어가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은 채인 자세였지만 상체
와 하체의 꾸준한 움직임으로 기어간다. 프란은 자신이 옆으로 누운 지렁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프란은 필사적으로 꾸물대며 기어가서, 드디어 도착지점에 이르렀다. ……벌써 속을 센 숫자는 육십사. 프
란은 온 몸의 부위 중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부위인 손가락으로, 벽에 다 걸지 못해서 바닥에 눕혀져
있는 레이아나의 그림 중 한 점을 추스렸다.
아름다운 액자에 걸려 밑에 놓여진 그 그림. 프란은 액자의 한끝을 잡고 청동제로 장식된, 극히 일부의
날카로운 부분에 밧줄을 갖다댔다. 제발 손목 부분만이라도 끊어져라! 있는 힘을 다해 청동부분에 대고
밧줄을 누른다. 그러는 동안에도 숫자는 끊임없이 세어지고 있었다. ……백이십이, 백이십삼, 백이십사…
… 제발, 어떤 신이라도 좋으니까! 으아, 레이나인지 뭔지 하는 당신! 나랑 닮은 게 진짜라면 좀 도와줘
도 되잖아!
레이니아.
프란은 놀란다. 여자의 얼굴은 지나치게 경건하고 성스러운 느낌이다.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숙미
와 여자다움. 헤에, 어디가 똑같다는 거냐? 비슷한 거라곤 눈동자 색과 머리카락 정도? 얼굴선? ……으음?
프란은 그러나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어 청동제 장식 안의 그림을 빼냈다. 그리고는 둘둘 말아, 대충 옆
구리에 끼웠다. 그래, 한 장 정도 갖고 나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그 때였다.
뚜벅뚜벅.
철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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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습니다."
헤헤, 하고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남자가 말했다. 학자 타입으로 생긴 남자는 칙칙한 노란색과 옅은 초록
색이 지저분하게 섞인, 천박한 금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보일린은 오늘을 축제의 날로 결정했다. 오늘,
카세타의 여러 곳에서 동시에 축포가 쏘아 올려질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끊임없이
터지는 아름다운 불꽃은 카세타를 뒤흔들고 수도에 사는 모든 시민들의 목을 쥐리라. 그리고 그 사랑스러
운 불꽃이 마침내 유종의 미를 거둘 때, 준비해놓은 모든 것이 터진다. 이틀 후, 이틀 후다. 지금은 그
전야의 밤.
보일린은 자신만의 레이니아를 떠올리며 그녀의, 아니, 그의 하얀 속살을 생각하곤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 축제다. 축제다!
▷◀▷◀▷◀▷◀▷◀▷◀
딸깍.
'빌어먹을!'
두다다닷!
그리고 예전에 프란을 납치하려고 시도하는 도중에 한 차례 그녀를 겪었음에도 그녀의 대담함을 전혀 고려
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남자는 막 문을 연 순간, 갑자기 자신의 안면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나무 색의
물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는 표현이 옳겠다. 그는 뭔가 돌출
되고 깎아지르듯 조각되어 있는, 무엇인지 모를 어떤 것이 눈앞으로 튀어나온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생각은 거기까지.
퍼어어어어억!
퍼버벅!
"크윽!"
의자와의 키스도 큰 충격이었을 텐데 복부로 가해진 짜릿한 충격은 그 이상이었으리라. 남자의 배 부분에
서 의자가 몇 번 춤을 추는 동안, 프란은 오른발로 그 의자를 밟고 올라섰다. 여기까지는 평범했다. 그러
나 그녀는 그 다음 순간 결코 평범한 인간으로써는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프란은 밟고선 오른발에 붙인
가속을 그대로 옮겨, 남자의 머리에 왼발을 디뎠던 것이다.
퍽!
세 번째 공격이다.
남자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정체가 '세라딘' 이니만큼. 그러나 남자는 프란 프리텐이라는,
카르멘 가주의 시종을 너무나 얕봤다. 그리고 비켈린 못지 않은 악명을 (숨은 곳에서) 자랑하는 세라딘
하나를 그대로 KO 시킨 프란은, 그 좁디좁은 '레이니아 매니아'를 위한 방을 벗어나 마음껏 달리기 시작했
다. 다다다다닥, 놀랄만한 속도로 프란은 달린다.
어찌됐든 세라딘인 남자가 그 방에서 소리친 죄수, 라는 한마디는 엄청났다. 여기저기에서 산발적으로 사
람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프란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일단 벽의 가 쪽으로 숨었다. 움푹 파인
벽과 벽 틈사이의 작은 공간 사이로 숨자, 얇은 편인 그녀의 몸이 감쪽같이 숨겨진다. 프란은 새액새액
숨을 몰아쉬었다.
튀어나온 무리들이 언제 어디로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프란은 어디로든 숨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
다. 아니면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리는 편이 나을까. 근데 도대체 여기가 몇 층쯤일까. 프란은 등을 조금
씩 움직여 창문 아래를 살폈다. 그리고 그 순간, 프란은 두 말 없이 뛰어내리는 일은 포기하기로 했다.
나무의 정수리가 똑바로 내려다보인다. 그것도 아주 긴 간격을 두고. 여기는 적어도 5 층 높이다. 뛰어내
렸다간 뼈도 못 추린다. 나는 오래 살 거다, 라고 프란은 중얼거린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 살 거야!
악운에 강하다면 강한 것이 그녀 아니던가. 그녀는 자신의 악운을 믿기로 했고, 그래서, 조심히 문을 열
고 안으로 들어섰다. 산발적으로 오가던 사람들의 소리가 발악적으로 커진다. 그녀는 찰칵, 하고 문을 닫
았다. 귀족가 저택의 방 중 태반이 사람이 들지 않은 응접실이며 접대실. 여기도 그 중 하나이길 간절히
바라면서, 프란은 주변을 휙휙 살폈다.
"누구냐?"
그런데 불행히도 바로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란은 깜짝 놀라 납작하게 엎드렸다. 사람은 의외로
발밑을 살필 줄을 모른다.
"착각인가."
방은 조금 특이한 구조다. 침대가 있고, 저 너머에 드리우듯 커튼이 걸려 있다. 녹색과 섞인 듯한 어설픈
금발을 가진 남자는 커튼이 있는 쪽에서 머리를 긁으며 나왔다. 책을 읽고 있었던 건가. 분명히 학자타입
의 인간. 피부 등등을 보니 검을 배우기는커녕 만져본 적도 없겠다, 하고 프란은 판단했다.
퍼억!
그러나 이미 프란 프리텐의 몸은 정신을 거부하고 있었다.
기사도 정신이고 뭐고, 일단 살고 봐야 하는 모양이다.
프란은 그렇게 생각하다, 곧 단념하고 말았다. 침대 시트를 둘둘 말아서 5 층 높이를 내려간다는 생각자체
가 아슬아슬한데다가(그녀는 자신의 몸무게를 자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려가는 동안 그 요란스러
운 탈출장치가 들키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제로인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어쩐다.
혹시 주변에 뭔가 참고가 될만한 것이 없을까 싶어서 대충 뒤적여 봤지만 기껏 발견한 것은 '가에린 상단,
제닌 고물상에서 아름다운 축제를' 이라고 적어놓은 한심한 일기 같은 것 뿐이었다. 아름다운 축제는 무
슨, 빌어먹을 것. 한참 고민하던 프란은, 역시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와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하나 택했
다.
▷◀▷◀▷◀▷◀▷◀▷◀
"도망쳤다니?"
이스티네 보일린은 진귀한 보석들로 몸을 치장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콧수염과 구레나룻을 손질하고 가
장 좋은 옷을 입었으며 아주 오랜만에 머리도 단장했다.
역겨운 기름이 흐르는 얼굴이나 비대한 몸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고 해도, 보일린으로써는 노력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잔뜩 부푼 가슴을 안고 그 방으로 간 이스티네 보일린은, 마사지용 계란
한 판이 모자랄 정도로 무자비하게 터진 세라딘 남자의 얼굴을 보며 놀라는 수밖에 없었다.
"도망갔습니다. 말 그대로."
"남작님!"
"닥쳐! 지금 나는 바빠!"
또 하나의 세라딘이 다가오며 그를 부르자, 보일린은 신경질적으로 응대했다. 세라딘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되었든 '세라딘' 은 이스티네 가에 매인 몸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세라딘' 은 협력자일 뿐. 이렇게
함부로 대해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참았다.
"중요한 손님이라니?"
"설마?"
"그 설마가 맞아. 시즈 아일린님, 아니, 여기에선 저스티스 카르멘이군요. 하여튼 그 분이 오신 모양입
니다."
"이런 미친!"
"일단 너희들은 레이니아님을 찾아! 숨어있긴 뭘 숨어 있겠다는 거야! 아일린 가의 가주가 '세라딘' 의
얼굴 하나하나를 다 기억할 리가 없어. 너희들은 흩어져서 레이니아님을 찾아! 그게 최우선이다!"
그러나 세라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일린은 철컥철컥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보일린은 뒤를 돌아
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
무슨 발악이든 해볼 생각인 프란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창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사방을 무섭게 살폈다.
아직은 경계가 그리 삼엄하지 않다. 그녀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건물 외벽에 매달렸다.
가호를 달라는 것인지 벌을 달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투로 한차례 진지하게 기도한 프란은 다시금 떨리
는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
반은 응접실 한켠에 있었다. 반은 응접실 전체를 가리듯 쳐 놓은 붉은색의 커튼이 거추장스럽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느낌과 동시에, 그는 손님인 주제에 주인이라도 되는 듯 그 어떤 양해도 구하지 않고 좍 하
고 커튼을 열어젖혔다.
"오셨습니까."
"대체 무슨 일이신지."
종은 어디까지나 매매가 가능한 '물건' 이다. 가주의 옆에 달라붙어 시중을 드는 시종이라면 몸값이 비싸
기야 하겠지만 그 몸값이 거기서 거기지 어디까지 뛰겠나, 이 말이다. 그래, 한 번 물어보기라도 하는 건
데. 보일린은 그제야 후회한다. '저 종을 내게 팔지 않겠습니까?' 라고 물어본 뒤에 납치해도 늦지 않았
을 문제다. 의심이야 받았겠지만 그것은 후의 문제이고.
"아아. 뭐라고 해야 할까. 참 특이해서 그랬을 뿐입니다. 한 가문의 가주님을 보필하는 자가 그토록 나이
가 어린 경우는 잘 없어서, 랄까요."
보일린은 자신이 반의 함정을 잘 피해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보일린은, 모르는 척, 한마디 더 했다.
웃으며 한 질문이었다. 어차피 그 시종은 이 저택 어딘가에 있다. 저스티스 카르멘이 돌아가고 나면, 분
명히 다시 무릎 꿇려져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평생 동안 저택에 가두어놓고 자신만의 레이니아
로 살게 할 테다.
소년이라고 했는가. 상관없다. 소년이라도 드레스를 입히고, 머리를 기르게 하고, 머리가 길어지기까지는
가발을 씌울 것이다. 안을 수도 있다. 적어도 그가 '레이니아' 의 형상을 하고 있는 동안이라면.
"사겠다고?"
반은 훗, 하고 가볍게 웃었다.
"4 천 5 백만 케트."
"네?"
능글능글한 변태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기엔 너무나 정돈된 말이다. 그러나 보일린은 자신만만한 경고는 그
다음 소리에 묻혀 버렸다.
"끄아아아아아악!"
"무, 무슨 짓입니까!"
창 밖을 잠시 바라보던 반이.
……검을 뽑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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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76 :: 오! 나의 주인님- PART 14: 비밀(8)
허나 '손' 으로 잡았다기보다는 '손가락 네 개' 로 잡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지금의 상황은 그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다. 부들부들 떨리는 시선으로 프란은 위를 쳐다보았다. 몸은 대롱대롱 매달려 간간이
저택의 외벽에 부딪치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밑은 쳐다보지 않았다. 방금 전, 그녀를 잡으려던 남자
하나가 4 층에서 그대로 곤두박질쳐 떨어졌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확실하고 꼼꼼하게 외벽을 타고 내리던
그녀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도 그 남자를 피하다 그런 것이었다. 프란처럼 악운을 타고난 자라면
모를까, 저 밑에서 나무 가지에라도 걸리지 않았다면 떨어진 남자가 하고 있을 꼴은 뻔했다.
"잡아!"
"죽여버려!"
"죽이면 안 돼!"
자신을 내려다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위에서 외쳐대는 소리에, 프란은 부들거리는 손을 안쪽으로
밀어 넣으려 애쓰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이 밑층으로 내려갈까? 잠시 생각했던 프란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 그 층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을 것이고 들키는 순간 이번에야말로 체포다. 그러면서 프란은, 하체
를 크게 한 번 휘둘러 제비 넘기를 한 다음 한 칸 앞쪽의 방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나 프란은 자신이 공중곡예사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쪽이다!"
'빌어먹을.'
설상가상으로, 프란이 매달린 창문이 있는 방으로 한 무리가 우르르 몰려왔다. 이 상태라면 강제로 끌어
올려질지도 모른다. 으아, 정말 짜증나 미치겠네. 뭘 어쩌란 거냐, 도대체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창문에 쳐진 커튼이 열어젖혀졌다. 눈이 마주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이 프란을 내려다본다.
"끌어올려!"
투박스러운 손들이 내려오는 것을 보며 프란은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싫다! 이번에 거기로 끌려가면 정
말 끝장이란 말이다!
펄럭, 펄럭펄럭.
'어……?'
갑자기 요란한 소리, 그러니까 꽤나 두꺼운 질감의 천이 휘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밑층의 창문에
서 들린 소리라는 걸 깨달은 순간, 프란은 거의 반사적으로 밑을 보았다. 그리고 그 때.
"내려와!"
"……."
"내려오란 말 안 들리나!"
"프란 프리텐!"
쉬익!
"……에고고."
▷◀▷◀▷◀▷◀▷◀
"……에고고."
'그의 레이니아' 는 카르멘 가주의 뒤에서 꽤나 흉한 모습으로 착지했다. 엉덩방아를 심하게 찧으며 일어
난 프란은, 보일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엄청난 스피드로 벌떡 일어섰다. 경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프
란을 향해 뒤돌아선 상태인 반은, 그런 프란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프란은 움찔했다. 도대체 이
대마왕이 여기에 왜 있는지 알 수 없는 프란이었다. 그러다가, 프란은 보았다. 반은 아주 가볍게, 한숨
같은 것을 쉬는 모습을. 하아, 하고 낮게. 그것이 안도의 한숨인지 그녀의 한심함을 탓하는 한숨인지는
알 수 없다.
반이 문득 입술을 열었다.
"……독단이었군."
보일린은 입술을 잘끈 물었다. 그리고 그는, 프란이 반에게 슬금 다가가서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어
쩌고를 속삭인 순간 판단을 내렸다.
"전원 들어와!"
보일린은 선택했다. 그의 선택은, 여기서 저스티스 카르멘을 처치하는 것. 그리고, '그의 레이니아'를
가지는 것이었다.
▷◀▷◀▷◀▷◀▷◀▷◀
"미쳤군."
그래, 맞다. 나는 미쳤는지도 모르지, 저스티스 카르멘.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잘된 선택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오늘 저녁에 불꽃은 쏘아 올려질 것이다. 내일이면 그 많은 불꽃들이 카세타 전역에서 아름다운 그
림을 그리겠지. 남빛의 하늘을 캔버스 삼아 그려진 그 아름다운 그림은 이 나라를 바꾸는 초석이 될 것이
다. 그리고 이틀 후, 이 곳의 모든 것은 전복된다. 아마 그 과정에서 가장 방해될 사람은.
"가주님."
프란은 나지막이 말하곤 반의 옆에 섰다. 그녀는 자신에게 검이 없다는 것을 반에게 알리려 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는 듯 했다. 반은 프란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그 눈에서, 프란은 반에게 무언가 생각이 있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자신은 검을 휘두를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그렇게 느꼈다.
"잡아라."
"예?"
"……잡아라."
―창문으로, 말이다.
▷◀▷◀▷◀▷◀▷◀▷◀
"잡아!"
"으아?"
투두두두두두두둑!
두 사람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커튼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뜯어졌다. 창 바깥으로 펄럭이고 있던 그
커튼은 물론, 3 층의 높이를 커버할 만큼 길지는 않았다. 다만.
다만, 한층 내려간 2 층의, 3 층 응접실에서 대각선 방향에 위치한 방 하나에 닿을만한 길이는 되었을 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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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잡담이 갑자기 엄청나게 길어진 느낌입니다.;;; 내일 1KB 부족한 것을 반드시.. 갚을게요.
자,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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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77 :: 오! 나의 주인님- PART 14: 비밀(9)
챙캉!
"꺄아악!"
방 안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던 여자 하나가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난입에 고함을 지르며 바깥으로 뛰쳐나갔
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밖으로 뛰쳐나가는 여자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던 프란은, 어차피 엎어진 물이지,
하고 생각하며 뻗었던 손을 다시 내렸다. 그녀는 상반신을 숙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뛰어들면서 깨어진
창문에 긁혀 얼굴에 엷은 상처가 그어졌다. 거기에서 점점이 피가 묻어났다. 프란은 그것을 쓱하고 닦으
며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2 층에서 뛰어내린 주인과 시종은 달리기 시작했다. 둘은 위험천만한 라이브 쇼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
"어쩌지?"
"미친놈이야, 저 이스티네 보일린이란 녀석. 일단 우리는 여기에 있지. 나중에 추궁당할 때 당하더라도
이건 아니야."
▷◀▷◀▷◀▷◀▷◀▷◀
별빛이 묽었다.
이스티네 저택 대 탈주.
프란은 입술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번 탈주의 방식이 자신이 알던 가주의 방식과는
조금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프란이 아는 가주는 적이 아무리 많아도 창문으로 탈출을 한다거나 할
사람은 아니었다. 앞에 서 있는 적들을 모두 쓱싹쓱싹 무 썰기 했으면 했지.
오늘은 모든 것이 저 카르멘 가주답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이 그다운 것이고 무엇이 그답지 않은 것이면
어떠랴. 어차피 그런 것은 부차적인 것. 지금 그들은 이스티네 저택을 빠져 나왔고, 함께 카르멘 가로 돌
아가고 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가주님."
"네 빚."
프란의 질문에 반은 차갑게 답했다. 프란은 에헤, 하는 기분이 들어 반을 보았다. 그리고 순간, 프란은
갑작스럽게 반의 발걸음이 빨라지는 바람에 조금 놀랐다. 어이, 어이, 이봐요. 잠깐만. 왜 갑자기 은근
슬쩍 빨리 걷는 건데?
오호라, 4500 만 케트? 프란은 속으로 계산해보았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빚이 많이 줄었다. 하기야 그
빚을 줄이기 위하여 자신은 목숨을 바짝바짝 줄여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같이 가요!"
▷◀▷◀▷◀▷◀▷◀▷◀
"……."
시온 아일린은 수많은 자료들과 참고서적을 뒤졌던 터다. 그는 드디어 찾아냈고, 동시에 경악했다. 아린
의 방을 찾기를 두세 번. 시온은 다시 한 번 찬찬히 기록들을 살핀다. 이 일을 하느라 꼬박 하루를 샌 탓
에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훑었던 탓에 인상은 사납기가 그지없었다.
실제로 자켄린은 시온을 향해 외치기도 했다. '네 녀석이 가져오는 그 막대한 수업료만 아니면 난 네 녀석
을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다!' 말년의 노마법사는 젊은 시절 너무나 호화롭게 생활한 나머지 꽤나 궁핍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독설에도 겨우 시온은 아함, 하고 크게 하품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두 달 후 있었던 마법 경진 대회에서 당연히 시온이 꼴등을 할 거라고 일짜감치 판단을 내렸던 자
켄린은, 자신이 가르쳐준 이상의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전하는 시온 아일린에게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
었다. 자켄린은 그 다음날부터 열성적으로 시온에게 마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법을 물려받아
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제자는, 자켄린에게 시온이 처음이었다.
허나 머리가 좋든 마법적 재능이 있든 시온 아일린은 언제나 빈둥빈둥 거렸고 그래서 노년의 대마법사 자
켄린은 때로 호통을 치고 때로 애걸을 했다. 만약 지금 이렇게까지 열중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 시온의 모
습을 본다면 자켄린은 눈물을 뿌리며 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 이놈, 으흑, 네 녀석이 이렇게만 마법
연구하는 모습을 봤다면 한이 없겠다, 라면서. 그리고 시온은 그 단단한 세필나무 방망이(노년의 대마법
사들에겐 필수품이다.)로 사정없이 두드려 맞았을 것이다.
시온의 모습에 경악할 두 번째 사람은 아마도 마린. '크아아악, 이렇게 서류를 빨리 읽을 수 있다면 왜
그 동안 말을 안 한 거예요! 노처녀 밤새는 모습이 그리도 아름답습디까? 좀 도와줄 수도 있잖아요!' 마
린에게는 아마 이런 모습을 들키지 않는 편이 나을 듯 하다.
시온은 비틀비틀 걸어가기 시작했다. 시온은 알고 있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노력했든 그는
'이진느 아일린' 의 아들이고 그런 자신이 어떤 짓을 하든 아일린이란 이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
을. 그리고 시온은 역시 알고 있었다. 결국에 그가 택하게 될 길이 무엇인지.
시온은 피식 웃었다.
▷◀▷◀▷◀▷◀▷◀▷◀
무언가를 하고 있던 헤이튼은 웃으며 시온을 맞았다. 시온은 비틀린 입가로 그런 헤이튼을 잠시 노려보다
피식, 하고 웃었다. 헤이튼은 그런 시온을 조금 의아한 눈으로 보다가 그를 소파로 안내했다. 시온은 소
파에 털썩, 하고 주저앉았다.
시온의, 조금은 공허해 보이는 진초록의 눈이 슬쩍 빛을 머금었다싶은 순간, 시온이 입술을 벌렸다.
"……무슨 말이오?"
헤이튼의 목소리가 묵직했다. 시온은 피식피식 헛웃음만 터뜨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시온은 매서운
눈으로 헤이튼을 한차례 노려보았다. 헤이튼은 시온의 초록색 눈동자가 가득한 분노로 메워지는 것을 보았
다. 은발에 초록색 눈동자. 처음 보았을 때 저 이진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닮은.
헤이튼은 시온의 말에 어깨를 움찔했다. 헤이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시온을 보았다. 시온은 눈꼬
리를 가늘게 휘었다.
"그래, 내가 간과했어. ……크루레티나에 대해서는 옛날 스승님과 한 번 실험을 한 적도 있었는데 왜 몰랐
을까."
……정작 가장 중요한 사실은 모르는구나, 아일린 가의 도련님. 그래, 평생을 모르고 살아준다면 그것이 더
좋겠지. 어차피 알아주길 바란 것도 아니니 말이야. 그러나 역시, 랄까. 저렇게 큰소리를 치는 걸 보면
증거도 잡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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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 ........알고 싶어.
프: 북부 로이네트.
가: 현재 생활에 만족해?
프: 소원? 뻔하지. 어서 빚 갚는 거.
프: ....뭐야? 그럼 나는 왜 그런 거 안해?
프: 그런게 어딨어어어어어어!!(끌려간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 목: 79 :: 오! 나의 주인님-PART 14: 비밀(10)
너무나 오랫동안 휴식을 취하지 못했던 탓에, 프란은 어젯밤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던 터
였다. 그리고 새벽, 그런 프란의 침실로 몰래 찾아들었던 시온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프란을 향
해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던 차였다.
그는 쌕쌕 고운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있는(물론 미화법이고, 사실은 오우거 저리가라 할 정도로 큰 숨
소리였다.) 프란의 머리맡에 살포시 앉았다. 그는 옆얼굴을 반쯤 가린 그녀의 금색 머리카락을 살포시 걷
어낸 뒤 속삭였다. '프란, 나랑 결혼할래?' 라고.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건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일어나봐, 프란. 프란! 아무리 큰 목소
리로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있던 프란은, 그 한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그대로 공처럼 튀어 오르더니 정확하
게, 지나칠 정도로 정확하게 시온을 걷어찼던 것이다.
"……으, 으음?"
머리를 긁적이며 멍하게 일어나 앉은 프란은, 눈곱이 낀 얼굴로 사방을 훑었다. 방금 전 무언가 끔찍한
소리가 들려 벌떡 일어나긴 했는데, 흐음. 뭐였지, 방금 그건?
"……윽…… 우욱."
잠시 두리번거리던 프란은, 침대 밑에서 들려온 이상한 소리에 놀라 후다닥 아래쪽을 살폈다. 거기서 그
녀는, 상반신을 구부린 채 컥컥대고 있는 은발의 남자를 발견하곤 흠칫했다.
자신이 시온의 어디를 가격했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프란이 침대에서 내려서며 물었다. 시온은 '어느 부
위' 를 감싼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시온의 어깨를 팡팡, 하고 쳤다.
시온의 벌벌 떨리는 목소리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프란이 픽하고 코웃음을 쳤다. 시온은 한참동안 몸을 웅
크리고 있다가, 아주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다가 그는 프란을 향해 싱긋, 하고 눈꼬리를 휘며 웃
어보였다. 시온을 잘 아는 누군가가 봤다면 '앗, 나왔다! 궁극의 눈웃음!' 하고 소리쳤을지도 모른다.
웬만한 여자들을 그대로 쓰러지게 만드는 눈웃음이었건만 저 대단한 프란 프리텐양은 뭐냐, 라는 눈으로
볼 뿐이다.
"꺄아아아악!"
그 소리에 놀란 시온이 흠칫하고 팔을 풀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시온은 거기서, 마치 굉장한 괴물이라
도 본 양 몸을 덜덜 떨며 자신을 손가락질하고 있는 분홍색 머리칼의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온은 잠
시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내려고 애쓰다가, 곧 떠올려내고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저기, 뮤? 여긴 웬일……."
"꺄아아아아아아!"
시온이 흠칫하고 프란이 엥? 하는 소리를 내는 사이, 뮤는 주먹을 꼭 쥐더니 온 저택이 쩌렁쩌렁 울릴만
한 큰 목소리로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
"……살아있었나?"
'왜 안 보이지?'
'……그럼 네가 여쭤봐.'
'네가 하면 될 거 아냐!'
'네가 여쭤보라니까!'
'싫다니까!'
호위무사들이 큼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프란은 속으로 키득거리며 안에 있는 가주에게 기척을 알리려
했다. 바로 그 순간, 호위무사 중 하나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아, 잠깐."
"에?"
"안 계신다."
"엉?"
"가주님, 지금 여기 안 계신다."
▷◀▷◀▷◀▷◀▷◀▷◀
"……."
"……그래서."
"싫다."
"싫…… 예?"
사신의 얼굴이 망가졌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뱉어낸 카르멘 가주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깨끗하고 단아한 얼굴선을 가진 카르멘 가의 가주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는지 느끼지 못하
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돌아가라."
"알고 계실 겁니다, 카르멘 경. 현재 카세타의 반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생
각하실지 모르나 카르멘 경, 오해 말고 들어주십시오. 현재 국왕 폐하께서는 카르멘 경에 대해서라면 전
폭적으로 믿고 계십니다. 그러나 대 카세타 반역이 일어났다, 라 라 말이 들릴 경우 가장 먼저 의심받는
것은 카세타 초기 때부터 언제나 카르멘 가……."
쾅!
흠칫.
사신은,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티 테이블을 그대로 내리친 카르멘 가주의 주먹이
보인다. 그의 목소리는 새벽의 안개마냥 바닥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사신은 단지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어쩌면 반 역시 알고 있을 사실을. 카르멘 가문은 황실에서 언제나 경계해 마지않는 대 가문이고, 반역
이 일어날 때마다 가장 먼저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던 가문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기에, 대대로 카르멘 가
문은 반역토벌에 대해 헌신적이었다. 사신은 그 선례를 들려고 했던 것이다. 아마 역대의 가주들에게라면
사신의 말은 통했을 것이다. 허나 역대의 가주들과 이 사람은 다르다.
"……실언했습니다."
"끌려 나갈 건가 제 발로 나갈 건가."
"……."
사신은 조용히 일어섰다. 사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국가 전체를 모욕하는 일. 그러나 저번에도 그랬듯
이번 일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물어물 넘어가고 말 것이다. 그것이 카르멘 가주― 이 남자의 힘인가.
하기야, 하고 사신은 생각했다. 키네온은 이 만만치 않은 소년 가주와 적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딸을 주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포섭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지.
"그만 나와라."
"아, 예에."
"식사는?"
"아, 방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가지."
"가주님!"
▷◀▷◀▷◀▷◀▷◀▷◀
똑똑똑.
헤이튼은 가볍게 방문에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젭니다."
헤이튼은 숨을 골랐다.
"……시온 아일린은 반란의 표면에만 결부되어 있습니다. 깊숙이까지는 파고들지 않아요. 아니, 지금 중요
한 건 그게 아니지요. 시온 아일린이 알아버린 것은 반란에 관련된 종류가 아닙니다. 시온 아일린은, '저
스티스 카르멘' 독약사건에 대해 알아버린 것 같습니다."
"……알아 버렸다구요?"
"그렇습니다."
"그래, 뭐라던가요?"
"……눈감아 주겠답니다."
"과연."
남자는 큭큭,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 시온 아일린. 너도 결국 나와 같다. 핏줄을 부정하지 못하지.
"대신."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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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조그마한 티 테이블 위에다 무엇인가를 잔뜩 내려놓는다. 국화차부터 시작해서 아샴, 얼그레이, 레
몬홍차까지. 여러 종류의 차를 차곡차곡 내놓고 '식지 마, 식지 말란 말이야! 오! 나의 주인님을 창조한
내 이름을 걸고 식으면 안 돼!' 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친 후 얼른 가서 쿠키를 이것저것 내온다.
자, 티타임 시작합니다!
반: …….
반: ……해봐라.
반: …….
반: (짧게) 세이피안.
반: …….
반: …….
가: ……저, 저기요?
반: ……(빤히 바라본다.)
가: 차, 차 드실래요?(말을 돌리기 시작 한다;;)
반: ……(뭔가 불만 있는 듯)
반: ……마린에게 물어보도록.
가: (중얼…… 마린은 캐스팅할 생각이 없는데……) 아, 그렇다면 혹시 저번에 화약고에서 만났던 여성분
기억하십니까?
반: …….
반: …….
가: ……저, 기, 가주님?
반: (역시 간결)시종이다.
가: 그게 끝인가요?
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가: (오, 오옷. 표정이 흔들린다!) ……아, 아닙니다, 아무 것도. (다음 질문을 보던 가넷, 창백해진
다.) 저, 저기, 저기…… 저기…….
반: (냉담)알아서 뭐할건가.
반: …….
반: ……없다.
가: (드디어는 쓰러진다.)
반: (말없이 등돌린다.)
가: 가주니이이이이이임!!(어디론가 끌려나간다;;)
가넷입니다.
어라, 드림워커가 작동되는군요(놀라고 있다)
사실 운영자님이 일주일간 드림워커를 닫고
서버 방화벽 구축에 들어간다고 하셔서..;;
카페에도 방금 막 글을 올렸습니다.
어제는 배가본드를 보는 도중에 잠이 들고 말아서...(여덟시쯤;)
...바, 방금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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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거죠.”
“……확실한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반이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았기에, 프란은 험험,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
러다 프란은 반을 향해 바짝 몸을 내밀더니, 속삭이듯 반에게 말했다.
“가주님.”
“뭔가.”
“……저 혼자 알아볼까요?”
“가, 가시려구요?”
“불만인가.”
그러나.
“시끄럽다.”
▷◀▷◀▷◀▷◀▷◀▷◀
“출동이다, 키르!”
‘그러면서 벌써 말에 탄 너는 뭐냐!’
가에린 상단과 제닌 고물상. 수도의 양 끝에서 일어난 그 불꽃은, 사실 말이 불꽃이지 폭발이라 불리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몇 년 동안이나 카세타 왕실과 기사단에 상납하는 무기를 독점해 왔던 가에린 상
단. 카세타 전역에 있는 고철이 모여든다는 제닌 고물상. 바로 그 곳에서 시작된 폭발은, 정확히 열 가구
씩을 그대로 폭발시키고 거짓말처럼 멎었다.
헤냔은 낮게 중얼거렸다.
아나이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실은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물론 케이온 기사단과 디센 기사단은 이
른 새벽에 소집되었다. 그러나 왕궁 쪽에서는 뾰족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 했을 뿐, 이 갑작스
러운 폭발에 대한 원인을 규명해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새벽녘의 스산한 바람이 그치고 아침 햇살
이 왕궁 표면에 부드럽게 닿았을 무렵, 황궁의 보초병 하나가 화살에 꽂힌 종이를 가지고 왔다.
아나이스도 이것이 적절한 대비책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수도 자체가 얼마나 넓은 곳인데 고
작 이 정도의 인원으로 경비가 될 거란 말인가. 아나이스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헤냔을 보며 픽 웃었
다.
“헤냔 드 키에르.”
“뭐가 불만이야?”
“내가 언제 불만 있댔어?”
“……그 사람.”
“엉?”
“푸하하하하하핫!”
그러나 물으면서도, 아나이스는 억지로 속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런, 이런. 헤냔. 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저스티스 카르멘을 정말이지 싫어했다고.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였잖아.
아나이스는 또 말갈기를 부여잡고는 속으로 끅끅대며 웃었다. 반란 진압에 카르멘 가주가 어째서 끼어들
어야 하냐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게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니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그녀다. 한
참 만에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아나이스는 험험, 하고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음?”
헤냔이 눈을 반짝이며 돌아보자 아나이스는 빙긋 웃었다.
“........오기 싫대.”
“미남 발견!”
“무슨 헛소…….”
아나이스는 그렇게 말하려다 움찔 굳어버리고 말았다. 헤냔이, 위험할 정도로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리나!’
▷◀▷◀▷◀▷◀▷◀▷◀
“……가주님.”
“무슨 소리지?”
“가주님.”
“…….”
“있잖아요, 가주님.”
“시끄럽군.”
두다닷 쏟아내듯 외쳤던 프란은 자신을 물끄러미 반의 시선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발끈해서 몇 마디하고, 반이 물끄러미 노려보면 시선을 내리깔며 나 죽었소, 라고 고개를 숙이는 것. 으
이구, 이 놈의 빚만 아니면!
보라색 머리카락.
어깨를 훨씬 넘어서 옆구리 정도까지 내려오는 그 장발의 보라색 머리카락만으로도 시선을 잡아끌기엔 충
분하다. 거기에 은은한 은색이 감도는 보랏빛 눈동자. 말했듯이, 조각 같은 생김생김이라 이거지. 프란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실버 블레이드.
‘그 그림, 팔면 비쌀까나.’
프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퍼뜩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어서, 프란은 고개를 번쩍 들고 반을 바
라보았다.
“뭐가 말인가.”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이를테면 어제, 가주님은 변태 놈, 아니, 그 이스티네 보일린에게 모욕당한
셈이잖아요. 그걸 핑계로 그 저택을 뒤져보면 어떨까요?”
그러나 사신이 반에게 찾아와 아침에 하는 말을 들었던 프란은, 우연인지 아닌지, 자신이 훔치듯 보았던
그 장소가 폭발이 일어난 곳과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이번 폭발은 이스티네 보일린과 큰 관련이 있
다는 말이 된다.
“그럴 생각 없다.”
“저스티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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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도련님.”
“웬일이야?”
“……스웬이…….”
시온의 반응에 뭔가 생각하는 눈치였던 마린은, 고개를 재빠르게 저었다. 그녀는 얼른 뒤돌아서며 높은
톤으로 말했다.
방문을 열고 나온 시온이 마린과 나란히 복도를 걷는다. 그러다가 문득, 마린을 흘끗 본 시온은 그녀에
게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언제나 밝고 활달하기가 그지없는 이 여인의 표정이 어둡기 그지없다.
게다가 그녀의 눈 밑으로 까맣게 돋아 있는 것.
막 농을 걸려다 말고, 시온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우뚝 멈춰선 채로 자신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마린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시온은 무슨 일이 있군,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린을 보았
다. 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뭔 소리야, 지금?”
“응.”
“……정말요?”
“……하.”
마린은 얼굴 한 쪽을 찡그리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마린은 잠시 그 상태 그대로, 몇 초간을 정지해있
다가, 다시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한참 광소를 터뜨리던 마린의 웃음이 갑자기 딱, 하고 멎었다. 시온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 마린은 훗, 하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를 겁주셨다 이거죠, 가주님. 이 마린을 적으로 돌리면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아직 모르시나
보군요. 후, 후훗 ……이 빚은 꼭 갚아 드리지요!”
‘마, 마녀 부활.’
▷◀▷◀▷◀▷◀▷◀▷◀
“헤에.”
상당히 진지하게 튀어나온 마린의 말에, 시온은 무슨 그런 무례한 소릴! 나의 이런 깜찍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걸 영광으로 알라고! 하고 소리를 쳤다. 물론 마린은 무시했다.
‘……그만 은퇴해야겠다.’
‘…….’
물론 정원사는 베이지 않은 왼손으로 손자를 한차례 구타한 후 재빨리 스웬의 방으로 달려갔다. 저 버릇
없는 손자 녀석에게 아직은 자리를 빼앗길 수 없다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던 정원사는 그러나, 다음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방의 상태였다.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 잡동사니를 비롯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그 방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피를 흘리면서 서 있던 정원사는, 그러다가 묘한 종이를 한 장 발견했다. 잠시 굳어 있던 그는, 그 길로
등을 돌려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당장 옆방의 마린을 찾았다.
“맞아.”
“시온 도련님.”
“응, 말해.”
“뭘 찾으시죠?”
“내가 찾긴 뭘 찾아?”
“……이것, 찾으시나요?”
“응? 그게 뭔데?”
“글쎄요, 이게 뭘까요?”
마린이 품에서 쏙 꺼낸 조그마한 것에 시온은 일부로 들뜬 아이처럼 경박하게, 그러나 속으로는 조바심을
치며 물었다. 그러자 마린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오늘이 그 날이죠, 도련님. ……가주님이 말한 한 달, 오늘이 그 날이에요.”
마린이 갑자기 내던진 그 말에, 시온은 늑대에 습격당한 레이디 같은 표정을 지으며 옆에 있던 탁자를 부
여잡았다.
“흐흑. 역시 그랬던 거야.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노처녀에게 노려지고 있었던 거야. 아아, 나의 순결,
미안해 프란. 나는 이대로 여기 있는 마린에게 당하는 거야.”
“집사장님!”
‘윽.’
뮤는 자신의 사랑하는 그이를 노리는 저 남색가를 무서운 눈으로 쏘아봐준 후,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마린에게 말했다.
“뭐? 또?”
시온은 점잖지 못하게도 그렇게 외쳐버리고 말았고, 그 순간 마린의 따가운 눈짓을 받았다.
▷◀▷◀▷◀▷◀▷◀▷◀
키네세스는 숨 가쁜 얼굴로 카르멘 가 저택에 들어섰다. 단숨에 정원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물빛 머리카락
을 보고 있던 카르멘 가의 정원사는, 자신의 손자를 흘낏 보았다. 그의 손자는 아닌 척 하고 있었지만,
가끔씩 저 공주님이 저택을 찾을 때마다 간이며 쓸개까지 다 빠진 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물론 멀리에서
밖에 볼 수 없는 공주님이긴 하지만. 정원사는 의사가 없어진 바람에 자신이 대충 칭칭 감아놓은 붕대를
처량하게 한 번 바라보았다.
‘평생동안 가위를 동반해 살아온 내 신세가 불쌍하누나. 이놈의 자식아, 공주님 그만 봐라.할아버지 손
에 피나는 건 안 보이고 공주님 머리카락만 보이냐.’
“공주님.”
▷◀▷◀▷◀▷◀▷◀▷◀
프란은 사랑이 불타오르는 눈으로 아나이스를 정신없이 훔쳐보기 시작했다. 그런 프란을 한차례 바라보며,
아나이스는 찡긋 윙크를 했다. 프란은 그러나 윙크는 받지 못했다는 듯, 여전히 홀린 듯한 눈으로 아나
이스를 볼 뿐이었다. 누가 보면 여기사에게 반한 남자시종, 이라며 웃음을 터뜨릴만한 상황이다.
“……그 잘난 불꽃놀이?”
“가자.”
“아나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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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트- 이하 가, 시온 아일린- 이하 시
가: 안녕, 시온!
가: …….
그리고 잠시 후, 또 이상한 남자가 등장해 시온에게 뭔가를 얘기한다. 시온은 오, 하고 감탄하며 그 이
야기를 끝까지 들은 후 가넷을 본다.
시: 아, 뭐라고 할까. 아일린의 이름을 벗어도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도라는 점에서 상당히 만족스러워.
(웃음)
가: …….
……시온과의 인터뷰였습니다.
다음 인터뷰는 헤냔 드 키에르 군과 하겠습니다^^
“안다.”
“받아라.”
프란은 슬그머니 단검을 검집에서 꺼냈다. 검날이 내뿜는 빛이 차분하다. 프란은 살짝 검의 중앙을 눌러
보았다. 머리카락을 한 올 갖다대자 소리도 없이 반으로 갈라져 밑으로 떨어진다. 프란은 얼른 검을 검집
안으로 회수한 후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 단검 비싼가요?”
“…….”
“그게 말입니다. 카제노도 아일린만은 못하지만 꽤나 유명한 상업가잖아요. 게다가 기반이 카세타에 있
고. 여기 수도만 해도 카제노 상단의 가게가 꽤 많을 것 아닙니까. 그걸 다 찾아보려면 시간이 만만치 않
을 텐데요. 차라리 카르멘 가의 사람들을 푸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면 지금, 웬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사도 따라오고 있으니 기사단에 알리든가요.”
“그렇게 요란 떨며 다닐 일이 아니다.”
“흐음.”
“헤냔.”
“응?”
헤냔이 웃으며 답하자 아나이스는 변한 아들을 바라보는 늙은 어머니의 마음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스티스 카르멘이 우리 순수한 키르를 이렇게 만들었어, 라는 울음은 속으로 삼키는 아나이스였다.
▷◀▷◀▷◀▷◀▷◀▷◀
“잠깐 살펴보겠다.”
“왕궁에서요?”
무엇보다도 반의 얼굴이 워낙에 귀족적이라 신분을 의심하는 행동 자체가 불필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반과 남자가 잠시 대화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던 프란은 얼른 몸을 움직여 가게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
다.
“저 사람은 뭐지요?”
비싼 물건 앞에서 유독 눈살을 찌푸리며 오래 머무는 프란을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남자가 묻자,
반이 간단히 답했다.
“수행원.”
“아……. 예. 그렇습니까.”
프란은 그러면서도 여기저기를 꼼꼼하게 훑어보고 있었다. 이 가게는 그리 크지는 않았다. 프란은 그다
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단 이 번 일은 자신이 제의한 것이기에 성실하게 모든 것을 확인했다. 어두컴컴한
상자들이 쌓여 있는 가게의 안쪽은 물론, 창고, 그리고 물건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대 등 폭탄이 숨어 있
을만한 공간 사이사이를 꼼꼼히 살펴보던 프란은, 어느 순간 멈칫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금발 녹안.
“이만 가보겠다.”
“아이고. 살펴 가십쇼!”
▷◀▷◀▷◀▷◀▷◀▷◀
카제노가 아무리 잘나도 자신의 아일린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멋대로 해석하며
프란은 속으로 웃었다. 그래도 아일린의 가주라 이건가. 프란은 손을 깍지 껴 머리 뒤로 돌렸다. 그녀는
다시 흘낏 뒤를 돌아보았다. 아나이스와 헤냔은 저 멀찍이에서 천천히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는데, 처음과
는 달리 반도 프란도 그다지 둘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두 기사는 정말로 순찰을 도는 것처럼 행동했고 자신들을 방해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아나
이스는 자신들이 따라가는 걸 뻔히 아는 프란과 반에게서 반응이 없자 분개해하며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졸졸 따라가야 하느냐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헤냔은 간단히 시끄럽다고 대답했을 뿐이다.
“밥 좀 먹고 하죠.”
“바쁘다.”
“뭘로 하시겠어요?”
둘이 자리에 앉자마자, 아직 어려보이는 급사가 다가와서 물었다. 무표정하지만 미간에 엷은 주름이 하
나 간 반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답했다.
“제일 빨리 되는 걸로 둘.”
“크레이프가 제일 빨리 됩니다.”
“그걸로.”
“……예에.”
“웃기는군.”
프란이 그렇게 무서운 시선을 받는 사람과의 동행자로써의 민망함으로 뒤통수를 슬슬 긁을 지경이 되었을
무렵, 급사가 크레이프를 두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고개를 꾸벅 숙인뒤 접시를 내려놓고 급히 사라지는
급사의 얼굴이 붉어져있었다. 한 번만 더 볼까 싶었는데 고개를 돌리자마자 곧장 반과 눈이 마주쳐버린 탓
이다.
“…….”
“…….”
“어이.”
“어이.”
프란이 부르자, 청년이 흠칫했다. 로브 사이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있었다. 푸른색 머리카락이다.
“미인이지?”
프란은 그 청년을 향해 고개를 낮추며 작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흘낏, 눈으로
저 멀리에 있는 반을 가리켰다. 푸른색 머리칼의 청년은 흠칫했다. 그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네, 네?”
“그, 그런 적 없어요.”
청년은 더듬더듬 말했다. 얼굴이 확 붉어진 것이나 말을 더듬는 모양이 영락없이 시골에서 갓 상경한 듯
한 촌뜨기 청년인 것 같다. 프란은 그러나 이런 겉모습 보다는 아까 전, 순간적으로 느꼈던 그 시선을 훨
씬 더 신뢰하고 있었다.
“이러지 마시오.”
챙!
‘끼어들지 마세요!’
청년은 프란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흠칫했다. 프란은 그대로 치고 들어갔다. 청년은 유려한 움직임으로
검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게 만들었다. 이번엔 자신의 차례라는 듯, 청년은 침착하게 검을 프란의 옆구
리 쪽으로 찔러 들어왔다. 그 검을 흘릴 수 없음을 알고, 프란은 얼른 춤을 추는 듯한 동작으로 몸을 돌
렸다. 휘릭, 하는 소리와 함께 프란이 다시 자리를 잡는다. 프란의 얼굴에는 이미 어떻게 갈무리할 수 없
는 즐거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제는 이 청년과 왜 싸우게 되었는지에 대한 생각도 없어진 듯 했다.
“어이. 왜 숨겨?”
‘그렇게 하면 등 뒤가 비는 것도 모르나!’
반이 소리를 치려는 순간, 남자의 검이 반의 예상 그대로 프란의 등 쪽으로 내려왔다. 프란은 그러나 다
음 순간 놀랍게도, 오른발을 옆으로 길게 빼 몸을 깊이 낮춰 검의 각도가 어긋나게 한 후 남자의 손을 그
대로 낚아채어 자신의 가슴께로 세게 잡아당겼다. 균형이 어그러진 남자가 검을 채 박을 틈도 없이, 프란
은 그대로 자신의 등과 무릎을 굽히며 청년을 메어꽂았다. 힘이 아닌 기술이다.
“헉!”
청년은 뜻밖의 공격에 무척이나 당황한 듯, 멍하게 누워서 다가오는 프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란이 씩
웃으며 그의 로브 쪽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 때였다. 청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일어서더
니, 그대로 프란에게 검을 날렸다.
프란은 순간적으로 긴장했고 그랬기에 검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아니, 막을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프란은 자신의 옆구리로 그리 깊지 않은 붉은 선이 하나 생겼다는 것, 그리고 남자가 그대로 창문 쪽으로
뛰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해볼 수도 없고 어떻게 저지할 수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프란은 당혹
감에 얼어붙었다.
“너……!”
▷◀▷◀▷◀▷◀▷◀▷◀
“……들켰다.”
‘카세타에 세라딘이 있다’ 는 사실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셀키는 자신의 동료들을 떠올랐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정말 얼마 안 남았다고. 셀키는 눈을 질끈 감았
다. 그러다가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시즈 아일린이 여기는 웬일일까. 셀키
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알려야했다.
▷◀▷◀▷◀▷◀▷◀▷◀
“시끄럽군.”
“……이길 수, 있었습니다.”
프란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프란이 멈춰 서서 소리를 질렀다가 반의 싸늘한 눈동자에 고개를 숙였다. 뭐하는 짓이냐, 프란 프리텐.
저 남자에게 다정한 위로라도 기대했느냐. 바보같이.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얌전히 찌그러져 있어야지. 프란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후 입술을 잘끈 물었다.
반의 목소리가 프란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녀석은 세라딘이다.”
“세라딘…… 이요?”
“……카제노를 마저 살핀다.”
▷◀▷◀▷◀▷◀▷◀▷◀
“왕궁에서 나왔다.”
반이 여태까지와 다름없는 딱딱한 어조로 말하자 상인은 깜짝 놀란 얼굴로 예에? 하고 소리를 쳤다. 상
인은 그러나 여태까지 반에게 얼어붙었던 여타의 상인과는 달리 고개를 갸웃하며 놀란 듯한 얼굴을 했다.
“여기.”
‘가, 갖고 있었냐?’
프란은 깜짝 놀랐다. 여태까지 아무도 신분증을 요구하는 일이 없어서 반이 그것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보나마나 위조증이겠지만, 하고 프란은 힐끗 그 신분증이라는 것을 살폈다가 깜
짝 놀라고 말았다. 국왕의 옥쇄가 선명히 찍혀 있는 진짜 신분증이 아닌가. 프란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
다. 이 인간, 도대체 저런 건 언제 준비했단 말인가. 아니면 저런 걸 모두 가지고 있기라도 한건가.
“기다릴 수 없다면?”
‘강제로?’
아나이스와 헤냔은 상황파악이 안되는 눈으로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상인은
두 기사와 냉정한 눈빛의 소년을 번갈아가며 살피다가 고개를 숙였다.
▷◀▷◀▷◀▷◀▷◀▷◀
“뭔가 알아낸 거죠?”
“‘가에린 상단, 제닌 고물상에 축제를. 카제노- 수도의 붉은 축복. 아산- 카세타의 상징.’”
“사실입니까?”
아나이스가 소리쳤다.
“것 봐, 내가 뭔가 알고 있다고 그랬잖아.”
‘도대체 카르멘 가의 가주는 이런 정보를 어디서 얻었단 말인가. 저 시종이 얻었다는 말은 거짓말인 게
틀림없어. 게다가 왜 기사단에 알리지 않은 거지?’
“모른다.”
“모른…… 예?”
아나이스가 버럭 소리를 쳤지만 반은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었다. 헤냔은 아까부터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잠시 흐른 뒤 문득 헤냔이 탁, 하고 손바닥을 튀겼다.
“뭐?”
“그거라니?”
“…….”
“그래, 중앙광장. 거기가 폭발하면 수도가 난리가 나겠지. 빌어먹을! 가자, 헤냔!”
“모른다.”
‘그래, 중앙광장에 아산의 동상이 있다면 그곳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러나
수도의 상징이라는 건 무엇인가. 중앙광장이 수도의 상징이라는 건가?’
“뭔가.”
반의 얼굴 역시 조금 굳어졌다.
“언제 폭발하지?”
“8 시. 8 시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서둘러야죠!”
“프란 프리텐.”
“예?”
“중앙광장으로 가라.”
“예?”
“예?”
“카세타의 현재 왕궁은…….”
“이거야 원. 늦을 뻔 했군.”
“가주님, 지금…….”
“현 왕궁은 아산 전 국왕 때 완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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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었습니다.
저번에 공지띄우고 잠적한 시간과 비슷하게 늦었군요.
그때와 똑같은 이유로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어요, 새하얗게 불태웠습니다(.....)
오늘 오후쯤에 두편 정도가 더 올라갈 것 같습니다.
-_ㅠ사실 쉬는 동안 글을 써두긴 했는데 옮겨적지를 못했습니다.
또 잠적했을까봐 걱정하는 분이 많으셨겠네요.
두려워서 아직 리플 못 읽어봤습니다;;
160 개.. 이제부터 읽겠습니다.;;
아나이스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
“왕궁에서 나오셨다고?”
폭약을 물감에 비유하는 남자에게 짜증을 내듯 프란이 입술을 씰룩였다. 그러다가 반의 눈이 가볍게 들려
올라갔다.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너는 뛰어라.”
“가주님은……?”
“막는다.”
“네 놈 누구냐!”
남자들 중 하나가 반의 검에 질린 듯 소리를 쳤다. 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프란에게
말했다.
“……죽지 마세요!”
“헛소리!”
저 말이 다정하게 들리다니, 완전 미쳤군. 프란은 아무 생각도 않고 달리기로 했다. 그녀는 믿기로 했다.
그래, 반은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멀쩡히 있을 것이다. 늘 그랬듯 그 차가운 얼굴로. 반드시.
▷◀▷◀▷◀▷◀▷◀▷◀
“헤냔! 헤냔 드 키에르!”
빨리. 빨리 해야 된다. 늦다. 이대로라면 늦어. 안돼. 모든 것이 끝나버릴 지도 몰라. 프란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강박관념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있는대로 돋워 크게 소리쳤다.
“헤냔 드 키에르―!”
▷◀▷◀▷◀▷◀▷◀▷◀
폭약을 찾다가 한숨 돌릴 생각으로 허리를 폈던 헤냔은 뜻밖에도 거리 저 쪽에서 뛰어오는 금색 머리카락
에 놀라 등을 곧게 세웠다. 프란은 너무나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온 나머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숨을 헐떡
이고 있었다. 꽤 먼 거리에 있었음에도, 헤냔은 프란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동자가 붉게 충혈 되어 있는 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며 한걸음씩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프란과 헤냔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 때 헤냔은 옛날의, 아주 옛날의 프란을 떠올렸다. 처
음 만났을 때의 프리나를 말이다. 처음, 견습 기사단에 왔던 프리나의 당돌한 눈동자와 지금 자신을 바라
보는 충혈된 프란의 눈동자가 겹치면서, 데자뷰 현상이 일어난다.
“에?”
헤냔이 굳은 듯 섰다.
맙소사. 지금 뭐라고? 뭐라고 했지, 프리나? 헤냔은 잽싸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수도 전체에서 수상한
무리를 지켜보아야 할 수도 경비원들과 흩어져서 수도를 살피기로 했던 기사단이 모두 이 곳에 모여 있다.
궁궐을 지키고 있던 디센 기사단의 절반까지 이 곳에 나와 있다. 지금 궁은. 비어, 있어.
“……구, 궁궐에…….”
헤냔은 더듬더듬 말하다말고 발을 헛디뎌 휘청였다. 프란은 그런 헤냔의 어깨를 세게 내리쳤다. 순식간
에 정신을 차린 듯, 얼떨떨한 얼굴을 하던 헤냔은 프란의 강한 눈에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얼른 런
스에게로 달려갔다. 프란은 양 무릎에 양손을 각각 얹고 등을 구부린 채 헉헉, 하고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골랐다. 기사단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집결했다. 당황하지 않으려 애쓰며 빨리 궁으로 돌아가려는 그들
을 보던 프란은 재빠르게 헤냔에게로 다가갔다. 프란은 산소부족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헤
냔에게 말했다.
헤냔이 흠칫 돌아보았다. 아나이스가 함께 타자는 신호를 보내오자 헤냔은 자신의 말고삐를 프란에게로
건네주었다. 프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잽싸게 발로 말의 배를 때렸다.
히이이이잉!
말이 울부짖는 소리를 냈다. 기사단이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받으며 프란은 곧장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카르멘 가로.
▷◀▷◀▷◀▷◀▷◀▷◀
숨을 헐떡이며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한참 말조차 잇지 못하는 프란을 보며 시온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온 것인가. 시온이 프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무슨 일이야, 라고 물으려는 순간
고개를 떨구고 있던 프란이 시온의 팔을 덥썩, 하고 붙잡았다.
“시온 아일린.”
“왜?”
“확실히.”
“……도와줘.”
“뭐?”
프란은 순간 흠칫했다.
“그나마 네가 제일 낫군.”
그 말에 푸른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입술을 내리며 흘리듯 웃었다. 그는 아까 전 식당에서 반에게 로브가
잡아 채인 셀키였다.
▷◀▷◀▷◀▷◀▷◀▷◀
“왜 웃지?”
“……걱정했던 제가 바보 같아서요.”
“‘저거’ 라뇨?”
“아무도 없는 곳. ……적색 산맥의 ‘마지막 눈물이 고이는 계곡’ 근처가 좋겠군. 텔레포트 해라.”
당황하고 있는 시온의 뒤에서 반이 말하자 시온은 하하, 하고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곧 그의 입술이 조
금 벌어졌다.
“있다.”
“이런, 이런.”
아무런 망설임 없이 튀어나오는 반의 긍정에 시온은 씩 웃었다. 한참동안 시온은 폭약이 든 사과궤짝을
만지작거렸다. 시간이 촉박해지고 있었다. 반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한 순간, 사과궤짝을 만지작거리고 있
던 시온이 반 쪽으로 빙글 돌아서며 그 특유의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곧 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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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계산을 실패했습니다..;;;;
한편을 더 만들기에는 양이 좀 부족하더군요;;
다음 번에 많은 양으로-_-; 하하;;
그리고 공지 사항 있습니다, 읽어주세요.
죄, 죄송합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변명은 또 뒤에다 하겠습니다;;;
“너희들인가?”
“건방진 놈들.”
프란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핫, 하는 소리와 함께 일제히 놈들이 덤벼들었다. 프란은 그러나 이번엔
그다지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아까는 반과 둘이었지만 이번에는 자신까지 여덟 명이다. 게다가 함께
온 이들은 카르멘의 검사들.
‘꿇릴 거 없지!’
“시종, 조심해라!”
한 명이 내뱉듯 소리를 질렀다. 프란은 그 소리에 흩어져 있던 정신을 그제야 차렸다. 그녀는 심장 쪽으
로 곧장 내뻗어오는 검을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한 다음, 춤을 추는 듯 유연한 동작으로 몸을 숙이며 틈을
파고들었다.
“이봐, 거기 시종!”
“프란 프리텐이다!”
프란은 아차, 싶다. 너무 신나게 싸우느라 그만 아예 일 자체를 잊었던 까닭이다. 이런 단세포 같으니.
프란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일곱 명이 내어주는 길
을 따라 얼른 창고로 달음질쳤다.
▷◀▷◀▷◀▷◀▷◀▷◀
자신이 폭탄을 텔레포트 시키기 싫다면 어쩌겠냐는 질문을 던져 순간적으로 반을 긴장시킨 시온은 특유의
능글능글한 태도로 씩 웃어보였다.
“나는 아일린 가 사람이고 아직도 이해가 안 가지만 그 ‘잘난 녀석들’ 이 나란 놈한테 반했다고 했잖습
니까?”
“어떻게 생각하쇼?”
반은 생각도 해보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바라는 게 뭐냐.”
시온은 눈을 찡긋했다.
밀쳐낼 수도 있었지만 워낙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여 프란은 시온을 그대로 부축했다. 시온은 대답하기도
힘든지 입을 열지 않았다. 온 몸이 들썩들썩 거릴 만큼 시온의 호흡이 벅차다. 반은 옆으로 다가와 시온
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어 부축했다.
“……무리했군.”
▷◀▷◀▷◀▷◀▷◀▷◀
펑!
펑―!
“…….”
“…….”
열명, 모든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하늘로 향했다. 프란은 어이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디서 하는 것인지는 모르나 위로 솟아올랐다가 아래로 곤두박질치듯 피어나는 노란색의 불꽃이
선명하게 보이는 걸 보면 그리 먼 곳은 아닌 듯 하다.
카세타의 밤하늘을 수놓으면서 ‘불꽃놀이를 방자한 반역’ 이 아닌 진짜 불꽃이 오르고 있었다. 밤하늘
을 찬찬히 물들여 나가는 그 어이없을 정도로 천진한 불꽃들을 조금은 허탈한 마음으로 올려다보며, 그들
은 카르멘 가로 귀환했다.
PART 16: 공주님
반은 상당히 지쳐 있었다.
‘게다가, 세라딘.’
반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어차피 세라딘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다. 그것은 가문이 생길 때부터 존재한,
아일린이라는 거대 가문을 유지하기 위한 원로원과 가주간의 약속이자 암묵의 룰이다.
‘비켈린’ 과 ‘세라딘’.
“……힘들어 죽겠네.”
“난 이제 더 이상 시종이 아니에요.”
“무슨 헛소리냐.”
반의 말에 프란은 곧장 대답해왔다.
“어라, 마린?”
‘무슨 일이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프란이 생각했다. 마린의 말이 끝나자 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며 알겠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그대로 자신과 함께 돌아온 검사들에게 명령
했다.
“하찮은 일이라니!”
“말해봐, 마린.”
그러다 그 무거운 공기를 깨뜨리며 반이 다시금 명령했다. 공주가 납치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잠시 얼
어있었던 검사들은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시간 없다.”
반이 잘라 말했다. 그런데 그 말에 발끈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여자에 관해서라면 언제나 배려가 넘
치는 시온도, 왕족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초조해하고 있던 마린도 아니었다.
“아니, 잠깐만요!”
고함을 빽 지른 건 프란이었다.
프란은 당황한 듯 반의 옷소매를 잡았다. 반은 뭐냐는 눈빛으로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정말로 어이가
없다는 듯 반을 보며 소리를 높였다.
“그 분, 키네세스 공주님은 적어도 가주님의 친구 아닙니까? 시간이 없다는 한마디로 그분을 그렇게 간
단히 포기하는 겁니까?”
“…….”
“이거 어쩌면 나중에 상당히 곤란할 수도 있다고요. 아시다시피 국왕 폐하께서 공주님을 오죽 사랑하십
니까. 아주 애정의 도가 지나칠 정도로 아끼시잖수? 공주님이 죽기라도 한다면 그건 또 어쩝니까.”
“시간 없다.”
“얼마 주실래요?”
“……프란?”
“엥?”
갑작스러운 그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시온과 마린이었다. 프란은 활짝 웃어보였다.
프란의 말뜻을 그제야 눈치 챘는지 시온과 마린이 질린 눈을 했다. 반은 프란을 빤히 보았다. 프란은 이
쯤이야 뭐 어때요, 하는 눈으로 반을 보고 있었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크게 한 번 얽혔다. 사병들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궁으로 출격할 차례라고 말이라도 하는 듯.
반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은 도대체가 컨트롤이 안 된다. 강압적으로 눌러도, 목숨을 위협해
도, 결국엔 저렇게 어느 순간 탁 하고 튀어버린다. 뭘 생각하는 걸까. 저 눈동자로 또렷이 자신을 바라보
며 싱긋 웃는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 맡겨주세요, 라니.
반이 대답했다.
“필요없다.”
프란은 다시 한 번 웃었다.
▷◀▷◀▷◀▷◀▷◀▷◀
“나는?”
“어이. 마법을 써서 체력도 잔뜩 바닥난 주제에 누구 짐이 되겠다고 ‘나는?’ 이라는 거냐? 방금까지
헉헉대고 있던 놈이. 약이라도 처먹었냐?”
“엥? 그건 또 무슨 말이냐?”
▷◀▷◀▷◀▷◀▷◀▷◀
“일단 내가 저택 반대쪽에다 마법을 쓰지. 주의가 그 쪽으로 쏠렸을 때 재빨리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거
야.”
프란은 높고 견고하기가 그지없는 이스티네 가의 성벽을 두드리며 말했다. 예전에도 한 번 탈출을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이 귀족가 성벽의 높이란 정말이지 장난이 아니다.
“뭐가 간단한데?”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에 놀란 프란이 묻자 시온은 고개를 45 도 각도로 꺾으며 우울한 눈으로 하늘을 보
았다.
“좋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린 시온은 그대로, 위로 올렸던 손바닥을 휙 하고 아래로 젖혔다. 동시에,
광구가 저택의 아래쪽을 향해 처박히듯 내려 꽂혔다. 저택은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 쪽이야!”
시온의 능숙한 행동에 의아해하면서도 그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선 프란은, 정원의 바깥쪽을 크게 돌아 들
어가기로 결심하고 호흡을 길게 늘였다.
“이쪽으로 가자.”
이스티네 저택은 마법 때문에 소란스러웠던 것을 순식간에 가다듬고 다시 보초에 만전을 기울이고 있었다.
훈련이 잘 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프란은 훅,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시끄럽군.”
프란은 시온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얼른 검을 빼들었다. 쉬익, 하는 작은 소리에 시온은 긴장한 눈으로
프란을 보았다. 프란은 후, 하고 잠시 웃었다. 둘은 호흡을 가다듬고 문으로 달려갈 타이밍을 재고 있었
다. 저택의 문 앞에는 따로 보초가 없으나 서너 명 정도가 비스듬하게 선 채로 있다가 가끔씩 저택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긴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 둘, 셋.
우당탕!
“……!”
프란은 움찔하고 얼어버렸다.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정원 밑에 얕게 깔려 있던 있는 자갈을 밟고 넘어
진 것이다. 깜짝 놀라 얼른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문을 지키고 있던 보초 셋이 순식간에 두 사람이 숨어
있던 수풀 더미 속으로 다가왔다.
“누구냐!”
그렇게 결심한 프란이 막 검을 치켜 올리고 뛰어나가려는 순간, 시온이 단검의 끝을 조심히 잡고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는 찡긋, 프란을 향해 윙크를 해보였다.
“여기선 내가 희생하지.”
“시온?”
'야, 시온!'
시온은 낮은 정원수와 수풀 속에서 재빠르게 기어 나왔다. 그 주위를 둥글게 감싸고 점점 거리를 좁혀오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누구냐!”
휘청.
“누구라고 했소?”
“시온 아일린! 얼라리, 이거 벌써 내 얼굴을 잊어버린 거야? 가끔씩 보기도 했을 텐데. 비엘이 내 얘기
하면서 눈 감아 주라고 하지 않던가? 아아, 혹시 나에 대한 마음이 식어서 이젠 살짝 담장을 넘어온 남자
에 대해 무자비하게 대하라고 말해?”
‘비엘?’
순간, 프란은 머릿속을 치고 지나가는 기억에 움찔했다. 비엘이라면, 분명 그녀였다. 축제에서 그들을
덮쳤던 남자가 했던 말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맙소사. 프란은 자신의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그 비엘이라는 여자가 이스티네 가문의 아가씨였단 말인
가.
“따라 오시오.”
▷◀▷◀▷◀▷◀▷◀▷◀
하리나스 백작은 소리를 쳤다. 벌써 시간폭탄이 터져야할 시간이다. 수도의 한 부분이 완전히 날아가고
불꽃에 휩싸여야 마땅하다. 왕궁에서도 훤히 내다보일 정도로 아름답고 거대한 혀를 내보이며 하늘로 치솟
아야 할 불꽃.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궁은?”
“옳은 말이야.”
옆에 있던 보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리나스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큭큭 소리죽여 웃었다. 빌어먹을.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단은 부딪쳐 보는 수밖에.
그리고 만일에 만일을 위한 카드가 남아있기도 하고. 하리나스 백작은 보일린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저
카르멘 가가 어떨지 살짝 염탐하러 갔던 보일린이 얻은 수확은 엄청난 것이었다. 키네세스 제 3 공주라니.
“설마. 헤이튼 그 작자가 얼마나 약았는지 그대도 잘 알지 않소. 이번에도 그가 카르멘 가에서 빼돌린
녀석은 겨우 서른 명이오, 서른 명! 꽤 정예이긴 하지만. 우리가 실패할 것을 고려해서 최대한 증거를 남
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이더군. 후, 한 배를 탔으니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
‘저 인간이 왜 여기에?’
프란은 당황함에 잠시 굳어버렸다. 도저히 여기에 보일리가 없는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뭔가
싶어 프란은 저도 모르게 조심스레 그의 뒤를 밟았다.
스웬.
카르멘 가의 전용 의사.
프란은 검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밑으로 늘어뜨린 채 스웬의 뒤를 차근차근 밟았다. 그리고 막 그
가 코너를 꺾어 도는 순간, 벽에 기대어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겨나가던 프란은 움찔 멈춰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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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 좀 적습니다.
사실 앞부분 수정 때문에 조금 바빴습니다, 게다가 도중에 편수가 날아가서... 앞부분은 어떻게 조달을
했습니다만 뒷부분은 조달이 도저히 불가능해서 여러분께 가지고 계시면 달라는 부탁까지 해야만 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무사히 받았습니다ㅠ_ㅠ 가장 먼저 주신 두 분께는 책 나오면 꼭 보
내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책 나오면 다시 따로 메일 보내겠습니다.)
프란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기척을 최대한 숨기려고 애썼다.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다. 스웬이 여
기에 왜 있는지는 정말로 궁금한 일이지만 ‘야, 여기 웬일이야? 우리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부드
럽게 브루스나 한 번 춰보자고.’ 라고 말할 시간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일단 스웬이 가고난 뒤에 저 두
남자를 해치우고, 키네세스 공주를 데려가야 한다.
프란은 초조하게 바닥을 긁으며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음에
도 안에서는 사람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프란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가락을
천천히, 그리고 소리 없이 꺾었다. 혹시 저 방에 들어선 그대로 나오지 않을 생각인가.
심장에 손을 얹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말없이 긴장을 확인시킨다. 흥, 웃기지 말라 이거야. 프란은 입
가를 조심스레 비틀었다. 그래,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목표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말이지. 겁먹지 마
라, 프란 프리텐. 세상은 배짱인거다! 배짱으로 되지 않은 일이 있었어? 한 번 결심하고 돌진한 뒤에 후
회한 적이 있어? 없다. 프란 프리텐 사전엔 적어도. 무슨 일이든 진심으로, 정말로 죽을 듯한 긴장감 속
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다.
프란은 검집을 왼손에 잡은 채 조심스레 세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천천히 한걸음씩 물러선 그녀는 부메
랑을 던질 때처럼 재빠르게 검집을 든 채로 몸을 휙 젖혔다. 막 그녀가 그 검집을 저 너머로 던지려는 순
간이었다.
찰칵.
‘……죽이는 타이밍이로군.’
‘안 돼, 떠올리지 마!’
‘좋았어!’
프란은 두 사람의 그림자가 저 먼 곳까지 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 단검을 손 안에서 한바퀴
빙글, 하고 돌렸다. 그리고는 처음의 계획대로 왼손에 든 검집을 그대로 들어 부메랑처럼 저 편을 향해
날렸다.
휘익.
챙캉!
“누구냐!”
챙!
“누구냐.”
“이래봬도 나, 검 좀 쓰걸랑?”
“미안.”
“미안해.”
아직은 그다지 이런 일에 익숙하지 못해. 가주놈은 어떻게 이런 일을 하고도 그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
프란은 낮게 중얼거리며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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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프란의 부름에, 키네세스는 멈칫하고 몸을 떨었다. 이윽고,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프란 쪽으로 시
선을 돌렸다. 순식간에 프란과 키네세스의 눈이 마주쳤다. 막 서두르고 있던 찰나였으나, 프란은 마치 시
간이 정지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곧 저 계단을 밟고 스웬을 배웅했던 남자가 돌아올 것이다. 그 남자를 자신이 상대할 수 있을까? 게다가
키네세스까지 데리고 도망가면서? 아니, 그건 무리다. 그런데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 키네세스가
뿜는 기운에 완전히 감전된 느낌이다. 키네세스는 멍하게 프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공주님!”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프란이 한차례 더 불렀을 때다. 한참동안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키네세스가
천천히 일어섰다. 힘없는 걸음걸이로 막 이 쪽으로 오는 키네세스가 보였다. 그 모습에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얼른 그 쪽으로 달려간 프란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 인가요?”
키네세스의 눈물에 프란은 깜짝 놀라고 만다. 게다가 어딘가 멍하게 나사가 풀려버린 듯한 이 표정. 어
째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러는 거지? 프란은 얼른 공주의 어깨를 잡아 부축을 했다. 키네세스
는 휘청, 하면서 프란의 옷깃을 아슬하게 붙잡았다.
“공주님!”
키네세스는 갑자기 프란의 어깨를 꾹 붙잡았다. 아까 그렇게 힘없이 비틀거렸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었다. 프란이 놀라 움찔 한 발자국 물러서려는 순간 키네세스가 갑자기 소리를 쳤다.
“공주님, 공주……!”
갑자기 오열하는 키네세스를 막기 위해 프란이 그녀를 끌어당기려는데 프란이 프란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
대로 쓰러지듯 무너졌다.
키네세스의 태도에 프란은 완전히 당황해버린다. 키네세스의 여윈 손마디가 벌벌 떨리고 있었다. 프란의
옷깃을 꼭 잡은 그녀는 프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
정신적 공황상태다. 프란은 당황에서 벗어나 자신을 힘껏 움켜쥔 키네세스의 손을 떼어냈다. 키네세스가
울며 그녀를 올려다본 순간, 프란의 손이 높게 들려졌다.
짜악!
짜악!
키네세스는 머리가 흔들리는, 뇌까지 흔들리는 듯한 묘한 느낌에 고개를 저었다. 마치, 영상처럼 방금
전의 일이 떠오른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의식이 돌아온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저스티스가 서 있는
듯 했던 공간에 있는 것은 그가 아닌 금발의 소년이 있다.
“아?”
“그 분인가요?”
“……예?”
“그 분이 보내셨나요?”
프란은 순간,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게 묻는 키네세스의 눈동자가 너무나 깊어서 당황한
것이다. 열일곱 살이라는 공주의 애정은 생각보다도 훨씬 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이런 상황에
서조차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공주님, 대단하시군요. 프란은 따끔거리는 가슴을 꾹 하고 한 번
누른 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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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정신 나갔어.”
헤냔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도 웃으면서 상대의 말을 긍정했다. 그러나 정신이 나갔
다고 말한 아나이스 역시 싱글싱글 웃는 낯이다. 아니, 좋아죽는 얼굴이라고 부르는 편이 옳다. 아나이스
는 헤냔의 뒤통수를 딱, 하고 한 대 갈긴 후 다시 한 번 크게 피식 웃었다. 그러자 헤냔이 아나이스의 옆
구리를 쿡 하고 찔렀다.
“가서 알려드려.”
“내가?”
“응, 네가.”
“알았어!”
헤냔은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인상을 찌푸린 뒤, 그대로 분수의 물이 오르는 뾰족한 틈새를 커다란 망치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물론 헤냔이 막 행동을 시작했을 때 모든 기사들은 ‘미쳤군.’ 하는 생각을 하지 않
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둬.”
“……농담할 때냐?”
아나이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고 그 기사단원은 상황이 상황이 아님에도 곧장 그 곳에서 신경을 꺼버렸다.
헤냔이 ‘눈 돌아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케이온 기사단원들은 지긋지긋하게,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헤냔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더듬더듬 돌조각 속에
서 검은 것이 만져지기 시작했을 때, 무언가 견고한 것이 물에 젖지 않은 채로 분수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헤냔은 저도 모르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헤냔? 찾았다고?”
“시한폭탄인가?”
“그런 건 아니고 스위치로 조정하는 폭탄인 것 같군.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말이지. 지금 조치하겠소.”
“이거 이상하군.”
“이상하다니?”
헤냔은 순간 허리를 곧추세웠다. 불길한 생각이 난 탓이다. 아니, 설마. 헤냔은 조금 웃었다. 그럴리가.
안 그래도 경비가 삼엄한 궁궐이다. 분수대 같은 곳에 숨긴것만해도 충분히 놀라운데 도처에 폭탄을 숨겨
놓는다는 물론 불가능한 소리……
콰콰콰콰콰콰쾅!
바로 그 때였다.
아나이스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자각해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평소에 차분하기 그지없는 런스도
마찬가지였고 몇 년간을 궁성마법사로 살아왔던 몇몇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폭탄, 이라는 것을 각오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설마……
콰콰콰콰콰콰쾅!
“이런 젠장!”
성벽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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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저택을 빠져나오는 동안 경비를 두세 명 마주쳤지만, 프란은 날렵한 동작으로 정확하게 그 모두를 처리했
다. 도중에 날아든 어떤 검이 그녀의 왼팔에 흉측한 키스마크를 남기긴 했지만, 둘은 다행히도 무사히 바
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막 성밖으로 나와서 호흡을 고르는데, 키네세스가 반쯤 쉰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남자?”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프란이 낮게 되물어도 키네세스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주먹을 꾹 쥐어보
였을 뿐. 키네세스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바르르 떨렸다. 뭘 생각하는 걸까, 이 공주님은. 그러다가
프란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어깨를 탁탁 쳤다.
그렇게 두 사람이 달렸다. 그러다가 한참, 아까의 일로 평정을 되찾았다 싶었던 키네세스가 다시 떨기
시작하자 프란은 얘기를 해달라고 말했다. 무언가 입술을 움직여 말을 한다면 그나마 좀 나을 것 같았기에.
한참동안 아무 말 없던 키네세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래요. 재능.”
키네세스는 마른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웃음이 바람결에 공허하게 흩어졌다. 손가락에서 뭔가가 바스락
바스락 마른 듯이 느껴진다.
“어릴 때부터 이거다, 싶으면 반드시 그것이었죠. 그것을 재능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르겠어요?
그런데 그 사람, 당신의 주인을 만났을 때 쭉 그렇게만 생각해 오던 내 내부에서 무언가가 변했어. 그 전
에는 내 재능을 믿고, 그리고 그것에 의지해 자신만만해 했죠.
믿었어요. 내가 여자고, 나에겐 오라버니들보다 지지자가 없다고는 해도, 그래도 내게는 그 모든 불리함
을 극복해낼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말이에요. 건방진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결코 내가 부족하다고
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적어도 나의 모든 형제들 중에서는. 오히려 월등하다고 생각했죠. 맞아요, 나는
왕위에 관심이 있었던 거예요.”
단지 마음을 가라앉히라는 뜻에서 말을 시켰더니 한다는 소리가 왕위에 관심이 있다고? 물론 그녀도 왕의
직계혈통인데다 아직 황태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으로 미루어 왕위에 관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공주이고 여태껏 카세타에서는 여왕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그녀에겐 제대로 된 명분이 하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말 하나가 바로 목을 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이 시대에, 도대체 무얼 믿고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카르멘 경과.”
키네세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잘나서 아바마마가 청하는 여러 가지 행사에도 나타나지 않는 걸까. 일종의 오기였어
요. 그런 거 말이에요, 알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네까짓 게 뭔데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야, 하는. 아
무리 카르멘 가의 가주라고 해봤자 그는 내 아버님의 국민이고, 결국엔 이 나라의 귀족이니 내 발밑의 사
람인걸.
그런데 우습게도 나는 그 사람에게 만나자마자 도움을 받았어요. 아바마마가 저에게 딸려 보내신 보좌관
두 명과 기사 세 명, 나까지 그렇게 여섯이서 처음 카르멘 가 정원의 풀을 밟았던 걸로 기억해요. 명목은
함께 차라도 마셔요, 라는 것이었지만 저도 알고 있었지요.
아바마마는 그 때부터 벌써 저스티스 경에게 관심이 있으셨던 거예요, 저의 상대로 말이에요. 그렇게 처
음 만난 저스티스 경은, 우습게도 말이에요. 정말 우습게도, 악독하다는 소문이 무색하리만치 어린 사람
이었어요. 물론 나이보다는 훨씬 성숙해보였지만, 그래도 어리다는 걸 어떻게 해볼 수는 없는 거잖아요?”
“……공주님.”
“네?”
“얘기는 감사하게 잘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듣기엔 좀 과분한 내용도 있는 것 같고, 에에, 뭐라고 해야
하나, 저한테 알려주시면 곤란한 얘기도 섞여 있었던 것 같은데.”
마음의 깊이.
프란은 쓰게 웃었다.
“이제, 빨리 달려줘요.”
키네세스의 말에 프란은 하하, 하고 웃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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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에, 예에.
곧 돌아옵니다.
정말로 곧 돌아올게요.(정말? 여행은? OT 는? 따위는 미뤄두도록 해요, 우리)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예쁜 책과 함께 오겠습니다.
무책임하지만 무양심하지는 않은 가넷이었습니다.
part 17: 격돌
“젠장할!”
헤냔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헤냔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은 그러나 모두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전진
하지 못했다. 제 3 궁이 파괴된 자리에서 일어난 엄청난 먼지가 그들의 접근을 용납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으…… 윽.”
“……노, 농담이지?”
“세상에.”
무너진 성벽의 틈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군사들 앞에서 기사단은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저만
한 숫자의 병력을 가지고도 그토록 얌전히 엎드려 있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3 궁이 전복
되면서 생긴 틈은, 그나마 제 3 궁 주변을 두르듯 세워진 제 4 궁과 제 5 궁이 무너지지 않은 탓에 그리 넓
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틈 사이로 좁게 들어서는 반군의 숫자는 할말을 잃게 만들 만큼 충분히 위협적이
었다.
기사단장인 런스와 메이스 역시 당황한 건 마찬가지. 상황이나 적군의 숫자에 당황한 것이 아니라 기사단
내부의 엄청난 술렁임에 당황한 것이다. 단 한 번도 이만한 폭발을 경험한 적이 없는 기사단이다. 설마하
니 궁성 내부까지 적이 진입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 분명한 기사단이다. 그 사실에 대한 경악이
적에 대한 경악으로 확산되는 것을 지켜보다못한 런스는,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아 위로 치켜들었다. 사기
를 북돋는 말을 할 셈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기사들은 흠칫했다. 사나운 얼굴을 한 여기사. 아나이스 폰 그란젤이다. 그녀의 얼굴이 차게 굳어있다.
“키르,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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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그렇잖아도 먼지가 콧속으로 사정없이 스미는데, 저 앞쪽의 반군은 말을 앞세워 더더욱 크게 먼지를 일으
키고 있었다. 헤냔은 눈을 부릅떴다. 먼지 탓에 벌써부터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헤냔은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맨 앞에 있는 말의 다리를 그대로 베어 들어갔다.
“으아아악!”
“막아, 막으라고!”
“호슨! 죽지 마!”
아비규환이다.
“억! ……으아아아아아악!”
퍽!
가슴이 일자로 갈라진 한 기사가 땅에 쓰러지기가 무섭게 적군의 말이 그의 머리를 짓밟았다. 기사들은 동
료의 죽음을 애도할 틈도 없었다.
일단 수적인 열세가 너무 컸다. 게다가 적군의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났다. 몇몇은 쉽게 베어낼 수 있는가
하면 다른 몇몇은 기사들의 실력을 웃도는 검술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마저 있었다.
‘씨팔.’
“네놈들이!”
촤악!
촤악!
기사단은 시간이 흐를수록 급격히 지쳐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제 3 궁의 무너진 틈으로 들어온 적군은 이
제 슬슬 공격대행을 정비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가라앉았다 싶었던 먼지는 그치지 않는 격돌로 스멀스멀
다시 모두를 압박하고 있다.
런스는 한 명을 베어버림과 동시에 땀이 흐르는 이마를 손목으로 재빨리 훔쳤다. 그러다 그의 시야에 문득
분주하게 움직이는 초록색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헤냔이다.
“하압!”
런스가 알기로, 헤냔의 근육은 그렇게까지 격렬한 움직임을 제대로 견딜 수 있을 만큼 잘 발달되어 있지는
않았다. 벌써 그렇게 자신을 아끼지 않는 검을 쓴 지가 몇 십 분이 흘렀으니 오른쪽 어깨에 마비가 올만
한데도 헤냔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헤냔, 이 녀석……!’
‘선배 체면 구기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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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냔은 멈칫 한걸음을 물러섰다. 아까부터 팔 근육이 뜨겁다. 평소라면 이렇게 무리하는 검을 쓰거나 하
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무 덥다.
“제법이군, 꼬맹이.”
“…….”
모닝스타.
‘헉!’
그러나 그 순간, 헤냔은 남자가 믿을 수 없을만큼 빠른 속도로 무기를 회수해 재차 휘두르는 것을 발견하
고는 깜짝 놀라 몸을 틀어냈다. 간발의 차이로 몸이 두 쪽 나는 것을 피한 헤냔의 오른쪽 옆구리가 길게
베어져 있다.
남자가 입술을 가볍게 비틀며 놀리듯 한 말에 헤냔은 헉헉대며 검을 다시 올렸다. 더워. 헤냔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아프다. 모닝스타는 다시 한 번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모닝스타가 그토록 빠른 속도
를 낼 수 있는 건 다름아닌 남자의 팔힘 때문이다.
“이 날다람쥐 같은 애송이가!”
팍!
"어딜!"
“윽!”
“하악, 하악.”
‘미치겠네.’
기사단은 물론이고 적군의 움직임까지 현저히 느려졌다. 뒤에서 두두두두, 하고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이어 나타난 한 무리에, 아나이스는 속으로 씩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당황하는 앞의 상대를 정확한
솜씨로 칼질했다.
‘영웅이란 녀석들은 타이밍이 어떤지 정확히 들어맞춘다더만. 이거야 원. 타이밍이 좋아도 너무 좋잖아?’
“드디어 왔다!”
가넷입니다.
심하게 많이 늦었습니다.(돌맞고 끌려가다가 또 맞는다)
아이고야, 왜 이렇게 늦었는지ㅠ_ㅠ
기실 컴퓨터는 일주일정도 전에 들어왔는데, 너무나 정신이 없어서 글을 제대로 쓰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쓰지 못하는 동안 생각해둔 것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싶습니다.
이제 다시 연재 들어갑니다.
늦은만큼 되도록 성실하겠습니다.
‘또 한 차례 대륙이 뒤집어지겠군.’
“가주님!”
“칼리.”
“하명하십시오.”
“전달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칼리가 공처럼 빠른 동작으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 모습을 잠
시 바라보고 섰던 반이 이윽고 진군 명령을 내렸다.
“와아!”
절로 소리가 되어 튀어 나왔다. 런스는 그렇게 외치고 뛰어간 헤냔을 멍하니 보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열혈 소년 헤냔의 눈은 또렷하게 한 점, 저 멀리 있는 반을 향해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미쳐 있지만 가장 미친 건 저 멀리 보이는 보라색 머리의 미소년이다. 제일 고고한 태
도로 차분하게 있는 듯해도 정말이지 저 사람은 ‘조용히 미쳤다.’
“억!”
갑작스러운 그 등장에 헤냔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당혹감은 더욱 컸
다.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려는 헤냔을 향해 검은 여인, 켈리가 당황하지도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키에르 경이십니까?”
“에?”
“전갈?”
“……재미없어, 아나이스.”
사악!
“네?”
“대장님! 전갈입니다!”
◇ ◇ ◇
기사단과 카르멘 가 병사들, 반란군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흙먼지를 일으키는 와중에서도, 한 무리의
사람들은 침울하게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너무 가만히 서 있어 구경꾼이 아닌가하는 의
심마저 살만한 그들의 정체는 그 이름도 찬란한 ‘카세타 궁중 마법사’- 적군과 아군이 한데 어우러져 있
어 공격조차 할 수 없는 그들의 마음은 지금, 천근만근이었다.
“헉!”
한데 뭉친 채로, 기사단의 보호를 받으며 간간히 한숨을 내쉬고 있던 다른 마법사들도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에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라톤이 아직도 자기네들 주위로 기사들이 진을 치듯 보호를 해주고 있으
며, 따라서 지금 눈에 띈 이 남자가 적군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내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누, 누구요?”
나름대로 자부심이 섞인 말이었지만 반은 가느다란 실망의 한숨을 쉼으로서 라톤의 자부심을 산산 조각나
게 만들었다.
‘이, 이 젊은 놈이!’
“어, 어찌?”
◇ ◇ ◇
라톤이 뭐라고 중얼거리건 말건, 반은 사방을 휩쓸며 반란군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카르멘
가에 들어온 뒤, 있는 힘껏 검을 닦았던 카르멘 가의 검사들도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검을 휘
두른다.
“있지, 키르.”
“헤냔이라니까! 근데 왜, 아나?”
“귀여운 미소년이 세트로 싸우는 걸 보고 싶었는데. 카르멘 경, 헤냔, 그리고 그 시종. 보기만 해도 힘
이 불끈불끈 날 거야.”
“……대장님은 어쩌고?”
할 말이 없는 헤냔이었다.
‘심하잖아!’
프란이 걱정스레 말했지만 키네세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키네세스의 안색은 몹시 파리했다.
“내가 가야해요. ……오라버니는, 왕위 따위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이러다 여자가 좋아지는 거 아냐?’- 시온이 들었으면 수천 번 기절했을 법한 생각을 하며, 프란은
결연한 얼굴로 키네세스 옆으로 다가왔다. 프란의 눈이 별 수십 개는 집어넣은 듯 번쩍번쩍 빛났다.
“엥? 아, 아닙니까?”
키네세스는 숨도 쉬지 않고 답했다.
“비밀 통로로 가고 있어요. 비상시, 왕은 가장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해요. 비밀 통로는 오직 왕만이 알죠.
일가가 모두 죽는다 해도 왕은 살아 있어야 하니까.
왕의 아내도, 자식조차도 그 비밀 통로에 대해선 알지 못해요. 왕비가 딴 마음을 먹으면 왕이 죽으니까.
자식들이 아버지를 폐위하려 하면 왕이 죽으니까. 그래서 왕은 모든 권력을 후계자에게 물려줄 때까지,
오직 혼자만 그 곳을 독점하죠. 지금 아버지는 그 비밀 공간에 있을 거예요.”
“우연히.”
“우연히?”
“여기가 어딘가 싶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죽 한 번 따라 가봤죠. 그래서 외부에서 들어가는 방법도 알게
됐어요. 아바마마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 네가 간 곳이 바로 비밀통로란다.’ 라고 얘기해주셨을 땐
정말 기뻤어요. 아바마마가 혼내지도 않고 부드럽게 말씀해주셨으니까.”
그 때를 회상하는 듯 아련한 눈동자를 하는 키네세스를 향해, 프란은 솟구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질문했다.
“다섯 살 때요.”
그야말로 경악이다.
“그 정도는 모두 다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흐어어억!’
“좀 도와줘요, 힘들어요.”
그 묘비석은 프란의 가슴께까지 올라올 만큼 거대한 것이어서 한 눈에 보아도 여기가 예사 사람의 무덤이
아님을 짐작케 해주었다. 잘 다듬어진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그 묘비석에는 ‘카세타의 영원한 황제, 영원
한 파수꾼. 제 5 대 황제 아산 여기에 잠들다.’ 라는 글귀가 떡하니 적혀 있었다.
“왜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실로 희생적인 기사도 정신으로, 프란은 자기가 그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흙을 조금만 걷어
냈을 뿐인데, 안쪽에서 뭔가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어?”
“들어가요.”
◇ ◇ ◇
“공주님.”
“왜요?”
‘농담 아니에요.’
“엑?”
“제가 폐하를요?”
돌아본 키네세스는 ‘전 연약해요’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아무리 지략이 뛰어나다 해도 그녀
는 아직 어린 공주다. 보통의 공주도 검과는 원수처럼 담을 쌓고 사는게 현실인데, 몸이 약하다는 키네세
스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게다가.
“왜, 왜 그래요?”
프란은 괜히 멋쩍어진다. 아까부터 왕가의 비밀을 줄줄이 듣고 있으려니, 이래도 되나 싶었던 것이다.
그런 프란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네세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뇨, 그 여인에겐 아이가 있었어요. 여인은 아이에게 이곳을 가르쳐 주었겠죠. ……죽은 줄 알았지만,
그 아이는 살아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아바마마와 나. 그리고 스웬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의 이복 오라
버니. 이렇게 세 사람이 이 곳을 알지요.”
“스웬이라고요……?”
키네세스는 울 것 같은 눈을 했다.
“프란도 알겠군요.”
“서, 설마?”
◇ ◇ ◇
지금, 공주의 머릿속은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니, 정확히 말해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첫째 오라비가 반란의 주모자인 것도 놀랄 판인데 그 정체가 사모하는 사람의 전용 주치의라
니.
‘카르멘 경, 너무 힘듭니다.’
그 때였다, 프란이 갑자기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앞으로 뛰어가기 시작한 것은. 키네세스는 갑작스러운
그 몸놀림에 놀라면서도 절룩거리며 프란의 뒤를 따랐다. 곧, 프란과 키네세스는 저 앞 쪽에 지친 몸을
이끌고 앉아 있는 한 늙은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바마마!”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말을 들어도 자신의 아버지는 카세타의 왕이었다. 그러나 폭탄이 터지고 반란군이
궁성으로 침입한 순간, 왕은 누구보다도 먼저 가장 안전한 곳으로 도피한 것이다. 아내도, 자식들도 모두
버려둔 채 자기 침실과 연결된 비밀 통로 안으로.
키네세스의 외침에 키네온은 고개를 들었다. 근심으로 얼룩져 있던 그의 얼굴에 일말의 기쁨이 번졌다.
“……내 딸, 내 보석! 그래, 그래. 너는 무사히 올 줄 알았다. 너는 똑똑한 아이니 여기를 기억할 줄 알
았어. 그래, 그래. 카르멘 경이……?”
프란은 부녀가 서로를 껴안고 도닥이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상한 기분이다. 대마왕은 공주에게도,
심지어 한 나라의 왕에게도 희망을 주는 남자인 것이다. 왜지, 그는 그냥 대마왕일 뿐인데. 프란은 가슴
이 답답해진다. 알고 보면 그도 배고플 때 크레이프를 먹고, 알고 보면 그도 피곤한 얼굴을 하고, 가끔은
진짜 미친 것 같은 히스테리를 부리며, 이유 없이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는데.
마지막 말에 프란이 흠칫할 틈도 없이, 갑작스레 튀어나온 새된 목소리가 부녀의 대화를 갈라놓았다.
프란은 가만히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썼다. 방금 전 스웬이 던진 말에서 묘한 구절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제야 스웬 같았다.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매달린 순간, 그의 얼굴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 같았던 카르
멘 가 전용의사의 가면이 거짓말처럼 되살아났다. 프란이 화를 내기도 전에, 스웬의 뒤에서 또 다른 목소
리가 울렸다. 중년 남성의 낮은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간파해낸 키네온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곧이어 나타난 얼굴은 키네
온에게도 키네세스에게도 익숙한 것.
“네, 네 놈이!”
프란은 긴장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스웬과 하리나스 백작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언제나 백의로 가
리고 있어 몰랐는데, 스웬의 몸은 의외로 탄탄한 근육질이었다. 어쩌면 상당한 실력자일지도 모른다는 생
각에 프란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하리나스는 스웬의 뒤에서 가만히 팔짱을 낀 채, 신하의 배신으로 억장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
는 왕을 보고 있었다. 곧 하리나스의 입술이 비웃듯 열렸다.
키네세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억 안 나십니까, 폐하? 왕비 전하의 음해로 쫓겨났던 폐하의 첫 여자. 폐하를 시해하려 했다는 모함
을 뒤집어쓰고 쫓겨났던, 그녀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스웬이 다가올 때마다 키네온의 얼굴은 시시각각 창백해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스웬을 훑어보았다. 한참
동안 스웬을 보던 키네온의 얼굴에서 일순 완전히 핏기가 가셨다.
“이, 이럴 수가.”
“지랄하네.”
“웃기지마!”
“아바마마, 정신 차리세요.”
“고만 좀 하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프란은 스웬이 휘두른 검을 정확하게 막아냈다. 그녀는 비뚜름한 얼굴로 스웬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란은 훈수 두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뭐라고?”
프란의 그 말에, 스웬은 가만히 한 걸음을 물러서 프란의 얼굴을 묵묵히 주시했다. 그리고 잠시 뒤, 스
웬은 프란의 훈수에 답해주는 대신 전혀 다른 말을 꺼내 프란을 경악케 만들었다.
“둘 다 닥쳐!”
“이얍!”
“하리나스!”
“네, 왕자 전하.”
스웬은 키네세스를 머리부터 끝까지 훑어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능글맞은 웃음에, 키네
세스는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하리나스! 저 놈을 죽여!”
“그럽시다.”
콰콰쾅!
프란의 뒤편으로부터, 갑자기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하리나스와 스웬, 프란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프란은 깜짝 놀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벽이 떡하니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바마마!”
우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뭐?”
프란은 할 말을 잃었다.
키네세스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떨려 나왔다. 키네세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시종 하나를 맹수들의 먹이로
내던져 주는 것에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대로였으면 그녀도 별다
른 가책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선택이니까. 허나 그녀를 구해주고 여기까지 데려와 준
저 금색 머리칼의 시종에게, 키네세스는 일종의 죄의식을 느꼈다.
“하리나스, 별 문제는 없다. 보일린이 여길 알고 있으니 우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구하러 올 것이다. 왕
은 놓치겠지만, 어차피 저 비겁한 작자가 살아날 방법은 없어.”
“후후.”
프란은 이를 악 물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제기랄!’
쉬익!
갑작스레 오른 쪽에서 달려든 검에, 반은 그답지 않은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검이 휘둘러진 후에야 누
군가가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음을 눈치 챈 것이다. 목을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날아든 그 공격은 너
무나도 빨라, 검으로 막을 수조차 없었다. 반은 재빨리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시즈 아일린!”
“…….”
“영감의 열한 번째 개로군.”
챙!
“……너는!”
셀키가 소리를 쳤다. 검은 복면까지 했지만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셀키는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반을 노
려보았다.
“넌 켈리지? 서른 번째 비켈린!”
복면을 쓰고 있지만 셀키는 확신에 차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켈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거짓말 마!”
셀키는 치가 떨렸다. 아일린을 유지하기 위해, 제 3 대 원로원과 가주는 ‘질서 유지용 개인 병력’ 을
만들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 것이 세라딘과 비켈린.
세라딘과 비켈린의 이름은 오직 아일린 가의 자기장 안에서만 울려 퍼져야 할 이름, 그것이 지금 카세타
의 반란 사건 때문에 카르멘 가의 이름 앞에 노출되고 있었다.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그런데 셀키로서
는 억울하게도, 세라딘인 이쪽은 정체를 드러냈건만 비켈린인 켈리는 아닌 척 시침을 떼고 있는 것이다.
세라딘은 비켈린이, 비켈린은 세라딘이 상대하는 것이 원칙! 켈리는 셀키와 싸울 준비를 했다. 허나 예
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공격 자세를 잡는 켈리를 반이 막아선 것이다.
“가라.”
보통의 상대라면 모르되, 상대는 아일린의 두 축 중 하나인 세라딘이다. 아일린을 단단히 받쳐줘야 할
세라딘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공격 의사를 밝힌 이상, 반이 직접 해결하는 것이 옳다.
“죽어라, 시즈 아일린!”
챙!
퍼벅!
반의 팔꿈치는 셀키의 얼굴을 정확하게 강타했다. 셀키가 주인의 몸 때문에 휘청거리는 말을 진정시킬 세
도 없이, 반이 다시 공격을 해왔다. 이번에는 얼굴이다.
“이익!”
“영감의 개답군.”
반이 말했다. 셀키는 그것이 칭찬인지 비꼼인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셀키가 공격을 했다. 반은 날아
오는 그 검을 막듯이 흘린 뒤, 그대로 셀키의 손을 찔렀다.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공격이었다. 팔을 찔
린 고통에, 셀키는 할 말도 잊은 채 입을 크게 벌렸다. 허나 애써 고통을 참은 셀키는 눈을 들어 반을 보
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셀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얼어버렸다.
“시즈 아일……!”
그건 정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감정으로 충만한 눈동자.
저것이 정말 시즈 아일린인가?
언제나 차갑고 냉정했던 가주였기에, 분노조차도 제대로 표출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사람을 벨 때조차
담담했던 시즈 아일린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그의 얼굴에는 온연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콰직!
셀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시온 도련님.’
◇ ◇ ◇
“죽이라고!”
반란군의 목소리가 새되게 높여졌다. 그들은 치열하게 항전하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제 2 궁 쪽으로 몰리
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아까부터 왼쪽에 위치한 기사단이 그들을 제 2 궁 쪽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는데,
이젠 오른쪽에 위치한 카르멘 가의 검사들이 이에 동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주님.’
세라딘이 여기까지 들어오리라고는 칼리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반의 마음은 찢겨지고 있을 것이다.
저 표정은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 무표정이 더욱 가슴 아프다. 싸움을 하는 동안 자신이 훨씬
큰 상처를 입었음에도, 켈리는 자기 상처 따위는 아랑곳 않고 반만을 신경 쓰고 있었다. 달리 비켈린이
아닌 것이다.
반은 전장을 휙, 한 번 둘러보았다.
이제쯤 신호를 보내야 한다. 칼리는 반을 바라보며 ‘시작할까요?’ 물으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칼리
는 반의 윗옷 칼라에 꽂힌 자그마한 핀을 하나 발견했다. 셀키의 공격을 못보는 원인이 되었던 바로 그 옷
핀이다.
“칼리, 신호 보내.”
“……네.”
펑!
퍼-엉!
칼리가 터뜨린 불꽃은 하늘로 내쏘여져 찬란한 노란색 꽃을 피웠다. 이 전투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화려하고 큰 꽃이었다.
여기에서 싸우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저게 무슨 미친 짓이야?’ 라는 표정을 지으며 칼리가 쏘아올
린 축포를 보고 있었지만, 궁정 마법사들은 달랐다. 방금 쏘아 올려진 축포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
다. 저 것은 반이 다른 누구도 아닌, 마법사들에게 보내는 신호탄이었다.
“시작해!”
“저, 정말 하실 겁니까?”
‘다들, 나를 용서해라.’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지축을 흔들며, 여태까지 들었던 그 어떤 것보다 끔찍한 소리가 들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왜 그러지? 나 같은 건 한주먹이라며?”
프란은 말 그대로 ‘깐죽거리고’ 있었다. 제자리에서 가볍게 통통 튀어 보이는 프란의 얼굴에는 아직도
웃음이 머물러 있었고, 오렌지색 눈동자는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이나 패배 같은 것은 한 번
도 상상해보지 않은 것 같은 눈동자다. 고난 따위는 모르고 살아온 소년이 가질 법한, 세상 무서울 것이
없다는 그 눈은 있는 대로 상처를 입은 프란의 몸과 완연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하하!”
조금씩, 조금씩 프란을 압박해 들어가던 하리나스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너털웃음이다. 자
리에 앉은 채 프란과 하리나스를 바라보고 있던 스웬은 그런 하리나스를 미친 놈 바라보듯 보았다.
프란의 상태는 어딜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하리나스로서는 그녀가 아직도 서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방금 전 프란은 왼쪽 가슴 윗부분을 아슬아슬하게 베였다. 프란이 뒤쪽으로 훌쩍 물러서면서
긴급히 지혈을 하긴 했지만, 그것은 그리 만만한 상처가 아니었다.
“이봐.”
“왜!”
프란이 냅다 고함을 쳤다. 그 짜증 섞인 목소리에 하리나스는 빙긋 웃었다.
프란은 그 갑작스러운 제안에 ‘에?’ 하는 소리를 냈다. 방금 전까지 무자비한 검술로 자신을 난타하고
있던 녀석이 그렇게 물어올 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인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어때?”
그런데 말을 마친 하리나스는 프란이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기묘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뭐지? 하고 하리나스는 생각했다. 자신이 달콤한 상상에 취해 있는 동안, 프란이 키네온과 키네세
스가 닫아버린 그 벽 가까이에 서 있었던 것이다. 거기로 도망갈 구석 따윈 없는데도. 그리고 프란은 달
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피를 철철 흘리는 어린 남자애가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하기엔 불가능할
정도로 민첩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프란을 달렸다. 긴장한 하리나스가 검을 들어 그녀의 가슴팍을 노렸을 때도,
프란은 그가 당황하는 바람에 생긴 조그마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에잇!”
날다람쥐! 하고 뒤에 있던 스웬은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오래지 못했다. 하리나스의 왼쪽으로 파고들
었던 프란이 하리나스를 찌르는 대신, 그의 뒤쪽으로 몸을 날렸기 때문이다. 하리나스가 눈치 채고 몸을
돌렸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어느덧 프란은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단검은 어느새 스웬의 목에 정확하게 가닿아
있다. 하리나스 백작은 순간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스웬이 갖고 있던 검을 떨어뜨린 채, 프란은 스웬의
목젖에 정확히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똑, 똑, 똑.
“대마왕?”
프란이 서슬 시퍼렇게 협박했다. 스웬은 당황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침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리나스를 마주했다. 곧 스웬의 얼굴에 조소가 나타났다. 그가 픽, 하고 웃었다. 하리나스가 검을
버리지 않고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신인가, 하리나스?”
“굳이 그럴 마음은 없었습니다만,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지금 들었습니다. 키네세스 공주는 아름
다운 사람이죠. 그녀와 두 번째 결혼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스웬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말할 뿐이었다.
쐐액!
‘안 돼, 꼭 죽는 것 같잖아.’
입술을 깨물며 프란은 그 다정한 얼굴을 지워냈다. 다리가 덜덜 떨린다. 공격은 딱 한 번뿐이다.
“이얏!”
나는.
오늘.
여기서.
죽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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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
바람이 노래를 했다.
“거짓말…… 이지?”
처음 짐작했던 대로, 카르멘 가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이 작전을 몰랐던 성 싶었다. 반란군과 함께 섞여들
어 궁의 잔해 속에 파묻힌 자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콰쾅!
“단장님!”
헤냔은 런스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멱살을 잡힌 런스는 하극상에 해당하는 이 행동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헤냔이 누구보다 분노할 것임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헤냔은 알고 있었다. 전투를 계속해 반란군을 완전히 소통하려고 했다면, 아마 이것보다 훨
씬 더 많은 수의 인원이 희생되어야 했을 것이다. 반란군의 숫자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반이
궁을 무너뜨려 반란군을 소통하는 작전을 세움으로서 오히려 더욱 많은 아군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을,
헤냔의 이성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은 그 이성적인 종합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미안하다, 헤냔.”
헤냔이 마구잡이로 런스를 흔들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아나이스가 뒤에서 헤냔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퍼억!
곧 그가 아나이스에게 말했다.
“아나이스, 정리하자-.”
◇ ◇ ◇
반은 헤냔과 런스 쪽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미친 듯이 화를 내던 헤냔이 기절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반은 예감한다. 헤냔 키에르, 저 도전적인 눈빛을 가진 소년은 조만간에 카르멘 가에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 때처럼 손목을 걸고 싸우자고 말할지도 모르고 이 전투의 강제적인 종결을 문제 삼을 지도 모른다.
반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켈리, 뒤를 부탁한다.”
“뒤를 부탁하신다니요?”
“이 핀의 주인은 누굽니까?”
“말이 많군.”
“다녀오십시오, 가주님.”
◇ ◇ ◇
자신의 뱃속에 푹, 하고 꽂혔다가 다시 회수되어 바깥의 공기를 마시는 하리나스 백작의 차가운 검을, 멍
하게 보았던 것까지 기억이 났다. 그런 지독한 고통은 난생 처음이었다. 배에 불이 붙은 것 같은 감각,
온 몸의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이상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쓰러졌을 테고, 바닥에 누웠을 테지. 그런데 ‘누워 있다.’ 라는 감각조
차 없다. 온 몸이 허공에 붕 뜬 느낌, 아니, 수백 미터나 되는 바다 속에 거꾸로 처박힌 느낌이다. 여기
서 쓰러지면 대마왕한테도 창피고, 키네세스 공주님에게도 창피고, 무엇보다도 스스로한테 쪽팔리는 일인
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일어날 수가 없다.
숨을 쉴 수가 없네, 하고 중얼거린다.
“죽었나?”
“끈질긴 꼬맹이였습니다.”
“그렇군.”
“과찬이십니다, 왕자님.”
하리나스가 배신할 작자라면, 스웬은 처음부터 하리나스를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의 위기를 넘
기며 스웬은 사람 보는 안목 하나만은 확실하게 배웠다. 하리나스 백작은 권력의 더러운 앞잡이이고 오직
권력을 위해서만 목숨을 내놓을 작자이지만, 이번 반란이 성공했을 경우 자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
기도 했다.
“엉망진창인 반란이군.”
“방금 전에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그건 분명 마법사들이 무언가를 파괴하는 소리였어. 반란은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
그 때였다.
저 멀리서 저벅, 저벅, 하고 보폭이 큰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누가 들어왔나?”
하리나스는 반색했다. 자신들을 꺼내주러 사람들이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하리나스는
안색은 급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 ◇ ◇
명검끼리의 맑은 부딪침.
다른 건 못 들어도 그 소리 하나만큼은 아직도 들을 수 있다니, 우스운 일이다.
“……프……! ……리텐!”
“……대마왕.”
“말하지 마라.”
‘환상인데 참 리얼하네.’
“…….”
그 모습을 보며, 프란은 조금 웃었다. 환상이라도 좋다. 왠지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 몸은 이미 감각조차
없지만.
‘그래도 믿을 건 대마왕뿐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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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제가 부끄럽네요. ;
PART 19 : 카르멘 가의 하루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지난밤에 있었던 흉측한 반란이 모두 거짓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듯, 아침의 여신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채 그 얼굴을 내밀었다. 허나 여신의 자비는 기사단과 카르멘 가 검사들 모두에게, 그저
가혹할 뿐이었다. 어두울 때는 차라리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 둘, 정확한 형체를 갖춘 채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한 햇살이 그들의 눈물까지 증발시켜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불행히도 여신의 힘은 거
기까지 미치진 못했다.
반란은 종결되었다.
허나 그에 대한 희생은 너무도 컸다.
“그것은……?”
칼리가 놀란 듯 물었다.
말에 탄 채, 반은 오른손으로 프란의 몸을 잡고 왼팔로 말고삐를 쥐고 있었다. 허나 칼리가 놀란 것은 반
이 프란을 데려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반의 왼팔에, 선명하게 검상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온 힘을 다
해 그은 듯, 꽤 깊은 상처였다. 검은 경장이 뜯겨져 나간 것도 선명하게 보인다. 다만 경장의 검은색이
피의 붉은색을 가려, 잘 표시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돌아간다.”
◇ ◇ ◇
“가주님!”
“형님!”
“어떻게 됐죠?”
“프란은요?”
난감한 듯 반에게서 그 ‘물건’ 을 받아들었지만, 그 물건이 품에 안기자 시온은 그것의 정체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시온의 얼굴이 갑각류의 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진다.
그는 딱 이만한 체형의 사람을 알고 있었다. 궁정 무도회 때는 억지로 드레스를 입혀 함께 춤을 추기도 했
고, 그녀가 임무를 수행하느라 죽을 뻔 했을 때는 함께 말을 타고 도망한 적도 있었다.
“……세키에 여신님.”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신의 이름을 불렀다. 마법사 대부분이 무신론자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그 나직한
탄식은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숨을 쉬고 있다.’
“의사는 불렀다.”
시온은 처음으로, 치유 마법에 젬병인 스스로를 원망했다. 이전에는 불편하기만 할 뿐 이처럼 절박하게
그 능력을 원한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 자신이 바로 마법사임에
도! 그저 붕대에 칭칭 감겨 있는 프란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는 일 외에는.
“가주님, 다치셨잖아요?”
칼리가 발견했던 팔의 검상을 마린도 눈치 챈 것이다. 마린은 재빨리 다가와 반의 팔을 잡았다. 무자비하
게 뜯긴 검은색 경장 사이로, 급하게 지혈을 한 흔적이 보인다.
“별 것 아니다.”
“필요 없다.”
무뚝뚝하게 잘랐지만, 마린이 누구던가. 시온도 인정한 불여우 100 단이 아니겠는가. 보통 사람이라면
‘필요 없다.’ 는 한 마디에 ‘넵!’ 하고 물러가겠지만, 마린에겐 어림도 없는 소리다.
“어서요!”
아침 준비를 하느라 법석이 날 시간이지만, 오늘의 카르멘 가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가주가 저택을
비웠었기 때문이다. 온 집안 식구들이 반을 기다리느라 초조한 마음속에서 뜬 밤을 보냈다.
그렇게 말하며 마린은 반을 강제로 침대에 앉혔다. 옷깃을 마구 잡아당기는 폼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
말 덮친다고 생각할 만도 했다. 마린이 막 반의 옷을 벗기려고 손을 뻗었을 때였다. 반은 조용히, 그녀의
손을 치워 냈다. 마린이 걱정스레 바라보는 동안, 반은 묵묵히 상의를 벗었다.
“세상에…….”
드러난 반의 팔을 보면서, 마린은 저도 모르게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팔에 위치한 검상이 생각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잘못 놔뒀다간 한 동안 팔을 움직이지 못할 지도 모른다. 반이 검술 가문의 가주이고 지
금 다친 것이 오른팔임을 감안해볼 때,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시끄럽다.”
“반란은…… 종결되었습니까?”
반은 과감 없이 답했다.
“그래.”
“그래.”
“그래.”
“아일린으로?”
“……가여운 분. 또, 또 얼마나…….”
◇ ◇ ◇
“프란, 일어나봐.”
장난스럽게 호랑이 흉내까지 냈지만, 그렇게 말하는 시온의 진초록 눈동자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는
힘없이 늘어진 프란의 손을 꽉 쥐었다. 프란이 깨어 있었다면 ‘이 느끼 버터! 당장 손 안 떼?’ 라고 외
쳤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시온은 말을 잇지 못했다.
차라리 프란을 몰랐던 바람둥이 느끼 버터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렇게 괴로운 것이 감정이라면, 사랑
이라면, 다시는 이런 마음 따위 느끼고 싶지 않다. 사람 마음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발기는 것 같은
이 감각이 좋아한다는 거라면, 그런 건 평생 알지 못한 채 살아도 좋았을 것이다. 가볍게 이 여자 저 여
자를 전전했을 때는 가슴을 치는 기쁨이 없었지만 이처럼 살을 도려내는 고통 또한 몰랐기에.
똑똑똑.
“도련님, 나예요.”
‘한 잔 한 모양인데?’
시온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마린이 방 안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한 순간 비틀, 한 것이다. 거기에다
마린은 품 안 가득 와인을 안고 있었다. 그녀가 살짝 웃어 보인다.
“그래요?”
그 때였다. 마린이 와인을 방바닥에 놓아둔 채 품을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낸 것은. 그녀의 손에 들려나온
건 얇은 종이 한 장이었다. 시온은 의아한 눈으로 그 종이를 보았다. 마린은 그 종이를 시온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시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갑자기 머릿속에 얼음이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다. 시온은 그 종이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시온이 찾아냈던 크루레티나의 범인, 그에 대한 증거가 틀림없다.
“내 명줄이라니?”
“아직도 선하네요. 프란이 크루레티나에 당했던 날, 도련님이 그랬었죠. 내가 범인을 잡겠으니, 프란을
놓아주라고. 범인을 못 잡으면 도련님의 목숨을 주겠다고.”
“그 땐 내가 좀 멋있었지? 하긴 난 늘 멋지지.”
여유의 가면을 아무리 뒤집어쓰려고 해도, 잘 되지가 않았다. 원래 바람둥이의 천적은 여우인 법이다. 느
끼 버터 시온을 애송이인양 갖고 놀 수 있는 ‘진짜 여우’ 는 바로 눈앞에 있는 저 마린밖에 없다.
마린은 선선히 그 종이를 건네주었다. 종이에 적힌 것은 단순했다. 그것은 일종의 자백서로, ‘죽은 유니
를 사주해 내가 가주의 찻잔에 독을 탔다.’ 라고 적혀 있었다. 거기다가 스웬은 계획을 생각해낸 시기와
독약을 제조한 방법, 독을 가주의 잔에 탄 방법까지도 소상히 적어 놓았다.
메모를 읽은 시온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마린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
고 보았다. 마린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곧, 그녀답지 않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응?”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마린은 한 동안, 아무 말도 않고 시온의 진초록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시온은 깜짝 놀랐다.
취기 때문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마린이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저렇
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마린이었다.
“도련님, 부탁이에요. 제발 가주님께 도움이 될 일이라면, 진실을 밝혀주세요. ……안 그래도, 힘드신 분
입니다.”
“실례했습니다. 도련님.”
쾅!
스웬은 크루레티나의 원산지가 ‘카세타 서부와 로이네트’ 라고 했다. 하지만 키네세스는 ‘세이피안 남
부’ 라고 말했다. 거짓말을 할 사람이라면, 키네세스보다는 스웬 쪽이다. 그 때부터 시온은 미친 듯이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깐깐한 아린까지 구워삶아 카세타에 들어온 모든 물품들을 낱낱이 조사한 그는,
마침내 알아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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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 감사합니다!
시간은 빠르게도 흘러갔다. 앞에서 잡아당기는 사람은 있어도 뒤에서 잡아당기는 사람은 없는지, 시간은
멈추지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앞으로만 달려 나갔다.
‘하리나스.’
“……아직 빚이 많이 남은 녀석이니.”
“가주님!”
“산책 나가십니까?”
반은 말도 없이 빠르게 걸어 나갔다.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호위무사들은 긴장된 얼굴을 했다. 허나 그
들은 반을 따라 나서지는 않았다. 반이 턱짓으로 따라오지 말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호위무사들은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복도 어딘가를 향해 발을 옮기는 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은 노크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헤이튼의 방 안은 촛불 하나만 외롭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두침침한 방안, 허나 헤이튼은 잠들어 있던 것
이 아니었다. 헤이튼은 뒷짐을 지고 선 채 창밖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었다. 방문 여닫히는 소리를 들었
는지 헤이튼이 돌아본다.
“어머니에게 졌을 때, 분했나.”
“아닙니다. 원래 그 자리는 누님께 갔어야 했습니다. 저보다 뛰어난 검사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으니.
카르멘 가는 강한 자가 승계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말 속에 숨은 뜻을 반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치밀하게 계산했더군.”
“무슨 말씀이신지?”
하리나스 백작은 죽었고 보일린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스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그가 살아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제 헤이튼이 반란에 협조했음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네?”
그제야 헤이튼은 반의 허리께를 본다. 거기엔 카르멘 가주의 상징, 루니아 블레이드가 걸려 있었다. 초라
한 촛불 하나만 켜져 있어서 몰랐는데, 반의 얼굴에 음영이 내려앉은 것이 어쩐지 심상치가 않다.
반은 등을 돌리며 말했다.
“검투장으로 가자.”
◇ ◇ ◇
‘다친 것인가?’
카르멘 가주 자리는 카르멘 가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계승해야 한다. 누나인 루이사 카르멘에게 졌을 때
미련 없이 그녀를 가주로 받들었던 것은, 루이사가 자신보다 훨씬 강한 검사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여
자의 몸이었음에도 루이사 카르멘의 검은 웬만한 남자 못지않게 묵직했다. 검을 든 꽃이라는 뜻에서 ‘화
검’ 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나 자신의 누나는 그 빛나는 외모보다도 검으로 더 빛나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
라면, 가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허나.
“어머니는 너를 신뢰했지.”
“모두에게 인정받는 가주라는 건 웃기는 소리지. 이제 알겠다. ……네가 사라지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가주
가 되지 않는다.”
그 말과 함께 반은 검을 내뻗었다.
인정받고 싶었었다.
피로 피를 해결하며,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 ‘대 카르멘 가의 가주’ 로 완전한 인정을 받을 거라고 믿
었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이 가문의 유일무이한 가주로, 그래서 더 이상은 피 칠갑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리라 생각했다. 인정만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덤벼라, 헤이튼.”
반은 초반부터 밀렸다.
챙!
챙! 챙! 챙! 챙!
옆구리와 어깨, 배, 다리를 차례로 노리고 들어온 검을 반은 간결한 동작으로 막아냈다. 헤이튼은 자신이
쓰는 검술과 반이 쓰는 검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상기해냈다. 뭐니 뭐니 해도 같은 핏줄에, 같은 검을
배운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간단한 동작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것일 테다.
“누님이 기뻐하시겠습니다.”
챙!
“헛소리.”
허나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반에게 허점이 생겼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쳤을지 모르나, 헤이튼은
똑똑히 볼 수 있는 허점이었다. 바로 반의 오른팔 윗부분, 상처 입은 그 부분이다. 헤이튼은 검으로 반의
발등을 노리는 척 하며, 반이 그 곳을 막으려 몸을 트는 순간 그의 팔을 한 차례 강하게 내리쳤다. 공격
은 정확하게 먹혔다.
“……!”
챙! 챙!
‘그래도 내겐 아직 이르다!’
챙!
달은 고요히, 삼촌과 조카의 검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챙! 챙! 챙!
두 검의 합이 눈부시다.
“억!”
그러다 한 순간이었다.
‘승부를 걸었군!’
‘기회다!’
“……!”
헉, 헉.
반은 조금 망설이다 답했다.
“……시종의 수법이다.”
“……졌습니다.”
헤이튼은 후, 하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여위어 빛나는 달이 그런 헤이튼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
다.
우스운 일이었다.
‘내가, 진 것인가?’
“……로이네트로 가라.”
“무슨 말씀이신지요?”
반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헤이튼은 정면에서 바라보는 반의 또렷한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반은 헤이튼의 눈을 쏘듯이 바라
보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
“그런 적 없습니다.”
또렷한 증거가 없는 일은 발뺌하면 그만이다. 헤이튼은 차분하게 그렇게 응대했다. 반의 차가운 눈동자가
꿈틀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스웬이라고? 죽은 게 아니었나?’
믿을 수가 없었다.
“왜……?”
“어머니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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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소식 하나!
드림워커 프로 연재란에서 새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제목은 <인어왕자>입니다.
오나주 끝내기도 전에 뭣이라?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가만히 그 짱돌을 내려놓으시구요.. (하하;) ...
잠수 동안에 썼던 글이라 오나주 연재 속도에 타격을 주지는 않을 겁니다. 즐겁게 썼으니 생각 있으신 분
은 읽어주세요.
여하간 또 한 편, 업합니다.
이번 편은 좀 길어요 ^-^ 24KB 나 되다니... 이건 둘로 쪼개어도 황금빛이 나오는 양이 아닌가.... (머
엉)
(그런데 어째서 글의 퀄리티는 떨어지는 것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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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0 : 즐거운 나의 집
반란이 종결된 지 16 일째 되는 아침, 오렌지색 눈동자의 소녀는 가만히 눈을 떴다. 프란은 여기가 어딘가
싶어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어라?’ 하는 소리를 냈다.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보일린
그 자식이 날 또 납치했나, 라는 생각에 주변을 미친 듯이 훑어보던 프란은, 곧 천장의 무늬가 익숙하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나 산 거야?”
“물마시고 싶어.”
“여, 뮤!”
“프란!”
“아야!”
“어머, 미안!”
“뮤.”
“응.”
뮤가 아무 말 않고 다시 눈물만 흘린다.
“왜, 왜 그래?”
가슴이 뜨끔해진 프란이 의아한 눈으로 묻는다. 뮤는 담담한 얼굴을 만들어 보려 애썼지만, 그것이 뜻대
로 되지는 않았다. 한참만에야 겨우 눈물을 멈춘 뮤는 프란에게 다가와 그녀의 목을 가만히 감싸 안았다.
엉겁결에 뮤의 가슴에 파묻힌 프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프란은 몸을 비틀어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가만히 속삭인 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프란, 약속해줘.”
“다시는, 이런 몸으로 누워있지 않겠다고. 나, 프란이 나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아.
하지만, 아프지 마. 부탁이야.”
프란도 목이 멘다.
“미안해.”
◇ ◇ ◇
“어이구, 우리 프란양은 오늘도 아리따우시네! 누워 있을 때는 내가 뽀뽀해도 가만히 있기에 어찌나 좋았
던지! 이제 일어났으니 그런 짓 했다간 턱이 날아가겠다, 그지?”
“으아악! 작작 좀 해, 느끼 버터!”
프란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쳤다. 그러나 시온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아랑곳이 다 뭔가.
시온은 날듯이 다가와 프란의 어깨를 감싸 안기까지 했다. 이거 못 놔? 하며 버둥대던 프란은 곧 온 몸에
힘을 빼고 말았다. 16 일 만에 의식을 찾은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밀어낼 힘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시
온은 그런 프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후, 하고 깊은 숨을 내쉰다.
시온은 프란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며 저도 모르게 히죽, 하고 웃었다. 프란은 참지 못하고 결국 말해버리
고 말았다.
퍽!
‘과격한데, 프란.’
시온이 다시 험험, 소리를 내며 프란의 옆으로 오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예전 어느 때처럼,
시온은 ‘어느 부위’ 를 손으로 가린 채 절룩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프란은 비록 느끼 버터이긴 해도 정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설명해주기에 시온보다 적합한 인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온이 프란의 침대에 살포시 앉는다. 프란은 대뜸 물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는 대신, 시온은 가만히 손을 뻗어 프란의 얼굴을 만졌을 뿐이다. 프란은 그 손을 파
리라도 되는 양 찰싹 내리쳤다.
“이 자식이!”
프란은 울컥 그렇게 말하고 싶다. 이 깊은 진초록 눈동자는 자신이 아닌 훨씬 아름답고 화려한 여성을 향
해야 한다. 그러나 프란이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시온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 ◇ ◇
“……라는 거지.”
한참 동안, 프란은 입을 조금 벌린 채 시온의 이야기를 멍하니 듣기만 했다. 이야기가 다 끝나도 프란에
게서 반응이 없자, 시온이 프란의 팔을 쿡 하고 찔렀다. 프란이 비명 내지르듯 소리를 지른 건 그 순간이
다.
“암, 암. 그랬고말고.”
“아는 척 좀 하지 마!”
프란이 ‘미친 거 아냐?’ 라고 소리친 이유를 시온은 알지 못했다. 프란은 다시금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
동을 간신히 참는다. 저 가주는, 제 2 궁을 통째로 전복시켜 사람들을 압사시킨다는 어마어마한 발상을 한
것도 모자라 그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왔다. 타이밍을 생각해봤을 때 그 것 말고는 도
대체 답이 없다. 어떻게 왔는지도 알 수 없다. 자신은 기절해버렸으니까. 하지만, 반은 왔었다. 거짓말
처럼.
“그래서, 대마왕은?”
“……어, 다쳤다며?”
조금 더 시온과 이야기를 나누던 프란은 갑자기 하암, 하고 하품을 했다. 궁금증이 풀리자 급격히 졸음
이 밀려온 것이다. 피로의 기색이 얼굴에 다 드러났는지, 시온이 앉았던 자리에서 훌쩍 일어섰다. 더 같
이 있고 싶지만, 지금 일어난 사람을 무리하게 만들면 안 되니까.
“일단은 안정을 취해, 프란. 마린은 지금 집무 중인데 오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 밤이 되면 널 찾아오려
고 들겠지만, 내가 내일 오라고 말해둘게.”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은 문을 나서기 전, 갑자기 몸을 돌리며 프란을 향해 찡긋, 윙크를 해보였
다. 그 모습에 또다시 닭이 돼버린 프란에게 시온이 말했다.
“있지, 프란.”
“……자유로워지고 싶지?”
“아니야, 쉬어.”
◇ ◇ ◇
“깨어났습니다, 가주님!”
“역시 죽지 않는 꼬맹이예요!”
둘은 신이 나서 소리쳤다.
‘죽었다.’
“나가라.”
“예, 옛! 죄, 죄송합니다.”
“카르멘 경?”
‘그, 그게 아니면 궁궐이 아닌 카르멘 가에 기념탑을 세우는 게 못마땅한가? 공적을 치하할 때는 남들이
다 보는 곳에다 기념탑을 세워줘야 하는데 광장 같은 길가도 아니고 궁궐도 아닌 자기 집안에다 주는 게
못마땅할 수도 있지! 자기만 보고 좋으면 끝이니까. 아악, 그것도 아닌가? ……설마, 내 말투가 전체적으
로? 안 돼, 이제 더 이상 끌려 나가는 건 사양이야!’
사신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으니 사신이 오는 것인데, 이쪽에서 친히 와주겠다
니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났다고?’
반은 문을 열었다.
‘지금, 웃고 있는 거냐.’
◇ ◇ ◇
“마린, 삐쳤어?”
둘 사이에 싸늘한 침묵이 옷자락을 내렸다. 반을 아줌마로 만들어버린 프란은 필사적으로 입안에서 단어들
을 굴렸다.
“…….”
“……살려주세요.”
‘안 물어봤는데?’
차라도 내와야 하나, 프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차를 가져오려면 저 멀리 부엌까지 가야한
다. 환자인 몸으로 거기까지 가는 건 아무래도 무리지 싶다. 멀쩡하게 보이려고 꽤 노력했지만, 아무리
강철 체력인 프란이라 해도 16 일 만에 처음으로 눈을 뜬 날이다. 아직도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은데 차
를 가져올 여력이 있을 리가 없다.
“……그 때, 말인데요.”
“어떻게, 오셨어요?”
“무슨 말인가.”
다 알면서도 시침 떼는 거다, 하고 프란은 속으로 생각했다.
‘심술탱이 대마왕.’
‘으윽.’
프란은 속으로 혀를 날름 내민다. 부끄러워서다. 확실히 거기엔 왕도 있고, 공주도 있었다. 그런데 ‘어
떻게 날 구하러 왔냐.’ 라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 자신이 우습다.
반이 답했다.
“엥?”
프란은 아일린을 그저 ‘정말 잘 사는 대단한 갑부 집안’ 쯤으로 알고 있지만 아일린은 그렇게 간단히 정
의되는 집단이 아니다. 카르멘 가도 복잡한 사연을 갖고 있긴 마찬가지지만, 그 내부 구조를 살펴보면 생
각보다 훨씬 단순함을 알 수 있다. 가주를 정점으로 완벽하게 위계 질서화 된 가문. 허나 아일린은 생각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파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가주부터 시작해 원로원, 비켈린, 세라딘, 정초원,
위저드 리그…….
위저드 리그에는 천재적인 마법사들, 과학자들이 아일린을 위해 오늘도 봉사하고 있다. 시온만 만나면 패
죽이려고 드는 시온의 스승 자켈린도 바로 그 아일린의 마법사중 하나다.
“다친 데 없어요?”
‘대마왕, 넌 다친 덴 없냐?’
진짜 말투와는 다른 고운 말투를 구사하느라 프란은 꽤 힘이 들었다. 하긴 물으나마나였다. 헤이튼과의
검투로 더욱 악화된 팔이 옷 속에 단단히 감춰진 탓에, 반은 너무나 멀쩡해 보였던 것이다.
반은 한참 후 입을 열었다.
“엉? 왜요?”
그녀는 ‘저스티스 카르멘’ 이나 ‘시즈 아일린’ 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마왕, 그 자체를 원한다. 그
것은 그 짧은 시간 접촉한 프란도 알 수 있을 만큼 깊은 감정이었다. 대체 가문 말고 뭔가 생각하는 게 있
을까 싶은 저 가주는 왜 그녀와 결혼하지 않는다는 걸까?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인데.
“건방지군.”
“락케이드가 누구냐.”
프란은 어느덧 꿈을 꾸는 것 같이 행복한 얼굴이 되었다. 순식간에 찾아온 평화가 그녀의 얼굴을 물들인다.
“그렇군.”
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정을 취해라.”
‘이 대마왕!’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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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광란이었죠.
예, 뭐. 잡담이었고요.
일요일은 오나주 연재가 없습니다. 참고 하시길 바래요 ^-^;
연참을 위해 아껴두려다 그냥 올립니다.
이번 편도 자르기가 좀 그래서 양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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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가로 갈 때, 데려가야겠군.’
아일린으로 돌아가면 세라딘 문제로 한 동안은 골머리를 앓겠지만 그것은 원래 예정된 일이었으니까.
반은 낮게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가주로 있을 당시, 문하생들은 평화로웠다. 그것은 어머니의 덕이고 힘이었을 것이다.
똑똑똑.
“형님, 접니다.”
“……들어와.”
“무슨 일이지?”
반의 검은 어둠 속에서 검휘를 뿜고 있었다. 살기를 머금지 않아도 무서운 검이다. 시온은 반의 정면,
반이 검을 뻗으면 그대로 심장을 맞을 그 위치에 가서 섰다.
반은 오늘의 시온이 평소의 시온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언제나 방긋 방긋 웃음을 머금고 있던 진초록
의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흐르고 있다. 저런 눈은, 오히려 시온이 어릴 때 자주 봤다. 반에겐 고모이고,
시온에겐 어머니인 이진느 아일린이 ‘안 돼!’ 라고 소리를 칠 때마다 어린 시온은 저런 눈을 했었다.
하지만 성장한 뒤로,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 일은 거의 없었다.
시온이 입을 열었다.
“형님. 저를 보십시오.”
“보고 있다.”
“앉아라.”
“마린에게 들었다.”
이렇게 이 일은 묻혀 진다. 시온은 마음이 쓰리다. 그래도 그는, 일단 그 건을 잊기로 했다. 오늘의 본
론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온은 더 이상 우물 쭈물거리지 않기로 했다. 그는 정말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반의 눈썹이 꿈틀했다.
“표정을 보니 취향이 어쩌니 하고 싶으신 것 같은데, 그러지 마십시오. 자유롭게 해주십시오. 프란에게
남은 빚, 제가 모두 갚겠습니다. 다시는, 위험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한 번 더 그런 꼴로 들어오는
거 보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아일린의 재산, 제게도 상속권이 있다는 것 아시겠지요. 전에도 말
씀드렸듯이 저는 아일린의 재산 따위 필요 없습니다. 전부, 제 몫까지 전부 다 형님이 가져가십시오. 승
계권도 필요 없습니다. 그 정도면 프란이 진 빚의 수 십 배는 되겠지요.”
“전 형님을 존경합니다. 여태껏 그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러나 형님의 방식은 좋아하지 않
습니다. 프란, 보내주세요.”
여자에게 매료되는 것은 한 순간. 갖고 싶음도 한 순간. 메이는 건 질색이다. 그러나 프란은 다르다.
지켜주고 싶고 아끼고 싶고 함께 하고 싶다. 이런 게 사랑이라 불리는 감정이라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프란이 자유로워지면 데리고 떠나고 싶다. 곁에 두고 천천히 마음을 열고 싶다.
“싫다.”
“시온.”
반이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시온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시온의 눈에서 농담이 사라지니 이
것도 묘한 느낌이다. 반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내 시종이다.”
“……!”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 ◇ ◇
“아이고, 삭신이야.”
“오랜만이야!”
“가주님, 식사 왔습니다!”
“들어와.”
‘윽, 저 산은 다 뭐다냐!’
“나흘, 딱 맞췄죠?”
프란이 씩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이 의자에서 일어서 탁자 쪽
으로 다가온다. 탁자 위에 오늘 준비된 아침 식사를 늘어놓으면서, 프란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지
는 걸 느꼈다. 왜 처음 눈을 뜬 날 ‘즐거운 나의 집’ 같은 얼토당토않은 노래가 생각났는지 이젠 알 것
같았다. 지긋지긋한 대마왕이 있는 이 카르멘 가가 어느새 그녀의 집 비슷한 것이 되었음을, 반의 탁자에
아침 식사를 올려놓는 이 만만찮은 하루의 시작이 어느 덧 자연스러운 일과가 되었음을, 프란은 인정하기
로 한다.
반은 의자에 앉았다. 그로서도 프란이 가져오는 식사를 먹는 것은 오랜만이다. 프란이 쓰러져 있던 이
며칠간엔 뮤 이레아스라는 시녀가 덜덜 떨며 프란 대신 그의 식사시중을 들어왔다. 참 이상한 일이다. 프
란이 저 자리에 서 있는 지금에야 ‘반란은 정말 끝났군.’ 하는 생각이 드는걸 보니.
“왜 그러나.”
“토끼 구이 좋아하세요?”
“먹어라.”
“에?”
“난 안 좋아한다.”
“와, 맛있겠다!”
“……케첩이나 닦아라.”
“…….”
허나 즐거운 식사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이 식사를 반쯤 마쳤을 무렵, 문 밖에서 방해하는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호위무사의 음성이었다.
반은 순간적으로 헤냔의 얼굴을 떠올렸다. 헤냔이 한 번쯤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
면 식사가 종결될 거란 생각에, 토끼 고기를 거의 우겨넣다시피 하고 있던 프란도 의아한 얼굴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누구인가.”
“세라딘의 사키입니다.”
“들여보내.”
여자, 사키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사키가 프란을 만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처음 사키가 프란을 봤던
것은 카세타 왕궁 무도회에서였다. 사키는 그 때 프란의 목에 검을 대고 협박을 하려 했었다. 허나 그 일
은 실패로 돌아갔다. 갑자기 시온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때 사키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마법사인 시
온이 처음으로 발명했던 안개 탄을 바로 그 발명자 앞에 집어던지고 도망갔었다.
프란의 시선을 일별한 후, 사키는 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감기에 걸린 양 목소리도 걸걸하게 냈다.
허나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프란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무렵, 반은 살기를 숨기지 않은 채 사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프란은 아
까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던 그 살기에 잠시 몸을 굳혔다. 도대체 저기 있는 저 방문자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저 사람 때문에 반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스물두 번째 개로군.”
“웃기는군.”
사키는 속으로 계속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표면적으로, 셀키를 제외하면 세라딘은 이 반란과는 상관없
는 사람들이다.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프란은 엉뚱한 일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프란은 셀키라는 이름을 어디
선가 들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생각이 난다. 식당에서 그녀와 검을 섞었던 푸른 머리의 남자를 말
하던 거다. 순간적으로 프란의 눈이 불타올랐다. 그 때는 너무 큰 차이로 당했었다. 반드시, 설욕을 할
것이라 다짐했었던 프란이다. 갑자기 호기심이 맹렬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허나 이 심각한 상황에 끼어
들어 ‘그래서, 그 셀키라는 놈은 너랑 무슨 관계인데?’ 라고 물었다간 목이 달아날 판이다. 프란은 일단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꾹 내려참았다. 그러면서 프란은 사키의 얼굴을 더더욱 빤히 바라보고 시작했다.
그야말로 빤히.
사키는 그 시선을 느끼고는 더욱 더 고개를 숙였다. 시즈 아일린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지경인데
프란이 저런 시선으로 보고 있으니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사키였다.
“믿어 주십시오, 가주님! 저희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현장에서 찾아낸 셀키의 시신을 조각조각 찢었
습니다. 또한 저희가, 셀키가 도와주고 있던 보일린 이스티네라는 남작을 잡았습니다. 도망 중에 있던 남
자라, 저희 세라딘이 아니었다면 놓쳤을 겁니다. 아! 그리고 여기, 그 보일린이 가지고 있던 가주님이 검
입니다.”
‘더러운 놈들.’
다시, 사키는 반이 자신을 베려 한다고 느꼈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선명한 영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
쳐지난다. 저 은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지 말자! 그러면 모든 게 끝이야. 마주 하지 마!
“……가주님.”
콰직!
프란이 그랬을 진데 사키는 더 말해야 무엇 하겠는가. 사키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가, 가주님.”
“아일린에서.”
“목을 씻고 기다려라.”
◇ ◇ ◇
사키가 돌아간 뒤, 프란은 반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고 있었다. 대마왕의 기분이 너무 안 좋은 듯해서 한
참 망설이고 있던 프란은 반이 다시 서류를 집어 들자 그 때서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저기, 가주님.”
말 없는 긍정이 이어진다.
“궁성에요?”
프란이 되물었다. 프란은 그제야 키네세스와 키네온에게 생각이 미친다. 자신을 하리나스와 스웬의 미끼
로 썼던 키네온과 안타까운 듯 그런 키네온을 원망하던 키네세스. 분한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건 아니나,
프란은 그에 대한 복수심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저 쪽은 한 나라의 왕이고 가신도 아닌 자기를
장기판의 말 다루듯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쨌든, 자신은 살아있지 않은가.
키네세스라면 더더욱 원망할 생각이 없는 프란이다.
“예, 그럼 잘 다녀오세요.”
“너도 간다.”
“네? 저는 또 왜요?”
“옷을 갈아입어라.”
“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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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은 잘 읽고 있습니다.
PART 21 : 궁궐에서
“어서 들라하라.”
곧 문이 열렸다.
“카르멘 경, 어서 오시오.”
“카르멘 경…….”
키네온의 말투에는 프란을 미끼로 쓴 것에 대한 죄책감 따위는 들어 있지 않았다. 프란은 그것에 조금은
화가 난다. 아무리 왕이라 해도 그렇지, 저런 식으로 나올 것까지 있나 싶은 것이다. 그래도 프란은 참는
다. 허나 프란의 말투는 저도 모르게 조금 비틀려 나왔다.
“빚이라니요?”
“카르멘 경!”
“하문 하십시오.”
“그 빚, 제가 갚아도 되나요?”
“……예?”
“그, 그게 무슨?”
반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빚은 3 천 5 백만 케트입니다.”
키네세스가 놀란 것은 당연지사.
“네? 네? 3 천 5 백만 케트라고요?”
말끝에 키네세스는 프란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병약한 공주님이 짓는 미소는 그야말로 환상적이
다.
반과 프란을 연결해주는 관계는 오직 하나, ‘빚’ 뿐이다. 주인과 시종이라는 관계도 오직 그 빚 아래에
서만 작동한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프란은 ‘신분’ 같은 걸로 카르멘 가에 묶이지 않는다.
반으로서는 키네세스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시온이 찾아왔을 때는 프란이 없었기에 ‘싫다.’
고만 말하면 그만이었지만 이번은 다르다.
“네?”
“이달 내로.”
“그랬군요. 이달 내로라니.”
키네세스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키네온이 그녀를 조용히 가로막았다. 키네세스는 슬픈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곧 그녀가 나직한 한숨을 쉰다.
“…….”
“두 번째는…….”
◇ ◇ ◇
“아바마마!”
키네세스는 울듯이 키네온을 다시 불렀다. 허나 키네온은 입술을 다문 채 침묵할 뿐이었다. 키네세스는
눈물이 맺힌 채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연약한 공주님의 몸에서 결연한 의지가 배어났다.
◇ ◇ ◇
반과 프란은 왕실 정원을 막 지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발밑에서 보드랍게 밟히는 잔디에 기분까지 좋아진
다. 프란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니었나.”
‘으윽.’
“전 말입니다, 가주님. 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부터 제 인생을 책임질 사람은 저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
다. 제 힘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제 인생을 제 힘으로 온전히 책임졌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럼 락케이드에게도 부끄러울 겁니다.”
프란이 뭐라고 외치든 간에, 반은 아랑곳 않고 걷기만 했다. 그런 반의 뒷모습을 보며 프란은 ‘제대로
된 소원도 없는 대마왕 같으니.’ 라고 중얼거렸다.
그 때였다.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다 말고, 프란은 놀란다. 거기에는 키네온보다, 키네세스보다
며칠 간 훨씬 수척해져버린 사람이 서 있었다.
“헤냔 키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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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한 순간, 헤냔과 프란의 눈이 마주쳤다. 무섭게 타오르고 있던 헤냔의 눈가가 조금이나마 부드러
워진다.
‘무사했구나, 프리나.’
자신을 바라보는 노골적인 시선에, 프란은 몸을 꼬았다. 아직도 헤냔이 부담스러운 프란이었다.
‘이렇게 마주치는군.’
“…….”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겁니다.”
“어린애로군.”
반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차갑다, 프란은 그렇게 느낀다. 헤냔이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다면 반은
차갑게 내려앉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째서 반 역시 헤냔만큼이나 슬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걸
까.
곧, 소년 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평소의 헤냔이라면 결코 이렇게 빈정대며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헤냔은 지금 짙은 비애감에 젖어 있었다.
강하기만 하다면, 자신에게 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반에게 달려들고 싶었다. 허나 손목을 걸고 벌인 저
번 승부에서 뼈가 저릴 만큼 알았다. 그가 반군의 대장 센을 가볍게 베어 넘길 때도 호흡이 가쁠만한 충격
으로 분명히 알았다.
헤냔 자신의 검은 저 남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헤냔은 그래서, 이 슬픔을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덤벼, 헤냔 키에르!”
“뭐……?”
“앗!”
어찌됐든 방어하지 않으면 당하겠다는 생각에 헤냔도 검을 뽑았다. 그리고서 헤냔은 부끄러워진다. 습관
처럼 늘 검을 들고 다니긴 하는데, 저번 전투 후 그 검을 한 번도 손질하지 않았던 것이다. 적의 피는 아
직도 헤냔의 검에 말라붙어 있었다. 프란은 그런 헤냔의 검을 가차 없이 비웃었다.
챙! 챙! 챙!
‘강해졌구나.’
헤냔의 눈빛이 변했다. 이번에는 원망을 가득 담아서가 아니라, 투지를 머금어 그의 눈이 타오른다.
‘그래, 그 눈.’
챙!
프란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 역시 죽음의 위기를 몇 번이나 뛰어 넘으며 더더욱 강해지지
않았던가.
헤냔의 검이 처음으로 프란을 노리고 들어왔다. 프란은 그 검을 부드럽게 흘리며 헤냔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헤냔이 주춤하는 사이, 프란은 아무 망설임 없이 헤냔의 배를 쾅, 들이박았다.
“윽.”
헤냔이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2 주일이 넘게 계속 술을 마셨던 헤냔의 컨디션은 최악일 수밖에 없었다.
프란은 비틀거리는 헤냔을 향해 재차 검을 휘둘렀다. 가볍게 무릎을 노린다. 헤냔이 발을 살짝 벌린다.
프란은 슬쩍, 그런 헤냔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헉!”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프리나, 나는…….”
헤냔이 막 무어라고 말하려 한 그 때였다. 프란이 갑자기 철썩, 하고 헤냔의 얼굴을 후려친 것은. 헤냔
은 놀라 눈을 부릅떴다.
“뭐?”
“프리나?”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프란이 말했다.
헤냔은 아무 말도 못했다.
“하지만 이제 아니야. 난 이렇게 남을 원망하며 자기 슬픔을 달래는 녀석을 라이벌로 삼고 싶지는 않
아.”
“프리나.”
“왜!”
“……고마워.”
흥, 소리를 내며 프란은 돌아섰다. 씩씩거리며 발을 옮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헤냔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프리나의 말이 옳다. 힘이 없는 것을 원망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문득 헤냔의 눈이 번쩍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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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챕터가 1 부 마지막입니다.
이런저런 수많은 사연 끝에 오나주 4 권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즉, 출판된다는 말입니다.)
담당님께 원고를 넘기면 책은 빠른 시일 내에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수정하느라 박 터지는 하루입니다.
(2 년 반의 공백을 메우는 수정.... 지금보다 훨씬 글을 못 썼군요
. 지금보다 못하다니, 정말 최악이야... 따위를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예, 그럼 다음 챕터에서 뵙겠습니다.
1 부 마지막 챕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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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 아일린 가로!
궁궐에서 돌아온 저녁, 반은 의사를 불러들였다. 며칠 지나면 낫겠지, 싶었는데 이 상처가 심상치가 않
았기 때문이다. 의사는 놀란 눈치였다.
“어쩌다 이러셨습니까?”
반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알 것 없다.”
의사는 반의 반응에 잠깐 얼굴을 찌푸렸으나 곧 눈앞의 사람이 카르멘 가주라는 것을 상기, 재빨리 가방
에서 부목을 꺼내들었다. 반의 팔 상태는 아주 안 좋았다. 아무래도 크게 베인 후 무리하게 움직였던 모
양이다. 이 상태라면 완치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필요 없다.”
“이걸 안 하면 위험합니다.”
“시끄럽다. 그만 나가봐라.”
이제 곧 아일린 가로 돌아간다.
‘어쩐다.’
반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유난히 녹색 비나룬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 * *
“프란.”
“웬일이야?”
“우리 예쁜 프란 보러 왔지.”
누가 시온 아일린 아니랄까봐.
“……당장 꺼져.”
프란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시온은 조용히 눈을 감고는 양 손을 가슴팍에 모았다. 곧, 그가
무언가를 중얼중얼 외우기 시작했다. 시온의 손에서 거짓말 같이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또 마법이구
나. 프란은 눈을 크게 떴다. 시온은 보란 듯 손을 벌리며 눈을 떴다.
“어, 어?”
나비들은 프란의 주위에서 맴돌기도 하고, 검투장 안을 날아다니기도 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 나비들
이 한 줄기 빛 같아 보인다. 감탄하는 프란 앞에서 시온이 눈을 찡긋 했다.
“예뻐.”
“응, 프란만큼.”
“아일린에서 기다릴게.”
“……뭐?”
프란은 시온의 가슴을 슬며시 밀어냈다. 시온은 순간적으로 상처 받은 표정을 지었으나, 곧 거짓말처럼
그 표정을 녹여 없앴다.
“프란.”
“왜?”
* * *
시온이 떠난 지 삼일 째 되는 아침.
“진심이세요?”
‘농담이지, 대마왕?’
“죽고 싶나.”
“……아뇨. 전 오래 살 건데요.”
이해할 수 없는 건 이거다.
“말이 많군.”
반은 반대로 생각이 있었다. 우선, 아일린 가에는 알리지 않고 떠나야 한다. 급습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
으니까.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그의 팔이었다. 의사는 한 달 꼬박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럴 시
간은 없었다. 누군가와 함께 떠난다면 그는 반의 부상 소식을 알게 될 것이다. 차라리 반이 원래의 컨디
션이라면 공격하지 않을 사람들도 반이 상처 입었다는 것을 알면 쌍수 들고 공격해올 것이다. 조용히 떠나
는 것이 낫다.
“내일 떠난다.”
반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마지막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프란은 죽어라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 * *
“다녀와.”
마린의 반응은 담백했다. ‘대마왕이 내일 떠난데!’ 라고 말하기 무섭게 마린은 단정하게 이별의 멘트를
했다. 어차피 빚을 갚는 동안은 반의 옆에 있어야 하니 아일린에서 곧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흥, 알고 있었지?”
“그럼. 내가 달리 집사장이겠어?”
카르멘 가보다 무서운 곳이라니, 프란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뮤는 아랑곳 않고 프란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 아무리 무서운 곳이라도 좋으니 프란과 함께 가고 싶었던 것이다. 프란은 그런 뮤를 다
정하게 한 차례 안아주었지만 뮤의 울음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프란은 뮤의 핑크색 머리카락을 가
지런히 넘겨주며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괜찮아, 뮤. 또 볼 수 있을 거야.”
“프란, 흑.”
* * *
새벽이다.
프란은 거울 앞에서, 반이 주었던 단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언제 길었대?”
“가주님!”
“제가 좀 늦었죠?”
“들어라.”
말하기가 무섭게 반이 자기의 발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에는 도무지 여행용 ‘짐’ 이라고 보기엔
무리인 거대한 ‘짐 뭉치’ 가 있었다.
“…….”
“침낭.”
“뭐라고요!”
“……마, 마차는요?”
곧, 두 필의 말이 출발했다.
* * *
“……무, 무겁…….”
무겁다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프란은 침낭들을 쌍으로 메고 저벅저벅 걷고 있었다. 물론 반은 본
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란은 속으로 이를 우득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프란은 기분이 꽤 들떴다.
이게 얼마 만에 가는 세이피안인가.
‘이 짐만 아니면 더 기쁠 텐데.’
“아, 이거 진짜 무거워요.”
“가주님, 우리 밥은 안 먹습니까?”
“조용히 해라.”
석양이 뉘엿뉘엿 졌다. 프란의 금색 머리칼이 그 석양을 받아 찬란한 빛을 낸다. 아름다운 그 머리칼을
잠시 보고 있던 반은 둔덕 위에서 멈춰 섰다. 잠시 뒤, 프란도 끙끙거리며 그 둔덕 위로 올라섰다. 반의
옆으로 온 프란이 엇, 하는 소리를 낸다.
“이건?”
반은 무덤 앞에 앉았다.
가문의 이름은 붙어 있지 않다. 아버지의 아일린도, 어머니의 카르멘도 없다. 무덤에 새겨진 이름도 애
칭이다. 로웬이 아닌 로이로, 루이사가 아닌 루사로 그의 부모는 여기에 영원히 묻혔다. 마지막까지도 전
대륙에는 자신들의 결혼을 비밀로 한 채-
“어디 가는 건가.”
“잠깐만요.”
어머니.
“가주님!”
시종은 저 편에서 마구 달려오고 있었다. 어디서 꺾었는지, 프란의 손에는 풀꽃이 잔뜩 들려 있었다. 뭔
가, 싶어 반이 앉은 채로 올려다보는데 프란이 그것을 가지런히 엮어 무덤 앞에 놓는다.
“……반.”
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받은 이름.”
* * *
정확히 일주일 뒤.
오! 나의 주인님 1 부 완결입니다.
공지사항 업뎃되니 읽어주셔요.
티타임 PART 2.
그 첫 번째, 프란 프리텐.
그 때, 난데없이 예정에도 없던 헤냔과 키네세스 난입. 가넷이 흠칫하는 사이 멋대로 떠들기 시작.
가넷 : (약간 기죽은 얼굴) 저기, 키네세스 공주님. 아무리 당신이 공주이긴 해도 나는 당신을 만든 사
람……
가넷 : 또 라고 하지 마. 저번 티타임은 벌써 3 년쯤 전에 있었잖아……
가넷 : 후후후. (먼 산)
가넷 : ……너 왠지 똑똑해졌다?
프란 : ……나 원래 똑똑해.
가넷 : 너, 쌓인 게 많구나.
프란 : …… 당연하지.
프란 : 어.
가넷 : 그거 엄청 비싸다?
프란 : ……뭐?
가넷 : 팔면 빚도 갚을 수 있지 -_-
프란 : 헉! 그게 정말이야?
가넷 : 응.
가넷 : 응.
가넷 : 어째서?
가넷 : 대답이나 해!
가넷 : 풋!
프란 : 죽을 만큼 부려 먹어주마, 으하하!
가넷 : 뭐, 뭐야! 이, 있는 거냐!
프란 : 이상형은 집사 같은 남자.
가넷 : (휘청)
프란 : 또, 첫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넷 : +_+
프란 : 집사.
프란 : 야,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
가넷 : 음? 응, 물어봐.
티타임 PART 2.
티타임 PART 1 때의 처절한 실패를 돌이켜보는 가넷. (겁나서 반에겐 변변히 말도 못 시켜봤음) 이번에는
단단히 각오를 하고!
프란 때와는 달리 다양한 음식들 준비. 대학로 빵굼*에서 공수해온 고구마 모양의 달콤한 빵을 내온다.
일단 입이 고급이니까…… 뭘 준비해야 될지 모르겠어. (털썩) 일단 되는대로 딸기 생크림 케이크와 블루
베리 치즈 레어 케이크, 아몬드 초코 쿠키 등을 모아온다.
차는 반이 즐겨 마시는 뮤니아 차!
반 : ……
가넷 :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아, 저기. 오랜만……
반 : 뭔가.
가넷 : 루, 루니아 블레이드 좀 치우고 말하면 안 될까요? 아무리 나한텐 그 세계 무기가 안 통해도 역시
싫은 건 싫단 말입니다 ㅠ_ㅠ
반 : 나는 바쁘다.
가넷 : ……아, 예. 짜, 짧게 할게요.
반 : …….
가넷 : 시, 시작할게요.
반 : …….
반 : ……바쁘다 했다.
가넷 : 모, 모른다니요?
반 : 읽어보면 알 것 아닌가.
가넷 : …….
반 : ……더 할 말 없는가?
반 : 그랬나. 몰랐군.
가넷 : ……. (저기요?;)
반 : …아직 안 끝났나?
반 : ……헤이튼 쪽이 낫다.
반 : 엄했다.
반 : 그래서?
가넷 : …….
반 : …….
반 : 하리나스. 락케이드.
가넷 : 제 2 의 켈리란 무엇인가요?
반 : …….
반 : 그래.
가넷 : (포기) 노래 잘하십니까?
반 : 해본 적 없다.
가넷 : 정말입니까?;;;
반 : …….
반 : ……가겠다.
반, 벌떡 일어남.
반 : (살기) 보내라.
가넷 : 네에 ㅠ_ㅠ
늘 그랬듯이.
상대가 반일 때는 별 알아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ㅠ_ㅠ 너무 앞서나가는 질문은…….
그 세 번째, 시온 아일린.
평온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가넷. 심지어 준비한 것도 데자와, 캔 커피 (그것도 500 원짜리), 그
리고 엄마손 파이, 빅 파이 같은 것들이다. 반 때와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성의 없는 준비. 그러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시온 아일린 : 이하 ‘시온’
가넷 : 기억력 한 번 좋다;;
가넷 : ……됐으니까 와서 앉아.
가넷 : ……병원 같은 덴 안가도 돼.
시온 : ……거짓말. 비쌀 리가 없을 것 같은데.
시온 : 그건 비. 밀. (윙크)
시온 : 하하하하하하하하!
가넷 : 우, 웃다니?
시온 : (눈에 맺힌 눈물을 닦고 있다) 아아, 형님과 똑같은 미모의 ‘여성’ 이라면 고려해볼게.
가넷 : 응, 그렇긴 해.
가넷 : ……
시온 : (웃으며) 왜?
시온 : 당연. 레이니아 왕비가 아무리 예뻤다 해도 프란만큼 찬란하게 빛나진 않았을 거야. 프란은 뭐랄
까, 별 같아. 아무리 멀리 있어도 반짝반짝 빛이나. 누구나 프란에게 끌리는 건 바로 그 빛 때문 이겠지.
가넷 : (빛이 아니라 빚이겠지……) 자켄린에게 얼마나 맞았기에 이제 감흥이 없는 거야?
가넷 : 어릴 때 반을 어떻게 생각했어?
시온 : (약간 인상) 어머니가 끌고 갔어. 속셈이 있었겠지. 별로 흥미가 없었는데, 스승님이 나보고 천
재라고 하더라고. 이럭저럭 여자 만나는 거 말고는 별 할 일도 없고 해서 남는 시간에 스승님이랑 같이 보
내게 됐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마법을 익히게 된 거야. 여러모로 유용하지, 마법이란 건. 나비도
만들 수 있고. (웃음)
시온 : 날 너무 잘 아는군.
시온 : 피임은 철저히. 여자를 울린다면 최악의 남자지. 사귄 여자는 잘 모르겠어. 세어본 적도 없을뿐더
러, 지금이야 어찌됐든 그 때 그 때마다 내 감정이 완전히 거짓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겠어? 그녀들을
‘나와 사귄 사람들’ 이라고 뭉뚱그리고 싶지 않아. 가끔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이름으로, 얼굴으로,
느낌으로 기억하고 싶지.
이상 시온 아일린과의 인터뷰였습니다.
다음은 헤냔 키에르 군과 하겠습니다.
헤냔과는 처음이군요.
약- 간 들뜬 가넷.
헤냔이 온다, 헤냔이 온다, 헤냔이 온다!
'처음 만나는 건데 뭐라고 해야 하지?'
꽤 정성들여 준비한 애플파이와 멜진.
헤냔 키에르 : 이하 헤냔
정색한 얼굴로 묻는 헤냔. 자식, 그래봤자 너도 내 자식이지. 생각하며 싱글싱글 웃는 가넷을 향해, 헤냔
이 날카롭게 외친다.
가넷 : 아니, 그게 아니라……
가넷 : …….
또 어디선가 남자 하나가 뛰어옴. 그가 헤냔에게 소곤소곤 설명을 하지만, 헤냔은 계속해서 눈을 동그랗
게 뜨고 ‘뭐라고요?’ 라고 묻거나 ‘정말입니까? 맹세할 수 있습니까?’ ‘세키에 여신과 라이메스의 앞
에 대고 맹세하십시오.’ 등등을 반복한다. 약 삼십분 후, 완전히 지쳐버린 가넷에게 다가오는 헤냔.
그 남자가 도대체 뭐라고 말한 것인지는 누구도 모름. 그러나 헤냔은 홀가분한 얼굴로 의자에 앉는다.
헤냔 : 반갑습니다.
헤냔 : (못 들은 듯) 뭐라고 하셨습니까?
가넷 : ……어이?;
헤냔 : 아…… 솔직히 당황했어요. 프리나 어깨에 문신이 있다는 소문은 세이피안 견습 기사단에도 돌았
었습니다. (2 권 참조) 처음엔 다들 프리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서, 아주 과거가 나쁘다고들 악 소문
을 퍼뜨렸어요. 결국엔 그 사람들 모두가 프리나를 좋아하게 되긴 했지만. (웃음) 그런데 그런 문신이 진
짜 있었는지는 몰랐어요. (3 권, 5 권 참조) 그리고 그런 걸 그 하질리언도 갖고 있고……. 뭔가, 묘한
박탈감이 들던걸요. 나에겐 없는 것을 저녀석은 갖고 있구나, 하는.
헤냔 : 저는 표정관리를 잘 합니다!
가넷 : 반과 시온 중 누가 나아?
가넷 : 으, 으음.
가넷 : 그, 그게 다야?
가넷 : 말을 해, 말을!
헤냔 : 수, 수락할 겁니다!
헤냔 : 검이 좋았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가넷 : 기사 말고도 검을 쓸 수 있는 일은 많이 있잖아?
헤냔 : (또 빨개짐) 아?
가넷 : 응, 내가 안 구워서 그래.
가넷 : 잘 가, 헤냔.
헤냔 : 네, 안녕히.
키네세스를 사석에서 만나는 것도 역시 처음인 가넷. 공주한테는 뭘 대접하면 좋을까 골똘히 고민하다가,
반과 있을 때의 그녀는 항상 뮤니아 차를 마셨다는 것을 기억해냄. 뮤니아 차 두 잔과 그것과 어울릴법한
예쁜 쿠키들을 준비함.
가넷 : (그게 아니얏!)
키네세스는 물빛의 레이디라는 별칭이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다. 부드럽게 웨이브 진
물빛 머리카락과 호수 같은 눈동자, 손목을 쥐면 뚝 꺾어질 만큼 연약한 몸매지만 그에 비해 볼륨 있는 가
슴 등등이 가히 사기 캐릭터 수준. 빈약한 프란의 몸매를 생각하며 잠시 한숨.
가넷 : 예, 반가워요. 여기 앉으세요.
가넷 : 그리고?
가넷 : 반이 첫사랑인가요?
키네세스 : (슬픈 얼굴) 생각하고 싶지 않군요. ……하지만, 나에게는 조그마한 확신이 하나 있어요. 그
분의 마음을 흔들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거라는. 그렇다면 항상 옆에 있어왔던 내게, 보다 많은 기회
가 있지 않을까요.
키네세스 : (얼굴이 굳음) ……그 날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어요. 아버님만이 그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 같
아요. 아직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건 알지만,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면
몸이 먼저 공포 반응을 보여요. …무서워요.
키네세스 : 호호. (소리 내어 처음으로 웃음) 기사단은 재미있는 단체에요. 거의 남자들로 이루어진 지
라, 신기한 부분도 많죠. 두 기사단 모두 엉뚱한 구석이 있어요. 왕국을 보호할 강한 기사들인 건 분명한
데, 평소엔 장난도 잘 치고 다들 귀여워요. 기사단엔 정말 관심이 많답니다. 더 강한 기사단을 만들기 위
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그 둘의 관계를 가르쳐준 건…… (조그마한 목소리로) 사실, 그란젤
경이었답니다.
가넷 : 반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카페 여러분, 재미있으셨나요?
이상 티타임 이벤트였습니다.
많이 긴장하고 있는 가넷.
으, 으음. 게시판 밑에 달린 리플들을 읽어본다.
Ramya : 윗분들이 질문을 많이 하셔서 저는 하나만 할게요, 오나주 가상 캐스팅을 한다면 누구누구를 뽑
으실 거예요? (모델, 연기자, 가수 등등 국적, 인종 가리지 않고요) 혹은 오나주 주인공(들)의 모델
(들)이 있습니까?
가넷 : 우와, 굉장히 재미있는 질문이네요. 프란은 좀 더 젊을 때의 위노나 라이더? 욕심을 좀 내자면,
'라 붐' 때의 소피 마르소. 반은, 음, '토탈 이클립스' 할 때의 디카프리오. 지금은 잭 니콜슨화 되었
지만, 그 때만 해도 정말 많이 예뻤죠. 시온은...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네요. 헤냔은 러브 액츄얼리
의 미남 꼬맹이 토마스 생스터가 훌~쩍 자란 느낌으로. 아, 헤냔치고는 너무 도도한가요?; 키네세스는
'여왕 마고' 때의 이자벨 아자니. 뭔가 이미지들이 튀는군요. 좀 더 생각해볼게요 아, 특별히 모델은 없
답니다.
이상 가넷 답변이었습니다.
휘유, 생각보다 질문이 많았어요.
뭔가 너무 길어져 버렸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