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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009년 10월, 미국 최대의 온라인 음반 판매처인 아이튠즈의 힙합 음악 차트에서


한국 걸그룹 2NE1의 앨범 “To Anyone”이 에미넴의 “Recovery”에 뒤이어 2위에
올랐다. 미국 LA의 한 극장에서 ‘소시파이드(Soshified)라고 인쇄된 티를 입은
소녀시대의 팬 500여 명이 모여 히트곡 ‘지(Gee)’를 한국말로 부르며 춤을 추는가
하면, 이들의 뮤직비디오 ‘Run Devil Run’의 유튜브 조회수는 2011년 7월 현재
2,600만 건을 넘어섰다.
프랑스의 르 제니스 드 파리 콘서트홀에는 샤이니, 소녀시대, f(x) 등 한국
아이돌그룹의 공연을 보기 위해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스웨덴 등 유럽
각지에서 온 K-Pop 팬들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방콕에서는 ‘제 2의 닉쿤’을
꿈꾸는 태국 청소년들이 한국의 댄스그룹의 춤과 노래를 따라하며 주말마다 열띤
경연을 벌이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현재 ‘K-Pop’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현상들이다.
한국의 대중음악이 ‘한류’라는 보다 넓은 이름 아래 중국, 대만 등지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이후 여러 가수들이 부침을
반복하고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는 가운데, K-Pop은 차츰 해외 인지도를 넓혀가기
시작했고, 2000년대 후반에 이르러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등 아시아 지역을
넘어서 유럽, 미국에까지 확산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제 전세계적인 K-
Pop의 인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한 실체를 가진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해외 언론들의 K-Pop에 대한 주목은 그 증거로 볼 수 있다. 2000년대
이전만 해도 K-Pop은 일본, 중국, 홍콩, 대만 등 아시아권에서만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전세계 언론들이 K-Pop에 주목하고 있다. 2002년 6월 1일
프랑스의 <르몽드>지는 한, 일 양국을 오가며 활동 중인 소녀가수 보아를
소개하며 “보아는 파워풀한 목소리, 노래와 춤을 한꺼번에 조화시키는 재능으로
일본 열도에서 성공을 거둔 최초의 한반도 출신 젊은 아티스트가 됐다"고
언급했다. 이어 동남아에서 불고 있는 ‘한류 열풍’과 K-Pop의 현황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보아의 성공은 앞선 세대가 서로 지니고 있던 증오심을 전혀 모르는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가까워지는 경향을 암시하고 있으며, 십수년 간의
외교 노력보다도 더욱 효과적인 양국 간의 가교가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경제주간지 <포브스>는 2008년 9월 ‘세계를 휩쓸 트렌드 20’의 하나로 K-
Pop을 선정했다. <포브스>는 “K-Pop은 아시아에서 인기를 끌면서 자국의
자생적인 스타들을 일본에서 말레이시아에 이르는 여러 국가에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서양의 팝이 한국 대중음악에 영향을 미치며 ‘모방-번안-창작’의 과정을 거쳐
한국 대중음악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면, 이제는 외국인들이 한국
대중음악을 K-Pop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즐기게 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K-
Pop은 전세계적인 문화 소통 및 교류의 산물이며, 한국만의 것이라기 보다는
세계의 것이다.
이 책은 90년대 중반 이후 단기간 내에 아시아 음악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이어서 팝 음악의 본고장인 미국 시장까지 내다보고 있는 K-Pop의
근황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이슈라 할 수 있는 “왜 K-
Pop인가”라는 질문으로 들어간다. K-Pop이라는 콘텐츠가 갖는 매력적 요인과
그러한 콘텐츠가 언어와 지리적 장벽을 넘어서 전파될 수 있게 한 뉴미디어의
역할은 K-Pop만이 아니라 동시대 전세계의 젊은 세대들에게 소비, 향유되는
문화와 음악의 보편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이어서 한국 대중음악의 과거를
들여다 보는 것은 현재의 K-Pop이 어떠한 역사와 맥락 속에서 생성되고
발전했는가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근 가장
주목 받고 있는 K-Pop 가수들을 소개할 것이다.

제 1장 K-Pop의 글로벌화

K-Pop이란 무엇인가?
1990년대 후반에 한국의 아이돌 그룹 H.O.T가 파워풀한 그룹 댄스와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의 노래로 중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K-Pop’이라는 용어는 한국 뮤지션들에 의해 불려져
전세계적으로 인지도를 얻게 된 한국의 팝 음악을 가리킨다. K-Pop은 미국과
유럽 팝 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소화해 낸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유럽 팬들의 K-Pop에 대한 열정
2011년 6월 10일과 11일에 2차례에 걸쳐서 열린 “SM 월드투어 인 파리” 공연은
유럽에서의 K-Pop의 인지도를 실감케 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공연은 프랑스
현지 팬들의 요청에 의한 한국 아이돌 가수의 최초 공연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프랑스 팬들은 당초 1회로 예정되어 있던 공연 일정에 대해 플래시몹과
K-Pop에 맞춘 그룹댄스를 벌이며 추가 공연을 요청하는 시위를 했다. K-Pop
공연을 요청하는 플래시몹 시위는 런던, 멕시코, 페루, 뉴욕 등지에서도 잇따랐고,
심지어 모스크바에서도 큐브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의 콘서트에 대한 요청이
있었다.

[Box] 영국은 슈퍼쥬니어, 프랑스와 스페인은 빅뱅 (한류 선호도 조사)

K-Pop에 눈뜨기 시작한 미국


5인조 걸그룹 원더걸스가 펑크 밴드 Jonas brothers의 초대형 콘서트 오프닝
무대에 올라 “Nobody”를 부르자 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부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들의 노래와 춤을 따라하기도 했다. 원더걸스는 이 노래로
한국 가수 최초로 2009년 10월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올랐다. 2011년에는
보이밴드 빅뱅의 멤버 태양의 솔로 앨범 “Delux Edition”이 아시아 가수 최초로
미국 아이튠즈 R&B/소울 차트 3위에 올랐고, 그의 앨범은 하루만에 3만 장이
모두 매진되었다. 팝 음악의 본고장이자 아시아 뮤지션들에게 진입 장벽이
높기로 유명한 미국에서도 K-Pop에 대한 관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11년 7월에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뉴욕 K-Pop 콘테스트가
열렸다. 미국 젊은이들과 뉴욕 시민, 페이스북의 케이팝 팬클럽 회원, 관광객과
교민 등 1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진행된 콘테스트의 우승자 매디슨
쿤스트(15세)는 "비아시아권 최초의 케이팝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Box] K-Pop을 소개하는 영문 사이트 Allkpop.com

일본을 휩쓴 한국의 걸그룹들


전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가장 큰 음악시장인 일본에서 현재 가장 핫한 두
가수는 소녀시대와 카라다. 앞서 데뷔한 보아와 동방신기가 처음부터 일본어로
음반을 내고 데뷔를 한 반면, 소녀시대와 카라는 한국에서 인기를 얻은 노래를
그대로 일본으로 가져가 일본어로 불러 인기를 얻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소녀시대의 첫 번째 스튜디오 앨범 “Girl’s Generation”은 일본에서 5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일본음반산업협회로부터 “더블 플래티넘”으로 선정되었고, 단숨에
오리곤 주간 앨범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카라는 소녀시대와 달리 적극적으로
일본 TV 쇼프로그램에 출연하며 귀엽고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하여 인기를
얻었다. 한국 가수들의 잇따른 일본 진출 성공을 두고 일본 미디어들은 비틀즈를
위시한 영국 록음악이 미국을 뒤흔들었던 “British Invasion”에 비유해 “Korean
Invasion”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신한류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중반에 이르는 1세대 한류가 한국 드라마를
중심으로 했다면,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신한류의 중심은 단연 K-Pop이다.
그리고 이 흐름을 이끌어 낸 시발점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K-Pop 열풍이다.
2010년부터 2011년에 걸쳐 슈퍼쥬니어의 “보나마나”는 대만의 한국음악 톱100에서
52주 연속 1위 자리를 지켰다. 슈퍼쥬니어는 재빨리 중국 시장을 겨냥하여
한국인과 중국인 멤버들로 구성된 서브 유닛인 슈퍼쥬니어-M을 중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에서 데뷔시켰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한국 아이돌그룹은
모방하고 싶은 쿨한 트렌드로 받아들여 진다. 한국 가수들의 노래와 춤, 컨셉,
심지어 이름마저 흉내 낸 동남아시아의 카피 그룹들을 만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Box] 라틴 정취 속을 파고든 한국의 전통 가락

유튜브로 증폭된 전세계적인 K-Pop의 인기


2011년 6월 11일자 <시사저널>은 한류가 “디지털 실크로드”를 타고 인종과 지역,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고 있다고 언급했다. 한국의 3대 메이저 엔터테인먼트
기획사 SM, YG, JYP는 소속 가수들의 신곡 티저 뮤직비디오를 유튜브에 공개했고,
이 뮤직비디오를 클릭한 사람들의 90퍼센트 이상은 미국, 유럽, 호주, 남미,
아시아 등 해외 거주자들이었다.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한 것은 소녀시대의
“Gee”(4,200만 회)였다.

제 2장 왜 K-Pop인가?
24시간 전세계를 대상으로 방송하는 Bloomberg TV의 주말 인기 프로그램인
<Monocle>은 지난 2011년 2월 20일 한국의 음악산업과 K-Pop을 조명하는
특집을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K-Pop의 역량에 관해 세 가지 논점에 맞춰
분석했다. 첫째, K-Pop이 가장 큰 수출 잠재력을 가진 산업이라는 점, 둘째, K-
Pop의 성공에는 소셜 미디어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 셋째, K-Pop은 단지 음악
이상의 것, 즉 오디오와 주얼 양자의 통일체라는 점을 들었다. 특별 출연자인
MTV 아시아 담당 부회장인 Ben Richardson은 K-Pop이 이미 아시아와 전
세계에서 성공을 하고 있으며, 미국을 제외하면 앞으로 한국이 전 세계 팝
음악의 공급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엔터테인먼트 수출국으로서 한국은 현재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MTV가 진출한
거의 모든 시장에서 한국의 콘텐츠는 실질적으로 시청률과 프로그램 세일즈를
끌어올리고 있다. K-Pop은 시청자들과 연결되고 있다. 여러 다른 문화들에 잘
적용되는 음악, 특히 청소년들에 적용되는 것을 발견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한국의 콘텐츠가 미국의 것과 대등하게 그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성공
모델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데 매우 뛰어나다.”
소셜 미디어의 역할에 대해 한국의 대표적 연예기획사 YG Entertainment의
총감독인 김진우 씨는 “유튜브가 젊은 사람들에게 직접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큰
수단이다. 더 이상 세계에는 경계선이나 장애가 없다. 더 이상 TV 방송국이나
라디오 방송국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소셜 네트워킹의 역할을 강조했다.

세계를 사로잡은 K-Pop의 매력


K-Pop의 대중적인 인기는 그들의 트랜스내셔널한 음악 스타일, 따라하기 쉬운
코러스와 그룹댄스, 독특한 패션의 조합에서 찾을 수 있다. 1990년대의 두 아이돌
그룹인 H.O.T.와 젝스키스는 하드코어랩과 유로 테크노, 한국화된 힙합과 디스코
스타일의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결합한 음악을 선보였고, 그 뒤를 이은 신화,
동방신기, 샤이니, 빅뱅은 힙합을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를 혼합하여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동시대의 트렌디한 음악 스타일을 받아들여
독특하고 다이내믹한 방식으로 소화해 냄으로써 K-Pop은 전세계 음악팬들에게
보편적인 매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K-Pop의 글로벌화에는 테디, 켄지, 박진영과 같은 동시대 미국과 유럽의
음악적 감수성을 갖춘 해외파 프로듀서와 작곡가들의 참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2NE1의 음반 프로듀싱에 참여한 윌.아이.엠처럼 국내 가수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는 프로듀서와 직접 손을 잡는 경우도 늘었다. 이러한
협력은 한국 가수들이 동시대의 글로벌한 음악 트렌드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소화해 낼 수 있을 만한 역량을 갖추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이시하라 신 일본 NHK 예능프로그램부 총제작자는 “한국 아이돌 음악은 강렬한
중저음 비트가 특징적인 미국 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리듬과 보컬,
안무가 더해져 파급력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했다.

[Box] 레이디 가가 프로듀서의 K-Pop에 대한 관심

한국형 스타메이킹 시스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 아이돌그룹의 노래와 춤 실력은 그들의 외모가
지닌 강점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멤버 간의 기량 차이도 컸다.
그러나 최근의 동방신기, 소녀시대, 빅뱅과 같은 그룹들은 각각의 멤버 모두가
뛰어난 노래와 춤 실력, 개성적인 매력을 지니고 고른 인기를 얻는다. 이는
2000년대 초반 이후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기획사들이 발전시켜 온 독특한
스타메이킹 시스템의 힘이다. 치열한 오디션과 경쟁, 수 년에 걸친 노래와 춤,
외국어 트레이닝이라는 데뷔 과정은 K-Pop 스타들이 세계 무대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을 선보일 수 있게 하는 바탕이다.
지난 2011년 4월 8일 방한한 팝 프로듀서 퀸시 존스는 한국 가수들의 실력을
극찬했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타이거JK부터 보아까지 만나봤는데 실력이 매우
좋다"며, "중국, 일본의 아티스트들도 만나봤지만 한국 아티스트들이 최고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음악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라면서, "K-Pop이 서구 음악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냐고 물으면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미 충분히 경쟁력을 갖췄다"고 높게 평가했다.

[Box] 주요 엔터테인먼트 기획사(SM, JYP, YG, DSP, 큐브)의 발전과 특징적 스타일

소셜미디어를 통한 확산
1990년대까지만 해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 제한되어 있던 K-Pop에
대한 관심이 아시아를 넘어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데에 중요한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소셜미디어다. 전통적 미디어가 한정된 지면에서 다수를 상대하기
위해 최신, 인기 음악을 중심으로 다루었다면, 최근의 소셜미디어는 주변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보다 다양한 음악을 소개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 전 세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강점을 갖는다.
미국의 파워블로거 페레즈 힐튼이 올린 뮤직비디오를 계기로 미국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에이전시 CAA와 계약을 맺고 미국 시장 진출에 나선 원더걸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소셜미디어는 K-Pop뿐만 아니라 비서구권의 음악이 세계
음악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기회다. 타임지는 “한국
아티스트들이 라디오, 텔레비전과 같은 전통적인 창구를 넘어서, 인터넷을 통한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언급했다.

[Box] 원 클릭으로 비서구권의 팝을 만날 수 있게 한 SNS


(SM엔터테인먼트 정창환 이사)

아시아 10대 시장의 탄생


K-Pop 열풍의 진원지가 아시아라는 사실은 단순한 지리적 근접성 이상의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중국과 동남아시아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개혁, 개
방화되면서 가능해진 ‘아시아 10대 시장’의 탄생이다. 경제발전과 함께 개인화되고
서구화된 아시아 10대 젊은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콘텐츠가 자국에는 없었는데,
때마침 K-Pop이 인터넷을 타고 전파된 것이다. 내수 규모가 작아서 해외 진출이
필수적이었던 한국은 일찍부터 아시아 시장을 염두에 두고 적극적인 현지화 전략
을 벌였다. 1990년대 중후반의 1세대 한류와 K-Pop이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2000년대 중반 이후의 K-Pop은 그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제 3장 K-Pop의 역사

한국 대중가요의 탄생(1985-1944)
초창기 한국 대중가요는 영미권과 일본의 영향을 받으며 시작되었고, 서구 문물
의 유입과 일제식민통치라는 역사적 상황과 필연적으로 맞물려 있었다. 창가라고
불리는 최초의 한국 대중가요는 미국과 영국의 포크송을 번안하여 만들어 졌으며,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은 트로트 계열의 음악들은 지금까지도 중장년층에게 호소
력을 갖는 장르로 남아 있다.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미국 팝의 영향(1945-1959)


해방과 전쟁이라는 격동의 역사의 한복판에서도, 한국 대중음악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여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들이 출입하는
클럽들과 AFKN을 통해 소개된 미국의 팝음악이었다. 냇 킹 콜, 마릴린 먼로, 루
이 암스트롱 등 슈퍼스타들이 내한해 위문공연을 벌이기도 했지만, 미8군 무대를
미국 연예들만으로 감당할 수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한국 연예인들이 미8군 무대
에 진출하여 미군을 대상으로 공연을 하게 됐다. 1950년대 후반 미군 무대가 한창
정점에 이르렀을 때 미군 클럽은 264곳에 이르렀고, 미군 쇼를 통해 한국 연예인
들이 벌어들인 수익은 연간 120만 달러에 육박했는데, 이는 당시의 한국 수출총
액과 맞먹는 액수였다.
미군 당국의 엄격한 심사, 일명 ‘오디션’을 통과하기 위해 한국 가수들은 미국
의 최신 레퍼토리를 입수해 끊임없이 연습함으로써 실력과 흥행성을 배가시켰다.
당시 미8군 쇼의 주류를 이룬 빅 밴드 편성의 악단은 재즈를 위주로 컨트리, 리
듬앤블루스, 로큰롤 등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연주했다. 미군 클럽이라는 특수
한 공간에서, 한국인이 아니라 미군 청중을 대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식
팝은 모방의 과정을 거쳐 한국의 대중음악으로 정착하는 단초를 열었다.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흐름과 전환(1960-1969)


1960년대는 민간 방송사들의 개국, 라디오 방송극의 인기,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등으로 20세기 후반을 주도할 한국 문화예술의 기본 틀이 형성된 시기였다. 아직
까지 로컬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미8군 쇼 무대
출신 음악인들이 국내 대중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이봉조, 김대환, 김희갑,
신중현, 김홍탁 등의 연주자와 작곡가, 한명숙, 최희준, 현미, 패티 김, 윤복희, 펄
시스터즈 등의 가수들이 그들이다. 이들 중 김시스터즈, 패티 김, 윤복희 등은 외
국으로 활동 무대를 넓히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 서구권에서의 비틀즈의 인기는 고스란히 한국에도 전해져, “그룹
사운드”라는 이름 하에 Add4와 키보이스와 같은 한국 록의 1세대가 출현했다. 한
국 대중음악은 비틀즈에서부터 헤비메탈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다양한 장르의 음
악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였고, 이는 훗날 전 세계인의 인기를 얻는 글로벌 K-Pop
이 탄생하는 풍성한 토대가 되었다.

[Box] 한국 가수들의 해외 진출
과거에도 한국 노래 또는 가수의 해외진출은 드물지만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한명
숙의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는 한류의 원조라 할 만한 인기를 얻었다. 미 8군 쇼
에서 크게 활약했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무명이었던 한명숙은 1961년 이 노래로
‘노란샤쓰’ 붐을 일으켰다. 연일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고, 운동 경기장에서 응
원가로도 불리던 이 노래는 1962년부터 동남아로 퍼져나갔고, 1965년에 방한한 프
랑스 샹송가수 이베트 지로에 의해서도 불려졌다. 그는 이 노래로 프랑스에서 레
코드를 취입하기도 했다.
대만, 태국 등에 수출된 동명의 영화와 더불어 노란샤쓰 붐은 더욱 고조됐고,
1972년 일본 가수 하마무라 미치코가 리메이크 해서 불러 30만 장의 판매고를 기
록했다.
김 시스터즈의 미국 진출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이들은 미8군 쇼에서 공연
을 하다가 1959년 동양쇼의 매니저였던 톰 볼에게 픽업되어 미국 라스베가스로
진출했다. 국내 가수 최초로 미국에서 음반을 냈고, 수록곡 ‘찰리 브라운’으로 빌
보드 싱글 차트 6위에 오르며 ‘동양의 요정’으로 불렸다. 1964년에는 미국 최고의
인기 TV 프로그램인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하는가 하면, 뉴욕, 워싱턴, 시카고 등
미국 주요도시에서 순회공연 가졌고, 다음 해에는 로마, 파리, 베니스, 마드리드,
뮌헨, 런던, 몬테 카를로 등 유럽 각국을 돌며 환영을 받았다.
한국 가수가 국제가요제에 직접 진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수 정훈희는 세계
유수의 국제가요제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던 대표적인 가수였
다. 1970년 42개국이 참여한 일본 도쿄 야마하 가요제에서 ‘안개’로 입상했으며,
이듬해 그리스 국제가요제에서는 ‘너’라는 곡으로 아시아에서 일본을 제치고 유일
하게 수상했다. 1972년에는 또 한 차례 도쿄 야마하에서 ‘좋아서 만났지요’로 가수
상을 수상했고, 1975년 칠레 가요제에서는 ‘무인도’로 3위와 최고가수상을 동시에
받았다. 가수 현미는 1971년 7월 그리스 세계가요제에 참가, ‘별'로 입상을 차지했
으며, 패티 김은 1974년 6월 제 4회 도쿄국제가요제에 작곡가 길옥윤과 함께 '사
랑은 영원히'로 출전해 14개국 450곡 중에서 3위에 입상했다.

[Box] 번안 가요의 시대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가요는 미국식 팝이나 번안가요가 주류를 이뤘으며 자
작곡은 드물었다. 1960년대 말 어쿠스틱 기타의 반주에 서정적인 가사를 담은 가
수들이 서울의 중심 명동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방송을 통해 인기스타로 떠
올랐다. Tom Jones의 Delilah(1968)를 번안하여 부른 조영남, Nana Mouskouri의 Me
T'aspro Mou Mantil(1969)를 번안하여 부른 트윈 폴리오, 뚜아에 무아의 약속(1970),
라나에 로스포의 사랑해 등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했던 경험이 있던 이들은 명동의 음악살롱 쎄시봉을 중심
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스스로 기타를 튕기며 영미 팝송과 샹송, 칸초네 등을 연
주했다. 특히 트윈폴리오는 이탈리아의 칸초네 가수 Milba와 그리스 가수 Nana
Mouskouri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1980년대까지 미국식 팝의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1978년 10월 10일자 동
아일보는 「뽕짝가요 퇴조시킨 팝송」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미국식 가요가 80%
에 달한다며 한국적 특성의 상실을 우려하기도 했다.
“주한미군의 AFKN방송은 24시간 방송 시간 중 20시간 이상을 미국의 팝송(유
행가요)을 틀어댄다.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한 레코드점엔 미군계통으로부터
1주일에만도 2백장의 새로운 팝송판이, 한 달에 1천여 장의 레코드판이 흘러나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간다. 아니 국내 TV, 방송에서조차도 팝송화한 미국식 가요
들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우리나라 전국은 온통 미국 팝송으로 가득하다.
한미간의 문화관계에 있어서도 팝송처럼 우리 사회에 '철저하게' 파고든, 그리
고 우리의 것을 '몰아대고' 있는 것은 또 없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한 TV 방송국
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가요 가수 U양이 새로운 곡을 갖고 음악담당 프로듀서
를 찾았다. 젊은 이 음악담당 프로듀서는 U양의 신곡을 보더니 ‘트로트곡(한국민
요조곡)이라 곤란하다’며 거절을 해 버렸다. 이런 일은 '다반사'로 경음악계에 알
려져 있다. 이제 한국인의 감정과 희로애락이 담긴 전통가요들은 설 자리를 잃었
으며 "구정이나 추석날의 특별쇼에나 나갈 정도"라고 한다. (중략) 요즘 당국은 심
야의 라디오방송에서 미국의 팝송을 자율규제토록 했다. 그러나 한국방송에서 미
국의 팝송이 끊어지는 순간 젊은이의 다이얼은 AFKN으로 돌려졌다는 방송가의
말이다.”
1982년 8월30일자 경향신문은 「가요 뽕짝조서 팝계열로」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한국의 대중가요가 전통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의 대중가요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대부분 감상적인 주제에 애조의 멜로디
로 가슴을 적셨던 뽕짝조의 노래는 우리 주위에서 많이 사라지고 있음을 실감한
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양한 가사에 발랄, 경쾌한 리듬의 팝뮤직이 대중가요의 주
류를 형성해가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가 이미 세계적인 경향인 팝송의 영향권에
깊숙이 침투돼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같은 현상은 현재 디스크 판매와 방송
횟수 빈도 등에서 나타난 인기송의 가사와 리듬에서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톱
랭킹의 가수 조용필이 지난 6월 동심을 노래한 '못찾겠다 꾀꼬리'는 4분의 4박자
인 펑키 리듬으로 구성돼 있다. 그는 1973년 뽕짝조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히
트시킨 이후 '창밖의 여자'(슬로 고고), '미워미워미워'(왈츠) 등으로 이어지는 팝송
쪽의 노래로 리듬의 변천을 주도해오고 있다.
폭발적인 인기로 조용필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는 학생가수 이용의 히트송인 '
잊혀진 계절'은 슬로고고 리듬. 국풍 81에서 선보인 고고 리듬인 '바람이려오'가
성공한 이후 그의 노래는 특히 젊은 층을 매료하는 팝송 스타일의 멜로디이다.
MBC대학가요제에서 출발, 정상권에 육박해있는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
는 디스코 리듬. 산노래의 간판보컬인 산울림이 최근 신보로 열창하고 있는 '내게
사랑은 너무 써'는 댄스뮤직인 스윙 리듬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훈아가 뽕짝조
인 '울긴 왜 울어'로 아직도 상층권에서 후퇴하지 않았다. 정상권 여자가수들의
노래 역시 팝뮤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신선한 마스크의 남궁옥분이 '사랑사랑 누가 말했나'에 이어 최근에 발표, 인기
를 끌고 있는 '꿈을 먹는 젊은이'는 포크 계열에서 분류된 4분의 4박자의 칼립소
리듬. 민해경이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슬로고고)에 이어 발표한 신곡 '깊어지
거라'는 팝송의 뉴웨이브에 접근한 펑키 리듬이다. 육중한 몸을 밉지 않게 흔들며
노래하는 디스코의 간판스타 이은하가 부른 '네가 좋아' 역시 디스코 리듬. ‘노래
하면 춤추며'의 디스코 노래로 기반을 구축한 계은숙의 '다정한 눈빛으로' 역시
디스코 리듬. 윤시내의 재기곡으로 큰 반응을 얻고 있는 애소조의 'DJ에게'도 디
스코의 감미로운 선율을 타고 있다. 이상 남녀 가수 10명의 최근 히트송이 한결
같이 디스코 내지 슬로고고, 뉴웨이브 등 팝송의 리듬을 담고 있다… (중략) … 4분
의 4박자가 주류인 팝송의 리듬이 큰 맥을 이루고 있으며 가사 역시 다양한 형태
로 변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가사에 담긴 내용의 대종은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으나 생활 주변의 얘기와 자연 등 폭넓은 영역류의 팝송류가 불려지고 있다.
또 '당신' '그대' 등으로 표현되던 호칭이 '너 '나' 등 1인칭으로 변했으며 3절까지
이어지던 가사가 기승전결의 종전 형식을 탈피, 짧게 또는 길게 1절로 끝나는 노
래가 많아졌다. 팝송은 50년대에 미군의 상륙과 함께 국내에 도입된 후 60년대에
들면서 확산, 젊은이와 더불어 꾸준한 발전을 보여왔다. 젋은 세대의 파워가 더욱
커지면서 세대의 흐름을 민감하게 반영하는 대중가요가 이쪽으로 가고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으로 보인다.”

<1970년대 번안가요 및 원곡>


원곡 제목 국적․가수 번안곡 제목 비고
뉴질랜드
Pokarekare Ana 연가(戀歌)
Kiri Te Kanawa
미국
In Our Small Way 나의 작은 꿈
Michael Jackson
Green Green Grass영국
고향의 푸른잔디
Of Home Tom Jones
미국 1972
The Snake 최진사댁 셋째딸
Al Wilson 빌보드 no.1
The Banks Of The호주
내고향 충청도
Ohio Olivia Newton John
미국
Wedding Cake 웨딩케익
Connie Francis
Early In The영국
행복한 아침
Morning Cliff Richard
volevo un gatto이탈리아
검은 고양이 네로
nero Vincenza Pastorelli
이스라엘
Erev shel shoshanim 가시리
Miriam Makeba
러시아
. Million Allyh Roz 백만송이 장미
Alla Pugacheva
Me t'aspro mou그리스
하얀 손수건
mantili Nana mouskouri
독일
A Little Peace 작은평화
Nicole
필리핀 사랑하는 나의 아
Anak
Freddie Aguilar 들아
스페인
Adios amor 그리워라
Mocedades
이렇듯 한국에는 팝송, 샹송, 칸초네, 그리고 파두(Fado)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대중가요들이 소개됐다. 이따금씩 방문하는 서구 팝뮤지션의 공연엔 발
디딜 틈 없이 관객들이 밀려들었다. 1969년 영국 가수 클리프 리처드의 내한공연
은 극단적인 사례에 속한다. 유교의 강한 전통이 남아있는 한국사회였음에도 여
학생들은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서구 위주의 팝문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음
악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진추하(홍콩)의 One Summer Night, Graduation Tears,
심지어는 필리핀의 타갈로그어로 불려진 'Anak'(Sony by Freddie Aguila)이란 노래
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물을 맘껏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한국의 대중음악
시장은 전세계의 노래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였다. 비틀즈에서부터 헤비메탈에 이
르기까지 모든 장르를 소개됐다. 이는 훗날 케이팝, 케이락이 탄생하는 풍성한 토
대가 됐다.
1982년 3월까지 한국공연윤리위원회 가요분과위의 심사를 거친 가요는 무려 7
천4백15건. 유형별로 분류하면 국내가요의 가사가 1,604건, 경음악 포함 악보가
1,692건 이밖에 외국의 클래식과 팝송이 2,688건 수입돼 세계 속 한국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포크뮤직과 청년문화(1970-1979)
1970년대 “청년문화”를 주도한 전후 세대의 젊은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미국문화
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기성세대와 군사문화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들
은 1960년대 후반에 세계에 번진 히피문화와 음악을 받아들였고, 한국에 포크뮤
직 붐이 일었다. 선배 가수들과 달리 1970년대의 포크뮤직 가수들은 명문대 출신
들로 음악을 통한 생계 유지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일종의 아마추어리즘과 그로
인한 자유분방함, 솔직함을 특징으로 했다.
1970년대 후반 대학생에 초점을 맞춰 기획된 일련의 가요제들은 국내 대중가요
창작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1977년부터 MBC가 개최해 온 ‘대학가
요제’는 한국의 대중가요에 다양성과 함께 지적인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창구역
할을 했다. 대학가요제가 젊은층의 인기를 끌자 ‘강변가요제’ 등 유사 가요제들
이 탄생했다.

[Box] 본격적인 한국 포크의 시작, 한대수


슈퍼스타 조용필과 발라드 시대(1980-1989)
1980년대에는, 이전 시기까지 축적된 한국 대중음악의 성장을 바탕으로 록과 포
크, 트로트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모든 세대로부터 사랑을 받은 조용필이
라는 슈퍼스타가 탄생했다. 그는 한국 가수로는 최초로 뉴욕 카네기홀에서 단독
공연을 가졌고, 일본에서 낸 그의 음반들은 50만장이 넘게 팔린 골든디스크로 기
록되었다. 1980년 후반에는 이광조, 이문세, 변진섭 등이 주도한 발라드 음악이 큰
인기를 얻었고, 1990년대 중반까지도 그 기세를 이어갔다.

서태지와 아이들, K-Pop의 새로운 역사를 쓰다(1990-1999)


1990년대는 한국 음반시장이 가장 큰 호황을 누린 시기였다. 김건모의 ‘잘못된 만
남’이 단일 음반 판매량만 250만 장 이상을 기록해 한국 기네스에 등재되었고, 같
은 시기 서태지와 아이들, 신승훈 등이 100만 장 판매고를 돌파했다. 특히 서태지
와 아이들의 등장은 한국 대중음악계에 일종의 전환점을 가져왔다. 이들은 한국
음악에 랩과 힙합을 도입했고, 화려한 안무와 패션을 선보였다. 기성세대는 이들
의 음악에 경악했지만, ‘신세대’라 불리는 젊은 세대들은 열광했다. 10대는 문화소
비의 중심으로 등장했고, 이들을 타겟으로 한 TV와 매스미디어의 위력이 증폭되
면서, 이후 음악 시장의 판도를 크게 바꿔 놓았다.
한국의 주요 엔터테인먼트 기획사들이 현재와 같은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한 것
도 이때부터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예기획사인 SM 엔터테인먼트
가 1995년에 설립되면서 아이돌 가수 열풍을 주도했고, 199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YG 엔터테인먼트, DSP 엔터테인먼트, JYP 엔터테인먼트가 뒤를 이었다. 이들 소속
사에서 배출한 H.O.T., God, 젝스키스, S.E.S., 핑클 등이 높은 음반 판매고를 올리
며 이례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시기의 그룹들을 현재는 1세대 아이돌이라고 칭하
기도 한다.

K-Pop의 세계화(2000-2010)
1990년대 중반 이후로 한국 아이돌그룹들이 한국의 주류 대중음악계를 주도했고,
이들은 국내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해외진출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해외진출이 보다 안정적으로 눈부신 성과를 내게 된 것은 2000년대에 이르러서
다. 데뷔 때부터 일본 시장을 겨냥해 트레이닝을 받은 보아는 2002년에 “ID:
Peace B”로 한국인 최초로 오리콘 싱글 차트 정상에 올랐고, 그녀의 데뷔 앨범
“Listen To My heart”는 일본에서 1,300만 장이 판매되었다. 가수 비는 2005년 베이
징 공연에 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CNN 방송이 뽑은 아시아에서 가장 기대되
는 한류 스타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0년대 후반은 그야말로 아이돌그룹의 춘추전국시대다. 동방신기, 슈퍼쥬니어,
빅뱅, 샤이니, 2PM 등의 보이그룹들과 소녀시대, 원더걸스, 카라, 2NE1 등의 걸그
룹들은 한층 성숙한 실력을 바탕으로 국내에서는 10대뿐 아니라 20, 30대 혹은 그
이상으로 팬층을 확대해 가고 있으며, 해외에서는 아시아를 넘어 유럽, 미국에서
까지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걸그룹들의 약진이 두드러지는데, 원더걸스는
"Nobody"로 미국 진출을 선언한 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 로 빌보드 핫 100에 76
위로 진입했다. 소녀시대는 "Gee"로 일본 오리콘 싱글 차트 1위에 올랐다. 2000년
대 들어 음반 시장의 지형도가 변화하면서, 이들은 앨범보다는 싱글 위주로 활동
을 벌이며 음원 시장을 공략하는가 하면, 온라인을 주요 마케팅 공간으로 활용하
고 있다.

제 4장 K-Pop을 대표하는 가수들

이 장에서는 현재 국내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혹은 주목할 만한 K-Pop 가수들을


장르별로 선별하여 그들의 주요 특징과 그간의 활동 내역을 소개한다. 해외에서
높은 인지도를 얻고 있는 아이돌그룹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을
다룸으로써, K-Pop의 전체적인 지형도와 더 큰 성장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돌그룹 및 솔로
슈퍼쥬니어, 동방신기, 빅뱅, 샤이니, 2PM
소녀시대, 카라, 원더걸스, 2NE1, f(x)
비, 보아

R&B/ 발라드/ 재즈
박정현, 김범수, BMK, 브라운아이드 소울, SG 워너비

힙합
에픽 하이, 드렁큰 타이거, 다이내믹 듀오, 리쌍

인디/록
윤도현밴드, 크라잉넛, 언니네이발관, 갤럭시 익스프레스

예시)
빅뱅
- 2006~ / YG Entertainment/ 5 members
- G-Dragon, Taeyang, T.O.P. Daesung, Seungri
빅뱅은 2000년대 가장 독특한 개성과 실력을 갖춘 아이돌그룹이다. 라이벌인 동
방신기, 슈퍼쥬니어 등이 10대를 타겟으로 한 비주얼 중심의 아이돌이었다면 빅
뱅은 힙합 스타일을 전면에 내세워 20대 이상에게도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어느
새 데뷔 6년 차를 맞은 빅뱅은 스스로 작사와 작곡, 프로듀싱까지 맡아서 하는
실력파 그룹으로 인정받고 있다. 팀의 리더인 G-드래곤은 초등학교 시절 SM엔터
테인먼트 소속 연습생으로 출발해 성공한 대표적인 아이돌 스타이자 프로듀서다.
2010년에는 G-드래곤과 T.O.P이 서브 유닛을 형성했고, 승리가 미니 앨범 “V.V.I.P.”
를 발표하기도 했다. 정식 미국 활동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2011년 3월에 발표한
빅뱅의 미니 앨범 “Tonight”은 미국 빌보드 히트시커스 앨범 차트 7위, 월드앨범
차트 3위에 오르며 화제를 모았다.

에필로그
해외에서의 K-Pop의 인기가 지속 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은 2000년대 초반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1990년대만 해도 ‘한류’와 K-Pop의 인기를 아시아
시장에만 국한시켜 생각했던 언론들이 이제는 K-Pop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진지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국이라고 하면 삼성과 현대만을 떠올리던
외국인들에게 K-Pop은 또 하나의 새롭고 강력한 브랜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Bloomberg TV의 프로그램 <Monocle>에 출연한 MTV 아시아 담당 부회장인
Ben Richardson은 K-Pop이 이미 아시아와 전 세계에서 성공을 하고 있으며,
미국을 제외하면 앞으로 한국이 전 세계 팝 음악의 공급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엔터테인먼트 수출국으로서 한국은 현재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MTV가 진출한
거의 모든 시장에서 한국의 콘텐츠는 실질적으로 시청률과 프로그램 세일즈를
끌어올리고 있다. K-Pop은 시청자들과 연결되고 있다. 여러 다른 문화들에 잘
적용되는 음악, 특히 청소년들에 적용되는 것을 발견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한국의 콘텐츠가 미국의 것과 대등하게 그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성공
모델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데 매우 뛰어나다.”
K-Pop은 더 이상 한국이라는 영토를 유일한 시장으로 여기지 않고, 글로벌 시
장을 향한 가속도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 K-Pop의 글로벌화 이전에, 한국 대중음
악은 그 출발부터 이미 일본과 미국의 강력한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개화기의
창가는 미국과 영국의 포크송을 번안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오늘날 한국 대
중음악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팝, 록, 재즈, 힙합, 일렉트로니카 등의 장르와
그 기반이 되는 인적 자원 및 물적 조건 역시 미8군 무대와 인근의 미군 클럽들
과의 연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1990년 후반 일본문화 개방 이전까지 보이지 않
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일본의 J-Pop이 한국 대중음악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게 전 세계의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받아들이며 성장해 온 한국 대중음
악이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서구와 일본의 대중음악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
는 콘텐츠를 갖추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이라는 영토를 넘어 세계로 진출
하게 되었다. 그 동안 한국 바깥에서 안으로 향하던 흐름이 이제는 그 역방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K-Pop의 글로벌화는 밖에서 안으로 혹은 안에서 밖으로라는 단일한 방
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복잡한 혼종화hybrization의 경향을 띠고 전개된다.
미국이나 유럽의 작곡가가 만든 노래를 소녀시대, 샤이니, f(x)가 부르고, 외국인
안무가의 안무를 받아 빅뱅이 춤을 추며, 이들이 부른 노래와 춤에 중앙아시아와
남미의 팬들이 열광한다. 또한 태국계 미국인 멤버를 포함한 2PM이나 중국계 멤
버를 포함한 미쓰에이가 중국 시장에 진출해 성공을 거둔다. 뿐만 아니라 국내
연예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와 JYP엔터테인먼트는 각각 중국과 미국에 지사를
두고 초국적 기업이 되어 가고 있다. 이렇듯 음악과 안무, 매니지먼트 시스템, 스
타의 국적이나 인종 등 다방면에서 혼종적인 요소들이 모여 K-Pop을 구성하고
있다.
여기에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글로벌화가 K-Pop의 글로벌
화를 더욱 촉진했다. 음악 산업의 중심은 이제 CD 같은 물질화된 매체에서 유튜
브 같은 온라인 사이트를 통한 디지털 파일의 다운로드와 실시간 감상으로 이행
했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소통한다. 스마트폰의 등장은 음악을 듣는
방식뿐 아니라 음악을 통해 사람들이 소통하는 방식까지 바꿔 놓았다. 그 결과
음악과 음악을 통한 소통의 장은 더 이상 한국이라는 제한된 국경 안에 머물지
않는다.
이처럼 K-Pop은 일방적인 문화상품의 생산과 전파가 아니라, 다양한 영향과
소통 관계 속에서 탄생하고 여전히 그 과정 중에 놓여 있는 하나의 문화현상이라
는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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