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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K-Pop의 글로벌화
K-Pop이란 무엇인가?
1990년대 후반에 한국의 아이돌 그룹 H.O.T가 파워풀한 그룹 댄스와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의 노래로 중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K-Pop’이라는 용어는 한국 뮤지션들에 의해 불려져
전세계적으로 인지도를 얻게 된 한국의 팝 음악을 가리킨다. K-Pop은 미국과
유럽 팝 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소화해 낸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유럽 팬들의 K-Pop에 대한 열정
2011년 6월 10일과 11일에 2차례에 걸쳐서 열린 “SM 월드투어 인 파리” 공연은
유럽에서의 K-Pop의 인지도를 실감케 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공연은 프랑스
현지 팬들의 요청에 의한 한국 아이돌 가수의 최초 공연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프랑스 팬들은 당초 1회로 예정되어 있던 공연 일정에 대해 플래시몹과
K-Pop에 맞춘 그룹댄스를 벌이며 추가 공연을 요청하는 시위를 했다. K-Pop
공연을 요청하는 플래시몹 시위는 런던, 멕시코, 페루, 뉴욕 등지에서도 잇따랐고,
심지어 모스크바에서도 큐브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의 콘서트에 대한 요청이
있었다.
제 2장 왜 K-Pop인가?
24시간 전세계를 대상으로 방송하는 Bloomberg TV의 주말 인기 프로그램인
<Monocle>은 지난 2011년 2월 20일 한국의 음악산업과 K-Pop을 조명하는
특집을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K-Pop의 역량에 관해 세 가지 논점에 맞춰
분석했다. 첫째, K-Pop이 가장 큰 수출 잠재력을 가진 산업이라는 점, 둘째, K-
Pop의 성공에는 소셜 미디어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 셋째, K-Pop은 단지 음악
이상의 것, 즉 오디오와 주얼 양자의 통일체라는 점을 들었다. 특별 출연자인
MTV 아시아 담당 부회장인 Ben Richardson은 K-Pop이 이미 아시아와 전
세계에서 성공을 하고 있으며, 미국을 제외하면 앞으로 한국이 전 세계 팝
음악의 공급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엔터테인먼트 수출국으로서 한국은 현재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MTV가 진출한
거의 모든 시장에서 한국의 콘텐츠는 실질적으로 시청률과 프로그램 세일즈를
끌어올리고 있다. K-Pop은 시청자들과 연결되고 있다. 여러 다른 문화들에 잘
적용되는 음악, 특히 청소년들에 적용되는 것을 발견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한국의 콘텐츠가 미국의 것과 대등하게 그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성공
모델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데 매우 뛰어나다.”
소셜 미디어의 역할에 대해 한국의 대표적 연예기획사 YG Entertainment의
총감독인 김진우 씨는 “유튜브가 젊은 사람들에게 직접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큰
수단이다. 더 이상 세계에는 경계선이나 장애가 없다. 더 이상 TV 방송국이나
라디오 방송국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소셜 네트워킹의 역할을 강조했다.
[Box] 주요 엔터테인먼트 기획사(SM, JYP, YG, DSP, 큐브)의 발전과 특징적 스타일
소셜미디어를 통한 확산
1990년대까지만 해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 제한되어 있던 K-Pop에
대한 관심이 아시아를 넘어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데에 중요한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소셜미디어다. 전통적 미디어가 한정된 지면에서 다수를 상대하기
위해 최신, 인기 음악을 중심으로 다루었다면, 최근의 소셜미디어는 주변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보다 다양한 음악을 소개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 전 세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강점을 갖는다.
미국의 파워블로거 페레즈 힐튼이 올린 뮤직비디오를 계기로 미국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에이전시 CAA와 계약을 맺고 미국 시장 진출에 나선 원더걸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소셜미디어는 K-Pop뿐만 아니라 비서구권의 음악이 세계
음악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기회다. 타임지는 “한국
아티스트들이 라디오, 텔레비전과 같은 전통적인 창구를 넘어서, 인터넷을 통한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언급했다.
제 3장 K-Pop의 역사
한국 대중가요의 탄생(1985-1944)
초창기 한국 대중가요는 영미권과 일본의 영향을 받으며 시작되었고, 서구 문물
의 유입과 일제식민통치라는 역사적 상황과 필연적으로 맞물려 있었다. 창가라고
불리는 최초의 한국 대중가요는 미국과 영국의 포크송을 번안하여 만들어 졌으며,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은 트로트 계열의 음악들은 지금까지도 중장년층에게 호소
력을 갖는 장르로 남아 있다.
[Box] 한국 가수들의 해외 진출
과거에도 한국 노래 또는 가수의 해외진출은 드물지만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한명
숙의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는 한류의 원조라 할 만한 인기를 얻었다. 미 8군 쇼
에서 크게 활약했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무명이었던 한명숙은 1961년 이 노래로
‘노란샤쓰’ 붐을 일으켰다. 연일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고, 운동 경기장에서 응
원가로도 불리던 이 노래는 1962년부터 동남아로 퍼져나갔고, 1965년에 방한한 프
랑스 샹송가수 이베트 지로에 의해서도 불려졌다. 그는 이 노래로 프랑스에서 레
코드를 취입하기도 했다.
대만, 태국 등에 수출된 동명의 영화와 더불어 노란샤쓰 붐은 더욱 고조됐고,
1972년 일본 가수 하마무라 미치코가 리메이크 해서 불러 30만 장의 판매고를 기
록했다.
김 시스터즈의 미국 진출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이들은 미8군 쇼에서 공연
을 하다가 1959년 동양쇼의 매니저였던 톰 볼에게 픽업되어 미국 라스베가스로
진출했다. 국내 가수 최초로 미국에서 음반을 냈고, 수록곡 ‘찰리 브라운’으로 빌
보드 싱글 차트 6위에 오르며 ‘동양의 요정’으로 불렸다. 1964년에는 미국 최고의
인기 TV 프로그램인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하는가 하면, 뉴욕, 워싱턴, 시카고 등
미국 주요도시에서 순회공연 가졌고, 다음 해에는 로마, 파리, 베니스, 마드리드,
뮌헨, 런던, 몬테 카를로 등 유럽 각국을 돌며 환영을 받았다.
한국 가수가 국제가요제에 직접 진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수 정훈희는 세계
유수의 국제가요제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던 대표적인 가수였
다. 1970년 42개국이 참여한 일본 도쿄 야마하 가요제에서 ‘안개’로 입상했으며,
이듬해 그리스 국제가요제에서는 ‘너’라는 곡으로 아시아에서 일본을 제치고 유일
하게 수상했다. 1972년에는 또 한 차례 도쿄 야마하에서 ‘좋아서 만났지요’로 가수
상을 수상했고, 1975년 칠레 가요제에서는 ‘무인도’로 3위와 최고가수상을 동시에
받았다. 가수 현미는 1971년 7월 그리스 세계가요제에 참가, ‘별'로 입상을 차지했
으며, 패티 김은 1974년 6월 제 4회 도쿄국제가요제에 작곡가 길옥윤과 함께 '사
랑은 영원히'로 출전해 14개국 450곡 중에서 3위에 입상했다.
[Box] 번안 가요의 시대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가요는 미국식 팝이나 번안가요가 주류를 이뤘으며 자
작곡은 드물었다. 1960년대 말 어쿠스틱 기타의 반주에 서정적인 가사를 담은 가
수들이 서울의 중심 명동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방송을 통해 인기스타로 떠
올랐다. Tom Jones의 Delilah(1968)를 번안하여 부른 조영남, Nana Mouskouri의 Me
T'aspro Mou Mantil(1969)를 번안하여 부른 트윈 폴리오, 뚜아에 무아의 약속(1970),
라나에 로스포의 사랑해 등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했던 경험이 있던 이들은 명동의 음악살롱 쎄시봉을 중심
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스스로 기타를 튕기며 영미 팝송과 샹송, 칸초네 등을 연
주했다. 특히 트윈폴리오는 이탈리아의 칸초네 가수 Milba와 그리스 가수 Nana
Mouskouri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1980년대까지 미국식 팝의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1978년 10월 10일자 동
아일보는 「뽕짝가요 퇴조시킨 팝송」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미국식 가요가 80%
에 달한다며 한국적 특성의 상실을 우려하기도 했다.
“주한미군의 AFKN방송은 24시간 방송 시간 중 20시간 이상을 미국의 팝송(유
행가요)을 틀어댄다.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한 레코드점엔 미군계통으로부터
1주일에만도 2백장의 새로운 팝송판이, 한 달에 1천여 장의 레코드판이 흘러나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간다. 아니 국내 TV, 방송에서조차도 팝송화한 미국식 가요
들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우리나라 전국은 온통 미국 팝송으로 가득하다.
한미간의 문화관계에 있어서도 팝송처럼 우리 사회에 '철저하게' 파고든, 그리
고 우리의 것을 '몰아대고' 있는 것은 또 없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한 TV 방송국
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가요 가수 U양이 새로운 곡을 갖고 음악담당 프로듀서
를 찾았다. 젊은 이 음악담당 프로듀서는 U양의 신곡을 보더니 ‘트로트곡(한국민
요조곡)이라 곤란하다’며 거절을 해 버렸다. 이런 일은 '다반사'로 경음악계에 알
려져 있다. 이제 한국인의 감정과 희로애락이 담긴 전통가요들은 설 자리를 잃었
으며 "구정이나 추석날의 특별쇼에나 나갈 정도"라고 한다. (중략) 요즘 당국은 심
야의 라디오방송에서 미국의 팝송을 자율규제토록 했다. 그러나 한국방송에서 미
국의 팝송이 끊어지는 순간 젊은이의 다이얼은 AFKN으로 돌려졌다는 방송가의
말이다.”
1982년 8월30일자 경향신문은 「가요 뽕짝조서 팝계열로」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한국의 대중가요가 전통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의 대중가요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대부분 감상적인 주제에 애조의 멜로디
로 가슴을 적셨던 뽕짝조의 노래는 우리 주위에서 많이 사라지고 있음을 실감한
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양한 가사에 발랄, 경쾌한 리듬의 팝뮤직이 대중가요의 주
류를 형성해가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가 이미 세계적인 경향인 팝송의 영향권에
깊숙이 침투돼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같은 현상은 현재 디스크 판매와 방송
횟수 빈도 등에서 나타난 인기송의 가사와 리듬에서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톱
랭킹의 가수 조용필이 지난 6월 동심을 노래한 '못찾겠다 꾀꼬리'는 4분의 4박자
인 펑키 리듬으로 구성돼 있다. 그는 1973년 뽕짝조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히
트시킨 이후 '창밖의 여자'(슬로 고고), '미워미워미워'(왈츠) 등으로 이어지는 팝송
쪽의 노래로 리듬의 변천을 주도해오고 있다.
폭발적인 인기로 조용필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는 학생가수 이용의 히트송인 '
잊혀진 계절'은 슬로고고 리듬. 국풍 81에서 선보인 고고 리듬인 '바람이려오'가
성공한 이후 그의 노래는 특히 젊은 층을 매료하는 팝송 스타일의 멜로디이다.
MBC대학가요제에서 출발, 정상권에 육박해있는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
는 디스코 리듬. 산노래의 간판보컬인 산울림이 최근 신보로 열창하고 있는 '내게
사랑은 너무 써'는 댄스뮤직인 스윙 리듬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훈아가 뽕짝조
인 '울긴 왜 울어'로 아직도 상층권에서 후퇴하지 않았다. 정상권 여자가수들의
노래 역시 팝뮤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신선한 마스크의 남궁옥분이 '사랑사랑 누가 말했나'에 이어 최근에 발표, 인기
를 끌고 있는 '꿈을 먹는 젊은이'는 포크 계열에서 분류된 4분의 4박자의 칼립소
리듬. 민해경이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슬로고고)에 이어 발표한 신곡 '깊어지
거라'는 팝송의 뉴웨이브에 접근한 펑키 리듬이다. 육중한 몸을 밉지 않게 흔들며
노래하는 디스코의 간판스타 이은하가 부른 '네가 좋아' 역시 디스코 리듬. ‘노래
하면 춤추며'의 디스코 노래로 기반을 구축한 계은숙의 '다정한 눈빛으로' 역시
디스코 리듬. 윤시내의 재기곡으로 큰 반응을 얻고 있는 애소조의 'DJ에게'도 디
스코의 감미로운 선율을 타고 있다. 이상 남녀 가수 10명의 최근 히트송이 한결
같이 디스코 내지 슬로고고, 뉴웨이브 등 팝송의 리듬을 담고 있다… (중략) … 4분
의 4박자가 주류인 팝송의 리듬이 큰 맥을 이루고 있으며 가사 역시 다양한 형태
로 변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가사에 담긴 내용의 대종은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으나 생활 주변의 얘기와 자연 등 폭넓은 영역류의 팝송류가 불려지고 있다.
또 '당신' '그대' 등으로 표현되던 호칭이 '너 '나' 등 1인칭으로 변했으며 3절까지
이어지던 가사가 기승전결의 종전 형식을 탈피, 짧게 또는 길게 1절로 끝나는 노
래가 많아졌다. 팝송은 50년대에 미군의 상륙과 함께 국내에 도입된 후 60년대에
들면서 확산, 젊은이와 더불어 꾸준한 발전을 보여왔다. 젋은 세대의 파워가 더욱
커지면서 세대의 흐름을 민감하게 반영하는 대중가요가 이쪽으로 가고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으로 보인다.”
포크뮤직과 청년문화(1970-1979)
1970년대 “청년문화”를 주도한 전후 세대의 젊은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미국문화
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기성세대와 군사문화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들
은 1960년대 후반에 세계에 번진 히피문화와 음악을 받아들였고, 한국에 포크뮤
직 붐이 일었다. 선배 가수들과 달리 1970년대의 포크뮤직 가수들은 명문대 출신
들로 음악을 통한 생계 유지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일종의 아마추어리즘과 그로
인한 자유분방함, 솔직함을 특징으로 했다.
1970년대 후반 대학생에 초점을 맞춰 기획된 일련의 가요제들은 국내 대중가요
창작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1977년부터 MBC가 개최해 온 ‘대학가
요제’는 한국의 대중가요에 다양성과 함께 지적인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창구역
할을 했다. 대학가요제가 젊은층의 인기를 끌자 ‘강변가요제’ 등 유사 가요제들
이 탄생했다.
K-Pop의 세계화(2000-2010)
1990년대 중반 이후로 한국 아이돌그룹들이 한국의 주류 대중음악계를 주도했고,
이들은 국내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해외진출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해외진출이 보다 안정적으로 눈부신 성과를 내게 된 것은 2000년대에 이르러서
다. 데뷔 때부터 일본 시장을 겨냥해 트레이닝을 받은 보아는 2002년에 “ID:
Peace B”로 한국인 최초로 오리콘 싱글 차트 정상에 올랐고, 그녀의 데뷔 앨범
“Listen To My heart”는 일본에서 1,300만 장이 판매되었다. 가수 비는 2005년 베이
징 공연에 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CNN 방송이 뽑은 아시아에서 가장 기대되
는 한류 스타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0년대 후반은 그야말로 아이돌그룹의 춘추전국시대다. 동방신기, 슈퍼쥬니어,
빅뱅, 샤이니, 2PM 등의 보이그룹들과 소녀시대, 원더걸스, 카라, 2NE1 등의 걸그
룹들은 한층 성숙한 실력을 바탕으로 국내에서는 10대뿐 아니라 20, 30대 혹은 그
이상으로 팬층을 확대해 가고 있으며, 해외에서는 아시아를 넘어 유럽, 미국에서
까지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걸그룹들의 약진이 두드러지는데, 원더걸스는
"Nobody"로 미국 진출을 선언한 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 로 빌보드 핫 100에 76
위로 진입했다. 소녀시대는 "Gee"로 일본 오리콘 싱글 차트 1위에 올랐다. 2000년
대 들어 음반 시장의 지형도가 변화하면서, 이들은 앨범보다는 싱글 위주로 활동
을 벌이며 음원 시장을 공략하는가 하면, 온라인을 주요 마케팅 공간으로 활용하
고 있다.
R&B/ 발라드/ 재즈
박정현, 김범수, BMK, 브라운아이드 소울, SG 워너비
힙합
에픽 하이, 드렁큰 타이거, 다이내믹 듀오, 리쌍
인디/록
윤도현밴드, 크라잉넛, 언니네이발관, 갤럭시 익스프레스
예시)
빅뱅
- 2006~ / YG Entertainment/ 5 members
- G-Dragon, Taeyang, T.O.P. Daesung, Seungri
빅뱅은 2000년대 가장 독특한 개성과 실력을 갖춘 아이돌그룹이다. 라이벌인 동
방신기, 슈퍼쥬니어 등이 10대를 타겟으로 한 비주얼 중심의 아이돌이었다면 빅
뱅은 힙합 스타일을 전면에 내세워 20대 이상에게도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어느
새 데뷔 6년 차를 맞은 빅뱅은 스스로 작사와 작곡, 프로듀싱까지 맡아서 하는
실력파 그룹으로 인정받고 있다. 팀의 리더인 G-드래곤은 초등학교 시절 SM엔터
테인먼트 소속 연습생으로 출발해 성공한 대표적인 아이돌 스타이자 프로듀서다.
2010년에는 G-드래곤과 T.O.P이 서브 유닛을 형성했고, 승리가 미니 앨범 “V.V.I.P.”
를 발표하기도 했다. 정식 미국 활동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2011년 3월에 발표한
빅뱅의 미니 앨범 “Tonight”은 미국 빌보드 히트시커스 앨범 차트 7위, 월드앨범
차트 3위에 오르며 화제를 모았다.
에필로그
해외에서의 K-Pop의 인기가 지속 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은 2000년대 초반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1990년대만 해도 ‘한류’와 K-Pop의 인기를 아시아
시장에만 국한시켜 생각했던 언론들이 이제는 K-Pop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진지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국이라고 하면 삼성과 현대만을 떠올리던
외국인들에게 K-Pop은 또 하나의 새롭고 강력한 브랜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Bloomberg TV의 프로그램 <Monocle>에 출연한 MTV 아시아 담당 부회장인
Ben Richardson은 K-Pop이 이미 아시아와 전 세계에서 성공을 하고 있으며,
미국을 제외하면 앞으로 한국이 전 세계 팝 음악의 공급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엔터테인먼트 수출국으로서 한국은 현재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MTV가 진출한
거의 모든 시장에서 한국의 콘텐츠는 실질적으로 시청률과 프로그램 세일즈를
끌어올리고 있다. K-Pop은 시청자들과 연결되고 있다. 여러 다른 문화들에 잘
적용되는 음악, 특히 청소년들에 적용되는 것을 발견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한국의 콘텐츠가 미국의 것과 대등하게 그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성공
모델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데 매우 뛰어나다.”
K-Pop은 더 이상 한국이라는 영토를 유일한 시장으로 여기지 않고, 글로벌 시
장을 향한 가속도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 K-Pop의 글로벌화 이전에, 한국 대중음
악은 그 출발부터 이미 일본과 미국의 강력한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개화기의
창가는 미국과 영국의 포크송을 번안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오늘날 한국 대
중음악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팝, 록, 재즈, 힙합, 일렉트로니카 등의 장르와
그 기반이 되는 인적 자원 및 물적 조건 역시 미8군 무대와 인근의 미군 클럽들
과의 연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1990년 후반 일본문화 개방 이전까지 보이지 않
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일본의 J-Pop이 한국 대중음악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게 전 세계의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받아들이며 성장해 온 한국 대중음
악이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서구와 일본의 대중음악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
는 콘텐츠를 갖추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이라는 영토를 넘어 세계로 진출
하게 되었다. 그 동안 한국 바깥에서 안으로 향하던 흐름이 이제는 그 역방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K-Pop의 글로벌화는 밖에서 안으로 혹은 안에서 밖으로라는 단일한 방
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복잡한 혼종화hybrization의 경향을 띠고 전개된다.
미국이나 유럽의 작곡가가 만든 노래를 소녀시대, 샤이니, f(x)가 부르고, 외국인
안무가의 안무를 받아 빅뱅이 춤을 추며, 이들이 부른 노래와 춤에 중앙아시아와
남미의 팬들이 열광한다. 또한 태국계 미국인 멤버를 포함한 2PM이나 중국계 멤
버를 포함한 미쓰에이가 중국 시장에 진출해 성공을 거둔다. 뿐만 아니라 국내
연예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와 JYP엔터테인먼트는 각각 중국과 미국에 지사를
두고 초국적 기업이 되어 가고 있다. 이렇듯 음악과 안무, 매니지먼트 시스템, 스
타의 국적이나 인종 등 다방면에서 혼종적인 요소들이 모여 K-Pop을 구성하고
있다.
여기에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글로벌화가 K-Pop의 글로벌
화를 더욱 촉진했다. 음악 산업의 중심은 이제 CD 같은 물질화된 매체에서 유튜
브 같은 온라인 사이트를 통한 디지털 파일의 다운로드와 실시간 감상으로 이행
했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소통한다. 스마트폰의 등장은 음악을 듣는
방식뿐 아니라 음악을 통해 사람들이 소통하는 방식까지 바꿔 놓았다. 그 결과
음악과 음악을 통한 소통의 장은 더 이상 한국이라는 제한된 국경 안에 머물지
않는다.
이처럼 K-Pop은 일방적인 문화상품의 생산과 전파가 아니라, 다양한 영향과
소통 관계 속에서 탄생하고 여전히 그 과정 중에 놓여 있는 하나의 문화현상이라
는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