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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가 상앙
법가 상앙
입력 : 2016.06.23 10:06:16
전국시대 진나라의 혁명가 상앙. 그는 군주를 설득해 20 년간 개혁정치를 펼쳤고, 재상이 되어 무한할 것
같은 권력과 명예를 누렸다. 하지만 그는 온몸이 찢기는 죽임을 당했다. 원인은 단순했다. 배운 것 많고
지혜로웠지만 상앙의 눈은 현재만 바라보는 근시였다.
그는 자신의 개혁정치가 빚어낼 빛과 그림자를 살피지 못했고 무엇보다 다가올 미래 권력의 관리에 실패했
다.
춘추시대가 끝나고 중국은 전국시대(기원전 475~기원전 221 년)로 접어들었다. 춘추시대의 패자는 관중이
라는 걸출한 재상의 보필을 받은 제나라 환공이었다. 하지만 그 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세상은 다시 분열
되었고 수십 개의 국가들이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전국시대는 진, 초, 위, 조나라 등 7
개 국가로 정립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는 위魏나라였다. 이 무렵 작은 위衛나라에서 상앙이
태어났다. 이때가 기원전 395 년이다. 상앙의 원래 성은 공손으로, 그의 본명은 공손 앙이었다(후일 그는
상앙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의 가문은 주나라 왕족과 위나라 귀족의 후손으로 명문가였다. 상앙의 아버
지는 위나라의 공자였지만 어머니는 첩이었다. 때문에 상앙은 평생 첩의 아들이라는 ‘서자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남달리 총명했던 상앙은 유학을 공부하면서도 특히 법가에 심취했다. 그는 자신을 ‘유학자’라 설명했지
만 예와 인을 강조한 유학보다는 ‘힘과 법으로 세상을 교화’하는 법가에 동조했다. 태생적 한계를 직감
한 상앙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출세하려는 욕망이 강했다. 그는 또한 남을 믿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상앙은 세상에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강력한 위魏나라로 갔다. 상앙은 뛰어난 판단력, 해박한 지식과 정
치적 감각으로 곧 두각을 나타내 위魏나라 실력자인 재상 공숙좌의 가신이 된다. 공숙좌는 상앙의 재주를
아꼈고 천하를 경영할 인물로 평가했다. 공숙좌는 평상시는 물론 전쟁터에서도 상앙을 항시 대동했다. 한
번은 전쟁 중에 적국에 잡혀 포로가 되었다 돌아온 공숙좌가 병에 걸렸다. 위나라 혜왕이 공숙좌를 문병
왔다. 잠시 주변을 물린 공숙좌가 혜왕과 비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처럼 상앙은 대담성과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상앙의 예상대로 궁에 돌아온 혜왕은 “별 재
주도 없는 상앙을 나에게 추천하는 것으로 봐서 공숙좌가 노망이 든 모양이다”라고 측근들에게 푸념을 늘
어놓았다고 한다. 이때가 기원전 361 년으로 상앙의 나이 34 세 때이다.
진나라로 간 상앙은 번호표를 받고 진 효공의 면접을 기다렸다. 기다림은 세월이었다. 상앙은 머리를 써
효공이 총애하는 신하 경감과 선을 댔다. 그를 통해 상앙은 효공과 대면할 수 있었다. 상앙은 효공과 총
세 번의 면접을 치렀다. 앞선 두 번의 면접 때 상앙은 효공에게 하늘과 성군의 예와 도를 설파했으나 효공
의 반응은 그다지 뜨겁지 않았다. 마지막 세 번째 면접에서 상앙은 효공에게 패자의 도를 설파한다. 단기
간에 강력한 국가를 만들고자 한 효공은 상앙의 말에 매료당했다. 상앙은 효공에게 농업 장려로 백성을 배
부르게 해 나라의 재정을 튼튼하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농전사상 農
戰思想’을 주장했다. 효공은 그 자리에서 상앙을 등용했다. 상앙은 진 효공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대대
적인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군사, 재정, 법제, 토지, 관리체계 등 진나라의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
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계획해 이를 지속적으로 시행했다. 후대 역사가들은 상앙의 개혁정치를 ‘변법 變
法’이라 불렀다.
1 차 변법은 기원전 359 년부터 실시됐다. 상앙은 진나라의 모든 가구를 5, 10 가구의 단위로 정리했다.
그리고 이 단위별로 세금과 병역의 의무를 부과했다. 또한 이 단위 가구에서 범죄가 발생했는데도 고발을
안 하면 연좌제로 엄하게 처벌했다. 물론 포상도 단위 가구에 똑같이 시행했다. 이는 훗날 오가작통법으
로 발전했다. 이 고발제도를 통해 상앙은 진나라의 모든 백성을 실질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또한 등급제를 실시했다. 위로는 귀족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 모두에게 총 20 등급의
작위를 부여했다. 작위에 따라 옷, 집, 생활 등 모든 실생활과 명예까지 차등을 두었다. 작위 등급은 철
저하게 공로의 유무와 대소를 따져 부여했다. 공을 세우면 작위를 주었고 공이 없으면 귀족이라도 작위를
박탈했다. 이로 인해 자연히 백성들은 전쟁에 참전하거나 농업 생산량을 늘리는 방법 등으로 작위를 받았
다. 대신 귀족들은 지위를 유지하려는 중압감에 시달렸다. 귀족계급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개혁에는 당연히 부작용과 반발이 있기 마련이다. 귀족들은 반발했고 효공조차 우려를 표명했다. 하지만
상앙은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그는 “군주, 시대를 앞서 나가려면 비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를 두려워
해서는 안 됩니다. 개혁에 있어 모든 의견을 조율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결과가 좋으면 부작용
과 반대 여론도 수그러질 것입니다”라고 효공을 설득했다. 하지만 진나라 귀족 가문은 서로 연합해 변법
을 저지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오죽하면 하루에 변법 반대 상소만도 수천 개가 진왕 효공에게 올라
올 정도였다.
어느 날, 태자가 변법을 위반하는 일이 벌어졌다. ‘법 앞에서 예외가 없다’를 천명한 효공과 상앙이었지
만 장차 다음 왕권을 물려받을 태자를 벌할 수는 없었다. 대신 태자의 스승을 처벌했다. 태자의 스승은
진왕 효공의 형제로 태자에게는 백부인 공자 건이었다. 상앙은 태자 대신 스승인 공자 건의 코를 베면서
태자의 죄를 물었다. 그리고 태자의 다른 스승들은 모두 먹물로 얼굴에 문신을 새겨 넣어 죄인임을 만천하
에 알렸다. 황족인 공자 건은 충격을 받고 은둔했다. 태자는 분노했다. 아무리 상앙이 아버지 진 효공의
신임을 받고 있지만 자신의 스승을 벌하는 것은 태자를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태자는 복수를 다짐
했다.
20 년간 지속된 변법으로 나라는 예와 인보다 법이 앞서는 통제 국가가 되었고 진나라는 강력한 군사강국
으로 우뚝 섰다. 진나라는 서서히 굴기(몸을 일으킴)를 시작했다. 상앙은 정치, 군사, 외교를 총괄하는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위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위나라 혜왕은 그를 후하게 대접했다. 과거 공숙좌가 혜
왕에게 상앙을 천거했지만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일을 안주삼아 이야기 하면서 두 사람은 양국의 선린을
다짐했다. 상앙은 위나라 혜왕에게 “위나라와 제나라가 분쟁이 발생해도 진나라는 중립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위나라의 관심을 제나라로 돌리고 그동안 진나라를 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진 효혜왕은 상앙의 시체를 수도인 함양으로 가지고 와 거열형에 처하고 상앙의 삼족을 연좌제로 몰아 모
두 몰살했다. 상앙은 자신이 만든 법인 연좌제의 덫에 걸려 멸문지화를 당했고 자신 또한 거열형으로 시신
조차 보존치 못했다. 역사의 아이러니인 셈이다.
중국 역사상 3 명의 혁명가가 있다.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을 패자로 만든 명재상 관중, 전국시대 진나라의
개혁을 추진한 상앙 그리고 송나라 신종 치세에서 신법으로 개혁정치를 편 왕안석이다. 이 중에서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성공한 개혁으로 칭송받는 것은 관중이 유일하다. 물론 상앙의 개혁은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는 개혁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집안이 멸문을 당했다. 왕안석의 개혁 역시 중도에 실패했고
한때 역사가들에 의해 실패한 정치가로 낙인찍혔다. 이 세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은 바로 열린 귀,
넓은 가슴 그리고 세상을 포용하는 관용의 차이였다. 관중은 위로는 왕부터, 아래의 백성까지 모두에게
어진 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왕안석과 마찬가지로 상앙 역시 마치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오만에 가득
한 정치를 함으로써 많은 적을 만들었고 끝내 그 적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상앙의 개혁 정치인 ‘변법’을 성공한 정치로 보는 측면이 있다. 낙후된 변방국가 진나라를 전국시대 패
자로 만들었고, 효혜왕은 상앙을 미워해 죽였지만 그가 만든 정책인 변법을 지속했다. 그리고 100 여 년
이 지난 기원전 221 년 진나라의 시황제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만드는데 성공한 점은 상앙의 변법이
부국강병에서는 효과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앙은 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역사가 사
마천은 <사기>에서 ‘상앙은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잔인한 정치가’였다고 평가했다. 상앙은 법으
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 그는 ‘법으로 강한 국가를 만들 수 있고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다’
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그의 이런 뜻은 부국강병을 원하는 진 효공의 목적과 부합해 꽃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상앙이 간과한 것은 엄한 법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상식이었다. 법은 수단이고 방법이
지 목적은 아니다. 그는 법으로 세상을 바꾸고 교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 세상은 법보다 인정,
의리, 대의, 예의가 지배하는,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상앙은 자신
이 만든 법으로 인해 자신은 물론 그의 가문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그의 업적은 아침이슬처럼 사라
져 버린 것이다. 상앙은 현재에 충실했다. 그것은 법가의 기본 사상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시간의 축적이
고 시간은 현재의 권력에서 미래의 권력으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무리 느려 보이고, 오지 않을
것 같아도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다.
상앙은 귀족 세력의 와해를 통해 현재의 권력을 만끽했지만 미래 권력의 0 순위인 태자를 모욕하면서 잠재
적 불안 요소를 스스로 만들었다. 태자가 자신을 무시한 상앙을 죽이겠다고 결심한 순간, 고개를 들었을
때 사방은 모두 상앙의 적으로 가득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현재의 권력 즉 진 효공이 죽자 상앙은 혼자
외톨이로 남았다. 그 막강했던 권력도 효공이 존재함으로써 그 힘이 발휘된다는 것을 상앙은 잊은 것이다.
현재에만 몰두하고 미래를 대비하지 못한 것이 바로 상앙이 실각하고 죽임을 당한 첫 번째 이유이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다그치고 앞장서서 전진하는 용장형의 상관도 있고, 영리하게 이익만 찾아다니는
지장 스타일도 있지만 가장 주목받는 것은 역시 덕장이다. 덕장은 사람을 모으는 재주가 있다. 그들은 많
이 듣고, 많이 양보하고, 많이 용서하고, 많이 베푸는 것에 익숙한 리더이다. 5 분 지각에 사정도 듣지
않고 소리를 지르고, 점심시간도 12 시 땡! 하면 시작해 1 시 땡! 하면 자리에 앉아있어야 하고, 약간의
실수에도 시말서 제출 요구를 남발하는 용장형 리더의 부서는 겉으로는 일사분란하고 조직화되어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들을 연결하는 것은 규칙과 원칙뿐이다.
용장과 지장은 자신감이 넘치고 자신의 똑똑함을 알기에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생각과 판단만이 옳은 것이라 주장한다. 그들은 직원을 하나의 인격체이자 동료가 아닌 쓰임새로 판단하는
버릇이 있다. 등급과 점수를 매기고 장점보다 단점을 더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이런 리더의 조직에서 창의
적인 업무와 훈훈한 직장의 덕목을 찾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오로지 생존게임만 벌어지는 것이다.
용장, 지장도 좋지만 결국 ‘덕장’이 되어야 한다. 덕장이라고 무조건 황희 정승처럼 호인 역할을 하라
는 것이 아니다. 원칙, 사규, 고과 등에 있어 객관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
만 이 판단의 밑바탕에 ‘상대에 대한 배려’, ‘상대의 장점을 보려는 노력’, ‘상대를 존중하는 예의’
가 든든한 받침이 되는 덕장이 되라는 것이다. 직장을 인간에 비유하면 냉정하고 잔인할 정도로 차가운 인
간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많은 조직원을 통솔하고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찾아낸 가장 효율적인 시
스템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차가운 쇠덩어리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동료들끼리는 그 옛날
모발 단속하는 고등학교 학생주임의 손에 들려있던 30cm 자를 들이대지는 말아야 한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칼럼니스트) 사진 pixab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