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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
리뷰
불교학
Critical

Review
Critical

리뷰
for
Review

Buddhist
for

Studies
Buddhist

Studies

18
2015
|투고논문| ①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A̅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a̅laṅka̅ra :

Youngjin LEE ②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 하영수 ③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a̅ya)의 의미 : 이수미 ④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 조윤경

⑤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 Daniel M. Stuart |번역|

강 ①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 폴 드미에빌 / 김성철, 배재형, 차상엽
대 역 ② 연민과 공성-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 Lambert Schmithausen(람버트 슈미트하우젠)/ 사이토 나오키(齊

교 藤直樹) 일역, 양영순 역 |서평| 크리스티앙 부이, 뺷나타파 요가수행자들과 우빠니샤드 : 힌두 문헌의 역사에 대한

불 연구뺸 : 박영길

18

GEUMGANG UNIVERSITY 문
Geumgang Center for Buddhist Studies 화

Nonsan, South Korea
구 금강대학교
ISSN 1975-2660
소 불교문화연구소 2 0 1 5
불교학리뷰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금강대학교
불교문 화연구 소
불교학리뷰(ISSN 1975-2660)는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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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 리뷰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2 0 1 5 18

금강대학교
불교문 화연구 소
편집자 서문

뺷불교학리뷰뺸가 지령 18호를 맞았다. 2006년 2월 28일자로 창간된 지 꼭 10


년 만이다. 2015년에는 경사도 있었다. 마침내 뺷불교학리뷰뺸가 한국연구재단 등
재후보지로 선정된 것이다. 이제까지 1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 10년을 준비하라
는 채찍과 격려로 삼고자 한다.

짧지 않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가 펴내는 뺷불교


학리뷰뺸는 소소하다면 소소한, 크다면 큰 변화를 겪었다. 애초에 뺷불교학리뷰뺸
는 그 이름이 보여주듯이 기존의 불교학 관련 학술지와는 달리 불교학계의 연구
성과를 ‘비판적’으로 ‘다시 보고자 한’ 것이었다. 창간호에 실린 <창간의 변>의
표현대로 하자면 “새로 출판된 저술이나 연구 성과를 소개하고 연구의 흐름을
조망하는 매체”를 지향한 것이었다. 이는 기존의 불교학 관련 잡지에 대한 ‘메타-
잡지’ 혹은 ‘비평지’라는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이러한 정신에 따라 뺷불교학리
뷰뺸는 천편일률적인 논문 대신 연구사, 연구노트, 외국 논문의 번역, 서평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출발한 뺷불교학리뷰뺸의 성격을 바꾼 계기는 불교문화연구소가 2007


년도에 인문한국(HK) 지원 사업에 선정된 것이었다. 이 사업에 선정된 이후 사
6 불교학리뷰 vol.18

업 결과를 외화할 매체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뺷불교학리뷰뺸는 주로


HK사업 성과를 반영한 논문과 함께 외부 투고자들의 논문도 함께 싣게 되었다.
더불어 기존 창간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연구사를 중심으로 한 논문과 번역 논문,
서평 등은 계속 유지하였다. 이 기간 동안 뺷불교학리뷰뺸는 기존의 불교학 관련
학술지와 차별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경주하였다. 수록되는 논문 분
야는 불교학에서도 가장 기초를 이루는 문헌학 분야의 논문을 위주로 하였으며,
질적으로는 국제적 수준의 논문을 확보하기 위해 영어권과 일어권을 위주로 한
외국 논문 및 국내 학자의 외국어 논문 비중을 절반 가까이 유지하였다.

이상과 같은 뺷불교학리뷰뺸의 노력이 마침내 학계에 인정받아 2015년 학술지


평가에서 등재후보지로 선정되었다. 등재후보지 선정 이후에는 기존의 뺷불교학
리뷰뺸 편집 방향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가
장 먼저 준비한 것은 뺷불교학리뷰뺸의 국제적 수준을 보다 높이기 위한 방안이었
다. 먼저 뺷불교학리뷰뺸의 국제적 인지도를 높여 외국인 학자의 자발적 투고를 유
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국제적인 불교학 관련 네트워크인 H-Buddhism의
공고를 준비하고 Mohoney 저널 리스트(http://indica-et-buddhica.org)에 게재
하였다. 투고 규정을 포함한 홈페이지의 영문화 등도 진행하여 다음 호부터 적용
할 예정이다. 국내 학자의 논문 수준을 국제적 수준으로 높이기 위해 외국인 전
문학자에게 심사(Peer-review)를 맡긴 것도 이번 호의 특징이다. 외국에서 발표
된 논문이나 외국 대학에서 취득한 박사학위 논문을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기
위한 시도도 그 일환이다. 이는 한국연구재단이 2014년에 발간한 <분야별 연구
윤리 매뉴얼(인문사회분야)>(연구책임자: 류동춘, p.48, p.54~55)에 따르면, 자
기 표절과는 무관하며, 적극 권장할 만한 사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쳐 최종 게재 확정된 논문 등을 아래에 소개한다.

금강대학교 이영진 교수의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


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는 뺷현관장엄론뺸에 대한 아리
야 비묵티세나의 주석서 사본 세 종류를 바탕으로 두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편집자 서문 7

첫째는 프라크리트에 익숙하지 않은 필사자에 의한 오사를 수정하여, 아리야 비


묵티세나가 인용한 문장의 원래 의미인 “그를 단지 여래라고 불러야지 정등각자
로 부르지 말라”로 개선한 것이다. 둘째는 아리야 비묵티세나 주석서의 제명에
대한 문제다. 논자는, 저자 문제와는 별도로, 뺷현관장엄론뺸의 게송이 주석서와
분리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주석서의 제명을 재고해야 할 필요성
을 지적하고 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이수미 교수의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
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는 불교 수행자가 명상 수행 중에 얻
은 미세한 몸을 의미하는 의생신이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에서 가지는 의미를 규
명한 논문이다. 기존 연구가 팔리 문헌을 중심으로 의생신이 가진 우주론적/수증
론적 함의를 밝히는데 머물렀다면 이 논문은 뺷승만경뺸과 뺷보성론뺸 그리고 뺷불성
론뺸을 중심으로 대승 전통에 나타난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의생신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논자는 결론적으로 의생신이 중유, 선정에 대응하는 몸, 그리고 무
루에 머무는 성인의 몸이라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금강대학교 하영수 선생의 「뺷법화경뺸에서의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은 일견
모순된 용어로 보이는 ‘붓다의 보살행’이란 주제를 산스크리트 원전 및 한역 제
역본의 대조를 통해 천착한 논문이다. 일반적으로 한역 뺷법화경뺸에서 붓다의 무
한한 수명을 설하는 구절이 세친의 뺷법화경론뺸과 산스크리트 출판본 및 사본에
서는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고 되어 있는 것에 주목하고, 산스크리트본
이 원래의 의미를 전하고 있을 가능성을 지적하였다. 논자는 이를 바탕으로 붓다
의 수명이 무한하다는 것은 붓다의 보살행 곧 교화행의 무한성을 의미하는 것이
라고 지적하고 있다.
서강대학교 조윤경 박사의 「성실학파의 ‘이제상즉’에 대한 사상적 고찰」은 중
국불교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상즉’ 개념에 대한 성실학파의 해석을 살핀 논
문이다. 이 논문은 삼론학파에 의해 일방적으로 비판되어 온 성실학파의 ‘상즉’
개념을 성실학파 내부의 입장에서 다루고 있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성실학파 내
부에서 ‘상즉’의 의미를 동일성을 강조하는 입장, 차이성을 강조하는 입장, 불이
성을 강조하는 입장 등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밝히고, 이러한 성실학파의 해석이
8 불교학리뷰 vol.18

‘즉’의 풍부한 용법을 파생시켜 후대 중국철학의 핵심인 ‘상즉’ 개념으로 발전하


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 댄 스튜어트 교수의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는 비교적 덜 알려지고
연구가 덜된 뺷정법염처경뺸의 명상 수행에 대한 연구다. 다소 현란한 수사를 뚫는
수고를 무릅쓴다면, 이 논문은 뺷정법염처경뺸의 구조와 내용, 그리고 거기에 담긴
명상 수행의 내용에 대한 좋은 소개가 될 것이다. 논자는 이 논문에서 특히 뺷정법
염처경뺸이 붓다의 전지성과 그에 이르는 수행도에 대해 명백하고 독특하게 이론
화하고 있다고 논한다. 그리고 그 논의 과정에서 이러한 불교 수행과 인식, 그리
고 그로 인해 획득하는 힘 등에 대한 이론화가 전통적인 정전 자료를 가져와 중
층적인 서사구조 안에 놓음으로써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금강대학교 차상엽 교수 등이 번역하고 있는 폴 드미에빌 저 뺷라싸 종교 회의


(Le Concile de Lhasa)뺸의 연재가 이번 호로 여섯 번째를 맞았다. 이 책은 티벳
삼예사에서 벌어진 인도불교도와 중국불교도 사이에 벌어진 점진적인 수행방법
과 돈오적인 수행방법의 역사적인 충돌을 다루는 명저다. 이 책의 번역을 처음
연재한 뺷불교학리뷰뺸 9호(2011)의 간단한 해제에서도 밝혔듯이, 서구에서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일련의 작업들을 진행하고 있지만, 국내 학계에서는 아직 이 연
구를 온전히 흡수하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는 이 책이 불어로 씌어졌다는 점, 그
리고 중국과 티베트의 자료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어 현대 불어와 불교 고전
어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 번
역 연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불어전문가와 티베트불교 전문가 등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번 호에는 티베트 점령기 둔황의 절도사가
티베트 왕과 재상 등에게 보내는 편지 18편을 번역한 부분을 실었다.
동국대학교 양영순 선생이 번역한 「연민과 공성(Mitleid und Leerheit)」은
뺷불교학리뷰뺸 16호(2014)에 실린 논문 「평정과 자비(Gleichmut und Mitgefühl)」
에 이은 연작 논문이다. 이 논문은 독일 함부르크 대학 명예교수인 람버트 슈미
트하우젠 교수가 초기불교부터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자비’라는 말로 잘 알려
편집자 서문 9

진 불교 이타주의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밝힌 책이다. 탁월한 언어 능력과 손을


잡고 이끄는 듯한 독특한 논문 작성으로 저명한 교수의 이 논문은 1990년대 이
후 유식사상 이외의 분야로 넓어진 그의 학문적 관심을 보여주는 대표적 논문 중
하나다. 비록 일본어 역에서 중역된 것이지만, 필요한 부분에서는 독일어에 능통
한 전공자의 도움을 받아 오역을 최소화 하였다. 대승불교의 이타 정신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논문일 것이다.
금강대학교 박영길 선생의 서평은 크리스티앙 부이의 뺷나타파 요가수행자들
과 우빠니샤드: 힌두 문헌의 역사에 대한 연구뺸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부이의 이
저서는 하타요가 연구사에서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부이는 이 작품
에서 하타요가 문헌의 성립사를 재구성하고, 불이론적 베단타 학파가 하타요가
를 수용하는 과정과 당위성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단타 학파의 비조 샹카
라가 비판한 요가전통을 후대의 베단타 학파가 수용하고 게다가 높이 평가하고
있는 점은 일견 모순된다. 부이는 이러한 모순을 샹캬라가 비판한 요가와 수용한
요가를 나눔으로써 해결한다. 곧 샹카라가 비판한 것은 뺷요가경뺸 전통으로 대표
되는 상캬 전통의 파탄잘리요가일 뿐, 그 전통에 속하지 않은 비-파탄잘리 요가
는 적극 수용하고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평자가 소개한대로 만약 이
러한 부이의 관점이 승인된다면, 현재 알려진 인도철학사의 요가 전통은 9세기
이후 창안되어 천 년 이상 주류를 형성해온 베단타의 불이론적 요가를 배제한 기
형적 요가 전통일 뿐일 것이다.

뺷불교학리뷰뺸는 이번 호로 창간 10주년, 지령 18호를 맞이하였다. 그 동안 불


교학계에서는 시도하지 않는 혹은 시도하였더라도 생명력이 길지 않았던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계속해왔다. 앞으로 10년은 이러한 시도를 더욱더 국내에 뿌리내
리고 더욱더 세계로 뻗어나가는 시간이 될 것이다.

계룡산 자락에서
뺷불교학리뷰뺸 편집위원장
김성철
차례

| 편집자 서문 | 5

| 투고논문 |

①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A̅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a̅laṅka̅ra : Youngjin LEE 15

②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 하영수 49

③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a̅ya)의 의미 :


이수미 87

④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 조윤경 129

⑤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 Daniel M. Stuart 165
| 번역 |

①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 폴 드미에빌 / 김성철, 배재형, 차상엽 역 199

② 연민과 공성 - 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 Lambert Schmithausen(람버트 슈미트하우젠)
/ 사이토 나오키(齊藤直樹) 일역, 양영순 역 261

| 서평 |

크리스티앙 부이, 뺷나타파 요가수행자들과 우빠니샤드 : 힌두 문헌의 역사에 대한 연구뺸


: 박영길 291

| 윤리규정 | 309

| 편집규정 | 317
투고논문

①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A̅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a̅laṅka̅ra
Youngjin LEE

②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하영수

③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a̅ya)의 의미
이수미

④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조윤경

⑤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Daniel M. Stuart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Youngjin LEE
(HK Research Professor, Geumgang Center for Buddhist Studies)

국문요약

이 논문은 뺷현관장엄론뺸에 대한 아리야 비묵띠세나의 주석서에 나타난 두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두 문제 중 하나는 전와(轉訛)된 쁘라끄리뜨 문장이
고 다른 하나는 아리야 비묵띠세나의 주석서 제명의 혼란이다. 필자는 이 문제
를 다루기 위해서 ‘사본 A’와 ‘사본 B’로 부른 네팔과 티벳에 보존되어있는 사
본들과 ‘사본 C’라고 부른 네팔-독일 사본보존프로젝트(NGMPP)에서 두 군
데로 흩어져 있던 새로 확인된 뺷현관장엄론뺸 사본을 참조하였다.

*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Korea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Grant funded by the
Korean Government (KRF-2007-361-AM0046).

불교학리뷰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18권 (2015. 12) 15p~48p
16 불교학리뷰 vol.18

두 번째 장에서는 아리야 비묵띠세나가 쁘라끄리뜨를 사용하는 다른 학파


로부터 인용하였지만, 필사자들이 이 언어에 대해 익숙하지 않아 초래된 전와
된 문장을 “tathāgato tti vattavvo ṇo tu vattavvo sammāsaṃbuddhaḥ”(그를
단지 여래라고 불러야지 정등각자로 부르지 말아라)로 개선하였다. 그리고 특
히 이 인용이 아리야 비묵띠세나가 주석하고 있는 뺷이만오천송반야뺸와 일치하
지 않음에도 그가 이 문장을 인용한 의도에 관해 다루었다.
제 3장에서는 주로 아리야 비묵띠세나 주석서의 제명에 대한 혼동을 다루었
다. 실례로 사본 A의 콜로폰에는 이 주석서의 제명이 “Pañcaviṃśatisāhasri-
kāryaprajñāpāramitopadeśaṃ Abhisamayālaṃkāraśāstraṃ”(이만 오천송 반
야에 대한 가르침인 현관장엄론)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이는 주석 대상인 뺷현관
장엄론뺸 게송의 제명과 일치한다. 더욱이 새로 확인된 게송 사본의 첫 번째 앞면
에는 “Śrīpañcaviṃśtisāhasrikāyāḥ Prajñāpāyamitāyāḥ ․ ĀryaVimuktisenakṛteyaṃ
ṭīkā sunirmalā”(이 [문헌]은 성스러운 이만 오천송 반야에 대한 오점이 없는
주석서로서 아리야 비묵띠세나가 지었다.)라는 기술이 있다. 이 두 자료는 “아
리야 비묵띠세나가 뺷현관장엄론뺸 주석서뿐만이 아니라, 성 마이트레야 나타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뺷현관장엄론뺸 그 자체 즉 게송도 지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장의 결론에서는 무엇 때문에 주석서 제명의 혼란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의
견을 피력하였고 주석서의 제명을 다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제어: 현관장엄론, 아리야 비묵띠세나, 쁘라끄리뜨, 여래, 불지(佛地), 제


명의 혼란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17

I. Introduction

Until very recently, it was believed that a single palm-leaf manuscript of


Ārya Vimuktiṣeṇa’s1) commentary, commonly called Abhisamayālaṅkāravṛtti,2)
survives. Giuseppe Tucci photographed this manuscript kept by Rājaguru,
in Nepal, during his expedition in 1954. The photos with their modern
apograph are now preserved in the Instituto Italiano per l’Africa e l’Oriente
in Rome.3) This palm-leaf manuscript was also microfilmed by the
Nepal-German Manuscript Preservation Project (NGMPP A 37/9) and is
now preserved in the National Archives of Kathmandu (NAK 5-55)
(hereafter, ms A).
In 2013, another manuscript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now

* I should make it clear that the third chapter of this paper is the revision of LEE 2015. However,
I added some materials that I hadn’t yet found at that time to support my assertion and changed
my conclusion.
* I would like to express my gratitude to Ms. Wendy Morison who proofread this manuscript
carefully and reviewers who gave valuable suggestions to me. Courtesy of them, I could revise
and improve this paper.
1) I adopt “Vimuktiṣeṇa” instead of the proper Sanskrit form, Vimuktisena, based on readings of
th th
relatively old manuscripts (12 ~13 ?) that I consulted. cf. Abhisamayālaṅkārālokā NGMPP
A 37/7(= NAK 3/738) 17r5, etc. Wohihara, one of editors of Ālokā, always adopted the
reading, Vimuktiṣeṇa; Abhisamayālaṅkāravivṛti NGMPP A 35/12 (=NAK 5/236) 1v2 and
29r2; Abhisamayālaṅkāravivṛti NGMPP A 35/10 (=NAK 3/738) 35v6.
2) This text is not only the oldest available commentary on Abhisamayālaṅkāra but also possibly
the first commentary. See Makransky 1997. 187; regarding the traditional view, which
ascribes AA to Maitreyanātha and makes mention of Asaṅga and Vasubandhu as Ārya
Vimuktiṣeṇa’s predecessors, consult Apple 2008, 26-28; with rescpect to the unreliability of
the traditional view, which was inherited by Tibetan tradition, see Nakamura 2011.
3) Sferra 2008. 28, 52; Regarding the modern apograph of the manuscript, see Sferra 2008, 63.
18 불교학리뷰 vol.18

preserved in Tibet, was identified by Guan Di, a Ph.D. candidate at Peking


University (hereafter, ms B). This manuscript, placed fourteenth on Wang
Sen’s list,4) seems to have been microfilmed by the Institute of South Asia
and Southeast Asia Studies of Peking University in 1988.5) The manuscript
on palm leaves consists of 107 folios and is written in the script named “the
Proto-Bengali-cum-Proto-Maithili type” by Gustav Roth.6) It probably
dates back to the early twelfth century, which is about the same time period
as ms A.7) In 2014, the digital images from the microfilm were shared,
courtesy of Prof. Duan Qing at Peking University, with scholars who are
Abhisamayālaṅkāra specialists, including myself.
In a previous paper, I reported that eight folios that are scattered into two
sets — three folios of ms A (numbered 97, 99, and 100) and five folios of
NGMPP A 35/12 (the 1st, 2nd, 4th, 6th, and 8th folios), which are limited
to parts that are only written in the Nepalese script with the hooked top on
the palm leaves—constitute one and the same manuscript of AA (hereafter,
ms C).8) Recently, at the Geumgang-Taisho joint seminar, I also asserted

4) Hu-von Hinüber 2006, 300; another text, titled Pañcaviṃśatisāhasrikāprajñāpāramitābhi-


samayālaṃkāravṛtti, comprised of 252 folios, is listed eighth on Wang sen’s list. I also found
a manuscript titled Abhisamayālaṃkāravṛtti consisting of 84 folios on the list of Sanskrit
manuscripts preserved in CTRC. But these manuscripts are not accessible to almost all
scholars until now.
5) Saerji 2014, 294; However, according to Prof. Dr. Karashima Seishima, this manuscript
together with others, which had been preserved in the Library of the Cultural Palace of
Nationalities (民族文化宮圖書館), Beijing, were microfilmed much earlier, probably in 1960s.
6) Roth 1970. ⅩⅩⅠ-ⅩⅩⅤ ; The akṣara list made by Kouda Ryōshū is very useful for learning
this script: Kouda 2004, 93-112.
7) Consult the third chapter of this paper, “Colophon of ms B and the title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19

that ms C was written by the first scribe of ms A.

In this paper, I would like to discuss two matters relating to the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namely, ms A and ms B,
together with the newly identified kārikā manuscript, ms C:
1. a quotation of one short sentence in Prakrit from another school,
which is corrupt in both of the manuscripts, ms A and ms B, and
unusually differentiates tathāgata from samyaksaṃbuddha, and
2. the final colophon of ms B and the title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with reference to ms C.

II. Corrupt sentence in Prakrit

In the first chapter of his commentary, Ārya Vimuktiṣeṇa quotes one


short Prakrit sentence from another school (nikāyāntara), which is yet to be
identified. In both manuscripts, ms A and ms B, this sentence seems to be
corrupt, mainly because the scribes did not have sufficient knowledge of
Prakrit. The corrupt sentence is preceded by the following passage:

[In the Perfection of Wisdom in 25,000 lines, the Blessed one says]
“Furthermore, Subhūti, a bodhisattva should be called none other than tathāgata
after9) the tenth stage” with the implied sense of fulfilment of all qualities of

8) Lee 2015, 221-225.


9) Excluding the recast version of PvsP and Xuanzang’s translation, 若菩薩摩訶薩住第十地已。
與諸如來應言無別: ≪大般若波羅蜜多經≫ 83c23-24, other sources do not support “daśamyā
20 불교학리뷰 vol.18

the Buddha such as the ten powers, which is the realization of the Perfectly
enlightened one.10)

A 36v4-5, B 34v1: daśamyāḥ punaḥ subhūte bhūmeḥ paraṃ bodhisatvas11)


tathāgata evêti vaktavya iti | samyaksaṃbuddhādhigamadaśabalādisarvabu-
ddhadharmmaparipūryabhisandhinā12)

Being preceded by the above passage, Ārya Vimuktiṣeṇa quotes one


sentence from the unidentified text of the unspecified school:

bhūmeḥ paraṃ”, but instead give support to “is staying at the tenth stage (daśamyāṃ bhūmau
sthitaḥ or vartamānaḥ)” as in LPG 97r14, 97r15, and 93v15-94r1. Surprisingly, in PvsP[K]
102.23~29, the Buddha’s reply to the question from Subhūti, “kathaṃ bodhisattvo
mahāsattvo daśamyāṃ bhūmau sthitaḥ saṃs tathāgata eveti vaktavyaḥ”, is as follows: evaṃ
hi subhūte bodhisattvo mahāsattvo daśamyāḥ punar bodhisattvabhūmeḥ paraṃ tathāgata
eveti vaktavyaḥ. This would implies that “daśamyāḥ bodhisattvabhūmeḥ param” is actually
of the same meaning of “daśamyāṃ bhūmau sthitaḥ”, which could be translated into
“sometimes after [a bodhisattva has entered] the tenth bodhisattva-stage.”
10) The Tibetan translation is portrayed differently. D [No. 3787] shes phyin, ka 78b5; Q [No.
5185] sher phyin ka 90b5-6: rab 'byor byang chub sems dpa' chen po sa bcu pa la gnas pa ni
de bzhin gshegs pa nyid du brjod do zhes bya ba ni yang dag par rdzogs pa'i sangs rgyas kyis
brnyes pa'i stobs la sogs pa sangs rgyas kyi chos thams cad yongs su ma rdzogs pa la dgongs
pa yin no || “… a bodhisattva who is abiding at the tenth stage should be called none other than
tathāgata” … [he] has not fulfilled all qualities of the Buddha, such as the ten powers that the
Perfectly enlightened one had attained.
11) bodhisatvas] A, bodhisattvas B; At the first abhisamaya of ms B, the unexpected reading,
˚sattva, appears more than ninty times, while it appears only fourteen times in ms A. On the
Hybrid Sanskrit form of bodhisatva, see Bhattacharya 2010.
12) ˚paripūryabhisandhinā] applied sandhi, ˚paripūriabhisandhinā AB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21

A 36v4-5, B 34v1-2: nikāyāntare [']py uktaṃ |

transcription tathāgato tti vantavo ṇo tu rthattartho sammāsaṃbuddha iti |

transcription tathāgato tti caturtho ṇo tu vvattartho sammāsambuddha iti |

Tib[D] 78b6; Tib[Q] 90b6-7: sde pa gzhan dag las kyang de bzhin gshegs pa
zhes brjod par bya'i | yang dag par rdzogs pa'i sangs rgyas zhes ni brjod par
mi bya'o zhes bshad do ||

Based on the Tibetan translation, we can assume that the Sanskritized


form of the quotation is “tathāgata iti vaktavyaḥ | no tu vaktavyaḥ
samyaksaṃbuddhaḥ”. If we accept this reconstruction, then we could
correct the Prakrit sentence to “tathāgato tti vattavvo ṇo tu vattavvo
sammāsaṃbuddhaḥ.”13) The translation would be as follows:

13) I am deeply indebted to Prof. Dr. Karashima Seishi for this correction. He willingly accepted
my request to read this sentence, together with the colophon of ms B, at the Brāhmī club.
Prof. Karashima suggested this revision, hereby sharing his excellent knowledge of Prakrit
with myself and others. The main reason for corruption of this sentence is because the scribes
did not accept the gemination of vv. For them, only gemination after r—for example, rvv and
rmm and so on— is allowed. They, therefore, read rvv as rth, which is very similar to the
shape of the former. With regard to Pkt. vattavva < Skt. vaktavya, see Pischel, 1965, 392. (§
570); In Pkt. the dental n is changed into the cerebral ṇ. Pischel 1965, 165, 224; Woolner
1917, 11(§ 7). I did not find any rule stating that the initial gemination of vv is allowed in Pkt.
22 불교학리뷰 vol.18

In another school, there is also a saying that you should call him tathāgata, but
not samyaksaṃbuddha (perfectly enlightened one).

As mentioned before, the text, along with the school,14) has not been
identified. Although I searched both Sanskrit e-texts and Chinese texts
available to me, I could find neither the same sentence nor the concept that
differentiates tathāgata from samyaksaṃbuddha. I did, however, find a
passage in the section of the Daśabhūmikasūtra, describing the tenth
bodhisattva-stage (Dharmameghā bhūmi), which is quite similar to the
quotation and the explanation offered by Ārya Vimuktiṣeṇa.

[When] rays of light have been poured on the head of the bodhisattva
simultaneously, he is called “one who has been initiated” into the sphere of the
Perfectly enlightened one. However, he is called “a perfectly enlightened one”
after fulfilling the ten powers [of the Buddha] … You, Conqueror's child! In
this way, the bodhisattva, as soon as he has been initiated by Buddhas, Blessed
ones, is called “one who has been conferred the initiation of the great wisdom”,
15)
namely, initiation into the perfectly enlightened one. However, he will be
called “a perfectly enlightened one” by fulfillment of the ten powers [of the
Buddha] …

14) We can exclude the Sammatīya school (正量部), since colophons of ms A and ms B reveal
that Ārya Vimuktiṣeṇa as a Mahāyānist belonged to the Kaurukulla[ka] branch of the noble
Sammatīya school. See n. 52.
15) This compound, samyaksaṃbuddhābhiṣekeṇa, does not occur in sources other than the
Sanskrit texts.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23

tāś ca raśmaya[s] tulyakālaṃ tasya bodhisatvasyottamāṃge nipatitā16)


bhavaṃti | sa ca bodhisatvo 'bhiṣikta17) ity ucyate | samyaksaṃbuddhaviśaye
daśabalaparipūryā tu saṃyaksaṃbuddha iti saṃkhyāṃ pratilabhate | … evam
eva bhavaṃto jinaputrā[ḥ] samanaṃtarābhiṣikto18) bodhisattvas tai[r] buddhair
bhagavadbhir mahājñānābhiṣekābhiṣikta ity ucyate samyaksaṃbuddhābhiṣekeṇa
daśabalaparipūryā tu samyaksaṃbuddha iti [saṃkhyāṃ gacchati] | … 19)

'od gzer de dag kyang dus gcig tu byang chub sems dpa' de'i yan lag gi dam pa
la 'bab par 'gyur te | byang chub sems dpa' de yang yang dag par rdzogs pa'i
sang rgyas kyi yul la mngon par dbang bskur ba zhes bya'o || stobs bcu yong su
rdzogs nas ni | yang dag par rdzogs pa'i sang rgyas su bgrang ba yang thob
par 'gyur ro || … kye rgyal ba'i sras de bzhin du byang chub sems dpa' yang
sang rgyas bcom ldan 'das de dag gis dbang bskur ma thag tu ye shes kyi
dbang bskur bas dbang bskur ba zhes bya ste | stobs bcu yong su rdzogs nas ni
yang dag par rdzogs pa'i sang rgyas kyi grangs su 'gro 'o || … 20)

16) nipatitā] em., nipatitāni ms


17) bodhisatvo 'bhiṣikta] em., bodhisatvābhiṣikta ms
18) samanaṃtarā˚ ] em., syamanaṃtarā˚ ms
19) Quotation from a manuscript of the Daśabhūmikasūtra referred to as ms B by Matsuda (1996)
contained in NGMPP A38/7 56v1-6: This passage from the oldest Nepalese manuscript,
named ms A by Matsuda, is unfortunately missing. Other Sanskrit sources include (1)
DBh[R] 85.23-86.09 (2) DBh[K] 183.11-184.08; Chinese translation : (3) ≪漸備一切智徳經≫
(T.285, Dharmarakṣa 297 CE) 490c18-491a13 (4) ≪十住經≫ (T.286, Kumārajīva 402-412
CE) 529a19-b06 (5) ≪大方廣佛華嚴經≫ (T.278, Buddhabhadra 418-412 CE) 572b02-25 (6)
≪大方廣佛華嚴經≫ (T.279, Śikṣānanda 695-699 CE) 206a16-b01 (7) ≪佛説十地經≫
(T.287, Śīladharma 753-790 CE) 568b11-c09; This passage is also quoted in the Chinese
translation of Vasubandhu’s commentary on the Daśabhūmikasūtra ≪十地經論≫ (T.1522)
195b24-c10.
20) Tibetan translation in the mdo sde section: Stog Kanjur [TBRC version], mdo sde, ga
24 불교학리뷰 vol.18

This quotation makes no mention of a bodhisattva who abides at the


tenth bodhisattva-stage and has been initiated by Buddhas as tathāgata.
However, a clear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e bodhisattva who has been
conferred the initiation of the great wisdom, and the perfectly enlightened
one who has completed the ten powers. Ārya Vimuktiṣeṇa’s explanation
that all qualities of the Buddha are represented by the ten powers would
seem to have something to do with the Daśabhūmikasūtra. This is due to
the fact that PvsP, on which Ārya Vimuktiṣeṇa commented, lists additional
items to the ten powers, which begin with ten perfections and end in the
abandonment of all defilements and cessation of continuation of the latent
tendencies.21) Given that the Daśabhūmikasūtra and the Mahāsāṃghikas
had a close relationship,22) the aforementioned, unidentified school might
be the Mahāsāṃghikas.23)
Ārya Vimuktiṣeṇa quotes the same sentence from the PvsP twice more.
The following quotes support Ārya Vimuktiṣeṇa’s distinction between
tathāgata and saṃyaksambuddha as in the Prakrit sentence and reveal why
a bodhisattva after the tenth stage is called tathāgata.

136a6-131a1 (vol. 54), Shey Kanjur[TBRC version] mdo sde, ga 136a7-137a1 (vol.50).
21) PvsP[D] 225.08-12; PvsP[K] Ⅰ-2, 102.23-29; LPG 97r13-15; ≪光讃經≫ (T.222,
Dharmarakṣa 286 CE) 197a23-26; ≪放光經≫ (T.221, Wu Chaluo (無叉羅) 291 CE)
29b19-22. Up to the sarvākārajñatā (薩云若慧); ≪摩訶般若波羅蜜經≫ (T.223, Kumārajīva
404 CE) 259c07-10; ≪大般若波羅蜜多經≫ (T.220, Xuanzang 660-663 CE) 88c11-17. All
Chinese translations start with the six perfections, instead of the ten perfections;
Tib[Kanjur] D No.0009, shes phyin, ka 260a5-260b1; Tib[Tanjur] D No. 3790, sher phyin,
ga 248b7-249a3.
22) Karashima 2014, p.139, n.82; Skilling 2013, 202.
23) It was reported that the language of the Mahāsāṃghikas was Prakrit. Bareau 1955, p.56, n.4;
Baruah 2000, 48.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25

(1) Then, in this context which bodhisattva is referred to? [A bodhisattva] who
has a wisdom of such qualities that has been cultivated for a single day [is
referred to.]
Is he one for the first time to resolve [to become the Buddha], who has
entered into the activities, who is irreversible, or who is obstructed by one
rebirth?
First, he is not the fourth since it will be said, “a bodhisattva should be
called none other than tathāgata after the tenth stage.”
What does it mean? The [bodhisattva] should be called tathāgata because
of his engaging in the services of tathāgata, not because of his realization
of tathāgata.

(2) If the aforementioned Non-returner has abandoned the eighth class of


defilements relating to the Summit of Existence, then this [bodhisattva] is
taught to be one progressing towards the fruit of Arhatship. [The Blessed
one] says: “Śāriputra! There are bodhisattvas who, having stood in the six
perfections, make the qualities of the Buddha appear and they themselves
are not separated from the qualities of the Buddha until they realize the
unexcelled complete enlightenment.” Regarding this [bodhisattva progressing
towards the fruit of Arhatship, the Blessed one] will say, “A bodhisattva
should be called none other than tathāgata after the tenth stage.”
For what reason? Because it is accepted that he is waiting on living beings
with the duties of tathāgata.
The Arhat, however, is none other than the Perfectly enlightened one. This
[Arhat identified as the Perfectly enlightened one] is not mentioned here
26 불교학리뷰 vol.18

because it has already been explained in the instruction on the Buddha-


jewel.24)

(1) katamaḥ punar atra bodhisatvo [']dhikriyate | yasyêyam evaṃguṇā


ekadivasaparibhāvitā prajñā | kiṃ prathamacittotpādikaḥ | caryāpratipanno
[']vaivarttikaḥ | ekajātipratibaddho vā na tāvac caturtho daśamyā bhūmeḥ
paran tathāgata eva vaktavya ity abhidhānāt | ko [']rthas tathāgatakṛtyena
pratyupasthānāt tathāgato [']sau vaktavyo na tu tathāgatādhigamena | A
9v4-6, B 9r2-3.

(2) ya eṣo 'nāgāmîty uktas tasya yadi bhāvāgrikāṇāṃ kleśānām aṣṭamaḥ prakāraḥ
prahīṇo bhavati | tato [']sāv arhatvaphalapratipannaka ity ucyate | yad
āha santi śāriputra25) bodhisatvā ye ṣaṭsu pāramitāsu sthitvā satvānāṃ
buddhadharmmāvabhāsaṃ kurvanti26) ātmanā ca buddhadharmmāvabhāse-
nâvirahitā bhavanti27) yāvad anuttarāṃ samyaksaṃbodhim abhisaṃbuddhā
iti | tam evâdhikṛtya vakṣyati | daśamyā bhūmeḥ paraṃ bodhisatvas
tathāgata eva vaktavya iti | kiṃ kāraṇaṃ sa hi tathāgatakṛtyena satvānāṃ
pratyupasthita iti kṛtvā | arhaṃs tu samyaksaṃbuddha eva sa28) ca
buddharatnāvavāde nirdiṣṭatvān29) na punar ihôcyate | A 14r1-3, B 13r2-3.

24) With regard to another English translation, consult Sparham 2006, 30 and 43.
25) śāriputra] B, śāripu A
26) kurvanti] A, kurvvanti B
27) bhavanti] B, bhavaṃti A
28) sa] B, om. A
pc, ac
29) nirdiṣṭatvān] B, tinirdiṣṭatvān A .. diṣṭatvān A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27

In these quotations, the bodhisattva whom should be called tathāgata is


considered to have two possible identities. Either he is one who is
obstructed by a single rebirth (ekajātipratibaddha)30) or one progressing
towards the fruit of arhatship (arhattvaphalapratipannaka). Both of whom,
however, belong to the assembly of irreversible bodhisattvas.31) This
bodhisattva is referred to as tathāgata because he, who has not yet attained
the final realization (tathāgatādhigama=bodhi), is performing services for
other beings. The last two sentences of the second quotation clearly show
that tathāgata identified as arhattvaphalapratipannaka is differentiated from
arhat, which is a synonym for the perfectly enlightened one. What Ārya
Vimuktiṣeṇa means here is that after the tenth stage, a bodhisattva can be
called tathāgata who is still waiting on living beings with the duties of
tathāgata, but cannot be called Arhat ․ Samyaksaṃbuddha who has fulfilled
the qualities of the Buddha.
Ārya Vimuktiṣeṇa, after having quoted the sentence in Prakrit, mentions
another system of the ten levels that are common to all three vehicles,
introduced in PsvP:

The tenth stage, however, [is taught, as such, in the kārikā of the
Abhisamayālaṅkāra] :

30) Tsong kha pa also placed the ekajātipratibaddha at the tenth stage. See Apple 2008, 159.
31) Although the ekajātipratibaddha is understood to be the “Once-returner” (Apple 2008, 159),
Rngog blo ldan shes rab, the first commentator of the AA and the Tibetan translator of the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as well, asserted that the arhattvaphalapratipannaka is to
be obstructed by one rebirth. For details on the irreversible bodhisattvas, consult Apple 2008,
149-180.
28 불교학리뷰 vol.18

The stage of the Buddha [in which a bodhisattva]32) dwells by [certain kinds
of] knowledge,33) after having gone beyond the nine levels,34) is to be known
as the tenth bodhisattva-stage.

And the nine levels [in the kārikā] are (1) the lineage-level, characterized by
lineages of disciples and so on, (2) the eighth level of one progressing towards
the first fruit, (3) the level of seeing of stream-enterers, (4) the level of
diminishment of once-returners, (5) the level of being free from desire of
none-returners, (6) the level of those one who have done [the work to be done]
of Arhats, (7) the level of disciples of which intention is to clearly distinguish
the three vehicles, as it is said, “the designation of the ‘vehicle of disciples and
pratyekabuddhas’ is for distinguishing [the three] Vehicles,”35) (8) the

32) This translation is supported by Haribhadra’s comment on the same kārikā, which I will
quote in footnote 47. The kārikā itself could be translated into “The knowledge—with which
a bodhisattva abides at the stage of the Buddha, after having gone beyond the nine stages—is
to be known as the tenth bodhisattva-stage”, the meaning of which the composer of AA
would intend.
33) Ārya Vimuktiṣeṇa seems to interpret the knowledge (jñāna) as skill in means (upāyakauśala)
in his commentary. According to Haribhadra’s commentaries on AA, certain kinds of
wisdom are ascribed to those that start with the wisdom based on the sovereign mastery of
karmic actions (karmavaśitāśrayatva : AAA[W] 104, 10) or that begin with the wisdom of
aspirational prayer (praṇidhāna : AAV[A] 34.21.)
34) I will refer to “bhūmi” as “level”, instead of “stage”, which I have used so far. This is in order
to distinguish the stages common to the three Vehicles from those of bodhisattvas only.
35) The recast version of the Sanskrit text, namely PsvP[D] and PsvP[K], along with two Tibetan
translations, Tib[Kanjur] and Tib[Tanjur], enumerate 9 stages, from (1) to (9). This is the
same as the quotation mentioned. However, other sources omit the seventh level, and prior to
the lineage level (gotrabhūmi) add another stage: śuklavipaśyanābhūmi (level of bright
insight, LPG 97v1); 見現 (insight), ≪光讃經≫ 199a1; 滅淨 (destruction of virtues[?], ≪放光
經≫ 29b25; 乾慧地 (level of dry wisdom) ≪摩訶般若波羅蜜經≫ 259c12; 淨觀地 (level of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29

pratyekabuddha-level of pratyekabuddhas, both living like rhinoceros and


living with crowds, and (9) the bodhisattva-stage with the previously mentioned
nine kinds. Therefore, [the Blessed one] says [in the 25,000 lines,] “When a
bodhisattva who is practicing in the six perfections up to the Buddha’s qualities
not shared with others with skill in means, having gone beyond the lineage-
level to the bodhisattva-stage, dwells in the Buddha-stage. This is the tenth
bodhisattva-stage.”36)

daśamī punar37) bhūmir

nava bhūmīr atikramya buddhabhūmau pratiṣṭhate |


yena jñānena sā jñeyā daśamī bodhisattvabhūḥ38) ||

tāś cêmā nava bhūmayo yad idaṃ gotrabhūmiḥ śrāvakādigotralakṣaṇā |


aṣṭamakabhūmiḥ prathamaphalapratipannakasya39) ․ darśanabhūmiḥ śrotaā-
pannasya | tanubhūmiḥ sakṛdāgāminaḥ | vītarāgabhūmir anāgāminaḥ |
kṛtāvibhūmir arahataḥ | śrāvakabhūmir yānatrayav[y]aktavyavasthānābhisandhinā |
yathoktaṃ śrāvakapratyekabuddhayānam iti bhūmivyavasthānasyâitad adhivacanam

bright insight), ≪大般若波羅蜜多經≫ 88c18. I do not know how to interpret “若有所處” in


≪光讃經≫ 199a1, which should be related to (3) and (4). There are other passages in the
recast version of PvsP and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in which the ten levels start
with the level of bright insight (śuklavipaśyanābhūmi). cf. PvsP[K] 1-2, 113 and A 38r5 and
B 36r1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36) With regard to another English translation, see Sparham 2005, 123.
37) punar] A, puna B
38) bodhisattvabhūḥ] B, bodhisatvabhūmiḥ A (hypermetric)
39) ˚pratipannakasya] A, ˚pratipannasya B
30 불교학리뷰 vol.18

iti | pratyekabuddhabhūmiḥ khaḍgaviṣāṇakalpānāṃ varggacāriṇāṃ ca


pratyekabuddhānām | bodhisatvabhūmiś40) ca yathoktâiva navavidhā | tenâha
yadā Subhūte bodhisattva upāyakauśalena pāramitāsu yāvad āveṇikeṣu
buddhadharmmeṣu caran* gotrabhūmiṃ yāvad bodhisatvabhūmim atikramya
buddhabhūmau pratiṣṭhate | iyaṃ bodhisatvasya41) daśamī bhūmir iti || 16 || A
36v5-37r1 ; B 34v2-4

If we depend entirely on Ārya Vimuktiṣeṇa’s explanations, then the


intention of the composer(s) of PvsP in introducing this heterogeneous
system, is accounted for as follows: a bodhisattva, who stays after the tenth
bodhisattva-stage and is engaging in the services of tathāgata, is not
qualified to attain the ultimate stage, until he perfects all the qualities of the
Buddha and comprehends the levels of disciples and pratyekabuddhas. The
real tenth bodhisattva-stage can only be reached after he has fulfilled all
qualities of the Buddha and passed through the levels common to all three
vehicles. In doing so, he will attain the final realization and the title of the
Arhat ․ Samyaksaṃbuddha.
According to this understanding, the Buddha-stage is the stage of Cloud
of Dharma even though the former is a higher stage than the latter. This is
because Ārya Vimuktiṣeṇa excludes the stage of Cloud of Dharma from the
ninth of the ten levels common to all three vehicles. In this respect, he
appears to divide the Cloud of Dharma into two stages, namely, the lower
pseudo-stage and the ultimate true stage. The former is the stage in which a

40) bodhisatva˚] A, bodhisattva˚ B


41) bodhisatva˚] B, bodhisattva˚ A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31

bodhisattva who has yet to embrace the vehicle of disciples and


pratyekabuddhas remains, while the latter is the level of the Buddha where
only one who has embraced the vehicle can reach.
However, we are not sure that the explanation of Ārya Vimuktiṣeṇa
conforms to that of the Perfection of Wisdom in 25,000 lines itself. This is
because many of the versions of the Perfection of Wisdom in 25,000 lines
describe a bodhisattva who has already attained the qualities of the Buddha
as tathāgata.42)
In the latest Chinese translation by Xuanzang (660~663 CE), the last
stage of the ten levels common to all three vehicles appears be interpreted
as being distinct from the stage of Cloud of Dharma, which is differs from
Ārya Vimuktiṣeṇa’s explanation. According to his translation, the last stage
is not defined as the tenth bodhisattva-stage, but as the level of Tathāgata
(如來地). When a bodhisattva at the tenth stage has completed the qualities
of the Buddha, passed through the nine stages from the level of bright
insight (淨觀地) up to the bodhisattva-stages, and perpetually abandoned all

42) When a bodhisattva has attained the qualities of the Buddha, he becomes tathāgata. LPG
97r13-15, Tib[Kanjur]: Delge[0009] shes phyin, ka 260a5-260b1, Tib[Tanjur]: Delge
[2790] shes phyin, kha 248b7~249a3, ≪放光經≫T 221. 29b19-22, PvsP [D] 225.08-11,
PvsP[K]Ⅰ-2 102.24~102.29. The Chinese translation by Kumārajīva, ““須菩提。十地菩薩
當知如佛 (Subhūti! You should know that a bodhisattva of the tenth stage is the same as the
Buddha.)≪摩訶般若波羅蜜經≫T.223, 257c06-07) and Xuanzang’s interpretation, ““若菩薩
摩訶薩住第十地已。與諸如來應言無別 (A bodhisattva, a great being, who has stayed at the
tenth stage, should be told to be no different from tathāgatas: ≪大般若波羅蜜多經≫ T.220,
83c23-24) remind me of “tathāgata iva” instead of “tathāgata eva”. The reason why a
bodhisattva is almost identical to tathāgatas or buddhas seems to rest on his ability to (or the
possibility of) becoming tathāgata through fulfilling all qualities of the Buddha. That is to
say that he will have completed the qualities of the Buddha someday.
32 불교학리뷰 vol.18

defilements and ended continuation of the latent tendencies with skilful


means, he, as the Arhat ․ Samyaksaṃbuddha, finally abides at this level.43)
The stage of Cloud of Dharma is defined as the tenth stage where
bodhisattvas must perfect twelve dharmas beginning with accepting earnest
vows of (beings of) limitless places (攝受無邊處所大願).44) In other
materials, except for the Chinese translation by Dharmaraksạ (286 CE),
these twelve dharmas are mentioned as preparations that bodhisattvas at the
ninth bodhisattva-stage need to complete. This tenth bodhisattva-stage is
also considered the place where a bodhisattva, who in essence is no
different from tathāgata, stays as he is capable of becoming tathāgata.45)
Because the bodhisattva at the tenth bodhisattva-stage should go forward or
reach (趣) the level of Tathāgata, this level becomes a distintive and higher
state than the tenth bodhisattva-stage.46)

43) “善現。云何菩薩摩訶薩住第十地趣如來地。善現。是菩薩摩訶薩方便善巧。行六波羅蜜多四念
住乃至十八佛不共法。超淨觀地種姓地第八地具見地薄地離欲地已辦地獨覺地及菩薩地。又能
永斷一切煩惱習氣相續。便成如來應正等覺住如來地。善現。如是菩薩摩訶薩住第十地趣如來
地。” ≪大般若波羅蜜多經≫ T.220, 88c17-24.
44) The meaning of this term differs in its Sanskrit equivalent, “yad uta anantapraṇidhānaparigrahaḥ,
sa yathā yathā praṇidadhāti tathā tathāsya samṛdhyate (Accepting infinite earnest vows
means that the more he (=a bodhisattva at the ninth stage) takes the earnest vow, the more
increased it becomes.)” PvsP[K]Ⅰ-2 92.06-08.
45) “復次善現。諸菩薩摩訶薩住第十地時。應圓滿十二法。云何十二。一者應圓滿攝受無邊處所大
願隨有所願 皆令證得 … 十二者應圓滿一切功徳成辦具足。善現。諸菩薩摩訶薩住第十地時。
應勤圓滿此十二法。善現 當知。若菩薩摩訶薩住第十地已。與諸如來應言無別。”≪大般若波羅
蜜多經≫ T.220, 83c13-24.
46) When it comes to the bodhisattva-stages that are peculiar to bodhisattvas, the level of
Tathāgata (如來地) can be considered the eleventh bodhisattva-stage, even though it is still
the tenth level common to the three vehicles. I am hesitant to apply this interpretation to
other sources. It could be an unique or liberal interpretation by Xuanzang from the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33

Nevertheless, it is obvious that Ārya Vimuktiṣeṇa’s quotation of the


Prakrit sentence had played a crucial role in reinforcing his understanding
of PvsP.47)

III. Colophon of ms B and the title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Ms A and ms B end with a final colophon on folio 112 recto (112r2-6)


and on folio 106 verso (106r4-106v2) respectively. While the colophon of

Yogācāra’s standpoint. In the Bodhisattvabhūmi belonging to the Yogācāra tradition, the


thirteenth Tathāgatabhūmi is clearly distinguished from the twelfth niṣṭhāgamanabhūmi,
which is a synonym for the Dharmameghabhūmi. See Kim 2004, 89-91. Especially n. 29;
Also see MSA[Levi] 160.21-28. Here, the stage of the Buddha (Buddhabhūmi) of which
fruit is attainment of enlightenment (bodheḥ prāptiḥ) is separated from the tenth stage of
which fruit is initiation [into the sphere of the Buddha] (abhiṣeka). Xuanzang’s translations
of the Saṃdhinirmocanasūtra and the Yogācārabhūmi, both of which have exactly the same
sentences, clarify that the Buddha-stage is the eleventh stage: “爾時觀自在菩薩白佛言。世
尊。如佛所說菩薩十地。所謂極喜地 ․ 離垢地 ․ 發光地 ․ 焰慧地 ․ 極難勝地 ․ 現前地 ․ 遠行地 ․不動
地 ․ 善慧地 ․ 法雲地。復說佛地爲第十一。”≪解深密經≫(T.676) 703b14~17, ≪瑜伽師地論≫
(T.1579)729a19-23.
47) The tendency to divide the tenth bodhisattva-stage (Cloud of Dharma stage) into two, was
continued by Haribhadra (active during the reign of King Dharmapāla in the late-eighth
century, or at the beginning of the ninth century). Evidence of this can be seen in his
commentary: bodhisattva-bhūmiś ca yathoktā bodhisattvānāṃ navavidhā. ity evaṃ
nava-bhūmim atikramya daśamyāṃ punar bhūmau bodhisattvo buddha eva vaktavyo, na tu
samyaksambuddha iti pañcaviṃśatisahasrikāyā vacanāt. yatra buddha-bhūmau yena
karma-vaśitāśrayatvādinā jñānenāvatiṣṭhate sā tena prāpyā daśamī dharma-meghāmbu-
pravarśaṇād dharma-meghā bodhisattva-bhūmiḥ. AAA[W] 104,03-11. Also see AAV[A]
34,16-23.
34 불교학리뷰 vol.18

ms A is almost perfectly preserved,48) around half of the colophon of ms B


is missing. Fortunately, we can reconstruct the missing part of ms B with
assistance from ms A and the Tibetan translation.49) This, however, does
exclude the portion peculiar to ms B that contains information regarding the
identity of the donor of the manuscript as well as the date it was copied.
Thanks to Nakamura’s excellent edition as well as his English translation,50)
we do not need to thoroughly deal with the colophon of ms A here. I will
briefly mention three relevant points:

1. The colophon provides information confirming that the title of this text,
commonly called Abhisamayālaṃkāravṛtti,51) is “Pañcaviṃśatisāhasrikā-
ryaprajñāpāramitopadeśaṃ Abhisamayālaṃkāraśāstram.”
2. Ārya Vimuktiṣeṇa, a Mahāyānist, was also affiliated with the Kaukulla[ka]
branch of the Sammatīya school (正量部).52)
3. The colophon dates ms A — donated by Cintāmaṇiśrīmitra, also a
Mahāyānist — to the thirty-second regnal year of a king named Rāmapāla
(ca. 1077-1120) of the Pāla Empire.53)

48) The last three akṣaras at the end of line 4, as well as the first three and a single akṣara in the
middle of line 6, are damaged. We can, however, reconstruct them without too much
difficulty. See Lee 2015, 229-230; Nakamura 2014, 712-713.
49) Nakamura 2014, 498.06-14., which ends with the first verse in the Śārdūlavikrīḍita meter of
ms A.
50) Nakamura 2014, 328.09-329.12; 655.26-656.21.
51) Pensa 1967; Sparham 2005; Nakamura 2014.
52) Nakamura 2014, 328; mahāyānasaṃ(pr)asth(i)tasya śākyabhikṣor Āryavimuktiṣeṇasya
kaurukullāryasammatāyasyâ˚ A112r3; /// .. rukullārya .. + .. .. + B 106r5; Regarding the
Kaukullaka branch of the Sammatīya school, see Bareau 1955, 25, 40, 126.
53) A 112r5-6: deyadharmmo yaṃ pravaramahāyānayāyinaḥ paṇḍitasthaviraśākyabhikṣoś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35

Below is a transcription of the colophon of ms B, which was not


included in ms A, followed by its translation based on my own
reconstruction:54)

106v1 /// .. .. (m).(h)ā(y)ānayāyi(na)ḥ paṇḍitasthavirābha(yā) .. .. g(u)p.aśiṣya-


(sya) sthavira(Ś)ubhākaraguptasya ya .. tra puṇyaṃ tad bhavatv ācār(y)o .ā ..
.. .. .. pitṛpūrvvaṅgamaṃ kṛtvā sakalasattvarā .. .. .. tta(r)ajñā .. .. lāvā .. ///
106v1v2 ///.. likhitam (i)daṃ pustaka(m)* || @ || .. bhaṃ bh. .. tu sa(r)vvsa-
ttvarāśe(r) nnara .. .. m iti || @ ||55)

[This is a religious gift] of the elder Śubhākaragupta, practicing the excellent


Great Vehicle and a pupil of the learned, the elder [Abhayākara]gup[t]a.56)
May the merit of this lead [a heap of] all beings preceded by [teachers,
preceptors, mother] and father [to obtain the fruit of] the highest knowledge!
This manuscript has been written … Let it be virtuous …

Unfortunately, the part containing the exact date when ms B was copied

Cintāmaṇiśrīmitrasya … parameśvaraparamabhaṭṭāra .. paramasaugatamahārājādhirāja-


śrīmatRāmapāladevapravarddhamānakalyāṇavijayarājye samvat* || 32 || aśvinadine || 5 ||
54) Lee 2015, 230ff.
55) Lee 2015, 228; The conventions adopted by me here are as follows: three slashes “///” mean
a leaf is broken off here; round brackets “( )” indicate that a character or characters are
damaged but can nonetheless be read or inferred with certainty; a single period “.” indicates
that a part of akṣara is illegible, while two periods “..” mean that the whole akṣara is
unreadable; square brackets “[]” indicate supplemented letter(s) or word(s) by the editor ; *
indicates an anusvāra; “@” represents an ornament.
56) Abhayākaragupta is believed to have flourished between the late-eleventh century and
early-twelfth century, during the reign of the Rāmapāla, and passed away in 1125 CE.
36 불교학리뷰 vol.18

is missing. We can, however, make a rough guess as to when the manuscript


was finished. I suggest that the teacher of Śubhākaragupta, who donated
this manuscript and who is also the author of the Abhisamayamañjarī,57) is
Abhayākaragupta. The renowned scholar Abhayākaragupta finished writing
the Munimatālaṃkāra, a commentary on AA, during the thirtieth regnal
year of King Rāmapāla.58) If my reconstruction is accepted, then ms B
would have been written just slightly after ms A.
Before moving on to another topic, I would like to point out that the date
of the Tibetan translation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slightly
precedes ms A and ms B. Both of these belong to the early twelfth century.
The colophon of the Tibetan translation says that [rNgog] Blo ldan shes rab
(1059-1109 CE), in collaboration with Amaragomin (Go mi 'chi med),
translated this text.59) According to the only known full-length biography of
Blo ldan shes rab, he went to Magadha which was ruled by the King
Rāmapāla at that time and studied the Abhisamayālaṅkāra under the
tutelage of Amaragomin.60) There, with Amaragomin, he must have

57) Abhisamayamañjarī 30 : śrīvajrayognīsādhanam Abhisamayamañjarīnāma mahācārya-


Śubhākaraguptaracitaṃ samāptam | Lee 2015, 234, n.29.
58) Li 2013, 1-3. samāpto 'yaṃ munimatālaṅkāraḥ || || kṛti(r) mahāpaṇḍitĀbhayākaraguptapādānām
iti || || sūrir vvikramaśīlasyābhayo marmmaspṛśaṃ girāṃ | rājye śrīRāmapālasya triṅśada-
bde 'karod imām ||; Lee 2015, 234, n.30.
59) Nakamura 2014, 499.01-02: rgya gar gyi mkhan po shar phyogs kyi dge bsnyen chen po
dpal go mi 'chi med dang | lo ts'a ba chen po sh'akya'i dge slong blo ldan shes rab kyis
bsgyur cing zhus te legs par gtan la phab pa'o || || ; Nakamura 2014, 657.04-07: “Go mi 'chi
med−Indian wise, great religious friend (➝ great layman) of the East−and [rNgog] Blo
ldan shes rab−great translator, Buddhist monk−translated, discussed, and made decision” ;
Only in the sNar thang version, “maṅgalāṃ bhavantu” (“May all [beings] be blessed!”) is
added.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37

translated AA as well as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He also revised


the old Tibetan translation of AAV, or the short commentary by Haribhadra.61)
Since he returned to Tibet at the end of the eleventh century, the translation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must have been finished before the
twelfth century.
Let us return to the first point, which is the title of the text we are dealing
with. In the colophon of ms A,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is titled
“Pañcaviṃśatisāhasrikāryaprajñāpāramitopadeśaṃ Abhisamayālaṃkāra-
śāstram”62) This title is reminiscent of the title of AA itself,
Abhisamayālaṅkāraṃ [nāma] Prajñāpāramitopadeśaśāstram, which is
believed to have been composed by the Noble Maitreyanātha.63) The
section colophons of ms A and ms B clearly show that the commentary by

60) Apple 2009, 17-18; Kramer 2007, 38-41.


61) Kramer 2007, 58. He also revised the Ālokā by Haribhadra in collaboration with Dhīrapāla;
Nakamura Hodo gave me information about his forthcoming paper, which also deals with Blo
ldan shes rab’s works, “The reception and Transmission of the Abhisamayālaṃkāra in Tibet-
The Interpretation of the Embodiment of Buddha in the Chapter 8” which was presented at
the 3rd Conference of the International Seminar of Young Tibetologists in Japan.
62) Namely, the Treatise of Abhisamayālaṃkāra that is instruction on the noble Perfection of
Wisdom in 25,000 lines; A 112r2-3: pañcaviṃśatisāhasrikāryaprajñāpāramitopadeśaṃ
abhisamayālaṃkāraśāstraṃ parisamāptam* || ❁ || kṛ((.. .. ..ṃ su))≪tiḥ su≫ kṛtikarmmaṇo
mahāyānasaṃ(pr)asth(i)tasya śākyabhikṣor Āryavimuktiṣeṇasya; B 106r4 : pañcaviṃ-
śatisāhasrikāryaprajñāpāramitopadeśa .. .. ///
63) abhisamayālaṅkāre prajñāpāramitopadeśaśāstre sarvākārajñatā'dhikāraḥ prathamaḥ samāptaḥ ||
C 3r5. In Obermiller (1970, 40), the text is titled “Abhisamayālaṅkāraṃ nāma prajñāpāra-
mitopadeśaśāstram”. Additionally, another title, “abhisamayālaṅkāraratnāmaprapāra-
mitopadeśaśāstraṃ”, found on the colophon of the paper manuscript in the Devanāgarī
script that is pasted onto ms C, should be corrected to “abhisamayālaṅkāraran nāma
prajñāpāramitopadeśaśāstraṃ.”
38 불교학리뷰 vol.18

Ārya Vimuktiṣeṇa has the same title as AA itself.64) This could possibly
mean that Ārya Vimuktiṣeṇa himself composed the kārikās i.e., the
Abhisamayālaṅkāra.
On the first folio recto of ms A, there is a title written in Devānāgarī by
the same scribe who wrote the second title on the first folio recto of ms C,
which was corrected by another hand:

C 1r1 transcription
Śrīpañcaviṃśtisāhasrikāyāḥ Prajñāpāyamitāyāḥ ‧
(1) Late Nepalese
ĀryaVimuktisenakṛteyaṃ ṭīkā sunirmalā
(2) Devānāgarī Abhisamayālaṅkārakārikā ĀryaMaitreyanāthakṛtiḥ

A 1r1 transcription
Āryapañcaviṃśatisāhasrikā Prajñāpāramitā
(3) Before correction
Abhisamayālaṅkāropadeśaśāstram śākyabhikṣor
written by the same hand (2)
ĀcāryaVimuktisenasya kṛtiḥ
Āryapañcaviṃśatisāhasrikā Prajñāpāramitā
(4) After correction Abhisamayālaṅkāropadeśaśāstravyākhyā śākyabhikṣor
ĀcāryaVimuktisenasya sunirmalā kṛtiḥ

64) Lee 2015, p.236, n.34. A 44v3, B 42r2: Abhisamayālaṅkāre Prajñāpāramitopadeśaśāstre


sarvākārajñatādhikāraḥ || @ || subhūtiparivarttaḥ prathamaḥ || @ || The topic of the
knowledge in all aspects in Abhisamayālaṃkāra, the treatise of instruction on the
Perfection[s] of Wisdom. The first section of Subhūti [in Perfection of Wisdom in 25,000
lines.] (sarvā˚] A, sarvvā B); C 8v3 Abhisamayālaṅkāre Prajñāpāramitopadeśaśāstre sarva-
kārajñatā'dhikāraḥ prathamaḥ samāptaḥ || @ ||;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section
colophons is that both ms A and ms B have the title of the first topic and the first section of
the Prajñāpāramitā, while ms C does not. In the Tibetan translation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the “abhisamayālaṅkāraśāstra” refers to the kārikās. See n. 68.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39

The correction of ms A indicates that the corrector’s choice of the title


(3), which appears to have been copied from the final colophon, was not
suitable for Ārya (or Āc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since he believed
that Maitreyanātha had composed the kārikās. Therefore, he added vyākhyā
to the śāstra65) in order to distinguish between the commentary and the
kārikās. If we follow these corrections, then we are forced to understand
that (1) is the title of the commentary, even though it is written on the first
folio of ms C, the content of which comprises the kārikās only.
Confusion of the title of AA with that of its commentary may imply that
there was a tendency to affiliate the kārikās with Ārya Vimuktiṣeṇa at a certain
point in time.66) Presumably after Haribha (or perhaps his predecessors)
had ascribed the kārikās to Maitreyanātha for the first time,67) this

65) The possibility exists that the first verse in Śārdūlavikrīḍita meter influenced this correction:
A 112r4 “… tenâryeṇa cirād ayaṃ paṭudhiyā (pṛ)ṣṭvêva sākṣāj jinaṃ saṃ[kh]yāc ca
kramanāmabhedaphalato vyākhyāta ity adbhutaṃ ||” (“ Therefore, it is marvelous that … the
noble [Vimuktiṣeṇa], after having directly asked the Victor (=Maitreyanātha who composed
AA(?)) with the clear intelligence, he has at last explained (vyākhyāta) this [system or
doctrine of Perfection of Wisdom] by means of number, sequence, name, divisions and
results.” Nakamura 2014, 655.
66) Considering that the titles of (1) and (3) were added after the scribe had finished writing
almost half of ms A and ms C in the early-twelfth century, this tendency may have at least
continued throughout the twelfth century.
67) Two Haribhadra’s commentaries, AAA and AAV, are the earliest accounts to attribute the
authorship of AA to Maitreyanātha. See AAA[W] 01.13-14, AAV[A] 03.10-11; In the c and
d pādas of the first verse of the colophon of ms A, which I have quoted in n. 65,
Maitreyanātha seems to be regarded as the author of AA or, at least, one who inspired Ārya
Vimuktiṣeṇa to compose his own commentary; Regarding the question of Ārya
Maitreyanātha’s authorship and the existence of the commentaries by Vasubandhu and
Asaṅga first mentioned by Haribhadra, consult Makransky 1997, 111 and Nakamura 2011.
40 불교학리뷰 vol.18

mythological, though popular belief gained prevalence over the authorship


of Ārya Vimuktiṣeṇa, as in (2). As a result of this trend, the title of the
commentary would have been changed to either the Abhisamayālaṅkāraśā-
stravyākhyā, as in (4), or the Abhisamayālaṅkāraśaśāstravṛtti, as the
Tibetan translation of the commentary reveals.68) I believe that we do not
have decisive enough evidence to ascribe authorship of the kārikās to Ārya
Vimuktiṣeṇa, although some of the aforementioned titles would support this
claim.69)
If we turn our eyes to the Tibetan translation of AA by Blo ldan shes rab

68) Nakamura 2014 ; D [No. 3787] shes phyin, ka 14b1-2 ; Q [No. 5185] sher phyin ka 15b4-5 :
'phags pa shes rab kyi pha rol tu phyin pa stong phrag nyi shu lnga pa'i tshul gyi mngon par
rtogs pa'i rgyan gyi man ngag gi bstan bcos kyi 'grel pa = Pañcaviṃśatisāhasrikā-
ryaprajñāpāramitopadeśasya Abhisamayālaṅkāraśāstrasya vṛtti; This name might have
been derived from or influenced by the one of the opening verses by Haribhadra (AAA[W]
01.19-20) “yogābhyāsapadārthatattvamathanāl lokottarajñāninaḥ jātas tv ĀryaVimukti-
ṣeṇasudhiyo yatno mahān vṛttitaḥ | ” (The very intelligent Ārya Vimuktiṣeṇa, who had
supramundane knowledge coming from churning out the truth of the subjects [of AA]
through repeated yoga practice, has made a great effort in [composing] the Vṛtti.)
69) For example, the Mahāyānasūtrālaṃkāra consists of the kārikās that were also traditionally
ascribed to Maitreyanātha, along with their commentary (bhāṣya) by Vasubandhu. In the
colophon of the Levi’s edition, which ascribes the authorship of kārikās to the Great
Bodhisattva Vyavadātasamaya, the work is titled not “Mahāyānasūtrālaṃkārabhāṣya” but
“Mahāyānasūtrālaṃkāra” (samāptaś ca Mahāyānasūtrālaṃkāra iti || MSA[Levi] 189.07.)
A recent English translation adds “vyākhyā” after “Mahāyānasūtrālaṃkāra” based on the
Tibetan translation. Jamspal, L, R. Clark, J. Wilson, L. Zwilling, M. Sweet, and R. Turman
2004, 344; However, we cannot exclude the possibility that Ārya Vimuktiṣeṇa himself
actually composed the kārikās, as is asserted by modern scholarship: “It is possible Ārya
Vimuktisena’s commentary is not only the oldest available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ṃkāra but also the first. As we have said, it is also quite possible that Ārya
Vimuktisena himself was the author of AA.” Makransky 1997, 187.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41

with the assistance of Amaragomin, who also translated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there is no mention of its authorship in the colophon.70) I am
uncertain of the reason why Blo ldan shes rab did not refer to its authorship.
Especially since in his commentary on the Ratnagotravibhāga, named the
Theg chen rgyud bla'i don bsdus pa, he classified AA as a provisional
(neyārtha) text among the five teachings of Maitreya.71) The most acceptable
explanation for this is that the Sanskrit manuscript(s) that Blo ldan shes rab
consulted did not contain any information regarding its authorship.
Based on the previously mentioned sources, I suggest that regardless of
its authorship, AA was not originally separated from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This is the most probable reason for why the two texts have
the same title. Regardless of whether my suggestion is acceptable or not,
we might at least reconsider the title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commonly called Abhisamayālaṅkāravṛtti by many contemporary scholars.

70) Obermiller 1929, 72.14-16 : “shes rab kyi pha rol tu phyin pa'i man ngag gi bstan bcos
mngon par rtogs pa'i rgyan ces bya ba | rje btsun byams pa mgon po'i mdzad ba rdzogs so ||”
(=Abhisamayālaṅkāraṃ nāma Prajñāpāramitopadeśaśāstram | bhaṭṭarakaMaitreyanāthasya
kṛtiḥ samāptā || “The work of the most venerable Maitreyanātha has been completed.”;
Although Obermiller edited a colophon that attributes authorship to Maitreyanātha, I could
not find this sentence in any of the versions of the Tibetan translation of AA that are
accessible to me; Tib[C] 13b4-6, Tib[D] 13a6-7, Tib[K] 15b2-3, Tib[N] 14a7, Tib[Q]
15b2-3 : “'phags pa shes rab kyi pha rol tu phyin pa'i man ngag gi bstan bcos mngon par
rtogs pa'i rgyan zhes bya ba'i tshig le'ur byas pa rdzogs so || || paṇḍita go mi 'chi med dang |
lo ts'a ba blo ldan shes rab kyi 'gyur || ”; However, on folio 1 recto of the Narthang and the
Golden Tanjur, I found a title “shes rab kyi pha rol tu phyin pa'i man ngag gi bstan bcos
mngon par rtogs pa'i rgyan zhes bya ba rje btsun byams pa mgon pos mdzad pa bzhugs so |”,
from which Obermiller’s insertion most probably came.
71) Cha 2013, p.243, n.7.
42 불교학리뷰 vol.18

약호 및 참고문헌

AA = Abhisamayālaṅkāra(kārikā)
AAA[W] = Abhisamayālaṃkārālokā Prajñāpāramitāvyākhyā The work
of Haribhdara, ed. by Unrai Wogihara. Tokyo 1932-1935:
The Toyo Bunko.
AAV[A] = Abhisamayālaṃkārakārikāśāstravivṛti Haribhadra's commen-
tary on the Abhisamayālaṃkāra-kārikā-śāstra editied for
the first time from a Sanskrit manuscript, ed. by Amano,
Kõei H. Kyoto 2000: Heirakuji-Shoten.
DBh[R] = Daśabhūmikasūtra et Bodhisattvabhūmi- Chapitres Vihāra
et Bhūmi, ed. by Rahder, J. Paris 1926: Paul Geuthner.
DBh[K] = Daśabhūmīśvaro nāma Mahāyānasūtram, ed. by Kondō,
Ryūkō, 3rd ed., Kyoto 1983: Rinsen Book Co.
LPG = The Gilgit manuscript of the Larger Prajñāpāramitā. in
Gilgit Buddhist Manuscripts, Śaṭapiṭaka vol. 10(3-5) ed.
by Vira, Raghu and Chandra Lokesh
MSA[Levi] = Mahāyāna-sūtrālaṃkāra Exposé de la Doctrine du Grand
Véhicule, ed. by Lévi, Sylvain, reprint. Kyoto 1983: Rinsen
Book Co.
PvsP[D] = The Pañcaviṃśatisāhasrikā Prajñāpāramitā-edited with
critical notes and introduction, ed. by Dutt, Nalinaksha,
London 1934: Luzac & Co.
PvsP[K]Ⅰ-2 = Pañcaviṃśatisāhasrikā Prajñāpāramitā Ⅰ-2, ed. by Kimura,
Takayasu, Tokyo 2009 : Sabkibo Busshorin Publishing.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43

Abhisamayamañjarī Śubhākaragupta viracita, Mṅon-par rtogs pa'i sne ma.


ed. by Samdhong Rinpoche and Vrajavallabha Dvivedī, Sāranātha, Vā
rānạsī : Durlabha Bauddha Grantha Śodha Yojan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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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Contributions to the development and classification of the
Abhisamayālaṃkāra literature in Tibet from the ninth to fourtee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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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47

Abstract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

Youngjin LEE

HK Research Professor, Geumgang Center for Buddhist Studies

This paper deals with two issues in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ālaṅkāra[kārikā], one being a corrupt sentence in Prakrit
and the other relating to the title of the commentary by Ārya Vimuktiṣeṇa.
In this research, I have consulted two Sanskrit manuscripts preserved in
Nepal and Tibet, which are referred to as ms A and ms B by me as well as a
newly identified manuscript, which is scattered into two sets in NGMPP.
In the second chapter, I revised a corrupt Prakrit sentence into “tathāgato
tti vattavvo ṇo tu vattavvo sammāsaṃbuddhaḥ” (He should be called
tathāgata, but not saṃyaksambuddha, a perfectly enlightened one.) in both
the manuscripts. This mistranslation was due to the scribes’s limited
knowledge of Prakrit. I also tried to figure out why Ārya Vimuktiṣeṇa
48 불교학리뷰 vol.18

quotes this Prakrit sentence, in which tathāgata is unusually differentiated


from saṃyaksambuddha, especially when we consider that the quotation,
presumably from the Mahāsāṃghikas, does not match the description of the
Pañcaviṃśatisāhasrikā Prajñāpāramitā, on which Ārya Vimuktiṣeṇa is
commenting.
The third section mainly deals with confusion relating to the title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In the colophons of ms A, the text, commonly
called Abhisamayālaṃkāravṛtti, is titled, “Pañcaviṃśatisāhasrikāryaprajñā-
pāramitopadeśam Abhisamayālaṃkāraśāstraṃ. This is the same title that
the manuscript(s) of kārikās has. Moreover, there is a description,
“Śrīpañcaviṃśtisāhasrikāyāḥ Prajñāpāyamitāyāḥ ․ ĀryaVimuktisenakṛteyaṃ
ṭīkā sunirmalā” on the first recto of the newly identified manuscript of the
kārikās. Both of these examples tell us that the kārikās and the commentary
were composed by the same person, Ārya Vimuktiṣeṇa. In conclusion of
this chapter, I put forward reasons for the confusion and suggest that the
title of Ā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is to be reconsided.

Key words : Abhisamayālaṅkāra, Ārya Vimuktiṣeṇa, Prakrit, tathāgata,


Buddhabhūmi, confusion relating to the title

2015년 10월 14일 투고


2015년 11월 24일 심사완료
2015년 11월 30일 게재확정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하영수
(금강대학교)

국문요약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은 붓다의 수명에 관해서 중요한 교설을 설하는 품


으로 예로부터 중시되어 왔다. 그런데 범어본 「여래수량품」에는 “나(=붓다)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경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 구절은 한역 뺷법화경뺸
에는 설해지지 않았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본 논문
을 작성한 계기이다.
본 논문에서는 한역과 범어본 사이의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 몇 가지 단계를

* 본 논문은 필자가 2015년도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의 제4장 <불보(佛寶)의 재해석: 석가모니 붓


다의 보살행> 중 일부 내용에 다소 수정을 더하여 작성한 것이다.

불교학리뷰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18권 (2015. 12) 49p~85p
50 불교학리뷰 vol.18

설정하여 이를 검토했다.
먼저 원문 추정을 시도해 보았다. 원문에 관해서는 크게 두 종류의 독법이
있음을 확인했는데, 뺷법화경뺸의 두 한역인 뺷정법화경뺸과 뺷묘법연화경뺸의 독
법과 범어본 뺷법화경뺸과 각종 범어사본, 그리고 뺷법화경론뺸의 독법이 그것이
다. 그 중 범어본 자료들은 독법이 일치했는데, 모두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경
문을 포함하고 있다. 뺷법화경론뺸의 경문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를 통해 원문을
추정해 보았다.
이후 추정된 원문을 바탕으로 「여래수량품」의 내용을 재구성해 보았다. 그
결과 ‘붓다의 보살행’이란 다름 아닌 구원성불한 이래로 전개해온 ‘붓다의 교
화행’을 지시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붓다의 교화행을 보살행으로 명명
하는 범본의 내용전개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뺷법화경뺸에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이 설해진 배경에 대해서
검토했다. 뺷법화경론뺸에서는 이를 본원(本願)과 연결시켜 설명하는데, 이는
핵심을 간파한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이 교설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므로, 붓
다의 본원의 특징인 예토에서의 성불 및 교화라는 문맥을 보다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이를 뺷비화경뺸을 참고하여 검토했다.
이러한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이 함의하는 바는 붓다의 무한에 가까운
수명이 그대로 그의 자비의 교화행을 의미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아울러 일체
중생을 성불로 이끌겠다는 붓다의 서원(誓願)은 ‘일불승(一佛乘)’의 지혜를
밝히는 일(「방편품」)과 ‘붓다의 부단한 보살행’(「수량품」)이라는 두 축에 의해
완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뺷법화경뺸, 붓다의 보살행, 뺷비화경뺸, 본원(本願), 예토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51

1. 들어가는 말: 「여래수량품」의 붓다의 보살행

종래에 뺷법화경뺸은 구마라집의 뺷묘법연화경뺸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범어 사본을 교정한 비판적 편집본이 출간되면서 법화경에 대한 연구
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범어본과 한역의 차이는 대개
근소한 것이며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를 드러내는 정도에 머무는 것으로 이해
되기 쉽지만, 그러나 실제로 양자를 대조해보면 형식과 내용 면에 있어서 종종
무시할 수 없는 차이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특히 그러한 차이점이 경전의
중요한 교설과 직접적으로 관련될 경우에는 단순히 내용상의 상이함을 넘어서
경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해석학적인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바로 그
러한 문제를 「제16여래수량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래수량품」은 「제2방편품」과 더불어 법화경의 근본 교설을 담고 있는 품
이라 할 수 있다. 「여래수량품」에서는 석가모니 붓다에 대한 놀라운 사실이 밝
혀지는데, 붓다는 사실 현생에서 최근에 깨달은 것이 아니라 아득히 먼 과거세
에 이미 성불했다는 이른바 ‘구원실성(久遠實成)’과 앞으로 남은 ‘수명’에 관
한 법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붓다의 구원실성과 수명에 관한 교설을 둘러싸고
두 한역(뺷정법화경뺸과 뺷묘법연화경뺸)과 범어본에 확연한 의미상의 차이가 발
견된다. 두 한역에서는 붓다의 수명에 방점이 놓여 있지만, 범어본에서는 “나
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고 설하면서 붓다가 보살행을 행하고 있음을 강조
하고 있다.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낯설고 또한 교리적인 모순을 내포하는 것
으로 생각되는 내용이 범어본 뺷법화경뺸에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역
과 범어본의 차이는 단순한 의미상의 상이함을 넘어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이
요청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인도논사의 주석서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세친(世親,
Vasubandhu)의 뺷법화경론(法華經論)뺸Saddharmapuṇḍarīkasūtra-upadeśa에
52 불교학리뷰 vol.18

다음과 같은 특징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뺷법화경론뺸은 범본은 산실되었고, 한


역으로 보리유지(菩提流支, Bodhiruci) 역 뺷묘법연화경우바제사(妙法蓮華經
憂波提舍)뺸와 늑나마제(勒那摩提, Ratnamati) 역 뺷묘법연화경론우바제사(妙
法蓮華經論優波提舍)뺸 2종만이 전해지는데, 두 번역 모두 「여래수량품」의 해
당 구절에 관해 뺷묘법연화경뺸의 번역어를 거의 그대로 차용하면서도 내용상으
로는 범어본의 독법을 지지하고 있다.
이로써 뺷법화경뺸에 있어 중요한 교설을 담고 있는 「여래수량품」의 특정 구
절에 관해 몇 가지 문제가 노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래수량품」에서 설하는
붓다의 수명에 관해서 원문은 무엇이고, 그 의미는 어떤 것이며, 무엇을 함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이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는 「여래수량품」의 특정 구절에 관해 원문을
추정하고 그 의미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여래수량품」의 문제의 경문

「여래수량품」은 청중들에게 여래에 대한 믿음을 지닐 것을 요구하면서 시


작된다.1) 동일한 말을 세 번 반복하고, 이에 대해 미륵보살을 위시한 모든 보
살들이 여래에 대한 믿음을 보이면서 설법을 간청하기를 세 번 반복한 후에 설
법이 시작된다. 석가모니 붓다는 가야성 부근에서 이번 생애에 성불한 것이 아
니라, 사실은 수백천코티나유타의 겁 이전에 성불했다고 말한다.2) 이미 아득
한 과거세에 성불했다는 이른바 구원성불(久遠成佛)의 교설이다. 붓다는 오래
전에 성불한 이후 사바세계(娑婆世界, Sahā-lokadhātu)와 다른 많은 세계에서

1) 뺷묘법연화경뺸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b1-2): 諸善男子 汝等當信解如來誠諦之語.


2) 뺷묘법연화경뺸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b12-13): 善男子 我實成佛已來無量無邊百千萬億那
由他劫.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53

법을 설해왔고 또한 때때로 방편으로서 열반(죽음)에 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때때로 붓다는 중생의 선근이 적고 번뇌가 많을 경우에는 “어릴 적에
출가하여 최근에 깨달았다”고 설명하기도 하였으나, 그와 같은 법문은 중생들
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설한다.3) 그리고 여래의 방편은 진실한 것이
며 거짓말[虛言]이 아닌데, 그 이유는 여래의 교화가 세상 사람들이 보고 생각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인 여래의 경계(如實知見)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
라고 설명된다.4) 그리고 본 논문에서 검토해보고자 하는 경문이 이어진다.5)

3) 뺷묘법연화경뺸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b13-c9).


4) 뺷묘법연화경뺸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12-13): 諸所言說 皆實不虛 所以者何 如來如實知見
三界之相.
5) 「여래수량품」의 해당 구절에 관해서 본격적으로 논의한 연구는 매우 적은 실정이다. 따라서 본문
중에 선행연구를 개관하지 않고, 다만 각주에 국내외 연구동향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를 대신하기
로 한다.
먼저 국내에서 「여래수량품」의 해당 구절에 대한 연구는 필자가 아는 한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
았다. 다음으로 해외의 연구동향을 언급하자면, 범어본 뺷법화경뺸에 대한 번역본 중에서 Kern의 영
역, 土田와 岩本의 일역, 그리고 松濤의 일역 등에서 범본의 표기대로 해당구절을 번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붓다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고 번역. Kern 1963, 302.; 土田&岩本-下
1965, 21.; 松濤-Ⅱ 2001, 109-110. 그러나 이러한 번역본에서 구체적인 해설이나 논의를 하고 있
지는 않다. 필자가 아는 한 다음의 두 연구에서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로 田村芳朗의 뺷법화경뺸 해설서에서는 붓다가 보살행을 하고 있으므로 뺷법화경뺸에서 보살
행이 강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취지의 언급을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부터 뺷법화경뺸의
중심사상에 기존의 진리(방편품), 생명(수량품)과 더불어 실천(보살행)을 포함시켜 이를 뺷법화경뺸
의 3대사상이라고 해설한다. 그러나 그는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문제를 그 특이성과 중요성에 비해
지나치게 간명하게 언급하고 있어, 심도 있는 논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田村 1969, 115ff.
두 번째 연구로는 松本史朗의 「久遠實成の佛について」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이 논문은
필자가 아는 한 「여래수량품」의 해당 경문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한 최초의 연구이다. 또한 필자
가 이 문제에 착목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논문이기도 하다. 松本는 뺷정법화경뺸·뺷묘법연화경뺸이라
는 기존의 한역과 세친의 뺷법화경론뺸을 대조하고, 여기에 범어본 및 범어사본을 활용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본 논문에서 범어 원문을 추정하기 위해 채용한 방법은 松本가 그의 논문에서 취한 방법
과 같다. 필자는 여기에 범어본 자료를 더욱 보강하여 논의를 전개했다. 松本와 필자는 문헌 활용에
있어 기본적으로 동일한 방법을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범어본
54 불교학리뷰 vol.18

문제의 경문
[1] 뺷묘법연화경뺸: 諸善男子 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 今猶未盡.(T.9, 42c22-23)
[2] 뺷정법화경뺸: 又如來不必如初所說 前過去世時行菩薩法 以爲成就壽命限也.
(T.9, 113c23-25)

인용문 [1]은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앞의 “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


이 주어, “今猶未盡”이 술어가 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해석은 “내가 본래
행했던 보살도에 의해 이룬 수명은 지금도 오히려 끝나지 않았다”가 될 것이
다. 위 번역문은 과거에 행했던 보살도라는 인행(因行)에 의해 수명을 얻었는
데(所成壽命), 그 수명이 지금도 다 끝나지 않았음(今猶未盡)을 밝히고 있다
고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전체가 한 문장으로 되어 있고, 중점은
수명에 있으며, 문장의 부정어가 “未” 하나라는 점이다.
한편, 뺷정법화경뺸의 한역은 번역이 쉽지 않으나, 이를 시도하면, “또한 여래
가 반드시 처음 설한 바와 같지 않으니, 이전의 과거세 때에 행했던 보살법으
로 성취한 수명의 한도(限)를 삼는다”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앞 문장
“또한 여래가 반드시 처음 설한 바와 같지 않으니”의 부분은 석가모니 붓다의
교화방식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중생이 선근
이 적고 번뇌가 많을 경우에는 방편으로 “젊을 때에 출가하여 깨달았다”6)고
설한다고 하였는데, 약 2500년 전에 출현하여 29세에 출가한 석가모니 붓다의
교화 역시 이와 같은 방식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붓다의 실제 성불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므로, “처음 설한 것과는 다르다”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뒤
의 “前過去世”로 시작되는 문장은 붓다의 수명이 과거에 보살법(보살행)에 의
해 성취한 것을 한도로 삼는다고 하여, 붓다의 수명이 보살행에 의해 결정된

에 誤記가 있다고 보고, 뺷묘법연화경뺸의 독법을 지지한다. 자세한 내용은 松本 2012, 243-254.
6) 뺷묘법연화경뺸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7): 我少出家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55

것과 같은 인상을 주는데,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전체적으로는


여래가 처음 설한 바, 즉 보드가야에서 최근에야 깨달음 얻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여래의 수명의 한도는 과거의 보살행에 의해 결정(성취)되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수명이 남아 있다고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용문 [2]
역시 붓다의 실제 수명을 설명하기 위해 과거에 보살행을 행했다는 설명을 덧
붙이고 있으므로, 전체적으로 붓다의 수명(成就壽命)에 중점이 있다고 할 수
있고, 문장 전체의 부정어가 “不” 하나이다.
위의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두 한역의 번역이 의미상 반드시 일치하
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지만, 두 번역문 모두 붓다의 실제 수명에 방점이 있
으며, 그것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하나의 부정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공통점
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뺷법화경뺸에 대한 세친의 주석서 뺷법화경론뺸(보리유지 역)에서 해당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3] 뺷법화경론뺸: 내가 전생에서 행했던(本行) 보살도가 지금도 아직 다 완수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我本行菩薩道今猶未滿者)은 [내가 세웠던] 본원 때문이다. [제
도되어야 할] 중생계가 아직 남아 있어 [본]원이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다 채워지
지 않았다고 하는 것(言未滿者)이 깨달음을 완전히 갖추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非謂菩提不滿足). 이룬 수명이 또한 앞의 수의 두 배라는 것(所成壽命復
倍上數者)이란, 이 문장은 여래의 수명이 영원함을 드러내어 밝히는 것이다. 뛰어
난 방편으로 많은 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7)

7) 뺷묘법연화경우바제사뺸권2 「제3비유품」(T.26, 9b27-c2): 我本行菩薩道今猶未滿者 以本願故 衆


生界未盡 願非究竟故 言未滿者 非謂菩提不滿足也 所成壽命復倍上數者 此文示現如來命常 善巧
方便顯多數故.
뺷법화경론뺸의 두 번역본은 어구의 가감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본 논문에서 문제로 삼는
‘보살행’에 관해서는 번역이 일치한다. 늑나마제 역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56 불교학리뷰 vol.18

위의 인용문에서 밑줄 친 부분이 뺷묘법연화경뺸의 원문에 해당하는데, [1]의


인용문에서 “今猶未盡”이 “今猶未滿”으로 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뺷묘법연
화경뺸의 한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의를 끄는 것은 뺷법화경론뺸의
주석은 번역어에 있어 뺷묘법연화경뺸과 거의 일치하지만, 문장의 구성과 내용
이 다르다는 점이다. 뺷묘법연화경뺸은 “과거에 보살도를 행함으로 얻은 수명이
지금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반해, 뺷법화경론뺸에서는 “내가 전생
에서 행했던(本行) 보살도가 지금도 아직 다 완수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즉,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 술어의 주어가 뺷묘법연화경뺸에서는 ‘수명’으로 되
어 있고, 뺷법화경론뺸에서는 ‘보살도’로 되어 있어 서로 다르다. 뺷법화경론뺸에
서는 과거에 행한 보살도가 다 완수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내가 세웠던] 본
원 때문이다. [제도되어야 할] 중생계가 아직 남아 있어 [본]원이 완성되지 않
은 것이다” 라고 설명하면서,8) 그러나 이것이 보리(bodhi), 즉 깨달음을 완전
히 갖추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석하고 있다. 그리고 [보살도에
의해] 이룬 수명(所成壽命)이 위의 수의 두 배라고 주석하고 있다(復倍上數).
즉 뺷묘법연화경뺸에서 [과거에 성취한] 수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번역되었
던 하나의 문장을, 뺷법화경론뺸에서는 ① 보살행이 다 완수되지 않았고, ② [보
살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所成壽命)이 두 배가 남았다고 하여, 두 가지 내용
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①의 내용은 교리적으로
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붓다란 과거세에 본원
(本願, pūrva-pranidhāṇa)을 세우고 육바라밀을 수행하여, 보살도를 완성하였
기 때문에 그 과보로서 붓다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인데, ①의
내용은 성불한 붓다의 보살행이 아직 다 완수되지 않았다고 하여, 교리적인 혼

뺷묘법연화경론우바제사뺸권1 「제3비유품」(T.26, 19a2-6): 我本行菩薩道今猶未滿者 以本願故 眾


生界未盡願非究竟故 言未滿者 非謂菩提不滿足故 所成壽命復倍上數者 示現如來常命方便顯多數
過上數量不可數知故.
8) 번역은 大竹晋 2011, 86-88을 참조.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57

선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뺷정법화경뺸, 뺷묘법연화경뺸, 뺷법화경론뺸이 각기


내용이 서로 다르고, 교리적으로도 혼란이 예상되는 이 경문을 범어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4]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r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


a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SP, p.319,2-3)

위 범어문은 Kern&Nanjio 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에 대한 번역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게다가 또한 선남자들이여, 나에게는 지금도(adyāpi) 과거의(=과거에서부터 계속해


온) 보살행(bodhisattvacaryā)이 완성되지 않았고(na pariniṣpāditā), [보살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의 양(āyuṣpramāṇam)도 또한(api) 다 채워지지 않았다(aparipūrṇam).9)

인용한 범어문은 두 가지 사실, 즉 ①과거세에 행했던 보살행이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는 것과 ②수명의 양도 다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
고 있다. 위에 인용한 범문 [4]가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과 수명이라는 두 가
지 내용을 설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말로 “~도”라고 번역할 수 있는 “api”가
위 문장 안에 두 번 나온다는 것에서도 예상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위에 인용
된 범문은 뺷법화경론뺸의 인용(인용문[3])과 내용적으로 거의 같다고 할 수 있
다. 다만 인용문[3]에서 마지막의 “復倍上數”는 범문의 이어지는 문장에, “그
리고 실로 또한 선남자들이여, 아직까지도 나에게는 수명이 다 만료되기까지
는 그 두 배(tad-dviguṇa, 復倍上數)의 수백·천·나유타의 겁이 남아 있다”10)

9) 번역은 松濤 2001, 109-110 참조. 괄호 안의 보충은 필자에 의함.


10) SP. 319, 3-4: api tu khalu punaḥ kulaputrā adyāpi taddviguṇena me kalpakoṭīnayutaśa-
tasahasrāṇi bhaviṣyanti āyuṣpramāṇasyāparipūrṇatvāt/
58 불교학리뷰 vol.18

라는 문장을 앞 문장과 연결시켜서 주석하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앞에서 제시한 두 개의 한역과 주석서 뺷법화경론뺸 중에서 현존하는 범문과 가
장 가까운 것은 뺷법화경론뺸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
다고 하는, 매우 생소하고 교리적으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위 문장
에는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11) 그렇지만 이 문제에 대해, 교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위의 문장을 억지로 교리적으로 맞도록 번역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위 경문의 범어원문의 형태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 필자는 뺷정법화
경뺸·뺷묘법연화경뺸이 아닌, 지금의 범문, 그리고 범문과 거의 흡사한 뺷법화경
론뺸의 해당번역을 더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 먼저 범어본의 사본 등을
통해 살펴본 후에, 경전의 내용을 검토함으로써 이러한 독법의 타당성을 제시
하도록 하겠다.

3. 범어본에 의한 해당 구절의 재해석

1) 범어본에 의한 원문 추정
뺷법화경뺸은 중앙아시아나 네팔 등에서 많은 범어 사본이 발견되었고, 현재
사본을 로마자로 전사(轉寫)하여 출판한 판본들도 상당한 수에 달한다. 여기
서는 교정본과 전사본들의 표기를 확인해보도록 한다.

-교정본-
① Kern&Nanjio 본과 더불어 널리 활용되는 Wogihara&Tsuchida 교정본은 다

11) 앞서 소개한 松本의 논문에서 그가 범어본을 오류로 보고 뺷묘법연화경뺸의 독법을 지지한 결정적
인 이유 중 하나는 붓다가 보살행을 한다는 것이 교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용인하기 어려운
내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松本, 앞의 논문, 254.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59

음과 같다.12)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yuṣ-
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

② Dutt가 중앙아시아의 사본을 바탕으로 작성한 교정본은 다음과 같다.13)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yuṣpra-
māṇam apy aparipūrṇam /

③ Vaidya가 네팔 사본을 바탕으로 작성한 교정본은 다음과 같다.14)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 /
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

세 개의 교정본은 구절의 띄어쓰기 등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구문 전체에


대한 독해는 모두 Kern&Nanjio의 인용문 [4]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사본류
에 관해서는 뺷법화경뺸 사본의 주요 출토지인 카시미르, 중앙아시아, 네팔계통
의 사본 독법을 제시하도록 한다.

-사본류-
① Watanabe Shoko(渡辺照宏)가 Gilgit에서 발견된 사본을 교정하여 로마자로
전사(轉寫)한 교정본은 다음과 같다.15)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vikī bodhisattvacarī pariniṣpāditā āyuṣp-
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12) SP(WT). 1958, 271,16-272,1.


13) Dutt, Nalinaksha 1953, 209,15-16.
14) Vaidya, P.L. 1960, 290,27-28.
15) Watanabe, Shoko 1975, 113,11-12.
60 불교학리뷰 vol.18

② Toda Hirohumi(戸田博文)의 중앙아시아 사본 로마나이즈본은 다음과 같다.16)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ū)r(v)i(kā )yuṣpramāṇam api me kula-
putrā aparipūrnam/

③ 네팔계 사본을 중심으로 집성한 Toda에서는 18개의 사본이 거의 일치한다.17)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r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 āyuṣ-
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먼저 ①에 관해서 말하자면, 와타나베는 자신의 전사본에서 위와 같이 표기


를 하고, 각주에 “paurvika-bodhisattvacarī-pariniṣpādit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로 읽어야 한다고 추가하고 있다.18) 이를 해석하면 “과거의 보살
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도 다 채워지지 않았다”로 번역할 수 있는데, 그는 이러한
독해가 한역의 “本行菩薩道所成壽命, 今猶未盡”과 부합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와타나베는 위의 전사본을 출판하기 전에 사본의 위 구절에 대한 독해방
식을 문제로 삼아 논한 적이 있다.19) 와타나베는 사본의 위 구절이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을 표하면서, 이를 위와 마찬가지로
“paurvika-bodhisattvacarī-pariniṣpādit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으로
읽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독해가 사본에 의해
지지되지는 않는다고 부연하고 있다.20)
②의 특징은 “me kulaputrā”가 두 번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 구
절에 두 개의 문장이 있음을 의미한다. 즉 “나에게 선남자들이여(me kulaputrā)”

16) Toda, Hirohumi 1981, 156.


17) Toda, Hirohumi 1994-2002, Vol.Ⅶ, 4-7.
18) Watanabe, Shoko 1975, 113의 각주12) 참조.
19) 渡辺照宏 1970, 85-86.
20) 위의 책, 같은 곳.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61

와 같이 문장을 이끄는 말을 반복한다는 것은 ‘과거에서부터 행해오던 보살행


이 끝나지 않았음’과 ‘수명의 양이 다 채워지지 않았다’는 두 가지 내용이 설해
지고 있음을 명백하게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③에 관해서 말하자면, 전체 18개의 사본 중에서 15개의 사본이 위의 독해
와 일치한다. 그리고 15개 중에서 10개의 사본이, “pariniṣpāditā”와 “āyuṣpra-
māṇam” 사이에 단다(“/”)를 넣어, 이 구절을 두 가지 내용이 설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3개의 사본에 이독(異讀)이 보이는데, 문장 후반부의
“apy aparipūrṇam”가 “adhy aparipūrṇam”으로 되어 있는 사본이 1개, “asya
paripūrṇam”의 형태를 보이는 사본이 2개 있다. 여기서 adhy aparipūrṇam의
“adhy”는 의미를 형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apy의 오기(誤記)로 생각되며, asya
paripūrṇam의 “asya”는 ‘s’가 ‘p’와 유사하므로, “apy+a(paripūrṇam)”의 오
기로 추정할 수 있다.
이상의 교정본과 사본들을 종합하여 판단을 내리자면 현존하는 교정본과
사본들은 모두 인용 [4]의 범어문을 지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와타나베는
이 구절이 함의하는 교리적 특이성으로 인해 사본의 표기에 의문을 표하면서
뺷묘법연화경뺸의 문의(文意)와 통하는 독법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 독해는
자신이 밝히고 있듯 사본에 의해 지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여기서 인용문
[4]에 대한 뺷법화경론뺸의 주석방식의 특이점을 상기할 볼 필요가 있다. 보리류
지 역과 늑나마제 역과 모두 뺷묘법연화경뺸의 번역어 “我本行菩薩道所成壽
命”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주석에 있어서는 “我本行菩薩道”와 “所成
壽命”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이를 해석하고 있다. 이는 곧 두 역자가 번역어에
관해서는 뺷묘법연화경뺸의 것을 그대로 채용하되, 독해에 있어서는 뺷묘법연화
경뺸의 이 구절을 오독(誤讀)으로 보고 이에 따르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은 다음의 두 가지를 의미할 것이다.
62 불교학리뷰 vol.18

첫째, 「여래수량품」의 상기 구절에 관해 두 부류의 독법이 존재한다. ① 현


존하는 범어본의 교정본과 사본들 그리고 뺷법화경론뺸의 독법과 ② 뺷정법화
경뺸·뺷묘법연화경뺸의 독법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현존하는 범어 사본과 교정
본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고, 한역 뺷법화경론뺸의 독법도 이를 지지하므로 범
어본의 독법을 필사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한 오류라고 보기 어려우리라 생각된
다. 따라서 범어본 뺷법화경뺸의 해당 경문은 타당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로써 「여래수량품」 해당 경문의 원문을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여래수량품」의 상기 구절에 관해 거의 모든 사본이 일치한다는 점으
로부터, 범어본을 통해 뺷법화경뺸을 읽고 신행하던 사람들에게 있어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고 이해되었던 전통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상
정할 수 있다. 뺷법화경론뺸의 두 번역본이 오역(誤譯)이 아니라면, 이 점은 한역
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이상의 논의에 의해 「여래수량품」에서 묘사되는 붓다에 대해 ‘석가모니 붓
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라는 입장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붓다
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이 과연 뺷법화경뺸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고 있고,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지에 대해 검토해보도록 한다.

2) 「여래수량품」 문맥의 재구성


‘붓다의 보살행’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미 깨달음을 얻어 성불한 붓다가 여
전히 보살행을 한다는 이 낯선 교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해서는 이 교설, 붓다의 보살행이 설해진 인용문[4]를 중심으로 그
전후 문맥을 재구성해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용문[4]
앞에서는 구원성불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고, 인용문[4] 이후에는 우리에게
알려진 역사적 붓다에 관해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 둘을 각기 ‘구원실성불(久
遠實成佛)의 보살행’과 ‘가야근성불(伽倻近成佛)의 보살행’으로 나누어 검토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63

하도록 한다.

(1) 구원실성불(久遠實成佛)의 보살행


「여래수량품」에서 석가모니 붓다가 먼 과거에 이미 성불했다는 사실이 밝
혀졌는데, 이러한 구원실성의 붓다가 인용문 [4]에서 보살행을 계속 전개하고
있다고 설하였다. 이 표현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이미 깨달
음을 이룬 붓다가 구원성불한 후에 실제로 어떤 활동을 펼쳐왔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구원실성불의 구체적인 행적에 관해서는 마츠모토 시
로(松本史朗)의 연구가 유용하다.21)
마츠모토는 그의 논문 전반에 걸쳐 구원실성의 붓다와 가야근성의 붓다가
대비적으로 이해되거나, 구원실성의 붓다에 대해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이해하
는 경향에 대해 비판한다. 마츠모토는 뺷법화경뺸에 제시된 구원실성의 붓다가
과거에 깨달음을 얻은 장소가 “사바세계”의 “가야성 부근의 보리수 아래”임을
다음의 경문을 들어 밝히고 있다.22)

[5] 아지타(아일다=미륵)여, 나는 이 사바세계에서 무상정등각을 깨닫고서, 이 모


든 보살 마하살들(=종지용출의 보살들)을 무상정등각을 향하여 교화하고, 고무시
키고, 환희케 하고, 교도(敎導)한 것이다.23)

[6] 그리고 나는 가야(성)에 있는 그 나무(보리수)의 뿌리 부근에서 무상의 법륜을

21) 松本, 앞의 논문 참조.


22) 경문 [5]와 [6]은 松本의 위 연구에 인용된 것이다. 위의 논문, 243-244.
23) SP. 309,4-6: mayaite ajita sarve bodhisattvā mahāsattvā asyāṃ sahāyāṃ lokadhātāv anuttarāṃ
samyaksaṃbodhim abhisaṃbudhya samādāpitāḥ samuttejitāḥ saṃpraharṣitā anuttarāyāṃ
samyaksaṃbodhau pariṇāmitāḥ /
뺷묘법연화경뺸권5 「제15종지용출품」(T.9, 41a2-3): 是諸大菩薩摩訶薩 無量無数阿僧祇 從地涌
出 汝等昔所未見者 我於是娑婆世界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已 敎化示導是諸菩薩.
64 불교학리뷰 vol.18

굴리고서 모두(종지용출의 보살들)를 이 최상의 보리를 위해 숙련시켰다.(게


송 42)
너희들 모두 나의 번뇌로부터 자유롭고(無漏), 진실한 말을 듣고서 나를 믿으
라. 나는 그와 같이 오래 전에(evaṃ ciram) 최상의 보리를 얻었으며, 그리고
그와 같이 오래 동안(evaṃ ciram) 나는 그들 모두(=종지용출의 보살들)를 [무
상정등각을 향하여] 숙련시킨 것이다.(게송 43)24)

위 경문에서 붓다의 성불이 사바세계의 가야성 부근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서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장소는 경전에서 붓다가 아
주 먼 과거세에 성불했음을 증명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종지용출의 보살들을
교화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위 경문들은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즉 붓다가 성불한 이후에 지속적으로 행한 것은 주로 설법을 통한 중생의 교화
(samādāpana)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원실성불의 교화는 매우 다양
한 방식으로 전개되어왔다.

[7] 이때부터 줄곧 나는 선남자들여, 이 사바세계(娑婆世界, Sahā-lokadhātu)와


다른 수백·천·코티·나유타의 세계에서 중생들에게 법을 설시해온 것이다.25)

24) SP. 301,9-12: mayā ca prāpya imam agrabodhiṃ nagare gayāyāṃ drumamūli tatra/
anuttaraṃ vartiya dharmacakraṃ paripācitāḥ sarvi ihāgrabodhau//42//
anāsravā bhūta iyaṃ mi vācā śruṇitva sarve mama śraddadhadhvam/
evaṃ ciraṃ prāpta mayāgrabodhi paripācitāś caiti mayaiva sarve//43//
뺷묘법연화경뺸권5 「제15종지용출품」(T.9, 41b23-28): 我於伽耶城 菩提樹下坐 得成最正覺 轉無
上法輪 爾乃敎化之 令初發道心 今皆住不退 悉當得成佛 我今說實語 汝等一心信 我從久遠來 敎化
是等衆.
25) SP. 317,9-10: yataḥ prabhṛty ahaṃ kulaputrā asyāṃ sahāyāṃ lokadhātau sattvānāṃ dharmaṃ
deśayāmi anyeṣu ca lokadhātukoṭīnayutaśatasahasreṣu/
뺷묘법연화경뺸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b26-28): 自從是來 我常在此娑婆世界說法敎化 亦
於餘處百千萬億那由他阿僧祇國導利衆生.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65

위 인용문에서 “이때부터 줄곧”이란 구체적으로는 앞의 ‘오백진점겁(五百


塵點劫)’의 비유를 지시한다. 오백진점겁이란 석가모니 붓다의 성불과 수명이
라는 시간적 문제를 공간적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 비유인데, 그 내용은 오백천
만억나유타로 표현되는 무한에 가까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가루
로 만들어 가루 하나를 일겁(一劫)으로 치더라도 붓다가 성불하고서 경과한
시간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26) 따라서 “이때부터 줄곧”이란 ‘아주 오래
전에 성불한 이래로 계속해서’라는 의미가 된다. 즉 구원(久遠)에 성불한 이후
붓다는 사바세계와 다른 수많은 세계에서 중생에게 법을 설해왔다. 그리고 헤
아릴 수 없이 오래전에 성불한 이후 계속해서 중생을 교화하는 가운데, 때때로
열반(죽음)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설해진다.

[8] 그리고 또한 선남자들이여, 여래는 계속해서 찾아오는 중생들의 능력(indrya)


과 지혜의 높고 낮음, 정진을 시작한 [시간의] 길이를 관찰하고서, 곳곳에서(각각
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였다. 그리고 곳곳에서 자신의 완전한 열반
(parinirvāṇa)을 선언하였으며, 그리고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중생들을 다양한 법
문으로 만족시켰던 것이다.27)

위 인용문에서 붓다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교화를 했는데 색신(色身,


rūpakāya)의 소멸, 즉 육체적 죽음을 통해 성취되는 완전한 열반(parinirvāṇa,

26) 뺷묘법연화경뺸권5 「제16여래수량품」 T09, 42b11-26.


27) SP. 317,13-318,1: api tu khalu punaḥ kulaputrāḥ tathāgata āgatāgatānāṃ sattvānām indri-
yaparāparajñatāṃ vīryārabdhimātratāṃ vyavalokya tasmiṃs tasminn ātmano nāma vyāharati
tasmiṃs tasmiṃś cātmanaḥ parinirvāṇaṃ vyāharati tathā tathā ca sattvān paritoṣayati
nānāvidhair dharmaparyāyaiḥ/
뺷묘법연화경뺸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1-5): 諸善男子 若有衆生來至我所 我以佛眼 觀其
信等諸根利鈍 隨所應度 處處自說 名字不同 年紀大小 亦復現言當入涅槃 又以種種方便說微妙法
能令衆生發歡喜心.
66 불교학리뷰 vol.18

般涅槃)도 그의 교화 방법 중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붓다는 헤아릴 수 없이 오


래 전에 성불을 이룬 이후로 계속해서 중생을 제도해 왔는데, 때때로 육체적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중생을 교화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완전한 열반에 든
붓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다음의 경문을 보도록 한다.

[9] 실로 선남자들이여, 여래는 여래가 해야 할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여래는


그토록 오래전에 깨닫고, 헤아릴 수 없는 수명(ayuṣpramāṇa)을 가지고 항상(sadā)
머물러 있었으며, 여래는 열반에 든 적이 없으나 중생들을 교화하고자 완전한 열
반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28)

위 인용문은 붓다가 중생 교화를 위해 열반에 들기는 하였지만 실제로는 열


반에 든 적이 없으며, 언제나 상주하고 있다고 설하고 있다. 여기서 밝혀지는
것은 붓다의 열반이 소멸이 아니라 교화의 한 방편(方便, upāya)이라는 점이
다. 이상의 경문들은 때때로 열반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실제로 열반에 들지
않고 언제나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쉼 없이 활동하는 붓다의 이미지를 전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언급한 인용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자면, 위의 인용문 [7]
[8] [9]는 모두 인용문 [4]의 앞의 내용들이다. 그 중에서 인용문 [7]은 “그때부
터 줄곧”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백진점겁에 비유될 만큼 먼 과거에 성
불을 이룬 붓다의 교화활동이 시작된 시기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인용문 [9]
는 인용문[4]의 “나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는 구절 바로 앞의 문장이다.

28) SP. 318,14-315,1 : yad dhi kulaputrās tathāgatena kartavyaṃ tat tathāgataḥ karoti/ tāvac
cirābhisaṃbuddho 'parimitāyuṣpramāṇas tathāgataḥ sadā sthitaḥ/ aparinirvṛtas tathāgataḥ
parinirvāṇam ādarśayati vaineyavaśena/
뺷묘법연화경뺸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19-21): 所作佛事 未曾暫廢 如是我成佛已來 甚大
久遠 壽命無量阿僧祇劫 常住不滅.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67

따라서 인용문들의 내용을 정리하면, 앞에서 오백진점겁에 비유되는 아득한


과거에 성불했음을 밝히고 나서, 이 시기부터 계속해서 교화활동이 지속되었
음을 인용문[7]이 설명하고, 인용문 [8]에서 때때로 과거에 열반에 들었음을
설하나, 인용문 [9]에서 실제로는 열반에 들지 않고 상주하여 법을 설함을 밝
히고, 마지막에 인용문 [4]에서 앞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여 이를 “나의 보살행
이 끝나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용문[4] 앞에 내용은 모
두 과거에 깨달음을 성취한 이후 붓다가 펼쳤던 다양한 ‘교화행(敎化行)’을 지
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로부터 펼쳐왔던 다양한 교
화행을 인용문[4]에서 “나의 보살행(菩薩行)은 끝나지 않았다”고 명확하게 밝
히고 있다. 즉 과거로부터 행해왔던 ‘교화행’을 ‘보살행’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인용문[4]의 맥락인 것이다.

(2) 가야근성불(伽倻近成佛)의 보살행


석가모니 붓다가 구원성불한 이래로 쉼 없이 중생을 교화한 것을 붓다 자
신이 보살행으로 규정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현재불, 그러니까 지금
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인도에서 출현하여, 가야성 근처의 보리수 아래에
서 최근에 성불한 것으로 알려진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10] 게다가 또한 선남자들이여, 나에게는 지금도(adyāpi) 과거의(=과거에서부터


계속해온) 보살행(bodhisattvacaryā)은 완성되지 않았고(na pariniṣpāditā), [보살
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의 양(āyuṣpramāṇam)도 또한 다 채워지지 않았다(aparipūr-
ṇam). 그런데 실로 또한 선남자들이여, 나에게는 앞으로도(adyāpi) 수명의 양이
다 채워지기까지 그것(지금까지의 수명의 양)의 두 배에 달하는 수백·천·코티·나
유타의 겁이 남아있다. 실로 또한 나는 지금(idānīm) [실제로는] 결코 완전한 열반
68 불교학리뷰 vol.18

에 들지 않음에도 완전한 열반[에 들어간다]고 선언하는 것이다.29)

위 인용문에는 가야성 부근에서 최근에 성불한 붓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석가모니 붓다의 수명과 열반에 대한 교설이 담겨 있다. 우선 석가모
니 붓다의 남은 수명에 관해 구원에 성불한 이후 현재까지 아직 그 수명이 다
채워지지 않았음은 인용문 [4]에서 설해진 바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는
앞으로 남은 붓다의 수명은 그것의 두 배(taddviguṇa)가 더 남아 있다고 설해
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붓다의 수명을 설명한 그 다음의 문장인데, 이
문장에서 주목해야 할 표현은 “지금(idānīm)”이라는 단어이다. “지금(idānīm)”
이란 말은 과거세에 이미 성불을 이룬 붓다가 선언한 열반에 대해 대비적으로
사용된 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때의 “지금”이란 말은 곧 “바로 이번 생에
있어서”의 의미이며, 직접적으로는 「제11견보탑품」에서의 열반에 대한 선언
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30) 그리고 열반에 든다는 것의 실질적인 의미는 인
용문[9]에서 그 의미가 밝혀졌듯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열반을 보여줄 뿐,
실제로는 결코 열반에 들지 않고, 항상 우리 곁에 머무르며 중생교화를 위해
쉼 없이 노력하고 있음을 의도하고 있다.
이상으로 「여래수량품」의 주요 내용을 인용문[4]를 중심으로 하여 구원실
성불의 보살행과 가야근성불의 보살행이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해보았다. 결론
을 말하자면, 구원성불한 붓다와 가야근성의 붓다의 보살행은 동일하며, 그 핵

29) SP. 319,2-5: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r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yu-


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api tu khalu punaḥ kulaputrā adyāpi taddviguṇena me
kalpakoṭīnayutaśatasahasrāṇi bhaviṣyanti āyuṣpramāṇasyāparipūrṇatvāt/ idānīṃ khalu
punar ahaṃ kulaputrā aparinirvāyamāṇa eva parinirvāṇam ārocayāmi/
뺷묘법연화경뺸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22-24): 諸善男子 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 今猶未
盡 復倍上數 然今非實滅度 而便唱言 當取滅度.
30) 뺷묘법연화경뺸권4 「제11견보탑품」(T.9, 33c13-14): 誰能於此娑婆國土廣說妙法華經 今正是時
如來不久當入涅槃.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69

심은 중생에 대한 교화, 즉 ‘교화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중생을 교화


하기 위해 항상 상주하며 법을 설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열반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양한 방편으로 중생을 돕는다. 그와 같이 구원성불한 이래 무수
한 시간동안에 걸친 ‘교화행’을 인용문[4]에서 붓다 자신이 ‘보살행’이라고 불
렀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중생에게 법을 설하고, 또한 과거와 똑같은 방
식으로 중생교화의 일환(一環)으로써 열반을 보여줄 것임을 선언하였다. 그리
고 붓다에게는 앞으로도 무한에 가까운 수명이 남아있다. 과거에 행했던 교화
활동을 붓다 스스로가 보살행이라고 불렀으므로, 가야근성불의 교화행도 마찬
가지로 보살행이 된다. 따라서 붓다의 보살행은 과거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
에까지 그의 수명이 남아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이상에서 범어본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내용을 한역의 그것과 비교하여 검
토해보도록 한다. 범어본의 내용전개는 과거에 성불한 이래로 다양한 중생교
화를 펼쳐왔음을 설하고, 그 교화행을 가리켜서 보살행이라 부르면서 앞으로
도 수명이 매우 많이 남아 있으므로, 그 수명 동안에 붓다의 교화행, 즉 보살행
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한역의 경우에는 과거에 성불한 이래
로 다양한 방식으로 교화행을 펼쳐왔음을 설하고서, “내가 과거에 행한 보살
도에 의해 이룬 수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今猶未
盡)”는 흐름이 된다. 그 경우에, 앞에서 자세하게 과거의 ‘교화활동’을 설명하
다가 갑자기 ‘보살도에 의해 성취한 수명’ 문제로 넘어가게 되므로 내용전개가
매끄럽다고 하기는 어렵다. 또한 그 직전의 내용은 분명히 구원에 성불했다는
것이었는데, 갑자기 구원성불 이전의 과거에 보살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을 언
급한다면, 과거에 성불했다는 내용과 성불 이전의 과거에 보살행을 했다는 두
개의 과거사(過去事)가 등장하므로 혼란스러운 느낌을 주게 된다. 그러므로 「여
래수량품」의 내용전개는 먼저 서두에서 붓다가 아주 먼 과거에 성불했음을 밝
히고, 그 오랜 시간동안 붓다 자신이 다양한 방법으로 중생을 교화했음을 설명
70 불교학리뷰 vol.18

하고, 그것을 보살행이라고 규정하고, 앞으로도 수명이 그에 두 배가 넘게 남


았으므로, 자신의 교화행/보살행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범어본의 내
용 전개가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이것이 「여래수량품」의 문맥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이해가 적어도 범본을 중심으로 뺷법화경뺸을 이해해온 사람
들에 의해 지지되어왔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4. 석가모니 붓다의 현재진행형 보살행

1) 석가모니 붓다의 서원과 예토성불-뺷비화경뺸의 설명


이상으로 「여래수량품」에서 언급되는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에 대해 검토
해보았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왜 뺷법화경뺸에는 다른
경전에서는 보이지 않는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독특한 교설이 설해지고 있는
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인용문 [3]의 뺷법화경론뺸에서는 “본원(本願)을
가지기 때문이다, [즉] 중생계가 다하지 않으니 원(願)이 궁극적으로 끝난 것
(究竟)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리(bodhi)가 다 구족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즉 뺷법화경론뺸에서는 붓다의 보살행을 석가모니 붓다가
보살시절에 세웠던 본원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31) 붓다는 보리(bodhi)를
성취했지만, 제도되어야 할 중생계는 끝이 없으므로, 한량없는 중생을 성불로
이끌기 위해 보살 때 세웠던 원행을 계속한다는 해석은 경전의 문의(文意)를
잘 드러내는 탁월한 주석으로 생각된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중생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31) 뺷법화경뺸에서 석가모니 붓다의 본원은 모든 중생이 붓다와 동등한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 본원
은 이미 완성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뺷묘법연화경뺸권1 「제2방편품」(T.9, 8b4-7): 舍利弗當知 我
本立誓願 欲令一切衆 如我等無異 如我昔所願 今者已滿足 化一切衆生 皆令入佛道.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71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붓다가 보살행을 멈추지 않고


계속한다고 한다면, 이는 다른 불국토의 붓다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기 때
문이다. 즉 서방 극락(極樂, Sukhāvatī)정토에서도 중생계는 끝이 없으므로 아
미타불(阿彌陀佛, Amitābha) 역시 쉼 없이 보살행을 행해야 할 것이고, 동방
묘희국(妙喜國, Abhirati)의 아촉불(阿閦佛, Akṣobhya)도 마찬가지일 것이
다.32) 따라서 모든 불국토의 붓다들은 예외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다는 교
리가 성립할 것이며, 그러한 교리가 불교의 교리사에 있어서 이미 정설로서 확
립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체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리는 성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붓다의 보살행을 본원과 연결시켜 설명하는 뺷법화경론뺸의
주석은 어떤 특정한 맥락이 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며, 그 작업은 무엇보
다도 석가모니 붓다가 보살 시절에 세운 본원이 어떤 고유의 특징을 지니는가
에 대해 검토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석가모니 붓다의 현저한 특징 중 하나로 예토(穢土)에서의 성불과 중생교화
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화성유품(化城喻品)」에는 대통지승(大通智勝, Mahā-
abhijñājñānābhibhū)여래의 아들인 16왕자들이 대통지승여래에게 출가하여
법을 청문하고 성불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중 석가모니 붓다는 예토인 사
바세계에서 성불했다고 명시하고 있다.33) 이러한 석가모니 붓다의 예토성불
및 중생교화의 인연에 대해 보다 상세한 내용을 전하는 경전으로 뺷비화경(悲
華經)뺸을 들 수 있다.
뺷비화경뺸의 범어 경전 제목은 Karuṇāpuṇḍarīka-sūtra이다. 제목에서 karuṇā
는 자비, puṇḍarīka는 연꽃들 중에서도 흰 연꽃(白蓮)을 의미하며, 따라서 경
전 제목은 ‘자비(慈悲)의 흰 연꽃(白蓮)에 관해 설하는 경전(經)’으로 풀이될

32) 붓다와 그들의 국토에 관해서는 다음의 저서들을 참조. 시즈타니 마사오·수구로 신죠 2008,
199-210.; 폴 윌리암스·앤서니 트라이브 2009, 269-274.
33) 뺷묘법연화경뺸권3 「제7화성유품」(T.9, 25c5-6): 第十六我釋迦牟尼佛 於娑婆國土成阿耨多羅三
藐三菩提.
72 불교학리뷰 vol.18

수 있다. 뺷비화경뺸에는 총 4종류의 한역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뺷비화경뺸의 원


형으로 추측되는 축법호 역의 뺷한거경(閑居經)뺸(1권), 역자불명의 뺷대승비분
타리경(大乘悲分陀利經)뺸, 도공(道龔) 역 뺷비화경뺸, 담무참 역의 뺷비화경뺸(10
권)이다.34) 뺷정법화경뺸을 번역한 축법호가 이 경전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뺷한
거경뺸을 번역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는 경전의 내용을 상세히 소
개하는 것은 생략하고, 사전의 해설로 이를 대신하고자 한다. 뺷비화경뺸에 대한
뺷大乘經典解說事典뺸의 내용 소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아미타불이나 아촉불이 정토에서 깨달은 붓다임에 반해, 뺷비화경뺸에서는 석가모니


붓다가 이 예토인 사바세계에서 깨닫고,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구제하려고 한다. 그
석가모니불이 대비(大悲, mahākaruṇā)의 보살임을 찬탄하는 것이 주제이다.35)

뺷비화경뺸에서는 석가모니 붓다가 과거 보살이었을 시기에 500가지의 서원


(誓願)을 세웠다고 설명한다. 경전에 그 구체적인 항목들이 소개되지는 않지
만, 요점은 그의 본원(本願, pūrvapranidhāṇa)이 정토(淨土)가 아닌 예토(穢
土)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아미타불이나 아촉불이 과거 보살
이었을 시절에 정토(淨土)에서 성불할 것을 서원했는데 반해, 석가모니의 전
신인 보해(寶海, Samudrareṇu)보살은 예토, 그 중에서도 번뇌가 가장 치성한
사바세계에서 성불하여 괴로움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할 것을 서원했다고 한다.
이에 당시의 붓다인 보장(寶藏, Ratnagarbha)여래는 보해보살의 자비심을 크
게 칭찬하여, 그를 대비보살(大悲菩薩)이라고 부른다.36) 뺷비화경뺸은 석가모
니 붓다가 예토에서 성불하여 중생을 교화하게 된 인연이 그의 본원에 의한 것
이며, 그 본원은 그의 자비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34) 鎌田茂雄·河村孝照 1998, 43f.


35) 勝崎裕彦 외 3인 편 1997, 232f.
36) 위의 책, 같은 곳.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73

필자는 석가모니 붓다 본원의 특징인 예토에서의 성불 및 중생제도가 붓다


의 보살행이라는 특수한 교설과 관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토의 중생을 제
도한다는 것은 자신이 인행(因行)으로 성취한 과보를 향유할 여유도 없이, 쉼
없이 중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대단히 수고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뺷법화경뺸에
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중생에게] 여러 선근이 생기도록, 여러 인연과 비유와 온갖 말로써 가지가지


법문을 하는 것이니라. 붓다로서 해야할 일을 지금까지 잠시도 그만 둔 적이 없느
니라.37)

예토에서 성불하여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쉼 없이 헌신하는 석가모니 붓다


의 교화는 철저하게 이타행으로 일관된 것이며, 이는 대자비심의 발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석가모니 붓다의 이타행은 문수보살이나 관세음보살과
같은 일천제보살(一闡提菩薩, icchantikabodhisattva)의 관념과도 유사성이
인정된다.38) 예를 들어 문수보살은 본래 성불을 이룬 붓다이지만, 중생제도를
위해 보살의 모습으로 교화하며 때때로 열반을 보여주기는 했는데, 실제로는

37) 뺷묘법연화경뺸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17-21): 欲令生諸善根 以若干因緣 譬喻 言辭種種


說法 所作佛事 未曾暫廢.
38) 一闡提(icchantika)란 일반적으로 반열반의 성질이 없는 자, 또는 성불의 원인을 가지지 않은 자
라고 설명된다. 한편, 뺷능가경(楞伽經)뺸에서는 두 유형의 일천제에 대해 설하고 있다. 첫째는 일
체의 선근을 끊어(斷善根) 반열반할 수 없는 범부중생 일천제이다. 두 번째 유형의 일천제는 중생
구제의 本願(pūrva-pranidhāṇa)을 세우고, 그 원력에 의해 윤회 속에 머무르며 대비의 이타행을
실천하는 보살들이다. 이 대보살들은 중생제도를 위해 자발적으로 열반을 거부하기 때문에 ‘일
천제보살(一闡提菩薩, icchantikabodhisattva), 또는 대비천제(大悲闡提)’라고 불린다. 두 종류
의 일천제는 모두 열반에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지만, 그 이유가 업력(業力)이냐, 원력(願力)이
냐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일천제의 의미 및 뺷능가경뺸에서 설명된 두 종류의 일천제에 관
해서는 다음의 논문들을 참조. 小川一乘 1968, 340-343.; 가라시마 세이시(辛嶋静志) 2012,
301-319.
74 불교학리뷰 vol.18

열반에 들지 않고 교화행을 계속 펼치고 있다.39) 석가모니 붓다가 열반을 보여


주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열반에 들지 않고 예토에 머물러 중생을 제도하는 것
과 문수보살과 같은 대보살이 열반을 미루면서 예토에서 중생교화에 힘쓰는
것은 ‘붓다’와 ‘보살’이라는 명칭의 차이는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차이가 거의
없다.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특수한 교설은 불보살의 본원과 대자비심, 자유
자재한 구제력, 예토라는 환경의 특수성 등을 함께 고려한다면 수긍하기 어려
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석가모니 붓다에게 자신이 보살 시절에 닦은 공덕을 붓다가
된 후에 스스로 향유하는 자수용(自受用, svasaṃbhoga)이 존재하는가 라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40) 석가모니 붓다는 성불하여 많은 공덕을 성취하
였지만, 예토라는 환경은 그것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환경이라고 보기는 어려
울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 붓다의 ‘예토의 성불 및 중생제도’라는 서원이 결
과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으로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특유의 교설을 낳
은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39) 뺷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뺸에는 문수보살이 과거에 용종상불(龍種上佛)이었을 시절에 많은


중생을 교화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용종상불이 열반에 들자 중생들은 무수한 탑을 세워 공양했지
만, 그는 실제로 열반에 들었던 것은 아니며, 지금도 여전히 붓다를 도와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 平
川彰는 문수보살이 과거에 용종상불이었다는 점, 그리고 뺷수능엄삼매경뺸에서 묘사되는 문수보
살의 열반 시현(示現) 등을 근거로 문수보살의 경지를 붓다의 경지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한다. 平
川彰 1991, 43ff. 참고로 뺷수능엄삼매경뺸에서 문수보살이 중생제도를 위해 열반을 시현(示現)
한 것과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서 설명하는 열반에 관한 묘사는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40) 붓다의 세 가지 신체(자성신, 수용신, 변화신) 중에서 법락을 수용하는 수용신(受用身, sāṃbhogika-
kāya)에는 스스로 법락을 수용하는 자수용(自受用)과 타인에게 법락을 수용케 하는 타수용(他受
用)이 있다. 자수용은 자리적인 성격의 것이며, 타수용은 이타적 행위이다. 히라카와 아키라 등
편 2001, 132.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75

2) 석가모니 붓다의 예토교화와 「신해품」


여기서는 석가모니 붓다가 예토인 사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모습을
경전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제4신해품」에는 유명한 장자궁자(長子窮子)
의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는 붓다 자신이 설한 것이 아니라 가섭과 수보리 등
대제자들이 설한 것인데, 위대한 지혜와 공덕을 갖춘 붓다를 부유한 자산가(장
자)에, 성문제자들을 가난한 아들(궁자)에 비유하고 있다. 그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면, 장자의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우연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가난한 아들은,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저택에서
사자좌에 앉아 많은 귀족들에게 공경을 받으며 위엄스럽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도망치게 된다(아들은 그 자산가가 자신의 아버지인
줄 알지 못한다). 도망치다 결국 기절까지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의 집
에 들어와 일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유한 자산가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고
유산을 물려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가운데 아버지의 집에서 오물청소의
일을 하고 있는 아들을 보고서, 아버지가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하는 장면이
설해지는데, 그에 대한 묘사가 주의를 끈다.

그리고 그 부유한 남자는 둥근(gavākṣa, 소의 눈처럼 둥근) 창문을 통해 자신의 아


들이 오물통을 청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보고서 한편으로 기특하게 생각했습
니다. 그리하여 그 장자는 자신의 저택에서 내려와서(avatīrya), 화환과 장신구를
내려놓고 부드럽고(mṛduka) 깨끗하고(caukṣa) 화려한(udāra) 옷을 벗고 더러운
옷을 걸치고서 오른손에 바구니(piṭaka)를 들고서 먼지(pāṃsu)로 자신의 몸 곳곳
(gātra)을 더럽히고서 아주 멀찍이서 말을 걸면서 그 가난한 사내에게로 다가갔습
니다. 다가가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대들은 바구니를 가지고 있게. 서
있지 말고 오물(pāṃsu)을 치우게.” 이러한 방법(upāya)으로 그 아들에게 말을 걸
고 서로 얘기를 할 것입니다.41)
76 불교학리뷰 vol.18

자산가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내려와 깨끗하


고 부드러운 옷을 벗고, 장신구를 내려놓고, 더러운 옷을 걸치고 온 몸에 먼지
를 묻히고서 아들에게 말을 건네는 이 장면은 석존의 교화가 어떠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예토에서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중생들에게 교화를 한다는 것은
석가모니 붓다가 자신의 복덕과 안락을 내려놓고, 아들과 똑같이 더러운 옷을
입고 온 몸에 흙먼지를 묻히고 다가가 함께 땀 흘려 일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석존의 교화는 보살들에 둘러싸여 자신이 지은 인행의 과보를 향유
하면서 법을 설하는 정토의 붓다들과는 대조를 이룬다. 예토에서는 중생들이
선업이 적고, 근기가 낮으므로 그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붓다는 위 비유에서 집
으로 표현된 자신의 거처에서 내려와서, 자신이 성취한 복덕과 장엄을 버리고,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예토의 거친 풍토 속에서 많은 고통을 감내하면서 법
을 전해야 했다. 즉 예토에서의 교화란 붓다가 자신의 성취 속에 머무르는 것
이 아니라, ‘내려옴’이라는 하향적인 운동을 동반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필자
는 석가모니 붓다의 교화에 대해서 예토가 지니는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
다고 생각되며, 「신해품」의 위 비유는 「여래수량품」의 ‘나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는 문구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방식
의 교화란 예토 교화의 필연적인 양상이며, 예토 교화를 서원한 석가모니 붓다

41) SP. 106,2-8: sa cāḍhyaḥ puruṣo gavākṣavātāyanena taṃ svakaṃ putraṃ paśyet saṃkāradhānaṃ
śodhayamānam/ dṛṣṭvā ca punar āścaryaprāpto bhavet/ atha khalu sa gṛhapatiḥ svakān
niveśanād avatīrya apanayitvā mālyābharaṇāni, apanayitvā mṛdukāni vastrāṇi, caukṣāṇy
udārāṇi malināni vastrāṇi prāvṛtya, dakṣiṇena pāṇinā piṭakaṃ parigṛhya pāṃsunā svagātraṃ
dūṣayitvā dūrata eva saṃbhāṣamāṇo yena sa daridrapuruṣas tenopasaṃkrāmet upasaṃkra-
myaivaṃ vadet/ vahantu bhavantaḥ piṭakāni, mā tiṣṭhata, harata pāṃsūni/ anenopāyena taṃ
putram ālapet saṃlapec ca/
뺷묘법연화경뺸권2 「제4신해품」(T.9, 17a14-19): 又以他日 於窓牖中遙見子身 羸瘦憔悴 糞土塵坌
污穢不淨 卽脫瓔珞 細軟上服 嚴飾之具 更著麁弊垢膩之衣 塵土坌身 右手執持除糞之器 狀有所畏
語諸作人 汝等勤作 勿得懈息 以方便故 得近其子.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77

에게는 일종의 숙명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경전에서는 붓다 자신이 “나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고 표현했지만, 예토에서의 교화에는 사실상 보살행
의 연속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필연적인 측면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5. 맺음말: 요약 및 그 함의에 대해서

이제 뺷법화경뺸의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이상의 논의를 정


리하고 그 함의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범어본 「여래수량품」에는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고 설해지고 있다.
이 내용은 한역본에는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따라서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
가를 몇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 번째 단계로서 먼저 원문을 추정해보았는데, 범어본 교정본과 사본류 그
리고 뺷법화경론뺸을 근거로 하여 범어본이 원문을 전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시
했다. 또한 범어본 뺷법화경뺸과 사본들, 그리고 뺷법화경론뺸이 모두 일치하고 있
으므로, 경전(범어본 뺷법화경뺸)과 논서(뺷법화경론뺸)의 가르침대로 ‘붓다의 보
살행’이라는 교설을 신앙하던 전통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
았다.
이러한 입장을 확인하고서 다음으로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내용을 중심으
로 「여래수량품」의 내용을 재구성해보았다. 범본의 내용에 따르면, 「여래수량
품」의 내용 전개는 ①붓다가 아주 먼 과거에 성불했음을 밝히고, ②그 후에 다
양한 방법으로 중생교화를 펼쳐왔음을 설하고, ③그러한 ‘교화행’을 붓다 스
스로가 ‘보살행’으로 규정하고서 ④붓다에게는 아직도 많은 수명이 남아 있음
을 알리고, ⑤따라서 앞으로도 붓다의 보살행/교화행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
는 흐름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내용 전개는 붓다의 교화와 수명을 일목요연하
78 불교학리뷰 vol.18

게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 한역의 내용 전개는 ①과 ②는 동일


하나 ③과 ④를 하나로 묶어 과거에 닦았던 보살행에 의해 얻은 수명이 많이
남아 있다고 설하는 흐름이 된다. 과거의 교화행을 설하다가 갑자기 보살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이 많이 남아 있다는 교설이 전개되는 것은 흐름상 돌연한 느
낌을 주며, 더욱이 구원성불한 붓다의 교화행을 설하다가 구원성불 이전의 보
살행을 언급하는 것은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붓다
의 보살행’이라는 범어본의 맥락이 다소 생소하기는 하지만, 경전의 흐름상으
로는 더 자연스럽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후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법문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에 대해 검
토해보았다. ‘본원’에 의해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라는 뺷법화경론뺸
의 주석은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붓다의 보살행은 그다지 일
반적인 내용이 아니므로,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석가
모니 붓다가 세운 본원의 특징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문
제에 관해 뺷비화경뺸의 설명을 참조하여, 석가모니 붓다의 본원인 ‘예토에서의
성불과 교화’가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구체
적인 모습이 「신해품」의 장자궁자의 비유에 잘 묘사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즉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붓다가 머물고 있는 예토라
는 환경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예토라는 특수한 환경은 불과(佛果)를 성취한
붓다가 과보의 향유에 머무르지 않고, ‘내려옴’이라는 하향적인 활동을 통해서
만 중생을 교화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예토에서의 교화에는 보살
행의 연속이라 할 만한 행(行)의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뺷법화경뺸의 교설이 함의하는 것은 무엇인
가? 필자는 다음의 두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여래수량품」은 석가모니 붓다의 무한한 수명을 설하는 것으로 유명
하지만, 범어본을 통해 볼 경우 그 풍경에는 미세한 변화가 발생한다. 그 변화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79

란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는 문장이 「여래수량품」 내에 도입되면서


붓다의 수명이 무한하다는 교설이 곧 붓다의 무한한 보살행을 지시하게 된다
는 것이다. 즉 ‘여래의 수명=보살행’의 등식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붓다가 그의 위대함을 칭송받기 위해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중생구제
를 위해 우리 곁에 머문다는 「여래수량품」의 대의(大義)는 ‘붓다의 보살행’을
매개로 하여 보다 명료하게 드러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여래의 수명=보살행’이라는 함의와 관련하여 다음의 내용에 대해 검
토해 보겠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뺷법화경뺸에서 붓다 교화의 궁극적인 목적
은 중생들로 하여금 일체지(一切智)를 성취하도록 하여 모두 성불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대한 목표를 경전에서는 ‘일불승(一佛乘)’이라는 용어로 표
현하는데, 일불승은 다음의 두 계기를 통해 확립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
저 지혜의 관점에서 일불승의 이치를 밝히고서(「방편품」), 실제로 붓다가 상
주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중생을 도와 성불로 이끄는 방편교화행, 즉 보살행
을 펼침으로써(「여래수량품」) 일체중생의 성불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와 같이 「방편품」(지혜)과 「여래수량품」(방편)이 하나가 됨으로써 ‘일체중생
을 구제하겠다는 붓다의 본원이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경전의 문구는 온전하
게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여래수량품」의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에 대해 대
강의 문맥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 연구에서 다루지 못한 문제들,
예를 들어 뺷법화경뺸에서의 보살행에 관한 보다 면밀한 검토, 그리고 붓다들이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리라는 서원을 실현해가는 구체적인 방식 등에 관해서
는 차후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80 불교학리뷰 vol.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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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83

Abstract

The Śākyamunibuddha’s Bodhisattvacaryā


in the Sanskrit Version of the Lotus Sutra

Youngsu Ha

Geumgang Univ.

The Chapter on the Duration of Life of the Tathāgata in the Lotus Sutra
(Saddharmapuṇḍarīkasūtra) has been regarded as an important chapter.
However, the Sanskrit version of the same chapter includes a passage that
states, “I have not accomplished my ancient bodhisattvacaryā (bodhisattva’s
practice). This passage is not mentioned in the Chinese translation of the
Lotus Sutra. The difference between the Sanskrit version and the Chinese
translation is what lead me to write this paper.
In this paper, I set up several steps in order to review this incongruity.
Firstly, I tried to infer an original passage of the Lotus Sutra. Of the original
passage, it can be said that there are two types of readings. The first type is
found in two versions of the Chinese translation of the Lotus Sutra, i.e.
Zheng-fa-hua-jing (正法華經) and Miao-fa-lian-hua-jing (妙法蓮華經). The
84 불교학리뷰 vol.18

second type is found in the Sanskrit matrials of the Sūtra and Fa-hua-
jing-lun (法華經論). The Sanskrit matrials, which include the critical
editions and manuscripts of the Lotus Sutra that I use as references in this
paper, can be read in the same way. This is to say that they both include the
phrase regarding the ‘Buddha’s bodhisattvacaryā.’ And the passage of
Fa-hua-jing-lun is the same as the Sanskrit reading. In this manner, I was
able to infer the original passage.
Based on the newly understood passage, I tried to also reconstruct the
context of the Chapter on the Duration of Life of the Tathāgata. As a result,
I can confirm that the passage concerning the Buddha’s bodhisattvacaryā
speaks about the Buddha’s saving activities, since enlightenment in the
distant past. And the Sanskrit context, which names the Buddha’s saving
activities as the Buddha’s bodhisattvacaryā, thus has validity.
Next, I examined the background as to why the passage on the Buddha’s
bodhisattvacaryā was written. In the Fa-hua-jing-lun, Vasubandhu(世親)
explains that this was the original vow of the Buddha and it therefore
identifies the core of the matter. However, this belief regarding the
Buddha’s bodhisattvacaryā is not the generally accepted view. For this
reason, it was necessary to reveal the characteristic of the original vow of
the Śākyamuni Buddha by referring to the Lotus of the Compassion Sutra
(Karuṇāpuṇḍarīkasūtra).
The Buddha’s bodhisattvacaryā implies that the Buddha’s unlimited
lifespan is indicative of his endless saving activity. The Buddha’s original
vow, which is that he would lead all living beings to perfect enlightenment,
could be completed via two paths; one being the revelation of the One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85

Buddha-vehicle and the other being the Buddha’s endless bodhisattvacaryā.

Keyword : Lotus Sutra, Buddha’s bodhisattvacaryā (Bodhisattva-practice


of the Buddha), Lotus of the Compassion Sutra, original vow
of the Buddha, mundane world.

2015년 10월 25일 투고


2015년 11월 18일 심사완료
2015년 11월 30일 게재확정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이수미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국문요약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은 불교 수행자가 명상 수행 중에 얻


은 미세한 몸을 가리킨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 개념이 불교 우주론에 있어서
중요한 이론적 함의를 가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팔리 문헌에는 의생신이 단지
명상 수행의 영적 부산물일 뿐 아니라 삼계 내의 특수한 존재 양상을 가리킨다
는 것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의생신에 대한 연구는 대개 초기의

* 이 논문은 Buddhist Studies Review 31.1(2014), pp. 65-90 (Copyright © Equinox Publishing
Ltd 2014)에 실린 “The Meaning of ‘Mind-made Body’ (S. manomaya-kāya, C. yisheng shen
意生身) in Buddhist Cosmological and Soteriological systems”의 한글번역이다.

불교학리뷰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18권 (2015. 12) 87p~128p
88 불교학리뷰 vol.18

팔리 자료에 집중되어 왔고 따라서 이 개념의 이후 전통에서의 이론적 발전 또


는 수증론적 중요성은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 논문은 이러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한 초기 작업으로서 뺷승만경뺸, 그리고 의생신 논의에 있어서 뺷승만경뺸에 이
론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두 논서인 뺷보성론뺸과 뺷불성론뺸에 나타난 의생신
의 의미를 고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승 전통의 보다 광범위한 우주론적, 수증
론적 체계에 있어서 이 개념이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를 논의하려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초기 불교 문헌에서의 의생신의 의미를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 의생
신 개념의 우주론적, 수증론적 의미를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대승 문헌들 간의
이론적 연결성을 분석함으로써 고찰한다.

주제어: 의생신, 중유, 불교 우주론, 마음, 몸, 뺷승만경뺸, 뺷보성론뺸, 뺷불성론뺸,


진제(499-569)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89

서론

불교 수행자가 명상 수행 중에 얻는 미세한 몸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은 초기 불교에서 대승 전통에 이르기
까지 경론 자료에 꾸준히 등장하는 개념이다. 의생신은 실증적 검증의 영역을
벗어나는 내부경험과 관련되는 개념이므로 불교의 신화적 영역을 표방하는 것
으로 여겨졌지만 선행하는 연구들1)에 의해 의생신이 불교 우주론 체계에서 가
지는 중요한 이론적 함의가 밝혀졌다. 즉, 이러한 연구들에 의하면 불교 수행
자들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이러한 특별한 몸을 성취하는 것은 불교 우주
론 체계 내에서 그들의 존재론적 양상이 진보하는 것과 관련성이 있다.
그러나 의생신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대개 초기 팔리 자료에 바탕을 두
어 왔다. 이들 선행 연구들은 의생신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지대한 기여
를 하였지만 이 개념의 대승 전통내에서의 이론적 발전이나 수증론적 중요성
은 다루지 않았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팔리 전통 이후에 이 개념이 전개된 양
상을 고찰하여 통합적인 관점에서 의생신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시도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의생신이 가지는 여러 단계적 의미들을 팔리 자료
에 대한 선행 연구결과와 대승 경론의 이론들을 연결함으로써 고찰한다.
첫 번째 장에서는 의생신의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불교 우주론 체계와 연결
되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팔리 자료에 나오는 의생신의 의미에 대한 선행
연구들을 개괄한다. 그 다음 장에서는 팔리 외 문헌에 나타나는 의생신의 또
다른 하나의 의미, 즉 현생과 내생 사이의 중간적 단계에 있어서의 존재적 양
상으로서의 의미를 논한다. 이 논문의 중심이 되는 마지막 장에서는 뺷승만경뺸
과 같은 대승경전과 이와 이론적으로 연관성을 가지는 6, 7세기 중국 논서들에

1) 이러한 의생신의 의미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Johansson 1979, 34-39; Hamilton 1996, 144-
55; Radich 2007, 224-87; Fukuhara 1960이 있다.
90 불교학리뷰 vol.18

나타난 의생신의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의생신의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대승의


우주론적, 수증론적 체계 내에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고려한다.

1. 불교 우주론에서 본 의생신과 명상

팔리 경전에서 의생신의 개념은 다양한 맥락 내에서 나타나고 있고 따라서


다양한 의미적 색채를 지니고 있다.2) 이 의미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의생신의 의미는 명상 수행 중에 불교수행자가 얻는 특별한 몸이라는 것이다.
Samaññaphala Sutta (沙門果經)에는 이러한 의생신의 전형적인 모습이 기술
되어 있다(DN I 47-85; Rhys Davids 1899, 65-95). 이 경에는 ‘은둔수행자의
삶에서 얻어지는 결실들’이 얻어지는 순서대로 제시되어 있는데, 이 중 의생신

2) Michael David Radich는 빨리 경전에 나타나는 의생신의 개념이 가지는 의미의 범주를 (I) 불교
수행과 [그로 인한 영적 지위의] 성취, (II) 우주론, (III) 다른 부파의 견해들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나누고 이들을 다시 아홉 가지 하위 범주로 나눈다. 첫 번째 범주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하위 범
주로 나누어진다: (1) 아라한의 지위를 추구하는 수행자들이 수행 과정에서 얻어지는 몸, (2) 특정
수준의 [영적] 성취를 이룬 부처의 제자들이 사후에 받는 몸, (3) 붓다가 범천(the heaven of
Brahmā)을 방문할 때의 몸, (4) 붓다가 가르침을 주기 위해 한 제자에게 왔을 때 지니는 형태 (1
회), (5) 한 자비로운 재가인이 특정 하늘에 환생할 때 받는 일종의 몸. 두 번째 범주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하위 범주로 나뉜다: (6) 특정 신들이 어떤 하늘에 권화할 때의 형태, (7) 우주 발생에 대한
설명에서 겁초에 존재들이 다시 권화할 때 지니는 형태. 세 번째 범주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하위
범주로 나뉜다: (8) 자아 개념을 논박하는 가르침에서 붓다가 상주하는 자아로 잘못 여겨질 수 있
는 것으로 언급한 대상들 가운데 하나, (9) Brahmajāla Sutta에서 붓다가 반박하는 일곱 가지 허무
주의적 견해들 가운데 하나의 견해의 일부분 (Radich 2007, 224-247). 명상 중에 생겨나는 특별한
몸이라는 의생신의 전형적 의미는 Radich의 분류에서 아홉 가지 범주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
로 보인다. Radich는 비록 (I) 불교 수행과 [그로 인한 영적 지위의] 성취와 (II) 우주론이라는 범주
를 나누고 있지만 사실 첫 번째 범주는 두 번째 범주로 환원될 수 있는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필
자는 이 장에서 불교 수행과 [그로 인한 영적 지위의] 성취와 불교 우주론간의 상호 연관성에 관해
논의하고자 한다.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91

은 후반 단계에서 얻어지는 영적인 결실들 중 하나에 속한다. 수행자는 전반


단계의 ‘결실들,’ 즉 여러 단계의 ‘도덕성,’ ‘감각기관에 대한 제어,’ ‘마음챙김
과 자기제어,’ ‘만족’을 차례로 성취한 후에 ‘한적한 장소를 택’하여 ‘마음을
기민하고 몰두한 상태로 만든다.’ 이 과정을 통해 마침내 수행자의 마음은 집
중을 얻고 이어서 사선정(四禪定, P. jhāna, S. dhyāna)에 들어가게 된다. 수
행자가 의생신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고통도 안락함도 없는 순수한
자기제어와 평정’으로 여겨지는 네 번째 선정(四禪)의 단계에서이다:

그는 이 몸으로부터 형체를 가지고 마음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 자신의 몸의) 모


든 사지와 신체부분을 가져 어떤 기관도 결여되지 않은 또 하나의 몸을 불러냅니
다. 왕이시여, 마치 갈대의 껍질로부터 갈대를 뽑아내듯이 말입니다. 그는 알 것입
니다: ‘이것은 갈대이고 이것은 껍질이다. 갈대와 그 껍질은 별개의 것이다. 갈대
가 빠져 나온 것은 바로 그 껍질에서부터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그가 뱀의 허물에
서 뱀을 꺼내는 것과도 같고 칼집에서 칼을 꺼내는 것과도 같습니다(DN I 77;
Rhys Davids 1899, 87-8).

이 특별한 몸은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현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이면서 다수가 되’거나 ‘다수이면서 하나가 되’고, ‘보이
거나 보이지 않거나 하고,’ ‘마치 공기를 통하듯이 벽이나 성곽이나 언덕의 저
편으로 막힘 없이 지나가고,’ ‘마치 물을 통과하듯이 딱딱한 땅을 위아래로 통
과하고,’ ‘마치 딱딱한 땅 위에서처럼 물 위를 빠지지 않고 걷고,’ ‘마치 날고
있는 새들처럼 다리를 꼰 채로 공중으로 다니며,’ ‘해와 달을 만지고 느끼며,’
‘심지어 범천에까지 몸으로 닿는다’는 것이다(DN I 77-8; Rhys Davids 1899,
88-9).
Samaññaphala Sutta의 이 문맥에서 비록 의생신이 단지 명상 수행의 산물
92 불교학리뷰 vol.18

로 설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특별한 명상 단계에서 의생신이 생겨난다


는 설명은 다른 한편 불교의 우주론적 체계인 욕계(欲界, kāma-dhātu), 색계
(色界, rūpa-dhātu), 무색계(無色界, arūpa-dhātu)에 상응성을 가지는 우주론
적 함의를 가진다.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아래에서 논의되듯이, 수행자가
이전 생에 있어서 성취한 도덕적, 명상적 단계에 의해 삼계에서 그 수행자가
취하게 되는 존재론적 양상이 결정된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볼 때 불교 수행자
들이 사선(四禪)을 성취하여 의생신을 만들어내는 것은 단지 명상 수행 중에
수행자가 겪는 초자연적인 경험일 뿐만이 아니라 불교 우주론적 체계에서 더
높은 존재론적 단계로 나아간 수행자에게 나타나는 전초적인 징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Poṭṭhapāda Sutta (布吒娑樓經)에는 삼계의 우주 체계와 세 가지 존재론적
양상의 상호관계를 나타내는 구절이 나온다. 붓다가 Poṭṭhapāda에게 삼계에
존재하는 세 가지 유형의 ‘인격성’ 또는 ‘통념적 자아’3)를 설하면서 이 인격성
또는 통념적 자아는 궁극적으로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데, 이 설법
에서 ‘의생’(manomaya)은 통념적 자아인 세 가지 존재론적 양상 중 하나로 언
급되고 있다:

다음의 세 가지 양상의 인격성(atta-paṭilābhā)들은, 포타파다여, [세상에서 흔히


통용되고 있다]: 물질적인 [또는 ‘거친’] 것(oḷāriko), 비물질적인 [또는 ‘의생의’]
것(manomayo), 그리고 형체가 없는 것(arūpo). 첫 번째는 형체가 있고 네 가지 원
소로 만들어져 있으며 고형의 음식으로 자양된다. 두 번째는 형체가 없으며 마음
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크고 작은 신체 부분과 기관들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 세 번

3) Hamilton은 이 문맥에서 ‘atta-paṭilābha’(‘자아의 [성질을] 띔’)가 ‘개별적 존재,’ 즉 삼계 각각에


서의 ‘통념적 자아’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이 구절에 나오는 oḷārika, manomaya, arūpa
가 각각 삼계의 거친 물질적 형태, 미세한 물질적 형태, 형태가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Hamilton 1996, 152).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93

째는 형체가 없으며 상(想)으로만 만들어져 있다(saññāmayo) (DN I 195; Rhys


Davids 1899, 259-260).

이 구절에 따르면 삼계의 ‘통념적인 자아’는 각각 ‘거친’(oḷārika) 것과 ‘의


생의’(manomaya) 것, 그리고 ‘형체가 없는’(arūpa) 것이라고 한다. 이 경의
주석에서도 또한 이 세 가지 유형의 ‘통념적 자아’를 각각 욕의 존재(kāma-
bhava), 색의 존재(rūpa-bhava), 무색의 존재(arūpa-bhava)로 설명하여 이 세
가지 측면과 욕계, 색계, 무색계를 연결시키고 있다(DN-a II 380; Hamilton
1996, 152).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세 종류의 자아는 각각 욕계, 색계, 무색계의
존재들을 가리키고 있음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Apaṇṇaka Sutta (無戲論經)에는 색계와 무색계의 천신들(devas)간의 존재
론적 차별성을 상술하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붓다는 바라문 재가자들에게 직
접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어떤 견해를 결정적인 진실로 받아들인다면 이것
은 ‘능숙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면서 색계의 천신들을 ‘의생’(manomaya)으로,
무색계의 천신들을 ‘상(想)에 의해 만들어진’(saññāmaya) 것으로 설하고 있다:

‘결정코 무색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이론 및 견해를 주장하는 수행자과


바라문에 대해 말하자면, 만약 그들의 말이 진실이라면 내가 [죽은 후에] 마음으로
만들어진(manomayā) 미세한 물질계(rūpino)의 신들 가운데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이 분명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결정코 비물질적인 계가 존재한다’라고 하는
이론 및 견해를 주장하는 수행자와 바라문에 대해서 말하자면, 만일 그들의 말이
진실이라면 내가 [죽은 후에] 상(想)으로 만들어진(saññāmayā) 비물질계의 신들
가운데 다시 나타나는 것이 분명히 가능할 것이다(MN I 410; Ñanamoli 1995, 516).

이 구절에서 붓다는 미세한 물질계(즉, 색계)와 빗물질계(즉, 무색계)의 존


94 불교학리뷰 vol.18

재들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고, 이는 바로 우주론 체계에서의 구별이 삼계 중생


들의 존재양상의 차별과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 구절의 주석에는
각 계의 존재로 환생하기 위해서는 그 계에 해당하는 특정적인 명상 단계가 전
생에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미세한 물질계와 비물질계의 천신
들(devas)은 그들이 각각 그들의 앞선 생에서 색계선(rūpa jhāna)과 무색계선
(arūpa jhāna)을 닦은 결과인 것이다(MN-a III 122; Hamilton 1996, 153).4)
따라서 수행자의 특정 명상 단계의 성취는 그 수행자의 존재론적인 변화로 이
어지며, 이 변화는 다시 그들의 우주론적 위치의 변경이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고 말할 수 있다.
Nirodha Sutta (成就戒經)에는 수행자가 특정 명상 단계를 성취한 것이 그
수행자의 우주론적 단계와 연결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구절이 있다. 이 구절
에는 한 수행자가 현생에서 ‘상수멸정’(想受滅定, saññāvedayita-nirodha)의
명상 단계에는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최종적인 지혜는 얻지 못했다고 한다면
다음 생에는 어느 계에 태어날 것인가 하는 이론적인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붓다의 상수 제자 중 하나인 사리풋타(Sāriputta)는 이러한 수행자는 ‘거친 음
식을 섭취하는 신들을 넘어서서 의생의 신들 사이에 [즉, 색계에] 다시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 때 우다인(Udāyin)이라는 이름의 비구는 이에 대해 세
번씩이나 동의하지 않는다. 후에 붓다는 우다인에게 누가 의생신을 가진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한다. 이에 대해 우다인은 형체가 없으며 상(想)으로 만

4) 몇몇 학자들은 삼계라는 불교 우주론 체계가 특정 명상 단계를 성취하는 것과 상호 연관성이 있다


는 것을 논의해 왔다. 예를 들어 Rupert Gethin은 논문 ‘Cosmology and Meditation: From the
Aggañña Sutta to the Mahāyāna’에서 불교 우주론과 네 번째 선정(jhāna/dhyāna)과의 연관성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Gethin 1997, 186-204); 최봉수는 의생신과 삼계의 관련성을 분석하면서
의생신의 함의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Choe 1988). Donald Swearer 또한 ‘의생’(manomaya)이
고대 불교 신화가 가지는 ‘신비적’ 요소만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선정(jhāna) 수행과 관련한 윤
리적, 존재론적 함의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Swearer 1973, 447-452). 불교 우주론 체계
와 인도 고대의 다른 우주론에 대한 설명은 Gombrich 1975 참조.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95

들어진(arūpī-saññāmayā) [즉, 무색계의] 천신들이 의생신을 가진다고 대답


하고 붓다는 이 대답을 꾸짖는다(AN III 193-195; Bodhi 2012, 778-80;
Hamilton 1996, 153-154).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몇 가지 이슈가 제기되
었지만5) 현 논의에 있어서 유의해야 할 점은 바로 명상적 성취가 이 구절에서
기술되고 있는 방식이다; 이 구절에서는 수행자가 상수멸정이라는 명상단계를
성취하는 것이 그 수행자가 더 높은 우주론적 단계로 환생하기 위한 직접적인
요소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 방식은 또한 수행자의 영적 진보
가 우주론 체계 내에서의 그들의 존재론적 단계와 대응되는 관련성을 가진다
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영적 성취도와 우주론적 단계 간의 상호연관성을 고려할 때 앞서 인
용한 Samaññaphala Sutta의 구절은 불교 우주론이라는 넓은 맥락에서 다시
금 설명될 수 있다. 수행자의 영적 성취도가 불교 우주론 체계 내에서 그들의
존재론적 단계를 결정짓는다고 한다면, 수행자가 선(jhāna)의 특정 단계를 성
취하고 곧이어 의생신을 만들어내는 현상은 현생에 있어서의 수행자의 영적
진보라는 관점에서뿐만이 아니라 내생에 그들이 성취할 더 높은 우주론적 단
계로의 존재론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또한 수행자가
영적으로 진보함에 따라 그들의 존재론적 양상 또한 진보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불교 우주론 체계에서의 삼계는 개개 수행자들의 명상을 통한 영적 진보가
총합적으로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의생신은 불교
우주론 내에서 중생들이 가지는 존재론적 단계와의 관련하여 표면적 해석 구
도를 넘어서서 보다 넓은 이론적 함의를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6)

5) 이 구절을 바탕으로 몇몇 학자들은 의생신이 무색계가 아니라 색계의 천신들의 몸이라고 주장한
다. 하지만 붓다가 우다인을 꾸짖은 것은 우다인의 대답이 색계와 무색계의 천신 둘 다가 아니라 단
지 무색계의 신만을 의미하면서 대답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뺷아비달마대비바사론뺸
(阿毘達磨大毘婆沙論, *Mahāvibhāṣā)에서는 색계와 무색계의 천신들 둘 다를 의생신의 범주로
본다. 아래의 각주 25도 참조.
96 불교학리뷰 vol.18

2. 중유로서의 의생신

테라바다의 팔리 경전에 나오는 의생신의 전형적 의미가 불교 우주론적 체계


와 연관성을 가짐에 반해서 다른 계통의 경전 자료에는 완전히 다른 의생신의
의미가 등장한다. 또 하나의 아비달마 학파인 음광부(飮光部, Kāśyapīya)7)에
속하는 경전군인 뺷잡아함경뺸(雜阿含經, Saṃyuktāgama)에는 의생신이 윤회의
과정의 중생을 현생에서 내생으로 옮겨주는 일종의 매개체로 묘사되고 있다:

붓다가 밧차에게 말했다: ‘중생이 현생에서 생명을 다할 때 그 중생은 의생신을 타


고 또 다른 곳에서 태어난다. 이 때 그 중생은 욕망으로 인해서 [또 하나의 생을]
취하며, 욕망으로 인해 [그 생에] 머문다. 그러므로 [의생신은] ‘유여’(有餘, S.
śeṣa)라고 한다.’8)

6) 비록 윤회의 세계가 삼계로 나뉘어지고 팔리 자료에서는 의생신이 색계의 존재론적 양상을 나타내
는 것이라고 설해져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구분은, Hamilton이 반복하여 주장하듯이, 단계들 간
의 물질과 정신의 구분과 같은 ‘존재론적인 불연속성’(ontological discontinuity)을 의미하는 것
은 아니다(Hamilton 1996, 138-168). Hamilton은 차별적인 우주론적 단계들은 밀도에 있어서의
차이(거친 물질적 형태, 미세한 형태, 무형태)나 유사한 조건하의 현상의 양상이라는 관점에서 설
명될 수 있다고 한다. 즉 우주론적 단계들 간의 차별성을 결정하는 것은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양상이나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pp. 149-150). Peter Harvey 또한 팔리 불교에
서의 정신적인 요소와 물질적 요소 간에 설정되는 존재론적(ontological) 차별성의 문제점을 지적
하고 있다(Harvey 1993). 심리학적 관점에서의 불교의 마음과 육체의 이분법의 문제에 대해서는
Rune E. A. Johansson’s The Dynamic Psychology of Early Buddhism, 이 중 특히 Perception
and Feeling, Motivation, the Intellectual Superstructure의 장을 참조(Johansson 1979).
7) 음광부는 이론적으로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 school)와 가까운 학파이다. 설일체유부는 특히
‘중유’(中有, S. antarā-bhava)의 개념을 받아들였고 의생신의 관점에서 이 개념을 이해하였다.
8) 佛告婆蹉:眾生於此處命終,乘意生身生於餘處,當於爾時,因愛故取,因愛而住,故說有餘 (雜
阿含經T99:02.244b02-05). 이 구절에 근거하여 Fukuhara Ryōgon(福原亮厳)은 의생신이 윤회
의 주체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설일체유부가 의생신 개념을 삼계를 벗어난
보살의 몸에는 적용시키지 않고 삼계 내의 중생들에게만 적용시킴으로써 한정된 의미로 의생신의
개념을 사용하였음을 지적하고, 이런 점에서 의생신 개념을 넓은 의미에서의 윤회의 주체로 볼 수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97

여기서 의생신은 중생이 죽음의 순간에 내생의 다른 곳에 다시 태어나기 위


하여 ‘타는’(C. sheng 乘)9)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의생신에 대한 설명
은 죽음과 환생 사이의 과도기적 존재의 양상에 해당하는 개념, 즉 생유(生有,
S. upapatti-bhava), 본유(本有, S. pūrvakāla-bhava), 사유(死有, S. maraṇa-
bhava)와 함께 중생의 ‘네 가지 존재양상’(四有, S. catur-bhava) 중 하나를
구성하는 ‘중유’(中有, S. antarā-bhava)의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시 말
해 앞의 장에서 명상 수행의 부산물로 설명되었던 의생신을 이 구절에서는 생
과 생 사이의 중간 존재인 중유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팔리 경전에는 ‘antarā/antarena’라는 용어가 종종 쓰여지고는 있다. 하지
만 개별적인 주제 또는 개념으로서 중유(antarā-bhava)라는 단어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10) 중유가 아비달마 학파들 간에 논쟁적인 개념이었고 모든 아비
달마 학파들이 이 개념을 받아들인 것이 아님은 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져 왔
다.11) 이 개념은 뺷아비달마대비바사론뺸과 같은 설일체유부의 문헌이나 후기
대승 문헌, 특히 설일체유부의 사상을 이론적으로 계승한 유식학파의 저술들
에 대체로 나타난다.12) 설일체유부가 중유 개념을 수용하였다는 사실로부터

는 없다고 결론 내린다(Fukuhara 1960, 53). 어떤 경우이든 간에 의생신은 한 중생이 현생과 내생


사이에 임시적으로 취하는 형태인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 Radich 2007, 275-277도 참조. 보살의
몸으로서의 의생신에 대해서는 아래 제3장에서 더 논의될 것이다.
9) 이 구절에 대응하는 팔리 자료(SN 44.9)에서는 ‘타는’에 해당하는 정확한 용어가 나타나지 않는
다. 아래의 각주 12 참조.
10) Somaratne는 중유 개념이 구체화되어 설명되기 시작한 것은 비록 아비달마 시대이지만 가장 초
기의 불교인들 또한 이 개념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논증하고 있다; 그 증거로서 새로운 식을 찾아
서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가는 존재를 가리키는 팔리 니까야의 ‘gandhabba’의 개념을 제시한다.
또한 Somaratne는 가장 초기의 시기에 ‘antarā/ antarena’가 존재의 ‘중간적인 것’ 또는 ‘중간적
상태’의 의미로 이미 사용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Somaratne 1999, 149-152). 사실상 설일체유
부의 뺷아비달마대비바사론뺸은 건달박(揵達縛, S. gardharva, P. gandhabba)을 중유의 여러 이
름 중 하나로 제시한다(아래의 각주 22 참조). Harvey (1995, 98-108) 또한 팔리 니까야에서 생
과 생 사이의 중간적 존재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일련의 증거를 논의하고 있다.
11) 중유의 개념을 수용한 학파와 수용하지 않은 학파의 목록은 Blezer 1997, 6, n.33 참조.
98 불교학리뷰 vol.18

설일체유부와 동일한 사상적 계통에 속하는 ‘북방 불교’에서는 이 개념이 수용


되고 있는 반면 테라바다 학파에 바탕을 두고 발전한 ‘남방 불교’ 전통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이 또한 설명된다. ‘남방 불교’가 아비달마 시대의
고대 불교의 특징들을 팔리 니까야 안에 대체로 보존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북방 불교’는 지속적인 진화를 거쳐 마침내 대승불교로 발전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학파들의 이러한 계보학적 발전을 통해 어떤 이유로 대승전
통, 특히 유식학파와 티벳의 금강승 전통 내에서만 중유 개념이 나타나고 있는
가 하는 것이 설명될 수 있다.13)
설일체유부에서는 중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경증으로서 ‘도중에/중간에
[즉, 중유의 상태에서] 열반을 얻는 자,’ 즉 ‘중반’(中般, P. antarā-parinibbāyin,
S. antarā-parinirvāyin)의 이론을 제시한다. 중반은 ‘[환생 후에] 곧 열반을 얻

12) Bryan J. Cuevas는 설일체유부와 이 학파와 관련된 학파들, 즉 경량부나 대승 유가학파들이 사후


의 중간 상태의 존재의 개념을 받아들였으며 적어도 5세기경 까지 이 중유의 개념이 정립되었다
고 주장한다(Cuevas 2003, 42). 같은 맥락에서, Radich 또한 지적하길, 비록 위에서 인용된 음광
부의 뺷잡아함경뺸의 이 구절이 테라바다의 팔리 경전의 SN 44.9에 해당하지만 팔리 자료에는 의
생신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해당 팔리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밧차여,
한 존재가 이 몸을 옆에 놓고 다른 몸으로 다시 일어날 때, 나는 욕망이 그것을 위한 연료임을 단언
한다. 진실로, 밧차여, 욕망은 그 경우에 있어서 연료이다’(Radich 2007, 246). 의생신이라는 단
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Radich의 번역과 동일하지만 Thanissaro Bhikkhu는 이 구절을 Radich
와는 다르게 번역한다(Harvey 또한 이 Thanissaro Bhikkhu의 번역에 동의한다(Harvey 1995,
98-9)): ‘밧차여, 한 존재가 이 몸을 옆에 두고 다른 몸으로 아직 다시 태어나지 않았을 때 나는 그
것을 욕망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욕망은 그 때에 그것을 유지시켜주는 것이
기 때문이다’(Access to Insight 2014).
13) 티벳과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중유 개념과 관련된 불교 의례가 행해져 오고 있다. 동
아시아에서는 중유의 상태의 사자를 좋은 곳에 환생하도록 이끌어주기 위하여 임종 후 일 주일에
한 번씩 일곱 번간 행하는 ‘사십구제’(四十九齋)라고 불리는 전통적 불교의례가 있다. 중유는 죽
은 후 사십구일 동안 지속한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Bar do thos grol chen po (‘중간 상태 동안
에서의 들음을 통한 대자유’)는 Tibetan Book of the Dead라는 영어제목을 통해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중간적 존재(T. bar do)를 자유(grol)로 이끌어주는 티벳 의례가 체계적
으로 상술되어 있다(Buswell and Lopez 2013, 827).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99

는 자’(P. upahacca-parinibbāyin)/ ‘환생에서 열반을 얻는 자,’ 즉 ‘생반’(生


般, S. upapadya-parinirvāyin),’ ‘노력 없이도 열반을 얻는 자,’ 즉 ‘무행반’
(無行般, P. asaṅkhāra-parinibbāyin, S. sābhisaṃkāra-parinirvāyin), ‘노력
으로 열반을 얻는 자,’ 즉 ‘유행반’(有行般, P. sasaṅkhāra-parinibbāyin, S.
anabhisaṃkāra-parinirvāyin), ‘가장 높은 영역으로 위를 향해 가는 자,’ 즉
‘상류반’(上流般, P. uddhaṃsota akaniṭṭha-gāmin, S. ūrdvasrotas akaniṣṭa-
gāmin)과 함께 다섯 가지의 ‘돌아오지 않는 자,’ 즉 ‘불환’(不還, P. and S.
anāgāmin)14) 중 하나이다. 팔리 문헌에서도 중반의 개념은 다섯 종류의 불환
에 대한 설명과 함께 나온다. 불환은 팔리 문헌에서 네 단계의 ‘성인’
(ārya-pudgala)의 네 단계, 즉 ‘흐름에 들어간 자’(預流, P. sotāpanna), ‘한번
돌아오는 자’(一來, P. sakadāgāmin), ‘돌아오지 않는 자’(不還, P. anāgāmin),
아라한(P. arhat) 가운데 세 번째 단계로 설해지고 있고,15) 중반 개념 또한 적
지 않게 언급되고 있다.16) 이와 같은 문헌적 증거를 바탕으로 설일체유부는 중
반을 다음과 같이 중유의 상태에서 열반을 얻은 자로서 해석하고 있다:

당신은 중간적 존재(中陰) [즉, 중유]가 있음을 알 것이다. … 왜 그러한가? 왜냐하


면 이것이 붓다가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가 설했듯이 사부(士夫, sapta
satpuruṣa-gataya)17)가 받는 일곱 가지의 길(趣) 중에는 ‘중간적[존재 상태에서

14) 다섯 가지 유형의 불환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Abhidharmakośa-bhāṣya VI.37-39, 43-44에 자


세히 설명되어 있다; Pruden 1988, vol.3, 966-71; 979-81 참조.
15) 예를 들어 이 네 가지 단계의 성인들은 SN V 200에 언급되어 있다(Bodhi 2000, 1674).
16) 예를 들어 DN III 237, SN V 69-70, AN IV 70-4. 팔리 문헌에서 중반을 언급하는 곳의 목록은
Blezer 1997, 7. n. 40. 9참조.
17) ‘일곱 가지의 결과’(sapta satpuruṣagataya)는 SN V 69-7, 237, 285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
다(Bodhi 2000, 1572-73, 1702-03, 1743): (1) 수행자는 완전한 지혜(aññā)를 현생에 일찍 얻을
수 있다, (2) 그렇지 않으면 임종 시에 완전한 지혜를 얻는다, (3) 완전한 지혜를 현생에 일찍 얻거
나 임종 시에도 얻을 수 없으면 다섯 가지 하위의 장애를 끝내고 중반이 된다, (4) … 생반이 된다,
(5) … 무행반이 된다, (6) … 유행반이 된다, (7) … 상류반이 된다. 더 자세한 논의는 Harvey 1995,
100 불교학리뷰 vol.18

받는] 열반’(中般涅槃)이 있다. 만약 중간적 존재(中陰)가 없다면 중간적 [존재 상


태에서 받는] 열반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들 [즉, 이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이 ‘중
간적인 천신’(中天)이 있어서 이것을 좇아 [중간적]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이라
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중간적인 천신’은] 천신의 길(天趣)로서
설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 [그들의 주장에 의한다면] 나머지[종류의 불환]도 또
한 잘못됨이 있다. ‘태어날 때 [얻는] 열반’(生般涅槃)을 말할 때에는 [이에 해당
하는] ‘태어날 때의 천신’(生天)이라는 것이 또 있어서겠는가?18)

위의 구절에는 당시 아비달마 학파들은 중반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가


에 대해서 일치되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19) 따라서 중유의 존재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위의 구절에
따르면 중유의 존재를 받아들인 학파들은 중반을 중유의 상태에서 열반을 얻
은 자들이라고 이해했지만 몇몇 다른 학파들은 중반을 ‘중간적인 천신’이라는
의미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Somaratne가 주장하듯이, 비록 테라바다
논사들이 중유 개념 자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할지도 일부 팔리 자료에는 적
어도 중반의 개념과 관련해서는 중유의 존재가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
인다. 왜냐하면 중반은 육체가 죽은 이후에 다시 태어날 수 없는 존재이지만20)

100-02 와 Hwang 2006, 30 참조.


18) 當知有中陰 … 何以故。世尊所説故。如世尊説。七士夫趣有中般涅槃。若無中陰者則無中般涅
槃。若言有中天從彼般涅槃者不然。天趣中不説故。… 餘亦有過。若説生般涅槃。復有名生天
耶(雜阿毘曇心論(*Saṃyuktābhidharma-hṛdaya Śāstra) T 1152 962c18-25).
19) 이 학파들 간의 중반 개념에 대한 해석의 차이점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Blezer 1997, 6-13참조.
20) AN II 134에서는 재생/환생(uppatti)과 존재(bhava)의 개념이 구분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분
은 ‘중반’이 다시 태어나는 존재가 아님을 논증한다. 여기서 중반은 ‘존재를 취하는 장애’
(bhava-paṭilābhika-saṃyojana)는 아직 가지고 있지만 다른 유형의 불환들과는 달리 더 이상
‘재생/환생을 취하는 장애’(uppatti-paṭilābhika-saṃyojana)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이것
은 중반의 존재가 다시 태어남을 겪지는 않지만 여전히 일종의 존재론적 상태는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Harvey 1995, 101-02; Somaratne 1999, 148 참조).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101

아직 깨닫기 이전의 존재로서 여전히 윤회의 상태에 있어야 하고 따라서 이들


이 열반을 얻을 때에는 어떠한 상태 ― 가령 ‘중간적 존재’와 같은 ― 에 있어
야 하기 때문이다(Somaratne 1999, 148-149). 아무튼 설일체유부에 의한 중
반의 해석은 북방불교 전통에서 널리 수용되었고21) 중간적 존재라는 개념 또
한 이 전통 내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설일체유부의 백과사전적 논서인 뺷아비달마대비바사론뺸에는 중유
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들이 등장한다. 즉 중유는 ‘건달박’(揵達縛, S. gandharva,
P. gandhabba)이나 ‘구생’(求生, S. saṃbhavaiṣin), 또는 ‘의성’(意成, S.
manomaya)라고도 이름한다고 한다.22) 이 중 건달박은 팔리 니까야에서 새로
운 식(識)을 찾아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가는 존재로서 나와 있다(MN I
265-66; Harvey 1995, 105-06). 이 건달박을 중유의 다른 이름으로 보고 있다
는 것은 설일체유부가 건달박의 존재를 중유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나타낸다.23)
건달박의 개념은 테라바다 논사들에게도 역시 알려져 있었지만 테라바다 논사
들은 건달박을 중유와 동일한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구생, 즉 ‘생을

21)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남방불교’의 범주에 속하는 스리랑카의 오늘날의 불교 의식에서는 흔히


‘아귀’로 알려져 있고 불교 우주론 체계에 있어서는 욕계의 육도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preta가
비록 중유만큼 넓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중유와 유사한 함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
다(Langer 2009, 80-84). 남방 불교에 있어서의 preta 개념이 가지는 의미와 이 개념의 중유와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는 이 주제에 있어서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22) 如是中有有多種名。或名中有。或名揵達縛。或名求有。或名意成(阿毘達磨大毘婆沙論 T 1545
363a01-02) 이 네 가지 명칭은 세친의 Abhidharmakośa에도 또한 언급되고 있는데(III 40c-41a;
Pruden 1988, vol 2, 441-42) 세친은 ‘일어남’(S. nirvṛtti, 起)을 부가하여 총 다섯 가지의 명칭을
제시하고 있다; Radich 2007, 278 참조.
이 구절에 해당하는 한역은 다음과 같다:
由佛世尊以五種名說中有故。何等為五。一者意成。從意生故。非精血等所有外緣合所成故。
二者求生。常喜尋察當生處故。三者食香。身資香食往生處故。四者中有。二趣中間所有蘊
故。五者名起。對向當生暫時起故(阿毘達磨俱舍論 T 1558 55b03-08).
23) 위의 각주 10 참조.
102 불교학리뷰 vol.18

찾는 자’(saṃbhavaiṣin)가 중유의 다른 이름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중유의


개념이 단지 중반과 같은 특별한 존재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깨닫
지 못한 중생들에게도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윤회에 얽매여 다
음 ‘생을 찾는’ 운명을 가진 존재는 다름아닌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기 때문이다.
뺷아비달마대비바사론뺸의 또 다른 구절에는 의생의 존재가 여러 유형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설해져 있다. 이 유형들에는 앞서 논의한 두 가지 의생신, 즉
삼계 내의 존재론적 양상으로서의 의생신과 중유라는 일종의 몸으로서의 의생
신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중생이 출생의 유행에 따라 네 가지로 분류되어
있는데 ‘의생’(또는 ‘의성’(意成))은 그 중 한 가지 유형인 ‘마음을 따라서 태
어남’으로 설명되고 있다. 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의생’의 출생 유형에 속
하는 부류는 겁초의 사람(劫初人), 중유, 색계와 무색계의 신들, 그리고 변화
의 몸(變化身)의 네 가지이다:

질문: 왜 중유는 의성[신; 즉 의생신]이라고도 이름하는가? 대답: 왜냐하면 [중유


는] 마음을 따라 태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에 대해 말하자면, [1] 어떤 이들은
마음을 따라 태어나고; [2] 어떤 이들은 업(業)에 따라 태어나고; [3] 어떤 이들은
[그들의 업의] 이숙(異熟, S. vipāka)을 따라 태어나고; [4]어떤 이들은 음욕을 따
라 태어난다. [1]마음을 따라 태어난 자들은 겁초인(劫初人)들과 모든 중유와 색
계와 무색계[의 신들]과 변화신(變化身, S. *pariṇāma-kāya24))들을 말한다; [2]

24) ‘변화신’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 원어가 pariṇāma-kāya임을 추정할 수 있게 하는 구절이 있다.


뺷아비달마대비바사론뺸의 번역자인 현장은 또 다른 그의 번역서인 뺷성유식론뺸(成唯識論,
*Vijñaptimātratāsiddhi Śāstra)에서 의성신(意成身)과 함께 변화신은 ‘불사의변역생사’(不思
議變易生死)를 받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二不思議變易生死。 謂諸無漏有分別 業由
所知障緣助勢力所感殊勝細異熟果。… 或名意成身隨意願成故。… 亦名變化身。無漏定力轉令
異本如變化故(成唯識論 T1585 45a17-25)). 다음 장에서 논의될 것이지만, 뺷승만경뺸에는 ‘불사
의변역사’(不思議變易死, S. acintya-pāriṇāmikī-cyuti)가 설해지고 있고(현장 또한 뺷성유식론뺸
의 해당 구절에서 뺷승만경뺸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변화’(變化)는 ‘변역’(變易, S. pāriṇāmikī)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103

업을 따라 태어나는 이들은 모든 지옥[의 중생들]을 말하니, 경전에서 지옥의 유정


들은 업에 의해 얽매어서 벗어나지 못한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그들의 업
으로 인해 태어나는 것이지 마음이 즐거워하는 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3] 이
숙을 따라 태어나는 자들은 모든 날아다니는 새와 귀신 등을 말한다. 그 이숙의 힘
이 가볍고도 강하여, 그들은 공중에 날아다닐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벽이나 장애
물이 방해가 되지 않는다; [4]음욕을 따라 태어난 자들은 욕계의 여섯 신들과 모든
인간들을 말한다. 모든 중유의 몸은 마음을 따라 태어나서 마음을 타고서 활동하
므로 의성[신]이라고 이름한다.25)

위의 구절은 앞서 고찰한 두 종류의 의생신 외에 두 가지의 의생신을 더 제


시하고 있다. 즉, ‘겁초의 사람’과 ‘변화신’이다. 팔리 문헌에는 겁초의 존재를
언급하는 곳이 여러 군데 있는데, 예를 들어 Kosala Sutta에서는 겁과 겁 사이
에 우주가 생겨날 때 중생들은 일반적으로 ‘흐르는 광채’(ābhassara-)의 중생
으로 다시 태어나는데 이들은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고’(manomaya), 기쁨을
먹고 살며, 스스로 빛이 나고, 하늘에서 날아다니며, 영예롭게 산다고 설해져
있다(AN V 59-60; Bodhi 2012, 1380). 겁초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묘사에 비
추어 본다면, ‘흐르는 광채’의 중생들은 색계의 네 가지 천의 분류 가운데 두
번째 천의 가장 상위에 위치한 광음천(光音天, P. ābhassara)의 천신들의 존
재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구나 이 구절 바로 뒤의 문장에서는 이 중생들
을 ‘흐르는 광채의 천신들’이라고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26) 그렇다면 뺷아비달

과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5) 問何故中有復名意成。答從意生故。謂諸有情或從意生。或從業生。或從異熟生。或從婬欲生。
從意生者。謂劫初人及諸中有。色無色界并變化身。從業生者。謂諸地獄。如契經說。地獄有
情業所繫縛不能免離。由業而生不由意樂。從異熟生者。謂諸飛鳥及鬼神等。由彼異熟勢輕健
故能飛行空。或壁障無礙。從婬欲生者。謂六欲天及諸人等。諸中有身從意生故。乘意行故名
為意成(阿毘達磨大毘婆沙論, T 1545 363a17-27).
26) 이 구절 바로 뒤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세계가 허물어질 때에 흐르는 광채의 천신들은 가장 뛰어
104 불교학리뷰 vol.18

마대비바사론뺸에서 언급하고 있는 의생신의 한 가지 유형인 겁초인들은 겁초


에 존재한 특정 부류의 천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DN III 84-85).
하지만 여전히 네 번째 유형의 의생신, 즉 ‘변화신’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뺷아비달마대비바사론뺸의 이 구절을 통해서는 거의 알 수가 없다. 뺷승만경뺸이
나 뺷능가경뺸과 같은 대승경전들에서는 이 ‘변화신’의 개념에 대해서 불교 성
인의 몸이라는 개념과 연관하여 자체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는데 다음 장에
서는 이에 대해 논의한다.

3. 불교 성인의 몸으로서의 의생신

1) 대승 우주론적 체계에서의 의생신


대승 문헌에서는 위에서 살펴본 팔리 문헌 및 다른 아비달마 자료에 등장하는
의생신과는 매우 다른 새로운 구도의 의생신이 제시되고 있다. 뺷승만경뺸에는 의생
신이 세 종류의 불교 성인, 즉 아라한, 벽지불(pratyekabuddhas), 대력보살(大力
菩薩, S. vaśitā-prāpta bodhisattva)27)의 몸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뺷보성론뺸(寶
性論, Ratnagotravibhāga Śāstra), 뺷불성론뺸(佛性論), 뺷불설무상의경뺸(佛說無
上依經, *Anuttarāśraya Sūtra), 뺷성유식론뺸(成唯識論, *Vijñaptimātratāsiddhi
Śāstra)과 같은 대승 경론에는 뺷승만경뺸의 구도를 바탕으로 의생신이 논의되
고 있다.28) 이 경론들 이외에 뺷능가경뺸(楞伽經, Laṅkāvatāra Sūtra)에는 의생

나지만 심지어 이 천신들에게도 변화가 있고 변형이 있다’(AN V 60; Bodhi 2012, 1380). 이 구
절에서는 천신들의 존재를 ‘흐르는 광채’의 천신이 가지는 뛰어난 특성들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변화와 퇴보를 겪는 존재로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언급 방식에서 볼 때 이 천신들은 명
백히 광음천의 신들로 여겨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7) 아래에서 곧 논의될 것이다.
28) 이 네 가지 경론은 모두 의생신 논의에 있어서 뺷승만경뺸을 경전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뺷불설무
상의경뺸과 세친의 저술로 되어 있지만 이것이 의심되고 있는 논서인 뺷불성론뺸에는 뺷보성론뺸과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105

신이 다른 단계의 보살도에 속하는 세 가지 종류의 보살의 몸과 연관되어 설명


되고 있으며,29) 뺷대승밀엄경뺸(大乘密嚴經, Ghanavyūha Sūtra)에는 열 가지
종류의 의생신이 언급되고 있다.30) 필자는 의생신 개념을 다루는 이 모든 자료
들을 살펴보기보다는 뺷승만경뺸과 함께, 의생신의 논의에 있어서 뺷승만경뺸에
바탕을 두고 내용상 유사성을 가지는 두 논서인 뺷보성론뺸과 뺷불성론뺸에 초점
을 맞추려고 한다.31)
뺷승만경뺸32)에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의생신이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의

매우 유사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경론은 뺷보성론뺸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


정되고 있다. 특히 의생신에 대한 구절에 있어서 세 문헌은 약간의 표현상의 차이점을 제외하고
는 서로 대응하고 있다. Kubota Chikara(久保田力)는 이 세 문헌을 비교를 통해 네 가지 장애(障
碍, paripantha)와 세 가지 잡염(雜染, saṃkleśa)의 이론에 관해 논의하였다(Kubota 1999;
Kubota 1998). 뺷불성론뺸과 뺷불설무상의경뺸은 진제(眞諦 , Paramārtha, 499-569)의 한역만이 존
재하기 때문에 이 문헌들의 저자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학자들은 비록 이 두 문헌이 진
제 자신에 의한 저술은 아니라고 할 지라도 진제 자신의 해석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뺷불성
론뺸의 저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특히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들 문헌의 저자의 문제와 문
헌들 간의 연대기적인 관계에 대한 설명은 Tsukinowa 1935; Takasaki 1974, 7, 769; Takasaki
2005, 15-64; King 1991, 23-26 참조. 뺷성유식론뺸에는 뺷승만경뺸의 인용과 함께 의생신(/의성신)
이 불사의변역생사(不思議變易生死)와의 관련 하에 설명되어 있다. 불사의변역생사는, 아래에
서 곧 논의되듯이, 분단생사(分段生死)와 함께 생사 순환의 두 가지 유형을 말한다(T 1585 45a14-
24).
29) 뺷능가경뺸에는 의생신이 언급되는 곳이 두 군데 있다. 한 곳에서는 의생신은 제8지의 보살에 의해
얻어진다고 설명되어 있고(Nanjio 1923, 80-81), 다른 구절에는 세 종류의 의생신이 설명되어
있는데, 이 각각은 보살도의 특정 지위에 속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Nanjio 1923, 136-137 참
조). 문맥 상에서의 이 구절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Tokiwa 1995 참조. 또한 Radich 2007, 281-
283도 참조.
30) 捨於世間中 所取能取見 轉依離麁重 智慧不思議 十種意生身 眾妙為嚴好 作三界之主 而來密
嚴國(大乘密嚴經 T681 728a10-13). 이 경의 범어 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31) 뺷불설무상의경뺸의 의생신에 대한 구절(T 669 472a24-b05) 은 비교적 짧고 대부분 뺷불성론뺸의
해당부분에 중복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이 세 연관된 문헌 중에서 필자는 본 연구를 뺷보성론뺸과
뺷불성론뺸에 한정하여 진행하였다.
32) 비록 뺷승만경뺸의 범본은 현존하지 않지만 이 경의 상당한 부분이 뺷보성론뺸내에 인용되어 있다.
106 불교학리뷰 vol.18

특별한 몸으로 기술되고 있으면서, 이 세 종류의 성인들은 특별한 죽음인 불사


의변역사(不思議變易死, S. acintya-pāriṇāmikī-cyuti)를 겪는다고 설해져 있
다; 반면에 ‘[생을] 재연결(S. pratisaṃdhi)하는 중생들’ [즉, 다시 태어나는 중
생들]33)은 제한된 길이의 생이 순환되는 가운데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죽음인
‘끊어지는 죽음,’ 즉 ‘분단사’(分段死, S. pariccheda-cyuti)를 받는다고 한다.

두 가지의 ‘죽음’이 있다. 무엇이 그 둘인가? ‘분단사’(分段死, S. pariccheda- cyuti)


와 ‘불사의변역사’(不思議變易死, S. acintya-pāriṇāmikī-cyuti)이다. 분단사는
[생을] 재연결(S. pratisaṃdhi)하는 중생들 [즉, 다시 태어나는 중생들]에 속해 있
고, 불사의변역사는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의 의생신부터 구경무상보리(究竟

필자는 범본의 단편들과 티벳역, 그리고 한역을 포함하여 여러 판본을 참조한 Alex Wayman
and Hideko Wayman의 번역을 참고하였다(Wayman and Wayman 1973). 뺷승만경뺸의 한역은
두 가지가 현존한다. 즉, Guṇabhadra (394-468)에 의해 436년에 번역된 뺷승만사자후일승대방
편방광경뺸(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 T353)과 Bodhiruci (572?-727)에 의해 713년에 번역
된 뺷대보적경뺸(大寶積經) 의 48번째 회인 「승만부인회」(勝鬘夫人會; T 310)이다. 티벳역은 「승
만부인회」와 유사하고 뺷보성론뺸에 인용된 뺷승만경뺸의 구절은 Guṇabhadra의 번역과 유사하다
는 것이 또한 알려져 있다(Ogawa 2001, 16-17). 필자는 이 논문에서 Guṇabhadra의 번역본을
사용하였다.
33) Alex Wayman은 ‘pratisaṃdhi’의 일차적 의미가 [새로운 몸으로] 다시(prati) 연결된다
(saṃdhi)는 것, 즉 ‘환생’임을 언급하고 있지만 뺷승만경뺸에서는 아라한이 환생을 벗어남이 부정
되고 있기 때문에 이 경에서는 이러한 ‘pratisaṃdhi’의 일반적 의미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
한다(Wayman and Wayman 1973, 82, n. 53). 그러나 뺷승만경뺸에서 설해지는 아라한이 받아야
하는 환생이 윤회 내에서 중생들이 받는 환생과 같은 종류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뺷승만경뺸
에는 ‘아라한은 … 윤회에서의 [생의] 재연결을 … 극복하였다’라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Wayman and Wayman 1973, 83). 게다가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이 받는 죽음은 윤회 내에
서 중생들이 경험하는 일반적인 죽음과 구별하여 ‘불사의변역’(acintya-pāriṇāmikī)이라고 서
술되어 있다. ‘불사의변역사’는, 아래에서 논의되듯이, 제8지에 도달한 보살에게 일어나는 일종
의 존재론적 변화를 말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뺷승만경뺸에 언급된 환생과 죽음은 중생의 존
재론적 양상과 단계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어져야 하고, ‘pratisaṃdhi’를 ‘환생’이라고 번역할
때에는 단지 윤회를 겪는 중생들의 환생에만 제한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107

無上菩提)에 이르기까지[의 단계]에 속한다.34)

뺷승만경뺸은 이어서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의 의생신이 불사의변역사를


받는 것은 그들에게 아직 제거하지 못한 번뇌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한다.35) 다
시 말해 뺷승만경뺸에는 이 성인들의 의생신이 아직 영적으로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남아있는 일종의 바람직하지 못한 존재 상태로 기술되고 있
는 것이다. 사실 뺷승만경뺸에서는 의생신이 가장 근본적 번뇌인 ‘무명주지’(無
明住地, S. avidyāvāsa-bhūmi)와 연결되어 있고, 반면 삼계의 중생들은 ‘취’
(取, S. upādāna)와 같은 번뇌와 연결되고 있다:36)

취(取, S. upādāna)를 연(緣)으로 하고 유루업(有漏業, S. sāsrava-karma)을 인


(因)으로 하여 삼계[의 존재]가 생겨난다. 마찬가지로 무명주지(無明住地, S.
avidyāvāsa-bhūmi)를 연으로 하고 무루업(無漏業, S. anāsrava-karma)을 인으
로 하여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의 세 종류의 의생신이 생겨난다.37)

34) Wayman and Wayman 1973, 82. 번역 수정됨. 이 구절에 대한 범본은 유실되었다. 한역의 대응
구절은 다음과 같다: 有二種死。何等爲二。謂分段死。不思議變易死。分段死者。謂虚僞衆生。
不思議變易死者。謂阿羅漢辟支佛大力菩薩意生身乃至究竟無上菩提(T 353 219c20-23).
35) Wayman and Wayman 1973, 83-84. 한역은 다음과 같다: 阿羅漢辟支佛…非盡一切煩惱。亦非
盡一切受生故說不受後有。何以故 有煩惱(T 353 219c27-a01).
36) 이 구절에 바로 앞서서 뺷승만경뺸은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지위에서는 여전히 제거될 수 없는 번뇌
로서 (1) 네 가지의 ‘주지번뇌’(住地煩惱), 즉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 ‘욕애주지’(欲愛住地),
‘색애주지’(色愛住地), ‘유애주지’(有愛住地)와 (2) ‘기번뇌’(起煩惱)를 설명하고 있다. ‘주지번
뇌’는 의식의 근저에서 다른 모든 번뇌의 근본으로 무시이래로 작용해 왔던 번뇌를 말한다.
Wayman은 이 네 가지의 ‘주지번뇌’를 십이연기의 고리에서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취(取, S.
upādāna) 네 가지, 즉 견취(見取, S. dṛṣṭi-upādāna), 욕취(欲取, S. kāma-upādāna), 계금취(戒禁
取, S. śīla-vrata-upādāna), 아어취(我語取, S. ātma-vādopādāna)에 각각 연관시킨다. Wayman
and Wayman 1973, 84. n. 56 참조.
37) Wayman의 번역은 Wayman and Wayman 1973, 85 참조. 又如取縁有漏業因而生三有。如是無
明住地縁無漏業因。生阿羅漢辟支佛大力菩薩三種意生身(T 353 220a16-18).
108 불교학리뷰 vol.18

여기서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이 존재하는 모습은 삼계에 속한 존재와는


대조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므로 이들은 삼계에서 벗어난 존재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삼계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 종류의 성인은 여전히
무명의 영향을 받는 불완전한 존재로 기술되고 있다.
비록 영적으로 앞서 있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라고 하는 의생신에 대한
뺷승만경뺸의 이러한 관점은 뺷보성론뺸에도 역시 나타난다. 뺷보성론뺸에는 세 종
류 성인의 의생신이 네 가지 종류의 ‘장애’(障, S. paripantha)와 연관되어 여
래의 법신의 네 가지 공덕바라밀(功德波羅蜜, S. guṇa-pāramitā) 을 갖추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로 기술되어 있다: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은 비록 ‘무루계’(無漏界, S. anāsrava-dhātu)에 머물지


만 여래의 법신의 네 가지 공덕바라밀(功德波羅蜜, S. guṇa-pāramitā)을 얻음에
있어서는 이들에게도 네 가지의 ‘장애’(障, S. paripantha)가 있다. … [1] ‘연상’
(緣相, S. pratyaya-lakṣaṇa)은 ‘무명주지’를 말한다. [일반 중생에게 있어서] ‘무
명’(無明, S. avidyā)이 ‘행’(行, S. saṃskāra)[의 연(緣)]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
종류의 성인들에게 있어서는 ‘무명주지’가 ‘행’의 연이다38)]. [2] ‘인상’(因相, S.
hetu-lakṣaṇa)은 [의생신의 인(因)인] ‘무명주지’에 의해 조건 지워진(緣) ‘무루
업’(無漏業, S. anāsrava-karma)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 중생에게 있어
서 ‘무명’에 의해 조건 지워진] ‘행’과 비교될 수 있다. [3] ‘생상’(生相, S.
saṃbhava-lakṣaṇa)은 ‘무명주지’를 연으로 하고 ‘무루업’을 인으로 하여 세 종류
의 의생신(S. manomayātmabhāva)이 생겨남을 말한다. 마치 삼계(S. tribhava)
[의 중생들]의 생성이 네 가지의 ‘취’(取, S. upādāna)39)를 연으로 하고 ‘유루업’
(有漏業, S. sāsrava-karma)을 인으로 하는 것과 같다.40) [4] ‘괴상’(壞相, S.

38) 한역에는 ‘무명주지가 행에 대하여 조건이 된다’(無明住地與行作緣)라고 분명히 설해져 있다. 전


구절에 대한 한역은 아래의 각주 41 참조.
39) 위의 각주 36 참조.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109

vibhava-lakṣaṇa)은 삼종 의생신의 생성에 의해 조건 지워진 ‘불가사의변역사’(不


可思議變易死, S. acintya-pāriṇāmikī-cyuti)를 말한다. 그것은 ‘생’(生, S. jāti)에
의해 조건 지워진 [삼계의 중생들의] ‘노사’(老死, S. jarā-maraṇa)에 상응한다.41)

이 구절에서, 뺷승만경뺸에서 의생신의 연과 인으로 각각 설해지고 있는 ‘무


명주지’와 ‘무루업’은 이 네 가지의 ‘장애’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인 ‘연상’
과 ‘인상’을 말하고 의생신의 생성과 죽음은 각각 세 번째와 네 번째인 ‘생상’
과 ‘괴상’으로 설해지고 있다. 또한 무루계의 삼종 성인이 가지는 이 네 가지의
장애는 ‘유루계(有漏界, S. sāsrava-dhātu)’의 일반 중생들과 관련된 네 가지
현상, 즉 ‘무명,’ ‘행,’ ‘생성,’ ‘노사’에 또한 비교될 수 있다.
일반 중생들과 의생신을 가진 삼종의 성인들이 각각 나란히 유루계와 무루
계라는 두 차별적인 영역에 속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에서 볼 때, 대승의
우주론 체계에 있어서 이 두 종류의 존재들은 서로 다른 범주를 구성하는 것으
로 보인다. 일반적 중생들은 삼계에 속한 상태로, 의생신을 가진 존재들은 삼
계를 벗어난 상태로 각각 네 종류의 장애에 속박되어 영적으로 불완전한 존재
로 기술되고 있고, 또한 각각의 특수한 존재 양상을 가지고 특수한 삶의 순환
방식을 가지는 것으로 설해지고 있다. 뺷승만경뺸과 뺷보성론뺸에서 설해지고 있
는 의생신은 이런 점에서 삼계의 일반 중생들과 함께 대승 우주론 체계에 있어
서의 두 가지 존재 유형 중 하나로 이해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40) 문맥에서 보았을 때, ‘취’와 ‘유루업’은 각각 ‘무명’과 ‘행’에 해당하는 듯 하다. 조금 뒤의 구절에
서는 범본의 anāsrava-karma 의 위치에 ‘행’이 사용되고 있다.
41) Johnston 1950, 32-34; Takasaki 1966, 214-216, 번역 수정됨. 한역은 다음과 같다: 又此四種波
羅蜜等住無漏界中。聲聞辟支佛得大力自在。菩薩為證如來功德法身第一彼岸有四種障。… 緣
相者。謂無明住地。即此無明住地與行作緣。如無明緣行。無明住地緣亦如是故。因相者。謂
無明住地緣行。即此無明住地緣行為因。如行緣識。無漏業緣亦如是故。生相者。謂無明住地
緣依無漏業因生三種意生身。如四種取。緣依有漏業因而生三界。三種意生身生亦如是故。壞
相者謂三種意生身緣不可思議變易死如依生緣故有老死(T 1611 830a28-b11).
110 불교학리뷰 vol.18

2) 대승 수증론 체계에서의 의생신


뺷불성론뺸은 앞서 언급했듯이 뺷보성론뺸에 부분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논
서인데,42) 여기에는 위에서 살펴본 뺷보성론뺸의 구절과 정확히 상응하는 방식
으로 의생신을 논의하는 구절이 있다. 뺷보성론뺸과 뺷불성론뺸의 상응 부분은 구
조상으로도 대체로 동일하고 내용상으로도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뺷보성론뺸과
마찬가지로 뺷불성론뺸에는 삼계를 벗어나 무루계에 머무는 세 종류의 성인(聖
人, S. ārya),43) 즉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이 (그들이 완전한 붓다가 되기 전
에) 여래의 법신의 네 가지 공덕바라밀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네 가지의
‘해로운 장애,’ 즉 ‘원장’(怨障) 때문이라고 설해지고 있다.44)
하지만 뺷불성론뺸은 뺷보성론뺸에서 논의되고 있는 네 가지 현상, 즉 연상, 인
상, 생상, 괴상을 각각 ‘네 종류의 생사’(四種生死), 즉 ‘방편의 생사’(方便生
死), ‘인연의 생사’(因緣生死), ‘[남아있는 한] 생을 가진(有有) 생사’(有有生
死), ‘[남아있는] 생이 없는(無有) 생사’(無有生死)라는 개념으로 대치하고 있
다.45) 그리고 나서 뺷불성론뺸은 계속하여 각각의 생사의 순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방편의 생사’는 ‘무명주지’(無明住地)가 새로운 ‘무루업’(無漏業)을 만들어


내는 [현상]을 말한다.46) 이것은 ‘무명’(無明)이 ‘행’(行)을 만들어내는 [일반적인

42) 위의 각주 28 참조.
43) 뺷불성론뺸의 이 구절에서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은 분명히 ‘성인’으로 불리고 있다. 뺷보성론뺸
의 상응 구절에서는 이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뺷보성론뺸의 상응구절은 위의 인용문 참조).
44) 以出三界外有三種聖人。謂聲聞。獨覺。大力菩薩。住無流界。有四種怨障。由此四怨障故。
不得如來法身四種功德波羅蜜(佛性論 T 1610 799a06-08).
45) 四怨障者。一方便生死。二因緣生死。三有有生死。四無有生死(佛性論 T 1610 799a08-10).
46) 뺷불성론뺸에서는 ‘방편’과 ‘인연’이 구별되고 있다. 첫 번째 생사인 ‘방편의 생사’는 무명주지가
무명주지와 다른 종류인 무루업을 과(果, S. phala)로 가질 때의 생사라고 한다; 예를 들어 무명주
지는 무명주지와 마찬가지로 세속(俗, S. saṃvṛti)에 속하는 복행(福行)을 생겨나게 할 때에는 같
은 종류의 과를 생겨나게 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진실(真, S. paramārtha)에 속하는 지혜행(智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111

중생들에 있어서의 현상]에 비교된다. … [2] ‘인연의 생사’는 ‘무명주지’에 의해


만들어진 ‘무루업’[에 의한 현상]을 말하며, 이 업은 [총괄적으로] 이름하여 ‘인연
의 생사’라고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중생들에 있어서] 무명에 의해 생겨난 ‘업’
[에 의한 현상]에 비교된다. … [3] ‘[남아있는 한] 생을 가진(有有) 생사’란 ‘무명
주지’를 방편(方便, S. upāya)47)으로 삼고 ‘무루업’을 인으로 삼는 세 종류의 성인
의 의생신[이 생겨나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은 네 가지 ‘취’(取) 에 의해 조건 지
워지고 ‘유루업’(有漏業)을 인으로 하는 삼계 내의 몸들이 생겨남[이라는 일반 중
생들에 있어서의 현상]에 비교된다. … [4]‘[남아있는] 생이 없는(無有) 생사’란 세
종류의 성인의 마지막 의생신48)에 의해 조건 지워지는 ‘불가사유퇴타’(不可思惟

慧行) 또한 일으키므로 다른 종류의 과 또한 생겨나게 한다고 한다; 一方便生死者 … 或因煩惱方


便。生同類果。名為因緣。如無明生不善行。若生不同類果。但名方便。如無明生善行。不動
行故。今無明住地生新無漏業亦爾。或生同類。或不同類。生福行。名為同類。以同緣俗故。
生智慧行。名不同類。以智是真慧故。 是名方便生死(佛性論 T 1610 799a10-17). 반대로, 두
번째 생사인 ‘인연의 생사’는 무루업은 무루업과 같은 종류의 결과만을 생겨나게 하므로 이렇게
불린다고 한다; 선행(善行)은 단지 즐거운 결과(樂果)만을 낳고, 반면에 불선(不善)은 단지 괴로
운 과보(苦報)만을 부른다고 한다; 二因緣生死者 … 但感同類不生不同類果。善行但生樂果。 不
善但招苦報。故名因緣生死(佛性論 T 1610 799a17-20).
47) 뺷보성론뺸에서는 ‘방편’ 대신 ‘연’(緣)이 사용되고 있으므로 ‘방편’은 자신과 다른 종류의 과를 생
기게 하는 ‘연’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에서 첫 번째 생사인 ‘방편생사’를
‘연’의 생사라고 본다면 뺷보성론뺸의 첫 번째 ‘장애’인 ‘연상’과 서로 상통함을 알 수 있다.
48) ‘세 종류의 성인의 마지막 의생신’(三聖意生最後身)이 이 성인들이 그들의 영적 과정에서 단지
마지막으로 가지는 의생신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완전한 붓다가 된 후에는 더 이상 의생신
을 존재론적 양상으로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문제는 부처의 존재론적
양상이 의생신과 관련성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인지와 같은 이슈들과 연관된다. 이러
한 이슈는 특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Radich가 지적했듯이, 의생신이 붓다의 ‘화
신’(化身, S. nairmāṇika-kāya)의 전조적 형태일 가능성이 자주 제기되어 왔기 때문이다
(Radich 2007, 224). Frank E. Reynold와 같은 몇몇 학자들은 의생신을 ‘법신’(法身, S.
dharma-kāya)과 연결시키기도 한다(Reynolds 1977, 383-87). 하지만 Radich는 대승전적에서
는 의생신이 주로 삼종의 성인과 같이 수증론적으로 붓다보다 열등한 존재들의 몸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런 해석 경향을 문제시하고 있다(Radich 2007, 283-84). 현재의 인용 구절
의 문맥에서는 그 의미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양쪽의 주장에 대한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어야
112 불교학리뷰 vol.18

退墮)[에 의한 현상]을 말한다. 이것은 ‘생겨남’(生) 에 의해 조건 지워지는 [일반


중생들의] ‘노사’[의 현상]에 비교된다.49)

뺷불성론뺸의 이 구절에서 네 가지의 장애 대신 네 가지의 생사의 순환 유형


이 도입된 것은 단순히 각 유형의 장애가 불교 성인들이 붓다의 공덕바라밀을
얻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나 이유로서 설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장애들
이 특별한 부류의 존재들이 겪는 특별한 유형의 생사순환을 구성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뺷불성론뺸에서 위의 삼종 성인의 네 가지 장애에 대한 논의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되고 있다: ‘십지[의 보살들]은 네 가지 장애로 인해 네 공덕
바라밀을 아직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금강심(金剛心)[즉, 십지의 마지막인 금
강유정(金剛喩定, S. vajra-upama-samādhi)의 단계]를 성취하고 나서야 공
덕바라밀을 얻는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50) 다시 말해 뺷불성
론뺸에서 삼종 성인의 네 장애에 대한 논의가 도입된 것은 성불 이전까지 이 장
애를 지니고 있는 십지 보살의 경우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세친의
51)
Mahāyānasaṃgraha-bhāṣya의 진제 역인 뺷섭대승론석뺸(攝大乘論釋) 에는

할 것으로 보인다.
49) 一方便生死者。是無明住地。能生新無漏業。譬如無明生行 … 二因緣生死者。是無明住地所生
無漏業。是業名為因緣生死。譬如無明所生行是業 … 三有有生死者。是無明住地為方便。無漏
業為因。三種聖人是意所生身。譬如四取為緣。有漏業為因三界內生身 … 四無有生死者。是三
聖意生最後身為緣。是不可思惟退墮。譬如生為緣。老死等為過失(佛性論 T 1610 799a10-29).
50) 復次十地由四障故。未得極果四德。金剛後心。方乃得之 應知 …(佛性論 T 1610 799a04-05).
뺷보성론뺸에는 이와 상응하는 구절이 보이지 않는다.
51) 진제가 뺷불성론뺸의 가탁된 저자로서든지 아니면 번역 과정 중 상당 부분을 편집한 편집자로서든
지 간에 뺷불성론뺸의 성립에 있어서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고 추정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
제 역의 뺷섭대승론석뺸 또한 진제 자신의 편집을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진제 역의 뺷섭대승론
석뺸에는 티벳본이나 현장 역에는 보이지 않는 진제 자신의 주석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이 알려져
있는데, 이 네 가지 생사의 개념 또한 현장 역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또 다른 진제의 번역인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113

이 네 가지의 생사가 네 가지 특정 단계의 보살의 수증론적 지위, 즉 [1] 초지에


서 제4지의 보살, [2]제5지에서 제7지의 보살, [3] 제8지에서 제10지의 보살,
그리고 [4] 여래지(如來地, S. tāthāgata-bhūmi)에 각각 대응되고 있다.52)
또한, 뺷불성론뺸에는 각각의 수행의 구도에 있어서의 수증론적인 함의가 유
사하다는 점에서 보살의 앞의 세 종류의 생사는 특정의 수증 단계에 있는 세
부류의 이승에 각각 비교되고 있다. 이는 또한 네 종류의 생사가 특정적인 생
사순환의 유형을 가진 특정적인 수증 단계와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앞의
세 종류의 생사에 비교된 세 부류의 이승은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1] [보살의] ‘방편생사’는 [이승의] 범부(凡夫)의 지위에 비교되고, [2][보살의]


‘인연생사’는 [이승의] 수다원(須陀洹, S. sotāpanna; 預流) 이상[의 지위]에 비교
53)
될 수 있다.
[3] ‘[보살의 ‘유유생사’에서 ‘유유,’ 즉 하나의 남아있는] 생을 가짐’이란 미래에

뺷불설무상의경뺸(佛說無上依經, *Anuttarāśraya Sūtra; T669 472b14-23)에 이 개념이 논의되


고 있고 따라서 이러한 개념들이 진제에 의해 첨가된 것임이 강하게 시사되고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이 세 경론에 등장하는 이 개념들은 진제를 통해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52) 有二十二無明。麁重報障十一地。諸地各能滅三障。各得勝功德。初地能滅三障者。一法我分別
無明。二惡道業無明。此二無明感方便生死名麁重報。為滅三障故修正勤。因修正勤滅三障。
已得入初地得十分圓滿 … 已入第二地得八種清淨功德入 … 已入第三地得八種轉勝清淨及四定
等。… 已入第四地得八種轉勝清淨。…所以未得者由三障故。一生死涅槃一向背取思惟無明。
二方便所攝修習道品無明。此二無明所感因緣生死名麁重報。為滅此三障故。修正勤。因修正
勤滅三障。已入第五地得八種轉勝清淨 … 已入第六地得八種轉勝清淨 … 已入第七地得八種轉勝
清淨 … 所以未能者由三障故。一於無相觀作功用無明。二於相行自在無明。此二無明所感有有
生死名麁重報。為滅三障故修正勤。因修正勤滅三障。已入第八地得八種轉勝清淨 …已入第九
地得八種轉勝清淨 …已入第十地得八種轉勝清淨。及能得正說圓滿法身等 … 所以未得者由三障
故一於一切應知境微細著無明。二於一切應知境微細礙無明。此二無明所感無有生死名麁重
報。為滅此三障故修正勤。因修正勤滅三障。已入如來地得七種最勝清淨。(攝大乘論釋 T 1595
225c21-227a02).
53) 方便生死。譬凡夫位。因緣生死。譬須陀洹以上(佛性論 T 1610 799a20-21).
114 불교학리뷰 vol.18

오직 하나의 남아있는 생을 가지므로 이를 ‘유유’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번


째[즉, 다음] 생에서 열반을 얻는 ‘위로 향하여 돌아오지 않는 자’(上流阿那含人)
[즉, 상류반(上流般, S. ūrdvasrotas akaniṣṭa-gāmin)]54)에 비교될 수 있다. 왜냐
하면 [두 부류는 모두] 하나의 생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유’라고 부
른다.55)

여기서 보살의 생사의 첫 번째 단계는 수행과정에 있어서 초기 단계에 속한


다는 점에서 이승의 범부의 지위56)에 비교되고 있다; 두 번째 단계는 깨달음의
과정에 있어서 확립된 단계라는 점에서 수다원, 즉 ‘흐름에 들어간 자’에 비교
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수행과정의 마지막 단계라는 점에서 다음 생에 열반을
얻게 될, 다시 말해 아라한이 될 ‘상류아나함인’에 비교되고 있다. 이 가운데에
서 뺷불성론뺸에는 세 번째 보살의 부류가 이승의 세 번째 부류에 비교되는 이유
가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두 부류 모두가 그들 각각의 최종 목표인 성불과 아
라한과를 다음 생에 이룰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단지 한 생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생만이 남아있는 생사, 즉 유유생사를 받을 보살
과 다음 생에 열반을 얻게 될 상류아나함인은 각자 보살로서 또는 이승인으로
서 모두 그들의 마지막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생사순환의 유형과 수증론적 의미의 유사성이라는 관점에서의 이승 수행자

54) 이 유형의 불환은 처음에는 색계 내의 ‘청정한 영역의’ 하늘들 가운데 하나에서 태어나고 그리고
나서 이 중 가장 높은 하늘인 색구경천(色究竟天, S. Akaniṣṭha)에 태어나 아라한이 된다고 한다.
Pruden 1988, vol. 3, 967-69 참조.
55) 有有者。未來生有。更有一生。名為有有。如上流阿那含人。於第二生中般涅槃者。餘有一生故。
故名有有(佛性論 T 1610 799a25-27).
56) 아래에서 논의되듯이 뺷불성론뺸에서 이승 수행에 있어서의 범부는 사선근(四善根, S. catuṣ-
kuśala-mūla) 또는 순결택분(順決擇分, S. nirvedha-bhāgīya), 즉 ‘난’(煖, S. uṣma-gata), ‘정’
(頂, S. mūrdhan), ‘인’(忍, S. kṣānti), ‘세법/세제일법’(世法/世第一法, S. laukika-agra-dharma)
의 지위에 있는 자들을 말한다.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115

들과 십지 보살들을 비교하면 아래의 <표 1>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표 1. 뺷불성론뺸과 진제 역 뺷섭대승론석뺸을 바탕으로 한 이승인과 보살의 수증론적 지


위와 생사순환의 유형 비교

이승인의 지위 보살의 지위 및 생사
범부 초지에서 제4지까지의 보살(방편생사)
예류/수다원(sotāpanna) 이상의 이승 제5지에서 제7지까지의 보살(인연생사)
아라한이 되기 전 마지막 생을 살고 있는
상류반/상류아나함(ūrdvasrotas akaniṣṭa-gāmin) 제8지에서 제10지까지의 보살(유유생사)

[아라한] 여래지(무유생사)

비록 이승과 보살 간의 수행 과정이 가지는 수증론적 함의를 평행하게 대응


하여 상호 비교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대승의 관
점에서 볼 때 이승의 수행 과정은 보살의 수행 구도 속에 포함되어 설명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뺷불성론뺸의 관점 또한 대승의 관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뺷불성론뺸의 위 인용문에 나타난 구도에 따르면 삼종 성인의 의생신은
각각 세 가지 생사에 대응하고 있고, 세 번째의 생사는 위의 표에 보이듯이 마
지막 하나의 생만을 남겨놓고 있는 생사로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논의
되고 있는 대승의 관점에서 볼 때 삼종의 성인은 대승 수행의 최고 단계, 즉 성
불 이전 마지막 생을 살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고, 세 번째의 생사를 받
는 대력보살은 제8지에서 제10지의 보살에 해당함을 표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비록 이승인과 보살들이 그들의 수증론적 과정와
생사 순환에서 단계별로 유사한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유사
성이 그들 간에 존재론적 양상이 동일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
를 들어, 이승과 보살의 세 번째 부류는 위에서 논의했듯이 하나의 생만을 남
겨놓고 있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지만 이 단계의 보살은 삼종 성인의 하나로
서 의생신을 가지는 반면 이승인인 상류반은 아라한이 가지는 의생신을 가지
116 불교학리뷰 vol.18

는 것은 아니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뺷불성론뺸(그리고 뺷보성론뺸)에는 의생신


이 세 가지 장애와 연결되어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이라는 삼종 성인의 몸
으로 분명히 설해져 있고, 따라서 이 세 번째 단계의 보살은 상류반과 같은 불
환이 아니라 아라한과 동일한 존재론적 양상을 가지는 것이다.57) 그렇다면 수
증단계에 있어서의 이승인과 보살간의 유사성과 그들의 존재론적 양상은 두
가지 별개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승인과 보살의 수증론적 단계의 비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
다고 할 수 있다: [1] 첫 번째는 수증론적 함의와 생사 순환의 유사성에 바탕을
두는 설명방식이고, [2] 두 번째는 우주론 체계에서 그들의 존재론적 양상에
바탕을 두는 설명방식이다. 첫 번째 설명방식의 관점에서 논하자면, 세 번째

57) 실제로 아라한의 지위는 보통 대승 전통의 보살 십지 가운데 제8지(또는 제7지)보살의 지위에 상


응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초기 불교전통의 다섯 단계의 수행 계위인 (1) 자량위(資糧位, S.
saṃbhāra-avasthā), (2) 가행위 (加行位, S. prayoga-avasthā), (3) 견도(見道, S. darśana-
mārga), (4) 수도(修道, S. bhāvanā-mārga), (5) 무학 (無學, S. aśaikṣatva)은 그 구성에 있어서,
예를 들어, 뺷성유식론뺸과 같은 유식전적에 나와 있는 대승의 다섯 단계의 수행, 즉 (1) 자량위(資
糧位, S. saṃbhāra-avasthā), (2) 가행위(加行位, S. prayoga-avasthā), (3) 통달위(通達位, S.
*prativedha-avasthā), (4) 수습위(修習位, S. *bhāvana-avasthā), (5) 구경위(究竟位, S. *niṣṭha-
avasthā)와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유식의 수행 구도가 초기불교의 수행 계위와 일대일 대응되는
것은 아니다. 대승의 보살도는 궁극적으로 성불로 정점을 이루지만 초기불교의 수행과정은 아라
한과를 얻는 것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즉, 대승 수행과정으로서 새로이 등장한 보살 십지의 단
계는 초기불교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수행단계에 중첩되고 있지만(보살도의 초지는 초기불교 수행
의 세 번째 단계인 견도(見道, S. darśana-mārga)에 대응하고, 보살도의 제2지에서 제10지까지
는 초기불교 수행의 네 번째 단계인 수도(修道 S. bhāvanā-mārga)에 대응한다(Gethin 1998
194-98; 229-31)) 초기불교의 네 번째 단계인 수도는 대승의 네 번째 단계인 수습위에 정확히 대
응되는 것은 아니다. 대승의 수습위는 앞서 언급했듯이 제2지부터 제10지까지를 말하지만 초기
불교의 네 번째 단계는 보살도에 있어서 제2지부터 제7지(또는 제6지)까지만 해당하기 때문이
다. 다시 말해, 제8지(또는 제7지)이상의 보살지에 대해서는 초기불교 구도에 대응하는 부분이
없다. 이것은 초기불교 수행구도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인 아라한과에 대응하는 것이 보살지의 제
8지(또는 제7지)인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비록 초기의 수행구도와 유사한 듯 하지만
대승의 수행 체계가 더 포괄적인 수증적 구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표 2도 참조.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117

단계의 이승인과 보살이 마지막 하나의 생만이 남아있다고 할 때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의 이승인과 보살은 여전히 적어도 두 번의 환생을 겪어야 한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설명방식의 관점에서 논하자면, 삼종 성인의 아랫
단계의 중생들, 즉 아라한 또는 벽지불 이하의 이승인들과 대력보살 이하의 보
살들은 삼계에서(즉, 유루계에서) 윤회의 생사를 겪는 무상한 몸을 여전히 가
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뺷보성론뺸과 뺷불성론뺸에 따르면 의
생신은 삼계를 벗어나서(즉, 무루계에서) 적어도 윤회의 생사로부터는 자유로
워진 삼종 성인들의 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뺷불성론뺸에는 ‘성인’(聖人, S. ārya)58)이 ‘세상을 벗어난’
(出世) 존재라고 설해져 있기도 하고59) 다른 한편으로는 초지 이상의 보살이
‘성인’이라고 정의되어 있기도 하여60) 초지 이상의 보살이 삼계를 벗어난 의
생신을 받는 것임이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은 위에서 언급한 두
번째 설명 방식의 관점에는 어긋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처럼 모순을 가
지는 것처럼 보이는 뺷불성론뺸(그리고 뺷보성론뺸)의 입장은 이 부류의 보살이
삼계 내의 무상한 몸과 삼계를 벗어난 의생신을 모두 받고 있다고 한다면 모순
없이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초지부터 제7지까지의 보살, 즉 일반 중생과
대력보살의 지위 사이에 위치한 보살들은 유루계에서 무루계로의 수행의 중간
단계에 속하는 존재로서 삼계에 속하여 있으면서도 때로는 삼계를 벗어나는
존재로 설명될 수 있다.
이승인의 경우에 있어서도 동일한 점이 고려될 수 있다. 표 1에서 볼 수 있
는 것과 같이 첫 번째의 이승인의 부류는 뺷불성론뺸에서 범부로 설해져 있고 따
라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승인은 이론적으로는 범부를 벗어난 위치에 있는 것

58) 위의 각주 43 참조.
59) 有二種學人。一凡夫。二聖人。此惑在學道凡夫相續中。無始已來未曾見理。因初出世聖道所破
名為見諦。(佛性論 T 1610 807a28-b01).
60) 聖人者。初地以上(佛性論 T 1610 807b12).
118 불교학리뷰 vol.18

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예류, 일래, 불환은 삼계를 완전히 벗어난 존재들이 아


니라 벗어나는 도중에 있는 존재들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위의 두 번째 설명
방식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류의 이승인은 아직 아라한을
성취하지 못한 부류들이기 때문에 삼계의 윤회 안에서 무상한 몸을 받고 있다
고 보아야 한다. 이론적인 추정과 실제적인 설명 간에 보이는 이러한 모순은,
위의 보살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의 이승인이
유루계에서 무루계로 나아가는 과정에 속하는 중생으로서 삼계의 윤회의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행 과정 중에 의생신 또한 가질 수 있다고 설명할 때에
해결될 수 있다.
뺷불성론뺸에는 삼계를 벗어난 성인들과, 위에서 논의했듯이, 삼계에 속하기
도 하고 벗어나기도 한 ‘준’성인들 이외에 범부에 대한 설명도 나온다. ‘수행을
하는 자,’ 즉 ‘학인’(學人, S. śaikṣa)을 범부와 성인의 두 부류로 나누어 논의
하는뺷보성론뺸의 구절61)을 설명하면서,62) 뺷불성론뺸에는 각각의 부류를 다시
‘소승’(小乘, S. hīnayāna)[즉, 이승]과 대승(大乘, S. Mahāyāna)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소승의 경우에는 ‘학인’의 지위에 있는 범부가 네 가지 단계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네 단계는 일반적으로 ‘사선근’(四善根, S. catuṣ-kuśala-
mūla) 또는 순결택분(順決擇分, S. nirvedha-bhāgīya)으로 알려져 있는 ‘난’
(煖, S. uṣma-gata), ‘정’(頂, S. mūrdhan), ‘인’(忍, S. kṣānti), ‘세법/세제일
법’(世法/世第一法, S. laukika-agra-dharma)을 말한다; 반면 대승에 있어서
‘학인’의 지위에 있는 범부는 ‘십신(十信) 등의 여러 지위’에 있는 자들을 가리
킨다고 설해져 있다.63)

61) Johnston 1950, 67-68; Takasaki 1966, 279-280.


62) 뺷불성론뺸에는 ‘해석하여 말하자면’(釋曰)으로 시작하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진제
자신의 주석인 것으로 추정된다. ‘학인’에 대한 뺷불성론뺸의 설명 또한 이 ‘석왈’부분에 포함되어
있다.
63) 釋曰。學道凡夫相續中者。若小乘則從煖頂忍世法。此四是學道凡夫位 … 若大乘則十信等諸位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119

이승과 보살에 속하는 이들 ‘성인,’ ‘준’성인, ‘범부’의 수증론적 단계를 우


주론적 체계에서의 그들의 존재론적 양상을 바탕으로 정리하면 다음의 <표 2>
와 같다:

표 2. 뺷보성론뺸, 뺷불성론뺸, 진제 역 뺷섭대승론석뺸을 바탕으로 한 이승인과 보살의 수


증론적 지위와 우주론 체계의 비교

우주론적 체계 이승인 보살
사선근(catuṣ-kuśala-mūla) 위의 십신(十信) 등의 여러 지위에
삼계(유루계)
범부 있는 범부
예류(sotāpanna)부터
삼계와 삼계를 벗어남
상류반(ūrdvasrotas 초지에서 제7지까지의 보살
(유루계와 무루계)
akaniṣṭa-gāmin)까지의 이승
아라한 제8지에서 제10지까지의 보살
삼계를 벗어남(무루계)
여래지

이 표에 나타나 있듯이 불교 우주론 체계는 각각의 수증적 단계에 따라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 중생들의 존재론적 양상의 차별을 근거로 하여 세 가지로 나
누어 볼 수 있다. 유루계는 무상한 몸을 가지고 삼계 내에서 윤회를 받는 범부

(佛性論 T 1610 807b01-b12). ‘십신’의 개념은 52 또는 57단계의 보살도의 구도에서 ‘십주’(十


住), ‘십행’(十行), ‘십회향’(十迴向)과 함께 범부의 지위로 나온다. 이러한 보살도의 구도는 뺷보
살영락본업경뺸(菩薩瓔珞本業經; T1485 1012a23-29; 1017a06-08)과 뺷수능엄경뺸(首楞嚴經,
Śūraṃgama-samādhi Sūtra; T945 141c01-142c28)과 같은 위경으로 추정되는 경에서 등장한
다. 52단계의 구도의 경우에는 이 네 부류의 10단계의 범부의 지위 다음에 보살의 십지(十地, S.
daśa-bhūmi), ‘등각’(等覺, S. samyak-saṃbodhi), ‘묘각’(妙覺, S. *subuddhi)의 단계가 차례
대로 이어져 총 52단계가 된다; 57단계의 경우에는 네 부류의 10단계의 범부의 지위와 보살 십지
사이에 ‘사선근’(四善根, S. catuṣ-kuśala-mūla)이 위치하며 네 부류의 10단계의 범부의 지위 이
전에 ‘건혜지’(乾慧地, S. *śukla-vipaśyanā-bhūmi)라는 단계가 또 하나 위치한다. Kawamura
2004와 Chŏn and Mujinjang 1988 또한 참조. 뺷불성론뺸에는 소승의 ‘학인’의 단계에 있어서의
‘성인’은 명확히 설명되어 있지 않고, 반면에 대승의 ‘학인’의 단계에 있는 ‘성인’은 위에서 논의
했듯이 초지 이상의 보살로 명시되어 있다(위의 각주 60 참조).
120 불교학리뷰 vol.18

들의 영역이며, 반면 무루계는 윤회의 무상한 몸 대신 의생신을 가지고 삼계로


부터 완전히 벗어난 성인들의 영역이다. 이 두 영역 사이에 속하는 중생들은
삼계에 속하기도 하고 벗어나기도 하여 윤회의 무상한 몸과 의생신을 모두 받
는다. 이 중간 단계의 중생들은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침내 삼계를 벗어난
완전한 성인의 단계로 나아가게 될 때까지 삼계에 머물면서 수행단계에 따라
일정한 시간 동안 삼계의 윤회를 초월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결론

이 논문에서 필자는 의생신의 다양한 의미를 초기불교 전통의 팔리 자료와


뺷승만경뺸 및 뺷승만경뺸에 부분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뺷보성론뺸과 뺷불성론뺸 같
은 대승경론들을 바탕으로 살펴보았다. 팔리 자료에 근거한 선행연구들에 따
르면 의생신은 수행자의 선정(jhāna) 중에 생겨나는 미세한 몸이며 불교 우주
론 체계에서는 색계 중생들의 존재론적 양상을 가리킨다. 그리고 팔리 문헌 이
외의 자료에 바탕을 둔 다른 연구에 의하면 의생신은 윤회의 과정에서 죽음과
환생 사이의 중간적 상태에 속하는 존재론적 양상인 중유(antarā-bhava)를 의
미한다. 뺷승만경뺸이나 뺷보성론뺸, 그리고(특히 진제의 관점을 반영하는; 각주
51참조) 뺷불성론뺸과 같은 대승 경론에는 삼종의 불교 성인, 즉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의 몸으로서의 의생신이라는 또 다른 하나의 의미가 제시되고 있다.
의생신이라는 이 특별한 몸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이
개념이 어떤 이론적 함의를 가지고 실제로 경론 내에서 사용되고 있는지 등은
앞으로 진행될 연구 주제이다.
의생신의 개념이 문맥에 따라 각각의 이론적 중요성을 가지고 다양한 의미
를 지니고 있는 것을 고려할 때, 이 의생신 개념은 서로 다른 범주에서 ‘마음에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121

의해 만들어진’ 다양한 단계의 대상에 적용되고 있는 일종의 기능적인 개념임


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비록 명백한 연결성을 가지는 직접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의생신으로 불리는 이러한 여러 유형의 ‘몸’들 간에는 어
떠한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네 유형의 의생신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순
차적으로 나열해 보면, (1) 중간적인 상태에서의 존재론적 양상(antarā-bhava),
(2) 색계 또는 무색계와 이에 대응하는 선정(jhāna) 상태에서의 존재가 가지는
존재론적 양상, (3) 세 종류의 불교 성인의 몸과 같다.
이 가운데, 첫 번째인 중간적 존재, 즉 중유는 가장 기본적이고 영적으로 하
위 단계에 위치하는 의생신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비록 마음이 그 몸을 지시
또는 통제하고 있다 하더라도, 중유란 깨닫기 이전의 모든 중생들이 죽음과 환
생 사이에 처하게 되는 과도기적 상태를 말할 뿐이기 때문이다. 불교 수행이라
는 관점에서 볼 때에도 중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특별한 노력이나 수행도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두 번째 유형의 의생신은 첫 번째 단계보다 영적으로
앞선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 의생신은 수행자들이 현생에
서 높은 영적 단계를 성취한 결과로 색계나 무색계에 환생할 때 얻을 수 있거
나 아니면 현생의 선정(jhāna)을 통해 미세한 몸으로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
다. 하지만 이 유형의 의생신은 여전히 무상한 몸일 뿐이다. 왜냐하면 비록 거
친 물질의 몸은 벗어났지만 이 몸은 여전히 삼계의 윤회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
다. 삼계의 무상한 몸의 한계로부터의 비로소 자유를 얻는 것은 삼종의 불교
성인의 몸을 통해서이다. 수행자들이 삼계의 윤회로부터 벗어나서 의생신을
얻을 수 있을 때 그들은 완전한 의미의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인의 몸으로
서의 의생신은 윤회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 성인의 마음에 의하여 조절되
고 있고 따라서 세 유형의 의생신 가운데 영적으로 가장 높은 단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122 불교학리뷰 vol.18

약호 및 참고문헌

ABBREVIATIONS
AN Aṅguttara Nikāya
DN Dīgha Nikāya
DN-a Dīgha Nikāyaṭṭhakathā (Sumaṅgalavilāsinī)
MN Majjhima Nikāya
MN-a Majjhima Nikāyaṭṭhakathā (Papañcasūdanī)
SN Saṃyutta Nikāya
T Taishō shinshū daizō kyō 大正新脩大藏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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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āya)의 의미 127

Abstract

The Meaning of ‘Mind-made Body’


(S. manomaya-kāya, C. yisheng shen 意生身)
in Buddhist Cosmological and
Soteriological systems

Sumi Lee

Academy of Buddhist Studies, Dongguk University

The ‘mind-made body’ (S. manomaya-kāya, C. yisheng shen 意生身) is


seen as a subtle body attained by a Buddhist adept during meditative
practice. Previous research has elucidated this concept as having important
doctrinal significance in the Buddhist cosmological system. The Pāli
canonical evidence shows that the manomaya-kāya is not merely a spiritual
byproduct of meditative training, but also a specific existential mode of
being in the system of the three realms. Studies of the manomaya-kāya to
date, however, have focused mostly on early Pāli materials, and thus do not
encompass theoretical development and soteriological significance of this
128 불교학리뷰 vol.18

notion in later tradition. As a beginning step to fill this gap, this article
explores the meanings of the manomaya-kāya represented in the Śrīmālādevī
Sūtra and the two treatises of the Ratnagotravibhāga Śāstra and the Foxing
lun, which are doctrinally based on the Śrīmālādevī Sūtra in their discussion
of the manomaya-kāya. Through the observation of the manomaya-kāya in
these Mahāyāna texts, this article seeks to demonstrate how the concept is
used in the broader cosmological and soteriological system of Mahāyāna
tradition. For this purpose, I first review the meanings of the manomaya-
kāya in early Buddhist texts and then observe the cosmological and
soteriological meaning of the notion by analyzing the theoretical connection
between the three Mahāyāna texts.

Keywords: manomaya-kāya, antarā-bhava, Buddhist cosmology, mind,


body, Śrīmālādevī Sūtra, Ratnagotravibhāga Śāstra, Foxing
lun, Paramārtha (499-569)

2015년 10월 20일 투고


2015년 11월 25일 심사완료
2015년 11월 30일 게재확정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조윤경
(서강대)

국문요약

‘相即’은 중국철학의 대표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로, 본래 불교가 중국에 수


용되면서 이제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二諦相即은 뺷반야
경뺸의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이다(色即是空, 空即是色)”에서 유래하지
만, 二諦相即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대략 5세기에 시작되었다. 초기 二諦相
即에 대한 논의 가운데 성실학파의 二諦相即義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
다. 그들은 풍부한 논의를 통해 二諦相即의 특수한 의미를 규명하였다. 구체

* 본 논문은 필자의 박사학위논문 「教門即是理門: 吉藏二諦思想研究」(北京大學博士學位論文, 2014)


의 제4장 제1절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논문임을 밝힌다.

불교학리뷰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18권 (2015. 12) 129p~163p
130 불교학리뷰 vol.18

적으로, 智藏(458-522)은 이제를 一體로 보는 관점에서 이제의 동일성을 강조


하기 위해 ‘即’을 ‘곧 ~이다(即是)’라고 해석한다. 반면, 僧綽은 이제의 異體
를 강조하여 相即을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不相離)’는 뜻으로 보았다. 한편
으로 僧旻(467-527)은 인연 가법(緣假)의 차원에서 ‘이제가 다르지 않다(二諦
不異)’는 뜻으로 ‘即’을 국한하여 쓴다. 이러한 성실론사의 二諦相即義는 후
대 중국철학의 핵심인 相即 사상으로 발전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주제어: 相即, 二諦, 智藏, 僧綽, 僧旻, 성실학파, 體用.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31

들어가며

‘相即’은 중국철학의 독창적인 사유 구조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로서 유불도 삼교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相即’은 여러 다
른 용법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본체와 현상계, 즉 體用의 불가
분의 관계를 나타내는 데 핵심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相即 사상은
중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중국이 인도에서 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와 중국문화가 교류하고 융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相即 사상의 연
원은 불전의 번역, 특히 뺷반야경뺸의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이다(色即是
空, 空即是色)” 등의 경문을 번역하면서 色과 空의 이질적인 개념을 ‘即’으로
연결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원래 뺷반야경뺸의 ‘即’은 일종의 虛詞로서 그것이 생략된다고 하더라도 문
장의 원뜻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렇듯 ‘即’은 문장 속에서 실질적이고 구체
적인 의미값을 지닌 개념어(實詞)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맥락에서 융통성 있게 적용되어 왔고, 또 이렇게 구체적으로 적용되
는 과정에서 더욱 풍부한 의미가 파생되어 ‘即’의 여러 용법이 발생하게 되었
다. 이러한 변용 속에서 형성된 ‘相即’ 개념은 현실세계와 본래적 이상을 유기
적이면서도 유연하게 연결시키기 때문에 중국철학에서 불가결한 요소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相即 사상 가운데서도 體用의 相即은 중국적 사유 모식을 대
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논문에서는 중국불교에서 ‘相即’이 하나의 사상으로 자리매김 한 직후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성실론사들의 ‘二諦相即’ 개념에 대해 고찰하여 중
국불교의 초기 ‘相即’ 사상을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후
기 삼론종 문헌 등에 기록된 智藏(458-522)과 그의 제자인 僧綽, 그리고 僧旻
(467-527)의 二諦相即義를 살펴볼 것이다. 이들의 二諦相即義에 대한 기록
132 불교학리뷰 vol.18

은 대부분 후대 삼론종의 문헌에 의존하기에 이들의 사상을 해석하는 데 있어


삼론사의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
한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삼론 문헌에 기술된 내용을 바탕으로 성실론사들의
二諦相即義를 규명해보는 것은 초기 相即 사상의 변용 과정을 조명하는 데 필
수적인 연결고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실론사들의 二諦相即義는
중국철학에서 體와 用의 관계를 설명하는 원형적인 특질이 남북조 시기 이미
원숙하게 형성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Ⅰ. 불전의 번역과 ‘相即’의 유래

‘相即’이라는 단어의 유래를 찾기 위해서는 불교 경전의 번역사업으로 거슬


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即’자
가 상용화되기 시작하였는데 뺷반야경뺸의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이다(色即是空,
空即是色)”의 구절에서 ‘即’자가 쓰인 것이 대표적이다. 사카모토 유키오(坂
本幸男)는 뺷即の意義及び構造について뺸라는 논문에서 ‘即’의 구체적인 용례
를 고찰하여 경론에서 쓰인 ‘即’은 산스크리트어 ‘yad…tad’이나 ‘eva’를 번역
한 것이라고 밝힌다. 그는 玄奘(602-664)이 번역한 뺷반야심경뺸에서 ‘即’은 산
스크리트어 ‘yad…tad’의 번역이며, 동시에 경문에서 ‘即’의 이유에 대해서는
‘다르지 않음(不異; na pṛthak)’이라고 밝히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그
는 鳩摩羅什(343-413)이 번역한 뺷소품반야경뺸 제1권1)에서 ‘即’은 산스크리
트어 ‘eva’를 번역한 것이며 그 이유 역시 ‘다르지 않음(不異; na anya)’이었음
을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뺷중론뺸에서의 ‘即’은 산스크리트어 ‘yad…tad’의 번

1) 뺷小品般若波羅蜜經뺸卷第一(T.8, 538b27): 幻不異色, 色不異幻. 幻即是色, 色即是幻.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33

역이거나 ‘eva’를 번역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2) 이처럼 불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色과 空이 다르지 않음을 표현하기 위해 ‘即’을 썼던 것이 후대 ‘相
即’ 개념이 형성되는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자적인 ‘相即’ 개념은 불전 번역 이후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다음 장에서는 남북조 시대의 二諦相即義에 대
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南北朝 二諦相即의 사상적 배경

‘相即’ 사상은 5세기 중국불교계에서 형성된 사조이다. 구마라집의 제자인


僧肇(384-414)의 뺷肇論뺸에서 진제와 속제가 둘이 아니라는(眞俗不二) 사상
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이로부터 二諦相即 사상의 맹아를 엿볼 수 있다. 많
은 연구들이 뺷조론뺸에서 ‘即體即用’의 體用論의 기원을 찾고 있고,3) 실제 뺷조
론뺸에서 ‘即偽即真’4)과 같은 ‘即…即…’ 구문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엄밀
히 말하면 뺷조론뺸에서는 ‘相即’이란 표현이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후대에서
논의하는 相即의 유래를 뺷조론뺸에서 직접적으로 도출하는 것은 다소 비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승조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불교계의 사상적 패러다임이 격변하고,
여러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二諦相即’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조 시대 불교계에서 ‘二諦相即’에 대해 규명하는 풍조가 매우 성
행하였고, 여러 학파의 논사들이 모두 二諦相即義에 대해 전문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따라서 ‘二諦相即’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승조 사후부

2) 坂本幸男 1956, 341-342.


3) 湯用彤 2007, 295-297.
4) 뺷肇論뺸(T.45, 152b03)
134 불교학리뷰 vol.18

터 문헌의 기록이 분명하게 남아있는 성실론사들의 二諦相即義가 출현한 시


기 사이인 5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삼론종의 二諦相即義는 당대 성실론사들처럼 자신의 ‘二諦相即’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규명하려 하기보다, 성실론사들의 ‘二諦相即’을 반론하는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5) 결과적으로 삼론종의 문헌에서 성실론사들의 二諦相即義에
대한 직간접적 단서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성실론사들의 二諦相即義를 고찰하기에 앞서, 먼저 남북조 二諦相論론의
특징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여러 논사들은 대승경전 가운데에서 특히 뺷대품반야경뺸의 ‘色即
空, 空即色’을 중심으로 色과 空이 相即, 즉 합일하는 원리를 규명하고자 하였
다.6) 삼론종에서도 경전에서 色과 空의 相即을 말하는 것은 요점만을 간명하
게 논하는 切論이라 하고, 세제와 제일의제, 즉 眞俗의 차원에서 相即을 말하
는 것은 응용하여 풀이하는 奢論이라고 규정하고 있다.7) 이 사실에 비추어 보
더라도 당시 二諦相即 논의의 관건은 色과 空의 相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당
시 논사들은 色과 空이 동일한 체(一體)인지 아니면 다른 체(異體)인지 등의
이론을 통해 色과 空을 회통하고자 하였다. 후대 大中興寺의 釋道安의 제자
인 慧影(?-600)은 그의 뺷大智度論疏뺸에서 相即義에 대해 규명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엿볼 수 있다.

‘色即是空, 空即是色’은 스승께서 “이것은 相即義를 밝히는 것이다”라고 말씀

5) 계환 2001, 60-61.
6) 뺷二諦義뺸下卷(T.45, 105a10-12): 雖有三經文, 諸師多就뺷大品經뺸, 明色即空, 空即色也.
7)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81c14-16): 若言‘真即俗, 俗即真’者, 此是奢論. 若言‘色即是空,
空即是色’, 此即是切論. 雖復奢切, 同辨相即義; 뺷二諦義뺸下卷(T.45, 104c18-21): 뺷涅槃經뺸言奢,
뺷大品뺸、뺷淨名經뺸言切: 뺷涅槃經뺸奢者, 뺷涅槃뺸云, “世諦即第一義諦”, 不云“第一義諦即世諦”, 故뺷涅
槃뺸言奢. 뺷大品뺸、뺷淨名뺸切者, 뺷大品뺸“色即是空, 空即是色”, 뺷淨名뺸亦爾, 所以為切也.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35

하셨다. 지금 이제는 둘이어도 即하지 않고 하나여도 即하지 않으니, 다만 한 법에


서 그 의미가 두 가지이지만 동일한 체를 취하기 때문에 ‘即’이라 명명하였다. 色
이 인연을 따라 자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無’라고 말했으니, 이것은 자성이
없다는 無이고, 연기의 有에 即한다. 이 色이 연기하므로 ‘有’라고 말했으니, 이
연기의 有는 인연을 따라 자성이 없는 無에 即한다. 그러나 ‘二諦相即’이라는 표
현은 경론에서 말한 것을 본 적이 없다. ‘相即’이라는 말은 단지 ‘色即是空, 空即
是色’을 가리키는 언어로, 단지 ‘即是’의 ‘即’일 뿐이니, 두 법이 相即하는 即이므
로 ‘相即’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8)

위에서 혜영의 스승 도안은 ‘色即是空, 空即是色’이 相即義라고 규정하고


있다. 혜영은 ‘相即’에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相即’의 의미는 본래 뺷반야경뺸
에서 말한 ‘色即是空, 空即是色’에서 ‘即是’의 ‘即’을 가리키는 것으로, 有無
는 한 법의 두 뜻일 뿐이므로 체가 동일하다고 한다. 하지만 ‘相即’을 오해하여
두 법이 함께 합하여진다고 잘못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므로 그는 ‘相即’의 표
현에서 ‘相’을 빼고 ‘即是’의 ‘即’만을 인정한다.9)
앞의 논의를 종합하면, ‘相即’에 대해 규명하려는 시도는 본래 뺷반야경뺸의
‘色即是空, 空即是色’을 중심으로 촉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후에 논
의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二諦相即에서 다루는 내용이 뺷반야경뺸에만 국한되지
않고, 뺷유마경뺸이나 뺷열반경뺸 등 다른 대승경전에까지 확대되었다.
둘째, 초기 ‘相即’에 관한 논의에서는 ‘即’과 ‘離’가 대비되어 사용되었다.

8) 뺷大智度論疏뺸卷第17(X.46, 866a07-13): ‘色即是空, 空即是色’者, 師言“此明相即義”. 今謂二諦


若二亦不即, 一亦不即, 但於一法上, 有其二義, 取其一體, 故名為即. 言色從緣無性, 故說為無. 此為
無性之無, 即是緣起之有. 此色緣起, 說故為有. 此緣起之有, 是即從緣無性之無. 而言二諦相即者,
未見經論說. 言相即, 但言‘色即是空, 空即是色’, 但是即是之即, 非是二法相即之即, 故云相即也.
9) 뺷大智度論疏뺸卷第17(X.46, 866a13-16): 但人見此二義, 互談剩說相即, 逐令一切傳之. 今以非一
非二乃談其即, 無有相即之即. 若言相即者, 應有二法共合, 可說為相即. 今唯即是之即, 不得論相.
136 불교학리뷰 vol.18

초기의 ‘即’의 함의는 ‘離’와 상대되는 ‘동일하다’, ‘일치하다’ 정도의 비교적


단순한 뜻이었지만, 후에 ‘이제는 一體인가 異體인가’ 등의 논제를 둘러싼 논
쟁을 통해서 그 의미가 점점 세분화되었다. 예를 들어, 淨影寺 慧遠(523-592)
은 뺷大乘義章뺸에서 四宗, 즉 立性宗, 破性宗, 破相宗, 顯實宗의 교판을 통해
이제를 변석하였는데, 「二諦義」 마지막 부분에서 四宗 이제의 동일함(即)과
분리됨(離)에 대해 서술하였다. 이처럼 혜원이 ‘即’과 ‘離’ 두 개념을 상대해서
각 학파의 이제의 성격을 규정하려 하였던 시도 이면에는 남북조 불교계에서
일반적으로 ‘即’이 ‘離’에 상대하는 개념으로 인식되었던 사상적 배경이 깔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혜원은 四宗 가운데 입성종의 이제에 대
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처음 입성종에서 이제가 서로 바라봄에 동일함(即)과 분리됨(離)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세 구절로 분별해 보겠다. 하나, 세제가 곧 제일의제이니, 말하자면 오
음, 십팔계, 십이처 등이다. 현상의 모습의 차별을 세제라고 하고, 곧 이 법 속에 진
리가 있는 것을 진제라고 한다. 둘, 세제가 진제와 동일하지 않으니(不即), 비택멸
무위와 허공무위를 가리킨다. 셋, 진제가 그 세제를 바라봄에 동일하지도 않고 분
리되지도 않으니, 空과 無我를 가리킨다. 곧 오음에서 空과 無我를 밝혔으므로
‘분리되지 않는다(不離)’고 이름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만 구별하여 집착한
나 또는 타자가 없다는 것일 뿐, 오음법은 空하지 않으므로 ‘동일하지 않다(不即)’
고 이름하였다.10)

입성종은 비담종을 가리키는데, 혜원은 비담종의 이제에 대해 ‘동일함(即)

10) 뺷大乘義章뺸卷第一(T.44, 485a11-18): 第四門中, 明即離者, 就初宗二諦相望, 即離不定, 三句分


別: 一者, 世諦即第一義, 如說陰界十二入等, 事相差別以為世諦, 即此法中, 所有諦理, 說為真諦.
二者, 世諦不即真諦, 謂非數滅、虛空無為. 三者, 真諦望彼世諦, 不即不離, 謂空、無我, 即就陰
上, 明空、無我, 名為不離, 然彼但無橫計我、人, 不空陰法, 故名不即.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37

과 분리됨(離)이 정해지지 않았다(即離不定)’는 입장에서 다각적으로 규명하


고 있다. 즉, 세제에서 진제를 바라보면 현상세계의 차별(세제)는 진리(진제)
와 상즉하지만, 세제는 허공무위나 비택멸무위와는 상즉하지 않는다. 한편, 진
제에서 세제를 바라보면 진제법인 空과 無我는 오음의 현상세계와는 분리되
지 않지만(不離), 오음법은 空하지 않기 때문에 진제가 오음법과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不即). 또한 현실종은 자파인 지론종을 가리킨다. 그는 지론종의 이
제에 관해 依持義와 緣起義의 두 차원에서 밝히고 있다. 이 가운데 依持義에
서 바라본 이제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만일 依持에서 이제가 서로 바라보면, 동일하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는다. 진


실에 의거하여 妄想이 일어나니 妄想에서 곧 진실을 변별하므로 ‘분리되지 않는
다(不離)’고 할 수 있으나, 진실과 妄想의 본성은 다르므로 ‘동일하지 않다(不即)’
고 할 수 있다.11)

이처럼 依持義에서는 진제와 속제가 동일하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다(不


即不離)고 밝히고 있다. 구체적으로 妄想은 진실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분리되지 않는다(不離)’고 할 수 있지만 양자의 본성은 다르기 때문에 ‘동일
하지 않다(不即)’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혜원은 二諦相即을 밝히는 방식
에서 기본적으로 ‘即’과 ‘離’가 서로 대립되는 의미라고 전제하고, 이 대립되
는 개념쌍을 활용하여 四宗에서 진속이제의 관계를 파악하려 하였다. 따라서
당시 불교계의 일반적인 통념상 ‘即’은 ‘離’에 대립하는 의미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11) 뺷大乘義章뺸卷第一(T.44, 485b04-07): 若就依持二諦相望, 不即不離. 依真起妄, 即妄辨真, 得說


不離, 真妄性別, 得云不即.
138 불교학리뷰 vol.18

Ⅲ. 성실학파의 ‘二諦相即’ 사상

梁代 성실론사들은 이와 같은 사상적 배경 속에서 二諦相即義를 개진하였


다. 양대에 손꼽히는 삼대법사는 開善寺 智藏, 莊嚴寺 僧旻, 光宅寺 法雲
(467-529)으로, 지장은 뺷열반경뺸에 뛰어났으며, 승민은 뺷십지경뺸과 뺷승만경뺸
에, 법운은 뺷법화경뺸에 있어서 독보적이었다.12) 이 가운데 법운은 二諦相即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드물었던 것으로 보이고, 삼론사들도 二諦相
即을 천명할 때 법운보다는 二諦相即에 대해 구체적인 입장을 표명했던 지장
과 승민, 그리고 지장의 제자인 龍光寺 僧綽의 二諦相即義를 중점적으로 비
판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 세 사람의 二諦相即義를 중심으로 당
대 성실학파의 ‘二諦相即’ 개념을 고찰하고자 한다.

1. 智藏의 二諦相即義
당시 남조 불교계에서 지장은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는데, 특히 그의 이
제 사상의 영향은 지대했다. 지장은 자신의 뺷二諦義뺸를 저술하였는데, 지장
의 사상이야말로 삼론종이 비판하는 중심 대상이다.13) 사실 吉藏(549-623)의
뺷二諦義뺸나 慧均의 뺷大乘四論玄義記·二諦義뺸의 구조는 그들의 스승인 法朗
(507-581)이 지장의 뺷이제의뺸를 한 조목 한 조목 비판하기 위해 지장의 목차
를 그대로 가져왔던 것에 유래하기 때문에 그 구조 자체는 오히려 지장의 사상
적 구조를 대변하고 있다.14) 그 가운데 한 조목이 ‘二諦相即義’이므로 지장이
자신의 뺷이제의뺸를 쓰면서 ‘二諦相即’의 문제를 한 장으로 할애하여 비교적
중요하게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12) 뺷法華玄論뺸卷第一(T.34, 363c17-20): 爰至梁始三大法師碩學當時名高一代. 大集數論遍釋眾經.


但開善以涅槃騰譽. 莊嚴以十地勝鬘擅名. 光宅法華當時獨步.
13) 당시 지장의 생애와 그의 정치적, 사상적 영향력에 대해서 김성철 2009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14) 김성철 2009, 159-160; 조윤경 2014, 328-329.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39

지장은 이제가 동일한 체(一體)라는 관점에서 二諦相即의 ‘即’의 의미는


‘곧 ~이다(即是)’라고 해석한다. 혜균은 뺷대승사론현의기뺸에서 二諦一體說의
‘相即’의 의미는 ‘곧 ~이다(即是)’의 ‘即’(‘即是之即’)이라고 밝히고 있는
데15), 혜균이 말하는 二諦一體說의 대표인물은 바로 지장이다. 뺷大乘玄論뺸에
서도 ‘即是’로 지장의 ‘二諦相即’의 의미를 정의하고 있어16) 혜균의 정의와도
일치한다.17) 지장의 二諦相即義는 뺷대품반야경뺸의 ‘即是’로 眞俗을 동일한
체(一體)로 해석하는데, 비록 작용에서는 眞俗이 나뉠 수 있을지라도 眞俗의
본체는 모두 中道이기에 결국 하나라는 것이 구체적인 내용이다.18) 지장의 二
諦相即의 구체적 함의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그의 이제와 中道의 체용론을 살
펴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장은 그의 뺷이제의뺸 서문에서 “이제는 법성의 旨歸이고, 하나의 진리(一
真)로서 不二의 지극한 이치이다”19)라고 말한다. 지장은 이제를 기본적으로

15)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81c16-18): 但成論師解相即, 有兩種: 一云, 二諦異體而同處,


故名相即. 二云, 一體故言相即, ‘即’是‘即是’之即也.
16) 뺷大乘玄論뺸에서 ‘即是即’이라는 표현은 두 번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即是’로 지장의 二諦相即
의 함의를 정의하고 있다. 뺷大乘玄論뺸卷第一(T.45, 21c11; 21c29)
17) 뺷대승현론뺸은 길장의 찬술이 아니며 뺷대승현론뺸 이외의 다른 문헌에서 길장이 ‘即是之即’ 혹은
‘即是即’을 글자 그대로 언급한 적은 없지만 길장의 뺷이제의뺸에서 지장의 二諦相即義가 ‘即是’를
표방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길장도 혜균과 같이 지장의 相即을 ‘即是之即’이라고 여기
고 있다고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18) 길장은 이러한 지장의 二諦相即 해석이 뺷열반경뺸에서 “실제로는 둘이 없지만, 중생을 따라서 둘
이 있다고 설법하셨다”고 한 것에 어긋난다고 질책한다. 뺷二諦義뺸中卷(T.45, 101b10-13): 彼脫
云: 此是二諦相即義, 故云‘即是’者, 亦不然. 彼雖相即恒二, 二而恒即, 終是二理. 二理不可無, 故
彼不得言‘實無二, 隨順眾生, 故說有二’也.
19)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73c05-07): 第三開善寺藏法師云: 二諦者, 蓋是法性之旨歸, 一
真不二之極理也. 이 말은 길장의 뺷이제의뺸에서도 보이는데, 길장이 그의 서문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으므로 지장의 뺷이제의뺸의 서문에 나오는 말을 삼론사들이 인용한 것이라고 보인다. 뺷二諦義뺸
下卷(T.45, 108a28-29): 故彼뺷序뺸云, “二諦者, 一真不二之極理”. 김성철은 그의 논문(각주 60
번)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김성철 2009, 170)
140 불교학리뷰 vol.18

이치로 해석하는데, 이제는 ‘하나의 진리(一真)로서 不二’의 이치이다. 그렇지


만 지장을 비롯한 성실론사들은 대개 三假20)를 세제로 보고 四忘을 진제로 보
는데, 이 때 三假와 四忘(假名과 空)은 완전히 성격을 달리한다. 혜균의 해석
에 의하면, 지장의 二諦理 가운데 世諦理는 모습과 이름이 있어 이름에 가탁
하여 말할 수 있는 반면, 真諦理는 모습과 이름이 없어 이름에 가탁할 수도 말
할 수도 없는 것이다.21) 그렇다면 이렇게 상반된 世諦理와 真諦理가 도대체
어떻게 하나라는 말인가?
길장은 지장이 원래 진제를 이제의 체로 여겼는데, 후기에 자신의 사상적 입
장을 바꾸어 中道를 이제의 체라고 주장했다고 전한다.22) 그리고 지장의 사상
이 진제체에서 중도체로 전환하게 된 까닭은 僧朗의 사상에 간접적 영향을 받
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승랑에게 사사받은 周顒이 뺷三宗論뺸을
출간하여 中道가 이제의 체라고 밝히자, 양무제가 智寂 등을 승랑에게 파견하
여 승랑의 사상을 흡수하고 만년에 뺷制旨義뺸를 지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동
속에서 지장도 승랑의 이론을 듣고서 中道가 二諦體라고 하였으나, 자신이 직
접 계승한 것이 아니기에 그 내용이 편벽되어 자신의 원래 입장인 진제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이 길장의 입장이다.23) 이러한 길장의 해석은
다분히 삼론종의 입장에서 지장을 평가한 것이기에 사실관계는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지장이 본래의 이제일체 사상에서 中道를 二諦體로 보
는 관점으로 전환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는 초기에는 假名의 작용이 본체인

20) 三假에 관해서, 길장과 혜균은 뺷성실론뺸에 소승과 대승의 교설이 혼재하고 있다고 여긴다. 혜균
은 뺷성실론뺸에서 三假는 때로는 因成假, 相續假, 相待假를 지칭하는데 이것은 소승설에 해당하
고, 때로는 名假, 受假, 法假를 지칭하는데 이것은 대승설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慧均, 최연식 校
注 2009, 79): 中假者, 且前出뺷成論뺸等中假也. 但彼大小乘說不同: 小乘明三中: 真、俗、合, 三中
也. 三假者, 因成、相續、相待假, 如뺷八不義뺸中說也. 大乘則名受法三假也.
21)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85a12-20)
22) 김성철 2009, 173.
23) 김성철 2009, 171-173.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41

진제에 의거한다고 해석하지만, 후기에 이르러서는 진속이제를 모두 작용으로


보고 中道가 이제의 본체(中道二諦體)라고 해석한다. 우선 길장의 해석에서
그의 초기 사상을 살펴보겠다.

첫째, 진제를 본체로 보는 학설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空이 이치의 근본임


을 밝힌다. 일체법이 모두 空을 근본으로 하며 有는 근본이 아니기 때문에 진제가
(이제의) 본체임을 밝힌다. 둘째, 有는 속제라는 것이다. 속제를 끊는 것은 진제를
깨닫기 위해서이니 진제가 본체이다.24)

길장은 이제를 동일한 체(一體)로 보는 관점은 모두 지장 문하의 가르침이


라고 밝히면서 총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그 중 속제를 이제의 체(二諦體)로
보거나 진속이제가 서로 이제의 체(二諦體)가 된다고 보는 관점은 모두 지류
에 불과하며, 진제를 이제의 체(二諦體)로 보는 것이 지장의 본래 뜻이라고 한
다.25) 따라서 위의 인용문에서 길장이 진제체에 대해 천명한 내용은 지장의 초
기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위에서 진제를 이제의 본체
로 보는 까닭은 진제인 空이 본질적으로 이치의 근본(理本)일 뿐 아니라, 목적
론적 관점에서도 속제인 有의 궁극적 목적은 그것을 끊고 진제를 깨닫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三假의 有는 작용은 있지만 실재하지 않고 결국은 모두 四
忘, 즉 空에 귀결되는 것이다.

24) 뺷二諦義뺸下卷(T.45, 107c19-22): 第一、真諦為體者, 有二義: 一者, 明空為理本. 明一切法


皆以空為本, 有非是本. 為是故以真諦為體也. 二者, 有為俗諦. 折俗本為悟真, 故真為體也.
25) 뺷二諦義뺸下卷(T.45, 107c17-29) 길장은 모두 다섯 가지 유형의 二諦體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이제를 一體로 보는 세 가지 유형은 모두 지장 문하의 가르침이며, 中道를 이제의 본체로
보는 관점은 지장의 후기 사상에 속한다. 또한, 이제를 異體로 보는 관점은 지장의 수제자였던
승작이 지장의 사상에 모순점을 느끼고, 새롭게 주장하게 된 학설이다. 이처럼 길장이 제시한 다
섯 가지 유형의 학설이 모두 지장과 연관된다는 사실에서 당시 지장의 사상적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다.
142 불교학리뷰 vol.18

지장의 본체론적 사유는 경문의 해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장은 뺷유


마경뺸의 “색이 곧 공이지 색이 소멸하여 공한 것이 아니니, 색의 본성은 스스
로 공하다(色則是空, 非色滅空, 色性自空)”는 구절을 “색은 본체에서 공이지,
색이 무너져서 공이 되는 것이 아니다(色即體是空, 非是壞色得空)”고 해석하
면서 色의 본성이 空에 상즉함을 강조한다.26)
그럼, 지장의 후기 사상은 어떻게 변모한 것인가?27) 길장은 지장의 二諦相
即義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음으로 개선사 지장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假名은 스스로 체가 없으니


생기하여도 有가 아니므로, 속제는 곧 진제이다. 진제는 체가 없어서 가현할 수 있
으므로, 진제는 곧 속제이다. 속제는 곧 진제이니, 無를 떠나서는 有가 없고, 진제
는 곧 속제이니, 有를 떠나서는 無가 없다. 그러므로 둘이 아니면서(不二) 둘이니,
中道는 곧 이제이고, 둘이면서 둘이 아니니(不二), 이제는 곧 中道이다.”28)

또한, 혜균은 뺷대승사론현의기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셋째, 개선사 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假名은 스스로 체가 없는 까닭에 생


기하여도 有가 아니니 속제는 곧 진제이다. 체가 없는 까닭에 가현할 수 있으므로,
진제는 곧 속제이다. 진제는 곧 속제이니, 無를 떠나서는 有가 없고, 속제는 곧 진
제이니, 有를 떠나서는 無가 없다. 그러므로 진제와 속제는 둘이 아니다(不二). 둘
이 아니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면서 둘이니 이제의 이치가

26)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82c01-03)


27) 지장의 中道二諦體(中道二諦體)에 대해서는 길장의 뺷이제의뺸와 혜균의 뺷大乘四論玄義記뺸의 기
록이 매우 유사하므로, 이것 역시 지장의 뺷이제의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28) 뺷二諦義뺸下卷(T.45, 105a20-23): 次, 開善解云, “假無自體, 生而非有, 故俗即真. 真無體可假, 故
真即俗. 俗即真, 離無無有, 真即俗, 離有無無. 故不二而二, 中道即二諦, 二而不二, 二諦即中道.”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43

명료하고, 둘이면서 둘이 아닌 것은 하나의 中道이다.”29)

둘째, 동일한 체이므로 ‘相即’이라고 말하는데, ‘即’은 ‘即是’의 即이다. 그러


므로 개선사 지장이 이르기를, “假名은 스스로 체가 없으니 생기하여도 有가 아니
므로, 속제는 곧 진제이다. 체가 없는 까닭에 가현할 수 있으니, 진제는 곧 속제이
다”라고 하였다.30)

앞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지장은 有를 假名으로 보고, 空을 본체로 보


았던 초기 입장을 수정하여, 후기에는 有와 無의 진속이제를 모두 假名의 범
주로 두고 그 假名의 본체는 不二中道로 전환한다. 비록 이제의 본체는 진제
에서 中道로 옮겨왔지만, 두 학설 모두 假名의 작용을 궁극적으로 본체에 귀
속시킨다는 점에서 통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그가 이제를 ‘하나의 진리
(一真)로서 不二의 지극한 이치’라고 한 것도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길장은
지장의 中道體에 대해 “기존에는 그것이 서로 모순된다(相違)고 말했지만 그
것은 결정적으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中道는 여전히 진제이고, 진제는 여전
히 中道이기 때문이다”31)라고 말한다. 지장의 초기 사상과 후기 사상을 간략
하게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29)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80b10-14):三、開善云, “假自無體, 故生而非有, 俗即是真. 無


體故可假, 真則是俗. 真則是俗, 離無無有, 俗則是真, 離有無無. 故真俗不二: 不二而二, 二則不二.
不二而二, 二諦理明, 二則不二, 是一中道也.”
30)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81c17-19): 二云, 一體故言相即, 即是即是之即也. 故開善云,
“假自無體, 生而非有, 俗即真, 無體故可假, 真即是俗”也.
31) 뺷二諦義뺸下卷(T.45, 108a29-b01): 從來言彼相違, 彼定不相違. 中道還是真諦, 真諦還是中道故也.
144 불교학리뷰 vol.18

표 1. 지장의 二諦體
초기 二諦體 용 체
假名 → 空
(有) (無)

후기 二諦體 용 체
二諦 → 中道
二(有, 無) 不二(非有非無)

위의 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장의 이제의 일체설은 실제로는 작용과 본체


라는 측면에서 이중적 구조를 하나로 통합하여 일체를 성립시킨 이제설이다.
이러한 지장의 이제설은 그것의 중층적인 구조만 두고 논한다면 삼론종의 이제
와 中道의 체용론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만, 양자의 심층적 함의는 서로 다르
다. 지장은 작용을 본체에 귀속시키는 崇本息末식 일체론으로 二諦相即을 해
석하지만, 삼론종에서 체용은 서로 대립되기보다 상호평등한 관계성을 지닌다.
지장의 체용론과 마찬가지로 그의 相即체계도 두 가지 층위로 나눌 수 있는
데, 그는 먼저 진제체와 假名의 작용(俗)의 관계를 통해서 有無의 불가분의 相
即性을 담보한 다음에 다시 中道體와 二諦用의 이중구조를 통하여 “둘이 아
니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둘이 아닌(不二而二, 二而不二)”의 相即性을 성립
시킨다.
수행론에서 보자면, 지장은 열반은 이제가 상즉할 뿐만 아니라, 혼연일체가
된 상태(冥真)로 해석한다.

개선사 지장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佛果인 열반은 이제를 구족한다. 열


반은 상속가와 상대가 二假이므로 세제이고, 진제에 상즉할 뿐만 아니라, 다시 진
제와 혼일하게 되기 때문에 이제이다.”32)

32) 뺷涅槃經遊意뺸(T.38, 235c25-27): 開善解云: 果涅槃具足二諦. 涅槃是續待二假, 故是世諦. 非但


則真, 亦復冥真, 故是二諦.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45

개선사 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佛果인 열반은 다시 이제에 통섭된다. 체


가 상속가와 상대가 二假이므로 세제이다. 바로 이 二假가 공할 수 있으므로 진제
이고, 佛果인 영지는 다시 진제와 혼일하다.”33)

위의 뺷涅槃經遊意뺸와 灌頂(561-632)의 뺷大般涅槃經玄義뺸에서 인용한 지


장의 말은 대략적으로 일치한다. 위 인용문과 같이 지장은 열반을 상속가와 상
대가 二假이므로 세제이며34) 가명은 空하여 진제에 상즉하므로 이제에 통섭된
다고 여겼다. 그리고 나아가 열반은 이제가 완전히 혼일하여 구분될 수 없는 상
태로 보았다. 또한 열반과 영묘한 지혜도 구분이 없는데, 그것은 지혜의 체는 오
묘하면서도 항상 고요하여 경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35) 하지만 德에 따라
서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범부는 지혜가 경계와 혼일함(冥)도 부합함(會)
도 없고,36) 인위의 성인은 지혜가 경계와 부합하지만(會) 혼일하지는(冥) 못하
고, 佛果는 지혜가 경계와 혼일하면서(冥) 부합한다(會).37)38) 이와 같이 지장
의 체용일체의 ‘二諦相即’은 궁극적으로 지혜와 이치와의 합일을 추구한다.
지장의 체용의 ‘二諦相即’은 체용이 일체임을 강조하는 사유로서 중국철학

33) 뺷大般涅槃經玄義뺸卷上(T.38, 7b20-22): 開善云: 佛果涅槃還為二諦所攝. 體是續待二假, 故是世


諦. 即此二假可空, 故是真諦, 佛果靈智, 亦復冥真也.
34)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82a01-02): 開善等云: 佛果二諦所攝, 猶是續(讀)、待二假成,
故得云相即. 원문의 ‘續’字는 속장경에서는 ‘讀’字로 표기되어 있지만 필사본들에서는 ‘續’이라
고 기록되어 있으며, 내용상으로도 ‘續’이 맞다. (慧均, 최연식 校注 2009, 201)
35) 뺷涅槃經遊意뺸(T.38, 238b21-23): 第一 、開善明知照真, 即與冥一, 無復境智異. 所以爾者,
智體既妙, 湛然常寂, 與境不殊.
36) 지장은 혼일함(冥)과 부합함(會)의 의미 층차를 구분하지만, 승민과 승작은 양자의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37) 뺷涅槃經遊意뺸(T.38, 238b23-25): 但約德而辨自有三句: 一、凡夫不冥不會, 二、因中聖人會而
不冥, 三者, 佛果亦冥亦會也.
38) 지장이 금강심(등각위) 이후의 마음이 진여 등 법성과 같다(뺷中觀論疏뺸卷第九(T.42, 143a02-03):
金剛後心, 且冥且會, 同真如等法性)고 한 말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146 불교학리뷰 vol.18

에서 현상과 본체의 관계를 규명할 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이다. 또한 불


교사상사에서도 그의 체용의 相即論은 후대의 相即論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한 혜영의 ‘即是’의 ‘即’도 지장의 ‘即’ 의미와 매우 유사하
다. 그는 “다만 한 법에서 그 의미가 두 가지이지만 동일한 체를 취하기 때문에
‘即’이라 이름하였다”39)고 하였는데, 한 법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一法
二義)에서도 동일한 체에 두 작용이 있는(一體二用) 구조를 엿볼 수 있다. 그
런가하면 혜원은 依持義가 아닌 緣起義에서야 비로소 이제의 ‘상즉(相即)’을
거론하는데 “체성에 상즉하여 작용을 일으키는데 작용이 곧 체성이기 때문이
다”40)라고 한다. 물론 지장과 혜원의 사상은 매우 다르지만, “청정한 법계는
여래장의 체성이 연기(如來藏體緣起)하여 생사열반을 만들어내니, 진실한 본
성 그 자체는 진제이고, 연기의 작용을 세제라 판단한다”41)는 同體緣集의 이
제상즉도 체용의 상즉의라는 측면에서는 지장의 일체론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결론적으로, 지장의 ‘即是’의 ‘即’은 假名과 이치가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假名은 허망하므로 그 자체로 존립불가
능하고 본체인 이치에 의거한다는 일체론적 사유를 담고 있다. 이처럼 작용을
본체에 귀속시켜 양자의 합일을 도출하는 방식은 ‘체용’에 관한 대표적인 사유
형식 가운데 하나로서, 지장의 사상은 체용론의 전형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도 사상사적 의의가 있다.

2. 僧綽의 二諦相即義
龍光寺 승작은 본래 지장의 수제자(大學士)였지만,42) 훗날 二諦異體說을

39) 뺷大智度論疏뺸卷第17(X.46, 866a08-06)


40) 뺷大乘義章뺸卷第一(T.44, 485b07-08): 若就緣起二諦相望, 得言相即, 即體起用, 用即體故.
41) 뺷大乘義章뺸卷第一(T.44, 483c19-21): 若就緣起以明二者, 清淨法界, 如來藏體緣起, 造作生死涅
槃, 真性自體, 說為真諦, 緣起之用, 判為世諦.
42) 뺷二諦義뺸下卷(T.45, 105a28)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47

제창하면서 지장의 이제일체설의 모순을 전면적으로 비판하였다.43) 그는 이


제는 본체가 다르다는 관점에 기초하여 경전에 나오는 ‘空即色, 色即空’을 ‘空
과 色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空色不相離)’라고 해석하고,44) ‘即’을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不相離)’는 뜻으로 풀이한다.
승작은 자신의 서로 떨어지지 않는(不相離) ‘即’을 해석하기 위해 뺷유마경·
불국품뺸에서 “나의 이 국토는 항상 청정하다”라고 한 구절에 의거하여 논의를
펼친다. 淨土는 穢土가 있는 곳에 있으므로 淨土와 穢土는 결코 떨어질 수 없
지만, “정토는 정업에 감응하고 예토는 예업에 감응하므로(淨土淨業感, 穢土
穢業感)”, 실제로는 淨土와 穢土가 서로 섞여서 하나의 국토를 이룰 수는 없
는 것과 같이 空과 色도 분리될 수는 없지만 본체가 확연히 구별된다는 것이
다.45) 그의 相即 사상은 아래의 그림과 같이 표현해 볼 수 있다.

그림 1. 승작의 二諦相即義: 서로 떨어지지 않음(不相離)

43) 길장은 승작이 지장을 반박한 일화를 바이세시카(衛世)가 샹키야(僧佉)를 반박한 것에 비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뺷二諦義뺸下卷(T.45, 106c02-05): 次, 龍光如衛世. 衛世本是僧佉學士, 晚椎僧佉
一義, 明大有常, 瓶等無常. 大有遍, 瓶等不遍. 大有總, 瓶等別. 大有了因, 瓶等生因. 大有不可壞,
瓶等可壞.
44) 뺷二諦義뺸下卷(T.45, 105a28)
45) 뺷二諦義뺸下卷(T.45, 105a29-b04): 如뺷淨名經뺸云“我此土常淨”, 此明淨土, 即在穢土處. 故言‘此
土淨’, 非是淨穢混成一土. 何者? 淨土是淨報, 穢土是穢報. 淨土淨業感, 穢土穢業感. 既有淨報穢
報、淨業穢業, 故不得一, 但不相離為即也.
148 불교학리뷰 vol.18

이제의 본체는 구별되지만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不相離)’는 승작의 이제


이체설이야말로 앞에서 혜영이 ‘相即’을 ‘두 법이 함께 합하여지는 것(二法共
合)’으로 오해했다고 비난한 相即論에 부합하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승작의 사유는 서로 이질적인 속성의 三假와 四忘(假名과 空)이 相即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지만 승작의 상
즉론은 실질적으로는 色과 空, 두 법의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상관성을 해체하
는 방식으로 相即을 해명한 것이기에 相即論의 본질에서 멀어졌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고, 당시의 여타 相即論과 비교해서도 극단적인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승작의 이러한 사유방식은 보편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하였지만, 그가 한 때
스승이었던 지장의 일체설이 내재하고 있던 모순에 대해 철저하게 고민한 끝
에 제시한 대안임은 틀림없다. 승작이 지장을 비판했던 사건은 당시 불교계에
서 상당히 유명했으며, 그 구체적 내용 역시 잘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길장이
뺷이제의뺸에서 지장을 힐난하는 내용도 상당 부분이 이전에 승작이 지장의 二
諦一體를 비판했던 논리를 차용한 것이다. 한편 길장은 두 가지 관점에서 지장
의 空과 色이 상즉한다는 점을 반박하는데 이 두 가지 힐난 가운데 지장에 대
한 승작의 비판이 내재하고 있다. 우선, 길장의 두 가지 힐난을 제시하면 다음
과 같다.

첫째 힐난: ‘色即空’이라고 할 때, 色이 일어날 때 空이 色과 함께 일어나므로


‘色即空’이라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色이 아직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이 空이 존재
하므로 ‘色即空’이라고 하는 것인가? 만약 色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 色에 상
즉하는 空이 이미 존재하면, 이것은 空은 본래부터 존재하고 色은 비로소 생기하
게 된 것으로 本有와 始有가 다른데 어떻게 상즉할 수가 있겠는가! 本有인 空은
常이고 始有인 色은 無常이니, 常과 無常이 다르므로 상즉할 수 없다. 만약 ‘空과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49

色이 함께 일어난다’고 말하면, 空과 色이 모두 始有가 되어 모두 본래는 없었다


가 지금 존재하게 된 것이고 모두 無常일 것이다.46)

둘째 힐난: 너희의 ‘色即空’일 때 空과 色은 分際가 있는가 아니면 分際가 없


는가? 만약 分際가 없으면, 한데 섞여서 하나를 이룬다. 만약 空과 色이 하나라면
모두 常이거나 모두 無常이어야 한다. 眞俗이 동일하지만 속제는 無常이고 진제
는 常을 말하는 것이라면 같은 방식으로 眞俗이 동일하지만 진제는 無常이고 속
제는 常이라고 힐난할 수 있다. 만약 分際가 있으면 空과 色이 달라서, 상즉하더
라도 결국 분제가 있고 결국 다른 것이다.47)

지장의 ‘色即空’의 관점에 대해, 첫째 힐난은 本有와 始有 개념을 도입하여


空과 色이 발생하는 시간적 순서를 문제 삼았고, 둘째 힐난은 시간적, 논리적
순서의 차이를 떠나 일체와 이체의 문제를 궁구하여, 空과 色 사이에 모종의
分際가 있으므로 결국 지장의 相即義는 모순된다고 지적한다.48) 길장은 오로
지 지장의 견해를 타파하기 위해 힐난한 것이었지 지장의 반대 견해를 내세우
려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길장과는 달리, 승작은 이제가 異體라는 입장에
서 無常인 色과 常인 空 사이에 시간적 간극이 존재하거나 둘 사이에 分際가
구분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지장에 대해 위와 같은 힐난을 펼쳤
을 것이다.

46) 뺷二諦義뺸下卷(T.45, 105c01-07): 第一難云: 色即空時, 為色起之時, 空與色同起, 故云‘色即空’,


為當色未起前已有此空, 故云‘色即空’耶? 若使色未起時, 已有即色之空者, 此則空本有, 色即始
生, 本始為異, 云何相即! 本有空即常, 始有色則無常, 常無常異, 故不得即也. 若言‘空與色俱起’者,
則空與色俱是始有, 皆是本無今始有, 皆無常也.
47) 뺷二諦義뺸下卷(T.45, 105c07-12): 第二難云: 汝色即空時, 為空色分際, 為不分際? 若不分際, 則混
成一. 若空色一, 皆常皆無常. 真俗一言俗無常真常者, 即例難真俗一真無常俗常也. 若分際, 則空
色異, 雖即終分際終異.
48) 空과 色 사이의 分際 문제에 관해서는 류효현 2007, 135에서 상세히 논하고 있다.
150 불교학리뷰 vol.18

승작은 이제가 두 가지 체일 수밖에 없는 근거로 뺷성실론뺸의 “부처께서 세


제가 제일의제라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제일의제가 세제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다”라는 구절을 든다. 또한 그는 같은 맥락에서 지장의 三種中道를 재
해석한다. 그는 지장이 “두 가지 이치에서 밝히면 두 가지 中道(二中)이고, 종
합하여 논하면 하나의 中道(一中)”라고 말한 것에 착안하여, 이제는 각각의
체가 있고 하나의 中道(一中)는 양자를 합한 것일 뿐이라는 새로운 三種中道
해석을 내놓는다.49)
승작의 二諦異體說은 지혜와 경계(靈智와 真諦)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창안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지장의 일체상즉은 지혜와 경계의 관계가 모호하
여 궁극적으로 영묘한 지혜(靈智)의 작용을 해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 무엇보
다 그는 열반을 지혜와 경계가 완전히 혼연일체가 된 것이라는 사유 자체를 받
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불지는 靈智의 지혜이고 진제는 지혜가 없는 경계로
서 양자는 체가 다르다”50)고 보고 열반의 상속가와 상대가 二假은 진제와 相
即, 즉 분리되지는 않지만(‘即真’) 이 二假가 ‘진제와 혼일(冥真)’하지는 않다
고 밝혔다. 그는 “진제와 혼일하면(冥真)은 완고한 경계(頑境)와 같아서 영묘
한 지혜(靈智)가 없으므로 진제라고 할 수 없다”고 지장을 비판한다.51) 즉 지
혜와 경계 가운데 어느 한 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 쪽도 존립할 수 없다고 보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승작은 八地 이상의 보살만이 並觀의 공용을 갖추
는데, 지혜가 眞俗 두 경계(二境)을 동시에 관조하는 것이 並觀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並觀이 성립시키기 위해서라도 中道 속에서 이제(二境)의 구분

49)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80b07-10): 二、龍光云: 二諦二體, 故뺷論 ‧ 十號品뺸云, “佛不


說世諦為第一義諦, 不說第一義諦為世諦”. 뺷論뺸既云‘二諦理’, 寧非二體也! 故法師云, “約兩理明
二中, 合而論之, 一中也”.
50) 뺷涅槃經遊意뺸(T.38, 238b25-27): 第二解不同此說, 明佛知是靈智之智, 真諦是無智之境, 兩
體既殊, 豈可研此有智之法, 同無知之境!
51) 뺷大般涅槃經玄義뺸卷上(T.38, 7b24-26): 龍光云: 佛果涅槃具相續相待二假, 即世諦乃即真之義,
而不冥真. 若冥真同頑境, 即無靈智, 故非真諦也.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51

은 여전히 존재해야만 한다고 여겼다.52)


요약하면, 승작의 二諦相即義는 지장의 일체론적 相即 사상에 대한 고민
끝에, 속제와 진제가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相即의 뜻만 수용하고 이제의 구
별이 완전히 소실되어(‘冥真’) 동일한 체(一體)를 이룬다는 지장의 관점은 부
정한다. 한편, 승민의 二諦相即의 뜻은 지장이나 승작과는 맥락이 다른데, 뒤
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겠다.

3. 僧旻의 二諦相即義
승민 역시 양나라 명승으로서, 여러 교학적 해석에서 지장과 입장이 상당히
충돌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삼론종 문헌에도 두 사람의 논쟁이 간략하게 등장
한다. 승민은 이제를 “미혹됨을 막는 수승한 경계이고, 이치에 들어가는 중요
한 나루(却惑之勝境, 入道之要津)”53)라고 정의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이제를
두 가지 인식의 경계로 파악한다.54)
승민의 二諦相即義에 관해서 그 의미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를 파악하기
는 쉽지 않은데, 무엇보다도 길장과 혜균이 승민의 입장을 분류하는 데에 차이
가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길장은 큰 그림에서는 지장과 승민이 모두 二
諦一體의 相即을 주장하지만 승작은 二諦異體의 相即을 주장한다고 나눈다.
반면, 혜균에 의하면 지장과 승작은 一體와 異體의 구별이 있을지언정 모두
이제의 相即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공통되는데 승민은 ‘상즉하지 않음(不相
即)’도 거론하고 있다. 길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선사 지장과 장엄사 승민은 一體를 밝히고, 용광사 승작은 異體를 밝혔다. 여

52) 뺷二諦義뺸下卷(T.45, 110b01-05): 設使得明並觀者, 師詺為簫管並、伏鼈出鼻並, 有兩境在中, 而


雙照為並觀, 是事不然. 뺷經뺸明照有即是空, 照空即是有, 何時有兩境凝然在中, 雙照為並觀耶!
53)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73c05)
54)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76a06-07): 二、莊嚴云: 如四諦, 知是諦.
152 불교학리뷰 vol.18

러 해석이 다양하지만, 일체와 이체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이곳에서 말하는 세


사람이 일체의 사람을 통섭하는 것이다.55)

또한 혜균은 승민의 相即義를 다음과 같은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또한 만약 인연에 의해 생성된 것이면 상즉하지만 인연으로 생성될 필요가 없


으면 상즉하지 않는다. 만약 허망한 원인을 따라서 생성되면 相即이 있지만, 진실
한 원인에 의해 판별된 것이면 상즉하지 않는다.56)

위의 두 인용문의 내용은 얼핏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길장과 혜균의


해석을 종합하여 이해하면 승민의 전반적인 이제 이론체계와 二諦相即義를
조금이나마 재구성해 볼 수 있다. 길장은 승민이 언급한 ‘二諦相即’의 실질적
의미를 ‘이제가 다르지 않다는 것(二諦不異)’이라 규정하는데, 그 구체적인 내
용은 다음과 같다.

장엄사 승민이 말하기를, “인연 가법(緣假)은 空과 다를 수 없으므로 속제가 곧


진제이다. 四忘은 有와 다를 수 없으므로 진제가 곧 속제이다. 비록 속제가 곧 진
제라 하더라도 결국 名相은 名相이 없는 것(無名相)이라 할 수 없다. 비록 진제가
곧 속제라 하더라도 결국 명상이 없음(無名相)은 名相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가 다르지 않다는 것(不異)이 相即이다.57)

55) 뺷二諦義뺸下卷(T.45, 105b05-07): 開善與莊嚴明一體, 龍光明異體. 釋雖眾多, 不出一異, 故此三


人攝一切人也.
56)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81c21-23): 又若為因緣生者, 即是相即, 若不須因生, 即不
相即. 若順虗妄因生, 則有相即, 若為真實因所辨, 則不相即.
57) 뺷二諦義뺸下卷(T.45, 105a16-20): 莊嚴云: 緣假無可以異空, 故俗即真, 四忘無可以異有, 故真即
俗. 雖俗即真, 終不可以名相為無名相. 雖真即俗, 終不可以無名相為名相. 故二諦不異為相即也.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53

그는 三假와 四忘이 다르지는 않지만(不異), 三假는 名相이 있고 四忘은


名相이 없다는 점에서 양자의 속성은 분명히 구별된다고 본다. 따라서 이름과
형상의 측면에서 말하면, 名相이 있고 없음으로 眞俗이 나뉘기에, 사실 이제
가 서로 완전히 동일한 것도 아니다. 이 점에서 그의 ‘이제가 다르지 않다(二諦
不異)’는 相即義는 지장이 본체에 작용을 완전히 귀속시키는 二諦相即과 구
별된다. 이렇게 이제의 相即을 다르지는 않지만 같지도 않은 것으로 규정하는
승민의 사유는 二諦相即의 체계 속에서만 파악하려고 하면 잘 드러나지 않고,
그의 전체 이제 교학을 고찰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승민은 이제를 이치에 들어가기 위한 인식적 수단으로 보았는데, 이제는
“미혹이 소멸하여 깨달음이 발생하도록(滅惑生解)”58) 하여 궁극적 이치에 들
어가도록 촉진하는 작용을 할 뿐, 그 자체는 이치와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이
제가 서로 상즉한다, 즉 다르지 않다는 것은 궁극적 깨달음과는 별도로 인연
가법(緣假)의 차원에서만 논한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二諦相即의 문제는 中
道나 열반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 열반과 이제의 관계에 대해서 승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엄사 승민은 “열반은 妙有無為로서 이제를 초월하니 이 妙有는 無에 상즉하


지 않는다. 虗空無為는 業因으로 얻을 수 있는 과보가 아니고, 상주하며 편재하므
로 有에 상즉하지 않는다.”59)

장엄사 승민은 “佛果인 열반은 이제를 초월하니, 진속이제가 통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범부가 미혹된 원인으로 감응하는 과보는 거짓된(浮虛) 세제이며 假
名의 본체는 空하기 때문에 진제이다. 佛果는 미혹된 원인이 감응하는 것이 아니

58) 뺷大品經遊意뺸(T.33, 64b28-29): 莊嚴云: 滅惑生解, 如因滅果生, 故佛地不即惑.


59)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81c23-582a01): 如莊嚴家云, “涅槃妙有出二諦外, 此妙有不即
於無. 虗空不為業因所得, 常爾具遍, 故不即於有”也.
154 불교학리뷰 vol.18

라서 세제가 아니며 空으로 되돌릴 수 없으므로 진제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뺷인


왕경뺸에서 “세제와 제일의제를 초월하여, 제11지 살바야지에 머문다”라고 한 것
을 인용하였다.60)

승민에게 있어서, 미혹된 중생의 경계와 부처의 경지(佛地)가 완전히 분리


되는 것처럼 열반은 이제의 한계를 벗어난 절대적인 경계이다. 이것은 이제가
열반을 통섭한다는 지장의 견해와 상반된다. 또한 지장은 “열반은 환상과 같
고 꿈과 같다”는 뺷대품반야경뺸의 문구에 근거하여 열반이 假名이라고 승민을
힐난하는데, 승민은 이에 대해 뺷대품반야경뺸은 제2시의 가르침일 뿐, 뺷열반경뺸
에서는 “空하지 않은 것이 대열반”이라고 하였으며, 열반은 ‘妙有’이고 ‘善有’
이기에 空하지 않다고 응수한다.61)
승민은 中道의 이치는 진제도 아니고 속제도 아니어서(非真非俗), 이제 밖
에 별도로 있는 경계라고 한다.62) 승민의 이론 체계에서 이제는 有爲法의 범
위 내의 假名과 空만을 가리키므로, 이제는 열반을 통섭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사법에 속하는 三無爲조차 통섭할 수 없다.63) 예를 들어 허공은 三假가 아
니고 四忘도 아니므로, 진제도 속제도 아니어서 이제를 완전히 벗어난 것이
다.64) 이렇게 본다면, 승민이 이제가 다르지 않다는 相即 개념을 그의 교학체

60) 뺷大般涅槃經玄義뺸卷上(T.38, 7b15-20): 莊嚴云, “佛果涅槃出二諦外, 非真俗攝. 凡夫以惑因感


果是浮虛世諦, 假體即空故是真諦. 佛果非惑因所感, 故非世諦, 不可復空, 故非真諦.” 引뺷仁王經뺸
云, “超度世諦第一義諦, 住第十一薩雲若地”也.
61) 뺷二諦義뺸下卷(T.45, 113c02-07)
62) 뺷校勘大乘四論玄義記뺸(慧均, 최연식 校注 2009, 86-87): 若如莊嚴家義, 涅槃出二諦, 故非真非俗
為中道者, 復是別有中道之理, 何開二諦中也!
63) 뺷二諦義뺸下卷(T.45, 113b01-05): 攝生死中法, 亦復不盡. 何者? 生死中, 有有法、有空法. 虛空不
為二諦所攝: 虛空不為異具所成, 故非因成假. 無前滅後生, 非相續假, 亦非相待假.
64) 뺷二諦義뺸下卷(T.45, 113b06-11): 莊嚴明虛空故非因成、相續, 亦非相待假. 何者? 虛空是常, 無
有名相, 名相是無常. 以虛空常, 故無名相. 無名相故, 非相待假. 故虛空非三假. 非三假, 非世諦, 非
三假故, 不可即空, 故非真諦.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55

계 안에 수용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허망한 인연의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것


일 뿐이다. 따라서 승민의 二諦相即은 그의 궁극적인 열반과 밀접한 연관성을
상실한 相即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Ⅳ.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삼론종의 비판

성실론사들은 二諦相即의 문제에 관해 자신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논쟁하는 과정을 통해, ‘相即’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는 데에 공헌하였으나, 삼
론사들의 격렬한 비판을 받아 훗날 그들의 相即義는 부정되고 결국 다른 형태
의 相即義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삼론종은 사견을 타파하고(破邪) 정견을 펼치는(申正) 두 측면에서 二諦相
即義를 전개하면서, 먼저 성실론사의 二諦一體와 二諦異體를 타파해야 할 삿
된 대상으로 삼는다. 이는 삼론종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길장은 뺷이
제의뺸에서 법랑이 “이와 같이 이제 一體나 異體의 견해 등을 깨끗이 씻어내어
마침내 더 버릴 것이 없는 것이 二諦相即의 뜻”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
고 법랑의 스승인 山中寺 僧詮(?-558)이 “지금 만약 다시 견해가 있으면 足載
일 뿐”이라고 한 것도 같은 뜻으로 해석한다.65) 삼론사들이 성실학파의 相即
견해를 비판하는 주요 논점은 결국 中道體의 문제로 귀결된다.
삼론사들이 가장 중점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지장이다. 그것은 당시
지장이 상당히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中道
를 이제의 본체로 설정하는 점 등에서 삼론종의 이론구조와 유사한 일면이 있
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65) 뺷二諦義뺸下卷(T.45, 106b11-14): 問: 他解既非, 今若為釋耶? 師云, “只洗淨如此二諦一體異體,


畢竟無遺, 即是二諦相即義”. 所以山中師云, “今時若更有解, 乃是足載耳”云云.
156 불교학리뷰 vol.18

길장은 지장의 中道 제일의제를 비판하기 위해 주로 지장의 중도를 이제에


환원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하여 지장이 中道가 二諦體라고 주장하지만,
지장이 말하는 中道는 결국 진제와 다를 것이 없다고 폄하한다. 또한 지장이
‘진제도 아니고 속제도 아닌 것(非真非俗)’이 중도라고 밝힌 것에 대해서는 길
장은 그의 ‘진제가 아님(非真)’은 속제(有)로 환원되고 ‘속제가 아님(非俗)’도
진제(無)로 환원되어 결국 유무와 구별되는 중도가 없다고 한다.66)
한편으로 혜균은 지장의 一體二用의 이론구조 자체가 모순되었기에 二諦
相即에 부합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67) 지장의 체용의 相即義는 有無와 真俗
의 두 작용을 동일한 본체로 귀속시켜서 상즉한다고 하지만, 이제가 작용에서
는 여전히 격절되어 있다면 체용은 여전히 구별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
로 혜균은 이제가 一體二用이나 二用一體이면 상즉한다고 할 수 없고, 이름
과 작용(名用)에서 이름이 하나인데 쓰임이 다르거나 혹은 쓰임이 하나인데
이름이 다를 때에만 진정으로 상즉할 수 있다고 한다.68)
이들의 지장의 중도를 비판하는 방법에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결국 지장 사
상에 내재하는 이론적 모순을 부각시키기 위해 논변을 전개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이것은 깨달음에서 지혜와 이치의 관계 문제로 귀결된다. 길
장은 이제가 일체라면 병관이 성립할 수 없다는 승작의 힐난을 차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개선사 지장이 至忘彌存義69)을 말하는데 ‘충만하게 있다

66) 뺷二諦義뺸下卷(T.45, 109a08-12): 彼云“我亦明非真非俗中道”者, 不然. 且問: 汝‘非真非俗’是何


物耶? 非真還是俗, 非俗還是真, 非有還是無, 非無還是有, 還是有無二見, 故無中道第一義諦也!
67)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83a09-14): 五、二諦中道為體, 有無為義. 今謂不然: 為當合此
中道之體, 而有有無兩用? 為當離此中道, 而有有無兩用? 若合此中道, 唯應有一用, 不應二用. 若
離此中道為兩用者, 中道既被離, 即非復中道, 故二諦自有二體, 何得同以一中道為體!
68)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82b01-05): 若一而有異, 二諦一體二用, 則不論即(則). 若有異
而一, 如二用一體, 亦不論即. 何者? 體一一無即義, 二用理異, 亦無有即義也. 今謂名一而用異故
即, 用一而名異故即. 此是名用、用名, 一異相即也.
69) 이 학설에 대한 기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至忘彌存義’라고 기록하고 있는 문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57

는(彌存)’ 뜻은 有이고 ‘지극한 잊음(至忘)’은 無이니, 이 또한 有無가 함께 합


쳐지는 것”70)이어서 자신이 주장한 ‘即是’의 相即義에 위배된다고 비판하기
도 한다.
이러한 비판들은 결국 단순한 체용의 기제만으로는 中道와 이제가 동일하
다는 것을 충분히 해명하기에 부족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지혜가 中道의 이치
를 깨달을 때, 세제가 진제와 혼일하게 되어(冥真) 지극히 잊게 된다면(至忘)
성인의 깨달음은 범부의 미혹된 마음과 격절되어 현실 세계와 무관하게 되고,
이 때 中道는 결국에 진제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한편 이제의 체는 다르지만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승작의 二諦相即義에
대해서 삼론종은 비판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다. 예를 들어, 길
장은 “용광사 승작은 이체를 밝혔는데, 이 뜻은 스스로 경전에 반대되니, 다시
힐난할 필요도 없다”71)고 하였다. 특히, 혜균은 이제에 두 가지 체가 있다는
것은 뺷열반경뺸의 경문에 위배된다고 밝혔다.72) 삼론사들은 승작의 이제는 ‘서
로 떨어지지 않는다(不相離)’는 상즉 이해는 대승경전에 위배되어 그릇된 견
해임이 자명하다고 여겨, 그것을 힐난하는데 그다지 큰 공을 들이지 않는다.
또한, 승작의 並觀에 관해 법랑은 中道 속에서 이제가 확연히 구분된다는 관
점을 ‘피리관 병관(簫管並)’, ‘엎드린 자라가 코를 내놓는 병관(伏鼈出鼻並)’
이라고 풍자하였다.73) 이것은 이제의 두 경계가 완전히 떨어질 수는 없지만 그

헌들이고, 다른 하나는 ‘至亡彌存義’라고 기록하고 있는 문헌들이다. 예를 들어, 길장의 뺷淨名玄


論뺸이나 혜균의 뺷大乘四論玄義記뺸 등에서는 ‘至忘’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길장의 뺷中觀論疏뺸 등
에서는 ‘至亡’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至忘’이 지장의 원의에 부합한다고 보고, 전자
의 기록을 따랐다. 하지만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 보다 상세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70) 뺷中觀論疏뺸卷第九(T.42, 157c08-09): 又開善云“至亡彌存義”: 彌存義為有, 至亡為無, 亦是有無
共合也.
71) 뺷二諦義뺸下卷(T.45, 105b07): 龍光明異體, 此義自反뺷經뺸, 不須更難!
72)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80c04-06)
73) 뺷二諦義뺸下卷(T.45, 110b01-05): 設使得明並觀者, 師詺為簫管並、伏鼈出鼻並, 有兩境在中, 而
雙照為並觀, 是事不然. 뺷經뺸明照有即是空, 照空即是有, 何時有兩境凝然在中, 雙照為並觀耶!
158 불교학리뷰 vol.18

렇다고 서로 소통할 수도 없는 상태를 피리관(簫管)과 자라코(鼈鼻)의 형상에


비유한 것이다.
또한, 길장은 승민이 이제가 다르지 않다(相即)고 하면서도 “진제는 결국
名相이 없으며 속제는 결국 名相이 있다”74)고 하였던 것에 대해서, 그의 名相
과 無名相은 구분된다는 명제가 자가당착임을 지적한다. 뺷이제의뺸에 따르면
승민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체는 항상 즉하지만, 이름과 뜻은 다르
다(體常即, 但名義異)”75)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길장은 이것도 여전히 모순
된다고 비판한다.76)
길장은 승민이 中道를 밝힌 적이 없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승민이 말한 中
道가 이제와의 연관성이 없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中道가 아니라고 한 것
이다.77) 승민은 이제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그에게 생사와 열반은 완전
히 격절된 세계이며, 이제는 거짓(虛假)이고 열반은 실유하는 것이다.78) 그렇
다면 승민의 교학 체계에서 二諦相即의 의미는 무상하고 변화하는 세간의 허
망함에서 어떤 통일된 법칙성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고, 그가 이제는 “이치에
들어가는 중요한 나루(入道之要津)”79)라고 한 것을 비유하여 말하면, 배는 그
나루를 떠나야 비로소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앞서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삼론종의 비판을 지장, 승작, 승민의 순
서로 나열해보았다. 삼론종의 성실론사들의 二諦相即에 대한 비판은 통일된
체계를 갖추고 성립된 것은 아니라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 하나하나 비판하여

74) 뺷二諦義뺸下卷(T.45, 105b14-15): 真諦終無名相, 俗諦終有名相.


75) 뺷二諦義뺸下卷(T.45, 105b16)
76) 뺷二諦義뺸下卷(T.45, 105b16-19): 又責: 汝俗體即真, 俗名即真不? 若名義即真者, 真諦既常, 名義
即常, 名義無常, 真亦即無常! 若名義不即真, 名義出真外, 出法性外, 故不可也!
77) 뺷二諦義뺸下卷(T.45, 105a23-25): 問: 開善明中道, 莊嚴不明中道, 何意爾耶? 解云: 莊嚴不以中道
為二諦體, 故不明中道.
78) 뺷中觀論疏뺸卷第八(T.42, 127a14-15): 如莊嚴義, 生死是虛假故不實, 涅槃非虛假故實.
79) 뺷大乘四論玄義記뺸卷第五(X.46, 573c05)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59

논파하는 것이 중점이었다. 앞의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론종이 성실론사


들의 相即을 비판하였던 주안점은 단순히 이제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결국
이들의 中道觀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되고 있다.

나오며

이상으로 남북조 성실론사인 지장, 승작, 승민의 二諦相即義를 고찰하고,


또 삼론종의 성실론사에 대한 비판까지 살펴보았다. 지장은 이제를 一體로 보
는 관점에서 이제의 동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即’을 ‘곧 ~이다(即是)’라고 해
석한 반면, 승작은 이제의 異體를 강조하여 相即을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不
相離)’는 뜻으로 보았다. 한편으로 승민은 인연 가법(緣假)의 차원에서 ‘이제
가 다르지 않다(二諦不異)’는 뜻으로 ‘即’을 국한하여 쓴다. 성실론사의 二諦
相即義는 이전의 비교적 단순했던 ‘相即’의 함의를 자신의 사상에 입각하여
정교하게 개진하였고, 그들의 각기 다른 相即 해석은 ‘即’의 풍부한 용법을 파
생시켜, 후대 중국철학의 핵심인 相即 사상으로 발전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성실학파의 사상적 명맥은 실질적으로 끊겼지만 그들의 二諦
相即의 사유는 오늘날에도 아직 유효하므로 그것을 재조명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성실론사의 二諦相即 사상은 삼론사들에 의해 오로지 타파해야할 대상
으로 설정되어 비판받아 왔다. 하지만 이들의 二諦相即義는 體用의 측면에서,
현상세계의 다양한 작용은 결국 하나의 體에 의해 통섭되는 것인지 아니면 겉
으로 드러난 작용이 다르다면 결국 그 體도 구분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관해 본
원적이고 핵심적인 사유를 담고 있다. 실제로 지장의 一體의 相即이나 승작의
異體의 相即 등은 후대 중국철학 體用論에서 볼 수 있는 구조적 원형을 이미
상당히 원숙한 형태로 내포하고 있다. 이렇듯 남북조 성실학파의 二諦相即義
160 불교학리뷰 vol.18

는 불교의 개념어를 중국적으로 재해석하고 변용하여 ‘相即’이 중국의 독창적


인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는 데 초석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남북조 성실론사들의 사상은 삼론사들의 비판에 의해 지나치게 폄
하되어 그 가치가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 하지만 삼론 문헌에 비판의 형식으
로 이들 사상의 편린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삼론종이 이
들의 사상을 간접적으로 전해주었으며, 비록 제한적일지라도 오늘날 그 사상
적 면모를 이해해볼 수 있다. 본 논문은 성실론사의 二諦相即義에 대한 시론
적인 고찰을 시도하는데 그쳤지만, 앞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성실학파에 관한
보다 진전된 연구들이 나온다면 이들 사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61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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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불교학리뷰 vol.18

Abstract

A Study of the Xiangji Philosophy


of the Two Truths
according to the Chengshi School

Cho, Yoon Kyung

(Sogang University)

“Xiangji” is one of the essential concepts in Chinese philosophy. It was


first formed to describ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truths after
Buddhism was introduced to China. Although the Xiangji philosophy of the
two truths originated from the phrase, “What is form that is emptiness, what
is emptiness that is form (色卽是空, 空卽是色)” in the Prajnaparamitas, it
became the subject of discussions as an independently founded concept,
later around the 5th century. Of the earliest discussions concerning the
Xiangji philosophy of the two truths, the most renowned arguments were
presented by the Chengshi School. They succeeded in defining the
particular meaning of the Xiangji with regard to the two truths through
various debates. One of the most valued contributions came from Zhizang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163

(458-522) who interpreted “ji” as “be equal to”, based on the thought that
the two truths are completely equal. Sengchuo, however, interpreted “ji” as
“inseparable”, thereby claiming that the two truths were ultimately different.
Sengmin (467-527) offered a different understanding by confining the
meaning of “ji” to “undifferentiated”, and being dependent certain conditions.
Ultimately, the Xiangji theory of the Chengshi School became an
irreplaceable cornerstone of the Xiangji theory that evolved in later Chinese
philosophy.

Keyword: Xiangji, two truths, Zhizang, Sengchuo, Sengmin, Chengshi


School, essence and function

2015년 10월 25일 투고


2015년 11월 19일 심사완료
2015년 11월 30일 게재확정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Daniel M. Stuart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Columbia)

국문요약

2세기에서 4세기 무렵의 불교 산스크리트 문헌인 뺷정법념처경뺸(Saddhar-


masmṛtyupasthānasūtra)은 대체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던 초기 불교 유가행파
(yogācāra)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해당 문헌이 지니는 불교 수행도와의 이
론적 관계는 도덕적인 통달(ethical mastery)을 바탕으로 하고 통찰 지혜
(insight knowledge)의 강력한 형태 속에 정점에 달한 정신적 능력(spiritual
power)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드러내 준다. 필자는 이 문헌이 “붓다의 일체를
아는 지혜”[一切智omniscience]와 그러한 일체지로 이끄는 길을 분명하고 독
특하게 이론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통찰 수행(Buddhist

불교학리뷰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18권 (2015. 12) 165p~196p
166 불교학리뷰 vol.18

insight practices)을 그러한 지혜를 기르기 위한 기반으로 채용하면서, 뺷정법


념처경뺸에 개술한 수행 체제(regime of practice)는 불교 수행자가 윤리적인
것에서부터 해체적인 것에 이르는 다양한 인식론적인 리스트를 경험적으로 거
치게 하며, 이를 통해 우주적 자재(cosmic sovereignty)로 나아가는 발전단계
속에서 붓다가 가진 힘과 같은 강력한 힘을 낳는 실재에 관한 지혜를 습득하
게 한다. 필자는 이러한 불교 수행, 지혜, 그리고 힘의 이론화가 전통적인 경전
의 근거들을 사용함으로써, 그리고 그러한 경전의 근거를 넘어서 유가행파의
수행자를 일체지에 접근하는 불교 명상으로부터 나온 “지혜에 관한 지혜”
(metaknowledge)에 대한 강력한 매개체로서 나타내는 중층적 서술 속에 넣음
으로써 어떻게 이행되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주제어: 명상수행, 유가행파, 뺷정법념처경뺸, 일체지, 힘, 지혜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167

The Buddha’s biography is a narrative of conquest: first, a conquest of


the teachers of his time, and second of the entire cosmos, beginning with
the internal enemies of his own mental and physical urges and extending to
the highest realms of existence. This conquest gets played out first in the
context of meditation, when the Buddha conquers the evil demigod Māra,
and second in the context of teaching, when he brings his inner state of
conqueror to the knowledge of others. An additional mode of conquest
involves the coalescence of the power of meditation and teaching in the
miraculous, perhaps best exemplified by stories of the Buddha’s Twin
Miracle, which he is said to have carried out in order to trump the powers
of other ascetics or to assuage the doubts of his own relatives and
countrymen.
This powerful narrative legacy influenced conceptions of Buddhist practice
throughout the history of the Buddhist tradition in India. The Buddha’s
story — his actions, his wisdom, and his powers — formed the foundation for
many practitioners’ conceptualization of their own identities. In this paper,
I look at how the elements of this legacy get appropriated in a single Buddhist
text — the second to fourth-century CE Saddharmasmṛtyupasthānasūtra
(hereafter Saddhsu)— in a description of the individual spiritual development
of an ideal meditation practitioner, as he works towards becoming a master
practitioner (yogācāra).
The text represents an attempt to theorize the way in which meditation
practice allows a Buddhist contemplative to experientially negotiate a variety
of epistemological registers — from the ethical to the deconstructive — and
thereby acquire knowledge of the world that serves as a powerful force in
168 불교학리뷰 vol.18

the development of cosmic sovereignty, power comparable to that of a


Buddha. As it outlines this process, the text allows for the production of a
form of knowledge that is altogether distinct from what was conceived of in
earlier and contemporaneous layers of Buddhist literature. It presents a
panoptic noetic vision of Buddhist reality exemplified in the meditations of
a master practitioner (yogācāra). Such a way of seeing is also a way of
knowing, and the text implicitly associates such knowledge with the
Buddha’s omniscience. In fact, the yogācāra of the Saddhsu approaches the
Buddha’s level of knowledge, as he has comprehensive knowledge of
karma and its ripening. This knowledge, furthermore, is presented as the
result of a progressive conquest of the universe, a power play in the cosmic
battle between the forces of the dharma and the forces of the adharma. In
the text, this way of knowing and seeing — albeit the product of amassed
spiritual power — in turn ultimately transcends power relationships. It is a
form of knowledge transcendentally above the fray of the power play, while
at the same time immanently cognizant of its details. I suggest that this
form of knowledge gets produced discursively in the structural framework
of the Saddhsu, where multiple narrative frames construct a meta-
gnosiological perspective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ranscendent
knowledge, the knowledge of cultivation, and the cosmic sovereignty of
individual practitioners.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169

I. Introducing the Saddharmasmṛtyupasthānasūtra

The Saddhsu is historically and textually heterogeneous, like many other


authorless Buddhist sūtras. It has come down to us today in a form that was
more or less fixed by the middle of the sixth century of the Common Era,
when it was translated into Chinese (538 CE).1) However, textual work
done by Lin Li-kouang and Kogen Mizuno suggests that it should not be
dated to any later than the end of the fourth century, and was possibly
produced much earlier.2) It is thus reasonable to think that the text was
composed some time between the years 150 and 400 of the Common Era.3)
For the present purposes, I would point out that the Saddhsu — even in its
broadest contours — was most likely compiled at approximately the same
time as some of the most famous Mahāyāna Sūtras and is likewise
generally contemporaneous with, or predates, some of the most important
early śāstric sources on Buddhist practice, such as the Yogācārabhūmi of
Asaṅga (360-400 CE).
Early research by Lin Li-kouang on the Chinese and Tibetan translations
of the Saddhsu made it clear that the text contained important material for
the study of the history of Buddhist meditative and philosophical traditions.4)
Unfortunately, Lin died before he could complete his study, and few
scholars followed up on his work. The discovery several years ago of a
partial Sanskrit manuscript of the Saddhsu, held at Norbulingka in Lhasa,

1) 뺷正法念處經뺸(T.17, 1a1-417c19).
2) See Lin and Demiéville 1949, 110-114; Mizuno 1964.
3) For a more detailed discussion of the dating of the text, see Stuart 2015, vol. I, 43-45.
4) Lin and Demiéville 1949.
170 불교학리뷰 vol.18

has aroused new interest in the text.5) I recently published an edition and
study of the text’s second chapter, and several other scholars are working
on other sections of it.6) However, it will be many years until the text will
be available in its entirety. The text is voluminous, a veritable encyclopedia
of Middle Period Buddhist thought, and presents challenges to the editor
since it survives only in a single manuscript. Despite these difficulties,
access to the text in its original Sanskrit opens many new avenues for study,
and the present article is one first step in opening up the text to a wider
audience of scholars.
Treating the text as a whole, we can read it as a presentation of basic
ethical and meditative practices, which is then expanded into a compendium
of cosmology, modeled loosely on the structure of the five gatis, or realms
of rebirth. The text describes an incremental path of Buddhist practice,
beginning with the cultivation of the ten paths of wholesome conduct (daśa
kuśalakarmapatha) and leading into a series of meditative forays in
eighteen stages (bhūmi).7) These practices emerged historically as an organic

5) My work on the text is based on a photocopy of the manuscript kept in the collection of the
China Tibetology Research Center (Box 12, No.1) in Beijing.
6) See Stuart 2015, in which I also edit some short sections of the sixth chapter of the text. Vesna
Wallace is preparing an edition of the first chapter of the text, and Mitsuyo Demoto-Hahn is
preparing an edition of the third chapter. The first three chapters only account for
approximately one third of the extant Sanskrit manuscript, which itself covers only the first
half of the entire text. So, much work remains to be done. Additionally, Mitsuyo Demoto-
Hahn (2009) has published a short article on the system of hells in the Saddhsu, in which she
provides a basic overview of the text with a focus on its third chapter.
7) While the Sanskrit and Tibetan versions of the text do not contain a systematic scheme of
chapters, the Chinese translators organized the text into seven chapters: 1. The ten paths of
wholesome action, 2. Basic meditation and the human realm (saṃsāra), 3. Envisioning the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171

outgrowth of the traditional canonical Buddhist meditative practice of


distinguishing the six basic elements of human experience (ṣaḍdhātu). This
canonical practice is represented historically in a single Buddhist sūtra
from the Madhyamāgama (with a parallel in the Majjhimanikāya), entitled
the Sūtra on Distinguishing the Six Elements (Ṣaḍdhātuvibhaṅgasūtra).8)
The meditative program of the Saddhsu is complex. For a complete analysis
of the text’s historical, textual, and philosophical engagements, I encourage
readers to consult my study (Stuart 2015).9) The arguments below about
conceptions of power in the Saddhsu take as background the analysis of the
meditative program that I have already carried out in the book. It suffices to
briefly note here that the text expands upon the traditional practice of
distinguishing the six elements, bringing the practice into a developed
Abhidharmic framework while simultaneously and explicitly reframing it
as a process of smṛtyupasthāna meditation, the traditional Buddhist practice
of “establishing awareness.” The practice of establishing awareness is best
known in its canonical formulations in the *Smṛtyupasthānasūtras, but
texts such as the Saddhsu and the early tradition in general indicate that
smṛtyupasthāna was considered more of a meta-practice, a reductive way
of conceptualizing the basic crux of all forms of Buddhist practice.10) In

hell realms, 4. Envisioning the realm of hungry ghosts, 5. Envisioning the realm of animals,
6. Envisioning the realm of deities, and 7. Observation of the body (a self-standing sūtra). For
an outline and overview of the text, see Stuart 2015, vol. I, 46-107. See also Lin and
Demiéville 1949, 1-63.
8) MĀ 162 at T.1, 690a19-692b21; Derge, mngon pa, Ju 34b6-43a3; MN 140 at MN III 237-47.
For a synoptic comparison of these parallel sūtras, see Stuart 2015, vol. II, 222-301.
9) See particularly Stuart 2015, vol. I, 108-300.
10) MN 10 at MN I 56-63; DN 22 at DN II 290-315; MĀ 98 at T.1, 582b7-584c1; EĀ 12.1 at
172 불교학리뷰 vol.18

this way, the Saddhsu draws on the currency of smṛtyupasthāna while


reworking practices not directly derived from the early *Smṛtyupasthānasūtras.
Suffice it to say that the basic practices of the Saddhsu primarily involve
discernment — first of body, then of mind, and then of body and mind — in
light of the three or four characteristics of existence: suffering, impermanence,
not-self, and emptiness. This process of discernment leads to a complete
envisioning of the cosmos and the workings of karma in a broad spread of
cosmological observations. It is in the full expansion of such practice that
one can discern the text’s larger vision of knowledge and power, to which
we now turn.

II. Omniscience in Dispute

So, the text draws on early Buddhist canonical Sūtra traditions but
expands well beyond them in a broadly figured spread of Sūtric,
Abhidharmic, proto-śāstric, and cosmological forays. It does so through a
literary structure that brings these diverse aspects of the text into a
contained epistemological frame, allowing these historically constructed
developments of the Buddhist tradition to sit within a larger system of
interconnected phenomena. I will return later to how this system is
effectuated. First, however, I would like to touch briefly on what seems to
have been the major theoretical issue behind the Saddhsu’s textual/

T.1, 567c29-569b12. For a brief discussion of the notion of smṛtyupasthāna as a framework


of meta-practice, see Stuart 2015, 38-40.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173

scholastic/practice program, by looking at its frame story (nidāna).11) To


summarize the story: while on an alms round, a group of monks newly
ordained under Śāriputra find themselves in a conversation with mendicants
of another practice tradition, who sound suspiciously like Jains:

The wanderers and mendicants of the other school [said]: “Is it true, good
Śākyas, that your ascetic Gautama teaches that harmful bodily action
(kāyadaṇḍa)12) is bad (aśubha) — with unwanted, undesirable, and wretched

11) For a translation of the entire frame story, see Stuart 2015, vol. I, 55-59.
12) The use of the term daṇḍa in the Saddhsu, to refer to harmful action, reveals the way that
religious conceptual frameworks and terminology were appropriated across sectarian lines
in the history of South Asia. The term daṇḍa literally means “stick” or “rod.” However, it
was used in certain religious contexts in the sense of “harmful act.” For instance, we find this
definition in an old canonical text, describing an exchange between Dīgha Tapassī, a
follower of the leader of the Jains (Nigaṇṭha Nātaputta), and the Buddha. (My translation is
e
adapted from Bodhi and Ñāṇamoli 1995, 477 [MN 56 at MN I 372 (B )]): “Friend Gotama,
Nigaṇṭha Nātaputta is not accustomed to using the description ‘action, action.’ He is
accustomed to using the description ‘rod, rod (daṇḍa).’”
“Tapassi, how many rods does he describe for the carrying out of evil action, for the
production of evil action?”
“Friend Gotama, Nigaṇṭha Nātaputta describes three rods for the carrying out of evil action,
for the production of evil action; namely: the bodily rod, the vocal rod, and the mental rod.”
(“na kho, āvuso gotama, āciṇṇaṃ nigaṇṭhassa nāṭaputtassa ‘kammaṃ, kamman’ ti
paññapetuṃ. ‘daṇḍaṃ, daṇḍan’ ti kho, āvuso gotama, āciṇṇaṃ nigaṇṭhassa nāṭaputtassa
paññapetun” ti.
“kati pana, tapassi, nigaṇṭho nāṭaputto daṇḍāni paññapeti pāpassa kammassa kiriyāya
pāpassa kammassa pavattiyā” ti?
“tīṇi kho, āvuso gotama, nigaṇṭho nāṭaputto daṇḍāni paññapeti pāpassa kammassa kiriyāya
pāpassa kammassa pavattiyāti, seyyathidaṃ: kāyadaṇḍaṃ, vacīdaṇḍaṃ, manodaṇḍan” ti.)
In its employment of the term daṇda in precisely the way that it was once used by the early
Jains, the Saddhsu is an example of how interreligious dialogue directly impacts the
174 불교학리뷰 vol.18

results — and does not approve of [such action] for others? We also teach that
harmful bodily action is bad — with unwanted, undesirable, and wretched
results — and do not approve of [such action] for others. Sirs, your ascetic
Gautama teaches that harmful vocal action (vāgdaṇḍa) is bad … We also teach
that harmful vocal action is bad … Sirs, your ascetic Gautama teaches that
harmful mental action (manodaṇḍa) is bad … We also teach that harmful
mental action is bad …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the Dharma and
Discipline of your ascetic Gautama and our own [Dharma and Discipline]?
What is the divergence and the distinction by which the Dharma and Discipline
of the ascetic Gautama is distinguished from ours, [such that] he proclaims
himself to be ‘omniscient (sarvajña)’?” When thus questioned … the newly
renounced monks on their alms round, being without [their preceptor] the
venerable Śāriputra and the other monks, were dismayed, and did not respond.13)

Unable to respond to these other ascetics, the newly ordained monks


return from their alms round and share the encounter with their preceptor,
Śāriputra. He says to them:

“If I, good sirs, had been with you in Rājagṛha at that crossroad … then I would
have used the Dharma to debate (vigrahaḥ kṛto) those wanderers and
mendicants of another school … The Blessed One, with all-pervading vision, to

developments of the use of terminology within specific South Asian traditions. This also
indicates that the somewhat stock description of the back and forth between the ascetics of
other schools and Buddhist monks in the frame story may not be all that far away from
historical reality.
13) Ms 1b2-5 (T.17, 1b29-1c17; Derge, mdo sde, Ya 82a4-83a2).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175

whom all is evident (sarvapratyakṣa), who knows the ripening of the fruit of
action,14) has conquered the seers of all schools, and teaches the Dharma of the
ripening of the fruit of action to disciples, lay followers, gods and humans not
far [from here]. You should ask him [about this]. He will teach you the entirety
of the ripening of the fruit of action. He will teach you that Dharma which is
not seen in this world, with its deities, Māras, and brahmās, [not seen] in this
generation with its ascetics and brāhmaṇas. The Blessed One, the knower of
the supremely mysterious15) ripening of the fruit of action, will teach you that
Dharma which is not apparent (pratyakṣa) even to us.”16)

14) Here I follow Wallace’s emendation of Ms: sarvapratyakṣa〈ḥ〉 karmaphalavipākajñaḥ. Ms


reads: sarvapratyakṣakarmaphalavipākajñaḥ.
It remains a question throughout the text whether to interpret the second compound
presented here as a dvandva or a tatpuruṣa compound. That is, is the Buddha one who
“knows action, its fruit, and its ripening” or one who “knows the ripening of the fruit of
action”? Ultimately, this distinction is merely semantic, since one who knows ripening must
also know action and fruit. In my translations, I play with this interpretation, allowing for
both possibilities, depending on the context in which the compound is embedded.
15) I read atīvaparokṣakarma˚ after Wallace, who suggests atīva parokṣakarma˚. Ms reads
atīvaparokṣaṃ karma˚. One reviewer suggested a reading of atīvaparokṣaḥ karma˚. While
this is indeed a possible reading, there is little that lends support to it, and it seems like a
puzzling description of the Buddha. The Chinese translation of the text, for instance, reads
唯有世尊,第一善解業果報法, which suggests the absence or omission of the term parokṣa
altogether, or an abridgement of the relative correlative phrasing in the previous clause. The
Tibetan translation reads shin tu mngon sum du gyur pa, which does suggest a nominative,
but with a meaning opposite to of that of parokṣa. It seems evident that the text may simply
be corrupt. In the end, the original reading of the manuscript might be the simplest one: The
Buddha’s teaching (dharma), which pertains to the ripening of the fruit of action, is
supremely mysterious or beyond the range of ordinary perception. The grammatical
relations work in this instance, but the syntax is problematic.
16) Ms 1b6-2a2 (T.17, 1c22-2a5; Derge, mdo sde, Ya 83a5-83b3).
176 불교학리뷰 vol.18

Taking Śāriputra’s advice, the monks approach the Buddha and relate to
him their encounter with the mendicants of another school. In response to
this, the Buddha replies by delivering the discourse, which he first summarizes
as follows:

“Monks, I will teach you … the Dharma discourse called ‘The Presence of
Awareness of the True Dharma(s) (Saddharmasmṛtyupasthāna)’ … What,
monks, is this Dharma discourse called ‘The Presence of Awareness of the
True Dharma(s)’? It is: [One] sees Dharma as Dharma, and what is not Dharma
as not Dharma. Awareness is permanently present with respect to that
[Dharma], and doubt does not arise for him. He is one who delights in hearing
the Dharma, and he respectfully serves his elders. That ascetic is one who
knows action, its fruit, and its ripening in birth and death, [as instantiated in all]
three types of action: physical, vocal, or mental. His vision is not inverted. He
is not led [astray] by another [teacher].”17)

The frame story points to an underlying theoretical question that the


Saddhsu is dealing with. The combative non-Buddhist mendicants’ initial
question about what distinguishes their practice of restraint from the
Buddha’s teachings on action refers to claims that the Buddha is
“omniscient” (sarvajña). This reference allows us to discern the overarching
theoretical crux of the text: Its account of Buddhist practice is an attempt to
theorize the Buddha’s omniscience, something that various Buddhist
traditions were engaging in rather seriously during the first centuries of the

17) Ms 2a6-7 (T.17, 2b4-14; Derge, mdo sde, Ya 84a6-84b3).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177

Common Era.18) The Saddhsu enacts such a theorization in a rather unique


way, however, through an extensive description of practices based on the
early Sūtra and Abhidharma traditions, with a particular emphasis on the
practice of dharmasmṛtyupasthāna. I will get into the details of how the
text does this momentarily.
The frame story also shows precisely what the authors/compilers/
redactors of the Saddhsu had in mind when they spoke of the Buddha as
omniscient. Śāriputra describes the Buddha first as “one with all-pervading
vision, to whom all is evident, who knows the ripening of the fruit of
action” (samantacakṣuḥ sarvapratyakṣaḥ karmaphalavipākajñaḥ), then as
“the knower of the supremely mysterious ripening of the fruit of action”
(atīvaparokṣakarmaphalavipākajñaḥ). These statements show fairly clearly
what sets the Buddha apart: he has not only mastered his physical, vocal,
and mental actions, but has a comprehensive knowledge of the functioning
of all action and its results.

18) The theoretical question of the nature of the Buddha’s omniscience is a key foundational
question driving much Mahāyāna Buddhist philosophy. On this issue as it emerged in
Buddhist epistemological traditions, see McClintock 2010. McClintock’s discussion of
early conceptions of the nature of the Buddha’s omniscience (McClintock 2010, 23-45) are
particularly relevant to an understanding of the historical context in which the Saddhsu was
produced.
178 불교학리뷰 vol.18

III. The Three-tiered Narrative Structure

It turns out, however, that in the context of the Saddhsu the Buddha is
not the only one with such powerful knowledge. In the first chapter of the
text, the Buddha proclaims that he does not see anyone other than his
meditation practitioner disciples (yogācāro macchrāvakaḥ) who can
observe and understand the intricacies of the way in which actions ripen.19)
In this statement, we see a significant development in the conception of

19) Ms 3b7 (T.17, 3c10-11; Derge, mdo sde, Ya 88a4-5): nāham anyat paśyāmi ya evaṃ
karmadharmavipākam anupaśyati yathā māmako yogācāro macchrāvakaḥ |
Vesna Wallace , in her edition in progress of the first chapter of the Saddhsu, emends the text
to read anyaṃ.
As Lin (Lin and Demiéville 1949, 242, footnote 1) points out, this type of rhetoric is
common even in some of the earliest canonical texts. For instance, see MN 13 at MN I 85
e
(B ) (with comparable parallels in MĀ at T.1, 584c27-29 and Taishō no. 53 at T.1, 847a1-3):
“Monks, I do not see — in the world with its deities, Māras, and brahmās, in this generation
with its ascetics and brāhmaṇas, deities and humans — anyone other than the Tathāgata, the
disciple of the Tathāgata, or one who has learned it from them, who can satisfy the mind [of
a questioner] with an explanation to these questions.” (nāhaṃ taṃ, bhikkhave, passāmi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yo
imesaṃ pañhānaṃ veyyākaraṇena cittaṃ ārādheyya, aññatra tathāgatena vā tathāgatasāvakena
vā, ito vā pana sutvā.)
A passage more closely related to this canonical precedent can be found in the first chapter
of the Saddhsu (Ms 3a1; T.17, 2c26-29; Derge, mdo sde, Ya 86a1-3), preceding the quote
above. There we find a more traditional idea: the law of karma is beyond the scope of
understanding of non-Buddhist traditions, and only the Buddha’s disciples can access such
knowledge, becoming masters of action and result (karmaphalavipākajña) having heard
about it from the Buddha.
A more complex iteration of the refrain found at Ms 3a1 can be found at Ms 69b5-70a2
(T.17, 73c13-74a14; Derge, mdo sde, Ya 245b5-246b2).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179

what is possible for the disciple of a Buddha. The particular reference to a


disciple who is a yogācāra, a meditation practitioner, also has broader
implications.20) That is, the text tacitly suggests that a yogācāra disciple of
the Buddha is capable of approaching omniscience, which is typically the
purview only of the Buddhas.
This tacit suggestion can be discerned in the text’s narrative structure.
The Saddhsu is composed in a three-tiered narrative framework. First we
have an outer narrative frame, which we have already encountered: the
Buddha giving a discourse in response to the questions of his disciples. In
his response, he brings in the second narrative frame, which I refer to as the
middle frame. This narrative portrays a yogācāra progressing through an
elaborate series of meditative observations that comprehensively detail the
law of karma — first as it pertains to the ethical and meditative practices of
the human realm, and then as it pertains to the other four realms of
existence: the hells, the animal realm, the realm of hungry ghosts, and the
realm of deities. This description of the yogācāra’s discernment of the law
of karma, however, is presented as the observation of a third narrative, which
I refer to as the inner frame. To be more specific, the yogācāra envisions
the path of practice of a lay practitioner, who first develops the ethical
practices of the ten paths of wholesome action (daśakuśalakarmapatha),
goes on to become a monk, masters the discernment (prajñā) of the
constituents of human experience, and finally attains dhyāna and gains the

20) On the term yogācāra, see Silk 1997 and 2000. See also the Introduction to White ed. 2011.
It appears that the Saddhsu deploys the term yogācāra as more than simply a generic trope,
which is what Silk’s work indicates.
180 불교학리뷰 vol.18

ability to discerningly experience all the realms of existence, the entire


cosmos.
It is in this three-tiered structure that the Saddhsu most explicitly
illustrates its vision of an interrelationship between power and knowledge.
The middle frame is a description of a yogācāra’s contemplative discernment
of the laws of karma, reflecting an all-encompassing noetic vision of reality
for a supreme Buddhist adept. The inner frame of the text, on the other
hand, contains descriptions of basic insight meditation practices that bring a
monastic practitioner to the point of being able to correctly develop such
meditative vision, and to understand the world in connection with the
fundamental constituents of human experience according to Buddhist
tradition. The contemplative process entailed in such developments is
portrayed as progress towards becoming a full-fledged yogācāra. As a
monk progresses in meditation, he comes closer and closer to attaining the
state of the master yogācāra who is the main agent of the middle frame of
the text. In this way, the Saddhsu can be read as a text detailing the making
of a yogācāra. From the standpoint of the middle frame of the text, then,
we see a fully developed yogācāra noetically reflecting upon or envisioning
the contemplative process that an ordinary monk must undertake to attain
the status of a yogācāra. It is a portrayal of a meditative meta-knowledge,
inscribed recursively by the phrase — echoing the canonical description of
the practice of dharmasmṛtyupasthāna — punar api yogacāra ādhyātmike
dharme dharmānupaśyī viharati: “And further, the yoga practitioner dwells
observing dharma-s among internal dharma[-s].”21) The yogācāra, practicing

21) Cf. DN 22 at DN II 303: puna ca paraṁ, bhikkhave, bhikkhu dhammesu dhammānupassī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181

at the pinnacle of insight knowledge, discerns the process by which


meditative knowledge is acquired.
In the discernment of this process, a set of cosmic power relationships
emerges, constructed around the way a spiritual practitioner knows about
the universe, knows about himself, knows about karma, and knows about
the process of discerning all of these forms of knowledge as well. These
relationships primarily come to light in the inner narrative frame, which
serves as the primary substantial content of the text. It is here that we find
an additional structuring principle: a scheme of meditative stages (bhūmi)
through which the main actor of the text progresses. We might therefore
term the Saddhsu a yogācārabhūmi (a text outlining stages of meditative
practice), and class it among a whole genre of such texts produced during
the first five centuries of the Common Era in India.22) Uniquely, the
Saddhsu presents a scheme of eighteen stages. It should be emphasized,
however, that the text ends abruptly, leaving its treatment of the stage
progression incomplete. This means that the original text must have been

viharati …. Also cf. the Pañcaviṃśatisāhasrikā Prajñāpāramitā (Takayasu ed. 2006, 56,
with my punctuation): katamāni ca, Subhūte, catvāri smṛtyupasthānāni? … adhyātmadharme
dharmānupaśyī viharati, bahirdhādharme dharmānupaśyī viharati, adhyātmabahirdhādharme
dharmānupaśyī viharati, ātāpī saṃprajānan smṛtimān, vinīya loke ’bhidhyādaurmanasye.
samudayānupaśyī ca dharmāṇāṃ viharati, vyayānupaśyī ca dharmāṇāṃviharati. dharme
dharmānupaśyī viharati, aniścitaś ca viharati, na ca kañcil loke upādatte. imāny ucyante
catvāri smṛtyupasthānāni. The singular emphasis on internal (ādhyātmika) dharmas in the
Saddhsu reveals a peculiarly mentalist emphasis, and a new and creative engagement with
the traditional practice of dharmasmṛtyupasthāna.
22) On the yogācārabhūmi as a textual genre, see Demiéville 1954, Yamabe 1999, and Deleanu
2006.
182 불교학리뷰 vol.18

much longer, and that the stage scheme as we have it is incomplete.23)


Whatever the original text may have looked like, the first eighteen stages
as we have them provide enough information for readers to discern the
power-knowledge ideology envisioned therein.24) At the end of each stage,
the text provides a description of how the accomplishments of a monk
progressing through the stages come to the notice of various supernatural
forces, such as earth spirits (bhaumayakṣa), flying spirits (antarikṣacarayakṣa)
and various types of deities. These supernatural beings become part of the
practitioner’s retinue of admirers, actively aware of his meditative progress.
As the narrative progresses, so also does these observers’ rank in the
cosmological order become more elevated. For example, a monk first gains
the notice of the lowest deities of the realm of sensuality (kāmadhātu), the
Four Great Kings (catvāro mahārājānaḥ) and the deities in the Retinue of
the Four Great Kings (cāturmahārājakāyikadeva), when he attains right
view just prior to engaging in serious meditative practice. He gains the
notice of Śakra and the deities of the Heaven of the Thirty-three
(trayastrimśadeva), as well as the Yāma deities (yāmadeva), when he
progresses to the third stage of meditative practice, and he gains the notice
of the bodhisattva Maitreya and the deities of Tuṣita Heaven (tuṣitadeva)

23) There is of course a conclusion at the very end of the text, but it clearly belongs to the seventh
chapter, which should be read as a distinct sūtra (T.17, 417c17-18 [Derge, mdo sde, Sha
227b6-7]): “At that time, the monks heard the teaching of the World-honored One and were
all overjoyed. They gave rise to a mind of faithful delight towards the teaching of the
World-honored One. They rejoiced, bearing it in mind.” 「時諸比丘。聞世尊說。皆大歡喜。
於世尊說。生信樂心。歡喜奉行。」
24) For a more detailed discussion of the Saddhsu’s second chapter and its role as the practical
core of the Saddhsu, see Stuart 2014 and Stuart 2015, vol. I, 108-97.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183

when he accomplishes the fourth stage. The mention of Maitreya in this


progression is particularly interesting because it indicates that the authors/
redactors/compilers of the Saddhsu were one of a number of yogācāra
Maitreya cults prevalent in the Northwest of India during the first few
centuries of the Common Era.25) The progression continues — if somewhat
unevenly — into the later stages, with the practitioner ultimately gaining the
notice of beings as lofty as the deities of Minor Aura (parīttaśubhadeva),
who abide in the higher realms of the sphere of subtle materiality
(rūpadhātu), when he progresses to the eighteenth stage.26)
This narrative element of the text’s stage scheme can be read as a textual
allusion, echoing the canonical Dharmacakrapravartanadharmaparyāya,
the first sermon of Gautama the Buddha according to tradition. That sermon
comes to a close with the following:

[When Ājñātakauṇḍinya had realized the Dharma after hearing it from the
Buddha,] the earth spirits raised a cry and spread the word: “Good sirs, at
Vārāṇasī, in the Deer Park of Ṛṣivadana, in accordance with Dharma and for
the welfare and happiness of many people, out of compassion for the world, for
the benefit and happiness of deities and humans, the Blessed One has set in
motion the wheel of the Dharma — with its three rounds and twelve
permutations — which conforms with the Dharma and cannot be turned back by
[any] ascetic, brāhmaṇa, deity, Māra, brahmā, or anyone in the world. In this
way, the divine hosts (divyāḥ kāyāḥ) are increasing, the hosts of demons

25) See Demiéville 1954, 376-395.


26) For an overview of the fundamentals of Buddhist cosmology, see Kirfel 1967 [1920],
178-209, Kloetzli 1983 (especially 23-50), and Sadakata 1997, 19-112.
184 불교학리뷰 vol.18

(āsūrāḥ kāyāḥ) are perishing.” Having heard [this] cry of the earth spirits, the
flying spirits spread it [onward, and it spread respectively to] the deities of the
Retinue of the Four Great Kings, the deities of the Heaven of the Thirty-three,
the Yāma deities, the deities who delight in creation and the deities who delight
in wielding power over the creations of others. In a moment, an instant, a short
interval, the cry reached the brahmā-world. The deities of Brahmā’s Retinue
[likewise] raised a cry and spread the word: “Good sirs, at Vārāṇasī … In this
way, the divine hosts are increasing, the hosts of demons are perishing.” [Because]
“the blessed one set in motion (pravartitaṃ) the wheel of the Dharma — with
its three rounds and twelve permutations — which is in conformity with the
Dharma,” therefore the name of this Dharma discourse is the “Setting in
Motion of the Wheel of the Dharma (dharmacakrapravartanam).”27)

27) Sbhv I 136-137 (my punctuation): bhaumā yakṣāḥ śabdam udīrayanti, ghoṣam anuśrāvayanti:
“etan, mārṣā, bhagavatā vārāṇasyām ṛṣivadane mṛgadāve triparivartaṃ dvādaśākāraṃ
dharmyaṃ dharmacakraṃ pravartitam apravartyaṃ śramaṇena vā brāhmaṇena vā devena
vā māreṇa vā brahmaṇā vā kenacid vā loke ásahadharmataḥñ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i arthāya sukhāya devamanuṣyāṇām. iti divyāḥ kāyā abhivardhiṣyante,
āsūrāḥ kāyāḥ parihāsyante” iti. bhaumānāṃ yakṣāṇāṃ śabdaṃ śrutvā antarikṣāvacarā
yakṣās átam anuśrāvayantiñ, cāturmahārājakāyikā devāḥ trāyastriṃśā yāmās tuṣitā
nirmāṇaratayaḥ paranirmitavaśavartino devāḥ. tena kṣaṇena, teṇa lavena, tena muhūrtena,
tena kṣaṇalavamuhūrtena yāvad brahmalokaṃ śabdo 'gamat. brahmakāyikā devāḥ śabdam
udīrayanti, ghoṣam anuśrāvayanti: “etan, mārṣā, bhagavatā vārāṇasyaṃ … iti divyāḥ kāyā
abhivardhiṣyante, āsurāḥ kāyāḥ parihāsyanta” iti. “pravartitaṃ bhagavatā vārāṇasyām
ṛṣivadane mṛgadāve triparivartaṃ dvādaśākāraṃ dharmyaṃ dharmacakram” iti, tasmād
asya dharmaparyāyasya “dharmacakrapravartanam” ity adhivacanaṃ.
This discourse survives in a number of parallels in different strata of Buddhist literature.
Three very close parallels to the above passage can be found in the Sūtra and Vinaya
literature, all with (Mūla-)Sarvāstivāda affiliations: SĀ 379 at T.2, 104a13-28, Taishō no.
1450 at T.24, 128a14-b1 and Taishō no. 1435 at T.23, 448c19-449a7. The Pāli parallels of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185

A comparison of this passage with the refrains that occur at the end of
each stage in the Saddhsu shows that the Saddhsu’s narrative framework is
indebted to this classical literary form of the early tradition. This allusion
also reveals that the authors/compilers/redactors of the Saddhsu were
attempting to equate the spiritual power of their gradualist approach to
Buddhist meditation with the spiritual power of the Buddha’s act of
teaching the Dharma. This idea is highlighted in the text’s narrative
refrains, when the deities proclaim to one another that the meditating
monk’s progress is an indication that “Māra’s faction is waning, the faction
of the True Dharma is waxing.”28) These statements frame the monk’s
practice as a power play in a cosmic battle with negative cosmological
forces (Mārapaḳsa), a war for the sake of the Dharma.29) As he progresses
in his skillful engagement with the phenomena of the world, his discernment
(prajñā) of every sphere of experienced reality allows him to gain

this passage (SN V 423-424 and Vin I 11-12) are quite similar, though less embellished, and
notably lack explicit reference to the notion that the act of teaching the Dharma is connected
to a shift in the cosmological balance of powers. Such reference is also absent in the
Mahīśāsaka-vinaya parallel (Taishō no. 1421 at T.22, 104c16-23) and the Dharmaguptaka-
vinaya parallel (Taishō no. 1428 at T.22, 788b28-c7). This is an important difference, as the
Saddhsu, in its cosmological refrains, explicitly draws on this particular motif of the
(Mūla-)Sarvāstivādin textual tradition.
28) Saddhsu II §1.5.2 (Stuart 2015, vol. I, 324-25): “hīyate mārapakṣaḥ. abhyuddhriyate
saddharmapakṣaḥ.” Such refrains appear in a number of different permutations throughout
the Saddhsu.
29) It is clear that Māra here refers to the deity Māra, a representative and figurehead of the
forces of the adharma. The text’s mentalist orientation does allow for the possibility of
interpreting all cosmological figurations as internal forces, but the concrete nature of the
cosmological descriptions makes me inclined not to take such an interpretation as primary.
186 불교학리뷰 vol.18

sovereignty over these elements of experience, with grand cosmological


implications. Omniscience, then, in the context of the Saddhsu, refers not
only to a way of knowing but also to a way of being (or not being) and
acting, and to the possibility of wielding power in or upon the world(s).

IV. Power-knowledge in the Saddharmasmṛtyupasthānasūtra

Finally, we might look briefly at some of the descriptions of knowledge


attained in the first two chapters and ten stages of the Saddhsu, understanding
that it is the development of these forms of meditative practice-knowledge
that serves as the substantive force behind a practitioner’s amassment of
cosmic power, exemplified by his growing flock of supernatural admirers:

I samyagdṛṣṭipurodhasa: “He who is guided by right cognition”


II.3.1 ṣaḍdhātutattvajña˚: “Knower of the six elements”
II.5.1.19 udayavyayatattvajña: “Knower of the arising and passing away
[phenomena]”
II. 5.1.20 skandhatattvajña: “Knower of the nature of the aggregates”
II.5.1.22 mārgāmārgatattvajña: “Knower of the nature of what is and is not the
path of practice”
II.5.2.3.4 cakṣuḥsaṃsparśajavedanāsañjñācetanātattvajña, mārgatattvajña: “Knower
of the nature of feelings, perceptions, and intentions connected to eye-contact”,
“Knower of the nature of the path”
II.5.2.5.2 ˚āyatanatattvajña: “Knower of the nature of the [twelve] sense-spheres”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187

II.7.1 karmaphalavipākajña: “Knower of the ripening of the fruit of action”


II.7.2 karmaphalaśubhāśubhajña: “Knower of the fruits of action, both good
and bad”
II.7.5 karmadharmavipākajña: “Knower of the ripening of action dharma-s”
II.7.8 dharmādharmaparīkṣātattvajña: “Knower of the nature of the investigation
of what is and is not Dharma”
II.7.18 karmadharmavipākajña: “Knower of the ripening of action dharma-s”
II.7.21.2 taccharīradharmatattvajña (impurity [aśubha] practice): “Knower of
the nature of the body”
II.10.6 dharmādharmavidhijña: “Knower of the method of what is and is not
Dharma” …

In later chapters of the text, we find the epithet karmaphalavipākajña or


“knower of the ripening of the fruit of action” to be the primary descriptive
term used to refer to the main actor of the text. The ideal practitioner of the
Saddhsu attains this stage of knowledge, as shown above, already in the
seventh stage of meditative practice. This knowledge of the ripening of the
fruit of karma is also precisely the form of knowledge described at the
opening of the Saddhsu as a quality associated with the Buddha’s
omniscience. Indeed, by the tenth stage of the Saddhsu, our practitioner has
accomplished the aim of practice that the Buddha set out in the frame story.
Such a practitioner has the capacity to discern all aspects of worldly and
transcendent reality. As the text carries forward, the practitioner carries on
the process of discernment by envisioning the ripening of karma in the
manifold realms of the cosmos beyond the human realm: the hell realms,
188 불교학리뷰 vol.18

the realm of hungry ghosts, the realm of animals, and the realms of deities.
Most significantly, what emerges from the Saddhsu’s practice framework is
the basic notion that these forms of knowledge — emergent from certain
modes of physical, vocal, and finally mental discipline — naturally bring
about an amassment of spiritual power that draws good or dharmic
supernatural forces near, and conquers negative or adharmic supernatural
forces.
The inner frame of the Saddhsu, therefore, provides readers with a fairly
straightforward conception of power-knowledge, one that is in line with
traditional Buddhist conceptions:30) Buddhist ascetic sovereign power is
attained progressively — first through the mastery of physical, vocal, and
mental restraint, and then through the practice of discernment into all the
phenomena of existence, from the human ethical, to the psycho-physical, to
the cosmological. In the Saddhsu, this conception relates the supernormal
force of the meditation practice of ideal individual practitioners to the
supernormal force of the Buddha’s teaching of the Dharma. We see here
two key aspects of power-knowledge that emerge in the Saddhsu. First, the
disciplinary power of Buddhist ethics — which underwrites a rigorous
process of self-surveillance while also invoking the prospect of panoptic
surveillance by the Buddha, the Buddhist community, or supernormal
beings — produces forms of knowledge that provide a practitioner with the

30) I employ Foucauldian language here in an attempt to show how such theoretical frameworks
can be fruitfully, though not seamlessly, engaged in the sphere of traditional Buddhist ethical
and contemplative thought. See particularly Foucault 1990 [1978] and Foucault 1995 [1977]
for a full account of Foucault’s conceptions of sovereign power, disciplinary power, and
power/knowledge more broadly speaking.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189

possibility of attaining mastery of worldly (laukika) sovereign power.31)


Second, the proper mode of cognizing worldly phenomena — a regime of
mental discipline that emerges from the context of more basic forms of
physical and vocal discipline — produces transcendent ascetic knowledge
leading to the possibility of liberation.32)
But the presence of the middle frame of the text, in which the yogācāra
is described observing all of this with his noetic dharma-discerning vision,
complicates the epistemological implications of the text’s program, pointing
to a more exalted conception of power-knowledge than that exhibited
within the inner frame. The meta-knowledge of the yogācāra of the middle
frame is ultimately the final result of the spiritual conquest outlined in the
inner frame; it is power perfected. However, this knowledge about

31) The relationship between ethical mastery and worldly sovereign power is developed in
particular in the first chapter of the Saddhsu. See, for example, Ms 7a2 (T.17, 6c24-26;
Derge, mdo sde, Ya 96a3-4): “If one transforms [good conduct] towards the defiling
pleasure of sense objects rooted in craving, he becomes a brahmā, a Māra, or a Śakra. If he
transforms it into human greatness, he becomes a wheel-turning monarch, wealthy with the
seven treasures and ruling the four continents. …” (yadi vā sāṃkleśike tṛṣṇāhetubhūte
viṣayasaukhye pariṇāmayati, sa brahmā vā bhavati, māro vā śakro vā ‹|› yadi
manuṣyamāhātmyaṃ pariṇāmayati, sa rājā cakravarttī bhavati {|} saptaratnasamṛddhaś
caturdvīpabhojī ‹|› …). See also Ms 7a2 (T.17, 6c16-20; Derge, mdo sde, Ya 95b5-96a1); Ms
7a8-7b1 (T.17, 7a27-29; Derge, mdo sde, Ya 97a3-4); Ms 8b6-10b6 (T.17, 8b29-10b24;
Derge, mdo sde, Ya 100b5-105b2). Additionally, see Stuart 2015, vol. I, 478-81. There,
transcendent sovereignty is invoked along with forms of worldly sovereignty.
32) Ms 10b7 (T.17, 10c1-2; Derge, mdo sde, Ya 105b4-5): “Now, because of the absence of
wrong view, all bad things disappear for one of right view. The fetters and latent defilements
are relinquished. Nirvāṇa is close to him, and the flow of existence at a remove.” (iha
mithyādṛṣṭivirahād asya samyagdarśinaḥ sarvānarthāḥ prahīyante ‹|› saṃyojanānuśayā
vā##ntībhavanti ‹|› nirvāṇam antike cāsya bhavanti, dūrībhavati saṃsāra‹ḥ |›)
190 불교학리뷰 vol.18

knowledge, like the omniscience of the Buddha, becomes transcendent in


the vision of the yogacāra, beyond relations of power. The yogācāra thus
functions in the text like a godhead, representing supreme knowledge and
perhaps standing in for the Buddha in the world.33) In setting up the
yogācāra in this way, the Saddhsu provides a vision of spiritual sovereignty
that begins with basic ethical practices, must be fought out in the arena of
the body, mind, and cosmos, but ultimately stands apart, transcendentally
above the power play yet intimately and immanently cognizant of its
details.

33) One question that looms here is the extent of the power of such practitioners, and whether a
Buddha’s omniscience, as envisioned by the Saddhsu, should be conceived of simply in
terms of knowing about, as opposed to acting upon, the world. It is difficult to answer this
question since the text does not provide a clear outline of the Buddhology it is working with.
However, the basic ethical framework that the text outlines suggests that contemplative
knowledge emerges from action in the world and likewise has the capacity to transform the
world and its actions. If we take this relationship seriously, we have to allow for the
possibility that the authors/compilers/redactors of the Saddhsu may have been working with
a framework of thought in which omnipotence might emerge as a property of omniscience.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191

약호 및 참고문헌

Abbreviations and Sigla


e
B Burmese edition of the Pali canon (Chaṭṭha Saṅgāyana CD-
ROM from Dhammagiri, Version 3)
DN Dīghanikāya
EĀ Ekottarikāgāma (Taishō no. 125)
em. emended
MĀ Madhymāgāma (Taishō no. 26)
MN Majjhimanikāya
Ms A photocopy of the single known Sanskrit manuscript of the
Saddharmasmṛtyupasthānasūtra kept in the collection of the
China Tibetology Research Center (Box 12, No.1), the original
of which is held at Norbulingka in Lhasa.
Saddhsu Saddharmasmṛtyupasthānasūtra
SĀ Saṃyuktāgama (Taishō no. 99)
SN Saṃyuttanikāya
Sbhv Saṅghabhedavastu (Gnoli and Venkatacharya 1977-8)
T Taishō Shinshū Daizōkyō
‹…› suggested addition by editor
{…} suggested deletion by editor
# stands for a symbol in Ms that indicates a space upon which
the scribe found it impossible to write

References to the Taishō edition of the Chinese Buddhist canon are to the
CBETA 電子佛典集成光碟 2011 version.
192 불교학리뷰 vol.18

Bibliography
Anālayo, Bhikkhu. 2011a. A Comparative Study of the Majjhima-nikāya.
Taipei: Dharma Drum Publishing Corporation.
Deleanu, Florin. 2006. The Chapter on the Mundane Path (Laukikamār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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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195

Abstract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Daniel M. Stuart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Columbia)

The second to fourth-century CE Buddhist Sanskrit text, the Saddharma-


smṛtyupasthānasūtra, allows scholars a glimpse into a largely unstudied
early cult of Buddhist meditation practitioners (yogācāra). The text’s
theoretical engagement with the path of Buddhist practice reveals an
expansive vision of spiritual power founded on ethical mastery and
culminating in powerful forms of insight knowledge. I argue that the text
represents an explicit and unique attempt to theorize a Buddha’s
omniscience and the path leading to such omniscience. Employing specific
Buddhist insight practices as foundational for cultivating such knowledge,
the regime of practice outlined in the Saddharmasmṛtyupasthānasūtra
allows a Buddhist practitioner to experientially negotiate a variety of
196 불교학리뷰 vol.18

epistemological registers, from the ethical to the deconstructive, and to


thereby acquire knowledge of the reality that serves as a powerful force in
the development of cosmic sovereignty, Buddha-like power. I show how
this theorization about Buddhist practice, knowledge, and power is carried
out by drawing on traditional canonical textual sources and pushing beyond
them in a layered narrative that figures the yogācāra practitioner as a
powerful conduit of a Buddhist contemplative metaknowledge approaching
omniscience.

Key Words: meditation practice, yogācāra, Saddharmasmṛtyupasthānasūtra,


omniscience, power, knowledge

2015년 11월 1일 투고
2015년 11월 23일 심사완료
2015년 11월 30일 게재확정
번 역

①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


정적靜寂주의 논쟁(VI)
폴 드미에빌
김성철, 배재형, 차상엽 역

② 연민과 공성 - 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Lambert Schmithausen(람버트 슈미트하우젠)
사이토 나오키(齊藤直樹) 일역, 양영순 역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 VI)*
폴 드미에빌 (Collège de France, 1894~1979)
(중국학 및 중국문학 교수)

역자_김성철 (금강대 불문연 HK교수)

배재형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차상엽 (금강대 불문연 HK교수)

티벳 점령기 둔황의 어느 중국인 절도사가 쓴 필사본 단편들

[1] [티벳 왕에게 올리는] 상서上書. 금관과 은곽에 담긴 사리 도합 137


“두”가 사주의 모某 불교 사원에서 왔음을 왕에게 고하기 위함.1)

“신하”2)라 자칭하는 글쓴이는 성스러운 유골들(“사리śarīra”)에 전적인 존

* 이 번역은 「라싸 종교회의: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뺷불


교학리뷰뺸 17(2015.6), 171-188)에 이어지는 번역이다. 이 책과 번역의 의의에 대해서는 뺷불교
학리뷰뺸 9(2011.06), 267 참조. 이번 호에는 티베트 점령기 둔황의 절도사가 티베트 왕과 재상
등에게 보내는 편지 18편을 번역한 부분을 실었다.

불교학리뷰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18권 (2015. 12) 199p~260p
200 불교학리뷰 vol.18

경을 표함으로써 글을 시작한다. 그는 이 유골들을 붓다 샤꺄무니의 유해로,


붓다의 몸이 바뀐 결과3)로 규정한다. 총 84두斗4)를 헤아리는데 그 중 일부는
천룡天龍들의 사원에 모셔졌던 것이고 나머지는 재가자와 성자들이 건립한
탑들 안에 보존돼 있던 것이다. 그 모양이 쌀이나 곡식의 낱알처럼 둥글고 빛
깔은 마치 금분金粉처럼 반짝이며, 아주 단단해서 망치로도 불로도 물로도 부
술 수 없다.5) 사리에는 온갖 영험한 속성들이 있어서, 예를 들면 그 수나 양을
자유자재로 늘리거나 줄인다. 크게 상서로운 특성이 있어 사리의 발굴은 특히
왕들에게 길조로 여겨진다.1)2)3)4)5)
이어 글쓴이는 사주가 세워진 지 천년이 되었건만 부처님의 사리가 사주에
나타난 것은 겨우 100년 전이라고 말한다. 한 송이 연꽃의 이름을 딴 어느 사
원에 이 사리의 명칭을 그대로 갖다 쓴 탑이 있고,6) 사원 본전本殿과 성소의

1) (문서 제목) 謹啓沙州寺舍利骨一百三十七粒幷金棺銀槨盛全. 문서의 연대는 794년으로 추정된


다.(본서 256, n. 2)
2) 臣.
3) 化而爲之. 이 유골들이 화신(化身, nirmāṇakāya)의 결과라는 이야기다. 다른 한편 극동지역에서
는 이 유골에 어떤 효험과 영험한 속성이 있다고들 여긴다.
4) 都八斛四升. “파인트pinte[액체의 양을 재는 옛 단위로 0.93리터에 해당하지만 이 수치는 영미권
의 경우 나라마다 상이하다.(역자)]”에 상당하는 升은 “브와소boisseau[곡물의 양을 재는 옛 단위
(역자)]”에 해당하는 斗의 오식이고, 이 숫자는 84두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84는 뺷佛母般尼洹
經뺸(뺷대정신수대장경뺸, no. 145, 870c)이 아쇼카왕의 8만 4천개 탑 안에 안치된 유골 사리를 가리
켜 쓴 숫자이기 때문이다. 뺷根本說一切有部毗奈耶雜事뺸(뺷대정신수대장경뺸, no. 1451, 제39권,
402b)에 따르면 붓다의 사리는 106두를 헤아리는데, 그 중 7개 부분은 남섬부주Jambudvīpa에 나
뉘어 보내졌고 8번째 부분은 라마그라마Rāmagrāma의 용왕nāgarāja들의 궁전에 보존되어 있다.
5) 形圓粟粒, 色暎金砂. 堅勁不碎於砧鎚, 焚漂罔滅於水火. 극동에서 통상 붓다의 사리를 묘사할 때 쓰
는 표현이 이 구절에 요약돼 있다. 붓다의 사리들은 항상 “과顆”(매끈한 작은 알갱이들)로 그 수를
헤아린다. 나가이 고토長井古藤는 사리 숭배에 대한 한 연구(뺷宗敎硏究뺸, II, iv, 1925년 7월, 94 이
하)에서 이 표현의 기원을 추적하면서 śarīra ― 사망했으되 부패되지 않은 “시신” ― 와 dhātu, 즉
화장하고 남은 시신의 “꽃망울 같고 매끈한 진주 같고 금분 같은” “조각들”을 구분하는 뺷長部經典
注뺸Sumaṅgala-vilāsinī를 예로 든다.
6) 분명 련대사蓮臺寺의 사리탑舍利塔을 말하는 것이다. 련대사는 슈타인 필사본 2729번의, 티벳 점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01

영향이 달과 별처럼 주州 전역에 두루 미치는 동안 사리가 담긴 금관은 다시


은곽에 담겨7) 이 탑 아래 땅 속 깊이 묻혀 있었다.8) 그런데 근자에 요새를 수
비하는 병사들이 어느 날 아침 단순한 연기煙氣가 아닌 어떤 상서로운 기운을
보는가 하면, 어느 날 밤엔가는 성벽에 오른 관속들이 기이한 빛을 목격하기도
했다. 상서로운 전조가 나타난 마을을 기리고저 고승 한 명이 멀리서 왔다.9)
우리는 성심으로 (티벳의 왕을 위해) 고승에게 사리를 한 “두”도 빠뜨리지 않
고 전한다. 이런 자연적 기적은 왕의 덕치를 기리기 위해 일어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고, 이런 성스러운 유물은 되살아난 법法의 햇살을 더욱 빛나게 하
는 데 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토록 희유한 일이
이 후미진 곳에서 일어났을 것이며, 어찌 불교가 바다 안쪽에 (티벳 깊숙이까
지) 널리 퍼졌겠는가?10)
글쓴이의 말은 계속된다. 둔황이 티벳 왕의 위세에 부복한 지 8년이 흘렀고

령기 둔황 사원들의 목록 가운데 언급된 사원이다.(L. Giles, B. S. O. S., IX, 23과 1039 참조.) 천
불동의 한 석굴 벽면에 그려진 벽화에 “窟禪蓮臺寺釋門法律福遂…”(부수, 한 석굴 안[에 자리한]
선[찰] 련대사의 부처님 법과 율의 [대가])라는 봉헌 비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사원은 천불동 중
한 곳 안에 있었던 것 같다. 石岩, 뺷敦煌石室畵象題識뺸(본서 161, n. 3), 5a 참조. 석암이 이 책의 서
문 16a에서 이 사원의 조성 연대를 오대五代로 추정했던 이유에 대해선 아는 바 없다.
7) 819년 장안에 도착해 한유韓愈의 유명한 고언을 샀던 사리(붓다의 손가락 뼈 여덟 “두”)도 금과 은
으로 만든 이중 “관” 속에 담겨 있었다. 이 관들은 붓다의 사리를 위해 660년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어느 황후가 그 비용을 댔다.(뺷法苑珠林뺸, 뺷대정신수대장경뺸, no. 2122, 제38권, 587a) 지금 우리
가 보고 있는 이 서신에서 “금”과 “은”으로 만들었다는 수식어들은 문체상의 관용어구일 공산이
크다.
8) 且沙州置經千祀, 舍利出纔百年. 寺因蓮花而建名. 塔從舍利而爲號. 金棺銀槨, 葬於九地之中. 月殿
星宮, 鎭乎一州之內.
9) 昨者官軍壓壘, 朝見非煙之祥. 人吏登陴, 夜覩毫光之異. 果得高僧, 遠降象駕來儀. 멀리서 온 고승
이란 물론 티벳의 왕궁에서 온 승려를 말한다.
10) 表以精誠, 無遣[遺로 읽음]顆粒. 自然靈物, 應代照 贊普德化之年. 聖迹呈祥, 明像法重興之日. 不
然, 希有之事, 豈現於荒陬? 無爲之宗, 流行於海內? “바다 안쪽”이란 이 세계(天下)다. 티벳의 군
주에게 올리는 서신이니, 그의 나라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202 불교학리뷰 vol.18

그새 둔황 백성들은 입술에 피를 바르면서 맹세를 거듭하길 세 번, 그러나 여


러 번 반복해서 의심과 우려가 일었으니 그때마다 군대가 움직였다.11) 감히 하
늘에 맞서는 자는 결국 땅에 쓰러질 것이다. 그리하여 항복과 저항 사이에서
머뭇거린 탓에 우리가 겹겹이 포위당했던 것이고,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
는 탓에 1만이나 되는 사망자가 났던 것이다.12)
엎드려 아뢰길, 우리를 진흙탕과 불타는 숯 속에 던져 넣지13) 않으려는 (티
벳) 재상들의 선의를 믿는다. 폐하의 위대한 나라에서 백성들은 생명을 사랑한
다.14) 우리 역시 포승줄과 감옥을 면하길 바란다. 성스럽고 신성한 티벳 왕께
서 그 명을 어겼던 자들의 처형을 면해주시고 왕궁에 경의를 표하지 않는 죄를
범한 자들에게 관용을 베푸시길! 바로 이것이 엎드려 절하기를 거듭하며 죽을
죄를 참회하는 이 서신의 작자가 소망하는 바다.15)
작자는 유골 사리를 세 명의 비구― 그 중 한 명의 이름은 사자후Siṁhanāda
다 ― 에게 맡겨 왕에게 바치도록 한다고 밝힌다. 그리고는 왕의 영원한 영광
을 위해, 왕이 정복한 지역에 베푸는 호의로서 완전한 사면령을 내려달라고 간
청한다. 작자는 왕에게 복의 한없는 증장이 있을 것이라며 승니들의 여러 수계
식에 왕림해 수계를 해달라고 왕을 초대하기도 한다. 이로 말미암아 왕은 위로

11) 입술에 피를 바르는 이 맹세는 불교 도입 이전 티벳의 의식에 따른 것이었다.(본서 229, n. 6) 여기


서 둔황 절도사가 에둘러 말한 무장 반란은 분명 787년으로 추정했던 둔황의 공식적 항복(본서
177) 이후의 일이었다. 이 항복이 8년 전의 일이니, 이 서신의 연대는 794년으로 봐야 한다.
12) 自燉煌歸化, 向歷八年. 歃血尋盟, 前後三度. 頻招猜忌, 屢發兵戈. 豈敢違天, 終當致地? 仿偟依拒,
陷在重圍. 進退無由, 甘從万死.
13) 도탄에 빠진 백성의 모습. 뺷書經뺸, Couvreur 옮김, 104. Maspero, Ml. posth., II, 159, n. 2 참조.
14) 생명에 대한 사랑은 중국에서 군주의 덕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그것은 특히 역도들에 대한 관
용으로 나타난다. 뺷書經뺸, Couvreur 옮김, 38 참조. “중하다고 의심되는 죄를 가벼이 다루고 그
경중이 분명치 않은 공로를 크게 다루십니다. 자칫 무고한 자를 처형하게 되느니 차라리 법의 집
행을 소홀히 하십니다. 이렇듯 생명을 아끼시니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것입니다.”
15) 伏賴宰相守信, 使无塗炭之憂. 大國好生, 庶免纍囚之苦. 伏惟 聖神贊普[…]寬違 命之誅, 捨不庭之
罪. 臣厶誠歡誠喜, 頓首頓首, 死罪死罪.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03

는 부처님의 뜻과 아래로는 백성들의 마음과 같음을 보이게 될 것이다. 마지막


으로 작자는 자신이 “사막의 관문”의 절도사라는 미천한 임무에 붙들려 있어
왕궁에 하례를 드리러 갈 수 없음에 용서를 구한다. 작자는 왕에 대한 찬사와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마음을 표하고, 존경과 두려움과 죄스러움을 담은 예
의 근언으로 상서를 마친다.16)

[2] [티벳의 모 재상에게 보내는] 출가 허락을 얻기 위한 청원서.17)

작자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어떻게 채식을 해왔는지 상기시키는 것으로 글


을 시작한다. 청년이 되어서는 불가의 전적들, 경經과 논論을 암송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긴 세월 동안 꾸준히 재계齋戒를 지켜왔다. (불사佛事에 동참하
기 위해) 가족과 일신의 몸을 희생했다. 계속해서 그는 인생살이의 환멸을 묘
사한다. 그는 자신의 큰 열망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고향에서, 갑옷에 눌려 희
미해진 왕도를 일구는 데 힘쓰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조정18)과 백성에 대
해, 맡았던 공무를 다하기엔 자신이 한참 부족했으니 이는 부끄러운 일이다.19)

16) 其舍利骨, 先付僧師子吼等三人進. 伏乞大赦所獲之邑, 冀以永年之優. 廣度僧尼, 用益無疆之福.


庶得上契佛意, 下恊人心. 持望天恩允臣所請. 臣厶限以守官沙塞, 不獲稱慶闕庭. 無任喜慶, 爲國
祈福之至. 謹附表, 陳賀以聞. 臣厶誠歡誠懼, 頓首頓首, 死罪死罪. 謹言. “限以守官”, 즉 “지방 수
령의 임무에 묶여”라는 문구는 이 시기에 상급 기관에 올리는 공문서들 속에서는 일종의 의례적
관용구였던 것 같다. 이 문구는 약간 변형된 형태들로 이 문서의 다른 곳에서도 재발견된다.(색인
의 守 항목 참조.) 여기서는 守官(守는 상성자上聲字)을 “맡은 바 직분을 다한다.”는 일반적 의미
로 이해하면 안 될 것 같다. 그보다는 당대唐代에 주州를 다스리던 자들의 호칭들 중 하나인 태수
太守 같은, 지방 통치자를 가리킬 때 쓴 문어적 호칭인 (거성자去聲字) 守, 즉 “수령직職”의 의미
로 사용한 것 같다.(des Rotours, 뺷통보뺸, XXV, 263, 264, n. 1) 뺷遊仙窟뺸(서기 약 700년경), 루
쉰본魯迅本(1929), 62의 “王事有限, 不敢稽停…” 참조.
17) (제목 :) 狀請出家.
18) 여기서는 중국의 조정을 말하는 것 같다.
19) 右厶年在襁褓, 不食薰羶. 及乎佩角隽[觹로 읽음], 每誦經論. 持齋持戒, 積有歲年. 捐室捐軀, 累移星
紀. 豈期弘志未立, 王道驅馳? 空使黃髮於鄕關. 實慙紫綬於朝野.
204 불교학리뷰 vol.18

이 글의 수신자인 티벳의 재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를 얼마 전 사주에서


일을 돕는 자로 삼아주었다.20) 하지만 그도 어언 “이순耳順”의 나이, 예순에
이를 것이다.21) “수레를 매달아 놓는”(懸車) 때, 즉 물러나야 할 때가 머잖아
그에게 올 것이다. 그는 이미 일개 늙은이일 뿐, 나라에 바칠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22)
허나 불교의 홍포는 왕조의 거룩한 번영에 이로울 수밖에 없다. 그가 담曇
이라는 한 화상23)을 모신 지 이십년, 그 문하에서 그는 오랜 세월 경론을 공부
했다. 그는 인생이 얼마나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인지 안다. 아들 중 하나가 얼
마 전 부당한 해를 입은 탓에 그는 의지할 곳 하나 없이 버려져 혼자 남았다. 그
런 고로 출가하기 위해 사직을 청하니, 그가 가려는 경건한 길을 절대 막지 말
아달라고 재상에게 간청한다. 그는 재상 자신은 물론이고 해탈이란 대의를 위
하는 것이 될 조치에 감사함을 보이고자 몸을 바치고 만 번의 죽음을 감내할
각오가 돼 있다고 선언한다.24)

[3] 사직과 출가 승낙을 청하기 위해 티벳 왕에게 올리는 글

전편과 똑같은 목적을 내걸면서도 티벳 왕에게 올리는 공문서25) 형식을 띤

20) 近日相公, 不以庸鄙, 令介沙州. 相公은 宰相을 일컫는 호칭이다. 介는 (관리를 돕는) “조수”나 (중
국인과 티벳인들 사이의) “중재자”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후자의 의미는 여기서는 너무 엄격
한 것 같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 글의 작자가 둔황에서 티벳의 통치를 돕는 데 호출됨을 영광스럽
게 여겼다는 사실을 뜻하는, 단순한 공손함의 표현이다.
21) 뺷논어뺸, Couvreur 옮김, 뺷四書뺸, 77.
22) 將登耳順之年, 漸及懸車之日. 老夫耄矣. 誠無於[以로 읽음]供國用.
23) 曇和尙. 曇은 다르마dharma의 통상적인 트랜스크립션으로, 어느 중국인 승려의 범명梵名의 약
칭일 것이다.
24) 佛法興流, 庶裨益於聖祚. 厶便事曇和尙卄年. 經論之門, 久承訓習. 緬維生死之事, 迅若駃流. 昨緣
愚子枉被某害, 一身單獨, 擧目无依. 今請捨官出家. 伏相公无障聖道, 則小人與身報賀, 万死酬恩.
解脫之因, 伏望哀察.
25) 表, 奏.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05

이 단편의 완전한 제목은 이렇다. “사원 건립을 위해 집과 재물과 보화, 우마와


전답 등등을 불교 공동체의 지속적 안녕을 위해 보시하면서 사직하고 출가하
기 위함.”26)
고령의 독거노인, 공무상의 무능력, 불교에 대한 오랜 경험 등등, 이 글의 논
지 일부의 용어는 전편과 똑같다. 작자는 종교에 귀의할 뜻을 내보이면서 자신
이 스승의 지도로 선禪을 닦으며 불가의 절식節食 규정[때가 아닐 때 음식을
취하지 않는 것. 역자]과 도덕률을 항상 지켜왔음을 상기시킨다. 그는 자신의
집을 사원으로 바꿔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지면 티벳이 그에게 베푼 호의를 결
코 잊지 않고 티벳의 번영과 평안을 기원하겠노라 서원한다. 그는 “자줏빛 점
토”로 짓고 있는 어떤 건축물이 머잖아 완공되리라 기대하나 아직 그 이름을
받지 못했으니,27) 왕에게 자신의 요청에 호의적인 성지聖旨를 내려주십사 간
청한다.

[4] 전편과 비슷한 상서

이 단편의 제목에 따르면 작자는 둔황의 절도사다.28) 그는 화상 한 명 또는

26) 捨官出家, 幷施宅充寺, 資財馱馬田園等, 充爲常住. 승가 전체에 귀속하는 것으로, 개인이 양도할
수 없는 승가의 재산(常住僧物)에 대하여, 모치즈끼望月信亨, 뺷불교해설사전뺸, 2693 참조. 常住
僧物은 뺷小品뺸Cullavagga, VI, 15의 avissajjiya sanghika들이다.
27) 伏望紫埿修造向終, 名額未到. 이 글의 작자가 자신의 집 옆에 신축 중이었던 어떤 불교 건축물에
관한 이야기거나, 혹은 자신의 집을 사원으로 개조 중인데 중국 풍습에 따라 현판에 써넣을 이 사
원의 공식적 이름을 미처 하사받지 못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28) 沙州都上表. 특히 자사刺史들을 감독하는 무관이었다가 후에 절도사란 명칭으로 바뀐 도독都督
(“총독”)의 경우처럼, 많은 관직명에 都라는 단어가 보인다.(뺷辭海뺸. des Rotours, Traité des
fonctionnaires, 820) 이 단편의 좀 더 뒤(이어지는 하단의 주 참조.)에서 작자는 자신을 牧守流
沙, 즉 티벳인들을 대신해 “퀵샌드quick sand”(沙州, 사막의 관문)를 다스리는 자라고 밝힌다. 牧
守는 그가 자신을 태수太守나 자사로 여겼다는 이야기다. 都督이란 말은 아마 투르크어를 거쳐서
겠지만 티벳어(to-dog)가 되었으니, 한 중국인이 티벳인에게 소청의 글을 보내면서 자신을 지칭
하기 위해 都督의 약어를 썼을 가능성이 있다. 본서 197, n. 2 및 273, n. 2 참조.
206 불교학리뷰 vol.18

여럿이 티벳 왕의 전언을 갖고 와 그(들)편으로 하례 인사와 자신의 소망을 표


하는 것이라 고한다. 이어 그는 자신의 기력이 다했음을 하소연한다. 이 지역
이 티벳 “황제의” 위세에 굴복한 지 10년이 흘렀고, 그가 이 “류사流沙” 지역
을 다스린 지는 고작 2년 남짓이다.29) 황제가 그를 관직에 임명하면서, “백성
百城”의 임무, 즉 한 지역의 통치를 맡기면서 베푼 호의를 받을 자격이 그에겐
없었다.30)
이어서 그는 “널리 백성을 구제하면서 샤꺄Śākya의 가르침을 현양한” 티벳
왕의 불교적 덕행을 기린다.31) 그는 앞서의 단편들이 그렇듯 불자佛者로서의
자기 이력을 상기시킨다. 이제 그의 나이 57세다. 머리털이 빠지고 고독하며
가족도 후손도 없다. 분에 넘치게도 많은 녹봉과 높은 지위를 받아 이를 항상
부끄럽게 여겼다.32) 그는 “먹물 옷을 걸치게 해주십사” 왕의 허락을 간청하고,
그에 대한 감사의 뜻을 과장된 말로 미리 표한다.33)

[5] 자수로 만든 도상 외 다른 [선물들]을 바치고자 [티벳 왕에게 쓴 글]34)

작자는 자신의 주州가 산물이 빈약한 (중국의) 아주 먼 변경에 위치해 있음


을 밝힌다. 그는 군주에게 바칠 것이 조촐한 선물들밖에 없음에 용서를 구한다.
공덕을 얻길 바라면서 그가 왕에게 보내는 것들은 지역 토산물이 아니라 멀리
서 그에게 온 것으로,35) 여러 색의 자수로 만든 (성스러운) 도상이거나 목각상

29) 自歸皇化, 向歷十年. 牧守流沙, 纔經兩翡[稔의 오기]. 流沙는 둔황 지역의 모래사막 지대를 말한
다. 연대에 관해선 본서 275 참조.
30) 承乏備員, 實將尸素. 爲政之道, 字養無方. 虛蒙萬里之恩. 猥忝百城之任. “百城”이란 100개 성城
의 도독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고 말해진 한 인물, 북량北涼 왕조의 어느 지방 도독에 빗대어 말
한 것이다.(뺷南史뺸, 제56권, 8a)
31) 伏維 聖神贊普, 弘揚釋敎, 大濟蒸人.
32) 彌慙重祿, 尙荷崇班. 處官位, 乃知策无能. 効駈馳, 則以䈥[筋의 속자]力不逮.
33) 伏望矜臣老朽, 許臣披緇. 剖心銘肌, 萬死之誠 ….
34) (제목 :) 進繡像等.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07

들이다. 이미 약간 오래된 것이지만 그 솜씨는 훌륭하다. 작자는 한 통의 상서


와 함께 이것들을 궁으로 돌아가는 어떤 승려(일행)편에 왕에게 보내려 한다.36)

[6] 모 (티벳인) 상관에게 보내는 서한37)

절기상의 의례적 인사말38)에 따르면 이 서한을 쓴 시기는 8월이다. 그렇다


면 이 서한이 있을 자리는 여기가 아닌 것 같다. 시기 순으로 보아 좀 더 뒤에, 8
번째와 9번째 필사본 사이에 있어야 했다. (필사본 자체에는 일련번호가 없다.)
작자는 당일 전령이 갖고 온 서한을 받았다고 알린다. 그 서한의 발신자는
주(둔황)의 실정을 물었다. 백성의 먼 앞일을 우려하고 부지런히 관료들을 살
피는 것은 추호도 악의에서가 아니라 모든 반란의 진압을 독려하고 주민들의
화평을 도모하기 위함이라.39) 이에 대한 회답으로 작자는 자신의 충절과 열성
을 맹세하고 몸을 낮춰 무능함을 부각시킨다. 작자는 모 (티벳인) 절도사에게
알리니 그 절도사가 백성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신임 티벳인) 유후사留後使
한 명을 파견했다고 고한다. 주州는 (지금) 지극히 평온하다. 주민들이 수확에
열중하니 더 이상의 소란은 없다. 편지 말미의 인사말에서 작자는 자신을 자사
로 칭한다.40)

35) 중국 내지內地에서 온 것이란 이야기가 틀림없다. 右臣州居極邊, 素無物産. 雖心効葵藿, 願欲獻


芹, 徒懷萬里之誠, 難辜九重之聖. 前件功德等, 皆自遠而來, 非當土所有. 보시를 가리키는 공덕
(功德, guṇa)이란 말은 공덕주(功德主, dānapati)나 공덕료(功德料, 삼보에 봉헌한 물건들) 같은
용어들 속에도 보인다.
36) 輒煩天聽, 用表愚誠. 謹因僧歸朝, 奉進以聞. 謹進, 厶年厶月厶日, 臣厶進.
37) 제목은 없다. 서한문書翰文이고 공식적 보고서는 아니다.
38) 仲秋漸凉.
39) 今月 日使至奉書尉問, 遠念黎庶, 知不附邪, 早察官寮, 以順討逆, 俾四人康業, 一州權安.
40) 尋申留後使, 蒙節兒至. 安存百姓, 州府底寧. 勉力收穫, 更无驚擾. 伏維昭察. 卑守有限. 拜奉. 謹奉
啓起居. 謹啓. 유후사留後使는 당나라 말 무렵(777년 이후) 군軍 절도사들의 명칭으로, 정식 임명
된 절도사(도道의 군사 통수권자)들이 공석일 때 그 직위를 대신하는 자들로 여겨졌다. 그러나 실
제로는, 유후사들은 제멋대로이기 일쑤였고 승인을 받을 것이란 기대 속에서 스스로 절도사라 여
208 불교학리뷰 vol.18

[7] 벗에게 쓴 편지

공무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이 단편에서 작자는 수취인에게 “황제의 일”(皇


事)이 언제 자신을 “옛집으로” 돌아가게(返故居) 해줄지 묻는다. 그는 수취인
에게 둔황의 기후가 몸에 해롭고 자신의 건강이 나쁘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다.

[8] 티벳의 재상에게 올리는 보고서41)

7월에 작성된 이 보고서는 절기상의 의례적 인사와 복의 기원으로 시작한


다. 작자는 말한다. 수취인(또는 왕)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사주는 그동안 수차
례 거듭해서 “[풍속을] 바꾸려는 왕의 위력”에, 다시 말해 티벳의 통치에 저항
했습니다. 전쟁은 이제 겨우 끝났고 백성들은 다소나마 마음을 놓았으며 여러
관리들은 정성으로 백성을 돌보았으니, (티벳의 통치) 덕분에 2년이 채 안 되
어 각자 생업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만 지난 해 범국충氾國忠이란 자와 그 무리
들이 한해瀚海42) 사막으로 도주할 궁리를 했습니다. 일전에 이를 아뢰니 대신

겼다.(des Rotours, Traité des Examens, 25, n. 1과 355. Traité des fonctionnaires, 825, n. 2 참
조.) 이 글에서 유후사로 불린 티벳인은 과주에 주재해 있었다.(본서 264, n. 1) 節兒는 “정식 인가
받은 전권사절”인 使持節 또는 持節의 약칭일 것이다. (使)持節은 자사나 지방 군정을 담당한 여
타 관리들에게 추가로 부여되는 직함(加號)들이었다. 뺷辭海뺸(뺷卯集뺸, 114)는 이 직함들이 절도
사 제도가 만들어지는 8세기 초반 이후 폐지되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894년의 어느 비문에 등장
하는 세 인물, 각각 사주와 과주와 감주의 자사였던 이들의 관직명 첫머리에 여전히 使持節이란
형용어구가 보인다.(Chavannes, Dix inscriptions…, 92~94) 여기 나온 節兒란 용어는 상급자인
과주 절도사가 둔황에 파견한 티벳인 사절의 존칭일지도 모른다.(본서 264, n. 1 참조.) 하지만 단
순하게, 중국인들이 몇몇 티벳인 군정 관할자에게 붙인 직함인 절도사의 약칭으로 보는 편이 더
그럴듯하다.(본서 264, n. 2 참조.) 節兒蕃使에서 使의 용법도 바로 그럴 것이다.(본서 272, n. 1)
卑守有限, 즉 “자사로서 미천한 소인의 직무에 매여”란 표현에 대해선 본서 257, n. 1을 참조.
41) 무제.
42) 瀚海라는 명칭은 일찍이 바이칼 호를 가리켰던 것으로 보이지만 나중에는 몽골사막 일대, 또는
더 구체적으로 그 중 위구르족이 점령한 북서부 지역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당태종(627~649)은
이곳에 부府를 설치했었다.(Chavannes, Documents…, 21, n. 1, 91) 663년부터 669년까지 중국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09

께서 그들을 벌하기 위해 주천(酒泉, 肅州)으로 유배 보낸 일이 있습니다.43)


하지만 천 리44) 밖 그곳에서 그들은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리라고 누가 짐
작이나 했겠습니까?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듯 (그들이 사주성을 습격했으니)
야심한 밤 겹겹이 쌓은 성벽45)을 넘어와 티벳인 관원들을 도륙했고, 가짜 (옥
관玉關) 역호驛戶46)인 형흥邢興을 세워 탁발拓拔 왕자를 자처했습니다.47)

인들이 위구르족 거주 지역에 설치한 도호부都護府도 이 이름으로 불렀다.(des Rotours, 뺷통보뺸,


XXV, 252) 703년부터 한해군瀚海軍이라 불린 군대는 북정北庭(투르판 지역 구청쯔古城子 인
근의 Bechbalik[: 우름치Urumchi 부근. 그러나 오늘날엔 비슈발릭Bishbalik 또는 別失八里로
읽고 표기한다. 역자]. des Rotours, Traité des fonctionnaires, 803, n. 2)에 주둔했었다. 자일즈
Giles가 펴낸(B. S. O. S., VI, 934) 9세기의 지리 관련 필사본 단편 역시 이 군대를 언급하는데,
이 단편에서 한해군은 정주(庭州, Bechbalik)에 위치해 있다. 범국충(본서 269~272)과 관련해
서, 필사본에는 氾忠國으로 잘못 표기돼 있다.
43) 遠申相府, 罰配酒泉. 配(流配)는 추방형이다. 최근에 그 옛 이름을 되찾은 酒泉은 만청시대의 숙
주肅州로, 둔황에서 300km 정도 떨어져 있다.
44) 사주에서 숙주까지의 거리를 어림잡아 표현한 것이다. (뺷원화군현지뺸, 제40권, 8b에 따르면 사주
와 숙주의 거리는 780리다.)
45) 重城. 본서 271, n. 2 및 Pelliot, 뺷유고뺸Œuvres posthumes, III, 126, n. 2 참조.
46) 본서 269, n. 1 참조.
47) 豈期千里爲謀, 重城夜越. 有同天落, 戕殺蕃官. 僞立驛戶邢興, 揚言拓拔王子. 탁발拓拔이란 성씨
姓氏는 선비鮮卑 혈통의 한 부족의 이름으로, 그 투르크어 명칭(Tabγać)과 후위後魏 왕조
(386~534)를 중국에 전해주었고 당대唐代에도 중국 서북면 일대에 두루 퍼져 있었다. 탁발씨 선
비의 한 지파支派는 4세기 말부터 중국 서북면으로 이주했었는데 남량南涼(397~414) 왕조를 세
운 독발부禿髮部가 바로 그들이다.(P. A. Boodberg, “The Language of the T’o-pa Wei”, H. J.
A. S., I, 168 참조.) 뺷五代史記뺸, 제74권, 1b에 따르면 탁발족은 감숙과 청해호에 정착한 선비족
의 또 다른 부족 토욕혼吐谷渾의 명문대가족들 중 하나가 되었다. 9세기 중반 감숙과 청해호 일대
에서 티벳인들 간의 내전에 참여했던 무장들 중 한 명으로, 론공열論恐熱에 반대한 상비비尙婢婢
휘하에서 싸우다 866년에 론공열을 죽였고, 중국과 맹약을 맺은 뒤 그 수급을 장안에 보냈던 자
는 탁발회광拓拔懷光이라 불렸다.(뺷당서뺸, 제216권하, 7b. 버쉘역, 524. 뺷자치통감뺸, 제248권,
27b~28a와 제249권, 29b, 30b와 제250권, 47b) 이 자는 십중팔구 토욕혼인이었다. 730년 운양
雲陽(지금의 섬서성 빈현邠縣, 장안 북서쪽) 태생인 유명한 순례자 오공悟空은 자칭 후위 탁발씨
의 후손이라던 차車씨 가문 출신이었다.(Lévi-Chavannes, J. As., 1895, II, 342) 786년 또는 787
년에 티벳인들은 섬서성 북쪽 어얼둬쓰Ordos 지역의 하주夏州에서 당나라 자사 한 명을 내쫓았
210 불교학리뷰 vol.18

그들이 백성을 핍박하여 그 위력에 대한 공포심을 퍼뜨렸으니, (형체와) 빛깔


을 분간할 수 없고 깊은지 얕은지도 가늠 안 되는 야심한 밤이면 군졸과 주민
들은 겁에 질려 저마다 몸을 숨겼습니다.48) 마침 나라49)의 대덕bhadanta께서
성내에 계셔 부상이나 해를 입으셨을까 두려워, 소인이 달려가 이를 알렸고 죽
든 살든 같이 있을 은신처를 찾았습니다. (또는 그리 할 것을 권했습니다.) 새
벽녘에 소인이 나와 뿔뿔이 보루로 내려온 수하들을 불러 모았고, 흩어지지 말
것을 명하면서 군졸들을 규합했습니다. 맹세컨대 소인은 (티벳인) 관원들을 구
했습니다. 저희가 아문衙門에 당도했을 때 그곳은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습
니다. 곧장 발길을 돌린 저희는 소요를 일으킨 주모자들을 잡기 위해 매복했습
니다. 이 비적 떼들 중 일곱은 하늘이 친 그물을 한 발자국도 빠져나가지 못했
고, 대덕 마하연 앞에서 추문을 당했습니다. 저희는 본거지50)에 대해 낱낱이
캐물어 과주에 고했습니다. 어제 저희는 이 비적들을 밧줄로 길게 묶고51) 칼을
씌워 관원 한 명을 붙여 보내면서 삼엄한 감시 하에 인솔하도록 했습니다.52)

는데, 그 자사의 이름이 탁발건휘拓拔乾暉(뺷구뺸, 제196권하, 4a. 버쉘역, 493. 버쉘은 이 이름을
빠뜨렸다. 뺷당서뺸, 제216권하, 2b) 또는 탁발조요拓拔朝曜(뺷당회요뺸, 제97권, 9a)였다. 대대로
하주를 다스려온 이 어얼둬쓰의 탁발씨들은 당항족(黨項族, 탕구트족. 언어학적으로 티벳족과
유사함)에 속했었다. 당항족은 가장 강력한 부족이었다.(뺷당서뺸, 제221권상, 1b) 송대宋代에 서
하西夏 왕국을 세웠던 이들이 바로 당항족이다. 몇몇 계보학자와 역사가들은 이 왕국을 후위 탁
발씨의 후예들이 세운 것으로 본다.(Chavannes, Dix inscriptions, 13, n. 1) Eberhard, Das
Toba-Reich Nordchinas, 332~382와 Stein, “Mi-ñag et Si-hia”, Actes du XXIe Congrès Int.
des Or., Paris, 1949, 266도 볼 것.
48) 迫脅人庶, 張皇兵威. 夜色不分, 深淺莫測. 卒人芒怕, 各自潛藏.
49) 國이란 글자 앞에 경의를 표하는 공백을 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나라는 티벳을 가리킨다. 德은
bhadanta의 번역으로 “높은 덕을 지녔다”는 뜻의 大德이다.
50) 具中衙帳. 中은 마땅히 申자여야 한다. 衙帳은 틀림없는 일종의 군사령부일 것이다. 摩란 글자 뒤
에 더해 訶衍이란 문자가 (필적은 같고) 더 작은 크기로 적혀 있다.
51) 索은 과주의 행정 당국이 사주에 사람을 보내 죄인들을 찾게 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52) 爲 國德在城, 恐被傷害, 厶走報迴避, 共同死生. 及至天明, 厶出招集所由, 分頭下堡, 收令不散, 誓
救諸官. 厶比至衙門, 已投烈火. 遂即旋踵, 設伏摛姦. 其賊七人不漏天網, 並對大德摩訶衍推問. 具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11

이런 일들이 있은 후 (과주의 티벳인) 유후사는 사주에 (암살당한 전임자를 대


신하기 위한 티벳인) 신임 전권사절을 파견하려 했습니다.53) 백성들은 전적
으로 평온합니다. 저마다 농사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동도東道”의 “군주
軍州”에선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이 보고서는 격식을 갖춘 의례적 문구로 끝
난다.54)

中衙帳, 幷報瓜州. 昨索賊釘枷, 差官銅送. 銅은 錮의 오식이다.(본서 267, n. 2 참조) 錮는 禁錮나


錮身 같은 표현들 속에서 “감옥에 넣다, 가두다, 칼을 씌우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53) 訖已, 蒙留後使差新節兒到沙州. 본서 261, n. 2 참조.
54) 百姓具安, 各就豐[農으로 읽음]務. 其東道軍州, 不報消息. 伏惟昭[照로 읽음]察, 卑守有限. 군주
軍州란 용어는 아마 티벳의 군부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뺷당서뺸, 제67권, 1a에 하서의 절도사가
710년에 만들어졌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 명칭 안에 군주란 용어가 복수 형태로 들어 있다.(河西
諸軍州節度) 그러나 이와타Iwata(뺷동양학보뺸, 제23권, ii, 116a)에 따르면 이 경우 軍州는 “하서
의 군대와 주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서의 절도사는 양주, 감주, 숙주, 이주伊州, 과
주, 사주, 서주西州 등 하서의 일곱 개 주들 외에도 여러 군대를 관장했기 때문이다.
동도東道란 티벳 제국의 거대 행정구역 내지 군사구역들 가운데 어느 한 중심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도道는 당나라 시대에 중국 지방들의 명칭이었다. 이 지방들 중 일부는 예컨대 산남도山
南道처럼 동도東道와 서도西道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롱우와 하서 같은 북서부 지방들의 경우
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동도”란 말은 마땅히 티벳 제국의 틀 안에서 이해해야지, 티벳인들이
나 그들의 중국인 신하들이 중국의 행정지역 용어를 갖다 쓴 것으로 봐선 안 된다. 이 道란 단어
는 8세기 초 무렵부터 중국에서, 절도사들이 다스린 변경에 위치한 군사 지역들을 가리키는 말
로도 쓰였다. 이 지역 국경 수비대를 통솔한 자들이 절도사였다. 글자의 발음이나 형태가 같긴 하
지만 이 군사 지역들(道)은 적어도 얼마 동안은 행정 지역명(道)과 구별됐던 것으로 보인다.(des
Rotours, Traité des fonctionnaires, 786 이하 참조)
한문 전적들이 道라 일컫는 티벳의 지역들은 군軍 관부들로 나뉘어 있었던 것 같고, 이 관부들을
가리키는 말이 한문 전적들에 나온 節度(使)인 것 같다.(본서 240, n. 6 참조) 뺷책부원귀뺸, 제961
권, 吐蕃傳, 17a에 따르면 쏭짼감뽀가 티벳을 통일했던 당시(呑倂諸蕃) 그 영토가 평방 천리에 달
했는데, 그는 열 곳의 절도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 매 단위마다 고위급 대신들에게 그 통치를 맡겼
다 한다.(每十節度置一上相統之) 768년 직전에 아마 유명한 상걸심아(샹 티쑴제. 본서 288, n. 3
참조)의 부친이었을 상찬마尙贊摩는 상실결尙悉結을 이어 東面節度使專河隴이 되었다.(뺷당서뺸,
제216권하, 1a. 버쉘 번역, 482) 762년 무렵 숙주(지금의 감숙성 주천酒泉)의 중국인 자사가 상
찬마에게 쓴 어느 서신에서는 이 인물을 일컬어 “동쪽 도道의 여러 절節([度使])들을 쥐고 있었
던, 티벳 왕의 중요한 신하들 중 한 사람”(본서 299, n. 2 참조)이라고 했다. 789년 당나라 군대는
212 불교학리뷰 vol.18

휴주爪州 지역(지금의 사천성)에서 청해와 엽성獵城의 “티벳인 절도” 두 명에게 패전을 안겼다.
(吐蕃靑海獵城二節度. 뺷구뺸, 제196권하, 7a. 버쉘 번역, 503. 엽獵 대신 납臘을 쓰기도 할 것이다.
다른 곳에서 발견된 명칭은 그렇다.) 800년에 당나라 무장 위고韋臯는 티벳인 수장 마정덕馬定德
의 항복을 받았는데, 마정덕의 직함은 영롱관嬰籠官으로 낭공[,] 납성 등 아홉 개 절도사를 다스
리던 자였다.(吐蕃酋師[帥로 교정]兼監統曩貢臘城等九節度使?籠官馬定德. 뺷구뺸, 제196권하, 8b.
버쉘 번역, 509. 뺷당뺸, 제216권하, 4b. 뺷구뺸, 제140권, 위고전傳, 2a 및 뺷당뺸, 제158권, 2a 참조.
뺷자뺸, 제236권, 36a) 籠자 앞의 嬰자는 오식일 공산이 크고, 쓸데없이 덧붙여진 글자임에 틀림없
다. (백납본 뺷구당서뺸, 열전列傳, 제146권하, 11b, 14~12a, 1에는 또 다른 글자 하나, 아니 더 정
확히 말해 이해할 수 없는 글자 두 개가 나온다. 이 글자들 역시 오식으로 봐야 할 것이다.) 농관籠
官이란 용어는 한문 문헌들 속에서 티벳인 관리들을 가리키는 말로 재차 등장하곤 한다. 776년
“대롱관大籠官” 한 명이 포로로 잡힌다.(뺷당서뺸, 제216권하, 1b. 버쉘 번역, 484) 789년에는 45
명(뺷구뺸, 제146권하, 7a. 버쉘 번역, 503)을, 797년에는 7명(뺷구뺸, 제216권하, 8a. 버쉘 번역,
507. 뺷당회요뺸, 제97권, 10b. 뺷책부원귀뺸, 제987권, 4b)을 생포한다. 거기다 티벳인들에 맞선 21
년간의 원정 중 1,500명의 절도節度와 도독都督과 성주城主와 농관을 포로로 잡거나 죽였다는
위고의 말도 있다.[뺷당서뺸, 제158권, 2b] 어쨌거나 마정덕에 관한 이야기에서 관련 인물은 버쉘
의 번역이나 뺷구당서뺸 백납본에 따르면 마치 두 명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단 한 명일 것이다.
802년에 위고는 사천성 유주維州 앞에서 “내정을 담당한 대상 겸 동쪽 변경 지역 다섯 개 도의 절
도병마사이자 유목민들의 통솔자”(內大相兼東境五道節度兵馬使都統羣牧大使)란 직책에 있던
티벳인 수령 론망열(論莽熱, 뢴망세르Blon Maṅ-bźer)을 생포하기도 했다.(뺷구뺸, 제196권하,
9a. 버쉘 번역, 510. 뺷구뺸, 제140권, 2b. 뺷당서뺸, 제158권, 2a. 뺷자뺸, 236권, 37b. 뺷책뺸, 제987권,
6a. Laufer, 뺷통보뺸, XV, 82, n. 3에 따르면 론망열은 인명人名이 아니라 內大相, blon maṅ-bźer
이란 직함의 트랜스크립션이다. 과연 뺷당서뺸, 제216권상, 1a에서 중국어로 內相인 낭뢴첸뽀
naṅ-blon čhe[n]-po[曩論掣逋]의 직함들 중 하나를 옮겨적을 때 나오는 용어가 바로 이 트랜스
크립션, 論莽熱이다.) 뺷당서뺸, 제216권하, 4b, 11에는 “동쪽 변경” 대신 “松州”라는 다른 형태로
나온다.(兼松州五道節度 운운) 송주는 감숙성의 경계 부근, 지금의 사천성 서북면 송반현성松潘
縣城 내에 자리하고 있었다. 티벳의 동쪽 “도절도(사)道節度(使)”는 바로 여기에 주재했을 것이
다. 821년의 어느 표문表文에서 왕애王涯는 그 옛날 송松이란 중국의 주가 있었던 성城이 오래
전부터 “티벳 절도”의 소재지였다고 고한다.(故松州城, 是吐蕃舊置節度之所, 뺷구뺸, 제169권, 4a,
1. 뺷책뺸, 제993권, 21b) 809년과 814년 사이에 (세랑드의) 사진 및 북정(北庭古城 지역)의 행군
과 (감숙甘肅의) 경주, 원주 등지의 중국인 절도사 주충량(四鎭北庭行軍涇原等州節度使 … 朱忠
亮)이 이웃한 티벳인 론결도리論結都離에게 보낸 한통의 서한(뺷백씨장경집뺸, 제40권, 30a~31b.
이 서한의 막연한 연대는 주충량의 전기에서 어림잡은 것이다. 뺷당서뺸, 제170권, 2b. 뺷구뺸, 제151
권, 3a)에서, 이 티벳인은 “大蕃東道節度使”란 직책으로 불린다. 뺷책부원귀뺸, 제980권, 15b는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13

812년 론고도論誥都(여기서 誥는 詰의 오식일 수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이는 앞선 서한 속 인물


과 동일인일지 모른다.), “티벳의 동도 절도, 재상(이기도 했던?) 상기심아(샹 티쑴제)”(吐蕃東道
節度論誥都宰相尙綺心兒)의 편지 한 통이 당나라 (장안 서쪽) 봉상鳳翔의 절도사 이유란李惟蘭
에게 발송된 일을 언급한다. 822년 유원정劉元鼎이 티벳에서 당번唐蕃 회맹조약을 체결하고 돌
아올 때, 하주河州(지금의 감숙성 임하臨夏, 청대淸代의 난주蘭州 남서쪽)를 지나는 길에 어느 티
벳 도원수都元帥의 영접을 받은 일이 있다. 이때 유원정에 대한 예우로 동쪽의 절도(사)들인 티벳
장수들 100인 이상이 대하천大夏川에 운집해 있었다.(뺷책뺸, 제981권, 19a, 東節度使. 뺷당뺸, 제
216권하, 6b. 버쉘 번역, 521, 東方節度.) 뺷책부원귀뺸에 따르면 상탑장(尙榻藏, 샹딱상Źaṅ
Stag-bzaṅ. 뺷당서뺸의 표기는 尙塔藏)이라 불린 이 도원수는 재상 상기심아(샹 티쑴제)와 다른 인
물이 아니었다.(卽蕃相尙綺心兒也) 뺷구당서뺸, 제196권하, 11a(버쉘 번역, 519)에 따르면 유원정
이 하주에서 티벳의 상서령尙書令이자 도원수인 상기심아(본서, 283 참조)를 만난 것은 그보다
앞서(初) 티벳에 갔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東道節度”란 직함은 849년, 중국이 북서지역을 탈환
하기 직전에 재등장한다. 이 해 벽두에 티벳의 동도절도사가 항복(뺷구뺸, 제196권하, 11b. 버쉘 번
역, 524)하거나 죽임을 당했다.(뺷자치통감고이뺸, 제22권, 7a~b에 인용된 사료들. 뺷자뺸, 제248권,
28b) 당시 중국에 항복했던 주들로 아마도 티벳의 이 동도절도가 다스렸을 지역들, 즉 진주秦州
(지금의 감숙성 천수天水현)와 원주原州(감숙성 고원固原현)와 안락주安樂州(녕하寧夏성 중위
中衛현)는 오늘날의 감숙성과 녕하성 남동부에 위치해 있었다.
토마스가 연구(J. R. A. S., 1933, 380. Tibetan Literary Texts…, I, 282 이하)한 티벳 문헌들에 따
르면 티벳 제국은 네 개의 루ru 또는 “뿔(角)”(이것이 티벳 관련 한문 문헌들에 등장하는 道일
까?)로 나뉘었고, 이들 각각은 다시 똥뾘stoṅ-dpon, 즉 천호千戶의 우두머리들(이들이 한문 문헌
에 등장하는 節度[使]들일까? 둔황 연보와 바코Bacot…, Documents…, 63과 69는 755년 둔황 지
역 똥사르(Stoṅ-sar, 東薩爾)에 세 명의 똥뾘을 임명했다고 언급한다.)이 통솔하는 똥데stoṅ-sde,
즉 “천 개의 부락(千戶縣)”으로 나뉘어 있었다. 당나라와의 국경은 왼쪽 지역(ru), 즉 남쪽 지역
(ru) 관할이었다. 793년 사천성 북서 지역에서 위고가 티벳인들에게 안긴 패배를 언급한 문헌이
티벳인 수령 론망열(blon maṅ-bźer)을 “南道元帥”란 직함으로 부른 것(뺷구뺸, 제196권하, 8a, 1.
버쉘 번역, 506. 뺷구뺸, 제140권, 2a, 3. 뺷당뺸, 제216권하, 4b, 1과 제158권, 1b, 13)은 제국의 이 편
제를 암시하는 것일까?
하지만 어쩌면 여기서 道는 어떤 지리적 구역이 아니라 그 본래의 뜻인 길(또는 진로chemin)의
의미로 쓰인 것일지 모른다. 道란 말은 중국에서도 군사용어로 길을 뜻한 경우가 간혹 있었다.
635년 당나라는 코코노르의 토욕혼인들에 대한 군사원정을 개시했다. 당시 코코노르 지역의 서
해도西海道, 적석도積石道, 선주도鄯州道 등 모든 이동로(道)마다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들
이 임명되었다.(뺷당뺸, 제193권, 5a, 토욕혼에 관한 장) 이는 물론 전장에 군대를 나누어 배치하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조금 후인 670년 토욕혼인들은 티벳인들의 공격을 받자 당나라에 도움을 청
214 불교학리뷰 vol.18

[9] 모 (티벳인) 상관에게 고함

이 단편이 작성된 때는 9월로 돼 있다. 서두와 말미의 정형구는, 그 수신자

했다. 당시 무장 한 명은 “라싸 원정길(道)에 오른 군대의 최고 지휘관”(邏娑道行軍大總管)으로,


다른 한 명은 “양주 원정길에 오른 군대의 최고 지휘관”(涼州行軍大總管)으로 임명되었다.(뺷구뺸,
제196권상, 3b. 버쉘 번역, 448. 뺷당뺸, 제216권상, 3a) 두 직함들 중 첫 번째에서 “邏娑道”의 道는
“길, 이동로”란 의미 외엔 달리 읽을 방법이 없다. 마찬가지로 676년에도 당나라 장수들이 “조주
원정길에 오른 군대의 원수들”(洮州道行軍元帥)로 임명되었고, “양주로의 원정길”(涼州道)에서
도 역시 그랬다.(뺷당뺸, 제216권상, 3a~b와 4a, 690년과 691년 참조.) 더욱이 뺷당서뺸의 뺷兵志뺸
(des Rotours 번역, 786)는 道란 군사용어로, 역시 道로 불리던 지방들의 조직과는 다른, 별개의
조직을 가리켰다고 설명한다. 앞에서 인용한 문헌에 따르면 이들 군사적 道는 임시적이고 일시적
인 성격을 띤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위고의 전기를 읽노라면 사천에서 운남雲南에 이르는 통로, 즉 南道(“남쪽 길”)라 불린 길이 있었
고, 위고가 793년 티벳인들과 싸워 승리한 뒤에 이 길이 다시 열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뺷당뺸,
제158권, 2a, 3) 앞에서 이미 인용한 펠리오 장서 2555번 필사본에는 770년에 숙주의 중국인 자
사가 그 이웃의 티벳인으로 “동도東道의 여러 절도節度를 쥐고 있던” 상찬마에게 보낸 한 통의
서한이 담겨 있다. 이 서한의 제목은 “남쪽의 티벳 (관리)에게 답함”(본서 292 이하)이다. 지금 보
고 있는 여덟 번째 필사본이나 열 번째 필사본에 나온 道의 경우, “길”과 “행정구역”이란 두 가지
의미 중 어느 쪽인지를 가려내기란 어렵다.
티벳어 루ru에 관해선 중국어 려旅(“군사들의 무리brigade”. 500명을 하나의 부대로 묶는, 고대
중국의 군대 편제 단위)의 차용어로 생각해볼 수 있고, 토마스도 旅를 보통 “brigade”로 번역한
다. 하지만 旅에는 어떤 영토의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 같고, Documents de Touen-houang
relatifs au Tibet의 번역(40, n. 3)에서 바코Bacot는 旅를 “깃발(旗)들bannires”로 옮기곤 “영토
상의 구역”이라고 해설했다. 아마 이 용어는 차라리 알타이인altaïque들의 정치 용어에서 “뿔角”
을 뜻하는 단어들에 가까운 용어인 것 같다. P. A. Boodberg(“Marginalia to the Histories of the
Northern Dynasties, 3, The Altaic Word for Horn in the Political Nomenclature of the
Steppe”, H. J. As. St., IV, iii-iv, déc. 1939, 230~239)에 따르면 한漢나라 시대에 흉노족은 십각
十角을 갖고 있었는데 모두 선우單于의 아들과 형제들이었다. 또 당나라 시대에 서西투르크족은
좌우로 다섯 개씩 열 개의 oq(화살箭이란 뜻)를 두었는데, 이는 흉노족의 옛 조직과 관련이 있을
것이고, 이에 비춰 본다면 투르크어 oq의 어원적 의미는 뿔이며 거기서 부족들이나 유목민 무리
들이란 의미가 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Boodberg의 추측들 ― 그야말로 추측들의 연속이
다 ― 이 맞다면 티벳의 루ru는 투르크인들에게서 차용한 말일 것이다. 뚜찌Tucci 역시 티벳 제
국의 루ru 조직이 투르크인들(과 더 나중의 몽골인들)의 것과 비슷했다고 믿는 쪽으로 기운
다.(Tibetan Painted Scrolls, 737~738)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15

가 모 국무대신으로 적시돼 있는 여덟 번째 단편에 나온 것과 같다.55) 작자는


고한다. 불시에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은 이미 아뢴 대로 처형되었고, 강압에
못 이겨 그들을 좇았던 자들은 호의를 베푸신 덕분에 삼엄한 감시 아래 과주로
보내졌습니다.56) 백성들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고 생업에 열중하고 있습니
다. (신임 티벳인) 절도가 당도했습니다. 포세布稅57)와 맥세麥稅는 당연히 전
부 거둬들일 겁니다. 작자는 감히 청하길, 하지만 더운 바람이 새순을 썩게 만
들었으니 절반만 감면해 달라 한다. 그리하면 백성들이 매우 기뻐할 것이라면
서.58) 앞서 백성들은 쟁기를 끌 소는 물론이고 강철로 만든 농기구들도 없이
씨를 뿌리고 모내기를 했다. 작자는 소와 농기구가 필요하다는 청원(들)을 이
미 했으나 아직도 후속 조치가 없음을 상기시킨다. 겨울부터 손쓰지 않으면 봄
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한다.59)

[10] 서한

9월에 쓴 이 서한에서 작자는 편지를 주고받기에도 너무 멀리 있어 한동안


소원했던 수취인 생각을 많이 한다고 밝힌다.60) 그는 수취인의 건강을 기원하
고는, 장청張淸이란 자와 그 일당이 사람들(간수들)을 죽이고 다른 공범들과
함께 동쪽의 옥관 역호61)에서 달아난 경위를 고한다. 말을 훔치고 갑옷을 탈취

55) 季秋已冷. 伏惟 尊體動止萬福. 厶蒙恩, 운운. 말미의 문구는 이렇다. 伏惟照察. 卑守有限. 謹回.
56) 勃逆之人, 已聞伏法. 脅從之類, 錮送瓜州. 伏法, 즉 “형벌을 달게 받다”란 표현은 “처형되다”란
뜻이다.
57) 피륙으로 바치는 공납은 조調라 불렸다.
58) 百姓具安, 各就生計. 節兒到上訖. 所稅布麥, 誠合全輸. 屢熱風損苗, 犯顔申訴尙論仁造, 半放半徵.
凡厥邊眼, 不任胥悅. 邊眼이 아니라 邊民이 맞을 것이다.
59) 又緣種蒔, 例乏耕牛. 豐[農으로 읽음]器之間, 苦無鎠鐵. 先具申請, 未有處分. 冬不預爲, 春事難濟.
伏惟照察. 卑守有限.
60) 執別稍久, 傾注良多. 尺素間然, 方寸何解? 季秋霜冷, 伏惟 動止康悆.
61) 본서 269, n. 1 참조.
216 불교학리뷰 vol.18

한 그들은 전속력으로 천릿길을 달려 사주로 향했고, 삼수(三宿, 자정 무렵)에


당도했다. 동도東道(또는 구역)의 봉화대62)에선 눈곱만큼의 경고도 없었다.
반역자들은 한밤중에 중성重城을 넘어와 수비군을 도륙했다. 마을 장정들은
모두 들판에 있었고 집안엔 노인과 아이들뿐이었다. 방비를 소홀히 한 티벳인
관원들은 화禍를 예견하지 못했다. 아전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여하한
대항도 하기 힘들 뻔 했다. 새벽녘에야 비로소 작자는 수비병들을 소집해 역도
들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고 그 태만함 여부를 가리
고자 진영에 이를 고했다.63)

[11] 옥관 역호를 나온 범국충 등 역도 여섯 명의 의복과 갑옷과 무기에


대해 사주(둔황)에서 고함.65)

이제 보신 물건들은 도적놈들 것입니다. 이들이 대성大城을 넘어 자성子64)

62) 망루에서 밤에 신호로 올렸던 불을 烽이라 한다. 낮엔 연기를 피워 신호를 보냈는데 이를 燧라 한


다. 티벳인들의 이 망루에 대해서는 뺷당서뺸, 버쉘 번역, 441과 토마스, J. R. A. S., 1933, 381을 참조.
63) 厶推免. 玉關驛戶張淸等, 從東煞人聚徒逃走. 劫馬取甲, 來赴沙州. 千里奔騰, 三宿而至. 東道烽鋪,
煙塵莫知, 夜越重城, 損[害를 덧붙여야 할까?]官守. 丁壯適野, 老幼在家. 蕃官慢防, 不虞禍至. 人
吏散亂, 難與力爭. 稍禽[惟로 교정?]天明, 招誘摛獲. 具申牙帳, 冀表忠貞. 披豁未從[?], 空勞寐寤.
珍重珍重. 推免은 필시 推恩(뺷孟子뺸, Couvreur역, 뺷四書뺸, 317)으로 읽어야 한다. 推恩은 “(소인
에게까지) 베푸신 은혜 덕분에”란 뜻으로, 서한문 첫머리에 쓰는 관용구다. 앞 필사본들의 蒙恩
에 해당한다.
64) 沙州狀逆賊玉關驛戶氾國忠等六人衣甲器械全. 이 보고서는 범국충 무리의 의복이나 무기 등과
함께 전달됐음이 분명하다. 이 필사본은 옥관역玉關驛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적시하지 않는다.
슈타인 필사본 2669번은 둔황현縣의 12개 향鄕들 중 하나로 옥관향玉關鄕을 언급(Giles, B. S.
O. S., VII, 551)하고, 슈타인 필사본 6454번의 간기(761년. Giles, 상동, IX, 12)에도 옥관역의
소재지는 마찬가지로 둔황현과 둔황군郡에 속했다고 적혀 있다. 옥관은 (본서 273, n. 5에서 말한
것처럼) 아마 옥문관玉門關의 약칭일 것이다. 옥문관은 누란樓蘭과 타림Tarim을 거쳐 서역으로
나아가는 길이 시작되던, 한대漢代의 유명한 관문이었다.
기원전 100년 무렵(Giles, 같은 책, VII, 552~554 참조) 둔황 서쪽 100여 킬로미터(뺷통보뺸, XIV
의 슈타인의 기록에 따르면 북위 40° 22', 동경 93° 50' 지점)에 세워진 이 관문은 과주(지금의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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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安西縣 남쪽 과주진瓜州鎭. 둔황 북동쪽으로 100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출발해 하미와


투르판 등지를 향하는 북서쪽 우회로가 서역과의 주된 교통로가 되면서 버려졌지만, 그 흔적은
오늘날까지 보존돼 있다. 둔황 출신으로 북량北涼 때 사람이면서 특히 저거목건沮渠牧犍 시대
(433~439, 뺷魏書뺸, 제52권, 7a 참조)에 양주涼州(지금의 감숙성 무위武威)를 다스렸고, 따라서
그 지역을 익히 알았던 감인闞駰의 뺷十三州志뺸에 따르면, 이미 한나라 때 옥문관의 방어를 포기
했을 것이고 주둔군(둔수屯戌)은 옥문관에서 당시 옥문현玉門縣이라 불린 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둔황 동쪽으로 250여 킬로미터 거리에, 안서(과거의 과주)와 주천(酒泉, 과거의 숙주) 중
간에 역시 같은 지명의 현 하나가 더 있다. (안사고顔師古의 뺷漢書뺸 주석, 제28권하, 2a에 있는 闞
駰의 인용 참조. 813년과 815년 사이에 집성된 원화元和 시대의 지리서 뺷원화군현도지뺸, 제40
권, 6b에는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원 출처에 대한 언급 없이 재차 등장한다. 뺷자치통감뺸, 제213
권, 22a, 727년 관련 대목에 주석을 달았던 10세기 문인 송백宋白의 설명 역시 참조할 것.)
옥문현은 627년에 행정상 폐지되었다.(뺷당서뺸, 제40권, 8b. 뺷구뺸, 제40권, 28a) 그 뒤 티벳인 침
략자들의 위협이 있자 옥문은 하나의 “수비군”, 즉 옥문군玉門軍이 되었다. 뺷당서뺸, 제40권, 8b
는 개원開元 연간(713~741) 옥문군이 설치된 것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710년의 어느 영지令旨
에는 이미 “玉門軍使”에 대한 언급이 있다.(뺷唐大詔令集뺸, 제130권, 9b. 본서 294, 727년에 관한
본문의 서술과 n. 5 역시 참고할 것.) 뺷원화군현지뺸, 제40권, 2a에 따르면 옥문“군軍”은 618~626
년에 양공인楊恭仁이 설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뺷원화군현지뺸와 위에 언급한 뺷자치통감뺸의 주석
은 727년에 티벳인들의 공격을 받았던 이 옥문군이 숙주 서쪽으로 200리 거리에 있었다고 기록
한다. 슈타인 컬렉션의 뺷둔황록敦煌錄뺸(뺷대정신수대장경뺸, no. 2091, 998a, 자일즈Giles의 번
역, J. R. A. S., 1914, 703~736)도 마찬가지로 사주의 “옛 옥문관을 주의 동쪽으로” 옮겼음을 언
급한다. 옥문군은 3,000명의 장졸로 구성돼 있었다.(뺷全唐文뺸, 제23권, 1b, 현종玄宗의 칙령. 여
기서 二는 三의 오기誤記다. des Rotours, Traité des fonctionnaires, 801, n. 1 참조.) 옥문현은
755년 가서한哥舒翰에 의해 재건됐을 것이다.(뺷당서뺸, 제40권, 8b. 뺷원화군현지뺸, 제40권, 7a)
그렇지만 759년의 한 간기(슈타인 필사본 5357번. Giles, B. S. O. S., IX, 15) 속에 여전히 “玉門
軍副使”란 직함이 보인다. 8세기 말 티벳에 정복당한 뒤 옥문이란 이름은 행정 지명에서 사라졌
다가 청대淸代에 와서야 옥문현으로 복원됐고, 그 후 오늘날까지 유지되어 왔다. 당대唐代에 옥
문현은 숙주(지금의 酒泉)에 속하면서 숙주 최서단最西端과 과주 지역의 경계를 표시했을 것이
다.(뺷甘肅通誌뺸, 1736년 판본, 제3권, 102a 참조.)
옥문관으로 말하자면, 크나큰 역사적 명성을 얻게 된 이 명칭은 당대唐代에 서역 교통로의 출발
점으로 여겨져, 국경 감시를 담당한 관청이 설치돼야 마땅한 역참들에 붙여진 것이었다. 629년
인도로 출발할 때 현장은 과주에서 북쪽으로 50리 ― 약 15킬로미터 ― 떨어진, 호로하葫蘆河
(지금의 소륵하疏勒河) 기슭의 옥문관을 찾았다.(Stein, “La traverse du dsert par Hiuan-tsang
en 630 ap. J.-C.”, 뺷통보뺸, XX, 339~343 참조.) 뺷원화군현지뺸, 제40권, 9b는 813~815년에 과주
218 불교학리뷰 vol.18

의 행정 중심지(治所)인 진창현晉昌縣(이곳이 티벳 문헌들에 나오는 “瓜州晉昌”이다. Thomas,


J. R. A. S., 1934, 93과 Bacot, Documents, 47. 본서 202 참조.)에서 동쪽으로 20보(步. 약 30여
미터) 거리에 옥문관 한 곳이 있었다고 하면서, 둔황 서쪽에 있던 한 대漢代의 “옛” 옥문관(玉門
故關)과 애써 구분한다. 步란 글자가 오자誤字가 아니라면, 이 시기에 “옥문관”이라 불린 국경 관
리 역참이 과주 내에서도 진창현의 행정관청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단 말인가? 옥문관(이
있던?) 진창성시(또는 성채?), 즉 玉門關晉昌城을 언급하고 있는 뺷隋書뺸, 제84권, 8a(샤반이 번
역한 뺷西突厥史料뺸Documents sur les Tou-kiue…, 18. 610년의 일들을 기록한 대목)의 한 문장
에서 그런 결론이 나올 성싶기도 하다. 938~942년 고거회高居誨가 호탄에 갔을 때, 그는 당시 중
국과 티벳의 국경 바로 앞인, 과주 동쪽의 옥문관을 통과했다.(뺷五代史記뺸, 제74권, 4b) 따라서
옥문관은 샤반이 지적(Dix inscriptions…, 67, n. 2)했듯이 수당隋唐시대에는 다소간 “유동적”
이었던 것 같다. 우리 필사본에 나온 “玉關”은 하나의 역驛이었고 역도들이 이곳에서 한해瀚海사
막(본서 262, n. 1)으로 달아났다고 하는 만큼, 이는 “돌투성이 사막”인 고비사막의 입구(北山,
현장이 말한 “모래강流沙河”[뺷西遊記뺸에 나오는 표현이다. 역자])로, 과주 북쪽에 위치한 옥문
관을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읽고 있는 필사본 뭉치의 8번째 단편에서 사주의 중국인 절도
사는 말하길, 옥관 역도들이 사막으로 도주(내지 탈옥을 도모)한 것을 티벳 재상에게 알리고자 글
을 쓴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면 옥(문)관의 소재지가 과주에 있지 않고 사주에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을 터, 그렇다면 여기서의 옥관은 슈타인 필사본 2669와 6454번의 옥관“향鄕”일
것이다. 1944년 뺷眞理雜誌뺸(重慶, 제1권, iv)에 발표된, 옥문관과 양관陽關에 대한 향달向達의
연구가 있지만 입수할 수 없었다. 본서 308의 주와 권말의 보유편, 365~366*도 참조할 것.
*[다음은 「보유편」의 해당 대목을 옮긴 것이다. 역자] 스벤 헤딘Sven Hedin 탐험대가 감숙성에
서 찾아낸 한대漢代 목간들의 교정 편집자이자 석학인 라오간勞榦은 1947년에 “Étude sur les
vestiges des Deux Passes”(「두 관문의 유적 연구」, Bull. Hist. Phil., Ac. Sinica, XI, 287~296)
라는 논고를 발표했다. 그는 이 연구에서 옥문관과 양관의 잇단 위치 추정들과 남아 있는 흔적들
을 하나하나 검토한다.
라오간은 한대漢代의 옥문현玉門縣이 있던 곳은 청대淸代에 복원된 옥문현의 현재 위치와 달랐
고, 한나라의 옥문현은 동쪽으로 훨씬 더 먼 곳, 즉 주천酒泉(숙주) 서쪽으로 450리가 아니라 220
리, 필시 오늘날 이른바 적금소赤金所라고 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한나라
초기에 최초의 옥문관이 세워진 곳도 바로 그 근처, 아마 지금의 적금협赤金峽이었을 것이라 한
다. 알다시피 샤반과 슈타인은 뺷사기뺸의 한 구절에 의거해 옥문관의 최초 위치를 둔황 동쪽으로
잡고 기원 전 100년 무렵 서쪽으로 옮겨진 것(뺷통보뺸, XIV, 슈타인의 지적)이라는 제안을 이미
했었다. 자일즈L. Giles가 이 설說을 비판했다.(B. S. O. S., VII, 553~554) 이 문제는 라오간이
제기한 주장들에 비추어 다시 검토해볼만 하다.
라오간은 과주 북쪽으로 50리에 위치해 있었고 629년 현장이 지났던 당대唐代 초기의 옥문관을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19

城65) 안에 침입해 판돌判咄(?) 등과 경비를 서던 위병 여럿을 죽인 것이 이


달66) 11일 사경(四更, 새벽 1~3시)의 일입니다.67) 하賀라 불리는 한 백성이
달려와 이를 알렸습니다. 하지만 밤이 어두운 탓에 그는 (침입자들이) 몇이나

지금의 고욕성苦峪城 북쪽 약 50리에 있는 고성古城의 잔해로 보고 있다. 고욕성은 주천 서쪽


480리, 둔황 동쪽 300리에 위치한다. 그런데 뺷원화군현지뺸가 가리키는 바에 따르면 그 거리에 있
는 것은 바로 과주여서, 라오간은 당나라 때의 과주는 바로 그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봐야만 하고,
오렐 슈타인이 추측한 대로 지금의 안서安西 부근의 과주성瓜州城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생각
한다. 현재의 과주성은 동쪽으로 훨씬 더 먼 곳에, 주천에서 약 600리, 둔황에서 195리 되는 곳에
있다.
738년에 옥문관을 지났던 잠삼岑參의 시편들에 의하면 옥문관은 8세기까지 그곳에 있었을 것이
다. 옥문관을 과주 동쪽으로 이전한 것은 8세기 말과 9세기 초 사이의 일로 보이는데, 이는 814년
무렵의 문헌인 뺷원화군현지뺸를 통해 입증된다. 내가 이용한(본서 270) 금릉서국金陵書局 목판
본(1880) 뺷원화군현지뺸는 옥문관을 진창현에서 동쪽으로 20보에 위치시킨다. 진창현은 과주의
행정 중심지가 있었던 곳이다. 라오간은 “20보” 대신 그 거리를 “一百五十步”로 본다. 그가 이 수
치를 또 다른 뺷원화군현지뺸 판본에서 찾아낸 것인지, 나는 그 여부를 모른다. 대남각총서岱南閣
叢書본에도 역시 “20보”로 나온다. 내가 잘못 안 게 아니라면 최상의 판본은 장구현張駒賢의 비
판적 주해가 달려 있는 기보총서畿輔叢書(1887)본으로, 뺷총서집성叢書集成뺸, fasc. 3084~3095
에 재수록돼 있다. 이 판본(fasc. 3095, p.1165)에는 “20보”로 돼 있으나, 장구현은 주해(같은 곳,
p.1184)에서 왕기王琦(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뺷원화군현지뺸의 인용에 의거한 변형인 “20
리”를 거론한다. 훨씬 더 그럴듯한 이 이본異本의 언급이 정답일 가능성은 아주 높다. 里자와 步
자를 혼동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옥문玉門은 스타엘 홀슈타인Staël-Holstein의 호탄어 필사본 중 한 지명地名 목록에서 Gākämą'nä
란 형태로 등장한다.(H. W. Bailey, Asia Major, II, 1951, 12) 이 필사본은 구스타프 할로운
Gustav Haloun에 따르면 865년의 것(같은 곳, 1)으로, 옥문은 할로운이 고증하고 있는 일련의
다른 지명들과 더불어 과주와 숙주 사이에 언급돼 있다. 옥문현縣도 옥문군軍도 9세기에는 더 이
상 존재하지 않게 됐던(본서 269, n. 1 참조) 만큼, 이때의 옥문은 옥문관關을 말한 것임에 틀림없
다. 역驛과 향鄕은 옥문玉門이 아니라(본서 269, n. 1 참조) 옥관玉關이란 형태로만 알려진 것으
로 보인다.
65) 분명 성시 외곽을 방어했던 바깥쪽 성곽과 성시 요새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子城이란 용어에 대
해서는 뺷辭海뺸를 참조하기 바란다.)
66) 7월. 8번째 단편 참조.
67) 右件賊今月十一日四更驀大城入子城, 煞去阝[却으로 수정]監使判咄等數人. 判咄은 (判官의?) 오
자일 것이다.
220 불교학리뷰 vol.18

되는지 몰랐습니다. 한편으론 마침 수확기였던 탓에 모두들 성 밖에 나가 있었


고, 소임자 몇이 성내에 남아 있었으나 그들조차 겁에 질려 몸을 숨기기에 바
빴습니다.68) 사태의 추이가 나빠지는 것을 본 소인은 티벳의 대덕을 찾아 (일
어난 일을) 고하고, (대덕과 상의하여) 함께 위기를 면할 방도를 찾을 요량으로
용흥사龍興寺69)로 피신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날이 밝았습니다. 소인이 밖으
로 나가 십여 명의 백성을 모았지만 도적들에 대항하는 데 쓸 만한 무기가 하
나도 없었습니다. 맹세컨대 소인은 (맞붙어 싸우느니) 티벳인 절도사[또는 유
후사]를 구할 결심으로 무리를 이끌었습니다.70) 저희가 (안쪽) 자성 남문 아래
당도했을 때는 절도사와 다른 (티벳인 관원들)이 이미 (그들) 처소에 불을 붙
인 뒤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칼로 베고 자신들의 칼 끝 위로 쓰러지면서

68) 其夜有百姓賀走報. 爲夜黑, 不知多少. 復百姓收刈之時, 盡在城外. 城中縱有所由, 忙怕藏避. 所由


는 성의 방비를 “담당했던 자들”이다. 본서 263, n. 5와 Duyvendak, 뺷통보뺸, XXXVIII, 299 참조.
69) 龍興寺는 사주의 불교 사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원이었다. 사주 사원들의 이름이 적힌 어느
목록을 보면 제일 먼저 용흥사가 언급될 뿐 아니라, 슈타인 필사본 2729번의 간기에서도 승려들
수가 가장 많은 사원으로 꼽혔기 때문이다.(Giles, B. S. O. S., IX, 23) 펠리오 필사본 2250번 뒷
면에 있는 비슷한 목록에서도 역시 그렇다. 763년과 764년, 774년(Giles, 같은 곳, 16~18)과 873
년(같은 곳, 1032) 등등의 연대가 적힌 여러 간기들에서도 용흥사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황
皇)용의 날아오름”을 뜻하는 龍興이란 이름의 사원들은 관官에서 지은 것이었다. 무武 황후의
찬탈이 있은 뒤, 707년 중종中宗 황제는 2년 전인 705년 즉위 당시 당唐 왕조의 복원을 기리고자
제국의 모든 주에 건립하게 했던 중흥사中興寺(“부흥의 사원”)에 용흥사란 이 이름을 하사했다.
(뺷구뺸, 제7권, 2a, 4b. B. É. F. E.-O., XXIV, 184 참조. 184쪽의 “686년”은 부주의해서 범한 오
류다. “707년”으로 해야 한다.) 바로 이 사원에서 739년의 칙령으로 당 왕조 역대 황제들의 기일
에 불교 제례를 봉행케 했다.(뺷佛祖統紀뺸, 뺷대정신수대장경뺸, no. 2035, 제40권, 375a) 과연 불교
는 737년에 사부祠部의 감독 하에 놓이게 됐으니, 결국 다시 당나라의 국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
던 것이다.(뺷당회요뺸, 제49권, 5a) 당대唐代의 용흥사들은 아주 멀리 중앙아시아에 있던 당나라
의 속국屬國들, 고성古城지역의 북정北庭(悟空의 전기, Lévi-Chavannes, J. A., 1895, ii, 365. 戎
法의 전기, 뺷宋高僧傳뺸, 뺷대정신수대장경뺸, no. 2061, 제3권, 721a~b), 쿠챠와 호탄(Pelliot, B.
É. F. E.-O., VIII, 512)에서까지 발견되었다.
70) 厶見事急, 遂走投龍興寺, 覔蕃大德, 告報相將逐便迴避. 于時天明. 厶遂出招集得百姓十餘人. 並
無尺鐵寸兵可拒其賊. 厶誓衆前行, 擬救節兒蕃使. 본서 261, n. 2 참조.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21

불길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그들의 몸은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71) 소


인, 조금씩 장정들을 모으는 데 성공했고 계책을 써서 역도들을 사로잡았습니
다. 바야흐로 신神들이 저희와 함께 하고 황천皇天이 (죄인들을) 중벌로 다스
리심을, 소인은 알았습니다. 범국충과 그 도당은 단 한 명도 덫을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72)
동도東道(또는 구역)의 봉화대들에서는 아무런 경고도 없었습니다. 이 도적
떼들이 저희에게 제 발로 굴러들어 오리라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티벳 장수와 티벳인들 일부가 여전히 생존해 있고 일부는 죽었습니다. 그 정확
한 수는 모릅니다.73)
대덕 앞에서 추궁당한 도적들 중 하나가 자복한 즉슨 대략 이렇습니다. 역참
의 수장 왕령전王令詮과 그 일당은 학살과 폭행, 살인을 일삼으며 서쪽으로 왔
습니다. 만약 저들(붙잡힌 “도적놈들”)이 공연히 (사주)성에 투항하면 사주에
머물 수 없을 것을 염려했다 합니다. 해서 그들은 티벳인 관리들을 죽일 계획
을 세웠다고 합니다.74)
사건의 전말은 그러합니다. 대덕께서 이미 공무 보고를 통해 이를 알리셨습
니다. (이번에는) 소인이 위와 같이 삼가 아룁니다.75)

[12] 편지

이 편지는 7월에 쓴 것으로 돼 있다. 작성자는 편지 수신인이 사절을 보내

71) 及至子城南門下, 其節兒等已縱火燒舍, 伏劒自裁, 投身火中, 化爲灰燼.


72) 厶漸合集得百姓, 設詐擒獲. 則知神道助順, 皇天共誅. 氾國忠等人, 一無漏網.
73) 東道烽鋪不告煙塵, 莫惻[測으로 읽음.]此賊, 有同天落. 今蕃軍將等, 或在或亡, 不知實數.
74) 其賊對大德某畧問. 欵稱驛將王令詮等, 苦尅煞劫西來. 若公然投城, 恐不容住止. 遂謀煞蕃官是實.
대강 번역하자면 그렇다. 붙잡힌 자들은 우두머리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한 것 같다.
75) 大德厶已具牌子申上. 謹具如前. “작은 판, 방문(榜文)”을 뜻하는 牌자는 만청 시대에도 여전히 몇
몇 공문서 형식에 의례적으로 사용된 글자였다.
222 불교학리뷰 vol.18

근황을 묻고 도움을 주었던 것과 염려해주심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수신인이


(과주의 티벳인) 절도사에게 권유해 특임 유후를 파견하게 한 일로, 작성자는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그 덕분에 (사주)성은 평온을 되찾았다.76) 서한체 양
식상의 의례적 문구들은 어느 국무대신에게 보내는 여덟 번째 단편의 것과 비
슷하다.

[13] 어느 도독都督에게 쓴 편지

역시 7월에 작성됐고 어느 도독(?)에게 보내는 것으로 전편과 비슷하다.77)


전편에서처럼, 편지를 쓴 이는 사자使者를 통해 안부를 묻는 수신인에게 감사
를 표하고, 둔황에 일어난 거듭된 화란과 자신의 충정, 백성을 향한 그의 책임
감을 에둘러 말한다.

[14] 어느 장수將帥에게 쓴 편지

8월에 작성된 편지로 그 어투가 꽤나 친근하다. “우리가 손을 맞잡았던 게


바로 엊그제인데, 더위와 추위가 번갈아가며 지나길 벌써 여러 번일세그려.”
운운.78) 편지의 작자는 그가 동료라 부르는 수신인과 형제 같은 우정을 맺었
다.79) 뜻하지 않은 사정이 둘을 떼어놓아 한 사람은 동쪽에, 한 사람은 서쪽에
있다. 작자는 그를 생각하고 재회하길 바란다. 어쩌면 작자의 옛 중국인 동료
들 중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76) 厶蒙免[恩으로 읽음.]旣沗[添의 이체자.]親隣同憂禍亂. 蒙諮留後發遺專使. 城池獲安, 實賴其力.


77) 使至辱問, 殊慰馳情. 孟秋餘熱. 惟 督動靜 爾祐…. 督은 都督을 대신한 글자일 것이다.(본서 259, n.
2 참조)
78) (시작은 이렇다. :) 握手如昨, 炎凉屢隔, 운운. 편지 수신인은 어떤 장군이다. …惟 將軍動靜兼祐….
79) 厶蒙粗[?]遣[?]. 同志同官, 惟兄惟弟. 忽然分別, 一東一西. 恨以殊鄕, 各居異域, 운운.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23

[15] 어느 (중국인) 벗에게 쓴 편지

글쓴이는 편지의 벗과 여러 해 떨어져 있었고 그의 소재를 헛되이 수소문했


었다. 어느 날 문득 그 벗의 편지 한 통을 받고 기뻐한다. 글쓴이가 말하길, 철
령鐵嶺까지의 길은 멀고 옥관에는 인적이 뜸하다 한다. 그럼에도 그는 벗의 기
별이 또 오길 바란다.80)

[16] 어느 (중국인) 벗에게 쓴 편지

내용은 전편과 비슷하다. 글쓴이는 운산雲山 너머 아득히 멀리 있어 서신을


나누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절절한 심정으로 “목을 길게 빼고” 동쪽을 바라
본다.81)

[17] 티벳의 재상에게 쓴 편지

1월에 쓴 것으로, 첫 시작 문구는 여덟 번째나 아홉 번째 단편들의 것과 같


지만 공식적 보고서라기보다는 사적 편지처럼 끝맺고 있다.82) 왕과 재상의 은
혜로 관리와 백성들은 지금 평온하게 그들의 일에 종사하고 있고, 아무 근심도
없다.83) 글쓴이가 특히 감사하는 것은 일전에 둔황으로 철을 보내준 일이다.
이로써 농기구를 확충한 만큼 더 나은 경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두가 재
상의 큰 은혜 덕분이니, 마치 가뭄 끝에 오는 단비와 같고 운운.

80) 鐵嶺路遠, 玉關人稀. 瞻望 德音, 心魂幾斷. 玉關은 물론 옥문관으로, 둔황 지역을 가리키는 문어적
표현으로 쓰이곤 했다. 鐵嶺은 너무 막연해서 어디를 가리키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81) 雲山眇邈, 音信難通. 引領東瞻, 心魂幾斷. 뺷左傳뺸, Couvreur 옮김, II, 104 참조. “경공景公은 기
대에 차서 목을 길게 빼고 서쪽을 바라보았다.”
82) 謹奉啓起居. 不宣, 謹啓.
83) 厶蒙思即日沙州官吏百姓, 特沐贊普鴻恩, 相府仁造, 各居産業, 怛腹[復으로 읽음.]無憂, 운운.
224 불교학리뷰 vol.18

이 필사본 뭉치는 다각도의 관찰을 요한다.


첫 번째 청원에서 둔황의 중국인 절도사는 티벳에 항복한 뒤 수차례나 노골
적으로 반역을 기도했던 둔황 백성을 용서해 주십사 바라면서 티벳 왕에게 불
佛사리를 보낸다. 이에 따르면 둔황의 항복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
일 둔황의 항복이 내 그럴듯한 가설대로 787년의 일이었다면 이 단편의 작성
연대는 794년, 그러니까 라싸 논쟁(792~793?) 이듬해가 될 것이다. 왕과 절도
사 사이의 메신저 구실을 하는 이들은 (그들 중 한 명의 이름이 확인해주듯이
티벳인 아닌 중국인) 비구승들이고, 절도사는 야만인 군주의 불교적 신심信心
을 함축적으로 역설한다. 티벳 왕은 당신의 나라에 불교를 널리 퍼뜨리면서
“법法의 햇살을 부활시켰던” 장본인이고, 그의 중국인 도반道伴은 거듭 계戒
를 내림으로써 (티벳?) 승가의 성장을 권장한다는 것이다. 이 암시적 표현들은
한편으로 보면 티쏭데짼 시대의 티벳에서 불교가 돌연 국교로까지 도약했다는
우리의 생각과 맞아 떨어진다.
그 다음 이어지는 세 편의 단편들도 불교도이자 둔황의 절도사였던 동일인
이 쓴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마찬가지로 승려들을 통해 전달된 왕의 교서를 언
급하고 있는) 네 번째 단편에서, 둔황이 항복한 지 10년이 흘렀고 자신이 둔황
을 다스린 지는 2년이 됐다고 적는다. 그렇다면 이 단편의 연대는 796년이 될
것이고, 작자는 절도사로 임명되자 둔황의 말썽 많은 중국인 신민들을 향한 군
주의 노여움을 달랠 목적으로 불사리와 첫 번째 청원서를 티벳 왕에게 보냈던
것이리라. 그가 “영광”으로 여겼던, 티벳인 정복자들이 부여한 임무란 편하고
한가한 일이 물론 아니었으니, 필시 티벳인 주인들과 중국인 동포들 모두로부
터 심한 원성을 사기 마련인 관직에서 이 절도사가 가급적 빨리 떠날 궁리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는 사직하고 은거하려는 중국인
관리들이 으레 써먹었던 고전적 수법에 의지한다. 종교로의 귀의를 허락해 달
라 청하는 것이다. 허락이 난다면 전 재산을 사원에 바칠 요량이라며, 그는 왕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25

과 모 대신의 신심에 호소한다. 종교로의 귀의는 티벳의 통치를 돕는 일에 연


루되지 않으려는 중국인들의 상투적 핑계거리들 중 하나였음에 틀림없다.84)

84) 적가비翟家碑(뺷사주문록뺸, 장부蔣斧판본, 21b. 라진옥 편집본, 13b)에는 당나라 군부에서 두각


을 나타냈고 784년 이희열李希烈의 난(본서 177, n. 1 참조)을 진압하는 데 참가했던 둔황의 어느
장군의 아들로, 비범한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귀의한 적연翟涓이란 인물이 나온다.
그의 차남은 둔황에서 관리가 되고 그의 장남은 역시 둔황에서 승통僧統이 된다.(라진옥, 뺷막고
굴석실비록뺸의 찬문 참조. 뺷東方文庫뺸, 제71권, I, 13)
색索씨 가문의 경우는 한층 더 전형적이다.(870년 무렵의 비문. 뺷사주문록뺸, 장부蔣斧판본, 16b
이하. 라진옥 편집본, 10a 이하. 야부키, 뺷명사여운뺸, pl. 84, no. 4. 뺷명사여운해설뺸, 241 이하) 이
가문은 서기 2세기부터 둔황에 정착한 가문으로, 둔황에서 가장 오래고 가장 유력한 가문들 중 하
나다.(石岩, 뺷敦煌石室畫像題識뺸, 서문, 17a 참조) 티벳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문중의 수장 색봉
진索奉珍은 무관武官으로 침략자에 맞서 싸워 이름을 떨친다. 초야에 묻혀 산 그 아들 색정국索
定國은 “頓悟大乘賢”이다. 812년에 어느 사원에서 사망한 색정국은 탑 안에 매장됐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다. 장자인 색청우索淸宇는 티벳인들을 돕기로 해 사주성을 지키는 임무(沙州防城
使)를 맡고 “국경의 평화를 지켰다.” 둘째인 색향索香(향은 그의 속호俗號다.)은 의변義䛒이란
이름으로 불문佛門에 들어가 사주석문도법률沙州釋門都法律이란 직함을 얻고 지역 승가에서
중요한 지위에 오른다. 그 문하에 수많은 출가 및 재가 제자들이 있었다. 869년 70세의 나이로 입
적한다.(라진옥, 전게서, I, 13의 찬문 참조) 셋째인 색청정索淸貞은 예禮와 악樂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유명한 유생儒生(禮樂名家)이었던 것 같다. 장자인 색청우의 아들들은 중국의 둔황 탈환
에 가담했다. 그들 중 한 명은 용맹하기로 특히 이름이 높았고, 장의조가 승전보를 들고 장안에 갔
을 때 그를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찬문은 奉元戎而歸闕이라 말한다.)
둔황의 또 다른 명문가 음陰씨 가문(이 가문에 대해서는 石岩, 전게서, 서문, 18a~b를 보라.)은 티
벳의 둔황 점령 하에서 비슷한 운명을 겪게 된다.(839년의 비문. 뺷사주문록뺸, 장부蔣斧판본, 11a
이하. 라진옥 편집본, 7a 이하) 증조부 음사원陰嗣瑗과 조부 음정계陰庭誡, 부친 음백륜陰伯倫은
모두 당나라 무관으로 종사했다. 티벳이 둔황을 정복했을 때 음백륜은 당나라 황제와 티벳 왕이
라는 “두 명의 군주 앞에 무릎을 꿇어야”(事遇此年, 屈膝兩朝之主) 했다. 그는 “부락대사部落大
使”로서 티벳을 위해 일하게 됐다.(賛普啓關之後, 左衽遷階. 及宰輔給印之初, 垂袪補職. 蕃朝改
受得沙前州道門親表部落大使) 그의 장자 음가정陰嘉政은 일개 재가 불자(處士)로 은거의 삶을
살며 “현재 (중국의?) 성스러운 군주와 그 선조 일곱 분을 위해”(爲當今聖主及七代) 막고산莫高
山에 석굴 하나를 조성한다. 둘째 아들 음가진陰嘉珍은 곳간과 회계를 담당하는 자로서 티벳인들
의 하인이 된다.(본서 240, n. 6) 셋째 아들은 리전離纒이란 이름으로 불문에 들어가 “沙州釋門三
學都法律大德”이란 칭호를 얻는다. 그 누이들 중 한 명은 지혜智惠라는 비구니고, 종형제들 중 한
명은 령보靈寶라는 비구다.
226 불교학리뷰 vol.18

다섯 번째 단편은 중국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불화 등을 봉송한다고 왕에게


고한다. 이것들을 왕에게 가져갈 임무를 맡은 이들 역시 사문들이다. 필시 중
국인들일 이 불교 승려들이 티벳 왕궁과 중국 북서부 사이를 줄기차게 오갔음
은 분명한 일이니, 그들은 둔황의 중국인 관리들과 이들의 티벳인 주군들 사이
에서 메신저 역할을 하곤 했었다.
이어지는 (여섯 번째와, 여덟 번째부터 열두 번째까지의) 단편들은 둔황 내
부인들이 아니라 옥관역(또는 옥관향)이라는 둔황현 관할 내의 한 역참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반역자들의 둔황 습격과 연관된다. 이 반역자들은 그 이름으로
볼 때 언뜻 중국인들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 중 한 명은 자칭 탁발 왕족
의 후손이라 주장했다. 탁발은 선비족에서 유래한 유명한 씨족으로 중국 최대
의 “야만족” 왕조들 중 하나인 후위後魏 왕조를 세웠으니, 그 명성은 중국 북
서부에서, 특히 (청해호 지역의) 토욕혼인들과 당항족(탕구트족Tangouts)들
에게 오래도록 전해졌다. 역도들의 습격은 7월 11일에 일어났다. 같은 7월 중
에, 아니면 필시 습격 사건 직후에 쓴, 수신자가 티벳의 재상인 보고문(여덟 번
째 단편)에서 중국인 절도사는 티벳에 항거하는 거듭된 시도들로 빚어진 연이
은 소란들 뒤에 “2년 전부터” 마침내 둔황에 평화가 회복되었는데, 마침 그때
이 새로운 사건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앞의 단편들에 담
긴 정보와 비교해보면 문제의 사건은 네 번째 단편을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
와 같은 해(796년?)에 일어났던 것 같고, 당시 절도사는 이전 단편들을 쓴 인
물과 동일인이었던 것 같다. 그의 사직 요청은 아직 티벳인 주인들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가 아니었나 싶다.85) 그가 고하길, 이 반역자들은 지난해(795

85) 토마스Thomas가 J. R. A. S.(1927, 815)에 발표한 티벳어 필사본 단편의 시대적 배경은 아마 이
무렵일 것이다. 토마스의 번역은 이렇다.
“왼창도’On-čaṅ-do 궁에서 봉인된 [칙서를] 보낸 것은 소상히 듣고자 함이라.”
“[짼-(?)]뽀께서 신하들과 함께 사주(둔황) 요새를 장악[티벳의 정복, 787년?]하시니, 통치권을
놓고 벌어진 경쟁에서 [중국인이?] 티벳 신하들 중 도독이자 최고 지휘관[쩨제르rce-rjer]으로 …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27

년?) 사막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들은 둔황의 중국인 절도사의 고발로 티벳


인들에게 붙잡혀 주천酒泉(둔황 동쪽의 숙주)으로 유배당했다. 바로 그곳에서,
이들은 또 한 번 달아났다. 이들은 말과 무기를 훔친 뒤 주천에서 300여 킬로
미터 떨어진 둔황까지 전속력으로 내달려 한밤중에 도착한다. 성을 지키던 군
졸들은 기습을 당하고 살해된다. ― 어쩌면 공범일지도 모를 ― 주민들은 곡식
을 거두느라 성 안에 없었고, 성 밖의 경작지에서 밤을 보낸다. 그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다. 절도사를 비롯한 티벳인 군관들은 구조되기도 전에 자신들의 처소
에 불을 놓고 자결한다. 그 당시 티벳 전사들의 마음가짐을 특징적으로 보여주
는 행동이다. 중국인 절도사의 행보도 못지않게 독특하다. 이 화급한 위기의
와중에 그가 대피하러 간 곳이 바로 둔황 유수의 불교사원이다. 이곳에서 그는
그 이름으로 봐서 고향으로 돌아온 라싸 논쟁의 주역이라 할 수밖에 없는, 우

임명된 최고의 인물을 죽였습니다. 7년이 흘러 … 죽었습니다.[첫 번째 한문 필사본의 반역자들


말인가? “8년 전부터”이니까, 787년~794년이 되는 것인가?] 그 후 은덕을 입어 … 소신이 도독으
로 사주에 왔으니[우리 필사본의 작자가 794년에 중국인 자사刺使로 임명됐다는 것일까?], 엄청
난 공을 들여서야 사주를 회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10년 … 내분이나 갈등이 없었습니다.[둔황
의 평온했던 2년이란 794~796년을 말하는 것일까?]”
“이롭기 그지없는 선물, 곡식을 폐하께 바치는 일도 (명령을 받고 하거나) 거르는 법이 없었습니
다. 바라옵건대 이 청원을 … 받아들여주시옵소서 … 허락해주시옵소서. 이런 연유로 대신 [뢴]챈
세르[Blon] Bchan-bźer와 대신 [뢴Blon] …이 자필 서명한 … 보내왔던 것입니다.”
또 다른 티벳어 단편(Thomas, 같은 곳, 840) 하나는 뢴 땐세르Blon Bstan-bźer(Bc[h]an-bźer?
본서 281, n. 3 참조)란 어느 도독을 거론하고 있다. 토마스는 자신의 번역에서 사주의 이 도독 쩨
제르to-dog rce-rjer를 중국인으로 보았던 것 같지만, 사실 이 인물이 중국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 어원이 중국어인 도독이란 직함은 아마도 튀르크어를 거쳐 티벳 고유의 관직명 체계 안
에 수용된 것으로 보이는 반면, 정작 중국에서는 사어死語가 되었기 때문이다.(본서 197, n. 2) 고
로 토마스의 티벳어 단편에 나온 중국인 자사에 대해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 단편
이 어떤 상황에서 “왼창도궁”에서 온 것인지 이렇다 할 설명이 없다. 왼창도는 랠빠짼(Ral-pa-čan,
815~838)이 태어났던 왕의 처소(Bacot, Documents de Touen-houang, 39~42)로, 라싸 인근의
끼Skyi에 위치(Tucci, “Validity…”, 314)해 있었다. 이곳은 뺷翻譯名義大集뺸의 편찬이 시작됐을
때 랠빠짼의 부친인 티데쏭짼Khri-lde-sroṅ-bcan이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Tucci, Tombs…,
15~18) [보유편, 본서 367 참조]
228 불교학리뷰 vol.18

리의 화상 마하연을 만난다. 중국인 절도사는 그를 가리켜 “티벳의 대덕”, “나


라(즉, 티벳)의 대덕”이라 칭한다. 보고서를 보면 절도사는 둔황의 티벳인 관
리들을 구할 생각만큼이나 마하연을 구할 궁리를 하는 모양새다. 그의 말은 고
스란히, 둔황의 티벳인 지배자들과 그 토착 신민들 사이의 관계에서 이 성직자
에게 부여된 역할의 지대한 비중을 드러내준다. 한밤의 활극이 지나간 이른 아
침, 계략을 써서 반역자들 여럿을 붙잡는 데 성공했을 때, 삼엄한 감시를 붙여
과주로 이송하기에 앞서 죄인들을 심문하는 이가 바로 마하연이다. 중국인 절
도사보다 먼저 티벳 당국자들에게 최초의 공식 보고를 올린 이도 바로 마하연
이다. (티벳어를 배우기라도 했던 걸까?)
이 필사본 뭉치의 후반부 단편들에서 절도사는 티벳인 상관들에게 둔황이
완전히 평온을 되찾았다고 알린다. 습격을 당해 죽은 절도사를 대신하기 위해,
둔황의 절도사보다 상급자였던 것으로 보이는 과주 절도사가 신임 티벳인 절
도사를 파견했다. 한문 텍스트는 이들을 각각 절아節兒(절도사)와 유후(사)留
後(使)로 부르고 있는데,86) 이는 당대唐代의 관직 체계에서 복수의 주들을 포
괄하는 도道들의 책임자로 임명된, 황제가 보낸 관리를 일컫는 직함들이다.87)
그 소재지가 명시되지 않은 “동도東道”를 언급하기도 한다.88) 아홉 번째 단편
에서 중국인 자사는 티벳의 대신에게 둔황의 농민들이 쓸 농기구를 만들 수 있
도록 철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열일곱 번째 단편에서는 이 요청을 들어준 그
에게 감사한다. 티벳인들은 아마 무기를 만들기 위해 철을 미리 징발해뒀을 것
이다.
둔황 사건의 와중에 드러난 대덕 마하연의 독보적인 역할은, 티벳인들에게

86) 펠리오 장서의 티벳어 필사본 1121, 1127, 1235번은 사주의 어느 쩨제rce-rje(“지휘관”, “통솔
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1156번 필사본에는 어느 막뾘dmag-pon(“장군”)과 짼spyan(“눈”, 감
찰관)이 나온다. Lalou, Inventaire…, II(1950)과 본서 281, n. 6 참조.
87) 본서 261, n. 2 참조.
88) 본서 264, n. 2 참조.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29

점령된 북서 지역에서 중국인 승려들이 행사한 영향력에 대해 다른 많은 문서


들이 암시하는 바의 확증에 다름 아니다. 앞서 보았다시피 라싸에서 마하연의
신봉자들 중 한 명은 대덕 “승통”으로 임명되었는데, 티벳 점령 하의 둔황에서
도 티벳 왕으로부터 이 직함을 하사받았던 여러 중국인들이 있었다.89) 둔황의
중국 명문가들 대부분은 지역 불교 승가에 가문의 대변자들을 갖고 있었던 것
으로 보이니, 이로써 이 승려들이 티벳인들과의 관계에서, 더 나중에는 중국의
둔황 탈환에서 제일가는 역할을 했다90)는 것이 어느 정도 설명된다. 라싸에서

89) 본서 34~37과 215, n. 2. [그 중 하나가] 오승통吳僧統[이다.] 순혈 중국인으로, 당나라 관리였던


그 아비는 티벳에 맞서 둔황을 지키는 데 가담했었다. 젊은 시절 불문에 들어가 맨 먼저 “釋門都法
律兼攝引敎授”로 불렸다. 10년 넘게 이 직함을 갖고 있던 그는 “또 한 번의 부름”으로 “釋門都校
[敎로 읽음]授”란 직함을 받았다. 오승통에게 헌정되고, 명료함 이상으로 대구對句 효과를 노린
비문에 따르면, 두 직함들 중 첫 번째 것은 중국 황제에 의해 수여됐던 것 같다.(上命擧其賢德, 遂
使知釋門都法律 운운) 두 번째 직함은 아무래도, 비문이 다음과 같이 요란한 찬사를 늘어놓은 티
벳 왕에게서 받은 것이다. “성스럽고 신성한 짼뽀께서 그 문치文治를 만 리萬里 밖까지 넓히셨으
니, 모든 이웃들이 그 치하에 모여든 것을 기뻐했다. 더 이상 국경을 지키느라 근심하지 않았다.
짼뽀의 위세가 모든 것을 정화했다. 부처님의 광휘가 그의 광채를 더욱 빛냈고 성스러운 구름들
이 다시 모여들었다. 화상[오승통]은 청중과 학생들을 [불교로] 이끌 목적으로 [소승의] 다섯 개
학파의 학설들을 자세히 밝혔다. 초심자들의 진일보를 위해 그는 삼승三乘의 기본 교의들을 폭넓
게 설명했다. (화상 덕분에) 청중과 학생들은 뺷유마경뺸Vimalakīrti-sūtra과 유식Vijñaptimātra
의 [가르침들을] 완전히 깨쳤고, 씨줄의 가르침과 날줄의 가르침[, 즉 돈오와 점수]의 [방법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공부했다. 이들은 감각되는 것의 공성空性을 체험했고 돈오로써 깨치게 되었다.
이들은 깨달음의 요체를 깊이 이해했고 ‘작용하지 않음’(無爲, asaṁskṛta) 가운데 머물렀다. …
또 한 번의 부름을 받은 그는 석문도교수로 영전했다.”(則聖神賛普, 萬里化均, 四隣慶附. 邊虞不
誡, 勢○風淸. 佛日重暉, 聖雲補集. 和尙以誘聲聞後學, 宏開五部之宗. 引進前修, 廣說三乘之旨.
維摩唯識, 洞達於始終. 橫宗豎[竪로 읽음]宗, 精硏於本末. 加以知色空而明頓悟, 了覺性而住無爲
[…] 又承詔命, 遷知釋門都校[敎로 읽음]授.) 비문에 적힌 직함이 입증하듯이 더 나중에 가서는 승
통의 직책도 맡았다. 이 비문은 그가 신자들의 도움으로 칠불七佛에 봉헌된 석굴을 파고 다수의
불화佛畵로 장엄하게 했다고 회상한다. 이 석굴의 조성을 계기로 군주와 대신들의 번영, 이웃 나
라들과 화목하길 기원했다는 것도 비문에 뚜렷이 언급돼 있다.(伏願世主處南面之尊, 威雄武定,
臣忠安富, 國之政信重和隣 …) 짼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티벳 제국에 대한 이야
기이다.[보유편, 본서 367 참조.]
230 불교학리뷰 vol.18

돌아온 노화상 마하연은 틀림없이 티벳인들로부터 공식적인 어떤 종교적 직함


을 받았다. 중국인 자사보다 우선시되는 식으로 그 존재감을 인정받았던 것에
서 보듯, 마하연은 티벳 왕궁에 오래 체류한 덕분에 지역의 군 당국자들 사이
에서도 위신이 섰을 것이다.
마침 둔황과 과주에 대한 티벳의 통치권은 그 종교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지
역의 중국인 성직자들에게 호소한 불교도 전사戰士들의 수중에 있었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앞서 펠리오 장서의 한 필사본을 통해 보았다시피, 과주 절
도사 론실홍걸리실거라論悉歹勺乞里悉去囉는 특히 둔황의 승려들에게 그 자신
의 죄업을 참회하기 위함과 동시에 티벳의 왕과 재상령공宰相令公인 샹 티쑴
제(尙乞里心兒)의 복을 위한 의식을 봉행하게 했었다.91) 또 다른 한 편의 필
사본92)에 의하면 승려들이 “우리 도독都督”으로 부른 한 인물93)은 어떤 의례
의 비용을 댈 목적으로 “가산家産 일부를 떼어” 내놓으면서,94) 이 의례의 공
덕이 전해져서 맨 먼저 열렬한 불교도인 왕을, 다음으로 재상 상랍장허률발(샹
하상 루뺄Źaṅ Lha-bzaṅ Klu-dpal)95)을, 끝으로 필사본을 쓴 승려들이 그 높

90) 적翟씨, 색索씨, 음陰씨 가문. 본서 275, n. 1. (장의조 가문과 인척관계를 맺었던) 이李씨 가문. 본
서 236, n. 1.
91) 펠리오 장서, 2449번 필사본. 본서 239 이하.
92) 펠리오 장서, 2974번 및 3395번 필사본. 이 두 편의 필사본은 (시작과 끝 부분이 없어) 그 자체로
불완전한 편린인 동일한 한 편의 필사본의 (찢어진) 조각들이다. 2449번 필사본과 동일한 장르의
글이지만 글씨체가 보잘 것 없고 판독하기 힘들다.
93) 我都督公. 어쩌면 과주 절도사를 말한 것일 지도 모른다. (과주에서 둔황으로 파견된?) “특사들”
이 언급되고 이들이 승려들에게 의식의 봉행을 “명령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則有專使等奉
爲宰相, 운운)
94) 減割家儲奉資 國相, 운운.
95) 宰相尙臘藏噓律鉢. 하상루뺄Lha-bzaṅ Klu-dpal은 여러 티벳 문서들 속에서 중국을 굴복시킨 장
군(Tucci, Tombs…, 26)으로, “중국의 정복자”이자 일종의 티벳 법전法典 또는 호구조사의 저자
(Thomas, Tibetan Literary Texts…, I, 287)로, 무티짼뽀Mu-khri bcan-po(= 무띡짼뽀Mu-tig
bcan-po. 티쏭데짼의 아들. 9세기 초에 쌔나렉Sad-na-legs이란 이명異名으로 재위했다고 추정
되는 인물.) 왕자의 삼촌으로, 중국과 티벳의 국경을 지킨 장군(Thomas, 같은 책, 301)으로 거명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31

은 지위와 무용을 칭송하는 “동군東軍의” 재상령공인 샹 티쑴제(尙乞心兒)96)


를 “장엄하길” 바란다. 다른 필사본97)에도 역시 또 한 명의 티벳 재상 상결력
사98)의 안위를 위한 의례를 봉행케 하는 론찬몰열이란 재상99)과 상걸실가란
절도(사)100)가 보인다.
둔황의 이 모든 필사본들에서 샹 티쑴제의 이름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을 볼
때, 둔황의 중국인 절도사가 거듭해서 서한을 보낸 익명의 티벳 “대신”(宰相)
이란 달리 보면 신원미상의 인물이 아니라 바로 이 고위급 인물이 아니었는지

되는 인물이다. 이는 십중팔구 본서 247쪽에 인용된 티벳어 단편에서, 샹 티쑴제와 함께 중국인


과 드루그인(위구르인?)들에게 커다란 패배를 안긴 것으로 언급되는 “큰외숙” (첸뽀 샹Chen-po
Źaṅ) 하상Lha-bzaṅ일 것이다. 우리의 한문 필사본은 이 인물에게 요란스런 찬사를 보낸다. “신
성한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이…, 삼라만상의 원리들을 음악의 규범에 따라 다스리고(順律呂
以理陰陽) 통치의 질서를 온전하게 유지시키는(百官惣紀) 이.” 그는 국경지역에서의 군사 작전
들로 특히 명성을 떨치다 그 와중에 경미한 병을 얻었다. “도독”이 이 필사본의 불교 의례를 시설
했던 것은 한편으론 그의 쾌유를 빌고자 함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도독은 오래 전부터 샹하상루
뺄의 각별한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我都督公長承寵惠, 特沐光暉)
96) 東軍宰相令公尙乞心兒.
97) 펠리오 장서, 3770번 필사본, 네 번째 장.
98) 宰相尙[변용해서 上으로도 씀]結力絲. 펠리오 장서 3770번 필사본의 다섯 번째 장은 론흘협열갈
지란 이름의 과주 절도사瓜州大節度使論紇頰熱渴支를 위해 봉행된 어느 의례에 관한 내용이다.
頰은 걜rgyal에, 熱은 쎄르bźer에 대응한다.(822년의 비문 참조.) (뺷考異뺸, 제21권, 10b, 842년에
인용된) 뺷補國史뺸에 따르면, bźer는 티벳에서 장군의 호칭으로 중국어 郞과 같았다. (郞은 중국의
여러 관직명들 속에 들어갔던 글자로 존경의 뉘앙스가 담겨 있다.) 이 인물은 아마 중국 사료들이
“거물급 수장”(渠帥) 내지 “고위급 장수”(貴將)로 언급하고 있고 787년에 상결찬尙結賛이 평화
협상을 위해 명사鳴沙에서 중국의 적장 마수馬燧에게 파견(본서 291, n. 1)했던 론협열論頰熱
(*뢴걜쎄르Blon Rgyal-bźer)과 동일인일 것이다.(뺷구뺸, 제196권하, 4a. 버쉘역, 493, 뺷당서뺸, 제
216권하, 2b. 뺷자뺸, 제232권, 6b. 뺷책뺸, 제980권, 14a) 803년 당나라 조정에 사절로 파견됐던 이
역시 론협열이었다.(뺷구뺸, 제196권하, 9a. 버쉘역, 510. 뺷당서뺸, 제216권하, 4b. 뺷책뺸, 제980권,
14b)
99) 宰相論賛沒熱. 과주 도독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뢴챈쎄르Blon Bc[h]an-bźer가 분명하다.(본서
277, n. 1)
100) 何周[河州?]節度尙乞悉加. (마지막 두 글자는 의심스럽다.) 河州는 감숙성에 있었다.(본서 266)
232 불교학리뷰 vol.18

자문해봄직 하다.101) 더 앞에서 보았다시피102) (776년부터?) 둔황을 포위하


고 점령했으며 (787년에?) 최초의 티벳인 절도사로 임명됐던 이가 다름 아닌
샹 티쑴제다. 이어서 그는 최고 반열의 재상103)에 올랐고 대신들의 회의를 주
재하는 의장직104)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뛰어난 대신들에게 왕국의 몇몇 지역
(복수의 “절도사 관할 지역”을 포괄하면서 중국어로 “도道”라고 지칭된 지역
들105))의 통치를 맡겼던 티벳의 관례에 따르면, 샹 티쑴제는 줄곧 티벳 제국의
동쪽, 중국과의 접경 지역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 811년, 지금의
감숙성 남동부에 위치한 세 개 주를 중국으로 반환하는 문제를 협상하기 위한
헌종憲宗 황제의 친서는 바로 그에게 보낸 것이다.106) 812년 장안 서쪽 봉상
鳳翔의 중국 자사가 샹 티쑴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재상인 동시에 “토
번동도절도吐蕃東道節度”란 직함으로 불린다.107) 그로부터 4년 뒤엔 위구르

101) 尙 乞-[里(또는 律)-]心-兒 = Źaṅ Khri-sum-rǰe(샹 티쑴제)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토마스가


J. R. A. S., 1928, 98에 인용한 펠리오Pelliot를 참조할 것. 兒를 rǰe의 트랜스크립션으로 본 것은
놀랍다. 8~9세기에 兒의 (공인된) 보통의 발음은 *ńźiḙ였다. 그러나 북서부 지역에서 ńź-는 당
시에 ź로 발음됐던 것 같다.(羅常培, 뺷唐五代西北方音뺸, 164) [b]źer는 늘상 熱(옛 발음은 *ńźįät)
로 옮겨졌다. 이 시기의 중국-티벳어 문헌들을 보면 티벳어 ǰ에 해당하는 것은 [당대 중국어 발
음의] 첫 자모字母 t’ś-이거나(*t’śįäng 正 = ǰeṅ, 라상배, 같은 책, 170) 첫 자모 ď ’-다.(*ď ’i 持
= ǰi, 같은 책, 193) 티벳어로 옮긴 뺷千字文뺸을 보면 兒를 źi로 옮겨 적었다.(같은 책, 191) 만일 티
벳어 필사본들의 쩨제rce-rje(본서 277, n. 1과 278, n. 1)가 중국어 節兒(*tsiet-ńźiḙ. 본서 261,
n. 2)와 대응했다면, 우리로서는 兒=rǰe에 대한 또 하나의 예를 얻는 셈이다. (본서 283, n. 3에
서) 확인된 형태지만 乞里心兒는 티쑴쎄르Khri-sum-bźer라는 형태와 대응할 수도 있다.
102) 본서 174~177.
103) 宰相. 822년 비문 속의 뢴뽀blon-po에 부합하는 직함이다. (이 비문에 따르면 blon-po는 티벳에
서 가장 높은 직책이다.)
104) 尙書令, 中書令, 令公은 “최고의 재상”을 뜻하는 티벳어 뢴첸뽀blon-čhe[n] [-po]의 그럴듯한
등가어들이다. 뺷당서뺸(제216권상, 1a)는 blon-čhe[n] [-po]를 大相으로 옮긴다. 마찬가지로
“최고의 재상”을 의미한다.(본서 241, n. 5와 247, n. 4. Laufer, 뺷통보뺸, XV, 81 참조.)
105) 본서 264, n. 2 참조.
106) 본서 225, n. 3. 이 서한에서 상걸심아의 직함은 吐蕃宰相이다.
107) 본서 265~266. 그렇지만 어쩌면 이 편지에서 샹 티쑴제는 재상이란 직함으로만 언급된 것일지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33

족을 토벌하는 원정에 나서 그 수도를 위협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108) 819년


에 그는 지금의 녕하寧夏 남동쪽 염주鹽州의 포위공격에 참전한다.109) 821년
의 당-토번 회맹조약 체결 시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틀림없이 중국 관련
현안을 전담한 전문가로서, 티벳 궁정의 불교도 조언자(뺄첸뽀Dpal-čhe(n)-po)
와 협력해 사전에 장안으로 보낸 조약문을 작성했던 이가 다름 아닌 샹 티쑴제
다. 이 조약은 821년 11월 8일 장안에서 체결됐다.110) 그렇지만 이듬해(822년
5월 30일) 티벳에서 거행된, 조약 체결을 기념하는 의식에 그가 참석했는지는
확실치 않다.111) 하기야 이 의식에서 당唐을 대표했던 사절 유원정이 티벳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을 때, 그는 지금의 감숙성 하주河州에서 당시 도원수로 동
쪽의 “절도(들)”인 100명도 더 되는 티벳 장군들을 지휘했던 샹 티쑴제의 영접
을 받은 일이 있었다. 샹 티쑴제는 제장諸將들을 대하大夏 계곡에 모아놓고는
중국 사절 앞에서 엄숙하게 조약문을 읽게 했고 그 규정들을 지킬 것을 엄히
명했다.112) 같은 해, 822년에 그는 위구르족 토벌 원정의 선두에 다시 모습을

도 모른다. 이 편지의 공동 수신인으로 “吐蕃東道節度論誥都(또는 論詰都)”라는 다른 한 인물


이 있기 때문이다. 석연치 않은 문장이다.
108) 뺷구뺸, 제196권하, 11a. 뺷당서뺸, 제216권하, 7a(버쉘역, 519, 521). 본서 289~290과 290의 n. 2
참조.
109) 본서 172, n. 2.
110) 본서 229, n. 1과 247, n. 4.
111) 나이토內藤虎次郎는 (뺷硏幾小錄뺸, 340에서) 회맹 조약의 티벳인 서명자들을 티벳어와 중국어
로 거명하고 있는 라싸 석비의 측면 비문 문구들 중 네 번째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샹 티쑴제의
중국어 이름을 판독했다고 주장한다. “天下兵馬都元帥同平章事尙起心兒.” 그러나 그가 발표
한 탁본을 보면 문제의 바로 그 대목은 완전히 판독불가다. 라진옥이 석비의 이 부분을 판독하면
서 읽어낸 거라곤 직함과 尙이란 글자뿐이다. 라상배는 언급 없이 지나친다. 라우페와 다치바나
立花秀孝가 판독했던 비문의 티벳어 부분에도 이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나로선 버쉘과 라상배
가 발표한 탁본들에서 ○奇心兒란 문자들을 충분히 식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티벳어 이름
은 여전히 판독이 어렵다. 샹 티쑴제가 라싸의 맹세 의식에 참석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상당히 중
요한 인물이었던 만큼 조약문에 그 이름이 올랐을 수 있다.
112) 본서 266. 뺷구당서뺸의 해당 구절은 이상하지만, 이에 따르면 유원정이 하주에서 샹 티쑴제를 만
234 불교학리뷰 vol.18

드러낸다.113)
티벳 점령 하의 둔황에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게 분명한 이 막강한 재상
이자 도원수가 열성 불교도였다는 점,114) 이 점만큼은 이미 언급된 문서들에
서 의심할 여지가 없고, 이런 문서라면 거론된 것 외에도 다른 것들을 더 보탤
수 있다. 둔황의 한 티벳어 필사본을 보면 샹 티쑴제는 중국어 이름을 가진 어
느 화상을 저녁 만찬에 초대해 선물을 한 아름 안긴다. 화상은 지금의 감숙성
에서 불법佛法을 가르쳤고 이제 중국으로 갈 채비를 했던 것 같다. 샹 티쑴제
는 화상의 후임자를 찾는 일로 근심했다. 이 후임자는 아마도 중국 화상의 티
벳인 제자였던 것 같다.115) 역시 둔황에서 출토된 한문 필사본 한 편은 샹 티쑴
제가 아마도 그의 생애 말년에 “기거할 곳으로 선택”했던 모 불교 사원이 둔황

난 것은 앞서(初) 티벳에 갔을 때라고 한다. 뺷당서뺸에 의하면 유원정이 하주에서 만난 인물의 이


름은 탑榻(또는 塔)-장藏(샹 딱[?]-상Źaṅ Stag[?]-bzaṅ)인데, 이것이 십중팔구 샹 티쑴제의
본명일 것이다. 티쑴제Khri-sum-rǰe는 하나의 직함이기 때문이다. 뺷책부원귀뺸는 “도원수 상탑
장尙榻藏”과 “宰相 尙乞心兒”가 오직 한 명의 동일인일 뿐이었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113) 뺷당서뺸, 제216권하, 6b. 버쉘역, 522.
114) 9세기 초, 불교를 수호하겠다는 까르충Karchung 칙령에 서약했던 대신들 가운데 두 명의 티쑴
제Khri-sum-rǰe 뻭하speg-lha와 한 명의 티쑴쎄르Khri-sum-bźer 도짼mdo-bcan이 등장한
다.(Tucci, Tombs…, 54)
115) 펠리오 장서의 티벳어 필사본 996번. Lalou, J. A., 1939, II, 511~517 참조. 이 필사본은 베우씽
화상(Be’u-siṅ hva-śaṅ, 保興화상?)의 제자인 남케닝뽀(Nam-ka’i sñiṅ-po, Ākāśagarbha, 虛
空藏)라는 어느 화상의, 일종의 정신적 계보다. 베우씽은 안서安西(구자龜玆 지방)에서 온 선禪
의 대가(로 중국인, 또는 그 이름이 말하듯 중국어 구사자)였다. 안서에서 그는 인도 출신으로 안
서에 와 거기서 입적한, 아단덕(阿丹德, A-rtan-hyver)이라는 스승의 제자였다. 이번에는 베우
씽이 안서를 떠나 사주와 감주 지방으로 왔고 숙주에서 입적했다. 그의 제자 맨화상(Man
hva-śaṅ. [뺷토번승쟁기뺸는 망화상莽和尙으로 표기함. 역자])은 쫑까Coṅ-ka(?)에서 가르쳤다.
그가 중국에 가려 하니 데뢴bde-blon(“복된 재상福相”) 샹 티쑴제 마르부mar-bu(“아들, 제자”)
가 그를 초청했고, 대신할 누군가를 정해 달라 청하며 선물들을 바쳤다. 맨화상은 (티벳인?) 제
자 남카Nam-ka(또는 남케닝뽀)를 천거했으니, 필사본은 이 인물이 티쏭데짼의 재위 시(797년)
에 생존했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아까샤가르바는 다른 티벳어 사료들을 통해서도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35

성내에 건립 중이라 말한다. 둔황의 어느 식자가 쓴 이 필사본 조각에는 “도원


수상서령都元帥尙書令”의 조상들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다. 그 제목은 다음
과 같다.116)

황명으로 대슬슬이란 고신을 하사받은 티벳의 상서령 상기률심아(샹 티쑴제)


가 성광사를 [건립하면서 얻은] 공덕을 칭송하는 글.117) 티벳 속령 옛 둔황 백성

116) 예전에 펠리오 장서 한문 필사본 2765번으로 분류되던 이 필사본은 펠리오 장서 티벳어 필사본
1070번이 되었다. 그 앞면의 첫머리에 얼마간의 티벳어 문장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티벳어 문
장들 뒤엔 834년(1월부터 4월까지)의 불완전한 중국식 달력이 앞면을 채우고 있다. 이제 분석
할 찬문은 필사본 뒷면에 제법 수려한 필치로 적혀 있다. 종이는 심하게 마모됐고 그 길이는
29cm다.
117) 大蕃勅尙書令賜大瑟瑟告身尙起律心兒聖光寺功德頌. 勅이란 단어는 당대唐代의 의전 규약에
서 황제의 명에 따라 수여된 직함들에 따라 붙는 말이었다.(R. des Rotours, Traité des examens,
250) 告身은 관리들에게 주었던 직첩 내지 임명장을 가리켰다. 고신은 두 부符로 이루어져 있었
고 그 중 한 부는 이를 발행한 관청에 보관되었다.(같은 책, 44, 219) “고신을 하사받은” 이란 따
라서 관부官符를 소유한 사람임을 의미한다. 헌데 알다시피 당나라 때의 티벳에서 관리들은 符
또는 관직 위계상의 서열에 따라 달라지는 장식章飾을 소지했으니, 조금씩 다른 그 목록들이 한
문 문헌들에 보존돼 있다. 뺷당서뺸, 제216권상, 1b(버쉘역, 442)에 따르면 이 공식적 표장標章들
(官之章飾)은 “착용한 자의 지위를 변별하기 위해” 팔 앞에 부착돼 있었다.(綴臂前以辨貴賤) 그
서열은 다음과 같았다. 내림순으로
①瑟瑟
②金
③金塗銀(도금한 은)
④銀
⑤銅(구리 또는 청동)
이들 서열은 매 등급마다 다시 상하로 나뉘어 있었으니(差上下), 모두 합하면 10등급이었다. 뺷책
부원귀뺸, 제961권, 15b와 뺷通典뺸, 제190권, 10a(銅은 熟銅, 즉 “세공된 구리 또는 청동”으로 적
혀 있다.)와 뺷당회요뺸, 제97권, 2a에 이 목록이 나오며, 그 크기는 세 치이고 모직 옷이나 털옷
위, 어깨 앞쪽이나 상박上膊에 부착했다고 명시한다.(各以方圓三寸, 褐上裝之, 安膊前, 以別貴
賤) 하지만 뺷책부원귀뺸, 제961권, 17a는 쏭짼감뽀 시대 티벳 제국의 편성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구절에서 “작위爵位”들을 변별할 때 쓰는 고신 목록 하나를 내놓는데, 이 목록에서는 금金 대신
진주가, 金塗銀 대신 황동이 등장한다.
236 불교학리뷰 vol.18

두○ 지음.118)

①진주(寳珠)
②瑟瑟(大, 小)
③銀(大, 小)
④䃋[鍮]石(황동 또는 놋쇠. 大, 小)
⑤銅(구리 또는 청동. 大, 小)
금과 황동이 모두 티벳 [관부]의 표장을 만드는 데 쓰였다는 것, 이는 한편으론 뺷자치통감뺸, 제
209권, 42a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709년 금성공주를 데리러 온 두 명의 사절들 중
한 사람은 슬슬부瑟瑟符였고 다른 한 사람은 금부金符의 소지자였다. 다른 한편으론 큼직한 황
동 고신을 받은(授大鍮石告身) 장군들을 언급하는 펠리오 장서 3829번 필사본도 이를 확인해
준다. 瑟瑟에 대해서라면, 라우페Laufer가 그 어원을 이란어, 십중팔구 속디아어로 보았던
(Sino-Iranica, 516) 이 용어는 “티벳에서 매우 귀중히 여겨 남녀가 머리 장식품으로 썼던”(뺷당
회요뺸, 제97권, 1b. 뺷통전뺸, 제190권, 9b) 일종의 보석을 가리킨다. 그 정체는 불확실하다. 章鴻
釗(Lapidarium Sinicum, 1921. B. É. F. E. -O., XXIV, 288 참조)와, 더 최근에는 리드Read와
C. Pak(“Minerals and Stones”, Bull. Pek. Soc. Nat. Hist., 1928, III, ii, 23)이 그 보석을 사파
이어로 보는가하면, 허스Hirth와 샤반은 터키옥玉으로 보았다. 티벳어 둔황 필사본 1089번의
다음과 같은 샹뢴(źaṅ-lon=źaṅ-blon, 尙論)의 서열(Stein, B. É. F. E. -O., XLI, 436, n. 2 참조)
을 신뢰한다면 허스와 샤반의 말이 맞을 것이다.
샹뢴첸뽀Źaṅ-lon čhen-po, “위대한 샹뢴źaṅ-lon”
샹뢴유이이게빠Źaṅ-lon g.yu'i yi-ge-pa, “터키옥 ‘증서’를 소지한 샹뢴”
샹뢴쎄르기이게빠Źaṅ-lon gser-gyi yi-ge-pa, “금 증서를 소지한 샹뢴”
샹뢴타멘이게빠Źaṅ-lon phra-men yi-ge-pa, “보석(?) 증서를 소지한 샹뢴”
샹뢴윌기이게빠Źaṅ-lon dṅul-gyi yi-ge-pa, “은 증서를 소지한 샹뢴”
샹뢴라갠기이게빠Źaṅ-lon ra-gan-gyi yi-ge-pa, “황동 증서를 소지한 샹뢴”
샹뢴상끼이게빠Źaṅ-lon zaṅs-kyi yi-ge-pa, “동 (또는 청동) 증서를 소지한 샹뢴”
이게yi-ge라는 용어의 본뜻은 “글자, 문자”지만 여기서는 각종 관부들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는
것이 분명한 만큼, 옛 문헌 뺷빼마탕익뺸(Padma thaṅ-yig, Thomas, Tibetan Literary Texts, I,
277~285)의 한 대목에 의거해 그것이 티벳 군대의 각급 부대 또는 루락ru-lag=이 소지했던, 터
키옥과 동으로 만든 “기록(물)”(익창yig-chaṅs)과 같은 것 아닌가 자문해볼 수 있다.
관직 위계 제도와, 여러 상이한 직책에 수여된 장식들로 그 등급을 외적으로 구분하려는 생각은
중국의 발상이 티벳으로 건너온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차이점들이 있었다. 뺷구당서뺸, 제196
권상, 6b(버쉘역, 466)에는 730년에 현종玄宗 황제가 장안의 황궁에서 티벳 사절 한 명의 알현
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사절은 금성공주를 데려가기 위해 710년에 이미 중국에 온 적
이 있었고 (중국) 문자도 알고 있었다. 황제는 그에게 선물로 자색 옷 한 벌과 금(으로 장식한?)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37

이 필사본 서두의 각운이 맞지 않는 미사여구들 가운데에는 “연대蓮臺의


상서로운 전조”, 다시 말해 련대사(“연화대의 승원vihāra”)라는 둔황 사원에
대한 암시가 있다.119) 찬문은 재상의 무공과 불교적 신심을 동시에 기린다.

요대와 “어대魚袋” 하나를 하사했다. 티벳 사절은 옷에 다는 이런 장식이 티벳에 없고(無此章


服) 이토록 귀한 상을 감히 받을 수 없다 하면서 어대를 받지 않았다.
고고학자 하라다原田가 “中國唐代的服裝與首飾”(뺷文學院雜誌뺸, Journal of the College of
Literature, 동경대학출판부, IV, 1921, 57 이하)이란 연구에서 취합한 문헌들에 따르면, 중국
관리들이 착용했던 장식은 곧은 물고기 모양(魚符)이었다. 좌우 두 쪽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중
왼쪽은 궁에 보관되었다. 관리나 고관이 입궁할 때면 두 쪽을 맞추어 오른쪽[*불어 원문에는 왼
쪽으로 돼 있다. 오식으로 보인다. 역자]을 소지한 사람의 신원을 확인했다. 이 물고기에는 소지
자의 관직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뺷辭海뺸, 「亥集」, 56에 인용된 뺷演繁露뺸에 따르면 어부를 소
지한 자들은 어서魚書라는 임명장 사본도 하나씩 받았다.) 황태자의 어부는 비취로, 다른 왕자
들 것은 금으로, 관리들 것은 청동으로 만들었다. 어부는 주머니(魚袋)에 넣었는데, 관직 서열상
가장 높은 세 개 등급의 어대엔 금장식이,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등급 것엔 은장식이 있었고 소지
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주머니를 요대에 매달았다. 가죽으로 만든 요대에는 금속 꾸밈
새(銙) 장식이 있었고 여기에 걸쇠를 달아 요대를 매었다. 이 꾸밈새의 소재나 개수 역시 소지한
사람의 서열에 따라 달랐고, 이에 대한 규정 자체가 당나라 시대 내내 계속 변했다. 674년의 어
느 조령(뺷당회요뺸, 제31권)이 아홉 개 품에 대해 적용한 그 규정은 아래와 같았다.
1~3품, 13개 金銙와 玉銙 (또는 金玉銙?)
4품, 11개 金銙
5품, 10개 金銙
6~7품, 9개 銀銙
8~9품, 9개 鍮石(황동)銙
그 외 일반 관리들, 7개 銅(또는 靑銅)銙 (또는?) 鐵銙
鍮石(황동)이 무소(犀. 쇼소인正倉院의 반서斑犀다. 뺷東睿修行뺸, 제1권, 8번 및 11번 도판 참
조.) 가죽으로 대체된 때도 있었다. 관리들의 서열은 관복 색깔로도 역시 구분되었다.
118) 大蕃右燉煌郡布衣竇○. 마지막 글자는 너무 흐릿해서 해독이 어렵다. 수식어 右(“오른쪽의, 서
쪽의”)의 의미는 모호하다. 필시 古로 보고 “옛 둔황군”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본서 287, n. 3
참조.) 布衣란 용어는 (비단옷이 아닌) “베옷”으로, 관리가 아닌 평민들을 말할 때 쓴다. 두씨 가
문은 둔황에서 찬문이나 비문 등을 짓는 일을 전문으로 맡았다. 본서 250, n. 2 참조.
119) 草秀蓮臺之瑞, 人風鯁直 운운. 본서 255, n. 2 참조. 어쩌면 불교가 두루 백성들의 품행에, 아니
면 특별히 재상의 덕성에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을 두고 한 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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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훈으로써 그는 삿된 교의들을 용감하게 물리친다. 찬란한 업적으로써 많은


이들을 정법에 귀의시킨다.”120) 그의 직함은 이렇게 돼 있다. “칙령에 따라 임
명된 상서령공 겸 티벳의 도원수, 육군의 지휘관, 대슬슬이신 샹 티쑴제.”121)
그는 불사佛事를 일구어 자신의 주군과 부처님께 바친다.122) “둔황 옛 군의
성 안”에 거처를 정한 다음, 그는 거기에 성광사를 건립했다.123) “신성한 빛의
승원”이란 뜻이다. 이 명칭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신성한 군주”, 즉 티벳
왕께서 온 우주를 비추는 해와 달과 별의 “세 빛”을 관장하신다. 상서령공은
성은의 자비로운 빛을 받고, 성덕의 광휘는 둔황 사막의 “류사流沙”에까지 퍼
진다. 하여 “신성한 빛聖光”이라 이름한다.124)
다음으로 샹 티쑴제의 선조들에 대한 찬문이 있다. 그의 증조부는 재상이었
으며 높은 지위에 올랐다. 티벳의 국정을 운영함에서 큰 몫을 했던 인물이
다.125) 조부 상기립장126)은 칙시중勅侍中이자 대슬슬이었다.127) 그는 전장에

120) 成勳, 則勇破邪原. 勣効, 則多歸正法.


121) 勅尙書令公兼統六軍甲兵霸國都元帥賜大瑟瑟告身尙起律心兒. 티벳 장수들에 관한 이런 류의
문서들에 왕왕 등장하는 “육군”이란 필시 티벳의 관군을 가리키는 중국식 표현에 불과할 것이
다.(본서 288, n. 6 참조.) 고대 중국에서 왕은 여섯 개 군대를 거느렸다.(뺷周禮뺸, 에두아르 비오
douard Biot역, II, 142) 당나라 시대의 “육군”은 “궁 북쪽宮北”의 군대들로 황제의 보위를 담
당했다.(R. des Rotours, Traité des examens, 235. Traité des fonctionnaires, 58)
122) 黃金布地, 白璧邀工. 進直道以事君, 傾眞○而向佛. “황금을 땅에 펼친다黃金布地”는 말은 아나
타삔다다(Anāthapiṇḍada, 給孤獨)가 금으로 땅을 뒤덮어가며 기원정사Jetavana를 샀던 일을
빗댄 것이다. 白璧은 “하얀 옥”이란 뜻으로 황금黃金과 대비를 이룬다. 이 문장은 璧을 壁으로
보고 종교 건축물의 “벽들을 하얗게 칠하기 위해 장인들을 고용하다”로 읽어야 하는 게 아닌 담
에야, “막대한 비용을 들여 장인들을 고용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필사본에는 붓다와 티벳 왕
에게 뭔가를 바치는 이중의 봉헌이 시종일관 나온다.(본서 241~246 참조.)
123) 爰乃卜宅燉煌古郡. 州城內建造聖光寺一所. 石岩의 뺷敦煌石室畫像題識뺸, 서문, 16a에 의하면
둔황에서 “발굴됐고” 현재 청해의 군벌 마보방馬步芳이 (아직 생존해 있다면) 소유한 1017~
1022년의 한 탑파stūpa에 관한 기記(天禧塔記)에 성광사에 대한 정보들이 있을 것이라 한다.
124) 聖主統三光之明, 無幽不照. 令公承九天之寵, 肱股奉陽. 近霑聖德之弘, 遠沐思暉之重. 率賔咸
服, 觀國之光. 燭賑流沙, 稱聖光寺也.
125) 曾皇祖, 敕宰輔, 賜大告身. 諱. 牂水長流, 旣儕臣於舟楫, 盤根宰鼎, 貴住重於鹽梅. 乘軒畏夏日之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39

서와 마찬가지로 궁정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샹 티쑴제의 작고한 아비(?)[필


사본의 先門이 아버지를 뜻한다고 볼 수밖에 없기에 물음표를 쓴 것이다. 130
번 주를 참조하라. 역자] 상찬마는 부상서령128)이자 슬슬이었다.129) 필사본은

威. 變瑝[?]問春前之喘. 宰輔는 宰相의 고어체 동의어다. 직함 뒤에 휘諱자가 나온다. 중국에서


비문이나 찬문 등을 적을 때의 관례가 그렇듯이 직함 다음에는 고인의 인명을 적어야 할 것이나,
필사본에 이 이름 자체가 없다. 더 뒤로 가 봐도 샹 티쑴제의 조부와 부친의 이름들도 마찬가지
로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베껴 쓴 것(본서 194, n. 1 참조)인 이 필사본에서 공경의 의미로 이 이
름들을 삼가 밝히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필사자가 한 칸의 공백으로 이 생략을 알리지
않았던 것은 이상하다. 휘자 다음의 문장은 대략 이런 의미다. “짱(Gcaṅ, Brahmaputra)강의 영
원한 흐름 속에서, 그는 배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사공과 같았다.(훌륭한 재상이란 은유다.
뺷書經뺸, Couvreur역, 153 참조.) 숱한 역경에 처해서도 조언자로서, 그는 소금과 자두로 맛을 낼
줄 알았다.(마찬가지로 좋은 재상의 은유다. 뺷書經뺸, 같은 책, 158 참조.)” 운운.
126) 尙己立藏. 티벳어로 샹티상Źaṅ Khri-bzaṅ? 둔황의 티벳 연대기[인 뺷西藏王室世系牒뺸 : 뺷토번
승쟁기뺸 참조. 역자]에는 704년에 재상이었고 721년에 사망한 한 인물로 티상딱짭Khri-bzaṅ
stag-cab이란 이름이 나온다.(Bacot…, Documents, 40, 46) 822년 비문의 서명자들 중엔 상기
립찬(尙綺立賛, 샹티짼Źaṅ Khri-bcan. Laufer, 뺷통보뺸, XV, 73)이란 이름이 보이지만, 그 연대
로 봐서 이 인물을 샹 티쑴제의 조부와 동일인으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127) 皇祖父尙己立藏, 勅時中, 大瑟瑟告身, 諱. 弼承霸業, 世祿良家. 居朝諍處理之能. 出战任輪轅之
重. 時는 틀림없는 동음이의어 侍의 오류일 것이다. 시중侍中은 문하성門下省의 장으로, 중국
관직 체계에서 최고위직들 중 하나이자 중서령中書令과 동급의 관직이었다. Des Rotours,
Traité des fonctionnaires, 131 참조.
128) 십중팔구 뢴체고망blon-čhe mgo-maṅ, 본서 183, n. 4 참조.
129) 勅 相國先門尙賛磨, 副尙書令, 瑟瑟告身, 諱. 寔豫樟聳幹, 處宇宙長材. 橫湌海鯨鳞, 吸江淮不
測, 운운. 두 번째 글자는 亡(“사망한”)일 수 있다. 첫머리의 네 글자는 아마도 착오일 것이다.
(勅은 “왕의 명으로 임명된”이란 말인데, 그렇다면 副尙書令 앞에 위치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
를 가리키는 데 先門이란 표현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맥락에 따르면 여기선 샹 티쑴제의 부친을
가리킨다고밖에 볼 수 없다. 어쩌면 門은 卿의 초서체를 부정확하게 표기한 것일지 모른다. 先卿
은 작고한 부친을 일컫는 통상적 호칭들 중 하나다. 諱(“돌아가신 양반의 생전 이름”) 다음은 이
런 의미다. “참말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무들 중 하나인 녹나무로 세운 기둥 같았다.” 운
운. 같은 풍의 문장들이 이어진다.
*뺷토번승쟁기뺸는 日로 읽었지만 펠리오 장서 티벳어 필사본 1070번의 표기를 확인한 결과 로
표기돼 있다. 없는 한자다. 글자 획이 지워지거나 손상됐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문장 전체의
의미가 불확실한 만큼 불분명한 형태 그대로 놔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역자)
240 불교학리뷰 vol.18

그의 정복들, 그가 곤경에 처했던 어느 “이웃 나라”(중국일까?)를 위난에서 구


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도움을 줬던 일을 에둘러 말한다.130) 필사본 말미에
는 샹 티쑴제에 대한 (미완未完의) 찬문이 담겨 있다. 주로 그의 군사 원정과
영토 정복에 관한 것이다.131) “북쪽에서는 예리한 창을 들어 랑산을 휩쓸었다.
서쪽에서는 높고 큰 산 위로 올라 아홉 개 씨족의 야만인 군대를 쳐부수었다.
흉노족 … 국경에서는 현왕賢王들을 추격해 패주시켰다. 선우의 막사에서 사
조射?의 귀인들을 사로잡았다. 맨머리의 야만인들은 달아났다.132) …”

130) 跨秦右地方. 外不敵驍果. 救隣國艱虞. 起義兵而濟. “그는 진(섬서陝西의 옛 명칭)의 서쪽에 있


는 땅을 점령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의 용맹함에 대적할 수 없었다. 곤경에 처한 이웃나라를
구하기 위해 그는 호의로 원정군을 보내 도왔다.” 784년 주자朱泚의 난 당시 티벳인들이 당나라
에 도움을 줬던 일을 말함이 분명하다.(본서 177, n. 1과 182, n. 3, 291, n. 1 참조.)
131) 統六軍以長征. 廣十道而開闢. “十道”는 “六軍”(본서 287, n. 1)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중국식 표
현일 뿐이다. 당唐 제국은 열 개의 “道” 내지 省으로 나뉘어 있었다.
132) 北擧攙槍, 掃狠山一陣. 西高太白, 破九姓胡軍. 獫狁◯邊, 逐賢王遁竄. 單于倀[帳으로 읽음]下,
擒射鵰貴人. 科頭逬走, 운운. 필사본은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는 몇몇 관용적 표현들로 끝난다.
랑산은 황하강 하투河套의 북쪽, 지금의 우라트Urat족 지역에 위치한다. 하지만 이는 필시 어떤
“문학적 비유”에 불과하다. 기원전 119년에 흉노족을 정복한 곽거병霍去病 장군은 狠居胥山에
서 제사를 모셔(封) 그 승리를 기렸다.(뺷史記뺸, 10b. 제111권, 5b. 뺷漢書뺸, 제94권, 9a) 이 산을
랑산(뺷中國古今地名辭典뺸, 商務印書館出版)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지금의 녕하寧夏
인근으로 보는 이들(다키카와瀧川資言, 뺷史記會註考證뺸, 도쿄, 1933, 제110권, 53)도 있다.
“아홉 개 씨족의 야만인들”이란 뺷당서뺸의 저자들이 아홉 개 씨족으로 분류하고 있는 튀르크족
내지 위구르인들이다. 소무(昭武. 아랍어로 Schāba, 페르시아어로 Schāwa?)라는 아홉 개 속득
(粟特) 가문(昭武九姓. Chavannes, Documents sur les Tou-kiue…, 134 참조.)일 리 없다. 이 씨
족들이 “서쪽에” 있었다는 것은, 이런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의미를 갖는다면, 전체적으로 보아
티벳이 아니라 둔황과 관련된다.(보유편, 본서 368~369 참조.)
高太白이란 표현은 문제의 군사 원정들이 중국 서부에 위치한 산악지역들에서 있었음을 단적
으로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太白(금성金星)은 장안 남서쪽 친링秦嶺산맥(終南山)의 최고봉(약
4,000m) 이름이다. 옛 문헌들에 따르면 이 봉우리는 무공산武功山에 닿아 있었다. (장안 서쪽,
오늘날의 무공현武功縣은 이 산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武功은 “군사적 공로”를 뜻하는데, 태
백산과 무공산은 흔히 함께 언급되곤 한다.(예컨대 商務印書館出版, 뺷中國古今地名辭典뺸,
141b에 인용된 뺷水經注뺸) 고로 高太白은 샹 티쑴제의 높은 군사적 공로들을 동시에 아우르는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41

그 어투가 아무래도 둔황의 중국인 아첨꾼들의 빈말 같은 이 마지막 구절들


에서 도출할 수 있는 실증적인 거라곤, 샹 티쑴제가 훈족(흉노)의 후예들로 여
겨진 “야만인들”, 즉 튀르크 위구르족이나 토욕혼인들과 싸웠다는 것이 전부
다. 알다시피 샹 티쑴제가 위구르 토벌 원정을 여러 차례 지휘하긴 했다. 그러
나 중국 사절과의 회담들에서 그가 즐겨 응수하곤 했던 대로 샹 티쑴제는 위구
르족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 허약함에 다만 업신여기는 마음이 들
뿐이었다.133) 샹 티쑴제가 주로 공들인 일은 물론 중국인들에 대적하는 것이
었다. 중국인 식자는 이 점을 강조하지 않고 있는데, 왜 그런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중국 문제 전문가이자 당번唐蕃 국경지역의 절도사로서 샹 티쑴제는 그 아
비 상찬마尙贊摩의 뒤를 이었던 것이 틀림없다.134) 이미 본 대로 상찬마는

암시 또는 비유일 수 있다.
험윤獫狁은 중국에선 튀르크족의 선조들로 여겨지는 흉노(훈Huns)족의 옛 이름이다. 현왕賢
王, 즉 “어진 왕”은 tou-k'i(튀르크어 doghri?)라는 칭호의 번역으로, 한대漢代의 한족漢族과 흉
노족 간 전쟁담에서 자주 언급된, 흉노 제국 최고위 관리들의 직함이다.(Chavannes, Mém.
hist., I, LXVI. de Groot, Die Hunnen der vorchristlichen Zeit, 55 참조.) 선우單于는 흉노족
군주의 칭호였고, 사조(射鵰, “수리를 쏘아 잡는 명사수”)란 역시 흉노족을 일컫는 수식 어구다.
“귀한 사람”이란 뜻의 貴人은 (황제의 후궁을 일컫는 칭호이기도 한데) 뺷史記뺸, 제109권, 1b(de
Groot, 같은 책, 94 참조)의 한 구절을 잘못 차용해서 나온 말 같다. 뺷史記뺸의 이 대목은 기원전
150년 무렵 한나라 경제景帝의 어느 환관(中貴人)이 장수 이광李廣의 흉노 토벌 원정에 따라나
섰다가 흉노의 “독수리 사냥꾼들”(즉, 활쏘기에 능한 자들)에 의해 부상을 입었고 이 사냥꾼들
이 다시 이광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히게 됐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133) 본서 282~283 참조. 유원정과의 한 회담에서 샹 티쑴제는 816년에 별 어려움 없이 위구르족을
그들의 수도 부근까지 몰아붙였음을 상기시키고, 그토록 허약한 족속을 티벳보다 더 명예롭게
취급하는 중국을 나무란다.(뺷구뺸, 제196권하, 11a. 뺷당서뺸, 제216권하, 6b~7a. 버쉘역, 519~521)
134) 尙贊摩. 원래의 티벳어 이름으론 여성형인 샹짼마Źaṅ Bcan-ma가 아니라 샹짼바Źaṅ Bcan-ba
여야 할 것이다. 투르케스탄에서 발견된 어느 티벳어 군사 문서는 그 수신자가 “주군 짼바
Bcan-ba”다.(Thomas, J. R. A. S., 1933, 396) 둔황의 티벳 연대기 속에 나오는 이름 역시 샹짼
바Žaṅ Bcan-ba다.(Bacot…, Documents…, 65) 이 이름은 분명 하나의 직함에 불과하다. 펠리
오 장서 2555번 필사본(본서 293, n. 1)에서 상찬마는 上贊摩射婆蕚이라 불린다. 그런데 알다시
242 불교학리뷰 vol.18

768년 이전부터 하서와 롱우, 즉 둔황이 자리한 광대한 중국 북서 지역을 관할


하는 특별 권한을 가진 티벳의 “동東[도道] 절도”로 임명됐었다.135) 768년에
상찬마는 티벳의 빈주邠州 정벌군의 선두에 선다. 장안에서 북서쪽으로 100
여 킬로미터 떨어진 빈주에서 중국인들은 그에게 패배를 안겼다.136) 펠리오

피 당대唐代 북서지방 중국말의 티벳어 트랜스크립션에서 m-으로 시작하는 중국어 음절이 비


음(-n, -ṅ)으로 끝났던 경우를 빼곤 중국어 초성 m에 상응하는 티벳어는 언제나 b- (또는 'b-)다.
고로 摩(磨) = 티벳어 ba다. 이 등가 관계는 당대 북서지방 발음의 특수성에 의거한 것이었다. 북
서지방에서 m-은 mb-로 발음됐었다.(라상배, 뺷唐五代西北方音뺸, 17, 22, 143과 본서 25, n. 9
참조.)
135) 본서 264, n. 2 참조. 상찬마는 “762년부터 (중국) 국경을 번번이 침입한 일로 뛰어난 공을 쌓은
뒤 퇴역을 청했던”(뺷당서뺸, 제216권하, 1a. 버쉘역, 482) 상실결尙悉結의 후임으로 이 직책을
맡았다. 상찬마는 765년 9월 티벳인과 당항족과 토욕혼인 등의 연합으로 만들어진 야만족 유목
민 군대가 장안을 향해 침입했던 일을 논한 한문 사료들 속에 이미 언급된다. 이때 봉천奉天(장
안 북서쪽 75km, 지금의 섬서성 건현乾縣)과 예천醴泉(봉천의 동쪽)을 점령했던 티벳 장수들
가운데 상결식[과] 찬마尙結息贊摩(또는 磨)가 있었다.(뺷구뺸, 제196권상, 10a. 뺷당서뺸, 제221
권상, 8b. 뺷책뺸, 제987권, 2a) 버쉘(버쉘역, 479)과 라우페(뺷통보뺸, XV, 106, n. 1)는 이 대목에
서 단 하나의 이름, 상결식찬마만을 보았다. 하지만 상찬마에 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뺷당서뺸,
제216권하, 1a(768년)의 한 구절에서, 그는 (상尙자 없이) 찬마로 지칭된다. 다른 한편 뺷자치통
감뺸, 제223권, 55b, 765년에는 찬마란 이름에 나란히 적힌 이름으로 상결식 대신 상결실尙結悉
이 나온다.(뺷구뺸, 제11권, 6a의 尙品息은 오식임이 틀림없다.) 그러니 이 상결식 또는 상결실이
다름 아닌 상실결이고, 상찬마가 중국 북서부의 티벳인 절도사로서 그 뒤를 곧바로 계승했던 게
아닌지 자문해봄직 하다. 尙結息은 샹걜식Źaṅ Rgyal-zigs에 들어맞으니 그 표기 형태는 맞을
것이다. 둔황의 티벳 연대기(Bacot…, Documents…, 65)에 따르면 762년에 경사京師(keṅ-śi.
king-che. “수도”, 장안. 중국 북서부 방언에서 중국어를 티벳어로 옮길 때 king은 항상 keṅ으로
옮겨졌다.)를 점령했던 티벳의 장수들로 샹걜식(Žaṅ Rgyal-zigs = 尙結息)과 샹똥짼(Źaṅ
Stoṅ-rcan = 尙息東贊), 샹짼바(Žaṅ Bcan-ba = 尙贊磨)와 뢴딱다(Blon Stag-sgra = 論息諾羅)
가 거명되었다. (위에 열거한) 한문 문헌들을 보면 이 중에서 앞의 세 명은 765년 장안을 위협했
던 장수들의 이름 가운데 언급된 이들이다. 고로 尙結息贊摩는 분명 “샹걜식Źaṅ Rgyal-zigs[과
샹Źaṅ] 짼바Bcan-ba”에 대응한다. 아래 이어지는 각주에서 보다시피 중국인 필사자들 때문에
이 이름들은 뒤죽박죽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136) 뺷자치통감뺸, 제224권, 62a에 의거하고 뺷구뺸, 제11권, 10b의 보충 설명을 보면 상찬마는 768년
10월 11일에 빈주邠州(지금의 섬서성 빈현)를 점령했으나, 이튿날인 10월 12일에 빈녕邠寧(섬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43

서와 감숙)의 도절도사 마린馬璘이 상찬마의 2만여 군을 격퇴했다. 뺷자치통감뺸은 “尙贊摩”로,


뺷당서뺸, 제216권하, 1a는 “贊摩”로, 뺷구당서뺸, 제196권하, 1a는 尙悉摩로 적고 있다. 뺷당서뺸, 제
216권하, 1a, 768년 이하 대목에서도 尙悉摩가 당나라 조정에 “다시 온(復來)” 것으로 언급되
고, 뺷책부원귀뺸, 제976권, 4a는 尙悉摩란 이름의 한 인물이 769년에 사절로 장안에 있었고 그를
위한 연회가 열렸다고 기록한다.
이 이름들이 전해지는 와중에 분명 혼동이 끼어들었다. 783년 청수에서 체결된 당번 회맹조약
을 준비할 때 “대상大相”(blon čhe) 尙結息은 경질되고 그의 “부상副相”(blon čhe mgo-maṅ?)
으로 중국과 더 타협적이었던 尙結贊이 그를 대신했다.(본서 183, n. 4 참조.) 여기서 尙結息
(Žaṅ Rgyal-zigs? 822년의 비문에서 結이 rgyud의 번역이었다면 Žaṅ Rgyud-zigs? Laufer,
뺷통보뺸, 1914, 78. 하지만 Pelliot, 뺷통보뺸, 1915, 15도 참조하라.)은 뺷구당서뺸, 제196권하, 2b,
3~5(버쉘역, 488)와 뺷책부원귀뺸, 제980권, 12b의 표기다. 뺷당서뺸, 제216권하, 1b, 13은 尙悉結
로 적는다. 십중팔구 768년 무렵까지 중국 접경지역의 군절도사였던 인물일 것이고 상찬마는
그를 이어 바야흐로 이 직책을 맡았을 것이다. 상찬마의 전임자는 직책에서 물러난 뒤 틀림없이
“대상”이 됐을 것이다.
尙結贊(Źaṅ Rgyal-bcan?)에 관해서라면 이 인물의 이름은 정확한 것으로 보이며, 782년부터
796년 사망할 때까지 중국 사료들 속에서 그의 이력을 꽤 규칙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뺷당서뺸,
제216권하, 4b. 버쉘역, 506) 상결찬은 783년 1월(2월 20일)에 청수에서 조약을 체결하고 7월
에 장안에서 이를 재확인했던(뺷구뺸, 제122권, 1b, 제125권, 2a, 제196권하, 2b. 버쉘역, 488. 뺷당
서뺸, 제216권하, 2a. 뺷자뺸, 제228권, 29b. 뺷책뺸, 제981권, 11a, 13a) 인물이고, 주자의 반란을 진
압할 목적으로 784년 당나라에 티벳의 지원군을 보냈던 인물이다. 당나라는 원군의 파병에 보
상을 약조했지만 그는 보상받지 못했고, 이 일로 중국에 반감을 품게 됐다.(본서 177, n. 1과
182, n. 3 참조.) 그리하여 상결찬은 감숙 남동부와 섬서 서부, 황하강 하투를 침략해 786년 말에
점령했다. (당시 그는 여전히 대상이었다.) 그 다음엔 鹽州(지금의 녕하 남동부)와 夏州(섬서 북
부)에 몇몇 주둔군만 남기고 동계 숙영을 위해 787년 초에 주력부대와 함께 명사鳴沙로 철군했
다. 자일즈는 명사가 둔황(B. S. O. S., VII, 562)이라 믿지만 그렇진 않다. 명사는 지금의 녕하
남서쪽, 황하 하투의 서쪽 지류에 있었다.(뺷자뺸, 제232권, 3b, 6b8, 7a5. 뺷구뺸, 제196권하, 4a. 버
쉘역, 493 참조.) 상결찬은 시기심을 이용해 국경지역 당나라 군 수장들을 이간시켰고, 당나라
밀정들을 활용하면서 장수들이 서로 반목하도록(反間) 충동질하여 청수 조약을 갱신해야 한다
는 미명 아래 당나라 황제의 전권사절단을 평량(平涼. 감숙, 지금의 녕하 남부)으로 유인하고는,
787년 6월 5일 매복하고 있다가 사절단을 붙잡았다.(본서 182, n. 3 참조.) 789년에 남조南詔는
상결찬의 “흉악한 모략질”에 대해 불평했고, 티벳인들에 맞서 지금의 운남雲南과 사천四川 접
경지역(嶲[또는 雟]州의 臺登)에서 중국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뺷구뺸, 제222권상, 3b) 중국인
들에게 크게 패한 이 전쟁에서 상결찬은 걸장서서(乞臧庶庶, Khri-bzaṅ-…)란 이름의 아들(진
244 불교학리뷰 vol.18

장서 필사본들 중 약간 이른 시기(762년 무렵)137)로 그 연대를 산정해야 하


는, 숙주 자사가 상찬마에게 보낸 한 통의 서신이 있어 그 전문을 여기 분석
한다.138)

[제목 :] 숙주 자사 류신벽을 위해 남쪽의 어느 티벳인에게 회답으로 쓴 편지,


두오 씀.139)

중국 자사는 서신 교환 상대가 보낸 론실린종140)이라는 “평화의 사자使者”


가 한 통의 편지와 은반銀盤을 갖고 당도했음을 알린다. 자사는 상찬마사파악
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의례적인 계절 인사말(편지를 쓴 시기는 1월이다.)을
전한다.141) 다음으로 그는 이 서한의 목적이 특히 숙주를 겨냥해 티벳인들이
도발한 당번唐蕃 전쟁을 끝내기 위해 티벳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촉
구하는 데 있다고 밝힌다.

짜 아들이거나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 하나를 잃었다.(뺷구뺸, 제196권하, 7a. 버쉘역, 503. 뺷구뺸,
제122권상, 3b. 뺷자뺸, 제233권, 17b)
상결찬의 이력은 몇몇 행적들(영토 정복, “어려움에 처한 이웃 나라”를 지원)에서 샹 티쑴제의
찬문이 상찬마에 관해 들려준 이야기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한편으로 “尙結贊”이란 이름은
한문 문헌들 속에서 충분히 밝혀져 있고, 다른 한편으론 이 상결찬이 “대상”이었던 반면 상찬마
는 “부상”일 뿐인데다 대슬슬의 품계에도 이르지 못했으니, 이는 “상결찬”이란 인물의 비중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두 이름은 거의 틀림없이 별개의 인물을 가리킨다.
137) 본서 301, n. 1과 302, n. 2, 303, n. 6을 참조하라.
138) 이 필사본 전문은 펠리오 장서 2555번 필사본이 실려 있는 긴 두루마리의 앞면 끝에 있다. 2555

번 필사본에 대해서는 본서 306, n. 3을 보라.


139) 爲肅州刺史劉臣璧答南蕃書. 竇吳. 남번南蕃(“남쪽의” 티벳)은 마땅히 숙주와 관련해서 이해돼
야 한다. 본서 267의 주 참조. 두竇씨 가문에 대해서는 본서 250, n. 2를 참조할 것. 오吳를 이름
으로 쓰다니 기이하다.
140) 論悉藺琮, 뢴씨쫑Blon Srid-coṅ?
141) 和使論悉藺琮至, 遠垂翰墨, 兼惠銀盤. 覩物思賢, 愧○○分○○. 首春尙寒. 惟 上賛摩射婆蕚, 動
納淸勝. 臣璧盡忠之○, 餘何足言? 본서 290, n. 2 참조.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45

이렇게 말문을 열면서 자사는 현종(玄宗, 712~756)142)의 재위로부터 시작


해 양국 관계의 지난 변천사를 잠시 상기시킨다. 그의 말인즉, 현종의 즉위 이
래 당은 티벳과의 선린 정책을 취했고 “그리하여 양국은 오직 한마음일 따름
이었다.”143) 당나라 황실의 공주가 티벳에 갔고144) (두 나라 모두 자국) 영토
(의 지역명들)을 (석비에) 새기면서 (이렇게 정해진 국경을) 침범하지 않기로
맹세했다.145) 이에 따라 혼인으로 맺어진 양국 간의 동맹은 지리적 현실로도

142) 당대唐代의 관례(본서 231, n. 1)에 따라 사후에 추증된 칭호가 아니라 (822년의 비문에서처럼,
데라모토寺本婉雅, 뺷大谷學報뺸, 제10권, III, 556, 566 참조) 그의 생전에, 즉 742년 3월 22일
(뺷당서뺸, 제5권, 9a 참조)에 받은 존호로 지칭된다.
143) 昔我開元聖文神武太上皇帝, 登極之際, 與賛普神君契合. […]倂兩國一心.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보면 실은 현종이 재위하기 이전의 일들이다. 현종은 재위 기간 전반부에는 티벳에 우호적인 그
어떤 정책도 채택하지 않았다.(본서 5, 227)
144) 公主下降於紫霄之中, 遠適於黃河之外. 금성공주의 혼인(710년).
145) 鐫銘列土, 誓不相侵 운운. 당나라가 금성공주와의 혼인을 승낙하기 직전, 신룡神龍 2년(706년)
“효화孝和 황제”(孝和는 705~710년 재위한 중종中宗의 사후 존호들 중 하나다. 뺷구뺸, 제7권, 7a
참조.)의 치세 때 당나라와 티벳 국경을 정하는 조약 하나가 맺어졌고 석비에 이를 새겨 넣었다.
(뺷당서뺸, 제216권상, 6a와 버쉘역, 460의 714년 기록에서 이 조약 관련 언급들을 참조. 뺷책뺸, 제
981권, 6a. 뺷전당문뺸, 제999권, 3a. 같은 조약임이 분명한데 그 연대가 경룡景龍 2년, 즉 708년으
로 잘못 적혀 있다. 아마도 실수일 것이다. 이 조약은 뺷구뺸, 제196권하, 2a와 버쉘역 486의 781년
기록에도 언급된다. 뺷당서뺸, 제216권하, 1b. 뺷책뺸, 제980권, 12b, 제981권, 10b) 그 후로 티벳인
들은 여러 번 거듭하여 (특히 714년에는) 금성공주의 중재로 조약을 갱신하려 했다. 하지만 730
년에야 비로소 새로운 국경 조약이 원칙적으로 체결됐고, 734년에는 조약 문안을 새겨 넣은 석
비들이 당과 티벳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녕西寧에서 라싸로 가는 길에 있는 적령赤嶺에
건립됐다.(본서 185, n. 3 참조.) 이 석비들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사료들마다 다르다.(730년,
733년, 734년?) 그 연대를 확정하려면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뺷구뺸, 제8권, 12b, 13b,
14b. 뺷구뺸, 제196권상, 6b. 버쉘역, 466. 뺷구뺸, 제196권상, 7a. 버쉘역, 468. 뺷당서뺸, 제216권상,
7a. 뺷자뺸, 제213권, 25b, 27b~28a. 뺷책뺸, 제979권, 9a[비문碑文]와 제981권, 8a~b) 822년에 유
원정은 이 조약의 한문 석비가 엎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티벳어가 적힌 석비만이 온전히 서 있었
다. 그는 적령의 위치를 장안에서 3천 리 거리의 석보성石堡城 서쪽이라 기록했다.(뺷당서뺸, 제
216권하, 6a. 버쉘역, 531, n. 39와 본서 318, n. 2 참조.) 숙주 자사의 이 편지에서 거론된 것은
아마 이 두 번째 조약(730~734년)이 맞을 것이다. 편지에서 언급된즉, 금성공주의 혼인(710년)
이후를 말하기 때문이다.
246 불교학리뷰 vol.18

공고해졌다.146) 석비에 적힌 조약(문)이 아직도 보존돼 있다. (이 모든 것이 고


작) 반세기밖에 안 된 일로, 우리와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다.147)
(그러나) 727년에 왕을 아랑곳 않는 (티벳의 장수) 실낙라悉諾邏148)가 하
늘의 뜻을 거역하고 조약의 맹세를 저버려 군사를 일으켰고, 거대한 사막을 건
너와 과주를 점령했다.149) 그는 주민들에게 흙을 쌓고 나무를 모으게 해 옥문

146) 是知舅生[甥의 오기로 보임.]義國, 天然有之, 운운.


147) […]碑契猶存, 五十年間, 其則何遠. 나중에 보겠지만 이 서한은 숙종(肅宗, 756~762년)이 재위
할 때로 그 연대를 잡아야 한다. 어쨌든 티벳인들이 숙주를 점령한 때인 766~767년보다는 앞선
다.(본서 171, n. 2) 그러니까 706년의 조약이나 710년 금성공주의 혼인, 아니면 713년 현종이
즉위한 때로부터 50년이란 소리일 것이다.
148) 이 인물이 한문 사료들 속에서 얻은 이름은 悉諾邏恭祿이다. 이는 음성학적으로 완벽하게 일치
하진 않아도 [Bacot, et al.의] Documents de Touen-houang…, 47~48과 150에 나온 딱다콩록
Stag-sgra Khoṅ-log일 수밖에 없다. 원래의 발음은 낙다콩록Snag-sgra Koṅ-log이 될 것이다.
발음상의 이 변칙은 첫 번째 비음을 폐쇄음으로 변형시키는 북서부 중국어 발음 경향으로 설명
이 될 것이다.(*nâk 諾 > ndâk > dâk. 따라서 悉諾은 닥sdag 또는 딱stag에 해당함.) 중국 사료
에 따르면 실낙라공록은 727년 9월 26일 과주를 점령한 다음 과주 자사를 포로로 잡고 마을을
약탈했으며 성벽을 부순 뒤 물러났다. 곧이어 그는 (과주 동쪽의) 옥문군玉門軍을 공격했고 상
락현(常樂縣, 과주 서쪽)을 포위했다. 상락현이 장기간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견디니 티벳인들
이 철군했다. 그러자 당나라 황제는 신임 과주 자사를 임명했는데, 이 신임 자사가 성을 재건하
고 주민들을 다시 모았다. 실낙라悉諾邏로 말하자면, 당唐의 하서 절도사는 밀정들을 동원해 실
낙라가 당과 담합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면서 티벳인들에게 그를 밀고했고, 이에 티벳 왕은 실낙
라를 불러들여 처형했다. 이듬해 또 한 명의 티벳 장수가 과주를 다시 공격하지만 중국인들에게
격퇴 당했다.(뺷구뺸, 제8권, 11a, 제103권, 2b, 제99권, 3b~4a, 제196권상, 5b. 버쉘역, 462~463.
뺷당서뺸, 제5권, 6b, 제101권, 2b, 제133권, 2b, 제216권상, 6b. 뺷자뺸, 제212권, 22a 이하) 따라서
749년 코코노르 호수 부근의 석보石堡에서 가서한哥舒瀚이 사로잡았던 이는 또 다른 실낙라
(뺷자뺸, 제216권, 51b. 본서 296 참조.)이고, 소비蘇毗족 왕의 아들로 755년 당唐에 항복했던 실
낙라도 있다.(본서 38, n. 3) 와델Waddell이 발표했던 대로 포탈라궁의 석주 비문들에는 842년
왕조의 위기에 일역을 담당했을 딱다루콩Stag-sgra Klu-khoṅ이란 인물이 언급된다.(J. R. A.
S., 1910, 1269) 뺷당서뺸, 제40권, 7a(버쉘역, 539)의, 8세기 중엽의 노정路程에 따르면 코코노
르와 라싸의 길 중간에 “실낙라역悉諾羅驛”이란 역참 하나가 있다. 바로 이곳이 그 씨족의 세력
권이었을 것이다.
149) 둔황 북동쪽, 지금의 안서安西 부근.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47

군玉門軍150)의 성을 침수시켰다. (물에) 쪼개진 산이 흙물을 토해냈다.151) 그


가 스스로를 전쟁 영웅으로 여기면서 국경지역을 어지럽히니, 그 해악이 점점
심해져 6년 내지 7년은 족히 가는 손실을 입혔다.152)
편지는 이어 튀르크족 출신으로 당나라 장수였던 가서한이 이끈 군사원정
의 승리들을 상기시킨다. 가서한은 “8년 내지 9년간”(747~754년 무렵) 티벳
인들을 “아주 못살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그는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코코노
르까지 가서 소금 호수의 한 섬에 병사들을 집결시켜 티벳에 맞섰다. 그는 여
러 곳을 정복하고 다섯 군데에 요새(城)를 지었다.153) 당시 그 전쟁으로 국경

150) 과주의 동쪽, 과주와 숙주 사이. 본서 269, n. 1 참조.


151) (흙으로 쌓은) 성城벽의 하부를 잠기게 해서(灌) 무너뜨리기 쉽게 만들려고 흙과 나무로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왔다는 이야기 같다. 이 방법은 중국에 익히 알려져 있었다. 기원전 225년 진시
황 휘하의 장수 왕전王翦은 위魏나라 수도 대량大梁을 “물에 잠기게 하려고” 황하의 물을 끌어
왔고, 성벽은 무너져 내렸다.(引河溝灌大梁, 大梁城壞) 뺷사기뺸, 제6권, 4a. 샤반Chavannes의 번
역으론 II, 121 참조.
152) 去開元十有五載, 悉諾邏不恭王, 違天背盟, ○振干戈. 橫行大漠, 陷瓜州. 黎庶聚土積薪, 灌玉門
軍城, 决山噴浪. 自以爲軍戎大壯, 擾攘邊陲. 爲害滋深, 已六七年矣. 실낙라가 일으킨 혼란 자체
는 “6년 또는 7년”까지 지속될 수 없었다. 한문 사료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증언하는 바에 따르
면 그는 과주를 침략한 후에 처형됐기 때문이다. 이 서한의 작자는 아마 727년의 과주 침략부터
734년의 조약 체결 때까지의 당번唐蕃 전쟁들 전체를 염두에 뒀을 것이다.
153) 及哥舒瀚出將天寄, 擢旄擁關西之師, 稜威奮伐. 龍胊[駒]島, 入菀秀川. 開地數千, 築城五所.
謀力雲合, 指麾從風. 使蕃不聊生, 亦八九年矣. 당대唐代의 역사서들에 가서한(사서史書들은 瀚
을 본서 297, n. 2에서처럼 삼수변三水邊 없이 翰으로 적는다.)의 일대기가 나온다.(뺷구뺸, 제104
권, 4b~6b. 뺷당서뺸, 제135권, 1a~3a. 뺷자뺸, 제215권, 46b 이하와 버쉘역, 473~ 475 참조.) 그는
튀르크인 내지 더 정확히는 튀르기시(突騎施. 哥舒는 그의 부족명이었다.) 아버지와 호탄인 어
머니(뺷당서뺸에 따르면 호탄 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당나라 안서도호安西都護를
위해 일했고 구자(龜玆, Koutcha. 당시 안서도호부의 소재지였다. 프랑케Franke가 Gesch. des
ch. Reiches, III, 399에서 말하는 지금의 감숙성 안서가 아니다.)에서 살았다. 나이 마흔에 부친
이 작고하자 가서한은 장안에 와서 3년을 머물렀다. 이어 747년 말에 량주涼州와 감숙 사이 대두
군大斗軍(des Rotours, Traité des Fonctionnaires, 799 참조.)의 부사副使로 들어가 하서절도
사(감숙 남동부, 량주에 소재) 왕수王達를 위해 일했고, (아마 량주 지역에 있었을) 신성新城에서
티벳인들과 전투를 벌였으며, 롱우(감숙과 녕하 등등)의 장군 및 부절도사로 임명되고 나서 다시
248 불교학리뷰 vol.18

정식 절도사가 되었다. (뺷당서뺸의 집필자들이 내용을 너무 요약해서 적은 나머지 뺷당서뺸, 제216


권상, 8a³는 가서한이 743년부터 롱우의 절도사로 임명됐다고 말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가 롱우
절도사에 임명된 것은 747년 12월 25일이었다. des Rotours, Traité des Fonctionnaires, 845,
n. 2 참조.) 이듬해인 748년부터 가서한은 코코노르 호수 기슭에 신위군神威軍이라는 “군영”을
“구축했다.”(築神威軍靑海上. 본서 186, 라싸를 오가는 길에 자리한 천위군天威軍을 말한다.)
“군영”(軍)은 여기서 본래적 의미의 경비대가 주둔했던 진지 또는 요새를 뜻하는 것 같다. 뺷당
서뺸의 뺷兵志뺸(제50권, 4b. des Rotours역, 같은 책, 785)에 따르면 군軍은 국경의 경계를 맡은
경비대들 중에서도 더 강한 부대들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였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편지의, 가
서한이 쌓았다고 하는 다섯 개 요새(城)들이란, 당대唐代의 엄밀한 군사용어로 볼 때 城이 軍보
다 덜 중요한 진지였음에도 불구하고, 틀림없이 이 軍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뺷당서뺸와 des
Rotours, 같은 책) 게다가 사서들은 748년에 “망아지와 용들의 섬”(駒龍島. 다름 아닌 우리의
서한에 언급된 섬이다. 말을 대량 사육한 몽골족 혈통의 토욕혼인들이 코코노르에 정착해 동절
기에 그곳에서 용들이 수태시켰다고 여겨진 암말들을 방목했기에 그런 이름을 갖게 됐다. 뺷구뺸,
제198권, 4b. 뺷당서뺸, 제221권상, 5b)이라 불린 코코노르의 한 섬에 지어진 요새를 지칭하는 데
城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가서한은 이렇게 코코노르 연안의 티벳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 다음
그들을 공격하고 쳐부수었으며 그들의 수장 悉諾羅를 잡아(749년 여름. 뺷자뺸, 제216권, 51b와
뺷책뺸, 제986권, 24b 참조.) 석보성石堡城에 가두었다. 석보성은 호수 동쪽면에서 상당히 중요
한 전략적 요충지로, 741년부터 티벳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뺷자뺸, 제214권, 39a) 티벳인들을
물리친 뒤 가서한은 이곳에 신무군神武軍이라는 “군영”을 설치했다.(des Rotours, 전게서,
809, n. 1 참조.) 751년부터 753년(또는 뺷당서뺸, 제5권, 11a와 뺷자뺸, 제217권, 59b~60a에 따르
면 754년)까지 그는 티벳인들이 다수의 요새를 구축해두었던 구곡(九曲. 코코노르 호수 남동쪽,
황하에 인접한 지금의 파연巴燕 일대) 전 지역을 정복한 다음 거기에 군영과 현縣들을 설치했고,
신책군神策軍과 완수군宛秀軍이란 군영을 “구축(築)했다.” 마지막의 완수군은 (宛 대신 菀으
로) 우리의 편지에 언급돼 있는데, 지금의 청해성 내 곽주(廓州. 지금의 서녕 이남, 황하와 접함.
des Rotours, 전게서, 810, n. 2) 서쪽에 위치했었다. 신책군은 동쪽으로 더 멀리, 지금의 감숙
성 남서부에 위치해 있었다. 뺷당서뺸, 제50권, 4b와 제216권상, 8a(버쉘역, 473), 그리고 뺷자치
통감뺸, 제217권, 59a의 주석(疏義)에 따르면 신책군은 조주洮州 서쪽, 지금의 임담臨潭 인근,
고란皋蘭(蘭州) 남쪽에 있었다.(des Rotours, 같은 곳, 810, n. 1 참조.)
사료들의 기술에 따르면 가서한이 정복하고 개척한 지역은 지금의 청해성 동부와 감숙성 남서
부에 걸쳐 있었다. 753년부터 가서한은 747년부터 갖고 있던 롱우절도사직에 더해 하서절도사
직까지 겸했다. 754년에 소비蘇毗족 왕자 실낙라의 항복을 받아낸 이가 바로 그였다.(본서 38,
n. 3) 그러나 그는 과로로 건강을 해쳤고, 같은 해인 754년 요양을 위해 장안으로 가야 했다. 755
년 말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는 장안의 자택에서 휴양 중이었다.(뺷자뺸, 제217권, 63a)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49

이 유린당하고 티벳인들이 말도 못할 고초를 겪었다 한들 이는 스스로를 책망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가서한의 군사원정들은 실낙라의 침략에서 비롯된
결과일 뿐이니까. 사마귀(실낙라)가 등 뒤의 참새(가서한)를 짐작도 못한 채
매미(과주)를 사냥한 것과 같은 이치 아니겠는가.154)
글쓴이는 말한다. 하기야 재앙이 행복을 덮으러 오고 실패가 성공을 감추러
오기 마련이니, 망하고 흥함은 다 그 때가 있는 법이다. 얻는가 하면 잃기도 하
니, 세상만사가 무릇 그러하다.155) 바야흐로 그는 평화론적 입장을 개진한다.
온 생명의 아버지인 하늘과 그 어머니인 대지가 서로 나뉘면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낳았으니, 만약 한 물건(一物)이라도 손상시킨다면 하늘과 땅의 조화를

안록산은 일전에(752년에) 장안에서 가서한을 만난 일이 있었고, 둘의 출신이 비슷함을 들어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기까지 했다. 알다시피 안록산은 “세랑디앙sérindien”, 즉 서역
인(胡) 아버지와 튀르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들 한다. 뺷安祿山事蹟뺸에 따르면 더 정
확히는 생부를 알 수 없고, 그가 태어난 뒤 그 어미는 안安씨 성을 가진 어느 “胡”에게 개가改嫁
했다. 이 안씨는 서역인, 아마도 이란인이었을 것이다.(하라다 요시토原田淑人, 「西域發現的繪
畫所見衣飾的硏究」, 뺷東洋文庫論叢뺸, 제4권, 74와 des Rotours, Traité des Fonctionnaires,
712, n. 4 참조.) 가서한이 안록산의 제안에 응하지 않자 둘의 사이는 틀어졌다. 756년 1월 18일
안록산이 낙양洛陽을 점령하자 가서한은 장안을 방어하기 위해 (하서, 롱우, 삭방朔方 등) 북서
부에서 긴급 동원된 군대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1월 27일. 뺷구뺸, 제9권, 9b 참조.) 그는 756년
7월 9일 장안으로 진입하는 통로인 동관潼關의 입구 령보靈寶에서 패해 안록산의 손아귀에 놓
이게 됐다. 가서한이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록산은 얼마 안 있어 낙양에서 그를 처형했다.
뺷金石萃編뺸(제90권, 권말)에는 753년 무렵 감숙성 란주蘭州 지역에 건립된 어느 석비에 의거
해, 가서한이 티벳인들을 상대로 거둔 승리들을 기리는 비문의 편린들이 전재돼 있다. 754년 무
렵 가서한에게 헌정한 장문의 시에서 두보杜甫는 티벳인들에 대한 그의 승리를 찬양했다.(投贈
哥舒開府翰二十韻. 뺷杜工部詩뺸, 뺷四部叢刊뺸本, 제15권, 14a~16b) 하지만 나중에는, 령보 전투
에서 패한 가서한이 최후를 맞은 뒤 759년에 지은, 두보의 가장 유명한 시편들 중 한 편(「潼關吏」,
같은 곳, 제14권, 6a)의 마지막 시구詩句에서는 그를 비난했다. 죽기에 앞서 찬탈자에게 항복했
으니 그 패배가 한층 더 수치스럽다는 거였다. des Rotours, 전게서, 845, n. 2와 본서 「보유편」,
369~370도 참조할 것.
154) 뺷莊子뺸, Wieger 옮김, 뺷道敎뺸, II, 377 참조.
155) 向若無悉諾邏先侵, 豈見哥舒翰後患? 有同螗[螳으로 봐야 함.]蜋捕蟬, 不知黃雀在其後矣. 蓋知
禍福相掩, 盛衰更朦. 廢興有時也, 得常道也.
250 불교학리뷰 vol.18

해치는 것이다. 병장기와 살인을 애호하는 것은 하늘의 선한 뜻에 반反하니


화禍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일이요, 땅의 의로움에 반하니 재앙을 부를 수밖
에 없는 일이로다. 그런데도 중국과 티벳의 적개심과 무력 충돌과 살육은 바
로 거기서 말미암은 것이니 이 얼마나 한탄할 일인가! 중국인 자사의 외침은
그렇다.156)
이어 말하길 자신이 한참 어리석고 둔할지라도, 그로선 중국과 티벳의 국경
에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장래의 먼 계책을 제안하고 불가침 구상을 토의하고
싶으니 이를 참작해 줄 것을 상찬마에게 권한다.157) 도의에 입각한 설득 다음
엔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논변이 이어진다. 그의 말인즉 티벳은 동으로는 코코
노르 호수의 한 모퉁이158)를 차지하고 있고, 서로는 황하의 (원류인) 협곡에
닿아 있다.159) 남으로는 철령이 굳건히 지켜주고 북으로는 설산이 빽빽이 막
아선다.160) 라싸 저 너머로는 곤륜崑崙산맥까지 이르고, 곤륜 옆으론 수산물

156) 且天者父也, 地者母也. 父母之開而生萬類. 若損一物, 天地爲之傷和. 好同[用으로 봐야 함.]干


戈, 愛其殺戮, 違天之慈, 得無禍乎? 違天之義, 得無害乎? 使兩國反覆, 兵戈相誅, 莫不由此. 良可
悲也. 유교적 평화론이다.
157) 臣壁[璧으로 읽음.]不才, 城[誠으로 읽음.]無遠識. 願奉安兩壃之長計, 論不侵之遠謀. 希稍覽也.
158) 隅, 바다(코코노르는 중국어로 靑海라 불린다.)의 한 언저리. 뺷書經뺸, Couvreur역, 54 참조. 여
기서 이 용어는 우주의 끝 가장자리들에 해당한다.
159) 한대漢代 이후 중국인들은 호탄강이 황하의 원류들 가운데 하나라고 믿었다. 822년 유원정이
사절로 티벳에 다녀오고 나서야 비로소 황하의 발원지를 티벳 동쪽으로 보는 설이 널리 인정받
았다.(Chavannes, B. É. F. E.-O., III, 230, n. 3 참조.) 그러나 옛 설을 따르는 자들이 여전히 있
었으니, 예를 들면 둔황 지역을 다룬 9세기 말 지리서의 편린에 이런 옛 설이 보인다. 이 지리서
편린은 자일즈가 번역했다. M. Giles, B. S. O. S., VI, 831.
160) 且吐蕃東有靑海之隅, 西接黃河之險. 南有鐵領之固, 北有雪山之窂[牢로 읽어야 함]. 설산, 즉
“눈 덮인 산”은 히말라야의 번역으로 불교문학 및 문헌 등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킬 때 쓴다.
하지만 중국 서부에 위치한 여러 산들과, 특히 오늘날의 지명으로 하면 리히트호펜Richthofen
산맥의 명칭이기도 한데, 이 산맥의 만년설은 감숙과 청해 경계, 량주와 숙주 사이를 지나 둔황
에 이르는 길의 남서부까지 이른다. 당대唐代의 몇몇 주석들에서는 기련祁連이란 이름으로 불
리는 산맥이다.(Chavannes, Documents…, 133, n. 2) 게다가 당대唐代에는 설산이란 명칭으로
더 광대한 산맥을 가리켰던 것 같다. 뺷敦煌錄뺸은 남쪽에서 둔황으로 흘러드는 감천甘泉의 발원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51

을 물로 운반해서 돛단배로 늘 뒤덮여 있는 월越과 통한다.161) 소와 말을 뭍으


로 (운반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골짜기를 (오간다.) (티벳의) 여러 고장은 전
사들로 넘치고 영토는 광대하며 국경은 자연적으로 보위되니, 그 면적이 수만
리에 이른다. 제 백성을 건사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티벳은 갖고 있다. 그러
니 무엇이 아쉬워 성들을 공격해 작은 이득을 구하며 영토를 탐해 사람에게 해
를 입힌단 말인가? 하늘이 용납지 않고 신들이 벌할 일이로다.162)

지가 설산이라는 산이라고 기록한다.(뺷大正뺸, no. 2091, 997c. 자일즈역, J. R. A. S., 1914,


703~736) 손해제孫楷第가 연구해 뺷圖書季刊뺸(Q. Bull. of Ch. Bibl.의 한문본), III, iii, 1936년
9월에 발표했던, 장의조에게 헌정된 어느 변문變文(펠리오 장서 2962번 필사본)에 따르면, 위
구르족에게 가는 중국 사절단 일행이 856년에 “눈 덮인 산의 남쪽 발치에서”(雪山南畔) 습격과
약탈을 당했다. 일행 중 한 명은 달아났고 사주에 당도해 장의조를 만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뺷원화군현지뺸, 제40권, 4b와 9b는 설산이 진창晉昌(과주)에서 남쪽으로 160리, 장액張掖(감
주)에서 남쪽으로 100리에 있었다고 기록한다. 당대唐代의 다른 문헌들(뺷後漢書뺸의 주해, 제2
권, 8a. 자일즈, B. S. O. S., VI, 843 참조.)은 “설산으로도 불리는” 기련산을 이주伊州 북쪽에
위치시키는데, 그렇다면 이는 하미Hami 부근, 지금의 타시불락Tāsh-Bulak 북쪽에 솟아 있는
칼릭 탁(Karlik-tāgh, “눈 덮인 산”)일 것이다.(Stein, 자일즈의 인용, 같은 곳) 현대의 지명 사전
들은 운남雲南과 사천四川 등지의 또 다른 설산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서한에서 이
명칭은 틀림없이 감숙甘肅의 오아시스들, 량주涼州, 감주甘州, 숙주肅州, 과주瓜州, 사주沙州
를 따라 남서쪽에 뻗어 있는 산계山系 전체를 가리킨다. 이 편지가 작성된 시대에 이 오아시스
들을 아직 중국인들이 관할하고 있었으니, 이 산맥은 실제로 당시 티벳의 북쪽 국경들 중 일부
를 형성했다.
161) 邏娑之外, 極乎崑崙. 崑崙之傍, 通乎百越. 水運海物, 舟帆 空. “百越”은 원래 중국 남부와 안남의
인도차이나 반도 해안지방에 살던 주민들이다. 崑崙은 아시아 고지대 산악지역 아니면 인도차
이나와 인도네시아의 나라들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뺷책뺸, 제961권, 16b(吐蕃傳) 참조. “장
하(藏河, Gcaṅ-po, Brahmaputra)는 물이란 물은 모두 거두어 라싸에서 남동쪽으로 삼백 리를
흘러간다. 장하는 남南으로 곤륜의 나라(들)을 관통한다…” 숙주 자사, 아니 그의 편지를 대필한
식자의 지리적 관념은 확실히 그리 정확하지도, 그리 믿을만하지도 않았다. 혹시 티벳과 버마의
교역 관계에 관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티벳이 바다까지 영토를 넓힌 것으로 그들이 상상했던 것
일까?
162) 平陸牛馬萬川. 群國富兵衆. 土廣而境違自然. 方圓數萬里之國, 足可以爲育養. 何要攻城而求小
利, 貪地而損人? 此天道所不容, 神明之所必罰. 문장과 구두법句讀法은 불확실하다. 논법은 뺷墨
子뺸의 「非攻」(“공격을 삼가다”)장, Forke 옮김, 266 이하의 것과 비슷하다. 불교적 암시가 전혀
252 불교학리뷰 vol.18

이제 상찬마라면 티벳 왕의 중신들 중 한 명으로, (티벳의) 동도(지방) 절도


(군사 관할지)를 여럿 점하고 있다.163) 그런 그가 어찌하여 화해정책을 채택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지 않는가? 국경에서 무기를 거두어 땅에 씨앗을 뿌리게
하고, 중국인들의 원한과 분노를 종식시켜 혼인동맹으로 맺어진 두 나라의 우
의를 회복하는 것, 이런 계책이야말로 지속적인 결실을 맺게 할진저. 그저 한
때에 그친다면 값어치 없는 일이리라. 사사로이 이익을 도모하고자 주군의 비
위를 맞추고 벼슬을 얻고자 아첨한다면, 이는 제 나라를 해치는 신하로 처신하
는 것이지 결코 충절과 올곧음을 보인 것일 수 없다.164)
숙주 자사는 이어 755년 12월에 일어나 료수遼水와 유연幽燕(지금의 하북
성河北省)부터 당 제국 수도권首都圈 내의 황하와 낙하洛河 연안까지, 중국
북부 전역을 유린했던 “최근의”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떠올린다.165) 티벳인
들은 중국과 혼인으로 맺어졌음에도 난을 평정하기 위한 군사적 원조를 함에
서 무능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난을 이용해 중국인들을 공격하고 약탈하기에
여념이 없기까지 했으니 심히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었다.166)

없는 것은 이런 류의 외교문서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50년 뒤에 한 티벳 수장의 환심


을 사려는 당나라 관리가 어김없이 불교적 논변에 기대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는 있다.
163) 본서 264, n. 2 참조. 뺷당서뺸(본서 290, n. 3)에 따르면 762년 이후에야 비로소 상찬마는 상실결
에 이어 티벳의 “동도절도”가 되었다.
164) 今 上賛摩爲蕃王重臣, 秉東道數節. 何不諫王以治國之道, 安社稷之計, 罷甲兵於兩壃, 種 於原
野, 止漢家之怨憤, 通舅生[甥으로 봐야 한다.]之義國? 此萬世之計也, 不獨一時而用之. 若順君
以安私, 諂媚而求位, 此殊[殄 또는 殘으로 봐야 한다.]國之臣也, 忠良之所不爲.
165) 傾[頃으로 읽음.] 安祿山背恩, 史思明構乱. 結党[=黨]遼水, 扇動幽燕. 敢以狂兵稱杆河洛. 동쪽
수도 낙양은 756년 1월 18일 역도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같은 해 7월 14일 현종은 서쪽 수도 장
안을 버리고 몸을 피했다.(뺷구뺸, 제9권, 9a~10a. 뺷자뺸, 제217권, 65a와 제218권, 3a)
166) 外生[甥이 맞다.]未能以助兵靜乱, 反更侵魚[漁로 봐야 한다.]襲人之危. 深不義也. 外甥(=사위),
즉 “결혼한 누이의 자녀”란 티벳 왕을 말한다. 뺷당서뺸, 제216권상, 8a(버쉘이 번역하지 않은 대
목으로, 755년 이하)는 안록산의 난과 숙종肅宗 재위(756~762) 초반 동안 중국에 대한 티벳인
들의 태도를 이렇게 요약한다. “안록산이 난을 일으켜 가서한이 하(서)와 롱(우)의 모든 병력을
이끌고 동관을 지키러 동쪽에 오니, (하서와 롱우의) 제장諸將과 그 휘하 부대들은 난을 평정하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53

는 데 골몰했다. 그 무렵 이 부대들을 행영行營이라 불렀다. 국경이 텅 비고 지키는 이 없으니 티


벳인들은 이 국면을 이용해 폭력과 약탈에 열중할 수 있었다. 지덕至德(756년. 연호의 변경이 8
월 12일에 공포됐다.) 초에 티벳인들은 수주(嶲州, 지금의 서창西昌. 만청滿淸시대의 寧遠으로
四川 남서쪽. 뺷당서뺸의 본기本紀, 제6권, 1b는 수주의 점령을 755년으로 잡는다.)와 위무(威武,
神威軍과 神武軍. 본서 295, n. 2와 370 참조.) 등 여러 성을 점령했다.(取嶲州及威武等諸城) 그
들은 (코코노르 동쪽의 요충지) 석보石堡(본서 295, n. 2)를 점령했고, 이듬해(757년) 사절단을
보내 도적떼들(즉, 역도들)의 진압(에 협력이 필요한지)에 대해 묻고 (당唐과의) 친선을 돈독히
하자고 했다. 새 황제인 숙종肅宗은 이 사절단의 방문에 대한 답례(報聘)로 급사중給事中 남거
천南巨川을 파견했다. 그러나 바로 같은 해에 티벳인들은 곽주(廓州, 지금의 청해성 서녕西寧
남쪽)와 패주(霸州, 지금의 사천성 리번理番, 成都 북서쪽)와 민주(岷州, 지금의 감숙성 남부 민
현岷縣) 등지와 (코코노르 남쪽의) 하원군河源軍 및 (감숙 남쪽의) 막문군莫門軍을 공격해 점령
했다. 사절들은 여러 번 와서 평화를 제안했다. (숙종) 황제는 (이 제안들에) 성의라곤 없음을 제
대로 알았지만, 당시로서는 (안록산의 난에서 비롯된) 위기에 대처(함에서 동맹국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재상宰相 곽자의郭子儀와 소화蕭華, 배준경裴遵慶 등에게 티벳인들과 조약을
체결하라는 령을 내렸다. 하지만 조약은 성사되지 못했다. 762년 티벳인들은 림조(臨洮, 감숙성
皋蘭 남쪽)를 덮쳤고 진주(天水, 감숙성 남동부, 섬서성 부근)와 성주(감숙성 成縣), 위주(감숙
성 平涼縣) 등지를 점령했다.(陷臨洮取秦成渭等州)”(본서 171, n. 3 참조.)
뺷책부원귀뺸, 제956권, 8b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기록한다. “천보天寶 말(755년)에 나라의 위난
에 대처하고자 하(서)와 롱(우)와 삭방(朔方. 寧夏와 어얼둬쓰鄂爾多斯 등 지역이었다.)의 전군
全軍을 동원했고 그러자 티벳인들이 (장안 북서쪽, 지금의 섬서성) 빈주邠州 전역을 점령했다.”
뺷책부원귀뺸, 제963권, 15a의 또 다른 구절에 따르면 756년 8월(8월 30일~9월 28일) 숙종이 난
을 피해 령무(靈武. 청대淸代의 靈州, 녕하 남쪽)에 있었는데, 여기서 그의 즉위를 기리는 의식
이 8월 12일에 열리자 위구르와 티벳인 수장들이 차례로 와서는 동맹을 맺고 난의 진압에 참여
하겠다고 제안했다. 티벳인들은 757년 2월(뺷책뺸, 제963권, 15b)에도 이를 재차 제안했다. 이때
황제는 장안 서쪽으로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봉상鳳翔에 안거하면서 환도 준비를 하고 있었
다. 757년 9월(당唐은 9월 중에 장안을 되찾았다.) 숙종이 남거천을 사절로 티벳에 보냈다는 뺷당
서뺸의 기록은 바로 이때 있었던 일이다.
우리의 서한이 확인하듯이, 티벳인들의 제안은 필시 위험천만한 것으로 여겨졌기에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757년 11월 13일, 위수渭水에서 장안 서쪽으로 흐르는 풍수灃水 강변의 향적사香
積寺 인근에서 당唐 태자의 지휘 아래 역도들을 괴멸시키고 이튿날 장안을 탈환했던 군대들을
언급하면서, 한문 사료들은 (이 토벌군의 주력이었던) 위구르족과 세랑디아인(서역西域인,
[Chavannes, Documents sur les Tou-kiue…, 158, n. 4 및 299 참조])들, “남쪽 야만인들”(南
詔)과 “아랍인들”(大食人)을 꼽지만 티벳인들은 거론하지 않는다.(뺷구뺸, 제10권, 4b. 뺷자뺸, 제
254 불교학리뷰 vol.18

허나 (보위에 계신) 우리 황제167)께서 황하 북쪽으로 피신해168) 그곳에서

220권, 19a)
167) 我乾坤大聖光文武孝感皇帝. 두 글자만 아니라면(元 대신 乾을 썼고, 光과 文 사이에 天이 실수
로 누락됨.) 이것은 759년 2월 3일 아비인 현종이 아들인 숙종(756~762) 황제에게 내린 존호다.
숙종은 재위 말까지 이 존호를 갖고 있었지만, 762년 5월 16일에 갑자기 서거하기 몇 달 전, 761
년 10월 23일에 반포한 어느 칙령에서 이 존호가 여전히 자신에게 합당치 않다는 뜻을 밝히긴
했다.(뺷구뺸, 제10권, 7b~10b. 뺷당뺸, 제6권, 3a, 4a) 이 존호는 현종이 758년 2월 17일 숙종에게
하사한 존호 光天文武大聖孝感皇帝(뺷구뺸, 제10권, 6a. 뺷당뺸, 제6권, 3a)와는 약간 다르다. 따라
서 우리의 서한은 확실히 759년 이후의 것이고, 대종代宗에 대한 그 어떤 암시도 없는 걸 보면
아마도 대종이 즉위(762년 5월 18일)하기 이전으로 그 연대를 잡아야 할 것이다.
168) 麟躍鳳翔, 龍飛河朔. 글자 그대로 읽으면 “일각수가 봉상으로 뛰어올랐고 용이 황하 북쪽으로
날아올랐다.”는 말이다. 河(東)과 朔(方)을 의미할 수 있는 河朔은 여기선 삭방절도사朔方節度
使가 있던 靈武(지금의 녕하 남쪽, 황하 하투지역)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이곳은 장안을 포기
한 뒤 미래의 숙종이 피신해 안록산의 난의 평정을 도모하고, 756년 8월 12일 황제 즉위를 선포
했던 곳이다. 숙종은 757년 3월 4일부터 봉상에 있으면서 장안을 되찾기 위한 ― 주로 야만인들
로 구성된 ― 그의 군대를 그곳에 집결시켰다. 이 군대가 향적사의 대전투를 개시하기 위해 757
년 10월 29일 출정했던 곳, 숙종에게 장안으로 가는 문을 다시 열어준 곳이 바로 봉상이다. 12월
8일 숙종은 장안으로 돌아갔다.(뺷구뺸, 제10권, 4b. 뺷자뺸, 제219권, 15b와 제220권, 19a, 21b) 우
리의 서한은 靈武에 앞서 鳳翔을 언급하고 있으니 사건들을 일어난 순서대로 적은 게 아니다. 장
안을 떠난 현종이 봉상에 머물렀던 것은 맞다. 하지만 “일각수를 뛰어오르게” 하기는커녕, 그는
봉상에서 폐위당하는 처지가 됐다.
756년 7월 14일 장안을 버린 뒤 현종과 그 아들, 즉 미래의 숙종은 16일에 장안 서쪽으로 약 50
킬로미터 떨어진 마외馬嵬에서 헤어져, 현종은 서쪽으로 갔고 숙종은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봉천奉天, 영수永壽, 신평新平 ― 지금의 섬서성 乾縣, 永壽縣, 邠縣 ― 을 지났고, 녕하의 靈武
로 가기 위해 다시 (지금의 감숙성) 안정安定으로 갔다. 7월 17일 현종은 부풍현扶風縣에서 멈
추었고, 18일부터 20일까지 부풍군扶風郡에 머물렀다. 부풍군의 행정 관청이 봉상에 있었다.
(그래서 756년부터 758년까지 부풍군의 명칭은 봉상군이었다. des Rotours, Traité des
Fonctionnaires, 683의 주 참조.) 거기서 현종은 사천으로 가기로 결정했으니, 이는 안록산에
맞선 싸움을 포기하는, 정말이지 “일각수의 도약”과는 전혀 딴판인 그런 결정이었다.(뺷구뺸, 제9
권, 10a~b와 제10권, 1b. 뺷자뺸, 제218권, 3a~5a)
鳳翔을 “불사조가 날아올랐다”는 하나의 표현으로 해석해봄직하고, 틀림없이 이 편지를 쓴 이
도 그런 중의重義적 유희를 염두에 두었겠지만, 그러나 河朔과 대구를 이루고 있음은 鳳翔이 하
나의 고유명사임을 가리킨다.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55

황실의 위엄을 다시 보이셨다.169) 황제께서는 부풍扶風의 정예군과 중앙아시


아의 호전적 유목부족들에 힘입어 군권軍權을 회복하셨다. 그는 역도들을 모
조리 멸했다.170) 장안 일대의 질서를 회복하고 당唐의 위엄을 되살려 속국屬
國 백성들이 그 앞에 재차 몸을 굽히게 하고, 병장기를 거두게 하여 평화와 복
과 번영을 만방에 다시 꽃피게 했다.171) 티벳과 같은 동맹국이라면 이야말로
마땅히 기뻐할 일이다. 이 기쁨을 기탄없이 드러내지 못하게 막는 것은 오직
티벳과 중국을 가르는 경계선뿐이다.172)
이어 자사는 상찬마를 설득해 숙주를 위협하는 모든 기도를 만류하려 애쓴
다. 자사의 말인즉, 숙주는 일개 작은 고을에 불과하다. 산이 가파르고 길은 좁
다. 물도 부족해서 가는 곳마다 짭짤한 모래밭뿐이다. 그 크기라고 해봐야 이

169) 披日月而昇九天, 挂星辰而朝丂囯.


170) 帝於是䩙扶桑弓, 扙[杖으로 읽어야 함.]倚天劍. 龍騰於囯九五. 師出以六軍. 權扶風銳兵. 駈[驅
로 읽음.]大 [宛으로 읽음.]曉[驍로 읽음.]衆. 雷鼓震, 逆党[黨으로 읽음.]殘除. 부풍은 여전히
봉상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고을의 명칭이다. 756년 8월 27일의 한 조령에서는 부풍을 봉상군이
라 한다고 했다.(뺷자뺸, 제218권, 7b) 앞서(본서 301, n. 2) 보았다시피 숙종이 장안에서 황위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봉상에서 군대를 재규합한 덕분이다. “전사 유목민들인 大 ”은 장
안을 탈환했던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군대다. 大 은 페르가나Ferghana의 옛 이름이었고, 이
군대 중에 실제로 페르가나에서 온 병사들이 있었다.(본서 300, n. 1 말미에 언급된 Chavannes
을 참조.)
171) 乾坤霧收. 河洛雲卷. 百蠻稽䫙[顙으로 읽음.]而來貢. 九夷匍匐而称[=稱]臣. 休士馬於函関. 倒干
戈於長府. 率士歌堯舜之年. 海內樂成康之代. “황하와 낙양 위 암운을 걷어낸 일”, 즉 757년 장
안 일대의 탈환(낙양은 12월 3일 수복됨)을 말하면서, 762년 무렵의 이 편지의 글쓴이는 그가
익히 알고 있던 근래의 일들을 에둘러 말했다. 하지만 그가 “병사와 병마들을 (낙양과 장안 사
이) 함관函關에서 쉬게” 했고 “창과 방패를 장(안)의 창고에 눕혔다.”고 덧붙이거나, 요순과 성
강 같은 옛 성왕들의 시대인 양 다시 온 태평성대를 칭송했을 때, 그는 너무 멀리 나갔고 장밋빛
미래를 그렸던 셈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안록산의 공모자 사사명이 얼마 안 있어 낙양을 당나라
로부터 다시 취해 761년까지 점령했고, 그 아들 사조의史朝義는 763년 초에 가서야 비로소 굴
복했으니, 이 거대한 반란의 종식으로 볼 수 있는 시기는 763년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당나라
의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763년 11월에는 티벳인들이 장안을 점령했다.
172) 旣爲舅生[=甥]計開忻歡, 限以兩壃難由面歡. 미심쩍은 번역.
256 불교학리뷰 vol.18

백 리를 넘지 않으니, 군대와 병마가 주둔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님은 분명하


다.173) 자사는 상찬마가 3년 전 7월 15일에 숙주를 “방문”했던 일을 상기시킨
다. “누추한 내 고장에 방문하심에, 이를 빛내기 위해 공의 대군이 멀리서 오는
수고를 했습니다.”174) 틀림없이 티벳이 침입한 일을 좀 더 외교적 문투로 표현
한 것일 텐데, 당시의 “방문” 때 자사는 “방문자”에게 연회를 제공함은 물론
약소하나마 자원을 이용하게 해주었고, 그와 더불어 술잔을 옆에 두고 두 나라
의 병무와 “구생舅甥의”, 그러니까 중국 황제와 티벳 왕의 우호관계를 논했었
다 말한다.175) 이 토론이 있고 나서 (상)찬마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을 약조하
며 군대를 물리려 했고, 이후로도 정녕 자신의 언약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자사가 부끄러움을 토로하고 결코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칭송하는 그 넓은
안목과 높은 인품을 상찬마는 그렇게 증명했다.176)
뒤이어 자사는 그의 상관으로 (숙주를 관할한) 려呂라 하는 하서의 (군)절도
사를 칭찬하기 시작한다.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의 재능, 담대함과 관용을 찬양
한다. 그는 용맹을 좋아하면서도 매우 어질다. 지혜가 높으면서도 사리에 두루
통달한 정신의 소유자다. 그가 “깃발을 쥔 지”, 다시 말해 군절도사의 직무를
시작한 지 4년, 지역 전체의 환경이 달라졌다.177) 그는 병사들의 고된 의무를
가엾게 여겨 군사 원정을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 식견을 갖춘 군주의 나라(티
벳)에 할 일이 있음을 기뻐해 국경을 성실히 지킨다. 그 인간애와 절제심이 실

173) 且肅州小郡, 山險路陜. 境少泉澤, 周圓磧鹵. 地方不過三百里, 素非士馬候憩[憇로 읽음.]之所.


174) 三年以前, 七月十五日, 勞賛摩大師遠辱敝邑.
175) 竭金河單[簞? 觶?]酌[?]. 論兩國甲兵. 傾東門淡杯, 叙舅生[甥이 맞다.]義好. 석연치 않은 원문,
어림잡은 번역. “金河”나 “東門”이란 용어들이 연회가 열렸던 장소와 관련이 있을까?
176) 一言道感, 便沐迴軍. 期不再來, 果副明信. 則知賛摩量廣而器深, 節高而志大. 懷其愧也, 何嘗忘
之?
177) 五涼이란 감숙성을 뜻하는 문학적 표현으로, 4세기와 5세기에 감숙 지역을 다스렸던 5대 량涼
왕조(前涼, 後涼, 南涼, 北涼, 西涼)에 빗댄 말이다. 뺷辭海뺸, 뺷子集뺸, 154a에 인용된 張九齡(서기
740년)의 시구와, 우리 서한의 글쓴이가 기억했던 것으로 보이는 시구(兼擁旄於五涼) 참조.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57

로 이와 같도다!178)

178) 今我河西節度使呂公, 天假奇才, 神資武畧. 包推海量, 含藏是非. 好勇而至仁, 上智而宏達. 擁旄


四載, 變五涼. 愍战仕之勞, 不忍征伐. 讙明主之國, 謹守封疆. 其愛人也如是, 其不貪也如此.
절도사 려공은 누구인가? 하서절도사 직함은 756년 7월 9일 령보에서 패배할 때까지 가서한이
갖고 있었다.(본서 295, n. 2) 사마광은 뺷자치통감고이뺸(사부총간본, 제14권, 6a)에서, 754년
장안에 은거해야 했던 무렵의 가서한이 하서와 롱우의 절도사 직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지적한
다. (뺷자치통감고이뺸, 제218권, 5b에 인용된) 뺷玄宗實錄뺸의 기록에 따르면 756년 7월 25일 현
종 황제는 사천四川으로 가는 도중 왕사례王思禮가 평량平涼에서 수집한 정보들을 보고받았
다. 안록산의 난이 하서의 이민족(뺷자치통감뺸의 한 주석에 의하면 튀르크족) 주민들 사이에 야
기한 분쟁에 관한 정보였다. 그 부족민들은 가서한을 따라 중원으로 떠난 자기 수장(都護)들이
령보에서 패함으로써 죽었다고 믿고 그 후계를 다투는 싸움을 벌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수장
들은 령보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현종은 당시 하서병마사河西兵馬使이던 주필周泌(이체자
佖, 祕[=秘, 역자])이란 자를 하서절도사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주필은 예전에 왕사례와 더불
어 북서지역에서 가서한 휘하에 있었다.(뺷구뺸, 제110권, 5a와 뺷당서뺸, 제147권, 1a 참조.) 동시
에 현종은 팽원요彭元耀(또는 暉)를 롱우절도사로 임명했다. 두 절도사에게는 이민족 수장들과
함께 그들의 임지로 가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들은 현종의 아들을 알현하기 위해 령무(녕하)
를 거쳐 갔을 공산이 크다. 왜 그런가 하면 (마찬가지로 뺷자치통감고이뺸, 제13권, 13b에 인용됐
고 뺷구뺸, 제10권, 2b가 의거하고 있는) 뺷肅宗實錄뺸에, 숙종이 즉위일인 756년 8월 12일 령무에
서 몇몇 인사 조치를 했을 때 그 두 사람을 절도사로 임명한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3일 뒤인 8월
15일, 당시 보안普安(成都 북서쪽, 지금의 劍閣)에 있던 현종 황제가 새로운 인사 조치들을 했는
데, 그중에는 풍왕공豐王珙을 무위, 즉 량주 도독 겸 하서와 롱우와 안서(세랑드Sérinde)와 북
정(투르판 지역)의 절도사로, 그러니까 당나라 북서부 국경지대 전체의 군권을 총괄하는 자리
에 임명한 일이 있다.(뺷구뺸, 제9권, 10b. 뺷당서뺸, 제5권, 12b. 뺷자뺸, 제218권, 6b~7a) 하지만 현
종은 이 무렵 아들에 의해 사실상 황위를 박탈당한 처지였으니 이 임명은 효력을 갖지 못했다.
하서절도의 소재지인 량주에 당도한 이는 주필이었고, 수개월 뒤인 757년 2월 10일 현지 주민
들이 일으킨 폭동의 와중에 그는 그곳에서 살해됐다.(뺷구뺸, 제10권, 3b. 뺷당서뺸, 제6권, 2a. 뺷자뺸,
제219권, 14b)
최칭崔稱(또는 偁)이라는 절도사의 판관判官이 이 폭동을 진압해 757년 3월 17일에 량주의 질
서가 회복됐다.(뺷당서뺸, 제6권, 2a 참조.) 하지만 주필의 후임자는 757년 6월 1일에야 겨우 임명
됐던 것 같다.(뺷구뺸, 제10권, 4a와 제108권, 4b, 제146권, 4a. 뺷당서뺸, 제126권, 5a와 제172권,
4a) 이 신임 하서절도사의 이름은 두홍점杜鴻漸으로, 꽤 유력한 인물이었다.(뺷당서뺸에 그의 일
대기가 전한다.) 숙종이 봉상에서 임명할 당시 병부부시랑兵部副侍郎이던 그는, 756년에 자신
이 다스리던 령무에서 숙종을 영접한 뒤 숙종의 즉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숙종은 그를 하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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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사막에 오래 놔두지 않았으니, 안록산의 도당들로부터 장안 일대를 되찾자마자(757년


12월) 그를 지금의 호북성湖北省의 형남절도사荊南먢度使로 보냈다. 이것이 758년의 일(뺷자뺸,
제221권, 32a)이었고, 그는 769년에 죽었다.(뺷구뺸, 제108권, 5a. 뺷당서뺸, 제126권, 5b)
두홍점의 후임으로 하서절도에 임명된 이를 역사는 기록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덕종德宗 재
위시의 조세개혁으로 유명한 재상 양염(楊炎, 727~781)이 관직 생활 초기에 우연한 일로 (량주
관할 하의 두 현縣들 중 하나인) 신조神鳥의 현령이자 하서절도사의 서기 이태간李太 이란 자
와 술을 먹은 뒤 주먹다짐을 한 일이 있었다. 하서절도사가 몸소 이 일에 개입해야 했다. 이 절도
사의 이름은 려숭분呂崇賁(양염의 일대기, 뺷구뺸, 제118권, 5a. 뺷당서뺸, 제145권, 5b)으로, 이가
바로 우리 필사본의 “呂公”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양염의 주먹다짐이 언제 일인지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려숭분이 (뺷구뺸, 제10권, 2b에 따르면) 포주(蒲州. 황하 굴곡부의, 지금의 山西省 永
濟縣) 자사나 (뺷자뺸, 제218권, 6b에 따르면) 포관蒲關(포주 인근에 위치한 황하의 관문) 방어사
防禦使로 재임하고 가서한 휘하에서 령보전투에 참전(뺷구뺸, 제110권, 5a. 뺷당서뺸, 제148권, 1a
참조)한 뒤, 756년 8월 12일 숙종 즉위 시 관내절도사關內節度使에 임명되면서 安化(감숙의 동
쪽 끝, 지금의 慶陽)에 주재하게 됐음을, 우리가 다른 경로를 통해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關
內라고 하면 원래 지금의 섬서 북부, 장안, 감숙 동부, 녕하 남동부를 포괄했다.) 그의 이름이 다
시 보이는 것은 772년으로, 이 때 그는 영남嶺南(지금의 兩廣, 즉 광둥성과 광시성 지역)절도사
와 광주廣州도독이 되지만(뺷구뺸, 제11권, 14b) 773년 광주에서 가서한의 한 아들 손에 피살된
다.(뺷구뺸, 제11권, 15a, 제122권, 2a, 제157권, 1b. 뺷당서뺸, 제6권, 8b, 제138권, 4a. 뺷자뺸, 제224
권, 67a) 관내절도사로 임명된 756년과 영남절도사로 임명된 772년 사이에, 또 다른 하서절도
사 양지열楊志烈에 앞서, 두홍점의 뒤를 이은 하서절도사가 그였다는 것은 아주 그럴듯한 생각
이다. 두홍점이 하서절도 직을 떠난 것은 757~758년이고 양지열이 그 직을 맡은 것은 763년이
다. 양지열은 764년에 량주를 티벳인들에게 넘긴 다음 감주甘州로 피신해 있다가 765년에 죽임
을 당했다.(뺷구뺸, 제196권상, 10a, 3 참조. 절도사 양지열을 구하고 하서에서 돌아온 마린馬璘
은 763년 말 장안에서 물러난 티벳인들을 봉상에서 무찔렀다. 뺷당서뺸, 제6권, 6b와 뺷자뺸, 제223
권, 53b, 제224권, 58a. 764년 말에 하서절도사 양지열의 군대는 령무에서 퇼뢰스(Tölös, 鐵勒)
수령 복고회은僕固懷恩에 패했다. 뺷구뺸, 제196권상, 10a와 버쉘역, 479, 뺷당서뺸, 제6권, 7a, 제
216권상, 8b. 764년 티벳인들이 량주를 공략하니 양지열은 감주로 달아났다. 그는 765년 10월
감주에서 피살됐다.) 사실 려숭분은 759년에 하서절도사로 임명돼야 했다. 이 해에 두홍점의 후
임으로 래전來瑱이란 자가 임명됐는데, 이 관리가 군사적 사건들로 인해 중앙에 계속 붙들려 있
어 절도사로 부임할 수 없었고, 또 다른 직책이 그에게 맡겨졌기 때문이다.(뺷당서뺸, 제144권, 1a.
래전의 일대기) 이 시기에 마침 려숭분이 하서에 있었고 절도사 직을 맡기기 위해 그가 선택됐
음이 분명하다.
이 필사본의 “呂公”은 4년을 봉직했다. 만일 려숭분이 759년에 두홍점을 이어 절도사가 됐다면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259

고장에 완연한 평온이 깃든 이즈음 상찬마가 평화의 메시지를 보내니 이야


말로 시의적절하다. 자사는 이 다행스러운 조치가 “철이나 바위처럼 굳건히”
유지되고, 더 이상 서로 공격하는 일이 절대 없기를 기원한다.179)
편지는 의례적 관용어구들로 끝난다. 자사는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느라 상찬
마를 사적으로 만날 수 없음을 애석해 한다. 장군 한 명180)이 이 답신을 상찬마
에게 전할 것이다.181)

둔황에서 발견된 문서들을 형편 닿는 대로 다루다보니 이 역사적 해설이 다


소 잡다해졌다. 내 이야기가 주제를 벗어나 흐르기 일쑤였던 것은 변명하자면
둔황 문서들 일부가 갖는 현장성, 지난 전쟁의 와중에 그 문서들을 읽었을 때
날 사로잡은 현재성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무릇 역사란 그 현재성으로 해서 되
살아나기 마련 아닌가? 결론 삼아 나는 이번에도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어느
둔황 필사본182)에 실린 두 부류의 미공개 연속 시편들 중에서, 당대唐代 티벳

이 서한의 연대는 762년이 되고, 위에서 이미 언급했던 다른 연대기적 지표들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
179) 頃緣大定 恩布遐荒. 今所和來正合其日. 願爲鐵石永罷相侵. 必也二三, 其如天道. 마지막 문구는
약속이나 서약의 관용구일 것이다. “변절할 때마다 하늘의 정의에 따른 [징벌이] 있으리!” “二
三”이란 표현은 변덕스런 언행을 뜻한다.
180) 將軍璠旰. 그 다음에 오는 한자 白은 트랜스크립션으로 보이며, 이름의 일부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은 그리 분명치 않아서 고유명사가 아닐 수도 있다.
181) 限以封守, 言會無由. 但增瞻雲山, 仰德雄極. 珍重珍重. 謹勒. 將軍璠旰白還答. 不具. 肅州刺史劉
璧臣[臣璧?]頓首.
182) 펠리오 장서 2555번. 이 필사본은 폭 27cm의 아주 긴 두루마리로, 종이 질이 나쁘다. 훼손이 심
해서 그럭저럭 투명한 종이를 덧대 땜질했지만 필사본을 좀 편하게 읽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
앞면은 똑같이 작고 고른 정자체 글자들로 된, 갖가지 텍스트들로 가득 차 있다. 시편들과 다른
여러 텍스트들 맨 앞에 있는 것은 특히 747년 공장孔璋이 이옹李邕을 대신하여 죽기를 청하고
자 현종 황제에게 올린 유명한 표문(孔璋代李邕死表)이다. 이어 나오는 텍스트들이 여기서 분
석된 첫 번째 연작시 18수로, “[북방] 이민족의 피리 연주곡 18수”(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불
260 불교학리뷰 vol.18

에 있던 중국인 포로들의 심경을 여실히 들려주는 시들을 몇 수 골라 읽을 것


이다. 이 시편들이 걸작은 아니지만, 제아무리 볼품없는 시까지도, 그보다 더
생생한 것이란 도대체 없다. 시편의 작자들은 유감이지만 알 수 없다. 그래도
티벳의 중국인들이 으레 처했던, 이방의 주인을 섬겨야 하는 노예된 처지와 오
랑캐 나라로의 유배와 설상가상으로 고산지대로의 유배라는 삼중고 앞에서,
화상 마하연이나 서문을 쓴 왕석이나 함께 추방된 다른 많은 일행들의 것이었
을 그 심정을 이 익명의 작자들이 정확히 ― 또 매양 상당히 암시적인 투로 ―
옮겼으리라 추측할 수는 있다.

어 원문에는 笳가 茄로 표기돼 있지만, 펠리오 장서 2555번을 확인하니 笳로 적혀 있었다. 폴 드


미에빌도 당연히 필사본을 직접 보면서 이 대목을 옮기거나 번역했을 터, 茄 표기는 드미에빌의
착오라기보다는 이 저작의 편집상의 실수 아니면 조판상의 오식으로 보인다. 역자.] 당대唐代의
음악 작품 제목이다. Courant, Essai historique sur la musique classique des Chinois, 165, n.
8과 171 참조.)란 제목이 달려 있다. 이어 다른 시편들이 나오고, 마지막엔 숙주 자사가 상찬마
에게 보낸 것으로 본서 292~306에 번역했던 762년의 편지가 있다.
뒷면에는 맨 먼저 다른 필적의, 대개는 작자미상인 여러 시편들이 온다. 그 중 한 수는 잠삼(岑參,
8세기)의 시이고, 다른 한 수는 마운기馬雲奇의 시다. (마운기의 이 시는 이백李白이 상찬했던
안진경顔眞卿의 제자로 8세기의 위대한 서예가인 회소懷素와 관련이 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앞면의 시들과 비슷한 필적과 먹으로 쓴, 이 책에서 분석한 두 번째 연작시들이다. 그 뒤에
또 두 편의 텍스트가 있는데, 하나는 왕희지王羲之의 짤막한 산문이고 다른 하나는 어느 황제가
지은 시다. 뒷면 말미는 텍스트 없이 여백만 있다.
연민과 공성 - 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람버트 슈미트하우젠
(Lambert Schmithausen)

일역자_사이토 나오키(齊藤直樹)
(게이오(慶應義塾) 대학 문학부 철학강사)

역자_양영순(동국대 인도철학과)

1. 구제(利)의 종극인 붓다의 경지로 향하는 계기가 되는 연민

첫 번째 논문(「평정과 자비」)에서 필자가 보여준 대로 초기불교의 정규문헌

* 역주 : 뺷불교학리뷰뺸 16호에 게재된 함부르크 대학 람버트 슈미트하우젠 교수의 논문 번역 「평정


과 자비」에 이어서 본 논문을 게재한다. 두 논문이 수록되어 있는 원서 Der Buddhismus als
Anfrage an Christliche Theologie und Philosophie의 성립 및 슈미트하우젠 교수의 업적에 관해
서는 전 호에 실은 일본 역자(사이토 나오키)의 머리말을 참조하길 바란다. 거기서 언급했듯이 「평
정과 자비」와 「연민과 공성」은 쌍을 이루는 연작으로서, 슈미트하우젠 교수는 일역자에게 두 논
문 중 어느 하나만 번역하지 말고 두 논문을 모두 번역할 것을 당부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한국어 번
역도 두 논문을 모두 번역하여 게재한다.

불교학리뷰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18권 (2015. 12) 261p~287p
262 불교학리뷰 vol.18

에 이미 자신이 발견한 구제(利)의 길을 타자에게도 알리려는 붓다의 결단동


기로 자비(kāruññatā), 연민(anukampā), 그리고 동정(anuddayā)이라는 동의
어가 열거되어 있다. 후대 제 문헌에서는 보수적인 학파도 포함하여, 붓다의
이 자비가 종종 ‘위대한 연민(mahākaruṇā 大悲心)’으로서 일상적인 동정과
구별될 뿐 아니라 성문(śrāvaka, 즉 고래의 보수적 구제의 길을 신봉하는 자들)
이 무량(apramāṇa, 각주23 참조)의 하나로 수습하는 연민과도 다른 것으로 여
겨졌다.1) 성문의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연민은 이미 자기 자신의 정신적 완성
에 도움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타자의 구제를 위해서만 도움이 되었다.2) 그것
은 불행한 중생을 단지 불쌍하게 여기는 것만이 아니라 그 중생을 실제로 돕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3) 이 점은 설일체유부의 교의에서 ‘통상적인’ 연민이
‘증오를 갖지 않는 것(adveṣa)’중의 하나로 열거되는 반면 위대한 연민의 본질
은 ‘미망을 떠난 것(amoha)’으로 규정되는 것4)과 부합한다.
또한 필자는 붓다 자신이 발견한 구제의 길을 알리려는 결의에 이른 것이 깨
달음 이후였고, 게다가 몇 가지 전승에 의하면 그 길을 피하기까지 했다는 인
상을 표준적인 정규문헌에서 받았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후대의 문헌(보수적
인 학파도 포함해서)에서는 이에 대해 미래불(=석가모니불)이 (아직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는) 보살이었을 때5) 일찍이 타자구제를 위해 광범위한 활동의 기

1) Mppś Ⅲ: 1705ff(광범위한 전거를 들고 있다.)


2) MPPU 210b19-21(Mppś Ⅲ:1259) 참조. 그러나 여기에서는 성문의 ‘무량(無量)’과 보살(각주7
참조)의 우애(그 외)가 대비되어 있다. ― 위대한 연민이 타자의 구제(이타)와 연결되어 있음은 다
음과 같은 기술에도 나타난다. 즉, 연민은 중생이 극심하게 고통받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보
내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것이든 약한 것이든, 혹은 무상함 자체로 인해 생기는 고통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무릇 그들이 고에 처해있는 한 구제할 수 없는 자들에게 향하는 것이다.
3) Vi 428a22-26; AKBh 415,9f(VP Ⅶ: 79); MPPU 256b24-c2(Mppś Ⅲ: 1710; 1707 참조)
4) Vi 428a15f; AKBh 415,7(VP Ⅷ: 78); Mppś Ⅲ: 1707. 최후 부분에는 양자를 다르게 구별하는 것
도 설해져있다.
5) VETTER, T. 2000. “Der Mahāyāna-Buddhismus(Anfänge, Wesen)”, in Der Buddhismus als
Anfrage an Christliche Theologie und Philosophie, 376 n.5; Sāratthappakāsinī Ⅱ: 21, 12f 참조.
연민과 공성 - 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263

반으로 (일체지성이라고도 불리는) 붓다의 경지를 목표로 내걸고 있었고, 그래


서 긴 전생을 거치는 동안 이미 그 목표를 향해 자기희생이라는 파국까지 이르
는 보시공덕을 행했다는 견해가 나타난다.6) 그리하여 대승에서는 처음부터 타
자구제를 위한 광범위한 활동에 바쳐진 이 붓다의 경지가 ― 처음에는 아마도
같은 경로를 거친 ― 수행자 자신도 그곳에 도달하려 노력해야 하는 목표로서
확장해간다. 그곳을 향하는 결의와 결의를 실현하려는 결정적인 계기로 인정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사항이지만 ‘역사상의’ 보살이나 그들을 따르
는 보살들7)에게 역시 바로 연민일 뿐이다.8) 많은 대승불전은 적어도 어느 정
도의 성숙도에 도달한 보살의 연민도 ‘위대한 연민’으로 부르고 있다.9)

6) Cariyāpiṭaka 73(1.1.10:sabbaññutā; 75(1.4.9: sambodhi); 81(1.9.52f); 88(2.6.12:bodhi);


JātakaⅠ: 14,2,ff.
7) 이 말이 (제1의적으로) 대승의 구제의 길을 신봉하는 것으로 파악될 경우 이를 보살이라고 표기한다.
8) 예를 들어 BoBh 8,21-23; 10,12f; MSA ⅩⅦ.31a(uttamabodhibījam, sc. karuṇā); BhKrl 188,1f
와 190,13ff(vB3;6); BhKr 23,10ff; MPPU 256c16ff(MppśⅢ: 1711): 우애와 연민. ― 그러나
실제로는(HARRISON [1995: 주86을 보라], 19에 서술되었듯이) 초일상적인 힘, 신통력, 혹은 사
회적 지위라는 것의 매력도 동기로 감안해야 한다. 이 점은 BoBh 9,12-18에 명확하게 설해져있다.
불교도가 역사상 붓다의 (보살로서의) 전생에 투영한, (대부분은 前불교적인) 역사에서도 연민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유명한 Vessantarajātaka(Jātaka Ⅵ:
479ff[No. 547])에서는 연민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하지 않고, 적어도 팔리본의 오래된 구절에는
자신의 처자식을 헌상한다는 놀라운 행위에 이르기까지 보시의 영웅적 실천은 주인공 자신이 천
계에 도달하기 위한 요인이었고, 이후에 쓰여진 산문 주석과 그것에 인용된 Cariyāpiṭaka 운문은
단지 ‘일체지성’=붓다의 경지를 본래 목표로 내건 것에 그치고 있다(ALSDORF, L. hrsg. v.
WETZLER, A. 1974. Klein Schriften, Wiesbaden: 277f; 317). 여기에서 파생된 복잡한 문제에
대한 상세한 고찰은 본고의 범위에서는 행하지 않을 것이다.
9) 예를 들어 T Ⅺ: 236a24ff; AkṣⅠ: 87ff, 특히 89,19ff(Ⅱ:353ff, 특히 361f); Śikṣ 286,6-287,8;
MPPU 211b20-24(Mppś Ⅲ: 1269); 또한 256b21ff(Mppś Ⅲ: 1710); BhKr1 190,7-10(vB 6)
참조.
264 불교학리뷰 vol.18

2. 자기구제(自利)와 타자구제(利他)

대승에서는 추구되어야 할 구제(利)의 종국인 붓다의 경지가 강조되어 있는


데, 그것은 자기구제(自利)를 전면에 내세우는 전통적인 구제를 위한 노력에
관한 평가의 전환과 관련되어 있다. 첫 논문에서 말했듯이 오래된 성전의 많은
부분에서 이미 자기구제(자리)와 타자구제 양쪽으로 노력하는 자들이 자기구
제(자리)만을 추구하는 자들보다 높게 평가되어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자기
구제(자리)만을 추구하는 것의 정당성을 되묻는 일은 없었고 그 의의를 저하하
고자 의도되지도 않았다. 그것과 완전히 대립되는 경향이 대승에서 보인다. 몇
몇 계통에서는 자기의 해방에 집중하는 오래된 구제의 길은 결국은 과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일종의 돌아가는 길, 혹은 좋게 말해도 중계점이라고 간주되고,
붓다의 경지로 이끄는 보살의 길이 유일한 구제의 길(ekayāna:一乘)라는 점이
분명해지기까지 그 경향이 진전된다.10) 다른 대승 계통은 이에 대해서 오래된
구제의 길에서 자기해방을 달성할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더라도11) 그것을
더 열등한 선택지로 하고,12) 잠재적으로 보살이 타락하는 길로 소개하고 있

10) 특히 잘 알려진 것으로 Saddharmapuṇḍarīka-Sūtra(예를 들어 ed. Kern/Nanjio 40f; 46(2.54)


가 있다. 여래장계통에 관해서는 제7절을 보라. RUEGG, D. Seyfort. 1969. La théorie du
tathāgatagarbha et du gotra, Paris: 177ff 참조.
11) 특히 유가행파(제7절을 보라). BoBh 113,3-5도 그것에 관해 주의를 끈다. 그곳에서는 자기의 구
제(자리)를 생각하여, 타자의 구제(이타)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성문’에게는 무위에 머무르며 행
동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어울리지만, 보살에게는 그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제4절
에서 소묘하는 Aṣṭa 제20장의 입장도 참조하라. 그것은 오래된 의미에서의 구제의 종국인 열반
으로의 오입을 보살이 주의해야할 현실적인 가능성으로서 전제하고 있다. AkṣⅠ; 86,22-24
(Ⅱ:351)등, 게다가 다른 부분도 참조.
12) 이것은 특히 전통적인 구제의 길을 ‘소승’(hīnayāna: 예를 들어 BoBh 228,6; MSA(Bh) Ⅰ.10,
Ⅷ.5, Ⅸ.8 등)이라 부를 때 말해지는 것이다. 또한 CONZE, E. and IIDA, Sh. 1968. “‘Maitreya’s
Questions’ in the Prajñāpāramitā”, in: Mélanges d’Indianisme à la mémoire de L. RENOU,
Paris: 229-242, Ⅶ. 82-86. 참조.
연민과 공성 - 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265

다.13) 그러나 이 점이 보살에게 자기의 구제(svārtha)를 지향할 여지가 남아있


지 않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14)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해탈이
기도 하다.15) 그러나 그것은 바로 타자의 구제(parārtha)를 위한 광범위한 활
동과 연결된 해탈의 형식이고16), 게다가 완전한 붓다의 설법이라는 방식의 활
동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원조와 자선이라는 방법으로서 이미 보살의 길에서
행해진 활동과 관련된 해탈의 형식이다.17) 그때 붓다의 경지로 가는 길 대부분
은(즉, 페터(Vetter)의 세 번째 논문18)에서 논해졌듯이 돈오나 밀교적인 불교
를 빼면) 지난한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지고19), 그러므로 자

13) 제4절을 보라. 예를 들어 MSABh ad ⅩⅦ.30(124,14); Aṣṭa 116,5ff(163f 참조; T Ⅶ: 810c8-14


도 참조; 오래된 판본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보살은 성문이나 독각처럼 홀로 자기수련에만 몰두
하고, 고요하게 하거나, 열반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그 짐을 열의의 결여(alpotsukatā 116,27)쪽
으로 던져서는 안 되며, 일체중생의 구제(利)를 위해 일해야 한다.
14) 예를 들어 CONZE/IIDA 1968, Ⅵ.71; MSA(Bh) Ⅱ.12(9,23f); Ⅳ.1(13,23;14,2f); Ⅴ.1(19,14);
ⅩⅦ.66b(132,2); Ⅴ.8cd(21,10f) 참조: 보살은 항상 타자의 구제(이타)를 위해 노력하고 바로 그
로 인해 자기의 구제(자리)와 타자의 구제(이타)를 성취하며, (무주처)열반의 기쁨을 얻는다.
BoBh 15,15도 참조. 그 기술에 의하면 보살은 자기의 구제 ‧ 이익만을 추구해야하는 것도, 타자
의 구제 ‧ 이익만을 추구해야하는 것도 아니라 (보살이 예를 들어 불교의 구제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그것을 설하려는 것. 16,11f.), 타자와 결부된 구제와 이익을 추구해
야한다(16,6-9와 19-21); 그것에 대해 타자에게만 이익을 주면서 게다가 자기의 완성에 기반하
여 행해진 행위(예를 들어 보살이 이미 도달한 선정의 단계, 혹은 해탈을 얻은 붓다가 지닌 능력을
중생의 안녕을 위해 포기하고, 더 하위의 영역에 나아가 귀환하는 것)라면 그 모방이 채용된다.
(16,12-19)
15) 예를 들어 BoBh 29,15f(HS. …… śikṣate mahāyānenāyatyām ātmanaḥ parinirvāṇaya); 62,1ff;
63,17f; 64,6; MSA(Bh) Ⅴ.11b(22,8): 보살의 실천은 최상의 적정, 즉 ‘무주처’열반을 동반한다.
(-anugata)(제7절을 보라); RGV(V) Ⅰ.93(58,10ff); Ⅱ.8(81,1-4); T ⅩⅩⅪ: 55b20f.
16) BoBhD 16,15-17; 281,13-15(kṛtyāvihāniḥ로 읽어야 한다; T ⅩⅩⅥ: 327B 18-28 그리고 ⅩⅩ
Ⅺ: 58b21-26(‘자리 ‧ 이타’의 관점에서 본 ‘佛身’); POUSSIN, de La Vallée 1928-29, 711). 자
세히는 제7절.
17) BoBh 16,6f 그리고 14f;29,7,11 그리고 13f; 80,16ff(보시); 97,9-24; 100, 13ff(중생의 구제 ‧ 이
익을 위한 선행)
18) 역주: 주 5 참조.
266 불교학리뷰 vol.18

기의 해탈이 크게 늦어진다고 생각하는 범위 안에서 타자의 구제에 분명히 우


선권이 주어진다. 바수반두20)(400년경?)는 이 지연과 어려움을 스스로 받아
들이는 보살의 각오를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기록한다. 즉, 타자의 구제를 위
해(혹은 타자의 이익과 관련하여) 진정으로 연민에 가득찬 자에게는 타자의 구
제 곧 이익과 자기의 그것이 같은 것이고21), 타자의 고통은 그를 고통스럽게
하지만22) 그 자신의 고통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3. ‘무량’23)의 재해석

대승에서 타자구제가 가장 강조된 점을 감안하면, 무량을 논할 때도 이 측면


이 더 많이 언급된 점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대승의 제 문헌 중에서 ‘무량’이
라는 틀에서도, 타자구제를 위한 활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나 ‘위대한 연
민’이라는 의미에서 연민을 파악하는 경향이 보이는 경우에는 타자구제의 강
조는 연민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다.24) 이와 동시에 많은 대승문헌은 연민

19) 예를 들어 MSA Ⅸ.1-3; MSABh 171,17. 마찬가지로 Vi 428b19-29와 AK(Bh) 181,3f(VPⅢ:


188f)라는 보수파 계통의 문헌. 그 외 POUSSIN, de La Vallée 1928-29, 732ff참조.
20) AKBh 182,3ff(VP Ⅲ: 191f); 보수파 계통의 문헌이지만 그 부분에서는 분명하게 대승 정신의 영향
이 나타난다. 구사론에 준하여 구성되어 있지만 엄격하게 보수적인 문헌인 중현(Saṃghabhadra)의
*Nyāyānusāra(뺷순정리론뺸)에는 당연하게도 이것과 대응하는 부분이 발견된다.
21) MSA(Bh) Ⅴ.2(19,22f) 참조: ‘누가 타자의 구제(이타)를 자기의 그것보다도 중대하게 볼 것인
가, 무엇이 자기의 구제(자리)를 위한 것인가, 타자의 구제(이타)란 무엇인가’(Bh.,: ‘그에게 이
두 가지 사이에 차이는 없다.’
22) MSA(Bh) Ⅳ.27b; ⅩⅦ.52a(Bh 128,25: karuṇayā bodhisattvaḥ paraduḥkhair duḥkhitaḥ) 참
조; 이어서 보살은 타자에게 행복을 전하는 것에 의해 스스로도 행복해진다는 보완적인 견해가
설해진다.
23) 역주: ‘헤아릴수 없는 것(apramāṇa, 無量)’이란 우애(maitrī, 慈), 연민(karuṇā, 悲), 기쁨(muditā,
喜), 평정(upekṣā, 捨)이라는 4가지의 수양덕목으로 이뤄진 정신의 단계적 구조. 주25에서 소개
될 MAITHRIMURTHI의 저작은 ‘무량’에 관한 포괄적 연구서로 뛰어난 성과이다.
연민과 공성 - 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267

에 더 높은 위치를 부여하고 있다.25) 때로는 연민이 ‘무량’ 중에서 가장 뛰어나


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분명히 설해진 경우도 있다.26) 또한 가끔 우애
(maitrī)에도 일정한 우위성을 인정하는 경우가 있는데27), 이는 특히 우애가
위대한 우애(大慈)로서 붓다나 보살의 위대한 연민(大悲)과 함께 등장하고28),
근본적으로 다른 중생의 구제(利)에 도움되는 경우이다.29) ‘무량’ 중의 하나
인 보살의 우애는 타자구제를 향한 것으로 특징지워진다.30) 다만 자기의 정화
와 구제(利)와 수호가 (부분적으로는 우위에 서며) 동기로서 열거되는 경우도
있다.31)
평정(upekṣā)을 대승의 정신성속에 넣으려고 할 때 그 말이 어디까지나 무
집착 혹은 무관심이라는 울림을 가지는 한 특히 곤란한 문제가 생긴다. 왜냐면
중생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태도는 보살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다.32) 이런 점에서 평정이라는 말을 경우에 따라서 이타적인 의미로 확장하거
나 재해석하는 일이 생겼다. 그것은 예를 들어 몇몇 문헌에서 나타나는 ‘자기
와 타자를 지키기 위한 평정’이라는 문장에서 분명해진다.33) 많은 문헌에서
중생을 번뇌에서 해방시키고 싶은 서원으로서 평정을 파악함으로써 해석이 확
장되어 있다.34) 어떤 문헌에서는 평정(upekṣā)이 수습의 종국 혹은 최고지점

24) 예를 들어 T Ⅺ: 236a24ff(PAGEL, U. 1995. The Bodhisattvapiṭaka, Tring: 142 참조); AkṣⅠ:


87ff(Ⅱ: 353ff)
25) 예를 들어 BoBh 167,1ff와 MSA ⅩⅦ.29ff(텍스트의 교정에 관해서는 필자의 첫 번째 논문 시작
에 소개한 M. MAITHRIMURTHI의 학위논문을 보라(한국어 역에서는「평정과 자비」, 뺷불교학
리뷰뺸 16호 181이하임.-역주).
26) 예를 들어 BoBh 63,25와 197,23.
27) MPPU 211b12f와 25(Mppś Ⅲ: 1268f)
28) MPPU 256b10ff(Mppś Ⅲ: 1709ff; 1705ff도 참조)
29) MPPU 256b10ff(Mppś Ⅲ: 1709ff; 1705ff도 참조) 참조.
30) MPPU 210b19-26(Mppś Ⅲ: 1259)
31) T Ⅺ: 235b12ff(PAGEL 1995, 140f); AkṣⅠ: 85,26ff(Ⅱ: 345ff).
32) MSABh 16, 27f(ad Ⅳ.17b); 18,24(ad Ⅳ.27)
33) T Ⅺ: 238B15(PAGEL 1995, 143); Akṣ Ⅰ:92; Ⅱ:373.
268 불교학리뷰 vol.18

이라는 본래의 지위를 잃고, 우애와 연민에 앞서 불공평한 감정을 제거하기 위


한 예비적인 수습으로 격하되었다는 점에서 중점의 근본적인 이행이 분명해졌
고, 대승이 오래된 불교보다도 우위에 놓여져 있다.35)

4. 정신성의 상보적인 양극인 연민과 공성간의 긴장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붓다의 경지는 해탈에 도달한 상태이기도 하고, 해


탈 그 자체로서 세계 내 속박을 극복함으로써만 획득되는 것이다. 세계 내 속
박의 극복은 (*해탈에 이르기 위한)36) 모든 요인중 하나이고, 페터가 논한 문
헌 곧 뺷팔천송반야경(Aṣṭasāhasrikā Prajñāpāramitā)뺸에서는 완전한 지혜
(prajñāpāramitā)의 성취37), 게다가 보살의 길에서는 이미 (거의) 그것을 성취
한 것으로 간주되어 있다. 페터가 보여주었듯이 완전한 지혜에 머무는 것은 공
성(śūnyatā)에 머무는 것을 포함한다38) 그러나 공성에 머무는 것은 사물을 규

34) 예를 들어 BoBh 166,14-16; MSA(Bh) ⅩⅦ.18(121,22); ASBh 124,15-17; 여기에서 평정은


분명히 ‘바라보다’=‘염려하다’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있다. MPPU 210a2-6(MppśⅢ:1255)도
참조. 여기에서는 평정이 이하와 같이 해설되어 있다. 즉 중생은 락도 아니고 고도 아니며, 평온한
상태에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이해하려는 ‘원망’, 게다가 이어서(210a6-9), 우애, 기쁨을 함께 하
는 것, 그리고 연민에 의해 행자 자신 속에서 생기는 동정이나 슬픔에서 행자가 ‘벗어나는 것’, 그
후(210b4ff; MppśⅢ: 1258), 우애 등에서 생겨난 비현실적인 소원인 억측을 극복하는 ‘수단’, 최
후에는(210b12-14; MppśⅢ: 1258f), 심지어 중생을 포기하는 것(중생을 일시적으로 그들 자신
에게 맡겨버린다는 의미인가?), 즉 강한 감정에 휩싸이기 쉬운 ‘무량’의 다른 세 가지 덕목과는
달리 해탈을 쉽게 하는 ‘평정’(upekṣā)이다.
35) BhKr2 5,17ff.
36) 역주: *에 이은 괄호안의 문장은 역자에 의한 보충이다. 이하와 같다.
37) Aṣṭ 26, 31(Co.104); 94,30ff(Co.144ff); T Ⅷ: 442b22ff)도 참조, 특히 95,17,96,11 그리고
97,21; 102,28f(Co.152) 참조.
38) Aṣṭa 17,30(Co. 97; TⅧ: 429b5f). ‘완전한 지혜’와 공성의 명상(공삼매 śūnyatāsamādhi)와의
관계에 관해서는 BREET, J.A. DE. 1992. “The Concept Upāyakauśalya in the Aṣṭasāhasrikā
연민과 공성 - 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269

정할 때 그것을 공으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39) 명상(samādhi) 상태 속에서


사물이 더 이상 그 규정성에 의해 지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특징없음(無相, ānimitta)’, 즉 모든 현상과 표상이 사라진 상태도 같은 의미
로 말하고 있다.40) 이렇게 하여 ‘해체(부정)된’ 세계에 인간은 더 이상 갇히지
않으며, 그러므로 이 삼매는 열반과 통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해탈
(부정)’은 뺷팔천송뺸에서는 열반과 연결되어 있다41). 아마도 ‘해체(부정)’가 보
살의 관심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특히 이(*‘해체(부정)’와 열반의 연결)에
의한 것일 것이다. 즉 ‘해체(부정)’는 세계에의 집착 혹은 세계로부터 이탈하
고자하는 열반을 향하는 노력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42)
그러나 페터가 말했듯이 이 논의는 보살의 미래 목적, 즉 붓다의 경지까지도
해체(부정)된다는 흡인력에 삼켜질 위험을 품고 있다. 이 문제는 뺷팔천송뺸 제
20장에서 주제로 논해진다. 여기에서도 보살은 공성(śūnyatā)과 ‘특징없음
(ānimitta)’의 명상에 주해야 하지만43), 동시에 이들 명상은 그의 목적 즉, 붓
다의 경지를 획득하는 것을 위험하게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44) 그러나
여기에서 주어지는 해결책은 보살이 이들 명상에 완전히 몰입하면 안 된다는

Prajñāpāramitā”, in WZKS 36: 202-216, 특히 206ff를 참조.


39) Aṣṭa 95,5f(Co.144)도 참조.
40) 예를 들어 Aṣṭa 170,11(Co.209). 오래된 정규문헌 속의 공성과 ‘특징없음’의 결부에 대해서는
MNⅢ: 108f와 111,6-8; 명확한 구별은 MNⅠ:297f를 참조.
41) Aṣṭa18.29ff(Co.97); 20,21(Co.99)
42) Aṣṭa26,31(Co.104); 19,13ff참조(Co.98). 그러나 세계의 ‘해체(부정)’가 타자구제(이타)를 위
해 세계 속에 머무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긴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이미 같은 효과를 갖고 있다.
Aṣṭa 14,23-47(Co.93); MSA Ⅳ.24도 참조; MAVBh ad Ⅰ.18c(25,16f)
43) AṣṭaⅠ83, 3과 9(Co.222); TⅧ: 458b16f와 21); 184,28과 30f(Co.224; T Ⅷ: 458c11과 13);
185, 3f, 18과 25f(T Ⅷ: 458c24-26). YUYAMA, A. ed. 1976. (Prajñāpāramitā-) Ratnaguṇā-
saṃcayagāthā, Cambridge: ⅩⅩ. 4d 참조.
44) Aṣṭa 119, 32ff(Co.167)도 참조; VETTER, T. 1984. “A Comparison between the Mysticism
of the Older Prajñāpāramitā Literature and the Mysticism of the Mūlamadhyamakakārikās
of Nāgārjuna”, in Acta Indologica 6: 479 참조.
270 불교학리뷰 vol.18

지극히 명쾌한 것이다. 보살은 이에 익숙한 것은 좋지만 그에 대한 직접지(체


험)를 졸속으로 ‘현전화(sākṣāt-kṛ-)’해서는 안 되며, 그것들에 ‘빠져(pat)’서는
안 된다.45) 즉 보살은 일체의 악한 영향, 즉 세계에 대한 집착이 소멸되고 말
정도(āsravakṣaya: Aṣṭa 183, 14f)로 공성과 ‘특징없음’이 그를 이른바 무아상
태로 만들어버려서 ― 오래된 구제의 길의 신봉자같이46) ― 그를 바로 열반으
로 이끌고 말 정도로 그 명상들에 집중적으로 생사를 걸고 몰두해서는 안 된다.
보살이 붓다의 본성을 아직 완전히 체현하지 않았다면, 그는 (옳든 그르든) 그
점을 피해서는 안 된다47). 그때까지 보살은 공성과 ‘특징없음’에 거리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보살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람들 앞에서 실제 명상에
들어가기 전에 그렇게 할 것을 단호히 결의하고48), 나아가 일체중생에 대한 공
평한 우애49)나 연민의 수양이 요구된다50).

45) Aṣṭa 183,7ff(Co.222; T Ⅷ: 458b19ff; bhūtakoṭi와의 대응을 필자는 T.No. 224속에서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Aṣṭa 123,19=T Ⅷ: 448b26이라는 대응은 확실히 발견된다.); 184,31f(Co.224;
T Ⅷ: 458c11f와 13f); 185,3ff, 10f, 15, 18과 27ff(T Ⅷ: 458c15, 19f, 23, 27과 29); 186,3ff(T
Ⅷ: 459a4f) 등.; VETTER 1984, 506 참조. 또한 DBhS Ⅶ.L과 Ⅵ.O(52,14ff: 보살은 조건지워
진 것(유위법)은 한편으로 철저하게 악으로 향하고, 한편으로 실체를 갖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항상 이미 무로 돌아가 있다는 통찰에 의해 확실히 세계로의 몰입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먼 과
거부터 적정에 도달해 있는 상태라고 완전하게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연민 때문에 다른 중생
을 무시하면서까지 붓다의 경지를 얻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 BhKr2 67,17ff.
47) Aṣṭa 184,28(Co.224; T Ⅷ: 458c10f; 458c20도 참조) 참조. BhKr2 67,17ff.
47) Aṣṭa 185,5f(Co.224; T Ⅷ: 458c15f); 11ff(T Ⅷ: 458c19ff); 27f; 186,31f. Aṣṭa 121,10ff(Co.
168; T Ⅷ: 448a16ff)도 참조. 그곳에서 세계에 등을 돌리고 현세에 이미 열반해 있다는 선언은
보살에게 대한 악마(Māra)의 행위(즉 ‘시험’)로 간주되어 있다.
48) Aṣṭa 183,10ff(Co.222; T Ⅷ: 458b21ff). 이 문맥에서 텍스트는 upāyakauśalya ‘교묘한 방법, 선
교방편’을 화제로 올리고 있다. (184,20f와 24; 185,11과 27; T Ⅷ: 458c19와 26f; 117,30-32
[Co.165]; VETTER 1984, 506)도 참조.
49) Aṣṭa 184,26f(Co.224; T Ⅷ: 458c8-10; KIMURA, T. ed. 1990. Pañcaviṃśatisāhasrikā
Prajñāpāramitā, Ⅳ, Tokyo: 195, 16-18); Ratnaguṇasaṃcayagāthā ⅩⅩ.4b 참조. 또한 Aṣṭa
의 제1장(14,15ff; Co.93)에 있는 모든 중생을 어머니로 보라는 것과 같은, 특정한 심적 수습에
있어서 같은 의미를 VETTER가 상정하고 있다. 다만 그곳에서는 그러한 수습이 보살의 실천(즉
연민과 공성 - 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271

공성의 지혜는 자동적으로 일체중생에 대한 연민을 일으킨다51)는 특히 눈


에 띄는 주장은 적어도 뺷팔천송뺸에는 적합하지 않음이 분명해진 듯이 보인
다. 더 말하자면 공성과 연민은 두 극을 이루고 있고 양자는 붓다의 경지와
관련하여 불가결한 것이지만 분명히 어떤 종류의 긴장 하에 놓여져 있으며
서로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듯 보인다. (다른 제 문헌 속에서 이 인상
이 뒷받침된다.)52) 게다가 연민의 수습에 의한 공성의 관찰뿐 아니라, 역으

중생을 위한 자기투입이나 자기희생)을 쉽고 즐거운 것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작은 것’에


서 동기 지워진 것에 지나지 않지만. (VETTER, T. 1994. “On the Origin of Mahāyāna
Buddhism and the Subsequent Introduction of Prajñāpāramitā”, in Asiatische Studien 48.4:
1257, n.31도 참조)
50) T Ⅷ: 58c11(Aṣṭa에 대응은 없다; 그러나 Aṣṭa 184,20과 186,7f: upekṣā도 포함하여 무량전체);
b25(Aṣṭa [183,17]에 대응은 없지만, Ratnaguṇasaṃcayagāthā ⅩⅩ.1에 부합한다. 그곳에서
보살은 명상에 머물 때 중생을 연민으로 배려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붓다의 본성을 얻는다고 설
해져있다). 주57, 게다가 MPPU256c19-23(MppśⅢ: 1712): 위대한 우애와 위대한 연민.
51) Streng, F.J. Śūnyam and Śūnyatā 항, in ELIADE, M.(ed.), The Encyclopedia of Religion,
vol.14: 154(왼쪽 편) 참조: ‘……공성이라는 개념은 「공이라는 존재방식」으로의 존재를 지각하
는 실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한편으로……연민……을 발생시킨다’ (그것에 대해
id.154 [오른쪽] ‘……공성의 인식은 연민과 결부되어 있다.……’). 필자의 첫 번째 논문 주 40(한
국어 역에서는 주47)을 참조.
52) 예를 들어 DBhS Ⅶ.A.1: 보살은 공성의 명상과 그 외에서 정신을 단련하지만, 그러나 (붓다의 경
지를 얻기 위한) 선행과 지식을 쌓아간다 ; T Ⅹ: 106c11f; ‘제 보살은 중생은 (진실로는) 존재하
지 않음을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러나 중생을 무시하지 않는다’(GOMEZ, L.
1993. in TAKEUCHI, Y. ed., Buddhist Spirituality, New York: 167); MPPU 175a2f=Mppś
Ⅱ950 참조: ‘제법의 실상은 무위무작이라는 것을 알고도 (글자 그대로는 ‘행하는 것도 없고 행하
지 않음도 없이’) 본원의 대비로 중생을 건너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Bodhicittavivaraṇa 90
(LINDTNER, C. 1982. Nagarjuniana, Copenhagen: 210f. 참조): ‘보살이 ‘번뇌’라는 섶을 공
성이라는 지혜의 불로 태워버렸다 해도 연민에 의해 풍부해지고 있다’; BhKr1 217, 18f(vB 38):
모든 존재요소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살은 일체중생을 걱정하는 것
을 그만두지 않는다; 221,12-1: 지상의 진실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살은 세속의 생존을 끊
지 않고 중생구제를 위한 연민에 기반하여 행동한다.; Dīpaṃkaraśrījñāna, Sūtrārthasamucca-
yopadeśa, Peking-Tanjur Ki: 354b와 Gi: 37a(MOCHIZUKI, K. ed. Sep. 1996. Nihon
shūkyō gakkai: 3, 6): ‘모든 존재요소에는 본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
272 불교학리뷰 vol.18

로 공성의 관찰에 의한 연민이라는 관계도 보인다. 예를 들어 뺷입보리행론


(Bodhicaryāvatāra)뺸에 대한 프라즈냐카라마티(Prajñākaramati)의 주석에
는53) 다음과 같이 설해져있다. 즉, 보살은 연민 때문에 윤회에 머물러 있음에
도 불구하고 공성의 지혜에 의거하여 윤회의 과오들에 의해 염오되지 않는다.
환언하면 보살이 조급하게 (무여)열반에 들어가지 않게 작용하는 연민은 공성
의 지혜의 의해 유지되어 있다. 보살이 윤회에도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 상태는
바로 이 두 계기의 균형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 자체로 본다면 반대의 방향
성을 가진 두 계기의 상보성이 후대 논사의 한 게송에 간결하고 적확하게 표명
되어 있다. ‘연민을 거부하고, 공성에만 집착하는 자, 그 자는 최상의 도(즉 붓
다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반대로 단지 연민만을 행하는 자는 수천번의 생을
거쳐도 해탈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양자를 연결하는 방법을 안다면, 생존에
도 열반에도 묶이지 않는다.’54)
‘지혜(prajñā)’가 공성을 그 내용으로 가지고, 방편(upāya 즉, 특히 보시 등
다른 완전한 덕)55)으로의 역행이 연민에 기반한 경우에는 이 두 가지 계기가 각
각 ‘공성’과 ‘연민’을 대신한다. 카말라쉴라56)(AD. 8세기후반)는 다음과 같이

생에 대한 연민을 증대시킨다.’(chos thams cad bdag mad par śes kyaṅ sems can la sñiṅ rje
bskyed pa’o).
53) BCAP 211,9-11(ad Ⅸ.53).
54) SHABIDULLAH, M. 1928. Les chants mystiques de Kāṇha et de Saraha, Paris: 130(제
16-17게송); Saraha, SĀNKṚTYĀYANA, R. ed., Dohākośa, 1957. Patna: 4ff(제16송c-17송d);
BENDALL, C. ed. 1903/1904. Subhāṣitasaṃgraha, in Le Muséon: 8과 249f; 텍스트의 세부
사항은 확실치 않다.
karuṇā chaḍḍi jŏ suṇṇahī laggā ṇaü so pāvaï uttima maggā /
ahavā karuṇā kevala bhāvaï jammasahassahï jammasahassahï(v.l: so saṃsāraha)
mokkha na pāvaï /
suṇṇakaruṇa jaï(v.1.: jaï puṇu beṇṇi vi) joaṇa sakkaï ṇaü bhavĕ ṇaü nivvāṇe(ṃ) thakkaï //
55) BhKr1 197,2(vB 13); BhKr2 59,16. 참조.
56) BhKr2 67,11-20; 69,9-11과 21-25; 65,8-21과 BhKr1 197,1ff(vB 13)도 참조.
연민과 공성 - 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273

말한다. 즉, 지혜만을 행할 때 보살은 ‘성문’이 추구하는 (무여)열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반대로 ‘방편’만을 실천한다면 그는 보통사람들처럼 윤회에 속박될
것이다. 그는 (‘성문’처럼) 공성을 현전시키지(sākṣāt-kṛ-)않고 다만 공성의 지
혜를 ‘방편’과 연결시켜서 행함으로써만 무주처열반(apratiṣṭhita-nirvāṇa: 제7
절을 보시오), 즉 해탈에 도달한 상태로 세간에서 활동할 수 있는 장에 도달한다.
이상의 논술에서 ‘깨달음(즉 붓다의 경지)에 이르는 [길]은 공성과 연민을
포함하고 있다57)’는 언명도 양극의 상보성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양극성이 내포한 긴장이 여기에서는 명백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
만, 부정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졌다고 본다.58)

5. 유정(有情)없는 연민

그런데 연민과 모든 존재요소의 무실체성인 공성간의 이 같은 긴장은 연민


과 (상주하는 전체적이고 통일적인 실체로서의) 인격 혹은 유정을 비존재로 간
주하는 보수적인 관점의 공성간에도 보인다. 뺷입보리행론뺸에 다음과 같이 말
한다. ‘[유정]이 존재하지 않을 때 연민이 누구에게 향해야할지 묻는다면, (다

57) Ratnāvalī 4.96: śunyatā-karuṇā-garbhaṃ……bodhisādhanam. BhKr1 221,3f(vB 41); BhKr2


55,24f; 73,23-25; Śikṣ 270,8; 275,10. 272,9ff에는 經(Ratnacūḍa)에서 그것과 관련된 다음의
인용을 들고 있다. 보살은 ‘모든 뛰어난 특질(?)을 가진 공성’(sarvākāravaropetā śūnyatā라는 형
태의 명상 ― Aṣṭa 183, 10(Co.222)에서도 보살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되어있다 ― 을 실현하고,
그때 보시등과 특히 우애(와 연민?)을 채우는 공성(의 명상)이 중시된다.
58) 금강승의 제 문헌도 이 점을 말하는지에 대해 필자는 그 방면의 전문가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SHASTRI, H. ed. 1927. Advayavajrasaṃgaraha, Baroda: 24, 7f(‘공성과 연민은 등
불과 빛처럼 다른 것이다 ; 공성과 연민은 등불과 빛과 같다.’)등은 오히려 양자의 동적인 통일성
을 나타내는 듯 보인다. 이것은 금강승이 ― 의례적 ‧ 명상적인 선취라는 형태로 ― 道로서의 果
(즉 붓다의 경지)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해진 것과 관련될 것이다. 공성과 연민간의 긴장이 붓다
에게 해소된 것에 대해서는 제7절을 참조.
274 불교학리뷰 vol.18

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붓다의 경지라는) 목적을 위해 (보살이 의


도적으로) 몸에 걸친 미망에 의해 분별된(prakalpita) (유정에게)이다.’59)
주석자는 이 게송을 주석할 때 이제설을 근거로 한다. 즉 ‘유정’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승의제와 유정의 정립을 적어도 잠정적으로 인정하는 세속제이다.
승의제는 지혜를 대상으로 하며, 그것 없이는 모든 그릇된 표상에서 벗어난다
는 의미의 붓다의 지위를 얻을 수 없다.60) 이에 반해 연민은 한정된 진실의 영
역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승의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 말
했듯이 단지 가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실체적인 존재인 유정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61) 이 규정에 따른다면 필자가 첫 논문의 끝에 인용한, 비바사사(毘
婆沙師)의 입장에 나타나는 무집착과 연민간의 긴장처럼 지혜와 연민간의 긴
장이 붓다에게도 있게 된다. 이 점은 주석자 프라즈냐카라마티가 그 논제와 관
련해 인용한 게송문에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62) 즉 ‘지혜는 진실을 대상으로
하고 [한편으로] 연민은 세속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진실하게 사유하는
당신(붓다)에게는 중생이 존재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당신이] 10력
을 지닌 자(=붓다)의 모태인 연민으로 가득 찰 때, 당신에게는 자식에 대한 부
모처럼 고통받는 중생에 대한 사랑이 생겨난다.’
그러나 주석자는 다른 한편으로 연민은 ‘중생’이라는 관념이 없어도 가능하
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비인격적인’ 존재요소(dharma)만을 대상으로 하여

59) BCA Ⅸ.76; 구판(SAITO, A. 1993. A Study of Akṣayamati(=Śāntideva)’s Bodhisattvaca-


ryāvatāra as Found in the Tibetan Manuscripts from Tun-huang, Mie University: 18f)에서
는 다소 다르다. ‘목적을 위해(주석 ib,79f: 실제적인 배려에서) 허락되는 한 자기자신으로 여겨
진 (다른) 자에 대해서’. DBhS Ⅶ.A.2도 참조: 실체적인 자기, 인격 혹은 유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는 것을 통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살은 ‘무량’의 수습을 그만두지 않는다.
60) BCAP 228,25-27; 229,3.
61) BCAP 228,28f; AKBh 414,17f(VP Ⅶ:77) 및 MppśⅢ도 참조: 1706(3.a)와 1715(설일체유부
의 견해지만, MPPU의 작자는 그것을 붓다와 관련시켜 부인하고 있다.)
62) BCAP 229,5-8(=Guṇāparyantastotra 33).
연민과 공성 - 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275

가지는 연민이 있고, 나아가 어떤 대상도 갖지 않는(anālambana) 연민까지 있


다고 한다.63) 이와 함께 비교적 초기 대승경전에 나타나는64), 우애와 연민을
공성과 조화시키려는 시도로 보이는 견해가 도마 위에 올려진다. 존재요소만
을 대상으로 하는 연민은 존재요소의 단순한 집합체(인 중생)65), 그중에서도
특히 ‘고(불쾌감)’라는 요인을 드러내고 있는 집합체에 향한다. 대상을 가지지
않는 연민은 존재요소도 무가치한 것으로 하는 공성과 존재요소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공성과 상응하며66), 또한 아마도 승의제로 향하는 지혜의 영
역에서 유지되는 순수한 심정이나 기질로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음에 틀림없
다. 연민의 이 형식은 제불(諸佛)67)의 경우, 높은 경지에 도달한 보살68)에게
주어진다. 그것에 대해 그 외의 보살에관해 말해지는 것으로 잘 알려진 견해로
바꿔보면, 카말라쉴라의 다음과 같은 확언이 있다. 즉, 깊은 명상에서 생겨난
승의제(paramārtha)로 향하는 초세속적 지혜의 경지에서는 방편(즉, 위대한
연민과 그것에 상응하는 행위)의 수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수습은 이
하와 같은 지혜라면 완전히 양립될 수 있다. 즉 초세속적인 지혜를 가져오거나
그것에 이어서 생겨나는 지혜, 그리고 사물(즉 다양한 현상)을 지각하는 동시
에 그것들의 진실한 본성(즉 공성)을 바르게 파악하는 지혜이다. 이는 예를 들
어 주술사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환영을 보지만 동시에 그 허구적 본성을
보고 있는 것69)과 같은 것이다.

63) BCAP 228,30f.


64) PAGEL 1995, 141; AkṣⅠ:86과 165; Ⅱ:351f; 이것들 두 개의 텍스트에서는 그러나 우애(maitrī)
에 관해서만 서술하고 있다. MPPU 209b 28ff(Mppś Ⅲ: 1250ff, 다른 자료도 열거하고 있다.)와
350b25-28(우애와 연민)도 참조. ‘무량’의 모든 것에 표면화하여 전용되고 있는 예로서는 BoBh
166,2-10(MAITHRIMURTHI 1999 [「평정과 자비」(뺷불교학리뷰뺸16호) 250]과 특히 258-262.
참조.
65) MPPU 209b29ff(Mppś Ⅲ: 1253); BoBh 166,6-8. 참조.
66) MPPU 209c6ff(Mppś Ⅲ: 1253); 350b28; BoBh 166,8f. 참조.
67) 제불에 한정한다고 하는 부분으로 MPPU 209c7(MppśⅢ: 1253); 350b25-28.
68) PAGEL 1995; MppśⅢ: 1251f. 인용된 전적으로서 특히 BoBh166,2f도 참조.
276 불교학리뷰 vol.18

6. 공성지의 발로로서 연민

공성을 내재화한 후에 연민이 발생한다고 해서 공성 경험 자체가 반드시 연


민으로 종착되어야 한다고 이해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환언하면 (나가르주나
의 중론송 Madhyamaka-kārikā 24장에서 말하는 의미의 공이 아니라, ‘존재
적’ 세계로서는 고유한 실체의 불변성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변화와 움직임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 한) 공성이 존재론적으로 연민의 필수적인 조건도 아닐
뿐 아니라, 인식적으로 (의식적으로 경험된 것으로서) 그것의 충분한 이유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70) 그러나 상술한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다음
사항뿐이다. 즉 공성지에는 틀림없는 몇 가지 상(세속적인 것에 대한 모든 집
착이나 윤회에 대한 두려움, 그것과 가능한 한 빠르게 열반에 이르려는 노력,
이러한 것을 버리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공성지가 그 정도로 강력하게 돌
출하지 않는 한 이들 상이 연민에게 힘을 더해주고 그것을 안정된 것으로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성지 이후에 연민이 실제로 나타난다는 것
은 연민이 ― 대승문헌에서 일반적인 의미에 한정해서 말하자면(예를 들어
BoBh 10, 12f) ― 이미 이전에 주도적인 동기로서 눈에 보이는 형태로 혹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었음(그래서 바로 그렇기에 때때로 공성지에서도 ‘대
상을 가지지 않는’ 혹은 기질로서 존속하고 있는)을 전제하고 있다. 아마도 적
어도 연민은 공성지에서 자연적으로 나온다는 인상을 주는 몇 가지 표현(관견
에 의한 한 그 수는 그 정도로 많지 않은데, 아마도 비교적 후기 문헌에서 보인

69) BhKr1 221,15ff(vB 42: jñānaprayogapṛṣṭhabhāvinī and abhiniveśinī로 읽음); BhKr2 71,
10ff. 참조.
70) 아직 자신의 해탈만을 추구하는 ‘성문(Śrāvaka)’이라도 ‘존재요소의 공성을 이해하겠지만, 그로
인해 그들에게 연민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중관파 학승 찬드라키르티의 견해(유가행파의 입장과
대립하여. 주76을 보라)는 이 견해를 지지한다. (Candrakīrti, Madhyamakāvatāra, de La Vallée
POUSSIN, ed. 1907-12. St. Petersburg: 19, 17ff; Prasannapadā, de La Vallée POUSSIN, ed.
1903-13. St. Petersburg: 351-53. 참조; RUEGG, Seyfort 1969, 171 및 311). 참조
연민과 공성 - 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277

다)은 그러한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71)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해


진다. ‘정신적인 실천에 전념하는 자가 이러한 공성[의 고찰이나 지]를 쌓는다
면, 그 자에게 타자의 구제를 위해 활동하려는 의심할 여지없는 의지가 생긴
다.72) 혹은 ‘[보살]’은 모든 존재요소가 공임을 인식하기 때문에 그들 중에서
중생(=유정)에 대한 연민의 흐름이 이후에 일어난다.’73)
그러나 그러한 표현은 정말 연민이 공성지의 결과라는 것을 주장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연민이란 원래 공성지 뒤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연민은 처음부터 보살의 길과 함께 있다는 생각과 모순된다)이라는 의미에
서 당연히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공성지가 연민에 새로운 깊은 기
반을 부여한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가능성이 열리는 것은 공성을 현상의 무가
치로 상정하는 경우가 아니라 공성의 편재 즉, 현상으로 편재한다기 보다 오히
려 중생으로 편재하는 공성으로서 일체중생에게 공통된 진정한 본질(그래서
이 의미에서 중생의 진정한 자기, 즉 그의 아트만)임을 출발점으로 할 때이다.
이 견해는 특히 유가행파의 몇몇 문헌에서 나타난다. 그곳에서는 타자에 대한
보살의 활동은 보살이(황금율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중생을 자기 자신과 같다
고 보고74), ‘위대한 자아라는 견해’(mahātma-dṛṣṭi)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기
초지워진다.75) 게다가 이 점은 보살(초기의 보살)은 모든 중생에게서 진정한

71) 금강승 전문가에게 더욱 타당한 해석에 관한 가르침을 받고 싶다.


72) Bodhicittavivaraṇa 73(LINDTNER 1982, 206f) Dīpaṃkaraśrījñāna, Ratnakaraṇḍakodghāṭa,
Peking-Tanjur A: 108b2f(전거불명의 인용) 참조: [모든 것]은 본래 생겨난 적이 없다는 것을 근
본적으로 안다면, 윤회의 진흙탕에 속박된 [유정]에 대한 연민이 자연스럽게(ṅaṅ gis) 일어난다.]
어느 경우든 다음에 드는 인용과는 달리, ‘왜냐하면’이 아니라, 단지 ‘~라면’이라고 말하고 있다.
73) Saṃvṛtibodhicittabhāvanopadeśavarṇasaṃgraha(Aśvaghoṣa에 귀속되지만, 꽤 의심스럽다):
Peking-Tanjur A: 15b6f; Gi: 157a5 chos kun stoṅ pa ñid rtogs pas // ’gro la sñiṅ rje’i chu
rgyun ’bhuṅ //
74) 예를 들어 MSA(Bh) Ⅳ.9(15,24); Ⅸ.76(48,1f); ⅩⅥ.45(110,11f) ⅩⅦ.35(125,17f); ⅩⅨ.4
(161,3f); ⅩⅩ-ⅩⅪ.28(180,17f). Aṣṭa 14,18ff(Co.93)도 참조.
75) MSA ⅩⅣ.37(95,24f)
278 불교학리뷰 vol.18

현실성(dharmadhātu)의 동등성 및 변재성(sarvatraga(tva))을 보는 것에서 도


출된다.76) 그러나 진정한 현실성은 모든 중생과 ‘중생을 구성하는’ 구성요소
(dharma)가 본체를 갖지 않는(nairātmya)다는 점, 즉 공이라는 것에 다름 아니
다.77) 편재하는 진정한 본질에 대한 지혜, 또한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과 타
자 간에 공통된 자아(ātman)의 지혜인 공성지는 보살에게 자아의 새로운 차원
을 개시한다.78) 그 차원은 이전 자아의 한계를 없애고 또한 그 차원에서 그 자
아는 의식이 다양성의 세계에 귀환한 후에도 일찍이 있었던 수승한 단계에는
두 번 다시 들어서지 않게 된다.
그 외에 더 강력한 기반으로서 타자에 대한 윤리적인 행동의 근거지움이 여
래장계통의 제 문헌에 나타난다. 여래장사상에 의하면 (동물도 포함해서:
RGV I.119f) 모든 중생은 여래의 자궁(즉 불성)에 덮힌 형태나 소질로서 이미
항상 자기 속에 있다.79) 그러므로 누구든지 모든 중생에게, 붓다에 대한 것과
같은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RGV I.166). 그러나 여기에는 유가행파
의 그것과 같은 논거도 보인다. 즉 모든 중생에게는 동질 혹은 동일한 진정한
본성, 즉 불성 ― 다른 곳에서는 분명하게 자아(ātman)로 쓰여있다 ― 이 갖춰
져 있다는 그 교설이나 통찰은 자기애에 등을 돌리고 자기와 타자 간의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는 위대한 우애(mahāmaitrī 大慈心)로 통하며, 다른 중생에게

76) MSA(Bh) ⅩⅣ.30(94,12f); MA VBh ad Ⅱ.14(35,10f); BCAP ad Ⅵ.126과 BhKr1 225,2-4


(vB 46; dharmadhātoḥ sarvatragatā-prabodhāt [혹은 -pra<ti>vedhāt로 읽음]). 같은 논의가 T
ⅩⅩⅪ: 55c14f(T ⅩⅬⅢ: 597b26-c1도 참조.)에서도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단지 ‘성문(Śrāvaka)’에게서 어느 특정한, 해탈의 모습이 되지 않는 제한 즉, 그들은
진정한 현실성(*tathatā)을 존재요소의 공성이라는 상(相) 아래에서 보는 것이 아니기에 위대한
연민을 일으킬 수 없다는 제한이 작용하고 있음을 말한 것에 불과하다.
77) MSA(Bh) Ⅸ.23(38,1ff: 게송에서는 nairātmyātmāgra로 읽음); MAV 1.14.
78) MSA(Bh) Ⅸ.23(38,1ff); 다만 여기에서는 붓다에 관해서 설해져있다. 초발지에 닿는 것으로써
시작된 활동만이(MSABh ad ⅩⅦ.35=125,17f; ⅩⅩ-ⅩⅪ.7=176,27f. 참조), 붓다에게는 완성
에 이르렀다. (MSABh ad Ⅸ.15=36,22f 참조)
79) RGV(V)Ⅰ.156cf;Ⅰ.27-28(26,3f와 5); Ⅰ.95ff; 68,13(adⅠ.133); 72,8-12(adⅠ.149-152)
연민과 공성 - 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279

해를 끼치는 일이 없는 결과를 낳는다.80)

7. 붓다의 본질이라는 교리에서 구제활동과 해탈의 결합

마지막으로 세속에서 직접적인 활동으로서의 붓다의 경지와 해탈에 도달한


상태로서의 붓다의 경지 간에 있는 긴장이라는 또 하나의 특징을 좀 더 고찰해
보자. 뺷팔천송뺸의 제20장에 의하면 전술했듯이 붓다의 속성(buddha-dharma)을
완전히 몸에 지니기까지 보살은 직접지로써 공성을 현전화하는 것(sākṣātkāra,
즉 붓다의 경지를 삶에서 실현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붓다의 특성을 완전히
몸에 지닌 후라면, 보살은 공성지를 완전히 현전화하는 것이 허용되며81), 실제
로 붓다가 되기 위해서 그것은 불가결한 것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붓다의 경
지가 해탈인 한, 그 경지에 도달한 그 순간에 모든 번뇌(āsrava), 즉 존재에 결
부된 모든 요인이 소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붓다
가 세속에 머무르는 것과 세속에서의 그 매개없는 활동간에 기한이 설정되게
된다. 즉 그 죽음과 함께 붓다는 무여열반에 들어설 것이다.82)
이상의 사항은 초기불교의 제 문헌(과 또한 뺷보살지(Bodhisattvabhūmi)뺸같
은 많은 다른 대승문헌83))의 견해와 완전히 일치한다.
생존 중에 오염의 원인이 소멸한 상태, 이른바 ‘유여의열반(존재요소(신체)

80) Peking-Kanjur mDo Tsu: 202b2ff, esp. 203b8ff: TⅡ:540a18ff, esp. c2ff(Aṅgulimālāya-Sūtra).
81) 그렇게 Aṣṭa 185,12-14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Co.224f; T Ⅷ: 458c21에서는 ‘보살은 그리하
여 붓다가 된다’고만 말해진다.
82) Aṣṭa50,11f(co.118) 참조; 19,3f(Co.97; 문맥에서는 보살은 그러한 생각에 결코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그 생각을 무언가 다른 생각으로 바꾸자는 것은 아니다);
201,5ff(Co.99) 참조, 그곳에는 열반은 완전한 깨달음 뒤에 나타난다.
83) BoBh 45,12f 참조. (주90을 보라). Yogācārabhūmi의 다른 편에도 같은 언명이 보인다. 예를 들
어 T ⅩⅩⅩ: 582a11f.
280 불교학리뷰 vol.18

가 아직 남아있는 열반’(sopadhiśeṣaṃ nirvāṇam)에 이어서 죽음과 함께 ‘무


여의열반(존재요소도 더 이상 남지 않은 열반)’(nirupadhiśeṣaṃ nirvāṇam),
혹은 ‘무여열반’이 온다. 이는 붓다나 일반적인 해탈자에게 대해 말해진다. 붓
다의 사후에 해탈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붓다에 의해 확립된 가르침과 그들 자
신의 노력만이 의지처가 되었지만, 신자집단에게 그것은 만족되지 않는 것이
었다. 그 점은 예를 들어 (슈타인켈러와 페터 논문에서 이미 서술하고 있듯이)
유골 숭배의 발전84)과 유골이 아직 살아있다는 관념85)이나 (이것도 또한 슈타
인켈러가 이미 언급하고 있듯이) 붓다는 실제로 죽지 않았고 상상을 뛰어넘는
초 세속적 낙원에서 영화에 둘러쌓인 채 영원히 살고 있는데, 지상에는 아주
짧은 기간동안 나타난 것이 구제(利)를 촉구하기 위한 겉모습에 지나지 않는
다는 관념의 등장86)에 나타나 있다.
타자구제를 위한 가능한 한 광범위한 활동이라는 이상을 내건 대승에서도
활동의 기한이 문제시되었을 것이다.87) 필자가 보는 한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두 가지 해결방법을 들 수 있다. 첫째는 (고위의) 보살에 대해서 이미 붓다와
동등한 구제활동을 요구하고, 보살로서의 활동 기간을 연장하는 ― 때로는 결
코 붓다가 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보살관까지 간다 ― 경향을 볼 수 있다.88)

84) Aṣṭa 50,11-13(Co.118); Mppś Ⅲ: 1259. 참조.


85) SCHOPEN, G. 1997. Bones, Stones, and Buddhist Monks, Honolulu: 125ff.
86) 1982. “Sanskrit Fragments of a Lokottaravādin Tradition”. in HEERCUS, L.A. 외 ed., Indo-
logical and Buddhist Studies(Vol. in Honour of Prof. J.W. DE JONG), Canberra: 211ff 참조;
HARRISON, P. 1995. “Some Reflections on the Personality of the Buddha” in: 大谷學報74:
1-28.
87) 같은 문제는 붓다의 고귀한 지위와 불가사의한 힘이 붓다의 경지를 추구하여 노력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동기였다는 것에 관해서 생긴다.
88) NANJIO, B. ed. 1923. Laṅkāvatārasūtra, Kyoto: 66, 5ff(SUZUKI, D.T. 1973. The Lanka-
vatarasutra, 59; GOLZIO, K.H. 1996. Die makellose Wahrheit erschauen, Bern etc: 84). 또
한 WILLAMS, P. 1989. Mahāyāna Buddhism, London 외: 239 및 LAMOTTE, E. 1965. La
Concentration de la Marche héroique, Bruxelles: 145-147 참조: 바로 초세속적 붓다와 같은
연민과 공성 - 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281

또 다른 시도는 초세속적인 붓다를 상정하는 중에 그 수명을 사실상 혹은 명확


하게 영원한 것으로 제시하거나89), 붓다의 힘을 무여열반에까지 확장함90)으
로써 붓다의 활동 기한을 무화시켜버리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계기는 최종적으
로 다음과 같은 교리로 수렴되어 간다. 즉 붓다에게는 생존시의 열반 국면과
한결같이 무한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상태인 무여열반, 즉 (슈타인켈너가 이미
지적한) ‘무주처열반’(apratiṣṭhita-nirvāṇa)91)의 국면이 융합되는 것이다. 이

것으로 말해진 보살은 무리의 우두머리나 선장처럼 중생을 목적 즉, 피안(열반)으로 이끌고 게다


가 스스로는 또 다른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 (*세속으로) 돌아온다. 필자가 보는 한 보살의 이러한
행위의 기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기한이 분명히 무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RGVV 48,10-12 참조. (ad Ⅰ.68; Sāgaramatiparipṛcchā에서 인용): 위대한 연민
때문에 보살은 최종적으로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로 재생으로
돌아온다. 주91 참조.
89) 예를 들어 Saddharmapuṇḍarīkasūtra 제15장(Tathāgatāyuṣpramāṇaparivarta) 혹은 뺷대무량
수경뺸(INAGAKI, H. 1994. The three Pure Land Sūtra, Tokyo: 243) 법장 보살(미래의 아미타
불) 제13서원.
90) 초기 유가행파에서 붓다가 무여열반에 들어간(즉 불멸) 후에도 적어도 일정기간 존속하는 것, 스
승이 자기 모습의 현현을 살면서 나타내는 것,(BoBh 45,12f: kiñcic ca nirmāṇam adhitiṣṭhati
yad uparate ’pi……tathāgate……anuvartata eva), 혹은 스승이 전생의 서원 때문에 선정에서 나
오듯이 무여열반에서 한번 다시 몸을 일으키는 것(SCHIMITHAUSEN, L. 1969. Der Nirvāṇa-
Abschntt in der Viniścayasaṃgrahaṇī der Yogācārabhūmiḥ, Wien: 54f와 159f)에 의해 보증
된다는 관념들을 찾을 수 있다. 다른 제 문헌에 의하면(예를 들어 MSABh 109,12f(ad ⅩⅥ.41);
125,17(ad ⅩⅦ.35; 136,29(ad ⅩⅧ.25); 141,12(ad Ⅹ8i.3-44); ASBh 109. 10f; 123,21), 타자
구제(이타)를 위한 보살의 활동에서 탁월성은 무여열반(nirupādhiśeṣa-nirvāṇa)에 들어선 후에
도 끝나는 일이 없다(akṣaya). 이는 열반의 두 가지 국면의 통합에 적어도 정당하게 접근해있다.
91) 예를 들어 MSA(Bh) Ⅸ.45와 70; BhKr1 197,1ff(vB13); BhKr2 65,16ff; 69,21ff. 보살에 관해
서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보살은 세속에 상처받지 않고, 연민에 기반하여 자신의 의지로 세
속에 머물기 때문에 열반에도 윤회에도 정착하는 일이 없다(예를 들어 MSABh ad ⅩⅦ.32;
Abhidharmasamuccaya, Peking-Tanjur Li: 108b4f도 참조: 붓다와 보살의 ‘무주처열반’
CONZE/IIDA 1968, Ⅵ.66ff도 참조: 보살의 열반은 그가 윤회와 열반 양쪽을 즉, 한쪽으로는 타
자구제(이타)를 위해 또 다른 한쪽으로는 자기 자신의 구제(자리)를 위해 버린다는 것으로 특징
지워진다.
282 불교학리뷰 vol.18

하에서 그 교리 중 두 가지를 소개할 것이다.


이미 언급한 여래장계통의 견해에 의하면 모든 중생 속에 이미 항상 갖춰져
있는 원인도 없이 상주하는 진정한 현실성92) ― 그 완전한 현전이 열반이 된
다 ― 은 동시에 불성으로 간주된다.93) 즉 진정한 현실성은 실체로서 중생에
속하고 본질적으로 그들에게 융합하고 있는 탁월성94)과 분리될 수 없다. 또한
이 탁월성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중단되는 일이 없다고 하는, 똑
같이 본질적인 활동에 부여하는 것이다.95) 한편 이에 이어 이 계통에서 해탈은
불성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96), 다른 한편으로 붓다의 구제활동(세속에서 그
육체적인 외양의 현현을 포함해서)은 상주하는 진정한 현실성에서 나오는 자
연적인 발로로서 무기한97)이라는 견해가 나타난다.
또 하나의 해법은98) 유가행파의 후기 문헌 예를 들어 인도를 순례한 중국
역경가 현장에 의해 편찬된 바수반두의 뺷유식삼십송뺸에 대한 주석 뺷성유식
론뺸99) 등에 체계적으로 논술되어 있다. 그곳에서 진정한 현실성(tathatā 진여)

92) RGV Ⅰ.35; 1.79ff. 이하의 논술에 관해서는 FRAUWALLNER, E. 1994. Die Philosophie des
Buddhismus, Berlin: 256f; RUEGG, Seyfort 1969, 245ff(와 SCHMITHAUSEN, L. 1973.
Wiener Zeitschrift für die Kunde Südasiens 17: 129ff.에서의 필자의 언급); RUEGG, Seyfort.
1989. Buddha-nature, Mind and the Problem of Gradualism in a Comparative Perspective,
London: 17ff. 참조
93) RGV Ⅰ.84와 87.
94) RGV Ⅰ.42; 155; RGVV 21,10f(ad Ⅰ.24); 22,8f(ad Ⅰ.25); 39,5ff(ad Ⅰ.44); 76,8f(ad
Ⅰ.154f); 91,2ff(chap.Ⅲ). ‘공성’이라는 개념은 진정한 현실성을 향하는 경우에 중생은 (그 본
질에서) 외적 ‧ 우연적인 오염(객진)에 관해서 공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중생은 상기의 실
체적인 탁월성에 관해서는 공하지 않다. (RGVⅠ.155).
95) RGVV 21,11-13(ad Ⅰ.24); 24,9f(ad Ⅰ.25); 98,2ff(chap.Ⅳ).
96) RGV Ⅰ.94.
97) 예를 들어 RGV Ⅳ.1; Ⅳ.12; 4.53-56; Ⅳ.91.
98) 어느 정도는 오래된 ‘무여열반’이 ‘유여(즉 생존 중의) 열반’에 통합되어 있다. 여래장계통에서는
오히려 그 역이 발생되었다.
99) 이하에서 나타내는 전거에서는 앞에는 한역(T ⅩⅩⅪ no.1585) 부분, 뒤에는 프랑스어역
POUSSIN, L. de La Vallée. 1928-29. Vijñaptimātratāsiddhi: La Siddhi de Hiuantsang,
연민과 공성 - 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283

은 ― 내재화된 직접지로서 ― 다만 열반만(55b3ff/670f)을 현성하고, 그때 보


수적인 구제의 길인 열반은 대부분 유가사의 견해에 의하면 무시되어도 상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진정한 현실성은 ‘개아로서의 공’이라는 관점에
서만 알려지는 것이다.(55c4f/674). 이 점에서 재생을 조건짓는 부정(不淨)한
심적 요소로부터의 해방인 해탈이 얻어지고, 이어서 해탈한 자의 죽음과 함께
그 개인으로서의 생이 모두 사라진 후 (그 자의 진정한 본질을 이루는) 진정한
현실성만이 남게 된다(55c9-11/675)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가 되고자 염원한
다면 진정한 현실성보다 깊은 지(知) ― 그 지(知)와 함께 (대승이 생각하는)
모든 것에 편재하는 ‘존재요소의 공성’이라는 관점이 파악되어야 할(55c14-
16/677f) ― 뿐 아니라 이에 더해 더욱더 산출되는 정신적 탁월성의 총체
(56a7ff/681ff)까지도 불가결한 것이 된다. 이 탁월성은 일반 중생을 구성하고
있는 부정한 정신적 요인의 총체를 청정한 정신적 요인의 총체로 전환한 결과
에 다름 아니다.(56a12ff/ 681ff; 56b2-6/ 684) 이 탁월성은 진정한 현실성의
내재뿐 아니라(56c4ff와 14ff/ 688ff), 일체지성(56c6f와 19f/ 688ff)100), 위대
한 연민(56a18/ 683) 등을 포함하기에 세속에서 붓다의 능력을 위한 기반도
이룬다(56a25ff/ 683). 탁월성은 심적 성질의 것, 즉 개개의 순간적인 요인의
연쇄일지라도 연쇄로서 무기한(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단절하지 않고) 존족하
기에(56a10ff/ 681ff)101) 붓다(혹은 일체제불) 활동의 유효성은 미래영겁에
걸쳐 보증된다.(55b18/ 671) 붓다가 가지는 청정한 요인의 이 총체는 동시에
그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행복을 포함하기 때문에(57c27f/ 705), 이 구조에
서 타자구제의 노력이 동시에 ‘단순한’ 열반보다 높은 가치를 갖는 자기구제
(자리)라는 존재방식과 결부된다.102)

Paris 부분을 들고 있다.


100) T ⅩⅩⅪ: 302c20-23.
101) 57c6-10/700f와 T ⅩⅩⅪ: 326b11f.
102) 그러나 (다른 제 문헌 속에) 붓다의 ‘무주처열반’에서야말로 절대적 고요로서의 열반을 단념한
284 불교학리뷰 vol.18

스스로 붓다의 경지를 추구하여 힘을 다하고, 또한 자리와 함께 특히 이타도


행하도록 사람들에게 호소한다는 음조를 가진 위에서 말한 흐름과는 별개로,
그것과 전혀 다른 전개가 있음을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아미타
불에 대한 숭배에서는 신자가 자리와 이타에 대한 배려를 멀고도 가깝게 계시
는 초월적인 붓다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는 것, 아니 오히려 맡겨야 한다
는 것이다.103)

다는 견해를 암시하는 듯한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Bhkr25,9ff, 그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


다. 제불은 자신의 해탈을 완전히 획득하고 있고 열반성에 오로지 만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문’과는 달리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 ‘고통받는’ 중생을 심사숙고하여 작열하는 철로 지어진
집을 피하듯 열반성을 우회하여 그 위대한 연민 때문에 해탈에 도달하지 못한 중생이 있는 한 세
간 속에서 ‘무주처열반’의 상태 그대로 머문다고 한다.
103) 이 계통과 붓다 일반과 아미타불의 본질에 관한 교리에 대해서는 INAGAKI 1994, 3ff를 참조.
연민과 공성 - 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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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평

크리스티앙 부이, 뺷나타파 요가수행자들과 우빠니샤드 :


힌두 문헌의 역사에 대한 연구뺸
박영길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크리스티앙 부이,
뺷나타파 요가수행자들과 우빠니샤드 :
힌두 문헌의 역사에 대한 연구뺸*
박영길
(금강대)

사상적 공백을 이어줄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발견하거나 존재 사실조차 알려


지지 않은 새로운 문헌의 발굴을 인도학의 주요한 성과 중 하나라 한다면 인도
학에서 대단히 불행했던 분야는 하타요가일 것이다. 하타요가에 대한 유서깊
은 편견과 오해가1) 100년 동안 넘게 상속되었다 해도 베단따와 공존하며 천

* Christian Bouy, Les Nātha-Yogin Et Les Upaniṣads: Ètude D’histoire De La Littèrature


Hindoue(Collège de France, Publications De L’institue De Civilisation Indienne. Série in-8°,
Fascicule 62). Paris: Collège de France, Édition-Diffusion de Boccard, 1994.(Collège de
France-Paris. ISBN: 2-86803-062-9)

불교학리뷰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18권 (2015. 12) 291p~306p
292 불교학리뷰 vol.18

년 동안 인도 사상을 양분했던 하타요가를 미답의 금맥으로 남겨 두었다는 것


은 분명 인도학의 미스터리다.1)하타요가의 수행 체계와 철학에 대한 규명 작
업은 물론이고 적어도, 이미 출판된 40여 종의 문헌을 제외하고도 약 150여 종
류의 다양한 문헌들이 아직까지 사본실 수장고에서 잠들어 있다는 것을2) 감안
한다면 필자의 생각은 결코 틀리지 않을 것이다. 뺷요가경뺸에 대한 학자들의 주
석서, 사실상 학자들의 겸업 주석서들로 영속성을 보증받는 빠딴잘리 요가3)에
대한 조명에 비추어 본다면 그 이후 천 년 동안 주류를 형성했던 하타요가와
그 문헌이 망각되었다는 것은 의아스러울 정도이다.
브릭스(Briggs, 1938)와 같은 혜안을 지닌 선구적 연구 성과물조차 없었던
것도 아니고 또 언제부터인가 여행지의 어느 낯선 동네에서조차 만날 수 있는
요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공백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은 혹시 빠딴잘리의
요가가 모든 요가를 통합한 유일무이한 요가이자, 말하자면 ‘정통’이라는 착각
에 빠져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4) 마치 아이엥가를 비롯한 마이소르 전통

1) 버치(Birch, 2012, pp. 529-530)가 지적했듯이 ‘하타요가를 자기 학대를 포함하는 요가의 일종’으
로 간주하거나(Otto von Böhtlingk), 거꾸로 선 채 연기를 흡입하거나 고행을 수반하는 요가로 보
는 경향은 모니에르-윌리엄스를 비롯한 19세기 학자에게 만연한 것이었고 지금도 그러한 편견에
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미켈리스(Michelis, 2014, pp. 178-180)의 지적대로 빠딴잘리의 정신적
요가를 라자요가와 동일시하고 하타요가를 육체적인 저급한 요가로 간주했던 비베까난다의 자의
적인 해석이 아직도 무비판적으로 통용되고 있고 또 마이소르의 레슬링 요가(mallayoga)에서 유
래한 현대의 체위 중심적 요가를 하타요가로 오인하는 것도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박영길(2013, p. 70)을 참조.
2) 아직 학계에 공개되지 않은 하타요가 필사본에 대한 간단한 목록은 박영길(2013, pp. 48-60)을 참
조. 이 목록은 2017년 뺷하타요가문헌 성립사(가제)뺸에서 업데이트될 예정이다.
3) 현재까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하타요가와 달리 빠딴잘리 요가를 추종하는 실천가 집단이 실존했
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뺷요가경뺸에 대한 주석 문헌을 제외한 독립적인 문헌이 없다는 것도
단적인 예이다(비록 16세기의 비갸나빅슈가 남긴 뺷요가사라상그라하뺸(Yogasārasaṃgraha)라
는 독립적인 문헌이 있지만 이것은 하타요가의 경우처럼 독창적인 별도의 문헌이라기보다는 뺷요
가경뺸을 재 해설하는 문헌이다). 반면 하타요가의 경우, 주석서를 제외한 독립적인 문헌 만 해도 최
소 100여 종 이상으로 파악된다.
크리스티앙 부이, 뺷나타파 요가수행자들과 우빠니샤드 : 힌두 문헌의 역사에 대한 연구뺸 293

의 체위요가(더 정확히는 레슬링 요가, mallayoga) 추종자들이 자신의 체위요


가와 유전적 친연성 조차 없는 뺷요가경뺸의 몇몇 경구를 이유도 모른 채 찬양하
거나 들먹이는 것처럼 말이다.

쁘라나를 통해 인체(人體)를 신체(神體, divyadeha)로 만드는 연금술 즉,


몸 안에서 신성을 구현하려는 9세기의 새로운 인문학(신학과 반대의 의미로)
으로서의 하타요가가, 만약 부이(Bouy)의 연구대로 베단따 학자들의 절대적
인 지지를 받으며 천 년 동안 주류 요가를 형성했던 것이 사실이라 한다면 인
도철학사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요가는 장구한 요가사에서 가장 큰 강줄기
가 배제된 지류 요가 내지는 요가사의 전반부에 불과할 것이다.

하타요가가 주류 학계의 수면에 떠오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 샌더슨(Alexis


Sanderson) 문하에 있던 멀린슨(Mallinson, James)과 버치(Birch, Jason) 그
리고 키스(Kiss, Csaba)가 박사학위를 받으면서부터이다.5) 이들 옥스퍼드 삼
인방에 의해 하타요가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가 개시되고 이제 비로소 하타요
가에 대한 문헌적, 수행적 정의가 확보된 상태이다. 하지만 아직은 하타요가사
(史)의 서문이라도 작성할 수 있을 만큼의 자료가 축적된 것은 아니다. 객관성
과 타당성을 확보한 이론은 물론이고 심지어 논쟁이나 담론의 돌파구를 열어
줄 만한 가설적 논의조차 드문 것이 하타요가학의 현실이다. 하타요가에 대한
하나의 가설조차 내놓기 힘들었던 것은 하타요가의 연대기적 정황조차 파악하

4) 물론 이것은 빠딴잘리 요가의 성립사적 의의나 철학적 중요성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브라흐
마난다와 같은 17세기의 하타요가 주석자조차 빠딴잘리의 수뜨라에 권위를 부여했듯이 앞으로도
빠딴잘리 요가의 철학적 의미와 중요성은 결코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빠딴
잘리 요가에 비견될 수 있는 그 이후의 주류 요가에 대한 학계의 외면이 의외라는 것이다.
5) 멀린슨(James Mallinson)과 버치(Jason Birch), 키스(Csaba Kiss)는 각각 뺷케짜리비드야뺸(Khe-
carīvidyā, 2007년 출판), 뺷아마나스까 요가뺸(Amanaskayoga), 뺷맛첸드라상히따뺸(Matsyendra-
saṃhitā, 일부)에 대한 비판적 교정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94 불교학리뷰 vol.18

기 힘들다는 현실, 더 구체적으로는 최초의 하타요가 문헌인 뺷고락샤샤따까뺸


를 비롯해서 하타요가의 개조인 고락샤나 그의 스승으로 알려진 맛첸드라에서
말문이 막혀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 부이(Christian Bouy)의 1994년 작, 뺷나타파 요가수행자들과 우


빠니샤드: 힌두 문헌의 역사에 대한 연구뺸(Les Nātha-Yogin Et Les Upaniṣads:
Ètude D’histoire De La Littèrature Hindoue)는 하타요가 연구사에서 유례없
는 기념비적 성과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부이가 다루고자 했던 것
은 10개의 요가 ― 우빠니샤드 문헌들이고 초점은 불이론 학자에 의해 집성된
요가 ― 우빠니샤드들이 전대의 하타요가 문헌에서 차용하거나 발췌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이 작업이 난해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타요
가가 불이론에 수용되는 과정과 당위성을 추적하면서도 동시에 비교 대상이라
할 수 있는 하타요가 문헌의 성립사를 홀로 구성해야 하는 선결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두 선결 작업은 모두 극도의 치밀함을 수반하지만 전자의 경우엔 샹
까라가 비판하고 부정했던 요가 전통(빠딴잘리 요가)과 그가 활용했던 요가
(말하자면 그 이후에 하타요가로 체계화된 요가)를 구별하지 않았던 기존 베단
따 연구자들의 단순한 사고 및 그것이 지금까지 확대 재생산한 통념들까지 극
복해야 하는 작업이고 후자의 경우엔 이에 덧붙여 오류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선구자적 용기까지 필요한 분야이기도 하다. 비록 선결 과제이긴 했지만
후자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하타요가 문헌의 성립사와 연대기적 정황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부이의 연구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은 본서 덕분에 비로소 멀린슨, 버치를 비
롯한 젊고 총명한 문헌학자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검증되었고 또 앞
으로, 이 문헌을 통해 하타요가학에 뛰어 든 새로운 연구자들의 무수한 인용들
로도 재차 확인될 것이다.
크리스티앙 부이, 뺷나타파 요가수행자들과 우빠니샤드 : 힌두 문헌의 역사에 대한 연구뺸 295

크리스티앙 부이는 1981년 파리-소르본느(Paris-Sorbonne University,


Paris IV)에서 가우다빠다의 뺷아가마샤스뜨라뺸(Āgamaśāstra)에 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파리의 콜레쥬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에
서 산스끄리뜨 조교수로 재직하던 지난 2011년에 작고했다.
본서는 부이가 프랑스의 공개강좌제 고등교육 기관인 ‘꼴레쥬 드 프랑스-
CNRS’(Collège de France-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의
소그룹인 ‘종교, 의례와 이데올로기’(religions, rites et idéologies: URAD
1424그룹)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발표했던 ‘고락샤나타, 나타요가 수행자의 문
헌 그리고 요가를 다루는 몇몇 우빠니샤드 문헌’(Gorakṣanātha, la littérature
des Nātha-yogin et quelques textes upaniṣadiques qui traitent de sujets
yogiques, 1992년)에 대한 새로운 버전이다. 서두에서 알 수 있듯이 본서는
1992년 당시의 멤버로 이젠 딴뜨리즘의 거목이 된 부이예(Bouiller, Vèronique),
구드리안(Goudriaan, Teun), 화이트(White, David Gordon)의 지원과 당대의
거장, 파두(Padoux Andrè)의 검토로 출판되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머리말
2. 고락샤나타와 뺷고락샤샤따까뺸
3. 요가를 주제로 삼은 몇몇 우빠니샤드 문헌에 대한 고찰
3.1. 예비적 고찰
3.2. 뺷디야나빈두 우빠니샤드뺸(Dhyānabindūpaniṣad)
3.3. 뺷나다빈두 우빠니샤드뺸(Nādabinūpaniṣad)
3.4. 뺷요가쉬카 우빠니샤드뺸(Yogaśikhopaniṣad)
3.5. 뺷요가쭈다마니 우빠니샤드뺸(Yogacūḍāmaṇyupaniṣad)
3.6. 뺷요가꾼달리 우빠니샤드뺸(Yogakuṇḍalyupaniṣad)
296 불교학리뷰 vol.18

3.7. 뺷니르바나 우빠니샤드뺸(Nirvāṇopaniṣad)


3.8. 뺷만달라브라흐마나 우빠니샤드뺸(Maṇḍalabrāhmaṇopaniṣad)
3.9. 뺷샨딜랴 우빠니샤드뺸(Śāṇḍilyopaniṣad)
3.10. 뺷사우브하기야락스미 우빠니샤드뺸(Saubhāgyalakṣmyupaniṣad)
4. 불이론 베단따 학자와 요가
4.1. 예비적 고찰
4.2. 샹까라와 요가
4.3. 가우다빠다의 베단따적 요가
4.4. 뺷요가수뜨라바쉬야비바라나뺸(Yogasūtrabhāṣya-vivaraṇa)
4.5. 샹까라의 것으로 귀속된 두 개의 작품,
뺷자각뺸(Ātmabodha)과 뺷직접적 체험뺸(Aparokṣānubhūti)
4.6. 아따르바베다의 부록 Caraṇavyūha에서 언급된
‘우빠니샤드에 대한 두 목록’에서의 요가 문헌과 그것의 성립 연대
4.7. 14세기 중반과 18세기 초 사이의 불이론 베단따 학자와 요가
4.8. 108 우빠니샤드 집성(18세기 전반부)
5. 나라야나가 그의 우빠니샤드 주해에서 참조했던 요가 문헌과
쉬바난다 사라스바띠가 그의 요가찐따마니 안에서 참조했던 요가 문헌.
5.1. 나라야나(Nārāyaṇa)가 인용했던 요가 문헌
5.2. 쉬바난다 사라스바띠(Śivānanda Sarasvatī)가 인용한 요가 문헌
6. <108 우빠니샤드 집성>의 요가 문헌과 나타파의 문헌스바뜨마라마의
뺷하타의 등불뺸(Haṭhapradīpikā): 성립 시기 및 인용에 대하여
6.1. 뺷디야나빈두 우빠니샤드뺸(Dhyānabindūpaniṣad)
6.2. 뺷나다빈두 우빠니샤드뺸(Nādabinūpaniṣad)
6.3. 뺷샨딜랴 우빠니샤드뺸(Śāṇḍilyopaniṣad)
6.4. 뺷요가쭈다마니 우빠니샤드뺸(Yogacūḍāmaṇyupaniṣad)
6.5. 뺷요가꾼달리 우빠니샤드뺸(Yogakuṇḍalyupaniṣad)
6.6. 뺷요가쉬카 우빠니샤드뺸(Yogaśikhopaniṣad) 제1장
6.7.1. 뺷니르바나 우빠니샤드뺸(Nirvāṇopaniṣad)
크리스티앙 부이, 뺷나타파 요가수행자들과 우빠니샤드 : 힌두 문헌의 역사에 대한 연구뺸 297

6.7.2. 뺷만달라브라흐마나 우빠니샤드뺸(Maṇḍalabrāhmaṇopaniṣad)


제4 브라흐마나
6.7.3. 뺷사우브하그야락슈미 우빠니샤드뺸(Saubhāgyalakṣmyupaniṣad)
결론
연표
참고문헌
우빠니샤드 색인
우빠니샤드 출처 색인
일반 색인
주제별 목차

목차에서 알 수 있듯이 본서의 주요 소재는 1700년대 초반6)의 <108 우빠


니샤드 집성>에 수록된 요가 우빠니샤드 문헌이다.7) 부이가 요가 ― 우빠니샤
드 문헌을 연구했던 것은 학창 시절부터 시작된 고 ― 우빠니샤드에 대한 관심
이 확장된 것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결정적 계기는 아우프레히트(Theodor
Aufrect)가 뺷요가쭈다마니우빠니샤드뺸 필사본의 내용이 ‘최초의 하타요가 문
헌으로 알려진 뺷고락샤샤따까뺸의 내용과 사실상 동일하다’는 견해를 밝혔던
데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이가 내린 결론은 ‘1450년 경에 성립된 뺷하타의 등불뺸이 불이론 베단따


학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불이론으로 수용되기 시작했으며 적극적으

6) 부이에 따르면(p. 29, 114) ‘108 우빠니샤드 집성’은,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에 생존했던 사다쉬
바 브라흐멘드라(Sadāśiva Brahmendra)의 Svānubhūtiprakaśikā와 Ātmānusamdhāna가 작성
된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되 우빠니샤드브라흐마요긴의 최초 주석이 1751년 12월 17일에
완료되었으므로 <108우빠니샤드 집성>이 성립된 시기는 18세기 전반이다.
7) 부이가 밝혔듯이(p. 29) <108 우빠니샤드 집성>은 우빠니샤드브라흐마요긴(Upaniṣadbrahamyogin)
의 주석과 함께 편집되어 1920년 부터 1936년 사이에 아디야르(Adyar)에서 차례대로 출판되었다.
298 불교학리뷰 vol.18

로 수용된 17세기의 한 사례가 요가-우빠니샤드 문헌이라는 것’이다. 치밀하


고 방대한 연구에 비해 지극히 단순한 결론이지만, 샹까라에 의해 단호하게 비
판되었던 요가가 15세기 이후의 불이론 추종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
고 권위와 영향력까지 행사하게 된 역설적 맥락8)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해결의
열쇠를 쥔 하타요가 문헌에 대한 문헌학적 정보조차 없었다는 것을 고려한다
면 어지간한 내공으로는 시도조차 못 할 과제이기도 하다.

17세기의 불이론 학자에 의해 편집된 요가-우빠니샤드 문헌들이 거의 전


대의 하타요가 문헌을 차용했다(p. 51)는 부이의 주장은 대단히 파격적이다.
또한 8세기의 샹까라가 요가를 비판하고 단호히 거부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
면 후대 불이론의 변심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부이의 연구를 요약하면 스바뜨마라마(Svātmarāma, 1450년 경)의 뺷하타


의 등불뺸(Haṭhapradīpikā)이 그 이후의 불이론자들에게 대단한 반향을 일으
킨 후 점차 권위를 지닌 요가의 고전으로 간주되기 시작했고(p. 10, 13) 15-16
세기부터 유행처럼 번져(p. 68, 72) 18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는 고락샤의 문헌
과 뺷하타의 등불뺸의 권위는 확고해지게 된다.(p. 10, 69)9) 부이에 따르면 불이
론이 하타요가를 수용한 주요한 결과물이 17세기의 뺷108 우빠니샤드 집성뺸에
수록된 요가-우빠니샤드 문헌이다.

8) 근-현대 빤디뜨들의 맹목적인 친-요가적 성향도 대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베
단따 학도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자질(catūḥsādhana)’ 중 ‘평정(śama), 자제(dama), 마음의 통제
(uparama), 인내(titikṣa), 믿음(śradha), 명상(samādhāna)’와 같은 여섯 조건의 구비(ṣaṭkasaṃpatti)
라는 원론적 근거 만으로 스승이 완강히 비판했던 요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9) 부이가 살펴보았듯이 나라야나(Nārayaṇa, 1500-1700년 경)의 아타르바베다 모음집에 대한 주석
에 인용된 주요 게송이 Khecarīvidyā, Yogayājñāvalkya, Gorakṣaśataka, Haṭhapradīpikā 등과
같은 하타요가 문헌이고(해당 게송과 출처에 대해서는 pp. 74-75의 도표를 참조) 쉬바난다 사라스
바띠의 경우엔 거의 전적으로 하타요가 문헌에 의존하고 있다(pp. 68-70).
크리스티앙 부이, 뺷나타파 요가수행자들과 우빠니샤드 : 힌두 문헌의 역사에 대한 연구뺸 299

여기서 들 수 있는 하나의 사례는 최초의 하타요가 문헌으로 알려진 뺷고락


샤샤따까뺸와 뺷요가쭈다마니우빠니샤드뺸(Yogacūḍāmaṇyupanisiad)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물론 두 문헌의 관계는 부이가 밝혔듯이(p. 36) 뮌헨에서 뺷요가
쭈다마니우빠니샤드뺸 필사본을 조사했던 아우프레히트가 이미 1909년에 뺷요
가쭈다마니우빠니샤드뺸와 뺷고락샤샤따까뺸의 내용이 대단히 유사하다는 것을
최초로 지적한 바 있고10) 1976년의 노보트니도 자신이 편집한 뺷고락샤샤따
까뺸의 7송과 10송의 절반, 13. 14-49, 51-84,86, 88, 99-108, 110-124송이 뺷요
가쭈다마니우빠니샤드뺸와 일치한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11) 부이의 도표(p.
100)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Yogacūḍāmaṇyupanisiad Gorakṣaśataka Gorakṣapaddhati


Adyar본 Baroda 필사본 Nowotny 1976본 Bombay, 1967본
1 104a 6-7 (4b) (I. 4b)
2 7 I. 7
3a-b 10c-d 10c-d
3c-4b 13 13
4c-24 15-35b 15-35b
25-29 36-40 36-40
(a)
30a-b (90a-b ?) (39a-b ?)
30c-39b 41-49 41-49
39c-45 51-57
46-47 81-82
48-51 77-80
(b)
51-83
52-65 63-76
66-70 58-62
71 83

10) 그는 뺷요가쭈다마니우빠니샤드뺸의 게송 대부분이 뺷고락샤샤따까뺸에서 인용했다고 말했다.


11) 아우프레히트와 노보트니가 살펴 본 뺷요가쭈다마니우빠니샤드뺸의 판본은 1920년부터 Adyar에
서 시리즈로 간행된 출판본이다.
300 불교학리뷰 vol.18

Yogacūḍāmaṇyupanisiad Gorakṣaśataka Gorakṣapaddhati


72-84 105a7-106a9 - -
85 84 84
86ab 86ab 86a-b
86c-90 87c-91 87c-91
(c)
91a-b 92a-b (91b ?) 92a (91b ?)
91c-96 92c-97 92c-97
97-99 99-101,
102-103, 99-101
(d) (e)
100-106 104e-106 , II.1-7
109e-108
(f)
107-121 110-124 9-23
YcūU 30a-b = GoŚ 39a-b, GoP. I.39ab, YcūU 30b는 gacchati로 되어 있음(dhāvati: GoŚ, GoP)
(a)

YcūU 61a: bindur brahmā; GoŚ 71a 및 GoP I.73a: binduḥ śivo
(b)

(c)
YcūU 91b=YcūU 10b.
YcūU 105a: Hp. II.12a(=ŚāṇḍU. I.7.3a)를 참조.
(d)

104a-d와 107a-d는 노보트니 교정본에서 사용된 네 개의 사본 중 한 개의 B 사본에서는 발견되지


(e)

않음
YcūU 118c-d: 노보트니가 사용한 사본 P에 있는 것과 동일한 내용; GoŚ, p. 85, 121.2이하를 참조.
(f )

부이에 따르면 Adyar본 뺷요가쭈다마니우빠니샤드뺸의 제1송과 72-84를 제


외한 모든 게송이 뺷고락샤샤따까뺸와 뺷고락샤빠드핫띠뺸라는 두 문헌에서 발견
된다.12) 한편,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조사한 바로다(Baroda)의 그란타
(grantha) 필사본(Baroda Oriental Institute, Ms. No. 9995r/1)과 Adyar에서

12) 부이에 따르면 ‘뺷고락샤샤따까뺸의 원문’은 뺷고락샤빠드핫띠뺸(Gorakṣapaddhati), 뺷고락샤상히


따뺸(Gorakṣasaṃhitā), 뺷고락샤샤따까뺸(Gorakṣaśataka), 뺷고락샤요가샤스뜨라뺸(Gorakṣayo-
gaśāstra), 뺷하타그란타뺸(Haṭhagrantha), 뺷하타요가뺸(Haṭhayoga), 뺷하타요가찐따마니뺸(Haṭha-
cintāmaṇi), 뺷하타요가고락샤샤따까뺸, 뺷갸나쁘라꺄샤샤따까뺸(Jñānaprakāśaśataka), 뺷갸나샤
따까뺸(Jñānaśataka), 뺷묵띠소빠나뺸(Muktisopāna), 뺷비베까마르딴다뺸(Vivekamārtaṇḍa), 뺷요
가찐따마니뺸(Yogacintāmaṇi), 뺷요가마르딴다뺸(Yogamārtaṇḍa), 뺷요가사라뺸(Yogasāra) 등과
같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데 이 중에는 명칭으로만 전해지는 것도 있고 혹은 언급되기만 했던
문헌도 있다(p. 18).
크리스티앙 부이, 뺷나타파 요가수행자들과 우빠니샤드 : 힌두 문헌의 역사에 대한 연구뺸 301

출판된 뺷요가쭈다마니우빠니샤드뺸와 일치하는 곳은 두 군데 뿐이다. 부이에


따르면 바로다 필사본이 더 오래된 형태의 이본이지만 부이의 결론은 ‘108 우
빠니샤드’가 집성되던 17세기에 편집자가 뺷고락샤샤따까뺸에서 발췌한 게송을
뺷요가쭈다마니우빠니샤드뺸 2-71, 84-121에 편입시켰다는 것(p. 37)이다.

이 쯤에서 떠오르는 의문은, 불이론자들이 요가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


었던 근거와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한 것이다. 반대로 오히려 하타요가 문헌이
불이론 문헌을 발췌했던 것은 아닐까? 부이가 스스로 묻고 대답했듯이 뺷고락
샤샤따까뺸와 뺷하타의 등불뺸, 뺷요가비자뺸(Yogabīja)와 같은 하타요가 문헌이
각각 뺷요가쭈다마니-우빠니샤드뺸, 뺷나디빈두-우삐니샤드뺸, 뺷요가쉬카-우
빠니샤드뺸를 차용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pp. 111-112). 그 이유는 나라야나
(Nārāṇaya)와 같은 요가-우빠니샤드 주석자들조차 뺷하타의 등불뺸이나 뺷케
짜리비디야뺸를 인용하고 있고 또 고락샤나타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p.
115)이고 또 뺷하타의 등불뺸이 뺷나다빈두-우빠니샤드뺸나 샹까라의 뺷아빠록
샤아누브후띠뺸(Aparokṣānubhūti)를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p. 112)이다. 덧붙
이자면 최소한 14세기 이전에 성립된 뺷고락샤샤따까뺸13)와 1450년에 성립된
뺷하타의 등불뺸이 15세기에서 17세기에 성립된 요가-우빠니샤드들을 인용했
을 리 만무할 것이다.

13) 부이는 고락샤나타의 생존 시기에 대한 하한선을 14세기 이전으로 추정하는데 그 근거는 14세기
무렵에 성립된 뺷샤릉가드하라빠드핫띠뺸(Śārṅgadharapaddhati)가 고락샤나타를 언급하고 인
용하기 때문이고(p.15) 두 번째는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에 뺷바가바드기따뺸에 대한 마라
띠(Marāṭhī) 주석, Dīpikā를 남긴 마하라쉬뜨라의 성자, 갸나나타(Jñānanātha 혹은 Jñāneśvara
로 알려짐)가 자신의 계보를 아디나타(Ādinātha)-맛첸드라나타(Matsyendranātha)-고락샤
나타(Gorakṣanātha)로 열거했기 때문이다(p.15). 마지막은 뺷고락샤샤따까뺸가 뺷스깐다뿌라나뺸
(Skandhapurāṇa)의 <까쉬 편>(Kaśīkhaṇḍa) 이전에 성립되었다는 것인데 그에 따르면 <까쉬
편> 중 Yogākhyāna 편의 제I장 59-158송은 뺷고락샤샤따까뺸에 영향을 받은 것이거나 혹은 베낀
것이다.
302 불교학리뷰 vol.18

부이의 주장에 동의할 경우엔 불이론 학자들은 물론이고 요가 학자들도 풀


기 힘든 새로운 난점이 생긴다. 그것은 뺷고락샤샤따까뺸와 뺷하타의 등불뺸에 권
위를 부여하고 인용하며 자설에 편입시킨 불이론자들의 행위는, 사실상 샹까
라의 불이론에서 이탈한 것 내지는 반역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부이의 지적대로, 샹까라(Śaṅkara)가 이미 뺷브리하다란야까-우빠니샤드뺸
(Bṛhadāraṇyakopaniṣad) I.4.7에 대한 주석에서 ‘심작용(心作用)의 지멸’
(cittavṛttinirodha)이라는 방법으로는 해탈에 도달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p.
51) 특히 뺷브라흐마경 주해뺸(Brahmasūtrabhāṣya) II.1.3에서 요가를 정면으
로 비판했다는 점에서(p. 55) 15세기 이후의 불이론이 요가를 수용하고 심지
어 하타요가 문헌에 권위를 부여했던 것(p. 10)은 극적인 변심, 아니 스승의 가
르침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일 것이다. 17-18세기의 불이론 수행자들조차 샹까
라의 뺷브라흐마경주해뺸에서 설명된 불교의 유식사상을 알고 있었을 정도로14)
뺷브라흐마경주해뺸의 권위가 확고했다는 점에서 ‘샹까라가 불교보다 더 강력
하고 정확하게 비판했던 요가’를 후대의 불이론이 수용하고 심지어 권위를 부
여했던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는 요가에 대한 샹까라의 입장이 전환되었을 가능성이다. 부이가 뺷빠딴잘라요

14) 17세기의 불이론 학자이자 요가 주석가인 브라흐마난다는 뺷하타의 등불뺸 IV.61a의 “manodṛśyam
idaṃ sarvaṃ”(이 세상 만물은 마음에 의해서 드러난 것이다)의 의미를 해설한 후 이러한 관점이
‘불교도의 사상(bauddhamata)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해설한다. 브라흐마난다의 요지는 ‘외
계 대상이 표상에 불과하고 따라서 실재성이 없다는 점에서 자신의 사상이 불교와 다를 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달리 이러한 미혹의 근저에 있는 브라흐만 만큼은 참 존재라는 점에서
불교의 허무론과 다르다는 것’이다. 브라흐마난다의 해설은 비록 샹까라 이후의 일반적인 경향
대로 불교를 허무론(śūnyavāda)으로 간주하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지만 바꾸어 말하면
샹까라의 뺷브라흐마경 주해뺸의 입장을 그대로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는 박영길(2015, pp. 49-50)을 참조.
크리스티앙 부이, 뺷나타파 요가수행자들과 우빠니샤드 : 힌두 문헌의 역사에 대한 연구뺸 303

가샤스뜨라비바라나뺸(Pātañjalayogaśāstravivaraṇa)를 검토하면서 ‘샹까라


가 초기엔 요가수행자였지만 후대엔 요가로 전향했을 것’이라는 하커(Paul
Hacker, 1958-9, pp. 119-148)의 대범한 가설을 상기했던 것(p. 61) 역시 이
문제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부이는 즉답 대신 다양한 가능성을
언급한 후 ‘설사 이 문헌이 샹까라의 진작이라 해도 전형적인 샹까라의 작품과
는 거리가 있다는 선’(p. 62)에서 마무리한다. 필자도 여기서 이 문제를 다룰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샹까라가 거부했던 요가가 후대의 불이론에 수
용될 수 있었던 근거’를 비바라나의 진-위 문제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샹까라가 요가에서 불이론으로 전향했다’고 한다면, 후대의 불이론자
들이 재차 샹까라가 하선했던 그 배를 짊어지고 산으로 갈 이유가 오히려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스승이 요가수행자에서 불이론으로 전향했다’는 것은
‘요가의 유용성’을 떠올리게 했다기 보다는 요가 비판의 정당성만 더 각인시켰
을 것이다. 더욱이 후술하겠지만 ‘상캬적 요가에 대한 바로 그 해설서’가 샹까
라의 진작이라 해도 그것이 후대 불이론이 하타요가를 수용하게 된 버팀목이
나 근거는 될 수 없다.

두 번째는 상까라가 ‘거부했던 요가’와 그가 ‘충분히 활용했던 요가’를 구별


하는 것이다. 샹까라가 거부하고 비판했던 요가는 의심할 바 없이 BṛU. I.4.7
에 대한 주석에서 비판된 ‘심작용(心作用)의 지멸’(cittavṛttinirodha)의 요가,
즉 그가 파악한 바의 ‘상캬적’ 빠딴잘리 요가이다. 또 Bsbh. II.1.3에서 비판했
던 요가 역시 ‘사실 그가 틈만나면 끊임없이 비판하고자 했던 상캬’에 대한 비
판의 동일 선상에서 제기된 ‘상캬적 요가’이다. 샹까라의 요가 비판은 ‘지성을
결여한 승인(勝因, mūladhāna, =prakṛti)에서 세계가 전개될 수 없고 오직 의
식적 존재인 브라흐만에서 전개될 수 있다’는 논리에서 근본원질-전변설을
비판하고 브라흐만-전변설을 확립하고자 했던 샹까라의 상캬 비판의 연장선
304 불교학리뷰 vol.18

에서 이루어 졌다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샹까라의 요가 비판은, 그가 끊


임없이 비판하고자 했던 상캬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제기된 ‘상캬적 요가’에
대한 비판일 뿐 ‘요가 그 자체’나 ‘요가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될 수 없다
고 할 수 있다.15)
빠딴잘리 요가가 전대의 요가를 통합했던 유일무이한 요가는 결코 아니었
고 따라서 샹까라가 상캬적 요가를 비판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요가가 비판
되었던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빠딴잘리 요가가 요가의 전부라는 견해’에 근
거한 지극히 단순한 생각일 것이다. 이 점은, 샹까라 시대에 이미 ‘빠딴잘리의
요가와 구별되는 요가 전통’이 있었고 샹까라도 ‘바로 그 비-상캬적인 요가’
의 주요 개념을 충분히 활용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빠딴잘리 요가에서 발견
되지 않는 개념, 즉 수슘나(suṣumnā, TUbh.1.62, PrUbh.3.7), 72,000나디
(nādyaḥ .... dvāsapatatiḥ sahasrā. BUbh.2.1.9)와 같은 개념이 샹까라의 작품
에서 발견되고 더 놀라운 것은 꿈브하까(kumbhaka, BGbh.4.29와 꿈브하까-
쁘라나야마16)(kumbhakaprāṇāyāma, BGbh.4.29) 등 후대 하타요가의 핵심

15) 흥미롭게도 17세기 브라흐마난다는 뺷하타의 등불뺸에 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뺷브라흐마경뺸(Brahmasūtra)의 저자인 뷔야사(Vyāsa)가 요가를 배척했던 것으로 의심
해서는 안 된다. [뷔야사는] ‘원질(原質, prakṛti)이 독립성(svātantrya)과 지성(cit)을 결여한다
(bheda)’는 측면만(āṃśa-mātra) 배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가 특유의 수행법이 부정된 것은
아니다. ... [따라서 요가 수행의 중요성에 대해]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더욱이] ‘단지 요가를
알고자 하는 바람(yogajijñāsoḥ) 만으로도 <소리로서의 브라흐만>(śabdabrahman)을 초월한
다.’(BG. VI.44)라는 세존(끄리쉬나)의 말씀대로 ‘단지 요가를 알고자 하는 욕구 만으로도 최고
의 존재가 되는데’ 하물며 요가수행자의 경우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 (na ca brahmasūtrakṛtā
vyāsena yogo nirākṛta iti śaṅkanīyam∣prakṛtisvātantryacidbhedāṃśamātrasya nirākaraṇāt∣
na tu bhāvanā viśeṣarūpayogasya∣...kiṃ bahunā∣“jijñāsur api yogasya śabdabrahmātivartate”
(BG. VI.44) iti vadatā bhagavatā yogajijñāsor apy autkṛṣṭyaṃ varṇitaṃ kim uta yoginaḥ∣
nāradādibhaktaśreṣṭhair yājñavalkyādijñānimukhyaiś cāsyāḥ sevanād bhaktajñāninām apy
aviruddhety uparamyate∥Hp-Jt. I.4)
16) 하타요가에서 꿈브하까-쁘라나야마는 ‘들숨 후 그 숨을 최대한 참은 상태(pūrakaprāṇāyāma)
가 저절로 연장된 상태로 께발라-꿈브하까로 불린다. 이 점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박영길(2015,
크리스티앙 부이, 뺷나타파 요가수행자들과 우빠니샤드 : 힌두 문헌의 역사에 대한 연구뺸 305

용어들이 고락샤보다 몇 백 년 전 인물인 샹까라에 의해 최초로 정의되었다는


점이다.17) 이것은 빠딴잘리 요가와 전혀 무관한 별도의 요가 전통들(또는 가
르침)이 상까라 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요가들, 즉 말하자
면 ‘훗날 하타요가로 체계화되기 이전의 비-상캬적 요가 전통’에 대해 샹까
라가 우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요가를 잘 알고 충분히 활용했다는 것을 염
두에 둔다면 그 이후의 불이론이 하타요가를 수용했던 것은 결코 반역 행위가
아닐 것이다. 요가에 대한 샹까라의 이중적 태도, 다시 말해서 ‘상캬적 요가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와 동시에 ‘그 외의 요가 가르침을 인정하고 활용하는’ 이
중적 태도 중에서 후대의 불이론이 수용했던 요가는 의심할 바 없이 후자로서
의 요가(비-상캬적 요가), 즉 하타요가이다.
이 점에서 후대 불이론자들의 친요가적 성향을 뺷빠딴잘라요가샤스뜨라비
바라나뺸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무모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후대의 불이

상권 pp. 399-409)을 참조.


17) 필자가 아는 한 하타요가의 전문 용어인 꿈브하까(kumbhaka)를 비롯해서 뿌라까(pūraka), 레짜
까(recaka), 꿈브하까(kumbhaka)와 같은 세 종류의 쁘라나야마(prāṇāyāma)에 대한 언급 및 꿈
브하까-쁘라나야마에 대한 정의는 샹까라 작품(뺷바가바드기따뺸 IV.29)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다. 예를 들면 샹까라는 뺷바가바드기따뺸 IV.29의 호흡제의(prāṇāyāmayajña)를 다음과 같이 해
설한다.
“아빠나에 즉 아빠나의 작용에 쁘라나를 즉, 쁘라나의 작용을 바친다는 것은 뿌라까로 불리는 쁘
라나아야마를 실행하다는 의미이다. 그와 같이 다른 사람은 쁘라나에 아빠나를 바치는데 그것은
그들이 레짜까로 불리는 쁘라나야마를 행한다는 의미이다. 쁘라나와 아빠나의 흐름이란 입과 코
에 의해서 숨이 나가는 것이 쁘라나의 흐름이고 그것과 반대로 아래로 향하는 것이 아빠나의 [흐
름]인데 이 두 가지 쁘라나와 아빠나의 흐름이 통제되고서 즉 멈추고서 쁘라나야마를 지속적으로
실행하는 것 즉, 쁘라나야마를 목표로 하는 것이 꿈브하까로 불리는 쁘라나야마를 행한다는 의미
이다.” (apāne ʼpānavṛttau juhvati prakṣipanti prāṇaṃ prāṇavṛttiṃ pūrakākhyaṃ prāṇāyāmaṃ
kurvantīty arthaḥ∣prāṇe ʼpānaṃ tathā ʼpare juhvatī recakākhyaṃ ca prāṇāyāmaṃ kurvantīty
etat∣prāṇāpānagatī mukhanāsikābhyāṃ vāyor nirgamanaṃ prāṇasya gatis tadviparyaye-
ṇādhogamanam apānasya te prāṇāpānagatī eva ruddhvā nirudhya prāṇāyāmaparāyaṇaḥ
prāṇāyāmatatparāḥ kumbhakākhyaṃ prāṇāyāmaṃ kurvantīty arthaḥ ∥BG-Śbh. IV.29)
306 불교학리뷰 vol.18

론이 수용하고 권위를 부여했던 것은, 말하자면 ‘상캬적 요가라 할 수 있는 뺷빠


딴잘리요가샤스뜨라비바라나뺸’가 아니라 상캬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고 다
분히 불이론 지향적이었던 하타요가18) 문헌이었기 때문이다.

요가-우빠니샤드와 하타요가 문헌을 연구했던 부이의 주장, 즉 ‘15세기 이


후의 불이론이 하타요가를 수용하는 것이 유행이었고 또 뺷고락샤샤따까뺸나
뺷하타의 등불뺸에 권위를 부여했다는 것’은 파격적으로 들리지만 그의 연구를
살펴보면 불이론의 하타요가 수용은 자연스럽고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던 것
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앞으로는, 샹까라를 추종한다는 현대 불이론자(또는 빤
디뜨)들의 친-요가적 성향에 더 이상 당황할 이유도 없고 또 그들의 요가 친
향적 DNA가 어디서 유래하는지를 되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요가를 상캬적 요가, 즉 ‘샹까라가 비판했던 빠딴잘리 요가’로 오해하는 우를 재
차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부이의 논의대로 ‘불이론에 수용된 요가’란
고락샤에서 스바뜨마라마로 이어지는 중세기의 나타파 요가, 즉 ‘본서 이후부터
비로소 학계에서 조명되기 시작한’ 하타요가에 한정될 뿐이기 때문이다.

18) 하타요가 문헌들운 상캬적 개념 대신 아뜨만, 뚜리야, 불이, 합일과 같은 불이론의 술어를 즐겨 사
용하고 있고 또 사상적으로도 불이론과 대립각을 세울 요소가 없다.
뺷불교학리뷰뺸 연구윤리규정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뺷불교학리뷰뺸 연구윤리규정

제 1 장 총칙

제1조 (목적) 이 규정은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가 발행하는 뺷불교학리


뷰뺸의 출판에서 연구 윤리와 진실성의 확보, 그리고 그를 위한 운영
기준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적용대상) 이 규정은 뺷불교학리뷰뺸에 논문을 투고하는 저자와 편집
위원, 심사자에게 적용한다.
제3조 (연구 부정 행위의 정의)
제1항 (표절 행위) ‘표절’은 저작권법상 보호되는 타인의 저작, 연구 착상
및 아이디어나 가설, 이론 등 연구결과를 정당한 승인 또는 인용없
이 사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세부적으로는 아이디어 표절, 텍스트
표절, 모자이크 표절, 자기 표절 등으로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표
절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① ‘아이디어 표절’이라 함은 창시자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고 전체나 일부
분을 그대로 또는 피상적으로 수정해서 그의 아이디어(설명, 이론,
결론, 가설, 은유 등)를 도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통
상 각주 또는 참고 인용의 형태를 통해 아이디어의 출처를 밝힐 윤
리적 책무가 있으며, 타인의 연구제안서 및 기고 원고에 대해 동료
나 심사를 통해 알게 된 타인의 아이디어를 적절한 출처와 인용 없
이 도용해서는 안된다.
② ‘텍스트 표절’이라 함은 저자를 밝히지 않고 타인 저술의 텍스트 일부를
복사하는 행위를 말한다.
310 불교학리뷰 vol.18

③ ‘모자이크 표절’이라 함은 타인 저술의 텍스트 일부를 조합하거나, 단어


를 추가 또는 삽입하거나, 단어의 동의어로 대체하여 사용하면서 원
저자와 출처를 밝히지 않는 행위를 말한다.
④ ‘자기 표절’이라 함은 이미 발표한 자신의 논문의 일부를 인용하고 인용
처리를 하지 않거나 이미 발표한 논문의 일부를 다른 논문에서 그대
로 사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제2항 (중복 게재)
① ‘중복 게재’는 편집인이나 독자에게 이미 출간된 본인 논문의 존재를 알
리지 않고 이미 출간된 본인 논문과 완전히 동일하거나 거의 동일한
텍스트의 본인 논문을 다른 학술지에 다시 제출하여 출간하는 것을
말한다.
② 이미 출간된 본인 논문과 주된 내용이 동일하다면 후에 출간된 본인 논
문의 본문이 다소 다른 시각이나 관점을 보여주는 텍스트를 사용하
거나 이미 출간된 동일한 테이터에 대한 다소 다른 분석을 포함하더
라고 중복에 해당한다.
③ 이미 출간된 논문을 인지할 수 없는 다른 독자군을 위하여 중복 게재를
하는 경우에는 두 학술지의 편집인이 중복 게재에 대해 동의해야 하
고, 저자는 학술지의 독자들에게 동일 논문이 다른 학술지에 출간되
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한 언어로 출간된 논문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여 다른 학술지에 출간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④ 동일 논문을 서로 다른 학회지에 복수로 기고하는 것은 금지되며, 하나
의 학술지에 게재거부가 결정된 후에 다른 학술지에 기고하는 것이
원칙이다.
제3항 (위변조 행위)
① ‘위조’라 함은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 또는 연구결과 등을 허위로 만들어
샙불교학리뷰샚 연구윤리규정 311

내는 행위를 말한다.
② ‘변조’라 함은 연구재료ㆍ장비ㆍ과정 등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자료
를 임의로 변형ㆍ삭제함으로써 연구 내용 또는 결과를 왜곡하는 행
위를 말한다.

제 2 장 윤리규정

제1조 (저자 윤리)


① 저자는 총칙 제3조에서 정의한 연구부정행위를 행해서는 안되며, 만약
사후에 연구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그에 상응하는 제
재를 받을 수 있다.
② 저자는 자신의 저작물에 소개, 참조, 논평 등의 방법으로 타인의 저작
물의 일부를 원문 그대로 또는 번역하여 인용할 수 있다.
③ 저자는 출처 표시와 참고문헌 목록 작성의 정확성을 기하여야 한다. 저
자는 인용의 모든 요소(저자명, 학술지의 권ㆍ호수, 쪽수, 출간년도
등)를 2차 출처에 의존하지 말고 원 논문에서 직접 확인해야 한다.
다만 불가피한 경우에는 재인용임을 밝히고 인용할 수 있다.
④ 저자는 피인용 저작물이 인용 저작물과 명확히 구별될 수 있도록 신의
와 성실의 원칙에 입각하여 합리적인 방식으로 인용하여야 한다.
⑤ 저자는 원칙적으로 공표된 저작물을 인용하여야 하며, 공개되지 않은
학술자료를 논문 심사나 연구제안서 심사 또는 사적 접촉을 통하여
획득한 경우에는 반드시 해당 연구자의 동의를 얻어 인용하여야 한다.
⑥ 저자는 타인이 이미 발표한 논문에 담긴 이론이나 아이디어를 번안해서
자신의 저작물에 소개할 때에는 그 출처를 명시해야 한다.
⑦ 저자는 하나의 출처로부터 집중적으로 차용하는 경우 어떤 아이디어가
312 불교학리뷰 vol.18

자신의 것이고 어떤 아이디어가 참조된 출처로부터 왔는지를 독자들


이 명확하게 알 수 있도록 집필해야 한다.
⑧ 저자는 자신의 저작물에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연구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주었거나, 독자가 연구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도
움이 될 수 있는 중요한 공개 문헌이라면, 관련 연구자가 이론적ㆍ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참고문헌에 제시할 수
있다.
⑨ 선행 연구 리뷰에서 초록을 사용했으면서도 참고문헌 목록에는 학술지
논문을 인용하거나, 논문의 출간 버전으로 인용하면서 실제로는 학
술회의 발표 논문집에 출간된 초기 버전 또는 예비 버전을 사용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⑩ 타인의 아이디어 또는 그가 제공한 사실에 관한 정보를 사용할 경우에
는 누구의 것인지 출처를 밝혀야 하지만, 그것이 일반적으로 공지된
지식이거나 독자들이 인지하고 있는 자료인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제2조 (편집위원 윤리)


① 편집위원은 투고된 논문의 접수, 심사의뢰, 게재여부를 결정하는 모든
권한을 갖는다.
② 편집위원은 논문 저자의 인적 사항을 절대로 비밀로 하여야 하며, 저자
의 인격과 학자로서의 독립성을 존중해야 한다.
③ 편집위원은 투고된 논문 저자의 성별, 나이, 소속과 무관하게 오로지
논문의 질적 수준과 투고 및 심사와 윤리 기준에 근거하여 공평히
취급해야 한다.
④ 편집위원은 투고된 논문의 평가를 해당 분야의 전문적 지식과 공정한
판단 능력을 가진 심사자에게 의뢰해야 한다.
샙불교학리뷰샚 연구윤리규정 313

⑤ 편집위원은 투고된 논문의 게재가 결정될 때까지 저자에 대한 사상이나


논문의 내용을 공개해서는 안된다.

제3조 (심사자 윤리)


① 심사자는 소정의 심사규정에 따라 투고 논문을 공정하고 성실하게 평가
하고 그 결과를 편집위원회에 통보해야 한다.
② 심사자는 개인적 관점과 견해, 해석의 차이를 떠나 학문적 양심과 객관
적 기준에 따라 투고 논문을 심사해야 한다.
③ 심사자는 심사과정에서 알게된 저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비밀로 해야
한다.
④ 심사자는 평가 의견 작성시 논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정중하고 부드
럽게 표현하여야 하며, 저자를 비하하거나 모욕적인 표현을 해서는
안된다.
⑤ 심사자는 논문 심사 과정에서 알게 된 특정 정보를 원저자의 동의없이
심사자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연구에 유용해서는 안 된다.
⑥ 심사자는 의뢰받은 논문 심사를 제삼자에게 의탁하거나 논의해서는 안
된다.

제 3 장 윤리규정의 운영

제1조 (윤리규정 준수) 뺷불교학리뷰뺸에 논문을 투고한 저자, 편집위원, 심


사자는 본 윤리규정의 준수를 서약한 것으로 간주한다.
제2조 (윤리위원회 구성) 윤리위원회는 5인 이상으로 구성하며, 당연직으
로 불교문화연구소장, 뺷불교학리뷰뺸 편집위원장, 불교학 전공 주임
교수를 위촉한다. 다른 위원은 편집위원장이 위촉하되, 임기는 2년
314 불교학리뷰 vol.18

으로 하고 연임할 수 있다.
제3조 (윤리위원장) 위원장은 윤리위원회에서 호선으로 정하되, 위원회를
대표하며 회의를 주재한다.
제4조 (윤리위원회 기능) 윤리위원회는 다음 각 호의 사항을 심의ㆍ의결한다.
① 연구윤리와 진실성에 관한 제도의 수립 및 운영에 관한 사항
② 연규윤리규정 등 관련 규정의 제ㆍ개정에 관한 사항
③ 연구부정행위의 제보 접수, 조사 및 처리에 관한 사항
④ 연구 진실성 검증결과 처리 및 후속조치에 관한 사항
제5조 (윤리규정 위반 및 연구부정행위 제보 및 접수)
① 뺷불교학리뷰뺸와 관련한 연구부정행위가 발생했을 때, 제보자는 윤리위
원회에 서면 또는 전자우편 등의 방법으로 제보할 수 있다.
② 윤리위원회는 제보자의 신원을 보호해야 하며, 제보자는 제보를 이유로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③ 제보자 및 피제보자는 윤리위원회의 조사에 성실히 임해야 하며, 피제
보자에게는 소명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④ 조사 과정에서 제보자에게 부당한 압력이나 위해 등이 가해지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피조사자의 명예와 권리 또한 보호되어야 한다.
⑤ 윤리위원회 조사 결과 연구윤리부정행위가 명백할 경우, 윤리위원회는
징계를 의결할 수 있다. 징계에는 경고, 투고제한, 게재 유보 및 게
재 취소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이 조치를 다른 기관이나 개
인에게 알릴 수 있다.

부칙

이 규정은 2010년 7월 1일부터 시행한다.


편집위원회 구성 및
논문심사규정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뺷불교학리뷰뺸 편집위원회 구성 및 논문심사 규정

1. 편집위원회 규정

1) 편집위원회 구성
(1) 편집위원회는 불교학부 전임교수 1명과 불교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1명을 당연직으로 하고, 관련 불교학자 중에서 약간 명을 선임한다.
(2) 편집위원은 불교학 관련 전공 교수로서 해당 분야 논문이 10편 이
상인 자로 나머지 성원을 구성한다.
(3) 편집위원(장)의 임기는 2년으로 하되, 연임할 수 있다.
2) 편집회의 시기
(1) 편집회의는 연 2회(각각 6월과 12월 중) 개최한다.
(2) 편집위원장은 필요에 따라 임시 편집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
3) 편집회의 규정
(1) 편집회의는 편집위원 4/6 이상의 참석을 정족수로 한다.
(2) 편집회의는 편집위원장이 주관하며, 위원장 유고 시 내규에 따라
편집위원 중 한 명이 위원장의 임무를 대신한다.
(3) 편집위원회에서는 논문집의 편집 방향과 게재 순서를 정한다.
(4) 편집위원회에서는 논문의 심사위원을 선발 ・ 위촉한다.
(5) 편집회의에서는 발표된 논문 중에서 ‘수정 후 게재’ ‘수정 후 재심
사’ 판정이 나온 논문에 대하여 심사 ・ 결정한다.
(6) 기타 사항은 편집위원장의 결정에 따른다.
318 불교학리뷰 vol.18

2. 논문심사 규정

1) 논문 심사 절차
(1) 편집위원회에서는 금강대학교 불교학부 및 불교문화연구소에서 개
최하는 모든 학술발표회에서 발표된 논문 및 투고된 논문에 대하여
각각 관련 전공학자 3인을 심사위원으로 선정 ・ 위촉하고 심사를
의뢰한다.
(2) 심사의 평가 항목과 배점은 다음과 같다.
평가항목 항목당 배점
연구주제의 독창성과 명확성 20
논지 전개의 타당성과 일관성 20
자료분석, 각주의 정확성 20
선행 연구의 이해와 참고문헌의 적절성 20
연구 결과의 유용성과 기여도 20

(3) 심사위원은 심사 결과를 다음과 같은 기준에 따라 총점과 등급으로


판단한다.
총점 등급 판정
100~95점 A 게재
94~85점 B 수정 후 게재
84~75점 C 수정 후 재심사
74점 이하 D 게재 불가

(4) 게재불가(D) 판정을 내렸을 경우에, 심사위원은 소정의 양식에 따


라 그 이유를 반드시 명시해야 한다.
(5) 편집위원회는 3인의 심사위원이 판정한 점수의 평균을 상기 (3)의
기준에 따라 최종 판정하고 B(수정 후 게재)와 C(수정 후 재심사)
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처리한다.
① B(수정 후 게재)를 받은 경우, 수정 후 제출한 논문을 B 이하
로 판정한 심사위원과 편집위원장이 상의하여 결정한다. 다만 심사
샙불교학리뷰샚 편집위원회 구성 및 논문심사 규정 319

위원간 의견이 상이할 경우 편집위원장이 처리를 결정한다.


② C(수정 후 재심사)를 받은 경우, 수정 후 제출한 논문에 대해
심사위원을 다시 위촉하여 심사하고, 그 결과에 따라 처리한다.
(6) 심사결과는 투고자에게 그 사항을 통보한다.
(7) 규정 이외의 사항은 편집위원장의 결정을 따른다.

2) 논문 심사 기준
(1) 뺷불교학리뷰뺸 논문게재원칙 및 집필요령의 체제를 준수하여야 한다.
(2) 논문의 주제의식과 논제가 명확하며, 타당한 논리적 근거가 제시되
어야 한다.
(3)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논제, 개념, 논거, 관점 등이 제시되어야 한다.
(4) 관련 분야에 대한 기초 문헌과 2차 문헌에 대한 적절한 논의가 이
루어져야 한다.
(5) 1차 또는 2차 문헌에 대한 단순 해석, 정리, 요약에 그친 논문들은
권장되지 않는다.
(6) 논문 주제와 관련된 국내외의 선행 연구 논문 및 저술에 대한 논의
를 적극 권장하며, 특히 최근의 연구물을 권장한다.

3) 논문 이외의 역주, 서평, 번역 등의 게재 기준


(1) 논문 이외의 원고는 원칙적으로 편집위원(들)이 작성자를 추천하고
완성된 원고에 대해서는 편집위원회에서 검토하여 게재 여부를 결
정한다.
(2) 외부에서 투고된 원고에 관해서는 외부 전문가 1인의 견해를 참조
하여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여부를 결정한다.
320 불교학리뷰 vol.18

3. 논문 게재 원칙 및 원고 작성 요령

1) 논문 게재 원칙
(1) 뺷불교학리뷰뺸에 게재하는 논문은 금강대학교 불교학부 및 불교문화
연구소에서 개최하는 ‘정기학술회의’, ‘국제학술세미나’와 ‘콜로키움’
및 ‘정기발표회’ 등에서 발표한 논문은 물론 여타의 투고논문도 게
재할 수 있다.(단, 다른 학술지에 실린 논문은 제외한다)
(2) 논문의 채택 여부와 게재 순서는 편집위원회의 결정에 따른다.
(3) 논문의 내용은 불교학 및 그와 관련된 학술연구논문으로 한다.
(4) 기타 세부적인 사항은 편집위원회의 결정에 따른다.

2) 논문 투고 규정
※ 각주와 참고문헌의 기본 형식은 시카고 매뉴얼(The Chicago Manual
of Style, 15th ed. (2003) & 16th ed.(2010))의 저자-연도 표기 표
기 방식을 준수한다. 그 외는 아래의 규정을 따른다.
(1) 원고 분량
① 논문은 본문과 각주를 포함하여 200자 원고지 150매 이내로 한
다. 초과시에는 편집위원회의 결정을 따른다.
② 논문은 HWP(버전 2007 이상) 혹은 MS Word(버전 2004 이
상: .doc 혹은 .docx)로 작성하며, 글자 크기는 본문 11pt., 인
용문 9pt.로 한다. 줄간격은 160%, 자간은 0, 장평은 100으로
한다.
(2) 논문의 작성방법
작성논문은 다음과 같은 순서를 갖추어야 한다.
제목-필자명(소속)-한국어 초록(주제어)-본문-참고문헌-영문초
록(키워드)
샙불교학리뷰샚 편집위원회 구성 및 논문심사 규정 321

① 제목 및 이름
가. 제목 위에 “뺷불교학리뷰뺸 제○호(연도, 월)”라고 밝힌다.
예) 뺷불교학리뷰뺸 제16호(2014, 12)
나. 필자의 이름과 소속을 밝힌다.
다. 필자가 2인 이상일 경우는 공동저자의 성명을 “ · ”으로 구
분하여 병기하되, 연구에 대한 기여도를 반영하여, 좌로부
터 제 1저자 · 제 2저자 (계속시 추가) 순으로 기록한다. 교
신저자는 괄호 속에 교신저자임을 표기한다.
② 국문 초록과 주제어
가. 국문초록의 분량은 200자 원고지 5매 내외로 작성한다.
나. 주제어는 5개로 하며 국문초록 끝에 작성한다.
③ 본문
가. 장, 절, 항, 목 등의 번호는 Ⅰ.→1.→1)→(1)→A.의 순으
로 표기한다.
나. 저서 제목은 동양어권 저서명의 경우 반각 겹낫표(뺷 뺸)로,
서양어권 저서명의 경우는 이탤릭체로 표기한다.
예) 동양어권 저서: 뺷韓國佛敎槪論뺸
서양어권 저서: Philosophy and Psychology in the
Abhidharma
다. 강조는 작은 따옴표(‘ ’)로 표기한다.
라. 표와 그림은 <표1>, <그림1>과 같은 형식으로 일련번호를
지정하여 상단에 표기한다. 단, 출처를 밝히고자 할 때에는
하단에 “출처: ○○○○”라고 표기한다.
마. 본문의 인용문
ㄱ. 직접인용일 경우 3행 이내는 큰 따옴표(“ ”)로써 문장
322 불교학리뷰 vol.18

안에 기술한다. 3행 이상일 때는 따옴표를 쓰지 않고 행


을 바꾸어 좌우로 들여서 문단을 설정한다. 인용문 안에
인용 문이 있을 경우는 작은 따옴표(‘ ’)로 표시한다.
ㄴ. 원전(原典)을 인용할 때에도 이를 따르되 논문을 쓸 때
사용한 언어로 번역하여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그 원
문은 각주에 표기한다.
ㄷ. 시나 게송을 인용할 때 3, 4행 정도는 문장 안에서 다
루고, 그 이상일 때에는 독립 된 문단으로 기록한다.
문장 안에서 인용할 경우 행과 행 사이는 /으로, 연과
연 사이 는 //으로 표기한다.
ㄹ. 인용문의 처음과 끝 부분을 줄이거나 생략할 때에는 3
점 줄임표(…)로, 중략의 경우 는 ‘… 중략 …’으로 표
기한다.
ㅁ. 인용원문에 오기, 혹은 오류가 있을 때는 그 부분을 교
정하여 각주에 오기, 혹은 오류의 원문을 밝힌다.
④ 각주
가. 각주 작성시 주의 사항
ㄱ. 각주는 1), 2) 등으로 표기하고 참조주와 내용주는 간략히
작성한다. 각주에는 저자 연도방식과 약호를 쓰고 온전한
서지정보는 참고문헌에 기입한다. ex) Schmithausen
1987, 1-2.; AKBh 130,10ff.
ㄴ. 연도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서기를 쓰되, 연호를
표기하고자 할 경우에는 ( ) 속에 병기한다.
ㄷ. 여러 권의 저서나 논문들을 함께 표기할 때는 단락을
나누지 말고 쌍반점(;)으로 연결 한다.
샙불교학리뷰샚 편집위원회 구성 및 논문심사 규정 323

ㄹ. 페이지는 “p.”나 “pp.”로 표기하지 않고 페이지 사이는


“-”로 표기한다.
예) Schmithausen 1987, 18f. 또는 Schmithausen
1987, 24-25.
ㅁ.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표기한다.
예) 뺷中論』(T.30, 1a15-20): 인용문.
ㅂ. 티벳대장경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표기한다.
예) Derge, dkon rtsegs, Ca 68a1–114b7.
ㅅ. 빨리대장경의 약호는 기본적으로 PTS의 약호를 따른다.
예) DN. II, 135. (예의 의미: Dīgha Nikāya Vol.2, p.135)
Sn., 342. (예의 의미: Suttanipāta verse 342)
Vism., 542. (예의 의미: Visuddhimagga, p.542)
ㅇ. 인터넷 정보의 인용은 학술적 가치가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사이트로 하고, 그 인용은 온전한 URL 정보와
검색일자를 표기한다.
예) http://www.studies.worldtipitaka.org(검색일자:
2013.2.15.)
⑤ 참고문헌
가. 약호
- A, B, C 순으로 작성한다.
나. 약호 외의 참고문헌은 동양어권 저작과 서양어권 저작의 순
서로 기입한다.
다. 동양어권 저작의 경우 한-중-일 순서로 하되 각 언어의 자
모배열 순서를 따른다.
라. 서양어권 저작의 경우 A, B, C 순으로 작성한다.
324 불교학리뷰 vol.18

마. 동일한 저자의 저작일 경우에는 오래된 연도 순으로 작성한다.


바. 저자명은 성(姓)-명(名)의 순서로 한다. 단 서양어 저자의
경우 성(姓) 뒤에 쉼표(,)를 붙여준다.
사. 저자가 2인 일 경우 동양어권은 쉼표로(,) 나누고 서양어권
은 and로 나눈다. 단 서양어권의 경우 두 번째 저자는 쉼표
없이 명(名)-성(姓)의 순서로 기입한다.
예) FALK, Harry, and Seishi KARASHIMA. 2011. “A
first- century Prajnaparamita manuscript from Gandhara:
parivarta 1 (Texts from the Split Collection 1).”
ARIRIAB 15: 19-61.
아. 저자가 3인 이상일 경우 동양어권은 쉼표로(,) 나누고 서양
어권은 쉼표들(,)로 나누고 마지막 인명앞에 쉼표(,)와 and
를 쓴다.
예) ALLON, Mark, Richard SALOMON, Geraldine JACOBSEN,
and Ugo ZOPPI. 2006. “Radiocarbon dating of Kharosthi
fragments from the Schøyen and senior manuscript
collections.” In Buddhist Manuscripts Ⅲ, ed., Jens
BRAAVIG, 279-291. Oslo: Hermes Publishing.
자. 단행본은 페이지 번호를 생략하고, 논문의 경우는 시작과
끝의 페이지 번호까지 표기한다.
⑥ 영문초록(English Abstract)과 키워드(Key Word)
가. 논문에는 반드시 영문초록(논문제목과 필자이름 포함)을 첨
부하여야 하며, 그 분량은 200에서 300단어 이내로 한다.
나. 논문의 주제에 부합하는 7개 이내의 키워드를 영문으로 영
문초록 끝에 첨부한다.
샙불교학리뷰샚 편집위원회 구성 및 논문심사 규정 325

2) Manuscript Submission Guidelines


※ The formating of footnote and reference follows the author-date system in
the Chicago Manual (The Chicago Manual of Style, 15th ed. (2003) & 16th
ed. (2010)) The following guidelines are applied to all other specifics.
(1) Amount of Manuscript
① The content including text and footnotes should not be more than
150 pages of squared manuscript paper for 200 characters or 7,500
English words. If exceeds, the decision is made by the editorial
board.
② The manuscripts should be prepared with HWP (Ver. 2007 or later)
or MS Word (Ver. 2004 or later: .doc or .docx extension) in 11
points for the body text and 9 points for quotations. Lines are spaced
in 160%, letters in tracking of 0 and horizontally scaled to 100%.

(2) How to Write Paper (Structure of Paper)


A submitted paper must follow the structure below.
Title - Author (Affiliation) - Korean Abstract (Key Word) -
Body Text - Reference - English Abstract (Key Word)
① Title and Name of Author
A. On top of the title, place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Vol.
○(Month, Year).
example) 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Vol. 16(Dec. 2014)
B. Place author's name and affiliation.
C. For two or more authors, the names are divided by " ․ " and placed
from the left as 1st author ․ 2nd author (added for more additional
326 불교학리뷰 vol.18

names) according to contribution rate. Corresponding authors


are marked as corresponding authors in parenthesis.
② Korean Abstract and Key Word
A. The amount of Korean abstract is about 5 pages of squared
manuscript paper for 200 characters.
B. 5 key words are placed at the end of Korean abstract.
* Those who are not familiar with Korean are recommended to
write an English abstract and keywords only. Our editorial staff
member will be translating the abstract and the keywords into
Korean.
③ Body Text
A. Chapter, Section, Paragraph, Item numbers are marked as Ⅰ.→1.
→1)→(1)→A.
B. Titles in Asian languages are marked by double scythe symbol (뺷 뺸)
or double angle bracket (≪ ≫), and those in Western languages
in italics.
example) Asian language book: 뺷韓國佛敎槪論뺸 or ≪韓國佛敎
槪論≫
Western language book: Philosophy and Psychology in
the Abhidharma
C. Use single quotation marks (‘ ’) for emphasis.
D. Tables and figures are tagged by serial numbers on top as <Table
1> and <Figure 1>. For sources, place "Source: ○○○○" under
the object.
E. Quotation in Body Text
샙불교학리뷰샚 편집위원회 구성 및 논문심사 규정 327

a. Direct quotations not larger than 3 lines are marked by double


quotation marks (“ ”). If it is larger than 3 lines, begin a new
line and with indentation from both sides without quotation
marks. Quotations within quotation are marked by single
quotation marks (‘ ’).
b. Quoted original text follows the same rule, basically translated
in the language of the paper with original text in the footnote.
c. Quotations of poets or Gāthā up to 3~4 lines are included
between other sentences, and those more than that are separated
as paragraphs. For quotation between sentences, lines are
divided by / and stanzas by //.
d. Ellipsis of the beginning or the ending of quotations are
marked by ellipsis of three dots (…), and ommission by ‘…
omitted …’
e. For typos or errors in the original text of quotations, that
specific parts should be revised and state the original text in
the foot note to show its typo or error.
④ Foot Note
A. Notes for Foot Notes
a. Foot notes are marked as 1), 2, and reference foot notes and
content note are briefly placed. Foot notes are accompanied by
author name, date and code and full reference is placed in the
reference section. ex) Schmithausen 1987, 1-2.; AKBh 130,10ff.
b. Except special cases, dates are in CE but year names are added
with ( ).
328 불교학리뷰 vol.18

c. Multiple books or papers are listed with semicolon (;)


inbetween, and they do not begin a new paragraph.
d. Pages are not followed or precedented by “p.” or “pp.” and "-"
is marked between pages.
ex) Schmithausen 1987, 18f. or Schmithausen 1987, 24-25.
e. Chinese Tripiṭaka (漢譯大藏經) is marked as below.
ex) 뺷中論뺸(T.30, 1a15-20): quotation.
f. Tibetan Tripiṭaka is marked as below.
ex) Derge, dkon rtsegs, Ca 68a1–114b7.
g. Codes for Pāli Tripitaka basically follow those of PTS.
ex) DN. II, 135. (meaning of the example: Dīgha Nikāya Vol.2,
p.135)
Sn., 342. (meaning of the example: Suttanipāta verse 342)
Vism., 542. (meaning of the example: Visuddhimagga,
p.542)
h. Information from internet websites is available only if it is
academically valuable, and its quotation should include full
URL and date of search result.
ex) http://www.studies. worldtipitaka.org(search date: 2013.2.15.)
⑤ Reference
A. Code
- Codes are marked as A, B, and C.
B. Regarding the order of references, literatures in Asian languages
precedes those of Western languages.
C. Literatures in Asian languages are listed in the order of Korean-
샙불교학리뷰샚 편집위원회 구성 및 논문심사 규정 329

Chinese-Japanese in alphabetical order of each language.


D. Literatures in Western languages are listed in alphabetical order.
E. The older literature precedes the latter if they were written by the
same author.
F. Surname precedes given name. Author names in Western
languages have comma (,) after the surname.
G. Two author names in Asian languages are divided by comma (,)
and for those in Western languages, the second name is written
as given name-surname without a comma.
ex) FALK, Harry, and Seishi KARASHIMA. 2011. “A first-
century Prajñāpāramitā manuscript from Gandhāra: parivarta
1(Texts from the Split Collection 1).” ARIRIAB 15: 19-61.
H. Three or more author names in Asian languages are divided by
comma (,) and for those in Western languages, they are divided
by commas (,) and a comma and 'and' are placed before the last
author name.
ex) ALLON, Mark, Richard SALOMON, Geraldine JACOBSEN,
and Ugo ZOPPI. 2006. “Radiocarbon dating of Kharosthi
fragments from the Schøyen and senior manuscript
collections.” In Buddhist Manuscripts Ⅲ, ed., Jens BRAAVIG,
279-291. Oslo: Hermes Publishing.
I. Page numbers are omitted for references in book form, and
papers are followed by the first and last page numbers.
⑥ English Abstract and Key Word
A. Each paper should be attached by an English abstract (including
330 불교학리뷰 vol.18

title and author name), and the amount should be between 200
and 300 words.
B. Not more than 7 key words which are relevant to the thesis of the
paper at the end of the English abstract in English.

4. 발행일

본 연구소 학술지는 매년 2회 발행한다. 1회는 12월 31일로, 2회는 6월


30일로 한다.

부칙

1. 본 규정은 2008년 12월 1일부터 시행한다.


2. 본 규정은 2011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
3. 본 규정은 2014년 7월 1일부터 시행한다.
금강대학교 뺷불교학리뷰뺸 2015년 (vol.18)

발 행 처 ・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 TEL : 041-731-3614 / www.gcbs.ggu.ac.kr


발 행 일 ・ 2015년 12월 31일
디 자 인 ・ 도서출판 씨아이알 | TEL : 02-2275-8603 FAX : 02-2265-9394

불교학
리뷰
불교학
Critical

Review
Critical

리뷰
for
Review

Buddhist
for

Studies
Buddhist

Studies

18
2015
|투고논문| ① On Two Sanskrit Manuscripts of A̅rya Vimuktiṣeṇa's Commentary on the Abhisamaya̅laṅka̅ra :

Youngjin LEE ② 범본 뺷법화경뺸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 하영수 ③ 불교 우주론과 수증론
체계에서 본 의생신(意生身, S. manomaya-ka̅ya)의 의미 : 이수미 ④ 성실학파의 ‘二諦相即’에 대한 사상적 고찰 : 조윤경

⑤ Power in Practice: Cosmic Sovereignty Envisioned in Buddhism’s Middle Period : Daniel M. Stuart |번역|

강 ① 라싸 종교회의 : 서기 8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도들의 돈頓/정적靜寂주의 논쟁(VI) : 폴 드미에빌 / 김성철, 배재형, 차상엽
대 역 ② 연민과 공성-대승의 정신성과 구제(利)의 목적 : Lambert Schmithausen(람버트 슈미트하우젠)/ 사이토 나오키(齊

교 藤直樹) 일역, 양영순 역 |서평| 크리스티앙 부이, 뺷나타파 요가수행자들과 우빠니샤드 : 힌두 문헌의 역사에 대한

불 연구뺸 : 박영길

18

GEUMGANG UNIVERSITY 문
Geumgang Center for Buddhist Studies 화

Nonsan, South Korea
구 금강대학교
ISSN 1975-2660
소 불교문화연구소 2 0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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