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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마의 동방선교역사 St Thomas East Mission [4]

성 도마의 동방선교역사는 기독교역사 중에서 매우 중요하다. 바울사도의 서방선


교의 차원을 능가하는 매우 진지한 동방선교의 역사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전해오는 신약성서나 초대교회사에서는 성 도마와 그의 동방선교에 대한 이야기
가 별로 전해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성 도마의 인도, 중국, 한국에까지 이르는
동방선교의 역사는 기독교교회의 역사 중에서 지구촌의 기독교화라는 개념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인도의 그리스도 (Christ of India)라고 하는 명제는 성 도마의 기
독교전래사의 이야기와 동일시 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사도바울의 기독교의 세
계화 보다 더 크고 방대한 차원의 기독교선교의 역사라 말할 수 있다. 성 도마가
이미 정신문화가 고도로 발전한 고대 인도에서 당대의 힌두철학과 불교교리 및
윤리 등을 능가하는 새로운 복음에 대한 관심사를 일깨우는 일은 성 도마에게 있
어서 결코 쉽지 않은 과업이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의 의심하는 행위를
이해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혔던 상처들을 일일히 다 보여주면서 만져보고 확인하
도록 하셨다. 사도 도마는 의심되었던 자신의 모든 요소를 완전히 불식시키기 위
위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박혔던 흔적을 철저히 조사하고나서 “참으
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My God”. 눈에 보이지 아
니하는 그리고 멀리 다른 나라에서 다른 시간대에 일어난 사건을 의심하는 사람
들에게는 예수와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예수를 직접 만나서 생활을 함께 하였고
십자가 사건을 소상히 알고 있고 또 상처들을 철저히 조사해보고나서 자신의 의
심을 완전히 불식시켰다고 하는 것은 인도에서는 매우 큰 사건으로 받아드리게
된 것이다. 성 도마의 극단적인 의심과 재확인의 과정을 통한 긍정적인 면모를

인도에서는 그대로 받아 드렸다.

그래서 지금도 성 도마를 기념하는 그림이나 조각품에는 반드시 “My Lord, My


God”라는 성 도마의 고백을 반드시 기록하고 있다. 성 도마를 기리는 대성당의
입구 또는 성 도마가 이룩한 많은 암반무덤과 암반교회의 입구에도 반드시 “My
Lord, My God”라는 구절을 새겨놓았다. 도마의 극단의 의심의 결과인 참다운 진
실된 고백 즉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심치 않고 받아 드렸던
것이다. 성 도마는 북부 인도 즉 파키스탄의 탁실라에서 인도사상에 대한 전반적
인 오리엔테이션과 함께 산스크리트 언어를 완벽하게 마스터 하였다. 그는 탁실
라에 약 4년간 체류하였다. 그리고는 인도의 최남단의 항구도시인 코르카이
(Korkai), 지금은 카니아쿠마리 (Kanyakumari)라고 불려지는 장소이다. 거기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대부분 산호와 진주를 캐내어서 장식구를 만들어 인도
의 귀족층과 부유층에게 공급하여서 부자가 된 유대인들이었다. 성 도마는 그들
과 유대를 맺고 그들을 위하여서 암반무덤과 암반교회를 만들어 주어서 큰 대우
와 함께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성 도마는 바로 인도의 최남단의
항구도시인 코르카이 지금은 카니아 쿠마리에서 서쪽의 지역인 케랄라 (Kerala)

주에다가 7개의 성 도마 교회를 건립하였다. 그때가 주후 52년경이었다.

성 도마는 자신이 큰 저택과 왕궁의 규모의 건축물을 설계하고 건축할만큼 역량


이 있는 건축가였다. 그래서 그는 케랄라주에다 세운 7개의 교회의 건물은 거의
전부를 자기자신의 설계와 건축으로 세워 놓았다. 인도사람들은 이러한 다방면에
재주를 타고난 성 도마를 매우 귀한 인물로 인정하여서 그의 아름다운 아담한 교
회로 모여들어서 그의 설교를 듣곤 하였다. 그리고 성 도마는 병고치는 은사까지
가지고 있어서 많은 질병에 걸려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그리
고 성 도마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전파하는 충실한 사도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남서부 인도의 케랄라 지역에 유포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
는 건너편의 동쪽의 해안가인 타밀 나두 (Tamil Nadu)에다가는 21개의 성 도마
그리스도인 교회를 건립하였다. 타밀 나두는 서부의 케랄라 지역의 약 5배나 되
는 광활한 지역이다. 타밀 나두 지역의 북쪽에는 마드라스로 알려진 장소가 있고
거기에는 타밀 나두의 수도인 첸나이 (Chennai)라는 유서깊은 큰 도시가 있었다.
성 도마는 그곳에서 산을 하나를 매입하여서 성 도마의 산 “St Thomas Mountain”
이라고 하고 그곳에다 자신의 설계와 건축으로 매우 아름답고 아담한 교회를 건
립하였다. 거기에서 성 도마는 항상 예수님께서 게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처
럼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교통하기 위한 경건한 장소로 생각하고 매일 그곳
에서 경건한 명상의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바로 그 아담한 교회내에서 기도하는
중에 힌두교와 불교의 불한당 들이 창살로 찔러서 성 도마는 순교를 당하였다.
그때가 주후 72년이었다. 성 도마가 칠순의 고령의 나이에 순교를 당한 것이다.
그 동안에 성 도마의 유해는 에데싸로 옮겨지고 나중에는 이탈리아로 옮겨졌다.
오늘날에는 인도의 마드라스 첸나이 성 도마 기념 대성당의 지하에 안치되어 있
다. 많은 관광객들이 성 도마의 첸나이 교회를 방문하여서 그 유해앞에서 그를
추모하고 곧바로 그 인근의 성 도마의 산 정상에 위치한 성 도마 자신의 설계하
고 건축함 아담한 교회를 둘러보면서 성 도마를 추모하는 행사가 그치지 않는다
고 한다.

인도의 최북부 지역 오늘날 파키스탄의 히말라야와 가까운 장소에는 쉼라


(Shimla)라는 도시가 있다. 그 도시는 해발 2200미터나 되는 높은 고산 지대에 이
룩된 고대의 도시인데 그 높은 곳에도 성 도마가 직접 올라가 복음을 전파하였고
또 자신이 설계하고 건축한 교회의 건물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물론 오래
된 건물이기 때문에 최근에 리모델링하였다. 성 도마는 인도의 많은 장소에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아담하고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교회건물들을 도처에 자신의 설
계와 건축으로 세워놓은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성 도마의 인도선교는
자기 당대에 성공한 엄청난 차원의 성공을 이룬 동방선교였다. 지금도 인도의 도
처에 성 도마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암반무덤과 암반교회는 물론 자신이 직접 설
계하고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교회들을 건립하였다. 그 당시에는 100명 내
지 200명 정도의 교인들이 모이던 때였기에 성 도마가 설계하여 건립한 교회의
규모는 작은교회인데 매우 아름답게 보이는 건축예술의 높은 수준이었음에 우리
는 오늘날에도 그의 예술성과 부지런함에 대한 경탄을 그치지 아니하고 있는 것
이다. 인도의 최북단의 고산지대에 지금도 건축하기 어려운 교회의 건물을 지어
놓았는지 신비하기 그지 없다. 성 도마는 사도바울과 같은 서신이나 글들은 남기
지 아니하였다. 성 도마의 설교문 등은 “도마의 행적”이라는 글에 몇 군데 인용된
바는 있다. 그러나 성 도마는 자신의 설교는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전하는 것을 선교의 사명으로 생각한 것이 분명하였다. 사도바울과 비교한다면
성 도마의 신앙을 표현한 글이나 설교문이나 서한문 등이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
문에 성 도마는 사상적인 면이나 신학적인 면에서는 사도바울의 경지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성 도마는 힌두철학, 불교의 윤리 등에
관한 매우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고, 예수 그리스의 말씀을 절대적인 하늘
나라의 메시지 곧 자기자신은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 이상
으로는 생각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인도의 북부고산지역 쉼라에 성 도마가 직접 건축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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