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3

1900 년 대한제국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계산리(현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에서

출생했다. 사형제 중 막내였는데 셋째 형 현정건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고생하다 출옥한지 반년만에 사망했으며,[2] 현정건의 아내인 윤덕경도 현정건이 사망한지 41
일만에 음독 자살하였기에[3] 현진건은 더더욱 일본을 증오하게 된다. 이렇다보니 같은 시대를
살아간 많은 문인들이 친일파 논란이 있던 것과는 달리 현진건은 그런 논란이 아예 없다. 아예
목숨걸고 독립운동에 나선 이육사와 더불어 문인으로서 글로 항일하던 인물로 많이 평가받는다.

1915 년 이순득과 결혼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6 년 2 학년 재학중에 자퇴후


도쿄로 가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했다. 1917 년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대구에서 백기만·
이상화 등과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 그해 4 월에 현진건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5 년제 세이조 중학교에 3 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18 년 상하이 호강대학교[4]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하여 1920 년 졸업 후 귀국했다. 귀국 후 당숙이었던 현보운의 양자가
되어 친형들과는 6 촌 형제가 되었다.

귀국 후 친척 현희운의 추천으로 개벽 11 호에 "희생화"를 게재하여 문단에 등단했지만, 현진건


본인이 "희생화"를 습작으로 간주하여 일반적으로 현진건의 첫 작품은 "빈처"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5] "빈처"가 염상섭의 극찬을 받으면서 현진건은 문학 동인 "백조"에 들어가게 되어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등의 사실주의적 소설들을 잇달아 발표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1921 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된다. 1924 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있다가 이후 1927 년 동아일보로 옮겨 1936 년까지 사회부 부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36 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사건(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 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후 
동아일보를 퇴사했으나 1939 년 학예부 부장으로 복직했다.

일제 말기 현진건의 삶은 비참한 모습 그 자체였다. 당시 일제를 위한 작품을 쓰지 않으면


취직이나 생계를 이어간다는 게 거의 불가능했던 시기였다. 그런 시대에서 현진건은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한 채 가난에 쪄들어 살면서 문학인으로서의 지조를 지키면서 여생을 보냈다. 이는
친일 문학가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광복 후에도 그게 뭐가 잘못이냐며 뻔뻔한 모습을 보인 
김동인이나 주요한과 대조된다. 그밖에 먹고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친일 활동을 했던 
이효석이나 채만식도 있긴 한데 그나마 이들은 이걸 후회하고 죄의식을 느꼈다. 음악가 
홍난파도 흥사단가를 작곡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잡혀 복역했고, 결국 석방된 후 친일
활동을 하긴 했다. 이후 시골에서 양계업을 하며 한편으로 동아일보에 1939 년부터 장편 소설
"흑치상지"를 연재했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연재가 중단되어 끝내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그 뒤 어려운 나날을 보내다가 1943 년 장결핵으로 별세했다.[6]

유언에 따라 화장되고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장리에 매장되었으나 그 후 남서울 개발관계호


묘소가 사라져 유해는 한강에 뿌려졌다.
현진건은 친일행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생활도 깨끗했다. 이광수 이래 일제시대
문인들이 기생 끼고 살거나, 두집 살림은 기본적으로 벌린 사람이 태반인데 현진건은
아내에게만 충실했다.

 현진건의 작품들[편집]
 빈처(1921)
 술 권하는 사회(1921) :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는 표제작이 되는 <타락자>와 함께
1922 년 단편집으로 출간되었다.
 운수 좋은 날(1924)
 할머니의 죽음(1925)
 B 사감과 러브레터(1925)
 불(1925) : <운수 좋은 날>, <할머니의 죽음>, <B 사감과 러브레터>, <불> 등을 포함하여
<우편국에서>, <까막잡기>, <그리운 흘긴 눈>, <발>, <새빨간 웃음>, <사립정신병원장>, <
고향> 등 11 편의 단편이 1926 년 <조선의 얼굴>이라는 단편집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 고향(1926)
 무영탑(1938) : 1939 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970 년 신영균, 김지미 주연으로
영화화되었고 2015 학년도 수능 국어 A/B 형 공통으로 출제되었다.
 불국사 기행(1929)
 적도(1939)
 흑치상지(1939, 미완성) : 사실상 그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한 작품인데 이 작품이 일제의
강압으로 연재 중단되자 그는 큰 상실감에 빠져 자주 과음하고 결국 과음으로 인한
장결핵으로 사망한다.
배경은 1920 년대의 서울이다. 어느 비오는 날, 인력거꾼 김첨지는 그날따라 유독 가지 말라고
말리는 병든 아내를 두고 돈을 벌러 나온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독 손님이 많아서 김첨지는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집에 가까이 갈수록 어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져 불길해 하던
중, 마침 친한 친구 치삼이를 만나 그와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아내가 그리도 먹고 싶다던 설렁탕[2]을 사서 집에 돌아갔는데...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설렁탕을 먹고 싶어했던 아내가 세상을 떠나 있더라는 내용.설마설마하던 불안감을 계속해서


느끼던 김첨지는 결국 아내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그 시신을 붙들고 절규하며 "왜 설렁탕을
사왔는데 먹지를 못하냐"고 울부짖으며 절망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사실 김첨지의 아내는 병에 걸린 지 한 달가량이 지나 있었다. 아내는 단 한번도 약을 먹어본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병이란 놈에게 약을 주어 보내면 재미를 붙여서 자꾸 온다'는 김 첨지의
신조 때문. 사실 이건 핑계고, 약을 살 돈도 벌지 못하고 있었다는 이유가 더 크다.

아내의 병이 더 악화된 일도 있었는데, 며칠을 굶은 아내가 '김첨지가 오래간만에 돈을 벌어서


산 조로 밥을 지었는데 다 익지도 않은 밥을 급하게 욱여넣으며 먹다가 체한 일'이었다.

명대사로는

"에이, 오라질 년, 조랑복[3]은 할 수가 없어, 못 먹어 병, 먹어서 병, 어쩌란 말이야! 왜 눈을 바루


뜨지 못해!"

"이런 오라질 년! 조밥도 못 먹는 년이 설렁탕은, 또 처먹고 지랄병을 하게!"

"이런 오라질 년, 주야장천 집안에 누워만 있으면 제일이야! 남편이 왔는데도 일어나지를 못해!"
오라질을 정말 좋아한다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지금이야 결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소설에 아내의 죽음을 암시하는 복선이 너무 자주
깊게 깔려 있어서 반전물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결말이 너무 뻔히 예상된다. 하지만 이것은
작가의 의도적인 연출이기도 하고, 교과서에도 복선의 정석으로 많이 설명된다. 또한 초반에
돈이 잘 들어오나 후에 알고보니 아내가 죽는 어찌 보면 운이 안 좋은 날인데 제목을 운수 좋은
날이라 붙임으로써 반어적 표현을 강조하고 있다.

하류층이 집에 있는 가족에게 뭔가 별식을 사다 먹이는 행위는 그 가족 구성원의 건강이 극히


위중하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일종의 사망 플래그라고 볼 수 있다.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