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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엠 퓨전 판타지 장편소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1 화

프롤로그

2019 년 1 월 1 일.

세상이 바뀌었다.

게이트,몬스터,시스템,플레이어.

이전에는 없던 개념들이 새롭게 추 가된 것이다.

지키려는 자와 침략하려는 자.

두 세력의 싸움은 세계 각지에서 벌어졌다.

1 년,2 년,3 년…… 5 년.

2024 년 11 월 4 일.

모든 플레이어들의 귓가로 시스템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지구 에어리어 최후의 보스,서리 여왕이 출현합니다.]

[서리여왕을 처치할 시 지구에 안 전지대가 생성됩니다.]

최후의 보스! 그녀만 처치하면 예

전처럼 살 수 있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각오를 다졌 고,사람들은 희망을 품었다.

단 하루.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데 걸린 시 간이었다.

고고한 걸음으로 게이트를 걸어 나 온 서리여왕은 그날.

손짓 한 번으로 남태평양해를 얼려 버렸다.

사람들의 저항 의지까지 얼려 버린 압도적인 한 수였다.

그때 마음이 꺾이지 않았던 이는

다섯 명뿐.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인 그들은 남 극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 다.

“가자,서리여왕 잡으러.”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일 을 해내기 위해서.

남극에 위치한 최후의 던전.


여왕의 둥지의 2 층.

다섯 명의 남녀가 위로 향하는 계 단 앞에 도착했다.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단 한 명만이 계단을 오르실 수 있습니다.]

“이런 시벌,여기까지 와서 한 명 이라고?”

근육질의 남자가 바닥을 쿵! 밟으 며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그럼 나머지 네 명은 여기가 묏자 리라는 거잖아?”

그들은 둥지에 입장한 순간부터 서 리여왕의 숨결에 쫓겼다.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지독한 숨 결을 피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즉,이 계단을 한 명만 올라갈 수 있다면,나머지는 얼음조각상이 되 어야 한다는 뜻이다.

“……숨결에 따라잡히기 전까지는 대충 2 분 정도 남았어,빨리 정하 자.”

대마도사라 불리는 스카야가 그들 을 돌아보며 말했다.

“난 어둑서니가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해. 서리여왕을 죽일 확률이 가 장 높으니까.”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두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 기더라?”

“……쩝. 할 말 없게 만드는군.”

한숨을 내쉰 근육질의 거한은 항복 이라도 하듯 두 손을 들어올렸다.

이에 카우보이 모자를 쓴 남자,길 베르토 그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동의한다. 애초에 어둑서니 를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 서리여왕

과의 상성이 좋지 않아.”

“……하긴.”

그의 말이 맞았다.

라마다트 칼리는 압도적인 근력 수 치를 보유했지만,서리여왕과의 상 성은 불리했다.

그녀의 손길,혹은 숨결에 한 번이 라도 적중당하면 그 부위가 얼어버 리니까.

그것은 일본도를 다루는 텐메이 미 오 역시 마찬가지.

후방지원 포지션인 자신과 스카야 는 서리여왕의 저돌적인 접근을 막 아내는 것조차 벅찼다.

“그럼 결정 났네.”
네 사람이 몸을 돌려 어둑서니를 쳐다봤다.

검은색 가면을 쓴 남자였다.

“……너희들,후회 안 할 자신 있 냐?”

가면 안쪽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흘 러나왔다.

그의 질문에 라마다트는 어깨를 한 번 으쏙거렸다.

“후회? 하겠지. 존나게 할걸? 그런 데 뭘 어쩌냐? 네가 가장 성공 확 률이 높은데.”

“좋아. 그럼 숨결이 도착하기 전에 죽이고 올게.”

“불가(不可). 그건 무리입니다.”

텐메이 미오가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 저희 때문에 서두르지 마십 시오. 그녀를 확실하게 죽일 수 있 는 순간까지 참고 기다리세요.”

“미오의 말이 맞다. 2 분 만에 서리 여왕을 죽이는 건 불가능해. 오히려 네가 성급하게 달려들면 그녀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뿐이지.”

이어서 라마다트,스카야도 맞장구 를 쳤다.

“들었냐? 괜히 나대다가 죽지 말고 확실하게 목이나 따달라고. 그게 양 보의 대가다.”

“우리는 몰라도 너라면 할 수 있 어.”

어둑서니는 자신을 향해 무한한 신 뢰를 보내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만약 자신이 남아야 했다면,이들 처럼 초연하게 응원해 줄 수 있었을 까?

자신이 없다.

가면 안쪽에서 입술을 꾹 깨문 그

는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보자. 약속이다.”

동료들은 피식 웃으며 알겠으니 어 서가라고 손짓했다.

기약 없는 약속을 뒤로한 어둑서니 는 얼음 계단을 몇 개씩이나 뛰어 올라갔다.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그럴 시간조차 아까웠으니까.

쿠르르르릉.

뒤쪽의 계단이 무너지며 동료들의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았을 때도.

그의 시선은 계단의 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침내 모든 계단을 올라온 순간.

“기어이 제 무덤까지 찾아왔구나.”

[지구 에어리어의 보스 몬스터,서 리여왕과 조우하셨습니다.]

[그녀를 처치하면 지구 에어리어에 안전지대가 형성됩니다.]

거대한 방의 중앙.

얼어붙은 옥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서리여왕의 모습은 고고하고 우아해 보였다.

하지만 어둑서니는 그녀의 가녀린 겉모습에 속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서리의 기운 은 다가오는 모든 것을 얼릴 것처럼 위협 적 이 었으니까.

스릉.

무기 뽑히는 소리가 적막한 공간의 온도를 더욱 낮추었다.

어둑서니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뱉어 냈다.

“5 년.”

세상이 게임처럼 바뀌고 흐른 시간 이다.

“이제 그만 끝내자.”

“끝을…… 낸다고?”

풋! 가녀린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 린 서리여왕이 우아한 웃음을 터트 렸다.

“아하하하! 그대는 이 세계에 대해 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내가 너 죽이러 와서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우우우웅!

그의 주변에서 넘실거리며 일어난 어둠은,얼어붙은 공간을 검게 물들 이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어둑서니 서준호.

그가 입을 열었다.

“널 죽이고,게임을 끝낸다. 난 그 것만 알면 돼.”

어둠과 얼음의 격돌은 대폭발을 일 으켰다.

“하아,하아……

긴 전투 끝에 서리여왕이 거친 숨 을 토해냈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지만,입꼬리 에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즐거웠노라.”

“난 별로.”

뚱한 목소리로 대꾸한 서준호는 반 토막 난 칼을 힘껏 휘둘렀다.

서걱!

서리여왕의 머리는 여타 생물과 다 를 바 없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귓가를 울 렸다.

[축하드립니다! 지구 에어리어의

보스,서리여왕을 처치하셨습니다.]

[칭호,‘봄을 여는 자’를 획득했습 니다.]

[지구 에어리어에 안전지대가 형성 됩니다.]

“후우우……

서준호의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불

어나왔다.

결국 해냈다.

세상이 지옥처럼 변한지 5 년.

자신의 평화롭던 일상을 집어삼킨 몬스터 새끼들에게 드디어 복수를

마쳤다.

'어머니,아버지.’

부모님을 떠올린 서준호는 떨리는 눈빛으로 디지털시계를 확인했다.

꾸욱,이빨이 입술을 강하게 파고 들자 혀끝에선 진한 철분 맛이 느껴 졌다.

“……씨발,진짜 미안하다.”

전투 시간은 76 시간 48 분 16 초.

동료들은 이미 한참 전에 얼음조각 상이 되었을 것이다.

‘나중에 보자는 약속은…… 결국 못 지켰네.’

허망한 시선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 졌다.

그때,별안간 땅에서 솟아오른 어 둠의 송곳니가 서리여왕의 몸을 씹 어 먹었다.

으적,으적!

배부른 식사를 마친 송곳니는 사라 지기 직전,무언가를 툭 뱉어냈다.


핵.

몬스터들 중 일부가 지니고 있는 일종의 동력원이다.

지금은 새로운 에너지자원으로 각 광받는 물건이기도 하고.

'동료들의 희생으로 얻은 게……

데구르르.

참담한 표정을 지은 서준호는 발 앞까지 굴러온 핵을 줍기 위해 몸을 숙였다.

“고작 이딴 거라니.”

그리고 핵을 집는 순간.

정신없는 메시지들이 눈과 귀를 어 지럽히기 시작했다.

[경고! 서리여왕의 핵이 당신에게 흡수되기 시작합니다.]

[흡수율 0.001%…….]

[서리여왕의 핵이 내뿜는 한기로 인해 모든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하 락합니다.]

[근력 217 -> 21]

[체력 201 -> 24]

[속도 225 -> 26]

[마력 183 -> 18]

[서리여왕의 핵을 온전히 흡수할 때까지 육체가 동면 상태에 들어갑 니다.]

“무슨……?!”

깜짝 놀란 서준호가 당장 핵을 놓

으려했지만,그것은 이미 피부 속으 로 흡수된 상태였다.

쩌저저적!

전신의 피부에 살얼음이 끼고,혈 액순환과 심장박동이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들오들.

지독한 한기는 순식간에 혈관을 타 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뼈마디가 시려오고,턱이 절로 움 직이며 이빨이 딱딱 부딪친다.

‘이런…… 미친 던전아……

서준호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그대로 얼어붙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여러분,11 월 11 일이 무슨 날일까 요?”

예전에는 모두가 이 질문에 빼빼로 데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2024 년을 기준으로 정답은 바뀌었다.

“예? 그야 영웅의 날이죠.”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합니까?”

영웅의 날.

2024 년 이후,11 월 11 일은 세상을 구한 다섯 명의 영웅을 기리는 날이 되었다.

그 때문인지 10 월 중순부터 11 월 초까지는 한국행 티켓이 불티나게 팔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서울 역사박물관에 안치된 5 영웅의 얼음조각상은,이 날 하루만 공개되 었으니까.

“당시 게이트와 몬스터의 출현이

사회에 끼친 영향은……

자리에 앉은 수천 명의 관중이 무 대 위,정장을 입은 큐레이터를 주 목했다.

언어는 한국어였지만,실시간 통역 시스템 덕분에 이해를 못하는 사람 은 없었다.

“……시간이 홀러 2024 년,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몬스터가 나타났어 요.”

번쩍! 노란 모자를 쓴 유치원생 하 나가 손을 들며 소리쳤다.

“서리여왕이요! 선생님한테 들었어 요!”

“맞아요. 어린 친구가 참 똑똑하네 요.”

싱긋 미소를 지은 큐레이터가 말을 이었다.

“서리여왕은 손짓 한 번에 남태평 양해를 얼린 규격 외 몬스터였죠. 그녀의 등장에 모두가 절망했을 때,


오직 다섯 명은 가슴 속에 희망의 불씨를 피운 채 남극으로 향했어 요.”

“둥지 공략대죠?”

“이번에도 정답이에요. 그들은 인 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을 해낸 전설적인 플레이어들.”

돌연 무대의 조명이 꺼졌다.

큐레이터는 침을 꿀꺽 삼키는 관중 들을 바라보며,천천히 손가락을 튕 겼다. 따악!

그러자 무대의 커튼이 걷히고,강 화유리벽을 통해 다섯 개의 얼음조 각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은 우리가 5 영웅이라 부르는 분들입니다. 모두 경의를 표해주십 시오.”


찰칵,찰칵!

여기저기서 플래쉬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인류를 구한 영웅들을 찍

는 데 여념이 없었다.

물론 두 눈을 감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영웅들께서 서리여왕을 처치한 덕 분에 지구에는 수많은 안전지대가 생겼답니다. 이와 관련하여……

큐레이터가 열심히 설명을 이어나 갈 때,유치원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바,방금 조각상이 움직였어요!”

“호호,안타깝네요. 이번에는 오답 이에요.”

큐레이터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이 강화유리벽 안쪽은 24 시간 온 도가 유지되어 조각상에 어떠한 문 제도 일어나지 않도록……

토도독.

그때,이상한 소리를 들은 큐레이 터가 돌연 말을 멈추고,뒤를 돌아 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유리벽 쪽으로 다가 가 내부의 얼음조각상들을 확인했 다.

이상한 소리가 난 방향에는 검은색 가면을 쓴,어둑서니의 얼음상이 세 워져 있었다.

잠시 지켜봤지만,지난 25 년간 그 래왔듯 한결같은 모습이다.

“그,그럼 그렇죠. 이제 와서 갑자 기 문제가 생길 리가 없잖아요?”

그녀가 겨우 안도하는 순간.

퍼서석!

기대를 배신한 얼음조각상이 깨지 며 사람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

추위에 몸을 덜덜 떠는 그의 눈과 귀를 시스템 메시지가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흡수율 99.9999%…….]

[흡수율 100%.]

[축하드립니다, 서리여왕의 핵을 온전히 흡수하셨습니다.]

[새로운 능력,‘서리 (EX)’를 획득했 습니다.]

[레벨이 초기화됩니다.]

‘이게 뭔…… 씹…… 추워……


그가 천천히 감기는 눈 너머로 본 광경은.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 다보며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우,움직이는데?”

“Holy shit!"

“살아 있어…… 어둑서니가 살아 있다고! 이봐! 당장 의사부터 불 러!”

“어어! 최 기자야. 지금 당장 기사 하나 받아 적어라. 아,일단 쓰라면 써! 특종이니까!”

강당은 순식간에 시장바닥처럼 시 끄러워졌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02 화

25 년 후(1)

[전설,기나긴 잠에서 깨어나다.]

[현대판 캡틴 아메리카? 25 년 전 서리여왕을 처치한 세계 최고의 플 레이어,어둑서니의 귀환.]

[한국 플레이어 협회,‘어둑서니의 건강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할 것’ 입 장 발표.]

[영웅의 날 기념 따뜻한 겨울나기 모금,사상 최고액 돌파.]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서준호는 읽고 있던 신문을 접어 옆으로 치웠 다.

“그러니까…… 25 년이 지났다고.”

눈 한 번 감았다 뜨니 25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있었다.

현실성이 워낙 떨어지는 이야기다 보니 놀랍거나 당황스럽지는 않았

다.

처음에는 몰래카메라 같은 것이 아 닐까 의심했지만,그러기엔 증거가 너무 명확했다.

‘머리카락도 이렇게나 자랐고...... 근육도 대부분 사라져 있어. 그런데 늙지는 않았단 말이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 과 뼈가 보일 정도로 앙상한 몸.

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서준호는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어둑서니 님. 지금 플레이어 협회 장께서 오신답니다.”

어딜 가도 당당한,세계 최고의 의

료진들이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 말했다.

그건 인류를 구한 영웅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서준호도 이를 불편해하지는 않았 다.

그의 입장에서는 항상 받던 대우였 기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이 다.


“협회장은 내가 아는 사람인가?”

모르는 사이면 당장 핸들 꺾어서 돌아가라고 할 생각이었다.

깨어난 지 하루도 채 안 됐는데, 벌써부터 귀찮아지는 건 질색이었으

니까.

하지만 의사의 입에선 의외의 말이 홀러 나왔다.

“예. 협회장께서는 어둑서니 님이 자신의 친구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셨 습니다.”

“친구……? 홈.”

자신의 친구를 자처할 존재가 그리 많지는 않을 텐데.

‘뭐,만나보면 알겠지.’

서준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의 서울 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세상이 바뀌긴 바뀌었구나.”

고층 빌딩들은 훨씬 더 많아졌고,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미세먼지가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서울 시 곳곳에 세워져 있던 게이트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 았다.

‘내가…… 그리고 너희들이 그토록 원하던 평화로운 세상이다.’

동료들을 떠올린 서준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럼 난 이제 뭐하지.”

스무 살에 세상이 바뀌었고,그때 부터 플레이어가 되어 게이트만 주 구장창 다녔다.

당연히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몬스 터를 사냥하는 것뿐이다.

‘나 이제 백수네?’

그리 불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쓰 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협!”

이에 당황한 의사들이 입을 틀어막 으며 가까스로 비명을 삼켰다.

어둑서니가 누구인가?

대한민국 소속이라는 것을 제외하 면 실명,나이,얼굴,그 어떠한 정 보도 공개하지 않았던 신비로운 인

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갑자기 가면을 벗고 얼굴을 공개하다니?

떨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킨 의사 하나가 입을 열었다.


“가,가면은 왜…… 왜 벗으시는 지?”

“응? 그야 이제 필요 없잖아.”

서준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검은색 가면을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평화로운 세상이니까.”

“어…… 음……

동시에 의료진들의 낯빛이 확 어두 워 졌다.

그들의 변화를 눈치챈 서준호가 물 었다.

“뭐야,반응들이 왜 그래?”

“아니,그게……

우물쭈물,의사들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 고 있던 찰나.

“그건 내가 설명해 줄게.”

병실 문이 열리며 깔끔한 용모의 미중년이 들어왔다.

동시에 그를 쳐다본 서준호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여졌다.

잔주름은 좀 생겼지만,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너…… 설마 덕구냐?”

“프흡.”

의사들이 고개를 푹 숙이며 웃음을 꾹 참았다.

“크흠!”

얼굴이 살짝 붉어진 중년인은 의사 들을 돌아보았다.

“잠시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싶습 니다.”

“예,협회장님.”

의사들이 병실을 우르르 빠져 나가 고 단 둘이 남게되자,협회장은 의 자를 끌어와 앉았다.

서준호를 바라보는 그의 동공이 세 차게 흔들렸다.

“……준호,넌 예전 모습 그대로구 나.”

무려 25 년 만에 보는 친구는,25 년 전과 똑같았다.

자신은 이제 피부가 쳐지고 배가 나올 나이가 되었지만,그는 과거의 젊은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완벽하던 몸이 앙상하게 말라 있을 뿐.


괜히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진 협회 장은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이야. 이 목소리,진짜 덕구 맞 네?”

나이가 들어 살짝 굵어졌지만,자 신의 죽마고우 심덕구의 목소리가 맞았다.

아저씨가 되어버린 친구를 신기하 게 쳐다보던 서준호는,무언가를 발 견하곤 낄낄 웃기 시작했다.

“야,거봐! 내가 그거 M 자 탈모 초기증상 맞다고 했지? 아니라며?”

“넌 오랜만에 만나서 할 얘기가 그 딴 거 밖에……!”

순간적으로 울컥한 협회장,심덕구 는 이내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그래…… 내가 아는 서준호 는 늘 이랬지. 감동의 재회는 무 슨..,’

“너 나한테 그런 걸 기대했어?”

서준호는 아예 배를 잡고 끅끅거리 며 웃었다.

“25 년…… 큭큭,25 년이 지났는데 도 탈모약은 개발이 안 됐나봐?”

“……그래도 가발은 엄청 잘 나온 다. 진짜랑 구분이 안 돼. 오늘은 급히 온다고 못 썼지만.”

"그래? 그럼 다음에 한 번 보여 줘.”

“놀랄 준비나 해라.”

두 사람은 정말 시답잖은 이야기를 했다.

다 큰 남자 둘이서 할 이야기가 뭐 그리 많은지,쉴 새 없이 새로운 주제가 튀어나왔다.

대부분은 심덕구가 이야기를 시작 하고,서준호는 소쿠리에 담긴 귤을 까먹으며 맞장구를 치는 식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심덕구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녀석,여전하네.”

코흘리개 시절부터 함께 나고 자란 친구는,시간이 흘러도 여전했다.

사실 병원으로 오는 길 내내 마음 이 심란했다.

세월에 찌들어 ‘어른’이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두려 웠던 것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스 스럼없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너도 여전해. 뱃살은 좀 나왔지 만.”

“……너도 나이 먹어봐라.”

멋쩍은 표정을 지은 심덕구에게 서 준호가 말했다.


“이제 긴장 풀렸으면 슬슬 말해봐. 아까 의사들 반응 뭔데?”

“아,으음.”

올 것이 왔구나.

그러한 표정을 지어보인 심덕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너희들이 여왕의 둥지를 공략 한 순간,모든 플레이어들은 똑같은 메시지를 들었어.”

그는 마치 과거를 회상하듯,창밖 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축하드립니다. 서리여왕이 처치되 었습니다.]

[지구 에어리어에 안전지대가 형성 됩니다.]

세계가 환호했다.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된다. 예전 처럼 평화롭게 살 수 있다.

플레이어,일반인의 구분 없이 모 두가 얼싸안고 기쁨과 해방의 눈물 을 흘렸다.

하지만 메시지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태평양에 차원 엘리베이터가 생성 됩니다.]

[2 층,프론티어 에어리어가 개방되 었습니다.]

[프론티어에서는 플레이어의 최대 레벨 제한이 80 에서 120 으로 확장 됩니다.]

[그럼 모두 최후의 층까지 힘내주 십 시오.]

뭐?”

“아니 씨발,이게 뭔 개 X 같은 소 리야!”

“2 층이라니? 서리여왕을 죽이면 끝나는 거 아니었어?”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했으 니까.

세계의 내로라하는 플레이어와 협 회장,정치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대회의를 가졌다.

회의가 이어지는 며칠 동안, 플레 이어들에겐 계속해서 메시지가 떠올

탔다.

[층을 올라 지구의 멸망을 막으십 시오.]

[층을 올라 지구의 멸망을 막으십 시오.]

[층을 을라 지구의 멸망을 막으십 시오.]


지구의 멸망.

그 단어가 주는 불길함에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은 결국 답을 내렸다.

우선 새롭게 열린 2 층,프론티어에

선발대를 보내보자고.

“•“…그래서?”

서준호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 었다.

그 음성에서 허탈함과 분노를 읽어 낸 심덕구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2 층은 기회의 땅이었다. 넘쳐흐르 는 자원,새로운 마법과 기술들,인 류는 그곳으로부터 막대한 자원과


지식을 얻게 되었고,덕분에 지금의 부유한 지구가 탄생했지.”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 라……

“총 10 개층.”

심덕구가 그의 목소리를 잘라냈다.

“네가 궁금한 건 이 부분이지? 차 원 엘리베이터에 존재하는 버튼은 1 층부터 10 층까지야.”

“겨우 10 층인가……

그제서야 서준호의 굳어 있던 표정 이 풀렸다.

그와 동료들이 1 층,그러니까 지구 의 최종보스인 서리여왕을 잡기까지 5 년이 걸렸다.

'그 후로 25 년이 지났으니까.,

단순계산으로는 2, 3, 4, 5, 6.

다섯 개의 층을 클리어하고 7 층까

지는 올라갔어야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 다.

‘당시 나와 동료들을 제외한 플레 이어들의 수준은 크게 떨어졌지.’

그들과 나머지 플레이어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4 차원의 벽이 존재했 다.

고작 다섯 명이서 남극으로 향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은 전혀 도움이 되질 않 았으니까.

‘게다가 공략 난이도가 점점 높아 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실적으

로는 5 층 정도려나.’

나름대로 계산을 끝낸 서준호가 심 덕구를 쳐다봤다.


“그래서 지금은 몇 층까지 공략했 는데?”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거리던 심덕 구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 다.

그 반응에 괜히 불안해진 서준호가 그를 재촉했다.

“야…… 왜 말을 못해?”

긴 침묵이 이어졌다.

후우우,한숨으로 그 정적을 끊어 낸 심덕구가 눈을 떴다.

“지난 25 년간 인류가 정복한 것은 2 층까지 다.”

그 말을 듣자마자 뇌 정지가 와버 린 서준호는 그대로 푹신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한참동안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던 그가 말했다.

“씨 발.”

“……할 말이 없다.”

“25 년이야,25 년. 그 시간 동안 고 작 2 층이라는 게 말이 돼?”

“변명처럼 들리겠지만,이유가 있 었다.”

"후,좋아.”

상체를 벌떡 일으킨 서준호가 그를 노려봤다.

“말해봐. 이쯤 되니 궁금해서라도 꼭 들어봐야겠다. 대체 얼마나 병신 같은 이유인지.”

“……서리여왕의 핵.”

심덕구가 그 단어를 입에 담는 순 간,서준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심덕구는 말을 이어나갔다.

“3 층은 용암지대와 흡사한 환경이 야.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정상적 인 활동을 할 수가 없는 장소였지.


결국 우리는 도저히 공략을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우선 3 층의 열기를 식히는 방법부터 백방으로 수색했
다.”

“……그래서?”

“용암을 생성하는 제단. 그곳을 서 리여왕의 핵으로 얼려야지만 환경이 바뀔 거야.”

“해,핵은 찾았고?”

"후우우……

심덕구는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말 면목 없다 너희가 공략하 여왕의 둥지를 수천’ 수만 번은 졌지만,서리여왕의 핵은 끝 5'발겨 하지


못했어.” "
그야 당연히 못 찾았을 것이다

왜냐아면 서리여왕의 핵은 자신이 톱수한 상태였으니까

“어,음......?

잠시 머리를 굴리던 서준호가 조심 스레 말을 뻗어,그의 어깨를 기계

처럼 토닥였다.

“그건 어쩔 수 없네. 그냥 운이 없 었어.”

“너…… 이해해 주는 거냐? 너희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는데도?”

고개를 들어 올린 심덕구는 적잖은 감동을 받은 표정이었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성숙한 녀석이었나.’

동시에 친구를 함부로 판단한 스스 로가 부끄러워졌다.

자신이 아는 서준호라면 별의별 지 랄을 다 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보라,마치 자신의 잘못이 라고 말하는 듯한 저 순수한 눈빛 을.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해. 서로 이해해 줘야지.”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다.”

“대신 내가 실수하면 너도 한 번 이해해 줘야 한다?”

“그야 물론이지.”

심덕구의 따뜻한 눈빛이 서준호를 향했다.

그 시선을 슬며시 피한 서준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언제 말해야 잔소리를 덜 듣 지?’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03 화

25 년 후(2)

점심 무렵에 시작된 대화는 서울이 화려한 네온사인에 잠길 즈음에서야 끝을 맺었다.

수다를 떤 것만 무려 일곱 시간.

허기를 느낀 심덕구가 시간을 확인 하며 물었다.

“으음,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배 안 고파? 뭐라도 먹을래?”

잠시 고민하던 서준호는 고개를 흔 들었다.

“밥은 됐고,부탁 하나만 하자.”

“부탁? 뭔데?”
“서울 역사박물관,거기가 그렇게 유명하다며?”

해석하자면 가보고 싶다는 뜻이다.

심덕구는 그가 박물관에 가려는 이 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녀석,동료들이 보고 싶은가보군.’

사실 이런 부탁을 해올 줄 알고, 이미 그에 맞는 준비도 해놓은 상태 였다.

타인에겐 정 없이 굴어도,자신의 사람만큼은 끔찍하게 아끼던 놈 아 닌가.

스윽.

심덕구는 품 안에서 조그마한 팔찌 하나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서준호가 두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 다.

“와우,기술 발전한 것 보소. 설마 이것이 그 유명한 서울 역사박물 관?”

“농담은. 이건 비타(Vita). 이 조그 만 물건이 네가 알던 컴퓨터랑 비슷 한 거다. 실시간 통역,전화,


인터 넷,지도,결제…… 웬만한 건 이거 하나로 다 할 수 있지.”

“재미있네. 그래서 이걸 주는 이유 는 뭔데?”

비타를 팔에 차며 묻자,심덕구가 씨익 웃었다.

“난 지금부터 계단을 통해 1 층으로 내려갈 거다. 이미 기자와 시민,플 레이어들이 쫙 깔려 있으니 나랑


같 이 가면 아마 귀찮아질 가능성이 높 지.”

"혼자 엘리베이터 타라는 말을 뭐 그리 어렵게 해?”

“크홈. 웬만한 결제는 비타를 사용 하면 될 테고,현금이 필요하면 이 거 써라.”

덕구가 빳빳한 지폐들을 두둑하게 건넸다.

“이야,이거 뭔가 기분 묘한데? 아 저씨한테 용돈 받는 것 같아.”

“시끄러워. 서울 역사박물관 건물 뒤편으로 가면,관계자만이 이용할 수 있는 문이 있다.”

“패스워드는?”

“네 홍채 데이터를 등록해 놨어.”

“호오,일처리 솜씨가 더 늘었네?”

“25 년이나 지났다. 안 늘었으면 협 회장 못 해먹지.”

서준호는 새삼스런 눈빛으로 친구 를 바라보았다.

그는 예전부터 자신의 일들을 처리 해줬던 유능한 서포터였다.

“일 끝나면 다시 병실로 돌아와. 의사들이 당분간 상태를 봐야 한다 고 했으니까.”


“분부대로 합죠.”

“그럼 내일 또 온다.”

“그러든가.”

심덕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문 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는 병실을 나가기까지 세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왜 자꾸 돌아봐?”

“……그냥. 아직도 네가 돌아온 게 실감나지 않아서.”

“나이 먹더니 징그러워졌네. 빨리 안 나가?”

“큭큭큭.”

결국 서준호가 베개를 집어던지고 나서야,덕구는 껄껄거리며 병실을

빠져 나갔다.

“……나도 준비할까.”

환자복을 벗은 그는 옆에 마련되어 있는,잘 다려진 옷들을 입었다.

2049 년의 패션 센스는 솔직히 25 년 전과 비교해서 큰 차이가 없었 다.

“다행이다. 미래에는 졸쫄이 타이 즈 같은 게 국민 패션이 될 줄 알 았는데.”

하긴,덕구의 깔끔한 정장 차림이 나 의사들의 가운만 봐도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았다.

병실을 빠져 나온 서준호는 엘리베 이터를 통해 순식간에 1 층으로 내려 갔다.

계단 쪽에는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 인 덕구의 모습이 보였다.

찰칵! 찰칵!

“어둑서니의 건강은 어떻습니까!”

“영웅께서는 어떠한 이상도 없으시 겁니까?”

。정말 어둑서니 님이 맞습니까?”

“그분의 모습을 감추는 것은 이어 협회의 월권입니다! 국민* 도 알 권리가 있습니다!” '

“기자회견은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질문 세례를 받고 있는 그는 쩔쩔 매지도,당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표정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질문에만 대답을 했다.

그야말로 협회장에 걸맞는 노련한 모습이다.

“녀석,고생하네.”
서준호는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는 병원을 빠져 나갔다.

병원 앞 택시 정류소에는 택시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하지만 안쪽에는 단 한 명의 운전 기사도 타고 있지 않았다

“뭐지? 다들 저녁 드시러 가셨나?” 길가에 쪼그려 앉은 서준호는 기사 아저씨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멀리서 직장인 하나가 땀 을 뻘뻘 홀리며 달려왔다.

“으아아,바쁘다 바빠.”

빈 택시의 문을 연 그는 그대로 뒷좌석에 앉았다.

그러자 택시가 혼자서 도로를 미끄 러져 나갔다.

“……어? 분명 운전석에 아무도 없 었는데?”

흔들리는 눈빛으로 떠나는 택시를 바라보던 서준호는 택시를 향해 쭈 뻣쭈뻣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좌석에 올라 타자,친절한 안내음이 들려왔다.

-목적지를 설정해 주십시오.

“……서울 역사박물관.”

이어서 ‘주행을 시작합니다’라는 음성과 함께 택시가 저절로 움직이

기 시작했다.

“오오오! 이거 대박인데? 진짜 미 래에 온 것 같잖아?”

신기한 표정으로 택시를 구석구석 살피던 서준호는 조그마한 책자를 발견했다.

[자율주행택시는 18 년 전에 상용화 된 뒤로 교통사고 0%라는 기염을 토해낸 혁신적인 기술…….]

“교통사고 발생율이 0%라고? 이 야,세상 진짜 좋아졌네.”

심지어 승차감마저 좋다.

기분이 좋아진 서준호는 미소를 지 으며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얼굴을 때렸고,서울의 밤거리가 시야에 들 어왔다.

현재 시간은 오후 8 시 20 분.

거리는 정장을 입은 직장인과 젊은 대학생들로 가득했다.

게이트의 등장 이후로는 보기 힘들 었던 풍경이다.

‘그야 언제,어디서 게이트와 몬스 터가 나타날지 몰랐으니까.’

뿌듯한 마음으로 거리를 바라보기 를 잠시.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타로 결제를 마치고 내리자,하 얀 돌로 이루어진 넓고 깔끔한 장소 가 보였다.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거나,가족들 이 삼삼오오 모여 산책을 하는 박물 관 앞 공원이었다.

뛰어다니면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던 서준호의 두 눈이 이채를 발했다.

‘잠깐만,저건 내 가면이잖아?’

아이들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어둑서니 가면을 쓰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러 가지 가면을 팔고 있는 노점이 보였다.

호기심이 생겨 가까이 다가가자, 아이 하나가 제 부모의 소매를 붙잡 고 칭얼댔다.

“아앙! 사줘! 어둑서니 가면 사줘 어어어!"

“얘는 참…… 저번에도 사줬잖아.”

“저번에 산거는 스카야 가면이란 말이야!”

“쓰읍! 자꾸 억지 부릴래?”

“아아아아앙!”

“그럼 진호는 여기 살아. 엄마랑 아빠는 집에 갈 거야.”

자신의 가면을 가지기 위에 땅바닥 에 누워 울기까지 하다니.

괜히 콧대가 높아진 서준호는 노점 주인에게 물었다.

“영웅들 가면 잘 팔려요?”

“말해서 뭐합니까. 제일 잘 팔리죠. 특히……

노점 주인은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 도 말해주듯,주변을 두리번거리더 니 낮게 속삭였다.

“대마법사 스카야의 가면이 제일 잘 팔립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눈매를 좁힌 서준호가 말도 안 된 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어둑서니 가면이 제일 잘 팔리지 않아요?”

“그럴 리가요. 그건 네 번째로 잘 팔립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서준호는 노 점에서 판매중인 가면들을 살폈다.

거리에서 판매하는 가면답게 완성

도가 그리 높지는 않았다.

“거,젊은 손님에게만 해주는 말인 데,다른 영웅들 가면은 다 얼굴이 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둑서니만 얼
굴 공개를 안 했으니 별수 있겠어 요? 이 시커먼 가면을 파는 수밖 에…… 당연히 어린 아이들은 그리 안
좋아하죠.”

“멋있잖아요. 검은 가면.”

“하이고, 아이들은 화려하고 이쁘 고 멋진 걸 좋아하더이다.”

“……가면 주세요.”

어둑서니 가면을 네 개나 구매한 서준호는 그것을 주렁주렁 들고 다

녔다.

“내 오리지널 가면 실제로 보면 진 짜 멋있는데.”

꿍얼거리며 건물 뒤쪽으로 이동한 그는 관계자용 문을 발견했다.

홍채 인식을 마치자,영업시간이 끝난 서울 역사박물관의 문이 그에 게만 오픈되었다.

“와,저걸 여기다 전시해 놨어?”

박물관 내부에는 몬스터들의 모형, 가죽,뼈.

혹은 과거에 유명했던 플레이어들 이 사용하던 무구가 전시되어 있었 다.

여유롭게 그것들을 감상하던 서준 호는 마침내 안치실 앞에 도착했다.

-훙채 확인 완료. 문을 개방합니 다.

치이이익.

문이 열리자 새하얀 연기가 문틈 사이사이로 빠져 나왔다.

이 한기,이 느낌.

안치실 내부는 서리여왕의 둥지와 매우 흡사한 환경이었다.

‘뭐,얼음상을 원본 형태로 보관하 기 위해서겠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동료들이 죽어서도 서리여왕의 그 늘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 웠던 것이다.

저벅,저벅.

안치실 중앙으로 걸어간 서준호는 네 개의 얼음조각상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얼음상에 갇혀 있는 2 남 2 녀의 모습은,그의 망막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대마도사,스카야 키릴랜드.

파괴왕,라마다트 칼리.

잿빛 사신,길베르토 그린.

천봉(天鳳),텐메이 미오.
자신의 동료이자,등을 맡길 수 있 던 유일한 친구들.

“……늦어서 미안.”

서준호는 그들과 나중에 보자는 약 속을 고작 사흘 전에 나누었다.

25 년이나 지나서,이런 형태로 지 켜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약속이었 다.

털썩.

서준호는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앉 았다.

“너네 그거 아냐? 세상 진짜 좋아

진 거. 혹시 자율주행택시라고 들어 봤어?”

그는 친구들에게,자신들이 일궈낸 평화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말재주가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손짓까지 섞어가며 최대한 자세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우리가 꿈꿔왔던 평화는 지켜졌 어.”

비록 그것이 반쪽짜리 평화라 해 f,그들은 분명 인류를 구하고 지 구를 멸망에서 구해냈다

그러니까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난 거 맞겠지? 어

깨 위의 짐을 좀 내려놔도 되는 거 겠지?

서준호는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 말을 뱉어내면,정말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게 실감날 것 같았기 때문 이다.

차가운 얼음에 갇힌 동료들의 시간 은 영원히 멈추고,자신의 시간만이 다시 흐를 것 같았다.

“……술이나 받아.”

그는 인벤토리에 들어 있던 술을 꺼내 동료들 앞에 조금씩 뿌려주었 다.

구매했을 때는 30 년산이었으나,지 금은 55 년산이 되어버린 귀한 술이 었다.

졸졸졸.

술을 잘 못 마시던 미오와 스카야 의 앞에는 조금만.

나머지 두 사람 앞에는 부족함 없 이.

남아 있는 술은 모두 자신의 목구 멍으로 넘겼다.

“크으으.”

정신이 번쩍 든 그는 구매했던 어 둑서니 가면을 얼음상 앞에 하나씩


놔주었다.

“하나씩 들고 가. 나 제법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살았으니,천국에서도 VIP 대접해 줄 거다.”

동료들의 넋을 달래고,인사까지 마쳤다.

그러고도 한 자락 미련이 남은 서 준호는 괜히 동료들의 얼음상에 묻 은 먼지를 털어냈다.

“……이게 뭐냐,먼지나 묻히고 다 니고.”

툭툭.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동료들 의 얼음상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 내는 순간.

[서리 (EX) 능력의 보유를 확인했 습니다.]

[서리(EX) 능력을 통해 얼음상의 봉인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마력 수치가 터무니없이 모자랍니 다. 봉인 해제에 실패합니다.]

세 줄기의 메시지가 그의 눈과 귀 를 뒤흔들었다.

“……뭐?”

서준호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다시 한 번 얼음상에 손을 대보

았다.

이번에도 똑같은 메시지가 흘러나 왔다.

동시에 그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 기 시작했다.

‘봉인을 해제할 수 있다고? 내가?’

덕구에게 들었다.

이건 현대 기술이나 플레이어의 능 력으로도 함부로 녹일 수 없는,절 대영도의 얼음이라고.

그런데 자신이 이것들을 녹일 수 있단다.

“서리 능력이라면……

서리여왕의 핵을 통해 획득한 스킬 이다.

“후을,하아,후우을,하아아.”

심호흡을 통해 마음을 진정시킨 서 준호가 생각에 잠겼다.

우선 자신의 상태부터 확인해야 한 다는 결론이 나왔다.

“상태창.”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본인에게만 보이는 홀로그램창이 떠올랐다.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부여하는 권능 중 하나였다.

[서준히
레벨 : 1

칭호 : 봄을 여는 자

근력 : 21 체력 : 24

속도 : 26 마력 : 18

<보유 능력>

서리(EX), 어둠의 파수꾼(S), 사냥 꾼의 밤(A), 영웅의 정신력(A), 무 기술의 달인(A), 강렬한 직감


(B).

<특이사항>

능력치가 대폭 하락된 상태입니 다.

시간이 흐르거나, 일정 레벨에 도 달할 때마다 일부 능력치를 복구 할 수 있습니다.

상태창을 빠르게 훑던 서준호의 눈 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자신에게 서리 (EX)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게 열쇠구나.’

친구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열 쇠.

게다가 기존의 S 등급마저 뛰어넘

은,전대미문의 EX 등급 스킬이다.

‘덕구는 여전히 S 등급이 최고의 능 력이라고 했어.’

한국의 플레이어 협회장조차 그렇 게 말했으니 자신이 최초 보유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시스템은 내 마력 수치가 낮아서 얼음상의 봉인을 해제할 수 없다고 했으니……

서준호는 그제야 자신의 상태창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쯧.”

가볍게 혀를 찼다.

80 이었던 레벨은 1 이 되어 있었고 능력치들은 처참한 수준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

그나마 다행인건,사라진 능력치가 영영 소실된 건 아니라는 점이다.

‘복구는 할 수 있는 모양이네.’

물론 하루이를 정도로 복구될 수준 은 절대 아닌 것 같다.

그가 보유한 능력 중 하나인 강렬 한 직감(B)에 의해 그런 확신이 들 었다.

“그나저나 마력 수치가 십팔? 이건 뭐 욕해달라는 건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홀린 서준호 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예전부터 낮은 마력 수치에 번번이 발목을 붙잡혔던 기억이 떠오른 탓 이었다.

“또 마력이 문제네.”

영약도 먹어보고,마력 상승 아이 템도 전신에 둘둘 둘러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마력 수치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는 그의 시선에,무언가가 보였다.

"응? 봄을 여는 자?”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니,분명 서 리여왕을 잡았을 때 이런 칭호를 획 득했었다.

플레이어 생활을 5 년이나 했지만, 이것이 처음으로 얻은 칭호였다.

‘……스카야는 스스로 마법을 창조 해 낸 날,‘마도의 첫 걸음’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했지.’

마력 수치가 무려 15 개나 오르고 캐스팅 속도가 빨라졌다고 자랑하던 것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업적 비스무리한 걸 달 성하면 주는 것 같은데…… 어디 효 과나 한 번 볼까.’

서준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칭호 확인,봄을 여는 자.”

스르륵.

떠오른 상태창 밑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04 화

25 년 후(3)

[봄을 여는 자]

등급 : S

내용 : 시작의 층 플로어 마스터, 서리여왕을 처치한 자에게 주는 칭

효과 : 체력, 마력 재생 속도

500% 상승,플로어를 올라갈 때마 다 모든 능력치 30 상승.

입을 꾹 다문 서준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는 칭호의 효과를 몇 번이고 다 시 읽었다.

‘이게 칭호의 효과라고?’

기껏해야 스카야처럼 능력치 몇 개 올라가는 것이 전부일 줄 알았다.

‘미친,이건 그 정도 수준이 아니 잖아.’


솔직히 말하면 체력,마력 재생 속 도 500% 상승은 있으면 좋고,없으 면 살짝 아쉬운 효과다.

그러나 두 번째 효과는 다르다.

“플로어를 올라갈 때마다 모든 능 력치가 30 씩 오른다라……

즉,차원 엘리베이터를 타고 층을 올라갈 때마다 효과가 발동한다는 소리.

만약 10 층까지 올라간다고 가정할 시,그의 모든 능력치는 최소 270 이상이 된다.

“맙소사.”

감히 상상조차 안 되는 능력치에 서준호가 몸을 부르르 떨며 전율했 다.

그가 서리여왕을 잡았을 때 가장 높은 수치였던 속도는 225, 가장 낮 았던 마력은 183 이었다.

‘그때도 무서울 게 없었는데,모든 능력치가 270 이상이라면……

서준호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것도 정말 최소로 잡았을 때 270 이라는 소리다.

만약 전신에 아이템을 두르고,레 벨까지 빵빵하게 올린다면?

'거기에 잃어버린 능력치까지 복구 하면……

그의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그림 이 그려졌다.

괴물 같던 마력량을 자랑하던 서리 여왕,그녀가 가볍게 손을 휘저을 때마다 얼어붙던 세상.

‘그 힘을…… 아니,그것보다 더 강한 힘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 다.’

그 정도 힘이라면 이 얼음상을 녹 이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서준호는 눈앞에 놓 인 네 개의 얼음상을 말없이 쳐다보 았다.

한참이나 자리에 서 있던 그는 조 용히 안치실을 빠져 나왔다.

박물관을 나서는 그의 눈동자에는, 이전에 없던 각오가 새겨진 상태였 다.

‘10 층이라고? 까짓것 올라가지 뭐.’ 최후의 층에 도달해 게임을 끝낸다 는 인류의 비원을 위해서?

아니면 지구의 멸망을 피하기 위해

서?

“미친 소리.”

서준호는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것 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그가 플레이어 복귀를 결정한 이유 는 단 하나.

‘내 친구들을 차가운 얼음 감옥에 서 꺼내주기 위해서.’

오직 그것만을 위해 다시 한 번 플레이어가 되겠다.


다짐은 가슴 속 깊은 곳에 타리를 틀었다.

“뭐?! 플레이어 복귀?”

다음 날,병실을 찾아온 심덕구는 난데없는 폭탄선언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심지어 서준호는 하룻밤 사이 그 길던 머리를 깔끔하게 잘라놓은 상 태였다.

푸짐한 설렁탕을 푹푹 떠먹던 서준 호가 그를 힐긋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까지 놀라? 내가 그거 빼면 할 줄 아는 게 뭐 있다고.”

“너무 갑작스럽잖아. 너 맨날 은퇴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그 녀석 맞아?”

“마음이야 언제든지 바뀔 수 있 지.”

“그거야 그렇지만…… 나는 좀 별 로인 것 같다.”

그가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라 생각했기어 L 서준호는 숟가락을 내 려놓으며 의문을 드러냈다.

“이유는?”

“첫 번째는 네가 좀 쉬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스스로를 얼마 나 몰아붙이는지를 옆에서 봐왔기

때문에 잘 알아. 너 그 정도 했으면 충분해. 이제 어깨 위의 짐 좀 내려 놓고,하고 싶은 일 찾아라.”

잔소리,잔소리,또 잔소리.

이 자식은 얼굴만 보면 잔소리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진 서준호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두 번째는 이유는?”

“마인(魔人) 때문이다.”

“음? 그 녀석들 또 생겼어?”

침묵은 긍정을 의미했다.

서준호는 빠르게 상황파악을 끝냈 다.

“하긴,이런 상황인데 없는 게 더 웃기지. 바퀴벌레처럼 질긴 놈들이 잖아.”

마인 (魔 人).

그들은 게이트를 닫거나,몬스터를 처치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자신들의 능력으로 불법적인 일을 하거나,살인,테러를 일삼는 것을 즐기는 사회의 악이다.

"요즘 마인들 때문에 난리도 아니


다.”

“재미있네. 나 있을 때는 숨도 못 쉬던 것들이.”

“그때야 그랬지.”

28 년 전,세상의 모든 마인들은 자 취를 감추었다.

서준호를 비롯한 5 영웅을 두려워했 기 때문이다.

그들이 있는 한 자신들이 설 자리 는 없다는 것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음지로 숨어버렸다.

“하지만 2 층이 열리고 상황이 바뀌 었다. 프론티어에는 CCTV 나 위성 같은 게 없으니까.”

쳐심헒" 는이

서준호를 빤히

“게다가 다섯 진 상태였지.”

명의 영웅까지 사라

“아주 살판났겠네.”

“그동안 대체 어떻게 참았는지, 전 보다 더 미쳐서 날뛰더라.”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

압도적인 무력으로 그들에게 참된 교육을 해줄 존재의 부재.

그게 바로 마인들이 마음 놓고 활

개를 칠 수 있는 이유였다.

“내 복귀를 왜 반대하는지는 알 것 같아.”

서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구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언 제,어떻게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

지난 25 년간 힘을 키워온 마인들 에게,자신은 최고의 사냥감에 불과 할 테니까.

그는 혹시나 하는 목소리로 물었 다.

“개네…… 아직도 나 많이 싫어하 냐?”

“몰라서 묻냐? 네가 돌아온 걸 가 장 기뻐한 게 그놈들일걸? 이제 죽 일 수 있으니까.”

“에이씨.”

서준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영웅 대접 받으면서 편하게 레벨 좀 올리나 싶었는데,일이 이상하게 꼬인다.


“그러니까 복귀할 생각은 얌전히 접어. 지금 네가 플레이어로 활동하 려면 어둑서니의 가면과 닉네임을
모두 버리고 활동하는 방법뿐인 데…… 막말로 너】가 그럴 이유가 없 잖아? 어딜 가도 왕처럼 대접받으며

살 수 있고,최고의 플레이어 1

24 시간 경호해 줄 텐데.” 은이

층. 거기까지 올라가야 외

“아니,갑자기 왜?”

심덕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느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아는 서준호라면 지금쯤 세 상을 구한 보상을 챙기겠다며 계획 표 I 짜고 있어야 정상이었으니까.

“3 층 용암지대. 거기 공략할 방법 음 따로 있고?”

“어제 말해줬잖냐. 지금 당장은 마 tg•한 방법이 없다니까.”

“그 방법이 나한테 있다면?”

심덕구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런 주제로 헛소리를 할 녀석은 아니다.

“자세히 말해봐.”

“서리여왕의 핵을 찾고 있다고 했 지?”

“어. 뭔가 짐작 가는 부분이라도 있냐?”

“있지.”

후루를.

뚝배기를 들어 설렁탕 국물을 시원 하게 넘긴 서준호가 말을 이었다.

“끄으,잘 먹었다.”

“말을 하다 말고…… 아무튼 그래 서 뭔데?”

“잘 먹었어.”

“아니,지금 설렁탕 얘기 따위를 할 때가 아니잖……

“설렁탕 얘기 아닌데?”

그 말에 심덕구가 두 눈을 꿈뻑거 렸다.

“설렁탕 얘기가 아니라면…… 잠 깐,너 설마……?”

“크홈.”

“아니지? 설마 서리여왕의 핵을 먹 었다는 미친 소리는 아니지?!”


심덕구가 당장이라도 배를 찢을 기 세로 일어서자,서준호가 황급히 그 를 진정시켰다.

"에헤이. 좀! 예나 지금이나 성격 존나 급한 건 여전하네. 얘기부터 들어봐.”

“너,너,너……! 그걸 진짜 처먹었 냐?!”

“아니 내가 먹고 싶어서 먹은 줄 알아? 만지니까 지 혼자 흡수되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아,의사가 스트레스 받지 말 랬는데.”

고개를 젖힌 심덕구가 뒷목을 주물 렸다.

잠시 후,그는 초췌해진 얼굴로 입 을 열었다.

“네 성격에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꺼낸 건,해결 방법이 있어서지?”

“어.”

서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핵을 흡수하니까 서리 능력이 생 겼어.”

“……그걸로 3 층의 제단을 얼리는

건 가능하고?”

“가능해.”

서준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 했다.

무려 EX 등급의 능력이다.

이 능력이 안 통한다면,그건 서리 여왕의 핵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후우,한숨 돌렸군.”

심덕구가 알겠다는 둣 고개를 끄덕 였다.

그는 서준호의 말을 눈곱만큼도 의 심하지 않았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서리여

왕 공략까지 해낸 녀석이 아닌가.

그가 가능하다고 하면 가능한 것이 다.

동시에 왜 복귀하겠다고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동료들이랑도 뭔가 관련 있지?”

“나중에 보자는 약속 지키는 놈이 하나도 없더라고. 깨워서 따져야지.”

“깨운다라…… 그것까지 가능한 거 냐?”

“시스템이 가능하대.”
“그래? 좋은 소식이네.”

진한 미소를 지은 심덕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는 현재 서준호가 무엇을 원하는 지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의사들이 네 얼 굴 봤었지?”

“정확히 9 명이었어.”

“마침 휘하에 기억을 지우는 능력 자가 하나 있다. 조치를 해두는 편 이 안전하겠지.”

척하면 척.

서준호는 심덕구와 대화를 나눌 때 가 제일 편했다.

“아,맞다. 그런데 나 레벨 초기화

되서 지금 1 이야.”

“……설마 능력치들도?”

“빙고.”

“후우,넌 꼭 잘나가다가 마지막에 초를 치더라.”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른 심덕 구는 빠르게 정신을 추스르곤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뭐,좋게 생각하면 다행이야. 다른 사람들은 네가 여전히 강할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어둑서니가 1 레벨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겠지.”

“그럼 당분간은 정체를 들킬 염려 가 없겠군.”

“플레이어 자격증은 네 권한으로 발급해 줄 수 있지?”

“아,그게……

심덕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2 층이 열리고,아무래도 세계기관 인 플레이어 협회보다는 길드의 힘 이 더 커졌다.”

“뭐야,설마 자격증 발급권을 뺏긴 거야?”

“그건 아냐. 협회에서 플레이어 자 격증 심사를 진행할 때,몇몇 길드

에서 참관을 하는 형식이다. 이 공 개 심사에서 통과하는 자들만이 자 격증을 받을 수 있지. 이건 내


권한 으로도 어떻게 프리패스를 줄 수가 없어.”

“쯧,귀찮아졌네.”

“주먹구구식이던 예전과 비교하면 절차가 많이 생기긴 했지.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건 기회이기도 하


다.”

눈을 빛낸 심덕구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봐. 내가 너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려면,그만한 명분이 있어

야 해.”

“……오호라?”

요컨대,심사에서 최고의 결과를 내라는 뜻이었다.

모든 길드에서 탐을 낼 정도로 훌 륭한 플레이어라는 것을 증명만 한 다면.

심덕구가 협회 차원에서 엄청난 지 원을 해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어둠 능력은 절대 쓰면 안 돼. 될 수 있으면 서리 능력도 숨겨 야 하고.”

“어둠은 그렇다 치고,서리는 왜?”

“마인 녀석들도 3 층을 공략하는 열 쇠가 얼음 능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 으니까. 괜히 주목을 끌어봐야


좋을 건 없잖아.”

“음,이해했어.”

병실 침대에 누워 있던 서준호가 목을 가볍게 한 바퀴 돌렸다.

“몸이 근질근질하네…… 심사할 때 쓸 장비는?”

그가 사용하던 최고의 무구들은 현 재 레벨,능력치 제한 때문에 사용 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지금은 얌전히 인벤토리에 보관되어 있는 상태였다.

“무구는 당일 네가 직접 고를 수 있어. 심사 땐 동일한 장비를 사용 해야 하거든.”

“공정하네.”

서준호가 씨익 웃었다.

“무엇보다 이 깜 먹고 평가를 받는 다는 게 너무 신선한데?”

“뭐,적당히 날뛰고 와라. 그럼 나 는 서준호라는 인물의 배경부터 만 들어야겠군. 출생년도,성장 환경,


인물 관계…… 당분간 좀 바쁘겠 어.”

“며칠이나 걸릴 것 같아?”

“사나흘. 너는 준비가 언제쯤 끝날 것 같은데? 한 달?”

그 질문을 들은 서준호는,뭐 그렇 게까지 필요하겠냐는 표정으로 대꾸 했다.

“난 일주일. 그거면 충분해.”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05 화

나 때는 말이야(1)
한국 병원에 마련된 12 번 재활치 료실.

서준호는 그 방의 중앙에서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동료였던 라마다트에게 배운 마력 의 순환을 도와주는 자세였다.

‘어차피 몸을 키우는 건 하루이를 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자신이 전성기 수준까지 몸을 키우 려면,짧아도 몇 달은 걸릴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긴 시간 동안 몸만 만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우선은 현재 개선할 수 있 는 부분부터 바꿀 생각이었다.

‘마력 수치가 십팔이라……

결코 높은 수치는 아니었다.

조금 재능이 있는 플레이어의 경 우,각성하는 순간 마력 수치가 20 을 넘었으니까.

“쯧,예전에도 마력 늘린다고 개고 생했는데.”

옛 기억을 떠올린 서준호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플레이어로 각성하던 날,가 족을 잃고 복수심에 눈이 멀었던 바 로 그날.

그는 s 등급 능력인 ‘어둠의 파수 꾼’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해 본 것은 무려 반 년이나 지난 후였 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 미친 능력,마력을 무진장 처 먹는단 말이지.’

강한 위력을 내는 만큼 많은 마력 이 필요했다.

때문에 남들보다 마력 수치가 낮았 던 서준호는,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정말 독종처럼 살았다.

레벨이 오를 때마다 상승하는 모든 능력치 1.

플레이어가 된 직후의 그에겐 그것 이 마력을 올릴 수 있는 유일한 방 법이었다.

그래서 몬스터를 죽이고,죽이고, 죽이고,또 죽여서 레벨을 올렸다.

남들이 한 번 사냥을 갈 때 그는 세 번,다섯 번을 갔다.

남들이 부상을 입고 병실에서 휴식 할 때도,그는 대충 붕대를 두르고 또 사냥에 나섰다.

그 지옥 같은 삶을 몇 년이고 견 뎌내자,그는 어느새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가 되어 있었다.

“후우……

상념을 털어낸 서준호는 천천히 몸 속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마력이 전신을 돌아다니며 마 력 회로를 일깨우기 시작했다.

'많이 녹슬었네.’

마력 회로는 무려 25 년 동안이나 사용되지 않았던 탓인지,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마력을 기차,마력 회로를 선로에 비유한다.

기차가 지나가지 않는 선로는 무성 한 잡초로 뒤덮이는 것이 당연지사.

지금 서준호의 마력 회로도 마찬가 지였다.

오랜 시간 동안 마력이 지나가지 않은 회로는 잔뜩 녹슬어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이런

부분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마력을 사용하는 데는 지장 이 없으니까.

하지만 서준호는 회로를 항상 최고 의 컨디션으로 유지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마력,효율적으 로 써야지.’

깨끗하고 정순한 회로를 질주하는 마력은 손실률이 훨씬 더 낮다.

그것이 서준호가 마력 회로를 꼼꼼 하게 관리하는 이유였다.

‘지금은 마력 손실률이 30% 가까 이 되네. 이러면 못 쓰지.’

과과과과!

서준호는 티끌 같은 마력을 한데 뭉쳐,녹슨 마력 회로에 그대로 풀 어 버렸다.

들소처럼 일어난 마력은 금세 회로 를 따라 질주하기 시작했다.

전신에 나무뿌리처럼 퍼져 있는 회 로 위로 마력이 지나갈 때마다,불 순물들이 벗겨져 나갔다.

스르륵.

감겨 있던 눈이 떠졌을 때는 무려 세 시간이나 흐른 상태였다.

그의 전신은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

다.

“킁킁, 다행히 냄새는 안 나네.”

얼음상에 갇혀 있었기 때문인지 노 폐물이 쌓이지는 않았다.

이건 좋은 소식이었다.

단순히 몸의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데에만 전념하면 된다는 뜻이었으니 까.

자리에서 일어난 서준호는 가볍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세 시간 전과는 다르게,마력이 들 불처럼 일어났다.

“마력 손실률이 5%라…… 예전보

단 못하지만 나쁘진 않네.”

역시 이 맛에 회로 관리하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서준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보유한 모든 마력을 끌어올리 기 시작했다.

자신의 능력을 어디까지 끌어낼 수 있는지 확인해 볼 요량이었다.

사아아아!

마력이 만들어낸 어둠은 마치 물속 에 떨어진 검은색 물감처럼,화려하 게 피어났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필시 아름답

다고 감탄하며 다가갔을 것이다.

하나,이 능력의 진가를 아는 사람 이라면 절대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어둠은 그 어떤 속성보다도 흉악하 고,난폭하니까.

“크윽……

능력을 유지하던 서준호의 얼굴이 시시각각 일그러졌다.

“후음,쿨럭! 쿨럭……

결국 참다못한 그는 거친 숨을 토 해냈다.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어둠도 사

라진 상태였다.

그는 소매로 입가의 침을 닦으며 생각했다.

‘현재 마력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 인가.’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 다.

‘이러면…… 실전에선 어떤 식으로 운용해야 하지?’

‘예전에 마력이 부족했을 땐 어떻 게 싸웠더라?’

‘아 근데 마력 진짜 존나 딸리네.’

기억을 더듬자 답은 바로 나왔다.

'블라인드 혹은 트랩,간단한 물리 력의 행사가 고작이겠어.’

상대의 시야를 가리거나,발목을 붙잡는 정도.


현재의 쥐꼬리만 한 마력으로 가능 한 건 그게 전부였다.

‘마력이 차오르면,그땐 서리 능력 에 대해 알아보자.’

봄을 여는 자의 효과 덕분에 마력 이 회복되는 건 체감이 될 정도로 빨랐다.

소모한 마력을 모두 회복한 서준호 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과연 어떨런지.”

솔직히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S 등급인 어둠의 파수꾼조차 제대로 다루게 되니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물며 EX 등급인 서리는 더 강할 터.

그래서인지 두렵기까지 했다.

‘……이것도 마력을 미친 듯이 처 먹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표정을 지은 서준호는 천천 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 아니,이렇게인가?’

어둠과 서리.

두 능력 모두 무에서 유를 창조한 다는 점에선 비슷했다.

그 때문인지 서준호는 서리 능력을 생각보다 쉽게 발동할 수 있었다.

쩌저저적!

밟고 있던 바닥이 차갑게 얼어붙었 다.

반면 서준호의 입가엔 따스한 미소 가 걸린 상태였다.

“생각보다 안 먹는다!”

물론 명색이 EX 등급 스킬이기에 소모되는 마력이 적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둠을 지키는 파수꾼과 비

숫한 정도다.

그 말은 즉,소모되는 마력 대비 가성비가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면…… 마력을 조금만 더 올리면 실전에서 활용 가능한 수준 이 되겠는데?’

심지어 이 능력은 어둠의 파수꾼을 처음 다뤘을 때처럼 이런저런 실험 을 해볼 필요가 없었다.

“이미 모범 답안은 충분히 봐둔 상 태니까.”

서준호는 서리여왕과 무려 70 시간 이 넘는 전투를 치렀다.

달리 말하면,그녀가 사용하는 기
술을 70 시간 동안 익혔다는 뜻이다.

그것도 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직접 당하는 입장에서 말이 다.

“심사가 기대되네.”

서준호의 입가로 진한 미소가 내려 앉았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지나 갔다.

그 시간 동안 서준호는 몸을 단련

했고,심덕구가 가져오는 자료들을 달달 외웠다.

대부분 지난 25 년 동안 벌어진 사 건들을 요약해 놓은 자료들이었다.

“좋아,준비 끝.”

우두둑,우둑.

목을 돌려 뼈마디를 스트레칭한 서 준호가 외출복을 입었다.

오늘 시험을 치루는 것과 동시에, 이 병실에서 퇴원할 예정이었다.

‘물론 대역이 나를 대신해서 여기 에 드러눕겠지만.’

공식적으로 어둑서니는 아직 병상

에 누워 있는 신세다.

최소 몇 달은 정양을 해야 하는 상태라는 것이 협회의 공식 입장이 었으니까.

“어둑서니 님을 대중에 공개하라!”

“공개하라!”

병원을 나선 서준호는 확성기까지 들고 시끄럽게 떠드는 기자와 시민 들을 뒤로했다.

“공개 같은 소리하네. 저놈들은 입 원한 환자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나.”

하긴,그 정도 상식이 있다면 아침 부터 저러고 있지는 않겠지.

따지고 보면 자신이 원인이었으니 할 말이 없기도 하다.

택시를 탄 서준호는 곧장 한국 플 레이어 협회 건물로 향했다.

“돈 좀 썼나 보네?”

80 층짜리 건물은 곡선의 유려한 디자인으로 지어져 있었다.

입구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 여 있는 상태.

그들이 모두 플레이어 자격증 시험 에 응시하려는 지원자들이었다.

서준호는 이미 예약해 둔 상태였기 에,줄을 서지 않고 빠르게 입장할


수 있었다.

“대기실에서 쉬시다가 본인 차례가 오면 입장해 주세요.”

서준호가 자신의 대기표를 스윽 쳐 다봤다.

75 번. 조금 기다려야 하는 순번이 다.

웅성웅성.

대기실 안쪽은 생각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자격증 심사는 정해진 인원만을 뽑 는 상대평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능력만 충분하면 모두가 통과할 수

있는 절대 평가이기에 굳이 서로를 견제할 이유가 없었다.

“웃차.”

의자에 앉은 서준호는 팔짱을 끼더 니 두 눈을 감고,귀를 열었다.

심덕구가 전해준 딱딱한 자료만으 로는 접할 수 없는,날것의 정보들 이 속속들이 들려왔다.

“아침에 뉴스 보셨어요? 2 층의 고 대 던전이 드디어 공략…… 천상의 숨결이……

“오늘 심사위원이 무려 심덕구 협 회장이래요.”

“하아,오늘도 떨어지면 4 수예요.”

"전 각성한 지 2 년이 지났는데,아 직도 시험을 통과 못 했어요. 진짜 재능이 없는 걸까요?”

“심사에서 무슨 무기를 골라야 승 산이 높은지 아시는 분?”

‘그리 쓸 만한 정보는 없네.’

하긴,아직 플레이어도 되지도 못 한 사람들이 떠드는 말이다.

오히려 그들의 입에서 고급 정보가 나오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겠지.

정보 수집에 흥미를 잃은 서준호가 눈을 뜨는 순간.

타이밍 좋게 안내 방송이 시작되었

다.

-1 번 지원자,들어와 주십시오.

곧이어 대기실의 중앙에 거대한 홀 로그램 스크린이 생성되었다.

화면을 통해 시험장 내부의 상황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잠시 후,세팅룸에서 무기 선택을 마친 1 번 지원자가 화면에 잡혔다.

‘창이라.’
길쭉한 창을 든 그의 얼굴에는 긴 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나 심사는 그런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호오.”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몬스터들이 남자를 향해 돌진했다.

남자는 창을 크게 휘두르며 전진했 고,몬스터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 섰다.

“오오,기세가 굉장한데?”

“몬스터들이 쫄아서 뒷걸음 치고 있어.”

“부럽다. 1 번은 여유롭게 합격하겠 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대기실의 지원자 들이 감탄을 쏟아냈다.

하지만 서준호는 그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에이,창 저렇게 쓰는 거 아닌데.’

창은 상대와의 거리를 확보했을 때 가장 강력한 성능을 발휘하는 무기 다.

저렇게 미련하게 거리를 좁히는 행 동은 창에 대한 이해도가 바닥을 친 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남자는 죽기를 각 오하고 달려든 몬스터들과 엉키며 뒤로 넘어졌다.

그것으로 전투는 끝.

몬스터들은 순식간에 사라졌고,남 자는 멍한 표정으로 불합격 통지를 받아야 했다.

‘대충 저런 식으로 진행되는구나.’

서준호는 벌써부터 온몸이 근질거 리기 시작했다.

과연 홀로그램 몬스터도 ‘베는 맛’ 이 있을까?

* * *

심사위원이 자리한 방의 구조는 매 우 독특했다.

우선 한쪽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 었는데,그곳을 통해 시험장을 내려 다볼 수 있었다.

유리 앞에 마련된 푹신한 소파에 는,열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음,이번 지원자도 실력이 영 별 로네요.”

“사전에 몬스터의 특징,공략법을 숙지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준비성은 플레이어에겐 기본 인데 말이에요.”

“탈락시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길드의 참관인들이 너도나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다만 평소와는 달리 의견을 강력하 게 내세우지는 못했다.

그저 조심스레 의견을 제시하고, 한 사람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탈락시키 도록 하죠.”

한국 플레이어 협회의 위상이 과거 와는 달리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협회장이다.

참관인들은 심덕구의 심기를 거스 르지 않고자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다음 지원자 들여보내세요.”

심덕구의 말이 끝나자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잠시 후,새로운 지원자가 시험장 내부로 들어섰다.

동시에 대다수의 참관인들이 눈살 을 찌푸렸다.

“하아…… 저런 사람은 매 시험마 다 꼭 있네요.”

“이번엔 좀 많이 과한데요? 검, 활,투척용 단검,창에다가 권총까 지…… 아주 무기란 무기는 싹 쓸어


왔군요.”

꼭 무기에 대한 이해도도 없으면 서,저렇게 주렁주렁 들고 다니는 놈들이 있다니까요.”

I 무기를 많이 들고 다니면 강해지 는 줄 아는 거죠.”

막말로 지가 어둑서니예요,뭐예 요?”

“몸도 삐쩍 마른 것을 보니 자기 관리 능력까지 의심되는 사람이네 요.”

이번에 나타난 지원자는 흔히 말하 는 어둑서니 병에 걸린 환자였다.

무기술의 달인,걸어 다니는 무기 고라고도 불리었던 어둑서니를 따라

하는 철없는 햇병아리들.

그들은 여러 종류의 무기를 주렁주 렁 들고 다니는 것이 특징이었다.

“저희도 어이가 없는데,협회장님 은 더하시겠어요.”

“무슨 뜻입니까?”

“그야 저런 사람들은 전부 협회장 님의 친우 분이신 어둑서니 님을 따 라하는 거잖습니까.”

“협회장님은 무결점의 플레이어라 고 불리던 그분을 누구보다 가까이 서 지켜보신 분이고요.”

“……뭐,그렇죠. 상황이 제법 재미 있군요.”

말을 마친 심덕구는 시험장을 빤히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홀렸다.

‘화려하게 날뛰고 오라고는 했지 만…… 이건 너무하잖아,이 자식 아.’

어둑서니 병에 걸린 환자(?).
서준호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시 험장을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06 화

나 때는 말이야(2)

-75 번 지원자,들어와 주십시오.

‘내 차례다.’

자신을 부르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서준호는 대기실과 연결된 세팅룸으 로 들어갔다.

안쪽에서 기다리던 협회 직원이 입

을 열었다.

“환영합니다,서준호 지원자님.”

“네.”

“이 방에 있는 무기 중에서 원하시 는 것을 고르신 뒤,이쪽 문을 통해 나가시면 됩니다.”

서준호는 방에 진열된 무기들을 둘 러보았다.

십팔반병기나 권총,활은 물론이고 할버드 같은 독특한 무기들까지 모 두 준비되어 있었다.

“무기 소지에 제한은 없죠?”

“네. 간혹 가다 두 개 이상의 무기

를 고르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잘됐네요.”

서준호는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무기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우선 허리춤에 글록 17 이 수납된 벨트를 찼고,등에는 화살통과 활을 맸다.

왼쪽 허벅지에는 다섯 개의 투척용 단검을 꽂아 넣었고,허리춤에 검집 을 매단 뒤 마지막으로 창을 들었


다.

이를 지켜보던 직원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서준호 지원자님. 지금 그 무기들

을 다 가져가시겠다는 건가요?”

“안 돼요?”

“하아…… 됩니다,돼요.”

직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서준호 같은 지원자들을 많이 봐왔 기에,충고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체념한 표정으로 장갑 한 쌍 을 내밀었다.

“준비를 마치셨으면 이 장갑을 착 용해 주세요.”

서준호가 멀뚱거리며 장갑을 쳐다 만 보자,그의 입에서 설명이 흘러

나왔다.

“시험장에서 소환되는 홀로그램 몬 스터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마도구입니다.”

“호오,신기하네.”

그제서야 장갑을 낀 서준호는 마지 막으로 장비들을 최종점검하고 고개 를 들었다.

"준비 끝났는데,가도 되죠?”

"네. 이쪽의 문을 이용하시면 됩니 다.”

서준호는 직원이 가리키는 문을 열 고 들어섰다.

시험장은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넓 었는데,벽과 천장,바닥이 온통 하 얀색이었다.

-서준호 지원자,준비되셨습니까.

부웅,붕.

그는 창대를 부드럽게 돌리며 스피 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사방에 서 몬스터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직접 보니까 더 신기하네.’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몬스터는 마치 진짜 몬스터를 눈앞에 둔 것처

럼 정교했다.

그들을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서준호는 이미 적에 대한 파악을 마 친 상태였다.

‘난쟁이 스무 마리라. 확실히 초보 자들이 상대하기에는 조금 과하네.’

그것이 자격증 심사의 합격률이 3%도 안 되는 이유일 것이다.

난쟁이의 평균 신장은 130cm.

성인 남성에 비해 한참이나 작은 놈들은 당연히 신체 능력 또한 별 볼일 없다.

단,플레이어가 그 사실을 알고 있 는 것 이상으로 본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난쟁이는 비열하고 똑똑하지.’

그들은 부족한 신체 능력을 깡과 독기,잔머리로 보완하는 몬스터였 다.


때문에 아까의 1 번 지원자처럼 그 들을 얕보고 함부로 접근했다간,어 어 하는 순간 몸의 균형을 잃고 넘
어진다.

현실이었으면 넘어지는 순간 끝났 다고 보면 된다.

‘놈들의 단검이 전신을 벌집처럼 쑤셔놓을 테니까.’

서준호는 자신을 향해 적개심을 드

러내는 난쟁이들을 보며 피식 웃었 다.

‘하,옛날 생각나네.’

침을 뚝뚝 흘리는 못생긴 난쟁이들 이 그의 풋풋한 옛 기억을 되살렸기 때문이다.

“세상 참 좋아졌어. 예전에는 이런 거 없었는데.”

자격증 심사? 홀로그램 몬스터?

‘그딴게 어딨어.’

옛날에는 플레이어가 되고 싶다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게이트에 들어 가야 했다.

살아서 돌아오면 자격증이 발급되 고,실패하면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 다.

“나 때는 말이야. 노력을 해야 했 어. 그것도 아주 많은 노오오력을.”

죽지 않기 위한 노력과 몬스터를 죽이려는 노력.

심지어 그렇게 노력하고도,재수가 없으면 죽는 것이 플레이어의 삶이 었다.

그런 세대를 거쳐온 서준호의 입장 에서 볼 때.

홀로그램 몬스터라는 건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우스웠다.

‘아무리 진짜를 잘 흉내냈지만

그래봐야 인공지능으로 만들어낸 가짜’에 불과하다.

“이러면 덤비겠지?”

서준호가 허리를 살짝 비틀어 의도 적인 ‘빈틈’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난쟁이들이 캬악!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1.5 미터.’

현재 그가 들고 있는 창의 길이는 130cm 정도.

팔의 길이까지 합치면 그가 절대적

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공간은 반 경 1.5 미터 정도 된다.

물론 눈앞의 데이터 쪼가리들이 그 런 것까지 알 리는 없었다.


-키르륵!

-키엑!

가장 성격이 급한 난쟁이 네 마리 가,단검을 꼬나쥐고 서준호에게 점 프했다.

들고 있는 단검을 두 손으로 꽉 쥐고 있는 것이.

그대로 자신의 머리를 찍어버릴 요 량인 것 같았다.

하지만 허공에 떠오른 그들의 몸이 최고점에 다다르기 직전.

‘흐음.’

일반 성인보다 적은 서준호의 팔 근육이,순간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파바바박!

섬광처럼 뻗어나간 창극은 난쟁이 들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터트렸다.

그들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폴리 곤 조각이 되어 사라졌다.

-키륵?

-카아악!

갑작스러운 동료의 죽음에 기세 좋

던 난쟁이들이 우선 발을 멈추고 사 방으로 흩어졌다.

‘강한 적과 마주치면 산개해서 포 위한다라…… 난쟁이의 특징은 잘 구현해 놨네.’

서준호는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꽂아 넣었다.

“하지만 그렇게 흩어져봤자 답은 안 나올 텐데.”

그는 왼손으로 허벅지에 꽂힌 단검 다섯 개를 뽑고,오른손으로는 글록 17 을 뽑았다.

‘뒤에 있는 놈들부터 처리한다.’ 휘익!

서준호가 흩뿌린 다섯 개의 단검이 선이 되어 뒤쪽으로 날아가는 것과 동시에.

탕탕탕탕!

글록 17 의 총구가 불을 내뿜었다.

단검으로 다섯 마리,권총으로 네 마리.

눈 한 번 깜빡할 시간에 아홉 마 리의 난쟁이가 비명조차 남기지 못 하고 사라졌다.

-키,키으윽.

- 쿠라앙!

그쯤되자 남겨진 일곱 마리는 어깨


를 늘어트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 나기 시작했다.

“호오,공포까지 느낀다고?”

녀석들의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을 읽어낸 서준호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진짜 골 때리는 악취미인 데.”

전의를 상실한 몬스터를 마주했을 때,그것을 죽일 수 있는가 없는가.

이 시험은 플레이어에게 그러한 질 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 답은 하나지.”

서준호는 메고 있던 활을 뽑아들더 니,그대로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키,키에엑!

두려움에 이성을 상실한 난쟁이들 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가 기 시작했다.

난쟁이는 체격이 작고 왜소한 만 큼,날렵하기 때문에 초보 궁수들에 겐 악몽 같은 존재다.

‘하지만 나에겐 무기술의 달인(A) 이 있거든. 길베르토가 활과 총기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고.’

길베르토 그린은 5 영웅 중의 한 명.

잿빛사신이라고도 불리던 총잡이 다.

‘녀석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는 없 지.’

쭈우우욱.

서준호가 활의 시위를 당기자,난 쟁이들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저 자식들은 홀로그램 주제에 삶에 대한 애착이 오리지날 이상으로 강 하다.

서준호는 한쪽 눈을 감고 움직이는 대상을 정조준했다.

시위를 당기고 있는 그의 드로잉 폼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완벽한 T 자 형태를 취한 순간.

쇄애애애애액!

예고없이 쏘아진 화살이 난쟁이의 뒤통수를 파고들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난쟁이가 지그 재그로 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었 다.

하지만 서준호는 이에 만족하지 않 았다.

재빠르게 어깨 너머로 넘어간 손은 새로운 화살을 시위에 걸쳤다.

피잉,핑! 피이잉!

세 발의 화살이 연달아 날아갔고, 세 개의 폴리곤이 만들어졌다.

“후우.”
그것으로 활을 내려놓은 서준호는 마지막으로 검집을 어루만졌다.

‘마지막은 역시 이 녀석이지.’

검은 그가 가장 오래 사용했던 무 기이자,가장 자신 있는 무기다.

- 키아아악!

도망쳐도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일까.

마지막으로 남은 세 마리의 난쟁이

들은 붉게 충혈된 눈을 앞세우며 달 려들었다.

乂 O으 乂 O으

—I, ---- —I •

서준호는 난쟁이들이 가까이 다가 올 때까지 얌전히 검 손잡이만 어루 만졌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1 미터 앞의 바닥을 보며,그곳에 가상의 선을 하나 그었다.

그것은 자신의 검이 닿을 수 있는 최장의 사정거리임과 동시에,난쟁 이들의 ‘생명선’이다.

-캬아아악.

-크라악!

달려온 난쟁이들이 몸이 생명선을 넘어선 순간.

입꼬리를 말아올린 서준호의 손바 닥이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선 넘었네?”

동시에 검집 속 철검이 빛살처럼 튀어나왔다.

스르릉! 서걱!

단 한 번의 강렬한 절삭음이 짧게 울려 퍼졌고,목이 날아간 난쟁이들 은 폴리곤이 되어 흩어졌다.

“그럼 죽어야지.”

누구나 감탄할 만한 실력을 선보인

서준호였지만,검을 잡은 손을 내려 다보는 그의 두 눈에는 껍껍함이 가 득했다.

‘감각이 많이 무뎌졌어.’

당연한 말이지만,전성기 때와 비 교하면 실력이 너무나도 줄어 있었 다.

아쉬운 부분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프네.”

짧은 시간 동안 한계까지 끌어올린 전신의 근육과 뼈마디가 비명을 지 르는 중이었다.


‘게이트를 다니기 위해선 어느 정 도 몸을 만들어야겠어.’

불쾌한 표정을 지은 서준호의 귓가 로,심사의 결과가 홀러나왔다.

•■하,합격…… 75 번 지원자,서준 호 님의 심사 합격을 통보합니다.

……대단해요.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옵니다.”

서준호의 심사가 끝났을 때,참관 인들은 들뜬 표정과 목소리를 감추 지 못했다.

평소에는 항상 도도한 자세로 의자

=1 앉아 있는 그들이,벌떡 일어나 게]창에 파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모습부터가 그들의 흥분을 대변해


주었다.

“제 눈이 틀렸군요. 단순히 어둑서 니를 따라하는 모방자가 아니었습니 다.”

“자신의 사정거리를 완벽하게 이해 한 창의 운용법부터 단검 투척과 사 격술,궁술. 마지막으로


담백하면서 도 절제된 검술까지•…“ 무기에 대 한 이해도가 남다릅니다.”

“심지어 신체 밸런스를 보십시오 눈대중으로만 봐도 근육량이 부족하 다 못해 처참한데…… 저런 레벨의

몸놀림이 가능하다니?”

참관인들의 입에서는 칭찬이 끊이 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때,심덕구와 마찬가지로 호들갑 을 떨지 않은 유일한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프로필을 보니…… 보유 능력은 무기 숙련 하나가 끝이로군요. 그것 도 겨우 D 등급.”

“……어?”

“D 등급이라고요?”

열띤 음성을 뱉어내던 참관인들이 마치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조용 해졌다.

‘서브도 아니고,하나밖에 없는 능 력이 D 등급이면 각 잡고 키우기는 좀 그런데.’

‘음,이건 그거로군. 보유한 능력 하나만 미친 듯이 파고든 노력 파……

‘과연. 본인도 스스로의 능력이 별 로라는 걸 알고 이 자격증 심사에 모든 걸 걸었던 건가.’

‘투자 대비 효율이 정말 안 나오는 부류잖아.’

‘하마터면 속을 뻔했어.’

이미 참관인들의 머릿속에서는 계 산이 모두 끝난 상태였다.

능력이 C 등급만 되었어도 길드로 스카웃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D 등급이라니?

물론 꾸준히 투자를 하고,운이 따 라준다면 최상급 플레이어가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하나 그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길 드’의 스카우터들.

‘도박에서 승리하면 그야 달콤하지 만…… 패배하면 그만큼 쓴 게 없 지.’

‘편한 길 놔두고 굳이 험한 길을 걸을 필요는 없어.’

'전투 센스가 탐나기는 하지만 내 가 데려가기엔 조금 찜찜하다.’

내가 먹기엔 좀 그렇고,남 주기엔 아까운 플레이어.

서준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계륵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 사실을 조용히 지켜보던 심덕구 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커피를 홀짝 였다.

‘이 정도면 준호를 영입해도 잡음 이 나오지는 않겠군.’

그는 자격증 심사에서 최고의 결과 를 보여주었다.

심덕구로서는 그를 제대로 밀어줄 ‘명분’이 생긴 것이다.

비록 길드 스카우터들은 잠재력이 낮다고 판단해서 그의 영입을 꺼리 는 중이지만…….

‘이쯤 되니 녀석이 보유한 능력들 을 숨긴 게 미안해질 정도야.’

서준호는 어둠과 서리,무려 두 가 지 속성을 다룰 수 있는 최상급 플 레이어다.

심지어 보유한 스킬들의 면면도 상 당하다.

당장 저들이 무기 숙련(D)으로 알 고 있는 것도,실제로는 무기술의

달인(A)이 아니었던가.

‘심사가 끝나면 유리창 청소나 해 야겠어.’

여유롭게 커피잔을 내려놓은 심덕 구의 입가엔 승자의 미소가 걸려 있 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07 화

새벽의 저주(1)

스스

—f—f.

오늘까지 결제해야 할 서류에 서명 을 마친 심덕구는 가볍게 책상을 정 리했다.

하루의 업무를 완벽하게 끝낸 그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낄낄낄낄. 아,이 소설 골때리네 진짜.”

그 밝은 표정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진상이 하나 보인다.

자신의 집무실 소파에 드러누운 채,과자와 콜라를 먹으며 소설을 읽고 있는 진상이.


‘가장 존경하는 플레이어 1 위,가 장 닮고 싶은 플레이어 1 위가……

정말 저런 녀석이어도 괜찮은 걸 까?

한숨을 푹 내쉰 심덕구는 그에게 다가갔다.

“뭐 보냐?”

“엉? 주인공이 사제인데 힐 안 하 고 칼질만 하는 소설.”

“미친 사제네.”

맞은편 소파에 앉은 심덕구는 손목 의 비타를 두드려 몇몇 자료들을 허 공에 띄웠다.

“이거나 봐. 네가 구해달라던 자료 들이다.”

“오?”

슬쩍 내린 책 너머로 엿보이는 서

준호의 눈빛이 빛났다.

탁! 그 즉시 책을 덮은 서준호는 자세를 바로하며 허공의 문서들을 읽어내렸다.

“이야,딱 내가 필요로 하던 자료 들이잖아? 역시 일처리가 깔끔하다 니까.”

기뻐 보이는 친구를 바라보는 심덕 구의 표정은 심란했다.

“됐고,대체 너한테 이런 자료들이 왜 필요한데? 설마 공략할 생각은 아니지?”

“당연히 공략해야지. 안 들어갈 거 면 귀찮게 자료 조사는 뭐 하러

해?”

“뭣?! 하지만……

심덕구의 흔들리는 시선이 허공의 자료들을 빠르게 훑었다.

그것들은 지난 25 년 동안 단 한 명도 클리어하지 못한,‘미공략 게 이트’들에 관한 자료들이다.

“……너 단 한 번도 공략된 적 없 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지?”

“게이트 안에서의 실패는 곧 죽음. 설마 내가 그걸 모를까.”

미공략 게이트에 들어간 플레이어 들은 시체조차 못 남기고 죽었다.

“그래봤자 저레벨 허접 게이트들인 데 뭘.”

“하긴,별도 안 붙은 게이트들이긴 하지……

“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서준호의 질문에 심덕구가 아,짧 은 탄식을 터트렸다.

“맞다. 이건 네가 잠들어 있을 때 생긴 개념이구나.”


그는 최대한 짧고 간략하게 설명했 다.

별 (S).

게이트에 입장한 플레이어 1 만 명

이 죽을 때마다, 해당 게이트에는 별이 하나씩 붙는다.

이 개념이 정립된 것은 17 년 전.

그 뒤로 별을 부여받은 게이트의 개수는 총 14 개였다고 한다.

“여태 2 만 명 이상이 실패한 게이 트는 없었으니 1 성 게이트가 최고 등급이지. 지금까지 11 개가 공략되


었고,남아있는 세 개의 게이트가 세계 3 대 미공략 게이트라고 불리는 중이다.”

“잠깐만,나도 1 만 명 이상이 실패 한 게이트를 몇 개 공략했는데?”

그가 어둑서니이던 시절,1 만 명

이상의 플레이어가 공략에 실패한 게이트가 몇 개나 있었다.

국내보다는 해외,특히 중국이나 인도처럼 인구수가 많은 나라에 있 는 게이트들이었다.

"내가 세 개…… 아니,네 개를 공 략했던가?”

“맞아. 공식적으로 어둑서니는 네 개의 별을 획득했어. 대충 1 성급 게 이트의 느낌은 알겠지?”

“응. 지금은 그걸 1 성급 게이트라 고 부르는구나. 확실히 들어갔을 때 의 느낌부터가 달랐지.”

다른 게이트와 비교하면 등장하는

보스 몬스터의 수준 자체가 다른 게 이트.

서준호가 기억하는 1 성급 게이트들 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잠깐만’ 내가 획득한 별이 네 개 뿐이라면 서리여왕의 둥지에는 별이 안 붙은 거네?”

“당연하지. 그녀는 1 만 명 이상을 죽이지 않았어. 너희가 둥지의 최초 도전자였으니까.”

덕구는 어깨를 으쏙거리며 말했다.

“덧붙이자면 현존하는 최고의 플레 이어,통칭 아홉 개의 하늘이라 불 리는 구천 Ul 天 9 도 회소 하나씩의

별은 가지고 있다.”

“……별명 한 번 유치하고 요란하 다,사람한테 하늘이 뭐냐.”

“크큭,너 지금 질투하냐?”

“질투는 무슨.”

서준호가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자신의 친구를 귀엽게 쳐다보던 덕 구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너 지금 고작 1 레벨이다. 아무리 별이 안 붙어 있다 해도,미 공략 게이트는 너무 무리수 같은
데?”

“덕구야. 혹시 이런 말 들어봤냐?”

서준호는 거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 켜들더니,양팔을 소파 머리 부분에 스윽 올렸다.

"폼은 일시적이지만,클래스는 영 원하다.”

“……본인 입으로 그런 말하면 안 부끄럽냐?”

“전혀. 사실인데 뭐가 부끄러워.”

애초에 공략할 자신이 없었다면 도 전조차 안 했을 것이다.

서준호는 사냥에 있어서만큼은,감 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철한 분석가 였으니까.

"뭐 그리 걱정이 많아? 게다가 미 공략 게이트는 협회 입장에서도 골 칫거리잖아?”

“……그건 사실이지만,그렇다고 친구를 위험한 곳에 보낼 생각은 없 다.”

“아이고야.”

서준호는 못 본 사이 걱정과 나이 만 많아진 친구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감동 받을 타이밍에 이런 말하는 게 조금 미안한데,나한테 이득이 되니까 가는 거야.”

“……이득? 무슨 이득?”

“게이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경험치 보상이 점점 증가하니까.”

몇 년 동안 공략이 안 된 미공략 게이트의 경우,누적된 경험치가 어 마어 마하다.

“야. 그래서 지금 그깟 레벨 좀 빨 리 올리겠다고 미공략 게이트에 들 어가겠다고?”

“그게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길이 니까.”

“그냥 평범한 게이트 공략하면서 안전하게 성장하면 안 되냐? 어차피 네 실력이면 성장 속도도 느리진 않
을 텐데.”

“느리지 않는 정도로는 부족해.”

서준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덕 구를 쳐다봤다.

“마인 놈들이 날 노리는 이상,시 간은 절대 내 편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레벨을 올 려야 돼.”

최소한 정체를 들키더라도,반격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강해져야 한 다.

‘차원 엘리베이터를 통해 2 층,프 론티어로 올라갈 수 있는 건 30 레

벨 이상의 플레이어뿐.’
30 레벨을 최대한 빨리 달성하는 것이 현재 서준호의 목표였다.

그의 진심을 전해들은 심덕구는 무 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이 짧았다. 네가 그런 종류의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줄이 야.”

‘사실 압박감이랑은 거리가 멀지 만.’

굳이 따지자면,감히 주제도 모르 고 자신을 노리는 마인들을 패주고 싶을 뿐이었다.

물론 서준호는 이제야 얌전해진 친

구의 착각을 굳이 고쳐주지는 않았 다.

“그럼 네가 처음으로 들어갈 게이 트는……

허공의 자료를 올려다보던 덕구의 한쪽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런,1 레벨에 갈 수 있는 미공략 게이트는 한 곳 밖에 없잖아?”

7 년 전에 출현한 이 게이트는 현 재까지 142 명의 플레이어를 먹어치 운 괴물이었다.

오직 ‘1 레벨’ 플레이어만 들어갈 수 있기에 초보자들의 무덤이라 불 리는 곳.

심지어 게이트의 이름 또한 섬뜩했 다.

“새벽의 저주라.”

게이트의 이름을 확인한 서준호가 어깨를 으쏙거렸다.

“이름만 보면 무슨 좀비라도 나올 것 같은데?”

“그거야 들어가기 전까지는 모르 지. 일단 공략 조건은 해가 뜰 때까 지 생존하는 거네.”

“별거 아니잖아.”

“하여튼 자신감 하나는……

물론 실력이 그 자신감을 뒷받침한

다는 것을 알기에,미워보이지가 않 는다.

스윽. 심덕구가 품에서 카드 하나 를 꺼내면서 내밀었다.

“여기에 네 계약금 넣어뒀다.”

플레이어 협회와 계약을 맺으면서 받게 되는 돈이었다.

서준호가 카드를 쥐는 순간,심덕 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넌 오늘부터 일 년 동안 내 부하 야.”

“웃어? 상전인 부하가 뭔지 제대로 보여줄게.”

계약금 2 억에 순수 연봉 15 억.
거기다 클리어하는 게이트의 수준 에 따른 추가적인 금액과 인센티브 까지.

서준호는 신인치고는 파격적인 대 우를 받으며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 다.

“아참. 그리고 네 집 말인더 L 당분 간은 협회에서 지내는 게 어떠냐? 이 건물엔 협회 소속 플레이어들을


위한 주거 공간이 있으니까.”

“나쁘지 않네. 여기서 지내면 안전 은 보장될 테니까.”

협회 건물에는 항상 백 명이 넘어

가는 플레이어들이 생활하고 있다.

게다가 건물 전체에 마법 방벽이 덧씌워진 상태.

웬만큼 미친놈이 아닌 다음에야, 이곳을 테러할 생각은 꿈도 못 꾼다 는 소리였다.

거기까지 계산이 끝난 서준호는 결 정을 내렸다.

“여기서 지내지 뭐. 대신 전망 좋 은 방으로 줘.”

“알겠다. 나중에 실적 더 쌓으면 아예 층 하나를 통째로 주마.”

“기대할게.”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심덕구는 구석에 놓여 있던 거대한 박스 하나를 껑껑 거리며 들고 왔다.

이마의 땀을 닦아낸 그가 눈짓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열어봐라. 네가 쓸 방어구니까.”

“방어구?”

눈을 반짝인 서준호가 냉큼 상자를 열었다.

안쪽에는 그가 선호하는 가죽 갑옷 세트가 하나 들어 있었다.

그는 갑옷을 들어보았다.

“……가볍네?”

이어서 손톱으로 갑옷 표면을 긁어 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질기기까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괜찮은데?”

“그럴 수밖에. 권 노야 작품이니 까.”

“뭐?!”

서준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 다.

권 노야가 누구인가?
오직 어둑서니 한 사람을 위해서만 망치를 들던 세계적인 야장이 아니

던가.

"그 영감 아직까지 살아계셔? 백 살은 되셨을 텐데?”

“올해로 아흔 여덟이다. 공방은 손 자에게 물려준 지 오래지만,아직 정정하시더군.”

“이야,그럼 장비만 받고 입 싹 닦 을 순 없지. 한 번 찾아가야겠어.”

당장이라도 출발할 기세였지만,심 덕구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이를 제지 했다.

"그건 안 돼.”

“뭐? 왜?”

"지금은 네 안전을 위해서 모든 걸 경계해야 하니까.”

“……너 지금 권 노야를 의심하는 거야?”

서준호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권 노야는 어떤 의미로는 그의 첫 번째 동료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였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건 권 노야가 아니야.”

심덕구가 그럴 리 있겠냐는 표정으 로 고개를 저었다.

“마인과 길드의 눈이 귀찮은 것뿐 이지.”

“……공방에 눈이 붙어 있구나.”

“그럴 수밖에. 어둑서니와 권 노야 가 밀접한 관계였다는 건 누구나 알 고 있는 사실이니까.”

어둑서니가 돌아온 이상,권 노야 의 공방에 감시가 붙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런 상황에서 서준호가 공방을 찾 아가 권 노야와 만난다면,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세계에서 권 노야와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 는 사람은 몇 없었으니까.

“흐음. 하긴. 이제 막 플레이어가

된 풋내기가 권 노야의 공방에 들어 선다면……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 겠어.”

“심부름꾼을 통해 방어구를 구매하 면서 권 노야에게도 현재 상황을 설 명해 드렸으니 이해하실게다.”

“과연.”

당장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안타깝기는 했다.

매번 툴툴거리는 꼬장꼬장한 영감 이지만,그와의 유대감은 돈독했으 니까.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레벨 좀 올 려서 찾아가는 수밖에. 게다가……

서준호가 슬쩍 자신의 앙상한 팔을 내려다봤다.


‘그 영감,잔소리 하나는 덕구 이 녀석을 뛰어넘는단 말이지.’

이 꼴로 찾아가면 잔소리가 몇 시 간이나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 상 대다.

서준호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 어났다.

“방어구는 잘 받을게. 무기는?”

“협회 창고에 제법 쓸 만한 것들이 있으니 자유롭게 사용해.”

커피로 입술을 축인 심덕구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게이트 공략은 언제쯤 갈 생각이냐.”

“본래라면 바로 다닐 생각이었는 데……

자격증 심사가 그의 생각을 바꿔놓 았다.

‘고작 난쟁이 스무 마리를 상대하 고도 체력이 그 모양이었어.’

게이트,그것도 아무도 클리어하지 못한 게이트라면 단언컨대 난쟁이 스무 마리를 상대하는 것보다 힘든


장소일 것이다.

“시간이 아깝지만,우선은 몸부터

만들어야지.”

"잘 생각했다. 기간은 어느 정도로 잡고 있는데?”

“최소한의 기준만 넘기면 되니 까……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던 서준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열홀. 그걸 목표로 하자.”

시간은 빛살처럼 흘러갔다.

* * *

남양주시의 천마산은 아슬아슬하게 안전지대에서 벗어난 곳이다.

그 때문인지 7 년 전,그곳에는 게 이트가 하나 생성되었다.

끼이이익.

게이트를 코앞에 두고 있는 천마산 주차장에 자율주행택시가 한 대 멈 춰 섰다.

차에서 내린 건 이십대 중반의 평 범하게 생긴 남자였다.

“여기인가.”

남자의 정체는 열홀 사이에 살이 조금 오른 서준호였다.


물론 그의 몸은 여전히 비쩍 말라 보였으나,형형하게 빛나는 눈은 열 흘 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준호는 눈앞에 자리한 4 미터 높 이의 푸른색 타원을 바라보았다.

‘게이트.’

알 수 없는 세계와 연결되는 미지 의 포탈.

몬스터와 함정이 도사리는 게이트 내부에서는 그 무엇도 믿어선 안 된 다.

‘믿을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

그리고 자기 자신을 ‘믿으려면’ 그

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실력이 뒤따라 야 한다.

서준호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지난 열홀간 미친 듯이 몸 을 만들었다.

‘제법 힘들었지.’

눈을 뜨는 순간부터 감는 순간까지 훈련을 쉬지 않았다.

심지어 식사조차 오직 영양소의 보 충만을 위해서 이루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단기간에 몸의 성능을 끌어올리려 면,그 정도 독기는 품어야 하는 법 이니까.

다행스럽게도 그 지옥 같은 수련의 결과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서준히

레벨 : 1

칭호 : 봄을 여는 자

근력 : 25 체력 : 27

속도 : 31 마력 : 18

비록 마력 수치를 올리지는 못했지 만,기존 21 이었던 근력을 25 까지 올렸고.

24 이던 체력과 26 이었던 속도는 각각 27, 31 까지 올랐다.

‘능력치는 성장하기 전에 최대한 많이 올려둬야 편하지.’

레벨과 능력치가 높아질수록 단순 한 트레이닝으로는 올리기 힘들어지 기 때문이다.

“자,그럼 가볼까.”

아무도 없는 황량한 주차장.

그곳에 정차되어 있는 자율주행택 시 한 대.

“냐옹.”
그리고 길고양이 한 마리.

서준호가 미공략 게이트,〈새벽의 저주>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것 은 그들이 전부였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08 화

새벽의 저주(2)

저벅.

서준호가 푸른색의 타원형 게이트 에 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가 몸을 담은 세계(世界)가 바뀌 었다.

말 그대로 시야부터 공기까지 모든

것이 바뀐 것이다.

“무덤가인가.”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이세계의 무덤 가.

밟고 있는 흙은 물론이고,자라난 나무와 잡초들까지 지구에선 볼 수 없는 것투성이었다.

서준호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했다.

“흐음…… 하아…… 흐음…… 하아 아……

지구의 어떤 곳에서도 마실 수 없 는 독특한 무게의 공기였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세포 하나하나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 기분이 서준호의 마음을 편안하 게 만들어주었다.

“……나도 슬슬 미쳐가나 봐. 이딴 곳에 와서 아늑함을 느끼다니.”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서준호가 입 을 열었다.

“게이트 정보.”

눈앞에 떠오른 홀로그램 창이 게이 트의 정보를 간단하게 표시해주었 다.

[새벽의 저주】

입장 조건 : 1 레벨 이하

인원 제한 : 10 명

공략 조건 : 해가 뜰 때까지 생존 난이도 : 보통

‘흠. 자료를 조사할 때도 느낀 거

지만,그리 어려운 조건은 아니야.’ 단순히 해가 뜰 때까지 살아남기만

치면 되는 간단한 조건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노을이 천천히

떨어지는 중이었다.

바깥과는 시간 축이 완전히 다른 게이트 내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딱 좋은 시간대에 왔어. 자료를 조사한 보람이 있네.”

서준호는 몸을 만드는 와중에도 게 이트에 대한 자료 조사를 게을 리 하지 않았다.

그 결과,아침 일찍 입장한 파티의 생존 시간이 가장 길었다는 것을 알 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아침 시간에 맞춰서 들어왔다.

。정오 이후로 들어온 파티들은 고 생 좀 했겠어.” "

플레이어는 첫 게이트를 공략하는 순간 바로 2 레벨이 되어버린다.

반면에 이 게이트의 입장 조건은 1 레벨 이하.

즉,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이전에 게이트에 가본 적 없는 생초 짜들뿐이다.

‘그런 초보자들이 생소한 환경에 서,게이트에 들어오자마자 전투가 시작되면……

그야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평소 실력의 절반 정도밖에 내지 못했겠지.

"과연 몇 마리나 나오려나.”

반면에 모든 준비가 완벽한 서준호 는 평소 실력의 100% 이상을 낼 자신이 있었다.

노을이 떨어지고,무덤가에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서준호는 별이 촘촘히 박혀 있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귀기 (鬼氣).’

무덤가 전체에서는 으스스한 기운

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주로 망자(Undead)들이 뿜어내는 기운으로,한 번 겪으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피부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이 느 낌. 개인적으로 별로 안 좋아하는 데.”

한숨을 내쉰 서준호는 별빛과 달빛 의 도움으로 무덤가를 둘러보았다.

달빛을 머금은 무덤가의 땅이 들썩 이기 시작했다.

과득,과악!

이어서 수십 개의 손아귀들이 흙바 닥을 뚫고나오기 시작했다.

“설마했는데,진짜 좀비잖아?”
서준호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뽑았다.

좀비들을 가장 쉽게 잡을 수 있는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바로 지 금이다.

“아냐아냐. 힘들게 나올 필요 없어. 그냥 거기 쭈욱 묻혀 있어.”

푹,푹!

서준호는 지상으로 기어 나오는 좀 비들의 머리를 아주 깨끗하게 뚫어 버렸다.

제 아무리 생명력이 질긴 좀비라지

만,뇌가 박살나면 움직일 도리가 없으니까.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머 릿수가 꽤 되는 것 같은데.’

심지어 지금은 인간의 시야가 대폭 줄어드는 밤 시간.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게이트에서의 밤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물론,어딜 가도 예외는 꼭 하나씩 있는 법이다.

[밤이 되었습니다. 사냥꾼의 밤(A) 이 발동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집니다.]

그 예외가 바로 서준호였다.

낮에도 이기고, 밤에도 이기는 플 레이어.

그가 완전무결의 플레이어로 불리 는 이유 중 하나였다.

“아,이제 좀 잘 보인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면서 안력 또 한 상승되었다.

덕분에 달빛에 의지하여 간신히 실 루엣만 보이던 좀비들이 자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야,생각보다 많네?”

서준호는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수 십 마리의 시체들을 바라보며,태연 자약하게 웃었다.

달빛이 깃든 무덤가에는 때 아닌 파티가 열렸다.

물론 일반적인 파티처럼 신나는 음 악도,폭죽도 없었다.

하지만 좀비의 목 썰리는 소리가

음악을 대신했고. 허공에 흩뿌려지 는 피가 곧 폭죽이었다.

-그어어어.
-으어어어.

좀비들을 상대하는 것은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우선 녀석들의 움직임은 웬만한 성 인보다 재빠르다.

‘게다가 이 녀석들은 방어조차 하 지 않아.’

자신의 팔다리가 날아가도 신경 쓰 지 않는 것이 바로 좀비다.

그들은 고통을 느낄 수 없기에,모

든 힘을 공격에만 쏟아붓는다.

살육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자들이 상대하기엔 최악이라는 소리다.

“너희들한텐 안 됐네. 난 경력 짱 짱한 신입이거든.”

물론 그들의 공격은 서준호의 옷깃 조차 스치지 못했다.

좀비들은 그저 상대에게 달려들어 서 물어뜯는 것이 공격 패턴의 전부 인 단순한 녀석들이다.

당연히 서준호에게 있어선 움직이 는 샌드백,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 었다.

“협회 검이 은근히 상태가 좋네.”

서걱!

협회의 플레이어들에게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무기는 생각보다 품질이 우수했다.

덕분에 좀비의 목을 베는 데 큰 힘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검신이 달빛을 한 번 반사시킬 때 마다,좀비의 목 하나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하지만 확실히 이 숫자는 거슬려.’

지금까지 확인한 것만 무려 사십 마리.

아무리 서준호라고 해도 사방이 포

위되어 검을 휘두토' 공간조차 나오 지 않는다면, 이 집요한 시체들에게 살점을 내어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물리는 순간 내 인생은 끝.’

때문에 그는 절대로 좀비가 자신의 배후를 차지하게 두지 않았다.

탕! 타탕!

좀비 세 마리가 그의 비어 있는 뒷공간을 파고드는 순간.

서준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몬 스터용 권총,글록 17 을 뽑아 방아 쇠를 당겼다.

미간에 총알이 박힌 좀비들의 머리

는 마치 물풍선처럼 터져 나갔다.
-그어어어어.

‘상대가 좀비라서 다행이야.’

오크 정도만 되어도 피부를 뚫으려 면 총알에 마력을 덧씌워야 한다.

하지만 썩은 시체가 상대라면,굳 이 마력을 담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것이 숙련된 플레이어가 좀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였다.

고통과 공포를 모르는 좀비는 ‘최 고의 병사’가 될 수는 있어도,‘최고 의 무기’는 못 되니까.

“자고로 최고의 무기라면 어떤 적

이든 죽일 수 있어야지.”

좀비는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를 만나는 순간,그 가치가 사라진다.

바로 지금처럼.

“후우우……

서준호는 시계를 힐긋 쳐다보았다.

세 시간.

전투가 시작된 이후 흐른 시간이었 다.

주변을 둘러보자 살아 움직이는 시 체는 고작 네 마리뿐이었다.

“슬슬 돌아가서 샤워하고 싶으니까 빨리 덤벼.”

-그으으으어.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걸까?

옆에서 엄청난 입 냄새를 자랑하는 좀비 한 마리가 나타났다.

이에 서준호는 찌푸린 표정으로 손 을 들더니,녀석의 아래턱에 총구르 바짝 갖다 대었다 s

“다음 생엔 양치질 잘 하고 ” 타아아앙!

그는 상대가 쓰러지는 것을 확인하 지도 않고,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검을 뿌렸다.

스아악!

-그으어…….

-엇……?

좀비 두 마리의 머리를 사선으로 베어버린 검은 그대로 서준호의 손 을 떠났다.

쐐애애액! 터어엉!

마지막 좀비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 은 검은,그러고도 힘이 남아 뒤쪽 의 나무에 박혔다.


이후 몇 번 꿈틀거리던 좀비의 몸 이 축 늘어졌다.

“끝났네.”

나무에 박힌 검을 회수한 서준호는 묻은 피를 털어내며 조용해진 무덤 가를 둘러봤다.

만약 권총을 안 들고 왔었다면,조 금 귀찮아졌을 것이다.

싸우는 와중에도 꾸역꾸역 올라온 좀비의 수는 도합 오십 마리가 넘었 으니까.

“……흠.”

무언가 석연잖은 표정을 지어보인

서준호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상태 창을 확인했다.

게이트 공략 경험치를 받기도 전에 레벨이 두 개나 오른 상태였다.

‘역시 미공략 게이트에 온건 탁월 한 선택이었어.’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사실에 미 소가 번지려던 순간.

“누구…… 누구 있으세요?”

어디선가 미약한 목소리가 흘러나 왔다.

동시에 미소가 싹 가신 서준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목소리라고?’

여자 목소리였다.

그것도 숨이 끊기기 직전의 미약한 호흡이 섞인 거친 목소리.

심지어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한국 어.

“어딥니까!”

“사,사람……? 이쪽! 이쪽이에요! 흑흑,감사합니다……

목소리에선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아 주 강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거의 다 쉬어가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

다.

“이 밑에 계신 거 맞습니까?”

“네네…… 저 여기 있어요……

무덤가 끄트머리에 세워진 묘비.

목소리는 그 아래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서준호는 두 손을 이용해 묘비를 덮은 흙을 모조리 걷어냈다.

그러자 고동색 나무로 만들어진 깔 끔한 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틀 전에 친구들이랑 게이트에 들어오셨다고요?”

“네…… 미공략 게이트를 다녀오면 이름을 크게 날릴 수 있을 거라고 해서…… 흑흑.”

“저런,무모했네요.”

가볍게 혀를 찬 서준호는 안타깝다 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잘 안 들려서 그 러는데,소리 한 번만 크게 질러주 실래요?”

“……소리는 왜요?”

“그냥 해주세요.”

그의 부탁에 잠시 머뭇거리던 관 속의 여인은,있는 힘껏 소리를 질

렸다.

“아아아아!”

“그 정도면 충분해요.”

서준호는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듯, 밝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머리가 밑에 있구나.”

이어서 순식간에 권총을 뽑아낸 그 는 관 아래쪽을 향해 주저 없이 방 아쇠를 당겼다.

탕! 탕탕탕탕!

탄창 하나를 완전히 비워낸 서준호 가 검을 뽑았다.

그때는 이미 박살난 관 뚜껑이 열

리며 피를 철철 흘리는 ‘무언가’가 기어 나오는 중이었다.

“그으윽…… 어떻…… 어떻게 알

온몸에서 악취를 풍기는 괴물은 꽤 나 억울해 보였다.

그럴 만도 하다.

7 년 동안 수백 명의 플레이어를 상대하면서,정체가 들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을 테니까.

서준호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괴물 의 미간에 검극을 갖다댔다.

“난 원래 남을 잘 안 믿어. 그것도 게이트 안쪽에서는 더더욱.”

푸우욱!

가볍게 밀어낸 검은 괴물의 미간을 그대로 파고들었다.


서준호는 축 늘어지는 시체를 바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게이트 안에 생존자 따위 가 있을 리 없잖아.”

단 한 명의 플레이어라도 남아 있 는 이상,닫힌 게이트는 절대로 열 리지 않는다.

아마 저 괴물에게 당한 초보 플레 이어들에게도 이 정도 상식은 가지 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가 슴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르지.’

좀비 떼를 쓸어버린 후,서준호는 무언가 석연잖음을 느꼈었다.

‘오십 마리가 넘는 좀비는 확실히 위협적이기는 하지만, 플레이어가 열 명이나 모이면 상대 못 할 정도


는 아니야.’

그런데도 이 게이트는 무려 7 년이 라는 시간동안 공략되지 않았다.

서준호는 여기서 무언가 찜찜함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트릭커 (Tricker)가 있었다 면 납득이 간다.’

트릭커는 좀비 따위보다 훨씬 강력 하고,먹어치운 대상의 기억까지 소 량 흡수할 수 있다.

아마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 었던 것도,수많은 한국 플레이어를 먹어치웠기 때문이겠지.

“몬스터 주제에 머리 잘 썼네. 악 취를 감추려고 관에 숨기까지 하다 니.”

물론 이번에는 그 안에 숨어 있다 가 아무것도 못 하고 죽었지만 말이 다.

띠링,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플레이어를 적대하는 몬스터가 모 두 죽었습니다.]

[공략 조건을 충족한 것으로 간주 됩니다.]

[새벽의 저주 공략에 성공했습니 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 상승했습니다.]

[잃어버린 마력 능력치가 4 복구되 었습니다.]

확실히 미공략 게이트의 경험치 보

상은 짭짤했다.

게다가 잃어버렸던 능력치의 일부 가 복구되었다.

‘5 레벨 단위로 잃어버린 능력치가 복구되는 건가? 그리 많이 오르는 건 아니지만……

그게 어디인가,
서준호는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 한 마력이 네 개나 올랐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무언가를 더 갈구하는 것처럼 여전히 반짝였다.

“여기서 끝나면 미공략 게이트가 아니잖아. 그렇지?”

그 말에 맞장구라도 치듯,추가적 인 메시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09 화

새벽의 저주(3)

[클리어 보상으로 새로운 능력,‘죽 은 자의 고백(C)’을 획득했습니다.]

[한 시간 후 게이트가 자동 소멸됨 니다.]

능력이라고?”

아무리 미공략 게이트라지만 보상 으로 능력이 나오다니?

기껏해야 레어 등급의 재료가 나올 거라는 서준호의 예상이 완전히 빗 나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추측이 빗나간 서준호는 불 쾌하기는커녕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 다.

‘시작부터 새로운 능력이라니,운 이너무 좋잖아?’

이런 식의 오답은 백번이라도 환영 이다.

서준호는 곧장 능력의 효과를 확인 했다.

[죽은 자의 고백]

등급 : c

효과 : 대상의 기억이 담겨 있는 영상을 재생합니다. 단,죽은 생물에 게만 시전할 수 있습니다.

“……죽은 생물의 기억이 담겨 있 는 영상이라고?”

그렇다면 사이코메트리와 비슷한 ‘기억영사’의 능력일 가능성이 높았 다.

하지만 발동 조건은 그보다 훨씬

더 까다로웠다.

‘즉,대상의 기억을 볼 수는 있지 만 죽은 경우에만 사용이 가능하다 는 건가.’

경우에 따라서는 큰 효과를 누릴 수도 있겠지만 결코 만능의 능력은 아니었다.

동시에 왜 이런 능력이 게이트 보 상으로 지급되었는지가 짐작되었다.

‘트릭커 때문이야.’

트릭커는 죽은 자의 기억을 흡수하 는 몬스터.

보통 게이트의 공략 보상은 이처럼 등장하는 몬스터와 관계된 무언가를


줄 때가 많았다.

“어떤 식으로 사용할지는 차차 연 구를 해봐야겠네.”

중요한 점은,어둑서니에게는 없었 던 새로운 힘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예전보다 더 강해진다고……?”

본인조차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보던 서준호는 피곤한 미소를 지었다.

별이 촘촘하게 박힌 밤하늘을 보 자,시원한 맥주 한 캔이 간절하게 생각났다.

하지 말라는 일을 하는 사람은 어 디에나 꼭 한 명씩 있다.

남양주 시민 최만득(37 세,독신, 남)이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오호홍,공기 좋은 산을 오르는 것이 건강에 최고인데,이 좋은 걸 왜 못 하게 하냐고.”

천마산에 게이트가 생겨난 이후, 플레이어 협회는 시민들의 접근을 통제했다.

하지만 그 넓은 지역을 모두 봉쇄

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

의지의 사나이 최만득은 결국 협회 의 눈길을 피해 산을 오를 수 있는 코스를 발견해 냈다.

“크으,오늘도 공기가 달달하구나, 달아!”

새벽의 맑고 신선한 공기를 폐부 가득 채운 최만득은 흐르는 땀을 수 건으로 닦았다.

그는 천마산 게이트가 보이는 나무 에서 등산을 멈추곤 했다.

‘아무래 그래도 게이트에 너무 가 까이 가는 것은 위험하니까 말이 야……

오늘도 어김없이 반환점인 나무에 도착한 최만득은 슬쩍 고개를 들었 다.

“응?”

잠시 게이트 쪽을 바라보던 그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뭐여,저쪽에 있던 시퍼런 게이트 가…… 오늘은 왜 안 보여?”

설마 오랫동안 플레이어가 들어가 지 않아 개문(開門)이라도 된 것일 까? e

등골이 오싹해진 최만득이었으나 냉정하게 생각을 하곤 고개를 흔들 었다.

'그럴 리가 없지. 만약 정말 개문 이 된 것이라면,협회의 경보가 울 려도 진작 울렸을 테니.’

그렇다면 게이트가 안 보이는 이유 는 뭘까?

잠시 고민하던 최만득은,침을 꿀 꺽 삼키곤 천천히 게이트 쪽으로 걸 음을 옮겼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것이다.
잠시 후 게이트가 있던 장소에 도 착한 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어,없잖아?”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있던 게

이트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 다.

“공략…… 게이트가 공략된 거다!”

순간 기자로 일하고 있는 친구가 생각난 최만득은 손목의 비타를 두 드렸다.

“어어,두칠아! 잘 지냈냐? 너 오 늘 나한테 술 한잔 사야겠는데?”

[속보! 초보자의 무덤이라 불리던

‘새벽의 저주’ 게이트,하룻밤 사이 소멸.]

[미공략 게이트를 클리어한 플레이 어는 대체 누구?]

[물망에 오른 길드 소속 유망주들, ‘나는 아니다’ 잇따라 부인.]

“나원,하여튼 저 녀석 온 뒤로 세 상이 시끄러워졌다니까.”

중얼거리는 심덕구의 표정은 이례 적으로 밝았다.

미공략 게이트 하나가 사라지자 앓 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했기 때문 이다.

‘게다가 길드 녀석들이 당황하는 걸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고 말이 지.’

대형 길드에서도 미공략 게이트에 는 쉽사리 도전을 하지 못했다.

정말 재능 있고 아끼는 유망주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위험한 곳에 보 내지 않았고,실력이 어중간한 길드


원 역시 그런 곳에 보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흠. 준호야. 이거 정말 안 밝힐 거냐?”

기사를 보던 심덕구가 아쉬운 표정 을 지으며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대단한 플레이어 가 협회 소속의 서준호라고 발표하 고 싶었지만,당사자가 이를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참아. 아직 때가 아니야.”

“하지만 너무 아쉽잖아. 이걸 밝히 는 순간 넌 화제의 신인으로 급부상 하고 몸값도 확 치솟을 텐데?”

“아이고,넌 여전히 이런 부분은 약하구나.”

서준호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넌 왜 사람들이 명품을 선호한다 51 생각해? 어차피 중국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건 똑같은데.”
“..그야 비싸니까?”

“맞아. 아무나 가질 수 없다는 점 이 명품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시켜 주지,

“그래서 명품이 되시겠다?”

“그냥 명품이 아니야.”

서준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모두가 사고 싶어 하지만 살 수 없는,마치 전설의 콜라보 한정판 같은 존재가 되어야지.”

“……한마디로 사람들의 애간장을 살살 태우시겠다. 이 말이군.”

“이제야 뭘 좀 알아듣네.”

심덕구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

“넌 가끔 보면 성격이 너무 나쁘다 니까. 혈액형도 드지?”

“설마. 그리고 생각보다 그렇게 오 래 끌 수는 없을 거야.”

이미 미공략 게이트가 하나 소멸되 었다.

여기서 눈•치 빠른 사람들은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혹시 다음에도 미공략 게이트에 나타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남아 있는 미공략 게이트 앞에서 대기를 할 터.

그때가 되면 서준호와 심덕구는 손 한 번 안 대고,아주 자연스럽게 정 체를 드러낼 수 있다.

“격 떨어지게 내 입으로 새벽의 저 주 그거 제가 공략했어요! 나 대단 하죠? 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자기가 언제부터 격 같은 걸 챙겼다고.”

심덕구가 한껏 투덜거렸으나,서준 호의 계획이 좋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미담이나 영웅담은 당사자

가 스스로 떠벌리는 것보다는 제삼 자의 입을 통해 알려지는 것이 훨씬 효과적 이 었으니 까.

“뭐,알겠어. 특별히 필요한 건 없 고?”

“하나 있어.”

서준호가 들고 있던 스케줄표 하나 를 흔들었다.

“이제 국내에는 미공략 게이트가 두 개밖에 안 남았어.”

“잘된 거 아니냐?”

“물론 국가 입장에서는 잘됐겠지. 하지만 이렇게 되면 내가 사냥할 곳 이 마땅치 않아.”


■로•••••• 그럼 해외 쪽 게이트를 알 아보는 건 어떠냐?”

“아마 그래야 될 것 같아 어차피 다른 나라도 미공략 게이트들 때문 에 골치 아파하지?”

“그야 물론이지.”

심덕구는 이따금씩 타국의 협회장 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기에 그들의 상황을 잘 알았다.

‘우리나라는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편이야.’

중국이나 러시아,미국처럼 국토가 넓은 나라에는 아직도 많은 미공략 게이트들이 남아 있다.

‘그들은 자국의 미공략 게이트들을 없애고 싶어 하고……

서준호는 미공략 게이트에 들어가 고 싶어 한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니 그를 파견 보내는 것에 잡음이 일어날 리 없다.

그것도 무료 봉사가 아니라,막대 한 의뢰비를 받고 생색까지 내면서 파견 보낼 수가 있다.

“……그 부분은 나한테 맡겨. 내가 최고의 조건을 받아낼 테니까.”

자신이 활약할 때라고 생각했던 것 일까.

심덕구의 두 눈이 묘하게 반짝였 다.

파들파들.

서준호의 팔은 경련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의 몸에서 비 오듯 흘러내린 땀 은 연무장 바닥을 훙건히 적신 상태 였다.

“칠십…… 이……

한 쪽 팔로 물구나무를 선 그는

천천히 푸쉬 업을 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도 허리가 올곧게 펴진 것이,신체 밸런스가 얼마나 뛰어난 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칠십…… 하아,하아……

몸을 지탱하는 오른쪽 팔이 금방이 라도 터질 것 같았지만,서준호는 이를 악물고 버렸다.

‘여기서 뛰어넘어야 한다.’

체력과 정신이 한계라는 벽과 마주 했을 때,그 벽을 뛰어넘는 것.

그것이 자신을 한층 더 높은 곳으 로 이끌어줄 것임을 잘 안다.

때문에 서준호는 온몸의 힘을 쥐어 짜내어 오른손에 밀어넣었다.

“으아아아! 칠십삼!”

비명을 내지른 그의 몸은 다음 순 간 그대로 무너졌다.


저릿저릿한 오른손을 시원한 해방 감이 휘감았다.

동시에 그의 표정에도 산뜻한 미소 가 드리워졌다.

[근력 능력치가 1 상승했습니다.]

이틀 밤낮을 훈련한 결과,기어코

근력 능력치를 하나 올린 것이다.

과거에 몸을 극한까지 단련한 이후 로는 맛볼 수 없었던 짜릿한 기분이 었다.

“허억…… 흐어어……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거칠게 뱉 어낸 서준호는 잠시 후 어기적거리 며 상체를 일으켰다.

생수통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 그 는 벽에 등을 기댄 채,비타를 두드 렸다.

그러자 원하는 자료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과거 인도의 신성조차 실패했던 국내 최장 미공략 게이트,과연 공 략은 언제?]

[미공략 게이트 ‘리우프의 화원’, 정말 이대로 괜찮은가?]

[점점 커져가는 게이트의 균열. 개 문이 멀지 않은 모습이다.(사진 첨 부)]

[속보! 리우프의 화원 124 차 공략 실패. 입장 플레이어 전원 사망.]

[새벽의 저주를 공략한 플레이어, 혹시 리우프의 화원에도 도전하나? 관심 조명.]

“……흠.”

관련 자료들을 조사하던 서준호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리우프의 화원이라.’

9 년전 발생한 이 게이트는 한국에 서 가장 오래된 미공략 게이트였다.

때문에 정부와 협회에서는 이 게이 트를 공략하고자 별 수를 다 썼다.

‘공략 시 정부 지원금 인당 10 억에 협회,길드 가입 우대라……

게이트 하나를 공략하는 보상치고 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정예 파티들이

당당하게 출사표를 던지고 게이트로 들어갔다.

결과는 124 전 124 패,0 승.

리우프의 화원은 인간들에게 함락 당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래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거구나.’

서준호는 관련 자료들을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과거의 한국 플레이어 협회는 국내 에서 게이트를 공략할 인재가 없다 고 판단하고 해외로 눈길을 돌렸다.

‘결국 막대한 의뢰비를 바치고 초 빙한 것이 인도의 신성. 티차르 비 쉬.’

서류에 기입된 정보에 따르면,그 의 재능은 매우 훌륭한 편이다.

의심이 많은 서준호는 그의 활동이 담겨 있는 영상을 몇 개나 돌려보았 다.

‘좋은 플레이어야.’

나쁜 습관도 없고,화살 하나는 정 말 기가 막히게 쏜다.

자신이 보아왔던 그 어떤 궁수보다 도 ‘재능’이 뛰어난 녀석이다.

‘이대로 쭉 성장했으면 그린을 뛰 어 넘었을지도.’

하지만 그는 실패했다.

게이트에서의 실패는 곧 죽음.

22 세의 창창하고 앞날이 밝던 플 레이어는 그렇게 유품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안타까운 일이지.”

그것은 한국에게도,인도에게도 뼈 아픈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던 서준호는 연무장에 세워놓은 창을 들어올렸다.

“무기는 이걸 가져가야겠어.”

창은 상대와의 거리만 확보하면 절 대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사기

적인 무기다.

‘게다가 리우프라면 방어력이 단단 하고 공격 범위가 넓기로 소문난 몬 스터.’

검은 리치가 짧을 것이고,총알로 는 리우프의 외피를 뚫을 수 없다.

“상태창.”

서준호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서준히

레벨 : 5

칭호 : 봄을 여는 자

근력 : 30 체력 : 31

속도 : 35 마력 : 26

조금 전에 근력 스탯을 하나 을리 면서,마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30 대에 들어섰다.

‘이 정도 능력치면 웬만한 10 레벨 플레이어보다도 뛰어난 편이야.’


아마 지금의 서준호보다 강한 5 레 벨 플레이어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 을 것이다.

심지어 마력 수치가 26 이 되자 서 리 능력도 제법 다룰 수 있게 되었

다.

“실전에서는 처음 사용하는 건가.”

미공략 게이트 도전을 앞둔 자의 두려움? 긴장감?

연무장 거울을 통해 비춰진 서준호 에게선 그런 모습을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까기 직전 의 아이처럼.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10 화

리우프의 화원(1)

리우프의 화원은 강원도 평창군 진 부면 척천리라는 오지에 위치에 있 었다.

지구에 안전지대가 생기면서,사람 이 사는 곳 주변에는 게이트가 발생 하지 않은 탓이었다.

끼이이익.

시골에 들어선 자율주행택시가 멈 추자,안쪽에서 인상을 잔뜩 찌푸린 남자가 걸어 나왔다.

“에이씨,매일마다 이게 무슨 개고 생이야……

카메라를 챙긴 남자가 투덜거리자, 먼저 와있던 기자들이 친근하게 손 을 들었다.

“여어,정 기자! 왔어?”

정 기자라 불린 남자는 양손으로 제 팔뚝을 비비며 그들에게 달려갔 다.

“예. 어후,그나저나 오늘도 춥네 요. 매일 이게 무슨 고생들이십니

까.”

。내 말이. 애초에 새벽의 저주를 공략한 사람이 리우프의 화원도 략한다는 보장이 있냐고.” °

“없죠. 그냥 대형 언론사보다 먼저 기사는 내고 싶고,마땅한 기삿거리 는 없으니 저희 같은 아랫사람이나


굴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에이씨,내가 서러워서 하루빨리 실적 쌓고 메이저 언론사로 이적한 다.”

기자들의 입에서 상사에 대한 험담 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러던 중,한 대의 자율주행택시

가 또 비포장된 도로 위에 들어섰 다.

“……응? 기자가 또 오나 본데?”


“그러게요. 불쌍한 사람이 하나 더 오네요.”

“피차 불쌍한 처지인건 같은데,가 서 인사라도 나누죠?”

택시에서 내린 것은 스무 살 중반 정도로 보이는 어린 남자였다.

그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게이트를 확인하고는 그쪽으로 걸어 갔다.

“어,어어? 저 사람 지금 게이트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뭐? 미친 거 아냐? 당장 막아!”

서둘러 달려간 기자들이 남자의 앞 을 막아섰다.

통행에 방해를 받은 남자는 뚱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봤다.

“뭐예요?”

“아니,뭐긴요. 지금 설마 저 게이 트로 들어가시려고 하신 겁니까?”

“그런데요.”

“하……

깊은 빡침을 느낀 기자 하나가 한 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줘 봐요.”

“예?”

“아,플레이어 자격증 좀 줘보라고 요.”

이에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자격증을 슥 보여주었다.

“서준호…… 플레이어?”

“잠깐만요. 이 사람 자격증을 딴지 아직 2 주밖에 안 됐는데요?”

“환장하겠네. 이봐요 당신,지금 당 신이 들어가려고 한 곳이 대체 어디 인지는 압니까?”

“리우프의 화원.”

“그걸 아는 양반이 저길 들어가겠

다고?”

기자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 며 서준호의 행색을 살폈다.

입고 있는 장비의 품질은 제법 좋 아 보였지만,그의 몸은 자신들보다 도 허약해보였다.

‘뭐야,앙상하게 마른 몸은.’

‘정말 플레이어 맞아?’


‘일단 체술 쪽에 특화된 플레이어 는 아닌 것 같네. 마법사인가?’

‘밥은 먹고 다니는 거겠지?’

기자들은 은연중에 그를 무시했다.

그때,서준호의 행색을 살피던 기

자 하나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입을 열었다.

“응? 이 창에 박혀 있는 이거,플 레이어 협회 마크잖아?”

“진짜네? 혹시 협회 소속이쇼?”

“그런데요.”

“아아,그렇구나아?”

짧은 탄성을 흘린 기자는 순식간에 주변의 다른 기자들과 눈빛을 교환 했다.

척 보기에도 어수룩해 보이는 이 남자를 이용하면,상부에서 그토록 원하던 특종 기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녹음기를 켠 기자들이 운을 띄우기 시작했다.

“어유,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고생 이 참 많네.”

“협회 소속이면 주변에서 무시도 많이 받죠?”

“글쎄요,잘 모르겠는데.”

서준호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부정 하자,기자가 그의 어깨를 팡팡 치 면서 친근감을 표시했다.

“에이! 그쪽이 내 동생 같아서 불 쌍하니까 이러는 거야〜 오늘도 봐. 새벽부터 택시타고 이 깡촌에 혼자
와서 게이트 들어가는 거. 이게 말

이 되는 대우야? 안 그래 정 기 자?”

“어우,말도 안 되는 대우죠. 길드 소속이었으면 상상도 못 했을걸요?”

“그렇지? 대체 협회에서는 무슨 생 각으로 이런 애를 미공략 게이트에 들여보내는 거야?”

‘……아하.’

기자들의 어설픈 연기를 지켜보던 서준호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들이 대체 무슨 기사를 쓰고 싶 어서 안달이 났는지 훤히 보였기 때 문이다.

‘협회가 미공략 게이트에 플레이어

를 강제로 집어넣는다는 기사를 쓰 고 싶나 본데.’

게이트는 일종의 폭탄이다.

사람이 일정 주기 이상 들어가지 않게 되면 강제로 개문(開門)되기 때문이다.


게이트가 터지면 안쪽에 있던 몬스 터들이 세상에 홀러나오는 것도 당 연한 수순.

안전지대는 게이트 생성을 막아주 는 곳이지,몬스터의 침입까지 차단 시켜 주는 곳이 아냐.’ "

당연히 협회 입장에서는 미공략 게 이트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싫다는 사람의 등을 억지로 떠밀어 들여보낼 수도 없는 법이니까.

그것이 이런 기레기들이 꾸준히 음 모론을 제시하는 이유였다.

‘그것도 사실 확인만 되면 특종이 나 다름없는 음모지.’

대한민국 플레이어의 인권을 보호 해야 할 협회가 앞장서서 플레이어 를 사지로 몰아넣는다?

이런 구설수에 오르기만 해도,수 많은 길드가 협회를 물어뜯을 것이 뻔했다.

‘하여튼 옛날이나 지금이나. 꼭 기 레기들이 문제예요.’

팩트는 뒷전으로 미뤄두고,대중들 이 좋아할 만한 자극적인 소재로 기 사를 쓰는 자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한 기사에는 어떠한 철학도,객관적인 시선도 없 다.

서준호는 예전부터 이런 놈들을, ‘진짜 기자’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진 기자의 손을 툭 쳐낸 서준호는,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직업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부터 피곤해 진 서준호는 뒷목을 가볍게 주물렀

다.

“응? 말 좀 해봐. 협회에서는 대체 뭐라고 하면서 여기로 보낸 거야?”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는데,이건 협회의 강압을 받았다는 것으로 해 석해도 되는 거겠지?”

그 와중에도 눈치 없는 기자들은 마이크를 흔들며 그의 신경을 긁었 다.

결국 참다못한 서준호는 인상을 찌 푸렸다.

“꺼져.”

“……뭐,뭐?”

다짜고짜 욕설을 들은 기자들이 멍 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거물급 플레이어라고 해도, 언론사를 등지는 경우는 없다.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스타플레이 어란 결국 이슈 메이킹으로 만들어 지기 때문이다.

“지,지금 국민의 목소리를 대표하 는 기자들에게. 꺼지라는 욕설을 하 신 것 맞습니까?”

“아니,이 자식이 동생 같아서 충 고 몇 마디 해줬더니,아주 맞먹으 려고 드네.”


“너 이런 식으로 막 나가면 사회에

서 매장되는 거 알아,몰라! 어?!”

화가 난 기자들은 적반하장으로 큰 소리를 치며 눈을 부라렸다.

그 모습이 웃기다 못해 한심해 보 인 서준호는 마력을 가볍게 끌어올 렸다.

“기자? 내 앞에 기자가 어딨는데.”

서준호의 몸에서 폭발적인 살기가 홀러나오자,기자들이 몸을 움찔거 렸다.

능력치는 바닥까지 떨어졌을지언 정,숱한 사선을 넘나든 자의 살기 다.

사무실에서 키보드만 두드리던 배

나온 돼지들이 버틸 수 있을 리 만 무했다.

‘으으…… 무슨 사람 눈빛이……

‘기삿거리 하나 건지려다가 진짜로 죽겠는데 이거.’

‘이거 순 또라이 아냐?’

결국 꼬리를 내린 기레기들은 슬그 머니 뒤로 물러섰다.

그들을 바라보는 서준호의 얼굴에 는 짜증이 가득했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짜증나게 만 드네.”

예전에는 자신의 앞에서 이런 개소

리를 늘어놓는 기레기들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몇 놈이 그런 짓 을 하다가,세계적인 지탄을 받고 언론사까지 문을 닫은 뒤로는 없었 다.

‘아아,그리운 옛날이여.’

새삼스럽게 신세가 처량해진 서준 호는 한숨을 푹 내쉰 뒤,곧바로 게 이트를 건너갔다.

우우웅.

푸른빛을 뿜어내던 게이트가 이내 붉은색으로 바뀌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기자들이 너도 나도 입을 열었다.

뭐,뭐야.”

“게이트가 붉은색이면…… 진짜로 게이트가 잠긴 거잖아?”

“정말 그냥 들어갔다고? 죽을지도 모르는데 유언조차 안 남기고?”

그들의 얼굴 위에 떠오른 황당함 은,차츰 분노로 바뀌었다.

“아니,그런데 저 새파랗게 어린놈 의 새끼가?”


“저거저거,완전히 망나니 같은 놈 아닙니까?”

“이거야말로 국민들이 알아야 하는 부분 아닐까요? 서준호 플레이어의

몰상식한 실태!”

“어디 어른들 앞에서 눈 시퍼렇게 뜨고 말대꾸를 따박따박…… 에이 잉,나 때는 말이여……!”

한참이나 욕설을 내뱉으며 씩씩거 리던 기자 하나가 돌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난 오늘은 그냥 철수할란다.”

“……예? 아니 그래도 형님. 게이 트에 플레이어가 들어갔는데 결과도 안 보고 가신다고요?”

“이걸 굳이 볼 필요가 있어? 왜? 설마 저 망나니 같은 놈이 공략에 성공할까 봐?”

코웃음을 친 기자가 게이트를 노려 봤다.

“저놈 저거,어차피 안에서 죽어. 그걸 뭐 하러 기다리고 있어?”

“하긴•"… 미공략 게이트이니 성공 확률은 굉장히 희박하죠.”

“희박한 게 아니라 그냥 없다니까. 이건 부장 놈도 뭐라고 못할걸?”

그의 말에 혹한 기자들은 하나둘씩 짐을 챙기며 떠날 채비를 했다.

그들도 서준호의 독설로 기분이 잔 뜩 상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저쪽 휴게소에서 국밥 한 그릇씩

들 들자고.”

“그렇게 하시죠. 기분이 영 안 좋 으니,술이나 마시고 품시다.”

각자의 차에 을라탄 기자들은 울퉁 불퉁한 시골 길을 빠져 나가기 시작 했다.

마지막으로 차에 타던 기자가 문득 게이트를 돌아봤다.

‘그런데 이렇게 철수했다가 만약 게이트 공략이 성공하면 어떻게 되 는 거지?’

그는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서준호라는 놈이 게이트 공략 에 성공한다면,아마 그에게 마이크

를 내미는 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그는 명실상부 모두의 주목을 받는 슈퍼 루키가 되어 있을 테니까.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기자는 피식 웃음을 홀렸다.

“에이,무슨 소설도 아니고.”

그는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 고 확신하며 차에 올라탔다.

“예쁘네.”
리우프의 화원에 들어선 서준호가 첫 감상을 뱉어냈다.

눈앞에는 미국 헌팅턴 도서관에서 나 볼법한 아름다운 화원이 있었다.

드넓은 화원에는 형형색색의 거대 한 꽃들이 보기 좋게 올라온 상태였 다.

누가봐도 칭찬을 늘어놓을만큼 화 려한 꽃들을 바라보며,서준호가 말 을 이었다.

“예쁜 쓰레기들이네.”

만약 리우프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

이 그 말을 듣는다면,단번에 반발 할 것이 분명했다.

대체 저 꽃들을 보고 어떻게 쓰레 기라고 할 수 있냐고 방방 렬 테니 까.

하지만 저 꽃은 해가 지면 최악의 몬스터로 변한다.

그것이 바로 꽃(Flower)에서 기인 한 몬스터,리우프(Rewolf)였으니까.

부응,붕.

서준호는 들고온 창을 가볍게 휘둘 렸다.

“예전에 내가 쓰던 창과 비교하 면…… 많이 안 좋아.”

그건 당연한 소리였다. 그가 애용 하던 창은 무려 유니크 등급의 무기 였으니까.

이 창은 그것에 비하면 디자인도 투박했고 무게 중심도 살짝 어긋나 있었다.

무기를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서준 호가 볼 때,빈말로도 좋은 무기라 말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뭐,나니까.”

호기롭게 중얼거린 그는 창을 화려 하게 돌렸다.

지난 이틀간의 연습을 통해 창의 무게에 대한 적응은 끝낸 상태였다.

“게이트 정보.”

[리우프의 화원]

입장 조건 : 5 시 0 레벨

인원 제한 : 4 명

공략 조건 : 모든 몬스터의 제거 난이도 : 어려움

“흠.”

리우프의 화원은 최대 네 명까지

들어올 수 있는 게이트였다.

그래서인지 이 게이트에 혼자 들어
온 사람은 서준호가 처음이었다.

‘인도의 신성조차 자신의 팀원 세 명을 이끌고 들어왔었지.’

같은 팀원이라면 필시 손발이 잘 맞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실패했다는 건,이 게이 트에 뭔가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

서준호의 시선이 화원 너머로 향했 다.

그곳에는 넝쿨과 나뭇가지가 엉키 고 엉켜서 만들어진 3 미터 높이의 미로가 세워져 있었다.

‘저기에 뭔가 함정이 숨겨져 있겠 지.’

서준호는 꽃들을 밟지 않고,흙길 만 따라걸으며 화원 중앙의 벤치에 앉았다.

이제 리우프가 활동을 시작할 때까 지 얌전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전자책 사놓길 잘했네.”

벤치에 드러누운 서준호는 비타에 저장해 놓은 판타지 소설을 읽었다.

독서는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 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11 화

리우프의 화원(2)

해가 졌다.

이를 확인한 서준호는 비타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차,슬슬 오겠네.”

리우프는 꽃의 모습을 띈 몬스터 다.

하지만,일반적인 꽃과는 구조가 정반대였다.

우선 아름다운 꽃잎이 발바닥에 붙 어 있었고,줄기 부분은 위를 향해 있다.

굵고 질긴 줄기가 몇 번이나 꼬여 사람의 형상을 취한 몬스터가 바로 리우프.

“지금처럼 어두운 밤에 보면 꼭 사 람처럼 보인다니까.”

그래서 놈들에게 붙은 별명이 바로 꽃귀신이 었다.

[밤이 되었습니다. 사냥꾼의 밤(A) 이 발동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집니다.]


서준호는 감각이 예민해지자 눈을 감고 모든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훈련의 성과를 확인해 볼 요량이었 다.

쩌적,쩌저적.

땅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우프는 햇빛이 내려찍는 낮 시간 에는 땅에 들어가 꽃잎을 위로 향하

고 먹이를 유혹한다.

그가 꽃을 밟지 않고 흙길로만 다 녔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멋모르고 리우프의 근처를 돌아다 니는 순간,줄기에 묶여 땅속으로 끌려가지.’

밤이 되었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 다.

놈들은 달이 뜨면 땅에서 기어나와 스스로 먹잇감을 찾아 배회하니까.

“리우프. 단단하고 질긴 줄기 때문 에 방어력은 상당하지만……

속도가 느리고,약점도 명확한 몬 스터다.

바로 발바닥에 붙어 있는 꽃.

그것이 리우프의 약점이었다.

“그런데 겨우 두 마리라,환영 인 사치고는 너무 싱거운데?”

서준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 만,예리하게 벼려진 감각이 주변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왼쪽에 하나,오른쪽에 하나.’

파악을 마친 그는 순식간에 창대의 아래와 위를 붙잡고 왼쪽으로 달려 나갔다.

쿠드득,쐐애애액!

리우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간

을 향해 팔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온다.’

서준호는 앞쪽의 공기 흐름이 변하 는 순간.

창대를 바닥에 박아 넣고 장대높이 뛰기 선수처럼 뛰어올랐다.

후우우웅!

그 동작 한 번으로 서준호는 두 가지 전술적 이점을 획득했다.

하나는 리우프의 공격을 완벽하게 피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1.5 미터.’

창술에 최적화된 거리를 차지했다 는 것이다.

심지어 방금 전 공격을 날린 리우 프는 완벽한 무방비 상태.

후우웅!

자세를 낮춘 서준호의 몸이 팽이처 럼 회전하며 땅을 창대로 쓸었다.

과득! 한쪽 다리를 강하게 얻어맞 은 리우프의 몸이 뒤로 살짝 기우는 순간.

‘지금이다.’

그대로 달려나간 서준호의 어깨가 녀석의 가슴을 들이박았다.

쿠웅! 리우프가 육중한 소리를 내 며 넘어졌다.

‘뒤로 두 걸음 정도인가?’

저벅,저벅.

서준호가 뒤쪽으로 여유롭게 물러 섰다.

동시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리우프 의 팔이 딱 두 발자국 앞의 공간을 베고 지나갔다.

‘오늘 컨디션 괜찮네.’

빙그레 미소를 지은 서준호는 그립 을 바꿔 창대의 중앙 부분을 붙잡았 다.

동시에 그의 마력 회로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마 힘 조절은 안 될 거야. 실전 에서 사용하는 건 나도 처음이라.”

입 밖으로 나온 단어가 흩어지기도 전에 주변의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 했다.

쩌저적!

서준호의 창날 위로 서리의 기운이 덧씌워졌다.

때마침 감겨 있던 그의 눈도 천천 히 떠졌다.

두 눈이 드디어 암순응(暗順應)을

끝냈다는 뜻이었다.

서준호는 자신의 창을 빤히 내려다 보았다.

‘서리여왕이 쓰던 거랑 똑같이 생 겼어.’

당연하다. 이 능력은 서리여왕의 힘 그 자체니까.

“기분이 참 묘하네.”

한때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적의 능 력을 사용하는 기분이란,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묘했다.


‘감상은 여기까지. 슬슬 위력을 확

인해 볼까.’

서리 능력은 연무장에서 몇 번이나 사용해 봤다.

하지만 실제 몬스터를 상대로 위력 을 확인한 적은 없었다.

즉,지금이 ‘서리’ 능력의 위력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시간이다.

파아아앙!

바닥에 쓰러진 리우프가 예고 없이 팔을 날렸다.

서준호는 가볍게 몸을 숙임으로써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차락!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나가는 순간, 그의 이두근이 힘 차게 부풀었다.

“흐읍!”

다음 순간,시원하게 뻗어나간 창 이 공기를 꿰뚫었다.

쩌저적! 퍼석!

순식간에 내지른 두 번의 창격은 누워 있던 리우프의 발바닥,즉 꽃 잎에 적중했다.

서리의 힘은 꽃잎과 닿는 순간 그 것을 얼려 버렸고.

얼어버린 꽃잎을 다시 강타했을 때,그것은 수십 개의 얼음 결정이 되어 깨져 버렸다.

소리를 낼 수 없는 리우프가 자신 의 고통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마치 도마 위에 오른 활어처럼 펄 떡거리던 녀석의 몸이 이내 축 늘어 졌다.

[리우프를 처치하셨습니다.]

“……죽었다고? 벌써?”

서준호의 입에서 떨떠름한 목소리 가 홀러나왔다.

아무리 약점을 노렸다지만,리우프

는 단단하기로 유명한 몬스터가 아 닌가?

한데 공격 두 번에 그대로 죽어버 리다니?

그의 두 눈이 시린 예기를 뿜어내 고 있는 창날로 향했다.

‘이거…… 효과가 좋아도 너무 좋 은데?’

얼려 버린 후에 깨트린다.
사실 그것은 꽃잎을 부시는 데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계속 쓰는 건 무리겠어.’

방금 전의 전투로 마력이 1/5 가

까이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다음번에는 마력을 조금만 써봐야 지.’

그러면 위력은 조금 떨어지겠지만, 기술의 유지 시간은 더 늘어날 것이 다.

생각을 정리한 서준호는 남아 있는 리우프를 쳐다보았다.

천천히 다가오던 녀석은 양팔을 베 베 꼬아 뾰족한 송곳처럼 만들었다.

“쌍창이라,멋있는데!”

칭찬을 듣고 신이라도 난 듯,리우 프가 두 개의 송곳을 그대로 내질렀 다.

후우웅! 서준호의 창이 물결처럼 유연하게 돌아가며 이를 막아냈다.

깡,까앙!

무기의 날카로움은 저쪽의 승리였 지만,창을 다루는 기술에 있어서는 서준호의 압승이었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리우프는 두 팔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섰다.

서준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 다.

쉬이이익!

서준호의 손이 순식간에 미끄러지 며 창대의 아래,거의 끄트머리 부

분을 쥐었다.

몸을 한 바퀴 돌린 그는 창에 회 전력을 가득 실어서,마치 몽둥이처 럼 휘둘렀다.

과드드득!

리우프의 관자놀이 쪽에서 장작을 패는 듯한 거친 타격음이 터져 나왔 다.

“역시 단단하네.”

사람이었다면 방금의 일격에 사망 했겠지만,리우프는 그저 머리를 한 번 털어낼 뿐이었다.

오히려 이 공격으로 화가 제대로 난 녀석은 두 개의 줄기창을 마구잡

이로 휘둘렀다.

‘느려.’

리우프가 아무리 단단한 몬스터라 지만,머리를 얻어맞았는데 충격이 없을 리는 없다.

실제로 녀석의 공격은 처음의 날쎈 속도를 모두 상실한 상태.


서준호는 가벼운 스텝으로 이를 피 하면서 카운터를 날렸다.

과드드득!

이번에는 횡으로 휘둘러진 창이 리 우푸의 관자놀이를 때렸다.

아까와 똑같은 장소였다.

“꽃은 말이야. 줄기가 꺾여도 죽 어.”

다시 한 번,이번에는 더 세게 휘 둘러진 창이 리우프의 관자놀이를 몇 번이고 연타했다.

과득,과득,과지직!

결국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리우프 의 머리 줄기는 그대로 꺾이더니 덜 렁거 렸다.

[리우프를 처치하셨습니다.]

한바탕 전투를 마친 서준호는 주변

을 돌아보며 긴장의 끈을 다시 조였 다.

“……그럼 그렇지. 겨우 두 마리로 끝날 리가 있나. 명색이 미공략 게 이트인데.”

우드득,우득.

땅에서 새롭게 기어나온 네 마리의 리우프가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 다.

‘몬스터 웨이브.’

몬스터가 마치 물결처럼 계속 몰려 오는 것을 표현한 단어다.

“과연 이번 파도는 몇 번이나 치려 나?”

부응,붕.

서준호는 여유롭게 창대를 돌리며 리우프들을 기다렸다.

아직까지 그는 땀 한 방울조차 흘 리지 않은 상태였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화원에서, 수십 마리의 무언가가 사람 하나를 쫓고 있었다.

‘왼쪽에서 공격 하나,뒤에서 셋, 앞에서 둘……

전후좌우.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확인한 서준호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적당히 좀 해라,이 새끼들아!”

참다못해 욕지거리를 뱉어낸 그는 곧장 오른손으로 창을 휘두르며 왼 손을 들어올렸다.

쩌저적!
순식간에 두껍게 얼어붙은 왼손은 훌륭한 방패가 되었다.

그 위로 리우프들의 공격이 폭격처 럼 떨어져 내렸다.

쩡,쩌저정!

얼음 방패는 무려 열두 번의 공격 을 막아내곤 산산 조각나며 깨졌다.

“ 으”

얼음 파편이 시야를 가린 순간,서 준호는 마력을 두 다리에 쏟아부으 며 바닥을 박찼다.

항상 마력의 절제를 중시하는 그답 지 않은 모습이었으나,상황은 그 정도로 급박했다.

쇄애액!

그가 몸을 날린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리우프들이 날카로운 공격을 쏟아냈다.

황급히 피한다고 피했지만 왼쪽 어 깻죽지가 찢기고,우측 옆구리에서 피가 튀었다.

“뭐 이런 개 같은 패턴이 다 있 어!”

서준호는 처음 두 마리의 리우프가 나왔을 때 코웃음을 쳤다.

이어서 네 마리의 리우프가 나왔을 때는 싱글벙글 미소까지 지었다.

하지만 그다음 여덟 마리의 리우프 가 나왔을 때부터 분위기는 싸해지 기 시작했다.

‘이거…… 설마 웨이브가 지날 때 마다 두 배씩 늘어나는 건 아니겠

지? 에이,그건 좀 에바지.’

하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그의 불길한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 다.

“에이씨,나는 왜 이딴 것만 잘 맞 추냐.”

네 번째 웨이브에선 열여섯 마리의 리우프가 튀어나왔고.

핵핵 거리며 놈들을 모두 해치운 순간,시키지도 않은 리우프 서른두 마리가 또 튀어나왔다.

“허억, 헉……

두 시간이 넘어가는 전투 끝에 그 의 숨은 턱밑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만약 평소에 체력 훈련을 게을 리 했다면,몸에 바람구멍이 나도 몇 개는 났을 터였다.

'살다살다 리우프 따위한테 궁지에 다 몰리네. 돌아가면 수련량 무조건 두 배로 늘린다.’

바짝 날이 선 서준호는 주변을 훑 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체력과 정신력이 한계에 다다른 지금,그의 전투 감 각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마치 온몸이 조그마한 틈에 끼이기 라도 한 것처럼, 전신의 감각이 날 카롭게 조여졌다.

“……후우.”
덕분에 잡념은 사라지고 집중력이 칼날처럼 예리해졌다.

이 집중력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 는 순간,목숨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온다.’

서준호의 몸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체력을 낭비하지 않는 절제된 몸놀 림이 비처럼 날아드는 공격들을 하 나씩 피하기 시작했다.

물론 상대의 공격을 마냥 피하기만 하는 것은 그의 성미에 안 맞았다.

쌔애애액!

그의 속도와 힘,분노가 고스란히 담긴 창이 휘둘러지며 리우프 네 마 리의 머리를 터트렸다.

“큭!”

물론 그 대가로 온몸에서 마력이 쭉 하고 빠져 나갔다.

순간적으로 얼굴빛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문제는 이러고도 리우프가 열다섯 마리나 남았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해야지.”

어차피 선택지는 없다.

못 하면 죽는 수밖에 없으니까.

서준호는 땀으로 미끌거리는 창대 를 꽉 쥐었다.

시간이 걸리고,체력도 많이 빠지 겠지만 여기서 이 녀석들을 모두 해 치워야 한다.

‘저 뒤쪽의 미궁으로 도망치면 당 장이야 편하겠지만……

그 안에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 을지 모른다.

심지어 그곳에 들어가면 이 녀석들 과 좁은 골목에서 싸워야 한다.

미궁은 방어력이 높고 팔이 쭉쭉

늘어나는 리우프들에게 최적화된 전 투 장소.

‘무조건 여기서 승부수를 던져야 돼.’

각오를 세운 서준호가 호흡을 터트 리며 땅을 거칠게 짓밟았다.

“하압!”

동시에 남아 있던 마력의 2/3 가량 이 썰물처럼 사라졌다.

쩌저저적!
효율을 포기하고 파괴력만을 극대 화시킨 얼음의 창날이 달빛 아래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30 초. 그 이상은 무리다.’

그것이 지금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시가 급한 서준호는 생각할 겨를 도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서걱!

서리 능력으로 강화된 창은 평범한 무기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날 카로워진 상태였다.

그 증거로 창날에 베인 리우프의 껍질이 두부처럼 잘려나갔다.

서준호의 두 눈이 시야를 가득 메 운 적들의 공격을 담았다.

‘.저 공격을 모두 피하면서 싸

우는 건 불가능해.’

기술은 충분했지만,시간이 부족했 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이제 25 초…… 24 초뿐.

서준호는 찰나의 순간 과감한 결정 을 내렸다.

‘육참골단 (肉祈骨斷).’

자신의 살을 내어주고 상대의 뼈를 취한다는 뜻이다.

그는 치명상으로 이어지지 않을 공 격은 과감하게 몸으로 받아내며 앞

으로 돌진했다.

핏! 좌아악!

그의 팔에서,허벅지에서,등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 미련한 돌진은 的초 만 에 리우프를 무려 아홉 마리나 처치 했다.

“하악…… 학,하악……

누군가 봤다면 감탄했을 만한 실력 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대단한 일을 단번에 해낸 서준 호의 몸에선 피와 땀이 비처럼 흘러 내리는 중이었다.

쩌저적.

서준호는 후들거리는 손을 들어 상 처 부위를 얼렸다.

‘이걸로 피가 더 흐르는 것은 막을 수 있겠지.’

남은 적은 딱 여섯 마리.

입에서는 단내가 풀풀 올라오고, 팔다리가 쉴 새 없이 떨렸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나에겐…… 봄을 여는 자가 있다. 이 악물고 버티면 이길 수 있어.’

봄을 여는 자 칭호에는 체력,마력

회복 속도 500% 상승효과가 붙어 있다.

서준호는 자신의 육방(A 方)을 점 거한 리우프들을 돌아보며,다시 한 번 창을 꼬나 쥐었다.

“……덤비든가.”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일 까.

여섯 마리의 리우프들이 그를 향해 공격을 날렸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12 화

리우프의 화원(3)

어둠이 물러간다.

성스러운 새벽의 여명이 화원을 밝 게 비추었다.

“하…… 존나 힘드네.”

꽃밭에 드러누운 서준호는 풀린 동 공을 들어 그 장엄한 모습을 쳐다봤

다.

“끄음차.”

창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난 서준호는,덜덜 떨리는 다리를 바닥 에 고정시키고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 다.

“……까딱하면 저세상 구경할 뻔했 어.”

화원의 곳곳에선 간밤의 치열했던 전투 흔적이 엿보였다.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서준호의 귓가를 울렸다.

[리우프의 정원을 공략하셨습니다.]

“……흠.”

서준호는 기뻐하기보다는,무언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게이트의 공략 조건은 모든 몬 스터의 제거.

물론 62 마리의 몬스터를 사냥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만 입장한 플레이어가 네 명 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한 사람당 15 마리 정도를 처치하

는 건 크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서준호는 턱을 어루만지며 깊은 생 각에 빠져들었다.

'나는 지난 9 년 동안 이 게이트에 들어왔던 플레이어 186 명의 정보를 모두 확인했어.’

그들 중 대다수는 초보자였지만, 개중에는 인도의 신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보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그 녀석 혼자서도 리우프 40 마리는 잡 았을 거야.’

함께 들어갔던 세 명이 어지간한 트롤이 아닌 이상,무조건 클리어해

야 정상이다.

“그런데 왜 실패했을까?”

분명 자신이 놓친 부분이 있다.

서준호의 미간에 골이 파이려는 순 간.

[클리어 보상으로 혈화(血花)를 획 득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 상승했습니다.]

[잃어버린 근력 능력치가 5 복구되

었습니다.]

[한 시간 후 게이트가 자동 소멸됨 니다.]

새로운 메시지들이 그의 눈앞을 어 지럽 혔다.

동시에 서준호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

사실 게이트의 클리어 보상에는 크 게 기대하지 않았다.

저레벨 게이트에서 주는 보상이야 어차피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뜬금없이 혈화가 나 오다니?

서준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 다.

‘운이 좋네.’

게이트에서 희박한 확률로 생성되 는 혈화의 씨앗은,사람의 피를 잔 뜩 머금어야만 발아한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바로 피의 꽃, 혈화(血花).

서준호도 소문으로만 들어봤지 직 접 획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이템 정보.”

인벤토리에서 혈화를 꺼내며 중얼 거리자,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혈화 (血花)]

등급 : 레어

내용 : 사람의 피를 머금고 영초가 된 기이한 식물. 꽃잎의 개수에 따 라 효과가 달라진다.

효과 : 달려 있는 꽃잎 하나를 먹 을 때마다 마력 능력치 ! 상승.

배시시.

서준호의 얼굴이 인자한 옆집 아저 씨처럼 푸근해졌다.

지금이라면 웃는 얼굴로 게이트 밖 의 기레기들과 대화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기로 혈화의 꽃잎은 일 년에 하나씩 생기는데……

이 게이트가 생긴 지는 9 년이 흘 렸다.

하지만 싹이 조금 늦게 렀는지,혈 화에는 아홉 개가 아닌 일곱 개의 꽃잎이 붙어 있었다.

“이게 어디야? 잘 먹겠습니다.”

서준호는 망설임 없이 혈화를 제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으적,으적.

입 안 가득 비릿한 피냄새가 퍼졌 다.

[마력이 1 상승했습니다.]

[마력이 1 상승했습니다.]

[마력이…….]

모든 꽃잎을 먹어치운 서준호가 입

맛을 다셨다.

“……맛은 최악인데 있으면 하나 더 먹고 싶네.”

그는 이것보다 더한 맛이라도 먹을 용의가 있었다.

“잠깐만,그럼 지금 내 능력치 가…… 상태창.”

[서준히

레벨 : 9
칭호 : 봄을 여는 자

근력 : 34 체력 : 35

속도 : 39 마력 : 37

간밤에 리우프들을 학살하고,게이 트까지 클리어했지만 레벨은 네 개 밖에 오르지 않았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요구하는 경험 치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레벨업으로 모든 능력치가 네 개 씩 올랐고…… 혈화를 먹어서 추가 마력이 일곱 개.’

불과 하룻밤 사이에 마력만 11 개 를 올린 것이다.

“당분간 마력 걱정은 한시름 덜겠

어.”

적어도 다음 전투는 훨씬 더 수월 해질 것이 분명했다.

싱긋 미소를 지은 서준호가 고개를 돌렸다.

“자,게이트는 클리어되었으니…… 여유롭게 핵을 챙겨볼까.”

부지런히 리우프의 시체를 돌아다 닌 서준호는 몬스터의 핵들을 인벤 토리에 담았다.

그는 이후로 게이트를 나가지 않 고,오히려 발걸음을 돌려 미궁 쪽 으로 향했다.

가까이서 올려다본 미궁은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높았다.

‘멀리서 봤을 때는 3 미터 정도 높 이인줄 알았는데,5 미터는 되겠는 데?’

높이가 주는 심리적 압박감이 상당 하다.

환한 아침에도 이럴진대, 어두운 밤에 리우프들에게 쫓기면서 이곳에 들어왔다면 어땠을까?

문득 어젯밤 이곳으로 도망치지 않 은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쩌저저저적.

미궁으로 들어선 서준호는,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끔 바닥을 조금씩 얼리면서 이동했다. "I

미궁 바닥에는 온갖 종류의 무기와 방어구들이 떨어져 있었다.

서준호의 두 눈이 무구들을 빠르게 선별했다.

‘저건 낡았고,저건 부서졌고,얼씨 구,저건 또 뭐야? 방어구 안쪽에 꽃이 피었잖아?’ "

그의 눈에 차는 무구는 좀처럼 쉽 게 보이지 않았다.

“으 ”
유.

잠시 후 막다른 길에 다다른 서_준 호가 낮은 신음을 홀렸다. I "

그곳의 벽에는 해골 하나가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수첩과 활 하나가 널브 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찾았다.”

자신이 찾고 있던 물건을 발견한 서준호는 천천히 벽 쪽으로 걸어갔 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활을 조심스럽 게 들어올렸다.

먼지로 뒤덮였지만 고장 난 곳은 없어 보이는 훌륭한 활이었다.

‘이게 폭풍접인가.’

화살을 쏘면 나비가 날갯짓하는 것 처럼 어지러이 날아가는데,그때 어나는 바람이 가히 폭풍 같다하 4


붙여진 이름이 바로 폭풍접 <).

“2 층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는 ‘지 평선의 끝’만큼은 아니겠지만…… 좋은 활이야.”

애초에 화살이 지평선 끝까지 날아 간다는 저격용 활,‘지평선의 끝’은 활을 광적으로 수집하는 마인의
손 에 들어갔다고 들었으니 자신과는 인연이 없는 무구다.

잠시 활을 쳐다보던 서준호는 고개

를 돌렸다.

이쯤 되니 이 해골이 누구인지 자 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티차르 비쉬.”

인도 출신의 유망주.

서준호는 그를 향해 가볍게 묵념했 다.

“고맙다.”

만약 그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면,죽기 전에 활을 인벤토리에 넣 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 레어 등급의 활은 세 상에서 영영 사라졌을 터.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유야 이 수첩에 쓰여 있겠지.” 서준호는 풍화되기 직전의 낡은 수

첩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안쪽에는 정갈한 필체의 알파벳이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건…… 일지네.”
그곳에는 티차르 비쉬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쓰여져 있었다.

수첩에는 날짜와 시간별로 일지가 기록되어 있었다.

서준호는 영어와 일본어,인도어에 능했기에 읽는 데 문제는 없었다.

-2044 년 4 월 7 일 오후 12 시 40 분.

한국으로부터 리우프의 화원을 공 략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고작 10 레벨인 나에겐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보상이 제시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만류했지만,이 기회를 놓칠

순 없다.

-2044 년 4 월 23 일 오후 4 시 12 분 떨린다.

내일이면 리우프의 화원 게이트에 들어간다.

연습 삼아 쏴본 화살들의 명중률이

높다.

느낌이 좋다.

-2044 년 4 월 24 일 오전 11 시 37

드디어 게이트 내부로 들어왔다.

함께 들어온 이들은 나와 1 레벨부

터 호흡을 맞춘 믿음직스러운 동료

들이다.

우리는 주변부터 살펴보았다.

이곳은 게이트 안쪽이라고는 생각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2044 년 4 월 24 일 오후 8 시 33 분

밤이 되자 땅속에서 꽃귀신들이 기 어 나왔다.

게이트 패턴은 몬스터 웨이브.

첫 번째 웨이브에서 리우프 8 마리 가 나왔다.

우리는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놈들 을 사냥했다.

하지만 두 번째 웨이브에선 16 마
리가 나왔고.

세 번째 웨이브에선 32 마리가 나 왔다.

네 번째 웨이브 때,64 마리의 리우 프를 목전에 둔 우리는 미궁 속으로 도망쳤다.

설마 저 녀석들을 처치하면 128 마 리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젠장,이 게이트는 단단히 미쳐 있 다.

-2044 년 4 월 25 일 오전 5 시 29 분

새벽이 밝았다.

빌어먹을 첫날을 무사히 보낸 것이

다.

우리를 쫓던 리우프들은 다시 땅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하지만 간밤에 피를 너무 많이 흘 린 동료 한 명이 죽었다.

……그를 위해 약소한 무덤을 만들 고 잘 묻어주었다.

맹세컨대,이 게이트에서 보낸 하 루는 내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2044 년 4 월 25 일 오후 7 시 12 부

이제 곧 해가 진다.

내일도 일지를 쓸 수 있기를.

파괴의 신 시바여,저희를 굽어살 피소서.

-2044 년 4 월 26 일 오후 2 시 48 분

전투가 끝나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손가락에 힘이 잘 안 들어가서 펜 을 잡는 것조차 힘들다.

간밤에는 전날에 사냥하던 모든 리 우프를 이어서 처치했다.

하지만 그 후로 다섯 번째 웨이브 가 시작되었고,무려 128 마리의 리 우프가 나타났다.

절대 과장이 아니다. 정말 128 마리

였다.

죽기 살기로 싸운 결과,이제 남아 있는 리우프는 40 마리밖에 안 된다.

그 정도는 오늘의 해가 지면 혼자 서도 모두 사냥할 자신이 있다.

내일이면 이 지긋지긋한 게이트에 서 나가는구나.


……잠깐만,설마 여섯 번째 웨이 브까지 있는 건 아니겠지?

-2044 년 4 월 26 일 오후 5 시 2 분

개새끼,미친새끼!

동료 중 한 명이 마인이었다.

대체 어떻게 우리를 감쪽같이 속였

던 거지?

녀석은 나를 배후에서 기습했다.

더럽고 비열한 마인의 목숨은 내가 거두었지만,전투 과정에서 왼쪽 손 바닥이 길게 찢어졌다.

왼쪽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래서야 활을 쥐는 것은 무리다

리를 듣고 뒤늦게 달려온 마지막 O 료의 안색이 하얗게 질 렸다 :: 우리 두 사람뿐이다. 오늘 밤 이


걱정된다.

일지를 거기까지 읽은 서준호의 눈 빛이 살짝 슬퍼졌다.

이후로 쓰여진 일지는 글씨체가 굉 장히 구불구불했기 때문이다.

마치 당시의 급박함이 글자를 통해 전해지는 것 같았다.

-2044 년 4 월 26 일 오후 6 시 58 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미 궁 쪽으로 도망쳤다.

부상을 입은 내 몫까지 싸우던 마 지막 동료가 리우프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젠장!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동시에 겁이 난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너무나 두렵다. 온몸이 덜덜 떨린 다.

정신을 차려보니 미궁의 막다른 길 이 나를 막고 있다.

오는 길에 미궁의 함정까지 밟아 한쪽 다리에선 피가 철철 나는 중이 다.

거동이 힘들다. 아무래도 여기가 내 무덤이 될 듯하다.

……멀리서 리우프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혹시 누군가가 이 수첩을 발견한다 면,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 해주기를…….

리우프들이 도착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는지, 일지는 약간의 시간을 두 고 다시 쓰여졌다.


서준호가 그것을 알아차린 이유는 간단했다.

밑에 쓰인 글자의 필체는 더 거칠 어졌고,더 짙은 원망과 분노를 담 고 있었으니까.

그곳에는 날짜나 시간조차 적혀 있

지 않았다.

-내가 만약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빌어먹을 마인 새끼들부터 모조리 씹어먹을 것이다.

인류를 좀 먹는 암덩이 같은 놈들.

시바 신이시여,제발 그들을 모두 지옥의 불구덩이에 처넣어주십시오.

이 티차르 비쉬의 영혼을 바치겠나 이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가엾은 전사의 복수를 해주십시오.

이후로는 두서없는 원망과 욕설들 이 수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게 무려 몇 페이지나 되었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는 다시 한 번 느낌이 변했다.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 럼,온전한 정신으로 쓴 글 같았다.

티차르 비쉬라는 사람의 평소 성정 을 담아낸 듯 깔끔하고 정갈한 필체 였다.

-2044 년 4 월 27 일 오전 12 시 1 분

저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이제 수첩과 펜을 내려놓고,잇몸 으로라도 시위를 당기려합니다.

전쟁의 여신이시여,궁술의 신이시 여.

다시 한 번 장엄한 나비의 기적을 저에게.

일지는 거기서 끝을 고했다.

“……아쉽게도 기적은 없었나 보 군.”

있었다면 안 죽었겠지.

동시에 서준호가 품고 있던 의문도 말끔하게 해결되었다.

‘이 게이트는 입장한 플레이어의 수에 따라 소환되는 리우프의 수가 많아지는구나.’

서준호는 등줄기를 짝아악 타고 올 라오는 소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약 자신이 허접한 플레이어 세 명과 함께 게이트에 들어왔다면?

다섯 번의 웨이브 동안 상대해야 하는 리우프가 총합 248 마리다.

“……그건 나도 자신이 없는데.”


특히 짐짝 세 개를 등에 업은 상 태에서는 더더욱 무리다.

‘혼자 들어오는 게 가장 이상적인

공략법일 줄이야.’

지난 9 년간 이 게이트에 혼자 입 장한 것은 서준호가 처음이었다.

선발대가 줄줄이 실패하자 잔뜩 겁 을 먹은 후발대는 네 명을 꽉꽉 채 워서 도전했기 때문이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서준호는 자 리에서 일어났다.

“끄응차.”

그는 인벤토리를 뒤졌다.

혹시나 싶어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을 찾기 위해서였다.

“여기 있네.”

딸깍! 졸졸졸.

서준호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싸구 려 양주를 따 해골 앞에 뿌렸다.

“힌두교는 윤회 사상을 믿는다지? 부디 좋은 곳에서 환생했기를 빈 다.”

서준호는 티차르를 위해 짧은 기도 의 시간을 가졌다.

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춘 그는 그 제서야 폭풍접의 정보를 확인했다.

[폭풍접 (暴風媒)]

등급 : 레어

화살의 관통력 250% 증가

날아가는 화살의 주변으로 거친 바 람이 생성됨

착용 제한 : 레벨 10, 근력 45, 속 도 45 이상

세상에 아무리 게임처럼 변했다지 만,무기에는 공격력 같은 것이 붙 어 있지 않았다.

그야 머리가 터지고 심장을 뚫리면 결국 너도 한 방,나도 한 방인 것 이 현실이었으니까.

“……훌륭하네.”

폭풍접의 효과는 끝내줬지만,서준 호는 평소처럼 기쁨을 드러내지 않 고 자중했다.

그것이 티차르 비쉬를 향한 예의라 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력과 속도 수치가 부족해서 당 장은 못 쓰겠어.’

물론 사용이야 가능하지만,착용 제한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아이템의 효과를 받을 수 없다.

서준호는 삶을 갈망하듯 하늘을 쳐 다보고 있는 티차르의 두개골을 내 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활은 잠시 빌려간다.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마인 놈들에게는 확실히 복수해줄게. 나도 그 새끼들 정말 싫어하거든.”

덜그럭. 마치 알았다고 대답이라도 하듯.

수년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을 티 차르의 두개골이 아래로 푹 꺼졌다.

“……그럼 잘 있어라,인도의 젊은 영웅이여.”

그를 등진 서준호는 곧장 게이트를 빠져 나갔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13 화

독특한 플레이어(1)

[이번에도 또? 미공략 게이트,‘리 우프의 화원’ 완전 소멸 확인.]

[인터넷 언론사 다수,공략자로 ‘서 준호’ 플레이어 지목.]

[서준호 플레이어,그는 과연 누구 인가?]

기사를 읽던 심덕구가 천천히 고개 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야. 이쪽에서 정보 하나 안 홀렸는데 사람들은 네가 공략자 라는 걸 알게 되었어.”

“그렇다니까.”

서준호는 협회장실 소파에 벌렁 누 워 있었다.

“아,소파 진짜 편하네…… 나 여 기 있는 초콜릿 먹어도 되냐?”

“……먹든가.”

옅은 한숨을 내쉰 덕구가 말을 이

었다.

“그리고 인도 정부에서도 고맙다는 서신이 왔더라. 네가 가져온 일지를 받은 티차르의 가족들이 펑펑 울었


대.”

“잘됐네.”

“네 덕분에 유품이라도 건져서 다 행이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아쉽다니 뭐가?”

심덕구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 표정 을 짓더니,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다. 이거 말하면 나더러 더러 운 세상에 물든 놈이라고 욕할 거

같아.”

“설마. 네가 세상에 찌들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데 왜 굳이 욕을 하 겠어?”


“……고마워서 돌아가시겠군.”

“그래서 뭐가 아쉬운 건데.”

서준호의 재촉이 이어지자 심덕구 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폭풍접 있잖냐. 티차르 비 쉬가 다루던 유명한 활. 그게 발견 안 되어서 아쉽다고.”

“응? 아…… 내가 말 안 했었나.”

초콜릿을 우물거리던 서준호가 인

벤토리에서 주섬주섬 폭풍접을 꺼내 들었다.

“자.”

“……어?”

멍한 표정으로 활과 서준호를 번갈 아가면서 쳐다보던 심덕구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너! 너,너……!”

“아씨 깜짝이야. 귀청 떨어지겠다.”

“야 인마! 숨길 걸 숨겨야지! 이거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외교 문제 생 기면 어쩌려고 그래?”

폭풍접은 인도의 게이트에서 발견

된 아이템이다.

국가에서 티차르 비쉬에게 ‘대여’ 해 준 물건으로, 소유권은 여전히 인도 정부에 있었다.

서준호가 심덕구를 스윽 쳐다보며 말했다.

“나에겐 그런 문제를 전문적으로 해결해 주는 친구가 하나 있어.”

“그게 설마 나는 아니지?”

“그 친구가 눈치는 참 빨라.”

“……하아,돌아가시겠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심덕구는 그 잠깐 사이에 한 달은 더 늙어 보였

다.

서준호는 그런 덕구에게 폭풍접을 스윽 내밀었다.

“내 활 구경할래?”

“지금 그런 걸 할 때가……

폭풍접은 인도 정부에서 국보로 삼 았을 정도로 대단한 활이다.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 것이 더 이 상한 수준.


가발을 벅벅 긁은 심덕구는 조심스 럽게 폭풍접을 집었다.

한참이나 이리저리 살피던 그가 저 도 모르게 감탄을 뱉어냈다.

“……야,확실히 대단하긴 하다. 인 도에서 국보로 삼을 만해.”

“그렇지? 하지만 함부로 쓰진 못할 거야.”

“그야 물론이지. 대외적으로는 티 차르 비쉬의 인벤토리에서 소멸한 물건이니까.”

“아니,내가 경계하는 건 인도가 아니야. 마인이지.”

“……마인?”

대화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심덕 구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말의 의미를

이해한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칼 시그너를 경계하는 거구나?”

서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궁(魔弓) 칼 시그너.

그는 활을 광적으로 수집하는 마인 이다.

‘게다가 대놓고 폭풍접을 가져가겠 다고 경고까지 남겼던 놈이야. 아마 티차르와 함께 게이트에 들어간 마
인도 그의 명령을 받은 거겠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폭풍접을 들 고 있다는 사실은 절대 들켜선 안 된다.

들키는 순간 시그너의 화살이 자신 을 향하게 될 테니까. "

‘지금쯤이면 기사도 봤을 거야., 서준호는 폭풍접을 발견하지 못했 다는 기사를 오피셜로 발표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칼 시그너는 활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마인이 다.

어쩌면 그 기사를 보고도 의심을 거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나를 의심한다면……

최소 13 레벨이 넘어야 입장할 수 있는 한국의 마지막 미공략 게이트.

자신이 그곳에 도전할 때,그는 반 드시 마인을 함께 집어넣을 것이다.

‘티차르 비쉬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서준호의 손이 폭풍접을 부드럽게 쓸었다.

잘하면 티차르에게 약속했던 복수 를 생각보다 빠르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인이 된다는


것.

세상에서 이것을 직접 경험해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의 공통점은 꿈만 같다는 벅찬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준호는 이미 비슷한 일을 숱하게 겪어본 적이 있었기에 놀라 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귀찮다는 표정으로 되 물었다.

“……기자들이 몰려왔다고?”

“그래! 마지못해 미공략 게이트를 클리어한 것이 너라고 인정하니까, 구름처럼 몰려왔더라.”

아침부터 서준호의 방에 찾아온 덕 구는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기자들…… 혹시 내가 게이트 앞 에서 만났다던 그 삼류 기레기들 같 은 녀석들 아냐?”

“아니,이번에는 대형 언론사들이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였어.”

“홈.”

두꺼운 솜이불에 몸을 돌돌 말아놓 은 서준호는 그제서야 고개만 빼꼼 내밀며 물었다.

“길드 애들은?”

“당연히 붙었지. 맛있는 냄새가 나

는 곳이면 빠지지 않는 게 길드 정 보부 아니냐.”

“……빅 6 애들도?”

“아서라. 너 아직 그 정도는 아냐.”

심덕구가 고개를 저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과 업적 들을 보유한 여섯 개의 길드.

통칭 빅 6 는 엉덩이가 무겁기로 소 문난 곳이다.

“하지만 너의 이름값이 계속해서 오른다면…… 그들도 결국 관심을 드러내겠지.”

“만약 내가 빅 6 의 러브콜을 받으

면……

“그때가 네 몸값이 떡상하는 순간 이지.”

서준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이거야 원. 갈 길이 먼데 왜 벌써 부터 난리래.”

“네가 내딛은 걸음들이 범상치 않 으니 이러는 거지. 한국을 골치 아 프게 했던 미공략 게이트를 무려 두


개나 클리어한 플레이어니까.”
의자에서 일어난 심덕구는 넥타이 를 고쳐 매며 말했다.

“아무튼 한시라도 빨리 알려주고 싶어서 직접 찾아왔다.”

“……그냥 문자를 보내라,문자를.”

“이런 사안은 얼굴 마주하고 말해 주는 게 예의야.”

“곤히 자는 사람을 깨우는 건 예의 가 아니라는 것까지 알면 참 좋았을 텐데……

툴툴거렸지만 이미 여섯 시간 이상 을 잔 상태였다.

몸의 피로는 진작 다 풀린 서준호 가 엉금엉금,솜 이불더미에서 기어 나왔다.

“흐아암,기자회견 한 번 해야겠 어.”

“그래? 시간은 언제가 편한데?”

“지금 당장.”

“……당장?”

멈칫한 심덕구가 그의 상태를 훑으 며 되물었다.

“씻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 겠어?”

“됐어. 남들 앞에서 멋있는 척,있 어 보이는 척하는 건 어둑서니 시절 에 지겹도록 했으니까.”

그때는 싫어도 그런 ‘척’을 해야 했다.

인류의 영웅,세계의 희망이 서툴

고 어수룩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되었 으니까.

“지금의 난 어둑서니가 아닌 서준 호잖아?”

“……뭐,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 게 해.”

덕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누이 말하지만 너는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 자격이 있어.”

“그렇게 살다가 문제 생기면?”

“협회 제명이지.”

“치사한 놈……

그게 농담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서준호는 피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 났다.

“먼저 내려가 있어. 난 세수 좀 하 고 갈 테니까.”

“세팅해놓을 테니까 30 분 안에만 내려와.”


덕구가 방을 나가자,서준호는 화 장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자 머리 위에는 제법 그 럴싸한 까치집이 지어져 있었다.

“내 인생이라……

어둑서니 때는 그저 앞만 보고 달 렸다.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이유도 없 었다.

어둑서니에겐 오직 분노를 표출할 몬스터만이 필요했으니까.

그 광기에 가깝던 분노를 잠재워준 것이 바로 동료들이었다.

‘빠르지만 급하지 않게. 여유롭지 만 결코 느리지 않게.’

스스로에게 당부를 마친 서준호는 세안을 마치고 파자마의 구겨진 부 분을 확확 폈다.

“흠,잘생겼네.”

거울 속 서준호에게선 어둑서니 시

절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나,빈 틈 하나 없던 모범적인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찾을 필요는 없겠지.’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는 자 유로운 삶.

그것이 서준호가 어둑서니 시절에 동경하던 삶이었으니까.

웅성웅성.

협회의 회견장에는 수많은 기자들

과 각종 길드의 정보부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첫 게이트로 새벽의 저주,두 번 째에 리우프의 화원 공략이라…… 이거 진짜 물건인데?”

“가끔씩 이런 녀석이 튀어나오지. 편하고 안락한 길은 스스로 거부하 는 다이나믹한 놈들.”

“소위 말하는 천재,뭐 그런 거겠 지?”

자리에 모인 이들의 눈동자에는 기 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에게는 서준호가 원석처럼 느 껴졌기 때문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원석들 중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원석은 좀처럼 없지.’

‘김우중이나 신성현처럼 한국이 또 한 명의 스타플레이어를 낳을 수도 있겠어.’

‘무엇보다 이슈 메이커로서의 자질 이 탁월해.’

‘요즘 1 층 플레이어에 대한 기삿거 리가 영 없었는데…… 잘됐군.’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서준 호는,정확히 30 분이 지났을 때 모 습을 드러냈다.


“나온다!”

“사진 찍어!”

찰칵,찰칵!

“응?”

“어?”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던 기자와 정 보부원들이 뒤늦게 의문을 뱉어냈 다.

서준호의 옷차림새가 너무 독특했 기 때문이다.

'뭐지? 저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입 을 법한 옷이야?’

‘혹시 요즘은 저런 옷차림이 유행 하나?’

‘저 남자…… 지금 기자회견 한다 는 건 알고온 거 맞겠지?’

파자마를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면 서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최초의 남 자.

거기에 까치집이 지어진 머리 스타 일은 화룡점정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잠깐만,진짜 플레이어 맞아? 나보다 약해 보이는데?’

‘저게 정말 미공략 게이트를 두 개 나 클리어한 플레이어라고?’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졸려

서 방으로 가야 할걸 회견장에 잘못 들어왔다거나……

패션은 그렇다 치고,서준호는 외 형마저도 그들의 기대와 크게 동떨 어진 모습이었다.

강인한 근육남,혹은 차가운 인상 의 킬러를 연상하던 이들이 하나같 이 병찐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당황을 금치 못했을 때,자 리에 앉은 서준호는 하품을 쩌억 뱉 어내며 입을 열었다.

“흐아암. 서준호입니다. 지금부터 30 분 동안 기자회견을 진행하겠습 니다. 먼저 질문하실 분?”

뒤늦게 정신을 차린 기자들이 너 나 할 거 없이 손을 들었다.

“게이트를 공략할 때의 상황을 자 세히 들려주시죠!”

“어떤 심정으로 도전하신 겁니까?”

“미공략 게이트로 데뷔를 하셨는 데,여기에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서준호는 자신을 어미새처럼 바라 보는 이들에게 순서대로 대답을 해 주었다.

“우선 새벽의 저주부터 말씀드리자 면 게이트 내부는 무덤가였습니다. 공략 조건은 다들 아시다시피 해가

뜰 때까지 생존하는 것이었는데


기자들은 서준호의 말을 그대로 방 아 적으며 실시간으로 기사를 작성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그들의 머리 를 채운 생각은 모두 똑같았다.

‘허풍은 좀 심한 편이군. 아무리 미공략 던전이라지만 오십 마리가 넘는 좀비를 상대했다니……

‘고작 1 레벨 초보자가 그 많은 좀 비를 모두 죽이고 트릭커까지 처치 했다? 이걸 누가 믿어?’

‘아마 배경은 심덕구겠지. 대중이

좋아할 만한 소재를 구상해서 대본 을 숙지시켰을 거야.’

‘뭐,그래도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자극적인 내용이니 상관없나.’

질문과 응답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 게 흘러갔다.

서준호가 마치 베테랑처럼 회견장 의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기 때문이 다.

이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기자들이 었다.

‘진짜로 기자회견이 처음인가? 마 치 이런 자리에 몇 번이나 나와본 듯한 솜씨인데.’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회견장에 처 음 나오면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는 데…… 보기보다 노련하군.’

‘한 마디로 타고났다.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겠어.’

물론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서준호는 그저 이런 자리를 셀 수 조차 없을 정도로 많이 겪어왔던 것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들의 착각은 서준호에게 도움이 되었다.

‘언뜻 보기엔 허약해 보이는 초보 플레이어,하지만 누구보다 대단한 일을 해냈다라……

‘거기에 파자마를 입고 회견장에 나타나는 나사 하나 빠진 성격까 지.’

‘보면 볼수록 캐릭터가 괜찮은데?’

‘당분간은 이 녀석을 위주로 기사 를 써나가면 되겠군.’

서준호는 기사 소재를 따는 것이 쉽지 않은 기자들에게 가뭄 속 단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14 화

독특한 플레이어(2)

서준호는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했던 30 분이 지난 현재,회견 장의 분위기는 더 이상 달아오를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괜찮네. 내일 신문은 볼만 하겠 어.’

기자들의 반짝거리는 눈을 확인한 서준호는 슬슬 마무리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질문 하나만 받을게요.”


그러자 기자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이 손을 번쩍 들었다.

“다음에 들어가실 게이트는 정하셨 습니까?”

“아뇨.”

대답은 칼처럼 돌아왔다.

마치 이 질문만 예상했다는 것처 럼.

“꼭 가고 싶은 게이트가 있는데,

아직은 레벨이 낮아서 못 가요.”

“레벨이 낮으셔서 못 가는 곳이 라…… 대체 거기가 어딥니까?”

기자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묻자,서 준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동해 게이트입니다.”

“그렇군요. 다음번에 꼭 공략하고 싶으신 곳은 동해 게이…… 예에?!”

기자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으나, 이를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회견장의 모든 사람들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서준호를 쳐 다보았다.

개중에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 닌가 싶어 옆 사람에게 재차 확인하 는 이들마저 있었다.

그들의 반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동해 게이트,그곳은 이제 한국에 남아 있는 마지막 미공략 게이트였 으니까.

“……사실 서준호의 행적을 떠올려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으음,확실히. 잊고 있었지만 그는 미공략 게이트를 두 개나 클리어한 플레이어니까.”

“대체 왜 예상도 못 하고 있었지?”

“그야 물론……

기자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서준 호에게 향했다.

살집이 조금 붙었다고는 하나 여전 히 비쩍 마른 몰골.

그리고 위압감을 뿜어내는 방어구 대신 대충 걸쳐 입은 파자마와 삼선 슬리퍼.

누가 봐도 동해 게이트에 들어갈 정도의 대단한 플레이어처럼 느껴지 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레벨만 오르면 또 다 시 미공략 게이트에 들어가신다는 소리입니까?”

“맞습니다.”

“놀랍군요. 만약 동해 게이트까지 클리어하신다면,무려 세 개의 미공 략 게이트를 공략하시는 겁니다.


실 현만 된다면 전대미문의 업적이 될 텐데요.”
가만히 듣고 있던 기자들도 하나둘 입을 열었다.

“동해 게이트의 입장 조건은 B 레 벨 이상. 1 층에서는 난이도가 높은 곳으로 손꼽히는데요.”

“벌써 공략에 실패한 플레이어가 8,715 명입니다. 머잖아 1 성급 게이 트가 될 거라는 말도 나오고 있어

요.”

“심지어 길드의 정보부에 따르면 보스 몬스터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 은 게이트입니다.”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실 자신은 있으십니까?”

"솔직히 무리하시는 게 아닌가 싶 습니다만……

서준호는 기자들이 부정적으로 반 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보스 몬스터의 유무는 크 지.’

보스 몬스터는 일반적인 몬스터와 는 차원이 다른 힘을 지니고 있다.

압도적인 힘과 뛰어난 지력으로 몬 스터들을 부리는 왕으로 군림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보스 몬스터였다.

서준호는 자신의 입끝만을 바라보 는 기자들을 보며,피식 웃었다.

“보스 몬스터,싸우면 제가 이깁니 다.”

25 년 전,‘무관의 제왕’이라 불리던 이의 과감한 발언이었다.

[‘보스 몬스터? 싸우면 내가 다 이 겨’ 서준호 플레이어 파격 발언 화 제.]

[지금까지 이런 발언은 없었다. 이 것은 오만인가 자신감인가. 화제의 신인,서준호.]

[서준호,‘공략 中 폭풍접은 발견 못 해’,다시 한 번 말뚝 박아.]

[다음 공략 장소는 신중히 선별할 것. 서준호 플레이어 개인지명 의뢰 폭주.]

[서준호 플레이어,가장 존경하는 플레이어는 누구냐는 질문에 ‘어둑 서니’라고 답해.]

길드 마스터의 집무실에 앉아 있던 남자는 조용히 읽고 있던 신문을 내 려놓았다.

그의 시선은 무려 신문 4 면 구석 에 실린,파자마를 입고 있는 서준 호를 담고 있었다.

“……4 면에 사진까지? 신인치고는 엄청난 대우로군.”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맞장구를 쳤다.

“미공략 게이트를 클리어한 효과를 톡톡히 본 것 같습니다.”

“1 층에서 재미있는 소식이 올라오 는 건 간만이군.”

빅 6 라 불리는 길드 중 한국인이 마스터로 있는 곳은 두 곳이다.


하나는 손채원이 마스터로 있는 정 숙한 달이었고,다른 하나가 신성현 이 이끄는 도깨비였다.

눈앞의 남자,신성현을 쳐다보던 도깨비의 부길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신경이 쓰이신다면,한 번 접촉을 해볼까요?”

“음? 아니,아직 그 정도는 아냐. 한참 멀었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은 신성현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 면 그걸 우연이라고 불러. 하지만 같은 일이 한 번 더 일어나면 그걸


뭐라고 부르지?”

“그건…… 실력이라고들 하지 않습 니까?”

“그렇지,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 라.”

신성현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세 번. 나는 같은 일이 세 번 정 도는 반복되어야 실력이라 생각한 다.”

“세 번이라…… 명심하겠습니다.” 부길마가 고개를 짧게 숙였다. 보스의 의중을 알아차린 것이다.

‘서준호라,앞으로 한 번 남았군.’ 만약 그가 앞으로 한 번 더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낸다면.

그는 비로소 도깨비 길드의 초대를 받게 될 것이다.

“이건 패스,아 이것도.”

“그럼 이건 어때?”

“음,나쁘진 않은데 안 땡겨. 그것 도 패스할게.”

서준호와 심덕구는 열심히 서류를 주고받으며 분류를 하는 중이었다.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들이 전부 서준호를 ‘개인지명’한 의뢰서였다.

“기자회견의 효과가 이렇게까지 좋 을 줄은 몰랐다. 너 지금 완전 인기 인이야.”

“덕구야,내가 인기 있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

“……재수 없는 놈.”

짜게 식은 눈으로 서준호를 홀기던 심덕구가 고개를 돌렸다.

현재 그들은 총 세 가지 조건을 위주로 서류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1, 게이트의 경험치 보상이 괜찮은 가.

2, 게이트의 난이도가 적절한가.

3, 의뢰인이 지급하는 보상이 괜찮 은가.


한참이나 서류를 정리하던 심덕구 가 가발을 긁적였다.

“홈. 조건이 세 가지나 있으니 은 근히 부합되는 의뢰를 찾기가 힘드 네.”

“솔직히 나는 세 번째 조건은 포기 해도 괜찮은데.”

“그건 안 돼. 이건 네 첫 번째 개 인지명 의뢰다. 이 의뢰가 향후의 몸값을 결정짓게 될 거야.”

“그런가? 내가 동해 게이트까지 공 략하면 몸값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 을 것 같은데.”

“하지만 플레이어의 이미지라는 건 굉장히 중요해. 1 억으로 의뢰할 수 있는 플레이어와 10 억으로 의뢰할

수 있는 플레이어. 그 격차는 생각 보다 크다.”

현재 서준호의 레벨은 9.

동해 게이트의 입장 조건을 맞추려 면 앞으로 레벨을 네 개나 더 을려 야 했다.

“음?”

그때,의뢰서 하나를 읽던 심덕구 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것을 서준 호에게 건넸다.

“준호야. 이건 어때?”

“어디 보자.”

그 의뢰서는 프린트로 대충 찍어낸 다른 의뢰서와는 달리,손 글씨로 직접 작성된 상태였다.

보는 것만으로 시원해지는 호쾌한 필체가 서준호의 눈길을 사로잡았 다.

하지만 의뢰서의 내용은 그리 시원 하지 못했다.

“흠. 불치병에 걸린 딸을 치료하기 위한 아버지의 의뢰라.”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약재 는 불꽃 호리의 내단이야.”

불꽃 호리.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보던 서 준호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

“예전에 한 번 잡아본 적 있지?”

“……어. 죽다 살아났지만.”

그때는 플레이어가 되고 반 년도 안 된 시점으로,지금 생각해보면 풋내기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현재 불꽃 호리가 나오는 게이트가 있나? 나도 활동하면서 한 번 밖에 못 봤는데.”

“있어. 그것도 국내에.”

심덕구의 말에 서준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짜? 그런데 내가 왜 여태까지 몰랐지?”

“그야 넌 미공략 게이트에 관련된 자료만 주구장창 조사했으니까.”

“아니,불꽃 호리가 나오는데 미공 략 판정은 못 받았어?”

“조건이 덜 채워졌거든. 3 개월 전 에 발생한 게이트라서.”

세계 플레이어 협회의 방침에 의하 면,미공략 게이트는 두 가지 조건 을 필요로 한다.

하나는 게이트 발생 시간이 6 개월 이 지났을 것.

다른 하나는 그 기간 동안 공략이

5 번 이상 실패하는 것이다.

“설명하는 것보다는 보는 게 빠르 겠지.”

손목의 비타를 두드려 자료를 찾은 덕구가 이를 허공에 띄웠다.

[불타는 모래 언덕]

입장 조건 : 5~15 레벨

인원 제한 : 30 명

공략 조건 : 불꽃 호리 처치

난이도 : 어려움

서준호는 게이트의 정보를 보는 순 간 눈을 반짝였다.

“이 녀석,내가 잡았던 것보다 어 려운 놈이야.”

그가 이런 판단을 내린 데에는 이 유가 있었다.

“예전에 내가 불꽃 호리를 잡았을 때는,입장 조건이 10 에서 20 레벨. 그리고 인원 제한도 50 명이나


되었 거든.”

하지만 지금은 입장 조건과 인원 제한이 더 까다로워졌다.

때문에 서준호는 불꽃 호리를 공략 하는 게 예전보다 더 어려워졌을 것 이라 판단했다.

하나 그의 말을 들은 심덕구가 고 개를 흔들었다.

“마냥 그런 건 아니야.”

“……왜?”

“예전이랑 지금은 플레이어들의 수 준이 다르잖아. 아이템들의 스펙도 많이 을라갔고.”

“플레이어들의 실력이 상향평준화 되었다는 건가?”


잠시 생각해보던 서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그럴지도. 돌아온 뒤로 제대로 된 플레이어를 본 적이 없어서 모르 겠지만.”

그가 정신을 차린 뒤에 만난 플레 이어라는 자격증 심사 때 본 이들이 전부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플레이어들의 수준은 어느 정도지?’

정말 덕구의 말대로 예전보다 강해 졌을까?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강해진 걸 까?

“……듣고 보니 궁금하네.”

따지고 보면 그는 1 세대 플레이어. 즉,현재 활동하는 모든 플레이어 들의 귀감이 되는 선배가 아니던가.

‘후배들의 실력을 한 번쯤은 봐둘 필요가 있겠지.’

결정을 내린 서준호는 들고 있던 의뢰서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 의뢰로 할게. 후배들 얼굴도 한 번 볼겸.”

그러자 심덕구의 안색이 단번에 환 해졌다.

“정말이냐?”

“어. 그런데 너 되게 기뻐한다?”

“아,아니 그게……

예전부터 다른 사람은 몰라도,서 준호만큼은 자신의 속내를 기가 막 히게 꿰뚫어봤다.

결국 변명하기를 체념한 심덕구가 입을 열었다.

“사실 그 의뢰인. 조금 아는 사람 이거든.”

“그래? 친한 사이야?”

“그 정도까진 아니야. 그 사람이 너에게 개인 지명 의뢰를 넣은 것도 몰랐으니까.”

확실히 의뢰서를 처음 발견한 순

간,덕구의 눈빛이 흔들리긴 했다.

“명호그룹 알지? 거기 회장이야.”

“어? 그럼 최만혁 아저씨 아들이겠 네?”

“최필호라고 그 양반 둘째 아들. 너도 본 적은 없지만 이름은 들어봤 지?”

“뭐…… 그 아저씨가 아들 자랑할 때 몇 번.”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의뢰서를 쳐다보던 서준호는 잠시 후,고개를 끄덕였다.


“재밌겠네. 미팅 날짜 잡아줘.”

다음 날 아침,덕구의 호출을 받은 서준호는 협회장실로 향했다.

‘음?’

협회장실에 들어선 서준호의 신형 이 잠시 멈칫했다.

안쪽에는 덕구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색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정장을 입고 있는 미녀였다.

“아,왔군요.”

서준호를 확인한 심덕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인사부터 나누시죠. 이쪽은 오늘부터 서준호 씨의 비서 겸 매니 저를 겸임하게 될 차시은 양입니


다.”

“차시은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네,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씩씩하게 말하는 그녀와 인사를 나 누던 서준호는 이 상황을 단번에 파 악했다.

‘과연. 앞으로는 이 사람이 내 대 외적인 활동을 담당하는 역할이구 나.’

덕구와 자신이 아무리 친근한 사이 라 할지라도,그건 사적인 관계다.

플레이어 협회장이 풋내기 플레이 어를 보좌하며 다닌다?

그건 누가 봐도 의심을 살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녀석이 공과 사를 잘 구분해서 다 행이야.’

서준호는 서운함보다는,일처리가 확실한 덕구의 모습에 더 큰 신뢰감 을 느꼈다.

심덕구가 입을 열었다.

“오늘 명호그룹의 최필호 회장과

미팅이 있었죠?”

“그렇습니다,협회장님.”

서준호의 예의바른 존댓말에 심덕 구의 입꼬리가 피식피식 올라갔다.

“여기 있는 차시은 양이 안내할 테 니 한 번 같이 움직여보세요. 굉장 히 유능한 친구이니 앞으로 많은 도


움이 될 겁니다.”

“그,그렇게 유능하지는…… 높은 평가에 감사드려요.”

살짝 부끄러운 목소리로 대꾸한 차 시은이 서준호를 쳐다봤다.

“저기…… 미팅까지 32 분이 남았 으니 6 분 내로 출발하셔야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바로 가죠.”

“앗,네!”

차시은이 또각거리는 힐 소리로 그 를 안내했다.

“잘 다녀오세요. 저는 여기 앉아서 좋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자리에 앉은 심덕구가 손을 흔들며 웃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15 화

개인지명의뢰(1)

명호그룹은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 재계서열 1 위로 군림했다.

명호길드,명호전자,명호전기,명 호중공업,명호물산,명호재단 등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진출한 명호그 룹의 로열패밀리는 깨끗한 세금 납

부와 구설수 없는 사생활로 국민들 의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항상 행복할 것 같던 그들 에게 커다란 우환이 찾아왔지요.”

차량 뒷좌석에 앉아 있던 서준호가 힐긋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에 앉은 차시은은 마치 동화 를 읽어주듯,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브리핑을 하는 중이었다.

“우환이라면…… 혹시 딸의?”

“네. 최필호 회장의 장녀가 불치병 으로 분류되는 ‘구음절맥증’으로 판 명났거든요.”

“아,그거 고치기 힘든데……

구음절맥증(九陰絶脈症)을 지닌 사 람은 선천적으로 강한 음기(陰氣)를 지니고 태어나기에 단명하기


쉽다.

치료법이라고 해봤자 반대 속성인 양기(陽氣)를 불어넣어 상쇄하는 것 이 전부.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그 정도의 양기를 품은 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구음절맥증을 치료할 수 있는 재 료 중 하나가 바로 불꽃 호리의 내 단이에요. 29 년 전,만인의 존경을


받던 최고의 플레이어 어둑서니 님

께서 불꽃 호리를 사냥하셔서 그것 을 증명해 내셨거든요.”

“아…… 그거야 뭐,그리 대단한 건 아닌데.”

서준호가 볼을 긁적거리며 쑥스러 워하자,차시은이 고개를 갸웃거렸 다.

“저기,왜 준호 님이 쑥스러워하세 요?”


“……평소부터 존경하던 어둑서니 님과 같은 몬스터를 사냥한다니까 너무 떨려서요.”

순간적으로 만들어낸 변명이 제법 그럴듯했는지,그녀는 별 의심 없이

말을 이어갔다.

“당시 어둑서니 님이 가져온 불꽃 호리의 내단은 프랑스의 거부에게 판매되었어요. 그는 내단으로 아내 의


구음절맥을 치료하는 데 성공했 죠.”

“음음.”

서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 불꽃 호리의 내단을 높은 가격에 팔았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 문이다.

“최필호 회장이 준호 님에게 이 의 뢰를 맡긴 데에는 그러한 배경이 있 답니다.”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이해가 확 되네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들리는 정보 에 의하면 최필호 회장에게 이 의뢰 를 받은 것은 준호 님이 처음이 아


닌 듯해요.”

“그거야 딸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당연하죠. 여태 몇 명이나 받았어 요?”

“지금까지 7 팀이 동일한 의뢰를 받 았고,모두 실패했습니다.”

“많네요. 이번에는 저 하나뿐인가 요?”

“그것까진 모르겠어요.”

“뭐,그건 최필호 회장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알게 되겠죠.”

타이밍 좋게 차가 멈춰 섰고,차에 서 내린 서준호는 명호그룹의 사옥 을 올려다봤다.

“예전이랑 똑같네……

“이전에도 방문하신 적이 있으세 요?”

“뭐. 아주 오래전에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서준호가 차시 은에게 눈짓했다.

“그럼 들어가죠.”

“네.”

1 층의 데스크로 향하자,여직원이 웃는 낯으로 질문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차시은이 품속에서 플레이어 협회 사원증을 꺼내 보였다.

“플레이어 협회에서 왔습니다. 개 인 지명 의뢰 건에 대하여 10 시 정 각에 최필호 회장님과의 미팅이 잡


혀 있어요.”
“아,서준호 플레이어님이시죠? 저 쪽의 엘리베이터를 이용……?”

말을 잇던 여직원이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 가 커졌다.

'무슨 일이지?’

몸을 돌리자,한 중년인이 경호원 들을 이끌고 그들에게 다가오는 중 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중년인은 맑은 눈등 자를 반짝이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오늘을 많이 기다리 고 있었어요. 내가 최필호입니다,”

명호그룹의 회장이 1 층까지 마중 나올 줄은 몰랐기에,서준호와 차시 은은 솔직하게 놀랐다.

동시에 딸을 위하는 아버지의 마음 이 느껴진 탓일까.

가슴 한편이 괜히 간지러워진 서준 호는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서준호라고 합니다. 사진으로만 뵙던 분을 뵙게 되어 영광이네요.”

“하하. 오히려 미공략 게이트를 클 리어해 수백만 시민의 안전을 도모 한 영웅을 만나서 제가 영광이지
요.”

최필호는 웃는 낯으로 말을 했지 만,꽉 쥔 손에서는 간절함이 느껴 졌다.

“우선 올라가서 이야기하지요.”

그를 따라 최상층의 회장실로 향하 자,그들 앞에 향이 좋은 커피가 놓 여졌다.

최필호는 서준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것을 기다리더니,천천히 입 을 열었다.

“협회의 정보력이라면 제 상황이 어떤지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준호는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예,맞습니다.”

“제 일생의 소원입니다. 내 딸아이

를…… 우리 선희의 병을 낫게 해주 세요.”

눈시울을 붉히는 최필호에게선 전 국민의 존경을 받는 기업가의 모습 을 찾아볼 수 없었다.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그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불꽃 호리의 내단이 필요하시다고 요.”

서준호가 커피를 홀짝이며 입을 열 었다.

“예. 백방으로 수소문해본 결과,그 것이 과거 딸아이의 병과 동일한 증

세를 치료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 요.”


“맞습니다. 회장님께서도 다 알고 계시는 것 같으니,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지요.”

“시원시원하니 좋군요. 우선 제가 생각한 의뢰비는…… 150 억입니다.”

150 억.

예상을 웃도는 금액에 차시은의 눈 이 살짝 커졌다.

그녀는 서준호를 쳐다보며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빨리 수락하죠!” 라고 외치는 듯했다.

하지만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을 해보던 서준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 다.”

이에 옅은 한숨을 내쉰 최필호는 바로 가격을 올렸다.

“그럼 200 억 드리지요.”

“회장님.”

“이걸로도 모자랍니까? 그럼 25 0…… 아니,300 억 주겠습니다. 더 필요합니까?”

입술을 꽉 깨문 최필호를 빤히 쳐

다보던 서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 다.

“값을 올리자는 말이 아니에요. 100 억,의뢰비는 딱 100 억을 받겠 습니다.”

«..?«

그의 예상치 못한 발언에 최필호와 차시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이요?”

그는 서준호가 부른 액수가 너무 작다고 느꼈다.

과거에 어둑서니가 프랑스의 거부 에게 불꽃 호리의 내단을 판매한 금 액이 딱 100 억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다르 다.

물가 상승은 둘째치더라도,프랑스 의 거부는 치료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내단을 샀지만 자신은 효


과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구매 하는 것이 아닌가.

물건이란 구매자가 얼마나 그 물건 을 원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 는 법. 1

실제로 지금까지 자신에게 의 받아간 팀들은,최고 240 억이라= 액수를 불렀다. 다=

“예,100 억이면 충분합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소?”

싱긋 미소를 지은 서준호는 한마디 를 덧붙였다.

“과거 프랑스의 거부는 내단의 구 입가로 500 억을 불렀습니다. 그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전 재산
이라도 내놓을 기세였거든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아,심덕구 협회장에게 들었습니 다.”

“과연.”

심덕구라면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 를 알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어둑서 니 의 절친이 었으니까.

“하지만 어둑서니는 그 가격을 거 절하고 오히려 싸게 판매했죠.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잠시 생각을 해보던 최필호가 모르 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경청하지요.”

“가족을 구하려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니까…… 라 고 하더군요.”

“저 또한 어둑서니 님의 생각에 동 의합니다. 가족을 살리려는 사람의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뱃속 을 불리는 건…… 기분이 많이 찜찜 할 것 같거든요.”

이야기를 들은 최필호와 차시은은 느낀 것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최필호가 무거운 입술을 벌렸다.

“……후우,우선 사과부터 해야겠 군요.”

이어서 가볍게 고개를 숙인 그는, 무슨 뜻이냐는 서준호의 눈빛에 설 명을 시작했다.

“여태까지 저에게 의뢰를 받아간 이들은,모두 돈만 노리는 사람들이

었습니다. 선희의 목숨값을 저울질 하며 더 많은 의뢰비를 받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지요.”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가족의 고통을 처음으로 공감해 주 신 건 서준호 플레이어뿐입니다. 그


런 분을 그들과 똑같은 부류로 생각 한 점,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최필호는 서준호의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여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신경 써주고,배려해 주는 플레이어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서준호 플레이 어. 그대에게만 의뢰를 하면 될 것 같군요.”

“의외네요. 제가 내단을 가져올 것 이라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그 질문에 최필호는 빙그레 웃었 다.

“나이를 먹다 보니 늘어나는 건 주 름과 사람 보는 눈뿐이라서요.”

“칭찬의 말씀이니 감사히 받겠습니 다.”


“슬슬 점심시간이 다가오는데,함 께 식사라도 하실까요?”

“죄송합니다. 아무리 저라도 불꽃 호리를 상대하려면 그만한 준비가 필요한지라.”

서준호가 단칼에 식사 자리를 거부 했지만,최필호는 전혀 기분 나쁜 눈치가 아니었다. I

“아,제가 실수를 했군요 목숨과 관계된 일이니 준비는 철저히 하 야지요.”

“아닙니다. 대신 식사는 다음번 하시죠. 제가 내단을 들고 돌아와으 때 말입니다.”

“말만 들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군 요. 최고의 요리사를 준비해놓겠습

니다.”

인자한 웃음을 지어보인 최필호는 그들을 사옥 밖까지 마중나왔다.

“그럼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마십시오.”

당신은 최고의 패에 배팅을 한 셈 이니까.

뒷말을 삼킨 서준호는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아까 어둑서니 님에 관한 이야기, 사실이에요?”

가만히 있던 차시은이 눈을 반짝거 리며 물었다.

“잘 안 믿겨지죠? 그는 기계처럼 딱딱한 이미지였으니까……

차시은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저는 오히려 어둑서니 님 처럼 마음이 따뜻한 분이라면 충분 히 그러셨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인가요? 어둑서니가?”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아

까 해주신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확신했어요.”

가만히 눈을 감은 차시은은 누군가 를 떠올리듯,제 무릎 위에 두 손을 공손히 올려놓았다.

“아마 어둑서니 님이 내단의 값을 과하게 받지 않으신 이유는,본인의 가족이 생각나서가 아닐까요?”

“어둑서니 님은 부모님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도했다고 알고 있어요. 아마 스스로에겐 그 부분이 인생에


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었겠죠. 그래 서 가족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

을 볼 때면,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 신 것이 아닐까요?”

조용히 창밖의 한강을 쳐다보던 서 준호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중얼거 렸다.

“……그럴지도 모르죠.”

“뭐,물론 이건 어둑서니 님 말고 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요.”


차는 협회에 도착할 때까지 조용했 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16 화

개인지명의뢰 (2)

“어땠어?”

서준호가 홀로 협회장실에 들어서 자,덕구가 물었다.

“다짜고짜 뭐가?”

“차시은 양 말이야. 똑 부러지지?”

“야,고작 두 시간 같이 있었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잠시 생각하던 서준호가 뒷말을 이 어 붙였다.

“..뭐,브리핑을 잘하는 재주는

있더라.” I

“네가 몰라서 그래. 사실 스펙만 따지면 대기업이나 유명 길드에 들 어갈 만한 사람이거든.”

“그런 사람이 왜 이런 누추한 곳 에?”

“못 느꼈냐? 어둑서니를 엄청 존경 하거든. 심지어 입사동기도 어둑서 니가 잠시 몸 담았던 곳이기에


일해 보고 싶은 거라던데.”

“별난 여자네.”

서준호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 자,심덕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려면 어때. 유능한 친구니까 곁에 두고 잘 쓰라고. 그럼 나가자”

“나가다니,어딜?”

“불꽃 호리를 상대하려면 쓸 만한 장비 정도는 필요할 거 아니냐.”

“쇼핑이야?”

“아니,협회 무구 보관실에 갈 거 야.”

“……구두쇠 녀석.”

“야야,진짜 좋은 무구들 많다니까.

직접 보고 판단해,보고.”

심덕구는 툴툴거리는 친구를 이•끓 고 무구 보관실로 이동했다.

“여기는 지난번에 나 혼자 와빴잖 아. 별거 없더만.” **


“그때는 네가 뭣도 없을 때니까 i 구역에만 들어갈 수 있었던 거고.”

지이이잉.

심덕구의 홍채가 인식되자 a 보관실 1 구역의 뒤쪽 문이 열렸다. f 호리를 잡을 거라면 최소한 않=”무구
정도는 챙겨줘야 하지

“……호오.”

흥미가 동한 서준호는 2 구역을 천 천히 둘러보았다.

확실히 1 구역보다는 훨씬 품질이 좋은 무구들이 많았다.

“아무거나 골라도 돼?”

“어. 필요하다면 설명해 줄 수도 있는데.”

“그럼 좀 부탁할게. 세월이 홀러서 그런지,생소한 것들이 좀 있네.”

그 말에 피식 웃음을 지은 심덕구 는 서준호 앞에 있던 검을 들어올렸 다.

“예전에 우리가 학교 끝나고 PC 방 한창 다녔을 때 하던 게임 기억 나 냐?”

“어. 리그 오브 갓이였나?”

“맞아. 그때는 왜,대규모 패치 한 번 하면 새로운 전략이나 아이템들 이 나오고 그랬잖아.”

“그랬었지. 새로운 패치 나오는 날 마다 너랑 나랑 머리 맞대면서 공략 법짜고 그랬는데.”

잠시 추억에 잠긴 두 사람이 키득 거리며 웃었다.

“장비도 마찬가지야. 지난 25 년 동 안 쉴 새 없이 발전했거든.”

심덕구는 검 손잡이가 서준호에게 향하게끔 내밀었다.

“한 번 뽑아봐.”

검을 뽑았지만,그저 평범하게 품 질이 좋은 검일 뿐이었다.

다만 신소재를 사용했기 때문인지 무게가 훨씬 가벼웠다.

“좀 실망인데? 그냥 평범하게 좋은 검이잖아.”

“마력을 한 번 넣어봐.”

긴가민가한 상태로 검에 마력을 불 어넣는 순간,서준호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거 뭐야?”

“마력 전도 수율을 최고로 높인 검 이다. 예전에 네가 사용하던 검에는 이런 기능이 없었지?”

“어.”

“이쪽에 있는 무구들도 다 마찬가 지야.”


심덕구는 신이 난 듯 서준호에게 이런저런 무구들을 소개했다.

“이건 강력한 전기가 흐르는 줄로 몬스터를 속박하는 아이템.”

“여기 있는 방어구는 마력을 불어 넣으면 에너지 실드가 발동해서 적

의 공격을 막아줘.”

“아,이것도 설명했던가? 마력 폭 탄이라는 건데,터트리면 위력이 어 마어마하다.”

한참이나 설명을 하던 심덕구는 뚱 한 서준호의 얼굴을 확인했다.

“……뭐야,표정이 왜 그래? 엄청 좋아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 서준호는 아이템에 대한 욕 심이 제법 있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아니,흥미롭긴 한데…… 요즘 플 레이어들은 이런 것들을 사용한다 고?”

“당연하지. 아무 기능 없는 옛 무

구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 이잖아.”

미간을 찌푸린 서준호가 그를 돌아 보며 물었다.

“그럼 스스로 마력을 무기나 방어 구에 싣는 연습은 언제 하는데?”

“응? 그거야……

말문이 막힌 심덕구는 어깨를 으쏙 거렸다.

“내가 플레이어가 아니라서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굳이 그런 연습이 필요한가? 최신 장비가 이렇게나 잘


나오는데.”

“하아……

그 말에 서준호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덕구야. 요즘 잘 나간다는…… 랭 커라는 녀석들도 이런 거 쓰고 다니 냐?”

“음,보통 랭커들은 커스텀 장비를 쓰니까 그건 잘 모르겠네.”

입을 꾹 다문 서준호는 잠시 생각 을 정리했다.

‘플레이어들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 되었다라…… 확실히 그렇겠어.’

예전에는 플레이어들이 오크의 두 꺼운 가죽을 뚫지 못해 비참한 죽음 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장비들을 사용한 다면 오크의 피부 정도는 손쉽게 뚫 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건 기껏해야 일반 몬 스터만 사냥할 수 있는 장난감이 야.’

이런 것들로는 결코 ‘최고’를 사냥 할 수 없다.

서준호조차 긴장하게 만들었던 강 력한 포식자들.


그들에겐 이런 장난감이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미심쩍은 의심 따위가 아닌 확신이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난폭하고 거친 마력 앞에선 플레이어의 마력 회로 조차 고장이 나.’

그렇다면 과연 등급조차 부여받지 못한 이런 가짜 아티팩트 (Fake Artifact)들은 어떨까?

단언컨대,제 위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고장나 버릴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상대할 불꽃 호리 ■는..

플레이어가 저레벨에 조우하는 몬

스터들 중에서 상급으로 분류되는 ‘보스 몬스터’다.

서준호가 한참이나 침묵을 고수하 자,가슴이 답답해진 심덕구가 입을 열었다.

“아니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뭐가 문제냐니까?”

“이런 장난감으로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에는 한계가 있어.”

서준호는 검을 다시 제자리에 툭 던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덕구야. 플레이어의 레벨이 낮을 때 약한 몬스터가 나오는 이유가 뭔 지 아냐.”

“……그야 레벨이 낮을 때 강한 몬 스터가 나오면 모두 죽어버리니까 그런 거 아니냐?”

“맞아. 이 시스템이란 녀석은 정말 엿 같지만, 짜증나게도 그런 부분에 선 매우 공평하거든.”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두 눈을 감은 서준호는 과거에 최 강이라 불렸던 자신과 네 동료의 성 장 과정을 떠올렸다.

“……플레이어는 사냥을 하면서 계 속해서 성장해야 돼. 그래야 레벨이 높아졌을 때 강력한 몬스터들을 상
대할 수 있는 힘과 경험이 생기는

거야.”

“너는 이 최첨단 무구들이 강력한 몬스터에게는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 하는구나?”

“어. 그래서 물어봤던 거야. 랭커들 도 이런 무구를 쓰냐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심덕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확실히…… 최첨단 무구를 쓰는 플레이어치고 엄청난 업적을 이뤄낸 녀석은 없어. 하지만 고만고만한 게
이트에서는 결과를 내놓는 것도 사 실이야.”

“그야 이런 무구들은 어중간한 몬 스터를 상대할 때는 효과적일 테니 까.”

코웃음을 친 서준호는 주변을 둘러 보더니,무언가를 발견하곤 방의 구 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장검 한 자루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入己근 I

---,■ -,■ - o •

검집에서 검을 뽑자,명검이 내는 특유의 청명한 소리가 방을 울렸다.

“이건 뭐야?”

“그것도 신소재로 만든 검이긴 한

데,다른 기능이 안 붙어 있어서 구 석에 처박아 놓은 건데.”

“……세상이 정말 재미있어졌어. 스스로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장 난감 따위로 막아버리잖아.”

그건 아마도 이 세상이 너무나도 평화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난 이 검으로 할게. 더 볼 건 없 을 것 같다. 아!”

서준호가 마력 폭탄을 몇 개 집어 들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건 제법 재미있을 것 같 으니 몇 개 가져갈래.”

“그래라……

어깨가 축 늘어진 심덕구가 심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불타는 모래 언덕 게이트 앞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은 플레이어와 그들의 가족 이었지만,일부는 서준호를 기다리 는 기자들이었다.

“많이도 모였네요.”

서준호가 바깥을 힐긋 쳐다보면서 중얼거리자,옆에서 차시은이 부시

럭 거렸다.

보온병에 담겨 있던 차를 뚜껑에 따른 그녀가 이를 내밀었다.

“라벤더 차예요. 신경계의 왕성한 활동을 장려하며 심신안정과 불안감 해소에도 효과가 좋대요.”

“……준비가 철저하시네요.”

“비서니까요. 그런데 공략 전의 플 레이어는 극도의 긴장과 불안감에 시달린다고 들었는데…

서준호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의 고 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이상하네요. 준호 님은 긴장한 사 람처럼 보이지가 않아요.”

“……속으로 하고 있어요,속으로.”

건네받은 라벤더 차를 호호 불어 마신 서준호는 창밖의 게이트로 시 선을 돌렸다.

“맛있네요. 그나저나 플레이어들이 조금 많은데요?”


“혼자서 들어가시는 게 아니니까 요. 불꽃 호리의 내단은 모두가 탐 내는 재료거든요.”

“길드 소속 플레이어들도 왔다고 들었습니다. 총 몇 명입니까?”

“준호 님을 포함해서 총 27 명이 게이트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과연 그중에서 몇 명이나 돌아오게 될런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서준호는 문 을 열고 내렸다.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카 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며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다른 플레이어와 함께 공략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신데요,현재 심정 이 어떠십니까?”

“불꽃 호리는 상대하기 매우 까다 로운 보스 몬스터로 알려져 있는데 자신이 있으십니까?”

“명호그룹의 최필호 회장에게서 개

인 지명 의뢰를 받았다는 소문이 사 실인가요 r

그에게 구름처럼 몰려드는 기자들 을 바라보던 주변의 플레이어들이 투덜거렸다.

“참내,누가 보면 랭커라도 온 줄 알겠네.”

“신인이지만 요즘 가장 핫한 녀석 아닙니까. 기삿거리로는 최고다 이 거겠죠.”

“그런데 저 삐쩍 마른 녀석이 정말 미공략 게이트를 두 번이나 클리어 한 건가? 뭔가 잘못 알려진 거 아


냐?”

“사실 저도 이해가 잘 안 되기는 해요. 보니까 장비들도 너무 구식인 데.”

“뭐…… 인벤토리에 보관해 놨겠 지. 설마 저런 무구들을 들고 공략 하겠어?”

그들이 불평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 다.

신인 중에서 서준호처럼 많은 관심 을 받는 플레이어는 거의 없었기 때 문이었다.

유명 길드 소속이 아닌 이상,대부 분의 플레이어는 인터뷰조차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으니까.

경■론 서준호도 그 사심음 잠 O>77 있었다. 5

‘벌써부터 기자들이 이렇게나 붙다 니................ 예상보다 많아,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살짝 기분이 좋아진 그는 입꼬리르 올리며 인터뷰에 응답했다. 5 “심정이요? 산책 나온 것처럼 펴아


하네요.” ""

“불꽃 호리? 내단 빼고 모조 어 먹겠습니다.”

짧은 인터뷰를 마치자 차시은이 똑 부러지게 기자들을 물렸다.

“서준호 플레이어의 멘탈 관리를 위해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 다.”


기자들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지 만,게이트에 들어가는 사람을 귀찮 게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차시은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기자들이 이렇게까지 많 이 몰려들 줄은 몰랐어요.”

“그만큼 저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차시은은 여태껏 수많은 플레이어 들을 지켜봤다.

하지만 게이트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렇게까지 차분한 사람을 보는 것 은 처음이었다.

‘게이트도 고작 두 번밖에 안 가봤 으면서……

혹시 여자 앞이라고 남자 특유의 허세를 부리는 것일까?

잠시 서준호를 바라보던 차시은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네,다녀오면 라벤더 차 한 번 더 끓여주세요. 맛있더라고요.”

서준호는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아참,그리고 내일은 평소보다 일 찍 일어나서 준비하셔야 될 겁니 다.”

“네? 준비라면 어떤……?”

차시은이 눈을 깜빡이며 묻자,서 준호는 고개만 살짝 돌리며 말했다.

“오늘 공략이 끝나면 저에게 개인 지명 의뢰가 미어터질 테니까,마음 의 준비를 해두세요.”

오전 11 시 28 분.

27 명의 플레이어가 가족의 응원과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게이트로 들 어갔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17 화

꼬리가 몇 개야?(1)

불타는 모래 언덕 게이트 내부.

그곳은 하늘색과 황토색,오직 두 가지 색만이 존재하는 황량한 사막 이었다.

설마 사막 지형이 나올 거라고 예 상하지 못한 플레이어들은 불만을 터트렸다.

“아니 미친,판금 갑옷 입고 왔는 데 사막 나오는 거 실화야?”

“큰일났네…… 마실 물은 많이 준 비해오지 않았는데.”

“뭐야 이 모래. 발이 푹푹 빠지잖 아? 진짜 여기서 전투를 해야 하는 건가……?”

“진짜 미친 듯이 덥네.”

한 평생을 살면서도 사막을 경험하 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군다나 이들은 사막이라는 미지 의 환경에서 전투까지 치러야 했다.

그 사실에 멘탈이 흔들린 플레이어

들이 욕지거리만 뱉어내던 순간.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누군가가 플레이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끌었다.

“우선은 이쪽으로 모여주시기 바랍 니다.”

“뭐야,저 새끼 누군데?”

“몰라? 아,혹시 길드 소속 플레이 어 아닐까?”

“흠,길드?”

사람들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자 신들을 부른 남자 앞으로 모였다.

그는 자신과 함께 들어온 세 명의

팀원을 뒤에 세운 채 입을 열었다.

“우선 제 소개를 드리자면,저는 대한민국 랭킹 13 위 길드인 청해의 차민우입니다.”

“처,청해 길드 r

“뭐야. 오늘 공략에 참가한다는 길 드가 청해였어?”

“거긴 완전 잘나가는 곳이잖아.”

“엘리트들만 가는 곳 아니야?”

남자를 못 미더워하던 사람들의 태 도가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청해 길드는 빅 6 에 비할 바는 아 니지만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명문 길

드였기 때문이다.

“다들 아시다시피,이런 대규모 게 이트에선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뭐…… 맞는 말이지.”

“애초에 이런 게이트는 혼자서 깨 라고 만들어진 곳이 아니니까.”

“다 같이 힘을 합쳐야 겨우 쩔 수 있는 거 아니겠어.”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 민우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 제안을 하나 드리겠습니 다.”

“제안이라면?”

“1,000 만 원. 이번 공략에서 저희 의 작전을 잘 따라주시는 모든 분들 께 드리겠습니다.”


“오…… 생각보다 세게 부르는데?”

“그 정도 돈이면 청해 길드의 작전 을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지.”

플레이어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호의적이었다.

그때,서준호가 손을 들며 질문했 다.

“그럼 보상은 어떻게 나누는 겁니 까. 불꽃 호리의 내단 말입니다.”

“……물론 내단은 저희 길드가 가 져갑니다.”

사람들이 곧장 반발했다.

“뭐요? 부르는 게 값인 내단을 쏙 빼가겠다고?”

“여기 인원 다 합해봐야 3 억도 안 나가는데 그건 좀 아니지.”

“저 사람 저거 선 넘네.”

여론이 안 좋게 홀러가자,차민우 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럼 여러분은 저희의 도움 없이 불꽃 호리를 사냥할 자신이 있으심 니까?”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한 번도 상대해 본 적이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차민우는 그 침묵을 이용해 못을 박아버렸다.

“후우,좋습니다. 지금 저희에게 합 류하시는 분들에게는 1,500 만 원씩 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변 심하여 오시는 분들에게는 500 만 원밖에 못 드립니다.”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다.

명문 길드 플레이어의 공략에 따라

안전하게 사냥하고 1,500 만 원을 받 느냐.

아니면 위험하지만 독자적으로 행 동하면서 불꽃 호리를 사냥하고 수 십억을 얻느냐.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먼저 손 을 들었다.

“전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저도요. 어차피 판금 갑옷 입고 와서 혼자서 공략하는 건무리니 까……

“혹시 지금 합류하면 식수도 나눠 주시나요? 그럼 합류할게요.”

사냥 준비가 조금씩 부족했던 자

*e".

그들이 먼저 합류 의사를 드러내 자,남아 있는 플레이어들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죄다 저쪽에 붙잖아?”

“쓰읍. 이번 기회에 한몫 단단히 잡으려고 왔는데,저렇게 덩치 큰 그룹이 있으면 개인은 아무것도 못


한단 말이지.”

“아쉽지만 이번 공략은 1,500 만 원 으로 만족해야겠어. 나도 합류할래.”

청해 길드원을 제외한 23 명의 플 레이어 중 22 명이 청해 길드에 붙 었다.

차민우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혼 자 덩그러니 서 있는 남자,서준호 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웃차.”

서준호는 자세를 낮춰 신발끈을 단 단하게 조이더니,일어나서 그들을 한 번 쓱 쳐다봤다.

“혼자 할랍니다.”

모래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그를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이 소곤거렸다.

“저 사람이 서준호지? 미공략 게이 트를 두 번이나 클리어했다던……

“아무래도 내단에 대한 욕심을 버 리지 못했나 보군.”

“저 남자가 어떻게 싸우는지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어.”

사람들의 대화를 듣던 차민우가 의 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그 사람이 서준호라고? 새벽 의 저주와 리우프의 화원을 공략했 다는?’

사진을 본 적은 없지만,들려오는 기사를 통해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 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만남을 기대하 고 있었건만,실제로 본 그는 볼품

없는 몸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에게선 어떠한 위압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찬가지 심정을 느꼈는지,청해 길드원들이 하나씩 입을 열었다.

“역시 소문이란 늘 과장되게 마련 이군요.”

“신성이다, 천재다 뭐다 하더 니…… 별로 강해보이진 않던데요.”

“아무리 봐도 팀장님께서 신경 쓰 실 정도의 남자는 아닌 듯합니다”

••너회는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애초에 신경을 쓴 적조차 " 는데.,, 卜 없

머릿속에서 서준호라는 남자를 깨 끗하게 지워버린 차민우는 사람들에 게 돌아갔다.

무리에서 이탈한 서준호는 모래사 막을 정처 없이 거닐었다.

‘불꽃 호리…… 그 녀석은 몬스터 와 영물의 경계에 있는 존재야.’


예전에 서준호가 상대했던 불꽃 호 리의 꼬리는 무려 여섯 개였다.

녀석은 천년이라는 시간 동안 꼬리

가 최대 아홉 개까지 늘어나며,모 든 꼬리가 모이는 순간 하늘에서 여 우들을 굽어 살피는 천호(千孤)


가 된다.

“불꽃 호리는 꼬리가 많을수록 더 강력해진다고 하지.”

동시에 더 많은 불여우 군단을 이 끌고 다닌다.

이 게이트의 불꽃 호리가 몇 개의 꼬리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금.

서준호는 정찰에 유리한 지형을 찾 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높은 곳을 찾아야 해.’

모래 언덕을 몇 개나 지난 서준호 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언덕을 찾 을 수 있었다.

그 위에선 멀리서 움직이는 플레이 어들의 행렬까지 보였다.

“지금부턴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겠 네.”

머지않아 불여우들이 그들을 덮칠 것이고,때가 되면 불꽃 호리가 모 습을 드러낼 것이다.

서준호는 그 순간을 기다릴 생각이 었다.

‘녀석의 꼬리가 몇 개인지부터 확 인하고 움직인다. 그게 먼저야.’

자리에 앉은 서준호는 얼음 덩어리 몇 개를 만들어 쥐곤 몸의 온도를 최대한 낮췄다.

기다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 다.

불여우는 후각은 매우 뛰어난 편이 었으니까.

대열의 앞쪽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부,불여우다!”

“대체 몇 마리지? 30…… 40…… 이런 미친,50 마리는 되겠어!”

어느새 주변을 포위한 불여우들이 어슬렁거리자,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당황했다.

차민우는 당황한 사람들부터 진정 시켰다.

“당황하지 마시고 작전대로만 따라 주세요! 이쪽이 유리합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저마다 무기를 뽑고 스킬을 사용하 면서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불여우 의 돌진을 기다렸다.

-갸르르…….

-크앙.
일반적인 여우보다 네 배는 커다란 불여우 수십 마리가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똑똑한 녀석들이 가장 먼저 알아첸 것은 머릿수였다.

적이 26 명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 아차린 순간.

영리한 불여우 50 마리는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캬앗!

-그르르…… 와르르알!

동시에 차민우는 두 눈이 반짝였 다.

그는 튀어나가려는 사람들을 억지 로 진정시키며,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불여우들과의 거리가 20 미 터 정도가 된 순간.

“지금입니다!”

차민우가 소리치자,몇몇 플레이어 들이 마력을 끌어을렸다.

동시에 사막의 모래 아래에 묻혀 있던 함정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순식간에 지상으로 튀어나온 함정

들 사이사이로 강력한 전깃줄이 연 결되 었다.

뭣도 모르고 이와 부딪친 불여우들 의 몸에선 고소한 냄새가 피어올랐 다.

“됐다!”

“작전이 제대로 먹혔어요!”

“후후,그야 물론이지요.”

차민우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쳐 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다.

그는 마치 격투기 선수들이 싸우는 링처럼 형성된 전깃줄을 바라보았

‘현대 사회의 사냥은 예전과는 많 이 달라졌다.’

지금은 최첨단 시대.

옛날처럼 주먹구구식으로 무기를 휘두르고,조잡한 함정이나 설치하 던 때와는 달랐다.

국립 과학원과 길드 연구소에서 개 발한 무구에 얼마나 빨리 익숙해지 느냐.

그것이 사냥의 기본이 되어버린 시 대였다.

‘거기에 나처럼 무구를 이용한 전 략,전술을 짜는 것까지 능하다 면..

그야말로 랭커 타이틀을 다는 것은 시간문제.


차민우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몬스터의 수가 순식간에 절반 이하가 되었습니다! 사냥의 시간입 니다!”

불여우의 숫자가 20 마리가 된 순 간,차민우는 함정을 해제하고 무기 를 뽑았다.

그는 뒤에서 명령을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직접 최전선으로 뛰어 들어 불여우를 사냥했다.

레벨을 빨리 올리려면 사냥 기여도

를 높이는 것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서걱! 쯔아아악!

청해 길드에 입단한 엘리트답게, 차민우와 동료들은 다른 플레이어들 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불여우들


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뭐야,불꽃 호리의 게이트라길래 잔뜩 긴장했는데…… 별 거 없잖 아?”

“우린 선택을 잘한 거야. 청해 길 드 쪽에 합류한 것이 옳았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자,플 레이어들도 평소의 제 실력을 발휘 하기 시작했다.

결국 부상자 하나 내지 않은 플레 이어들은 불여우와의 전투에서 압승 을 거두었다.

전투가 끝나자 사람들이 차민우 곁 으로 모여들었다.

“정말 대단한 작전이었습니다. 제 갈량의 환생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아마 이번 공략이 끝나면,차 팀 장의 이름값이 크게 오를 거라 생각 합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던데 전화 번호라도 교환하실래요?”

I 자민우는 자신을 영웅처럼 떠받드 는 사람들을 웃는 낯으로 말렸다

“자자,아직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가장 중요한 전투가 남지 않았습니까?”

“아…… 그렇지요. 불꽃 호리와의 전투가 남아 있었죠.”

“하지만 거기에 대한 작전도 다 짜 두셨잖습니까?”

“차 팀장님의 전술이라면 이미 승 리는 따 놓은 당상이지요.”

“그렇게 믿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 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솔직히 차민 우는 가슴이 떨렸다.

‘이번 공략이 끝나면,난 영웅으로 서 첫발을 내딛게 된다.’

전설적인 플레이어,어둑서니가 해 냈던 것과 동일한 업적이 커리어에 추가되는 것이다.

심지어 단 한 명의 부상자도 내지 않고 불꽃 호리를 사냥한다면 오히 려 어둑서니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는 설레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 히며 함정들을 재정비했다.


‘역시 앞으로의 사냥은 전술과 접 략,최신식 장비가 답이라는 내 각이 옳았어.’

사람들이 수통의 물을 마시며 휴식 을 취하기를 잠시.

어디선가 자그마한 소리가 들려왔 다.

파슥,파슥. 화르르륵.

모래를 밟는 소리? 아니,모래를 태우는 소리?

당황한 사람들은 몬스터가 근처에 온 것도 아니건만,본능적으로 무기 를 뽑았다.

인간의 DNA 깊숙이 각인된 생존 본능이 경종을 울린 것이다.

“차, 차 팀장님. 이건 대체?”

“……아무래도 온 것 같군요.”

차민우는 다른 의미로 떨리는 마음 을 진정시켰다.

잠시 후,거대한 그림자가 태양빛 을 지우며 그들을 드리웠다.

“응? 그림자……?”

약속이라도 한 듯,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린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딱 딱하게 굳었다.

“마,말도 안 돼.”

“저게…… 불꽃 호리는 아니겠지?”

몸길이 20 미터,꼬리길이 5 미터, 어깨높이 6 미터.

마치 건물처럼 느껴지는 거대한 여 우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대한 여우,불꽃 호리는 목을 앞 으로 빼내더니, 죽어버린 불여우들 을 쳐다보았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눈빛이 저러할 까.

진한 슬픔이 차오른 눈을 내비친 불꽃 호리는 고개를 젖히고,태양을 향해 울부짖었다.

-구오오오……!

산이 없건만,사막의 모래 언덕을

타고 반사된 울음소리는 메아리처럼 천지를 울렸다.

동시에 패닉에 빠진 플레이어들의 눈앞으로,섬뜩한 경고문이 드리워 졌다.

[불타는 모래 언덕의 보스 몬스터, 불꽃 호리와 조우하셨습니다.]

불꽃 호리의 거대한 몸 뒤편으로.

이글거리는 아홉 개의 꼬리가 구름 처럼 나풀거렸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18 화

꼬리가 몇 개야?(2)

플레이어들은 눈앞에서 넘실거리는 아홉 개의 꼬리를 두 눈 가득 담았 다.

“……말도 안 돼. 구미(九尾)라 고?”

“미,미친! 과거에 어둑서니가 겨 우 잡았다던 녀석조차 육미(A 尾)였

는데!”

“아,아아아……

차민우를 비롯한 모든 플레이어들 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단순히 모습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전의를 상실시키는 존재.

그것이 바로 ‘보스 몬스터’였다.

“다들 정신 차리세요!”

곧 죽어도 엘리트인 차민우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는 목청을 높이며 공포에 물든 플레이어들의 정신을 다잡았다.

“어차피 게이트 안에선 도망칠 곳

이 없습니다. 등을 보이는 순간 싹 다 죽어요!”

물론 아홉 개의 꼬리를 지닌 불꽃 호리는 그의 예상을 벗어난 존재였 다.

하지만 그는 그 정도로 전의를 상 실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몬스터. 심장이 뚫리고 머리가 터지면 결국 죽는다.’

게다가 불꽃 호리를 위해 준비해 놓은 함정들은 아까보다 세 배는 더 강했다.

“할 수 있습니다! 모두 정신 차리 세요!”

그 호통이 플레이어들의 정신을 일 깨웠다.

“그,그래. 정신 차려야지.”

“……도망치다가 죽을 바에는 칼침 이라도 한 번 놔주겠어.”

다시금 정신을 차린 플레이어들은 사전에 협의된 진형을 갖췄다.

동시에 불꽃 호리가 천천히 다가왔 다.

“지금입니다!”

차민우가 소리치자 플레이어들이 미리 준비해놓았던 함정을 발동시켰 다.

파지지지지직!
지상으로 올라온 최첨단 함정들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작동되었다.

이전보다 세 겹은 더 두꺼운 전깃 줄은,마치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 를 내었다.

멈칫,함정은 불꽃 호리의 거대한 몸마저 멈추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돼,됐다!”

“함정이 통합니다!”

“할 수 있어…… 사냥할 수 있다

고!”

본인들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가 지펴지 는 순간.

그들은 마주했다.

좌아아아악!

분노로 이글거리는 불꽃 호리의 두 눈을.

‘‘.

“허,협!”

플레이어들이 저도 모르게 눈을 깔 았다.

등골이 절로 오싹해지는,사냥꾼의

소름 돋는 눈빛이 드러난 순간.

불꽃 호리는 자신의 꼬리를 부채처 럼 좌악 펼쳤다.

그 행위로 일어난 압도적인 마력이 최첨단 함정들을 그대로 망가트리기 시작했다.

지지직,퍼엉! 펑!

여기저기서 폭발하는 함정들을 바 라보던 플레이어들이 당황했다.

“이,이럴 때 고장이라니?”

“안 돼!”

동시에 속박에서 풀려난 불꽃 호리 의 등 뒤에서 수십 개의 여우불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마법 계열 를 레이어의 ‘파이어볼’과 비슷한 위력 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천천히 솟아오르던 여우불들은,그 대로 플레이어들의 진형을 폭격했 다.

과앙! 광!
사막의 모래가 하늘로 비산하고, 동시에 혼비백산한 플레이어들이 비 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크아아악!”

“끄으윽,다리가! 내 다리가!”

“아,앞이…… 앞이 안 보여!”

차민우는 오합지졸마냥 흩어지는 플레이어들에게 소리쳤다.

“어디 갑니까! 위치를 고수하세요! 지금 진형이 흐트러지면 모두가 위 험…… 아악!”

갑자기 어젯죽지가 화끈거리는 고 통이 느껴졌다.

황급히 시선을 내린 차민우는,자 신의 어깨를 불태우는 여우불을 볼 수 있었다.

‘날아오는 것을 보지도 못했는 데……!’

황급히 불을 끈 그의 어깨에선 연 신 기포가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강함

저런 녀석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만이었다

“……뭐야 이게.”

그가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 을 홀렸다. °

이건 이 레벨 대에서 사냥하라고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덜덜덜.

사막은 여전히 더웠고, 불꽃 호리 가 소환한 불덩이들은 그 열기를 더

욱 높이는 중이었다.

그러나 차민우는 심장 부근이 급속 도로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동자는 신념이 박살난 인간 의 그것처럼 텅 비어버린 상태였다.

‘끝났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

“불꽃 호리는 전술도,전략도,최첨 단 장비도 먹히지 않는 몬스터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녀석을 사냥 해야 하지? 어둑서니는 대체 이런

놈을 어떻게 사냥한 거지?

나오지 않는 답을 찾던 차민우는 머리맡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이글이글.

위쪽에서,마치 태양을 축소시켜 놓은 듯한 거대한 불덩이가 플레이 어들에게 떨어지고 있었다.


차민우는 그 순간 깨달았다.

‘아,나는…… 이렇게 죽는구나.’

피할 생각조차 못하고 현실감이 느 껴지지 않는 불덩이를 멍하니 쳐다 보던 순간.

또렷한 목소리 하나가 그의 정신을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전술,전략 그리고 뭐였더라,최첨 단 장비? 물론 훌륭한 것들이지.”

사박,사박.

사막의 뜨거운 모래를 즈려밟으며 한 남자가 걸어온다.

그는 자연스럽게 차민우의 앞을 막 아서더니,시선을 위로 고정했다.

“그것들로는 사냥할 수 없는 몬스 터를 만났을 때,어떻게 해야 하는 지가 궁금한가?”

끄덕끄덕,차민우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움직였다.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 가 안 되었지만,이 남자라면 해답 을 알려줄 것 같았다.

삐쩍 마른 볼품없는 몸을 지닌 남 자,서준호에게선 반짝이는 빛이 새 어 나오는 것 같았다.

“답은 간단해. 플레이어가 세상에 처음 나타났을 때 그들에게 가장 요 구되었던 것.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모든 플레이어들이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것.”

스르르릉!

서준호의 검이 검집을 빠져 나오며

세차게 울었다.

“바로 압도적인 전투력이다.”

U I,,

차민우의 크게 뜨여진 동공으로 서 준호의 등이 반사되었다.

위에서 아래.

그가 검극으로 이은 선이 불덩이를 정확히 둘로 쪼갰다.

과아아아아앙!

불꽃 호리가 사용하는 최강의 공 격.

염화구(炎火球)를 베어낸 서준호는 찌푸린 눈으로 저릿저릿 울리는 팔

을 내려다봤다.

‘쯧,아직 한참 멀었네.’
단 한 번의 공격에 마력을 1/3 가 량 쏟아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실한 육 체는 충격을 완전하게 흘려내지 못 했다.

卞 I 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만 족할까.’

뒤를 쳐다본 서준호가 옅은 한숨을 흘렸다.

우선 사람들의 목숨은 살렸기 때문 이다.

그는 시선을 다시 불꽃 호리에게 고정시키며 말했다.

“사람들 데리고 도망쳐.”

이에 당황한 차민우가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빛…… 아,아니. 서준호 님께서 는?”

그의 존댓말에,슬쩍 뒤를 쳐다본 서준호는 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표 정을 지었다.

“나는 플레이어 본연의 의무를 완 수해야지.”

“플레이어 본연의…… 의무라면?”

“이걸 또 고민하네? 애초에 하나밖 에 더 있어?”

몬스터를 사냥하고 게이트의 공략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

그것이 이 세상에 플레이어가 나타 난 이유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크오오오!

불꽃 호리가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인간에게 적개심을 드러냈다.

이에 서준호는 인상을 잔뜩 일그러 트리며 중얼거렸다.

“……덥네.”

주변의 온도는 마치 뜨거운 사우나

에 들어온 것처럼 높았다.

‘예전에도 느꼈지만,아주 화끈한 놈이라니까.’

그 와중에 정신을 차린 차민우는 사람들을 부축하며 모래 언덕 뒤로 피신했다.

이를 확인한 서준호의 입가에서 웃 음기가 싹 사라졌다.

“자,이제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사 라졌으니……

그는 분노에 먹힌 호리 불꽃의 거 대한 두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너랑 나,둘이서만 찐하게 놀아보 자고.”

-고오오오오!
불꽃 호리의 비명에 주변의 모래 언덕들이 터져 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서준호는 쫄기는 커녕 오히려 앞으로 달려나갔다.

화르르르륵!

다시 한 번 수십 개의 여우 불이 허공에 생성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서준호가 인벤토리에서 거 대한 방패를 하나 꺼냈다.

“보는 눈이 없다는 건……

서리 능력을 마음껏 사용해도 된다 는 뜻이다.

쩌저저저적!

방패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기존보다 두 배는 더 두꺼워진 얼 음 방패를 앞세운 서준호는 그대로 돌진했다.

과앙! 과아아앙!

여우불이 방패를 두드리며 그의 돌 진 속도를 늦췄지만,서준호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우선 최대한 거리를 좁히는 게 우 선이다.’

-캬아아악!

끊임없는 견제에도 인간의 돌진이

멈추지 않자,불꽃 호리가 입을 쩌 억 벌렸다.

염화구,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 강의 공격을 다시 한 번 날려서 강 제로 멈출 요량이었다.

동시에 서준호의 눈이 번뜩였다.

‘준비 동작이 크다. 염화구인가?’

위력이 높은 기술을 사용하면 빈틈 역시 커지는 법.

서준호는 그 빈틈을 놓칠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다.

“흐압!”

부풀어오른 대퇴근이 땅을 박차며

그를 모래 언덕 위로 올려놓았다.

불꽃 호리의 입에서 염화구가 쏘아 져 나온 것도 그때였다.

‘아무리 나라지만,저걸 또 정면에 서 받아냈다가는……

마력과 몸이 버텨내질 못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서준호는, 얼음 방패를 내리며 그대로 그 위에 올라탔다.


좌아아악!

마치 보드를 탄 듯,그를 태운 방 패가 엄청난 속도로 모래 언덕을 내 려갔다.

화르르륵!

염화구는 간발의 차이로 서준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보는 사람의 심장이 철렁일 정도로 위태로운 순간이었지만,서준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과아아앙!

염화구가 직격한 모래 언덕이 그대 로 터져 나가며 일대에 흙먼지가 내 려 앉았다.

-……캬오오.

불꽃 호리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홁먼지 때문에 인간의 모습이 보이

지 않았기 때문이다.

- 킁킁.

하지만 흙먼지 속에 섞인 인간의 ‘냄새’는 여전했다.

후우우웅!

불꽃 호리는 지척까지 다가온 냄새 를 향해 그대로 앞발을 휘둘렀다.

좌아아아악!

날카로운 발톱에 무언가가 시원하 게 찢겨져 나갔다.

하지만 불꽃 호리의 눈빛은 세차게 요동쳤다.

자신의 발톱에 찢긴 것은,인간이

아니라 땀에 젖은 수건이었기 때문 이다.

동시에 흙먼지를 뚫고나온 서준호 가 녀석의 코를 밟고 허공으로 도약 했다.

‘확실히 서리 능력은 편해.’

그는 흙먼지가 내려앉는 순간,자 신의 땀이 묻은 수건을 던지면서 몸 을 얼렸다.

당연히 냄새는 완벽하게 차단.

불꽃 호리는 처음부터 미끼를 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캬아아악!

서준호는 순식간에 불꽃 호리의 거 대한 몸을 뛰어넘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등을 돌린 순간,이글거리며 불타 는 아홉 개의 꼬리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불꽃 호리는 꼬리의 개수가 많아질 수록 그 힘이 강해지는 몬스터다.

과거에 어둑서니는 죽기 직전,‘그 반대’를 떠올렸다.

‘녀석은 꼬리가 많을수록 강해진 다. 그럼 반대로 꼬리의 개수가 줄 어든다면?’

서준호는 과감하게 검을 휘둘렀다. 과거에 스스로 증명해 본 적이 있 기에,이 행동이 불러올 결과 또한


확신할 수 있었다.

쩌저저저적!

주변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서준호가 쥔 검에선 시리도록 차가 운 예기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쨍그랑!

검과 꼬리가 교차하는 순간,마치 도자기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준호는 눈앞으로 흩날리는 수백

개의 얼음 파편을 쳐다보며,입꼬리 를 올렸다.

“예전에는 하나하나 자른다고 화상 까지 입으면서 개고생했는데……

다행히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 다.

“그냥 얼리고 깨버리면 그만이잖 아?”

-캬아아아아악!

소중한 꼬리를 네 개나 잃어버린 불꽃 호리의 입에서,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19 화

꼬리가 몇 개야?(3)

불꽃 호리는 최상위 포식자다.

천적이라 부를 만한 존재도 없었 고,적수도 없었다.

한 마디로 지금은 녀석이 천 년 가까이 살아오면서,처음으로 '고통’ 을 느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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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던 불 꽃 호리가 고개를 획 돌렸다.

감히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앞발 보다도 작은 인간을 쳐죽여야만 분 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녀석은 무턱대고 상대에게 달려드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예상대로네.’
서준호의 눈매가 반달처럼 곱게 휘 었다.

불꽃 호리는 경계를 한답시고 거리 를 벌렸지만,그는 그 움직임에서

두려움을 읽었다.

‘녀석들의 최종 목표는 아홉 개의 꼬리를 만들고’ 천 년을 채워 천호 가 되는 거야.’

당연히 꼬리를 잃는 것에 대한 두 려음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의 꼬리를 만들기 위해선 111 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리기 때문이 다.

‘나는 사냥꾼.’

사냥감의 목숨을 끊는 자.

그 과정에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용한다.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면 그 부분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사냥 당하는 입장에선 “사냥 진짜 뭣같이 하네”라고 욕을 해도 할 말 이 없는 사냥법이었다.

‘지금부터는 육탄전도 가능해.’

조금 전까지는 불가능했다.

압도적인 체급과 마력의 차이.

그 벽을 넘어서는 것이 힘들었으니 까.

하지만 불꽃 호리의 꼬리가 다섯 개가 되던 순간,상황은 바뀌었다.

“흐읍!”

서준호의 몸이 탄환처럼 빠르게 쏘 아졌다.

예고 없이 이루어진 기습에 놀란 불꽃 호리는,본능적으로 앞발을 휘 둘렀다.

후우우웅!

공기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찢겨져 나갔다.

그만큼 압도적인 위력.

단순히 덩치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행사할 수 있는 불공평한 물리력이 었다.

타앗!

하지만 공중에서 유연하게 몸을 비 튼 서준호는,휘둘러지는 앞발을 밟 고 도약했다.

순식간에 녀석의 배후를 점한 그는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캬아아악!

이미 한 번 당해봤기 때문일까,재 빨리 몸을 돌린 불꽃 호리가 자세를 낮췄다.


꼬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걸렸네.”

동시에 서준호의 입꼬리가 올라갔 다.

지능이 높은 불꽃 호리는 같은 공 격을 두 번이나 허용할 녀석이 아니 었다.

때문에 그는 처음부터 꼬리를 노리 지 않았다.

꼬리는 아니지만,큰 유효타를 넣 을 수 있는 부위.

쇄애애액!

수직으로 솟구친 서준호의 검이 부 드러운 무언가를 그어올렸다.

피익!

바로 불꽃 호리의 왼쪽 눈동자였 다.

...Ill

신경이 멀쩡한 생명체라면 상처를 입는 순간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그 고통은 순간적으로 시야 를 좁게 만든다.

하물며 불꽃 호리는 지금까지 두 눈으로 바라보던 세상을 한 쪽으로 만 보는 중이었다.

만약 녀석이 전투에 숙달되어 있었 다면,치명상을 입는 순간 머리를 식혔을 것이다.

전투 중에 이성을 잃는 것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간단한 것조차 모르 는구나.”

안타깝게도 불꽃 호리는 그만한 전 투 경험을 쌓지 못했다.

그 간단한 것을 가르쳐 줄만큼 대 단한 적수가 없었으니까.

“어쩌겠어,모르면 맞아야지.”

서준호의 몸이 불꽃 호리의 왼쪽을 파고들었다.

눈이 찢어지면서,철저하게 사각이 되어버린 공간이었다.

스격! 서억!

그의 검은 불꽃 호리의 피부에 스

크래치를 잔뜩 내기 시작했다.

철철! 불꽃 호리의 몸 곳곳에서 피 가 홀러내렸다.

- 키아아아악!

그쯤 되니 불꽃 호리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여기서 추가타를 더 허용하면,천 호고 나발이고 목숨이 끝날 것이라 는 사실을.

一카악! 카아아 o]•아으^

불꽃 호리는 두 개의 앞발을 미친 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십 개의 여우불도 시간차를 두며 날아들었다.

“귀찮네.”

하늘을 가득 메운 여우불을 바라보 던 서준호는,더 이상 무리라는 말 을 사용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면 난색을 표하며 도망 칠 궁리부터 했겠지만,지금은 그저 조금 귀찮은 정도.

딱 그 정도였다.

퍼어엉! 퍼엉!

얼어붙은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날아오던 여우불이 그대로 터져 나

갔다.

서준호는 불꽃 호리의 앞발 또한 피하지 않았다.

“정신 차려라,너 이제 구미 아니 야.”

서걱!

날카로운 검극이 녀석의 앞발을 그 대로 파고들었다.

꼬리가 잘리면서 마력이 낮아졌고, 방어력 또한 크게 저하된 상태였기 에 가능한 일이었다.

-케엑,질록!

불꽃 호리가 기침을 뱉어내기 시작

했다.

치명타를 연달아 허용해,몸 상태 가 엉망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끝내자.”

서준호가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캬아아아악!

상처 입은 포식자,불꽃 호리는 최 후의 발악을 시작했다.

쩍 벌린 입에서 생성되는 염화구 는,무려 ‘두 개’였다.

마지막 순간에 한계를 뛰어넘어 새 로운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

쩌저저저적!

푹! 푸욱!

바닥에서 생성된 붉고 날카로운 얼 음의 창들이,불꽃 호리의 몸을 사 정없이 꿰뚫었다.

녀석의 하나 남은 눈동자에선,생 기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수십 명의 플레이어를 상대로도 위 압감을 자랑하던 불꽃 호리는,단말 마조차 남기지 못한 채 고개를 축

늘어트렸다.

마력 공급원을 잃어버린 염화구 또 한 실타래처럼 흩어졌다.

“후우.”

원거리에서 무언가를 얼리는 것은 연습할 때만 사용해 본 기술.

실전에서 사용해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생각대로 잘 풀려서 다행이야.’

서준호는 평소에 무기를 얼릴 때, 대기 중의 수분을 얼리는 식으로 사 용해왔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멀리 떨어진 거

리에서는 그런 고난이도 기술이 불 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매개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만드느라 고생했지.”

필요한 것은 충분한 양의 액체.

때문에 서준호는 불꽃 호리의 전신 에 스크래치를 냈던 것이다.

녀석에게서 다량의 피가 흐르도록 말이다.

“후우우…… 젠장. 온몸이 터질 것 처럼 아프네.”

근육의 힘을 한계 이상으로 쥐어짜

내고,마력도 바닥까지 드러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장이라도 쓰 러져서 쉬고 싶었으나,그는 이를 참아냈다.

“할 일은 끝내놓고 자야지.”

터덜,터덜.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불꽃 호 리에게 다가간 서준호는 녀석을 올 려다보았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커다란 녀석이 다.


그 거대한 몸 곳곳을 뚫은 얼음의 창은,더 이상 마력을 주입하지 않 자 금세 녹아버렸다.

이곳은 사막이었으니까.

‘역시 EX 등급 능력이라 이건가. 공격력은 발군이네.’

사실 따지고 보면 공격력만 발군인 것이 아니다.

서리 능력은 유틸성도 좋고,방어 력도 훌륭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서리여왕이 이 능력 을 들고 자신에게 패배한 것이 이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뭐,기량이 다르다는 거겠지. 기량 이.”

제 얼굴에 금칠을 한 서준호는 곧

장 불꽃 호리의 배를 가르고 그곳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밖으로 빠져 나온 그의 손에는 야구공 크기의 무언가가 쥐 어져 있었다.

“후우,이거 진짜 맛 더럽게 없는 데……

그것은 불꽃 호리의 간이었다.

정말 먹기 싫은 비쥬얼과 식감을 자랑하는 재료지만,‘고작’ 그런 이 유로 안 먹을 수는 없다.

‘이걸 먹으면 모든 능력치가 다섯 개나 오르거든.’

아득,아드득!

결국 두 눈을 꼭 감은 서준호는 머리를 비우고 생간을 씹어먹었다.

제법 긴 고통의 시간이 끝나자,그 에 대한 보상이 따라왔다.

[불꽃 호리의 생간을 섭취하셨습니 다.]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으엑.”

깨끗한 물로 입안을 행구는 순간, 공략을 알리는 메시지들이 떠올랐 다.

[불타는 모래 언덕을 공략하셨습니 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4 상승했습니다.]

[잃어버린 근력 능력치가 3 복구되 었습니다.]

[잃어버린 속도 능력치가 2 복구되 었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불꽃 호리의 내 단’을 획득했습니다.]

[한 시간 후 게이트가 자동 소멸됨 니다.]

“……그럼 이제 진짜 끝난 거 맞 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벤토리까지 열어 내단을 확인한 순간.

서준호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 졌다.

현대 사회의 기자들.

그것도 게이트부의 기자들은 생각 보다 고된 직업군 중 하나였다.

플레이어들이 게이트에 입장하는 순간부터,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 지기 때문이다.

자리를 잠깐이나마 비우는 것도 힘 들었다.

그 타이밍에 공략이 끝나면,특종 의 기회는 말짱 광이 되어버리니까.

“아,선배님. 한 번만 봐주세요.”

“어림도 없다 막내야. 이것이 현대 사회의 비정함이니라,돈 내놓거라.”

“……에이씨.”

그래서 게이트부 기자들은 보통 2 인 1 조로 활동하며.

플레이어가 공략을 하는 동안 저들 끼리 소소한 놀이를 하곤 했다.

그 놀이란 때로는 체스가 되고,때 로는 바둑이 되었으며,때로는 지금 처럼 포커가 되었다.

“이게 참,게이트부 기자가 힘든 것 같으면서도 은근 꿀이라니까요. 이렇게 근무 시간에 당당하게 놀 수


도 있고요.”

“꿀은 개뿔,꿀단지를 깨버릴까 보 다. 얼어 뒤지겠는데 좋긴 뭐가 좋 아? 난 밤샘 야근해도 좋으니 사무

실에서 일하고 싶다.”

“뭐…… 사실 제일 답답한 건 플레 이어들이 대체 언제 나올지조차 모 른다는 거죠.”

이전의 공략대들은 불타는 모래 언 덕에서 평균 이틀을 버렸다.

물론 그것도 모두 실패했을 때의 이야기.

만약 이번 공략대가 클리어에 성공 한다 해도, 최소 하루는 더 기다려 야 할 것이다.

“만약 공략이 실패한다면 더 일찍 열릴 수는 있겠지만요.”

후배가 철없는 소리를 하자 선배

기자는 따끔하게 혼을 냈다.

“야 이 새끼야. 그래도 나라를 위 해 사지로 들어간 사람들이다. 재수 없는 소리 할래?”


“죄,죄송합니다. 제가 실언했어 요.”

“……패나 돌려.”

눈치를 살피던 후배가 천천히 카드 를 섞었다.

이어서 85 번째 포커 게임이 시작 되는 순간.

선배의 어깨 너머로 게이트를 힐긋 쳐다본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졌다.

“어?”

“……뭐냐,신종 포커페이스야?”

“아,아뇨. 저기 선배님. 게이트에 플레이어가 들어가면 붉은색이 되 죠?”

“그걸 몰라서 물어? 플레이어가 들 어가기 전에는 푸른색,들어가면 붉 은색이잖아.”

“저,저도 그렇게 알고 있는데

후배가 횡설수설 헛소리를 시작하 자,선배가 미간을 찌푸렸다.

“야. 너 패 존나 구리지? 왜 이리

헛바닥이 길어?”

“아니 그게…… 게이트의 색상이 바뀌었단 말이에요!”

“고작 한다는 변명이 그거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선배 기자는,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뭐야. 저거 왜 녹색이야?”

저도 모르게 카드 뭉치를 떨어트린 선배 기자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게이트가 푸른색도,붉은색도 아닌 녹색이다.

그 말은,게이트가 완전히 공략되

어 한 시간 뒤에 소멸된다는 뜻.

“뭐? 녹색?”

“아니,진짜로 공략에 성공했다 고?”

“게다가 클리어 타임이 13 시간이 라니…… 앞선 공략대들이 실패했던 시간보다도 빠르잖아?”

“특종…… 특종이다!”

텐트를 치고 대기하던 기자들이 서 둘러 카메라를 챙겨들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20 화

구음절맥 (1)
달칵!

붉은색이던 게이트가 녹색으로 바 뀌면서,마치 자물쇠가 열리는 듯한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동시에 게이트 너머에서 플레이어 들이 하나둘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던 기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전투가 치열했나 봐. 다들 꼴이 말이 아닌걸.”

“그러게 말이야. 역시 불꽃 호리는 불꽃 호리인가 봐.”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기자들은 그나마 멀쩡한 플레이어들을 붙잡고 마이크를 내밀었다.

“불꽃 호리의 꼬리는 몇 개였습니 까?”

“게이트 내부는 어둑서니 때와 마 찬가지로 푸른 초원이었습니까?”

“이번 공략에 지대한 공헌을 한, MVP 플레이어는 누구라고 생각하 십니까?”

앞선 몇 개의 질문에는 대답이 쉽 게 돌아왔다.

하지만 마지막 질문을 듣는 순간, 플레이어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게 이트 쪽을 쳐다보았다.

‘뭐지?’

‘이 반응은…… 아직 나오지 않았 다는 뜻인가?’

‘지금까지 안 나온 플레이어가 누 구 있더라?’

기자들이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던 순간.

플레이어 하나가 잔뜩 쉬어버린 목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저기 나오네요.”

동시에 기자들의 고개가 게이트 쪽 으로 휙휙 돌아갔다.

터벅,터벅.

한 남자가 누군가를 업고 천천히 게이트를 빠져 나오는 중이었다.

“저건……

“차민우! 청해 길드의 차민우다!”

“분명 청해의 길드 마스터인 차원

우의 동생이었지?”

“들어보니 그는 게이트 내부에서 플레이어들을 하나로 모아서 지휘했 다고 하더군.”

“과연. 그럼 이번 공략의 MVP 가 차민우라는 거네?”


납득을 마친 기자들은 빠르게 기사 부터 작성했다.

남들보다 빨리 업로드해야 더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민우의 뒤에 업혀 있는 남자. 저거 서준호 아냐 r

“진짜잖아? 왜 업혀 있는 거지?”

축 늘어진 서준호의 모습을 확인한 기자들의 얼굴 위로 실망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미공략 게이트를 두 개나 클 리어하고,당돌한 기자회견까지 거 치며 명실상부 가장 주목받는 루키


중 한 명이 되었다.

“아쉽게 됐네. 이번 게이트에선 딱 히 큰 활약을 하지 못한 모양이야.”

“어쩔 수 없지. 명문 길드의 엘리 트들은 유소년 때부터 교육을 받으 니까.”

“서준호는 그런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잖아? 엘리트랑 비교하면 급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

기자들이 쑥덕거리며 차민우를 기 다릴 때.

그는 서준호를 앰블런스에 조심스 럽게 눕힌 뒤에야 자신의 치료를 시 작했다.

잠시 후,치료가 끝났다는 의사의 콜 사인이 떨어지자 차민우의 인터 뷰가 시작되었다.

그는 앞선 플레이어들과는 다르게, 마이크가 올려진 단상을 앞에 두고 질문을 받았다.

기자들이 이번 공략의 MVP 를 차

민우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플레이어들을 전두지휘하며 이번 전투를 승리로 이끄셨다는데,기분 이 어떠십니까?”

“이번에 나타난 불꽃 호리는 꼬리 가 무려 아홉 개라고 들었습니다. 난이도는 어땠나요?”

“벌써부터 차민우 플레이어의 이름 이 인터넷에서 실시간 검색어 1 위를 찍었습니다. 평소부터 영웅이


되시 는 것이 꿈이라고 하셨는데,꿈을 이루신 소감이 어떻죠?”

기자들의 질문을 듣던 차민우가 눈 을 깜빡거렸다.

이어서 비타를 두드린 그는,정말 로 실시간 검색어에 제 이름이 박혀 있자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그 모습은 누가 봐도 기뻐하는 사 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기자들이 손 을 재차 질문했다.

“전혀 기뻐 보이지 않으시는데,이 유가 뭔가요?”

“그거야……
문득 말을 멈춘 차민우는,단상 너 머로 보이는 기자들을 빙 둘러보았

다.

‘……이런 광경이었구나.’

자신을 향해있는 수십 개의 카메라 렌즈와 시선.

그것은 게이트 공략을 성공적으로 끝내고,인터뷰를 하는 영웅들에게 만 주어지는 경치다.

차민우는 어렸을 때부터 TV 를 통 해 그들의 빛나는 모습을 보면서 자 라왔다.

그 영향인지,어느샌가 그는 어둑 서니와 같은 영웅이 되는 것을 꿈꾸 게 되었다.

‘어쩌면 지금은 내 꿈을 손쉽게 이

룰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일지도 몰 라.’

하지만 그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부끄럽게 남의 업적을 훔치면서까 지 빛날 생각은 없었다.

스스로 빛을 낼 줄 아는 자만이 별이 될 수 있고,나아가서 태양이 되는 법이다.

남의 업적을 훔쳐서 빛나는 것은, 그저 심지에 불이 붙은 폭죽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건 결국 내 자신의 격을 낮추는 행위일 뿐이지.’

차민우는 오히려 후련하다는 표정

을 지으며 눈을 떴다.

“아무래도 이 자리는,절 위한 자 리가 아닌 것 같군요.”

그 말에 기자들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겸손…… 인가?”

“표정을 보니 진심이 덕지덕지 묻 어 있는 것 같은데.”

“아니,서준호도 그러더니…… 요 즘 따라 인터뷰 따는 애들은 정신세 계가 왜 이리 독특해?”

“냅둬. 유행인가보지. 이유나 물어 보자고.”

술렁거리던 기자들이 질문을 던졌 다. ‘이유가 뭡니까’ 라고.

이에 차민우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 했다.

“불꽃 호리,제가 안 잡았습니다. 아니,정확하게 말하면 못 잡았습니 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럼 다른 플레이어들이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정말로 불꽃 호리를 잡은 게 저라고 했습니까?”

그야..”
잠시 기억을 더듬던 기자들이 단체 로 물음표를 띄웠다.

생각해보니 공략에 참여했던 플레 이어들은,차민우라는 이름을 꺼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차민우가 나 왔을 때 MVP 가 나왔다고……

‘……어라? 잠깐만.’

‘차민우는 혼자서 나온 게 아니었 잖아?’

‘그럼 이번 공략의 진정한 MVP 느..?

‘서준호?!’

빠르게 굴러가던 그들의 머리가 천 천히 느려지고,그를 대신하듯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정정 기사와 후속 보도.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 했 으니까.

고된 일을 끝내고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는 듯한 포근한 느낌.

마치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편안 한 기분이 들자,서준호는 눈을 번

쩍 떴다.

“흐마?!”

그러자 생전 처음 듣는 비명과 함 께,잔뜩 놀란 얼굴로 물러서는 차 시은이 보였다.

“……아니,상처 받게 뭘 그렇게까 지 놀라세요. 나쁜 짓이라도 하고 있었어요?”

“그,그럴 리가 없잖아요. 갑자기 눈을 뜨셔서 놀란것뿐이에요.”

그녀가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지금 몇 시죠?”

“오전 9 시 28 분이요. 8 시간 주무셨

어요.”

“……많이 피곤했나 보네요. 그럼 차 비서는 밤새도록 제 옆에 있었던 겁니까?”

“아니요?”

차시은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저는 아침 6 시에 병실로 출근했어 요.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라고 말씀 하셨으니까요.”

“……세상에.”

서준호는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정신을 잃었으면 그러지 않

으셔도 되는데……

“일찍 일어나실 수도 있으니까요. 아참,심심해서 준호 님에게 온 개 인지명 의뢰들을 정리하고 있었거든


요?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정 말 많이 왔어요. 아니다,이건 과거 형이네요. 지금도 많이 오고
있어 요.”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셨네요.”

서준호가 몸을 일으키려하자,차시 은이 이를 말렸다.

“어어? 의사의 말에 따르면 과로래 요.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고 누워 계세요.”

“제가 원체 가만히 있는 걸 못하는 놈인지라,오히려 누워 있는 게 무 리하는 거예요.”

결국 거추장스러운 붕대들을 풀고 일어난 서준호의 눈이 깜빡거렸다.

“음? 그런데 몸 상태가…… 좋네 요?”

근육통이 조금 남은 것 같지만 가 벼운 운동으로 풀릴 정도다.

불꽃 호리와 그렇게 격렬한 전투를 벌였건만,몸 상태는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멀쩡했다.

서준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 다.

“혹시 저,자는 사이에 영약이라도 투여 받았습니까?”

“아뇨? 제가 알기로는 기본적인 영 양 주사만 맞았다고 들었는데요.”

“……그럼 뭐지.”

봄을 여는 자의 효과가 이렇게까지 좋은 건가?

고개를 갸웃거린 서준호는 이내 어 깨를 으쓱거렸다.

“뭐,잘됐네요. 여기 어디 병원이에 요?”

“한국 병원이요. 어둑서니 님께서 도 요양 중이신,한국 최고의 병원

이지요.”

차시은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빤히 쳐다봤다.

위층 어딘가에 어둑서니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크흠.”

괜히 머쓱해진 서준호가 화장실에 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차시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더 누워 있지 않으셔도 괜찮 으세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서준호가 고개 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최필호 회장이 절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아……

그가 서두르는 이유를 알게 된 차 시은이 입술을 조그맣게 벌렸다.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서준 호를 쳐다봤다.

“본인의 몸이 다 낫지도 않으셨는 데…… 타인부터 생각하시네요?”

“저는 몸이 살짝 뻐근한 게 전부지 만,지금 이 순간에도 한 사람은 죽 어가고 있고,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슴도 미어지는 중이니까 요.”

최필호 회장은 지금 당장 달려와서 내단을 받아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예의가 아닌 것을 알기에,
발만 동동 구르며''자신 5 깨어나기를 기도 하고 있겠지.

“제 휴식은 그녀의 치료가 끝나고 난 이후에 언제라도 가능합니다.”

“..알겠어요. 그럼 제가 모실게

요.”

군말 없이 고개를 숙인 차시으으 병실 문을 열고 그를 주차장까지나 내했다. I

순식간에 도로를 미끄러진 자 는 최필호 회장의 자택으로 향했다

차시은에게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 리던 최필호 회장은 현관문까지 마 중을 나온 상태였다.

“아니,이렇게 빨리 움직이셔도 되 는 겁니까? 기사에는 실신하셨다고 쓰여 있던데……

“과장이 심하네요. 그냥 졸려서 푹 자고 일어난 것뿐인데요,뭘.”

씨익 웃은 서준호는 넓은 마당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히려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온 게 실례가 아닐까 싶네요.” "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선 안쪽 으로 가지요.” " "

최필호 회장은 집에 들어서자 사용 인에게 커피를 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서준호가 이를 제지했다.

“아뇨. 커피는 나중에 마시죠. 따님 방이 어딥니까? 치료부터 해야겠습 니다.”

그 말에 안색이 밝아진 최필호 회 장은 직접 그를 안내했다.

열은 분홍색 계열로 꾸며진 아기자 기한 방의 침대에는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 O. O O O."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과 바

짝 말라 건조해진 입술,하얗게 질 린 안색이 그녀의 상태를 말해주는 듯했다.

‘……생각한 것보다 심각한데.’


이건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할 정 도다.

서준호는 황급히 인벤토리에서 불 꽃 호리의 내단을 꺼내들었다.

동시에 최필호 회장이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어엇……

“아,이런. 깜빡했네요. 아마 내단 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화상을 입 으실 수 있습니다.”

“저,저는 괜찮습니다만…… 정말 그렇게 뜨거운 걸 먹여도 괜찮을까 요?”

“물론 그냥 먹여선 안 됩니다.”

서준호가 내단을 꼭 쥐면서 물었 다.

“회장님께서는 불꽃 호리의 내단으 로 어떻게 구음절맥증을 치료하는지 아십니까?”

알 리가 없다.

유일하게 그것을 알고 있을 프랑스 의 거부조차도,치료 과정까지는 모

른다고 말했으니까.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최필호는 물론이고,차시 은까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심덕구 협회장님께서 저 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 니다.”

“아니,그분은 구음절맥증의 치료 법을 어떻게……?”

“과거에 이 내단으로 프랑스 거부 의 아내를 치료한 것은,다름 아닌 어둑서니 였으니까요.”

아아!”

단숨에 납득이 되었다.

심덕구는 어둑서니와 마음을 터놓 은 친구였으니까.

꼬옥!

최필호 회장이 서준호의 두 손을 꼬옥 붙잡았다.

몹시 뜨거울 텐데도,그의 눈빛에 는 흔들림이 없었다.

“……제 딸을 부탁합니다.”

“맡겨주세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는 차시은과 함께 방을 나

섰다.

서준호가 치료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준 것이었다.


드르륵.

의자를 끌어온 서준호는 자리에 앉 아,최선희의 손목을 붙잡았다.

동시에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으음,마력 회로가 아주 꽁꽁 얼 어 있네.’

최선희의 상태는 예전에 자신이 치 료했던 환자보다 더 안 좋았다.

‘우선은 내단을 가루로 만들고,조 금씩 털어 넣으면서 얼어붙은 회로

부터 녹여야……

그가 구체적인 치료 계획을 세워나 가던 순간.

전혀 예상치도 못한 메시지가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대상에게서 중급 음기(陰氣)가 느 껴집니다.]

[서리 능력을 통해 음기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흡수 시 마력 능력치가 상승합니 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21 화

구음절맥 (2)

부비적,부비적.

서준호가 손등으로 제 눈을 비볐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메시지 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건 25 년 평생…… 아니,50

년 평생으로 계산해야 하나? 아무튼 살면서 처음 보는데.’

서리 능력은 만능이라는 말이 걸맞 을 정도로 어디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최고의 능력이다.

공격에 능하고,방어에도 능하며, 변수를 창출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마력 능력치를 상 승시키는 것까지 가능하다고?’

그야말로 완전무결의 능력이 아닌 가.

이런 능력은 어둠의 파수꾼에조차 없었다.

‘아니,그건 단정 짓기엔 이른가, 만약 서리 능력이 구음절맥이라는 희대의 불치병에서 ‘음기’를


흡수할 수 있다면.

어둠의 파수꾼은 어둠과 관련된 무 언가를 흡수할 수도 있는 일이다.

‘어둠과 관련된 무언가라…… 여태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조사 정도 는 해봐야겠어.’


어찌되었건 현재 상황은 자신에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오히려 잘된 일이다.

‘마력 능력치가 올라간다면 무조건

흡수해야지.’

게다가 일이 잘 풀리면 불꽃 호리 의 내단까지 아낄 수 있으니 일석이 조.

서준호는 두 눈을 천천히 감고,최 선희의 손목을 붙잡은 손에 모든 신 경을 집중했다.

솨아아아아.

그의 몸에서 홀러나온 정순한 마력 이 최선희의 손목을 통해 스며들었 다.

'우선 마력 회로의 구조 파악부터.’

머릿속으로 최선희의 마력 회로가 마치 그림처럼 그려졌다.

일반인보다 더 비좁은 회로.

심지어 회로 곳곳에는 고드름 모양 의 음기가 쫙 깔려 있었다.

‘이런 건 단숨에,아주 시원하게 밀어붙여야 돼.’

치료가 길어지면 환자에게 큰 부담 만 지울 뿐이다.

과과과과과!

서준호의 마력이 거친 황소처럼 최 선희의 마력 회로를 쭈욱 내달렸다.

마력과 충돌한 고드름들은 순식간 에 얼음 파편이 되어 으스러졌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건…… 마치 눈덩이 같네.’

눈밭에서 눈덩이를 굴리는 것마냥, 깨진 얼음 결정들이 그의 마력에 달 라붙으며 덩치를 키워나갔다.

거기서 잠시 마력을 갈무리한 서준 호는 환자의 상태를 유심히 살펴보 았다.

“……호오?”

자연스럽게 흥미롭다는 표정이 지 어 졌다.

‘이건 정말 기대 이상인데?’

그는 과거에 불꽃 호리의 내단으로 구음절맥증을 치료한 적이 있다.

내단의 양기를 이용해 강제로 얼어 붙은 마력 회로를 녹인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환자에게 그리 좋 은 치료법은 아니었어.’


극상성의 기운을 계속 부딪쳐서 서 로를 상쇄시키는 일이었으니까.

환자의 마력 회로에서 소규모 폭발 이 계속 일어난다고 보면 된다.

당연히 환자가 부담해야 할 정신 적,육체적 피로 또한 상상을 초월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였다.

새액,새액.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음을 홀리던 최선희는,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고 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행이야.,

성과를 확인한 서준호는 이후부터 거침이 없었다.

그는 두 개의 손을 이용해 최선희 의 손목을 각각 붙잡고,양쪽에서 음기를 흡수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손을 하나만 쓸 때보다 흡수 속도는 두 배 더 빨랐 다.

물론 그것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 했다.

마력 회로는 신경계와 밀접한 연관 성을 지닌 곳.

자칫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대 체 어느 부분이 고장 날지 알 수가 없다.

때문에 서준호는 마치 외나무다리 를 걷는 것처럼 집중,또 집중해야 했다.

똑.

콧잔등을 타고내린 땀방울이 침대 시트에 떨어졌을 때.

서준호는 참아왔던 긴 한숨을 내쉬 었다.

길었던 치료가 드디어 끝난 것이었 다.

“후아아…… 이거 두 번 할 짓은 못 되겠네.”

슬쩍 시간을 확인해 보니 치료를 시작한 지 무려 네 시간이나 흐른 상태였다.

‘이전에 내단을 사용했을 땐 2 시간 10 분 정도밖에 안 걸렸는데……

치료법이 달라서인지,이번에는 그 두 배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결과는 스스로가 뿌듯할 정 도의 대성공이었다.

“아마 후유증도 없을 거야.”

최선희의 전신에 촘촘하게 퍼져 있 던 음기를 뿌리까지 싹 다 흡수했 다.

그녀에게도 좋은 일이었지만,자신 에게는 더 좋은 일이었다.

[마력 능력치가 5 상승했습니다.]

최종적으로 마력이 다섯 개나 올랐 으니까.


“상태창.”

[서준히

레벨 : 13

칭호 : 봄을 여는 자

근력 : 46 체력 : 44

속도 : 50 마력 : 51

조용히 자신의 상태를 관찰하던 서 준호는 그제서야 입 꼬리를 올렸다.

“흐흐……

마치 아저씨 같은 헤픈 웃음소리였

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오랜 시간 정점에 서 있어본 그가 볼 때,이 상태창은 단단히 미쳐 있 었으니까.

‘능력치란 개인마다 편차가 어느 정도 있지만……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정도 수치면 최소 35 벨의 플레 이어와 비슷해.’

한 마디로 동일 레벨 구간에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마력 능력치가 드디어 50

을 넘겼다.

‘이제 슬슬 어둠의 파수꾼도 실전 에서 사용해도 되겠어.’

마력을 미친 듯이 잡아먹던 어둠의 능력.

물론 전성기 수준처럼 사용하지는 못하겠지만,어둑서니의 초창기 시 절 정도까지는 사용할 수 있을 것이


다.

문을 열고 방을 나서자,방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던 최필호 회장 이 벌떡 일어났다.

“치,치료는……

잘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서준호

는 환한 미소를 선물해주었다.

“무사히 끝났습니다. 병은 완치되 었으며,후유증 또한 없을 겁니다.”

«..끄,,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최필호 회장은 차마 말을 뱉어내지 못하고,눈물을 펑펑 쏟으며 서준호 의 손을 꼬옥 잡았다.

고마움,그의 손을 통해 상대방의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정말…… 정말 고맙…… 끄흐 흑……

아이처럼 울던 최필호는 잠시만 기 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 어갔다.

최필호 회장의 집무실.

그곳의 소파에 앉은 서준호는 맞은 편의 최필호 회장을 바라봤다.

“정말,정말로 고맙습니다.”

그가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최선희의 상태를 확인한 그의 안색 은 이전보다 훨씬 더 밝아보였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요. 엄밀히 말하자면 계약은 내단을 가져오는 것으로 끝났습니 다. 원하신다면 치료에 대한 계약을
추가로 맺으실 수도 있는 상황이었 지요.”

그건 사실이었다.

다만 사람 목숨을 가지고 지저분하 게 돈을 버는 걸 서준호가 싫어했을 뿐이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잠깐 사이에 정말 많은 고민을 했습 니다.”

최필호 회장은 아주 그냥 꿀이 뚝

뚝 떨어지는 눈으로 서준호를 바라 봤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진 서준호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돈을 더 드릴까 했습니 다만…… 이전에 계약할 때를 떠올 리면 서준호 플레이어가 돈을 탐하


는 인물은 아닌 것 같더군요.”

“경제적으로 그리 부족함을 느끼지 는 않아서요.”

이미 돈으로 살 수 있는,아니,돈 으로도 살 수 없는 사치를 누려본 서준호다.

그에게 돈이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벌면 되는,딱 그 정도 수준의 도구 였다.

“그래서 정했습니다. 한 번.”

최필호 회장이 검지 하나를 펼쳤 다.

“한 번…… 이요?”
“은인께서 도움을 요청하실 때,명 호의 모든 힘을 동원해 한 번의 도 움을 드리겠습니다.”

단 한 번.

어찌 보면 야박한 숫자다.

하지만 서준호는 명호그룹의 힘으 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떠올려보

았다.

‘……아니,그 반대를 떠올리는 게 더 빠르겠어.’

무엇을 할 수 있냐를 따지기보다, 무엇을 못 하는가를 찾는 것이 더 빠른 수준이다.

명호그룹은 대한민국 재계 서열 1 위의 그룹.

한 분야의 정점에게는 그들만의 독 륵한 무기가 있는 법이다.

그들의 무기는 다름아닌 길드였다.

‘붉은탑 길드.’

최필호의 장남이 마스터를 맡고 있

는 길드.

플레이어 강국이라 불리는 대한민 국에서 랭킹 5 위를 유지 중인 곳이 다.

‘나중에 정말 필요해질 때,든든한 원군을 한 번은 부를 수 있겠어.’

보상으로는 차고 넘친다고 생각한 서준호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룹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도록 신중히 사용하겠습니다.”

“하하하,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서준호 플레이어는 저희 가문의 은 인이시니까요.”

최필호가 굉장히 넉넉한 표정을 지

었다.

“그러면 지난번에 함께하지 못했던 식사,지금은 어떠신지요.”

“당연히 참석해야죠.”

“비서 분도 함께 드시죠.”

마침 배가 고팠던 서준호는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얼음상에서 깨어난 뒤에 먹은 음식 들 중에서,가장 맛있는 식사였다.

차시은은 협회로 돌아오는 내내 거 듭해서 당부했다.

“의사가 꼭 휴식을…… 최소 사흘 은…… 그리고 무리한 운동도 자 제…… 아시겠어요?”

“알겠다니까요. 대신 차 비서도 오 늘은 일찍 퇴근하세요. 일찍 출근한 다고 고생하셨으니까.”


“……정말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죠.”

서준호가 고개를 끄덕이자,그녀는 살짝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럼…… 오늘은 저도 일찍

퇴근해서 마음의 양식을 쌓는 시간 을 가질게요.”

“독서를 좋아하시나 봐요?”

“옛 선인들께서는 책에 세상이 담 겨 있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퇴근을 한 뒤에도 자발적으로 공부 하는 모범생이라니.

덕구의 칭찬이 그렇게나 자자하더 니,과연 엘리트다운 발언이었다.

“그럼 즐거운 독서 시간 가지세 요.”

“네,그럼 내일 아침에 찾아뵐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씀 드리면……

“최소 사흘은 푹 쉬면서 무리한 운 동 안 할게요.”

“어머,이제 잘 기억하시네요. 그럼 들어가볼게요.”

서준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떠 나는 차시은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 다봤다.

“……왜 내 주변 사람들은 다 잔소 리쟁이인거지?”

주위로 잔소리쟁이들만 모이는 것 일까,아니면 그의 주변에 오면 잔 소리가 느는 것일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는 곧장 협회장실로 올라갔다.

“오!”

그를 본 덕구의 첫 마디였다.

그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걸어와 서준호의 어깨를 툭 쳤다.

“방금 막 최필호 회장이랑 통화 끝 난 참이다. 완치되었다며? 엄청 좋 아하시더라.”

“입이 귀에 걸리셨더라고.”

“잘된 일이지. 너는 몸 좀 어떠 냐?”

“난 괜찮아. 가벼운 근육통 정도만 느껴지는데?”

“……무슨 영약이라도 투여했냐?”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래.”

“네 몸뚱이도 참 대단하다.”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았다.

“언론사에서 난리 났어. 회견 언제 열거냐고 물어보는 전화가 무슨 초 단위로 걸려와.”

“회견……? 쓰읍,귀찮은데. 기자 회견 그거 얼마 전에 했잖아.”

“그때는 리우프의 화원을 공략해서 열었던 거고, 이번엔 불꽃 호리잖아. 네가 드나드는 게이트가 얼마나

단한 것들인지 이제야 좀 실감이 되 냐?”

“진짜 귀찮은데……

서준호가 진심으로 가기 싫다는 표 정을 짓자,심덕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 그냥 재끼든가. 아예 예전 스타일로 가면 되지.”

“예전 스타일?”

“정말 중요한 일 아니면 회견 자체 를 안 해버리는…… 극한의 신비주 의 컨셉 말이다.”

잠시 고민을 해보던 서준호가 고개 를 끄덕였다.

“신비주의 컨셉까지는 아니지만, 이번 회견은 패스하자. 어차피 뻔하 고 식상한 질문들이나 해댈 텐데,


그런 거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 는 없지.”

“알겠다. 그럼 언론 쪽은 내가 알 아서 무마할게.”

“땡큐. 아 그리고.......,’

서준호가 인벤토리에서 불꽃 호리 의 내단을 꺼냈다. '

방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자,심 덕구가 넥타이를 풀면서 인상을 푸렸다.

“야,덥잖아. 뭐냐 그거?”

“이거 불꽃 호리의 내단.”

오묘한 표정을 지어보인 심덕구가 내단과 서준호를 번갈아가며 쳐다봤 다.

“뭐야. 한 번에 두 개나 나온 거 야?”

“야,내단이 무슨 라면 봉지에 들 어 있는 다시마인 줄 알아? 하나밖 에 안 나왔어.”

“뭐? 하지만 최필호 회장의 딸은 분명히 완치되었다고……

“그건 내단의 힘을 써서 치료한 게

아니야.”

파사사삭.

서리 능력이 한껏 올라간 방의 온 도를 순식간에 낮춰버렸다.

심덕구가 다시 넥타이를 조이며 행 복한 표정을 지었다.


“아,시원하네. 넌 좋겠다. 여름에 전기세 아낄 수 있어서.”

“뭐래. 아무튼 최선희는 서리 능력 으로 치료했어. 구음절맥의 음기를 내가 전부 흡수했거든.”

심덕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 다.

“……그게 가능해?”

“해보니까 되더라고. 심지어 마력 능력치까지 올랐어.”

“아니 무슨 능력 하나로 다 해먹 네,다 해먹어.”

질린 표정을 짓던 덕구는 돌연 무 언가를 떠올린 듯,눈을 빛냈다.

“야 잠깐만. 그럼 음기가 맺혀 있 는 아이템도 흡수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눈■치 빠른 녀석.

서준호는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 는 녀석을 보며 씨익 웃었다.

“내가 너한테 이 말을 왜 꺼냈겠 어.”

“아하. 나보고 그런 아이템들 찾아 서 대령하라 이 말이었구만.”

심덕구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홀렸지만,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 다.

“부탁 좀 하자. 그런데 문제가 하 나 있어. 구음절맥증의 음기가 중급 이라고 표시되더라고. 증가한 마력
능력치는 다섯 개뿐이고.”

“흠. 구음절맥의 음기는 현대의학 으로는 손도 못 댈 정도로 지독한 데…… 그게 겨우 중급이다? 그럼

웬만한 아이템으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겠네.”

“그리고 하나 더 있어.”

심덕구는 계속 뻔뻔하게 요구하는 서준호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 다.

“아,예에〜 서준호 님. 이번에는 또 무엇이 쳐필요하신지요.”

“어둠의 파수꾼. 이 녀석도 무언가 를 흡수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과연. 확실히 그건 알아볼 필 요가 있겠어.”

속성 계열 능력은 흔치않다.

게다가 보유한 속성 계열 능력이 각각 S, EX 등급인 플레이어는 오직 서준호 뿐이다.

능력에 대한 연구를 스스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소리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심덕구가 고 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는 나대로 물건들을 찾아 볼 테니,넌 그동안 마켓 쪽을 살펴 봐.”

당연한 말이지만 동네의 슈퍼마켓 따위를 말하는 건 아니었다.


더 플레이어 마켓 (The Player

Market).

전 세계에 지점을 두고 있는,지구 최대 규모의 플레이어 장터를 의미 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22 화

블랙마켓 (1)

플레이어 마켓에는 없는 것이 없 다.

영약,무기,방어구,연금술 재료, 스킬북 등등.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다.

일반인에게도 쇼핑 장소로 인기가

많았기에 항상 사람이 붐비는 곳이 었다.

“여긴 옛날이랑 똑같네.”

마켓에 도착한 서준호는 감회가 새 로운 표정으로 시장의 입구를 쳐다 봤다.

29 년전,오래된 물건의 메카나 다 름없던 인사동 중고시장은 플레이어 마켓으로 바뀌었다.

‘한국에는 서울의 인사동과 부산의 남포등. 딱 두 군데 밖에 없지.’

오늘 서준호가 방문한 곳은 서울 지점이었다.

입구에 걸려 있는 LED 간판이 그

에게는 홀로그램 간판보다도 친숙하 게 느껴졌다.

'거리는 훨씬 더 활발해졌고.’

예전에도 일반인의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지금처럼 많지는 않았다.

마켓의 넓은 거리 곳곳에는 데이트 를 나온 연인과 사람들이 가득했다.

서준호는 시끌벅적한 마켓을 거닐 며 진열된 상품들을 둘러보았다.

‘그냥저냥 구색을 갖춘 수준이네.’

자신의 기준으로 보면 하품(下品) 에서 중품(巾品,) 사이의 물건들.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아직도 진짜 좋은 물건은 안에 있 나보네.’

더 안쪽,소위 ‘블랙마켓’이라 불리 는 시장 속의 시장이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입수하 는 것 또한 플레이어의 능력.

하지만 서준호는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 없이 덕구에게 방법을 전해들 은 상태였다.


‘블랙마켓의 입장 방법은 새해마다 갱신되니까 예전 방법은 소용이 없 어.’

대한민국의 번잡한 시내에는 단 한 군데도 빠짐없이 영화관과 음식점들

이 들어서 있다.

플레이어 마켓이라고 다를 건 없었 다.

“찾았다.”

자신이 찾던 영화관을 발견한 서준 호는 곧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쉽고 간편한 자동 매표소 에서 표를 뽑을 때,서준호는 구태 여 직원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고객님.”

데스크의 남직원이 환한 미소를 지 으며 그를 반겼다.

서준호는 덕구에게 들었던 암구호

를 내뱉었다.

지금 상영하는 영화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영화가 뭐예요?”

이에 남직원이 미소를 유지하며 대 꾸했다.

“아쉽지만 현재 상영 중인 영화들 은 모두 평가가 좋습니다.” 安

“그럼 가장 빠른 시간의 영화 한 편이랑,컵에다가 얼음만 채워서 세요.”

“네,손님. 결제 도와드리겠습니 다.”

끝까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직 원은 태연스럽게 얼음이 담긴 컵과

영화표를 건네주었다.

‘8 관의 G-10 석.’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서 앉자,마 침 모든 광고가 끝나고 조명이 꺼졌 다.

영화관을 자주 방문하는 이라면 알 것이다.

영화가 시작된 순간부터,주변 사 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다는 것을.

심지어 서준호의 자리는 상영관의 맨 뒤쪽 끝자리.

모든 사람이 숨 죽여 영화를 관람 하고 있을 때,서준호가 앉은 좌석

에서 미약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왔다.’

서준호는 그 마력에 반발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맡겼다.

다음 순간,그의 모습이 기척도 없 이 영화관에서 사라졌다.


영화에 푹 빠진 관객들은 그 사실 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공간이동 혹은 텔레포트라 불리는 마법.

그것을 겪을 때의 느낌은 게이트에 들어설 때와 매우 비슷하다.

굳이 차이점을 꼽으라면 마법사의 수준에 따라 구토를 유발할 수도 있 다.

‘으으…… 텔레포트는 역시 스카야 가 최고네.’

살짝 울렁거리는 속을 달랜 서준호 는 어느 거리의 입구에 서 있었다.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를 한 번씩 힐긋거리며 쳐다봤다.

그들 모두가 블랙마켓에 입장할 자 격을 갖춘 사람들이다.

‘마켓은 국가마다 지점이 따로 있 지만,블랙마켓은 다르지.’

전 세계의 모든 플레이어 마켓은 결국 하나의 블랙마켓으로 향하는 ‘항구’에 불과하다.

‘여기가…… 에스토니아라고 했 나?’

블랙마켓은 이름도 생소한 유럽 국 가의 지하에 만들어진 시장이다.

그래서인지 하늘, 아니 천장에는 해와 달을 대신해서 반짝이는 돌이 무수히 박혀 있었다.

이 경이로운 시장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

서 10 명도 채 안 된다.

‘뭐,그것도 옛날이야기니까 지금 은 더 알고 있을지도.’

그가 블랙마켓의 위치를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마켓의 텔레포터가 형편없다고 짜 증을 낸 스카야가,다음부터는 직접 찾아오겠다고 마력을 역추적하여 이


곳의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그 후로는 서준호도 마켓의 텔레포 터를 이용한 적이 없었다.

스카야에게 부탁하면 프리패스로 보내주었으니까.

‘그것 때문에 마켓의 오너가 스카

야를 싫어했지.’

물론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목숨을 소중 히 여기는 법이기에.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서준호는 걸 음을 옮겼다.

블랙마켓을 안내해줄 가이드? 이곳 에 그런 친절한 존재 따위는 없다.


‘애초에 여긴 팔자 좋게 쇼핑을 할 수 있는 곳이 못 돼.’

일반인과 수준 낮은 플레이어의 접 근을 막아놓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뒷세계로 분류되는 블랙마켓은 하

나의 독립된 국가나 마찬가지.

이곳은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통용 되는 상식이 결여된 장소였다.

‘단순히 어깨가 부딪쳤다거나,눈 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죽는 살벌한 곳이지.’

마켓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장소.

블랙마켓은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관리인에게 돈만 쥐어주면 살인 정 도는 눈을 감아준다.

하지만 서준호의 발걸음에는 거침 이 없었다.

이곳에서 자신보다 강한 플레이어

를 만날 확률이 매우 낮았기 때문이 다.

'프론티어의 입장 조건이 30 레벨 이상인지라,잘나가는 놈들은 대부 분 2 층에 있어.’

현재 지구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대 부분 30 레벨 이하거나 2 층의 부담 감을 견디지 못하고 내려온 이들뿐.

즉,지금의 능력치로도 모두 상대 할 수 있는 녀석들뿐이라는 뜻이었 다.

'여기다.’

가게 하나를 발견한 서준호는 낡은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지노샤의 고물 상점]

영문 필기체로 쓰여진 가게는 고물 로 분류되는 아이템들을 판매하는 장소였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죽었다 깨 어나도 방문하지 않을만한 가게.

하지만 현재 서준호가 원하는 물건 을 찾는다면,이곳보다 적절한 곳은 없었다.

끼이익! 오래되어 비명을 지르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지 냄새가 코

를 찔렀다.

“어서 오쇼.”

노란 머리의 껄렁해 보이는 남자는 서준호를 쳐다보더니,들고 있던 신 문과 그를 대조했다.

“……오야? 이거 한국의 유명 인사 께서 납셨네.”

그가 읽고 있던 신문의 1 면에는 서준호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기사는 안 읽어봐도 뻔했다.

불꽃 호리를 사냥한 그를 한껏 추 켜세워 주는 내용일 테니까.


치이익. 남자는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물면서 말했다.

“뭘 찾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가 게를 잘못 찾아온 것 같수다.”

“여기 고물 상점 아닙니까?”

“……흠. 그럼 다 알고 왔다는 말 인데.”

미간을 찌푸린 그는 제 가게를 둘 러 보았다.

“뭐,맘껏 둘러보쇼. 쓸 만한 물건 은 없겠지만.”

“속성 계열 아이템은 어느 쪽에 있 습니까.”

“……저쪽 구석 두 번째 선반.”

그가 가리킨 곳으로 향한 서준호는 산처럼 쌓여 있는 아이템들을 보는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빙고.’

특별한 능력이 부여된 아이템은 아 티팩트라 불리며 고가에 거래된다.

하지만 모든 아티팩트가 플레이어 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용하면 저주에 걸리는 아이템도 있고,사용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서 외면되는 것도 있다.

그런 아이템들은 모두 이 고물가게 로 직행한다.

특별한 것을 찾는 이의 눈에 띄기 를 바라면서,이 먼지 쌓인 가게에 쭉 묻혀 있는 것이다.

‘완전 노다지잖아?’

직원에게 등을 보이고 있던 서준호 가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의 눈앞으로는 쉴 새 없이 메시 지가 떠오르는 중이었다.

[대상에게서 하급 한기(寒氣)가 느 껴집니다.]

[대상에게서 하급 음기(陰氣)가 느 껴집니다.]

[대상에게서 중하급 서리기운이 느 껴집니다.]

주인을 만나지 못해 수십 년간 가 게에 처박혀 있던 아이템들이 너도 나도 소리쳤다.

그렇게 서준호가 찾아낸 얼음(水) 계열 아티팩트는 총 일곱 개.

대부분은 하급 이하의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지만,운 좋게 중하급 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마력 능력치도 조금은

오르겠지.’

서준호는 그것들을 들고 껄렁남에 게 돌아갔다.


그는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튕겨 넣으며 목을 앞으로 쭉 뻤다.

“……뭐야. 이걸 다 사겠다고?”

“안 됩니까?”

“아니,안 될 건 없는데…… 아니 지. 이럴 땐 고맙습니다였지.”

고개를 꾸벅 숙인 그는 서랍장에서 계산기를 꺼냈다.

“혹시나 싶어서 말해두지만,아무 리 고물이라고 해도 이 녀석들은 아

티팩트 중에서 가장 고가에 거래된 다는 속성 계열 아티팩트요.”

“상관없어요.”

“……쿨해서 좋구먼.”

타다닥!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린 그가 서준호의 눈치를 살폈다.

“제일 상태가 안 좋은 것도 개당 5 천부터 시작하고…… 내가 봤을 때 이쪽 물건은 주인만 잘 만나면 제


노릇을 톡톡히 할 것 같거든요? 이 녀석은 4 억 주셔야겠는데.”

“그래서 다 합쳐서 얼마냐고요.”

“일곱 개에 10 억 2 천인데…… 뒤 에 2 천은 빼드릴게.”

가격을 들은 서준호는 군말없이 몸 을 돌렸다.

이에 조급해진 건 직원이었다.

“자,잠깐! 그럼 천만 원 정도 더 깎아드릴게……!”

절박한 목소리가 서준호를 붙잡았 지만,그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 였다.

‘가격이 착하네.’

마력 하나를 올려주는 영약은 최소 10 억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저 아티팩트들 일곱 개에 10 억이라니?

이건 앉아서 돈을 쓸어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서준호는 다시 한 번 가게 구석으로 향했다.

‘얼음 계열 아이템들이 더 없나 다 시 한 번 둘러보고,이번엔 어둠 계 열도 찾아보자.’

30 분가량을 더 껑껑거리며 뒤지던 그는,결국 최하급 얼음 계열 아이 템 두 개를 더 찾아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어둠 속성이 붙은 아이 템은 굉장히 희귀한지라 하나도 찾 아내지 못했다.

두 개의 아이템을 더 들고 오자

그사이에 재떨이에는 담배꽁초 두 개가 늘어 있었다.


“응? 설마 그것도 같이 사시려 고……?”

“얼맙니까.”

“에…… 그게……

열심히 머리를 굴린 직원은 은근슬 쩍 앞선 일곱 개의 아이템을 서준호 에게 밀었다.

“이것들이랑 같이 사면 딱 11 억만 받을게.”

뒤에 가져온 두 개의 아이템은 각 각 5,000 만 원에 주겠다는 소리다.

‘잘됐네.’

굳이 협상을 하면서 심력을 소모할 생각은 없었지만,깎아준다는데 거 절할 생각도 없었다.

“전부 살게요.”

“아이고오! 유명 인사께서는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르셔.”

열심히 딸랑거린 직원은 그의 마음 이 바뀔 새라,황급히 결제를 마쳤 다.

“자,그러면……

아이템들을 인벤토리에 잘 넣어둔 서준호가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정도 샀으면 슬슬 보여주시 죠?”

“……무슨 말씀이신지?”

남자가 오리발을 내밀자,서준호는 알거 다 아는 사람들끼리 왜 이러냐 는 표정을 지었다.

“간혹가다 멋도 모르는 초보자들이 실수로 판매하는 멀쩡한 아티팩트 들…… 즉 이 가게의 최상품들만 따
로 모아놓는 방이 있다고 들었는데 요?”

게슴츠레한 눈으로 서준호를 내려 다보던 직원이 제 머리를 벅벅 긁었

다.

“……젠장. 그 얘기는 어디서?”

“노코멘트.”

“아오. 입 싼 새끼들이 왜 이리 많 아?”

불만을 토로 한 직원은 입구 쪽으 로 걸어갔다.

철컥.

문을 잠그고 걸어둔 팻말을 CLOSE 로 뒤집은 그는 담배 한 개 비를 입에 물며 턱을 까딱였다.

“따라오쇼.”

그를 따라 가게 안쪽으로 향하는
서준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23 화

블랙마켓 (2)

가게의 안쪽에는 문이 하나 있었 다.

그곳으로 들어가자 깔끔하게 정리 된 창고가 나왔다.

“속성 계열 아이템은 저기 있는 게 다요.”

서준호는 그가 가리킨 곳으로 가서 아이템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과연.’

확실히 상태가 좋은 녀석들이 많 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자신이 찾는 어둠 속성의 아이템이 없다는 것.

하지만 얼음 속성 아티팩트는 있었 다.

‘딱 하나 있네.’

서준호는 시린 기운을 쁨어내는 장 갑 한 쌍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벽에 기댄 채 담배를 피고

있던 직원이 깜짝 놀라서 앞으로 뛰 쳐나왔다.

어어,그거 함부로 만지면 크일 나요!”

황급히 달려온 그는 서준호에게서 장갑을 낚아채더니 제자리에 돌려놓 았다.

그는 십 년 감수했다는 표정으로 열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완전 돌아버린 장갑이에요. 저주 받았다니까? 옵션은 정말 괜찮 게 붙었는데,때때로 마력 폭주 현


상이 일어나서 착용자의 몸을 꽁꽁 얼려 버리거든요. 벌써 셋이나 당했

으요.”

“……한 번 볼게요.”

서준호는 아이템 감정을 통해 장갑 의 정보를 확인했다.

[서리요정의 원한이 맺힌 장갑]

등급 : 레어(저주)

속도 +1

체력 +1

마력 +2
서리요정의 원한 - 때때로 착용자 의 몸을 얼려 버립니다.

착용 제한 : 레벨 10, 속도 40 이 상, 마력 50 이상

[대상에게서 중급 서리기운이 느껴 집니다.]

[홉수를 통해 아이템을 정화할 수 있습니다.]

‘……대박이다.’

무려 구음절맥과 동일한 중급의 서 리기 운이다.

그렇다면 마력 능력치를 다섯 개 가까이 상승시킬 수 있다는 뜻.

서준호는 눈을 빛내며 구매 의사를

드러냈다.

“이거 얼마예요?”

“……진짜 사실라고?”

슬쩍 그의 눈치를 보던 직원이 혀 로 입술을 축였다.

“아이템 정보를 보면 아시겠지만, 이게 실력 있는 정화사가 정화만 해 주면 못해도 30 억은 할 만한 물건


이거든요.”

“그래서 현재 가격은요.”

“……뭐,나도 사람 잡아먹은 물건 계속 들고 있긴 뭐하고…… 정화사 를 찾는 것도 힘드니 18 억에 드릴


게.”

레어 등급이란 걸 생각하면 굉장히 저렴하다.

서준호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 다.

“쟁여둔 물건은 이게 답니까? 어둠 속성의 아이템은 없어요?”

“에이,손님도 참. 빛이나 어둠 속 성 아이템이 이딴 곳에 굴러다니겠 어요? 2 층의 마켓이라면 모를까.”

‘2 층인가. 나중에 한 번 가봐야겠 네.’

장갑의 계산까지 마친 직원은 싱글 벙글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그럼 또 오십쇼!”

가게를 나온 서준호는 혹시나 싶어 아티팩트 가게에도 방문했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사용가능한 아 이템들은,최하급 속성만 부여되어 있어도 10 억이 넘어갔다.

“가성비가 너무 구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서준호는 블 랙마켓의 중앙에 위치한 주점으로 향했다.

배가 고파서는 아니었다.
“더 할 것도 없으니 돌아갈까.”

블랙마켓에 입장할 때는 반드시 마

켓의 텔레포터가 필요하다.

그건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쇼핑을 끝낸 고객들이 텔레포트 서 비스를 요청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주점이었다.

물론 주점답게 술도 팔았고,거기 에 더해 정보까지 판매하는 장소였 다.

서준호가 주점에 들어서자,술을 마시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그를 쳐 다봤다.

“어라,저 녀석은……

“신문에서 본 것 같아. 한국의 유 망주랬나?”

“이번에 불꽃 호리를 잡았다고 하 더군.”

“그래? 뉴비치곤 나뽀지 않네.” 사람들의 관심과 평가가 칼날처럼 날아들었다.

그들을 무시한 서준호는 유리잔을 닦고 있는 바텐더에게 다가갔다.

“정보? 술? 아니면…… 텔레포트 신청이십니까?” ~

“텔레포트. 목적지는 한국의 이사 동 지부.” "

10 분 정도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럼 그동안 마실 술도 한 잔• 주

세요. 마티니로.”

올리브가 담긴 마티니를 홀짝이고 있자,시끌벅적한 대화 소리들이 들 려왔다.

“내가 이번에 도박장에서 얼마나 땄냐면……

“소문 들었냐? 최근 들어 구천(九 天) 중 하나인 김우중의 모습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던데.”

“아니,그래서 협회는 대체 어둑서 니를 언제까지 꽁꽁 숨길 생각이 래?”

여러 가지 대화들을 듣고 있던 서 준호의 미간이 갑자기 찌푸려졌다.

“쯧,블랙마켓의 수준도 예전 같지 않아. 아까 서준호 들어온 거 봤 지?”

“당연히 봤지. 그런데 그 녀석 아 직 20 레벨도 못 찍지 않았나?”

“이제 겨우 10 레벨을 넘긴 수준일 걸?”

“허참,협회에서 밀어주는 유망주 는 다르다 이건가?"

주점의 구석 자리에서 오고가는 대 화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서준호는 가볍게 혀를 찼다.

‘쯧. 벌써부터 저런 벌레들이 꼬이

는 건가.’

플레이어에게 스스로의 이름은 하 나의 브랜드와 같다.

자신의 이름값이 높아지면 높아질 수록 몸값도 상승하고,계약 조건도 더 좋아진다.

그와 덩달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 또한 많아진다.

하지만 이 이름값,즉 명성을 을리 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하다.

목숨 걸고 게이트를 다녀도 뛰어난 활약을 펼치지 않는 이상 쌓기가 어 려우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삼류

인터넷 기사에조차 제 이름 석자를 띄우지 못 한다.

‘하지만 명성을 단숨에 높이는 방 법이 하나 있지.’

서준호는 손을 들어 바텐더에게 요 청했다.

“정보를 좀 사고 싶은데요.”

“어떤 종류의 정보를 원하시는지 요?”

“저기 왼쪽 구석에 있는 플레이어 세 명에 대한 정보.”

“……알겠습니다.”

노련한 바텐더는 구석 쪽을 쳐다보

지도 않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서준호는 곧 다가올 벌레들을 느긋 =게 기다리며 올리브를 씹어 먹었

명성을 가장 빠르게 올리는 방법 은•••••• 바로 유명한 플레이어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이지.,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사람들 에게 가장 단순하고,직관적으로 증 명하는 방법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벌레들의 대화 내용 은 그쪽으로 이어졌다.

“흠. 그런데 저놈이 그렇게 대단한 가? 보기엔 비실비실해 보이는데.”

“플레이어를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 면 안 되지. 다만……

“게이트 공략과 플레이어와의 대결 은 다르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거 지?”

“맞아.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과 사 람을 상대하는 것은 그 본질부터가 다르거든.”

“흐흐, 제법 괜찮은 먹잇감인 데…… 어떻게 생각해?”

서로 눈빛을 교환한 남자들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서준호에게 걸어왔 다.


그때,자리로 돌아온 바텐더가 서

준호에게 서류 봉투 한 장을 건넸 다.

“요청하신 정보입니다. 대금은

3,000 달러입니다.”

서준호는 자신의 왼쪽 손목을 내밀 었다.

“100 달러 더 빼가요. 팁.”

“감사합니다.”

계산이 끝나자 서류 봉투를 뜯은 서준호는 내용을 대충 훑어보았다.

‘23, 25, 22/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의 레벨 이었다.

그들의 능력과 특이사항 등이 간략 하게 쓰여 있었으나,자신에게 위협 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한 마디로 듣도 보도 못한 잡놈 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서준호가 서 둘러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거 정말 일부러 한 것처럼 완벽 하잖아?’

집에 나오는 벌레를 퇴치해 본 사 람들은 안다.

벌레란 초장에 아주 확실하게 퇴치 해야 하는 존재다.

어물쩍거리는 순간,개체 수는 걷 잡을 수 없이 불어난다.

‘아마 날 최고의 먹잇감으로 보고 있겠지.’

우선 레벨 차이가 두 배에 가깝다.

일반적인 경우라면,저들이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다는 소리다.

‘이름 한 번 날려보지 못한 놈들이 자주 쓰는 방법이야.’

자라나는 새싹을 밟는 것.

그것은 굉장히 치사하고 비열한 술

수지만,의외로 효과적이다.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면서도 그 들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니까.

‘예전이랑은 또 다른 종류의 귀찮 음이네.’

그때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벌레들 은 많았다.


하지만 그 벌레들은 종류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자신에게 아부를 하며 눈도 장을 찍으려는 종류였으니까.

‘나와 인사를 나눈 것만으로도 스 팩이 되는 시대였지.’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자신에게 정면으로 덤벼드는 인간 은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저 녀석들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지만……

그것은 피차 마찬가지.

저들도 자신에게 큰 원한은 없지만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시비를 걸러 오는 길 아닌가.

‘그렇다면 나도 철저히 이용해 줄 수밖에.’

그래야 앞으로도 저런 종류의 벌레 가 꼬이지 않는다.

탁,서준호가 빈 술잔을 내려놓는 순간.

“이봐.”

툭툭,낯설고 투박한 손길이 그의 어깨를 기분 나쁘게 두드렸다.

“네가 서준호지? 기사를 통해 많이 봐왔다. 우리들은 완전 네 팬이라 고.”

“맞아,네 사진이 실린 기사도 따 로 스크랩해서 보관 중이다.”

남자들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은 그들은 원하지도 않은 덕담을 늘어놓았다.

“우린 솔직히 네가 자랑스러워.”

“업계 선배 입장에서 볼 때,너처 럼 뛰어난 후배는 기특한 법이거 드 ”

“귀여운 후배에게는 뭐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고,그런 게 선배 의 마음 아니겠냐.”

이야기를 듣던 서준호는 피식 웃으 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라…… 그럼 혹시 플레이어 데뷔 년도가?”

“응? 가장 오래된 나는 4 년이 고…… 어이,너희들도 3 년은 넘었 지?”

“어.”

“이야,다들 오래되셨네.”

서준호가 작게 감탄하자,남자들이 목에 힘을 빳빳하게 주며 거들먹거 렸다.

“크흠. 기왕 말이 나와서 하는 말 인데,우리 덕분에 너희가 쉽게 사 냥을 다니는 거야.”

“그럼그럼. 우리 같은 사람들이 길 을 잘 닦아놨으니까 후배들이 편한 거 아니겠어?”


“……품!”

그들의 말을 듣다가 빵 터진 서준

호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 번 터진 웃음은 멈출 줄 몰랐 다.

“끅…… 끄끅…… 으하하!”

고개를 테이블에 묻은 그는 배를 잡고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그러자 남자들의 표정이 대번에 굳 었다.

덩달아 그들의 목소리 또한 낮아졌 다.

“……왜 웃지?”

“재미있으라고 한 얘기는 아니었는 데 말이야.”

훈훈하던 분위기가 손바닥 뒤진드 바뀌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서준호는 눈가에 맺힌 눈물들을 닦아내며 J 했다. 5

“아니,웃기니까 웃지. 길을 닦아놨 다고? 그건 1 세대 플레이어들이 해 놓은 거 아닌가.”

데뷔한 지 5 년도 안 된 것들이 할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1 세대 플레이어인 서준호 입장에서 는 기가 차다 못해 어이가 없는 상 황.

하지만 까마득한 후배에게 반말과

욕설을 듣게 된 남자들이 가만히 있 을 리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들은 분노 를 토해냈다.

“이 새파랗게 어린놈의 새끼가!”

“감히 하늘같은 선배들에게 모욕감 을 줘?”

“아무래도 교육이 필요하겠군.”

서준호는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이 무섭지도 않은지.

오히려 빙그레 웃는 얼굴로 질문했 다.

“너희들,혹시 맷돌 손잡이를 뭐라

고 부르는지 알아?”

대답은 즉각적으로 튀어나왔다.

“그건 어이라고 부른다.”

“만약 맷돌에 뭘 갈려고 하는데 손 잡이가 빠지지? 그런 상황을 두고 어이가 없다고 그래.”
“딱 지금 우리 같은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지. 어이가 없다 이 후배 새끼야.”

무식하게 생긴 것들이 생각보다 박 식하다.

대사를 빼앗긴 서준호는 뚱한 표정

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너희들 목적이야 처음부터 뻔 히 보였으니까 되도 않는 연기는 집 어치우자고.”

“……알고 있었나?”

“그런데도 도망치지 않았다니…… 용기는 칭찬해 주지.”

남자들은 당황하기는커녕,피식 웃 으며 주변을 훑어봤다.

이미 주점의 모든 시선들이 그들에 게 몰린 상태.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던 상황 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 남자들은 모 두가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로 말 했다.

“우리는 그저 선배된 도리로 업계 후배에게 한 수 가르침을 내려주려 고 한 것뿐인데……

“후배한테 이렇게까지 개무시를 당 하니 가벼운 훈육으로 끝내지는 못 할 것 같군.”

“기억해라,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 다.”

데뷔한지 가장 오래되었다던 남자 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겠지.

와라,선배를 하늘처럼 모시는 참된 인간으로 만들어주마.”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서준 호는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바텐더 에게 고개를 돌렸다.

“텔레포트 대기 시간,몇 분 남았 죠?”

“……4 분 정도 남았습니다만.”

“4 분이라.”

우드득,서준호는 어깨를 스트레칭 하며 중얼거렸다.

“가볍게 놀아주기에는 충분하겠 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24 화

블랙마켓 (3)

주점의 의자와 테이블이 양쪽으로 밀리고,둥근 공간이 생겼다.

일종의 경기장이 만들어진 셈이다.


그곳에 서 있는 의기양양한 표정의 세 남자를 향해,구경꾼들이 쑥덕거 렸다.

“수치심도 모르는 작자들 같으니라 고.”

“이제 겨우 10 레벨 넘긴 녀석을 제물로 바쳐서 이름을 날리겠다 고……? 짐승 새끼들인가.”

“뭐,약하면 짓밟히는 것이 이 세 계의 규칙이니 도와줄 마음은 없지 만.”

“이번 일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 는 서준호에겐 제법 큰 타격이 되겠 어.”

“한창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니 말이 야. 기삿거리로 쓰기 딱 좋잖아.”

개중에는 아예 비타를 이용해 현재

상황을 녹화하는 이들마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세 남자는 서로를 쳐다보며 입꼬리를 썰룩거렸다.

‘이거 완전 우리 계획대로 되고 있 는데?’

‘내가 뭐랬어. 이 녀석 완전 봉이 라니까. 걸어 다니는 봉.’

‘오늘 이후로 우리 강남삼절의 이 름이 천하를 떨치겠군.’

그들이 그렇게까지 자신하는 이유 는 높은 레벨 때문이었다.

‘레벨이 높으니 당연히 능력치도 이쪽이 더 높지.’

‘게다가 상대는 아직 사람의 목숨 을 노리는 싸움을 겪어보지 못한 풋 내기.’

가장 먼저 나선 것은 22 레벨의 플 레이어 였다.

한 자루의 창을 사용하는 그는 서 준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강남삼절이라 부 르지. 각각 창,검,마법을 주력으로 내세운 실력파 플레이어들이다.


나 는 삼절 중 창을 맡고 있는,절명창 (絶命松)이라 한다. 오늘의 대결을 영광스럽게 생각해도 좋다.”

“……어휴.”

대체 누가 영광스러워해야 하는 건 지.

게다가 강남삼절이라는 유치한 이 름 따위는 들어본 적조차 없다.

실제로 구경꾼들도 서로를 쳐다보 며 “강남?”,“손절?”이라 중얼거리 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기는 이거면 되겠지.’

인벤토리를 뒤적거린 서준호는 조 그마한 비수 하나를 꺼내들었다.

겨우 손바닥 길이 정도의 짧고 가 느다란 비수였다.

그 무기를 본 절명창의 눈썹이 꿈

틀거렸다.
“……그게 네 무기인가? 기사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데. 네놈은 검사잖 아?”

“그건 소 잡을 때 쓰는 칼이고. 이 건……

“설마 닭을 잡을 때 쓰는 칼이라는 거냐?”

서준호가 비수를 살랑살랑 흔들며 상대를 도발했다.

“아니,벌레 눌러죽일 때 쓰는 칼 인데.”

“……이놈이!”

얼굴이 시뻘게진 절명창은 삼류잡 배답게,예고조차 없이 공격을 날렸 다.

“헉!”

“저런 비열한!”

비명을 터트린 구경꾼들이 숨을 헉 소리 나게 참았다.

그들이 숨을 들이켠 순간, 두 사람 의 간격은 10 미터에서 5 미터로 줄 었고.

눈을 한 번 깜빡인 순간,절명창의 창끝은 어느새 서준호의 심장 언저 리에 도착해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쿠당탕!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절명창이 바 닥을 뒹굴었다.

“으어억……!”

허리가 제대로 접힌 절명창은 비명 조차 크게 내질 못했다.

무기까지 놓친 그는 식은땀을 뻘뻘 홀리며 끙끙거릴 뿐이었다.

“창 그렇게 뻔하게 쓰는 거 아닌 데……

절명창을 내려다보던 서준호가 조 그마한 목소리로 훈수를 뒀다.

수치심을 느낀 절명창은 버럭 소리 라도 지르고 싶었으나,그럴 힘조차 나질 않았다.

“……과연. 이름값은 한다 이건가.”

“저 녀석,상대를 너무 우습게 봤 어. 아무리 그래도 협회 최고의 유 망주인데.”

절명창의 동료들이 고개를 절레절 레 흔들었다.

그들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짓 고 있었다.

‘상대가 반응조차 못 할 거라고 생 각하고 창을 너무 정직하게 내질렀 다.’

‘그로인해 생긴 빈틈이 너무 컸어. 상대가 대비를 하고 있었다면 저렇 게 업어 치는 것도 쉽지.’

현재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쉽네.’

서준호는 바닥에 누운 절명창인지 뭔지의 허리를 꾹꾹 밟았다.

“아아악! 아파…… 아파요!”

그가 울먹거리며 소리치자,동료들 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이,그 발 안 치워?”

“아무리 그래도 업계 선배한테 예

의가 너무 없잖냐.”

“나 원래 예의 없는데? 너희가 가 르쳐 준다며.”

도발이 먹혔는지 절명검이 대번에 검을 뽑았다.

서준호는 아까 그가 했던 말을 떠 올렸다.

‘저 녀석이지? 몬스터를 잡는 것과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그 본질부터 가 다르다고 한 놈이.’

물론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몬스터와 싸우면 반드시 죽일 수 있는 급소를 노리지만,사람을 상대

로는 그게 쉽지 않다.

특히 한 번도 살인을 경험해보지 못한 초심자에게는 더더욱.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아쉽게도 서준호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과거 어둑서니 시절,마인들 을 숱하게 죽였던 사람이었으니까.

“장난은 여기까지다. 검을 들어라, 서준호.”

서준호가 비수를 삐쭉 세웠다.

그 모습을 보던 절명검이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저 녀석 때문에 우 리 강남삼절을 얕보는 모양이군.”

그는 서준호가 절명창의 실력을 보 고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이라 생각 했다.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을 거다.”

“너나 잘해. 나중에 방심해서 진거 라고 개소리하지 말고.”

이 대련은 앞으로 강남삼절인지 손 절인지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대련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절명검은 묵묵히 자신의 검에 마력을 불어넣 었다.


우우웅!

얇고 희미한 막이 검신의 위를 코 팅하듯 뒤덮었다.

이를 확인한 구경꾼들이 저도 모르 게 오오- 소리를 내었다.

“오! 저 녀석,검기 좀 쓸 줄 아는 녀석인가?”

“저건 마력에 대한 이해도가 없으 면 불가능한 기술인데.”

“저 레벨에 제법이잖아?”

검기 (劍氣).

검에 마력을 덧씌워 예리도와 내구 도를 증가시키는 기술이다.

도에 씌우면 도기(刀氣)가 되고, 창에 씌우면 창기(檢氣)가 된다.

마력을 극한까지 응축시켜 유형화 시킨다는 검강(劍强)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검기를 쓰는 것만으로


도 충분히 실력자 소리를 들을 정도 는 되었다.

‘검기 같은 소리하네.’

서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 다.

뭣도 모르는 사람들은 절명검의 검 기에 환호했지만,그가 보기에 그것 은 가짜였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간신히

형태만 따라한 거잖아?’

사람들이 검기에 환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원래라면 베지 못할 것을 베고,뚫 지 못할 것을 뚫을 수 있기 때문이 다.

하지만 지금 절명검이 쓴 검기는 그냥 겉멋,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 었다.

‘검의 파괴력은 조금 더 강해졌겠 지만,오히려 내구도는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을걸.’

허접한 기술을 본 서준호가 질린 표정을 짓자,이를 다르게 받아들인

절명검이 미소 지었다.

“훗,수준의 차이를 깨달았다면 절 망하는 것도 당연하지. 하지만 후회 해도 늦었다.”

그는 천천히 서준호에게 걸어갔다.

절명창처럼 빈틈을 내주지만 않으 면 무조건 이긴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하나 서준호의 생각은 달랐다.

‘저 녀석 실수하네?’

과거 어둑서니 시절,그는 수많은 마인들을 사냥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보다 훨씬 더 강

한 마인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했 던 비결이 무엇일까?

누구는 그의 완벽한 무기술 때문이 라고 했고,다른 누군가는 S 등급의 능력 덕분이라고 했다.

물론 그것들이 ‘이유’의 한 축을 차지한 건 맞았지만,가장 큰 이유 는 따로 존재했다.

‘호흡.’

서준호는 상대의 호흡을 빼앗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고수들은 전투에 돌입하는 순간부 터 균등한 호홉을 내쉬고,마신다.

하지만 아직 전투에 미숙한 하수들

은 그러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훈련이 안 되어 있는 사람은,허를 찔리면 숨을 크게 마 실 수밖에 없어.’

허파에 바람이 차는 그 찰나의 순 간,사람의 몸은 경직되게 마련이다.

서준호는 상대의 호흡 패턴을 억지 로 망쳐서 빈틈을 강제로 만드는 것 을 즐겨했다.

‘물론 싸움 좀 한다는 애들 상대로 는 안 통하는 방법이지만……

다행히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는 싸움 좀 못하는 애가 아닌가.

“음?”

“어?”

대결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동시 에 의문을 드러냈다•

완벽한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한 서 준호가 자진해서 절명검에게 다가갔 기 때문이다.

‘완전히 자포자기라도 한 건가?’

‘궁지에 물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봐야 할 까?’

‘우선은 더 지켜봐야겠다.,

f 대와 우려,의문을 한 몸에 받은 서준호는 손바닥 크기의 비수를 아

래로 늘어트렸다.

지금 이 순간,하수들이 볼 때 서 준호의 전신은 빈틈투성이었다.

“허점투성이로군!”

이때다 싶은 하수,절명검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검이 서준호의 어깨에 박히기 직전.

서준호의 비수가 먼저 그의 검면을 찔렀다.


후우우웅!

밀려난 절명검의 검은 서준호의 어 깨가 아닌,빈 허공을 찔렀다.

동시에 절명검의 인상이 찌푸려졌 다.

‘……감히 내 검을 쳐내? 절명창이 당한 것도 무리는 아니구나.’

서준호는 생각보다 눈이 더 좋았 고,반응속도도 빨랐다.

과연 협회에서 작정하고 밀어줄만 한 유망주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레벨의 차이는 절 대적이다,이 시건방진 녀석아.’

절명검의 손목이 틀어지며 검날 또 한 옆으로 누웠다.

동시에 횡으로 베어진 검이 서준호

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막거나 피해내지 못하면 머리가 날 아갈 만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오냐오냐 해줬더니 선을 넘어 버리네.”

적당히 챙길 것만 챙기고 빠지려던 서준호의 눈빛이 깊어졌다.

상대는 지금 이 순간,자신을 죽이 려고 검에 살기를 담았다.

더 이상 귀엽게 봐줄 수만은 없다 는 뜻이다.

똑! 똑!

마치 수도꼭지에 고여 있던 물방울

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절명검의 손목에 위치한 동맥이었다.

“으아아악!”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시끄러운 소 리와 함께,절명검의 손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서준호의 비수가 그의 동맥을 정확 히 찌른 것이다.

“앞으로 그 손으로 검은 못 들 거 야. 숟가락은 들 수 있겠지만.”

검사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한 마디였다.

절명검은 잠시 멍한 눈빛으로 쉴 새 없이 덜덜 떨리는 제 손을 내려 다보았다.

마치 제 손이 아닌 것 같았다.

안간힘을 써서 멈춰보려 했지만, 손의 떨림은 멎지를 않았다.

“이런…… 이런 개……!”
순식간에 허리를 숙인 절명검은 왼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검을 낚아챘 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표독스러운 얼굴로 달려드는 그의 모습은 공포 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서준호의 눈 빛에는,두려움 대신 진한 안타까움 이 담겨 있었다.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먼저 내 목숨 노렸잖 아.”

그러니 상대방은 억울함을 느낄 자 격이 없다.

자신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 다.

하지만 세상을 잃은 것처럼 자신을 노려보는 절명검을 보자,괜히 입맛 이 쓰다.

과드득!

날아드는 검을 슬쩍 피한 서준호는 발로 절명검의 무릎을 내리찍었다.

무릎이 박살나며 몸의 중심을 잃어 버린 절명검의 명치로 주먹이 파고 들었다.

“커흐억!”

“이 개새끼야!”

절명검이 쓰러짐과 동시에 강남삼 절에서 마법을 담당하는 사내,절명 마(絶命魔)가 난입했다.

누가봐도 살수는 절명검이 먼저 뿌 렸지만,팔은 안으로 굽는 법 아닌

가.

새애애액!

허공에 생성된 마력의 창이 서준호 에게 날아들었다.

“지들이 먼저 시작했으면서.”

하지만 이럴 때는 꼭 자신만 나쁜 놈이 되는 기분이다.

서준호는 자신의 심장을 노리는 마 법창을 손등으로 쳐내고는 반대쪽 손을 뿌렸다.

날아간 비수는 정확히 절명마의 복 부를 꿰뚫었다.

“컥! 크헉!”

숨이 턱하니 막힌 절명마가 반사적 으로 비수를 뽑으려했다.

하지만 그의 귓가로 서준호의 차가 운 음성이 꽂혔다.

“그거 뽑으면 뒤져. 병원가면 살 수 있을 거다.”

정신이 번쩍 든 절명마는 비수 손 잡이를 슬그머니 놓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마비되었던 이성이 돌아오자,현재 상황이 냉철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저 녀석은 플레이어가 된 지 이제 고작 한 달이 된 초보자인데…… 이 격차는 도대체?’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가 느껴졌 다.

만약 그가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 았다면? 자신들은 이미 죽어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끝났네.’

전투 시간은 3 분 남짓이었지만,결 과는 모두의 예상과 정반대였다.

주점 바닥에는 피를 철철 홀리는 강남삼절이 끙끙거리며 누워 있었으 니까.

그 모습을 바라보던 구경꾼들은, 비명 대신 박수와 환호를 내질렀다.

“우와,대단한데!”

“자기보다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를 셋이나 해치웠잖아?”

“그것도 치열하게 싸운 게 아니라, 압도적인 실력으로 제압만 했어.”

“협회에서 간만에 쓸 만한 플레이 어가 나온 것 같은데?”

“멋있었다! 서준호!”

세상이 게임처럼 바뀐 후에 비틀린 상식의 일면이었다.

다친 사람을 걱정하기는커녕 승자 에게 엄지나 치켜세우고 있다.

‘하여튼 나 빼고는 정상인이 없다

니까. 25 년이 지나면서 더 심해졌 군.’

이 미친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세 가지뿐.

그들과 함께 미치거나,감정을 느 끼지 않거나,그것도 아니면 항상 괴로워하며 살거나.

그것 중 하나를 택해야지만 버틸 수 있다.

“……후우.”

서준호는 그나마 상태가 제일 괜찮 은 절명창에게 다가가 그 앞에 쪼그 려 앉았다.

그리고 질문했다.

“너희,나한테 복수할 거야?”

마치 배가 고프냐고 묻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절명창은 본능적으로 깨달 았다.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을 하는 순 간,자신들은 죽는다는 것을.

그는 덜덜 떨리는 고개를 필사적으 로 내저었다.


“아,아니요. 아닙니다. 펴,평생 그림자도 쳐다보지 않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그럼 잘 살아.”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서준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바텐더에게 걸 어갔다.

“텔레포트 준비는?”

“지금 막 끝났습니다.”

“안내해요.”

을 때와 마찬가지로 텔레포트는 순 식간에 끝났다.

인사동의 더러운 골목길로 이동된 서준호는,고개를 들어 좁디좁은 하 늘을 올려다봤다.

“……친구들 보고 싶다.”

서준호는 오늘도 가슴 한켠이 쓰라

렸다.

원망이란 수십 번을 받아도 익숙해 지지 않는 감정이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25 화

홍련의 공주

부르릉.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인사동 마켓 거리에 들어섰다.

뒷좌석에 앉은 여자가 아이스크림 을 깨작거리며 부하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서 준호요.”

조수석의 부하는 홀로그램 영상 하 나를 뒤로 보냈다.

“불과 몇 분 전에 찍힌 영상인데 한 번 보세요.”

여자는 조용히 영상을 시청했다.

화면에는 세 명의 플레이어를 단숨 에 제압하는 서준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여기 나온 녀석들은 뭐야?”

“알아봤는데 별로 대단한 놈들은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같이 레벨이 20 은 넘더라고요.”

“흐응.”

시청을 끝낸 여자는 대수롭지 않은 음성을 뱉어냈다.

하지만 부하는 대번에 알 수 있었 다.


‘마음에 드셨나 보네.’

목소리 끝이 묘하게 올라갔다는 것 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녀의 기분이 좋을 때만 나 오는 습관이었다.

“전 개인적으로 기대 이상이라서 괜찮은데,공주님이 보기엔 어때 요?”

“뭐,나쁘진 않네.”

그녀는 영상을 다시 한 번 돌려보 았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능력치는 돈만 쳐바르면 개나 소나 올릴 수 있거든. 하지만……

“이 녀석처럼 눈이 좋은 플레이어 는 좀처럼 없다. 라고 말씀하고 싶 으신 거죠?”

“……너 자꾸 내가 하려는 말 가로 채지 마.”

“네네.”

실실 웃는 부하의 태도에 열이 뻗

쳤지만,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꿰뚫어보았다.

실제로 그녀는 서준호가 상대의 공 격을 여유롭게 피하는 부분에서 감 명을 받았으니까.

잠시 후,차가 어느 골목길 앞에 멈춰 섰다.

“이제 슬슬 아이스크림 내려놓으시 죠. 곧 나타날 것 같은데.”

“알아서 함.”

깨작거리던 아이스크림을 오도독 부숴먹은 그녀가 돌연 창문에 찰싹 달라붙었다.

“야야,저기 저 사람 아니야?”

때마침 골목길에서 서준호가 걸어 나왔다.

그를 알아본 시민들이 걸음을 멈추 며 그의 사진을 찍어댔다.

“맞아요. 우리 공주님이랑 다르게 완전 인싸인데요?”

백미러를 한 차례 노려본 여자는 이어서 서준호를 관찰했다.

“뭐야,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쓸 만하잖아?”

서준호를 직접 보고 내린 결론이었 다.

아직 단련되지 않은 몸 때문에 얼 핏 보기엔 약해 보였지만,눈빛만큼 은 날이 바짝 서 있었다.

일류 플레이어들과 비교해도 손색 이 없을 눈빛이었다.

“그럼 데려올게요.”

부하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도리도 리 흔들며 차문을 열었다.


“직접 갈래. 왠지 앞으로 자주 보 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김〜치!”

“……김치요.”

서준호가 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골목길을 나오자마자 자칭 팬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붙들린 탓이었 다.

“저기, 뒷사람도 좀 생각해주세 요!”

“사진을 몇 장이나 찍는 겁니까?”

“……뭐? 뒷사람?”

깜짝 놀란 서준호가 고개를 돌렸 다.

그곳에는 언제 생겼는지,십수 명

이 줄을 서 있는 상태였다.

‘준법정신 한 번 대단하네!’

심지어 줄은 계속해서 늘어나는 중 이었다.

이대로라면 집에 돌아가는 것은 몇 시간 후가 될 지도 모른다.

사냥을 할 때도 울린 적 없던 머 릿속 경종이 웨엥 거리며 비명을 질 렸다.

그때 였다.

“서준호 플레이어?”

꾀꼬리처럼 맑은 목소리는 도로의 시끄러운 소음들을 뚫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자신의 가슴 정도까 지 오는 아담한 여자가 그를 올려다 보는 중이었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굉장히 수상해 보였지만,서준호는 다른 부분에서 놀랐다.

‘……강하잖아?’

빈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빙상에서 깨어난 이 후로 봤던 이들 중에서 가장 강한 플레이어 였다.

‘내가 조사한 여성 플레이어 중에 서 이 정도로 강한 사람은...... ’

이미 서준호의 머릿속에는 랭커를 포함한 유명 플레이어들의 정보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덕분에 답은 금방 나왔다.

아담한 키,붉게 웨이브진 긴 머 리,그리고 가까운 곳에 서 있는 것 만으로도 후끈한 열기.


그 조건들이 가리키는 인물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도깨비의 공주.’

붉은 연꽃이라고도 불리는 그녀는 화염 계열 능력자로,도깨비 길드의 플레이어 였다.

직책은 팀장이었지만,독특한 이름 때문에 공주님이라는 호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고 들었다.

서준호는 시치미를 뚝 떼며 물었 다.

“누구신지?”

“죄송한데 둘이서만 대화할 수 있 을까요? 저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녀가 명함 하나를 스윽 건넸다.

[도깨비 길드. 제 2 팀 팀장 공주하.]

‘역시.’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도깨비의 접근이라…… 역시 스카 우트라고 보는 게 옳겠지.’

길드에 소속될 생각은 없지만 기분 이 좋은 것은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도깨비 길드는 세 계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여섯 개의 길드.

통칭 빅 6 에 속하는 거대한 세력 아닌가.

‘일 년 수익이 어지간한 국가의 예 산을 가볍게 넘는다고 알려진 곳이 야.’

서준호는 의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우와,도깨비 길드에서 저에겐 어 쩐 일로?”

“흠홈. 근처 카페에서 달콤한 아이 스초코나 한 잔씩 마시면서 얘기하 죠.”

대답은 당연히 0K 였다.

합법적(?)으로 이 포토존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룸 형식으로 되어 있는 조용한 카 페의 구석 자리.

방의 입구를 공주하의 부하가 막아 섰다.

그제서야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 은 공주하는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 했다.

“아우,땀나,밖에 다닐 때가 제일 싫다니까요. 더운 건 딱 질색인데 가리고 다녀야 하니까.”

“……화염 계열 능력자 아니세요?”

“그게 문제예요. 저는 시원하고 차 가운 게 좋거든요.”


투정을 부리는 공주하는 23 살이라 는 프로필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 도로 엣된 얼굴이었다.

그녀를 쳐다보던 서준호는 긴가민 가했다.

‘이렇게 순하게 생긴 녀석이 정말 그 소문의 도깨비 공주가 맞나?’

도깨비 공주,혹은 홍련의 공주는 마인들조차 두려워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서준호가 볼 때는 그냥 또 래의 소녀처럼 느껴지는 귀여운 여 인일 뿐이었다.

“아,대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실례

좀 할게요.”

우우웅.

공주하가 돌연 마력을 끌어올리자, 두 사람의 주변으로 무형의 막이 생 겨났다.

소리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방음벽 인 셈이다.

이를 확인한 서준호가 눈을 깜빡였 다.

‘어? 이 기술은……

어디서 좀 많이 보던 익숙한 기술 이다.

서준호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공

주하가 황급히 설명했다.

“아,놀라셨다면 죄송요. 스카야 님 이 저술하신 마력학개론에 수록된 마력운용법인데,주변의 소리를 차


단시키는 얇은 막을 만든 것뿐이에 요.”

“……그렇군요.”

“배우기는 상당히 까다로운데,배 워두면 편하니까 나중에 배워보세 요.”

‘할 줄 아는데……

쪼오옥.

빨대로 아이스초코를 빨아먹은 공 주하가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저희 길드 올래요?”

“……갑자기요?”

서준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 물었다.

무슨 길드 제의를 ‘점심으로 짜장 면이나 먹을래?’라는 어투로 묻는단 말인가.

그것도 모든 플레이어들이 꿈꾸는 빅 6, 도깨비 길드에서 말이다.

“서준호 플레이어의 영입은 부마스 터가 지시했어요. 물론 최종 판단은 제가 직접 만나보고 내리라고 말하


긴 했지만…… 제가 볼 땐 합격이거 든요.”
“어떤 점에서요?”

“우선 결과물. 현재 서준호 플레이 어가 쌓아놓은 업적만 봐도 저희가 러브콜을 보내는 데에는 이상할 게
없어요. 슈퍼 루키니까요.”

서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 다.

애초에 이런 결과를 노리고 움직인 것이었으니 당연할 수밖에.

현재 동레벨 플레이어 중에서,그 보다 화려한 커리어를 지닌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전투 센스랑 잠재력을 제 가 높이 평가.”

“전투 센스라면…… 혹시 영상이 벌써 퍼진 겁니까?”

주점에서 사람들이 자신과 강남삼 절의 대결을 촬영하는 것을 보았다.

당연히 그 영상이 인터넷에 퍼지는 것도 예상 범주 내였다.

다만 그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빨 탔을 뿐.

“잘 봤어요. 싸움 잘하시던데요? 보유한 스킬이 이등급 무기 숙련 하 나 뿐인 거 맞아요?”

“맞습니다.”

현재 서준호의 공식 프로필에 기입

된 스킬은 오직 무기 숙련(D)뿐이 었다.

“더 욕심나는데요? 생각해 봐요. D 등급 능력 하나인데 벌써 그 실력 에,그 커리어예요. 만약 거기에 다


른 능력들까지 추가된다면?”

“뭐……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더 강해지겠죠?”

“무엇을 상상하든,그 이상으로 강 해질 거예요.”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자랑을 늘어 놓았다.

“저희 길드에 가입하시면 짱짱쎈

스킬북들이 지원될 거예요. 뿐만 아 니라 전문 게이트 코디들이 레벨을 가장 빠르게 올릴 수 있는


코스까지 맞춤형으로 짜드릴 거고요.”

“굉장하네요.”

덕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길드 가 협회보다 잘나가는 데에는 이유 가 있었다.

그녀가 늘어놓은 조건만 들어봐도 길드에 가입하는 것이 무조건 이득 아닌가?

‘게다가 연봉이나 인센티브 비율도 협회보다 높아.’

그야말로 협회의 완패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세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길드 중 한 곳이에요. 협 회와는 달리 2 층에 대한 정보도 굉
장히 많고요. 이건 나중에 서준호 플레이어의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될 걸요?”

“확실히 그렇겠네요.”

“만약 협회에게 지불해야 할 위약 금이 걱정되신다면,그것도 저희 길 드에서 부담할게요.”

아마 이 부분에서 대부분의 플레이 어는 협회의 뒤통수를 치고 길드에 가입했을 것이다.

‘하긴,조건이 이 정도까지 차이나

니까 협회에 쓸 만한 놈들이 없는 거겠지.’

하지만 서준호는 길드가 아무리 좋 은 조건을 내세워도 가입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엄청난 부와 명예를 단기간 에 쌓을 수 있겠지. 하지만……

과연 이익을 중시하는 길드에서 그 돈을 대가없이 주는 걸까?

대답은 당연히 NO, 절대 아니다.

받은 돈과 명예만큼 무언가를 토해 내야 한다.

‘보통은 명령이지.’

길드가 내려주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

그것이 길드 소속 플레이어의 가장 큰 업무였다.

본인의 성장에만 주력해야 하는 서 준호에게 길드 시스템이란,발목만 붙잡는 장애물이었다. ’ "

‘오히려 지금이 딱 좋아,

플레이어 협회는 세계적인 기구다. 때문에 각 나라의 협회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은 일종의 공무원 취급^
받는다.

보통의 공무원이라면 위에서 까라

면 까야겠지만.......,

무려 한국 플레이어 협회의 우두머 리가 자신의 뒷배 아닌가.

당장 공무에 투입되지 않아도 뭐라 고 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어때요?”

공주하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거절할리가 없잖아.’

무려 빅 6, 그것도 도깨비 길드다.

게다가 자신도 잠시 1 층에 들린 것뿐,도깨비 공주라 불리는 랭커다.


그런 존재가 직접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며 영입을 제안했으니 거절하 는 게 신기한 수준이다.

하지만 서준호의 입에선 의외의 말 이 흘러나왔다.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그래그래,그럼 앞으로는 편하게 말 놓…… 에?”

동그랗게 뜨인 공주하의 눈이 꿈뻑 거렸다.

그녀는 두 손을 파닥거리며 재차 설명했다.

“어…… 저기,아직 제 말을 이해 하지 못하신 것 같은데.”

“아뇨,이해했습니다. 도깨비 길드 에서 굉장히 좋은 조건으로 저를 불 러주셨다는 거 압니다.”

“……그런데 어째서?”

공주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정말 순수하게 궁금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제안을 거 절한 것인지 들어보고 싶었다.

“혹시 용미사두라는 말 아세요?”

“아,납득 완료요.”

공주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서준 호를 쳐다봤다.

‘……보기보다 야망이 큰 남자였 네.’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낫다 라.

말을 듣고 보니 단번에 이해되었 다.

‘뭐,실제로 이 사람이 도깨비에 온다고 해도…… 절대 높은 위치까 지 올라갈 수는 없겠지.’

서준호가 매우 뛰어난 원석이기는 하지만,이미 도깨비에는 그 수준의 플레이어가 존재했다.

현재 최고의 플레이어로 손꼽히는 신성현,김우중 같은 사람들은 이 5 서준호의 레벨 즈음에 완성된 플레


이어였다. 미공략 게이트 공략이라 는 업적은 부족할지 몰라도 말이다

‘게다가 그들은 S 등급 능력의 소유 자.’

D 등급 능력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대단하지만 정말 열심히 수 해도 B 등급으로 올리는 것이 한계 일


터. 아무리 잘 활용해도 S 등급과 는 성장의 포텐셜이 차이가 난다

아마 스스로도 그런 부분을 이해하 고 있기에 도깨비의 가입을 거절한

것이리라.
‘똑똑하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빅 6 에 가입하는 것을 결승선으로 설정한다.

가입만 하면 자신의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착각의 늪에 빠지는 것이 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길드 내부에서 의 경쟁은 바깥에서의 경쟁보다 훨 씬 더 치열하다.

전 세계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만 모인 곳이 바로 빅 6 였으니까.

그런 곳에서 자력으로 2 팀의 팀장 까지 따낸 공주하였기에,서준호의

생각이 쉽게 이해되었다.

‘후음,자신의 그릇을 알고 깨끗하 게 물러나는 사람이라…… 제법 멋 있네.’

솔직히 조금 아쉽기는 했다.

자신이 거두어서 제대로 키운다면, 랭커 말석에는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결국 그녀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제가 원래 치근대는 스타일은 아 닌데요,이번에는 한 번만 더 물어 볼게요. 정말 안 올래요?”

“죄송합니다.”

“……뭐,그럼 어쩔 수 없죠.”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올 수도 없을 뿐더러,그건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다.

자리에서 일어난 공주하는 카페를 떠나기 전 한 마디를 더 남겼다.

“아,그리고 조심하는 게 좋을 거 예요.”

“……혹시 길드 가입을 거절했다고 보복을?”

“아니아니,내가 키는 작아도 속은 안 좁거든요? 사람을 뭘로 보고!”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던 공주하

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최근 마인들의 움직임이 유례없이 활발해졌어요. 그건 1 층에서도 마찬 가지.”

“•…“1 층에서도 말입니까?”

“네,마인 중에 해골술사라는 녀 석이 하나 있는데 대륙을 돌아다 니면서 테러를 해대서 골치 아파


죽겠다니까요. 지가 홍길동이야 뭐 야? 아무튼 그쪽도 조심해요.”

“충고 감사합니다.”

“그럼 언젠가 또 봐요. 뱀의 머리 씨.”

인사를 남긴 공주하는 총총 걸음으


로 부하를 데리고 카페를 빠져 나갔 다.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서 준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라.’

느낌이 쎄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서준호가 살아오면서 DNA 에 각인 시킨 본능.

그 방대한 양의 빅데이터가 보내는 일종의 경고였다.

‘만약 마인들이 나를 노린다면…… 그건 분명 동해 게이트 때문이겠

지.’

인벤토리에 잠들어 있는 레어급 활,폭풍접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미 활의 착용 제한은 모두 넘긴 상태.

‘과연 그 위명에 걸맞는 효과를 보 여줄까?’

폭풍을 부른다는 활,폭풍접.

그 활의 명성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26 화

이름 없는 용(1)

“……마인에 대한 경고를 했다고? 사실일까?”

심각한 표정을 지은 덕구가 되물었 다.

“도깨비에서 나한테 거짓말을 한다 고 무슨 이득을 보겠어? 사실이겠 지.”

협회에 돌아온 서준호는 곧장 덕구 를 찾아갔다.

공주하에게 들었던 정보를 공유하 기 위해서였다.

“끄응,그나저나 해골술사라니… 전혀 몰랐어. 빅 6 길드와 어느 정도 정보력의 차이가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협회에서는 낌새조차 느끼지 못한 정보를 길드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 다.

그 말은 길드의 정보력이 협회보다 최소 두,세 걸음은 앞서 있다는 것 을 의미했다.

“그나저나 도깨비 제안 거절한 거 는 정말 후회 안 하냐? 심지어 공 주하가 직접 왔다며? 그녀의 팀은


지금 2 층에서도 엄청 잘나가는데.”

“별로? 말했잖아. 어차피 길드에 소속되면 내 자유가 박탈된다니까.”

“너 정도 플레이어라면 계약할 때 그 정도 옵션은 넣을 수 있을 텐 데.”


“나 보내고 싶어?”

안색이 부쩍 어두워진 덕구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게 너한테 더 좋지 않나 싶어 서…… 내가 괜히 네 발목을 붙잡고

있나 싶기도 하고.”

“난 또 무슨 소리 하나 했네.”

서준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새로운 칼을 사면 뽑아보고 싶고, 뽑아보면 휘둘러보고 싶고,휘두르 다보면 무언가를 베어보고


싶어지는 게 사람이야. 길드에서 나를 데려간 다면,어떤 식으로든 사용하겠지.”

“그건 그렇지.”

“만약 내가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면 군말없이 갔을 테지 만…… 난 아니잖아?”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친구들을

되살리는 것뿐이다.

당연히 골치 아픈 길드 생활을 하 는 것보다는,덕구가 있는 협회에 소속되는 것이 편하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감동 받은 얼굴의 덕구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좋아! 이참에 계약조건 갱신하 자.”

“이렇게 갑자기?”

“너 이제 이름값 충분히 쌓였어. 게다가 빅 6 에서 오퍼까지 온 귀하신 몸이잖아.”

심덕구는 말이 나온 김에 정말 끝 장을 보려는지,새로운 계약서를 즉 석에서 작성했다.

계약서의 내용을 훑어보던 서준호 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야,이거 조건을 너무 세게 부르는 거 아니냐? 너 이거 감당할 수 있겠어?”

“도깨비에서도 탐을 내던 인재다. 그 정도 주는 건 당연해. 우리가 검 소해서 그렇지, 자금력이


떨어지는 곳은 아냐.”

“아니 그래도 일반 게이트 공략 한 번에 5 억이라니……

게다가 미공략 게이트는 무려 15 억이다.

조건을 갱신하기 전에 연봉으로 받 던 돈을 공략 한 번 할 때마다 받 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지명의뢰의 정산 비율이 나 혜택 등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방도 옮겨줄게. 그 층 하나를 네 가 전부 쓸 수 있도록.”


“나 갑자기 좀 무서워지네. 왜 이 렇게 잘해주지?”

“계속 해주고는 싶었는데 못 해줬 던 것뿐이야. 이제 빅 6 의 오퍼도 받 았겠다. 눈치 볼 게 뭐있어?”

뿌듯한 표정을 지어보인 심덕구가 계약서에 시원스레 사인을 했다.

“그리고 정보력에 관한 문제는… 최대한 길드들과의 격차를 좁혀보도 록 노력하마.”

“그러면 고맙지.”

새로운 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서준 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방에 올라가본다. 몇 층 으로 가면 되지?” I 乂

“乃층. 전망 좋은 층이다.”

그럼 짐 옮기면 되겠네. 아참.” 방을 나서기 직전’ 서준호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동해 게이트 공략은 일주일 뒤로 일정 잡아줘.”

“마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며. 준비할 시간을 너무 넉넉하게 주는 거 아냐?”

“일부러 넉넉하게 주는 거야.”

서준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미끼를 뿌려야 월척이 낚이는 법 이니까.”

[서준호 플레이어,‘때가 되었다’. 동해 게이트 공략 발표.]

[대한민국,미공략 게이트 없는 최 초의 특급 안전지대 되나? 세계인의 관심 집중.]

[속보! 서준호 플레이어,도깨비 길드의 영입 제안 단칼에 거절 ]

[한국 플레이어 협회 이어와 재계약 맺어. 것’ 공식 입장 발표.]

,‘서준호 플레 이적은 없을

단=갗략 발표는

그것은 모두가 원했지만 아무도 하 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심지어 공략을 선언한 게 무려 서 준호였다.

데뷔한지 한 달이 겨우 넘어가는 시점에서 빅 6 의 오퍼까지 따낸 괴물 신인.

때문에 이번 공략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드디어.”

2 층 프론티어의 북동쪽에 위치한 비명산.

그곳의 봉우리에 앉아 기사를 읽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있느냐.”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르셨습니까. 시그너 님.”

만약 누군가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면 경악한 표정을 지었을 것 이다.

칼 시그너.

마인 협회의 간부이자 테러리스트 인 그는 세계적인 수배가 걸려 있는 마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녀석이다.”

“저도 기사를 봤습니다. 시그너 님 께서 폭풍접의 소유자라고 의심하시 는 인물이지요?”

“그래,폭풍접…… 내가 아주 탐을 내는 활이지.”

시그너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가 빠 르게 사라졌다.

부하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한데 공식 기사에서는 폭풍접이 티차르 비쉬의 인벤토리에서 소멸했 다고 했습니다만.”

“흥.”

시그너가 코웃음을 쳤다.

“그야 당연히 숨기겠지. 티차르 비 쉬가 마인에게 습격당했다는 수첩을 스스로 공개한 놈이다. 당연히
마인 을 경계하지 않겠느냐.”

“그럼 시그너 님은 그가 폭풍접을 손에 넣으셨다고 보십니까?”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

“제가 한 번 1 층에 내려가 볼까 요?”

“아서라. 이미 협회 측에선 놈의 뒤에 플레이어들을 붙여놨다. 괜히 꼬리가 밟히면 좋지 않아.”

턱을 문지르던 시그너는 무언가를 떠올리며 물었다.

“지금 1 층에 쓸 만한 놈이 남아 있던가?”

“물론입니다. 힘에 대한 욕망을 품 은 자는 언제나 널려 있으니까요. 그중에서 쓸 만한 놈들이라면……


곧 열릴 라스베가스 경매에 투입하 려던 그림자 형제는 어떠십니까?”

“그림자 형제라…… 고작 둘이서 괜찮겠나?”

잠시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려 보던 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실력이라면 충분할 겁니 다.”

“그럼 녀석들을 이번 동해 게이트


에 같이 들여보내. 임무는 말 안 해 도 알겠지?”

“예.”

“그리고 슬슬 이동을 준비해야겠 군.”

“……벌써 말입니까?”

“끈질긴 놈이다.”

시그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상 을 찌푸렸다.

몇 킬로미터 밖에 설치해 둔 트랩 이 적을 감지한 것이다.

“……빌어먹을 새끼.”

칼 시그너가 이를 갈았다.

그는 궁수,상대와의 거리를 두고 싸울 때 가장 장점이 드러나는 클래 스다.

하지만 충분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격자와 싸울 용기 를 내지 못했다.

‘구천(九天) 중 하나가 상대라 면……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의 나 에겐 무리다.’

아홉 개의 하늘.

현존하는 플레이어와 마인 중에서 가장 강력한 아홉을 부르는 말이다 지금 자신의 뒤를 쫓고 있는 것으


그중 하나로,무려 검성이라 불리

김우중이 었다.

몇 달 전 재수 없게 꼬리를 밟힌 뒤로,그는 끈질기게 자신을 쫓아오 는 중이었다.

“서준호라고 했나,운 하나는 타고 난 놈이군.”

만약 자신이 김우중에게 쫓기는 신 세만 아니었다면,직접 1 층에 내려 갔을 것이다.

하지만 김우중이라는 괴물을 등 뒤 에 달고,협회의 눈이 곳곳에 깔려 있는 1 층에 내려가는 것은 자살 행


위였다.

“그 행운이 언제까지 붙어 있을지

두고 보지.”

칼 시그너가 건조한 입술을 혀로 축였다.

비명산에 자욱하게 깔린 안개를 내 려다보던 그는 이내 몸을 돌려 사라 졌다.

♦ * *

“행운이 따르고 있어요!”

차시은의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기사 보셨어요? 무려 그림자 형제가 동해 게이트 공략에 참가한


대요! 공략이 한층 수월해지겠는데 요?”

“글쎄요,그건 또 어떨지……

서준호가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 리자,차시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들의 참가를 플러스로 봐야 할 지, 마이너스로 봐야 할지 헷갈려서 요.”

“그야 당연히 플러스가 아닐까요? 그림자 형제는 준호 님만큼은 아니 지만,뛰어난 실력과 커리어를 지닌
이들인걸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인 서준호

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럼 그들에 대한 자료를 준비해 주세요. 보고 판단하겠습니 다.”

“네,빠짐없이 준비할게요.”

차시은이 자료를 정리하러 떠나자 서준호는 체력단련실로 향했다.

재계약의 조건 중 하나였던 개인 단련실이었다.

“후우,후우……

서준호는 넓은 단련실을 구보로 돌 기 시작했다.

한 바퀴를 돌 때마다 그의 다리는 조금씩 더 빠르게 움직였다.

‘평소에 이런 식으로 훈련을 해둬 야 실전에서 실수가 나오지 않아.’

마치 기어를 조정하며 자동차를 길 들이듯,근육을 사전에 미리 조정하 는 행위였다.

바퀴가 늘어날수록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그렇게 100 바퀴를 돌았다.

“허억! 허억!”

훈련을 마친 그의 심장은 터질 것 처럼 빠르게 뛰는 중이었다.

입에서는 단내가 풍겨 나왔고,손 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의 노곤함이 밀려왔다.

“후우우……

하지만 이건 준비 운동에 불과했 다.

빠르게 호흡을 갈무리한 그는 마력 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마력을 운용할 때 가장 필요한 것 은 정신력.’

정신력이 흐트러지면 마력의 흐름 도 뚝뚝 끊어진다.


때문에 서준호는 일부러 기력을 바

닥까지 끌어내린 뒤에 마력을 훈련 하는 것을 선호했다. "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도 마력을 와 벽하게 다룰 수 있다면,커다란 4 점이 사라지는 거니까.

‘스카야가 고안한 무식한 훈련법이 긴 하지만…… 확실히 효과는 좋다 말이지.,

화아아악!

■에서 꽃처럼 피어난 것은 최근 자= 사용하던 서리 능력이 아닌, °!■등의 파수꾼이었다.

아가 있을 리 없건만,그의 주변 맹도는 어둠은 마치 반갑다고 인

사하는 듯했다.

“……정말 오랜만에 보네.”

예전에는 매일,매순간을 함께하던 녀석이다.

그만큼 의지했고,또 그 기대를 배 신한 적이 없었던 녀석.

‘아마 이번 게이트에서는 이 녀석 도 써야 할 거야.’

일렁거리는 어둠을 몇 차례 쓰다듬 은 서준호는 비타를 두드려 동해 게 이트의 정보를 띄웠다.

[잊혀진 용의 섬]

입장 조건 : 13〜25 레벨

인원 제한 : 20 명

공략 조건 : 무명용의 처치

난이도 : 매우 어려음

‘용이라……

서준호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

다.

게이트가 생겨난 뒤로,서브컬쳐에

서만 볼 수 있던 용(龍)은 더 이상

환상종이 아니게 되었다.

플레이어들은 동양의 용,서양의 드래곤들을 강력한 상급 몬스터로서

마주하게 되었으니까.

‘용과 드래곤이라면 나도 몇 번 잡 아본 적 있어.’

솔직히 말하면 까다로운 상대다.


특히 비행 능력이 전무한 서준호에 게는 정말로 성가신 존재였다.

‘내가 용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녀석의 비늘을 잡고 버티면 서 싸우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녀 석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방법이
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가 더 편하긴 한데…… 현실적으론 무리겠지.”

용은 지성이 뛰어난 몬스터다.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적수라고 생 각하면,하늘 위에서 내려올 생각조 차 않는다.

그 말은 비늘을 붙잡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는 소리다.

띠링!

그때,차시은에게서 파일이 도착했 다.

안쪽에는 그림자 형제의 능력과 프 로필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어?”

조용히 내용을 읽던 서준호가 돌연

눈을 반짝였다.

‘이건…… 이용할 수 있겠는데?’

그림자 형제의 능력을 알게 된 순 간,그의 머릿속으로 두 가지 계획 이 떠올랐다.

하나는 그림자 형제가 순수하게 자 신을 도와주려고 공략에 참가한 이 들일 때의 시나리오였다.

“그때는 서로 협력해서 무명용을 잡으면 되는 거고.”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뚝배기를 깨 려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마인일 경 우였다.

“……이 경우에는 조금 귀찮아지겠

어.”

솔직히 지금 보유한 마력으로는 두 명의 마인과 용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 조금은 버거웠다.

하지만 서준호는 이 부분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인벤토리.”

텅,터엉!

인벤토리에 들어 있던 아이템들이 바닥에 우수수 쏟아졌다.

바로 블랙마켓에 갔을 때 샀던 불 량 아티팩트들이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27 화


이름 없는 용(2)

[마력 능력치가 1 상승했습니다.]

[마력 능력치가 0.5 상승했습니다.]

[마력 능력치가 2 상승했습니다.]

[마력 능력치가 0.5 상승했습니다.]

아홉 개의 얼음 속성 아이템을 모 두 흡수한 결과.

총 10 개의 마력 능력치가 상승했 다.

“흐음,홉수하니까 완전 고물이 되 어버리네.”

얼음 속성이 사라진 골동품들은 그 저 평범한 아이템이 되어버렸지만 후회는 없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메인 디쉬는 따 로 있었으니까.’

그는 따로 빼두었던 장갑 한 쌍을

바라보았다.

서리요정의 원한이 맺힌 장갑. 저주를 받은 아이템으로,무려 중

급의 서리기운이 맺혀 있었다.

“마력 다섯 개 상승 가즈아!” 장갑에 손을 올린 서준호는 아이템

에 깃든 음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최선희를 치료할 때와 마찬가지로 차가운 기운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 어오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자신의 마력과 맞물리더 니,이내 새로운 마력이 되었다.

[마력 능력치가 4 상승했습니다.]

“아……

서준호가 못내 아쉬운 음성을 흘렸 다.

최소 다섯 개는 상승할 줄 알았는 데,같은 등급의 기운을 흡수해도 편차가 있는 모양이다.

‘하긴,사람의 몸에 깃든 기운이 아이템에 깃든 것보다는 더 많을 테 니.’

입맛을 다신 서준호는 정화가 끝난 장갑을 다시 한 번 감정했다.

[마력이 깃든 장갑】

등급 : 레어

속도 +1 체력 +1 마력 +2

착용 제한 : 레벨 10, 속도 40 이 상, 마력 50 이상
“괜찮네.”

장갑에 걸려 있던 저주는 완벽하게 정화되어 있었다.

그 말은 서준호가 지금 당장 사용 할 수 있다는 뜻.

“착용감도 나쁘지 않고.”

심지어 장갑의 사이즈도 마치 제것 처럼 꼭 들어맞았다.

‘이 정도면 무명용을 상대할 준비 는 끝났어.’

이번 흡수를 통해 총 마력량은 67 이 되었다.

이 정도 마력이면 그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기술들도 거리낌 없이 사용 할 수 있으리라.

“재미있겠네.”

서준호의 입가로 진한 미소가 지어 졌다.

동해 게이트는 울산에 위치한 일산 해수욕장에 떡하니 들어서 있었다.

울산 시민들에게는 무더운 더위를 해소시켜 줄 해수욕장을 강제로 폐 장시킨 원흉이었으며.

나아가 국민들에게는 이제 대한민 국의 마지막 미공략 게이트로 유명 한 장소였다.

웅성웅성.

여름 휴가철에도 개미 한 마리 얼

씬거리지 않던 일산해수욕장은 간마 에 사람으로 붐볐다. v "

그들 모두가 오늘의 공략을 구경하 러 나온 이들이었다.

국내기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외신기자들의 수도 제법 많았다 ’

“그만큼 이번 공략에 많은 관심이 쏠렸다는 소리겠지.”

한국 플레이어 협회장인 심덕구도 오늘만큼은 특별히 현장에 나왔다

오늘은 대한민국이 세계 최초로 특 급 안전지대가 될지도 모르는 뜻 깊 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안 떨리냐?”

미국 대통령들이 타고 다닌다는 두 꺼운 캐딜락 밴에 앉아 있던 심덕구 가 물었다.

질문을 던진 대상은 말할 것도 없 이 뒷좌석의 서준호였다.

“……지금 엄청 떨리는 중.”

친구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대답 이 돌아오자,심덕구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뿅! 뿅…… 띠로리〜

슬픈 BGM 과 함께 서준호가 플레 이하던 게임의 캐릭터가 사망했


그는 들고 있던 게임기를 좌석 뒤

편으로 던지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와! 진짜 똥겜이다. 어떻게 보스 랑 싸울 때마다 진동이 저딴 식으로 크게 울리냐.”

“……게임 얘기였냐?”

“엉? 그럼 설마 저거 물어본 거였 어?”

서준호가 턱끝으로 해수욕장에 위 치한 게이트를 가리켰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웃기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서리여왕의 멱까지 따고 온 내가 이름도 모르는 용 한 마리한테 벌벌 떨겠어?”

대부분의 보스 몬스터들은 저마다 고유의 '이름’ 혹은 ‘이명’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과거 북유럽에서 딱 한 번 등장했다던 펜릴.

그것도 아니면 노르웨이의 바다에 서 나타난 크라켄 등이 거기에 속했 다.

하다못해 얼마 전에 잡았던 불꽃 호리조차도 고유의 이름이 있지 않 았는가.

“음, 확실히 무명용(無名龍)이 라…… 이름이 없는걸 보니 대단한 존재는 아니겠지?”

“대단한 녀석이었으면 고유 이름이 있었겠지.”

서준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심덕구는 묘하게 불안했다.

“방심은 금물이다. 이 게이트에서 500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는 걸 잊어선 안 돼.”

“난 방심 같은 거 안 해.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소린데,이름이 없어도 용은 용이야.”

몬스터 중에서는 최소 상급으로 분 류되는 강력한 종족이다.

“용은 풋내기 플레이어들이,그것 도 용을 사냥하는 법조차 제대로 알

지 못하는 사람들이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니야.”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걱정은 무슨.”

심덕구가 툴툴거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 이 연예인 걱정,재벌 걱정,마지막 이 서준호 걱정인데.”

“아는 놈이 왜 그렇게 불안해 보 여?”

“그냥…… 이번에는 몬스터만 상대 하는 게 아닐 수도 있잖아.”

오늘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은 서준 호와 그림자 형제 둘.


딱 세 사람뿐이었다.

“다른 공략자가 없다는 건,그 녀 석들이 마인의 하수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소리잖아?”

“겨우 30 레벨이잖아. 나 얼마 전에 20 레벨 넘는 애들 세 명 한꺼번에 이긴 거 몰라?"

“야,그림자 형제가 그런 놈들이랑 비슷한 수준인 줄 알아?”

“뭐,커리어 보니 조금 낫더만. 쪼 오금.”

“하여간 자존심 하고는……

그림자 형제는 미국 국적의 플레이 어로,자국에서는 영응으로 대접받 는 이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까지 쌓아온 커리어가 제법 화려했기 때문이다.

‘200 건이 넘어가는 개인지명 의뢰 의 성공률이 100%니까.’

그들은 게이트 공략을 본업으로 삼 는 플레이어들은 아니었다.

주특기는 요인의 경호.

때문에 개인지명 의뢰에서는 항상 일순위로 꼽히는 이들이었다.

“형제 똘■이서 나란히 그림자 계열 능력을 각성하다니. 운이 좋아도 너 무 좋잖아.”

같은 집안의 형제 사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동시에 능력을 각성할 확 률은 낮다•

거기서 둘 다 속성 능력을 얻을 가능성은 매우매우 낮고.

만약 천운이 따라 두 사람 모두 속성 능력을 얻었다 해도,동일 속 성을 보유할 확률은 한없이 0%에


수럼한다.

여기서 서준호는 생각했다.

“미국 파워볼로 1 조 상금에 당첨되

고,그 돈으로 티켓을 두 장 더 샀 는데 그것들도 1 등에 당첨될 만한 확률인데?”

“그래서 미국인들이 그림자 형제를 좋아하지. 영웅의 운명을 타고난 형 제라면서.”

심덕구가 복잡한 목소리를 뱉어냈 다.

“미국이 또 워낙 영웅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나라잖냐.”

“하긴,내가 즐겨보던 마블이나 디 씨 코믹스도 다 그쪽 동네에서 만들 어진 거니까.”

만약 그들이 정말 마인의 하수인이

라면,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미래의 영웅으로 기대 받고 있는데

‘•…"뭐,그건 나중에 알아보면 되 겠지.’

서준호는 탄산수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어? 왔나 본데?”

“그러네. 우리도 나가자.”

그림자 형제를 태운 차량이 주차장 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이 그쪽으로 다가가자,차문이 열리며 키가 큰

남자 둘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서준호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Hey! I am a big fan of you. Sir, Junho! (이봐! 난 네 팬이야. 준 호 경!)”

“Thanks, but I am not sir, my name is junho Seo.(고맙지만 내 이 름은 준호 경이 아니라


서준호야).”

서준호의 입에서 완벽한 발음의 영 어가 흘러나오자,주변 기자들은 물 론 그림자 형제도 놀란 표정을


지었 다.

“뭐야,영어를 제대로 할 줄 알잖

아?”

“발음이 좋은데. 유학 경험이라도 있나?”

“아니,그냥 영어에 익숙할 뿐이야. 친구 중에 영국 토박이가 하나 있거 드 ”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마법만 연구 하던 괴짜 아가씨가 하나 있었다.

준호와 주먹을 맞댄 그림자 형제

■들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다행이네! 아무래도 비타 통역기능을 이용하면 시간 차가 조금은 있으니까,공략할 때 불편하 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문제없겠

어!”

“나도 이렇게 영어를 잘할 줄은 상 상하지 못했어. 나중에 기회 되면 그 친구도 소개시켜 줘.”

“뭐…… 기회가 되면.”

첫 만남부터 제법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한 세 사람에 의해,장내의 분 위기 또한 훈훈해졌다.

오직 심덕구만이 그 분위기를 온전 히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모습만 보면 아주 도원결의 라도 맺을 기세인데……

저들이 정말로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게이트 안에 서는 대체 어떤 분위기가 형성될 지 가 신경 쓰일 뿐이었다.

그때,시선을 눈치챔 형제가 심덕 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음? 저희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 까?”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현재 미 국에서 가장 핫하다는 영웅들의 모 습이 신기해서요.”

“아니 뭐,미안하실 것까지야……

서로 인사를 나눈 그들은 기자들과 의 인터뷰를 시작했다.

좋아하는 K 팝 가수가 있냐,김치 맛을 아느냐 등의 수준 낮은 질문은 일절 나오지 않았다.

“오늘의 공략에 참가하게 된 이유 를 여쭤 봐도 될까요?”

“어…… 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서준호라는 남자 때문입니다.”

“서준호 플레이어요?”

“그렇습니다. 그가 두 개의 미공략 게이트와 불꽃 호리를 잡았다는 기 사를 봤을 땐…… 뭔가 피가 끓어오


르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호승심을 느꼈다는 거군요?”

“하하,존경이라고 해두죠.”

한 시간 가량 이어지던 인터뷰는 밝은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가진 서준호와 그림자 형제가 해변가에 모였다.

“이 게이트가 한국 최후의 미공략 게이트라며?”

“한국이 특급 안전지대로 선정될 수 있게 최선을 다 해보자고.”

두 사람의 격려에 서준호는 티 없 이 맑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걱정하지 마,내가 할 수 있는 최 선을 준비해 왔으니까.”

플레이어 가 게 이 트를 공략하면 서 가장 긴장하는 순간이 언제일까?

어떤 이는 보스를 만났을 때라고 말하고,또 어떤 사람은 동료가 부 상당했을 때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가 장 긴장하는 순간은,다름 아닌 ‘게 이트에 입장할 때’였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몬스터가 어떤 함정을 깔아놓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때문에 게이트에 들어가는 순간은 플레이어들이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 데……

그림자 형제의 본래 계획은 게이트 에 들어서자마자 서준호를 기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방비한 상태로 서 있는 서준호의 뒷모습을 보아도 섣불리 손이 나가지가 않았다.

‘빈틈…… 이 맞나?’
무척이나 허술해 보이지만,막상

공격을 하면 완벽하게 받아칠 것 같 다는 근거 없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 다.

서로 눈빛을 마주친 두 사람은 자 연스럽게 거리를 벌리며 서준호를 포위했다.

“시원한 곳이군. 안 그래?”

“설마 게이트 내부에서 이런 풍경 을 보게 될 줄이야……

현재 세 사람이 서 있는 곳은 고 독함이 느껴지는 섬이었다.

동쪽의 조그마한 숲 지역을 제외하 면 어느 방향이든 수평선만이 보였 다.

쏴아아아! 철-써억!

거칠고 사나운 파도는 섬을 쉴 새 없이 때렸다.

“몬스터라고는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는데,무명용이라는 녀석은 어디 있는 거지?”

“용이라…… 한 번쯤 사냥해 보고 싶은 녀석이었지.”

팔짱을 끼고 있는 그림자 형제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유지했다.

오직 서준호만이 찌푸린 인상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뭔가 이상해.’

이번에 그가 잡을 무명용은 그럴듯 한 ‘이명’ 하나 없는 용이 아닌가.

한데 서준호는 이곳에서 매우 익숙 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마치 1 성급 게이트에 들어갔 을 때나 느낄 법한 기분이잖아.’

물론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그림 자 형제는 풍경이 좋다고 시시덕거 리며 서준호의 빈틈을 살피기에 바


빴다.

후우우우우욱!

그때,돌연 세 사람이 서 있는 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응? 무슨……

“구름이라도 꼈나?”

찌푸린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면 그 림자 형제의 고개가 모로 돌아갔다.

“저게…… 뭐지?”

새하얀 구름의 위쪽으로,거뭇거뭇 하고 거대한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설마 무명용인가?”

“뭐,일단 위치는 확인되었군. 그런 데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녀석을 어 떻게 사냥하지?”


그림자 형제가 서준호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하나,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서준호는 감쪽같이 사 라진 후였다.

“어,어느 틈에?”

“말도 안 돼! 인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경악해하는 그림자 형제의 머리 위 에서,쩌렁쩌렁한 포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오오오오오오!

검은색 암세포 같은 것이 몸 전체 를 뒤덮고 있는 15 미터 길이의 거 대한 흑룡.

사나운 붉은색 안광을 줄기줄기 뿜 어내는 무명용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잊혀진 용과 조우하셨습니다.]

같은 시각,섬의 동쪽에 위치한 숲 속에서 어둠이 일렁거렸다.

그곳에서 걸어 나온 서준호는 한껏 당황한 그림자 형제를 바라보며 두 눈을 차갑게 빛냈다.

“자,이제 증명해 봐. 너희가 마인 의 하수인인지…… 아닌지를.”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28 화

이름 없는 용(3)

“이 새끼…… 설마 우리가 노리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림자 형제는 연신 두 눈을 굴리 며 서준호를 찾았다.

하지만 그들의 시력으로 이미 어두

운 숲 속에 숨은 그를 찾아내는 것 은 무리였다.

“끄응,그럼 아무 이유도 없이 도 망친 거라고?”

“우리를 미끼로 사용한다고 보는 게 옳겠지.”

“……개새끼네.”

그림자 형제는 서준호가 자신들을 시험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 다.

“한국의 영웅이니 뭐니 하더니,결 국 기회주의자일 뿐이었어.”

“누누이 말했잖아. 어차피 이 시대 에 영웅 따위는 없다니까.”

낮게 읊조린 그림자 형제는 자신들 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는 용을 바 라보았다.

저릿저릿.
그저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부가 떨리며 오한이 든다.

“……용이라는 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너와 내 가 힘을 합치면 잡을 수 있다.”

“서준호는 어떡하지? 우리가 용을 사냥하면 게이트가 클리어 될 텐데, 그럼 임무 실패야.”

잠시 생각을 하던 형,에드바르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럼 내가 용을 상대하고 있을 테 니 넌 녀석을 쫓아. 아마 저쪽 숲에 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혼자서 괜찮겠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의 코웃음과 동시에 바닥에 드리 워졌던 그림자들이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나,둘,셋…….

무려 열다섯 개의 그림자가 사람의

형상을 취했다.

이어서 그림자로 만들어진 검과 창 까지 꼬나쥔 그들은 훌륭한 병사였 다.

“걱정 말고 놈을 죽여. 일이 끝나 면 곧장 합류하고.”

“알았어,형. 그럼 조심하고 있어.”

동생이 무리에서 이탈하자,무명용 의 눈동자가 잠시 그를 쫓았다.

“이쪽이다,지렁이!”

하지만 에드바르가 날린 공격이 자 신의 비늘을 맞추자,무명용은 목표 를 변경했다.

“이 쥐새끼 같은 놈. 대체 어디 숨 은 거냐.”

조금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동생이 되어버린 빈센트가 두 눈에 불을 켰다.

그림자 형제가 개인지명 의뢰에서 성공률 100%를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빌어먹을. 우리의 계획이 흐트러 진 게 얼마만이지?’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설계해 놓은 계획.

그리고 그 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

그 두 가지가 환상의 시너지를 냈 기에 여태 단 한 번의 실패도 겪지 않았던 것이다.

‘감히 우리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 들어? 곱게 죽이진 않겠다.’

프로로서의 자존심이 제대로 상한 빈센트가 이를 갈았다.


그는 사실 처음부터 이번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스베가스 경매의 준비만 해도 빠듯한데…… 이런 시시한 일을 해 야 하다니.’

이번 경매에는 2 층의 고대던전에서 발굴된 최상급 마력핵,‘천상의 숨 결’이 나온다.

마인 협회에서 이만한 건수를 놓칠 이유는 없었다.

그 핵을 손에 넣기만 하면,자신들 의 거점을 하나 더 구축하는 것도 가능했으니까.

‘만약 이번 일로 경매 때의 계획에 약간의 차질이라도 생긴다면……

부르르,저절로 몸이 떨려왔다.

아마 자신과 형은 살아도 산 목숨 이 아니게 될 것이다.

아찔한 상황을 떠올린 빈센트의 눈 에서는 살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충혈된 것을 넘어 붉게 물든 그의 눈동자가 어둠에 잠긴 숲을 노려보 았다.

‘빠르게 죽이고 임무를 완수한다.’

화아악!

돌연 땅으로 푹 꺼진 빈센트의 몸 은 수십 미터 앞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 이동. 그림자 혹은 그늘을

타고 이동하는 기술이었다.

물론 그 거리에 제약은 있다.

30 미터,그것이 그들이 한 번에 이 동할 수 있는 최대거리였다.

“……느껴지는군.”

숲 지역에 도착한 빈센트가 빽빽한 나뭇잎들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앞쪽의 나무 뒤에서 미묘한 마력 파장이 느껴지는 중이었다.

게이트 밖에서 미리 주먹을 맞대며 확인해 두었던,서준호의 마력 파장 과 동일했다.

‘마력조차 숨기지 못하는 애송이

가.’

비웃음을 흘린 빈센트는 조용히 마 력을 끌어올렸다.

상대가 절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스르륵.

순식간에 그림자가 뭉치며 날카로 운 단도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빈센트는 이를 등 뒤에 감추며 다 급하게 소리쳤다.


“이봐,거기 있어? 형이 용과 전투 를 시작했어! 네 도움이 필요해!”

이미 상대의 위치는 알아낸 상태였

다.

이대로 가까이 접근하여 사정거리 에 들어가는 순간.

단도를 휘둘러 서준호의 목숨을 끊 을 생각이었다.

“우리가 뭐 잘못한거라도 있어? 함 께 힘을 합쳐서 공략을 하기로 했잖 아. 그러니까……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인 빈센트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보였다.

그 얼굴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마 음을 약하게 만드는 특유의 호소력 이 있었다.

하지만 한 걸음,두 걸음…… 마지

막 세 걸음.

빈센트의 두 다리가 목표 위치에 도달하는 순간.

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곱게 뒤져!”

화아아아악!

빈센트는 단검을 날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숲속,빽빽한 나뭇잎과 나 뭇가지가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어주 고 있었다.

‘내 홈그라운드나 다름없는 곳에

들어오다니. 아주 제대로 미쳤군.’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단도가 순 식간에 사라졌다.

사라진 단도는 서준호의 마력이 느 껴지는 장소로 순간이동했다.

푸욱!

느낌이 왔다.

단도를 직접 휘두른 것도 아니건 만,진한 손맛과 함께 찰진 소리가 들린 것이다.

빈센트는 쾌재를 부르며 여유롭게 걸어 나갔다.

“그러게 왜 별것도 아닌 새끼가 사

람을 귀찮게 만들……

나무 뒤쪽의 시체를 확인한 빈센트 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시체가 아니잖아?’

단도는 마치 어둠을 뭉쳐서 만든 것 같은 인형에 박혀 있는 상태였 다.

‘함정!’

그것을 깨닫는 순간 빈센트는 마력 을 끌어올리며 감각을 확장시켰다.

서준호의 마력 파장은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자부했다.

하지만……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

것도.

‘뭐지? 이럴 리가 없는데……

빈센트가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찰 나,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마인이었다니,유감이야.”

황급히 몸을 돌리자,팔짱을 낀채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는 서준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방금 서준호가 했던 말을 떠 올리며 입을 열었다.

“……방금 그 말,무슨 뜻이지?”

“음? 영어로 말했으니 알아들었을 텐데?”

서준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 마인이잖아. 뭘 이제 와서 아 닌 척해? 뒤질라고.”

빈센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저놈이 그걸 어떻게……?’

오늘의 작전을 알고 있는 것은 두 형제와 명령을 내린 사람.

그리고 명령을 내린 자가 주인으로 모시는 남자,칼 시그너.

이렇게 네 명밖에 모르는 일이었 다.

당연히 이야기가 새어 나갈 구석

또한 없었다.

‘그렇다는 건……

허풍,즉 블러핑(Bluffing)이다.

그는 어깨를 으쏙거리며 말했다.

“마인이라니,지금 대체 무슨 소리 를 하는 거야?”
“아하,오리발을 내미시겠다? 조금 전에 날 죽이려고 했으면서.”

“그거야 네가 먼저 우리를 배신했 으니까.”

서준호가 피식 웃었다.

빈센트가 변명하는 것이 그저 귀여 웠기 때문이다.

마치 술래잡기를 하던 아이가 제 머리를 이불 밑에 숨겨놓고,본인은 잘 숨었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 시뻘건 눈동자나 좀 숨기고 말 하면 믿어줄게.”

“뭐?”

“마인 특유의 적안(赤眼)을 대놓고 보여주는데 네 말을 어떻게 믿어.”

잠시 혼란스러움을 느낀 빈센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제어가…… 안 되고 있는 건가?’

마인들은 마기(魔氣)를 끌어올리면 눈이 새빨갛게 변하는 특징이 있다.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 사이에 섞이 기 위해서라도 이것을 조절하는 훈 련을 반드시 한다.

빈센트 또한 이 제어를 제법 잘한 다고 자부하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형과 함께 활동한 2 년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의심을 산 적이 없지 않은가.

“막 제어가 안 되고 그러지?”

그런 상황에서 날아온 서준호의 질 문은 예리한 부분을 찔렀다.

빈센트는 욱한 표정으로 차갑게 쏘 아붙였다.

“닥쳐라.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 나 본데…… 내가 마인인 것이 밝혀 지면 벌벌 떨기라도 할 줄


알았나?”

“아니? 증거인멸 하겠다고 날 죽이 려 들겠지. 너희 패턴은 항상 그렇 거든.”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을 살살 긁는 짜증나는 말투였다.

“아주 잘 알고 있군.”

이제는 정체를 숨길 생각조차 없는 빈센트의 적안은 살기로 번들거렸 다.

웬만한 플레이어가 봐도 간담이 서 늘해질 만한 눈빛이었지만,서준호 는 그 시선을 정면에서 받고도 멀쩡


한 표정을 지었다.

“어우,우리 친구가 화가 좀 많이 나있네.”

“친구? 조금 어울려 줬더니…… 주 제를 모르고 설치는구나!”

빈센트가 마기를 끌어올렸다.


게이트에서 아주 희귀하게 출현하 는 마족.

그들의 피를 마시고 살아남은 자들 만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마인 이다.

서준호는 턱을 쓰다듬으며 정말 오 랜만에 마주하는 마기를 감평했다.

'음, 마기는 일반적으로 마력보다 훨씬 난폭하고 거친 기운이지.’

더군다나 마기는 발현한 것만으로 도 상대를 위축시키는 효과가 있다.

빈센트는 아무 말도 못하는 서준호 를 보며 그가 공포에 질렸다고 생각 했다.

“마음껏 두려워해도 좋다.”

꾸우욱.

빈센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 마기를 극성까지 끌어올린

것도 몇 달만이었다.

'크으…… 역시 마기를 끌어올릴 때의 기분은 최고로군.’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몽롱 해지고 마음이 붕 떴다.

마치 스스로가 신이라도 된 것처 럼,온몸에서는 힘이 넘쳐흘렀다.

눈앞의 서준호 정도는 언제든지 짜 부라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곱게 죽일 순 없지. 넌 오 늘 나의 심기를 너무 많이 긁어댔거 든 ”

빈센트는 상대에게 편안한 죽음을 선물해 줄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농락하고,고통을 줘서,최 후에는 스스로 죽여달라고 사정을 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우선 쓸모없는 다리부터 자르고 시작할까.”

빈센트가 그림자 단검을 세 개나 소환하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괴롭힐 거라면 다리는 없어 도 무관했으니까.

스윽,그때. 서준호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뭐,오랜만에 재미있는걸 보여줬 으니 나도 답례 정도는 해줄게.”

“필요 없어!”

슈숙! 허공에 떠있던 단검들이 사 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단검들은 서준 호의 다리를 그대로 절단…….

“어?”

빈센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 한 번 깜빡거린 사이에 서준호 의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조준이 잘못됐나? 아니,그럴 리 가……

목소리는 뒤쪽에서 들려왔다.

“처음에는 단순히 인기척을 줄이는 것이 전부였어.”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일렁거리는 어둠을 발에 두르고 있는 서준호의 모습이 보였다.

어둠은 마치 콩나물처럼 자라면서, 그의 발목,종아리,허벅지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조금 익숙해지니 그다음에는 나의 소리와 냄새를 차단할 수 있었지.”

“그 기운은…… 대체 뭐냐.”

빈센트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 다.

현재 서준호를 감싸고 있는 기운은 절대 마기가 아니었다.

‘한데 대체 뭐란 말이냐. 이 위압 감은?’

자신이 보아온 그 어떤 기운보다도 흉폭하고 사나웠다.

그저 닿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존재 가 사라질 것 같은 폭력적인 기운이 었다.

“하나씩 지워 나가는 거야. 처음에 는 기척,다음은 소리와 냄새…… 그럼 그다음 단계는 뭘까?”

질문과 동시에,서준호의 눈밑에서 일렁거리던 어둠이 그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덮어버렸다.

그러자 숲속으로 적막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서준호의 냄새,기척,소리,마력 파장…… 그의 정보를 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완벽하게 차단된 상태


였다.

그것이 바로 몬스터 군단 사이에서 도 유유자적 산책을 할 수 있게 만 들어준다는 어둑서니의 고유 기술.

밤걸음이었다.

“하…… 하하?”

숲속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빈센트 가 허탈함 웃음을 뱉어냈다.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완벽한 은신술을 자랑하는 상대와 어두운 숲속에서 싸운다?

‘내가 큰 착각을 했군.’

이곳은 자신의 홈그라운드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서준호가 작정하고 날될 수 있는 최고의 무대였다.

‘이곳에서 그와 싸우는 것은 미친 짓이야.’


그때 빈센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딱 하나였다.

‘일단 튀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29 화

이름 없는 용(4)

“허억,허억!”

얼굴이 하얗게 질린 빈센트는 열심 히 숲속을 달렸다.

보이지 않는 적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 생각하니,머리카락이 쭈뻣 서 는 기분이었다.

“새끼,도망하나는 잘 치네.”

스르륵.

밤걸음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서준호는 딱히 그를 공격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마인이라는 건 확인이 되었으니 지금 죽이기엔 아깝지.’

그들을 이용하여 무명용 사냥부터 끝내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저 녀석들에겐 사냥개 역할을 맡 겨야겠어.’

물론 사냥이 끝나면,쓸모없어진 사냥개는 토사구팽을 당하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다.

때문에 서준호는 일부러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지 않고 적당히 겁만 줘 서 쫓아냈다.

“벌써부터 겁먹으면 곤란하거든.”

서준호는 사냥개들이 조우하는 것 을 보며 자신도 사냥할 준비를 시작 했다.

“뭐야,그 녀석의 저항이 제법 거 셌나 봐?”

거친 전투를 벌이던 무명용이 잠시 구름 위로 을라가자,에드바르는 동 생을 쳐다보며 물었다.

빈센트의 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 이다.

어디서 굴렀는지 몸에는 흙과 잡초 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얼굴은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처리는 확실히 했지?”

“아,아냐…… 못했어……

동생의 얼빵한 대답에 에드바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치만 그 새끼 뭔가 수상하다고! 우리가 마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 고,힘까지 숨기고 있었어! 마기를
극성까지 끌어올렸는데 기척조차 찾 지 못했다니까?”

빈센트는 서준호가 힘을 숨긴 강자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상황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에드바르는 냉정하게 판단했 다.

“그런데 넌 어떻게 살아왔지?”

“……뭐?”

“그 녀석이 정말로 힘을 숨긴 강자 였다면, 어째서 널 놓쳤냐는 뜻이

야.”

빈센트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형의 말이 맞았다.

만약 녀석이 자신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면,형과 떨어져 있을 때 승부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도망을 치는 와중에 단 한 번의 공격도 받지 않았다.

‘옷이 더러워진 것도 단순히 넘어 져서 그런 것뿐이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빈센트의 얼 굴이 일그러졌다.

“잠깐만,그럼 내가 녀석의 허세에 속은 거라고?”

“아니라면 널 곱게 보내줄 리가 없 잖아. 우리가 떨어져 있을 때를 노 리는 것이 당연한데.”

빠드득!

이를 간 빈센트는 당장이라도 돌아 갈 것처럼 몸을 돌렸다.

“이런 압삽한 새끼! 감히 잔머리를 굴리다니,내가 지금 당장 돌아가 서……

“아니,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하늘을 올려다보던 에드바르가 고

개를 흔들었다.

“오히려 잘 왔다. 무명용을 상대하 는 건 나 혼자서는 힘들어.”

“……그렇게 강해?”

“강한 것도 있지만 상대하기가 까 다로워. 하늘을 날아다니니 공격하 기도 난해하고.”

“그럼 녀석의 몸에 올라타는 편이 좋겠네.”

“맞아. 하지만 녀석의 시선이 나에 게 집중되어 있어서 번번이 실패했 다.”

“••••••그래서 도와달라는 거구나?”


빈센트는 단번에 형의 뜻을 이해했 다.

“지상에서 하는 공격은 효과가 없 어. 놈의 역린을 직접적으로 타격해 야 해.”

용과 드래곤이 지닌 유일의 약점이 바로 역린(逆鑛)이었다.

거대한 신체에서 단 하나만이 존재 하는,다른 비늘들과는 방향이 반대 로 되어 있는 비늘.

“그럼 서준호는 어떻게 하지?”

“무명용부터 잡고 그다음에 협공으 로 죽이면 되잖아.”

“……좋아. 그럼 용이 내려오면 시 선을 잡고 있어. 내가 그림자 이동 술로 녀석의 위에 올라탈 테니까.”

“부탁한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무명용 이 구름을 뚫고 그들의 시야에 나타 났다.

녀석의 입은 쩌억 벌려진 상태였는 데,그곳에는 검은색 기운이 뭉쳐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에드바르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빌어먹을! 구름 위에서 브레스를 모으고 있었나!”

-그오오오오!

무명용의 입가에서 뿜어진 어둠의 광선이 에드바르를 향해 떨어졌다.

“크학!”

그림자 이동술로 가까스로 공격을 피해냈지만,그의 그림자 병사들은 아니었다.

남아 있던 병사들이 모두 파괴되자 에드바르는 가볍게 각혈을 쏟아냈 다.

“형!”

“신경 쓰지 말고…… 집중해라!”

땅에서 솟아난 길쭉한 그림자는 곧

창이 되었다.

에드바르는 그 창을 꼬나쥐며 자세 를 잡았다.

전형적인 투창의 자세였다.

‘눈! 눈이 아니면 답이 없다.’

무명용의 전신을 덮고 있는 비늘은 상상이상으로 단단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 어떤 공격을 퍼부어도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천 연의 방어구였다.

화아아아악!

마기를 한계까지 끌어올린 에드바 르의 두 눈이 점점 더 붉어졌다.


이번 공격을 어떻게든 성공시켜 무 명용의 고도를 낮춰야했다.

그래야 빈센트가 녀석의 위로 올라 갈 수 있을 테니까.

“흐으음!”

가볍게 움직이던 두 다리에 점점 가속도가 붙었다.

이내 그의 몸이 최고속도에 도달한 순간,창이 그의 손아귀를 떠났다.

한 줄기 섬광이 되어 날아간 창은 직선으로 뻗어나가며 무명용의 얼굴 로 쏘아졌다.

과드드득!

“아!”

에드바르가 안타까운 비명을 터트 렸다.

공격이 목표로 잡았던 눈동자에서 한 치 정도 빗나간 것이다.

하지만 얼굴의 비늘이 다른 곳보다 강도가 약한 것인지,창은 녀석의 피부에 박힌 상태였다.

- 그오오오오오!

무명용이 고통에 몸무림 치며 발작 했다.

마치 도마 위의 장어처럼 어지러이 몸을 뒤흔든 녀석의 고도가 점점 더

낮아졌다.

5 천 미터 이상의 상공에 있던 녀 석의 몸은 잠시 후,200 미터 정도까 지 떨어졌다.

‘조금만 더 내려오면……

에드바르가 간절히 소망했지만,무 명용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목숨에 위험을 느낄 정도의 공격을 받은 녀석은 다시 하늘 위로 올라갈 준비를 마쳤다.

“젠장,빈센트! 지금이다!”

에드바르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지금 무명용이 하늘 위로 올라간다

면,녀석은 두 번 다시 내려오지 않 을 것이라고.

그와 똑같은 생각을 품은 빈센트가 소리쳤다.

“도와줘!”

동시에 에드바르가 가볍게 진각을 밟았다.

쿠웅!

그는 바닥에서 튀어오른 그림자 조 각들을 집어,빈센트와 무명용 사이 로 던졌다.


조각들의 거리는 딱 30 미터.

그림자 이동술을 펼칠 수 있는 최

대거리 였다.

숙,슈숙!

빈센트는 형이 깔아준 그림자 조각 들로 이동하며 무명용에게 접근했 다.

- 크오오오!

적의 접근을 알아차린 무명용이 빠 르게 허공으로 솟구쳤지만,빈센트 가 한발 더 빨랐다.

“으아아아아!”

덥석!

가까스로 무명용의 꼬리를 붙잡은 빈센트는 단단한 비늘을 꽉 붙잡으

며 소리쳤다.

“됐다! 올라탔어!”

“역린의 위치…… 등쪽……!”

에드바르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멀 어 졌다.

“크웃!”

빈센트는 두 손으로 비늘을 꽉 붙 잡고,두 다리로도 꼬리를 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흔들리 는 몸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젠장,안전장치 없이 롤러코스터 를 타는 게 이것보단 낫겠어.’

뒤를 힐긋 쳐다본 무명용은 인간이 자신의 꼬리에 을라탔다는 것을 알 아차렸다.

그때부터 녀석은 미친 듯이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후욱,후욱……

이를 악물고 꼬리에 매달려 있던 빈센트가 우연히 아래쪽을 쳐다보았 다.

‘우을 r

비행기나 배를 타도 멀미가 없던 그였지만,순간적으로 구토감이 올 라왔다.

이미 자신이 서 있던 섬은 개미처 럼 작게 보이는 상태.

현재 그의 주위를 둘러싼 것은 구 름의 파도였다.

‘……목숨을 건질 자신은 있지만, 그래도 떨리는걸.’

침을 꿀꺽 삼킨 빈센트는 겨우 멘 탈을 부여잡고 천천히 몸을 움직였 다.


빈센트는 무명용의 몸을 기어오르 며 순식간에 등 부근에 도착했다.

“찾았다!”

목표를 발견한 그의 눈이 반짝였

다.

검은색으로 나있는 다른 비늘들과 는 달리,유독 하나의 비늘만 하얀 색에 역방향이었다.

‘역린.’

용과 드래곤의 유일한 약점으로 불 리는 부위다.

빈센트는 주저 없이 손을 뻗어 역 린을 뜯어냈다.

찌리릿.

동시에 무명용은 짜릿한 전류가 자 신의 몸을 관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

았다.

“됐다! 역린을 뜯었으니 이제

빈센트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드 는 순간.

푸우욱!

그의 어깨를 길다란 흑색 창 하나 가 꿰뚫었다.

“커헉……?”

어지간한 플레이어라면 정신을 잃 을 정도로 아찔한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빈센트는 고통에 약간의 면 역을 가지고 있는 마인.

그는 황급히 창대를 붙잡고 상처 부위를 지혈하며 사태를 파악해 나 갔다.

‘누구지? 혹시 서준호가……?’

단번에 고개가 흔들어졌다.

불가능하다.

그가 정말로 힘을 숨기고 있었다고 해도, 이곳은 공기조차 희박한 5,000 미터 상공.

지상으로부터의 공격이 닿을 리가 없었다.

‘서준호는 아니야. 그렇다면•…"

빈센트의 떨리는 두 눈이 무명용을

바라봤다.

- 크오오오오오!
붉은 안광을 줄기줄기 홀러내리는 녀석의 머리 주위로,흑색의 창 수 십 개 떠올라 있었다.

‘망했다.’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빈센트는 일 말의 고민도 없이 녀석의 등을 박차 고 뛰어내렸다.

쇄애애애액!

등 뒤에서 흑색 창들이 자신의 뒤 를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빈센트는 곧장 마력을 끌

어올렸다.

‘그림자 복귀술!’

후우우우욱!

동시에 공간이 뒤틀리는 느낌과 함 께 그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컥! 쿨럭!”

입에서 피를 토해낸 그의 곁으로 황급히 에드바르가 달려왔다.

“성공했……? 잠깐,이 상처는 뭐 야?”

빈센트는 자신의 옆에 주저앉은 에 드바르의 팔을 황급히 붙잡았다.

“형,망했…… 크윽,망했어!”

“망하다니,그게 무슨 소리야?”

“도망쳐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명용이 상공의 구름들을 찢어발 기며 등장했다.

- 크로오오오오오오오오!

동시에 그들이 위치한 곳으로 흑색 창들의 폭격이 떨어졌다.

서준호는 잔뜩 화가 난 무명용과

전투를 벌이는 그림자 형제를 멀리 서 지켜보았다.

“수능은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되, 사냥은 절대 교과서에서 배우지 마 라…… 내가 한 말이지만 진짜 명언


이라니까.”

그는 처음부터 이 상황을 예견했 다.

“겁도 없이 역린을 건드리니까 저 런 꼴이 나지.”

역린을 공략하면 용을 잡기 쉽다.


그것은 용을 사냥해 본 적 없는 초보자들이 흔히 착각하는 부분이었 다.

물론 역린이 용과 드래곤의 약점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린을 찾았다고 용을 쉽게 죽일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역린의 위치가 들통 나는 순간, 용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평소보 다 훨씬 더 포악해지지.’

괜히 용의 역린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 나도는 것이 아니다.

용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는 플레 이어라면,역린은 건드리지 않는 것 이 신상에 좋다.

‘지금이라면 솔직히 나 역시 분노 한 용을 정면에서 상대할 자신은 없

어.’

하지만 그 분노를 대신해서 받아줄 ‘미끼’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럼 죽지 말고 잘들 도망쳐라. 내가 녀석을 사냥하기 전까지.”

꾸우우우욱.

서준호가 폭풍접의 시위를 당기며 중얼거렸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30 화

죽은 자의 고백(1)

분노에 눈이 뒤집힌 무명용은 강했 다.

“젠장,형!”

“에이씨,말 시키지 마! 집중력 흐 트러지니까!”

우애 좋던 그림자 형제의 대화를

끊어놓을 정도로 강했다.

에드바르와 빈센트는 초 단위로 날 아오는 흑색 창들을 피하느라 진땀 을 홀렸다.

‘젠장…… 용이란 녀석은 마력이 무한인건가?’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창 하나를 피해낼 때마다,그들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허공을 바라보았 다.

그곳에 두둥실 떠올라 있는 흑색 창들은 그 수가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았다.

쇄애애애액!

하나를 날리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창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숨이 턱하고 막힐 정도의 벽으로 다가왔 다.

‘이 씨발 공격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건데?’


‘끝이라는 게 있긴 한가?’

사람이란 결승선이 확고히 정해졌 을 때 제대로 달릴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림자 형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폭격 속에서,무의미하게 체 력만 소진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공격이라도 통했으면 시 원하게 싸워보기나 할 텐데……

‘저 빌어먹을 비늘,너무 단단해서 우리의 공격은 소용이 없어.’

진퇴양난에 빠진 그림자 형제의 머 릿속으로 자신들의 최후가 그려지던 순간.

“……!”

‘‘……!”

그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 다.

뒤쪽에서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폭풍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뒤쪽이다! 이제 와서 새로운 패턴 이라고?’

‘젠장,여기서 죽는 건가……

형제의 눈동자에 짙은 패색이 드리 우던 찰나.

과과과과과과!

거친 바람을 동반한 화살 하나가 그대로 무명용의 눈에 처박혔다.

무명용의 입이 크게 벌어지고,고 통어린 울부짖음이 공간을 뒤흔들었 다.

좌아아아악!

하늘 위로 분수처럼 뿜어진 용의 피는 대지와 형제의 얼굴로 후두둑 떨어졌다.

멍하니 입을 벌린 형제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건 설마……

‘서준호?’

두 사람의 눈빛이 빠르게 교차했 다.

그가 자신들을 지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동시에 그 이유 또한 짐작되었다.

‘하긴,우리가 죽으면 결국 그놈만

손해지.’

‘혼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무명용 을 사냥하지 못할 테니까.’

결국 죽이 되든 밥이 되든,무명용 을 사냥하는 건 세 명이서 해야 하 는 일.


사냥이 끝나면 다시 적이 되겠지 만,살고 싶다면 지금은 힘을 합쳐 야 한다.

죽어 있던 두 사람의 눈동자로 희 망의 불씨가 활활 타올랐다.

반쯤은 포기했던 삶에 대한 애착도 강하게 끓어올랐다.

“우리는 적당히 눈치 보다가 빠지

자.”

“물론이지. 어차피 공격은 저쪽이 하는 거야. 무명용의 시선이 어디로 쏠리게 될지는 뻔하지.”

거기까지 계산을 마친 그림자 형제 는 다시 떨어지기 시작하는 흑색 창 을 피하기 시작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활을 내린 서준호가 영혼 없는 목 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화살을 쏜 이후로 그림자 형제의 움직임이 갑자기 활발해졌 다.

바로 그들에게 희망이 생겼기 때문 이다.

그리고 그 희망이 무엇인지 유추해 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마 무명용의 어그로가 나한테 쏠리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지?”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 그리는 핑크빛 청사 진.. 그거 사실 오아시스가 아니

라 신기루거든.”

서준호 입장에서는 무명용의 어그 로를 끌면서까지 공격할 이유가 하 등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전제가 잘못되었다.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서준호는 혼 자서도 무명용을 사냥할 자신이 있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형제를 끌어들인 것은,사냥을 더 편하게 하기 위함이다.

‘굳이 쉬운 길을 놔두고 돌아갈 필 요는 없으니까.’

서준호가 다시 한 번 폭풍접을 들 어올렸다.

그가 겨냥한 것은 그림자 형제도, 무명용도 아닌 잿빛 하늘이었다.

‘확실히 용의 비늘은 단단해. 웬만 한 공격으로는 뚫을 수가 없지.’

웬만큼 강한 공격으로도 노릴만한 곳은 눈 정도 밖에 없다.

‘게다가 만약 여기서 유효타를 조 금이라도 더 넣게 되면……

그 순간 무명용은 목표를 재설정할 것이다.


감히 덤빌 생각조차 못하는 두 벌 레보다는,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적이 더 성가실 테니까.

“그러니까 다음 공격 한 번에 모든 걸 끝내야 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사냥을 끝내 는 방법은 유일했다.

‘시간차 공격.’

무수히 많은 공격들을 단 한 번에 퍼부어서 반응조차 못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근접 무기로는 하기 힘든, 원거리 무기만의 메리트였다.

꾸우우욱.

하늘을 향해 시위를 당긴 서준호의 모든 신경이 두 눈에 집중되었다.

그는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를 모조 리 배제하고,강제로 무아지경의 상 태에 돌입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적막감이 정신을 감싸는 것과 동시에,계산이 시작되었다.

‘타격 부위 확인. 화살의 궤적 확 인. 시간은 0.5 초 단위로 쏟아부으 면 되겠지.’

섬세한 조율을 끝낸 그는 거칠게 휘날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을려다 보았다.

“풍속이나 풍향은…… 계산할 필요 가 없고.”

그는 중얼거리면서 들고 있던 활을 슬쩍 쳐다보았다.

폭풍접은 겨우 레어 등급의 무기, 당연히 그보다 더 좋은 등급의 활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더 좋은 활들을 제치고,유 일하게 한 나라의 국보가 된 이유는 간단했다.

‘폭풍을 일으키는 능력.’

폭풍접으로 쏘아낸 화살은 항상 폭 풍을 몰고 다닌다.

그때 발생하는 풍압은 몹시 강력하 여,마주치는 모든 바람을 찢어발긴 다.

‘즉,폭풍접으로 화살을 쏠 땐 풍 속,풍향 등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예로부터 화살을 제멋대로 밀어내 는 바람은 궁수들이 뛰어넘어야 할 평생의 숙적이었다.

하지만 폭풍접을 쥐는 순간,그 숙 적은 귀신처럼 사라진다.

'그게 이 활이 한 나라의 국보가 된 이유.’

동시에 마인,칼 시그너가 고작 레 어 등급의 활에 욕심을 드러내는 이 유였다.

꾸우우우우욱!

서준호가 폭풍접의 시위를 한계까 지 당겼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시위에는 그 무엇도 걸려 있지 않았다.

‘무명용의 덩치가 생각보다 훨씬 커서…… 화살 정도로는 안 돼.’ 생각을 마친 그는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텅 비어 있던 시위에 어둠 으로 만든 화살이 걸렸다.

아니,사실 화살이라고 칭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다크 스피어.”

2 미터 길이의 끝이 뾰족한 창.

서준호가 그것을 시위에 건 것은 단순한 겉멋 때문이 아니었다.

‘어둠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힘.’

어둠으로 만들어진 무기는,상대방 의 ‘방어’마저도 무시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과거 어둑서니가 최강 의 창이라 불리던 결정적인 이유였 다.

투우우우웅!

서준호가 미련 없이 시위를 놓았 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풍압이 그를 덮 쳤지만,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같 은 동작을 반복했다.

투웅! 투우우웅! 투우웅!

어둠의 창을 무려 스무 번이나 쏘 아냈을 때,흐른 시간은 고작 7 초 남짓이었다.

스무 발의 창들은 제각각의 궤적을 그리며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모두 제대로 들어갔다.’

숙련된 궁수는 시위를 놓는 순간 그것이 목표를 꿰뚫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법.

서준호는 모든 공격이 적중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럼 슬슬 가볼까.”

방금의 공격으로 인해 사냥은 이미 끝난 상태.

이제는 사냥개를 삶아먹을 시간이 었다.

‘아니,서준호 이 씹새…….

‘왜 이렇게 공격을 안 해?’

그림자 형제의 얼굴로 당황스러움 이 떠올랐다.

무명용의 눈에 화살을 박아 넣은 뒤로,서준호의 추가타가 전혀 날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머리가 복잡해지던 순간.

“니네는 하라는 사냥은 안 하고 왜 탄막슈팅게임을 하고 있냐.”

이곳에서는 절대 들려선 안 될 목 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를 파고들었 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그림자 형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미친…… 네놈이 여길 왜 와!”

“후방에서 지원을 하는 게 아니었 나?”

“했는데?”

서준호가 하늘을 쳐다보며 턱을 까 딱였다.

사람의 본능에 따라,그림자 형제 의 고개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돌 아갔다.

그곳에는 빠르게 떨어지는 스무 개 의 별이 있었다.

‘……별? 아니,자세히 보니 창이

잖아. 그것도 흑색 창! 무명용의 공 격인가?’

‘아니,저건…… 무명용의 창과는 조금 다른데?’

전투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창 이 그림자 형제가 아닌 무명용에게 떨어졌다.

...9

위쪽에서 들리는 거친 바람 소리에 무명용이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푸우욱!

흑색 창 하나가 무명용의 몸을 그 대로 꿰뚫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유성처럼 떨어진 흑색 창들이 계속해서 그를 두드렸다.

팍! 파팍! 파아악!

창들은 15 미터의 거대한 몸을 꼬 리부터 목까지 관통하여 무명용을 바닥에 고정시켰다.

- 7] 아•아•아•아•아•아아아•아싹• I

주변의 돌멩이들이 날아갈 정도로 쩌렁쩌렁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엄청난 고통에 무명용이 몸을 비틀 었지만,땅에 못처럼 박힌 창은 그 의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벌레처럼 바둥거리는 용을 쳐다보 던 그림자 형제의 눈이 파르르 떨렸 다.

‘그렇게나 강하던 무명용을…… 이 렇게 쉽게?’

‘게다가 저렇게 높은 수준의 시간 차 공격이라니? 서준호의 주무기는 검이라고 들었는데?’

피부가 오싹해질 정도로 무기를 잘 다루는 녀석이다.

게다가 창에 담겨 있는 기운은 자 신들이 상상하던 그 이상의 힘을 품 고 있었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그림자 형제

는 몸을 돌리며 백기를 들었다.


“이봐,함께 사냥을 한 전우끼리 대화를 좀 해보는 게 어떨까?”

“너도 알잖아. 우린 잔챙이에 불과 하다는 거. 접선 위치와 방법을 가 르쳐 줄 테니 우린 살려줘.”

조금 더 큰 꼬리를 잡을 수 있는 기회,제법 그럴듯한 협상 카드였다.

하지만 서준호의 눈빛은 단호했다.

“안 돼,협상할 생각 없어. 꺼져.”

그들이 여기서 살아나가면 곤란해 지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기 때문 이다.

‘그림자 형제가 나가면,마인 협회 에서 가만히 있을까?’

당연히 가만히 안 있는다.

최면 계열 능력자를 데려오든,아 니면 고문을 하든.

게이트 내부에서의 모든 일을 낱낱 이 토해내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인 협회는 내 힘의 출처를 의심하게 되겠지.’

때문에 저 녀석들은 이곳에서 사고 사로 처치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결정을 내린 서준호가 검을 뽑았 다.

“우리가 곱게 죽어줄 것 같아!?”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빈센트가 욕설을 내뱉는 순간.

푸욱!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 소리……

그가 굉장히 자주 들어왔고,또 가 장 좋아하는 소리.

바로 날붙이로 심장을 꿰뚫는 소리 였다.

한데 이번에는 그 소리가 굉장히 크게 들렸다.

마치 바깥이 아닌,자신의 몸속에

서 들리는 것처럼.

“……아?”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빈센트는 피를 토해내며 자신의 가슴팍을 더 듬었다.

뾰족한 검 한 자루가 자신의 가슴 앞쪽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대체 언…… 제?’


그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빈센트으으으! 이 개자식!”

에드바르의 분노에 찬 고함이 귀를 웅웅 울렸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올린 빈센트 의 눈동자에서는 생기가 빠르게 사 라지는 중이었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서준호의 검에 잘린 에드바르의 목 이었다.

입가에서 주르륵 피를 흘리던 빈센 트가 피식 웃었다.

‘이건 무슨,개꿈…… 인가……

마인 빈센트는 그렇게,깔끔하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

“……내가 너무 물러졌나. 너무 편 하게 보내줬네.”

좌아아악!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서준호가 싸늘한 눈빛으로 두 구의 시체를 내 려다보았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늘 찜찜한 기 분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 대상이 마인이라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그들이 앗아간 생명이 수백일 테고,놔뒀다면 앞으로 앗아갈 생명 이 또 수백일 테니까.

“너희에게도 다음 생이란 게 있다 면,평생을 속죄하면서 살아.”

-갸오오오오오오!

서준호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Q 며 용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t °

정신이 가출할 정도의 고통 속에서 는,아무리 용이라고 해도 마력을 운용하지 못했다. "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

가까이 다가가자 무명용의 붉고 탁 한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녀석의 눈에 서는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졌다.

“뭔데,그 눈빛은.”

괜히 뒤승승한 기분을 느낀 서준호 가 검을 들었다.

우우웅!

검날 위로 흑색의 검기가 씌워졌 다.

강남삼절의 절명검이 봤다면,마시 던 오렌지 주스를 주르륵 뱉어낼 정 도로 완벽한 검기였다.

“잘 가라.”

무명용의 몸 위에 올라탄 서준호는 주저 없이 역린에 검을 쑤셔 박았 다.


부르르르르!

무명용의 몸이 한 차례 경련을 일 으키더니,이내 축 늘어져서는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잊혀진 용의 섬을 공략하셨습니 다.]

[클리어 보상으로 용의 뼈 (20kg)를 획득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했습니다.]

[잃어버린 마력 능력치가 2 복구되 었습니다.]

[잃어버린 체력 능력치가 1 복구되 었습니다.]

[잃어버린 근력 능력치가 2 복구되 었습니다.]

[한 시간 후 게이트가 자동 소멸됨 니다.]

게이트의 공략 보상으로는 레벨이 다섯 개 올랐다.

하지만 이 게이트에서 최종적으로 올라간 레벨은 무려 여섯 개였다.

‘플레이어를 사냥해도 경험치는 오 르니까.’

그것이 마인들이 PK(Player Kill)를 즐겨하는 이유였다.

서준호는 조용해진 섬을 한 차례 둘러보다가,그림자 형제에게 다가 갔다.

“드디어 이걸 사용해 보는 건가.”

새벽의 저주 게이트에서 트릭커를 잡고 보상으로 얻어낸 C 등급 스킬, 죽은 자의 고백.

죽은 생물의 기억을 재생시킬 수 있는 굉장히 특이한 스킬이었다.

서준호는 빈센트의 시체 옆에 쪼그 려 앉아,그의 이마에 손을 갖다대 며 말했다.

“자,어디 한 번 고백해 보렴.”

[죽은 자의 고백이 시작됩니다.]

[빈센트의 기억 영상을 재생합니 다.]

스르륵.

그의 눈앞으로 ‘기억 영상’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31 화


죽은 자의 고백(2)

“호오,이런 식이구나?”

서준호는 기억 영상의 기능들을 빠 르게 훑어보았다.

‘빨리감기,뒤로감기,음량 조절이 랑 화면 밝기…… 얼씨구? 검색 기 능까지 있네?’

가장 먼저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 다.

사람의 기억이란 워낙 방대해서, 원하는 기억을 직접 찾아내려면 며 칠 밤낮을 새도 모자랄 테니까.

서준호는 비교적 최근의 기억들부 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한테 왜,왜 이러세요?

-다,다 주겠네! 내가 가진 돈 다 준다고!

-컥,크허억…….

영상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 고 있는 것은 수많은 살인의 기억들

이었다.

눈썹을 꿈틀거린 서준호는 깊이 후 회했다.

'에이씨,이걸 보니까 너무 편하게 보내준 것 같은데.’

가볍게 혀를 찬 그는 검색 기능으 로 '협회’와 관련된 기억들을 불러 냈다.

그러자 영상 속의 그림자 형제는 양복을 들고 미국의 한 세탁소를 찾 아갔다.

치이익,치이익!

다리미의 스팀을 뿜어내며 옷을 다 리던 대머리 남자가 그들을 돌아보

며 말했다.

-위쪽에서 지령이 떨어졌다. 확인 해봐.

-지령이라니? 우리는 라스베가스 경매를 준비 중인데?

-그걸 왜 나한테 따져? 나는 연락 책에 불과하니까 자세한 경위까지는 모른다고.

Jim's Cleaners.

서준호는 세탁소의 이름을 빠르게 외웠다.

‘지령을 받는 장소라면…… 저곳이 마인 협회의 접선 장소 중 한 곳이 다.’

더 큰 꼬리의 위치를 찾아낸 순간 이었다.

이후로도 몇몇 기억을 더 훑어보던 서준호가 슬슬 영상을 종료하려던 순간.

한 남자가 영상에 등장했다.


-호오,형제라고? 눈빛이 마음에 드는구나.

-너희들에게 힘을 나누어주지.

-지금부터 이 녀석들을 2 급 관리 품으로 분류하겠다.

욱씬.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크윽!”

[스킬의 등급이 낮아 대상의 기억 을 완벽하게 재생할 수 없습니다.]

[사용자의 안전을 위해 스킬을 강 제종료합니다.]

얼굴을 찌푸린 서준호는 아직까지 욱씬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끄음…… 마지막의 그건 뭐지?’

그림자 형제에게 힘을 나누어준다

는 남자.

당연히 그들보다 높은 신분을 가진 마인일 것이 뻔했다.

“얼굴을 봐뒀으면 좋았을 텐데.”

스킬의 등급이 낮아서 그런지,그 의 얼굴은 마치 노이즈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서준호는 아쉬움을 내뱉으며 자리 에서 일어났다.

이어서 에드바르의 기억까지 싹 훑 었으나,이번에도 의문의 남자가 등 장하자 스킬이 중지되었다.

‘아무래도 쓸 만한 기억들을 얻으 려면 스킬 등급부터 올려야겠어.’

스킬이란 많이 쓰고,숙련도가 늘 어나면 등급 또한 상승한다.

‘물론 재능과 노력 여하에 따라 평 생 등급 하나조차 올리지 못하는 이 들이 태반이긴 한데……

서준호의 재능은 최상급.

게다가 노력으로는 어느 무리에서 도 독종이라는 소리를 최소 한 번쯤 은 들어본 몸이었다.

어깨를 으쓱거린 그는 고개를 돌려 무명용의 시체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스킬은 인간의 기 억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지?”

죽은 자의 고백은 죽은 ‘생물’의 기억을 볼 수 있다.

즉,용의 기억도 볼 수 있다는 소 리.

서준호는 무명용의 시체 쪽으로 걸 어갔다.


‘솔직히 조금 궁금하기는 했어.’

녀석이 왜 마지막 순간 자신을 그 토록 슬프게 쳐다봤는지,그리고 대 체 정체가 무엇인지.

“이 정도로 강력한 용이라면 이름 이 있을 법도 한데 말이야.”

무명용은 이전의 불꽃 호리와는 비

교도 안 될 정도로 강했다.

이번에야 그림자 형제가 미끼 역할 을 해줬기에 편하게 사냥을 했을 뿐.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서준호도 피 해를 각오해야 할 정도의 강적이었 다.

“한 번 보자고. 네가 어떤 녀석이 었는지.”

서준호의 손이 무명용의 이마에 가 법게 올려졌다.

화아아아악!

이미 두 번이나 경험을 해본지라 그는 익숙하게 영상을 재생시켰다.

한데 무명용은 앞선 두 사람과는 달리,매우 짧은 분량의 영상 하나 만이 떠올랐다.

“……응?”

그 기억 영상을 감상하던 서준호의 표정이 점차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옥좌에 앉아 있는 왕의 안색은 무 척이나 나빠 보였다.

쿨럭쿨럭.

가래 섞인 기침을 뱉어내던 왕은,

텅 비어 있는 대전을 내려다보며 쓸 쓸한 음성을 뱉어냈다.

“법사.”

“예,전하.”

법복을 입고 있는 승려 하나가 고 개를 숙이며 왕에게 예의를 갖췄다.

“내 명이 그리 길지는 않은 것 같 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죽음은 이미 정해진 바,지 금은 조금 더 현실적인 문제를 다뤄 야 하지 않겠소.”

스윽,옥좌에서 일어난 왕은 대전

의 창을 열어 물감처럼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과 5 년 전,드디어 세 나라의 길고도 길었던 전쟁이 끝을 맺었 소.”

“전하를 향한 만백성의 칭송이 하 늘까지 닿을 정도이옵니다.”


“백성들이야 평화의 시대라고 좋아 하지만,우리는 알지 않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왕의 말은 사실이었다.

북쪽의 대국(치설)은 지금 이 순간 에도 호시탐탐 그들의 땅을 노리는

중이었다.

당장이야 태평성대가 펼쳐졌다지 만,그들은 이것이 바람 앞의 등불 처럼 한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 다.

“나는 이제 곧 죽소. 나와 함께 이 땅을 질타했던 천하의 대장군들도 이제는 늙었지.”

“강물은 늘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 다. 저희가 양성한 후학들은 절대 선대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을 것
이옵니다.”

“암,그래야지,물론 그래야지.”

뿌듯한 표정을 지어보인 왕은 둥둥

떠다니는 구름을 쳐다보더니 두 눈 을 감았다.

“하지만 인재(人材)만으로는 부족 하오. 대국은 이미 세상을 떠난 수 많은 영웅들이 신통이 되어 수호하


는 국가가 아니오.”

“한낱 미신일 뿐이옵니다.”

“하지만 미신이 아니라면 어쩔 테 요?”

몸을 돌린 왕의 붉은 용포가 거칠 게 펄럭였다.

“만약 정말로 그들의 나라를 수호 하는 용들이 있다면,나의 백성과 군대가 이를 감당할 수 있겠냐는 말

이오.”

법사는 입을 닫았다.

불교에 몸담은 그의 입장에서는 왕 의 걱정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 다.

그런 그를 잠시 쳐다보던 왕이 천 천히 입을 열었다.

“……짐이 죽으면 화장하여 동쪽의 바다에 뿌려주시오.”

“저언하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깜짝 놀란 법사가 갈라지는 목소리 로 소리쳤다.

선조들과 함께 고분에 잠들어야 할 귀중한 옥체를 대뜸 화장하라니?

하지만 뜻을 확고히 정한 왕의 음 성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 로 단호했다.

“짐 스스로가 호국대룡(護國火 m) 이 되어,불법을 받들고 이 나라를 수호하겠소.”

“전하,용이란 말이 좋아 용일 뿐. 실상은 저희 인간들이 사는 육도의 인간도보다도 격이 낮은 축생도에


속한 미물일 뿐이옵니다. 어찌 전하 께서 윤회를 마다하시고 스스로 수 라의 업보를 짊어지려
하시옵니까?”
“법사,나는 이미 세상의 영화를 멀리한 지 오래요. 만약 언젠가 스 스로의 자아까지 잃고 축생으로 전
락해 버린다 해도,그 또한 나의 운 명이 아니겠소.”

♦ * *

기억 영상은 껄껄 웃는 왕을 천천 히 줌 아웃하면서 끝이 났다.

정신을 차린 서준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홀렸다.

“……하?”

이름 없는 용의 정체가 무엇인지 눈치를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호국대통이라고 자칭할 만한 사람이라면......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녔던 사람 이라면 국사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만한 인물.

바로 치열했던 삼국시대에 막을 내 린 신라의 제왕,문무왕이다.

“와,이건 진짜 예상 못 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서준호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중 얼거렸다.

그때,눈앞으로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죽은 자의 고백을 통해 역사의 일 부를 엿보았습니다.]

[스킬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 다.]

‘어라? 이것도 예상 못 했는데.’

오늘따라 예상을 빗나가는 일들이 유독 많았다.

부쩍 지친 표정의 서준호는 무명용 의 시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자신이 사냥했다지만,따지고 보면 이 땅을 외세로부터 지켜주신 선조 가 아니던가?

잠시 생각을 정리한 서준호는 천천 히 두 손을 들어 공손하게 합장했 다.

“……왕이시여,이 땅은 이제 안전 하니 부디 편히 잠드시기를.”

그 순간,무명용의 시커먼 비늘 사 이사이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 왔다.

암세포처럼 더럽던 비늘들이 그 빛 에 타서 녹아내리자,투명하고 성스

러운 용 한 마리가 허공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영체?’

육신이 없는 영혼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동시에 중저음의 목소리가 머릿속 을 가볍게 울렸다.

-나를 위해… 기도… 덕분에… 승 천…… 고맙… 구나…….


용은 잠시 서준호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잿빛 구름을 뚫으며 하늘 위로 승천해 버렸다.

[이름 없는 용 게이트의 숨겨진 공 략,‘용의 승천’을 클리어하셨습니 다.]

[보상으로 '만파식적(萬波息苗)’을 획득합니다.]

[칭호,‘승천의 조력자’를 획득했습 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 상승했습니다.]

[잃어버린 속도 능력치가 3 복구되 었습니다.]

[잃어버린 근력 능력치가 1 복구되 었습니다.]

[잃어버린 체력 능력치가 2 복구되 었습니다.]

“이게 숨겨진 공략이었다고?”

생각지도 못한 20 레벨의 달성에 추가보상까지 획득했다.

제 머리를 긁적거린 서준호는 실없 는 웃음을 흘렸다.

“……뭐,가끔은 예상이 빗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네.”

완벽했던 공략 시나리오의 결말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잠시 노을이 지는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던 서준호는,그대로 게이트 를 건너갔다.

“게,게이트 컬러 체인지! 색상은 그린! 공략에 성공했습니다!”

“곧 나오겠군! 의사들 대기시켜!”

“어이,그쪽 앞에 기자들! 안전선 뒤로 물러나!”

일산해수욕장 일대가 분주해졌다.

협회에서는 플레이어들의 혹시 모

를 부상을 위해 의료진을 대기시켰 고,기자들을 앞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아 놨다.

긴장과 기대가 섞여 있는 분위기 속에서,한 남자가 게이트를 걸어 나왔다.

"서준호! 대한민국의 서준호 플레 이어다!”

“그런데 표정이 너무 어두운데?”

“어? 잠깐만,게이트가 그대로 닫 히는…… 데?”

“그럼 그림자 형제는……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다.

게이트 안에서 누군가가 죽는다고 해도 그건 서준호가 되었지’ 설마 그림자 형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이들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I 그때,서글픈 표정을 지은 심덕구 협회장이 서준호에게 다가가 그 어깨를
토닥였다. H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서 준호 플레이어.” ■ 1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그가 혼자서 나왔다는 건,그림 형제가 마인이 맞다는 소리*

달리 말하면 그 두 사람을 서준호 가 처치했다는 뜻이다.

찰칵,찰칵!

상황과는 별개로 기자들은 두 사람 의 투샷을 찍어댔다.

동료를 잃고 슬픔에 빠진 플레이 어,그리고 그를 위로하는 협회장.

이 얼마나 그림이 되는 구도인가?

잠시 후,큰 상처가 없다는 것이 밝혀진 서준호는 인터뷰 단상에 올 라섰다.

“……그것은 사고였습니다.”

서준호의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멀찍이 서 있던 심덕구조차 눈을

꿈뻑이게 만들 정도로,완벽한 눈물 연기 였다.

한참을 끅끅거리며 울던 서준호가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그림자 형제,그들의 영웅적 인 희생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입니 다.”

마인 두 명이,희생정신 투철한 영 웅으로 포장되는 순간이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32 화

마음의 양식을 쌓아요(1)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준호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남자 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칼 시그너는 잠시 침묵을 지 키더니,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확실히 알겠군. 이 녀석의

운이 빌어먹을 정도로 좋다는 것 말 이다.”

서준호는 인터뷰에서 공략 당시의 상황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했다.

우선 그는 게이트에 들어가자마자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설마 용이 출현하는 게이트가 미로 패턴이었다니,확실히 당황스 러을 만해.’

일반적으로 용이 출현하는 게이트 는 넓은 공간을 지니고 있다.


한데 사방이 빽빽하게 막혀 있는 미로라니?

이건 칼 시그너조차 예상하지 못했

던 상황이다.

‘게다가 쁠쁠이 흩어져서 시작하는 타입이라니…… 최악이다.’

간혹 이렇게 입장하는 순간부터 모 든 동료들과 떨어진 채 시작되는 패 턴이 나오기는 한다.

[복잡한 미로를 겨우겨우 탈출했는 데…… 그게 한 다섯 시간 걸렸나 요? 미로를 나오니까 뻥 뚫린 공간


이 나타나더라고요. 그곳에는 그림 자 형제의…… 크흑,시체와 다 죽 어가는 무명용이 있었습니다. 제가
미로를 조금만 더 빨리 탈출했더라

흘쩍,모두 제가 과란

칼 시그너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

상황이 이렇게까지 꼬이자,서준호 가 홀리는 눈물마저 가증스러운 연 기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후.. 더욱 짜증나는 건 납득이

된다는 거다. 아무래도 십 레벨 초 반인 그놈보다 실력이 좋은 그림자 형제 쪽이 미로를 먼저 빠져나왔겠


지.’

아쉽게도 이번에는 그 출중한 능력

이 독이 되었다.

탈출한 그들은 무명용 도 없이 싸웠을 것이다말。 결과는 그림자 형제와 무명용의 동귀어진.’

어처구니없게도 가장 능력이 부족 해서 미로를 늦게 나온 서준호만 살 아남은 셈이다.

“정말 운이 좋은 놈입니다.”

“나도 이런 녀석은 처음 보는 군,

“라스베가스 경매는 어떻게 진행할 까요? 원래는 그림자 형제가 맡기로

되어 있었습니다만.”

“끄음.”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을 쓰기 에 딱 좋은 상황이었다.

이번 라스베가스 경매에는 최상급 마력핵인 ‘천상의 숨결’이 출품된다.

마인 협회의 간부들이 직접 탈취를 명한 물건이니만큼,반드시 확보해 야 한다.

“미치겠군. 하필이면 그걸 깔끔하 게 빼돌릴 유일한 방법인 그림자 형 제가……

칼 시그너가 머리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 또 한 무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폭풍접의 행방을 쫓기 위해 그림 자 형제를 움직인 것은…… 내 독단 적인 명령이었다.’

사실 그는 명령을 내릴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꼬일 것이라고는 생각 하지 않았다.

그림자 형제라면 서준호를 가볍게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예상 못한 게이트의 패턴에 의해 죽어버렸다.

‘만약 그들의 부재로 천상의 숨결 을 손에 넣지 못한다면……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정도로 큰 사안이었다.

결국 칼 시그너는 무언가를 각오한 표정으로 부하에게 명령했다.

“이번에 번견(番犬)들이 2 층에 올 라오지 않나?”

“예,상부에서는 그들을 더 이상 1 층에서만 굴리는 것이 전력낭비라고 판단. 2 층으로의 진출을


명하였습니 다.”

“……올라오는 거 잠시 미룬다는 지령 내려보내. 이번 라스베가스 경 매,그놈들에게 맡긴다.”

“예? 하지만 시그너 님,그들의 호

출 명령은……

번견을 2 층으로 불러들인 건 시그 너보다 더 윗선인 간부 쪽에서 내린 명령이다.

즉,그가 번견들의 진출을 막는 것 은 일종의 월권행위.

강자지존이 유일한 규칙인 마인 협 회에서는,당장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는 처사였다.

하지만 칼 시그너 또한 물러날 구 석이 없었다.

“잊었나? 마인 협회는 성과와 실력 이 전부다. 비록 몇 대 얻어터지긴 하겠지만…… 천상의 숨결을 잃는

것보다는 낫겠지.”

““•…꿀꺽.”

부하가 침을 크게 삼켰다.

그의 말 또한 나름 일리가 있었다. 확실히 현재 1 층에서 활동하는 마 인들 중에선,번견 부대의 실력이


가장 뛰어났으니까.

'하지만 만약 그들마저 실패하 면……

자신이 모시는 칼 시그너는 I 론 자신의 목까지 날아갈 수도 있다, , 부하는 어깨를 가늘게 떨며 고개#
숙였다.

“이번 임무,반드시 성공시키라는 명령을 내려두겠습니다.”

“아마 실패하지는 않을 거다. 번견 녀석들…… 1 층에 있기에는 아까운 인재들이 니까.”


총 세 명으로 이루어진 번견 부대 의 평균 레벨은 53.

레벨과 실력 모두 1 층에 있을 만 한 자들이 아니었다.

때문에 칼 시그너는 그들의 성공을 확신했다.

♦ * *

쿠우웅!

“……이게 다 뭡니까?”

서준호가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 더미를 쳐다보며 멍하니 물었다.

그러자 그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 민 차시은이 입을 열었다.

“준호 님을 향한 러브콜,개인 지 명 의뢰예요.”

“……왜 이번에는 분류를 안 하셨 죠?”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를 가리키며 묻자,그녀가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

다.

“……열심히 한 거예요,분류.”

“분류하고 남은 것들이 이 정도라 고요?”

서준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 다.

물론 동해 게이트를 공략한 것은 확실히 대단한 커리어였다.

덕분에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에서 미공략 게이트를 단 하나도 보유하 지 않은 나라.

즉,최초의 특급 안전지대국 판정 을 받았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라니…… 심지어 저는 게이트를 클리어에 숟 가락만 얹었는데요.”

“하지만 결국 살아남은 건 준호 님 뿐이잖아요. 플레이어 세계에서는 운도 실력이라고 하더라구요.”

“……과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서준호는 질 색한 눈으로 서류 더미를 쳐다봤다.

“그래서 이걸 저에게 보여주신 이 유는,설마 저보고 선택하라는 건가 요?”

“네. 의뢰의 보상과 난이도,의뢰인 의 신분까지 모두 최상의 것들만 간

추렸어요.”

“끄음. 일단은 알겠습니다.”

“그리고……

차시은이 한 발을 내딛어 서준호에 게 바짝 다가왔다.


“뭐,뭡니까.”

가까이서 서준호를 쳐다보던 그녀 는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머리 손질 좀 하셔야 될 것 같아요. 평소에도 느끼고는 있었는 데,어제 기사에 실린 사진을 보니


까 확실히 알겠더라구요. 지금 준호 님의 머리는 너무 지저분해요.”

“……제가 무슨 연예인도 아닌데 그런 게 필요해요?”

“필요해요!”

단호한 목소리를 내뱉은 차시은이 비타를 두드려 자료 화면을 띄웠다.

그곳에는 현재 잘나가는 스타를레 이어들의 프로필들이 쭈욱 나열되어 있었다.

모두 연예인처럼 잘생기고 예쁜 건 아니었지만,적어도 관리만큼은 잘 받은 티가 났다.

“이들 중에는 준호 님보다 커리어 가 낮은 이들도 있어요. 하지만 그 들조차 공식 석상에서는 촌스러워

보이지 않잖아요?”

“촌스럽다니……

서준호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그는 책상 위에 올려진 거울을 통 해 자신의 머리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머리가 많이 자라긴 했네.’

얼음상에서 깨어났을 때,그의 머 리는 굉장히 긴 상태였다.

머리카락이 엉덩이까지 내려올 정 도였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친구들의 얼음상 앞에서 그

들을 꺼내주기로 약속했던 그날 밤.

병실로 돌아온 그는 단검으로 자신 의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잘라 버렸 다.

‘그때는 나름 남자답게 보였는데.’

그 뒤로 벌써 한 달이 넘는 시간 이 흘렀다.

그동안 삐쭉빼쭉 제멋대로 자라난 머리카락은 확실히 지저분해보였다.

“오늘 푹 쉬실 예정이시죠?”

“예,뭐.”

“그럼 오늘 당장 여기 이 명함의 미용실에 찾아가셔서 머리부터 자르

세요.”

얼떨결에 명함을 받은 서준호는 옅 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이런 부분에 있어선 어둑서 니 때가 지금보다 더 편했다.

‘동료들이 매번 메이크업이 귀찮다 고 투정부리던 이유가 있었구나.’

5 영웅이 기자회견이라도 하는 날이 면,그는 동료들의 푸념을 받아줘야 만 했다.

물론 그는 가면 하나만 쓰면 되었 기에,메이크업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오늘은 차 비서도 일찍 퇴근

하세요.”

“……정말이세요?”

“추리고 추려서 이 정도 양이 나올 정도면,무리하신 것 같은데요. 오늘 은 일찍 들어가세요.”

단언컨대 그녀와 만난 이후로 가장 기뻐보이는 표정이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차시은은 후다닥 방을 빠져나갔다.

“거,되게 좋아하시네.”

홀로 남은 서준호는 서랍에서 마스 크를 꺼내 얼굴에 씌웠다.

이제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 아졌으니까.

머리를 깔끔하게 자른 서준호는 엘 리베이터에서 거울을 쳐다보며 흐뭇 한 표정을 지었다.

“……짜식,잘 생겼는데?”

누가 들었다면 재수 없다고 질색을 하며 돌아봤겠지만,차마 부정까지 는 못 했을 것이다.

스왈로우 펌으로 머리의 볼륨감을

살린 그는 정말로 잘 생겼으니까 너머리를 자르니까 생각보다 개운하

예전에는 머리가 길다고 대충 동네 미용실에 가서 다.

느껴지면 자르곤 했

껌을 짝짝 씹어대시던 아주머니와, 꼬리를 핑크빛으로 염색한 강아지가 있는 미용실이었다.

“……하나를 쥐었으면 다른 하나는 놔줘야지.”

그가 어둑서니였을 때는,가면만 벗으면 어디를 돌아다녀도 그를 알 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이미 대한민국의 젊은 영웅이 자 떠오르는 플레이어.

나라를 특급 안전지대로 만든 업적 때문에 스타플레이어 못지않은 인기 를 누리고 있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귀찮기만 한데.’


투덜거리며 한숨을 내쉰 그는 엘리 베이터가 열리기 전에 다시 마스크 를 뒤집어썼다.

번잡한 거리로 나온 그는 곧장 택 시를 타고 만화방으로 향했다.

“가끔은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줘야지.”

어둑서니 때는 더욱 자주 리프레시 를 해주곤 했다.

항상 수련과 사냥만 반복하는 퍽퍽 한 삶도,때로는 환기를 시켜줄 필 요가 있으니까.

딸랑! 만화방에 도착한 서준호는 매우 익숙하게 소설책 몇 권을 대여 했다.

‘여긴 올 때마다 손님이 없네. 곧 망하려나.’

이제 겨우 세 번째 방문하는 것이 었지만,손님이 없는 이유는 쉽게

짐작이 갔다.

‘확실히 요즘은 고급스러운 인테리 어의 북카페들이 많으니까.’

그런 곳들은 마치 카페나 레스토랑 처럼 커피와 음료수,맛있는 음식까 지 시킬 수 있다.

반면 이곳은 주문할 수 있는 메뉴 가 라면과 냉동만두,핫바가 전부인 고전적인 만화방이었다.

'뭐,덕분에 손님이 없어서 즐기기 엔 편하지만.’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은 그는 털 레털레 구석 자리로 찾아갔다.

“음?”

자리에 도착한 서준호의 몸이 멈칫 했다.

손님이 한 명도 없는 줄 알았는데, 선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줄근한 추리닝 세트를 입은 채 머리에는 헤어롤 하나를 말고 있는 여자였다.

“후우우…… 후루룩,후루룩.”

한 손으로는 열심히 라면을 식혀먹 으며,시선은 다른 손에 들린 소설 책을 향해있다.

단언컨대 만화방에 하루이를 와본 초보의 솜씨는 절대 아니었다.

그때,인기척을 느끼고 서준호를 슬쩍 올려다본 여자가 사례라도 걸 린 듯 기침을 토해냈다.

“으엣…… 콜록콜록!”

빛과 같은 속도로 젓가락을 내려놓 은 그녀는 들고 있던 책으로 재빨리 얼굴을 가렸다.

얼굴이 작아서 그런지 책 한 권으 로도 충분히 가려졌지만,이미 늦었 다.

“……차 비서님?”

서준호가 어색한 표정으로 차시은 을 불렀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33 화

마음의 양식을 쌓아요(2)

차시은이 소설책 너머로 서준호를 힐긋 쳐다봤다.

눈앞에서 그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걸까.

그녀는 눈을 부릅뜨며 힘을 줘보기

도 하고, 가늘게 떠보기도 했다.

“그렇게 노려보셔도 안 사라집니 다.”

“하아……

서준호의 말을 듣고 체념이라도 했 는지,그녀는 얼굴을 가리던 책을 내렸다.

볼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것을 보니 부끄럽긴 한가 보다.

그녀는 찔리는 바가 있는지 부랴부 랴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 나이가 스물셋. 다 큰 성인이 소설책을 읽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 니라고 생각해요.”

“누가 잘못된 일이래요? 다만

그녀의 생소한 모습이 꽤나 신선했 던 서준호는 어깨를 으쏙거리며 놀 렸다.

“옛 선인들께서 말씀하셨다는 세상 이 담겨 있는 책이 그 소설은 아닌 것 같아서요.”

〈9 억 9 천만년 수련한 SSS 급 먼치 킨〉.

솔직히 제목만 봐도 1, 2 권 내용은 뻔히 알 것만 같은 소설이었다.

“이,이건…… 이거는……

귀까지 빨개진 차시은은 말을 더듬 더니 살짝 물기 젖은 목소리로 물었 다.

“그,그러는 준호 님은 얼마나 대 단한 책을 읽으시는데요?”

“저야 물론……

여유롭게 입을 연 서준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젤싸게 대여한 소설을 뒤로 가렸다.

‘이건…… 막상막하의 승부인데?’

최근 그가 재미를 붙인 이 소설은 사제가 게임 속 세상에서 검을 들고

다니는 내용으로, 솔직히 제목이 유 치해서 보여주기가 조금 그랬다.

“저기,무승부로 하지 않을래요?”

“제목 보여주시면요.”
서준호가 체념한 표정으로 대여한 책을 보여주자,그녀는 풋!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그녀 특유의 낭랑한 목소 리로 중얼거렸다.

“……내 거랑 별 차이도 없구만.”

할 말이 없어진 서준호는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상처뿐인 결과만을 남긴 두 사람은 이후로 조용히 각자 독서의 시간을 가졌다.

사르륵,사륵.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시계의 초침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리는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후아아…… 재밌었다.”

대여한 소설을 모두 읽은 서준호가 뻐근한 목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때마침 차시은도 책을 다 읽었는 지,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책을 덮고 있었다.

“차 비서도 다 읽었습니까?”

“네,무척이나 재미있었습니다.”

그녀의 표정이 매우 밝았기에,서 준호는 꾀죄죄한 만화방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조금 의외이긴 합니다.”

“제가 이런 곳에 오는 것 말인가 요?”

“예,엄청난 엘리트라고 들었거든 요. 그래서 이런 장소와는 거리가 먼 아가씨일 줄 알았어요.”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죠.”

뽀드득,가볍게 기지개를 편 그녀

는 머리에 달려 있던 헤어롤을 벗기 며 말했다.

“그래도 전 여기가 좋아요. 누구의 간섭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요.”

“확실히 만화방은 그 특유의 분위 기가 좋죠.”

“게다가 요즘은 비타로 보는 전자 책이 유행인데,전 이 책장을 넘기 는 느낌이 좋거든요.”

“아아,그리고 책 냄새도 은근히 좋지 않습니까?”

“맞아요! 특히나 오래된 책은 뭐랄 까? 세월의 냄새가 담긴 것 같아서

고상함마저 느껴지죠.”

소설 감상이라는 공통적인 취미가 있어서인지,두 사람의 대화는 30 분 이나 이어졌다.

그녀와 만난 뒤로 나눈 모든 대화 보다,이 잠깐 사이에 나눈 대화량 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앗,벌써 시간이 이렇게……”


어!^ 오후 8 시가 넘었다는 것을 깨달은 차시은이 자리에서 일어났 다.

저는 슬슬 가봐야 할 것 같아요 ”

“택시 잡아드릴까요?”

“집이 바로 앞이라서 괜찮아요.”

자신이 신고 있는 삼선 슬리퍼를 가리킨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요.”

그녀가 슬리퍼를 이끌고 만화방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던 서준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차 비서도 힘들겠어.”

주변의 기대대로 엘리트의 삶을 사 느라 정작 본인의 삶은 즐기지 못하 는 것 같아서 조금은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선택한 삶이

다.

‘제삼자인 내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지.’

오히려 평소에 완벽하게 비서 역할 을 수행해 내는 그녀가 새삼 존경스 러워질 정도였다.

“그럼 나도 힘내볼까.”

다양한 의미로 재충전의 시간을 가 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미국?”

심덕구가 두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 다.

“설마 그림자 형제의 장례식에 참 여하려는 건 아니지?”

“내가 거길 왜 가.”

혼신의 눈물 연기는 인터뷰 때 한 것으로 충분했다.

허접 마인 떨거지들의 장례식에까 지 참가해서 혼신의 눈물 연기를 또 하고싶지는 않았다.

“내 눈물 비싸거든?”

“그럼 그렇지. 네 성격에 거길 갈 리는 없고……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은 심 덕구가 입을 열었다.

“미국에는 무슨 볼일인데?”

“그림자 허접들을 족치면서 마인 협회의 접선 장소를 하나 알아냈거 든.”

“뭐!? 진짜로? 어딘데?”


그가 당장이라도 플레이어들을 보 낼 기세였기에,서준호는 고개를 흔 들었다.

“내가 직접 갈 거야.”

“흐음,걱정되는데……

“내가?”

“아니,너 말고 마인들. 정보 뽑아 내야 하는데 네가 다 죽여 버리면 어떡하냐.”

“……정보는 확실히 물어다줄 테니 걱정 마.”

애초에 그림자 형제의 기억에서 본 세탁소는 그리 위험한 장소가 아니 었다.

그곳에 거주하는 마인은 겨우 두 명뿐이고,그들도 잔챙이에 불과했 으니까.

‘만약 그놈들에게 쓸 만한 기억을 흡수하지 못하면…… 꼬리는 끊긴 다.’

서준호는 제발 그들이 쓸 만한 정 보를 알고 있기를 기도했다.

“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딱히 걱정하진 않을거 L 대신 도움이 필요 하면 언제든지 말해.”

믿음직스러운 말을 뱉어낸 심덕구 가 다음 주제를 꺼냈다.

“그리고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청 원 올라온 거 알아? 너 훈장 주라 고.”

“훈장? 갑자기 왜?”

“네 덕분에 대한민국이 세계 최초 로 특급 안전지대가 되었잖냐.”

“난 또 뭐라고……

서준호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협회 차원에서 힘 좀 쓰면 훈장 받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생 각 있어?”

“덕구야,너 혹시 우리나라에 존재 하는 훈장이 총 몇 개인지 아냐?”

잠시 고민하던 덕구가 고개를 흔들 었다.

“몰라? 그걸 누가 다 외우고 다 녀?”

“총 56 개야. 어떻게 아냐고? 난 그 훈장들 종류별로 하나씩 다 있거

든.”

그가 어둑서니던 시절에는,정말 쉴 틈 없이 훈장이 수여되었다.

가장 높은 등급의 무궁화대훈장부 터,별 상관도 없는 새마을훈장까지 가리지 않고 받았다.

왜냐하면 한 번 받은 훈장을 두 개 이상 받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 어 있었으니까.

“이번에 훈장 줘봐야 3 등급 수교훈 장 정도 줄 것 같은데,필요없어. 그것도 이미 있거든.”

“……남들은 5 등급 훈장조차 못 받
아서 안달인데.”

“네가 훈장 50 번 넘게 받아봐. 수 여식 존나 귀찮다니까. 그리고……

서준호가 인벤토리에서 용의 뼈의 절반인 10kg 꺼냈다.

이를 멀뚱멀뚱 쳐다보던 심덕구가 물었다.

“갑자기 뭔 뼈냐?”

“그거 용뼈.”

등급마다 편차가 있긴 하지만,용 의 뼈는 kg 당 수천만 원은 가볍게 호가하는 상급 재료다.

“과연,무명용을 잡았을 때 얻은 거구나. 그런데 이건 갑자기 왜?”

“그거 10kg 인데 절반은 네가 알아 서 쓰고,5kg 으로 권 노야한테 내 검 하나 의뢰해 줘.”

“아,잠깐만.”

비타의 메모장을 켠 덕구가 필기 준비를 마쳤다.

“뭐 따로 요구할 부분은 없어? 검 의 길이라던가,무게라던가.”

“그냥 권 노야한테 내가 항상 쓰던 거 만들어달라고 하면 알 거야.”

“……그 영감님,춘추가 내일 모레

면 100 세인데,그걸 기억하고 계실 까?”

덕구의 걱정에 서준호는 피식 웃었 다.

“이렇게 전해드려. 그것도 기억 못 하시면 망치 내려놓고 시골 가서 감 귤 농사나 지으시라고.”

“……검에 자폭기능 달려서 와도 난 모른다.”

“킥킥.”

“아무튼 용의 뼈 5 날은 잘 쓸게, 고맙다.”

“오냐.”

쿨하게 대꾸한 서준호는 이후 자신 의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벌렁 드 러누웠다.

그는 비타를 두드려 차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차 비서,라스베가스행 비행기 티 켓 좀 끊어주세요. 탑승 날짜는 내 일로.

-(알겠다고 경례하는 고양이 이모 티콘)

평소에는 쓰지 않던 귀여운 이모티 콘을 보낸걸 보면 어제 일 이후로 조금은 친해진 것 같다.

“그럼 이제..
눈을 빛낸 서준호가 인벤토리를 뒤 적거 렸다.

잠시 후 그의 손에는 세련된 대나 무 피리 하나가 들렸다.

“이게 만파식적이란 말이지.” 세상의 온갖 파란을 없애고 평화를 불러온다는 제례(祭禮)의 피리.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세상을 가질 수도 있다고 알려진 천하의 보배 중 하나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피리의 자태를 감상했다.

‘멋있게 생겼네. 성능이 어떨지는 봐야 알겠지만.’

서준호는 만파식적을 감정했다.

[만파식적 (萬波息苗)]

등급 : 유니크

피리를 불어 세 가지 능력 중 한 가지를 사용할 수 있음.

1. 제왕의 군세.

2. 제왕의 공간.

3. 제왕의 무구.

이 아이템은 세 번 사용할 시 파괴

됩니다(3/3).

착용 제한 : 레벨 30.

“……유니크 등급이라.”

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노말,매직,레어,유니크,레전더 리.

이게 현재까지 밝혀진 아이템들의 등급이다.

“복귀한 후에 얻은 아이템들 중에 선 가장 등급이 높네.”

심지어 그 효과 또한 예사롭지 않 았다.

나하나가 전투 혹은 전쟁의 판 도를 뒤집을 정도로 강력하겠지?’

하지만 맛있는 것은 가장 나중에.

서준호는 무명용에게 받은 칭호부 터 먼저 살펴보았다.

[서준히

레벨 : 20

칭호 : 봄을 여는 자, 승천의 조력 자
근력 : 59 체력 : 58

속도 : 64 마력 : 82

“크으〜”

짝짝짝. 감개가 무량해진 서준호가 박수를 쳤다.

“살다보니 내 능력치 중에서 마력 이 가장 높은 날도 오는구나.”

예전의 마력 고자 시절에는 상상도 못해보던 일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능력치들이 낮은 것도 아니고 말이지.’

능력치만 보면 지금 당장 2 층에서 사냥을 다녀도 문제가 없을 수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

다고,그는 자신의 미래가 궁금해지 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한 3 층까지만 올라가 도……

구천 C/lX)이라 불리는 아홉 명의 절대강자보다 강해지지 않을까?

“한 번쯤은 보고 싶은데 말이야. 그 구천이라는 녀석들도.”

자신의 전성기 때로부터 25 년이 흐른 지금,이 시대의 절대자는 얼 마나 강한지가 궁금했다.

입맛을 다신 서준호는 주저하지 않 고 칭호 효과부터 확인했다.

[승천의 조력자]

등급 : B

내용 : 무명용이 잃어버린 옛 이름 을 되찾아주고, 승천을 시켜준 자에 게 주는 칭호.

효과 : 모든 능력치 +3

짝짝짝.

침대 위에서 다시 한 번 손뻑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B 등급 칭호에 S 등급인 봄을 여는 자 정도의 효과를 바라는 건 말도 안 되고,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

지.”

이 정도 성장 속도라면 검강을 쓰 는 날도 머지않았다고 생각되었다.

검강이란 단순히 마력 수치가 높다 고 쓸 수 있다기보다는 마력에 대한 이해도가 필요한 기술.

예전에는 마력 수치가 115 를 넘고, 마력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부 터 사용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과거보다 더 빨 리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오늘 하루는 마음 편히 푹 쉬려고 했던 서준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 났다.


“이런 걸 봐버렸는데,어떻게 가만 히 누워 있겠어.”

부쩍 오른 능력치들을 보니 다시 한 번 몸을 조율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훈련장에서 홀린 땀 한 방울이 실 전에서 흘릴 피 한 방울을 대신한 다.

서준호가 가장 신봉하는 말 중 하 나였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34 화

죄의 도시(1)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라고 불 리는 라스베가스.

공연과 유흥,도박이 24 시간 존재 하는 이곳은 다른 말로는 씬 시티, 죄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후…… 죄고 나발이고,드디어 도 착이구나.”

서준호는 비행기에서 꼬박 12 시간, 출입국 심사까지 합치면 14 시간이 지나서야 라스베가스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스카야.. 오늘따라 네가 보고싶

구나.’

텔레포트 한 번으로 지구의 어디든 1 초만에 이동시켜주던 그녀가 문득 그리워졌다.

옅은 한숨을 내쉰 그는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호텔에 체크인부터 했 다.

방에 올라와 캐리어를 대충 던져두 고는 커튼을 활짝 열고 도시를 내려

다보았다.

“확실히 멋진 도시네.” 라스베가스는 몬스터들의 피해를 받지 않은 도시로도 유명했다.

애초에 이곳에 위치한 호텔과 빌딩 의 소유자들은 모두 재벌.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서 게이트가 발생할 때마다 플레이 어들을 고용했다.

“그야말로 자본주의가 낳은 도시 지.”

오는 길에 듣기로는 며칠 후에 이 도시에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경매가 열린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거리에는 벌써부터 수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뭐,경매는 내 알 바 아니고……

서준호는 비타를 두드려 지도 앱을 열었다.

“가깝네.”

그림자 형제의 기억 속 세탁소는 도시의 외곽에 위치해있었다.

달려가도 30 분이면 도착할 만한 거리.


‘꾸물대지 말고 빨리 해치우자고.’

가방에서 챙이 좁은 야구 모자를 꺼낸 서준호는 이를 깊숙히 눌러쓰

고 객실을 나섰다.

* * *

치이이익! 치익!

세탁소의 내부는 더웠다.

뜨거운 스팀을 뿜어대는 다리미가 몇 개나 있었기 때문이다.

“후,더워 뒤지겠군.”

라스베가스가 사막 한가운데 위치 한 도시라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 였다.

꾹,꾸국.

“에이씨! 빌어먹을 수리 기사는 대 체 언제 오는 거야?”

고장난 에어컨 리모콘을 꾹꾹 누르 던 남자가 이를 집어던지며 짜증을 냈다.

“요즘 들어 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니까.”

“뭘 또 그렇게 짜증이야?”

“아니,잘 풀리는 일이 최소한 하 나는 있어야 짜증을 안 낼거 아냐. 그림자 형제는 용 먹이가 되어서 뒤
져 버렸고,날씨는 개같이 더운데 에어컨은 고장났고. 또……

동료에게 푸념을 늘어놓던 대머리 가 무언가를 떠올리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나마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젠장,번견 새끼들은 이제 안 봐도 될 줄 알았는데. 또 보게 생겼 잖아.”

“번견? 아아,그분들이 쌍둥이를 대신한다지?”

“하필이면 왜 그 또라이들이냐고.”

번견 부대는 1 층에 거주하는 마인 들에게는 실력자라고 위명이 자자했 다.

때문에 많은 마인들의 존경을 받기 도 했지만,대머리는 그들을 유독 두려워했다.

“또라이라니? 만나본 적이 있어?”

“있지. 진짜 제대로 미친 녀석들이 야.”

그가 이 세탁소를 물려받게 된 이 유도 그들이 자신의 상관이었던 남 자를 죽였기 때문이다.

이유는 정말 별거 없었다.

“피 냄새를 맡은지 너무 오래되었 다고 했나……


“뭐?”

“후우,아무것도 아냐.”

대머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순간,딸랑!

문이 열리며 세 명의 남녀가 가게 로 들어섰다.

동시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대머 리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오,오셨습니까.”

“……뭐야,여긴 왜 이렇게 더워? 너 죽을래?”

껌을 질겅질겅 씹던 여자가 히스테 릭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 다.

평소였다면 죽여보라고 기세등등하 게 소리쳤겠지만,대머리는 바짝 쫄 아서 고개부터 숙였다.

“가게가 더워서 죄송합니다!”

“쯧,지령서나 가져와.”

대머리는 덩치에 맞지 않는 재빠른 속도로 비품실에서 서류 봉투를 하 나 가져왔다.

핵! 그에게서 서류 봉투를 낚아첸 여자는 이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 다.

“햇!”

가게 바닥에 껌을 뱉어낸 여자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거봐라? 소문이 사실이었네?”

“그럼 진짜로 우리의 2 층 진출이 누락되었다고?”

“니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든가.”

옆에있던 홀쭉한 남자는 서류를 건 네받더니,내용을 확인하고는 이를 콱 구겨버렸다.

그는 가장 뒤쪽에 있던 차가운 인 상의 남자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대장,이건 위에다가 정식으로 항 의해야 하는 거 아냐? 게다가 천상 의 숨결이라니?”

“나도 이번에는 저 뼈다귀 의견에 동의. 애초에 칼 시그너는 우리 직 속 상관도 아니잖아.”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대장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홀쭉한 남자는 자신이 구겼 던 서류를 빠르게 펴서 그에게 공손 히 내밀었다.

대장의 눈동자가 서류 내용을 천천 히 훑었다.

화르르륵!

순식간에 일어난 화염은 서류를 한


줌의 재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대머리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 다.

“이 밖에 다른 지령은?”

“어,없었습니다.”

“……가자,

대장이 가게를 빠져나가자,홀쭉남 과 불량녀도 빠르게 그를 쫓아나갔 다.

“후,후아아……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 앉은 대머리의 전신에선 땀이 비오 듯 쏟아지고 있었다.

눈치껏 입을 다물고 있던 동료가 슬그머니 질문을 던졌다.

“저들이 그…… 번견 부대 분들?”

“어. 진짜 뒤지는 줄 알았네.”

“확실히 앞에있던 여자랑 남자는 좀 무섭더라. 근데 대장이라는 사람 은 착해보이던데?”

“착해?”

대머리는 마치 버려진 담배꽁초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동료를 쳐 다보았다.

“넌 대체 눈을 왜 달고다니는 거 냐. 없으면 얼굴이 심심하게 생겨

서?”

“뭐 이 새까? 왜 나한테 화풀이 야?”

동료가 화를 내자,대머리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무섭다던 여자랑 남자가 그 대장한테 쩔쩔매는 거 못 봤냐?”

“……확실히 그렇긴 했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눈에는 조용하던 대장보다 다 른 두 사람이 훨씬 더 강해보였다.

“한 번만 말해줄 테니 잘 들어.”

대머리는 가게에 아무도 없음을 다

시 한 번 확인한 뒤에야 입을 열었 다.

“번견들의 대장은 구천 중 한 사람 인 나자드 할로우의 세 번째 제자 야.”

“뭐? 잠깐만,할로우 님의 제자라 면……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지,동료 가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설마 아까 그 남자가 반년 전에 터키 대학살을 일으켰다는…… 해골술사 아르마?”


“맞아. 그 사건으로 세계적인 현상

금이 붙었지만 단 한 번도 꼬리가 잡히지 않은 실력자지.”

“이런 미친……

자신이 그런 무서운 작자를 아무렇 지도 않게 쳐다봤다니?

괜스레 목 부분이 서늘해진 그는 저도 모르게 제 목을 만졌다.

“번견 부대원도 처음에는 다섯이었 는데,그 중 둘이 아르마의 해골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어.”

“제대로 미친놈이네.”

“그치? 상또라이라니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 중 하

나가 높으신 분의 뒷담을 까는 것이 다.

두 남자는 머리를 맞대고 숙덕거리 며 수다를 떨었다.

그때,예고 없이 문이 덜컥 열렸 다.

혹시 번견들이 돌아온 것인가 싶어 얼굴이 하얗게 질린 두 남자는 서둘 러 문가를 확인했다.

“……후아.”

“아나,타이밍. 괜히 졸았네.”

두 마인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홀러 나왔다.

가게에 들어선 건 번견 부대가 아 닌,야구 모자를 쓴 동양계 남성이 었기 때문이다.

짜증이 난 대머리는 아니꼬운 눈빛 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에어컨 수리 기사요?”

“……에어컨이 고장 났나 봐?”

남자의 입에선 유창한 영어가 홀러 나왔다.

다인종 국가인 미국에서는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기에 대머리는 고개 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워 뒤지기 일보직전이

지.”

“그런 문제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 을 것 같은데.”

“네가? 어떻게?”

대머리의 질문에 남자는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동시에 가게의 온도가 빠른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오오? 시원하잖아!”

“아,살 것 같다.”

순식간에 웃음꽃이 만개한 두 마인 이 기쁜 표정으로 물개 박수를 쳤 다.

“너 대단하잖아?”

“플레이어 였나?”

남자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 와중에도 가게의 온도는 계속해 서 내려가는 중이었다.

부르르르.

온몸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두 마인 이 저들의 팔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봐,이제 충분한 것 같아.”

“도와주는 건 고마운데 온도를 너 무 많이 내렸어. 춥다고.”

하지만 남자는 온도를 내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당연히 마인들이 느끼는 추위도 점 점 더 강해졌다.

딱딱딱!

뻣속까지 시려오는 한기에 마인들 의 턱뼈가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 다.

그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호통을 쳤 다.

“어이,춥다고 하잖아! 더 이상 온 도를 내릴 필요 없다니까?”

“장난치는 거라면 좋은 말로 할 때 그만둬라.”

그들의 말을 듣던 남자,서준호는

모자챙을 더 깊숙히 누르며 웃었다.

“마인 새끼들치고는 멍청하네.”

“……뭐?”

“이, 이 새끼,뭔가 알고 온 놈이 다!”

상황을 눈치챈 마인들이 빠르게 무 기를 꺼내려했지만,이미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쉽게 두 명의 마인을 제압한 서 준호는 현관문으로 다가가 펫말을 CLOSED 로 바꾸었다.

뒤를 돌아본 서준호는 꽁꽁 얼어붙 은 두 마인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끓는 물 속의 개구리라고 들어봤 나 모르겠네.”


물이 끓는 냄비에 개구리를 넣으면 녀석은 깜짝 놀라서 바로 튀어오른 다.

하지만 미지근한 물이 담긴 냄비에 개구리를 넣고,천천히 물을 끓이면 개구리는 죽을 때까지 탈출을 시도


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실험이 있었 다.

‘덕분에 조용히 처리할 수 있겠어.’ 두 마인의 레벨은 각각 30 정도. 서준호라면 정면에서 싸워도 손쉽

게 제압할 수 있었지만, 이곳은 도

시였다.

게다가 바로 옆에 위치한 샌드위치 가게도 정상적으로 영업 중인 상태.

“시끄러워지면 좋을 게 없거든.”

솔직히 에어컨이 고장난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그 상황을 살린 것은 서준호의 재치였다.

“이봐,우리한테 원하는 게 뭐야?”

“협력할게. 알려달라는 건 다 말해 줄 수 있어.”

어느새 눈이 빨개져 있는 마인들의 제안에 서준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자 마음이 급해진 마인들이 날 카로운 목소리로 협박했다.

“우릴 죽여봤자 이 가게에서 단서 같은 건 찾아내지 못할걸?”

“넌 결국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글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 는데.”

딸깍.

가게의 불을 끈 서준호는 두 남자 에게 다가가며 차갑게 웃었다.

“죽은 자가 의외로 말이 많더라 고.”

비품실 의자에 앉아 있던 서준호가 스킬의 사용을 종료했다.

눈앞의 죽은 두 마인에게서 필요한 기억들을 뽑아낸 그는 생각부터 정 리했다.

‘우선 여기 있는 이 두 녀석은 잔 챙이가 맞아.’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선량한 플레 이어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세탁소라고 불리는 이 가게는 마인 협회의 지령을 1 층의 마인들에게 전 달하는 역할.

어중이떠중이에게 맡길 정도로 의 미 없는 장소는 아니었으니까.

콰드득,과득!

바닥에서 튀어나온 어둠의 송곳니 가 마인들의 시체를 씹어먹기 시작 했다.

잠시 후,비품실 바닥에는 그 흔한 핏방울 하나조차 남지 않았다.


말 그대로 깔끔한 뒤처리였다.

“번견이라……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떠올리던 서 준호가 재빨리 비타를 두드렸다.

-으어어…… 여보세요…….

“덕구냐?”

-야…… 이 미친놈아…… 여기 지 금 새벽 두 시 반이야…….

“자는 중에 깨워서 미안한데,나 부탁 하나만 하자.”

-……왜,혹시 위험한 상황이냐?

황급히 잠에서 깬 듯한,또렷한 목 소리가 비타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게 아니고,혹시 이번에 열리는 라스베가스 경매에 대해서 좀 알

아?”

-알지. 갑자기 그건 왜?

“알아보니까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 갈 수 없다던데,그거 혹시 너도 구 할 수 있는 거냐?”

-……하,넌 대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살짝 자존심이 상한 듯한 심덕구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초대장이 필요한거지? 묵고 있는 호텔이랑 객실 번호나 내놔.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뒷배였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35 화

죄의 도시(2)

똑똑똑.

침대에 누워서 TV 를 보고 있는데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서준호가 문을 열자,정장을 입은 신사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호텔의 총 지배인

인 라울 파말타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시죠?”

“한국 플레이어 협회장이신 미 A 심께서 전해달라고하신 물건으 고 왔습니다.” e 卜지

“아아.”

그렇다면 경매장의 초대장이다 서준호가 손을 내밀자,지배인으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1-


그러자 뒤쪽에서 대기하던 호텔 원들이 정장이 걸린 옷걸이,구두 1 시계괵■을 들고 나타났다 ,

“미스터 심께서는 경매장에 가실

때 이것들을 꼭 착용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구두와 넥타 이,양말과 시계까지 모두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갑작스런 선물이긴 했지만,납득은 되었다.

초대장을 지참해야만 참석할 수 있 는 수준 높은 경매이니 드레스코드 정도는 맞춰야 할 터.

서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초대장 을 받아들자,지배인은 90 도로 인사 를 하고는 사라졌다.

“흠,그런데 패션이 조금 과한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원단으로 만든 건지,보 랏빛이 감도는 정장은 딱 봐도 나 비싼 몸이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잠깐만,정장만 그런 게 아닌 데? 이 구두는 용가죽이잖아.”

서준호는 당장 덕구에게 전화를 때 렸다.

-여보세요? 받았구나?

”지금 막 받았는데,이건 너무 과 한 거 아니야?

-과하다니? 그 정도는 입어줘야 무시를 안 당하지.

“……아니,그냥 경매에 참석하는

것뿐인데 무시를 왜 당해?”

-그건 나중에 알게 될 거다. 그리 고 그 정장,누에여왕의 천잠사로 만든 거야. 한 벌에 15 억이나 하는


녀석이지.

“와우.”

서준호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정 장을 바라보았다.

-오늘부터는 네가 무시를 당하면 내 이미지가 나빠지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알 수 없는 덕구의 말에 서준호가 되물었다.

그러자 전화 너머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중에 알게 될 거다.

“……싱겁기는,아무튼 준 거니까 잘 입는다. 갈때 기념품 사갈까?”

-기념품은 무슨. 면세점에서 양주 나 사와.

“오냐.”
전화를 끊은 서준호는 옷들을 방구 석에 잘 보관해 두고 날짜를 확인했 다.

'옥션이 열리는 건 모레.’

앞으로 이틀 후.

이 도시에선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흐르게 될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예정이 었지.”

서준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라스베가스만큼 오전과 오후의 분 위기가 급변하는 도시는 또 없다.

오전에는 마치 뉴욕처럼 바쁜 도시 의 삶을 보여주다가도,밤만 되면 카지노와 클럽이 화려한 LED 를 번

쩍거리며 여행객들을 유혹한다

서준호는 그중에서 가장 밝은 빛을 쁨어대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MGM 그랜드 호텔.”

내일 밤,이 호텔의 그랜드 가든 아레나에서 경매가 열린다.

'메이웨더와 파퀴아오가 경기를 치 룬 장소이기도 하지. 요즘 애들은 모르겠지만.’

오늘은 가볍게 호텔을 눈에 익히고 자 방문한 상태였다.

캐주얼한 정장을 입고 호텔로 들어 서자,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 이 카지노였다.

“카지노라.”

자신과는 인연이 없었던 장소였다.

미성년자일 땐 당연히 못 들어갔 고,성인이 되었을 땐 사냥을 다니 느라 바빠서 못 갔으니까.

호기심이 살짝 생겨 카지노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삐- 하는 알람음이 울렸다.

곧이어 정장을 입은 남자 플레이어 몇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어? 서준호 씨?”

그 중 선두에 서 있던 사람이 눈 을 동그랗게 뜨며 아는 체를 했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하지만 얼굴을 봐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서준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상대 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기억 못 하시는구나,그럴 만도 하죠. 지난번에는 얼굴만 잠시 봤을 뿐이니까요.”

“저희가 어디서 만났던가요?”

“저번에 왜,공주님 모시고 인사동 에서 뵙지 않았습니까.”


“아아!”

서준호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탄성

을 터트렸다.

누군가 했더니,공주하를 수행하던 플레이어 였다.

그는 반갑게 악수를 신청했다.

“몰라 뵈서 죄송해요. 서준호라고 합니다.”

“아니에요. 저라도 몰라봤을 테니 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전 도깨비 길 드의 하인호입니다.”

공주와 하인이라니,천생연분이 따 로 없다.

인사를 마친 하인호는 주변을 둘러 보며 물었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네 요.”

“이번에 엄청난 규모의 경매가 열 린다길래 구경하러 왔습니다.”

이에 하인호•가 활짝 웃었다.

“그래요? 사실 저희 팀이 1 층에 내려온 이유도 옥션 때문입니다. 이 =에 주최 측에서 저희 길드에 경호


를 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거든요 ” 과연 도깨비 길드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규모라 불리는 옥션에서 경호 J 맡길 정도의 실력과 신뢰가 쌓였 소리였으니까.

“아,그런데 혹시 카지노에 입장하 실 생각이셨습니까?”

“예,하지만 알람이 울리더군요.”

서준호가 어깨를 으쓱거리자,하인 호가 사람 좋게 웃었다. ' I

“서준호 씨도 아시겠지만,플레이 어는 일반인과 많이 다릅니다.”

“그렇죠.”

“세상이 바뀌고 난 직후,카지노 측에서는 엄청난 손해를 입었습니 다. 플레이어들 때문이죠.”

“자신의 우월한 신체 능력이나 고 유 능력으로 게임에 참여한 거군

요.”

“맞습니다. 투시 능력부터 시작해 서 독심,미래 예지 등등…… 카지 노에선 너무나도 유리한 능력들이


많았으니까요.”

하인호는 자연스럽게 서준호를 데 리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래서 카지노 측에서 대놓은 대 안이 바로 플레이어와 일반인의 구 분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플레이어들을 위한 카지노가 따로 존재한다는 건가요?”

“빙고. 역시 이해력이 빠르셔.”


딸깍,하인호가 거대한 원목 문을

열고 들어서자,바깥과 그리 다를 것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서준호는 단번에 차이점을 눈치챘다.

“모두 플레이어군요.”

방을 채우고 있는 수백 명의 사람 들이 전부 플레이어였다.

“맞습니다. 이곳은 플레이어를 위 한 카지노. 본인의 능력을 사용하셔 도 무방합니다. 애초에 딜러들도
플 레이어거든요.”

“하지만…… 그러면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가 무조건 유리한 게 아닌 지?”

레벨이 높으면 능력치도 더 높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이해력도 남다 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인호는 멋쩍은 표정을 짓 더니 슬며시 한 쪽을 가리켰다.

“그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전투를 위한 감각과,게임을 위한 감각은 많이 다른가 봐요.”

“아아아앙!”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서준호는,머리를 감싸면서 비명을 지르는 여인을 쳐다봤다.

아담한 체구에 붉게 웨이브진 머 리. 한 번 보면 잊을 수가 없는 사

람이 었다.

“……인호 씨 상관 아니세요?”

“우리 공주님은…… 게임에는 영 재능이 없으신가 봅니다.”

하인호는 마치 공부는 안 하고 놀 기만 하는 자식을 바라보는 눈빛으 로 공주하를 쳐다봤다.

“그럼 저희는 다시 순찰하러 가보 겠습니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인호가 손을 크게 흔들면서 사라 지자,서준호는 걸음을 옮겼다.

‘플레이어 카지노라……

그는 우선 무슨 게임들이 있는지부 터 살펴보았다.

일반인들이 카지노에서 즐겨하는 게임은 룰렛,슬롯,바카라,포커, 블랙잭 등이 있다.

하지만 이곳에선 그런 게임들을 하 지 않았다.

‘과연. 확률이나 심리 싸움보다 는.. 플레이어의 능력을 전제로

하는 도박들뿐인가.’

사실 카지노보다는 게임 센터라고 부르는 것이 더 알맞을만한 장소였 다.


물론 배팅된 칩의 액수들을 보면,

카지노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지만.

“부,분명히 2 번에 있었는데? 이거 사기 아니야?”

서준호는 열심히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공주하에게 다가갔다.

현재 그녀가 하고 있는 게임은 세 개의 컵 중 어디에 공이 있는가를 맞추는,야바위였다.

“이거 재밌습니까?”

“벌써 10 억이나 털렸는데 재미가 있겠…… 어?”

옆 자리를 획 노려봤다가 그를 알 아본 공주하의 표정이 순식간에 온 순해졌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 다.

“우와,뱀 머리 씨다!”

“......서준호입니다.”

“뭐예요? 설마 드디어 제 부하가 될 마음이 생겨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예요? 완전 감동이야!”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서준호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 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하핫,농담이에요,농담. 그래서 진짜 어권 일이에요?”

“내일 열리는 옥션에 참가하려고

요. 시간이 남아서 카지노를 구경하 고 있었는데,하인호 씨가 절 이곳 에 데려다줬습니다.”

“아아,그렇구나아.”

그녀는 자신의 왼쪽 팔에 달아놓은 관계자 완장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 쓱거렸다.

“뭐,혹시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 지 나한테 말해요. 내가 지금 이 호 텔의 경호 캡틴이거든요.”

그런 사람이 업무 중에 도박을 해 도 괜찮냐고는 굳이 묻지 않았다.

“아참. 그리고 뱀 머리 씨 덕분에

우리나라가 특급 안전지대가 됐던데 요?”

“운이 좋았습니다. 공략이야 그림 자 형제가 다 했죠.”

“이 업계에선 운도 실력이라구요.”

서준호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 게임 많 이 어렵나요?”


“아우우! 말도 말아요,진짜아.”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딜러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이에 갈 곳 잃은 딜러의 시선이

애꿎은 땅으로 향했다.

“이 사람 손 진짜 빨라요. 듣기로 는 2 층에서 활동했다는데,은퇴하고 딜러가 된 거래요.”

“누군지는 모르고요?”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죄다 저렇 게 가면을 쓰고 있는데.”

그녀의 말처럼 모든 딜러들은 순백 의 가면을 쓰고 하얀 장갑을 낀 상 태였다.

그 이유는 쉽게 짐작되었다.

‘아마 딜러의 정체와 능력을 감추 기 위해서겠지.’

서준호가 손을 들자 웨이터가 다가 와 그의 돈을 칩으로 바꿔주었다.

가볍게 1 억 정도만 환전한 그는 10 개의 칩을 한 번에 내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공주하가 훈수를 두었다.

“올인하시려고요? 이 사람 손 진짜 빠르다니까요. 처음 몇 번은 실패하 면서 속도를 눈에 익히는 게 좋을


텐데……

“그렇게 하시고 10 억 잃으신 거 아닙니까?”

묵직한 팩트로 한 대 때려주자,상 처받은 표정의 공주하가 고개를 휙 돌렸다.

‘삐지셨네.’

하지만 덕분에 조용한 환경을 얻었 다.

딜러가 서준호에게 물었다.

“섞을까요?”

“예.”

말이 끝나자 딜러가 세 개의 컵을 뒤집어서 보여주더니,중앙의 컵에 공을 넣고 섞었다.

동시에 서준호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빠른데?’

그의 손은 잔상을 남기면서 컵을 섞는 중이었다.

기존에 세 개이던 컵이 무려 여섯 개까지 늘어나 보일 정도였다.


탁!

컵을 섞은 딜러가 고를 테면 골라 보라는 자신만만 목소리로 말했다.

“쵸이스해 주시죠.”

“아,이거는 알겠다.”

컵을 섞는 사이에 화가 다 풀렸는 지,공주하가 슬그머니 다시금 훈수

를 뒀다.

“왼쪽일걸요? 저 이번에는 진짜 본 것 같은데. 아,지금이라도 배팅할 까……?”

서준호는 고민에 빠진 공주하를 돌 아보며 말했다.

“공 팀장님은 앞으로도 도박 안 하 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왜요?”

그는 차마 순수한 얼굴을 갸웃거리 는 그녀에게 뒷말을 내뱉지는 못했 다.

‘그야 엄청 못 하시니까.’

서준호는 가운데에 있는 컵을 골랐 다.

옆에서 공주하가 ‘허얼,왼쪽인데’ 라고 중얼거렸지만 서준호는 웃었 다.

딜러가 중앙의 컵을 뒤집으며 그 안에 공이 있음을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축하드립니다.”

좌르르르륵.

딜러가 기존의 칩 10 개에 10 개를 더해 서준호에게 내밀었다.

순식간에 두 배로 늘어난 칩.

“우,우와아아! 뭐예요? 이게 말로 만 듣던 초심자의 행운인가? 가운데 였네요?”

제 일처럼 기뻐하던 공주하는 충고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만하세요. 도박은 원래 랐을 때 그만두는 거랬어요.”

그녀는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뒷말 을 이었다.

“……물론 저는 한 번도 못 따서 그만두지 못했지만요.”

“뭡니까,그 슬픈 사연은.”

서준호가 칩을 모으며 자리에서 일

어나려던 순간.

“어이 뼈다귀. 이걸로 승부해 볼 래?”


“뼈다귀라고 부르지 마라.”

새로운 플레이어 두 명이 그들의 옆 자리에 앉았다.

힐긋 옆을 쳐다본 서준호는 살짝 들었던 엉덩이를 다시 내렸다.

‘……이 녀석들이 여긴 왜?’

서준호는 그들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그들이 누구 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번견 부대.’

세탁소 마인들의 기억에서 보았던, 홀쭉남과 불량녀가 지금 자신의 옆 자리에 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36 화

번견 사냥(1)

‘거리는 약 30 센티미터.’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공격 사정거

리 안쪽에 있다.

지금 당장 기습한다면,그들의 목 을 단칼에 날릴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명분이 없어.’

자신은 그들이 마인이라는 것을 알 지만,그 정보는 다른 마인의 기억 에서 읽어낸 것이다.

그들이 죽이고 나면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최고의 시나리오는 놈들이 스스로 마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건데……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죽었으면 죽었지,이렇게 플레이어 가 많은 곳에서 마기를 드러낼 아마 추어들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직접 판을 만들 수밖에.’

다행히 그들은 자신이 번견 부대를

노리고 있다는 걸 모른다.

마음을 편안하게 먹은 서준호는 공 주하를 돌아보며 웃었다.

“이거 재밌는데요? 저 몇 게임만 더 할게요.”

“아휴, 도박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 거냐면……

서준호는 도박 중독의 무시무시함 에 대해 설파하는 공주하를 상대하 면서도,번견 부대에 대한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섞을까요?”

딜러의 물음에 번견 부대의 두 사 람이 각각 칩을 열 개씩 걸며 고개

를 끄덕였다.

이에 서준호도 자신의 칩 20 개를 모두 밀어 넣으며 말했다.

“섞어주세요.”

“이번에는 세 분이시니 컵을 다섯 개 섞겠습니다.”

딜러의 손이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 작했다.

다섯 개의 컵은 점점 속도가 빨라 지더니 이내 스무 개처럼 보이기 시 작했다.

“우와아,저쪽 딜러 장난 아닌데?”

“누구지? 저 정도 실력이면 이름

꽤나 날렸겠는데.”

구경꾼들이 감탄을 뱉어낼 정도로 화려한 솜씨였다.

탁,탁. 탁,탁,탁!

다 섞은 컵들을 내려놓은 딜러가 플레이어들을 쳐다봤다.

원하는 컵을 고르라는 뜻이었다

“맨 오른쪽.”

서준호가 대답하자,불량녀와 홀쭉 남도 차례대로 대꾸했다. &

“난 중앙.”

“오른쪽 끝에 있는 걸로 하지 ”

이어서 딜러가 컵들을 뒤집었다.

결과는 서준호와 홀쭉남의 승리였 다.

차르르륵.

순식간에 40 개가 된 칩을 보며,공 주하가 눈을 반짝였다.

“와와. 뱀 머리 씨,이쪽에 재능이 있는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잘해 요?”

“그야……

서준호는 말끝을 흐리며 생각했다.

‘예전에 그린이 그랬었지.’

5 영웅 중 하나인 길베르토 그린에


게 사격술을 배우던 시절,너무 궁 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다.

너는 눈으로 쫓을 수도 없이 빠르 거나,화려한 페이크를 주는 적을 만나면 어떻게 하냐고.

이에 그린은 딱 한마디를 했다.

-껍데기를 보지 말고 알멩이를 봐 라.

그때 그가 건네준 가르침은 이후로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능력치만 따져보면 아마 공주하가 저 딜러보다 월등할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 게임에서 이기

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그녀의 눈이 껍데기,즉 컵만 쫓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서준호는 딜러가 컵을 섞는 순간 알맹이가 무엇인지를 깨달았 다.

‘이 딜러의 능력은 속도랑은 관계 가 없어.’

그의 팔이 잔상을 남기는 것은,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 이 아니었다.

답은 환영. 딜러가 인위적으로 만 들어낸 환상에 불과했다.

‘어깨와 손목,컵의 위치를 한 눈

에 담으면 어색하다는 것이 확 느껴 져.’

딜러는 컵을 섞다가 환영 능력을 이용해서 공이 담긴 컵을 바꿔친다.

솔직히 사기라고 칭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트릭을 진작 알고 있다면 정답을 맞추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 았다.

‘어깨를 보면 돼. 근육의 움직임은 정직하니까.’

그의 어깨 근육을 보고 팔이 몇 번 움직이는지,어떻게 움직이는지, 쥐고 있는 컵을 어느 방향으로 음직

였는지만 계산하면 되는 쉬운 문제 다.

아마 공주하라면 원리를 가르쳐 주 는 순간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끝나면 가르쳐 드릴게요.”

서준호는 칩을 정리하며 옆 자리의 홀쭉남을 쳐다봤다.

‘정답을 맞춘 건 우연인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세 번의 게 임을 더 해보았다.

그동안 불량녀는 단 한 번도 정답 을 맞추지 못했고,홀쭉남과 서준호 만 계속해서 승리했다.

‘내 답을 따라 고르는 건 아냐.’
두 게임은 홀쭉남이 그보다 먼저 정답을 골랐기 때문이다.

그 말은 즉,그 또한 이 게임의 트 릭을 단번에 파악했다는 것.

‘여자보다는…… 남자 쪽이 상대하 기 성가시겠어.’

가능하다면 둘 중 하나 정도는 오 늘 밤 해치워두고 싶다.

전투에 앞서 상대방의 전력을 깎아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하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딜러 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울한 목소

리로 말했다.

“잠시 기다려주시면 다른 딜러가 올 겁니다.”

서준호는 자리에 앉은 이후 네 번 의 배팅을 모두 성공시켰다. 그것도 전부 을인으로.

처음에는 1 억이었던 돈이 잠깐 사 이에 16 억까지 늘어난 상황.

손해액이 너무 크니 카지노에서 딜 러를 교환한 것이다.

“대,대박. 5 분도 안 되서 16 억이 라니……

공주하가 부러움이 가득 담긴 눈빛 으로 서준호를 쳐다봤다.

돈이 아쉬운 입장은 아니니,순전 히 그의 게임 실력을 부러워하고 있 는 것이다.

‘딱 좋은 타이밍이야.’

서준호는 일부러 큰 목소리로 말했 다.

“마침 딜러도 자리를 비웠으니,제 가 재미있는 거 하나 보여드릴까 요?”

품속에 손을 넣은 그는 잠시 안쪽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곳에는 아무것 도 들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이 정장 밖으로 나 왔을 때,손에는 얼음 나침반이 들 린 상태였다.

그 짧은 순간 서리 능력을 사용해 만든 것이다.

“우와,예쁘다.”

공주하가 눈을 반짝이며 나침반을 쳐다봤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두 마인도 은연중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서준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 을 열었다.

“심덕구 협회장님이 저에게 맡기신

물건인데,이게 상당히 재미있는 아 티 팩트예요.”


“아티팩트라고요? 그러고 보니 마 력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그야 마력으로 만들었으니 느껴지 는 게 당연하다.

“이 나침반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특정한 사람들을 찾는데 도움을 줍 니다.”

“특정한 사람이라뇨?”

“하하,물론 그들이 이런 자리에 있을 리는 없겠지만……

서준호는 말을 하면서 나침반에 마 력을 불어넣었다.

동시에 나침반의 바늘이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돌아가던 바늘의 끝은 서준 호가 의도한 곳을 정확히 가리켰다.

“……어?”

나침반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공주 하가 두 눈을 깜빡였다.

바늘의 끝이 서준호의 옆자리에 앉 아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면서 가 리켰기 때문이다.

“음,뱀 머리 씨. 바늘이 저분들을 가리키는데요?” ^es

이에 서준호는 당황한 표정을 억지

로 숨기려는 사람을 연기했다.

“아,이게 왜…… 왜 이러지.”

침을 꿀꺽 삼킨 그는 어정쩡한 자 세로 일어났다.

“팀장님,저 잠시 배가 아파서 화 장실 좀……

“앗,다녀와요.”

서준호가 손을 흔드는 공주하를 남 기고 다급히 자리를 뜨자,홀쭉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화장실 좀 다녀온다.”

“오래 걸려?”

불량녀의 물음에 그는 단호한 목소

리로 대꾸했다.

“아니,5 분 안에 돌아오지.”

서준호는 화장실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쫓기기라도 하듯,호텔 을 달려나와 뒷골목에 몸을 숨겼다.

깜빡,깜빡.

고장이라도 난 듯,주기적으로 깜 빡이는 램프 하나만이 밝혀주는 어 두운 골목이었다.


“허억,허억……

서준호는 누가 봐도 호흡이 가빠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의 뒤를 밟은 홀쭉남은 골목길의 입구를 자연스럽게 막아서며 말했 다.

“여기가 화장실은 아닌 것 같은 데.”

서준호는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이에 홀쭉남이 피식 웃으며 물었 다.

“정말 운이 더럽게도 없군. 안 그

래?”

그는 서준호가 굉장히 불운하다고 생각했다.

‘얼음 나침반. 아마도 그건 마인을 판별하는 도구겠지.’

설마 그런 아티팩트가 있을 것이라 고는 그도 상상하지 못했다.

만약 나침반의 바늘이 자신과 불량 녀를 정확하게 지목하지 않았다면, 그도 나침반의 효과를 몰랐을 것이


다.

‘내일의 거사를 위해서 우리의 존 재를 아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어야 한다.’

그게 홀쭉남이 직접 움직인 이유였 다.

스르륵. 뼈가 보일 정도로 앙상한 그의 손이 검 손잡이를 쥐었다

“고통없이 보내주지.”

그가 검을 줄수하기 직전.

서준호는 아직까지 들고 있던 얼음 나침반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시간이 지나 녹기 시작한 나 침반을 미련 없이 버렸다.

파사삭.

땅에 떨어진 나침반이 힘없이 부서 지자,홀쪽남의 미간이 좁혀졌다.

‘부서져? 아티팩트가 저렇게 쉽 게?’

마력이 깃들어 있는 아티팩트의 내 구도는 강하다.

적어도 저렇게 바닥에 떨어졌다고 박살날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다.

동시에 홀쭉남의 눈빛이 바뀌었다.

“나침반은 가짜…… 즉 이건 함정 이군.”

“게임할 때도 느낀 거지만,넌 역 시 눈치가 빨라.”


스릉. 검을 뽑은 서준호의 얼굴은 더 이상 잔뜩 겁을 먹고 도망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눈앞의 사냥감을 어떻게 잡 을지를 고민하는 사냥꾼의 얼굴이었 다.

“어떻게 눈치챘지?”

“노코멘트.”

“네 녀석 이외에 우리의 정체를 알 고 있는 사람은?”

“노코멘트.”

“……어디까지 알고 있지?”

이 질문에는 대답을 해주는 편이 좋다.

그래야 상대방이 도망치지 않을 테

니까.

서준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입 을 열었다.

“글쎄,내일 너희들의 스케줄 정 도?”

“그렇군.”

내일의 계획을 아는 이상 절대 살 려둬서는 안 된다.

홀쭉남은 그런 판단을 내린 순간, 경고조차 없이 검을 출수했다.

쐐애애애액!

공기의 결을 타고 뻗어나온 검은 순식간에 서준호의 목을 노렸다.

!”

한 끝 차이로 이를 피해낸 서준호 는 굳은 표정으로 목 부근을 어루만 졌다.

“피해? 쓸 만한 실력이군.”

서준호는 최선을 다해 공격을 피했 건만,홀쭉남의 평가는 매우 박했다.

하지만 서준호 또한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빨라.’

속도 능력치가 무려 60 을 넘은 자 신이 따라잡기 벅찰 정도로 빨랐다.

‘단순히 능력치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어.’

만약 상대의 속도 능력치가 80 이 넘는다고 해도,이처럼 압도적인 빠 르기를 보이진 못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능력이다.’

서준호의 딱딱한 얼굴을 쳐다보던 홀쭉남이 검을 비스듬하게 눕혔다.

“눈빛을 보니 눈치챈 것 같군. 나 는 가속능력자,총 세 차례 가속할 수 있지. 방금 보여준 것이 1 단 가


속이고……

스윽.

다시 한 번 자세를 잡은 그가 입 을 열었다.

“다음번에는 곧장 3 단 가속을 사용 하겠다.”

“……굳이 그런 말을 해주는 이유 는?”

“첫 합을 겨루는 순간 네 재량은 파악했다. 넌 이 공격을 알고도 못 막아.”

‘눈치 한 번 더럽게 빠르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현재의 서준호는 무슨 수를 써도 그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

했다.

심지어 상대의 눈은 점점 붉게 변 하는 중.

‘……가속 능력에 마기까지 사용하 겠다는 건가.’

그건 다음번 공격으로 자신을 반드 시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에이씨.”

서준호는 가볍게 혀를 찼다.

‘상대는 눈치가 빠르고,조심성도 많아. 하지만 확신이 생기면 주저하 지 않는다.’

카지노와 뒷골목에서의 대화를 통

해 얻어낸 상대의 정보들이다.

‘그렇다면 길게 끌어서 좋을 건 없 어. 첫 합. 그때 모든 걸 끝낸다.’

서준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번견 부대는 개개인이 자신보다 강 한 녀석들.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진 순간, 목이 날아가는 것은 이쪽이다.

“……후우.”

심기일전의 상태로 자세를 갖춘 서 준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전투에서,더 이상 시력은 필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눈으로 따라잡질 못하니 아예 감아버린다라…… 나쁘지 않은 선택이군.”

그런 서준호의 모습을 쳐다보던 홀 쭉남이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그는 이번 공격으로 서준호의 숨통 을 확실하게 끊어버릴 생각이었다.

‘어디보자,가장 노리기 좋은 장소 느..»

많고 많은 인간의 급소 중에서,칼 로 찔렀을 때 즉사하는 장소는 머리 와 심장밖에 없다.

서준호의 자세를 확인한 홀쭉남의 눈이 빛났다.

‘머리 쪽에 유독 빈틈이 많군. 나 라면 단숨에 목을 날려버릴 수 있 다.’

상대의 빈틈을 발견한 순간,그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심장을 찔러야겠군.’

만에 하나까지 생각해서 내린 신중 한 판단이었다.

만약 상대가 의도적으로 빈틈을 만 든 것이라면,괜히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잘 가라.”

짧은 선언을 남긴 홀쭉남이 그대로

땅을 박찼다.

탓.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화아아아악!

허공에서 폭발하듯 튀어나온 어둠 이 골목길을 뒤덮었다.

당연히 홀쭉남의 시야 또한 순식간 에 어둠에 잠겼다.

“크옷!?”

그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였 으나,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잔기술을 부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그는 자신이 꿰뚫어야 할 심장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상대가 전력으로 피한다고 하 더라도,자신의 속도를 따돌리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그저 예정된 장소에 검을 찔 러넣기만 하면 된다.’

망설임이 없으니 그의 검끝 또한 흔들리지 않았다.

속도를 더 끌어올린 홀쭉남은 자신 있게 검을 내질렀다.

쌔애애애액!
무서운 소리를 내며 쇄도한 그의

검은 순식간에 서준호의 가슴을 파 고들었다.

‘역시.’

홀쭉남의 한 쪽 입꼬리가 올라갔 다.

예상대로 자신의 검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 었다.

파사삭!

서준호는,처음부터 그의 공격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이다.

“아까도 말했지만,넌 조심성이 너 무 많아.”

“.I"

때로는 조심성이 독이 되기도 한 다.

특히 서준호처럼,심리전을 펼칠 줄 아는 상대를 만났을 때는 더더 욱.

‘파사삭? 그건 살갗을 꿰뚫는 소리 가 아닌데……?’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 은 홀쭉남은 미련 없이 검을 놓고

뒤로 빠지려했다.

하지만 서준호가 그리 허술한 사람 은 아니었다.

쩌저적.

“크옷!?”

홀쭉남은 그제야 자신의 손이 검과 함께 얼어붙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37 화

번견 사냥⑵

강제로 얼어붙은 손을 빼내려고 하 자,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크아악!”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아직 반대쪽 손이 남아 있다 r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은 그는 오른
손으로 단검을 쥐고,그대로 서준호 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준호가 한 발 빨랐다.

그는 상대의 팔을 얼리는 것과 동 시에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콰드드득!

서준호의 검은 홀쭉남의 쇄골을 그 대로 박살낸 뒤,심장을 비스듬하게 내리 찔렀다.

“쿨럭!”

홀쭉남의 입에서 피가 왈칵! 뿜어 져 나왔다.

수많은 사선을 느껴온 그는 본능적 으로 느꼈다.

‘이 더러운 골목길이 내 무덤이 되 겠군.’

심장이 뚫리고도 살 수 있는 사람 은 없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죽음을 내다본 순간 결단을 내렸다.

‘대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이 상황을 보고하는 것이 우선이라 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빠르게 단검을 버리고,손목 의 비타를 두드렸다.

“그건 안 되지. 내가 왜 손목까지 얼려놨다고 생각해?”

“ | 99

하지만 비타를 차고 있는 손목은 얼음으로 뒤덮인 상태.

그의 손가락 끝에서는 얼음의 차가 운 감촉만이 느껴졌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애초에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상대는 자신의 속도를 따라잡지도 못하는 애송이.

심지어 자신은 수많은 사선을 거쳐 온 베태랑이다.

‘운이 더럽게도 없는 것은…… 저 녀석이 아닌 나였나.’

그는 자신의 죽는 이유가,상대의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운도…… 쿨럭, 대장 앞에서는……

홀쭉남은 마지막 힘을 짜내 상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는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생 에 마지막 저주를 퍼부었다.


“대장께서…… 네놈을 지옥으로 보 내주실 것이다.”

“내가 거길 왜 가? 거긴 너 같은

새끼들이나 가는 곳이고.”

기분이 나빠진 서준호는 검 손잡이 를 한 바퀴 빙글 돌렸다.

“크허…… 억……!”

피를 토하면서 쓰러진 홀쭉남의 눈 동자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붉은 눈은 끝 까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여튼 지긋지긋한 마인 놈들.”

서준호는 홀쭉남의 이마에 손을 올 리며 중얼거렸다.

“정보나 내놔.”

라스베가스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호텔.

소파에 앉아 도시를 내려다보던 두 남녀 사이에는 몇 시간 동안이나 대 화가 없었다.

딸깍!

마침내 벽걸이 시계의 침이 새벽 4 시를 가리켰다.

“.인정하기는 싫지만,그 뼈다

귀 녀석은 근접에선 나보다 강해.” 먼저 입을 연 것은 번견 부대의

여자,불량녀였다.

옆에 앉아 있던 대장 아르마는 눈 을 감고 있는 상태였다.

“분명히 5 분 안에 돌아온다고 했는 데,벌써 여덟 시간이 지났어.”

항상 팀을 먼저 생각하는 홀쭉남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연락이 두절 된 것은 처음이다.

두 사람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녀석이 당한 거야.”

아마 그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 이 아닐 것이다.

울적한 목소리를 뱉어낸 불량녀는 결국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항상 티격태격 싸우던 사이였지만, 몇 년이나 한솥밥을 먹은 동료가 아 닌가.

“병신. 금방 끝내고 오겠다고 나대 더니.”

“인상착의는?”

“동양계 남자. 한국어를 사용하고, 공주하와 함께 있었으니 도깨비 길 드원일 가능성이 높아.”
아르마는 말없이 자신의 비타를 두 드렸다.

좌라라락.

그의 앞으로 수천 개의 홀로그램 프로필이 떠올랐다.

“현재 라스베가스에 위치한 한국인 플레이어들의 사진이다. 이중에 있 는지 찾아봐.”

“잠깐만.”

불량녀는 빠르게 프로필들을 훑었 다.

그녀의 눈은 쉴 새 없이 움직였지 만,절대 허투루 보고 있는 것은 아 니었다.

수천 개에 달하는 프로필을 모두

둘러본 그녀가 없다고 말을 하려던 찰나.

“어?”

그녀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자신이 찾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이 새끼야!”

“……확실한가?”

“확실해! 불과 몇 시간 전에 봤는 걸?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불량녀의 확신어린 목소리에 아르 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서 준호.

최근 마인 협회의 데이터베이스에 오른 인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데뷔한 지 고작 두 달밖에 안 되는 초보 플레이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자신의 부하 가 그에게 당했을 것 같지는 않았 다.

하나 그의 프로필을 자세히 살펴보 던 아르마는 조금씩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남자,뭔가 있군. 그림자 형제 와도 엮여 있다.”

“……정말이네? 그 두 사람이랑 같 이 미공략 게이트에 들어간 녀석이

었어.”

두 사람이 돌아오지 못한 게이트에 함께 들어간 남자.

그리고 이번의 일까지.

“지금 이 시간부로 서준호를 위험 인물로 지정한다.”

“알았어.”
불량녀는 이를 아드득 갈며 분노를 드러냈다.

“진짜 만나기만 해봐. 확실하게 죽 여 버릴 거야.”

MGM 그랜드 가든 아레나.

항상 최고들의 경기만을 다루는 열 정 넘치던 경기장이었지만,오늘만 큼은 정숙함을 뽐냈다.

‘무슨 영화제도 아니고.’

입구에는 길다란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고,세계적인 배우나 영화감독, 정치인이나 플레이어들이 모였다.

꽃이 모인 곳에는 벌도 꼬이는 법.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언론사의 기 자들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여 념이 없었다.

뻑 _ 뻑_

레드카펫에 올라서기 직전,모든 사람은 공항 검문대를 방불케하는 빡빡한 조사를 통과해야 했다. 서준
호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경호 역할을 맡은 도깨비 길드원이 그를 제지하며 손을 내밀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이에 서준호는 품속에서 초대장을 꺼내 내밀었다.

봉해져 있던 편지지를 뜯어 내용을 확인하던 경호원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냉큼 자리를 비켜서며 깍듯하 게 인사했다.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음? 몸수색은 안 해요?”

서준호가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며 묻자,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바로 입장하시면 됩 니다.”

‘공주하 팀장님이 따로 귀띔이라도 해뒀나?’

그의 공손한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 린 서준호는 레드카펫 위로 올라섰

다.

덕구가 보내준 최고의 정장과 계,구두까지 갖춰 입은 그 I 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1

“어라? 저 남자는 누구지?”

“연예인인가? 잘생겼는데.”
“비율 좋고 몸이 슬림한 거 보 모델 같기도 하고.”

남자 기자들은 그의 정장과 구두를 보며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e

여자 기자들은 그의 잘생긴 얼굴과 비율 좋은 몸을 보며 관심을 드러냈 다.

서준호는 사람들의 눈빛을 조명으 로 삼으며 아레나에 들어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먹거 리를 판매하는 바였다.

‘마실 것이 필요하긴 해.’

오후에 시작하는 경매는 동이 트고 나서야 끝날 수도 있다.

서준호는 물을 한 병 사기 위해 주문대로 향했다.

“아이스티,얼음 동동 띄워서 주세 요. 스무 잔 주세요.”

자신의 앞에서 음료를 주문하는 여 자의 익숙한 정수리를 내려다본 서

준호가 눈을 깜빡였다.

오늘은 검은색 정장을 입고 포니테 일로 머리를 묶은 공주하였다.

“또 뵙네요.”

“으아아,너무 더워서 짜증이 나 아…… 으어?”

셔츠를 흔들며 바람을 일으키던 공 주하는 뒤를 보더니,서준호를 확인 하고는 팔짱을 꼈다.

“어라,이게 누구신가? 화장실 갔 다가 돌아오지 않으신 뱀 머리 씨 아니신가?”

“……아.”

생가해보니 어젯밤,화장실을 다녀 온다는 말을 남기고는 돌아가지 않 았다.

“설마 기다리셨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아니이,사 람이 말을 시작했으면 끝을 맺어야 지이. 저 어제 얼음 나침반이 대체


뭐하는 아티팩트인지 궁금해서 두 시간 동안 기다렸거든요? 그리고 저 원래 궁금한 거 생기면 잠도 못 자
요. 지금 눈밑에 다크서클 생긴 거 보이시죠?” 1

“..죄송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기

에 서준호는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서 미안함을 읽은 공주 하는 아휴우,옅은 숨을 내쉬면서


팔짱을 풀었다.

“뭐예요 진짜. 그렇게 시원하게 사 과해 버리니까 화도 못 내겠네.”

“대신 다음번에 맛있는 거 한 번 대접할게요.”

“……비싼 거 얻어먹어야지.”
그제서야 표정이 풀린 공주하는 시 간을 확인하더니,바닥의 아이스박 스를 들어올렸다.

“하웃차.”

“공 팀장님,그건 대체……?”

“아아,그냥 평범한 아이스박스예 요. 안에 아이스크림이랑 음료수,아 이스티 등이 들어 있죠.”

그녀는 마치 강력한 보스 몬스터를 바라보듯,경매장의 입구를 쳐다봤 다.

“……뱀 머리 씨도 마음 단단히 먹 으세요. 긴 싸움이 될 테니까.”

“더위를 정말 많이 타시나 봐요.”

“엄청 잘 타요. 제 생각에는 라스 베가스가 사막 지대라 그런지 유독 더운 것 같아요.”

“불꽃을 다루시니까 더위 저항이라 도 생겨야 하지 않나요?”

“내 말이요! 짜증나게 몸에 열만 많아져서 맨날 덥다니까요.”

말을 마친 공주하는 아이스박스를 들고 있는 손 대신 고개를 흔들었 다.

“오늘 경매 재미있게 보세요. 자리 가 가까우면 좋았을 텐데,전 보안 문제 때문에 앞쪽이라서.”

“네,그럼 공 팀장님도……

서준호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부디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

시길.”

“훙흐흐으응. 아이스박스〜 내 보물 상자래요〜”

차곡차곡.

공주하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좌석 앞에 아이스박스를 두었다.

그것은 앞으로 몇 시간 동안 자신 의 더위를 식혀줄 은혜로운 보물 상 자나 다름이 없었다.

“와아,진짜 가깝네.”

코앞이나 다름없는 무대를 바라보 던 공주하가 감탄했다.

그녀의 좌석은 무대의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다.

본래라면 VIP 들만 앉을 수 있는 자리였지만,경호 캡틴이라는 직책 덕분에 앉게 된 것이었다.

‘확실히 이렇게 가까우면 무대에서 어떠한 문제가 생겨도 바로 튀어나 갈 수 있겠어.’

슬쩍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쳐다 보니,확실히 얼굴만 봐도 알 만한 유명 인사들뿐이 었다.

‘미국 부통령이랑…… 프랑스 플레

이어 협회장도 있고,영국의 여왕님 까지 오셨네?’


하나같이 세계적인 입지를 자랑하 는 인물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지만,나라 의 핵심 권력자들은 여전히 큰 힘을 쥐고 있었다.

“여기 앉으면 되나.”

그때,옆자리에 사람이 앉자 공주 하는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 다.

“어?”

동시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뱀 머리 씨?”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것은 다름 아닌 서준호였다.

공주하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더 니 불안한 표정으로 그에게 속삭였 다.

“그…… 저기,있잖아요. 여기는 좌 석이 다 정해진 시스템이라서 아무 데나 막 앉으시면 안 돼요.”

“A-13 석이면 여기 아닙니까? 초 대장에 그렇게 쓰여 있는데요.”

“어라? 저 잠깐 초대장 좀 봐도 돼요?”

서준호가 거리낌 없이 초대장을 보 여주자,이를 확인하던 공주하의 입 이 헤 벌어졌다.

‘뭐,뭐야. VIP 티켓이잖아? 이건 나도 못 받는 건데……?’

아무리 그녀가 유명한 랭커 플레어 라지만,길드의 마스터도,부마스터 도 아닌 일개 팀장이다.

당연히 자력으로 구할 수 있는 초 대장은 한 단계 낮은 프리미엄 등급 이 한계.

‘잠깐만,그러고 보니……

공주하의 시선이 서준호를 훑었다.

이전의 촌스럽고 지저분하던 머리 는 전문가의 손길을 받아 잘 관리된 상태였고.

옷과 구두는 슬쩍 봐도 최소 수십 억짜리였다.

오늘따라 왠지 잘생겨 보인다 했더 니,옷이 날개인가 보다.

‘데뷔한 지 이제 두 달에 접어드는 플레이어가 저 정도 차림을 맞추려 면……

번뜩! 공주하의 머리로 생각 하나 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어제 카지노에서 딴 돈 을 다 쓰신 거예요?”

“예?”

“그,지금 보니 차림새가 굉장하셔 서요.”

“아,이거요?”
서준호는 자신의 옷을 슬쩍 내려다 보며 피식 웃었다.

“아니에요. 오늘 입은 옷과 시계들 은 전부 협회장님께서 맞춰줬어요. 초대장도 그분이 주신 거고요.”

“아아〜 그렇구나.”

오해가 풀린 공주하였지만,그녀는 오히려 더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그 를 쳐다봤다.

“정말 엄청난 신임을 받고 계시나 봐요. 설마 심덕구 협회장께서 후계 자로 삼으실 줄이야.”

“……예? 후계자라뇨?”

서준호가 눈을 깜빡이며 묻자,공 주하가 피식 웃었다.

“정말 모르셨나요? 여긴 단순한 경 매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에요. VIP 초대장은 고위 권력자나 대형


길드 의 마스터 정도가 아니면 받을 수 없다구요. 자격이 안 되는 자는 들 어올 수도 없는……. 그걸
선뜻 내 주셨다는 건,심덕구 협회장께서 뱀 머리 씨를 자신의 대리인. 즉,후계

자 정도로 생각하신다는 뜻이죠.”

“……맙소사.”

그제야 덕구 녀석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경매장은 자신이 가는데 왜 옷까지 챙겨주면서 본인 이미지를 걱정하나 했더니,이런 뜻이 숨겨져 있을 줄


이야.

“확실히 한국 플레이어 협회에서는 제법 오랜 시간 동안 간판스타가 나 오질 않았죠.”

공주하가 생글거리는 눈빛으로 서 준호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협회장께선 뱀 머리 씨

가 그 역할을 맡아주기를 원하시나 봐요.”

“……부담스럽네요.”

돌아가는 즉시 따지겠다는 다짐을 하는 순간.

파악!

경매장 내부의 불이 꺼졌다.

“앗,시작하나 봐요.”

더 옥션.

세계 최대 규모의 경매라 불리는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38 화

더 옥션(1)

은은한 조명이 켜지고,무대 위로 한 중년인이 올라섰다.


세계적인 경매 진행자로 명성이 높 은 도니 라치필드였다.

경매를 항상 유쾌하게 이끌어가기 로 유명한 사람이었지만,오늘의 표 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저렇게 유명한 사람도 긴장이 되 나 봐요.”

“자리가 자리니까요.”

오늘의 경매는 단순한 토크쇼가 아 니었다.

세계의 모든 권력이 한 자리에 모 였다고 칭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인터넷에선 우스갯소리로 오늘의


경매를 ‘세계정상회담’이라 부르기도 했다.

오늘 밤,신사 숙녀 여러분을 모 시게 된 도니 라치필드입니다” 그는 살짝 긴장된 표정이었지만 프

로답게 경매를 이끌었다.

“우선 경매 방식에 대해서 알려드 리겠습니다. 입찰자 분들의 좌석을 보시면 조그마한 리모콘이 보이실
겁니다.”

“이건가 봐요.”

공주하가 널찍하고 편안한 의자에 놓여져 있던 리모콘을 들어올렸다.

“입찰 방식은 간단합니다. 리모콘 에 위치한 초록색 버튼을 누르시고, 원하시는 금액을 입력하시면
끝입니 다.”

경매가 생소한 사람들도 특유의 손 가락 사인을 외울 필요가 없는 간편

한 방법이었다.

“이미 오늘 밤을 많이 기다리셨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더 이상의 기다 림은 필요없겠지요. 바로 경매를


시 작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물품은 과 거 사자왕 리차드가 사용한 명 검……

물품이 무대 위로 올라오면,커다 란 홀로그램 스크린이 이를 크게 확 대시켜 주었다.

“뱀 머리 씨는 오늘 구매하시고 싶 은 거 있으세요?”

“딱히 없어요. 공 팀장님은요?”

“저도 뭐.. 아시다시피 저는 단

순한 입찰자 신분으로 온 것이 아니 니까요.”

공주하가 팔에 달린 관계자 완장을 가리켰다.

그녀는 어깨를 당당하게 피면서 말 했다.

“프로라면 일을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근무 시간에 도박하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서준호는 대충 맞장구를 쳐주며 생 각에 잠겼다.

어젯밤,그는 어두운 뒷골목에서 자신이 처치한 번견의 기억을 읽었


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 혼자서는 아르마를 못 잡아.’

그의 무력이 상상이상으로 강력했 던 탓이다.

자신이라면 그를 혼자서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그것은 큰 착 각이었다.

아르마는 시체들의 왕이자 구천 중 하나인 나자드 할로우의 세 번째 제 자.

‘지금 당장 2 층에 올라가도 문제가 없을 정도의 실력자야.’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가 소환사 이기 때문이다.

소환사는 본인의 레벨보다 소환물 의 레벨과 무력이 더 중요시되는 클 래스니까.

‘다행히 어젯밤에 기억을 읽은 덕 분에 그가 뭘 소환할 수 있는지는 알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들을 혼자서 상대 할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도 지원군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라스베가스에 서 지원군이 되어줄 만한 존재라

면?’

서준호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빨대로 아이스티를 마시면 서,경매에 흠뻑 빠진 공주하의 모 습이 눈에 들어왔다.

‘공주하밖에 없어.’

그녀는 아르마를 압도할 수 있는 실력자.

게다가 이번 경매에서 경호 역할을 맡은 만큼,이해관계까지 일치했다.

서준호는 들고 있던 카탈로그를 확 인했다.

‘천상의 숨결이 무대에 올라오는

것은 대략 다섯 시간 후.’

번견 부대의 작전은 그때부터 시작 될 것이다.

* * ♦

경매는 아무런 문제없이 다섯 시간 째에 접어들었다.

서준호가 바짝 긴장을 하고 있을 무렵.

“203 번,축하드립니다. 얼음 왕관 에 낙찰되셨습니다.”


“아니 대체 203 번이 누구야?”

“아까부터 냉기속성과 관련된 물건 들은 그 사람이 죄다 싹쓸어가고 있 어.”

입찰자들이 수근거리자,서준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203 번은 그가 아 니었다.

굳이 수십 억원을 들여가면서 얼음 관련 아티팩트를 살 이유는 없었으 니까.

“와아,재미지다〜 재미지다〜”

203 번은,그의 옆자리에 앉은 천진 난만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리모콘을 꾹 꾹 눌러댔다.

방금 것까지 포함해서 벌써 낙찰 받은 물건만 일곱 개.

모두 더위를 식혀주는 능력이 달린 아티 팩트들이 었다.

“……아까 프로라면 일을 제대로 해야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서준호의 일침에 뜨끔한 공주하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지,진정한 프로라면 그 뭐야…… 그,그래요! 멀티태스킹! 그게 되어 야 하거든요.”

어째 프로의 기준이 점점 높아진 다.

본인도 민망한 건 아는지,앗홈. 가벼운 헛기침을 뱉어낸 그녀가 서 준호를 슬쩍 쳐다봤다.

“뱀 머리 씨는 뭐 안 사세요?”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살 텐데, 글쎄요.”

“딱히 장비 욕심은 없으신가 봐 요?”

“……욕심은 많아요.”

굳이 따지자면 장비에 욕심이 많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장비를 구매를 하지 않는 이유는,보는 눈이 무지막지하게 높 기 때문이었다.

‘어째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 냐.’

과거 최고의 무구들을 다뤄본 그의 눈은 밑도 끝도 없이 높아져 있는 상태.

당연히 웬만한 아티팩트들이 눈에 찰 리 없었다.

때문에 그가 여태 구매한 것은 잔 병치레를 막아주는 목걸이 하나뿐이 었다.

서준호가 목걸이를 구매하자,공주

하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뭐예요? 여자친구 줄 선물이에 요?”


“너무하시네. 여자친구가 있냐고 먼저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닙니까?”

“앗,죄송…… 그럼 어머니?”

“어머니도 없습니다.”

“……죄송해요. 저 그냥 입 다물게 요.”

얼굴이 하얗게 질린 공주하가 슬그 머니 고개를 돌렸다.

“다음에 소개해 드릴 물품은 사연 이 참 많은 물건입니다. 카탈로그

84 번,알 수 없는 공.”

“알 수 없는 공……?”

그사이 서준호의 관심은 다시 경매 물품을 향해 있었다.

주먹 두 개 크기의 조그마한 공은 이따금 빛을 뿜어냈다.

물품에 대한 도니의 설명이 이어졌 다.

“이십여 년 전,2 층의 게이트를 클 리어하고 보상으로 나온 이 빛나는 공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


릅니다. 아이템 감정도 안 되는 이 공에 분명 놀라운 능력이 숨어있겠 거니 생각하고 여태껏 수많은 사람

들이 구매했지만,아직 공의 능력을 알아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 다. 마지막 소유자였던 영국의


찰리 백작님께서 판매 의사를 드러낸 물 건입니다. 5 만 달러부터 시작하겠습 니다.”

“또 저 공인가.”

“경매 인생 20 년을 살았지만,저 공만큼 자주 본 물건은 없어.”

“그만큼 되파는 사람이 많으니까.”

“살 사람이 있을까? 알 만한 사람 들은 아무도 안 살 텐데.”

서준호는 사람들이 중얼거리는 것 을 한 귀로 홀리는 중이었다.

그의 두 눈은 공에 집중되어 있었 다.

‘……사야겠다.’

합당한 이유나 근거는 없었다.

서준호가 이렇게 제멋대로의 감정 을 느끼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 다.

하지만 그는 이런 종류의 직감이 느껴질 때마다 본능에 몸을 맡겼다.

‘아마도 내 능력 중 하나인 강렬한 직감(B) 때문이겠지.’

그에 따른 결과는 항상 최고였으니 까.

서준호가 리모콘을 들어 올리자 공 주하가 눈을 깜빡였다.


“저기…… 혹시 저 공 사시려고 요?”

“네. 갑자기 끌려서요.”

그는 연신 물음표를 띄우는 공주하 를 내버려 두고 리모콘의 버튼을 눌 렸다.

“173 번,5 만 2 천 달러 나왔습니 다.”

“89 번,5 만 5 천 달러 나왔습니다.”

“114 번,5 만 7 천……

그래도 호기심을 참지 못한 사람이

수백 명 중에 몇 명은 있었다.

한창 레이스를 달린 끝에,서준호 는 정체불명의 공을 15 만 달러에 낙찰 받았다.

‘기대되네.’

대체 저 공에 무엇이길래 자신의 직감이 발동한 것일까.

서준호가 살짝 설레는 마음을 느끼 기를 잠시.

다음 물품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 물건을 보기 위해 라스베가스까지 오셨을 겁니다.”

도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운을 띄우자,사람들이 자세를 바로 했다.

“드디어 나오는군.”

“카탈로그 85 번. 확실해.”

“이걸 보고 싶어서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경매장 여기저기에서 침을 꿀꺽 삼 키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도니가 우아한 몸짓으로 물품을 소 개했다.

“2 층의 고대던전에서 발굴된 최상 급 마력핵,천상의 숨결입니다.”

파앗!

수십 개의 조명이 밝게 켜지며 무 대의 중앙에 위치한 보석을 비추었 다.

동시에 사람들의 탄성이 여기저기 서 터져 나왔다.

“오오,저것이……

“천상의 숨결!”

“과연 신이 직접 빚었다는 말이 나 올 만큼 아름답군.”

대부분의 마력핵은 동그란 보석 모 양을 하고 있다.


당장 서준호가 흡수했던 서리여왕

의 핵만 봐도,둥글둥글한 사파이어 처럼 생겼었으니까.

천상의 숨결 역시 하얀색과 황금색 이 적절하게 배치된 동그란 보석 모 양이었다.

“와아,진짜 예뻐요.”

심미적 요소까지 갖춘 천상의 숨결 은 말 그대로 하늘이 내뿜은 숨결을 연상시켰다.

게다가 모양도 모양이지만,다른 부분에서도 감탄이 흘러나왔다. "

‘……어마어마한 마력량이다.’

왜 저 마력핵 하나가 도시를 은영 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도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엄청난 마력이 저 조그 마한 핵 하나에 담겨 있었다.

“공 팀장님,저 핵이 누굴 잡고 나 온 거라고요?”

“빅 6 길드 중 하나인 라비린스가 프론티어의 고대던전인,영광의 무 덤’에서 입수한 거예요. 라비린스에


서 사활을 걸고 진행한 공략이었느 데…… 피해는 컸지만 결국 성공 g 죠. 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마력
핵을 판다고 들었어요.”

“얼마나 할까요?”

“우음…… 그거야 부르는 게 값이

겠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스윽,주변을 둘러본 공주하가 고 개를 가까이 갖다대며 속삭였다.

“조 단위까지는 우습게 올라갈 거 예요. 요즘은 석유나 전기보다 마력 을 쓰는 곳이 많잖아요. 아마 VIP


석 에 앉은 사람들은 국가 예산까지 끌 어서 저걸 손에 넣으려 할걸요?”

“……맙소사.”

슬쩍 주변을 둘러본 서준호는,그 제야 각국 수장들의 보이지 않는 신 경전을 느꼈다.

하지만 서준호는 빠르게 정신을 가

다듬었다.

‘천상이 숨결이 나왔으니 슬슬 시 작될 거야.’

번견 부대.

천상의 숨결이 무대에 올라왔으니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신이 빚었다는 최상급 마력핵! 천 상의 숨결은 입찰가 100 만 달러부 터 시작하겠습니다!”

뻑_ 삐빅_
순식간에 홀로그램 스크린으로 입 찰 희망가가 올라왔다.

일반인 경쟁자들을 떨어트리기 위

함일까,입찰가는 단숨에 5,000 억을 훌쩍 넘어섰다.

꿀꺽.

과연 얼마에 낙찰이 될 지 모두가 숨을 죽이고 무대 위를 쳐다보는 순 간.

«..<?,,

무언가를 느낀 공주하가 미간을 찌 푸리며 고개를 올렸다.

그녀보다 한 박자 늦게 무언가를 느낀 서준호도 경매장의 천장을 바 라보았다.

‘왔다.’

과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천장이 그 대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관객석의 누구도 피해를 입 지 않은 상태였다.

‘과연,수호의 기사라는 이명은 괜 히 붙은 게 아닌가 보네.’

랭커 하인호.

그가 순식간에 관객석 전부를 뒤덮 는 마력 방벽을 생성한 것이다.

“대체 어떤 놈들이……! 잠깐만, 저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공주하는 마

력 방벽 위에서 꿀렁거리는 물체들 을 눈여겨보았다.

“해고을?”

천장을 뚫고 침입한 것은 수십 마 리의 해골들.

그것을 목격한 서준호는 심각한 목 소리로 중얼거렸다.

“해골이라니…… 설마 터키에서 대 학살을 일으킨 해골술사라도 나타난 걸까요?”

“해골술사? 그거 가능성 있네요!”

눈을 빛낸 공주하는 자신의 비타를 향해 빠르게 속삭였다.

“VIP 들과 관객 대피를 최우선으로! 그다음 경매 물품 보호해. 해골은 나와 인호가 맡는다. 어서


움직여!”

과연 프로는 프로다.

순식간에 카리스마 넘치는 전장의 지휘관이 된 그녀는 서준호를 돌아 보며 물었다.


“뱀 머리 씨. 혹시 괜찮으시면 힘 좀 보태주실 수 있…… 어라?”

공주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서준호는,귀신처럼 사라진 상 태였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39 화

더 옥션(2)

“이쪽입니다!”

“질서를 지키세요! 모두 안전하게 대피하실 수 있습니다!”

“수호의 기사 하인호 아시죠? 현재 그가 몬스터들을 막고 있으니 여러 분은 안전합니다!”

“줄 좀 서세요! 줄 좀 서세…… 아 니 줄 좀 서라고!”

도깨비 길드원들이 이성을 잃은 사 람들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질서가 지켜지는 일 따위는 없었다.

광광! 과아앙!

“흐이익!”

“저,저러다가 깨지는 거 아냐?”

“빨리 좀 나갑시다! 앞에 좀 비키 라고!”

“어어? 밀지 마! 당신 내가 누군 줄 알아?”

조금만 고개를 들어 올려도,보호 막을 사납게 내려치고 있는 해골 병 사들이 보였으니까.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한마음 한뜻 으로 질서를 무시한 채 앞사람을 밀 었다.

“후우,부팀장님. 사람들이 저희 말 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데 어떡하 죠?”

“차라리 귀를 접어버릴까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마력 방벽을 펼치고 있던 부팀장 하인호는 팀원들의 말에 가볍게 혀 를 찼다.

그는 입구 앞에 모여 서로를 밀고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쳐다보았 다.

저들 모두가 부나 명예,혹은 권력 을 산처럼 쌓은 존재들이다.

‘있는 놈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죽음이라더니……

그 옛날 진시황도 죽음이 두려워 불로초를 찾고,자신의 무덤에 병마 용들을 세우지 않았던가.

딱히 해결책을 찾지 못한 하인호가 한숨만 쉬던 순간.

화르르륵!
주변에서 어마어마한 열기가 느껴 지더니,경매장의 한쪽 벽이 괴 I 과 함께 터져나갔다. oa

그 엄청난 소리에 약간이나마 이성 을 되찾은 사람들은 소리가 난 조으 돌아봤다. '거 s

“그 좁아터진 입구로 사람들을 언 제 내보내려고? 이쪽으로 인도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수십 억짜리 건물 벽을 날려 버린 공주하가 소리 쳤다.

“아니, 공주님 그걸 부셔버리시 면……

“왜요? 완전 잘하셨는데. 공주님

나이스!”

“자자,저기 보이죠? 저쪽 출구가 훨씬 넓습니다. 더 빨리 나갈 수 있 다고요. 어서 따라와요!”

난처해하는 하인호와는 달리,팀원 들은 그녀를 향해 엄지를 척 내밀었 다.

뚫린 구멍을 통해 경매장을 가득 채우던 사람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가 기 시작했다.

“하여튼 이렇게 쉬운 걸 가지 고……

광! 과광,광광!

그사이 하인호의 보호막을 두드 는 해골들은 더 늘어나있었다 천장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해골드 이


뛰어내린 것이다. e

그들을 올려다보는 하인호의 눈매 가 가늘어졌다. k

'대중 눈대중으로만 세어도 벌써 120 마리가 넘는데?’

도대체 상대가 누구이기에 이 정도 스케일의 테러를 감행하는 걸까?

그의 시선이 위쪽에 고정되어 있던 순간.

쓰애액!

그는 무언가가 ‘갑작스럽게’ 공기 를 가르며 날아오는 소리를 들었다.

“……무슨!?”

당황한 하인호가 황급히 전신에 보 호막을 두르며 상체를 비트는 순간.

피익!

보호막을 그대로 박살낸 저격총의 탄환이 그의 어깨를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모든 생각을 새하얗게 지울 정도의 격통이 느껴 졌다.

“크으…… 아아악!”

집중력이 흐트러지니 그가 유지하

고 있던 마력 방벽 또한 사라졌다.
달그락,달그락!

그 위에 서 있던 해골 병사들도 하나둘 경매장 바닥에 떨어졌다.

“인호야!”

아끼던 부하가 비명을 지르면서 쓰 러지자,공주하는 한 쪽 입술을 살 짝 깨물었다.

그녀가 정말로 열 받았을 때 나오 는 습관이었다.

“해골술사의 마력을 역추적하기 전 까지는 적당히 시간만 끌려고 했는 데……

이미 글렀다.

부하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도깨비 의 공주는,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 태였으니까.

화르르륵!

그녀의 분노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몸 주변으로 불꽃이 피어올랐다.

검은 정장을 입고 포니테일 머리를 한 그녀와 환상적으로 잘 어울리는 새빨간 불꽃이었다.

“안 되겠어.”

결정을 내린 공주하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하나 그 행동이 불러온 결과는 결 코 가볍지 않았다.

화아아악!

은은한 조명이 비춰주던 건물 내부 가 순간 대낮처럼 환해졌다.

경매장 내부에서 생성된 불의 기둥 은 건물 천장을 뚫고 그대로 하늘까 지 솟아올랐다.

화르르륵.

그것으로 끝.

1 초도 안 될 것 같은 찰나의 순간, 백 마리가 넘어가는 해골 군단이 재 가 되어 사라졌다.

그 와중에 기절한 하인호와 천상의 숨결이 놓여진 무대는 그을음 하나 없이 멀쩡했다.

공주하는 송글송글 맺힌 이마의 땀 을 손등으로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아휴,더워.”

그랜드 가든 아레나로부터 4km 가량 떨어진 미라지 호텔 옥상.

불량녀는 하늘을 붉게 물들인 거대 한 불기둥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

다.

“……미친. 저게 진짜 인간의 능력 이라고? CG 아니야? 말이 안 되잖 아.”

엄청난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공포로 인한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 해질 정도였다.


‘공주하의 능력이 속성계 최강이라 는 불꽃의 지배자(S)라고 들은 적이 있지만……"

설마 저 정도일 줄이야

만약 저런 괴물과 지척에서 싸워야 했다면?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상상

도 하기 싫을 정도였다.

“후우,내가 저격수라서 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는 쓰고 있던 고글을 조정했다.

그러자 시야가 망원경처럼 확대되 었다.

‘저게 천상의 숨결이구나.’

그 옆에는 자신이 쓰러트린 하인호 의 모습이 보였다.

보물을 지키는 감시자도 사라졌으 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이리오렴, 우리 귀염둥이.”

그녀는 천상의 숨결을 바라보며 자

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텔레포트.’

乂、乂、스

동시에 손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 껴 졌다.

“어머, 이거 완전 내 스타일인데?”

그녀는 아름다운 천상의 숨결을 바 라보며 감탄했다.

때마침 대장에게서도 전화가 걸려 왔다.

- 물건은?

“내가 누구겠어? 손에 넣었지.”

-잘했다. 그럼 바로 B 포인트로 와.

“오케이〜”

전화를 끊은 그녀는 자리를 떠날 채비를 했다.

그녀는 저격총을 어루만지며 괜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쯧,결국 서준호라는 놈은 놓 쳤네.”

보이기만 하면 저격총으로 미간을 뚫어주겠다고 다짐했는데,정말 운 이 좋은 녀석이다.


“하지만 언젠가 2 층으로 올라오게 되면,그날이 네놈의 제삿…… 응?”

그때,무언가를 발견한 불량녀가 다시 한 번 고글을 조작했다.

지이잉.

다시 한 번 확대된 시야에서,그녀 는 자신이 그토록 찾던 얼굴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서준호오!”

분노와 반가움이 섞인 소리를 토해 낸 그녀는 다시 한 번 저격총을 들 어올렸다.

“운이 좋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그 생각은 취소야.”

현재 그는 도로를 뛰고 있었다.

대체 어디를 그리 열심히 가는 건 지,정말 빨리 뛰는 중이었다.

‘킥,재수 없는 녀석. 하필이면 달 려와도 이쪽으로 달려오네.’

그녀는 저격총의 스코프로 서준호 의 미간을 정확히 조준했다.

“고통 없이,한 방에 머리통을 터 트려줄게.”

살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 린 그녀는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겼 다.

타아아아앙!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호텔의 옥상

에 울려 퍼진 순간.

총알은 그 자취를 감추더니 서준호 의 코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우후후,고작 데뷔한 지 두 달 된 애송이가 받아낼 만한 탄환이 아니 야.”

그녀가 최고의 부대,번견에서 저 격수로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 했다.

총알을 상대의 코앞으로 ‘텔레포 트’시키는 초고난이도 기술을 구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는,총의 격발음 을 듣기도 전에 몸에 구멍이 뚫리는

지독한 공격이다.

“지옥으로 꺼져 버…… 응?”

조준경으로 시체를 확인하려던 불 량녀의 눈이 찌푸려졌다.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을 줄 알았 던 서준호가 여전히 도로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내가 실수했나?”

당황한 불량녀는 고개를 갸웃거리 며 다시 한 번 저격총을 장전했다.

‘이상하네. 지난 3 년간 단 한 번도 실수를 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까지 그녀의 저격 성공률은

100%.

단 한 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었기 에,그녀는 첫 실패를 단순한 해프 닝으로 넘겨짚었다.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실수였다.

만약 그녀가 숙련된 저격수였다면, 첫 발이 빗나가는 순간 황급히 자리 를 떠났을 테니까.

“이번에는 절대로 안 놓쳐.”

불량녀는 한층 더 신중하게 서준호 를 노렸다.

그와의 거리는 어느새 1km 정도까 지 가까워진 상태.

‘죽어 r

그녀는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다 시 한 번 텔레포트 능력을 사용했 다.

쉬이익!

눈앞에서 사라진 총알은 이번에도 서준호의 코앞에서 모습을 드러냈 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들어갔어. 절대 못 피해.’

그녀가 확신을 품으며 서준호를 쳐 다보는 순간.

획!

그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서 총알을 피해 버렸다.

“이런 미친! 저 새끼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 있어!?”

장면을 똑똑히 목격한 불량녀가 저 도 모르게 비명을 터트렸다.

“피했다고? 내 총알을? 그것도 코 앞에서? 저렇게 쉽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2 층에서 수호의 기사라고 불리는 랭커 하인호마저 자신의 총 알에 당하지 않았던가.

‘이건 말그대로 알고도 못 막

는…… 그런 종류의 공격인데? 저 애송이가 하인호보다 뛰어난 플레이 어라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으니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불량녀는 일 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 았다.

‘잠깐만,그러고 보니……?’

서준호는 아까부터 이곳.


그녀가 위치한 건물을 향해 일직선 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설마? 젠장!”

욕짓거리를 뱉어낸 불량녀는 황급 히 저격총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놓은 천상의 숨 결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과지직!

단단한 운동화가 그녀의 손등을 그 대로 밟으며 뼈마디를 박살내 버렸 다.

M | »

불량녀는 감히 비명을 지를 생각조 차 하지 못했다.

박살난 손을 시작으로,전신의 모

든 혈관이 얼어붙기 시작했으니까.

“허억,허억…… 후우우.”

서준호는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 을 토해냈다.

얼마나 빨리 달려왔는지,그의 몸 에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중이었다.

“……놓치는 줄 알았잖아.”

그녀의 능력이 텔레포트라는 것은 홀쭉남의 기억을 읽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도망치기 전에 따라잡

는 방법은 그로서는 단 하나밖에 없 었다.

‘끄음,역시 이 정도의 거리는 힘 드네.’

그림자 밟기.

마력을 소모해 그늘이나 어둠으로 몸을 이동시키는,마법사의 블링크 와 유사한 능력이다.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소모되는 마 력량이 정말 어마어마하다는 점.

“조금 힘들긴 하지만 뭐,결과가 좋으니까.”

스르릉.

서준호가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오늘 밤,그는 세상에서 번견 부대 를 지울 생각이었다.

“더워…… 덥다고오!”

화르르르르륵!

또 한 무리의 해골들을 녹여버린 공주하가 히스테릭한 비명을 질렀 다.


끝도없이 쏟아져오는 해골들을 녹 이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끈질긴

더위가 그녀를 괴롭혔다.

“으허헝,남극…… 남극은 시원하 겠지? 좋아,이번 일 끝나면 세종기 지로 휴가를 떠날 거야.”

그녀는 또다시 밀려오는 해골들을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빨리 방에 돌아가서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무 럭 자라날 때.

부하 팀원 하나가 황급히 달려왔 다.

“공주님!”

“왜 불러!”

“큰일 났습니다!”

침을 꿀꺽 삼킨 부하가 무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처,천상의 숨결이 보이지 않아 요!”

“……뭐?”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공주하가 재 차 확인했다.

“관계자들이 챙겨간 거 아니야?”

“아니랍니다. 분명 난전 중에 사라 진 거예요.”

“하지만 무대 위로는 해골 병사는 커녕 뼈 한 조각조차 올려보내지 않

았는데……?”

두 사람이 멍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빠진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

다른 팀원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뭐,뭐야 이 녀석들! 강해!”

공주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야! 너희는 그깟 해골들 상대로 무슨 엄살을……

그녀의 말끝이 천천히 흐려졌다.

항상 똑같은 해골만 보내오던 해골

술사가,처음으로 다른 타입의 해골 을 보냈기 때문이다.

“검은색 해골?”

모든 뼈가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해 골이 총 여섯 마리.


심지어 그 해골들은 제각각 다른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어? 저건……

부하가 해골을 쳐다보며 알은체를 했다.

“왜? 아는 해골이야?”

“아뇨. 그딴게 어딨어요…… 다만 저 녀석들이 쓰고 있는 장비들은 몇

개 압니다.”

“유명한 장비들인가?”

“……혹시 3 년 전에 2 층에서 한창 떠들썩했던 사건 기억하십니까?”

기억을 더듬던 공주하가 주저없이 입을 열었다.

“플레이어 실종 사건?”

“예. 110 레벨이 넘는 실력자들이 흔적도 없이 실종되었던 충격적인 사건이지요.”

“본론만,빨리.”

그녀의 재촉에 부하가 내용을 요약 했다.

“저 녀석들의 장비,그때 실종된 사람들이 쓰던 것들과 동일합니다.”

“……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공주하가 다 시 한 번 흑골(黑#)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평균 레벨 75 가 넘어가는 자신의 팀원들을 상대로도 한 치의 밀림이 없었다.

‘……아니,오히려 해골들 쪽으로 천천히 승기가 기울고 있어.’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은 공주하가 부하에게 물었다.

“너,실종자들의 스킬이나 전투법

은 알아?”

“예. 제가 그때 사건 조사 담당이 었어서 잘 압니다.”

“어때?”

그녀가 무엇을 묻는지를 이해한 부 하는,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무 겁게 끄덕였다.

“저 해골들이 쓰고 있는 능력이나 전투법. 모두 희생자들의 것과 일치 합니다.”

“……그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 다.


과거의 플레이어들이,언데드가 되 어 돌아왔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40 화

더 옥션(3)

서준호의 눈꺼풀이 한 차례 깜빡였 다.

불량녀의 기억을 모두 읽은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이 녀석도 그 뼈다귀 녀석이랑 다

를 게 없네.’

알고 있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다는 뜻이다.

두 사람은 마인 협회에 대해선 수 박 겉핥기 식으로만 알고 있었다.

‘번견 부대,번견 부대하더니…… 결국 이 녀석들도 소모품일 뿐이었 어.,

하지만 실망하기엔 아직 일렀다.

그들의 대장인 해골술사 아르마가 남아 있었으니까.

‘그 녀석이라면 조금 제대로 된 정 보를 가지고 있겠지.’

서준호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녀석은 구천 중 하나인 시체들 의 왕,나자드 할로우의 제자니까 말이야.’

실제로 지금 경매장을 공격하고 있 을 흑골도,모두 나자드가 직접 사 냥해서 선물한 것이었다.

“자, 그럼 이제 어쩐다.”

기억을 읽은 덕분에,아르마가 어 디 있는지는 알아낸 상태였다.

그가 말했던 B 포인트는 그들이 묵 고 있는 호텔의 객실이었다.

“하지만 거길 들어가는 건…… 미 친 짓이고.”

현재 그곳에는 아르마가 준비한 마 법 함정들이 겹겹이 설치된 상태.

마법 저항력이 부족한 자신이 문을 연다면,그 순간 사망할 것이 틀림 없었다.

‘하여튼 마법사들이란.’

쯧,서준호가 귀찮은 표정으로 혀 를 찼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대로 아르마를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들어갈 수 없다면,밖으로

불러내면 되는 거니까.”

그는 불량녀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비타를 풀었다.


익숙하게 잠금 패턴을 푼 뒤,아르 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이상한 녀석에게 쫓기는 중 이야. 서준호는 아니고,도깨비 길드 원처럼 보이지는 않아.

-물건은?

■•안 뺐겼어. 이 녀석 끈질기니 까…… 우선 호텔 옆 골목길에 숨겨 둘게. 부대의 표식을 찾아.

굳이 도와달라거나,살려달라는 메 시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이 여자는 그런 말을 내뱉는 성격 이 아니거든.’

홀쭉남도 그랬지만,불량녀도 자신 의 안위보다는 팀을 더 생각하는 사 람이 었다.

만약 자신이 살려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면,아르마는 대번에 의심을 했을 것이다.

- 알았다.

별 의심없는 메시지가 돌아오자, 서준호는 미련 없이 비타를 땅에 버 리며 입을 열었다.

“먹어치워.”

과득,과드득!

어둠의 송곳니가 무언가를 씹는 소 리만이 건물 옥상에 울려 퍼졌다.

조명 하나 켜놓지 않은 어두운 호 텔 객실.

아르마는 손을 가볍게 휘저어 홀로 그램 메시지 앱을 꼈다.

그는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생 각에 잠겼다.

‘쫓기고 있다니,대체 누구한테?’

가장 처음 의심했던 건 단연 도깨 비 길드원과 서준호였다.

하지만 그들이 아니라는 말을 들은 이상,아르마의 생각은 복잡해질 수 밖에 없었다.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 제삼자가 있다는 소리인데.’

달갑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아르마는 마법사답게,모든 일이 자신의 예상 범주 내에 있는 것을 선호했으니까.

가벼운 한숨을 내쉰 그는 손을 휘

저었다.

그러자 방 곳곳에 숨겨져 있던 마 법진들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는 자신의 흔적까지 완벽하게 지 운 뒤,호텔을 빠져나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근처 건 물의 벽에서 익숙한 표식을 찾았다.


일반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그마한 표식이었다.

‘저쪽이군.’

바로 번견 부대가 사용하는 고유의 표식이었다.

이 표식을 아는 사람은 1, 2 층을 통틀어도 다섯 명이 넘어가지 않았 다.

그 사실이 아르마의 경계심을 누그 러트렸다.

‘느껴진다.’

골목길에 들어서서 기감을 높이자, 쓰레기통 안쪽에서 강렬한 마력이 느껴졌다.

쓰레기통 뚜껑 따위로는 절대 감추 지 못하는,최상급의 마력핵이 뿜어 낼 만한 기운이었다.

드르륵.

아르마는 쓰레기통 뚜껑을 열어 찬 란하게 빛나는 보석을 집어 들었다.

“마치 얼음 같군.”

천상의 숨결을 실제로 보는 것은 아르마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때문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 건 가? 생각보다 아름답지는 않아.’

오히려 조잡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 로 무언가가 엉성했다.

동시에 아르마의 눈매가 가늘어졌 다.

“그런데…… 마력핵이 왜 이렇게

차가운 거지?”

그의 머릿속으로 한 줄기 의문이 피어나는 순간.

쩌저저적!

그가 들고 있던 천상의 숨결,아 니. 서준호가 만들어낸 ‘얼음 폭탄’ 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크윽!?”

랭커,아니 설령 구천이 오더라도 반응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거리 에서 펼쳐진 기습이다.

당연히 아르마는 이를 회피하지 못 했다.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면서 도 상황부터 파악했다.

‘오른쪽 팔과 어깨를 포함한 상체 부분이…… 모두 얼어붙었다.’

그것으로 상황 파악은 끝.

아르마의 두 눈이 빠르게 골목길을 훑었다.


그는 이미 일어난 일에 미련을 둘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기습을 성공시켰다면 그 이후에 추가타를 날려 확인 사살을 원하고 있을 터.’

상대가 어떻게 번견 부대의 표식을

알고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하가 배신을 했거나,상 대의 능력에 당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중요한 건 이 근처에 적이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부터 그 적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것만 알면 된 다.

‘대체 어디지?’

아르마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동시에 그의 몸 주변으로 흉악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홀쭉남이나 불량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마기였다

‘주변에는 없군.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건가.’

아르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는 조심성이 많은 녀석이다. 감사하게도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 " s

‘아무리 나라도 기습을 받은 직후 에 공격을 받았으면 꼼짝없이 죽었 겠지만….,

찰■나의 시간이라도 주어진다면 이 4 기는 달라진다.

“소환.”

주문을 뱉어낸 아르마가 아랫입술 을 꽉 깨물었다.

이미 공주하라는 괴물의 발목을 붙 잡아두기 위해,최상급 흑골을 여섯 마리나 소모한 상태다.

‘더 이상의 전력 누수는 원치 않았 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완벽한 상태로 2 층에 진출하고 싶 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본인이 죽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우우우웅!

아르마가 멀쩡한 왼손을 휘젓자 허 공에 마기를 가득 품은 마법진이 빠 르게 새겨졌다.

프론티어의 마탑 출신 마도사가 보 더라도 혀를 내두를 만큼 훌륭한 캐 스팅이 었다.

“나쁘지 않네.”

옆에서 지켜보던 서준호가 보기에 도 훌륭한 캐스팅이었다.

아르마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뜨여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변에선

그 어떠한 기척도,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언제……?”

대체 이 남자는 언제부터 자신의 등 뒤에 서 있었단 말인가.

피가 차갑게 식으며 등 뒤로 소름 이 쫙 돋았다.

현재 그의 오른쪽 몸은 마비.

그리고 왼쪽 손은 해골을 소환하기 위해 캐스팅을 하는 중이다.

한 마디로 완벽한 무방비 상태.

“내가 확실한 걸 좋아해서 말이 야.”

푸욱.

서준호는 자신보다 곱절은 강력한, 해골술사라는 이명까지 얻은 사내의 등을 뒤에서 찔렀다.

“커흑!”

아르마의 입에서 역류한 피가 쏟아 졌다.

마법사가 가장 취약한 타이밍은 바 로 주문을 캐스팅 하는 순간.

서준호는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만 을 기다려왔다.

“끄으…… 윽.”

아르마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향

했다.

자신의 가슴을 뚫고 삐쭉 튀어나온 날카로운 검신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건 엘릭서,혹은 그에 준하는 치 료사가 없는 이상 살아날 수가 없는 상처였다.

아쉽게도 아르마에겐 그 두 가지가 모두 없었다.

‘완벽한 패배…… 인가.’

비통했다.

이제 2 층으로 올라가,스승님에게 제대로 된 비전을 전수 받고 세상을

호령할 꿈을 품었다.

하지만 그 꿈은 2 층의 흙바닥 한 번 밟아보지 못한 채 이렇게 끝을 고했다.

주르륵.

아르마는 비통함에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의…… 이름은……?”

자신의 목숨을 거둬가는 사람의 이 름 정도는 알고 싶었다.

대체 누구일까?

누구이기에 자신의 계획을 이토록 완벽하게 파훼하고,번견 부대를 세

상에서 지우는 것일까?

아르마의 질문에 서준호는 대답 대 신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너는 지금까지 네가 죽인 사람의 부탁을 하나라도 들어준 적이 있 나?”

잠시 생각을 해보던 아르마가 자조 섞인 웃음을 피식 홀렸다.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런데 뭘 뻔뻔하게 쳐묻고 있어. 안 알려줘,새끼야.”

우드득.

그대로 검을 비틀어버린 서준호가 이를 거칠게 빼냈다.

좌아아악!

분수처럼 뿌려진 피는 더러운 뒷골 목의 벽을 흠뻑 적셨다.

해골술사,터키에서 수만 명의 시 민들을 학살하며 해골 군단을 만들 어낸 세계적인 범죄자.

두려움의 대상으로 군림하던 그는, 더러운 뒷골목에서 싸늘하게 죽었 다.

“후우.”

서준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홀러 나왔다.

일을 무사히 끝마쳤다는 안도의 뜻 도 있었지만,찜찜한 기분이 느껴졌 기 때문이다.

“마인을 죽이는 거야 뭐 새삼스럽 지도 않지만……

그들을 처치하고 떠오른 메시지를 바라보는 건 몇 번을 반복해도 좀처 럼 적응이 되질 않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 상승했습니다.]

번견 부대의 세 명을 처치하고 오 른 레벨은 총 두 개.

앞선 두 사람을 잡았을 때는 레벨 이 안 올랐는데,아르마를 잡으니 무려 두 개가 올랐다.

‘아르마의 레벨이 더 높고…… 보 유한 스킬들의 랭크도 높았기 때문 인가 보네.’

상념을 지워낸 서준호는 싸늘한 눈 빛으로 아르마를 내려다봤다.


“너는 뭘 좀 알고 있었으면 좋겠 어.”

그의 손이 해골술사의 뒤통수를 누 르자,새로운 기억들이 눈앞에 떠올 탔다.

-소환 계열이라? 흔치 않은 재능 이로군. 위쪽에서 마음에 들어 하겠 어.

-호오,이게 얼마만의 1 급 관리품 입니까?

-영광스럽게 생각해라. 나자드 할 로우 님께서 너의 재능을 마음에 들 어 하셨다.

-지금 이 시간부로 너를 번견 부 대의 대장으로 임명…….

-우리 마인 협회의 최종목적은 탑 을 지배하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네가 2 층에 올라가면…….

“아,또 이러네.”

서준호가 돌연 인상을 찌푸렸다.

[스킬의 등급이 낮아 대상의 기억

을 완벽하게 재생할 수 없습니다.]

[사용자의 안전을 위해 스킬을 강 제종료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억들은 모 조리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단편적인 부분들 뿐.

물론 그것만 해도 커다란 수확인 것은 맞았다.

현재 각국의 정부나 플레이어 협회 에서는 마인들의 꼬리조차 못 잡고 있었으니까.

“후우,그나저나 정말 쓰레기 같은 놈들이야.”

서준호가 아르마의 기억 속에서 읽 어낸 것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바 로 고아원이었다.

‘고아들을 이용해 마인을 양성하다 니……

마인 협회에서는 고아들을 훌륭한 마인으로 키워내기 위해 따로 고아 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의 혹독한 훈 련을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은 가차 없이 버려졌다.

심지어 그들은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마인이 되기 전까지는 일개 관리품으로 여겨졌다.

‘아르마도 고아원 출신의 플레이어 중 하나.’

서준호는 두 눈을 감았다.

마인 협회.

그들이 쓰레기 집단이라는 걸 나름 잘 안다고 자부했건만,아무래도 새 발의 피였나 보다.

‘알게 된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 어.’


이 사실은 덕구에게 전달해 확실하 게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서준호는 해골술사의 손가락에 끼 워져 있던 반지를 빼내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투박 한 은반지.

하지만 이를 쳐다보는 서준호의 표 정은 흥미로워 보였다.

“재미 있네.”

그것은 지구가 아닌 2 층,프론티어 에어리어의 던전에서 발굴된 것으 로.

“나자드 할로우 녀석,마인 주제에 제자는 끔찍하게 아끼네?”

무려 유니크 등급의 반지였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41 화

제가 선물 줄게요

“아이템 감정.”

서준호는 반지의 정보를 확인했다.

기억을 통해 효과는 알고 있었지 만,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 고 싶었기 때문이다.

[버프 오라 링]

등급 : 유니크

착용자와 반경 30 미터 거리 내의 아군과 소환수를 강화시켜주는 ‘강화 버프’를 생성.

★ 강화 버프 : 모든 능력치 +5 증 가.

착용 제한 : 레벨 25, 모든 능력치 60 이상.

“크……

서준호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흘러 나왔다.

‘프론티어산 아이템이 좋다는 이야 기는 몇 번이나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단순히 반지를 착용하는 것만으로 도 모든 능력치 상승 효과를 영구적 으로 누릴 수가 있다.

게다가 이 반지는 소환사라면 눈이 돌아갈 만한 물건이었다.

‘거리 제한이 있지만,본인뿐만 아 니라 소환수까지 버프 오라가 적용 되다니.’

그야말로 소환사에겐 꿈의 아이템 이나 다름없는 반지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착용 제한 레벨 에 비해 능력치 제한이 조금 과하다 는 점.


하지만 자신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모든 능력치는 60 을 돌파한 상태였으니까.

레벨만 세 개를 더 올리면 언제든 지 이 반지를 착용할 수 있다는 소 리였다.

“넌 조만간 꼭 다시보자.”

서준호는 은반지를 인벤토리에 고 이 모셔두었다.

25 레벨이 되는 날,이 반지는 자신 의 열 손가락 중 하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다른 건 뭐,볼 필요 없을 것 같 고.”

아르마가 걸친 아이템들은 대부분 레어 이상의 아이템들이었다.

하지만 모두 마법사,혹은 소환사 를 위한 것들뿐.

굳이 팔려고 한다면 블랙마켓을 통 하는 방법이 있었으나,서준호는 굳 이 그러지 않았다.

‘그깟 돈 몇 푼 벌겠다고 꼬리가 밟힐 만한 짓을 할 수는 없지.’

그는 오히려 아르마의 옷을 가만히 내버려 둔 채,자신의 흔적들을 지 우기 시작했다.

자신의 지문이나 발자국 등을 완벽 하게 지워낸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 을 지었다.

“완벽해.”

아마 사이코메트리 관련 능력자가 와도 자신을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스카야의 어깨너머로 배웠던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네.’

마력을 이용해 자신의 흔적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방법.

무려 대마도사가 직접 고안한 방법 이었으니까.

다음 날 아침,공주하는 퀭한 눈등 자로 부하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판다 처럼 진하게 드리워진 상태였다.

“아직…… 아직 못 찾았니?”

“죄송합니다,못 찾았답니다.”

“아흐으응.”

공주하의 입에서 울먹임에 가까운 한숨 소리가 홀러나왔다.

“해골술사 놈,대체 어디 있는 거 야?”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간밤 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젯밤,그녀가 팀원들과 함께 흑 골을 상대하고 있었을 때.


별안간 모든 해골들이 가루가 되며 사라졌다.

“뭐,뭐야. 다 죽은 겁니까?”

“어떻게 된 일이지?”

팀원들이 어리둥절하자,공주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상황을 추리했다.

“정신 차려. 멀쩡하던 녀석들이 갑 자기 죽을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해골술사가 일부러 소환 을 해제했다는 소리로군요.”

“그래. 아마 본래 목적이었던 천상 의 숨결을 안전한 장소까지 빼돌렸 을 거야.”

공주하가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더 싸웠으면 위치를 알아 낼 수 있었는데……

그녀는 싸우는 도중에도 흑골들의 몸에 이식된 마력의 패턴을 분석했

다.

아주 조금만 더 파고들었으면 해골 술사의 위치를 알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해골술사,적이지만 정말 똑똑한 녀석이야.,

설마 자신이 마력을 역추적하는 시 간까지 완벽히 계산해서 소환을 취 소할 줄이야.

정말 무시무시한 녀석이다.

“……지금 몇 시야?”

“오전 7 시입니다.”

“아흑.”

그때부터 공주하는 호텔 프론트 소 파에 앉아 보고만 기다리는 중이었 다.

혹시라도 해골술사가 발견되면 바 로 움직이기 위해 한숨도 못 잔 상 태.

잠을 좋아하고 늦잠을 사랑하는 그 녀에게는 이보다 더한 고문이 없을 정도였다.

“공주님.”

“하으으음. 왜애애.”

하인호의 부름에 공주하가 졸린 눈 을 부비면서 대꾸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조심스럽게 상 자 하나를 건넸다.

“누군가가 공주님 앞으로 남긴 물 건이라고 하는데요.”

“……뭐야,팬이야?”
공주하는 피곤한 와중에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는 세계적인 랭커인 것도 모자 라 귀여운 외모까지 갖춘 희귀한 존 재.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 또한 굉장히 많았다.

팬클럽의 회원 수만 벌써 3 천만

명이 넘은 상태였다.

“아니이 뭘 자꾸 이런 걸 준대...... 내가 팬 싸인회 같은 자리 아니면 선물 자제하라고 카페 공지에다


놓기까지 했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굉장 히 뿌듯해 보였다.

상자를 들고 있던 하인호는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 었다.

“그런데 내용물이 좀……

“......왜? 설마 또 이상한거야?” 공주하가 덜컥 겁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

이따금 그녀를 위한답시고,피부에 좋다고 소문난 천년독사의 허물 같 은 징그러운 것들을 보내는 극성팬
도 있었으니까.

의외로 겁이 많은 공주하는 그런 선물들을 받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 라곤 했다.

“아니 뭐,징그러운 물건은 아니에 요. 어떤 의미로는 놀랍기는 하지만 요.”

“……대체 뭐가 들어 있는데 그 래?”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는 상자의 뚜 껑을 열어보았다.

안쪽에는 큼지막한 보석 하나가 들 어 있었다.

“어? 이거……

저도 모르게 그 보석을 들어 올린 공주하가 중얼거렸다.

“와아, 진짜 잘 만들었다. 경매장에 서 본 천상의 숨결이랑 똑같이 생겼 어.”

“진품 맞답니다. 지금 경매소 관리 인에게 감정받고 오는 길이에요.”

“뭐!?”

깜짝 놀란 공주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품이라니? 그건 해골술사 쪽에 서 가져갔잖아?”

“그래서 놀랍다고 했잖아요.”

어깨를 으쓱거린 하인호가 포스트 잇을 한 장 내밀었다.

“상자 안에 함께 들어 있던 쪽지인 데,보실래요?”

“볼래!”
포스트잇을 받아든 공주하는 화려 한 영문 필기체로 쓰여진 내용을 읽 어 내렸다.

-해골술사 외 마인 2 명 처치. 천상

의 숨결 탈환. 해골술사는 XX 호텔 의 뒷골목에 위치. by 지나가던 당 신의 팬.

“헐.”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 렸다.

“내,내 팬이 상황을 다 끝내놨다 는데?”

“그렇다네요.”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뭐 어때요? 아무튼 잘 해결됐잖습

니까. 위약금을 물어낼 필요도 없 고.”

하인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상의 숨결 못 찾았으면 엄청나 게 물어내야 했을걸요.”

“하으,너무 감사하다…… 혹시 이 분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없을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은데.”

“저라고 시도해 보지 않았겠어요? 당장 해골술사의 시체부터 조사했 죠.”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체 어떤 대단하신 팬이 납셨는 지는 몰라도,흔적일랑 아무것도 남

겨놓지 않았어요. 제대로 된 프로의 솜씨입니다. 최소 랭커인 건 확실한 데,누구인지는 짐작조차 못


하겠네 요.”

“아,누구지? 진짜 궁금해 죽겠 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며 랭커들의 이름을 줄줄 늘어놓던 순간.

그들의 앞으로 익숙한 사람이 지나 갔다.

“어? 어어!”

그를 알아본 공주하가 두 눈에 쌍 심지를 키며 그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오!”

쿵쿵!

바닥을 찍으며 걸어간 공주하는 몸 을 돌리는 서준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상대는 산뜻한 미소와 함께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아,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치임〜?”

팔짱을 낀 공주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서준호를 홀겼다.

“아니,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예?”

“와아,아예 모르는 척을 하시겠 다? 어제 도망갔잖아요!”

“도망? 제가요……?”

서준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제 의 일을 떠올렸다.

‘아아,설마……

그는 그제야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번견 부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재 빨리 움직인 것뿐이었지만,그녀의 입장에선 도망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으니까.

“어라,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화장 실 간다면서 도망쳤죠? 상습범이시 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공주하는 누 가 봐도 단단히 화가 난 모습이었 다.

그녀는 서준호에게 업계 선배로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스파이더맨 안 보셨어요? 큰 힘에 는 큰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왜, 예전에 어둑서니 좌께서도


말씀하셨 거든요? 플레이어의 힘은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제가요?”

"뭐래요? 그쪽 말고 어둑서니 좌께 서 말씀하셨다고요.”

“아아,어둑서니…… 좌요.”

서준호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억 지로 감추며 어색한 웃음을 홀렸다.

‘내가 저딴 말도 했던가?’

솔직히 기억도 잘 안 난다.

애초에 인터뷰에서 했던 말들 중 절반 이상은 대본이었으니까.

“앞으로는 일 터지면 도망부터 가 지 마시고,시민들의 안전도 좀 지 켜주라 이거예요. 아시겠어요?”

“……명심하겠습니다.”

한바탕 훈계를 내린 공주하는 지난 일은 금방 잊는 스타일인지,다시금 화를 풀었다.

“빠른 반성 보기 좋네요. 아참,그 리고 뱀 머리 씨는 혹시 이게 뭔지 아세요?”

그녀는 자랑이 하고 싶어 미치겠다 는 얼굴로 포스트잇을 팔랑팔랑 흔 들었다.


“모르겠는데요.”

“아니 글쎄에,제 팬 중 한 명이 간밤에 해골술사랑 마인들 다 때려 잡고 천상의 숨결을 저한테 보내놨 지


뭐예요? 아이참,누구 팬이길래 그렇게 솜씨가 좋은지…… 아참,내 팬이었지?”

그녀는 무척이나 뿌듯한 표정을 짓

고 있었다.

만약 꼬리가 달려 있다면 그것도 열심히 흔들 것 같은 표정이랄까.

“인호가 보기에는 최소 랭커라고 하던데,누구일지 궁금하네요.”

“……랭커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노노,그럴 리가 없어요.” 검지손가락을 좌우로 흔든 공주하 가 피식 웃었다.

마치 서준호가 몰라도 한참이나 모 르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인호가 해골술사의 시신을 뒤져봤 거든요? 조그마한 흔적조차 못 찾았

대요.”

“그래요?”

“네. 대단하지 않아요? 인호도 나 름 랭커인데 흔적조차 못 찾다 니…… 얼마나 대단한 플레이어일까
요?”

이번에는 서준호의 표정이 뿌듯해 졌다.

랭커조차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자 신의 뒷처리가 완벽했다는 뜻이었으 니까.

“음,게다가 영어 필기체가 이렇게 자연스러운 걸로 봤을 때…… 아무 래도 미국인이겠죠? 미국에 랭커가

누가 있더라.”

“……굳이 지금 알려고 할 필요가 있습니까? 언젠가 정체를 밝히고 싶 으면 스스로 말하겠죠.”

“그,그렇죠? 이렇게 알아내려고 하는 건 실례겠죠?”

머쓱한 표정을 지은 공주하는 포스 트잇을 인벤토리에 조심스럽게 보관 하고는 말했다.

“이제 뱀 머리 씨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저는 일이 끝났으니 어제 경매장에서 낙찰받은 물품들 받고


잠부터 잔 후에,다시 2 층으로 올라 가볼 생각인데.”

“저도 경매가 끝난 이상 이곳에 볼 일은 없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죠.”

“그러고 보니 어제 이상한 공이랑 목걸이 하나 낙찰 받으셨죠?”

“예. 수령을 여기서 받으면 된다고 들어서 왔는데요.”

“저쪽 데스크로 가시면 돼요.”

한 쪽 벽을 가리킨 공주하는 시원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막상 헤어진다니까 조금 섭섭하네 요. 막간에 다시 한 번 물어보는 건 데,저희 길드 오실래요?”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치,또 까였네.”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공주하는 오 른손을 척하고 내밀며 악수를 요청 했다.

“그럼 다음에 볼 때까지 건강하시 구요. 아마 다음에는 2 층에서 보게 되겠죠?”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 다.”

“후흐흥,다들 말은 그렇게 해요. 레벨이 오를수록 압박감이 심해져서 문제지.”

“두고 보시면 알 겁니다.”

“오올,자신감이 대단하신데요? 좋 아요. 반년 안에 2 층에 올라오시면 제가 선물 줄게요.”

“만약 못 가면요?”

“그때는 뱀 머리 씨가 제 소원 하 나 들어주기. 어때요?”

그 소원이 무엇인지는 훤히 들여다 보였다.

아마 자신의 길드로 오라는 것이겠 지.

“나중에 딴 소리하기 없습니다.”

물론 자신이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

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서준호는 그녀의 조그마한 손을 마 주잡았다.

“낙찰 받으신 알 수 없는 공과 체 력 재생의 목걸이입니다.”

서준호는 경매 창구의 직원이 내미 는 고급스러운 원목 상자를 받아들 었다.

딸깍,상자를 열자 부드러운 천에 쌓인 공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이게 뭘까?’

자신이 이것을 왜 원했는지는 아직 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강렬한 직감(B) 스킬이 그 렇게 강하게 외쳤을 때는 항상 분명 한 이유가 따랐다.

“아이템 감정도 안 되네.”

공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서준호는 마력을 한 번 불어넣어봤다.

우우웅. 그러자 잠깐이지만 공이 크게 진동했다.

마치 예전에 쓰던 스마트폰이 울리 는 것 같은 울림이었다.

‘하지만 딱히 바뀐 건 없는 것 같 은데……
서준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공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앞으로 심심할 때마다 꺼내서 마력 을 불어넣어볼 생각이었다.

“뭐,언젠가는 결과가 나오겠지.”

그 결과가 죽이 될지,밥이 될지는 오직 시간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42 화

권 노야(1)

서준호가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고 있을 무렵.

2 층,프론티어에선 한 남성이 자신 의 주택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응?”

남자는 현관문 앞에 떨어진 택배

상자를 들어올렸다.

“텔레포트 배송…… 그것도 1 층에 서 온 택배라고?”

텔레포트 배송은 가격이 비싸지만, 몇 시간 만에 상대에게 보내준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그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층을 오가는 택배,그것도 텔레포 트 배송은 일반인이 부담하기에는 제법 가격대가 있다.

“뭘 시킨 기억은 없는데……

그는 발송인이 불분명한 택배 상자

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마인 녀석들의 함정인건가?’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는 최근 비밀리에 마인들의 뒤를 밟고 있었으니까.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려 폭발에 대 비한 남자는 택배 상자의 포장을 뜯 기 시작했다. "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포장지 밑에 는 고급스러운 상자가 들어 있었다.

“이건……

그는 상자에 각인된 표식을 알아보 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모르겠는가.

그것은 최근 2 층에까지 화제가 된 세계 최대 규모의 경매.

더 옥션의 마크였으니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자를 열자, 안쪽에는 제법 세련된 목걸이가 놓 여져 있었다.

“아이템 감정.”

그것이 레어 등급 목걸이라는 것을 알아낸 남자는 더욱 큰 혼란에 빠졌 다.

‘체력 재생의 목걸이라…… 대체 누가 나에게 이런 걸?’

고민을 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 다.

가족도,동료도,심지어 소속된 길 드조차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자 신에게 이런 선물을 보낼 사람은


없 었으니까.

‘음? 쪽지인가.’

상자 귀퉁이에 꽂혀 있는 쪽지를 발견한 그는 빠르게 그것을 읽어 내 렸다.

-항상 건강하길 바란다. 반 년 안 에 올라갈게. 너의 삼촌이.

쪽지를 몇 번이고 읽은 남자는 말 없이 고개를 들어 별이 반짝이는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별처럼 반짝이기 시작했 다.

‘반년이라…… 슬슬 움직이시려는 건가.’

기대감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걱 정이 앞섰다.

2 층은 자신의 삼촌이 알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내 어깨를 으쏙거리 며 웃음을 홀렸다.

“나도 참,내가 지금 누굴 걱정하 는 건지.”

그의 이름은 아서 그린.

길베르토 그린의 아들이자,5 영웅 이 제 조카처럼 여기던 남자였다.

인천 공항의 게이트를 나선 서준호 가 두 눈을 꿈뻑거렸다.

전혀 기대도 안 했던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언제나처럼 깔끔한 정장을 입은 차 시은이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중얼 거렸다.

“아,미안해요. 솔직히 공항까지 마 중 나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귀국하는 상사를 모시는 것 또한 비서의 업무니까요.”

자연스럽게 서준호를 이끈 그녀는 차량의 조수석에 탑승하며 물었다.

“따로 들르실 곳이 있으신가요? 아 니면 바로 협회로 갈까요?”


“협회로 가주세요. 그리고.”

서준호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잘 포장된 책자를 꺼내들었다.

“선물이에요. 뭘 사야 될지를 몰라 서 그냥 책 한 권 사왔는데…… 마 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저야 주신다면 무엇이든 감사히 받겠……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 던 차시은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 다.

서준호의 손에 들린 책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잔잔한 파문이 일어났다.

“자,잠시만요. 혹시 할리우드에서 영화 제작까지 결정 난 판타지 소 설,〈게이츠 가의 막내아들〉을


사오 신 거예요? 그것도 양장본으로 ..!?”

“어라,이 소설 아세요? 베스트셸 러 칸에 딱 한 세트 남아 있던데.”

“알다마다요! 저 알아요!”

입을 조그맣게 벌린 차시은은 마치 세뱃돈을 받듯,두 손을 공손하게 내밀어 책을 받았다.

잠시 책을 바라보던 그녀는 보물이 라도 다루듯 이를 꼬옥 안으며 고개 를 숙였다.

“이거 제가 어떻게든 원서를 구해 보려고 했는데 번번이 실패한 책이 거든요.”

“그래요? 뭔가 좀 뿌듯하네요.”

서준호는 행복한 표정을 짓는 차시 은에게 말했다.

“지금 바로 읽으셔도 됩니다.”

“그,그럴 수는…… 아직 업무 시 간인걸요.”

대답은 진짜 멋있는데, 갈 곳 잃은 눈빛은 거칠게 요동치는 중.

“정리하실 서류라도 남아 있습니 까?”

“서류는 공항 오는 길에 다 처리해 놓기는 했는데요……

“그럼 뭐가 문제예요?”

피식 웃음을 흘린 서준호는 시트 깊숙히 몸을 파묻었다.

“독서 잘하시고,도착하면 깨워주 세요.”

잠시 고민을 하던 차시은이 기어들 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잘 주무세요……

그로부터 몇 분이나 지났을까.

서준호는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를

ASMR 삼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여어〜 명탐정 씨 오셨나?”

협회장실로 들어서자,덕구가 특유 의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 었다.

이에 서준호는 뚱한 표정으로 되물 었다.

“명탐정? 갑자기 무슨 소리야.”

“원래 명탐정이 가는 곳마다 막 사 건 터지고,테러 일어나고 그러거든.

마치 너처럼.”

“난 또 뭐라고……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은 그는 면 세점에서 사온 양주부터 꺼내 들었 다.

“자,발베니 1975. 선물이야.”

“비싼 거 사왔네? 그런데 어쩌냐, 나 지금 금주 기간이라서 술 못 마 시는데.”

“그럼 나중에 마시면 되지.”

서준호는 수백만 원 짜리 양주를 들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덕구 에게 말했다.

“오는 길에 아서한테 연락 한 번 했어. 반년 안에 올라가겠다고.”

“그건 정말 잘했다. 그 녀석,많이 힘들었을 텐데 혼자서도 참 올곧게 자랐어.”

“얼굴 본지 꽤 됐나 봐?”

“2 층에 올라간 후로는 한 번도 안 내려왔거든. 1 층에선 아버지가 자꾸 생각난다고……

“쓰으읍.”

괜히 입맛이 써진 서준호는 화제를 돌렸다.

“아참,그리고 공주하 팀장한테 들

어보니…… 나한테 준 초대장이 평 범한 게 아니라며?”

“들었냐?”

심덕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 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내가 그만큼 널 아끼니까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 한 번 한 거 야.”

“아,징그럽게 왜 그래?”

“흐흐,그 징그러움이 언젠가는 널 한 번 살려줄 거다.”

다 큰 친구 녀석의 애정에 괜히 머쓱해진 서준호가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나 부탁 하나만 하자.”

“부탁? 뭔데?”
“고아원 하나를 찾고 있어.”

“……갑자기 웬 고아원?”

심덕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친구가 왜 고아원을 찾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 제법 무거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까.”

서준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 를 시작했다.

자신에게 죽은 자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번 라스베가스 경매에서 번견 부대를 해치운 것이 자신이라 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마인들이 고아들을 마 인으로 양성하는 시설에 대한 이야 기까지.

이야기가 끝났을 때,심덕구의 얼 굴은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 었다.

“……지금 한 말,모두 사실이냐?”

“어. 하지만 고아원의 자세한 위치 는 모르겠어. 다만 국내에 있는 건 확실히 아냐.”

“젠장,이놈들은 왜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걸 몰라!”

주먹으로 의자 손잡이를 쿵 내려찍 은 덕구는 씩씩거리면서 열을 냈다.

그만큼 고아원의 존재는 그에게 충 격적으로 다가왔다.

“……후우,약속할게. 그 부분은 내 가 반드시 알아낸다.”

“부탁 좀 하자.”

한참을 씩씩거리던 덕구는 발베니 1975 의 코르크를 땄다.

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서준호가 물었다.

“너 금주 기간이라며?”

“아씨 몰라! 그렇게 열 받는 이야 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 어.”

“기다려봐.”

서준호는 순식간에 서리 능력을 사 용했다.

그러자 글라스 잔 안으로 몇 개의 얼음이 생성되었다.

술을 따른 두 사람은 이를 목구멍 에 털어 넣었다.

“크으……
독한 양주의 뒷맛에 오만인상을 찌 푸린 덕구가 입가를 홈치며 말했다.

“권 노야가 너 부르더라.”

“노야가 나를?”

“어. 미국가기 전에 제작 요청한 검 있잖냐,그거 내일 완성되는데 직접 주고 싶대. 슬슬 만나도 구설


수가 돌지 않겠다 싶은 거지.”

“……과연.”

서준호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고개 를 끄덕였다.

과거에 그가 깨어난 직후 권 노야 와 만나지 못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당시의 나는 이름값이라고는 쥐뿔 도 없었으니까.’

반면 권 노야의 명성은 고고한 성 벽처럼 높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 다.

“네가 보기엔 어때? 내가 노야를 만나도 될 정도의 명성은 쌓았다고 생각해?”

“뭐,2 층의 랭커들까지 포함하면 아직도 한참은 멀었지만…… 1 층 한 정으로는 제법 이름을 날리는 편이


지. 네 행보가 워낙에 충격적이었으 니까.”

대외적으로 알려진 서준호의 레벨 은 15 남짓.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명세가 남다른 이유는 단순했다.

“역시 미공략 게이트들을 클리어한 게 컸구나.”

“네 작전이 제대로 먹혀든 거지.”

미공략 게이트에만 들어가더니,결 국 대한민국을 특급 안전지대로 만 든 신인 플레이어.

남들은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 던 것을 그가 해냈기 때문이다.

“내일이라고 했지?”

“그래,아침 일찍 한 번 가봐.”

“알았어. 그럼 나는 이만 쉬러간

다.”

심덕구는 방을 나서는 친구를 보며 피식 웃었다.

“녀석,오랜만에 노야 만난다고 신 났군.”

어깨를 으쓱거리며 술을 한 잔 더 마신 그는, 웃음기를 싹 거두며 비 서에게 전화했다.

“전 세계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 고 아원의 리스트 작성해서 올려주게.”

그는 이번 일을 절대 대충 조사할 생각이 없었다.


날이 밝자 서준호는 인사동의 플레 이어 마켓으로 향했다.

마켓 안쪽에 형성된 공방 거리.

그곳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대장간 이 바로 권 노야의 공방이었다.

서준호는 25 년이라는 세월이 홀렸 음에도 바뀐 것이 없는 공방을 그리 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권 노야의 손자도 많 이 자랐겠어.’

그를 떠올리자 피식 미소가 흘러나

왔다.

갈 때마다 항상 권 영감에게 혼나 고 울고 있길래,매번 아이스크림을 사주던 녀석이다.

영웅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니는 게 강아지 같아서 제법 귀여웠는데.

‘그 내성적이고 비실비실하던 녀석 이 어떻게 컸을지 궁금하네.’

덕구에게 듣기로는 권 노야에게 공 방을 물려받은 그 울보가 현재 공방 의 주인이라고 했다.

공방으로 가까이 걸어가자 귓가로 규칙적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까앙! 까앙! 까앙!

공기를 울리는 망치질 소리는 굉장 히 맑고 깨끗했다.

그 울보 꼬맹이,영감한테 아주 제대로 배웠나본데?,

기대를 안고 공방의 문을 두드리 자,이내 망치질 소리가 멈췄다.

“누구십니까?”

현관문이 열리며 공방 내부의 뜨거 운 열기가 그대로 홀러나왔다.

그와 함께 어깨가 떡 벌어진 191

cm 의 근육질 거한이 걸어 나왔다.

그는 본인이 대장장이임을 증명이 라도 하듯,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작업복까지 입은 상태였다.

'잠깐. 그렇다는 말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던 서준호가 눈만 깜빡거렸다. "

,이 녀석이 권 노야의 손자라고?, 예전에는 강아지처럼 귀여웠는데,

25 년 사이에 무슨 헬 하운드가 어 있다.

그사이에 서준호를 알아본 상대는 인사를 건네왔다.

“아,서준호 플레이어군요. 협회에 서 연락은 받았습니다. 들어오세요.”


가게 안쪽으로 들어서자,깔끔하고

정갈한 공방의 내부가 눈에 들어왔 다.

벌써 몇 대에 걸쳐 야장(治匠)일을 하고 있는 가문이니,실력 하나는 확실하다.

‘노야는 아마 위층에 있겠지.’

서준호가 한쪽에 위치한 계단을 쳐 다보면서 생각하던 찰나.

“그놈 참,얼굴 한 번 보기가 더럽 게 힘들구나.”

몹시 익숙한,꼬장꼬장한 음성이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이에 천천히 몸을 돌린 서준호는 백발과 수염이 무성한 노인을 향해

살포시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야,노야.”

무려 25 년만의 재회였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43 화

권 노야(2)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아무 말 없 이 서로를 쳐다봤다.

권 노야의 손자인 권팔모는 어둑서 니의 얼굴을 몰랐지만,권 노야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둑서니의 가면을 만들 어준 것이 바로 본인이었으니까.

두 사람은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처 럼 허울 없이 지내던 사이이기도 했 다.

그는 한쪽 눈을 찌푸린 채 서준호 를 악동 바라보듯 보는 중이었다.

“저기…… 혹시 두 분이서 이전에 만나신 적이 있으세요?”

권팔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 지만 권 노야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게 있다. 팔모야,손님 대접 하게 아가릿 차나 한 잔 내오거라.”

“예? 아니 그 귀한 차를요……?”

권 노야가 고개를 끄덕이자,거한

은 연신 서준호를 힐긋거리더니 부 엌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서준호가 피 식 웃었다.

“제 할아버지 말 잘 듣는 건 여전 하네.”

“네놈이 뭘 몰라서 그래. 말 안 들 을 땐 또 지지리도 안 듣는다.”

서준호는 모루 위에 올려진 검 한 자루를 집어들었다.


“그래도 노야한테 그렇게 혼나고 울면서 배우더니 제대로 배웠네. 훌 륭한 검이야. 무게 중심도 완벽하
고.”

“……홍,아직도 가르칠 게 산더미 야.”

“하여간 칭찬에 서투른 것도 여전 해.”

실실거리며 웃은 서준호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왜 환영 인사 안 해줘요? 나 돌아왔는데 기쁘지 않나?”

“기쁘긴!”

오만인상을 쓰며 얼굴을 콱! 구긴 권 노야가 징그럽다는 듯 그를 쳐다 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결국 그는 인

상을 풀며 서준호의 어깨를 툭툭 두 드려 주었다.

“……욕 봤다.”

“고마워요. 노야는 여전히 정정하 네. 성격도 조금 유해진 것 같고.”

“아부해도 나오는 건 없다. 일단 앉어.”

노야는 서준호에게 의자를 권해주 기 무섭게 질문부터 던졌다.

“대체 이유가 뭐야?”

“아니,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물 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요?”

“덕구 녀석에게 대강의 사정은 들

었다. 하지만 복귀를 한 결정적인 이유는 듣지 못했지.”

“음,백문이 불여일견이겠죠.”

서준호는 손가락을 튕겨 서리 결정 을 허공에 두둥실 떠을렸다.

그것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 던 권 노야가 입을 열었다.

“설마 서리 여왕의 능력인 게냐?”

“응,그녀의 능력을 얻었고 동료들 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어 요.”

“과연.”

권 노야는 그 말 한마디에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한 이유라면,정이 많은 눈앞 의 바보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복 귀할 만했으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도 다시 잘해보자 구요. 어차피 우리는 종신 관계였으 니까.”


“흐음?”

그때,권 노야가 의미심장한 콧소 리를 냈다.

“내가 종신 계약을 맺은 건 어둑서 니였지,서준호라는 풋내기가 아니 었다만?”

“에이 진짜 치사하게…… 농담이

죠?”

서준호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묻자 권 노야가 으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장난이다. 오랜만에 그 멍청한 얼 굴이나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다.”

“나 진짜 잘생긴 얼굴이라니까 자 꾸 그러네.”

“기생오래비처럼 생겨서 잘생기기 는 개뿔. 우리 팔모처럼 남자다워야 잘생긴 거지.”

“……아,그러세요.”

그가 손자 자랑에 빠지기 직전,서 준호는 용건부터 꺼냈다.

“내 검이 완성되었다길래 찾아왔 어.”

“용골로 만들어달라던 것 말이냐? 그거야 완성됐지.”

“의뢰 신청한지 닷새밖에 안 된 것 같은데,왜 이렇게 빨라요?”

“흥,그새 까먹었더냐?”

권 노야가 뒤쪽 선반에서 흑색 검 집 하나를 들고 오며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위해 망치를 들고,너 는 나를 위해 검을 든다. 그것이 너 와 내가 나눈 약속 아니었더냐.”

“그거 내가 했던 말은 아니죠? 너

무 오글거리는데.”

“……크흠,무기나 확인해봐라.”

그에게서 검집을 받아든 서준호의 눈이 반짝였다.

용의 뼈로 만들어진 검집의 중앙에 는 붉은색으로 권 노야의 공방 마크 가 각인되어 있었다.

“검빨 조합이라…… 간지 죽이네 요.”

“그 안에 있는 놈은 더 죽인다.”

권 노야의 자신만만한 포부에 침을 꿀꺽 삼킨 서준호가 검의 손잡이를 바라봤다.

검집과 똑같은 흑색 손잡이는 용의 머리 형상을 띄고 있었다.

기대감과 설렘으로 가볍게 멸리는 서준호의 손이 그 손잡이를 꽉 쥐었 다.

‘……내 손의 형태랑 딱 들어맞아.’


25 년이 지났지만,그가 여전히 자 신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괜히 가슴 한쪽이 시큰해진 서준호 는 빠르게 검을 뽑았다.

스아아앙!

주변 공기를 잘라내는 듯한 날카로 운 소리와 함께,검이 뽑혀 나왔다.

용의 입에서부터 뻗어져 나온 아름 다운 은색 검신이 두 눈을 사로잡았 다.

예술품처럼 느껴지는 검의 월리티 에 입만 쩍 벌리고 있을 때,귓가로 잔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 녀석아,요즘 누가 용 골만 덜렁 던져주면서 검을 만들어 달라고 하느냐? 용골과 신소재를 좀


섞어봤다.”

“아아,그래서 삐까번쩍하군요. 뼈 로만 만들었으면 이렇지 않았을 텐 데.”

“용의 뼈만 사용한 것보다 마력 전

도율과 내구도가 놀랄 만큼 상승했 을게야.”

“확인해 볼게요,아이템 감정.”

동시에 아이템의 정보가 눈앞에 떠 올랐다.

[흑룡아 (黑龍공)]

등급 : 유니크

*튼튼한 무기 : 이 검은 굉장히 튼 튼합니다. 쉽게 날이 무더지거나 녹 슬지 않습니다.

★치명적인 상처 : 이 검으로 입힌 상처는 간단히 치유되지 않습니다.

★끈질긴 사냥꾼 : 검신에 피가 묻 어 있으면, 상대방의 대략적인 위치 를 알 수 있습니다.

착용 제한 : 레벨 23, 근력 60 이 상,속도 60 이상.

“……그래,이게 검이지.”

지금까지 협회 무구 보관실에 굴러 다니던 보급형 검을 사용하던 서준 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보통 야장들이 만든 아이템들은 대 부분이 노말,조금 잘 만들어졌다 싶으면 매직 등급이다.

하지만 권 노야는 지구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나기로 이름이 높은 야 장중한명.

그 때문인지 흑룡아의 등급은 무려 유니 크였다.

“실력은 여전하시네요. 검은 용의 송곳니라,엄청난 검이야. 마음에 들 어.”

“실력이 여전해? 오히려 더 늘었다 이놈아.”

검을 받은 서준호가 아이처럼 좋아 하자 권 노야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미소를 지었다.

“하여튼 고얀 녀석. 뒷방에서 바둑


이나 두면서 쉬려고 했더니 나타나 서 일을 또 시키는구나.”

“노야 성격에 무슨 뒷방에서 바둑 이야. 그리고 바둑도 못 두면서.”

“내 바둑 실력이 예전이랑 똑같은 줄 아느냐? 이젠 잘 둬!”

서로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의 사이 로 결국 바둑판이 깔렸다.

그때,앞치마를 두른 권팔모가 찻 상을 들고 나타났다.

“뜨거우니 조심히 드세요.”

뜨거운 찻잔을 내려놓은 그는 권 노야가 자리를 비워달라고 눈짓하자 2 층으로 올라갔다.

“귀한 차야. 홀리지 말어.”

“노야도 참,나도 비싸다는 차는 다 마셔봤는데 뭘.”

하지만 후후 불어 차를 조금 마신 순간,서준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뭐야 이 차……

“끌끌끌,머리가 맑아지지? 눈도 막 시원해지고? 막막 더 마시고 싶 어지지?”

“이거 대체 무슨 차예요?”

“그건 바둑에서 이기면 알려주지.”

권 노야의 얄미운 웃음에 서준호는 바둑돌을 집었다.

그리고 30 분 후,권 노야는 애꿎은 바둑돌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아니 뭐 이런 똥 같은 게임이 다 있누.”

“바둑 그렇게 두는 거 아닌데

“시끄러워 이놈아!”

차갑게 식은 차를 한 입에 털어넣 은 권 노야는 약속이 떠올랐는지 입 을 열었다.

“네 녀석, 아인종(亞人種)이라고 들어보았느냐.”

“인간과 유사하면서 지성도 있는

몬스터,오크나 엘프…… 밴시 같은 녀석들 아닌가?”

“옛날에는 그렇게 불렀지만,2 층이 열리고 아인종의 사전적 정의가 바 뀌었다.”

권 노야는 이해가 쉽도록 바둑판 위의 바둑돌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는 검은 돌만 한쪽 구석으로 밀 어 넣었다.

“자,이 검은 돌들이 여태껏 플레 이어가 게이트 안에서 사냥했던 아 인종이다. 여전히 몬스터라 불리는
녀석들이지.”
“그럼 하얀 돌은?”

“지금 우리가 아인종이라 부르는 존재들이지.”

“그 둘의 차이가 뭔데요?”

“지성.”

권 노야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우선 현재 우리가 아인종이라 부 르는 존재들은 모두 대화가 통한 다.”

“잠깐만요. 그럼 오크랑도 말이 통 한다고?”

서준호의 두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 했다.

그가 알고 있는 오크는 항상 꿰엑 꿱 고함만 질러대던 녀석이었기 때 문이다.

“오크들은 부족의 숫자가 굉장히 많은 종족이야. 대화가 통하는 부족 은 그리 많지는 않지.”

“그래도 말이 통하는 녀석들이 있 다는 거네요. 그런데 갑자기 아인종 이야기는 왜……?”

“네 녀석이 차에 대해 묻지 않았느 냐.”

권 노야는 찻잔을 만지며 말을 이 어나갔다.

“아가릿 차라고 한다. 엘프들이 직

접 재배한 찻잎으로 돈을 주고도 구 할 수 없지.”

“……2 층에 가도 못 구하나?”

“모르지. 네 녀석이 엘프와 인연이 닿는다면 구할 수 있을지도.”

모처럼 마음에 드는 차였기에 아쉬 운 마음을 달랜 서준호가 입을 열었 다.

“그런데 노야,나 뭐 하나 더 물어 봐도 돼?”

“또 뭐냐.”

“아마 직접 보는 게 빠를 거야.”

말을 마친 서준호는 경매장에서 구

입한 ‘알 수 없는 공’을 꺼냈다.

권 노야는 바둑판 위에 올려진 공 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신기하게 생긴 공이로군.”

“……그 말은 노야도 이게 뭔지 모 른다는 거지?”

“이놈아,내가 첨성탑의 현자도 아 닌데 모든 걸 알 수야 있겠느냐? 다만……


알 수 없는 공을 들어 올린 노야 는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 덕였다.

“하나는 알 것 같군. 이 공은 엘프 들의 물건인 것 같구나.”

“그걸 어떻게 알아?”

“흠,설명하자면 길어지니 짧게 요 약을 해주마. 나는 엘프 부족의 장 로와 만나본 적이 있다.”

“잠깐만,그럼 노야가 2 층을 가봤 다고?”

“내가 올라간 게 아니다. 그쪽이 내려온 거지.”

‘‘……!”

차원 엘리베이터를 통해 위층의 존 재가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

신선한 충격을 받은 서준호를 향해

노야가 당부했다.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지는 마라. 이래 뵈도 1 급 기밀이니까.”

“나 입 무거운 거 잘 알잖아. 계속 말해줘.”

“엘프는 뭐랄까…… 신비하면서도 독특한 기운을 품고 있더군. 분명 내 눈앞에 존재하는 사람을 보고 있


는데도 물이나 식물을 마주하는 듯 한 기분이었지.”

권 노야가 공을 쳐다보며 말했다.

“마치 이 공에서 느껴지는 기운처 럼 말이다.”

“……엘프의 물건이라.”

서준호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공 을 쳐다보자 노야가 말을 이었다.

“1 층에서 엘프를 찾을 수는 없을 테니, 다크엘프의 숲이라도 찾아가 보지 그러느냐.”

“다크엘프? 굳이 그럴 필요가 있으 려나.”

"나야 모르지. 다만 엘프의 물건 중에는 세계수의 기운을 받으면 작 동하는 것이 있으니 하는 소리다.”

“과연……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서준호는 비 타를 두드려 기사 하나를 찾았다.

자신이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봤던 기사 중 하나였다.

[영국 그랜덤 지역에서 새로운 게 이트 생성,출현 몬스터는 다크엘프. 공략 지원자 모집 中.]

“마침 잘됐네.”

다음으로 공략할 게이트가 정해지 는 순간이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44 화


야생의 숲(1)

“가거라. 멀리는 안 나가마.”

무심한 음성을 남긴 권 노야는 뒤 도 안 돌아보고 2 층으로 올라가 버 렸다.

권팔모는 그런 할아버지를 보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너무 기분 나빠하진 말아주세요. 감정 표현이 서투르신 것뿐이세요.”

알지,누구보다 잘 알지.

서준호가 빙그레 미소 짓자 권팔모 가 조그마한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이건 뭐예요?”

“아가릿 찻잎인데 전해주라고 하시 더군요. 할아버지가 처음 보는 사람 에게 이토록 잘 대해주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서준호 플레 이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신 모양 입니다.”

앞에서는 툴툴거려도 뒤에서는 이 것저것 다 챙겨주는 것이 권 노야의

매력이었다.

“노야한테 감사하다고 전해주세 요.”

“네,그리고……

눈을 반짝이던 권팔모는 이내 고개 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조만 간 아시게 될 테지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권팔모는 근 육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공방을 나선 서준호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조만간 알게 된다고? 대체 뭘?’

가르쳐 주지 않으니 알 도리가 없 었다.

지금은 그저 그것이 나쁜 일은 아 닐 것 같다는 느낌만을 받을 뿐이었 다.

“다크엘프요?”

서류를 정리하던 차시은이 깜짝 놀 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세요?”

“그야 유명한 몬스터잖아요. 여러 의미로.”

그녀는 곧장 비타를 두드려 다크엘 프 관련 항목을 열더니 이를 읽어 내렸다.

“다크엘프,세계수를 배신하고 부 정한 힘을 취해 타락한 자들을 일컫 는다. 부족 단위로 생활하는 몬스터


이기에 출현하는 게이트의 난이도는 최소 어려움으로 분류된다. 운이 좋 다면 그들의 마을에서 전설의
비약 인 엘릭서를 입수할 수도 있다.”

“요약 깔끔하네요.”

“감사합니다. 혹시 공략하시려는

게이트가 그랜덤에서 발생한 게이트 예요?”

“맞습니다,혹시 무슨 정보라도 있 습니까?”

“음. 정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데, 국내 기사가 하나 뜨긴 했어요.”

차시은이 기사 하나를 서준호 앞에 띄워주었다.

[청해 길드,그랜덤 게이트 공략대 참가 발표.]

"청해 길드라.”

국내외를 막론하고 제법 이름이 있 는 명문 길드였다.

게다가 불꽃 호리를 공략할 당시 만났던 차민우가 소속된 길드이기도 했다.

“그 밖에는요?”

“음,한국 팀은 청해가 끝인 것 같 고,그 외에는 전 세계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것 같아요.”

“전 세계 여기저기서……? 잠깐만 요. 그러고 보니 게이트의 정보가 어떻게 됩니까?”

알고 있는 것이라곤 게이트의 입장 조건이 20 레벨 이상이라는 것뿐이

었던 서준호가 물었다.

“게이트의 이름은 ‘야생의 숲’,입 장 조건은 35 레벨 이하의 플레이어, 공략 조건은 검은이끼


부족장의 처 치구요. 마지막으로 게이트의 인원 제한은……

잠시 서준호를 눈치를 살핀 차시은 이 어색하게 웃었다.

“200 명이네요.”

“……맙소사.”

서준호가 가볍게 이마를 짚었다.

게이트의 입장 조건은 절대 플레이 어나 몬스터, 어느 한 쪽으로 유리 하게 설정되지 않는다.

‘시스템이라는 녀석이 제법 공평하 다는 소리지.’

그런데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플레이어가 200 명으로 설정되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만큼 공략하기 어려운 몬스터가 나오거나……

혹은 게이트 내부가 미친 듯이 넓 어서 그만큼 많은 수의 몬스터가 나 오거나.


분명 그 두 가지 경우의 수 중 하 나이리라.

“야생의 숲이라.”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상대하기 힘 든 보스 몬스터 한 마리가 나오는 것이 편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100 명이 넘어 가는 플레이어를 지키면서 게이트를 공략할 수는 없었으니까.

후두둑,후두둑.

하늘에선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굵은 빗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산 중턱에 위치한 허름한 오두막에

몸을 숨긴 두 남자는 딱딱하게 굳은 빵을 씹었다.

“젠장.”

맛 따위가 느껴질 리 없는 빵을 집어던진 남자,칼 시그너는 무척이 나 예민해 보였다.

그의 눈치를 살핀 부하가 조용히 먹던 빵을 내려놓았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분노를 삭이는 그의 현재 사정은 무척이나 안 좋았다.

첫 번째 이유는 단연 뒤를 추격하 는 검성 김우중이었다.

요즘은 하루에 두 시간도 채 못 자고 이동 중이건만,그와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 괴물만으로도 충분히 미칠 것 같은데……

까드득,칼 시그너가 이를 갈았다.

어제 아침,번견 부대가 전멸하고 임무에 실패했다는 보고서가 날아왔 기 때문이다.

당연히 마인 협회는 분노했고,그 에게 당장 돌아오라는 명령이 떨어 진 상태였다.

‘정말 거지같은 상황이다.’

그는 번견 부대가 실패할 것이라고 는 생각조차 안했고,해골술사의 죽 음 또한 예상치 못했다.

‘나자드 할로우는 제자를 아끼기로 소문이 난 자인데, 그의 제자를 죽 게 만들었으니……

저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졌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꼬였을까?

분노할 대상을 찾던 그의 머릿속으 로 한 남자가 떠올랐다.

“……서준호.”

일의 시발점이자 자신의 계획을 번 번이 망친 남자.

그는 자신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데에는 서준호의 탓이 크다고 생각 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서준호도 라스베 가스 경매에 참석했다.’

그가 있는 장소에서 그림자 형제가 죽었고,번견 부대도 전멸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협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 지 않는다는 거지.’

이미 협회에 이야기를 해본 상태였 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데뷔 한 지 고작 두 달이 된 플레이어가 그들을 해치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솔직히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칼 시 그너조차 콧방귀를 꼈을 것이 분명 했다.

'아마 내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 기 위해 핑계를 대고 있다고 생각하 겠지.’

그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끼이익.

돌연 오두막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U J,,

그 어떤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칼 시그너와 부하가 당황한 표정으로 각자의 무기를 집었다.

우르르릉! 과광!

천둥이 치는 살벌한 광경을 등진 괴한은 마법사 모자를 쓴 채 우두커 니 입구 쪽에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시그 너와 부하는 저도 모르게 무기를 바 닥에 내려놓았다.

한쪽 무릎을 꿇은 고개를 숙인 그

들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글 송글 맺힌 상태였다.

‘회기……!’

‘최소 협회 간부급의 강자다 r

하나같이 쓰레기들만 모인 마인 협 회에서 나름의 위계질서가 잡히고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강자지존’이라는 마 족의 특징을 고스란히 빼닮은 마인 들의 특징 때문이었다.

자신보다 강한 마인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모든 마인들의 공통된 사항이었으니까.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괴한은 칼 시그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

“네놈이 칼 시그너냐.”

“……마,맞습니다.”

감히 거짓을 고할 수 없는 상황이 었다.

그 정도로 난폭한 마기가 오두막은 물론이고,그 지역 일대를 감 있었으니까.


잠시 칼 시그너를 내려다본 괴한은 쓰고 있던 마법사 모자를 벗었다 I 그러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나자드 할로우. 내가

네놈을 찾아온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r

“나,나자드 할로우 님……r

칼 시그너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 노괴가 제자의 목숨값을

받으려고 직접 찾아올 줄이야?

하지만 나자드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홀러나왔다.

“네놈의 보고서는 읽었다. 흥미롭

더군.”

“……제 보고서라면?”

“서준호라는 녀석에 관한 보고서 말이다.”

서준호!

그 이름이 동앗줄임을 깨달은 칼 시그너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 다.

“마,맞습니다. 제가 그에 대한 보 고서를 올렸습니다.”

“네 보고서에 따르면 서준호라는 풋내기가 그림자 형제와 번견 부 대…… 그러니까 내 제자의 죽음에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하던데,내가

이해를 제대로 한 건가?”

“예. 분명 그들의 죽음에는 서준호. 그 남자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칼 시그너도 이에 대한 확 신은 없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살아남으려면 반 드시 서준호가 그들의 죽음과 관련 되었다고 주장해야 했다.

“흠.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하 지? 그 녀석은 데뷔한 지 이제 겨 우 두 달이 넘은 애송이다.”

“그것은……
칼 시그너의 두 눈이 빠르게 굴러 갔다.

그는 무력 또한 강력했지만,마인 협회의 요직을 차지한 사람답게 눈 치 또한 빨랐다.

‘나자드 할로우가 저런 시답잖은 질문을 던지려고 날 찾아온 건 아닐 터.’

나자드 정도의 인물이 움직이는 데 에는 항상 분명한 목적이 동반된다.

그 목적을 빠르게 파악한 칼 시그 너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며 입을 열 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는 모릅니다.”

“..모른다?”

나자드 할로우의 눈빛이 서릿발처 럼 차가워졌다.

동시에 일어난 마력과 마기가 한데 섞여 칼 시그너의 목을 붙잡고 허공 으로 들어올렸다.

“커,커헉!”

“지금 내가 그딴 소리나 들으려고 이곳에 온 줄 아느냐?”

“저,정말 모릅니다. 하지만……!”

칼 시그너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최선의 한 마디를 던졌다.

“제가…… 그 녀석을 생포해서 나 자드 님의 앞에…… 대령하겠습니

잠시 시그너를 노려보던 나자드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살짝 땅을 찍었 다.

쿠웅! 그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칼 시그너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런 그의 머리맡으로 나자드의 차 가운 음성이 떨어졌다.

“반년을 주지. 그 안에 녀석을 내 앞으로 끌고 오도록.”

“쿨럭…… 하,하지만 나자드 님. 그 녀석이 30 레벨을 먼저 찍어야 2 층에 데려올 수 있습니다. 그 부분

은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착각하지 마라. 그 불가능을 가능 하게 만드는 것이 네놈의 목숨값이 니까.”

그 말을 끝으로 나자드는 작은 입 자가 되어 그대로 사라졌다.

쏴아아아아!

다시 비오는 소리만이 적막한 오두 막을 감싸자,부하가 빠르게 다가왔 다.

“시그너 님,괜찮으십니까?”

“……젠장.”

애꿎은 바닥을 주먹으로 내려친 칼

시그너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부하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명 령 했다.

“김우중을 따돌리고 몰래 1 층으로 내려간다. 패스파인더를 찾아.”

패스파인더.

그는 플레이어 협회의 눈을 피해 차원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였다.

드르륵,드르륵.

서준호가 걸어가자 그의 뒤를 인공 지능 캐리어가 알아서 뒤따라왔다.

차시은이 예약해준 호텔방에 들어 선 그는 그랜덤의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나라의 날씨가 심술맞은 건 예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하루에 사계절을 겪을 수 있다고 불리우는 영국의 날씨는 여전했다.

아침에 공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해가 쨍쨍한 여름 날씨였건만,오후 에 들어서자 쌀쌀한 가을 날씨로


바 뀐 상태였으니까.

짐을 정리한 서준호는 자신의 스케

줄부터 확인했다.

‘공략은 사흘 후.’

굳이 영국에 며칠 먼저 도착한 것 은 시차 적응과 함께 컨디션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였다.

숙련된 플레이어 일수록,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는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어놓는 법이니까.

“사홀 동안 제대로 몸 좀 풀어볼 까.”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게이트에 들 어가기 며칠 전부터 식단 조절과 가 벼운 운동을 병행한다.

하지만 서준호는 전투 감각을 최고

조로 끌어올리기 위해 전혀 색다른 선택을 했다.

“운동삼아 가볍게 다녀오지 뭐.”

그는 야생의 숲에 들어가기 전에, 인근 지역의 게이트 하나를 공략할 셈이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45 화

야생의 숲(2)

야생의 숲을 공략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예정대로 게이트 앞에 모인 수많은 플레이어 사이에는 청해 길드의 차 민우도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주변 플레이어들을 살펴보던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

였다.

“과연……
“응? 뭐라고 하셨어요?”

중얼거림을 들은 팀원이 묻자,차 민우는 턱끝으로 다른 플레이어들을 가리켰다.

“주변 플레이어들을 잘 살펴봐. 지 금 이곳에 어중이떠중이는 단 한 명 도 없다.”

보통 플레이어가 25 레벨 정도 되 면 초보 티를 확실하게 벗었다고 평 가받는다.

서준호처럼 미공략 게이트만 주구 장창 돌지 않는 이상,게이트를 최

소 스무 번은 공략해야 찍을 수 있 는 레벨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최소 십수 번의 사선을 넘었다는 뜻.

차민우의 말처럼 그들 중 어수룩해 보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긴…… 여긴 20 레벨 이상 35 레 벨 이하의 플레이어들만 입장할 수 있는 게이트니까요.”

“확실히 국내에서 보던 플레이어들 이랑은 발산하는 기세부터가 달라 요. 장비들도 좋고요.”

“우리가 세계라는 큰 무대에 발을 들여놨다는 증거지.”

묘하게 들뜬 차민우는 주변을 힐긋 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던 팀원들이 피식 웃었다.

“지금 서준호 플레이어 찾고 있 죠?”

“아주 목이 빠지겠네요,빠지겠어.”

“……기대가 되는 걸 어떡하냐.” 서준호가 불꽃 호리 공략에서 보여 줬던 모습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쉬운 길,편한 길만 골라가려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지.’

그 날 이후로 차민우는 스스로의 기량을 갈고닦기 시작했다.

서준호를 다시 만나게 되면 더 나 아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 이다.

“……저기 계시는군.”

차민우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면서 한쪽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지난번보다 몸이 훨씬 좋 아진 서준호가 서 있었다.

“그런데 저 모습은 대체……?”

고개를 갸웃거린 차민우는 곧장 서 준호에게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그의 얼굴을 알 아본 서준호가 눈을 깜빡였다.

“어? 혹시 저번에 불꽃 호리 잡을 때……

“기억해 주셨군요. 다시 한 번 소 개드리겠습니다. 청해 길드의 차민 우입니다.”


“여기서 또 보네요. 그때 저를 부 축해 주셨다고 들었는데 뒤늦게나마 고맙습니다.”

“감사 인사는 제가 드려야죠. 저희 의 목숨을 구해주셨으니까요.”

차민우의 뒤쪽에 서 있던 팀원들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 까? 방어구 상태가…… 말이 아닙니 다만.”

“아,이거요……?”

서준호가 쓰게 웃으며 자신의 방어 구를 내려다보았다.

권 노야가 만든 가죽 방어구는 현 재 걸레짝처럼 여기저기가 찢어진 상태였다.

‘너무 욕심을 부렸어.’

서준호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흘러 나왔다.

전투 감각과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현지의 게이트를 들어간다는 계획 자체는 좋았다.

하지만 흥을 너무 과하게 낸 것이 문제였다.

‘……그냥 하나만 돌걸. 두 개는 좀 무리였네.’

그는 사홀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인 근 지역의 게이트를 무려 두 개나 공략한 상태였다.

덕분에 ‘흑룡아’를 장비할 수 있는 23 레벨은 찍을 수 있었지만,그 과 정에서 방어구가 걸레짝이


되어버렸 다.

“그냥 간단하게 몸 좀 풀고 왔습니

다.”

••••••대체 어떤 식으로 몸을 풀어 야 방어구가 저 모양이 되지?,

차민우는 의문이 들었지만,질문을 삼키며 현실적인 얘기를 꺼냈다.

“정말 그런 방어구로 공략하실 수 있겠습니까? 많이 위험해보입니다 만.”

“게이트 입장 시간이 5 분밖에 남았 는데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요,그 냥 들어가야죠.”

그건 또 맞는 말이었다.

딱히 도와줄 방법이 없었던 터라 차민우가 안타까운 표정만 짓고 있

을 때.

후우웅!

두 사람 앞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정차했다.

“서준호 씨 맞으시죠?”
“네,제가 서준호인데요.”

“그럼 여기 서명 좀 해주세요. 퀵 입니다.”

서준호가 서명을 하자 택배 기사는 대형 캐리어 하나를 내려주더니 다 시 사라졌다.

옆에서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차민우가 물었다.

“혹시 새로운 방어구를 주문하신 겁니까?”

“아뇨,저는 딱히 뭘 시킨 적이 없 는데……

고개를 갸웃거린 서준호는 캐리어 를 한 번 들어보았다.

‘제법 묵직하네?’

이어서 캐리어를 내려놓은 그는 손 잡이 부분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키리릭,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캐리어가 열렸고.

예술 작품처럼 느껴지는 흑색 갑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서준호는 저도 모르게 갑옷의 표면 을 만져보았다.

그러자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확실해. 이건 용의 뼈로 만든 갑 옷이다.’

그는 곧장 캐리어 안쪽에 있던 쪽 지를 확인했다.

[심덕구 협회장의 의뢰입니다. 갑 옷의 이름은 간단하게 흑갑(黑針 1)으 로 지었습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 겠습니다.

-권팔모 올림.]

‘……마음에 안 들 리가 없잖아.’

권 노야가 만들어준 ‘흑룡아’와 무 척이나 잘 어울리는 방어구였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차례대로 이렇 게 훌륭한 장비들을 만들어 줄 줄이 야.

서준호는 그제서야 공방을 나설 때 권팔모가 해줬던 말의 의미를 깨달 았다.

‘조만간 알게 된다던 게 이걸 말하 던 거였나…… 하여간 덕구 녀석.’

그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알아서 쓰라고 용골을 줘놨더니 그 걸로 자신의 갑옷을 만들어서 선물 할 줄이야.

그로써는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이 었지만,타이밍이 좋았다.

지금 자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방 어구가 절실한 상황이 었으니까


“.정말 아름다운 갑옷입니다.”

옆에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방어구 를 구경하던 차민우가 중얼거렸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방어구를

쳐다보기에 바빴다.

‘우리 길드와 전속 계약이 되어 있 는 공방의 방어구들보다도 품질이 훨씬 뛰어나다.’

보통 뼈로 만들어진 경갑옷들은 투 박한 인상을 주며 착용하면 실제로 도 조금 불편하다.

하지만 눈앞의 방어구는 그런 느낌 이 일절 들지 않았다.

‘관절 부분이 정교하고 조그마한 뼈들로 이루어져 있어.’

그것은 웬만한 실력으로는 흉내내 기조차 힘든 고급 기술이었다.

그쯤되니 차민우는 궁금해지기 시

작했다.

‘대체 어떤 명인께서 이런 갑옷을 만든 거지?’

혹시나 싶어 캐리어를 쳐다봤지만 유명 브랜드 공방의 로고는 단 하나 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가볍게 날려 쓴 듯한 글씨체 로 ‘Kwuan’이라는 단어 하나가 조 그맣게 새겨져 있었다.

“권..?”

무의식적으로 그 단어를 소리 내서 읽은 순간,차민우의 두 눈이 화등 잔만 하게 커졌다.

이 세상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대장장이가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권씨 성의 대장 장이.

그것도 이 정도 수준의 방어구를 만들 실력이 되는 사람은,그가 알 기로 단 두 명밖에 없다.

"아,안동 권씨 공방……!”

가문 대대로 대장장이를 배출한 그 곳은 지금에 이르러선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문이 되었다.

왜냐하면 세계 최고의 대장장이 중 한 명인 ‘권 노야’가 가주로 있는 가문이었으니까.

실제로 안동 권씨 공방이라는 말

한 마디에 주변 플레이어들의 표정 이 싹 바뀌었다.

“뭐? 저게 권씨 공방의 방어구라 고?”

“말도 안 돼. 그곳에서 초보자의 방어구를 제작해 줬다는 얘기는 단 한 번도 못 들어봤어.”

“뭔가 착각한거겠지.”

모두의 이목이 모인 상태에서,서 준호는 천천히 흑갑을 들어올렸다.


혹시나 싶어 캐리어를 쳐다봤지만 그곳에는 상갑 하나만이 존재했다•

‘보통 방어구는 상의,하의가 한 세트인데.. 시간이 부족해서 하의

는 못 만든 건가?’

서준호는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으 며 흑갑을 장비했다.

그리고 그 순간.

좌라라라락!

흑갑이 마치 기계 부품처럼 펼쳐지 며 머리와 발을 제외한 전신을 뒤덮 었다.

“마, 맙소사! 스프레드 아머

(Spread armor) 라고!?”

“이런 미친…… 저건 고대 아티팩 트에나 달려 있는 효과잖아?”

“현재 저 기술을 다룰 수 있는 야

장은 전 세계에 몇 명 없다고 들었 는데……

“잠깐만,지금 보니 캐리어 안쪽에 권이라는 서명이 새겨져 있어!”

“뭐? 그럼 저게 정말로…… 권씨 공방에서 만들어진 방어구라고?”

여기저기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 들이 들렸다.

현재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권씨 공방의 스프레드 아머.

시중에선 부르는 것이 곧 값이라고 평가받는 최고 수준의 방어구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플레이어들은 부 러운 눈길로 서준호를 쳐다봤다.

“웃차.”

이리저리 몸을 돌리며 갑옷의 성능 을 실험한 서준호의 표정이 밝아졌 다.

‘마음에 들어.’

그가 여태까지 가죽 갑옷을 선호하 던 이유는 단순했다.

경갑옷이나 중갑옷은 아무리 수준 높은 경량화 마법을 부여해도 음직 이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팔모의 흑갑은 그의 음직 임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았다.

‘심지어 옵션까지 좋아.’

아이템 감정을 마친 서준호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곱게 휘었다.

[흑갑 (黑錦)]

등급 : 유니크
체력 +15

* 경량화 : 이 갑옷에는 경량화 마 법이 걸려 있습니다.

*교란 : 이 갑옷은 착용자를 향한 C 등급 이하의 추적 스킬을 차단합니 다.

착용 제한 : 레벨 23, 체력 60 이 상, 근력 60 이상.

물론 권 노야의 검과 비교하면 옵 션이 살짝 모자란 것이 사실이지만 이 또한 유니크 아이템.

자신의 레벨 대에서 구할 수 있는 장비들 중에선 최고였다.

‘게다가 두 장비 모두 맞춤 제작템 이라서 효율이 좋지.’

보통의 장비들은 착용 제한이 낮으 면 성능도 낮다.

그렇다고 반대로 착용 제한이 너무 높다면? 당연히 플레이어가 사용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무기들에는 그러한 단점 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플레이어가 뛰어난 야 장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폭발적인 시너지.’

흑룡아와 흑갑은 레벨 제한을 최대 한 낮추고,반대로 능력치 제한은 높게 올린 상태였다.

말 그대로 서준호라는 플레이어의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장비.

그것이 바로 뛰어난 야장에게 맞춤 제작형 아이템을 받았을 때 일어나 는 일이었다.

“설마 권씨 공방과 거래가 가능할 줄이야…… 역시 협회는 협회군요.”

차민우는 그가 권씨 공방의 방어구 를 얻은 것이 협회의 능력이라고 생 각했다.

서준호가 뛰어난 건 사실이었지만, 권씨 공방은 단 한 번도 초보자와 거래한 적이 없었으니까.

“협회장님이 힘 좀 써주셨죠.”

싱긋 웃어 보인 서준호는 시간을 확인했다.

마침 현재 시각은 11 시 정각.

어느새 게이트에 들어가야 할 때가

되었다.

“저기,서준호 씨.”

그때,잠시 무언가를 망설이던 차 민우가 어렵게 입술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혹시…… 현재 소속된 파티가 있 으십니까?”

“파티요?”

보통 야생의 숲처럼 많은 플레이어 가 들어가는 게이트에서 개인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다.


최소 파티 (Party) 라고 불리는 팀 단위로 뭉쳐서 공략을 하기마련.

그것은 서준호라고 다르지 않았다.

‘게이트의 인원 제한이 200 명이 면…… 몬스터는 많으면 천 마리까 지도 나오겠지.’

자신도 이런 게이트에서는 등을 맞 댈 사람이 최소 한두 명은 필요했 다.

혼자서 다니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그건 비효율적이었으니 까.

“아직 없습니다만?”

“그,그럼 혹시 이번 게이트에서는 저희 파티와 함께하시지 않으시겠습 니까?”

긴장한 표정의 차민우가 자신의 팀 원 둘을 가리키며 말했다.

‘청해 길드라면 나쁘지 않지…… 아니,오히려 훌륭해.’

명문 길드로 구분되는 만큼 구성원 모두가 엘리트이기 때문이다.

제안을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한 서준호는 기쁜 마음으로 이를 받아 들였다.

“제안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번 같이 해보죠.”

오전 11 시 02 분.

200 명의 정원을 꽉 채운 플레이어

들이 ‘야생의 숲’ 게이트를 넘었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46 화

야생의 숲(3)

야생의 숲은 마치 아마존을 연상케 하는 무더운 숲이었다.

“힝,굳이 고르라면 온대 활엽수림 이 더 편한데……

차민우의 팀원 중 한 명인 여자가 울상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이에 다른 팀원인 남자는 몸을 숙 여 홁을 만지면서 대꾸했다.

“어쩔 수 없잖아. 햇빛의 세기랑 토양,식물들의 형태를 보니 이곳은 열대 우림이야.”

주변을 둘러보던 서준호는 뿔뿔이 흩어지는 플레이어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몇 사람이 똑같이 생긴 금속 말 뚝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호 님,저희도 슬슬 움직이시 죠.”

뒤를 돌아보니 차민우가 그들과 같 은 금속 말뚝을 쥐고 있는 것이 보

였다.
서준호는 그것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건 뭐예요?”

“……예?”

차민우가 당황한 표정으로 대꾸하 자,여자 팀원이 푸하! 웃음을 터트 렸다.

“뭐야,터미널(Terminal) 처음 봐 요?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으시네.”

“쓰읍,서미래. 무례하게 행동하지 마.”

그녀를 나무란 차민우는 금속 말뚝 을 들어 올리며 설명했다.

“직접 보시는 건 아마 처음일 텐 데,이게 바로 터미널입니다. 대규모 플레이어가 입장하는 게이트의 파티


장들이 들고 다니는 것으로,이것을 땅에 박으면 게이트 내부에 마력 통 신망이 구축되어서 서로 연락을
주 고받을 수 있게 만들어주죠.”

“호오.”

이것은 과거에는 없던 기술이었다.

“과연, 그래서 한마디의 상의도 없 이 저렇게 뿔뿔이 흩어지는군요.”

안 그래도 게이트에 입장한 플레이 어들이 대뜸 사방으로 흩어지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일단 게이트에 들어오면 한 군데에 모여서 작전 회의를 하는 것이 기본이었으니까.

“네,아주 오래 전에는 이런 기술 이 없어서 플레이어들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 했다던데,지금은 그러는


것이 더 비효율적이니까요.”

어깨를 으쏙거린 차민우는 신기하 다는 눈빛으로 서준호를 쳐다봤다.

“저번 게이트 때부터 느낀 거지만, 준호 님은 최신 장비에는 그다지 관 심이 없으신가 봅니다.”

“쿠쿡,무슨 옛날 사람 보는 것 같 네요.”

“……예,옛날 사람이라뇨

괜히 속이 뜨끔해진 서준호는 화제 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서로 통성 명도 못 나눴네요. 전 서준호라고 합니다.”

“서미래예요.”

“저는 최진표입니다.”

각각 귀염상에 콧잔등의 주근깨가 특징인 여자와,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왜소한 남자였다.

차민우는 깜빡했다는 표정으로 입 을 열었다.

“아차,외부인과 함께 파티를 하는 건 오랜만이라 깜빡했군요. 간단하 게 저희의 능력에 대해 설명을 드리


겠습니다.”

“……괜찮겠어요?”
서준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 다.

보통은 자신의 능력을 꽁꽁 숨기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게 이트를 공략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것은 없으니까요.”

차민우는 자신의 팀원들을 바라보 며 말을 이었다.

“이쪽의 진표는 힐러입니다. 팀에 서 비디오를 녹화하는 역할도 겸임 하고 있지요.”

“비디오 녹화요?”

“예,보통 파티 단위로 활동하는 플레이어들은 피드백을 받고 더 발 전하기 위해서 게이트 내부에서의


일을 모두 녹화해 놓습니다.”

“으음〜 여태 혼자서만 다니셔서 그런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구 나.”

“그럴 수밖에 없지. 일반적인 게이 트를 공략하시던 분이 아니니까.”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소규모,대규

모 게이트를 가리지 않고 다니며 경험을 쌓는다.

모두 돌아

터미널이나 녹화에 적인 플레이어라면 부분이었다. "

대한 것도 일반 모두 알고 있는

하지만 귀환 후 사냥을 인터넷으로 배운 서준호에게는 그것들이 제법 생소하게 느껴졌다.

25 년 전과 지금은 공통점도 많았 지만,그만큼 차이점도 많았으니까.

“그리고 이 촐랑거리는 녀석을 저 희는 스포일러라고 부릅니다.”

차민우가 서미래를 가리키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포일러요?”

“예. 가끔씩 영화나 소설의 줄거리 를 묻지도 않았는데 미리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아아,확실히 있죠.”

“바로 그 뜻입니다.”

서준호가 여전히 이해를 못하겠다 는 표정을 짓자,차민우가 싱긋 웃 었다.

“뭐,백 번의 설명보다 한 번 보시 는 게 빠를 겁니다. 서미래.”

“음음,이 몸의 차례인가? 어디 관 상을 한 번 보세나〜”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온 서미래는 서준호를 빤히 쳐다봤다.

‘……아니,나를 보고 있는 게 아 니야.’
시선은 자신을 향해 있었지만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 게 들었다.

“후아!”

잠시 후,거친 숨을 토해낸 서미래 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 었다.

“우와,소문난 잔칫집에는 먹을 게 없다던데…… 이 사람은 완전 그 반 대네?”

“어때?”

차민우의 질문에 서미래가 어깨를 으쏙였다.

“어떻고 자시고,진짜 미친 읏이 잘 싸우네요. 혼자서 다크엘쯔 열 마리를 도륙내 버리는데요?”

“훗. 내가 뭐랬냐. 대단하신 분이라 니까.”

마치 본인의 일인 양 뿌듯한 ■표정 을 지은 차민우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서준호에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바라본 인물의 미 ,엿볼 수 있습니다. g 지만 자 신이 본 미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대상에게 말해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제가 크게 다치거 든요.”

“……미래 예지!”

그것은 굉장히 희귀한 능력이었다.

그가 어둑서니로 활동하던 때도 미 래를 엿볼 수 있는 자는 지구에 열 명이 채 안 되었으니까.

‘그렇다면 혹시...... ’

자신이 언제쯤 목표를 이룰 수 있 는가.

즉,언제가 되어야 동료들을 되살 릴 수 있는가를 물어보려던 순간

척.

서미래가 단호하게 손바닥을 내밀 었다.

“참고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물어 보려고 하지 마세요. 저는 그리 먼 미래를 볼 수도 없을뿐더러,제 미


리보기는 어디까지나 참고용이니까 요.”

“……참고용이라니,그게 무슨 뜻 입니까?”

“오케이,쉽고 빠르게 설명해 줄게 요. 예정대로라면 그쪽이 다크엘프 열 마리를 도륙내겠죠?”

그녀의 질문에 서준호가 고개를 끄

덕였다.

그것이 그녀가 본 자신의 ‘미래’였 으니까.

“하지만 그쪽이 작정하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어 떻게 될까요?”


“……나는 다크엘프를 사냥하지 않 겠죠.”

“빙고. 그게 제 미리보기가 참고용 인 이유예요. 전 능력의 특성상 제 가 본 미래를 대상에게 말해줘야


하 는데,그러면 그 미래가 어떤 식으 로든 바뀔 가능성이 높거든요.”

“과연.”

그녀가 본 미래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소리였다.

만약 그녀가 본 미래가 썩 달갑지 않은 미래라면,대상은 그 미래를 무조건 바꿀 테니까.

“제가 그녀를 이번 게이트에 데려 온 이유도 참고를 위해서였습니다. 빠져나갈 방도가 없는 함정이나 병


력에 둘러싸이면 큰일이니까요.”

“그렇군요. 한 마디로 보험. 미래의 정보를 바탕으로 게이트를 공략하겠 다는 생각이시네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그녀는 본인의 능력을 단순한 참고

용이라고 펌하했지만,서준호의 생 각은 달랐다.

‘성능이야 어떻든 누군가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은 사기적이야.’

동시에 이 파티에 합류해서 다행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능력자가 파티에 있다면,항 상 최악의 선택지를 배제하고 공략 을 진행할 수 있으니까.

“저야 뭐,변변찮은 신체 강화 계 열 능력자고…… 준호 님은 무기를 잘 다루는 능력이셨죠?”

“맞습니다.”

“파티의 밸런스가 제법 잘 잡혀 있

군요. 느낌이 좋습니다.”

싱긋 웃어 보인 차민우는 터미널을 들어올렸다.

“그럼 저희도 슬슬 움직이죠. 적당 한 장소에 캠프를 만들고 통신망을 구축해야 하니까요.”

♦ * *

삐- 삐-

터미널을 땅 속에 박자 비프음이 두 번 울렸다.

차민우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후우,설치가 끝났습니다. 그럼 어 디 한 번……

그는 비타를 두드려 누군가에게 연 락했다.

그러자 잠시 후,홀로그램 디스플 레이가 떠오르며 외국인의 얼굴이 보였다.

-요,와씹. 아직까지 무사하네?


“당연한 소리를. 그쪽은 어때?”

-우린 여태 다크엘프를 한 마리도 못 만났어. 참고로 여긴 동쪽이야.

“정반대네. 우린 서쪽이거든.”

-그래? 마침 잘됐다. 혹시 끝을 마

주하지는 않았어? 이쪽 방향은 맵이 계속 열려 있어.

“안타깝지만 우리도 아직 막힌 구 역은 못 봤어.”

-흠 그래? 그럼 맵이 생각보다 더 넓다는 소린데…… 아무튼 위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알았다. 수고해.”

친구와의 영상 통화를 끝낸 차민우 가 일행을 돌아보았다.

“상황이 나쁘지 않군요. 플레이어 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캠프를 설치 중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본 미래랑 별 차

이도 없네. 나쁘지 않아.”

“방금 커뮤니티를 살펴봤는데,다 크엘프를 만난 파티가 단 한 곳도 없네요. 생각보다 적의 수가 적은가


본데요?”

차민우와 팀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서준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맵이 너무 넓어.’

그야 200 명이나 입장이 가능한 게 이트였으니 지역이 넓은 것쯤이야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 크기가 상상이상으로 넓

다는 것이 문제였다.

‘우린 무려 다섯 시간을 이동했어. 그건 동쪽으로 향한 파티도 마찬가 지겠지.’

플레이어의 이동속도는 일반인보다 훨씬 빠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파티는 여전 히 맵의 끝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게 넓은 곳에서 200 명의 플레 이어가 한 마리의 다크엘프도 만나 지 못했다?’

비타로 커뮤니티에 접속해보니 다 크엘프들이 겁을 먹었네 숨었네 온 갖 추측들이 난무했다.

하지만 서준호의 생각은 달랐다.

‘오크 같은 경우에는 부족장의 명 령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지만 다크엘프는 아니야.’

그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높 기에 부족장의 말이라고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밖에 수상한 인간들이 있으니 돌아 다니지 말라고 명령해도 가볍게 무 시한다는 소리다.


‘한데 자존심 강한 다크엘프들이 명령에 따른다는 건…… 그만큼 부 족장이 강하다는 소리겠지.’

생각을 정리한 서준호가 서미래에

게 다가가 물었다.

저기요. 혹시 제 미래를 다시 한 번 봐줄 수 있어요?”

“안타깝지만 아직 능력을 그렇게 자주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은 못 돼 요. 앞으로 일곱 시간은 더 기다려 야


사용할 수 있어요.”

“으음…… 아까 제 미래를 봤을 때 는 제가 혼자서 다크엘프 열 마리를 도륙냈다고 했죠?”

“네. 정확히 열 마리였어요.”

“그럼 그게 몇 시쯤인지는 알려줄 수 있습니까?”

“어어……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

만 사방이 캄캄했으니까 아마 밤일 걸요?”

밤. 예상하던 대답이 돌아오자 서 준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의 한 쪽 입꼬리가 올라 갔다. 마치 웃긴 이야기를 들은 것 처럼.

“……재미있네.”

“예? 뭐가요?”

“아뇨,아무것도 아닙니다.”

고개를 내저은 서준호는 그 즉시 인벤토리에서 침낭을 꺼내 평평한 바닥에 내려놓더니.

안쪽으로 꼬물꼬물 들어가 지퍼를 착 올렸다.

아직 햇빛이 쌩쨍했지만,그 모습 은 누가 봐도 잠을 청하는 이의 모 습이 었다.

“저기…… 지금 혹시 주무시려는 겁니까?”

힐러남이 얼빵한 표정으로 묻자 서 준호는 알람을 맞추면서 고개를 끄 덕였다.

“네,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밤에는

잠을 못 잘 것 같아서요.”

“..잠시만요. 설마 다크엘프가

야간 공습을 실행할 수도 있다는 소

리예요?”

“굳이 물어보신다면 그럴 거라고 확신합니다.”

서준호의 대답에 표정이 굳어진 차 민우는 그 즉시 비타를 두드려 커뮤 니티 채널 전체에 연락을 돌렸다.
하지만 그리 긍정적인 답변들이 돌 아오지는 않았는지,그의 표정은 심 란해 보였다. °

“으음,다들 안 믿는 눈치입니다 자존심 강한 다크엘프가 누군가의 명령을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군요.”

“뭐,그게 당연한 반응이겠죠. 무시

하고 지금은 푹 자두세요.”

서준호는 숙면을 하려고 작정이라 도 한듯,눈가에 안대를 뒤집어쓰며 중얼거렸다.

“사냥하랴,사람들 구하러 다니 랴…… 바쁜 밤이 될 것 같으니까 요.”

그리고 그의 말이 사실로 밝혀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 다.

투두두두두!

고작 다섯 시간 후,어두워진 숲 전역에서 ‘인간 사냥’이 시작되었으 니까.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47 화

야생의 숲(4)

타닥, 타닥.

어둠이 내려앉은 숲의 공터에는 환 한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그 앞에는 숲의 남쪽을 탐사 중이 던 브라보 파티 소속의 남자 둘이 앉아 있었다.

“흐아암,선배는 안 졸리세요?”

“졸려도 참는 거지. 불침번을 서는 중이니까.”

“……그건 그렇죠.”

후배는 슬쩍 고개를 돌려 곤히 자 는 선배들을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 다.

“그런데 다른 선배님들은 걱정도 안 되시나 봐요. 다크엘프들이 야습 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야습? 야,상대가 다크엘프인데 그런 걸 하겠냐.”

나무 꼬챙이에 끼운 치즈를 굽던

선배가 대꾸했다.

“다크엘프는 강한 힘에 대한 유혹 을 견디지 못하고 세계수의 뿌리를 갉아먹어 타락한 존재들이야. 큰 힘


은 손에 넣었지만 세계수의 저주를 받아 지성이 파괴되었지. 명령이고 자시고 지들끼리도 대화조차 안 통
하는 놈들인데 그런 군사행동을 펼 칠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래도 낮에 만나지 않았으니 밤에 만날 확률이 높은거 아니에 요?”

“뭐’ 그래봤자 개인행동을 하는 놈 들이니 온다고 해도 기껏해야 하 C 마리 정도겠지.” "

“으음,하긴 그 정도 숫자면 저희 둘로도 충분하죠.”


“그렇다니까. 괜히 졸지 마.”

그때,앞쪽의 풀숲이 흔들리는 소 리가 났다.

“……쉿.”

검지를 입가에 대며 조용하라는 신 호를 보낸 선배는 풀숲을 노려보았 다.

- 그르릉.

-크륵.

개가 짖는 소리와 함께 하나,둘, 성!••••".

어둠 속에서 그들을 빤히 쳐다보는 붉은 눈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 다.

“서,선배님.”

겁을 집어먹은 후배는 무기에 손부 터 뻗었지만,선배는 맥이 탁 풀린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난 또 뭐라고…… 야 겁먹지 마. 저것들 울독이다.”

“……울독이요?”

“엉,Wolfdog. 줄여서 울독이라고 부르는 놈들이지.”

그는 경계심을 풀며 대수롭지 않다

는 듯 말했다.

“겁이 많은 놈들이라서 그렇게 위 협적인 몬스터는 아니야.”

“그래도…… 저만 한 숫자가 쳐다 보니까 좀 무서운데요.”

“넌 그렇게 콩알만 한 간덩이로 어 떻게 플레이어 해먹냐? 그리고 울독 은 불을 무서워한다고.”

그는 굽고 있던 치즈를 내려놓더니 햇불을 하나 만들어 풀숲 앞으로 던 졌다.

“휘이휘이,저리 꺼져. 막내놈 울겠 다.”

“우,울기는 제가 언제요.”

선배가 그의 귀여운 반응에 낄낄거 릴 때,후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저 녀석들 정말로 불 무서 워하는 거 맞습니까?”

“왜,내 말은 못 믿겠어?”

“그런 건 아닌데요……

후배의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울독 의 붉은 눈동자들이 점점 크게 보이 기 시작했다.

놈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 이었다.

과드득!
결국 수풀 밖으로 삐져나온 울독의

앞발이 불붙은 장작을 그대로 짓밟 았다.

동시에 무언가를 발견한 선배는 안 색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자신의 무 기를 쥐었다.

“……애들 깨워.”

“네,네?”

“애들 깨우라고! 지금 당장!”

그가 본 것은 열 마리의 울독.

그리고 그 위에 타고 있는 다크엘 프들이 었다.

BB] H] H] H] - l 페 비 H 네 -

알람이 울리자 서준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쓰고 있던 안대를 신속하게 벗은 그는 침낭에서 나와 주변부터 살폈 다.

“아,일어났어요?”

모닥불을 지펴놓고 불침번을 서던 서미래가 친근하게 인사했다.

“……상황은 어때요?”

“아직까지는 특별한 일이 없네요.”

“다른 파티들은요?”

“불침번을 서는 사람들끼리 30 분 간격으로 커뮤니티에 댓글을 달기로 했어요. 지금이 1 시 58 분이니 2 분


뒤에 또 댓글이 우수수 달리겠죠.”

서준호는 모닥불로 다가가 그녀가 띄워놓은 홀로그램 화면을 훑어보았 다.

‘확실히 댓글들을 보니 새벽 1 시 30 분까지는 야습을 받은 파티가 없 어.’

혹시 자신의 생각이 너무 지나쳤던 걸까?

그가 미간을 좁히는 순간,시간이

새벽 2 시로 바뀌었다.

“자,댓글을 달아보죠.”

댓글 창에 생존 신고를 마친 서미 래는 화면을 새로고침했다.

“응?”

하지만 새로고침을 몇 번이나해도 댓글이 달리지 않자,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요. 마력 네트워크망에 오류라도 생겼나……?”


“아뇨.”

스르릉.

검을 뽑은 서준호가 단호히 부정했

다.

그는 어두컴컴한 수풀 너머를 응시 하며 중얼거렸다.

“아마 그들에게도 찾아간 거겠죠. 저놈들이.”

“저놈들이요……?”

서미래가 곧장 고개를 돌렸지만 그 녀의 눈에는 어두운 숲의 풍경만이 보였다.

하지만 서준호는 그녀가 보지 못하 는 것들을 보는 중이었다.

지금은 밤.

그는 사냥꾼의 밤(A)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하고 감각들이 예민해진 상태였으니까.

‘붉은 눈동자에 사족보행…… 울독 이다.’

울독은 맷집이 좋고 이동속도가 굉 장히 빠르지만 대다수의 플레이어들 은 그들을 낮잡아본다.

바로 겁이 많고 전투력이 약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 었다.

실제로 울독은 몇 마리가 모여 있 든,햇불만 들고 있으면 큰 위협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건 야생의 울독들 이야 기고.’

그들은 누군가에게 ‘사육’되는 순 간,전혀 다른 몬스터가 된다.

‘마치 말처럼.’

태생적으로 순하고 겁이 많은 말이 훈련을 받아 용맹한 전투마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옵니다.”

“오다뇨? 대체 뭐가……

투두두두!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수풀 들이 강렬한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

렸다.

동시에 서준호는 쥐고 있던 협회검 을 슬쩍 쳐다보았다.

'흑룡아의 첫 끼니인데 저런 맛없 는 녀석들을 먹여줄 수는 없지.’


그는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차 팀장 깨워요.”

“진심이세요? 하지만 저는 아무것 도……

안 보이는데요? 라고 서미래가 말 하려던 순간.

커어엉!

수풀에서 빛살처럼 튀어나온 울독 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앞발톱을 휘 둘렀다.

‘……아?’

서미래는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다 가오는 발톱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녀는 능력 특성상 전투원보다는 서포터에 가까운 역할군.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튀어나온 울 독의 공격을 회피하기에는 신체 능 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서걱!

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그어진 백색

섬광 하나가 울독의 몸을 반으로 갈 라버렸다.

그러자 울독의 위에 타고 있던 다 크엘프가 그대로 모닥불 위를 뒹굴 었다.

“캬아아악!”

화상을 입고 찢어지는 비명을 뱉어 낸 다크엘프의 몰골은 흉측했다.

미(美)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은 세계수의 저주를 받아 썩어 문드러진 피부를 지니고 있었으니 까.

“어디보자…… 남아 있는 다크엘프 가 열 마리,울독이 아홉.”

서준호는 자신을 포위한 몬스터들 을 스윽 훑었다.

“먼저 오든가. 싫으면 내가 가고.”

“크르륵!”

“캭!”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일 까?

다크엘프들이 무기를 꼬나쥐고 서 준호에게 달려들었다.

‘어디 흑갑의 성능을 한 번 확인해 볼까.’

눈을 반짝인 서준호는 자신에게 달 려드는 전방의 다크엘프 셋을 일검 에 갈라버렸다.

좌아아악!
그들의 뜨거운 피가 땅에 닿기도 전에,그는 이미 두 번째 검격을 준 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뒤쪽의 다크엘 프들이 공격을 성공시켰다.

깡! 까강!

그러자 옆구리와 등쪽에서 간지러 운 느낌이 들었다.

“……이거 끝내주네?”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린 그는 그대 로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몽둥이처 럼 휘둘렀다.

좌아아악!

다크엘프의 머리통 네 개가 추가적 으로 허공에 떠올랐다.

평균 레벨 30〜35 의 다크엘프들이 그의 일검조차 받아내지 못한 것이 다.

‘아,옛날 생각난다.’

옛날에도 능력치가 높아진 후로는 이런 잡몹들을 상대로 낑껑대면서 사냥한 기억은 없었다.

그저 학살을 했을 뿐이다. 마치 지 금처럼.

“캬,캬윽!”

“크르윽!”

순식간에 동료 일곱이 죽자 다크엘 프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 굴을 쳐다봤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 사이에 전우 애 따위가 있을 리는 없었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 린다, 이놈들아.”

그저 남아 있는 아군을 어떻게 활 용해야 본인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를 본능적으로 계산할 뿐.

서준호는 주춤주춤 물러나는 그들 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나마 용감한 다크엘프 하나가 악 에 찬 눈으로 창을 내질렀다.

채앵!

이를 가볍게 홀린 서준호의 검은 창대를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가며 녀석의 심장을 터트렸다.

‘남은건 둘. 누구로 할까?’

둘 중 하나는 자연스럽게 놓아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차민우 파티의 눈을 피해

‘죽은 자의 고백’을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쇄애액!
고맙게도 다크엘프 한 마리가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러서 그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오케이,건방진 놈. 너로 정했다.”

순식간에 녀석의 목을 날려버린 서 준호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에이씨,저기 한 마리 도망가네? 마무리하고 올게요!”

깨개갱! 깨앵!

뒤쪽에서는 한창 개 잡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잠에서 깬 차민우와 최진표 가 울독들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 이다.

“나쁘지 않네.”

고개를 돌린 서준호는 허겁지겁 도 망치는 다크엘프를 뒤따랐다.

“음음,과연.”

죽은 다크엘프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아 있던 서준호가 중얼거렸다.

“부족장 녀석은 확실히 강하네.”

그의 인정을 받았다는 건 이 숲을 지배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강자라는 소리였다.

게다가 녀석은 단순히 힘만 센 것 도 아니었다.

‘머리를 쓸 줄 알아. 우리가 대비 를 할 수 없도록 동시다발적으로 야 습한 것만 봐도 그래.’

게다가 더 재미있는 부분은 녀석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다크엘프는 세계수의 뿌리를 갉아 먹은 순간부터 지성이 파괴된다고 들었는데……

부족장은 아직까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중이다.

‘이 녀석,정신력이 엄청난가 본 데? 타락하기 전에도 단순한 조무래 기는 아니었을 거야.’

죽은 자의 고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딱 거기까지.

서준호가 캠프로 돌아가자,상황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후우,준호 님의 예상이 맞았군요. 정말 야습이라니……

울독 아홉 마리를 처치한 차민우는 호흡을 정돈하며 설명을 늘어놓았 다.

“자고 있는데 괴성 소리가 들려서 일어나보니 한창 싸우고 계시더군 요. 부랴부랴 정신을 차리고 진표와
함께 울독들을 정리하긴 했는데…… 후우,죄송합니다.”

“저도 죄송합니다.”

그들은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도 자 고 있었던 것이 부끄럽고 미안한 눈 치였다.


“너무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울독 아홉 마리를 해치웠잖 아요.”

만약 그들이 울독을 맡아주지 않았 다면,서준호는 죽은 자의 고백을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두 사람을 나쁘지 않다고 평 가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적어도 내 발목을 붙잡을 사람들 은 아냐.’

오히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존 재였다.

서준호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 각했다.

“그나저나 다른 캠프들 상황은 어 떻습니까?”

그 질문에 서미래의 눈꼬리와 어깨 가 축 쳐졌다.

“……많이 안 좋아요. 잘 대처한 파티도 있지만,그렇지 못한 곳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아예 구성원 모


두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는 파 티도 있는 것 같고요.”

“그럼 서둘러야겠네요.”

“서두르다니,뭘 말입니까?”

차민우가 묻자,마른 수건으로 검 신에 묻은 피를 닦던 서준호가 짧게 대답했다.

“사냥.”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48 화

야생의 숲(5)

어두운 숲 속을 네 남녀가 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달리고 있는 길이 울퉁불퉁 한 숲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굉장 히 빠른 속도였다.

‘……정말 대단해.’

차민우는 선두를 자처한 서준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감탄했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숲에서,게다 가 길도 아닌 곳을 달리고 있는데도 자세가 안정적이야.’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재 서준호는 나머지 세 사람이 따라오기 쉽도록 쉬운 길만을 골라 가는 중이었다.

그것은 플레이어의 덕목 중 하나인 주변 지형 파악 능력이 매우 출중하 다는 증거.

차민우는 그가 양파 같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시니 원……,

그때,그의 비타가 짧은 알림을 토 해냈다.


동시에 서준호가 우뚝 멈춰섰다.

“혹시 구조 신호입니까?”

“확인해보겠습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차민우의 눈이 반 짝였다. "

그는 서준호를 쳐다보며 고개를 힘 차게 끄덕였다.

“구조 신호가 맞습니다. 동쪽 2km 부근에서 보낸 거예요.”

“2km 면 그리 멀지 않네요. 거기부 터 합류합니다.”

서준호는 동쪽으로 향하는 길을 찾 으며 생각했다.

‘최대한 많은 플레이어들을 구해야 해.’

당연한 소리지만 플레이어들을 구 하려는 이유는 딱히 투철한 영웅 정 신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게이트를 가장 효율적으로 공 략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을 냉정하게 계산하고,저울질 한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현재 검은이끼 부족 마을에 거주 하는 다크엘프는 총 1,000 마리.’

혼자서 공략하기에는 상당히 거슬 리는 머릿수다.

‘나도 사람이라고,사람.’

그는 사람이기 때문에 잠을 자야 하고,휴식을 취해야 하며 때때로는 밥도 먹어야 한다.

따라서 1,000 마리의 다크엘프를 혼 자서 사냥하려면 최소 열흘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문제는 그것도 내가 전력을 냈을 때의 이야기라는 거지.’

여기서 전력이라는 건 그가 서리와 어둠의 파수꾼 능력을 사용했을 때 를 말한다.

당연히 지금처럼 차민우 파티와 함 께하는 중에는 그 능력을 사용할 수 가 없었다.

‘결국 손발에 모래주머니를 찬 내 가 이 게이트를 가장 빨리 공략하는 방법은……

바로 함께 들어온 플레이어들을 최 대한 활용하는 것.

그것이 서준호가 새벽녘의 숲을 이 렇게 열심히 달리는 이유였다.

‘아마 오늘 밤이 분수령이 되겠지.’

그는 다크엘프들의 야습이 양날의 검과 같다고 생각했다.

현재 숲 전체에 흩어진 52 개의 파 티에는 최소 10 마리 이상의 다크엘 프들이 야습한 상태.

‘만약 그놈들을 모조리 사냥한다 면?,


하룻밤만에 적의 세력을 절반 이상 해치울 수 있다.

그쯤되면 다크엘프도 오늘과 같은 자잘한 게릴라전을 펼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병력을 나누기에는 마 을의 안전이 걱정될 테니까.

채앵,챙!

그때 앞쪽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 리가 들렸다.

야심한 새벽 시간이라 그런지 그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준호 님!”

“들었어요. 저 먼저 합류합니다!”

속도를 올린 서준호의 신형이 엿가 락처럼 쭉쭉 늘어졌다.

순식간에 나머지 세 사람을 따돌린 그는 인벤토리에서 투창을 꺼내들었 다.

“으으,사,살려줘!”

공터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울독의 밑에 깔려 있는 플레이 어.

그런 그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울 독 위에 타고 있던 다크엘프가 검을 높게 들어올렸다.

‘타이밍 좋고.’

서준호는 달리는 속도를 그대로 투 창에 실어던졌다.

쐐애애액!

마치 포환이 날아가는 듯한 사나운 소리와 함께.

과드득! 두개골에 창이 박힌 다크

엘프의 신형이 옆으로 스르륵 무너 졌다.

-컹컹!

주인을 잃은 울독은 혼란스러운 표 정으로 창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봤 다.

-……경?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달빛 섬광.

그것이 녀석이 기억하는 생에 마지 막 광경이었다.

서걱!

울독의 목을 그대로 참수한 서준호 는 검을 회수하며 주변을 훑었다.

“다크엘프가 다섯,울독이 셋 남았 네.”

다크엘프와 울독의 피를 뒤집어쓴 플레이어는 상황 파악을 못하고 신 음만 흘려댔다.


그를 힐긋 쳐다본 서준호는 일언반 구도 없이,다른 플레이어들이 싸우 는 장소로 몸을 날렸다.

“어? 프,플레이어!”

“지원이다! 다른 파티에서 구조 신 호를 보고 지원을 와줬구나!”

수세에 몰려 있던 플레이어들의 얼

굴이 밝아졌다.

“캬아아악!”

반면 사냥을 방해받은 다크엘프들 의 얼굴은 더욱 험악해졌다.

놈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을 내버려 두고 일제히 서준호에게 달려들었 다.

가장 거슬리는 존재부터 쳐죽이겠 다는 심산이었다.

“키륵!”

창을 꼬나쥔 선두의 다크엘프는 서 준호의 심장을 향해 창을 있는 힘껏 찔러 넣었다.

그 속도는 웬만한 플레이어보다 훨 씬 빨랐다.

“창의 속도,궤적, 힘의 배분까지 다 좋은데…… 딱 하나가 나빠. 바 로 상대.”

제자리에 서 있던 서준호는 천천히 한 쪽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창날이 그를 찌르기 직전, 벼락처럼 손날을 떨어트려 창대를 부러트렸다.

우지직!

무기를 잃어버린 다크엘프의 두 눈 이 휘둥그렇게 커지는 순간.

부러진 반쪽짜리 창날을 허공에서 그대로 낚아챈 서준호가 이를 녀석 의 목젖에 찔러 넣었다.

“네 창 쩔더라.”

“칵…… 카악……!”

숨조차 쉬지 못하는 녀석의 복부를 병 차버린 서준호는 검을 늘어트리 며 앞으로 걸어갔다.

주춤주춤.

그의 오만하고도 위압적인 기세에 짓눌린 다크엘프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우리를 잊지 말라고!”

“이 새끼들,동료의 복수다!”

생존자 파티의 플레이어들이 녀석 들의 훤히 비어버린 등을 찔렀다.

상황이 싱겁게 마무리되자 검을 수 납한 서준호가 물었다.


“파티장 손?”

“아,접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공손하 게 손을 들었다.

“피해 상황은요?”

“……야습으로 불침번을 서던 두 명이 죽었습니다. 그들의 비명을 듣 고 저희도 잠에서 깨긴 했지만……

크윽,비몽사몽한 정신으로 도망만 치다가 동료 셋을 더 잃었습니다.”

그는 분하다는 표정으로 눈물을 홀 리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입술에서 도 피가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그 심정을 잘 안다.

동료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마음은 앞으로도 족쇄가 되어 따라다닐 것 이다.

툭툭.

서준호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어깨

를 두드렸다.

한참이나 울먹이던 남자는 소매로 눈물을 슥슥 훔쳤다.

“늦었지만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그때서야 차민우 일행이 공터에 도 착했다.

그들은 상황이 마무리 된 것을 보 고는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너무 늦었군요.”

“헤엑,헤엑…… 저 진짜 열심히 달려왔는데……

서미래의 억울함이 느껴지는 중얼

거림을 듣던 서준호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부터 동쪽으로 갈 겁 니다.”

“동쪽이요……?”

생존자 파티장이 말을 받았다.

“예.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플레이 어들을 구하고,다크엘프를 사냥할 겁니다.”

이유는 간단했다.

검은이끼 부족의 마을은 동쪽 끝에 위치해 있으니까.


서준호가 물었다.

“저희와 뜻을 함께하시면 원수들을

모두 쓸어드리죠. 어쩌실래요?”

반 토막이 난 파티의 힘으로 복수 를 꿈꾸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복수를 함께해 준단다.

그 이유만으로도 파티장의 대답은 정해진 상태였다.

툭툭.

그는 자잘하게 말을 내뱉지 않았 다.

독기 가득한 눈빛을 드러내더니 주 먹으로 가슴을 한 번 칠 뿐이었다.

“좋네요.”

충분한 대답을 들은 서준호가 요구 했다.

“그럼 지금부터 북쪽으로 가주세 요.”

“북쪽? 따로 움직이는 겁니까?”

“예.”

서준호가 아무리 부지런히 움직여 도,새벽 동안 동서남북의 모든 숲 을 돌아다닐 수는 없다.

야생의 숲은 그만큼 넓은 지역이었 으니까.

‘그러니 내 손과 발이 되어 움직여

줄 산하의 파티들이 필요해.,

자신이 동쪽으로 향할 때 북쪽과 남쪽을 커버해줄 사람들이 필요했 다.

서준호는 자신이 구한 플레이어들 에게 그 역할을 맡길 생각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파티장이 입을 열었다.

“……저희 파티는 대한민국의 신성 에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철그덕.

흙바닥에 떨어진 투구를 주워 제 머리에 눌러쓴 파티장이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러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 다. 지금부터 블루웨일 파티는 북쪽 으로 향합니다.”

그들은 서준호의 첫 번째 손이 되 었다.

“허억…… 허억……

햇볕이 쨍쨍한 숲속을 달리던 남자 가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의 입에서는 단내가 풀풀 풍겨져 나왔다.

‘더 이상은…… 때려죽여도 못 달 려……

꼬박 이틀 가량을 도망쳤다.

허기는 물론이고 탈수 증상까지 걸 린 상태.

심지어 후들거리는 두 다리는 더 이상 움직이기를 거부했다.

결정적으로,자신은 중독된 상태였 다.

‘빌어먹을 다크엘프 놈들,화살촉 에 독을 발라놨어.’

셔츠를 올려 까맣게 변색된 옆구리 를 쳐다보던 그는 죽음이 코앞까지

당도했다고 생각했다.

중독된 상태에서,발 빠르고 후각 까지 뛰어난 울독들의 추격을 벗어 날 방법은 없었으니까.

“젠장……

서럽고 두려운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가 속해 있던 파티는 평균 레벨 28 의 숙련된 플레이어들로 구성되 어 있었다.

만약 다크엘프와 밝은 곳에서 정면 승부를 벌였다면 부상자조차 없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더럽고 졸렬한 몬스터 새끼들!”

하지만 적들은 간교했다.

어둠을 망토처럼 두른 다크엘프와 울독이 그들의 캠프를 야습했다.

자신이 따르던 선배의 재빠른 대처 가 아니었다면,그들의 파티는 전멸 했을 것이 분명했다.

一컹! 컹컹!

그때 멀리서 울독이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죽기 싫어! 나는 아직 죽기에는 창창한 나이인데……

더 이상 도망칠만한 기력은 없다.

다가오는 죽음을 마주한 남자는 눈

물을 줄줄 흘리면서 손을 움직였다.

그의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권총에 탄환을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내가 죽을 땐 죽더라도……

자랑스러운 브라보 파티의 막내로 서 개새끼 한두 마리 정도는 데려가 리라.

그가 이를 꽉 깨물며 장전을 마치 는 순간.


-커어어엉!

수풀에서 울독이 튀어나오며 그의 왼쪽 팔을 물어뜯었다.

“크윽!”

동시에 그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아앙!

한 줄기 총성이 숲으로 넓게 울려 퍼졌다.

“꼴좋다! 큭……

남자는 바닥에 고꾸라진 울독을 보 며 승리를 자축했지만.

一컹! 컹!

-커어엉!

-커엉! 커어엉!

이어지는 울독의 울음소리 수십 개 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심지어 울독의 이빨에 물린 상처가 제법 깊어 보인다.

‘이렇게 죽는 건가.’

한 자락 남아 있던 생존에 대한 희망이 연기처럼 흩어지려던 때.

별안간 울독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구슬프게 바뀌기 시작했다.

-끼잉,껑!

-왈왈! 깨갱!

“뭐,뭐지?”

남자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귀를 종긋 기울였다.

머지않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

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총성이……

“울독들이 누군가를 추격…… 어쩌 면 우리가 찾던……

“이 근처쯤일 텐데……

‘사람이다……r

눈알을 데굴데굴 굴린 남자는 소리 를 지를 힘조차 없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하늘을 향 해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었다.

타아앙!

그리고 잠시 후,울창한 덩쿨이 잘 리며 익숙한 얼굴이 고개를 쏘옥 내

밀었다.

“찾았다! 이 녀석! 이 녀석이 저희 파티의 막내입니다!”

“서,선배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선배의 얼굴을 보자 남자는 결국 울음보가 터져 버 렸다.

“끄흑…… 대체 어떻게…… 저는 선배가 꼼짝없이 돌아가신 줄……

“새끼야 내가 죽긴 왜 죽어? 그리 고 감사 인사는……

고개를 돌린 선배는 다가오는 사람 들을 쳐다봤다.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걸어오는 수십 명의 플레이어.

그의 시선은 그들을 선두에서 이끄 는 사내에게 고정되었다.

“내가 아닌 저분에게 하라고.”

“저분이…… 대체 누구신데요

……?”

게이트 안에서 사람들을 저렇게 주 렁주렁 데리고 다니는 사람을 처음 본 후배가 물었다.

이에 선배는 짧게 한 마디를 뱉어 냈다.

“서준호 플레이어야. 하지만 아마

사람들은 조만간 그를 이명(異名)으 로 부르겠지.”

“이명……? 1 층의 플레이어한테도 이명이 붙어요?”

“보통은 안 붙지만 저분처럼 놀라 운 업적을 세운 플레이어에게는 근 사한 이명이 붙지.”

“대체 무슨 이명이 붙었는데요?”

꼬박 이틀 동안.

서준호의 지휘 아래에서 총 152 명 의 플레이어가 구출되었고,436 마리 의 다크엘프가 죽었다.

그 놀라운 업적을 직접 목도한 플 레이어들이 입을 모아 붙인 이명은

단 하나.

“아군을 수호하고 적들을 참수하는 검은 갑옷의 기사.”

바로 흑기사(Dark Knight) 였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49 화

야생의 숲(6)

야생의 숲 동쪽에 위치한 넓은 공 터.

그곳은 제법 그럴싸한 전초기지로 탈바꿈된 상태였다.

두 개의 입구에는 엉성하지만 목책 이 세워져 있었고,경계병이 각각 네 명씩 서 있었다.

기지의 중앙에는 캠프파이어를 연 상시키는 거대한 불이 타오르고 있 었는데,그 주변으로 80 명이 넘어가


는 플레이어들이 옹기종기 모여 늦 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후루룩,후를.”

서준호의 저녁은 컵라면이었다.

인벤토리에 챙겨둔 김치와 함께 든 든한 식사를 마친 그는 주변을 훑어 봤다.

‘여기에 80 명. 그리고 북쪽과 남쪽 에서 합류 중인 플레이어들이 72 명.’

총합 152 명.

그것은 현재 이 게이트 안에 존재 하는 플레이어의 수와 동일했다.

놀랍게도 그들 모두가 자신과 뜻을 함께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 아.’

첫날 밤의 야습으로 48 명의 플레 이어가 목숨을 잃었다.

총 전력의 사분의 일이 사라진 셈 으로,그만큼 남은 이들에게 지워진 부담감은 더욱 커졌다.

‘……그나마 부담감과 함께 분노도 커져서 다행이야.’

친구,선배,후배,연인.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플레이어 들은 복수의 칼을 갈았다.

아마 날이 밝는 즉시 총공세를 펼 치자는 명령을 내려도 그들은 군말 없이 따를 것이다.

서준호는 침착하게 현재 상황부터 정리했다.

‘현재 내 레벨이 24.’

그가 직접 처치한 다크엘프와 울독 은 78 마리로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는 않았다.

대부분은 그의 부탁을 받고 숲 전

역으로 흩어진 플레이어들이 해치운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플레이어의 구출을 우선순 위로 두었기에 사냥만 주구장창 할 시간도 없었다.

‘남아 있는 적들의 수는 560 마리 정도였나?’


이 게이트에 들어온 플레이어라면 두당 다크엘프 네 마리는 가뿐하게 사냥할 능력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사냥’을 했을 때의 이야기다.

‘아마 내일부터 이루어지는 건 전 쟁에 가깝겠지.’

마지막 실종자였던 브라보 파티의 막내를 구한 이후.

서준호는 지금 이 자리에 전초기지 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그 이후로 단 한 마리의 다크엘프 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크엘프 놈들도 더 이상의 전력 손실은 부담스럽다는 거야.’

부족장 녀석은 머리를 굴릴 줄 아 는 놈이니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것 이다.

아마 마을의 빗장을 굳게 걸어 잠 그고 수성에만 전념하겠지.

결국 먼저 움직여야 하는 건 이쪽 이었다.

‘문제는……

서준호는 식사 중인 플레이어들의 면면을 살폈다.

인종도,국적도,소속된 길드나 파 티까지 모두 다른 각양각색의 플레 이어들.

그들 중에는 서미래와 같은 비전투 원도 포함된 상태였다.

‘부족장의 명령으로 하나 되어 움 직이는 다크엘프와 비교하면…… 오 합지졸이야.’

당장이야 복수에 눈이 멀어 자신의 말을 따른다지만,그게 언제까지고 이어질지는 몰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략을 서둘러야 된다고요!”

“아니, 심정이야 이해는 되지 만…… 한 사람을 위해 전체가 희생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서준호의 눈에 논쟁을 벌이는 두 그룹이 들어왔다.

“젠장…… 이건 병원의 고위 치료 사 정도는 되어야 해독할 수 있는 수준이란 말입니다.”

다크엘프의 독에 당한 브라보 파티 의 막내.

그는 현재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 다.

최진표를 비롯한 힐러들이 치료를 시도해봤지만,그들의 수준으로는 해독할 수 없는 지독한 독이었다.

“대체 뭐가 그리 무섭습니까? 합류 중인 플레이어까지 포함하면 150 명 이에요,150 명!”

“아니,말은 똑바로 하세요. 무섭긴 대체 누가 무서워해요?”

“……끄응.”

서준호가 이마를 짚었다.


안 그래도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데 서로 다투기까지 하다니.

‘아무래도 이들을 데리고 정상적으 로 공략하는 건 무리인데……

그때,말다툼을 벌이는 이들을 쳐 다보던 플레이어 하나가 물었다.

“준호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빨리 공략하는 것과 천천히 공략하는 것. 둘 다 장단점은 있죠. 하지만 저는……

그가 입술을 열자,수십 쌍의 눈등 자가 그를 향했다.

“가능하다면 최대한 빨리 공략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브라보 파티원들의 얼굴이 밝아졌 고,다른 쪽 그룹은 이해할 수 없다 는 표정을 지었다.

이에 서준호는 황급히 못을 박았 다.

“확실히 말해두지만 환자 한 명을 위해서 내린 결론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극히 객관적으로 생각해 서 도출된 결론이었다.

그는 기억을 통해 적들의 규모를

정확히 알고 있지만,아직 이들은 모르지 않는가.

“우선 저는 최소 첫날 밤 야습을 했던 다크엘프들과 비슷한 규모가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그리 생각하시는 연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저희는 많아봐야 200 마리 정도라 고 생각했습니다만.”

“어려울 거 없죠. 아마 여러분은 다크엘프의 습성을 염두에 두고 계 산하셨을 겁니다.”

다크엘프는 기본적으로 개인주의 성향이 매우 두드러지는 녀석들이

다.

이곳에 모인 플레이어들은 초보가 아니니 그 점을 가장 먼저 의식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숲의 다크엘프들이 일 반적이지 않다는 거지.’

그건 지성을 갖춘 검은이끼 부족장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갖춘 녀석은 개인 주의가 만연한 다크엘프들을 하나 모았으니까.

그 사실은 첫날 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야습이 시행된 것만 봐 수 있었다.

이러한 부분을 설명해 주자,플레 이어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확실히 이 숲의 다크엘 프가 알려진 것과 많이 다르긴 하 죠.”

“야습을 했다는 것은 놈들이 조직 적이라는 뜻. 그 구심점이 되는 건 말씀하신 대로 부족장일 가능성이


매우 크군요.”

“문득 과거에 어둑서니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수능 공부는 교 과서 위주로 하되 사냥은 절대 교과


서에서 배우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마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

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게이트 안쪽은 역시 예측불허의 장소네요.”

플레이어들이 서준호의 의견에 쉽 게 공감을 했다.

그는 이곳에서 레벨이 제일 낮은 플레이어였지만,동시에 가장 많 것을 보여준 플레이어였으니까.

‘이래서 플레이어가 실적주의라는 소리를 듣는 거지.’ I

마나 남았을까요?”

“울독은 더 이상 없을 겁니다.”

“예에!?”

서준호의 확신에 찬 발언에 플레이 어들이 눈을 깜빡였다.

그가 점쟁이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부분을 확신한단 말인가.

“마지막 플레이어를 구출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그건 혹시 저희 막내의 이야기인 가요?” "

브라보 파티원이 조용히 손을 들며 물었다.

서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향 해 물었다.

“그때 그를 쫓고 있던 것이 뭐였 죠?”

“어…… 분명히 울독 수십 마리였 습니다. 다크엘프들이 개들을 풀어 녀석을 추격하더군요.”

“맞습니다. 그리고 그를 쫓던 울독 들은 모두 성체가 아닌 새끼들이었 죠.”

그를 쫓고 있던 것은 아직 다 자 라지 못해 다크엘프를 태우지 못하 는 아기 울독들이었다.

“추격에 새끼들까지 동원했다는 소

리는,놈들이 야습에서 성체 울독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아아……

“과연!”

플레이어들이 무릎을 탁 치며 이에 공감했다.

동시에 감탄했다.
자신들이 그저 사냥에 여념이 없을 때,서준호는 그런 디테일한 부분까 지 놓치지 않았으니까.

“아마 당장은 다크엘프들도 마을 빗장을 걸어 잠그고 수성에 전념하 겠죠.”

서준호는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말했다.

“하지만 공략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리한건 그들이 아닌 저희입니다.”

그는 플레이어들이 지닌 고질적인 문제를 짚었다.

“넉넉치 못한 식량,불편한 잠자리, 수적 열세.”

적들의 군세는 아직도 500 마리가 넘게 남아 있다.

부족장도 당장이야 가만히 있겠지 만,상황을 파악한다면 움직임이 달 라질 것이다.

“저희를 미친 듯이 괴롭힐 겁니다. 첫 날처럼 대대적인 야습은 없겠지 만……

“밤마다 독이 듬뿍 묻은 화살을 날 리고 도망치겠군요.”

“충분히 쉬지 못한 저희는 날이 갈 수록 피폐해질 테고……

“자신들이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 서는 순간,마을에서 우르르 나오겠 군요.”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들뿐이라 서 이해시키기는 편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한 플레이어 들은 서준호의 의견을 지지했다.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듣고 보니 말씀하신 대로 최대한 빨리 공략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 다.”

공략 속도를 높이자는 쪽으로 의견 이 좁혀지자 플레이어들 사이의 불 화 또한 사라졌다.

“저기,아까는 미안합니다. 저희도 목숨이 달린 일인지라……

“아뇨. 저희도 너무 저희 입장만 밀어붙여서 죄송했습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서준호는 자리를 파했다.

“현재 탐색꾼 플레이어들에게 주변 정찰을 부탁한 상태입니다. 마을에 대한 정보가 빨리 들어오면 좋겠군
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준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늦어도 내일 아침이면 마을의 존 재가 알려지겠지.’

그가 일부러 동쪽 공터에 전초기지 를 세운 이유는 놈들의 마을이 동쪽 에 있었기 때문이니까.

“그럼 날이 밝기까지 다들 푹 쉬어 두세요.”

이후 서준호는 슬쩍 따라오라는 눈

짓을 서미래에게 보냈다.
“왜 불렀어요?”

그를 따라 조용한 곳까지 따라온 서미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리보기 능력,이제 사용할 수 있죠?”

“어"•… 가능은 해요. 봐드릴까 요?”

“예.”

서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는 제스처를 취한 서미래는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기를 잠시,고개를 흔든 그녀

가 입을 열었다.

“오오,놈들의 마을을 찾았어요! 그리고 내일 점심 즈음에 바로 공략 하러 가는데요?”

“그리고요?”

“놈들의 수가 제법 많아요. 말씀하 신대로 울독들은 보이지 않았고…… 다크엘프가 한 600 마리 정도?”

“또?”

“그리고……

부르르르.

돌연 몸을 떨어 보인 그녀는 짐짓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제 어깨를 감

싸 안았다.

“매우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다 크엘프가 있어요…… 그 녀석 주변 에는 다른 녀석들보다 덩치가 큰 다


크엘프들도 다섯 마리가 보였구요.”

다행히 자신도 아는 녀석들이었다.

‘검은이끼 부족장과 그를 보필하는 다크 엘븐 나이트들.’

하지만 서준호가 알고 싶은 정보는 이런 게 아니었다.

적들의 정보야 이미 기억을 통해 봐와서 익히 알고 있는 것들.

그가 진짜 궁금한 것은,‘자신’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알쏭달쏭.

그녀는 의구심이 담긴 눈빛으로 서 준호를 쳐다봤다.

“그쪽이 무슨 얼음 같은 걸 들고 있던데…… 아티팩트인가요?”


서준호는 무표정을 고수했지만 속 은 조금 쓰린 상태였다.

‘……부족장 녀석이 그렇게나 강한 가? 내가 서리 능력을 써야 할 정 도로?,

바로 이것을 알고 싶어서 그녀에게

미래를 봐달라고 한 것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능력이 공개 될 수 있는 상황은 원천 차단하고 싶었으니까.

“많은 도움이 됐어요. 지금 본 것 들은 다른 플레이어들한테도 말해주 세요.”

“뭐…… 그럴게요.”

서미래가 자리를 떠나자 서준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침 해가 밝자 밤새 정찰을 떠났 던 탐색꾼들이 돌아왔다.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 를 들고서.

“마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 멀지 않아요. 여기서 동쪽으 로 걸어서 두 시간 정도?”

“오오오,스포일러의 말이 맞았군.”

그것이 좋은 소식이었고.

“……그런데 병력이 생각보다 훨씬 많아요.”

“멀리서 살핀 것이 전부이지만 최 소 500 마리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힘든 싸움이 될 겁니다.”

그것이 나쁜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미 전날 밤 서준호가 예 상했던 부분이었기에 놀라는 플레이 어는 없었다.

그저 서준호가 이를 맞췄다는 점을 두고 다시 한 번 그의 뛰어남을 인 정할 뿐.

“블랙카우 파티 7 인,합류합니다.”

“철괴 파티 4 인,합류했소.”

게다가 북쪽과 남쪽에 퍼트려놓았 던 플레이어들이 속속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점심 무렵이 되자 게이트의 모든 플레이어가 한 자리에 모이는 희귀 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대형 게이트 안에서 이 정도 숫자 의 플레이어가 한 자리에 모이다 니……

“입장할 때를 제외하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정말 재미있어. 이 많은 사람 들을 그러모은 게 단 한 사람의 힘 이라니.”

플레이어들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흑갑을 입고 전쟁 준비를 하는 서준 호에게 향했다.


따지고 보면 이 자리에 모두는 그 에게 값을 셈할 수 없는 도움을 받 은 상태였다.

만약 그에게 도움받지 못했다면,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허리를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던 서준호가 물었다.

“준비는 끝났어요?”

이에 씩씩하게 대답한 것은 다름 아닌 차민우였다.

게이트에 입장할 때는 분명 그가 파티장이었는데,어느샌가 서준호의

부관처럼 되어 있었다.

심지어 본인은 오히려 그것을 마음 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거동불가의 부상자 3 인과 그들을 보호할 비전투원 2 인을 제외한 147 인. 준비 끝났습니다.”

“그럼 가시죠.”

서준호의 담담한 중얼거림과 동시 에 탐색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길을 잡았다.

그 뒤를 서준호가 따랐고,또 그 뒤를 100 명이 넘어가는 플레이어들 이 뒤따랐다.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귀환 050 화

야생의 숲(7)

사람은 눈으로 보고,귀로 듣고, 피부로 느끼면서 경험을 쌓는다.

하지만 인간들은 예로부터 호기심 이 왕성했다.

자신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알고 싶 어진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기록이었다.

서준호도 엘프의 마을에 방문한 자 가 서술한 일지를 읽은 적이 있었 다.

‘엘프들의 마을은 숲속의 세계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로형 구조.’

하지만 다크엘프의 마을을 전혀 달 탔다.

세계수의 버림을 받은 그들에게는 울창한 나무와 꽃,식물 따위가 허 락되지 않았으니까.

실제로 그들의 마을에는 그 흔한 잡초 한 뿌리조차 없었다.

‘다크엘프가 머무는 곳 주변의 식 물은 말라죽고,나무는 비틀리며 열 매는 썩어.’

그것이 세계수의 저주를 받은 엘프 의 말로.

심지어 그들은 직사광선에 노출되 면 지독한 피부병에 걸리기까지 한 다.

‘결국 다크엘프들은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도망쳤지.’


그곳은 다름 아닌 지하였다.

서준호도 어둑서니 시절에 다크엘 프의 지하 마을 몇 개를 공략해본 적이 있었다.

들어놓은 걸까요?”

'왜겠어.’

부족장 녀석이 영약해서겠지.

검은이끼 부족의 마을에는 거대한 지하굴 입구 하나만이 존재했다.

“입구가 하나뿐이라 뒤를 잡힐 리 는 없겠지만……

대신 부족장을 만나려면 지하굴의 모든 다크엘프들을 상대해야 하리 라.

미간을 찌푸린 서준호가 마을을 둘 러싼 돌벽 위를 쳐다봤다.

그곳에는 두꺼운 망토로 피부를 모

두 가린 다크엘프 궁수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50 마리?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는 건 큰 문제가 안 되겠군요.”

현재 모인 플레이어들의 수준과 머 릿수를 생각하면 50 마리는 아무것 도 아니었다.

실제로 플레이어들은 몸이 근질근 질한지 의욕을 드러냈다.

“해치울까요?”

“이 거리라면 제 능력으로 소리소 문 없이 처치할 수 있습니다.”

“신호만 주시죠.”

막을 이유는 없었기에 서준호는 고 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플레이어들이 각자의 능력 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돌벽 위에서 갑자기 생장한 덩쿨이 다크엘프의 몸을 파고들기도 했고.

궁수들의 살이 다크엘프 궁수의 심 장과 미간을 정확히 꿰뚫기도 했다.

50 마리의 적들이 처리되는데 걸린 시간은 단 15 초였다.

“갑시다.”

수풀 속에서 몸을 일으킨 서준호는 당당하게 마을 정문으로 들어섰다.

플레이어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마을을 둘러봤다.

“정말 조용하군요.”

“만약 다크엘프에 대해서 모르는 초보자들이 찾아왔다면,버려진 마 을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 는 조용한 마을.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저희들의 발밑 에 오백의 다크엘프들이 우글거리는 거죠?”

그 말을 듣고 저마다 상상을 해본

사람들은 소름끼친다는 표정을 지었 다.

“들어가죠. 혹시 모르니 탐색꾼 두 분이서 입구를 지켜주세요.”

입구에 플레이어 두 명을 세운 서 준호는 거리낌 없이 거대한 지하굴 입구로 들어섰다.

이어진 긴 계단을 내려가 은은한 햇불이 비추는 공터를 보는 순간,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입구가 여러 개가 필 요 없었구만.”

보통 다크엘프들의 지하 마을은 개 미굴처럼 생긴 구조다.

하지만 검은이끼 부족의 지하굴은 마치 진시황릉처럼 기다란 일자 구 조로 되어 있었다.

저 멀리,그러니까 1 킬로미터 정도 앞의 썩은 나무 옥좌에 거대한 다크 엘프가 앉아 있었다.

“저 녀석이 검은이끼 부족의 장.” 서준호는 그와 자신의 거리를 가늠 해 보았다. °

‘거리는 겨우 1 킬로미터. 그리 멀 지는 않아. 다만……

그와 자신의 사이에는 500 마리가 넘는 다크엘프들이 병마용처럼 빼곡 히 들어서 있었다.

심지어 그들을 지휘하는 건 일반적 인 다크엘프보다 훨씬 강한 다크 엘 븐 나이트였다.

“으음……!”

“개미굴처럼 좁은 지역에서의 난전 을 예상했는데…… 대규모 전면전이 라니?”

“다크엘프가 이런 구조의 마을을 만들었다는 소문은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한 플레이어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준호는 담담한 표정을 지 으며 말했다.

“오히려 잘 됐네요.”

플레이어들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 으로 그를 쳐다봤다.

“저는 적들이 수적 우위를 바탕으 로 저희를 포위하는 것을 걱정했습 니다. 하지만 이곳은 장애물조차 없
는 복도.”

마치 6 차선 고속도로처럼 뻥 뚫린 지하 복도만이 존재했다.

“그냥 정면에서 부딪치면 됩니다. 한 사람당 다크엘프 네 마리씩만 잡 으면 되겠네요.”

말을 끝맺은 서준호는 주변을 스윽 훑어보며 플레이어들과 눈을 맞췄

다.
그의 눈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당신들,설마 다크엘프 네 마리조 차 잡을 자신이 없냐고.

그 오만한 눈빛을 마주한 플레이어 들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뭐지? 뭔가 속에서부터 울컥하는 데?’

‘아무리 그래도 내 레벨이 몇인데 다크엘프 네 마리도 못 잡을까

‘네 마리가 뭐야? 난 열 마리를 잡 겠어.’

은인의 의심에 자신의 강함을 증명 해보이고 싶은 마음과 호승심.

•그 두 가지 감정이 플레이어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까짓거 한 번 해봅시다!"

“어이,우리 파티원들은 두당 다섯 마리씩 잡고 나중에 나한테 녹화 영 상으로 검사 받아라.”

“다섯 마리? 홋,아그들아. 저쪽 샌님들이 다섯 마리란다. 그럼 우린 열 마리로 간다!”

“우오오오!”

같은 아군이어도 제각각 다른 길드

와 파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다.

서로간의 경쟁의식은 당연히 존재 했다.

서준호는 타이밍 좋게 피어오른 플 레이어들의 경쟁 욕구에 찬물을 쏟 아붓지 않았다.

‘내가 미쳤어?’

오히려 그 마음에 기름을 붓고 불 을 더 질렀다.

그러고 보니 엘릭서가 있으려나?” 엘릭서.

죽어가는 사람도 되살린다는 엘프 들의 비약.

그건 플레이어들이 이 게이트에 들 어온 가장 큰 이유였다.

복수심에 잊고 있던 엘릭서의 존재 가 언급되자 플레이어들이 눈을 빛 냈다.

‘……그래,엘릭서. 까맣게 잊고 있 었군.’

‘보통 엘릭서가 발견되면 공략 기 여도에 따라 용량을 나누니까……

‘가만,우리 파티가 지금까지 다크 엘프를 몇 마리 잡았더라?’

잠시 생각을 정리한 플레이어들은 단순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자잘한 기여도보다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활약 을 하는 파티가 엘릭서를 가장 많이 가져갈 것이라고.


‘이제야 쓸 만한 얼굴들이 됐네.’

플레이어들의 면면을 확인한 서준 호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함이 엿보 이던 그들의 눈빛에는 살기와 독기 가 가득 찬 상태였다

그렇다면 더 망설일 필요가 있을 까?

‘없지.’

스르릉!

서준호의 협회검이 힘차게 울었다.

그는 돌격하자는 낯부끄러운 말 따 위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저 누구보다 먼저,누구보다 빠 르게 달려 나가서.

서걱!

다크엘프 다섯 마리의 목을 베어냈 다.

그 호쾌한 일검이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치사하게 먼저 가기 있습니까!?”

“얘들아,가자!”

“우어어어어!”

그 시원시원한 모습에 제대로 스위 치가 켜진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빼 들고 전장에 난입했다.

백 명이 넘는 플레이어와 수백 마 리의 몬스터가 한데 엉킨 전쟁.

옆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틈조차 없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 속에서 가장 꿀을 빨고 있는

것은 서준호였다.

‘와,경험치 들어오는 속도 봐라.’

그의 레벨은 이 게이트에서 가장 낮았지만,능력치는 오히려 제일 높 았다.

덕분에 남들이 검을 두 번 세 번 휘둘러서 다크엘프 한 마리를 잡을 때.

그는 단 한 번의 검격으로 다크엘 프를 사냥할 수 있었다.

‘게다가 검술 테크닉도 내가 제일 쩔고.’

서준호의 검은 하나하나가 즉사로 이어지는 급소만 노리는 중이었다.

말 그대로 지독한 살기가 드리워진 검.

그 검이 사람을 향했다면 희대의 빌런이 되었겠지만,다행히 검끝은 몬스터를 향해 있었다.


서걱! 서걱!

그래서인지 서준호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다크엘프의 검이 앞을 막으면 검을 베었고.

다크엘프의 방패가 앞을 막으면 그 방패를 베어냈다.

검에 실린 검기가 그 말도 안 되

는 일을 가능케 해주었다.

‘뭐야,검기라고? 게다가 나보다 완성도가 높아 보이는데?’

'데뷔한지 아직 세 달도 안 됐다고 들었는데……

'이게 재능의 차이인가?,

보는 이로 하여금 허탈함을 심어줄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검기였다.

서걱! 서걱!

흑색의 검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서준호를 막을 수 있는 다크엘프는 어디에도 없었다.

때문에 바퀴벌레처럼 득실거리는

다크엘프들을 돌파하면서도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오히려 기세를 탄 서준호는 탄력을 받아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기여도를 높이겠다고 호기롭게 그 를 따라오던 플레이어들은 어느 순 간 숨이 턱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 다.

‘대체…… 속도는 언제 늦추시는 거지?’

‘설마 이대로 부족장한테까지 가는 건 아니겠지?’

‘젠장,나는 슬슬 한계인데……

‘멈춰줘요 시벌.’

결국 자신의 한계를 느낀 플레이어 들은 하나둘 서준호의 꼬리에서 떨 어져 나갔다.

“크윽!”

개중에는 악으로 깡으로 그를 뒤따 르던 차민우도 있었다.

그는 사방의 다크엘프들을 검으로 밀쳐내며 연신 땀을 뻘뻘 홀리고 있 었다.

서걱!

좌에서 우로 가볍게 검을 그어 주 변의 다크엘프들을 일소시킨 서준호

가 그에게 다가갔다.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뒤쪽으로 빠지세요.”


“하,하지만……

차민우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 니,흔들리는 눈빛으로 부족장이 있 는 방향을 쳐다봤다.

“그럼 설마 혼자서 저 길을 뚫으시 겠다는 소립니까? 그건 정말 미친 짓입니다.”

피식. 서준호는 대수롭지 않게 웃 으며 대꾸했다.

“아직 저를 잘 모르시나본데,저 원래 미친 짓 자주해요.”

그래서 덕구랑 다른 애들한테도 자 주 혼나거든요.

할 말을 잃어버린 차민우는 완벽하 게 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 순간 깨달았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게 욕심이라 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뒤쫓아가기는커녕,멀리서 지켜보 는 것마저도 벅찰 줄은 몰랐다.

‘아직도 갈 길은 멀구나.’

자신의 한계를 여실히 실감한 그는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그저 다짐을 할 뿐이었다.

“다음에는 절대로…… 뒤쳐지는 일 이 없을 겁니다.”

“그 말 지키시려면 고생 꽤나 많이 하셔야 할 텐데?”

“두고 보십시오. 독하게 훈련할 테 니까.”

단단한 눈빛으로 대꾸한 차민우는 몸을 돌렸다.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서 준호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눈이네. 목표를 지닌 사람은 금방 강해지는 법이지.’

벌써부터 다음에 만날 때가 기대되 는 남자였다.

스윽,몸을 돌린 서준호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현재 그는 24 레벨에 경험치 바를 94% 정도 채운 상태.

다크엘프가 마리당 0.25%씩 경험 치를 줬으니 24 마리만 더 잡으면 25 레벨이 도달한다.

“……하지만 더 빠르게 올리는 방 법이 있지.”

서준호는 자신의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녀석들을 응시했다.

일반적인 다크엘프보다 머리 하나 크기 정도 더 높아 보이는 녀석들.

“다크 엘븐 나이트라면 경험치도 더 잘 주지 않겠어?”


검은이끼 부족에 딱 다섯만이 존재 하는 다크 엘븐 나이트.

그들 모두가 서준호를 에워쌌다.

“이야,그런데 한 번에 다섯 마리 를 다 붙였어? 너네 대장이 날 좀 높게 평가하나 보다?”

흥이 돋은 서준호는 검을 바닥에 꽂아넣으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그에 상응하

는 예를 갖춰야겠지.”

그는 인벤토리에서 칠흑의 검집 하 나를 뽑아냈다.

세계삼대야장 중 하나인 권 노야가 용의 뼈를 직접 두드려 빚어낸 하나 의 예술 작품.

흑룡아가 처음으로 적을 물어뜯기 위해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우우웅!

녀석은 어서 맛있는 피를 먹여달라 고 보채기라도 하듯,연신 검명을 터트렸다.

“나참,이 녀석 성격 한 번 존나 급하네.”

물론 싫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이 너무 잘 맞아서 신 기할 정도였다.

“어떻게 주인 마음을 이렇게 잘 헤 아린대?”

자신도 지금 당장 이 녀석을 휘두 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 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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