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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전문사학위논문
지도교수 양 정 무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


연구: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비평, 후원자 및 미술시장의
관계를 중심으로

The Study of Dante Gabriel Rossetti’s‘Venetian Style’


in the relation of art criticism, clients, and art market in
Victorian England

2016년 2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 과정

미술원 미술이론과 미술사전공


전사랑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 연구: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비평, 후원자 및 미술시장의 관계
를 중심으로

지도교수 양정무

이 논문을 예술전문사 학위논문으로 제출함

2016년 2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과정
미술원 미술이론과 미술사전공
전사랑
전 사 랑의 예술전문사 학위논문을 인준함

2016년 2월

심사위원장 전 동 호 (인)

위 원 양 정 무 (인)

위 원 이 임 수 (인)
국 문 초 록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은 주로 여성의 상반신만을 감


각적으로 재현한 로제티의 1860년대 화풍을 일컫는다. 기존 로제티 연구에서는
‘베네치아 양식’에 대한 사회 경제사적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다. 이에 본 연
구는 ‘베네치아 양식’에 집중하여 당대 사회상의 역학관계를 파악하고자 했
다. 특히 이 양식의 등장 배경과 미술비평, 미술시장, 후원자와의 관계를 다루면
서 로제티의 중기 양식을 다각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은 19세기 중후반 영국에서 16세기 베네치아
미술이 각광받은 가운데 등장한 복고적 양식이었으나 비평계에서 비난을 면치
못했다. 19세기 미술시장과 미술비평이 대중적 영역으로 확대된 가운데, 로제티
의 감각적인 여성 재현방식과 유미주의적인 특성이 빅토리아 시대 보수적 관념
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이에 본 연구는 당대 미술비평을 분석하면서 ‘베네치아
양식’이 어떤 미적 논제를 야기시켰는지 파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당대 주
류 보수적 비평을 주도하던 존 러스킨을 중심으로 로버트 부캐넌 등의 비평과,
A. C. 스윈번, 윌리엄 로제티 등의 유미주의 비평에 대한 평가와 분석을 시도했
다. 그리고 당대 미술계에 전반적으로 보수적 관념이 팽배해 있었음을 확인하였
다.
당대 비평계에서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면치 못한 로제티의 ‘베네
치아 양식’은 역설적으로 로제티의 소수의 부르주아 후원자들 사이에서는 애
호의 대상이었다. 이에 본 연구는 로제티가 비평계의 날선 비난을 피해 소수의
후원자들과 거래하면서 이른바 ‘틈새시장’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
던 것에 주목했다.
특별히 미술시장안에서 ‘베네치아 양식’을 파악하기 위해 본 연구자는
로제티의 경제적 상황, 작품판매 방식, 작품의 매매 가격, 후원자들의 작품 진열

i
방식과 미적 취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특히 미술시장에 있어서 어느 정도 미술
비평과의 유착 관계가 지속된 가운데, 거부로 성장한 신흥 부르주아로 구성된
로제티의 후원자들이 당대 미술계와는 차별적인 취향을 확립하고 있었음을 확
인했다. 이에 로제티의 미술을 애호한 구매자들의 취향을 부각시키고, 선구적
미술 배후에 자리잡은 이들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ii
목 차

국문초록 = ⅰ
목차 = ⅲ
도판목록 = ⅴ-ⅶ
부록목차 = ⅷ

Ⅰ. 서론 ................................................................................................................. 1

Ⅱ. 연구사 .............................................................................................................. 6

Ⅲ. 로제티의 생애 ................................................................................................ 16

Ⅳ. 빅토리아 시대 부흥한 베네치아 미술 ......................................................... 22

1. 그랜드 투어, 박물관을 통한 베네치아 회화로의 접근 .......................... 23


2. 16세기 베네치아와 19세기 영국: 해상무역 제국의 멘탈리티 ............... 27

Ⅴ. ‘베네치아 양식’에 대한 동시대 비평 ..................................................... 35

1. 19세기 중후반의 미술 언론매체 .............................................................. 37


2. 존 러스킨의 비평 ...................................................................................... 42
3. 유미주의 비평가들 .................................................................................... 49
4. 부케넌과 보수적 비평 .............................................................................. 54

iii
Ⅵ. ‘베네치아 양식’과 미술시장 ................................................................... 61

1. 사회 경제적 배경 ...................................................................................... 62
2. 상업 갤러리의 성장 .................................................................................. 65
3. 로제티의 경제적 상황과 작품 판매 방식 ............................................... 67
4. 신흥 부르주아 후원자들의 취향 .............................................................. 70

Ⅶ. 결론 ................................................................................................................ 78

참고도판 ................................................................................................................ 81
참고문헌 ................................................................................................................ 96
Abstract ................................................................................................................ 101

[부록 1] ................................................................................................................ 103


[부록 2] ................................................................................................................ 106
[부록 3] ................................................................................................................ 107

iv
도 판 목 록

[도판 1]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키스한 입술>, 1859, 캔버스에 유화, 보스턴 미


술관, 보스턴.
[도판 2]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푸른 내실>, 1865, 캔버스에 유화, 바버 미술관,
버밍엄.
[도판 3] 존 에버릿 밀레이, <단풍>, 1856, 캔버스에 유화, 맨체스터 시립 미술관,
맨체스터.
[도판 4] 윌리엄 홀먼 헌트,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의 달콤함>, 1866, 캔
버스에 유화, 포비스 매거진 컬렉션, 뉴욕.
[도판 5]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발견>, 1854-5, 캔버스에 유화, 델라웨어 미술
관, 델라웨어.
[도판 6]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레이디 릴리트>, 1866-7, 캔버스에 유화, 델라
웨어 미술관, 델라웨어.
[도판 7] 윌리엄 홀먼 헌트, <깨어나는 양심>, 1853-4, 캔버스에 유화, 테이트 갤
러리, 런던.
[도판 8] 존 에버릿 밀레이, <신부 들러리>, 1851, 캔버스에 유화, 피츠윌리엄 미
술관, 캐임브리지.
[도판 9]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성모의 소녀시절>, 1848-9, 캔버스에 유화, 테
이트 갤러리, 런던.
[도판 10] 카를로 라지노 <피사 캄포 사토의 프레스코 화>, 1828, 판화.
[도판 11]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베아트리체 죽음 첫 번째 기일의 천사>, 1849,
종이에 잉크.
[도판 12]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시몬의 문가에 서 있는 막달라 마리아>,
1858-9, 종이에 펜과 잉크, 피츠윌리엄 미술관, 캐임브리지.
[도판 13]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푸른 밀실>, 1856-7, 종이에 수채, 테이트 갤

v
러리, 런던.
[도판 14] 티치아노, <거울과 여인>, 1514-5, 캔버스에 유화, 루브르 박물관, 파
리.
[도판 15]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파지오의 정부>, 1863, 캔버스에 유화, 테이트
갤러리, 런던.
[도판 16]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아침 음악>, 1864, 종이에 수채, 피츠윌리엄
미술관, 캐임브리지.
[도판 17]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아름다운 베아트리스>, 1864-70, 캔버스에 유
화, 피츠윌리엄 미술관, 캐임브리지.
[도판 18]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내실 목초지>, 1872, 캔버스에 유화, 맨체스
터 미술관, 맨체스터.
[도판 19]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연인>, 1866, 캔버스에 유화, 테이트 갤러리,
런던.
[도판 20] 파올로 베로네제, <가나의 혼인잔치>, 1563, 캔버스에 유화, 루브르 박
물관, 파리.
[도판 21] 조르지오네, <로라>, 1506, 캔버스에 유화, 빈 미술사 박물관, 비엔나.
[도판 22] 티치아노, <플로라>, 1515, 캔버스에 유화,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도판 23]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베로니카 베로네제>, 1872, 캔버스에 유화, 델
라웨어 미술관, 델라웨어.
[도판 24]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허영심 있는 여성>, 1866, 캔버스에 유화, 테
이트 갤러리, 런던.
[도판 25] 파올로 베로네제, <베네치아 여인의 초상>, 1560, 캔버스에 유화, 루브
르 박물관, 파리.
[도판 26]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비너스 버티코디아>, 1868-8, 캔버스에 유화,
러셀 코츠 미술관, 본머스.
[도판 27] 티치아노, <목가적 콘서트>, 1510, 캔버스에 유화, 루브르 박물관, 파
리.

vi
[도판 28] 헨리 트레프리 던, <체인 워크에서 로제티와 티오도어 와츠 던톤>, 구
아슈, 1882.
[도판 29] <가나의 혼인잔치> 세부.
[도판 30] <가나의 혼인잔치> 세부.
[도판 31] 티치아노,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초상>, 1545, 캔버스에 유화, 팔라조
피티, 피렌체.
[도판 32] 로제티가 수집한 도자기. 와이트윅 영지, 우버햄튼.
[도판 33] 파올로 베로네제, <성 아그네스로 재현된 여인의 초상>, 1575-80, 휴스
턴 미술관, 휴스턴.
[도판 34]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조르지오네 그림>, 1853, 종이에 잉크, 버밍엄
시립 미술관, 버밍엄.
[도판 35] 존 에버릿 밀레이, <검은 제복을 입은 브런즈위커>, 1860, 캔버스에 유
화, 레이디 레버 미술관, 리버풀.
[도판 36] 레이렌드의 응접실. 프린세스 게이트, 런던, 1892, 베드포드 리미어.
[도판 37]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루크레지아 보르지아>, 1860-1, 종이에 수채,
테이트 갤러리, 런던.
[도판 38]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에스타르테 시리아카>, 1877, 캔버스에 유화,
맨체스터 시립 미술관, 맨체스터.
[도판 39]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백일몽>, 1880, 캔버스에 유화, 빅토리아 알버
트 박물관, 런던.
[도판 40]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창문에 있는 소녀>, 1862, 캔버스에 유화, 피
츠윌리엄 박물관, 케임브릿지.
[도판 41]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마음의 여왕>, 1866, 캔버스에 유화, 캘빈그로
브 미술관 및 박물관, 글래스고.
[도판 42]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아름다운 로자문드>, 1861, 캔버스에 유화, 웨
일즈 국립 박물관, 카디프.

vii
부 록 목 차

[부록 1] 로제티 작품 거래목록


[부록 2] 라파엘전파 화가들의 경제적 상황
[부록 3] 1867년 연국 전역 인구의 계층구조

viii
감사의 글

부족한 논문에 감사의 글을 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논문을 쓰는 과정


에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이 글을 씁니다. 지난 2년간의 연구 성과를 담
은 이 논문은 저에게 16세기 베네치아, 19세기 런던이라는 다른 세계를 여행하
고 그 시대의 시각문화를 체험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 주위 많은 분들의
격려와 도움이 없었더라면 저는 오롯이 집중하여 미술을 연구하는 행운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선 날것 그대로의 글을 봐주시고, 그 속에서 가능성을 읽어주신 지도교수
양정무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교수님의 지도로 저의 단순한 사고가 확
장하고 수정되어 하나의 연구 논문이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2009년부터
인문학을 공부한 이래로 저의 글을 봐주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던 영문학도
최나영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외에도 초고를 봐준 전수은, 중간심사
최종본을 수정해준 이현구, 논문을 쓰는 힘든 과정에 활기찬 에너지로 웃음을
준 막내, 그리고 이 연구의 피와 살이 되었던 외서들을 너그럽게 구매해 준 한
국예술종합학교 도서관에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저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학문의 길을 걷는 것을 응원해주신 부모님
과 시부모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이 논문을 쓰는 모든 과정에 남편의 애
정 어린 격려와 물심양면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저를 새롭고 더 나은 세
계로 이끌고 이상을 함께 나누는 남편에게 이 논문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논문을 본격적으로 집필하는 동안 저의 배 속에는 새 생명이 자라고 있
었습니다. 잠시 학문의 길을 떠나지만 제가 이제껏 공부한 인문학을 삶 속에서
경험하고 그 끈을 놓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머지않아 제 관심사인 로
제티의 후기작과 세기말 미술이 연결되는 지점과 아르누보 미술 등을 더 깊이
연구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이 논문을 마무리 합니다.
Ⅰ. 서론

이 논문은 1850년대 라파엘전파의 일원이었던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의 16세기 베네치아 미술을 환기시키는 복고적 양식
인 ‘베네치아 양식’에 주목한다.1) 이 양식은 복고적이기는 하지만, 로제티가
1859년 <키스한 입술>[도판 1]을 발표한 이래로 10여 년간 독자적으로 확립한
화풍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학자들은 로제티의 1860년대 회화에 대해
‘베네치아적 방식’(Venetian manner)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2) 특히 프
렛존과 팍손 등의 미술사학자들은 이 시기 회화를 ‘베네치아 양식’(Venetian
style)으로 칭하고 있다.3) 로제티 자신도 그의 중기 양식이 ‘베네치아적 측
면’(Venetian aspect)이 있다고 언급했다.4) 또한 그의 작품 <허영심 있는 여
성>(Monna Vanna, 1866)[도판 24]에 대해 ‘베네치아 여성의 이상적 아름다움을
재현하고자 했다’고 밝힌 바 있을 정도로 로제티는 16세기 베네치아 회화와
자신의 1860년대 회화 양식과의 상관관계를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5) 그러므로

1) 1850년대 라파엘전파를 이끌었던 로제티는 1859년 <키스한 입술>(Bocca Baciata)[도


판 1]을 통해 라파엘전파를 벗어난 독자적 화풍을 선보였다. <키스한 입술>로부터 꾸준
히 이어진 독특한 양식은 티치아노의 <거울과 여인>(Woman with a Mirror, 1515)과 같
은 베네치아 화가들의 여성 상반신 그림과 흡사하여 ‘베네치아적’이라고 평가받았다. 이
처럼 로제티의 1860년대를 포괄하는 중기작이 베네치아적 화풍이라고 평가 받고 있는
반면 그의 후기작은 또 다른 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프렛존은 1860년대 후반 로제티가
“그의 회화적 관습을 변화”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860년대 후반부터 1880년대까
지의 회화가 육체적인 것와 정신적인 것 모두의 극대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60
년대 ‘베네치아 양식’과 구별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였다. Elizabeth Prettejohn, Art for
Art’s Sake: Aestheticism in Victorian Painting (New Haven: Yale UP, 2007), p. 223 참조.
이런 점에서 로제티의 작품은 1849년부터 라파엘전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1850년대는
초기, <키스한 입술>부터 1860년대까지의 ‘베네치아 양식’은 중기, 187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의 작품은 후기로 분류할 수 있다
2) Allen Stanley, op. cit., p. 63.
3) Elizabeth Prettejohn, op. cit., p. 208, Alicia Craig Faxon, Dante Gabriel Rossetti
(Oxford: Phaidon Press, 1989), p. 150.
4) W. E. Fredeman, The Correspondence of Dante Gabriel Rossetti (Cambridge:
Cambridge UP, 2002-10) Vol. Ⅱ, p. 269.
5) William E. Fredeman, The Correspondence of Dante Gabriel Rossetti (Cambridge: D.

1
이 논문에서는 1860년대를 아우르는 로제티의 중기 회화를 ‘베네치아 양식’
이라 칭하고자 한다.6)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은 19세기에 들어 르네상스
베네치아 미술이 영국 내에서 대대적으로 각광받았던 동시대 영국의 문화적 배
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16세기 베네치아 미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음에도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은 노골적으로 성을 표현하고 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로제티의 중기 회화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과감한
여성 이미지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키스한 입술>[도판 1]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Decameron, 1470)에서 여덟 명의 남성과 천 번의 잠자
리를 같이 하고, 아홉 번째 남자인 알가브(Algarve)왕과‘상호간의 즐거
움’(mutual joy)을 위해 결혼한 아라티엘(Aratiel)을 재현하고 있다.7) 그리고 로
제티는 “키스한 입술은 그 신선함을 잃지 않으며 반대로 달처럼 다시 재생된
다”고 그림 뒷면에 새겨 넣었다.8) 이처럼 그는 종교적, 도덕적 주제를 재현한

S. Brewer, 2003), Vol. Ⅲ, p. 472.


6) 일반적으로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은 밀폐된 공간 속 여성의 상반신을 주로 재현
하고 있다. 이같은 형식적 특징은 16세기 베네치아 화가들의 회화에서 자주 나타난다.
이에 대해 파올라 티나글리는 ‘초상화’(portrait)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지적하면서, 16세
기 베네치아 화가들의 여성 상반신 그림이 초상화로 분류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일반적으로 초상화는 주문자의 주문을 받아 주문자의 권위나 성품을 시각적으
로 표현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화가의 이상적 미를 재현한 베네치아 여성 상반
신 그림과는 그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르지오네의 <로라>(1506)[도판 21]
와 티치아노의 <플로라>(1515)[도판 22] 등 베네치아 여성 초상화는 ‘실재’ 여성을 재현
한 것이라기보다는 미의 ‘시각적 재현’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티나글리는 이런
의미에서 베네치아 회화 중 ‘여성 초상화’는 극소수라고 밝히며, 베네치아 회화에서 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그림을 ‘상반신 회화’(half-figure painting)라 칭한 바 있다. Paola
Tinagli, Women in Italian Renaissance Art (Manchester: Manchester UP, 1997), p. 99 같
은 맥락에서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 중 대다수의 그림도 ‘여성 상반신 회화’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베네치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상반신 회화와 달리 로제티의 작품은 그려진
모델의 신원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이 로제티의 여성 상반신 회화를 ‘초상화’로 분류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로제티는 거리에서 직접 작품의 모델이 될 여성을 기용
했고 여성에게 사회적으로 이상적인 여성의 가치관을 덧입히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의 성
적 매력을 극대화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7) Elizabeth Prettjohn, op. cit., p. 211.

2
초기작에서와는 다르게 자기만족적이고 성의 자기 결정권을 지닌 여성을 제시
했다. 이후 로제티는 여성의 복종이나 순종, 가족을 위한 희생 등과 같은 가치
관을 전달하고 있었던 당대 회화들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로제티는 여성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도 새로운 시도를 했다. 1860년대
회화의 모델이 된 마리 포드(Marie Ford), 페니 콘포드(Fanny Cornford)와 같은
인물은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린 이상적 여성상과 거리가 멀다. 부드럽고 탐스러
운 육체와 외모를 뽐내는 16세기 베네치아 회화 속 여성들과는 달리 로제티의
여성들은 육중한 몸에 빨강머리, 과하게 표현된 입술, 윤곽이 큰 얼굴을 자랑한
다. 일례로 <키스한 입술>[도판 1]과 <푸른 내실>[도판 2] 등의 모델인 페니 콘
포스는 로제티가 ‘착한 코끼리’(good elephant)라 부를 정도로 골격이 크고 살집
이 있는 여성이었다.9) 이 여성의 모습은 르네상스 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시대의
이상적 미와는 거리가 있다. 또한 <파지오의 정부>[도판 15]와 <푸른 내실>[도판
2]에서와 같이 이국적인 진기한 물품과 의상에 휘감긴 모습도 근면과 검소를 강
조한 19세기 영국에서 바람직한 여성상은 아니었다.10) 때문에 로제티의 베네치
아 양식은 당대 비평계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며 대중적 영역으로 확대된 미술시
장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19세기 중후반 미술은 대중과 언론매체, 그리고 미술시장이 한
데 엮여 있어서 대부분의 화가들은 그 삼각 지점이 만든 범위 안에 놓여 있었
다. 이러한 사실은 1850년대에서 80년대까지의 시기가 “생존 화가들의 황금기”
라고 불릴 정도로 문화 예술적 측면에서 대중들과 국가적 관심이 치솟은 것과

8) “The mouth that has been kissed loses not its freshnesss; still it renews itself even
as does the moon.” David Rodgers, Rossetti (London: Phaidon, 2002), p. 66.
9) David Rodgers, op. cit., p. 28.
10) 리처드 D. 앨틱은 빅토리아 시대의 공동 도덕의 정수가 “점잖음”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어떤 사람을 “점잖다”라고 언급하는 것은 신분을 막론하
고 그를 영국 사회의 ‘내집단’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었다. 앨틱은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
성 보다는 여론의 합의와 평판이 더욱 중시 되었다고 주장한다. ‘점잖음’을 결정짓는 요
인으로는 절제, 검약, 깨끗한 외모와 말끔한 집, 훌륭한 매너, 법에 대한 존중, 사업에서
의 정직성, 순결이 포함되었다. (리처드 D. 앨틱,『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과 사상』(서
울: 아카넷, 2011), 이미애 옮김, p. 263)

3
무관하지 않다. 19세기 중후반 시장 경제의 성장은 미술시장을 제한된 유한계급
뿐 아니라 급부상한 신흥계급에게도 접근 가능한 영역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영국 미술비평은 여가시간이 생긴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미술교육의 역할을, 부유한 시민들에게는 ‘어떤 그림을 사야할 지’를 알려주는
가이드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 미술시장에서의 성공은 어느 정도 미술 언론매
체의 평가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언론매체와 미술시장의 유착관계는 이 시기 미
술을 한정짓게 만든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로제티에게 주목할만한 점은 그가 1859년 <키스한 입술>
을 공개한 이후부터 대중과 언론매체와의 관계를 피하고 신흥 부르주아 후원자
들 사이에서 형성한 한정된 미술시장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립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로제티의 중후기 양식이 당대 주류 비평가들에게는 홀대를 받았으
나 오히려 신흥 부르주아 후원자들의 취향을 만족시켰다는 것의 반증이기도하
다. 로제티의 작품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미술 비평계와 로제티의 후원자들 사이
에 생성된 미술시장 간의 대립된 입장은 주목할만한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본 연
구자는 로제티가 대중미술에서 벗어난 선구적 미술을 지속시킬 수 있게 한 원
동력으로 소수의 신흥 부르주아 미술 후원자들을 꼽는다. 보통의 서민에서 자수
성가하여 영국 산업경제 발전에 큰 공을 세우고 막대한 자본을 획득한 ‘신흥
부르주아’는 대중미술보다 혁신적이고 선구적인 미술을 후원함으로써 19세기
영국미술에 보다 다채로운 색을 입힌 배후 세력이었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크게 세 가지 요소를 통해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을
이해해보려 한다. 먼저 Ⅳ장 ‘빅토리아 시대 부흥한 베네치아 미술’에서는 로
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이 영국 경제 최전성기에 확립될 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보고, 당대 영국에서 16세기 베네치아 미술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확인
한다. 그리고 로제티가 당대 유행하고 있던 16세기 베네치아 미술을 차용하면서
도 어떤 현대적인 특질을 부각시켰는지 살펴본다. Ⅴ장 ‘베네치아 양식에 대한
동시대 비평’에서는 동시대 비평계에서 본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을 봄으로
써 베네치아 양식이 당대 비평계에 던진 미적 논제가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한다.
이를 위해 존 러스킨을 필두로 한 보수적 비평가들과, 베네치아 양식을 옹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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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 스윈번, 윌리엄 로제티 등의 유미주의 비평 담론을 살펴본다. Ⅵ장에서는
미술시장 안에서 ‘베네치아 양식’의 위치를 확인한다.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은 산업 자본주의 국가의 유동적인 시장의 흐름 안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양식이 신흥 부르주아로 성장한 거부들 사이에서 형성된 이
른바 ‘틈새 시장’(niche market)을 공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Ⅵ장
‘베네치아 양식과 미술시장’에서는 로제티의 경제적 상황과 작품 거래가격,
판매 방식과 함께 후원자들의 취향을 분석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결과적으로 미
술 비평계와 미술시장이라는 역동적인 구도 속에 위치한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을 살펴보는 것은 로제티 미술을 다각적으로 읽게 하는 발판이 될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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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연구사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은 영국 미술사에서 주목할만한 화풍으로, 다양한


관점에서의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로제티에 대한 연구가 보다 독립적으
로 진행된 것은 2000년대 이후부터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라파엘전파로 활동한
다른 작가들과 비교연구 되어왔고 후기작은 ‘후기 라파엘전파’를 구성하는 에드
워드 번 존스(Edward Burne-Jones)와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등과 함께
연구되어 왔다.11) 이처럼 로제티 연구사는 라파엘전파라는 해석 틀 안에서 해석
되어 왔기 때문에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을 독립적으로 해석한 연구는 쉽
게 찾아 볼 수 없는 실정이다. 또한 로제티 연구사는 라파엘전파 연구사의 전반
적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에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을 분석하는 데
있어 라파엘전파 연구사의 틀을 어느 정도 포괄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라파엘전파 연구사를 참조하면서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에 관한
연구사에 집중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로제티의 1860년대 베네치아 양식에 대한 연구사는 다음과 같이 구분해서
살펴본다. 1880년대의 국수주의 비평, 20세기 전반기와 중반기의 비평, 1980년대
의 페미니즘 비평, 그리고 2000년 이후의 비평 순서이다. 1880년대 비평은 1860

11) 1849년 'P. R. B.'(Pre-Raphaelite Brotherhood)라는 명칭을 가지고 단테 가브리엘 로


제티(Dante Gabriel Rossetti), 존 에버릿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윌리엄 홀먼 헌트
(William Holman Hunt)등을 포함한 7명의 화가들은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의 초기
작품은 성명서(manifesto), 즉, 자신들의 예술에 대한 공표문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들
미술 운동의 목적은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를 위시한 르네상스 거장들의 고전주의적 전
통에 머물러 있던 로열 아카데미(Royal Academy)의 미술에서 벗어나 ‘단순한 정직성
(simple honesty)’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15세기 이탈리아 미술, 혹은 초기 르네상
스 미술로 돌아가는 것에 있었다. 그러므로 1850년대 라파엘전파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
징은 평면적 표면, 화려한 색채, 사물의 섬세한 표현, 중세 혹은 프레스코 회화를 연상
시키는 초기 르네상스적 기법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러나 라파엘전파 형제회는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그 응집력이 상실되었으며, 중심 멤버들이 서로 다른 예
술적 방향을 택하게 되면서 라파엘전파는 해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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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부터 사적으로만 작품을 유통하던 로제티의 작품이 그의 회고전을 통해 대중
에 공개된 1880년대에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서술된 비평이다. 1980년대 페미니
즘 비평은 1961년 테이트 갤러리에서 라파엘전파 전시를 대대적으로 진행하면
서 시작되었다. 특히 페미니즘 연구는 테이트 갤러리의 전시를 통해 로제티가
영국 미술계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을 데보라 체리(Debora Cherry)가
비판하면서 진행되었다. 최근의 비평은 로제티의 중후기 작품에 나타난 선구적
특징을 파악해 내는 데 주목하고 있다. 대표적 학자들로는 로제티의 시와 회화
를 함께 분석한 불렌(J. B. Bullen), 그리고 엘리자베스 프렛존(Elizabeth
Prettejohn), 알리슨 스미스(Alison Smith), 팀 베링거(Tim Barringer)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는 국내 로제티 연구를 살펴보면서 본 논문의 차별점을 드러내려 한
다.

1. 1880년대 국수주의 연구사

로제티는 베네치아 양식의 시작을 공언한 작품인 <키스한 입술>[도판 1] 이


후로 공적인 작품 공개를 거의 하지 않았다.12) 때문에 로제티 사후 회고전이 있
기까지 그의 중후기작에 대한 유의미한 연구는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로제티에
대한 연구는 1882년 회고전에서 로제티의 작품이 대중에게 공개되고 나서야 본
격적으로 재개되었다. 주목할만한 점은 1859년 <키스한 입술>을 전시 했을 당시
의 작품에 대한 비난이 1882년에는 찬사로 변했다는 것이다. 1882년 타임즈는
“로제티는 현대 예술가 중에서 가히 천재적이며, 가장 두드러진 방법으로 그
천재성을 나타낸다. 화가이자 시인으로서 그는 뛰어나게 창조적이다”라고 기록

12) 로제티는 화가로 활동한 1849년부터 1881년까지 18번 정도의 전시에 참여했으며,
그의 작품 가운데 32점만이 당대 대중에 공개되었다. 이 중 몇몇의 작품은 로제티 자신
이 모르는 채로 공개되기도 했고, 작품 구매자들이 로제티의 허가를 받고 전시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로제티는 1860년대 이후로 빈번하게 전시제의를 거절했다. 또한 그
는 작품 구매자가 화가의 저작권을 존중하지 않고 임의적으로 작품을 공개하는 것에 대
해 강하게 반대했을 만큼 작품공개에 민감했다. Alicia Craig Faxon, op. cit., 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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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다.13) 또한 1883년에는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는 미술사에 남을 여성의
아름다움의 전형을 만드는데 그의 온 에너지를 쏟았다”고 평가했다.14)
이러한 평가는 1860년대 그의 작품이 처음 공개 되었을 때의 비난과 대조
된다. 로제티의 평가에 대한 이러한 갑작스러운 변화는 1880년대의 국수주의적
비평과 맞닿아 있다. 줄리 코델(Julie F. Codell)은 1880년부터 1908년 사이 라파
엘전파에 대한 비평이 “영국의 대담한 반란자의 아이콘에서 건전화되고, 길들여
지고, 상업화되었으며, 국가적이 되었다”고 밝혔다.15) 그에 따르면 1880년에서
1908년 사이의 기간 동안 이전 시대에서는 반동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진 라파
엘전파의 초기 이상이 ‘영국적 이상’으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적
비평이 로제티에게까지 적용되어 로제티의 중, 후기작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해
석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국수주의적 비평은 당대 영국이 유럽 대륙으로부터 벗어난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맥락에서 코델은 퀼터(Quilter) 스필만
(M. H. Spielmann), 샤프(William Sharp), 리차드 레드그레이브(Richard Redgrave)
를 비롯한 비평가들이 라파엘전파 화가들의 영국적인 순수 혈통을 강조하여 비
평했다고 주장했다. 코델은 이전 학자들이 이탈리아계 영국인인 로제티를 ‘실질
적 이탈리아인’(essentially Italian)이라고 언급한 반면16), 1882년 샤프는 ‘틀림없
는 영국인’(an unmistakable Englishman)이라고 강조한 것을 그 예로 든다.17) 이
처럼 이 시기 라파엘전파에 대한 비평은 유럽 대륙 미술이 라파엘전파 화가들
에게 끼친 영향을 의도적으로 지우고, 라파엘전파가 영국의 토양에서 태동한 미
술 해운동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려 노력했다.

13)“Rossetti is perhaps, among modern artists, the one in whom genius, properly
so-called, manifested itself in the most striking manner, As a painter and poet he was
distinctively creative” The Times, 30 December 1882, p. 6.
14) “Dante Gabriel Rossetti concentrated all his energy on the development of a type
of female loveliness.” The Times, 12 January 1883, p. 4.
15) ed. Michaela Giebelhausen and Tim Barringer (Julie F. Codell), Writing the
Pre-Raphaelites (Surrey: Ashgate, 2009) p. 53.
16) Ibid., p. 67.
17) William Sharp, Great English Painters (London: Walter Scoot, 1886), p.ⅹⅰⅴ , p.
37. (ed. Michaela Giebelhausen and Tim Barringer, op. cit., p. 67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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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세기 전/중반기

이후 1880년대부터 1980년에 이르는 기간의 비평 흐름에서는 로제티의 베


네치아 양식에 대한 유의미한 해석을 찾기 어렵다. 1907년 리차드 머더(Richard
Muther)는 『현대 회화의 역사』제 3권에서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에 대해 언
급했다. 그는 로제티의 중후기작을 현대 회화로 규정하고 “(로제티는) 그의 동시
대 화가들로부터 아무것도 차용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로제티로부터 배웠다”고
주장하며 로제티의 현대성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머더는 베네치아 양식을 로제
티의 후기작과 일반화시켜 해석하면서 베네치아 양식적 특성을 파악하지는 못
하고 있다. 특히 머더의 베네치아 양식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도 많은 오류를 담
고 있어서 그의 주장을 신뢰하기 어렵게 한다.
예를 들어 머더는 <프로세피나>(Prosepine, 1874), <베로니카 베로네제>[도판
23] , <아스타르테 시리아카>[도판 38] 등과 같은 로제티의 후기 작품이 로제티
의 아내 시덜을 모델로 한 그림이라고 주장했고, 로제티가 시덜을 “베네치아 패
션으로 휘감아” 재현했다고 지적했다.18) 그러나 <프로세피나>와 <아스타르테 시
리아카>는 제인 모리스를 모델로 하고 있으며, <베로니카 베로네제>는 패니 콘
포스를 모델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머더는 모리스와 시덜, 콘포스 외
형의 확연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혀 감지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더불어
머더가 제시한 작품들은 모두 로제티의 후기작으로, 의복에 있어서도 베네치아
적 특성이 부각되지 않는다.19) 이처럼 20세기 초반 베네치아 양식에 대한 비평

18) Richard Muther, The History of Modern Painting (J. M. Dent & Company, 1907),
Vol. Ⅲ, pp. 170-171.
19) 베네치아 양식의 특성은 로제티의 후기작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로제티의 후
기 양식은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에스타르테 시리아카>[도판 38], <백일몽>[도판
39]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의 후기작에서 여성의 성적 측면은 강조되고 있지 않으
며 시각적, 촉각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주는 요소들 또한 배제되었다. 다시 말해 로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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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면밀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라파엘전파에 대한 비평은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나 역시 로제티
의 베네치아 양식에 주의를 기울인 논문은 찾아보기 힘들다. 브라이슨 버로우는
“라파엘전파에 대한 현대적 시각”이라는 1947년 논문에서 로제티의 천재성을 인
정하지만, 로제티의 중후기작에 대해서는 “상업화되었다”고 짧게 비판하는 것으
로 마무리하고 있을 뿐이다.20) 이처럼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에 대한 연구가
미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해당 양식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이러니하
게도 페미니즘 비평이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을 비판하면서 부터였다.

3. 페미니즘

1980년대 페미니즘 비평은 대표적으로 데보라 체리와 그리젤다 폴록의 “가부


장적 힘과 라파엘전파”를 들 수 있다. 1984년 발행된 이 논문은 1961년 마스 갤
러리(Maas Gallery)와 1984년 테이트 갤러리(Tate Gallery)에서 열린 라파엘전파
전시를 문제 삼는 것으로 시작한다. 폴록과 체리는 이 전시가 미술시장에서 라
파엘전파 작품의 ‘상품’(commodities)으로서의 ‘지위를 상승’시켰다고 밝힌다. 더
욱이 1984년 테이트 갤러리에서의 전시는 미술사적 승인과 학술적 관습에서 지
위 상승을 기념 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21)

의 후기 양식은 인간의 감각적 영역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에 집중한 중기 양식에


비해 대담하거나 노골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또한 복장이나 여성의 신체 표현에 있어서
도 여성미보다는 중성적인 인물을 재현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나아가 로제티의 후기
작에 재현된 여성은 성적 매력보다는 정신성을 강조하는 여신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프렛존은 로제티의 후기 양식이 갈수록 사이즈가 커짐에 따라, 관람자가 “종교적 이미
지 앞에 선 숭배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Elizabeth Prettjohn, op.
cit., p. 223.
20) Bryson Burroughs, “A Modern View of the Pre-Raphaelites,”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Bulletin, New Series (May 1947), p, 231.
21) Cherry and Pollock, “Patriarchal Power and the Pre-Raphaelites,” Art History
(December 1984), p.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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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체리는 이 전시에 재현된 여성 이미지가 “신비롭고, 우울하며, 조용
한 수동적 여성성의 전형을 제공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러한 관습적인 여
성 이미지를 통해 가부장적 관념이 재생산된다고 지적하였다.22) 특히, 그들은
라파엘전파의 그림이 부르주아 가정의 테두리에서 보호받는 여성과, 하층 계급
의 ‘부도덕한’(impure) 여성간의 대립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했다.23) 그리
고 부도덕한 여성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로제티의 <발견>[도판 5]과 귀니비어
(Guinevere)를 재현한 그림, <레이디 릴리트>[도판 6] 그리고 헌트의 <깨어나는
양심>[도판 7] 등을 예로 든다. 이처럼 폴록과 체리는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에
해당하는 <레이디 릴리트>와 로제티의 초기작 <발견>을 같은 선상에서 파악하
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폴록과 체리는 로제티의 베네치아 화풍에 나타나는
양식상의 변화나 성에 관한 로제티의 변모된 시각에 주목하지 않는다.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에 나타난 여성의 성 담론이 초기 라파엘전파 화가들과 입장을
달리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4. 최근 연구사

2000년대에 들어서 로제티 연구에 의미 있는 시도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시인이기도 했던 로제티의 문학과 시각예술의 상관관계를 보여주
는 문학과 미술사의 학제간 연구이다. 로제티가 이따금 그의 회화를 시로 표현
했고, 그림 액자에 시를 새겨놓기도 했다는 사실은 회화와 시와의 밀접한 상관
관계를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24) 특히 시는 로제티가 평생 동안 몰두했던

22) Ibid., p. 493.


23) Ibid., p. 492.
24) 로제티의 시는 그림에 비해 그의 사적 역사를 내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그의 아내 시덜과의 결혼, 그리고 시덜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아내 제인 모리스(Jane Morris)와의 사랑을 통한 행복과 죄의식은 그의 시에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로제티의 시는 그의 예술과 삶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주고, 그의 시각예술은 보다 추상적인 특징이 있다. 로제티의 시는 그의 그림에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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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그가 남긴『시선집』(Poems, 1870)과 『서정시와 소네트』(Ballads and
Sonnets, 1881), 그리고 생전에 남긴 편지들은 로제티 연구를 더욱 풍요롭게 해
주는 자료들이다.25)26) 영문학자인 J. B. 불렌(Bullen)은 19세기 영국 문학과 미술
의 상관관계에 주목하면서 라파엘전파뿐만 아니라 로제티에 대한 심도 있는 연
구를 했다. 특히 그는『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화가이자 시인』(Dante Gabriel
Rossetti: Painter & Poet)을 통해 로제티의 예술성을 시각미술과 문학이라는 양
측면에서 분석한 바 있다.
이같은 학제 간 연구는 그동안 미술사학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은 로제티의
문학적, 시각적 예술의 전반을 분석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저작이라 할 수 있
다. 그러나 이러한 저작은 미술사적 맥락 안에서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의 독
특성을 파악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다. 특히 불렌은 로제티 회화를 주로 개인
사적인 맥락에서 읽어내려 하는 경향이 있다. 한 예로 그는 로제티의 1860년대
의 화풍 변화의 원인을 로제티와 그의 모델 패니 콘포스, 그리고 조지 보이스
(George Boyce)와의 삼각관계에서 유래한 자유롭고 개방적인 성적 경험에서 찾
는다.27) 그러나 로제티의 화풍변화는 개인사를 넘어서 19세기 중반 예술세계에
서 꿈틀거리고 있던 미적 감각의 표현이었고,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요인은

해서 성적 묘사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서 로제티의 첫 시집이 출간되고 난 직후 로


버트 뷰캐넌(Robert Buchanan)을 비롯한 비평가들은 그의 사생활을 문제 삼으며, 로제티
의 예술세계가 “건강한 삶의 형식으로부터 병적으로 이탈했다”고 비난했다. (Ibid., p.
227.)
25) 로제티는 1862년 아내 엘리자베스 시덜이 사망한 후 그동안 썼던 시 노트를 시덜과
함께 묻었다. 그러나 로제티는 주위의 설득으로 1869년 아트 딜러 찰스 어거스터스 호
웰(Charles Augustus Howell)을 통해 시덜의 무덤을 채굴하여 시 노트를 다시 꺼낼것을
허가 하였다. 이 노트에 담긴 시들은 1870년 출판되었고 1판이 1000부가 팔렸다. (Alicia
Craig Faxon, op. cit., p. 181-2.)
26) 로제티의 편지 글은 그의 사적 생활과 후원자와의 관계, 작품의 의도 등 많은 것을
알아 낼 수 있게 하는 주요 자료인데 2000년대에 들어서 출간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Dante Gabriel Rossetti, Dante Gabriel Rossetti: His Family Letters (London: Adamant
Media Corporation, 2001), William E. Fredeman(ed), The Correspondence of Dante
Gabriel Rossetti (London: D.S.Brewer, 2010), Dante Gabriel Rossetti, Letters of Dante
Gabriel Rossetti to William Allingham (Cornell University Library, 2009) 등이 있다.
27) J. B. Bullen, op. cit., p.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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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다.
미술사학에서는 엘리자베스 프렛존, 알리슨 스미스(Alison Smith), 팀 베링거
(Tim Barringer)등의 신진 학자들이 새롭게 로제티의 중후기 회화에 관심을 보이
기 시작했다. 미술사의 흐름 안에서 로제티의 1860년대 회화의 위치를 분석한
선구적 저작으로는 엘리자베스 프렛존의『예술을 위한 예술: 빅토리아 시대 회
화에 나타난 유미주의』(Art for Art’s Sake: Aestheticism in Victorian Painting,
2007)가 있다. 이 책은 로제티를 라파엘전파에서 분리해 유미주의에 편입시킨
주목할 만한 저서이다. 이 저작에서 프렛존은 기존 연구자들이 19세기 후반으로
잡는 유미주의의 시작을 1860년대로 앞당긴다. 다시 말해 비록 ‘유미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을 뿐, 1860년대부터 많은 비평가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
미주의의 모태가 싹트고 있었고, 그 중심에 로제티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특히 프렛존은 1860년대 나타난 로제티의 화풍 변화를 세세히 밝히면서 유
미주의의 선구자로서 로제티의 역할에 주목한다. 나아가 그녀는 리히턴(Frederic
Leighton)과 로제티를 마네와 세잔과 비교하는 것이 여전히 ‘충격적
인’(scandalous) 질문인지를 자문하고, 그것은 ‘취향의 문제’(matter of taste)라고
답한다. 이처럼 프렛존은 로제티의 1860년대 작품이 19세기 말 영국의 유미주의
를 이끈 대표작이라고 인정하는 데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마네와 세잔이 19세
기 프랑스 미술에서 그러하듯, 로제티와 리히턴을 영국 미술계의 혁명적인 인물
로 인정한다.28)
알리슨 스미스와 팀 베링거도 이 주장에 동조한다. 특히 팀 베링거는 라파엘
전파 회원들의 변화를 헌트(William Holman Hunt)와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브라운(Ford Madox Brown)의 ‘색다른 사실주의’와, 로제티와 번 존스
(Edward Burne-Jones)의 ‘시적 해방’ 이라는 두 양식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이
두 양식 사이에서 독창적인 긴장이 일었으며, 이는 아방가르드적 움직임에서 라
파엘전파의 역동적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 지적한다.29) 또한 스미스는 어느 순간
부터 ‘라파엘전파주의’(Pre-Raphaelitism)와 ‘로제티주의’(Rossttism)가 구별되기

28) Elizabeth Prettjohn, op. cit., p. 9.


29) Tim Barringer, op. cit., p.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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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했다고 언급했다.30) 이처럼 획기적인 양식적 변화를 추구한 로제티의 미술
을 라파엘전파로부터 떼어내어 해석한 것은 신진학자들의 의미있는 성과가 아
닐 수 없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팀 베링거와 알리슨 스미스와 같은 연구자들은
로제티의 중기작인 베네치아 양식보다는 1870년대 초반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로제티의 후기작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5. 국내 연구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로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베네치아 양식을 연구한 소수의 논문 가운데 대다수는 1980년대의
페미니즘적 해석을 되풀이 하고 있다. 권행가는 ⌜레이디 릴리트 연구⌟에서 로
제티의 <레이디 릴리트>[도판 6]를 부르주아 남성 중심의 성 이데올로기의 재현
으로 보고 있다.31) 한편 조예인은 같은 맥락에서 ⌜라파엘전파에 나타난 ‘타락
한 여성의 신화⌟에서 로제티의 <발견>[도판 5]과 헌트의 <깨어나는 양심>[도판
7], 브라운의 <당신의 아들을 데려가세요>(Take your Son, Sir! 1851-52)를 심층
적으로 비교 분석했다.32) 이러한 국내 로제티 연구는 로제티 작품이 남성의 욕
망에 기초하여 여성을 재현하는 회화적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는 1980년대의 페
미니즘적 주장과 일맥상통하다.
소수의 국내 연구 중에서 로제티의 1860년대 회화에 주목한 연구는 권행가
의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레이디 릴리트> 연구”가 있다. 권행가는 로제티의
1868년 작 <레이디 릴리트>가 “남성의 욕망에 기초한 환상”이라고 정의했으며,

30) ed. Tim Barringer(Alison Smith), Pre-Raphaelites: Victorian Avant-Garde (London:


Tate Publishing, 2012), p. 234.
31) 권행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레이디 릴리트> 연구⌟, 석사학위논문, 홍익대
학교 대학원, 1993.
32) 조예인, ⌜라파엘전파에 나타난 ‘타락한 여성의 신화⌟, 석사학위논문, 홍익대학교
대학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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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욕망을 하나의 이미지로 대체시킨 성적 대상물”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
장했다.33) 특히 그는 로제티의 여성 이미지들이 세기말 비어즐리나 클림트, 뭉
크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팜므 파탈(famme fatal)의 전형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레이디 릴리트>가 근본적으로 “쾌락과 여성의 성의 위험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으며, 중세, 르네상스 이래로 ‘여성들의 파괴적인 힘’이 19세기에 부활되고 과
장된 것이라고 파악했다.34)
그러나 이러한 국내 연구는 1980년대 페미니즘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기에
로제티의 회화를 당대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파악하게 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
다. 이처럼 현재까지 로제티 연구사에서 부족한 부분은 세 가지로 추려 볼 수
있다. 첫째, 로제티의 중기 작품을 ‘베네치아 양식’이라고 칭하면서도 16세기
베네치아 회화와의 직접적인 비교 연구가 미흡하다. 둘째, 로제티가 16세기 예
술적 황금기인 르네상스 회화의 특성을 차용하면서도 어떻게 유미주의라는 현
대적 예술 양식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필요가 있다. 셋
째, 로제티의 베네치아 화풍이 태동할 수 있었던 배경, 그리고 당대 비평, 미술
시장 간의 긴장관계를 사회사적으로 분석한 연구가 부족하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를 다룸으로써 로제티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일으키고자 한다.

33) 권행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레이디 릴리트 연구>”. 『미술사 연구』(미술사
연구회, 1995) 제 9집, p. 50.
34) 권행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레이디 릴리트> 연구”, 『19세기의 서양미술』
(서울: 조형 교육, 2001), p.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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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로제티의 생애

1873년 로제티는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창녀가 되는 것과 같다”며 후원자


들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한 바 있다.35) 이처럼 로
제티는 후원자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화가였다. 이에 대해 미술사학자
알리샤 크레이그 팍손은 로제티를 포함한 라파엘전파 화가들이 프랑스에서 활
동한 동시대 화가들 – 쿠르베, 마네, 드가 –의 유복한 경제적 상황과는 전혀 다
른 입장에 놓여 있었다고 강조했다. 동시대 프랑스 화가들과 달리 라파엘전파
화가들 모두가 “생활을 하기 위해 예술에 매달려야 했다”는 것이다.36) 나아가
팍손은 로제티는 ‘특정 계급에 속하지 않는 세계인’(classless cosmopolitan) 이었
으며, 헌트는 자신의 ‘중하위 계급을 부끄러워’했다는 것을 강조했다.37) 이러한
사실은 라파엘전파 화가들의 대다수가 후원자의 취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는 것을 시사한다.
로제티의 작품 거래 목록을 보면, 1860년대를 기점으로 로제티의 미술과 부
르주아 후원자들의 상관관계가 더욱 명확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로
제티의 화풍 변화를 미술사적, 문화적 관점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자칫 순진한
발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로제티의 작품을 사회경제적 맥락에서
분석해 보기 위한 일환으로, 그의 경제적 상태에 주목하면서 개인사를 짚어본
다. 이는 1860년대 로제티의 화풍 변화를 사회경제적 맥락으로 읽어내는 Ⅶ장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과 미술시장”으로 연결될 것이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는 이탈리아인 부모에게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시인이

35) “...to be an artist is to be just the same thing as to be a whore.” Oswald Doughty
and John Robert Wahl, Letters of Dante Gabriel Rossetti (Oxford: Clarendon press,
1965-67) Vol. Ⅳ, p. 1635. (Jan Marsh, Dante Gabriel Rossetti: Painter and Poet
(London: Widenfeld & Nicolson, 1999), p. 527에서 재인용)
36) Alicia Craig Faxon, op. cit., p. 73.
37) Cherry and Pollock, op. cit., p. 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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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학자였던 로제티의 아버지 가브리엘 파스퀠레 주세페 로제티(Gabriele
Pasquale Giuseppe Rossetti, 이하 ‘가브리엘 로제티’)는 1821년 정치적인 문제로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사람이었다. 이후 그는 영국에서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며 근근이 살아가다 1831년 런던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에 교수로
임용되었다. 가브리엘 로제티의 교수 임용은 분명히 사회적 신분 상승을 말해주
는 척도이지만 이것이 경제적 풍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수입은 연
봉 10파운드 정도에 강의비가 추가 되는 수준이었다.38) 가브리엘 로제티의 주
수입원은 여전히 사교육이었으며, 사교육 수요가 줄자 딸인 마리아 프란체스카
로제티는 가정교사로, 둘째 아들 윌리엄 로제티는 공무원으로, 심지어 아내까지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치며 생활에 보탬이 되어야 했다.39) 로제티가의
거주지를 통해서도 그들의 경제적 상황을 알 수 있는데, 그들이 살던 샬롯 가
(Charlotte Street)는 암암리에 매춘을 하는 여관이 있을 정도로 더럽고 어두운
곳이었다.40)
그럼에도 로제티의 집은 이탈리아계 유명인사와 문학가들로 붐볐기 때문에
로제티와 그의 형제들은 문학적 영향을 받을 수 있었고 특히 로제티는 미술과
시에 있어서 두각을 나타냈다.41) 그는 1844년 두 차례에 걸쳐 로열 아카데미
(Royal Academy of Arts)에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1845년 17세에 입학을 허가
받았다. 그러나 총 9년 과정인 로열 아카데미의 교육 과정에서 그는 죽은 황제
들과 고전적 신들의 석고상을 맹종하고 모방하는 것에 싫증을 느낀다.42) 그리고
그림보다는 시 작문, 문학 번역에 열중하였는데, 특히 1848년에는 단테 알리게
리(Dante Alighieri, 1265-1321)의 『새로운 인생』(Vita Nuova, 1295)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단테에 대한 로제티의 존경심은 대단해서, 『새로운 인생』의 번역

38) Alicia Craig Faxon, op. cit., p. 31.


39) J. B. Bullen, op. cit., p. 22.
40) Ibid., p. 17.
41) 로제티의 형제들은 다음과 같다. 마리아 프란체스카 로제티(Maria Francesca
Rossetti, 1827-1876)는 작가이며, 윌리엄 마이클 로제티(William Michael Rossetti,
1829-1919)는 작가이자 미술비평가, 크리스티나 로제티(Christina Rossetti, 1830-1894)는
시인이다.
42) Ibid., p.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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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마친 1849년부터 ‘가브리엘 찰스 단테 로제티’라는 원래 이름 대신 ‘단테 가
브리엘 로제티’로 서명하기 시작했다.43)
1848년 로제티는 로열 아카데미를 떠나 포드 메독스 브라운(Ford Madox
Brown)을 찾아가 그의 제자로 잠시 있었으며, 석고상이 아닌 실제 모델을 기용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브라운은 현대 유럽 미술을 로제티에게 소개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로제티는 브라운의 지시를 받는 미술작업에도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이후 그는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 동년배인 화가들을 찾았다.
특히 윌리엄 홀먼 헌트, 존 에버릿 밀레이와 어울리게 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라파엘전파의 초석이 되는 미술이론을 구축했다. 이로써 헌트, 밀레이, 로제티를
중심으로 한 화가들은 아카데미 회화와는 거리를 둔 채 ‘라파엘전파 형제
회’(Pre-Raphaelite Brotherhood)라는 이름아래 실험적 작업을 해 나갔다. 그러나
라파엘전파 형제회는 5년을 채 지속하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로제티가 라파엘전파의 일원으로서 활동하던 시절 그의 작품 구매자들은
주로 정치계 인사나 귀부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례로 로제티의 첫 작품
인 <성모의 소녀시절>(The Girlhood of Mary Virgin, 1849)[도판 9]은 바스(Bath)
후작부인에게 80파운드(현재 가치 6,000파운드)에 팔렸다.44) 그리고 <다윗의 자
손>(The seed of David, 1858-64)은 국회의원 헨리 브루스(Henry Bruce)가 400파
운드(현재 가치 22,000 파운드)에 구매했다.45) 로제티는 첫 작품을 판매하면서
아버지 연봉의 8배에 달하는 금액을 벌어들인 것이다.
그러나 로제티는 돈을 관리할만한 현실감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버는 돈에 걸맞는 삶의 질을 추구했고, 풍족한 삶을 영위하다 보면 잔고는 바닥
나 있었다. 포드 매독스 브라운의 일기와 편지에는 로제티가 돈을 빌려갔다거
나46), 로제티가 거래인으로부터 돈을 받고 “모두 사치스럽게”썼다는 일화를 심

43) Elizabeth Prettjohn, op. cit., p. 205.


44) Alicia Craig Faxon, op. cit., p. 54.
45) J. B. Bullen, op. cit., p. 97.
46) 브라운의 일기장에는 그의 경제적 빈곤함이 상세하게 적혀있으며, 더불어 “가브리
엘이 10파운드 빌려갔다”(10 pounds owning to me by Gabriel)는 등의 사실이 나타나 있
다. Ford M. Hueffer, Ford Madox Brown: A Record of his Life and Work (New York:
Longman, 1896), p.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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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47)
로제티가 이처럼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에는 존 러스킨
(John Ruskin)의 실질적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대 유명한 미술비평가였던
러스킨은 1850년대 중반부터 로제티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러스킨은 지인들에게
로제티의 작품을 구매할 것을 독려했을 뿐만 아니라 로제티의 수채화, <라헬과
레아에 대한 단테의 환시>(Dante’s vision of Rachel and Leah, 1855), <성 가족
의 유월절>(The Passover of the Holy Family, 1855-56) 등을 직접 구매하기도
했다.48) 러스킨은 또한 로제티의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엘리자베스 시덜
(Elizabeth Siddal)의 미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시덜을 후원했다. 러스킨은 시덜에
게 매년 150 파운드의 생활비를 지급하였고 로제티와 시덜이 결혼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49) 1850년대 로제티가 주로 그린 수채
화 대부분에 시덜의 모습이 등장하며, 병약하고 몽환에 잠긴 듯한 시덜의 모습
은 중세주의적 특징을 시각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로제티의 중세적 화풍의
배후에는 당시 중세 고딕 미술에 심취해 있던 러스킨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로제티는 러스킨의 미술이론을 시각화시키는 화가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러스킨에게 물질적, 정신적 조력을 받는 만큼이나 미술적 간
섭을 피할 수 없었던 로제티는 러스킨과 점차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
에 시덜도 러스킨의 간섭에 지쳐 1857년 이후로 러스킨의 경제적 지원을 거절
했다.50) 러스킨의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로제티는 1860년 시덜과 결혼했지만 시
덜은 1862년 아편에 중독되어 사망한다. 시덜이 사망하기까지 로제티는 비싼 의
료비를 감당하기 위해 시덜을 윌리엄 모리스의 집으로 요양 보내고 작업에 열
중해야 했다.51)
로제티는 1859년 <키스한 입술>[도판 1]을 시작으로 화풍 변화를 꾀했는데,

47) Ibid., p. 141.


48) 러스킨은 1855년 로제티의 수채화 <아서왕의 무덤>(Arthur’s Tomb)을 20파운드에
구매했다. Alicia Craig Faxon, op. cit., p. 88.
49) J. B. Bullen, op. cit., p. 135.
50) Ibid., p. 135.
51) Henrietta Garnett, Wives and Stunners: The Pre-Raphaelites and Their Muses
(London: Macmillan, 2012), p. 190.

19
이는 시덜이 죽은 1862년 그가 채텀 플레이스(Chatham Place)에서 런던 첼시
(Chelsea)의 튜더 하우스(Tudor House)52)로 이사함으로써 더욱 확고해졌다. 첼시
의 새집은 로제티가 라파엘전파 화가들이나 러스킨이 아닌, 새로운 종류의 예술
가들과 친분을 쌓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부근에는 철학자이자 작가 토머스 칼
라일(Thomas Calyle), 저술가 리 헌트(Leigh Hunt), 제임스 멕닐 휘슬러(Jame
McNeill Whistler)등이 살았고 로제티는 그들과 교류했다. 그리고 로제티의 집은
휘슬러, 번 존스, 윌리엄 모리스 등 새로운 화풍을 공유하는 화가들의 모임 장
소가 되었다. 튜더 하우스에서 작가 스윈번(Algernon Charles Swinburne)은 로제
티의 동거인으로 살기도 했으며, 로제티의 동생이자 비평가 윌리엄 로제티가 이
부근으로 이사 오면서 로제티는 라파엘전파에 이어 유미주의 예술가들의 모임
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로제티의 활발한 사회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불렌은 1860년대 후
반에 들어서 로제티의 활발한 사회생활이 종결되었으며, 유미주의 화가들과의
교류도 단절되었다고 지적한다.53) 실제로 로제티는 1870년대에 들어 아편에 중
독되어 몸이 쇠약해져 가면서 점차 고립되었다. 이는 개인사적으로 크게 두 가
지 요인 때문이었다. 첫째는 아기를 사산하고 다음해 아편에 중독되어 사망한
아내 시덜에 대한 죄책감과, 윌리엄 모리스의 아내 제인 모리스와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이었다. 떠들썩한 스캔들을 원치 않았던 윌리엄 모리스는 제인과 로제
티의 관계를 묵인했으며, 자신의 가족과 로제티가 함께 살 집으로 켐스코트 영
지(Kelmscott Manor)를 구했다.54) 로제티와 모리스는 이 집에서 공동으로 집세를
내며 함께 살았으며, 로제티와 모리스 가의 기이한 동거생활은 1874년까지 이어

52) 당시 첼시라는 곳은 값이 싸면서도, 예스러운 컨트리 하우스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


었다. 또한 로제티의 임대 주거지 튜더 하우스는 예술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윌리엄 모
리스(William Morris, 1834-1896)의 붉은 집(Red House)처럼 로제티의 정체성과 예술적
취향을 한껏 표현하는 집이었다. 로제티의 튜더 하우스는 모리스가 건축부터 설계, 장식
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붉은 집처럼 거주자의 예술성을 공공연히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
럼에도 로제티는 템스 강이 내려다보이는 튜더 하우스를 자신의 장식품과 미술 컬렉션
으로 채우는 것을 상당히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도판 28].
53) J. B. Bullen, op. cit., p. 186.
54) Ibid., p. 224.

20
졌다.55) 제인 모리스와의 비밀스런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 로제티는 런던에서 멀
리 떨어진 켐스코트에서 고립적인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1870년대 로제티의 개인사는 비극적이다. 1872년 그는 약물과 위스
키에 의존하여 살았으며 자살을 시도했고, 정신 분열증을 겪었으며 시력도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874년 캠스코트 영지에서 다시 첼시로 돌아온 후에
도 고립적인 생활을 이어갔다. 이러한 개인사는 1870년대 로제티의 화풍에도 적
지 않은 영향을 끼쳐서 그의 후기작은 이전 것들에 비해 더욱 상징적고 몽환적
이며, 사적이다.56) 이런 점에서 이 논문에서 주목하는 1860년대는 한 화가의 일
생에 있어서도 사회적으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던 시기였다. 또한 이 특정시
기는 요동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당대의 변화를 회화를 통해 그려내고, 화
가로서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시키고 예술적 발전을 주도한 중요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55) Ibid., p. 241.


56) 로제티의 동생 윌리엄 마이클 로제티는 1882년 로제티가 죽은 후 로제티가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간단한 전기를 덧붙여『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그의 가족 편지』
(Dante Gabriel Rossetti: His Family Letters, 1895)를 출간했다. 이는 윌리엄 로제티가 화
가이자 시인이었던 로제티의 명성을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이 저작에서 윌리엄 로제
티는 로제티가 1870년대부터 약물중독과 정신쇠약에 시달렸다는 것을 가감없이 기록하
고 있다. 윌리엄 로제티는 1879년 10월 로제티의 상황을 “나의 형은 약물의 과다한 복
용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 우울하고 외로워
서 네가 오늘 저녁 한두 시간 와서 있어준다면 좋을 것 같다”는 등의 로제티의 상태를
담은 편지를 덧붙인다. William Michael Rossetti, op. cit., Vol. Ⅱ, p. 354. 그러나 줄리
엉펑트(Julie L’Enfant)에 의하면 윌리엄 로제티는 이 저서에서 당대 논란이 될만한 로
제티와 제인 모리스, 페니 콘포스와의 사생활은 당대 논란이 될 것을 우려해 의도적으
로 누락시켰다. ed. Michaela Giebelhausen and Tim Barringer, op. cit., p. 109.

21
Ⅳ. 빅토리아 시대 부흥한 베네치아 미술

이 장은 로제티의 회화양식이 1859년 이래로 갑작스럽게 베네치아적 면모를 보


여주는 양식으로 변모한 이유에 대해 거시적으로 접근한다. 이를 위해 19세기
중후반 영국의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 위치한 르네상스 베네치아 미술의 지위를
확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요인은 로제티가 베네치아 회화를 접하게 된 경로와
함께 제시될 것이다. 첫째로, 영국의 미술가와 중산층 계급에게 그랜드 투어, 박
물관을 통한 베네치아 회화로의 접근이 가능해진 사회적 배경에 주목한다. 더불
어 이 시기 영국인들의 피렌체 미술에 대한 미술이론과 기교에 대한 관심이 베
네치아 미술로 확대된 배경을 살펴본다.
Ⅳ-2절에서는 19세기 중후반 영국 미술계가 왜 특별히 베네치아 미술에 반
응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본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해상제국으로서의 멘탈리
티에서 찾는다. 이 시기 베네치아의 전성기와 상업적으로 번성한 19세기 런던을
비교하는 것은 흔한 일 이었다. 이안 와렐의 주장처럼, “해상 무역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한 르네상스 베네치아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영국 또한 쇠락
의 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19세기 영국인들 사이에 깔려 있었”
던 것이다.57) 이런 맥락에서 해상무역을 통한 부를 여실히 보여주는 르네상스
베네치아 미술이 19세기 중후반에 들어 경제적 호황기를 누린 영국인들의 미적
호기심을 자극시켰다는 것은 쉽게 수긍할 수 있다.

57) Ian Warrell, Turner and Venice (London: Tate Publishing, 2003), p. 14.

22
1. 그랜드투어, 박물관을 통한 베네치아 회화로의 접근

이사벨라(Maurizio Isabella)는 19세기 영국에서 “이탈리아에 대한 깊고 열성


적인 애호가 일었다”고 주장한다.58) 그리고 이 시기 이탈리아에 관한 서적들이
대중들에게 “영국이 이제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재현한다”는 믿음
과 자부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덧붙인다.59) 그에 의하면 19세기 영국인들에게
‘이탈리아’와 ‘문화’는 동의어였으며 영국인들에게 이탈리아는 감정과 욕망을 자
유롭게 해주는 ‘상상의 나라’였다. 다시 말해 당대 이탈리아는 그림같이 아름다
우면서도 퇴폐적이고, 미적 즐거움과 부도덕성, 매력과 윤리적 타락과 같은 상
반된 개념이 함축된 대상이었다.60) 프로테스탄트적 도덕과 윤리의식을 강요받은
영국인들, 특히 상류 계급의 자제들에게는 이탈리아의 퇴폐성조차 매력적인 요
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처럼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 대한 영국인들의 애
호는 너무도 강해서, 이탈리아로의 그랜드 투어는 영국의 상류사회에서 교양수
업과 같은 개념으로 필수적인 것이었다.61)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라파엘전파 화가들 또한 이탈리아, 특히 베네
치아 미술에 반응했다. 라파엘전파의 화가인 밀레이는 1865년, 헌트는 1866-7년
이탈리아에 방문했으며 이탈리아의 풍경이나 인물들을 자신들의 화폭에 담았다.
로제티는 이탈리아계 영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없었지만,
당대 중산층의 사회적 분위기와 주변 지인들의 이탈리아 미술 경험은 그가 베

58) Maurizio Isabella, The Pre-Raphaelites and Italy (Oxford: The Ashmolean Museum,
2010), p. 36.
59) Ibid., p. 38.
60) Ibid., p. 36.
61) 그랜드 투어(Grand Tour)는 1660년대부터 상류계급에서 유행한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친 유럽 젊은이들의 대대적 여행이다. 이 여행을 통해 그들은 서양 문명의 기원에 대
한 지식을 체득하고 고전 예술을 감상했으며, 그림을 주문하기도 했다. 한정된 계급에게
만 해당되었던 이러한 특권은 19세기 증기선의 발달로 중산층 계급에 까지 확대 되었
다.

23
네치아 회화에 이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러스킨이 수차례 이탈리아
방문 후마다 매번 로제티를 찾아와 테크닉이나 주제 선택 면에서 해주었던 충
고와 조언은 로제티의 화풍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라파엘전파 회원들과 동생 윌리엄 로제티를 통한 베네치아 회화의 간접
경험 외에도,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르네상스 거장들의 판화는 일찍부터 로제티
에게 미적 자극을 주었다.62) 로제티는 당대에는 조르지오네의 작품이라고 인식
되었던 티치아노의 <목가적 콘서트>(Pastoral Concert, 1509)의 판화를 보고 여성
의 감각적인 아름다움, 음악적 요소, 그리고 따뜻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63) 또
한 그는 그의 아내 시덜을 모델로 두고 작업하고 있는 베네치아 화가를 드로잉
하고는 <조르지오네 그림>(Giorgione Painting)(1853)[도판 34]이라 이름 붙였다.
자신과 조르지오네를 동일시 한 것인데, 이에 대해 오몬드는 로제티가 조르지오
네에게서 동질감을 느낀 것이라 주장했다.64) 이처럼 로제티에게 베네치아 회화
는 꾸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과 동경이 화풍 변화로까지
나아간 것은 그 스스로 베네치아 회화를 실견한 이후부터였다.
로제티는 1863년 윌리엄 로제티와 중부 유럽으로 그랜드 투어를 떠났으며,
이 여행은 그에게 베네치아 회화를 탐구하는 미술적 경험이 되었다. 윌리엄 로
제티에 의하면 앤트워프(Antwerp)의 미술관에서 로제티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의상을 입은 조르지오네의 아름다운 남성”을 보고 그 자리에서 스케치를 하기
도 했을 정도로 베네치아 회화에 자극을 받았다.65) 로제티는 또한 1849년과
1855년, 그리고 1860년에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해 베로네제, 티치아노, 조르지오
네의 그림을 실견했다.66) 오몬드가 로제티는 베네치아 거장의 그림 앞에서 “그

62) 로제티는 1848년 헌트와 함께 작업실 벽에 불멸의 화가 리스트를 적어 놓기도 했


다. 그 명단에는 조반니 벨리니, 조르지오네,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 주로 베네치아 화가
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Lisa Tickner, Dante Gabriel Rossetti (London: Tate
Publishing, 2003), p. 42.
63) Leonee Ormond, “Dante Gabriel Rossetti and the Old Masters,” The Yearbook of
English Studies: (Victorian Literature 36.2 : 2006), p. 158.
64) Ibid,, p. 158.
65) William Rossetti, Rossetti Papers (London: Sands, 1903), p. 33. (Leonee Ormond, op.
cit., p. 158에서 재인용)
66) J. B. Bullen, op. cit., p.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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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전의) 미술 이론을 버리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지적할 정도로 로제
티에게 베네치아 회화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67)
로제티는 특히 티치아노나 조르지오네가 재현한 여성 이미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티치아노의 <거울과 여인>[도판 14], 조르지오네의 <로라>[도판
21]와 같은 작품은 성적 여성을 재현하면서도 그들에게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
으며, 대신 색감의 대비를 통한 여성 육체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로제티는 1855년 신혼여행 때 파리를 방문하여 루브르 박물관에서
티치아노의 <거울과 여인>의 사진을 사왔으며 자신에 앨범에 끼워 넣으며 ‘티치
아노의 정부’라고 이름 붙였다.68) 이는 티치아노의 <거울과 여인>과 로제티의
<파지오의 정부>[도판 15]와의 상관관계를 더욱 확실하게 해주는 사실이기도 하
다.
영국 내에서도 박물관, 미술관이 발전함에 따라 베네치아 회화를 감상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특히 1823년 설립된 내셔널 갤러리는 공공기관으로서
미적 경험의 장이 되었다. 그리고 1855년 찰스 이스트레이크(Charles Eastlake)가
10년간 관장직을 맡게 되면서 그 기반이 공고히 다져졌다. 이스트레이크는 미술
관의 소장품과 전시를 기획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된
다.69) 특히 그는 북부 이탈리아 작품을 주로 구매하고 소장하고 있었던 내셔널
갤러리를 통해 16세기 베네치아 회화를 적극적으로 구매함으로써 베네치아 미
술에 대한 당대 영국인들의 애호 증대에 이바지했다.
내셔널 갤러리는 19세기에만 베로네제(Paolo Veronese)의 작품 10점, 벨리
니(Giovanni Bellini)의 작품 14점, 팔마 베키오(Palma Vecchio)의 작품 등을 구매
하면서 로제티를 비롯한 화가들이 르네상스 베네치아 회화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경로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1857년에는 베로네제의 <알렉산더 이전의 다
리우스 가족>(The Family of Darius before Alexander, 1565-7)을 구매했는데, 내
셔널 갤러리가 오스트리아 프랑(franc)으로 36만 프랑이라는 거액을 지불했다는

67) Leonee Ormond, op. cit., p. 158.


68) J. B. Bullen, The Pre-Raphaelite Body (NY: Oxford UP, 2005), p. 157.
69) Charlotte Klonk, “Mounting Vision: Charles Eastlake and the National Gallery of
London,” The Art Bulletin (2002), 82. 2, p.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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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 큰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존 러스킨이 이에 대해 “나는 그 작품에 너무
높은 가격이란 없다고 생각한다”고 타임즈 지에 썼을 정도로 당대 미술계에서
베네치아 회화에 대한 관심과 애호는 상당했다.70)
특히 베니스 아카데미의 관장이었던 베론 갈바나(Baron Galvagna)는 조반니
벨리니의 <석류의 성모>(Madonna of the Pomegranate, 1480-90), 틴토레토의
<추기경의 초상>(Portrait of Cardinal)과 같은 명작들을 포함한 10점의 회화를
1855년 네셔널 갤러리에 팔았다.71) 그리고 이를 보상하기 위해 구매자 측에서
해당 지역사회에게 모작을 제작해 주는 것은 관행이었다. 일례로 이스트레이크
의 중개상이었던 오토 문들러(Otto Mundler)가 비첸자의 디엔 백작(Count
Thiene)에게서 조르지오네의 그림을 사려했을 때 디엔 백작은 그림 값과 함께
모작을 그려 줄 것을 요구했다.72)
이처럼 영국이 이탈리아의 국가적 유산을 박탈하고 모작으로 대체해 주는
것에 대해 당대 몇몇 비평가들은 우려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죄책감은
“영국에서 (그 작품들이) 더 잘 보존 될 것”이라는 합리화로 쉽게 잊혀졌다.73)
같은 맥락에서 러스킨은 영국을 ‘시각적 피난처’로서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하
면서, “스스로의 고급 미술을 가지지 못한 영국이 적어도 영국이 생산해 내지
못하는 것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74) 당대 영국은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그에 대한 국가적 위상을 자국민에게 명실공히 하기위한 방편으
로 미술품 구매에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70) Xavier F. Solomon, Veronese (London: National Gallery, 2014), p. 11.


71) ed. John E. Law (Donata Levi), Victorian and Edwardian Responses to the Italian
Renaissance (Burlington: Ashgate, 2005), p. 39.
72) Mundler, The Travel Diaries of Otto Mundler 1855-1858, ed. Togneri Dowd, 1985,
p. 18 (Donata Levi, op. cit., p. 39에서 재인용)
73) Donata Levi, op. cit., p. 33.
74) J. Ruskin, ‘Danger to the National Gallery. The the Editor of the Times’, in The
Times, 7 January 1847. (Donata Levi, op. cit., p. 40 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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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6세기 베네치아와 19세기 영국: 해상 무역 제국으로서의 멘탈리티

16세기 베네치아는 시민 계급의 자본 축적으로 전례 없는 호황기를 누렸다.


자유로운 무역을 통해 동양권 지역과도 활발한 거래를 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미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베네치아 회화에 등장하는 화
려한 의복과 동양권에서 들여온 도자기 등의 귀중품은 새롭고 역동적인 분위기
를 연출했다. 이같은 특징들은 당대 영국에서 베네치아 회화를 선호한 이유와도
직결될 수 있다.
19세기 영국인들이 베네치아 회화를 높이 평가 한 것은 그들이 베네치아 회
화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투영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영국인들에게는 16세기
베네치아 회화를 후원하던 부유한 세력가들처럼 물질문명을 만끽할 수 있는 경
제적 상황이 주어졌다. 그리고 이에 따라 베네치아 회화에 나타난 해상 제국의
원형으로서의 멘탈리티를 인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절에서는 16세기 베네
치아에서 해상 무역 공화국으로서의 화려한 물질문화를 회화 속에 녹여낸 배경
을 살펴 보고 이같은 특성이 19세기 영국인들의 어떤 감성을 자극했는지를 진
단한다. 나아가 로제티가 19세기 해상무역 제국인 영국의 물질문화를 어떤 방식
으로 과시했는지를 살펴본다.
16세기 베네치아는 동양 문화권과 상당한 교류를 했으며, 미술에 있어서도
다양한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 특히 전 세계로부터 온 귀중품에 대한 높은 관심
은 당대 미술에 반영되어 해상제국으로서의 위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당대 영국
인들이 이 부유함을 화려한 색채 사용으로 가감없이 드러낸 16세기 베네치아
회화를 애호한 것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 할 수 있다. 전례 없이 물질적 호황
기를 누린 19세기 영국의 도시인들에게 물질문화를 한껏 표현한 르네상스 베네
치아의 회화는 베네치아의 전성기를 상기시키면서 당대 영국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먼저 베네치아 회화에서 물질문화가 가감 없이, 어쩌면 과시적으로 드러난

27
이유를 짚어보고 이를 19세기 영국의 상황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16세기 베네
치아에서 물질문화는 귀족계급과 상인계급간의 경쟁의식에 의해 형성된 측면이
있다. 특히 상인계층이 성장하자 귀족계급은 부유한 상인계급과 자신들을 차별
화하려고 했다. 1506년에는 귀족 혈통의 순수성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귀족의
출생을 신고해야 했고, 1526년에는 귀족과 일반인의 결혼이 금지되었다.75) 또한
비단 옷도 일부의 성직자와 상류계급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신흥계급은 다
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존재와 가치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포티니 브라운은 조반니 벨리니의 시대에는 초상화 주문이 귀족에게만 국
한되어 있었으나 16세기 중반이 되면서 상인들과 장인들도 초상화를 주문했다
는 것을 밝힌다.76) 이에 대해 귀족들은 더 값비싼 재료와 그들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상징, 가문의 문장을 첨가함으로써 차별화된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경쟁적
으로 시민계급은 더욱 화려하고 진귀한 물건을 그려 넣은 그림을 주문하기 시
작했다. 이러한 상황은 전반적인 그림 수요의 증가를 이끌면서 미술시장에 큰
활력을 불어 넣었고, 화가들은 이들의 취향을 만족시킬 만한, 갖가지 비단과 장
식품들로 장식된 그림을 제작했다. 계층은 달랐지만 두 계급 모두 자신들을 독
자적으로 표현하려고 했고, 이러한 자기 표현방식에 값비싼 귀중품을 활용하려
했다는 것은 베네치아 미술 취향에 간과할 수 없는 한 부분이다.
당대 화가들은 이러한 과시적인 물질문화를 회화로 재현했는데, 특히 파올
로 베로네제(Paolo Veronese)는 그 중심에 선 화가였다. 1660년 마르코 보스치니
(Marco Boschini)는 베로네제를 “아름다운 물건들의 화가”라고 평가했다.77) 이에
대해 듀이트(Rembrandt Duits)는 베로네제 작품에 나타난 옷감과 여러 가지 귀
중품들이 작품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를 세세히 짚어 내었다. 그는 <가나
의 혼인잔치>에 은식기, 실크, 동방에서 온 값비싼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호화로

75) Patricia Fortini Brown. Art and Life in Renaissance Venice (London: Laurence King
Publishing, 1997), p. 148.
76) Ibid., 149.
77) Marco Boschini, La carta del navegar pitoresco (Roma: Baba, 1660), p. 59. (ed.
Virginia Brilliant (Rembrandt Duit), Paolo Veronese: A Master and His Workshop in
Renaissance Venice (London: Scala, 2012), p. 59에서 재인용).

28
운 물건들이 가득 차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베로네제가 귀중품의
존재를 관람자들이 강하게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 물건의 질감을 자유로운 붓
놀림과 빛의 효과로 그려 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도판 30].78)
특히 베로네제를 비롯한 많은 베네치아 화가들이 물질문화를 구현하면서
대표적으로 등장시킨 것은 실크였다. 특별히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보여줘야 했
던 초상화에서 실크 의복이 얼마나 화려하고 정교하게 표현됐는지의 여부는 중
요한 관건이었다. 실제로 우르비노의 공작 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Francesco
della Rovere)는 베네치아에 있는 그의 중개인에게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있
는 여인의 초상화”를 사기 원한다고 요구했다. 브라운은 이에 대해 훌륭한 드
레스 표현이 구매자에게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79)
16세기 베네치아에서 실크 옷감은 부유한 상인 계급에게 인기 있는 품목이
었다. 그러나 15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실크의 소비는 귀족이나 교회의 높은 계급
에게만 제한되어 있었고, 부유한 상인들은 예복과 같은 특별한 옷만을 실크로
제작했다.80)81) 15세기 베네치아는 실크의 소비에 계급 간 차등이 있었을지 모르
나 16세기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16세기에는 신흥 상인 계층이 주도적으로 소비
문화를 이끌었고, 이는 의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예로 티치아노의 <피
에트로 아레티노의 초상>(1545)[도판 31]을 들 수 있다. 아레티노는 구두장이의
아들이지만 베네치아에서 문인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다. 초상화 속 아레티
노는 자신의 성공을 뽐내듯 비단옷에 금 목걸이를 과시하고 있다.
양정무가 『상인과 미술』에서 주지하듯이, 이러한 과시적인 소비는 적극

78) Rembrandt Duit, op. cit., p. 59.


79) Patricia Portini Brown, op. cit., p. 159.
80) Ibid., p. 62.
81) 마린 사누도(Marin Sanudo)가 1493년에 쓴 글을 보면, 당시 베네치아의 계급과 복식
의 상관관계를 알 수 있다. ‘도시와 공국을 지배하는 자들은 신사(귀족)이며, 시민계급,
그 다음으로 장인이나 하층계급이 있다. 신사계급은 그들 자신을 의복으로 시민계급과
구별시키지 않았는데, 그들이 시민계급과 거의 비슷하게 입었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법적으로 정해진 상원의원만이 공무를 보는 기간에만 색깔이 있는 의복을 입을 수 있었
다’ Marin Sanudo, ”Praise of the city of Venice, 1493,“ in Chmbers and Pullan, Venice:
A Documentary History, pp. 4-20 (Patricia Fortini Brown, op. cit., p. 143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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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미술 수요로 이어졌다.82) 특히 <가나의 혼인잔치>에 재현된 금줄로 수놓인
실크 의복은 회화 그 자체보다 더 값어치가 있는 상품이었다[도판 29], [도판
30].83) 때문에 베로네제를 비롯한 많은 베네치아 화가들이 새틴(satin)을 비롯한
귀중품을 회화에 첨가한 것은 가문의 문장이나 상징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려 한 지배계층과는 차별적으로, 스스로 부를 축적한 시민계급의 그림에
대한 소유욕을 불 지폈다.
특히 베네치아 화가들은 오랫동안 외래적인 것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통합하
면서도 그 외래 문물의 이국적이고 낯선 느낌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다.84) 베네치아 화가들은 오랜 교역의 역사를 통해 구축된 외래의
것에 대한 열린 의식과 회화 매체상의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해 왔던 것이다. 거
기에다 표현력을 최고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그들의 능력이 베네치아 회화를
차별적이고 독자적인 것으로 구축하는 발판이 되었다. 시각적 자극에 매우 예민
했던 화가들은 더 화려한 색채와 그림 속 귀중품을 통해 시대 변화에 걸맞는
미적 취향을 창조해 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물건의 존재를 강력하게 표현한 베로네제의 작품은 ‘장식적’이라는
이유로, 극적 상황에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85) 당대 바자
리(Giorgion Vasari)는 베로네제의 그림에 대해, “그림의 크기, 인물들의 수, 의복
의 다양성의 측면에서 훌륭한 그림”이라고 평가했다.86) 바자리는 베로네제의
작품이 예술적이라기보다는 장식적 측면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지적한 것

82) 양정무,『상인과 미술』(서울: 사회평론, 2011), p. 19.


83) 듀이트는 이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곁들인다. 베로네제는 <가나의 혼인잔치>를 주
문한 산 조르지오 마조레(St. Giorgio Maggiore)의 수도사에게 총 324 듀캇(ducat)을 받았
고, 이는 1엘(ell, 과거 직물 길이를 나타내던 단위, 63.8 센티민터, 혹은 25 인치 정도의
크기) 당 2듀캇을 받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한편 새틴도 1엘당 2듀캇에 거래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같은 크기의 실크와 당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 거의 동일한 가
격으로 거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bid., p. 64.
84) Patricia Fortini Brown. op. cit., p. 140-141.
85) Ibid., p. 61.
86) Ed. R. Bettarini and P. Barocchi (Giorgio Vasari), Le vite de’piu eccelenti pittori
scultori ed architettori (Firenze: Sansoni, 1906), Vol. Ⅴ, p. 378. (Rembrandt Duit, op.
cit., p. 61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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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절하는 20세기까지 이어졌다. 특히 1976년 피그나티
(Teresio Pignatti)는 베로네제가 그린 두칼레 궁의 대 회의실 천장 벽화에 대해
평가한 바 있다. 그는 “훌륭한 푸른색, 빨간색, 분홍색, 그리고 파란색 옷”에
주목하면서, 베로네제가 “궁극적으로 위대한 장식가로 매김 했다”고 평했
다.87)88)
그러나 로제티를 비롯한 대다수의 19세기 영국인들은 20세기까지 이어진
베로네제에 대한 평가절하에 참여하지 않았다. 로제티는 1864년 베로네제의 <가
나의 혼인잔치>를 보고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감탄했
다.89) 그리고 앞서 살펴 보았듯이 러스킨도 네셔널 갤러리가 베로네제의 <알렉
산더 이전의 다리우스 가족>을 거금을 주고 구입하는 것에 대해 “나는 그 작품
에 너무 높은 가격이란 없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베로제제 회화가 가
진 독창성을 높이 샀다. 이는 2000년대에 와서 T. J 클라크가 주장한 바 있듯이,
“그(베로네제)의 독창성은 빛과 질감뿐만 아니라 무늬가 있는 직물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에 있다” 와 같은 긍정적인 평가와 맞물린다.90)

87) Teresio Pignatti, Veronese (Venice: Alfieri, 1976), Vol. Ⅰ, p. 84. (Rembrandt Duit,
op. cit., p. 61에서 재인용).
88) 최근 연구에서는 베로네제의 작품이 ‘극적 특성’(theatrical quality)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 받고 있으며, 특히 <가나의 혼인잔치>의 건축적 묘사가 이러한 극적 특징을 부각
시켜주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페트리샤 포트니 브라운(Patricia Fortini
Brown)은 베로네제의 그림이 장식적이라는 비판을 반박하고 있는데, 그녀의 주장에 따
르면 이 그림이 밀집되어 표현된 서사적 방식으로 중심 사건(예수의 기적)이 사소한 세
부사항으로 들어가 있음에도, 그 극적이고 기적적인 순간을 잘 잡아내고 있다고 지적한
다. 특히 그녀는 이 작품의 극적 효과를 세부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녀는 예수 앞에
있는 음악가들이 모래시계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이 모래시계는 계산된
시간안의 음악을 상징하고, 이는 때가 다가오고 있는 예수의 희생을 예고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또한 예수 뒤에서 고기를 자르고 있는 백정들의 모습도 예수의 희생을 보다
극적으로 예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Patricia Fortini Brown, op. cit., p. 106.
89) D. G. Rossetti to William Michael Rossetti, 9 June, 1860. Ed. William E. Fredeman,
op. cit., Vol. Ⅱ, p. 298.
90) “What is truly unique is not just his feeling for lustres and textures, but his ability
to grasp and render a patterned fabric.” T. J. Clark, “Veronese’s Allegories of Love,”
London Review (2014), p.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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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네제의 그림은 당대의 물질문화를 재현한다. 일례로 베로네제의 <성 아
그네스로 재현된 여성의 초상>(Portrait of a Woman as Saint Agnes, 1575-80)[도
판 33]에서 여인은 르네상스 귀부인의 옷차림을 하고 있다.91) 듀이트에 의하면
제시된 의복은 당대 현실 여성의 옷차림을 반영하고 있다. 다만 그는 여성의 아
칸서스 잎 모양으로 장식된 겉옷만은 베로네제의 창조물임을 밝힌다. 이는 <가
나의 혼인잔치>에서도 마찬가지로, 근동에서 온 인물들이 두르고 있는 터번이라
든지, 금줄로 장식된 동양의 의복도 어느 정도 당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
에 대해 듀이트는 베로네제가 베네치아에 방문한 동양의 고위관리의 의상에 영
감을 받았거나, 오토만 제국이나 근동을 방문한 화가들이 가지고 들어온 드로잉
을 연구하여 재현했을 가능성을 지적한 바 있다.92) 이처럼 <가나의 혼인잔치>에
묘사된 동양적 의복은 <성 아그네스의 초상>에서의 의복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의복에 작가의 상상력이 조금 가미된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베네치아 미술이 이러한 독자적인 표현 방식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이유
는 상인계급의 성장 때문이었다. 양정무는 급부상한 상인계층이 “자신만의 새로
운 표현 형식”을 만들어 냈으며, 이들의 적극적인 미술 수요는 “모방소비”가 아
니었다고 지적했다.93) 이 같은 사실은 19세기 중후반 영국 미술에게 적용될 수
있다. 18세기부터 많은 대륙과의 교류로 영국 런던에서도 상공업을 토대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했고, 귀족들에게만 허락되었던 미술품 구매가 새
로운 계층의 소비자들에게 꾸준히 확대 되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 이러한
경향이 대중에게 확대되면서 틈새시장이 생겨난 것이다. 특히 빅토리아 시대 석
탄, 철강, 해운업 등으로 거부가 되어 새롭게 등장한 미술 후원자들은 당대 보
수적인 미술과 다른,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과 같은 새로운 미적 취향을 이끌
어내게 된다.
16세기 베네치아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영국에서 미술 후원자로 떠오른 부
르주아 계층은 작품 수요를 증가하게 만들었고, 미술시장에 활력을 주는 요인이
되었다. 탄광, 운송, 선박 등의 사업 발달에 따라 성장한 거부들은 귀중품 수집

91) Rembrandt Duit, op. cit., p. 67.


92) Ibid., p. 67.
93) 양정무, op. cit., p. 19.

32
을 시작하면서 귀족계급과 구별되는 물질 문화를 정립하고자 했다. 그리고 1860
년대 로제티 회화에서 나타나는 물질주의적 속성은 이러한 신흥계급의 수집 문
화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16세기 베로네제의 미술과 19세기 로제티의 ‘베
네치아 양식’에 나타난 물질적 속성은 신흥 세력이 당대의 활발한 무역으로 인
한 물질문화를 미적 ‘취향’으로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공통된 배경을 가지고
있다. 베로네제가 그의 작품을 통해 당대 베네치아의 물질 문화를 보여주었듯이
로제티는 런던의 유행품목과 이국적 물건들을 배치시킴으로써 물질적 재현을
통한 시각적 자극을 꿰했다[도판 2], [도판 19]. 그러나 로제티는 베로네제가 물
질문화적 속성을 재현한 것과 달리 당대 부르주아들 사이에서 수집 품목이었던
물건들을 마치 일상 품목으로 재현하면서 색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로제티의 취향은 귀족계급보다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로제티의 집 튜더 하우스(Tudor House)는 그의 취향을 확인할 수 있
게 한다. 그는 1860년대부터 고가구, 자기, 천, 악기, 장식품 등을 수집하고 자신
의 집 내부를 이러한 장식품들로 꾸몄다[도판 32]. 이러한 수집 취미는 영국문화
의 한 부분이었으며, 로제티는 이러한 수집 문화의 선두주자였다.94)95)
나아가 로제티는 당대의 부르주아 계층의 수집 문화를 회화에 적극 반영하
였고 이는 부르주아 계층의 취향을 만족시켰다. 예를 들어 로제티의 후원자 레
이렌드(Frederick Leyland)는 한 여성이 악기와 함께 제시된 그림을 선호했는
데,96) 로제티는 일본 악기 코토, 바이올린, 피리 등을 재현하면서 이에 부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레이렌드 외에도 조지 프라이스 보이스(George Price Boyce)처럼
기모노와 같은 이국적인 여성의복을 수집하거나 중국 찻잔을 수집하던 부르주
아들의 취향은 로제티의 1860년대 회화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푸른 내실>[도판 2]의 푸른색 도자기로 장식된 벽이나, 일본
악기 코토, 그리고 <연인>[도판 19]의 초록색 기모노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

94) J. B. Bullen, Rossetti: Painter & Poet, op. cit., p. 152.


95) 로제티가 1862년부터 1864년까지 포드 메독스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는 튜더 하우
스에 채워 넣을 고가구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Ford M. Hueffer, Ford Madox
Brown: A Record of his Life and Work (New York: Longman, 1896), p 209.
96) Alicia Craig Faxon, op. cit., p. 167.

33
다. <푸른 내실>에 등장하는 일본 악기 코토, 아랍식 타일, 중국 찻잔을 연상시
키는 문양 등은 당대 유행하던 품목들이었다. 특히 로제티는 휘슬러(James
McNeill Whistler)와 함께 경쟁적으로 중국 찻잔과 도자기 등을 수집하였는데,
<푸른 내실>[도판 2]의 벽 장식 문양은 휘슬러와 함께 딜러 머레이 마크스
(Murray Marks)에게서 구매한 중국식 생강 단지의 문양에서 따온 것 이었다.97)
또한 <연인> 속 초록색 실크 기모노는 로제티의 후원자 조지 프라이스 보이스
에게서 빌린 품목이었다.98)99) 그러나 로제티의 회화에서 귀중품의 재현은 베네
치아 회화에서 나타나는 ‘과시’라기 보다는 부르주아들이 수집한 품목에 대한
‘이상적 재현’을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로제티의 회화에서 나타난 귀중품이라던지, 여성의 옷차림은 당대 현실에
서 동떨어져 있다. 이런 점에서 로제티의 회화에서 귀중품의 재현은 베네치아
회화에서 나타나는 ‘과시’라기 보다는 부르주아들이 새로운 수집 취향을 반영한
이상적 재현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에서 차이점이 있다. 다시 말해 베네치아 회
화에서 나타난 귀중품은 당대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다. 반면 로제티의
회화는 19세기 영국의 부르주아 계층의 ‘수집’ 품목을 이용하여 당대 현실적 여
성과는 동떨어진 이미지를 재현한 것에서 그 특이점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연인>[도판 19] 속 기모노 뿐만 아니라 여성의 머리 장신구 또한 동양에서 온
물건이었는데 이는 당대 영국 여성들의 의복과는 거리가 멀다. 로제티는 이같은
이국적 물품을 색다른 미를 지닌 여성과 함께 제시함으로써 ‘수집’의 대상인 물
질을 여성의 아름다움을 뽐내주는, 살아 숨쉬는 도구로 이용했다. 이를 통해 로
제티는 어느 시대와 장소에도 속하지 않는 여성을 재현함으로써 부르주아 후원
자들의 미적 상상력을 자극했다고 볼 수 있다. ‘베네치아 양식’과 후원자 취향과
의 상관관계는 Ⅵ-4장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한다.

97) Lisa Tickner, op. cit., p. 45.


98) David Rodgers, op. cit., p. 29.
99) 로제티는 조지 프라이스 보이스에게 1864년 12월 16일 보낸 편지에서 “그 녹색 일
본 드레스가 간절히 필요하다”면서 <연인>을 위해 의상을 빌려줄 것을 청했다. ed.
William E. Fredeman, op. cit., Vol. Ⅲ, p. 227.

34
Ⅴ.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에 대한 동시대 비평

19세기 중반부터 급성장한 『아트 저널』과 『아트 매거진』등의 미술 언론매


체는 미술시장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매체는 갤러리, 박물관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중산층 계급에게 필수불가결
한 것이 되었다. 우드슨 불턴은 전문적인 미술비평이 미술을 ‘주류 문화’로 이끄
는데 기여했으며, 미술가, 미술 비평가, 그리고 후원자들이 “전통적인 미학의
범주를 재정립했다”고 주장했다.100) 미술비평뿐만 아니라 산업 발전에 따라 부
흥한 신문과 주간지, 문예비평지도 활발하게 생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제티
는 1860년 이래로 소규모의 후원자들만을 상대하며 의도적으로 비평계로부터
자신의 미술을 고립시켰다. 그는 날선 비판과 찬사를 오가며 작품이 소모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특히 자신을 향한 비판에 대해서는 매우 예민하게 반응
한 예술가였다.
로제티가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그림을 후원자들하고만 거래했음에도, 그는
끊임없이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그 이유는 로제티가 화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시인이었고, 그의 문학적, 시각적 예술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제티의 시를 비평한 많은 비평가들에게는 사적으로만 유통되던 그의 회화가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시에 대한 비평에서 로제티의 회
화에 대한 언급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회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알
려진 그의 시는 로제티가 대중에게 그림을 공개하지 않더라도 비평계에서 그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 장에서는 특히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에 대한 비평이 당대 어떤 논란을
야기했는지 살펴본다. 특히 1871년 부캐넌(Robert Buchanan)이 로제티의 회화와

100) Amy Woodson-Boulton, Transformative Beauty (California: Stanford UP, 2012), p.


11.

35
시에 대해 전반적으로 비판한 “육체파 시인들”(The Fleshly School of Poetry)
을 시작으로 1881년 부캐넌이 로제티의 예술에 대한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기까
지, 비평이 변모되는 과정을 분석해본다. 궁극적으로 로제티가 문학과 회화라는
각기 다른 예술적 영역을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동일한 메시지, 즉, 인간의 육
체와 성, 감각에 대한 긍정이 1880년대에 와서야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상황을
분석한다.
1860년대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을 분석한 비평은 크게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로제티의 색채와 미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옹호한
윌리엄 마이클 로제티, A. C. 스윈번, F. G. 스티븐스 등이 있다. 이들은 로제티
뿐만 아니라 에드워드 번 존스, 알버트 무어, 제임스 멕닐 휘슬러 등의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을 실천한 화가들 편에 서 있었다. 이 비평가들은
미술에서 교훈이 아닌 ‘즐거움’(pleasure)과 미 그 자체를 추구했으므로, 이들을
‘유미주의 비평가’라고 칭하고자 한다.
이와 반대편에는 여전히 미술에 있어서의 도덕성과 사회적 측면을 강조한
존 러스킨을 대표로 하는 대다수의 보수적인 비평가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로버트 부케넌(Robert Buchanan)은 로제티의 문학적, 시각적 예술에 나타난 성
적 요소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로제티를 비롯한 유미주의 화가들, 비평가
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 장에서는 이처럼 양 극단에 위치한 당대 비평을 살펴
본다. 궁극적으로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이 당대 어떤 미술 이론적 화두를 던
졌는지를 확인하면서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이 가진 선구적 요소를 짚어내고
자 한다.

36
1. 19세기 중후반의 미술 언론매체

빅토리아 시대 언론매체는 미술시장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줄


리 코델(Julie F. Codell)은 19세기 대중 예술 언론매체의 대표로 『아트 저널』
(Art Journal) 과 『아트 매거진』(Magazine of Art)을 꼽는다.101) 『아트 저널』
은 1839년 창간 당시 월간 발행 부수가 700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1851년에는 2
만 5000부로 늘었다.102) 같은 시기『아트 매거진』은 초판이 매진되어 1만 부를
다시 찍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103) 코델은 이러한 매체들이 “미술 작업을
중산층의 사회적 예법, 빅토리아 시대의 노동주의, 영국성의 모범이 되는 예술
가들의 사업으로 변형”시켰고, 미술의 소비자이자, 국가적 문화의 옹호자로 떠
오른 중산층에게 인도자 역할을 했다고 역설했다.104)
코델의 이러한 주장은 아트 저널을 창간한 사뮤엘 카터 홀(Samuel Carter
Hall)이 가졌던 목표를 생각할 때 쉽게 수긍할 수 있다. 홀의 첫 번째 목표는
“사람들이 영국 미술을 후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거장들’의
작품 거래에 있어서 광범위하고 비도덕적인 거래를 파괴하는 것이었다.105)106)

101) ed. Pamela Fletcher & Anne Helmreich(Julie F. Codell), The rise of the modern
art market in London, 1850-1939 (New York: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13), p.
128.
102) Art Journal, 1851, p. 301; Landow, ‘There began to a Great Talking about the
Fine Arts’, p. 30 (Thomas M. Bayer and John R. Page, The Development of the Art
Market in England: Money as Muse, 1730-1900 (London: Pickering & Chatto, 2011), p.
130에서 재인용)
103) Simon Nowell-Smith, The House of Cassell, 1848-1958 (London: Casell, 1958), p.
32.(Thomas M. Bayer and John R. Page, op. cit., p.131에서 재인용)
104) Ibid., 128.
105) Samuel Carter Hall, Retrospective of A Long Life from 1815-1883 (New York: D.
Appleton and Company, 1883), pp. 199-204. (Thomas M. Bayer and John R. Page, op.
cit., p. 100.에서 재인용)
106) 이와 같은 목표는 로열 아카데미의 프로파간다이기도 했다. 로열 아카데미는 영국
콜렉터들의 외국 화가와 그림에 대한 전통적인 애호가 16세기부터 영국미술 발전의 장

37
그리고 이러한 목표는 『아트 저널』 ‘영국 미술가들의 초상’(Portraits of British
Artists)이라는 연재에서 구체화되었다. 이 저널에서는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거
장들과 영국 화가들을 병행하여 다루었다.107) 이를 통해 독자들이 영국 미술을
르네상스 미술과 동일시하도록 부추겼을 뿐 아니라 영국미술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도록 유도했다.
이처럼 언론매체들은 신흥 부르주아들이 르네상스 거장들을 뒤로 하고 영
국 미술을 후원하도록 하려는 다소 국수주의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아트
저널』이나 『아트 매거진』에서는 미술비평뿐만 아니라 동시대 영국 화가들의
전기를 출간하는 등 화가를 소개하고 독자들에게 해당화가 작품의 ‘투자 가
치’를 보장하기도 했다.108) 다시 말해 스스로 미술작품을 판단할 기준이 정립
되지 않은 중산층 구매자들에게 미술비평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사야할지’
를 결정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화가, 미술비평, 미술시장의 삼각
구도는 19세기 중후반 영국 미술을 이해하는데 필수불가결한 핵심이다.
예를 들어 이 ‘삼각구도’안에 위치한 그림으로 윌리엄 파웰 프리스(Willam
Powell Frith)의 <기차역>(The Railway Station, 1862)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아트 딜러 빅터 플레토우(Victor Flatow)에게 당대 영국에서 미술작품 거래액 중
최고값인 5,250 파운드에 거래되었다.109) 또한 이 작품이 ‘플레토우의 헤이마켓
갤러리’(Flatow’s Haymarket Gallery)에 전시되는 첫 7주간 2만 천명이 방문했
으며 플레토우는 전례 없이 많은 저작권료를 수익으로 남겼다.110) <기차역>의
이와 같은 성공은 미술 비평계의 반응과 무관하지 않았다. 런던 대학의 영문학

애요소로 작용했다고 인지했으며, 영국미술을 위해서는 이에 도전해야 함을 시사했다.


이같은 문제의식은 1830년부터 1850년까지 로열 아카데미의 원장이었던 마틴 아처 시
(Sir Martin Archer Shee)가 국가적 미술을 위해 적극적 운동을 벌이면서 공론화 되었다.
Shearer West, “William Powell Frith, and the British School of Art,” Victorian Studeis
(Winter 1990), p. 310.
107) Thomas M. Bayer and John R. Page, op. cit., p. 100.
108) Ibid., p. 136-7.
109)
http://www.branchcollective.org/?ps_articles=nancy-rose-marshall-on-william-powell-friths-
railway-station-april-1862
110) Shearer West, op. cit., p. 314.

38
과 교수이자 『펀치』(Punch)의 편집자였던 톰 테일러(Tom Taylor)는 당대 영향
력 있는 미술비평가였는데, 그는 이 작품에 플레토우가 지불한 상당한 금액에
대해 옹호했다. 나아가 그는 <기차역>이 역사화의 고양된 도덕주의를 위해 접근
할 수 있는 대체물을 제공함으로써 ‘대중을 위한’ 요구에 응했다며 찬사를
보냈다.111)『아트 저널』을 비롯한 유력한 비평지에서도 <기차역>에 대해 “위
대한 국가적 그림”이라며 칭찬을 지속했다.112) 이같이 미술 비평계에서의 긍정
적인 반응은 이 작품이 헨리 그래이브스 앤 컴퍼니(Henry Graves & Co.,)에
18,400 파운드에 재판매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상업 갤러리에 대한 리뷰도 미술 언론매체에서 필수적으로 언급되
었고, 특히 상업 갤러리의 성공이 미술비평가들에 의해 좌우 되었을 정도로 언
론 비평의 영향력은 상당했다.113) 그러나 당대 화가들이 작품을 판매하는데 있
어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던 비평계는 로제티에게는 관대하지 않았다. <기차역>
에 대해 긍정적 비평을 했던 테일러는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에 대해서는 감
각적 색채주의와 종교적 환기(evocation)가 잘못 되어 있으며, 역겹다고 지적한
바 있다.114) 이처럼 일화적이고 도덕적 미술에 대한 미술 비평계의 입장과 이에
대한 대중들의 옹호는 미술시장에서 로제티의 자리를 축소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로제티는 공적으로 작품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자신만의 원칙을
고수해 미술 비평계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그는 1877년 그로스브너 갤러리
(Grosvener Gallery)의 개관전 초대를 거절하면서 “나를 주저하게 하는 것은 내
일생동안 최선을 다한 노력의 결과물과 내 목표 사이의 계속되는 차이로 인한
불만족 때문이다” 고 밝힌 바 있다.115)

111) Ibid., p. 316.


112)
http://www.branchcollective.org/?ps_articles=nancy-rose-marshall-on-william-powell-friths-
railway-station-april-1862
113) Thomas M. Bayer and John R. Page, op. cit., p. 136.
114) Tom Taylor, “English Painters of the Present Day,” Portfolio 1 (1870), p. 73.
(Shearer West, op. cit., p. 322에서 재인용)
115)“What holds me back is simply the lifelong feeling of dissatisfaction which I
have experienced from the disparity of aim and attainment in what I have all my life
produced as best as I could.” D. G. Rossetti, letter to The Times, 26 March 1877, p. 6.

39
이처럼 로제티가 거절의 뜻을 『타임스』(The Times)지에 보낸 것은 그가 자
신의 변함없는 뜻을 당대 미술계에 공공연히 알리려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로제티의 이러한 겸손한 거절의 말에서 그의 심중을 파악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로제티의 내심은 그와 함께 유미주의를 이끌었던 J. M. 휘슬러의 다음의 고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짐작된다.

나는 미술계에서 독립적인 위치를 갖고 아카데미에 대적했던 것으로 알


려져왔다 ... 나는 추종자 무리들을 갖는 대중적 그림 생산자(picture maker)
의 자리를 견디지 못하겠다. 나의 미술은 대중들에게 제공되는 일반적인
것 들에서 꽤 떨어져 있다.116)

확실히 당대 대중 언론매체가 선호한 그림들과 로제티나 휘슬러의 작품은 상당


한 거리가 있다. 당대의 국가관과 도덕적, 윤리적 범주를 넘지 않는 미술을 선
호하던 대중 언론매체는 선구적인 영국 미술을 발굴하는 데에는 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대 미술 비평에 대한 이와 같은 일반적인 해석은 300개 이상의
월간지와 일간지, 정기간행물들의 성향을 모두 포괄하지는 못할 것이다. 특히
로제티를 중심으로 한 시인들과 비평가들은 지속적으로 도덕적, 윤리적 범주를
벗어난 유미주의 미술을 옹호했다. 일명 ‘로제티 무리’(Rossetti Circle)이라고 불
리는 이 그룹은 시인이자 비평가 스윈번(Algernon Charles Swinburne), 로제티의
동생이자 비평가 윌리엄 로제티, 비평가 시드니 콜빈(Sidney Colvin), F. G. 스티
븐스(F. G. Stephens)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이론은 로제티의 회화 뿐

(ed. Pamela Fletcher & Anne Helmreich(Patricia de Montfort), op. cit., 에서 재인용)
116) “I am known and always have been known to hold an independent position
in Art and to have had the Academy opposed to me ... I don’t stand in the
position of the popular picture maker with herds of admirers – My Art is quite apart
from the usual stuff furnished in the mass ...” Whistler to Anderson Rose, (21
November 1878), Margaret MacDonald et al., Correspondence of James McNeil Whistler,
1855-1903 (University of Glasgow, 2003-4), p. (Patricia de Montfort, op. cit., 258에서 재
인용)

40
아니라 유미주의 미술과 문학이 영국에 자리잡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로제티 무리’의 비평과 예술 활동은 ‘육욕적’인 것을 극찬한다는 오
해를 받고 비난을 받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미학을 고집했다. 뿐만 아니라 이
들은 로제티가 비평계에서 스스로 고립시킨 것과 대조적으로 자신들의 이론을
끊임없이 미술, 문학계에 관철시켰다. 때문에 이러한 유미주의 비평가들의 많은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시인이자 비평가 로버트 부케넌은 로제티를 중심으
로 한 이 무리를 ‘육체파’라고 칭하며 대대적인 비난을 가했다.117) 부케넌의
이러한 입장은 유미주의를 보는 당대 일반적인 시각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유미주의 비평가’들은 로제티의 회화가 대중에 눈에서 사라진 1860년대
부터 로제티를 옹호하는 글을 여러 잡지에 출간했다. 부케넌 역시 1871년부터
로제티의 시와 회화에 대한 비난을 시작했기 때문에 이들의 비평은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처럼 로제티의 1860년대 베네치아 양식은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이어지는 절에서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이 불지폈던 미
적 논제들을 당대 비평을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117) http://www.robertbuchanan.co.uk/html/fleshlyschool.html (2015. 4. 19. 7:49 PM)

41
2. 존 러스킨(1819-1900)의 비평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였던 러스킨과 로제티의 관계는 미술에 있어


서 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가족과 같이 친밀했다. 특히 러스킨과의 가족적인
역할놀이 안에서 로제티는 ‘다루기 힘든 아이’(enfant terrible) 역할을 맡았다고
전해진다.118) 두 사람의 관계는 라파엘전파 초기부터 형성되었고 러스킨의 미술
이론은 로제티가 라파엘전파 화가로 활동할 당시부터 영향력을 미쳤다. 라파엘
전파 창립 회원들은 러스킨의 『근대 화가들』(Modern Painters, 1843-60)을 탐
독했으며, 러스킨이 이 책에서 주장한 자연주의 미학은 라파엘전파 화풍의 이론
적 기반이 되었다.
라파엘전파 화가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작품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1850년 『발생』(The Germ)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잡지는 어조가
순진무구하며, 혼란스럽고 ‘잘 못 쓰여’졌다는 평가를 받았다.119) 이에 대해 워
너는 라파엘전파 화가들의 글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무시되었고, 오히려 러
스킨이 1851년 쓴 “라파엘전파주의”(Pre-Raphaelitism)가 라파엘전파주의 이론적
발전에 기초가 되었다고 보았다.120) 같은 해 라파엘전파 화가들의 그림이 대중
과 아카데미로부터 몰이해되고 있을 때 러스킨은 『타임스』지에 라파엘전파를
옹호하는 글을 써주었다. 이 글은 당대 미술계에 라파엘전파의 그림이 받아들여
지게 하는 데 기여했다.
러스킨과 라파엘전파 화가들은 아카데미 형식을 거부하고 자연의 극치를 옹
호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당시 로열 아카데미는 초대 원장이자, 18세기
영국 미술에 큰 영향을 준 조슈아 레이놀드(Joshua Reynold)의 이론을 따르고
있었다. 레이놀드는 미(beauty)와 진실(truth)이 단일하고 영원 불변한 자연법칙

118) J. B. Bullen, Rossetti: Painter & Poet. op. cit., p. 79.


119) Marcia Werner, Pre-Raphaelite Painting and Nineteenth-Century Realism
(Cambridge: Cambridge UP, 2005), p. 17.
120) Ibid., p. 18-19.

42
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미란 보편타당한 것이었고, 감식안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공통된 미를 추구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하는 ‘보편
타당한 미’란 고대 그리스 미술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아카데미 화가들은 고대
그리스 미술을 복제하는 것에 급급했다.
반면 러스킨과 라파엘전파 화가들에게 미란, 자연에 완전히 진실할 때만 얻
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공유된 미의 규범은 없으며, 자연을 섬세한 사실
주의로 재현하는 것에서 미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미적 사실주의를
위해 러스킨은 화가들에게 실외로 나가 자연에서 작업하라고 독려했다. 이에 반
응하여 실제적으로 라파엘전파 화가들은 캔버스를 실내에서 실외로 이동시켰다.
또한 러스킨은 자연이 가진 신성함을 강조했는데, 그의 이러한 입장은 종교적이
고, 도덕적이며, 디테일을 섬세하게 묘사하던 1850년대 라파엘전파 화풍에 영향
을 주었다. 특히 러스킨은『근대 화가들』 제 3권에서 회화를 표면적으로 이해
하기보다, 주제적 측면에서 이해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회화의 주제가 도덕적이
고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것이기를 바랬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러스킨에게 미
술은 사회적 공정성의 지표였다.121) 특히 그의 유명한 에세이 “고딕의 속
성”(Nature of Gothic)에서 러스킨은 미를 미학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도덕적
관점에서 파악해야 하며, 실제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지적했
다.
그러나 러스킨이 베네치아 회화를 접하면서 그의 이러한 입장은 점차 달라
지기 시작했다. 러스킨은 여러 차례 베네치아를 방문하고 베네치아 건축을 연구
하여 1851년 『베네치아의 돌』(The Stones of Venice)을 발표했다. 1858년에는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고 베로네제의 그림을 보았으며, 이를 토대로 『근대 화
가들』 (1860) 제 5권에서 베네치아 회화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즉 러스킨이 미
술비평을 시작하던 무렵부터 베네치아 미술은 그에게 익숙한 것이었으나 실질
적으로 베네치아 미술이 그의 미술이론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고 할 수 있다.
러스킨은 『근대 화가들』 제 5권에서 피렌체 미술과 베네치아 미술을 구

121) Amy Woodson-Boulton, op. cit., p. 9.

43
분하고 베네치아 미술을 우위에 두었다. 그는 피렌체 미술이 “본질적으로 기독
교적”이고, 금욕적이며, “그리스 기질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주장했다.122) 또한
피렌체 회화에서 풍경화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가 화가들이 돌, 나무, 공기와 같
은 자연을 경멸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반면 베네치아 미술은 거대하고 깊은
색채를 즐기며, 자연에 친숙하며, 자연을 통해 “다른 종류의 미”를 탐색했다고
썼다.123) 이처럼 러스킨은 피렌체 회화가 놓치고 있는 인간의 욕망이나 자연의
아름다운 속성이 베네치아 회화에서는 구현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베네치아 미술에 관한 이러한 러스킨의 비평은 러스킨의 초기 도덕주의 비
평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프렛존에 따르면 러스킨은 베네치아 회화에 몰두하
기 시작하면서 순전한 육체적 아름다움을 경험했고 이러한 감각적 경험이 그로
하여금 프로테스탄티즘 복음주의를 잠시나마 포기하게 만들었다.124) 다시 말해
러스킨의 1850년대 이론이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에 반해, 1860년에 출간된
『근대 화가들』5권은 도덕적인 메시지보다는 감각적 경험과 육체적 아름다움
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러스킨은 베네치아 회화에 종교성보다는 육
체, 자연에 대한 찬미가 더 짙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러스킨은
틴토레토는 ‘감각론자’(sensualist), 베로네제는 ‘믿지 않는 자’(unbeliever)라고 칭
했다.125) 그리고 티치아노가 “인간의 몸이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사랑스럽다”
는 것을 작품을 통해 나타냈다고 보았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베네치아 회화에
서 여성의 신체적 아름다움이 남성의 신체의 아름다움보다 더 완벽하게 드러난
다고 보았으며, 특별히 베네치아 회화의 감각성을 극찬했다.
특히 이 저작에서 러스킨이 강조한 것은 베네치아 회화의 색채였다. 그는
베네치아 화풍이 “더욱 거대하고 깊은 색채를 즐기고 있다”126)고 밝혔다. 그리
고 베네치아 화가들의 주된 목적이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 이었다고 역설
했다. 예를 들어 티치아노가 성모 마리아를 그린 것은 보는 이가 그녀를 믿게

122) John Ruskin, Modern Painters (London: Adamant Media Corporation, 2005), Vol.
Ⅴ, p. 238.
123) Ibid., 240.
124) Elizabeth Prettjohn. The Art of the Pre-Raphaelites (London: Tate, 2007), p. 116.
125) Ibid., p. 244.
126) John Ruskin, op. cit., p.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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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붉은색과 푸른색을 즐기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127)
이와 같이 러스킨이 선보다 색채에 주목한 것은 당대 영국에서는 신선한 충격
을 주었다. 당대 로열 아카데미는 피렌체 거장들의 선을 중시했고 이러한 교육
을 받은 영국의 화가들 역시 색채보다는 선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색채에 대한 러스킨의 관심에 부응하듯, 로제티를 비롯한 밀레이와 헌트는
색채 실험을 시작했다.128) 밀레이의 <단풍>[도판 3]은 가을 저녁 낙엽을 태우는
소녀들의 모습, 가을의 정취, 단풍의 빛깔, 소녀들의 붉은 뺨의 색채를 조화롭게
보여주고 있다. 세밀한 묘사와 놀랄만한 사실성으로 라파엘전파 화가들 중에서
가장 촉망받던 밀레이도 사실주의보다는 색채 표현에 더욱 역점을 두었던 것이
다. 특히 이 작품에서 밀레이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저녁노을의 색채를 포착하
고 있다.
로제티 또한 1859년에 들어서 본격적인 유화 작업을 시작했고, 드로잉보다
색채 표현에 역점을 두었다. 수채화에서 유화로의 매체에서의 변화도 그가 색채

127) Ibid., p. 254.


128) 1850년대 로제티는 색채보다는 선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그가 주창한 선은 전
성기 르네상스 화가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아카데미즘 양식의 선과는 다른 것이었다.
로제티의 선은 르네상스 전성기의 선이 아닌, 보다 단순한 14, 15세기 회화의 그것과 가
까운 선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법은 소묘를 한 다음, 판화와
같이 윤곽을 진하게 그리고 색을 입히는 방식이었다. <성모의 소녀시절>[도판 9]에서 볼
수 있듯이 로제티는 유화를 그릴 때에도 드로잉 기술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고, 색채는
드로잉에서 정확히 정해진 자리에 입혀졌다. ed. Elizabeth Prettejohn (Colin Cruise),
The Cambridge companion to the Pre-Raphaelites (New York: Cambridge UP, 2012), p.
106.때문에 색이 중첩되지 않으며 빛에 따른 색의 변화도 뚜렷하지 않다. <푸른 내실>
[도판 2]과 <성모의 소녀시절>[도판 9]에서도 볼 수 있듯이, 로제티의 초기작에서 붉은색
과 푸른색의 표현은 두드러져 있지만 이러한 색채는 거의 단색조를 띄고 있으며 빛에
따라 충분히 변주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로제티의 초기 회화는 색채보다는 드로잉에
더 의존하고 있으며, 색채는 드로잉 하는 과정에서 이미 계획된, 단순한 역할을 하고 있
을 뿐이다. 드로잉에 충실했던 로제티의 1850년대 작품은 작은 수채화가 대다수이다. 그
는 유화를 그린다 해도 얇은 수채화 붓으로 윤곽선을 뚜렷하게 강조하면서 작업했다.
<푸른 밀실>(The Blue Closet, 1856-57)[도판 13] 에서도 볼 수 있듯이 로제티는 뚜렷하
게 구획된 선의 형태 안에서 대조되는 색채를 병치시켰다. 중세 문학『아서왕의 죽음』
(Le Morte D’ Arthur)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품은 형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 모두에
서 중세적인 분위기를 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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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관심을 가지게 됨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수채화에 비해
다양한 색채 실험을 할 수 있는 유화로의 변화는 그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계기
가 된 것이다. 로제티는 1859년 윌리엄 벨 스콧(William Bell Scott)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유화로 상반신 그림을 그렸다”고 말하면서 라파엘전파 회화에서
일반적으로 쓰였던 “몸에 점을 찍는”(stippling on flesh)의 방식을 피했다고 썼
다.129) 이처럼 로제티는 라파엘전파 회화의 기법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 육체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서 베네치아 양식을 확립했다.
특히 로제티의 색채 사용은 그가 16세기 베네치아 미술에 나타난 색채를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베로니카 베로네제>(Veronica
Veronese, 1872)[도판 23]는 ‘베로나에서 온 베로니카’로 직역되는 그림인데, 파
올로 베로네제에 대한 직접적인 오마주를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로제티
는 녹색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베네치아의 화가 베로네제와 같이 ‘다양한 녹색을
탐구하기 위해’ 이 작품을 그렸다고 말했다.130) 베로네제의 여성 초상화에서 색
채는 여성의 의복이나 장신구의 화려함을 발산하며, 대조되는 색채를 대비시키
고 그 대비를 통해 색채의 화려함을 부각시킨다. 로제티도 16세기 베네치아 색
채의 선례를 따라 <레이디 릴리트>[도판 6], <푸른 내실>[도판 2] <연인>[도판
19] 에서처럼 폐쇄된 공간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여성들의 화려한 의복이나
장신구에 다양한 색채를 대비시킴으로써 시각적 자극을 극대화 하였다. 또한
<연인>[도판 19]에서 로제티는 장신구나 의복과 같은 인공적인 색채를 표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다양한 피부색 재현을 통해 색다른 실행을 감행했다. 이 작
품에서 로제티는 전례 없이 흑인을 등장시키고 아랍계, 아시아계 여성들을 재현
했다. 이는 베로네제가 <가나의 혼인잔치>(1563)[도판 20]에서 다양한 인종을 재
현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효과를 모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도판 29].131)

129) “I have painted a half-figure in oil, in doing which I have made an effort to
avoid what I know to be a besetting sin of mine, and indeed rather common to PR
painting- that of stippling on flesh” David Rodgers, op. cit., p. 20.
130) Tim Barringer, Reading the Pre-Raphaelites (New Haven: Yale UP, 1998), p. 166.
131) 베네치아 회화에 재현된 흑인이 당대 어떤 반응을 불러 일으켰는지 알 수는 없으
나, 확실히 19세기 프랑스와 영국 회화에서 재현된 흑인은 상당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
다. 특히 잔 마시는 1819년 게리코(Theodore Gericault)의 <메두사의 위대한 뗏목>(g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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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로제티가 회화에서 도덕적 함의를 걷어내고 여성의 아름다움 그 자
체를 탐구하려 했다는 점과 베네치아의 색채 사용을 강조한 점은 러스킨의 영
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로제티의 화풍 변화는 르네상스 베네치아 화가들의
그림보다 대담하고 감각적이었기 때문에 러스킨이 추구한 ‘베네치아 양식’에 부
합하지 않았다. 러스킨은 직접적으로 로제티의 새로운 시도가 자신의 미술이론
과는 거리가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132) 그는 1865년 로제티에게 보내는 편지에
“너 자신만의 방식에 있어서의 변화는 나의 어떠한 공감도 이끌어내지 못하며,
나는 네가 기뻐할 만한 칭찬은 해줄 수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133) 또한 같은

Raft of the Medusa)이 프랑스와 영국 사회에 가져다 준 충격을 기록하면서, 19세기 화


가들이 흑인이 가진 조각적 측면과 미를 인지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마시는
회화에서 흑인의 재현이 내포한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불편한 입장 또한 표명하고 있
다. Jan Marsh, Black Victorians: Black People in British Art 1800-1900, op. cit., p. 19.
이런 맥락에서 로제티의 <연인>은 아시아계, 인도계 여성들과 흑인 어린아이에 둘러싸
인 백인 여성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다고 해석되어져 ‘백인중심주의’ 이데올로기를
전달하고 있다는 지적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하나의 담론을 잣대
로 회화에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 해석을 낳는지를 보여준다. 더욱이 로제티는
<연인>의 주문자 조지 레이(George Rae)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속 흑인 아이에 대해,
“나는 나의 그림의 색채가 보석과 같길 원했다. 그리고 흑옥석은 매우 귀중한 것이었
다” 고 밝힌 바 있다. Ed. William E. Fredeman, Vol. Ⅲ, op. cit., p. 272. 이는 다양한
인종을 재현함으로 그가 바랬던 효과가 인종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색채의 미
에 대한 탐구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이러한 사실은 유색인종의 여성을 재현
한 로제티의 의도가 베로네제의 회화에서처럼, 회화에 더 많은 생기를 부여하고 풍요로
운 미적 감각과 색의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함에 더 가까웠다고 해석할 수 있게 한다.
132) 러스킨은 1886년 4월 18일 케이트 그린어웨이(Kate Greenaway)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에게는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지... 터너-밀레이-로제티-헌트-존스- 그리고 케이트
그린어웨이까지, 내가 그들에게 충고한 것을 하나라도 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라고
한탄한 바 있다. (and think a little how nasty it has neen for me, all my life to have
Turner – Millais – Rossetti – Hunt – Jones – and Kate Greenaway, never one of
them doing a single thing I say they should!) Rodney Engen, Kate Greenaway: A
Biography (New York: Macdonald, 1981), p. 136 (Gail S. Weinberg, “ ‘An Irish Maniac’:
Ruskin, Rossetti, and Frances McCracken.” The Burlington Magazine (Aug 2001), 143.
1181, p. 491. 재인용)
133) “a change in your own methods of work with which I have no symphathy and
which renders it impossible to give you the kind of praise which whould gi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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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비너스 버티코디아>[도판 26]에 대해서는 “그것들의 조악함(coarseness)은
끔찍해 ... 다른 표현은 쓸 수 없군”과 같은 비판적 평가를 서슴지 않았다.134)
그리고 이로 인해 러스킨과 로제티의 관계는 멀어져서, 끝내 그 우정을 회복하
지 못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로제티의 1860년대 작품이
‘베네치아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로제티가 16세기의 회화 양식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한, 베네치아 회화로 로제티를 이끈 장본인은
러스킨 일지라도, 로제티 자신만의 새로운 양식을 확고히 했다는 사실이다.
로제티의 새로운 화풍에 대한 라파엘전파 화가들의 반응도 긍정적이지 않
았다. 특히 헌트는 1860년 <키스한 입술>에 대해 당시 외국에서 들여오던 포르
노그래피를 언급하면서, ‘역겨운 성’(gross sexuality)이라 비난했다.135) 1895년에
는 로제티가 ‘감각적 방식’(sensual manner)를 고수했다고 지적하면서 ‘아마추어
일 뿐’이라고 일축했다.136) 이는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이 그가 이전에 추구하
던 미술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로 인해 로제티는 1850년대 자신과 예술을 논하고 같은 이론을 탐구하던
동지들에게서 벗어나 또 다른 예술가 무리를 이끌게 된다. 이 ‘무리들’에 대해
러스킨은 “네가 지금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이 너를 망치고 있다”와 같은 충고
를 하기도 했다.137) 러스킨이 로제티에게 언급한 ‘네가 지금 관계 맺고 있는 사
람들’이란, 로제티의 새로운 후원자들뿐만 아니라 유미주의 시인들과 비평가들
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로제티의 튜더 하우스에 모여 새로운 미

pleasure.” John Ruskin, The Works of John Ruskin, E. T. Cook and Alexander
Wedderburn, eds., xxxvi, 1903-12, pp. 488-95. (Allen Stanley, The New Painting of the
1860 (London: Yale UP, 2011), p. 63에서 재인용)
134) Helen Rossetti Angeli, Dante Gabriel Rossetti: His Friends and Enemies (London:
Hamish Hamilton, 1949), p. 92), (J. B. Bullen, Rossetti: Painter & Poet, op. cit., p. 168에
서 재인용)
135) Tim Barringer, Pre-Raphaelites: Victorian Avant-Garde, op. cit., p. 15.
136) March 28th 1895, Millais Papers (New York: Morgan Library), MA 1485 K. 415
(Tim Barringer, Pre-Raphaelites: Victorian Avant-Garde, op. cit., p. 15에서 재인용)
137) Helen Rossetti Angeli, Dante Gabriel Rossetti: His Friends and Enemies (London:
Hamish Hamilton, 1949), p. 92, (J. B. Bullen, Rossetti: Painter & Poet, op. cit., p. 168에
서 재인용)

48
술과 문학을 토론했으며 그 이론들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임은 로제티가 급격히 쇠약해지고 정신적으로 피폐하기 전인 1870년대 초
까지만 지속되었다. 이런 점에서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은 로제티가 라파엘전
파의 미술이론가의 역할을 자처한 러스킨과 라파엘전파 형제회 화가들에서 멀
리 떨어져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탐구한 시기에 주도적으로 확립한 양식이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유미주의 비평가들

앞서 언급했듯이 로제티는 1859년 이후로는 작품을 공적으로 공개하는 것을


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미주의 비평가들은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에 대
한 옹호적인 비평을 미술잡지에 수록하기도 했다. 로제티의 하숙인이자 유미주
의 작가였던 스윈번(Algernon Charles Swinburne, 1837-1909)은 <푸른 내실>(The
Blue Bower)[도판 2]에 대해 “점잖게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놀랍도록 아름답
다”고 평했다.138) 역시 로제티의 친구이자 미술비평가 F. G. 스티븐스(Frederic
George Stephens) 또한 『아테나움』(Athenaeum)지에서 ‘경탄할만한 육
체’(marvellous fleshiness), ‘매력적인 감각성’(fascinating sensuousness)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로제티의 새로운 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139) 그러나 대
중들에게 로제티의 작품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옹호적 비평은 별다
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한 로제티 스스로도 이들이 자신에 대한 비평을 싣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140) 때문에 이들의 비평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138) Andrew Wilton, The Age of Rossetti, ‘Burne-Jones and Watts (London:
Flammarion, 1997), p. 97. (ed. Michaela Giebelhausen and Tim Barringer (David Peters
Corbett), Writing the Pre-Raphaelites (Surrey: Ashgate, 2009), p. 93에서 재인용)
139) F. G. Stephens, “Mr. Rossetti’s Pictures,” p. 548. (Elizabeth Prettejohn, Art for
Art’s Sake: Aestheticism in Victorian Painting, op. cit., p. 221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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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구하고 유미주의 비평가들의 비평은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에 대한 당대의
색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먼저 로제티 회화의 유미주의로의 움직임을 가장 먼저 알아채고, 이를 비평
한 사람은 로제티의 동생 윌리엄 마이클 로제티였다. 윌리엄 로제티는 1850년부
터 1878년까지 영국과 미국 정기간행물에 400편에 가까운 글을 쓴 활동적인 비
평가였다.141) 이 시기는 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미술 전시
리뷰를 싣는 것이 어렵지 않던 때였다.142) 이런 상황에서 윌리엄 로제티는 헨리
제임스(Henry James)가 ‘현재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비평가’라고 꼽은 3인
중 한 사람일 정도로 인정받는 미술 비평가였다.143)
안젤라 터웰에 따르면, 윌리엄 로제티는 의도적으로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의 회화를 비평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144) 그 이유는 로제티가 자신의 작품을
공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비평의 대상이 되는 것도 꺼려했기 때문일 것이
다. 그럼에도 윌리엄 로제티의 이론과 로제티의 회화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존재
한다. 윌리엄 로제티는 자신의 형의 그림을 직접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자제했으
나 로제티 회화와 비슷한 미학적 입장을 견지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로제티의
미술 양식이 영국 미술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고 할 수 있다.
1850년대 초반 라파엘전파의 이론을 담은 잡지 『발생』(The Germ)의 편집
자였던 윌리엄 로제티는 로제티가 베네치아 양식으로 양식적 변화를 꿰한 무렵
부터 이론적 변화를 감행했다. 그는 로제티와 함께 미학적 변화를 추구한 라파

140) 스윈번은 로제티의 튜더 하우스에서 하숙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사적으로만 거래되


던 로제티 회화에 충분히 접근할 수 있었다. 한편 로제티는 비평을 통해 자신을 옹호하
던 스윈번이 부케넌의 논쟁을 가중시켰다고 비난했으며 둘은 1872년 이후로는 만나지
않았다. ed. Elizabeth Prettejohn (Catherine Maxwell), The Cambridge Companion to the
Pre-Raphaelites (Cambridge: Cambridge UP, 2012), p. 236.
141) ed. Elizabeth Prettejohn (Angela Thirlwell), op. cit., p. 254.
142) ed. Michaela Giebelhausen and Tim Barringer (Julie L’Enfant), op. cit., p. 103.
143) ed. John L. Sweeney(Henry James), The Painter’s Eye: Notes and Essays on the
Pictorial Arts (Madison, WI: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89), p. 37. (Angela
Thirlwell, op. cit., p. 254에서 재인용)
144) Angela Thirlwell, op. cit., p. 254.

50
엘전파 화가인 1856년 밀레이의 <단풍>[도판 3]에 대해서도 비평한 바 있다. 이
비평에서도 윌리엄 로제티는 당대 비평가들과는 다른 시각을 보여주었다. 그는
다른 비평가들처럼 주제적 측면에서 분석하지 않고, <단풍>이 보여주는 격렬한
감정과 색채에 중점을 맞추면서 새로운 미학적 이론을 구축해 나갔다.145) 다시
말해 그는 미술의 도덕적, 사회적 측면을 강조한 1850년대 초반의 이론에서 벗
어나 미술의 색채, 미적측면에 관심을 피력한 비평을 주도하였다. 특히 윌리엄
로제티는 “예술의 지적 요소보다 스타일이 열등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
고 스타일은 더욱 주목할만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러스킨을 필두로
한 보수적인 미술비평에 있어서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 함을 강조한 것이
다.146)
이어 F. G. 스티븐스가 1865년『아테나움』에 발표한 비평은 유미주의 비평
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로제티의 <푸른 내실>[도판 2]에 대해 단순한 주제를
‘내재적 아름다움과 선율이 있는 색채’를 통해 그려낸 ‘서정적인 시’(lyrical
poem)라 칭했다. 또한 ‘티치아노와 조르지오네도 이런 종류의 시를 창조해 내었
다’고 주장했다.147) 한편 <푸른 내실>에 나타난 성적 묘사에 대해서는, ‘육체 중
가장 아름다운 육체’, ‘표현력에 있어 매혹적인 감각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분석
했다.148) 이러한 스티븐스의 비평은 로제티의 미술이 이전과는 다른 미술에 대
한 인지 방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적절한 예이다. 스티븐스는 <푸른
내실>에서 어떠한 도덕적, 교훈적 함의를 찾고 있지 않다. 대신 그는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에 나타난 시각적이며 감각적 요소에 집중하면서 유미주의 미술
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시드니 콜빈은 로제티를 비롯한 에드워드 번 존스, 사이먼 솔로
몬 등이 ‘사실주의없이 미를 추구’했다고 보면서, 스티븐스의 유미주의에 대한

145) William Rossetti, “R. A. Exhibition-Second Visit,” The Spectator (May 1856), p.
570.
146) William Michael Rossetti, ‘The Royal Academy Exhibition,“ Fraser’s Magazine
(June 1865), LXXI, p. 740 (Julie L’Enfant, op. cit., p. 106에서 재인용)
147) F. G. Stephens, “Mr. Rossetti’s Pictures,” Athenaeum (October 1865), p. 545.
148) Ibid., p. 546.

51
다소 모호한 해석에서 한 발 나아가 분석했다.149) 콜빈의 주장에서 회화는 더
이상 사회적 교훈을 전하는 매체가 아닌, 인간의 시각에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예술이 된다. 특히 1867년의 그의 논문에서 콜빈은 1860년대 중후반 사실주의보
다 미 자체를 추구한 화가들을 분석한 바 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알버트 무어
(Albert Moore), 로제티와 번 존스, 사이먼 솔로몬, 와츠(George Frederic Watts)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유미주의 미술은 한 화가나 그룹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유미주의 미술이 확대된 가운데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이 특별히 부각되
어 비난받은 이유는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이 여타 유미주의 화가과는 달리
성적인 요소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로제티와 같은 시기 여성의
성적 매력을 부각시킨 작품으로 라파엘전파 화가였던 밀레이의 <단풍>(Autumn
Leaves, 1856)[도판 3]과 헌트의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의 달콤함>(IL
Dolce far Niente, 1866)[도판 4] 등이 있다. 그러나 당대 로제티의 <키스한 입
술> 만이 맹비난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헌트나 밀레이가 보여준 여성
의 성적 매력은 19세기 영국 사회의 통념이나 관습 안에서 어느 정도 허용되는
범위 안에 위치해있는 반면, 로제티의 여성의 성은 그 범위를 이탈했기 때문이
다.150)
헌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달콤함>[도판 4]은, 로제티의 여성 초상
화와 비슷하게 호화로운 물건들 사이에서 서있는 여성의 성적 매력을 과시하고

149) 이에 대한 콜빈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화가에게 미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회화예술은 직접적으로 시각을 다루는 예술이다. 우리가 직
접적으로 시각을 통해 인지하는 것의 완벽함은 형태와 색채의 완벽함을 통해서이다. 미
란, 회화예술의 근본적인 목표이다”(I would affirm that beauty should be one
paramount aim of the pictorial artist. Pictorial art addresses itself directly to the sense
of sight ... The only perfection of which we can have direct cognisance through the
sense of sight is the perfection of forms and colours – beauty, in a word – should be
the prime object of pictorial art). Sidney Colvin, “English Painters and Painting in
1867,” Fortnightly Review (October 1867), p. 465. (Elizabeth Prettejohn, Art for Art’s
Sake: Aestheticism in Victorian Painting op. cit., p. 30-31에서 재인용)
150)

52
있다. 그러나 <키스한 입술>과 다르게 재현된 여성은 당대의 보수적인 관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네 번째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반지는 그녀가 결혼을 했
거나 그에 임박한 여성이라는 상징이며, 거울에 비친 집안 내부의 풍경은 일반
적인 가정에 가깝다. 이처럼 헌트는 어떠한 의미를 갖지 않은 ‘아름다운 여성’을
그리되, 그것이 사회적 통념에서 받아들여지는 조건에서 제시한 것이다.
반면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은 재현된 밀폐된 공간이 혼외 관계를 함의하
는 공간인 ‘내실’(bower)이라는 것을 <푸른 내실>[도판 2]과 같은 작품 제목에서
부터 공공연히 들어내고 있을 정도로 성적으로 노골적이다.151) 더구나 <파지오
의 정부>[도판 15]에 재현되어 있듯이 여성의 속살이 비쳐 보이는 얇은 실크는
티치아노의 <거울과 여인>[도판 14]에 나타난 옷감에 비해 여성의 성적 매력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이처럼 시대적으로 ‘부도덕한’ 공간에서 성적 아름다움을
감추기 보다는 드러내는 로제티의 여성은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적 가치를 건드
렸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윌리엄 로제티, 스윈번 등 로제티의 지인들로 구성된 비평가
집단은 로제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제티에 대한 비평을 꾸준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1850년대 말에서 1860년대 초 윌리엄 로제티는 의도적으로 자
신의 형을 비평하지 않고 로제티를 대신하여 그와 비슷한 화풍을 보여주는 다
른 유미주의 화가들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1860년대 후반 로제티의
회화가 이끌어내는 성과 육체에 대한 담론을 공유할 만한 화가는 찾기 힘들었
기 때문에 윌리엄 로제티는 1868년 직접적으로 로제티를 비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스윈번과 윌리엄 로제티는 1868년 ‘로열 아카데미 전시에 대한 노트’(Notes
on the Royal Academy Exhibition)에서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에 해당하는 <푸
른 내실>(1856)[도판 2], <레이디 릴리트>(1866-7)[도판 6], <허영심있는 여
성>(1866)[도판 24]을 성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 이들은 이 그림들이 지적이기
보다는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을 다루고 있다고 보았다.152) 특히 <레이디

151) 불렌은 당대 ‘내실’(bower) 이라는 단어가 합법적이지 않은 성적인 관계를 의미하


는 공간임을 밝힌 바 있다. J. B. Bullen, Rossetti: Painter & Poet. op. cit., p. 171.
152)<레이디 릴리트>에 대해 스윈번과 윌리엄 로제티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달콤하

53
릴리트>가 표면적으로는 이성에 짓눌린 육체를 깨우고 보는 이를 유혹하는 여
성이지만,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에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더불
어 로제티 작품이 가지고 있는 미적 측면에도 주의를 기울였는데, <비너스 버티
코디아>[도판 26]에 대해 ‘신성한 미의 전형’이라 일컬으며 “어느 누구의 칭
찬을 넘어선다”며 옹호했다.

4. 부케넌과 보수적 비평

그러나 로제티가 스스로 회화를 대중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이상 유미주의


비평은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오히려 로제티와 ‘그를 둘러싼 무리들’이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로제티가 1870년에 <시집>(Poems)을 출간하면서 부터였
다. 특히 로버트 부캐넌이 ‘토머스 메이틀런드’(Thomas Maitland) 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1871년 『컨템포러리 리뷰』(Contemporary Review)에 기고한 “육체파
시”(The Fleshly School of Poetry)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비평은 로제티 미
술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153) “육체파 시”는 부캐넌이 로제티
의 당대 회화에 대해 언급했다는 점에서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볼 수 있다. 부케넌은 사적으로 거래되던 로제티의 회화나 사진

고 풍성한 입술은 실현되고 완결된 즐거움의 인내심, 그리고 쾌감을 인지하는 열정의
따뜻한 휴식의 상태를 가지고 있다 ... 이 그림의 나른한 장관은 흠잡을 데 없는 육체적
아름다움과 피할 수 없는 즐거움의 위험성에 대한, 생각의 구현을 위한 딱 맞는 옷이다.
이 고요하고 숭고한 여자 마법사에게는 생명이 아닌 육체가 있다. 그녀는 단지 흡수력
으로 남성의 영혼을 매혹하고 끌어 들인다”(the sweet luxurious mouth has the
patience of pleasure fulfilled and complete, the warm repose of passion sure of its
delight...The sleepy splendour of the picture is a fit raiment for the idea incarnate of
faultless fleshly beauty and peril of pleasure unavoidable. For this serene and sublime
sorceress, there is no life but of the body ... she charms and draws down the souls of
men by pure force of absorption....)http://www.rossettiarchive.org/docs/n5054.r47.rad.html
153) http://www.robertbuchanan.co.uk/html/fleshlyschool.html (2015. 4. 19. 7:49 PM) 다음
의 사이트에서 전문을 확인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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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찍힌 작품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고 로제티의 시와 회화가 가진 긴밀한 관
계를 알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부케넌의 비평은 로제티의 시에 대한 해석과 비
평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에도 본질적으로는 로제티의 예술 전반에 대한 거센
비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부캐넌은 매튜 아놀드, 스윈번, 모리스 등을 ‘육체파’라고 칭하며, 로제티를
그 대표로 앞세워 분석한다. 그는 이 “육체파 신사들”(fleshly gentlemen)이 “시
적, 그리고 회화적 예술의 목적으로서 육욕성(fleshliness)을 극찬하기로 약속”하
고, 영혼보다 육체가 값지다고 주장하는 “공공 범죄자”(Public offender)라 칭했
다. 그는 또한 로제티에 대해 “불쾌한 상상을 하고 잘 못 그리는 화가”, “머리
카락 뿌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육욕적인”사람이라고 혹평했다. 이처럼 부케넌은
로제티의 문학적, 회화적 예술 전반에 대한 공격을 넘어서 로제티라는 인간 자
체에 대한 맹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부케넌 외에도 W. J. 코트호프(Courthope)는 로제티를 옹호하는 유미주의 비
평가들을 ‘로제티를 둘러싼 문학파’(literary school around Rossetti)라 칭하며
“그들 시대의 활동적인 삶에 무관심”하고 그들 스스로 ‘시적 기교’에 몰두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또한 당대 선두적인 주간 비평지였던 『템플 바』(Temple
Bar)도 이를 문제 삼고 1872년 “로제티와 그의 추종자들은 건전한 진실을 말하
고 있지 않다.”고 밝히면서 부케넌의 손을 들어주었다.
로제티는 비평계에서 자신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는 상황이 되자 자신이 어
떠한 음모의 피해자라는 망상을 이어갔으며 1872년에는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
다.154) 이때부터 로제티는 공적으로 공개되어있던 그의 시선집조차 지인들에게
사적으로 판매하는 방식으로 대중과 비평가의 눈에서 멀리 떨어지는 방법을 택
했다. 회화의 경우, 저작권으로 자신의 작품의 이미지를 복사하는 것까지 금했
다.155)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대 미술비평은 빅토리아 시대 국가관 못지않
게 보수적이었고, 이러한 보수적 미술계에서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이 받을 수

154) Alicia Craig Faxon, op. cit., p. 183.


155) 로제티는 저작권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자신의 그림에 대한 전시회나 복제품
도 금했다. 그는 인쇄나 목판화로 찍어낸 그림이 그의 작품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한
다고 생각하여 복제권도 팔지 않았다. Ibid., p. 167.

55
있는 비평이란 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캐넌의 육체파 비평은 『아트 저널』이나 『아트 매거진』과
같은 대중적인 언론매체가 아닌 『스펙테이터』(Spectator),『아테나움』
(Athenaeum), 『세인트 폴 매거진』(St. Paul Magazine) 등과 같은 보다 전문화
된 비평 매체에서 로제티의 이름이 끊임없이 언급되게 하는 발로가 되었다. 부
캐넌이 1871년 ‘육체파 비평’을 통해 로제티를 비롯한 스윈번, 윌리엄 로제티 등
을 맹렬히 비난한 이후 이들이 다시 부캐넌의 주장에 반론하고, 이에 다시 부캐
넌을 옹호하는 무리들이 반박하는 행태는 10년이 넘게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부케넌의 비평에 대한 로제티 자신의 반론을 살펴 보기로 하자. 로제티
는 부케넌이 필명으로 자신을 공격한 것에 대해 문제 삼고 “잠행하는 비평 집
단”(The Stealthy School of Criticism)이라는 제목의 글을 『아테나움』에 발표했
다. 이 글에서 로제티는 자신의 시에 대한 반론을 폈으며 회화에 대해서는 짤막
하게 언급했다. 그는 “시적, 그리고 회화적 예술의 목적으로서 육욕성을 극찬하
기로 약속”했다는 부케넌에 주장에 대해 자신의 시가 ‘육욕성’, ‘동물적’
이라는 용어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주도면밀하게 보여준다. 회화에 대해서는
“나는 내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그러나 내 그림을 아는 사
람은 (부케넌의 주장을) 비웃을 것이다”156)고 언급했다. 이는 로제티 자신의 시
각예술에 대한 자신감과, 이를 후원하는 이들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에 맞서 1872년 부케넌은 실명으로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는 로제
티 시에 나타난 노골적인 성적 묘사가 로제티의 합법적인 결혼 생활에서의 성
생활을 다루고 있을 지라도, ‘동물적인 것은 동물적인 것’ 이라며 이에 대한 비
판을 계속하겠다고 피력했다.157) 이처럼 부케넌의 비판은 로제티의 문학적, 시각
적 예술에 대한 평가라기보다는 얼마나 그것이 ‘성적인지’에 치우쳐 있었다.
당대 성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다시피한 욕망으로 치부되었다. 그래서 그것이
가정안에서 이루어지건, 그렇지 않건 간에 성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156) “I say nothing of my pictures; but those who know them will laugh at the
idea.” http://www.robertbuchanan.co.uk/html/stealthy.html (2015. 8. 26. 8: 11 P.M.)
157) John A. Cassidy, “Buchanan and the Fleshly controversy,” PMLA (1952), LXVII, p.
78.

56
것은 로제티의 경우에서처럼 인신공격과 비슷한 수준의 비평을 받을 만한 것이
었다.
부케넌 외에도 당대 선두적인 주간 비평지였던 『템플 바』(Temple Bar)에서
도 로제티의 성적 요인을 문제 삼았다. 『템플 바』는 1872년 “로제티와 그의
추종자들은 건전한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다. 이 집단의 글 모두에서 육체적인
것이 드러나는데, 이는 과장되어 있고 유해한 것이다”158)며 부케넌을 지지했다.
이처럼 로제티 시의 형식적 측면이나 문학적 성과는 거의 비평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오로지 ‘육체적’(fleshly)인 측면만이 부각되었다는 것은 주목할만하
다.
부케넌과 『템플 바』의 이러한 주장은 로제티가 더욱 필사적으로 자신의
회화를 공개하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베네치아 양식은
색채 사용에 있어 대담하며, 성적 함의를 시각적으로 강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
문이다. 또한 로제티의 아내 시덜을 묘사한 그림은 그의 초기작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 이후 로제티의 모델이 되었던 패니 콘포스나 제인 모리스와 같은 여성
들과 로제티와의 관계는 ‘합법적’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19세기
중후반의 시대적 상황은 로제티의 회화를 제대로 인식할 만한 문화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성’이라는 것은 로제티의 문학적, 시
각적 예술이 있는 그대로 평가받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가 될 만큼 당대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에게 성은 상당히 왜곡되어 있었다. 부케넌이 성에 대
해 집착스러울 만큼 비판을 가한 것은 당대의 시대상을 생각할 때 그리 놀랄만
한 일이 아니다. 로빈 시트(Robin Sheets)는 로제티의 시 “제니”(Jenny)가 포르노
그래피와 등가로 해석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했다. 특히 그는 당대 성이란 것
이 얼마나 몰이해되고 있었는지, 그리고 성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인간을 억압
했는지를 보여준 바 있다. 시트에 의하면 당시 금욕은 많은 지식인들이 장려한

158)“Rossetti and his admirers have been told a few wholesome truths. There is all
the writings of this school a fleshliness which is ... exaggerated and unwholesome...”
Cassidy, op.cit., p. 79.

57
인간의 가치였다. 뿐만 아니라 의학계에서도 금욕을 권장했다. 1897년 한 의학
서적에서는 “자신의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능력을 가장 높고 최상의 상태로 유
지시켜야 하는 젊은 남성은 가능한 합법적인 성적 행위의 형태일지라도 모든
성적 액체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쓰여있을 정도였다.159) 또한
의학계에서 티오필루스 팔민(Theophilus Parvin)과 같은 권위자는 뉴턴, 카트, 파
스칼, 베토벤과 같은 천재들이 성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훌륭한 작품을 창
조해 낼 수 있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160) 이처럼 성은 창조적인 고차원의 정신
적 영역의 활동과 대립되는 것으로 받아들여 졌다. 또한 인간적인 것과 반대되
는 동물적 영역의 저급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가감 없이 표현한 로제티의 베네치
아 양식을 처음으로 공언한 <키스한 입술>(1859)이 여덟 명의 남성과 관계한 후
알가브 왕과 ‘상호간의 만족’을 위해 결혼한 데카메론의 인물 아라티엘을 다
루고 있다는 점은 로제티의 대담한 면모를 확인하게 한다. 로제티의 성적 대담
성이 “역겨운 성”161), 혹은 부케넌의 표현대로 “동물적”이라고 몰이해 된것
은 당대 시대적으로 당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인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에 대한 사회적 터부가 이처럼 확장되어 있는 가운데,
부케넌의 반대편에는 로제티를 중심으로 ‘제 2기 라파엘 전파’라고 부르는 윌리
엄 모리스, 스윈번, 윌리엄 로제티 등의 인물들이 있었다. 특히 앞서 살펴본 유
미주의 비평가들이 로제티의 회화적 입장을 로제티 자신보다 더 적극적으로 피
력했음에서 불구하고 부케넌의 유미주의, 성적 묘사에 대한 비난은 1880년대 들
어서야 옹호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부케넌은 자신의 소설을 로제티에게 헌정
하고, 1887년 저작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에 대한 노트”(A Note on Dante

159) John S. Haller and Robin M. Haller, The Physician and Sexuality in Victorian
America (New York: WW Norton & Co, 1977), p. 196 (Robin Sheets, “Pornography and
Art: The Case of Jenny,” Critical Inquiry(1988), XIV, p. 325에서 재인용)
160) Ibid., p. 325.
161) ed. Tim Barringer and Jason Rosenfield (Tim Barringer), op. cit., p. 15에서 재인
용)

58
Rossetti)에서는 완전히 로제티의 입장에 동조함을 시사했다.162)
캐시디는 부케넌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로제티의 정신적, 육체적 병세
가 악화된 것에 대해 부케넌이 죄책감을 느꼈고 부케넌 자신이 부인의 임박한
죽음 앞에서 로제티와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163) 그러나 부케넌의
입장 변화는 사적으로만 해석할 만한 것은 아니다. 당대 졸라(Émile Zola), 입센
(Henrik Ibsen) 등의 유럽 문학을 통해 확장된 성에 대한 논의는 보수적인 영국
지식인들 사이에도 확장되었기 때문이었다. 부케넌 역시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87년 “육체적 사랑을 포함한 모든 사랑이 인간
최상의 기쁨”이라 밝히며 로제티의 입장에 동조하게 된다.164)
최근 학자들도 로제티에 대한 부케넌의 보수적 비평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
인 입장을 취하고 로제티의 예술이 가진 선구적 특성에 주목하고 있다. 실리아
마식(Celia Marshik)은 로제티와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비평가, 작가, 화가 집단
이 모더니즘 태동에 있어 특권적 위치에 자리한다고 주장했다.165) 또한 그는
『영국 모더니즘과 검열』에서 로제티의 시를 다루면서, 로제티를 당대 검열의
위협을 받은 ‘모더니즘의 선구자’라고 칭했다.166)
엘리자베스 프렛존 또한 로제티의 시 “축복받은 소녀”(The Blessed Damozel)
에 대한 부케넌의 비평을 문제 삼았다. 부케넌은 이 시가 엘리자베스 시덜의 죽
음을 경험한 후에 나온 작가의 전기적 사실과 관련된 것이라는 전제 하에 비평
했다. 하지만 “축복받은 소녀”는 로제티가 시덜을 만나기도 전에 습작하기 시작
한 작품 이었다.167) 이처럼 로제티에 대한 부케넌의 비판은 로제티의 전기적 사
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쓰인 사적 삶에 대한 비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아가
프렛존은 부케넌을 비롯한 비평가들이 ‘육체’를 너무 편협하게 보고 있다고 비

162) John A. Cassidy, op. cit., p. 90.


163) Ibid., p. 88.
164) Ibid., p. 90.
165) Celia Marshik, British Modernism and Censorship (Cambridge: Cambridge UP,
2006), p. 14.
166) Ibid., p. 4.
167) Elizabeth Prettejohn, Art for Art’s Sake: Aestheticism in Victorian Painting, op.
cit., p. 202.

59
판했다. 그는 육체란 ‘속세에서 인간의 경험을 정의하는 특징’이며, 로제티의
예술세계에서 성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적 경험의 통로라고 분석했
다.168) 이러한 주장은 로제티가 악기나 음악에 취해 있는 여성을 재현하며, 다양
한 붓터치를 통해 다양한 촉각을 묘사하며, 감각적 색채를 활용함으로써 인간의
감각을 상기시키려 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의미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성애, 육체, 감각에 대한 편협한 사고가 점철되어 있었던 19세기 중후반, 로
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회화를 통해 시대
적 도덕관을 전달하지 않았으며 형식과 색채에 있어서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
지도 않았다. 그의 베네치아 양식은 사회적인 예술적 검열이 확대된 가운데, 끊
임없이 인간의 감춰진 감각과 본능을 탐구한 기록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더불
어 이에 대한 당대 베네치아 양식에 대한 비평 공방은 영국 미술에 있어 러스
킨의 도덕적인 미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론을 공론화시킨 발판을 마련해 주었
다고 할 수 있다.

168) Ibid., p. 220-221.

60
Ⅵ.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과 미술시장

Ⅳ장 ‘빅토리아 시대에 부흥한 베네치아 미술’에서 살펴보았듯이 19세기


영국에서 베네치아 미술은 대중들에게 친숙한 이미지였다. 특히 네셔널 갤러리
가 이탈리아에 값비싼 돈을 치르고 사온 베네치아 미술은 대중들에게 해상무역
의 제국으로서 떠오른 당대 영국의 위상을 상기시켰다. 국가적으로 르네상스 베
네치아 미술에 대한 관심이 부상한 가운데, 소수의 신흥 부르주아 후원자들은
16세기 베네치아 미술에 머무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르네상스 베네
치아 미술을 통해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양식의 베네치아 미술
을 후원함으로써 혁신성을 발휘했다.
Ⅵ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평계에서 인간의 욕구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는 이유로 혹평을 받은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에 대한 비평계의 비난과 로제
티의 후원자들 사이의 온도차는 극명하다. 아서 휴즈(Arthur Hughes)는 <키스한
입술>의 최초 구매자 조지 프라이스 보이스(George Price Boyce)가 “저 예쁜 것
에 입이 닳도록 키스할 것”169)이라고 기록한 바 있다. 또한 로제티의 후원자 조
지 레이(George Rae)는 <연인>[도판 19]을 볼 때마다 “아름다움의 전기적 충
격”(electric shock of beauty)을 받는다고 토로한 바 있다.170) 이처럼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은 그의 후원자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이미지였다. 이는 앞서
살펴 본 미술 언론매체의 반응과는 차이가 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장
에서는 19세기 중후반 영국의 경제적 성장과 더불어 성장한 미술시장을 분석해

169) John Vicoll, Dante Gabriel Rossetti (London: Studio Vista, 1975), p. 125 (ed.
Michaela Giebelhausen and Tim Barringer (David Peters Corbett), op. cit., p. 95에서 재
인용).
170) Rae to Rossetti, 5 March 1866,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Dianee Sachko
Macleod, Art and the Victorian Middle Class: Money and the making of cultural identity
(Cambridge: Cambridge Press, 1996), p. 282에서 재인용).

61
보고,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과 신흥 후원자들의 취향과의 상관관계를 살펴 보
고자 한다.

1. 사회 경제적 배경

많은 역사학자들이 1851년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열린 만국박람회(The


Great Exhibition)를 영국 경제 부흥의 상징으로 꼽는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사
브릭스(Asa Briggs)도 1851년부터 1867년까지를 ‘빅토리아 시대의 전성기’라 칭
하고, 이 특별한 시대에 독특한 문명사회가 만들어 졌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
고’(thought), ‘노동’(Work), ‘발달’(progress)을 이 시대의 세 가지 특징으로 지적
했다.171) 그는 또한 국가 분위기에 영향을 준 요인으로 다섯 가지를 언급하는데,
그 중 그가 밝힌 가장 중요한 두 요소는 ‘직접적인 부의 영향’이고, 두 번째는
‘국가 안전감’이다.172) 브릭스에 의하면 이 특정시기 농부와 노동자, 사업가들이
부를 분배했고,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이 인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음식에 대한
세금이 삭감되었다. 더불어 그는 국가적 안전망이 영국 의회의 권한을 신뢰하도
록 부추겼다고 주장했다.
만국박람회를 전후로 한 영국 경제의 성장은 이처럼 긍정적으로 평가되지
만, 브릭스는 영국 호황기 뒤편에 가려진 어두운 면을 보여주면서 이 시기에 대
한 평가가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지적한다.173) 동인도회사에 대항한 인도의 세포
이 항쟁은 1857년에부터 3년간 지속되어 영국 정부를 위협했으며, 수정궁으로
인해 들떠있던 도시의 산업 지역사회와 시골 농촌사회의 격차가 상당했다는 것
이다. 이처럼 이 논문에서 다루는 1860년대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

171) Asa Briggs, Victorian People: A reassessment of persons & themes 1851-1867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5), p. 1.
172) 브릭스는 이 외에도 “기관에 대한 신뢰”(trust in institutions), “공통된 도덕률에 대
한 신뢰”(belief in a common moral code), “언론의 자유에 대한 신뢰”(belief in free
discussion)을 언급했다. Briggs, op. cit., p. 3-4.
173) Ibid., p. 5.

62
지만 적어도 도시 부르주아들이 주체가 된 미술시장에서 만큼은 브릭스가 언급
한 “직접적인 부의 영향”이 그 힘을 과시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같은 맥락에서 에이미 우드슨 불턴(Amy Woodson-Boulton)은 1830년대와
1840년대 중산층 후원자들이 미술시장에 들어왔고, 그들이 새로운 “시각 경
제”(visual economy)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174) 한편 질레트와 호펜은 자본가들
이 영국미술에 영향을 미친 ‘경제적 전성기’는 1850년부터 1880년대에 해당한다
고 밝혔다.175) 정리하면 1830년대에서 1840년대 미술시장에서 중산층 후원자들
의 역할이 점점 커지면서 19세기 중후반에는 미술시장의 전성기가 도래한 것이
다. 이런 점에서 로제티를 비롯한 라파엘전파 화가들은 미술시장이 급성장한 시
기에 활동하는 행운을 누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19세기 중반은 귀족계급이나 신사계급에게만 독점되었던 미술이 절
대 다수의 대중에게 확대된 시기였다. L. V. 필즈(Fildes)는 이에 대해 빅토리아
시대의 두 가지 핵심적인 특징을 지적한다. 첫째는 화가들과 대중간의 관계가
긴밀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미술이 보다 넓은 범위의 사회계층에게 확장되었다
는 것이다.176) 실제로 빅토리아 시대 중간계급은 전시회, 신문, 삽화 책을 통해
미술을 접할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엘리트 집단에게 전시회는 사교모임에서 빠
질 수 없는 행사이기도 했다.177) 그러나 필즈는 대중이 이례적으로 미술에 관여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예술과 도덕의 관계가 밀접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밝힌다.
같은 맥락에서 파올라 질레트(Paola Gillett) 또한 1850년대와 60년대 화가들
이 ‘개인적 영감’보다는 ‘공통된 목적’(common ideas)과 ‘이상’(ideals)을 추구했다
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미술이 보다 넓은 범위의 사회계층에게 확장되

174) Amy Woodson-Boulton, op. cit., p. 10.


175) 질레트는 1880년대 후반부터 1890년대를 ‘(미술품의) 고가의 시대가 명백히 끝난’
시대라고 본다. Paola Gillet, Worlds of Art: Painters in Victorian Society (New Jersey:
Rutgers University Press, 1990), p. 17. 또한 호펜은 ‘성공한 빅토리아조 화가들의 경제
적 전성기는 1850년대에서 1880년대까지 지속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K. Theodore
Hoppen, The Mid-Victorian Generation 1846-1886 (Oxford: Clarendon Press, 1998), p.
404)
176) ed. Tim Barringer, Pre-Raphaelites: Victorian Avant-Garde. op. cit., p. 156.
177) Paula Gillett, op. cit., p. 192.

63
면서 미술과 도덕이 필연적인 상관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
한다.178) 그러나 로제티의 미술은 사회적 이상보다는 개인적 영감에 몰입하고
있기에 주목할만하다.
특히 로제티의 <키스한 입술>은 엘리자베스 프렛존의 주장과 같이 기존 회
화의 ‘관습적 도덕성’으로부터 미적 자립을 선언한 작품이다.179) 이처럼 1860년
대 이후 그려진 로제티의 작품들은 도덕, 윤리적 가치를 설파하거나 영국의 눈
부신 산업 발전을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인간의 성과 아름다움을 구현하
며, 후기로 갈수록 꿈, 인간의 정신성과 상상의 세계를 재현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특징들이 로제티가 자신의 시대를 앞서 상징주의와 유미주
의와 맥을 같이 할 수 있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로제티가 이처럼 당대 화가들의 공통된 이상에서 벗어나 ‘개인적 영감’을
더욱 깊이 탐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대중, 혹은 미술 언론매체가 아닌 소수
의 부르주아 후원자들과 관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새롭게 성장한 자
본가들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미술품이 ‘사치품’으로 인식될 수 있게 하면서 미
술시장에 탄력을 불러 일으켰다.180) 파올라 질레트는 여기에 덧붙여 특히 이 시
대 영국 미술시장에서 자본가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를 지적 하였
다. 프랑스에서는 교회나 국가에서 미술품을 주문하는 경우가 꾸준히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교회나 국가가 회화를 주문하는 경우는 드물었다는 것이다.181) 이런
점에서 이 시기 영국 화가들에게 있어서 후원자들은 절대적인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178) Ibid., p. 17.


179) ed. Michaela Giebelhausen and Tim Barringer (David Peters Corbett), op. cit., p.
92.
180) 매튜 플램핀은 라파엘전파 그룹이 활동하던 시기는 회화가 사치품으로 인식되었던
시대라고 주장했다. ed. Michaela Gibebelhausen and Tim Barringer (Matthew Plampin),
op. cit., p. 193.
181) Paola Gillett, op. cit., p. 4.

64
2. 상업 갤러리의 성장

확장된 미술 구매자들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19세기 중반에는 많은 상


업 갤러리들이 생겨났다. 19세기 중반까지 영국에서 로열 아카데미는 그림을 공
적으로 전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다. 그러나 몇몇 상업 갤러리가 생
기면서 화가들은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난 화풍을 미술계에 선보일 수 있게 되었
다. 로제티는 상업 갤러리를 발 빠르게 이용해, 그의 첫 작품 <성모의 소녀시
절>(1849)을 로열 아카데미가 아닌 상업 갤러리 ‘현대 예술 자유전’(Free
Exhibition of Modern Art)에서 열린 전시에 출품했다. 이는 밀레이와 헌트를 비
롯한 다른 라파엘전파 화가들이 자신의 처녀작을 아카데미에 보내고 1850년대
후반부터 상업 갤러리를 활용하기 시작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자유전은 당대 화가들과 비평가들 사이에서 로열 아카데미보다 못한 ‘2류
장소’(second-tier venue)라고 여겨졌다. 그럼에도 로제티가 아카데미가 아닌
자유전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작품을 위한 보다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 아카데미가 작품 사이의 간격을 빼곡하게 전시한
것에 반해, 상업 갤러리는 보다 여유로운 공간 확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를 찾자면 그가 기존의 미술문화를 주도하던 기득권 세력에서 벗어난
미술시장에서 새로운 후원자를 찾으려 했던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다.
상업 갤러리가 활성화되자, 로제티를 비롯한 라파엘전파의 몇몇 화가들은
1857년과 1859년 각각 러셀 플레이스(Russell Place)와 호가스 클럽(Hogarth
Club)이라는 상업 갤러리를 만들었다. 먼저 러셀 플레이스는 매독스 브라운과
존 애버릿 밀레이, 로제티가 주도한 갤러리였다.182) 이 갤러리는 작가들의 주도
아래 설립되고, 전시된 특이한 형태의 초기 상업 갤러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로제티는 윌리엄 마이클 로제티의 주도 아래 아트 딜러 감바르트(Ernest

182) Elizabeth Prettjohn, The Art of the Pre-Raphaelites, op. cit., 119.

65
Gambart)와 함께 미국에서도 전시를 진행했다. 이러한 미술시장에서 혁신적인
시도를 통해 라파엘전파는 1860년경에는 많은 사적 후원자를 갖게 되었다. 그리
고 라파엘전파의 창립자들인 밀레이와 브라운, 그리고 로제티는 각각 다른 방식
으로 미술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부상할 수 있었다.183)
한편 러셀 플레이스와 호가스 클럽은 조금은 배타적인 전시 공간이었다.
러셀 플레이스는 초대권이 있어야 입장이 가능했고, 호가스 클럽은 회원권이 있
어야 입장할 수 있었다.184) 라파엘전파 회원들이 이처럼 ‘대중’보다는 ‘선택된
소수’에게만 자신의 작품을 공개한 것은 아주 경제적인 전략이었다. 플램핀은
이 두 전시장의 목적이 ‘통제된 환경’에서 새로운 고객들을 화가들에게 소개
시키기 위함이었다고 밝힌다.185) 이 같은 선택은 시끌벅적하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뒤섞인 곳에서 대중을 공략하기 보다는, 쾌적한 환경에서 선택된 소수만
을 공략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는 많은 미술계의 유명인사들에게 로제티의
확립된 미술세계를 각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호가스 클럽에서의 전시 이후
로제티는 공적인 작품 공개 없이 사적인 거래만으로도 작품 생활을 할 수 있는
밑바탕을 마련하게 된다. 실제로 1861년 로스(J. Anderson Rose), 존 마샬(John
Marshall), 길램(Major Gillam) 등 호가스 클럽의 회원들이 로제티 작품의 구매자
가 되었다.186)187)

183) 존 에버릿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는 초기에 라파엘전파에서 두각을 보인 유


망주였으나 그룹이 해체된 이후에는 로열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으며, 윌리엄 홀먼 헌
트(William Holman Hunt)는 아카데미를 거부하고 사적 갤러리를 만들어 그의 종교화를
전시했고 후에는 그로스브너 갤러리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ed. Susan P. Casteras and
Colleen Denney (Colleen Denney), The Grosvenor Gallery: A Palace of Art in Victorian
England (London: Yale UP, 1996), p. 13.
184) ed. Michaela Gibebelhausen and Tim Barringer (Matthew Plampin), op. cit., p. 201.
185) Ibid., p. 201.
186) J. B. Bullen, Rossetti: Painter & Poet op. cit., p. 144.
187)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호가스 클럽에서의 전시가 이 전시에 참여한 모든
화가들에게 필연적으로 지속적인 후원자 창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브라운
(Ford Madox Brown)의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The Last of England, 1855)은 고작 5파
운드에 팔렸지만 1865년 작 <노동>(Work)은 1320 파운드에 팔렸다. 이는 브라운이 사적
갤러리를 통해 스스로를 홍보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효과를 알 수 있게 하지만, 그의
작품은 지속적으로 구매자의 구미를 끌어당기지는 못했다. 호펜(K. Theodore Hoppen)에

66
3. 로제티의 작품판매 방식

그렇다면 1860년 이후로 공적 전시를 거의 하지 않았던 로제티가 어떻게 자


신의 그림을 고객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로제티의
작품 판매 방식에 있어 러셀 플레이스나 호가스 클럽의 선택된 소수를 위한 갤
러리 형식은 1860-70년대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장소는 다름 아닌 로제티 자신
의 집이었다. 로제티는 1862년 채텀 플레이스(Chatham Place)에서 튜더 하우스
(Tudor House)로 이사했다. 이 두 장소 모두 로제티가 잠재적인 후원지 혹은 구
매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이에 대해 윌리엄 로제티는 채텀 플레이스
는 예술가들과 구매자들로 붐볐으며, 그 공간에서 “미술이 생산되었을 뿐만 아
니라 팔렸다”고 기록한 바 있다.188)
로제티는 이외에도 아트 딜러나 중개상을 적극 활용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
로 후원자를 물색했다. 그 예로 1860년대에는 아트 딜러 어니스트 감바르트
(Ernest Garmbart), 1870년대 초반에는 중개상 찰스 어거스터스 호웰(Charles
Augustus Howell)을 들 수 있다. 특히 호웰은 1870년부터 1873년까지 판매가의
10퍼센트를 수수료로 받고 68점의 작품을 중개했다.189) 로제티의 작품가격은 50
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상승하여, 1877년 <아스타르테 시리아카>가 2100 파운드
에 팔리기에 이른다.190) 로제티의 최고 연 소득은 3,725 파운드 정도였는데,191)
이는 <부록 3>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소득층 제 1등급, 즉 상위 0.4%에 해당한
다. 결국 그가 발 빠르게 성장하는 미술시장에 적응했기 때문에 자수성가한 화

의하면, 브라운의 일기에 어떻게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고 1870년 맨체스터 시청에 벽화를 의뢰받을 때까지 그의 재정상태는 빈곤했다. K.
Theodore Hoppen, op. cit., p. 407. 이와같은 사실은 로제티의 미학과 신흥 부르주아 계
급과의 상관관계를 더욱 명확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188) ed. Michaela Gibebelhausen and Tim Barringer (Matthew Plampin), op. cit., p. 206.
189) Alicia Craig Faxon, op. cit., p. 160.
190)ed. Tim Barringer (Alison Smith), op. cit., p. 216.
191)Alicia Craig Faxon, op. cit., p. 73.

67
가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적 후원자를 확보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예술가의 자유를 보장
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제티는 작품 완성 후 구매자를 찾는 경우도 있었지만
18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주문을 받은 후 그림 제작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
졌다. 로제티는 작품의 사이즈, 매체, 인물의 수, 주제에 따라 가격을 조정했으
며, 주문자의 요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192) 예를 들어 레이렌드는 단일
인물과 악기가 배치된 그림을 선호했는데, 이는 <베로니카 베로네제>, <푸른 내
실>등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로제티의 내심은 “그들(후원자)은 특별한 것을 원하
는 특별한 사람들이지. 그런데 그들은 한정된 취향으로부터 결코 일탈하지 않
아”라고 쓴 1871년 편지에 드러나 있다.193) 그럼에도 로제티는 그의 작품의 주
제를 후원자들에게 먼저 제시하기도 했으며, 스스로의 생각과 이상을 그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194) 이런 점에서 로제티의 작품은 로제티의 이상과
구매자들의 취향이 함께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화가들에 비해 로제티가 복제화를 종종 제작한 것도 주문자의 요구
때문이었다. 로제티는 작품의 공적 공개를 꺼렸을 뿐 아니라 판화로 복사본을
만드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195) 이는 로제티의 많은 주문자가 종종 복제화를
요청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로제티의 주 고객이었던 윌리엄 그레이엄(William
Graham)은 <아름다운 베아트리스>(Beata Beatrix)[도판 17]를 보고 “그 작품을
본 첫날 내가 본 어떤 그림보다 나의 감정을 자극했고 그 그림에 대한 사랑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고 고백하며 로제티에게 복제화를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
다.196) 로제티는 복제화를 제작하는 것도 매우 싫어했으나 고객 관리를 위해 이

192) Alicia Craig Faxon, op. cit., p. 166.


193) Oswald Doughty and John Robert Wahl, Letters of Dante Gabriel Rossetti (Oxford:
Clarendon press, 1965-67), Vol. Ⅲ, p. 929 (Alicia Craig Faxon, op. cit., p. 167에서 재인
용)
194) Alicia Craig Faxon, op. cit., p. 165.
195) Ibid., p. 167.
196) 윌리엄 그레이엄은 1871년 1월 12일 편지에서 이와같이 고백한다. “I know that
the labour of repeating, apart from the delight of invention and the surprise of
discovery, is especially hard to your temperament. . . . (However,) the Beatrice, from
the first day I saw it, has appealed to my feeling altogether above and beyond any

68
와 같은 청을 거절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제티의 모든 작품이 얼마에 거래되었는지 알기는 쉽지 않으나 <푸른 내
실>(1865)이 로제티의 또 다른 컬렉터였던 감바르트에게 210 파운드(현재 14,000
파운드 정도)에 팔렸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197) 그리고 로제티의 열렬한 후
원자였던 레이렌드는 이보다 더 많은 금액을 지불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
다. 또한 1870년대에는 로제티의 그림의 가치가 상승해 <시리아의 에스타르테>
가 2만 천 파운드에 팔렸다. 이를 통해 그의 작품의 가격이 10년 동안 100배 정
도 올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미술이 신흥계급 사이에서
유명세를 탔다는 것과, 당시 로제티의 회화가 사적 거래를 통해 상당히 활발하
게 유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후원자들은 로제티의 그림의 가격을 상승시키기도 했는데, 1874년 로제티가
레이렌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작은 <루크레지아>를 당신의 이름으로 보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괜찮으시다면 경매인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최저 경매가격 100파운드에
전달하겠습니다. 제가 21살에 그렸던 진기한 초기작이 크리스티를 통해
에그뉴에게 400 파운드 정도에 팔렸습니다 ... 198)

이 편지는 로제티 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루크레지아 보르지아>(Lucrezia


Borgia, 1860)[도판 37]를 레이렌드의 이름으로 크리스티에 넘기는 과정을 보여
준다. 편지에서 드러나듯이 로제티는 이전 소장자에 따라 경매값이 유동하는 당

picture I ever saw, and the love for it has only deepened. . . .”(Doughty Oswald and
John Robert Wahl, Letters of Dante Gabriel Rossetti (Oxford: Clarendon Press), Vol. Ⅲ,
p. 969.)

198)“...would you mind sending in as yours that little Lucrezia...? If so, I


could forward it in your name to the Auctioneers, putting a reserved price of 100
pounds. An early – very early - & very quaint thing of mine, painted at 21, was
bought by Agnew the other day at Christie’s for nearly 400 pounds ....” D. G. Rossetti
to F. Leyland, 31 May 1874, ed. William E. Fredeman, op. cit., Vol. 6, p. 468.

69
시 미술시장의 생리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루크레지아 보
르지아>는 로제티의 또 다른 후원자 조지 레이에게 상승된 가격에 팔렸다.199)
이 외에도 <푸른 내실>은 윌리엄 에그뉴에게, 그리고 1866년에는 섬유 사업가
사뮤엘 멘델(Samuel Mendel)에게 상승된 가격에 팔렸다.200) 이처럼 로제티의 후
원자들은 로제티의 그림 가격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도 해 주었던 것이
다.

4. 신흥 부르주아 후원자들의 취향

“한 수집가의 각각의 선택이 점차적으로 새로운 미술시장과 새로운 시각 언


어를 창조한다”는 우드슨 불턴의 주장대로 로제티의 미술은 신흥 부르주아 후
원자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201) 그러나 로제티의 한정된 후원자들은 대다수의
중간계급 후원자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페트리샤 풀햄(Patricia Pulham)은 미술생
산에 있어서 중간계급의 영향력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미술에 대한 감식안
이 부족했던 중간계급 미술애호가들은 주로 민족적이고, 도덕적이며, 종교적 내
용을 가진 그림에 영향을 받고, 주문했다.202) 나아가 그들은 하층계급을 겨냥한
전시회를 지원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회화를 당대의 국가적 가치관을 전
달할 도구로서 인식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그들은 미술을 상당히 표면적으
로 인지했고, 일화적이고 도덕적인 그림들을 대중화시키는 것에 기여 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로제티의 후원자들은 대부분 거부로 성장한 신흥 부르주아 후원자들
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정한 소수의 후원자가 로제티의 그림을

199) http://www.rossettiarchive.org/docs/s124.raw.html, 2015. 4. 23. 3:36 PM.


200)Tim Barringer, Pre-Raphaelites: Victorian Avant-Garde, op. cit., p. 168
201) “Many individual choices by single collectors gradually created a new art market
and a new visual language.” Amy Woodson-Boulton, op. cit., p. 11.
202)ed. Chris Williams (Patricia Pulham), A Companion to Nineteenth-Century Britain
(Oxford: Blackwell Publishing, 2006), p. 450.

70
꾸준히 주문했다. 로제티의 후원자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리버풀 지역의 선박
거물 레이렌드, 와인 상이자 직물 제조업자였던 윌리엄 그레이엄, 제임스 리어
서트, 은행가 조지 레이 등을 들 수 있다.203) 특히 다른 컬렉터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로제티의 작품들을 모았던 레이렌드는 로제티와 솔직하게 의견
을 나누었으며, 로제티가 제시하는 만큼의 작품 값을 지불하고 돈을 빌려주기도
했을 만큼 각별한 사이를 유지했다.204)205) 이 절에서는 특히 로제티의 대표적
후원자들을 중심으로 로제티 미술과 후원자들 사이의 연관성을 분석한다.
로제티의 대표적 후원자 레이렌드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로 존 비비
(John Bibby)와 선스 앤 컴퍼니(Sons & Company)에서 견습생으로 시작해 회사
의 동업자(partner) 자리까지 올랐다. 그리고 1873년에 레이렌드 해운회사
(Leyland Shipping Line)를 세운 거부였다. 레이렌드를 비롯한 당시 거부들은 베
네치아 회화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Ⅳ-2절 ‘해상 제국으로서
의 멘탈리티’에서 살펴 본 것처럼 상인계급이 사회 지도세력으로 떠오른 베네치
아 공화국에 대한 환상도 일정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레이렌드는 아트 딜러 머레이 마크스(Murray Marks)에게 자신의 집 프
린스 게이트(Prince’s Gate)를 장식하는 일을 전담시켰다. 메크리오드에 의하면
마크스는 고객들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재주가 있었다. 마크스는 레이렌드의 집
또한 “베네치아 상인의 집”의 분위기를 내어서 레이렌드를 만족시켰다.206) [도판
36]은 1892년의 레이렌드의 응접실로, 이곳에 전시된 로제티의 그림은 모두
1860-80년대에 제작된 작품들이다. 이는 로제티 작품의 사적 거래와 화풍 사이
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레이렌드는 보티첼리(Botticelli), 필리포 리피

203) 윌리엄 마이클 로제티는 로제티의 후원자를 다음과 같이 나열 한 바 있다. “James


Leathar, ... George Rae, Frederick R. Leyland, William Graham, and Leonard R. Valpy,
and in a minor degree James Anderson Rose, George Clabburn, and Lord
Mount-Temple ... Messrs Clarence Fry, Constantine Ionides, and William A. Turner.”
William Michael Rossetti, Some Reminiscences 2 (London: Brown Langham, 1906), pp.
340-1. (Patricia de Montfort, op. cit., p. 260에서 재인용.)
204) Tim Barringer, Reading the Pre-Raphaelites, op. cit., p. 166.
205) ed. Pamela Fletcher & Anne Helmreich(Patricia de Montfort), op. cit., p. 260.
206) Dianee Sachko Macleod, op. cit., p. 313.

71
(Filipo Lippi), 크리벨리(Criveli)를 비롯해 베네치아 화가인 틴토레토, 조르지오네
등의 거장들의 그림을 소장했다.207) 특히 레이렌드와 리어서트는 베네치아 화가
들과 로제티의 그림을 나란히 걸어 두는 것을 즐겼다.208) 이같은 사실은 후원자
들이 로제티의 베네치아 회화적 특성을 선호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로제티의 ‘한정된 후원자들’의 취향은 상류계급 미술 구매자들과도 구별된
다. 앞장에서 언급한 이른바 ‘유미주의 비평가들’ 중 한 사람이었던 스티븐스
(Frederic George Stephens)는 상류계급의 미술 구매자들이 “피에트로 페루지노
(Pietro Perugino)를 칭찬하고, 터너(Turner)를 무시했으며, 윌슨(Wilson)을 굶게
내버려 두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209) 상류층에 속한 미술 애호가들이 19세기
중후반 당대 미술가들을 외면하고 르네상스 거장들의 회화를 구매하는 것에 주
목한 것이다. 또한 당대 기록에서 몇몇 귀족들이 19세기 화가들에게 16세기 베
네치아 회화의 모작을 주문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210) 일반화할 수는 없지
만 상류 계급 미술 후원자들은 새로운 미술을 후원하기 보다는 16세기 르네상
스 미술에 머물러 있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스티븐스가 ‘대상인’(merchant prince)라 언급한 거부로 성장한 신흥 부
르주아 후원자들은 일반적인 중간계급의 후원자들과도, 상류 계급의 구매자들과
도 구별되는 취향을 드러낸다. 스티븐스에 의하면 이들은 터너, 윌리엄 헌트
(William Hunt), 홀먼 헌트(Holman Hunt), 그리고 로제티의 그림을 구매하고 당
대 영국 화가들을 후원함으로써 미술시장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211)
호펜(Theodore Hoppen)은 로제티를 비롯한 라파엘전파 회원들과 사업가들간의
상관관계를 지적한 바 있다. 그는 당대 자수성가한 후원자들의 혁신성이 “기존

207) Alicia Craig Faxon, op. cit., p. 167.


208) Ibid., 167.
209) Frederic George Stephens, “English Painters of the Present Day. ⅩⅩⅠ. William
Holman Hunt”, The Portfolio (March 1871), p. 38 (Dianne Sachko MacLeod,
“Mid-Victorian Patronage of the Arts: F. G. Stephens’s ‘The Private Collection of
England.’” The Burlington Magazine 128 (Aug 1986), p. 598에서 재인용)
210) 로제티가 1864년 레쉬버튼 귀족부인(Lady Ashburton)에게 보낸 편지에서 레쉬버튼
귀족 부인이 알퐁스 르그로(Alphonse Legros)에게 조르지오네와 티치아노 그림을 모작할
것을 주문한 것이 확인된다. Ed. William E. Fredeman, op. cit., Vol. Ⅲ, p. 189.
211) Frederic George Stephens, op. cit., p. 38.

72
의 찌꺼기를 걷어내고 보다 흥미로운 소재들로 대체하기를” 갈망하게 했다고
설파했다.212) 이런 맥락에서 레이렌드가 당대의 미술적 관습에서 벗어나 있던
로제티와 휘슬러 등의 현대 작가를 선호했다는 점은 납득할만한 사실이다. 투자
의 관점에서 현대 작가의 작품을 구매하는 것은 기존의 명작이라고 밝혀진 이
전의 회화를 구매하는 것보다 위험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멕로드가 밝힌 바 있
듯이, 혁신적인 선택에 익숙한 후원가들은 “미술시장에서의 실패를 인정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던”것이다.213)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일반적인 경향이 있다. 로제티의 후원자들의 취향과
베네치아적 회화와의 상관관계는 후원자들이 로제티의 회화를 ‘어디에’ 두었는
지를 인지할 때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메크리오드는 로제티의 후원자들이 로
제티의 ‘성적 여성의 상반신 회화’를 그들의 ‘사적 공간’(sanctum)에 두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조지 레이가 로제티의 그림 21점을 전통적인 풍경화 콜렉션과
분리해서 전시해 둔 것에 주목했다.214) 레이렌드가 자신의 응접실을 로제티의
그림으로 장식하면서 스스로를 당대의 베네치아 상인과 같은 면모를 공공연히
과시한 반면 조지 레이와 같은 후원자는 보다 은밀한 곳에 로제티의 회화를 두
었던 것이다. 멕크리오드는 이러한 로제티의 그림들로 장식된 ‘완벽한 인테리어’
가 고단한 사업가들에게 위안을 주었고, 동시에 그들을 유쾌하고 만족스러운 세
계로 이끌었다고 지적한다.215)
다시 말해 로제티의 회화가 르네상스 베네치아 회화를 상기시키면서, 후원
자들의 피난처로서의 공간을 완성시켜주는 장식적 효과를 지녔기에 후원자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이는 로제티가 1866년 9월 그의 후원자 존 미첼(John Mitchell)
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212) K. Theodore Hoppen, op. cit., p. 411.


213) Dianee Sachko MacLeod, “Mid-Victorian Patronage of the Arts: F. G. Stephens’s
‘The Private Collection of England,” op. cit., p. 601.
214) Dianee Sachko Macleod, Art and the Victorian Middle Class: Money and the
making of cultural identity, op. cit., p. 282.
215) Ibid., p. 284.

73
저는 제가 그린 어떤 그림 보다 방을 장식하는 데 가장 효과적일 것
이라고 믿는 그림을 거의 완성하였습니다. <허영심 있는 여성>[도판 24]
은 화려한 흰색과 금색 드레스를 입은 베네치아 여인을 재현하고 있습
니다. 간단히 말해 여성의 아름다움에 있어서 베네치아적 이상(ideal)인
것이죠.216)

이는 Ⅳ-2장 에서 살펴 본 것처럼, 로제티가 베네치아 화가들의 섬세하고 화려


한 물질적 표현을 차용하고, 이를 기법적으로 강화시킨 것과 연관된다. 로제티
는 환상성을 강화시키는 소품과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신흥 부르주아의 취향을
만족시켰던 것이다.
나아가 로제티의 육감적이고 성적인 여성들의 상반신 회화는 후원자들의
은밀한 감성을 건드렸다. 비평계에서 비판을 받았던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은
르네상스 베네치아 미술을 상기시키면서도 성적 표현에 있어서는 더 노골적이
었다. 로제티의 후원자 윌리엄 그레이엄이 자신이 주문한 누드화를 집안으로 들
여 올 때, 그의 아내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림의 제목을 ‘세례자 요한’으로 바꿨
다.217) 이 사실은 사적으로 주문한 그림이 후원자들의 내적이고 은밀한 욕구를
만족시켜 주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게 한다. 16세기 베네치아 회화와 구별되
는 로제티의 ‘선구적’ 베네치아 양식을 후원자들이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로제티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현대적 의미의 성을 그들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남아 있는 기록이 부족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외부 현실세계
의 도덕성과 관습성에서 벗어나, 은밀한 밀실을 연상시키는 로제티의 그림들이
소수의 후원자들의 욕구를 만족 시켰다는 사실이다.

216) ‘I have a picture close on completion – one of my best I believe, and probably
the most effective as a room decoration which I have ever painted. It is called Venus
Vaneta, and represents a Venetian lady in a rich dress of white and gold – in short
the Venetian ideal of female bauty’. Ed. William E. Fredeman, op. cit., Vol. Ⅲ, p. 472.
217) Frances Horner, in Times Remembered, p. 6. (Dianee Sachko Macleod, Art and
the Victorian Middle Class: Money and the making of cultural identity op. cit., p. 281에
서 재인용)

74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에 나타난 성적인 요소를 떠나서, 로제티의 후원자
들의 취향은 유미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그들의 취향은 꽤나 까다로워서, 로제
티에게 작품 수정을 아주 직접적으로 주문하기도 했다. 주문자들의 수정사항은
대부분 주제적 문제가 아니라 인물의 목이 얇아야 한다거나, 고양이를 추가하라
는 등의 ‘미적’ 요소에 치중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218)219) 특히 후원자 제임스
리어서트(James Leathart)는 <트리스트럼과 아름다운 이솔데>(Sir Tristram and
La Belle Iseult, 1867)에 대해 자신의 기대에 맞지 않는 다는 이유로 구매하기를
거절했고 이에 로제티는 리어서트의 주문에 맞게 그림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
다.220) 특히 리어서트는 자신이 각각의 미술가들의 ‘최고작’을 구매하는 것을 자
랑으로 여겼다.221) 이처럼 로제티의 후원자들이 자신의 미술적 안목과 취향에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이같은 사실은 로제티의 후원자들이 왜 특별히 개인적으로 화가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후원자의 역할을 자처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미술시장에서
‘완성된’ 그림을 보고 사기 보다는 화가 개개인의 미술을 후원함으로써 자신들
의 취향을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처럼 대중에게는 홀대받
은 로제티를 후원했던 소수의 부르주아들은 당대 영국 미술시장에서 사적이고
은밀한 통로를 만들었고, 이같은 ‘틈새시장’이 영국미술에 미친 영향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로제티를 기점으로 형성된 은밀한 미술시장은 로제티의 제자이자, ‘제 2세

218) 리어서트는 <트리스트럼과 아름다운 이졸데>에서 트리스트럼의 목이 얇아야 하며,


머리 숱도 줄여달라고 주문한 바 있다. Dianne Sachko MacLeod, “Mid-Victorian
Patronage of the Arts: F. G. Stephens’s ‘The Private Collection of England,” op. cit., p.
601.
219) 1868년 2월 17일 로제티가 레이렌드(Frederick Leyland)에게 보낸 편지에는 “새끼
고양이를 추가하는 것 외에 <레이디 릴리트>[도판 6]에 더할 것은 없습니다 .... 나머지
두 가지는 거의 마쳤습니다”와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레이렌드가 로제티에게 작
품에 몇 가지 수정 사항을 요구했고 이를 로제티가 이행하며 진행상황을 전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레이디 릴리트>에 새끼 고양이는 추가 되지 않았다. Ed. William E.
Fredeman, op, cit., Vol. Ⅳ, p. 16.
220) Dianne Sachko MacLeod, op. cit., 1986, p. 601.
221) Ibid., p. 601.

75
대 라파엘전파’라 불리는 에드워드 번 존스와 J. M. 휘슬러, 알폰스 레그로
(Alphonso Legros) 등에게 확대 되었다. 특히 로제티를 기점으로 제임스 리어서
트를 비롯한 후원자들 사이에서 영국 아방가르드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
다.222) 로제티는 선구적 미술에 관심을 가진 리어서트에게 에드워드 번 존스, J.
M. 휘슬러, 알폰스 리그로를 소개시켜 주었고 리어서트와 레이렌드는 이들의 후
원자가 되었다.223) 결국 로제티의 후원자들은 로제티의 뒤를 따르는 유미주의
화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함으로써 로제티의 선구적 미술이 영국 미술에 정착
할 수 있도록 일조했던 것이다.
끝으로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과 신흥 부르주아 후원자들의 취향과의 상
관관계를 당대 프랑스 인상주의 미술과 비교하면서 미술 후원에 있어 취향의
문제를 다시한번 상기시키고자 한다. 로제티가 상대적으로 부르주아 후원자들을
통해 물질적 안락을 누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1860년대 인상주의 화가들의 미술
시장에서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는 당대 인상주의 회화의 후원자들이
프레더릭 바자이유(Frederic Bazaille), 구스타브 까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처럼 스스로 화가이거나, 부르주아가 아닌 도시 근로자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
다.

222)ed. Pamela Fletcher & Anne Helmreich (Patricia de Montfort), op. cit., p. 260-1.
223) ‘The picture of Whistler’s which I mentioned was the unfinished Chines one,
since bought by Gambart & which was, as I thought, the one about the which you
wished to know. The Thames picture is still unsold, and on enquiring of Whistler I find
the price is 300 guineas. It is the noblest of all the pictures he has done hitherto, and
is the one for your collection. As regards Legros’s works, I yesterday saw for the first
time a picture he is doing now, of Hamlet in his mother’s chamber, where he kills
Polonius, about 20 inches by 15 I suppose in size, it may be rather more, and a truly
admirable work, the finest he has done in London as yet. He intends to ask 45 guineas
for it. It is so very cheap proportionatly to the othet that I am induced to mention it
to you, since it is a work which will stand the proximity of anything whatever, being
most full & luminous in colour, though, like all his works, low in tone.‘ 1863년 12월 편
지에서 로제티는 리어서트에게 휘슬러와 리그로의 그림의 사이즈와 주제, 가격 등을 상
세히 소개시켜주며 구매를 독려한다. 이같이 로제티가 자신의 충실한 후원자들에게 다
른 화가의 그림을 소개하는 것은 드문일이 아니었다. Ed. William E. Fredeman, op. cit.,
Vol. Ⅲ, p. 94.

76
특히 르누아르와 모네, 세잔, 마네 등을 후원한 빅토르 쇼캐(Victor
Chocquet)는 세관원이었는데, 그는 적은 봉급을 거의 인상주의 회화들을 구매하
는데 투자했다.224) 의사였던 폴 가셋(Paul Gachet) 또한 마네를 후원하고, 화가
들을 치료해 주는 대가로 그림을 가져가기도 했다.225) 쇼캐와 같은 사무직원과
평범한 의사였던 가셋이 인상주의 회화를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은 당대 인상주
의 회화가 상당히 저렴한 가격으로 거래되었기 때문이다.
후원자로서 유복한 집안의 자제였던 바자이유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까이유보트 등은 그들 스스로 화가 집단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후원자와 새로
운 미술간의 상관관계를 객관적으로 밝히는데 어려움이 있다. 반면 인상주의 회
화에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애호한 쇼캐와 가셋의 예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
가 있다. 샤피로(Meyer Schapiro)에 의하면 인상주의 회화는 ‘아침식사, 소풍, 산
책, 뱃놀이, 여가, 휴가 여행’ 등을 제시하면서 1860년대와 70년대의 부르주아들
의 여가활동을 보여주고 있다.226) 보다 정확히 말해 이러한 그림들은 샤피로의
표현을 빌자면, ‘교양있는 불로소득 생활자’(cultivated rentier)들의 모습을 재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림들이 부르주아가 아닌 도시의 평범한 중간계급을 자극
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쇼캐와 가셋과 같은 파리의 도시 근로자들이
도시계획으로 구획된 파리의 풍광 속 유한계급의 모습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
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미술과 후원자 취향간의 상관관계는 한마
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취향이란, 혹은 어떤 특정한 이미지를 애호한
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가지지 못한 이상적 세계를 물질적으로나마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과 다름 아닐 것이다.

224) http://www.visual-arts-cork.com/history-of-art/impressionism.htm.
225) http://en.wikipedia.org/wiki/Paul_Gachet.
226) Meyer Schapiro, “The Nature of Abstract Art,” Marxist Quartely, January-March
1937, p. 83. (T. J. Clark, The Painting of Modern Life (New Jersey: Princeton UP,
1984), p. 3에서 재인용).

77
Ⅷ. 결론

본 논문은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을 분석하면서 로제티가 베네치아


회화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 빅토리아 시대의 물질문화와 성 이데올로기 등을
녹여내면서 재해석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로제티가 1850년대의 자연주의와 사실
주의, 혹은 라파엘전파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양식을 확립할 수 있었던 배경을
19세기 중후반 영국의 사회 경제적 상황에서 찾았다. 문화적 배경으로는 Ⅳ장에
서 살펴보았듯이 국가 전반적으로 베네치아 회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기 때
문이었고, 사회 경제적으로는 Ⅵ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영국 최고의 경제 부흥을
이끌었던 신흥 부르주아가 미술시장으로 편입되어, 자신들만의 취향을 확립시키
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Ⅵ-4절에서는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의 회화가 왜 특별히 소수의 신
흥 부르주아 후원자들을 자극했는지에 대해 분석했다. 후원자들은 자신의 집을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상기시키면서도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주는 로제티의 미
술로 장식함으로써 베네치아의 상인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
리고 후원자들이 성공한 부르주아들에게 기대되던 보수적 도덕 윤리관에서 벗
어난 로제티의 도발적인 회화를 통해 보상심리에 의한 만족감을 느꼈을 가능성
도 추측해볼 수 있다. 우드스 불턴은 국가가 시민들에게 산업 자본주의로부터의
‘피난처’(refuge)로서 미술관을 제공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227) 같은 맥락에서
신흥 부르주아들도 당대에는 몰이해되던 화가들을 후원하면서 스스로에게 보수
적 사회에서의 피난처를 제공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27) 우드슨 불턴은 이시기에 ‘새로운 형태의 공공장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지적


한다. 여기에는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공원 등의 장소가 해당되는데, 특히 박물관이나
미술 갤러리는 시민들에게 산업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미적, 도덕적 경험을 하게하는
‘피난처를 제공’했다고 주장하였다. Amy Woodson-Boulton, op. cit., p. 5.

78
아쉽게도 영국 미술시장의 황금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파멜라 플레
처와 앤 헴라이츠에 의하면, 1851년 만국박람회가 열린 시기가 영국 산업 성장
의 ‘정점’에 해당하고, 오하이오 생명 보험과 신탁회사(Ohio Life Insurance and
Trust Company)가 파산한 1862년에서 68년 사이는 경제 침체기, 1870년대 중반
부터 1896년까지는 ‘긴 불황기’에 해당한다.228) 이러한 경기 침체는 당연히 미술
시장에까지 파급되어서, 1880년대 후반부터 1890년대에 활동한 화가들은 ‘높은
가격의 시대가 명백히 끝난’상황에서 사회적 지위보다는 그림 파는 일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229) 로제티도 예외 없이 1870년대 후반에는 판매되는 작품 수가
줄었으며 소득도 불안정 했다.230) 이는 그의 후원자들의 주요 산업이었던 석탄,
구리, 직물, 해운산업 등이 이전처럼 번창하지 못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영국 역사에서도 경제적으로 가장 호황을 누렸던 19세기 중후반기에 태
동한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베네치아 양식은 라파엘전파 화가인 밀레이나 헌
트의 미술에 비해 영국미술에 남긴 예술적 유산이 매우 크다. 밀레이의 치밀한
사실주의적 테크닉은 찬사 받을만하고, 이는 그가 로열 아카테미의 회장이 되고
준남작 작위를 받은 것으로 이어졌다. 부록2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밀레이의 연소
득은 2만에서 4만 파운드 정도였으며, 이는 부록3의 상류층 1등급의 소득을 훌
쩍 뛰어 넘는다. 그러나 팍손은 밀레이가 당대에는 성공한 화가였지만 이어지는
세대에서 미술적 계보를 확립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231)
반면 로제티 미술의 계보는 영국 내에서는 에드워드 번 존스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등으로 이어졌다.232) 국제적으로는 상징주
의 예술가들과 세기말(Fin de siècle)의 데카당트(decadent) 예술가들도 로제티의

228) ed. Pamela Fletcher & Anne Helmreich, op. cit., p. 4.


229) Paula Gillet, op. cit., p. 17.
230) J. B. Bullen, Rossetti: Painter & Poet, op. cit., p. 253.
231) Alicia Craig Faxon, op. cit., p. 218.
232) 모스(David Morse)는 상징주의 예술에서 로제티가 휘슬러를 앞섰다고 주장한 바
있다. 모스는 휘슬러가 외부 세계(external world)를 포착하는데 비해 로제티는 초기작부
터 ‘복잡한 사적 상징주의’(complex personal symbolism)를 보여주었고, 이는 ‘과감
한’(radical) 시도였다고 밝힌바 있다. David Morse, High Victorian Culture (New York:
New York UP, 1993), p. 456.

79
후예라고 평가된다.233) 영국의 경제적 상황은 악화되었으나, 로제티의 예술적 유
산이 후대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경로를 막는 요소가 되지는 못한 것이다.

233) Christopher Wood, The Pre-Raphaelites (London: Cassel & Co, 1997), p. 101.

80
참고도판

[도판 2]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푸


[도판 1]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키스
른 내실>, 1865, 캔버스에 유화, 바
한 입술>, 1859, 캔버스에 유화, 보스턴
버 미술관, 버밍엄.
미술관, 보스턴.

[도판 3] 존 에버릿 밀레이, <단풍>


1856, 캔버스에 유화, 맨체스터 시립
미술관, 맨체스터.

81
[도판 5]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발견>,
[도판 4] 윌리엄 홀먼 헌트, <아무것
1854-5, 캔버스에 유화, 델라웨어 미술
도 (의미)하지 않는 것의 달콤함>,
관, 델라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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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렉션, 뉴욕.

[도판 6]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레이디 릴리트>, 1866-7, 캔버스
에 유화, 델라웨어 미술관, 델라
웨어.

82
[도판 8] 존 에버릿 밀레이, <신
[도판 7] 윌리엄 홀먼 헌트, <깨어나는 부 들러리>, 1851, 캔버스에 유
양심>, 1853-4, 캔버스에 유화, 테이트 화, 피츠윌리엄 미술관, 캐임브
갤러리, 런던. 리지.

[도판 9]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성모의 소녀


시절>, 1848-9, 캔버스에 유화, 테이트 갤러리,
런던.

83
[도판 11]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도판 10] 카를로 라지노 <피사 캄포 사토 <베아트리체 죽음 첫 번째 기일의
의 프레스코 화>, 1828, 판화. 천사>, 1849, 종이에 잉크.

[도판 12]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시몬의


문가에 서 있는 막달라 마리아>, 1858-9,
종이에 펜과 잉크, 피츠윌리엄 미술관, 캐
임브리지.

84
[도판 13]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푸른 밀실>, 1856-7, 종이에 수채, 테이트 갤
러리, 런던.

[도판 14] 티치아노, <거울과 여 [도판 15]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인>, 1514-5, 캔버스에 유화, 루브 <파지오의 정부>, 1863, 캔버스에
르 박물관, 파리. 유화, 테이트 갤러리, 런던.

85
[도판 16]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아
침 음악>, 1864, 종이에 수채, 피츠윌
[도판 17]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리엄 미술관, 캐임브리지.
<아름다운 베아트리스>, 1864-70, 캔
버스에 유화, 피츠윌리엄 미술관,
캐임브리지.

[도판 18]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내실 목초


지>, 1872, 캔버스에 유화, 맨체스터 미술관,
맨체스터.

86
[도판 19]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연인>, 1866,
캔버스에 유화, 테이트 갤러리, 런던.

[도판 20] 파올로 베로네제, <가


나의 혼인잔치>, 1563, 캔버스에
유화, 루브르 박물관, 파리.

[도판 21] 조르지오네, <로라>, 1506, 캔버스에 유화, 빈


미술사 박물관, 비엔나.

87
[도판 22] 티치아노, <플로
[도판 23] 단테 가브리엘 로제
라>, 1515, 캔버스에 유화,
티, <베로니카 베로네제>, 1872,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캔버스에 유화, 델라웨어 미술
관, 델라웨어.

[도판 24]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도판 25] 파올로 베로네제,


<허영심 있는 여성>, 1866, 캔버스 <베네치아 여인의 초상>, 1560,
에 유화, 테이트 갤러리, 런던. 캔버스에 유화, 루브르 박물관,
파리.

88
[도판 26]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비너스 버티코디아>,
1868-8, 캔버스에 유화, 러셀 코츠 미술관, 본머스.

[도판 27] 티치아노, <목가적 콘서트>, 1510,


캔버스에 유화, 루브르 박물관, 파리.

[도판 28] 헨리 트레프리 던, <체인 워크에서 로제티


와 티오도어 와츠 던톤>, 구아슈, 1882.

89
[도판 29] <가나의 혼인잔치> 세부.
[도판 30] <가나의 혼인잔치> 세부.

[도판 32] 로제티가 수집한 도자기.


[도판 31] 티치아노, <피에트로 아
와이트윅 영지, 우버햄튼.
레티노의 초상>, 1545, 캔버스에 유
화, 팔라조 피티, 피렌체.

90
[도판 34]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조르지오
네 그림>, 1853, 종이에 잉크, 버밍엄 시립
미술관, 버밍엄.
[도판 33] 파올로 베로네제, <성 아그
네스로 재현된 여인의 초상>, 1575-80,
휴스턴 미술관, 휴스턴.

[도판 35] 존 에버릿 밀레이, <검은 제


복을 입은 브런즈위커>, 1860, 캔버스에
유화, 레이디 레버 미술관, 리버풀.

91
[도판 36] 레이렌드의 응접실. 프린세스 게이트, 런던, 1892, 베드포드 리미어.

[도판 37]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루크레지아 보르지아>, 1860-1, 종이에 수채, 테이트
갤러리, 런던.

92
[도판 38]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에스타르테 시리아카>, 1877, 캔버스에 유화, 맨체스
터 시립 미술관, 맨체스터.

[도판 39]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백일몽>, 1880, 캔버스에 유화,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
관, 런던.

93
[도판 40]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창문에 있는 소녀>, 1862, 캔버스에 유화, 피츠윌리엄
박물관, 케임브릿지.

[도판 41]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마음의 여왕>, 1866, 캔버스에 유화, 캘빈그로브 미술
관 및 박물관, 글래스고.

94
[도판 42]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아름다운 로자문드>, 1861, 캔버스에 유화, 웨일즈 국
립 박물관, 카디프.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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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The Times, 30 December 1882, p. 6.
The Times, 12 January 1883, p. 4.

100
Abstract

The Study of Dante Gabriel Rossetti’s ‘Venetian Style’


in the relation of art criticism, clients, and art market in
Victorian England

Jun, Sarang

Department of Art Theory


School of Visual Art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Advisor: Yang, Jeong Mu

Dante Gabriel Rossetti’s ‘Venetian Style’ refers to Rossetti’s specific style of


half-figure paintings of a single woman, usually sensually represented. The
‘Venetian Style’usually comprise of his paintings from Bocca Baciata in 1859
to late 1860s. The previous studies on the‘Venetian Style’were rather in the
scope of identifying the aesthetic qualities of the style, with regard to
Rossetti’s oeuvre. As a result, the studies in this subject have not been fully
related to socioeconomic matters in mid-to-late 19th century Victorian period.
Therefore, this research purports to introduce the background of emergence of
the‘Venetian style’ in the 19th century English art scene, attempting to

101
understand the relationship with the dynamics of art criticism and art market.
Specifically, this dissertation seeks to cast a spotlight on the relation of art the
market with art criticism in regards to the‘Venetian Style’.

Although Rossetti’s‘Venetian Style’had been brought about when popularity


of the 16th century Venetian paintings was realised, his specific style of
Venetian manner brought severe attacks from art critics of the day.
Rossetti’s sensually represented women and the aesthetic qualities of the style
provoked conservative English art world. To understand the situation in art
criticism, this study tries to evaluate the literature of the time. By analysing
the mainstream criticism with the small circle of aesthetic critical views on the
‘Venetian Style’, this paper argues that there were expanded conservative
social ideals on the sensual, and sexual nature of human beings.

Despite the low opinion of the art critics, the‘Venetian Style’was a highly
popular attraction to a small circle of bourgeois clients. As the field of art
market and art criticism expanded to the public in the 19th Century, Rossetti’s
position in the art world was not a common one, as he occupied a‘niche
market’among the particularly selected group of clients, avoiding the public
art market and the field of art criticism.

Specifically, this thesis highlights the aesthetic taste of Rossetti’s bourgeois


clients. By analys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Venetian Style’with the
selected patrons in the art market, this paper attempts to reveal the method
of sales, the sale price of the paintings, the ways of displaying in the clients’
galleries, and the aesthetic taste of Rossetti’s clients.

102
〚부록 1〛

로제티 작품 거래목록

작품년도/ 거래가격 현 재 가 치
작품 제목(매체) 구매자
거래년도 (£) (£)
The Girlhood of Mary Dowager
Virgin (f. p. 54) 1849/1849 80 6000 Marchioness
(oil on canvas) of Bath
F r a n c i s
Ecce Ancillia Domini
1850/1853 50 3500 MacCracken
(oil on canvas)! (f. 56)
of Belfast
/1874 388 Christie
The Seed of David (f. Henry Bruce
120) 1858-64/? 400 22,000 (member of
(oil triptych) Parliament)
/1886 840 Tate Gallery
Arthur’s Tomb (f. 88)
1855/1855 20 John Ruskin
(watercolor)
30(each
Moxon Tennyson (f. 91)
1857/? illustratio
(Wood block illustration)
n)
Bocca Baciata (t2. 162) George Price
1859/1859 40
(oil on canvas) Boyce
The Blue Bower
E r n e s t
(t2. 168) 1865/? 210 14,000
Garmbart
(oil on canvas)
340 William Agnew
/1866 Samuel Mendel
The Barber
/1959 1900 Institute of
Fine Arts

103
The Beloved(a)
1865-6 300 George Rae
(oil on panel)
Venus Verticordia(a) Frederick
1867/1868
(chalk on paper) Leyland
/1899 126 John Bibby
Major C.S.
/1981 294
Goldman
Venus Verticordia (a) John Mitchell
1864-8
(oil on canvas) of Bradford
/1887 472 John Graham
A r t h u r
/1894 525
Anderson
Russell-Cotes
/1936 105
Art Gallery
Frederick
Lady Lilith (t1. 166) 1866-1868 472
Leyland
The Walker
Dante’s Dream 1871/1881 1571 140,000
Art Gallery
1871-7/ W i l l a m
The Blessed Damozel234) 1157
1877 Graham
The Bower Meadow (a)
1872 735 ?
(oil on canvas)
Veronica Veronese (t1. Frederick
1872/?
164) Leyland
Proserpine (r. 42) 1874 W. A. Turner
Clarence Fry
Astarte Syriaca (s. 216)
1877/1877 2.100 135,000 (photographer
(oil on canvas)
)
A Vision of Fiammetta
1878 W. A. Turner
(t2. 217)
1888 1,207 ?
800 Frederick
La Pia (t2. 208) 1868-81
(guineas) Leyland
* J. B. Bullen, Rossetti: Painter & Poet (London: Frances Lincoln Limited,

104
2011), Alicia Craig Faxon, Dante Gabriel Rossetti (Oxford: Phaidon Press, 1989),
David Rodgers, Rossetti (New York: Phaidon Press, 2002), Tim Barringer et al.,
Pre-Raphaelites: Victorian Avant-Garde (London: Tate Publishing, 2012), Tim
Barringer, Reading the Pre-Raphaelites (London: Yale UP, 1998), www.
rossettiarchive.org 에서 재구성.
* ‘a’는 로제티 아카이브, ‘b’는 불렌을, ‘f’는 팍손, ‘r’은 로저스, ‘t1’은 Tim
Barringer, Reading the Pre-Raphaelites (London: Yale UP, 1998), ‘t2’는 Tim
Barringer et al., Pre-Raphaelites: Victorian Avant-Garde (London: Tate
Publishing, 2012)을 지칭.

234) https://en.wikipedia.org/wiki/The_Blessed_Damozel

105
〚부록 2〛

라파엘전파 화가들의 경제적 상황

최고 연간 소득 최고 거래 값 사후자산
밀레이(f. 73)
20,000- 40,000£
(John Everett Millais)
£21,00
로제티(f. 73)
3,725£ (Astarte Syriaca
(Dante Gabriel Rossetti)
1876-7)
브라운(b. 144) £1320 (Work,
(Ford Madox Brown) 1865)
헌트(f. 73) £12,000
(William Holman Hunt) (The Light of the £16,3000
World 1851-3)
1867년 영국 4등급 고급
50 - 70£
숙련노동자 평균연봉

*Alison Smith, “Mythologies.” Pre-Raphaelites: Victorian Avant-Garde (London:


Tate Publishing, 2012), Alicia Craig Faxon, Dante Gabriel Rossetti (Oxford:
Phaidon Press, 1989), J. B. Bullen, Rossetti: Painter & Poet (London: Frances
Lincoln, 2011) 에서 재구성

106
〚부록 3〛

1867년 연국 전역 인구의 계층구조 (중하층 이상)

계층 납세대상자 수 총인구 중 비율
상류 및 중산층
1등급, 고소득:
(1) 연 5000£ 이상 8,100 0.07
(2)1,000 - 5,000£ 46,100 0.4
2등급, 중간소득
163,900 1.4
300 – 1,000 £
3등급, 저소득
947,900 8.6
100 - 300 £

*Joan Perkin, Women and Marriage in Nineteenth-Century England, London:


Routledge, p.118(윤혜준, 『재산의 풍경』, 서울: 한국문화사, 2013, p. 33에서 재
인용)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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