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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낚시

2011.01.11.불의 날
든 글

파리낚시 ......... 3
루어 ......... 8
바다로 간 배불뚝이 ......... 16
소나기 ......... 22
클럽, OGC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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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낚시

“생명이란 참으로 미묘한 것입니다. 살 만큼 산 놈이라야 지혜도 있고 악착도 해져서


잡을 만하지요. 치어(稚魚)는 어려서인지 생명의 포기도 그만큼 빠르더군요.”

그는 사내의 어감에서 문득 ‘너는 치어 같은 놈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출처: 어떤 귀향( ‘ 97 한국소설문학상 수상작품집), 홍성암

햇살이 막 건져 올린 국수사리마냥 김을 폴폴 내며 다발지어 쏟아지는 오후였다. 사방으로 흩


어지던 국수다발들이 한곳으로 몰려들더니, 그 열기의 뭉치들이 목 안으로 들어와 목구멍을 턱턱
틀어막았다. 에어컨은 쉴 새 없이 쳇바퀴를 돌았지만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방울들의 속도를 따라
잡지는 못하였다. 길가에 늘어선 나무와 풀꽃들은 땅속의 수분을 길어 올려 머리라도 감고 있는
것인지, 그 주변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대전 톨게이트를 통과한 뒤 고속도로를 달리다 옥천 IC로 나와서 낯선 국도의 맥을 짚기 시작


한지도 어느덧 한 시간 반이 지났다. 먼저 목적지에 도착한 동료들 중 한명에게 전화를 걸어서 길
을 물었었다. 19번 국도를 찾아 달리다가 505번 지방도로 접어들어 산계리라는 마을을 찾으면 된
다고 했었다. 그러나 쉽사리 19번 국도의 표지판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안남면이라는 마을에
접어들어 공터가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건너편 버드나무 아래 평상에는 마을 노인들 수 명이 앉
아서 세월을 낚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담배를 한 대 피고 근처 슈퍼에 들러 물을 사면서 길을 물었
다.

목적지인 청성면 산계리 산계교 근처의 강가에 도착한 것은 예정시간 보다 거의 2시간이 늦은


오후 4시였다. 먼저 도착한 스무 명 남짓한 동료들은 벌써 한차례의 음주가무를 끝냈는지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더러는 러닝셔츠 차림으로 자리에 널브러져 있고 더러는 제법 먼 곳의 물가로 가
서 낚시질이며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동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였다. 길을 잃고 헤맸던 순간의 단상들을 이야기 하
였다. 그러나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들은 강변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뜨거운
열기의 투망에 걸려들어 노곤한 몸짓으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대충 벗어던져 놓았던 옷가지를 추슬러 가방에 넣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두세 명의 사진광들
은 쉴 새 없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셔터를 눌러대었다. 어, 오셨네요? 거기 한 번 서 보세요. 걸
작 하나 만들어 보게요. 어색한 표정과 몸짓으로 자청한 전속사진사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콘크리
트로 계단처럼 층이 지게 만들어놓은 인공제방이 있었다. 제방은 어른 키 높이보다 조금 더 높았
다. 그 위로 저절로 넘쳐나는 물살이 얇고 넓은 비닐장판처럼 펼쳐져 강으로 흘러내렸다. 비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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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계단의 바닥에는 물이끼들이 두꺼운 겉켜를 이루어 짙은 초록빛을 띠었다. 물살이 빠르게 흘
러내리는 가운데, 뭔가 검은색의 덩어리들이 잽싸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기들이 펄떡거리는 게 보
이지요?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르게 동료 한 명이 지나가면서 말을 걸었다. 네에? 저게 물고기란
말입니까? 네, 하도 빨라서 얼핏 봐서는 알아보기 힘들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고기들이랍니다. 물
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실력이 보통 아닌데, 대 부분은 새들의 먹잇감이 되죠. 물론 제방 안쪽으로
까지 뛰어오르지는 못하지요. 시력이 나쁜 건지, 쏟아지는 햇살이 반사되어 그런지 좀체 물고기
형상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걸음을 옮길 때마다 후드득 도망치는 흑색 덩어리들의 정체가
물고기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처음 느꼈었던 당혹감은 가라앉았다.

형, 언제 왔어요? 제방 아래쪽에서 누군가 반가운 목소리를 던졌다. 아둔한 물고기나 다름없는


나에게 군침 도는 미끼와도 마찬가지인 친한 후배의 음성이었다. 어, 방금. 한참 헤매다 겨우 찾아
왔지. 거기서 뭐하냐? 히히, 파리낚시 하지요. 여기 봐요. 1.5 리터들이 음료수 병에 하나 가득 고
기가 채워져 있었다. 피라미 통조림쯤 되는 거야? 히히, 그런 셈이지요. 후배에게 다가가서 물속을
들여다보니 가느다랗고 투명한 낚싯줄에 듬성듬성 묶여 있는 털바늘들이 물결을 따라 아래위로
흔들리고 있었다. 형도 한번 해보세요. 엄청 많이 잡혀요. 난 저기 가서 삼겹살에 맥주 한잔 마시
고 올게요. 난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쉬워요. 그냥 잠시 한눈팔다가 가끔씩 낚싯줄을 들어 올려
보시면 눈먼 고기들이 파닥거릴 겁니다. 후배는 '물 반, 고기 반', 이라는 말을 무슨 주문처럼 남기
고 그 자리를 떠났다. 물 건너편에서는 두 명이 한조를 이뤄 투망을 던지고 있었다. 투망을 던지
는 사람은 정과장이었다. 시골출신 이라 투망질에 능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몇 분 지나지 않아 고기들이 파리 모양으로 치장된 털 속의 바늘에 입술을 꿰인
채 퍼덕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물살이 센 곳에 있는 바늘에 더 자주 걸려들었다. 한심한
것들. 제대로 된 미끼도 못 먹고 이렇게 작은 미늘에 목숨을 걸다니, 쯧쯧. 혼잣말로 중얼거렸으나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짧은 바지를 입었지만 물고기를 떼어내러 물속으로 몇 번 들락날락
하는 사이 어느새 팬티 라인까지 젖어 있었다.
매운탕을 끓이고도 남을 만치의 고기를 충분히 포획한 동료들은 어느새 모두 돗자리를 깔아놓
은 그늘로 가버렸다. 투망을 하던 정과장도 조수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멀리서 후배
의 목소리가 들렸다. 혀엉, 이제 철수합시다아! 라면이랑 매운탕 끓여 먹어야지요오. 주변에 사람
이 없어서인지 물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지막으로 걸려 든 한 마리를 낚싯바늘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갔다. 심하게


요동치는 녀석은 눈을 껌뻑거리며 입에 거품까지 물고 있었다. 미늘이 살 속을 깊숙하게 파고드는
모양이었다. 왼손으로 낚싯줄을 쥐고 오른손으로는 물고기의 미끈거리는 몸을 잡아 미늘에서 빼어
주려는데, 아차 하는 순간 비어 있던 바늘 하나에 왼손이 걸려버렸다. 따끔하였지만 워낙 작은 호
(毫)수의 바늘이라 피는 나지 않았다. 오른손에는 어렵사리 떼어놓은 고기가 헐떡거리고 있었다.
녀석을 손에 쥔 채 왼손을 낚아챈 겁 없는 바늘을 빼어내려고 했다. 순간 발을 삐끗하였다. 오른
쪽 슬리퍼가 물 위로 둥실 떠올랐다. 더욱 거세어진 것만 같은 물살은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마냥
슬리퍼를 몰아갔다. 왼손에 걸린 바늘을 급히 떼어내고 몸을 돌려 슬리퍼를 따라 가려는데 이번에
는 물살을 따라 늘어졌던 낚싯줄의 다른 바늘이 왼쪽 발목을 꽉 깨물었다. 몸을 뒤척이는 사이 왼
쪽 슬리퍼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물고기가 손을 빠져나간 사실은 미처 깨달을 틈도 없
었다.
기어이 피 맛을 보겠다고 칭얼대는 바늘들을 진정시키고 맨발로 오른쪽 슬리퍼를 따라 성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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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 물속을 걸어갔다. 야, 야! 거기 서! 어디로 가는 거야? 몇 발작 가지 않아 왼쪽 슬리퍼도 발견
하였다. 두 개의 남색 슬리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성능 좋은
배가 되어 둥둥 떠내려갔다. 그러다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급류를 타고 더 넓고 깊은 곳으로 휙 사
라졌다. 발바닥이 아픈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슬리퍼들의 꽁지를 쫓아갔다.
앗! 바닥이 푹 꺼지는 느낌에 화들짝 놀랐을 때는 이미 늦었음을 알았다. 순간 몸의 무게 중심
을 잃고 휘청거렸다. 첨벙, 하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한여름의 미지근한 강물이
몸의 모든 구멍들을 찾아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나는 여태껏 헤엄을 칠 줄 모르는 바보 같은 물고
기였음을 상기하였다.

누군가 가만히 몸을 흔드는 느낌에 눈을 떴다. 다리에 쥐가 났는지 지글거리며 빠르게 오가는
혈류를 느꼈다. 앳되어 보이는 한 여자가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인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귀청을 울리지는 못하였다. 눈을 뜨셨네요! 정신이 좀 드세요? 천 마리의 물고기가 차례로
물 위에 떠올랐다가 돌아오는 시간만큼이나 잠들어 계셨어요. 전혀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눈치 챘
는지 여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좀 더 쉬셔야겠어요. 나중에 다시 와볼게요. 여자가 떠나고 나
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평 남짓한 방이었다. 가구라고는 침대 옆에 있는 동그란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역시 동그란 형태의 문이 하나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벽이 묘한 곡면을 이루고 있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벽에 저절로 생긴듯한 빗금들이 보였다. 문득 머릿속에서 뽀글거리는 물소리
가 들렸다. 들렸다기보다는 작게 움찔대는 진동들이 느껴졌다. 비 오는 날 강가나 호숫가에서 보
았던 물위의 파원들이 원무를 추는 것 같기도 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여자가 동그란 문을 밀고 들어섰다. 몸을 일으켰더니 현기증이 일었다.


잠시 기다린 여자는 내 손을 잡아 문밖으로 끌었다. 정신을 잃고 누워 있던 방보다 조금 더 큰방
이 나타났다. 한구석에는 이젤이 놓여 있었다. 제가 요즘 그리고 있는 그림인데, 한번 보실래요?
여전히 입술만 옴찔거리고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여자가 이끄는 곳으로 걸어
갔다.
이젤에는 백호 남짓한 캔버스가 걸려 있었다. 그 주변에는 붓이나 기름통이며 팔레트 같은 도구
라고는 전혀 뵈지 않았다. 이젤 앞에 역시나 둥근 의자 하나 달랑 놓여 있고, 이 방에는 침대조차
없었다. 여자의 침실은 아닌 모양이었다. 여자가 부끄러운 듯 손짓하는 캔버스를 무심코 바라보았
다.
한 남자의 누드였다. 치부는 아직 형태의 덩어리만 잡아놓은 바탕작업 상태였고, 잘 발달 된 골
격과 근육을 가진 체형이었다. 남자라고 생각이 든 것은 우람한 몸매 때문이었고, 뜻밖에도 얼굴
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물고기 모양이었다. 방의 황량한 풍경과 마찬가지로 그림 속에도 배경
이라고 할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이 그림은 아마 일만 마리의 물
고기가 물 위로 떠올랐다가 돌아올 때쯤에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눈이 예민해져서인지, 문득 눈물방울 하나가 여자의 눈가에 생겨났다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
내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의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여
주었다. 손가락마다 물감 같은 색채가 배어있었다. 아마도 채색을 손으로 한 듯하였다. 캔버스에
배어 있는 색채의 느낌으로 봐서는 유화가 분명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뵈지 않던 유화구(油畵具)
중에 하나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림에서 남자의 머리 부분을 가리켰다. 왜 물고기 얼굴을 하고 있으며, 이 남자는 누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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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여
자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이제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를 못 들으시는 것 같아 텔
레파시로 말할게요. 제 친구랍니다. 그런데, ······, 그는 ······, 죽었어요. 그는 언제나 이곳을 떠나고
싶어 했었어요. 전 그를 사랑했지만, 그리고 그도 저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몇 번씩이나 저와 이곳을 떠나 물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곤 했지요. 그런 날이면 그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 밤을 새다시피 물 밖 세상의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처음에는 너무 신기하고 재
미있어 그의 이야기 에 푹 빠졌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입 주위가 피범벅이 되어 돌아 왔어
요. 지독한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져서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지요. 그리고 그는 그대로 쓰러져버
렸어요. 다음날 정신을 차린 그로부터 상처를 입게 된 경위를 듣게 되었어요.

어느 한순간 나는 격심한 한기를 느끼게 되었다. 이가 닥닥 부딪히며 벌벌 떨 정도까지 되자 여


자가 살며시 내 몸을 껴안았다. 그때서야 내가 여태껏 벌거벗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여자는
옷이라 할 무엇도 입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어쩐지 몸의 윤곽과 치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성스러운 곡선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여자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날따라 수면에는 굴절된 햇빛의 찬란한 무늬 가운데 묘한 그림
자 하나가 드리워져 있더래요. 작고 가느다란 무엇인가가 흔들리는 물결을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지요. 어쩐지 그는 그것을 지니면 수면을 박차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다는 강렬한 느낌
에 사로잡혔더래요. 함께 길을 떠났던 동료들이 점점 멀어져 가면서 주의를 줬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한참 동안 그 기묘한 물체를 응시하고 있었대요. 그러다 물 밖의 바람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지 수면이 꼼짝도 않고 거울처럼 편평하게 정지하는 순간, 그는 그 물체를 덥석 물었대요. 그러자
갑자기 그의 몸이 수면을 뚫고 휙 공중으로 치솟았대요. 알 수 없는 어떤 강력한 힘이 그의 몸 전
체를 한없이 높은 하늘로 들어 올리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문득 왼쪽 볼을 파고드는 무서운 고통
에 정신이 아찔해졌대요. 그 물체는 가느다랗고 투명한 줄에 묶여 있었고,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그 줄의 힘이 그를 어지럽게 흔들어 놓았대요.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스스로 수면을 박차고 공중으
로 날아올라 물 밖 세상을 훔쳐보았었는데, 그때만 해도 눈부신 햇살과 멀리 보이는 풀꽃들의 흔
들림에 넋을 잃을 정도로 좋아했었더래요. 그런데 이번에는 엄청난 고통과 함께 눈알이 빠질 듯
온몸을 핑핑 돌게 만드는 불가항력의 힘에 이끌려 혼절을 할 정도였대요. 자신이 살길은 살점을
찢고 더욱 깊게 파고드는 그 작은 물체를 뱉어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어느새 여자의 눈가에는 물기가 흥건하였다. 내 몸을 껴안은 여자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느닷


없이 나의 중심에 욕망의 불꽃이 솟아올랐다. 그 떨림이 만들어내는 뜻밖의 효과가 나도 모르게
여자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게 했다. 그리고 눈썹, 콧잔등, 귓불로 이어지는 입맞춤 뒤에 입술을
맞대고 혀끝을 여자의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여자의 몸속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굴 같았다. 나
의 중심은 외눈박이 물고기가 되어 그 작고 따듯한 동굴 속으로 탐사를 떠났다. 동굴의 표면에서
는 순식간에 뜨거운 샘물이 솟아났다. 나의 물고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자와 나는 벌거벗은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여자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나는 여자의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아 ······, 제가 잠들었었나요?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는 그를 흔들어 대던 줄이 끊어져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 그러나 입속의 바늘은 차츰 그의 몸


과 마음을 갉아 먹고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의 원인이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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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을 추스르고 다시 이젤 앞에 섰다. 여자는 동그란 의자에 앉았다. 여자의 텔레파시가 계
속되었다.
그가 그런 사고를 당하고 돌아온 뒤로도 몇 번 더 어딘가로 사라졌다 며칠 만에야 돌아오곤 했
어요. 깊숙하게 박혀 마치 그의 몸 일부가 되어버린 듯 한 작은 물체를 입 속에 지닌 채 말이죠.
저는 너무 속이 상해 그가 어디로 가건, 언제 돌아오건 신경을 끊어버렸어요. 그렇지만 제 마음
속에는 언제나 그에 대한 생각뿐이었지요. 그는 점점 밖으로 나가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언제나
침통한 표정으로 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지요.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아예 침대에 누워서 일어
나지 않았어요. 가끔 그에게 가보면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천장만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어
요. 하루는 그가 측은하게 생각되어 그의 여자가 되리라 다짐을 하였지요. 침대로 올라가서 곁에
누워 그의 욕망을 자극했어요. 그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저의 혀로 적셔주었지요. 그런데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오로지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는 이미 시체나 다름이 없었어요. 결국 저
는 비참한 심정으로 그의 방을 나왔어요. 그날 이후 다시는 그의 곁으로 가지 않으리라 결심을 하
면서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방에서 고약한 냄새가 새어나와 급히 들어가 봤어요. 침대
는 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위에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집어삼킨 듯 한 얼굴로 그가 죽어 있었어
요. 방바닥에도 핏물이 흥건했는데, 문득 불빛에 반짝이는 작은 물음표 모양의 물체가 보였어요.
그가 입속에 품고 있던 것이 분명했어요.

여자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그날 저녁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 이젤이 있던 옆방으로 가봤더니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젤에 걸려 있는 그림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 그림 속 물고기 얼굴 남자의 건장한 두 다리 사이에는 거꾸로 선 물음표 모
양의 낚싯바늘이 덧칠되어 있었다.

어디선가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음의 날카로운 소리였다. 잠이 깨었다. 몸을 일으키


고 보니 강가였다. 보름에 가까운 크고 밝은 달이 근처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
았으나 함께 왔던 동료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낯익은 차 한대만 덩그러니 달빛에 빛
나고 있었다. 다시 히스테리 섞인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발에 통증이 느껴졌다. 발바닥이
얼얼했다. 겨우 일어나서 소리가 나는 쪽을 찾아보았다. 멀리 강 건너편에 두 명의 여자가 보였다.
달빛이 비교적 밝아 여자들의 얼굴이 희뿌옇게 보였다. 여자들은 한참을 더 웃고 나더니 손을 맞
잡고 천천히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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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어

안녕? 월요일 아침, 공기가 선선하네. 지난 토요일이 처서였으니 이제 정말 가을이 온 건가. 대


전에서 옥천 가는 국도를 달리다 보면 문득 앞 차창에 확 다가오는 전원 식당 간판에 적혀 있는
것처럼 ‘청풍명월’의 가을이네. 낡은 전설 하나쯤 가슴 깊은 곳에서 낚아 올리고 싶어지는 계절이
지.

지난 금요일 출장을 다녀 온 이후 몸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지만 토요일 오전, 시내로 볼일을


보러 나서는데 왼쪽가슴께가 눌리듯 아파왔어.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엉뚱하게도 차를 돌려 서
대전 IC 옆의 논산 방향 국도로 향했지. 예전에 무심코 지나쳤던 저수지가 하나 있었는데 전날 인
터넷 검색을 통해 그곳이 ‘방동저수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
그곳에 도착하여 잠시 차를 세우고 주변 풍경을 살펴보면서 낚시를 하거나 수상보트 타는 사람
들을 구경했지. 근처 가게에 들러 캔 커피 하나 사 마시면서 주인아저씨에게 낚시 잘 되느냐 물어
보기도 했고.
차에는 늘 낚시가방을 싣고 다니거든. 그래봐야 아직 제대로 흔히 말하는 월척 한 마리 잡아본
적 없는 손방인데, 묘한 매력에 끌려 그냥 자동차 부속품처럼 언제나 갖고 다니지. 최근 아주 오
래 벼른 끝에 1992년에 나왔던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 브래드 피트 주연의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영화를 보고나니 더욱 낚시에 관심이 쏠리네. 그런데 현실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그저 꿈일 뿐이었는데, 그날은 스스로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리 떠났던 거야. 저수지
는 물이 깊어 제법 고기들이 많을 것 같았지만 아직 수온도 높은데다 마땅히 내가 머물만한 자리
가 없어 다시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지.

조금 더 달리다가 아주 좁은 시골길로 빠져 기차가 다니는 철다리 밑을 지나 ‘두계천'이란 곳으


로 향했지. 두 개의 철로가 놓여 있는 다리 아래에 주차를 하고 수심을 살핀 뒤 적절한 자리를 찾
았어.
그날은 비가 온 다음 날이라 날씨는 매우 선선했어. 개천치고는 제법 넓었고, 물살이 매우 빨랐
어. 수심은 약간 깊었고. 찌낚시와는 달리 채비가 간단한 루어 낚싯대를 들고 한 구석 바위 쪽으
로 갔지. 가짜미끼를 달고 영화에서처럼 휘익 낚싯줄을 날렸지. 고기야, 잡히면 잡히는 것이고 말
면 마는 것이고.
그저 흘러가는 물결과 바람소리, 잊을 만하면 지나가는 기차소리, 멀리 산등성이의 당당한 풍경
등에 푹 빠질 만도 했지. 역시나 어설픈 낚시꾼에게 고기들은 쉽게 찾아오지 않더라. 오후 한 시
가 넘었는데, 배는 고프지 않았어. 본래는 대략 한 시쯤까지만 하다 돌아갈 생각이었지. 집에도 그
냥 볼일이 길어졌다는 전화를 했었고. 그런데 어느 한 순간 릴에서 풀려나갔던 낚싯줄이 심하게
꼬여 버린 것이야.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마구 엉클어진 줄을 양손으로 쥐고 무슨 반죽이라도 하는듯한 손
짓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지. 엉킴의 시작과 끝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얽힌 부분이 느슨해지도록
줄과 줄 사이의 간격을 늘려나갔어. 찌그러진 타원 형태의 수많은 고리들이 비밀집회라도 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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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처럼 한곳으로 몰려들었더군.
조금씩 풀어지는 가 싶으면 다시 더 엉키고, 계속 서 있으니 다리가 아파 쪼그리고 앉아 하다보
면 쥐가 나려 하고, 그렇게 삼십 분 넘게 씨름을 했지. 간간이 물 위로 고기가 폴짝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어. 흔히 사건의 실마리를 푼다는 표현들을 하곤 하잖아. 실의 시작과 끝, 나는 실마리
에는 관심 없었고 그저 손이 가는대로 계속 엉킨 고리들과 교감하고 있었지.
점점 물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고 주변의 배경은 아웃포커스로 흐려졌어. 내가 작업을 하는
동안 이상한 벌레 한 마리가 다리를 타고 올라왔어. 개미 한 마리는 겁도 없이 왼쪽 팔뚝을 타고
오르다 꽉 깨물기도 했고.

“아얏!”

“놔! 놔란 말이야!”

“어딜 가려고?“

“내가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야!”

대략 천 미터 쯤은 족히 되는 높이였을 것이다. 산의 8부 능선쯤 될까. 반복되는 S자 코스였지


만 제법 넓은 왕복 4차선 도로가 있고, 양 옆으로는 주로 ‘유황오리’나 ‘백숙’이라는 글자를 간판에
대문짝만하게 써 붙인 식당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그 사이사이는 물론이고 뒤쪽으로 마치 대도시
시내의 유흥가처럼 불야성의 모텔들이 이국적인 이름표를 달고 네온사인 불빛을 밤하늘에 쏘아대
고 있었다.
이미 자정을 넘은 시간, 여자는 벌써 꽤나 먼 곳까지 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
던 엘리스 모텔 231호의 방문을 잠그지도 못하고 헐레벌떡 달려 나왔었다. 별별 상상을 다 하며
걱정을 증폭시켜 가던 참이었는데,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 속에서 보도가 없는 도로 갓길을 휘적휘
적 걸어가고 있던 여자를 발견하고 팔을 낚아챘었다. 여자는 분노의 음향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팔에 달라붙은 남자의 손목을 콱 깨물어버렸던 것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처음 만났던 천 사백 여일 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듯 세
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삼십 여분의 실랑이 끝에 다시 231호로 돌아왔다.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지금껏 수면 위로 끌어 올린 적은 한 번


도 없었다. 남자는 여자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면서 그저 언제까지고 끊어지지 않는 인연 정도로
지속하리라 다짐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몹시 피곤한 상태로 여자를 만났었는데, 차를
몰고 산으로 오르는 내내 여자는 휴대폰 속의 그 남자 목소리에 귀를 맡기느라 그의 존재에 대해
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해 기분이 몹시 상했었다. 자신은 마치 건전지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서, 그 남자에게로 달려가는 시계바늘 같은 여자에게 자신은 전해액이 다 되면 폐건전지 수거함에
버려지고 말 운명인 양 여겨지는 것이었다. 차라리 완전히 방전되는 것이 낫겠다 싶어지니 닳아빠
진 타이어처럼 노곤하던 피로는 어디론가 달아나버렸다.

여자가 팬티바람에 수건으로 가슴을 가린 채 욕실에서 나와 침대에 걸터앉았을 때 남자는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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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졌다. 여자의 그날이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여자는 한껏 기분이 좋은 상태로 욕실
을 나왔었는데 문득 두 다리를 꼭 붙이고 두 팔은 엑스 자로 가슴에 솟아나 있는 두 개의 둥근
문고리에 빗장을 걸었다. 어색한 침묵 끝에 남자의 단단하게 달아오른 열쇠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
하였고, 서로 등을 돌린 채 각자의 방향에서 시야를 가로막는 사방연속무늬 속에 갇혀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자는 지독한 논리증후군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남자를 밴댕이로 변신
시키는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남자는 질투의 힘으로 버텼고, 마침내 여자는 남자를 내팽개치고
방을 뛰쳐나가버렸었다.

거의 한 시간에 달하는 나만의 전쟁 중에, 낚싯바늘은 물속에 있고 물살에 떠밀려 조금씩 풀어


진 낚싯줄이 릴대 고리를 빠져 나갔지. 이제 조금만 더 풀면 될 것 같을 정도로 엉클어짐의 덩치
가 작아졌지. 날씨는 흐려 한동안 그러고 있는 동안 약간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어. 어깨 근육은
뭉치고 종아리도 뻐근해진데다 정신은 혼미해졌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왼쪽 가슴께의 통증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어.
한 순간 '이쯤 하자!'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전부터 과감하게 헝클어진 부분을 니퍼로 잘라내고
낚싯바늘을 다시 묶기만 하면 깔끔하게 끝난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으면서도 괜한 고집으로
한 시간 넘게 씨름을 한 셈이었는데, 마지막 몇 분만큼의 미로를 남겨 두고 마침내 낚싯줄을 싹둑
잘라버렸지. 그러고 나서 다시 낚싯바늘을 달았지. 처음 달았던 벌레 모양의 웜루어는 제쳐놓고
이번에는 물속에서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두 개의 날개가 있고 그 아래로 잔털 속에 숨겨진 바
늘이 반짝거리는 스피너로 채비하여 몇 차례 더 캐스팅을 시도했지.
그런데 아무리 해도 고기의 입질은 느껴지지 않더라. 그러다 한두 번, 천천히 줄을 감는데 뭔가
가짜미끼를 건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줄의 미세한 흔들림에 긴장을 했지.
‘바람의 여자(풍녀)'라는 소설을 썼던 이관용 작가는 여자의 은밀한 곳을 만질 때 바르르 떨리는
감각을 낚시할 때의 입질에 비유했었는데, 그 정도까지의 섬세한 떨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통
때와는 다른 느낌에 드디어 한 마리 낚나보다 했지. 그래서 서툴지만 결정적인 챔질을 시도했지.
아뿔싸! 줄은 너무 팽팽하고 낚싯대의 끝은 휘어졌는데, 도무지 당겨져 오지를 않는 거야. 잠시
낚싯대를 통해 전해지는 물속의 상황을 감지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지.
점차 이건 물고기가 아니란 확신이 들면서 물 속 바닥의 수초나 돌멩이가 낚싯바늘을 물어버린
것임을 깨달았지. 릴을 풀거나 감으며 낚싯대를 위로 치켜들었다가 팔을 쭉 뻗는 등 몇 차례의 어
설픈 춤사위 끝에 겨우 줄을 끊지 않고도 바늘을 무사히 빼낼 수 있었지.
헛된 캐스팅과 반응 없는 고기들과의 싸움은 오후 네 시까지 이어졌으나 결국 나는 짐을 챙길
수밖에 없었지. 지난 휴가 때 아주 잠시 바닷물에 담갔다가 제대로 씻지 못해 아직도 짠 바다냄새
가 나는 살림망엔 개미들만 잔뜩 붙어 있더군.

그날 저녁, 베이징 올림픽 야구 결승전이 있었지. 아무추어야구 세계 최강이라는 쿠바와 우리나


라 대표팀의 숨 막히는 경기를 보았지.
다시 왼쪽 가슴께가 뻐근하게 아파왔어.
나 혼자만의 외출에서 돌아와 좀 쉬려고 했는데 장모님의 성화 덕분에 집 근처에 있는 주말농
장으로 가서 백 포기가 넘는 배추 모종을 심고 물도 주고 하느라 누적된 피로가 아침의 기분 나
쁜 그 통증을 되불러 온 것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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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승리, 올림픽 야구 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보고나서야 긴 하
루의 막을 내릴 수 있었지. 그들의 금메달이 내 가슴에 묵직한 느낌을 더하더라.
그날 밤에, 이승엽이 때린 홈런볼이 하늘을 날아가면서 물고기로 변신하는 꿈을 꾸었지. 하늘을
나는 물고기라니, 다음엔 물속이 아니라 하늘에 낚싯줄을 던져야 할까봐.

여자와 연락이 끊어진 지 어느새 천 일이 넘었다. 남자는 여자의 그 남자가 인연의 끈을 아직까
지 놓지 않고 있으리라 믿으며 살아왔다.
여자의 주변에는 늘 남자가 많았었다. 스스로 미끼가 되어주는 경우도 많았다. 몇 명의 남자가
여자를 간이 정류장처럼 스쳐 지나갔었고, 여자는 언제나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단순히 여자의
바람기라 단정 짓는 것은 억지였다. 집어등(集魚燈) 같은 여자의 매력은 무엇일까, 남자는 늘 궁금
하였다.

여자가 사는 집에서 몇 분만 걸어가면 발 아래로 멀리 더럽고 수심이 얕은 강이 흘러가는 것이


내려다뵈는 제법 높은 언덕이 있었다.
여자가 스무 살 무렵 스스로 손목을 긋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무시로 가곤 했다는 자신만
의 은신처였다. 주변에 집들이 즐비했지만 한 사람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골목을 지나 작은 텃밭
을 따라가면 인적이 뚝 끊어져버리는 자투리땅 쯤 되는 곳이었다.
강가에 사람이 뵈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쩌다 취미삼아 농사를 짓는 노인네 두어 명이 밭두렁에
퍼질러 앉아 말라가는 강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두어 해 전 남자는 차를 큰길가에 세워두고 그곳으로 가보았다. 차마 여자의 집 앞으로 지나갈


수 없어 다른 골목길을 골랐다. 문득 여자의 귓등에서 풍겨 오곤 하던 겐조향수 냄새가 나는 듯했
다. 여자가 즐겨 입던 청치마 끝자락이 길쭉한 벌레모양 루어의 꼬리처럼 팔랑거리며 다소 가파른
골목길을 가로막아 서는 것 같은 환각에 사로잡혔다. 저녁 일곱 시에 가까운 시간이었고 어느새
어둠의 빗질이 시작되고 있었다. 낮은 지붕 아래 작은 창문들을 통해 새어나오는 형광등 불빛들이
바람을 몰고 다니면서 여자의 치맛자락을 더 심하게 흔들어놓았다. 여자의 은신처에 도착하니 생
각보다 밝았고, 멀리 서쪽 하늘에는 불그스레한 노을의 투망질이 한창이었다. 발아래 강물은 어느
새 노을의 손아귀에 덜미를 잡혔는지 붉게 물든 물결을 빠르게 뒤집으며 흘러가고 있었다. ‘물고
기는 없을 거야.......’ 남자는 한 번도 그 강에서 낚시질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남자가 강의 이름을 ‘금어강(禁魚江)’이라 부르기로 했다는 말을 여자에게 했을 때 여자
는 배꼽이 떨어져 강물 속에 빠졌다며 찾아내라고 야단법석을 떨었었다.
남자는 여자의 목에 언제나 걸려 있던 작은 물고기 모양의 목걸이를 기억해내었다.

여자를 만난 지 오백일 즈음 되었을 때 남쪽 바다로 놀러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심하게 다툰 적


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셈이었다. 그리고 여
자와의 인연은 거기까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여자의 생일이 다가오던 그 해 연말에 아주 조그
만 다이아몬드가 눈알처럼 박혀 있는 물고기모양의 목걸이를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얘는 물도 없이 어찌 살까? 남해 금산 보리암에서 봤던 풍경(風磬) 기억나지? 절에 있는 목어


(木魚)는 왜 허공에 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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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여자가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가 울대를 거쳐 힘들게 끌어올린
뒤 간신히 입술로 물고 있는 말에 대해서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 뒤로 다시 오백 일도 훨씬 더 넘도록 물고기모양 목걸이를 계속 볼 수 있었던 것은 여자의
무심함 때문이었을까. 물고기 같은 여자에게 자신이 물이 되어주고 있었던 까닭일까, 남자는 도무
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날, 오전 11시 조금 넘어 딸아이와 낚시를 하러 가겠다고 선언하다시피 말했지. 의외로 안


사람이나 장모님이 반기더군. 복숭아, 사과, 포도, 옥수수 끓인 물, 커피 등을 챙겨 주더라.
딸아이는 평소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하는 아빠와의 오붓한 시간을 갖는다는 생각 때문인지
신이 났더군.
동네 김밥 전문점에 들러 천오백 원 하는 김밥 두 줄을 샀고 바로 어제 달려갔던 곳을 향해 가
는 동안 다 먹어 치웠지. 아직 어려 그다지 많이 못 먹을 것이란 생각은 나의 속단이었어. 참 맛
있게 먹는 모습을 보자니 한 줄 더 살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어.
전날 허탕을 치고도 다시 그 자리에 갔지. 물론 딸아이에게나 안사람에게는 처음 가보는 것인
양 말했었고. 딸아이 덕분에 챙길 짐은 전날보다 배로 늘었어. 낚시용 의자의 부피가 제일 컸고,
파라솔과 준비해간 먹을거리들이 들어 있는 가방과 낚싯대 등을 바위까지 날랐지.
잠시 후 두 명의 낚시꾼이 근처로 다가 왔는데 너무 얕아진 수심에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었어.
그 중 중년의 사내는 담배를 꼬나 문 채 여기저기 오가며 상황을 살폈고 이십대로 뵈는 젊은 친
구는 열심히 낚싯대를 설치하고 있더군.
몇 마디 말을 섞었지. 찌낚시를 하러 왔느냐 물었고, 루어낚시는 잘 되는 곳이냐고도 물었지. 몇
차례 왔었는데, 오늘은 별로라면서 특히 그곳은 수심이 얕고 고기들도 거의 없을 것 같다더군.
딸아이는 의자에 앉아 발을 굴리며 가끔 지나가는 기차를 보고 좋아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지겨운 지 시무룩해졌어.

전날에 비해 기온은 10도 이상 올라 땀이 났지. 몇 차례 캐스팅을 하였지. 역시나 고기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전혀 입질을 느낄 수 없었어.
한 시간 가량 있었나. 이윽고 오후 세 시쯤이 되었고, 더 이상 있다가는 나도 아이도 지치기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차라리 방동저수지로 가보자고 결심했지.
짐을 정리하여 아이와 함께 차를 세워 둔 곳으로 나오는데 두 명의 꾼들도 포기를 했는지 주섬
주섬 자리 정리를 하더군.
방동저수지에는 전날보다 훨씬 많은 차들과 사람들이 나른한 일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더라. 주
변 음식점의 야외 테라스에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지.
간단하게 채비를 마치고 낚시를 시작했는데, 역시나 쉽사리 입질이 오지 않았어. 물은 무척 깊
고 저수지 주변과 가장자리에 수초가 우거져 있어 다소 희망적이었는데도 전혀 기회가 오지 않더
라.
일가족이 근처로 몰려 왔는데, 중년 남자 한 명이 줄을 던진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어른 손바닥
만 한 고기를 낚아 올리더니 대여섯 살 먹은 자기 아들에게 자랑을 하더군. 나도 한 마리쯤 낚아
딸아이에게 자랑하고 싶어졌는데, 여러 차례 수초에 걸리기만 했고 어느 순간 발치를 보니 벌집이
있어 얼른 다른 자리로 옮겼지. 그러고 나서 다시 시도를 했는데 좀처럼 입질이 오질 않았어. 가
짜미끼를 물고기 모양과 거의 흡사하고 크기만 좀 작은 미노우로 바꿔 끼웠지. 두서너 번 미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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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짜릿한 어떤 느낌을 받아 드디어 한 수 하나보다 싶었는데 역시 그마저도 아무런 소득이 없어
허공에 떠오른 낚싯바늘에서 물방울만 뚝뚝 떨어져 내렸지.
오후 네 시가 넘어서 결국 이번에도 허탕을 치고, 초보라서 당연한 수업료를 낸 셈 치자 생각하
면서 자리를 접었지.

돌아올 때는 갈 때와 달리 국도 대신 서대전 IC로 진입하여 고속도로를 달렸지. 멀리 동쪽 하늘


에 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구름을 보면서 딸아이가 갑자기 신이 나서 재잘거리기 시작했어.

“아빠! 저것 봐! 저 구름은 코끼리 같다, 어! 저건 공룡 같네. 저기는 바다 같아. 고래랑 물고기


들도 있네. 근데, 아빠! 왜 물고기가 하늘에 떠 있는 거야? 구름은 그림을 참 잘 그리지? 집에 가
서 나도 예쁜 그림 그려 아빠 줄게, 알았지?”

둘이 낚시하러 가 있는 동안 나머지 가족들은 수산물 시장에서 꽃게를 사고 농산물 시장에서


포도와 복숭아를, 다시 대형 할인매장에 들러 이런저런 생필품을 사는 등 꽤 오랜 시간을 보내었
는지 우리가 집에 도착하고 나서 한참 뒤에야 왔어.
잠시 후 어느새 주말농장으로 가셨던 장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전날 심은 배추모종이 말
라 쓰러져 있으니 물 한 말과 물뿌리개를 가져오라고 하시는 거야. 내가 가기로 했지.
전날 모종이 심겨져 있던 모판에서 뿌리에 붙어 있는 모판흙 덩이가 쉽사리 빠지지 않았었는데,
그나마 온전하게 쏙 빠졌던 모종들은 꼿꼿하게 잘 서 있고 뿌리가 많이 드러난 것들은 하나같이
맥없이 늘어져 있더라. 물을 주고 주변 흙도 북돋워 주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지.

먼저 여자와 연락은 끊은 쪽은 남자였다.


고향 후배의 소개로 한 여자를 만나 불과 육 개월 만에 결혼을 했고 대학원을 마치는 것과 동
시에 비교적 이름 있는 회사에 취직을 하였다.
여자가 사는 도시에서 떠나 회사가 있는 낯선 도시에 적응을 해야 했다. 금어강은 너무 멀어졌
고 대신 금강이 코앞에 있었다.
아내와 종종 금강을 끼고 도는 국도를 달리다 인적 드문 곳에 있는 모텔에 들러 사랑을 하고
휴식을 취하다 돌아오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아내는 아이를 가졌다. 예쁜 딸아이가 태어났다.
남자의 아내가 동화책을 판매하는 제법 큰 출판사 영업사원으로 일하게 되어 장모가 아이를 돌
봐주러 고향을 버리고 남자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남자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여자로부터 몇 번 휴대폰 문자가 왔었다. 남자는 여자의


마지막 문자에 자물쇠를 채웠다. 자물쇠청은 여자의 생일날짜로 바꿨다. 휴대폰 메모리에서 여자
의 번호를 쉽게 지우지는 못한 채 또 몇 백일이 흘렀다.
남자는 가끔 자신의 왼쪽 가슴을 쓸어내리는 버릇이 생겼다. 가슴 깊은 곳에 4행 10열의 구멍
이 뚫려 저절로 만들어진 모판에서 아무리 해도 여자에 대한 기억의 뿌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판
흙이 빠지질 않았다.
남자는 꿈속에서 종종 여자를 만났는데, 여자의 배역은 다양해서 어떤 때는 물고기였다가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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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이름 모를 식물의 모종이었다가 때로는 낯선 절의 처마 끝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목어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틀간의, 예정에 없던 낚시여행을 마치고 나니 다소 피곤하여 어젯밤엔 평소보다 훨씬 일찍 잠


자리에 들었지.
일용할 양식을 벌어야 하는 사십대의 가장으로서 내가 어부로 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다음에는 꼭 대물 한 마리를 낚고 말 것이란 희망을 베개 삼아 껴안으며 잠을 청했지.
새벽에 문득 잠이 깨었어. 또 꿈을 꾸었어. 강이 내려다 뵈는 언덕에 서 있었지. 허공에 대고 외
쳤어.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

“그런데, 내 목소리 들려? 아직 거기, 그 언덕에 숨어 있는 거니?”

잘 지내? 근데, 내 목걸이...... 목걸이를 잃어버렸어....... 불쌍한 물고기,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날
이제 다신 안보겠단 것이지? (10/22 22:30 pm 목어 010-xxxx-xxxx)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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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간 배불뚝이

자정은 남자에게 하루의 시작이다. 컴퓨터의 팬을 재촉하는 모터가 힘차게 쳇바퀴를 돌기 시작


한다. 철갑옷 같은 본체의 배꼽쯤에 박혀 있는 발광다이오드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나와 방바
닥을 기어 다닌다. 부쩍 매미소리처럼 소음이 심해진 형광등은 꺼 둔 채로다. 듀오백 의자에 허리
를 바짝 붙이고 불룩한 배를 돛처럼 밀어 올린다. 두 개의 엄지손을 평균대 같은 스페이스바 위에
두고 나머지 여덟 개의 손가락들은 피아노 건반이라도 두들기려는 듯 둥그렇게 말아 쥐는 형태로
자판의 ㅁㄴㅇㄹ ㅏㅣ;' 위에 올린다. 이제 랜선에 꽁꽁 묶어 둔 닻을 올리면 출항이다. 등대처럼
초록색 빛을 깜빡거리면서 모니터 뒤에 반쯤 가려진 허브가, 한때는 '모자이크'이었다가 '넷스케이
프 내비게이터'이기도 했다가 '모질라'이더니 이제는 '익스플로러'라고도 불리는 돛단배를 어서 띄
우라는 신호를 보낸다. 잘 훈련된 빛의 전령들은 사각형의 화면 속에서 끝없는 질주를 시작한다.
어쩌면 저렇게도 밝으며, 어쩌면 저렇게도 네모반듯한 울타리 속에서 손가락들의 에누리 없는 명
령에 절대복종을 하는 지, 남자는 신기하기만 하다.

남자의 여자는 건넛방 침대 위에서 지구의 중력을 시험하다 지쳐 잠들어 있다. 부쩍 자신의 배
에 힘을 실어주지 않는 여자의 남자를 대신하여 10킬로그램 남짓한 아이를 어르다가 잠이 들곤
한다.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이라고 한다. 가속도는 시계 바늘이 하나의 점에서 바로 옆의 점으
로 번지점프를 하듯 째깍 하는 순간, 질량을 지닌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 속도의 변화가 있을 때만
제 존재를 과시할 수 있다. 여자의 몸은 언젠가부터 65킬로그램만큼의 질량에서 변화가 없다. 여
자는 가속도를 무시하고 잠들어 있으므로 매트리스가 방바닥을 향해 움푹 꺼지긴 했어나 침대에
아무런 힘도 가하지 못한다. 편평한 그물에 쇠공을 올려놓은 것처럼, 질량을 지닌 모든 성간물질
들 때문에 우주공간도 마지못해 얼마간은 휘어 있다고 아인슈타인이 말했단다. 침대도 마지못해
매트리스의 일부를 휘어 여자의 몸이 지닌 질량에게 넘겨버린 셈이다. 여자는 꿈속의 바다를 항해
중이다. 여자의 남자가 하루를 시작할 때쯤이면 이미 망망대해를 떠도는 쪽배가 되어 있다.

남자는 자음과 모음을 교배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입 속에서 맴도는 말들의 모스부호가 삼십
견을 겪은 지 오랜 어깨를 지나 검도로 단련된 고속도로 같은 팔뚝을 달려서 황금분할로 빚어진
열 개의 손가락 끝에 다다라 자판을 두들긴다. 가끔 자음과 모음이 따로 놀아 자신의 의식을 배반
하는 역모의 순간을 맞이할 때면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 문다. 머릿속 뇌의 좌익인지 우익인지 모
를 어느 곳에서 솟아나는 생각의 흐름은 한동안 손가락들을 멈추게도 한다. 때로는 건넛방에서 비
상사태를 알리는 호각을 불듯 15개월 된 아이가 가위에 눌린 울음을 운다. 그때마다 남자는 후다
닥 달려가서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여자의 날숨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 돌아온다. 다행히 컴퓨터는
인내심이 강해서 손가락들의 부재를 잘 참고 있다.

새벽 세 시. 남자는 담배를 꺼내다가 비어버린 갑 속에 손가락을 붙잡힌다. 몇 알의 담배가루가


집게손가락에 새겨진 지문의 등고선 일부를 가리고 있다. 지문의 등고선?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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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다. 지문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등고선이 아니지. 삼각점을 중심으로 폐곡선이 이어진 꼴은 아니
잖아. 굳이 등고선이라 치면 칠 수도 있겠지만, 가만 보면 LP 레코드판의 홈 같은 것이지. 내 지문
을 레코드판 크기로 확대하여 턴테이블에 올리면 어떤 음악이 나올까? 열 개의 손가락이 만들어
내는 소리는 어떤 음색을 가지고 있을까? 남자는 재떨이에서 비교적 긴 꽁초를 집어 든다. 이놈
봐라, 새까만 곱슬머리에 허리까지 꺾인 놈이 날 노려보네?! 문득 남자는 로깡땡이라는 먼 나라,
한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낸다. 책장에서 누렇게 변색되어버린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번역판을
꺼내 든다. 어렵지 않게 콜린 윌슨이 사르트르의 로깡땡에 대해 써내려간 구절을 찾는다. 바닷가
에 서 있던 그는 물이 약간 묻어 있는 평평한 돌을 하나 주워 든다. 그러고는 갑자기 그는 무언가
정떨어지는 듯 한 것을 느낀다. 그것이 돌 때문인지, 아니면 바다 때문인지 그는 알 수가 없다, 그
는 돌을 떨어뜨리고 걸어가 버린다. 남자도 무언가 정떨어지는 듯 한 느낌이 들어서 꽁초를 재떨
이에 도로 쑤셔 박고 망연스레 책장을 바라본다. '아웃사이더'가 빠진 책장에는 위가 뾰족한 이등
변삼각형의 그림자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의혹과 행동'이, 오른쪽에는 '건전한 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있다. 문득 팔과 목덜미와 사타구니가 가렵다. 책갈피 대신 '아웃사이더' 속에 들어가 있던
좀들이 탈출을 성공한 것이다. 남자는 자신도 집을 탈출하려고 방을 나선다. 근처에 문을 열어 놓
았을 편의점의 좌표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면서.

남자는 전업 작가다. 등단은 십년 전에 했지만 작품집이라곤 달랑 한 권 출간되었고 그다지 알


아주는 사람도 없다. 하기야 지방 문인협회에서 마당발을 자랑하는 후배가 뒤를 봐주지 않았더라
면 등단도 할 수 없었겠지, 남자는 갑자기 그 후배가 어찌 살고 있나 궁금해진다. 다리 몇 개를
거쳐 온 소식에 의하면, 그 후배가 자주 가던 주점에서 한 여자와 눈과 배가 맞아 '바람과 함께'
사라졌단다. 남자는 등단 2년 전에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진탕 마시고 밤길을 어슬렁거리다가, '도
시의 사냥꾼'이라 자칭하던 한 녀석의 사냥감 중 한 명이었던 여자와 배만 맞았는데도 지금까지
한 지붕 한 이불을 지탱해오고 있다.

돈이 궁한 남자의 여자는 틈만 나면 뭐든 밥벌이를 하라고 그에게 달구친다. 즐겨 썼던 대학노


트를 접고 컴퓨터로 작업을 하게 되면서부터 남자의 글쓰기는 새마을호가 지나갈 때의 무궁화호
기차처럼 오히려 더 더디다. 땅 속에 파묻혀 있는 수도관처럼 얽히고설킨 전화선을 따라 오가는
인터넷의 광장에서 남자는 스스로 좌절하게 만드는 무수한 글들을 접한다. 언젠가부터 문학카페를
전전하였고 거기서 많은 사람들의 번쩍번쩍 윤기가 흐르는 글들을 읽을 때면 자신의 무능함에 치
를 떨곤 한다. 가끔은 <통신 회선으로 연결된 둘 이상의 컴퓨터 사용자가 자판을 통해 어떤 내
용의 짧은 문장을 타자함으로써 대화를 나누는 일>에 온몸을 팔면서 얼굴의 윤곽과 목소리의 음
색도 모르는 '사용자'에게 메피스토펠레스(파우스트전설에 등장하는 악마) 역할을 은근슬쩍 떠넘기
기도 한다.

“이 아저씨, 배불뚝이 어디 갔어?!”

밤 아홉 시. 여자의 남자는 한 지붕 아래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화장실 문을 탕탕


두드린다. 평소 '나는 무한변비를 지향한단 말이야!'라며 선언하다시피 외치던 여자의 남자는 아무
런 응답이 없다. 문을 벌컥 연다. 없다. 아이가 때맞춰 기적을 울린다.

여자의 남자가 홀연히 사라진 지 사흘이 지나도록 여자는 집을 나서지 못한다. 일용할 분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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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저귀는 여자에게 다그치듯 바닥을 보이고 있다. 남자가 담배 연기로 사방 벽지를 누렇게 처발라
놓은 골방으로 들어가 본다. 아이가 자는 틈을 타서 억지로라도 배를 맞추기 위해 남자가 앉은 의
자 밑에 무릎을 꿇을 때 외에는 통 들어오지를 않는, 남자만의 성(城)이나 다름없는 방이다. 의외
로 남자의 성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다. 컴퓨터가 놓여 있는 책상 쪽 벽을
빼고 나머지 벽면 모두를 가리고 있는 크고 작은 책장 속에는 그동안 남자가 '밥은 굶어도 이건
못 끊어!'라면서 버둥버둥 사 모은 책들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을 뿐이다. 검은 색 자판을
등에 지고 있는 두꺼운 공책 한 권이 문득 여자의 눈에 띈다. 1997년이라는 연도가 금색으로 오
목새김 되어 있다. 아주 오래전 여자가 남자에게 선물로 준 은색 금속박으로 만든 돛단배 모양의
책갈피가 꽂혀 있는 부분을 펼친다.

광 장
-1997년 5월 4일 새벽, 광장에서.

방, 방은 광장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폐쇄공간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의


육체와 혼란한 정신을 방바닥에 굴리면서 시간의 동굴을 파헤쳐 가며 산다. 그 동굴
의 벽에는 그가 내뿜는 가쁜 숨소리와 체취 그리고 몸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었다가
어느 한 순간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쾌락의 덩어리로 엉켜진 배설물들이 무슨 추상
화처럼 장식되어 있다. 그러한 순간에도 그의 정신은 명확하지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광장의 밝은 빛 속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 혼자 있
을 때의 고요함과 가라앉음의 시간이 누군가의 침입으로 깨어지면, 그런 정신의 혼란
이 어떤 공진주파수로 진동을 시작하면서 점점 증폭되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뒤
섞임 현상을 겪곤 한다.

술, 술을 마셨다. 그렇게 그는 중얼대며 걷고 있었다. 오히려 걸음걸이는 조금도 흐


트러짐이 없다. 주변의 나무들은 가로등의 붉은 빛을 껴안고 있다. 하늘에는 별들이
성기고 저물어 가는 달의 그림자가 건물들 뒤편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그의 걸음들
앞에는 남녀의 짝들이 좌우로 갈라서며 잔디밭이나 벤치에 앉았거나 누워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존재의 짝들이 그렇게 어둠을 치장하며 서로의 살갗을 더듬고 있
는 것이다. 술의 독기가 그의 혼란스럽던 머릿속을 일렬로 가지런하게 정리시켜버렸
다. 가야할 길은 두 발만이 알고 있는 듯하다. 사유의 즐거움은 발걸음의 방해를 전
혀 받지 않으며, 조금 선선한 봄과 여름의 중간지대에서 그의 걸음을 유혹하고 있다.

공간을 커다란 몸체로 장악하고 서있는 차들의 곁을 지나면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걸음의 자유를 강탈당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술을 마셨다. 그러한 그의
흐릿한 시선에 차창 속의 묘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흔들림. 태아가 어머니의 몸 속,
궁전 속에서 온몸으로 들었던 규칙적인 심장박동소리처럼 기차의 바퀴소리 또한 그
런 아득한 향수를 느끼도록 편안함을 주었던, 그런 규칙적인 흔들림이 인간의 기계
속에서 사유에 잠겨 걸어가는 그의 눈 속에 들어왔던 것이다. 입술들의 포개어짐, 손
과 손의 어지러운 교차, 처용이 보았었던 네 개 가랑이들의 꿈틀거림, 그러한 움직임
의 흔들림이 인간의 기계 속에서 강력한 인력으로 그의 정신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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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동전 하나의 삽입으로 종이컵 커피를 빼들고, 또 다른 한 손으로 하얀 몸뚱
어리의 발기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한 일상적인 행위가 조금이나마 그에게 위안
이 되었다. 딱딱한 돌 의자에 앉아서 후- 하고 연기를 내뿜으니 속도 한결 후련해진
듯하다. 의사감정의 한 예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 잠긴다. 입으로 빨아들이
고 코와, 다시 입으로 뿜어내는 흡입과 배설의 쾌락을 성행위에 비할 수도 있으리라
는 헛된 상상도 해본다. 도처에 흔들림으로 포착되는 성적인 움직임으로부터 그는 자
유로울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라고도 생각을 돌려보지만,
그는 광장의 공공성이 이미 깨어졌음을 알아버렸다. 밀실에서의 인간적 행위가 광장
에서의 공공연한 흔들림으로 보편화되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정염이 간밤의 부끄러운
자위를 떠올리게 하였다. 욕망의 꿈틀거림은 젊음의 징표라도 되는 양, 손과 생식기
의 만남은 뜨겁기만 하였다. 자기만의 밀실, 방 속에서의 그러한 자기와의 대면은 또
다른 삶의 화두를 던지곤 한다. 배설의 만족과 그 후의 허탈감. 수많은 사람들, 지구
위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쾌락은 생식기의 흔들림으로부터 이루어지
는 것인 듯 생각되어 진다. 더 이상 광장은 타인들과의 만남과 대화의 공간만은 아니
다. 지금 우리의 광장에는 붉은 불빛들과 으르렁대는 차들과 술 취한 남녀들의 낮밤
을 가리지 않는 깊은 키스와 갖가지 모양과 색채의 옷들과 서로가 서로에게로 전달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방,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습관적으로 걸어 잠근다. 불을 켤 수가 없다. 바르뷔스


의 지옥보다 못한 방이다. 옆방의 세계를 훔쳐볼 수조차 없는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
인 그야말로, 밀실이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가 기거하였던 지하방보다도 낫지가 못
하다. 수정궁에 대한 비판마저 그의 머릿속에는 떠오르지 않는 까닭에다. 그나마 밖
으로 뻗어나가는 컴퓨터의 통신망만이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 준다. 희미한 신
호를 타고 밀실의 바깥세계로 스며나가는 그의 세계는 수많은 전자들의 충돌로 스크
린의 표면에 검은 글자들을 만들어 누군가의 망막과 머릿속에까지 연결된다. 이와 같
은 광장에서는 최소한의 자유가 허용된다. 침묵의 자유다. 그리고 익명의 안락함이면
더욱 족하다.

-1997년 5월 5일 밤, 밀실에서

남자라는 굴레를 씌고 술을 마시는 수많은 사람들이 술집을 채우고 있다. 조금씩


열기가 번져갈수록 술의 입김은 그런 남자들에게 유혹의 그물을 던진다. 그도 예외
없이 술잔에 몸을 서서히 기대며 4월을 보내었다. 그러한 어느 날, 지독히도 여자의
육체가 궁금하였다. 순수가 절멸하여 간다는 세상에서 그의 가슴속에 숨겨져 있던 순
수 또한 술의 힘을 빌린 양 거세어지는 욕망을 억누를 수가 없어 보였다. 세상은 돈
을 주고 여자를 살 수 있는 시대이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옆을 지나다니더라
도 철저히 혼자일 수 있는 익명의 섬이 도시의 밤거리이다. 그의 취기가 익명의 가면
을 둘러쓰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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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들이 점점이 찍혀있는 곳. 밤낮이 없는 사람들의 움
직임. 소설이나 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인생을 만날 수 있는 곳. 혼자
걸어가는 그를 잡아끄는 아줌마들이 있다. 좋은 비디오와 젊은 아가씨, 샤워시설을
운운하며 '쉬고 가라'는 인정미 넘치는 유혹의 손길이 그를 끌어댄다. 한 명을 뿌리치
면 또 한 명이 달려든다. 그래, 방으로 가자. 타인들의 방으로 가자.

숙박계는 형식, 끼적거리는 주소와 이름은 그에게 또 다른 익명성을 떠올리게 하였


다. 몸속에서 꿈틀대던 욕망은 이미 싸늘히 식어 있다. 짧은 흥정이 이루어지는 동안,
그는 마치 제 2의 자신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듯 느껴졌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꿈속에서처럼 들려온다. 이십대 중반의 여자. 철저하게 직업


적인 몸짓으로 핸드백을 내려놓고 한마디 말도 없이 옷을 벗어댄다. 멍하니 누워있는
그에게 다가가서 잘 일어서지도 않는 술 취한 성기에 능숙한 손놀림으로 노란 고무
를 덮어씌운다. 순순히 침대에 누워 다리를 벌리는 여자, 인형과도 같이 수동적인 몸
짓이다. 그는 애정도 없는 육체의 욕망을 위하여 그 여자의 위로 자세를 낮추었다.
본능적으로 손이 여자의 몸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여자는 감전이라도 당한 양 손을
뿌리치며 장화 신은 그의 중심만을 사용하기를 명령한다. 두 세 차례의 도전과 실패
를 거친 후, 얌전한 그의 욕망은 양손을 먼 곳에 던져두고는 하체만을 움직이기 시작
한다. 여자는 비로소 신음을 흘린다. 거짓의 샛노란 신음소리가 삐걱거리는 침대의
소리와 어울려 가까이 켜져 있는 살색비디오에서처럼 음란한 색조를 만들어서 작고
지저분한 방안을 가득 채운다. 그의 11번 손가락은 제대로 굳지도 않은 채 헐거운 여
자의 컵을 휘저으며 남자의 자존심이란 듯 규칙적인 흔들림을 행하고 있었다. 그러고
도 짧은 순간의 절정이 온다니…….

버려진 채 침대에 누워있던 그는 새벽을 틈타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도둑고양


이처럼 살금살금 여관이라 불리어지는 방을 빠져 나와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며 허
위허위 걸어갔다. 술이 서서히 깨면서 머릿속이 빠개지는 것 같다. 마침내 그의 방에
도달하여 쓰러져버리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담으로 둘러싸여져 있는 수많은 방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움직임


들이 그에게 심한 멀미를 주었다. 길거리에 걸어가는 여자들 중에서 그의 체중을 실
어주고는 몇 장의 돈을 챙겨갔던 그 여자를 만날까봐 섬뜩할 때가 있기도 하였다.

그것은 무엇일까 ? 무엇이 우리들의 삶을 이러한 방들로 에워싸여져 가게 하는 것


일까 ? 정신과 육체의 격리에 의한 형이하학적 현상일까 ?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반
란하는 인간들의 당당한 의지의 표명일까 ? 잘난 남자들의 겁 없이 발기하는 성기의
헛된 욕망일까 ? 돈과 사치로 치닫는 여자들의 계산된 합법적 상거래행위일까 ? 신
의 계시로 이루어지는 세기말의 처절한 심판의 한 종류일까 ? 그의 작은 머릿속의
궁리 짓으로는 끝내 답을 얻지 못하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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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작은 답을 구하러 광장으로 나가보려 한다. 아마 광장에는 누군가가 있을 것
이다. 누군가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가리키며 희망을 얘기해 줄 것이다. 고도(孤島)라
도 좋으니 광장으로 가봐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문득 가슴이 부풀어 온다.

어느새 일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집을 떠난 남자의 소식은 그 어떤 다리도 건너오지 못하였고,


남자의 여자는 오늘 밤에도 침대 위에서 아이와 함께 중력을 시험한 뒤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꿈
속의 바다를 항해 중이다. 망망대해에서 문득 단춧구멍만 한 분화구가 보이는 매우 작은 섬 하나
를 발견한다. 여자는 그 섬에 발을 디딘다. 한줄기 바람이 파도를 따라 다리를 휘감고 든다. 서서
히 섬이 위로 떠오른다. 여자는 발아래를 내려다보다가 화들짝 놀란다. 배불뚝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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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한차례 소나기가 퍼붓고 난 고속도로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번들거린다. 그는 속도를 시간당


120킬로미터로 유지하면서 달리고 있다. 부산으로부터 120킬로미터 지점을 지나는 중이다. 룸미러
를 힐끔 보니 꽁무니에 바싹 붙어오는 승용차 한 대가 있다. 운전석에 앉은 여자는 민소매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두 귀에는 제법 큰 귀걸이를 하고 있다. 그 옆에는 역시 민소매 차림에 운전자보
다는 다소 수수해 뵈는 여자가 한껏 웃음을 흘리고 있다. 빠른 물고기처럼 꼬리를 흔들며 차선을
자주 바꿔대는 모양이, 제법 운전에는 이골이 난듯하다.

그는 괜한 심술이 발동한다. 룸미러를 통해 여자의 차가 방향지시등도 켜지 않고 오른쪽 차선으


로 빠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는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의 차가 주춤한다. 그
럼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그의 차 꽁무니로 바짝 다가온다. 7월말, 본격적인 휴가철에 접어들었
지만 상행선이라 도로에 차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앞에 1톤 트럭이 느릿느릿 기다시피 달리고 있
다. 그는 트럭과 여자의 차 사이에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달린다. 다시 룸미러를 들여다보니
여자의 차는 금세 왼쪽 깜빡이를 넣고 있다. 그때를 놓칠세라 다시 차선을 바꾼다. 이쯤이면 여자
도 짜증이 날만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런데 룸미러 속의 여자 둘은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빼어 물고 있다. 게다가 운전하는 여자는 아예 비스듬히 의자에 등을 기댄 거만한 자세로 왼손만
으로 핸들을 잡고 있다. 그의 치졸한 방해 작전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자는 거의 습관적으로 앞차의 꽁무니에 달라붙을 만큼 속력을 내었다. 그는 그런 사람들의 심


리상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종종 당하는 일이라 비교적 무심한 편이
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괜한 짜증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근래 들
어 별것 아닌 일에도 쉽게 감정이 상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낯빛이 어두
워졌다면서 간이 나빠진 것 아니냐는 둥 걱정의 말을 던지곤 했다. 1년 전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
자신에게 지방간이 생겼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 더 맹렬해진 더위에 지친 수


많은 사람들과 식은땀을 흘리는 자동차들이 한 모금 물을 마시기 위해 휴게소 광장에 고개를 처
박고 있었다. 금강휴게소. 그가 알기로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상행과 하행이 한 곳에서 만나는 곳
이었다. 편의점과 식당 옆으로 모텔이 있었다. 고속도로에 모텔이라니. 담배를 꺼내 물며 그는 모
텔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었다. 여느 모텔들과는 달리 딱히 주차장이라 할 만한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사방이 주차장이니 굳이 주차장 같은 건 필요 없겠지. 모텔이란 데가 고단한 나그
네가 잠을 자는 곳만은 아니지. 은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선 익명의 섬이 필요한 거야. 그는 혼
잣말로 중얼거렸다. 무심코 모텔 입구 쪽을 바라보니 중년의 남녀 한 쌍이 주춤거리며 계단을 오
르고 있었다. 벌건 대낮에 낮잠이라도 주무시려나. 그는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쑤셔 박으며 걸음을
되돌려 커피 전문점으로 향했다. 삼삼오오 짝을 이룬 젊은 남녀들은 끈적거리는 더위에는 아랑곳
없이 서로의 벗은 살을 부딪치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일가족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은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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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점 뒤 난관에 기대어 건너편에서 낚시질에 여념이 없는 강태공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열치열이다, 중얼거리며 그는 뜨거운 커피를 주문했다. 습관처럼 다시 담배를 꺼내 물고 강가


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았다. 몇 명의 중늙은이들이 줄을 지어 어디론가 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낙타처럼 불룩한 배낭을 하나씩 등에 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강물에 발이라도 적시러 가는 듯했
다. 무작정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는 낙타를 몰고 가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도 된 양 거만하게
연기를 내뿜었다. 강가에도 사람들이 넘쳐났다. 강은 태양열에 벌겋게 익어버린 대지의 상처처럼
허연 뱃살을 뒤집는 강물을 끊임없이 흘려보내고 있었다.

- 저기요, 저기......, 잠깐만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처음엔 설마 자신을 부를까 싶어 먼산바라기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불쑥


한꺼번에 두 명의 여자가 그의 앞에 다가섰다.

- 우리 사진 좀 찍어 주실래요?

검푸른 선글라스에 민소매 둘, 설마 아까 그 여자들? 그는 자신의 직감을 믿는 편이었다. 카메


라를 들이밀며 여자가 빙긋 웃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 비웃음 같게도 보였다. 옆에 서 있는 다른
여자는 오른손으로 왼쪽 팔꿈치를 감싸고 난감한 미소를 입가에 달고 있었다.

한여름에 온천이라니, 쳇! 그는 거래처 추대리가 제안한 약속장소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


간은 이미 배꼽시계를 허기지게 만드는 저녁 일곱 시, 호텔 미궁 로비. 에어컨 바람이 싫고 담배
도 피고 싶어 호텔의 입구 옆으로 가서 끈끈한 밤공기에 묻어오는 자동차소리를 듣고 서 있었다.
삼삼오오 낄낄거리며 지나가는 남자들의 앞으로 살색이 과다한 전단지를 든 양복 입은 까까머리
청년이 불쑥 다가섰다. 보나마나 무슨 나이트클럽이거나 ‘수십 명의 아가씨들 항시대기’를 캐치프
레이즈로 내건 단란주점일 터였다. 남자들 중 비교적 어려 보이는 한 명이 전단지를 받아들고 유
심히 내용을 탐독하였다. 다른 치들은 여전히 낄낄거리며 담배를 꺼내 물거나 침을 내뱉었다. 건
너편 신호등 앞에는 거의 벌거벗다시피 차려 입은 여자 세 명이 서로 엉덩이를 두들기며 호호거
리고 있었다. 그 앞으로는 몇 대의 빈 택시들이 일자진을 치고 더위에 지친 기사들의 머리통을 보
도 쪽으로 내걸고 있었다. 띠리리 띠리리- 그의 휴대폰이 울기 시작했다. 추대리의 호들갑스런 목
소리가 거리의 소음 속에서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십분 만 더 기다려 달라며 곧 죽여주는 곳으로
모시겠노라며 다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술 마시는 노래주점 시마. 주점이 술을 마신다는 것인지 노래가 그렇다는 것인지, 뭐야 이건. 그
는 추대리의 우악스런 손에 끌리다시피 하여 거울로 도배를 한 복도를 지나 황금빛 실내등에 야
릇한 냄새를 풍기는 밀실로 들어갔다. 아무리 봐도 스무 살쯤 되었을까 싶은 남자 종업원이 허리
를 굽히며 주문을 받았다. 십 팔년 산이 좋겠지요? 추대리는 그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인지 일방적
인 통보인지 미처 파악을 하기도 전에 일사천리로 두 명의 도우미 아가씨까지 일련의 거래를 끝
마치고는 걸쭉한 웃음을 배경음으로 깔며 그에게 이미 테이블 위에 도열해 있던 맥주를 따랐다.

- 이번에 출시된 물건, 정말 제대로 된 물건입니다요, 헤헤헤. 저를 믿고 계약서에 도장만 쾅 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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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주신다면 이 한 몸 받쳐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요, 자! 건배 하실까요?

- 그동안 추대리가 공급해준 제품들이 그나마 하자가 없었기에 이번 물건, 좀 위험부담이 크지


만 모험하는 셈 치고 계약하고자 하는 것이 민사장님의 최종 결정사항입니다. 단, 물량이 딸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주시고 또한 사후서비스 체계를 만드는 데 적극 협조해 달라는 말씀을 명심
해 주세요.

- 아, 그런 문제라면 걱정을 긁어모아 스위스 은행 비밀금고에 영치해 두셔도 됩니다요! 저희가


비록 어둠의 자식들 출신이지만 그것 하나만큼은 일절의 차질이 없도록 최우선 행동지침으로 삼
고 있습니다요! 자자, 이러지 말고 한 잔 주욱 들이키시고....... 이제 처자들 들어오라고 할까요?

창을 두들기는 굿거리장단의 빗소리에 그는 문득 잠이 깨었다. 심한 갈증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


려는데 오른쪽 팔이 침대에 못 박힌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다가 어
둠 속에서 거리를 알 수 없는 허공에 작은 초록빛이 점멸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어디에선가
로부터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덮쳐왔다. 냄새 속에는 분내와 살내가 섞여 있었다. 오른쪽
팔을 누르고 있는 것의 정체를 냄새로 알아챘다. 그는 벌거벗은 채 자신의 팔을 베개 삼아 곯아떨
어져 있는 여자를 간신히 벽 쪽으로 밀쳐놓았다. 텔레비전 리모컨과 성냥 따위가 올려져있는 작은
탁자를 더듬어 담배와 라이터를 찾았다. 여자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갈증보다 흡연욕구
가 먼저 그를 재촉하였다. 라이터 불을 켜자 여자의 군살 없는 나신과 낯설지 않은 얼굴의 윤곽이
어둠의 경계선을 그었다. 여자의 검은 머리칼은 어둠 속에 잠겨 방 전체가 얼굴의 배경이 된 듯하
였다. 하필이면 이 여자가....... 그가 내뿜은 담배연기가 여자의 몸을 따라 브라운운동을 하면서 열
려 있는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 가만 있어봐, 이 년아!

- 벌써 몇 번째야? 너 때문에 거기가 찢어지겠다!

- 글쎄, 한번만 더 하자니까. 찢어진 건 꼬매면 될 터이고.......

벽은 있으나마나 한 것인지 옆방의 생방송이 그대로 들려왔다. 끈적거리는 음색이 빗소리를 타


고 디딜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추대리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 지금 몇 시죠? 나 좀 봐, 얼마나 잔거야.......

- 이제 깼네. 네 시.

- 아휴, 좀 깨워 주시잖고.

- 침까지 흘리며 깊이 잠들었던데, 차마 깨울 수가 있나.

- 나, 또 일 나가야 한단 말예요!

- 23 -
- 그건 댁 사정이고!

- 근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죠?

- 글쎄....... 난 오늘 처음 와본 술집인데.

- 아니, 여기 말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그러니까 금강 휴게소.......

- 날 언제 봤다고 그러셔?

- 이상하네, 은서랑 부산 놀러갔다 돌아오는 길에 분명 거기서 아저씨랑 똑 같은 사람 봤었는


데....... 강가에서 사진 좀 찍어달라고 했던 것, 정말 기억 안나요?

- 난 몰라. 일 나가야 한다며, 빨리 씻고 가기나 하셔!

- 쳇, 내가 이런 일 한다고 실망하셨나, 딱 잡아떼시네. 아님 말구!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신을 감쌀 정도의 큰 수건으로 중요 부위만을 가리고 욕실로 사라


졌다. 어느새 옆방의 방아 찧는 소리는 그쳐 있었다. 은서라 불렸던 여자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
리지 않았다.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비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5층에서 내려다뵈
는 새벽거리에는 원색의 불빛들이 빗물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건너편 전봇대를 붙들
고 쪼그린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노란 비옷으로 중무장한 한 남자가 50시시 오토바
이를 타고 물을 튀기며 그 옆을 지나갔다. 바닥에 고여 있던 빗물의 수면이 일렁거리자 갖가지 색
의 불빛들이 뒤섞이며 이름 모를 화가의 추상화를 그려놓았다.

- 글쎄, 안 된다니까!

- 제발 한 번 만요. 갑자기 이곳이 답답해 미치겠거든요.

다시 일을 나가야 한다던 여자가 샤워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자신을 아무데나 데려가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은 매여 있는 몸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 쉴 수 있다며, 오늘 하
루쯤은 그깟 돈 잃어버린 셈 치고 푹 쉬고 싶다는 것이었다.

- 은서라는 친구랑 부산에서 실컷 놀다 온 것 아니었던가?

- 부산에 간 건 맞지만, 놀러간 건 아니었어요.

- 어쨌든 여기 돌아오기 전에도 쉬었는데 오늘 또 쉬려는 것 아닌가?

- 그야 제 맘이잖아요. 오늘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고 싶어요.

- 24 -
- 그럼 집에 가서 잠이나 푹 자시지, 왜 처음 본 나를 따라 오겠다는 것인지.

- 방콕은 싫어요. 드라이브하고 싶어 그러니 나 좀 아무데나 데려가줘요.

- 차가 있는 것 같던데, 왜 직접 운전해 마음 내키는 대로 가시지.

- 어머! 제가 차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 봐요! 금강 휴게소에서 날, 아니


은서와 같이 만난 적 있죠?

- 어휴, 또 그 얘기네. 차야 웬만하면 한 대씩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요즘 세상에?

- 이보셔요, 우리 같이 몸으로 먹고 사는 여자가 차를 가지기 쉬운 줄 아세요?

- 그럼, 부산에서부터 내 차 뒤를 줄곧 따라붙으며 심심하면 앞차를 추월하던 잘 빠진 차의 주


인은 누구였더라?

- 아저씨! 드디어 바른대로 말하는 군요! 그 봐요, 분명 만난 적 있다고 했잖아요! 거짓말의 달


인이네, 이 아저씨. 그 차는 렌트한 거였고, 벌써 반납 했다고요! 아휴!

갑자기 여자가 그의 무릎을 내려친다, 고개를 팽 돌리며 눈을 흘긴다, 그러면서도 마침내 범인


을 찾고 만 여형사라도 된 양 어깨를 으쓱거리며 헤헤거리다가 문득 벌거벗은 자기 몸을 양팔로
감싸 안더니 급히 침대보를 끌어 어깨까지 뒤집어썼다. 갓밝이가 동트는 창가를 한참동안이나 바
라보던 여자는 이윽고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은서라는 여자의 오빠가 부산항 부두에서 막일을 하다가 실족하여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일 년
전부터 도우미 소개소를 통해 알게 된 두 사람은 어릴 적 친구라도 만난 듯 금세 친해졌던 터라,
며칠 전에 은서를 따라 부산까지 가서 장례식을 치루고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친오빠는 아
니라고 했다. 은서가 부모에 관한 기억 없이 홀로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밤 하교 길. 어
두운 골목에서 하마터면 괴한 세 명에게 겁탈을 당할 뻔 했는데 홍길동처럼 어디선가 나타난 한
남자가 은서를 구해주었다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중학교 들어갈 즈음 동네 신발공장에 불이 나서
불길이 번진 인근 주택들 중 하나였던 자기 집이 홀라당 타버려 그의 부모와 일곱 살 난 여동생
이 화마(火魔)의 인질로 잡혀가버렸다고 했다. 은서와 남자는 오누이처럼 지내게 되었다. 은서가
전문대학에라도 가야한다며 남자는 그동안 해왔던 풀빵장사를 접고 일당이 센 부두 막일을 나가
기 시작했다. 은서는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도 자신의 고향이 대전이라는 사실을 믿어 왔었고, 마
침내 대전에 있는 NK대학의 합격통지서를 받고 오빠를 떠나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은서의 오빠는
매달 어김없이 용돈을 부치기 시작했고, 비가 와서 일거리가 없는 날에는 대궐 같은 술집의 마당
쇠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다.

- 한 편의 소설이네.

- 25 -
- 그렇죠? 그런데 실화라는 사실이 안타깝죠.

- 그런데 왜 그 오빠가 죽은 거야?

- 그런데 왜 저한테 반말을 하세요? 아까는 말을 높이시더니.

- 나보고 아저씨라며?! 아저씨가 어린 아가씨한테 말 좀 놓으면 안 되는가?

- 제가 어리긴 뭘 어려요! 이래 뵈도 스물 하고도 네 살이라고요!

- 알았어, 알았어. 어리다는 건 취소. 그런데 아직 질문에 답을 안 한건 알지?

- 아휴 바보 아저씨, 실족해서 바다에 빠진 것이라고 했잖아요!

여자는 ‘실족’이라는 단어를 마른 장작 꺾듯 뚝뚝 끊어 말했다. 은서가 대학에 입학한지 6개월여


만에 부산에서 오빠가 찾아왔었단다. 은서가 살고 있는 자양동 지하 셋방은 밤 9시가 넘었는데도
열쇠가 채워져 있었다. 한여름 밤의 모기떼에게 온몸을 맡긴 채 셋방 앞에 퍼질러 앉아 있었는데,
은서는 자정이 다 되도록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총각, 누군지 모르겠지만 은서학생 기다리나 본
데 그냥 돌아가쇼. 그 뭐, 술 먹는 주점인지 뭔지 하는데 돈 벌러 가서 새벽에 들어올 테니. 옆집
사는 아줌마가 은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양 조소 섞인 표정으로 말을 내뱉고는 손에 든 검
은 비닐봉지를 바스락거리다가 대문을 쾅 닫고 집안으로 사라졌다.

- 그런데 유나는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건지 물어봐도 될까?

전군가도로 진입하면서 그가 물었다. 여자는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 차안에 울리는 유라이어
힙(Uriah Heep)의 ‘July Morning' 간주에 맞춰 손바닥으로 차창을 두들기고 있었다.

- 글쎄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밀실 같은 모텔에 처박혀 있다가 지금은 이 길을 달리고 있는 상


황이랄까요?

유나가 열두 살 무렵이던 어느 날, 뒷마당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느닷없이 굵은 빗방


울이 듣기 시작했단다. 아빠는 골방 아랫목에 누워 숨바꼭질 하듯 기척도 없고, 집 나간 지 석 달
이 넘은 엄마는 편지 한 장 없었단다. 유나는 하늘과 땅을 이어붙이기라도 할 듯 퍼붓는 빗속에서
흠뻑 젖고 있었다. 얇은 면T셔츠가 부쩍 제법 봉긋해진 가슴에 착 달라붙었다. 미처 비를 피하지
못한 무당벌레 한 마리가 마당 흙바닥 위에 선을 그으며 SOS를 타진하고 있었다. 유나는 벌레가
겨우 그려내고 있는 상형문자를 순식간에 덮쳐 지워버리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뜨거운 입김이 귓속을 파고드는 것을 느끼는 순간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동네 양아


치를 자처하며 거들먹거리고 다니던 추봉길의 실핏줄 도드라진 눈알이 비에 젖은 유나의 온몸을
훑어 내리기 시작하였다.

- 26 -
그날 밤 유나의 아버지는 골방 바닥과 벽에 핏물로 혈화(血畵)를 그려놓고 눈을 감았다. 유나는
추봉길의 손에 끌려 놈이 마을을 떠나 새로 정착한 인근 관광특구의 지하세계로 내려갔다. 유나는
그 후로 추봉길의 비호를 받으며 2년제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 처음 몇 년간은 밤마다 추봉길
의 손길이 유나의 몸을 탐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갈수록 추봉길이 유나의 비위를 맞
추는 형국이 되었다. 지하세계에서 유나가 알지 못하는 일련의 변화가 바람을 몰고 다니더니 추봉
길을 제법 중책의 자리에 앉혀 놓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을 죽으라고 따라다니는 여자도 한
명 불러왔던 것이었다. 추봉길은 자신이 속해 있던 조직이 와해되어 한동안 그 여자와 제주도로
잠적했었다. 유나는 추봉길의 부재가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냥, 비가 오면 그저 맞으면 될 뿐이었다. 유나는 언제든 흠뻑 젖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끔 열두 살 이후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마의 얼굴이 지하세계의 유리벽 모퉁이에 되비치는 갖
가지 색의 불빛과 함께 환영처럼 나타났다 사라질 때면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의 독한 술로 머릿
속을 적셔버리곤 했다.

- 야, 바다다!

- 바다 처음 보나, 사이드미러 안 보이니 좀 가만히 있지. 바다를 치받아버리기 전에.

- 칫, 바다를 그런 식으로 모욕하지 마세욧!

- 어째 하늘이 심상찮은데....... 또 한바탕 쏟아지려나?

- 바다색이 잿빛이네요. 남해바다랑은 딴판이네.

- 서해로는 와본 적이 없는 모양이야?

- 글쎄요, 어쩐 일인지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담배 가게는 해변에서 제법 멀다. 거무튀튀한 파도가 혀를 날름대는 바닷가에 쪼그려 앉아 있는


유나를 먼발치에서 발견하고 그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갑자기 우박 같은 장대비가 쏟아져 내
린다. 제길, 우산도 없는데....... 그는 냅다 달린다. 여자는 파도에 이미 아랫도리가 젖은 데다 머리
위부터 등허리까지도 수직하강에 신이 난 빗방울들의 새로운 길이 되어가고 있다. 그는 바람이 불
지 않을 때 빗방울이 대략 시속 40킬로미터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장대비는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했는지 금방 시속 5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내려 박힌다. 유나는 좀처럼 꼼작하지 않고
무언가를 골똘히 바라보는 중이다. 빗방울들이 수면을 수많은 물결무늬들로 헤집어 놓는 가운데
네모반듯한 종이 한 장이 떠 있다. 언뜻 봐서는 그냥 흔한 종잇조각에 불과한데 한 발짝 다가서서
유심히 바라보니 인화된 사진이다. 배경은 물기가 번질거려 잘 뵈지 않지만 희미하게나마 민소매
차림의 두 여자가 서 있는 장면이란 것을 분간할 수 있다. 유나가 빗소리의 간극에 맞춰 나지막하
게 말한다. 은서를 걔 오빠에게 보내 주려고요. 유나는 왜 같이 보내는 거야, 라고 물어보려 했으
나 그는 마른침만 꿀꺽 삼키고 만다. [끝]

- 27 -
클럽, OGC

어서 오게. 우리 클럽에 가입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자네도 감을 잡았을 테지만, 우리


클럽은 비밀조직일세. 지금 이 순간부터 각별히 보안에 유의하길 바라네. 만에 하나 자네로 하여
불미스러운 보안사고가 생겨서 그 일이 외부로 새어나가게 된다면 그땐 각오해야 할 것이네.

자네의 마지막 경기는 새벽 2시 40분에 시작되었지. 나는 그날 일부러 잠을 깬 것은 아니었네.


꿈을 꾸다가 가위에 눌려 눈을 뜬 뒤로는 도무지 다시 잠들지 못해 텔레비전을 켠 것이었네. 자넨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더군. 몇 번의 실수도 눈에 띄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동안 너무나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 주었네. 평소 국내 리그전에서도 자네를 눈여겨 보았었네만, 이번의 국제대
회에서 자네가 보여준 투혼과 열정은 나의 잠을 멀리 쫓아버리기에 충분했네.
후반 40분, 1대 1로 팽팽하게 맞서가던 가운데 자네의 소속팀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할 때
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더군.

경기 중간 중간에 관중석을 비춰주는데, 우리 클럽 회원들 몇 명을 발견했네. 그들의 벌겋게 상


기된 표정에서, 그들이 자네와 자네 동료들의 뜨거운 열정에 푹 빠져 있음을 알 수 있었네. 1호, 3
호, 7호, 그리고 19호. 네 명의 회원들은 각기 조금씩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붉게 들끓어 오르는
응원열기에 휩싸여 있었네. 이번에 설마 20호 회원이 나오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듯 했
네. 오로지 승리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겠지. 나도 마찬가지였네. 우리는 19호로 만족한다고 생
각해 왔네.
대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쯤 우리는 대흥동 ‘나비는 꿈을 접지 않는다‘라는 술집에서 간만에 모
임을 가졌었네. 거기서 우리는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막내 19호에게 격려의 술잔을 건네기
도 하면서 더 이상의 회원은 생기지 않기를 염원 했었다네. 모처럼 만났지만 술을 마시는 내내 진
지했고 가끔 제법 긴 침묵이 흐르곤 했지.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이번에 20호가 나오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신가요?”
꽤 오랜 침묵을 깬 것은 18호였다네. 그는 모임을 위해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고 했
네. 원로회원인 1호, 2호, 3호 회원들은 벌써 술에 취했는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꾸도 없었
지. 순번으로는 막내이지만 나이는 18호보다 두 살 많은 19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네.
“정말, 그렇게 되면 우리 클럽 회원으로 자동가입이 되는 건가요?” 손에 든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
면서 19호가 말했네.
“글쎄, 그건 두고 봐야 하겠지. 우리 같은 사람이 더 이상 나오지 말란 법은 없을 테니, 만약 이
번에 또 한 명의 인간실격자가 탄생한다면 긴급회의를 열어야겠지.” 모임에서 거의 말이 없던 4호
가 담배를 꺼내 물며 조용히 말했네. “난 사실 20호 회원 입회는 반대였네. 더 이상 우리 조직이
커지지 않기를 바랐지. 1호부터 19호까지 한 명씩 회원이 늘 때마다 세상 사람들의 까닭 모를 분
노가 눈사태처럼 커지는 것 같았거든. 만약 우리가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전락(轉
落)의 가시밭길을 걷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우리는 단지 우리 팀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것밖
엔 없는데, 단 한 번의 실책으로 이렇게 비밀조직을 만들어 사람들의 눈치나 보면서 살아가야 한
단 말인가 싶었네.”

- 28 -
후반 41분, 자네는 몸을 반원형으로 돌렸네. 힘껏 발길질을 했네. 시시포스가 산 정상을 향해 커
다란 바위를 밀어 올리던 힘으로.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태운 기운찬 말들이 우렁차게 지축
을 울리듯. 폼페이를 땅 속으로 파묻어버린 베수비오 화산 폭발처럼.
그것이 부메랑처럼 되돌아 올 줄을 자네나 수만의 관중들이 어찌 알 수 있었겠나. 그물의 중력
장을 뒤흔들어 놓은 자네의 열정이 결국, 경기장을 에워싸고 있던 군중들로부터 분노의 화살을 맞
게 할 줄을 자네가 어찌 알았겠나.

어쩌면 우리 클럽의 5호나 6호쯤 되었을 지도 모를 한 사람은 누군가의 총에 맞아 땅속에 파묻


히고 말았던 일이 있었지. 지금 우리 클럽의 회원들은 운이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네. 비록 변변치
못한 임시직이지만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고, 보안유지를 잘 해서 그런지 어느 날 갑자기 어처
구니없는 살해를 당하지도 않았으니 말일세.

자네가 실책을 한 뒤 불과 5분여 동안 자네의 마음속에 몰려들었을 암울한 먹구름 같은 좌절감


을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네. 어떻게든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자네의
두 다리를 보면서 눈시울이 화끈해졌었네. 관중석으로 부터 쏟아지는 무수한 야유와 비난의 화살
을 대신 막아주고도 싶었네.
그러나 나나 우리 회원들 누구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네. 자네의 눈빛과 얼굴 표정은 지구라도
짊어지고 있는 듯 보였네. 슈퍼맨이 지구의 자전방향을 바꿔놓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깨에
짊어지지는 못하겠지. 자네는 그 짧은 순간에도 몇 번이나 지구를 들었다 놓은 것 같았네.

조만간 자네의 가입 환영회를 열 계획이라네. 우리 클럽의 이름은 OGC, 'Own Goal Club'의 약
어라네. 너무 단순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우린 만장일치로 이 이름을 받아들였네. 'Only God
Criticizes'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네. 우리는 자네가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네. 부디 딴 마음 먹지 말고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기 바라네. 때가 되면 자네를 다시 부르
겠네.

귀국 후 갑자기 자네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을 때, 어느 날 자네의 아내와 아이들을 만난 적


이 있었네. 사흘 밤 사흘 낮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자네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입술이 바짝
타들어가고 눈빛은 생기를 잃어 산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네. 오로지 자네가 아무 일없이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고 있다 말했었네.
물론 자네가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채로 등산객에게 발견되어 응급실로
옮겨졌다가 깨어났을 땐 가족들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지.
그 뒤로도 자네의 부재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선 가족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네. 자
네는 살아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중력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라네.
그 중력장이 흩어지거나 사라지고 나면 주변의 모든 것들은 혼돈의 검은 구멍 속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네.
자네가 그동안 맺어온 가족과 친지들과 지인들과의 관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그물망
으로 이어져 있다네. 그것의 중심에 자네가 있는 것이네. 자네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따라서 흔들
릴 것이네. 경기에서의 자책은 불가항력(不可抗力)이라는 말로 변명할 수 있네. 그렇지만 자네가

- 29 -
주변사람들과 만들어 온 그물망 앞에서 끊임없이 자학하고 무시로 좌절하여 만들어낸 자책은 누
구에게도 용서를 받을 수가 없네.

다시 한 번, 자네가 우리 클럽에 가입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휴대폰이나 메일, 꼭 열


어두게나. 언젠가는 자네를 부르는 메시지가 갈 것이네. 그때까지 무탈하시게나.

새벽 다섯 시. 문득 잠에서 깨었다. 늙었나 보다. 부쩍 아침잠이 없어졌다. 창가를 보니 희뿌연


여명이 검푸른 민무늬 커튼의 끄트머리를 타고 오르는 중이었다. 날마다 일찍 일어나는 새 몇 마
리가 재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문 밖 바로 2미터 앞이 대문이다. 어느새 옆집 강노인의 자
전거 끄는 소리, 건넛집 고3 미진이 학교 가는 소리 등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내 귀를 만진
다. 뱀처럼 스윽 대문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오늘신문' 배달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하품을
하며 신문을 들어올렸다. 문득 불길한 예감의 비린내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빼곡한 문자의
숲 속에서 불현듯 20호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이지 않는 잉크로 그린 그림처럼 떠올랐다.

30대 초반의 남자가 20일 오후 4시 대전 중구의 아파트 20층에서 투신자살했다.

경찰은 타살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며 자살로 결론짓고 원인을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


다. 목격자들도 “쿵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한 남성이 화단 철조망 위에 떨어져 있더라.”며
남자가 투신 후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전했다.

남자는 자살 한 달 전 블로그를 통해 "내가 산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가? 난 죽으라고 뛰


었을 뿐이었다. 아무도 내 발자국 따위에는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등의 글을 남겨 불안
한 심리상태를 표출한 바 있다. (I-GO 뉴스팀)

20호가 투신한지 달포쯤 지난 어느 날 오후 백곤(白鯤)이라는 사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집에서


북서쪽 방향에 있는 한 타이어공장 뒤로 흐르는 금강과, 대전 시내 곳곳을 굽이쳐 흐르는 갑천(甲
川)이 만나는 합수머리 일대에서 낚시를 하다 우연히 만나게 되었던 40대 초반의 노총각이었다.
백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전부였다. 백곤은 예전에 함께 낚시를 했던 곳으로 나와 달
라고 말했다. 그렇잖아도 시즌이 끝나서 무료하던 참이라고, 채비를 하여 가겠노라고 말해주었다.
백곤은 굳이 채비를 할 필요는 없다고, 그냥 이야기 할 것이 있다고만 하고는 전화를 뚝 끊었다.
백곤은 비교적 넓은 공터가 있는 연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 세 대의 낚싯대가 비
스듬히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그 뒤로는 땅속 깊이 박아놓은 우산모양의 햇빛가리개도 보였다.

- 낚시를 하고 있었던 건가?


- 아뇨, 제 것이 아니고 어떤 남자의 것인데 벌써 보름 째 이렇게 펼쳐놓고 있어요.
- 어떤 남자라니, 어디 갔는데?
- 글쎄요, 저도 그것이 궁금해서 어르신을 뵙자고 한 것이지요.
- 내가 그 남자의 행방을 어찌 알겠나, 이 사람아.
- 한동안 어르신께서 이곳에 거의 매일같이 오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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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요즘에 들어선 유식한 말로 두문불출이었네만. 자네야 말로 보름 내내 이곳에 왔단 말
아닌가?
- 아뇨, 저야 일주일에 두어 번 왔는데, 보름 전부터 오늘까지 계속 저래서.......

백곤의 말로는 어느 날 처음 그 남자를 보았는데 눈불개 비슷하게 생긴 45센티미터 가량의 물


고기를 잡아서는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한다. 무슨 어종이냐 물었더니 숭어라면서 몸에 좋으니 껍
질을 벗겨 구워 먹을 것이라 했단다. ‘숭어는 바닷물고기인데.......’ 백곤은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우선 자신의 조과(釣果)에 욕심이 나서 몇 분 더 남자의 이상한 행동을 지켜보다가 자리를 떴다고
했다.

백곤이 다시 남자를 본 것은 시월 중순 어느 주말, 밤 아홉 시쯤이었다. 강의 상류에서 한참 낚


싯줄을 던지다가 도통 입질을 받아내지 못해 의기소침하여 터벅터벅 합수머리 쪽으로 내려오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남자의 낚시도구가 펼쳐진 곳 진입로에서 걸음을 멈췄다. 혹시 남자가
있을까봐 플래시를 끄고 발소리를 죽인 채 강 쪽으로 다가섰다. 마침 보름에 가까운 날이라 주변
이 제법 밝게 보였다. 물살은 여느 때와 달리 잔잔했다. 바닥을 유심히 살피는데 문득 파란색의
비닐장판 같은 게 보였고 그 위에 사람의 머리 형상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
남자임에 틀림없다고 백곤은 생각했다. 다소 놀라 뒷걸음질 쳐 그곳 길가에 세워 둔 차로 돌아와
급히 시동을 걸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제 제법 추워졌는데 저렇게 잠을 자려고 하나.......’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백곤은 아무 생각 없이 다시 그곳을 찾았다.
남자는 없었다. 줄무늬 햇빛가리개와 세 대의 낚싯대와 파란색 비닐장판은 그대로였다. 장판 근처
몇 개의 돌덩이로 둘러싸인 움푹한 곳에 제법 굵은 나뭇가지들이 걸쳐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아래 시커멓게 타버린 나뭇재로 봐선 남자가 밤새 불을 지핀 모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갈대들이 바람에 서걱대고 제법 흐드러진 코스모스가 고추잠자리를 유인하는 몸짓을 해대었다. 남
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파란 비닐장판 위에 작은 빨간 사과 한 알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껍질이 그대로인데다 작고 너무 선연하게 붉어서 마치 플라스틱으로 만든 아이들 소
꿉놀이용 과일처럼 보였다. 한 발짝 다가가서 사과를 들어보았다. 뜻밖에도 그것은 사과가 아니라
축구공 모형이었다.

백곤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 자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구룡(九龍)마을이라고 아는가?


- 네, 알지요. 그 마을 위 산 속에 구룡지라는 작은 호수가 있잖아요.
- 그래, 그렇지. 그곳에 어떻게 구룡지가 생기게 되었는지 그 유래는 아는가?
-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군요. 그런데 그건 왜요?
- 그냥, 어쩐지 본래는 암수 다섯 마리의 용이 살았던 십룡(十龍)마을이었는데 무슨 일 때문인지
수컷 한 마리가 떠나버려 구룡마을이 된 것은 아닐까 싶었지. 짝을 잃고 홀로 남은 한 마리의 암
용은 어떻게 되었을까 늘 궁금해서 말이야.
- 에이, 어르신도! 지금 이곳에 머물다 사라진 남자 이야기를 하던 참인데 뜬금없이 웬 구룡 이
야기를 하고 그러세요.
- 그러게 말일세,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나는 걸까, 나도 모르겠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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