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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1.불의 날
든 글
파리낚시 ......... 3
루어 ......... 8
바다로 간 배불뚝이 ......... 16
소나기 ......... 22
클럽, OGC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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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낚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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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계단의 바닥에는 물이끼들이 두꺼운 겉켜를 이루어 짙은 초록빛을 띠었다. 물살이 빠르게 흘
러내리는 가운데, 뭔가 검은색의 덩어리들이 잽싸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기들이 펄떡거리는 게 보
이지요?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르게 동료 한 명이 지나가면서 말을 걸었다. 네에? 저게 물고기란
말입니까? 네, 하도 빨라서 얼핏 봐서는 알아보기 힘들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고기들이랍니다. 물
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실력이 보통 아닌데, 대 부분은 새들의 먹잇감이 되죠. 물론 제방 안쪽으로
까지 뛰어오르지는 못하지요. 시력이 나쁜 건지, 쏟아지는 햇살이 반사되어 그런지 좀체 물고기
형상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걸음을 옮길 때마다 후드득 도망치는 흑색 덩어리들의 정체가
물고기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처음 느꼈었던 당혹감은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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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 물속을 걸어갔다. 야, 야! 거기 서! 어디로 가는 거야? 몇 발작 가지 않아 왼쪽 슬리퍼도 발견
하였다. 두 개의 남색 슬리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성능 좋은
배가 되어 둥둥 떠내려갔다. 그러다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급류를 타고 더 넓고 깊은 곳으로 휙 사
라졌다. 발바닥이 아픈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슬리퍼들의 꽁지를 쫓아갔다.
앗! 바닥이 푹 꺼지는 느낌에 화들짝 놀랐을 때는 이미 늦었음을 알았다. 순간 몸의 무게 중심
을 잃고 휘청거렸다. 첨벙, 하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한여름의 미지근한 강물이
몸의 모든 구멍들을 찾아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나는 여태껏 헤엄을 칠 줄 모르는 바보 같은 물고
기였음을 상기하였다.
누군가 가만히 몸을 흔드는 느낌에 눈을 떴다. 다리에 쥐가 났는지 지글거리며 빠르게 오가는
혈류를 느꼈다. 앳되어 보이는 한 여자가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인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귀청을 울리지는 못하였다. 눈을 뜨셨네요! 정신이 좀 드세요? 천 마리의 물고기가 차례로
물 위에 떠올랐다가 돌아오는 시간만큼이나 잠들어 계셨어요. 전혀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눈치 챘
는지 여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좀 더 쉬셔야겠어요. 나중에 다시 와볼게요. 여자가 떠나고 나
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평 남짓한 방이었다. 가구라고는 침대 옆에 있는 동그란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역시 동그란 형태의 문이 하나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벽이 묘한 곡면을 이루고 있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벽에 저절로 생긴듯한 빗금들이 보였다. 문득 머릿속에서 뽀글거리는 물소리
가 들렸다. 들렸다기보다는 작게 움찔대는 진동들이 느껴졌다. 비 오는 날 강가나 호숫가에서 보
았던 물위의 파원들이 원무를 추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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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여
자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이제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를 못 들으시는 것 같아 텔
레파시로 말할게요. 제 친구랍니다. 그런데, ······, 그는 ······, 죽었어요. 그는 언제나 이곳을 떠나고
싶어 했었어요. 전 그를 사랑했지만, 그리고 그도 저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몇 번씩이나 저와 이곳을 떠나 물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곤 했지요. 그런 날이면 그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 밤을 새다시피 물 밖 세상의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처음에는 너무 신기하고 재
미있어 그의 이야기 에 푹 빠졌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입 주위가 피범벅이 되어 돌아 왔어
요. 지독한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져서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지요. 그리고 그는 그대로 쓰러져버
렸어요. 다음날 정신을 차린 그로부터 상처를 입게 된 경위를 듣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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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을 추스르고 다시 이젤 앞에 섰다. 여자는 동그란 의자에 앉았다. 여자의 텔레파시가 계
속되었다.
그가 그런 사고를 당하고 돌아온 뒤로도 몇 번 더 어딘가로 사라졌다 며칠 만에야 돌아오곤 했
어요. 깊숙하게 박혀 마치 그의 몸 일부가 되어버린 듯 한 작은 물체를 입 속에 지닌 채 말이죠.
저는 너무 속이 상해 그가 어디로 가건, 언제 돌아오건 신경을 끊어버렸어요. 그렇지만 제 마음
속에는 언제나 그에 대한 생각뿐이었지요. 그는 점점 밖으로 나가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언제나
침통한 표정으로 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지요.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아예 침대에 누워서 일어
나지 않았어요. 가끔 그에게 가보면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천장만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어
요. 하루는 그가 측은하게 생각되어 그의 여자가 되리라 다짐을 하였지요. 침대로 올라가서 곁에
누워 그의 욕망을 자극했어요. 그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저의 혀로 적셔주었지요. 그런데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오로지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는 이미 시체나 다름이 없었어요. 결국 저
는 비참한 심정으로 그의 방을 나왔어요. 그날 이후 다시는 그의 곁으로 가지 않으리라 결심을 하
면서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방에서 고약한 냄새가 새어나와 급히 들어가 봤어요. 침대
는 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위에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집어삼킨 듯 한 얼굴로 그가 죽어 있었어
요. 방바닥에도 핏물이 흥건했는데, 문득 불빛에 반짝이는 작은 물음표 모양의 물체가 보였어요.
그가 입속에 품고 있던 것이 분명했어요.
다음날 이젤이 있던 옆방으로 가봤더니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젤에 걸려 있는 그림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 그림 속 물고기 얼굴 남자의 건장한 두 다리 사이에는 거꾸로 선 물음표 모
양의 낚싯바늘이 덧칠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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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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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처럼 한곳으로 몰려들었더군.
조금씩 풀어지는 가 싶으면 다시 더 엉키고, 계속 서 있으니 다리가 아파 쪼그리고 앉아 하다보
면 쥐가 나려 하고, 그렇게 삼십 분 넘게 씨름을 했지. 간간이 물 위로 고기가 폴짝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어. 흔히 사건의 실마리를 푼다는 표현들을 하곤 하잖아. 실의 시작과 끝, 나는 실마리
에는 관심 없었고 그저 손이 가는대로 계속 엉킨 고리들과 교감하고 있었지.
점점 물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고 주변의 배경은 아웃포커스로 흐려졌어. 내가 작업을 하는
동안 이상한 벌레 한 마리가 다리를 타고 올라왔어. 개미 한 마리는 겁도 없이 왼쪽 팔뚝을 타고
오르다 꽉 깨물기도 했고.
“아얏!”
“놔! 놔란 말이야!”
“어딜 가려고?“
“내가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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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졌다. 여자의 그날이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여자는 한껏 기분이 좋은 상태로 욕실
을 나왔었는데 문득 두 다리를 꼭 붙이고 두 팔은 엑스 자로 가슴에 솟아나 있는 두 개의 둥근
문고리에 빗장을 걸었다. 어색한 침묵 끝에 남자의 단단하게 달아오른 열쇠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
하였고, 서로 등을 돌린 채 각자의 방향에서 시야를 가로막는 사방연속무늬 속에 갇혀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자는 지독한 논리증후군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남자를 밴댕이로 변신
시키는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남자는 질투의 힘으로 버텼고, 마침내 여자는 남자를 내팽개치고
방을 뛰쳐나가버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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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승리, 올림픽 야구 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보고나서야 긴 하
루의 막을 내릴 수 있었지. 그들의 금메달이 내 가슴에 묵직한 느낌을 더하더라.
그날 밤에, 이승엽이 때린 홈런볼이 하늘을 날아가면서 물고기로 변신하는 꿈을 꾸었지. 하늘을
나는 물고기라니, 다음엔 물속이 아니라 하늘에 낚싯줄을 던져야 할까봐.
여자와 연락이 끊어진 지 어느새 천 일이 넘었다. 남자는 여자의 그 남자가 인연의 끈을 아직까
지 놓지 않고 있으리라 믿으며 살아왔다.
여자의 주변에는 늘 남자가 많았었다. 스스로 미끼가 되어주는 경우도 많았다. 몇 명의 남자가
여자를 간이 정류장처럼 스쳐 지나갔었고, 여자는 언제나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단순히 여자의
바람기라 단정 짓는 것은 억지였다. 집어등(集魚燈) 같은 여자의 매력은 무엇일까, 남자는 늘 궁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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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여자가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가 울대를 거쳐 힘들게 끌어올린
뒤 간신히 입술로 물고 있는 말에 대해서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 뒤로 다시 오백 일도 훨씬 더 넘도록 물고기모양 목걸이를 계속 볼 수 있었던 것은 여자의
무심함 때문이었을까. 물고기 같은 여자에게 자신이 물이 되어주고 있었던 까닭일까, 남자는 도무
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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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짜릿한 어떤 느낌을 받아 드디어 한 수 하나보다 싶었는데 역시 그마저도 아무런 소득이 없어
허공에 떠오른 낚싯바늘에서 물방울만 뚝뚝 떨어져 내렸지.
오후 네 시가 넘어서 결국 이번에도 허탕을 치고, 초보라서 당연한 수업료를 낸 셈 치자 생각하
면서 자리를 접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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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이름 모를 식물의 모종이었다가 때로는 낯선 절의 처마 끝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목어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잘 지내? 근데, 내 목걸이...... 목걸이를 잃어버렸어....... 불쌍한 물고기,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날
이제 다신 안보겠단 것이지? (10/22 22:30 pm 목어 010-xxxx-xxxx)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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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간 배불뚝이
남자의 여자는 건넛방 침대 위에서 지구의 중력을 시험하다 지쳐 잠들어 있다. 부쩍 자신의 배
에 힘을 실어주지 않는 여자의 남자를 대신하여 10킬로그램 남짓한 아이를 어르다가 잠이 들곤
한다.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이라고 한다. 가속도는 시계 바늘이 하나의 점에서 바로 옆의 점으
로 번지점프를 하듯 째깍 하는 순간, 질량을 지닌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 속도의 변화가 있을 때만
제 존재를 과시할 수 있다. 여자의 몸은 언젠가부터 65킬로그램만큼의 질량에서 변화가 없다. 여
자는 가속도를 무시하고 잠들어 있으므로 매트리스가 방바닥을 향해 움푹 꺼지긴 했어나 침대에
아무런 힘도 가하지 못한다. 편평한 그물에 쇠공을 올려놓은 것처럼, 질량을 지닌 모든 성간물질
들 때문에 우주공간도 마지못해 얼마간은 휘어 있다고 아인슈타인이 말했단다. 침대도 마지못해
매트리스의 일부를 휘어 여자의 몸이 지닌 질량에게 넘겨버린 셈이다. 여자는 꿈속의 바다를 항해
중이다. 여자의 남자가 하루를 시작할 때쯤이면 이미 망망대해를 떠도는 쪽배가 되어 있다.
남자는 자음과 모음을 교배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입 속에서 맴도는 말들의 모스부호가 삼십
견을 겪은 지 오랜 어깨를 지나 검도로 단련된 고속도로 같은 팔뚝을 달려서 황금분할로 빚어진
열 개의 손가락 끝에 다다라 자판을 두들긴다. 가끔 자음과 모음이 따로 놀아 자신의 의식을 배반
하는 역모의 순간을 맞이할 때면 습관처럼 담배를 꺼내 문다. 머릿속 뇌의 좌익인지 우익인지 모
를 어느 곳에서 솟아나는 생각의 흐름은 한동안 손가락들을 멈추게도 한다. 때로는 건넛방에서 비
상사태를 알리는 호각을 불듯 15개월 된 아이가 가위에 눌린 울음을 운다. 그때마다 남자는 후다
닥 달려가서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여자의 날숨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 돌아온다. 다행히 컴퓨터는
인내심이 강해서 손가락들의 부재를 잘 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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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다. 지문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등고선이 아니지. 삼각점을 중심으로 폐곡선이 이어진 꼴은 아니
잖아. 굳이 등고선이라 치면 칠 수도 있겠지만, 가만 보면 LP 레코드판의 홈 같은 것이지. 내 지문
을 레코드판 크기로 확대하여 턴테이블에 올리면 어떤 음악이 나올까? 열 개의 손가락이 만들어
내는 소리는 어떤 음색을 가지고 있을까? 남자는 재떨이에서 비교적 긴 꽁초를 집어 든다. 이놈
봐라, 새까만 곱슬머리에 허리까지 꺾인 놈이 날 노려보네?! 문득 남자는 로깡땡이라는 먼 나라,
한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낸다. 책장에서 누렇게 변색되어버린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번역판을
꺼내 든다. 어렵지 않게 콜린 윌슨이 사르트르의 로깡땡에 대해 써내려간 구절을 찾는다. 바닷가
에 서 있던 그는 물이 약간 묻어 있는 평평한 돌을 하나 주워 든다. 그러고는 갑자기 그는 무언가
정떨어지는 듯 한 것을 느낀다. 그것이 돌 때문인지, 아니면 바다 때문인지 그는 알 수가 없다, 그
는 돌을 떨어뜨리고 걸어가 버린다. 남자도 무언가 정떨어지는 듯 한 느낌이 들어서 꽁초를 재떨
이에 도로 쑤셔 박고 망연스레 책장을 바라본다. '아웃사이더'가 빠진 책장에는 위가 뾰족한 이등
변삼각형의 그림자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의혹과 행동'이, 오른쪽에는 '건전한 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있다. 문득 팔과 목덜미와 사타구니가 가렵다. 책갈피 대신 '아웃사이더' 속에 들어가 있던
좀들이 탈출을 성공한 것이다. 남자는 자신도 집을 탈출하려고 방을 나선다. 근처에 문을 열어 놓
았을 편의점의 좌표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면서.
여자의 남자가 홀연히 사라진 지 사흘이 지나도록 여자는 집을 나서지 못한다. 일용할 분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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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저귀는 여자에게 다그치듯 바닥을 보이고 있다. 남자가 담배 연기로 사방 벽지를 누렇게 처발라
놓은 골방으로 들어가 본다. 아이가 자는 틈을 타서 억지로라도 배를 맞추기 위해 남자가 앉은 의
자 밑에 무릎을 꿇을 때 외에는 통 들어오지를 않는, 남자만의 성(城)이나 다름없는 방이다. 의외
로 남자의 성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다. 컴퓨터가 놓여 있는 책상 쪽 벽을
빼고 나머지 벽면 모두를 가리고 있는 크고 작은 책장 속에는 그동안 남자가 '밥은 굶어도 이건
못 끊어!'라면서 버둥버둥 사 모은 책들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을 뿐이다. 검은 색 자판을
등에 지고 있는 두꺼운 공책 한 권이 문득 여자의 눈에 띈다. 1997년이라는 연도가 금색으로 오
목새김 되어 있다. 아주 오래전 여자가 남자에게 선물로 준 은색 금속박으로 만든 돛단배 모양의
책갈피가 꽂혀 있는 부분을 펼친다.
광 장
-1997년 5월 4일 새벽, 광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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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동전 하나의 삽입으로 종이컵 커피를 빼들고, 또 다른 한 손으로 하얀 몸뚱
어리의 발기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한 일상적인 행위가 조금이나마 그에게 위안
이 되었다. 딱딱한 돌 의자에 앉아서 후- 하고 연기를 내뿜으니 속도 한결 후련해진
듯하다. 의사감정의 한 예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 잠긴다. 입으로 빨아들이
고 코와, 다시 입으로 뿜어내는 흡입과 배설의 쾌락을 성행위에 비할 수도 있으리라
는 헛된 상상도 해본다. 도처에 흔들림으로 포착되는 성적인 움직임으로부터 그는 자
유로울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라고도 생각을 돌려보지만,
그는 광장의 공공성이 이미 깨어졌음을 알아버렸다. 밀실에서의 인간적 행위가 광장
에서의 공공연한 흔들림으로 보편화되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정염이 간밤의 부끄러운
자위를 떠올리게 하였다. 욕망의 꿈틀거림은 젊음의 징표라도 되는 양, 손과 생식기
의 만남은 뜨겁기만 하였다. 자기만의 밀실, 방 속에서의 그러한 자기와의 대면은 또
다른 삶의 화두를 던지곤 한다. 배설의 만족과 그 후의 허탈감. 수많은 사람들, 지구
위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쾌락은 생식기의 흔들림으로부터 이루어지
는 것인 듯 생각되어 진다. 더 이상 광장은 타인들과의 만남과 대화의 공간만은 아니
다. 지금 우리의 광장에는 붉은 불빛들과 으르렁대는 차들과 술 취한 남녀들의 낮밤
을 가리지 않는 깊은 키스와 갖가지 모양과 색채의 옷들과 서로가 서로에게로 전달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1997년 5월 5일 밤, 밀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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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들이 점점이 찍혀있는 곳. 밤낮이 없는 사람들의 움
직임. 소설이나 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인생을 만날 수 있는 곳. 혼자
걸어가는 그를 잡아끄는 아줌마들이 있다. 좋은 비디오와 젊은 아가씨, 샤워시설을
운운하며 '쉬고 가라'는 인정미 넘치는 유혹의 손길이 그를 끌어댄다. 한 명을 뿌리치
면 또 한 명이 달려든다. 그래, 방으로 가자. 타인들의 방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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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작은 답을 구하러 광장으로 나가보려 한다. 아마 광장에는 누군가가 있을 것
이다. 누군가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가리키며 희망을 얘기해 줄 것이다. 고도(孤島)라
도 좋으니 광장으로 가봐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문득 가슴이 부풀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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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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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점 뒤 난관에 기대어 건너편에서 낚시질에 여념이 없는 강태공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우리 사진 좀 찍어 주실래요?
술 마시는 노래주점 시마. 주점이 술을 마신다는 것인지 노래가 그렇다는 것인지, 뭐야 이건. 그
는 추대리의 우악스런 손에 끌리다시피 하여 거울로 도배를 한 복도를 지나 황금빛 실내등에 야
릇한 냄새를 풍기는 밀실로 들어갔다. 아무리 봐도 스무 살쯤 되었을까 싶은 남자 종업원이 허리
를 굽히며 주문을 받았다. 십 팔년 산이 좋겠지요? 추대리는 그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인지 일방적
인 통보인지 미처 파악을 하기도 전에 일사천리로 두 명의 도우미 아가씨까지 일련의 거래를 끝
마치고는 걸쭉한 웃음을 배경음으로 깔며 그에게 이미 테이블 위에 도열해 있던 맥주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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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주신다면 이 한 몸 받쳐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요, 자! 건배 하실까요?
- 가만 있어봐, 이 년아!
- 이제 깼네. 네 시.
- 아휴, 좀 깨워 주시잖고.
- 나, 또 일 나가야 한단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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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댁 사정이고!
- 글쎄....... 난 오늘 처음 와본 술집인데.
- 날 언제 봤다고 그러셔?
- 글쎄, 안 된다니까!
다시 일을 나가야 한다던 여자가 샤워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자신을 아무데나 데려가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은 매여 있는 몸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 쉴 수 있다며, 오늘 하
루쯤은 그깟 돈 잃어버린 셈 치고 푹 쉬고 싶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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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집에 가서 잠이나 푹 자시지, 왜 처음 본 나를 따라 오겠다는 것인지.
은서라는 여자의 오빠가 부산항 부두에서 막일을 하다가 실족하여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일 년
전부터 도우미 소개소를 통해 알게 된 두 사람은 어릴 적 친구라도 만난 듯 금세 친해졌던 터라,
며칠 전에 은서를 따라 부산까지 가서 장례식을 치루고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친오빠는 아
니라고 했다. 은서가 부모에 관한 기억 없이 홀로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밤 하교 길. 어
두운 골목에서 하마터면 괴한 세 명에게 겁탈을 당할 뻔 했는데 홍길동처럼 어디선가 나타난 한
남자가 은서를 구해주었다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중학교 들어갈 즈음 동네 신발공장에 불이 나서
불길이 번진 인근 주택들 중 하나였던 자기 집이 홀라당 타버려 그의 부모와 일곱 살 난 여동생
이 화마(火魔)의 인질로 잡혀가버렸다고 했다. 은서와 남자는 오누이처럼 지내게 되었다. 은서가
전문대학에라도 가야한다며 남자는 그동안 해왔던 풀빵장사를 접고 일당이 센 부두 막일을 나가
기 시작했다. 은서는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도 자신의 고향이 대전이라는 사실을 믿어 왔었고, 마
침내 대전에 있는 NK대학의 합격통지서를 받고 오빠를 떠나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은서의 오빠는
매달 어김없이 용돈을 부치기 시작했고, 비가 와서 일거리가 없는 날에는 대궐 같은 술집의 마당
쇠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다.
- 한 편의 소설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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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죠? 그런데 실화라는 사실이 안타깝죠.
전군가도로 진입하면서 그가 물었다. 여자는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 차안에 울리는 유라이어
힙(Uriah Heep)의 ‘July Morning' 간주에 맞춰 손바닥으로 차창을 두들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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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유나의 아버지는 골방 바닥과 벽에 핏물로 혈화(血畵)를 그려놓고 눈을 감았다. 유나는
추봉길의 손에 끌려 놈이 마을을 떠나 새로 정착한 인근 관광특구의 지하세계로 내려갔다. 유나는
그 후로 추봉길의 비호를 받으며 2년제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 처음 몇 년간은 밤마다 추봉길
의 손길이 유나의 몸을 탐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갈수록 추봉길이 유나의 비위를 맞
추는 형국이 되었다. 지하세계에서 유나가 알지 못하는 일련의 변화가 바람을 몰고 다니더니 추봉
길을 제법 중책의 자리에 앉혀 놓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을 죽으라고 따라다니는 여자도 한
명 불러왔던 것이었다. 추봉길은 자신이 속해 있던 조직이 와해되어 한동안 그 여자와 제주도로
잠적했었다. 유나는 추봉길의 부재가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냥, 비가 오면 그저 맞으면 될 뿐이었다. 유나는 언제든 흠뻑 젖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끔 열두 살 이후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마의 얼굴이 지하세계의 유리벽 모퉁이에 되비치는 갖
가지 색의 불빛과 함께 환영처럼 나타났다 사라질 때면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의 독한 술로 머릿
속을 적셔버리곤 했다.
- 야, 바다다!
- 서해로는 와본 적이 없는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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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OGC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이번에 20호가 나오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신가요?”
꽤 오랜 침묵을 깬 것은 18호였다네. 그는 모임을 위해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고 했
네. 원로회원인 1호, 2호, 3호 회원들은 벌써 술에 취했는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꾸도 없었
지. 순번으로는 막내이지만 나이는 18호보다 두 살 많은 19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네.
“정말, 그렇게 되면 우리 클럽 회원으로 자동가입이 되는 건가요?” 손에 든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
면서 19호가 말했네.
“글쎄, 그건 두고 봐야 하겠지. 우리 같은 사람이 더 이상 나오지 말란 법은 없을 테니, 만약 이
번에 또 한 명의 인간실격자가 탄생한다면 긴급회의를 열어야겠지.” 모임에서 거의 말이 없던 4호
가 담배를 꺼내 물며 조용히 말했네. “난 사실 20호 회원 입회는 반대였네. 더 이상 우리 조직이
커지지 않기를 바랐지. 1호부터 19호까지 한 명씩 회원이 늘 때마다 세상 사람들의 까닭 모를 분
노가 눈사태처럼 커지는 것 같았거든. 만약 우리가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전락(轉
落)의 가시밭길을 걷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우리는 단지 우리 팀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것밖
엔 없는데, 단 한 번의 실책으로 이렇게 비밀조직을 만들어 사람들의 눈치나 보면서 살아가야 한
단 말인가 싶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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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 41분, 자네는 몸을 반원형으로 돌렸네. 힘껏 발길질을 했네. 시시포스가 산 정상을 향해 커
다란 바위를 밀어 올리던 힘으로.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태운 기운찬 말들이 우렁차게 지축
을 울리듯. 폼페이를 땅 속으로 파묻어버린 베수비오 화산 폭발처럼.
그것이 부메랑처럼 되돌아 올 줄을 자네나 수만의 관중들이 어찌 알 수 있었겠나. 그물의 중력
장을 뒤흔들어 놓은 자네의 열정이 결국, 경기장을 에워싸고 있던 군중들로부터 분노의 화살을 맞
게 할 줄을 자네가 어찌 알았겠나.
조만간 자네의 가입 환영회를 열 계획이라네. 우리 클럽의 이름은 OGC, 'Own Goal Club'의 약
어라네. 너무 단순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우린 만장일치로 이 이름을 받아들였네. 'Only God
Criticizes'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네. 우리는 자네가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네. 부디 딴 마음 먹지 말고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기 바라네. 때가 되면 자네를 다시 부르
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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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사람들과 만들어 온 그물망 앞에서 끊임없이 자학하고 무시로 좌절하여 만들어낸 자책은 누
구에게도 용서를 받을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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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요즘에 들어선 유식한 말로 두문불출이었네만. 자네야 말로 보름 내내 이곳에 왔단 말
아닌가?
- 아뇨, 저야 일주일에 두어 번 왔는데, 보름 전부터 오늘까지 계속 저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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