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29

연구논문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론과


영국, 인도, 그리스*

염 운 옥**

Ⅰ. 머리말
Ⅱ. 오리엔탈리스트 윌리엄 존즈와 아리안 인종론의 탄생
Ⅲ. 19세기 중반 아리안 인종론의 전개와 변용
Ⅳ. 유럽의 아리안, 고대 그리스인
Ⅴ. 맺음말

1)

Ⅰ. 머리말

이 논문의 목적은 영국의 식민주의 담론인 ‘아리안 인종(Aryan race)’론을


분석하는데 있다. 오늘날 ‘아리안(Aryan)’은 ‘인도-유럽인(Indo-European)’
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는가 하면, ‘인도-유럽어(Indo-European
languages)’라는 개념은 어족(語族) 분류에서 여전히 무비판적으로 쓰이고 있
다. ‘아리안주의(Aryanism)’나 ‘아리안 인종주의(Aryan racism)’라고 하면 무
엇보다도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암울한 역사를 연상하게 된다. 사실 나치 이데
올로기를 아리안주의나 아리안 인종주의라고 부르는 용법은 영어권에 익숙한
표현이기도 하다.1) 죽음의 수용소와 가스실이라는 최종해결로 가는 길에는

** 이 논문은 2015년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


임(NRF-2015S1A5B5A07042000).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1) 사실 아리안 인종(Aryan race, arische Rasse)이란 개념은 나치 시대 당대 문헌에
는 등장하지 않는다. 나치 시대 학자와 관료들이 사용한 용어는 아리안 인종이 아
니라 아리안 민족(Aryan people, arische Volk)이었다. Christopher Hutton, "Rethinking
the History of the Aryan Paradigm," History and Philosophy of the Language Sciences (2013),
196 歷史學硏究 제71집(2018.08)

몇 단계의 비약과 왜곡이 있었지만, 그 모든 비극의 중심에 아리안주의와 반


(反)유대주의가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아리안 인종론이 시작된 곳은 독일이 아니었다. 아리안 인종론은 18
세기말 영령 인도 캘커타에서 생산된 ‘발명품’이었다. ‘아리안’이 ‘인도-유럽
인’과 동의어로 인식된 역사적 맥락은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에 있었다. 오리
엔탈리스트(Orientalist) 윌리엄 존즈(William Jones, 1746-1794)는 산스크
리트학과 비교언어학 연구로부터 아리안 개념과 아리안 인종론을 창안했다.
18세기 말 캘커타는 인도에 관한 지식이 독점적으로 생산되던 공간이었다. 아
리안 인종론에서는 영국인을 ‘활기찬 아리안(vigorous Aryans)’으로, 인도인을
‘퇴화한 아리안(degenerate Aryans)’으로, 나머지 인류를 ‘후진적 비-아리안
(backward non-Aryan)’이라 부르며 영국인의 우월함을 주장하고 인도지배를
정당화했다.2)
캘커타에서 생산된 지식은 유럽으로 확산됐다. 하지만 유대인 홀로코스트로
귀결된 독일 아리안주의의 극단성에 가려 아리안 인종론의 첫 생산자는 영국
오리엔탈리스트들이었고, 첫 생산지는 인도 캘커타였다는 사실은 그리 주목받
지 못했다. 1930년대 독일의 아리안주의에서 보이는 아리안의 신체적·정신적
우월성 담론3)과 우생학 기획4)은 영국 오리엔탈리스트들이 생산한 아리안 인
종론의 요소들 가운데 독일 토양에 알맞은 요소를 편취해 구성한 것이었음에
도 말이다.5)

http://hiphilangsci.net/2013/07/24/rethinking-the-history-of-the-aryan-paradi
gm(2018. 7. 15.).
2) Tony Ballantyne, Orientalism and Race: Aryanism in the British Empire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2002), pp. 1-7.
3) 아리안 ‘초인(Superman)’의 신체적 우월성이라는 창조된 이미지는 스포츠와 예술
에서 선명하게 표출되었다. James A. Mangan, "Icon of Monumental Brutality:
Art and the Aryan Man,"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the History of Sports
16/2 (2007), pp. 128-152.
4) 독일 우생학의 특수성과 각국의 우생학 역사와 우생학의 국제적 지평에 대해서는
다음 문헌이 유용하다. Paul Weindling, "The ‘Sonderweg’ of German Eugenics:
Nationalism and Scientific Internationalism," The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22/3 (1989), pp. 321-333; Mark B. Adams, (Ed.), The
Wellborn Science: Eugenics in Germany, France, Brazil, and Russia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0).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론과 영국, 인도, 그리스(염운옥) 197

또한 아리안 인종론은 식민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상호규정, 상호교차


하는 양상을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아리안
인종론은 역사학 분야에서 정당하고 진지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아리안 인종
론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6)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아리안 인종론이 어떻게 등장했으며, 인도지배의 전개와 어떻게 연관되었으
며, 나아가 영국인의 자기인식과 정체성 형성에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분석해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식민주의와 민족주의가 교차하는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
다.
인도지배의 담론적 산물이며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인 아리안 인종론의 파급
력은 탄생지인 ‘식민지(colony)’ 인도에 국한되지 않고 ‘본국(metropole)’ 영
국의 민족주의를 직조(織造)하는 요소로도 작용했다. ‘신화(myth)’이지만 ‘구
성된 실재(constructed reality)’로서 아리안 인종론은 영제국 문화의 요소일
뿐 만 아니라 유럽 각 민족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초하는 발견의 도구이자
해석의 장치였다. 아리안주의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의 형성기 유럽에서 ‘상
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로서 민족이 구성되는 과정에 함께 짜여
들어갔다.
인종주의는 흔히 ‘오해’하듯이 민족주의의 타락한 형태가 아니다. 민족주의
와 인종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에 있다. 인종주의 없이는 민
족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를 인용해 말하
자면,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는 대체보충(supplément)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인종주의는 인종적·문화적 순수성을 통해 ‘진정한 민족주의’를 추

5) Carol A. Breckenridge and Peer Van der Beer (Eds.), Orientalism and the
Postcolonial Predicament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3), p. 83.
6) Joan Leopold, "British Applications of the Aryan Theory of Race to India,
1850-1870," The English Historical Review 89/352 (1974), pp. 578-603;
Tony Ballantyne, Orientalism and Race: Aryanism in the British Empire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2006); Edwin F. Bryant and Laurie L.
Patton (Eds.) The Indo-Aryan Controversy: Evidence and Inference in Indian
History (New York: Routledge Curzon, 2004); Romila Thapar, "The Theory of
Aryan Race and India: History and Politics." Social Scientist 24/1-3 (1996):
pp. 3-29. 등을 들 수 있다.
198 歷史學硏究 제71집(2018.08)

구하는 ‘과잉-민족주의(super-nationalism)’로 나타나거나, 국민을 넘어서는


이상적 공동체를 표방하는 ‘초-민족주의(supra-nationalism)’로 나타난다고
간파했다.7) 나치즘이 아리안의 순수한 혈통과 게르만 민족의 우월함을 주장
하는 과잉-민족주의의의 예라면, 영국이 인도지배에 동원했던 이데올로기 아
리안 인종론은 초-민족주의의 사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식민주의와 지식 형성의 관계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에서 버나드 콘
(Bernard S. Cohn)은 영국이 인도에서 지식이 식민권력을 ‘가시화’하고 ‘공식
화’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했다. 콘은 식민권력에 의한 지식 형성을 ‘역사학 양
식’, ‘관찰조사 양식, ‘계측 양식’, ‘박물관학 양식’, ‘감시 양식’ 등으로 분류했
다. 콘의 연구는 인도에 관한 여러 양식의 지식이 획득되고 체계화되는 과정
이 영국 국내의 정책과 제도 형성과 맞물려 있었다는 점을 부각시켜, 식민국
가와 본국의 국가 형성을 단일한 분석틀로 보는 신선한 시각을 제시했다. 그
러나 콘의 연구에서 인종주의는 분석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소여(所與)의 사실
로 전제되고 있었다. 식민주의 연구에서 인종주의는 ‘전제’가 아니라 ‘분석대
상’이 되어야 하는데, 콘의 연구서에서 ‘아리안 인종’론은 한 차례 언급되는
데 그칠 뿐이다.8)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콘이 전제로 삼고 있는 지점에서 출
발해, 식민주의 지식으로서 아리안 인종론의 성격과 의미에 접근해 보려 한
다.
기존 연구로는 토머스 트라우트만(Thomas R. Trautmann)9)과 토니 발렌타
인(Tony Ballantyne)10)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언어학자 트라우트만은 연구서
아리안과 영국령 인도(Aryan and British India)와 아리안 논쟁(The
Aryan Debate)에서 18세기말 비교언어학 분야가 탄생하면서 아리안 인종론

07) Etienne Balibar, "Racism and Nationalism," in Etienne Balibar and Immanuel
Maurice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 Ambiguous Identities (London, New
York: Verso, 1991), pp. 59-62.
08) Bernard S. Cohn, Colonialism and Its Forms of Knowledge: The British in
India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p. 92.
09) Thomas R. Trautmann, Aryans and British India (L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Thomas R. Trautmann, (Ed.), The Aryan Debate (New Delhi &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10) Tony Ballantyne, Orientalism and Race: Aryanism in the British Empire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2006).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론과 영국, 인도, 그리스(염운옥) 199

이 등장하는 현상을 분석했다. 존즈의 주된 연구 분야가 언어학이었다는 사실


을 감안하면 트라우트만의 연구에서 참고할 점은 많다. 그러나 트라우트만의
언어학적 연구는 역사적 맥락과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토니 발렌타인의 오리엔탈리즘과 인종: 영제국의 아리안주의(Orientalism
and Race: Aryanism in the British Empire)는 아리안주의의 ‘트랜스내셔널
(transnational)’ 지평에 주목한 흥미로운 연구다. 뉴질랜드 출신 역사가 발렌
타인은 아리안 인종론이 영제국의 관계망(web)을 타고 어떻게 흘러 다녔는가
에 주목했다. 발렌타인의 독창성은 영국 오리엔탈리스트들의 담론적 구성물인
아리안 인종론이 영제국의 중심과 주변부에서 어떻게 유통되고 전유되었는가
를 밝혔다는데 있다. 발렌타인은 인도에서 시작된 아리안 인종론이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기원과 문화를 설명하는데 전유되는 양상을 분석했다. 본국과 식
민지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제국의 관계망 속에서 인도와 뉴질랜드의 관계,
식민지와 식민지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에 주목한 그의 연구는 제국사의 새로
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본 연구는 발렌타인처럼 제국의 관계망을 타고 전파·확산된는 아리
안 인종론가 아니라 본국으로 ‘되돌아온’ 아리안 인종론에 주목하고자 한다.
아리안 인종론이 영국인은 누구인가, 영국인은 어떤 민족이며 어떤 인종인가
를 말하는데 활용되는 현상은 문화연구가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이 대처리
즘을 분석하면서 제시한 ‘제국의 반격(empire strikes back)’ 현상11), 즉 식
민지가 부메랑이 되어 본국으로 돌아오는 현상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콘, 트라우트만, 발렌타인 등의 선행 연구를 비판적으로 참조
한 위에,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결합, 아리안 인종론을 통한 영국 인종과 민
족의 재(再) 정의 과정,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도와 그리스에 대한 이해 등
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11) Centre for Contemporary Cultural Studies, Empire Strikes Back: Race and
Racism In 70's Britain (New York: Routledge, 2004).
200 歷史學硏究 제71집(2018.08)

Ⅱ. 오리엔탈리스트 윌리엄 존즈와 아리안 인종론의 탄생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에는 토가를 입은 존즈의 기념상이 서있다. 1799년


존 베이컨(John Bacon)이 조각한 이 기념상에서 존즈는 자신이 번역한 마누
법전(Institutes of Hindu Law; or, the Ordinances of Menu)에 한 팔을 올
리고 기대어 서있다. 기단 부분은 우유의 바다에 떠 있는 힌두의 신(神) 비슈
누(Vishnu)와 락슈미(Laksmi)12)가 동그란 유리구슬 같은 구(球) 안에 갇혀
있고, 토가를 입은 유럽인 남성 둘이 이를 감싸고 있다. 힌두의 신들이 유럽
기독교 문화에 안전하게 길들여지는 형상이다(그림1, 2). 이 존즈 기념상은
이국적 인도 문화가 존즈의 활약으로 비로소 제국 중심부에 ‘안치’되었음을
상징한다. 기념상의 주인공 존즈는 1784년 ‘캘커타 아시아 협회(Asiatic
Society of Calcutta)’를 창립했고 캘커타에서 평생을 보냈다. ‘오리엔탈
(Orientalist) 존즈’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오리엔탈리스트의 ‘전형’이라할
만한 인물이었다.

12) 힌두교에는 삼주신(三主神) 트리무르티(Trimūrti)가 있는데, 창조의 신 브라흐마


(Brahma)와 파괴의 신 시바(Shiva), 유지의 신 비슈누(Vishnu)다. 비슈누의 부인
락슈미(Laksmi)는 부와 행운의 여신이다. 힌두 신화에 따르면 비슈누는 지상의
질서와 진리, 정의(다르마)가 오염되고 쇠퇴할 때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여
러 형태로 변신해 지상에 나타난다고 한다.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론과 영국, 인도, 그리스(염운옥) 201

<그림 1> 윌리엄 존즈 기념상, 세인트 <그림 2> 윌리엄 존즈 기념상, 기단 부


폴대성당(The Courtauld Gallery 분(The Courtauld Gallery Website ©
Website © The Courtauld Institute of The Courtauld Institute of Art,
Art, London) London)

영국의 인도 식민지 건설은 18세기 벵골 지방을 정복하면서 시작됐다. 영


국은 이제 인도인은 누구인가, 세계 민족들 가운데 인도인은 어디에 속하는
가, 인도인과 영국인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런 문제들에 답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찬란한 고대문명의 후예 인도는 ‘갈색 피부의 토착 미개인’과 ‘하얀 피
부의 유럽 문명인’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쉽사리 맞아떨어지지 않는 난해한
대상이었다. ‘아리안 인종’론이라는 독특한 인종 담론은 이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에서 등장한 해답이었다. 인도인과 영국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비교
언어학과 인류학 연구를 통해 얻어질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아리안 인종론이
탄생했다.13)
18세기말 캘커타는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말하는 ‘서양
(occident)’이 ‘동양(orient)’을 지배하기 위한 지식,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의 발상지였다. 사이드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동양은 스스로
를 대표/재현(represent)할 수 없고 서양에 의해 대표/재현되어야 한다. 그리

13) Thomas R. Trautmann, Aryans and British Ind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pp. 3-4.
202 歷史學硏究 제71집(2018.08)

고 동양은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구성하고 평가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찬란했


던 동양의 과거를 발견하는 주체는 서양이라는 사고방식이야말로 오리엔탈리
즘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대전제였다. 오리엔탈리스트 존즈는 동양을 코드화
하고 도표화하고 비교함으로써 동양이라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식을 제시하
고 동양 지배를 현실화하는 전망을 열었다.14)
존즈는 법률가이자 시인이며, 뛰어난 고전학자로서 지칠 줄 모르는 동양에
대한 탐구자였다. 존즈가 관심을 둔 분야는 힌두법 뿐만 아니라 이슬람법에
서, 벵골의 통치, 인도의 의학, 과학, 자연자원, 산업, 아시아의 문학과 수사학
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것이었다. 동인도회사의 법관으로 인도에 부임
하기 전에 이미 존즈는 아랍어, 히브리어, 페르시아어에 정통한 학자였고, 인
도에 와서는 산스크리트어 문헌을 영어로 번역했다.15)
존즈는 동인도회사의 이른바 ‘회사-오리엔탈리즘(company orientalism)’16)
의 설계자였다. 1600년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특허장을 받은 동인도회사
는 초기에는 인도의 향신료와 면직물을 유럽 시장으로 수출하는 무역회사였으
나 점차, ‘상인의 외피를 쓴 국가(a State in the Disguise of a Merchant)
’17), 나아가 ‘회사-국가(company state)’18)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존즈는
1783년 벵골 대법원(Bengal Supreme Court) 배석판사(puisne judge)로 임명
된 후 판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1788년 힌두와 이슬람 법률을 집대성하

14) Edward Said, Orientalism: Western Conceptions of the Orient (Penguin Books,
1995), p. 95.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분석대상을 아랍과 이슬람
세계로 대한 영국, 프랑스, 미국의 연구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인도와 윌리엄
존즈에 대해서는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 이전에 이루어진 오리엔탈리즘의 전사
(前史)로서 짧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15) Michael J. Franklin, 'Orientalist Jones': Sir William Jones, Poet, Lawyer, and
Linguist, 1746-1794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16) Tony Ballantyne, Orientalism and Race: Aryanism in the British Empire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2006), p. 19.
17) Philip J. Stern, The Company-State: Corporate Sovereignty and the Early
Modern Foundations of the British Empire in India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p. 3.
18) Philip J. Stern, The Company-State: Corporate Sovereignty and the Early
Modern Foundations of the British Empire in India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p. 6.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론과 영국, 인도, 그리스(염운옥) 203

는 작업을 시작했고, 1794년 마누법전을 번역했다. 그의 마누법전영어 번


역은 여러 오류에도 불구하고 영국인의 인도 이해뿐만 아니라 인도인이 인도
를 이해하는데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19)
학자인 동시에 법률가, 행정가로서 존즈는 인도 현지에서 인도를 경험적으
로 연구함으로써 서구 지식의 틀 속에서 인도문화를 비교 가능한 대상으로 만
들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산스크리트어가 그리스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리안 인종론은 식민지 인도 캘커타에서 식민 통치와 비교
언어학 연구의 부산물로 탄생했던 것이다.20) 존즈는 산스크리트 문헌에서 발
견한 ‘아라야(Arya)’라는 범주를 인류학적으로 해석하고 발전시켰다. ‘아라야’
는 산스크리트어로 ‘고귀하다’는 뜻이다. 존즈는 ‘아라야’에서 파생된 ‘아리안’
을 인종과 언어에 적용했다. 고대 인도와 이란, 유럽에 거주하며 유사한 언어
를 사용했던 사람들을 인종적으로는 ‘아리안’이라 총칭하고, 언어학적으로는
‘인도-유럽어족’이라 불렀다. 존즈는 비교언어학 연구에서 시작해 ‘언어’ 집단
을 ‘인종’ 집단과 동일시했던 것이다. 존즈는 이러한 내용을 아시아연구
(Asiatick Researches)에 발표했다.21)
존즈는 산스크리트어와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 영어, 켈트어 사이에 친
연성이 있다고 보았다. 친족 관계를 지칭하는 단어를 예를 들어 비교해보면,
영어의 ‘mother’와 ‘father’는 라틴어로는 ‘mater’와 ‘pater’, 산스크리트어로는
‘matru’와 ‘pitru’로서 유사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단일기원설(monogenesis)의
입장에서 존즈는 인도-유럽어의 기원인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는 ‘아리안’은
유럽 민족들의 먼 친척에 해당하며, 인류는 하나의 조상에서 여러 ‘민족들’이
확산되었다고 보았다. 존즈의 언어학적 발견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안’이란 개념을 통해 영국인과 인도인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시사한
다고 받아들여졌다.

19) 구하원,「윌리엄 존스(William Jones)와 마누법전(Mānava Dharmaśāstra)의 번


역」, 인도연구18-2(2013), 3쪽.
20) Partha Mitter, "Greece, India and Race among the Victorians," Orrells, Daniel,
Gurminder K. Bhambra, and Tessa Roynon (Eds.) African Athena: New
Agenda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p. 61.
21) Sir William Jones, “On the Hindus,” The Third Anniversary Discourse,
Delivered 2 February, 1786. The Works of Sir William Jones. Vol. 1
(London: G. G. and J. Robinson, 1799), pp. 19-34.
204 歷史學硏究 제71집(2018.08)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라틴어의 공통 기원설과 언어를 공유하는 언어 공


동체 집단을 아리안 인종이라고 보는 존즈의 발견은 시원적 화자 공동체, 시
원의 조국, 이민과 정복 같은 보다 더 광범위한 주장을 포함하는 아리안 인종
론을 촉발했다. 아리안 인종론의 핵심 내용은 이렇다. 기원전 1,500년경 아리
안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발원한 유목민으로 인도와 이란으로 이주해 와
서 갈색 피부의 토착민 드라비다인(Dravidians)을 정복하고 베다(Verda) 문화
를 건설했다. 인도문명은 아리안이라는 문명화된 침입자가 토착 야만인 드라
비다인을 정복해 건설한 문명이라는 것이다. 소위 ‘아리안 침략설(Aryan
invasion theory)’ 서사의 핵심은 아리안이라는 우월한 침략자가 토착민을 정
복하고 한때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꽃피웠지만, 결국에는 토착 야만인과의 혼
혈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22)
아리안 침략설의 진위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하
지만 인도와 유럽을 연결하는 아리안 인종의 혈통과 아리안 문명의 존재에 대
해서는 사실 보다는 허구로 여겨지는 경향이 강하다. 언어와 인종은 동일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기원전 2600년경 인더스강 문명의 주인공들이 누구
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현재 인도인의 주류를 이루는 북인
도인과는 다른 사람들로 추측할 따름이다. 북인도인의 조상은 기원전
1,700-1,500년경 중앙아시아에서 인도아대륙으로 들어와 정착한 아리안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라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다. 그러나 아리안을 순수한 혈연적
특성을 가진 민족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수천 년 동안 이동과 정착을 반복
하며 구대륙 전역을 누빈 아리안에게서 혈연적 순수성 찾는다는 것 자체가 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안은 인종·종족적 개념으로 보기 보다는
언어·문화적 공동체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23)
존즈와 같은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인도 고대 문명의 황금기와 당대 힌두 문
화의 타락상을 대비시키면서 인도 지배를 정당화했다. 인도는 과거에는 찬란
했지만 현재는 과거의 영광을 상실했다. 이제 인도가 상실한 과거의 위대함을

22) Christopher Hutton, "Rethinking the History of the Aryan Paradigm," History
and Philosophy of the Language Sciences (2013), http://hiphilangsci.net/2013/
07/24/ rethinking-the-history-of-the-aryan-paradigm(2018. 7. 15.).
23) 이지은,「인도를 문명으로 이끈 이주민, 아리아인」, CHINDIA Plus77 (2013),
48-49쪽.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론과 영국, 인도, 그리스(염운옥) 205

발견하고 회복시키는 것이 영국의 책무가 된다. 더구나 고대 아리안으로서 영


국인과 인도인은 친족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인도를 문명화시키는 영국의 지배
는 정당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선하다는 논리로 귀결되었다.

Ⅲ. 19세기 중반 아리안 인종론의 전개와 변용

영국의 인도지배가 전개되는 양상에 따라 아리안 인종론은 변용을 거듭했


다. 아리안 인종론이 오리엔탈리스트의 좁은 지식 서클을 떠나 광범위하게 대
중적으로 수용된 것은 1850년대 이후였다. 1850~70년대는 소위 ‘과학적’ 생
물학적 인종주의가 체계화되는 한편, 언어만이 인종 분류의 타당한 기준이라
사상이 비교문헌학자들 사이에서 생겨나던 시기였다. 피부색이나 눈동자색,
두개골 측정치가 아니라 언어야말로 인종을 분류하는 신뢰할 만한 기준이라는
것이다.24) ‘아리안’이라는 용어는 영국 정부의 공식문서와 보고서에서는 발견
되지 않지만25) 인도 현지에서 활동했던 학자, 선교사, 언론인, 정치가, 정부
관료 등은 인도 식민지의 대중을 향해, 그리고 영국 본국의 대중을 향해 내놓
은 발언에서 저마다의 목적을 위해 아리안 인종론을 활용했다.
먼저 아리안 인종론의 대중화에 대해서는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 1823-1900)를 빼놓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뮐러는 독일 동부
데사우 출신으로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수학했고 1851년 옥스퍼드대학에서 근
대 유럽어 강의를 시작한 이래 생애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냈다. 인도학과 비
교종교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리그베다를 처음 편집한 것을 비롯해
학술서와 대중서 약 50여권을 저술했다. 대중적으로는 독일 소년과 영국 소녀
의 사랑을 그린 낭만적 소설 독일인의 사랑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24) 대표적인 인물로는 프랑스의 에르네스트 르낭을 들 수 있다. 르낭에 대해서는 다


음 문헌을 참조. Said, Edward. Orientalism: Western Conceptions of the Orient
(Routledge & Kegan Pail Ltd., 1978; Penguin Books, 1985: 1991: 1995), 2부
2장; 신행선,「에르네스트 르낭의 “인종”과 인종주의」, 서양사론, 73 (2002),
5-28쪽.
25) Joan Leopold, "British Applications of the Aryan Theory of Race to India,
1850-1870," The English Historical Review 89.352 (1974), p. 588.
206 歷史學硏究 제71집(2018.08)

뮐러는 영국에서 아리안 인종에 관한 대중강연을 통해 힌두인, 그리스인,


튜튼인의 공통 조상 아리안과 잉글랜드인과 벵갈인 사이의 혈연관계, 인도인
피지배민과 영국인 지배자 사이에 광범위한 친족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
러나 뮐러는 나중에 ‘영국인 병사’와 ‘검은 벵갈인’에게 공통의 혈통적 계보가
존재한다는 견해를 철회했다.26) 뮐러는 인종주의적 목적에 문헌학을 활용하
는데 가담하지 않으려 했고, 언어의 기원을 인류의 다원기원론(polygenesis)
으로 설명하는 입장과도 거리를 두려했다. 뮐러는 언어적 기준과 인종적 기준
을 분리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아리안 인종, 아리안 혈통, 아리안 눈동자, 아
리안 모발을 말하는 인류학자는 ‘장두인의 사전(dolichocephalic dictionary)’
이나 ‘단두인의 문법(brachycephalic grammar) 같은 것을 말하는 언어학자만
큼이나 어리석게 보인”27)다고 비판했다. 뮐러는 언어와 인종의 동일시를 비판
함으로 언어학을 인종주의로부터 분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어와 인
종의 무분별한 동일시를 경계했다고 해서 뮐러가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 자체
를 비판했던 것은 아니다. 뮐러의 이런 입장은 일종의 식민주의적 온정주의
(colonial paternalism)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857년 인도항쟁은 전환의 계기였다. 1857년 이후 아리안 인종론은 더 이
상 한가로운 과거 해석의 담론이 아니라 당면한 문제가 되었다. 1857년 벵갈
군에 속한 13만 9천명의 세포이 병사 가운데 7천여 명이 영국에 반기를 들었
고, 이로써 자유주의자와 공리주의자들이 내세운 ‘문명화 사명(civilizing
mission)’은 흔들리고 말았다. 흔히 ‘세포이 항쟁’으로 불리며 인도 민족주의
의 태동을 알리는 1857년의 사건으로 인해 영국의 인도 지배는 위기에 봉착
했다.
1857년 이후 위기에 대한 인식은 뮐러의 제자 에드워드 바일즈 코웰
(Edward Byles Cowell, 1826-1903)에게서도 보인다. 코웰은 1867년 캠브리
지 대학 산스크리트학 교수 취임 연설에서 인도인을 야만인이나 어린아이로,
열등한 인종으로만 본다면 지대수취권이나 행정권 장악은 가능하겠지만, 통치
자와 피치자 사이의 공감은 생기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영제국은 사상

26) Edwin Bryant, The Quest for the Origins of Vedic Culture: the Indo-Aryan
Migration Debat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p. 33.
27) Friedrich Max Müller, Biographies of Words and the Home of the Aryans
(London: Longmans, Green, and co., 1888), p. 120.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론과 영국, 인도, 그리스(염운옥) 207

누각에 불과하다고 경고했다. 더구나 1857년 인도항쟁 이후 인도는 서서히


오랜 정체와 쇠퇴에서 깨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인도를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코웰은 이어서, 근대 그리스인은 과거 그리스인과 피한방
울 섞이지 않았지만 인도는 다르다고 말한다. 힌두는 아리안 정복자의 직계
후손으로서 영국인과 같은 아리안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위대한 식민지 인도
가 서구 문명과 뿌리를 공유한다는 사실은 축복할만한 일이 아니겠냐고 코웰
은 역설한다.28)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 존 윌슨(John Wilson, 1804-1875)은 인도의 영국
지배는 신이 예정한 “귀향(homecoming)”이며 아리안 인종의 “가족 재회
(family reunion)”라고 설교하기도 했다.29) 작가이자 정치가인 사무엘 랭
(Samuel Laing, 1810-1897)은 힌두는 영국 식민지배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
를 입거나 민족감정이 손상되었다고 느낄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오랜 쇠락
끝에 드디어 인도가 아리안 제국의 주권 아래 통합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30)
헨리 메인(Henry James Sumner Maine, 1822-1888)은 1857년 이후 인
도통치의 위기에 대한 처방을 제시한 법학자였다. 메인은 인도 정부의 법률
전문가로서 캘커타 대학 부학장을 지냈고 영국으로 돌아가 옥스퍼드 대학과
캠브리지 대학의 법학 교수를 지냈다. 메인은 서구 대 비서구, 서구 시민법
(civil law) 대(對) 비서구 관습법(common law)라는 이분법적 이해 위에서
고대법을 연구했다. 메인은 현학적이고 텍스트의존적인 오리엔탈리스트의 연
구 성과에서 벗어나 인도 지방 구석구석까지 미친 영국 관리들의 상세한 보고
서를 통해 ‘현실의 인도(real India)’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명화 사
명의 대의를 앞세운 인도지배가 위기에 봉착한 원인은 그동안 추상적인 문헌
에 매달려 있었던 때문이라는 것이다. 메인은 식민지배의 위기에 대처해 관점
의 전환을 요구했다. 오리엔탈리스트의 지나친 문헌 중심에서 벗어서 인도의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다.31)

28) Joan Leopold, "British Applications of the Aryan Theory of Race to India,
1850-1870," The English Historical Review 89/352 (1974), p. 583.
29) Ibid., p. 599.
30) Ibid., p. 601.
31) 마흐무드 맘다니, 규정과 지배: 원주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창비, 2017),
17-18쪽.
208 歷史學硏究 제71집(2018.08)

‘현실의 인도’로 깊숙이 들어가야 인도지배가 성공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


일까? 메인은 여기서 아리안 인종론을 꺼내든다. 즉, 영국이 인도를 잘 알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뿌리가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메인은 고대 아리안의 유산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 인도인데, 그 이유는 지리
적 격리와 고립, 정체로 인해 “원시 아리안 집단, 원시 아리안 제도, 원시 아
리안 사상이 초기 발전단계의 형태로 인도에 실제로 보존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고대 유럽의 상당한 부분이 인도에 살아남아 있다”고 주장했다.32)
메인이 1857년 세포이 항쟁 이후 초래된 통치의 위기에 대해 내놓은 처방
은 간접지배(indirect rule)라는 새로운 통치기술이었다. 간접지배는 차이에
대한 다원주의적 관리를 의미하며 결코 느슨한 지배가 아니라 보다 ,촘촘한
지배였다.33) 간접지배에서 지배의 언어는 부드러워졌고 식민지인의 문화적
전통은 존중하고 보존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메인의 간접지배 원리는 아리
안 인종의 단일성과 우월성을 전제로 한 위에서, 인도에 남아있는 아리안 문
화의 고대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유산을 보존해야 하고, 인도인들 사이의 다양
한 차이를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인도인 모두가 아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도인
가운데 힌두, 파시, 페르시아인 만이 아리안에 해당한다. 즉 인도의 상위 카스
트만이 지배민족 영국인과 뿌리를 같이 한다는 생각이 아리안 인종론이었
다.34) 브라만 같은 상위 카스트에서 인도지배의 협력세력을 양성하려는 지배
의 논리를 아리안 인종론은 뒷받침했던 것이다. 메인이 ‘현실의 인도’로 내려
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의 의도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상위 카스트에서

32) 같은 책, 19쪽; Henry James Sumner Maine, “The Effects of Observation of


India on Modern European Thought,” Maine, Village Communities in the East
and West, with Other Lectures, Addresses and Essays, 3rd ed. (New York:
Henry Holt & Company, 1889). p. 220, p.224.
33) 마흐무드 맘다니는 19세기 중반 식민주의의 위기로 인해 ‘식민지 통치성(colonial
governmentality)’이라는 새로운 형식이 탄생했는데, 이는 피식민지 주민의 주체
성을 주조하는 통치성으로서 간접지배로 나타났다고 본다. 헨리 메인은 식민지
통치성 원리를 제시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맘다니는 분석한다. 마흐무드
맘다니, 규정과 지배: 원주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창비, 2017), 13쪽,
66-67쪽.
34) Joan Leopold, "British Applications of the Aryan Theory of Race to India,
1850-1870," The English Historical Review 89/352 (1974), p. 580.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론과 영국, 인도, 그리스(염운옥) 209

협력세력을 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머지 인도 하층민은 ‘부족(tribe)’으로


분류해 그들의 차이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아리안 인종론에 근
거한 ‘동화주의’와 차이의 관리라는 ‘다원주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나란히 존
재하는 것이었다.

Ⅳ.유럽의 아리안, 고대 그리스인

아리안 인종론은 인도에서 지배의 위계질서를 구동하는 논리였을 뿐만 아


니라 영국 본국에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구성하는데도 영향력을 미쳤다.
19세기 영국에서 민족과 인종이 주조되는 과정에서 인도와 그리스는 둘 다
중요했고 서로 연결돼 있었다. 그리스가 ‘순수한 유럽’이라는 이미지는 북부
인도의 아리안이 인도 아대륙 남쪽에 거주하던 비-아리안 주민을 굴복시켰다
는 신화와 나란히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인도와 그리스는 아리안의 동
일한 뿌리에서 나왔고, 고대 인도 아리안이 ‘아시아의 아리안(Asian Aryan)’
이라면, 고대 그리스인은 ‘유럽의 아리안(European Aryan)’이라는 것이다.35)
인도, 그리스와 뿌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유럽문명의 원류에 닿는 지름길이
었다. 마틴 버낼(Martin Bernal)이 블랙 아테나(Black Athena)에서 적절하
게 지적하듯이, 그리스를 근대 유럽 문명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신격화하는
‘아리안 모델’의 부상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등장한 근대적 현상이었다.
산스크리트어와 유럽어 사이에 유사성이 발견되자 유럽 문명의 원류가 누구인
가의 논의에서 인도가 부상하고 이집트가 퇴조하게 되었다. 버낼은 19세기 이
전까지는 그리스 문명이 인근 이집트에 빚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보편적으로
수용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아리안주의에서는 그리스 문명의 순수성과 독
자성을 해치는 그 어떤 비(非)유럽적 요소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집트
와의 활발한 교류는 의도적으로 망각되었다는 것이다. ‘순백’의 그리스인이 유
럽 문명의 원류가 되고 ‘검은 피부’의 이집트인이 배제되는 과정에 낭만주의
시대에 만개한 아리안주의가 공헌했다.36)

35) Partha Mitter, "Greece, India and Race among the Victorians," Orrells, Daniel,
Gurminder K. Bhambra, and Tessa Roynon (Eds.) African Athena: New
Agenda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pp. 60-61.
210 歷史學硏究 제71집(2018.08)

헬레니즘은 범유럽적 현상이었으며, 유럽 여러 민족은 저마다 자신들이 더


그리스에 가깝다고 주장하며 경쟁했다. 하지만 헬레니즘의 그리스는 ‘역사적
실체로서의 그리스’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헬레니즘의 그리스 부활
은 당대의 필요에 의해 이상화된 고대 그리스의 ‘재창조’였다. 유럽 각국에서
발흥하던 민족주의는 헬레니즘을 활용했다. 18세기 중반 헤르쿨레니움와 폼페
이가 발굴되고 많은 유럽인들이 그리스를 여행할 수 있게 되면서 유럽인들은
그리스를 자신의 “조국의 연장(extension of home)”으로 간주했고, 눈앞에 보
이는 그리스의 공간을 과장된 고대사로 포장했다.37) 그리스 여행은 ‘공간 여
행’일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로의 ‘시간 여행’이었던 셈이다.
또한, 독일의 요한 요하임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1768)에 의해 그리스에 대한 미학적 이상화가 이루어졌다. 빙켈만은 
그리스 미술 모방론과 고대 미술사저술을 통해 그리스에 미학적 이상향이
자 서구 문명의 원류라는 위상을 부여했다.38) 이렇게 19세기 유럽인들은 고
대 그리스인, 즉 ‘헬라스(Hellas)’를 ‘백인 유럽 문명의 선구자’라는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태도는 그리스를 이집트,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와 연결된
고대 지중해 문명의 공간적 연속성 속에서 보던 이전 시대의 태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서구 문명에서 고대 그리스의 특권적 지위는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18세기 중반 빙켈만부터 시작해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로 이어진
범(汎)유럽의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의 산물이었다.

36) Martin Bernal, "The image of Ancient Greece as a Tool for Colonialism and
European Hegemony," George C. Bond and Angela Gilliam (Eds.) Social
Construction of the Past: Representation as power (Psychology Press, 1997),
pp. 108-119. 버낼의 주장을 더 밀고 나가 그리스 문명은 선진 이집트문명으로
부터 광범위한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 그리스가 이집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논지에 대해서는 다음 문헌이 유용하다. 장 필리프
오모툰드 지음, 경희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옮김, 유럽 문명의 아프리카 기원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5).
37) Artemis Leontis, Topographies of Hellenism: Mapping the Homeland (Ithaca
& London: Cornell UP, 1995). p. 10. 이효석, 「헬레니즘, 유럽중심주의, 영국성
-19세기 영국사회와 고대 그리스의 전유」, 19세기 영어권 문학 13/2 (2007),
116쪽에서 재인용.
38) David Ferris, Silent Urns: Romanticism, Hellenism, Modernity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0), p. 4.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론과 영국, 인도, 그리스(염운옥) 211

유럽 문화의 원류로서 고대 그리스를 향한 동경과 숭배는 18세기말 유럽


전역에서, 특히 독일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던 현상이지만, 영국의 ‘그리스 열
풍’ 역시 독일에 못지않았다. 낭만파 시인 존 키츠(John Keats)는 아티카풍의
고대 그리스 항아리를 찬미하는 시를 바쳤다. 수니움의 대리석 계단에 눕게
해달라고 노래한 조지 고든 바이런 경(Lord George Gordon Byron)은 그리스
독립운동에 참전했다가 죽음을 맞았다.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uart)와 니
컬러스 레벳(Nicholas Revett)은 2년간 아테네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1762년
고대 그리스 유적과 건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담은 아테네의 고적(The
Antiquities of Athens)을 발간했다. 스튜어트와 레벳의 그리스 여행은 영국
에서 ‘그리스 부활’의 신호탄이 되었다.39) 이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1850년
런던 시내 한복판에 이오니아식 열주가 늘어선 그리스 양식의 건물이 등장했
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신축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은 영제국 심장부에
화려하게 부활한 그리스 문화의 상징물이었다.
영국박물관에 전시된 ‘파르테논 마블(Parthenon Marbles)’ 만큼 그리스 열
풍과 함께 직조된 민족의식과 인종의식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없을 것이
다. 오스만 제국 주재 대사 엘긴 경 토머스 브루스(Thomas Bruce)가 1806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엘긴 마블(Elgin Marbles)’
이라고도 불리는 파르테논 신전 조각은 그리스로부터 거센 반환요구를 받고
있는 대표적인 약탈 유물이다. 엘긴 마블은 영국인의 뿌리를 고대 그리스에
닿게 해주고, 나아가 초-민족적(supra-national) 지배민족으로서 영국인의 지
위를 확인시켜주는 ‘마법의 돌’이었다.
그러나 엘긴 마블이 처음부터 환영받으며 영국박물관에 모셔졌던 것은 아
니다. ‘마법’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의회
가 엘긴 경으로부터 3만 5천 파운드에 구매를 결정한 것은 1816년이 되어서
였다. 긴 교섭 과정은 엘긴 마블이 ‘가치 없는 돌덩이’에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로 변신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예술품 구입 경쟁은 유럽 민족주의
경쟁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19세기 초 유럽 각국은 고대 유물과 예술품 획득
을 위해 외교전과 정복전쟁을 벌였고 획득한 전리품 전시를 위해 박물관을 건
립했다. 민족주의 형성기에 예술품 획득 경쟁은 보다 더 ‘우월하고’, ‘보편적

39) Richard Jenkins, The Victorians and Ancient Greece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pp. 1-2.
212 歷史學硏究 제71집(2018.08)

인’ 민족이 되기 위해 유용한 방법이었다.40) 망설이던 의원들을 설득한 논리


는 영국이 엘긴 마블을 구매하지 않으면 러시아 황제나 프러시아 국왕 손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마침내 의회 특별위원회는 엘긴 마블에 명예로
운 ‘망명지’를 제공할 나라는 영국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41)
마침내 영국박물관에 소장·전시된 엘긴 마블이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
는가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제임스 스테파노프(James Stephanoff)의
〈예술의 진보: 고대부터 피디아스 시대까지 조각과 회화 작품의 앙상블(The
Ascent of the Arts: An Assemblage of Works of Art in Sculpture and
Painting from the earliest Period to the Time of Phydias, 이하 앙상블)〉이
다. 1845년 제작된 이 수채화는 영국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각품을 고
대 이집트로부터 엘긴 마블에 이르기까지 발전단계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 그
림 가장 아래 단에는 힌두와 자바 조각이 놓여있고, 그 양쪽 옆에는 마야문명
유적지 코판과 팔렝케의 거대한 조상과 부조가 있다. 페르세폴리스와 바빌론
의 조각이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이집트, 에트루리아와 초기 그리스 유물이
이어진다. 페르세폴리스와 바빌론조각은 아이기나에서 온 페디먼트의 아래쪽
에 있다. 크산투스와 피갈리아에서 온 부조와 파편들, 테세우스(Theseus), 세
레스(Ceres), 라토마(Latona), 파테스(Fates) 등 파르테논 신전에서 온 조각
들이 그 위에 있고, 마지막으로 맨 꼭대기는 미네르바 신전에서 열린 아테네
축전에 참여한 행렬의 기마 인물들의 부조로 끝이 난다(그림3).42)

40) Holger Hoock, Empires of the Imagination: Politics, War, and the Arts in the
British World, 1750-1850 (London: Profile Books, 2010), p. 21.
41) Fiona Rose-Greenland, "The Parthenon Marbles as Icons of Nationalism in
Nineteenth-century Britain," Nations and Nationalism 19/4 (2013), pp.
659-662.
42) Ian Dennis Jenkins, Archaeologists & Aesthetics: In the Sculpture Galleries
of the British Museum 1800-1939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1992),
pp. 61-65; Ian Dennis Jenkins, "James Stephanoff and the British Museum,"
Apollo-the International Magazine of the Arts, 121/277 (1985), pp.
174-181, 스탠리 아베, 「중국 조각의 근대적 순간」, 미술자료 82 (2012),
67-69쪽에서 재인용.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론과 영국, 인도, 그리스(염운옥) 213

<그림 3> The Ascent of the Arts: An Assemblage


of Works of Art in Sculpture and in Painting by
James Stephanoff, 1845(© British Museum)

19세기 중엽 루브르박물관이나 영국박물관과 같은 제국주의 열강의 박물관


에 소장된 고대 조각들은 전 세계에서 수집된 유물들이었다. 스테파노프의
〈앙상블〉은 서로 다른 문화에서 수집한 고대 조각들 사이에 영국박물관이 부
여한 위계질서를 보여준다. 이 위계질서는 고전기 그리스 예술과 여타 예술을
연결하는 고리로 영국박물관이 채택한 ‘예술의 연쇄(chain of art)’ 개념에 따
른 것이었다. ‘예술의 연쇄’ 개념은 ‘존재의 연쇄(chain of being)’라는 진화론
적 사고에 근거한 은유적 구성물에 다름 아니다.43)
그리스와의 혈연의식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정치가 윌리엄 글
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1809-1898)에 관한 것이다. 1862년 스

43) Sharon Elleana Murray, "The Gaze of the Beholder: How National Identity in
Nineteenth-Century England Was Reinforced by the Collection and Display of
Ancient Egyptian Material Culture," Electronic Theses, Treatises and
Dissertations. Paper 2172 (2004), p. 14.
214 歷史學硏究 제71집(2018.08)

코틀랜드 출신의 역사가 조지 핀레이(Geroge Finlay, 1799-1875)는 중세사


가 에드워드 프리먼(Edward A. Freeman, 1823-1892)에게 편지를 보내 글
래드스턴을 그리스의 국왕으로 추대하자고 주장했다. 핀레이는 1823년 바이
런 경을 따라 그리스 독립 운동에 참전했고, 죽을 때까지 그리스에 거주하며
그리스 독립혁명사와 비잔틴 제국사를 연구한 역사가였다. 일견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 주장에 대한 당대의 반응이 흥미롭다. 글래드스턴 본인은 가십거리
로 여겼지만 흥미로워 했고, 자유당 정치가 일부는 매력적인 제안이라 여기기
까지 했다. 1858-1859년 이오니아 특명전권공사를 지낸 글래드스턴에게 그
리스 국왕 추대 논의는 처음 나온 얘기도 아니었다.44)
사실 글래드스턴은 호머와 그의 시대(1858)라는 책을 쓸 만큼 그리스에
관심이 많았고, 고전기 그리스어와 라틴어, 고전 문화에 대한 관심을 평생 간
직했다. 글래드스턴의 세계관에서 헬레니즘은 헤브라이즘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이다.45) 글래드스턴에게 호머는 외국인이 아니라 친족으로 여겨졌다. 호머
시대 그리스와 빅토리아시대 영국 사이의 유사성은 문화적인 것에 그치지 않
고 인종적인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글래드스턴이 호머 시대 그리스인과 당대
영국인을 ‘아리안’이라는 개념으로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빅토리아인은 근대
‘아시아적’ 그리스인 보다 호머 시대 그리스인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음은 틀
림없다.46) 이런 사고방식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호머 시대의 그리스인
과 영국인을 연결하는 아리안주의라는 핏줄의식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
다.
유럽문명의 기원으로서 헬레니즘과 영국인을 연결 짓는 논의는 사상가 매
슈 아널드(Matthew Arnold, 1822-1888)에게서도 보인다. 아널드는 고대 그
리스의 아테네인을 이상적인 인간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문학과 삶의 태도를
영국에 이식해야한다고 생각한 영국의 대표적인 헬레니스트였다. 그의 이상사
회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였다.47) 1869년 문화와 무질서(Culture and

44) Clare A. Simmons, “The Claim of Blood: Gladstone as King of Greece,”


Nineteenth-Century Contexts: An Interdisciplinary Journal 13/2 (1989), pp.
227-237.
45) 김기순, 신념과 비전의 정치가: 글래드스턴, (한울아카데미, 2007), 32-33쪽.
46) Clare A. Simmons, “The Claim of Blood: Gladstone as King of Greece,”
Nineteenth-Century Contexts: An Interdisciplinary Journal 13/2 (1989), p.
234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론과 영국, 인도, 그리스(염운옥) 215

Anarchy) 초판에서 아널드는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피력한대로 인간의 단


일기원설이 옳다고 전제하면서 인류는 인종적·문화적으로 인도-유럽계와 셈
계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아널드는 영국인은 “기질적으로 누구 못지않게 인도
-유럽적”이지만 실제 삶과 도덕에서 셈계 헤브라이인이 가진 확신성, 고집,
강렬성을 굳건히 갖고 있으며 이러한 성향이 17세기 청교도주의로 나타났다
고 보았다. 청교도주의는 헬레니즘에 맞선 헤브라이즘의 반작용이었다는 것이
다.48) 아널드는 당대 영국 문화의 주류인 헤브라이즘이 빠지기 쉬운 무교양
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헬레니즘을 적극적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널드가 보기에 영국 문화의 원류는 헬레니즘에 있기에 고대 그리스는 마땅
히 돌아가야 할 고향이었다. 그런데 인도-유럽계 영국인의 기원은 아리안이
기 때문에 헬레니즘의 문화적 이상을 성취할 잠재성은 이미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49) 영국인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통합한 최상의 것으로서 문화
와 교양을 담지한 민족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아널드의 문장은 헬레니즘의
적자(嫡子)에서 지배민족으로 성장하는 영국인이라는 민족 정체성 서사의 완
성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엘긴 마블의 도착과 영국박물관에서의 전시, 글래드스턴 그리스 국왕 추대
론, 아널드의 헬레니즘 문화론으로 대변되는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한 동경과
찬양을 통해 영국인종, 영국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는 지배민족이자 보편
민족으로서 자신을 규정해나갔다. 그리스에 대한 열광과 숭배, 그리스와 ‘뿌
리’를 공유한다는 의식은 아리안 인종론, 인도에 대한 식민지배와 동시대적
현상이었다. 19세기 영국의 민족 정체성은 영국의 인도지배 과정에서 생산된
아리안 인종론과 그리스 문화에 대한 전유를 거치면서 만들어졌다. 이는 민족
주의와 인종주의가 어떻게 결합했는가 보여주는 사례인 동시에, 인도와 그리
스라는 타자를 통해 자기인식과 자기완성의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 다름 아
니었다.

47) 이효석,「헬레니즘, 유럽중심주의, 영국성-19세기 영국사회와 고대 그리스의 전유


」, 19세기 영어권 문학 13/2 (2007), 109-110쪽.
48) 매슈 아널드 지음, 윤지관 옮김,교양과 무질서 (한길사, 2006), 168-169쪽 ;
Athena S. Leoussi, “Nationalism and Racial Hellenism in Nineteenth-Century
England and France,” Ethnic and Racial Studies 20/1 (1997), pp. 55-56.
49) Richard Jenkins, The Victorians and Ancient Greece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p. 166.
216 歷史學硏究 제71집(2018.08)

Ⅴ. 맺음말

영국판 ‘내선일체론’이라고 할 만한 아리안 인종론은 일차적으로는 식민지


배를 정당화하고 영제국을 옹호하는 논리였다. 존즈와 같은 오리엔탈리스트들
에게 영국의 책무는 인도가 상실한 과거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회복시키는 것
이었다. 영국인과 인도인은 고대 아리안으로서 친족 관계이기 때문에 인도를
문명화시키는 영국의 지배는 이질적이지 않고 자연스런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아리안 인종론은 인도지배의 협력세력을 양성하는 논리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는 상위 카스트에서 협력세력을 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머지 인도 하층민
은 ‘부족(tribe)’으로 분류해 그들의 차이를 관리함으로써 아리안 인종론에 근
거한 ‘동화주의’와 차이의 관리라는 ‘다원주의’는 지배전략의 양면을 이루었다.
그리스에 대한 열광과 숭배, 그리스와 ‘뿌리’를 공유한다는 의식은 아리안
인종론, 인도에 대한 식민지배와 동시대적 현상이었다. 19세기 영국의 민
족 정체성은 영국의 인도지배 과정에서 생산된 아리안 인종론과 그리스 문
화에 대한 전유를 거쳐 형성됐다. 고대 인도인이 ‘아시안 아리안’이라면 고
대 그리스인은 ‘유럽의 아리안’이었다. 아리안 인종론의 전개는 이는 인도
와 그리스라는 타자를 통해 영국의 자기 정체성,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만
들어지는 과정이었다.
아리안 인종론의 정치적 입장이 반드시 식민지 옹호론으로만 귀결되는 것
은 아니었다. 뿌리가 같다는 관념은 정반대의 결론을 낳을 수도 있었다. 인도
기독교도 가운데는 영국 여왕에 대한 충성과 복종 아래 영국인과 인도인의 우
애를 바탕으로 평등사회를 건설한다는 전망을 아리안 인종론을 전유해 주장하
는 사람들도 있었다. 뿌리가 같다면 평등할 수 있다는 논리다. 또한 19세기말
힌두 민족주의자들도 식민지 해방운동에 아리안주의를 활용하기도 했다.50)
아리안주의라는 인종적 언어는 영국의 인도 지배를 안정시키는 수단이었지

50) 이 점에 대해서는 이지은,「인도 식민지 시기와 국가형성기 하층카스트 엘리트의


저항 담론 형성과 역사인식」,동양사학연구125 (2013), 405-440쪽을 참조. 조
띠라오 풀레와 아리안 인종설 뒤집기와 암베드까르와 ‘달리뜨’ 정체성을 분석하고
있다. 풀레와 암베드까르는 아리안 인종설 받아들이면서도 전복적으로 사고한다.
아리안은 3천 년 전 인도에 침입해 선주민을 정복하고 카스트 제도로 착취한 침
략자 즉 이방인이고, 하층카스트를 이루는 비(非)아리안 선주민이야말로 인도의
원래 주인이라는 것이다.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론과 영국, 인도, 그리스(염운옥) 217

만 동시에 제국의 질서에 긴장을 유발하는 원천이 되기도 했다. 지배를 위해


서는 한편으로는 영국인과 인도인의 유사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두 사회와 집
단 사이에 차이를 강조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리안 인종론에 내포되어 있는
스스로를 내파(內破)하는 모순은 인도라는 다이아몬드를 ‘왕관의 보석’51)으로
억지로 세공하려는 영국이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었다.
아리안 인종론은 역설적인 형태로 오늘날까지도 살아있다. 오늘날 인도 반
(反)인종주의 운동은 반(反)카스트운동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달리트, 즉
불가촉천민의 해방을 주장하는 반카스트운동 진영에서는 아리안주의 담론을
비판한다. 그런데 이런 비판은 역설적으로 아리안주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으로 귀결된다. 일종의 적대적 공존 관계인 것이다. 또한 현대적 맥락에서 아
리안 인종론의 카스트 제도와의 연관성도 주목할 만하다. 인도 카스트 제도는
원래는 종교적 개념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나 영국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힌
두교 고유의 전통으로 ‘발명’되고 ‘고정’되었다. 카스트는 영국이 19세기 후반
부터 근대적 ‘인구센서스’를 인도에 도입하면서 대다수의 인도인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며 이러한 카스트 의식은
훨씬 강화되고 식민정책이 부여한 카스트에 의한 위계질서의 지배를 받게 됐
다. 센서스에 기록된 각 카스트의 전통직업과 특질은 곧장 행정과 고용에 적
용되어 인도인들 사이에서 카스트의 중요성을 극대화시켰다.52) 카스트제도와
아리안 인종론의 관계, 카스트제도와 인종주의 및 반(反)인종주의와의 관계는
또 다른 연구를 요하는 과제라고 하겠다.

논문투고일: 2018.7.20. 심사완료일: 2018.8.12. 게재확정일: 2018.8.16.

51) 인도가 ‘왕관의 보석’이라는 디즈레일리의 널리 알려진 문구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


다. 실제로 인도산 코이누르(Koh-i-Noor) 다이아몬드가 여왕의 왕관을 장식하고
있다. 코이누르는 186.5 캐럿에 달하는 초대형 다이아몬드로 1849년 펀잡 지방을
병합한 동인도회사가 약탈해 빅토리아여왕에게 바친 것이다. 현재 인도에서는 약탈
유물이므로 반환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1851년 수정궁 대박람회에 전시된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에 관한 분석은 다음 논문을 참조. Paul Young, “‘Carbon, Mere
Carbon’: The Kohinoor, the Crystal Palace and the Mission to Make Sense of
British India,” Nineteenth-Century Contexts 29/4 (2007), pp. 343-358.
52) 이지은,「인도 센서스와 식민 지식의 구축: 19세기 인도 사회와 정립되지 않은
카스트」,역사문화연구59 (2016), 165-196쪽.
218 歷史學硏究 제71집(2018.08)

국문초록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론과


영국, 인도, 그리스

염 운 옥

본 연구는 영국의 인도 지배를 정당화한 식민주의 담론 아리안 인종론을


분석했다. 아리안 인종론은 식민주의와 인종주의가 어떻게 결합되는가를 보여
주는 역사적 실례였다. 아리안 인종론의 발상지는 영국령 인도 캘커타였다.
윌리엄 존즈 같은 영국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캘커타에서 비교언어학과 인류
학 연구를 통해 아리안 인종론을 창안했다. 아리안 인종론은 인도 캘커타에서
탄생했지만, 식민지 인도에 머물지 않고 본국 영국의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유럽의 백인우월주의가 주조되는데 영향을 미쳤다. 18세기말 오리엔탈리즘 지
식의 전형으로서 영령 인도에서 탄생한 아리안 인종론은 19세기 영제국 문화
의 핵심 요소로 작동했다. 영국인은 ‘활기찬 아리안’으로 인식된 반면, 인도인
은 ‘퇴화된 아리안’으로, 나머지 인류는 ‘후진적인 비(非)아리안’이라는 식으로
구분되었다. 아리안 인종론은 인도의 과거를 분석하고 영제국의 현재를 정당
화하는 도구로 작용했던 것이다. 인도인이 ‘아시안 아리안’이라면 그리스인은
‘유럽의 아리안’으로 인식되었다. 영국판 ‘내선일체론’이라 할 만한 아리안 인
종론은 식민지배 정당화와 제국 옹호라는 정치적 입장으로만 귀착되지 않았
다. 뿌리가 같다는 관념은 정반대의 결론을 낳을 수도 있었다. 영국 동양학자
들이 구성한 아리안 인종론을 인도인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유했다. 19세
기말 힌두 민족주의자들은 식민지 해방운동에 아리안주의를 활용하기도 했다.
아리안주의라는 인종적 언어는 영국의 인도 지배를 안정시키는 수단이었지만
동시에 제국의 질서에 긴장을 유발하는 원천이 되기도 했다.

<주제어>
영국, 인도, 그리스, 아리안주의, 식민주의, 인종주의, 오리엔탈리즘, 윌리엄 존즈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론과 영국, 인도, 그리스(염운옥) 219

Abstract

Colonialism and Racism: Britain, India, Greece,


and Aryanism

Yeom, Woon-Ok

This paper examines Aryanism discourse which supported British Raji in


colonial India. Aryanism was one of the most remarkable cases to witness
how colonialism and racism co-worked. The birthplace of Aryanism was
Calcutta in British India. The ardent Orientalist such as William Jones
fabricated the racial discourse. They created it through comparative
linguistics and ethnology. Aryanism was born in India, but its impact did
not only contained in colonial India. It also affected on metropole and
further on making of nationalism, racism and white supremacy. Aryanism
as a Orientalist knowledge worked as a important factor in British empire.
While the British was considered as 'vigorous Aryans', the Indians was
'degenerate Aryans' and the others 'backward Aryans'. While Indian was
considered as 'Asian Arynas', Greeks was 'European Aryans'. The
nationalist of India in late 19th century, however, appropriated the
discourse differently and they utilized it for the liberation movement from
colonial rule.

<Key words>
Britain, India, Greece, Aryanism, colonialism, racism, orientalism, William Jones
220 歷史學硏究 제71집(2018.08)

참고문헌

1. 1차 사료
ㆍJones, Sir William. “On the Hindus.” The Third Anniversary Discourse, Delivered
2 February, 1786. The Works of Sir William Jones. Vol. 1 (London:
G.G. and J. Robinson, 1799), pp. 19-34.
ㆍMaine, Henry James Sumner. “The Effects of Observation of India on Modern
European Thought.” Maine. Village Communities in the East and West,
with Other Lectures, Addresses and Essays. 3rd ed. (New York: Henry
Holt & Company, 1889). pp. 205-239.
ㆍMüller, Friedrich Max. Biographies of Words and the Home of the Aryans
(London: Longmans, Green, and co., 1888).

2. 2차 사료
1) 단행본
ㆍ김기순. 신념과 비전의 정치가: 글래드스턴(한울아카데미, 2007).
ㆍ버낼, 마틴 지음. 오흥식 옮김. 블랙 아테나1(소나무, 2006).
ㆍ아널드, 매슈 지음. 윤지관 옮김. 교양과 무질서(한길사, 2006).
ㆍ오모툰드, 장 필리프 지음. 경희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 옮김. 유럽 문명의 아프리카
기원(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5).
ㆍBallantyne, Tony. Orientalism and Race: Aryanism in the British Empire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2006).
ㆍBreckenridge, Carol A. and Peer Van der Beer (Eds.) Orientalism and the Postcolonial
Predicament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3).
ㆍBryant, Edwin. The Quest for the Origins of Vedic Culture: the Indo-Aryan
Migration Debat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ㆍBryant, Edwin F. and Laurie L. Patton (Eds.) The Indo-Aryan Controversy:
Evidence and Inference in Indian History (New York: Routledge Curzon,
2004).
ㆍCentre for Contemporary Cultural Studies. Empire Strikes Back: Race and
Racism In 70's Britain (New York: Routledge, 2004).
ㆍCohn, Bernard S. Colonialism and Its Forms of Knowledge: The British in India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ㆍFerris, David. Silent Urns: Romanticism, Hellenism, Modernity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0).
ㆍFranklin, Michael J. 'Orientalist Jones': Sir William Jones, Poet, Lawyer, and
Linguist, 1746-1794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론과 영국, 인도, 그리스(염운옥) 221

ㆍHoock, Holger. Empires of the Imagination: Politics, War, and the Arts in the
British World, 1750-1850 (London: Profile Books, 2010).
ㆍJenkins, Ian Dennis. Archaeologists & Aesthetics: In the Sculpture Galleries of
the British Museum 1800-1939 (London: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1992).
ㆍJenkins, Richard. The Victorians and Ancient Greece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ㆍLeontis, Artemis. Topographies of Hellenism: Mapping the Homeland (Ithaca &
London: Cornell UP, 1995).
ㆍMamdani, Mahmood. Define and Rule: Native as Political Identit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2), 최대희 옮김. 규정과 지배: 원주민은 어
떻게 만들어지는가(창비, 2017).
ㆍMantena, Karuna. Alibis of Empire: Henry Maine and the Ends of Liberal
Imperialism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0).
ㆍOrrells, Daniel, Gurminder K. Bhambra and Tessa Roynon. (Eds.) African
Athena: New Agenda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ㆍSaid, Edward. Orientalism: Western Conceptions of the Orient (Routledge &
Kegan Pail Ltd., 1978; Penguin Books, 1985: 1991: 1995), 박홍규 옮김.
오리엔탈리즘(교보문고, 1991: 2004).
ㆍStern, Philip J. The Company-State: Corporate Sovereignty and the Early
Modern Foundations of the British Empire in India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ㆍTrautmann, Thomas R. (Ed.) The Aryan Debate (New Delhi &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ㆍTrautmann, Thomas R. Aryans and British India (L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ㆍTrautmann, Thomas. Languages and Nations: The Dravidian Proof in Colonial
Madra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6).

2) 일반논문
ㆍ구하원. 「윌리엄 존스(William Jones)와 마누법전(Mānava Dharmaśāstra)의 번역」,
인도연구18/2 (2013), 1-34쪽.
ㆍ아베, 스탠리.「중국 조각의 근대적 순간」, 미술자료 82 (2012), 63-92쪽.
ㆍ이지은. 「인도 센서스와 식민 지식의 구축: 19 세기 인도 사회와 정립되지 않은
카스트」, 역사문화연구59 (2016), 165-196쪽.
ㆍ이지은. 「인도 식민지 시기와 국가형성기 하층카스트 엘리트의 저항 담론 형성과 역
사인식」, 동양사학연구125 (2013), 405-440쪽.
ㆍ이지은. 「인도를 문명으로 이끈 이주민, 아리아인」, CHINDIA Plus 77 (2013), 48-49쪽.
ㆍ이효석. 「헬레니즘, 유럽중심주의, 영국성-19세기 영국사회와 고대 그리스의 전유」,
222 歷史學硏究 제71집(2018.08)

19세기 영어권 문학 13/2 (2007), 97-123쪽.


ㆍBalibar, Etienne. "Racism and Nationalism." in Etienne Balibar and Immanuel
Maurice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 Ambiguous Identities (London,
New York: Verso, 1991), pp. 59-62.
ㆍBernal, Martin. "Race, Class, and Gender in the Formation of the Aryan Model
of Greek Origins." South Atlantic Quarterly 94/4 (1995), pp. 987-1008.
ㆍBernal, Martin. "Greece: Aryan or Mediterranean? Two Contending Historiographical
Models." Silva Federici (Ed.) Enduring Western Civilization: The
Construction of the Concept of Western Civilization and Its Others
(Westport, CT/London: Fraeger, 1995), pp. 3-11.
ㆍBernal, Martin. "The image of Ancient Greece as a Tool for Colonialism and
European Hegemony." George C. Bond and Angela Gilliam (Eds.) Social
Construction of the Past: Representation as power (Psychology Press,
1997), pp. 108-119.
ㆍHutton, Christopher. "Rethinking the History of the Aryan Paradigm." History
and Philosophy of the Language Sciences (2013), http://hiphilangsci.
net/2013/07/24/rethinking-the-history-of-the-aryan-paradigm(2018.
7. 15.).
ㆍHutton, Christopher. "Rethinking the History of the Aryan Paradigm." History
and Philosophy of the Language Sciences (2013).
ㆍJenkins, Ian Dennis. "James Stephanoff and the British Museum." Apollo: the
International Magazine of the Arts 121/277 (1985), pp. 174-181.
ㆍLeopold, Joan. "British Applications of the Aryan Theory of Race to India,
1850-1870." The English Historical Review 89/352 (1974), pp.
578-603.
ㆍLeoussi, Athena S. "Nationalism and Racial Hellenism in Nineteenth-Century
England and France." Ethnic and Racial Studies 20/1 (1997), pp.
42-68.
ㆍMangan, James A. "Icon of Monumental Brutality: Art and the Aryan Man."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the History of Sports 16/2 (2007), pp.
128-152.
ㆍMurray, Sharon Elleana. "The Gaze of the Beholder: How National Identity in
Nineteenth-Century England Was Reinforced by the Collection and
Display of Ancient Egyptian Material Culture." Electronic Theses,
Treatises and Dissertations. Paper 2172 (2004).
ㆍYoung, Paul. “‘Carbon, Mere Carbon’: The Kohinoor, the Crystal Palace and the
Mission to Make Sense of British India.” Nineteenth-Century Contexts
29/4 (2007), pp. 343-358.
ㆍSimmons, Clare A. “The Claim of Blood: Gladstone as King of Greece.”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아리안 인종론과 영국, 인도, 그리스(염운옥) 223

Nineteenth-Century Contexts: An Interdisciplinary Journal 13/2


(1989), pp. 227-237.
ㆍThapar, Romila. "The Theory of Aryan Race and India: History and Politics."
Social Scientist 24/1-3 (1996): pp. 3-29.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