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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표의 감각이 생각보다 더 좋은 것 같다.

AA-Rank 이상이라고 판단을 내렸지만, 오히려 더 높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은 관찰 명령이 내려온 목표가 아닌, 드락쉬 님의 뒤를 파는 하루살이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었고, 그 임무를 수행할만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보았다.

손쉽게 처리하는 방법은 많았지만, 들키지 않고 처리하는 건 번거로웠다.

이틀간 하루살이의 뒤를 밟으면서 녀석의 동선을 확인해봐야겠다고 결심하고 서서히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

“오빠, 고마워.”

“가족끼리 뭘 고마워해, 그런데 운전할 때 깜빡이 좀 넣어, 지켜보는데 조마조마해서 혼났다.”

민주는 성아를 집으로 데려오려고 했지만, 성아가 병실 밖으로 나가는 것에 극도로 불안 증세를
보이자 어쩔 수 없이 Seung-ho를 불러서 데리고 왔다.

경호원 겸 진정제 역할이었던 Seung-ho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지 않았고 자신의 방 문고리를 열고


들어가려던 성아는 그런 Seung-ho를 보고 방에 들어가지 않고 쪼르르 다가왔다.
“삼촌, 가실 거예요?”

성아가 퇴원하기 전 미주에게 담당의는 몰래 다가와서 성아가 혼자 있으면, 우울증 증세 때문에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고 될 수 있으면 정신과 치료를 지속해서
받는 걸 권했다.

시아는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고 자신은 곧 있으면 오후 출근을 해야 하는데


성아 혼자서 집에 둘 수는 없었다.

“아냐, 성아야. 삼촌 TV 보면서 먹을 거 사오신다고 하셨어. 옷 갈아입어.”

민주의 말에 Seung-ho는 입을 열려고 했지만, 등 뒤를 찔러오는 민주의 손가락에 입을 다물었다.

성아는 Seung-ho가 가는지 안 가는지 계속 지켜보겠다는 듯, Seung-ho를 노려보며 천천히 뒷걸음질


쳐서 방으로 들어갔다.

“의사가 그러는데 성아 상태가 많이 안 좋대… 혼자 두면…”

성아가 방으로 들어가는 걸 바라보고는 민주는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

말끝을 흐리며 뒷말을 하지 않았지만 어떤 말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Seung-ho도 한숨이 나오려고 하는 걸 억지로 참았다.

“당분간만 부탁할게, 응? 오빠…”


“알겠어.”

Seung-ho의 말에 민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일단, 나가서 뭐라도 사 와.”

민주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주려고 했지만, Seung-ho는 민주의 손을 막으며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삼촌, 나는 바나나슛!”

문이 닫히기 직전 성아가 자신이 원하는 과자를 소리쳤다.

“알겠어!”

아파트 복도로 나와서 소리쳐 주고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눌렀다.

아직 직업도 못 구하고 전전하고 있었는데 성아의 일로 인해서 결심이 섰다.

올라온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서 근처 편의점으로 걸어가면서, 예전에 헌터 협회에서 보았던


팸플릿을 어렴풋이 떠올려보았다.

헌터 공식 앱을 플레이 상점에 검색을 해보자 수많은 앱이 나왔다.

Seung-ho는 가장 사람들이 많이 다운로드한 앱을 다운로드해서 실행하자, 차례로 이것저것 설치를


하라는 화면 창에 떠올랐고, 시키는 대로 하나둘 설치를 하다 보니 어느새 편의점에 도착했다.
바나나슛과 팝콘, 육포를 담았고 가볍게 마실 맥주도 네 캔 담았다.

한 손에 봉투를 들고 한 손으로 깔린 앱으로 하나둘 인증을 마친 뒤,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자


자그마한 성아의 목소리와 함께 집 창문에서 손을 흔드는 성아가 보였다.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손을 흔드는 성아를 향해 Seung-ho는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아파트 복도로 나오지는 못하고, 문을 살짝 연 채로 고개만 빼꼼 내민


성아가 보였다.

그런 성아의 모습은 건물 틈에 숨어서, 먹이를 구해오는 어미를 바라보는 새끼 고양이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의 상처와 벌어진 틈을 메울 수 있을까 발걸음을 옮기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지만,


상념에 빠질 시간은 길지 않았다.

성아는 Seung-ho를 기다린 게 아니라 바나나슛을 기다린 것처럼, Seung-ho에게 봉투를 넘겨받아서
과자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쪼르르 소파 위로 가서 TV를 켜고 쪼그려 앉았다.

다람쥐처럼 바나나슛을 야금야금 먹는 성아를 뒤로한 채 민주는 출근 준비를 하느라 안방에서


바쁘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

“시아는 언제 와?”
“집에 바로 올 테니깐… 다섯 시 반? 여섯 시?”

“알겠어. 그리고… 그냥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민주에게 물어보는 Seung-ho의 마지막 목소리는 TV 소리에 묻힐 만큼 자그마했다.

그런 Seung-ho의 말에 민주는 고개를 살짝 끄덕거려주었고, Seung-ho는 냉장고에 맥주 캔 3개를


넣어두고 한 개만을 든 채로 성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맥주를 홀짝이면서 아까 깔아둔 협회 공식 앱을 둘러보고 있자, 성아가 티비를 보다 말고 슬금슬금


옆으로 점점 다가왔다.

“삼촌, 뭐 봐?”

성아가 성호의 폰 액정 위로 얼굴을 슬쩍 들이밀었다.

“헌터 협회 공식 커뮤니티? 삼촌 헌터 할 꺼야!?”

“뭐?!”

성아가 깜짝 놀라서 소리치자 막 화장을 마치고 나온 민주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빠, 미쳤어? 엄마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삼촌, 하지 마. 응? 왜 위험한 거 하려고 그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또박또박 쏘아대는 민주, Seung-ho의 팔을 붙잡으며 애원하는 성아를
진정시키는 데는 한참 시간이 지났다.

“정~말 안전하게 할 꺼야.”

“안전한 게 어딨어! 오빠 D-Rank이잖아.”

“맞아, Porter으로 또 가려고요? 낮은 등급 Gate는 헌터들이 Porter들을 잘못 지켜준다고 하던데!”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거야.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지만, Seung-ho는 애써 웃어보았다.

“일단, 재측정하고 협회에서 권장하는 Gate보다 한참 낮은 곳을 가면 되겠지? 성아야, 삼촌이


Gate 너머에서 살아 돌아온 게 땅따먹기해서 돌아왔겠어?”

# 14

13화 I Was A Porter (2)

“안 된다.”
그렇게도 좋아하는 Seung-ho의 얼굴을 보기 싫은 듯 고개를 돌린 채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등에는
단호함이 묻어 나와 있었다.

“어머니, 정말 안전하게 할 수 있어요. 한 번만 믿어주세요. 네?”

Seung-ho가 어머니를 살살 달래면서 설득하려고 했지만, Seung-ho의 말에 고개를 돌린 어머니의


눈빛은 결코 꺾을 수 없는 고집이 보였다.

“안된다 이놈아. 이 어미가 눈 감기 전까지는 죽어도 안 된다. 아니 죽어도 안 돼!”

Seung-ho가 할 말이 있다고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가슴 한편에 스며든 불안감은 헌터를 하겠다는


Seung-ho의 말에, 다시 또 아들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심으로 바뀌었다.

아버지는 끈질긴 설득 끝에 20년간 Gate 너머에서 생존도 했고, 마석도 많이 먹었기에 충분히 낮은
등급의 Gate는 여유가 있다는 아들의 말을 들어라도 주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Seung-ho가 하는 말을 전혀 듣지도 않으셨다.

“어머니, 등급 재측정 결과만 한 번 보시고…”

“난 그런 거 모른다!! 안 돼, 안 돼!!”

고래고래 악쓰는 어머니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더 이야기를 꺼냈다가 어머니가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Seung-ho는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네, 알겠어요.”

“네가 어떻게, 어떻게 돌아왔는데… 왜! 도대체 왜! 다시 그 흉악한 곳으로 다시 가려고 그래!”

끝내 눈물을 터트리며 Seung-ho의 가슴을 두드리는 어머니를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어머니를 품에 안아서 보듬어서 달래 드리고는 안방으로 모셔다 드렸다.

어쩔 수 없이 내일 거짓말한 뒤 협회로 가서 재측정을 하고 결과를 보여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재측정 값만으로는 어머니를 설득하기에는 다소 부족할 거 같아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머릿속으로 민종이 스쳐 지나갔다. 측정값이 나오는 즉시 민종에게 부탁해서 기사를 써달라고 할


요량으로 거실로 나오면서 민종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종은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는지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민종아, 혹…”

“Seung-ho 형 도와주세요! 여기, Gate 아웃 발생하기 직전이에요!”

폰 너머 민종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민종의 목소리 너머로 사람들의 비명도 함께 뒤섞여 들려왔다.


“어디야?”

“숭성 대학교!!”

위치를 말하자마자 민종도 도망치는 것인지 스피커 너머로 다급하게 달려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아버지! 저 민종이 좀 보고 올게요.”

Seung-ho는 전화를 끊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심란하신 표정으로 TV를 보고 계신


아버지에게 가볍게 말했다.

“조금 시끄러운 거 같던데, 술이라도 한잔하는 게냐?”

“아, 네. 민종이가 같이 한잔하자네요. 조금만 마시고 오겠습니다.”

민종이 크게 소리치는 바람에 소리가 들리셨나 보다.

다행히도 전화 내용은 정확히 듣지 못하셨는지 오해하시는 덕분에 변명거리가 생겼다.

“너무 늦지는 말아라, 네 엄마 걱정한다.”

“많이는 안 늦을 거예요.”

***

Gate 아웃.
Gate가 발생하고 Gate 게이지 수치에 따라서 발생하는 시간이 천차만별로 달라지지만, 발생하는
경우는 정해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수치에 비례해서 일정 시간 동안 Gate Master를 제거하지 못하거나 Gate 핵을 파괴하지


못했을 때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아주 특수한 경우지만 Gate 내부에서 사망한 헌터들의 등급 측정값이 최초의 Gate 게이지를
뛰어넘을 때 발생한다.

문제는 Gate 아웃이 발생하면 몬스터가 곱절은 강해져서 나오기 때문에 Gate 아웃이 발생하기 전
무조건 Gate 핵을 파괴해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게이지 수치가 0인 10급 Gate는 내부의 몬스터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Gate 아웃이 일어날
때까지 Gate 유형에 따라 채집, 채광 등을 할 수 있는 Gate였다.

Gate 수치가 낮아서 빠르게 사라지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작업을 마치고 나와야 해서 운이
따라줘야 뭐라도 건질 수 있었다.

Gate 수치가 0부터 500 이하는 9급 Gate로 최하급 몬스터들이 출몰하기에 최대 수치인 500에
가까우면 최소 권장은 D-Rank 헌터 1개 파티, C-Rank 헌터는 3명 이상을 권장했다.

Gate 수치가 500부터 1700 이하는 8급으로 주로 하급 몬스터 Gate였지만 아주 가끔 최하급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있거나 그것보다도 드물게 단 한 마리의 중하급 몬스터가 Gate를 지키는 일도
있었기에 헌터 사망자가 가장 많이 나오는 마의 구간 중 하나였다.
최대 수치에 가까우면 최소 권장은 C-Rank 1개 파티 또는 B-Rank 4인이었지만, 중하급 몬스터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C-Rank으로 이루어진 파티는 최소 권장을 아득히
뛰어넘어서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뉘엿뉘엿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한 시각 숭성대학교 안에 발생한 Gate에는 출입을 통제하는 간이


펜스가 처져있었고, 그 안에는 5명의 사람이 모여있었다.

대다수는 중세 시대 기사 코스프레를 한듯한 모습이었지만,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 중 아무도


그들을 우습게 보지는 않았다.

“수치는 협회에서 들은 대로 1670 확인했어. 우리넷은 1650이고. Porter 아저씨 측정값 얼마라고
했죠?”

“87입니다.”

가장 덩치가 좋고 등에 몸통만 한 카이트 실드를 멘 남자의 질문에, 각종 생존용품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사람이 대답하였다.

“딱 D-Rank 평균쯤 되시네. 명훈아 우리가 높은데? 다 죽으면 Gate 아웃 아냐?”

“야, 중하급 나올 확률 0.1%도 안 돼. 그리고 나온다면 바로 뛰쳐나오면 되잖아. 우리 B-Rank이야


B-Rank. 4명에다가 저기 저 아저씨까지 하면 완전 여유야.”

다소 불안하기는 했지만, 제아무리 중하급이라도 맘먹고 도망치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에 각자 들고 있는 무기를 고쳐매었다.

명훈이라고 불렸던 남자는 등에 멘 자신의 몸통만 한 카이트 실드를 앞으로 치켜들었다.


가장 먼저 명훈이 Gate 너머로 들어가자 순서대로 Gate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종 생존용품을 짊어진 Porter을 마지막으로 모두 Gate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Gate는 필드형이었다.

가장 먼저 Gate로 진입한 명훈은 카이트 실드를 치켜들고 중간중간 나무 틈 사이로 비춰주는


미약한 햇빛을 벗 삼아 한껏 긴장을 유지한 채 고요한 숲속을 매서운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겨 뒷사람과 겹치지 않게 자리를 비켜주자 순서대로 한 명씩


Gate를 통해서 나오기 시작했다.

각자 약속처럼 정해져 있는 듯 한쪽 방향씩 경계를 취하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Porter이 Gate를


나오자 서서히 이동을 시작했다.

한국은 땅거미가 지는 시각이었지만 Gate 너머는 이제 막 동이 터 오른 듯 나무 잎사귀에는 촉촉한


아침이슬이 영롱하게 맺혀있었다.

일행은 긴장감을 유지한 채 한 쪽으로 서서히 나아가기 시작했고 십 분쯤 지났을까, 명훈이 카이트
실드를 가볍게 두드려서 시선을 모았다.

명훈에게 시선을 돌리자 명훈은 한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었다. 손끝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니 멀리 몬스터 하나가 우거진 나무 틈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나무에 등을 비비고 있었다.

“으으… 나 저거 알아… 돌아가자. 우리가 먼저 발견해서 다행이야.”


일행 중 가장 후미에 있던 키는 가장 작지만, 팔뚝이 어지간한 남자 다리만 한 남자가 겁에
질린듯한 목소리로 아는 척하자 모두의 시선이 남자에게 집중되었다.

“뭐야? 너 저거 알아?”

“몬스터 이름보다는 별명이 더 유명해. 만두”

명훈의 질문에 남자가 대답하자 모두의 표정이 핼쑥하게 변했다.

“…돌아가자”

만두.

정식 명칭은 기간트고릴라로 평균 신장 3.5m에 이르는 이 몬스터는 8급 Gate에서는 단독으로 6급


Gate 이상에서는 무리로 출몰한다.

몸집 때문에 만두가 아니라 녀석에게 먹힌 사람 머리가 만개가 넘어간다고 해서 만두라고 불렀다.

중하급 몬스터 중 가장 머리가 좋아서 먼저 발견 당하면 돌아가지 못하게 퇴로를 차단하고 천천히
사냥한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녀석은 일행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일행은 만두에게 머리를 먹히지 않아도 되었고
모두 몸을 낮추어 천천히 Gate로 다가갔다.
들키지 않기 위해 소리도 죽이고 기다시피 이동을 한 탓일까, 동이 터 오르던 해는 어느새 등산을
시작했고 3부 능선쯤 다다랐을 때, Gate 근처에 도착했다.

가장 앞에서 기어가던 명훈이 Gate를 발견하고는 엎드렸던 몸을 일으키자 Gate 옆 나무에


기대앉은 외국인이 눈에 들어왔다.

웬 미친놈인가 싶었는데, 바닥에 던져 놓은 칼을 주워든 걸 보고 헌터인 걸 깨달았다.

“나가! 기간트고릴라가 여기에 있어.”

명훈은 가까이 다가가며 낮게 속삭였지만, 외국인 남자는 오히려 빙긋 웃으며 칼집을 주워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거 잘 됐군, 딱 좋아.”

외국인 남자의 말에 이 무슨 미친놈인가 싶었고 외국인 남자를 두고 Gate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명훈이 남자를 지나치는 순간 남자는 칼집을 뒤로 집어 던지며 뽑아 들고 미처 반응하지 못한


명훈의 목을 베었다.

명훈의 머리가 허공으로 치솟았지만, 몸은 앞으로 두 발자국 더 걷고는 고꾸라졌다.

뒤따라 걸어오던 네 명은 눈 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순간 멈췄지만, 즉각 정신을 차리며


각자 빠르게 무기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남자는 명훈의 목을 베었지만, 혈흔조차 남지 않은 검을 가볍게 고쳐 쥐고는 무기를 움켜쥔 네
명에게 파고들었다.

기습으로 취한 이득이 아니라 압도적인 능력 차이였을까, 물 흐르듯 움직이는 유려한 움직임은


상대의 검이 스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고, 휘두르는 검은 뱀보다 유연하게 빈틈을 파고들었다.

명훈의 친구들을 처리하는 데도 불과 삼십 초도 걸리지 않았고 잔뜩 겁에 질려 등을 돌린 채


도망치려던 Porter에게 빠르게 접근해서 등에 칼을 찔러 넣었다.

“이래서 Porter 일을 하는 놈들은 안 되는 거야.”

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는 Porter을 발로 툭툭 차면서 말하는 사이 자신의 영역에서 발생한


싸움을 눈치챈 기간트고릴라가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분노한 듯 양팔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남자는 등을 찌른 칼을 뽑은 뒤 주변 풀에 피를 대충 닦아내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창 한 자루를 쥐어 들고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는 Porter을 향해 가볍게 던져


주었다.

가벼운 동작과는 다르게 창은 남자의 목을 관통하여 바닥까지 꽂혀 버렸고 Porter은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절명했다.

그 순간 조건이 충족되어 버렸고 Gate 아웃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양팔을 휘두르며 달려오던 기간트고릴라도 이상을 감지했고 자신을 가둬둔 이 공간에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감지하고 잠시 멈추어 섰다.
그런 기간트고릴라를 뒤로한 채 남자는 칼집을 주워 칼을 집어넣고는 Gate 너머 지구로 다시
돌아갔다.

Gate를 통해 다시 지구로 넘어온 남자는 팔을 들어 시계를 바라보고 곧 근처를 지나갈 하루살이를


마중 나가기로 했다.

Gate 아웃의 징후를 띤 Gate를 뒤로 한 채로.

# 15

14화 I Was A Porter (3)

민종은 헬스를 마치고 지친 몸에 휴식을 안겨주기 위해서 숭성대학교 안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차가운 12월의 밤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저 멀리 Gate가 빛나는 걸
발견하고는 서둘러 달려가 보았다.

달려가는 방향에서는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채 서로를 밀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망치고


있었다.

Gate에서 멀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을 피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Gate 근처에 다다랐다.
Gate 아웃 현상은 헌터의 사망으로 발생한 것인지, 아직 협회에서 사람이 도착한 거 같지는 않았다.

Gate로 진입한 헌터가 죽는 일은 있어도 Gate 아웃이 될 정도로 죽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에 헌터


전문 기자 생활을 4년간 한 민종조차 처음 겪는 일이었다.

민종이 협회에 신고 전화하기 위해서 폰을 꺼내든 순간, Seung-ho에게서 전화가 왔다.

“민종아, 혹…”

“Seung-ho 형 도와주세요! 여기, Gate 아웃 발생하기 직전이에요!”

Seung-ho의 말을 자르면서 민종이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순간 Gate는 기다려주지 않겠다는 듯 한층 더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Gate 아웃의 2단계가 일어나고 있었다.

3단계로 이루어지는 Gate 아웃은 최초에 은은하던 Gate의 빛이 배로 밝아진다.

그 후 2단계에 돌입하면 Gate는 점차 밝아지며 이때까지는 Gate에 진입이 가능하지만, 빛이


최고조에 이르면 3단계가 시작된다.

3단계가 시작되면 흘러나오는 빛은 점차 그 세기가 줄어들기 시작하며, 이때부터는 Gate 진입이


불가능해진다.
“어디야?”

“숭성대학교!!”

당장이라도 달려올 듯한 Seung-ho의 목소리에 민종은 악을 쓰며 대답하고 서둘러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민종도 Gate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뒤돌아 냅다 뛰려고 했다.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외국인 남자만 없었다면.

“도망쳐요. Gate 아웃이 일어났어요!”

민종은 눈앞의 외국인 남자의 팔을 붙잡으며 같이 도망치려고 했지만, 뿌리 깊은 거목처럼 남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도망쳐야 한다고요!!”

민종은 남자의 팔을 붙잡고 연신 몸을 흔들어 보았지만, 남자는 점차 밝아지는 Gate와 민종을


번갈아 보면서 착잡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친절하군, 그래서 더 안타까워.”

남자는 쓴웃음을 지은 채로 의미심장하게 말했지만, 민종은 길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죽어도 난 몰라요.”
남자의 잡은 팔을 놓으며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남자의 발이 빠르게 움직이며 민종의 왼쪽
정강이를 가격했다.

순간 바닥이 민종의 얼굴을 강타하며 피부가 상했지만,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얼굴을 아파할
겨를도 없었다.

무릎 아래 다리는 기형적으로 꺾여있었고, 정강이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통증에 민종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끄아악, 왜, 왜!”

“살아남으면, 다시는 날 볼일은 없을 거야. 행운을 빌지.”

남자는 말을 끝으로 뒤돌아 사라져버렸고 민종은 난데없는 봉변에 고통 속에 몸부림치면서도 살기


위해 바닥을 기어갔다.

“끄으윽… 끅…”

차가운 12월의 겨울 바닥을 맨손으로 기어가는데도 손이 시린 걸 전혀 느끼지 못한 정도로


다급했다.

이를 악물고 바닥을 기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부러진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무의식중에 바닥을 긁은 손톱이 몇 개 부러졌다.

부러진 손톱에서는 피가 흘러나왔지만,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비하면 손톱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조족지혈이었다.
뒤편의 Gate는 어느새 빛이 최고조에 도달했는지 더는 밝아지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싶어서 절망감에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순간, 앞쪽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두운 절망 속에 내려온 한 줄기 빛처럼 곁으로 다가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힘겹게


고개를 들어 보였다.

“괜찮아요?”

천사의 목소리처럼 달콤하게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전혀 괜찮지 않지만, 민종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민종의 부러진 다리를 보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깜짝 놀랐지만, 뒤편에서 빛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Gate를 보았다.

여자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며 민종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어 부축을 시도했다.

부러진 왼쪽 다리 편에서 여자는 안간힘을 쓰며 민종을 일으켜 세웠다.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부러진 다리에 전해지는 충격에 자리에 주저앉을뻔했지만, 그대로 고통에
굴복해 버리면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흐윽…”
“괜찮아요? 일단, 가까운 건물로 들어가요.”

Gate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했지만, 민종의 다리 상태로는 얼마 도망칠 수도 없었다.

여자는 뒤편에서 점차 사그라지는 빛에 두려움이 왈칵 몰려들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이 죽을게


뻔한 데 자신 혼자 도망칠 만큼 모질지 못했다.

하지만 나아가는 속도는 여전히 더디기만 하였다.

“우리, 저 앞에 중앙, 도서관으로 들어가서, 숨어요.”

여자는 숨을 헐떡이며 민종을 부축한 채로 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중앙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은 낮은 언덕이었지만 자기보다 한참 무거운 민종을 부축하는 여자의


얼굴에서는 한겨울 날씨가 무색할 만큼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말할 힘 있으면, 빨리 걸어요!”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중앙도서관에 도착했지만, 교내에서 벌어진 Gate 아웃으로 인해서


도서관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상? 지하?”

여자의 물음에 재고의 가치도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지하에 갇히면 그대로 끝장이기에 가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높은 곳에서 지켜보려고 했지만,
자료실 문은 모조리 닫혀있었다.

“어떻게 하죠?”

극도의 긴장감으로 숨을 헐떡이는 여자의 질문에 민종은 피범벅인 손을 주머니에 넣어 핸드폰을


꺼내려고 했지만, 부러진 손톱이 옷에 걸렸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민종을 대신해서 여자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내주었다.

“비밀번호는 0904고, 통화목록 가장 위 사람한테 전화 좀 걸어주세요.”

“Seung-ho 형? 이 사람한테요?”

여자가 폰을 화면을 민종에게 보여주며 확인시켜주자, 민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 통화를 누르는 순간. 저 멀리 밤하늘을 가르며 우렁찬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쿠어어어!! 우훠우훠!!”

***

기간트고릴라는 온몸을 감싸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힘에 기쁨의 포효를 지르고 난 후, 갑자기 바뀐


낯선 주변 환경을 살피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살던 곳과 기온이 많이 차이가 났지만, 문제가 되지는 않았고 커다란 콧구멍을 벌렁거리자
여러 가지 이색적인 냄새와 낯설지만 익숙한 냄새가 났다.

방금 먹은 맛있는 음식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냄새가 나는 쪽으로 이동하니 바닥에 핏방울이 한두 방울씩 이어지고 있었다. 기간트고릴라는


냄새를 따라서 쫓아가기 시작했다.

먹잇감을 흔적을 쫓던 기간트고릴라는 어느 커다란 바위 안으로 이어지는 흔적에 이상하게 생긴


바위로 다가갔다.

바위 표면은 매끄럽고 군데군데 물처럼 반짝이는 돌들이 박혀 있었다. 손을 슬며시 뻗어서 만지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내렸고, 빛이 흘러나오는 내부가 보였다.

처음 보는 신기한 바위를 발견한 기간트고릴라는 흥분하여 바위 주변을 맴돌았다.

주변을 맴돌면서 반짝이는 바위들에 손가락을 한 번씩 넣으면서 부수다가, 바위 안쪽으로


들어가는 동굴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몸을 막는 반짝이는 바위들을 부숴 버렸다.

자자작! 콰직!

손쉽게 부서진 반짝이는 바위는 바닥에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동굴 안쪽에서 먹잇감의 냄새가
흘러나왔다.

먹잇감의 냄새에 흥분한 기간트고릴라는 가슴을 치며 소리 질렀다.


“후화후화후화!!”

하지만 동굴 안은 자신이 똑바로 서기에 좁았고 몸을 구겨 넣어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먹잇감의 냄새를 따라가 보았지만, 여러 가지 냄새 탓에 흔적을 쫓기가


힘들었다.

마지막에 바닥에 떨어진 먹잇감의 혈흔에 코를 대고 한참을 킁킁거렸다. 그러다 흔적을 놓친 것에


화가 치밀어서 주변을 막 때려보았다.

“꺅!”

주변을 때려 부수던 기간트고릴라는 자신의 머리 위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파괴를 일삼던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

아래쪽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부서지는 소리에 놀란 여자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민종이 빠르게 손을 뻗어 여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아래쪽에서 활발히 움직이던 몬스터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여자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민종은 여자를 탓할 수 없었다.

어떻게 자신들을 따라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어서 빨리 Seung-ho가 도착해 주기를 기도하며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귀에 온 신경을 쏟아부어 집중하니, 계단을 천천히 올라오는 몬스터의 발소리가 칼날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점차 목을 조여오는 죽음 앞에 몸이 떨려왔지만, 이대로 가만히 죽을 수는 없었다.

민종은 여자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자신이 생각해둔 바를 손짓으로 표현했다.

여자는 몬스터가 올라오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자는 민종의 손짓을 이해했지만,


어차피 불과 몇 초의 시간을 버는 최후의 발악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혹시라도 몬스터가 멍청하게 그대로 위에 남을지도 모른다고, 순진한 생각으로 자기


위로를 하면서 버튼을 눌러야 할 때를 기다렸다.

올라오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면서 4층 정도 올라왔다고 판단되었을 때, 열림 버튼을 눌렀고


민종은 쓰러지며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쓰러진 민종을 세울 겨를도 없이, 여자는 연신 닫힘 버튼과 1층 버튼을 연이어 눌렀다.

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기간트고릴라는 빠르게 계단을 뛰어 올라왔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순간


막 6층으로 도착한 기간트고릴라는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가 나는 바로 옆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자 주먹으로 한 대 후려쳤다.


엘리베이터 문은 뒤로 날아가며, 엘리베이터 와이어를 때렸고 엘리베이터는 살짝 출렁거렸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지만 먹을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았고, 자신이 쫓아온 먹잇감은


보이지 않았기에 잠시 주변을 살피며 먹잇감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주변의 다른 엘리베이터 문과 자료실 유리문을 파괴해 보았지만, 먹잇감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내려가던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1층에서 소리 내며 멈추었다.

그 소리에 몬스터는 내려간 엘리베이터 와이어를 붙잡으며 아래로 뛰어내렸다.

민종은 여자의 부축을 받으며 엘리베이터에 내려서 1층 로비로 나갔다. 그러자 자신이 내렸던
엘리베이터에서 뭔가 긁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서 뒤를 바라보자 엘리베이터는 굉음 소리와 함께 반쯤 내려갔다.

내려온 틈 사이로 수북한 털과, 어지간한 남성 가슴둘레만 한 다리가 보였다.

기간트고릴라는 벌려진 틈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어 민종을 발견하였다.

민종은 몬스터의 감정을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이빨을 드러내고 기쁨의 웃음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기간트고릴라는 좁은 틈을 빠져나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위에서 연신 점프하였고, 엘리베이터는 그


충격을 못 이겨 조금씩 내려갔다.
자신이 빠져나갈 틈이 충분히 생기자 기간트고릴라는 몸을 숙였고 자신의 눈에 제자리에 멈춘 채
소리를 지르는 먹잇감들이 포착되었다.

아까 먹은 5마리도 맛은 있었지만, 살아있는 먹이를 입에 넣고 움직일 때 그 식감을 느낄 수 있다는


행복감에 이빨을 드러내며 웃음 지었다.

민종과 여자는 황급히 중앙도서관을 빠져 나왔지만, 쿵쿵대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엘리베이터는


점점 내려가며 틈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혼자라도 도망쳐요.”

어깨를 부축하고 있는 여자에게 말했지만, 여자는 벌어지는 엘리베이터 틈을 바라보더니 몸이


굳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죽을 거야. 죽을 거야. 엄마, 아빠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기간트고릴라가 머리를 들이밀며 엘리베이터 사이를 빠져나오자 여자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빠져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같은 말을
반복하고만 있었다.

그 모습에 민종은 1초라도 시간을 벌자는 생각에 결의를 다지고, 여자의 앞에서 외발로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양팔을 벌렸다.

“나부터!! 나부터 먹어라!!”

민종은 Seung-ho가 도착하기 전까지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도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주었던
여자를 위해서 찰나의 시간이라도 벌자는 마음으로 죽음을 자청하고 앞으로 나섰다.
빠르게 달려오던 기간트고릴라는 갑작스러운 먹잇감의 행동에 잠시 멈칫했으나 군침을 다시며
로비를 지나 민종의 앞에 섰다.

기간트고릴라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민종은 죽음 앞에 초연하고자 했지만, 바지를 타고 흐르는


따스한 감각을 느꼈다.

이것이 살아서 느끼는 마지막 감각이라 생각하고는 두 눈을 감았다.

# 16

15화 I Was A Porter (4)

쾅!

“다리는 왜 그래? 야… 아니다.”

민종은 간절히 바라왔던 Seung-ho의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눈앞에 기간트고릴라가 있던 자리에는 Seung-ho가 자신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Seung-ho의 어깨너머로 기간트고릴라가 보였지만, 제아무리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머리가 없이


살아있을 수는 없었다.
“Seung-ho형…”

“고생했다.”

민종에게 다가와서 어깨를 두드려주는 Seung-ho의 말에 눈물이 왈칵 흐를뻔했다.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는 Seung-ho를 민종이 껴안으려고 했지만, Seung-ho는 끌어안으려는 민종의


어깨를 붙잡아서 막았다.

“저기… 너… 바지…”

띄엄띄엄 단어를 끊으면서 말한 Seung-ho의 눈동자가 민종의 하체를 흘끔거렸다.

바지를 적시다 못해 경사진 언덕 아래로 아직도 흘러가는 액체를 바라보며 민종은 감동에서 빠져
나왔다.

긴장이 풀려서 땅에 주저앉을뻔한 민종의 어깨를 부축하며, 민종의 뒤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분은?”

“제 생명의 은인이죠… 저분 없었으면 저는 저기 저 녀석 배 속에 있었을 거예요.”

그 말에 Seung-ho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한 손으로는 민종을 부축하고 다른 손을 뻗어 여자에게 내밀자,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맞잡았다.

차가운 바닥에 닿아있던 여자의 손은 차갑기 그지없었고, 붙잡은 Seung-ho의 따스한 손의 온기를
느끼며 차가운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 따스한 온기를 느끼자 정말 자신이 살아있다는 안도감에 잠시 멈췄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자가 연신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감사의 인사하는데, 그대로 뒀다가는 이 추운 겨울 바닥에


절이라도 하겠다 싶어서 말렸다.

더 있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멀리서 뭔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느껴지는 크기와 형태를 짐작했을 때 몬스터는 아닌 거 같았다.

아마도 뒤늦게 출동한 협회 인원들로 추정되었기에 그대로 기다려 보았다.

기척의 주인은 어느덧 Seung-ho의 시야에 들어왔고 상대방도 일행을 발견했는지 빠르게 달려왔다.

“Gate 아웃 발생지역입니다!! 여기에 계시면 위험합니다. 아직 몬스터가… 저기에 있네?”


Gate 발생지역에 사람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대피시키기 위해서 다가왔지만, 어찌 된 일인지
기간트고릴라는 중앙도서관 안쪽 계단 쪽에, 머리가 없어진 채로 틀어박혀 있었다.

몬스터를 저렇게 만든 용의자는 다리가 부러진 채 한 발로 서 있는 종민과 울고 있는 여자를


제외하면 한 명만이 남았다.

“헌터이십니까?”

상대방은 Seung-ho를 바라보며 딱 부러지는 어투로 물어보았다.

“예, 뭐 일단…”

Seung-ho가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했지만, 상대방은 개의치 않은 모습이었다.

“아,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협회 특수부 소속 최유일이라고 합니다. 혹시, 조사에 협조


가능하십니까?”

정중하게 물어보는 태도가 썩 나쁘지는 않았지만, Seung-ho는 기형적으로 꺾여있는 민종의 다리를
가리켰다.

“병원부터 가야겠는데요. 이 친구 다리가 이 모양이라서… 저는 몬스터 잡은 거밖에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아아, 여기는 숭성 중도, 부상자 한 명 있으니 차량 지원 바람. 그리고 현 시간부로


상황 종료. 다시 한번 더 말한다. 현 시간부로 상황 종료. 수습반 중도로 올려보내길. 이상.”
Seung-ho의 말에 남자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에 차고 있던 무전기로 상황을
전달하고 민종의 앞에 주저앉아서 부러진 다리를 살펴보려고 했다.

민종의 바지와 바닥에 남은 흔적만 아니었다면.

“제가 의사도 아니고 섣불리 손대기가 그렇군요.”

애써 변명하고는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최유일은 기간트고릴라 사체를 살펴보러 다가갔다.

어찌나 강하게 틀어박혔는지 계단은 모조리 부서졌고 벽에 틀어박힌 기간트고릴라 주변으로 금이


잔뜩 가 있었다.

직접적인 사인은 사라져버린 머리였겠지만, 머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흉부의 상태가 덤프트럭에
치인 것처럼 움푹 들어가 있었다.

기간트고릴라 주변은 벽에 부딪혀 터져버린 등과 허리에서 흘러나온 피로 인해 찰박거렸다.

기간트고릴라의 사체를 관찰할수록 밖에 서 있는 인물이 점차 두려워졌다.

기간트고릴라를 죽이는 건 자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토록 압도적으로, 그것도 맨손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했다.

그사이 민종을 태울 구급차가 도착했다.

“팀장님, 이분들입니까?”
최유일이 기간트고릴라의 사체를 만지던 사이 구급차량 뒤에서 내린 남자 중 한 명이 최유일을
발견하고는 다가오며 물어보았다.

“그래, 내가 따라갈 테니 현장 수습 들어가고, 피해 규모 파악해서 보고 올려.”

“알겠습니다.”

구급차로 걸어가는 최유일의 신발에 묻은 피 때문에 도서관 로비에는 최유일의 뒤를 따르듯


발자국이 새겨졌다.

***

병원에서 도착한 민종은 진통제를 맞고 부러진 다리를 잡아당겨 뼈를 대충 맞추고는 수술을


기다렸다.

병원으로 이동하는 사이 민종은 최유일에게 다리를 부러트린 사내의 이야기를 빼고 전부


털어놓았다.

부러진 다리는 도망치다가 넘어진 곳이 하필 보도블록 모서리 부분이라고 둘러대었다.

의심쩍어했지만 딱히 따지고들 부분이 없었고 협조에 감사하다며 인사를 건넨 후, 쾌차를


기원하며 떠나갔다.

최유일이 떠나자 Seung-ho를 불러 조용히 자신의 다리를 부러트린 남자의 이야기를 꺼냈고 자신이
추측하는 점을 말해주었다.
“드락쉬의 부하?”

“형, 목소리가 커요.”

응급실 침대를 빙 둘러 커튼을 치기는 했지만, 위아래가 모두 뚫려있고 얇은 천이 방음효과가


있겠는가.

민종은 정색하며 Seung-ho에게 뭐라 했지만, Seung-ho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가 왜?”

민종의 예상대로라면 자신을 공격하면 했지, 단순한 기자에 불과한 민종을 도대체 왜 공격했단
말인가?

“제가 드락쉬의 뒤를 파고 있어서 그렇겠죠.”

민종의 말에 Seung-ho의 얼굴이 화가 난 사람처럼 크게 붉어졌다.

“내가 그거 그만두라고 했지? 네 가정이 사실이라고 치면 너무 위험하고, 틀렸다면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했잖아.”

“틀리지 않았어요. 하… 노트북이 있으면 사진 보여드릴 텐데”

화를 내며 이야기하는 Seung-ho의 말에 민종은 가슴이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리려다가 부러진 손톱


때문에 멈칫했다.
“제 다리를 이렇게 만든 게 누군지 아세요? 들으시면 깜짝 놀랄걸요?”

Seung-ho에게 얼굴을 들이민 채 말하는 민종의 얼굴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누군데?”

꼭 물어봐 주기를 원하는 민종의 눈빛에 못 이겨 한숨을 내쉬며 못 이기는 척 물어보았다.

“Gate에서 돌아온 뒤 곧 흔적을 감췄던 드락쉬 Guild의 4제대 대장 빅토리 칸. 제가 일전에


이야기했죠? 좀 많이 늙기도 했고 당시에 경황이 없어서 몰랐지만, 지금 떠올려보니 그 사람이
맞아요.”

빅토리 칸이면 20년 전에도 이미 A-Rank 헌터였다.

자신보다야 약하겠지만, 민종 정도는 손가락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죽일 수 있었다.

민종도 그 사실을 알 텐데 목숨값으로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는 사실에 기뻐서 웃는 걸 보니 천생


기자였다.

“지금이라도 손 떼야 하는 거 아냐?”

생글생글 웃는 민종을 보며 정보를 얻어서 그렇게 좋냐고 타박 주고 싶었지만 정작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걱정이 가득 담긴 염려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Seung-ho의 말을 틀렸다는 듯 고개를 강하게 내저었다.


“아뇨! 지금 손을 떼면 죽여달라고 목을 내미는 것과 같아요. 수술이 끝나는 데로 자료를 억지로
짜깁기한 뒤 어설프게라도 기사를 낼 겁니다! 기사를 낸 상황에서 제가 죽으면 의혹은 어디로
쏠리겠어요? 어설픈 기사라도 그 기사가 제 방패가 돼줄 거예요. 오히려 더 과장되게, 더
자극적으로 쓸 겁니다.”

“네가 살아있는 걸 알면 오늘 밤에 직접 찾아올까? 아니, 그보다 헌터에게 습격당했다고 이야기를


했으면 협회에서 보호해줄 거 아냐!”

Seung-ho는 밤에 혹시나 빅토르 칸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이야기를 꺼내다가, 협회에서도


보호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거짓으로 조사에 응한 민종을 탓했다.

하지만 Seung-ho의 추궁에도 민종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 20년 전 A-Rank 헌터에게서 저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협회에 몇 있을까요? 그리고 그런


사람이 헛소리처럼 들리는 이 말을 믿어줄까요? 과연 협회에 드락쉬의 끈이 닿아있지 않을까요?”

민종의 말에 Seung-ho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패배를 시인했다.

“적어도 오늘은 옆에서 지켜달라 이거지?”

“네, 혹시 모르니까…”

말끝을 흐리며 멋쩍은 웃음으로 Seung-ho를 보고 실업이 웃는 걸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해서 사정을 대충 설명하면 아버지는 이해를 해주실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정말 민종의 다리가 부러져서 병원에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퉁퉁 부어오른 민종의 다리를
찍고 자신의 얼굴이 나오게 셀카도 찍었다.

민종은 난데없이 자신의 부러진 다리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는 Seung-ho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신경 꺼.”

Seung-ho는 부끄러움으로 살짝 상기되었고 아버지께 코톡으로 사진을 보내 상황을 설명하는 글을


보냈다.

아버지는 주무시지 않고 기다리셨던 건지 곧바로 전화가 왔다.

“술을 얼마나 먹였길래 그렇게 다쳐.”

“죄송합니다. 아버지 지금 민종이 보호자가 없어서… 제가 같이 좀 있어 줘야 할 거 같습니다. 오늘


집에 못 들어갈 거 같아요.”

“알겠다. 네 엄마한테는 내가 잘 말해놓으마.”

"네, 아버지도 걱정하지 마시고 이만 주무세요"

“그래, 끊으마.”

아버지와 전화를 끊고 나서 민종에게 고개를 끄덕이니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최민종 씨 수술실 들어가겠습니다.”

“갔다올게요.”

간호사들은 민종이 누워있는 침대를 끌고 응급실을 지나 수술실로 향했고, Seung-ho도 간호사들을


뒤따라 응급실을 나왔다.

“아, 저기…”

응급실 문밖 의자에는 민종을 구해준 민지 씨가 앉아 있었다. 민지 씨는 응급실에서 나오는 Seung-


ho를 보며 손에 쥐고 있던, 다소 식어버린 캔커피를 건네주었다.

“아직 집에 안 가셨네요. 혹시 어디 아프신 곳이라도?”

“아, 아뇨.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고맙다고 인사하고도 다시 이렇게 고맙다며 캔커피를 손에 쥐여주는 마음씨가 고마웠다.

Seung-ho는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침묵이 계속 이어졌고 민지 씨는 캔커피를 전해주는 게 목적이


아니라 따로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듯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아, 음, 그러니까… 다음에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으시면 연락처 좀 주실 수 있나요?”

연락처를 전해줬지만, 아직 더 할 말이 남아 있는지 망설이고 있었다.

“할 말 더 있으시면 하세요.”
“저… 저분 연락처도…”

민지 씨는 민종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며, 민종의 연락처도 알려 달라고 요구했다.

Seung-ho는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민종의 연락처까지 전해주자, 그제야 밝은 얼굴로 작별


인사를 건네며 병원 밖으로 사라졌다.

“하…”

병원 복도에 홀로 남겨진 Seung-ho의 입에서 땅이 꺼질듯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 17

16화 I Was A Porter (5)

민종과 Seung-ho의 걱정과는 다르게 빅토리 칸의 습격은 없었다.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민종의 노트북이 필요했지만, Seung-ho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른 아침부터 은혜에게 노트북을 가져다 달라고 전화했다.


은혜는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땅에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Seung-ho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뭐 때문에 다친 거냐고, 민종을 무섭게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시끄러워질 걸 예상한 Seung-ho는, 잠시 어머니에게 전화하러 간다며 말하고 병실에서


빠져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Seung-ho가 나가자마자 은혜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Seung-ho는 민종을 위해
잠시 묵념했다.

“아들?”

“네 어머니, 어제 집에 못 들어가서 걱정 많으셨죠?”

“아냐 아냐, 아침은 먹었고?”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먹으려고요.”

“그럼 못쓴다. 아침은 든든하게 먹어야지. 자고로 아침에 배가 든든해야…”

다행히도 어제의 일을 꺼내지 않겠다는 듯, 어머니는 평소와 같으셨다.

한참 동안 어머니의 잔소리가 이어지는 사이, 편의점까지 도착한 Seung-ho는 샌드위치 한 개와


우유 한 팩을 사고 빠져 나왔다.

“그래. 민종이 잘 챙겨주고, 오늘은 들어오지?”


“늦게라도 돌아갈게요, 어머니.”

“일단 저녁은 해둘 테니, 일찍 오면 같이 먹자꾸나.”

“네. 어머니 들어가세요.”

길었던 어머니와의 통화가 끝나고 샌드위치를 씹으며 천천히 병실로 걸어갔다.

병실 근처로 다가갔지만, 어찌 된 일인지 병실 안에는 사람들의 기척이 득실거렸다.

고작 샌드위치를 사러 갔다 오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싶어서 복도를 급하게


내달려서 병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은혜는 출근 준비를 위해 집으로 돌아갔는지 병실 안에 없었고 어제저녁에 보았던 최유일을


비롯해 협회 직원으로 추측되는 인원들이 있었는데 각자 손에 하나씩 과일 바구니와 음료수
선물세트를 들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아, 어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 협조에 감사드리며, 위로를 드리기 위해 이렇게 찾아뵈러
왔습니다. Gate 아웃으로 인해서 다치셨는데, 찾아오는 건 당연하죠.”

개소리였다.
몬스터에게 죽은 것도 아니고 넘어져서 다친 거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과일 바구니와 음료수
선물세트를 들고 찾아온다니. 얼굴색 하나 변함없이 말하는 최유일의 태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사실이라면 선물을 민종에게 줄 것이지, 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거기 두시고 잠시 이야기 좀 할까요.”

구차한 변명을 하던 유일의 얼굴에 철판이 벗겨졌다.

유일은 머쓱한 표정으로 과일 바구니를 침대 옆에 놔두고 서둘러 Seung-ho를 따라 병실을 빠져


나왔다.

“우리 조카도 안 믿을 이야기 마시고, 본론부터 말씀하시죠.”

Seung-ho의 말에 유일은 품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서 정중하게 건네주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고작 1천만 원 수표 한 장이 들어있었다.

“그건 어제 잡으신 기간트고릴라의 마석 값입니다.”

Seung-ho의 표정이 변하기 전, 유일은 재빠르게 돈 봉투의 정체를 말해주었고 Seung-ho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품속으로 챙겨 넣었다.

그리고 말없이 벽에 등을 기대며 눈빛으로 유일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유일은 그런 Seung-ho의 태도에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지만, 헛기침을 몇 번 하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큼!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협회 특수부로 오지 않으시겠습니까? 대우는 절대


섭섭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특수부는 여기저기 이동하는 곳이 많죠? 난 적어도 서울을 벗어날 생각 없습니다.”

Seung-ho가 단칼에 거절 의사를 표시하고 병실 문 손잡이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최유일이 다급하게 앞을 가로막았다.

“근무지 서울 한정!”

순간 Seung-ho가 움찔하였으나, 문을 막은 유일의 어깨를 슬며시 밀었다.

“어젯밤에 출동한 거로 봐서 근무 시간도 엉망인 거 같은데, 지금도 업무시간이죠? 야근하고


이렇게 아침…”

“공무원과 똑같은 근무 시간!”

하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Seung-ho의 앞을 가로막으며, 이래도 싫으냐는 표정으로 외치는 유일의


말은 매혹적이었다.

유일의 제안은 달콤해 보였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봐, 그게 당신 마음대로…… 되는 거였군.”


Seung-ho가 말하는 도중 유일은 급히 품을 뒤지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 Seung-ho 앞에 펼쳐 보였다.

유일의 손에는 어젯밤 급히 작성했을 게 뻔한 계약서가 들려있었고 방금 말한 내용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밤새도록 Seung-ho 씨가 원할 만한 모든 근무 조건을 생각해서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읽어보시죠.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리고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데 말 편히 하십시오.”

계약서에는 방금 Seung-ho가 말한 내용을 제외하고도 특이사항으로 계약 기간에 국산 차량에


한정하여 중형차량 지원, 협회 직원 임대 아파트 지원, 특수부 활동 중 제거한 몬스터 등급에 따라
마석 비용 지급 등이 적혀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계약서를 읽어보고는 Seung-ho는 너무나도 좋은 조건에 오히려 골치가 아파서 머리를 긁적였다.

“…어제 기간트고릴라 가슴 앞에서 마력을 폭발시켜 중앙도서관 안쪽으로 날려 보내신 게


맞습니까?”

“맞아.”

이왕 헌터를 하기로 한 거, 적당히 다 까발려 주기로 생각했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식견이 낮아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중앙도서관 계단에 틀어박히기 직전 머리도 마력을
폭발시켜서 날리신 게 맞습니까?”
“그것도 알아봤어?”

“알아차린 게 아니라 머리가 터졌는데 혈흔은 오로지 계단 근처에만 모여있어서 추측한 겁니다.”

원리는 간단했다.

대상의 앞에서 마력을 넓게 분산해 폭발을 일으켜 상대를 날려 보낸다.

그리고 대상을 향해 마력을 불안정한 상태로 쏘아내서 원하는 시간에 터지게 만든다.

물론 뒤에 날아가는 마력은 날아가는 대상보다 빠르게 쏘아져야 하며, 터지는 방향까지 조절해야
한다.

하지만 기간트고릴라의 덩치를 생각한다면 이미 마력 폭발로 날려 보내고 자시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흠…”

“직급에 대해 신경 쓰이시겠지만, 전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말이 부팀장이지, 현장에서는


Seung-ho 씨 의견을 적극적으로 존중할 생각입니다.”

“하나만 솔직히 말해주면 고려해보지.”

“제가 아는 거에 한해서는 성심성의껏 대답하겠습니다.”


영리하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면서 대답하는 모습이 살짝 눈에 거슬렸지만, 자신도 똑같았기에
나무랄 수 없었다.

“혹시 지금 Gate 수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나?”

질문과 동시에 느껴지는 최유일의 심박 수는 아주 조금이지만 상승했고, 공기를 들이마시는 양


또한 증가했다.

“저는 그런 사실이 있다고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좋아.”

Seung-ho의 말에 유일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사인하시죠. 벽에 불편하게…”

말을 하면서 병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문손잡이를 잡으려는 최유일의 팔을 Seung-ho가 붙잡았다.

“그만 가봐.”

“네? 방금 좋다고…”

“아, Gate가 수치가 높아지지 않아서 좋다는 거야.”

Seung-ho는 최유일을 옆으로 슬쩍 밀치고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유일은 차마 따라 들어가지


못했다.
“아니, 고려해보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자, 병문안은 여기까지. 환자가 쉬어야 하니깐 다들 나가주세요.”

최유일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아직 멀뚱멀뚱 서 있는 협회 사람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Seung-ho의 말에 멀뚱멀뚱 최유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골치 아픈 상황에 유일은 오른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주무르면서 왼손을 까딱여서 협회 인원들을


밖으로 불러내었다.

“돌아가자.”

마지막으로 나온 인원이 문을 닫고는 앞서 걸어가는 유일의 곁으로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저, 팀장님”

곁으로 다가온 남자가 초조한 표정으로 슬슬 눈치를 보더니 최유일을 불렀다.

최유일은 어젯밤 Seung-ho에게 건네줄 계약서 만들 거라고 윗분들에게 늦은 밤까지 전화를 돌리고
허락을 구했다. 그러면서 욕을 있는 대로 먹었는데 영입에 실패하자 골이 지끈거렸다.

이걸 어떻게 보고를 올려야 하나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에 빠져있던 최유일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늘 사온 선물세트, 영수증 처리됩니까?”

***

“골치가 좀 아플 거야.”

병실로 들어간 Seung-ho는 저 계약서를 만들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을 유일이 안쓰럽기는
했다. 그러나 아무리 공무원 같은 근무 시간이라 하더라도 자유로운 헌터 생활과 비교한다면, 철창
안에 갇힌 새와 같았다.

그리고 그런 사실 들어본 적은 없다고 말하는 최유일의 대답도, 영 석연치 않았다.

“스카우트 제의에요?”

“그렇지, 그보다 그 손가락으로 언제 기사 다 쓸래?”

피가 쏠리지 않게 침대 아래쪽을 들어 올려 다리를 높게 하고, 배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은 민종은


새끼손가락으로 독수리 타법을 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Seung-ho는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점심시간 전에는 다 적을 거 같아요.”

“그런데 확실히 그거 다 적으면, 네가 안전해지는 게 확실해?”


“형도 분명 관찰당하고 있을걸요? 딱히 뭔가를 밝히려는 기색이 없으니까 두고 본거지, 저처럼
조사하고 다녔으면… 어휴”

그 말에 며칠 전 지하철 출구에서 느껴졌던 시선이 떠올랐다.

“야 이 새끼야! 그거 쓰면 우리 부모님도 위험한 거 아냐!?”

Seung-ho가 민종의 노트북을 빼앗자 민종은 앉은 채로 급하게 손을 뻗어 노트북을 부여잡으려고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형, 형, 아니에요. 이번에 제가 살기 위해 기사를 쓰는데 형이 말해줬을 법한 내용은 전혀 없어요!


쓰는 거 봐요. 딱! 인터넷으로 떠돌고 예전 뉴스에 나왔던 내용에, 여기에 제가 사족을 붙여서
추측성 글을 추가한 거고… 여기 보시면 이때 집에 있었다는 증거가 없으니까 ‘의심되는 드락쉬도
이때 집을 비웠다.’ 이렇게 바꾼 거고, 또 이건…”

민종이 다급하게 Seung-ho가 들고 있는 자신의 노트북 모니터를 가리키며 모두 예전에 나왔던


일들을 짜깁기한 추측성 뉴스라고 이야기했지만, Seung-ho의 기분은 상당히 찜찜했다.

“빨리 줘요~ 점심 전에는 올려야지 형도 오후에 등급 재측정하러 가죠.”

“…너 올리기 전에 내가 한번 읽어보자.”

“알았어요.”

어차피 증거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심증만으로 적어 내리는 민종의 기사는 드락쉬의 팬들과


네티즌에게 딱 물어뜯기 좋은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이 먹잇감에 달려드는 하이에나와 까마귀들이 자신과 나아가 Seung-ho의 가족들까지
든든한 보호막 역할을 해줄 것이다.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면 곧바로 이 기사가 드락쉬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기사에 증거는 없다는
걸 드러냈기에 자신과 Seung-ho의 가족에 관한 관심을 거둘 거로 생각했다.

Seung-ho는 노트북을 돌려주자 규칙적으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연신 키보드를 두드리는 민종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폰을 꺼내보았다.

- 김성아 : 삼촌 뭐 해?

- Lee Seung-ho : 민종이 병문안 왔어. 그런데 왜?

- 김성아 : 삼촌 오늘 언제 올 거야? 우리 집에 와서 점심 먹을 거면, 엄마가 삼촌 몫까지 만들 거라고


물어보라고 했어.

성아의 코톡에 아차 싶었다.

어제 민주에게 약속해놓고 민종의 일 때문에 깜빡 잊고 있었다.

- Lee Seung-ho : 점심은 먹고 갈게

- 김성아 : 삼촌, 대답이 늦는데? 잊었지?? 응??

- Lee Seung-ho : 아냐, 그보다 오늘 볼일이 조금 있어서 아슬아슬하게 갈 거 같아.


- 김성아 : 아… 응…

- Lee Seung-ho : 그래도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깐 걱정하지 말고

Seung-ho의 글 옆에 숫자 1이 사라졌지만, 날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지만, 재측정을 빠르게 받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중앙지부가 가장 가깝겠지?”

“당연하죠.”

민종은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일전에 약간 안 좋게 나온 기억이 있는 중앙지부로 가야 한다는 점이 걸렸지만, 민주네로 가는 길에


있는 건 중앙지부가 유일했기에 찝찝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 다 안 썼어?”

“10분도 안 지났어요!”

***

“…좀 이따 보지.”

남자는 전화를 끊고 한참 아이들과 놀아주는 드락쉬에게 다가갔다.


가끔 보육원에서 아이들과 어울려서 놀아주는 사진이나, 몰래 선물을 놓고 가는 사진들은
드락쉬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정기적인 일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드락쉬 님.”

남자는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힌 채, 인형을 가지고 놀아주는 드락쉬를 낮게 불렀다.

“안나? 아저씨 잠시 저 친구랑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이만 일어나줄 수 있을까?”

“응!”

아이에게 인형을 안겨주며 상냥하게 말하자 아이는 드락쉬에게 받은 인형을 가지고 어디론가 총총
뛰어갔다.

“카뉴, 표정 좀 풀어. 아이들이 겁먹잖나. 무슨 일이야?”

“칸이 실패했습니다. 목표가 경계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하루살이는 약이 듣지 않았습니다.”

보육원에 있을 때 한순간도 웃음이 사라지지 않던 드락쉬의 가면에 미세하게 금이 가버렸다.

“날파리가 궁여지책으로 기사를 썼지만, 전부 추측에 불과한 내용입니다.”

더는 드락쉬의 가면에 균열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 다급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미 금이 가버린 가면은 깨어진 채로 붙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아까 인형을 품에 안고 떠났던 아이가 인형은 어디에 던져뒀는지 어설프게 종이를 잘라서


덕지덕지 붙여놓은 꽃 모양 종이를 가지고 드락쉬에게 달려왔다.

그 모습에 카뉴는 아이를 막으려고 했지만, 드락쉬가 한 발 더 빠르게 아이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안나, 무슨 일이니?”

미약하게 금이 가버린 가면이었지만 아이는 자신이 들고 온 종이꽃을 드락쉬의 손에 안겨주었다.

“선물! 만들었어. 저번 주에.”

“고맙구나.”

아이의 선물에 다행히도 가면은 서서히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이의 머리를 한 차례 헝클며 쓰다듬어주자, 아이는 아무런 걱정 없는 얼굴로 밝게 웃더니 다시


뒤로 돌아서 뛰어갔다.

“다음 주, 한국 일정 잡아봐.”

“알겠습니다.”
드락쉬의 말에 카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드락쉬는 고개를 돌려 하늘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넌 그곳에서 무엇을 얻었지?”

대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18

17화 I Was A Porter (6)

“375번 손님, 4번 창구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Seung-ho는 안내 방송에 따라 4번 창구로 가서 자리에 앉았는데 왠지 위치도 익숙하고 눈앞의


여직원도 익숙했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 나요?”

여직원도 기억이 날듯말듯한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Seung-ho를 바라보았고 Seung-ho는 거의 한


달 전에 봤던 얼굴인 걸 깨달았다.
“등급 재측정하러 왔습니다.”

“헌터 등록증 주세요.”

여직원의 말에 Seung-ho는 자신의 등록증을 건네주었고 등록증을 건네 받은 여직원은 기억이


났는지 눈이 커졌다.

“아,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앞장서서 복도를 걸어가는 여직원의 뒤를 따라 어느 방앞에 도착했는데 문 위에 크게


‘측정실’이라는 문패가 달려있었다.

여직원이 먼저 들어갔고 뒤따라간 Seung-ho의 눈에 측정실 가장 끝에 있는 측정기가 보였다.

어느새 측정기 앞쪽 책상에 다가간 여직원이 앉아 있는 남자에게 귓속말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대기하는 인원은 측정기 옆쪽 의자에 3명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고 측정기 안에서 검사복을 입은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측정기 위에는 378이라는 수치가 나와 있었다.

“아…”

수치를 확인한 여자는 실망감에 풀이 죽었고 책상에 앉아 있던 남자 직원은 곧 결과표를 뽑아서


건네주었다.
안내해준 여직원이 Seung-ho를 지나치며 측정실을 빠져나가자 측정실 한편에 있는 탈의실에서
남자 직원이 나와 Seung-ho에게 검사복을 건네주었다.

검사복으로 갈아입고 기다리던 Seung-ho의 차례가 다가오자 갑자기 측정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면이 있는 얼굴과 함께 몇 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에 기분이 상하려고 했지만, 그냥 저들을 무시하기로 했다.

“Lee Seung-ho 씨, 안으로 들어가셔서 발자국 모양 위에 양팔을 벌린 채로 서 계시면 됩니다. 삐-


소리가 들리면 최대한 움직이지 마시고 소리가 끝나면 나오시면 됩니다.”

남자 직원의 설명에 Seung-ho는 측정기 문을 열고 들어가서 바닥에 찍혀있는 발자국 모양 위에


양팔을 벌리고 섰다.

“곧 시작하겠습니다.”

삐----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정적이 감돌다가 곧이어 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잠시 참으며 멈춰 선 지 십여 초가 흐르자 소리가 멈추었고 Seung-ho는 측정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고개를 돌려 측정기 위를 바라보니 0825라는 숫자가 나와 있었다.

“어… B-Rank입니다.”
믿을 수 없는 수치에 Seung-ho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잘못 나온 게 아닙니까?”

Seung-ho가 따지고 들었고, 아까 여직원이 해준 말도 있었기에 책상에 앉은 남자 직원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기계가 잘못 측정한 적은 없는데…”

“박 과장 다시 측정해드려."”

측정실 입구에 서 있는 남자 중 한 명이 소리쳤고 Seung-ho는 다시 측정실로 들어갔다.

재측정했지만,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

이 수치로는 어머니를 설득할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지만, 수치가 이렇게 나온 걸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문 앞에서 Seung-ho를 지켜보던 인원들은 혀를 차며 나갔지만, 최초에 Seung-ho를 보았던 최명수


부장은 문 앞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Seung-ho가 탈의실에 옷을 갈아입고 나온 Seung-ho는 결과표를 들고 검사실을 나가려고 했지만, 문


앞에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최명수 부장을 발견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일전에는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때는 워낙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Seung-ho의 말에 최명수 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때 제가 너무 말을 다그친 점도 없지 않아 있었죠… 그런데 Seung-ho 씨


재측정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최명수 부장의 말에 Seung-ho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두 번이나 측정했는데 무엇을 다시 측정하자는 건가 싶었다.

“계속 받는다고 변할 건 없는 거 같은데요.”

“Seung-ho 씨, 저기 보세요.”

부정적인 Seung-ho의 말에 최명수 부장은 측정기를 가리켰다.

지금 막 한 남자가 측정기에서 측정기 위에 숫자는 412가 떠 있었다.

“Seung-ho 씨 결과표 보시죠.”

Seung-ho가 계속 측정기를 바라보자, 최명수 부장은 Seung-ho의 손에 들린 결과표를 보자고


이야기했다.

왜 이러는 거지 싶었지만 측정치 결과표를 최명수 부장에게 건네주자,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라도 있나요?”

“Seung-ho 씨 측정값이 0825라고 적혀있죠?”

최명수 부장이 Seung-ho에게 결과표에 나와 있는 수치를 가리키며 보여주었다.

“네, 그렇네요.”

“저기 측정기는 412죠?”

그 말을 끝으로 묘한 표정을 지으며 웃는 그 얼굴을 보자 Seung-ho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측정기가 4자리까지만 나오는 건가요.”

“출력값을 조절한다면 그 이상도 가능합니다. 기다리시면…”

이왕 온 김에 제대로 알고 가고 싶었지만, 자신을 기다리는 민주와 성아를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내일 찾아오겠습니다. 그런데… 저한테 이렇게 잘 해주시는 이유가 뭐죠?”

자신이 처음에 막 대했던 걸 생각하면 상식적으로 이렇게 살갑게 굴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의구심이 드는 건 당연했다.
Seung-ho의 의심 어린 눈초리에 다소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듯, 머리와 목을 연신 긁어댔다. 그러나
시간이 없는 Seung-ho는 손목을 툭툭 쳤고 최명수 부장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게… 제가 대외 관리부장으로 올라온 지, 올해 5년째지만 뭔가 그럴듯하게 실적을 낸 게


없어서… 만약 올해에도 실적을 내지 못하면 내년에… 음… 무슨 말인지 아시죠? 그래서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측정값 나온 거에 대한 기사와 홍보는 제가 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 전담 기자분이
있는 건 알지만, 이번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시나 드락쉬와 줄이 닿은 사람이 아닌가 싶었지만, 대놓고 자기 사심을 드러내는 모습에


의심했던 자신이 우스워서 피식 웃었다.

“그렇게 하죠.”

Seung-ho의 말에 쭈그러들었던 어깨가 단번에 펴지며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이건 제 연락첩니다. 재측정 하러 오시기 30분 전에 연락 주시면 출력값 조절해놓고


바로 측정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다음에 올 때 연락드리겠습니다.”

협회를 빠져나가는 Seung-ho를 건물 밖까지 배웅한 최명수 부장은 두 손을 치켜들며 만세를 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Seung-ho의 수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는 사람이 나왔을 텐데 잠시 허리를
굽힌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측정기를 만질 수 있는 건 측정실을 관리하는 박 과장이었기에, 부탁하기 위해 서둘러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

“민주야, 나왔어.”

Seung-ho가 벨을 누르며 말하자 민주는 현관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지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오빠, 고마워! 나 가볼게!”

협회에서 시간이 다소 지체되어 늦은 것일까, Seung-ho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달려가는


민주의 발걸음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어, 조심히 가.”

민주에게 인사해주고 현관문을 닫고 들어가자 거실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성아가 보였다.

축 처져 보이는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일이 있었나 싶었다.

“성아야 왜 그래? 엄마랑 싸웠어?”

신발을 벗으면서 물어보았지만, 대답이 없는 거로 봐서 그런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성아에게 다가서 꿀밤을 살짝 때리고 소파로 데려갔다.

“꽁해있으면 삼촌이 어떻게 알아? 말해봐, 무슨 일 때문에 엄마랑 싸운 거야?”


하지만 입술에 지퍼를 채운 듯, 성아는 대답이 없었다. Seung-ho는 그런 성아의 손을 붙잡아
감싸주었다.

성아의 손톱은 얼마나 물어뜯은 건지, 마치 선인장 가시처럼 손톱 끝이 삐쭉삐쭉했다.

삐쭉삐쭉한 손톱을 보니 성아의 마음도 더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선인장처럼 가시를 세워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성아의 손을 어루만지며 온기를 나눠준 게 효과가 있었을까, 성아가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주워서


Seung-ho에게 건네주었다.

반으로 곱게 접힌 종이를 펼쳐보니 성아의 수능 성적표가 펼쳐졌다.

“수능 성적표? 우와 우리 성아 공부 잘하네? 어디 대학 갈 거야?”

“대학 안 갈 거야.”

날이 시퍼렇게 선 성아의 말에 Seung-ho가 흠칫했다.

싸움이 난 원인을 알 법했다.

민주는 어떻게든 대학까지 보내주기 위해서 저렇게 일하는데 성아는 그런 엄마의 마음도 모른 채,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해서 이 사달이 난 것 같았다.

민주가 직장을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성아를 두고 출근을 하는 건


옳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역할도 해야 하는 민주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기에, 그 누구의 편도 들어줄
수가 없었다.

“과를 어디로 갈지 결정 못 한 거야? 과를 못 정했으면 성아가 나중에 하고 싶은 일 있을 거 아냐?


이거 하고 싶다. 이런 거 뭐가 있어?”

Seung-ho가 장난스럽게 성아의 팔뚝을 쿡쿡 찌르면서 물어봤지만, 다시 입에 자물쇠를 달았는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성아야. 말을 안 해주면, 삼촌이 아무것도 모르잖아.”

“…PD가 되고 싶어”

“그럼 하면 되겠네! 미녀 PD 김성아!”

Seung-ho가 성아의 기분을 풀어주고자 일부러 오버하면서, 치켜세워줬지만 성아는 초지일관


한결같았다.

오히려 기분이 더 상한 듯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Seung-ho도 답답한 마음에 속이


타들어 갔다.

“성아야, 삼촌도 같이 대학갈까? 삼촌이 어리게 보이니깐 같이 가도 모르겠지?”

Seung-ho가 장난스럽게 이야기했지만, Seung-ho의 말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성아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내가 지금 밖에도 못 나가는데 대학을 어떻게 가!! 밖에도 못 나가는 병신이 대학은 어떻게 가!!”

소리지르는 성아의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있었다.

“성아야…”

착잡한 표정으로 성아를 바라보았지만, 성아는 Seung-ho를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돌린 채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삼촌, 나도 대학 가고 싶어, 흑… 그런데 집 밖으로 나간다는 생각만 하면 너무 무서워, 밖에 그…


으으으악!”

그때 기억이 떠올랐는지 성아는 소파 위에서 발작을 일으켰다. Seung-ho는 성아의 어깨를


짓누르면서 진정시켰다.

“성아야!! 없어! 그 녀석 없어! 진정하고 숨 크게, 숨 크게 후! 하! 후! 하! 그래, 그래.”

한참을 몸을 비틀며 발작을 일으키던 성아는 간신히 진정했고 성아의 얼굴에 묻은 침과 눈물을
닦아주며, 어머니에게도 사실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성아가 더 망가지기 전에 정신과 치료가 시급했다.

***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녁 식사 도중에 Seung-ho가 입을 열자 어머니는 표정을 굳히며 숟가락을 내려놓으셨다.

“안된다.”

“그게 아니라, 성아 이야기에요.”

Seung-ho의 말에 어머니 옆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가 눈치를 주기 시작하셨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언제까지 숨길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아버지의 눈빛을 애써 모른척했다.

“사실, 제가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날… 성아가 조금 안 좋은 일을 당했어요.”

Seung-ho의 말에 어머니가 깜짝 놀라시며 엉덩이를 들썩이셨다.

“성아가? 무슨 일을 당해? 다친 게야? 민주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손녀의 걱정에 미간을 좁히며 걱정하시는 어머니에게는 조금, 아니, 너무나도 무거운 이야기가 될
것 같았지만 해야만 했다.

“납치를 당해서 몹쓸 일을 당할뻔했어요.”

“누가! 누가 우리 성아를!”

“여보, 일단 끝까지 들어. 일단 물 한 모금 먹고.”


Seung-ho의 말에 어머니가 흥분하셨고 그런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컵에 물을 따라서 건네주셨다.

목이 타셨는지 컵에 가득 찬 물을 꼴딱꼴딱 삼키어 한 번에 비우시고는 식탁에 몸을 기울이시며


Seung-ho의 말에 집중하셨다.

“다행히 몹쓸 일은 피했지만, 성아가 정신적으로 괴로워해요.”

“천만다행이다. 다행이야. 그, 그 몹쓸 놈은? 잡았어?”

“심장마비로 죽었어요. 천벌 받았죠. 그보다 성아가 지금 너무 심적으로 불안해서 혼자 둘 수가


없는 상황이라…”

“아이고, 내 새끼… 얼마나 안 좋길래 이렇게 어미 겁을 주는 게야.”

“같이 모여서 살면서 집에 혼자 못 있게 하고… 정신과 상담도 주기적으로 다녀야 할 거 같아요.”

“그래, 이 집 팔면 넓은 서울 바닥에 적당한 집 한 채 없겠냐, 좁아도 같이 모여 살면 그만이지.


이참에 민주도 집 빼서 다 같이 살면 되겠구나.”

“제 돈도 보태면 집 사는데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아이고, 또 뭐가 남았어? 어미 심장 벌렁벌렁한데 얼마나 더 놀라게 하려고?”

순간 Seung-ho의 심장이 뜨끔했다.


막 헌터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 데 타이밍 좋게 선수를 치셔서 혹시 눈치채셨나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가슴에 손을 올려놓은 어머니를 보며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치를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어머니의 손을 잡으셨다.

“우리 아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

아버지가 Seung-ho의 마음을 읽고 선수를 쳐주셨다.

“어머니, 저랑 내일 협회로 가서 재측정해보고 얼마나 안전하게 헌터 일을 할 수 있는지 어머니


귀로 직접 들어보시고 판단하면 안 될까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을 놓으시고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로 Seung-ho의 손을 잡으셨다.

“아들, 왜 계속 헌터 일을 하고 싶어 해, 돈이야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데… 조금 가난하게


살아도 이렇게 얼굴 보고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니.”

“어머니… 성아도 시아도 대학을 가는데 제가 힘이 돼주고 싶고, 저도 결혼해야죠. 결혼해서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을 정도만 벌고 헌터일 안 하겠습니다.”

Seung-ho는 오른손을 빼서 어머니의 손을 감싸며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어머니의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내가… 내가 불안해서 어떻게 사누… 우리 아들 들어간다는 생각만 해도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데…”
어머니는 저녁에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으셨는지, Seung-ho가 감싼 어머니의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내일, 내일 협회로 같이 가셔서 설명 들으시면 제 걱정이 아니라 몬스터 걱정을 하실 거예요.


어머니, 아들 한번 믿어보세요.”

# 19

18화 I Was A Porter (7)

“할머니…”

“아이고, 내 새끼. 얼마나 맘고생이 심하길래 얼굴이 반쪽이 돼버렸어.”

어머니는 성아의 얼굴을 매만지며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막기 위해 미간에 안간힘을 주었다.

“아침은 먹었고?”

“네, 먹었어요. 할머니.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게 뭐가 있어. 그…아니다. 어서 들어가자.”


Seung-ho는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도록 신신당부를 드렸다.

혹여나 실수라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가 그때 일을 떠올린다면, 성아가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다행히도 아슬아슬하게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민주야, 여기 앉아서 엄마랑 이야기 좀 하자.”

“엄마, 무슨 말을 꺼내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거야…”

거실 소파에 앉으신 어머니는 자신의 옆을 툭툭 치며, 설거지를 막 끝내고 온 민주를 불러 앉혔다.

어머니가 성아의 일을 숨긴 게 서운해서 혼내시려는 건가 싶었기에 민주는 어머니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성아도 삼촌이랑 이야기 좀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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