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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작가론 (2023년 02학기)

제1주 수업 자료

1. 작가란 어떤 존재인가?
작가(作家): 예술과 취미의 분야에서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
작가론(作家論): 작가의 예술 활동이나 사상을 연구하고 비평하는 일. 또는 그런 글.
주로 작품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2. (문학) 작품이란? 예술(문학) 창작 활동으로 얻어지는 제작물.


작품을 어떻게 구분해볼까?
1)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고유성(固有性)을 가진 작품
/對/ 대략 복제되는 작품=제품(製品)
2) 독자를 감동(感動)시키거나 즐겁게 해주는 (수준 높은) 작품 : 명작.
/對/ 평범하거나 흔한 일상적 수준의 작품 : 습작(習作), 범작(凡作)

3. 함께 해볼 만한 질문들

문1) 작품의 고유성과 유일무이성을 인정해줄까, 말까?


작품의 고유성과 유일무이성을 인정한다면 작가의 고유성과 유일무이성도 인정된다.

문2) 작품은 위대한 작품과 평범한 작품으로 등급화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작가도 등급화될 것이다.
매겨진 등급은 영원할까, 변화할까?

문3) 작가와 작품을 선택하는 연구자의 시각은 상대적일까, 절대적일까?


연구 시각의 상대성을 인정한다면 선택하는 작가도, 작품도, 그 의미도 달라질 수 있다.
[제2주차 수업 : 정전과 고전]

문4) 작가도 작품도 발굴(발견)되는 존재인가?

과제: 이번 학기에 내가 대면하고 싶은 작가는? [3선 1택]


[보론 자료]

1. 17세기 정두경(鄭斗卿)과 의고주의(擬古主義)

1) 자료 1 : 윤신지(尹新之)가 쓴 <동명집의 서문(東溟集序)>

기풍(氣風)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문학(文學)은 시대에 따라 낮아진다. 이것은 고


금을 관통하는 일상적인 이치이다. 그러니 당(唐)이 한(漢)에 미치지 못하고, 송
(宋)이 당(唐)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문
학이) 몹시도 자잘하게 되었으니, 아름답고 성대한 큰 기풍을 어느 누가 볼 수 있
겠는가. 그런데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이라는 분만은 홀로 오늘날의 세상 사
람과 같지 않다. 어쩌면 그렇게도 지은 시(詩)와 문(文)이 옛사람들의 시와 문과
흡사하단 말인가.
風以世變。文以世降。古今常理。無怪乎唐不及漢。宋不及唐。至於今日。其細已甚。
泱泱乎大風。誰得以見之。東溟鄭君平者。獨非今世人乎。何其文之似古人耶。

정두경은 까마득한 후생으로 뒤늦게 동국[조선]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천인(天人)의


이치를 궁구하고 백가(百家)의 설에 통달하여, 무너지는 물결을 되돌려서 능히 옛
도를 회복하였다. 일을 기록하는 것은 사마자장(司馬子長: 사마천)과 같고, 일을
논하는 것은 《전국책(戰國策)》과 비슷하며, 악부시(樂府詩)는 한(漢)나라와 위
(魏)나라 때의 악부와 같고, 가행(歌行)은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와 같고, 오
칠언(五七言)의 절구(絶句)와 근체시(近體詩)는 모두가 초당(初唐)과 성당(盛唐)
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그 이하에 대해서는 일삼지 않았으니, 아아 성대하
기도 하다. 어느 누가 기풍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문학은 시대에 따라 낮아진다고
하였단 말인가. 오직 그 인물의 높고 낮은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君平以眇然之身。晩生東國。究天人之際。通百家之說。力挽頹波。能復古道。記事似
司馬子長。論事似戰國策。樂府似漢魏。歌行似李杜。五七言絶句近體。都不出初盛唐
範圍。其以下不爲也。嗚呼盛哉。就謂風以世變文以世降耶。唯在其人物之高下耳

2) 의고주의(擬古主義)/ 상고주의(尙古主義)
옛것 즉 고대의 전형(典型)을 숭배하여 모방하는 예술 경향.
예: 文必秦漢 詩必盛唐
(산문 문장은 반드시 진나라와 한나라의 작품을 최고로 삼고
시는 반드시 당나라 시대 성당(盛唐) 작품을 최고로 삼아야 한다.)
2. 18세기 이용휴(李用休)가 보여준 개성(個性주의) 추구
: 이용휴의 문집 Ö혜환잡저(惠寰雜著)×에서 뽑은 ‘작가(作家)’의 용례.

내 나이 17-18살에 문장을 지으면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대우(對儷)를 모방하


기를 좋아하였는데, 조금 나이가 들어 그것을 보니 얼굴이 붉어져서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내쳐버렸다. 이후 송나라와 원나라 작가의 글을 배우자 사람들이 자못 그런 내 시문을 칭
찬하였고 또한 스스로도 이를 자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다시 보니 힘차지 않고 연
약하여 작가(作家)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므로 또한 내쳐버렸다. 그리하여 고대의 선진(先
秦) 양한(兩漢)에서 아래로 명나라 말기(明末)에 이르기까지 고문(古文)으로 이름난 것을
찾아 아침저녁으로 살피고 깨우쳐 곧 그 작법(排按․闔張과 汰字․鍊句)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제 30년이 되어 간다. ‘문장을 배우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아 힘을 씀이
끝이 없고 곁길을 돌아간 후에야 바야흐로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조카 이철환의 문집에 써준 글 : 「題吉甫文稿」, 권11) “而叔年十七八時, 爲文嗜對儷, 稍長
看之, 面赧然不能從篇, 去之. 師宋元諸子, 人頗賞之, 亦自多也. 已復取看, 則曼脆小骨, 不足
以言作家, 又去. 而求先秦兩漢, 下逮皇明之季, 以古文著者, 朝夕諦繹, 則稍解其排按闔張, 汰
字鍊句之法, 年皆已三十矣. 學問如登山, 消盡無限, 仄路廻徑, 然後方出上頂.”

詩 중에 唐詩만을 詩라고 하는 것이 요즘의 폐단이다. 그 詩體를 본받고 그 詩語


를 배워 거의 하나의 피리를 불고 있는 것과 같으니, 이는 앵무새가 종일토록 앵
앵거려도 자기의 소리가 없는 것과 같다. 내가 이것을 몹시 싫어한다.
Ö惠寰雜著× 卷6, 「李華國遺草序」, “詩無不詩唐詩者, 近日之弊也. 效其體學其語, 幾
乎一管之吹, 是猶百舌終日嚶嚶, 無自己聲, 余甚厭之.”

내 손자인 광국은 자기가 지은 시의 자구(字句)를 다듬어 고인(古人)의 법도에


맞은 연후에야 내놓았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추구하는 유행을 넘어섰으
니, 그가 작가(作家)라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다만 전에는 고(古: 고대의 모범
이 되는 작품)에 합치되는 것을 취하여 묘함(妙)으로 삼더니 이제 고(古)에서 벗
어남을 취하여 새로움(新)으로 삼고 있다. 이는 최상의 비결(秘訣)로써 진정한 작
가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Ö惠寰雜著× 卷7, 「題族孫光國詩卷」.

이 문집을 보니 대개 자운(自運: 자기답게 행동함, 글을 씀)하고 자귀(自貴: 자기


다움을 귀하게 여김)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옛 대가들에게 모의(模擬)하거나 의부
(依附: 빌붙음)하지 않았는데도 진성眞聲․진색眞色․진미眞味가 있으니, 비유하자면
좋은 차는 용연龍涎과 사향麝香처럼 좋은 재료를 섞지 않더라도 스스로 진향眞香
이 있는 것과 같다. Ö惠寰雜著× 卷9, 「壯窩集序」, “今閱此稿, 盖欲自運自貴者. 不模
擬依附于古昔大家, 而有眞聲眞色眞味, 譬如好茶不雜龍麝, 自有眞香也.“
3. 18세기 후반 박지원(朴趾源)의 법고창신론(法古創新論)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한다는 뜻.
옛것에 토대(土臺)를 두되 그것을 변화(變化)시킬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根
本)을 잃지 않아야 함.

문장을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인가? 논자(論者)들은 반드시 ‘법고(法古 옛것을 본받음 )’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세상에는 옛것을 흉내내고 본뜨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양화(陽貨)가 공자와 얼굴이 닮았다 해서 만세의 스
승이 될 수 있다는 셈이니, 어찌 ‘법고’를 해서 되겠는가.
그렇다면 ‘창신(刱新 새롭게 창조함 )’이 옳지 않겠는가. 그래서 마침내 세상에는 이상
하고 허황되게 문장을 지으면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연년(李延
年)의 신성(新聲: 유행가)을 종묘 제사(국가 차원에서 행하는 중요한 제사)에서 부를 수
있다는 셈(유행가 수준의 노래를 가지고 국가를 대표하는 것인 양 하니)이니, 어찌 ‘창신’
을 해서 되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옳단 말인가? 나는 장차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면 문장 짓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인가?

아! 소위 ‘법고’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이는 것이 병통이고, ‘창신’한다는 사람


은 상도(常道)에서 벗어나는 게 걱정거리이다.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
신’하면서도 능히 전아(典雅)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

박씨의 아들 제운(齊雲)이 나이 스물셋으로 문장에 능하고 호를 초정(楚亭)이라 하는


데, 나를 따라 공부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는 문장을 지음에 있어 선진(先秦)과 양한
(兩漢) 때 작품을 흠모하면서도 옛 표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진부한 말을 없애려
고 노력하다 보면 혹 근거 없는 표현을 쓰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고, 내세운 주장이 너무
고원하다 보면 혹 상도(常道)에서 자칫 벗어나기도 한다.
이래서 명나라의 여러 작가들이 ‘법고’와 ‘창신’에 대하여 서로 비방만 일삼다가 모두 정
도(正道)를 얻지 못한 채 다같이 말세의 자질구레한 폐단에 떨어져, 한갓 풍속만 병들게
하고 교화를 해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나는 이렇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러니
‘창신’을 한답시고 재주 부릴진댄 차라리 ‘법고’를 하다가 고루해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다.

* 초정집서(楚亭集序) :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초기 문집인 《초정집》에 부친


서문.
4. 작품에서 수준, 품질이라는 요소를 제쳐두면 어떤 작가를 주목할 수 있을까?
예) 17세기 시골 사람들의 일기와 문학 향유(시조, 한시..)
18-19세기 무명의 작가들
중인(中人) 계층의 시선집: 풍요속선風謠續選, 풍요삼선風謠三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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