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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역과해詳譯科解 금강경金剛經

삼장역회三藏譯會 용성龍城

백상규白相奎가 한글과 한문의 혼용 및 순한글문으로 강의하다

김호귀* ✽ 옮김

『금강마하반야바라밀경』의 전체적인 대의를 총체적으로 꿰뚫어 서술하다

(金剛摩訶般若波羅蜜經全部大義綸貫)

1. 대각이 세간에 출현하시면서 먼저 본분의 도리를 보여 주시다

(覺之應世에 先示本分)

각1)(覺1))이 초생하(初生下)시(時)에 엄연묵립(嚴然默立)하사 의륜문(意輪門)이니

흡사(恰似)하다 주행칠보(周行七步)하시고 지천지지(指天指地)하시고,

신륜문(身輪門)이니 회마(會麽)아 작대사자후(作大獅子吼)하사,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하시니,

수인구(誰人咎)오 차시(此是)삼백육십골절(三百六十骨節)과

팔만사천모공(八萬四千毛孔)을 진저흔번(盡底掀飜)하야

돈방제인면전(頓放諸人面前)이니라.

대각께서 처음에 탄생하실 적에 엄연하고 조용한 마음 자세로(嚴然默立)

이것은 의륜문(意輪門)과 매우 비슷하다.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하늘과 땅을 가리키시고

이것은 신륜문(身輪門)이니 알겠는가.

크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대사자후를 하셨다. 누구의 허물인가.

이것 이야말로 삼백육십 개의 뼈마디와 팔만 사천 개의 털구멍을

모두 치켜들어 모든 사람의 면전에 한꺼번에 보여 준 것이다.

2. 천 년 이후에 운문 문언이 대각의 본뜻을 드러내다


(一千年之下에 雲門이 彰覺本懷)

일천년(一千年)이후에 운문(雲門)성사(聖師)가 민(悶)대중(大衆)의 불회(不會)하사

창각(彰覺)본회(本懷)이라 하시니,

나도 당시(當時)에 런들 일봉(一棒)으로 죽여서 구자(狗子)와 먹게 하겠다고 하시니,

이것은 운문이 역추도용(逆椎倒用)하사 대중의 본분(本分)을 알고,

또한 창각의 본회를 드러내는 것이시니라.

대각께서 출현한 지 천 년 이후에 운문 성사2)는 당시의 대중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깨달음의 본뜻을 드러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한 방망이로 때려죽여서 개한테 먹이로 주었을 것이다.”3)

이것은 운문이 상식에 반하는 가르침을 활용하여(逆椎倒用) 대중의 본분을 알려 준 것이며 또한 부처님의 본뜻을
드러낸 것이다.

3.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을 보이시다

(爲度衆生하야 施設方便)

각(覺)이 진묵겁(塵墨劫)전에 조성정각(早成正覺)이었으나

위도중생(爲度衆生)을 위하여 입설산(入雪山)육년고행(六年苦行)하사

어보리(於菩提)나무 아래에 시성정각(示成正覺)하사

선설화엄대교(先設華嚴大敎)하시니 법대기소(法大機小)로 인하여

승당자(承當者)가 희(希)라

각(覺)이 이고(以故)로 삼칠일사유(三七日思惟)하다

부득이권설방편(不得已權設方便)하사

어록야원(於鹿野園)에 설사제법문(說四諦法門)하사

사범입성(捨凡入聖)케 하시고 또한 금강지심(金剛智心)으로

타파아공편진지의(打破我空偏眞之義)하시니

수보리(須菩提)의 이십년소득지심(二十年所得之心)이 도무영향(都無影響)이러라

수보리는 권현소승자(權現小乘者)라.
대각께서 진묵겁4) 이전에 일찍이 정각을 이루셨지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설산에 들어가서 6년 동안 고행을 하여

보리수 밑에서 정각의 성취를 보이셨다.

그리고 먼저 화엄대교를 시설하셨는데 법은 컸지만

근기가 낮은 까닭에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런 까닭에 21일 동안 사유하여 부득이하게 짐짓 방편을 보이셨는데

녹야원에서 사성제의 법문을 설하여 범부를 벗어나 성인에 들어가게 하셨다.

또한 금강지金剛智와 금강심金剛心5)으로 아공편진我空偏眞6)의 뜻을 타파하시니

수보리가 20년 동안 터득해 온 마음이 도무지 아무런 영향도 없어져 버렸다.

수보리는 방편으로 나타난 소승인이다.

4. 보통의 중생은 의심이 너무 많다

(常情衆生이 疑雲이 疊疊)

거세상정(擧世常情)이 능히 각(覺)을 알지 못하도다.

지금 인간에 와서 인인(人人)이 의심하는 각(覺)은


일용행사(日用行事)가 건건(件件) 다르며,
말하는 규율(規矩)과 사사법법(事事法法)이 세상(世相)과 반대(反)일세.

조달아사(調達阿闍)가 다 죽이고자 하고,

천신수라(天神修羅)와 외도마왕(外道魔王)이 다 크게 놀라고 의심하네.

어째서일까. (何以故 하이고)

각(覺)은 법계평등(法界平等)이어든 그는 차별(差別)이요,

각(覺)은 이타(利他)어든 그는 자리(自利)요,

각(覺)은 공활(共活)이어든 그는 자활(自活)이요,

각(覺)은 무상 무주 무착 무념(無相 無住 無着 無念)이어든

그는 유상 유주 유착 유념(有相 有住 有着 有念)이요,

각(覺)은 무아(無我)어든 그는 유아(有我)요,

각(覺)은 진아(眞我)어든 그는 망아(妄我)요,


각(覺)은 리단상견(離斷常見)이어든 그는 시단상견(是斷常見)이요,

각(覺)은 상락아정 사정지락(常樂我淨 四淨之樂)이어든


그는 오욕지락(五欲之樂)이요, 각(覺)은 삼계만법(三界萬法)이 유심유의(唯心唯識)이어든

그는 유천유기등(唯天唯氣等)이니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일들이 세상과 반대로서

당시제자(當時弟子)라도 의운(疑雲)이 중중(重重)하온 황호범부야(況乎凡夫耶).

부처님께서 세상의 사람들을 살펴보니

그들은 불법을 알지도 못하고 깨달을 수도 없었다.

이에 서둘러 인간세계에 이르러 보니

깨달음에 대하여 의심하는 사람들은 일상의 생활에서 사사건건이 어그러지며,

말하는 규범과 모든 행위가 세상의 도리와 상반되어 있었다.

가령 조달과 아사7)는 각각 부처님과 부왕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천신과 아수라와 외도와 마왕도 모두 크게 놀라며 의심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부처님에게는 법계가 평등하지만

그들 조달(調達 즉 제바달도(提婆達兜 제바달다))과 아사(阿闍世王)에게는 법계가 차별이고,

부처님은 이타행위를 하지만 그들은 자리행위를 하며,

부처님은 더불어 살려고 하지만 그들은 자기만 살려고 하고,

부처님은 무상·무주·무착·무념8)이지만 그들은 유상·유주·유착·유념이며,

부처님에게는 무아無我이지만 그들에게는 유아有我이고,

부처님은 진아眞我이지만 그들은 망아妄我이며,

부처님은 단견斷見과 상견常見9)을 벗어나 있지만

그들은 단견과 상견에 빠져 있고,

부처님에게는 상·락·아·정10)으로서 네 가지 완전한 즐거움이지만

그들에게는 오욕11)의 즐거움이며,

부처님에게는 삼계와 만법이 유심이고 유식12)이지만

그들에게는 유천(唯天)이고 유기(唯氣)13) 등이다.

이와 같은 온갖 경우에 대하여 세상의 도리와 상반되는 까닭에

부처님 당시 제자의 경우일지라도 의심이 넘치는데

하물며 범부의 경우이겠는가.


5. 경을 설할 때마다 먼저 평소와 같은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다

(每以說經에 先以平常示人)

각(覺)이 여소승중(與小乘衆)으로 착의끽반(着衣喫飯)하시며,

부좌이좌(敷座而坐)하시니 저사평상(這事平常)하야 여중일반(與衆一般)이라

일용동정(日用動靜)이 별무기특(別無奇特)이로다.

그러나 저일건사(這一件事)을 제인(諸人)이 범연간과(泛然看過)로되

뢰유수보리간파(賴有須菩提看破)하야

희유세존(希有世尊)하 한 대문(大文)

각지혜일(覺之慧日)이 광휘어만상(光輝於萬像)이로다.

부처님께서 소승의 대중과 똑같이 가사를 걸치고 공양을 하며

자리를 펴고 좌선을 하셨는데 그것은 평상의 모습으로서

대중과 똑같아서 일상의 동정에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저 한 가지 경우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듯이 여겨 간과했지만 오직 수보리만은 간파하였다.

‘희유 하십니다. 세존이시여’의 대목을 가리킨다.14)

이로써 태양과 같은 부처님의 지혜(慧日)가 삼라만상에 밝게 빛났다.

6. 의심을 끊고 믿음을 성취케 하다(斷疑成信)

이경(此經)은 파당기(破當機)법회(法會)의 의운(疑雲)하고,

이신입(以信入)으로 위취(爲趣)이니 의(疑)즉장도(則障道)니라.

의(疑)에 삼종(三種)이니 일(一)은 의인(疑人)이요

이(二)는 의법(疑法)이요 삼(三)은 의기(疑己)니.

의인자(疑人者)는 의인불진(疑人不眞)이니,

즉여제자(卽如弟子)가 문각(聞覺) 색신(色身) 법신(法身) 대신(大身) 소신(小身)하고

불지나개시진각(不知那箇是眞覺)이요,
의법자(疑法者)는 재설유법(纔說有法)이라가 각우설공(却又說空)하니

불지나개시진법(不知那箇是眞法)이요,

의기자(疑己者)는 기소법대(機小法大)하야 자불능감야(自不能堪也)이니라.

지금 이 경중에(今此經中) 삼의(三疑)가 무무不無할새

각(覺)이 어수보리소의처(於須菩提所疑處)에 일일편파(一一便破)하시니

의회영진(疑悔永盡)하고 안재반야(安在般若)이니

차경지소귀자야 (此經之所歸者也)니라.

이 『금강경』은 현재 법회에 참여한 대중의 의심을 타파하고 믿음으로써 깨달음에 들어갈 것을 지향한다.

의심하는 것은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데 말하자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람을 의심하는 것이고,

둘째는 법을 의심하는 것이며,

셋째는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다.

첫째의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설법하는 사람이 진실하지 않아서

곧 부처님의 제자인가를 의심하는 것이다.

색신과 법신 및 큰 몸과 작은 몸을 듣고 느끼면서도

어느 것이 진각眞覺인지 모르는 것이다.

둘째의 법을 의심하는 것은 어떤 법을 설했다가도

다시 그 설법이 공하다고 말하여 어떤 것이 진법眞法인지 모르는 것이다.

셋째의 자신을 의심하는 것은 자기의 능력은 미미한데

설법은 위대하여 스스로 설법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이 『금강경』에 그와 같은 세 가지 의심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가 의심하는 것에 대하여

낱낱이 의심하는 즉시 타파해 주어 의심이 영원히 소멸되고

반야에 안주하도록 해 주는데 이것 이야말로 이 『금강경』이 귀착하는 곳이다.

7. 『금강경』 전체의 대의를 총괄하여 판별하다

(此經始終大義總判)
“여세량마(如世良馬)가 견편영(見鞭影)이추풍천리(而追風千里)인달하야,

세존(世尊)이 부좌연안처(敷座宴安處)에 간파운희유(看破云希有)라 하니,

회마(會麽)아 작약화개정사안(芍藥花開正士顔)이요.

종람엽산야차두(棕櫚葉散夜叉頭)니라.

수보리(須菩提)가 삼십년래(三十年來)에 미증회차사(未曾會此事)러니

오늘(今日)에사 시지(始知)고 편도운선호념부촉(便道云善護念付囑)이라 하니,

정시친견여래일편고심순순지자(正是親見如來一片苦心淳淳之慈)로다.

수보리(須菩提)는 권현소승자(權現小乘者)라

특기종종의단(特起種種疑端)하야 파시회법중지의운(破時會法衆之疑雲)하고

사각일(使覺日)로 명명상속(明明相續)하야 등등무진(燈燈無盡)케 하니라.

초의공란의정사(初疑空亂意正士)가 이실구거(已失舊居)하고 시무신증(姑無新證)일새.

미지안신립명처고(未知安身立命處故)로 초문안신항복지법(初問安身降伏之法)하시니,

각(覺)이 이부착중생진상( 以不着衆生塵相)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중생난도(次疑衆生難度)어늘 이중생본공(以衆生本空)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각과난구(次疑覺果難求)어늘 이불필별구(以不必別求)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보시난주(次疑布施難周)어늘 이삼륜공적(以三輪空寂)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각토난엄(次疑覺土難嚴)이어늘 이심정즉각국토정(以心淨則覺國土淨)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보신무기(次疑報身無寄)어늘 이법신무의(以法身無依)로 파지(破之)하시니

도차(到此)하야 삼신일체(三身一體)요

신토(身土)가 개공(皆空)이라

이극정망(理極情忘)하야 언사상(言詞相)이 적멸(寂滅)하니라.

도차임마전지(到此任麽田地)하야 군의(群疑)가 이파(已破)에 사상(四相)이 돈공(頓空)하고

아집(我執)이 기망(旣忘)에 법신(法身)이 독로고(獨露故)로

세존(世尊)이 현법공승익운이하사등신명지다(顯法空勝益云以河沙等身命之多)로 보시군생(布施群生)이라도 불여지차


사구게(不如持此四句偈)하야

위인연설(爲人演說)이라 하시니라

차의외재보시(次疑外財布施)는 이(易)어니와 신명(身命)은 난사(難捨)라 하야늘

이인욕행(以忍欲行)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체공지법(次疑體空之法)이 안가작인취과(安可作因取果)오 하야늘


이무실무허(以無實無虛)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불주심(次疑不住心)으로 여하득합반야(如何得合般若)오 하야늘

이인아양망(以人我兩忘)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인아양망(次疑人我兩忘)이면 어하득계각심(如何得契覺心)고 하야늘

답운약의심욕계(答云若擬心欲契)인댄 전전차과(轉轉差過니라).

그러(然)하나 약리문자(若離文字)로 특지력구(特地力求)가

우각부시야(又却不是也)니 문자성공(文字性空)이라.

이차수지독송(以此受持讀誦)이면 각심(覺心이 평등(平等)이라 하시니라.”

상반경(上半經)은 파사상(破四相)고(故)로 추(麤)하고,

하반경(下半經)은 파사견(破四見)고(故)로 세(細)하니

학자(學者)는 관세심찰(細觀深察)이어다.

이하(此下)는 내파미세아법이집(乃破微細我法二執)하니라.

아견인견(我見人見) 운운(云云) 차의소오반야(次疑所悟般若)에

존견진법(存見眞法)이어늘 이무소득(以無所得)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소오반야(次疑所悟般若)에 존견성각지진인(存見成覺之眞因)이어늘

이법신(以法身)은 불속인과(不屬因果)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무법(次疑無法)이면 하위정사(何爲正士)고 하야늘

이무법무아(以無法無我)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여래유오안(次疑如來有五眼)이어늘

이지중생심위안(以知衆生心爲眼)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보시무복(次疑布施無福)이면 필부수행(必不修行)이라 하야늘

무복지복(無福之福)이 심다(甚多)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인과필무(次疑因果必無)면 의시무각(宜是無覺)이어늘

오각(吾覺)의 구족색상(具足色相)은 종하이득(從何以得)고 하야늘

이불응구족색상견(以不應具足色相見)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각무신상(次疑覺無身相)인댄 수당설법(誰當說法)고 하야늘

이무법가설(以無法可說)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미래중생(次疑未來衆生)이 난신난해(難信難解)라 하야늘


이무중생(以無衆生)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법신전공(次疑法身全空)이면 하언수일체선법(何言修一切善法)하야

증보리(證菩提)오 하야늘

이무소득평등(以無所得平等)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선법(次疑善法)이 기비(旣非)면 하법(何法)이 위승(爲勝)고 하야늘

이달반야최승(以達般若最勝)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생각(次疑生覺)이 평등(平等)이면 하언도생(何言度生)고 하야늘

이인아양망(以人我兩忘)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법보(次疑法報)가 전비신상이면 여래삼십이상은 비각(非覺)야아 하야늘

이전륜성왕(以轉輪聖王)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법보(次疑法報)가 무상(無相)하고 응화비진(應化非眞)이라 하니

기비단멸(豈非斷滅)가 하야늘

이불단불멸(以不斷不滅)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현견여래행주좌와(次疑現見如來行住坐臥)가

기비여래지아야(豈非如來之我耶)오 하야늘

일이지견(一異之見)을 미망(未忘)하고,

삼신일체지의(三身一體之義)를 미계고야(未契故也)라.

이미진세계(以微塵世界)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평등법신(次疑平等法身)이 일체개비(一切皆非)인댄

우하이각설사상견야(又何以覺說四相見耶)오 하야늘

이각비사상견(以覺非四相見)으로 파지(破之)하시니라.

우통론(又通論)컨댄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미도(迷倒)하야

소집(所執)이 견고난파(堅固難破)고(故)로,

각(覺)이 이금강심지(以金剛心智)로 중중파지(重重破之)하사,

령견본지법신진체(令見本智法身眞體)하니라.

초(初)에 집오온신심(執五蘊身心)과 내지(及) 육진지상(六塵之相)하야

착상행시(着相行施)로 이구복덕(以求福德)이어늘

각이 이무주(以無住)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의보리지상(次疑菩提之相)이어늘 이무소득(以無所得)으로 파지하시며,


차집보시(次執布施)하야 이구장엄각토(以求莊嚴覺土)어늘

이무토가엄(以無土可嚴)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집복덕(次執福德)하야 이구보상(以求報相)이어늘

이구족색신(以具足色身)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집여래(次執如來)가 유삼신상(有三身相)이어늘

이응화(以應化)는 비진(非眞)이요,

보신(報身)은 리상(離相)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집법신유상(次執法身有相)이어늘

이법신비상(以法身非相)으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집법신유실아(次執法身有實我)어늘

이일체법무아(以一切法無我)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집삼신정유(次執三身定有)어늘

이비일비이(以非一非異)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집법신불회설법(次執法身不會說法)이어늘

이삼신일체(以三身一體)로 파지(破之)하시며,

차집법신(次執法身)은 적멸(寂滅)이어니

여하시설(如何示說)고 하야늘,

이육유가관(以六喩假觀)으로 파지(破之)하시되,

중중축파(重重逐破)하야 일체개비(一切皆非)라 하시니,

제상(諸相)이 소망(銷亡)하고, 일심(一心)이 무기(無寄)로다.

소견지망(所見之妄)이 기공(旣空)하고

능견지망(能見之妄)이 역민(亦泯)하니

능소기공(能所旣空)에 공역공(空亦空)이로다.

직투법신향상일로(直透法身向上一路)고(故)로

거심즉착(擧心卽錯)하고 동념즉승(動念卽乖)하나니,

반야묘지(般若妙旨)가 극어시(極於斯)니라.

세상에서 훌륭한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도

바람을 좇아 천 리를 달려가듯이
수보리는 세존이 자리를 펴고 좌선하는 모습에서 간파하고

“희유 하십니다.”라고 말했다. 알겠는가.

작약 꽃망울 피어나니 보살(正士)의 얼굴이요

종려 잎사귀 떨어지니 야차의 머리라네

수보리가 30년 동안에도 일찍이 이 도리를 몰랐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존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호념하십니다.

모든 보살을 잘 부촉하십니다.”

이것 이야말로 바로 여래를 친견하는 한 조각 고심(一片苦心)이고

순순한 자비(淳淳之慈)이다.

수보리는 방편으로 나타난 소승인이다.

때문에 특별히 갖가지 의단疑端을 일으켜서

당시 법회에 모인 대중의 의심을 타파하고

깨달음의 지혜를 분명하게 상속하여 맑디맑게 영속시켜 준다.

(1) 첫째의 의심은 공연히 마음이 산란한 보살(空亂意正士)15)이

이미 과거의 번뇌(舊居)는 상실하였지만

여태 새로운 깨달음이 없어서 아직은 안신입명16)의 도리를 모르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우선 안신입명의 가르침과 항복의 가르침에 대하여 질문하였다.17)

이에 부처님이 중생의 번뇌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2) 다음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어렵다는 의문에 대해서는

중생은 본래 공하다는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3) 다음으로 깨침의 경지를 추구하기 어렵다는 의문에 대해서는

별도로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4) 다음으로 보시를 널리 베풀기 어렵다는 의문에 대해서는

삼륜공적18)의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5) 다음으로 보살은 불국토를 장엄하기 어렵다는 의문에 대해서는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다는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6) 다음으로 보신은 의지할 대상이 못된다는 의문에 대해서는

법신도 의지할 대상이 못된다는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여기에 이르러서 수보리는 기량伎倆이 이미 다하여 갖가지 의심이 영원히 풀렸다.

이로써 부처님의 마음이 드러나자

수보리는 마음이 안주되고 저절로 다스려지게 되었다.19)

때문에 수보리는 마침내 경전의 명칭에 대하여 질문한다.

(7) 또한 수보리가 다시 의심을 일으키자 나머지 의심을 타파해 주는데,

이어서 법신의 단멸에 대하여 의심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진진찰찰이 모두 법신이라 하여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8) 다음으로 화신을 진실한 부처님(眞覺)으로 잘못 인정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법신과 화신은 본래 같다고 하여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이 대목에 이르러서 삼신三身은 한 몸이고

몸과 국토20)가 모두 공하여 도리가 극에 이르자

분별생각은 사라지고 말의 모습은 적멸해진다.

수보리가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자 온갖 의심이 이미 타파되고

사상21)이 완전히 공해져서 아집은 이미 사라지고 법신이 우뚝 드러났다.

때문에 세존이 법공에 더욱더 뛰어난 이익이 있음을 드러내어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많은 몸과 목숨을 가지고

중생에게 보시하더라도 사구게四句偈22)를 수지하여

사람들에게 설해 주는 것만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9) 다음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재물보시는 쉽지만

몸과 목숨을 버리기는 어렵다는 의심에 대해서는

달리 욕망으로 터득한 색신23)을 인용하여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10) 다음으로 공을 체득한 법이 어찌 인을 지어서

과를 얻는24) 방식으로 가능한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실實도 없고 허虛도 없다는 가르침으로써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11) 다음으로 머무름이 없는 마음으로

어떻게 반야에 합치될 수 있는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남(人)과 나(我)를 모두 잊는 가르침으로써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12) 다음으로 남과 나를 모두 잊으면

어떻게 부처님과 마음25)에 계합될 수 있는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만약 분별심으로 계합하려고 한다면 점점 어그러진다고 답변하신다.

그렇다고 만약 문자를 벗어나서

특별한 방식으로 추구하는 것도 또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문자의 자성이 공하다는 입장에서

이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마음과 부처님이 평등하다.

상반의 경문26)은 사상四相을 타파해 주는 까닭에

추麤이고 하반의 경문은 사견四見을 타파해 주는 까닭에 세細이다.27)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살펴야 한다.

이하부터는 미세하게 아집과 법집을 타파한다.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

(13) 다음으로 반야를 깨닫는 것은

진법을 보는 것인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무소득의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14) 다음으로 반야를 깨닫는 것은

부처를 성취하는 참된 인을 보는 것인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법신은 인과 과(因果)에 속하지 않는다28)는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15) 다음으로 터득한 법이 없다면

어떻게 보살이 된 것인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터득한 법도 없고 터득한 주체도 없다는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16) 다음으로 여래에게 오안(육안·천안·혜안·법안·불안으로서 각각의 안목을 가리킨다.)이

있는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중생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안목이라는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17) 다음으로 보시를 해도 복덕이 없다면

복덕의 과보를 못 받는 것인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유루의 복덕이 아닌 무루의 복덕 이야말로 대단히 많은 복덕이라는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18) 다음으로 인과가 결코 없다면 마땅히 깨달음도 없을 텐데


부처님께서 구족한 32색신상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부처님은 결코 32색신상의 구족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19) 다음으로 부처님에게 32색신상이 없다면

누가 설법을 한다는 것인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가히 설해야 할 법조차 없다는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20) 다음으로 미래의 중생은 믿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의심에 대해서는

중생이라 할 것이 없다는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21) 다음으로 법신조차 완전히 공하다면

어째서 일체 선법을 닦아서

보리를 증득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집착이 없이 터득한 법은 평등하다는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22) 다음으로 이미 선법조차 없다면

무슨 법을 훌륭하다고 간주하는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반야에 통달하는 것이 가장 훌륭하다는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23) 다음으로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다면

어째서 중생을 제도한다고 말하는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남(중생)과 나(보살)라는 분별심을 잊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24) 다음으로 법신과 보신이 모두 진상이 아니라면

여래의 삼십이상은 부처님이라 말할 수 없는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전륜성왕의 삼십이상을 들어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25) 다음으로 법신과 보신은 형상이 없고

응화신은 진상이 아니라면 그것은 단멸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단멸이 아니라는 가르침29)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26) 다음으로 여래께서 걷고 머무르며 앉고 눕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여래의 진아가 아닌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같고 다름의 견해도 아직 타파하지 못하고

삼신일체라는 뜻에도 아직 계합되지 못한 까닭이다.


미진세계의 비유를 통해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27) 다음으로 평등한 법신의 일체가 모두 진여真如가 아니라면

또 어째서 부처님으로 나타나서 사상과 사견을 설하는 것인가 하는

의심에 대해서는 부처님은 사상과 사견을 볼 수가 없다는

가르침으로 그 의심을 타파해 주신다.

또한 총체적으로 논하자면 일체중생의 경우

미혹으로 전도되고 그 집착이 견고하여

그것을 타파하기 어려운 까닭에 부처님께서

금강심과 금강지로 거듭 그것을 타파하여

근본지혜인 법신의 진체眞體를 보도록 해 주신다.

(28) 먼저 오온의 몸과 마음 및 여섯 가지 경계(六塵)의 형상에 집착하고

나아가서 그 행상行相에 집착하는 보시로써 복덕을 추구하는 경우는

부처님께서 무집착(無住)으로 그것을 타파해 주신다.

(29) 다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행상에 대하여 의심하는 경우는

무소득의 가르침으로 그것을 타파해 주신다.

(30) 다음으로 보시에 집착하여 불국토의 장엄을 추구하는 경우는

장엄할 불국토가 없다는 가르침으로 그것을 타파해 주신다.

(31) 다음으로 복덕에 집착하여 복덕의 과보에 대한 행상을 추구하는 경우는 32가지를 구족한 색신상을 통하여
그것을 타파해 주신다.

(32) 다음으로 여래에게 삼신상이 있다고 집착하는 경우는 응화신은 진신이 아니고 보신은 분별상을 벗어나 있다
는 가르침으로 그것을 타파해 주신다.

(33) 다음으로 법신에도 형상이 있다고 집착하는 경우는 법신은 분별상이 아니라는 가르침으로 그것을 타파해 주
신다.

(34) 다음으로 법신에도 실아實我가 있다고 집착하는 경우는 일체법이 무아라는 가르침으로 그것을 타파해 주신
다.

(35) 다음으로 삼신에도 정해진 형상이 있다고 집착하는 경우는 삼신은 모두 동일하지도 않고 각각 다르지도 않
다는 가르침으로 그것을 타파해 주신다.

(36) 다음으로 법신은 언설의 설법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집착하는 경우는 삼신은 한 몸이라는 가르
침으로 그것을 타파해 주신다.

(37) 다음으로 법신은 적멸인데 어떻게 설법으로 드러내겠는가 하고 집착하는 경우는 여섯 가지 비유의 관찰30)
을 빌려서 그것을 타파해 주신다.
이처럼 갖가지로 그때그때의 의심을 타파해 주시니 일체의 모든 유위존재는 무상하고(一切皆非)31), 모든 유위상
은 소멸되며, 일심이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다.

때문에 소견의 허망이 이미 공하고 능견의 허망도 또한 공하므로 능과 소가 이미 공하고 그 공도 또한 공하다.

이로써 곧바로 법신의 향상일로32)를 터득한 까닭에 분별심으로 어찌하려고 하면 곧 어지러워지고 분별념으로
어찌하려고 해도 곧 어그러지고 만다.

그러므로 반야의 오묘한 지취旨趣는 이와 같은 분별의 경지에 머물러 있지 않다.

8. 부처님(覺)의 교리는 『금강경』에서 그치지 않는다

(覺敎理가 不止於此)

개반야(盖般若) 이후에 혜학(慧學)이 방성(方盛)하야

의학(義學)의 도(徒)가 위혜(爲慧)소비(所飛)故로 심부공혜(心浮空慧)하여

불능진정(不能鎭定)이어늘 이능엄(以楞嚴)대정(大定)으로 진지(鎭之)하시고

유설대원각(又說大圓覺)하사 사리사(使理事)로 쌍전무애(雙全無碍)케 하시며

유설법화(又說法華)하사 원현법계사상(圓現法界事相)하야

회삼귀일(會三歸一)케 하시며

유설열반 상락아정(又說涅槃 常樂我淨)하사

사교리(使敎理)로 원만(圓滿)케 하시니라

소위원자교(所謂圓字敎)가 시야(是也).

개화엄(盖華嚴)은 교중(敎中)의 제일구(第一句)이니

여선가(如禪家)의 거양종승(擧揚宗乘)에 선거제일구(先擧第一句)의 식(式)이오

법화열반(法華涅槃)은 교중(敎中)의 말후구(末后句)이니

여선가설법상상(如禪家說法上床)의 시(時)에 복거제일구(復擧第一句)의 식(式)이니라.

연(然그러함)이나 교중학자(敎中學者)가 체재법계무장애지(滯在於法界無障碍智)고(故)로

특설교외별전(特設敎外別傳)의 지(旨)하시니

차(此)는 비상상기자 (非上上機者)면 불오입(不悟入)이니라.

무릇 반야(般若)의 가르침이 설해진 이후에 혜학慧學이 바야흐로 왕성해져

교학을 배우는 사람들이 반야지혜를 바탕으로 비상하였다.


그런 까닭에 마음이 부공혜(浮空慧33)의 상태가 되어 진정할 수 없게 되자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楞嚴)』의 능엄삼매(大定)로써

그것을 진정(鎭之)시켜 주셨다.

또한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圓覺)』을 설하여

수행의 도리(理)와 수행의 행상(事)에 대하여 모두 완전하게 걸림이 없도록 해 주셨다.

또한 『묘법연화경(法華)』을 설하여 법계의 실상을 원만하게 드러내어

삼승의 방편을 모아서 일승으로 돌아가게(會三歸一) 하셨다.

또한 『대반열반경(涅槃』에서 영원과 묘락과 진아와 청정(常·樂·我·淨)을 설하여

교리(敎理)를 원만하게 하셨다.

소위 원자교(圓字敎)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무릇 『대방광불화엄경』은 교학 가운데 제일구(第一句)34)에 해당하기 때문에

저 선가에서는 선종의 종지(宗乘)를 널리 드러내는 경우에는

먼저 제일구의 방식35)으로 언급하였다.

그리고 『묘법연화경(法華)』과 『대반열반경(涅槃)』은

교학 가운데 말후구(末后句)36)에 해당하기 때문에

저 선가(禪家)에서 설법을 하는 경우 거듭 제일구의 방식으로 언급하였다.

그러나 교학자가 법계에 걸림이 없는 지혜에 빠져 있는 까닭에

특별히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종지(宗旨)를 내보이셨는데

이것은 상상근기(上上機者)가 아니면 깨달음에 들어갈 수 없다.

9. 오늘날의 사조를 논하다(論今思潮)

시운(時運)이 륜전(輪轉)에 민지(民智)가 개신(改新)하고 사조(思潮)가 일변(日變)이라.

지식계급(知識階級)도 경제생활(經濟生活)로 경쟁(競爭)이어니

하가(何暇)에 독한문(讀漢文)을 장년(長年)이리요.

연즉(然則) 한자장경(漢子藏經)이 적재여산(積在如山)이라도

귀어일개후물(歸於一個朽物)이라

이재(而哉) 시당여년(時當余年)이 육십(六十)이라.

정신(精神)이 단촉(短促)하며 수전안혼(手戰眼昏)하여 불감역경(不勘譯經)이로다.


이차연유(以此緣由)로 누고어동지(累告於同志)하여

발문어전선사찰(發文於全鮮寺刹)이로되

불시무심(不啻無心)이라.

역내비방자다의(亦乃誹謗者多矣)로다

여부득의(余不得已)하여 이선문(以鮮文)으로 역금강우주해(譯金剛又註解)하며,

우선한문(又鮮漢文)으로 역금강능엄원각(譯金剛楞嚴圓覺)이러니

우공후인지난해(又恐後人之難解)일가 하야, 삭제전역(削除前譯)하고

갱이상역주해과목(更以詳譯註解科目)하노라.

연(然)이나 경지역난(經之譯難)은 유가차치(猶可且置)어니와

인비실무(印費實無)를 내하내하(奈何奈何)오.

이고(以故)로 여역금강능엄원각(余譯金剛楞嚴圓覺)이각필(而擱筆)하노라.

시운이 끊임없이 흘러 사람들의 지혜가 새로워지고 사조가 매일 변하고 있다.

지식智識과 계급도 경제생활에 의하여 경쟁하는 즈음인데

어느 겨를에 한문경전을 읽느라고 오랜 세월을 보내겠는가.

그런 즉 한자경전이 산처럼 쌓여 있다 할지라도 하나의 오물이 되고 말 것이다.

지금 내 나이가 예순 살이 되고 보니

정신이 딸리고 손은 떨리며 눈은 침침하여

경전의 번역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동지들에게 거듭 말하면서

조선의 모든 사찰에 글을 돌렸는데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또한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내가 부득이하게 한글로 『금강경』을 번역하고 또 주해하였다.

또한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금강경』과 『능엄경』과 『원각경』을 번역하였는데

후인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이전의 번역을 삭제해 버리고

거듭 자세하게 번역을 하고 주해를 붙이며 과목을 나누었다.

그러나 경전 번역의 어려움은 오히려 차치하고라도

인쇄할 비용이 실로 없는 것을 어찌 한단 말인가.

이런 까닭에 나는 『금강경』과 『능엄경』과 『원각경』을 번역하고 그만 붓을 놓는다.


각기覺紀 2950년(1923) 계해癸亥 3월 8일

삼장역회三藏譯會 용성龍城 백상규白相奎가 쓰다(識)

금강마하반야바라밀경金剛摩訶般若波羅蜜經

삼장역회三藏譯會 용성龍城 백상규白相奎가 한글과 한문의 혼용 및 순 한글로 강의함

『금강경』의 제목을 해석하다(釋題)

금강(金剛)자는 금강무위각심(金剛無爲覺心)을 위함(謂)이오.

마하(摩訶)자는 절대(絶對)한 대(大)를 위(謂)함이요.

반야(般若)자는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를 위(謂)함이요.

바라밀(波羅蜜)자는 생사차안(生死此岸)을 초월(超越)하여

무상각안(無上覺岸)에 달함을 위함이니라.

경(經)은 이(此) 일부대의(一部大義)를 전(詮)하야

후진(後進)의 경로(徑路)를 개도(開導)함이니라.

이(此) 경대의(經大義)는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파(破)하고

상(相)이 공(空)함을 현(現)함이요.

이(此) 경대요(經大要)는 무상(無相)으로 위종(爲宗)하고

무주(無住)로 위체(爲體)하고 묘행(妙行)으로 위용(爲用)함이요.

이(此) 경대개(經大槪)는 수보리(須菩提)는 목의(默疑)하시고

세존(世尊)은 현답(現答)하심이니라.

‘금강’은 모든 사람에게 고유한 무위각심無爲覺心(변함이 없는 본래적인 불성을 가리킨다.)을 가리켜 말한다.

‘마하’는 광대무변한 우리네 자성의 절대적인 대大(크고 넓으며 끝없고 많으며 훌륭하고 오묘하다는 뜻이다.)를 말
한다.

‘반야’는 근본뿌리에 통달하는 지혜(根本智)를 가리키고,

또한 일체의 차별적인 현상을 모두 이해하여 분명하게 통달하는 지혜(後得智)를 가리킨 말이다.

‘바라밀’은 생사의 바다를 초월하여

무상각無上覺(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가리킨다.)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가리킨 말이다.


‘경’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과 같은 것으로 설법의 대의를 담아서

후진에게 길을 열어서 깨닫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 말이다.

이 경전의 대의大義는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타파하고

상相이 공空함을 드러낸다.

또한 이 경전의 대요大要는 무상無相으로 종지를 삼고,

무주無住로 본체를 삼으며, 묘행妙行으로 작용을 삼는다.

또한 이 경전의 대개大槪는 수보리는 내심으로 잠잠히 의심하고

세존께서는 언설로 답변하신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타심통으로 일체중생의 마음속을 다 꿰뚫어 보기 때문이다.

1. 부처님께서 세상에 머물러 설법을 하는 의식(覺住世說法儀式)

여시아문(如是我聞)하사오니

일시(一時)에 각(覺)이 재사위국(在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하사 여대비구중(與大比丘衆) 천이백오십인


(千二百五十人)과 구(俱)러시니

이와 같음을 나37)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38)에서

대비구 천이백오십 명39)과 함께 계셨다.40)

‘여시’는 이 『금강경』 전체의 대의를

다음과 같이 아난 자신이 들었다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천이백오십 명의 대비구와 함께

어느 지역에 계셨다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2. 부처님께서 세상에 머물러 계시는 평소의 모습을 보여 주다

(覺之住世에 平常示人)

이시(爾時)에 세존(世尊)이 식시(食時)에 착의지발(着衣持鉢)하시고,


입사위대성(入舍衛大城)하사,

걸식어기성중(乞食於其城中)하사,

차제걸이(次第乞已)하시고, 환지본처(還至本處)하사,

반식결(飯食訖)하시고, 수의발(收衣鉢)하시고,

세족이(洗足已)하시고, 부좌이좌(敷座而坐)러시니,

그때 세존께서는 공양 시간41)이 되자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사위대성에 들어가서

성안에서 차례로 걸식을 마치고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서 공양을 마치고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고 나서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42)

이것은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자리를 펴고 앉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것을 아는 자가 없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알겠는가.

밝은 달빛은 소나무 사이로 비취고

맑은 물은 돌멩이 위로 흘러가도다

3. 다행스럽게도 수보리가 그 모습을 알아차리다

(幸有須菩提點破)

시(時)에 장로수보리(長老須菩提)가 재대중(在大衆)가운데 있사,

즉종좌기(卽從座起)하사, 편단우견(偏袒右肩)하시고,

우슬착지(右膝着地)하시고, 합장공경(合掌恭敬)하시와,

이백각언(而白覺言)하시대, 희유세존(希有世尊)이시여.

그때 장로 수보리43)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의 옷을 벗어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을 하고 공경스럽게

대각에게 사뢰어 말씀드렸다. “희유 하십니다, 세존이시여.”44)

여기에서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자리를 펴고 앉는 것에 대하여

수보리가 알아차리고 ‘희유 하십니다,

세존이시여’ 하시니 이 한마디가

맑은 하늘에 벼락이 치고

평지에서는 파도가 일어 나도다

4. 바로 여래의 순순淳淳한 모습을 친견하다

(정시친견여래순순지자(正是親見如來淳淳之慈))

여래(如來)가 선호념(善護念)제정사(諸正士)하시며

선부촉(善付囑)제정사(諸正士)이시니이다.

여래께서는 모든 정사를 잘 두호(斗護)하여 보살펴 주시고

모든 정사를 잘 부촉해 주십니다.

수보리는 일찍이 소승이었기 때문에

대각께서 순순하신 자비를 모르고 있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대각께서 간절한 마음으로 어語·묵默·동動·정靜에서

잠시도 그만두지 않음을 알고서 호념(護念)하신다고 말한 것이다.

소승의 경우는 아집我執이 공한 줄 깨닫고

결정적으로 열반을 증득하였다고 말하다가도

대각께서 20년 동안 일편고심一片苦心으로 호념해 주신 방편을 통하여

오늘에야 활연대오豁然大悟한 까닭에


아我가 공空한 그 법집法執까지도 공空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안주할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란의정사空亂意正士45)라 불린다.

현재의 이와 같은 공란의정사를 잘 두호(斗護)하여 보살펴 주시고,

미래의 이와 같은 공란의정사를 잘 부촉(付囑)하여

그들에게 안주할 곳을 알려 주는 까닭에

수보리가 여래의 그와 같은 일편고심一片苦心을 깨닫고 나서

모든 정사正士를 잘 호념(護念)하시고

모든 정사를 잘 부촉(付囑)하신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5. 안심의 방법을 묻다(問安心方法)

세존(世尊)이시여 선남자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한 이는

응운하주(應云何住)하며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이닛고,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선남자·선여인은

마땅히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수보리가 질문한 까닭은 단지 아가 공한 것만 깨쳐서

그 경지에 편안히 머물러 있다가 이제야 아공(我空)에 집착함을 버렸지만

진공묘지眞空妙智는 증득하지 못하였다.

이에 더 이상 나아가려고 해도 새로 증득한 것은 없고

이미 안주한 경지는 버렸기 때문에

어중간하게 나아가야 할 곳을 모르고 있으므로

이에 공란의정사空亂意正士45)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은 어떻게 안주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를 질문한 것이다.


6. 잘 두호(斗護)하여 보살피고 잘 부촉한다는 뜻을

되돌이켜서 별도로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답변하다

(返取善護念付囑之意하야 答不必別求)

각언(覺言)하사대 선재선재(善哉善哉)라!

수보리(須菩提)야 여여소설(如汝所說)하야,

여래(如來)선호념(善護念)제정사(諸正士)하시며,

선부촉(善付囑)제정사(諸正士)하시나니,

여금체청(汝今諦聽)하라 당위여설(當爲汝說)호리라.

선남자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한 이는

응여시주(應如是住)하며, 여시항복기심(如是降伏其心)이니라.

대각께서 말씀하셨다. 잘했다. 참으로 잘했다.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것처럼

여래는 모든 정사를 잘 두호(斗護)하여 보살펴 주고 모든 정사를 잘 부촉해 준다.

그대는 이제 잘 듣거라. 마땅히 그대한테 말해 주겠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선남자·선여인은

마땅히 다음과 같이 머물러야 하고 다음과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대각께서는 모든 정사를 잘 두호하여 보살펴 주시고

모든 정사를 잘 부촉해 주신다는 수보리의 말을 취하여 답변한다.

이런 까닭에 대각께서는 그대가 말한 것처럼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은

별도로 안심을 통하여 깨치려고 애쓸 필요가(安心作覺) 없이

내가 호념(護念)하고 부촉(付囑)하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내가 호념하고 부촉하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처럼 안주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답변은

아래의 경문에 있으므로 자세하게 살펴보라.


옛날에 혜가가 달마에게 안심하는 방법을 물었는데 달마가 답변하였다.

“그대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대한테 안심하는 방법을 일러주겠다.

혜가가 여쭈었다.

“마음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가 말했다.

“그대의 마음을 이미 안심시켜 주었다.”

조사문중에서는 이처럼 말 한마디로 해결해 주었다.

그러나 대각께서는 임제할臨濟喝과 덕산방德山棒46)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허다한 언설을 베풀어 주셨다.

이것은 참으로 노파심절老婆心切(자세하고 친절하게 일러서 가르쳐 주는 것을 말한다.)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과연 안심입명安心立命47)의 도리를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오월의 강물은 깊고 초당은 호젓하다네48)

7. 무릇 다른 정사가 그 뜻을 모르는 까닭에 거듭 기꺼이 듣고자 하다

단제정사미령기지고(但諸正士未領其旨故) 갱욕락문(更欲樂聞)

유연(唯然)이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원락욕문(願樂欲聞)하나이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원컨대 기꺼이 듣고자 합니다.49)

수보리는 바로 대각의 마음을 믿은 까닭에

“예, 그리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말했지만

다른 정사는 부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

다시 듣고자 한다고 말한 것이다.

8. 안심의 방법을 드러내다(標安心方法)구체적인 뜻은 이하의 경문에 있다.


(義在下)

각고(覺告)수보리(須菩提)하사대

제정사(諸正士)가 응여시항복기심(應如是降伏其心)이니

대각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正士)은 반드시 다음과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수보리가 위에서 질문한 “마땅히 어떻게 안주해야 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각께서는 단지 마음을 다스리는 것만 답변하시고

안주하는 것에 대하여 답변하지 않은 뜻은

먼저 이승의 편공偏空(我空, 人空, 衆生空이라고도 한다.)에

집착하는 습기를 타파하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습기만 공하면 다스리지 않아도

저절로 편안해질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범부의 생각과 부처님의 이해가

모두 한곳에서 자연스럽게 다스려져야 할 것이지 억지로 할 것이 아니다.

9. 안심하는 관법에 대하여 해석하다(釋安心觀法)

소유일체중생지류(所有一切衆生之類)에

약란생(若卵生)과 약태생(若胎生)과 약습생(若濕生)과

약화생(若化生)과 약유색(若有色)과 약무색(若無色)과

약유상(若有想)과 약무상(若無想)과 약비유상(若非有想)과

약비무상(若非無想)을 아개령입무여열반(我皆令入無餘涅槃)하야,

이멸도지(而滅度之)이니,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호대

실무중생(實無衆生)이 득멸도자(得滅度者)니,
하이고(何以故)오, 수보리(須菩提)야

여정사(若正士)가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즉비정사(卽非正士)이니라.

존재하는 일체중생의 부류로서

알로 낳은 것이든지, 태로 낳은 것이든지, 습기로 낳은 것이든지,


변화해서 낳은 것이든지, 색계(色界)에서 낳은 것이든지,
무색계(無色界)에서 낳은 것이든지,
식무변처(識無邊處)에서 낳은 것이든지,
무소유처(無所有處)에서 낳은 것이든지,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서 낳은 것이든지 간에,

내가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게 하여 멸도시켰지만,

이와 같이 무량하고 무수하며 무변한 중생을 멸도시켜도

실로 중생은 멸도를 얻은 자가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약 정사에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50)이 있으면

곧 정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멸도는 중생심을 소멸하고 모든 대각의 청정각성(清净覺醒)의 언덕에 건너가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을 안주토록 하는 관법을 보여 준 것이다.

수보리가 위에서 “마땅히 어떻게 안주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한 것에는 수보리에게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정사의 목적은

위로는 대각의 지혜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중생은 끝이 없으니 어떻게 제도할 것이며

또 중생을 모두 제도하지 못하면 정사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며

중생을 모두 제도하고 나서 깨침을 성취하겠다고 하면

어느 때에 모두 제도할 것인가.

만약 이와 같다면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이고

그 마음은 안주할 것인가.


이와 같이 불안한 마음이 일어나서

급히 다스리는 방법과 안주하는 방법을 질문한 까닭에

대각께서 답변하신 뜻이 곧 아我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그러므로 그대는 진정으로 본래부터 깨달음을 성취할 것이 없고

또 어떤 중생도 가히 제도할 것이 없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중생이 많다고 해도 십이유생十二類生51)에서 낳지 않는 것이 없고,

비록 십이유생이 많다고 해도 태·난·습·화에서 낳지 않는 것이 없으며,

비록 태·난·습·화의 사생이 많다고 해도 색법과 심법에서 낳지 않는 것이 없다.

색에 대해서 말하자면 색이 있고 없는 두 가지에서 낳지 않는 것이 없고,

마음에 대해서 말하자면 생각이 있고 없는 두 가지에서 낳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그 극도極度에 이르러 말하자면


생각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 것에서 낳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이 십이망상十二妄想이 되는데

그 망상은 본래 공하므로 중생이 없는데 어찌 많다고 하겠는가.

중생이라는 것은 무릇 망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본래부터 없는 것이므로 중생이 있다고 본다면

그 중생은 곧 적멸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십이유생을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도

본래부터 가히 제도할 중생이 없는 까닭에 중생이 공한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이 본래부터 공한 까닭에 가히 성취할 깨달음이 없다.

왜냐하면 아상이 없은 즉 인상이 없고,

인상이 없은 즉 중생상이 없으며,

중생상이 없은 즉 수자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생계가 공하면

자연히 깨달음의 결과가 멀지 않은데

무엇을 제도하기 어렵고

무엇을 성취하기 어렵겠는가.

그러므로 무릇 자신의 마음에 중생이 공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육근이 텅 비고 심식이 공하면

저절로 축착합착築着嗑着댓돌이 들어맞고


맷돌이 들어맞듯이 어떤 상황이 잘 계합되는 것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의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정사가 아니다.

10. 수보리가 중생이 공하다는 말을 듣고서 의심이 일어나다

(須菩提聞衆生空하고 疑雲이 발발潑潑)

복차(復次)수보리(須菩提)야

정사(正士)가 어법(於法)에 응무소주(應無所住)하야

행어보시(行於布施)니

소위(所謂) 불주색보시(不住色布施)와

불주성향미촉법보시(不住聲香味觸法布施)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정사(正士)가 응여시보시(應如是布施)호대

불주어상(不住於相)이니라.

또한 수보리여, 정사가 저 법에 마땅히 집착이 없이 보시를 실천해야 한다.

이른바 색에 집착이 없이 보시하고,

소리와 향기와 맛과 부딪쳐 느끼는 것과 법에 집착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

수보리여, 정사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되 상에 집착이 없어야 한다.

수보리가 태·난·습·화 및 십이유생이 공하다는 말을 듣고

돌연히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어안이 벙벙하게 앉아서

다음과 같이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는

법보시와 재물보시의 두 가지가 근본이 되는데

지금 중생이 공하다면 보시를 베풀 자는 누구이고

보시를 받을 자는 누구인가’라고 의심하였다.

(1) 대각께서 상에 집착하는 의심을 타파하시다(覺破着相之疑)


대각께서 타심통52)의 지혜로 벌써 알아차리고 즉시 답변하셨다.

그대는 저 깨치지 못한 자들을 중생이라고 집착하지 말라.

마땅히 저 법에 집착이 없이 보시를 실천해야 한다.

곧 색·성·향·미·촉·법의 육진에 집착하여 보시하지 말라.

설령 이와 같이 보시하더라도 저 집착이 없는 상에도 집착하지 말라.

11. 만약 상에 머묾이 없으면 어떻게 복덕이 있겠는가 하고 의심하다

(疑云若不住相이면 何以有福고)

하이고(何以故)오 여정사(若正士)가 불주상보시(不住相布施)하면

기복덕(其福德)이 불가사량(不可思量)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동방허공(東方虛空)을 가사량불(可思量不)있겠느냐.

불야(不也)이다 세존(世尊)이시여

수보리(須菩提)야 남서북방사위상하허공(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을

가사량불(可思量不)있겠느냐.

불야(不也)니이다 세존(世尊)이시여

수보리(須菩提)야 정사(正士)의 무주상보시복덕(無住相布施福德)도

역복여시(亦復如是)하야 불가사량(不可思量)이니라.

왜냐하면 만약 정사가 상에 머묾이 없이 보시하면

그 복덕이 불가사량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방의 허공을 사량할 수 있겠느냐.

사량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남방·서방·북방·사유·상하의 허공을 사량할 수 있겠느냐.

사량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정사가 상이 집착이 없이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그와 같이 불가사량하다.
수보리는 보시를 하되 저 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고서

내심으로 가만히 의심하였다.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상에 머물지 않는다면 무엇으로써 복을 삼겠는가.’

(2) 대각께서 상을 벗어난 묘행을 보여 주시다(覺示離相妙行)

대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대는 인人·천天이 유루복만 알고

상을 떠난 복이 크다는 것은 모르는구나.

이제 중생에게 법으로 보시하거나

재물로 보시할 경우에 베푸는 자와 받는 자와

그 주는 보시물의 세 가지가 모두 공하기 때문에

가히 상에 머물 것이 없다.

그러므로 무주상보시가 한량없이 큰 복덕이 되는 까닭에

시방의 허공에 비유한 것이다.’

12. 결론으로 안심하는 방법을 보여 주시다(結示安心法)

수보리(須菩提)야 정사(正士)가 단응여소교주(但應如所敎住)니라

수보리여, 정사는 무릇 가르쳐 준 대로 안주해야 한다.

이것은 안심하는 방법을 결론지어 보여 주신 것이다.

위에서 마음이 안주하지 못한 까닭에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셨다.

내(我)가 없음을 관찰하라.

내가 없음을 보게 되면 곧 남(人)이 없는 것이다.

남과 나 둘을 모두 잊으면 곧 자심自心이 적멸할 것이다.


내 자심이 적멸하면 일체중생이 적멸할 것이다.

이제 중생이 고요하면 대각도 반드시 중생을 제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구하는 마음이 쉬고 취하고 버리는 마음도 없을 것이니

이처럼 내·외가 공하면 일심이 여여부동如如不動(진여의 상태처럼

부동한 경지를 가리킨다.)할 것이다.

이것이 곧 안심하는 방법이다.

때문에 내(覺)가 이왕 가르쳐 준 바와 같이 안주해야 한다.

이것은 위의 경문에서 ‘존재하는 일체중생의 부류로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곧 정사가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대목53)을 들어서 분석한 것이다.

13. 중생이 공하고 삼륜의 체가 적멸함을 듣고서

그러면 인과因果도 허망하게 시설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다

(聞衆生空三輪體寂하고 疑因虛設)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가시신상(可以身相)으로 견여래(見如來)불(不)아

불야(不也)니이다. 세존(世尊)이시여

불가시신상(不可以身相)으로 득견여래(得見如來)니이다.

하이고(何以故)오 여래소설신상(如來所說身相)이 즉비신상(卽非身相)이니이다.

각고(覺告)수보리(須菩提)하사대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니라.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신상身相을 통하여 여래를 볼 수가 있겠느냐.

볼 수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신상을 통해서는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신상(身相)은 곧 신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각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모든 상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은 진상이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수보리가 가만히 의심하였다.

정사가 보시로 복을 지어서 중생을 제도하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위로 대각의 지혜를 추구하는데

이제 이미 중생이 공하여

보시를 할 자와 보시를 받을 자와

그 보시물이 모두 공한 것이라면

인을 지어서 과를 받는다는 말도 허망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여래를 보면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54)가 완연하다.

어찌 무상한 인을 통하여 이와 같이 장엄한 신상을 얻었는가.

(3) 대각께서 상이 없는 묘행을 보여 주시다(覺示無相妙行)

대각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셨다.

그대가 마음으로 분별하여

‘지금 여래의 삼십이상과 팔십종호가 완연하니

어찌 무상한 인을 통하여 이와 같은 자마금신상紫磨金身相55)을 얻었는가’ 하니,


그대의 마음 같으면 여래법신을 육신상肉身相을 통하여 볼 수가 있겠구나.

수보리가 얼른 알아차리고 답변하였다.

예. 여래의 육신상을 통해서는 진정한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여래께서 일러 말씀하셨다.

모든 형상은 다 허망하다.

이것은 아我가 공空하고 법法이 공하며

아와 법이 모두 공하다는 것도 또한 공함을 가리킨다.

그러나 법신法身은 제법諸法의 형상을 떠나서


별도로 법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모든 형상을 진상真相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곧 이렇다 해도 얻을 수가 없고, 저렇다 해도 얻을 수가 없으며,

이렇다 저렇다 함을 모두 얻을 수가 없는 바로

그곳에서 여래를 깨쳐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곧 무상한 인因으로 무상한 과(無相果)에 계합하는 것이다.

14. 무상인으로 무상과에 계합한다는 것을 의심하다

(疑無相因으로 契無相果)

수보리(須菩提)가 백각언(白覺言)하사대 세존(世尊)이시여.

파유중생(頗有衆生)이 득문여시언설장구(得聞如是言說章句)하고 생실신(生實信)불(不)잇가.

각고(覺告)수보리(須菩提)하사대

막작시설(莫作是說)하라.

여래멸후후오백세(如來滅後後五百歲)에 유지계수복자(有持戒修福者)면,

어차장구(於此章句)에 능생신심(能生信心)하야,

이차위실(以此爲實)하리니 당지시인(當知是人)은

불어일각이각삼사오각(不於一覺二覺三四五覺)에 이종선근(而種善根)이라.

이어무량천만각소(已於無量千萬覺所)에 종제선근(種諸善根)일새

문시장구(聞是章句)면 내지일념(乃至一念)이라도

생정신자(生淨信者)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여래실지실견(如來悉知悉見)하나니

시제중생(是諸衆生)이 득여시무량복덕(得如是無量福德)이니라.

하이고(何以故)오 시제중생(是諸衆生)이

무복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며,

무법상(無法相)하며 역무비법상(亦無非法相)이니라.

하이고(何以故)오 시제중생(是諸衆生)이 약심취상(若心取相)하면,

즉위착아인중생수자(卽爲着我人衆生壽者)오.

약취법상(若取法相)이라도 즉위착아인중생수자(卽着我人衆生壽者)니,
하이고(何以故)오 여취비법상(若取非法相)이라도

즉위착아인중생수자(卽着我人衆生壽者)니라.

시고(是故)로 불응취법(不應取法)하 불응취비법(不應取非法)이니,

이시의고(以是義故)로 여래상설(如來常說)하사대

여등비구(汝等比丘)가 지아설법(知我說法)을 여벌유자(如筏喩者)니

법상응사(法尙應捨)어든 하황비법(何況非法)이따녀.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대부분의 중생들이 이와 같은 언설과 장구를 듣고

진실한 믿음을 내겠습니까.

대각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 하지 말라.

여래가 입멸한 이후 후오백세56)에도 계를 지니고 복덕을 닦는 자는

그 장구에 믿음을 내고 진실한 말씀으로 삼을 것이다.

이 사람은 한 부처님(覺)이나 두 부처님(覺) 서너 다섯 부처님께(覺)

선근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覺) 처소에서 모든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장구를 듣고 잠깐이라도 청정한 믿음을 내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여래는 이러한 중생들이 얻는 한량없는 복덕을 다 알고 다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중생들에게 다시는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이 없고,

법상이 없고 비법상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중생들이 만약 마음으로 상相에 집착하면

곧 아我와 인人과 중생衆生과 수자壽者에 집착하는 것이고,

만약 법상法相에 집착해도 아와 인과 중생과 수자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비법상非法相에 집착해도

곧 아와 인과 중생과 수자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法에 집착해도 안 되고 비법非法에 집착해도 안 된다.

이에 여래는 늘 말했다. 그대 비구들이여,

내 설법은 뗏목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법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非法이겠는가.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묵묵히

‘무상인無上因으로 무상과無上果에 계합한다는 것이 대단히 깊고 깊어서

한 사람도 믿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고 의심하였다.

이와 같은 의심이 일어나자

대각께 ‘중생이 과연 이런 말씀을 듣고서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라고 여쭈었다.

이것은 최초에 수보리가 유상인有相因에 집착하자

대각께서 무주상보시로써 타파해 주셨고,

다시 무상인으로는 유상과에 계합할 수 없다고 하여

유상과有相果에 집착하자

대각께서 법신은 형상(相)이 아니라는 말씀으로써 타파해 주셨지만

이로부터 무상인으로써 무상과에 계합하는 것은 깨쳤지만

후래에 중생이 그것을 깨치지 못할까 의심한 것이다.

어째서 믿기가 어려운가.

그것은 인·과가 모두 공하고(俱空因果) 인·법이 모두 없으므로(人法雙泯)

그 뜻이 대단히 깊은 까닭이다.

그러니 어찌 믿을 사람이 있겠는가.

(4) 대각께서 깨달음의 지견知見을 보여 주시다

(覺示覺之知見)

대각께서 이에 대하여 답변하셨다. 어찌 믿을 사람이 없겠는가.

무릇 이 설법을 믿는 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계를 지니고 복덕을 닦는 사람이어야 믿을 수가 있다.

또한 한량없는 천만 불각의 처소에서

깊이 선근을 심은 사람이어야 믿을 수가 있다.

그리하여 진실을 믿는 자는

그 복덕에 한량이 없는 줄을 내가 다 보고 다 안다.


이 설법을 믿는 자는 마음씀씀이가 큰 허공과 같아서

인아사상人我四相과 일체유무제상一切有無諸相이 모두 공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게는 법상도 없고 비법상도 없기 때문에

마음으로 일체상에 집착이 없다.

터럭 끝만 한 법만 집착해도 인아사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집착하지 않는다 해도 또한 집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남아 있는 까닭에

인아사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나는 결코 법에 집착하지 말고

비법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정사正士에게 가르친다.

왜냐하면 내 가르침에 들어오면

인人·법法이 모두 공하여 모든 집착을 온전히 벗어나서

일체 제법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어찌 사소한 것이라 말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곧 법이라는 것도 오히려 다 놓아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15. 대각은 색상도 없고 법은 취할 것도 없다는 말을 듣고

대각께서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것에 대하여 의심하다

(聞覺非色相이오 法不可取하고 疑覺成須57)菩提)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여래(如來)가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야

여래(如來)가 유소설법(有所說法)야

수보리언(須菩提言)하되 여아해각소설의(如我解覺所說義)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며,

역무유정법(亦無有定法)이 여래가설(如來可說)이니다.

하이고(何以故)오 여래소설법(如來所說法)이 개불가취(皆不可取)며,

불가설(不可說)며, 비법(非法)며, 비비법(非非法)이니, 소이자하(所以者何)오

일체현성(一切賢聖)이 개이무위법(皆以無爲法)으로 이유차별(而有差別)이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했느냐.

여래가 설법을 했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제가 대각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만한 정해진 깨침(法)이 없고,

또한 여래께서 설한 정해진 설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의 설법은 모두 취할 수가 없고 설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비법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현들은 다 무위법無爲法58)에서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대각은 색상을 통해서는 볼 수가 없고

그 설법은 취할 수도 없다는 말씀을 듣고는 다음과 같이 의심하였다.

‘만약 대각과 그 설법이 모두 무상無相하다면

그것은 대각과 그 설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대각께서는 보리를 성취하였는가.

또 지금 설법하시면서 그 설법이 없다고 하신 뜻은 무엇인가.’

(5) 대각께서 깨달음과 설법에 대한 지견을 모두 없애 주시다

(覺이 雙遣覺法知見)

대각께서는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覺)가 있고

설법(法)이 있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급히 불러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과연 여래가 보리를 성취한 것이 있는가.

과연 여래가 설법을 했는가.” 이에 수보리가 벌써 알아듣고 대답하였다.

“예. 대각께서 하신 설법의 뜻을 제가 이해하기로는

원래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정해진 깨침(法)이 없는 것이 곧 보리이고,

또한 정해진 설법(法)도 없음을 여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취할 수가 없다고 설법한 여래의 뜻을 수보리가 깊이 이해한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비단 여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의 현성도 모두 무위법으로써

갖가지 차별언사가 있다는 것이라고 수보리가 말씀을 드린 것이다.

그러나 굳이 무위법으로써 차별이 있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 뜻을 알 것이다.

16. 깨달음과 설법이 없다는 것은 이해하였으나

그 복덕이 뛰어나다는 것은 의심하다

(解無覺法이나 疑福殊勝)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약인(若人)이 만삼천대천세계(滿三千大千世界) 칠보(七寶)로 이용보시(以用布施)하면,

기복덕(其福德)이 녕위다불(寧爲多不)아.

수보리언(須菩提言)하되 심다(甚多)하니다.

세존(世尊)이시여. 하이고(何以故)오

기복덕(其福德)이 즉비복덕성(卽非福德性)일새,

시고(是故)로 여래설복덕다(如來說福德多)라 하시니다,

약복유인(若復有人)이 어차경중(於此經中)에 수지내지사구게등(受持乃至四句偈等)하야,

위타인설(爲他人說)하면,

기복(其福)이 승피(勝彼)하니, 하이고(何以故)오,

수보리(須菩提)야, 일체제각(一切諸覺)과

급제각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及諸覺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이

개어차경출(皆從此經出)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소위각법자(所謂覺法者)는 즉비각법(卽非覺法)이니라.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면

그 사람의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그 복덕은 복덕성이 아닌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의 사구게만이라도 받고 지니며

다른 사람에게 설해 준다고 하자.

그러면 이 복덕이 저 복덕보다 뛰어나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대각과 대각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가르침(法)은

다 이 경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소위 대각의 가르침(法)은 곧 대각의 가르침(法)이 아니다.

수보리가 이미 깨달음과 설법이 없다는 뜻은 이해하였다.

그러나 무릇 무위법에 계합한 자라면

어떻게 뛰어난 복덕을 얻을 것인가 하고 의심한 것이다.

(6) 대각께서 무상복덕無相福德이 최상임을 보여 주시다

(覺示無相之福爲最)

대각께서는 먼저 유상복덕으로 그 우열을 정해 두려고 물으셨다.

“만약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그것으로 얻은 복덕이 많겠느냐.”

이에 수보리는 벌써 알아듣고 답변하였다.

“그 유상복덕有相福德은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대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유상보시(有相布施)가 제아무리 크다고 해도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는

사구를 받고 지녀서 다른 사람에게 일러주는 것만 못하다.


왜냐하면 일체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모두 이 반야의 대지혜에서 나온 까닭에 그 복덕이 가장 뛰어나다.”

17. 깨달음과 설법은 모두 얻을 것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

수행(因)을 닦아서 깨침(果)을 터득한다(結)는 것을 의심하다

(聞覺法俱無可得하고 疑修因結果)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수다원(須陀洹)이 능작시념(能作是念)호대

아득수다원과(我得須陀洹果)불(不)아.

수보리언(須菩提言)하되 불야(不也)니다.

세존(世尊)이시여 하이고(何以故)오,

수다원(須陀洹)이 명위입류(名爲入流)로대 이무소입(而無所入)이니,

불입색성향미촉법(不入色聲香味觸法)일새,

시명수다원(是名須陀洹)이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사다함(斯陀含)이 능작시념(能作是念)호대,

아득사다함과(我得斯陀含果)불아.

수보리언(須菩提言)하되 불야(不也)니다.

세존(世尊)이시여. 하이고(何以故)오

사다함(斯陀含)이 명일왕래(名一往來)로대,

이실무왕래(而實無往來)할새 시명사다함(是名斯陀含)이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아나함(阿那含)이 능작시념(能作是念)호대,

아득아나함과(我得阿那含果)불(不)아.

수보리언(須菩提言)하되 불야(不也)니다.

세존(世尊)이시여, 하이고(何以故)오.

아나함(阿那含)이 명위불래(名爲不來)로대 이실무불래(而實無不來)할새,

시고명아나함(是故名阿那含)이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아라한(阿羅漢)이 능작시념(能作是念)호대,

아득아라한도(我得阿羅漢道)불(不)아.

수보리언(須菩提言)하되 불야(不也)니다.

세존(世尊)이시여 하이고(何以故)오.

실무유법(實無有法)이 명아라한(名阿羅漢)이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약아라한(若阿羅漢)이

작시념(作是念)호대 아득아라한도(我得阿羅漢道)라 하면,

즉위착아인중생수자(卽爲着我人衆生壽者)니다.

세존(世尊)이시여, 각설(覺說)아득무쟁삼매(我得無諍三昧)하야,

인중(人中)에 최위제일(最爲第一)이라 하시니,

시제일리욕아라한(是第一離欲阿羅漢)이니다.

(세존(世尊)이시여)59). 아불작시념(我不作是念)호대,

아시리욕아라한(我是離欲阿羅漢)이라 하나이다.

세존(世尊)이시여, 아약작시념(我若作是念)호대,

아득아라한도(我得阿羅漢道)라 하면,

세존(世尊)이 즉불설수보리(卽不說須菩提)가

시락아란나행자(是樂阿蘭那行者)라 하시련마는,

이수보리실무소행(以須菩提實無所行)일새,

이명수보리(而名須菩提)가 시락아란나행(是樂阿蘭那行)이라 하시나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라고 불리지만 들어간 것이 없는데,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간 것이
없는 것을 수다원이라 말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한번 왕래할 자’라고 불리지만

실로 한번 왕래함이 없는 것을 사다함이라 말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되돌아오지 않는 자’라 불리지만

실로 되돌아오지 않음이 없는 것을 아나함이라 말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제로 아라한이라 할 만한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아·인·중생·수자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대각께서는 저를 다툼이 없는 삼매(無諍三昧)60)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고 욕망을 벗어난 사람


가운데 제일가는 아라한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나 저는 제가 욕망을 벗어난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누리는 사람이다.

수보리는 실로 아란나행을 한 것이 없으므로

수보리야말로 아란나행을 누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설법이라 해도 설할 법이 없고

깨달음(覺)이라 해도 성취할 깨달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에 세존께서 우리에게 사제법을 설하셨는데

그것은 설법이 아닌가.

우리가 그 사제법을 의지해서 수행하여 사과四果61)를 얻었으니

그것은 과果가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가 열반과涅槃果에 주住하니 이것은 주住가 아닌가.’

(7) 대각께서 머묾이 없는 참된 종지를 보여 주시다

(覺示無住眞宗)

대각께서는 마치 도적이 탄 말을 빼앗아 타고서

도적을 쫓아가는 격이라는 비유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대들이 사과를 얻었다고 하니

수다원과와 사다함과와 아나함과와 아라한과를 얻었느냐.

본래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고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가 없는

이 한 물건62)을 능히 얻었다고 하겠느냐.

만약 얻었다고 말한다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수보리는 모든 소승들에 대하여 실제로 얻은 것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수보리 저를 무쟁삼매를 터득한 사람 가운데서

제일이라 말씀하시지만 수보리 저는 얻은 상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조금이라도 얻은 것이 있다면

세존께서는 저한테 욕망을 벗어난 아라한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고 하셨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아란나행도 이와 같으므로 달리 해석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수다원은 육진(六塵)을 거슬러 성인의 부류에 들어간다는 말이고,

사다함은 한번 왕래한다는 말인데 욕계에 와서 단번에 미혹을 단절하고 이후로는 아주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며, 아나함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뜻이고, 아라한은 모든 법이 일심에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육진(六塵)은 여섯 티끌의 심성(心性)을 더럽히는 육식(六識)의 대상계(對象界).

곧 육식(六識)의 육경(六境)을 지각(知覺)하는 안식(眼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에서 생기는


「빛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의 여섯 가지 욕정(欲情)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이것에 더럽혀지지 않는 일을 육근 청정이라 합니다.

육경(六境)은 육근이 인식할 수 있는 대상 경계.

불교에서 육근(六根)이 인식할 수 있는 대상 경계를 이르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눈·귀·코·혀·몸의 다섯 감각기관과 이를 통솔하는 의근(意根)을 육근이라 하는데, 이에 대응하는 인식대
상이 육경(六境)이다.

즉 눈으로 보는 것은 색경(色境), 귀로 듣는 것은 성경(聲境), 코로 냄새를 맡는 것은 향경(香境), 입으로 맛을 아


는 것은 미경(味境), 몸으로 느끼는 것은 촉경(觸境), 마음으로 아는 것은 법경(法境)이다.

이 육경이 육근과 중층적으로 합해져 인식체계를 설명하는 것이 불교의 12처설(十二處說)이다.

육근이 인식의 주체인 인간 존재라면 육경은 인간의 환경과 그를 둘러싼 현상으로, 모든 우주는 이 십이처에서
비롯되어 이 십이처로 들어간다.

이 십이처설은 인간이 인식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즉 모든 존재는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존재한다는

불교의 기본적 세계관을 설명하는 것으로,

불교의 기본 교리인 연기설의 기초를 이룬다.

이 감각기관과 감각대상 십이처에 육식(六識)을 합한 것이 18계(十八界)이다.

18. 대각께서 깨침의 결과(果)에도 집착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

여래의 수기에 대하여 의심하다(聞覺果無住하고 疑如來受記)

각고(覺告)수보리(須菩提)하사대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여래(如來)석재연등각소(昔在燃燈覺所)하야

어법(於法)에 유소득(有所得)불(不)아

불야(不也)이니다63). 세존(世尊)이시여

여래(如來)재연등각소(在燃燈覺所)하사,

어법(於法)에 실무소득(實無所得)이니다.

대각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燃燈覺) 처소에서 법을 얻은 것이 있느냐.

얻은 것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燃燈覺) 처소에서 실제로 법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수보리는 대각께서 깨침의 결과(果)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서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세존께서는 옛적에 연등부처님으로부터 깨침을 성취하리라는 수기를 받아서

오늘날 깨침을 성취하셨다.

이로써 본다면 반드시 깨달음을 성취한 것이 아닌가.

이미 정각(正覺)하였는데 어째서 과果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시는가.’

(8) 대각께서 구경(究竟)에 얻음이 없다는 뜻을 보여 주시다

(覺示究竟無得之旨)

대각께서 수보리의 질문을 가지고 되물으셨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燃燈覺) 처소에서 얻은 법이 있었겠느냐.

비록 연등부처님이 수기는 주었다 할지라도

무릇 나의 본연자성에 인가하여 계합한 것이지 실로 얻은 것이 없었다.

만약 나에게 얻은 것이 있었다면

연등부처님은 결코 수기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19.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부처님의 깨달음(果)에도

얻을 것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 불국토의 장엄에 대하여 의심하다

(聞菩提覺果無所得하고 疑莊嚴覺土)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정사(正士)가 장엄각토(莊嚴覺土)불(不)아.

불야(不也)니다 세존(世尊)이시여.

하이고(何以故)오, 장엄각토자(莊嚴覺土者)가

즉비장엄(卽非莊嚴)이라, 시명장엄(是名莊嚴)이니다.

시고(是故)로 수보리(須菩提)야.

제정사(諸正士)가 응여시생청정심(應如是生淸淨心)호대,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하며,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니,

응무소주(應無所住)하야, 이생기심(而生其心)이니라.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정사(正士)가 불국토(覺土)를 장엄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覺土)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하는 것이 아니므로 장엄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수보리여,

모든 정사는 이와 같이 반드시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결코 색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일으켜야 하고,

소리·향기·맛·부딪쳐 느끼는 촉·뜻으로 분별하는

법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반드시 머묾이 없이 그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수보리가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부처님(覺)의 깨달음(果)에도 집착이 없다면

불국토(覺土)를 장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각께서 이왕 우리들에게 정사행(正士行)을 가르치고

불국토(覺土)를 장엄하라고 일러주신 것은 무슨 뜻인가.’

(9) 대각께서 안심하는 방법을 가르치시다(覺示安心法)

대각께서 곧 수보리의 마음을 아시고 급히 불러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째서 의심하느냐.

정사가 과연 불국토(覺土)를 장엄하느냐.


수보리는 벌써 그 뜻을 이해하고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불국토(覺土)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므로 장엄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각의 뜻을 자세하게 관찰하면

불국토(覺土)는 정토를 가리킨 것인데

어찌 금·은·유리 등 칠보로 장엄할 수가 있겠는가.

비유하면 푸른 안경을 끼고 보면 청색 세계를 성취하고

홍색 안경을 끼고 보면 홍색 세계를 성취하는 것과 같다.

곧 중생의 업력을 따라서 국토의 차별이 각기 다르다.

비유하면 온 세계의 사람들이 하룻밤에 똑같이 꿈을 꾸는데

꿈속의 세계가 식識·심心의 변화에 따라서

갖가지 차별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곧 중생이 보는 세계는 예토라 말하는데

그것은 악업으로 장엄된 세계이다.

그러나 제불(諸覺)이 머무는 곳은 정토세계라 말하는데

그것은 무릇 청정심으로써 저 모든 물든 마음을 맑혀 주는 것이다.

그래서 물든 마음에서 물듦이 공하면 곧 국토가 청정한 것이다.

정사가 그 정토를 장엄하는 것은 무릇 마음만 청정하게 하는 것일 뿐이지

별도로 장엄할 것이 없다는 뜻을 대각께서 보여 주고자 하여

‘수보리여, 정사가 부처님의 세계를

금·은·유리 등 칠보로써 장엄하는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이에 수보리는 벌써 이해하고서 ‘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마음만 청정하면 세계가 저절로 청정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지혜가 청정하고 제업諸業이 공할 뿐이지

명칭과 형상이 없는 것이다.

곧 마음을 별도로 장엄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팔만사천의 끝없는 지혜로 장엄하는 것은

곧 장엄하는 것이 아니므로 장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또 의심한다.


청정심을 일으키라 하시는데 어떻게 일으키라는 것인가.

이에 대각께서 수보리의 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결코 육진에 물들이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지

별도로 청정한 것에 마음을 집착하여 일으키라는 말은 아니다.

결코 색에 집착하여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소리와 향기와 맛과 몸에 부딪치는 것과 뜻을 분별하는

법에 집착하여 마음을 일으키지 말며,

반드시 저 법에 집착이 없이 그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어떤 조사가 말씀하신

‘모든 반연을 좇지 말고 공한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64)는 말은

내·외·중간에 집착하지 않으면

무주심체無住心體가 영지불매靈知不昧65)한데

이것 이야말로 안심법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65)무주심체(無住心體)가 영지불매(靈知不昧)는

'마음이 어떤 형상에도 머무르지 않고, 영리한 지혜가 어둡지 않다’

또는

'본래청정한 우리의 심성 내지 불성은 어떤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일체에 신령스럽게 통한다'는 뜻입니다.

이 문장은 《보조국사 수심결 (修心訣)》이라는

고려시대의 불교 사상가 불일 보조국사 지눌(佛日普照國師知訥)의 저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문장은 수심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요약한 것으로,

‘마음을 비워서 공(空)을 깨닫고,


지혜를 발휘하여 진리를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20. 불국토를 장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천장대화신千丈大化身(화신으로 크게 나타낸 몸)이

어디에 머무는지 의심하다

(聞不莊嚴覺土하고 疑千仗大化身이 居何所耶)

수보리(須菩提)야 비유(譬如)하면,

유인(有人)이 신여수미산왕(身如須彌山王)하면,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시신(是身)이 위대(爲大)불(不)아.

수보리언(須菩提言)하되 심대(甚大)하니다.

세존(世尊)이시여. 하이고(何以故)오

각설비신(覺說非身)이 이명대신(是名大身)이니다.

수보리여, 비유해서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만큼 크다고 하자.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대각께서는 몸이 아닌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큰 몸이라 말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불국토(覺國土)를 장엄하지 않는다면 불국토(覺土)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천장대화신불(千丈大化身覺)은 어느 곳에 머무는 것인가.’

(10) 대각께서 법신의 참모습을 보여 주시다(覺示法身眞上66))

대각께서는 벌써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반드시 보신불(報身覺)이 실토實土에 머무는 것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을 아시고 물으셨다.

‘수보리여, 그대가 천장대화신불(千丈大化身覺)이

크다고 말한다면 어쩌겠느냐.

비유하면 어떤 사람의 몸이 크기가

삼백삼십육만 리나 되는 수미산왕67)만큼 크다고 하자.

그대는 어찌 생각하느냐. 대단히 크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법신을 가지고 보화신報化身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하신 것이다.

‘몸이 아닌 것’은 법신을 가리킨다.

법신은 상이 아니므로 참 불국토(覺國土)는 형상이 없는 것이다.

이에 법신을 형상을 통해서는 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불토(覺土)를 장엄하겠는가.

이로부터 육진상六塵相을 벗어나고 심연상心緣相을 벗어나면

모든 의심이 저절로 타파될 것이다.

몸과 국토가 모두 공하고 마음과 경계의 둘이 모두 단절되어야

곧 반야가 되어 법이 무주인 이치를 알 것이다.

대저 법신은 천지와 세계와 허공과 삼라만상이

곧 공한 까닭에 허공이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처럼

광대한 법신의 자성이 천지와 세계와 허공과 삼라만상을

온통 집어먹고 있는 그 법신이 작은 줄로만 알고 있구나.

천장대화신이면 어떻다는 말이고 수미산이면 어떻다는 말이냐.

그대는 그와 같이 집착하는 소견을 놓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대각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자

수보리는 그 뜻을 이해하고 말씀을 드렸다.

‘몸 아닌 것은 그 이름이 곧 큰 몸입니다.’

21. 대각께서 비유로써 법보시의 뛰어남을 드러내어 보여 주시다

(覺示以喩顯法殊勝)

수보리야 (須菩提야) 여항하 (如恒河) 중에 소유사수 (所有沙數)하야


여사사등항하 (如是沙等恒河)를 어의운하 (於意云何)오.

시제항하사 (是諸恒河沙)가 령위다불(寧爲多不)아

수보리언 (須菩提言)하되 심다 (甚多)니다.

세존(世尊)이시여, 단제항하 (但諸恒河)도

상다무수 (尙多無數)온 하황기사(何況其沙)리닛가.

수보리야 (須菩提)야 아금실언고여(我今實言告汝)하노니,

약유선남자선여인(若有善男子善女人)이 이칠보 (以七寶)로

만이소항하사수삼천대천세계(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하야,

이용보시(以用布施)하면 득복(得福)이 다불 (多不)아.

수보리언 (須菩提言)하되 심다 (甚多)하니다.

세존(世尊)이시여. 각고수보리(覺告須菩提)하사대.

약선남자선여인(若善男子善女人)이 어차경중(於此經中)에

내지수지사구게등(乃至受持四句偈等)하야,

위타인설 (爲他人說)하면,

이차복덕(而此福德)이 승전복덕 (勝前福德)하니라.

복차수보리(復次須菩提)야 수설시경 (隨說是經)하야,

내지사구게등(乃至四句偈等)히 당지차처(當知此處)는

일체세간천인아수라(一切世間天人阿修羅)가

개응공양(皆應供養)호대 여각탑묘 (如覺塔廟)온,

하황유인(何況有人)이 진능수지독송(盡能受持讀誦)함이따녀.

수보리(須菩提)야 당지시인(當知是人)은

성취최상제일희유지법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이니라.

약시경전소재지처(若是經典所在之處)는

즉위유각(卽爲有覺)과 약존중제자 (若尊重弟子)니라.

수보리여, 항하의 모래 수만큼 항하가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모든 항하의 모래 수는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무릇 항하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하물며 그 모래 수이겠습니까.


수보리여, 나는 지금 진실한 말로 그대에게 말한다.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그들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면 그 복덕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대각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이 경전의 사구게만이라도 받고 지니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이 저 복덕보다 더 뛰어나다.

또한 수보리여, 이 경전의 사구게만이라도 설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모든 세상의 천신·인간·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는

대각의 탑묘임을 알아야 한다.

하물며 이 경전 전체를 받고 지니며 읽고 외우는 사람이겠는가.

수보리여, 이 사람은 최상이고 제일가며

희유한 법을 성취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경전이 있는 곳이라면

곧 대각과 존경받는 제자들이 계시는 곳이다.

대각께서 비유로써 불법이 뛰어남을 말씀하신 것이다.

곧 범소유상凡所有相 등 사구게로써 중생을 위하여 해설하는 것이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보시하는 것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법은 최상이고 제일가며 희유한 법이므로

이 사구게가 온전하게 법신불(法身覺)인 까닭에

그대로 대각께서 계신 것과 같고,

이 사구게 등을 널리 연설하는 것이 대각의 뜻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존중받는 부처님의 제자와 같다고 하신 것이다.

22. 수보리가 갖가지 의심을 모두 타파하고 언설을 잊고

이치를 구극(究極)하여 마침내 경전의 제명을 청하다

(須菩提群疑가 頓破하고 言忘理極할새 遂請經名)


이시 (爾時)에 수보리 (須菩提) 백각언 (白覺言)하시대.

세존(世尊)이시여, 당하명차경 (當何名此經)이며,

아등(我等)이 운하봉지 (云何奉持)리닛고,

각고수보리 (覺告須菩提)하시대,

이경(是經)이 명위금강반야바라밀(名爲金剛般若波羅蜜)이니,

이시명자 (以是名字)로 여당봉지 (汝當奉持)하라.

소이자하 (所以者何)오, 수보리(須菩提)야

각설반야바라밀 (覺說般若波羅蜜)이

즉명반야바라밀 (是名般若波羅蜜)68)이니라.

그때 수보리가 대각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경전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고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니까.

대각(覺)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전의 제명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다.

이 제명으로 너희들은 받들어 지녀야 한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여래(覺)69)가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신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명칭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대각께서 이미 뚜렷이 법신을 드러내자

수보리가 그 법을 듣고서 갖가지 의심을 모두 타파하여

말을 잊고 이치가 극칙(極則)함을 이해한 까닭에

마침내 이 경전의 제명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11) 대각께서 반야의 실제를 보여 주시다

(覺示般若實際)

대각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전의 제명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다.’

대각의 뜻에는 이 법은 명칭이 없지만 무릇 이 마음일 뿐이다.

또 수보리가 여쭈었다. ‘어떻게 받들고 지녀야 합니까.’

대각께서 말씀하셨다. ‘다만 이 마음을 받들어 지녀라.

왜냐하면 이 마음이 본래 마음이 아니고

법도 또한 법이 아니므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명칭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이전에 이 가르침(法)을 듣지 못했을 때는

그 마음이 편하지 못한 까닭에

처음에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를 청하였다.

그것은 수보리가 이해하고 본 것이 눈에 가득히 진경塵境이어서

중생과 부처(覺)가 다르고 정토와 예토가 다르다고

간주하는 분별심이 있는 까닭에 그 마음이 불안하여 의심을 낸다.

그래서 처음에는 ‘중생을 제도하기 어렵다’고 의심하자

대각께서는 중생이 본래 없다는 것으로써 그 의심을 타파해 주셨고,

또 ‘대각의 깨침의 결과(覺果)가 어렵다’고 의심하자

결코 추구할 것이 없다는 것으로써 타파해 주셨으며,

또 널리 ‘보시하기가 어렵다’고 의심하자

삼륜(三輪)은 보시하는 자와 보시를 받는 자와 보시하는 물건이다.

이 공적(空寂)하다는 것으로써 타파해 주셨고,

또 ‘불국토(覺土)를 장엄하기가 어렵다’고 의심하자

마음이 청정하면 불국토(覺國土)가

청정하다는 것으로써 타파해 주셨으며,

또 ‘보신이 계실 곳이 없다’고 의심하자

법신은 무주하다는 것으로써 타파해 주셨다.

이에 이르러서 수보리가 모든 기량(器量)이 이미 다하였고

모든 의심이 이미 사라졌으며

대각의 의도(覺心)가 이미 다 드러났기 때문에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저절로 마음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래서 드디어 경전의 제명을 여쭈었다.

이에 대각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다.

‘실로 경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릇 이 마음일 뿐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는 것은 곧 마음이다.

23. 대각에게 형상이 없다면 누가 설법하는가를 의심하다

(疑覺無相인댄 誰當說法)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 (於意云何)오.

여래 (如來)가 유소설법불(有所說法不)아.

수보리(須菩提)가 백각언 (白覺言)하사대.

세존(世尊)이시여, 여래(如來)가 무소설(無所說)이시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설법한 것이 있느냐.

수보리가 대각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법하신 것이 없습니다.

수보리가 또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법신은 형상이 아니라면 누가 마땅히 설법하는 것인가.’

(12) 대각께서 법신에 형상이 없으므로

그 법에 대해서도 또한 설법이 없음을 보여 주시다

(覺示法身無形인댄 法亦無說)

대각께서 수보리를 불러서 물으셨다.

‘그대가 참으로 법신을 깨쳤을 때는 법도 또한 설할 것이 없다.’

24. 법신에 형상이 없다고 한다면


곧 단멸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를 의심하다

(疑法身非相인댄 卽墮斷滅)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 (於意云何)오.

삼천대천세계 (三千大千世界) 소유미진(所有微塵)이

시위다불(是爲多不)아.

수보리언 (須菩提言)하되 심다 (甚多)하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수보리(須菩提)야 제미진(諸微塵)을

여래설비미진(如來說非微塵)이라.

시명미진(是名微塵)이며

여래설세계비세계(如來說世界非世界)라,

시명세계(是名世界)니라.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를 이루고 있는 미진이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대각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모든 미진에 대하여 여래는 미진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이며 세계에 대하여

여래는 세계를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이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법신이 형상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단멸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

단멸(斷滅)은 무상한데 마땅히 어디에서 설법을 볼 것인가.’

(13) 대각께서는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시다

(覺이 向百尺竿頭하야 更進一步)


대각께서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앞을 향해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말씀하셨다.

삼천대천세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미진微震이

얼마나 많겠느냐고 물으신 것은

세계의 진진찰찰塵塵刹刹이 모두 법신法身이라는 뜻이다.

만약 미진세계로써 보자면 눈에 가득한 것이

진경塵境으로서 삼라만상森羅万象이 분연(扮演)하지만,

만약 모든 세계와 모든 미진이 곧 법신인 줄을 깨치면

푸릇푸릇한 청송靑松과 녹죽綠竹이 모두 진여법신眞如法身이고

불긋불긋한 봉선화와 희끗희끗한 오얏꽃이

모두 반야般若 아님이 없어서

산하대지에 온전히 법왕의 몸이 드러나 있다.

그런 까닭에 비록 제법이 공하지만 단멸에 빠지지 않고

세계가 단순한 세계가 아니라 법신의 세계이므로

그것을 세계라 말하는 것이다.

25. 수보리는 화신이 과연 진정한 부처님(眞覺)일까 하고 의심하다

(須菩提疑化身爲眞覺)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가이삼십이상(可以三十二相)으로 견여래불(見如來不)아.

불야(不也)니다. 세존(世尊)이시여.

불가이삼십이상(不可以三十二相)으로

득견여래(得見如來)니, 하이고(何以故)오.

여래설삼십이상(如來說三十二相)이 즉시비상(卽是非相)이라.

시명삼십이상(是名三十二相)이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십이상을 통해서 여래를 볼 수가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을 통해서는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삼십이상을 말씀하신 것은

곧 그 상이 아니라 이름이 삼십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만약 형상이 부처님(覺)이 아니라면

지금 대각께서 삼십이상을 갖추고 계신 것은

부처님(覺)이 아니란 말인가.’

(14) 대각께서 법신과 화신이 동일함을 보여 주시다

(覺示法化冥一)

대각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형상이 있는 것은 부처님(覺)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그대는 지금 삼십이상을 어떻게 보느냐.

형상은 본디 형상이 아니므로

형상을 벗어나서 공한 것이 아니라

형상이 그대로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응화신이 곧 법신이다.

삼신이 일체一體이므로 삼신이나 불국토(覺國土)가 곧 공한 것이다.

이치가 지극하면 허망한 생각을 잊는 것이므로 언설이 적멸한다.’

26. 수보리가 묵묵하게 깊이 계합하여

이치로 펼 수도 없고 말로 드러낼 수도 없게 되다

수보리 (須菩提) 묵묵심계 (默默深契)하야

무리가신 (無理可伸)이며 무언가정 (無言可呵)이

수보리(須菩提야) 약유선남자선여인(若有善男子善女人)이
이항하사등신명(以恒河沙等身命)으로 보시(布施)하야도,

여복유인(若復有人)이 어차경중(於此經中)에

내지수지사구게등(乃至受持四句偈等)하야,

위타인설(爲他人說)하면 기복(其福)이 심다 (甚多)하니라.

수보리여,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은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신명으로써 보시한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은 이 경전의 사구게만이라도 받고 지니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 그러면 이 복덕이 저 복덕보다 대단히 많다.

수보리가 법신의 진리를 깨쳐서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고(言語道斷)

분별의 마음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心行處滅) 까닭에

이치를 펼 수가 없고 말로 알릴 수도 없는 까닭에 묵묵부답(默默不答)하였다.

(15) 대각께서 법공의 뛰어난 이익을 나타내 보여 주시다

(覺示現法空勝益)

대각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상四相이 완전히 공하고(頓空)

아집과 법집이 모두 공한 법신이 뚜렷이 드러난

그 복덕력은 항하의 모래 만큼의 신명으로써

보시하는 것보다 뛰어나다.

그리고 이 사구게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는

구절의 진리가 곧 법신인 줄 알아서 항상 널리 펴는 까닭에

이 복덕력이 저 복덕력보다 뛰어나다.’

27. 수보리가 깨치고 나서 그 심정을 드러내 말씀드리다


(須菩提領悟하고 陳情發露)

이시(爾時)에 수보리(須菩提)가 문설시경(聞說是經)하고,

심해의취(深解義趣)하야 체루비읍(涕淚悲泣)하야,

이백각언(而白覺言)하사대 희유세존(希有世尊)이시여,

각설여시심심경전(覺說如是甚深經典)을

아종석래(我從昔來)에 소득혜안(所得慧眼)으로

미증득문여시지경(未曾得聞如是之經)이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여복유인(若復有人)이

득문시경(得聞是經)하고,

신심청정(信心淸淨)하야 즉생실상(卽生實相)하면,

당지시인(當知是人)은 성취제일희유공덕(成就第一希有功德)이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시실상자 (是實相者)가 즉시비상(卽是非相)일새,

시고(是故)로 여래설명실상(如來說名實相)이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아금득문여시경전(我今得聞如是經典)하옵고,

신해수지(信解受持)는 부족위난(不足爲難)이어니와,

여당래세후오백세(若當來世後五百歲)에

기유중생(其有衆生)이 득문시경(得聞是經)하고,

신해수지(信解受持)하면, 시인즉위제일희유, (是人卽爲第一希有)니,

하이고(何以故)오 수보리(須菩提)야

여래설제일바라밀, (如來說第一波羅蜜)이,

비제일바라밀(非第一波羅蜜)이라.

시명제일바라밀(是名第一波羅蜜)이니라.

그때 수보리가 이 경전 설하심을 듣고서

깊이 뜻을 이해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대각께 말씀드렸다.

희유 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옛적부터 지금까지 얻은 혜안70)으로는

대각께서 이와 같이 대단히 깊은 경전 설하심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음이 청정해지면 실상이 발생할 것인데

그 사람은 반드시 가장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란 곧 실상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이름을 실상이라 말씀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 경전을 믿고 이해하며

받고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미래세 후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전을 믿고 이해하며 받고 지닌다면

그 사람은 곧 제일 희유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상은 곧 아상이 아니고

인상·중생상·수자상들도 곧 그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상을 벗어난 사람을

제불(諸覺)이라 말하기 때문입니다.

대각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래, 바로 그렇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그 사람은 매우 희유한 사람인 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이 제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수보리 등은 20년 동안 상을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깨치고서 감격하여 찬탄하니

그것은 여래가 잘 부촉하심을 감격스럽게 간주한 것이다.

이전에 ‘희유 하십니다’라고 말했던 경우71)는

홀연히 세존의 일편고심一片苦心을 간파했기 때문이고,

지금 ‘희유 하십니다’라고 말한 경우는


세존께서 문답을 통하여 거듭 의심을 타파하심에

힘입어서 모든 의심이 다 사라지고 진심이 드러난 까닭에

다시 ‘희유 하십니다’라고 말씀드린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 등은 비록 믿기가 어렵더라도

여래를 친견한 까닭에 대각의 설법을 듣고서

곧 믿기가 어렵지 않게 되었지만,

만약 대각께서 열반하신 이후 2천5백 년 후에는

오탁악세로서 마구니가 강하고 정법이 미약할 것이므로

이 법을 믿는 자는 대단히 희유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사상: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벗어난 까닭에

본래 여여如如한데 그것은 곧 법신을 본 것이므로 참 희유한 것이다.

대각께서 수보리의 그 말을 인정하고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래, 바로 그렇다. 이 법을 듣고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대단히 희유할 것이다.

내 말은 머리로 분별하거나 마음으로 헤아릴 길이 없는 까닭에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다.’

28. 수보리가 재물보시(外施)는 잊을 수 있지만

목숨은 버리기 어려우니 어떻게 버릴 것인가를 의심하다

수보리 (須菩提) 의외시가망 (疑外施可忘)이나

신명난사 (身命難捨)이니 여하능사 (如何能捨)

수보리(須菩提)야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이

여래설비인욕바라밀(如來說非忍辱波羅蜜)이니,

하이고(何以故)오 수보리(須菩提)야

여아석위(如我昔爲) 가리왕(歌利王)의 할절신체(割截身體)로되,

아어이시(我於爾時)에 무아상(無我相) 무인상(無人相)

무중생상(無衆生相) 무수자상(無壽者相)하더니라.

하이고(何以故)오 아어왕석절절지해시(我於往昔節節支解時)에
약유아상(若有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면

응생진한(應生瞋恨)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우념과거어오백세(又念過去於五百歲)에

작인욕선인(作忍辱仙人)하니,

어이소세 (於爾所世)에 무아상(無我相) 무인상(無人相)

무중생상(無衆生相) 무수자상(無壽者相)이니라.

시고(是故)로 수보리(須菩提)야

정사(正士)가 응리일체상(應離一切相)하야,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나니,

부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하며,

부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니,

응생무소주심(應生無所住心)이니라.

약심유주(若心有住)하면, 즉위비주(卽爲非住)니,

시고(是故)로 각설정사심(覺說正士心)이 불응주색보시(不應住色布施)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정사(正士)가 위리익일체중생(爲利益一切衆生)하야,

응여시보시(應如是布施)니라.

여래설일체제상(如來說一切諸相)이 즉시비상(卽是非相)이며,

우설일체중생(又說一切衆生)이 즉비중생(卽非衆生)이니라.

수보리여, 인욕바라밀을 여래는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설하였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내가 옛적에 가리왕에게 신체가 베이고 단절되었을 때

나에게는 아상이 없었으며,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이 없었고, 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옛적에 마디마디 사지가 베이고 잘렸을 때

나에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다면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수보리여, 또한 생각하면 과거 오백세 동안에 인욕선인이었는데

그때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이 없었고, 수자상이 없었다.

수보리여, 이런 까닭에 정사는 모든 상을 벗어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반드시 형색에 집착이 없이 보리심을 일으켜야 하고,

소리·향기·맛·몸에 부딪치는 것·법에 집착이 없이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반드시 집착이 없이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만약 마음에 집착이 있으면 곧 올바른 머묾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각이 정사는 형색에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보시해야 한다고 설하였다.

수보리여, 정사는 일체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반드시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한다.

여래는 일체의 제상을 곧 상이 아니라고 설하였고,

또 일체의 중생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하였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대각께서 최초에 보시를 말씀하신 것은

곧 육진에 수용되는 물질로써 밖으로 보시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결코 버리기가 어려운 것을 버리는 것도

또한 복을 추구하는 것인데 상에 집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무상無相의 복덕이 더욱 크다고 하시며,

또 비단·칠보로써 보시할 뿐만 아니라

항하의 모래만큼의 목숨으로써 보시하여도

저 법을 깨쳐서 널리 중생을 위하여

해설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시니, 참으로 의심이 된다.

밖으로 보시하는 것은 잊어버릴 수가 있지만

목숨은 버리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버릴 수가 있겠는가.’

(16) 대각께서 오온의 실법에 대한 타파를 보여 주시다

(覺示破五蘊實法)

대각께서 수보리의 그 뜻을 아시고 특별히 인욕행을 말하여


오온신五蘊身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해 주셨다.

이것은 경전의 머리에서 ‘어떻게 안주해야 합니까’라고 여쭌 것에 대한 결답이다. 수보리는 목숨으로 보시함을 듣
고 오온이 본디 공함을 알지 못하고

‘신명상身命相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하는 의심에 대하여

대각께서 부득이 인욕행으로써 깊이 집착한 것을 타파해 주려고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내가 과거에 가리왕에게 몸이 베이고 잘렸을 때

인상과 아상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성을 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오온이 공한 것을 깨친 까닭에

칼로 물을 베는 것과 입으로 햇빛을 불어서 없애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고
담연(淡然 욕심(慾心)이 없고 깨끗함)하게 요동(搖動)치지 않았다.

그리고 과거에 인욕선인(忍辱仙人)이었을 때 인상과 아상이 없었기 때문에

일체상을 벗어나서 보리심을 일으켰던 것이다.’

앞에서 질문했던 어떻게 안주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결답結答하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반드시 색에 집착이 없이 보리심을 일으켜야 하고,

성·향·미·촉·법에 집착이 없이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만약 마음에 집착이 있으면 마음과 경계가 모두 망령된 것이므로

참으로 바르게 안주하는 것이 아니다.

정사가 무주상보시를 하는 것은 중생을 제도하려는 것이므로

상이 곧 상이 아니고 중생이 곧 중생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29. 주체(能)·객체(所)가 모두 공인데 인·과가 어디 있는가를 의심하다

의능소(疑能所)가 개공(皆空)인댄 인과(因果)가 나유(那有)

수보리(須菩提)야 여래(如來)는 시진어자(是眞語者)며,

실어자(實語者)며, 여어자(如語者)며

불광어자(不誑語者)며 불이어자(不異語者)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여래소득법(如來所得法)은
차법(此法)이 무실무허(無實無虛)하니라.

수보리여, 여래는 참된 말을 하는 자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자이며 여여한 말을 하는 자이고

헛된 말을 하지 않는 자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이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법에는 실다운 것도 없고 헛된 것도 없다.

수보리는 다시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이미 형상에 집착이 없으므로 일체가 다 공하다.

증득한 지혜도 공하여 체가 없다.

과가 공한 즉 인이 없고 인이 공한 즉 과를 얻을 수가 없다.

하물며 인因은 씨앗이다.

가운데 무주상보시를 하면 실로 과(果는 열매다.)를 증득할 것이 없다.’

(17) 대각께서 진실한 믿음을 보여 주시다(覺結示諦信)

대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여래가 스스로 깨달은 경계는 결코 허망하지 않다.

여래가 얻은 법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헛된 것도 아니므로

정식情識으로 집착하여 구하지 말라.’

30. 상에 머묾이 없이 보시하여 마음을 일으키면

어째서 반야에 합치되는가를 의심하다

의부주상보시생심(疑不住相布施生心)이면 어하합득반야 (如何合得般若)

수보리 (須菩提)야 약보살(若菩薩)이 심주어법(心住於法)하야

이행보시(而行布施)하면, 여인(如人)이 입암(入闇)에

즉무소견(卽無所見)인달하고, 약정사(若正士)가

심불주법(心不住法)하야 이행보시(而行布施)하면,
여인(如人)이 유목(有目)커든) 일광(日光)이 명조(明照)하야),

견종종색(見種種色)인달하니라.

수보리여, 만약 정사가 법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는 것과 같고,

정사가 법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보시하면

마치 눈 있는 사람이 햇빛이 빛나면

갖가지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과 같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형상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면

어찌 반야에 계합할 수가 있겠는가.’

(18) 대각께서 머묾이 없는 이익을 보여 주시다

(覺示無住之益)

대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머묾이 있는 마음은 무명無明(근본적인 번뇌)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경계에 장애가 된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고,

머묾이 없는 마음은 인상과 아상이 없다. 때문에

그것은 마치 해가 하늘에 오르면 밝게 만상을 비추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머묾이 없는 심체(無住心體)가

공적불매(空寂不昧)72)한 것이 곧 반야이다.’

72) 무주심체無住心體가 공적불매空寂不昧:

이 말은 본래청정한 우리의 심성 내지 불성은

본래부터 적멸의 모습임을 가리킨다.


무주심체無住心體가 공적불매空寂不昧:

마음이 어떤 상에도 머무르지 않고,

텅 비어서 고요하면서도 밝고 깨달음이 꺼지지 않는 것

무주심체無住心體: 마음이 어떤 상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

즉, 마음이 어떤 형상이나 개념이나 분별이나 집착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깨끗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마음의 본래 성품으로, 무아無我와 동일하다.

공적空寂: 텅 비어서 고요한 것. 즉, 마음에 아무런 걸림이나 잡념이 없고,

정적定寂하고 적적寂寂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마음의 진리체로, 진공眞空과 동일하다.

불매不昧: 밝고 깨달음이 꺼지지 않는 것.

즉, 마음에 영지靈智가 샘솟아서 모든 법을 밝히고,

혜안慧眼이 열려서 모든 상을 통찰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마음의 지혜로, 반야般若와 동일하다.

따라서 이 문장은 마음의 성품과 진리체와 지혜가 하나로 합쳐진 완전한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일원상一圓相의
본질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31. 비록 머묾이 없는 마음은 반야이지만 자기의 지혜로

어떻게 부처님의 지혜(覺智)에 계합하는가를 의심하다

의무주심(疑無住心)이 수시반야(雖是般若)나

기지(己智)로 어하계합각지 (如何契合覺智)

수보리(須菩提)야 당래지세(當來之世)에

약유선남자선여인(若有善男子善女人)이

능어차경(能於此經)에 수지독송(受持讀誦)하면,
즉위여래이각지혜(卽爲如來以覺智慧)로

실지시인(悉知是人)하며,

실견시인(悉見是人)하나니,

개득성취무량무변공덕(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하리라.

수보리야 (須菩提야) 약유선남자선여인(若有善男子善女人)이

초일분(初日分)에 이항하사등신(以恒河沙等身)으로 보시(布施)하고,

중일분(中日分)에 복이항하사등신(復以恒河沙等身)으로 보시(布施)하고,

후일분(後日分)에 역이항하사등신(亦以恒河沙等身)으로 보시(布施)호대,

여시무량백천만억겁(如是無量百千萬億劫)에 이신보시(以身布施)하야도,

약복유인(若復有人)이 문차경전(聞此經典)하고,

신심불역(信心不逆)하면, 기복승피(其福勝彼)함이온.

하황서사수지독송(何況書寫受持讀誦)하야,

위인해설(爲人解說)이따녀.

수보리여, 만약 미래세에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이 경전을 받고 지니며 읽고 외운다면

곧 여래는 대각의 지혜로

그 사람이 모두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할 것을 다 알고 다 본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아침나절에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고

점심나절에 다시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나절에 또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무량 백천만억 겁에 몸으로 보시한다고 하자.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신심으로 거스르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 복덕이 저 복덕보다 뛰어나다.

하물며 이 경전을 기록하고 베껴 쓰고 받고 지니며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해 주는 것이겠는가.

수보리는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근기가 미약하고 지식이 어두운 중생들이

어찌 부처님의 마음(覺心)에 계합하겠는가.’

(19) 대각께서 평등하다고 대답하시다(覺答平等)

대각께서 대답하셨다. ‘마음과 부처(覺)는 평등하다.

그러므로 현재와 미래는 물론이고

이 평등각심平等覺心을 알아서 이 경전을 받고 지니며 읽고 외우면

부처님(覺)께서 대원각大圓覺의 평등한 지혜로써

다 알고 다 보고서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시켜 주신다.

매일 세 차례에 걸쳐서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목숨으로 보시하되

무량 백천만억 겁 동안 보시해도

이 경전을 듣고 믿어서 거스르지 않는 복덕만은 못하다.

하물며 기록하고 베껴 쓰고 받고 지니며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이 경전의 진리를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설해 주는 것이겠는가.’

32. 대각께서 거듭 반야를 찬탄하시다

각시중찬반야 (覺示重讚般若)

수보리(須菩提)야 이요언지(以要言之)컨대,

시경(是經)이 유불가사의불가칭량무변공덕

(有不可思議不可稱量無邊功德)하니라.

여래위발대승자(如來爲發大乘者)하야 설(說)하며,

위발최상승자(爲發最上乘者)하야 설 (說)이니라.

약유인(若有人)이 능수지독송(能受持讀誦)하야 광위인설(廣爲人說)하면,

여래실지시인(如來悉知是人)하며, 실견시인(悉見是人)하나니,

개득성취불가량불가칭무유변불가사의공덕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無有邊不可思議功德)이니,
여시인등(如是人等)은 즉위하담여래아뇩다라삼먁삼보리

(卽爲荷擔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하이고(何以故)오 수보리(須菩提)약락소법자(若樂小法者)는

착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着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니,

즉어차경(卽於此經)에 불능청수독송(不能聽受讀誦)하며,

위인해설(爲人解說)이니라.

수보리여, 요약해서 말하면

이 경전에는 사량할 수가 없고 헤아릴 수도 없으며 끝없는 공덕이 있다.

여래는 대승심을 발생한 자를 위하여 설하고

최상승심을 발생한 자를 위하여 설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받고 지니며 읽고 외워서

널리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해 주면 여래는

그 사람이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끝없는 공덕을 성취할 줄을 다 알고 다 본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감당(荷擔: 어깨에 짊어진다는 말이다.)하게 될 것이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만약 소승법을 좋아하는 자는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에 집착하므로

이 경전을 듣고 받으며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경전의 뜻은 매우 심오하여 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공덕도 한량이 없다.

위에서는 무릇 사상四相이 공한 것에 대해서만 말하였지만

이제부터는 사견四見이 공한 것에 대하여 말한다.

이 미세한 사견이 공함을 증득하여 여법하게 경전을 받고 지니며 읽고 외우며

일체의 중생에게도 여법하게 진리를 선전하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가 없다.

이처럼 극히 미세한 아견我見·인견人見·중생견衆生見·수자견壽者見,

나我라 하는 소견과 남人이라 하는 소견과 중생衆生이라 하는 소견과


수자壽者라 하는 소견이라.

이 공한 사람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침을 항상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과 같다.

33. 대각께서 반야와 법신이 상주함을 보여 주시다

각시반야법신상주 (覺示般若法身常住)

수보리 (須菩提)야 재재처처(在在處處)에 여유차경(若有此經)하면,

일체세간천인아수라(一切世間天人阿修羅)의 소응공양(所應供養)이니,

당지차처(當知此處)는 즉위시탑(卽爲是塔)이라.

개응공경작례위요(皆應供73)敬作禮圍遶)74)하야,

이제화향(以諸華香)으로 이산기처(以75)散其處)니라.

또 수보리여, 만약 이 경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일체 세간의 천상·인간·아수라가 반드시 공양할 것이다.

그곳은 곧 탑묘가 될 것이니 모두 공경하여 예를 갖추고 돌면서

여러 가지 꽃과 향을 뿌리는 줄을 반드시 알아라.

대각께서 법신이 상주불생常住不生하고

상주불멸常住不滅함을 설명한 것이다.

34. 대각께서 반야로 장애와 번뇌를

벗어나는 이익에 대하여 보여 주시다

각시반야리장출천지익 (覺示般若離障出纏之益)

복차수보리(復次須菩提)야 선남자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

수지독송차경 (受持讀誦此經)호대,

여위인경천(若爲人輕賤)이면, 시인(是人)이

선세죄업(先世罪業)으로 응타악도(應墮惡道)로대,

이금세인(以今世人)이 경천고(輕賤故)로
선세죄업(先世罪業)이 즉위소멸(卽爲消滅하고,

당득여래아뇩다라삼먁삼보리(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라.

또한 수보리여, 선남자·선여인이 이 경전을 받고 지니며 읽고 외웠는데도

남한테 천대와 멸시를 받는다면

그 사람은 전생에 죄업으로 악도에 떨어져야 했지만

금생에 남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는 것으로 전생의 죄업이 소멸되고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대각께서 이 경전을 받고 지니며 읽고 외우는 공덕을 칭찬하셨다.

곧 죄업이 소멸될 뿐만 아니라 또한 정각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35. 대각께서 반야로 찰나에 삼계를 초월함을 찬탄하시다

각찬반야일념돈초 (覺讚般若一念頓超)

수보리(須菩提)야 아념과거무량아승기겁(我念過去無量阿僧祗劫)호니,

어연등각전(於燃燈覺前)에 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각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覺)하야,

실개공양승사(悉皆供養承事)하야 무공과자(無空過者)니,

약복유인(若復有人)이 어후말세(於後末世)에

능수지독송차경(能受持讀誦此經)하면,

소득공덕(所得功德)은 어아소공양제각공덕(於我所供養諸覺功德)이

백분(百分)에 불급일(不及一)이며,

천만억분(千萬億分)과 내지산수비유(乃至算數譬喩)라도

소불능급(所不能及)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약선남자선여인(若善男子善女人)이

어후말세(於後末世)에 유수지독송차경(有受持讀誦此經)하야,

소득공덕(所得功德)을 아약구설자(我若具說者)면,

혹유인(或有人)이 문(聞)하고,
심즉광란(心卽狂亂)하야 호의불신(狐疑不信)하리라.

수보리(須菩提)야 당지(當知)하라.

시경의불가사의(是經義不可思議)며,

과보(果報)도 역불가사의(亦不可思議)니라.

수보리여, 기억해 보면 연등불을 만나기 전

과거 무량한 아승지겁 동안에

팔백사천만억 나유타의 제불(諸覺)을 만나서

모두 공양하고 섬기며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후말세에

이 경전을 받고 지니며 읽고 외워서 얻은 공덕과 비교하면

내가 제불(諸覺)께 공양한 공덕은 그 백분의 일도 안 되고,

천·만·억분의 일도 안 되며, 나아가서 산수와 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후말세에

이 경전을 받고 지니며 읽고 외워서 얻는 공덕을

내가 자세하게 말한다면 혹 그것을 듣는 사람은

곧 마음이 미쳐 버리고 여우처럼 의심하여 믿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여, 이 경전의 뜻이 불가사의하고

그 과보도 또한 불가사의한 줄을 알아야 한다.

대각께서 찬탄하셨다.

‘이 반야를 깨친 자는 찰나에 삼계를 초월하여

영원히 부처님(覺)에 집착하는 소견과

설법(法)에 집착하는 소견을 벗어난 까닭에 공덕이 뛰어나다.

또 대각께서 열반하신 이후 2천5백 년76)에

이 설법을 믿는 자는 그 공덕이 더욱 클 것이다.

이처럼 반야의 공덕은 불가사의한 까닭에 그 과보도 역시 불가사의하다.’

(20) 지금까지 전편前篇의 내용에 대한 대의를 총괄적으로 논하다


(通論過去節全編大義)77)

이 경전의 처음부터 이 대목에 이르기까지는 전체적으로

대심중생大心衆生(보리심을 일으킨 대승보살을 가리킨다.)으로서

초발심한 정사의 아집과 법집을 타파한 것이다.

이것은 오온신심五蘊身心에 집착하여 아집을 삼고,

자신이 짓는 번뇌(緣塵)와 육도만행六度萬行으로써

보리를 추구하려는 것으로 법집을 삼는데,

대각께서는 이것들을 모두 상에 집착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전체적으로 추혹麤惑을 타파하신 것이다.

(21) 이하는 하편에 해당하는데 미세한 이집二執의 타파에 대하여

총괄적으로 논하다(此下는 通論下篇破微細二執)78)

이미 반야를 깨친 정사正士는

증득한 그 지혜로써 아상我相을 삼고,

증득해야 할 진여로써 인상人相을 삼으며,

증득하고 깨친 것으로써 중생상衆生相을 삼고,

증득하고 깨친 것을 잊지 못하여 그것이 지속되는 것으로써

수명상壽命相(壽者相과 동일하다.)을 삼는다.

이것은 대각께서 지극히 미세한 사상을 타파하신 것인데,

질문과 답변이 전편前篇과 같은 듯하지만

그 뜻은 천지간의 차이임을 알아야 한다.

36. 대각께서 미세한 아집과 법집을 타파하시다

각(覺)이 미파미세아법이집 (徵破微細我法二執)

이시(爾時)에 수보리(須菩提)가 백각언(白覺言)하사대,

세존(世尊)이시여, 선남자선여인(善男子善女人)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한 이는

운하응주(云何應住)하며,

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이닛고 각고수보리(覺告須菩提)하사대,

약선남자선여인(若善男子善女人)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79)者)는

당생여시심(當生如是心)호대,

아응도일체중생(我應度一切衆生)호리라 할지니,

도일체중생이(度一切衆生已)하야는

이무유일중생(而無有一衆生)이 실멸도자(實滅度者)니라.

하이고(何以故)오 수보리(須菩提)야80)

약정사(若正士)가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면

즉비정사(則非正士)이니라.

소이자하(所以者何)오 수보리(須菩提)야

실무유법(實無有法)하야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81)者)니라.

그때 수보리가 대각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선남자·선여인은

마땅히 어떻게 안주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대각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선여인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은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나는 반드시 일체중생을 멸도하리라.

일체중생을 멸도시켰지만 실제로는 어떤 중생도 멸도를 얻은 자가 없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만약 정사에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곧 정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킬 만한 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의 뜻은 이미 저 위에서 언급했으므로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대목부터 『금강경』 전체를 둘로 나누어서

그 전·후를 분석하므로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22) 이왕 지나간 경문을 거듭 해석하다

『금강경』의 첫머리에 수보리가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를 질문하였다.

이것은 범부 가운데서 대심중생으로서

처음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킨 초발심 정사에 해당한다.

때문에 여러 가지 모든 상에 집착하고

자기의 오온색신에 집착하여 수행을 한다.

가령 보시하는 경우에도 색·성·향·미·촉·법이라는

육진의 추물麤物에 집착하여 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추구하는 보리는 화신불(化身覺)의 색상에 집착한 것이면서

그 정토를 추구하는 것은 실보장엄토實寶莊嚴土를 구하는 것이다.

때문에 종종 수행하는 것이 모두 상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아득히 멀어져 있다.

이에 수보리가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낱낱이 의심하고

대각께서 낱낱이 타파하여 마음에 집착할 것이 없도록 해 준 연후에

비로소 실제로 반야에 계합하고 대중의 의심도 사라진다.

이것이 지금까지 위의 전반부에서 제시된 경문의 뜻이었는데

그 설법을 드러낸 것이 매끄럽지 못하였다.

(23) 이후에 등장하는 후반부의 대의를 미리 분석하다

경전의 이 대목부터 끝부분까지는

이미 반야를 깨친 정사들이 증득한 지혜를 잊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자신의 진아眞我로 간주하기에

그들이 증득한 인상과 아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을 타파해 준 까닭으로


그 뜻을 미세하다고 말한 것이다.

이에 후반부의 대목에 이르러서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를 다시 질문한 것은 다음과 같다.

곧 증득한 지혜를 잊지 못하고 또한 습기를 잊지 못한 까닭에

진여 가운데에 안주하기를 추구한 것이고,

또한 빨리 보리를 구하려는 것도

보리에 대한 집착이라는 말에 마음이 불안하여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을 물은 것은

깨달음(覺)을 추구하는 마음을 잊지 못하고

중생소견과 각 소견을 잊지 못하여

평등일여함을 통달하지 못한 까닭이다.

이에 전반부와 똑같이 질문한 것이다.

그러나 질문의 형식은 똑같지만 그 뜻은 천지만큼 차이가 난다.

때문에 세존께서 그 소견을 타파하여 말씀하셨다.

‘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다음과 같이 관찰해야 한다.

내가 일체의 중생을 멸도해도 어떤 중생도 멸도를 얻은 자는 없다.

왜냐하면 중생은 본디 여여하기 때문에 다시 멸도하기를 기다릴 것이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상에 집착하는 꼴이 되어 진정한 정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본래 어떤 법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37.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을 터득한 것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

깨친 반야가 비법인가 하고 의심하다

문법무가득(聞法無可得)하고 의소오반야비법 (疑所悟般若非法)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여래어연등각소(如來於燃燈覺所)에 유법(有法)하야,

득여래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불(不)아).

불야(不也)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여아해각소설의(如我解覺所說義)는
각(覺)이 어연등각소(於燃燈覺所)에 무유법(無有法)하야,

득여래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다.

각언여시여시(覺言如是如是)하다.

수보리(須菩提)야. 실무유법(實無有法)하야

여래득여래아뇩다라삼먁삼보리(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여유법(若有法)하야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댄,

연등각(燃燈覺)이 즉불여아수기(卽不與我授記)하사대,

여어래세(汝於來世)에 당득작각(當得作覺)하면,

호(號)를 석가모니(釋迦牟尼)라 하시련마는

이실무유법 (以實無有法)하야,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일새,

시고(是故)로 연등각(燃燈覺)이 여아수기(與我授記) 하사,

작시언(作是言)하사대 여어래세(汝於來世)에 당득작각(當得作覺)하면,

호(號)를 석가모니(釋迦牟尼)라 하리라 하시니라.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불(燃燈覺) 처소에서 터득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대각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대각께서 연등부처님(燃燈覺) 처소에서 터득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법이 없습니다.

대각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렇다.

수보리여,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 법은 없다.

수보리여,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 법이 있었다면

연등불(燃燈覺)은 나한테 그대는 내세에 석가모니라는 이름의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 법이 실제로 없었으므로

연등불은 나한테 그대는 내세에 반드시


석가모니라는 이름의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하였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실로 터득할 만한 법이 있었다면 지금 내가 깨친 반야가 어찌 법이 아니겠는가.

또한 세존께서 연등부처님(燃燈覺) 처소에서 보리를 증득하여

성불(成覺)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아서 오늘날 성불(成覺)하셨으니

어찌 보리를 터득한 것이 아니고서야 터득한 법이 없다고 하셨는가.’

(24) 대각께서 보리를 터득함이 없음을 보여 주시어

깨침(覺)에 대하여 집착하는 의심을 타파하시다

(覺示菩提無得하사 以破執覺之疑)

대각께서는 깨쳐서 부처가 되었다는 견해(覺所見)와

이후에 설법을 했다는 견해(法所見)에 집착함을 타파하여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실로 연등불(燃燈覺)이 나한테 수기할 법이 있어서 내가 받은 줄로 아느냐.

깨쳐서 부처가 되었다는 견해를 일으키지 말라.’

이에 수보리가 비단 상만 공한 것이 아니라

그 소견까지도 공한 줄을 깨치고 곧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제가 대각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저 연등불(燃燈覺) 처소에서 터득한 법이 없었습니다.’

대각께서 대답하신 뜻은 다음과 같다.

‘터득한 법이 없는데 어찌 법소견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연등불(燃燈覺)은 나한테 그대는

내세에 석가모니라는 이름의 부처(覺)가 될 것이라고 수기하였다.’

38. 인도 없고 과도 없다는 것에 대하여 의심하다(疑無因無果)


하이고(何以故)오 여래자(如來者)는 즉제법여의(卽諸法如義)니,

약유인(若有人)이 언(言)하되,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아.

수보리(須菩提)야 실무유법(實無有法)하야,

각(覺)이 득여래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여래소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가

어시중(於是中)에 무실무허(無實無虛)하니라.

시고(是故)로 여래설일체법(如來說一切法)이 개시각법(皆是覺法)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소언일체법자(所言一切法者)는

즉비일체법(卽非一切法)일새.

시고(是故)로 명일체법(名一切法)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비어인신(譬如人身)이 장대(長大)하니라.

수보리언(須菩提言)하되 세존(世尊)이시여.

여래설인신장대(如來說人身長大)가 즉위비대신(卽爲非大身)이라,

시명대신(是名大身)이니라.

왜냐하면 여래란 제법의 진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하였다고 말한다 해도

여래에게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 법이 실제로 없다.

수보리여, 여래가 터득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는

실다움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을 모두 불법(覺法)이라고 설한다.

수보리여, 일체법이라 말한 것은

곧 일체법이 아니므로 일체법이라 말한 것이다.

수보리여, 비유하면 사람의 몸이 장대한 경우와 같다.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곧 장대한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대한 몸입니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반야법은 성불(成覺)하는 진정한 인因이다.

그런데 지금 반야법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인이 없다는 것이므로 어찌 보리과菩提果인들 터득할 수 있겠는가.’

(25) 대각께서 법신은 인·과에 속하지 않음을 보여 주시다

(覺現法身이 不屬因果)

대각께서 그 집착을 타파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래는 색상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법에 여여하다는 뜻이다.

또한 제법이 본래 저절로 여여한 것이므로

수행을 말미암아 증득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실로 보리라는 법도 없는데 각소견覺所見을 용납하겠는가.

이에 선종의 종문에서는 향상일로向上一路(깨침에 안주하지 않고

지속적인 정진으로 깨침마저도 초월하는 모습)야말로

삼세의 제불(諸覺)이라도 볼 수가 없는데 만약 볼 수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눈이 먼 놈이라고 말한다.

무릇 제법에 단멸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에 실다움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법을 말하는 자는 곧 일체법이 아니다.

만약 장대한 몸이 몸 아님을 안다면

곧 제법도 제법이 아닌 줄을 알아야 한다.’

39. 무아라면 어떻게 중생을 제도하는가를 의심하다

(疑無我면 何以度生)
수보리(須菩提)야 정사(正士)도 역복여시(亦復如是)하야

약작시언 (若作是言)하되, 아당멸도무량중생(我當滅度無量衆生)이라 하면,

즉불명정사(卽不名正士)이니라, 하이고(何以故)오

수보리(須菩提)야 실무유법(實無有法)이 명위정사(名爲正士)니라.

시고(是故)로 각설일체법(覺說一切法)이

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약정사(若正士)가 작시언(作是言)하되,

아당장엄각토(我當莊嚴覺土)라 하면, 시불명정사(是不名正士)이니라.

하이고(何以故)오 여래설장엄각토자(如來說莊嚴覺土者)가

즉비장엄(卽非莊嚴)이라, 시명장엄(是名莊嚴)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약정사(若正士)가 통달무아법자 (通達無我法者)는

여래설명진시정사(如來說名眞是正士)이라 하니라.

수보리여, 정사도 또한 그와 같다.

만약 정사 자신이 반드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사가 아니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실로 정사라 할 만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여래(覺)는 일체법에 아가 없고 인이 없으며

중생이 없고 수자가 없다고 설한다.

수보리여, 만약 정사 자신이 반드시 불국토(覺土)를 장엄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사라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불국토(覺土)를 장엄한다고 말하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약 정사가 무아법에 통달한다면

여래는 그를 진정한 정사라 일컫는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내가 있고 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도 있어야 중생을 제도할 것이다.

그런데 이미 나도 없고 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도 없으면


어찌 정사가 있겠는가.’

(26) 대각께서 법신이 무아임을 보여서

정사의 미세한 아집과 법집을 타파해 주시다

각시법신무아(覺示法身無我)하사

예파정사미세이집(例破正士微細二執)

대각께서는 무아의 뜻으로 타파해 주시는데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없다는 말씀은 법집을 타파한 것이다.

‘무릇 법이 없으면 어찌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覺土)를 장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소견에 대하여

상적광토常寂光土로써 타파해 주셨다.

곧 법신은 명名·상相이 없으므로 나(我)라는 소견을 둘 것이 없고,

국토는 형상이 없으므로 불토(覺土)를 장엄한다는 소견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이에 마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집착하지 말고

불국토(覺國土)에 집착하지 말라. 세

간 사람의 눈으로 보는 허공에도 오히려 집착할 것이 없는데

하물며 우리의 본성은 그 허공이 아니라 허공과 평등한 본성이겠는가.

만약 이것을 통달하지 못한 사람은 정사가 아니다.

무아법을 증득한 사람이어야 여래께서는 진정한 정사라 말씀하신다.

인상과 아상이 깨지고 아집과 법집을 완전히 잊으면

모든 상이 공하여 형상으로 드러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자리에 눌러앉아서 집착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때문에 고인이 ‘물로 물을 씻지 못하는 도리를 향해서

한마디 일러 보라’고 말한 것을 알겠는가.

한강의 물이 동쪽으로 흘러가도다.

40. 제도할 중생을 볼 수가 없고 장엄할 정토가 없는데


어찌 오안이 필요하겠는가

불견중생가도(不見衆生可度)하고

무토가정(無土可淨)인댄 요오안작마 (要五眼作麽)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여래유육안불(如來有肉眼不)아.

여시(如是)하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여래유육안(如來有肉眼)하시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여래유천안불(如來有天眼不)아.

여시(如是)하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여래유천안(如來有天眼)하시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여래유회안불(如來有慧眼不)아. 여시(如是)하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여래유혜안(如來有慧眼)하시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여래유법안불(如來有法眼不)아.

여시(如是)하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여래유법안(如來有法眼)하시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여래유각안불(如來有覺眼不)아.

여시(如是)하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여래유각안(如來有覺眼)하시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여항하중소유사(如恒河中所有沙)를 각설시사불(覺說是沙不)아.

여시(如是)하니다. 세존(世尊)이시여, 각설시사(覺說是沙)하시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여일항하중소유사(如一恒河中所有沙)에 유여시사등항하(有如是沙等恒河)어든,

시제항하(是諸恒河)의 소유사수(所有沙數)를

각세계여시(覺世界如是)면, 녕위다불(寧爲多不)아.
심다(甚多)합니다. 세존(世尊)이시여.

각고수보리(覺告須菩提)하사대

이소국토중(爾所國土中)에 소유중생(所有衆生)의

약간종심(若干種心)을 여래실지(如來悉知)하시니,

하이고(何以故)오 각설제심(覺說諸心)이 개위비심(皆爲非心)이라,

시명위심(是名爲心)이니라. 소이자하(所以者何)오

수보리(須菩提)야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이며,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이며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니라.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는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는 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는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는 법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覺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는 불안(覺眼)이 있습니다.82)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는 항하의 모든 모래에 대하여 그 모래를 설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모래에 대하여 설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 항하의 모래가 있고 그 모래 수만큼의 항하가 있는데

저 모든 모래 수만큼의 불세계(覺世界)가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많겠느냐.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대각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 국토에 있는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안다.


왜냐하면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은 곧 마음이 아니라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과거의 마음도 없고

현재의 마음도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만약 정사가 제도해야 할 중생을 볼 수가 없고

장엄해야 할 불국토(覺國土)를 볼 수가 없다고 말한다면

여래의 오안五眼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7) 대각께서 마음과 부처(覺)와 중생의 셋은 차별이 없음을 보여 주시다

(覺示心覺及衆生三無差別)

대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오안은 오안이 아니다.

무릇 중생의 마음을 보는 것으로 눈을 삼는 것뿐이다.

여래가 시방의 무량세계의 모든 중생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다 알고 다 본다는 것은 그 중생의 전체가 여래의 자심중생인 까닭에

모든 중생들의 일념도 곧 여래의 자심이 발동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겠는가.

중생의 마음이 본디 여여하므로 분명 생·멸이 없어

여래심과 더불어 적연평등(寂然平等)하고 담연부동(湛然不動)하여


생·사 및 거·래가 단절되어 있다.

그러므로 마음과 부처(覺)와 중생은 차별이 없고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삼세에서 마음을 추구해도 결코 찾을 수가 없다.’

41. 중생과 국토가 모두 공하다면 꼭 복덕을 닦을 필요가 있는가를 의심하다

의생토개공(疑生土皆空)인대 필불수복덕 (必不修福德)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약유인(若有人)이 만삼천대천세계칠보(滿三千大千世界七寶)로

이용보시(以用布施)하면,

시인(是人)이 이시인연(以是因緣)으로 득복다불 (得福多不)아.

여시(如是)하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차인(此人)이 이시인연(以是因緣)으로 득복심다(得福甚多)합니다.

수보리(須菩提)야 복덕(福德)이 실유83)(實有83)인대,

여래불설득복덕다(如來不說得福德多)언마는

이복덕(以福德)이 무고(無故)로 여래설득복덕다(如來說得福德多)라 하니라.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히 채워서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그 인연으로 얻는 복덕이 많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그 인연으로 얻는 복덕은 대단히 많을 것입니다.

수보리여, 복덕이 실로 있다면

여래는 얻는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복덕이 없기 때문에 여래는 얻는 복덕이 많다고 말한 것이다.

수보리는 세존께서 오로지 모든 집착을 타파해 주신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중생과 국토가 모두 공하다면 곧 보시를 해도 복덕이 없다.

또 수고롭게 복덕을 닦을 필요도 없다.’

(28) 대각께서 무상無相의 복덕을 보여 주시다(覺示無相之福)

대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대는 유상복에만 집착한 까닭에


육진상六塵相이 본래 공한데도 그 진공묘지眞空妙智로

상에 머묾이 없는 보시를 베풀 줄 모르는구나.

마음이 허공과 같으면 복덕이 더욱더 많지만

그 복덕이 없는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말한다.’

42. 중생과 국토가 모두 공하다는 말을 듣고

여래가 구족한 색상을 의심하다

문생토개공 (聞生土皆空)하고 의여래구족색상 (疑如來具足色相)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각(覺)을 가이구족색신(可以具足色身)으로 견불(見不)아 불야(不也)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여래(如來)를 불응이구족색신(不應以具足色身)으로 견(見)이니다.

하이고(何以故)오 여래설구족색신(如來說具足色身)이

즉비구족색신(卽非具足色身)이라, 시명구족색신(是名具足色身)이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여래(如來)를 가이구족제상(可以具足諸相)으로 견불(見不)아.

불야(不也)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여래(如來)를 불응이구족제상(不應以具足諸相)으로 견(見)이니다.

하이고(何以故)오 여래설제상구족(如來說諸相具足)이 즉비구족(卽非具足)이라,

시명제상구족(是名諸相具足)이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覺)를 구족색신을 통해서 볼 수가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색신을 통해서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구족색신(具足色身)은

곧 구족색신이 아니라 이름이 구족색신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구족제상(具足諸相)을 통해서 볼 수가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제상을 통해서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구족제상은

곧 구족제상이 아니라 이름이 구족제상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는 중생과 국토가 공하다는 말씀을 듣고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覺國土)를 장엄하는 것은

성불(成覺)하는 인이므로

만덕을 구족하여 분명하게 그 결과가 있다.

그런데 지금 중생도 제도할 것이 없고

국토도 장엄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니

그것은 곧 인이 단절된 것이다.

그리고 보리를 증득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니

그것은 과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인·과가 단절된 것이라면

지금 보고 있는 색상을 구족한 여래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29) 대각께서 보신색상報身色相의 견해를 타파하시고

법신과 보신이 하나임을 드러내 주시다

(覺이 破報身色相之見하고 以顯法報冥一)

대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대는 만덕으로 장엄한 보신불(報身覺)이

구족색신을 얻은 것이라 생각한다.

곧 무량겁토록 육도만행을 닦되

한편으로는 이타행을 하고

한편으로는 자리행을 하여

모든 선업을 닦은 결과로 구족색상의 몸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여래가 그 모든 것을 공하다고 말한 것을 듣고는

현재 여래의 삼십이상과 팔십종호는

과연 무엇으로 얻었는가 의심하고 있다.


수보리여, 그대는 지금 보신색상이 그대로 법신인 줄을 모르고 있다.

여래가 말한 구족색신이란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므로

구족색신이라 표현한 것이지

여래의 삼십이상을 보신·화신·법신으로 나누어 볼 것이 아니다.

삼십이상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삼십이상이므로

이름을 삼십이상이라 말한 것이다.

이것은 법신과 보신과 화신이 하나이기 때문에

그 어느 하나를 집착해서는 안 된다.’

43. 불신(覺身)은 무상無相인데 과연 누가 설법을 하는지 의심하다

의각신무상(疑覺身無相)인데 수당설 (誰當說)

수보리(須菩提)야 여물위여래작시념(汝勿謂如來作是念)호대,

아당유소설법(我當有所說法)이라 하라.

막작시념(莫作是念)이니 하이고(何以故)오.

여인(若人)이 언(言)하되 여래유소설법(如來有所說法)이라 하면,

즉위방각(卽爲謗覺)이라 불능해아소설고(不能解我所說故)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설법자(說法者)는 무법가설(無法可說)이라,

시명설법(是名說法)이니라.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 자신이 설법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 말고,

또 그런 생각도 하지 말라.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법을 하였다고 말한다면

곧 여래(覺)를 비방하는 것으로

내가 설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설법이란 설할 만한 법이 없으므로 설법한다고 말한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대각께서 본디 형상이 없으므로 볼 수가 없다.

이것은 몸과 마음이 없다는 것인데 과연 누가 설법을 할 것인가.’

(30) 대각께서 보신불이 설법한다는 의심을 타파해 주시다

(覺이 破報身佛說法之疑)

대각께서는 수보리가 보신불(報身覺)과 화신불(化身覺)의 설법에

집착함을 타파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래가 출세한 것은 본디 설법을 하여

무릇 중생이 집착하는 소견에 따라서 타파해 주려는 것이다.

그 설법은 오직 무無라는 한 글자뿐이다.

그런데도 여래(覺)가 일체법을 말한 것은

일체의 마음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일체의 마음이 공하면 일체의 설법도 없다.

억지로 조작해서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할 만한 법이 없으므로 설법이라 말한 것이다.’

44. 비록 법신은 설법도 없고 현시하지도 않은 줄 알았지만

말세중생이 그것을 믿을 것인가

수오법신무설무시(雖悟法身無說無示)나

말세중생(末世衆生)이 능신부(能信否)

이시(爾時)에 혜명수보리(慧命須菩提) 백각언(白覺言)하사대.

세존(世尊)이시여, 파유중생(頗有衆生)이

어미래세(於未來世)에 문설시법(聞說是法)하고, 생신심불(生信心不)잇가.

각언(覺言)하시대 수보리 (須菩提)야.

피비중생(彼非衆生)이며, 비부중생(非不衆生)이니,

하이고(何以故)오 수보리(須菩提)야.
중생중생자(衆生衆生者)는 여래설비중생(如來說非衆生)이라,

시명중생(是名衆生)이니라.

그때 혜명 수보리가 대각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미래세84)에 이 설법을 듣고

신심을 일으킬 중생이 조금이라도 있겠습니까.

대각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저들은 중생이 아니고 비중생도 아니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중생중생이란

여래가 중생이라 말한 것이 아니라

곧 이름이 중생이기 때문이다.85)

수보리는 비록 법신은 설할 것도 없고

그 모습을 내보일 것도 없음을 알았지만

그 법이 매우 깊은 까닭에 말세중생이 믿을 수 있는지를 의심한다.

(31) 대각께서 중생견을 타파하시다(覺이 破衆生見)

대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저들은 중생도 아니고 비중생도 아니다.

중생은 본래 여여如如한 것이고 제법은 본래 평등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말세라는 상이 있겠는가.

중생의 본성이 본래 여여한 까닭에 저들은 중생이 아니고,

진여가 항상 연緣으로부터 사법事法을 성취하는 까닭에

저들은 비중생도 아니다.

수보리여, 중생이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연으로부터

제법이 화합하여 서로 발생하므로 중생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 이름이 중생일 뿐이다.

그러나 중생의 당처가 본래 공하여


실로 중생이란 없기 때문에 이름을 중생이라 말할 뿐이다.’

45. 법신이 무상無相한데

어찌 일체의 선법을 닦는다고 말하는지 의심하다

의법신(疑法身)이 무상(無相)인댄 하언수일체선법 (何言修一切善法)

수보리 (須菩提) 백각언(白覺言)하사대.

세존(世尊)이시여,

각득여래아뇩다라삼먁삼보리(覺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시니,

위무소득야(爲無所得耶)이까.

각언(覺言)하사대.86) 여시여시(如是如是))하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아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내지무유소법가득(乃至無有少法可得)일새.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복차수보리(復次須菩提)야 시법(是法)이 평등(平等)하야,

무유고하(無有高下)하니,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로

수일체선법(修一切善法)하면,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소언선법자(所言善法者)는

여래설즉비선법(如來說卽非善法)이라,

시명선법(是名善法)이니라.

수보리가 대각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대각께서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소득입니까.

대각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렇다. 수보리여,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 소소한 어떤 법도
얻은 것이 없었으므로 곧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수보리여, 또한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곧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아가 없고 인이 없으며 중생이 없고

수자가 없이 일체의 선법을 닦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수보리여, 여래가 설한 선법이란 선법이 아니므로

곧 이름이 선법일 뿐이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법신은 무상하므로 얻을 법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일체의 선법을 닦아서

보리를 증득한다고 설하시는가.

그렇다면 여래께서 보리과를 얻은 것이 아닐 것이다.’

(32) 대각께서 깨침과 설법에 대한 견해의 타파를 보여 주시다

(覺示破覺法見)

대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실로 얻을 것이 없으므로 중생과 제불(諸覺)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이것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데 어찌 실로 증득한 것이 있겠는가.
선법을 닦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것은

무릇 인상과 아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에 대한 소견을 벗어난 것이므로


하루 종일 닦아도 닦는 것이 없고 얻어도 얻는 것이 없다.

이것을 진정한 선법이라 말한다.’

46. 선법이 이미 선법이 아니라면

어떤 법이 뛰어난 법인지 의심하다

의선법(疑善法)이 즉비(卽非)면 하법(何法)이 위승(爲勝)


수보리(須菩提)야 약삼천대천세계중(若三千大千世界中)에

소유제수미산왕여시등칠보취(所有諸須彌山王如是等七寶聚)를

유인(有人)이 지용보시(持用布施)라도,

약인(若人)이 이차반야바라밀경(以此般若波羅蜜經)에

내지사구게등(乃至四句偈等)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며,

위타인설(爲他人說)하면 어전복덕(於前福德)이

백분(百分)에 불급일(不及一)이며,

백천만억분(百千萬億分)과 내지산수비유(乃至算數譬喩)라도

소불능급(所不能及)이니라.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수미산왕만큼의 칠보 무더기를 가지고 보시한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 내지 사구게 등을

받고 지니며 읽고 외워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고 하자.

그러면 앞의 복덕은 이 복덕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의 일, 만분의 일, 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내지 산수나 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선법이 아니면 어떤 법이 뛰어나다는 것인가.’

(33) 대각께서 상을 벗어난 공덕이 가장 뛰어남을 보여 주시다

각시리상지공(覺示離相之功)이 최승(最勝)

대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반야를 통달한 사람이 가장 뛰어나다.

그러므로 삼천대천세계 에는 백억의 수미산왕이 있는데

그만큼의 칠보 무더기로 보시하면 그 복덕이 많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사구게를 통하여 반야를 통달한 복덕만은 못하다.


왜냐하면 저 칠보로 보시한 경우는 상에 탐착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고 반야의 경우는

인상과 아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에 대한 소견을 벗어난 것으로

생·사를 해탈하기 때문이다.’

47. 이미 중생이 없다면 어찌 중생을 제도한다고 말하는지 의심하다

의기무중생(疑旣無衆生)이면 하언도생(何言度生)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여등(汝等)이 물위여래작시념(勿謂如來作是念)하되,

아당도중생(我當度衆生)이라 하라.

수보리(須菩提)야 막작시념(莫作是念)이니라.

하이고(何以故)오 실무유중생여래도자(實無有衆生如來度者)니라

약유중생여래도자(若有衆生如來度者)댄,

여래즉유아인중생수자(如來卽有我人衆生壽者)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여래설유아자(如來說有我者)가

즉비유아(卽非有我)언마는,

이범부지인(而凡夫之人)이 이위유아(以爲有我)라 하나니라.

수보리(須菩提)야 범부자(凡夫者)는

여래설즉비범부(如來說卽非凡夫)라 시명범부(是名凡夫)이라87).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대들은 여래 자신이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여, 그런 생각도 하지 말라.

왜냐하면 여래가 제도한 중생은 실제로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있다면

여래에게도 아·인·중생·수자라는 집착이 있는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는 아에 대한 집착은


곧 아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고 설하였다.

그런데도 범부는 아에 집착을 한다.

수보리여, 범부라는 것도 여래가 범부라 말한 것이 아니라

이름이 범부일 뿐이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그런 즉 중생과 제불(諸覺)이 평등하여 중생이 따로 없다.

그런데 어찌 여래께서는 중생을 제도한다고 말씀하시는가.

그러면 여래에게도 인상과 아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34) 대각께서 인상과 아상을 그대로 두고서

법신의 진아를 드러내 주시다

(覺有人我하고 顯法身眞我)

대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중생과 제불(諸覺)이

평등하다는 소견(所見)마저도 두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법신의 주변사周邊事일 뿐이지

법신의 향상사向上事는 못된다.

그리고 여래에게 중생을 제도한다는 생각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그런 생각이 나한테 있다면 나는 곧 범부이다.

그러나 여래가 범부를 언급한 것은 제도할 범부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어찌 여래에게 아我라는 소견이 있겠는가.’

이 경문은 반야(般若)의 현지玄旨가 극에 이른 것이다.

48. 법신과 보신이 이미 공이면 삼십이상인들

어찌 부처님(覺)이 아니겠는가 하고 의심하다

의법보(疑法報)가 기공(旣空)이면

삼십이상(三十二相)이 기비각야 (豈非覺耶)아


수보리(須菩提)야 의의운하(於意云何)오.

가이삼십이상(可以三十二相)으로 관여래불(觀如來不)아.

수보리언(須菩提言)하되 여시여시(如是如是)니다.

이삼십이상(以三十二相)으로 관여래(觀如來)니이다.

각언(覺言)하사대 수보리(須菩提)야.

약이삼십이상(若以三十二相)으로 관여래자(觀如來者)인댄,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즉시여래(卽是如來)로다.

수보리백각언(須菩提白覺言)하사대, 세존(世尊)이시여.

여아해각소설의(如我解覺所說義)는

불응이삼십이상(不應以三十二相)으로 관여래(觀如來)니다.

이시(爾時)에 세존(世尊)이 이설게언(而說偈言)하사대.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커나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하면,

시인(是人)이 행사도(行邪道)라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니라.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십이상을 통해서 여래를 볼 수가 있느냐.

예, 그렇습니다. 삼십이상을 통하여 여래를 볼 수가 있습니다.

대각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만약 삼십이상을 통해서 여래를 볼 수가 있다면

전륜성왕도 여래이겠구나.

수보리가 대각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대각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결코 삼십이상을 통하여 여래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셨다.

‘색으로 나를 보려 한다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니


결코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88)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나는 이미 법신도 아니고 보신은 상을 통하여 보지 못한다면

지금의 삼십이상이야말로 어찌 부처님(覺)이 아니겠는가.’

(35) 대각께서 응신과 화신은 진신이 아니고

법신은 상이 없음을 보여 주시다

각시응화비진(覺示應化非眞)이오 법신비상(法身非相)

대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과연 삼십이상을 통해서 여래를 볼 수가 있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삼십이상은 바로 여래입니다.

대각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전륜성왕이 여래이겠구나.

이에 수보리가 즉시 활연대오하여 말씀드렸다.

삼십이상을 통하여 여래를 볼 수는 없습니다.

이에 여래께서 사구게를 설하여 말씀하셨다.

만약 삼십이상과 팔십종호의 색상을 통하여

법신을 보려고 하든지 나무석가모니불(覺)을 불러서

여래의 법신을 추구하려고 하면

그것은 사도를 행하는 사람이므로

결코 법신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49. 법신은 무상無相하다는 말을 듣고

법신이 단멸인지 의심하다

문설법신무상(聞說法身無相)하고 의법신단멸(疑法身斷滅)

수보리(須菩提)야 여약작시념(汝若作是念)호대,

여래(如來)를) 불이구족상고(不以具足相故)로,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아.

수보리(須菩提)야 막작시념(莫作是念)하되,

여래(如來)를 불이구족상고(不以具足相故)로,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하라.

수보리(須菩提)야 여약작시념(汝89)若作是念)하되,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설제법단멸 (說諸法斷滅90)이 막작시념(莫作是念)하라.

하이고(何以故)오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91)는

어법(於法)에 불설단멸상(不說斷滅相)하나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자정사(若正士)가

이만형하사등세계칠보(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로

지용보시(持用布施92)라도, 약복유인(若復有人)이

지일체법무아(知一切法無我)하야 득성어인(得成於忍)하면,

차정사(此正士)는 승전정사소득공덕(勝前正士所得功德)이니라.

하이고(何以故93)오 수보리(須菩提)야 이제정사(以諸正士)가

불수복덕고(不受福德故)니라.

수보리백각언(須菩提白覺言)하되 세존(世尊)이시여.

운허정사(云何正士)가 불수복덕(不受福德)이니잇고,

수보리(須菩提)야 정사(正士)의 소작복덕(所作福德)은

불응탐착(不應貪着)일새, 시고(是故)로 설불수복덕(說不受福德)이니라.

수보리여, 그대가 만약 여래는 구족상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수보리여, 여래가 구족상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수보리여, 그대가 만약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가

제법의 단멸을 설한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제법에 대하여 단멸상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어떤 정사는 항하의 모래 수만큼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일체법이 무아임을 알아서 인욕을 성취한다.

그러면 이 정사의 공덕이 저 사람의 공덕보다 뛰어나다.

수보리여, 왜냐하면 모든 정사는 복덕을 받지 않는다.

수보리가 대각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정사는 복덕을 받지 않습니까.

수보리여, 정사는 자신이 지은 복덕에 결코 탐착이 없으므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법신과 보신상이 없고 응화신도 참되지 못하다면

그것은 단멸이 아닌가.’

(36) 대각께서 단멸의 잘못된 지견知見을 타파하시다

(覺이 破斷滅知見)

대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대가 법신진아(法身眞我)를 알지 못하여

그와 같은 소견을 낸 것이다.

그대는 말해 보라. 여래는 구족상이 없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구족상이 곧 여래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제법이 상주불생(常住不生)하고,


상주불멸(常住不滅)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뜻을 알면 구족상이 곧 여래이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제법에 대하여 단멸상을 말하지 않는다.

무릇 일체법이 모두 각각 제자리에 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버들은 푸릇푸릇하고

복숭아꽃은 불긋불긋하지만

모두 아我가 없다.

일체법에 아가 없는 것을 알아서

무생법인無生法忍(제법이 불생불멸인 줄을 깨치는 것이다.)을

성취하면 그 사람은 항상 칠보로 보시하는 것보다 뛰어나다.

왜냐하면 복덕성福德性이 공한 줄 통달하여

모든 경계에 탐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릇 탐착만 하지 말아야지

단멸이라는 소견을 두어서는 안 된다.

여래께서 이 무無라는 한 글자로 갖가지 견해를 타파하시고

진지견眞知見을 드러낸다.’

50. 아도 없고 복도 없으면

위의동정威儀動靜이 여래가 아닌지 의심하다

의무아무복(疑無我無福)인댄 위의동정(威儀動靜)이

비여래야(非如來耶))

수보리(須菩提)야 약유인(若有人)이 언(言)하되

여래(如來)가 약래약거약좌약와(若來若去若坐若臥)라 하면,

시인(是人)이 불해아소설의(不解我所說義)니,

하이고(何以故)오 여래자(如來者)는 무소종래(無所從來)하며,

역무소거(亦無所去)일새, 고(故)로 명여래(名如來)니라.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오고 가며 앉고 눕는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내 설법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란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므로

이름이 여래이기 때문이다.94)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아我가 없다면 복을 받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여래께서 행行·주住·좌坐·와臥하고

어語·묵默·동動·정靜하며

거去·래來·이離·유留하는 것이 여래가 아닌가.’

(37) 대각께서 법신의 진리세계(眞際)로 회귀함을 보여 주시다

각시회귀법신진제(覺示會歸法身眞際)

대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대가 삼신은 동일한가 다른가를 의심하는 소견을

잊지 못하는 것은 평등법신平等法身을 깨치지 못한 까닭이다.

이것은 행行·주住·좌坐·와臥의 경우와 어語·묵默·동動·정靜의 경우와


거去·래來·이離·유留의 경우를 가지고 여래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래에게 어찌 거去·래來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집착하는 것은 망견(妄見)에 빠진 것이므로

그 망정(妄情)을 잊어야만 동動·정靜이 둘이 아니게 된다.’

(38) 대각께서 미진과 세계로써

동일하다·다르다 하는 견해를 타파해 주시다

(覺이 以微塵世界로 破一異之見)

대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대는 삼신三身이 일체一體임을 모르는구나.

내가 비유를 들어서 자세하게 보여 주겠다.

세계가 한덩어리이지만 미세한 티끌이 모여서 세계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땅덩어리를 부수면 낱낱의 티끌이 되어

그 수효가 무수하다.

그 티끌의 수효로 보면 동일하지 않지만

그 한덩어리의 땅으로 보면 다르지가 않다.

이와 같이 삼신불(三身覺)이 한 몸(一體)으로서 다른 것이 아니다.

한 몸이지만 그 묘용妙用이 무수하여 하나가 아니다.

대저 미세한 티끌을 모아서 세계가 되는 것이므로

다르지만 다른 것이 아니고,

세계를 부수면 미세한 티끌이 되는 것이므로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미세한 티끌의 당체(當體)가 낱낱이 공한 것이므로

하나라든가 다르다든가 하는 모습이 없다.

이에 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하나라든가 다르다든가 하는 상이 있다면

곧 일합상一合相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일합상이라 하는 것이 변견邊見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로 합해지면 다를 수가 없고

다른 것으로 합해지면 하나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미세한 티끌이 실로 있다면

그것이 모여서 세계가 될 수가 없고,

만약 세계가 실로 있다면

그것이 흩어져서 미세한 티끌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범부들이 그것으로 일합상을 삼지만

여래가 설한 일합상은 그렇지 않고

양변(兩邊)을 벗어나서 일합상一合相이라 말한다.

양변을 벗어나면 그 경지는 언설로 표현할 수가 없는데


범부들은 유有·무無 및 일一·이異의 양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무릇 그것에 탐착하므로

삼신三身이 일체一體인 평등법신平等法身의 도리(道理)에 통달하지 못한다.’

51. 법신에게는 일체가 모두 그렇지 않다(非)면

무엇으로써 사상의 견해(四相見)를 설하는지 의심하다

의법신(疑法身)이 일체개비(一切皆非)인댄

우하이설사상견(又何以說四相見)

수보리(須菩提)야 약선남자선여인(若善男子善女人)이

이삼천대천세계(以三千大千世界)로 쇄위미진(碎爲微塵)하면,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시미진중(是微塵衆)이

영위다불 (寧爲多不)아.

심다(甚多)하니라. 세존(世尊)이시여.

하이고(何以故)오. 약시미진중(若是微塵衆)이 실유자(實有者)인댄,

각(覺)이 즉불설시미진중(卽不說是微塵衆)이시리니,

소이자하(所以者何)오 각설미진중(覺說微塵衆)이

즉비미진중(卽非微塵衆)이라.

시명미진중(是名微塵衆)이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여래소설삼천대천세계(如來所說三千大千世界)가

즉비세계(卽非世界)라, 시명세계(是名世界)니.

하이고(何以故)오. 약세계실유자(若世界實有者)인댄,

즉시일합상(卽是一合相)이어니와.

여래설일합상(如來說一合相)은 즉비일합상(卽非一合相)이라,

시명일합상(是名一合相)이니다.

수보리(須菩提)야 일합상자(一合相者)는,

즉시불가설(卽是不可說)이어늘, 단범부지인(但凡夫之人)이,

탐착기사(貪着其事)하나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약인(若人)이, 언(言)하되,


각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覺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라 하면,

수보리(須菩提)야, 어의운하(於意云何)오.

시인(是人)이 해아소설의불(解我所說義不)아.

불야(不也)니다95), 세존(世尊)이시여.

시인(是人)이, 불해여래소설의(不解如來所說義)니,

하이고(何以故)오. 세존(世尊)이,

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은,

즉비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卽非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라.

시명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입니다.

수보리(須菩提)야,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어일체법 (於一切法)에,

응여시지여시견여시신해(應如是知如是見如是信解)하야,

불생법상(不生法相)이니라.

수보리(須菩提)야, 소언법상자(所言法相者)는,

여래설즉비법상(如來說卽非法相)이라, 시명법상(是名法相)이니라.

수보리여,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미진을 만든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미진들이 얼마나 많겠느냐.

대단히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미진들이 실제로 있다면 여래(覺)께서는

곧 미진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覺)께서 설하신 미진들은

곧 미진들이 아니라 곧 이름이 미진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라 곧 이름이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실로 있다면

곧 일합상이겠지만 여래가 말한 일합상은

곧 일합상이 아니라 이름이 일합상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일합상이란 말할 수가 없는 것인데

무릇 범부들이 그것에 탐착할 따름이다.

수보리여, 어떤 사람은 여래(覺)가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을 설했다고 말한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이 여래가 설한 뜻을 이해했다 할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여래께서 설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설한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은

곧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이 아니라

이름이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일체법에 대하여 반드시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고 이해하여

법상法相을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수보리여, 법상法相에 대하여 여래는

곧 법상이 아니라고 말하였는데 이름이 법상이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평등법신平等法身으로서 일체가 모두 그렇지 않다(非)면

대각께서는 무엇 때문에 사상의 견해(四相見)를 말씀하셨는가.’

(39) 대각께서 법신의 경우 상을 떠나 있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해 주시다

각(覺)이 파집이상지견(破執離相之見)

대각께서 수보리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셨다.

‘여래(覺) 자신이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을 말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대는 그 사람이 여래(覺)가 말한 뜻을 이해한 사람이라고 간주하느냐.’


수보리가 그제서야 대각의 의중을 파악하고서 대답하였다.

‘예, 그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각께서 사상견四相見을 말씀하신 것은 실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견相見에 집착하는 소견을 버리게 하신 까닭입니다.

위에서 여러 번에 걸쳐서

그렇지 않다(非)고 말씀하신 것은 옳지 않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렇지 않다(非)고 말씀하신 것은 결정적으로

그런 견해를 단제해 주신 것입니다.

곧 대각에게 그 사상견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게 상견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경우 상견의 집착이 견고하여 타파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각께서 금강심지金剛心智로써 그 정견情見을 타파하고

자신의 법신 본체를 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52. 법신은 설법을 모르고 화신의 설법은

법신에 통달하지 못한 것인지 의심하다

(疑法身은 不會說法이오 化身所說은 不達法身)

須菩提야 若有人이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로 持用布施라도,

若有善男子善女人이 發菩提心96)者하야,

持於此經호대 乃至四句偈等히 受持讀誦하야,

爲人演說하면 其福勝彼하니라.

云何爲人演說고 不取於相하면, 如如不動하니라.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은 무량한 아승지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그것으로써97) 보시한다.

만약 어떤 선남자·선여인은 보리심을 일으켜서,

이 경전을 지니고 내지 사구게 등을 받고 지니며 읽고 외워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설해 준다.


그러면 이 선남자·선여인의 복덕이 앞사람의 복덕보다 뛰어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어떻게 연설해야 하겠는가.

상에 집착하지 말고 여여하고 부동해야 한다.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법신은 법을 설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 법을 설하는 자는 화신이다.

화신이 법을 설한다는 것은 법신의 경계를 터득하지 못한 것인데

어떻게 법신을 가지고 복덕을 얻는단 말인가.’

(40) 대각께서 화신의 설법은 곧 실법이니 삼신이 일체임을 보여 주시다

각시화신소설(覺示化身所說)이 즉실법(卽實法)이니 삼신(三身)이 일체고(一體故)

대각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화신불(化身覺)이 설한 경전 및 이 경전 가운데 사구게가 곧 법신 전체이다.

그러므로 삼신이 일체一體로서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곧 이 경전의 사구게를 받고 지니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연설하면

그 복덕이 무량하고 무수한 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보시한 복덕보다 뛰어나다.

그러면 그와 같은 설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연설해야 하는가.

법상에 집착하지 말고 여여하고 부동하게 설법해야 한다.’

이 뜻을 깨치면 세계가 법을 설하고, 미진들이 법을 설하며,

중생들이 법을 설하고 삼세일체가 다 법을 설한다.

53. 법신은 적멸한데 어떻게 설하는지 의심하다

의법신(疑法身)은 적멸(寂滅)이라 여하능설(如何能說) 하이고(何以故)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오.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어다.

왜냐하면
‘일체의 유위법은

마치 꿈과 꼭두각시와 물거품과 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으니

반드시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98)

수보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한다. ‘법신은 적멸한데 어떻게 법을 설하는가.’

(41) 대각께서 반야의 진공과 묘관을 보여 주시다

각시반야진공묘관(覺示般若眞空妙觀)

대각께서 유위법은 꿈과 꼭두각시와 물거품과 그림자와 이슬과 번개와 같다고

여섯 가지 비유로써 관찰하도록 한 것은 가관假觀을 통하여

진공眞空으로 들어가게 한 것이다.

54. 전편을 총결짓다(全編總結)

각설시경이(覺說是經已)에 장로수보리(長老須菩提)와

급제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니 (及諸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尼)

일체세간천인아수라(一切世間天人阿修羅)가

문각소설(聞覺所說)하고 개대환희(皆大歡喜)하야, 신수봉행(信受奉行)하니라.

대각께서 이 경전을 모두 설하고 나니

장로 수보리와 모든 비구·비구니·우바새청신사·우바이청신녀 및

일체세간의 천·인·아수라들이 대각의 설법을 듣고

모두 크게 환희하여 믿고 받으며 받들고 실천하였다.99)

이것은 경문을 종결하는 대목이다.

환희심을 일으키는 것은 깊이 그 오묘한 도리에 계합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믿는 것이 진정으로 수지하는 것이므로

경전을 받들어 지니는 것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대각기원大覺紀元 2950년(1923) 계해癸亥 3월 4일에 과해科解하고 번역을 마치다

1) 용성 선사가 ‘佛’ 자를 ‘覺’ 자로 바꾸었다.

2) 운문 성사雲門聖師 : 운문 문언雲門文偃(864~949)을 가리킨다.

당말오대 초기의 설봉 의존雪峯義存의 제자로서 선종오가 가운데 운문종의 개조이다.

3) 진각 혜심眞覺慧諶, 『선문염송염송설화회본禪門拈頌拈頌說話會本』 卷1(『韓國佛敎全書』 5, p.10中) 참조.

4) 진묵겁塵墨劫 : 진겁塵劫, 진점겁塵點劫이라고도 하는데 까마득히 오랜 세월을 가리킨다.

5) 금강지金剛智와 금강심金剛心: 금강지는 지극히 견고한 지혜로서 곧 여래의 안목을 가리키고, 금강심은 지극히
견고한 마음으로서 곧 여래의 자비를 가리킨다.

6) 아공편진我空偏眞: 아공의 치우친 도리를 깨달아 수행하는 것으로서 소승선을 가리킨다. 『도서都序』 卷上之一
(『大正新脩大藏經』 48, p.399中)

7) 조달調達과 아사阿闍: 조달은 데바닷타(제바달다, 提婆達多 : Devadatta)이고

아사는 아자타삿투(아사세왕, 阿闍世: Ajātasattu) 왕자이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나오는 인물로서 둘이 모의하여

조달調達은 부처님을 해치고 아사는 부왕을 폐위하기로 하였다.

조달은 실패하였지만 아사는 부왕佛王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8) 무상無相·무주無住·무착無着·무념無念:

분별상이 없고 머묾이 없으며 집착이 없고 분별념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9)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중도를 벗어나 있는 견해로서 편견을 가리킨다.

10) 상常·락樂·아我·정淨: 열반세계의 속성으로서

중생세계의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예토穢土의 속성에 대비된다.

11) 오욕五慾: 재물욕財物慾·명예욕名譽慾·식욕食慾·수면욕睡眠慾·색욕色慾을 가리킨다.

12) 유심唯心이고 유식唯識: 마음먹은 대로 자유자재한 것을 가리킨다.

13) 유천唯天이고 유기唯氣: 만물의 생성과 우주변화의 원체原體에 대하여

천명天命을 주장하는 경우는 유천이고 기氣를 주장하는 경우는 유기이다.

14) 부처님께서는 자리에 조용히 앉아 계셨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조용한 삼매 속에서 이미 설법을 마쳐 버렸다.

이 도리를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지나쳤지만

수보리는 삼매 속에서 설한 설법의 내용을 알아차린 까닭에


부처님을 향하여 ‘희유 하십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찬탄하였음을 가리킨다.

15) 정사正士: 각사覺士, 개사開士, 개차開遮,

대사大士와 마찬가지로 보살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16) 안신입명安身立命: 몸과 마음에 근심이 없이 살아가는 것으로

안심입명安心立命과 같은 의미이다.

17) 구마라집 번역본의 경우에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총론적으로 질문한

‘응운하주應云何住’ 및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의 두 가지 질문을 가리킨다.

18) 보시바라밀을 실천하는 가르침으로서

시자륜侍者輪·시물륜施物輪·수자륜受者輪이 모두 공하므로

그에 집착이 없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설한

삼륜공적三輪空寂 내지 삼륜청정三輪淸淨을 가리킨다.

19) 마음이 안주되고 저절로 다스려지게 되었다(心安自降):

이 대목은 수보리가 부처님께 질문한

‘어떻게 마음을 안주해야 합니까(應云何住)’ 및 ‘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云何降伏其心)’를 가리킨다.

20) 몸과 국토(身土): 주체와 객체를 가리킨다.

21) 사상四相: 여기에서의 사상은 아我의 사상으로서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가리킨다.

22) 사구게四句偈:

첫째는 사구四句의 정형화된 형식으로 설해진 부처님의 설법을 의미하고,

둘째는 일정한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을 의미하며,

셋째는 경전의 전체를 의미하는 등 세 가지 뜻이 있다.

23) 욕망으로 터득한 색신: 욕행欲行은 욕득색신欲得色身을 가리킨다.

욕득색신이란 어떤 보살이 이미 발심을 하고 나서 수행을 할 경우

부처님의 세 가지 화신의 모습의 상호가 구족된 것을 보고는

그것을 얻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세 가지 화신의 모습이란 진정한 여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24)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경지에 해당하는 체득의 공(俱空)은 인을 지어서

과를 얻는(作因取果) 소위 유루의 행위로는 결코 터득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25) 부처님과 마음(覺心): 추구의 대상으로서의 부처님과 추구하는 주체로서의

자신의 마음을 가리킨다. 이하에서는 ‘마음과 부처님(心覺)’으로 표기된다.

26) 32분과의 『금강경』을 기준으로 볼 경우에

앞의 제1 법회 인유분부터 제16 능정업장분까지를 상반의 경문으로 간주하고,

제17 구경무아분부터 제32 응화비진분까지를 하반의 경문으로 간주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27)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사상四相과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의 사견四見은

각각 인人의 사상四相(곧 我空)과 법의 사견四見(곧 法空)을 가리킨다.

때문에 전자를 소략하다(麤)고 말하고 후자를 자세하다(細)고 말한다.

28) 진여법신은 인과 과의 연기도리를 통하여 형성되고 소멸되는

유위법이 아니라 무위법에 속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29) 법신과 보신은 형상이 없는 까닭에 부동不動하는 것이므로 단斷이 아니고,

응화신은 거래去來하는 까닭에 거래去來가 없는 것이므로 멸滅이 아님을 가리킨다.

30) 일체의 유위법은 꿈·허깨비·물거품·그림자·아침이슬·번개와 같이 실체가 없고

무상하다는 비유를 관찰함으로써 집착과 분별로부터 벗어나도록 해 주는 가르침을 가리킨다.

31) 일체개비一切皆非: 제32 응화비진분의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것이 무상하고 허망하며 실체가 없어 진상이 아님을 가리킨다.

32) 법신의 향상일로(法身向上一路): 법신의 경지를 터득하고서도

그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 초월한 모습을 가리킨다.

33) 부공혜浮空慧: 마음이 악취공에 휘둘려서 올바른 견해를 지니지 못하는 모습을 가리킨다.

34) 제일구第一句: 최고의 진리를 나타내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팔만사천의 가르침 가운데 최초로 설했다는 의미로 쓰였다.

35) 제일구의 방식: 『화엄경』의 가르침을 가리킨다.

36) 말후구末後句: 최후의 가르침으로서 진실하고 원만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부처님 최후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37) 나: 부처님으로부터 친히 곁에서 설법을 들은 아난을 가리킨다.

이하 백용성 번역본의 텍스트는 척사대장경본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원문 및 해석은 그에 따른다. 척사대장경본은 오늘날 불광대장경본의 모본이 되었다.

38)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금강경』을 비롯한 수많은 경전을 설한 지역으로


사위국의 서울에 있다. 급고독 장자와 기타 태자가 각각 동산과 나무를 보시하여 지은 기원정사祇園精舍가 있다.

39) 천이백오십 명: 항상 부처님 곁에 머물면서

불법을 실천하는 1,250명의 상수대중常隨大衆을 가리킨다.

40) 경전의 일반적인 삼단 구성으로 보면 이 대목은 「서분序分」에 해당한다.

서분 가운데서도 신信·문聞·시時·주主·처處·중衆의 육성취六成就가

갖추어진 ≺ 증신서證信序≻에 해당한다.

이하 원문 교정의 대목은 구마라집 번역본을 저본으로 삼는다.

41) 공양 시간: 하루에 일식一食을 하는 당시 승가의 관례로 보면

사시巳時(9시~11시)에 해당하지만 사시공양을 하기 위하여

먼저 걸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식시食時는 걸식하러 나가는 시간을 가리킨다. 즉 8시 전후에 해당한다.

42) 이 대목은 「서분」 가운데 ≺ 별서別序≻로서 이 『금강경』에만 해당하는 내용이다.

위의 ≺ 증신서≻와 여기의 ≺ 별서≻는 모두 「서분」에 해당한다.

43) 수보리: 선현善現·선길善吉·길상吉祥·공생空生·선실善實 등으로 번역되어 불린다.

44) 이하부터 일반적인 경전의 삼단 분류 가운데 「정종분正宗分」에 해당한다.

45) 공란의정사空亂意正士: 모든 유위법에 집착하는 것을 대치하기 위하여

일체의 유위법은 공하다는 말을 사용했는데

다시 그 공이라는 말에 집착하는 보살을 가리킨다.

46) 임제할臨濟喝과 덕산방德山棒:

선지식이 제자에게 분별심과 집착심을 버리도록 일깨워 주는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47) 안심입명安心立命: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일상의 생활이 제대로 영위되는 것으로서

깨침의 경지 내지 모습을 가리킨다.

48) 두보(杜甫)(712~770)의 ≺ 엄공중하왕가초당겸휴주찬

嚴公仲夏枉駕草堂兼攜酒饌≻이라는 시에 나오는 대목이다.

百年地辟柴門逈 평생 두메산골에 사니 사립문도 없는데

五月江深草閣寒 오월의 강물은 깊고 초당은 호젓하다네

看弄漁舟移白日 한낮에 오가는 고깃배 바라보고 있자니

老農何有罄交歡 늙은 농부 살아가는 즐거움 무엇이련가

49) “예, 그리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원컨대 기꺼이 듣고자 합니다.”라는


대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예, 그리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기꺼이 듣고자 하였다.

둘째는 “예, 그리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기꺼이 듣고자 합니다.”

현재 조계종 표준 『금강경』에서는 전자의 해석 방식을 따르고 있다.

50) 아상我相(ātman-saṃjñā: 자아가 있다는 관념)·인상人相(pudgala-saṃjñā:

개아가 있다는 관념)·중생상衆生相(sattva-saṃjñā:

끊임이 없이 지속적인 중생이 있다는 관념)·수자상壽者相( jīva-saṃjñā: 영혼이 있다는 관념)은 인人의 사상四相이
고, 이하에 등장하는 유상有相·무상無相·법상法相·비법상非法相은 법法의 사상四相이다.

그러나 경문에는 유상有相과 무상無相은 생략된 모습이다.

이로써 대승경전으로서 『금강경』에는 인人의 사상四相이 공하고

법法의 사상四相이 공하다는

팔상八相의 구공俱空인 대승교리가 드러나 있다.

51) 십이유생十二類生: 『능엄경』에서 말하는 난생·태생·습생·화생·유색생·무색생·유상생·무상생·비유색생·비무색생·비


유상생·비무상생을 가리킨다. 그러나 『금강경』에서는 일반적으로 난생·태생·습생·화생·유색생·무색생·유상생·무상생·
비유상비무상생의 구류중생九類衆生으로 설명한다.

52)

타심통他心通: 부처님께서 터득한 천안통天眼通·천이통天耳通·신족통神足通·타심통他心通·숙명통宿命通·누진통漏盡


通의 육신통六神通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는 수보리가 의심한 내용을 알아차린다는 것으로 굳이 문답이 필요
가 없지만 다른 보살들을 위하여 짐짓 수보리와 부처님의 대화 형식을 빌려서 언설을 통한 문답을 드러낸다.

53)

이에 해당하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존재하는 일체중생의 부류로서 알로 낳은 것이든지 태로 낳은 것이든지 습


기로 낳은 것이든지 변화해서 낳은 것이든지, 색계에서 낳은 것이든지 무색계에서 낳은 것이든지, 식무변처에서
낳은 것이든지 무소유처에서 낳은 것이든지 비유상비무상처에서 낳은 것이든지 간에 내가 모두 무여열반에 들어
가게 하여 멸도시켰지만, 이와 같이 무량하고 무수하며 무변한 중생을 멸도시켜도 실로 중생은 멸도를 얻은 자가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약 보살(正士)에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正士)이 아니기 때문이
다.”

54)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 여래의 신체에 나타나 있는 특징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와 같


은 모습은 형상에 불과하므로 집착할 것이 못된다고 설명한다.

55)

자마금신상紫磨金身相: 여래의 삼십이상 가운데 16번째 설명으로서 ‘大人身黃金色 如紫磨金 是謂大人大人之相’을


가리킨다. 『중아함경中阿含徑』 卷11(『大正新脩大藏經』 1, p.494上).
56)

후오백세: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이후 불법의 미래를 각각 5백 년씩 다섯 단계로 나눈 것이 오오백세五五百歲이다.

제1 오백세는 해탈견고解脫堅固 시대이고,


제2 오백세는 선정견고禪定堅固 시대이며,
제3 오백세는 다문견고多聞堅固 시대이고,
제4 오백세는 탑사견고塔寺堅固 시대이며,
제5 오백세는 투쟁견고鬪諍堅固 시대이다.
후오백세는 이 가운데 제5 오백세를 가리킨다.

57) ‘須’ 자는 불필요하다.

58) 무위법無爲法: 가령 깨침과 열반과 진여 등의 경우처럼 인과의 법칙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닌 경우를 말한다.

59) 구마라집본에는 여기 ‘세존이시여’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60) 다툼이 없는 삼매(無諍三昧): 다툼이 없이 머무는 자,

내지 다툼이 없이 도 닦는 경지를 증득한 자로서 부처님이 수보리를 칭찬한 말이다. 아란나행阿蘭那行과 무쟁삼
매無諍三昧와 적정행寂靜行은 동일한 뜻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61) 사과四果: 소승의 교리에서 말하는 성인의 부류를 네 단계로 나눈 것이다.

수다원은 처음으로 성인의 대열에 합류한다는 뜻에서

입류入流(入類), 예류預流(預類)라 말했고,

사다함은 욕계에 한번 다녀와서 수행을 더 닦아야 한다는 뜻에서 일왕래一往來라 말했고, 아나함은 욕계에는 다
시 돌아올 필요가 없다는 뜻에서 불래不來라 말했고,

아라한과는 모든 번뇌를 초월하였다는 뜻에서 무학도無學道라 말하였다.

62) 한 물건: 언설로 표현할 수 없는 진여, 열반, 깨침 등을 가리키는 말로서

‘此事, 거시기(渠), 一着子, 一圓相’ 등과 같은 뜻이다.

63) 구마라집본에는 ‘不也’가 없다.

64) 달마의 『이종입二種入』에 나오는 내용으로 간주된다.

『소실육문少室六門』(『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48, p.370上).

“外息諸緣。內心無喘。心如牆壁。可以入道。

明佛心宗。等無差誤。行解相應。名之曰祖。”

“외식제연(外息諸緣). 내심무천(內心無喘). 심여장벽(心如牆壁). 가이입도(可以入道).

명불심종(明佛心宗). 등무착오(等無差誤). 행해상응(行解相應). 명지왈조(名之曰祖).”


"모든 외부의 조건을 놓아버리고, 내심에 숨가쁨이 없게 하라.

마음은 벽과 같이 고요하게 하라. 그러면 도에 들어갈 수 있다.

부처님의 마음의 진리를 밝히고, 모든 것이 같고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라.

행동과 깨달음이 서로 부합하면, 그것을 조사祖師라 부른다."라고 합니다.

이 문장은 선종의 고전 중 하나인 《소실육문》에서 발췌한 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진리를 깨닫는 방법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65) 무주심체無住心體가 영지불매靈知不昧:

이 말은 “본래청정한 우리의 심성 내지 불성은 어떤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일체에 신령스럽게 통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66) ‘上’은 ‘相’의 오기로 간주된다.

67) 수미산왕: 수미산이 가장 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고대 인도인의 관념에서는 우주의 중심에 8만 유순의 높이를 가진 수미산이 솟아 있다고 보았다.

68) 구마라집본에는 ‘是名般若波羅蜜’이 없다.

69) 여래(覺): 여기에서 각覺을 부처님이라 하지 않고 여래라고 한 것은

『금강경』의 설법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이 자신을 포함한 일반적인 부처님을

호칭할 경우에 여래라는 말로 일컬었기 때문이다.

70) 혜안慧眼: 사성제의 도리를 통하여 수보리 자신이 이전에 터득한 소승법을 가리킨다.

71) 이전에 ‘희유 하십니다’라고 말했던 것은

경전의 서두 부분에서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찬탄했던

“희유 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正士)을 잘 두호하여 보살펴 주시고

모든 보살(正士)을 잘 부촉해 주십니다.”라는 대목을 가리킨다.

72) 무주심체無住心體가 공적불매空寂不昧:

이 말은 "본래청정한 우리의 심성 내지 불성은 본래부터 적멸의 모습임"을 가리킨다.


73) ‘供’은 ‘恭’의 오기로 간주된다.

74) ‘遶’는 ‘繞’의 오기로 간주된다.

75) ‘以’는 ‘而’의 오기로 간주된다.

76) 불법의 시기를 오오백세五五百歲로 나누어 설명할 경우

마지막의 제5 오백세를 후말세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부처님의 입멸 이후 2천 년부터 2천5백 년 까지를 가리키는 말로서

흔히 말법시대라고 말한다.

77) 용성 선사는 이 부분 까지를 전편으로 분류하여 해석하였다.

78) 용성 선사는 이하의 부분을 후편으로 분류하여 해석한다.

79) 구마라집본에는 ‘心’이 없다.

80) 백용성 번역본 원문에는 ‘須菩提’가 누락되어 있으므로 보입한다.

81) 구마라집본에는 ‘心’이 없다.

82) 여기에서 말하는 오안五眼은 마음 내지 깨침의 경지를 다섯으로 나눈 것이다.

육안은 현재의 색을 보는 눈이고,

천안은 미래와 과거의 시간을 보는 눈이고,

혜안은 사성제의 도리를 깨치고 공을 터득한 눈이고,

법안은 제법무아의 도리를 깨쳐 평등을 터득한 눈이고,

불안은 일체의 번뇌를 영원히 단절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 눈이다.

83) 구마라집본에는 ‘福德實有’가 ‘若福德有實’로 되어 있다.

84) 미래세: 후오백세로서 투쟁견고의 시대로 대표되는 말법시대를 가리킨다.

85) 그때 혜명~중생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호주 종리사 석비濠洲鐘離寺石碑에 의하면,

822년에 유명幽冥 선사가 구마라집본에는 없는 내용을

보리유지본에 의거하여 보충한 것이라 한다.

86) 구마라집본에는 ‘佛言’이 없다.

87) 구마라집본에는 ‘是名凡夫’가 없다.

88) 현장 번역본에는 게송이 두 개인데 생략된 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마땅히 불을 법성으로 보라 / 부처님은 법으로 된 몸이다


/ 법성은 분별의 대상 아니니 / 그것은 분별로 알지 못하네”

89) 구마라집본에는 ‘汝’가 없다.

90) 구마라집본에는 ‘斷滅’이 ‘斷滅相’이다.

91) 구마라집본에는 ‘心’이 없다.

92) 구마라집본에는 “持用布施’가 ‘布施’이다.

93) 구마라집본에는 ‘何以故’가 없다.

94) 『금강경』에서 여래에 대하여 정의한 대목은 세 군데가 있다.

첫째는 “왜냐하면 일체의 상을 벗어난 사람을 제불(諸覺)이라 말하기 때문입니다.”이고,

둘째는 “왜냐하면 여래는 제법의 진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이며,

셋째는 “왜냐하면 여래란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므로 명칭이 여래이기 때문이다.”이다.

95) 구마라집본에는 ‘不也’가 없다.

96) 구마라집본에는 ‘菩薩心’이다.

97) 본 백용성 번역본에서는 ‘그것으로써’에 해당하는 원문 ‘以’를 보충하여 해석하였다.

98) 여기까지가 경전의 삼단 구성에서 「정종분正宗分」에 해당한다.

이하부터는 「유통분流通分」에 해당한다.

99) 이 대목은 경전의 삼단 분류 가운데 「유통분流通分」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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