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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호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과 巡狩

노 중 국

2012年 6月
서울特別市 市史編纂委員會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과 巡狩

노 중 국* 32)

1. 도론
2. 한강유역 확보
3. 한강유역 경영과 순수
4. 북한산순수비의 石質과 碑峰이 보여주는 의미-맺음말에 대신하여

1. 도론

538년 사비로 천도한 백제 성왕은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중흥을 이룩한


후 필생의 과업이 되어버린 한강 유역 회복 작전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를 상대하는 것은 백제의 힘만으로는 어려웠다. 그래서 성왕은 신
라 및 가야 세력을 끌어들여 연합군을 형성하기로 하였다. 이전까지 가
야와의 관계는 백제가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郡令과 城主를 설치한
문제로 말미암아 불편한 관계였다. 그러나 성왕은 541년과 544년 두 차
례에 걸쳐 개최한 사비회의를 통해 불편한 관계를 일단 우호적인 관계로
만들었다.1) 이로써 가야제국으로부터 지원군 파견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
신라와의 연합군 형성은 550년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550년 1월 백제는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취하였고, 이에 대응

*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1)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2년조 및 5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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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3월에 고구려는 군대를 보내 백제의 금현성을 포위하였다.2) 그런데


신라는 고구려가 금현성을 공격할 때 백제를 지원하는 원군을 보내지 않
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도살성과 금현성을 모두 차지하고 말았다.3) 양
국이 되풀이된 공방전으로 매우 困乏해진 국면을 이용하여 신라가 어부
지리를 취한 것이다. 이는 신라가 실리 추구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백제는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았다. 여기
에는 두 가지 조건이 고려되었던 것 같다. 하나는 고구려와 대립하고 있
는 상황에서 신라에 대해 반격을 가하게 되면 신라마저 적으로 돌릴 수
있다고 하는 우려였다. 다른 하나는 이 시기 성왕은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이러한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
해서는 신라의 도움이 필요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연유로 성왕은 신라와
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였고 마침내 신라로부터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이리하여 551년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행할 수 있었다.

2. 한강유역 확보

(1) 濟 ․ 羅 ․ 耶연합군의 北進과 신라의 10군 점령

백제가 신라, 가야와 더불어 고구려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시기에 고


구려의 내부 상황은 복잡하였다. 545년 안원왕이 죽은 후 왕위계승을 둘
러싸고 중부인의 麤群派와 소부인의 細群派가 각각 자신의 소생을 왕위
에 올리려고 크게 대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군파는 2천여 명이 죽임을

2) 뺷삼국사기뺸 권26, 백제본기 성왕 28년조의 “春正月 王遣將軍達已 領兵一萬 攻取高句麗道


薩城 三月 高句麗兵圍金峴城” 참조.
3) 뺷삼국사기뺸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1년조의 “王乘兩國兵疲 命伊湌異斯夫 出兵擊之 取二
城增築 留甲士一千戍之”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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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였다.4) 세군파를 물리친 추군파는 양원왕을 옹립하여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그렇지만 왕위계승 분쟁을 거치면서 일어난 세력교체는 귀족사
회를 크게 동요시켰다.5) 그 결과 혜량법사가 신라에 의탁한 것처럼6) 고
구려를 이탈하는 세력들도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설상사상으로 551년 9월에 돌궐이 공격해 왔다. 돌궐은
신성을 포위하였다가 이기지 못하자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장군
古紇은 1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1천명의 목을 베거나 포로로 잡
아 물리쳤다.7) 그러나 돌궐로 표현되는 세력의 침입은 고구려로서는 큰
충격이었고 서북방면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게 하였다.8) 그 결과 남
부전선에서의 방어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고구려가 처한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백제 성왕은 신라 ․ 가야와 연
합군을 형성하여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이 군사 작전은 두 방향으로 진
행되었다. 백제군은 한강하류 지역으로 진격하고 신라군은 한강상류 지
역으로 진격하였다.9) 백제군은 먼저 漢城을 차지한 후 다시 진군하여 한
강을 건너 平壤城을 공격하고 6군을 빼앗았다.10) 이때의 평양성은 남평

4)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6년 是歲條의 “是歲 高麗大亂 被誅殺者衆(百濟本紀云 十二月甲


午 高麗國細群與麤群 戰于宮門 伐鼓戰鬪 細群敗 不解兵三日 盡捕誅細群子孫 戊戌 狛鵠
香岡上王薨也)” 및 7년 시세조의 “是歲 高麗大亂 凡鬪死者二千餘人(百濟本紀云 高麗以正
月丙午 立中夫人子爲王 年八歲 狛王有三夫人 貞夫人無子 中夫人生世子 其舅氏麤群也 小
夫人生子 其舅氏細群也 及狛王疾篤 細群麤群各欲立其夫人之子 故細群死者二千餘人也)”
참조.
5) 이에 대한 정리는 노태돈,「고구려의 한수유역 상실의 원인에 대하여」,『한국사연구』13,
1976; 노태돈,『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398~400쪽 참조.
6) 뺷삼국사기뺸 권44, 열전4 거칠부전의 “今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참조.
7) 뺷삼국사기뺸 권19, 고구려본기 양원왕 7년조의 “秋九月 突厥來圍新城 不克 移攻白巖城 王
遣將軍高紇領兵一萬 拒克之 殺獲一千餘級 新羅來攻取十城” 참조.
8) 노태돈,『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403~404쪽.
9) 가야군은 어디로 진격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백제와 보조를 같이 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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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으로 경기도 양주시에 해당된다.


이 시기 백제군의 공격은 매우 신속하게 또 기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구의동 고구려 堡壘유적의 廢棄 상황이다. 발굴 결
과 이 보루 유적은 당시의 생활용기와 무기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로 폐
기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백제군의 기습 공격으로 이 보루
에 주둔한 고구려 군사들이 무기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퇴각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1)
한편 居柒夫와 仇珍 대각간 등 8명의 장군이 이끈 신라 군대는 백제가
한성을 공파한 승리를 타고서 竹嶺을 넘어 진군하여 ‘竹嶺 以外 高峴 以
內’의 10군을 차지하였다.12) 이 지역은 남한강 상류와 북한강 상류지역
에 해당된다. 이리하여 신라는 한강 상류지역을 점령하였다.
삼국연합군의 고구려 공격 기사에 대해 뺷삼국사기뺸 신라본기에는 551
년 3월로, 고구려본기에는 추9월로, 뺷일본서기뺸 흠명기 12년(551)조에는
3월 ‘是歲’조에 나온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고구려의 상황과 연관시켜 볼 때 9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2) 신라의 한강 중·하류 유역 점령

백제를 중심으로 구성된 백제 ․ 신라 ․ 가야 연합군의 고구려 공격 작전


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후 삼국의 역학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이 변화의 중심부에 진흥왕이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뺷삼국

10)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2년조의 “是歲 百濟聖明王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任那野)


往伐高句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 凡六郡之地 遂復故地” 참조.
11) 최종택, 뺷특별전 고구려 한강유역의 고구려 요새뺸, 서울대학교박물관, 2000, 46~53쪽.
12) 뺷삼국사기뺸 권44, 열전4 거칠부전의 “十二年新彌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湌 ․ 比台角湌 ․ 耽
知迊湌 ․ 非西迊湌 ․ 奴夫波珍湌 ․ 西力夫波珍湌 ․ 比次大阿湌 ․ 未珍夫阿湌等八將郡 與百濟
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乘勝取竹嶺以外高峴以內十郡”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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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뺸 진흥왕조에 나오는 다음의 기사이다.

第二十四眞興王 卽位時年十五歲 太后攝政 太后乃法興王之女子…㉠承聖三年


(554)九月 百濟兵來侵於珍城 掠取人男女三萬九千 馬八千匹而去 ㉡先是 百濟欲
與新羅合兵 謀伐高麗 眞興曰 國之興亡在天 若天未厭高麗 則我何敢望焉 乃以此
言通高麗 高麗感其言 與羅通好 而百濟怨之 故來爾13)

이 기사의 내용은 ㉠과 ㉡의 두 개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분은


554년 9월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였다는 것이고 ㉡부분은 신라는 고구
려를 함께 치자는 백제의 요청을 거부하고 도리어 고구려와 통하였다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부분이 앞서므로 ㉡부분의 사건을 먼저 정리해 두
기로 한다.
㉡부분 사건의 핵심은 백제가 신라에게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제
안한 것이다. 제안의 내용은 나와 있지 않지만 이미 한성과 평양 지역을
점령한 성왕의 입장에서 미루어 볼 때 내킨 김에 더 북진하자는 것이었
을 것이다. 이는 성왕이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을 가장 내세웠다는 사실에
서14) 짐작해 볼 수 있다.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대에 백제는 남으로는 영
산강 유역까지를 영역으로 편입하고15) 북으로는 황해도 新溪지역까지를
차지하여16) 전성기를 이루었다. 두 왕 시대의 재현을 꿈꾸었던 성왕은
한강 유역을 되찾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고구려를 밀어붙이려 하였던 것
이다.
그러나 이 북진 작업은 백제만의 힘으로 수행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13) 뺷삼국유사뺸 권1, 기이1 진흥왕조.


14)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2년조의 “聖明王曰 昔我先祖速古王貴須王之世 安羅加羅卓淳旱
岐等 初遣使相通 厚結親好 以爲子弟” 참조.
15) 뺷일본서기뺸 권9, 신공기 49년조.
16) 뺷삼국사기뺸 권24, 백제본기 근구수왕 즉위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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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은 신라에게 함께 고구려를 치자는 제안을 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신라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부 배경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진흥왕이 ‘眞興曰 國之興亡在天 若天未厭
高麗 則我何敢望焉’이라고 한 말에서 보듯이 고구려가 비록 한강유역을
빼앗겼다 하더라도 濟·羅의 힘만으로 고구려를 몰아붙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섣불리 고구려 영내로 깊숙이 들어갔다가는 낭
패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시기 신라는 중국으로 곧장 갈
수 있는 항로를 확보하는 것이 절실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해안 지
역을 차지해야 한다. 그렇지만 신라가 백제를 도와 북진을 하더라도 서
해안 지역은 당연히 백제가 차지할 것이므로 신라의 소망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다. 셋째는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
예상되는 백제의 비약적인 성장이 주는 부담이다. 이제까지 신라는 고구
려와 백제 사이에서 세력 균형의 錘로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해 왔다. 그
러나 백제의 盛勢는 이러한 힘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
한 판단 하에 신라는 백제의 제안을 거부하였고, 나아가 백제의 계획을
고구려에 통보하였다.
한편 이 시기 고구려는 남방전선으로부터는 백제 ․ 신라 ․ 가야 연합군의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고, 서북지방으로부터는 돌궐의 가중된 압박을
받고 있었다.17) 이러한 때에 신라가 접근해 온 것은 고구려로서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었다. 신라와 通和하게 되면 신라를 백제로부터 떼놓을 수
있게 되고 결과적으로 남방 전선에 대한 근심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리하여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화호 관계가 맺어졌다. 이 화호관계에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신라가 한강 하류를 점령할 때 고구려가 신라의 배
후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7) 노태돈,『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402~408쪽.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과 巡狩 51

신라가 고구려와 通和한 시기는 자료 ㉡부분의 ‘先是’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 先是는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한 553년 이전이다. 그런데
뺷일본서기뺸에 의하면 552년 5월에 백제 성왕은“高麗與新羅通和幷勢 謀
滅臣國與任那”라18) 하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신라와 고구려의 통화는
551년 9월 이후 552년 5월 이전의 어느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와 화호관계를 맺은 신라는 백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였
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백제는 왜에 원병을 요청하여19) 대응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화급하게 전개되는 신라와 고구려의 ‘通和幷勢’를 견디기
어려웠다. 이에 백제는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애써 점령한 한성과 평
양지역을 포기하였다.20) 이로 말미암아 백제는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백제군이 물러난 후 신라는 漢城에 입성하였다.21) 그러면 평양[양주]
지역은 어떠하였을까.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두 나라가
공동의 군사작전을 하였을 때 전후 처리도 협의하기 마련이라는 점이
다.22) 645년에 신라 김춘추와 당나라 이세민이 나당동맹을 맺으면서 백
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합의한 것
이 그 사례가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한성은
신라가, 평양은 고구려가 차지하는 것으로 사전 합의가 이루어졌고, 이러

18)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3년조.


19)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3년조의 “高麗與新羅通和幷勢 謀滅臣國與任那 故謹求請救兵
先攻不意…”및 흠명기 14년조의“今年忽聞新羅與狛國通謀云 百濟與任那頻詣日本 意謂
是乞軍兵 伐我國歟 事若實者 國之敗亡可企踵而待 先日本兵未發之間 伐取安羅 絶日本
路…”참조.
20)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3년조의“是歲 百濟棄漢城與平壤”참조.
21)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3년조의“是歲 百濟棄漢城與平壤 新羅因此入居漢城 今新羅之
牛頭方 尼彌方(地名未詳)”참조.
22) 뺷삼국사기뺸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상 大王報書의“我平定兩國 平壤已南百濟土地 並乞你
新羅 永爲安逸”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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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합의에 따라 신라는 한성에, 고구려는 평양에 입성하지 않았을까 한


다.23)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이곳에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 김무력을
군주로 임명하였다.24) 그 시기는 553년이었다.25)

(3) 관산성 전투와 한강 유역 확보26)

1) 백제의 반격과 百合野塞 戰鬪

신라와 고구려의 압박으로 한강유역을 포기한 성왕은 553년에 왕녀를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다. 성왕이 왕녀를 보낸 것은 신라와 고구려가
힘을 합쳐 계속 압박을 가해올 경우 그 압박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
하고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방편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때문에 이때 보
내진 왕녀는 인질의 성격을 지녔다. 진흥왕은 이 왕녀를 小妃로 삼았
다.27) 여기에는 백제를 더 이상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는 판단이 작용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성왕으로서는 필생의 작업으로 추진하였던 한강유역의 회복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성왕은 한강 유역 재탈환 작전을 단행하
였다.28) 이 작전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단계는 고구려를 공격
하는 것이다. 이 전쟁은 백합야새에서 이루어졌다. 백합야새는 백제 왕자

23) 노중국,「한성백제의 몰락과 수도 이전」,『향토서울』64, 서울시사편찬위원회, 2004.


24) 뺷삼국사기뺸 권5, 신라본기 진흥왕 14년조의“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湌武力爲
軍主”참조.
25)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3년조에는 552년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난다.
26) 관산성 전투에 대해서는 김갑동,「신라와 백제의 관산성 전투」,『백산학보』52, 신형식박
사회갑기념논총 신라사의 재조명, 1999; 전덕재,「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신
라문화』34, 2009; 김주성,「성왕의 한강유역 점령과 상실」,『백제사상의 전쟁』, 2000 참조.
27) 뺷삼국사기뺸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4년조의“冬十月 娶百濟王女爲小妃”참조.
28) 이때 백제는 왜로부터 良馬 2필, 同船 2척, 弓 50張, 箭 50具 등의 군사 지원을 받았다
이에 대해서는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4년조 참조.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과 巡狩 53

여창이 고구려와 대결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쌓은 것이


다.29) 553년 10월에 일어난 이 전투에서 양국이 동원한 군대는“發國中
兵”또는“覆如靑山 旌旗充滿”이라 한 표현에서 보듯이 규모가 컸다.30)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승리를 거두었고 고구려군은 東城山 위로 쫓겨 갔
다.31)
백제와 고구려가 공방을 벌이고 있을 때 신라는 어떠한 입장을 취하였
을까. 이를 추론하는데 단서가 되는 것이 뺷구당서뺸 신라전의 다음의 기
사이다.

乃問其使爲怨所由 對曰㉠先是百濟往伐高麗 ㉡(高麗)詣新羅請救 新羅發兵大破


百濟國 ㉢因此爲怨 每相攻伐 ㉣新羅得百濟王殺之 怨由此始32)

이 기사에서 ㉠부분은 백제가 고구려를 쳤다는 것이다. ㉡부분은 고구


려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신라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구원군을 보내
백제군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부분은 이로 말미암아 신라와 백제는 매
번 서로 攻伐을 하였다는 것이다. ㉣부분은 그 후에 신라가 백제왕을 붙

29) 백합야새를 황해도 황주의 蒜山으로 비정하는 견해(岩波講座 뺷日本書紀뺸 下, 岩波書店,


106쪽 頭注 8)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고구려가 平壤[楊州]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30) 뺷신당서뺸 권220, 동이열전 제145 신라전에는“悉兵”으로 나온다.
31)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4년조의“冬十月庚寅朔己酉 百濟王子餘昌(明王子威德王也) 發
國中兵向高麗國 築百合野塞 眠食軍士 是夕觀覽鉅野墳腴 平原瀰迤 人跡罕見 犬聲蔑聞.俄
而儵忽之際 聞鼓吹之聲 餘昌乃大驚 打鼓相應 通夜固守.凌晨起見 曠野之中 覆如靑山 旌
旗充滿 會明有着頸鎧者一騎 揷鐃者二騎 珥豹尾者二騎幷五騎 連轡到來 問曰小兒等言 於
吾野中 客人有在 何得不迎禮也 今欲早知 與吾可以禮問答者姓名年位 餘昌對曰 姓是同姓
位是扞率 年二十九矣 百濟反問 亦如前法而對答焉 遂乃立標而合戰 於是 百濟以鉾 刺墮高
麗勇士於馬斬首 仍刺擧頭於鉾末 還入示衆 高麗軍將憤怒益甚 是時 百濟歡叫之聲 可裂天
地 復其偏將 打鼓疾鬪 追却高麗王於東聖山之上”참조.
32)『구당서』권199, 상 열전149 동이 신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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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 죽였다는 것이다.33) 이 가운데 ㉠부분은 내용상으로는 백제와 고구


려 사이에 벌어진 백합야새 전투와 연관된다. 이 전투 때 신라의 동향을
보여주는 것이 ㉡부분이다. 이 문장에서 신라에 구원을 요청한 주체를
백제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바로 뒤에 신라가 백제국을 대파하였
다는 것과 연계시켜 보면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신라에 구원을 요청한
주체는 고구려로 보아야 한다. 신라는 고구려의 요청에 따라 군사를 지
원해 백제군을 대파하였다.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뺷일본
서기뺸에는 ‘高麗與新羅通和幷勢’로 표현하였다.

2) 백제의 管山城 함락

백합야새 전투에서 백제는 고구려군을 물리쳤지만 신라의 고구려 지원


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성왕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준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성왕은 가야군과 왜군도 끌어들이는 작업을 추진하
였다. 백제가 가야군을 끌어들였다는 것은 ‘백제왕 明膿이 加良과 함께
관산성을 공격하였다’고 한 기사에서34) 확인된다. 가야의 군대 파견은 2
차례에 걸쳐 열린 ‘사비회의’에서 백제와 보조를 같이 하기로 결정한 것
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백제는 554년에 왜에 사신을 보내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왜는 군대 1천명과, 말 100필, 배 40척을 보낼 것을 약속하
면서 동시에 선진문물을 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을 받아들여
백제는 왜가 553년에 요청한 五經博士와 醫博士, 易博士, 曆博士 등과 採
藥師, 樂人 등을 보내주었다.35)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有至臣이 거느린

33) 이 문장을“지난 날 백제가 고구려를 치러 갈 적에 신라에게 구원을 청하였는데 신라는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국을 쳐부수었다.”고 한 견해(서영수,『중국정사 조선전 역주』Ⅱ,
국사편찬위원회, 1988, 319쪽)도 있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34) 뺷삼국사기뺸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조에“百濟王明襛與加良 來攻管山城”라 한 기사
참조.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과 巡狩 55

왜군은 554년 5월에 백제로 출발하여 6월에 도착하였다.36)


가야군과 왜군의 지원을 얻게 된 백제는 554년 신라에 대한 공격을 단
행하였다. 양 세력의 공방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첫째 단계는 백제군
이 관산성37)을 공격하여 신라군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관산성은 충
북 옥천이다. 이 전투는 553년 12월에 일어났다. 이때 백제군은 선봉장
은 東方領인 物部莫奇武連이 맡았고, 신라군은 군주인 角干 于德과 耽知
가 거느리고 있었다. 이 전투는 각간 우덕과 탐지 등이 ‘失利’하였다고
한 것에서38) 보듯이 백제군이 승기를 잡았다. 그리하여 백제군은 관산성
을 함락시켰다. 이 전쟁에서 신라가 입은 피해가 매우 컸다. 피해의 규모
는 뺷삼국유사뺸에 ‘承聖三年(554)에 백제가 신라의 珍城을 공격하여 남녀
3만 9천명과 말 8천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고 한 기사에서39) 추론해 볼
수 있다.
이 전투가 일어난 날짜에 대해 뺷삼국유사뺸에는 9월로, 뺷일본서기뺸에
는 12월로 나와 차이가 난다. 필자는 이때 전투가 벌어진 곳이 한 곳만
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9월에는 진성에서 전투가 있었고 12월에는 관산성
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렇게 보면 백제는 554년
9월에 진성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12월에 관산성 전투에
서도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와 신라가 관산성과 진성에서 공방을 벌리고 있을 때 고구려의 동
향은 뺷일본서기뺸에 ‘지금 고구려가 신라와 함께 힘을 쓰고 있어 공을 이

35)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5년 2월조.


36)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15년 하5월조 및 동12월조.
37)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5년조에는 函山城으로 나온다.
38) 뺷삼국사기뺸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조의“百濟王明襛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
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참조.
39) 뺷삼국유사뺸 권1, 기이1 진흥왕조의“第二十四眞興王 卽位時年十五歲…承聖三年九月 百
濟兵來侵於珍城 掠取人男女三萬九千 馬八千匹而去”참조.
56 제81호

루기가 어렵다’고 한 성왕의 말에서40)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말은 고구


려와 신라가 군사적으로 보조를 같이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가
신라를 지원한 구체적인 모습은 분명히 하기 어렵지만 고구려의 親신라
적 움직임은 백제의 운신에 일정한 제약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3) 신라의 諜報 활동과 久陀牟羅塞 大會戰

① 신라의 諜報 활동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백제는 신라에 대한 두 번째의 공격을 시도하
였다. 이 공격을 위해 왕자 餘昌은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耆老들은 반대하였다. 그렇지만 여창은 이들의 반대를 물리치
고 직접 선봉에 나섰다.41) 이때 왜는 군사 1천 명과 말 1백 필, 이를 수
송할 배는 40척을 지원하였다.42) 한편 가야에 대해 백제는 1만 명의 군
대를 별도로 보내 합동작전을 하였다.43) 이리하여 백제-가야-왜군으로 구
성된 공격군은 신라로 진격해 들어가 구타모라새를 쌓고 영채를 세웠
다.44)
백제군의 공격에 각간 우덕과 탐지가 거느린 군대는 밀렸다. 이에 진
흥왕은 新州의 군대를 원군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신주 군주는 金武力이
었다. 김무력이 거느린 군대가 합세함으로써 양군의 대결은 우열을 가리
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진영 사이에 ‘長苦行陣’에서 보듯이 지구
전적인 대결 양상이 전개되었다.

40)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5년 12월조의“別奏 若但斯羅者 有至臣所將軍士 亦可足矣 今


狛與斯羅 同心戮力 難可成功”참조.
41)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5년 12월조의“餘昌謀伐新羅 耆老諫曰 天未與 懼禍及 餘昌曰
老矣 何怯也 我事大國 有何懼也 遂入新羅國 築久陀牟羅塞…”참조.
42)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5년 정월조의“卽令遣助軍數一千 馬一百匹 船四十隻”참조.
43)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5년 동12월조의“又奏臣別遣軍士萬人助任那”참조.
44) 구타모라새의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관산성과는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과 巡狩 57

이러한 대치 상황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상대국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신속하게 얻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유효한 정보를 얻는 방법으
로서 가장 많이 활용된 것이 첩자이다. 신라는 물론 백제와 고구려도 상
대국에 첩자를 파견하였다.45) 신라의 경우 660년 당나라가 신라와 동맹
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더 나아가 신라를 몰래 치려고 하였지만 신라
가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였다고 한 것을46) 들 수 있다. 이
는 첩보의 성과인 것이다.
첩보 활동에는 逆情報를 흘려 상대편의 판단을 흐리게 하기도 하였다.
김유신이 649년에 백제 장군 殷相이 석토성 등 7성을 공격하면서 道薩城
아래에서 잠시 쉴 때 水鳥가 동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군사들에게
금일 百濟人 첩자로 올 것이므로 거짓으로 모른 채 하며 誰何하지 말도
록 한 후 軍中에게 군령을 내리기를 ‘내일 원군이 올 것이니 원군이 오면
결전을 하자’고 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김유신의 역정보였지만 백제
첩자는 이를 그대로 은상에게 보고하였다. 은상은 그 첩보에 대해 의심
을 하면서도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이에 신라군의 공격을 받아 크
게 패하고 말았다.47)
상대국의 정보를 정확하게 수집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가장 확실하
다. 하나는 파견된 첩자가 상대국의 왕이나 실권자의 신임을 받도록 하
는 것이다. 그 사례로는 고구려 間諜僧 道琳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백제
에 파견된 도림은 바둑을 미끼로 개로왕의 신임을 얻은 후 개로왕으로
하여금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동시다발적으로 일으키도록 하여 백제의 재
정을 고갈시키고 민력을 피폐하게 하였다. 그리고 온갖 정보를 가지고

45) 삼국시기의 첩보 활동에 대해서는 김복순,「삼국의 첩보전과 승려」,『가산 이지관스님


화갑기념논총』, 1992 참조.
46) 뺷삼국사기뺸 권42, 열전2 김유신 중의“唐人滅百濟 營於泗沘之丘 陰謀侵新羅 我王知之
召群神問策”참조.
47) 뺷삼국사기뺸 권42, 열전2 김유신 중.
58 제81호

고구려로 되돌아가 보고하였다.48) 그의 첩보 활동으로 백제는 한성이 함


락되고 개로왕이 잡혀 죽는 큰 불운을 맞이하였다.
다른 하나는 상대국의 要人을 자신 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사례로
는 신라 김유신이 백제의 좌평 任子를 포섭한 것을 들 수 있다. 665년 신
라 부산현령 租未坤은 백제의 포로로 잡혀 좌평 任子의 家奴가 되었다.
조미곤은 성실하게 일하여 임자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백제의 백성이
되었으니 마땅히 國俗을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곳을 다니다가 신라
로 와서 김유신에게 백제의 사정을 알렸다. 김유신은 그의 忠直함을 믿
고 신라가 망하면 자신이 임자에게 기대고 백제가 망하면 임자가 자신에
게 기대도록 하는 책무를 조미곤에게 주었다. 다시 백제로 돌아간 조미
곤은 임자에게 김유신의 제안을 알렸고 마침내 임자가 이 제안을 받아들
이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49) 이후 임자는 ‘遂來說及中外之事 丁寧詳悉’
이라 한 기사에서 보듯이 백제의 중요한 정보를 상세하게 김유신에게 제
공하였다. 당시 임자는 좌평의 자리에 있으면서 政事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50) 때문에 임자의 정보는 정확한 고급 정보이면서 최신의 정
보였다. 이를 통해 신라는 백제를 병탄할 계획을 더욱 서둘렀다.51)

48) 뺷삼국사기뺸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조.


49) 뺷삼국사기뺸 권42, 열전2 김유신 중의“永徽六年(655)乙卯秋九月 庾信入百濟 攻都鄙川城
克之…先是租未坤級湌爲夫山縣令 被虜於百濟 爲佐平任子之家奴 從事勤恪 曾無懈慢 任子
憐之不疑 縱其出入 乃逃歸 以百濟之事 告庾信 庾信知租未困忠正而可用 乃語曰 吾聞任子
專百濟之事 思有以與謀而末由 子其爲我 再歸言之 答曰 公不以僕爲不肖 而指使之 雖死無
悔 遂復入於百濟 告任子曰 奴自以爲 旣爲國民 宜知國俗 是以出遊累旬不返 不勝犬馬戀主
之誠 故此來耳 任子信之不責 租未坤伺間報曰 前者畏罪不敢直言 其實往新羅還來 庾信諭
我 來告於君曰 邦國興亡 不可先知 若君國亡 則君依於我國 我國亡則吾依於君國 任子聞之
嘿然無語 租未坤惶懼而退 待罪數月 任子喚而問之曰 汝前說庾信之言 若河 租未坤驚恐祢
代 如前所言 任子曰 爾所傳 我爾悉知 可歸告之 遂來說及中外之事 丁寧詳悉 於是踰急幷呑
之謀”참조.
50) 뺷삼국사기뺸 권42, 열전2 김유신 중의“吾聞任子專百濟之事”참조.
51) 이에 대해서는 노중국,「7세기 신라와 백제와의 관계」,『2010 신라국제학술대회 논문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과 巡狩 59

554년 전쟁에서도 첩보 활동은 여전히 중요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주


목되는 것이 성왕이 최전선에 나가 있는 아들 餘昌을 위문하기 위해52)
50여 步騎를 거느리고53) 餘昌의 진지로 향하다가 매복한 신라군의 공격
을 받아 붙잡혀 죽었다는 사실이다. 신라가 성왕이 가는 길목에 군사를
매복시킨 것은 성왕의 이동 경로와 이동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런데 왕의 이동 경로와 시간은 중요한 비밀 사항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신라가 성왕의 이동 경로와 이동 시간을 정확히 파악하여
군대를 매복시켰다는 것은 첩보자의 공로이다. 왕과 관련한 사항이 중요
한 정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첩보자는 성왕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왕의 신임을 받는 자라고 할 수 있다.54) 이렇게 보면
이 시기에 신라는 백제의 유력 귀족이면서 왕의 신임을 받는 자와 연통
하였고, 그는 수시로 중요한 정보를 신라에 전해주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김무력은 성왕의 동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② 구타모라새 전투에서의 大勝과 한강유역 확보


성왕의 동향을 파악한 김무력은 성왕을 잡기 위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첩보에 따라 군사를 매복하기로 한 김무력은 이 임무를 裨將인 삼년산군
고간 都刀에게 맡겼다. 명령을 받은 도도는 성왕이 지나갈 길목에 군대
를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이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성왕은 50餘騎만을
거느리고 지나다가 신라 매복군의 급습을 받아 사로잡히고 말았다. 도도

집』4, 경주시 ․ 신라문화유산연구원, 2011, 23~24쪽 참조.


52)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5년 12월조의“其父明王憂慮餘昌長苦行陣 久廢眠食 父慈多厥
子孝希成 乃自往迎慰勞”참조.
53) 뺷삼국사기뺸 권26, 백제본기 성왕 32년조의“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王”참조.
54) 노중국,「7세기 신라와 백제와의 관계」,『2010 신라국제학술대회 논문집』4, 경주시 ․ 신라
문화유산연구원, 2011, 24~25쪽.
60 제81호

가 지휘한 매복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뺷일본서기뺸에는 성왕


을 잡아 죽인 사람은 佐知村 司馬奴 苦都로 나온다.55) 苦都와 都刀는 이
름이 비슷하고 또 성왕을 사로잡았다는 행동도 같다. 이를 근거로 두 사
람을 동일 인물로 보는 해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도도와 고도는 별개의 인물로 파악하고자 한다.
첫째로 奴 또는 賤奴라는 표현이 가지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두 가지
로 사용된다. 하나는 실제의 노(천노)를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노가 아닌 사람이 윗사람에 대해 자신을 낮추어 표현하는 경우이다.
후자의 사례로는 <모두루묘지명>에 대사자 모두루가 고구려 광개토대왕
에 대해 자신을 奴客으로 표현한 것을 들 수 있다.56) 그런데 이 문장에
서 노는 고도가 스스로를 낮추어 일컬은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고
도를 부르면서 한 말이다. 이는 고도가 노(천노)였음을 보여준다. 그가
노가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이 그렇게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도도는 高干이라는 外位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외위는
비록 지방민에게 주어진 관등이지만 노비 신분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아
니다. 따라서 고간이란 외위를 가진 도도는 奴일 수가 없다. 셋째는 도도
의 공식적인 직책이 裨將이었다는 사실이다. 비장은 하급 무관이지만 천
노가 맡는 직책은 아니다. 이는 김유신의 아들 元述이 비장으로서 石門
전투에 참여하였다는 사실,57) 진골귀족 출신인 화랑 斯多含이 貴幢裨將

55)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5년조의“新羅聞明王親來 悉發國中兵 斷道擊破 是時新羅謂佐


知村司馬奴苦都(更名谷智)曰 苦都賤奴也 明王明主也 今使賤奴殺明主 冀傳後世 莫忘於口
已而 苦都乃獲明王 再拜曰 請斬王首 明王對曰 王頭不合受奴手 苦都曰 我國法違背所盟 雖
曰國王 當受奴手(一本云明王乘踞胡床 解授佩刀於谷智令斬) 明王仰天大息涕泣 許諾曰 寡
人每念 常痛入骨髓 願計不可苟活 內延受斬 苦都斬首而煞 堀坎而埋(一本云 新羅葬埋明王
頭骨 而以禮送餘骨於百濟 今新羅王埋明王骨於北廳階下 名此廳曰都堂)”참조.
56) 한국고대사회연구소,『역주 한국고대금석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3.
57) 뺷삼국사기뺸 권43, 열전3 김유신 하의“庾信子元述爲裨將 亦欲戰死 其佐淡凌止之曰 大丈
夫非死之難 處死之爲難也 若死而無成 不若生而圖後效”참조.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과 巡狩 61

에 임명되어 대가야 정벌에 선봉으로 나선 사실58) 등에서 입증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도도는 삼년산군의 재지 유력자 출신이고, 고
도는 천노로 파악하는 바이다. 삼국시대에는 奴僕도 주인을 따라 전장에
나갔다. 鄕邑과 族姓을 모르는 丕寧子가 아들 擧眞과 노비 合節을 데리
고 전장에 나가서 장렬하게 전사한 것이59) 그 사례가 된다. 따라서 천노
로 표현된 고도도 주인을 따라 戰場에 와서 주인의 말을 돌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60)
이렇게 볼 때 이 매복 작전은 군주 김무력이 총체적으로 계획하였고,
고간 도도는 매복군을 이끌고 가서 기습 공격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천노
고도는 성왕을 사로잡아 죽이는 공로를 세운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성
왕을 사로잡아 죽인 군주 김무력은 다음날 여창의 군대를 포위 공격하였
다. 성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백제군은 대패하였고, 선봉
장으로 나섰던 여창은 겨우 포위를 뚫고 나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61)
이로써 진흥왕은 한강유역을 완전히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이때 신라가 거둔 전과에 대해 뺷삼국사기뺸 김유신전에는 1萬餘級을
참수한 것으로,62) 진흥왕본기에는 좌평 4명과 사졸 2만9천6백명을 죽였

58) 뺷삼국사기뺸 권44, 열전4 사다함전의“時斯多含年十五六 請從軍 王以幼少不許 其請勤而


志礭 遂命爲貴幢裨將 其徒從之者多”참조.
59) 뺷삼국사기뺸 권47, 열전7 비령자전의“丕寧子不知鄕邑族姓 眞德王元年丁未 百濟以大兵
來攻茂山.甘勿.桐岑等城…丕寧子再拜云 今於稠人廣衆之中 獨以事屬我 可謂知己矣 固當以
死報之 出謂奴合節曰 吾今日上爲國家 下爲知己死之 吾子擧眞 雖幼年有壯志 必欲與之俱
死 若父子倂命 則家人其將疇依 汝其與擧眞 好收吾骸骨 歸以慰母心…擧眞曰 見父死而苟
存 豈所謂孝子乎 卽以劒擊折合節臂 奔入敵中戰死 合節曰 私天崩矣 不死何爲 亦交鋒而
死”참조.
60)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후 사정에서 미루어 볼 때 都刀였을 가능성이 크다.
61) 뺷일본서기뺸 권19, 흠명기 15년조의“餘昌遂見圍繞 欲出不得 士卒遑駭 不知所圖 有能射
人筑紫國造 進而彎弓占擬 射落新羅騎卒…由是餘昌及諸將等得從間道逃歸”참조.
62) 뺷삼국사기뺸 권41, 열전1 김유신 상의“祖武力爲新州道行軍摠管 嘗領兵獲百濟王及其將四
人 斬首一萬餘級”참조.
62 제81호

고 한 필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고 나온다.63) 참수된 백제군의 수가


다른 것은 김유신 열전의 숫자는 김무력이 거느린 新州軍이 참수한 숫자
를, 신라본기의 숫자는 신라군이 이룩한 전공을 모두 합하여 기록한 때문
일 것이다. 戰功의 기록에는 과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번 패배는 백제
로서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그 결과 한강유역을 회복하여 국세를 떨치려
던 성왕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백제와 신라가 대회전을 벌린 시기에 대해 뺷삼국사기뺸에는 554년 추7
월로, 뺷일본서기뺸에는 12월로 나와 5개월의 차이가 난다. 필자는 이 전
투가 일회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백제와 신라의 전투는 554년
7월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이 종결된 것은 12월이었는데 뺷삼국사기뺸에서
는 이 모든 과정을 554년 7월조에, 뺷일본서기뺸에서는 12월조에 수록한
것으로 파악하는 바이다.

3. 한강유역 경영과 순수

(1) 진흥왕의 娘城 巡幸과 그 의미

뺷삼국사기뺸 진흥왕기에 의하면 진흥왕은 재위 37년 동안 두 번의 순행


을 하였다. 하나는 551년 3월의 娘城으로의 순행이고, 다른 하나는 555
년의 北漢山 순행이다. 두 순행은 모두 신라의 한강유역으로의 진출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는 먼저 낭성 순행의 의미에 대해 정리해 두기로 한다.
진흥왕은 551년 정월에 연호를 開國으로 고쳤다. 뺷삼국사기뺸에 의하

63) 뺷삼국사기뺸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조의“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襛與加良 來攻


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
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
無反者”참조.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과 巡狩 63

면 진흥왕은 540년에 즉위하였는데 이때의 나이는 7세였다.64) 따라서


551년은 진흥왕이 成年이 되는 해이다. 성년이 되자 진흥왕은 섭정을 거
두고 친정을 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연호를 개국으로 고친 것이다. 연호
를 개칭한 후 진흥왕은 3월에 낭성으로 순행하였다.
낭성으로의 순행은 진흥왕이 친정을 선포한 이후 제일 먼저 한 일이었
다. 이 순행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왕이 낭성으로 가서 한 일들에서 추론
해 볼 수밖에 없다. 진흥왕이 낭성에서 한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于
勒과 그 제자 尼文을 만나 가야금과 그 악을 연주하게 한 것이다. 우륵은
가야금을 만들고 12곡을 작곡한 대가야의 유명한 악사였다. 그는 가실왕
을 도와 음악을 통해 연맹체를 결속시키기 위해 진력하였다. 그렇지만
가실왕이 돌아간 후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將亂] 가야금을 가지
고 제자 이문과 함께 신라로 망명하였다. 진흥왕은 그의 망명을 받아들
여 國原에 안치하였다.65) 진흥왕은 이듬해에 階古, 法志, 萬德 3인으로
하여금 우륵에게서 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계고에게는 琴을, 법지에
게는 歌를, 만덕에게는 舞를 가르쳐 업을 이루게 하였다. 진흥왕으로부터
우대를 받은 우륵은 음악을 통해 신라의 興隆을 도모하는데 일조하였다.
그 결과 가야금이 오늘날에까지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66)
다른 하나는 이 달에 거칠부 등 8장군이 거느린 군대가 고구려 공격을
단행하였다는 점이다.67) 거칠부 등이 출동할 때 진흥왕이 낭성에 있었는

64) 뺷삼국사기뺸 권4, 신라본기 진흥왕 즉위년조.


65) 뺷삼국사기뺸 권32, 잡지1 악 가야금조의“後 于勒以其國將亂 攜樂器 投新羅眞興王 王受
之 安置國原”참조.
66) 우륵과 가야금에 대해서는 이정숙,「진흥왕대 우륵 망명의 사회 정치적 의미」,『이화사
학연구』30, 2003; 양기석,「국원소경과 우륵」,『충북사학』16집, 2006; 노중국 ․ 주보돈 ․
이영호 ․ 홍보식 ․ 김성혜 ․ 이진원 ․ 원등철,『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 대가야
박물관 ․ 계명대학교 학국학연구원, 2006 참조.
67) 뺷삼국사기뺸 권44, 열전4 거칠부전의“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湌…未珍夫阿湌
等八將郡 與百濟侵高句麗…”참조.
64 제81호

지 아니면 순행을 마치고 귀경한 후였는지에 대해 분명히 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낭성 순행과 고구려 공격이 같은 달이라는 사실에서 미루어 볼
때 진흥왕은 낭성에 있지 않았을까 한다.
낭성으로의 순행과 거칠부의 행군을 연계시켜 보면 다음의 몇 가지 사
항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진흥왕이 순행하면
서 각 지역의 병마를 살피고 명령만 내리면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군사 출동에 따른 민심의 동요를 잠
재우기 위해 민을 다독거리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진흥왕은 우륵을 만
나 음악을 연주하게 함으로써 예악 정치를 통해 평화적으로 나라를 다스
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을 것이다. 셋째로는 낭성에 주둔하여 출동하
는 군대를 독려하고 후방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이는 660년에 태종
무열왕이 백제를 공격할 때 손수 남천정까지 갔다가 今突城에 주둔한
후68) 김유신으로 하여금 백제 공격에 나서도록 한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
다.69) 따라서 진흥왕의 낭성으로의 순행은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2) 新州의 설치

551년 백제, 가야군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한 신라는 竹嶺 이외 高


峴 이내의 10군을 차지하였다. 이 10군을 다스리기 위해 신라가 어떤 조
치를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따라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는 종래 고구려가 행했던 지배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을까 한
다. 그러나 진흥왕은 553년에 한강하류 유역까지를 모두 차지한 후에는

68) 뺷삼국사기뺸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조. 금돌성은 상주의 백화산성에 비정되고 있
다. 금돌성이 백화산성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정영호,『상주지구고적조사보고서』, 단국대
학교 출판부, 1969 참조.
69) 이에 대해서는 노중국,『백제부흥운동사』, 일조각, 2003 참조.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과 巡狩 65

한성을 주치로 하는 新州를 곧장 설치하고 김무력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이처럼 신주 설치를 신속하게 한 것은 진흥왕이 한강하류 지역까지를 점
령한 후 이곳에 누구를 보내 다스릴 것인가에 대해 미리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조치를 취한 것을 보여준다.
신라가 영역을 확장해 나가면서 설치한 지방통치 조직 가운데 가장 중
심이 된 것이 州이다. 진흥왕대에 새로운 점령지에 설치된 주는 경북 상
주시의 上州, 경북 개령면의 靑州, 경남 창령의 比斯伐州 정도이고 대다
수는 군이나 현으로 편제되었다.70) 이는 州로 편제된 곳이 정치적 군사
적으로 비중이 높은 지역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주의 경우 백제와
고구려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곳이지만 역으로 이곳을 잘 지
키면 백제와 고구려 모두를 견제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신주는 다른 어
느 지역보다도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래서 신주는 경북 개령에 둔 청주,
경남 창녕에 둔 비사벌주, 강원도 고성에 둔 비열홀주와 더불어 사방군주
로 불렸다.71) 신주를 설치함으로써 신라는 한강 유역이 가지는 경제적
이점과 더불어 중국으로 직접 통할 수 있는 교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는 이후 신라의 비약적 발전에 토대가 되었다.

(3) 북한산 巡幸과 封疆拓定

554년 구타모라새 전투에서 승리한 진흥왕은 이듬해인 555년 10월에


북한산으로 순행을 하였다. 이 순행의 목적은 封疆을 拓定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553년 당시 평양[양주]에는 고구려군이 주둔하

70) 진 ․ 변한의 국 가운데 금관국은 금관군으로, 소문국은 문소군으로, 압량국은 장산군으로,


골화국은 임천현으로, 음즙벌국은 음즙화현으로, 아시량국은 함안군으로, 대가야국은 대
가야군으로 편제된 것이 그 예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뺷삼국사기뺸 권34, 지리1 양주, 강
주조 참조.
71)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 참조.
66 제81호

고 있었으므로 한강 이북 지역은 신라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555년


에 진흥왕은 북한산으로 순행하였다. 이는 555년 당시에 한강 이북의 북
한산 지역이 이미 신라의 영역이 된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진흥왕은 어떻게 하여 2~3년 사이에 평양[양주]지역까지를 영
역으로 확보할 수 있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553년 일어난
백합야새 전투와 554년에 일어난 구타모라새 전투의 결과이다. 백합야새
전투는 매우 치열하였지만 고구려군은 패배하였다. 반면에 신라는 구타
모라새 전투에서 백제를 완패시켰다. 이렇게 백제를 제압한 신라는 내킨
김에 고구려가 차지한 평양성 지역까지를 점령하지 않았을까 한다.
진흥왕이 이렇게 군사행동을 할 수 있었던 조건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백합야새 전투에서의 패배로 고구려군은 사기가 꺾
여 있었을 것이라는 판단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군도 신라의 배후를 위협
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백제가 신라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는 성왕의 시신 처리 문제도 일정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신라가 성왕의 시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백제와 교섭할 때 유리한 측면
이 많았다. 이는 전연이 고구려를 공격한 후 미천왕의 시신을 가지고 가
서 고구려에 신속을 요구한 사실에72) 의해 방증이 되리라 본다. 반면에
백제로서는 성왕의 시신을 돌려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백제
는 신라와 막후교섭을 하여 두골을 제외한 시신을 돌려받는 것으로 이
문제를 매듭지었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백제가 신라의 배후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신라는 배후에 대한
염려 없이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평양 지역까지를 차지하
는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73)

72) 뺷삼국사기뺸 권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3년조.


73) 이렇게 보면 진흥왕은 이때 평양 지역뿐만 아니라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 함흥지역까지
진격하는 작전을 세웠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서는 후일 검토해 보기로 한다.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과 巡狩 67

이렇게 보면 북한산으로의 순행 목적인 封疆拓定은 결국 고구려와의


국경선을 긋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한산으로 순행하여 봉강을 척정한
진흥왕은 18년(557)에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74) 그 치소
는 평양[양주]이었다. 진흥왕이 한강 이북으로 주치를 옮긴 것은 척정한
봉강을 보다 굳건히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하겠다.

(4) 褒賞과 恩典의 賜與

순행은 제왕이 지역의 민심도 訪採하고, 민들의 애로 사항도 듣고, 지


방관의 잘잘못을 살피기 위해 한다.75) 북한산비 Ⅴ행에“巡狩管境 訪採
民心 以欲勞賚”라는 구절이 이를 잘 보여준다. 순행 과정에서 제왕은 순
행지역 민들에게 일정한 은전을 내리기도 하였다. 진흥왕의 북한산 순행
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북한산비 Ⅷ행에는“忠信精誠이 있는 자에
게는 포상을 한다”고 기록하였다.76) 은전의 구체적인 내용은 진흥왕이
북한산 순행 후 귀경하면서 지나가는 주군에 1년의 租調를 면제해 주는
것과 사면령을 내려 二罪 이하의 죄수들을 모두 방면해 주는 것이었다.
순행이 아니더라도 국왕은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흉년이 들어 어려움
에 처한 민들에게 종종 은전을 내렸다. 鰥寡孤獨에게 물건을 차등있게
지급하였다든가, 가뭄이나 홍수가 든 지역에 조세를 감해주는 것 등이 그
것이다. 그러나 진흥왕이 한성을 순행하면서 내린 은전은 다른 사례와
비교해 볼 때 매우 크다. 그 배경은 신주 지역의 상황과 연계시켜 살펴보
아야 한다.

74) 뺷삼국사기뺸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8년조의“廢新州 置北漢山州”참조.


75) 순행의 의미에 대해서는 김영하,「신라시대 순수의 성격」,『민족문화연구』14, 1979 참조.
76) 북한산비 Ⅴ행의 일부 글자는 보이지 않지만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에 의해 복원할 수 있
다. 북한산비의 판독문은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북한산 진흥왕순수비」,『역주 한국고
대금석문』제2권(신라1 ․ 가야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참조.
68 제81호

신주 지역은 551년 이후 554년에 이르기까지 전란에 휩싸였다. 551년


에는 백제, 신라, 가야 연합군과 고구려군이 싸우면서 전장 터가 되었고,
553년에는 신라군이 한강하류 지역으로 진격하면서 역시 전장 터가 되었
다. 또 554년에 관산성 전투에서 고전하는 신라군을 지원하기 위해 김무
력이 州兵을 이끌고 참전하였을 때 주병의 대다수는 신주지역 사람들이
었다. 주병으로 전장에 투입된 이들은 김무력 휘하에서 백제 성왕을 사
로잡고 백제군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따라서 진흥왕은 이곳 주민들에
대해 일정한 포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포상은 두 가지 형태로 행해졌다. 하나는 충신과 정성을 다하여 전
장에서 공로를 세운 자들에게 내리는 포상이다. 포상의 내용은 황초령비
의 ‘可加賞爵物 以章勳効’77)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爵’과 ‘物’이다. 작이
란 관등이나 관직을 말하고, 물이란 위신품이나 곡물 등의 물건을 말한
다. 이는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신라 문무왕이 평양성 함락에
공로를 세운 자들에게 관등을 올려주고 검이나 극 등을 내려주거나,78)
布나 穀物을 하사한 것에서 입증된다.79)
공로에 대한 포상과 관련하여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은 성왕을 사로잡아
죽이는 공을 세운 천노 苦都에 대한 포상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포상 내용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자료는 없지만 이를 추론하는데 단
서가 되는 것이 고도가 후일 谷智로 이름을 고쳤다는 사실이다. 그가 구
타모라새 전투 이후에도 여전히 천노였다면 고도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
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 전투 이후 곡지로 개명하였다. 곡지로
의 개명은 그가 전장에서 세운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노비에서 양인으로

77)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황초령 진흥왕순수비」,『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2권(신라1 ․


가야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78) 뺷삼국사기뺸 권6,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8년조.
79) 뺷삼국사기뺸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상 8년조.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과 巡狩 69

신분이 바뀌자 양인 신분에 맞게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추론이 성립된다면 전쟁에서 세운 공로에 대한 포상에는 免賤도 포함된
다고 하겠다.
다른 하나는 지역민들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형태의 恩典이다. 신주의
경우 북한산 순행 과정에서 내린 은전이 이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租調
의 면제는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는 조치이다. 551년 한강유역의 점령,
554년 관산성 전투, 나아가 한강 이북 지역과 멀리 함경도 지역까지 진
출하는 과정에서 신라군이 입은 패해도 적지 않았다. 또 군수물자와 병
기의 조달 등은 백성들의 부담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많은 고
통을 감내하여야 하였고, 농민경제는 상당히 피폐하게 되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진흥왕은 피폐해진 민생 경제를 살려야 하였고 그 방법으로
1년 동안의 세금 감면을 해준 것으로 보인다. 사면령도 마찬가지이다. 피
폐해진 민생경제는 자연히 범죄자를 양산하게 된다. 범죄자의 창궐은 사
회질서를 문란하게 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 진흥왕은 사회 질서를 안정
시키고 민심을 무마하여야 하였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진흥왕은 二罪 이
하의 범죄자들을 방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은전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 신주 지역이었다. 이곳은 실제 전
장이 되었던 곳이고 점령자가 몇 차례 바뀐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불안은 다른 지역보다 높았을 것이다. 또 이 지역은 고구
려 및 백제와 접경을 한 지역이었다. 이들의 동향은 신라가 신주지역을
지키는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비록 6세기대의 일이지만 고구려
장군 온달이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출정하면서 “漢北지역의 백성들
이 비록 신라의 군현민이 되었지만 부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고 있다”80)
고 한 말이 이를 짐작하게 한다. 따라서 진흥왕은 새로이 정복한 이 지역

80) 뺷삼국사기뺸 권45, 열전5 온달전의“溫達奏曰 惟新羅割我漢北之地爲郡縣 百姓痛恨 未嘗


忘父母之國…”참조.
70 제81호

민들을 잘 다독거려야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의 마음이 고구려나


백제로 돌아가 反신라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흥
왕은 이 지역민들에게 세금 면제와 죄수들을 방면하는 은전을 베풀었던
것이다.

4. 북한산순수비의 石質과 碑峰이 보여주는 의미--


맺음말에 대신하여

(1) 비석의 석질이 보여주는 의미

신라는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을 대파하고 성왕과 좌평 4명을


비롯하여 3만에 가까운 士卒을 전사시키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로써 한강 유역은 완전히 신라의 영역이 되었고 신라는 대중교통로를 안
전하게 확보하였다. 이에 진흥왕은 새로이 편입된 지역의 민심도 採訪하
고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雄志를 표방하기 위해 이 지역을 순수한 후
그것을 기념하여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웠다.81)
북한산비와 관련하여 먼저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은 이 비에 사용된 돌
의 생산지이다. 북한산비는 원래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풍상
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표지석만 세워두었다. 그런데 세
월이 지나면서 많은 등산객들이 이 표지석을 북한산비로 오인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자 문화재청에서는 역사교육 차원에서 동일한 모형비를 만들

81) 북한산비에 대해서는 이우태,「북한산비의 신고찰」,『서울학연구』12, 1999; 노용필,「진


흥왕 북한산순수비 건립의 배경과 그 목적」,『향토서울』53, 1993 ; 노용필,『신라진흥왕
순수비연구』, 일조각, 1996 소수 참조.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과 巡狩 71

어 세워 두기로 하였다. 필자는 모형비 제작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자문회의에서는 가능하면 원 비석과 같은 재질의 돌을 사용하기로 하고
암석 분석을 의뢰하였다.
평소 필자는 비봉 지역에 바위가 많은 것을 보고 당연히 이 지역의 돌
을 이용하여 이 비를 만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암석 분석 결과 이
돌은 북한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돌이 아니며, 가장 가까운 것은 경주 지
역 돌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결과는 필자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경
주 지역 돌이라면 진흥왕이 비석 돌을 경주에서 북한산 비봉까지 운반해
간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일이 있은 후 필자는 오늘날의 상식으로 고대
사의 사건들을 해석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함경남도에 세워진 마운령비와 황초령비도 암석을 분석하여 원산지를 밝
히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 진흥왕은 왜 굳이 경주 돌을 북한산까지 가지고 가서 비를 만
들었을까. 필자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두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
나는 새로이 점령한 한강 유역이 이제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음을 확고히
하려는 의도이다. 그래서 경주에서 직접 돌을 가지고 가서 왕의 순수를
기록하도록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진흥왕은 아들 이름을 銅輪과 舍輪으로 짓고 스스로를 전
류성왕에 비겼으며, 말년에는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기도 하는 등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82) 또 북한산비에서는 석굴에 사는 道人을 특별히 언급하
였고,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에는 隨駕인명 가운데 沙門 道人을 제일 먼저
기록하였다. 도인은 남북조시대에 승려를 가리키는 말이다.83) 이러한 사

82) 뺷삼국사기뺸 권4, 신라본기 진흥왕 39년조의“王幼年卽位 一心奉佛 至末年 祝髮被僧衣 自


號法雲 以終其身 王妃亦効之爲尼 住永興寺”참조.
83) 신종원, 「‘道人’ 사용례를 통해 본 남조불교와 한일관계 - 신라 법흥왕 ․ 진흥왕대 불교를
중심으로 - 」, 뺷한국사연구』59, 1987. 이와는 달리 이 도인은 도교의 도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김태식,「봉선대전(封禪大典), 그 기념물로서의 진흥왕‘순수
72 제81호

실들은 진흥왕이 신라를 불국토로, 신라 왕경을 불국토의 중심지로 생각


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진흥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곳이
불국토가 되기를 원하였고, 순수를 하면서 이를 선포하고자 하였고 그 방
법의 하나로 경주 지역의 돌을 북한산까지 가지고 가서 비를 만들어 세
우지 않았을까 한다.

(2) 碑峰에 비를 세운 의미

북한산비가 세워진 비봉은 북한산 僧伽寺 뒤쪽의 해발고도 556m에 위


치한다. 이 봉우리에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졌다. 비봉이란 이름도 비
석이 있는 봉우리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이 비는 왕의 덕화를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왕의 덕화는 널리 알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비를 세우기 마련이다.8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는 사람들이 접근하기 매우 힘든 곳에 세워졌다. 그러면 진흥왕은 왜
이 비를 비봉이라는 높은 곳에 세웠을까.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진흥왕이 손수 비봉에 올랐다는 사실이
다. 이를 추론하는데 단서가 되는 것이 북한산비의 Ⅵ행의 ‘過漢城陟
△…’이다. 물론 陟자 다음에 나오는 글자들은 마모되어 어디로 올라갔는
지 알 수 없다. 그런데 Ⅶ행의 ‘見道人△居石窟△△△△’이라는 구절은
도인이 석굴에서 수도하는 모습을 진흥왕이 보았음을 시사해준다. 이 석
굴은 오늘날 승가사 뒤쪽의 석굴이다.85) 따라서 진흥왕이 올라간 곳은
바로 비봉인 것이다.
둘째로 신라에서 북한산이 가지는 의미이다. 북한산은 통일 이후 신라

비’」,『백산학보』68, 2004, 23쪽)도 있다.


84) 김태식,「봉선대전(封禪大典), 그 기념물로서의 진흥왕‘순수비’」,『백산학보』68, 2004, 2쪽.
85) 승가사에 대해서는 이홍직,「승가사 잡고」,『향토서울』6, 1959 및 문명대,「북한산 승가
사 석탑재」,『고고미술』91, 1968 참조.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과 巡狩 73

가 산천에 대한 제사체계를 정비할 때 이곳을 中祀에 속하는 四瀆의 하


나로 편제한 것에서86) 보듯이 신성한 산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진흥왕
도 비봉에 올라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87) 이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 북한산비 Ⅲ행의 “△窮用高祀西△△△”이다. 앞뒤로 보이지
않는 글자가 많아 내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지만 ‘祀西’는 서쪽
방향이나 서쪽 하늘을 향해 제사를 드린 것을 의미한다. 이는 왕의 제의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제사를 통해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확보하여 封疆을 拓定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이 지역을 잘 다스려 王化가 두루 미치도록 하
겠다는 다짐을 하였을 것이다. 이런 다짐을 한 후 진흥왕은 귀경하면서
주군에 은사를 내리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렇게 보면 북한산비는 진흥왕
이 이곳에 친히 오른 것을 기념하고 왕이 이곳에서 염원한 誓願을 길이
보존하기 위해 비봉에 비를 세운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하면 승
가사의 승려는 이 비를 지키고 관리하는 일을 맡았을 것이고, 진흥왕은
이 승가사에 일정한 경제적 반대급부를 주었을 것이다.

투고일 : 2012. 1. 2 심사 : 2012. 5. 23 ~ 29 게재확정일 : 2012. 5. 31

86) 뺷삼국사기뺸 권32, 잡지1 제사조 中祀의‘四瀆…北漢山河(漢山州)’참조. 이외에 小祀에


는 鉗岳(七重城)과 負兒岳(北漢山州)이 포함되어 있다.
87) 이를 封禪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김태식,「봉선대전(封禪大典), 그 기념물로서의 진흥
왕 ‘순수비’」,『백산학보』68, 2004 참조).
74 제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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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제81호

국문초록

551년 신라 진흥왕은 백제, 가야군과 더불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한 후 나아가 백제가 점령한 한강 하류 지역까지도
차지하였다. 이후 554년 백제와 신라 사이에 관산성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신라는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죽이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사람은 신주 군주 김무력과 비장 도고였다. 그
리고 신라의 조직적인 첩보 활동도 이 승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신주를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한강유역 경영에 들어간 진흥왕은 555년
에 신주로 순행하였다. 이 순행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고구
려와의 국경선을 확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 공을 세운 신주
주민들에게 포상을 내리는 것이었다.
진흥왕의 신주 순행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 북한산비이다. 이 비에 사
용된 돌은 경주에서 가지고 왔다. 북한산 지역의 돌이 아닌 경주 지역의
돌을 사용한 것은 새로 점령한 한강 유역 일대가 이제 신라의 영토가 되
었음을 확고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 비는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
운 비봉에 세워졌다. 높은 비봉에 이 비를 세운 것은 하늘에 드리는 제의
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제어 : 濟羅동맹, 管山城 전투, 북한산비, 첩보 활동, 恩典, 한강 유


역, 巡狩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과 巡狩 77

Abstract

Occupation of the Han River area and the


royal patrol of Silla King Jinheung

Noh, Choong-Kook

In 551, Silla King Jinheung attacked Goguryeo with allied forces of


Baekje and Gaya, and occupied 10 Gun(郡) on the upper areas of
Han River. After then Silla occupied the downstream areas of the
river, originally taken by Baekje. In the battle at Gwansan castle
between Baekje and Silla in 554, Silla gained a great victory by
capturing and executing King Seong of Baekje. Gunju (minister) Kim,
Mu-Ryuk of Sinju and Bijang (executive assistant) Dodo(都刀) led the
winning of the battle, and also systematic intelligence activities of Silla
greatly contributed to the victory.
By establishing Sinju, a local government, King Jinheung started full
management of the area of the Han River and went on patrol to Sinju
in 555. Two purposes of the patrol were to settle the national
boundaries between Silla and Goguryeo, and to award residents in
Sinju who contributed to the victory.
Bukhansan monument was raised to commemorate King Jinheung's
patrol to Sinju. The monument is made of a stone from Gyeongju,
the capital of Silla, not from Bukhansan area. It is to proclaim that
78 제81호

Han river area became Silla's territory. Moreover, it is set up on the


Bibong, a high-peak hard to access. This presents a ritual aspect of
the monument to the God.

Key words : Alliance between Baekje and Silla, Gwansan castle


battle, Bukhansan monument, intelligence activities,
spacial grace, Han River area, royal patr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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