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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가는 길, 알고 사는 삶(여호수아 3 장 1-

6 절)
우리 인생에 관하여 많은 담론이 있습니다. 안데르센은 신의 손가락으로
기록된 동화가 인생이라 말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세익스피어는 인생을
걸어다니는 그림자라고 했고, 존후레쳐는 무덤으로 가는 행진, 피로에지
는 긴여정, 올리버 윌던 홈슨은 우리 인생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인생의 담론은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습니다. 인생의 관한 논
리적 접근이 아닌 오랜 세월을 통하여 발견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
는 이런 담론이 우리 인생의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유
명한 철인들의 인생론이라 해도 모든 사람에게 정확한 담론이 될 수는 없
습니다. 그 담론들은 불안정하고 부정확한 개인의 삶에서 나온 것이기 때
문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이란 무엇인지,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요? 여기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 밖에서 인간을 볼 수 있어야 합
니다. 인간의 불완전한 속성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인간을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
님,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하나님, 또한 우리 인간의 심령과
부분 부분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하나님, 당신의 예정 속에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인생이 무엇이며,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쓰시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
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측 할 수 없는 인생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인생은 힘들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


습니다. 그러므로 힘든 인생을 힘들지 않게 사는 길은 예수님 앞에 나와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길이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인생은 힘이
듭니까? 사는 것이 왜 이리 힘듭니까? 이에 대해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말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ㅏㅠㅓㅓㄹ 하나님의 하
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 3:11)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
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
셨느니라. (전도서 7:14)

사는것이 힘든것은 삶을 가로막는 힘든 장애물 때문이 아니라 인생이 무


엇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
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르고 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뜻밖의 일의 연속 입니다. 뜻밖에 질고에 시달리
기도 합니다. 사업의 실패로, 가정의 불행 등으로 고통당합니다. 이런 뜻
밖의 어려움을 당할 때 마다 사람은 좌절하게 됩니다. 실패를 여러번 맛
보다보면 의지도 꺽이고 기세도 꺽입니다. 결국에는 인생의 낙오자가 되
어 인생의 밑바닥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 인생은 순탄하다, 걱정 없다, 참으로 평안하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내 인생은 내 뜻대로 만들어 지고 이루어진다 자신 할 수 있습니까?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오늘 성경 말씀은 어렵게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


가옵니다. 어려운 인생을 더 이상 어렵지 않게 사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
기 때문입니다. 4 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
지는 말라 그리 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
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에서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라는 구절에 집중해 봅시
다. '그리하면'이라는 말은 조건을 뜻합니다. 광야 40 년의 방랑을 끝내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행진해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백
성에게 하나님께서 '그리하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조건을
따르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조건을 따를 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의 가나안 땅, 우리에게 약속된 땅에 어떻게 들어갈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조건에 맞게 살면 확실한 길, 어떻게 살면
쉬운 길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는 말을 보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길은 이스라엘 60 만 대군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들의 초행길이였
기 때문에 그길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초행길이여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민족을 만나 무슨 일을 당할지
아무 것도 몰라도 하나님이 제시한 조건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의 조건을
충족시키며 살아가면 앞에 어떤 길이 있을지라도 우리 삶이 충분한 성공
을 이루는 것을 확실히 알 것입니다. 모르고 살아가는 생활은 힘들지만
알고 사는 것은 아주 편합니다. 금년 한해 동안 여러분도 알고 사는 한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여호수아를 따라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태어난 신세대였습니다. 그들에게 가나안은 새로운 땅, 경험해
보지 못한 낮선 땅 이었습니다. 인생의 경험도 부족하고 삶의 철학도 부
족한 그들이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곳 일곱 족속과 전쟁하면서 그곳
에 터를 잡고 산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신세대들은 가나안땅에 들어 간다는 것이 불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
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한 조건에 맞
게 살기만 하면 가나안에 들어가 어떻게 살지를 알려 주시겠다고 합니다.
새해를 맞는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눈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과 같습니다
2005 년 한해 동안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무슨 천
재지변이 일어날지, 이 나라에 어떤 무슨 일이 생길지, 이 지구가 어떻게
변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불경기가 더 심해질지, 질병이 세계에 만연할지,
어떻게 살게 될지 우리는 긍정적인 기대감 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2005 년 한해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 수 있습니다.
싯딤을 떠나 요단강으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서 휴식을 취합니다.
여호수아가 3 일 동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며 건
너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디로 인도하는지 말입니다. 3 일이 지나서 여호
수아는 유사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을 합니다. “백성에게 명
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 하면 너
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여러분 세상을 산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알고서 살면 힘들지
않습니다. “그리 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라는 말처럼 하나님을 따르
면 우리가 행해야 할 길을 하면 알게 해주신다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축복을 받겠습니까? 하나님의 뒤를 좇아가야 합니다. 3 절에
보면 언약궤를 좇아가라 말합니다.
언약궤를 쫒아가라

하나님의 언약궤를 법궤라고도 하고, 증거궤, 여호와의 궤, 하나님의 궤라


고도 말합니다. 언약궤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의미합니
다. 그 언약궤를 따라 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이고, 육신을
입고 이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이세상에 오셔서 제자
들을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
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명한 성경 주석가 메튜 헨리는 말씀을
따라가며 순종하는 생활을 언약궤를 따라가는 인생이라 말했습니다. 누
가복음 24 장 27 절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
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하는 말씀처럼 하나
님을 따르는 생활은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이요, 말씀을 따라는 생활이라
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11 장 8 절에서 믿음으로 갈바를 모르고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세기 12:1)”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했지만 어디로
가야하는지 갈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예수를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처럼 금
년에 뭐할지 모르고 어떻게 할지 모를지라도 예수따라 믿음으로 살면 주
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믿음으
로 따라가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따라 가는 것, 하나님따라 가는 것
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요단강을 건너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 가려는 이스라엘 앞에 요단강이 가로 막고 있


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요단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실패의 강, 불
행의 강, 죄악의 강이 우리 앞에 흐르고 있습니다. 넘실 대며 이스라엘을
가로막고 두렵게 하였던 요단강 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죄악과 사망과
고통의 물결, 질병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이 물결을 넘어가기에
인간의 힘은 너무나 나약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런 어려움을 건딜 수
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갈라
주시는 요단강을 건너가야지 내 힘으로 건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시편
119 편 105 편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말씀처럼 앞이 안보이는 현실도 예수님 따라가면 앞이 열릴 것입니다. 말
씀은 우리의 앞날을 열어주는 열쇠입니다. 두려움의 강, 앞길을 가로막는
강, 좌절하게 하는 저 강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왜 이런 능력이 있습니까? 그것은 말씀은 육신이 되신 예수님
의 현연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 장 14 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
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4 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
리 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
음이니라.” 여기서 언약궤와 사람들의 거리를 이천 규빗이라 딱 정했습니
다. 가까이 하지도 말고 떨어지지도 말고 딱 이천 규빗이라 정해놓았습니
다. 손가락에서 팔꿈치까지를 1 규빗(45 센치)이라 하니까 이천 규빗이라
함은 대게 900 미터 정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
일에 900 미터 이상을 걸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울타리 속에
살라는 뜻입니다. 너무 하나님께 가까이 갈려고 그분의 거룩함을 훼손하
려고 하지도 말고 너무 멀어 은혜생활에 떨어지지도 말라는 이야기입니
다. 말씀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있으면 어떤 어려움의 공격이 와도 승리할줄을 믿으시기 바
랍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이스라엘은 양을 많이 칩니다. 양의 특성은 광야에서 풀을 뜯어 먹는 것


입니다. 북쪽에 갈릴리 지방에는 풀이 많아도 밑으로 내려오면 삭막한 광
야에 풀을 찾기 힘이 듭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 편에서 “여호와는 나
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
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
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이 살고 있던
베들레헴에서 내려오면서 이스라엘 남부쪽으로 내려가면 풀이 없으므로
양을 끌고 광야를 헤메다가 풀이 있는 곳을 찾습니다. 그러나 양의 특성
은 풀이 있는 곳으로 가지 목자를 잘 따라가지 않습니다. 양이 풀이 있는
곳에서 내려가 정신없이 먹다가 목자는 그 양을 나오게 하려해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자는 그 양이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밧줄로 묶어
끌어올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잊어버립니다. 신앙생
활하다가도 다른데로 눈돌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하나님
께서는 가만히 계십니다. 그러다 방법이 없을 때 고난을 통해 끌어 올리
십니다. 강제로 하나님께로 끌어 올리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나오지 마
시고, 주님의 조건에 맞는 삶을 사시므로 많은 은혜 누리시기 주의 이름
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수아 3:1-6 에서 두 가지 중요한 내용.


1.법궤.
고대 근동에서의 전쟁은 각자의 신들의 전쟁으로 상징되었다. 따라서 전
쟁에 이기거나 패하는 것은 인간의 승리나 패배이전에 섬기는 신이 승리
하거나 패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승자가 전리품을 신전에 바치는 것은 승리를 신의 것으로 돌리기 때문이
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상징한다.

2.2 천 규빗.
유대인들의 구전 율법인 아가다에 의하면 2 천 큐빗은 율법에 따라 안식
일에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의 한계이다. 따라서 각 지파는 안식일
에 성막에서 기도 할 수 있도록 2 천 규빗 안에 장막을 쳐야만 하였다. 따
라서 어떤 의미에서 2 천 규빗은 하나님의 보호의 울타리의 범위를 나타
낸다고 볼 수 있다.
2 천 규빗으로 백성와 법궤의 간격을 두어 백성이 하나님의 보호의 울타
리를 벗어나 있도록 하였다. 이는 가나안 정복의 전쟁이 거룩한 전쟁으로
서 하나님의 승리하는 사실을 백성에서 나타나게 위한 상징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다윗 시대의 예루살렘의 인구가 약 3 천명 정도였다는 것을
고려할 때 여리고 전쟁 때의 히브리 병사 수십만은 엄청난 대군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으며 40 년 동안의 광야 훈련을 통한 군사력은 히브리
백성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가나안을 쉽게 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교
만함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전쟁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상징하는 법궤와 이를 운반
하는 레위 제사장들의 주도와 이루어졌으며 백성들은 수동적으로 따라는
입장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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