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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게 하라

(엡3:14-21)
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사도 바울의 기도 중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의 의미를 공부했습니다. 속사람의 강건함은 나를
죽여서 남을 살리는,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원리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발휘한 모든 지혜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지혜, 바로 십자가의 도를
우리는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기도 내용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의 부분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라“ 이 말씀은 쉬운 것 같지만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분명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기를 기도하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그 안에 안 계신 신자도 있습니까? 우리는 수많은 설교와 또 개인 적인 성경 묵상을
통해서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실감해 보신 분계십니까? “아, 내
안에는 예수님이 계셔” 그냥 막연히 추측들하고 계시지요? “계실거야” “계신 걸 거야”
“계실걸?”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맞다 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신다고 명확하게
진술을 합니다.
(요14:20)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사실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도 모르고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사실을 별로 인식하지도 못하며 인식할 수도 없고 인식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소망도 없고 힘도 없고 엉터리처럼 사는
것입니다. 왜 세상은 점점 이렇게 추악하게 타락해 가는지 아세요? 세상 사람들과 신자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소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소망이 없는 자들의 특징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타락입니다. 1986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엘리 위젤이라는 사람이 쓴 “밤”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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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습니다. 엘리 위젤은 홀로코스트로 유명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그의 책에 그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수천 명의 유대인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찬 빛이 완전히 차단된 기차 안에서 이제 곧 죽을
것을 감지한 소망을 잃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창피한 것도 모르고 성 관계를 갖더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자들의 특징은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추악하게
타락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마저 소망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대해 아무런 흥미를 가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어야 할 하나님 나라에
별로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자라는 사람들도 여전히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여전히 부도덕한 짓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 할 수
있는지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제가 한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정말 천국에 가고 싶으십니까? 조나단
에드워드나 허드슨 테일러, 마틴 로이드 존스, 존 오웬, 제임스 보이스 이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분들의 저서에서 ‘그토록 소망하고 가고 싶었던“그 천국에 그분들처럼 간절하게
가고 싶으신가요?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얘야, 이제 그만 올라와라”하면 훌훌 털고 기쁘게
가실 수 있으세요? 솔직히 별로 관심 없으시지요?
그럼, 천국이라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뭐든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고 보석으로
된 집에서 천년만년 영원히 사는 곳을 천국이라고 합니까?
우리는 천국은 “죽으면 마지못해 가는 곳”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천국은 우리가
들어가는 곳이라고도 표현을 하지만 천국은 우리에게 ”임하는 것“”우리에게 오는 것“이라는
표현도 많이 씁니다.
(막9:1)
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신학이 공간적 이원론의 헬라철학의 영향 아래 정립이 되어져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꾸
천국을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를 합니다. 게다가 우리 한 민족은 작은 땅 덩어리에 대대로
땅에 대한 한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토지나 건물에 상당히 애착을 가집니다.
그래서 ‘내 집 마련’이 무슨 구호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무슨 이민 공청회 같은데서 이민을
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왜 호주나 캐나다 미국 이런 곳으로 이민을 가려고 하냐고 물으면
“살기 좋은 땅이니까”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이민 오면 처음 하는 것이 뭡니까? 자기 집을
사는 것이죠. 그래서 천국도 그런 영토나 공간의 개념으로 자꾸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실 때 그 성경이 기록되었던 당시의 문화나 관습 같은 것들을 잘
이해하시고 읽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은 일차적으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읽혀졌던
것이기 때문에 당시 이 성경을 기록하였고 읽었던 사람들의 문화와 관습을 알지 못하고는
우리가 오해를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라”하면 먼저 영토를
떠올리시죠? 우리 민족은 국가의 삼 요소 “국민, 주권, 영토”중에 유독 영토에 관심이 많아요.
그렇지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국가, 나라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이 통치권입니다.
그들은 “나라”하면 통치권을 생각하지 땅 덩어리를 떠올리지 않습니다.
(눅19:11-12)
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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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2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시는 장면입니다. “므나의 비유”“달란트의 비유”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그 시작을 어떻게 하시는가하면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갔다“라고 시작을 합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를 다스릴 때에 그 지역 사정에 밝은
현지 사람들을 분봉 왕으로 삼아 통치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영 신통한 사람이 없을 때 총독을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분봉 왕은 반드시 로마의 원로원에 가서 통치권, 왕위를 받아 와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었습니다. 헤롯도 에돔 사람이었지만 로마의 원로원에 가서 왕위를 받아 와서
분봉 왕이 된 것이지요? 당시의 그런 상황들을 들어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헤롯이 로마의 원로원에 왕위를 받으러 갈 때, 통치권을 받으러 갈 때 영토와 국민은
있었습니다. 단지 로마의 황제와 원로원으로부터 통치권을 받기 위해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위를 무어라고 표현하는지 보세요. 12절을 영어로 보지요. He said therefore, A certain
nobleman went into a far country to receive for himself a kingdom, and to return.
뭐라고 합니까? 통치권, 왕위를 kingdom “나라”라고 표현을 합니다. 헬라어로도 “바실레이아”
“왕국”입니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라는 영토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권의
개념입니다. “누가 다스리느냐?“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는 저 멀리
있는 언젠가 우리가 갈 황금 보석으로 꾸며진 나라의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와 있는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 나라“라고 표현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교회가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나타내고 전하는 자들이 교회이지요.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아주 중요한 한 부분이 교회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면에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 하나님 나라를
통치권, 다스림의 개념으로 이해를 하면 마태복음 5장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가 무슨 뜻인지 clear해 집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먹을 것, 입을 것으로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는 말을 무슨 뜻으로 아셨습니까? 나라를 구하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너희의 삶이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들어가기를 먼저 구하라는
것입니다.
(눅15:18)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탕자가 자기의 잘 못을 뉘우치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하지 않고 “하늘(heaven)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을 하나님 나라라고 정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통치권을 이 땅에 그대로 가지고 오셨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일을 다 마치시고 왕으로 등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가지고
오신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신학용어로는 그분을 ”오토
바실레이아“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인류의 역사가 두 동강 나는 어떤 시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시점을
“주의 날, 주의 해“라고 불렀습니다. 그 때가 되면 이스라엘이 전 세계의 중심이 되어서 세상을
다스릴 것이고 다윗의 왕국이 회복이 되는 영광스러운 세 세대가 올 것이라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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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그 날이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욜2:31-32)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그리고 그 날이 오기 전에 어떤 사인이 있을 것이고 그 사인이 바로 엘리야가 오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말4:5)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엘리야가 다시 오게 되면 여호와의 날이 곧 오게 된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성경에서 이렇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야와 메시야를 오매불망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주변
국가들로부터 침략을 받고 그들의 나라로 끌려가 식민지로 살면서 온갖 고생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여호와의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기도하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엘리야의 모습은 이러했습니다.
(왕하1:7-8)
7 왕이 저희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고한 그 사람의 모양이
어떠하더냐
8 저희가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아합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아하시야가 다락에서 떨어져 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신하들을 보내서 자기의 병이 나을지 안 나을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어 보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들이 가다가 엘리야를 만나지요. 엘리야가 묻습니다. “어디 가느냐?”
“우리 왕이 다락에서 떨어졌는데 그 병이 나을지 안 나을지 바알세붑에게 물어보고 오라고
해서 가는 길입니다“ 하니까 엘리야가 대노합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바알에게 물어보러 가느냐?“”너희 왕이 그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반드시 죽으리라“하고
저주를 합니다. 신하들이 왕에게 와서 그대로 고합니다. 그때 아하시야가 그가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으니까 신하들이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라.”고
말합니다. 성경 각주에 보면 “털이 많은” 아래에“털옷을 입은“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스라엘에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며 세례를 주었습니다.
(막1:6)
6 요한은 약대 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들이 기다리던 엘리야가 나타난 것이지요. 그래서 종교지도자들까지도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온 것입니다. 그 요한이 오고 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십니다. 순서상으로 보면 유대인들이 그린 그림이 딱 맞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처음에는 대단한 환호를 받으신 것입니다.
(막1:14-15)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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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0:9)
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에서 ”가까이 왔다“”엥기켄“이라는 말은 ”엥기조“라는
말의 직설법 완료형 동사입니다. ”이미 근접하게 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마가복음
14장에도 동일하게 쓰였습니다.
(막14:42-43)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43 말씀하실 때에 곧 열 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님께서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그 단어가 바로 ”엥기켄”“이미 와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을 하실 때에 유다가 왔습니다. 말씀하신 것과 거의 동시에 온
것입니다.Just as he was speaking 헬라어로는 “유떼오스“인데 “immediately"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신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오심을 가리켜 ”회개하라 천국이 와 있다“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눅17:20-21)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 라고 물어보니까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천국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 라는 해석을 많이들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천국은 너희들 마음속에 있다”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거기서 ”너희 안에“는 ”엔또스
휘몬“입니다. 이 ”엔또스“라는 전치사는 뒤에 단수가 오면 ”in 이나 within"의 의미로 쓰이고
뒤에 복수가 오면 “among"으로 쓰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휘몬“이 ”너희들“이라는
복수입니다. 그래서 정확히 이 구절을 번역하면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둘러 싸여있는 예수 님 자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눅4:16-21)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읽으신 이 말씀은 이사야서 61장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 예언을
읽으시고 그 하나님 나라가 지금 너희 앞에 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그 주의해, 주의 날이 “오늘 너희에게 성취되어 있다“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Today this scripture is fulfilled in your hea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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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오심과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19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주의
해를 전파하러 오셨다는 구절이 있지요? 거기서 나오는 주의 은혜의 해는 “year of the
Lord""jubilee” “희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무슨 연관이 있는가?
희년은 안식년이 일곱 번 반복되고 난 50년째를 희년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대 안식년입니다. 안식일과 안식년, 그리고 희년은 같은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나라, 천국을 한 단어로 표현을 하라면 무엇이라
답하시겠습니까? “안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칠일 째
안식을 하심으로 재창조의 완성은 안식으로 결론이 날 것을 미리 예고해 주신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을 “주의 해, 희년”이 선포되는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출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시면서 제 칠일은 안식일이니 제 칠일에는 반드시 안식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레25:2-28)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3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4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5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9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10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11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23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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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있느니라
24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25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26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27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28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이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미쳐 돌아올지니 그가 곧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여기는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 칠일 뿐 아니라 7년 째 되는 날도 안식년으로
땅을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땅을 쉬게 하라는 것은 그 땅을 가는 자들의 쉼도 함께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희년에는 모든 빚이 다 탕감이 되고 생활이 어려워 땅을 판자들은 다
되돌려 받게 되는 해 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토지 매매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땅은 하나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활이 정말 어려워서 땅을 팔았을 때는
중간에 돈이 마련되면 다시 찾아 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그런 능력이 없을 때에
가까운 친족 중에 한 사람이 돈을 주고 그 땅을 찾아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 것을 고엘
제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땅을 물러 주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공고를 하지요? 누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면 이 사람의 땅을
무르라. 한 사람이 나섰지요? “당신이 그 기업을 무르겠는가?” 했을 때 그가 거절합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고 룻과 혼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으로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빚을 진 사람이 자기가 상환을 능력이
없을 때 누군가 나서서 그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이스라엘의 법이었고 누구도 그 빚을 상환할
능력이 없을 때는 하나님께서 희년을 주심으로 모든 빚을 탕감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자기들끼리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는 죄인들을 위해 그 빚을
탕감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셔서 “내가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왔다”“내가 희년을 선포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6절을 잘 보세요. 누군가 대신
토지를 무른다는 것을 표현하면서 거기에 무슨 단어를 씁니까? redeem"구속“이라는 말이지요?
26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희년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모형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정리를 해 보자고요. 주님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주의 해, 은혜의 해, 희년“을 선포하러 오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가 탕감이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빚을
완전히 다 탕감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재창조해 내셔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기꺼이 순종하고 그 통치를 기뻐하는 곳, 그 곳을 바로 하나님 나라,
천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 후에 안식을 하셨던 것처럼 이제
영원히 지속 될 완전한 재창조가 이루어진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주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에 그 재창조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자들이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 재창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축하하고 자랑하는 날인
것입니다.
우리가 “안식”하면 자꾸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안식이라는 것은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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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재창조 사역의 결과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유와 기쁨과 해방을 마음껏
누리는 것을 안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최선의 상태를
안식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안식이 이루어진 곳을 천국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있는 곳,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495장에서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 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함께 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렇게 외치다 갔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나니까 그 분이 있는 곳이 다 하늘나라더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하라는 대로 하고 그 분이 하지 말라는 것 안하고 사는 삶이 정말 평안한 자유의 삶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빨리 나그네 인생길을 마치고 하나님
나라로(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너무 너무 그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빌1:23)
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표준 새 번역)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고후5:8)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표준 새 번역)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는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
(살전4:16-17)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면 잘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 분의
다스림을 즐겁게 받는 곳을 천국이라고 한다면 오늘 날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천국, 하나님 나라에 관심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지도 않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잘 모른다는 이야기죠?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그 분과 함께 있는
것을 미치도록 사모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늘 날 기독교의 문제는 예수를 너무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모를 뿐 아니라 관심도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17:3)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는 영생을 , 천국을,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없습니다.
(사4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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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우리 주님을 바라보는 길만이 우리가 구원을 얻어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이 즐겁게 그
다스림에 순종을 하는 곳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그 천국을 살 수
있습니까? 못 삽니까? 살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옛 몸을 함께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거울처럼 동경처럼 밖에 그 하나님 나라를 맛보지 못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거울은
구리거울, 동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kingdom of heaven이라는 영화에 보면 그 거울이
나오지요? 일그러진 얼굴) 자세히 못 본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맛을 볼 수는 있는 것입니다.
코스코 같은 데 가면 피자나 햄버거나 소시지 같은 것을 조금씩 잘라주면서 맛을 보게 하지요?
왜 그렇게 하지요? 이 맛있는 음식을 맛보고 정말 맛있으면 온 것 하나 다 사 가지고 가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샘플이 기가 막히게 맛있으면 당연히 그 걸 사 가지고 갑니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그 천국을 조금씩은 맛보고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주어질 온전한 그 곳이
그립고 사무치게 가고 싶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별로 천국에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지금 제일 드시고 싶은 것을 하나씩 떠 올려 보세요. 다 떠 올리셨습니까? 뭡니까?
저도 한 가지 떠 올렸습니다. 다 떠올리셨으면 여러분이 지금 제일 드시고 싶은 음식이라고 떠
올리신 그 것이 전에 드셔 본 것입니까? 아니면 소문으로만 들은 것입니까? 보통 자기가
경험한 것 중 최고의 것을 인간은 소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먹어 보지 못한 것을
간절히 먹고 싶어 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에 가면 곰 발바닥 요리가 맛있다더라. 한번
먹어보고 싶다“ 그건 먹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안 먹어도 상관없어요.
오늘 날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천국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것은 지금
우리의 인생에서 그 하나님 나라를 맛보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날 예배당 안에서 그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잘 못
가르쳐 지고 있거나 충분하게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와 함께
있으며, 그 분의 통치를 받는 것이 사무치게 기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참 많이 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 예수가 누구입니까? 무엇을 하신 분입니까?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지요? 그런데 이번에 중국에 가서 중학생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신통하게도 그들도
예수가 ”인간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수업시간에 배웠답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다는 것 정도는 공산주의 국가 교과서에도 나오는 지식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더욱더 풍성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자들은 그 예수님을 아는 만큼 그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강하게 소망할 것이고
그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 천국이라면 그들은 이 땅의 것에 그렇게 연연해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고통 많은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천국을
경험하며 대망하며 사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그 천국이 자기 마음속에 있고 이제 그런 맛보기 정도가 아닌 완전한 실체로 주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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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할 날이 곧 올 텐데 세상 것에 그렇게 연연해하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은
이러한 고백을 하며 살았습니다.
(고후4:8-9)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빌3:8-9)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 께로서 난 의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런 고백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동일한 신앙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예수님에 대해서 열심히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를 알 수 있는가? 먼저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뭡니까? 성령에 의해서지요?
(요15:26)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6:13-14)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이렇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에 대해 배우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를 맛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성령의 은혜는 어떤 방법과 방편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까? 가만히 있는데 억지로 쑤셔 넣는 일은 없습니다.
(고후3:17-18)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계시하시고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게 하시는 성령의 일은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바라 볼 때 일어납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어디서 어떻게 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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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통해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주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면 이제 clear해 졌지요?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길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에게 일어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어떻게 바라봅니까?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모르고는 절대 천국을 사모할 수도 없고 가고 싶을
수도 없고 이 땅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가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속에 거하시기를 이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보시면 3장 4장 내내 안식을 설명하다가 뜬금없이 마지막 4장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골수와 관절을 쪼갠다.”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히4:12)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 말은 하나님 나라,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매일 그 말씀에 부딪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체험을 한다고 해도 그 체험은 여러분에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한다 해도 그것이 여러분에게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해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러한 자들에게 역사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하나님 나라를
소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울고불고 해도, 아무리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해도 아무리
방언하고 예언해도 여러분은 절대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 수 없고 예수를 알 수 없으면 그 분이 계신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루 종일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데 몇 시간이나 할애를 하시는지 돌아보십시오.
비디오는 하루에 몇 개씩 볼 시간이 있어도 성경 한 장 읽는 데는 전혀 시간을 쓰지 않는 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절대 변하지 않아요. 제가 이렇게 힘을 주어 강조해도
여전히 내일도 그렇게 사실 분들이 많을 것을 압니다.
기독교 신문에 보니까 교회 안에 가라지들 말고 “나는 진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 68%가 일주일에 성경을 한 번도 안 펴본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30%중에서 일주일에 5분 이상 성경을 읽는다고 대답한 사람이 24%였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신자라는 사람들, 거듭났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 위해 일주일에
5분의 시간도 안 낸다는 것입니다. 하긴 한국의 모 신학대학에서 1,000명의 목사님들에게
무기명 설문 조사를 했는데 하루에 성경을 30분 이상 읽는 목사님이 1,000명중에 딱 두 명
이었다고 하니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신자라는 사람들이 소망이
없느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성경을 전혀
궁금해 하지 않고 그것을 공부하는 데 열심을 내지 않기 때문에 일단 예수를 모르고 그러니까
그 분이 계신 곳에 별로 가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 분의 통치가 달갑지 않은 것입니다.
진짜 믿어도 되나? 내가 원하는 그런 다스림이 있는 곳일까? 이렇게 의심만 가득한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하신 일에 관해서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을 읽지도 않고 설령 읽더라도 자기의 유익을 위한 쪽으로 해석하고, 큐티
하고 하는 것은 영생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요5: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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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성경은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모형을 보여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
완전한 형상이 갖추어지게 된 것을 우리에게 완성품으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저
하늘에서 그 실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눅24:26-27,44-46)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벧전1:10-12)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공동번역)
10 이 구원은 여러분에게 내릴 은총을 두고 예언한 예언자들이 열심히 찾고 연구하던
것입니다.
11 예언자들이 그 일이 언제 어떤 모양으로 일어날 것인지를 연구하고 있을 때에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성령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12 그들은 자기들이 찾은 진리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교회를) 위한
것이었음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진리는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의 도움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분에게 알려졌습니다.
이것은 천사들도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 구약의 선지자들이 기록해 놓은 내용들이 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복음”“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후3:13-16)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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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이렇게 구약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 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고 그 말씀을 통해 역사 하시는
성령에 의해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읽으실 거예요? 안 읽으실 거예요? 그럼 다음 시간에는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는 누구이신지에 대해 잘 정리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을 토대로 부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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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게 하라(II)
(엡3:14-19)
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이 기도문 중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의
부분을 지금 공부하고 있습니다. 왜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들어와 계신 신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해야 하는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우리 주변에 게으르고 나태한 신자들이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너무나 알지
못해서 별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보면 왜 사도가 그 당시
신자인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그러한 기도를 했는지 충분히 알고도 남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천국, 하나님 나라는 영토의 개념이나 공간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통치권, 다스림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천국,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우리가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지고 황금 보석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예수와 함께 거하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래서 여전히 슬픔과 고통과 고난이 있는 이 땅에서도 우리는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왜 굳이 그런 설명을 해 드렸느냐 하면
이 천국, 하나님 나라를 공간 적인 개념으로만 이해를 하게 되면 많은 부작용들이 반드시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원화시켜서 사람들을
미혹시킨 여러 이단들 중에 다미 선교회라고 있었죠? 지금도 여전히 존재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거기서 나오는 잡지에 러시아에서 석탄을 캐기 위해 지하 수천 미터를
파고 들어가다가 지옥을 발견했다고 하면서 뿔이 달리고 꼬리가 달린 지옥의 사자들과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실은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조작이었지요.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현혹되어서 겁을 먹고 다미 선교회로 빠지게 되었었지요.
또 한때 전 세계를 강타한 펄시콜레 박사의 “내가 본 천국”같은 책에서도 천국을 너무
공간적인, 영토 적인 개념의 아름다운 곳으로만 그려놓아서 진짜 천국의 의미를 많이 왜곡시켜
놓았습니다. 이런 견해들은 우리 주님과는 아무 상관없이 천국은 “너무 너무 좋은 곳인데
거기 갔더니 덤으로 하나님과 예수님도 계시더라.” 는 식의 결론만 난무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분들과 함께 사는 것이 혹시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혹시 그 분들로 하여금 우리의
그 좋은 천국 삶이 조금 방해를 받을지도 모르겠어. 왜? 거기서는 그 분들을 예배하고
찬양해야 한다고 하니까...“이런 식 아닙니까? 천국과 지옥을 그렇게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다보면 우리는 진짜 천국을 놓치게 되고 자기가 상상하는 상상의 천국만을 그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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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될 것입니다. 그 상상의 천국은 아마 지옥일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대로 천국은 이 땅에서 맛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면 자기가 세상에서 즐기던 많은 것들이 시시해 지는 경험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깊이 알고 ,그 예수와 함께 거하고 그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인지 안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런 유치찬란한
개념의 천국도 이내 시시해 집니다.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 중에
“사노라면”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2절 가사 중에 “비가 새는 판자 집에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 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죠? 세상 사람들도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제가 저희 집사람한테 미안해서 간혹 어디라도 다녀오라고 하면 저희 집사람이 그 때마다 하는
말이 “당신과 함께 가지 않으면 그곳이 파라다이스라도 즐겁지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천국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분과 영원히 있을 수 있는 곳을 천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곳일 겁니다. 그러나 거기가 그렇게 좋은 곳이라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고 싶은 곳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꼭 천국을 맛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직접
그 나라에서 할 일을 이 땅에서 미리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뭡니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배를 통해 분명 천국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건 천국에서 영원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예수를 누리는 그 곳의 삶을 미리 맛보는 공식 적인 시간이 바로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함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 곳에서도 영원히 함께, 같은 기쁨을 누리게 될 장자들의
총회가 모여서 그들이 그토록 사모하는 주님을 자랑하며 찬양하며 섬기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배를 별로 시답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곳에서도 별로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지루할 거예요. 그곳에서 하는 것이 모두 예수를 예배하고 찬양하는 일인데 그게 기쁘겠어요?
그래서 저는 예배를 별로 기뻐하지 않고 작은 일만 있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예배를 빼먹는
사람들은 천국을 아직 맛보지 못한 사람들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럴 수가 없어요. 천국을 맛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가 모이는 자리를 사모하고
사모합니다. 저는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한다고 해도 예배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아직 복음에 대해 정확하게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천국도 그렇게 시답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니까요.
이러한 강의를 듣고 지난 한 주간 “나는 성경을 하루에 적어도 5분 이상씩 읽었다”고 하는 분
한번 손 좀 들어주세요. 예수를 아는 길이 하나님 나라를 맛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하고 강조했는데.
여러분, 우리 교회는 수없이 많은 이 땅을 오고 간 인류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선택을 받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남는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여러분의 천국을 준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안 되겠어요.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7장 3절을
읽겠습니다.
(요17:3)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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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인간들이 만들어 낸 상상 속의 하나님 말고,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과)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것은 우리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예수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멸망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데에 그렇게 소홀하시면 어떡합니까?
여러분, 영생을 얻는 길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영생이 뭡니까? 영원히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합니까? 영생은 단순히 시간 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영생은 거기에 더 손댈 것이
없고 더 진전될 여백이 없는 아름다움과 완성의 극치, 즉 신적인 성품을 지닌 신적인 생명을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간혹 성경에서 하나님을 영원하신 분, 그 분의 언약을 영원한 언약,
그리고 시편 같은 곳에는 하나님 나라를 ‘영원한 나라’ 라고 표현을 하고 하나님의 의를 영원한
의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영원하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적인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는 완전한 상태, 더 이상 손 댈 것이
없는 그런 극치의 상태를 “영원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영원“은 완성과 완전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은 우리에게 한 번에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얻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완성을 향해서 즉, 그 완성된 신적 성품을 포함한 신적인 생명을
향해서 우리는 매일 매일을 수고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시간 속에서의 우리는 그
완전에 절대 적으로 도달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영생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손발을 묶어놓고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다 해주시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롬6:22)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마지막 목표 지점이 어딥니까? 영생. 영생은 이렇게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마지막까지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목적지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은 그 영생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길뿐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그렇게 무시하면서 사세요? 영생이 별로 기대되지
않는 거예요. 그렇죠?
(요17:21-24)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어디까지 끌고 가시고자 하십니까?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온전함의 수준까지 끌고 가시시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라는 것이 뭡니까? 상대방의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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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내가 그 인격과 성품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아는 것을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거기까지 끌고 가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자들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sting 이라는 사람을 아주 좋아합니다. 저는 그 사람의 생년월일 , 그 사람이 어디서
사는지, 어떤 음악 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압니다. 그렇지만 정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것을 그 사람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이고 그 사람 자체를 깊이 아는 것을 “그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알게 되기까지 열정과 기대를 가지고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아니면 벌써 천국에 들어가 계셔야지요. 여러분은
이 땅에서 열심히 수고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영생은 완성과 완전을 향해 가는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후에 그냥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그의
백성들과 그 완성의 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28:20)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왜 우리와 끝 날까지 함께 계셔야 합니까?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이끌고 가시기 위해서입니다.
(요17:2)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보세요.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는 십자가 사건과 함께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이미 지셨는데 왜 권세를 가지신 예수께서 우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어야 합니까? 우리가 우리의 손과 발을 움직여서, 우리 주님의 도움을 받아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반드시 가야 할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의해 출생을
했지만 그 출생한 어린 아기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그 아기들을 온전한 성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분량으로 키워 내시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권세를 가지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량만큼 자라 가는 데 있어서 유일한 길이
하나님을 알고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엡4:13)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온전한 사람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을 알아
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골2:2-3)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예수 안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습니까? “충만,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
그“충만과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깨달아 그 분을 몸서리치게 사랑 하게 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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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도착지점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안 가고 전부 자기가 언제 어느 때 구원 받았다는
것만 자랑하고 다닙니다. 요즘 교회에 떠도는 간증은 전부 ”언제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다“입니다. 연예인들 불러다가 “자기는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놀라우신
은혜로 이렇게 구원하셨다”에 감동들하고 있습니다.
그 간증들 중에 “나는 예수를 믿고 그 분을 알아가기 위해 이러한 수고를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이러한 평강과 기쁨을 누린다. 그래서 난 하루라도 빨리 하나님 만나러 가고 싶다“
이런 간증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에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증은 홍해를 건넌
것에서 멈추어 있으면 안 됩니다. 이 땅에서 계속해서 그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already, not yet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계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한번 보세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불려 나왔습니다. 그 때 그는 전혀 하나님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우상을 만들어 팔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림을 받은 그 시점이
그에게 있어서는 구원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한번 부르신 자를 그의 자격과 행위를
보시고 탈락시키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불림을 받은 날부터 그의 인생여정을 통해 하나님을 조금씩, 조금씩 알아갑니다.
애굽으로 내려가 바로를 벌벌 떨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는 알게 됩니다.
“아 나를 이끌고 계신 분은 적어도 애굽 왕 바로 보다는 나으신 분이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에서 계속해서 그를 좇아가시면서 말씀을 하세요.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는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
신뢰를 하게 되느냐하면 조카 롯이 잡혀갔을 때 일개 부족의 족장인 그가 318명을 데리고
다섯 나라의 왕이 연합한 군대와 싸웁니다. 누구를 믿고 가는 것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자기의 목숨을 의탁하는 자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어디입니까? 이삭을 바치는 모리아 산의 사건입니다.
(히11:17-19)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가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려 내셔서 그 약속을
이루실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신뢰했고 그렇기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고
하나님께 목숨까지 바쳐 충성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기쁘게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에 기꺼이
순종하는 곳이 천국이라고 했지요?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은 아브라함의
천국이었습니다. 그 분이 어떤 분 이신지를 아는 자들에게는 아들을 잡아 죽이는 그 장소도
천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니까 그렇지”라고 말씀하지 마세요. 여러분도 그
자리까지 가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모든 믿는 자들의 모델인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아는 데서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이렇게 하나님을 알아 감으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쁘게 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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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들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꾸 기독교를 착한 일하고 선한 일 하게
하는 윤리적인 종교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기독교에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높은 윤리적
수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을 이루어 내라는 요구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없음을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께로 숨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자신의 삶을 주님께
의탁한 그 자들을 데리고 함께 영생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시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행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착하고 선한 일”이
아닙니다. 이게 성경이 요구하는 행함입니다.
(약2:21-24)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아브라함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행함이 어떤
행함이었습니까? 이삭을 바친 행함이었습니다. 그게 착한 일, 선한 일입니까?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행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 그 분의 통치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
맡기는 것을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서만 나오는 행함인
것입니다.
(약2:25)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기생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라합의 행함이 뭐였습니까? 자기
조국을 팔아먹은 행함이었습니다. 자기 나라 왕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그게 착한 일, 선한 일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시에 나라를 배반한 역적은 가장 극악한 형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목숨을 하나님께 의탁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순종을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의 심장에 칼을 꽂는 자리에서조차 그 다스림에 순종하는
천국을 경험했다면 라합도 그 나라를 팔아먹는 현장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자신을 완전히 던지는 그 곳이 천국이라면서요. 그러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행함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수2:9-11)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보세요. 하나님에 대해서 듣고 알자 “행함” “순종” “충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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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님 곁의 십자가에서 죽은 강도는 막 판에 죽기 전에 돌이켰습니다. 그는 평생 악한 일만
하던 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가 무엇을 행했습니까? 착한 일해서 구원
받았나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뭡니까? 자기를 주님께 의탁한
것입니다. 그 분의 다스림 안으로 자신을 던져 넣은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전부 합쳐봐야 우리나라 강원도 보다 작은 땅입니다. 3년 반 동안 수만 명의
인파를 몰고 다니시며 가르치신 주님에 대해 강도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을까요?
그리고 그는 예수 님 곁에서 가상 칠언을 비롯한 그 분의 음성과 그를 못 박는 원수들에 대한
그 분의 행동을 직접 보았습니다. 점점 예수님에 대해 알아 간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다른 강도와 함께 예수님께 저주를 퍼부었던 그가
예수님께 자기 목숨을 의탁한 것입니다. “저런 분이라면 나의 목숨을 걸만하다“믿고 신뢰를
하는 것입니다.”전에 내가 들었던 그 이야기들이 맞구나“ 우리가 정말 그 강도만큼이라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의탁합니까? 그러면서 항상 그 강도를 걸고 넘어져요.
그렇게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그 분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행함“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전부 던지는 기쁜“행함”을 이 땅에서 경험한 자들이 그런 순종의


삶, 행함의 삶을 영원히 살게 되는 천국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러한 “행함” “순종” “주님의 다스림에 완전히 자기의 삶을 의탁하는 삶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의 믿음을 “귀신들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약2:19-20)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그러니까 여러분은 반드시 이 땅에서 자기의 삶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온전히 던지는
‘행함’의 삶을 경험해야 하고 그 삶이 얼마나 기쁘고 평안하고 자유로운 삶인지를 느껴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국에서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천국입니다.
그 곳으로 가는 길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안 읽으실 거예요? 그런데도 성경공부 시간에 자꾸 빠지고 그러실
겁니까? 여러분은 그 비밀을 알 수 있게 된 특권을 가지신 분 들이예요. 왜 그 특권을 저
창고에다가 쳐 박아두고 계십니까? 교회가 아닌 사람들은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알 수 있게 되었는데도 전혀 그 비밀을 궁금해 하시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계시기를 힘써 기도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여러분, 사탄이 오늘 날 우리의 정신을 빼앗아 가는 것들을 너무 많이 우리에게 던져 놓고


우리를 기롱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성경을 홀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수작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주 자주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그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아가고 묵상해야 하는데 이 마귀들이 그 시간을 빼앗아 가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헬렐레 하면서 골프에 중독되고 비디오에 중독되고 사우나에
중독되고 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으시고 더 많은 수고를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영생에 이르는 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 하나님 나라를 맛 볼 수 있는 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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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는
없어요. 그 분은 영이시고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우리가 감히 인식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자신을 계시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4:4)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히1:3)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골1:15)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그렇죠?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그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지, 여러분이 지금껏 배워
오셨던 것을 한번 함께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그 분을 보고 싶어 안달을 하고 그렇게 그 분과 함께 거하게 될 날을
오매불망 소망했는지 함께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잘 정리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매일 매일 묵상하세요.

여러분이 다 아시는 사실입니다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요14:10)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1:1-3)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런데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이 되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물론 신성을 그대로 유지하신
채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 그 중에 타락하여 아주 지저분하게 되어 버린 사람이 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빌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이신 그 분이 육신의 몸을 영원히 가지시기로 한 것입니다.
(딤전2:5)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런데 왜 그 분이 그렇게 낮아지셔야 했지요?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모두 한 혈통으로 지으셨습니다. 아담은 전 인류를 대표해서 그 타락의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용어로 대표의 원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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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7:26)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성경에는 그러한 대표의 원리가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패역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왕이 잘하면 이스라엘
전부를 칭찬하십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골리앗을 물리치고 승리자가 되고 사사들이
이스라엘의 대표로 등장하여 대적들과 싸웁니다. 아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함으로 많은 군사가
죽고 이스라엘이 아이 성에서 패배를 합니다. 이러한 대표의 원리는 우리에게는 좀 불합리해
보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사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clan society"
집단 부족 사회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 받은 한
혈통이라는 개념이 보편적으로 편만한 개념이었기 때문에 대표의 원리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을 때는 당시의 문화나 관습을 잘 알아두어야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아담의 죄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든지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등의 개념이 전혀 낯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 혈통인 인류는 모두 하나님께 배역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가 없이는 둘 사이에 화평이 절대 이루어 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중보자로 나서신 것입니다.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는 죄가 없는,
그리고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 중보자로 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나서게 된 것입니다.
(히10:6-9)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시편40편에서 인용된 구절입니다.
(시40:6-8)
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하나님과 죄인을 화평케 할 수 있는 것은 희생 제사로도 안 되고 어떤 인간의 노력도 안 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로 드려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드려지는 제사만
하나님 앞에 유효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우리의 희생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밧세바에게서 난 아이를 죽이심으로 “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다른 생명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단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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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으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삼상2:25)
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 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 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사람으로는 안 됩니다.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안 계시다고 성경이 진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보기도’라는 말도 잘 쓰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은 사람인 아담이 지은 죄, 그리고 그
안에서 인류가 지은 죄를 담당하시러 오셔야 하기 때문에 아담과 똑같은 사람이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사람의 몸을 입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
성육신 인 것입니다.
첫 번째 아담이 전 인류를 대표해서 타락을 했고 두 번째 아담으로 불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 중에서 창세전에 하나님의 품에 품으셨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하고 큰 것을 보실 때도 자신을 스스로 낮추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너무나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40:15-17)
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16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17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는 열방이 한 방울 물 같고 섬들이 먼지 같습니다.
(욥35:6-8)
6 네가 범죄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시113:5-6)
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하나님은 이렇게 크신 분이십니다. 천지를 살피실 때도 스스로 낮추셔야 하는데 그 분이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는 그것을 “수그카타 바시스”라고 불렀습니다.
당시에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내려 갈 때 쓰였던 말입니다.
누가 이토록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위해 인성을 가지신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래서 천사들도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고후8:9)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표준 새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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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영원이신 그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자원해서 가실 수 있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이 땅에서 자신의 구속 사역을 완전하게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서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다 포기하시고 비우시고 내려오셨습니다.
(빌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자기를 비우셨다. 'nothing'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신성을 다 내려놓고 오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여전히
하나님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요2:11)
11 예수께서 이 첫 번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었다.
그러면 자신을 비우셨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영광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습니까? 어떤 존재나 사물의 내용이 드러나는 것을 영광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성품, 인격과 같은 그 존재의 내용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그런
내적인 영광 뿐 아니라 외적인 영광도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현현을 표현할 때
“빛”이라는 단어를 많이 써서 표현합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에서 혹은 광야의 성막에서
나타난 구름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왕상8:10-11)
10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11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이렇게 하나님께는 성품, 속성, 인격 같은 내적인 영광과 겉으로 표출되는 외적인 영광이
있습니다. 사실 같은 것이지만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그 외적인 영광을 내려놓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분을 몰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적으로 보여 지는 능력으로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시기를
포기하시고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한 성품이 제자들에게 드러난 것을 그
분의 영광이 드러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성”하면 자꾸 능력으로만 생각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신성을 가지셨는데 왜 십자가에서 아프셨느냐? 왜 죽음에서 스스로 살아나올
수 없으셨느냐? 이런 질문들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능력으로 자신을 증명하시기를
포기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기적과 이적도 성령께서 그 분을 통해 일하실 때만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내적 속성은
그대로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이 겪는 고통과 좌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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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배고픔과 피곤함을 그대로 겪으신 것입니다. 신성을 가지시고 그 것을 인간처럼
겪으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되는 곳이
천국입니다. 게다가 그 분이 이렇게 우리에게 사랑고백을 하십니다.
(아4:9-11)
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이렇게 여러분을 사랑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과 함께 살고 싶으세요? 그렇게 스스로 낮아지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손수 만드신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지신 것도 감당키 어려운데 그를 대신해서 죽으러 오셨습니다.
(사53:6-8)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가 죽으신 것은 마땅히 형벌을 받을 백성들의 허물 때문인데 아무도 그것을 안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마땅히 형벌 받아야 할 자들을 위해 낮아지셨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희년을 공부할 때 살펴보았지만 누군가가 중보자가 되어 다른
이의 짐을 짊어지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러한 예가 많이 나옵니다.
(애5:7)
7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왕하23:26-27)
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2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뺀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 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끌려간 이유를 므낫세 때에 저지른 죄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삼하24:10-17)
10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15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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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는데 백성들 칠 만 명이 죽습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단순히 나의 죄가 다른 사람에게 전가되어서 그들을 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형벌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그 둘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어야 함을 시사 하는 것입니다. 즉 다윗의 이야기에서처럼
백성이 자기의 죄 때문에 죽는 것으로 말미암아 다윗 자신이 죽는 것과 같은 아픔을 겪을 수
있는 관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은 고통을 공유하는 관계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즉, 둘이 한 몸이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아무 관계도 없는 자가 대신 형벌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가 위하여
죽어야 할 존재들과 먼저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들을 신부로 맞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혼인은 신랑이 신부를 위해 죽기 위해 치러진 혼인입니다.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부부 관계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엡5:25,31,32)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렇게 예수님과 교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먼저 하나로 연합이 된 것입니다.
(아6:3)
3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우리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떠나 교회와 먼저 한 몸이 되신 것입니다. 한 몸이 된 뒤에 죽어야
그 상대방이 함께 죽은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교회를 그 분의 신부로 맞는 “선택,
예정”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불특정 다수를 위해 죽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알매니안 주의는 아주 비 성경 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우리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기 전에 먼저 선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 적인 순종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과 함께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과 함께 살고 싶으십니까?
그리고 그 한 몸 된 자들을 위해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자유롭게 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셔서
진짜 한 영이 흐르는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완전히 묶어 버리신
것입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언약의 성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영을 소유하게 되어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함께 소유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일한 신의 성품을
우리가 갖게 된 것입니다.
(벧후1:4)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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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공동번역)
우리는 그 영광과 능력을 힘입어 귀중하고 가장 훌륭한 약속을 받았읍니다. 여러분은 그
덕분으로 정욕에서 나오는 이 세상의 부패에서 멀리 떠나 하나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읍니다.
우리는 로마서 1장18절에서 3장 20절까지에 기록된 그런 철저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이제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하신 언약은 끝까지 지켜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오,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과 영원히 함께 살고 싶으십니까? 이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엡4:21-24)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신의 성품을 나누어 받은 자로서의 삶을 이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이만큼을
너에게 주었으니 너도 나에게 이만큼을 달라는 반대급부의 요구가 아닙니다.” 그 신의
성품대로 살게 되면 우리 안에 놀라운 평안과 평화와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율법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그 나라의 삶의 원리로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시고 그 맛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이 땅을 살다보면 우리 안에 평안과 위안과
확신과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John owen목사님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삶이 얼마나 좋았으면 그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게끔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지지대와 받침대를 철저하게 의존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것들을 털어 버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의탁해야 하는데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내가 얼마나 손해를 볼 텐데 그렇게 살아“”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세상이 나를 얼마나 바보 취급을 할 텐데 내가 그렇게 살아“ 해보지도 않고
두려워합니다. 그것을 과감히 포기해 보면 진짜 평안과 자유와 기쁨과 확신이 오게 되는데
그것을 못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지지하고 있는 지지대를 어떻게 하면 놓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아는 만큼 그
분이 내 안에 차지하고 있는 자리만큼 그것들이 밀려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안과 자유가 점점 커지게 되고 우리는 그러한 자유와 평안과 기쁨의
완성인 하늘나라를 점점 더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눅2:28-29)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표준 새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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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이 아기를 자기 팔에 받아서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주님, 이제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이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보자 무어라고 말 합니까?
“이제 평안히 죽을 수 있겠다“는 고백을 합니다. 예수를 아는 자들은 이렇게 죽음 앞에서
당당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게 됩니다. 전혀 그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여러분을 기대하십니까?
그렇게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몸을 입은 ,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로서의 여러분을 열망하십니까? 우리는 반드시 그 삶을 열망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를
그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롬8:23)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곤고한 사망의
몸이 다 없어지고 새 몸을 입게 되는 그 천국을 소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그 예수님께서 그러한 사랑과 긍휼과 계획과 집요하심으로 지금까지
이루어 오셨다면 그 완성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여러분 그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예수님이 보고 싶으세요? 그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살고
싶으십니까?
매일 매일 그 예수님을 묵상하십시오. 아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매일 매일 그 예수님을
확인하십시오. 사단이 주는 가짜 영광에 속지 마세요. 마귀가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시험을 했다고 마태복음이 이야기합니다. 그 영광은 가짜
영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짜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편안함과 평안함을 바꾸지 마세요. 여러분은 주님주시는 평안함을
추구하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속지 마시고 더욱 더 예수님을 바로 알아가세요.
여러분의 수고가 반드시 동반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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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게 하라(III) - (1)시편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엡3:17)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so that 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through faith. And I pray that you, being
rooted and established in love,
우리는 바울의 기도 중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의 부
분을 계속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하는 방법으로 믿
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고 또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점점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말씀에 의해서 라는 것을 이미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오늘부터 몇 주간은 시가 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설명을 해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성경 전체의 맥을 설명해 드리면서 이 시가서가 성경의 가장
중심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 말씀드렸지요? 물론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 이 시가서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것인지를 살펴봄으로 해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더욱
더 깊이 각인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작년에 모세 오경에 나타난 예수 그
리스도에 관해서는 두 달간에 걸쳐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음에 관해서만 기록이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이 제일
어려워하시고 잘 못 읽으시는 부분이 이 시가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시가서도 단순한 윤
리적이며 도덕적인 권고나 책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 즉, 복음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 드리고 다음 절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성경은 모두 66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 39권 신약27권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중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우리가 토라(모세오경)이라고 부릅니다. 모세
가 애굽을 나온 후 광야에서 쓰기 시작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 상, 열왕기 하, 역대 상, 역대 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여기까지를 역사서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전쟁을 치르고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고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하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
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서를 ‘시가서’라고 합니다. 혹은 지
혜 문학이라고 도 부릅니다. 그리고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서를 대
선지 서라고 합니다. 다른 선지서보다 책의 양이 많아서 대 선지 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는 16명의 선지자가 나오는데 그 중 그 네 사람이 쓴 책을 대 선지 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호
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이렇게
12선지자의 선지 서를 소선지 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400년 암흑기를 거쳐 예수님께서 오시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4복음서가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 중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내
용이 많이 겹쳐있고 기록한 관점이 같다고 해서 공관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 중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이 되었고 그 마가복음에는 없고 마태복음, 누가 복음에만 있는 자료를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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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자료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의 뼈대 위에다 Q자료의 내용과 마태의 견해를 보탠
것이 마태복음이고 역시 마가복음의 뼈대 위에다 Q자료를 얹고 그 위에 누가의 견해를 보탠
것이 누가 복음입니다. 요한 음은 그 구조가 전혀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대단히 헬라 적인 배경
을 가지고 있는 복음서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
가 전후서,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예수님의 동생), 베드로 전후
서, 요한 1,2,3서 그리고 유다서(예수님의 동생), 요한 계시록으로 66권이 마무리됩니다.
이 전체가 한 가지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 분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쓰신 한 권의 책입니
다. 어떤 주제입니까? 우리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구속의 역사가 기록이 된 책입니다. 그 구원
이 누구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까?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그러니까 성경은 전체가 그 이야기
만 하고 있습니다.
(창2:8-10)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여기에서 이리로 가는 것입니다.
(계22:1-5)
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그래서 성경 신학에는 “종말은 태초의 완성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가 목적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이 목적은 처음부터 요한계시록 22장의 그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어떻게 그 불가능하고 패역한 인간들을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도 손상됨이 없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만들어 가시는가를 하나님의 교회에게 설명하시는 책이 바로 성경책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시가서도 그 관점으로 해석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시가서 공부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밝히 확인하게
되는 유익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편은 총 150편으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1,000년간에 걸쳐 기록이 된 방대한 분량의 책입


니다. 제가 요즘 스펄전 목사님의 시편 강해를 보면서 틈틈이 시편을 읽고 있는데 거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읽을 때가 많습니다. 시편 안에 얼마나 풍성하고 엄청난 하나님의 경륜이 숨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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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초로 쓰인 시편은 모세의 시편 90편입니다. 그리고 가장 나중에 쓰인 시편이 포로 귀환
시대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쓰인 시편 126편입니다.
총 150편의 시편 중에 75편이 다윗의 시편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3편, 고라의 자손이 11편
을 썼고 아삽이 12편, 헤만이 1편, 에단이 1편, 모세가 1편 이렇게 작시를 했고 나머지 46편은
익명입니다. 누가 지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자가 밝혀지지 않은 시편2편이나 95편 같은
것은 신약의 사도행전이나 히브리서를 보면 다윗의 저작인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히4:7)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시95:8)
8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행4:25)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시2:1)
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그러니까 거의 반 이상이 다윗의 시편입니다. 다윗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인물
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면서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하는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
도의 고난과 비교가 됩니다. 그런 고난과 핍박 속에서 결국 하나님께서 아들을 왕으로 삼으시
고 그 왕을 통해 그의 백성들이 건짐을 받는 그런 내용이 시편 전편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전체는 메시아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아 건짐을 받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고 그들의 삶(이를테면 신앙생활)에 관해서 아주 자세하게 기록이 되
어 있는 책입니다. 다윗의 한탄하는 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그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하나
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 내시어 그 고난 속에서 영광으로 자기의 아들을 그리고 그 안에 있
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승귀 시키시는 것을 우리는 시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는 시온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시온이 어디입니까? 성전이 있는 예
루살렘-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시편은
궁극 적으로 천국을 소망하고 천국을 기다리는 내용인 것입니다.
시편(2,45,72,110,118)편을 보면 메시야와 그의 통치와 심판에 대해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
는 것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 다섯 편을 messianic psalm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눅24:44)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렇게 시편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시편을 잘 보시면 다윗의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이며 우리의 기도이기도 한 것
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되어진 그리스도인의 삶은 당연히 이 땅
을 살다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백과 기도를 그대로 따라가게 된다는 것을 밝히 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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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시편은 총 다섯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1권이 (1-41)
2권이(42-72)
3권이(73-89)
4권이(90-106)
5권이(107-150)입니다.
보통 1권은 다윗의 사후에 솔로몬에 의해 수집이 된 것이라고 학자들이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
다. 그리고 2권은 고라 자손에 의해서, 3권은 히스기야 시대의 아삽에 의해서, 그리고 4권과 5
권은 에스라, 느헤미야에 의해서 수집이 되었고 최종적인 완성은 에스라 시대입니다.
이 다섯 권의 책은 모두 끝날 때마다 송영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편인 150편은
시편 전체의 송영에 해당합니다. 송영(doxology)은 공식 행사의 처음과 끝에 하나님의 영광을
짧게 찬양함으로써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음악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가
결국은 승리로 끝이 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역시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을 부르는 것으로 결국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1권2권에서는 탄식과 한탄의 시가 많은 반면 마지막 5권은 거의 다 찬양의 시입니다.
그것은 시편의 구조 자체가 고난에서 영광으로 이르는 삶, 우리 예수님의 삶, 그리고 우리 그리
스도인의 삶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애가에서 찬송과 감사로 흐릅니다.
보시겠어요? 제가 간단하게 시편의 몇 구절을 들어서 그 전체 내용을 맛을 보여 드리고 조금
자세하게 다루어 드리겠습니다.
(시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그런데 그 복 있는 자는 왕의 아들에게 입 맞추고 왕의 아들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시2:12)
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그런데 그 복 있는 자의 삶이 만사형통, 승승장구, 의기양양이 아니라 고난과 수난의 삶입니다.
(시22:1-2)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러나 참 복을 받은 자는 그렇게 고난과 수난으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시34:19)
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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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하나께서는 그 음부까지 내려갔던 하나님의 백성들, 의인들의 영혼을 끌어내셔서 결국 부활과
승귀로 이끄십니다. 이 세상에서 보면 악인이 잘되는 것 같고 의인들이 지지리 궁상처럼
보이지만 결국 어떻게 됩니까?
(시150:1)
1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자들의 결국입니다. 성소에서, 하나님계신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찬양을
하게 되는 자들, 그것이 우리의 참 복입니다. 우리는 시편을 통해서도
우리의 참 복은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계신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아니 그것은 성경 전체가 피력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삶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럼 이제 권별로 자세하게 그 내용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시편은 마구잡이로 모아놓은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시편의 순서가 전부 하나님의 편집입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기록이 된 것이기 때문에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1권을 보면 전부 다윗의 시입니다.(1-41) 시편 1권은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하는 시편들입니다.
여자의 후손 메시야를 보내서 그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언약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구약에서는 그 메시아를 예표 하는 인물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래서 1권은 모두 다윗의
시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다윗과 함께 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1권을 죽 읽어보시면
다윗이 고생 끝에 왕위에 오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어떻게 오실 것인지를
우리에게 암시해 줍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은 복 있는 자, 즉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시1:1)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권의 마지막인 41편을 볼까요?
(시41:2-12)
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어떤 말로 시작합니까? 1편의 시작과 똑같이 Blessed is the man 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1권은 하나님께서 그 복 있는 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세우실 것을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복 있는 자로 시작해서 복 있는 자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 복 있는 자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인지는 조금 있다가 시편 1,2편을 보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2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5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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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7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10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11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2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2권은 (42-72)하나님의 언약이 끊어지지 않고 아들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2권의 마지막은 솔로몬의 시편으로 끝납니다.
(시72:1-2)
1 하나님, 왕에게 주의 판단력을 주시고 왕의 아들에게 주의 의를 내려 주셔서,
2 왕이 주의 백성을 의로 판결할 수 있게 하시고, 불쌍한 백성을 공의로 판결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 시편 72편은 시편2편의 하나님의 언약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실 그 솔로몬은 왕의 아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상징이지요.
볼까요? 1편에서 복 있는 자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고는 2편에서 그 아들로 참 왕을
삼으시겠다는 언약을 하십니다.
(시2:7-12)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그 언약이 72편의 왕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솔로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72편을 죽 읽어보시면 시편 1편의 복 있는 자의 삶의 내용이 똑같이 등장합니다.
솔로몬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참 복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이죠.
(시1:3)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72:16)
16 산꼭대기의 땅에도 화곡이 풍성하고 그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
(공동번역)
방방곡곡엔 알곡이 주렁주렁, 레바논산처럼 산꼭대기까지 열매가 무르익고, 땅에는 이삭이
햇풀처럼 피어나게 되리라.
3권은(73-89) 이제 그 복 있는 자가 고난을 당하는 내용입니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나라가 갈립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남 유대가 다 망하고 성전도 파괴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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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그리고 왕도 끊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질문이 생깁니다.“하나님의 언약이 지금도 계속 유효한
것인가? 우리의 불순종으로 끊긴 것은 아닌가?”
그래서 3권의 마지막을 보면 모두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유효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지경에 처해 질 수 있는 것입니까?”
(시89:38-51)
38 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노하사 물리쳐 버리셨으며
39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40 저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보장을 훼파하셨으므로
41 길로 지나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42 주께서 저의 대적의 오른손을 높이시고 저희 모든 원수로 기쁘게 하셨으며
43 저의 칼날을 둔하게 하사 저로 전장에 서지 못하게 하셨으며
44 저의 영광을 그치게 하시고 그 위를 땅에 엎으셨으며
45 그 소년의 날을 단촉케 하시고 저를 수치로 덮으셨나이다(셀라)
46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47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48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셀라)
49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이전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50 주는 주의 종들의 받은 훼방을 기억하소서 유력한 모든 민족의 훼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51 여호와여 이 훼방은 주의 원수가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훼방한 것이로소이다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합니까? 왜 하나님이 훼방 받고 계십니까? 이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4권으로 넘어가면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해 주십니다.(90-106)3권의 마지막인 89편에서
90편으로 넘어가는데 모세의 시편으로 시작이 됩니다. 모세 때는 어떤 때이지요? 왕이 없던
시대지요? “너희에게 지금 왕이 없고 너희가 광야와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너희를 지키고 계신다. 모세 때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지만 그 때에도 하나님은
너희를 이끄셨다.” 모세와 함께 출애굽을 해서 너희가 광야에서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그 때도
나는 너희의 왕이었다는 내용을 4권에서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4권의 시작인 시편90편이
모세의 시편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시90:1)
1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그리고 시편91편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시91:1-16)
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2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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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가 되나니
5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6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7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8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10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13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14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15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너희가 고통을 받음으로 나의 언약을 의심하느냐? 지금도 나의 언약은 시퍼렇게 살아있고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4권입니다.
그래서 4권의 시편에 보면 여호와가 통치하신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권5권을 보시면(107-150)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들어있는 언약백성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게 될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삶은 바로
메시야를 고대하면서 예배하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시107:1-3)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 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3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시108:1-5)
1 (다윗의 찬송 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2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3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열방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4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찬송을 하고 예배를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확신 속에서
메시야를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110:1-2)
1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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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한 언약의 백성들은 아직 그 아들을 보지 못했지만 확신 속에서 찬양과 경배를
드렸습니다.
(시111:1)
1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112:1)
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113:1)
1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어떤 자들이 이런 할렐루야 찬양을 부를 수 있습니까?
(시120:1)
1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121:1)
1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122:1)
1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자기들의 목표 지점이 이 땅이 아니라 성소, 성전 하나님 계신 곳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할렐루야 찬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되자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질문과 문제가 다 해결이 됩니다. 왜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나님이 버린 것처럼 고난을 받고 있는지 왜 때로 하나님이 우리를 떠난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든 문제와 질문의 해답이 다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찬송을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드십니까? 성전으로 올라가십시오. 여러분, 외로우세요?
두려우십니까? 성전으로 올라가세요.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는 자리로 가세요.
(시150:1-6)
1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지어다
3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이렇게 시편은 예수님의 애가요, 예수님의 기도요, 예수님의 찬송입니다.
애가에서 찬송, 이 땅의 나그네 삶에서 천국 백성의 삶으로, 고난에서 영광으로 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입니다.
그럼 시편 전체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시편 1,2편을 살펴보면서 전체적인 복습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전체의 요약이라는 것은 전체 성경의 요약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시편1,2편은 연결이 되기 때문에 같은 한 시편으로 보는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시편 1편을 보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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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복 있는 사람과 악인에 대해 묘사를 합니다.
"blessed is the man" 이 “모든 시편의 첫 번째 구절”을 우리가 볼 때 우리는 “진짜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궁금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시편 전체에서 아니 성경 전체에서 누가 진짜
복이 있는 자인가를 분별해 내셔야 합니다. 이 땅에서 만사형통하고 승승장구하는 삶이 진짜
복이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 복의 내용은 다른 것인가? 꼭 분별하셔야 합니다.
개역 성경은“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번역을 해 놓았지만 원래 감탄문입니다. “오, 복 되도다”
“그 사람“ 영어로도 Blessed is the man입니다. 관사가 붙어 있지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어떤 특별한 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되는 자들입니다. 잘 보시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walk) 그리고 거기에 서지 않고(stand) 그리고 그 악인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sit)라고 우리가 죄에 어떤 순서로 빠지게 되는지를 점층법을 써서 표현합니다. 죄를
좇다가 그 앞에 서고 결국엔 그 자리에 주저 않아 버리는 그런 악인의 삶을 살지 않는 자들을
복 있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 있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시1:2)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 말씀이 그 삶에 이루어지는 자들입니다.
(시112:1,10)
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0 악인은 이를 보고 한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하리니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
(시119:1)
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히브리말로 “하가” “묵상 하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라고 했지요? 그 묵상한 바가 자기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까지가 묵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시편 119편 1절 말씀처럼 “복
있는 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그 행위가 깨끗하며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되는 자입니다. 여기서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되리라는 말은
”짜라흐 아싸“라는 말인데 ”거기서 나는 모든 것이 성숙해 지리로다.”라는 뜻입니다. 마소라
사본이나 고대 역본들을 보면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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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자 들은 악인의 길은 쳐다보지도 않는 자이며 늘 말씀을 묵상하며 그대로 살아내는
자이며 그의 행사, 그의 하는 일들이 다 성숙한 자들이라는 것이죠.
그런 의인이 우리 인간 중에 있습니까?
(롬3:10-12)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그러면 그 복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복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러면 그 복 받은 분이 살다 가신 모습
대로 살면 복을 받은 자들이겠지요? 예수님이 부자이셨습니까? 예수님이 명예가 있으셨나요?
예수님이 멋진 집이 있으셨습니까? 그 분은 머리 둘 곳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에게 늘 멸시 당하고 배반당하고 수난 당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이 복 받은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복” 하고는 완전히 다르지요? 그런데 그 복 있는 자를 열방이 비웃고
그에 대해 분노합니다.
(시2:1-3)
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웃으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시2:4-9)
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 모습으로 오히려 그에게 분노하게 되는
형국으로 오시게 될 것이지만 그 분이 진짜 하나님이 보내신 참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믿고 그분께 피하는 자들이 복이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 시편 2편입니다.
(시2:12)
12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개역 성경에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영어로도"him"목적격이고 히브리어로도 목적격입니다. 그러니까
그 앞의 단어를 받는 말입니다. 그 아들을 받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아들을 의지하고 그
아들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분께 피하고 그 분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역시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그런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보세요. 시편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기도이며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임과 동시에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이며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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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리스도의 삶과 그리스도의 기도라는 것은 그리스도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이며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복 있는 자”이신 메시야가 오셔서 살다 가신 모습
그대로 우리도 그렇게 살다 갈 것이며 그 삶이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고 조롱하는 삶이 될
것이지만 그 삶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복 있는 자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시편 1,2편이며 전체 시편의 내용이며 전체 성경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렇게 시편 전체는 진짜 복 있는 사람은 오히려 고난을 당하고 조롱당하고 약한 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진술합니다. 저에게 늘 위로가 되는 시편을 여러분과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시73:1-28)
1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2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3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5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6 그들에게는 오만이 목걸이요, 폭력이 그들의 나들이옷이다.
7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며, 마음에 기대한 것보다 더
얻으며,
8 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 즐긴다.
9 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 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
10 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물을 들이키듯,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11 덩달아 말한다.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 하고 말한다.
12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13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14 하나님, 주께서는 온종일 나를 괴롭히셨으며, 아침마다 나를 벌하셨습니다.
15 "나도 그들처럼 말하면서 살아야지" 하고 말했다면, 나도 주의 백성 가운데 한 사람처럼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16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17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 주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19 그들이 갑자기 놀라운 일을 당하고, 공포에 떨면서 자취를 감추며, 마침내 끝장을
맞이합니다.
20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21 나의 가슴이 쓰리고 심장이 찔린 듯이 아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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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나는 우둔하여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23 그러나 나는 늘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잡아 주십니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해 주시고, 마침내 나를 주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25 내가 주님과 함께 하니, 하늘로 가더라도, 내게 주님 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땅에서라도,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26 내 몸과 마음이 다 사그라져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시요, 내가 받을
몫의 전부이십니다.
27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망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정절을 버리는 사람은, 주께서 멸하실
것입니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주께서
이루신 일들을 전파하렵니다.
죽을 때도 편히 죽고 얼굴에 기름기가 주르르 흐르는 그 사람들을 복되다고 합니까? 악인들의
모습이 오히려 그렇다는 것입니다. 진짜 복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28절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자신을 의탁하는
자들이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조금 전에 읽었던 시편 2편의 결론과 같지요? 여러분은 성경
전체에서 이 원리를 찾아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지 않는 자들이 더 잘 되는 것 같고
더 형통해 보여도 하나님을 모르고 승승장구하는 자들은 복 있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는 시편의 복 있는 자의 모습을 똑같이 이렇게 묘사하고 있지요?
(마5:3-12)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게 복 있는 자들의 삶입니다. 그 삶을 그대로 살다 가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시편 전체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과 그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삶에 대해 체계 있고 차근차근하게 설명해 놓은
복음이 적혀 있는 책인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제 시편을 막 읽고 싶은 충동이 좀 드세요?
여러분, 성경을 통해 이렇게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조금 씩 조금씩 확인을
하게 되면 우리 입에서 찬송이 그치지 않게 됩니다. 시편의 제 5권에서 “우리의 목적지가 이
땅의 상황이 아닌 저 하나님 계신 성소라는 것을 아는 자들은 원수가 겹겹이 싸고 있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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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서도 할렐루야 찬양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의 목적지를 잘 확인하십시오.
우리 주의 환경을 영어로 무어라고 합니까? circumstance 그 단어는 라틴어 “키르쿰”과
“스타레”의 합성어입니다. 키르쿰은 “나의 밖에 있는 주위”를 뜻하는 것이고 “스타레”는
“서다”라는 뜻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여전히 나의 밖의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골로새서 1장 27절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 이니라”라는 말씀처럼 우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왜 밖의 환경을 자꾸 바라보십니까? 우리 기독교는 나의 환경을
바꾸어 평안을 얻어내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나의 소원이 모두 이루어지게 되는
만사형통의 종교가 아닙니다. 환경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로 말미암아
내가 변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에 잡혀갔습니다. 요셉은 그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피하려다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서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을 만나 꿈
해몽을 해 주고 술 맡은 관원에게서 나가면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지만 이내 그 술
맡은 관원이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 요셉의 처지를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시105:17-18)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는 구절 “네페쉬 보 바르젤”은 “내 영혼이 쇠꼬챙이로 뚫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합니다.
(창39:20-23)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성경이 말하는 형통한 삶이라는 것은 환경과는 아무 상관없는 단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형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거룩을 위해 여러분에게 질병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형통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그리스도인 됨을 위해 여러분의 사업을 망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형통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환경을 바라보시지 말고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확인하세요. 평안은 뭡니까? 어디서 그 말이 처음 나오지요? 사사기의 기드온 사건에서
처음 나옵니다. 당시 미디안이 추수 때만 되면 쳐 들어와서 곡식을 몽땅 빼앗아 가는 바람에
기드온이 몰래 먹느라고 집 안의 포도주 틀에다가 밀을 탈곡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그랬더니 기드온이 대뜸 따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의 이
상황이 이게 말이 됩니까?”
(삿6:12-13)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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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하라는 요구를 합니다. 그랬더니 나에게
지금 명령하시는 분이 주이신 것을 나에게 증명하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사자가 제물을 반석
위에 놓고 국물을 부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무 막대기를 그 제물에 갖다 대서 그 제물을
불사르려 합니다. 그런데 그 막대기에서 불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석에서 불이 나와 그
제물을 태워 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그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설명해 줍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뵈었으니 이제 자기는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면 죽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너는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안
죽지요? 그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그 곳을 기드온이 여호와
샬롬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평안은 나의 상황이 나아져서 아무 어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환경은 그대로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죄에서 구원을 받아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자라는 것을 깨닫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도 이제 죽지 않는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을 평안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환경을 바라보시지 말고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인생에 일어난 놀라운 일을 깨달아 아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경 전편에 걸쳐서 자상하게 설명하고 계신 그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찬송할 수 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골3:15-17)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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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게 하라(IV) 잠언 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엡3:17)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우리는 계속해서 시가서 속에 나타나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동안 시편을 열심히 읽어 보셨습니까? 시편에 어떻게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있는지 본인들 눈으로 확인을 하셨나요?
오늘은 잠언은 어떻게 읽어야 하며 잠언 속에는 어떻게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있는지
공부를 하겠습니다.
잠언의 히브리어 제목은 “미쉘레 쉘로모”입니다. 그 말은 솔로몬의 잠언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모든 책의 제목이 그렇듯이 히브리어 성경은 그 책의 첫 구절을 제목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솔로몬의 잠언“이라는 책에 나오는 잠언이 모두 솔로몬이 쓴
것은 아닙니다. 잠언30장은 아굴이 쓴 것이고 31장은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르무엘 왕에게
훈계한 잠언입니다. 그리고 22장:17-24:34절까지의 내용은 익명의 지혜 자에 의한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전체가 다 솔로몬이 쓴 잠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책제목도 그렇고 1장 1절에도
(잠1:1)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솔로몬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혜” 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 떠오르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전 건축입니다. 제가 주일 날
설교 때 구약 성경에서 성전은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했습니까?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들으시면 여러분은 이내 “성전이
완성되는 지혜”를 떠올리셔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탄생이 되고 그로 말미암아
완성이 되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는 지혜가 솔로몬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잠언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는 지혜”가 적혀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솔로몬의 잠언 중에 교회에게 그 내용을 이해시키는 데 필요한 만큼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왕상4:30-32)
30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31 저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와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32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
잠언의 핵심 단어는 “지혜”입니다. 참 지혜가 무엇인가? 그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 그리고 “그
지혜를 소유하라“. 그리고 ”그 참 지혜를 소유한 자의 삶은 어떠한 모습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지혜 있는 자로서의 삶으로 인도해 주는 지침서가 바로 잠언입니다.
(잠1:2-4)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그러나 단순히 세상 지혜를 얻고 도덕적인 교훈을 얻고자 잠언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잠언의 중요한 몇 구절을 들어서 그 내용에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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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1:7)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 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3:5-6)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8:13)
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어떻게 권고합니까?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분을 인정하면 그 분이 범사에 네 길을 지도하실
것이다. 그러니까 네 명철을 의뢰하지 말라. 오직 그 분만을 의지해라“ 그리고 ”그렇게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분을 인정하는 자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인데 그들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지 않는다.“ ”지혜가 있는 자들“이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악을 미워하며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갖지 않는다.” “그러니까 너희도 그렇게 살라” 는 것이 바로 잠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습니까? 잘 안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내 낙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이 뭡니까? 그러한 절망과 낙심과 좌절을 환희와 기쁨으로 충만케 만드는 것이
복음 아닙니까? 이 잠언도 바로 그 복음이 적혀 있는 책입니다. 여러분이 방금 제가 읽어드린
잠언의 세 구절을 들으시고 “난 안 돼” 라고 절망하셨다면 이제 여러분은 잠언을 공부하시면서
“어떻게 이렇게 불가능한 내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러한 자가 되어 있는가?” 하고
감격하시게 될 것입니다.

잠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에서 9장까지가 한 부분이고 10장에서


31장까지가 두 번째 부분입니다. 10장부터는 그야말로 여러 가지 교훈이 나열이 되어
있습니다. “말을 조심해라. 혀를 잘 못 놀리면 안 된다. 가족을 사랑해라. 자식은 패서
키워라“등등 여러 가지 교훈이 등장합니다. 그렇지만 이 10장부터 나와 있는 여러 가지 교훈의
내용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9장까지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그 잠언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잠언의 서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잠1:1-7)까지를 보면 잠언의 내용과 목적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즉, “지혜를 소유한 언약 백성의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다” 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언약 백성들에게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느냐 하면 계속해서 “내 아들아” 하고 부르시는 것을 우리가 보면서 이 잠언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당시에 존재하던 그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그 언약의 후손들인 하나님의 모든
언약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기도 합니다. 왜요? 우리가 하나도 지킬 수 없는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지키셔서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를 소유한 자들에게 이렇게 권고를
하십니다. 잠언1장 8절에서 19절 까지를 보면 그 아들에게 악한 교제를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0절부터 볼까요?
(잠1:10-19)
10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11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 537 -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12 음부 같이 그들을 산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13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14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15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16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데 빠름이니라
17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겠거늘
18 그들의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19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그러니까 이 잠언은 아들로 대표되는 지혜를 소유한 자와 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로 표현이
되는 세상과 사탄의 세력을 동시에 떠올려 놓고 교회에게 뭔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14:1)
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어리석은 자는 이렇게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잠언 전체에 지혜라는 말 “호크마” 라는 말이 거의 50 회 정도 나옵니다.
그리고 어리석음이라는 말 “케실”과 “에윌”이 70회 정도 나옵니다.
잠언에서는 이렇게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의 삶을 비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친절하
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 1장 20절에서 33절까지에서 “악한 자들, 어리석은 자들과의 교제는 피하되
지혜와의 교제는 피하지 말라, 지혜를 구해라“하고 권고하십니다.
(잠1:20-23)
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21 훤화하는 길머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가로되
22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리고 2장 1절에서 22절까지에서 “그 지혜를 구하는 자들, 지혜의 길로 가는 자들의 복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줍니다.
(잠2:1-12)
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4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6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 538 -
8 대저 그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9 그런즉 네가 공의와 공평과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10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이요
11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12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내리라
그리고 잠언 3장 1-12절까지에서 “그 얻은 지혜로 말미암아 이제 여호와를 신뢰하고 여호와를
경외하고, 여호와만 의뢰하며 살라“ 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자들의 유익을
바로 바로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잠3:1-12)
1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2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여기서 ‘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욤 아라크, 우쉐노트 하임’은 질적이며 양적인 “생명의
날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작정 오래 살게 해 준다는 말이 아니라, 영적으로
”행복한 긴 날들“이라는 뜻입니다)(엡5:16)
3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4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8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그리고 3장 13-35까지에서 “지혜를 소유한 자의 복“에 관해서 자상하게 설명을 해 줍니다.
(잠3:13-35)
13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14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15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17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 되도다
그리고 4장 1-9에서 “그러니까 그 지혜를 품에 안아라, 그 지혜를 품은 자가 영화로운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잠4:5-7)
5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6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7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리고는 4장10-7:27까지에서 “악인의 길을 피하라” 하시면서 “음녀와 이방 여인 즉,
세상, 사탄의 세력을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음녀와 이방여인을 따라가는 자들은 반드시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확인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잠4:14-17)
14 사특한 자의 첩경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
15 그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

- 539 -
16 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
17 불의의 떡을 먹으며 강포의 술을 마심이니라
(잠5:3-9)
3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4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5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
6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치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
하느니라
7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8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9 두렵건대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며 네 수한이 잔포 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
(잠6:6-26)
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7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8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9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10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면
11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이것은 단순히 게으름으로 인한 가난과 궁핍을 경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나태함으로
인해서 영원히 멸망하게 될 인간들을 향해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12 불량하고 악한 자는 그 행동에 궤휼한 입을 벌리며
13 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로 알게 하며
14 그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
15 그러므로 그 재앙이 갑자기 임한즉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당장에 패망하리라
16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17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18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19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20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21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22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24 이것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게, 이방 계집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25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26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음녀, 악한 계집으로 표현된 세상 풍속과 마귀의 세력을 좇아가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지혜를 좇는 자들은 악한 계집, 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를 좇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가 도대체 뭔가? 에 대한 대답이 바로 8장 전체입니다.
(잠8:12-36)

- 540 -
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14 내게는 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15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16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18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19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나으니라
20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21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32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33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35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36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골로새서 1장으로 한 번 가보시겠어요?
(골1:15-17)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마치 잠언 8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지요?
(요1:1-3)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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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지혜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태초에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는 지혜자의 지혜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사29:13-14)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그 지혜를 그 분의 백성들에게 부어서 그들을 살려 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11:1-2)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 약속이 이렇게 이루어 졌지요?
(엡1:17-19)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성령)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막6:2)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눅2:40)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잠언에서 솔로몬이 가리키던 참 지혜의 본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눅11:31)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진짜 참 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고전1:24,30)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골2:2-3)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 542 -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를 얻은 자는 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죽는다. 이것이 잠언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은 지혜를 택하라“ 그러면서 (잠9:1-18)에서 ”지혜냐? 미련한 여인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잠9:1-6)
1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2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3 그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4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5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6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잠9:13-18)
13 미련한 계집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14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15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을 불러 이르되
16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17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18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가 그의 곳에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음부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지혜와 미련한 계집의 부름에 “너희는 누구를 택하겠느냐?” 하고 선택을 종용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수신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잠언을 읽고
그 뜻을 알게 되면 지혜를 택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10장부터 전개되는 지혜를 소유한 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지혜가 오심으로 이러한 삶이 성도들의 삶에 나타납니다.
(골1:9-12)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골3:16-17)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 지혜가 있는 자들은 이렇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이해하고 10장부터 나오는 교훈의 내용을 읽으셔야 올바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 543 -
10장부터 31장까지의 잠언은 각 센텐스가 각기 다른 수많은 주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구조를 나누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모두 지혜를 소유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이 땅에서의 삶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알긴 아는데 안 되지요? 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인데 그
삶이 여전히 안 살아지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으면 큰일 난다는
것입니다. 그 분께서 이 잠언의 모든 삶을 다 살아내 주셨고 우리에게 산 것으로 전가
시켜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염치없지만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지혜를 소유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 은혜의 깊이를 아는 만큼 잠언의 교훈을 따라 한발 한발 우리의 삶도 그 곳으로
옮겨 놓는 것입니다. Union christ,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님 아니셨으면 큰 일 날 뻔한 것입니다. 정말 생각하기도 싫네요.

잠언 9장이 이 잠언에서 가장 중요한 장입니다. 잠언 9장에 잠언 전체의 주제가 요약이


되어있고 성경전체의 주제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잠언 9장을 보시면
아들이 생명의 길로 가는 길에 두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한 여인은 지혜의 여인이요 다른
여인은 미련한 여인이라고 표현된 마귀의 세력입니다. 그 두 여인 모두가 아들을 초대합니다.
누구의 식탁에 들어가 누구와 먹을 것인가?
(잠9:1-18)
1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2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3 그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4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5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6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7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
8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9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와 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11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질 것이요 네 생명의 해가 더하리라
12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
13 미련한 계집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14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15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을 불러 이르되
16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17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18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가 그의 곳에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음부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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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여인은 성중 높은 곳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높고 높은 시온 성, 왕이신 우리 하나님의
성입니다. 11절을 보시면 그 지혜의 여인이 차려 놓은 음식은 아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잠3:18)
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 되도다
(잠11:30)
30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그러면 그 지혜의 여인, 예수가 차려놓은 음식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늘의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바로 그 분 자신인 것입니다. 그 예수와 함께 예수를 먹고 마시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계3:20)
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 주님은 죄인들에게 찾아오셔서 함께 먹고 마심으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마11:18-19)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그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생명나무 실과가 주렁주렁 열린 새 하늘과 새 땅이 허락된 것입니다.
(계22:1-2)
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성중 높은 시온 산으로 초대하는 지혜의 여인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는 음식이 바로
생명나무인 것입니다. 그것은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계22:17)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절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그렇게 살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잠언 서에 이르는 모든 교훈을 우리 주님이 다 지켜내셨고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아들이 된 것입니다.
잠언 1장 1절부터 “내 아들아” 지혜를 택하고 악인의 길을 버려라 “내 아들아” 이렇게 살아라.
“내 아들아” 저렇게 살아라. 그래야 너희가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고 영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삶을 우리 주님께서 모두 살아내시고 바른 길을 택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공짜로 주신
것입니다. 그게 잠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자발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10장 이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미련한 여인도 높은 곳에 앉아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며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일한 무기는 모방입니다. 유사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혜의 여인,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음식은 생명의 떡이었지만 미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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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준비한 음식은 몰래 먹는 떡. 그것은 죽음의 떡인 것입니다.
(잠9:17)
17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그 떡이 당장 맛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음식은 입에 달수록 몸에 안 좋은 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지금 당장은 입에 달지만 그것은 속임수 인 것입니다.
세상이, 어리석은 자가, 미련한 여인이 우리에게 멋진 신기루를 보여주며 그의 상에 놓인
것들에 매력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욕심을 자극해서 그의 식탁의 음식을 탐내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의 식탁의 음식은 마치 공갈빵처럼 허무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고
집착하고 중독되어 있는 것들 우리가 우리의 안전을 그곳에 걸고 있는 것들 우리 삶의
지지대요 받침대라고 여기고 있는 모든 것들은 지금은 우리 입에 달지 몰라도 결국 우리를
멸망케 할 것들입니다.
(롬1:21-25)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우리가 하나님 이외에 의지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상은 누구를 위해
존재합니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것은 누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삶, 그 달콤한 삶을
약속하는 자가 바로 미련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가 인도하는 길은 생명과 수확과 많은
추수가 아니라 오히려 가뭄이요, 멸망인 것입니다.
(왕상17:1)
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열심히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결과가 뭡니까? 가뭄입니다. 그게 어리석은 자들의
결국입니다. 그들의 결국을 예레미야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렘3:1-5)
1 세상에서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본부가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않겠느냐 하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2 네 눈을 들어 자산을 보라 너의 행음치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3 그러므로 단 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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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소시의 애호자시오니
5 노를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두시겠나이까 하지 않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
아버지가 명하시는 길을 떠나 행음 하는 자들은 이렇게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손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은 이렇게 우리 언약의 백성들 “아들 들”은 지혜의 길을 택하게 되어 있고 그 지혜의 길을
택한 자들은 지혜가 요구하시는 삶을 살아내는 길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잠9:10)
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시111:10)
10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지혜를 소유한 자들은 이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길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잠언을 신명기 언약의 성취라고도 부릅니다.
신명기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언약을 재확인하는 책입니다. 레위기 18장 5절에
(레18:5)
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 언약을 신명기에서 재해석해 주십니다.
(신6:4-9)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예수님도 서기관 중 하나가 “율법 중 첫째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같은 대답을
하셨지요?
신명기에서는 그것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합니다. 언약의 백성들에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백성들의 삶이 이 땅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잠언인 것입니다. 그 삶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고 그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지혜를 소유한 자들에게서 나오게 되며 그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므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에게서는 반드시 그 삶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잠언을 신학자들이 구약의 야고보서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믿음이 뭐라고 했지요? 시편2편의 마지막 절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의뢰하고 그 아들에 입 맞추는 자라고 했지요? 완전히 자기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그들의 삶 속에서는 그 전적인 의뢰의 행위가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따라오지 않는 믿음은 가짜다“라는 것이 잠언이요 야고보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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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여러분에게서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하시거나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불가능함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앞길을 조명하시고 우리를 그 성중 높은 곳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시23:2-3)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잠2:6-8)
6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8 대저 그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시16:11)
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잠2:16,20)
16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20 지혜가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여러분이 지혜를 택한 것이 아니라 지혜가 여러분을 찾아와서 마치 여러분이 그 지혜를 택한
것처럼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가지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은 반드시 이루신다? 못 이루신다? 이루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힘내서 우리의 팔 다리를 움직여 지혜 자의 삶을 좇아 가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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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게 하라(V) 전도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엡3:17)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전도서의 제목은 히브리어로 코헬레트입니다. “카할”에서 나온 말입니다. “카할”이라는 말이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입니다. “에클레시아”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assembly, 집회, 교회,
모임”이라는 말입니다. 거기로부터 나온 “코헬레트“라는 단어는 ”모임, 회중,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LXX도 제목이 ”에클레시
아스테스“입니다. “전도자, 설교자, 회중에게 말하는 자”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이 전도서의
내용은 설교자, 전도자가 교회에게 주는 설교입니다.
이 전도서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솔로몬? 어떻게 아시죠? 전도서에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한번이라도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그렇지만 솔로몬으로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전1:1)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다윗의 아들이면 당연히 솔로몬이지요? 그렇지만 여기서 아들이라는 말“벤”이라는 말은
“자손”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입니다. 주다 벤허는 ‘훌의 자손 유다’라는 뜻이라 했지요?
그래서 그 말만 가지고는 저자가 솔로몬이라는 것을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시면
(전1:12)
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글을 쓴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었다고 하지요? 예루살렘은 남 유대의 수도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었는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남
유대와 북 이스라엘로 갈리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왕이 된 다윗의 아들이라는 말이 되지요?
그러면 누구입니까? 바로 솔로몬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여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의 왕으로 르호보암이 남 유대의 왕으로 갈라졌으니까요.
그리고 전도서 여러 곳에서 전도자 자신을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지혜를 소유한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전1:16)
16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잠언 공부할 때 배웠지요? 누구입니까? 솔로몬입니다.
(전12:9)
9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솔로몬이 잠언 3,000을 지었다는 말씀을 열왕기 상 4장에서 보았지요? 이렇게 전도서의 저자
전도자는 솔로몬이라는 것을 금방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전도서는 다윗 왕의 아들인 솔로몬 왕이 이스라엘의 전도자, 설교자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책입니다. 이것은 참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왕이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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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영적 이스라엘, 교회에게 참 지혜를 가르치는 모습의 protype입니다. 그러니까
전도서도 역시 “복음”입니다.
이 전도서는 솔로몬의 생애 말기인 BC935년경에 쓰인 책입니다.
전도서의 주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헛되다”“헤벨”이라는 단어입니다.
헤벨은 “수증기, 숨” 이라는 뜻입니다. 한번 불어 내면 없어져 버리는 헛된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이 “헛되다“라는 의미인 ”헤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아벨“입니다. 아벨은 등장하자마자 형 가인에 의해서 허무하게 죽었지요?
이렇게 이 “헤벨”은 “공허, 덧없음, 헛됨, 목적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1장 서두에 그 주제가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전1:2-3)
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 되도다
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이것이 바로 전도서의 주제입니다.
왜 모든 것이 이렇게 헛되게 된 것이지요? 인간의 타락 때문입니다. 인간이 타락을 한 이후에
인간의 모든 추구는 다 헛된 것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인간에게서 나오는 착한 일, 선한 일
조차도 헛된 것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에도 같은 단어가 나옵니다.
(롬8:18-22)
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0절에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에서의 “마타이오테스“가 바로 ”헤벨“”헛됨“입니다. 헬라어
성경 LXX에서 히브리어 ”헤벨“을 ”마타이오테스“로 번역을 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 헛된 것에 굴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허무한 것의 종착역이 어디입니까?
바로 ”사망“입니다. 모든 자들이 허무함에 굴복하여 살다가 결국 최후의 ”사망”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 바로 타락한 죄인들의 인생입니다. 전도서는 그렇게 인생의 허무함을 계속해서
나열하면서 “너희들 그런데도 그렇게 허무한 것을 좇으며 살래?”하고 열두 장 내내 독자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전12:13~14)
13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
이렇게 전도서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만이 헛되지 않은 삶이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떠나서 행해지는 모든 것은 다 헛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라.
오직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만이 헛되지 않은 삶이다“라고 교회에게 설교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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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입니다.
그 전도서의 주제인 “헛되다”라는 말이 주제어답게 전도서에 35번이 나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전도서에 많이 나오는 말이 “해 아래”라는 말입니다. (29번) 그 말은 그 “헛됨”이
미치는 범위가 “해 아래”라는 것입니다. “해 아래”에 있는 모든 만물이 다 헛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 아래” 유사 이래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
헛됨에 굴복하고 있는데 그 헛됨에서 벗어나서 헛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해 아래의 삶이 모두 헛된 것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간단합니다. “해
위의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 위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 실력으로는 절대
안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해 위의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해
아래 헛됨에 굴복하고 있는 자들을 품어 안으시고 죽어 버리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헛된 삶을
예수님께서 다 가지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 헛된 삶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어버리셨습니다. 그래서 그 해 아래에 태어난 헛된 옛 사람이 죽고 해 위의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갈3:13)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께서 허무한 삶을 산 자, 헛된 자,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죽으시고 우리를 그 허무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서에서 그 복된 이야기를 전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해 아래의 헛된 것에 굴복하며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해 위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전도서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 새롭게 태어난 자들은 삶의 기쁨과 만족과 목표와 의미도 새로워 진 자들이기
때문에 다른 헛된 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그렇게 살기를 힘쓰며 우리가 궁극에 가게 될 그 하늘나라만을 소망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전도서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전도서의 구조를 살펴보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전도서의 제목 격인 전도서 1:1을 보세요.
(전1:1)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 책은 언약의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지난 시간에 잠언을 공부하면서 계속해서 “내 아들아, 내 아들아”라는 구절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시편을 공부하면서도 제 2권이 “언약이 아들에게로 이어져서 성취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2권이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시편으로 끝나지요? 여기서도 다윗과 그의
아들이 등장함으로 이 책은 언약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언약의 후손인 교회에게 주는 책이며 그 언약의 후손들에게 참 목자이신, 참 설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목사의 설교는 이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의 내용으로 결론이 나야 합니다. 전도서의 내용이 무어라고
했지요? “당신들의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예수 잘 믿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삽시다.” 항상 이게 결론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우리 목사님은 항상 설교의 결론이
같을까?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설교자는 다른 이야기 할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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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설교는 “인생은 헛되고 헛된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으로 돌이켜라“항상 이것이
설교의 결론이어야 합니다. 목사가 할 일은 꼭 가지입니다.
(전3:18)
18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우리 인생의 목적이 뭐예요?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는 짐승입니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는 주일마다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여러분은 짐승입니다”
라는 것을 재확인 시켜드리고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바르게 설교를 하는 목사가 인기가 있을 리가 없지요. 목사가 목사 노릇을 바로 한다면 목사는
절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전12:11)
11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전도서의 마지막에서 지금까지 너희에게 한 모든 말씀은 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짐승이다. 짐승의 삶은 모두 헛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라“ That's it!
그런데 제가 뭐라고 다른 소리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인생을 통해 “저는 짐승입니다”
라는 고백과 함께 “그래서 제게는 구원자가 필요 합니다”라는 기도를 올리는 자로 변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15:26-28)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주님 저는 개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짐승임을 인정하는 곳에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이 (1:2-11)까지입니다. 전도서의 주제가 나오지요? “모든 것이 헛되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주제가 나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이 (1:12-11:8)까지입니다. 전도서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번째 부분에서는 헛된 삶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 전도자가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다 가졌고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된 것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기준으로 누가 더 많이 가지고 누가 조금 덜 가지고의 차이도 모두 헛된 것이고
“누가 더 착하고 누가 더 악하고”의 차이도 “누가 더 많이 배우고 누가 덜 배우고”의 차이도
역시 헛된 구분이라는 것을 전도자는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2:14-17)
14 지혜 자는 눈이 밝고 우매 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15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 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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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지혜 자나 우매 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 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17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 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전7:13-18)
13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18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전8:11-14)
11 사람들은 왜 서슴지 않고 죄를 짓는가? 악한 일을 하는데도 바로 벌이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12 악한 사람이 백 번 죄를 지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잘 되지만
13 악한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가 하는 일이 잘 될 리 없으며, 사는 날이
그림자 같고 한창 나이에 죽고 말 것이라고 한다.
14 이 세상에서 헛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악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의인이 받는가 하면,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인이 받는다. 이것을 보고, 나 어찌 헛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네 번째 부분(11:9-12:8)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행하시는 바를 모두 깨달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분은 주권자이시고 왕이시며 항상 옳으신 분이시므로 그 창조자를 기억하고 그
분에게로 돌아가라“ 라는 것을 세 번째 부분과 연결해서 설명해 줍니다. 욥기나 잠언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욥기도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을 하시는가를 묻지 말고 ”그 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다 옳다”라고 인정하고 그 분의 주권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그 분을 경외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회복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잠언도
마찬가지고요.
(전11:10-12:1,7,8)
10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8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리고 다섯 번째 부분인 (12:9-14)까지에서 “이제 이 이야기를 다 들었으니 이제 너희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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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라” 하고 끝을 맺습니다. 잠언에서처럼 여기서도 “내
아들아” 하고 언약의 후손인 교회, 바로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고 계십니다.
(전12:12-14)
12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이렇게 전도서도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헛된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자가 되라“ 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예수를
제시하는 복음이 적혀 있는 책인 것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허무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그곳이 빛으로, 충만으로, 질서로, 회복 되는 것을 우리가 새 창조,
재창조, 구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전도서가 바로 그 복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1:2)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바로 이 모습이 “허무”의 모습입니다. 예레미야에서도 창세기 1장 2절의 그 단어들을 그대로
인용해서 타락한 세상을 표현합니다.
(렘4:23)
23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그렇죠? 창조 전의 혼돈의 상태와 타락한 세상의 모습을 동일한 단어로 표현을 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그 혼돈함을 바로 잡고 공허함을 채워
주시며 그 것을 치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이 다시 혼돈하고 공허하며 헛된
것이 되어 버렸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창3:16-19)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인간의 죄의 결과로 그들의 마지막 종착역이 “사망”으로 결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든 것이 사망을 향해 간다는 것은 모든 것이 허무해 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들도 다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허무해 진 것입니다. 헛된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헛되고 허무한
인생의 모습이 죄인 아담의 아들들에게서 바로 나타납니다. 아담은 아들을 낳고 그가 자기들을
구원해 줄 “여인의 후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키우면서 보니까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둘째를 낳고는 그 아들 이름을 “헤벨” “아벨” 즉, 허무한 것, 헛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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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인생이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짐승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허무함”이라는 아들, 아벨은 정말 허무하게 형에게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죽은 아들
대신에 다른 아들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힌트”하셨습니다.
셋이라는 아들을 주시면서 하나님의 언약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할 인생을(헤벨) 모두
품에 안고 죄 없는 의인이 죽음으로 아벨은 의인이었죠. 그 허무가 죽고 이제 허무함에
굴복하지 않는 새 생명들이 탄생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힌트하신 것입니다. 그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의 protype인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헛된 삶이 되셔서 가인의 후예들에게
맞아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악, 패역함을 말할 때
성경은 “헤벨” “허무한 것” “헛된 것”으로 표현을 합니다.
(신32:21)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 하리로다
(시39:6-7)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 하나이다
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과 그 것들을 추구하는 삶은 다
헛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한마디로 “우상을 섬긴다.“라고 표현합니다.
(왕상16:13,26)
13 이는 바아사의 모든 죄와 그 아들 엘라의 죄를 인함이라 저희가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26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헛된 것“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하는 모든 것은, 우상을 섬기는 일은 다 미친 짓이라고 전도서가 강조합니다.
(전9:3)
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전부 일생동안 미친 짓만 하다가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의 실존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고후4:16)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해 아래 있는 허무한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새로 창조 된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해 위의 삶이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under the sun이 아니라 under the son의 상태로 들어간 자들입니다.
(계21:1,23)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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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더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시는 천국의 현실이 이 해 아래 사는 우리에게 이미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과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헛된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전1:2)
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 되도다
(고전15:57-58)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전도서에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고 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니까 이제 우리가 하는 수고가 헛된 것이 아닌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헛된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 하늘의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이제 우리의 모든 일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해 아래 헛된 것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을 갖고 있는 분들이 어떻게 여전히 헛된 일에만 몰두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헛된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고전15:17)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마타이오스, 헤벨)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가 있다면 그의 믿음은
헛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약4:13-17)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마타이오스, 헤벨)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해 아래의 것들, 헛된 것들을 자랑하는 것은 다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고지론“이 웬 말입니까? 기독교는 내가 무엇을 이루어 내서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해 우리는 짐승이요 ,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후예들이 과학과
문명을 발전시킬 때에 셋의 후손들은 호미 하나도 못 만들게 만드신 것입니다. 호미가
필요하면 가인의 후예들에게 가서 사서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 분께 의존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예를
보세요. 어찌 보면 베드로가 더욱 더 치사한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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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함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다시 나왔고 유다는 내 죄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목매달아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런 건방을 떠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매일 매일
확인하세요. “하나님 나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우리는 해 아래의 것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해 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해 위의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골3:1-4)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그리스도인이면 이제 해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빌3:20-21)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는 “해 위의 세상”의 시민권자인 것입니다. “해 아래 세상”에서는 이제 자꾸 눈을 떼세요.
(전1:9)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해 아래 새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고후5:17)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해 아래 새것이 있지요?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무한 데 굴복하지 않는 새 것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과 저입니다.
(전2:22-23)
22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골1:9-12)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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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5:16-18)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타락한 해 아래의 인생들은 모든 수고가 슬픔으로 결론을 맺게 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기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18절을 보시면 “우리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 삶 속에 기쁜 일과 감사한 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주시지도 않고 억지고 기쁨과 감사를 만들어 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예수로 말미암는 기쁨과 감사의 일들을 항상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우리는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기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겟세마네에서의 대 제사장 적 기도에서 우리는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자라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7:13)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는 해 아래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신 그 기쁨을 동일하게 가진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슬픔과 수고뿐인 삶에서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슬픔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국 그들의 모든 수고가 “사망”이라는 결론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헛되고 허무한 사망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만일 이곳에 아직도 그 헛된 것들의 노예로
사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그 헛되고 허무한 것에서 빨리 돌이키십시오. 나중에 그
불타버릴 헛된 것들과 함께 지옥의 땔감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전4:1)
1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 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
자가 없도다
타락한 인간의 슬픔과 아픔과 고난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습니까? 가족이라고 상대방의
아픔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습니까? 부모 자식 간에도 진정한 위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의 아픔이 제일 큽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모든 위로는
가면일 뿐입니다. ‘in my country’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samuel jackson과
julliette binoche가 주연을 한 영화입니다. 그 영화는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의 대통령이
되고 데스몬드 투투라는 카톨릭 대 주교가 인도하는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이라는 것이 남아프리카의 인종간의 화해 위원회가 하는 일들을 취재하면서 그
동안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당한 것을 지켜보면서 거의 실성을 할 정도로 흑인들에 대해 연민을
가집니다. 그들은 흑인들을 위해 목숨도 걸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그들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웁니다. 흑인들의 인권에 대해 취재하며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두
유부남, 유부녀가 바람을 피운다는 말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누가 누구를 위로해 줍니까?
자기 곁에 있는 남이 아무리 커다란 아픔 속에 슬퍼한다 해도 자기 앞에 있는 작은 초콜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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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잌에 눈이 머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위로 자가 생겼습니다.
(고후1:3-6)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의 위로가 되셔야 합니다. 남편에게 자식에게 아내에게 여러분의
위로를 구하지 마세요. 그들은 진정한 여러분의 위로가 못 됩니다. 우리 주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가 되십니다.
(전8:14)
14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 되도다
세상 사람들은 판단하기를 어떤 사람이 돈도 잘 벌고 하는 일이 잘 되면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럴만한 이유와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치부를 해 버립니다. 못
살고 못 배우고 일도 지지리 안 풀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무슨 잘 못이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악인이 의인의 대접을 받을 수 있고
의인이 악인의 대접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가?
(요3:35-36)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들을 믿는 자를 의인이라 하고 아들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자를 악인이라고 합니다.
의인과 악인의 구분은 “아들 안에 있느냐, 아니냐?“로 구분되어지는 것입니다.
(전3:11)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8:17)
17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 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 하리로다
이렇게 타락한 죄인들은 하나님의 행사를 깨닫지 못하던 자들이었는데 죄인들은 감히 하나님의
뜻을 상상할 수도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깨달은 자들은 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자 들이 되었습니다.
(롬12:2)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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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 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가능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감추어진 분, 노여워하시는 분,
구름, 불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묘사가 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죄인들과 함께
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18:11-14)
11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12 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4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시97:1-3)
1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2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3 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 사면의 대적을 사르는도다
(신5:22-27)
22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 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23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25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26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27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타락한 인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죄가 거룩 앞에 서면 그냥
녹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자신을 감추신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너무나
깊고 넓은 구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리가 되셔서 둘 사이에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이제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 분과 사귐이 있게
되었습니다.
(요일1:5-7)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우리가 여러 번 살펴보았지만 구약에서는 흑암 속에 감추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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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이셨지요?)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이제는 감히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벗”이 된 것입니다.
아니 “벗”정도가 아니라 하나가 되었습니다.
(요17:11,22,23)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하나가 되어 갑니다. 하나라는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대등한 차원에서의 교제”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고 계신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 하나님과 대등한 차원에서의, 하나로서의 교제와 사귐을 원하시기에 우리를
억지로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신 것입니다.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자로 만들어 내신 것이고 궁극에는 그렇게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교제하고 사귈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전도서가 우리의 구원을 어떻게 값나고 빛나게 밝혀 주는지 아시겠지요?
(전9:3-4)
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4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타락한 인간은 평생 미친 마음을 품다가 결국에는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들은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개처럼 산다 할지라도 이승에서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개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잖아요.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끝이며 영원한 형벌의 시작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릅니다.
(요일5:11-12)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 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으며 미친 짓을 하다가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사람들에 비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새 생명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복이 되어 버렸습니다.
(계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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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헛된 삶을 모두 가져가시고 우리가 새로운 자가 되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들이 되었고 헛된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되었고 모두
다 미친 짓을 하다가 죽어 가는 세상에서 새 생명을 소유하고 복된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전도자, 참 설교자가 우리 교회에게
지금 이 시간 하나님 없는 인생들의 허무함을 가르치시고 계신 책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헛된 것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사용해야 헛되지 않게 사용하는 것일까?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 것들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방법을 알아야겠지요?
마지막으로 거기에 대해 살펴보고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 땅의 헛된 모든 것들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를
택하시겠습니까? “돈”입니다. 물질계의 모든 것은 “돈”으로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헛됨의 상징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그걸 잘 정리하고 있으면 헛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겠지요?
여러분은 왜 돈을 버십니까? 보통은 이렇게들 정리를 하고 계시지요? 예수를 믿기 전에는 우리
배를 위해, 나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그리고 세상에 자랑을 하기 위해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서는 열심히 돈을 벌어서 이웃과 교회를 위해 쓰기 위해 돈을 법니다.
돈을 버는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돈을 벌어서 아무리 선하고 아름답게 쓴다고 해도 그 돈의 소유주가 여전히 자기
자신이라면 그는 지금 헛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왜 주일 날 광고 시간에
우리교회는 카타리나 수재 의연금 내는 것을 보류한다고 말씀을 드렸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불의 한 청지기의 비유가 누가복음에 나오지요? 제가 작년 야외 예배 때
그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했었습니다. 벌써 1년이 훨씬 넘었으니 기억이 잘 안 나시겠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세요. 불의 한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다가 주인한테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가서 무엇을 해서 먹고살까 생각해
보니 도대체 먹고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불러다가 그 빚을 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기름 백말을 빚진 사람을 불러서 50말로 감해 주었습니다. 밀 100석을 빚진 사람은 80석으로
감해 주었습니다. 아주 얍삽한 행동입니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남의 재산을 축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 불의 한 청지기의 행동을 지혜롭다고 칭찬을 합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제가 어떻게 설교를 했는가하면 당시에는 율법 상 고리대금업을 할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나 레위기나 신명기에 보면 정확히 나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물건을
꾸어주거나 돈을 꾸어주고 절대 이자를 받을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자 없이 누가
돈이나 곡식을 꾸어줍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이 생각해 낸 것이 차용 문서에다가 아예 이자까지
보태서 차용금액을 적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에 기름은 연 이자가 80%에 보험료가
20%였습니다. 그래서 이자가 합이 100%였습니다. 그러니까 기름50말을 빌린 사람은 일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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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기름 100말로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문서에 100말을 빌렸다고 적은
것입니다. 채권자가 율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합법적으로 채무자와 합의하에 그렇게 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밀은 이자20%에 보험료 5% 해서 합이 25%의 이자를 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밀 80석을 빌리게 되면 문서에는 100석이라고 적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불의 한 청지기가 쫓겨나기 전에 행한 일은 주인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사후예방을 한 것입니다. 이자를 빼고 빌려준 그대로 적게 만든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함으로 채무자들에게는 많은 짐을 덜어주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머리를 써서 자신의
미래를 긴박함을 가지고 준비했다는 점에서 그는 칭찬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불의 한 청지기입니다.
(눅16:8)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그 불의 한 청지기는 이 세대의 아들들을 대표하는 것이고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제자들이 빛의 아들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불의 한 청지기의 비유는 “이 세대의
아들들도 자기가 속한 나라의 원리를 따라 열심히 자기의 내일을 준비하는데 너희들은 빛의
아들들이면서도 왜 너희가 속한 나라의 원리를 따라 너희의 내일을 긴박하게 준비하지
않느냐?” 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그 불의 한 청지기가 불의 한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빛의 아들이 되지는 않습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서두를 꺼내는가 하면 그 돈이라는 것이 자기의 삶
속에서 “재(再) 정의(定意)” 되지 않고, 패러다임shift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 돈으로 좋은
일을 한다 해도 역시 그는 “불의한 자, 이 세대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 허무하고 헛된 일을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돈을 가지고 옳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약5:1-5)
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돈을 가지고 자기만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결국 다른 이들을 울게 만드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불의하고 악한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인간에게 맡기실 때 주인과 청지기의
관계로 맡기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 배만 불리 우는 데 쓰는 사람은 결국 다른 이들의
몫까지 혼자 먹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울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겉으로
보기에도 아주 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청지기도 있습니다.
(호12:8)
8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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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28:4-5)
4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5 네 큰 지혜와 장사함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인하여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모든 인간은 재물을 가지게 되면 남이 울든 말든 이기적으로 자기 배만 채우게 되거나 아니면
선한 일에 쓰면서 스스로 교만하게 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돈이나 지식이나 힘을 써야 헛되지 않게 잘 쓰는 것인가? 선한 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착한 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데 어떻게 사는 것이 헛되지
않은 삶인가? 불의 한 청지기 비유의 말미가 어떻게 맺어지는지 보세요.
(눅16:10-11)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불의 한 재물에 충성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최선을 다해서 벌어서
최선의 방법으로 쓰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쓰는 것이 과연 바르게 쓰는 것인가?
(눅16:12)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우리가 불의 한 재물에 충성을 하고 헛되지 않게 쓰기 위한 첫 번째 주지사항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다 “남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것”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게 정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근검절약해서 남을 돕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
마음에 은근한 자랑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랑은 교만이며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열심히 벌어서 선한 일을 하면서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헛되고 허무한 것들을 “남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 주인이 시키는
대로 잘 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선한 청지기들입니다.
그 선한 청지기들은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기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가난한 자입니다. “아무 것도 자기 것이 없으니까” 그래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가난한 자들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만 생존할
수 있는 아주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이 있건 없건, 지식이 많건 적건, 힘이 세건
약하건 늘 주인의 도움을 구하며 삽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헛되지 않은 삶을 사는 자들, 선한 청지기들은 절대 이 땅의 헛된 것들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고 우리가 우리의 안전의 근거를 삼고 있는 것은 모두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마6:19-24)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 질 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 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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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하나님과 맘몬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의 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도 결론을 이렇게 내리는 것입니다.
(눅16:13)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잠23:4-5)
4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5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딤전6:9-10)
9 부 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이 구절들은 돈을 많이 벌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게
무슨 돈이든 지식이든 건강이든 힘이든 자식이든)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나의 목적이 아니라 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이고 결국에는 완성이 될 것이라는 정확한 정의 아래 그 것들을 너희 인생의
목표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칭 “부자”가 없습니다. 모두 다 가난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돈”이 “재(再) 정의(定意)”가 된 사람들은 그게 조금 없어져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나의 그리스도인 됨을 위해 하나님은 그 상태를 필요로 하시는 것이니까요, 그들은 돈이
많아도 절대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 상태도 하나님께서 나의 거룩에 필요하니까 허락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 헛된 곳에서, 허무한 곳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모든 피조물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회복을 기다립니다. 그 물질계의 대표가 바로 돈입니다.
우리의 돈이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서 세상이 정의하고 있는 그 가치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다시 새롭게 “남의 것”으로 정의되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개, 돼지의 삶을 사는
것이요, 허무한 데 굴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의 소유로 정의 된 돈이 아무리
선한 곳에 쓰여도 그것은 허무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확실하게 정의가 된 사람은 열심히
수재의연금도 내시고 구제사업도 하시고 하세요. 그러나 아직 그것이 확실하게 정의되지
못하신 분들은 조금 더 참으시고 자기 의를 쌓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허무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제 그 허무한 것에 굴복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이제 허무한 것에서 벗어나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기쁘게
살아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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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게 하라(VI) 아가 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엡3:17)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오늘은 아가 서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아가서의 히브리어 제목은 “쉬르 하쉬림”인데 쉬르가 노래라는 뜻이고 ‘하쉬림’이 쉬르의
복수입니다. 그래서 그 뜻은 노래들 중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70인 역도 “아스마
아스마톤”이라 번역을 했고 라틴 벌게이트 성경도 ‘칸티쿰 칸티코룸’이라 했습니다. 전부
‘노래들 중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아가(雅歌)라고 번역이 된 것은 조금 의역이 된
것입니다. 아(雅)자가 ‘우아할 아’자입니다. 우아한 노래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아가서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는 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아가서가 남녀 간의 애정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그런 책은 아닙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하면 어떤 교회에서 ‘가정 사역’팀이라는 것을 운영하면서 이 아가
서를 인용해서 부부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들을 하는 것을 보고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가서에 보면 솔로몬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신랑이 떠났을 때 신부가 어떻게
처신을 하는가 하는 내용이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단순히 연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늘 그렇듯 구속사 적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의 지혜를 얻어내는 책이 아닌 것입니다.
아가서의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1장1절에 그 저자가 뚜렷이 나와 있습니다.
(아1:1)
1 솔로몬의 아가라
뿐만 아니라 (1:5, 3:7,9,11, 8:11,12)에도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명확하게 나옵니다.
이 아가서의 저작 연대는 그 솔로몬의 통치 시기인 BC970-931년 사이로 봅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지명들 ‘예루살렘, 갈멜, 사론, 엔게디, 헤르몬, 디르사’같은 지명들은
모두 통일왕국 시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리기 전의 도시 이름들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가 솔로몬이며 그 저작 시기도 그의 재위 기간 중이라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아가서를 해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먼저 풍유적 해석 방법(allegorical)이 있습니다. 이 해석방법은 대체로 역사나 실제 세계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작자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해석할 때에 강도 만난 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강도는 사탄이고, 여리고는 세상이며, 예루살렘은 하나님 나라인데, 그가 그 가는
길에서 환난을 당하게 되지만 예수 님(선한 사마리아 인)이 오셔서 그를 포도주와 기름을 발라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구해 주시고 여관(교회)에 데리고 가셔서 다시 오실 때까지(재림)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고 (구약과 신약)그를 맡기셨다 는 것으로 해석을 하는 것을
풍유적 해석 방법이라고 합니다. 지나친 비약이지요? 아가서는 풍유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이
거기에 나오는 지명이나 인물 사건들이 문학적 고안물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풍유적으로만 풀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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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가 극적 해석방법입니다.(dramatic)이 해석 방법은 아가서를 한 편의 희곡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희곡이 가져야 할 여러 가지 요소를 많이 빠뜨리고 있기 때문에 이 견해도
오늘날에는 그렇게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세 번째가 제의적 해석방법입니다.(cultic-mythological) 이 해석 방법은 고대 근동의 신화를
바탕으로 아가서가 기록이 되었다는 해석방법입니다. 이 아가서는 여 사제로 변신한 어떤
여신과 왕과의 혼인 이야기인데, 그 혼인을 축하하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가 예표론 적 해석방법입니다. (typological)이 해석 방법은 풍유적 해석방법과 비슷한
해석방법이지만 완전히 다른 해석 방법입니다. 풍유적 해석 방법은 역사성이나 사실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감추어진 영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예표론 적 해석방법은 구약
성경의 본문 설명 자체를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본문 속에서 신약
성경의 어떤 사건이나 가르침에 대한 예표 론 적(모형 적)연관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표론 적 해석방법에 따르면 솔로몬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고 술람미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예표 한다고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해석 방법이 이 아가서를 푸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야기를 원어 적으로 해석을 해 보면 그 해석을 지지할 수 있는
근거가 나옵니다.
술람미 여인에서 ‘술람미’는 ‘솔로몬‘이라는 단어의 여성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술람미는
솔로몬의 이름을 가진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야기라는
것은 왕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소유한 교회와의 사랑이야기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 신랑과 신부와의 깊고 깊은 사랑의 이야기를 촉각, 후각, 청각, 미각 모든 오감을
다 동원해서 표현을 해 놓은 것이 바로 아가서입니다.
아가 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사랑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신부, 그리고 혼인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가서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의 혼인 언약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이 아가서를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어떻게나 살갑게 사랑하시는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입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마다 낭독을 하는 책들이 있습니다. 오순절에는 룻기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초막절에는 전도서를 읽었습니다. 허무한 이 세상의 장막을 의지하지 말고 참 장막이
되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것이지요. 부림 절에는 에스더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이
멸망당한 날에는 예레미야 애가를 읽었습니다. 이 아가서는 유월절에 읽혀졌던 책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아가서를 이해하기를 출애굽을 한 이 후에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는 그 언약의 관점에서 이 아가서를 해석한 것입니다.
그저 죄만 짓고 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찾아가셔서 그들과 혼인을 맺으시는 구속사의
이야기가 아가서에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찾아가서 혼인을 맺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가서의 구조를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전체적인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아가서의 구조는 대칭 구조입니다. 카이즘 구조는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가운데의 핵심 내용을
중심으로 앞에서부터 한번 설명하고 그 핵심을 지나 다시 뒤로 가면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아가서는 총 7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네 번째 부분이 핵심부분이고 그 네 번째 부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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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해 전체의 내용이 모아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1:1-2:7 까지는 서문입니다. 왕의 사랑에 대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왕이 그 여인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왕의 고백이 적혀 있습니다.
2:8-17 까지 에서는 사랑하는 신부를 찾아서 왕이 방문을 합니다.
(아2:10-13)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 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3:1-5 까지 에서는 그 가운데 밤이 찾아옵니다. 그 여인이 꿈을 꿉니다. 하나 됨에서 분리되는
악몽입니다. 꿈에 솔로몬이 떠납니다.
(아3:1-2)
1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2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3:6-5:1 까지는 아가서의 클라이맥스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사랑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는 혼인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 됨에 대한 갈망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장 6-11에서 솔로몬 왕의 혼인 준비 모습이 나오고,
4장 1-15 에서 혼인을 준비하고 있는 술람미 여인의 단장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4장 16절에서 5장1절 까지 에는 혼인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아5:1)
1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
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그런데 신부가 또 악몽을 꿉니다. 혼인을 한 이후인데 또 신랑이 떠납니다. 그게 다섯 번째
부분입니다. 그게 5:2-7:10 까지 입니다. 이 부분은 세 번째 부분과 연결이 되는 내용입니다.
혼인을 했는데 또 남편이 떠나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7:11-8:4 까지가 여섯 번째 부분입니다. 거기서는 다시 왕이 찾아옵니다. 이제 그
후로는 여자가 신랑을 잃는 꿈을 꾸지 않습니다. 이제 영원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아7:11-13)
11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12 우리가 일찌기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13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 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사랑이 회복 된 에덴동산의 모습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8:5-14까지는 첫 번째와 연결되어져서 왕이 그 아내를 사랑하는 사랑이 더
커지게 됨을 보여 줍니다. 아주 진한 사랑의 모습이 오감을 동원하여 묘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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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가서의 구조를 잘 보시면 전체 구속사가 보여 집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네 번째 부분에서 혼인을 하게 되고 다섯 번째 부분에서 다시 신랑을
떠나보내는 경험을 하며 여섯 번째 부분에서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가 되어 영원히 변치 않은 하나 됨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혼인 이후에는 왜 신랑이 떠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까?
여러분 예수를 만나고 나면 매일 매일 매 순간 매 순간 늘 기쁘고 행복하고 평안하고
하십니까? 때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아무 상관이 없는 분처럼 느껴지실 때가 있지요? 왜
그런 일이 있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 정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예수님께 버려진다는 사실이 어떤 것인지 잘 압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가 게으르고 무관심하고 나태해져서 부패한 정욕과 합당치 못한 정서에
빠져들어 악한 정욕들을 부단히 제어하지 못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물리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잠깐 당신의 얼굴을 가리 우심으로 우리를 자극하셔서 당신을 부지런히
찾고 탐사하도록 하시기 위한 배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우리 하나님께서
자신을 감추실 때 아가서의 신부처럼 혼비백산해서 찾게 되어 있습니다.
(호5:15-6:1)
15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아5:6-8)
6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7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8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우리는 모두 그런 경험들을 합니다. 그게 혼인을 한 후에도 신부가 신랑이 떠나는 경험을 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자세히 이 아가서를 어떻게 구속사적인 면에서 해석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아가서를 읽어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아가서 전체에 흔하지 않은 식물들의 이름과
동물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스물 한 종류의 식물의 이름과 열다섯 종류의 동물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게 뭐 그렇게 특별한 의미가 있겠는가? 하시겠지만 그러한 동 식물들과 이
사랑이야기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동산은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누군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왕상4:33-34)
33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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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34 모든 민족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
이 구절은 솔로몬이 백향목으로부터 벽에 붙어 나는 우슬초까지, 그리고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해서 자유자재로 설명하고 이야기해 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구와
비슷합니까? 아담과 비슷합니다. 모든 동식물의 이름을 지어 준 아담과 흡사한 모습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 상대방의 기원과 내용을 자세하고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이 동식물에 대해서 그의 지혜로 논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아담의
이름을 짓는 모습과 동일한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이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동산에서의
사랑은 마치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사랑을 재연해 놓은 것 같이 보여 집니다.

그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 백성들의 구속사의 이야기가 어떻게 아가서에 배어있는지


한번 보지요.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진실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 때는 서로
부끄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창2:20-25)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여기에 보시면 아담의 결혼 장면이 나옵니다. 인류 최초의 결혼 장면입니다. 그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왕으로 세상을 다스리도록 분부를 받은 자였습니다.
(창5:1-3)
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자기의 형상을 따라 낳은 자를 아들이라 하지요?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창조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담은 이 땅을 다스리도록 분부를 받은 왕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왕의
아들이며 그 자신도 왕인 솔로몬과 아담을 연결시켜 드리려고 이렇게 설명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지의 주재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아담에게 신부인 이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셨습니다. 무죄한 상태에서 순결하고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하고 그 사랑에 금이 갔습니다. 서로
부끄러워하게 되었고 자기의 잘못을 서로에게 미루는 그런 타락한 사랑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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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6-13)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도 멀어지게 되었고 하나의 관계로 묶여졌던 부부관계에서도
실패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죄를 지은 인간은 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냥 내 쫓으시는 것이 아니라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시고
쫓아내십니다. 그들의 수치를 가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부끄러움을 가려 그
타락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언약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깨어진 혼인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시겠다는
것을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그 하나님의 고집스러운 열심이 계속해서 성경 전체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가죽옷이 어떻게 구속사와 연결이 되는지 보세요. 그 가죽옷이 아가서의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결혼으로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이스라엘에서 결혼이 어떻게 이루어 지느냐하면 신랑이 자신의 옷자락으로 신부를 덮는 것으로
결혼식이 완성됩니다.
(룻3:9)
9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룻이 보아스에게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라고 말한 것은 나를 당신의 신부로
맞아달라는 부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깊게 성경을 살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좇아 다니시며 광야에서 그들을 무언가로 덮으셨습니다. 무엇으로
덮으셨지요? 구름으로 덮으셨습니다.
(시105:39-40)
39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 불로 밝히셨으며
40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마치 첫날밤에 신랑이 신부를 자신의 옷자락으로 덮는 것 같은 묘사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구름으로 이스라엘을 덮으신 것은 바로 그 결혼언약의 예표를 계속해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내 신부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너희들을 구원해 내고 말 것이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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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렘2:1-2)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 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표준 새 번역)
"너는 가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이렇게 외쳐라.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젊은 시절에 얼마나 나에게 진실하였는지, 네가 신부 시절에 얼마나 나를 사랑하였는지, 저
광야에서, 씨 뿌린 것이 없는 땅에서, 네가 나를 어떻게 따랐는지, 내가 잘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을 예언하시는데 이스라엘이 과거 결혼
때에, 신부 시절에 그 사랑을 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언제를 결혼의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광야를 지날 때 시내 산에서 시내 산 언약을 맺으시지요? 그
때를 결혼의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반드시 지켜내시겠다는 것을
구름으로 그 신부를 덮음으로 예표 하시는 것입니다.
그 신부를 덮는 신랑의 “옷자락”은 “카나프”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옷의 끝 부분”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원래 단어의 뜻은 “날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셔서 광야를 통과하여 그들을 이끌어 내실 때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다고 하지요? 날개로 업어서 인도해 내셨다는 표현을 하지요?
(출19:4)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신32:11)
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눅13:34)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니까 성경은 신랑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신부와 이제 다시는 깨어지지 않는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 혼인 언약을 하시겠다는 고집스러운 집념과 계획과 그 실행이 성경 전편에
설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아가서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2:16)
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아6:3)
3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아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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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 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 하는구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지요?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아가서 전체에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렘11:4)
4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 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겔11:20)
20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슥8:7-8)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8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히8:10)
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가 됩니까?
(요17:20-26)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신랑이 신부에게 속하고 신부가 신랑에게 속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 혼인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우리는 확신 속에서 기다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게
아가서입니다.
그 복음을 깨닫고 확신 속에 거하는 자들은 절대 이 세상의 상황 때문에 기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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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1:4-6)
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6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 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술람미 여인이 자기가 거무스름하다고 흘겨보지 말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내가 조금
못생기고 못났다고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왕이 나를 침 궁으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에“ 내 처지가, 나의 상황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왕이
나를 사랑하시고 왕이 나를 신부로 맞아 주셨기 때문에 나는 당당한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내가 훌륭한 위인이 되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아름답게 승화되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신랑이 되어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신랑이 먼저 찾아오셔서 문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아2:8-9)
8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9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찾아오셔서 그 사랑하는 여인과 혼인
예식을 거행하십니다. 그리고는 나는 이렇게 못나고 부족한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찬사를 다
동원해서 “너는 아름답다, 난 널 사랑한다.”하고 프러포즈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게 아가서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과거나 현재의 모습으로 인해 열등감이나 우울증 같은 것에 빠져


있으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열등감에 빠집니까? 세상 적인 가치 기준에 내가 미달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울해 지지요? 세상 사람들에게 나를 자랑하고 싶은데 내 인생은
전혀 자랑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짜 신분을 아세요. 그리고
외치십시오. “감히 누가 나를 업신여겨? 누가 나를 향해 눈을 흘겨?” “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데, 우리 신랑이신 주님이 날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이 얼마나 큰사랑인지
보시겠어요?
(아8:7)
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품어
안으시며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1:15-16)
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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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랑은 이 독사 같은 눈을 비둘기 같다고 여겨주십니다. 그런데 그 분은 천지 만물의
주인이세요. 그 신랑이 나만 예뻐하십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우리를 업신여깁니까? 그러니까
당당하세요. 담대하십시오.
(아4:1-5)
1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2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3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4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5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7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8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 품보다 승하구나
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썩어서 고름이 뚝뚝 떨어지는 것같이 추하고 더러운 우리를 이렇게 예쁘게 보아주시는 신랑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분이 이렇게 거듭 거듭 언약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사54:4-8)
4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5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 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6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7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 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호2:19-20)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이 열심입니다. 성경은 이 하나님의 열심을 우리에게 친절하게 반복적이며 점층적으로 설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가서도 바로 그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결론지어지는 구속사,
복음의 내용을 극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내용을 에스겔서에서 이렇게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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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16:6-13)
6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7 내가 너로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이더라
8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9 내가 물로 너를 씻겨서 네 피를 없이 하며 네게 기름을 바르고
10 수놓은 옷을 입히고 물 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띠우고 명주로 덧입히고
11 패물을 채우고 팔 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12 코 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13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명주와 수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나아갔느니라
죄인이었던 하나님의 신부들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적신이요, 피투성이였습니다. 그러한
자들을 신랑의 영광의 옷자락으로 덮으시고 그 부끄러움을 가리시고 그들을 단장하시고 영원한
왕후의 지위에 올려놓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의 그 벌거벗은 부끄러운 아담과 하와를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시는 것을 시작으로 신랑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신부인 교회의
부끄러움을 덮고 아름답게 단장시켜 영원한 혼인잔치에 서게 하는가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렇게 신부를 단장하는 모습을 보시면 구약의 어떤 대목이 생각나시지 않으십니까? 머리에
관을 씌우고 기름을 바르고 베실로 짠 옷을 입고 금, 은으로 장식을 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제사장이지요? 출애굽기 28장에 제사장의 의복에 관해서 자세하게 나오고
29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출29:4-9)
4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5 의복을 가져다가 아론에게 속옷과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을 입히고 흉패를 달고 에봇에
공교히 짠 띠를 띠우고
6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성패를 더하고
7 관유를 가져다가 그 머리에 부어 바르고
8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9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워서 제사장의 직분을 그들에게 맡겨 영원한
규례가 되게 하라 너는 이같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지니라
이 제사장의 의복을 만드는 순서는 어떤 것을 만드는 순서의 정확하게 역순입니다.
무엇입니까? 성막입니다. 성막은 무엇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품어 안고 있는 것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가 맨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성막이라면
그 지성소를 상징하는 대제사장의 흉패가 제일 바깥에 나와 있는 것이 바로 제사장의
옷입니다. 그러면 그 제사장의 옷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입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부의 단장하는 모습이 대 제사장의 입성과 흡사하다는 것은 이제 무죄한 제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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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드려짐으로 자신의 모든 죄가 해결이 되고 하나님의 영원한 신부로 회복이 되는
복음의 옷을 대 제사장이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옷을 신부가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제사장 나라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도 말하고, 신부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다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 존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옷을 입고 계신
분들로서 그 신분에 맞게 그 분의 영광을 나타내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요17:22)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는 이미 그 영광의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자들이 자꾸 그 옷을
더럽혀서야 되겠습니까? 인생의 저 밑바닥까지 경험을 한 창녀를 데려다가 한 나라의 왕이
자기의 신부로 삼아 주셨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그 왕비가 여전히 창녀 짓이나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자기 신랑이 얼마나 존귀하고 크신 분인지 모르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신랑이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답고 크시고 그럼에도 나만 이렇게 끔찍하게 사랑해
주고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그 신랑에게 너무 감사해서, 그리고 그 분의 영광에 흠이 가지
않도록 삶을 다스리겠지요. 생각해 보세요. 정말 사랑하는 신랑과 영원히 살 혼인잔치를 앞두고
있는 신부가 그 신랑이 전혀 보고 싶지 않다면 그게 정말 사랑하는 사이입니까?
“결혼식 끝나면 영원히 볼 텐데 뭐, 지금은 옛날 애인도 좀 만나고, 신랑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먹지 말라는 것도 실컷 먹어두고 그래야겠다.“ 이게 정말 결혼식을 앞둔 행복한 신부의
모습입니까? 아니지요? 봐도, 봐도 또 보고 싶고 돌아서면 또 보고 싶고 한 것이 결혼식을 앞
둔 연인들의 모습 아닙니까? 전화가 조금만 뜸하게 와도 몇 번씩 수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잖아요? 그 신랑을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성경입니다. 유일하게 신랑이신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성경입니다. 그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 신부로서
프러포즈를 받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고민해 보세요.
결론을 맺지요.
(엡5:22-33)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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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지금까지 우리가 장시간에 걸쳐 공부한 내용이 여기 다 들어 있지요? 이 혼인잔치를 앞두고
있는 자들로서 아니 영적으로, 신분적으로는 이미 혼인을 한 자들로서 여러분의 평상의 삶을
잘 다스리십시오. 결혼 생활에서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를
세상에 잘 보이셔야 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은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결혼해서 전도하면 되지요? 잘 되던가요? 경험자들 한번 말씀해 보세요. 얼마나 힘드셨어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1차 적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그 1차 적인 사명이 올바로 수행이 되어질 때에 2차 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잡으세요.
그리고 교회의 1차 적인 사명도 올바른 말씀과 성례와 치리를 엄격히 거행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신부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고후11:2)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네, 우리는 그거 하는 겁니다. 교회는 무슨 대단한 일 하는 단체 아닙니다. 신부를 신부답게
만드는 훈련소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모두가 서로에 대해 그리스도에게 신부를
소개하는 중매쟁이가 되셔야 합니다.
(계19:7-9)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이제 곧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 희게 씻기어진 세마포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영원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게 될 것입니다.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시면서
오늘도 그 신분에 걸 맞는 삶을 경주해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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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게 하라 (VII) 욥기에 나타난 그리스도
(엡3:17)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오늘은 시가서 공부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욥기를 공부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욥기를 이해하기를 고난을 잘 참으면 믿음이 자라게 되며 복도 두 배로 받게
된다고 이해들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욥기를 잘 공부해 보면 욥기는 결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는 복음입니다. 아마 욥기만큼 복음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는 책도 드물 것입니다.
욥기라는 이름은 이 책의 등장인물인 욥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욥기가 된 것이지요. 욥은
실제 존재했던 인물입니다.
(겔14:14)
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거명하시는 것을 보면 그가 실제 존재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언제 적 사람인지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 적 증거로 볼 때 욥은 아브라함과 동시대, 족장시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욥42:16)
16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욥의 고난이 끝난 후에도 욥은 140년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LXX 70인 역 성경을 보면
그 구절이 “그의 시련이 있은 후에 170년을 살았다. 따라서 그는 모두 240년을
향유하였다”라고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욥에게 고난이 닥친 것이 욥의 나이
70이었을 때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사실이든 간에 욥이 200년을 넘게 장수를 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수명은 족장시대의 일반적 평균 수명이었습니다.
(창25:7)
7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
그리고 욥기 1장 3절에 보면 욥의 부귀의 정도를 가축의 수효로 제시를 합니다.
(욥1:3)
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이것도 역시 족장시대의 관례였습니다.
(창12:16)
16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이렇게 족장시대에는 부의 정도를 가축의 수요로 헤아려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고 욥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같은 족장들처럼 자기 가문의 제사장 적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욥1:5)
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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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모세 이후에는 누가 제사를 드렸지요? 레위지파 사람들. 그 전에는 집안의 가장들이 제사장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면 욥은 모세 시대 이전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모세 시대 이전을 우리가
족장시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족장 시대에는 하나님께 대한 대표적인 호칭이 “솨다이”였습니다. 욥기에도
그“솨다이”라는 단어가 31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욥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000년 경 서부
셈족 사람들이 많이 가졌던 이름이었습니다. BC1,000년경만 해도 그런 이름을 쓰진
않았답니다. 그래서 욥은 족장시대의 사람일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욥기의 저자는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욥기의 저자는 욥이다, 엘리후다, 모세다, 솔로몬이다, 이사야, 히스기야, 예레미야, 바룩,
에스라 중 한 사람으로 거론이 되지만 욥기의 저자를 증명할 만한 분명한 자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물어보지요 뭐.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욥기의 저자는 뛰어는 문학적 재능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의 문학자들도 이 욥기의 문학적 기교와 수려함에 혀를 내 두를 정도입니다.
유수한 문학가들이 이 욥기를 세계 문학의 걸작 중의 걸작으로 손을 꼽습니다. 그래서
문학도들은 이 욥기를 깊이 연구를 합니다.
이 욥기의 기록 연대도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알 필요가 없으니까 안 알려 주시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자고요.

그럼 이 욥기의 내용을 한번 분석해 보겠습니다.


욥기는 총42장의 긴 책입니다.
1:1-5 까지는 욥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그리고 1:6-12에서 첫 번째 천상의 장면이 나옵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사단이 대화를 나누십니다. 어떻게 사단이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으니까 궁금해 하지 말자고요.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십니다. “네가 내 종 욥을 보았느냐?”하시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대답 합니다“그가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것을 주셨으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지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칠 것을 허락합니다. 그게 두 번째 부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이 욥이 재난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그게 1:13-22까지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부분에서 다시 천상의 장면이 나옵니다. 그게 2:1-6까지고요.
욥이 그의 모든 소유가 다 날아가 버렸는데도 여전히 순전함을 지켰다고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니까 사단이 “그럼 이제 그의 살과 뼈를 한번 쳐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또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부분인 2:7-10에서 욥의 신체적 재난의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는 2:11-13에서 욥의 세 친구가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3장 전체에서 욥이 자신의 삶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4장부터 26장까지에서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 그리고 욥의 변론들이
이어집니다. 총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각기 자기들의 경험과 지식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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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해서 욥이 뭔가 잘 못을 했기 때문에 그러한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고 욥은
“나는 정말 아무 잘못 없다”라고 반박을 합니다.
그리고 27,28장에서 욥이 첫 번째 독백을 합니다. “난 잘못 없다”
(욥27:1-6)
1 욥이 비유로 말하였다.
2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다. 그분께서 나를 공정한 판결을 받지 못하게
하시며,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 괴롭게 하신다.
3 내게 호흡이 남아 있는 동안은, 하나님이 내 코에 불어넣으신 숨결이 내 코에 남아 있는
한,
4 내가 입술로 결코 악한 말을 하지 않으며, 내가 혀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6 내가 의롭다고 주장하면서 끝까지 굽히지 않아도, 내 평생에 양심에 꺼림칙한 날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29장과 30장 31장에서 두 번째 독백을 합니다.
29장에서는 과거에 좋았던 시절을 회상합니다.
그리고 30장에서는 애가를 부릅니다. “나는 너무 너무 슬프고 괴롭다“
그리고 31장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이렇게 욥이 끝까지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자
이제 그 세 친구와 욥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리후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욥과 그의 세 친구들에게 일장 연설을 합니다. 그것이 32장에서 37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욥32:1-5)
1 욥이 끝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므로, 이 세 사람은 욥을 설득하려고 하던 노력을
그만두었다.
2 욥이 이렇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잘못을 하나님께 돌리므로, 옆에 서서 듣기만
하던 엘리후라는 사람은, 듣다 못하여, 분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엘리후는 람
족속에 속하는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이다.
3 엘리후는 또 욥의 세 친구에게도 화를 냈다. 그 세 친구는 욥을 정죄하려고만 했지, 욥이
하는 말에 변변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4 그들 가운데서 엘리후가 가장 젊은 사람이므로,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다.
5 그런데 그 세 사람이 모두 욥에게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화가 났다.
이 엘리후라는 청년이 욥과 세 친구를 묵사발을 만듭니다. 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욥33:8-30)
8 어른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9 "내게는 잘못이 없다. 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나는 결백하다. 내게는 허물이 없다.
10 그런데도 하나님은 내게서 흠 잡을 것을 찾으시며, 나를 원수로 여기신다.
11 하나님이 내 발에 차꼬를 채우시고, 내 일거수 일투족을 다 감시하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러나 내가 욥 어른께 감히 말합니다. 어른은 잘못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보다도
크십니다.
13 그런데 어찌하여 어른께서는, 하나님께 불평을 하면서 대드시는 겁니까? 어른께서 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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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불평에 일일이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하나님께 원망을 할 수 있습니까?
17 하나님은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십니다. 교만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18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며, 사람의 목숨을 사망에서 건져
주십니다.
19 하나님은 사람에게 질병을 보내셔서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시고, 사람의 육체를 고통스럽게
해서라도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십니다.
22 이제, 그의 목숨은 무덤에 다가서고, 그의 생명은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23 그 때에 하나님의 천사 천 명 가운데서 한 명이 그를 도우러 올 것입니다. 그 천사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킬 것입니다.
24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천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가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그를 살려 주어라. 내가 그의 몸값을 받았다."
25 그렇게 되면, 그는 다시 젊음을 되찾고, 건강도 되찾을 것입니다.
26 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27 그는 사람들 앞에서 고백할 것입니다. "나는 죄를 지어서, 옳은 일을 그르쳤으나,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28 하나님이 나를 무덤에 내려가지 않게 구원해 주셨기에, 이렇게 살아서 빛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29 이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 번, 세 번, 이렇게
되풀이하시는 것은,
30 사람의 생명을 무덤에서 다시 끌어내셔서 생명의 빛을 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엘리후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욥과 세 친구들에게 강하게 피력합니다.
그 엘리후의 연설이 끝나자 이제 바로 하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그 부분이 38:1-40:2까지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욥38:1-6)
1 그 때에 주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2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3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5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6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자 그 때까지 자기는 결백하다고 “악악거리던 욥의 답변이 이렇게
나옵니다.
(욥40:3-5)
3 그 때에 욥이 주께 대답하였다.
4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5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하나님께서 두 번째 말씀하십니다. 그 부분이 40:6-41:34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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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씀을 다 듣고 욥이 최후의 고백을 이렇게 합니다. 그 부분이 42:1-6까지입니다.
(욥42:1-6)
1 욥이 주께 대답하였다.
2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4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엘리바스를 비롯한 욥의 세 친구들에게 이러한 판결을 내립니다.
(욥42:7-9)
7 주께서는 욥에게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한 것은,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마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지고 가서, 너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용서하여
달라고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고, 어리석게 말하였지만, 내가 그대로 갚지는 않을 것이다."
9 그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니, 주께서 욥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2:10-17까지에서 욥의 모든 사정이 두 배(倍)로 회복이 되는 장면이
나오고 욥기는 끝이 납니다. 우리가 이 욥기가 가진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욥기를
읽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에 회의”를 갖게 되는 엉뚱한 신정론에 빠지게 됩니다.
이 신정론(theodicy)은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세상과의 조화를
학문적으로 모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데 왜 세상이 이렇게 모순투성이인지,
아니면 악인이 의인을 압제하는 것을 볼 때 ‘혹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신 것은
아닌가?’하는 회의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것이 신정론(神正論)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 욥기를 읽으시면서 그런 회의가 들지 않으셨습니까?
“왜 착한 사람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예수 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고 해서 믿었는데
예수 믿고 났더니 오히려 일이 더 잘 안 풀리고 행복 끝 고생 시작이 되었다“ 이런 경험들
없으세요? 욥기에 그러한 하나님의 불공평함과 불합리함이 보이지 않으세요?
욥기를 단순히 ‘욥이 당하는 고난‘의 관점에서만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는
인간의 고통과 고난의 문제에 대한 해 답을 제시하는 책이 아닙니다.

욥기는 구원을 얻은 의인들은 인생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자신들이
받아 가지고 있는 그 선물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완성이 되고야 만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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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인과율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진리도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또
아울러서 올바른 신정론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니까 참 지혜,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의 인간의 지혜의 보잘 것 없음이 잘 나타나 있는 책인 것입니다. 욥기는
이렇게 단순히 고난의 문제에 관해서 기록되어 있는 책이 아니라 복음이 적혀 있는 책입니다.
그것을 지금부터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욥기 1장에 보면 욥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해 보지요.
(욥1:8-12)
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 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욥이 왜 고난을 당합니까? 사단이 참소해서? 사단이 왜 참소 했습니까? 하나님이 욥의
의로움을 자랑하시니까? 그럼 결론적으로 욥은 왜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까?
의로워서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 앞에 죄 지은 사람들이 당하는 형벌이라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래서 누가 조금
어려움을 겪으면 은연중에 “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벌을 받는 걸
거야”라고 생각들 합니다. 그것을 인과율이라고 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보시다시피 욥은
의인이라서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을 공부할 때 왜 우리가 그 일곱 재앙에 함께 노출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까? 왜 우리에게도 환난이 있고 재앙이 있고 궁핍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새 창조에는 역 창조가 선행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드렸지요? 그래서 그
말 탄 자들이 두 산 사이, 골짜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해 드렸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이 욥기를 그 역 창조의 관점에서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첫 창조 때의 아담과 이
욥을 한번 비교해 볼까요?
(욥1:1-5)
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4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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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인 물 중에 이렇게 거두절미하고 처음부터 무죄한 자, 순전한 자로
묘사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브라함? 바울?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던 자였고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 때려죽이러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누구지요? 아담입니다.
그가 죄를 짓기 전에는 아담은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에덴을 지키도록 명령을 받은
무죄한 자였습니다. 그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다스리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욥을 보세요. 그는 동방의 가장 큰 자였습니다. 왕입니다. 그는 자식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가축과 재산과 자식이 어마어마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요구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어 내고 있는 모습이지요? 창조의 완성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것들이 하나하나 파괴됩니다.
(욥1:13-19)
13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6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7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8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19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완성된 창조의 모습이 반대로 다 파괴되어 버리는 모습입니다.
새 창조는 반드시 역 창조를 거쳐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해서 설교했을 때 한번 설명해 드렸지요?
옛 창조는 새 창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새 언약으로 결론지어지지 않는
옛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고린도 후서
3장을 예로 들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옛 언약인 구약의 직분자인 모세를 죽게 하는
직분, 정죄의 직분이라고 바울이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첫 창조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목표 지점이 아니었습니다. 그 첫 창조를 거쳐 역
창조를 거쳐 새 창조에 이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 지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면 반드시 역 창조의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받고도 여전히 자기 안에 공존하는 ‘하나님 없이 살도록 잘 훈련되어진 성품, 인격,
습관, 버릇’ 이런 어둡고 못 된 것들이 고난과 환난과 궁핍 등을 통해서 무너지고 부서지고
잘려서 자기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조금 씩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 것을
우리가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고, 구원을 받고 있는 삶이라고 구원의 현재시제로 설명하는
것이고, 이미 이루어진 역 창조를 몸으로 체험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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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 선물로 넣어 주신 어떤 보물이 있는데 우리의 죄 된
경향, 악한 성품, 습관 같은 것들이 그 보물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 창조를
통해서 그 썩어 가는 첫 창조의 것들을 부수어 버리시고 새롭게 창조된 그의 실체를 조금 씩
조금씩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조금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욥이 욥기 서두에서 어떤 신앙고백을 하는지 보세요.


(욥1:20-22)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여러분 이런 신앙 고백 하실 수 있으세요?
(욥2:7-10)
7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은 이러한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욥은 그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사람입니다.
(욥7:17-21)
17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
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욥은 그 모든 고난이 주님의 허락하심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욥10:7-14)
7 내게 죄가 없다는 것과, 주의 손에서 나를 빼낼 사람이 없다는 것은, 주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8 주께서 손수 나를 빚으시고 지으셨는데, 어찌하여 이제 와서, 나에게 등을 돌리시고, 나를
멸망시키려고 하십니까?
9 주께서는, 진흙을 빚듯이 주께서 몸소 이 몸을 지으셨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를 티끌로 되돌아가게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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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주께서 내 아버지에게 힘을 주셔서, 나를 낳게 하시고, 어머니가 나를 품에 안고 젖을
물리게 하셨습니다.
11 주께서 살과 가죽으로 나를 입히시며, 뼈와 근육을 엮어서, 내 몸을 만드셨습니다.
12 주께서 저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시고, 나를 돌보셔서, 내 숨결까지 지켜 주셨습니다.
13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주께서는 늘 나를 해치실 생각을 몰래 품고 계셨습니다.
14 주께서는, 내가 죄를 짓나 안 짓나 지켜보고 계셨으며, 내가 죄를 짓기라도 하면 용서하지
않으실 작정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욥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왜 이러한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한 욥이 3장부터는 그렇게
하나님께 악악거립니까? 그는 의인이었고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자였지만 그는
진정으로 삶 속에서 그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already... not yet”의
교리입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을 얻었고 의인이 되었습니다만 우리는 구원을 얻어가야 하고
의인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
안에 주어진 그 금보다 귀한 은혜의 실체를 하나하나 껍질 벗기듯 벗겨가며 알아 가는
것입니다. 보세요. 욥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무엇을 근거로 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말합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무죄입니다“를 근거로 이야기를 해 나갑니다. 그 말은 욥은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의 삶이 인과율에 의해서 결정지어지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저는 죄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입니다” “왜 원인이 없는 이런 고난이라는 결과가 있는 것입니까?”
욥은 내내 그것으로 고민합니다. 그 것은 절대 복음이 아닙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사단은 늘 그 인과율로 복음을 희석시켜왔습니다.
욥기 1장에서 사탄이 어떻게 참소를 합니까?
(욥1:8-10)
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 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하나님께서 돈도 주고 명예도 주고 자식들도 많이 주었으니까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아닙니까? 한번 다 빼앗아 보세요. 그래도 그가 의인이 되는가?” 사단이 그렇게 참소합니다.
그게 인과율입니다. “원인이 있으니까 결과가 있는 것 아닙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창세기 3장 15절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도전인 것입니다.
“인간은 좋은 것으로 채워주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의로운 자를 만들어 내시더라.“ 이것이 욥기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 은혜를 살짝 가리고 인과율에 의한
거짓 복음을 세상에 뿌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기독교가 인과율에 의한 종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믿어줬으니 내게 좋은 것으로 주세요.“”내가 착하게 살 테니 ,
열심히 금식 기도 할 테니, 열심히 봉사 할 테니 좋은 것으로 보상해 주세요.“ 이게 인과율에
의한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보상으로 준다고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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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인과율에 의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내가 믿었고 내가 착하게
살았고 내가 회개해서 구원을 얻었다, 그리고 내가 믿어 주었으니 하나님은 나에게 이러
저러한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삼박자 축복이니 뭐니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지요? 그들이 좋아하는 돈, 건강 다 빼앗아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금방 사단의 참소대로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로 갑니다. 그러나 진짜들은
어떻게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나님 만으로 만족합니다.”로 갑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참소를 묵사발로 만들어 버리시고 그 최악의 고난 속에 던져진 욥에게서 그 고백을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히 고스란히 나타나 있는 책이 욥기입니다.
(합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욥은 42장에서 바로 이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은
반드시 이 고백을 받아 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짜들은 그러한 시험에서 다 떨어져
나갑니다.
인과율은 복음과 완전히 상반되는 것입니다. “인과율은 복음이 아니다“ 욥기는 전부 그
이야기의 반복입니다. 욥의 친구 빌닷의 논리를 한번 보세요.
(욥8:1-7)
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3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5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어떠세요? 욥의 친구 빌닷이 욥을 책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고 청결하고 정직하면, 네가 형통하고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하고 멋있게 충고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이렇게 살 수 있으세요?
이런 삶이되던가요? 안 되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멸망이리라“ 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가 아니면 사망으로밖에 갈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그렇게 은혜로 받고 자기 삶 속에서는 인과율에 의해서 복을
받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어찌 삼박자 축복이라는 것이 나올 수가 있습니까? 그건 성도들을
속이는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엘리바스의 논리도 역시 인과율에 의한 논리입니다.
(욥4:1-8)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였다.
2 누가 네게 말을 걸면 너는 짜증스럽겠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다.
3 생각해 보아라. 너도 전에 많은 사람을 가르치기도 하고, 힘없는 자들의 두 팔을 굳세게
붙들어 주기도 했으며,
4 쓰러지는 이들을 격려하여 일어나게도 하고, 힘이 빠진 이들의 무릎을 굳게 붙들어 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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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5 이제 이 일을 정작 네가 당하니까 너는 짜증스러워하고, 이 일이 정작 네게 닥치니까
낙담하는구나!
6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네 믿음이고, 온전한 길을 걷는 것이 네 희망이 아니냐?
7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
8 내가 본 바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보세요. 죄 없는 사람은 절대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인과율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시면 내가 본 바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라고 하지요? 그의 논리의 근거가 뭡니까? “내가 본 바로는” 즉 “자기의 이 땅에서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이 땅의 경험이나 체험으로 추측하고,
미루어 짐작하고, 정의 내리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이런 체험도 합니다. 이른바 직통 계시, 성령 체험 같은 것을
경험합니다.
(욥4:12-21)
12 한번은 조용한 가운데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데, 너무도 조용하여 겨우 알아들었다.
13 그 소리가 악몽처럼 나를 괴롭혔다.
14 두려움과 떨림이 나를 엄습하여, 뼈들이 막 흔들렸다.
15 어떤 영이 내 앞을 지나가니,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16 영이 멈추어 서기는 했으나 그 모습은 알아볼 수 없고, 형체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는데,
죽은 듯 조용한 가운데서 나는 이런 소리를 들었다.
17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있겠으며,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있겠느냐?
18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당신의 종들까지도 믿지 않으시고, 천사들에게마저도 허물이 있다고
하시는데,
19 하물며, 흙으로 만든 몸을 입고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사람이겠느냐?
20 사람은, 아침에는 살아 있다가도, 저녁이 오기 전에 예고도 없이 죽는 것, 별 수 없이
모두들 영원히 망하고 만다.
21 생명줄만 끊기면 사람은 그냥 죽고, 그 줄이 끊기면 지혜를 찾지 못하고 죽어간다."
굉장히 옳은 말 같고 엄청난 체험을 한 것 같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이러한 논리나 체험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욥42:7-8)
7 주께서는 욥에게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한 것은,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마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지고 가서, 너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용서하여
달라고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고, 어리석게 말하였지만, 내가 그대로 갚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들 말은 틀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그렇게 이 땅의 것으로 보여 지고 이 땅의
것으로 상을 받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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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5:23-27)
23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24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을 네가 알 것이라
26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
27 볼지어다 우리의 연구한 바가 이같으니 너는 듣고 네게 유익된 줄 알지니라
엘리바스가 욥에게 뭐라고 충고합니까? “너 하나님 말씀대로 죄 안 짓고 잘 살면 하나님께서
이 땅의 것들로 보상해 주신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를 사람을 중심에 놓고 이 땅의 것으로 보상을 약속하는 사람들은 전부
적그리스도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고 하늘의 것으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법칙이요 원리인 인과율에 의해서가 아닌 원인이 없는 곳에서 결과를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지혜로 구원을 완성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도 바로 그
은혜의 원리에 의해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계12:10)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 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 하던 자가 쫓겨났고
보세요. 인과율로 우리를 속이고 인간을 참소 하던 그는 이제 쫓겨났습니다. 구약은 이제 끝난
것입니다. 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 율법 아래에서 우리는 해방이 된 것입니다. 사단은 이제 절대
우리를 참소할 수 없습니다. 인과율에 의한 상벌의 시대는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속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아닌 것 같지만 그 인과율에 얼마나 젖어 있는지 몰라요. 그래서 자기 일이
조금만 안 되면 ‘새벽기도를 안 나가서 그런가?’ ”지난주일 날 예배를 빼먹고 골프를 치러
가서 그런가?“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기독교는 인과율에 지배를 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여전히 인과율에 젖어 있는지, 은혜를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시려면 한 세 달
동안 교회를 나오지 말아보세요. 그리고 성경도 읽지 마시고 기도도 하지 말아보세요. “그래도
난 그리스도인이 틀림없어“ 하시는 분이 진짜예요. 교회 한 주 만 빼 먹어도 불안하고
초조하고 ”혹시 이 일로 내게 어떤 벌이 내려지지 않을까?“이렇게 노심초사하는 분은 아직
은혜가 뭔지 잘 모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또 진짜 시험해 보지는 마세요.
하나님은 인과율에 근거하지 않은 원인 없는 결과 “십자가”로 그렇게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켜
내심으로 원인과 결과의 법칙으로 참소 하던 자들을 쫓아내시고 그 완성시켜 놓으신 구원을
우리 인생을 통해서 이해시키시고 설득시켜 내시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는 평생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가능케 하신 하나님의 능력 앞에
겸손히 항복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순종이요, 거룩인 것입니다.
창세기에서의 아담은 자신을 원인으로 해서 실패를 했지만 욥기에서의 욥은 원인이 없이
성공을 거두는 자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신약과 구약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욥이 이유 없이,
까닭 없이, 자기 자신에게서는 요만큼의 근거도 없이 의인으로, 복을 받은 자로 처음부터
등장을 하는 것이고 또 고난을 받을 때도, 세상 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까닭 없이, 이유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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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인 것입니다.
보세요, 그러한 고난의 끝에 하나님께서 어떤 결론을 이끌어 내십니까?
(욥38:1-3)
1 그 때에 주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2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3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욥이 계속해서 자신이 옳고 하나님이 실수하시는 것이라고 자기의 지혜를 여전히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십니다.
(욥40:4-6)
4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5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능력 면에서도 욥의 항복을 받아내십니다.
(욥40:6-9)
6 그러자 주께서 폭풍 가운데서 다시 말씀하셨다.
7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여라.
8 아직도 너는 내 판결을 비난하려느냐? 네가 자신을 옳다고 하려고, 내게 잘못을
덮어씌우려느냐?
9 네 팔이 하나님의 팔만큼 힘이 있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천둥소리 같은 우렁찬 소리를 낼
수 있느냐?
(욥42:2-6)
2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욥은 지혜의 면에서나 능력의 면에서 모두 하나님 앞에 완전한 항복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바로 이 항복을 받아 내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께 항복 할 때 진정한 승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욥의 고백 후에 욥이 풍성한 하늘의 풍요를 획득해서 구원이 완성되는 모습으로
욥기가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이 땅의 것을 열심히 구하다가 이 땅의 것으로 풍성하게 보상받고 이 땅에서
장수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나는
천국보다 여기가 훨씬 좋아요” 하고 이마빡에 써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배우며 하나님의 지혜에 순종하고 비록 인과율에
의해 나에게 이 땅에서 주어지는 보상이 없다할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자로 지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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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방해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서
“하나님만 옳습니다.”라는 고백을 받아내시고야 말, 분이시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시고 다른
곳에 눈 두지 마시고 오로지 우리의 소망, 천국을 향하여 올곧게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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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엡3:17)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라“는 사도 바울의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공부해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성령으로 교회 안에 와 계심에도 불구하고 교회인
에베소 신자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하기를 기도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통하여 자기 안에 와 계신 그리스도를 조금 씩 조금씩 알아 가는
과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신자가 된 교회를 향해서 그러한 기도를 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성숙해 가면서 “아 주님은 그런 분이구나. 그리고 그 분이 내 안에
계시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거기에 제가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더
잘 알게 되고 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명확하게
드러나게 해 준다고 했지요? 그래서 몇 주간에 걸쳐서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공부를 한 것입니다. 정말 성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만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함께
확인을 했습니다. 그렇죠?

오늘의 본론으로 넘어가지요. 사도 바울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을 확인하는 방법을 “믿음을 통해서”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다시 번역을 하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계신
것을 알게 된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알아 가는 그 과정이 믿음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믿음에 대한 바른 정의만 내려진다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쉽게 해결이 될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믿음은 무엇인가?“에 대해 설교를 한 것이
있습니다. 그 설교를 함께 참고를 하시면 좋습니다.
제가 그 때 믿음을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롬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 17절에서 복음(good news)이 어떻게 정의가 되고 있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의‘는 무엇이라고 했지요? ’의‘라는 것이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인격이나 존재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을 ’의‘’짜다크‘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책임을, 하나님의 약속을 성실히 수행해 내시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이라는 것을 갖게
만드시는 것을 우리가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의‘의 결과 즉, 하나님이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끝내시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믿음은 우리가 국어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어떤 존재나 대상을 받들고 따르는 것“ 곧 ”내가 행하는 나의 행위“로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고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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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시고 실행에 옮기시고 완성시키는 전 과정을 ‘믿음‘’객관적
믿음‘이라고 한다고 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되는
’주관적인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의 정확한 해석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오늘은 거기에 대해서 좀 더 확실하게 부연 설명을 해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
믿음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는 방법이요 수단이 되는 지“도 아울러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는 국어사전에서의 믿음의 정의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기독교 대 백과


사전에는 믿음이 어떻게 정의가 되어 있는지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믿음은 어떤 사물에 대한 신념과 어떤 사람에 대한 신뢰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학에서
믿음이란 인간이 절대자 또는 초월자를 이해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믿음은 계시에
응답하는 것이다. 성경에 있어서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의 믿음이란
일차적으로 신념이라기보다는 신뢰이며 추상적인 지식이기보다는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이다”
이 기독교 대 백과사전에 따르면 기독교에서의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사실에 대한 신념이나
신뢰라기보다는 인격과 인격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 즉, 하나님이라는 인격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시기 위해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는 그 계시에 반응하는 것을 우리가
믿음이라고 합니다.
시중에서 “믿음이 좋다”라고 하면 종교 행위를 열심히 하고 방언이나 예언이나 신유의 은사를
한 두 개 정도는 가지고 있고 기도할 때도 입만 열면 청산유수로 좔좔 읊어대는 사람들을
우리가 ‘믿음이 좋다‘라고 하지요? 혹은 그 사람의 그러한 열성적인 종교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게 되면 “저 사람은 참 믿음이 좋아, 믿음이 좋으니까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셔서 저렇게 행복하게 사는 거야‘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을 믿음이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하던 자들에게
“외식하는 자, 독사의 새끼”라는 말은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믿음은 우리가 기독교 대 백과 사전에서 읽었던 것처럼 기계나 무생물,
혹은 어떤 사실이나 지식, 혹은 알 수 없는 거대한 힘 같은 것에 보내는 신념이나 신뢰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인격과 인간이라는 인격 사이에서 생성되는 보다 깊고
고급한 어떤 것입니다.
믿음이 인격과 인격이 만나 그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는 말은 믿음이란 강제나 조정이나 억지를
동원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설득과 기대와 신뢰와 사랑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자라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상대방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격과 인격이 만나 상대방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습득하고 그
것을 근거로 ‘아, 이런 사람이라면 내가 정말 나의 모든 것을 맡겨도 되겠다.’라고 신뢰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상대방을 향한 나의 믿음의 행위 이전에 그 상대방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상대방은 강한 힘을 갖고 있고 나는 그 힘을 필요로
하는 약자이기 때문에 나는 무작정 그 상대방을 의지 한다“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대상을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무조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어떤 질서나 법칙으로 취급을 하게 되면 그 대상은 ‘내가 죄를 지으면 나를 자동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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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하는 존재, 내가 조금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내면 나에게 상을 주는 존재’ 이런 식의
기계적인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욥과 세 친구들의 처음 신앙이 그런 것이었죠? 우리는
기계에게 설득 당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기계를 설득하지 않습니다. 엔진이 말을 안 들으면
엔진 오일을 갈아줍니다.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가 안 나오면 발로 세 번 정도 차지 그
자판기를 설득하지 않습니다. ”자판기야 내가 가진 동전이 딱 그거밖에 없다, 그러니까 내
사정을 좀 봐 주라. 좀 힘이 들더라도 마지막 힘을 내서 내 커피만은 좀 내려 줄 수 없겠니?“
이러지 않습니다.
욥이 인과율에 근거하여“나는 아무 죄를 안 지었는데 왜 나에게 이러십니까?”하고 대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욥에게 대답하십니까? 대뜸 “너 악어를 이길 수 있니? 너 하마를 보았니?
그 풀만 먹는 하마가 어떻게 그렇게 힘이 센지 아니? 너 이슬은 누가 만드는지 아니? 서리는
누가 만드는지 아니? 너 우박창고를 봤니?” 이런 것을 물어보십니다. 하나님을 그저 잘하면
상주고 못 하면 벌을 주는 어떤 힘이요, 법칙이요, 질서로 이해하고 있던 욥에게 하나님은
“나는 무정한 법 개념이 아니다, 나는 의지를 가지고 선과 의를 이루기 위해 자연과 모든
생물의 인격에 개입하는 하나님이다. 나는 네 인생에 있어서 그저 심판관이고 무정한 법칙이
아니라 너를 복되게 하기 위해 네 인격과 네 인생에 개입하는 아버지이고 인도자이고 복
주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인격자인 나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너에게 허락하는 너에게 최고로 좋은, 참 복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너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욥기를 통해 우리 교회에게 바른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어떤 힘 있는 대상에게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도 아니고 방법도 아니고
나에게서 나오는 어떤 훌륭한 행위도 아닙니다. 믿음은 인격과 인격이 만나 그 인격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상호 신뢰입니다.
히브리서 11장으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히11:4-7)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4절을 보시면 아벨이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많이 들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아벨은 양 치던 자였기 때문에 피 있는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곡식으로 제사를 지내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고들 많이 생각합니다. 구속사적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벨이 피 있는
제물로 제사를 드린 행위를 믿음의 행위라고들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행위를 어여삐 여기시고
하나님이 그 제사를 열납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제사 중에는 짐승을 죽여서 태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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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도 있지만 곡식을 태워서 드리는 소제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안 됩니다. 그러면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창4:4-5)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보세요, 창세기의 설명은 제물의 종류나 제사의 방법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제물을
드린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열납 하시면서 그 제물도 함께 열납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열납 하지 않으심으로 그의 제사도 함께 열납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이 땅의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께 선뜻 드려지는 우리의
열심이라든지 행위의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이 땅의
것으로 보상을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 5절 6절 7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에게 맞아 죽었고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믿음이라는 원인이 이 땅의 어떤
것으로 보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누구는 믿어서 맞아 죽고 누구는
믿어서 하늘로 그냥 올라갑니다. 누가 더 훌륭한 신앙인 인지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생성이나 믿음의 보상에 이 세상의 것은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다”가 거기 등장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자기 믿음의 대가로 눈에 보이는 보상을 전혀
꿈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힘 있는 대상에게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얻어내기 위해 열심을 부리고 노력하고 치성을 드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보상으로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제공되지도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인격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격을 가진 인간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하시고 인간은 그 계시에 반응하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그들의 신을 설명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그저 그들의 신은 능력이 있고
초월적인 힘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신을 믿는 자들은 그 힘을 빌어서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주문, 혹은 부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소개하시고, 설명하시면서 우리를 설득하시고
우리를 이해시키시려 하십니다. 그리고 잘못을 하면 야단을 치시고 어르고 달래시고 때로는
화를 내시고 우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감정까지 동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조종하시지 않으시고 기계나 로봇 취급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진짜
친구 삼으시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를 진짜 자식 삼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장이 나면
눕혀놓고 회로를 갈아 끼우고 전선을 교체하는 로봇처럼 취급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설득하십니다. 회유하십니다.
(사1:2-6)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 하는도다 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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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보세요, 창조주가 피조물이 잘못했다고 해서 이렇게 가슴아파할 이유가 있습니까?
다 죽여 버리고 다시 만들던 가 뇌를 개조해서 다시 넣어 신제품으로 만들던가 하시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슬퍼하시고, 화를 내시고, 애원하시고 하나요? 우리를 인격자로 대우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자식이 뭘 잘 못했을 때 어머니가 자식의 버릇을 고치려고 “동네 사람들, 다 좀
나와 보시오” 하는 것 같지 않으세요?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러분 이런
경험 없으세요?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 교회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강제로 우리
코를 꿰어서 끌고 가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자신을 설명하시면서 “나는 이런 하나님이다. 너
그래도 나 안 따라올래?” 이렇게 설득하십니다.
(신4:32-40)
32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34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35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36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너로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37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38 너보다 강대한 열국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39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40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항복할 만한 분이신가를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온 천하 만물의 주인이시며
그 분이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하신 약속을 어떻게 신실하게 지키셨는가, 그리고 그들의 구원이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다는 것을 광야 40년을 통해 알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을 통해 모든 것을 비교하고
확인해서 “하나님, 당신만이 하나님이십니다. 당신만이 저의 사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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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당하신 분입니다” 하는 고백을 받아내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이 성경이고요.
믿음은 이렇게 인격적인 이해나 인식이 없이 주문이나 부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절대 강요나 강제가 아닙니다. 끊임없는 설득이며 이해의 작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짓게 그냥 놔두시는 것입니다.
강제로 죄 못 짓게 손 발 꽁꽁 묶지 않으십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열매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의탁하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놔두십니다. 기도한다고 안막아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손발을 움직이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것은 하나도 안 하고 이렇게 기도만 하는 것은 “하나님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어서 우리를
조종해 주세요.” 라고 하나님께 부탁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강제로 끌고
가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인생을 통해 스스로 그 싸움을 싸우게 하시고 결국 “모든 게
다 헛됩니다. 저는 하나님만 택하겠습니다.”라는 항복을 하게 만드십니다.
(창2:15-17)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다스려라“ 그리고 ”먹지 말아라“ 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아예 하나님의 명령을 입력한 칩을 뇌에다 장착하지 않으시고
명령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십니까?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접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조종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보고 선택하고 결정하라고 하십니다.
”다스려라, 먹지 말아라“라는 명령을 받고 어떻게 다스려야 되는가를 생각하고 노력해야 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저 선악과를 왜 먹으면 안 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먹을 것인지 안 먹을 것인지 스스로 결정을 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잘 이해하셔야 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셨다는 것을 최종 결재권을 주신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에서의 제한적인 선택권입니다. 우리의 운명까지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공부를 열심히 하는 자식으로 키우려고 결정을 하고 아이가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세 번 이사를 합니다. 맹자는 이사 간
곳에서 장사치들 흉내를 내고, 장의사 흉내를 내고 하는 선택을 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훌륭한 학생이 되어야 하고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큰 결정은 어머니가
한 것입니다. 맹자는 그 큰 결정 안에서의 작은 선택권을 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억지로 조종하고 입력해서 끌고 가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하나님이 결정해 놓으신 커다란 운명의 방향으로, 설득하시고 이해시키셔서 데리고 가십니다.
이번 주간이 우리 아이들 가을 방학입니다. 아이들이 방학을 하면 아빠하고 놀이 공원에 꼭
한번 가자고 졸라대서 약속을 했습니다. 오전 중에 볼일을 다 마치고 아이들하고 매직
마운틴에 갔습니다. 저는 놀이 공원에 가서 놀이 기구타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건 돈 내고
고문당하는 거지, 도대체 저에게는 매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 놀이 기구 타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신이 나서들 탑니다. 다른 것들은 대충 아이들하고 같이 타 주었는데
롤러코스터는 정말 못 타겠더라고요. 근데 아이들이 꼭 아버님하고 같이 타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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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억지로 앉아서 타는데 정말 기분 나쁘더라고요. 그 쇠막대기로 된 안전 바가 철커덩
하고 내려오는데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했습니다. 그게 슬슬 꼭대기로 올라가는데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저 꼭대기에 올라가면 쏜살같이 내려가겠지 하고
겁을 먹고 올라가고 있는데 드디어 그 롤러코스터가 미치도록 빨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뒤에서는 아이들이 좋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내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쩌자고 저에게
이런 시련까지 주십니까?’ 겨우 참고 목적지까지 다 왔는데 뒤에 탄 사람들이 다음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one more time, one more time" 하고 외칩니다. 그러니까 그 오퍼레이터가
무슨 선심 쓰듯이 ” OK one more time"그러더니 그대로 또 출발시키는 겁니다. 아니, 제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출발시키는 겁니다. 저는 그 안전 바를 올리고 거기서 내리려고
했는데 안전 바가 안 올라가는 겁니다. 그래서 꼼짝없이 또 한 번 고문을 당하고 내려와서 그
놀이 공원 바닥에다가 모듬전 부칠 뻔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끌고 가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십니다. 결정권을 주십니다. 시행착오를 허락하십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설명해
가십니다. 왜냐하면 인격 적인 존재들은 힘 있는 자에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존재들은
더욱 크고 두터운 인격 앞에 굴복합니다. 힘 있는 존재 앞에서는 아부나 약한 척 연극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굴복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힘으로 우리를 강제하지 않으시고
인격적으로 설득하시는 것입니다.
(창28:10-15)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분명 하나님께서 “모든 족속이 네 자손으로 인하여 복을 얻는 복을 주시며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야곱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데 얼마나 걸렸지요? 20년이나
걸렸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한 인간의 인생을 묵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20년이라는 시간과 기회와 경험의 장을 허락하셔서 인생이 헛되며 ,
세상에다가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얍복강
가에서 확인 도장을 찍으십니다. 하나님의 우선적인 목적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야곱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애정과 열심과 진심을
받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긴 시간과 과정을 통하여 항복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한시도 야곱에게서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20년간 수많은 고생과 오해와 반목과 질시를 받으며 살았던 야곱의 인생이 하나님이 함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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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야곱의 상황들을 섭리하시면서 야곱을 설득하시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형을 만나서 형을 어떻게 부릅니까? “내 주“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자신은
종이라고 합니다. 이제 야곱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을 지키시는 하나님뿐입니다. 야곱이 그것을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기꾼인 나에게 하신 약속을 그대로 지켜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야곱은 안 것입니다.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얍복강을 건넜는데 하나님의 약속대로 엄청난 부를
거머쥐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자식들의 모함으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게 모두 20년 전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그가 그렇게 목숨 걸고 자기 꾀로 긁어모은 재산을 에서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의 삶은 원수를 향하여 주라 부르고
자신이 오히려 종이 되어주는 삶, 즉 원수를 사랑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야곱이 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믿음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각하고 심사숙고하고 선택하고 결정을 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신학에서 구약에 나타난 대표적인 신학적 주제를 “계약 신학”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언약
신학”이라고도 부릅니다. 창세기서부터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라, 그러면 너는 복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을 누릴 것이고 이
명령을 어기면 너는 벌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 언약을 어기고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스라엘과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인간과 약속을 하십니까? 우리가 창세기 15장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과
약속을 하시지만 늘 혼자 그 약속을 지켜내십니다. 쪼갠 고기 사이로 인간과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혼자 지나가십니다. 그건 하나님 혼자 그 약속을 지켜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럴 거면 다 해 놓으시고 나중에 “짠”하고 “이거 내가 했다”하시면 될 것을 왜
굳이 하나님이 인간과 약속을 하시느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통해서 이루어 내실
어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을 그 자식이 꼭 알아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혼자 이루실 것이면서 하나님이 그 자식들하고 계속해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신7:6-11)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11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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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고 그 약속을 지켜 내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자식들에게 알리시기 위해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인격 적인 두 대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가 꼭 시행되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은 쌍방 간의 믿음이 전제가 되어야 약속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어떤 약속을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믿으신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여러분이 과거에 믿음을 정의하실 때 믿음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약한 자가 강한
자에 대한 신뢰요 의뢰인 것으로 정의하셨지요? 그러나 믿음은 그렇게 약자가 강자에게 보내는
신뢰일 뿐 아니라 강자가 약자에게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이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는 인격적인
신뢰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아, 아버지는 너를 믿는다.”라고
이야기할 때 아버지는 아들을 인격적인 차원에서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지, 아들에게 어떤
유익을 원하는 차원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동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버지의 믿음, 강
자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히11:8)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표현합니다.
(행7:2-4)
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 팔던
데라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수24:2-3)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너희 조상들“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그 다른 신들을 섬기던 조상들은
아브라함, 나홀, 데라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아니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우상을 섬기던 집안에서
태어나 우상을 섬기는 아버지와 함께 생활해 오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란에서 머물면서 밍기적 거리다가 아버지
데라가 거기서 죽었고 하란에서 밍기적 거리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십니다. 그게 창세기 12장입니다.
(창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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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그리고 12장,13장,14장에서 여러 사건들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납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가
가뭄이 심 하자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애굽 왕 바로에게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서
팔아먹습니다. 그 때 애굽 왕에게서 받은 노비와 양과 염소 나귀, 약대, 은, 금으로 아브라함이
부자가 됩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바로보다는 크신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롯과 헤어지는 사건도 겪습니다. 그리고 롯이 네 왕의 연합군에게 잡혀가게 되고
아브라함이 318명의 머슴들을 데리고 네 왕의 연합군과 싸워서 롯을 구해 옵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을 만나고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창15:1-6)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렇게 보시다시피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 가서야 여호와를 믿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나왔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히11:8)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By faith Abraham, when called to go to a place he would later receive as his
inheritance, obeyed and went, even though he did not know where he was going.
여기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구절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피스테이
칼루메노스”입니다. 수동태입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에 의해서(by
faith)불림을 당했다”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어서,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어서 거기서 나왔다는
뜻보다는 믿음이라는 것이 아브라함의 부름을 주도한 것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11장의 이 믿음과 창세기 15장에서의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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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목적을 세우시고 그들을 끌고 가시는 이해관계를 떠난 인격적인 대우를 또한 우리는
믿음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그
믿음은 바로 그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상대적으로 열등하고 약한 자가 종속적인 차원에서 강한 자에게 기대고
의지하여 무엇을 얻어내려는 것만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인격 적인 존재 쌍방 간에
일어나는 인격적인 신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믿을만한 존재여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어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믿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꼭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만들어 내시고 마시겠다는 사랑과 은혜의 결단을 전제로 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끌어내셨고 그로부터 하나님은
열심히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을 설명해 가시는 믿음의 행위를 계속해서 하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그 믿음의 행위가 아니면 절대 살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사망으로 던져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믿음의 행위가 우리를
살게 하며, 결국에는 그 객관적 믿음이 우리의 주관적 믿음을 이끌어 내시는 것이며, 그래서
이어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을 사도 바울이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열심을, 우리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믿음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스스로 믿음을 만들어 내거나 선택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이 축약되어지고 농축되어져 나타난 것이 무엇입니까? 그 모든 하나님의
열심이 어떤 한 사건으로 설명이 됩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지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하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기필코 만드시고야 마시겠다는 그 인간을 향한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으신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이렇게 진술하는 것입니다.
(엡2:8-9)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은혜, 믿음, 구원, 선물은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9절의 행위와 자랑 즉, 인과율과 자랑과
대조해서 기록이 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
즉, 하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기게 된 하나님의 선물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내용 중에 우리에게서 기인한 것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우리의 믿음의 행위로 인해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에 의해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구원에 관해서 조금 더 살펴보자고요. 구원을 받은 자들은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롬5:9-10)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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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제가 “의”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 드렸지요? “의”라는 것은 관계를 맺고 있는 네페쉬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것을 “의”라고 한다고 했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책임을 열심히 성실하게 수행해 내시고 인간은 인간의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것을 “의로운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관계를 10절에서‘하나님과 화목
되어진 관계’라고 하지요? 맞습니까? 그러니까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가 의로운 관계로
회복되어지는 것이고 그것을 다른 말로 화목 되어진 관계라고 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 지는데 그 믿음은 하나님의 열심에서 시작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가 진행되어지면서
우리에게서 믿음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구절이 있는 겁니다.
(롬3:21-26)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그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가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제가 지금까지 드렸던 말씀이 여기 다 들어있지요?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를 우리가 하나님의
의라고 하고 하나님의 의는 여러 번 설명해 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책임을 열심히 수행하시는 것’,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의롭게 만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의라는 말 대신에 믿음이라는 말을 넣어보세요. 하나님의 믿음이
나타나서 우리를 믿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이 화목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성경이 구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우리가 만들어 내는 어떤 종교적 열심도 아니고 하나님께 어떤 보상을 받는
근거도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어 우리에게서 반응을 받아내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인격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수많은 종교행위를 믿음의 행위라고 섣불리 단정 짓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근거로 나오지 않는 모든 행위들은 전부 쓰레기 같은 것들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더러운 쓰레기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라고 호되게
꾸짖으셨습니다. 겉으로는 번드르르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전부 자기의 자랑과 자기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주님이 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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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주님께서 공생애 첫 설교 때 “복과 율법과 거짓 선지자에”대해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들에게 편리하게 마음대로 뜯어 고쳐서 “나는 율법 지켰네,
나는 신앙이 좋은 사람이네” 이렇게 써먹었습니다. 예를 들어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유부녀만 건드리지 않으면 된다.“라고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해서 지켰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을 장로들의 유전을 악용해서 “고르반“즉, 하나님께 드려질 물건이라고 속여서 부모를
마땅히 봉양하는 의무를 저버렸습니다. 부모가 달라고 할까봐 부모 앞에서”이건 고르반입니다“
하고 선포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께도 드리지 않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썼다는 것이죠. 아니면 드리긴 드려도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면서 부모에게 봉양해야 할 것을
거기에 포함해서 바치는 행위를 했습니다.
인간들이 믿음의 행위로 내어놓는 사랑도 잘 보면 원수를 만드는 사랑입니다. 인간은
자기편만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자기편만을 사랑하다 보면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 사랑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믿음의 행위라고 내어놓는 수많은 종교 행위들은 이렇게 가식적이며 이기적인 것들입니다.
(말1:7-10)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2:3)
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근거하지 않고 만들어내는 믿음의 행위, 신앙의 행위라는
것이 모두 이런 것들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는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자기를 계시하시고 자기를 설명하시며 아울러 우리가 누구인지를 경험하게 하시면서
정말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 이라는 것을 설득해 내시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가? 이런 질문이 안 드세요?
제가 지금까지 믿음이라는 것은 인격 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상호 신뢰라고 했지요?
“인격 적인 관계“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 인격적인 존재는 상대방의 인격이 강하게 그를
감동시키고 설득시킬 때에 당연히 반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반응이 반드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인격 앞에 반응을 해서‘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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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은 구원을 얻는다.“라는 말입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믿어주시고 그들에게 믿음의 행위를 하심으로
믿음이 시작되고 인간은 그 하나님의 열심에 반응을 하게 되어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을 우리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은 “의”라고도 표현
할 수도 있고 그 믿음과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강제로 주입시키지 않으시고 시간과
경험과 기회의 장을 열어주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점점 쌓아가면서 그 믿음이
성장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은 한 마디로 인간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과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행위이며 그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에게서 책임이라는
반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는 자랑이 없고 그들에게서는 겸손과 감사와
찬양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게 믿음 있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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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엡3:17-19)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표준 새 번역)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우리는 지난주까지 아주 긴 시간 동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의 부분을 공부했습니다. 왜 이미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또 다시 갈구해야
하는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 할
수 있는 것인지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왜 그것이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인지도
지난주에 공부를 했지요?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은 그 객관적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관적인
믿음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 안에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한 자들의 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그 안에 예수께서 거하시는 자들은 어떤 표지가 나타나게 됩니까?
헌금을 많이 하게 되나요? 열심히 교회 일에 앞장서서 헌신하게 되나요? “아프리카를 내 품에“
하면서 선교에 힘쓰게 됩니까? 어떤 것으로 우리가 그 표지를 삼을 수 있습니까?
절대 이러한 외적인 나타남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가짜들도 얼마든지
가면을 쓰고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진짜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표지가 뭡니까?
인격의 변화입니다. 그의 마음 밭이 갈아엎어져서 그 이기 적이고 계산 적이었던 죄인의
인격이 다른 인격으로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번 공부한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와 충성, 그런
것들입니다. 그 모든 열매를 한 단어로 축약하여 표현하라고 하면 어떤 단어를 쓰시겠습니까?
사랑이지요.
(롬13:8-10)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룩한 삶의 내용은 전부 사랑으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자들의 표지는 바로 이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나 구제나 헌신 같은 것은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물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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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마든지 나의 자랑을 위해 연극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혀 하나님
앞에서 카운트되지 않는 겉만 번드르르한 행위를, 자기도 스스로에게 속으면서 행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평생을 아프리카에 가서 헌신한 슈바이처의 삶을 존경어린 눈으로 바라봅니다.
인간은 자기의 자랑을 위해서, 얼마든지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선한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은 늘 하나님과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그저 자신의 자랑과 만족을 위해 하는 어떤 선한 행위도
모두 “죄”입니다. 그것은 왜곡된 자기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새벽 기도 때 공부한
요한복음 18장을 한번 보고 넘어가지요.
(요18:28)
28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빌라도의 법정으로 예수님을 끌고 갔습니다. 이미 사형
언도를 내려놓고 총독인 빌라도에게 형식 적 재가를 받기 위해 간 것입니다.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엉터리 같은 재판을 거쳐서 로마의 총독 앞으로 끌고 간악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정결하게 지키겠다고
이방인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열심이 있는 자들이 눈앞에
있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죽이는 장면입니다.
(마23:3-7)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마23:25-28)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말2:13-16)
13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찌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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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 와서는 “왜 하나님 이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까?”하고
울고불고 야단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안 받는지 아니? 그 이유를 말해줄까?”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우리가 종교행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해서 그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 분의
성품을 닮고 싶고 이어받고 싶은 간절한 염원이 그 종교 행위의 내용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행위는 하는데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에서도 거짓말이나 하고 서로를 학대하고
하는 인격의 변화가 없는 그런 자들이 바치는 종교행위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보면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눈 꼬리는 점점 마귀할멈처럼 변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한 두 시간 새벽 기도 하고 눈 퉁퉁 부어서 나가면서 불쌍한 콩나물
장수 할머니한테 콩나물 더 안 준다고 삿대질하는 말도 안 되는 가짜 종교행위들이 범람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예수를 믿거나 안 믿거나 인간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마땅히 부모님을 섬겨야 할 책임과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책임을 어떻게 악용을 했는가 하면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과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고르반으로 하나님께
한번 드리고는 부모님께 드릴 것도 하나님께 드렸으니 난 내 할 일 다 했다는 식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은 당구를 1000을 치십니다. 그래서 간간이
교회 앞 당구장에서 교인들하고 내기 당구를 치신답니다. 그런데 실력이 워낙 좋으니까 치는
족족 이기시는 겁니다. 그 중에 자주 이 목사님께 돈을 잃던 한 교인에게 목사님께서 미안해서
“김 집사 이거 너무 자주 잃어서 어떡하지? 우리 핸디 조정을 좀 해야 하는 것 아니야?”
하셨답니다. 그랬더니 이 집사님이 “아니에요 목사님, 전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그래서 이
목사님이 속으로 “이 사람이야말로 참 훌륭한 신앙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 왈 “목사님한테 잃은 돈은 십일조에서 까요” 그러더랍니다. 어차피
목사님한테 잃은 거는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던 거니까 쌤쌤 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그런 거죠. 부모도 공경 못하는 인간들이 고르반이다 뭐다 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챙겨야 할 것은 바로 나의 인격입니다. 나의 거룩입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있는가?“ 그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임무와 목표를 말씀, 기도, 전도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전도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만하면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인정하는 풍토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묵상하라 하시고 기도하라 하시고 전도하라 하시는 것은 그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사랑하는
자로, 거룩한 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로 만들어 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말씀,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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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지 그 것 자체를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부모가 다그치는 것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신념에서가 아닌 것입니다. 공부를 잘 한다고 해서 다 돈을 잘 벌지는
않습니다. 그 공부 자체가 사람을 훌륭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망나니처럼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더 부자가 많습니다. 더 잘된 사람이 많아요. 공부는 돈을 잘 버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느냐? 그 나이에는 공부가 성실과 책임을 훈련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수학 시간에 배운 미분 적분, 집합 같은 것은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전혀 일상생활에서 써먹을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왜 애써서 그 미분 적분을
공부해야 합니까? 수학은 우리 뇌의 기능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에 미분 적분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라는 것은 더 큰 목적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여러
가지 종교 행위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기 위한 방법이요 길일뿐입니다.
그 것 자체를 행했다고 해서 그걸 믿음이 좋다, 신앙이 좋다 이렇게 평가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그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있느냐, 사랑하는 신앙인이 되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드리신 위대한 기도가 나옵니다.
(요17:13-22)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올바른 교회의 특징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올바른 교회는 예수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올바른 교회는 예수님의 거룩을 닮은 거룩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올바른 교회는 진리 위에 바로 서야 한다고 합니다.
네 번째로 올바른 교회는 선교에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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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로 올바른 교회는 하나 됨, 연합에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랑을 근거로 나와야 하는 것들입니다.

기쁨에서 사랑이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쾌락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배제된
자신의 육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엉터리 쾌락주의.
거룩에서 사랑이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자기 자랑, 자기만족밖에 남는 것이 없지요. 바리새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거룩의 표준에 도전을 하시니까 그 예수님을 죽여 버립니다. 이게 사랑이
빠진 거룩의 결과입니다. 진리에서 사랑이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냉혹한 정통주의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옳은 가르침이지만 사람을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선교에서 사랑이 빠지면 그게 무엇입니까? 제국주의입니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고 기독교를 전파하려 했습니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개신교를 전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을 노예 취급하고 , 우민 정책을 쓴다고 아기의 뇌의 발육에 꼭 필요한 소금의 양을
제한 시켜 버리는 잔혹한 인간들이 전하는 예수를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연합에서 사랑이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금방 대장이 되려는 자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이 근본적인 인격의 변화 없이 행해지는 모든 것은 사상누각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는 “거룩”입니다. 다른 말로 “성숙”입니다. 다른 말로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감”입니다.
(롬8:28)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라는 말이지요? 여기서 선을
이룬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인생에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뜻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뭡니까?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살전4:3)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우리는 신앙생활의 목표지점을 정확하게 잡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은 거룩입니다.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삶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는 이웃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까? 막연하지요?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먼저 결론적으로 사랑을 정의하자면 사랑은 “상대방의 성숙을 위해, 상대방의 성숙을 목표로
두고 끊임없이 나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가 잘 못 오해하고 있는 사랑의 종류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사랑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아기가 태어나게 되면 한동안 자기와 주변 세계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어느 것이 나이고 어느


것이 내가 아닌지 모릅니다. 몇 개월이 지나면서 자신과 외부를 구분합니다. 그것을 자아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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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 boundary라고 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시간이 가면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엄마와 자기가 하나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배가 고파도 엄마가 밥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나는 다른 존재인 것을, 그리고 외부 세계와 나는 다른 존재라는
것이라 깨닫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얼마간은 배고파서 울면 무조건 밥을 주니까 자기가
전지전능한 자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배가 고파서 우는데 엄마가 곁에 없기도 합니다. 내가 오줌을 싸서
불쾌한데 엄마가 갈아주지 않습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아이는 자기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살아야 하는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존재의 제한성을 인식하게 되고 자기 자아의 영역을 분명히 인식해 나갑니다.
그렇게 자기 자아의 영역을 인식하게 되면서 사람은 고독하고 외롭게 됩니다. 외부와 나와의
경계가 명확하게 인식이 되어 갈수록 인간은 점점 고독하고 외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소위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면 그 고립감이 순간적으로 허물어지게
됩니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억누르고 감추어 왔던 성적 충동이 밖으로
표출 되게 됩니다. 그것은 몸속에 일어나는 화학 반응일 뿐입니다. 그래서 급격히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욕망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서로에게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단시간에 서로에게 빠져 버리는 사랑은 그 성적 욕구가 사라지게
되는 순간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서로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함이 사라져 버리게 되면 이내
식어버리는 그런 것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의존감도 사랑이 아닙니다.“난 그 사람이 없으면 못 살아요”
굉장히 좋은 말 같지만 그것은 집착 혹은 의존이라고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연애 할 때
상대방이 “난 당신 없으면 죽어 버릴 거야”그러면 은근히 흐뭇해 하지요? 경계하셔야 합니다.
남편이나 자식이 없으면 자신의 인생이 통째로 날아가 버릴 것같이 느끼는 것은 절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이 안 된 사람에게서 나오는
철없는 행동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이 안 된 비 성숙한 사람은 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집착과 의존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남편이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하나가
되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어떤 목적을 향해 한 마음이 되라는 것이지 내 인생이
네 인생이고 네 인생이 내 인생이라는 식의 맹목적 하나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을 향한 멀고 험한 길은 혼자 가는 것입니다. 곁에서 기도로 삶으로 도울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은 홀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보면 사단장 사모님은
자기가 사단장이에요. 연대장 사모님은 자기가 연대장 사모님이에요. 저희 부대에 작전 참모의
사모님이 참모장 사모님의 고등학교 선배님이었어요. 그런데 자기 후배 앞에서 쩔쩔맵니다.
신발도 닦아 줘요. 상대방에 대해 지나치게 의존을 함으로 해서 자기를 잃어버리고 상대방에게
자기의 삶까지 의탁해 버리는 집착과 의존을 성경은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나와 다른 사람을 혼돈 하는 것을 나르시즘이라 합니다. 나르시즘은 “어머 어떡해, 난
너무 예뻐” 이런 것을 나르시즘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귀여운 애교죠. 나르시즘은
무서운 것입니다. 치마 바람의 주인공들 중에 그런 나르시즘 환자들이 많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자식은 잘 돼야 한다는 집념이 그런 치마 바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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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들은 자식의 진정한 필요와 성숙을 위해서가 아닌 나의 자랑을 위해서 자식의 출세를
꽤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곧 나이니까. 아이가 문제를 일으켜서 야단을 칠 때도 아이의 성숙을
위해서가 아닌 내가 부끄러워서 야단을 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놈이 쪽 팔리게 F가 뭐야?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정신병입니다.
세 번째로 무조건 적인 자기희생은 사랑이 아닙니다.
한국의 어머니들, 얼마나 희생을 하면서 사셨습니까? 찬밥만 먹고 늘 윗목은 어머니들
차지였고 허드렛일들은 전부 어머니들의 것이었습니다. 재떨이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를 불러서 재떨이를 가져오라고 시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어머니들의 삶을 지고지순한 사랑의 삶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상대방에게서 학대를 받으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이 희생만 하는 것은 병적인 것입니다.
사실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학대를 당해주면서 그 학대를 하는 사람에게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거나 모욕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나는 이렇게 학대를 받으면서도 상대방을 용서하고 있다’라는 도덕적인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학대받는 위치를 즐겨 찾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가 학대받는 위치에 서서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에게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다.
네 번째로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feeling이 아닙니다.
물론 나중에 감정이 동반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그러한 감정만으로는 정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이트클럽에 놀러 갔다가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서 그 날 밤 잠 자리를 같이
했다고 쳐보자고요.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들어서 그렇게 잠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제 대학 동창이 LA에 삽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아내가 얼마나 괴팍하고 지저분한지 몰라요. 그래서 그 친구는 그 아내의 얼굴만 보면
화가 난답니다. 어느 날 자기 마음속에 그 아내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불 일 듯 일어나더래요.
그동안 자기가 좀 너무했다 싶어서 꽃을 사들고 카드를 써서 아내를 기쁘게 해 주려고 마음을
먹었답니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초인종을 눌렀답니다. 자기
아내가 문을 열고 나오는데 옷에는 김치 국물이 뚝뚝 떨어져 있고 입에는 뭘 씹고 있는데
보니까 총각김치 무가 반쯤 삐져나와 있더래요. 그 순간 그 꽃으로 한 대 후려갈기고 나가고
싶더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사랑은 감정만으로 정의되지 못합니다. 인간의 감정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진짜 사랑은 그 대상의 성숙을 위해,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넓혀 가는 과정입니다.


자신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확장하고 자신을 넓혀간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것을 진짜 좋아하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그 대상을 어떻게
유익하게 할까 많이 연구하게 되지요? 예를 들어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은 평소에 좋아하던
여행도 자주 안 갑니다. 그 강아지를 혼자 있게 놔두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 그렇습니다. 어딜
가도 얼른 시간을 당겨 집에 들어가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먹일까, 털은 어떻게 깎아 줄까?
많이 생각합니다. 저희 집에는 코코스페녈이 한 마리가 있습니다. 코코스페녈은 귓병이 잘
걸립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귓병이 안 걸리게 되는지 인터넷으로 찾아서 그렇게 잘 관리를
해주곤 합니다. 그러면서 그 대상의 어떤 부분이 나의 존재의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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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만큼 나의 존재가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거기에는 나의
의지를 동원한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상대방의 성숙과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나의 존재를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지를 발동한 선택과 노력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선택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종류의 만남을, 갖게 됩니다. 인간적인 매력이나 성적인
매력이나 동정심이나 , 아니면 우연한 만남이나 여러 종류의 만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남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는 저절로 사랑이 생겨나도록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로
결정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사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우리에게서 어떤 사랑할 만한 근거나
조건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누구, 누구, 누구를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렇게
선택을 하신 후에 그 사람들에게 관심을 집중하셨습니다.
(시139:1-4)
1 주님, 주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2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3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4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께서는, 내가 그 혀로 무슨 말을 할지를 미리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큰 관심으로 우리에게 집중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어떨 때는 하나님께서
나만 사랑하시는 것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사랑하시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만일 이 지구상에 구원받을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었다 할지라도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죽이셨을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왜? 조건이 없습니다. 그냥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시고, 선택하시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아까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
거룩이라고 했지요? 그 거룩한 백성 됨을 위해, 그리스도를 닮게 만드시기 위해, 그렇게
성숙시키기 위해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시고 우리에게 관심을 집중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국어사전의 사랑의
개념과 많이 다르지요?
그렇게 상대방의 성숙과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내가 사랑하기로 결정하고 선택하고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 해주는 쪽이 덜 성숙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사랑 해주는 쪽이 더 성숙해야 합니다. 그래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상대방의 성숙을 위해
나의 성숙까지도 챙겨야 하기 때문에 사랑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성숙은 어떻게 챙길 수 있습니까? 똑같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으로 성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삶 속에 닥치는 고난으로 그 자신이 성숙해 집니다. 그래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실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을 떠나서 사랑을
논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나는 예쁘니까 나는 영원히 사랑 받을 거야, 나는 부자니까 우리 아내가 나를 영원히 사랑해
줄 거야. 그런 사람들 있는 것 같아요. 천만에요. 그런 매력들은 금방 시들게 마련입니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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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람이 12년 전에는 저렇지 않았습니다. 인형 같았어요. 척키 말고 바비 인형.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보니까 장모님이 옆에 누워 계세요. 저도 예전에는 꽤 괜찮았어요. 그런데 요즘
새벽에 문득 거울을 보면 거울에 저희 아버님이 와 계세요.
만일 사랑을 그런 외적인 것에 대한 매력이나 그 매력으로 인한 호감 같은 감정으로
정의한다면 그러한 매력이 떠나게 되면 사랑도 함께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권태기라는 것을 겪는 것입니다. 이제 쓴물 단물 다 빨아먹고 나니까 상대방이 싱거운 헐랭이
오이지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러한 매력들이 떠나도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기로 결정했고 선택했으므로 최선을 다해
상대방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앙 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사랑을 할 수 없어요. 신앙 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이기적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쉽게 싫증을 냅니다. 쉽게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손해 보는 것 같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기로 결정한 그 대상의
유익과 성숙을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commitment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 대상의 태도, 반응, 질에 상관없이
계속해서 무조건 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부어야 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commitment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사랑하셨고 여전히 이렇게 원수 짓을 하고
있는데도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사랑은 내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성숙과 유익을 위해
내가 나의 에너지를 동원해서 부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때로는 책망과 질책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환심을 사고 늘 나에게 좋은 감정을 갖게 만들기 위해 나쁜 길로
가는 데도 그냥 두고 보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궁극 적인 목적은 상대방의 성숙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옳지 못한 길로 갈 때는 책망하고 지적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13:6)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사랑은 불의 앞에서 절대 침묵하지 않습니다. 따끔하게 지적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상대방의 영적 성숙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끔 오해도
받게 됩니다. 진짜 사랑은 그러한 오해도 감수하고 오로지 상대방의 영적 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코치 가터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실화입니다. 캘리포니아의 리치몬드 고등학교 농구 부 스타
레이어 출신인 코치 카터가 자기 모교에 농구 부 코치가 되어서 순 날 건달들로 구성된 그
농구부원 들을 잘 훈련 시켜서 주 대항전까지 올라가는 내용입니다.
코치 카터는 엄격한 규율을 세우고 혹독한 훈련을 시킵니다. 그리고 농구부원들이 대학에 들어
갈 수 있도록 학교 시험 점수도 관리합니다. 그래서 승승장구하던 농구 경기를 완전히
중단하고 그 아이들 점수가 올라갈 때까지 경기를 안 시키고 공부만 시킵니다.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이 반발을 합니다. 그가 운영하는 스포츠 용품점에 돌이 막 날라듭니다.
그러나 그러한 오해 속에서도 자기 농구부원들의 미래를 생각해서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고등학교나 겨우 졸업하고 마약 중독자나 갱 단원이 되고 마는 그런 운동선수들의 미래를 이
사람은 뻔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이 한 사람의 코치의 사랑이 농구 부 전체를 대학에
보냅니다. 나중에야 코치 카터가 자신들에게 그렇게 혹독하게 한 것이 진짜 자신들을 사랑해서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진정한 사랑은 때로 오해도 사고 욕도 먹습니다. “사랑“ 하면 아름다운 순애보 만들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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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시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치열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끔 하나님이 원망스러워 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대 하실까?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나의 독립성과 인격성을 성숙시켜 가고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오해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삿대질도
받으시면서 우리의 성숙을 위해 묵묵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사이다 같은 환희만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집에 있을 때 저희 집사람을 들들 볶습니다. “비디오 보지 말아라, 성경 읽어라, 혹은 책
사다주고 언제까지 다 읽어라” 잔소리를 많이 합니다. 시간이 없다고 하면 제가 설거지, 청소
다 해줍니다. 그리고 성경 읽으라고 합니다. 기도하라고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제 아내가 다른
것 안 하고 제 시중 들어주고 제 심부름이나 해 주고 하는 것이 훨씬 이익입니다. 훨씬
편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상대방을 자기에게 복속시키는 것은
폭력입니다. 당장은 짜증을 내고 당장은 힘들어해도 내가 사랑하기로 결정한 나의 아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영적 유익과 영적 성숙을 위해 잠시의 편안함이나 안락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감정뿐만이 아니라 의지의 발동이며 선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서 “내가 너를 버리지 않겠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겠다, 너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고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사랑할 수 있는가?
(요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그런데 이게 새 계명입니까? 그 전에는
없던 계명인가요? 아닙니다.
(마22:37-40)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가 결국 무엇을 나타낸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면 옛 계명도 결국 사랑이지요?
그러면 새 계명과 옛 계명의 차이가 뭡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알면 우리도 그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인간들에게 요구되었던 율법의 내용은 하나님을 목숨 바쳐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타락한 인간이 해 낼 수 없는
요구였습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 와서 다시 새 계명이 주어집니다. 역시 “사랑하라“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을 해 내실
수 있는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랑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그 예수 안에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예수의 사랑을 한 자로 여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신
예수님의 삶처럼 우리도 인생 속에서 그 사랑을 연습하고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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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사랑을 할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즉,
복음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셔야 합니다. 뭔지 알아야 따라하지요.
그래서 말씀이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그 분은 어떤 분이신지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 궁극에는 그 예수님처럼 되라고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과 연결을 시키는 것입니다.
(엡3:17-19)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복음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모든 사랑은 먼저 자기를 사랑하는데서 시작된다는 것?
분명히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에베소서에서는 남편들에게 자기 아내를 사랑하기를 제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엡5:28)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그러니까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을 절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제가 오늘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깊이 사랑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가르쳐 드릴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간을 평가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 가지가 세속적 인본주의입니다. 이것은 진화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인간과
사회는 계속해서 진보하고 발전해서 인간을 잘만 가르치고 계발하면 급기야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지나치게 인간을 높이 평가하는 사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입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의 악한 면만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보는 비관적 사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받은 인간은 이러한 이중적인 면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근본적 사실주의라고 하지요.
우리는 망가진 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서는 한시라도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연약성과 죄악성, 부패성, 불가능함 같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자들이며 장차 예수님처럼 변할 것이라는 이중적
평가를 합니다.
(골3:2-4)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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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의 새로운 실존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으로 성숙해 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성숙해 질 것입니다. 그 때는 그 때고,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이렇게 더러운 지금의 나의 모습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우리는 점차 나아지기는 하겠지만 아마 죽는 날까지 마음속으로, 실제 삶으로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죄를 짓고 있는 우리를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구원받은 여러분의 실수나 실패를 전혀 카운트하지 않으시고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여러분을 보십니다. 망고 땡이죠?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전까지 그는 야비하고 치사한 사기꾼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야곱이
개과천선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후로는 그를 이스라엘로만 봐 주십니다. 야곱의 실수와 실패는 모두 어딘 가로 감추어지게
되고 야곱은 거룩한 이스라엘로만 하나님께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의 근본
적인 실존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맏아들 예수의 동생들인 작은 예수로만 평가되는 분들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의 진정한 영적 실존을 알고 그로 말미암아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과 조건에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세상이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기준을 무엇으로 삼느냐 하면 그가 가진 조건과 배경으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의사 아무개, 국회의원 아무개, 변호사 아무개, 거지 왕 김춘삼 이렇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조건과 배경과 환경으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세요.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이원범은 사도 세자의 증손입니다. 왕가의 세력다툼으로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원범은 오랜 세월을 평범한 농사꾼으로
살았습니다. 자연히 학문과도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원범이 19살이 되었을 때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어 버렸습니다. 유일한 왕족이었던 이원범은 농사꾼에서 졸지에 조선
25대 왕 철종으로 즉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무꾼이었을 때의 이원범과 철종 이원범이 다른 사람입니까? 같은 사람입니까?
같은 사람입니다. 그의 신분, 환경, 조건, 배경이 모두 달라졌지만 이원범은 여전히 그
이원범입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가하면 우리는 진짜 “나”가 누구인지 정말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을 꼬집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가면
속에 있는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환경과 조건과 배경을 가지고 ‘그 사람은 행복할거야, 그 사람은
불행할거야’하고 추측을 합니다. 그 환경과 배경과 조건이 여러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그런 것으로 정의하시면 안 됩니다. 아울러 나의 몸도 ‘나’는 아닙니다. 나를 이루고 있는
일부분입니다. 이화여대를 다니고 있던 이지선이라는 학생이 화상으로 온 전신이 자신도 못
알아 볼 정도로 일그러져 버렸습니다. 화상을 입기 전의 이지선과 화상 후의 이지선이 다른
사람입니까? 아니요.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 육신도 “나”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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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든 생각, 사상, 지위, 얼굴, 직업, 학벌 이 모든 것이 우리 자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그 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데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들일 뿐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입니까? 그런 모든 조건과 환경이 ‘나’를 정의하지
못한다면 진짜 나는 누구입니까?
(마3:16-17)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우리는 예수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이지요? 그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바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진짜 “나”는 여전히 멍청하게 죄에 끌려가고
죄를 추구하고 죄에 빠져 있는 추악한 모습이지만 이제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하나님의 딸이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나’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신분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 서에서 두 줄 걸러 한 번씩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를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우리는 절대 불가능한 자들임을 사도 바울은 절감한 것입니다.
(롬7:14-17)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바른 인식이 있는 분들이라면 여러분이 지금 짓는 모든 죄는
여러분이 짓는 죄가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죄가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새 사람으로 창조되었지만 우리 안에 죄의 습관과 경향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순결한 삶을 살아 낼 수 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죄들을 이제 전혀 카운트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얼마든지 죄를 지어도
괜찮습니다. 진짜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반드시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럼 이제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 맞습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짓는
우리를 보고도 “너는 존귀한 사람이야”라고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아냐, 하나님이 이런 파렴치한 자를 어떻게 사랑하겠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사랑하지 않으실 거야”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늘 조건 적인 사랑만 보아왔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사랑(unconditional love)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 그러면 먼저 ‘그 사람이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이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원수 되었을 때에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원수처럼 살고 있는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무조건 적으로 지속적으로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내가 좋은 사람, 나에게 잘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원수처럼
대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악물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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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그렇게 귀한 분들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죄 속에 뒹굴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을
직시하게 될 때 반성은 하시되 죄책감은 가지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이렇게 지저분한 죄 속에서 뒹구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43:1-7)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 “나”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애굽을, 구스를, 스바를 주고 바꾸실 정도로 우리는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지만
난 이제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버린 너의 그 옛 사람을 절대 기억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보는 내 자녀들은 모두 예수라는 내가 가장 사랑하고 기뻐하는 나의 맏아들 속에
들어있는 존귀한 자들뿐이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애굽을 구스를 스바를 불태워 버릴 수
있다. 왜냐하면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 나의 아들, 딸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실제로 하나님이 가장 아끼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사랑하신 존귀한 분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여러분을 인식시켜 주고 있는 여러 가지 표지들로부터 빠져 나오셔서 진짜
여러분을 보셔야 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저를 남들에게 인식시켜주던 모든 표지들을 다 떨쳐 버리고 맨 몸으로 미국에
와서 신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어느 날 신학교 교실에 앉아서 한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가수 김성수도 아니고 투사 김성수도 아니고 ‘나는 누구인가?’ 그렇게 다
떨어버리고 나니 “나”가 누구인지 저 자신도 모르겠더라고요. 한참을 생각 하던 중에 하나님
안에서 진짜‘나’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제가 귀한 사람인지 저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조건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진짜 ‘나’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진짜 ‘나’를
인식할 수 없도록 ‘가짜 가치’라는 것을 만들어서 ‘나’를 포장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그 가짜 ‘나‘를 치장하기 위해 공부하고 수고하고 노력하다가 결국 인생을 헛되이
끝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거벗은 “나”를 직시하고 그 “나”를 받아들일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 ’진짜 나‘를 발견하고 그 “나”를 좋아하고 즐거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가치를 많이 얻은 사람은 그 ’가치‘를 자랑하다가 죽고, 그것을 얻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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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한탄하다가 죽고 전부 그렇게 속절없이 가는 것입니다.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하고 그렇게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잘 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와 같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로서의 “나”를 발견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가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이 남보다 잘 되려고 노력하고 남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느라 시간을
허비합니까? 혹시 기대하는 바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낙담하고 자기 자신에게“에이 이
빙신아, 나가 죽어라” “너 같은 것은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이렇게 자기를
학대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그 껍질을 벗고 진짜 “나”를 보십시오. 황금같이 빛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인 ”나“를 보세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귀한 “나”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를 그렇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또 똑같이 그렇게 존귀하게 지음을 받은 다른 이웃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롬13:8-10)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우리는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그로 말미암아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나를 그렇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그렇게 존귀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자신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며 모임입니다.
(롬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니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이 뭡니까?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4:20-24)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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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자기들은 모리아 산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남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린다고, 어디서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맞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하게 되는 날이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으로 인 침을 받은 자들이 예수라는 진리에 근거하여 드리는 예배가 진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거룩한 삶입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게
진짜 예배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여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감사하고 찬양하고 자랑하는
시간이 우리가 모이는 공 예배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으니까 예배가 지겹고 지루하고 시간 때우기가 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아시겠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먼저 배우세요.
그리고 그 사랑이 뿌리와 기초가 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그 삶을
사십시오.
(요일4:7-12)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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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엡3:17-19)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지난 시간까지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확인하게 된 자들의 삶 속에서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열매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도 함께 살펴봤습니다.
사랑은 감정으로만 정의되는 것도 아니고 일시적인 기분도 아닌 선택이며 의지의 발동이라는
것도 공부했지요?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비교해서 설명해 드렸지요.
그리고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고는 절대 그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알아야 하고 복음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해야 하고, 그리고
거기서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3장 17절 18절 19절은 모두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좀 더 살펴 볼
것입니다.

여러분, 1977년에 퓰리쳐 상을 수상한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이 기억나십니까?


“뿌리” “Roots" 아프리카에서 끌려 온 자신의 조상 쿤타킨테의 이야기를 소설로 그려 놓은
아주 재미있는 책입니다. 고단한 노예의 하루를 마치고 쿤타킨테의 가족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쿤타킨테의 할머니로부터 자신들의 뿌리,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자신들의 할아버지가 만딩고 족의 얼마나 용맹스러운 용사였으며 이웃 부족과의 전쟁에서도
얼마나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인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노예 상인에게 잡혀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노예로 팔려오게 된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줍니다.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된 쿤타킨테는 아주 자긍심 있고 용기 있고 지혜로운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게 됩니다. 그러한 뿌리에 대한 의식과 소속감은 사람들에게 굉장한 안정감을 주고
자긍심을 줍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의식도 주고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강한 동기를
부여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 소속감을 찾기 위해 많은 애를 씁니다.
그래서 힘없는 어떤 무리를 편을 갈라 소속감을 주고 그 편을 위해 무언가를 하게 만들어 주면
금방 그 무리는 힘이 생기곤 합니다.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뿌리를 찾아
올라가서 우리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밝히 확인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 작업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큰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함께 하는 성경공부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고 그처럼
이웃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도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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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늘 로마서를 처음부터 쭉 리뷰를 해드릴 것입니다. 성경의 백미 하면 누구나
“로마서”를 듭니다. 이 로마서가 복음에 대해 아주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로마서에 나타난 복음을 간략하게 리뷰하면서 하나님께서 “바로
나”에게 어떤 사랑으로 어떤 은혜를 부으셨는가를 함께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써서 보낸 로마의 교회는 누가 세웠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
지만 그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로마 교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글라디오스 황제 때인 AD49년에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게 되
었습니다. 당연히 로마 교회에는 이방인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네로 황제 때 다시 유
대인들이 로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는 이렇게 교회 안에 유
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공존하게 되어서 안식일 문제라든지, 할례 문제라든지, 먹는 음식 문제
같은 것들로 다툼이 생겼을 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사도들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닌 로마 교회에 복음을 처음부터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하면서 이런 은혜로 구원을 받은 너희
들이 그런 사소한 것들로 분쟁을 해서 되겠느냐? 하고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1-17절까지 서론에서 복음에 대해서 개론적인 설명을 합니다.
(롬1:1-5)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전할
그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이다.“라고 서론에서 개론적인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장18절부터 왜 인간들에게 “구원“이 필요한가를 설명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구원
받아야 할 자가 어떤 위험에 빠져 있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한 것이죠? 어떤 위험입니까?
우리는 어디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죠? saved from what?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진노하시게 된 것입니까? 인간의 죄 때문이지요?
그 인간의 죄에 대해서 3장20절까지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 1:18-3:20까지를 조금 세밀하게 나누어 보면,
1:18-32절까지에 “이방인들”에게 왜 구원이 필요한가? 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장 전체와 3장 8절까지 유대인에게는 왜 복음이 필요한가? 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2장1-16까지에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죄가 기록이 되어있고
2:17-29까지 에서는 유대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세세한 죄를 샅샅이 지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1-8까지에는 “그러면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택해서 유대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 오셨다. 유대인들의 특권과 할례의 특권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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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장9-20 절까지에서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전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구원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의인이 없기 때문이다”하고 모든 인류에게 복
음이, 구원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롬3:9-12)
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리고 이어서 3장21-3장31절, 3장 마지막까지에서 “그래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았다. 그
럼 구원을 이루는 방법이 무엇인가?” 거기에 ‘이신 칭의’가 등장합니다. 모든 인간들은 반드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하면서 그 유명한 ”그러나 이제는“”누니 데“의 구절이 나옵니다.
(롬3:21)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 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 할례 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리고 4장으로 넘어가서 “선민이라고 자처해 왔던 유대인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유대인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설명해
줍니다.
(롬4:9-13)(표준 새 번역)
9 그러면 이러한 복은 할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리는 것입니까?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10 그러면 어떻게 아브라함이 그러한 인정을 받았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기 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할례를 받은
후에 된 일이 아니라, 할례를 받기 전에 된 일입니다.
11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표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동안에 이미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으니, 이것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도 의로움을 인정받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12 그는 또한 할례를 받은 사람의 조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가졌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가기까지 한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3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 된 것입니다.

- 625 -
23 "그가 의로움을 인정받았다" 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24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이렇게 4장에서는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에 관해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5:1-11까지 에서는 그 구원의 결과에 대해서 진술을 합니다.
그렇게 구원이 필요한 자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주어지게 되면 그들이 어떤 것을 누
리게 되는가에 대해서 자세하게 진술을 해 줍니다.
(롬5:1-5,11)
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왔고,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을 합니다. 우리가, 환난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11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5:12로부터 마지막 21절까지에서 “그럼 어떻게 하다가 우리가 이러한 상태에까지 빠졌
는가? 어떻게 우리는 그렇게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인가?” 에 대한 대답을 해 줍
니다. 그 답인 즉은 ”아담 안에서 그렇게 되었다“입니다. ”한 사람 아담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
아 우리가 그렇게 구원이 필요한 타락한 존재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대표의 원리를 설
명하고서 “그러므로 그 대표의 원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롭게 된다.”가 5장 후반부입니다.
(롬5:17-19)
17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함으로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다면,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지배할
것이 아닙니까?
18 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아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18절에서의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구원을 얻
게 되는 것이다“하고 바울이 5장까지에서 강하게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 당장 어떤 질문이 나
오게 되겠습니까?
“그럼 그렇게 믿음으로,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네?”이런 질
문이 나오겠지요? 거기에 대한 대답이 6장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그럴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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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가 6:1-14까지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는데 어떻게 계속해서 죄를 짓는 자
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냐?“ 바울은 단호하게 거기에 대해 대답을 합니다.
(롬6:2,11-13)
2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 스스로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2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그리고 6:15-7장6절까지 거기에 대해서 자세하게 부연 설명을 해 줍니다.
전에는 우리가 죄의 종이었기 때문에 죄가 시키는 대로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의의 길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우리가 율법과 혼인한 사이였으나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죽어 버렸기 때문에 합법적인 이혼관계가 되었고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
도와 결혼을 한 사이가 되었으니까 절대 정욕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7장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롬6:15-19)
15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마음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6 여러분이 자기를 누구에게나 종으로 내맡겨서 복종하게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죽음에 이르는 죄의 종이 되거나,
아니면 의로움에 이르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일은,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여러분은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18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이해력이 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으로 말을 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롬7:2-6)
2 결혼한 여인은,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법을 따라 남편에게 매여 있으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에게 매여 있던 그 법에서 해방됩니다.
3 그러므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로 가면, 그 여인은 간음한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므로, 다른
남자에게로 갈지라도, 간음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
4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다른 분, 곧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분에게
속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5 이전에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 때에는, 율법에 따른 죄의 정욕이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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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용해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6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우리를 얽어매던 것에서 죽어서,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를 따르는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리고 7장7절부터 마지막25절까지에서 “옛 본성과 새 본성의 싸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
렇게 구원을 받았는데도 왜 아직도 우리 안에서는 이러한 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가? 왜 내
가 원하는 선한 일이 나오지 않고 왜 내가 원치 않는 악한 것들이 내게서 나오는가? 그러니까
로마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질문들에 대해 속속들이 다 대답을 해 주는
책입니다. 그렇게 거듭난 자들의 안에서 일어나는 새 본성과 옛 본성의 싸움에 대해서 신랄하
게 묘사를 한 다음에 “그럼에도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지 않는 것에 대한 감사”를 쏟아 놓습니
다.
(롬7:21-25)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보세요. 여기까지는 여전히 추악한 모습을 보이는 자신에 대한 한탄입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25절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고 그 구원은 그럼에도 취소되지 않는다니
아, 나는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이냐“ 이게 7장 후반부입니다.
그리고 8장으로 이어집니다. 이 8장이 성경의 진수라는 로마서 안에서의 진수입니다.
(롬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8장에서 “그 구원은 창세전부터 계획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그래서 그 구원은 확실한 것이다”라고 성부, 성자, 성령의 하신 일과 하실 일에 대
해 자세하게 기술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체험이나 경험 같은 것으
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 역사적 사실인 하나님의 하신 일을 앎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강조합니다.
(롬8:31-35)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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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그 확실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나오겠지요? ‘그럼 유대인은 뭐냐?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 유대인에게 하신
약속은 뭐냐?’ 그런 질문이 나오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
등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수많은 약속을 해 오셨다. 만일 그 약속도 안 지키시는 분이라면
지금 당신이 말하고 있는 그 약속은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이렇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도전이 당연히 생기겠지요? 그 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약의 모든 약속은
혈통적 아브라함의 자녀에게 한 것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 “약속의 자녀에게 약속하신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9장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증거로 이삭과 이스마엘을 들어서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 장남인 이스마엘은 버리고 이삭만을 택하지 않았느냐? 하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혹시 이렇게 반문할 사람들이 있겠죠? ”그건 이스마엘이 적자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
냐?“ ”이스마엘은 서자라서 하나님이 택하지 않으신 것 아니냐? ”라는 질문이 나오겠지요? 바
울은 이어서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야곱과 에서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 줍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다. 서자니 적자니 따질 게재가 없는 쌍둥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의 자손 중에 야
곱만 택하시지 않았는가?“하고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신학 용어로 그것을 예정론이라고 부
르는 것입니다.
(롬9:10-16)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럼 또 이런 질문이 나오겠지요? “아니 뱃속에서 아무런 행위를 하지도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누구를 택하신다면 그 하나님의 행사는 불공평한 것 아니냐?” 라는 질문이 당연히 들겠지요?
그 때 바울은 모든 인류는 원죄가 있어서 날 때부터 다 죄인이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다 죽어
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무리를 거기서 건져내셨다면 그게 왜 불공평한 것이냐? 그리
고 토기장이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설명해 줍니다.
(롬9: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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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그러고 나서 “그럼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도 주셨고 약속도 주셨고 그들을 이끌어 오셨
는데 그들은 왜 실패했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이 9장30절에서 10장 마지막까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를 의지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
다는 것입니다.
(롬9:30-32)
30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의를 추구하지 않은 이방 사람들이 의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
31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32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으로가 아니라, 행위로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9장과 10장을 전혀 다른 이야기로 해석을 하시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9장은 보시다시피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철저하게
강조합니다. 그런데 10장을 언뜻 보시면 마치 알매니안 주의를 지지하는 것같이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성경이 일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롬10:8-10)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9장에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은혜를 강조했는데 10장에서는 “믿어라“”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그럽니다. 알매니안 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입니다. 그러나 그
밑의 구절들을 잘 보시면 10장이 절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롬10:13-15)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보세요. “맞다.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그런데 듣지 못하고 어찌 믿겠는가? 그리고 누군가가
보내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들이 와서 전하겠는가? 그 사람들은 누가 보냈는가? 하나님”
이게 어떻게 알매니안 주의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시지 않으시면 전하는 자도 없을 것이고
전하는 자가 없으면 들음도 없을 것이고 들음이 없이 어떻게 믿음이 생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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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장입니다. 10장은 9장을 더욱더 확실하게
부연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11장에서 “그럼 유대인은 다 버림받은 것이냐?” 에 대한 대답을 해 줍니다.
“아니다”하고 사도 바울은 11장에서 전체 구속사의 단계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먼저 택하셔서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언약을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사와 율법과 할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들에게 온 메시야를 이방인들의 손을 빌어 죽여 버렸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급속히 전파되게 되었고 하나님의 계획은 그렇게 착착 진행되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곧 처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구원을 시기해서 그들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이 11장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을 얻은 너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 그리스도인들의 행동강령이 12
장부터입니다. 12장부터 몇 가지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해 방향을 제시해 줍니
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해서 예수를 못 믿게 하는 위정자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순종해라. ‘신앙으로 그들에게 본을 보여라, 상전들아 노예들을 형제처럼 대해 줘라, 노예들아
상전의 일을 네 일처럼 해라, 세금도 꼬박 꼬박 내라‘ 이런 내용들로 16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찬양을 부르고 끝을 맺습니다.
(롬16:25-27)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게 로마서입니다. 이 로마서의 열여섯 장중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속의 원리에 대해 잘
설명해 놓은 11장을 함께 읽으면서 이 복음이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것이며
그 구속사의 비밀은 얼마나 신비한 것인지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한번 맛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기도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전체를 통해 계속해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9장부터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과 예배와 언약을 갖고 있던
육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로 구원에 이르려 했기 때문에, 행위에 의지했기
때문에 그들은 다 망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언약을 주신 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이었다.“는 것을 천명합니다. 그리고 10장으로 넘어와서 믿음은 그렇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그10장을 이렇게
마칩니다.
(롬10:19-21)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21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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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스라엘에게 손을 내밀고 하나님을 나타내셨는데 이스라엘이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11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을 다
버리신 것이냐?”
(롬11:1)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거부한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덤으로 은혜의 시대를
허락하셔서 이방인들을 건져내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이방인들의 수가 차게 되면 나중에
7년 대 환난을 전기로 민족적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신다는 시나리오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로마서 11장1절 한 절의 말씀이 세대주의자들의 그러한 주장을 일축해
버릴 수 있는 구절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다 버려진 것이 아니다. 날 봐라,
내가 유대인이다. 그런데 내가 구원받았다“ 그러는 것입니다.
버려진 이스라엘 속에서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영적 이스라엘은 계속 구원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때 교인들의 대부분이 누구였습니까? 유대인이었습니다.
(행2:38-41)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삼천 명은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 신자의 수가 날마다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세 번에 걸친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야고보가
바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행21:18-20)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 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몽땅 버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포함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계속해서 구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바울이 피력하는 것입니다.
(롬11:2-5)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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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바울은 이렇게 자기 자신을 예로 들어서 이스라엘이 모두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구약의 한 대목을 예로 들어서 남은 자들 그러니까 하나님께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자들, 영적 이스라엘에 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남겨놓으신 사람들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계속 구원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은 자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말고 택함을 받지 못하고 남겨진 자들은
어떻게 된 거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라고 바울이 7절부터 설명을 합니다.
(롬11:7-10)
7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남은 자들은 헬라어로“레임마”입니다. 7절에서도 남은 자가 나오지요?
여기서의 남은 자는 “로이포이“(the rest)입니다. 택함을 받지 못하고 남겨진 자들입니다.
8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멀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혼미한 영을 주셨다“ 이 말씀은 신명기29장과 이사야6장의 인용
구절입니다.
(신29:2-4)
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 목전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3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사6:9-10)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게 뭡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굉장히 나쁜 일을 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지지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귀가 멀고, 눈이 멀고, 혼미한 영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그냥 놔두셨다”라는 말씀입니다.
타락한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모두 그렇게 눈멀고 귀 막힌 채로 살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 중의 얼마를 하나님께서 눈을 뜨게 하시고 귀를 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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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듣게 하고 하나님을 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좋으실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밥을 잘 안 먹습니다. 그래서 늘 어머니가 좇아 다니면서 “밥 먹어라, 밥 먹어라”
해야 합니다. 그래도 조금 먹다가 맙니다. 어느 날부터 어머니가 식사 때가 되어도 아이에게
밥을 먹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 끼, 두 끼, 세끼 아이는 계속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사흘 째 되는 날 배가 너무 고파서 자기가 알아서 밥을 찾아 먹었습니다. 그것을 본
옆 집 아주머니가 “저 녀석 요즘 밥 잘 먹네.” 하셨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응, 저 녀석 밥을 사흘 굶겼더니 밥을 잘 먹네” 하셨습니다.
그 어머니가 밥을 굶긴 것입니까? 아이가 안 먹은 것입니다. 단지 어머니가 좇아 다니면서 밥
먹어라, 밥 먹어라 안 했을 뿐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악 하게, 혹은 강퍅하게 하셨다“라는 표현도 쓰지만 ”우리가
강퍅하다. 완악 하다“라는 말도 씁니다. 사실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악 하게 하셨다는 말을 사용하는가 하면 ”지금은 너희가
그런 멸망의 상태이지만 내가 장래에 모종의 조치를 취하겠다.“라는 구원사적인 역사를 예고할
때 ”하나님께서 완악 하게 하셨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왜 이스라엘은 완악 하게 놔두시고 귀를 멀게 하시고 눈을 멀게 하신 것입니까?
(롬11:25)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이스라엘이 마음이 완악 하게 되어 그들 가운데서 구원받는 자들이 이렇게 줄어들게 놔두신
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독한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그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도시인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셨을 때 요나는 거부했습니다.
요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이외에 다른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그에게는 말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완악 하게 놔두시고 이방인들에게 먼저 복음이 충만히 전파되도록
하신 다음에 이스라엘도 구원을 하시는 그런 구속의 단계를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것이 하나님의 깊은 지혜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비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9절과10절에서도 그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롬11:9-10)
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시편69편을 인용한 것이지요?
(시69:21-23)
21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22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23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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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편은 다윗의 이야기이지만 메시아에 관한 시편입니다. 다윗이 자기의 원수들을 저주하는
장면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지요? 그러니까 이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린 유대인들에게 그대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유대인들에게 주셨던 복, 밥상이 그러니까 하나님을 계시해 주신 것과 율법과
할례와 제사와 그런 것들이 모두 오히려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 유익한 것들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그저 자기들의 생각대로 그
복된 것들을 오용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지금 그런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시 한 번 11절에서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전부 회생가능성이 없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롬11:11)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여기서 “넘어지기까지” “핍토”는 회생 불가능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라는 것은 ”그들이 회생 불가능이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대답이 뭡니까?
“아니다”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들이 잠시 넘어짐으로 해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나중에 이스라엘이 “어, 저거 원래 우리 건데?”하고 시기가 나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신명기에 예언이 되어있던 것입니다.
(신32:21)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셨는데 그들이 안 받아들여서 교회를 덤으로
구원하셨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논리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미 계획하시고 그 계획,
하나님의 청사진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차근차근 완성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 내시기 위해 구속사의 단계를 그렇게 이끌고 계신 것입니다.
(합2:14)
14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슥14:20-21)
20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러한 결과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 와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 구속의 역사를 이렇게 끌고 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구속사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6절을 보시면
(롬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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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지금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지만 그들은 원래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같은 족장들 의
후손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17절-24절에 접붙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은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의 가지를 잘라내고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은
단계인데 곧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이 다시 줄기에 붙게 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롬11:25-26)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완악 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은 이방인들을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게 되면
이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된다.“ 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이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입증해 주는 구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전체가 다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다.“라고 해석을 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석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유대인 집단이라고 푸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구원의
대상이 사람의 혈통에 의해 좌우된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성경 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두 번째 견해가 갈6:16말씀에 근거해서 “온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온 교회를
말한다는 견해입니다. 그렇지만 9장부터의 이야기전개 내용이나 11장의 문맥을 보면 여기
11장에서의 ”온 이스라엘“에 이방인이 포함된다는 것이 아주 어색합니다.
특히 11장 상반 절에 보면 이스라엘과 남은 자를 대조하는 여러 구절이 있는데 그런 구절들과
전혀 어우러지지 못합니다.
세 번째 견해가 “온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유대인 전체”라는 것입니다. Lenski 나 robertson,
john murray 같은 사람들의 견해입니다. 저도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그렇게 보면 25절의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도 잘 연결이 됩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고 또 아울러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전체가 교회입니다.

그렇게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간에 우리 인간들 전체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인가?
바울은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한마디로 해 줍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key point입니다.
구원의 근거는, 구원의 발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롬11:30-32)
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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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비밀인 하나님의 구속 사, 이 모든 구원의 역사는 결국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긍휼’‘엘레오’라는 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가
죄인들에게 나타난 형태입니다. 은혜는 은혜인데 은혜 안에서도 특별히 죄로 인해 망가지고
더러워진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품어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을
‘긍휼‘’엘레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죄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멸망, 저주, 불이익 등을 없애
주시는 것입니다.
(시51:1)
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다윗이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인 다윗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합니까? 긍휼을
구합니다. 긍휼은 그렇게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용서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103:8-14))
8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이게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런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들의 죄를 아예
보지 않으십니다. 아니 그 죄까지도 품어 안고 사랑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자기의 추악한 모습을 발견하고도 떳떳하게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해서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과 태도와 감정을 직접 하나님께 투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들이지 못 합니다. 내가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못
마땅함과 수치스러움과 지기 혐오를 하나님께 그대로 투사해서 내가 내 자신이 미워지면
하나님께서도 당연히 자기를 그렇게 미워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브래넌 매닝스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이 우리와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향해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런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악을 용인하시지 않으시지만 우리 안에 악이 있다고 해서 그 분의 사랑을
감소시키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 긍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기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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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지금까지 로마서 전체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어떤 근거를
찾아내셔서 그 것을 근거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서 품에 안으시는 분이십니다.
죄는 자꾸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 우리는 즉각
적으로 자기혐오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을 하나님께 투사해서 하나님도 나를 절대
용서치 않으실 거야“하고 불안해하고 숨게 만듭니다. 죄를 짓는 것은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혹 우리가 죄를 지었더라도 여러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그 뜨거운 긍휼의 마음으로
우리를 택하셨고 택하신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좀 더 뻔뻔스러워
지세요. 자기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이렇게 존귀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십시오. 이 복음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아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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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진짜 사랑
(엡3:17-19)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인 “사랑”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하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내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우리를 그렇게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겨주시고 그렇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신자들이 도달해야할 목표지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우리 신자들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도달해야 할
유일한 목표지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놓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간이 타락을 하고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 왜곡되고 상실된 사랑을 우리 삶 속에 회복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자의 삶은 반드시 그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그 사랑
가운데서 터가 굳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계명을 두 가지로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주 너의 하나님을 네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 우리가 도달해야할 목표지점은 바로 거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인간론을 정리해 드리면서 우리 인간은 기능적인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했지만 아직 구조적인
형상은 남아 있다고 설명해 드렸지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그 사랑으로 우상과 나의 배를
사랑하는데 써 버리는 죄인들의 예를 들어서 설명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여전히 구조적인 면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은 “사랑”의 이야기를 보거나 듣게 되면 가슴이 아려오고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동스러운 다큐멘터리나 불쌍한 이들을 보면 함께 울기도 하고 함께 기뻐하기도
합니다. 왜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우리가 그렇게 울고 웃습니까? 모든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붙들고 있는
이 죄라는 놈이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을 하지 못하게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
사랑을 왜곡시켜서 엉터리 이기적인 “자기사랑”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왜곡된 자기사랑“을 하기 위해서 이웃과 하나님을 희생시키는 악한 행동을 서슴없이 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짐승들은 사냥을 할 때 자기가 먹을 만큼만 사냥해서 먹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힘에 부쳐 끌고 갈 수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잡습니다.
잡아서 버리는 한이 있어도 다 죽입니다.
짐승들은 자기에게 먹이를 주는 주인은 절대 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은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의 등에 비수를 꽃을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자기를 모욕하거나 자기와 다른
사람들은 죽어서 시체가 되어 있어도 무덤에서 끌어내서 토막토막 잘라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성경책에 손을 얹고 영원히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며 살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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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짐하고 다짐하고서도 자기 성질을 건드렸다고 토막을 쳐서 묻어 버릴 수 있는 것이 타락한,
사랑을 잃어버린, 아니 왜곡된 자기 사랑을 하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 때 신문의 헤드라인이
“부부 싸움은 칼로 몸 베기”였지요. 그렇게 사랑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 사랑을 회복시켜 영원한 하늘에서 데리고 사시고자 하신 일들이 바로 구원이며,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지 못한다면 그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 유명한, “사랑 장“이라 불리는 고린도 전서 13장을 가지고
그 사랑의 본질에 대해 조금 더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서를 잘 읽어보신 분들은 이 사랑 장이라고 하는 고린도 전서 13장이 조금 어색하게
끼어 있는 것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12장까지 은사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다가 갑자기
사랑 장 13장이 나옵니다. 그리고 14장부터 다시 그 은사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마치
13장은 삽입 장처럼 12장과 14장 사이에 끼어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인 즉은,
고린도 교회는 지금부터 2,000년 전에 그리스 지방에 있던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종교적인 열심이 대단했던 교회였습니다. 열심이 대단했던 만큼 교회 안에 많은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은사가 잘못 쓰이고 있었습니다. 눈에 띄는 은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했고 / 자기들은 이미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처럼
일상생활은 도덕적으로 아주 문란한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만연해 있던 그
은사에 대한 자랑과 시기와 질투를 이야기 하다가 12장을 이렇게 마칩니다.
(고전12:27-31)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러니까 은사에 대해서 죽 설명을 하고서 그 은사들이 왜 너희들에게 주어진 것인지 그리고
그 은사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13장에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그 은사를 가지고 너희의 신앙을 자랑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데 쓰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그렇게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은사들은
너희들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고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이게 고린도 전서 13장입니다.
지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종교행위에 안주하고 있습니까?
나는 기도한다. 나는 헌금한다. 나는 주일 성수한다. 이런 것들이 마치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종교행위들은 전부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훈련과 학습의 방편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지 그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지요? 아무쪼록 오늘 우리가 고린도전서 13장을 공부하면서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을 좀 모두 벗고 진짜 사랑을 배우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1절에서 3절까지 사랑의 절대성에 대해 설명을 하고 4절부터 7절까지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8절부터 마지막까지는 다시 사랑의 영원성을 들어서 사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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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끝을 맺습니다. 먼저 1절에서 3절까지를 한번 보지요.
(고전13: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1절을 보시면 아무리 훌륭한 눈에 띄는 은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같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헬라의 신비종교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자연의 신
디오니수스라는 신과 야생 동물의 여신인 키벨레라는 신을 섬기는 축제가 있었습니다.
그 때 치던 것이 바로 찰로코스라는 소리 나는 구리 우리나라 악기로 치면 징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킴발로스라는 꽹과리였습니다. 이러한 악기들은 사람들의 감정을 흥분시키는 역할을
했던 악기들이었습니다. 단음으로 계속해서 리듬을 치면 사람들이 흥분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마취제 없이 사람을 치료할 때 그런 방법을 쓴다고 하지요?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징과 꽹과리를 계속해서 치는 것도 그런 의도에서 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왜 이러한 이방 종교에서 쓰는 악기들을 여기에다 기록을 하고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사랑이 없는, 사랑을 근거로 하지 않은 여러 가지 은사는 그게 아무리 대단한
은사라 하더라도 그건 무당 짓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이 일부러 소리 나는 징, 울리는 꽹과리라는 단어를 가져다 쓴 것입니다.
그리고 2절을 보시면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언’ ‘프롭헤테리아’라는 것은 설교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잘 풀어서
그럴듯하게 설교를 하고 놀라운 성경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nothing이라는 것이지요.
"nothing"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제가 많이 떨렸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을
했습니다. “과연 나는 사랑으로 이 목회를 하고 있는가?” “나는 사랑으로 설교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nothing이라니까요. 얼마나 두려워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아무리 대단한
은사를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nothing이라는데
여러분 사랑하고 계십니까? 우리 오늘만큼은 그냥 흘려 지나지 말고 정말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자고요.
그리고 3절을 보시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털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 자기 몸을 제물로 드려서 다 불태운다 할지라도 그게 사랑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면 nothing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혀 카운트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정의하고 있는 사랑이 뭡니까? 내가 가진 것으로 불쌍한 사람을
돕고 남을 위해 이 한 몸 불태우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진짜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자기의 자랑을 위해서 연극으로도
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7,80년대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정말 자기 몸에 신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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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고 불을 질렀습니다. 거기서 얻어진 결과가 무엇이지요? 오히려 더 큰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것은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는 전혀 무익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엄청난 은사들을 가지고 있고 놀라운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있고, 자기 것을 다 털어 남을 위해 쓰는 구제 행위도 하고, 다른 이를 위해 자기 몸을
불태우는 것. 이게 뭡니까? 우리가 말하는 소위 “좋은 신앙“ 아닙니까?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그런 것은 다 가짜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거워지지요? 그래서 로마서에서 바울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기술을 합니다.
(롬12:9)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여기서 “거짓이 없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뉴포 크리토스”입니다. 그것은 그리스 시대의
연극배우들이 쓰던 탈이었습니다. 사랑은 연극배우들이 하는 연극처럼 위선적이고
이중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사랑은 언제든지 그런 가면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단호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Love must be sincere 이 sincere라는
단어는 라틴어 ‘시네세라’는 ‘밀 납, 초’라는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고대시대 때는 항아리나
도자기가 귀했기 때문에 항아리나 도자기가 깨지면 아까워서 ‘밀 납’으로 때워서 팔았다고
합니다. 많은 항아리와 도자기가 그렇게 ‘밀 납’으로 봉해진 것들이었기 때문에 고급 토기에는
“밀 납을 바르지 않았음 ‘시네세라’라는 도장을 찍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깨진 항아리인데도
안 깨진 항아리인 것처럼 위선적으로 속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너무나 허구가 많습니다.
그래서 존 캘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제로 사랑 아닌 것을 흉내 내는 것이 얼마나 교묘한지
그 정도를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속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이고
있다. 그들은 배반을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자신을 속이고 있으면서도 참 된 사람을
베푼다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자들이다. 정확하지요? 그래서 제가 칼빈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의도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으면서 거짓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맛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어설프게 흉내를 내는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런 사랑을
정말 할 수 있으십니까?

여러분, 제가 지난 시간에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선택이며 책임이라는 면을 많이


강조를 했지요? 그렇지만 그 사랑의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그 사랑을
근거로 자신의 사랑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나타내려는
것이 될 때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요, 소리 나는 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대상을
선택을 하고 지속적으로 사랑을 쏟아 붓기 전에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맛 보셔야
합니다. 그게 전제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랑은 전부 가짜입니다. 전부 자기 자랑일 뿐입니다.
왜곡된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계속해서 4절로 넘어가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라, 사랑하라 하는데 도대체 그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정확하게 알고 돌아가자고요.
(고전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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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가 이 구절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한 군데 더 찾아보겠습니다.
(요일4:16)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정확한 정의를 내려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니까요.
그러면 지금 읽은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에 하나님 혹은 예수님을 넣어서
읽어도 되는 것이지요? 우리 그렇게 한번 읽어볼까요?
4 예수님은 오래 참고 예수님은 온유하며 예수님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5 예수님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예수님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예수님은 성내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예수님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예수님은 모든 것을 참으며 예수님은 모든 것을 믿으며 예수님은 모든 것을 바라며
예수님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어떠세요? 정확하게 예수님의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지금 그 사랑의 자리에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 자기 이름을 넣어서 한번 읽어볼까요?
4 00 은 오래 참고 00 은 온유하며 00 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00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00 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5 00 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00 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00 은 성내지 아니하며
00 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00 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00 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00 은 모든 것을 참으며 00 은 모든 것을 믿으며 00 은 모든 것을 바라며 00 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어떠세요? 굉장히 어색하지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그리로 부르신다고요. 우리는 반드시 그
자리로 가야하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사랑이신 우리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랑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잘 배우시고 저나 여러분이나
그렇게 살기를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4절부터 보지요.
(고전13:4)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오래 참고“ 여기서 오래 참는다는 말은 ”마크로뒤메이“입니다. 이 말은 어떤 상황에
대한 ”오래 참음”이라기보다는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 즉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어려움을
견디는 것을 뜻합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손해를 당했을 때 그것을 보복할 힘이 있으면서도
자제하는 적극적인 인내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 오래 참음, 인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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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대목이 있지요?
(딤후4:2)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오래 참아라.“ ”네가 말씀을 전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봉변을 당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고, 배반을 당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인간관계에 노출이 될
텐데, 그 때마다 너는 오래 참아라.” 네, 사랑은 그렇게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이좋은 사람 사이에서는 오래 참음이라는 것이 필요가 없지요?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대적하고 나를 미워하는 그런 사람을 오래 참아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바로 붙어있는 단어가 “온유하며”입니다. 여기서 온유하다는 말“크레스
튜오마이”는 good 과 kind를 더해 놓은 단어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 남을 이롭게 하는
친절함과 선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단순히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고 인내하면서 그 미운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 자기의 가진 것으로 그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베푸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불가능 한 일인 것 같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래 참아
주지 않으셨다면 이 중에 누가 온전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래 참아 주십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아니 그 전, 선사시대 때부터 이 우주가 창조 된 날부터 우리를 향해
오래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벌레 같은 인간들을 오래 참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즘 제가 가장 감사하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 대해서
참 오래 참아주고 계시다는 것을 피부로 느낍니다.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롬2:4)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벧후3:8-9)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까지 이 더러운 역사를 오래
오래 참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 더러운 인생을 오래 참고,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래 참고, 온유하며“의 의미입니다. 그 오래 참고 온유하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긍휼“”엘레오“라고 표현할 수 있지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자들에게 은혜를 부으셔서 그 벌을 내리시지 않는 것을 긍휼이라
한다고 했지요? 바로 그 오래 참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그
하나님의 음성에 냉담했습니까? 얼마나 그 분을 멸시했습니까? 얼마나 우리가 그 분을
조롱하고 우습게 여겼습니까?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피조물들을 한 순간에 다 없애고
없던 걸로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그 모욕과 능멸을 참으시는 것입니다. 참으실
뿐 아니라, 단순히 용서하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각양 좋은 것을 계속해서 공급하고 계십니다.
그게 오래 참음입니다. 우리에게 동일하게 그 오래 참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도저히 불가능 할 것 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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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 인간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아시겠지요? 원래 우리는 그런 사랑을 하도록 지어진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죄라는 놈이 얼마나 지독한지 이제는 그 사랑이 너무 버거워서 우리
머리로는 가히 상상이 안 가는 그런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쏟아 부으셨고 우리를 다시 그 참 사랑의 자리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엡4:32)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딤전1:6)
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But for that very reason I was shown mercy so that in me, the worst of sinners,
Christ Jesus might display his unlimited patience as an example for those who would
believe on him and receive eternal life.
보세요.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셨으니까 너희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관포지교라는 말 아시지요? 아주 훌륭한 우정을 가리켜서 우리가 관포지교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사기에 나오는 말인데 중국 제나라 때 “관중과 포숙아“라는 두 재상의
이야기입니다. 관중은 어려서부터 포숙아와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관중은 늘
포숙아를 이용하고 놀려먹기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포숙아는 늘 참아 주고 인내하며 관중을
아껴 주었습니다. 한번은 관중과 포숙아가 둘이 동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포숙아가 자금을 대고
관중이 경영을 맡아 사업을 잘 일구었습니다. 그런데 관중이 그 이익금의 거의 대부분을
독차지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포숙아는 ”관중이 원래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자라서 그런
것“이라고 오히려 주위 사람들 앞에서 관중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둘이 함께 전쟁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관중은 포숙아를 내버려두고 세 번이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갔습니다. 포숙아는 역시 관중의 편을 들어 “그에게 늙으신 어머님이 계셔서 어머니가 보고
싶어 도망했던 것이라”고 대신 변명을 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황제가 죽었을 때 왕자가 두 명 있었는데 관중과 포숙아는 각기 다른 왕자를
모시고 그 왕자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었습니다. 관중이 멀리서 포숙아가 모시는 왕자를
향해 활을 쏘았습니다. 그 왕자는 포숙아의 말을 듣고 급히 죽은 체 했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황궁에 들어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황제는 자기에게 활을 쏜 관중을 당장 잡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포숙아가 그 황제 앞을 가로막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황제 폐하가
싫어서 활을 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모시고 있는 왕자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해 황제 폐하에게
활을 쏜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그의 충성심이 대단하고 그의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니
그를 재상에 앉히라고 황제에게 간곡히 간하여 관중이 제 나라의 재상이 됩니다.
이렇게 포숙아는 평생 관중을 참아 주고 그에게 자기의 좋은 것을 쏟아 부어 그 친구를
섬겼습니다. 나중에 관중이 이런 시를 씁니다. ‘생아자 부모, 지아자 포숙아’ ‘자기를 낳아주신
것은 부모이지만 자기를 알아준 것은 포숙아 뿐이다‘ 그렇게 자격 없는 상대방을 오래
참아주고 온유로 대해 주면 그 상대방이 그 사랑에 녹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포지교라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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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에게는 “스탠튼”이라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링컨을 얼마나 싫어하고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공식 석상에서
링컨에게 “교활하고 조잡한 어릿광대”라고 수시로 모욕을 했고 “세상에서 제일 못 생긴
고릴라”라고 모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릴라를 잡으려면 아프리카로 가지 말고
일리노이로 가라”고 링컨을 조롱했습니다. 링컨은 정말 못 생긴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말을
타고 가는데 어떤 여인이 링컨의 얼굴을 보고 너무 놀라서 링컨에게 막 따졌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링컨이 “부인, 내 얼굴이 이렇게 생긴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부모님이 나를
그렇게 낳아 주신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여인이 “당신이 그렇게 생긴 것은
부모의 책임이라지만 그 얼굴을 갖고 돌아다닌 것은 당신의 책임이다”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가 수염을 기른 것입니다. 정말 못 생긴 사람에게 못 생겼다고 공격을 하면
그건 치명타입니다. 자기의 감추고 싶은 부분을 자꾸 들춰내는 자가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런데 링컨이 대통령이 되자 그 “스탠튼”을 국방 장관에 임명을 합니다. 국방 장관에는 그가
가장 적임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링컨이 워신턴의 포드 극장에서 남부 출신 배우인
부스에게 저격당해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때 스탠튼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여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누워있다” 끊임없는 사랑과 인내는 이렇게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자들을 그렇게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그 분 앞에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뭡니까?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여기서 투기라는 것은


”젤로이”입니다. “시기, 질투“ 이런 뜻이죠. 우리 타락한 인간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천성 적으로 배 아파하는 자들입니다. 오죽하면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다 있겠습니까? 그것은 시기, 질투가 그만큼 타락한 인간의 보편 적이며 일반 적인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못 견뎌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곤란한
지경에 빠지면 은근히 그 것을 즐깁니다. 그게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여러분, 신문에 가끔
특종이라는 것이 올라옵니다. 그 특종 중에 우리 이웃의 잘된 일, 착한 일, 선한 일 이런 것이
올라오는 것 보셨어요? 아니요.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던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던가,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던가 하면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을 갖고 흥미를 가집니다. 그게 타락한 인간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여러 군데 다녔기 때문에 신학교 동기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이미 개척을 한
사람들도 있고 아직 다른 교회 부 목사로 사역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작년에 우리 교회가
개척되었을 때 다들 와서 축하를 해 주고 갔지요. 그런데 우리 교회에 개척 교회치고는
사람들이 좀 늘어났다는 소문이 도니까 얼마나 들 배 아파하는지 몰라요. 아주 눈에 보여요.
목사들도 그렇다니까요.
여러분, 왜 사람들이 시기를 하고 질투를 하지요? “내가 저 상대방보다 더 잘되고 더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 주님의 사랑에 충만히 거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 되던 못 되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목과 평가에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나는 이미 목이 충분히 해갈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목이 마르지 않거든요. 내가 누구를 시기한다는 것은 아직 내게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의식이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노래할 때, 한번 유명한 사람이 되어 봐야겠다고 꿈을 야무지게 먹고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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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돈 내고 노래를 배웠던 아이들이 하나 둘 씩 스타가 될 때마다 배가 아파서 못
참겠더라고요. 김민종, 박효신, 서문탁 이런 아이들이 음반을 수십만 장씩 팔고 가요 톱 텐
1위를 하고 그럴 때 겉으로는 축하를 해 줬지만 그 쓰린 배를 달래느라 밤마다 소주잔을
기울이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기독교 방송에서 제가 진행하던 방송이 제가 진행할
때는 그렇게 인기가 없다가 이현우, 윤도현, 유리 상자 이런 아이들이 진행을 맡으면서 뜨기
시작합니다. 너무 배가 아프지요. 지금은 누가 스타가 되던, 누가 얼마를 벌던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저 녀석 저렇게 어린 나이에 돈을 너무 쉽게 많이 벌어서 어디 예수 믿겠나?
이런 생각만 듭니다.
내게 어떤 다른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만한 것이 충분히 있으면 그 사람은 절대 남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습니까? 가인이 아벨을
왜 죽였습니까? 시기심 때문에 죽여 버린 것입니다. 시기 질투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시기 질투는 애교가 아닙니다. 어떤 질투심 많은 여자가 하나님도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도 질투한다. 그랬다는데 -그건 “열심“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우리 신자들은 그 불공평성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은
정말 불공평합니다. 누가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하게 태어납니까? 누가 예쁘게 나고 싶지
않아서 예쁘지 않게 납니까? 다들 잘 나고 싶고 다들 예쁘고 잘생기고 키 크고 싶습니다. 다리
길고 싶습니다.
네, 우리가 날 때부터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우리 신자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그 불공평한 것을
불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숙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불공평함 속에서 평안을, 안식을 얻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불공평하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 불공평함 속에서의 안식과 평안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공평함을 자기의 힘으로 공평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들 나섭니다. 그것을 것을 만용이라고
합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한국에서 막강한 정치 집단이 하나 생겼더라고요. “뉴 라이트
전국연합” 그게 얼마나 영향력 있는 정치 집단인지, 박근혜, 이명박, 손학규 같은 쟁쟁한
정치인들이 그 창립 집회에 다 나타나서 축사를 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신 우익 운동이지요.
2007년 대선 때 좌파 성향을 가진 정당의 재집권을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것이
바로 “뉴 라이트 전국 연합”입니다. 그 창립대회에서 그 뉴라이트 전국연합 의장이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사상, 도산 안창호의 진실정신, 백범 김구의 국가를 위한
헌신, 유일한의 투명한 자본주의, 장준하의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열린 민족주의를 받들어 이들
정신에 담긴 동양적 도덕성과 열린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보완해 가겠다.“ 라고
그 ”뉴 라이트 전국 연합“의 상임대표가 수천 명의 지지자들이 모인 창립총회에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섬기는 목회자입니다. 다산 정약용, 도산 안창호, 백범 김구를
본받아야 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분 아닙니까? 그리고 그렇게
가르쳐야 하는 분 아닙니까? 그런데 누구를 본받아 무엇을 이루자는 것입니까? 이제 그 분은
누구도 가벼이 볼 수 없는 명실상부한 막강한 정치 세력의 대장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그렇게 불공평함을 공평하게 만들어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 불공평함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으로 자족하는 훈련을 하고 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가진 자들의
행복과 안녕을 시기하여 못 가진 자의 편에서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행복과 복지와 안녕을 보면서 축하해 주고 자기 일 마냥 기뻐해 주는 것,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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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냥 자기의 자리에서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 시기하지 않는 사랑을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합니다. 자기가 하지 못한 것, 내 아이들 대에서라도 이루어 보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소질도
없는 아이에게 음악, 미술, 무용 다 가르칩니다. 땡 빛을 내서라도 과외 시킵니다.
왜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 나지 못해서 겪었던 한을 자식을 대리자로 내세워 풀어보려는
시도입니다. 그런 부모를 갖고 있는 아이들은 정말 불쌍한 아이들입니다. 아이 때부터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나야 한다고 하는 그러한 시기와 질투를 훈련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뭡니까? “사랑은 자랑하지 않으며” 여기서 쓰인 단어가
“페르페 류에타이”입니다. “고무풍선처럼 부풀리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왜 자랑을 하지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과장을 해서라도 자기를 포장합니다. 특히 우리 이민 사회를 보면
그런 자랑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잘 나가지 못했던 사람 거의 못 봤습니다.
그리고 웬 서울대 졸업생이 그렇게 많아요?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로렌스 크렙이라는 신학자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자기 동생이 사고로 죽어서 그
동생의 장례식에서 설교를 하는데 자기는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그래 크랩 잘했어,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많이 감동할거야” 동생의 장례식에서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자신을
자랑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로렌스 크렙은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합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러한 자랑은 하나님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기쁘게
받아주신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뭔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나아야 하나님도
나를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잘못된 신앙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서 그 천지의 주재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고 계심을 아는
사람들은 굳이 다른 사람의 인정 같은 것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목사들이 빠지기 쉬운 그런 실수지요.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몸에 무리가 가도 새벽기도 절대 안 빼먹고, 청렴하게 살기를 노력하고, 시간을 내서
심방도 가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애씁니다. 그러다가 제 친구 목사님들 두 명이
지난달에 몸에 스트로크가 와서 쓰러졌습니다.
나쁜 것 아닙니다. 그러나 교인들에게 인정받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저도 교인들에게 좋은 소리 해주고 교인들에게 인기를 끌고 싶은 마음이 가끔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라옵니다. 누가 욕먹고 싶겠습니까? 때로는 굉장히 외롭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천지의 주재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해 주고 계신다는 그 사실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을 외웁니다.
(갈1:10)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리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간곡히 부탁한 디모데 후서 4장 말씀을 떠올립니다.
(딤후4:2-5)
2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하십시오.
3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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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4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5 그러나 그대는 모든 경우에 정신을 차려,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있다는 그 확신이 있는 사람은 절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풍선을
부풀리듯이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자기들이 갖고 있는 은사를
너도 나도 부풀려 자랑들을 했습니다. 은사라는 것은 하나님이 목표지점으로 주시 그
목표지점에 잘 도달하라고 하나님께서 그 길까지 가는 길에 횃불로 주신 것들이 은사입니다.
그런데 그걸 전부 자기 자랑으로 쓰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건 신자의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분은 자기를 숨기셨습니다.
(빌2:5-7)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우리 주님은 자기를 완전히 비우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자기가 자랑할 만한 것들이 많이 있어도 오히려 자기를 감추고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자랑을 봅니까? 성경 많이 안다고, 기도 많이
한다고, 좋은 일 많이 한다고 얼마나 들 뻐깁니까? 그것은 사랑을 근거로 한 신앙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사랑은 교만하지 않으며“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교만일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겸손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자기의
장점을 잊어버리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냥 속으로는 ”내가 그래도 너보다 낫지“라고
생각하면서 겉으로만 ”제가 뭘요“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위선입니다. 겸손은 자기의 장점을
말 그대로 잊어버리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교만은 “휘브리스” 죄의 뿌리입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 위에
올라앉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마귀가 무엇으로 타락을 한 것입니까?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앉겠다고 하는 교만이요. 인간이 왜 타락했습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지요? 이렇게 자기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을 교만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끌고 가주시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하나님이 도와주기를
원합니다. 그게 교만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힘을 추구합니다. 출세하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을 이끌어 줄 하나님이 그 안에 인식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힘을 키워 남들보다 위에 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강하게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죄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남들의
인정이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남들보다 더 높이 앉으려 애 쓰지 않고 , 오히려 자기를
숨기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입니다.


이 단어 “아스케모네이” “무례”라는 말은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교회 론을 공부할 때 살펴 본 것처럼 고린도 전서 11장에 성찬식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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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일 다 마치고 정리하고 성찬식을 하러 왔는데 먼저 온
부자들이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버리고 먼저 취해 있는 것을 바울이 신랄하게
질책을 했지요? 그게 무례입니다. 다른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것.
교회 안에서 우리가 본의 아니게 무례하게 행할 때가 있습니다. 전혀 악의 없이 무례를 행할
때가 있습니다. 가난해 본 분들을 아시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자랑에 은근히 상처를
받습니다. “나는 매일 똑같은 고쟁이만 입고 다니는데 어떤 집사님은 매주 옷이 바뀐다.“ ”나는
이렇게 못 배웠는데 저 사람은 참 똑똑하다. 난 여태 뭘 한 걸까?“ 우리가 자기가 소유한 것을
누릴 때 다른 이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가진 사람들은 더 조심하고 신경을 써야 합니다.
아주 예민하게 배려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체면과 그들의 편리와
그들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그들이 수치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늘 배려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약점과 허물이 드러날까 봐 먼저 자기가 그것을 덮어주고 감춰 주려고 애 쓰는 것,
그것이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랑”아스케모네이“입니다.
그 다음이 뭐지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입니다. 이 말은 자기중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이 사랑의 본질을 전부 요약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사랑을 하지 못하는가 하면 “왜곡된, 이기적인 자기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참 힘든 것이지요.
자신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권리와 유익과 복지를 위해 사는 것이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쏟아 부으신 사랑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당신의
유익이 아니라 원수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가장 아끼는 것을 내어주시는 사랑,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타인 중심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렇게 타인 중심의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그렇게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거 연습하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부간에, 연인 간에, 형제간에,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도 얼마나
자기중심 적으로 살아갑니까? 아버지가 재산이라도 좀 남기고 가면 형제간에 그거 더 많이
갖겠다고 칼부림 나지요? 그런 것은 제가 아버님으로부터 참 잘 배웠어요.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실 때 땅을 좀 남기고 돌아가셨는데, 아버님이 장남이신데도 시골에서 사시는 막내
삼촌에게 그냥 다 주셨어요. 땅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지 서울서 사는
사람이 땅이 왜 필요해? “자기중심 성“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이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입니다.
헤롤드 채드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떠한 악도 쉽게 화를 내는 것만큼 공동체를 해치는
것이 없다. 쉽게 화를 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의 뚜렷한 증거이다“
쉽게 성을 내는 것은 공동체를 깨는 최악의 무기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생각해 보세요.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간구 하는 그 모습, 우리가 그런
신앙의 선배들을 보면서도 너무나 쉽게 우리의 분을 표출해 버리지 않습니까?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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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이 뭐지요?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입니다.
여기서 악한 것“카콘”은 내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본래적인 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닥쳤던 악한 것, 악한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지 아니하며“로기제타이”는
“셈하다, 계산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의 정확한 번역은 ”누군가 자기에게 행한
악한 행위를 복수하기 위해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 않으며”라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히8:12)
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시103:12)
12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하나님은 우리 죄를 아예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밤마다 예수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사기를 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자기가 신학교 때 지은 죄를 한번 물어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지요?
그랬더니 그 사기꾼이 그 사람만 아는 죄를 알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궁리해 낸 답이
‘예수님께서 잊어버리셨대요.’였답니다. 그런데 질문을 하신 그 목사님이 거기서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이 신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이미 그 죄를 다
잊으셨다고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해 놓으셨는데 나는 여태까지 그 죄로 괴로워하고
있었구나.‘하고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네, 사랑은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 악한 일들을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용서할 뿐
아니라 다 잊는 것입니다. 유대인 역사박물관 앞에 크게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용서한다. 그러나 결코 잊지는 않는다.”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망각이 없이는 절대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셨습니다. 다 잊어 주신 것입니다.
(사1:18)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그 다음 구절이 뭐지요?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범죄하고 실족하면 은근히 그것을 즐깁니다. 동정하는 척 하면서 그것을
즐깁니다. 주님은 죄에 빠진 이스라엘을 향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시면서 “예루살렘 아
예루살렘아 내가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너희를 모으려 한 것이 몇 번이냐?”
우리 주님은 자기가 스스로 그 죄에 빠진 이스라엘이 되십니다. 가슴 아파하십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실수를 즐깁니다. 그렇게 남의 잘못을, 약점을 즐기는 사람들은 반드시 뒷공론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간혹 교회 안에서 다른 이들의 잘못을 보게 되었을 때, 혹은 듣게
되었을 때 뒷공론 들을 많이 하지요? 핑계는 전부 “기도 제목을 나눈다는 핑계”로 “김
집사님, 우리 이 집사님을 위해 기도해 줍시다.” “왜요?” “글쎄 이 집사님이 어쩌구 저쩌구”
그러면서 은근히 그 사람이 저지른 실수를 즐깁니다. 이 gossip은 아주 나쁜 죄입니다. 그래서
고든 피라는 유명한 신약학자는 "가장 악한 종류의 악이 gossip 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정 맛 본 사람들이라면 절대 뒤에서 남 욕하고 뒤에서 남
이야기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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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울은 사랑의 본질을 이렇게 마무리 짓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서 “모든 것을 참으며”의 “판타 스테게이”는 “모든 것을 덮어서 막다“라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친 자에게 보복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고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맛 본 사람들만이 이러한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만이 모든 것을 참으며 그리고 자기에게 그렇게 해를 끼친 악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얼마 전 전방 부대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군인들이 죽었습니다.
그 사건을 저지른 김 일병이라는 사람의 공판 현장에 사망자 가족들이 전부 나와서 그 공판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가슴이 아프겠지요. 여러분이 그 사망자 가족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겠습니까? 생때같은 아들을 졸지에 잃었으니.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김 일병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신다면 그 사망자 가족의 입장에서 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왜? 그 많은 사람들 다 놔두고 저런 자를 사랑하시냐고
따지겠지요? 만일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아직 여러분이 어디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인지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르시는 분들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공부한 이 사랑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으실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우리 주님께서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까? 거기에 서서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살인자들 뿐 아니라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 거짓말쟁이, 사기꾼 온갖 종류의 죄를 지은 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향해 “저 놈을 죽여라, 저 놈을
죽여라”하고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향해 아무 말씀 안 하셨습니다.
“그래, 내가 죽으마.“ 이게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크신 사랑에 의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누구를 미워하며 누구를 시기하며 누구를 책망하며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여러분,
아직도 그건 예수님이니까 할 수 있는 사랑 아닙니까? 라고 반문하시렵니까?
(롬5:5)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그 사랑이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이미 부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이제 그 사랑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자 한다면 순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일4:19-21)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은 항상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열심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반드시 해 내야 합니다.
이제 새 계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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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라” 옛 계명도 “사랑하라“입니다. 그러나 옛 계명에서는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해
내야 했지만 새 계명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자로 만들어 놓았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사랑하는 자리로 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
계명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랑과는 담쌓은 사람으로 살고 있다면 그게 무슨 새 계명에 속한
구원받은 자이겠습니까? 바울이 이 고린도전서 13장을 어떻게 마칩니까?
(고전13:13)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여기서 “있을 것인데”는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인데”로 번역을 해야 맞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 신자의
신앙생활에서 꼭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죠? 믿음과 소망은 뭡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때까지만 필요한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실체를 보게 될 거니까요. 그 믿음과 소망이 필요 없어질 때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사랑하며 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만 남는 것입니다. 그 소중한
믿음, 소망도 결국에는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믿음이 있다고 자랑 마시고 소망이 확실하다고 자랑 마시고 나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를 먼저 확인하십시오. 그게 안 되고 있다면 오늘 우리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
합시다. ‘사랑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 사랑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부터 우리의 의지를
발동해서 힘껏 사랑해 봅시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의지의 발동입니다.
사랑은 결단이며 책임인 것입니다. 내 안에서 사랑하고픈 마음이 저절로 솟구쳐 나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우리 안에서 가끔은 그러한 감격스러운 생각들이 솟구쳐 날지도 모르지만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분명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사랑하고 싶지 않을 때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건 의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막 사랑하고 싶고 감격스럽고 그러면 사람 안에
“에피니프린”이라는 것이 생성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계속해서 나오게 되면 인간은 죽습니다.
그러니까 늘 감격스럽고, 늘 기쁘고, 늘 사랑이 넘친다는 사람은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천국에나 가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그렇게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때, 사랑할 기분이 들지 않을 때 사랑을 열심히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또 사랑해 보고, 또 안 되면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계속해서 그 사랑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부를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제가 만난 사람 중에 공부가 정말 좋다는 사람은 세 사람 만났는데 그 셋이 전부 우리
교회에 있어요. 누가 박사들 아니랄까봐 티를 냅니다.
보통 평범한 사람들은 공부하기 싫습니다. 그렇지만 왜 꾸역꾸역 합니까?
내가 건전하고 건강한, 성실하고 책임 감 있는 사회의 일원으로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훈련이기 때문에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 나이 때 성실과 책임을 훈련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공부니까요. 그런 것처럼 천국의 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영원히 있어야
하는 그 사랑을 연습하고 맛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
환경, 은사들은 전부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사랑합시다.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는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열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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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품어야 합니다. 난 안 될 거라고 자포자기(自暴自棄)하지 마세요. 사도 바울도 이
고린도서를 쓰기 얼마 전까지 사람들을 때려죽이느라 그 손에 피가 낭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자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 사마리아 놈들을 다 태워 죽일까요? 라고 했던 우레의 아들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을 기억하세요.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노력하자고요
(벧전4:7-8)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롬13:8-10)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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