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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수업의 No.

1 사악사회
名品 한국사
사악사회 고등 국사 한국사의 왜곡사례 심화자료

1)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대역사(大役事)를 진행 중이다. 사회과학원이 주도하여 동북 변강(邊疆)의 역사
와 현 상태를 연구하는 프로젝트,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수행하면서, 핵심 주제의 하나로 고조선사, 고구려사, 발해사
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5년 동안 약 3조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이 프로젝트에는 관련 학자들이 총망라되고 원장과 재
정부장이 고문을 맡고 있다.

중국은 고구려가 시종 중국의 지방정권이었고, 따라서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주장은 현재의 중국 영
토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는 모두 중국역사라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입각해 있다. 구체적으로는 고구려가 중국 경내인 한 현
도군에서 건국했고, 족원(族源)이 중국 상(商) 나라에서 나왔으며, 중원 왕조의 책봉을 받고 종속관계를 유지했다고 주장한다. 또
한 영토가 기본적으로 중국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고, 멸망 후 주민이 대부분 한족(漢族)으로 편입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수․당의 고구려 침공은 중국의 고유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통일과정이며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사의 기본 체계를 흔드는 역사왜곡이며, 지금 만약 고구려사를 한국사에서 떼어낸다면 한국사는 시작부터
다시 써야 한다. 고구려는 종족, 언어, 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중국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 때문에 한국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오
래 전부터 고구려사는 한국사의 일부로 보아왔다. 김부식이삼국사기에서 고구려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서술한 이래 고구려사
는 한번도 한국사의 범주에서 벗어난 적이 없고,삼국지(三國志) 송사(宋史) 등과 같은 중국 역사서 에서도 고구려사를 한

국사로 서술했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은 한반도의 정세 변화에 대한 대비책 강구, 즉 남북통일 같은 정세변화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중국동포의 동요

를 막고, 이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국가 차원의 사업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
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사 편입 기도는 역사왜곡에서 그치지 않고, 곧바로 현실 문제로 연결된다. 중국의 주장
대로라면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북한지역은 중국의 영토가 되고, 중국은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엄청난 복선이 고
구려사 편입 기도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기도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것은 일본 일부 우익이 교
과서에서 특정 사실을 왜곡하여 서술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럼에도 이에 관한 관심은 거의 없다. 일본교과서 왜곡 사건
때는 적극적이었던 정부도 이 문제에는 너무 소극적이다. 지금이라도 학계는 물론 정부,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대책을 세워야 한

다.

먼저 정부는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처할 기구를 설치해야 한다. 당면 과제는 고구려 벽화고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관한 문제

다. 북한은 평양 일원의 벽화고분 등재를 신청했지만 보류되었고, 중국은 집안의 벽화고분 등재를 신청할 것이다. 내년 소주(蘇
州)에서 개최될 유네스코회의에서 만약 중국의 신청만 받아들여진다면, 고구려사가 중국사로 편입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정부는 북한과 다각도로 협조하여 평양의 벽화고분이 등재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평양의 고분은 한민족의 문화유산이고,

고구려사는 한민족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중국학자들의 근거없는 주장을 반박하고 왜곡을 바로잡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고구려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

사학자와 고고학자는 12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분단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여러 이유로 고구려사 연구를 외면해 온 역사학계
의 책임도 있지만,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 경시와 기피 풍조가 낳은 결과다.

장기적으로는 고구려사 연구자를 양성하고, 고구려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성원, 그리고 시민단체의 노력이 여기에 더해져야 한다. 고구려사가 한국사로 남게 하려면 말이다.
안병우(한신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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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박살내기
사악사회 심화자료

2) 일본 교과서 왜곡 파동

▲임나일본부설 :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출병(出兵)… 임나라는 곳에 거점을 둔 것. 야마토 군세는 백제와 신라를 도와 고
구려와… 싸웠다 임나일본부를 기정 사실화한 후소샤 교과서의 잘못된 내용.

▲군대위안부 누락 : 후소샤 교과서는 일본군이 자행한 가혹행위의 상징인 군대 위안부 관련 내용을 아예 고의로 빠뜨려 잔
혹 행위의 실체를 은폐했다. 동경서적 등 4개 기존 교과서도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일반 사람도 많
은 희생을 했다로만 거짓기술.

▲한국강제병합 : 후소샤 교과서는 일본 정부는 한국 병합이 일본의 안정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
했다. 영국, 미국, 러시아 3국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국 국내에서는 일부에서 병합을 수용하
자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등으로 기술하고 있다.

▲한반도 위협설 : 후소샤 교과서는 한반도를 일본을 향해 대륙에서 돌출해 있는 팔뚝으로 묘사하면서, 조선반도가 일
본에 적대적인 대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일본을 공격하는 절호의 기지가 되어…라고 적고 있다.

▲한국사 폄하 : 중국의 복속국이었던 조선도 마찬가지…(조선의 국제적 지위부분) 조선과 베트남은 완전히 그 내부에 들어
가 중국 역대 왕조에 복속됐다 등으로 한국사를 언급할 때 조공, 종속, 속국 등의 용어로 한국사를 격하
했다.

임나일본부설이란?

19세기 후반 메이지 천황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임나 일본부설은 1949년 스에마쓰(末松保和)가 쓴 '임나흥망사'
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스에마쓰가 주장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국지' 위서 왜인전을 보면 3세기 중반 무렵 왜는 벌써 임나 가야를 차지하고 삼한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4세기 중엽에는
'일본서기'와 광개토왕비에서 알 수 있듯이 경남, 경북 대부분과 전남, 전북, 충청 일부를 정복하고 백제를 복속시켰다. 5세기 송
서 왜국전에 나오는 왜 5왕의 작호로 보아 중국 남조로부터 신라, 임나, 가라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임나 일본부는 5세기

후반부터 백제와 신라에게 공격을 받아 점점 쇠퇴해지다가 562년 마침내 신라에게 완전히 정복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646년까지
는 신라에게 임나지배권을 넘겨 준 대가를 받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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