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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I https://doi.org/10.35865/YWH.2020.1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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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1 : 기후위기 시대의 생태환경사 : 한국 기후사의 모색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 길었던 한 해, 1939년 조선 대가뭄의 양상과 그 여파 -*
1)

고태우(高泰雨)**

머리말
1. 1939년 대가뭄의 원인과 피해 양상
2. 재해대책의 전개와 특징
3. 식민지민의 다성성(多聲性)과 ‘내선일체’와의 거리
맺음말 : 전쟁과 생태환경, 재난의 문제

머리말
5월 21일(양력 7월 7일) 수원( 水源)이 고갈되었다.
5월 26일(양력 7월 12일, 초복) 백성을 살리는 것은 하늘인데 하늘의 뜻을 알

* 이 논문은 2019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9S1A6A3A01059888).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조교수・조선대학교 재난인문학연구사업단 일반연구원
대표논저 : 2020 「전시 총동원체제기 ‘개발동맹’의 형성과 토건업계의 동향」  東
方學志 192 : 2020 「식민지기 ‘북선개발( 北鮮開發
)’ 인식과 정책의 추이」 한
국문화 89 : 2020 「한국 재난 인식 연구의 성과와 과제 – 근대 이전 시기 역사학
계의 연구를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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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다.
6월 6일(양력 7월 22일, 중복) 가뭄이 갈수록 더하다. 시냇가의 밤나무 서너 그
루가 바싹 말라 죽었다.
6월 24일(양력 8월 9일) 산과 들에 푸른 빛이 없다.1)

경북 예천 맛질의 자작농 박희수( 朴熙洙)는 1939년 위와 같은 글을 일기


에 남겼다. 그해 조선 중남부의 대가뭄은 산과 들에 푸른 빛이 없을 정도로
유례없는 가뭄이었다. 식민지기를 통틀어 가장 큰 피해를 남긴 이 가뭄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 간사이지방에서도 동시에 발생하여 일본제국 차원의
식량문제를 일으키며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주었다. 본고는 1939년 가뭄에
대한 일본제국과 조선 사회의 대응에 주목하면서, 재난 상황에서 드러난
식민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1939년 대가뭄은 전시 총동원체제기 조선의 농업문제, 일본제국의 식량
문제를 거론할 때 자주 등장하는 사건이었다. 대한해( 大旱害)는 농업부문에
서 생산력확충운동이 차질을 빚게 했고, 조선증미계획이 실시되는 계기로서
주목받았다. 식민농정과 농촌경제의 변화에서 한해를 하나의 변수로 바라본
것이다.2) 그러나 대체로 농업사 연구에서 1939년의 가뭄은 이 시기를 다룰
때 하나의 배경으로서만 취급되었다.3) 최근 식민지기 재해・재난에 대한 의
미 있는 성과가 제출되고 있지만,4) 1939년을 온전히 조명하지는 못했다.

1) 朴成壽 註解, 2003 저상일월, 민속원, 550~551쪽 ; 國學振興硏究事業推進委


員會 編, 2007 예천 맛질 朴氏家 日記 5, 韓國精神文化硏究院, 453~455쪽
2) 이송순, 2008 일제하 전시 농업정책과 농촌 경제, 선인
3) 한국농촌경제연구원 편찬, 2003 한국 농업・농촌 100년사 상, 한국농촌경제연구
원・농림부, 제5편 제6장 ; 농촌진흥청 편, 2008 농정 변천사, 농촌진흥청, 제5장
참조.
4) 김종근, 2012 「일제하 京城의 홍수에 대한 식민정부의 대응 양상 분석」 한국사연
구 157 ; 고태우, 2014(a) 「일제 식민권력의 재해대책 추이와 성격」 역사문제연
구 31 : 2014(b) 「일제시기 재해문제와 ‘자선・기부문화’ - 전통・근대화・‘공공성’」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39

1939년의 가뭄 현상을 본격적으로 다룬 이는 히구치 유이치( 樋口雄一)가


유일하다. 그는 소화 14년 한해지( 昭和十四年 旱害誌)를 활용하여 재해의
양상, 농민 생활 및 건강상태 악화, 이농・이촌의 증대, 총독부의 대책 등을
요약적으로 설명했다. 나아가 1939년만큼의 위력을 보인 1942년의 한・수
해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이 시기 가뭄에 대한 식민권력의 재해대책이 농
민층의 이산(diaspora)을 강요한 것이라는 점도 밝혔다.5)
그러나 히구치 유이치의 연구는 소화 14년 한해지에 주로 의존하며
1939년 한해의 개략적인 양상을 드러내는 데 그쳤다. 더구나 조선인을 피
해자로서만 위치시키면서 그들과 조선 사회의 능동적인 대응을 포착하지
못했다. 재난 상황과 재해대책의 실행 과정에서 일본정부와 식민권력, 조선
사회 여러 주체의 활동을 규명하여 당시 재해대책의 성격과 각 주체의 재
해 인식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또한 대가뭄 자체를 자연재해이자
생태환경의 변수로서 바라보며 생태환경사, 기후사의 관점에서 새롭게 접
근할 여지가 있다.
기후사는 과거의 기록에서 날씨와 기후가 어떻게 변했는지, 그러한 변화
가 인류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연구하는 분야이다.6) 생태환경

東方學志 168 ; 송병권, 2015 「식민지 통치권력 재해 조사를 둘러싼 일반과 특


수의 간극 – 1928년 경북지역 가뭄 조사를 중심으로」 史林 54 ; 김태웅, 2017
「1925년 일제의 京城府 二村洞 水害對策과 都市開發 構想」 역사연구 33 ;
양지혜, 2020 「일제하 대형 댐의 건설과 ‘개발재난’ : 일본질소의 부전강수력발전
소 건설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문화 89. 윤대석이 1939년 한해에 주목했으나,
그는 이를 재난에 대한 생산력주의 서사가 등장하는 사례로서 취급했을 따름이다.
1876년의 ‘병자 대한해’를 1936년의 한해로 가리키는 등 내용상의 오류도 있다(윤
대석, 2014 「일제 말기 재난에 대한 생산력주의/생산주의의 대응」 구보학보 10).
5)樋口雄一 補論 一九三九年 大旱害 戰時下朝鮮 農民生活誌
, 1998 「 1 の 」 の 1939~
1945, 社会評論社 ; 樋口雄一, 2002 「植民地下朝鮮における自然災害と農民移
動」 法學新報 109-1・2
6) Sam White, Christian Pfister, Franz Mauelshagen edit., 2018 The Palgrave
140 역사와 현실 118

사는 인간과 자연환경의 상호관계에 주목한다. 이 점에서 생태환경사, 기후


사의 관점을 취한다는 것은 날씨와 기후를 역사 변화의 변수로 명확히 하
고, 날씨와 기후, 자연재해 등에 인간이 어떻게 영향을 받고 대응했는지에
주목하겠다는 점을 뜻한다.7)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첫째, 기후사 차원에서 1939년 대가
뭄이 어떻게 초래되었는지를 기상과 기후 측면에서 살펴보고, 이상 기후
현상이 화산 폭발이나 태양 흑점 변화와 관계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둘
째, 대가뭄이 준 피해 양상을 살펴보고, 여기에 일본정부와 식민권력이 세
운 대책의 내용과 특징을 검토하고자 한다. 셋째, 새로운 자료를 통하여 재
해대책에 대하여 식민지민이 능동적으로 대응한 점을 밝히고, 재난에 대처
하는 다양한 민중상을 그려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1940년대 연이어 등장한 다른 재난을 염두에 두면서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생태환경의 요소를 고려할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1. 1939 년 대가뭄의 원인과 피해 양상


1) 이상 기후 : 화산 폭발, 태양 흑점 변화의 나비 효과?

1939년의 대가뭄은 조선총독부 스스로 고래에 유례없는, 미증유의 참해


慘害)로 표현할 정도의 사건이었다. 실제 그 규모를 살펴보기 위한 하나의
(
척도로, 재해에 대응하기 위해 사용된 금액인 재해대책비를 들 수 있다.

Handbook of Climate History, London : Palgrave Macmillan, p.3


7) 이와 관련하여 엘니뇨와 기근, 제국주의의 관계에 주목한 마이크 데이비스의 연구
가 좋은 참조가 된다(마이크 데이비스, 정병선 역, 2008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이후).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41

재해대책비는 크게 이재구조비( 罹災救助費)와 재해구제사업비로 나뉜다.


이재구조비는 직접 이재민에게 식사를 급여하거나 물품을 지급하는 구제를
위해 지출되는 자금으로, 지출처에 따라 국고[조선총독부특별회계]와 지방
비[도비], 임시은사금( 臨時恩賜金), 은사이재구조기금, 천황 등 일본 왕실의
하사금, 그리고 민간에서 모금된 의연금으로 구성된다. 재해구제사업비란
재해로 인한 시설복구 또는 이재민 구제 목적으로 시행된 토목사업비를 말
한다. 파괴된 도로・교량, 제방, 철도 노선 복구, 화재에 손상된 건축물 수리
및 재건축, 한해나 흉작에 따른 제반 구제비, 토지개량사업과 사방사업 등
을 포괄한다.

<그림 1> 식민지시기 재해대책 비용 변동


朝鮮總督府統計年報 각 연도판 ; 朝鮮年鑑 각 연도판
출전 : 

<그림 1>에서 보듯이 재해대책비는 시기에 따라 심한 금액 차이를 보였


다.8) 재해가 당연히 변동성이 컸기 때문인데, 이재구조비보다는 재해구제
8) 상세 내역은 본 논문의 <부표> 참조.
142 역사와 현실 118

사업비가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후자가 토지개량사


업이나 시설 복구비 등 주로 토건사업에 쓰였기 때문이다.9)
식민지시기 전반을 통틀어서 가장 큰 재해대책비가 소요된 해는 1939년
이었다. 이 재해대책비는 바로 당시 한해( 旱害)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림 1>을 통하여 1939년이 왜 ‘미증유’의 한해, 가뭄이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음 규모는 1942년으로, 이 해는 수해와 한해가 동시에 조선
을 휩쓸었고, 1939년에 필적하는 대가뭄이 있었던 해였다.
1939년 대가뭄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 원인을 환경적 요소, 기상과 기
후 차원에서 검토해보자. 1939년 기상의 특징은 첫째, 계절풍이 약하고 눈
이 적었던 점, 둘째, 월 평균 기온이 계속해서 평년보다 높고, 특히 7~8월
이 혹서기였던 점, 셋째, 7월 중부 이남에서 기록적인 최다의 일조량이 관
측된 점, 넷째, 6~8월 중부 이남 강우량이 평년의 40~70% 수준에 지나지
않은 점, 다섯째, 두드러진 저기압이 한반도를 통과하지 않고, 태풍도 겨우
1회만 있었던 점이다. 이 다섯 가지 특징은 분명 이상 기후 현상으로 볼 수
있으며, 주로 “기압 배치 상황에 기초하여 발생”한 것이다.10)

<표 1> 평년 대비 1939년 4~7월 강우량 변화

강우량(mm) 평년 대비 1939년
지역 평년 1939년 강우량 차이 강우량 비율(%)
(a) (b) (a-b)
경기 659.3 348.3 311.0 52.8
충북 581.3 208.3 373.0 35.8
충남 558.3 241.1 317.2 43.2
전북 603.9 241.5 362.4 40.0
전남 634.9 248.5 386.4 39.1
경북 508.5 202.1 306.4 39.7

9) 이상 식민지기 재해대책비는 고태우, 2014(a) 앞의 논문, 380~390쪽 참조.


10) 朝鮮總督府 司政局 社會課, 1943 昭和十四年旱害誌[이하 소화 14년 한해
지], 37쪽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43

강우량(mm) 평년 대비 1939년
지역 평년 1939년 강우량 차이 강우량 비율(%)
(a) (b) (a-b)
경남 627.0 301.1 325.9 48.0
강원 628.6 399.6 229.0 63.6
평균 599.9 273.8 326.1 45.6
출전 : 소화 14년 한해지, 39쪽
비고 : 추계 과정에서 오류로 보이는 부분 바로잡음.

<그림 2> 1939년 낮 최고기온 돌파 지역 및 40도 기록 지역 분포


(출전 : 塚元稔, 1941 「昭和十四年の稀有の高溫に就て」 朝鮮總督府氣象臺年報 28, 92쪽)

1939년 가뭄과 직접 관련이 있는 기상 지표를 살펴보자. 첫째, 강수량의


경우 농사철, 특히 모내기철인 4~7월 조선 중남부 강우량은 <표 1>에서 보
듯이 각지 모두 평년 대비 300mm 이상이 부족했고, 평년 대비 강우량 비
144 역사와 현실 118

율이 평균 45.6%에 불과했다. 둘째, 가뭄은 기온과도 연관되는데, 1939년


은 더위가 매우 심했다. 일 최고기온을 보면 경북 서남부와 경남 북서부에
서 40℃에 육박하기도 하였고, 전국적으로 이전의 낮 최고기온 기록을 돌
파한 지역이 대부분이었다[<그림 2>].11) 셋째, 평균 일조량은 평양과 신의
주 등 조선 북부 지역이 평년에 비해 3% 감소한 것 외에, 나머지는 대체로
5~6% 증가했다. 넷째, 기록적인 고온과 일조량 증가가 결합하여 증발량도
늘어났다.12) 이상의 여러 조건이 맞물리며 유례없는 가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이상 기후와 가뭄의 근저에는 1938~1939년에 연이은 시베리아
캄차카반도에서의 화산 폭발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례적인 강수량
부족, 혹서는 주로 기압 배치와 관련된다. 1939년 여름은 일본에서 조선까
지 태평양 고기압이 견고하게 머물러 있어서 통상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
오는 저기압과 태풍이 올라오지 못했다. 이 태평양 고기압이 여름 내내 강
하게 한반도와 일본 일대에 자리 잡았던 이유를 당시 일본 오카야마( 岡山)
측후소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캄차카반도 주변의 화산 폭발이 많
아 분출된 화산재가 대기권에서 떠돌아다녀 태양열을 일정하게 차단함으로
써 지표면의 온도를 낮추어 북극해의 해빙이 늦어졌다. 이에 여름이 되어
도 북극해로부터 오호츠크해 방면으로 찬 기류가 흘러와 해수면 온도가 올
라가지 않았고, 이것이 기압골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13)

11) 1942년의 혹서도 1939년 못지 않았는데, 두 해의 여름 혹서 기록은 기후 변화가


급속해지는 2010년대 들어 깨지기 시작할 정도로 극심한 것이었다. 서울 기준 폭
염 발생일은 1939년 47일로 여전히 최고 기록을 갖고 있으며, 대구지역의 경우
1939년 폭염일 수가 46일로 역대 3위 기록이다. 기상청 기상자료개방포털 검색
(https://data.kma.go.kr/ 검색일 : 2020년 10월 20일)
12) 소화 14년 한해지, 38~42쪽
朝鮮, 關西 大旱害는 캄챠카 火山 爆發의 關聯」 朝鮮日報 1940년 3월 12
13) 「
일 ; 「참말로 그럴? 朝鮮의 大旱魃은 캄챠카 火山 爆發 문」 每日新報
1940년 3월 12일 ; 「火山爆發から朝鮮の大旱害」 釜山日報 1940년 3월 12일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45

이러한 설명은 화산과 기후의 관계에 관한 전형적인 설명, 곧 화산 폭발


분출물이 성층권에 도달하여 에어로졸(aerosol)이 형성되고, 이것이 지구
전체 기후의 순환 체계로 들어가 기온과 강수 패턴에 교란을 주는 방식을
가리킨다.14) 과연 이 설명이 사실과 부합할까?

<표 2>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캄차카반도, 쿠릴열도 화산 폭발 상황

지역 화산 이름 폭발 시기 폭발지수(VEI)
캄차카반도 Avachinsky 1938.3.6.~1938.12.1.(추정) 3
쿠릴열도 Nemo Peak 1938.8.12.~? 2
캄차카반도 Karymsky 1938.10.~? 2
〃 Mutnovsky 1938.11.~? 2
〃 Mutnovsky 1939.5.~? 2
〃 Tolbachik 1939.9.25.~9.27. 2
〃 Karymsky 1940.~? 2
〃 Zhupanovsky 1940.1~1940.2. 3
〃 Tolbachik 1940.2~1940.4. 2
〃 Tolbachik 1940.11.~1941.7.15.(±45일) 3
〃 Karymsky 1943.2.1.(±30일) 2
출전 : Global Volcanism Program, 2013 Volcanoes of the World, v. 4.8.3. Venzke, E (ed.).
Smithsonian Institution.(http://volcano.si.edu/)의 화산 폭발 데이터베이스(eruption database)
에서 추출(검색일 : 2020.10.20.).

<표 2>는 1939년에 직접 영향을 미쳤을 1938~39년과 그 이후 1940년대


초 캄차카반도와 쿠릴열도의 화산 폭발을 정리한 것이다. 1938년 캄차카반

; 「 朝鮮의 昨年 旱魃은 캄챡카 半島의 火山爆發이 根據 原因!」 每日申報


1940년 3월 17일. 당시 신문에는 “캄차카 반도 기타 화산의 폭발이 많았기 때문에
화산재가 공중에서 떠돌아다니는 동안에 습기를 포함하여 응결하면서 태양열을
흡수하였기 때문에, 지열이 쇠하여 해빙을 늦게 하였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는
것”으로 보도되었다(인용은 朝鮮日報 1940년 3월 12일, 앞의 기사).
14) 1815년 탐보라 화산 폭발 등 역사시대의 화산과 단기 기후 변화에 관해서는石弘
之, 2012 歷史を變えた火山噴火, 刀水書房 ; 길런 다시 우드, 류형식 역,
2017 세계사를 바꾼 화산, 탐보라, 소와당 참조.
146 역사와 현실 118

도 아바친스키(Avachinsky) 화산이 1938년 3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분화


했고, 이어 쿠릴열도의 네모 피크(Nemo Peak) 화산, 캄차카반도의 카림스
키(Karymsky), 무트노프스키(Mutnovsky) 화산 등이 연달아 분화했다. 이
가운데 1938년 아바친스키 화산의 폭발이 가장 커서 화산폭발지수(VEI) 3
을 가리킨다. 이는 성층권까지 화산재가 도달하여 단기간 기후에 변화를
주는 플리니식 분화(Plinian eruption)가 가능한 지수이지만, 분화 방식을 확
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비슷한 지역에 분포하는 여러 화산이 집중적으로
분화할 경우, 대기에 화산쇄설물(tephra)이 배출되어 국지적인 범위에서 기
후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캄차카반도 화산 폭발과 1939년 대가뭄을 연결하기 위
해서는 동북아시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본의 다른 화산 폭발과의 연관
관계, 엘니뇨-남방 진동(ENSO)와 태양 흑점 변화 등에 관한 복합적인 분석
을 가미할 필요가 있다. 엘니뇨-남방 진동의 경우, 1921~41년 사이에는 엘
니뇨가 약했던 시기였기 때문에15) 기후 변화에 미친 영향이 미미했을 가
능성이 크다.
다만 태양 흑점 변화와 1939년 한발의 원인이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당
시 일본학계에서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흑점 극대기에 고기압대가 북
으로 이동한다는 연구 결과가 소개되고, 그것이 태평양지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 이와 동시에 흑점 극대기와 극소기에 한발이 있었던 해를 비교
하는 식의 연구가 소개되는 데 그쳤다.16) 1939년이라는 특정 시점의 가뭄
과 흑점 변화의 상관관계를 직접 연결하지는 못했다.

15) 마이크 데이비스, 2008 앞의 책, 389쪽


16) 中央氣象臺, 1940.6 中央氣象臺彙報 第16冊 昭和十四年夏 旱魃調査報告, 東
京 : 中央氣象臺, 2~5쪽. 다만 일본 중앙기상대는 1939년 5~6월에 오호쓰크해 기단
이, 7월 이후에는 오가사와라 기단이 일본 일대를 지배하면서 일본 부근에 강우를
초래할 수 없었다는 점을 결론으로 제시했다. 中央氣象臺, 1940.6 앞의 책, 5쪽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47

화산 폭발이나 태양 흑점 변화와 1939년 대가뭄의 관계에 관한 결론을


현재로서는 도출하지 못했다. 이는 학제 간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럼
에도 1939년 기압 변화와 동반된 이례적인 여름철의 강수량 감소, 고온 현
상과 일조량 및 증발량 증가 등 이상 기후 현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대
가뭄을 유발한 사실만큼은 흔들리지 않는다.

2) 가뭄 피해 양상

<표 3> 식민지시기 주요 한해 상황

연도 수확피해면적 미작감수량 한해구제비(원) 피해지역


(논 : 정보) (石) 예산 결산
중서북부[경기・충청・전북・
1919 200,921 1,903,628 7,547,153 4,913,511
황해・평안 7도]
경기・충청・전라・경북・황해
1924 134,664 2,376,309 1,872,570 670,431
[7도]
경기・충북・전북・경북・황해
1928 214,201 2,006,076 916,266 916,266
[5도]
1929 112,177 1,884,245 1,129,424 1,129,424 전남・경상[3도]
1932 57,526 680,943 142,516 142,211 충남・전북・경북[3도]
1935 71,628 67,115 845,481 845,481 전라도[2도]
1936 58,435 671,578 483,066 483,685 경기・황해・평남[3도]
1938 14,330 735,376 486,256 468,256 충남・전북・경북[3도]
중남부[경기・강원・충청・전
1939 708,895 9,155,379 68,003,759 59,404,200
라・경상 8도]
출전 : 소화 14년 한해지, 30~35・57~64・168~173쪽
비고 : ①1919, 1939년 한해구제비는 각기 이듬해인 1920, 1940년까지 책정되어 두 해를 합산한 수치
②피해지역은 총독부 통계상으로 조사된 지역을 포괄한 것 ③예・결산액은 소수점 이하 반올림
④1939년 미작감수량은 평년수확량 대비 감수량

이상 기후가 동반한 가뭄은 조선에 어떠한 피해를 주었을까? 앞서 재해


대책비를 기준으로 1939년 한해가 가장 큰 규모의 것이었음을 확인했다.
수확 피해 면적, 쌀 수확 감소량 등을 다른 한해와 비교하면 <표 3>과 같
148 역사와 현실 118

다. 1919년과 1924년, 1928년의 가뭄도 상당한 규모였지만, 1939년 가뭄에


비교하면 피해면적과 수확량에서 큰 격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939년의
가뭄 피해는 쌀 수확 면적에서는 1928년의 3.3배, 감수량에서는 1924년의
3.9배를 기록했다.

<표 4> 1939년 논농사 피해

피해면적 평년
모내기 모내기 실수 평년 대비
지역 예정면적 면적 모내기 수확 70% 이상 계 모내기
불능 없음 수확 감소 (정보) 예정면적 확량 수확량 수확
(정보) (정보) (정보) (정보) (정보) 대비(%) (石) (石) 률
(%)
경기 197,099.9 168,119.0 28,980.9 28,203.1 49,199.1 106,383.1 54 1,424,191 2,728,663 52
충북 67,550.9 35,996.3 31,554.6 3,020.7 14,071.7 48,647.0 72 364,580 1,006,168 36
충남 159,172.2 102,880.1 56,292.1 21,428.0 29,224.7 106,944.8 67 728,424 2,334,043 31
전북 165,307.0 80,614.1 84,692.9 3,955.5 15,243.7 103,892.1 63 689,948 2,363,979 29
전남 197,693.5 134,604.6 63,088.9 10,800.5 16,770.8 90,660.2 46 1,513,089 2,607,728 58
경북 185,576.8 58,360.0 127,216.8 2,882.7 13,946.4 144,045.9 78 730,924 2,408,581 30
경남 167,783.2 120,707.0 47,076.2 14,284.8 28,915.4 90,276.4 53 1,270,421 2,369,690 53
강원 86,737.6 83,035.7 3,701.9 6,505.1 7,838.9 18,045.9 22 1,131,703 1,189,807 95
합계 1,226,921.1 784,316.8 442,604.3 91,080.4 175,210.7 708,895.4 58 7,853,280 17,008,659 46
출전 : 소화 14년 한해지, 64쪽

한해 지역에서의 지역별 가뭄 피해면적과 수확 실적을 <표 4>에서 살펴


보면, 모내기를 진행한 곳이 약 784,316정보로 전체 모내기 예정면적인
1,226,921정보 대비 63.9%에 불과했다. 모내기를 못한 지대를 포함하여 모
판에서 논으로 모를 옮겨도 물 부족으로 수확하지 못했거나 70% 이상 수
확이 감소한 지역을 합하면, 전체 모내기 예정면적의 58%가 될 정도였다.
이로 인하여 수확량은 평년 대비 46%에 불과했고, 한해 지역만 900만 석
이상이 감소했다. 특히 충청도와 전북, 경북지역은 평년 대비 수확률이
30%대를 밑돌 정도로 심각했다.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49

<표 5> 1939년 밭작물 수확량(한해지역 8도)

작물 경작면적 1939년 수확량 1938년 수확량 수확량 비교 전년


수확률
대비
(정보) (石) (石) (石) (%)
밭벼 16,225 50,522 140,911 -100,389 35.9
보리 1,155,117 10,869,639 9,649,709 1,219,930 112.6
목화 204,529 175,533,170 178,812,482 -3,279,312 98.2
콩 360,905 955,468 1,962,337 -1,006,869 48.7
조 311,119 1,823,247 1,391,464 431,783 131.0
출전 : 소화 14년 한해지, 78~82쪽

밭작물의 경우 작물별로 가뭄 피해 정도가 달랐다. 목화는 충청도와 전


북, 경북지역에는 한해에 병충해가 겹쳐 1938년보다 수확량이 감소했지만,
전년 대비 수확률로 보면 그리 큰 감소는 아니었다. 밭벼와 콩은 수확률이
50%를 밑돌 정도로 저조했던 반면 보리와 조는 수확률이 오히려 늘어났
다. 밭벼의 경우 논벼나 다른 곡류에 비해 전체 수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는 않으나, 콩은 가뭄에 파종기가 지연되고 발아가 불량하여 고사하는
경우가 많아 큰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보리와 조의 경우 벼에 대신하는 대
용작물로 심어져 수확이 늘어나, 식량문제 완화에 기여했다.17) 목화를 제
외한 나머지 곡류를 통틀어서 보면 보리와 조의 수확량이 늘어나 콩과 밭
벼의 수확 감소를 상쇄하는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표 6> 1939년 이재농가 상황

지역 벼농사 이재농가 이재 비율 구조 받은 구조 필요
농가 호수 호수 (%) 호수 호수
경기 229,138 116,866 51 36,602 80,264
충북 120,974 93,751 77 19,579 74,172
충남 207,057 144,673 69 50,309 94,364
전북 223,877 213,126 95 37,052 176,074
전남 403,884 174,082 43 56,119 117,963
경북 322,212 259,740 80 83,843 175,897

17) 소화 14년 한해지, 78~82쪽


150 역사와 현실 118

지역 벼농사 이재농가 이재 비율 구조 받은 구조 필요
농가 호수 호수 (%) 호수 호수
경남 277,416 161,576 58 37,828 123,748
강원 160,496 22,189 13 8,210 13,979
합계 1,945,054 1,186,003 60 329,542 856,461
출전 : 소화 14년 한해지, 90쪽
비고 : 이재농가 호수 및 구조 받은 호수, 구조 필요 호수 각각의 전체 합계는 원자료의 도별 수치
합산에 오류가 있어서 수정함.

수확량 감소는 농민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안기며 수많은 이재민을 발


생시켰다. 식민권력은 재해조사 과정에서 물 부족으로 모내기를 완료하지
못했거나, 했어도 벼가 고사하고 7할 이상 수확량이 감소한 경우를 이재농
가로 집계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표 6>에서 보는 것처럼 벼농사를 짓는
농가 가운데 60%가 가뭄 피해를 보았다. 피해 농가 중 자력이나 친척 및
이웃, 지주의 구조를 받은 농가 329,542호를 제외하고도 856,461호가 구조
가 필요한 농가로 분류되었다. 물론 조선총독부도 인정했듯이, 다소라도 한
해를 입지 않은 농가가 없었고 사실상 전 농가가 이재농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18) 그 정도로 한발로 인한 피해가 컸다.
수확 감소는 농가수지 악화로
이어졌다. 농산물, 현물로부터 얻
을 수 있는 수입이 줄어들었고,
본래 농산물로 자급자족하던 식
량을 사들이기 위한 현금 지출이
늘었으며, 모자라는 수입은 돈을
빌리거나, 부업이나 구제공사장
<그림 3> 익산군 왕궁면 저수지 균열 으로의 임금 취득으로 메워야 했
출처 : 소화 14년 한해지
다.19) 차입금은 다시 이자 부담
18) 소화 14년 한해지, 89쪽
19) 소화 14년 한해지, 102~104쪽의 경상북도 자작농과 자소작농, 소작농 각 가정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51

으로 이어져 가계 수지 개선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보다 사태


가 심각했던 빈민들 가운데는 초근목피와 묽은 죽으로 연명하다 아사지경
에 빠지는 등 생존을 위협받았다.
이런 가운데 다수 농민의 이주행렬이 이어졌고, 일부는 유랑민이 되었
다. 수업료를 내지 못한 학생들은 결석하거나 자퇴를 신청했다. 농업용수뿐
만 아니라 식수 부족 사태도 발생했다. 오염된 물을 마시거나 영양 결핍으
로 소화기 계통의 병과 결핵이 증가했고, 이질과 장티푸스 등 감염병이 유
행했다. 영양 상태는 어린이들의 체위 저하에도 영향을 주었다.20) 이처럼
가뭄이 드리운 그림자는 크고 짙었다.

<표 7> 전시 총동원체제기 일본의 쌀 공급량 (단위 : 1,000石, %)

지역 수이입 일본 수이입
조선 대만 베트남 태국 미얀마 합계(a) 내 합계(b) 비율
연도 생산 (a/b)
1937 6,736 4,856 11 208 - 11,815 67,340 79,155 14.9
1938 10,149 4,971 0 - - 15,217 66,320 81,537 18.7
1939 5,690 3,962 0 - - 9,949 65,869 75,818 13.1
1940 395 2,784 2,929 1,893 2,802 11,505 68,964 80,469 14.3
1941 3,306 1,970 3,751 2,903 2,916 14,882 60,874 75,756 19.6
1942 5,235 1,702 5,559 3,387 268 16,151 55,088 71,239 22.7
1943 - 1,638 3,719 1,177 120 6,654 66,776 73,430 9.1
1944 3,500 1,300 - - - 5,295 62,887 68,182 7.8
1945 1,421 151 - - - 1,573 58,559 60,132 2.6
출전 : 金子文夫 植民地 占領地支配 大石嘉一郞 編 日本帝國主義史 東京大學出版會, 429쪽
, 1994 「 ・ 」, , 3,

가뭄의 여파는 선행 연구에서 지적한 것처럼 제국 차원의 식량 조달 문


제로 파급되었다. <표 7>에서 보듯이 1939년 대가뭄으로 1940년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쌀 이출량이 급감했다. 이는 제국 차원의 식량 조달 문제로 이
의 사례들은 재난 전후의 가계 수지 변화를 잘 보여준다. 이에 관해서는 선행연구
에서 분석한 바 있다( 樋口雄一
, 1998 앞의 책, 211~212쪽).
20) 이재민의 건강상태는 樋口雄一
, 1998 앞의 책, 212~214쪽 참조.
152 역사와 현실 118

어져 일본은 1940년부터 점령지인 베트남과 태국,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쌀을 대량으로 수입했다. 1942년 한・수해는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쌀 공급 자체를 제약했다. 1943년 이후에는 아시아・태평양 일대에서 일본
의 전황이 불리해져 ‘남방’에서의 제해권, 수송문제가 발생하면서 동남아시
아로부터의 쌀 수입도 중단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식량 수급 사정은
한층 핍박받았다.21) 전쟁 상황과 함께 발생한 두 차례 조선에서의 재해는
일본제국의 식량 수급에 큰 장애가 되었다.

2. 재해대책의 전개와 특징
1) 제국 차원의 이례적인 대응

중일전쟁이 장기화하는 국면에서 가뭄으로 미곡 생산량이 감소하자 일


본의 식량 수급에는 큰 차질이 생겼다. 특히 1937~38년 조선에서 대풍작을
거둔 점에 비할 때 1939년의 대한해는 더욱 도드라져 보였을 것이며, “종
래 비교적 낙관적이었던 제국의 식량문제에 많은 의문점을 주었다.”22) 조
선이 일본 식량 조달의 핵심지대였고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슬로건으로
하던 상황에서 일본제국과 식민권력은 구체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조선총독부는 가뭄 기색이 역력해지던 1939년 6월 들어 대책 마련에 나
섰다. 6월 7일 총독부는 도 농무과장 회의를 개최하여 각 도에 못자리 용
수가 고갈된 경우, 못자리에 물이 있어도 논 자체에 용수가 부족하여 이앙
이 어려운 경우, 모가 부족할 경우의 배급, 이앙 때의 처치, 강우가 있을 경

21) 한국농촌경제연구원 편찬, 2003 앞의 책, 712~714쪽 ; 농촌진흥청 편, 2008 앞의


책, 355~357쪽 ; 이송순, 2008 앞의 책, 103쪽
22) 香山陽坪 朝鮮 旱害 二 朝鮮社會事業 20-2, 10쪽
, 1942.2 「 の ( )」 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53

우의 처치, 모내기한 논에서의 처치 등에 관한 상황별 조치를 정했다.23) 이


방침에 따라 각 도에서는 군과 읍면 단위로 자체 계획을 마련했다.24)
7월이 되어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더욱 나빠지자, 총독부는 7월 22일
오노 로쿠이치로( 大野緑一郎)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재해대책위
원회를 설치하고, 7월 25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다. 위원회에서는 26일
재해 상황 조사, 대용작의 파종, 구제토목공사나 부업 장려, 이민 알선 등
을 통한 이재자 구제방책, 이재지 부족 식량의 조정방책 등을 골자로 하는
한해대책요강을 발표했다.25)
각 도에서는 가뭄지역 조사를 통해 8월 15일 총독부로 대책안을 제출했
고, 총독부는 부내 7과에서 총 36명을 차출하여 경기도와 충청남북도, 전
라남북도, 경상남북도 등 7개 도로 7개 조사반을 편성하여 8월 18일부터
현지 조사를 보냈다.26) 대규모 인원이 동원된 조사반으로, 그만큼 총독부
도 사안의 중대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동시에 총독부 수뇌부도 시기와 지역을 나누어 한해지를 시찰했다. 오노

23) 소화 14년 한해지, 52~55쪽


24) 「慶南, 全北의 旱害對策」 每日新報 1939년 6월 8일 ; 「旱害克服의 對策」 每日
新報 1939년 6월 14일 ; 「江原道 移秧成績은 五割 程度에 未及」 每日新報
1939년 6월 15일 ; 「用水節約을 高調코 今後 假植을 奬勵」 每日新報 1939년
6월 16일
25) 「臨時災害對策委員會の設置」 同胞愛 17-9, 1939.9, 48~50쪽 ; 소화 14년 한
해지, 56쪽 ; 「旱害委員會 本府에 設置 决定」 每日新報 1939년 7월 22일 ;
「爲先 幹事會 열고 萬全策을 協議, 旱害對策委員會 活動」 每日新報 1939년
7월 23일 ; 「旱害對策에 完璧」 每日新報 1939년 7월 25일. 한해대책요강의 내
용은 「旱害對策ニ關スル件」(1939년 7월 26일), 旱害對策に關する主なる通牒
(소화 14년 한해지 附錄), 朝鮮總督府 司政局 社會課, 1~7쪽 참조.
26) 「旱害救濟對策調查!」 朝鮮日報 1939년 8월 4일 ; 「旱害 七道의 實情을 綜
合, 多角的 具體案 確立」 東亞日報 1939년 8월 19일. 조사반 조직은 소화
14년 한해지, 160쪽 참조.
154 역사와 현실 118

로쿠이치로 정무총감은 8월 1일부터 4일까지 충남과 전북지역 한해지역을


南次郞) 총독은 8월 11일부터 13일까지 경북과
돌아보았다.27) 미나미 지로(
경남지역을, 12일부터 오타케 쥬로(大竹十郞) 내무국장은 경기와 충북을, 미즈
타 나오마사(水田直昌) 재무국장은 충남과 전남북을 각각 시찰했다.28) 조사와
시찰 결과를 종합하여 오노 정무총감은 8월 14일 조선 한해 상황을 일본
내각에 보고하고 일본 정부의 경비 지출을 절충하기 위해 도쿄로 갔다.29)
이후 일본측에서 반응했다. 천황의 내탕금이 먼저 지출되었다.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척무대신은 8월 28일 히로히토 천황에게 조선의 한해
상황을 설명했고, 이후 히로히토는 9월 4일 히사마쓰 사다타카(久松定孝)
시종(侍從)을 조선으로 파견하여 이재민에 대한 내탕금 10만 원을 ‘하사’했
다. 히사마쓰 시종은 9월 7일부터 14일까지 조선 각지의 한해지역을 시찰
하며 직접 하사금을 각 도에 분배하기도 하였다. 각 도에서는 이를 ‘은사
恩賜)’기금으로 설정하여 한해구제용으로 사용했다.30) 내탕금 하사와 시종
(

27) 「大野政務總監 旱害地를 視察」 每日新報 1939년 7월 29일 ; 「旱害狀況을


視察, 大野總監, 全州서 一泊」 每日新報 1939년 8월 3일 ; 「代用食糧인 滿
洲粟 等 關稅 全部 撤廢를 决定」 東亞日報 1939년 8월 5일
28) 「自暴自棄하지 말고 가뭄과 싸워 익이자」 每日新報 1939년 8월 13일 ; 「水
田, 大竹 兩局長도 旱害狀況을 視察」 每日新報 1939년 8월 12일 ; 소화 14
년 한해지, 159쪽
29) 「南總督 以下 視察의 決論, “萬全 對策 時急 實施”」 每日新報 1939년 8월 15일
30) 「聖旨傳達」 同胞愛 17-10, 1939.10 ; 소화 14년 한해지, 137~144쪽 ; 「朝鮮
旱害狀况 小磯拓相이 奏上」 每日新報 1939년 8월 29일 ; 「朝鮮 旱害狀况을
小磯拓相 奏上」 東亞日報 1939년 8월 29일 ; 「朝鮮旱害御軫念 救恤金御下
賜」 每日新報 1939년 9월 5일 ; 「中南鮮 旱害에 惶感한 大御心」 每日新報
1939년 9월 7일 ; 「久松侍從 淸州 御着, 道廳에서 聖旨 傳達」 每日新報 1939
년 9월 9일 ; 「咸平, 羅州, 光山等 全南 旱害地를 御視察」 每日新報 1939년
9월 11일 ; 「朝鮮 旱害實情을 奏上, 天皇陛下 久松侍從에 賜謁」 每日新報
1939년 9월 17일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55

파견은 주요 재해 때마다 있었던 일이었는데,31) 천황의 인자함을 과시하며


조선 인민이 천황의 ‘적자( 赤子)’임을 보이려는 의도로 시행된 것이다.
가뭄으로 인한 조선 쌀의 수확량 감소는 제국 차원의 문제로 다뤄졌다.
당시 조선과 함께 일본 내에서도 시코쿠와 규슈지역에서 한해가 있었기 때
문에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가네미쓰 쓰네오( 金光庸夫) 척무대신
은 9월 8일 정례 각의 석상에서 일본과 조선의 한해응급대책 실시사항을
보고했고, 이 자리에서 한해대책 및 조선쌀 가격통제에 관한 내용이 논의
되었다.32)
조선총독부는 9월 16일 조선총독 명의로 총리대신과 척무대신 앞으로
내외지에 일관된 식량정책 수립을 건의하는 요망서를 전달했다. 요망서에
서 총독부는 조선에서의 제국식량정책이 “유감없이 진행하고 있으나, 조선
에서의 한해가 날로 심각해져 조선 내 식량 수급상 우려할 만한 사태”라는
점을 강조하고, 내외지 협력을 통한 적극적 식량정책 수립을 요청했다.33)

31) 시종 파견은 1923년 평안도 수해, 1925년 을축대홍수, 1928년 함경도 수해, 1930
년 풍수해, 1934년 조선 남부 수해, 1936년 조선 남부 대수해 때 있었다(「加藤侍
從 水害地 視察 每日申報
」 聖慮無量 水害 慰撫
 1923년 8월 28일 ; 「 하시고
로 侍從 差遣」 每日申報 1925년 7월 26일 ; 「關北水害地 視察次 甘露寺侍
從 入城」 每日申報 1928년 9월 21일 ; 「朝鮮 風水害에 救恤金 下賜」 每日
申報 1930년 7월 29일 ; 「災害地 尉問使 海江田侍從 入城」 每日申報
1930년 8월 1일; 「三南 水害에 救恤金 御下賜」 朝鮮中央日報 1934년 8월
11일 ; 「朝鮮 被害地에 侍從을 御差遣」 每日申報 1936년 9월 4일 ; 「侍從
御差遣에 南總督 恐懼謹話」 每日申報 1936년 9월 5일 ; 朝鮮總督府, 1931
昭和五年度 朝鮮風水害誌, 11~12쪽 ; 朝鮮社會事業協會 編, 1938 昭和十
一年の風水害誌, 朝鮮社會事業協會, 323~326쪽 참조).
32) 「旱害對策으로 關係省 連絡會議」 東亞日報 1939년 9월 9일 ; 「金光 拓相이
報告한 旱災와 朝鮮 米價 對策」 朝鮮日報 1939년 9월 9일 ; 「旱害對策 樹
立코저 各省聯絡會議 開催」 每日新報 1939년 9월 10일
33) 朝鮮總督府農林局 編, 1940 「第二十三 內外地一貫ノ食糧政策ニ關スル件」 旱
156 역사와 현실 118

이후 가네미쓰 척무대신은 조선에서의 피해 상황 조사 및 조선의 농정계획


수립을 위해 10월 6일 경성에 와서 8일부터 13일까지 조선 시찰을 진행했
다. 척무대신의 조선 시찰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이처럼 며칠에 걸친 실제
현장 시찰은 처음으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34)
일본의 정당과 그 소속 제국의회 의원들의 조선 한해 시찰도 이어졌다.
식민지의 특정사안에 대하여 일본 내 복수의 정당이 시찰단을 꾸린 일도
이례적이었다. 여기에는 일본에서도 중일전쟁으로 인한 물자 소모와 대가
뭄이 중첩되면서 에너지와 식량 부족이 심각해진 배경이 존재했다. 1939년
가을 들어 쌀 부족이 현저해져 각종 탈법행위 및 암거래가 발생했고, 일본
정부가 물자 부족 및 물가 상황 대처에 실패하면서 일본 국민의 불만이 팽
배했다.35) 각 정당은 핵심사안이었던 미가 문제에 대응하고 이를 정치적으
로 활용하기 위하여 이와 관련이 깊은 조선에서의 가뭄 상황을 조사하고자

害ト施設事項, 朝鮮總督府農林局, 30~32쪽


34) 가네미쓰 척무대신의 시찰 일정은 「金光拓務大臣旱害地視察ニ関スル件」 邦人
旅行者關係綴(CJA0002356), 1939 ; 高等外事月報 3, 1939.9, 21쪽 ; 高等
外事月報 4, 1939.10, 14쪽 ; 金光拓相 來鮮 車中 談, 「旱害實情 調査後 積極
對策을 樹立」 每日新報 1939년 10월 5일 ; 「社說 - 金光 拓相의 旱害地 視
察, 積極 對策 進行을 希望」 每日新報 1939년 10월 6일 ; 「金光拓相 今朝
退城, 旱害地 視察에 登程」 每日新報 1939년 10월 9일 ; 「金光拓相 慘憺한
旱害地 咸悅平野를 視察, 扶餘로부터 全州 到着」 每日新報 1939년 10월 11
일 ; 「旱害 克服精神에 金光拓相 感動!」 每日新報 1939년 10월 13일 ; 「慶北
內務部長 東上, 旱害 實情을 報吿」 每日新報 1939년 10월 17일 ; 朴致祐,
1939.12 「旱害七道의 現地報告」 農業朝鮮 2-12, 大同出版社 참조. 척무대신
의 적극적인 행보에는 아베 노부유키 내각이 조각될 때 미나미 총독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던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성격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朝鮮統治
問題 中心 拓相, 總督과 要談」 朝鮮日報 1939년 10월 8일 참조).
35) 林茂・辻清明 編, 1981 日本內閣史録 4, 第一法規, 126~129쪽 ; ゴ-ドン・M・
バーガー, 坂野潤治 訳, 2000 大政翼贊會 : 國民動員をめぐる相剋, 山川出
版社, 156~157쪽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57

했을 것이다.
일본의 정당들은 1939년 10~11월에 조선 한해 시찰을 진행했다. 정우회
政友會)에서는 농정(農政) 전문가 스케가와 게이시로(助川啓四郞)와 요시우
(
에 쇼료(吉植庄亮), 미야자키 하지메(宮崎一) 등 3명의 중의원의원이 파견되
었다.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에서는 중의원의원 스기야마 모토지로(杉山元
治郎), 미야케 쇼이치(三宅正一), 토미요시 에이지(冨吉榮二)와 당 농촌부장
쓰노다 도자부로(角田藤三郞)가 시찰했다. 민정당(民政黨)에서도 스에마쓰
가이이치로(末松階一郞), 나카무라 우메키치(中村梅吉) 의원이 시찰 길에 올
랐다.36)
각 정당 시찰단은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한해대책안’을 마련하여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한해대책 실현을 요구했다. 사회대중당은 시찰위원들
이 상임위원회에 시찰내용을 보고하고, 11월 16~17일 문부성과 척무성, 농
림성을 방문하여 대책 실현을 요청했다. 정우회는 11월 24일 임시총무회에
서 조선한해대책 및 미곡응급대책을 협의한 뒤 정부 및 총독부와 교섭할
위원을 지명했고, 민정당도 11월 30일 간부회 및 정무조사회에서 시찰원
보고를 마친 뒤, 교섭 위원을 지명했다.37)
한해대책 수립에는 예산 문제가 중요했는데, 총독부는 9월 4일 내무국장

36) 高等外事月報 4, 1939.10, 11~12쪽 ; 政友 旱害調査委員 談, 「鮮米의 增殖


을 來議會에서 强調」 每日新報 1939년 10월 12일 ; 「政友會의 三代議士 全
北 旱害를 視察」 每日新報 1939년 10월 16일 ; 「民政黨 旱害視察」 每日
新報 1939년 10월 26일 ; 杉山 代議士 入城談, 「朝鮮의 農民經濟 旱害 抵抗
力이 薄弱」 每日新報 1939년 10월 31일 ; 「社會大衆黨 派遣, 旱災地視察團
入京」 朝鮮日報 1939년 10월 31일; 「旱害 視察次로 民政議員 來鮮, 兩氏
明日 入城」 每日新報 1939년 11월 1일 ; 「民政黨 代議士 全北地方 視察」
每日申報 1939년 11월 6일
37) 「朝鮮의 旱害 應急對策 即時 實施를 要求, 杉山代議士等 農省 訪問」 每日
新報 1939년 11월 18일 ; 高等外事月報 6, 1939.12, 43~46쪽
158 역사와 현실 118

통첩으로 재해지역인 경기 이남 7도지사 앞으로 「한해대책사업실시요강」


을 발포했고, 한해구제사업으로 토지개량사업비, 사방사업비, 토목비, 임도
비, 부업장려비와 종곡[보리종자] 대부비를 설정해 시행할 것을 밝혔다.38)
이후 총독부는 척무성, 대장성과 절충하여 1939년 조선총독부특별회계 잉
여금에서 한해대책시설비용을 충당했고, 1940년도 조선총독부특별회계 추
가예산으로 한해대책비를 반영시키는 등 예산을 확보해갔다.39)

<표 8> 1939~40년 한해구제사업비 예 결산(단위 : 원)

예산 결산
구분 1939년 1940년 총 경비 1939년도 1940년도 총 경비
총경비 총경비 합계 총경비 총경비 합계
한해대책사업비 41,160,381 11,969,401 53,129,782 40,523,384 9,457,491 49,983,885
부업장려비 1,609,446 688,140 2,297,586 1,516,451 688,140 2,204,591
종곡배급비 6,416,410 6,416,410 6,416,410 6,416,410
아동교육비 198,389 161,610 359,999 198,389 161,610 359,999
노동자알선비 439,315 439,315 439,315 439,315
합계 54,626,358 13,377,401 68,003,759 49,093,949 10,307,241 59,404,200
출전 : 소화 14년 한해지, 169~173쪽
비고 : 아동교육비는 ‘아동급식 및 학용품비’의 약칭.

38) 「 旱害救濟事業實施方ノ件」(1939년 9월 4일), 旱害對策に關する主なる通牒


(소화 14년 한해지 附錄), 朝鮮總督府 司政局 社會課, 16~18쪽
39) 「拓務省所管旱害対策施設諸費ヲ朝鮮総督府特別会計剰余金ヨリ支出ス」(1939
년 12월 19일),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A02030133600, 公文類聚・
第六十三編・昭和十四年・第六十九巻・財政八・会計八 ; 「昭和十四年度特別会
計歳入歳出予算追加」(1940년 2월 19일), JACAR : A03022535900, 御署名原本・
昭和十五年・予算二月一九日 ; 「昭和十五年度各特別会計歳入歳出予算追加」
(1940.3.27.), JACAR : A03022536600, 御署名原本・昭和十五年・予算三月二七日 ;
「本府 旱害對策費等 中央과 折衝 完了」 每日新報 1939년 12월 16일 ; 「明春
三月末까지의 旱害救濟豫算 二千八百萬圓」 朝鮮日報 1939년 12월 20일 ; 「朝
鮮 旱害 狀況과 救濟對策을 說明」 每日新報 1940년 2월 24일. ; 「朝鮮旱害救
濟事業資金 二千三百四十萬圓 預金部委員會서 決定」 每日新報 1940년 3월
2일 등 참조.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59

그 결과 1939년 한해구제사업비 예산 및 결산은 <표 8>과 같다. 토지개


량비와 사방비( 砂防費), 임도비(林道費), 토목비가 포함되는 한해구제사업비
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결산 기준으로 1939년 총경비는 49,093,949
원, 1940년 총경비는 10,307,241원으로, 총경비 59,404,200원이 소요되었
다. 앞서도 확인했듯이 기존의 재해대책사업과 비교해 막대한 자금이 투입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식민권력의 한해대책사업이 갖는 성격을 살펴보도록 하자.

2) 자력갱생과 내핍, 식량 증산 강조

총독부 임시재해대책위원회는 1939년 7월 26일의 한해대책요강에서 이


재민들에 대한 구제방책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이재자에는 자력갱생의 정신을 진작시키는 것 외에, 되도록 인보상조( 隣保相助)


轉業)이 가능한 자는 극
또는 지주 등의 구조에 의하도록 하고, 출가 또는 전업(
勞力) 수요지에 알선함으로써, 기타 이재자는 그 지방에서 적당
력 그것을 노력(
한 구제사업을 행하여 노은(勞銀) 수입에 의한 구제방법을 고구(考究)하게 하고,
… 노유・부녀・병약 등의 원인으로 생업에 나갈 수 없는 자에 대해서는 직접구
조를 하는 것으로 함.40)

인용문 내용을 정리하면 첫째, 이재민의 자력갱생을 강조했다. 토목공사


와 같은 구제사업에 참여하여 임금을 취득하는 방식으로 재해를 극복하라
는 것이다. 둘째, 자력갱생에 대한 강조는 금품이나 현물을 지급하는 ‘직접
구조’ 방식의 최소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웃과 친척, 지주 등 지
역사회의 상부상조를 강조하고, 늙고 어리거나 병약하여 직접 생업에 종사

40) 소화 14년 한해지, 153쪽


160 역사와 현실 118

할 수 없는 경우에만 직접 구제하겠다는 것이다. 셋째, 노동력이 필요한 곳


으로의 이주, 알선을 표방했다.
이러한 방침은 식민지시기 재해대책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
다. 자력갱생은 ‘근로관’을 주입시키려는 교화와 통제의 원리가 담긴 것이
고, 이는 ‘조선인 나태론’ 인식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직접구조의 최소화
는 지역의 지주나 이웃에 의한 구제를 ‘미풍’으로 선전하면서 통치권력의
비용 부담을 줄이겠다는 의도가 있었다.41) 다만, 셋째의 노동 알선은 전시
체제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1937년 이후 총독부는 조선 농촌의 ‘과잉인구’
문제를 해소하겠다는 방침과 조선 북부 개발에 따른 노동력 확보를 위하여
만주 이민 알선사업과 토건・광산 현장으로의 노동자 알선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일본 등 노동력이 부족한 지역으로의 이주도
진행되었다. 곧, 이재민들을 만주 개척과 식민지 개발, 전쟁 수행이라는 정
책 목표에 활용하고자 했다.42)
미나미 총독은 1939년 8월 14일 임시재해대책위원회 석상에서 재해대책
에서의 주의사항을 언급했다. 그는 이재민 구제 방법으로 “어디까지든지
근로정신에 의할 것이며, 그러기 위하여는 어떠한 일이든지 일할 것을 주
어 구제할 것이며, 단순히 식량만을 주어 구제하는 방법을 취하지 말 것”
과, “일반 이재민으로 하여금 자력으로 재해를 이기고 나서도록 할 것이며,
이와 동시에 의뢰심을 가지지 않게 적절한 지도를 할 것”을 당부했다.43)
그는 9월 19일 총독부 정례국장회의에서는 천재( 天災)가 있든 없든 노인과
어린이, 불구자들을 사회사업으로 구제하는 것은 당연하나, “일반 이재민에
대하여는 직접 구제를 일체로 피할 것이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아

41) 식민권력의 재해대책 기조에 관해서는 고태우, 2014(a) 앞의 논문, 404~409쪽 참조.
42) 이주 알선 결과, 도내 21,176명, 도외[주로 조선 북부] 30,000명, 일본 22,608명,
총 73,784명이었고, 만주로는 849호가 이주했다(소화 14년 한해지, 181~182쪽).
自力 克服 勸 食糧 給與 不可 每日新報
43) 「 으로 을 奬, 의 는 」  1939년 8월 15일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61

라!’ 하는 주지 아래 근로정신을 적극적으로 일으킬 것”을 지시했다.44) 식


민지기 총독부 관료들의 재해 인식에 기반을 둔 전형적인 발언이다.
식민권력의 구제방침은 앞의 <표 8>에서 정리한 사업비에 반영되어 있
다. 토건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한해대책사업비는 이재민의 임금 취득을 기
하는 것으로, 여기에 속한 사업들은 총독부가 정책적으로 추진하던 중소하
천개수사업이나 치도사업, 사방사업, 그리고 조선증미계획( 朝鮮增米計劃)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수리관개사업에 이재민을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
업장려비와 종곡배급비는 식량 구제가 아닌 이재민이 직접 농사일과 부업
을 하는 것에 대한 보조비였다. 노동자알선비는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 북
부 지역에 부족한 노동력을 이재민을 보내 충당하기 위한 자금이었다.
한편으로 식민권력은 ‘인보상조’와 지주의 구조를 강조하며, 소작인에
대한 지주측의 구제를 장려했다. 소작료 감면, 종곡의 급여 또는 대부, 영
농자금과 생활자금 대부 등을 권장했다. 각 도에서는 도·군 농회 등의 주최
로 지주간담회를 개최하여 지역마다 자체 방침을 정하도록 했다.45) 예를
들어 1939년 8월 30일 충남 아산군 농회는 군 내외의 500정보 이상 소유
한 대지주 150여 명과 각 면장 등이 참여한 지주간담회를 개최했다. 이 자
리에서 수확 7할 이상의 감수는 소작료와 금비대( 金肥代)를 면제하고, 2~3
할 이상 감수는 소작료와 비료대를 경감하며, 대용작물에 대한 소작료는
징수하지 않고, 지주가 보리씨를 급여하여 보리 이모작을 철저히 장려한다
는 결의가 있었다.46)
식민권력은 직접구조를 위한 자금의 경우 의연금을 조성하여 충당하고

44) 「總督府 局長會義에서 旱害民 救濟를 激勵」 每日新報 1939년 9월 20일


45) 소화 14년 한해지, 235~236쪽 ; 「地主懇談會への本府の要望七項目」 京城
日報 1939년 9월 13일 ; 「總督府 要望事項과 地主들 意見 一致」 每日新報
1939년 9월 16일
46) 「旱害對策 協定, 牙山郡 地主懇談會서」 朝鮮日報 1939년 9월 2일
162 역사와 현실 118

자 했다. 흥미로운 점은 전국 단위 의연금 모금의 경우 풍수해 때는 여러


차례 있었으나, 한해에 대한 모금은 이때가 처음이었다.47) 그만큼 사태가
심각했던 점, 가뭄 피해가 식민권력의 대처 한계를 넘어섰던 점을 의미할
것이다.48) 모집 방법은 1939년 9월 15일부터 12월 31일까지 조선 내 100
만 원, 일본 및 대만, 만주 등에서 50만 원, 총 150만 원 모금을 목표로 조
선사회사업협회에서 의연금을 수합하겠다는 것으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
연맹과 조선사회사업협회, 도・부・군・면 등 관청, 각 신문사가 모집을 담당
했다. 각계각층에서 기부 행렬이 이어졌으나, 당초 기한이었던 1939년 연
말까지 모금은 부진했다.49) 기한을 연장한 결과, 1941년 8월 25일 당시까
지 총 1,526,090.56원이 모금되었다.50) 의연금은 피해 학생의 급식 및 학용
품비, 노동능력을 상실한 자에 대한 직접구제비로 활용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직접구조의 최소화, 자력갱생의 강조라는 재해대책의
기본 구조 이외에 식민권력은 전시 일본제국의 식량 공급지로서 조선의 역

旱害救濟義捐金 廣範圍로 募集方針!」 朝鮮日報 1939년 8월 9일 ; 「義捐


47) 「
金을 거두자, 얼마든지 조흐니 정성ᄭᅥᆺ 모하서 朝鮮社會事業協會로」 每日
新報 1939년 8월 10일. 한해 때 신문사나 지역 단위의 관청 및 민간단체가 의연
금을 모금한 적은 있으나, 총독부 차원에서 조선사회사업협회를 통해 모금을 진행
한 것은 1939년이 처음이었다.
48) 당국의 대응 한계선을 넘어선 점은 관료들의 발언에서 유추된다. 총독부 당국자들
은 전시 비상시국에 국민 전체가 절약하는 때에 비용이 드는 의연금 모집이 자신
들의 본의가 아닌 점을 언급하고, 한해가 광범하고 심각하여 관의 대책만으로는
구제의 목적을 충분하게 달성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했다( 本府當局 談
, 1939.10
「 旱害對策事業實施竝に義捐金募集に際して」 同胞愛 17-10, 4쪽 ; 大竹十
郞, 1939.11 「旱害對策竝に義捐金募集に就いて」 同胞愛 17-11, 6~7쪽).
49) 「이래 가지고 어떠케 百萬圓을!」 朝鮮日報 1939년 10월 17일 ; 「社說 - 旱害
義捐金」 朝鮮日報 1939년 12월 14일 ; 「社說 - 旱災와 年末의 同情金」 東
亞日報 1939년 12월 16일
50) 소화 14년 한해지, 319~322・332~334쪽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63

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방침을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궁극적으


로 식량 증산을 통한 일본 본국으로의 이출량 확보였다.
식민권력은 식민지 농촌에 대용작( 代用作)과 이모작을 강요했고, 제국 차
원에서는 새롭게 조선증미계획이 입안・실행되고, 공출 및 배급제도가 실시
되었다.51) 대가뭄으로 수확량이 감소한 와중에 증산 및 공출과 배급을 추
진하기 위해서는 식량 소비도 바뀌어야 했다. 총동원기구인 국민정신총동
원 조선연맹과 그 말단 조직인 애국반은 절미( 節米)운동과 대용식・혼식 캠
페인을 벌였다. 그들은 절식(節食)과 절주(節酒), 금주를 강조했으며, 과자
제조에 소비되는 곡식량을 줄이기 위해 어린이의 과자 섭취량을 억제하고
자 했다. 풀뿌리와 초목의 싹을 대용식으로 채취하고 조리해 먹을 것을 장
려했다. 하루 두 끼를 먹더라도 잘 씹어 먹으면 영양가가 향상되어 도리어
건강을 증징할 수 있다고 했다.52) 이는 곧 ‘내핍’을 뜻한다. 경찰당국은 주
민 단속을 강화하면서 애국반 조직을 활용하여 대대적인 시국좌담회를 개
최하며 그 운동을 뒷받침했다.53)
미나미 총독은 1939년 8월 13일 한해지 시찰 후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
겼다. 관민이 협력하여 천재를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점, 각지 애국반
이 천재극복을 위해 제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점을 평가하면서, “한해로
민중의 식량문제도 고려하는 때이기 때문에, 보리, 기타 군용마량( 馬糧)의
공출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용마량의 공출

51) 이송순, 2008 앞의 책, 제2장 참조.


52)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の通牒」 同胞愛 17-9, 1939.9, 51・53~54쪽 ; 「春
窮期克服實施要項」 朝鮮社會事業 18-4, 1940.4, 61~62쪽 ; 「菓子 조금식 먹
자, 兒童의 旱害克服策」 東亞日報 1940년 3월 28일
53) 朝鮮總督府 警務局 保安課, 1940 銃後を守る時局座談會, 11~13쪽 ; 참고로
1939년 8월부터 11월까지 한해를 주제로 한 좌담회는 총 42,844회 개최, 참가 연인원
2,275,547명(1회 평균 53.1명 참가)이었다(朝鮮總督府 警務局 保安課, 1940 앞의
책, 12쪽). 그만큼 식민당국이 한해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64 역사와 현실 118

은 총후국민의 당연한 책무라고 자각하며 공출하고 있는 상황은 무엇보다


유쾌하였다”라고 하였다.54) 이 부분에서 ‘민중의 식량문제’보다는 전쟁 수
행을 위한 ‘식량 공출’에 주안점이 가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상에서의 제반 대책을 통하여 식민당국은 대가뭄을 성공적으로 극복
했다고 자평했다. “따뜻한 당국의 구조 손길이 뻗치고 자력에 의해 갱생하
고자 하는 저[이재민]들의 강한 정신과 어울려서 가장 우려되던 단경기( 端
境期)도 춘궁기도 아름답게 돌파”했다.55) 이는 과연 얼마나 실상을 말해주
는 것일까?

3. 식민지민의 다성성(多聲性)과 ‘내선일체’와의 거리


1) 재해구제사업으로의 기투, ‘미담(美談)’의 탄생

한해구제사업비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한 한해대책사업비는 토목공사에


이재민을 동원하여 품삯을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한해구제토목사업으로
서 도로공사나 수리・개간공사는 일제가 산업개발을 목적으로 진행한 것으
로, 식민권력이 본래부터 실행하려던 사업을 재해대책으로 전용한 것이 많
았다. 또한 토건업자의 공사 이윤 추구라든가 자본가의 농업경영 확대 등
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업이기도 했다.56) 비록 공사 임금이 지나치게 헐
값이거나 임금 체불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이재민들은 공사를 통한 임금
획득의 기회를 포착하고자 하였다.

54) 소화 14년 한해지, 159쪽


55) 소화 14년 한해지, 105쪽
56) 구제토목사업의 성격과 이를 둘러싼 이해관계는 고태우, 2014(a) 앞의 논문, 409~
413쪽 참조.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65

이러한 재해구제사업을 둘러싼 문화는 1939~40년 대가뭄 당시에도 예외


는 아니었다. 먼저 한해구제공사 유치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예를 들어
경기 장단군 장단면에서는 1922년에 진남수리조합을 만들려다가 실패했던
면민들이 가뭄을 계기로 재해민 구제와 미곡 증산을 명분으로 한 수리조합
설치를 식민당국에 제안했다. 주민들은 1,330여 명이 연명한 진정서를
1939년 9월 당국에 제출했다.57) 1940년 2월에는 충남 당진군 이재민들이
춘궁기에 대비하여 합덕평야에서 한진항( 漢津港)까지 읍면도로를 개수하는
공사를 한해구제사업으로 진행해달라며 31명이 연서한 진정서를 충남도청
에 제출했다. 진정운동에는 임금 획득과 함께 도로 개수로 인한 한진항의
무역을 촉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58)
한해구제사업 유치운동 이외에 식민지민들은 재해 방지를 위한 수리조
합 인가나 치수공사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예컨대 1939년 7월 전남
영광군 묘량면에서는 해마다 발생하는 홍수와 한재에 대비하기 위하여 수
리조합 설립을 인가해달라고 49명이 연서하는 진정운동을 벌였다.59) 전북
옥구에서는 1939년 8월 다년간 지역 현안이었던 만경강 호안공사를 촉진
하기 위해 도회의원과 면장, 주변 농장 주임 등이 주축이 되어 전북도당국
에 진정했다.60)
이렇게 각지에서는 한해 구제를 위한 저수지 설치나 기정 공사의 촉진,
신규공사의 시행과 관련한 운동을 활발히 벌였다.61) 한해구제사업자금이
유포되는 기회를 포착하기 위한 대응이다. 또한 이재민들은 “다투어 당국
이 시행하는 구제공사에 출역”하려 했고, 이에 각지에서 시행되는 구제공
57) 「長湍 巨谷住民들이 水組 復活을 運動」 每日新報 1939년 9월 21일
58) 「春窮期에 勞賃 獲得코저 道路, 港灣改修 陳情」 東亞日報 1940년 2월 14일
59) 「旱災 恒久對策으로 水組 設置를 陳情」 朝鮮日報 1939년 7월 22일
60) 「旱害救濟事業으로 萬頃江 護岸工事, 澮縣面에서 道에 陳情」 每日新報
1939년 8월 6일
61) 高等外事月報 3, 1939.9, 25~26쪽
166 역사와 현실 118

사의 출역 상황은 양호했다.62)
심지어 당국의 구제사업에 감사하는 기념비를 세우는 일도 있었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국민정신총동원 구계리연맹원들은 예전부터 자신들이 요구
하던 임도개착공사가 한해구제사업으로 실행된 점을 총독의 “자애로운 아
버지 같은 마음”이라고 표현했다. 그들은 “거룩한 당국의 정치를 칭송”한
다는 글귀를 비석에 새겼다.63) 국민정신총동원 구계리연맹이 세운 비석이
기 때문에 식민통치를 미화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었을 수 있지만, 지역 현
안이었던 임도 개통은 지역민들에게 마을과 마을 사이의 소통과 경제적 교
류 증대를 기대하게 만들 수 있었다. 더구나 재해구제공사의 실시는 대가
뭄이 닥친 이재민들이 품삯을 취할 기회였기에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재해구제공사에 뛰어드는 것 외에 식민지민들은 협동, 단결하여 적극적
으로 재난을 극복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식민당국은 ‘미담가화( 美
談佳話)’로 선전했는데, 식민당국의 한해보고서에 등장하는 ‘미담’ 내용을
정리한 것이 <표 9>이다.
총 69건의 사례를 참여층과 내용별로 분류해보았다. 참여층을 보면 지주
와 자산가가 가장 많은 27건, 중심인물 등 적극적인 활동을 보인 인물이
17건, 부락연맹과 애국반, 학교 등 단체가 15건으로 다수를 차지했다. 내용
을 보면, 발동기 등을 활용한 용수 확보 등의 관개 활동이 24건, 주민들이
공동으로 모내기를 완료하는 등 ‘공동작업’이 16건, 그리고 이재민에게 곡
식을 기증하거나 생활비를 보조하는 현금・물품 보조가 10건이었다.

高等外事月報 9, 1940.4, 11~12・14쪽


62) 
63) 경남 창녕군 영산면 소재 구계임도개통기념탑( 九溪林道開通紀念塔) 비문. 이 비
문에 대한 소개는 고태우, 2014(b) 앞의 논문 참조. 실제로 1939년 가뭄이 심각해
지자 영산면을 비롯한 창녕군 유력자들은 저수지 개수와 임도 개설 등을 경남도청
에 진정하고, 한해극복협의회를 개최했다(「 旱害對策 促進 昌寧 郡民代表
을 , 들이
上道 陳情」 朝鮮日報 1939년 8월 17일 ; 「旱害克服協議會 昌寧에서 開催」
東亞日報 1939년 9월 10일).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67

<표 9> 1939년 한해 미담 내용 분류

참여 계층 신분 내용
지역 지주 관리 소작 種穀 현금. 구제
중심 료 세 의연
(건수) 자산가공직자 회사 단체 인물 합계 감면/ 급여 대납 물품 회 공 금 관
금 개 식수 교육 공동 기타 합계 참여 계층 신분
비고
기타 활동 제공 보조 작업
면제 대부 보조 사
경기
7 2 1 2 3 15 2 1 1 4 2 2 2 1 2 17 단체(부인회1)
(15)
충북 단체(연맹・애
3 1 3 7 2 2 2 1 7
(7) 국반2)
단체(연맹・애
충남 국반1)
14 3 1 3 7 28 2 3 1 5 1 2 5 2 2 6 29
(28) 기타(중심인
물2)
전남 단체(연맹・애
2 3 5 3 1 2 6
(5) 국반3)
경북 기타(중심인
1 2 2 4 9 1 8 7 16
(9) 물4)
경남 기타(중심인
2 3 5 1 4 3 8
(5) 물3)
합계 27 8 2 15 17 69 4 6 2 10 4 4 24 2 7 16 4 83
출전 : 소화 14년 한해지, 436~471쪽 ; , 1943  全羅南道
の 昭和十四年 全羅南道旱害誌
, 293~296쪽
비고 : ①참여 계층・신분 중, ‘지주・자산가’에는 기업가도 포함. ‘관리・공직자’ 중, 공직자에는 면협의
회원, 면서기, 구장직 포함. ‘중심인물・기타’에는 자료에 “중심인물”이라고 표현된 사례 및 신
분이 불분명한 인물을 포함. “중심인물”로 표현된 수는 ‘참여 계층・신분 비고’란에 기재.
②내용에는 건당 서로 중복되는 항목이 있으면 각각의 항목에 별도로 합산. ‘구제회・공사’에는
한해구제회 설립과 구제공사 시행한 경우를 합산. ‘관개 활동’은 발동기나 급수 펌프를 사용한
경우, 간이 우물 굴착 또는 용수공사 등을 지칭. ‘공동작업’은 공동노동으로 모내기하거나, 물
공급 등을 진행한 경우.

물론 위 ‘미담’ 사례는 식민권력의 공식 보고서에 소개되었기 때문에 통


치권의 의도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첫째, 지주의 경제적 행위가 ‘미
담’으로 포장되었다. <표 9>에서 보이는 지주・자산가 사례들은 대체로 자
기 토지의 소작인에 대한 처우 개선[소작료 감면, 위로금 제공, 생활비 지
급 등], 발동기를 활용한 용수 공사 등을 소개한 것들이다. 본인 소작인에
대한 처우 개선을 ‘미담’으로 분류할 수는 있지만, 이는 소작인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려는 행위이기도 하며, 관개 공사는 지주 자신의 경제적 피해를
줄이려는 행동이기도 하다.
168 역사와 현실 118

둘째,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산하
부락연맹과 애국반 활동이 선전되었
다. 앞서 언급했듯이 부락연맹과 애
국반은 절미운동 등 한해를 극복하
기 위한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
한 활동에 대한 기록은 총동원기구
가 당국의 시책에 따라 말단에서도
잘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셋째, ‘미담’ 가운데는 일본인 사
례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내선융
화를 의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림 4> 괴산군 청안면 말라붙은
백사천 바닥을 파고 있는 농민들
예를 들어 충남 논산의 지주 이우치
東亞日報 1939.8.3.
출전 : 
井內門十郞)는 논산군 성동면 주민
(
들이 강경천의 흙탕물을 음료수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본인 논에 관개를
중지하고 관개용수를 주민들의 음료수로 제공하며 본인 모가 고사하는 손
해를 감수했다. 충남 부여군의 아오키( 靑木龜吉)는 부근의 궁핍 농민 32명
분의 호별세를 대신 납부했다.64) 이러한 사례를 총독부는 내선융화의 발현
으로 선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요컨대 ‘미담’ 사례는 관민이 일치협력하여 대가뭄을 잘 극복하고 있다
는 점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미담’을 모범사례로 소개함으로써 또 다른
‘미담’ 사례를 자발적으로 끌어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식민권력의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미담’의 이면을 독해할 필요
가 있다. 가뭄의 극복은 식민권력뿐만 아니라 여타 식민지민에게도 최우선
과제였다. 부락연맹과 애국반에서의 활동도 통치당국의 의도에서만 이뤄진
64) 각 사례는 소화 14년 한해지, 451・453쪽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69

것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한발이 격심한 가운데 전 마을 사람들이 밤낮으


로 보를 개축하고 물을 끌어오는 행위65)는 생활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자발
성이 동반된 것일 수밖에 없다.
<표 9>에서도 보이는 ‘중심인물’들은 수로 개착, 공동 모내기 등 본인이
제기한 활동이 마을주민의 호응을 얻은 점으로 볼 때, 지역사회의 신임을
얻어 발언권, 주민 동원력이 있었던 인물들로 추정된다.66) ‘중심인물’은 식
민권력의 ‘육성’에 의해 창출된 면도 있으나, 지역사회의 신망을 바탕으로
주민들을 대변하는 구실을 하는 등 양면성이 있다.
가뭄에 허덕이는 사람들로서는 조금이라도 흉작을 면하고 기근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일 수밖에 없다. <그림 4>에서 보듯이 산과 초목, 모
든 생명체가 가뭄에 시달려 생기가 없는 상황에서도 마른 개천을 파내어
물을 찾아 우선 마른 목을 축이고, 물줄기를 끌어내 조금이라도 곡식을 심
는 것이 나을 것이다.67) 이러한 점에서 ‘미담’ 사례에는 이재민들의 협동과
단합이 내재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미담’은 의연금 모금 과정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앞서 언급했듯이
1939년 연말까지 의연금 모금 성적이 총독부의 목표치에 미달하면서 부진
한 점도 있었다. 총독부 직원 봉급에서 일률적으로 기부금이 공제되거
나,68) 지역별로 모금액이 할당되는 등 모금 과정에서 반강제적인 성격도
있었다.69) 그러나 전반적으로 쌓이는 의연금과 함께 조선인들의 미담가화

65) 소화 14년 한해지, 459~461・463~464・468~469쪽 ; 全羅南道, 1943 昭和十四


年の全羅南道旱害誌, 296쪽
66) 이 점에서 김민철이 40~50대의 경제적 능력과 실무행정력을 가진 지역유력자로서
촌락과 면을 활동공간으로 삼아 영향력을 행사한 이들을 ‘중심인물’로 정의한 것
과도 부합한다(김민철 지음, 2012 기로에 선 촌락 – 식민권력과 농촌사회, 혜안,
148~153, 290쪽 참조).
白沙川을 파흩이며 水源을 찾는 焦躁心」 東亞日報 1939년 8월 3일
67) 「
旱害救濟義捐金을 內地, 滿洲서도 募集」 朝鮮日報 1939년 9월 19일
68) 「
170 역사와 현실 118

도 늘어갔다.
생면부지임에도 물리적 장벽을 넘은 ‘동족애’가 발현되었다. 함북 경흥
군 경흥면에서는 촌락민들이 1938년 수해로 큰 곤란을 겪었지만 전국 각
지로부터 구제와 격려를 받았다며, 은혜를 갚는다면서 위문금을 보냈다.70)
시각장애인들도, 요양원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던 환자들도 “동족애의 동
정”을 발휘했다.71) 같은 재해민 처지로서 자신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있
는 이재민을 위해 구제금을 모금하는 이도 있었다. 일례로 전북 고창군 대
산면 한 공사장의 이재민 노동자들은 자신들은 몸이 성하여 품삯을 받아
먹고살지만, 신체 불구인 이재민들은 그것도 곤란하다면서 현금을 모아 보
냈다.72)
어려운 처지에서도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나섰다. 학생들이 폐품을 모으
거나 논밭에 떨어진 벼와 조 이삭을 모아 판 돈, 점심밥을 몇 끼 굶어 모은
돈이 신문사에 기탁되었고,73) 일본과 만주의 해외 유학생들은 학비를 아껴
성금에 보탰다.74) 유치원생들도 모금에 동참했다.75) 회갑연보다 성금을 중

69) 지역별 할당 사례는 「 罹災民 義捐金 配當」 朝鮮日報 1939년 10월 16일 ; 「寳城
旱害義捐金 千五百圓 配當」 朝鮮日報 1939년 10월 25일 ; 「仁川 旱害義捐金」
東亞日報 1939년 10월 29일 ; 「아직 八千圓 不足, 旱害義捐金 極不良」 朝鮮
日報 1939년 11월 30일 ; 「旱害義捐 募集」 朝鮮日報 1939년 12월 10일 참조.
70) 「國境 部落民이 報7恩의 義捐」 朝鮮日報 1939년 12월 25일
71) 「盲人들의 至誠, 旱害義捐金을 寄託」 朝鮮日報 1939년 12월 20일 ; 「平壤
盲人敎徒 旱害地에 捐金」 朝鮮日報 1939년 12월 21일 ; 「無情社會에 警鍾,
死線 넘은 이 純情」 朝鮮日報 1939년 10월 28일
72) 本社 特派員 朴致祐, 「依賴心은 一切로 驅逐, 不具者 外는 皆勞主義」 朝鮮日
報 1940년 1월 1일. 이밖에 「旱災義捐金遝至」 東亞日報 1940년 1월 13일 ;
「旱害罹災 出鄕班, 故鄕 災民에 義捐」 朝鮮日報 1940년 1월 14일 등 참조.
73) 「培明校生 美舉, 廢品 모아 義捐」 朝鮮日報 1939년 10월 22일 ; 「旱災義捐
金遝至」 東亞日報 1939년 12월 23일 ; 「廢品 回收하여 旱災 義捐」 朝鮮日
報 1940년 1월 3일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71

요시한 이도 있었다.76) 고향을 생각하며 만주와 일본, 중국 상하이에서, 멀


리 남양군도로 간 이주노동자들로부터 의연금이 답지했다.77) 함남 발전소
건설현장으로 이주한 노동자들은 휴일을 반납하고 일하여 얻은 임금 전부
를 의연금으로 보냈다.78)

2) 불만, 풍설과 미신, 그리고 ‘내선일체’와의 거리

식민지민의 적극적인 대응과 ‘미담’에는 식민당국이 이재민들의 자력갱


생 의지를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요소가 있었다. 그러나 식민권력의 공식 간
행물에서 나타나는 성공적인 평가와 달리, 군과 경찰의 내부 자료에서는
다른 양상도 확인된다.
고등경찰이 생산한 극비자료에는 당국의 대용작 조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지주와 농민들의 불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방관
청과 농회에서 주최한 지주간담회에서는 소작농의 대용작물에 대하여 소작
료를 징수하지 않기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주들은 소작료 징수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에 불만을 표했다. 수도작( 水稻作) 3할 이하의 경우 소작
74) 「興文中學生들 義捐金 醵出」 朝鮮日報 1939년 10월 6일 ; 「建國大學 在學
朝鮮人 學生 義捐」 朝鮮日報 1939년 10월 17일 ; 「大阪日新校生 拾九圓을
義捐」 朝鮮日報 1939년 11월 15일 ; 「旱害救濟義捐」 朝鮮日報 1939년
12월 25일
75) 「車里 幼稚園兒들이 旱害義捐金 寄託」 朝鮮日報 1939년 12월 14일 ; 「安國
幼稚園 災民救濟金 寄托」 東亞日報 1939년 12월 26일 ; 「春窮의 災地 동무
에게 新昌園兒들 十圓 寄金」 東亞日報 1940년 3월 28일
76) 「回甲宴 廢止, 災地에 同情金」 朝鮮日報 1939년 11월 7일. ; 「旱害救濟義
捐」 朝鮮日報 1939년 11월 22일
77) 남양군도 사례는 「南洋 在留同胞 故國 旱害義捐金 寄托」 朝鮮日報 1940년
4월 5일
78) 「間組 全南北 勞働者, 旱災地에 義捐」 東亞日報 1939년 11월 12일
172 역사와 현실 118

료를 면제하자는 방침에 대하여, 일부 지주는 허위로 면사무소에 수확량을


과대하게 보고하여 소작료를 챙기거나,79) 지가 하락을 이유로 대용작을 기
피하기도 하였다.80) “지주의 불안은 누가 보호하여 줄 것인가”라며, 지주
의 곤궁함이 소작인 이상인데 식민당국이 소작인 보호와 구조에만 편중되
어 있다는 불만을 내비치는 자도 있었다.81) 한편 좁쌀을 대용작으로 심은
경북의 농민들은 발아 상태가 좋지 않자, 군 당국이 알선한 종자가 불량하
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대용작으로서 메밀이 여성의 임신율을 감소시키
기 때문에 내년의 아이 출산이 완전히 없을 것이라는 소문도 퍼졌다.82)
1939년 8월 경찰의 충북지역 내사( 內査) 결과에 따르면, “민중의 태반은
완전히 한해에 실망하여 자포자기하고, 불안하고 애가 타서 극도로 시국에
무관심해져, 일본의 쇠운을 운위하여 성전( 聖戰)의 중지를 요망하거나, 올
겨울부터 내년 봄에 이르면 농민항쟁과 같은 전쟁소동이 있을지도 모른다”
며 ‘불온’하게 말하는 자가 있었다.83) 비슷한 시기, 고사한 못자리를 비관
하여 소각하거나 양잿물로 음독자살하려 하거나, 가뭄으로 부채를 갚을 가
망이 없다고 보아 염세자살한 자도 있었다. 자포자기하며 음주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었다.84)
걸식과 인신매매, 기아( 棄兒) 사건도 발생했다. 조선 남부에서 경성이나
79) 高等外事月報 2, 1939.8, 19쪽 ; 高等外事月報 3, 1939.9, 22~23쪽의 경북・
전남 ; 高等外事月報 4, 1939.10, 22~23쪽
80) 高等外事月報 1, 1939.7, 38쪽
81) 高等外事月報 3, 1939.9, 23쪽 충남 사례
82) 高等外事月報 2, 1939.8, 17, 23쪽
83) 「一. 旱害に伴ふ民心の狀況竝に對策」 高等外事月報 2, 1939.8, 18쪽. 같은
해 9월 충북지역 민정 조사 결과에도 중일전쟁이 장기화하고 각종 세금과 공과금
부담이 증대하는 때에, 유산・무산계급 너나 할 것 없이 “내심 시국에 대해서 불만
을 품는 경향이 있는 때, 갑자기 미증유의 대한해에 봉착해 민심은 상당히 동요하
고 있다”라고 파악했다( 高等外事月報  3, 1939.9, 24쪽).
高等外事月報
84)   1호, 1939.7, 38~39쪽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73

도시로 살길을 찾아가던 이재민 가운데는 길가의 민가에 음식을 강요하는


자가 발생했다. 가뭄으로 인한 생활고로 남의 집에 고용살이로 들어가거나
몸을 파는 여성이 늘어났고, 기아 사건도 일어났다.85) 전국적으로 수업료
가 없어 결석하거나 퇴학원을 내는 학생도 늘어났다.86) 직업을 구하려다
뜻하지 않으면 부랑자와 거지 무리에 투탁하는 자도 점차 증가하여87) 식
민권력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쌀이 없는 이재민들은 대용식으로 죽을 끓이고 술지게미를 찾고, 초근목
피를 채집하기 시작했다. 쑥과 약초를 뜯으러 산과 들판을 헤맸고, 이마저
도 어려우면 일가족이 모두 걸식에 나서다 도둑이 되기도 했다.88) 일례로
충북 보은군의 곽필영( 郭必榮) 가족은 1939년 연말 무렵 가뭄과 물가고로
생활난에 허덕인 나머지, 공복으로 인하여 한해구제공사장에 나가 일할 힘
도 없어서 절도를 감행했다.89)
이재민들의 유랑이 만연하면서 그들로부터의 위협을 피하려고 농촌을
떠나는 지주들도 늘어갔다. 언론에는 지주와 유산계층의 빈민, 이재민 구제
및 기부 미담이 보도되고는 했지만, 경찰 보고에 따르면 농촌 자산가 가운
데는 “부락 궁민 구제의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도시로 이주하는 자”가 발
생했다.90) 예를 들면 충북 보은군 마로면 세중리 백낙선( 白樂善)은 마로면
의 일류급 자산가로서, 1939년 10월 8일 대구 대명동으로 가족과 함께 이
거했다. 그는 자식 교육 목적과 함께 흉작으로 인하여 봄 수확기까지 자신

一 旱害に伴ふ民心の狀況竝に對策」 高等外事月報 2, 1939.8, 18쪽 경기,


85) 「 .
충남 사례 ;  高等外事月報  4, 1939.10, 16쪽
86) 高等外事月報  2, 1939.8, 23쪽
87) 高等外事月報  3, 1939.9, 26쪽
88) 高等外事月報 高等外事月報 4,
 2, 1939.8, 19쪽 전남, 충남, 경남 사례 ; 
1939.10, 15쪽
89) 高等外事月報 6, 1939.12, 49쪽
90) 高等外事月報 2, 1939.8, 18쪽 ; 高等外事月報 3, 1939.9, 23쪽
174 역사와 현실 118

을 향한 강・절도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며 도시로 이주했다.91)


식량 사정은 해가 바뀌어도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조선군사령부는 1940
년 1월 육군성에 조선 식량 자원 상태를 보고하며 쌀과 잡곡 취급이 전면
적인 물자 부족과 더불어 민심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보며, 다음과 같이 조
선의 정세를 분석했다.

중류 이상의 가족 및 관청, 요리점, 음식점 등에서의 사재기, 생산자의 매석( 賣


惜), 업자의 암거래 등은 사회 불안을 증대시킬 뿐 아니라, 물자 부족, 물가 앙
등은 중소 상공업자의 영업난을 초래하며, 봉급 임금생활자의 생활을 압박하여
대중은 오로지 당국의 시책 및 단속의 불철저를 논란하고 불평불만이 점차 확
대하고 있음은 치안상 경계가 필요한 바이다.92)

조선군은 경성과 남조선 일부 지방에서 식량 배급이 원활하지 않고, “하


층 조선인의 미곡 취득난이 상당히 심각하여 잡곡의 품질이 안 좋고 가격
이 높아져, 세민의 생활을 위협”하여 대중의 불만이 상당히 심각하고, 한해
지 주민의 동향을 낙관할 수 없다고 했다. “미곡업자의 가게 앞으로 군중
이 쇄도하고 쌀 소동이 발발”하거나, “당국의 시책을 비난하는 등 소요가
일어날 위험성”이 적지 않다고도 했다.
실제 1939년 12월 경성부에서는 쌀 입수 소동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12
월 17일 경성 북미창정( 北米倉町) 경일상회(京一商會)는 강원도에서 500가
마니가 입하되어 400가마니를 소매상에 배급하고 남은 100가마니를 18일
부터 한 명당 5승씩 제한적으로 판매하자, 부근 빈민이 한꺼번에 모여들어

91)  高等外事月報 4, 1939.10, 16쪽


92) 朝鮮軍司令部, 「昭和十五年初頭ニ於ケル朝鮮食糧資源ニ関スル一般情勢」(1940
년 1월 16일), 「昭和十五年度初頭に於ける朝鮮食糧資源に関する件」, JACAR :
C01004823100, 防衛省防衛研究所 陸軍省大日記 密大日記 昭和15年 密大日記
第9冊 昭和15年), 別冊 第二 「食糧問題ニ伴フ治安觀察」.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75

서 주변 경찰서원 10명이 나서서 진정시켰다. 같은 날 경성의 서대문 부근


조선인이 경영하는 어느 정미소에서는 쌀의 입하를 탐지한 주민이 정미소
로 모여들어 판매를 요구하자, 정미소 주인은 문을 폐쇄하고 문 안에서 소
량씩 배급을 시도했는데, 모여든 군중이 문을 파괴하고 침입하는 일도 벌
어졌다. 같은 날 강기정( 岡崎町) 용산정미소와 공덕정(孔德町) 형제정미소에
서도 쌀을 사러 수백 명이 모여들자, 경찰관들이 그들을 해산시키기도 했
다. 조선군은 이와 같은 상황이 “조금 잘못되면 곧바로 소요가” 일어나 미
곡창고와 미곡상이 습격당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상의 상황에 대하여 조선군사령부는 당국이 매점매석을 방지하고 잡
곡 확보와 배급을 원활하게 하여 민심 불안을 일소하고, 겨울철 구제토목
공사가 이뤄지지 않는 동안 이재민에 대하여 부업을 장려하고 의연금을 적
절히 운영하여 수입을 얻을 구제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보았다.93)
1940년 춘궁기가 닥치면서 오히려 상황이 더욱 나빠진 모습도 보인다.
일본과 만주, 북중국으로의 이주를 희망하는 자들이 증가했고, 초근목피와
해초 채취자, 수업료 체납자, 결식아동이 점점 증가 추세를 보였다. 가축을
방매하고 소작권을 매각하여 생활비에 보태려는 자도 상당수였고, 창기로
팔려 가는 여성 등 궁상( 窮狀)이 심각한 사례가 각지에서 발견되었다. 이재
민들이 식민권력이 시행하는 구제토목공사에 출역하여 난국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하루 두 끼만 먹는 영양 결핍 상황에서 노동자의 노동력도 저하되
었다.94)
‘자포자기’가 늘어가는 가운데, 유언비어와 풍설, 정감록류의 비기( 秘記),
93) 이상朝鮮軍司令部, 앞의 글
一 旱害に伴ふ治安槪況」 高等外事月報 9, 1940.4, 11~13쪽. 1940년 춘궁기
94) 「 .
때 경기와 경남의 한해지 주민은 1일 2식을 하면서도 한 끼는 나무 열매와 잡곡의
혼식죽으로 호구를 달래고 있었다(앞의 글, 14쪽). 두 끼 중 한 끼마저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었다.
176 역사와 현실 118

‘미신’에 기대는 조선 민중이 많았다. 조선 후기 이래로 수많은 변형 판본


이 나온 정감록에 기대는 현상도 있었다. 정감록에 “ 三人一夕”은 ‘麥’
자의 파자( 破子)이기에 이제부터 벼농사를 그만두고 보리농사를 짓지 않으
면 생명을 보전하기 어렵다는 말들이 떠돌았다.95) 한편 촌락 노인들의 경
험담과 합쳐져서 별자리, 기상 상태를 가지고 재해를 예상하는 풍설도 유
포되었다. 강수량이 적고 온난한 기후는 한발이 올 징조라든가, 곡우( 穀雨)
에 비가 내리면 대한발이, 철쭉 꽃잎 수가 11개라서 가뭄이 올 것이라든지
하는 말이었다.96)
중일전쟁 상황과도 연관되어 예로부터 대소동과 전쟁이 있는 해는 재해
가 닥치고 아사자가 많다든가, 중국 스파이가 동해로 잠입해 용이 서식하
는 곳에 독약을 투입했기 때문에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이도 있었다.97) 청주읍에 사는 빈농가 여자아이는 자장가에 가뭄에 절망하
는 가사를 넣어 불러 경찰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98) 전쟁 시국과 재해를
연결하는 것은 당시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리고 죽고 다치는 상황에서 안전
을 기원하는 심리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신의 대표 사례는 분묘 발굴이다. 한발의 원인을 성산( 聖山)에 분묘가
있기 때문으로 믿고, 특히 여성을 중심으로 대거 산 위의 분묘를 발굴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남 단성에서는 1939년 6월, 옛 무당이 제사를 지낸 터인
백마산( 白馬山)에 묘를 써서 가뭄이 오래 계속된다면서, 농민들이 묘를 찾
는 일이 발생했다.99) 같은 해 7월에는 전남 벌교에서 절망 상태에 빠진
5~6백 명의 여성들이 조를 짜 호미를 들고 제석산( 帝釋山) 북쪽 용제등(龍
95) 소화 14년 한해지, 472・475쪽 ; 高等外事月報 2, 1939.8, 23쪽
96) 소화 14년 한해지, 473~474쪽 ; 高等外事月報 6, 1939.12, 47쪽
97) 高等外事月報 2, 1939.8, 23쪽
98) 高等外事月報 2, 1939.8, 17쪽
99) 「비가 안 오심은 白馬山에 墓 쓴 탓?」 東亞日報 1939년 6월 21일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77

祭嶝)에 올라가 분묘 전부를 파서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이에 묘 주인들이


경찰에 고소하여 벌교주재소에 조사받는 피의자가 무려 1,607명에 이르는
일이 있었다.100) 8월 평남 순천에서는 가장 피해가 컸던 후탄면( 厚灘面)과
사인면( 舍人面) 농민 500여 명이 인근 소하산(蘇下山)으로 가서 한 기의 분
묘를 파내어 부근 공동묘지로 이장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무
덤에 묻힌 인물의 후손들은 수십 명을 모아 이장하려는 농민들을 저지하기
위해 일대 격투를 벌였다.101) 1939년 8월경 경찰이 적발한 미신행위 74건
가운데 대부분이 분묘 발굴 사건이었을 정도로,102) 분묘 발굴 미신이 만연
했다.

시국좌담회를 통해 본 최근 농촌민심의 동향은 일반적으로 시국 방면에 대한


관심이 엷고, 생활 당면의 제 문제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관찰되는데, 사변
이 항구화하면서 더욱 시국에 대한 인식을 철저히 하게 할 필요를 통감함과 동
시에, 생활 당면 문제에 대해서도 그 사안과 정도를 충분히 고찰하여 민중의 여
망에 따르는 지도・선처가 긴요하다.103) [밑줄은 인용자]

경기도와 경상남도에서 열린 시국좌담회에서 농민들이 질문한 사항은


대부분 농사와 식량에 관한 것, 물자수급 및 물가문제에 관한 것이었다.104)
질문 중 재해와 직접 관련되는 사항도 발견된다. 농민들은 ‘면내에서 갹출

100) 「旱害가 나흔 墳墓發掘의 迷信」 朝鮮日報 1939년 9월 12일


101) 「迷信과 旱魃이 나흔 喜活劇 一幕」 朝鮮日報 1939년 8월 23일
102) 高等外事月報 3, 1939.9, 25쪽
103) 高等外事月報 12, 1940.7, 1~2쪽
104) 질문사항에서 경기도는 ①농사에 관한 것[20개 항목], ②식량에 관한 것[22개],
③물자 및 물가문제에 관한 것[18개], ④시국에 관한 것[8개], ⑤기타[8개]의 분
포를 보였고, 경상남도는 ①농사에 관한 것[19개 항목], ②식량에 관한 것[9개],
③물자 및 물가문제에 관한 것(18개), ④시국에 관한 것[7개], ⑤기타[6개]였다(「
一. 最近に於ける農村民衆の動向」 高等外事月報 12, 1940.7, 22~26쪽).
178 역사와 현실 118

되어야 할 미곡이 면내 이재자에 배급되는지’, ‘식량이 곤궁한 한해민에 배


급이 되는지’, ‘구제공사가 언제 실시되며 올해는 없는지’, ‘일본과 만주로
의 이주 계획이 있는지’ 등을 질문했다.105) 위 인용문에서도 보듯이 일제
는 자신들이 추진하고 있는 총동원정책, 전쟁 수행에 요구되는 사업에 조
선사회가 잘 따라주기를 바랐다. 그에 반해 농민들은 ‘시국’에는 관심이 없
고, 자신들의 생활문제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식민권력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 상황을 식민당국은 “현 시국 아래에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도저히 지난”하다고 실토했다.106) 식민권력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
고 있었다.
생산력 확충과 ‘인고단련( 忍苦鍛鍊)’이 강요되고 식민지민이 전쟁 수행에
동원되던 상황, 재해대책에서도 계속해서 정신무장과 혼식·절식 등 내핍생
활이 강요되었던 상황에서 민중층에는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 탈출구 가운
데 하나가 유언비어나 풍설, 미신에 기대는 것이었다.
유례없는 사상통제와 물자통제, 강제동원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조선 민
중의 불만은 일제의 통제선을 넘어서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유언비어의 내
용이라든가, 시국보다는 생활에 집중했던 민중의 의향은 식민권력을 당혹
스럽게 했고, 통치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당국에 대한 비난과 미신,
유언비어는 계속해서 식민통치의 저변에 불안을 안겼다. 그럴수록 조선 주
민들은 ‘내선일체’와 ‘천황의 적자’라는 구호로부터 멀어졌다.

맺음말 : 전쟁과 생태환경, 재난의 문제


1939년은 유독 긴 한 해였다. 이상 기후라는 생태환경의 변수가 당대인

高等外事月報 12, 22~26쪽


105) 
高等外事月報 12, 22쪽
106) 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79

들의 삶에 준 여파는 컸다. 일본제국은 중국뿐만 아니라 기후와 날씨, 그로


인한 재난과도 싸워야 했다. 식민지민 역시 기후, 날씨와 다퉈야 했다. 대
가뭄과 전쟁이 결합되면서 빚어낸 식량난은 제국 차원의 문제로 비화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일제는 배급과 공출제도를 추진했고, 1934년 중단된 산
미증식계획을 새롭게 조선증미계획 시행으로 전환했다. 이 전환은 많은 조
선인을 더욱 쥐어짜고 그들에게 절약과 내핍을 강요하는 것을 의미했다.
총동원체제 아래에서 혹서와 물 부족에 허덕이고 굶주린 식민지민들에게는
더욱 이 한 해가 지긋지긋했을 것이다.
식민지민은 다양한 각도로 기후와 식민권력의 시책에 대응했다. 어떤 이
는 한해구제사업으로 홍수와 가뭄을 막겠다며 적극적으로 진정운동을 펼쳤
고, 또 다른 이는 열심히 보리를 심고 말라버린 냇가를 파며 버텼다. 이재
민과 생면부지의 사람들은 ‘동포애’를 발휘하며 의연금 모금에 동참했다.
이러한 ‘자력갱생’의 모습은 식민당국에는 ‘미담’으로 선전 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갱생이 쉽지 않았던 사람들은 걸식과 유랑 끝에 미신과 유언비어에
기대기도 하였다. 일흔을 훌쩍 넘긴 어떤 이는 병자년(1876년) 가뭄 때 뜯
어먹고 연명한 풀을 다시 뜯으며 기묘년(1939년)의 하늘을 쳐다보았을 터
이다.107) 원망 섞인 불만을 토로하며 당국의 시책에는 무관심했던 인민들
의 존재는 ‘내선일체’의 구호와는 괴리된 채 식민권력에도 통치의 부담을
안겼다.
1940년 봄까지 조선 중남부에는 계속 마른하늘이 이어졌다. 6월 들어서
야 어느 정도 해갈되었지만, 오히려 6월 하순부터 7월 중순까지 폭우가 쏟
아져 홍수 피해가 발생하는 지역도 있었다.108) 이후 1942년의 대가뭄은

災地의 우리는 이러케 싸운다 - 七道 旱害 現地報告(其四)」 朝鮮日報


107) 「
1940년 1월 8일
108) 1940년 5월까지 조선 각지의 강수량이 모두 평년보다 훨씬 적은 가뭄이 계속되
었다(「 朝鮮氣象槪況」 朝鮮總督府官報 昭和 제4052호, 1940년 7월 24일).
180 역사와 현실 118

1939년 못지않았다. 총독부 당국은 1939년과 비교하며 1942년의 한해가


“그 양에서, 그 범위에서 또 그 정도에서 실로 심각한 것”이며, 그 대책은
단순히 “일시적 국부적인 조치”로는 “전시하 국민생활”의 안정을 확보하기
가 어려움을 토로했다.109) 통치의 한계를 스스로 피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제국의 재난 대응 한계 속에 식민지 민중은 내핍에 시달렸고, 이로 인한 정
치사회적 불안은 계속되었다. 결국 일제는 전쟁과 자연재해 상황을 타개하
지 못한 채 패망했다.
중국에서는 1942년 300만 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허난 대기근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1939년 대가뭄의 여파가 채 가시기 전에 1942년의 대가뭄이
엄습했다. 이러한 상황이 정치경제와 식민지 사회에 미친 영향이 어떠했는
지, 다시 말해 아시아・태평양전쟁기를 연구할 때 잘 보이지 않은 생태환경
의 장벽에 관한 문제는 더욱 비중 있게 서술되어야 할 요소이다.

투고일자 : 2020. 11. 04. 심사일자 : 2020. 11. 23. 게재확정일자 : 2020. 11. 23.
주 제 어 : 가뭄, 생태환경사, 기후사, 조선총독부, 식량 공출, 내선일체, 재해대책
Key words : drought, Ecological and Environmental History, Climate History, Joseon Governor
General Office, extraction of food reserve, Notion of ‘Japanese Mainland and Joseon
being one,’ disaster countermeasures

그해 6월 하순 전국적으로 큰비가 내리면서 해갈되었다. 이를 각 언론사에서도


‘자우( 慈雨)’가 내렸다고 보도했다(「社說 - 慈雨頌」 朝鮮日報 1940년 6월
26일 ; 「 社說 - 今年의 年事」 東亞日報 1940년 6월 28일). 이후 계속되는 강
우로 인하여 한강과 예성강, 임진강, 금강, 만경강 유역에서는 상당한 홍수 피해
를 보았다(「自六月下旬, 至七月中旬豪雨と其の被害」 朝鮮社會事業 18-8,
1940.8, 76~78쪽).
109) 朝鮮總督府 法務局, 1943.11 「昭和十七年の旱害に基因せる犯罪の槪要」 經
濟情報 9, 260쪽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81

<부표> 식민지시기 재해대책비 추계(단위 : 엔, %)

연도 이재구조비 재해비(국고) 결산 합계
결산 비율 예산 결산 비율
1912 2,700 0.4 0 734,919 99.6 737,619
1913 0 0.0 76,194 76,194 100 76,194
1914 9,800 2.6 50,000 364,805 97.4 374,605
1915 20,861 3.6 326,445 551,490 96.4 572,351
1916 39,053 5.3 349,851 697,072 94.7 736,125
1917 6,990 1.7 0 395,179 98.3 402,169
1918 6,225 5.0 0 119,183 95.0 125,408
1919 80,722 3.4 250,710 2,284,355 96.6 2,365,077
1920 135,519 2.3 566,206 5,655,477 97.7 5,790,996
1921 7,317 0.6 425,600 1,137,974 99.4 1,145,291
1922 125,197 5.7 187,373 2,058,983 94.3 2,184,180
1923 251,877 6.7 889,600 3,528,639 93.3 3,780,516
1924 287,794 8.0 452,783 3,301,234 92.0 3,589,028
1925 683,337 10.6 1,961,581 5,761,183 89.4 6,444,520
1926 70,328 1.3 4,469,061 5,175,525 98.7 5,245,853
1927 11,848 0.3 3,121,649 3,589,220 99.7 3,601,068
1928 378,680 7.0 2,900,413 4,997,399 93.0 5,376,079
1929 241,015 6.5 1,711,085 3,450,085 93.5 3,691,100
1930 280,097 22.7 0 953,457 77.3 1,233,554
1931 108,437 10.1 931,801 962,474 89.9 1,070,911
1932 258,218 48.0 139,450 280,148 52.0 538,366
1933 732,392 36.8 88,565 1,255,883 63.2 1,988,275
1934 1,521,447 21.1 1,077,291 5,678,988 78.9 7,200,435
1935 895,369 31.6 932,945 1,934,619 68.4 2,829,988
1936 1,999,944 20.0 1,364,408 8,004,208 80.0 10,004,152
1937 243,779 6.8 2,283,782 3,342,500 93.2 3,586,279
1938 594,436 11.1 1,621,353 4,779,750 88.9 5,374,186
1939 2,396,275 5.7 6,698,117 39,947,268 94.3 42,343,543
1940 552,209 3.2 13,898,149 16,928,880 96.8 17,481,089
1941 104,570 2.1 1,896,000 4,935,026 97.9 5,039,596
1942 9,089,115 30.3 480,464 20,914,084 69.7 30,003,199
출전 : 朝鮮總督府統計年報 朝鮮年鑑
 각 연도판 ;   각 연도판
비고 : ①1912~14년 이재구조비는 결산 내역이 없어 예산액으로 대체 ②비율은 이재구조비와 재해비
결산의 상호 비율
182 역사와 현실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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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역사와 현실 118

<Abstract>

Japanese Imperialism fighting Climate and Weather, and the


Situation of residents in colonized Joseon
– The Joseon Famine in the “Longest Year” 1939, and the Aftermath -

Ko Tae-woo

Examined in this article is the 1939 Great famine in Joseon, in terms of


climatic factors and other issues related to the ecological environment of the
time. Such approach revealed three important points.
First, the 1939 Great famine seems to have been caused most probably by
climatic abnormalities, such as volcanic eruptions or changes in solar spot activities.
Second, the drought that hit Korea at the time caused significant decrease in
Joseon’s rice production, which in turn caused severe food shortage throughout
the Empire that also undermined Japan’s war efforts against China. In response,
Japanese Imperialism employed many counter measures, focusing on minimi-
zing direct aids, emphasizing self-rehabilitation, and increasing food transports.
Third, the Joseon people actively responded to the colonial authorities’ poli-
cy, and acted in various ways. People in distress tried to secure wages through
the public works for drought damage relief, and launched local appeal projects
to invite the construction work to their areas. People who were spared from
direct damages joined donation campaigns, out of their brethren affection. But
there were also other people who resorted to believing in superstitions and
rumors, after suffering a long hard time of begging and wandering. Such
people who remained indifferent to observing the colonial authorities’ policy
continued to become a burden, as the authorities still had to uphold and
propagate the slogan notion of ‘Japanese Mainland and Joseon being one.’
These three points show us that future historical studies of the Asian-Pacific
War period should pay more attention to climatic disasters as an ecological
environmental el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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