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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 Fi002672532
Kci Fi002672532
137
고태우(高泰雨)**
머리말
1. 1939년 대가뭄의 원인과 피해 양상
2. 재해대책의 전개와 특징
3. 식민지민의 다성성(多聲性)과 ‘내선일체’와의 거리
맺음말 : 전쟁과 생태환경, 재난의 문제
머리말
5월 21일(양력 7월 7일) 수원( 水源)이 고갈되었다.
5월 26일(양력 7월 12일, 초복) 백성을 살리는 것은 하늘인데 하늘의 뜻을 알
수 없다.
6월 6일(양력 7월 22일, 중복) 가뭄이 갈수록 더하다. 시냇가의 밤나무 서너 그
루가 바싹 말라 죽었다.
6월 24일(양력 8월 9일) 산과 들에 푸른 빛이 없다.1)
강우량(mm) 평년 대비 1939년
지역 평년 1939년 강우량 차이 강우량 비율(%)
(a) (b) (a-b)
경기 659.3 348.3 311.0 52.8
충북 581.3 208.3 373.0 35.8
충남 558.3 241.1 317.2 43.2
전북 603.9 241.5 362.4 40.0
전남 634.9 248.5 386.4 39.1
경북 508.5 202.1 306.4 39.7
강우량(mm) 평년 대비 1939년
지역 평년 1939년 강우량 차이 강우량 비율(%)
(a) (b) (a-b)
경남 627.0 301.1 325.9 48.0
강원 628.6 399.6 229.0 63.6
평균 599.9 273.8 326.1 45.6
출전 : 소화 14년 한해지, 39쪽
비고 : 추계 과정에서 오류로 보이는 부분 바로잡음.
지역 화산 이름 폭발 시기 폭발지수(VEI)
캄차카반도 Avachinsky 1938.3.6.~1938.12.1.(추정) 3
쿠릴열도 Nemo Peak 1938.8.12.~? 2
캄차카반도 Karymsky 1938.10.~? 2
〃 Mutnovsky 1938.11.~? 2
〃 Mutnovsky 1939.5.~? 2
〃 Tolbachik 1939.9.25.~9.27. 2
〃 Karymsky 1940.~? 2
〃 Zhupanovsky 1940.1~1940.2. 3
〃 Tolbachik 1940.2~1940.4. 2
〃 Tolbachik 1940.11.~1941.7.15.(±45일) 3
〃 Karymsky 1943.2.1.(±30일) 2
출전 : Global Volcanism Program, 2013 Volcanoes of the World, v. 4.8.3. Venzke, E (ed.).
Smithsonian Institution.(http://volcano.si.edu/)의 화산 폭발 데이터베이스(eruption database)
에서 추출(검색일 : 2020.10.20.).
2) 가뭄 피해 양상
피해면적 평년
모내기 모내기 실수 평년 대비
지역 예정면적 면적 모내기 수확 70% 이상 계 모내기
불능 없음 수확 감소 (정보) 예정면적 확량 수확량 수확
(정보) (정보) (정보) (정보) (정보) 대비(%) (石) (石) 률
(%)
경기 197,099.9 168,119.0 28,980.9 28,203.1 49,199.1 106,383.1 54 1,424,191 2,728,663 52
충북 67,550.9 35,996.3 31,554.6 3,020.7 14,071.7 48,647.0 72 364,580 1,006,168 36
충남 159,172.2 102,880.1 56,292.1 21,428.0 29,224.7 106,944.8 67 728,424 2,334,043 31
전북 165,307.0 80,614.1 84,692.9 3,955.5 15,243.7 103,892.1 63 689,948 2,363,979 29
전남 197,693.5 134,604.6 63,088.9 10,800.5 16,770.8 90,660.2 46 1,513,089 2,607,728 58
경북 185,576.8 58,360.0 127,216.8 2,882.7 13,946.4 144,045.9 78 730,924 2,408,581 30
경남 167,783.2 120,707.0 47,076.2 14,284.8 28,915.4 90,276.4 53 1,270,421 2,369,690 53
강원 86,737.6 83,035.7 3,701.9 6,505.1 7,838.9 18,045.9 22 1,131,703 1,189,807 95
합계 1,226,921.1 784,316.8 442,604.3 91,080.4 175,210.7 708,895.4 58 7,853,280 17,008,659 46
출전 : 소화 14년 한해지, 64쪽
지역 벼농사 이재농가 이재 비율 구조 받은 구조 필요
농가 호수 호수 (%) 호수 호수
경기 229,138 116,866 51 36,602 80,264
충북 120,974 93,751 77 19,579 74,172
충남 207,057 144,673 69 50,309 94,364
전북 223,877 213,126 95 37,052 176,074
전남 403,884 174,082 43 56,119 117,963
경북 322,212 259,740 80 83,843 175,897
지역 벼농사 이재농가 이재 비율 구조 받은 구조 필요
농가 호수 호수 (%) 호수 호수
경남 277,416 161,576 58 37,828 123,748
강원 160,496 22,189 13 8,210 13,979
합계 1,945,054 1,186,003 60 329,542 856,461
출전 : 소화 14년 한해지, 90쪽
비고 : 이재농가 호수 및 구조 받은 호수, 구조 필요 호수 각각의 전체 합계는 원자료의 도별 수치
합산에 오류가 있어서 수정함.
지역 수이입 일본 수이입
조선 대만 베트남 태국 미얀마 합계(a) 내 합계(b) 비율
연도 생산 (a/b)
1937 6,736 4,856 11 208 - 11,815 67,340 79,155 14.9
1938 10,149 4,971 0 - - 15,217 66,320 81,537 18.7
1939 5,690 3,962 0 - - 9,949 65,869 75,818 13.1
1940 395 2,784 2,929 1,893 2,802 11,505 68,964 80,469 14.3
1941 3,306 1,970 3,751 2,903 2,916 14,882 60,874 75,756 19.6
1942 5,235 1,702 5,559 3,387 268 16,151 55,088 71,239 22.7
1943 - 1,638 3,719 1,177 120 6,654 66,776 73,430 9.1
1944 3,500 1,300 - - - 5,295 62,887 68,182 7.8
1945 1,421 151 - - - 1,573 58,559 60,132 2.6
출전 : 金子文夫 植民地 占領地支配 大石嘉一郞 編 日本帝國主義史 東京大學出版會, 429쪽
, 1994 「 ・ 」, , 3,
2. 재해대책의 전개와 특징
1) 제국 차원의 이례적인 대응
31) 시종 파견은 1923년 평안도 수해, 1925년 을축대홍수, 1928년 함경도 수해, 1930
년 풍수해, 1934년 조선 남부 수해, 1936년 조선 남부 대수해 때 있었다(「加藤侍
從 水害地 視察 每日申報
」 聖慮無量 水害 慰撫
1923년 8월 28일 ; 「 하시고
로 侍從 差遣」 每日申報 1925년 7월 26일 ; 「關北水害地 視察次 甘露寺侍
從 入城」 每日申報 1928년 9월 21일 ; 「朝鮮 風水害에 救恤金 下賜」 每日
申報 1930년 7월 29일 ; 「災害地 尉問使 海江田侍從 入城」 每日申報
1930년 8월 1일; 「三南 水害에 救恤金 御下賜」 朝鮮中央日報 1934년 8월
11일 ; 「朝鮮 被害地에 侍從을 御差遣」 每日申報 1936년 9월 4일 ; 「侍從
御差遣에 南總督 恐懼謹話」 每日申報 1936년 9월 5일 ; 朝鮮總督府, 1931
昭和五年度 朝鮮風水害誌, 11~12쪽 ; 朝鮮社會事業協會 編, 1938 昭和十
一年の風水害誌, 朝鮮社會事業協會, 323~326쪽 참조).
32) 「旱害對策으로 關係省 連絡會議」 東亞日報 1939년 9월 9일 ; 「金光 拓相이
報告한 旱災와 朝鮮 米價 對策」 朝鮮日報 1939년 9월 9일 ; 「旱害對策 樹
立코저 各省聯絡會議 開催」 每日新報 1939년 9월 10일
33) 朝鮮總督府農林局 編, 1940 「第二十三 內外地一貫ノ食糧政策ニ關スル件」 旱
156 역사와 현실 118
했을 것이다.
일본의 정당들은 1939년 10~11월에 조선 한해 시찰을 진행했다. 정우회
政友會)에서는 농정(農政) 전문가 스케가와 게이시로(助川啓四郞)와 요시우
(
에 쇼료(吉植庄亮), 미야자키 하지메(宮崎一) 등 3명의 중의원의원이 파견되
었다.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에서는 중의원의원 스기야마 모토지로(杉山元
治郎), 미야케 쇼이치(三宅正一), 토미요시 에이지(冨吉榮二)와 당 농촌부장
쓰노다 도자부로(角田藤三郞)가 시찰했다. 민정당(民政黨)에서도 스에마쓰
가이이치로(末松階一郞), 나카무라 우메키치(中村梅吉) 의원이 시찰 길에 올
랐다.36)
각 정당 시찰단은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한해대책안’을 마련하여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한해대책 실현을 요구했다. 사회대중당은 시찰위원들
이 상임위원회에 시찰내용을 보고하고, 11월 16~17일 문부성과 척무성, 농
림성을 방문하여 대책 실현을 요청했다. 정우회는 11월 24일 임시총무회에
서 조선한해대책 및 미곡응급대책을 협의한 뒤 정부 및 총독부와 교섭할
위원을 지명했고, 민정당도 11월 30일 간부회 및 정무조사회에서 시찰원
보고를 마친 뒤, 교섭 위원을 지명했다.37)
한해대책 수립에는 예산 문제가 중요했는데, 총독부는 9월 4일 내무국장
예산 결산
구분 1939년 1940년 총 경비 1939년도 1940년도 총 경비
총경비 총경비 합계 총경비 총경비 합계
한해대책사업비 41,160,381 11,969,401 53,129,782 40,523,384 9,457,491 49,983,885
부업장려비 1,609,446 688,140 2,297,586 1,516,451 688,140 2,204,591
종곡배급비 6,416,410 6,416,410 6,416,410 6,416,410
아동교육비 198,389 161,610 359,999 198,389 161,610 359,999
노동자알선비 439,315 439,315 439,315 439,315
합계 54,626,358 13,377,401 68,003,759 49,093,949 10,307,241 59,404,200
출전 : 소화 14년 한해지, 169~173쪽
비고 : 아동교육비는 ‘아동급식 및 학용품비’의 약칭.
2) 자력갱생과 내핍, 식량 증산 강조
41) 식민권력의 재해대책 기조에 관해서는 고태우, 2014(a) 앞의 논문, 404~409쪽 참조.
42) 이주 알선 결과, 도내 21,176명, 도외[주로 조선 북부] 30,000명, 일본 22,608명,
총 73,784명이었고, 만주로는 849호가 이주했다(소화 14년 한해지, 181~182쪽).
自力 克服 勸 食糧 給與 不可 每日新報
43) 「 으로 을 奬, 의 는 」 1939년 8월 15일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61
사의 출역 상황은 양호했다.62)
심지어 당국의 구제사업에 감사하는 기념비를 세우는 일도 있었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국민정신총동원 구계리연맹원들은 예전부터 자신들이 요구
하던 임도개착공사가 한해구제사업으로 실행된 점을 총독의 “자애로운 아
버지 같은 마음”이라고 표현했다. 그들은 “거룩한 당국의 정치를 칭송”한
다는 글귀를 비석에 새겼다.63) 국민정신총동원 구계리연맹이 세운 비석이
기 때문에 식민통치를 미화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었을 수 있지만, 지역 현
안이었던 임도 개통은 지역민들에게 마을과 마을 사이의 소통과 경제적 교
류 증대를 기대하게 만들 수 있었다. 더구나 재해구제공사의 실시는 대가
뭄이 닥친 이재민들이 품삯을 취할 기회였기에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재해구제공사에 뛰어드는 것 외에 식민지민들은 협동, 단결하여 적극적
으로 재난을 극복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식민당국은 ‘미담가화( 美
談佳話)’로 선전했는데, 식민당국의 한해보고서에 등장하는 ‘미담’ 내용을
정리한 것이 <표 9>이다.
총 69건의 사례를 참여층과 내용별로 분류해보았다. 참여층을 보면 지주
와 자산가가 가장 많은 27건, 중심인물 등 적극적인 활동을 보인 인물이
17건, 부락연맹과 애국반, 학교 등 단체가 15건으로 다수를 차지했다. 내용
을 보면, 발동기 등을 활용한 용수 확보 등의 관개 활동이 24건, 주민들이
공동으로 모내기를 완료하는 등 ‘공동작업’이 16건, 그리고 이재민에게 곡
식을 기증하거나 생활비를 보조하는 현금・물품 보조가 10건이었다.
참여 계층 신분 내용
지역 지주 관리 소작 種穀 현금. 구제
중심 료 세 의연
(건수) 자산가공직자 회사 단체 인물 합계 감면/ 급여 대납 물품 회 공 금 관
금 개 식수 교육 공동 기타 합계 참여 계층 신분
비고
기타 활동 제공 보조 작업
면제 대부 보조 사
경기
7 2 1 2 3 15 2 1 1 4 2 2 2 1 2 17 단체(부인회1)
(15)
충북 단체(연맹・애
3 1 3 7 2 2 2 1 7
(7) 국반2)
단체(연맹・애
충남 국반1)
14 3 1 3 7 28 2 3 1 5 1 2 5 2 2 6 29
(28) 기타(중심인
물2)
전남 단체(연맹・애
2 3 5 3 1 2 6
(5) 국반3)
경북 기타(중심인
1 2 2 4 9 1 8 7 16
(9) 물4)
경남 기타(중심인
2 3 5 1 4 3 8
(5) 물3)
합계 27 8 2 15 17 69 4 6 2 10 4 4 24 2 7 16 4 83
출전 : 소화 14년 한해지, 436~471쪽 ; , 1943 全羅南道
の 昭和十四年 全羅南道旱害誌
, 293~296쪽
비고 : ①참여 계층・신분 중, ‘지주・자산가’에는 기업가도 포함. ‘관리・공직자’ 중, 공직자에는 면협의
회원, 면서기, 구장직 포함. ‘중심인물・기타’에는 자료에 “중심인물”이라고 표현된 사례 및 신
분이 불분명한 인물을 포함. “중심인물”로 표현된 수는 ‘참여 계층・신분 비고’란에 기재.
②내용에는 건당 서로 중복되는 항목이 있으면 각각의 항목에 별도로 합산. ‘구제회・공사’에는
한해구제회 설립과 구제공사 시행한 경우를 합산. ‘관개 활동’은 발동기나 급수 펌프를 사용한
경우, 간이 우물 굴착 또는 용수공사 등을 지칭. ‘공동작업’은 공동노동으로 모내기하거나, 물
공급 등을 진행한 경우.
둘째,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산하
부락연맹과 애국반 활동이 선전되었
다. 앞서 언급했듯이 부락연맹과 애
국반은 절미운동 등 한해를 극복하
기 위한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
한 활동에 대한 기록은 총동원기구
가 당국의 시책에 따라 말단에서도
잘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셋째, ‘미담’ 가운데는 일본인 사
례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내선융
화를 의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림 4> 괴산군 청안면 말라붙은
백사천 바닥을 파고 있는 농민들
예를 들어 충남 논산의 지주 이우치
東亞日報 1939.8.3.
출전 :
井內門十郞)는 논산군 성동면 주민
(
들이 강경천의 흙탕물을 음료수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본인 논에 관개를
중지하고 관개용수를 주민들의 음료수로 제공하며 본인 모가 고사하는 손
해를 감수했다. 충남 부여군의 아오키( 靑木龜吉)는 부근의 궁핍 농민 32명
분의 호별세를 대신 납부했다.64) 이러한 사례를 총독부는 내선융화의 발현
으로 선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요컨대 ‘미담’ 사례는 관민이 일치협력하여 대가뭄을 잘 극복하고 있다
는 점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미담’을 모범사례로 소개함으로써 또 다른
‘미담’ 사례를 자발적으로 끌어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식민권력의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미담’의 이면을 독해할 필요
가 있다. 가뭄의 극복은 식민권력뿐만 아니라 여타 식민지민에게도 최우선
과제였다. 부락연맹과 애국반에서의 활동도 통치당국의 의도에서만 이뤄진
64) 각 사례는 소화 14년 한해지, 451・453쪽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69
도 늘어갔다.
생면부지임에도 물리적 장벽을 넘은 ‘동족애’가 발현되었다. 함북 경흥
군 경흥면에서는 촌락민들이 1938년 수해로 큰 곤란을 겪었지만 전국 각
지로부터 구제와 격려를 받았다며, 은혜를 갚는다면서 위문금을 보냈다.70)
시각장애인들도, 요양원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던 환자들도 “동족애의 동
정”을 발휘했다.71) 같은 재해민 처지로서 자신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있
는 이재민을 위해 구제금을 모금하는 이도 있었다. 일례로 전북 고창군 대
산면 한 공사장의 이재민 노동자들은 자신들은 몸이 성하여 품삯을 받아
먹고살지만, 신체 불구인 이재민들은 그것도 곤란하다면서 현금을 모아 보
냈다.72)
어려운 처지에서도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나섰다. 학생들이 폐품을 모으
거나 논밭에 떨어진 벼와 조 이삭을 모아 판 돈, 점심밥을 몇 끼 굶어 모은
돈이 신문사에 기탁되었고,73) 일본과 만주의 해외 유학생들은 학비를 아껴
성금에 보탰다.74) 유치원생들도 모금에 동참했다.75) 회갑연보다 성금을 중
69) 지역별 할당 사례는 「 罹災民 義捐金 配當」 朝鮮日報 1939년 10월 16일 ; 「寳城
旱害義捐金 千五百圓 配當」 朝鮮日報 1939년 10월 25일 ; 「仁川 旱害義捐金」
東亞日報 1939년 10월 29일 ; 「아직 八千圓 不足, 旱害義捐金 極不良」 朝鮮
日報 1939년 11월 30일 ; 「旱害義捐 募集」 朝鮮日報 1939년 12월 10일 참조.
70) 「國境 部落民이 報7恩의 義捐」 朝鮮日報 1939년 12월 25일
71) 「盲人들의 至誠, 旱害義捐金을 寄託」 朝鮮日報 1939년 12월 20일 ; 「平壤
盲人敎徒 旱害地에 捐金」 朝鮮日報 1939년 12월 21일 ; 「無情社會에 警鍾,
死線 넘은 이 純情」 朝鮮日報 1939년 10월 28일
72) 本社 特派員 朴致祐, 「依賴心은 一切로 驅逐, 不具者 外는 皆勞主義」 朝鮮日
報 1940년 1월 1일. 이밖에 「旱災義捐金遝至」 東亞日報 1940년 1월 13일 ;
「旱害罹災 出鄕班, 故鄕 災民에 義捐」 朝鮮日報 1940년 1월 14일 등 참조.
73) 「培明校生 美舉, 廢品 모아 義捐」 朝鮮日報 1939년 10월 22일 ; 「旱災義捐
金遝至」 東亞日報 1939년 12월 23일 ; 「廢品 回收하여 旱災 義捐」 朝鮮日
報 1940년 1월 3일
기후, 날씨와도 싸워야 했던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지민 171
투고일자 : 2020. 11. 04. 심사일자 : 2020. 11. 23. 게재확정일자 : 2020. 11. 23.
주 제 어 : 가뭄, 생태환경사, 기후사, 조선총독부, 식량 공출, 내선일체, 재해대책
Key words : drought, Ecological and Environmental History, Climate History, Joseon Governor
General Office, extraction of food reserve, Notion of ‘Japanese Mainland and Joseon
being one,’ disaster countermeasures
연도 이재구조비 재해비(국고) 결산 합계
결산 비율 예산 결산 비율
1912 2,700 0.4 0 734,919 99.6 737,619
1913 0 0.0 76,194 76,194 100 76,194
1914 9,800 2.6 50,000 364,805 97.4 374,605
1915 20,861 3.6 326,445 551,490 96.4 572,351
1916 39,053 5.3 349,851 697,072 94.7 736,125
1917 6,990 1.7 0 395,179 98.3 402,169
1918 6,225 5.0 0 119,183 95.0 125,408
1919 80,722 3.4 250,710 2,284,355 96.6 2,365,077
1920 135,519 2.3 566,206 5,655,477 97.7 5,790,996
1921 7,317 0.6 425,600 1,137,974 99.4 1,145,291
1922 125,197 5.7 187,373 2,058,983 94.3 2,184,180
1923 251,877 6.7 889,600 3,528,639 93.3 3,780,516
1924 287,794 8.0 452,783 3,301,234 92.0 3,589,028
1925 683,337 10.6 1,961,581 5,761,183 89.4 6,444,520
1926 70,328 1.3 4,469,061 5,175,525 98.7 5,245,853
1927 11,848 0.3 3,121,649 3,589,220 99.7 3,601,068
1928 378,680 7.0 2,900,413 4,997,399 93.0 5,376,079
1929 241,015 6.5 1,711,085 3,450,085 93.5 3,691,100
1930 280,097 22.7 0 953,457 77.3 1,233,554
1931 108,437 10.1 931,801 962,474 89.9 1,070,911
1932 258,218 48.0 139,450 280,148 52.0 538,366
1933 732,392 36.8 88,565 1,255,883 63.2 1,988,275
1934 1,521,447 21.1 1,077,291 5,678,988 78.9 7,200,435
1935 895,369 31.6 932,945 1,934,619 68.4 2,829,988
1936 1,999,944 20.0 1,364,408 8,004,208 80.0 10,004,152
1937 243,779 6.8 2,283,782 3,342,500 93.2 3,586,279
1938 594,436 11.1 1,621,353 4,779,750 88.9 5,374,186
1939 2,396,275 5.7 6,698,117 39,947,268 94.3 42,343,543
1940 552,209 3.2 13,898,149 16,928,880 96.8 17,481,089
1941 104,570 2.1 1,896,000 4,935,026 97.9 5,039,596
1942 9,089,115 30.3 480,464 20,914,084 69.7 30,003,199
출전 : 朝鮮總督府統計年報 朝鮮年鑑
각 연도판 ; 각 연도판
비고 : ①1912~14년 이재구조비는 결산 내역이 없어 예산액으로 대체 ②비율은 이재구조비와 재해비
결산의 상호 비율
182 역사와 현실 118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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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 편, 2008 농정 변천사, 농촌진흥청
마이크 데이비스, 정병선 역, 2008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이후
이송순, 2008 일제하 전시 농업정책과 농촌 경제, 선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편찬, 2003 한국 농업・농촌 100년사 상, 한국농촌경제연구
원・농림부
<Abstract>
Ko Tae-w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