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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2 <자기 아들로 죽고 자기 아들로 살다>

[본문 : 롬 8 장 3 절~8 절]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한테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자꾸 이야기 하시는데,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에요? 도대체가?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고 원수로 행한다
네요. 로마서 8 장을 모든 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로마서의 분수령’이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아주 중요한 장입니다. 로이드 존스도 로마서 전체 중에 한 장만 고르라면 8 장을 고르겠다
라고 이야기 했을 정도로 아주 중요한 장이에요. 그래서 여러 번에 걸쳐서 단어 하나하나를 심도
있게 설명을 해 드리고 있어요. 어떤 주석서에도 없는 이야기를 해 드리고 있는 겁니다. 근데 아직도
그 개념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제가 좀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지금
알게 모르게 헬라어의 이원론적 철학의 관점으로 성경을 배워 오셨기 때문에 그래요. 수메르
문명에서 헬라문명으로 넘어가면서 성경 이해가 굉장히 왜곡 되어 졌어요. 성경은 절대 이원론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책이에요. 진리가 하나잖아요. 그걸 둘로 나누면 안 된다니까요. 진리는 둘로
나누어서 에피뚜미아의 두 마음으로 생각하고 이해하고 논해져서는 안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그리스도와 내가 그 이원적 관계인 절대 타자로 그분은 내 밖에 절대 타자로, 나도 그 분과 절대
타자의 자리에 있고 이러한 그런 이원적 관계로 이해 된다든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와 (나는 그
아들 아니에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와 그 예수에 의해 구원받은 나. 이런 식의 이원적 관계에
머물게 되면 우린 그 아들을 경외의 대상으로 섬김의 대상으로 섬겨 버리게 된다 구요. 잘 하는 것
같지만… 기독교는 그게 아닙니다.
이게 전부 헬라의 이원적 해석에 기인한 오해들인 거에요. 그게 겸손한 것 같고 내 자리를 지키는 것
같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그렇게 내가 그 자리에서 나를 섬기겠다고 하는 게 사실은
네가 하나님 노릇 하는 거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잘 이해하셔야 돼요. 그거 겸손한 거 아니에요.
거기에 다 속고 있는 거라니까요. 성경은 분명 우리 성도 전체를 가리켜 <아들><장자>라 불러요.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내 장자라 그랬다니까요. 내 장자. 장자는 예수님 아니에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아들이라 그래요. 장자라 그래요. 그리고, 그들의 화합인 교회를 ‘장자들의 총회’라고
한다니까요. 장자들만 있어. 다 아들만 있어. 그들만 모인 곳이에요. 그걸 교회라 한단 말이에요.
맏아들이 머리이고 다른 장자들이 지체들이 된 하나. 다 아들이에요. 그냥 그 자체가 아들이에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라니까요. 예수를 머리로 한 ‘하나’.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아들’이라고
부르고 주님도 그렇게 씨, 복음의 씨, 진리를, 씨를 마음으로 가진 이를 아들이라 그래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아들, 아들’ 할 때, 자기가 자기보고 아들이라 한 거 아니에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어떤 아들들에 관한 얘기한 거에요. 물론 그 안에는 예수도 들어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도… 근데, 그 분이 그 전체를 대표하는 거지. 나머지 아들들은 그 아들과 상관없는 아들들이
아니란 얘기에요. <성경은 우리의 이야기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 아들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씨’라 그랬죠? 씨 ‘[제라 H2233] 후손, 씨, 아들’ 은 생명의 씨인
진리를 가진 모든 자들을 총칭하는 개념이에요. 그게 아들이에요. 그래서, 생명을 담고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진리, 말씀이라고도 하고 아들이라고도 하는 거에요. 진리, 시, 말씀을 가졌기 때문에
그 씨를 가진 자가 아들이라니까요. 남자, 여자 마찬가지잖아요. 씨를 가진 건 남자죠? 아들이란
말이에요. 그 씨를 남자가 여자에게 주면 그 안에 생명이 들어가 그 여자가 씨를 갖게 되고 그 안에
그게 생명이 잉태되면 ‘아들’이라 그래요. 신부가 아들을 신랑으로 가지게 되면 그 신부가 아들과
연합이 되어서 아들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거에요. 씨를 가진 아들로… 또 다른 아들로 새롭게
재탄생 되는 거에요. 진리를 가진 이들은 그 안에 생명의 시를 가진 이들이 되어서 신부에서 아들이
되는 거에요. 여자들이 점점 남성화 되어져 가는 거라 그랬죠? 그건 진리를 담고 있는 거에요.
설명하고 있는 거에요. “어휴, 저 마누라가 왜 저렇게… 옛날에는 안 그러더니… 저렇게 그냥 빡빡하게
변해갈까?” 원래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그러니까, 어린 양과의 혼인잔치는 이미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거에요. 그런 거지.. 지금은 그런 일과는 전혀 무관한 내가 저 언젠가 어느 때에
혼인 잔치를 하게 되는 거 그런 거 아니란 말이에요. 여러분, 여기서 아들이 되어야 된다니까요. 그
씨를 마음으로 가져야 된다니까요. 그렇게 자기 안에 생명의 씨, 진리의 말씀을 담게 되면 그 진리가
하나님이므로 내가 바로 <성전>이 되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가 감지할 수도 없고 담을 수도 없어요.
아니 ‘하나님’이라 불러도 안 돼요. 그 분의 이름이 어떻게 ‘하나님’이에요? ‘하나’에다 ‘님’자 붙인 게
어떻게 그 분의 이름입니까? 이름도 부를 수도 없는 그 분…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아도나이’라고
바꿔 불렀죠? 그렇게 바꿔서도 부를 수 없는 그 분. 그 분 이라고 할 수 없는 그 존재. 아니
존재라고도 할 수 없는 거에요. 왜? 그거는 우리의 오감이 감지가 되어야 존재죠? 그런데 그 분은
그것도 아니잖아요. 그 분, 그 분이 내 안에 들어온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수준에 맞게 진리로
말씀으로 전해 준 그것이 내 안에 들어오면, 그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 여겨주시는 거에요. 우리의
수준에서 담은 그 하나님. 그걸 <엘로힘>이라 그래요. 그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가 바로
성전이 되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계신 처소니까… 거처니까… 그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처소라
부르고 히브리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처소를 [a (알레프) 히브리어 알파벳 중 첫 글자, 하나님]+b[(
베트) 성전, 집] 라 해서 ba;{awb} <아브> 라고 써 놓고 ‘아버지’라고 읽는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처소라 써놓고 글자 파자를 하면 <아버지>라고 읽는다니까요. 그 안에 진리를 담고 있는 이들은 ‘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라고 얘기하는 거에요. 그 진리를 씨로 생명으로 갖고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서…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러잖아요. ‘너희는 너희 안에 성령이
거하시잖아. 너희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줄 모르니?’ 그런다 구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을 글자로
써 놓고, 히브리 사람들은 <아버지>라고 읽는다니까요. 그러면 이제 자기 안에 아버지를 가진 이들은
그 아버지에 의해 낳아진 아들이 되는 거죠? 그러면 그 아버지에 의해 그 아들은 사용 되어진단
말이에요. 어떻게 사용 되어질까요? 그 아버지가… 예수 안에 아버지 계셨죠? 내 안에 아버지 계시다
그러잖아요. 그 아버지가 예수를 어떻게 사용했습니까? 그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사용했잖아요. 그리고는 결국 그의 육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니까요. 그게 아버지의 영광이
완료되어 있는 아버지의 영광이 확 피어난 아버지의 영광의 절정이 육의 죽음이었단 말이에요.
육체는 아니고, 그 아버지가 전부다. 이거… 그래서 하나님도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내
아들들, 내 백성들 오라 그래 그런 거에요. 우리는 아버지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을 [독사 G1391],
나타나는 나타내는 존재로 사는 거에요. 그 하나님을 내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우리는 근데 그 하나님을 내 영광을 위해 이용해 먹잖아요. 자해를 해서라도…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에레츠 H776], 땅. 에레츠가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뭐 하길?
잡길… 그물을 쳐서 잡기 시작하신다. 이게 ‘땅’ 이라는 단어가 자진 의미에요. 그렇게 써 놓고 ‘땅’이라
읽는다 구요. 그래서 이 세상은 땅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그물을 확 쳐서 잡아 올리는
곳이에요. 그래서 잡아 올려서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아! 이거 나쁜 고기 버리고 좋은 고기만 끌고
올라가시는 거에요. 이게 좋은 고기, 나쁜 고기, 그물의 비유란 말입니다. 그게 땅이에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아들들만 싹 골라 올리세요. 어떻게 해서? 죽여서… 바다에서 물고기가 땅으로 올라
오면 죽는다니까요. 저주의 바다에서 아들들을 낚아 올리는데 그들만 죽어요. 나머지는? 꼬리로
열심히~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랬는데… 그 꼬리로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자기 자랑하다가
그 저주의 물에서 죽어요. 아들들은 거기에서 꼬리를 삭제 당하고 머리로 편입이 되어 살아나는
거에요. 그래서 머리로 편입 되려면 그 목이 잘려져야죠?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부 참수당했다 그래요. 이 머리 자기 인생의 주체로 사는 그 주체권을 빼앗기는 거에요. 하나님에게
… 그게 죽음이라는 거에요. 육체의 죽음!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죄의 모양으로 육체의 죄를
정했다’ 라는 오늘 본문의 그 말씀을 나와 무관한 저 팔레스타인 땅에 이천 년 전에 왔던 어떤 그
아들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이 대표하고 있던 <나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나!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시는 동시에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난다 그러죠? 성경이 그러잖아요.
너희들은 다 죄인으로 태어난다. 왜? 아니, 하늘에서 의인으로 완성으로 된 이들이 왜 이 땅에 와서
죄인의 역할을 죄의 모양으로 살다 가냐 구요. 오늘 본문이 ‘죄의 모양’ 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왜 죄의 모양으로 살다 가게 해요? 왜? 그게 뭔지를 깨닫게 해서… 너희들을 존재하게 된
그 의가 뭔지를 설명하기 위함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아들들이 이 땅에 와서 <정죄>당하는
거에요. ‘정죄’ 라는 것은 뭐라 그랬어요?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그런 어떤 일을 근거로 하여 죄를
선고하는 게 아니라, 재판관이 심판관이 자기 임의대로 ‘너 죄 있어’ 그러면 그걸 ‘정죄’라 그래요.
하나님이 의인을 우리에게 내려 보내는 거에요. 예수님. 아들인 그 분을 내려 보내서 ‘너 죄인 해’
그러면 죄인이에요. 예수님은 죄가 없었잖아요. 근데 하나님이 죄인 해! 죄인의 대표로 죽어!
그러니까 죄인이에요. 그게 아들이라 구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죄인으로
만들었다가 의인으로 완성시키는 게 아니라. 의인으로 완성해 놓은 그게 도대체 어떠한 능력과
사랑으로 된 것인지 가르치기 위해 죄인의 과정을 잠시 살게 하시는 것뿐이라니까요. 그 모든 성경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는 나에게서 감지가 되어야 돼요. 내 안에서 모두 일어나는 일이어야 한단
말입니다. 예배소서 1 장에서 그러잖아요.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었다 그래요. 이미
아들들로 앉혔다. 과거완료로 해 버려요. 그러면 아들들이잖아요. 우리… 되었다며? 아들이
됐다면서요. 근데 그 아들이 왜 이 땅에 죄인으로 내려와서 그 죄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 하며 사냐
구요? 여러분이 자꾸 힘들다 어렵다 그러는데… 어려워요. 세상 사는 게 다 어려워요. 쉬운 사람
하나도 없다니까요.
엊그제 우리 그 미국에서 그 베버리힐즈에 사는 스티브라는 자이레에 사장이었던 분이에요. 2 조원을
번 사람이에요. 한국 사람 중에… 와 가지고 인터뷰를 하는데… 그러더라구요. 한국으로 들어 왔대요.
왜 들어왔냐고 그랬더니… 돈을 2 조원을 벌었는데, 회사를 팔아서 캐쉬로 2 조원이 남았어요. 그
얼마만큼 큰 돈인지 나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목욕탕이 11 개가 있는 집을 사서 베버리 힐즈, 마이클
잭슨 집 옆에다가 다섯이서 목욕탕 11 개를 어떻게 써요? 그러니까 이걸 자랑해야 되는 거야.
그러니까 매일 파티를 했다는 거죠. 조수미도 와서 집 안에서 콘서트를 했다니까 얼마나 크겠어요?
근데 6 개월 지나니까 너무 공허하더라는 거에요. 사람들이 백 명, 이백 명 와서 집 안에서 콘서트를
보고 가는데… 가고 나면 자기 침실과 부엌에 그 밥 먹는 탁자, 그거 이외에는 사용할 게 없어.
그러니까 너무 공허하니까 한국에 들어왔어요. 한국에 들어왔는데, 아무도 자기가 누구인지 안 알아
주네. 너무 화가 나더라는 거에요. 보세요. 여러분, 2 조원이 있으면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행복할
것 같죠? 공허해서 미치겠더래요. 그럼 뭐냐 구요. 도대체가? 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냐 구요? 아니 이 세상 것들을 내 에너지와 배경으로 삼아 그것만으로 정말 행복한 사람. 잠깐
잠깐은 행복을 느낄 수도 누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으로 계속 주구장창 행복한 사람이 누가 있어요?
다 힘들어요. 왜? 죄 때문에 그래요. 그걸 통과 시키면서… 그것이 내가 하나님 흉내 내는 그 삶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힘든 삶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게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이며
인생이라니까요. 그래서 아들들을 잠시 죄의 모양으로 ‘정죄’하여 내려 보내는 거에요. 경험해 보라는
거에요. 그리고… 그러니까 그 아들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거에요. 우리는 율법, 즉 말씀에 의하여 죽고 진리로 살아나는 예수와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이들이에요.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서…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러잖아요. ‘너희는 너희 안에 성령이 거하시잖아.


너희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줄 모르니?’ 그런다 구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을 글자로 써 놓고,
히브리 사람들은 <아버지>라고 읽는다니까요. 그러면 이제 자기 안에 아버지를 가진 이들은 그
아버지에 의해 낳아진 아들이 되는 거죠? 그러면 그 아버지에 의해 그 아들은 사용 되어진단
말이에요. 어떻게 사용 되어질까요? 그 아버지가… 예수 안에 아버지 계셨죠? 내 안에 아버지 계시다
그러잖아요. 그 아버지가 예수를 어떻게 사용했습니까? 그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사용했잖아요. 그리고는 결국 그의 육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니까요. 그게 아버지의 영광이
완료되어 있는 아버지의 영광이 확 피어난 아버지의 영광의 절정이 육의 죽음이었단 말이에요.
육체는 아니고, 그 아버지가 전부다. 이거… 그래서 하나님도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내
아들들, 내 백성들 오라 그래 그런 거에요. 우리는 아버지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을 [독사 G1391],
나타나는 나타내는 존재로 사는 거에요. 그 하나님을 내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우리는 근데 그 하나님을 내 영광을 위해 이용해 먹잖아요. 자해를 해서라도…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에레츠 H776], 땅. 에레츠가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뭐 하길?
잡길… 그물을 쳐서 잡기 시작하신다. 이게 ‘땅’ 이라는 단어가 자진 의미에요. 그렇게 써 놓고 ‘땅’이라
읽는다 구요. 그래서 이 세상은 땅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그물을 확 쳐서 잡아 올리는
곳이에요. 그래서 잡아 올려서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아! 이거 나쁜 고기 버리고 좋은 고기만 끌고
올라가시는 거에요. 이게 좋은 고기, 나쁜 고기, 그물의 비유란 말입니다. 그게 땅이에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아들들만 싹 골라 올리세요. 어떻게 해서? 죽여서… 바다에서 물고기가 땅으로 올라
오면 죽는다니까요. 저주의 바다에서 아들들을 낚아 올리는데 그들만 죽어요. 나머지는? 꼬리로
열심히~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랬는데… 그 꼬리로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자기 자랑하다가
그 저주의 물에서 죽어요. 아들들은 거기에서 꼬리를 삭제 당하고 머리로 편입이 되어 살아나는
거에요. 그래서 머리로 편입 되려면 그 목이 잘려져야죠?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부 참수당했다 그래요. 이 머리 자기 인생의 주체로 사는 그 주체권을 빼앗기는 거에요. 하나님에게
… 그게 죽음이라는 거에요. 육체의 죽음!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죄의 모양으로 육체의 죄를
정했다’ 라는 오늘 본문의 그 말씀을 나와 무관한 저 팔레스타인 땅에 이천 년 전에 왔던 어떤 그
아들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이 대표하고 있던 <나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나!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시는 동시에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난다 그러죠? 성경이 그러잖아요.
너희들은 다 죄인으로 태어난다. 왜? 아니, 하늘에서 의인으로 완성으로 된 이들이 왜 이 땅에 와서
죄인의 역할을 죄의 모양으로 살다 가냐 구요. 오늘 본문이 ‘죄의 모양’ 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왜 죄의 모양으로 살다 가게 해요? 왜? 그게 뭔지를 깨닫게 해서… 너희들을 존재하게 된
그 의가 뭔지를 설명하기 위함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아들들이 이 땅에 와서 <정죄>당하는
거에요. ‘정죄’ 라는 것은 뭐라 그랬어요?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그런 어떤 일을 근거로 하여 죄를
선고하는 게 아니라, 재판관이 심판관이 자기 임의대로 ‘너 죄 있어’ 그러면 그걸 ‘정죄’라 그래요.
하나님이 의인을 우리에게 내려 보내는 거에요. 예수님. 아들인 그 분을 내려 보내서 ‘너 죄인 해’
그러면 죄인이에요. 예수님은 죄가 없었잖아요. 근데 하나님이 죄인 해! 죄인의 대표로 죽어!
그러니까 죄인이에요. 그게 아들이라 구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죄인으로
만들었다가 의인으로 완성시키는 게 아니라. 의인으로 완성해 놓은 그게 도대체 어떠한 능력과
사랑으로 된 것인지 가르치기 위해 죄인의 과정을 잠시 살게 하시는 것뿐이라니까요. 그 모든 성경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는 나에게서 감지가 되어야 돼요. 내 안에서 모두 일어나는 일이어야 한단
말입니다. 예배소서 1 장에서 그러잖아요.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었다 그래요. 이미
아들들로 앉혔다. 과거완료로 해 버려요. 그러면 아들들이잖아요. 우리… 되었다며? 아들이
됐다면서요. 근데 그 아들이 왜 이 땅에 죄인으로 내려와서 그 죄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 하며 사냐
구요? 여러분이 자꾸 힘들다 어렵다 그러는데… 어려워요. 세상 사는 게 다 어려워요. 쉬운 사람
하나도 없다니까요.
엊그제 우리 그 미국에서 그 베버리힐즈에 사는 스티브라는 자이레에 사장이었던 분이에요. 2 조원을
번 사람이에요. 한국 사람 중에… 와 가지고 인터뷰를 하는데… 그러더라구요. 한국으로 들어 왔대요.
왜 들어왔냐고 그랬더니… 돈을 2 조원을 벌었는데, 회사를 팔아서 캐쉬로 2 조원이 남았어요. 그
얼마만큼 큰 돈인지 나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목욕탕이 11 개가 있는 집을 사서 베버리 힐즈, 마이클
잭슨 집 옆에다가 다섯이서 목욕탕 11 개를 어떻게 써요? 그러니까 이걸 자랑해야 되는 거야.
그러니까 매일 파티를 했다는 거죠. 조수미도 와서 집 안에서 콘서트를 했다니까 얼마나 크겠어요?
근데 6 개월 지나니까 너무 공허하더라는 거에요. 사람들이 백 명, 이백 명 와서 집 안에서 콘서트를
보고 가는데… 가고 나면 자기 침실과 부엌에 그 밥 먹는 탁자, 그거 이외에는 사용할 게 없어.
그러니까 너무 공허하니까 한국에 들어왔어요. 한국에 들어왔는데, 아무도 자기가 누구인지 안 알아
주네. 너무 화가 나더라는 거에요. 보세요. 여러분, 2 조원이 있으면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행복할
것 같죠? 공허해서 미치겠더래요. 그럼 뭐냐 구요. 도대체가? 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냐 구요? 아니 이 세상 것들을 내 에너지와 배경으로 삼아 그것만으로 정말 행복한 사람. 잠깐
잠깐은 행복을 느낄 수도 누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으로 계속 주구장창 행복한 사람이 누가 있어요?
다 힘들어요. 왜? 죄 때문에 그래요. 그걸 통과 시키면서… 그것이 내가 하나님 흉내 내는 그 삶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힘든 삶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게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이며
인생이라니까요. 그래서 아들들을 잠시 죄의 모양으로 ‘정죄’하여 내려 보내는 거에요. 경험해 보라는
거에요. 그리고… 그러니까 그 아들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거에요. 우리는 율법, 즉 말씀에 의하여 죽고 진리로 살아나는 예수와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이들이에요.

아들이거든요. 내 이야기에요. 내 이야기… 그건 동시에 일어나는 거에요. 죽는 만큼 살아나게 돼요.


죽는 만큼 누리게 돼요. 죽는 만큼 자유 하게 돼요. 그리고, 그리고 그 죽음을 육체의 죽음으로 완료가
죄죠. 육체가 죽으면 완료가 되고 그 즉시 완성이 되는 거에요. 육이 완전하게 죽으면서 피조물의
하나님 흉내내기가 종료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잠시 구는 꿈이라 생각하시면 돼요.
현신 속에서 여러분이 구는 꿈을 생각할 때 그 꿈 속에서의 나도 ‘나’ 이죠? 꿈을 구면서도 그래요.
어? 이거 꿈인데?... 라고 인식이 될 때가 있어요. 근데 그게 ‘나’라니까. 둘 다 ‘나’인데 깨버리는 게
꿈이에요.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게 현실이라구요. <우리의 현실은 하늘이라니까요.> 근데 이것도
‘나’라구요. 여기에서 겪는 아픔 고통 다 내가 겪어야 돼요. 거기서도 힘들어요. 그러나 이게 우리의
현실은 아니란 말입니다. 복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비 현실적이라 그러는데… 맞아요. 내 현실은
하늘이거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비 현실적일 수 밖에 없다니까… 근데 자꾸 왜 교회에서도
현실적인 얘기를 해 달래. 아니 내 현실이 묵시인데… 무슨… 현실적인 이야기를 자꾸 해 달라 그래요?
자 그렇게 우리의 하나님 흉내내기가 종료되면… 우리는 이제 하늘에서 하늘적 존재로 영원히 사는
거에요. 이렇게 아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여야 하기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거에요. 요한복음 5 장 17 절을 보세요. 아들, 아들, 아들 계속 나오는데 이게 누구 얘기인지…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이거는 “내 아버지께서 지금 일하시는 게 내가 일하는 거야.” 이런 이야기에요.
“아버지가 지금까지 일하니까 아휴~ 나도 일 할 수 밖에 없어”가 아니라 “내 아버지가 지금 일하시는
게 내가 하는 일에서 나타나는 거야.” 이런 말이에요.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자~ 진리이신 생명을 품고 오신 예수가 말씀하세요.
“내 안에 아버지가 계셔. 그 아버지가 일을 하시는 게 내 일이야. 그게 내가 하는 일이야. 내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일이야. 나는 아버지에게 장악되어 있어. 그 아버지가 내 안에서 일을 하는 게 이렇게
나타나는 거야.”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 아버지가 내 안에 일을 하는데 그 진리가 내 안에서 일을
하는데 이렇게 나타나는 거야.”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세요. “나는 내 아버지가 하라는 말만 했고 하라는 일만 했다” 그래요.
“내 스스로 한 거 아무것도 없다” 그래요. 본인이 직접… “다 아버지가 했다” 그래요.
예수인 그 껍데기는 아무런 주도권이 없었다고 이야기를 한다니까요. 근데 그 분이 <아들>이었단
말이에요. 그게 아들의 삶이에요. 아들의 육신이 부정이 되고 그러나 아버지의 하시는 일만 부각이
되는 거에요. 그게 육신의 죽음이에요. 그걸 그냥 십자가가 그냥 선명하게 보여 주는 거에요.
<아들은 이렇게 아버지에게 장악되어 아버지의 일을 나타내는 자다> 라는 걸… 그게 우리라니까요.
이걸 직역을 하면 “내가 아버지야” 이런 말이에요. 그렇잖아요. 내 안에 그 하나님이 말씀으로 진리로
들어와 있어요. 그걸 히브리 사람이 ‘아버지’라고 읽는다 했습니다. 그럼 내 안에 아버지 있고 아버지
안에 나 있으면 내가 아버지란 얘기 아니에요? 그죠? 근데 유대인들이 뭐라 그랬냐 하면 “어떻게
너와 아버지가 동일하냐? 네가 그 아버지 아들이야? 그 하나님이 네 아버지야?” 그랬어요. 여기 친
아버지라고 그랬는데… ‘친’이라는 단어는 없고, “아버지야?” 그러면 예수님이 이렇게 욕을 먹었으면…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죠? 양 아버지? 친 아버지? 친 아버지에요. 그 분이 여러분을
만들었다니까요. 양자됨은 adopt(입양)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아버지 되심>이라는 뜻이에요. 친
아버지라니까요. 우리 친 아버지… 그럼 우리도 그럼 똑같이 욕 먹어야 돼요? 이렇게? “야!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야?” 맞아요? 틀려요? 이것 봐! 자신이 없다니까! 아니 성경에는 우리를 창세 전에
하나님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라고 하는데 우리는 자신 없죠? 섬기는 데는 도가 텄어요.
근데 그 하나님이 내 안에 아버지로 와 계시고 내가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면 뭔가 꺼림칙해요.
이게 헬라의 이원론에 빠져서 그래요.
여러분, 그건 불경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백성을 그렇게 창조될 수 밖에 없는 거를 보여주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에요. “내 안에 내 아버지 있어. 그리고, 그 아버지에 의해
나는 <존재>야. 그 아버지가 하는 일을 내가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 아버지와 나는 하나지. 그러면
내가 사는 거는 내가 존재인 것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거죠?
그죠? 그게 아들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 매커니즘이라 구요. 그것이… 그러니까 육이 부정
당하는 거에요. 역사 속에서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이다’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에요.
<진리를 담은 자는 하나님을 담은 자고, 그들이 바로 하나님을 마음으로 가진 그 진리를 마음으로
가진 아들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근데 로마 헬라 철학에 물든 유대인들이 이원론적 사고에 푹 젖어서 하나님과 아들의 하나 됨이라는
그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도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나가 돼?” 왜? 그들은 영과 육 이런 거는
완전히 분리를 해서… 그런데 어떻게 그 하나님과 육, 인간이 하나가 돼? 그 분은 당연히 섬김의
대상이어야지… 근데 육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라고 하는 건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처럼 되어
하나님 흉내를 내는 거란 말이에요. 그것이… 그러니까 그 예수님의 말씀을 배격해 버린 거에요. 그
진리의 말씀을 배격해 버린 거에요. 알아 듣지도 못했어요.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냐?” 분개했단 말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도처에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은 많은데 그 분을 그냥 내 밖에 어떤 타자로
저기에다가 던져 놓고 그냥 열심히 ‘비나이다. 비나이다’ 만 하는 거죠. 그걸 우상이라 그래요. 여러분,
나와는 상관없는 어떤 힘있는 존재, 나를 도와 줄 수 있는 내 유익을 내 인간적인 욕심을
에피뚜미아를 도와 줄 수 있는 어떤 존재를 내가 섬기게 되면 그걸 믿음이라 하지 않고 신앙이라
하지 않고 <우상 섬김> 이라 그래요. 그것을… 그게 무속 신앙이라니까요. 신비주의나 기복주의는 말
할 것도 없고, 그런 건 이제 이야기도 하지 말자구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이 다 하셨으니 야~ 십자가, 피, 이것이 다 완성했으니까 우리는 거기에다 다 맡겨 놓고
우리는 그것과 상관없이 그냥 죄인으로 살면 돼! 막 살아!’ 이거 위험한 거에요. 똑같이 십자가 십자가
피 피… 하지만… 그건 내 밖의 십자가라니까요. 그건 내 밖에 피에요. 그게 사뭇 경건하고 거룩하고
인본주의를 탈피한 율법주의를 탈피한 대단한 신앙인 것 같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돼요. <
들음> 다음에는 <앎>으로 가야 돼요. 거기서 끝나면 안 돼요. 그래 알았어? 그럼 됐지… 뭐. 이게
아니라 <됨>의 자리로 가야 된다니까요. 그건 과정이에요. 그것이 우리의 인생 전체… 그 기간
동안에 일어나는 과정 그리고 <누림>의 자리로 가는 거에요. 그렇지 않고 들음, 앎 거기서
끝나버리면 이걸 <영지주의>라 그래요. 그래 다 완성됐다며, 이뤄 졌다며, 그 십자가가 다 했다며, 그
피가 다 했다며, 그 예수가 다 했다며, 근데 뭐? 내 밖에서 일어난 그 일… 그것이 나를 구원하지
못해요. 그게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어야 그것이 내 십자가… 내 피가 된다니까요. 십자가와 피가 내
밖에서 나를 구원한 어떤 능력으로 객관적인 어떤 개념이나 관념으로 존재하면 그것 자체가
우상이에요. 무시무시한 다른 우상보다 더 무서운 666 같은 우상이 되는 거에요. 십자가와 피라는
이름을 가진 우상. 19 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 하세요. “나라는 아들은 하나님 하시는 일을
본다. 내게서 어떤 일이 나오는데 이게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거에요. 내가 하면서 내가
그걸 본다는 거에요. 나는 아버지의 일을 블레포 해. 보고 있어.” 이러는 거에요. 그러한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게 아들의 일을 하는 거라는 거에요. 아들은 아버지에게 진리에게 장악되어 아버지가 시키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일만 하게 돼 있는 거에요. 그래서 아들은 그 일을 하면서 그걸 보는 거에요.
아버지의 일을 보는 거에요. 아들은 그런 방식으로 일을 해야 되는데… 어떻게 그 스스로 일을 할 수
있겠니? 가 19 절인 거에요. 스스로 일 못하는 거에요. 스스로 하겠다는 게 율법주의라니까요… 내
안에서 내 아버지가 행하시는 그 일이 바로 아들인 내가 하는 그 일이라는 거에요. “그러나 나는
없음이고 그 아버지가 진짜 전부이며 있음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우리의
삶이어야 되는 거에요. 그 아버지가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면 가서 매달려야 되는 거에요. 그래야 그
안에 있는 그 아버지가 높임을 받죠. 그 육은 거기서 죽는 거에요.
그리고는 20 절에서 아들과 너희를 동일시 해 버리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이시는데… 그렇게 되면 너희가 앞에서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신의 하시는 일을 보이신다. 그러면
너희가…” 라고 이름하면서… 아들과 너희를 동일시 시켜버려요. 그걸 본 너희가 그분을 찬송하게 될
거야. ‘귀히 여길지어다’ 이게 찬송하게 될 거야 라고요. 그러면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들은
누구에요? 당신을 머리로 한 씨를 가진 진리를 가진 이 아들들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성령을 받는 그
아들들. 증거가 있어요. 그 바로 밑에 줄에 한 번 보세요. 21 절을 보면,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이게 예수님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건 틀린 애기죠. 십자가 이전의 예수는 아무도 못 살렸습니다.
아무도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진리로 돌아오지 않았다니까요. 다 도망갔어요. 그러면… 이 아들은
뭐냐구요? 그 분이 언제 사람을 살릴 수 있었어요? 그 분이 “내가 가서 다른 보혜사로 올게. 내가
갔다가 내가 다시 올 거야.” 그랬어요. 성경에 요한복음에서 “내가 다시 올 건데… 어떻게 올 거냐면
그리스도의 영으로 올 거야. 보혜사. 다른 보혜사로 올 거야.” 그랬어요. 예수님이 지금 보혜사로
왔는데… 이 인간들은 그 인간들의 밖의 보혜사로는 절대 구원이 안 되는 거에요. 어떻게? 영으로
오셔서 말로 진리로 오셔서 그들 안으로 그냥 뚫고 들어가야 되는 거다. 그러니까 그 진리 그게
오셔서 우리를 살리게 되면 그 분이 머리가 되고 우리가 그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잖아요
그리스도인이 되죠? 크리스챤, 호 크리스토스가 된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그거 전체를 <아들>이라
한다 구요. 그걸 이야기 하는 거에요. 우리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그 아들로서 내 안에
있는 그 씨, 그 진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들에게 보내셔서 그걸 전하게 하셨을 때 내가 열망하게
되죠? 야~ 이들이 구원 받았으면 좋겠다. 야~ 이들이 이걸 좀 알아 들었으면 좋겠어. 제 마음처럼…
그랬을 때 이걸 받아들인 이들이 살아 나게 된다는 거에요. 아버지가 그들을 살리는 게 바로 우리가
진리가 되어서 말씀을 흘려 누군가가 살아 난다면, 그 아버지가 한 일이라는 거에요. 그것이요… 내
안에서… 그러니까 이 아들은 우리 이야기 하는 거에요. 오늘 본문에서도 아들도 정죄받아 죽고 그가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는 나와 관계없는 예수가 죽고 살아나서 내가 부활하는 그런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역사 속에서 반드시 십자가에 매달리게 돼 있단
말입니다. 그 언약 안에서 육을 부정 당하는 그 일을 반드시 지나게 돼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성경은
다 내 이야기 에요. 그래야 계시록에서 그 성경을 생명이다 그러죠. 그 책은 생명이다 그러잖아요.
근데 그 책에 내가 기록되어 있어야 생명 책에 내가 기록된 거죠? 아. 염라대왕이 들고 있는 그런 게
생명 책이 아니라니까요. 성경이 생명 책, 생명이란 말이에요. 거기에 적혀 있는 게 내 이야기여야
내가 생명 책에 녹명 된 거에요. 그게 내 이야기가 아니고, 아브라함의 이야기이고 야곱의 이야기이고
예수의 이야기이고 바울의 이야기이면 내가 그 책에 기록 안 되어 있는 거라니까요. 그럼 생명 책에
녹명 되지 못하면? 영원한 저주에 떨어지리라. 그러니까 이게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내 밖에 어떤 이가
법이 되어서 내가 지켜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 이렇게 보여 버리면 이건 내 책이 아니란
말이에요. 누군가 나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해 던진 책이 되는 거지… 근데 절대로
헬라의 이원론은 이걸 하나로 못 봐요. 그래서 법으로 읽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내 것이 안
되는 거에요. 내 것이… 그 아들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에피소드로 보여주는 곳이
있어요. 성경에서 예를 들어서 설명해 드릴게요. 누가복음 7 장 11 절을 보세요.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넘겨 줬다” 그래요. 넘겨 줬다. “아들을 넘겨주다” 이런 뜻이거든요. 디도미[G1325 넘겨주다]
아들이 죽었다가 사는 이야기에요. 아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아들이 죽었다가 살았다” 의 그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거를 그라는 이름은 성경에 여기 밖에 안 나와요. 그렇게 실물 교재를 사용하여
주님이 설명해 주는 거에요. 여기에 나오는 ‘나인성’ 나인이라는 이름은 성경에 여기 밖에 안 나와요.
지리 책을 봐도 지금도 거기가 어딘지는 몰라요. 근데 성경이 그냥 ‘나인성’이라고 이름을 이야기 해
버려요 근데, ‘나인’이라는 지명 뒤에 폴리스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폴리스는 성으로 둘러 싸여 있는 도시를 이야기 해요. 폴리스. 성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은 도시는
다른 단어로 씁니다. 근데 당시에 성으로 둘러 싸여 있는 도시는 <예루살렘>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폴리스 그러면… 산 위의 그 도시, “빛이 비추면 등불이 비추면 산 위에 있는 동네가 감추지 못한다.”
라고 했을 때… 그 산 위의 동네가 폴리스에요. 거기가 뭐라 그랬어요. 예루살렘이라 그랬죠?
팔레스타인에서 산 위의 동네는 산 위의 도시는 예루살렘 밖에 없어요. 다 평평한 데, 거기만 해발
800 미터란 말이에요. 예루살렘이라는 거기 자체가… 그래서 구약에서도 ‘그 산’ 그러면… 전부 거기
예루살렘이에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그 산에서 온다고 했을
때, 성전,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바로 그 예루살렘, 그 산, 거기를 성전이라 그래요. 그게
폴리스거든요. 근데… 나인이라는 이름 뒤에 폴리스를 붙여서 지금 성경이 그 율법의 핵심이며
중심인 그 예루살렘을 지금 이야기 하려고 하는 거에요. 근데, 거기에 ‘나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요. 이
나인이라는 이름은 헬라어에는 이렇게 쓰이지만 히브리서 온 단어인데, [나아]라는 단어에서 온
단어에요. ‘나아’는 목초지, 초장 이런 뜻이에요. 근데 이 단어는 생명에서 이 율법주의의 예루살렘이
있죠? 거기를 하나님이 대 선지서에서 이 ‘나아’라는 단어를 어떻게 쓰냐 하면, “그 초지, 이 나아 ,
이거는 이미 황폐해져서 먹을 것도 없는 그러한 메마른 초지, ‘나아’다. 이렇게 선언을 해 버리시고, 대
선지서에서는 그러나 내가 그 초지, 그 나아를 회복 시킬 거야.” 라고 이야기하는데, 거기에 이 단어를
써요. 이 ‘나아’를 시편 23 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고, 나는 양인데 그 분이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한다 할 때, 그 초장이 ‘나아’에요. 근데 무슨 초장? 푸른 초장. 이스라엘은 근데, 대 선지서에 보면
풀이 없는 초장, 목초지 라고 그래요. 그럼 그게 뭐에요? <옛 성전> 이야기하는 거에요. 옛 성전이
정말 양들이 먹을 것이 없는 곳, 뭔가 많이 내어 놓기는 하는데, 돌과 떡에서 머무르는 곳이에요.
거기는요 먹을 게 없는 곳이에요.
근데 푸른 초장을 뭐였어요? 진짜 양들이 먹을 게 있는 곳 그 옛 성전 율법이 진리로 해석되면 그게
진짜 우리의 양식이 되잖아요. 그게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다는 거에요. ‘나아’라는 그 황폐한
초장에서 푸른 초장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는 거에요. 하나님이… 목자이신 그 분이… 폴리스라는 게
‘나아’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인성’ ‘나인 폴리스’라는 건 예루살렘 이제 회복될 필요가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거에요. 거기에 누가 등장해요? 과부. 그 [케라 G5503]는 단어가 반드시 남편이
필요한 남편이 없으면 반쪽에 불과한 불완전한 존재라는 의미에요. 단순히 남편이 없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그 남편을 못 만나면 이렇게 황폐한 초장에서 굶어 죽는 그런
과부, 고아 그런 신세라는 이야기 해 주는 거에요. 나인성의 과부라는 그 단어 자체가 그런 배경을
설치해 놓는데… 아들이 죽네요. 또 여러분, 이 이야기는 로마의 백부장 이야기 바로 밑에 붙어 있는
이야기에요. 로마의 백부장 이야기가 뭐에요? 로마의 백부장은 로마인이에요. 로마의 군인은 히브리
사람도 할 수 있었어요. 로마의 시민권만 있으면… 그러나 간부들은요 백부장, 천부장 이거는 로마인
아니면 안 돼요. 그러니까 완전한 이방인 입니다. 유대주의 밖에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유대주의
밖에 어떤 이가 자기 하인이 아프다고 예수님께 찾아 와요. 근데 그 하인 [파이스 G3816] 라는 단어는
사실 아들이라는 단어로 쓰이는 단어거든요. 그러니까 아들이에요. 백부장의 아들. 그러니까
백부장의 아들도 아니고 ‘그 이방인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치유 되는가? 구원을
받는가?’의 이야기가 백부장의 이야기에요. 그래서 백부장 이야기에 어떤 이야기가 나오냐 하면
백부장이 뭐라 그러는지 아세요? 예수님에게… “그래 나 가서 고쳐 줄게” 그랬더니 “주여 ‘레오 레고’
말씀만 하세요” “레고 로고스” “말씀만 주세요” 그래요. 그러면 “내가 치유가 됩니다.” 백부장이… “
아니요 그런 거 말구요. 주님, 말씀만 주세요. 그러면 아들이 낫습니다.” 그래요. 그 때 예수님이 “내가
이스라엘 안에서는 이런 믿음을 못 봤다” 그래요. 이스라엘 전체를 부정한다니까요. 율법주의 전체를
… “유대주의, 율법주의 이스라엘아 이게 믿음이야. 너희들 안에는 이 믿음이 없어. 너희들이 열심히
율법 지키고, 행위를 내어 놓아서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니라 아들은 이렇게 ‘말씀을 주세요.’ 하여 그
말씀으로 살아나는 게 ‘아들’이야”라고 율법주의 유대주의 이스라엘 전체를 부정해 버리세요. 믿음
없는 자들로… 그리고 그 율법주의 밖에 있는 어떤 이방인이 말씀을 받자 아들로 살아 나는 거에요.
그게 로마의 백부장이에요.
이 이야기는 바로 그 밑에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그 아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아래로
내려 가서 또 아들의 이야기로 나와요. 왜?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매카니즘에 의해 온전케
치유가 되었는지를 이제 또 실물 교재로 또 보여 주는 거에요. 어떻게 유대주의 밖에 있는 그가
말씀으로 진리로 아들로 살아 났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라니까요.
그 이야기는요. 열왕기상 17 장에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의 데칼코마니에요. 딱 찍으면 똑 같은
이야기에요. 근데 열왕기상 17 장의 그 이야기가 지난 주에 제가 설명해 드렸지만, 어떻게 진행
됐어요? 일단 엘리야가 까마귀로부터 고기와 떡을…(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먹었던 거에요. 그거. 그거
먹고 다 죽었습니다.) 까마귀는 뭐라 그랬어요? 예수님이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했을 때 그 새가
누가복음에서는 “저 까마귀를 봐라”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 까마귀라는 단어 자체가 ‘덮다, 장막을
치다’ 이런 단어라 그랬으니까. 옛 성전이라는 말이에요. 옛 성전이 물어다 주는 광야로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는 절대 그들을 살려낼 수 없다 에요. 그게 율법이거든요. 그래서 그릿 시냇가에서 먹는
거에요. 먹고.. 그릿이 뭐라 그랬어요? [카라트 H3772]라 그랬죠? 카라트란 뭐냐 하면 인간이
선악구조의 두 마음으로 하나님께 뭔가 드리려고 할 때 항상 둘로 나누어서 제사와 율법으로 드린단
말이에요. 그걸 [바탈 H914]이라 그랬어요. 하나님이 그 반대쪽으로 넘어가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경계가 생겨요. 그게 카라트에요. 거기서 나온 단어가 [케리투트 H3748] 이혼증서 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여러분이 법으로 보고 하나님께 이걸 자꾸 지키고 행위로 내어 놓아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겠다 라고 하면 하나님이 넘어가서 케리투트 해 버리세요. 그러면 성겨이 여러분에게
이혼 증서가 돼 버리는 거에요. 하나님과의 이혼 증서! 그래서 엘리야가 까마귀로부터 떡과 고기를
먹고 받아 먹고 그릿 시내가 홀랑 말라 버릴 때, 그 카라트, 그릿 시내를 넘어가 버려요. 경계를
확실히 그어 버리는 거에요. 유대, 이스라엘 너희는 까마귀가 주는 떡과 고기를 먹는 진짜 기근 속에
있는 자들이야. 근데 그 밖에 풍년이 있단다. 그 기근의 이야기에 붙어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는
카라트, 그릿을 넘어가죠? 사르밧, 이방이에요. 이방에 갔더니 거기에 자기가 누구인지 알며 자기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알아요. 내가 가진 건 이 밀가루 한 줌 밖에 없는 그런 쓰레기 같은
존재인 것을 아는 남편이 필요한 어떤 과부가 있네. 근데, 그 과부에게서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까지 홀랑 뺏어 버리는 거에요. 그게 다나토스의 죽음이라니까요. 그랬더니 비로소 그 집에 풍년이
와요. 기름이 진리의 말씀이 떨어지지 않고, 양식이 떨어지지 않아요.
그러면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가? 그걸 설명해 주는 게 그 과부의 아들이 죽는 거에요. 죽었다가
살아난다 구요. 그 이야기란 말이에요. 역시 이것도 백부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 너희 안에는
이런 믿음 없어 라고 이스라엘을 부정하고 카라트, 그릿 시내를 홀랑 넘어가서 나인성으로 가는
거에요. 그리고 거기서 과부를 만나는 거죠. 남편이 필요한 과부… 근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었네요.
근데 그 아들이 죽었다라고 하는데 거기 쓴 단어가 그 죽음이라는 단어가 완료능동태에요. 그러니까
‘스스로 죽었다’라는 뜻이에요. 그 말은 그 아들이 자살했다는 뜻이 아니라 누가 내 목숨 뺏는 게
아니라 ‘나는 스스로 버릴 권세가 있는 자야’ 라고 한 어떤 아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에요. 그
스스로 죽은 과부의 아들이 있어요. 남편이 필요한 아들. 우리 얘기하는 거에요. 우리 얘기. 그 아들이
죽었어요. 근데 그 아들을 뭐라고 부르냐 하면 과부의 독자라고 그러죠? 그게 [모노게네스 G3439]
에요. 독생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에서 그 독생자랑 똑 같은
단어라니까요. 그게 그 아들이 독생자래요. 모노게네스, 하나만 가진 자. 하나님의 진리를 하나로 가진
자. 모노게네스 그 아들이 죽어요. 그 아들이 누구에요? 예수이면서 ‘나’라니까요. ‘예수께서 그
아들에게 손을 댔다’ 뭐 이렇게 번역 돼 있나요? 한글 개역성경에… 거기에 쓰인 단어가 [아프토마이
a[ptomai G680]인데… 그거는 아교로 딱 붙이다. 이렇게 같은 면을 아교로 붙여 버렸을 때 이렇게
하나가 되죠? 요즘도 그 어떤 강력한 본드보다 강한 접착제가 아교에요. 민어 부레로 만든 거…
그래서 진짜 단단하게 붙이려면 아교로 붙인다고… 그 단어에요. 아프토파이. 예수가 그 소년에게
붙어 버렸다 그래요. 연합! 연합이에요. 예수의 죽음으로 죽고, 예수의 부활로 살아나는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근데 개역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관에다가 손을 얹혔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
[소로스 G4673]라는 단어는 사실 침상이라는 단어거든요. 그 왜냐 하면은, 히브리 사람은 관이라는
것을 잘 안 썼어요. 아주 왕이나 귀족들, 특별한 사람들 아니면, 세마포로 이렇게 싸고, 뭐 향료 같은
거 넣어서 싸는 거 이런 거 아니었으면 율법상 그들은 시체를 만지면 안 되고, 죽음을 봐도 안 돼요.
그래서 누가 죽으면, 그가 죽은 침상을 그대로 들어서 무덤으로 가지고 갔어요. 그 침상이야기 하는
거에요. 거기에 죽어 있는 아들과 예수님이 아프토마이 붙어 버린 거에요. 열왕기상에서는 엘리야가
그 죽은 아들에게 어떻게 해요? 그대로 포개지죠? 이렇게 세 번. 그랬더니 아들이 살아나는 거거든요.
아들과 하나님, 엘리야가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엘’ 그 하나님이 그 아들과 하나가 되자 살아나는
거에요. 죽은 자가… 그렇게 밖에 살 수가 없다니까요. 우리는… 죽은 자들은… 그러면 그의 육이
부정되는 거기 때문에… 그가 죽고 사는 거란 말입니다. 근데, 그 아들이 그렇게 해서 죽었다가
살아나더니 뭐해요? 말을 하더라 그러죠.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길래 거기다 적어 놨을까요.
죽었다가 살아나서 말한게 뭐 그렇게 대단해요? 뭐 먹었더라, 울었더라, 감격했다 라도 아니고 ‘말을
했다.’ 로고스…
말이 없고 말을 할 수 없고 말을 들을 수 없는 게 죽은 거란 거에요. 그러나 그 분이 그와 하나가 되자
죽은 자가 살더니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백부장의 이야기에선 뭐라 그랬어요? “말씀만
하옵소서. 나에게 말을 하면 내가 낫겠나이다.” 했더니 예수님이 말씀을 던졌네요. 살아났어요. 이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걸 받아 살아났더니… 내 안에 말이 있네. 죽었다 살아난 아들이… 그 말을 가진
자를 <아들>이라 하는 거에요. 그게 독생자에요. <모노게네스> 열왕기상에 그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보세요.
[열왕기상 17 장 23 절, 24 절]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진리인 줄 아노라) 하니라
‘당신 참 정직하네요.’ 가 아니에요. 진리라는 단어에요. 진실이라는 말. 당신의 입에 있는 것이
진리이네요. 아니, 아들을 줬으면… 아들아! 뭐 이렇게 하던지… 우리 아들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이래야 되는데… 갑자기 그런 말을 다 잊어 버리고 당신 입에 있는 그 말이 진리네요. 그 진리가
살렸다는 뜻이에요. 그 진리로 살아나는 거네요. 그 과부가 아들로 살아나는 거에요. 진리를 받아… 그
이야기가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보세요. 조금 전까지는 물질에 묶여 있어요. 아들이 죽고
아들이 살아나고 울고 웃고 이거 물질 세계의 것이죠. 다… 근데, 그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나자
그거에는 관심이 없고 “아들이 죽었다 살았네요”가 아니라 “그게 진리네요” 비물질의 세계로 눈이
가는 거라. 물질의 세계에서 금방 아들이 죽었다고 울고 불고 했던 여자가 그거에서 벗어나서
현상계에서 그 일에서 벗어나서 당신 입에 있는 것이 진리네요.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이에요. 그게
우리의 인생 속에서 나타나는 거란 말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존재관 이라는 게 사실 물질에 국한되어
있어요. 우리의 사전은 오감으로 감지가 되지 않는 걸 존재라 하지 않아요. 하다 못해 냄새라도
있어야 돼요. 그래야 존재라 하죠. 미루어 추측하여…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물질이 그 안에 비물질의 세계의 것인 그 비물질의 진리가 들어있지 않으면, ‘그 물질이
죽었다’ 그래요. 죽은 것은 ‘존재’가 아니에요. 성경은 그걸 존재라 그러지 않아요. 묵시 속에서의
존재는 물질이 삭제되고 비물질 영의 것으로 사는 것을 ‘존재’라 그래요. 하나님 나라의 존재, 인간
세계 속의 오감으로 감지되는 그러한 것들을 이해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깨닫는
거는 다른 게 아니에요. 눈에 보이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이 현상계의 이 모든 게 그 내용, 비물질의
세계에 것인 하늘의 어떤 것을 담지 못하면 그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없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걸 ‘진리를 알았다’라고 하는 거에요. 숨쉬고, 생각하고 움직인다고 살았다고 이야기 안 한다니까요.
살아있는 건 ‘살아있음’ 이라는 건 그 안에 하나님의 것, 그 비물질의 세계에 그것이 들어 있을 때
그게 ‘살았다’라고 그래요. 그럼 ‘그게 빠졌다’ 라고 하면은 그게 ‘죽었다’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럼 그
죽은 것들이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은 가치 있다?없다? 무가치한 거에요.
예를 들어 볼게요. 다른 종교인들이나 예수를 안 믿는 그 무신론자들이 할 수 있는 어떤 근사한 가치
있어 보이는 행위들… 근데, 그들 안에 비물질 세계의 진리가 없네요. 생명이 없네요. 근데, 그들이
내어놓아 가치 있다고 칭찬받을 수 있는 그 일. 그게 진짜 하나님이 보기에 가치 있는 거에요?
나쁘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보기에 그게 구원과 관계 있는 거냐 구요. 근데,
기독교에 교회에 목적지가 거기가 돼 있냐 구요. 인간의 어떤 성숙,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 세상에
영향 끼치기 이런 거. 그건 복음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에요. 보이는 것은 나타나는
것으로 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면서요. 그러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거란 이야기네요. 그러면 그걸로 보지 못하면 그 보이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는 거에요.
그냥 모형이에요. 근데 그 모형을 모형으로만 내가 인식을 하고 그것을 끌어 당기면 그걸 ‘죄’라고
그래요. 성경이…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그래요. 그것을 거짓이라고 그래요. 그것을 가짜라 그래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여러분이 ‘살았다’고 하는 것.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 그
진리 때문에 여러분은 ‘산 자’ 죠? 그래서 바울이 그러는 거에요.
“나는 죽었어. 그런데 어떻게 산 자 된 줄 알아? 내가 사는 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로 산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갈라디아서 2 장 18 절 보세요.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헐었던 것’은 율법이죠.)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래요. 하나님은 율법을
폐했어요. 완성했어요. 근데 성경을 보면서 자꾸 또 “오리만 가자면 십리 가주래네. 오른편 때리면
왼편도 대 주래네? 속옷 달라면 겉옷도 주래네.” 이렇게 또 법으로 읽어 버리면 자기 스스로 자기를
죄인으로 만든다는 거에요.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나는 그 율법을 율법에 대해 죽었다 그래요.)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게 그 말이에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죽은 거라니까요. “그래서 난 어떻게 산 거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기에 나는 산 거야.”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거에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에요. 믿음이 진짜라는 거에요. 내 안에 사는 그리스도가 진짜
생명이라는 거에요 따라서, 육체를 얼마만큼이나 개발하고 성숙시키느냐 이런 거는 구원과 유기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못 미치는 거에요. 나쁘다는 거 아니에요. 하세요. 하세요. 이왕이면
세상사람들에게 칭찬 받으세요.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인의 목적지가 아니란 말입니다. 탕자의
비유의 이야기도 똑 같은 이야기에요. 누가복음 15 장 24 절 보세요.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여기도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네요. 이거 예수님 이야기에요? 내 이야기란 말이에요.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하나님의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야 되고, 잃었다가 얻어야 돼요. 근데 예수님이 그렇게 얘기했더니
유대인이 뭐라 그랬어요? “내가 아버지를 떠나온 적이 없거늘 내가 언제 종이 됐었냐? 내가 뭐
어디서 뭐 풀어야 된다는 거에요? 난 아버지를 떠나 본 적이 없어!” 이거 맏아들이죠? 이거요.
맏아들이 그러잖아요. “난 아버지가 시키는 거 다 했습니다. 내가 언제 아버지 떠난 적이 있습니까?
난 한번도 아버지를 떠난 적이 없어요.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왜 나를 칭찬하지 않고 아무것도 안
하고, 세상에 나가서 돼지들과 돼지 우리 안에서 돼지 쥐엄 열매와 싸움을 하던 저 놈을 기뻐하세요!
왜 장자의 상징인 그 반지를 저 놈한테 끼워 주세요! 아니 아버지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아버지 그런
거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 아니. 우리가 한 일로 평가를 해 달래니까요. 내가 아버지께 뭘 잘못
했냐구요. 아버지가 하라는 데로 다 했잖아요! 그러면 그 일로 나를 평가해 주세요! 자기가 행한 일로
아버지를 야단친다니가요. 아니 그건 공평한 처사가 아니잖아요! 은혜 같은 거 이런 개 뼈다귀 같은
소리하지 말고, 한 일대로 상을 주세요!”
시퍼렇게 산 거죠? 안 죽은 거에요. 그 아들은…
탕자는 나가 보니까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대지우리라는 것을 알았어요. 돼지는 유대인들이 가장
부정하다고 여겼던 짐승이에요. 그리고, 자기를 봤더니 “돼지들하고 쥐엄열매, 돼지 먹이 갖고 싸우고
있네. 내가 돼지구나” 를 알았어요. 그러면 “이건 먹을 거 아니고, 진짜 먹을 건 어딨지? 아! 아버지
집에… 그 아버지 집에는 종들도 풍성하게 먹던데…” 그리고 머리 긁적이면서 돌아온 거에요. “아버지
여기 밖에 비빌 때가 없어요. 나를 살려 줄 양식을 줄 곳은 여기 밖에 없네요.” 그랬더니 그 아버지가
“그래. 네가 그렇게 죽었다가 살았구나. 네가 그렇게 잃었다가 찾아 진 아들이구나. 그걸 회개라 그래.”
그거잖아요. 그죠? 그래서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이게 이렇게 붙어 있는 거에요. 그걸 다 싸
잡아서 비유, [파라볼레 G3850], 단수로 쓴다구요. 이 세 가지 네 가지 비유는 다 한 비유라는 얘기라
거든요. 이게 다 회개의 이야기였잖아요. 이게 회개야. 그 죄를 통하여 의와 선을 가르치는 거에요.
그걸 회개라 그래요. 죄를 달리 보게 하는 거. 그게 메타노이아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반드시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돼지라는 것을 아셔야 된다니까요. 그리고 이 세상이 돼지 우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거에요. 근데 그걸 아는 게 그게 쉽냐구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하나님 앞에서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으며 피조물의 자리로 잘 내려가면 되는 겁니다. 외롭고 힘들고 대로는 이
세상이 주는 위로나 위안이나 응원이나 이런 걸 안 주기 대문에 우울하고 힘들고 어렵기도 해요.
왜냐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거든요. 근데 우리는 그 세상의 평안해 갈급해 있다구요. 그리고
그것만 배워왔기 때문에 그거와 다른 평안(에이레네)을 주는데, 그게 때로는 외로움으로 감지되고,
우울함으로 감지되고, 힘듦으로 감지가 되고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라니까요. 세상도 줄 수 있는 평안으로 그게 감지가 되면 뭔가 잘못된 겁니다. 로마서 6 장 6
절을 보세요.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네~ 죄의 몸이 멸해졌는데… 그 죄가 누구를 부리겠어요. 없어졌는데, 죽어 버렸는데… 죽었다면서요
… 이 이야기하는 거에요.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죽었으면 그게 산 거야.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그럼, 죄에 대해서 여러분은 죽은 자네요. 죄가 여러분을 노예로 부릴 수도 없어요. 죄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거 믿으세요? 근데 왜 자꾸 회개하고 그러세요? 나쁜 거 아니에요. 그럴 수 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그 때마다 여러분이 그 복음 그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제자리를 딱 잡으셔야
돼요. “그렇지 맞아. 이거 하나님이 미워하는 거 맞아. 그렇지만, 이걸로 내가 흔들려선 안돼. 그렇게
때문에 예수 안에서 내가 죽은 거니까…” 그리로 돌아가시면 되는 겁니다. 로마서 7 장 4 절 보세요.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다른 이. 곧 죽은 이에게 가서 첫 번째 남편은 율법. 죽으면 예수, 죽으면 다른 이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오는 거죠. 그래서 첫째 남편은 죽고 둘째 남편으로 우리는 가야 산다 그러는 거에요.
다른 이. 그 다른 이에게로 가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다 그래요.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어떤 법이 우리를 독려하여 열매를 맺게 하잖아요. “야~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사니. 도덕은 이런
거고, 윤리는 이런 거니까 그렇게 살면 안돼” 라고 이렇게 열매를 맺게 하잖아요. 진리와 무관하게…
그건 사망의 열매래요. 아무리 멋있어 보여도…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우리는 우리의 두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라 그러죠? 자구 뭘 섬겨 드리고 뭘 해 드릴라 그러고 나를
“이 목숨 바치오니” 이렇게 간다니까요. 근데 하나님이 뭐라 그러냐면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라”
영의 새로운 것은 뭐? 진리의 말씀이죠. 진리의 성령. 그걸로 어떻게 섬겨요? 그걸 흘려 주는 게 진짜
섬김이죠? 그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드리는 거고, 하나님을 섬기는 거고, 그게 내 이웃에게
흘려지면 그들이 그것으로 살아나니까 진짜 사랑이네. 그게… 진짜 섬김이네. 그게… 이 세상에 같이
촛불 들고 나가서 대모 좀 해 줘가지고, 밥 몇 숟가락 더 먹게 해 주고, 봉급 좀 올려 받게 해 주고,
공평하게 임대주택 얻게 해 주고 해 봐야 진리를 전해 주지 않으면 죽으면 지옥인데, 그게 무슨
섬김이냐고요… 시간 많으면 그거 하세요. 나쁜 거 아니에요. 근데, 그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 하고
하라는 거에요. 진짜 섬기는 거…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
여러분, 서양 격언에 “가장 이타적인 삶이 가장 이기적인 삶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이거 좋은 말로
쓰는 거에요. 세상… “가장 자기를 위하는 삶은 남을 열심히 도와 주는 거야” 좋은 말이죠? 결국
목적은 뭐에요? ‘나’를 위함이에요. 이게 인간들의 선행의 정체라니까요.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 이
나의 만족과 체면과 평판을 얻기 위해 남을 열심히 이타적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게 ‘인간’이에요.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대부분 그렇게 사랑을 한다 구요. 인간들은… 복음을 모르는 진리를 모르는
인간들의 사랑의 정체가 그거에요. 자기 위해서 한다니까요. 그런 만족, 남이 해 주는 인정… 이런 거
없으면 재미없고 심심해서 안 해요. 보세요. 2 조원 벌었다던 그 사람 누구에게 자랑할 게 없으니까 그
집이 너무 넓은 거야. 그리고 내가 여기서 뭐하나… 이러는 거야… ‘아바’라는 그룹이 진짜 섬을 하난
샀었잖아요. 무인도를… 자기들만 거기서 성 짓고 거기에서 진짜 어마어마하게 하인들도
으리으리하게 산다고… 근데 무인도라 아무도 안 오네. 금방 팔았어요. 재미없어 가지고… 아니 무슨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하루에 다섯 끼 먹어요? 아니 뭐 윗방에는 머리 놓고 아래 방에는 다리 한 짝
놓고 이렇게 다섯 개 걸쳐서 자나? 인간들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요. 하나님이 그거 깨 주시는
거에요. 그게 다나토스의 죽음이라니까요. 그래요. 이왕이면 착한 사람으로 사세요. 그리고 이왕이면
불쌍한 사람들 많이 도와주며 사세요. 너무 인색하게 살지 마세요. 엊그제도 보니까 고작 그 이천
만원 유산 싸움 한다고 아버지가 그거 꼴 보기 싫어서 목 매달아 죽으셨더라구. 그거 자식들한테
그거 남겨줘 봐야 여러분 그거 독이에요. 독.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그랬다니까 남겨 줄 것도 없지만…
하여튼 혹시 어디다 감춰 둔 것 있으면 땅에 다 묻고 가시라고… 자식들한테 주고 가지 말고… 불쌍한
사람들 도와 주면서 사세요. 그리고 인격적으로 성숙해 지세요. 욕먹지 말고, 개독교니.. 뭐 이런 욕
먹지 말고… 그러나 성경이 뭔지 말씀이 뭔지 진리가 뭔지 먼저 알고 하자는 거에요. 그래야 내가 내
의, 내 자랑으로 안 쌓여요. 안 그러면 전부 내 자랑으로 쌓여요. 내 스팩으로 내 자가 발전 그 베터리
충전이 된다니까요. 진리 이 육체가 쏟아낼 수 있는 최상의 것들을 아무리 많이 쏟아낸다 할 지라도
사도 바울이 그거 다 배설물이라 그랬어요. 그 단어는 여러분 ‘똥’이라는 단어에요. 영양가가 아무
것도 없는 물 위에도 둥둥 뜰 수 밖에 없는 헛 것… 하나님이 그거 그렇게 인정 안 해 준다는 거에요.
진리가 없이 하는 모든 일은… 진리만이 생명인 거에요. 그 진리로 가는 길이 예수인 거고 그 길을
가야 진리를 만나고 생명을 얻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길이고 내가 진리야 내가 생명이야’ 그
말은 ‘내가 방법이고 내가 과정이며 내가 내용이고 내가 완료야.’ 이야기하는 거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거에요. 하나님이 내가 알파요 오메가라 그러죠? 알파는 헬라어의 첫 단어이고
오메가는 마지막 단어에요. 내가 시작하고 끝낸다는 거에요.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거에요.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서 “오실 그 이가 진짜 당신이 맞습니까?” 그렇게 물어요.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 로마서 7 장이 그 이야기에요.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됩니까?” 우리는 알죠? 이 둘 다 뭐? 같은 거에요. 예수님이 그 다른 이를 담고 오셨는데 그
다른 이라는 내용을 세례 요한이 못 보는 거에요. 그래서 세례 요한을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의
마지막 완료자, 완성자 라고 얘기하는 거에요. 구약의 마지막이라고 얘기하는 거에요. 아니 율법과
선지자.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아니에요? 근데 예수님이 굳이 그런다니까요. 얘가 구약의
마지막이야. 왜? 세례 요한이 구약의 그 마지막 그 인물로 대표로 모형으로 온 사람이에요. 그래서
신약 성경이, 사복음서가 세례 요한에서 시작되어 요한복음으로 끝나는 거고, 신약성경은 세례
요한으로 시작되어 요한계시록으로 끝나는 거에요. 요한이 죽고, 다른 요한, 다른 이가 완성하는
거에요. 그 요한이 구약 39 권 얌니아 회의인가요? 거기서 그거 결정할 때 그 때 살아있었다니까요.
끝까지 그거 영향력을 미치고 간 사람이 요한이에요. 사도 요한. 근데 그 사도 요한이 누구랑 같이
불림을 받아요? 성경은 항상 짝으로 불림을 받죠? 듀오. 야고보와 요한, 형제잖아요. 보세요. 그
야고보와 요한도 똑같이 세례 요한과 다른 요한의 이야기를 또 담고 있어요. 사도 중에 제일 먼저 목
잘려 죽은 사람이 누구? 야고보에요. 네. 그리고, 요한이 완성하는 거라니까요. 야고보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야곱’ 실족시키는 자, 비 진리, 강도 이런 뜻이에요. 그가 요한, 요하네스, 남아프리카
수다가 요하네스버그죠? 그 단어에요. 여호와의 은혜라는 뜻이에요. 요하네스가 강도에 불구한
실족시키는 자, 비 진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요하네스 완성이 되는데… 그 가운데는 반드시 <
죽음>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라는 것을 보여 주는 거에요. 그래서 세례 요한도 그러는 거에요. 이
사람이 예수님의 사촌이에요. 같이 자랐다니까요. 6 개월 차이 밖에 안 나요. 근데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그러네. 물 세례 계속 줘라. 그러면 그 중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리는 사람이 하나 있을 거야.
그가 ‘메시아’야. 그래서 계속 물 세례를 줬어요. 그랬더니 사촌이 오는데 아니 그 위에 정말 성령이
임하네. 너였냐? 이렇게 된 거죠. 아니 그런데, 어려서부터 같이 자랐을 거에요. 자치기도 하고 놓았을
거에요. 근데 자기가 감옥에 가 있는데 메시야라고 온 인간이 안 구해 주는 거에요. 이게
율법이라니까요. 물질 세계에 갇혀 있는 거. 그러니까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왜? 모형인 껍데기만 본 거에요. 구원을 못 받았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뭔가
이야기를 해 주기 위해 그 역할을 하는 거에요. 세례 요한이… 나중에 제가 설명해 드리겠지만, 창세기
1 장이 세례 요한의 이야기에요. 그리고, 마지막이 요한 계시록이니까 성경 전체는 요한에서 요한으로
끝나네. 네~ 여호와의 은혜에서 시작하여 여호와의 은혜로 끝나는 게 성경이에요. 그래서 백부장의
이야기로 이스라엘이 묵사발 되고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로 하나님의 은혜 그 아들의 죽음과 부활에
의한 구원의 이야기가 설명 되고 그 다음에 요한의 이야기가 또 붙어 있는 거에요. 면도칼 들어갈 틈
없이 하나님은 진리의 네러티브를 이렇게 이어가신단 말입니다. 그렇게 율법의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이 죽어야 사랑으로 완성되는 진리의 사도 요한으로 살게 되는 거. 이걸 설명해 주기 위해 오실
그 이, 다른 이, 오실 그 이에서 어떻게 다른 이가 되니? 네가 아들이 되어 목 잘려 죽으면… 그걸 다른
이로 보게 되는 거야. 이걸 요한이 삶으로 설명해 주고 간 거에요. 너 아직도 물질 세계에 갇혀
있잖아.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수준으로 대답해 주죠.
“제자들에게 가서 얘기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진다. 그것을 프토코스해서 가난한 자가 절대적
가난, 진리의 결핍을 아는 이들,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져…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앉은뱅이가 일어나. 소경이 눈을 뜬다. 귀머거리가 듣게 돼. 그리고 문둥이가 깨끗하게 된다. 가서
얘기해.”
이거 선지서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그대로 얘기해 줬어요. 그러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들을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아 예수 믿으면 병이 낫는 거구나’ 이렇게 받아 들이겠죠?
예수님은 그 안에 진리를 담아 주신 거에요. “아들이 죽고, 아들 안에서 죽고, 아들 안에서 산 자들은
그의 결핍이 채워지는 거고 그 때 그들의 눈이 열리고 그들의 귀가 열리고 그들이 말을 하게 되고
그게 바로 부정한 자가 정하게 되는 거야.” 이 이야기를 해 준 거란 말이에요. 주님이… 그런 한 번
보자 구요. 앉은뱅이는 다리가 없어요. 듣지 못해요. 보지 못해요. 말을 못해요. 요런 짐승이 하나
있는데… 뱀입니다. 뱀은 성대가 없어요. 성대가 없어서 소리를 못 내는데… 혀만 있네. 소리가 없는
자가 혀만 갖고 있으면 뭐에요? 그 혀가 글로사죠? 불의 혀처럼 성령이 임한다 했을 때, 그 혀를
성경이 방언이라고 번역했어요. 글로사를… 그러니까 말이 없는데, 내 안에 가진 말, 진리가 없는데
혀만 날름거리는 게 뭐에요? 방언이에요. 내용도 모르는 엉뚱한 말만 뇌까리는 거… 뱀의 혀라고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그 혀는 말이 없다니까요. 성대가 없어요. 소리를 못 내요. 왜? 내 안에 진리가
없거든. 뱀은 눈으로 입체적인 시각 이걸 확보할 수 없어요. 입체적인 시각이 없어서 형체를 분간하는
게 아니라 열과 냉한 것만 분별을 해요. 귀, 고막, 아무 것도 없어요. 진동만 감지해요. 다리가 없어서
서지도 못하네. 그러면 원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가 그 뱀이었단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뱀
되어서 죽을게. 그래야 너희들에게 평안의 복음에… 그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발이 생기고…
아름답도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 발이여~ 그 발이 생기고, 너희들의 귀가 열리며 너희들의
눈이 뜨여지고 너희들이 말을 하게 될 거란 거에요. 그게 부정한 뱀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뱀, 옛 뱀 이거 딴 데 가서 찾을 게 아니라 “하나님 내가
뱀이었습니다. 근데 그 아들의 죽음으로 제가 이렇게 그 진리를 말하고 그 진리를 보고 듣는 자가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리로 가야죠. 그게 나의 죽음이잖아요. 내 육의 죽음. 그거 하라는
거에요.
이게 뭐가 어렵냐 구요. 왜 자꾸 저한테 설교 어렵게 한다고 그래요? 무슨 얘기를 해 달라는 거에요?
영화 본 얘기 뭐 이런 거 해 드릴까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뭐 적용해야 할 것들 몇 개로 딱 추려서
대지 딱 딱 나눠서 이렇게 설명해 드리면 그거 쉽다고 하시겠어요? 아니 하나님이 하늘의 비밀은
감추어 놨다 그래요. 감추어 놨다 그러고… “그거를 가르쳐 주려고 너희들에게 성경을 줬는데
너희들이 못 알아 먹으니까 내가 가르치는 자를 함께 보내 줄게” 라고 까지 말씀 하셨어요. 그러면
그건 어떤 이가 열심히 하나님과 씨름하며 말씀과 씨름하며 잘 배워서 가르쳐 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이야기에요. 근데 그걸 어떻게 쉽게만 날로 먹을라고 그러냔 말이에요.
여러분 성경은 절대 문자로 보면 안 돼요. 그냥 여러분이 국어 책 읽는 수준으로 그리고 도덕 책 읽는
수준으로 그렇게 봐 버리면 성경은 그냥 도덕 윤리 책이 되어 버린다니까요. 그건 여러분의 영생에
아무런 영향을 못 미치게 돼요. 언어나 문자 소리는요 말은 항상 인간 중심으로 변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도 아주 급속도로 빨리 그래서 우리가 쓰는 언어를 50 년 전 어른들에게 하면 아무도 못 알아
들어요. 그죠? 할아버지들 손자들하고 얘기하면 저게 무슨 얘긴가? 그래요. 그 정도로 변한다니까요.
지금 우리가 소리로 갖고 있는 하늘 ‘천’(天) 이거는 얼마 전까지 하늘 ‘텬’이었어요. ‘텬’ 발음이 잘 안
되잖아요. 인간들이 발음 하기 쉬운 ‘천’으로 자기들이 바꿨거든요. 근데 ‘텬’이라고 읽었던 시대에
진리가 적혔다고 기록됐다고 생각해 보자 구요. 근데 우리가 ‘천’이라는 글자를 갖고 그 시대로 가요.
그러자 그 사람들에게 ‘천’이라고 이야기하면 그 사람이 그걸 알아 듣는다? 못 알아 듣는다? “천이
뭐야?” 근데 우리는 지금 이렇게 변화 되어진 이 ‘천’이라는 이 수준 이 영역으로 그 성경을 보고
있으면 안 되는 거에요. 그 ‘텬’이라고 쓰였을 때의 그 때 당시로 올라가서 배경과 문화와 그리고 그걸
쓴 이의 환경이나 인품 성격 심지어 이런 것까지도 다 고려를 하여 이게 이런 의미겠거니 하고
공부를 해야 되는 거에요. 여러분, 그래서 설교자나 책을 쓰고 하는 이들은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해서
그것이 그 당시에 어떤 의미로 쓰였겠는가? 그리고 그 당시의 책 들은 그 단어를 어떻게 쓰고
있는가를 잘 연구를 해서 이게 그거네요. 그리고 그것이 성경의 맥과 일치하게 하면 그 때 비로소
원고 하나 나오게 되는 거 거든요.
근데 그것도 아니고 난 세상에… 미국에서 아리조나인가 어딘가 알라바마에 집회를 갔는데 거기는
시골이라 목사가 부흥회를 하러 오면은요 동네 목사님이 다 오세요. 그게 예의인가 봐. 근데 설교가
끝난 다음에 같이 다과를 나누는데 복사들끼리 앉았어요. 인상 팍팍 쓰면서 “뭐 저런 게 와 갖고…” 막
~ 자기네들끼리 얘기하는데… 나는 말도 안 시키고… 아니 세상에 골프 치러 수요일마다 가는데
예배시간이 7 시인데요. 홀이 한 두 개가 남으면 이걸 교회를 가야 되나 저걸 마저 치고 가야 되나
이것 때문에… 근데 결국은 그걸 다 치고 간다는 거에요. 내가 놀란 거는… 그래서 늦게 가면요
사람들이 알아서 기도하고 있거나 찬송하고 있데요 그럼 올라가서 아무데나 펴서 자기가 그냥 갖고
있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다 은혜를 받는다는 거에요. 그거를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 얼마나 불쌍합니까! 거기 앉아 있는 분들이요. 전부 그 한국에서 국제 결혼한 그런 불쌍한
사람들인데… 거기요 근데 세상에 기도하다 가는 것도 아니고 골프 치다가 30 분씩 늦게 가 갖고
아무데나 펴서 아무 얘기나 하고 근데도 은혜 받더라 라고 히히덕 거리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우리 학교 가서 ‘바둑아, 영희야, 철수야 학교 가자’이것부터 배우죠? 그 다음에 화학 물리
지리 산수 뭐 이렇게 가는 거 아니에요? 그거 갖고 근데 ‘바둑아, 영희야, 철수야’도 모르는 인간들이
뭘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이것도 못 읽으면서 그게 무슨 원래 어떤 글자로 문자로 주어 졌는
건지도 모르면서 뭘 설명을 하겠다는 거에요. 뭘로? 내가 귀로 주어 들은 뉴스, 책 읽은 거, 영화 본거,
그런 거 얘기해 주면 전부 좋아가지고 말이죠. 쉽다 그러고… 저렇게 삶에 적용되는 말씀을 해
주셔야지 뭐 이렇게…
성경은 절대 소리로 읽으면 안 돼요. 내용으로 읽으셔야 돼요. 아니 아에 띄어쓰기가 없었다니까요.
모음도 업었고… 그거를 어떻게 읽으라고 주냐 구요. 소리를 내놓는 순간 너희들은 이것을
왜곡시킨다고 하나님이 그렇게 준 거에요. 성경을.. 그러니까 내용으로 하나 하나 보라는 거에요.
마지막으로 시편 19 편 2 절 보세요.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진리는 언어도 없고 소리도 없는 거에요. 그러나 통(通)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내용을 아셔야 돼요.
성경 많이 아는 거. 네. 열심히 하셔서 많이 아세요. 그러나 그것들은 다 진리의 하나로 통하게 돼
있어요. 하나님 전부, 나 아무 것도 아님. 그 해박한 지식 레위기 몇 장에 무슨 얘기가 있구요. 그건
성전에서 무슨 얘기구요. 이런 거 하나도 몰라도 돼요. 예수 성경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내 육신
전부 뭐에요? 거기로 건너가기 위한 ‘배’라니까요. 근데 육지에 건너 왔는데 그 배를 왜 짊어지고
다니는 거에요? 거기에 건너간 사람은 필요 없어요. 어휴 나이가 들어서 치매가 걸려서 옛날 성경을
자꾸 잊어버려… 괜찮아요. 당연한 거에요. 그렇게 잊어 버려야 되는 거에요. 버리세요. 자꾸… 그러나
그걸 통하여 내 마음에 심겨 준 하나님이 내 마음에 심어 준 그것만 갖고 있으면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불교에서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게 금강경하고 반야심경이거든요. 금강경을 읽어보면은요
진리, 진리, 진리… 전부 진리에요. 근데 뭐라 그러냐면은 ‘진리가 필요합니까? 진리를 아셔야 됩니다.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금강경이 그 얘기해요. 근데 내용이 없어요. 그 진리가
어떻게 되는 거고 뭐 무슨 얘기에요? 근데 끝까지… 그리고 반야심경에서 ‘건너가라 건너가라 그
너머에 진리가 있다’고 끝나네. 뭐 어떻게 하라는 거에요? 그거를 전파복음이라 그래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다 짊어 지셨데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 뭐 어떻게? 금강경하고 반야심경하고 그게 뭐가 달라요? 아니 그 내용을 설명해 줘야죠.
그래서 그 내용을 다른 예화도 아니고 성경에서 일부러 하나 하나 골라다가 설명해 주는데 그게 왜
어려워요? “어휴 그거였어?” 이렇게 감동적 이여야지. 성경에 관심이 없어서 그래요. 다들… 아뇨 그게
생명입니다. 물질은 영의 세계에서 아무 소용이 없어요. 여러분이 나중에 새로운 육신을 부여 받아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지만, 그렇게 진리를 품은 그러나 완성된 그 육신은 <영>이에요. 여러분
물질이 아니라니까요. 그 세계는… 그러니까 이 세상 속에서 진리를 담지 못한 물질들의 허황됨을 잘
배워서 아들로 죽고 다른 아들로 사는 거에요. 그게 여러분의 살 길입니다. 다음 시간에… To be
Continued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죽어서 산다는 이 역설이 이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에서
이해 되어지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 내가 그 하나님으로 살고 아버지는 나를
품음 이로 산다는 이 말이 어떻게 이해 되어지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인간의 모든 존재가 완전히
무시되고 삭제되는 것인데,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쉽게 수긍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뱀에 불과했던 그 우리의 실존을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아들로
바꿔주시니 아버지 하나님 그저 감개무량할 뿐입니다. 그것으로 기쁘게 하시고 그것으로 행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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