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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롬 8 장 3 절~8 절]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한테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자꾸 이야기 하시는데,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에요? 도대체가?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고 원수로 행한다
네요. 로마서 8 장을 모든 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로마서의 분수령’이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아주 중요한 장입니다. 로이드 존스도 로마서 전체 중에 한 장만 고르라면 8 장을 고르겠다
라고 이야기 했을 정도로 아주 중요한 장이에요. 그래서 여러 번에 걸쳐서 단어 하나하나를 심도
있게 설명을 해 드리고 있어요. 어떤 주석서에도 없는 이야기를 해 드리고 있는 겁니다. 근데 아직도
그 개념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제가 좀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지금
알게 모르게 헬라어의 이원론적 철학의 관점으로 성경을 배워 오셨기 때문에 그래요. 수메르
문명에서 헬라문명으로 넘어가면서 성경 이해가 굉장히 왜곡 되어 졌어요. 성경은 절대 이원론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책이에요. 진리가 하나잖아요. 그걸 둘로 나누면 안 된다니까요. 진리는 둘로
나누어서 에피뚜미아의 두 마음으로 생각하고 이해하고 논해져서는 안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그리스도와 내가 그 이원적 관계인 절대 타자로 그분은 내 밖에 절대 타자로, 나도 그 분과 절대
타자의 자리에 있고 이러한 그런 이원적 관계로 이해 된다든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와 (나는 그
아들 아니에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와 그 예수에 의해 구원받은 나. 이런 식의 이원적 관계에
머물게 되면 우린 그 아들을 경외의 대상으로 섬김의 대상으로 섬겨 버리게 된다 구요. 잘 하는 것
같지만… 기독교는 그게 아닙니다.
이게 전부 헬라의 이원적 해석에 기인한 오해들인 거에요. 그게 겸손한 것 같고 내 자리를 지키는 것
같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그렇게 내가 그 자리에서 나를 섬기겠다고 하는 게 사실은
네가 하나님 노릇 하는 거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잘 이해하셔야 돼요. 그거 겸손한 거 아니에요.
거기에 다 속고 있는 거라니까요. 성경은 분명 우리 성도 전체를 가리켜 <아들><장자>라 불러요.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내 장자라 그랬다니까요. 내 장자. 장자는 예수님 아니에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아들이라 그래요. 장자라 그래요. 그리고, 그들의 화합인 교회를 ‘장자들의 총회’라고
한다니까요. 장자들만 있어. 다 아들만 있어. 그들만 모인 곳이에요. 그걸 교회라 한단 말이에요.
맏아들이 머리이고 다른 장자들이 지체들이 된 하나. 다 아들이에요. 그냥 그 자체가 아들이에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라니까요. 예수를 머리로 한 ‘하나’.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아들’이라고
부르고 주님도 그렇게 씨, 복음의 씨, 진리를, 씨를 마음으로 가진 이를 아들이라 그래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아들, 아들’ 할 때, 자기가 자기보고 아들이라 한 거 아니에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어떤 아들들에 관한 얘기한 거에요. 물론 그 안에는 예수도 들어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도… 근데, 그 분이 그 전체를 대표하는 거지. 나머지 아들들은 그 아들과 상관없는 아들들이
아니란 얘기에요. <성경은 우리의 이야기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 아들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씨’라 그랬죠? 씨 ‘[제라 H2233] 후손, 씨, 아들’ 은 생명의 씨인
진리를 가진 모든 자들을 총칭하는 개념이에요. 그게 아들이에요. 그래서, 생명을 담고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진리, 말씀이라고도 하고 아들이라고도 하는 거에요. 진리, 시, 말씀을 가졌기 때문에
그 씨를 가진 자가 아들이라니까요. 남자, 여자 마찬가지잖아요. 씨를 가진 건 남자죠? 아들이란
말이에요. 그 씨를 남자가 여자에게 주면 그 안에 생명이 들어가 그 여자가 씨를 갖게 되고 그 안에
그게 생명이 잉태되면 ‘아들’이라 그래요. 신부가 아들을 신랑으로 가지게 되면 그 신부가 아들과
연합이 되어서 아들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거에요. 씨를 가진 아들로… 또 다른 아들로 새롭게
재탄생 되는 거에요. 진리를 가진 이들은 그 안에 생명의 시를 가진 이들이 되어서 신부에서 아들이
되는 거에요. 여자들이 점점 남성화 되어져 가는 거라 그랬죠? 그건 진리를 담고 있는 거에요.
설명하고 있는 거에요. “어휴, 저 마누라가 왜 저렇게… 옛날에는 안 그러더니… 저렇게 그냥 빡빡하게
변해갈까?” 원래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그러니까, 어린 양과의 혼인잔치는 이미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거에요. 그런 거지.. 지금은 그런 일과는 전혀 무관한 내가 저 언젠가 어느 때에
혼인 잔치를 하게 되는 거 그런 거 아니란 말이에요. 여러분, 여기서 아들이 되어야 된다니까요. 그
씨를 마음으로 가져야 된다니까요. 그렇게 자기 안에 생명의 씨, 진리의 말씀을 담게 되면 그 진리가
하나님이므로 내가 바로 <성전>이 되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가 감지할 수도 없고 담을 수도 없어요.
아니 ‘하나님’이라 불러도 안 돼요. 그 분의 이름이 어떻게 ‘하나님’이에요? ‘하나’에다 ‘님’자 붙인 게
어떻게 그 분의 이름입니까? 이름도 부를 수도 없는 그 분…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아도나이’라고
바꿔 불렀죠? 그렇게 바꿔서도 부를 수 없는 그 분. 그 분 이라고 할 수 없는 그 존재. 아니
존재라고도 할 수 없는 거에요. 왜? 그거는 우리의 오감이 감지가 되어야 존재죠? 그런데 그 분은
그것도 아니잖아요. 그 분, 그 분이 내 안에 들어온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수준에 맞게 진리로
말씀으로 전해 준 그것이 내 안에 들어오면, 그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 여겨주시는 거에요. 우리의
수준에서 담은 그 하나님. 그걸 <엘로힘>이라 그래요. 그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가 바로
성전이 되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계신 처소니까… 거처니까… 그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처소라
부르고 히브리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처소를 [a (알레프) 히브리어 알파벳 중 첫 글자, 하나님]+b[(
베트) 성전, 집] 라 해서 ba;{awb} <아브> 라고 써 놓고 ‘아버지’라고 읽는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처소라 써놓고 글자 파자를 하면 <아버지>라고 읽는다니까요. 그 안에 진리를 담고 있는 이들은 ‘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라고 얘기하는 거에요. 그 진리를 씨로 생명으로 갖고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서…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러잖아요. ‘너희는 너희 안에 성령이
거하시잖아. 너희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줄 모르니?’ 그런다 구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을 글자로
써 놓고, 히브리 사람들은 <아버지>라고 읽는다니까요. 그러면 이제 자기 안에 아버지를 가진 이들은
그 아버지에 의해 낳아진 아들이 되는 거죠? 그러면 그 아버지에 의해 그 아들은 사용 되어진단
말이에요. 어떻게 사용 되어질까요? 그 아버지가… 예수 안에 아버지 계셨죠? 내 안에 아버지 계시다
그러잖아요. 그 아버지가 예수를 어떻게 사용했습니까? 그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사용했잖아요. 그리고는 결국 그의 육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니까요. 그게 아버지의 영광이
완료되어 있는 아버지의 영광이 확 피어난 아버지의 영광의 절정이 육의 죽음이었단 말이에요.
육체는 아니고, 그 아버지가 전부다. 이거… 그래서 하나님도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내
아들들, 내 백성들 오라 그래 그런 거에요. 우리는 아버지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을 [독사 G1391],
나타나는 나타내는 존재로 사는 거에요. 그 하나님을 내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우리는 근데 그 하나님을 내 영광을 위해 이용해 먹잖아요. 자해를 해서라도…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에레츠 H776], 땅. 에레츠가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뭐 하길?
잡길… 그물을 쳐서 잡기 시작하신다. 이게 ‘땅’ 이라는 단어가 자진 의미에요. 그렇게 써 놓고 ‘땅’이라
읽는다 구요. 그래서 이 세상은 땅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그물을 확 쳐서 잡아 올리는
곳이에요. 그래서 잡아 올려서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아! 이거 나쁜 고기 버리고 좋은 고기만 끌고
올라가시는 거에요. 이게 좋은 고기, 나쁜 고기, 그물의 비유란 말입니다. 그게 땅이에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아들들만 싹 골라 올리세요. 어떻게 해서? 죽여서… 바다에서 물고기가 땅으로 올라
오면 죽는다니까요. 저주의 바다에서 아들들을 낚아 올리는데 그들만 죽어요. 나머지는? 꼬리로
열심히~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랬는데… 그 꼬리로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자기 자랑하다가
그 저주의 물에서 죽어요. 아들들은 거기에서 꼬리를 삭제 당하고 머리로 편입이 되어 살아나는
거에요. 그래서 머리로 편입 되려면 그 목이 잘려져야죠?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부 참수당했다 그래요. 이 머리 자기 인생의 주체로 사는 그 주체권을 빼앗기는 거에요. 하나님에게
… 그게 죽음이라는 거에요. 육체의 죽음!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죄의 모양으로 육체의 죄를
정했다’ 라는 오늘 본문의 그 말씀을 나와 무관한 저 팔레스타인 땅에 이천 년 전에 왔던 어떤 그
아들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이 대표하고 있던 <나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나!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시는 동시에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난다 그러죠? 성경이 그러잖아요.
너희들은 다 죄인으로 태어난다. 왜? 아니, 하늘에서 의인으로 완성으로 된 이들이 왜 이 땅에 와서
죄인의 역할을 죄의 모양으로 살다 가냐 구요. 오늘 본문이 ‘죄의 모양’ 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왜 죄의 모양으로 살다 가게 해요? 왜? 그게 뭔지를 깨닫게 해서… 너희들을 존재하게 된
그 의가 뭔지를 설명하기 위함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아들들이 이 땅에 와서 <정죄>당하는
거에요. ‘정죄’ 라는 것은 뭐라 그랬어요?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그런 어떤 일을 근거로 하여 죄를
선고하는 게 아니라, 재판관이 심판관이 자기 임의대로 ‘너 죄 있어’ 그러면 그걸 ‘정죄’라 그래요.
하나님이 의인을 우리에게 내려 보내는 거에요. 예수님. 아들인 그 분을 내려 보내서 ‘너 죄인 해’
그러면 죄인이에요. 예수님은 죄가 없었잖아요. 근데 하나님이 죄인 해! 죄인의 대표로 죽어!
그러니까 죄인이에요. 그게 아들이라 구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죄인으로
만들었다가 의인으로 완성시키는 게 아니라. 의인으로 완성해 놓은 그게 도대체 어떠한 능력과
사랑으로 된 것인지 가르치기 위해 죄인의 과정을 잠시 살게 하시는 것뿐이라니까요. 그 모든 성경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는 나에게서 감지가 되어야 돼요. 내 안에서 모두 일어나는 일이어야 한단
말입니다. 예배소서 1 장에서 그러잖아요.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었다 그래요. 이미
아들들로 앉혔다. 과거완료로 해 버려요. 그러면 아들들이잖아요. 우리… 되었다며? 아들이
됐다면서요. 근데 그 아들이 왜 이 땅에 죄인으로 내려와서 그 죄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 하며 사냐
구요? 여러분이 자꾸 힘들다 어렵다 그러는데… 어려워요. 세상 사는 게 다 어려워요. 쉬운 사람
하나도 없다니까요.
엊그제 우리 그 미국에서 그 베버리힐즈에 사는 스티브라는 자이레에 사장이었던 분이에요. 2 조원을
번 사람이에요. 한국 사람 중에… 와 가지고 인터뷰를 하는데… 그러더라구요. 한국으로 들어 왔대요.
왜 들어왔냐고 그랬더니… 돈을 2 조원을 벌었는데, 회사를 팔아서 캐쉬로 2 조원이 남았어요. 그
얼마만큼 큰 돈인지 나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목욕탕이 11 개가 있는 집을 사서 베버리 힐즈, 마이클
잭슨 집 옆에다가 다섯이서 목욕탕 11 개를 어떻게 써요? 그러니까 이걸 자랑해야 되는 거야.
그러니까 매일 파티를 했다는 거죠. 조수미도 와서 집 안에서 콘서트를 했다니까 얼마나 크겠어요?
근데 6 개월 지나니까 너무 공허하더라는 거에요. 사람들이 백 명, 이백 명 와서 집 안에서 콘서트를
보고 가는데… 가고 나면 자기 침실과 부엌에 그 밥 먹는 탁자, 그거 이외에는 사용할 게 없어.
그러니까 너무 공허하니까 한국에 들어왔어요. 한국에 들어왔는데, 아무도 자기가 누구인지 안 알아
주네. 너무 화가 나더라는 거에요. 보세요. 여러분, 2 조원이 있으면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행복할
것 같죠? 공허해서 미치겠더래요. 그럼 뭐냐 구요. 도대체가? 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냐 구요? 아니 이 세상 것들을 내 에너지와 배경으로 삼아 그것만으로 정말 행복한 사람. 잠깐
잠깐은 행복을 느낄 수도 누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으로 계속 주구장창 행복한 사람이 누가 있어요?
다 힘들어요. 왜? 죄 때문에 그래요. 그걸 통과 시키면서… 그것이 내가 하나님 흉내 내는 그 삶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힘든 삶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게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이며
인생이라니까요. 그래서 아들들을 잠시 죄의 모양으로 ‘정죄’하여 내려 보내는 거에요. 경험해 보라는
거에요. 그리고… 그러니까 그 아들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거에요. 우리는 율법, 즉 말씀에 의하여 죽고 진리로 살아나는 예수와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이들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죽어서 산다는 이 역설이 이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에서
이해 되어지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 내가 그 하나님으로 살고 아버지는 나를
품음 이로 산다는 이 말이 어떻게 이해 되어지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인간의 모든 존재가 완전히
무시되고 삭제되는 것인데,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쉽게 수긍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뱀에 불과했던 그 우리의 실존을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아들로
바꿔주시니 아버지 하나님 그저 감개무량할 뿐입니다. 그것으로 기쁘게 하시고 그것으로 행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