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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5 주일 설교 준비

온세대 한말씀 프로젝트

설교를 위한 본문의 범위 선정
사도행전 4 장 5-14 절

제목: 거침없이 담대하게


주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담대함을 주셨다.
이미지: 파레시아

1. 복음을 대적하는 세력은 진실에 관심이 없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을 치유하는 이적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 4
절에 의하면, 그 인원이 5 천 명이나 되었다. 앞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 나라의 말로
하나님의 큰 일을 증언하게 되고, 베드로가 비웃는 사람들에게 설교했을 때에는 3 천 명이 새로운
성도가 되었다. 그러니 엄청난 부흥이 일어난 셈이다.

그 비결이 뭘까?
숫자의 부흥만이 전부는 아니지만, 여기서 분명한 점이 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초대교회의 여러 모습에서 끌렸다. 그들의 메시지, 그들의
삶, 그들의 섬김 등에서 매력을 느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오늘은 “담대한 선포” 파레시아에 대해서
나누려고 한다.

파레시아가 무엇인지 나누기 전에, 오늘 본문의 상황을 보자. 이 본문은 처음으로 복음의 역사가
저항을 만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앞으로 이런 일은 계속 펼쳐질 것이다. 복음의 역사가 펼쳐지는
자리에 악한 사탄의 저항이 강력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복음에 대해 저항하는
사람들은 도깨비 방망이를 들고 있고, 머리에는 뿔이 난, 저승사자와 같은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제사장들, 성전의 책임자들, 사두개인들, 관리들, 장로들, 서기관들이었다. 쉽게 말해서, 대부분 종교와
정치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이 복음에 대항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진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질문을 보라.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밤에 억류했다. 특별한 이유도 없다. 날이 저물었다고
해서 다음 날 심문을 진행한다. 그 질문이 뭔가?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7 절)

이게 정말 중요한 질문인가? 이게 꼭 알아야 하는 그런 진리인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성전 미문에서


날마다 구걸하던 사람,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 그가 일어나고 걷고 뛰게 된 것이다.
그게 진실이다. 그게 진리이다. 그럼 이걸 주목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헌데 이 지도자들의 질문을 보라. 무슨 권세? 누구의 이름? 그게 무슨 중요성이 있는가? 이것은


그야말로 개소리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바알세불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께서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셨다. 그러자 말 못하던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다. 그때 일부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한다.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흠집을 내려는
시도를 한다. 마태복음 12 장 24 절에서는 이런 터무니없는 공격을 한 자들이 바리새인들이라고
밝힌다. 마가복음 3 장 22 절에서는 서기관들이 이런 억측을 부렸다고 기록한다. 누가복음 11 장 15
절에서는 일부의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했다고 말한다. 누가복음에서는 그런 비난의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의 리더였음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개소리에 대해서 예수님은 답변을 하신다.

1
눅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 오늘날도 사람들은 진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얼마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한 배우가 있다. 그는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던 배우이다. 그런 그가


경찰에서 마약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된다. 그런데 마약 혐의에 대해서 어떤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한다. 그러자 다른 찌라시 기사들이 나온다. 그가 불륜 관계에 있었고, 상대방이 술집 마담이었으며,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녹음이 버젓이 저녁 메인 뉴스에 나온다.

물론 이 배우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게 공영방송에서 메인 뉴스에


소개될 기사였을까? 어디 삼류 찌라시 언론에서 취급할 그런 저급한 내용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는 일이었고, 전 국민의 눈살을 찌뿌리게 하는 뉴스 공해일 뿐이다. 결국 한 생명이
꺼지고 말았다. 과연 이게 마약 수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주변에는 지금도 이런 일이 너무 자주 벌어진다. 진실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자극적인 기사를 통해서 클릭수를 늘리고,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그런 못된 삼류 보도 행태들이 너무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3.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담대함을 주셨다.

이런 저급한 접근에 대해서 베드로는 어떻게 대응을 하는가?


8 절에 의하면, 베드로는 성령에 충만하여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에게 말한다. 그의 첫 대응을 보라.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9 절)

이 구절을 유심히 살펴보면, 베드로의 지혜에 탄복하게 된다.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개소리와 같은 이상한 질문을 바꾼다.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사람들을 자극하려는 그런 질문의
방향을 다시 수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이다. 이게 먼저 주목할 일이다. 지금 눈 앞에 일어난 일은


가십거리가 아니다. 이것은 착한 일이다. 그런데 왜 이것을 찌라시로 만들려고 하는가, 이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말한다.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그걸 확인하는 것이
눈 앞에 벌어진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한 올바른 질문이라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베드로는 먼저 이 사건이 찌라시로 취급될 일이 아니라, 분명히 좋은 일이요 착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이제 마땅히 따라올 질문은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담대하게 선포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사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을 건강하게 되었다고, 이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선포한다.

그리고 아주 유명한 말씀이 이어진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12 절)

베드로의 대답은 사람들을 꼼짝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베드로의 담대함에 놀란다. 여기서 담대함이란 모든 것을 말한다는 의미의 헬라어
파레시아이다. 거침없이 진실을 말한다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담대한 것이다. 바로
2
그런 담대함이 베드로에게 있었다.

그렇다. 초대교회는 담대함이 있었다. 파레시아의 담대함,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꼭 필요한 말을


담대하게 전하는 것, 바로 그게 사도행전 증인들의 특징이다. 바로 그런 시원한 메시지에 사람들이
열광한 것이다. 이 담대함이 초대교회의 매력이었다.

여기 사용된 “파레시아”라는 단어가 아주 의미있다.


바울에게서도 이런 특징이 나온다. 후에 보게 될 스데반 역시 이런 파레시아가 있었다. 탈진실의
시대에 이런 자세가 꼭 필요하다. 담대하게 거침없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용기 말이다.

4.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신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신다.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담대함이다.
탈진실의 시대, 개소리가 난무하는 시대이기에 더욱 파레시아의 정신이 필요하다. 개소리를 하는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담대하게 진리를 외칠 필요가 있겠다. 예수님께서 그런 삶을 사셨고,
사도행전의 여러 설교자들이 그런 삶을 살았다. 이제는 우리들의 차례이다. 우리는 세상의 개소리에
맞서서 진리를 거침없이 담대하게 외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파레시아는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나온
것이었다.

냄새는 선을 넘는다는 말이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 사람은 그 선을


넘기 어렵다. 그러나 냄새는 넘어간다. 휴전선을 넘는 것도 냄새에게는 쉬운 일이다. 다른 것은
불가능해도 냄새는 그게 가능하다.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담대함은 바로 그런 냄새와 같다. 우리의
담대함은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막지 못하는 그런 거룩한 냄새이다. 선을 넘는다. 그런 특징으로 우리
자신을 재무장해야 하겠다.

그때 우리는 담장을 넘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 구체적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담장을 넘어


진리를 외치는 파레시아의 사람들,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려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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