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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0 주일 설교 준비

온세대 한말씀 프로젝트

사도행전 5 장 1-11 절

본문: 사도행전 5 장 1-11 절


제목: 거짓의 사람들
주제: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을 미워하신다
이미지:

1. 본문에 대한 고민과 키워드 정하기

이 본문은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판 후에, 그 금액을
사도들에게 드린다. 앞서 4 장에 나온 바나바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은 헌신처럼 보인다. 아마도
바나바와 이들 부부는 상당한 재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한 사람의 경우는
사도들의 큰 권능과 부흥 그리고 큰 은혜(4:33)의 결과와 함께 소개가 되고, 이들 부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나아가 온 교회와 사람들이 큰 두려움(5:11)을 갖는 사례가 되었을까?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본문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꺼린다. 그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설교자들은 이 본문으로 봉헌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면 벌을 받는다고 위협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이든 저런 경우이든 그다지 바람직한 접근은 아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말씀을 전하면
좋을까?

거짓말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풀어가도록 하자.


거짓말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풀어가는 핵심이 된다. 4 절에서 베드로가 하는 질문에 잘
나타난다.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그렇다. 이들 부부에게 임한 심판은
거짓말로 인한 것이다. 이제 그런 내용을 중심으로 몇 가지를 고찰해보자.

2. 앞선 흐름과 연결하기

오늘 본문에 대한 바른 이해는 앞선 이야기와의 관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4 장 마지막 단락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외부의 핍박에 대해 잘 대응한다.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더욱 말씀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기로 한다. 그와 함께 여유가 있는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교회 앞에 소유를
내어놓는다. 어찌보면 외부의 핍박이 신앙공동체를 하나가 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4 장 32
절은 그런 교회의 모습을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된 것으로 묘사한다.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는 마치 그리스 도덕 철학자들이 자주 읊던 격언과 비슷하다. “친구 사이는


모든 것을 공유한다.”(Amicorum communia omnia)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꿈꾸던 것을 현실로 만들었다. 한 마음과 한 뜻 그리고 소유를


공유하는 일, 이것 자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그러니 외부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공동체로 우뚝 세워지고 있다 하겠다.

그런데 바로 그런 좋은 분위기가 5 장에 들어가면서 순식간에 무너진다. 작은 곰팡이가 음식물


전체를 상하게 만드는 것처럼,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경건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을 한다.

그럼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이들 부부의 잘못이 뭔가? 그리고 그 잘못의 대가로 죽음을 맞는 것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현대인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 납득할 만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아나니아의 경우에는 회개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 같다. 본문 2 절에서 4 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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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아나니아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지 않는다. 삽비라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8 절에서 땅을 판
값이 이것 뿐인가 베드로가 묻는다. 돌아볼 기회를 주는 것이다. 아나니아의 경우에는 분명 그런
부분에서 자세한 설명이 없다.

자 그럼 정리를 해보자.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잘못이 뭔가? 명확하다. 거짓말을 했다는 점이다. 3 절에서는 성령을 속였다
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들 부부는 성령에 의해서 일어나는 행위들을
위조한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풀려난 후, 교회 성도들은 함께 기도했고 진동을 경험했고
성령의 충만함을 누렸다. 그 결과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고 물건을 통용하게 되었다. 바나바의
헌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성령께서 공동체 안에 행하신 한 마음과 한 뜻과 물건 통용의


아름다운 일들을 위조한 것이다. 왜 성령의 역사를 위조했을까? 자신들의 공동체 내부에서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 아니면 사람들에게 더욱 인정을 받고 싶어서, 아마 그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 부부의 죄는 성령을 속인 것에 있다. 본문 4 절을 새번역 성경이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땅은 팔리기 전에도 그대의 것이 아니었소? 또 팔린 뒤에도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소?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할 마음을 먹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오.”

재산을 나누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따라 하면 되는 것이다. 재산을 소유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들은 교회의 일치를 흔들고 성령을 속였다는 점에서 큰 범죄를 한
것이다.

여기서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 책에 대한 내용을 소개해도 좋겠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거짓말에 대해서 깊게 살펴본다. 자신이 상담했던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환자와 그들의 가족까지
깊게 추적해본다. 이 책의 핵심은 정신 질환의 근원적인 뿌리가 가해자와 또 피해자의 거짓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죄를 지을 수 있고, 또 거짓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짓과 질병을 한사코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거짓의 사람 혹은 악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도무지 치유될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 거짓은 사람을 혼돈시킨다. 악한 사람들은 거짓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기 기만을 쌓아 올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속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누구보다 가장 겁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모습이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을 피하면서, 자신의 목소리 듣기를 거부한다. 남의 정직한 목소리 역시 외면한다. 그들은 더 이상
지옥에 갈 필요가 없다. 이미 그들은 지옥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거짓의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8 장 31 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1-32)

그러자 유대인들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왜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는가”라고 반문을 한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라고
하신다. 그리고 대화를 주고 받는 가운데 이렇게 결론을 내리신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44 절)

그럼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혹여 우리도 거짓의 아비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책망하는 내용을 보면,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다”(5:3)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니
아나니아는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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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모습을 어떤 성서학자는 여호수아의 아간과 비교하기도 한다. 그의 범죄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무시한 것이었다. 그 역시 마귀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그로 인해 공동체 전체가 문제를 만나게
된다. 그러니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거짓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거룩하게 지키려고 하신다는 것을 알려준다.

삽비라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이 여인은 남편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2 절) 그리고 회개할 기회를
받았다. 하지만 남편의 최후가 어땠는지 알지 못하고, 남편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게 된다. 부부관계가
이렇게 어렵다. 남편이 아내의 뜻을 거역하기 어렵고, 아내가 남편의 계획을 반대하기 어렵다. 악한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함께 그런 선택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그런 점에서 부부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주님께서 부부의 중심에 계셔야만 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중심에는 주님이 아니라 돈이 있었다. 마귀가 심어 놓은 그릇된 생각이 있었다.
우리의 가정을 건강하게 챙겨야 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3. 젊은 사람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을 때, 이들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간 것은 젊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힘이


있어서 이런 일을 한 것일까? 루크 존슨은 여기 언급된 젊은이들은 저자가 의도적으로 아간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여호수아가 모조리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라합 가족을
끌어내어 이스라엘 진영 밖으로 둔 것이 ‘젊은이들’이었다. 본문의 <네안이스코스>와 같은 단어로
사용된다.

이걸 어떤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까?


기성세대가 죄와 타협을 하고 거짓의 사람으로 전락을 할 때, 그것을 끄집어내는 것이 진짜
젊은이라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젊은이는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보기 보다 신앙공동체의 경건과
거룩을 위해 죄를 미워하는 사람들, 거짓에 맞서서 싸우려는 사람들, 그들이 신앙공동체의 진짜
젊은이라고 하겠다. 다음세대는 성령이 충만한 세대가 되어 죄악의 자리를 떠나야 한다. 우리는 그런
준비를 해야만 하겠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은 불편한 본문이다. 이 본문을 피하는 것보다 오히려 불편하게 느끼는 것이
정직한 태도라고 하겠다. 마지막 구절 11 절이 그래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오늘 우리는 과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있을까?

앞선 4 장의 이야기가 교회 가운데 은혜가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물건을 나누는 놀라운 이야기이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내부의 문제로 인해 구멍이
생긴다. 거룩이 위태롭게 되었다.

하나님은 결코 교회의 거룩을 위태롭게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때로 두려운 일을 허용하신다.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여기 5 장 11 절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교회란 무엇인가? 어쩌면


저자는 교회란 성령의 이끌림을 따라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모여 큰 은혜를 경험하는 공동체이며,
동시에 이 공동체가 죄에 의해 거룩이 훼손되려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치유하시는 곳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교회는 은혜와 거룩이 함께 있어야 한다.

은혜는 있는데 거룩이 없으면, 그런 공동체는 죄 앞에서 무너진다.


거룩은 있는데 은혜가 없으면, 그런 공동체는 사랑 없음으로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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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지금도 은혜와 거룩을 겸비한 공동체를 세워 가신다. 그게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들려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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