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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군정실기 2

165
甲午軍政實記 二

갑오군정실기 1
출진 영관 죽산부사 이두황, 영관 구상조, 안성군수 홍운섭, 원세록에
게 전령함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으니 군대의 규율보다 엄격한 것이 없는데, 지금


군대가 머물기만 하고 나아가지 않아서 흉도(凶徒)들이 방자하게 극성
을 피우게 되었다고 들었다. 어찌하여 일의 체모(事體)가 이와 같을 수
있는가? 보통의 법률로 헤아려 보아도 한심하기 그지없다. 이에 또 전령
하니, 즉각 일전의 명령에 따라 적을 무찌르되 만일 전과 같이 답습하면
단연코 법에 따라 시행할 것이다. 충분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나아가 무찌르고 상황을 즉각 보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10월 12일│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뢰기를, “이번에 의정부의 초기에 대하여 윤허하신 것을 보니,


‘안성 전 군수(郡守) 성하영이 지난날 파직된 후에도 연이어서 비도(匪
徒)를 무찔러 자못 공로를 세웠기에 특별히 분간하여 서산군수로 임명하
였으니, 그에게 지름길로 곧바로 나아가게 하고 거느리고 있던 경병(京
兵)은 그대로 나누어 거느리게 하여 하루빨리 적을 무찔러서 제거하라.’
라고 하며 순무영이 서산군수 성하영에게 매우 빨리 명령하여 알리도록
하였습니다. 전일에 내려보낸 경리청 병정 중 1소대를 서산군수 성하영이
있는 곳에 옮겨 나아가도록 하여, 기한을 정하여 적을 무찌르도록 전령
하여 알리도록 하겠다는 내용을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갑오군정실기 2 167
서산군수 성하영에게 전령함

10월 11일에 의정부에서 임금께 아뢰기를, “이번에 서산의 예리(禮吏)가


전패(殿牌)를 가지고 왔을 때, 비류(匪類)가 작변(作變)하여 군수 박정
기(朴錠基)가 해를 입었고 관청 건물이 모두 탔다고 말하는 것을 확실하
게 들었습니다. 적의 세력이 자꾸 퍼지고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수령을 죽
이니, 이미 매우 통탄스럽고 놀라운 일입니다. 전패를 옮겨 봉안하기에
이른 것에 대해서 매우 놀랍고 송구스러우며, 전패는 내무아문에서 임시
로 받들도록 하였습니다.
안성의 전 군수 성하영은 지난날에 논파를 당한 후에도 연이어서 비류
를 무찔러서 자못 공로를 세운 것이 크게 드러나 특별히 분간하여 서산
군수로 임명하였습니다. 또한 그에게 지름길을 택하게 하여 그가 거느리
고 있던 경병(京兵)을 그대로 나누어 거느려서 하루빨리 적을 무찔러 제
거하도록 하는 일을 순무영으로 하여금 빨리 명령하여 알리도록 하였습
니다. 불쌍히 여겨 구휼하는 은전을 관찰사가 임금께 아뢰어 다시 품처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비답을 내렸다.
안성을 후원하기 위한 경리청 영관 구상조가 거느린 병정 1소대를 옮
겨 나아가도록 하는 일을 막 해당 영관에게 영칙하였다. 이에 전령하는
바이니, 도착하는 즉시 해당 병정을 교부(交付)하여 기회를 틈타 상황
변화에 대응하여 기한을 정해 무찌르고 평정할 것이며, 상황을 빨리 보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출진 영관 구상조에게 전령함

지금 듣건대 서산의 비류가 난을 초래하고 못된 짓을 하여 통탄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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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이길 수 없다. 그들을 물리칠 방안을 조금도 늦출 수 없으므로, 데리
고 있는 병정 중 1소대를 옮겨서 서산군수 성하영이 있는 곳으로 나가게
하여, 시간을 정하여 물리치고 평정하는 것으로 임금께 윤허를 얻었으니,
이에 전령하므로 도착하는 즉시 매우 빠르게 해당 군수에게 교부한 후에
상황을 빨리 보고함이 마땅하다.

상리국 경성 내외 14임방에게 전령함

상민(商民)들이 전후로 국가를 위한 일에 정성을 다하였으니 매우 가상


하다. 그러나 근래에 환난(患難)으로 각 임방(任房)이 반드시 흩어져 쇠
잔하게 될 염려가 있을 것이다. 본영은 순무하는 곳에서 단속하는 조치
를 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너희들 두목을 지금 영문에서 특별히 군
관으로 임명하고 이에 전령한다.
상민들은 평시에 규칙을 지키려 마음먹고 있어서 평민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으리니, 두목들이 각기 그들을 단속하고 이끄는 절
차를 서로 더 의논하여 확실하게 정하고 기율을 지키는 것은 옛날의 방식
대로 준수하되, 상민을 기록하여 만일에 이와 같은 때를 당하여 부탁을
하였는데 응하지 않는 자는 각별히 엄하게 권장하여 분명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상리국 전 통령(統領) 박복래(朴福來) 등 39인에게 보냄.

상리국 지방의 각 임방 이경석ㆍ이완배ㆍ송성운에게 전령함

상민들이 전후로 국가를 위한 일에 정성을 다하였으니 매우 가상하다.


그러나 근래에 소위 동도(東徒)들이 저와 같이 창궐하여 고을을 침해하
고 핍박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조정과 민간이 떠들썩하다. 상민들
또한 저들 무리들[彼徒]의 협박을 견디기 힘들어, 할 수 없이 비류를 따

갑오군정실기 2 169
라서 마구 섞여 못된 행실을 부렸다는 것을 옆에서 얻어들었다. 비록 그
들에게 협박을 받아서 그렇다 하더라도 평상시에 충성을 다한 상민들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이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혹 저들 무리가 받아들이
지 않는다면, 군대를 일으켜 무찔러 없앨 것이다. 대진(大陣)이 이르게 되
면 상민과 동학도를 구분하는 것이 어려우므로 이에 전령한다. 너희들
두목은 상민을 단속하되, 정말로 표호(標號)한 후에 와서 대진에게 아
뢰어 약속한 것을 지켜, 죄다 무찔러 죽게 되는 화를 면하는 것이 마땅하
다.

공무아문 서리에게 보내는 공이

본영에서 사역하기 위해, 광무국(鑛務局)의 서리 김동식(金東式)을 즉각


보내도록 할 것.

전 친군영에게 감결을 보냄

본영에서 사역하기 위해, 강갑이(姜甲伊)를 즉각 보내도록 할 것.

경기감사 신헌구가 원본을 베껴서 보고함

경기감사 신헌구가 원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이번에 지평 공형(公兄)


의 문장(文狀)을 보니, “지평현의 새로 제수된 현감 맹영재가 동도의 우
두머리[巨魁] 이인오(李寅五), 진천 접주 이재국(李載國) 및 이름을 알
수 없는 진(陳)ㆍ조(趙) 2놈을 지평과 여주가 만나는 두 경계 사이에서
잡아서 노상에서 죽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이어서 도착한 죽산부사 이두황의 첩보의 내용에 “10월 5일 밤에 동
도 박봉학(朴奉學)ㆍ이돈화(李敦化)ㆍ강원중(姜元中)ㆍ안창순(安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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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ㆍ박명복(朴命卜) 등 5놈을 잡았는데, 강원중ㆍ안창순ㆍ박명복 3
놈은 강제로 따른 자이므로 곧바로 풀어 주었으며, 박봉학ㆍ이돈화는
행패를 부린 행적을 모두 자백하고 복종하였으므로 모두 처결하였습니
다.”라고 하여, 이를 급히 임금께 보고합니다.
제(題) : (등보가) 도착했다.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함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합니다. “이번에 비도들이 괴산(槐山) 땅에 모여


있다.”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바로 충주 무극 장터에
서 곧장 비도들이 있는 곳을 향하여 행진하려 합니다.
제(題) : 선봉진과 일본 군사가 하루빨리 내려가고 있으니, 잠시 주둔
하였다가 일전에 전령한 것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함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합니다. 10월 5일 밤에 본진의 행순병(行巡


兵) 김윤근(金允根)ㆍ이윤달(李允達)ㆍ김준식(金俊植)ㆍ김석용(金石
龍)ㆍ송민수(宋敏水)ㆍ심선흥(沈先興)ㆍ김원태(金元太)ㆍ조이원(趙
已元)ㆍ김용연(金用連)이 본읍에서 20리쯤 되는 곳에 있는 주천당(注
川堂)ㆍ미륵(彌勒) 등지에서 동도인 박봉학ㆍ이돈화ㆍ강원중ㆍ안창
순ㆍ박명복 등 5놈을 잡아서 조사하여 캐물으니, 강원중ㆍ안창순ㆍ박
명복 3놈은 강제로 따르게 된 자였으므로 곧바로 풀어 주었습니다. 박
봉학은 검찰(檢察)이라 하면서 남의 무덤을 파고 채전(債錢)을 강제로
받았으며, 이돈화는 접사(接司)라고 하면서 동학도들을 거느리고 채전
을 받고 남의 나귀를 빼앗았다고 모두 자복하였으므로, 모두 처결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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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양지현감 박교양이 첩보함

양지현감 박교양(朴敎陽)이 첩보합니다. 이번에 도착한 순무영의 관문


내용에, “9월 25일에 의정부에서 임금께 아뢰기를, ‘충청도와 전라도의 비
류들이 근래 영남ㆍ강원도ㆍ경기ㆍ황해 지역에 널리 세력을 펼치고 있습
니다.’라고 하였다. 각처에서 그들을 토벌하거나 어루만져 달래는 일은
모두 순무사가 일체 맡아서 처리하도록 해야 하는데, 비류들이 6도에 널
리 퍼져 있어서 근심과 걱정이 그치지 않고 있다. 그들을 토멸하고 어루
만져 달래는 방법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으니, 무릇 일이 군사상의 기
밀(軍機)에 속하는 것은 해당 읍에서 곧바로 본영에 보고할 것이며, 여러
읍들은 각자 방어하고 지켜서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여 군대의 규율에 처
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관문을 상고하고, 거행한 상황을
곧바로 순무영에 보고하고 영(營)에도 보고하도록 할 것”이라 하셨으니,
적을 토벌하고 어루만져 달래는 방법은 각자 마을에서 엄하게 신칙하여
단속하고 그중에 소란을 일으킨 자는 무찔러 없애고, 안도시켜야 할 자
는 안정시키고 어루만져 달래라는 뜻으로 각별히 조치하였습니다.
제(題) : 각별히 단속하여 실효를 거두도록 하라.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함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합니다. 이번에 도착한 전령의 내용에, “‘뜻있는


선비 중에 군대에 필요한 물자를 낸 사람들이 많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들을 본 군문에 속하게 하여 힘을 다 바칠 수 있게 하라.”라고 하셨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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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로, 전령의 내용에 의하여 거행할 생각입니다.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함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합니다. 부사가 지난 9월 23일에 부임한 이후,


동도 1십여만 명이 보당(堡黨)을 쳐서 없애겠다고 하면서 진천 광혜원
에 모였는데, 적은 군사로 많은 무리들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은 이치상 그
런 것입니다. 가벼이 나아갔다가 쉽게 물러나는 것은 병법에서 꺼리는 일
입니다. 그래서 각각 돌아가서 생업에 종사하라는 내용의 방문을 죽산
부의 경계 내 및 인근 각처에 두루 게시하였습니다. 그들 무리 중에서 강
제로 따르게 된 자는 점차 돌아가서 흩어졌으며, 죽산부의 경계 내 및 여
주ㆍ이천ㆍ음죽ㆍ양지 등지로 도망하여 돌아간 자가 거의 반을 차지합
니다.
본진에서는 후원하는 병사들이 연이어서 오고, 저들 무리들은 그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저들은 두려운 마음을 품고 진천의 구만 장터
(九萬場基)로 물러났습니다. 며칠 있다가 다시 충주 무극 장터(無極場
基)로 물러났으며, 며칠 후에는 다시 보은(報恩)ㆍ괴산(槐山) 등지로 물
러났습니다. 현재 그들 무리들 중에 남은 자는 모두 우두머리로 행패를
부린 비류들입니다. 곧바로 군대를 나아가게 하여 토멸하려고 하였지만,
그들이 다시 돌아와서 틈을 노리는 근심이 없지 않아, 다만 이곳을 지키
고 있습니다.
또한 기찰하는 장교를 인근 각 곳에 보내어 지금 바로 그들 접주(接
主)와 접사(接司)로 행패를 부리는 자를 염탐하여 체포하려 하며, 선봉
장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가 병사들을 나누어 지키도록 하고, 곧바로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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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들을 출발시켜 그들의 소굴을 소탕할 생각입니다.
제(題) : 선봉진과 일본 군사가 이미 출발하였으며, 그들이 도착하기
를 기다려서 며칠 전에 전령한 것을 거행하도록 하라.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영솔 장졸이 20일 먹을 분량의 식량 가격 27,480냥


가운데 11,826냥을 통위영 영관에게 나누어 주었고, 11,400냥은 교도소
영관에게 분배하였습니다.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어제 유시(酉時, 오후 5~7시) 무렵에 각 소대를 이끌


고 아무런 폐해 없이 강을 건넜습니다. 과천읍에 이르러 머물러 묵었으
며, 아침과 저녁 등으로 식사를 하는 것에는 문제없이 음식을 제공하였
습니다. 이어서 출발합니다.
제(題) : 화성에 이르면 임시로 머물러 주차하였다가, 일본 군대가 들
어가면 상의해서 출발하여 나아가도록 하라.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뢰기를, 이번에 선봉장 이규태(李圭泰)의 빠른 보고를 보니,


“군대의 행진이 어제 과천현에 도착하였으며, 무사히 묵었다.”라고 합니
다. 감히 아룁니다.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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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장 이규태에게 전령함

일본 군사가 내일 출발하려고 한다. 잠시 수원부에 머물러 있다가, 그 일


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서로 의논하여 노정을 확실히 정하여 아뢰도
록 하라.
이에 교도소(敎導所)에도 일체 알리도록 하라.

여주목사 이재윤이 첩보함

여주목사 이재윤(李載允)이 첩보합니다. 순무영의 관문에 의거한 경기감


영의 감결 내용으로, “여주의 경계 내에 아직 비류들이 경계를 침범한 것
은 없지만, 여러 차례 관문으로 신칙하였기에 여주의 각 면리(面里)에 연
이어 엄하게 더욱 신칙하여 각자 막고 지키도록 하였고, 읍부(邑府)는
호(戶)마다 창과 활을 조치하여 마련하고, 각별히 막고 지키도록 할 것”
이라 하였습니다.

노량별장 민홍식이 첩보함

노량(露梁)별장(別將) 민홍식(閔弘植)이 첩보합니다. 어제 신시(申時,


오후 3~5시) 무렵에 선봉진 일행이 동작진(銅雀陣)을 무사히 건넜습니다.
제(題) : 모두 잘 알았다.

교도소 영관 이진호, 통위영 영관 장용진에게 전령함

일본 육군 보병 소좌 우마야하라(馬屋原)가 지금 바로 출발하였다. 잠
시 화성부(華城府)에 주둔하였다가, 그들 행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려라.
진퇴를 조절하는 절차는 하나같이 해당 사관(仕官)의 지휘를 듣고 시행
하라. 상황을 빨리 보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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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정들이 거쳐 가는 연로에 있는 각 읍과 진의 관에게 전령함

동학도를 쳐서 물리치는 일로 일본 군대가 지금 식량과 비용을 가지고


내려갔는바, 이르는 곳에서 혹 식량과 비용이 모자랄 염려가 있다. 이에
전령하는 바이니, 도착하는 즉시 그들이 거쳐 가는 각 읍에서는 해당 파
견된 관원의 말에 따라 먹을 것을 제공하고, 말의 먹이와 땔감 등과 같은
것을 마련하여 관아에서 뒷바라지하되, 필요한 물자는 어떠한 공곡ㆍ공
전 중에서 사실대로 집행하여 사용하고, 해당 군관의 신적(信蹟)을 받은
후 성책하여 함께 보고해 오면, 회감(會減)하는 것이 마땅하다.

강화 중군 황헌주에게 전령함

지난번 강화의 병정 2백 명을 이끌고 호서 등지로 나아가 지원하라는 내


용으로 관문을 내려 신칙하였다. 군대가 행군할 때 과연 어느 지방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는가? 지금 일본 육군 보병 중위 일진(一陣)이 출발하여
비도들을 무찌르는 것을 도울 것이다. 그러니 일본군이 도착하는 곳에서
는 진퇴를 조절하는 절차를 하나같이 해당 사관(仕官)의 지휘를 따라서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하고, 서로 힘을 합쳐 상황 변화에 대처하라. 만일
조금이라도 가볍게 여기고 해당 사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군대의 규
율이 매우 준엄하게 될 것이다. 잘 알아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행하
고 상황을 먼저 빨리 보고함이 마땅하다.

의정부가 상고함

의정부가 상고한다. 경기 소모관 맹영재(孟英在)가 의병을 제창하여 일


으켜서, 비류를 무찌른 것은 매우 가상하다. 그런데 그가 이끄는 포군(砲
軍)은 관병이 의지할 수 있는 것과 비교할 것이 못 된다. 이렇게 날씨가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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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때에 그들이 입고 있는 것이 얇은 옷 하나라는 점이 매우 걱정스럽다.
탁지목(度支木) 10동을 특별히 조치하여 보내니, 순무영에서 내려보내
나눠줘서 조정이 특별히 보살피고 있다는 뜻을 보여 주어라.

│10월 13일│
병정들이 거쳐 가는 연로에 있는 각 읍과 진의 관에게 전령함

순무영의 참모관을 임명하여 내려보내니, 그가 도착하는 곳에서는 그가


말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정탐하여 망을 보는 관리[偵探候吏]는 참모관
이 요청한 바에 따라 시행하여 기회를 놓치는 폐가 없도록 함이 마땅하
다.

임금이 전교함

임금이 전교하기를, “한번 비적들이 창궐한 이후에, 여러 번 유시를 내렸


는데도, 그들은 허물을 고치지 않고 심지어는 명리(命吏)를 살해하는 변
고까지 일으켰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고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군사를
일으켜서 도적을 무찔러 없애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 슬프게도 죄 없는
저 백성들이 난을 겪어 떠돌아다니고 고생하며 안정할 곳이 없어서 이렇
게 가을걷이할 때를 만나도 살 수 없게 되었으니,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방도를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 충청도 위무사(慰撫使)로 지중추원사
(知中樞院事) 박제관(朴齊寬)을 임명하고, 전라도 위무사로 전라감사
이도재(李道宰)를 겸임하도록 하고, 경상도 위무사로 선무사(宣撫使)
이중하(李重夏)를 옮겨서 임명하되, 직접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일일이
타일러서 각각 안도할 수 있게 하며, 내가 백성을 위하는 지극한 뜻을 실

갑오군정실기 2 177
천하라는 내용으로 묘당(廟堂)에서 빨리 말을 만들어 지시하여 의논하
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천부사 남정기가 첩보함

이천부사 남정기(南廷綺)가 첩보합니다. 10월 4일 발송해 10월 6일 신


시(申時, 오후 3~5시)에 도착한 비밀 전령[秘傳令]의 내용에 따라 더욱 엄
히 단속하여 각별히 거행할 계획입니다.
제(題) : 더욱 단속하여 실효를 거두기를 기약하라.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이번에 연풍(延豊)현감


서상학(徐相鶴)이 보고한 것을 보니, “9월 29일에 연풍현의 고사리면
(古沙里面) 안보(安報) 동임(洞任)의 문장(文狀) 내용에, ‘9월 28일 새
벽 머리에 충주 신당(新塘)ㆍ진촌(陳村) 2곳의 동도 수백 명이 일본 군대
와 접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동도가 사면에서 불을 놓아 우리 마을 27
호 및 추수한 곡물을 담은 포[秋收穀包]와 집물(什物)을 모두 태우자,
일본 군사가 동도를 향하여 총을 쏘았고, 총에 맞아 죽은 자가 6명이었
습니다. 동도가 흩어져 말하기를 「안보(安保) 1개 동(洞)과 연풍ㆍ문경
은 불에 태우고야 말겠다.」라고 하면서, 다시 충주 땅으로 돌아갔습니
다.’라고 하니, 그것을 알고서는 매우 놀라웠습니다. 현감이 관속들을 이
끌고 안보동에 나가서 일이 진행된 상태를 자세히 물었더니, 일본 군사
가 말한 내용 중에 ‘지금 병참(兵站)과 계엄이 전에 비하여 더욱 각별하
니, 이후 일의 상태에 대해서 계속하여 탐지하여 알려 주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하였으므로, 현감이 잘 살펴서 조사한 후에 관청으로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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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고, 불에 탄 백성들의 집을 성책(成冊)하여 첩보합니다.”라고 하였습니
다.
이렇게 추운 시기에 많은 백성들이 거처할 곳을 잃었기 때문에 매우 불
쌍하고 참혹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집을 짓고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한 방
법 및 그들을 도와줄 은전을 내려 주기 위한 절차를 빨리 거행하도록 하
라는 내용으로 거듭 신칙하여 처결하여 보냈습니다.
이어서 도착한 결성현의 수관리(守官吏) 문장(文狀) 내용에, “10월 5
일 술시(戌時, 오후 7~9시)에 동도 1천여 명이 총과 창을 각각 지니고, 총
을 쏘아 가면서 돌입하여 관청의 건물을 부수며 현감을 결박하고, 병부
(兵符)를 빼앗았으며, 관속과 고을 백성은 매를 맞지 않은 자가 없이 때
리고, 군기와 민가의 돈과 의복을 일일이 뒤져서 가지고 홍주 땅으로 향
했습니다. 그래서 병부와 군기를 다시 찾기 위해 군관을 정하여 동도가
있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러한 연유를 빨리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
니다.
병부를 빼앗긴 것을 알고서는 매우 놀라웠고, 즉시 다시 찾아오라는
내용으로 엄하게 신칙하여 결정하여 보냈습니다. 결성현감 박기붕(朴基
鵬)이 약탈을 당한 변고는 비록 뜻밖의 일이지만 일의 사체로 보건대, 그
대로 둘 수 없으므로 우선 파면하였습니다. 그의 죄상을 유사(攸司)가
임금께 아뢰어 처결해 주시도록 하고, 박기붕 대신에 묘당에서 각별히 사
람을 선택하여 임명하셔서 말을 주어 내려보내 주도록 하십시오. 급히 임
금께 아룁니다.
제(題) : 대군(大軍)이 이미 출발하였다. 이후 상황을 연속하여 빨리
보고하라.

갑오군정실기 2 179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이번에 도착한 아산현(牙


山縣)의 수관리(守官吏)의 문장(文狀)의 내용에, “10월 5일 해시(亥時,
오후 9~11시) 무렵에 덕산의 동도 수천 명이 각각 병기를 지니고서 총을 쏘
고 함성을 지르면서 곧바로 관아에 들어와 현감의 머리채를 잡고서 관문
밖으로 끌고 가 비석 근처에서 주먹으로 밀치고 때렸습니다. 심지어는 이
를 부러뜨리고 총으로 무릎과 정강이를 때려 (현감이) 정신을 잃고 넘어
져 기절하였습니다. 동도의 무리가 등불과 횃불을 켜서 군기를 약탈하였
으며, 군고(軍庫)에 불을 질러 화염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관문에서 고
을 안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집이 부서지지 않은 것이 없고, 약간의 집물
은 일일이 찾아내어 해가 뜰 무렵 신창(新昌) 등의 지역으로 향하여 갔습
니다.”라고 합니다. 급히 임금께 아룁니다.
제(題) : 대군이 이미 출발하였다. 비도가 출몰하여 가는 곳을 대진에
게 통보하여 보고하라.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10월 8일 태안(泰安)의


영저리 신태선(申泰善)이 와서 보고한 내용에, “역가(役價)를 징수하기
위해 본읍에 내려갔더니, 10월 1일 동도 수천 명이 총을 쏘고 돌입하여
부사(府使)와 종친부에서 파견된 관리를 붙잡아 질질 끌고 장터(場垈)
로 나아가서 총과 창으로 마구 찔러서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라고 하
였습니다. 비록 태안읍에서 문보(文報)한 것이 없어도, 영저리가 목격한
것을 이미 이와 같이 지적하였으니, 소위 비류들이 이르는 곳마다 창궐한
것을 일일이 들기 힘들지만, 명리를 죽이기에 이르렀으니 매우 놀라운 일

180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입니다. 지금 바로 영교(營校)를 보내어서 그에게 자세히 조사하여 오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길이 막혀서 오고 갈 수 없으므로, 매우 걱정입니
다. 급히 임금께 보고합니다.
제(題) : 비도들의 상황을 연속하여 급히 보고하라.

소모관 지평현감 맹영재에게 전령함

이번에 도착한 의정부에서 보낸 이문(移文)의 내용에, “경기도 소모관 맹


영재가 제창하여 일으켜서, 비류를 무찌른 것은 매우 가상하다. 그런데
그가 이끄는 포군(砲軍)은 관병이 의뢰하는 것과 비교할 것이 못 된다.
이렇게 날씨가 추운 때에 그들이 입고 있는 것은 얇은 옷 하나로 매우 걱
정스럽다. 탁지목(度支木) 10동을 특별히 조치하여 나누어 보내니, 순무
영에서 내려보내 나누어 주어 조정이 특별히 보살피고 있다는 뜻을 보여
주라.”라고 하였다. 이에 탁지목 10동을 내려보내니, 그가 이끄는 포군
들에게 일일이 나누어 주고, 조정의 덕의를 선포한 후에 상황을 급히 보
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때에 구획한 무명[木]을 즉시 믿을 만한 사람에게 보내어 운송하여
보내라.

의정부에 보고함

종사관(從事官)이 보고합니다. 이번에 도착한 이문(移文)에 의거하여


탁지아문에서 구획하여 보낸 무명 10동을 경기소모관 지평현감 맹영재
가 있는 곳에 내려보내어 포군(砲軍)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조정이 그들
을 두텁게 살피고 있음을 보여 주도록 하라는 내용을 전령하셨으니, 명
령하여 잘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갑오군정실기 2 181
도착한 관문을 첩보함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이 도착하였다는 내용의 관문이 도착하여 후


록하고 첩보합니다.

후(後)

一. 강화진무영[沁營]의 병정이 주둔한 곳마다 군량미와 땔감 등을 예에


의거하여 미리 준비하고 기다릴 것.
一. 무릇 군사상의 기밀과 관련된 것은 곧바로 본영에 보고하고, 여러 고
을은 각각 스스로 막아서 지키되, 소홀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으로
각 고을에 명령하여 알릴 것.

소모관 정기봉이 첩보함

소모관 정기봉(鄭基鳳)이 첩보합니다. 소모관이 양성(陽城) 땅에 주둔


하여 용인(龍仁)의 포군 30명, 양성의 포군 5명, 양지(陽智)의 포군 11명
으로, 모두 합하여 46명을 뽑았습니다. 오늘[10월 13일] 유시(酉時, 오
후 5~7시) 무렵에 경기 포군 도정령(砲軍 都正領) 류영순(柳永順)이 보
고한 내용에, 경기도 내에 있는 포군은 본영과 관련된 것으로 일제히 기
다리라는 내용으로 분부를 받았지만, 뽑아서 모집한 포군을 그가 스스
로 이끌고 가겠다는 내용으로 보고하였습니다. 비류들이 40~50리 떨어
진 곳에 주둔하여 모여 있으니, 비록 약간의 의기로 떨쳐 모인 선비들이
있어도 포군이 아니면 굳게 마음을 지니기 힘듭니다. 그래서 이에 보고합
니다. 헤아리신 후 용인ㆍ양성ㆍ양지 등지에서 뽑아 모집한 포군을 우선
그에게 허락해 주고, 이후에 그 외의 다른 각 고을 포군과 영(營)에 남아
있는 서양에서 만든 포(砲) 몇 자루[柄], 탄(彈) 수천 개를 특별히 내려

182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주어서 군사용으로 대비할 것입니다.
제(題) : 포군은 특별히 도정령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도록 허락하고,
이로써 명령하여 알리고, 군기와 탄환(藥丸)은 전령하여 보내도록 하라.

지나는 연로 각 읍 진관에게 전령함

소모관 정기봉이 비류를 토벌하는 일로 왕래할 때 인솔한 포군 등의 탄


약이 매양 부족하여 걱정이라 하니, 그가 경유하는 각 읍은 요구한 대로
탄환을 획급한 뒤 그 실수를 성책하여 빨리 보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도정령 류영순에게 전령함

소모관 정기봉의 보고를 보니, 용인ㆍ양성ㆍ양지 등에서 뽑은 포군 46명


을 특별히 허락해 보내 달라고 하였는바, 정기봉의 소모 임무 역시 가볍
지 않으니 즉시 그 수효대로 파견한 뒤 상황을 빨리 보고하는 것이 마땅
하다.

선봉장이 첩보함

선봉장이 첩보합니다. 어제[10월 12일] 미시(未時, 오후 1~3시) 무렵 각 소


대를 이끌고 폐해가 없이 행진하였고, 신시(申時, 오후 3~5시) 무렵에는 수
원부에 도착하여 먹을 것을 제공받고 머물러 묵었으며, 일본 군사도 파
견되어 왔습니다. 전령 1도(度) 및 탁지아문의 사통(私通) 1도가 함께
아울러 해시(亥時, 오후 9~11시) 무렵 도착하였습니다.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갑오군정실기 2 183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뢰기를, “이번에 선봉장 이규태의 빠른 보고를 보니, ‘군대의 행


진이 어제 수원부에 도착하였고, 아무 일 없이 묵었습니다.’라고 하였습
니다.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강화유수 김윤식이 첩보함

강화유수 김윤식(金允植)이 첩보합니다. 삼가 본영이 임금께 아뢰어 처


결하신 것에 의거한 관문에 따라 강화진무영[沁營]의 병정 삼초사(三哨
使) 중군(中軍) 황헌주(黃憲周)와 영관 황시중(黃時中)이 군대를 이끌
고 10월 11일 홍주목으로 출발하였으며, 중군 이하의 성명(姓名)을 성책
하고 수정하여 올려보냅니다.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군수조납단자(軍需助納單子)

銀貨 1백 원(元) 좌 찬 성 이유승(李裕承)
1백 원 학무대신 박정양(朴定陽)
1백 원 공무대신 서정순(徐正淳)
6백 5십 원 탁지부에 덜어서 두었음
8원 농상협판 성기운(成岐運)
엽전 5백 냥 호분위별장(虎賁衛別將) 홍계훈(洪啓薰)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뢰기를, “입전(立廛) 시민들이 엽전 2천 냥, 백목전(白木廛) 시

184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민들이 엽전 2천 냥, 지전(紙廛) 시민들이 엽전 1천 냥, 포전(布廛) 시민
들이 엽전 4백 냥, 저포전(苧布廛) 시민들이 5백 냥을 순무영에 와서 바
치며 군수(軍需)를 돕기를 원하므로, 이것을 받겠습니다. 이에 감히 아룁
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10월 14일│
영평군수 홍태윤이 첩보함

영평(永平)군수 홍태윤(洪泰潤)이 첩보합니다. 도착한 순무영의 전령에


의거한 진어외영(鎭禦外營)의 관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여러 고을의 비
류가 오히려 많이 빠져나갔으니, 기회를 만들어 찾아내어 체포하는 즉시
목을 베고 매달아 경계하고, 아울러 5가(家)를 통(統)으로 만들어 통수
(統首)에게 적발하게 하여 법률에 의거하여 그에 맞는 죄를 주라.”라고
하였습니다. 찾아내어 체포하는 방법과 통을 만들어 적발하는 것으로
경계 내에 신칙하였으며, 관문의 내용에 의거하여 거행하였습니다.
제(題) : 실심으로 실행하도록 할 일이다. 실효가 있기를 기대한다.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함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합니다. 10월 9일 미시(未時, 오후 1~3시) 무렵에


비류를 물리치기 위하여 군대의 행진이 음성(陰城)ㆍ괴산(槐山) 등지로
향한 연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10월 10일에 40리를 가서 음성
현(陰城縣)에 주둔하여 묵었으며, 동도의 거취를 찾아서 들어 보니, 10
월 6일에 괴산을 불태우고 이어서 청주(淸州) 등지로 향하였다고 합니

갑오군정실기 2 185
다. 그래서 10월 6일에 충주로 전진하여 응원할 생각입니다.
제(題) : 뒤를 따라서 행군하니, 적을 하나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
후 어떻게 처리하려고 하는가? 다만 지금부터 닥칠 것을 살피라.

충청병사 이장회가 첩보함

충청병사 이장회가 첩보합니다. 지금 적의 세력이 날마다 더 커져서 상황


이 더욱 심각하여 현재의 위태로움과 어려움을 헤아릴 수 없으니,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병력이 미치지 못하고, 무기도 얼마 되지 않아
다만 스스로 안타깝고 우울할 뿐입니다. 거의 속수무책입니다. 이에 보
고하오니, 정병(精兵) 1천 명 및 서양 총 1백 자루와 탄환 수만 개, 대포
몇 좌(坐)를 급히 내려보내도록 하시어, 큰 화를 면할 수 있도록 해 주십
시오.
제(題) : 이 뒤로 마땅히 조처가 있을 것이니, 조금 기다려라.

선봉장 이규태에게 전령함

인자(人字) 군막 18부(部)를 별무사(別武士) 허준(許俊)에게 영솔하여


가도록 하였으므로, 수효가 맞는지 확인하여 받은 후, 9부는 교도소(敎
導所)에 내어주고 그 나머지 9부는 통위영(統衛營)과 함께 적절하게 분
배하여 사용하라. 일이 벌어진 형편을 빨리 보고하도록 하라.

왕이 이름

왕이 이르기를, “지난번 국가에 어려움이 많은 것 때문에 비도가 때를 이


용하여 일어났다. 나는 백성들이 죄 없이 병화를 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가 없어서 여러 번 진무하고 깨우쳐 주었다. 그런데 끝내 죄를 뉘우칠 줄

186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모르고 날로 더욱 창궐하여 심지어 관리를 죽이고 백성을 해치며 고을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조야(朝野)가 다 같이 분격하였고, 모두가 ‘토벌하지 않으면 악(惡)을
징계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군사를 일으켜 나아가도록
하고, 적이 있는 곳마다 쓸어버리되, 그들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협박을
못 이겨 따라간 자는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대개 백성을 살리는 도(道)로써 백성을 죽이고자 하는 것20을 어찌 그
만둘 수 있었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근래 ‘비류가 억지로 양민을
협박하여21 모두 저들 무리에 들어가게 하자, 집을 버리고 생업을 잃어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 따르려 하지 않는 자가 열에 아홉이나 된다. 살아
있는 자는 이리저리 칼날에 맞아 들판에서 죽고, 그나마 살아 있는 자들
은 흩어져 떠돌아다니며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것을 면치 못한다.’고 들
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밤에 잠을 자도 편안하지 않으니, 이런 때에 백성
들을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하고 그들을 품어서 모으는 방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다.
아, 너희 삼남(三南)의 위무사(慰撫使)들은 가서 나의 말을 대신하여
덕의(德意)를 선포하고 연로(沿路)의 피해를 당한 지방에 직접 가서 돌
아다니면서 묻고 위로하여 편안하게 살게 하며, 도내 각 고을의 폐단이
되는 일들을 자세히 물어 가며 찾아서 일일이 보고하라.

20 대개……것:『맹자(孟子)』의 진심장구(盡心章句) 상(上)에 ‘백성을 살리는 도로써


백성을 죽이면, 비록 죽더라도 죽인 자를 원망하지 아니한다.[以生道殺民 雖死不
怨殺者]’는 것에서 유래했다.
21 비류가……협박하여 : 원문에 ‘剿驅良民’으로 되어 있으나, ‘勒驅良民’을 잘못 베낀 것임.

갑오군정실기 2 187
진실로 우리 백성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따르지 않을 리
가 없다. 전날의 잘못된 습속을 다 같이 고쳐 새롭게 하여, 나의 백성들
로 하여금 마치 호랑이의 입에서 벗어나 부모의 품 속으로 돌아온 것처
럼 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니, 잘 알았으리라 생각한
다.”라고 하였다.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11개의 고을과 진(鎭)에


서 군기를 빼앗긴 연유는 이미 연이어서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10월 10
일 유시(酉時, 오후 5~7시) 무렵 충주영장 김병요(金炳堯)가 첩정한 내용
에, “이번에 접한 영춘(永春)현감의 보고를 보니, ‘9월 23일 묘시(卯時, 오
전 5~7시) 무렵 동도 수백 명이 각각 총과 창을 지니고 군기고를 부수고
약환(藥丸) 등의 물건들을 빼앗아 갔으며, 관방(官房)과 창호와 서리와
장교들의 집 또한 부쉈습니다. 공전(公錢)ㆍ공첩(公牒)ㆍ재화ㆍ집물을
모두 찾아내었고 그대로 단양(丹陽)으로 향하였으며, 저희들의 앞길도
저들이 막아 감영과 병영에 나아가서 보고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
습니다. 그래서 빨리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도착한 당진(唐津)현감 윤우선(尹寓善)의 첩정 내용에, “10월
4일 신시(申時, 오후 3~5시) 무렵에 동도 1천여 명이 뜻하지 않게 갑자기
들어와 군기와 집물을 모두 빼앗아서, 곧바로 면천(沔川) 경계로 향하였
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의현(文義縣) 공형의 문장 내용에, “현감이 죄를 지어 파직되었는데,
이번달 10월 9일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에 동도 수백 명이 총을 쏘고 갑
자기 들어와 제반 군기를 모두 훔쳐갔다고 하였습니다.” 진잠현 공형의

188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문장 내용에 “신관이 아직 부임하지 않았는데, 10월 7일 9시에서 11시 무
렵에 동도 수천여 명이 갑자기 들어와 사방을 둘러싸고 관속을 결박하였
으며, 여러 가지 집물을 남김없이 모두 빼앗아서 공주(公州) 지역으로 향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역당들이 창궐하여 1도[省]에 두루 가득
찼으니 다양한 갈래로 그들을 무찔러야 하는데, 다만 군사가 적은 것이
한스럽습니다.
진잠(鎭岑) 겸임 회덕(懷德)현감 이규서(李圭瑞)는 그의 직임이 2곳
을 나누어 지켜야 하므로, 모두 살피는 것은 어려우니 마땅히 참작하여
야 할 것입니다. 파출하는 것 1조목은 임금의 처분을 기다려 거행하고,
해당 현의 수리(首吏)와 수향(首鄕)은 충청병영에서 무거운 죄로 다스렸
습니다.
문의현령 홍양섭(洪亮燮)은 전에 이미 죄를 물어 파직시켰으며, 문의현
의 이서와 향임들을 잡아서 죄를 다스릴 생각입니다. 영춘(永春)현감 박
용진(朴用鎭), 당진현감 윤우선(尹寓善) 등은 먼저 파출하였으며 그들
의 죄상은 유사(攸司)에서 임금께 아뢰어 처리하도록 빨리 아뢰었습니다.
제(題) : 청주영 근처에 있는 비류들이 창궐하여 더욱 심한데, 그들을
무찌를 방법을 잘 헤아려 계획하고, 그들을 소탕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
도록 하며, 비괴(匪魁)들의 성명을 낱낱이 보고해 오도록 하라.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경리청 3대병(隊兵)이 도


착한 상황과 군대를 출발시킬 계획에 관해서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
다. 국가의 중요한 병력을 통솔하는 것은 적절한 사람이 있은 다음에야
의식과 제도를 정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군대를 움직일 때, 경리청

갑오군정실기 2 189
에서 새로 임명된 부영관 안성군수 홍운섭은 안성을 막고 지키느라 아직
도 진에 나아가지 않았고, 전임 부영관인 성하영은 군사들의 수를 전달
하지도 않고 군사를 이끌어 청주병영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출발한
군대의 행진에 대해 통솔하고 조절하여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안성은 남쪽으로 통하는 중요한 곳으로, 잠깐 동안이라도 비울 수 있
는 곳이 아니므로 홍운섭에게 안성을 견고하게 지키게 하였고, 성하영은
이미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사람들 또한 참아내고 군심을
많이 얻어서 많은 군인들이 한목소리로 남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중망을 얻고 있으며 재주가 쓸 만한 자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
니다. 영관으로 다시 임명하는 일을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급히 임금
께 아룁니다.
제(題) : (등보가) 도착했다.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10월 9일 오시(午時, 오


전 11시~오후 1시) 즈음에 도착한 청안(淸安)현감 홍종익(洪鍾益)의 첩정
의 내용에, “10월 6일 동도 5천~6천 명이 진천(鎭川)에서 청안현 북면 명
암(鳴巖)을 거쳐 괴산(槐山)의 경계로 향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이 매우
놀랍고, 군관을 따로 정하여 몰래 탐지하였더니, 저들 무리가 곧바로 청
안현에 이르렀고, 또한 충주 무극리(無極里)에 모인 무리들이 밤을 이용
하여 길을 나누어 힘을 합쳐 사는 곳을 둘러쌌습니다. 죽인 것이 매우 많
고, 물화(物貨)와 소와 말을 모두 빼앗아 갔고, 10월 7일에 관청 건물과
민가에 불을 질러 모두 태우고 이어서 청주 청천면(靑川面)으로 향하였
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90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또한 10월 8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 무렵에는 충주의 동도 수백 명
이 길을 따라 청주읍을 지나다 청천으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비류가 영
(營) 아래에서 변고를 일으켜 군사들을 죽이고 기계(器械)를 약탈하였으
니, 이미 난역(亂逆)을 저지른 것이 큽니다. 그리고 지금 또한 1읍을 함
몰하는 변고가 있으니 놀라움을 이길 수 없음이 매우 심합니다.
경리청 3대 병정이 10월 9일 저녁 5시에서 7시 무렵에 먼저 도착하였으
므로, 하루빨리 연락을 드리며, 적을 쫓아서 생포하고 무찔러 없앨 생각
임을 급히 임금께 아룁니다.
제(題) : 비류가 이미 청천을 향하였다고 한다. 막고 지키는 절차를 더
욱 단속하도록 하라.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본도 감영에 주둔하고 있


는 청주병영의 병정 1백 명 중 80명이 모두 결단이 난 연유는 이미 급히 임
금께 아뢰었고, 남은 병사 20명은 동양병(東洋兵, 일본군) 21명과 함께
10월 8일 술시(戌時, 오후 7~9시) 무렵 공주에서 왔으므로, 급히 임금께
아룁니다.
제(題) : 수십 명이 살아서 돌아왔으니, 또한 다행이다.

경리청 소속에서 교체된 부영관 성하영이 첩보함

경리청 소속에서 교체된 부영관 성하영이 첩보합니다. 영관과 계원영관


(繼援領官) 구상조가 군사를 이끌고 청주로 급히 가던 차에, 10월 5일에
진천에 도착한 연유는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10월 7일 출발할 때에 이미
도착한 안성군수 홍운섭에게 도착한 순무사의 전령 내용에, “‘이번 비류들

갑오군정실기 2 191
이 안성에서부터 충주, 진천 광혜원(廣惠院) 등지에 널리 퍼져 있어서 장
차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이미 소모관
지평현감 맹영재에게 전령을 내려 앞으로 나아가 무찌르도록 하였으니,
공문을 보내어 서로 날을 기약하여 진을 합쳐서 변화하고, 때에 따라 적
을 물리치고 사로잡으라. 상황을 먼저 빨리 보고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안성군수의 공이(公移)를 보니, “지금 여기에 순무영에서 내린 전
령[令旨]이 있습니다. ‘소모관 맹영재가 오기를 기다린 후, 마땅히 진천
주진소(駐陳所)에서 군무와 관련된 임무를 교체하고, 병정을 이끌고 절
대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주둔하는 사이에 고을의 폐단
과 백성들의 사정이 실로 걱정이며, 영관은 지금 이미 체직된 것이어서 또
한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우니, 부득이 그대로 머물게 하고 사방으로 쫓
아서 탐지하니 근처에 있는 비류들이 모두 도피하였으며, 우두머리들의
몇몇 집을 수색하였더니, 남은 군물(軍物) 중에 안성군수가 잃어버린 화
살 1부ㆍ활 1장(張)ㆍ철질려(鐵蒺䉫) 2두(斗)ㆍ새로 만든 화살 8부 50
개ㆍ철창(鐵槍) 1자루ㆍ철촉롱(鐵燭籠) 4개 및 민간에서 탈취한 백미
(白米) 7석ㆍ정조(正租) 19석과 약간의 솥[釜鼎] 종류 모두를 거두어들
였으며, 기록하여 안성현에 맡겨 두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10월 8일 술시 무렵에 도착한 호서부원수(湖西副元帥)의 전령
내용에, “행군의 거동이 얼마나 어렵기에 진천에 도착하여 이틀을 머물러
묵고 있으니, 어떠한 이유가 있는가. 이와 같이 부서져 힘이 없는 읍에서
중요한 군대를 대접하는 것은 하루일지라도 매우 어려운 일인데, 어찌 이
틀을 대접할 수 있겠는가. 읍의 형세와 백성들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아
이와 같이 명확하지 않으며, 의심하여 나아가지 않아서 군심이 태만하여
크게 기세를 잃었으니, 그 죄에 해당하는 법을 적용하여 마땅히 군대의

192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규율을 사용하기 위하여 지금 장차 빨리 임금께 아뢰려 하며, 당일 내에
서둘러 이르러 병사를 바칠 것”이라 하였으니, 비록 오로지 이 전령의 내
용[令旨]으로 진퇴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이미 지난날 청주로 빨리 나아
가라는 영지(令旨)가 있었는데, 지금 또 청주병영에서 나아갈 것을 독촉
하는 전령이 있어 형세상 주둔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10월 9일에 병정
을 이끌고 청주로 갔습니다.
제(題) : 공문이 이르렀다(到付). 소모관 맹영재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으니, 반드시 다시 기다릴 필요는 없고, 새로운 영관으로 교체하
기 전까지는 이전과 같이 시행하라.

경리청 소속에서 교체된 부영관 성하영이 첩보함

경리청 소속에서 교체된 부영관 성하영이 첩보합니다. 영관과 계원영관


(繼援領官) 구상조가 10월 9일에 군사를 이끌고 청주로 빨리 간 연유에
대해서는 이미 급히 첩보하였습니다. 진천에서 청주 60리에 이르기까지
비류들이 모여 있는 곳은 없었으며, 아무런 폐해가 없이 도착하였습니다.
이번에 순무영의 출진 교장(敎長) 이장혁(李章爀)ㆍ김명환(金命煥)의
수본(手本)의 내용에, “‘저희들이 이끌고 있는 병정 50명ㆍ일본 군사 25
명이 9월 26일 천안현에 도달하였으며, 남면의 보산원(寶山院)ㆍ대거리
(垈巨里) 2개 동(洞)에 동도 수백 명이 방금 한곳에 모여 있었는데, 일본
군사와 경병(京兵)이 옮겨 출발한 후, 천안현의 군기를 빼앗아 갔습니
다.’라고 하였습니다.
9월 28일에 곧바로 그 동들로 향하였는데, 모두가 도피하였고 남아
있는 자들은 동민(洞民)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꺼번에 모두 효유한 후
에, 조총 8자루ㆍ환도 1자루ㆍ창 30자루ㆍ말 1필ㆍ문권(文券)과 화

갑오군정실기 2 193
약ㆍ연환(鉛丸)ㆍ염주(念珠) 등과 같은 물건을 탈취하였습니다. 9월
29일에는 전의현(全義縣)에 숙소를 마련하였는데, 고을 내에 소위 동학
의 우두머리 김철용(金哲用)ㆍ송동이(宋同伊)라는 자가 자칭 각 고을의
도인(道人)들을 모은다고 칭할 때에 군막으로 쓰일 것이라고 하면서 상
민(商民)들에게 양목(洋木)과 마필들을 빼앗아 와서 지금 가까운 마을
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날 밤에 그 마을을 포위하여 2놈을 찾아서 붙잡은 후에, 양
목 5필을 찾아냈습니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김철용과 송동이를 잡아와
서 9월 30일 공주로 들어갔더니, 충청감사가 분부한 내용에, ‘청주병영이
지난 9월 24일 동도와 접전한 후에 일이 위험에 처해 있어 시급하니 곧바
로 연이어 출발하라.’라는 뜻을 담아 명령하였습니다. 그래서 전의소(全
義所)에서 잡은 죄인 김철용과 송동이 2놈과 양목 5필을 함께 공주감영
에 맡겨 두었습니다.
10월 1일에 연기현에서 숙소를 마련하였고, 10월 2일에 청주병영에 도
착하였더니, 충청병사가 분부한 내용에 ‘접전한 이후부터 충청병영의 병
정은 성 머리[城頭]에 배열하여 서서 밤낮으로 견고하게 지키라.’라고 하
였고, 저들 무리들은 30리 밖으로 물러가서 한곳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각처의 동도가 어느 날 밤에 병영의 군기를 빼앗아 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날마다 이르렀으니, 지금 이곳에 내려온 경병과 본영 병정이 함께 합세하
여 출정하겠다는 내용으로 명령하여 알렸습니다.
그래서 10월 4일에 청주병 1백 명이 본영병과 일본 군사가 함께 30리
밖에 있는 송산리(宋山里)로 나아갔더니, 동도 수천 명과 서로 겨루면서
접전하였습니다. 저들 무리의 선두에 있는 자 10여 명이 총에 맞아 곧바
로 죽었고, 나머지 무리들은 도망하였으므로, 곧바로 그 마을에 들어가

194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도창(刀槍)ㆍ인극(釼戟)ㆍ갑옷과 투구 등과 같은 것을 3~4바리를 빼앗
아 돌아왔으며, 경병과 청주병은 1명도 다친 자가 없었습니다.”라고 하
였습니다.
매우 다행일 뿐만 아니라, 병정을 거느린 교장(敎長) 김명환과 이장혁
은 정성을 다하여 적을 토벌하여 사로잡았으니, 진실로 가상합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김명환과 이장혁이 용기를 내어 나아가
서 적을 토벌하여 사로잡은 것은 매우 가상하다. 마땅히 포상하라.

경리청 소속에서 교체된 부영관 성하영이 첩보함

경리청 소속에서 교체된 부영관 성하영이 첩보합니다. 영관이 안성군에


있을 때, 도착한 순무사의 영지(令旨)에 근거하여 계원영관 구상조와 함
께 3소대를 거느리고 급히 청주에 간 연유는 이미 첩보하였으며, 군대 행
군이 청주에 도착하여 주둔하였습니다.
또한 순무사에게 아뢴 내용에 대한 회답에, “죽산에 머물러 나아가지
않아서 접응하는 것이 아직 지체되고 있다. 어찌 군대의 규율이 있다고
하랴. 지금 청주영의 상황이 조금 느슨해졌으며, 또 경병과 일본 군사가
도착할 것이라고 들었다. 진천과 목천의 적을 깨끗하게 없애는 것이 급선
무이다. 이로써 공문을 주고받아 거행할 것이며, 대병(大兵)이 접응하기
위해 지금 막 출발하였으니, 적을 무찌르고 사로잡는 방법은 선봉진이
절제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정해진 날에 모두 목천 복구정(伏龜亭)으로 나아가서 선봉의
절제를 기다리겠다는 내용으로 우선 죽산부에 공문을 보냈으나, 지금
[구] 영관인 저는 이미 체직되었고, 신 영관은 부임한 지 며칠이 되었는데
도 아직도 군대를 이끄는 임무를 바꿔주러 오지 않고 있으므로, 임무가

갑오군정실기 2 195
없는 장수가 군대를 이끌어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황송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제(題) : 일본 군사가 이미 출발하였으니, 며칠 전 전령한 대로 시행하라.

선봉장 이규태에게 전령함

행군 시의 군율이 얼마나 엄중한데, 수원부에 머물 때 거느리고 있던 전배


군(前排軍)들이 해당 영에서 폐단을 일으키고 수원부사에게 금품을 요구
하여 큰 물의를 일으켰다는 말을 들었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 군율이 있
는가? 이에 전령을 내리니 전령이 도착하는 즉시 엄중하게 조사한 후, 사
실을 밝혀 내어 죄를 범한 군인을 붙잡아 형구를 채워 호송함으로써 군
율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이후 더욱 단단히 타일러 단속하여 다
시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고을과 마을에 폐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라.

수원유수 조병직이 장계함

수원유수 조병직(趙秉稷)이 장계합니다. 이번에 수원부 판관 이재근(李


載覲)의 첩정을 보니, “순무 선봉장 이규태가 이끄는 통위영 영관 1원과
대관 8원, 병정 317명이 10월 13일 술시(戌時, 오후 7~9시) 무렵에 수원부
에 들어와서 주둔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급히 임금께 아룁니다.
임금의 재가를 받아 순무영에 내려 줌.

훈칙함

훈칙(訓飭)22한다. 지금 시기는 순무영 군관의 책임이 가볍지 않다. 곧바

22 훈칙(訓飭):훈령을 내려 경계함.

196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로 해당하는 곳으로 나아가서 지방관 및 순무영에서 파견된 장령과 함께
때에 따라 의논하여 확실히 정하고, 협박을 받아 들어간 자는 잘못이 없
음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 주어 원래대로 되돌리고, 어리석어서 잘못 들어
간 자는 깨닫게 하여 스스로 새로워지게 하며, 가장 흉악하고 모질고 교
활하여 감히 교화를 거스르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해 대면서 난을 선동
하고 추악한 것을 믿고 고치지 않는 자는 방법을 마련하여 불러들여 끌
어들여서 대군의 행영(行營)에 보고하여 알리고, 법에 따라 엄단하라. 혹
시라도 갑자기 깨달아서 무리들을 흩어지게 하고 자신이 지은 죄를 자백
하고 복종하거나 그들의 우두머리를 포박해서 바치거나, 혹은 평민을 보
호하여 근처에 있는 지역들을 편안하며 조용하게 하고 흔들림이 없게 한
자는 이름을 지적하여 빨리 본영에 보고하여 마땅히 그가 저지른 이전의
과오를 씻어 주고, 오히려 상을 후하게 주도록 하라.
너희는 장차 이러한 뜻을 사실대로 확실히 판별하여 군대의 영을 어기
지 않도록 하며, 이를 위하여 특별히 명령하고, 이를 군관 김용만(金容
萬)과 김용연(金龍淵)에게 훈칙한다.

감독을 맡은 2위관인 히라키와 미야모토에게 훈령을 내림

전라도와 충청도의 동학당을 정벌하기 위해 인천에 상륙한 후, 보병 제


19대대 각 중대를 갖추어서 다음의 3개 도(道)로 전진할 것.
1. 수원ㆍ천안ㆍ공주
2. 용인ㆍ죽산ㆍ청주
3. 가흥ㆍ충주ㆍ문경
이상은 전진할 곳이다. 용인 및 죽산으로 향하는 중대는 교도 중대의
뒤를 따라서 이르고, 훈령은 귀관이 내린다. 교도 중대는 양지(陽智)에

갑오군정실기 2 197
서 정지하라. 인천에서 출발한 중대의 사관과 만나서, 위로부터 명령을
받아라. 목적한 곳에 도달하면, 충분히 부대와 협조하여 다시 출발하라.
조선의 군대는 각지에서 용무를 띠며 이르렀으며, 후방에서도 따라 이르
게 될 것이니 서로 투합할 때에 시의(時宜)에 알맞게 하라. 교도 중대를
편입하는 것은 오로지 귀관의 지휘 하에 속한 것이다.
임무상 이루어낸 것은 각 부대와 연락하여 통하는 것에 한하여 완급을
조절하여 상응함이 매우 필요하다.
1894년[明治 7年] 11월 10일 경성 수비대장 우마야하라(馬屋原) 소
좌가
히라키(白木) 보병 중위
미야모토(宮本) 보병 소위에게 보냄

안성군수 홍운섭이 첩보함

안성군수 홍운섭이 첩보합니다. 군수인 제가 10월 5일 부임하였는데, 전


군수(성하영)가 안성에 주둔한 1소대와 뒤를 따라온 경리청 병정 2소대
를 이끌고 이미 진천으로 전진하였습니다. 군수인 저는 곧바로 서둘러
갔지만, 그와 임무를 대체하여 군대를 이끌 겨를이 없었습니다. 경계 내의
백성은 동도가 약탈한 이후부터 모두 도피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있으므
로, 현재 민정 또한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잠시 며칠을 머물러서 이들 백
성들을 어루만져 위로한 후에 제가 출진한 연유는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이번에 전 군수인 성하영의 보장(報狀)을 받아보니 그에 대한 처결 내
용에, “죽산에 머물러 나아가지 않아서 접응하는 것이 지체되고 있다. 어
찌 군대의 규율이 있다고 하랴. 지금 청주영의 상황이 조금 느슨해졌으
며, 또 경병과 일본 군사가 도착한다고 들었다. 진천과 목천의 적을 깨

198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끗하게 없애는 것이 급선무이다. 이로써 공문을 주고받아 거행할 것이며,
대병(大兵)이 접응하기 위해 지금 막 출발하였으니, 적을 무찌르고 사로
잡는 방법은 선봉진이 절제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청주의 사정은 조금 완만하지만, 지금 안성 고을 백성들의 사정은 황
급할 뿐 아니라, 제사(題辭)에 의거하여 선봉진 절제를 듣게 하려면, 전
군수인 성하영이 이끄는 1소대 병정을 다시 되돌아오게 하지 않을 수 없
습니다. 또한 비류들이 목천 혜성산(惠城山, 세성산)과 천안 읍내에 모
여 있어서, 날이 갈수록 수백 명씩 직산 및 양성 소사(素沙) 등지로 가로
질러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안성 고을에 바라는 것은 전 군수 때
에 소위 목천포(木川包) 동도 1명을 효수한 바가 있고, 군수[홍운섭] 또
한 기회를 틈타 몇 놈을 잡아서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안성읍은 삼면이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위치에 있고, 적들의 정세가 지금 헤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전 군수[성하영]에게 알려서, 1소대 병정을 되
돌려 보내도록 하였으나, 전 군수가 이미 청주에 들어가 있어서 끝내 되
돌려 보내지 않았습니다. 맡은 일이 이미 체직되었다 하여 조금 느슨한
청주영에서 견고하게 지키려 하고, 안성의 위급한 상황을 어찌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단 말입니까.
또한 청주병영에서 보낸 관문의 내용을 보니 경리청 3소대가 이제야 도
착하였다고 합니다. 하루빨리 병사들을 움직여 역당들을 무찔러 없애야
하는데, 안성군 또한 관방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군수[홍운섭]가 자리를
비워 둘 수 없어서, 이번에 체임된 영관이 병사를 전해 주고 출발하였습니
다. 이런 연유를 갖추어 장계하여 보고하였습니다. 군수인 저[홍운섭]는
안성 고을에 주둔해 있으면서 50명의 병정을 단속하여 각별히 방어하라
고 하였는데, 저 홍운섭이 부임한 후에 살펴보니 전 군수 성하영이 이끄

갑오군정실기 2 199
는 부대(陣中)에서 와서 대기한 자는 다만 17명으로, 지금 어찌 50명이
라 하겠습니까?
또한 죽산부사의 회이(回移)를 보니, “나의 직임은 순무영의 영칙을 받
아서 비류를 무찌르려고 괴산을 향하여 가는 것인데, 음성에 이르러 탐문
하였더니, 비류들이 이미 그곳에서 흩어졌다. 그래서 나아가 도움을 주려
고 지금 청주로 간다.”라고 하였습니다. 청주영이 염려가 되더라도, 이미
경리청 영관이 이끄는 2소대의 병정이 있고, 또한 죽산부사가 가서 힘을
합치게 될 것이니, 모두 순무영 병정과 함께 하면 수가 매우 많아져 족히
부대를 합하여 상황 변화에 대처할 수 있겠지만, 안성 고을은 몇 개의 외
로운 군대로 화(禍)가 바로 앞에 이를 염려가 있어, 군수가 결코 잠시라
도 비울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대진(大陣)이 며칠 사이에 내려와서 반드시 영칙할 것이지만,
전 군수[성하영]가 아직 병사들을 되돌려주지 않으니, 매우 송구스럽고
민망합니다.
제(題) : 선봉진이 이미 출발하였고, 인근의 병사들도 연이어서 차례로
내려갔다. 군대의 진퇴를 모두 지휘받아 행하면 안성군은 자연히 염려가
없을 것이다. 청주영에서 절제하는 것까지는 모르겠다.

│10월 15일│
총어영에게 감결을 내림

본영에서 사역하기 위해 총어영의 창고지기[庫直] 신필구(申弼求) 등 역


인(役人) 2명을 즉각 보내도록 할 것.

200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이번에 청안현감 홍종익


(洪鍾益)의 첩정을 보니, “10월 6일에 청안현 북면 명암산(鳴巖山)에 모
여 있는 동도 5천~6천 명이 괴산으로 향하였다고 하므로, 장수와 아전
들을 따로 보내어 그들의 종적을 탐지하니, 그들은 충주의 무극(無極)
경계와 만나는 길에서 합세하여 괴산을 함몰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
습니다. 또한 소와 말 그리고 물화를 빼앗고 다음 날 새벽에 관청 건물과
민가에 불을 질러 모두 태운 뒤 청주의 청천으로 향하였으며, 뒤를 따르
던 동도 수백 명 또한 청천으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유를 첩보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각 곳에서의 적들의 세력이 점차 커지는데, 경
병이 와서 지원하는 것은 아직도 지체되고 있으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이를 급히 임금께 보고합니다.
제(題) : 이후의 상황을 연속하여 빨리 보고하라.

충청감사 박제순이 도부함

충청감사 박제순이 도부(到付)합니다. 군향과 필요한 것을 계속 행진소


(行陣所)로 운반하여 바치고, 지체되지 않게 접대하라는 내용으로 각각
해당 운량관(運糧官)에게 명령하여 알렸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안성군수 홍운섭이 첩보함

안성군수 홍운섭이 첩보합니다. 안성의 경계와 직산 입장면(立長面)이


서로 접하여 있는데, 10월 11일에 곧바로 동도 30여 명이 목천포(木川
包)라고 하면서 입장 등지에서 소란을 피우고 민간의 재물을 약탈하며,

갑오군정실기 2 201
평민들을 몰고 갔다고 들었습니다. 때문에 듣고 나서 매우 놀랐습니다.
제가 곧바로 안성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 17명을 이끌고 급히 그곳에
갔더니, 그 사이 도주한 자가 20여 명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사로잡은
자는 7명으로, 접주 박병억(朴秉億)은 우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
에서 효수하였습니다. 나머지 6명은 잡아와서 여러 차례 조사하였더니,
5명은 강제로 들어갔으므로 엄하게 신칙하여 풀어 주었으며, 1명은 직산
에 사는 민영훈(閔泳勳)인데, 폐해를 일으킨 것은 견줄 만한 것이 없을
정도여서 죄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안성군의 목촌면(木村面) 보체(保
體)에 사는 임상옥(林尙玉)은 원래 양반가의 비부(婢夫)로 동도에 들어
가 패악을 자행하였는데, 마을에서 잡아서 바쳤습니다. 그래서 10월 13
일 민영훈ㆍ임상옥 등 2놈은 많은 백성을 모아 놓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
는 거리에서 모두 효수하였습니다.
제(題) : 더욱 찾아서 살피고, 모두 없애도록 힘쓰라.

임금이 전교함

임금이 전교하기를, “근래에 패악한 무리들이 중앙과 지방에 출몰하여 밀


지(密旨)라 하거나 혹은 분부(分付)라 하면서 비류를 선동한다고 들었
는데, 듣고 나서 매우 놀라웠다. 비록 조정 관리라고 하더라도 행동이 수
상한 자가 있으면 일일이 잡아서 엄중히 조사하여 보고하고, 백성들의
의혹을 풀어 어려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싹을 끊어 버리도록 하라. 묘당
이 매우 빨리 각 해당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관문(關文)을 내려
신칙하라.”라고 하였다.

202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각 소대를 이끌고 수원부에 주둔하였으며, 아무런


폐해도 없이 머물러 묵었으며, 먹을 것을 제공받았습니다.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뢰기를, “이번에 선봉장 이규태가 10월 14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보낸 빠른 보고를 보니, ‘각 소대를 이끌고 수원부에 주둔하였
으며, 아무런 폐해도 없이 머물러 묵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감히 아
룁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선봉장 이규태에게 전령함

지금 들으니 공주의 비류들이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날뛰어, 예측할 수 없


는 근심이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이런 때에 구원하러 가는 일을 잠시라도
늦추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이에 전령하니, 전령이 도착하는 즉시 행군을
재촉하여 그들을 섬멸하기를 바라며, 일이 벌어진 형편을 빨리 보고하라.

서산군수 성하영에게 전령함

군대를 이끄는 임무를 새로운 영관이 와서 교체하기 전까지는 전날에 내


려진 영칙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이제야 처결을 내린다.
지금 공주의 비류가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할 수 없다고 들었다. 이런 때
에 나아가 지원하는 것은 잠시라도 늦출 수 없다. 도착하는 즉시 공주로
가서 서둘러서 그들을 토벌하고 사로잡도록 하고, 상황을 빨리 보고하

갑오군정실기 2 203
는 것이 마땅하다.

│10월 16일│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뢰기를, “이번에 선봉장 이규태가 10월 15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보낸 빠른 보고를 보니, ‘군대가 어제 수원부에 그대로 주둔하
였으며, 무사히 묵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였
다.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뢰기를, “이번에 출진한 영관 죽산부사 이두황의 첩보를 보니,


‘비도의 접주 우성칠(禹成七)ㆍ박만업(朴萬業)ㆍ박봉학(朴奉學)ㆍ이돈
화(李敦化) 등 4놈을 모두 처결하였습니다.’라고 하였고, 연이어 출진한
영관 안성군수 홍운섭의 첩보를 보니, ‘비도의 접주 박병억(朴秉億)ㆍ민
영훈(閔永勳)ㆍ임상옥(林尙玉) 등 3놈은 백성들을 크게 모아 놓고 모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서 효수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10월 15일 오후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도착해 청


주에 머물러 있는 경리청 소속으로 체임된 부영관 성하영이 첩정한 내용

204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을 보니, “순무영의 전령으로 인해서 곧바로 계원영관인 구상조가 이끄는
병정 3소대와 함께 청주로 빨리 나아갔음을 이미 순무영에 첩보하였으
며, 군대의 행진이 청주에 도착하여 주둔하였습니다.
또 도착한 순무영의 회제(回題) 내용에 ‘죽산에 머물러 나아가지 않아
서 접응하는 것이 아직 지체되고 있다. 어찌 군대의 규율이 있다고 하랴.
지금 「청주영의 상황이 조금 느슨해졌으며, 또 경병과 일본 군사가 도착
한다.」라고 들었다. 진천과 목천의 적을 깨끗하게 없애는 것이 급선무이
다. 이로써 공문을 주고받아 거행할 것이며, 대병(大兵)이 접응하기 위해
지금 막 출발하였으니, 적을 무찌르고 사로잡는 방법은 선봉진이 절제할
것’이라 하니, 우선 죽산부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영관이 이미 체
직되었고 새로운 영관이 부임한 지 며칠이 되었으나, 아직 영관의 임무를
와서 바꿔 주지 않았으니, 임무가 없는 장수가 군대를 나아가고 물러가
게 하는 절차를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라고
보고하였는데, 그에 대한 처결(題辭)의 내용 중에 ‘체임된 영관이 병정을
이끄는 것은 어려움이 있겠으나, 임시로 병정들을 이끌면서 순무영의 처
분을 기다려라.’라는 내용으로 비록 처결하여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저
는 병정을 이끌고 접대하는 절차는 처분을 기다렸다가 다시 곧바로 지휘
할 생각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題) : 해당 영관이 곧바로 속히 이끌도록 하라.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각 소대를 이끌고 수원부에 주둔하여 폐해 없이 머물


러 묵었고 음식을 제공받았으며, 일본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며칠 동
안 연이어 머물고 있으니,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갑오군정실기 2 205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순무영에서 베껴서 보낸 방시문(榜示文)을 몇 개로


베꼈으며, 경기도와 호남의 각 고을에 관문을 보내 신칙하되, 방시문을
게시하여 널리 알리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서둘러 명령하여 알렸습니다.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충청감사 박제순이 첩보함

충청감사 박제순이 첩보합니다. 본영은 요충지에 있는데 청주에서 병정


을 조달한 이후, 방어하여 지키는 것이 매우 허술합니다. 지금 토착군병
[土兵]을 불러 모아 부대를 만들어서 단련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군향을
마련하고 군사훈련을 하는데, 곳곳마다 사람이 필요합니다. 마땅히 도
내의 신사(紳士)들에게까지 적용하여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도사(都
事) 서병학(徐丙學)과 전 도사 조상희(趙相熙) 및 유학 구완희(具完喜)
가 군대의 일을 기억하고 잘 알고 있어서 그에게 감당하도록 임무를 맡겼
으나, 직명이 없이는 오랫동안 책임을 맡기가 어려우므로, 영(營)에서 모
두 순무영 참모관으로 임명하여 그들이 그대로 머물러 일을 맡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題) : 임금께 아뢰어 임명하도록 하라.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호남의 비류들이 이미 충


청도를 침범하여, 은진(恩津)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노성(魯城)의 관

206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사 또한 부서졌고, 군기 및 읍내의 인가가 약탈되어 텅 비었습니다. 지
금 감영과의 거리가 불과 40~50리인즉, 구원하는 군사가 도착하지 않으
면 살고 있는 백성들이 떠날 것입니다. 현재 상황을 말한다면, 도저히 어
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경리청의 전 부영관 성하영과 참모관 이상덕(李相
德) 등이 데리고 있는 병정이 진천과 청주 등지에 머문 지 10일이나 되었
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수차례 지원해 줄 것을 청하였으며, 순무영
과 선봉[前鋒]이 없이는 명령하여 지시하더라도 두려워서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또한 임금께 보고하여 조달해 오라는 내용의 관문을 내
어 독촉하였으며, 순무영이나 선봉은 그사이에 이미 길을 떠났는지 모르
지만, 길을 재촉하여 보내줄 것을 독촉하여 때에 늦지 않고 기회를 잃지
않게 하도록 묘당과 순무영이 임금께 아뢰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급히
임금께 아룁니다.
제(題) : 이미 순무영과 선봉진에 전령하였다.

장위영의 부영관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함

장위영의 부영관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합니다. 10월 10일에 음성에 주


둔하여 묵은 연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기찰포교[譏校]인 김성
연(金性連)이 음성현 남면 난매동(蘭梅洞)에 사는 접의 우두머리 송병
권(宋秉權)을 잡아 조사하였는데, 백미 1백 석을 근처에 사는 양반 박씨
[朴班]의 집에서 강제로 징수하여 표(標)를 받은 것이 있고, 지니고 있는
장물(臟物)은 접(接)에서 이끌고 있는 사람들의 성명을 적은 발기[件記]
1도(度)와 합진치성(合進致誠)하라는 내용의 사통(私通) 1도가 있었습
니다. 또한 전후로 지은 죄를 그가 이미 자복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일 진
시(辰時, 오전 7~9시) 무렵 음성의 대로 옆에서 처치하여 많은 무리들에게

갑오군정실기 2 207
경계하도록 하였습니다.
제(題) : 더욱 찾아내어 사로잡도록 하라.

장위영의 부영관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함

장위영의 부영관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합니다. 10월 10일에 음성에 주


둔하여 묵었고, 10월 11일에는 청주로 향하여 출발하였으며, 구원하러
가는 연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당일에 행군하여 청주병영으로
갔습니다. 명령을 기다려 군대를 움직일 생각입니다.
제(題) : 공주에 경보가 있으니, 선봉진의 지휘를 기다려 서둘러 거행하
라.

강화진무영 병방 황헌주가 첩보함

강화진무영[沁營]의 병방(兵房) 황헌주(黃憲周)가 첩보합니다. 삼가 전


령의 말씀에 의거하여 병방이 병정 265명을 이끌고 10월 12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 무렵 출발하여 수로를 이용해 인천 땅으로 향하였으며, 일본
군인이 와서 전령을 전하였습니다. 호서의 연로에서 일본 사관(仕官)을
만나서 그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제(題) : 하루빨리 출발하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라.

│10월 17일│
의정부에 보고함

종사관이 첩보합니다. 현재 선봉진은 이미 출발하였습니다. 군대의 상황


은 군대의 전보로 서로 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첩보하니, 헤아려

208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주신 후 곧바로 분부하여 보고하는 것에 따라 전보를 쳐서 바로 빨리 알
리도록 하겠습니다.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뢰기를, 지금 선봉장 이규태가 10월 16일 사시에 급히 보고한


것을 보니, “군대의 행진이 어제 그대로 수원부에 머물러서 무사히 묵었
다.”라고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뢰기를, 면주전(綿紬廛) 시민들이 엽전 4백 냥, 내어물전(內魚


物廛) 시민들이 엽전 2백 냥, 외어물전 시민들이 엽전 2백 냥, 청포전(靑
布廛) 시민들이 엽전 3백 냥, 전 부사 조진태(趙鎭泰)가 엽전 5백 냥, 전
군수 천일성(千一成)이 엽전 2백 냥, 전 사과 이성로(李聖魯)가 엽전 2백
냥을 가지고 와서 순무영에 바치고, 군수에 보탬이 되기를 바랐으므로,
받았다는 내용으로 감히 임금께 아룁니다.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10월 15일 미시(未時, 오후 1~3시)에 도착한 순무사


의 전령 내에, “군대의 행과 관련된 군대의 규율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데,
이번에 수원에서 머물러 묵을 때에 거느리고 있는 전배군(前排軍)들이 해
당 영에서 폐해를 일으키고, 부사를 토색하여 큰 소란을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들었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 군율이 있을 수 있는가? 이에 전
령하니, 도착하는 즉시 엄히 조사하고 찾아내어 실상을 밝히고, 일을 저

갑오군정실기 2 209
지른 군인은 수갑과 칼을 채워서 잡아 올리고 해당하는 군율을 시행하
며, 이후 단속하는 절차는 더욱 거듭 신칙하여 조금이라도 고을과 마을
에 폐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10월 12일에 군대의 행진이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 수원부로 들어갔으
며, 수많은 사람과 말들이 돌아가는 편에 휴식을 취해야 했으므로 머물
러 묵었습니다. 그래서 기수(旗手)에게 이속(吏屬)들을 불러오도록 하였
는데, 그가 처소를 변별하지 못하고 영내에 난입하여 적발되기에 이르렀
습니다. 비록 소란을 피우고 폐해가 없었다고 해도, 일의 체모로 말하면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들을 수원부의 옥에 임시로 단
단히 가두고,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는 날을 기다려서 적용할 법을 살
폈더니, 안렴(按廉)하기에 이르렀고, 이와 같은 영칙을 받들게 되어 매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곧바로 죄인을 압송하여 올릴 겨를이 없어서, 찬 옥에 오래 가둔 지 이
미 며칠이나 되어, 지금은 몸이 쇠약해져 삶과 죽음을 판별할 수 없게 되
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나아지기를 기다려 압송하여 올려보낼 생각입니
다.
제(題) : 본진(本陣)에서 죄의 무거움을 경중으로 나누어 처리하라.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10월 16일에 별무사가 가지고 온 인자군막(人字軍


幕) 18부(部)를 수대로 감독하여 받았으며, 이후 9부는 통위영 병정에
내어주었고, 9부는 교도소 병정이 있는 곳을 탐지하여 실어 보낼 생각입
니다.
제(題) : 교도대가 있는 곳에 즉각 빨리 실어 보내라.

210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인자군막을 실어 올 복마군(卜馬軍) 5명 및 말 5필


과 9월 26일의 군량과 반찬 및 말에게 줄 먹이의 값을 합한 429냥을 수
효에 맞추어서 감독하여 받았으며, 폐해 없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거느리고 있는 각 소대가 무사히 머물고 묵었으며,


음식을 제공받았습니다.
제(題) : 임금께 아뢰려고 하며, 첩보가 도착했다.

지평현감 맹영재가 첩보함

지평현감 맹영재가 첩보합니다. 이번에 받은 전령의 내용에 따라 현감이


이끄는 소모군병이 10월 11일에 출발하여 곧바로 순행할 곳인 신지(信
地)로 향하였습니다.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지평현감 맹영재가 첩보함

지평현감 맹영재가 첩보합니다. 10월 11일에 출발한 상황은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소모군병을 이끌고 10월 12일 신시(申時, 오후 3~5시)
무렵에 여주 점량면(占梁面) 덕곡리(德谷里)에 도착하여 충주 무기촌
(無基村) 및 진천 광혜원 등지를 자세히 탐지하였더니, 동도가 모두 도
망하여 흩어졌다가, 다시 몰래 괴산을 습격하여 읍내에 불을 지르고 모
두 태웠습니다. 그래서 죽산부사가 물리치기 위해 경군을 이끌고 동도들

갑오군정실기 2 211
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10월 13일에 현감이 죽산부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상황은 일이 발생하는 것에 따라 빨리 보고할 생각입니다.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지평현감 맹영재가 첩보함

지평현감 맹영재가 첩보합니다. 10월 13일에 군대를 이끌고 죽산부에 도


착한 연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10월 13일에 오는 길에 활산(活
山)의 접사(接司) 최제팔(崔齊八)을 잡아 덕실촌(德實村) 앞에서 죽였
으며, 10월 14일에 죽산 안광리(安光里) 접괴(接魁)인 출신 박성익(朴性
益)과 구계동(九溪洞)의 접사인 이춘오(李春五) 모두를 죽산부의 대로
변에서 죽였습니다. 구산리(九山里)의 동도 장태성(張太成)은 동학에 들
어가 그의 상전을 결박하여 혹독하게 무수히 장을 쳐서 정강이뼈가 드러
났습니다. 그래서 그 또한 대로변에서 죽였습니다. 충주의 선비와 백성들
이 낸 등소의 내용에, “동학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니,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으므로, 지금 충주 지방으로 방향을 바꿨습
니다.
제(題) : 충주와 청주 등지는 이미 대진(大陣)을 징발하여 보냈으며,
도망한 비도들은 반드시 여주와 지평 등지로 갈 것이다. 요충지로 회군
하여 가로막되, 상황에 임하여 잘 처리하도록 하라.

충청감사 박제순이 도부함

충청감사 박제순이 도부합니다. 선봉진 일행이 지금 바로 출발하여 점심


을 먹고 묵을 곳과 군량, 말먹이로 줄 콩, 땔감 등을 충분히 마련하여 기
다리라는 내용으로 명령하여 알리라는 관문이 이르렀습니다.

212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이번에 접한 수영 우후


(水虞侯) 김국서(金國序)의 첩정 내용에, “10월 7일 인시(寅時, 오전 3~5
시) 무렵 동도 수천 명이 수륙 양면으로 진출하여 영하(營下)에 갑자기
들어와서 총을 쏘고 소리를 지르면서 칼과 창을 마구 휘둘렀습니다. 수
사(水使)가 이치를 들어 그들을 꾸짖고 타일렀는데, 저들은 그를 발로
차고 때렸으며, 수교(首校)와 수리(首吏)를 모두 결박하여 칼로 마구 찔
러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그들은 군기고로 향하였고 수직(守
直)과 감색(監色)을 모두 함께 결박하였으며, 다른 수영 영속(營屬)들도
칼과 창으로 찌르거나 때렸고 군기와 집물 및 화약을 모두 빼앗아 곧바
로 결성 광천(廣川)으로 향하였으며, 수사는 결박된 채로 몇 차례 맞아
서 의식을 잃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題) : 비류가 지속적으로 창궐하여 수영을 침범하기에 이르렀으니,
더욱 마음이 아프고 한탄스럽다. 이창구(李昌九)가 있는 곳을 연이어서
자세히 탐지하라.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이번에 접한 홍주목사 이


승우의 첩정 내용에, “‘10월 8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무렵 면천
(沔川) 동도 우두머리 이창구가 수영의 군기(軍器)를 빼앗아 가지고 홍
주의 광천으로 와서 모여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민
병(民兵) 3백 명을 징발하여 그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달려갔는데, 저들 무

갑오군정실기 2 213
리 2백~3백 명이 군기를 묶은 것을 풀어서 정원갑(鄭元甲)의 빈집에 쌓아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곧바로 총을 쏘면서 전진하였습니다. 이때
부상을 입고 넘어진 자가 3명이었고, 피하다가 잡힌 자가 9명입니다. 군
기들은 남아 있는 대로 빼앗았으며, 모여 있는 저들 무리들은 모두 흩어
졌습니다. 민병은 곧바로 돌아왔으며, 잡은 9명은 임시로 엄하게 가두었
으며, 획득한 군기와 집물은 성책하여 감사에게 올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민병 중에 대장(隊長)과 몸을 바쳐 먼저 올라간 자를
격려하고 권장하기 위해 마땅히 두터운 상을 내리는 은전이 있어야 합니
다.”라고 하였습니다. 홍주목사와 전후로 미리 준비하여 막아서 무찌른
것은 여타의 것과는 크게 구별되는 일이며, 지금 또 잃어버린 군기를 되찾
고, 여러 놈을 붙잡았으니 더욱 그에 따른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대
장과 먼저 올라간 자는 충청감영에서 넉넉하게 시상할 생각입니다.
제(題) : 들으니 매우 다행스럽다. 이후 상황을 연속하여 보고하라.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10월 12일에 석성(石城)


의 하리(下吏) 강한춘(姜漢春)ㆍ신석표(申錫表) 등이 와서 고한 내용
에, “10월 11일 밤에 동도 수천 명이 총을 쏘면서 갑자기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석성현감이 나가서 그들을 알아듣도록 타이를 때, 저들 무리가
붙잡고서 마구잡이로 때렸습니다. 여러 서리들도 붙잡혀서 맞았으며, 거
의 죽게 되었습니다. 군기와 민가ㆍ돈과 재물ㆍ의복ㆍ소와 말 등의 물건
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그래서 이런 연유를 와서 고합니다.”라고 하였
으므로, 급히 임금께 아룁니다.
제(題) : 들으니 매우 마음이 아프고 한탄스럽다. 이후 상황을 연속하

214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여 보고하라.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15개 고을과 진(鎭)에서


군기를 빼앗긴 연유는 이미 연이어서 급히 임금께 아뢰었습니다. 이번에
보은군수 이규백(李圭白)이 첩정한 내용에, “10월 8일 신시(申時, 오후
3~5시) 무렵에 동도 수만 명이 무리를 이루어 (관아에) 함부로 마구 뛰어
들어 군기와 집물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또 도착한 결성(結成)의 공형(公兄) 문장(文狀)의 내용에, “10
월 6일 술시(戌時, 오후 7~9시) 무렵에 동도 수천 명이 각각 총과 창을 가
지고 쏘아 대면서 갑자기 들어와서 관아의 건물을 부수고, 결성현감을
끌어내어 묶어서 때린 것은 비할 바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관속과 지역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찌르고 때려서 다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군기와
집물은 모두 훔쳐내고, 결성현감이 지니고 있던 병부(兵符)와 입고 있던
의관(衣冠) 및 공적ㆍ사적으로 쓰던 재화를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그
래서 병부를 되찾고자 지금 방금 감색(監色)을 정하여 보냈으나, 현감이
간 곳을 알지 못하여 더욱 죄송하고 민망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적당들이 전후로 창궐하여 반역을 꾀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곧바로
가서 무찌르지 못하여 매우 죄송하고 민망합니다. 잃어버린 병부와 군물
들을 되찾을 절차는 각별히 신칙하였고, 결성현감 박기붕(朴基鵬)이 군
기를 지키지 못하고 병부를 빼앗긴 것은 이미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보
은군수 이규백과 함께 모두 파출하고, 그 죄상을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해 주십시오. 이를 급히 임금께 아룁니다.
제(題) : 들으니 매우 마음이 아프고 한탄스럽다. 토벌하여 사로잡기

갑오군정실기 2 215
를 기약하고 상황을 빨리 보고하라.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경리청 3대의 병정들이 오


게 된 연유는 이미 급히 임금께 보고하였습니다. 장위영 6대 병정들이 10
월 12일 저녁 5시에서 7시 무렵에 청주병영으로 나아가 구원하였으므로,
적당을 물리치기 위하여 지금 바로 징발하여 보낸 군대를 나누어서 출발
하게 하였습니다. 급히 임금께 아룁니다.
제(題) : (등보가) 도착했다.

경기감사 신헌구가 원문을 베껴서 보고함

경기감사 신헌구가 원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이번에 안성군수 홍운섭


의 보고를 보니, “10월 11일에 직산 입장면(立長面)에서 동도 7명을 붙
잡았는데, 접주 박병억(朴秉億)을 우선 효수하였습니다. 6명은 끝까지
엄히 조사하였는데, 5명은 과연 억지로 따른 자였으므로 새벽에 신칙하
여 풀어 주었으며, 1명은 직산에 사는 민영훈(閔泳勳)으로 그의 행적이
탄로 났으므로, 본군에 사는 백성들이 함께 잡아서 바친 임상옥(林尙玉)
과 함께 일체 효수하였습니다.”라고 하여 급히 임금께 아룁니다.
제(題) : (등보가) 도착했다.

│10월 18일│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일본 군사가 10월 18일 저녁 5시에서 7시 무렵 부

216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府)에 들어와 머물고 있는데, 의탁할 곳과 음식을 제공하는 절차에 모두
탈이 없었습니다.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공주를 구원하러 갈 도순무사의 전령이 10월 18일


술시(戌時, 오후 7~9시)에 도착하였습니다.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거느리고 있는 각 대(隊) 및 어제 도착한 일본 군사


를 임시로 무사히 묵게 하였으며, 10월 18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무렵
함께 출발하여 진위(振威)에 도착하여 머무르며 묵을 생각입니다.
제(題) : 임금께 아뢰기 위한 보고문이 도착했다.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선봉진이 10월 12일에 수원부에 도착하였고, 그날


저녁부터 10월 17일 아침까지 각 대(隊)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였으며,
14끼니[時]를 운량소에서 거행하였습니다. 그래서 갖고 온 도구들을 실
어 앞으로 출발하여 필요한 것에 대비할 생각입니다.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뢰기를, 이번에 선봉장 이규태가 10월 17일 진시에 급히 보고한

갑오군정실기 2 217
것을 보니, “군대의 행진이 10월 16일에 수원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무사히 묵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강령현감 류관수가 도부함

강령(康翎)현감 류관수(柳灌秀)가 도부합니다. 지난 9월 28일 오시(午


時, 오전 11시~오후 1시)의 전령 1도(度)가 오늘 신시 무렵에 도착하였습니
다.
제(題) : 더욱 단속하게 하라.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감사 박제순이 원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경리청의 전 부영관 성하


영이 이끌고 있는 병정을 관문을 내어서 징발해 온 연유는 이미 급히 임
금께 보고하였습니다. 성하영이 충청감영에 문서를 보낸 것 또한 다음에
주둔할 읍[前站邑]에 명령하여 알렸습니다. 마치 와서 구원해 줄 것처럼
하더니, 10월 13일에 장위영 영관 이두황의 6대(隊) 병정과 합해, 청주에
서 방향을 바꾸어 청산 등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지금 비류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더라도, 남비(南匪)가 곧
바로 공주로 향하는 것만큼 최고로 급한 상황이 없을 텐데, 해당 영관들
이 완급을 도모하지 않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크
게는 약자를 업신여기고 강자를 두려워하는 생각이 있는 것이며,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양 느려서 일을 이루지 못하는 탄식이 있는데, 저들은 남보
다 먼저 착수하여 사람들을 제압하기 위한 형세를 재빨리 얻고 있습니

218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다. 마른 양식과 짚신과 물건들을 미리 갖추어서 임금의 군대[王師, 京
軍]를 맞이하려 하는데, 도리어 도적에게 양식을 싸서 주는 것이 되고 있
습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니, 차라리 잘못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파견되어 온 경군들은 이리저리 슬슬 다니면서 방황하고 있는 형세로, 사
방으로 흩어져 있는 비류들을 몰아서 소굴을 만들어 주고, 남비들의 앞
길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된 의도는 오로지 충청감영에 있습니다. 현재의 계책으로 삼
아야 할 것은 먼저 감영이 있는 공주를 구하는 것으로, 요충지와 대로를
막아서 한편으로는 경기도를 둘러싸서 방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
친 도적들을 막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충청감영은 병사도 없고 식량도
없어서 하루에 열 번씩 놀라고 있으며, 매우 황급한 상태입니다. 이에 다
시 사실을 들어서 급히 임금께 아뢰니, 묘당과 순무영이 품처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급히 임금께 아룁니다.
제(題) : 이미 해당 영관에게 전령하였는데, 도착하지 못한 것 같다. 지
금 다시 문장을 만들어 전령하라.

서산군수 성하영에게 전령함

군대 행진의 진퇴를 해당 일본군 사관(仕官)의 지휘를 받아서 시행하도


록 이미 출진한 각 해당 영관들에게 영을 내려 신칙하였다. 또한 공주의
비류들이 갈수록 더욱 창궐하여 헤아릴 수 없는 염려가 있으며, 일본 군
사가 공주 등지로 방향을 바꿨다. 이에 전령을 하므로, 도착하는 즉시
이끌고 있는 병정 2대(隊)를 하루빨리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 진퇴를 조
절하는 것을 해당 사관과 함께 때에 따라 헤아리는 것이 마땅하다.

갑오군정실기 2 219
경기감사 신헌구가 원문을 베껴서 보고함

경기감사 신헌구가 원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이번에 접한 지평현감 맹


영재의 보고를 보니, 그가 아직 부임하지 않은 이유를 이미 첩보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순무영의 전령을 받고, 동도를 무찌르기 위해 소모군병을
이끌고 10월 11일 죽산에 도착하여 동도 활산(活山)의 접사(接司) 최제
팔(崔齊八), 안광리(安光里) 접괴(接魁)인 박성익(朴性益), 구계동(九
溪洞)의 접사인 이춘오(李春五) 등 3놈을 잡아 도로변에서 죽였습니다.
구산리(九山里)에 사는 장태성(張太成)도 동도로서 자신의 상전을 결박
하여 혹독하게 무수히 장을 쳤다는 이유로, 충주로 향하는 도로변에서
또한 죽였습니다.
연이어 도착한 죽산부사 이두황의 보고를 보니, 10월 10일에 동도 접
주 송병권(宋秉權)을 음성현에서 잡아 곧바로 처치하였다고 합니다. 급
히 임금께 아룁니다.
제(題) : (등보가) 도착했다.

병정들이 거쳐 가는 연로에 있는 각 읍과 진의 관에게 전령함

적을 무찌르기 위해 일본 군사가 이번에 스스로 군량과 비용을 가지고


내려갔지만, 이르는 곳에서 혹 다른 물건을 청구하면 곧바로 조치하라.
또한 마른 식량과 비용이 부족할 염려가 없지 않으므로, 이에 전령이 도
착하는 즉시 거쳐 가는 각 고을은 해당 파원들이 말하는 바에 따라서 먹
을 것 및 말에게 먹일 마른 식량과 땔감 등을 마련하여 주라. 필요한 물
력들은 어떠한 공곡ㆍ공전 중에서 실제로 집행하여 사용한 것에 따라서,
해당 군관에게 확실한 문서를 받은 후 성책하여 보고해 오면, 회감(會
減)하는 것이 마땅하다.

220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10월 19일│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함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합니다. 청안현(淸安縣)에서 군대의 행동을 살피


기 위해서 청주병영에 보고한 연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이번에
도착한 병영의 회제(回題) 내용에, “안성(安城)의 병정들이 어제 이미 와
서 머물고 있으며, 곧바로 빨리 나아가서 군대를 합치는 것을 의논하라.”
라고 하였으므로, 10월 12일에 청주성에 주둔하여 묵었습니다.
제(題) : 일본 군사는 이미 내려갔다. 그들과 함께 헤아려서 함께 나아
가고 물러가도록 하라.

선봉장이 첩보함

선봉장이 첩보합니다. 어제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각 소대를 데리고 일


본 군사와 함께 행진하였으며, 유시(酉時, 오전 5~7시)에 진위현(振威縣)
에 도착하였습니다. 폐해 없이 머물러 묵었으며, 음식을 제공받았습니다.
10월 19일 오전 8시 반에서 9시 반 무렵에 이어서 출발하였습니다.
제(題) : 임금께 아뢰기 위한 보고문이 도착했다.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뢰기를, “이번에 선봉장 이규태가 10월 18일 진시에 급히 보고


한 것을 보니, ‘군대의 행진이 10월 18일 진위현에 무사히 묵었습니다.’라
고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갑오군정실기 2 221
수원유수 조병직이 장계함

수원유수 조병직(趙秉稷)이 장계합니다. 순무영 선봉장 이규태가 이끄는


통위영 영관 1원ㆍ대관 8원ㆍ병정 317명이 수원부에 들어와 주둔한 연
유는 이미 임금께 급히 아뢰었습니다. 이번에 수원부의 판관 이재근(李載
覲)의 첩정 내용을 보니, 당일 오전 7시에서 9시 무렵에 모두 출발하여 진
위현으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임금께 급히 아룁니다.
순무영에 계하(啓下)하였다.

의정부에서 임금께 아룀

의정부에서 임금께 아뢰기를, “충청감사 박제순이 전후하여 올린 장계의


원문을 베껴서 보고한 것을 보니, 방어할 대책이 없는 상황을 진술하면서
‘순무영의 선봉진(先鋒陣)을 속히 내려보내 주시고, 장위영(壯衛營)과
경리청 두 영(營)의 영관(領官) 가운데 청주(淸州) 등지에 있는 자들도
즉시 와서 도와주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충청감영은 요
충지에 위치하여 방어를 소홀히 할 수가 없으니, 순무영에 속히 지시하여
빠른 시일 내에 가서 도와주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통위영 참령관 원세록이 첩보함

통위영 참령관 원세록(元世祿)이 첩보합니다. 10월 9일에 출발하여 10


월 13일 해시(亥時, 오후 9~11시)에 도착한 전령에 따라, 비류를 무찔러 없
앨 대책과 군대의 진퇴를 조절하는 절차를 영사(令辭)에 의거하여 거행
할 생각입니다.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222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함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합니다. 10월 9일에 출발하여 10월 13일 해시에


도착한 전령에 따라, 비류를 무찔러 없앨 대책과, 군대의 진퇴를 조절하
는 절차를 영사에 의거하여 거행할 생각입니다.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함

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합니다. 진병(進兵)하는 것을 모여 논의하기 위


해 10월 12일에 청주 땅에 주둔하여 묵은 연유는 이미 급히 보고드렸습
니다.
10월 13일에 보은 장내를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진남영 장졸들은 앞
에 서고, 장위영 장졸들은 중간에 서고, 경리청의 장졸들은 뒤에서 행군하
였습니다. 청주에서 미원(米院)에 이르러 경리청 장졸들은 미원점(米院
店)에 그대로 남아서 뒤에서 대응하도록 하였으며, 장위영과 진남영의 장
졸들은 곧바로 행군하여 삼경(三庚, 오후 11시~오전 1시)에 보은의 중치(中
峙)에 나누어 도착하였으며, 동도 35놈을 사로잡았습니다. 전진하다가
밤이 이미 깊어 그대로 허길곡점(許吉谷店)으로 향하여 군대를 머물게
하고, 밤을 지내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구현(龜峴)을 넘어갔습니다.
이미 잡은 동도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접주와 장물을 가진 자 12놈을 가
려내어 처치하였고, 그 외에 협박을 받아 따른 여러 놈들은 모두 곧바로
풀어 주었습니다. 보은 함림역(咸林驛)을 지나던 중에 또 임(任)씨 성을
가진 자[任名] 및 장물을 가진 동도 3놈을 모두 처치하였습니다.
진남영의 장졸은 곧바로 보은(報恩)읍으로 가서 머물렀습니다. 장위
영의 장졸들은 곧바로 장내(帳內)로 갔는데, 동도들은 이미 10월 11일에

갑오군정실기 2 223
청산(靑山)으로 옮겨서 모였다고 합니다. 비류들이 살던 풀로 만든 움
집[草窖] 4백여 곳과 마을에 있는 집이 수백여 호인데, 한 마을이 또한 이
미 텅 비어 있었고, 살고 있던 20여 놈들 또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수
색하여 잡은 3놈은 그 자리에서 총을 쏘아 죽인 후에 그들이 풀로 만든
움집과 가사(家舍)를 모두 태웠습니다. 보은으로 돌아오던 길에 한 놈
을 잡았는데, 이는 거괴를 따라다니면서 행패를 부린 자였으므로, 그 자
리에서 처단[結果]하였습니다. 처단된 자들의 성명과 죄목ㆍ장물을 모두
성책하여 올려보냈습니다.
당일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보은읍에 도착하였으며, 삼영(진남
영ㆍ장위영ㆍ경리청)의 장졸들은 함께 주둔하여 묵었습니다. 전진하여
무찌를 대책을 세워서 병사들을 나아가게 하는 것을 상의할 것입니다.
제(題) : 이미 진행하였으나 1명의 괴수는 잡지 못하였고, 다만 머물러
있으니, 일본 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린 후에 진퇴를 상의하라.

안성군수 홍운섭이 첩보함

안성군수 홍운섭이 첩보합니다. 전영관이 병정을 이끌고 청주로 향하여


갔으며, 군수인 저는 놀라서 겁을 먹은 고을의 백성들을 어루만져 위로하
기 위해 곧바로 빨리 가지 않고, 병사를 대신 이끌고 간 이유를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현재 고을 백성들은 거의 돌아와 살고 있으므로, 병정
들을 이끌고 나아가 적을 치기 위해 10월 19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무렵에 빨리 전진할 것입니다.
제(題) : (첩보가) 도착했다.

224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소모관 정기봉이 첩보함

소모관 정기봉(鄭基鳳)이 첩보합니다. 비류 백난수(白蘭秀)가 목천 서


근야미촌(西斤夜味村)에 살고 있는데, 본래 이름 있는 우두머리[魁]였습
니다. 그런데 수원포(水原包) 김내현(金鼐鉉)이 죽은 후에, 그가 스스로
분한 마음을 풀겠다고 하여 남은 무리 수천 명을 모아 4, 5대(隊)로 나
누어 천안ㆍ직산ㆍ양성 3읍의 경계를 오고 가면서, 동학을 저버리고 귀
화한 약간의 백성을 다시 협박하고 강제하여, 낮에는 흩어졌다가 밤에는
모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곳 백성들이 생업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리하여 모군(募軍) 백여 명을 이끌어 적당들을 몰아내고 흩어지게 하였
으며, 백성들을 알아듣도록 타일렀습니다.
양성의 공제면(孔悌面) 류성옥(柳成玉)은 비류로, 해당 접에서 가장
불량한 자입니다. 이어서 잡지 못하여서 그의 집을 적몰하였고, 백난수는
이미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뒤를 쫓아서 잡으려 하며, 그가 도망하면서
버린 총과 창 등의 물건들은 군용으로 사용하겠습니다. 명첩도록(名帖
都錄)과 기치(旗幟) 및 염주 등의 물건을 거두어 올립니다.
제(題) : 백난수와 유성옥을 잡아서 효수하고 보고하라.

│10월 20일│
경기감사 신헌구가 원문을 베껴서 보고함

경기감사 신헌구가 원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이번에 죽산부사 이두황


이 보고한 것을 보니, “10월 13일에 보은으로 향하였고, 진남영은 앞쪽에
있고, 장용영은 중간에 있으며, 경리청은 뒤에서 행군하면서 서로 합세하
여 보은 중치(中峙)와 함림역(咸林驛) 등지에서 동도 38명을 잡았습니

갑오군정실기 2 225
다. 억지로 그들을 따른 자 23명은 잘 타일러서 풀어 주었으며, 15명은
모두 처단하였습니다.
진남영의 장졸은 곧바로 보은읍으로 가서 머물러 진을 쳤으며, 장위영
의 장졸들은 곧바로 장내(帳內)로 들어가서 동도 4명을 잡았는데, 이들
또한 처단하고 풀로 만든 움집[草窖]을 모두 태운 후, 3영(진남영ㆍ장위
영ㆍ경리청)의 장졸들이 함께 전진하여 상의하고 그들을 물리칠 생각입
니다.”라고 하였기에, 급히 임금께 아룁니다.
제(題) : 임금께 아뢰기 위한 보고문이 도착했다.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뢰기를, 운봉(雲峰)에 사는 유학 백낙중(白樂中), 전 주서(注


書) 박봉양(朴鳳陽)은 남원의 비도가 남원군을 침범할 때에, 향정(鄕丁)
을 불러 모으고, 힘을 바쳐 포(砲)를 설치하여 몇 차례나 격퇴하였으니
매우 갸륵합니다. 백낙중을 소모관으로 임명하고, 박봉양을 참모관으로
임명하여, 그들에게 시종 힘을 다할 수 있도록 함이 어떻습니까?”라고 하
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뢰기를, “유학 오학수(吳學秀)를 참모관으로 임명하고, 장위영


영관 남만리(南萬里), 전 오위장 김진옥(金振玉), 전 감찰 유한세(劉漢
世), 전 사과 이흥교(李興敎), 유학 임형준(任炯準)ㆍ임병효(林炳孝)ㆍ이
건원(李健源)ㆍ신석규(申錫圭)ㆍ강원노(姜元魯)ㆍ이창직(李昌稙)ㆍ천
희천(千希天)ㆍ오인경(吳仁庚)을 모두 별군관으로 임명하려 합니다. 이

226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들을 주둔하고 있는 각 진에 나누어서 나아가도록 함이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오늘 오전 8시 반에서 9시 반 무렵에 진위에서 출발


한 연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일본 군사 1갈래를 맡은 대위가
진위에서 안성으로 방향을 바꾸고 내일 천안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
였고, 일본 군사 87명은 소위 1인과 경병정을 모두 합친 잡색 43인을 교
장(敎長) 황수옥(黃水玉)이 이끌고 평택ㆍ아산 등지로 나누어 향하였다
가 또한 천안에서 한데 모이기로 약속하여 그곳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끌
고 있는 각 대병(隊兵)은 미시(未時, 오후 1~3시) 무렵에 칠원점(柒園店)
에서 점심을 먹고, 술시(戌時, 오후 7~9시) 무렵에 성환역에서 머물러 묵을
것입니다.
제(題) : 각 진이 머물러 묵어 무사하니, 매우 다행이다.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본진이 수레로 옮겨 오는 일로, 일겸금군(一兼禁軍)


인 배용주(裵用珠)의 마필이 성환역에 이르러 죽었습니다. 그래서 말 주
인에게 노자로 2냥을 주어 올려보냅니다.
제(題) : 해당 영에 명령하여 알리도록 하라.

선봉이 첩보함

선봉이 첩보합니다. 어제 술시 무렵에 병정들을 거느리고 성환역에 도착

갑오군정실기 2 227
하여 무사히 묵었습니다. 직산 고을에서 소 1마리와 술 4동이를 가지고
와서 진(陣)에 바쳐, 병사들에게 먹일 것으로 삼았습니다. 각 소대 및 진
에 나와 있는 여러 인원들에게 나누어 먹였으며, 오늘 진시(辰時, 오전 7~9
시) 무렵에 천안으로 나아갈 생각입니다.
제(題) : 임금께 아뢰기 위한 보고문이 도착했다.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룁니다. 이번에 선봉장 이규태가 10월 19일에 급히 보고한 것


을 보니, “군대의 행진이 어제 성환역(成歡驛)에서 무사히 묵었으며, 직산
고을에서 소 1마리와 술 4동이를 가지고 와서 진에 바치면서, 병사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 위로하는 것으로 사용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
일이 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감히 임금께 아룁니다.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전 용호영에 사통23을 보냄

지금 이번에 선봉진으로 출정한 일겸금군(一兼禁軍)인 배용주(裵用珠)


마필이 성환역에 도착하였는데, 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는 공적인 것
이어서 영례(營例)에 의거하여 시행할 것입니다. 본영의 순무사도께서 내
리신 분부를 받들것이므로 이 사통을 보내니 이를 양해해 주시고 고하는
바를 시행하실 일입니다.

23 사통(私通):공적인 일로 관리들끼리 편지 등으로 사사로이 연락하던 일을 말함.

228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동도배들이 괴산군에서


변고를 일으킨 연유는 이미 급히 임금께 아뢰었습니다. 진남영에서 따로
보내 자세히 정탐한즉, 10월 6일에 동도가 괴산군에 크게 이르렀는데, 때
마침 일본 군사 수십 명이 와서 머물며 읍속 수백 명과 힘을 합해 싸움을
벌였으나, 적을 막지 못하고 마침내 궤멸하여 흩어졌습니다. 동도가 기
세를 타고 돌입하여 먼저 재화를 찾아내고, 관청 건물과 백성들의 집 7백
여 호를 일시에 불을 놓아 모두 태웠습니다. 군수와 관속배들이 겨우 충
주 지역으로 도피하였으며, 다치고 죽은 인명은 읍속으로 죽은 자가 10
명이고, 부상자가 수십 명이며, 일본 군사는 죽은 자가 1인이며, 부상자
가 2명입니다. 동도는 죽은 자가 15명입니다. 급히 임금께 아룁니다.
제(題) : (등보가) 도착했다.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17개 고을과 진(鎭)에서


군기를 빼앗긴 연유는 이미 급히 임금께 아뢰었습니다. 이번에 회덕현감
이규서(李圭瑞)의 첩정 내용에, “10월 8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무렵에 동도 4천~5천 명이 무리를 지어 갑자기 들어와 군기와 집물을 모
두 빼앗아 갔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여러 고을의 군물(軍物)을 차례로
약탈하여 빼앗아 가는 것이 갈수록 심해져 근심스럽고 답답합니다. 적당
을 무찔러 없애고 군기를 되찾는 방안을 연이어 더욱 살피도록 하였습니
다.
회덕현감 이규서는 적 막는 것을 준비하는 시기를 놓쳤으니, 참으로
소홀하였기 때문에 우선 파출(罷黜)하고, 그의 죄상을 유사(攸司)에게

갑오군정실기 2 229
품처하도록 하였으며, 변경에서의 경보를 알리는 문보(文報)가 여러 날
지체되고 있어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회덕의 수향과 이향들을 진남
영에서 무거운 형벌로 다스릴 생각입니다. 급히 임금께 아룁니다.
제(題) : 비도들이 도처에서 창궐하니, 매우 통탄스럽고 놀랍다. 그들
을 무찔러 사로잡는 방법을 더욱 신칙하여 실효를 거두도록 하라.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문을 베껴서 보고함

충청병사 이장회가 원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적당을 물리치기 위하여


병사를 일으킨 연유는 이미 임금께 아뢰었습니다. 10월 16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무렵에 도착한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의 첩정의 내용에, “10월
13일 진시에 청주병영에서 출발하여 청영(淸營, 鎭南營) 장졸이 앞에 서
고, 장위영(壯衛營) 장졸이 중간에 서고, 경리청(經理廳) 장졸은 뒤에서
행군하면서 함께 보은 장내(帳內)로 향하였습니다.
청주 미원(米院)에 이르러, 경리청 장졸은 그대로 남아서 뒤에서 대응
하도록 하였고, 나머지는 그대로 행군하여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에 보은 중치(中峙)에 도착하여 동도 35놈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의
접주와 행패를 부린 자 12놈을 조사하여 그 자리에서 총을 쏘아 죽였으
며, 그 외 협박을 받아 따른 자는 모두 풀어 주었습니다. 대암점(大巖店)
에 이르러 또 동도 3놈을 잡아서 모두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청주병영[淸營]의 장졸들은 보은읍에 남아서 진을 쳤으며, 장위영의 장
졸들은 곧바로 보은 장내로 들어갔는데, 비도는 이미 10월 11일에 청산
(靑山)으로 옮겨서 모여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도들이 살고 있던 풀
로 만든 움집[草窖] 4백여 곳과 마을에 있는 집 수백 호가 모두 텅 비어
있었습니다. 약간의 살고 있는 놈들 또한 이미 산으로 올라갔으며, 수색

230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하여 잡은 3놈은 그 자리에서 총을 쏘아 죽인 후에 그들이 풀로 만든 움
집과 가사(家舍)를 모두 태웠습니다. 보은으로 돌아오던 길에 한 놈을
잡았는데, 이는 거괴를 따라다니면서 행패를 부린 자였으므로, 또한 그
자리에서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처단된 놈들의 성명과 죄목ㆍ장물을 모
두 성책하여 올려보냈습니다.
당일에 보은에 도착하였으며, 삼영(진남영ㆍ장위영ㆍ경리청)의 장졸
들은 함께 주둔하여 묵었습니다. 전진하여 무찌른 것을 다시 산정(算定)
할 생각입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보고한 성책을 베껴서 순무영에 올려
보냅니다.
이어서 또 도착한 충청감영의 우영관(右領官) 이용정(李容正)의 첩정
내용에, “본진(진남영)이 경리청ㆍ장위영 2진과 함께 합세하여 적을 무찌
르는데, 공주 지역이 적의 세력으로 위급하여 군대를 나누어 구원하러 가
라.”라는 내용으로 이번에 전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남영이 경리청
병정과 함께 10월 15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보은에서 출발하여 공
주 부강(芙江)으로 향할 것이며, 장위영 병정은 임시로 보은에 주둔할 것
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적의 괴수가 이미 청산(靑山)으로 이동하였으
므로, 삼영이 함께 공격하더라도 오히려 군대 수가 적은 것이 한스러우
며, 충청감사가 구원하여야 하지만, 또한 그가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음
을 알고서 가던 길[中途]에 군대를 나누었으니, 이는 더욱 행동함에 조심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정을 자세히 살피고 행동을 하라는 내용
으로 처결하여 장위영 영관에게 신칙하였습니다. 향후 상황을 연이어 차
례대로 임금께 보고할 생각입니다. 급히 임금께 아룁니다.
제(題) : (등보가) 도착했다.

갑오군정실기 2 231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룁니다. 이번에 본 출진 영관 죽산부사 이두황의 첩보를 보니,


“진남영(鎭南營) 장졸이 앞에 서고, 장위영(壯衛營) 장졸이 중간에 서고,
경리청(經理廳) 장졸은 뒤에서 행군하면서 함께 보은 장내(帳內)로 향하
다가 보은 비류의 접주인 이태우(李泰友) 및 그중에 명색이 있는 조한길
(趙汗吉)ㆍ문학만(文學萬)ㆍ최일봉(崔一奉)ㆍ이원중(李元中)ㆍ강동
회(姜同會)ㆍ이희영(李喜榮)ㆍ조한석(趙汗石)ㆍ김해경(金海京)ㆍ안성
민(安性敏)과 성명을 알 수 없는 3명, 청산(靑山)의 비류로 성찰(省察)
을 맡고 있는 김기환(金基煥), 이천(利川)의 비류인 서수영(徐水榮)ㆍ조
인이(趙仁伊)ㆍ원석만(元石萬)ㆍ김석재(金石在), 안성(安城)의 비류
인 박공선(朴公先), 음성(陰城)의 비류로 접주를 맡고 있는 송병권(宋秉
權) 등 12놈을 모두 처치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이어서 소모관 지평현감 맹영재의 첩보를 보니, “죽산의 비괴인 박성
익(朴性益), 접사 최제팔(崔齊八)ㆍ이춘오(李春五)ㆍ장태성(張太成) 등
4놈을 모두 효수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감히 임금께 아룁니다.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번역 : 양진석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관)

232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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