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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軍政實記 八
서산군수 성하영이 보고함
갑오군정실기 8 85
칠(沈敬七)이 접주 나봉환(羅鳳煥)을 잡아 바쳤으므로 조사한 뒤에 총
살하였습니다. 심경칠은 혼자서 힘껏 거괴를 잡아 바쳤으니 참으로 가상
하여 얼마만큼의 전(錢)을 주어 그 노고에 보답하였습니다. 오늘 군대를
옮겨 서산으로 출발합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군산에서 승리를 거두어 기쁘고 다행이
다. 이후 (비도를) 소탕하는 방법을 각별히 더 강구하도록 하라.
86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하게 하였으니, 일본군과 물건을 나누라고 내린 전령은 환수하도록 하십
시오. 소모관은 남원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제(題) : 처음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참으로 가상하다. 군수물자
를 이미 마련하였다니 또한 다행한 일이다. 군대가 행진할 때 백성들을
편안히 머물러 살게 하는 일이 오늘날 제일 시급한 일이다.
갑오군정실기 8 87
양성현감 남계술이 보고함
88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전령을 보냈다.
인천의 감리에 관을 보냄
│12월 11일│
출정한 장령 및 청주의 병영에서 출정한 장령에게 전령함
갑오군정실기 8 89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도록 힘쓰게 하라.
임금께 아룀
선봉이 보고함
90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선봉이 보고함
선봉이 보고함
갑오군정실기 8 91
기 진(陣)의 형세가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적들은) 천보총(千步銃)을 계
속 발사하였으며, 깃발을 휘두르고 나팔을 크게 불며 그 기세가 대단하
였습니다. 적이 주둔한 곳은 모두 높은 산으로 지세가 험준한 곳이었으
며, 우리 군사는 평야의 낮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대관 윤희영과
교장 이경진ㆍ홍선경과 병사 90명이 일본 군사 20명과 함께 산의 서쪽
에서 공격하였으며, 대관 이규식, 교장 오순영ㆍ장세복ㆍ양기영과 병사
140명 및 일본 군사 20명은 산의 동쪽에서 공격하기 위하여 길을 나누어
양쪽에서 일제히 물밀듯이 올라갔는데, 적의 탄환이 비 오듯이 끊이지 않
고 아래로 날아왔습니다. 혹은 밭이랑에 기대어 총을 쏘기도 하고 혹은
들판에 엎드려 쏘기도 하면서, 대열의 선두와 후미가 서로 호응하며 앞을
향해 계속 진격하였습니다. 군사들이 함께 힘껏 함성을 지르며 산에 올
라 신속하게 공격하자, 적도는 두려워하고 겁을 먹은 채 깃발을 흔들어
머리와 꼬리가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적이 주둔했던 산을 빼앗아
건너편 봉우리를 바라다보니, 앞과 뒤의 산에 있던 적들이 성황산에 모두
모여서 계속하여 회룡총을 발사하고 나팔을 크게 불고는 그대로 산을
내려와 군대를 모으고 다시 네 갈래로 길을 나누어 성황산으로 급박하게
올라가면서 계속하여 총을 쏘았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습니다. 적
은 방비를 할 수가 없게 되자 각자 달아났습니다. 따라서 (아군은) 길을
나누어 동서로 20리가 되는 지경까지 쫓아가서 각기 생포한 자들이 50
여 명이었으며, 총에 맞아 죽은 자들은 40여 명이었습니다. 빼앗은 물건
은 회룡총 15자루ㆍ조총 2백여 자루, 화약과 탄환 및 창죽(槍竹)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안장을 갖춘 말은 6필이었습니다.
때는 이미 술시(戌時, 오후 7~9시)가 지날 무렵이어서 즉시 군사를 모아
점검해 보니 우리 병사들과 일본 병사들 모두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었
92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습니다. 그래서 엄히 경계를 서면서 읍에서 유숙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
다. 이번 싸움에 승리한 소식은 지체해서는 안 되기에 베껴 써서 먼저 보
고를 올리며, 책자는 담당 영관(領官)이 보고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수정
하여 올릴 계획입니다.
제(題) : 이렇게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 감탄
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이후 군대의 행진 상황에 대해서는 계속하여
빨리 보고하라.
갑오군정실기 8 93
고 하였으므로 타이르고 풀어 주었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이후의 상황을 계속하여 급히 보고하
라.
94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게 하면서 마음대로 결박하고 때렸습니다. 수성장(守城將) 김련(金鍊)
이 최가 놈을 잡아왔을 때 이미 죽은 유리(由吏)16 나종인(羅鍾寅)의 아
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그 자리에서 때려죽였으며, 최가 놈의 집
에 보관해 두었던 소금 343섬은 화재를 당한 백성들에 나누어 지급하
여 집을 다시 짓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지난달 29일에 바다를
건너 군산(群山)에 도착하였는데 비류들이 낌새를 채고 달아나 일개 진
(鎭)의 아전과 백성들이 모두 한통속이 되어 비괴(匪魁)가 빼앗아 취한
병기와 내왕하는 배에 실은 곡식을 창고에 쌓아 두고 출납할 때에는 도
장을 찍는 것을 마치 관청의 장부와 같이 하였습니다. (창고에) 쌓아 둔
쌀 602섬과 조(租) 80섬ㆍ콩 7섬은 모두 군산진의 첨사(僉使) 최건수
(崔健洙)가 있는 곳에 맡겨 두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동학에 물든 좌수
(座首) 문규선(文奎璇)과 자초를 담당한 최가(崔哥), 도포수(都砲手)
문가(文哥), 곡식을 맡은 박가(朴哥) 등을 붙잡아서 총살하였습니다.
뒤에 부임하기 위하여 서산군(瑞山郡)으로 갔는데, 한산의 수성장(守城
將) 김련(金鍊)과 서천의 수성장 나현구(羅鉉九), 홍산의 수성장 최학래
(崔鶴來) 등이 각각 휘하의 군사와 부보상(負褓袱商)을 데리고 비류를
쫓아 체포할 때 적의 형세를 정탐하여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라고 하였
습니다. 그들을 격려하여 칭찬하는 포상이 있어야 합당할 듯합니다. 조
정에 아뢰어 처리하여 주시기 바라며 급히 아룁니다.
제(題) : (등보가) 도착했다.
갑오군정실기 8 95
│12월 12일│
안성군수 홍운섭이 보고함
경기감사에게 관문을 보냄
96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백 명을 거느리고 위무사(慰撫使)를 호위하면서 이달 29일 신시(申時,
오후 3~5시)쯤에 완영(完營, 전주감영)에 도착하여 머물러 방어하였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이후 일의 형편을 계속 빨리 보고하라.
갑오군정실기 8 97
결탁하여 수천 명이 지금 12일에 한산에 쳐들어와 인가를 불태우고 감옥
에 갇힌 동도를 내보내어 멀리 달아날 염려가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
다. 이에 14일에 신의 병영에 있는 군사를 동원하여 대동한 군관 정기황
(鄭基璜)과 이석범(李錫範)으로 하여금 이들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
게 하였으며, 또한 수영(水營)ㆍ보령(保寧)ㆍ남포ㆍ비인(庇仁) 등의 병
사를 계속 동원하여 모두 5천여 명이 17일에 서천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멀리 바라다보니, 적도들이 10리쯤 떨어진 한산(韓山)의 금당산(金塘
山) 위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적의 세력을 헤아려 보니 위쪽으로는 공
격할 수가 없어서 산에서 내려오도록 꾀어내기 위하여 19일에 금당산 아
래로 바짝 진격하여 적과 접전을 벌여 수십 명을 총을 쏘아 죽이고는 돌
아서서 거짓으로 패하여 물러났습니다. 적이 과연 산에서 내려와 삼수동
(三水洞)에 진을 쳤기 때문에 전투를 벌여 승리를 할 만하기에 홍산(鴻
山)에 머물고 있는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永)과 비밀히 약속
을 하여 장차 그와 함께 안팎에서 협공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에 이르러 서천의 아전들이 아직 다 귀화하지 않고 군수를 거짓으로 꾀
어 접경지역까지 가로막고 완고하게 회군할 것을 요구하면서 “적들이 한
산에 있으니 반드시 서천에서 행진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했다고 합니
다. 적이 비록 한산의 경계에 있지만 서천읍에서 가까운데도 그들이 말하
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마침내는 성안에 있는 이른바 수백 명의 방수
군(防守軍)이 합세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도리어 다른 문으로 나가
서 안산(案山, 남쪽 산)에 진을 치고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여러 군사들이
의심을 하고 공격을 하려고 하자 서산군수가 다른 뜻이 없다고 힘써 말
하고는 즉시 밖에서 호응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군사들에
게 먹을 것을 보냈지만 촌민들이 마련한 대광주리의 밥을 겨우 먹었을 뿐
98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이어서 노숙을 하며 고생을 한 병졸들은 배고픔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였
습니다. 하리(下吏) 나운경(羅雲景)과 유한표(劉漢杓)가 즉시 지목하
여 떠들어 대기를, “비괴가 겉으로는 귀화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흉악
한 속셈을 갖고 마침내는 군량을 적진으로 실어 나르기에 이르렀다.”라
고 하였으며, 또 한 가지 말을 꺼내어 군사를 선동하기를, “지금 기다리
고 있는 경군(京軍)은 완주의 비류 전봉준이 경병의 복색으로 분장시킨
것으로 (우리를) 습격해 올 예정이다.”라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
고 두려워하여 각 진영에서 모인 장병들이 흩어질 염려가 있었습니다. 말
의 뿌리를 수소문하여 보니 서산군의 아전에게서 나왔지만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나가(羅哥) 놈의 입이었습니다. 군정(軍情)은 안정시키기가 어
렵고 또한 어느 때 뜻밖의 위기가 놓여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비인(庇仁)으로 부대를 옮기기 전에 서산의 군사가 한산을 경유하
여 온 것을 탐색하여 호응하려고 하였더니 곧바로 서천의 당산(堂山)으
로 진군해 왔습니다. 적도는 이미 서천성에 들어가 민가를 불태우고 관
고(官庫)에 있는 화약을 다투어 나누어 관아에 불을 질렀습니다. 적들도
불에 타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노략질을 하고 나가다가 갑자기
길산교(吉山橋)에서 서산의 군사와 맞닥뜨려 한 부대를 수없이 죽였고,
적의 무리도 총을 맞아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나머지 무리
들은 무너져 흩어졌는데 각 영읍(營邑)의 군사들이 흩어져 도망간 자들
을 생포한 수가 30명입니다. 26일에 와서야 비로소 회군하였습니다. 또
한 각 읍의 유회소에서 잡아온 나머지 무리들이 13놈이었기 때문에 취조
를 한 뒤에 참작하여 처리할 계획입니다. 이번에 승리를 거둔 것은 전적으
로 서산의 군사들이 때맞추어 지원하러 달려와 주었기 때문이니 왕의 교
화가 미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서천이라고 하는 읍은 호남과는 한 가
갑오군정실기 8 99
닥 강물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서 비류들이 가득한 것이 (다른) 여러
읍들보다도 더욱 심하여, 여전히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있지만 감
히 겉으로는 드러내서 교화를 거스르지 못할 뿐, 이처럼 속으로는 다른
의도를 지니며 숨기고 있습니다. 새로 부임하는 관리가 흉악한 술책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엄중하게 조사하여 자백을 받아내지 않으면 안됩니
다. 따라서 압송해 온 아전과 향임들로부터 공초를 받아내려고 합니다.
서천군수 유기남(柳冀南)은 부임한 이후부터 비도들이 경계를 침범한 일
과 관군이 성에 들어간 일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한 번도 보고를 한 일이
없으며, 회군한 지 이틀째 되는 날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보고서를 한
장 바쳤을 뿐입니다. 보낸 그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모두 날조된 것들입
니다. 관군이 돌아가 군율을 어기고 변란을 일으켜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했는가 하면, 심지어는 홍주(洪州)의 군사들은 만번을 죽여도 오히려 가
볍다는 따위의 말이 있으니 해괴하고 도리에 어긋나지 않음이 없으며, 참
으로 난잡하여 일일이 들어 말씀을 올릴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무릇 이
보고도 또한 아전들 중에서 몰래 적들과 내응한 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니
이제 일이 진정된 뒤에 벗어날 계책을 실행하고자 한다면 사체를 돌아보
지 마십시오. 이 같은 망녕된 행위가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장리배(將吏
輩)들의 시기와 의심에 불과한 것이니, 그 더러운 병이 얽히고 엉켜서 뻗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신의 병영에서 규합한 무리들은 모두가 무예를 익히
지 않고 훈련을 하지 않은 장병들입니다. 그동안에 공격과 수비를 잘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요행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스
스로 통제의 권한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번에 행군할 때에 실수가 있었는
데도 스스로 반성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병사를 내어 적을 토벌
한 조치를 가리켜서, ‘변란을 일으켜 나라를 그릇되게 하였으니 만번 죽
갑오군정실기 8 101
징계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군수는 이미 걱정을 나누는 처지에서 만분
의 일이라도 돕는 것이 마땅하므로 비록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진실로 작
은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어떻게 통지하여 강제로 따르게 하였겠습니까?
과연 복정을 통지한 일이 아니므로 위의 원납전 5백 냥은 다시 올려보냅
니다.
제(題) :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일이 없다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본
읍의 일이 힘을 쓸 일이 많고 궁핍하므로, 원래의 돈은 다시 내려보내어
본군에 보탬이 되게 하라.
갑오군정실기 8 103
음죽현감 김종원이 보고함
갑오군정실기 8 105
들이도록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총살하고 한편으로는 효수를 한 뒤
에 강위서를 대장(隊長)으로 차출해서 군정(軍丁)을 거느려 비도를 토
벌하고 각별히 방어하도록 더욱 엄중하게 타일렀습니다. 박동의를 소모
종사관으로 차출하고, 그 다음 날에 이진석은 정선군(旌善郡) 여량(餘
粮)으로 방향을 바꾸어 가서 비도와 접전을 벌여 접사(接司) 이중집(李
仲集) 등 14놈을 쏘아 죽였습니다. 이달 6일에 올린 강위서의 보고 내용
에, “동도의 거괴 차기석(車箕錫)이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봉평(蓬坪) 내
면(內面)과 영서(嶺西)의 여러 읍에 출몰하여 사람들을 살해하고 창고
와 민가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박동의
에게 병사들을 거느리고 바로 내면으로 가게 하고, 이어서 다시 양양(襄
陽)의 관부에 관문을 보내어 병정을 모집하였습니다. 양양 관아의 사인
(士人) 이석범(李錫範)은 진신(縉紳)의 후예로서 분연히 이미 의병을 모
집하여 이끌고 경내의 비도를 토벌하였으며, 소모사의 명령을 듣고 바로
같은 마을의 사인인 최주하(崔舟河)ㆍ김준수(金儁秀)ㆍ장혁주(張赫
周)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와서 대기하였습니다. 이달 11일에 강위서
가 홍천(洪川)의 허경(許坰)과 합세하여 바로 자운포(自雲包)를 토벌
해서 접주 위승국(魏承國)과 접사 심성숙(沈成淑) 등 17놈을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그 다음 날에 박동의가 이석범과 군사를 합세하여 바로 원
당리(元堂里)로 진격하여 차기석을 토벌할 때에 성찰(省察) 오덕현(吳
德玄) 등 3놈을 먼저 총을 쏘아 죽였고, 승세를 타서 차기석을 사로잡
고 청두리(靑頭里)로 진격하여 홍천의 비괴인 권성오(權成五) 등 12놈
을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이석범의 동생인 국범(國範)은 병사를 이끌고
신배령(新排嶺)으로 바로 들어갔습니다. 이석범의 부하[副徒]인 김익제
(金翼濟)는 병사를 이끌고 응봉령(鷹峰嶺)으로 바로 나아가 세 갈래 길
│12월 13일│
충청병사 이장회가 보고함
갑오군정실기 8 107
의 비류 수만 명이 무주(茂朱)에서 (출발하여) 7일에 옥천(沃川)에 도착
하여 영동(永同)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합니다. 만일 영동에 들어가게 된
다면 반드시 본읍으로 향하게 될 것이니 매우 놀랍고 두려운 일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길을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문의(文義)로 향
하고, 또 하나는 보은(報恩)으로 향하여 가다가 돌려서 영동에 도착하
려고 합니다. 10일 묘시(卯時, 오전 5~7시)쯤에 받은 보은군수의 급한 기
별에, “남쪽 비류 수만 명이 8일에 본읍 원암리(元巖里)에 와서 유숙하고
있으니 빨리 구원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여, 즉시 영관(領官) 이용정(李
容正)이 있는 곳에 전령을 보내 그로 하여금 함께 보은으로 가도록 하였
습니다. 지금 들으니, 청산과 회덕의 동도들이 관장(官長)의 비호를 믿고
서 예전의 습성이 재발하여 밖으로는 남비를 부르고, 안으로는 사통(私
通)을 일삼는다고 합니다. 그들을 토벌하는 일은 잠시라도 늦출 수 없
습니다. 따라서 창의인(倡義人) 박정빈(朴正彬)ㆍ홍영훈(洪永勳) 등과
함께 기복병(奇伏兵)을 나누어 설치하여 서로 응원하려고 합니다.
제(題) : 두 읍의 거동이 참으로 해괴하다.
충청감사에게 관문을 보냄
갑오군정실기 8 109
낙오되었다는 소식을 최근 들었다. 원래의 전령과 관방(關防)20을 다시
거두어 소모병(召募兵)으로 하여금 함께 돌려보내고 보고하라.
전라감사에게 관문을 보냄
갑오군정실기 8 111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모집한 군사들은 일단 돌려보내고 원
문(轅門, 군영)의 명령을 기다려라.
│12월 14일│
교도 중대장 이진호가 보고함
갑오군정실기 8 113
(隊官) 김명환(金命煥), 참모관 이윤철(李潤徹), 교장(敎場) 고진룡(高
振龍), 군관 장윤국(張允國) 등이 순회하면서 비도를 토벌하여 고산(高
山)에 이르러 십여 명의 비도를 붙잡았는데, 거괴는 이미 도망갔기 때문에
타일러서 풀어 주었습니다. 6일에 돌아오는 길에 전봉준 수하에 있던 이
른바 운량관(運糧官)과 우마감관(牛馬監官) 등의 직책을 맡았던 소진
갑(蘇眞甲)ㆍ김관지(金官之)ㆍ김만업(金萬業) 등을 붙잡았는데, 효포
(孝浦)ㆍ청주(淸州)ㆍ금산(錦山) 등지의 전투에서 계획한 것이 매우 흉
악하여 즉시 총살하였습니다. 빼앗은 군수물자는 책자로 만들어 올려보
냅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갑오군정실기 8 115
가까운 고을들을 살펴보니 추악한 무리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서 중간에
모여 진을 치고 있으니, 약탈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을까 봐 걱정이 됩니
다. 3일 신시(申時, 오후 3~5시)쯤에 서교장(西敎場)21에 군민(軍民)을 크
게 모아 (비도를)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한 뒤에 머리는 궤짝에 넣어 도
순무영(都巡撫營)에 올려보냈으며, 나머지 3놈은 경중을 나누어서 처분
하여 급히 아뢰고, 그 머리들은 궤짝에 넣어 올려보냅니다.
제(題) : 머리를 받았다.
후(後)
갑오군정실기 8 117
금 오가작통(五家作統)을 하며 서로 두루 잘 살피고 치밀하게 하여 거괴
를 수색하여 체포한 뒤, 즉시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고 백성들을 보
살펴서 안정시켜라. 대군(大軍)이 장차 진군하려 함에 상민(商民)들이
향도(嚮導)를 자원하고 있다니 그 정성이 가상하다. 해당 읍에서 보부
상의 두목에 각별히 신칙하여 그들로 하여금 조심스럽게 거행하도록 하
고 그 일의 형편을 급히 보고하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부사가 부
임 초부터 백성들을 잘 타이르고 위험한 말로 두렵게 하여, (비도는) 목
을 움츠리고 자취를 거두어서 거의 사그라졌는데, 이달 7일에 평산(平
山)에서 5, 6백 명의 비도가 갑자기 본부(本府)로 쳐들어와서 몰래 숨은
사람들을 위협하고 강제로 몰고 갔으며, 문서와 장부를 불태우고 무기
를 빼앗고 돈과 곡식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따라서 계책을 써서 명령
을 내리길, “경군(京軍)과 일본군이 행진하여 경계를 압박하려고 하였으
나, 옥석(玉石)이 모두 불에 탈 염려가 있기 때문에 동도에 들어가지 않
은 자들은 각각 성명을 쓰고 관인을 찍어 증거로 삼는 게 좋다.”라고 하
였습니다. 며칠 안으로 도장을 찍은 것이 수만여 장이 되었으며, 마을마
다 동도배들이 군기를 거두어 바치고 목숨을 구걸하였습니다. 귀화하
는 자들에게 모두 이를 지급하였더니 경내의 모든 동도들이 귀화하게 되
었으며, 혹은 이웃 읍에 사는 백성들도 이에 의지하여 교화하게 되었습니
다. 대체로 이 무리들은 모이면 난민(亂民)이 되고 흩어지면 양민(良民)
이 되니, 지금으로서는 잘 어루만지고 타일러서 안정을 시키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따라서 면전에서 별군관을 신칙하여 그로 하여금 다른
곳으로 순행하게 하고 이곳 경내는 다만 앞으로의 일만을 보겠다는 뜻
으로 약속하였습니다. 본부는 해평(海平)과 접경지역에 있으므로 엄중히
경계하며 방어하지 않을 수 없으나 군수물자를 댈 방안이 전혀 없으니
갑오군정실기 8 119
는 실제로 쓸 만한 인물이어서 참모사(參謀士)로 임명하면 좋으리라 생
각합니다. 처분을 기다립니다.
제(題) : 타일러서 귀화시켰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정석규는 큰
공을 세우는 것을 기다린 뒤에 헤아려 볼 일이다.
법무아문에 공문22을 보냄
군무아문이 공문을 보냄
갑오군정실기 8 121
군무아문이 공문을 보냄
군무아문에 회신을 보냄
│12월 15일│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급히 보고함
갑오군정실기 8 123
서 일어난 비도의 소요를 가서 토벌하려고 합니다. 생각하건대 이곳 금성
(錦城) 땅은 요충지에 있어서 보장(保障)의 직임이 있습니다. 지난 4월에
무안(務安)의 비류27 5백 명이 본주(本州, 나주)의 서쪽을 침범하여 백성
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졌습니다. 이에 격분하여 즉시 아전과 군교(軍校)
들을 이끌며 영장(營將)과 협력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비류를 습격하여
30여 명을 붙잡았습니다. 그중에서 거괴 이여춘(李汝春)과 채중빈(蔡仲
斌)ㆍ나순후(羅順厚)는 진영(鎭營)으로 압송하고 효수하여 사람을 경
계시켰습니다. 그 나머지 안계현(安啓玄) 등 27놈은 읍에서 처결하였습
니다. 16일에 거괴 전봉준(全琫準)과 손화중(孫化中) 등 여러 놈은 고부
(古阜)에서 나와 함평(咸平)에 진을 치고 있다가 장차 본주로 오려고 하
였지만 우리가 준비된 것을 보고는 감히 경계를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6
월 17일에 그들 수천 명의 무리가 남평(南平)을 무너뜨려 점거하고 기필
코 우리를 침범하겠다는 형세가 분명히 있었지만 우리들이 이미 굳게 지
키고 있었기 때문에 저들이 과연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7월 5일
에 비괴 최경선(崔敬善)이 또 만여 명을 이끌고 불을 지르고 총을 쏘며
곧바로 서문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목사(牧使)와 우영장(右營將)이 직접
포(砲)와 돌을 무릅쓰고 군민(軍民)을 격려했으며 먼저 대포를 쏘고 계
속하여 총을 쏘고 돌을 던져 저 비도들 중에서 넘어져 죽은 자들을 모두
합하면 1백 명은 되었으며, 나머지 무리들은 도망가 흩어졌습니다. 또
10월에 손화중이 만여 명이나 되는 많은 수를 이끌고 광주를 빼앗아 점
거하고 본주[羅州]의 동북쪽으로 침략해 왔습니다. 따라서 퇴교(退校)
김창균(金蒼均), 호장 정태완(鄭台完), 전 첨사(僉使) 김성진(金聲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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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대로 무기를 빼앗고는 본주(本州)로 향하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16
일에 행군하여 정탐하였는데, 적의 세력이 마치 숲과 같아서 우리는 적고
저들 무리는 많았습니다. 총을 잘 쏘는 포군 백여 명을 장등(長嶝)에 매
복시켰으며, 그 밖에 의거(義擧)하며 나온 민병 1,500명이 응접하여 지
원하였습니다. 17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쯤에 적들은 아군의 수
가 적은 것을 엿보고 대포를 쏘며 불을 지르고 곧장 이후(二帿)로 들어
왔습니다. 포수 강춘삼(姜春三)이 먼저 쏜 대포 한 발의 소리에 세 갈래
길의 복병이 일시에 돌격하자 저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도망갔는데, 총
을 맞고 죽은 자는 65명이었고, 서로 짓밟히며 물에 떨어져 죽은 자의 수
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아군은 이어서 진을 치고 있다가 밤
에 백여 명의 포군을 보내 마구 포를 쏘며 적을 습격하여 21명을 죽였습
니다. 이에 적의 간담은 서늘해지고 아군의 사기는 더욱 떨쳐 일어났는데
뜻밖에도 북쪽에서 위급한 소식이 들려와서 명령을 내려 회군하기에 이르
렀습니다. 북쪽의 위급한 소식은 이른바 오권선(吳權善)과 오석규(吳錫
圭)가 비류 만여 명을 불러 모아 곧장 읍 부근의 이로면(伊老面)으로 쳐
들어와 성을 도륙하겠다고 공공연히 떠들면서 평민 10여 명을 쏘아 죽이
고 시골집 열수십 곳을 불태운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읍은 단
단히 지키면서 그들이 느슨한 틈을 엿보아 24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
후 1시)쯤에 또 포군 3백 명을 보내 세 갈래의 기병(奇兵)29으로 나누어 먼
저 오권선을 공격하고 또 포군 50명과 민병 7백여 명을 보내 응접하게 하
였습니다. 미시(未時, 오후 1~3시)쯤에 갑자기 쳐들어가 (적의) 주위를 포
위하고 불시에 포를 쏘니 적들 가운데 총을 맞고 즉사한 자가 353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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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포상의 은전은 정부의 처분을 기다려
라.
임금께 아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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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풀어 주었더니, 2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쯤에 저들 무리 1만여 명
이 각자 총과 창을 가지고 부안으로 돌입하였습니다. 방어사(防禦使)
와 (종친부의) 파견원이 하리(下吏) 김원섭(金元燮)의 집으로 잠시 피신
하였는데, 저들이 바로 동헌(東軒)에 올라와서는 (이내) 관사(官舍)와
각 건물에 불을 지르고 방어사와 종친부의 파견원을 구석구석 찾았습니
다. 마침내 붙잡혔는데 창으로 마구 찌르고 끝내 칼로 흉악한 짓을 저질
렀습니다. 그리고 이방과 좌수는 한꺼번에 잡혀 여러 차례 묶여서 형벌
을 받았습니다.’” 서산군수(瑞山郡守)는 지금 이미 부임하였기 때문에
전 군수(郡守) 박정기(朴錠基)가 죽은 근본 사유를 상세히 보고하도록
역시 관문으로 지시하였더니, 지금 받은 해당 군수 성하영(成夏永)의 보
고 내용에, “전임 군수 박정기가 부임한 지 겨우 1달 만에 교화를 널리 펴
서 경내에 동도가 거의 귀화하였습니다. 뜻밖에 10월 1일에 수천 명의 비
류가 함성을 지르고 사방에서 모여들자 군(郡)의 아전이 위급함을 보고
해서 피할 것을 청했으나 전임 군수는 태연한 안색으로 말하기를, ‘어려
움에 직면해서 구차하게 사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고 칼
1자루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이방(吏房) 유리(由吏) 송병훈(宋秉勳)
이 곁에서 호위하다가 적에게 먼저 죽고 전임 군수는 혼자 문루에 기대어
칼을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하여 죽은 흉도가 수 명이나 되었고 부상을
입은 자는 셀 수가 없었습니다. 적들이 두려워서 물러가려고 했으나 아!
저 좌수(座首) 유선일(柳善一)과 사령(使令) 이삼달(李三達)ㆍ정차복
(鄭次卜), 관노(官奴) 금돌(金乭)이라는 이름을 가진 놈이 함께 모의하
고 안에서 호응하여 수없이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연달아 총을 쏘아 1
발에 죽지 않자 2발을 쏘았으나 2발에도 죽지 않자 3발, 4발을 쏘아도
죽지 않고 낯빛이 변하지 않으며 입에서 꾸짖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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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군수 김병숙이 보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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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령 상리국,33 호서와 경기도의 부보상 도두목 및 각 임방34 등에 전령
을 보냄
군무아문이 공이를 보냄
군무아문에 회이를 보냄
좌선봉에서 보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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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전라병사의 공문 내용에, “이달 5일에 비류 1만여 명이 장흥에 모여
부사(府使)를 잡아 심하게 때려 머리를 다쳤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
직 알 수 없으며,35 공형(公兄)을 총살하고 남녀를 살해하여 흐르는 피
가 도랑을 이루었습니다. 또 좌측 연안에서 정탐한 자들에게 들으니 ‘각
처의 비류 수만 명이 장흥을 함락시킨 무리들과 합세하여 곧바로 본 병영
을 도륙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방어와 수비를 비록 엄히 단속한다고
는 하지만 병사들이 모두 민간의 장정인 데다가 중과부적임을 생각하면
성을 잃어버릴 재난이 눈앞에 닥쳐 있습니다. 속히 구원하는 방책을 꾀하
여 성이 유린당하는 재난을 면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병영과 역
에서 알리는 경계의 보고가 이처럼 급박하기 때문에 진시(辰時, 오전 7~9
시)쯤에 각 소대를 거느리고 나주를 향하여 출발하였으며, 여산에서 군대
를 위로하기 위하여 사용한 음식은 책자로 만들어 올립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병영에서 지원하러 간 이후의 상황을
계속 급히 보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