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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군정실기 8

甲午軍政實記 八
서산군수 성하영이 보고함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永)이 보고합니다. 이번에 서천과 한


산 등 두 읍에서 적을 격파한 뒤에 나머지 무리들이 곳곳에 숨어 있기 때
문에 여러 날을 순행(巡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군산(群山)의 경우는
비록 호남에 있기는 하지만 호서(湖西)에서 나루 하나만 건너면 도달하
는 지역입니다. 달아난 적이 군산진에 몰래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
기 때문에 지난달 29일에 서천에서부터 행진하여 한산을 거쳐 30일에 바
다를 건너 군산에 도착하였지만 적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이미 달아난 뒤
였습니다. 부대를 주둔하고 뒤쫓아 정탐해 보니 일개 진(鎭)의 아전과 백
성들이 대부분 사악한 데 물들어 비류와 한통속이 되어 무기를 빼앗았으
며, 공사로 내왕하는 배들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실은 곡물을 총을 쏘
며 빼앗아 창고에 쌓아 두고 출납할 때에는 도장을 찍는 것을 마치 관
청의 장부와 같이 하였습니다. (창고에) 쌓아 둔 쌀 602섬과 조(租) 80
섬, 콩 7섬은 군산진의 첨사(僉使) 최건수(崔健洙)가 있는 곳에 맡겨 두
었습니다. 좌수(座首) 문규선(文奎璇)은 오랫동안 동학에 물든 자로 곡
식을 맡은 박가(朴哥)와 자초(煮硝)를 담당한 최가(崔哥), 도포수(都
砲手) 문가(文哥) 등과 함께 붙잡아서 총살하였습니다. 그 후 전곡(錢
穀) 외 지출과 상하군기(上下軍器) 장부 및 미곡과 군수물자는 군산진
의 공형(公兄)에 맡겨 두었으며, 고음(侤音)14 2건은 선봉진으로 보냈습
니다. 당일 옥구현감(沃溝縣監) 김주호(金疇鎬)가 전(錢) 1백 냥ㆍ소 1
마리ㆍ담배 20묶음ㆍ짚신 20켤레ㆍ술 7동이를 가져와서 병정들에게 먹
였습니다. 이달 1일에 군수가 서천으로 회진하였는데 이곳에 사는 심경

14 고음(侤音):죄인이 죄상을 자백하고 사실과 틀림없음을 다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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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沈敬七)이 접주 나봉환(羅鳳煥)을 잡아 바쳤으므로 조사한 뒤에 총
살하였습니다. 심경칠은 혼자서 힘껏 거괴를 잡아 바쳤으니 참으로 가상
하여 얼마만큼의 전(錢)을 주어 그 노고에 보답하였습니다. 오늘 군대를
옮겨 서산으로 출발합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군산에서 승리를 거두어 기쁘고 다행이
다. 이후 (비도를) 소탕하는 방법을 각별히 더 강구하도록 하라.

소모관 전동석이 보고함

소모관 전동석(田東錫)이 보고합니다. 지난달 30일에 고산(高山)에 도


착하여 비류의 접주(接主) 최성호(崔成浩)를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시
켰습니다. 다음 날 진안(鎭安)에 도착하여 비류 수천 명과 단병(短兵)15
으로 접전을 벌여 접주 선윤석(宣允錫)과 접사(接司) 유상원(劉尙源),
교장(敎長) 고윤흥(高允興) 등 30여 명을 베어 죽였으며, 나머지 무리들
은 사방으로 달아났습니다. 획득한 물건은 조총 21자루ㆍ양총(洋銃) 1
자루ㆍ탄환 20여 개ㆍ병정 복색의 친자(親字) 혁대 각 몇 건ㆍ장창(長
槍) 15간(桿)ㆍ환도(環刀) 15자루ㆍ화약 80여 근ㆍ철환 5만여 개ㆍ화
승(火繩) 천여 타(朶)ㆍ위조 목인(木印) 5개ㆍ도서(圖署) 2개이며, 이중
위조인은 앞서 단단히 싸서 올려보냈습니다. 적도 놈들이 쌓아 놓은 미
(米) 70여 섬 중 30여 섬은 생활이 어려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40여 섬은 진안의 이방(吏房)에게 지급하여 고을의 폐단을 바로잡으라
고 하였습니다. 연산(連山)에서 획득한 화약ㆍ총알ㆍ총ㆍ칼 등과 진안
에서 획득한 군수물자들은 모두 소모군의 진중(陣中)으로 옮겨서 사용

15 단병(短兵):칼이나 창으로 하는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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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하였으니, 일본군과 물건을 나누라고 내린 전령은 환수하도록 하십
시오. 소모관은 남원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제(題) : 처음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참으로 가상하다. 군수물자
를 이미 마련하였다니 또한 다행한 일이다. 군대가 행진할 때 백성들을
편안히 머물러 살게 하는 일이 오늘날 제일 시급한 일이다.

소모관 이장규가 보고함

소모관 이장규(李章珪)가 보고합니다. 의용군을 모아 각별히 정탐하여


비괴(匪魁) 호우도집(湖右都執) 권치우(權致佑)와 목천(木川)의 접사
(接司) 황하원(黃河源) 2놈을 붙잡아 이달 4일에 군사와 백성들을 크게
모아 놓고 총살하여 사람들에게 경계로 삼았습니다. 나머지 30여 명의
비도들은 상세하게 조사하고 엄중히 징계한 뒤에 귀화하여 편안히 모여
살게 하였습니다. 그중 안용희(安龍僖)는 거괴(巨魁) 교선(敎善)의 아
들이므로 마음대로 (죄의) 경중을 따질 수 없어서 일단 감옥에 가두었습
니다. 획득한 군수물자는 총 20자루와 창 60자루입니다. 지난 10월 26
일에 신례원(新禮院)에서 비도들과 접전을 벌일 때 소모관은 유회장(儒
會長)으로 향용(鄕勇) 1소대를 거느리고 홍주(洪州)의 후원병으로 적과
서로 싸웠지만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들을 상대하지 못하여 유학 홍경후
(洪敬厚) 등 3명과 한량 유춘근(兪春根) 등 9명이 의롭게 싸우다가 모
두 죽었으니, 그들의 충성이 가상하며 그 정성이 안타깝습니다. 특별히
포상을 베풀어 주십시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홍경후ㆍ유춘근 등 12명이 전사하였
다고 하는데, 사실을 조사한 뒤에 책으로 엮어 보고하라. 안용희는 일단
엄중히 감옥에 가두어라. 초토사(招討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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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현감 남계술이 보고함

양성현감(陽城縣監) 남계술(南啓述)이 보고합니다. 본읍에서 강제로


동도에 들어간 사람들을 한번 잘 타일러서 동학을 배반한 뒤로 온 경내
가 편안해졌으며 대부분 귀화하였습니다. 만일 이전에 지은 죄 때문에 잡
아들인다면 집마다 한 무리가 될 만큼 넘쳐나서 사람들을 이루 다 벨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뢰배들이 혹은 의병이라 칭하고 혹은 부상(負
商)이라 칭하면서 마구 침범하는 폐단이 종종 일어나기 때문에 귀화한
백성들이 공연히 놀라서 모두 의구심을 품고 있으니, 관(官)의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송구스럽고 괴롭습니다. 이에 우러러 보고하오니 침범하지
말라고 특별히 제사(題辭)를 내려 주셔서 후일의 폐단을 끊도록 하여 주
십시오.
제(題) : 이미 전에 말을 만들어 감영(監營)에서 관문(關文)을 내어주
었으니 반드시 이를 알려 주고, 보고한 대로 엄한 말로 전령을 내려보내
니 더욱 각별히 금지시켜라. 만일 이를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우선 잡
아들여 감옥에 가두고 보고를 올려라.

경상감사 조병호가 도착한 공문을 보고함

경상감사 조병호(趙秉鎬)가 공문이 도착한 일에 대해 살펴보는 일입니


다. “소모사 정의묵(鄭宜默)은 그가 가는 곳과 협의하여 토벌하도록 하
라. 지금 이 시기에 이러한 임무는 가벼운 것이 아니니 각별히 조심하도
록 경계하여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라.”라는 내용의 관문이 도착하였습
니다.
제(題) : 비도의 소요가 조금 멈추었으니 여러 고을을 나누어 순찰하
고, 다시 창궐하는 일이 없지 않으니 일단 본 경내에 머무르라는 뜻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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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령을 보냈다.

인천의 감리에 관을 보냄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전석규(田錫圭)가 태인(泰仁)에서 올라와서 인천항


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비밀리에 그를 탐문하여 붙잡아서 감옥에 가둔
뒤에 그 형편을 보고하여 올리도록 하라.

│12월 11일│
출정한 장령 및 청주의 병영에서 출정한 장령에게 전령함

본영(本營)의 참모관 이희정(李喜楨)을 청산(靑山)과 영동(永同) 지역


으로 내려보내니, 비괴를 붙잡을 때 같이 협의하도록 하며, 만일 잡고 나
서 본진(本陣)으로 잡아오거든 각별히 단속하여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
라.

양성현감 남계술에게 전령함

소요를 겪은 뒤의 민심을 어루만져 안정시키고 살 곳을 마련해 주는 것이


현재 가장 먼저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다. 지금 소모군과 의병이라 칭하
는가 하면 혹은 부상(負商)과 진(鎭)의 교졸에게 부탁하여 비류를 체포
한다고 핑계대면서, 오히려 귀화하여 안정을 취한 백성들을 함부로 침범
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미 해당 도의 감영에게 각별한 언사로 신칙
을 하였다. 이제 또다시 전령을 내려 누구를 막론하고 만일 이 같은 폐단
을 일으킨다면 하나하나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그 이름을 가리켜서 급
히 보고를 올려라. 어떻게 하든 잘 타일러서 이들 백성으로 하여금 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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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도록 힘쓰게 하라.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뢰기를, “출진한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永)이 이달 12월 2일에


올린 보고 내용에, ‘서천에서 적을 격파한 뒤에 호남의 군산진(群山鎭)으
로 나아갔는데, 앞서 모인 비류들이 낌새를 채고 이미 달아났고, 일개 진
(鎭)의 아전과 백성들이 대부분 사악한 데 물들어 무기와 공사로 내왕하
는 배에 실린 곡물을 빼앗았으며, 출납할 때에는 도장을 찍는 것을 마치
관청의 장부와 같이 하였습니다. 좌수(座首) 문규선(文奎璇)과 곡식을
맡은 자와 염자초를 담당한 자와 도포수(都砲手) 등 4놈이 거괴(巨魁)
여서 모두 (붙잡아서) 총살하였습니다. 쌀 602섬과 조(租) 80섬, 콩 7섬
은 군산진의 첨사(僉使) 최건수(崔健洙)가 있는 곳에 맡겨 두었습니다.
화약과 탄환 및 깃발들도 또한 많이 빼앗았습니다. 옥구현감(沃溝縣監)
김주호(金疇鎬)가 엽전 1백 냥, 소 1마리, 술과 담배 등의 물건을 가지고
직접 찾아와서 병정들에게 먹였습니다. 서천으로 회진하는 길에 이곳에
사는 군민 심경칠(沈敬七)이 접주 나봉환(羅鳳煥)을 잡아 바쳤으므로
엄히 조사한 뒤에 총살하였습니다. 당일로 서산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
고 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선봉이 보고함

선봉(先鋒)이 보고합니다. 각 소대를 거느리고 일본 군대와 함께 장성읍


(長城邑)에 주둔하였으며 아무런 사고 없이 유숙하였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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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이 보고함

선봉이 보고합니다. 11월 30일에 천원역(川原驛)에서 유숙한 사유는 이


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이달 1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쯤에 각 소대와
일본 군사를 거느리고 비를 무릅쓴 채 출발하였는데, 비와 눈이 번갈아
내리면서 병졸들이 그대로 (눈비를) 맞았습니다. 유시(酉時, 오후 5~7시)
쯤에 장성에 도착하여 아무런 사고 없이 유숙하였습니다. 미시(未時, 오
후 1~3시)쯤에 일본군 대위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가 대관(隊官) 신
창희(申昌熙)ㆍ오창성(吳昌成), 별군관 이지효(李志孝)ㆍ황범수(黃凡
秀)ㆍ이주서(李周瑞), 교장(敎長) 박상길(朴相吉)ㆍ황수옥(黃水玉) 등
과 아군 및 일본 군사를 거느리고 담양의 비류를 소탕하기 위하여 출발
하였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선봉이 보고함

선봉이 보고합니다. 지금 도착한 장위영(壯衛營)의 대관 윤희영(尹喜永)


등의 보고 내용에, “지난달 26일에 영관(領官) 이두황(李斗璜)의 명령으
로 지휘하여 대관 윤희영ㆍ이규식(李圭植), 교장 오순영(吳順永)ㆍ장
세복(張世福)ㆍ양기영(梁基英)ㆍ이경진(李景振)ㆍ홍선경(洪善敬) 등
과 병사 230명, 일본 군사 40명이 완영(完營, 전라감영)에서 출발하여 금
구(金溝)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 날 행군하여 태인(泰仁)에 도착하였
더니, 동괴(東魁) 전봉준(全琫準)과 김문행(金文行)ㆍ유공만(劉公萬)
ㆍ문행민(文行敏) 등 4놈의 접주(接主)가 8천여 명을 거느리고 그곳 읍
의 성황산(城隍山)ㆍ한가산(閑加山)ㆍ도리산(道理山)에 진을 치고 모
여 있었습니다. 세 곳이라고는 하지만 봉우리가 아홉 개나 되었으며,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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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진(陣)의 형세가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적들은) 천보총(千步銃)을 계
속 발사하였으며, 깃발을 휘두르고 나팔을 크게 불며 그 기세가 대단하
였습니다. 적이 주둔한 곳은 모두 높은 산으로 지세가 험준한 곳이었으
며, 우리 군사는 평야의 낮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대관 윤희영과
교장 이경진ㆍ홍선경과 병사 90명이 일본 군사 20명과 함께 산의 서쪽
에서 공격하였으며, 대관 이규식, 교장 오순영ㆍ장세복ㆍ양기영과 병사
140명 및 일본 군사 20명은 산의 동쪽에서 공격하기 위하여 길을 나누어
양쪽에서 일제히 물밀듯이 올라갔는데, 적의 탄환이 비 오듯이 끊이지 않
고 아래로 날아왔습니다. 혹은 밭이랑에 기대어 총을 쏘기도 하고 혹은
들판에 엎드려 쏘기도 하면서, 대열의 선두와 후미가 서로 호응하며 앞을
향해 계속 진격하였습니다. 군사들이 함께 힘껏 함성을 지르며 산에 올
라 신속하게 공격하자, 적도는 두려워하고 겁을 먹은 채 깃발을 흔들어
머리와 꼬리가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적이 주둔했던 산을 빼앗아
건너편 봉우리를 바라다보니, 앞과 뒤의 산에 있던 적들이 성황산에 모두
모여서 계속하여 회룡총을 발사하고 나팔을 크게 불고는 그대로 산을
내려와 군대를 모으고 다시 네 갈래로 길을 나누어 성황산으로 급박하게
올라가면서 계속하여 총을 쏘았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습니다. 적
은 방비를 할 수가 없게 되자 각자 달아났습니다. 따라서 (아군은) 길을
나누어 동서로 20리가 되는 지경까지 쫓아가서 각기 생포한 자들이 50
여 명이었으며, 총에 맞아 죽은 자들은 40여 명이었습니다. 빼앗은 물건
은 회룡총 15자루ㆍ조총 2백여 자루, 화약과 탄환 및 창죽(槍竹)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안장을 갖춘 말은 6필이었습니다.
때는 이미 술시(戌時, 오후 7~9시)가 지날 무렵이어서 즉시 군사를 모아
점검해 보니 우리 병사들과 일본 병사들 모두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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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그래서 엄히 경계를 서면서 읍에서 유숙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
다. 이번 싸움에 승리한 소식은 지체해서는 안 되기에 베껴 써서 먼저 보
고를 올리며, 책자는 담당 영관(領官)이 보고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수정
하여 올릴 계획입니다.
제(題) : 이렇게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 감탄
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이후 군대의 행진 상황에 대해서는 계속하여
빨리 보고하라.

전 경리청 참령관 구상조가 보고함

전 경리청(經理廳) 참령관(參領官) 구상조(具相祖)가 보고합니다. 이달


2일에 순무영(巡撫營)의 영지(令旨)로 좌선봉(左先鋒)의 통제를 지시받
았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전 경리청 참령관 구상조가 보고함

전 경리청 참령관 구상조가 보고합니다. 지난달 29일에 금영(錦營)의 지


휘로, 대관 김명환(金命煥)으로 하여금 병사 반 소대와 참모관 이윤철
(李潤徹), 교장 고진룡(高振龍), 금영의 군관 장윤국(張允國) 등과 함께
연산(連山)으로 출진하여 적을 소탕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관동포
(官洞包)의 수접주(首接主) 정판손(鄭判孫), 그곳의 접주 김현귀(金鉉
龜), 노성(魯城)의 대명포(大明包) 접주 박만은(朴萬殷), 그리고 전봉준
(全琫準)의 수하에 있는 이른바 오영도순찰(五營都廵察)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현우(李鉉右) 등 네 명은 큰 거리에서 즉시 총살하였으며,
그 나머지 김춘실(金春實), 도정택(都正澤) 등 14명은 대부분 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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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였으므로 타이르고 풀어 주었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이후의 상황을 계속하여 급히 보고하
라.

교도 중대장 이진호가 보고함

교도 중대장 이진호가 보고합니다. 이달 18일에 고산(高山)에 도착하여


저 비도들과 접전을 벌인 일은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22일에는 삼
례역(參禮驛)으로 행군하여 장위영(壯衛營)과 합병하였으며, 장차 오늘
과 내일 사이에 각 진영에서 와서 합세하기를 기다렸다가 전주(全州)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문의(文義)에 있을 때 보고를 올려 그 제사(題辭)를
받고 온 병사가 진산(珍山)에 도착하여 수천 명의 적과 마주쳐서 몸에
중상을 입고 겨우 목숨만을 건졌으므로 막중한 제사를 빼앗길 형편에 이
르렀다고 합니다. 저 비류들의 소요가 갈수록 더 흉악해지고 있으니 기
필코 토벌해야 하는데 참으로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전에 보낸 제사는 베껴서 점련(粘連)하
여 문서에 붙여 내려보냈다. 이후의 행군은 계속 빨리 보고하고 부상을
당한 병사가 무탈한지도 보고해 올려라.

충청감사 박제순이 베껴서 보고함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이 베껴서 보고합니다. 서산군수(瑞山郡守) 성


하영(成夏永)이 군사를 거느리고 한산(韓山)에 주둔한 연유는 이미 급
히 보고하였습니다. 지금 접수한 그곳 군수의 보고 내용에, “한산에 사는
최기현(崔奇賢)이 호남의 비류와 한통속이 되어 자칭 운량관(運粮官)이
라고 하면서 세곡(稅穀)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동민들에게 분할 납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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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하면서 마음대로 결박하고 때렸습니다. 수성장(守城將) 김련(金鍊)
이 최가 놈을 잡아왔을 때 이미 죽은 유리(由吏)16 나종인(羅鍾寅)의 아
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그 자리에서 때려죽였으며, 최가 놈의 집
에 보관해 두었던 소금 343섬은 화재를 당한 백성들에 나누어 지급하
여 집을 다시 짓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지난달 29일에 바다를
건너 군산(群山)에 도착하였는데 비류들이 낌새를 채고 달아나 일개 진
(鎭)의 아전과 백성들이 모두 한통속이 되어 비괴(匪魁)가 빼앗아 취한
병기와 내왕하는 배에 실은 곡식을 창고에 쌓아 두고 출납할 때에는 도
장을 찍는 것을 마치 관청의 장부와 같이 하였습니다. (창고에) 쌓아 둔
쌀 602섬과 조(租) 80섬ㆍ콩 7섬은 모두 군산진의 첨사(僉使) 최건수
(崔健洙)가 있는 곳에 맡겨 두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동학에 물든 좌수
(座首) 문규선(文奎璇)과 자초를 담당한 최가(崔哥), 도포수(都砲手)
문가(文哥), 곡식을 맡은 박가(朴哥) 등을 붙잡아서 총살하였습니다.
뒤에 부임하기 위하여 서산군(瑞山郡)으로 갔는데, 한산의 수성장(守城
將) 김련(金鍊)과 서천의 수성장 나현구(羅鉉九), 홍산의 수성장 최학래
(崔鶴來) 등이 각각 휘하의 군사와 부보상(負褓袱商)을 데리고 비류를
쫓아 체포할 때 적의 형세를 정탐하여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라고 하였
습니다. 그들을 격려하여 칭찬하는 포상이 있어야 합당할 듯합니다. 조
정에 아뢰어 처리하여 주시기 바라며 급히 아룁니다.
제(題) : (등보가) 도착했다.

16 유리(由吏):해유(解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아전. 곧 고을의 이방 아전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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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
안성군수 홍운섭이 보고함

안성군수(安城郡守) 홍운섭(洪運燮)이 보고합니다. 행진할 때 길가의


백성들이 간혹 술과 먹을 것을 군사들에게 가져와서 위로하기에 이를 책
으로 엮어 보고합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안성군수 홍운섭이 보고함

안성군수 홍운섭이 보고합니다. 군수가 임지로 돌아갈 때 길가의 백성들


이 동도 중에서 소요를 일으켜 백성들에게 해를 가한 사람들을 잡아내어
군대 앞에서 기다리면서 이들을 조사하여 처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
니다. 따라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널리 조사하여 징계하고 풀어 줄 것
인지를 헤아렸는데, 사람들이 모두 죽여도 좋다고 말하였습니다. 법적으
로 사면하기 어려운 자들은 홍공칠(洪公七) 등 5놈으로 즉시 총살하였
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경기감사에게 관문을 보냄

상고합니다. 적의 괴수(敵魁) 김개남(金介男)의 목을 전라감영에서 지정


한 장교가 가져왔으므로 조리를 돌리기 전에 잠시 고마청(雇馬廳)에 두
어 엄중히 지켜야 합니다.

강화의 병방 황헌주가 보고함

강화(江華)의 병방(兵房) 황헌주(黃憲周)가 보고합니다. 병방이 병사 2

96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백 명을 거느리고 위무사(慰撫使)를 호위하면서 이달 29일 신시(申時,
오후 3~5시)쯤에 완영(完營, 전주감영)에 도착하여 머물러 방어하였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이후 일의 형편을 계속 빨리 보고하라.

충청감사 박제순이 베껴서 보고함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이 베껴서 보고합니다. 지금 접수한 금정찰방


(金井察訪) 피병간(皮秉侃)의 보고 내용에, “10월 28일에 비류 수천 명
이 본역(本驛)으로 갑자기 들이닥쳐서 사람을 보는 대로 죽여 25명이 살
해되었으며, 빼앗긴 환미(還米)는 11섬 6말입니다. 각 역마다 쑤시고 다
니면서 보는 대로 빼앗은 말이 모두 합해 53필이었다고 하니, (곳간에)
쌀도 텅 비고, (마구간에) 말도 텅 비어 버려서 참으로 걱정이 됩니다.”라
고 하였으며, 바로 이웃에 있는 연산현감을 겸하고 있는 진잠현감(鎭岑
縣監) 이세경(李世卿)의 보고 내용에, “연산의 관동(官洞)에 사는 백성
들은 본래 패악한 부류들로서 크게 포(包)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지금
경리진(經理陣)에서 그 괴수 정판손(鄭判孫)을 잡아 죽이고, 또 진잠에
서 전봉준의 수하인 오영도찰(五營都察) 이현석(李鉉錫)과 접주(接主)
김현귀(金鉉龜) 및 노성접주(魯城接主) 박만은(朴萬殷) 등을 붙잡아
총살하였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급히 아룁니다.
제(題) : (등보가) 도착했다.

홍주목사 이승우가 베껴서 보고함

홍주목사(洪州牧使) 이승우(李勝宇)가 베껴서 보고합니다. 이달 13일


술시(戌時, 오후 7~9시)쯤에 도착한 남포(藍浦)의 현지 출신 토중군(土中
軍) 이종태(李鍾泰)의 보고 내용에, “여러 고을의 동도가 호남의 비류와

갑오군정실기 8 97
결탁하여 수천 명이 지금 12일에 한산에 쳐들어와 인가를 불태우고 감옥
에 갇힌 동도를 내보내어 멀리 달아날 염려가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
다. 이에 14일에 신의 병영에 있는 군사를 동원하여 대동한 군관 정기황
(鄭基璜)과 이석범(李錫範)으로 하여금 이들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
게 하였으며, 또한 수영(水營)ㆍ보령(保寧)ㆍ남포ㆍ비인(庇仁) 등의 병
사를 계속 동원하여 모두 5천여 명이 17일에 서천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멀리 바라다보니, 적도들이 10리쯤 떨어진 한산(韓山)의 금당산(金塘
山) 위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적의 세력을 헤아려 보니 위쪽으로는 공
격할 수가 없어서 산에서 내려오도록 꾀어내기 위하여 19일에 금당산 아
래로 바짝 진격하여 적과 접전을 벌여 수십 명을 총을 쏘아 죽이고는 돌
아서서 거짓으로 패하여 물러났습니다. 적이 과연 산에서 내려와 삼수동
(三水洞)에 진을 쳤기 때문에 전투를 벌여 승리를 할 만하기에 홍산(鴻
山)에 머물고 있는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永)과 비밀히 약속
을 하여 장차 그와 함께 안팎에서 협공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에 이르러 서천의 아전들이 아직 다 귀화하지 않고 군수를 거짓으로 꾀
어 접경지역까지 가로막고 완고하게 회군할 것을 요구하면서 “적들이 한
산에 있으니 반드시 서천에서 행진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했다고 합니
다. 적이 비록 한산의 경계에 있지만 서천읍에서 가까운데도 그들이 말하
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마침내는 성안에 있는 이른바 수백 명의 방수
군(防守軍)이 합세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도리어 다른 문으로 나가
서 안산(案山, 남쪽 산)에 진을 치고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여러 군사들이
의심을 하고 공격을 하려고 하자 서산군수가 다른 뜻이 없다고 힘써 말
하고는 즉시 밖에서 호응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군사들에
게 먹을 것을 보냈지만 촌민들이 마련한 대광주리의 밥을 겨우 먹었을 뿐

98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이어서 노숙을 하며 고생을 한 병졸들은 배고픔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였
습니다. 하리(下吏) 나운경(羅雲景)과 유한표(劉漢杓)가 즉시 지목하
여 떠들어 대기를, “비괴가 겉으로는 귀화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흉악
한 속셈을 갖고 마침내는 군량을 적진으로 실어 나르기에 이르렀다.”라
고 하였으며, 또 한 가지 말을 꺼내어 군사를 선동하기를, “지금 기다리
고 있는 경군(京軍)은 완주의 비류 전봉준이 경병의 복색으로 분장시킨
것으로 (우리를) 습격해 올 예정이다.”라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
고 두려워하여 각 진영에서 모인 장병들이 흩어질 염려가 있었습니다. 말
의 뿌리를 수소문하여 보니 서산군의 아전에게서 나왔지만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나가(羅哥) 놈의 입이었습니다. 군정(軍情)은 안정시키기가 어
렵고 또한 어느 때 뜻밖의 위기가 놓여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비인(庇仁)으로 부대를 옮기기 전에 서산의 군사가 한산을 경유하
여 온 것을 탐색하여 호응하려고 하였더니 곧바로 서천의 당산(堂山)으
로 진군해 왔습니다. 적도는 이미 서천성에 들어가 민가를 불태우고 관
고(官庫)에 있는 화약을 다투어 나누어 관아에 불을 질렀습니다. 적들도
불에 타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노략질을 하고 나가다가 갑자기
길산교(吉山橋)에서 서산의 군사와 맞닥뜨려 한 부대를 수없이 죽였고,
적의 무리도 총을 맞아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나머지 무리
들은 무너져 흩어졌는데 각 영읍(營邑)의 군사들이 흩어져 도망간 자들
을 생포한 수가 30명입니다. 26일에 와서야 비로소 회군하였습니다. 또
한 각 읍의 유회소에서 잡아온 나머지 무리들이 13놈이었기 때문에 취조
를 한 뒤에 참작하여 처리할 계획입니다. 이번에 승리를 거둔 것은 전적으
로 서산의 군사들이 때맞추어 지원하러 달려와 주었기 때문이니 왕의 교
화가 미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서천이라고 하는 읍은 호남과는 한 가

갑오군정실기 8 99
닥 강물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서 비류들이 가득한 것이 (다른) 여러
읍들보다도 더욱 심하여, 여전히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있지만 감
히 겉으로는 드러내서 교화를 거스르지 못할 뿐, 이처럼 속으로는 다른
의도를 지니며 숨기고 있습니다. 새로 부임하는 관리가 흉악한 술책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엄중하게 조사하여 자백을 받아내지 않으면 안됩니
다. 따라서 압송해 온 아전과 향임들로부터 공초를 받아내려고 합니다.
서천군수 유기남(柳冀南)은 부임한 이후부터 비도들이 경계를 침범한 일
과 관군이 성에 들어간 일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한 번도 보고를 한 일이
없으며, 회군한 지 이틀째 되는 날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보고서를 한
장 바쳤을 뿐입니다. 보낸 그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모두 날조된 것들입
니다. 관군이 돌아가 군율을 어기고 변란을 일으켜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했는가 하면, 심지어는 홍주(洪州)의 군사들은 만번을 죽여도 오히려 가
볍다는 따위의 말이 있으니 해괴하고 도리에 어긋나지 않음이 없으며, 참
으로 난잡하여 일일이 들어 말씀을 올릴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무릇 이
보고도 또한 아전들 중에서 몰래 적들과 내응한 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니
이제 일이 진정된 뒤에 벗어날 계책을 실행하고자 한다면 사체를 돌아보
지 마십시오. 이 같은 망녕된 행위가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장리배(將吏
輩)들의 시기와 의심에 불과한 것이니, 그 더러운 병이 얽히고 엉켜서 뻗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신의 병영에서 규합한 무리들은 모두가 무예를 익히
지 않고 훈련을 하지 않은 장병들입니다. 그동안에 공격과 수비를 잘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요행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스
스로 통제의 권한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번에 행군할 때에 실수가 있었는
데도 스스로 반성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병사를 내어 적을 토벌
한 조치를 가리켜서, ‘변란을 일으켜 나라를 그릇되게 하였으니 만번 죽

100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어도 가볍다.’고 곧장 몰아붙이는 식으로 보고를 한단 말입니까. 어찌 그
처럼 사리에 어긋날 수 있습니까? 신이 생각하건대 만일 군(軍)에 기강과
기율과 위엄이 있고 또 긍지가 있다고 한다면, 다른 능멸과 핍박을 받아
체통이 손상된다고 한들 이처럼 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도 신의 죄이며
둘도 신의 죄이니, 황공하여 처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천군은 속으로
복종하지 않고 교화되지 않았으며, 서천군을 지키는 병졸들도 어리석어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어서 후환이 될 것 같아 참으로 번민을 하고 있
습니다. 이에 급히 아룁니다.
제(題) : 보고를 들으니 참으로 놀랍고 해괴한 일이다. 이 일은 철저하
고 엄중하게 조사하지 않을 수 없다. 참작하여 처리한 뒤에 일의 형편을
소상하게 급히 보고하라.

온양군수 서만보가 보고함

온양군수(溫陽郡守) 서만보(徐晩輔)가 보고합니다. 방금 도착한 양호


도순무사의 전령 내용에, “온양군에서 원납전[願助葉錢] 5백 냥을 단자
를 갖추어 순무영에 보냈는데, 지금 들으니 본영에서 복정(卜定)17하여
통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영에서는 처음부터 이 같은 논의
를 한 일이 없으니, 이는 반드시 간사한 무리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렸
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엽전 5백 냥은 즉시 다시 내려보내고,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하여 그동안 지휘한 자가 누구인지 철저하고 엄중히
조사하여 감옥에 가두고 이후 그 이름을 지목하여 빨리 보고하고 엄중히

17 복정(卜定):공물 이외에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상급 관청에서 결정하여 하급 관청으


로 하여금 각 지방의 토산물을 강제로 납입하게 하던 일.

갑오군정실기 8 101
징계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군수는 이미 걱정을 나누는 처지에서 만분
의 일이라도 돕는 것이 마땅하므로 비록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진실로 작
은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어떻게 통지하여 강제로 따르게 하였겠습니까?
과연 복정을 통지한 일이 아니므로 위의 원납전 5백 냥은 다시 올려보냅
니다.
제(題) :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일이 없다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본
읍의 일이 힘을 쓸 일이 많고 궁핍하므로, 원래의 돈은 다시 내려보내어
본군에 보탬이 되게 하라.

음죽현감 김종원이 보고함

음죽현감(陰竹縣監) 김종원(金鍾遠)이 보고합니다. 지금 도착한 순영


(巡營)의 관문 내용에, “동도의 거괴 이기영(李基榮)과 윤치기(尹致基)
등 2놈을 정부에 낱낱이 보고하였다. 이에 대한 회제(回題)에, ‘이기영은
비괴라는 점을 이미 자백하였으니 군민(軍民)을 크게 모아 효수하여 사
람들을 경계시켜라. 윤치기는 진실로 그 아들이 저지른 죄가 없으니 어찌
뇌물을 주었을 리가 있겠는가? 우선 엄하게 형을 한 차례 가한 뒤에 1차
로 직초(直招)를 받아내어 보고를 올리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이기영은 이달 3일에 군민을 크게 모아 놓고 효수하여 사람들
을 경계시켰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음죽현감 김종원이 보고함

음죽현감 김종원이 보고합니다. 본현의 동도 접주(接主) 이의재(李義


載)와 이한갑(李汗甲) 및 충주에 사는 윤희경(尹羲敬) 등이 폐단을 일으

102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킨 연유는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지금 도착한 회제(回題)의 내용에, “이
의재ㆍ이한갑ㆍ윤희경 등이 집에 돌아간 것을 비밀히 정탐하여 체포한
뒤에 엄히 형벌을 가하고 직초를 받아내 보고를 올리고, 나머지 돈은 관
고(官庫)에 유치하고 시상(施賞)을 기다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위 이의
재 등 3놈은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잡지 못하고 있으며,
나머지 돈 1,150냥은 관고에 유치하였습니다.
제(題) : 그놈들이 집에 돌아올 것을 기다렸다가 잡은 뒤에 보고를 올
려라.

음죽현감 김종원이 보고함

음죽현감 김종원이 보고합니다. 본현의 비괴 박용구(朴容九), 임성질(林


聖質), 안재영(安在泳), 안경무(安敬武) 등의 죄상은 이미 보고하였습니
다. 지금 도착한 회제(回題)의 내용에, “박용구와 임성질은 정탐하여 붙
잡아서 직초를 받아내어 보고하고, 안재영과 안경무는 엄중히 문초하여
보고하고 우선 감옥에 가두어라.”라고 하였습니다. 박과 임 2놈은 안팎
으로 호응하고 가세하면서 비류들을 선동하였고 안재영과 함께 이미 보
은(報恩)에 갔습니다. 그들이 집에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반드시
그들을 정탐하여 붙잡아 감옥에 가둘 계획입니다. 안경무는 징치(懲治)
한 뒤 풀어 주었으며, 풀려난 뒤에 스스로 자신의 죄를 알고 멀리 달아나
버려 간 곳을 알 수 없습니다. 사방으로 다수의 인원을 보내 수색하도록
하겠습니다.
제(題) : 그들이 집에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붙잡아 감옥에 가둔
뒤에 보고하라.

갑오군정실기 8 103
음죽현감 김종원이 보고함

음죽현감 김종원이 보고합니다. 본현의 동도로 귀화한 부류들은 일일이


깨우쳐서 편안히 살고 있다는 것을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무극면
(無極面)에 사는 진사연(陳士連)은 처음에 강제로 동도에 들어갔다가
동학도를 배반하였습니다. 다만 지난달 27일에 소모관 목천현감(木川
縣監)이 충주에 주둔하였을 때 대포군(大砲軍) 수십 명을 파견하여 진
가 놈을 잡아 즉시 총살하였으며, 가산을 수색하여 얻고서는 그 고을 사
람들을 위협하여 그 부대로 수송하도록 하였습니다. 동쪽에서 붙잡고 서
쪽에서 체포하여 도처에서 적몰(籍沒)하였고, 공형(公兄)과 수교(首校)
들도 붙잡았다가 이제야 겨우 다시 풀어 주었습니다. 온 경내의 귀화한
백성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달아나 숨어 버리고는 다시 소요를 일으킬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목동(鳥木洞)의 박용구와 이경일(李敬一)은
곧 비류의 거괴로, 흥록동(興彔洞)도 조목동의 부근에 있습니다. 비류
의 가솔들이 울부짖으며 온 땅에 가득하였는데 그 정상이 매우 애처로웠
습니다. 따라서 갖고 있던 조포(租包) 중에서 29섬을 호구의 많고 적음
을 계산하여 한 명당 7말씩 약간을 나누어 지급하였으며, 나머지 조 35
섬은 각 항목의 공전(公錢)으로 충당하기 위하여 주두촌(舟頭村)의 삼
소임(三所任)18에게 맡겨 두었습니다. 각 지역에 있는 진졸(鎭卒)의 무리
들과 소모관의 포군이 번갈아 가며 출몰하여 갖은 폐단을 자아내고 있
는데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가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내의 각 동네
에 있는 무뢰배들이 허다하게 소요를 일으키고 있어서 이로 인하여 (소요

18 삼소임(三所任):마을의 일을 보는 동장ㆍ집강ㆍ통장(統長) 등을 말함. 이들은 관


의 지시를 전달하고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기도 하고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104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가) 더욱더 심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읍
의 형편이 말이 아니어서 가난하고 지친 백성들이 생활을 유지해 나가기
가 참으로 어려울 듯합니다. 이에 그 연유를 보고합니다. 피폐한 읍의 형
편을 헤아려서 즉시 특별한 조처를 내려 뒷날의 폐단을 막아 주시기 바랍
니다.
제(題) : 폐단을 일으키는 무뢰배들은 현장에서 발각되는 대로 붙잡아
감옥에 가둔 뒤에 보고하고, 비괴로서 도망간 자들은 일일이 정탐하여
모두 엄중하게 조사하고 감옥에 가둔 뒤에 서둘러 보고하라.

강릉부사 이회원이 보고함

강릉부사(江陵府使) 이회원(李會源)이 보고합니다. 지난달 29일에 도


착한 전령의 내용에, “소모사로 계하(啓下)19하였으니 직임을 살피라.”라
고 하였습니다. 본 관부의 영서(嶺西) 6면은 (읍과의 거리가) 수백 리나
떨어져 있으며,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패악한 부류들이 동도와
결탁하여 창고에 불을 지르고 사람의 목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난달 22일에 군정(軍丁)을 동원하여 본부의 중군(中軍) 출신(出身)
이진석(李震錫)과 전 감찰 이영찬(李永燦), 사인(士人) 박동의(朴東儀)
에게 이들을 거느리고 봉평면(蓬坪面)의 비도들을 토벌하도록 하였습
니다. 그 면에 사는 강위서(姜渭瑞)가 비도의 소요 행위에 격분하고 백
성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동네의
군사로 하여금 비괴 윤태열(尹泰烈), 정창호(丁昌浩) 등 13놈을 잡아

19 계하(啓下):임금의 재가를 받는 것을 말함. 계품한 문서에 재가의 표시로 계자인


(啓字印)을 찍어 내려보낸다.

갑오군정실기 8 105
들이도록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총살하고 한편으로는 효수를 한 뒤
에 강위서를 대장(隊長)으로 차출해서 군정(軍丁)을 거느려 비도를 토
벌하고 각별히 방어하도록 더욱 엄중하게 타일렀습니다. 박동의를 소모
종사관으로 차출하고, 그 다음 날에 이진석은 정선군(旌善郡) 여량(餘
粮)으로 방향을 바꾸어 가서 비도와 접전을 벌여 접사(接司) 이중집(李
仲集) 등 14놈을 쏘아 죽였습니다. 이달 6일에 올린 강위서의 보고 내용
에, “동도의 거괴 차기석(車箕錫)이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봉평(蓬坪) 내
면(內面)과 영서(嶺西)의 여러 읍에 출몰하여 사람들을 살해하고 창고
와 민가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박동의
에게 병사들을 거느리고 바로 내면으로 가게 하고, 이어서 다시 양양(襄
陽)의 관부에 관문을 보내어 병정을 모집하였습니다. 양양 관아의 사인
(士人) 이석범(李錫範)은 진신(縉紳)의 후예로서 분연히 이미 의병을 모
집하여 이끌고 경내의 비도를 토벌하였으며, 소모사의 명령을 듣고 바로
같은 마을의 사인인 최주하(崔舟河)ㆍ김준수(金儁秀)ㆍ장혁주(張赫
周)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와서 대기하였습니다. 이달 11일에 강위서
가 홍천(洪川)의 허경(許坰)과 합세하여 바로 자운포(自雲包)를 토벌
해서 접주 위승국(魏承國)과 접사 심성숙(沈成淑) 등 17놈을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그 다음 날에 박동의가 이석범과 군사를 합세하여 바로 원
당리(元堂里)로 진격하여 차기석을 토벌할 때에 성찰(省察) 오덕현(吳
德玄) 등 3놈을 먼저 총을 쏘아 죽였고, 승세를 타서 차기석을 사로잡
고 청두리(靑頭里)로 진격하여 홍천의 비괴인 권성오(權成五) 등 12놈
을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이석범의 동생인 국범(國範)은 병사를 이끌고
신배령(新排嶺)으로 바로 들어갔습니다. 이석범의 부하[副徒]인 김익제
(金翼濟)는 병사를 이끌고 응봉령(鷹峰嶺)으로 바로 나아가 세 갈래 길

106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로 협공하여 접주 김치실(金致實) 등 11놈을 총을 쏘아 죽였으며, 접사
박학조(朴學祚)를 사로잡았습니다. 또 손응선(孫應先) 등 60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잘 타일러서 귀화시켰습니다. 강위서는 흥정(興亭) 3리
로 방향을 바꿔 임정호(林正浩) 등 38놈을 총을 쏘아 죽였고, 나머지 무
리 백여 명은 잘 타일러서 귀화시켰습니다. 홍천에서는 지평현감(砥平縣
監)이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고, 횡성에서는 해당 현감이 소모관 정준
시(鄭駿時)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였으며, 평창(平昌)과 영월(寧
越)에서는 일본군이 먼저 토벌하였습니다. 다른 군대가 이미 지나간 곳
은 나아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각 군대는 그대로 회군하였습니다. 사
로잡은 거괴 차기석과 박학조 등 2놈은 이달 22일에 교장(敎場, 강릉관
아에 있음)에서 자리를 만들어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한 뒤에, 그 머리는
역자(驛子)를 정해 본도의 감영에 보냈습니다. 추운 겨울에 군정(軍情)
이 걱정스럽기 때문에 차례대로 물러나 돌아가게 하고 여러 차례 비도의
약탈을 겪은 백성들은 잘 타일러서 불러 모아 각각 머물러 살 곳을 마련
해 주었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이제는 조금 진정되었으니 백성들이 편
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더욱 강구하여 보살피도록 하고, 나머지 비도
들을 수색하여 붙잡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하라.

│12월 13일│
충청병사 이장회가 보고함

충청병사(忠淸兵使) 이장회(李長會)가 보고합니다. 이달 9일 유시(酉


時, 오후 5~7시)쯤에 도착한 청산(靑山) 공형(公兄)의 보고 내용에, “호남

갑오군정실기 8 107
의 비류 수만 명이 무주(茂朱)에서 (출발하여) 7일에 옥천(沃川)에 도착
하여 영동(永同)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합니다. 만일 영동에 들어가게 된
다면 반드시 본읍으로 향하게 될 것이니 매우 놀랍고 두려운 일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길을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문의(文義)로 향
하고, 또 하나는 보은(報恩)으로 향하여 가다가 돌려서 영동에 도착하
려고 합니다. 10일 묘시(卯時, 오전 5~7시)쯤에 받은 보은군수의 급한 기
별에, “남쪽 비류 수만 명이 8일에 본읍 원암리(元巖里)에 와서 유숙하고
있으니 빨리 구원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여, 즉시 영관(領官) 이용정(李
容正)이 있는 곳에 전령을 보내 그로 하여금 함께 보은으로 가도록 하였
습니다. 지금 들으니, 청산과 회덕의 동도들이 관장(官長)의 비호를 믿고
서 예전의 습성이 재발하여 밖으로는 남비를 부르고, 안으로는 사통(私
通)을 일삼는다고 합니다. 그들을 토벌하는 일은 잠시라도 늦출 수 없
습니다. 따라서 창의인(倡義人) 박정빈(朴正彬)ㆍ홍영훈(洪永勳) 등과
함께 기복병(奇伏兵)을 나누어 설치하여 서로 응원하려고 합니다.
제(題) : 두 읍의 거동이 참으로 해괴하다.

충청병사 이장회가 보고함

충청병사 이장회가 보고합니다. 지금 도착한 순무영(巡撫營)의 관문에,


“옥천(沃川)에서 창의한 박정빈(朴正彬)과 육상필(陸相弼)이 자못 일을
잘 처리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그 형편을 각별히 조사하여 보고하라.”라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정황을 자세히 조사하
였는데, 하는 조치마다 모두 애초에 실수하는 것이 없었으며 비류를 사
로잡으면 모두 거괴였으니, 이것을 보더라도 그들이 일을 잘 처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로잡은 비괴의 성명을 책으로 만들어 올려보냅니다.

108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제(題) : 책으로 엮은 보고문을 받았으니, 그들로 하여금 더욱 힘을 다
하게 하라. 감옥에 있는 여러 놈들의 죄는 용서할 수가 없으니 엄중히 곤
장을 때리고 그 정황을 보고해 올려라. 그리고 너는 일단 격식을 갖추어
죄인 신성렬(申性烈) 등 5명과 대접주 임궁호(任弓鎬)의 처와 거괴 최시
형(崔時亨)의 여식을 엄중히 감옥에 가두어라.

좌선봉 이규태와 우선봉 이두황에게 전령함

소모관ㆍ참모관ㆍ별군관이 민간에 폐해를 끼친다는 소문이 낭자히 들린


다. 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된다. 본진 중에 공로가 있는 자 5원
(員) 외에는 모두 전령하여, 거두어들여 올려보내서 해산함이 마땅하다.
이에 본진이 차출한 군관은 모두 해제하여 보내고 그 상황을 보고할
것임.

충청감사에게 관문을 보냄

상고한다. 최근에 들으니 소모관이나 참모관ㆍ별군관의 이름을 가진 자


들이 주력부대가 지나간 뒤에 낙오되어, 백성들을 토색질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고, 거짓으로 명목을 꾸며 대며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키고 있다
고 한다. 따라서 이미 관원을 파견하여 조사하고 바로잡았으나, 파견된
관원이 이미 가 버린 뒤에는 또다시 침학(侵虐)하여 반드시 일이 전혀 없
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진짜이든 가짜이든 간에 모두 관문을 보내
어 엄금하도록 하라. 전령은 다시 거두어 올려보내고, 가칭하는 자는 엄
중하게 가두고 보고하라. 유도(儒道)와 부상(負商)의 이름으로 폐단을
일으키는 자는 일체 엄금하라.
또한 소모관 최일환(崔日煥)이 완영(完營)을 따라 부임길에 나섰다가

갑오군정실기 8 109
낙오되었다는 소식을 최근 들었다. 원래의 전령과 관방(關防)20을 다시
거두어 소모병(召募兵)으로 하여금 함께 돌려보내고 보고하라.

전라감사에게 관문을 보냄

상고한다. 최근에 들으니 소모관이나 참모관ㆍ별군관의 이름을 가진 자


들이 주력부대가 지나간 뒤에 낙오되어, 백성들을 토색질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고, 거짓으로 명목을 꾸며 대며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스럽고 놀라운 일이다. 진짜이든 가짜이든 간에 모두
관문을 보내어 엄금하도록 하고, 전령은 다시 거두어 올려보내라. 가칭
하는 자는 엄중하게 가두고 보고하라. 소모관 전동석(田東錫)ㆍ고현주
(高顯柱)ㆍ이속의(李涑儀)ㆍ임두학(林斗鶴)ㆍ임낙선(林洛善)ㆍ조치
숙(曺致淑)ㆍ전대순(全大淳)ㆍ이봉규(李鳳奎)ㆍ박봉양(朴鳳陽)ㆍ백
낙중(白樂中)은 모두 완영(完營)에 보내어 통제를 받도록 하고, (그곳
에서) 지휘하여 그 폐단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와 공로를 살펴서 일의 형
편을 빨리 보고하도록 하라. 데리고 있는 소모관 최일환(崔日煥)은 관방
(關防)과 전령을 거두어서 올려보내고 모집한 병사들은 모두 돌려보내도
록 하라.

양구현감 임창호가 보고함

양구현감(楊口縣監) 임창호(任昌鎬)가 보고합니다. 이달 1일에 소모관


이 본현에 와서 비괴에게 물들었거나 미혹된 자들을 적발하여 엄중히 다
스리고 그로 하여금 귀화하여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여 온 경내가

20 관방(關防):여기서는 인신(印信)의 한 가지를 말함.

110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맑고 깨끗해졌으며, 이민(吏民)들이 안정되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
다. 소모관이 별포(別砲)를 훈련하고 (비도를) 사로잡고 깨우치는 데 온
정성을 다하니 감탄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제(題) : 이미 (백성들이) 안정이 되었으니 그들을 구휼하도록 하고,
만일 비류가 출몰하면 각별히 정탐하여 붙잡도록 하라.

소모관 정준시가 보고함

소모관 정준시(鄭駿時)가 보고합니다. 이달 1일에 양구(楊口)에 도착하


였더니 비괴 김계원(金桂元)이 (사람들을 동학에) 물들게 한 지가 10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동학도를) 배반하지 않고 나쁜 마음을 품은 부
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당 고을의 수령과 협의하여 함께 힘껏
설득하여 오라고 하기도 하고, 위엄을 보이며 가르치기도 하여 귀화한
자들이 23명이고 동학도를 배반한 여인이 2명이며 본 관청에서 타일러
서 귀화한 자들이 11명입니다. 이로부터 온 경내가 깨끗하게 정화되어 이
민(吏民)들이 안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듣건대 망명한 비괴들이 차츰
강릉 자운대(自雲垈)에 모여든다고 합니다. 이달 8일에 행군하기 위하
여 소모포군(召募砲軍)이 날마다 연습하고 있는데, 군량을 조달하는 문
제는 참모관 황기정(黃基鼎)이 충성을 다하여 스스로 조달하고, 별초장
(別哨將)인 전 출신(出身) 이인기(李寅基)가 성심껏 협력하여 백성들의
힘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참모관 이시영(李時榮)이 보여 준 문서
를 보니, 소모(召募)한 포군 56명과 민보군의 씩씩한 군사 4백 명도 또
한 군량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동영(東營, 어영청 총융청 등의 분영)에서 합
의를 보지 못한 여러 의견들이 있어 절제하고 서로 돕도록 한 것은 듣기
에 매우 불편합니다.

갑오군정실기 8 111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모집한 군사들은 일단 돌려보내고 원
문(轅門, 군영)의 명령을 기다려라.

│12월 14일│
교도 중대장 이진호가 보고함

교도 중대장 이진호(李軫鎬)가 보고합니다. 지난달 28일에 여러 읍에 각


부대를 나누어 파견하여 자세하게 규찰한 뒤에 진군한 사유는 방금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30일에 일본군 대대(大隊)와 장위영(壯衛營)의 병사들
이 함께 전주로 출발하였으며, 이달 1일에 임실에 도착하여 염탐하였더니
그 고을 현감 민충식(閔忠植)이 본래 양반가의 후예인 데다가 심지어 지
금 목민관으로 재직 중인데도, 동도와 결속하여 괴수 김개남(金介南)과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고 스스로 선봉이라고 일컬으면서 전주로 달려가
얼굴을 드러내 놓고 부신(符信)을 차고 다니며 갖은 행패를 부리니, 온
성의 이민(吏民)들이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열 사람의 눈을 가
리기는 어렵기에 우선 일본군 대대의 진영으로 잡아들였으며, 그 접주 문
한근(文漢根) 등 3놈은 당일 같은 무렵에 함께 총살하였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감옥에 가둔 범인을 중간에 잃어버렸다
고 하는데 참으로 놀랍고 한탄스러운 일이다. 행군할 때의 상황을 계속
하여 빨리 보고하라.

교도 중대장 이진호가 보고함

교도 중대장 이진호가 보고합니다. 이달 2일에 일본군 대대 및 장위영의


병사들과 함께 출발하여 3일에 남원(南原)에 도착하여 주둔하였습니다.

112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4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쯤에 순창(淳昌)에서 파견한 일본군 본대 군
사의 보고에 따르면 민보(民堡)에서 거괴 전녹두(田祿斗, 全綠豆, 전봉준
을 가리킴)를 붙잡았기 때문에 그를 데려오기 위하여 일본군 순포(巡捕) 4
명과 본대의 병사 9명을 정하여 보냈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이천부사 남정기가 보고함

이천부사(利川府使) 남정기(南廷綺)가 보고합니다. 이달 8일 미시(未


時, 오후 1~3시)쯤에 본읍 대대리(大垈里)에 사는 유학 최기락(崔基洛)이
말하길 ‘의병이 소지한 지평소모관(砥平召募官)의 전령으로 비도의 접사
(接司) 조용이(趙龍伊)를 추적하여 붙잡았다’고 하였으므로, 관부의 동
쪽에 있는 한 리(里)로 압송하여 와서 효수한 뒤에 출발하였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해당 소모관에게 관문을 보내 묻겠다.

함경감사 박기양이 공문을 보고함

함경감사 박기양(朴箕陽)입니다. 공문이 도착하였습니다. 다른 도의 비


류들 중에서 경내로 들어와서 민심을 선동하고 미혹시킨 자들이 있어서
잡는 대로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하라는 관문이 도착하였기에, 임기응
변으로 관문의 내용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제(題) : 각별히 탐색하여 붙잡아서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하라.

전 경리청 참령관 구상조가 보고함

전 경리청(經理廳) 참령관(參領官) 구상조(具相祖)가 보고합니다. 이


달 4일에 비괴를 총살한 연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5일에 대관

갑오군정실기 8 113
(隊官) 김명환(金命煥), 참모관 이윤철(李潤徹), 교장(敎場) 고진룡(高
振龍), 군관 장윤국(張允國) 등이 순회하면서 비도를 토벌하여 고산(高
山)에 이르러 십여 명의 비도를 붙잡았는데, 거괴는 이미 도망갔기 때문에
타일러서 풀어 주었습니다. 6일에 돌아오는 길에 전봉준 수하에 있던 이
른바 운량관(運糧官)과 우마감관(牛馬監官) 등의 직책을 맡았던 소진
갑(蘇眞甲)ㆍ김관지(金官之)ㆍ김만업(金萬業) 등을 붙잡았는데, 효포
(孝浦)ㆍ청주(淸州)ㆍ금산(錦山) 등지의 전투에서 계획한 것이 매우 흉
악하여 즉시 총살하였습니다. 빼앗은 군수물자는 책자로 만들어 올려보
냅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좌선봉 이규태에게 전령함

호남의 여러 군대는 차례로 모이고 있으나, 호서는 아직 소란스럽다. 다


만 소대의 반을 인솔하여 곧바로 충청감영으로 가서 주둔하도록 하되,
거느리고 있는 병정은 해당 영관에게 대신 영솔하게 하고 일본 군대와 협
의하여 거행하라는 뜻으로 영칙(令飭)한 후 출발하라.

호연초토사 이승우에게 전령함

최근 부랑하고 패악한 부류들이 순무영(巡撫營)의 장관(將官)과 병정이


라고 일컬으며, 말과 나귀를 타고 병정의 복색을 한 채 각각 총과 칼창을
지니고서 마을에서 소요를 일으키고 백성을 토색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전령이) 도착하는 즉시 연해의 여러 읍
에 관문을 보내어 (장관과 병정을) 사칭하고 폐단을 일으키는 놈들을 일
일이 조사하여 모두 경중을 나누어 참작하여 처리한 뒤에 보고하라.

114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황해감사 정현석이 보고함

황해감사(黃海監司) 정현석(鄭顯奭)이 보고합니다. 이달 27일에 일본


군 포군(砲軍)과 적비(賊匪)들이 장당현(將堂峴)에서 격렬한 싸움을 벌
인 연유는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사로잡은 적도 중에서 허원일(許元一)
등 10놈은 협박에 못 이겨 동학에 들어간 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동학
을 배반하고 귀화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여 엄히 타일러서 풀어 주었습
니다. 도령포수(都領砲手) 이인석(李仁石), 여원필(呂元必), 김승보(金
承甫), 양창렬(楊昌烈), 조석구(趙石九) 등 5놈은 접주와 화응(和應)하
여 성을 침범하고 변란을 일으켰습니다. 일일이 사실을 자백하였으므로
모두 즉시 처단하였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전라감사 이도재가 베껴서 보고함

전라감사 이도재(李道宰)가 베껴서 보고합니다. 기회를 살펴서 심영(沁


營, 강화진무영)의 병사들을 파견하려고 하는 연유는 이미 급히 보고를 드
렸습니다. 30일에 적괴 김개남(金介南)이 태인(泰仁)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일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심영의 병방(兵房) 황헌주(黃憲周)
로 하여금 대관 박승규(朴承奎)와 병사 80명 및 해당 감영의 포교 3명을
파견하여 즉시 앞으로 가게 하였습니다. 이날 밤 눈비가 오는 가운데 좁
은 길을 쏜살같이 달려 산내면 종송리에 이르러 김개남과 그 무리 3놈을
급습하여 붙잡고, 2일 유시(酉時, 오후 5~7시)쯤에 (그들을) 압송하여 신
의 감영에 도착하였습니다. 대저 이 적들은 사악한 이야기를 널리 퍼뜨려
서 양호(兩湖)에서 난을 선동하고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들에게 지독한
고통을 주고 있으니 마땅히 위로 압송하여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지금

갑오군정실기 8 115
가까운 고을들을 살펴보니 추악한 무리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서 중간에
모여 진을 치고 있으니, 약탈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을까 봐 걱정이 됩니
다. 3일 신시(申時, 오후 3~5시)쯤에 서교장(西敎場)21에 군민(軍民)을 크
게 모아 (비도를)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한 뒤에 머리는 궤짝에 넣어 도
순무영(都巡撫營)에 올려보냈으며, 나머지 3놈은 경중을 나누어서 처분
하여 급히 아뢰고, 그 머리들은 궤짝에 넣어 올려보냅니다.
제(題) : 머리를 받았다.

전라감사 이도재가 베껴서 보고함

전라감사 이도재가 베껴서 보고합니다. 적괴 김개남(金介男)을 효수하


여 사람들을 경계시킨 일은 이미 급하게 보고하였습니다. 신이 경내에 들
어오는 날에 비괴를 체포하는 데 후한 상을 내걸었습니다. 이제 다행하
게도 한 명의 병사도 잃지 않고 이처럼 거괴를 붙잡았으니 이는 임금님의
교화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영(沁營)의 장졸들이 변
하는 사태에 대응하여 방법을 강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힘을 내었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입니다. 이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뜻을 먼저
보이지 않을 수 없으니, 그렇게 한 후라야 앞으로 더욱더 격려하고 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장관(將官) 이하 공을 세운 사람들의 성명을
뒤에 기록하여 급히 보고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처리할 수 있도록
급히 아뢰어 주십시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심영(沁營)의 군진에서 큰 공을 상주할

21 서교장(西敎場):서쪽에 둔 군사훈련장. 처형장으로 이용되었다. 민간 전설로는 서


문 밖 초록바위에서 처형하고 효수해 조리돌렸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서울 서소문 거
리에 효시한 사진도 전해진다.

116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수 있어서 참으로 기쁘기 그지없다. 그중에서 으뜸가는 공을 세운 몇 명
은 다시 보고하여 공로에 보답할 수 있도록 하라.

후(後)

병방(兵房) 황헌주(黃憲周), 초장(哨長) 조용문(曺龍文), 포교(捕校)


윤치근(尹致根), 김경석(金京錫), 십장(什長) 박덕흥(朴德興), 영관(領
官) 황시중(黃時中), 전초대관(前哨隊官) 박승규(朴承奎), 병정 80명,
기패관(旗牌官) 윤기홍(尹基弘), 포교(捕校) 김시형(金時亨)

홍주목사 이승우가 보고함

홍주목사(洪州牧使) 이승우(李勝宇)가 보고합니다. 비류 중에서 전쟁


터에서 붙잡혀 그 죄가 매우 무거운 자는 즉시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
시키고 계본(啓本)을 작성하고 베껴서 보고하였습니다. 기찰하고 탐문
하여 붙잡은 자는 취조하여 자복을 받아내고, 처형한 자는 그때마다 급
히 보고하였으나 일이 번잡하여 이제부터는 책으로 엮어 올려보내겠으
며, 차후에도 이렇게 거행할 계획입니다.
제(題) : 성책(成冊)을 받았다.
이한규(李漢圭) 등 182명

연안부사 이계하가 보고함

연안부사(延安府使) 이계하(李啓夏)가 보고합니다. 방금 도착한 양호


도순무사의 전령 내용에, “근래 비류들의 정황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으
며, 해당 읍의 비도들은 지금도 창궐하고 있다고 들었다. 따라서 우선 전
령을 내리니 도착하는 즉시 각 면 각 동에 각별히 신칙하여 그들로 하여

갑오군정실기 8 117
금 오가작통(五家作統)을 하며 서로 두루 잘 살피고 치밀하게 하여 거괴
를 수색하여 체포한 뒤, 즉시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고 백성들을 보
살펴서 안정시켜라. 대군(大軍)이 장차 진군하려 함에 상민(商民)들이
향도(嚮導)를 자원하고 있다니 그 정성이 가상하다. 해당 읍에서 보부
상의 두목에 각별히 신칙하여 그들로 하여금 조심스럽게 거행하도록 하
고 그 일의 형편을 급히 보고하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부사가 부
임 초부터 백성들을 잘 타이르고 위험한 말로 두렵게 하여, (비도는) 목
을 움츠리고 자취를 거두어서 거의 사그라졌는데, 이달 7일에 평산(平
山)에서 5, 6백 명의 비도가 갑자기 본부(本府)로 쳐들어와서 몰래 숨은
사람들을 위협하고 강제로 몰고 갔으며, 문서와 장부를 불태우고 무기
를 빼앗고 돈과 곡식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따라서 계책을 써서 명령
을 내리길, “경군(京軍)과 일본군이 행진하여 경계를 압박하려고 하였으
나, 옥석(玉石)이 모두 불에 탈 염려가 있기 때문에 동도에 들어가지 않
은 자들은 각각 성명을 쓰고 관인을 찍어 증거로 삼는 게 좋다.”라고 하
였습니다. 며칠 안으로 도장을 찍은 것이 수만여 장이 되었으며, 마을마
다 동도배들이 군기를 거두어 바치고 목숨을 구걸하였습니다. 귀화하
는 자들에게 모두 이를 지급하였더니 경내의 모든 동도들이 귀화하게 되
었으며, 혹은 이웃 읍에 사는 백성들도 이에 의지하여 교화하게 되었습니
다. 대체로 이 무리들은 모이면 난민(亂民)이 되고 흩어지면 양민(良民)
이 되니, 지금으로서는 잘 어루만지고 타일러서 안정을 시키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따라서 면전에서 별군관을 신칙하여 그로 하여금 다른
곳으로 순행하게 하고 이곳 경내는 다만 앞으로의 일만을 보겠다는 뜻
으로 약속하였습니다. 본부는 해평(海平)과 접경지역에 있으므로 엄중히
경계하며 방어하지 않을 수 없으나 군수물자를 댈 방안이 전혀 없으니

118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경사(京司)에서 상납하기로 된 모종의 물자를 우선 얻어서 사용하는 것
이 어떨지 처분을 기다려 거행하겠습니다. 오가작통은 전령이 있기 전에
이미 신칙하였으며, 무기는 획득한 숫자가 잃어버린 것보다 조금 많습니
다. 이후의 일의 형편에 대해서는 다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제(題) : 비도들이 난리를 일으켰다니 참으로 놀랍고 한탄스러운 일이
다. 연안의 온 경내가 귀화하였다니 어떤 덕정을 펼쳐서인지 참으로 가상
하고 감탄할 만한 일이다. 군수물자는 이미 군사를 사용하는 때가 아닌
데 어찌 막아 지키기 위한 공납(公納)을 허용할 수 있겠는가? 읍에서 편
의대로 조처하도록 하라. 오가작통은 참된 마음[實心]을 지니고 실속 있
는 참된 정사[實政]를 펼친 연후라야 두드러진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
다.

연안부사 이계하가 보고함

연안부사 이계하가 보고합니다. 병사들을 모으기 위하여 지난달 26일에


배천[白川]에 도착하여 효유문(曉諭文)을 지어 각 면의 각 동에 돌아가
며 보였으며, 평산(平山)에서도 소요가 일어났다고 하였기 때문에 탁영
장(濯纓場)에 도착하여 또 효유문을 지어 일일이 돌아가며 보였습니다.
그러자 평산(平山)의 접주 홍좌경(洪佐卿)과 조원회(趙元會)가 제출한
단자에, “이 두 사람을 석방하면 평산의 인근에 있는 읍들이 모두 귀화하
게 될 것이다. 만일 (비도가) 다시 일어날 단서가 생긴다면 그들이 스스
로 그 죄를 감당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리를 알
아듣도록 일일이 타일러서 풀어 주었습니다. 그믐날에 황해감영[海營]에
도착하였는데, 읍의 서쪽으로 30리쯤 떨어진 곳에 저들 비류가 많이 모여
있어서 도로가 막혔으니 참으로 걱정이 됩니다. 함께 온 정석규(鄭錫圭)

갑오군정실기 8 119
는 실제로 쓸 만한 인물이어서 참모사(參謀士)로 임명하면 좋으리라 생
각합니다. 처분을 기다립니다.
제(題) : 타일러서 귀화시켰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정석규는 큰
공을 세우는 것을 기다린 뒤에 헤아려 볼 일이다.

전 경리청 참령관 구상조가 보고함

전 경리청(經理廳)의 참령관(參領官) 구상조(具相祖)가 보고합니다. 대


관 김명환(金命煥)이 반 소대의 병사들을 이끌고 연산(連山)으로 출진
하였을 때 해당 고을의 백성들이 소 한 마리를 군사들에게 먹였으며, 진
잠(鎭岑)에 도착하자 전 감역(監役) 이후선(李厚善)이 대광주리의 밥
과 병에 담은 마실 것을 주며 관군을 맞이했습니다. 또 공주(公州)에 도
착했을 때에는 군관 장윤국(張允國)이 소고기와 술을 잔뜩 준비하여 두
차례나 병사들을 먹이며 위로하였습니다. 전 오위장(五衛將) 이보경(李
輔景)은 빚은 술과 구운 양고기를 병사들에게 먹였으며, 또한 승전을 축
하하는 고시(古詩) 한 편을 지어서 군대를 더욱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감성(柑城) 두만동(斗滿洞)에서도 사람들이 소고기와 술과 떡으로 병사
들을 먹였습니다. 이어서 부대는 회덕으로 행군하였습니다.
제(題) : 소식을 들으니 매우 가상하다.

법무아문에 공문22을 보냄

아뢰는 것은, 지난번 (귀 아문이 보낸) 공문에 의거하여 감옥에 있는 신정

22 공이(公移):동급의 관아 사이에 보내는 공문. 이문(移文)이라고도 한다. 2품 이상


중앙 관아 및 지방 관찰사 등 조선 시대 최고의 관서 사이에 행정적으로 협조할 필요
가 있을 경우에 사용하였다.

120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엽(申禎燁)을 일본 영사의 심리를 기다려 그 사이에 조사하겠습니다. 지
금 저희 영(營) 도순무사의 지교(指敎)를 받아 다시 공문을 보내오니 심
사 여부를 상세히 회답[回移]하여 처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공문
을 보냅니다.

법무아문이 공문에 회신함

간단히 회답합니다. 보내주신 공문을 잘 받았습니다. 신정엽(申禎燁)을


회심(會審, 여럿이 모여 심문함)하는 일은 일본 영사가 아직도 기일을 지정
하지 않았기에, 이런 뜻으로 귀 영의 도순무사에 보고하오니, 다시 수일
간 기다려 주시길 삼가 바랍니다.

탁지아문이 공문에 회신함

삼가 답장을 하여 말씀을 드릴 것은, 대함(大函) 안에 본영(本營)의 우


선봉(右先鋒)이 사용하는 2품(品) 봉사(奉使) 인신(印信) 1개와 성궤
(盛櫃)에 넣어 건네 보낸 호소문[等情]이 들어 있었는데, 이를 살펴보니
본 아문에서 보관한 것은 단지 찰리사(察理使)의 인신으로 2품의 위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궤를 보내오니 서로 번갈아 조사하고 거두어
들인 뒤에 표(標)를 붙여 보존하는 것이 좋습니다. 삼가 아룁니다.

군무아문이 공문을 보냄

아뢰는 것은, 바친 탄환은 5만 개인데 살펴보니 남아 있는 것은 4만 개뿐


이기 때문에 지금 보내겠다는 뜻으로 본 아문의 대신의 가르침을 받자옵
고자 하오니 조사하여 거두어 주시길 바랍니다. 삼가 공문을 보냅니다.

갑오군정실기 8 121
군무아문이 공문을 보냄

아뢰는 것은, 일본인이 미리 살핀 바에 의거하여 동도를 토벌하러 출정한


장교와 병졸들이 각 항목별로 사용한 비용과 그 실제 수치를 상세히 계
산하여 보여 준다는 등의 말이 있어 알려 드리오니, 즉시 조사하여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공문을 보냅니다.

군무아문에 회신을 보냄

아뢰는 것은, 귀 아문에서 보낸 공문에 (동도를 토벌하러) 출정한 장교


와 병졸들이 각 항목별로 사용한 비용과 그 실제 수치를 상세히 작성하
여 올려보내라고 하였으나, 외읍(外邑)에서 운반한 곡식의 수요에 대해
서는 아직까지 보고된 것이 없어서 정확한 수치를 계산할 수 없습니다.
삼가 공문을 보냅니다.
성책(成冊)
전(錢) 80,539냥 9전 9푼, 쌀미(米) 1섬, 무명목(木) 96통(同) 41필 25
자 5치, 베포(布) 2필(9월 23일부터 12월 6일까지 각 항목별 지출[用下])

│12월 15일│
호남초토사 민종렬이 급히 보고함

호남초토사(湖南招討使) 민종렬(閔種烈)이 급히 보고합니다. “이달 24


일 신시(申時, 오후 3~5시)쯤에 도착한 의정부의 관문에, ‘호남에서 비도들
의 소요가 갈수록 더욱 창궐하고 있지만 그곳 목사가 줄곧 굳건히 지키
면서 우뚝하게 버팀돌이 되고 있으니 듣기에 참으로 가상한 일입니다. 홍
주목사(洪州牧使)의 예(例)에 따라 나주목사(羅州牧使) 민종렬을 호남

122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초토사로 차하(差下)하여, 그로 하여금 호남 우도의 각 고을을 지휘하
도록 하여 오로지 비도들을 토벌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라고 임금께 아뢰어 이를 윤허한다는 전교를 받았다. 전교의 내
용대로 받들어 시행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동도가
멋대로 행패를 부려 나라의 근심이 된 것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할 수 없
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성읍을 약탈하고 수령을 협박하며 관청의 장부
를 불태우고 무기를 도적질하였으며 심지어 대관(隊官)이 순절하자23 또
기(旗)에 목을 걸고 윤사(綸使)가 명을 받들자 길에서 불태워 죽이기까
지 하였습니다.24 또한 풍패(豊沛) 전주성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함락되
어 조경전(肇慶殿)과 경기전(慶基殿) 등 양 전(兩殿, 조경단전(肇慶壇殿)과
경기전(慶基殿))이 몽진(蒙塵)25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원통하고 분
하여 천지간에 용납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당시 관찰사였던 신과 초토사
는 조정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좇아서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길을 열
고자 하고 있으니, 저들 완악하게 꿈틀거리는 부류들도 마땅히 회개하
여야 하는데, 오히려 다시 쳐들어와 소요를 일으키고 전보다 훨씬 더 백
성들을 유린하였으며 방자하게 행동하면서 욕심을 채우고 정당한 조세
를 제멋대로 거두고, 명리(命吏)26를 욕보이고 죽여 그 죄악이 가득 찼습
니다. 외람되게도 재주가 없는 몸으로 명을 받자옵고 지금 여러 고을에

23 대관(隊官)이 순절하자:장위영 대관인 이학승(李學承)이 장성전투에서 농민군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을 말함.
24 윤사가……죽었습니다:고종의 윤음을 받들고 원평에서 전봉준을 만나 봉독한 배
은환(裵垠煥), 이효응(李斅應) 두 사람을 죽인 사실을 말함.
25 조경전(肇慶殿)과……몽진:이곳에 봉안한 이성계의 영정을 전라감영 판관 민영승
이 옮겨 놓은 일을 말함.
26 명리(命吏):조정에서 임명한 관리.

갑오군정실기 8 123
서 일어난 비도의 소요를 가서 토벌하려고 합니다. 생각하건대 이곳 금성
(錦城) 땅은 요충지에 있어서 보장(保障)의 직임이 있습니다. 지난 4월에
무안(務安)의 비류27 5백 명이 본주(本州, 나주)의 서쪽을 침범하여 백성
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졌습니다. 이에 격분하여 즉시 아전과 군교(軍校)
들을 이끌며 영장(營將)과 협력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비류를 습격하여
30여 명을 붙잡았습니다. 그중에서 거괴 이여춘(李汝春)과 채중빈(蔡仲
斌)ㆍ나순후(羅順厚)는 진영(鎭營)으로 압송하고 효수하여 사람을 경
계시켰습니다. 그 나머지 안계현(安啓玄) 등 27놈은 읍에서 처결하였습
니다. 16일에 거괴 전봉준(全琫準)과 손화중(孫化中) 등 여러 놈은 고부
(古阜)에서 나와 함평(咸平)에 진을 치고 있다가 장차 본주로 오려고 하
였지만 우리가 준비된 것을 보고는 감히 경계를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6
월 17일에 그들 수천 명의 무리가 남평(南平)을 무너뜨려 점거하고 기필
코 우리를 침범하겠다는 형세가 분명히 있었지만 우리들이 이미 굳게 지
키고 있었기 때문에 저들이 과연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7월 5일
에 비괴 최경선(崔敬善)이 또 만여 명을 이끌고 불을 지르고 총을 쏘며
곧바로 서문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목사(牧使)와 우영장(右營將)이 직접
포(砲)와 돌을 무릅쓰고 군민(軍民)을 격려했으며 먼저 대포를 쏘고 계
속하여 총을 쏘고 돌을 던져 저 비도들 중에서 넘어져 죽은 자들을 모두
합하면 1백 명은 되었으며, 나머지 무리들은 도망가 흩어졌습니다. 또
10월에 손화중이 만여 명이나 되는 많은 수를 이끌고 광주를 빼앗아 점
거하고 본주[羅州]의 동북쪽으로 침략해 왔습니다. 따라서 퇴교(退校)
김창균(金蒼均), 호장 정태완(鄭台完), 전 첨사(僉使) 김성진(金聲振),

27 무안(務安)의 비류:무안 대접주 배상옥은 나주를 공략하려고 몇 차례 공격했다.

124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이방 손상문(孫商文), 난후장(攔後將) 전학권(錢鶴權), 하리(下吏) 박
시홍(朴時泓), 이돈기(李敦祺) 등으로 하여금 포사(砲士) 3백 명을 거
느리고 나가게 하였습니다. 저 비도들은 아군의 수가 적은 것을 업신여겨
먼저 침범하여 접전을 벌이다가 대포를 쏘자 놀라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
났으며, 조총과 화약과 탄환 등을 빼앗았습니다. 뒤이어 수천여 명의 비
도들이 사창(社倉)에 가득하였기 때문에 일시에 쫓아가 죽였으며, 일제
히 대포를 쏘니 탄환에 맞아 죽은 자들이 23명이었습니다. 11월 11일에
비괴 오권선(吳權善)과 오석규(吳錫圭)28가 수천 명의 적당을 불러 모아
읍교(邑校) 손병선(孫炳先)을 붙잡아가서는 총살한 뒤에 시신을 불에
태우고는 무리를 주(州)의 북쪽 창고로 옮겼다고 하니, 원통하고 분함
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급히 호방(戶房) 김재환(金在煥) 등에게 명령
하여 포군을 나누어 이끌도록 하였으며, 좌수 박상수(朴祥壽), 천총(千
摠) 최성순(崔聖純), 하리(下吏) 박근욱(朴根郁), 최윤룡(崔允龍), 구유
술(具有述), 김학술(金學述), 양인환(梁仁煥), 최문섭(崔文燮) 등은 각
각 포군을 이끌고, 우영장(右營將)이 직접 수진군(守鎭軍) 150명을 직접
거느리게 하여 힘을 합하여 함께 토벌에 나서자, 한꺼번에 충돌하면서 전
투를 벌여 어지러히 포를 쏘고 서로 살해하니 총에 맞아 죽은 자가 21명
이 되었습니다. 포수 강춘삼(姜春三)과 대장(隊長) 전공서(錢公瑞), 김
기옥(金基玉) 등이 산으로 올라가 쏜살같이 쫓아가자 저들이 모두 새처
럼 놀라 영광(靈光) 쪽으로 달아났습니다. 또한 무안(務安)의 접주 배
상옥(裵相玉)이 만여 명의 무리를 불러 모아 그곳 현에 불을 지르고 마

28 오권선(吳權善)과 오석규(吳錫圭):나주 출신으로 나주 집강소를 차리고 광주에


서 활동한 손화중, 최경선과 연대해 나주관아 점령을 위해 전투를 여러 차례 벌였으
나 실패하였다.

갑오군정실기 8 125
음대로 무기를 빼앗고는 본주(本州)로 향하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16
일에 행군하여 정탐하였는데, 적의 세력이 마치 숲과 같아서 우리는 적고
저들 무리는 많았습니다. 총을 잘 쏘는 포군 백여 명을 장등(長嶝)에 매
복시켰으며, 그 밖에 의거(義擧)하며 나온 민병 1,500명이 응접하여 지
원하였습니다. 17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쯤에 적들은 아군의 수
가 적은 것을 엿보고 대포를 쏘며 불을 지르고 곧장 이후(二帿)로 들어
왔습니다. 포수 강춘삼(姜春三)이 먼저 쏜 대포 한 발의 소리에 세 갈래
길의 복병이 일시에 돌격하자 저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도망갔는데, 총
을 맞고 죽은 자는 65명이었고, 서로 짓밟히며 물에 떨어져 죽은 자의 수
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아군은 이어서 진을 치고 있다가 밤
에 백여 명의 포군을 보내 마구 포를 쏘며 적을 습격하여 21명을 죽였습
니다. 이에 적의 간담은 서늘해지고 아군의 사기는 더욱 떨쳐 일어났는데
뜻밖에도 북쪽에서 위급한 소식이 들려와서 명령을 내려 회군하기에 이르
렀습니다. 북쪽의 위급한 소식은 이른바 오권선(吳權善)과 오석규(吳錫
圭)가 비류 만여 명을 불러 모아 곧장 읍 부근의 이로면(伊老面)으로 쳐
들어와 성을 도륙하겠다고 공공연히 떠들면서 평민 10여 명을 쏘아 죽이
고 시골집 열수십 곳을 불태운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읍은 단
단히 지키면서 그들이 느슨한 틈을 엿보아 24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
후 1시)쯤에 또 포군 3백 명을 보내 세 갈래의 기병(奇兵)29으로 나누어 먼
저 오권선을 공격하고 또 포군 50명과 민병 7백여 명을 보내 응접하게 하
였습니다. 미시(未時, 오후 1~3시)쯤에 갑자기 쳐들어가 (적의) 주위를 포
위하고 불시에 포를 쏘니 적들 가운데 총을 맞고 즉사한 자가 353명이

29 기병(奇兵):적이 예측할 수 없는 기묘한 전술로 기습하는 부대를 말함.

126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나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대체로 적당
이 비록 그 수는 많았지만 모두 오합지졸이라 관군이 한 번 나아가면 문
득 (적들이) 모두 짐승처럼 달아났으니, 때문에 여러 번 전투를 하며 반
드시 승리한 것입니다. 빼앗은 무기는 대포 3좌, 말 16필, 조총 30자루입
니다. 이처럼 고립무원의 성을 8개월 동안 굳건히 지켰으며, 남은 군사들
이 적과 마주 싸우면서 2개월 동안 네 차례나 승리를 거두었고, 또한 한
명의 군사도 꺾이지 않고 하나의 병기도 버리지 않았으며, 위험한 수양성
(睢陽城)을 스스로 보호하였고30 즉묵성(卽墨城)31을 홀로 보전하였으
니, 이는 또한 요행이기는 하지만 진실로 임금의 덕화[王靈]에 힘입어, 방
어할 때에는 인화(人和)를 얻고, 전투에서는 군사력에 의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출전한 장령(將領)과 빼앗은 무기들은 책으로 엮어 올려보냅
니다. 그리고 별군관 김윤창(金潤昌)과 군관 송덕순(宋悳純)은 적시에
내려와 24일에 적을 토벌할 때 그들 덕분에 실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비류를 토벌할 때에도 잠시도 늦추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본읍은 각 읍의 접경지역에 있기 때문에 각처의 비류
들이 무시로 모이고 흩어지니 지금 성을 지키는 대책이 없는 일이 걱정이
됩니다. (신은) 임무를 맡은 이래 근심하고 두려워하였으니, 일의 형편을
헤아리셔서 특별히 정병(精兵) 수천 명을 본진(本陣)에 소속시켜 기필코
비도를 소탕하여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30 수양성(睢陽城)을 스스로 보호하였고:당(唐)나라 때의 장순(張巡)이 안녹산(安


祿山)과의 싸움에서 수양성(睢陽城)에 웅거한 고사에서 연유하여, 수양지위(睢陽
之危)는 위태로움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그와 같은 위태로운 상황을 스스로
의 힘으로 대처하였다는 뜻이다.
31 즉묵성(卽墨城):춘추전국시대에 연(燕)나라가 제(齊)나라를 쳐서 점령할 때에 72
성 중에 전단(田單)이 지키는 즉묵성만이 보전되었다고 한다.

갑오군정실기 8 127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포상의 은전은 정부의 처분을 기다려
라.

임금께 아룀

임금께 아뢰기를, “호남초토사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이 지난 11월


29일에 보낸 보고서를 지금 보니, ‘초여름부터 8개월 동안 흉악한 무리
들이 수만 명을 불러 모아 그 세력이 매우 창궐하였습니다. 다행히 인화
에 힘입어 (군사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힘을 다하고, 지리(地利)에 힘입
어 옥루(玉壘)32처럼 깊숙하고 성이 온전하였기에, 전후로 네 차례나 승
리하여 거괴 30명을 붙잡아 처결하였고 총을 쏘아 죽인 비류가 6백여 놈
이나 될 정도로 많았으며, 빼앗은 군수물자의 수도 적지 않았습니다. 적
의 간담이 이미 서늘해졌기 때문에 차츰 적을 소탕할 수 있는 희망을 갖
게 되었습니다. 본부(本府)의 아전과 군교로서 힘써 노력을 기울인 사람
들과 의병으로서 행동을 함께 한 사람들의 성명을 책으로 엮어 기록하여
올려보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곳 초토사가 덫을 놓아 적을 막고 처
음부터 끝까지 정성을 다하여 우뚝하게 한 지역의 믿을 만한 방어막[保
障]이 되었으니 참으로 가상합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바쳤던 사람들은
일이 평온해지기를 기다린 뒤에 별단(別單)에 순서대로 기입하여 올리겠
습니다.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라고 하였다.

32 옥루(玉壘):중국의 촉(蜀)나라 수도인 성도(成都)의 서북쪽에 있는 산 이름. 태양


이나 옥루나 모두 임금에 대한 사모의 정을 은근하게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128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충청감사 박제순이 베껴서 보고함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이 베껴서 보고합니다. 전에 도착한 의정부의


관문 내에, “지금 충청감사 박제순이 올린 장계의 등보를 보니, ‘태안(泰
安)의 전 부사(府使) 신백희(申百熙), 서산(瑞山)의 전 군수(郡守) 박
정기(朴錠基), 종친부(宗親府)에서 파견한 김경제(金慶濟) 등에 대하
여 백성을 구휼한 일을 포상하는 특전을 묘당(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는데, 세상이 어지러운 가운데 갑자기
목숨을 잃었으니 매우 참혹하고 측은하지만 죽은 사유가 아직 명백하
지 않다. 관찰사에게 상세하게 조사하여 다시 보고하게 한 뒤에 임금께
품처(禀處)하기를 ‘시신을 고향으로 운구하여 올 때 연로(沿路)에서 담
군(擔軍, 짐꾼)들을 지정해 공급하고 특별히 신경을 써서 호상(護喪)하
도록 두 도의 관찰사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
이 답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고, 전교에, ‘뜻을 잘 받들어 살펴서 시행
하라.’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태안의 전 부사 신백희와 종친부
에서 파견한 김경제가 죽은 근본 원인을 해당 관아의 수이향(首吏鄕)에
게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글을 지어 태안(泰安) 겸임 홍주영장(洪州營
將)에게 관문(關文)으로 지시하였는데, 지금 그곳 진(鎭)의 영장(營將)
홍건(洪楗)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습니다. “태안부의 좌수(座首) 명광
삼(明光三)과 이방(吏房) 김주하(金柱河)를 바로 잡아들여 상세하게
심문하였는데, 그 보고에 고하기를, ‘9월 26일에 종친부에서 파견한 관
원이 본 관아에 와서 귀화하도록 잘 타이르겠다는 뜻을 각 면(面)에 널
리 알렸습니다. 그달 그믐날에 수백 명의 비류가 모여 선(善)으로 나아
가 착하게 살겠다며 귀화한다는 뜻으로 일제히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
런데 10월 1일에 이른바 접주(接主)라고 하는 5명을 잡아들여 타이르고

갑오군정실기 8 129
바로 풀어 주었더니, 2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쯤에 저들 무리 1만여 명
이 각자 총과 창을 가지고 부안으로 돌입하였습니다. 방어사(防禦使)
와 (종친부의) 파견원이 하리(下吏) 김원섭(金元燮)의 집으로 잠시 피신
하였는데, 저들이 바로 동헌(東軒)에 올라와서는 (이내) 관사(官舍)와
각 건물에 불을 지르고 방어사와 종친부의 파견원을 구석구석 찾았습니
다. 마침내 붙잡혔는데 창으로 마구 찌르고 끝내 칼로 흉악한 짓을 저질
렀습니다. 그리고 이방과 좌수는 한꺼번에 잡혀 여러 차례 묶여서 형벌
을 받았습니다.’” 서산군수(瑞山郡守)는 지금 이미 부임하였기 때문에
전 군수(郡守) 박정기(朴錠基)가 죽은 근본 사유를 상세히 보고하도록
역시 관문으로 지시하였더니, 지금 받은 해당 군수 성하영(成夏永)의 보
고 내용에, “전임 군수 박정기가 부임한 지 겨우 1달 만에 교화를 널리 펴
서 경내에 동도가 거의 귀화하였습니다. 뜻밖에 10월 1일에 수천 명의 비
류가 함성을 지르고 사방에서 모여들자 군(郡)의 아전이 위급함을 보고
해서 피할 것을 청했으나 전임 군수는 태연한 안색으로 말하기를, ‘어려
움에 직면해서 구차하게 사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고 칼
1자루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이방(吏房) 유리(由吏) 송병훈(宋秉勳)
이 곁에서 호위하다가 적에게 먼저 죽고 전임 군수는 혼자 문루에 기대어
칼을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하여 죽은 흉도가 수 명이나 되었고 부상을
입은 자는 셀 수가 없었습니다. 적들이 두려워서 물러가려고 했으나 아!
저 좌수(座首) 유선일(柳善一)과 사령(使令) 이삼달(李三達)ㆍ정차복
(鄭次卜), 관노(官奴) 금돌(金乭)이라는 이름을 가진 놈이 함께 모의하
고 안에서 호응하여 수없이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연달아 총을 쏘아 1
발에 죽지 않자 2발을 쏘았으나 2발에도 죽지 않자 3발, 4발을 쏘아도
죽지 않고 낯빛이 변하지 않으며 입에서 꾸짖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습

130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니다. 마침내 다음 날에 흉도가 입을 억지로 열어 총을 쏘아서야 비로소
죽었습니다. 다시 (시신을) 염(斂)할 때까지 40일이나 되었지만 안색과
기품 있는 모습이 늠름하여 적을 꾸짖는 때와 같았습니다. 그 바른 충성
과 탁월한 절개는 옛사람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또한 이방 이
유리가 호위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린 일도 매우 가상합니다.”라고 하였
습니다. 이어서 해당 군(郡)의 유생들이 연명(聯名)으로 올린 소장의 뜻
이 대략 같다고 합니다. 이에 급히 아룁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지평현감 맹영재가 보고함

지평현감 맹영재가 보고합니다. 지금 전령의 뜻을 받들어 현감이 이달


11일에 회군하여 임소에 돌아왔습니다.
제(題) : 아무런 사고 없이 회군하였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별군관 홍재준이 보고함

별군관 홍재준(洪在駿)이 보고합니다. 이달 4일에 일본의 돛단배[風帆


船]가 결성포(結城浦)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군장(軍粧)과 탄환 등의 물
건 10여 태(駄)를 실어 왔습니다. 7일에는 화륜선(火輪船)이 용당진(龍
塘津)에 정박하여 육군 보병 103명이, 그리고 같은 날 육군 34명이 또 송
경(松京)에서 내려와서 모두 성에 들어왔습니다.
제(題) : 이미 원병(援兵)이 추가되었으니, 이후 일의 형편에 대해서는
서둘러 보고하라.

갑오군정실기 8 131
천안군수 김병숙이 보고함

천안군수(天安郡守) 김병숙(金炳塾)이 보고합니다. 본영의 별군관 윤


영렬(尹英烈)이 붙잡은 비류와 본군(本郡)에서 붙잡은 비도들은 경중을
나누어 처리하였으며, 빼앗은 군수물자는 이미 책으로 엮어 올려보냈습
니다. 그 이후 처형한 비류들은 5명이며 징계한 뒤에 풀어 준 자들은 19
명이고, 순영(巡營)과 병영(兵營)에 압송한 자들은 3명이며, 수색하여 획
득한 군수물자는 모두 책으로 엮어 올려보냈습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별군관은 이미 감하(減下)하였으니,
그 휘하의 군사들을 잘 타일러 해산시켜 돌려보내라.

홍주목사 이승우가 보고함

홍주목사 이승우(李勝宇)가 보고합니다. 영문(營門) 별군관 이창직(李


昌稙)이 일으킨 폐단에 관한 보고입니다. 도순무영의 제사(題辭)의 내용
에 의거하여 이창직이 감옥에 가둔 30명의 병사를 돌려보내겠다는 뜻을
선봉진(先鋒陣)에 공문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선봉진에서는 이미 호
남을 향하였으므로 받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창직을 어느 곳으로 보
낼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별군관 최일환(崔日煥)이 병정과 무뢰
배 8, 90명을 이끌고 비도를 토벌한다며 주군(州郡)을 돌아다니면서 평
민과 귀화 여부를 따지지 않고 조금 부유한 집마다 강제로 동도라는 이
름을 덧붙여 마음대로 죽이고 공공연히 약탈을 하여 쌀과 전(錢)과 포목
[木布]을 소로 나르고 배로 운반하여 지나는 곳마다 또한 난리를 만난
것 같았으며, 읍에서 보고하는 백성들의 정황이 날마다 몰려들고 있으니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동 최일환과 서산에서 붙잡은 이상렬(李
相烈)을 함께 압송해 왔기 때문에 심문한 결과 이가 놈은 일찍이 귀화한

132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자로, 과거의 일을 추궁하였더니 그가 빼앗은 물건이 전(錢) 9,300냥, 백
목(白木) 61필, 마포(麻布) 30필이어서 모두 서산(瑞山)으로 옮겨 두었
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곳 군(郡)에 관문을 보내 그가 전후로 약탈한 물
건을 압류하고 물건을 빼앗긴 사람들로부터 각자 진정이 오는 것을 기
다렸다가 조사를 하여 찾아서 지급할 계획입니다. 아! 저 최일환이 이미
훈령으로 가르침을 받았지만 삼가 받들어 행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연
줄을 따라 욕심을 부리면서 약탈을 일삼아 마을이 연이어 소란해지고 백
성들이 놀라 달아났습니다. 이에 동 최일환을 우선 옥에 가두고 사실대
로 보고드립니다.
제(題) : 갓(笠) 한 입이나 채소 하나라도 군율에 관계되거늘 하물며
부유한 백성들을 습격하여 재산을 약탈하고 비류를 다수 거느려 한길
에서 소요를 일으키는 자는 말할 것이 없다. 철저하게 엄중히 조사하
여 일일이 해당 백성들에게 되돌려준 뒤에 목을 베어 사람들을 경계시켜
라.

충청감사 박제순이 도착한 공문을 보고함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이 도착한 공문을 수령하였습니다. 옥천(沃川)


에서 의병을 일으킨 박정빈(朴正彬)과 육상필(陸相弼) 및 별군관(別軍
官)에게 보낸 전령을 환수하라는 관문이 도착하였습니다.
제(題) : 이미 전보로 답신하였다.

갑오군정실기 8 133
전령 상리국,33 호서와 경기도의 부보상 도두목 및 각 임방34 등에 전령
을 보냄

도내의 비류들이 이제 귀화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도 상민(商民)들이 오


히려 두려워하며 동요하기 시작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다는 이야기를 지
금 들었다. 정성을 다하여 공무에 힘쓰는 의리를 어찌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지니지 못하고 이 같은 일을 저지르는 것인가? 이는 분명 경박
하고 추잡한 자들이 틈을 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다. 이에 전령을 내리
니 각 해당 두목들에게 각별히 단속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폐단을 통렬
히 금지시켜 각자 돌아가 생업을 편안히 할 수 있도록 하라. 만일 이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단연코 별도로 엄히 처리하라. 두렵게 생각하고 거
행함이 마땅하다.

군무아문이 공이를 보냄

아뢰는 것은, 귀 순무영에서 보낸 공문의 내용에, 파원(派員)의 기마(騎


馬)비는 귀 순무영에서 경비를 마련하고 공문서를 보내 탁지부(度支部)
에서 내어주었지만, 옷값에 이르러서는 과연 그 전례가 없으니 공문에 의
존할 수가 없습니다. 조사 파원의 기마비를 귀 순무영에서 마련한다면
지체될 염려가 없지 않으니 지금부터는 말을 빌려서 내려보내십시오. 경
비와 세마전(貰馬錢, 말을 빌리는 삯)을 계산하여 보니 모두 4백 냥으로 이

33 상리국(商理局):혜상공국(惠商公局) 또는 상국(商局), 상당(商堂)이라고도 불렀


다. 이 기구는 상업 관련의 일을 보았다. 한편 보부상을 관리하는 기구로 1883년 혜
상공국을 설치해 보상과 부상을 완전 통합하였고 1885년 내무부로 이관해 상리국
으로 개칭하고 부상을 좌사, 보상을 우사로 구분하였다.
34 임방(任房):보부상들의 자치기구.

134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8


돈을 지출한 뒤라야 원주(原州)와 제천(堤川)으로 보낼 수가 있습니다.
즉시 마련하여 보내면 공사(公事)가 낭패에 빠질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삼가 공문을 보냅니다.

군무아문에 회이를 보냄

아뢰는 것은, 귀 아문의 공문에 의거하여 원주(原州)와 제천(堤川)에 내


려간 파원들의 경비와 세마전 4백 냥을 보내드리니 대조하여 받으시면 이
를 근거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삼가 공문을 보냅니다.

좌선봉에서 보고함

좌선봉(左先鋒)에서 보고합니다. 6일부터 8일까지 장성(長城)에 주둔


하여 아무런 사고 없이 숙박하였습니다. 지금 도착한 벽사찰방(碧沙察
訪)의 보고 내용에, “동도 1천여 명이 장흥(長興)에 모였다가 이달 4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쯤에 곧바로 본역(本驛)의 관아와 민가 여염집에
들어가 모두 불을 질렀는데, 우관(郵官)의 힘 따위로는 막을 대책이 없
어, (찰방이) 병영으로 말을 달려가 대면하여 (동도를) 토벌할 수 있는
방법을 갖추어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병사(兵使) 사또가 분부한 내용
에, ‘비류가 병영 아래 근처까지 닥쳤는데 방어하는 군사를 진영에서 풀
어내기가 매우 어려우니 지금 이러한 형편을 초토영(招討營)에 가서 고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분부하는 내용에, ‘나주의 군대를 동원
할 계획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역에 있는 4백여 호가 텅 비는 지경에 이
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처분을 내려 주셔서 경군
(京軍) 수백 명을 동원하여 즉시 토벌하도록 하여 놀라서 흩어진 백성들
로 하여금 예전처럼 안도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도

갑오군정실기 8 135
착한 전라병사의 공문 내용에, “이달 5일에 비류 1만여 명이 장흥에 모여
부사(府使)를 잡아 심하게 때려 머리를 다쳤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
직 알 수 없으며,35 공형(公兄)을 총살하고 남녀를 살해하여 흐르는 피
가 도랑을 이루었습니다. 또 좌측 연안에서 정탐한 자들에게 들으니 ‘각
처의 비류 수만 명이 장흥을 함락시킨 무리들과 합세하여 곧바로 본 병영
을 도륙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방어와 수비를 비록 엄히 단속한다고
는 하지만 병사들이 모두 민간의 장정인 데다가 중과부적임을 생각하면
성을 잃어버릴 재난이 눈앞에 닥쳐 있습니다. 속히 구원하는 방책을 꾀하
여 성이 유린당하는 재난을 면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병영과 역
에서 알리는 경계의 보고가 이처럼 급박하기 때문에 진시(辰時, 오전 7~9
시)쯤에 각 소대를 거느리고 나주를 향하여 출발하였으며, 여산에서 군대
를 위로하기 위하여 사용한 음식은 책자로 만들어 올립니다.
제(題) : (보고문이) 도착했다. 병영에서 지원하러 간 이후의 상황을
계속 급히 보고하라.

(번역 : 류호석 전북대 호남권한국학자료센터 연구원)

35 장흥에……없으며:장흥부사 박헌양(朴憲陽)은 농민군에게 살해되었다. 이명언,


이희인 등 지도자들이 이끄는 농민군은 이때 장흥관아를 점령하고 이어 강진으로 진
출하여 전라병영도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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