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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東硏究 2016년 제35권 1호, 41-72

‘아랍의 봄’ 전후의 정치와 젠더화


- 이집트를 중심으로-*
1)

조희선**

목 차
Ⅰ. 서론
Ⅱ. ‘아랍의 봄’전후의 이집트 정치상황
Ⅲ. ‘아랍의 봄’ 전후의 여성과 정치
Ⅳ. ‘아랍의 봄’과 젠더화
Ⅴ. 결론

* 이 논문은 2015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5S1A5A2A01010206)
**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교수
42 중동연구 제35권 1호

<Abstract>

Politics and Gendering before and after


‘Arab Spring’ in Egypt

Cho, Hee-Sun
(Myongji University)

In most countries, including Egypt, where ‘Arab Spring’ has


overtaken, strong doubt have been expressed as to achievements of
Democratization Revolution; except Tunisia, which succeeded in
democratization to some degree. However, there is no objection to
consider ‘Arab Spring’ in Egypt as a revolution, because the
authoritarian dictatorship government has collapsed by the power of
the people. Even though Egypt achieved remarkable democratization
through a people's revolution of all classes, religions and sexes, it
turned out to be the revival of former regime. This article starts
from the assumption that the strange counter-revolutionary
settlement in Egypt is closely connected with gender issues.
It is not the first time that women fought for national cause in
time of national crisis, together with men, crossing gender line. The
appearance of Egyptian women in fierce demonstration site or
overnight sit-in site was impressive enough to change the old image
of Arab women. After nationalist revolution, however, Egyptian
women were excluded, marginalized, and were coerced to remain in
more gendered social space, while suffering jeer, insult, sexual
harassment, sexual violence, and rape in public sphere. Especially
with the accession to power of conservative Islamic party after
‘아랍의 봄’ 전후의 정치와 젠더화 - 이집트를 중심으로- 43

revolution, ‘Arab Spring’ left severe counter-revolutionary effect for


women, to such an extent as some people say ‘Arab Winter’.
A study on politics and gendering in Egypt before and after ‘Arab
Spring’ have importance in respect of weighing up the possibility of
true democratization in Egypt, because women and gender are
regarded as core elements in processes of 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 This article can also demonstrate the reason why
conservative Islamic party’s rule ended in failure is bound up with
gendering. As the political and social movement began in 2004 in
Egypt, bearing fruit named ‘Arab Spring’ in 2011, and Egyptian
Islamic government came to an end in 2013, the temporal range of
this article will be limited to 2004-2013.

Key Words: ‘Arab Spring’, ‘Muslim Brothers’, Gender, Gendering,


Egyptian Women, Women’s Political Participation,
Democracy, Democratization

Ⅰ. 서론

1970년대 이후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 민주화의 ‘제3의 물결’이 불


어 닥쳤으나 ‘MENA 예외주의’1)라는 개념이 생겨날 정도로 중동과 북부
아프리카 지역은 민주화 물결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은 북부 아프리카와 중동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기존의 ‘MENA 예외주의’에 도전하는 듯하였다. 사실
미국정부는 수십 년간 ‘MENA 예외주의’를 정책 방향으로 설정하였으나
2001년 9월 11일 사태를 계기로 외교정책에 수정을 가하면서 ‘테러와의

1) 아랍과 중동의 정치문화와 종교가 민주주의의 현대적 규범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하


지 않다는 주장으로 미국 정부는 수십 년간 이를 아랍과 중동에 대한 정책방향으
로 설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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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선포하였다. 군사적으로 테러단체를 추적하는 것과 더불어 미국


정부는 중동과 북부아프리카 지역의 민주화 촉진이 그 해결책이라 믿었
다. 결국 튀니지의 ‘아랍의 봄’을 시작으로 이 지역에 민주화 바람이 불었
고 일부 학자들은 이를 ‘제4의 민주화물결’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
(Olimat 2014, 3).
그러나 ‘아랍의 봄’이 시작된 국가로 오늘날 어느 정도 민주화의 성과
를 거둔 것으로 간주되는 튀니지를 제외하고는 ‘아랍의 봄’이 불어 닥쳤
던 이집트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동과 북부아프리카 국가에서는 민주화
혁명에 대한 회의론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2010년 말부터 이 지역에서
목격되었던 대중 시위와 봉기를 민주화 혁명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랍의 봄’ 이후 정치적 억압과 권위주의가 다시 부활하였
다는 점에서 이를 반혁명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컨대 ‘아랍의
봄’ 이후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된 이집트의 무함마드 무르시(Muhammad
Mursi) 대통령은 정적들을 탄압하는가 하면 반민주적, 반여성적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전 정권의 군 장성 출신 압둘 팟타흐 알 시시(‘Abd
al-Fattah al-Sisi)에게 다시 정권을 내어주는 반혁명적 결과를 야기하
였기 때문이다(El-Said, Meari, Pratt 2015, 2-3).
그러나 국민의 힘에 의해 권위주의 독재체제가 무너졌다는 점에서 이
집트의 ‘아랍의 봄’을 일차적으로 혁명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본 연
구는 이집트가 성과 계층, 종교, 연령을 초월한 시민혁명을 통해 민주화
를 이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전 체제의 부활로 보이는 반혁
명적 결과로 이어진 것이 젠더 이슈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가정에서 출
발하였다. ‘아랍의 봄’이 비교적 민주화 과정으로 이어지고 있는 튀니지와
그렇지 않은 이집트를 비교해 볼 때 그 핵심을 이루는 것이 젠더 문제라
는 가정 하에서 본고에서는 ‘아랍의 봄’을 전후한 이집트의 정치와 젠더
화에 대해 연구하고자 한다.
여성은 다양한 의미와 영역2)에서 국가에 기여한다. 국가의 위기 시 나

2) 첫째,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민족 그룹의 구성원을 재생산한다. 둘째, 여성은 ‘인종


적/민족적 그룹의 경계’를 재생산한다. 셋째, 여성은 집단적 정체성을 재생산하고
그 문화를 전수하는데 참여한다. 넷째, 여성은 인종적/민족적 카테고리의 건설, 재
생산, 전달에 사용된 이데올로기적 담화의 상징이 된다. 마지막으로 여성은 ‘민족
‘아랍의 봄’ 전후의 정치와 젠더화 - 이집트를 중심으로- 45

타나는 혁명이나 민족주의의 운동과정에서 여성들은 ‘민족적, 경제적, 정


치적, 군사적 투쟁’에 참여하는 것(Wael 2014, 480)이 일반적이다.
MENA지역 여성들 또한 혁명이나 국가적 투쟁에 참여한 것은 ‘아랍의
봄’이 처음은 아니었다. 20세기 초 이집트 여성들은 영국의 식민주의에
대항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알제리 여성 또한 프랑스에 대항한 독
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가장 가깝게 이스라엘에 대항한
팔레스타인 투쟁에서 여성들이 시위와 투쟁에 적극 참여한 것은 주목할
만하였다.
이렇듯 국가의 위기 시 민족적 대의를 위해 여성들이 젠더라인(gender
line)을 넘나들며 남성들과 함께 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격렬
한 시위 현장이나 밤을 지새우는 농성장에서 함께 하였던 이집트 여성들
의 모습은 기존의 아랍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깨는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
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남성적 특성을 지니는 민족주의 혁명 이후 여성들
이 배제되고 주변화되는 현상은 이집트의 ‘아랍의 봄’ 이후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투쟁의 과정에서 권한을 가지지 못하는 여성들은 투쟁 이후의
조직에서도 권한을 가지기 어렵다. 만약 민족주의가 젠더 파워적 분석에
서 충분히 검토되지 않을 경우 민족 국가는 남성의 희망과 남성의 열망,
남성의 특권의 보고이다.”(Wael 2014, 481에서 재인용) 따라서 국가적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이 희생되어야 하는 민족주의 혁명 이후에 여성들이
주변화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한편, 혁명의 대의를 위해 공적영역에 참여하였던 여성들은 공권력뿐
만 아니라 일반남성들로부터 야유, 욕설, 성희롱, 성폭력, 강간 등에 시달
리면서 이전보다 더욱 젠더화된 사회적 공간에 머물도록 강요받았다. 특
히 이집트에서는 혁명 이후 정치권력 배분이라는 세력 다툼 앞에서 보수
적인 이슬람정당이 집권함으로써 ‘아랍의 봄’은 여성들에게는 ‘여성의 겨
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반혁명적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혹자는 ‘아랍
의 봄’을 꽃이 만개하나 모래바람 캄신(Khamsin)이 불어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계절로 간주되는 ‘이집트의 봄’에 비유하기도 하였다(Sika 2014,
61).

적,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투쟁’에 참여한다(Wael 2014, 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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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전후 이집트의 정치와 젠더화에 관한 연구3)는 이집트에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있다. 여성과 젠더는 혁명의 과정과 반혁명의 과정에서 핵심요
소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또한 본 연구는 보수적인 이슬람정당의 집권이
결과적으로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도 젠더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증명
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집트는 ‘아랍의 봄’ 이래 이슬람식 정치
구현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이슬람정당에 의해 구현된 정치적, 사회적
젠더화를 평가할 수 있는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의 시간적
범위는 2004년 이집트에서 시작된 정치적, 사회적 움직임이 2011년 ‘아
랍의 봄’으로 열매를 맺었고, 2013년 이집트에서 이슬람주의 정부가 종
식되었다는 점에서 2004년부터 2013년까지 한정하고자 한다.

Ⅱ. ‘아랍의 봄’ 전후의 이집트 정치상황

본 장에서는 ‘아랍의 봄’ 전후의 이집트 정치와 젠더화를 살펴보기에


앞서 이집트 혁명의 씨앗이 된 ‘아랍의 봄’ 이전의 정치상황, ‘아랍의 봄’
의 발발과 그 이후의 정치상황, 그리고 이슬람정당의 집권으로 나타난 민
주주의의 패러독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혁명의 씨앗

이집트 시민혁명의 결정적 계기는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무바라크(Mubarak) 대통령은 자신의 차남인 가말 무바라크(Gamal
Mubarak)에게 권력을 승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의
확대중동구상이 발표되고 민주화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미국의 우방인
이집트에 대한 정치개혁 압박이 시작되었다. 이집트의 진보진영은 이 기
회를 이용하여 거리 시위에 나섬으로써 이집트의 민주화를 희구하는 정

3) ‘이집트 사회와 젠더화’에 대한 연구는 본 연구의 후속연구로 진행하고자 한다.


‘아랍의 봄’ 전후의 정치와 젠더화 - 이집트를 중심으로- 47

치 운동을 촉발시켰다. 이 운동은 아랍어로 ‘키파야’(Kifayah, 충분해!)라


불렸으며 이 운동의 영향으로 2005년 헌법 및 선거법 개정됨으로써 진일
보한 정치체제가 등장하였다(인남식 2011, 248). 그 결과 2005년 12월
무슬림형제단은 150개의 선거구에서 경쟁할 수 있었고 그 가운데 90석
을 차지하였다. 이슬람주의자들의 성공에 위험을 느낀 이집트 정부는 결
국 2006년에 실시될 계획이던 국회의원선거4)를 2008년으로 연기시켰
다.
한편, 2007년에 이루어진 헌법 개정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차남 가말
무바라크가 권력을 승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새로운 헌법은 기존
체제의 재가를 받지 않은 대통령 후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그리고
헌법 179조는 민간인들을 재판할 수 있는 권리를 군사법정에 부여하였으
며, 정부당국이 시민들을 체포하거나 조사할 수 있는 더 많은 권한을 부
여하였다. 헌법 88조의 개정은 선거에 대한 사법부의 감시 기능을 약화
시키는 한편, 헌법 5조는 무슬림형제단의 정당 설립을 원천적으로 봉쇄
하였다(Ghabra, 2015, 202).
무바라크 정부의 이러한 반민주적 조치는 2008년 4월 6일 노동계의
파업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2008년 노동계의 파업은 2011년 혁명에 결
정적 영향을 미친 ‘4월 6일 젊은이 운동’을 결성시켰다. 이들은 2008년 3
월 낮은 임금과 높은 식료품값에 항의하는 마할라(Mahallah) 방직공장의
파업을 지지하기 위해 페이스북(Facebook) 페이지를 만든 바 있었다. 4
월 6일 이후 이 운동은 비폭력 시위를 통한 무바라크 체제의 전복을 목표
로 하는 연대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오프라인에서 서로 만난 적이 없었던
‘4월 6일 젊은이 운동’의 활동가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의 온라인을
통해 활동하다가 후에 반정부 거리시위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키파야’
운동, ‘4월 6일 젊은이 운동’, 그 밖에 시위동원을 통해 젊은이들과 시민
활동가들 사이에서 작은 파업과 시위가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확
신이 커지면서 일반 대중들의 의식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Ghabra 2015, 202-203).
무바라크 정부는 시민들의 반항적 분위기를 감지하고 당시 내무부 장

4) 당시 국회의원선거가 3단계에 걸쳐 진행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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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이었던 하빕 알 아들리(Habib al-‘Adli)에게 의존하여 일반시민들을


더욱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2010년 동안 하빕 알 아들리가 주도하는 공
권력을 통해 반대파 지도자들에 대한 협박을 비롯하여 학생운동가들, 더
나아가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공포정치가 만연하였다. 공권력은 이
들을 구타하거나 폭행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으며, 그 결과 ‘아랍의
봄’ 이전 이집트 정부와 국민들은 선포되지 않은 반 전쟁상태 속에 있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Ghabra 2015, 203).

2. ‘아랍의 봄’, 그리고 그 후

원래 ‘아랍의 봄’은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중부 소도시 시디 부지


드(Sidi Bouzid)에서 과일노점상을 하는 무함마드 부아지지(Muhammad
Bouazizi)가 경찰의 모욕과 횡포를 이기지 못하고 분신자살을 기도한 후
사망하면서 촉발되었다. 이로 인해 결국 튀니지의 벤 알리(Ben ‘Ali) 정
권이 붕괴되었으며 그 혁명의 여파가 이집트로까지 확산되었다. 이집트
에 혁명이 쉽게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가지 구조적 이유가 있
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이유는 곡물가 상승으로 인한 식량 보조금의 삭
감과 일자리 부족, 특히 청년층의 높은 실업 등으로 인한 경제적 문제를
들 수 있다. 둘째, 정치적 이유로 타락하고 부패한 권위주의와 독재정권
을 들 수 있다. 셋째, 특정지역에서 발생한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정치적
조류로 확산되게 한 기제로서 인터넷과 미디어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인남식 2011, 240-241).
튀니지에서 부아지지의 분신자살이 혁명을 촉발하였다면, 이집트의 봉
기는 경찰 고문으로 사망한 알렉산드리아 출신 28세 청년 칼리드 사이드
(Khalid Sa‘id)를 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페이스북 그룹에 의해 촉발되
었다. 이 페이스북 그룹은 2011년 1월 25일 시위를 촉구하면서 공권력의
잔악성과 수십 년간 지속된 권위주의 체제의 종식을 주장하였다. 온라인
을 통해 유명해진 이러한 이니시어티브에 오프라인 단체들이 합류하면서
이집트 현대사에서 가장 큰 혁명으로 기록되는 ‘아랍의 봄’이 발발하기에
이르렀다(Wael 2014, 483).
‘아랍의 봄’ 전후의 정치와 젠더화 - 이집트를 중심으로- 49

혁명 초기 무바라크 대통령과 집권 여당 ‘민족민주당’(NDP)은 혁명 세


력을 과소평가하여 강경대응으로 일관하였다. 결국 1백만 명의 사람들이
카이로 시내 중심에 위치한 타흐리르(Tahrir) 광장에 모여 농성을 시작
하였고 이들은 음식과 잠자리, 화장실 등을 마련하는 등 매우 조직적인
운동을 펼쳤다. 국민들의 신뢰를 받던 이집트 군은 무바라크 정권과 시위
대가 합의에 이르기 전까지 집회, 시위 및 농성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
언하였다. 결국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타흐리르 광장에서 수많은 시위대
들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자 시위대는 더욱 과격해졌고 2012년 1월 11
일 무바라크 대통령은 하야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대규모 봉기가 시작된 2011년 1월 25일부터 30년간 권좌에 있었던 무
바라크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한 2011년 2월 11일까지의 18일 동안을 진
정한 의미의 ‘아랍의 봄’ 혁명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Abouelnaga 2015, 35). 이 기간 동안 타흐리르 광장은 성과 계층, 종교,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들이 하나가 된 유토피아와 같은 곳이었다. 타
흐리르 광장의 시위자들은 서로간의 깊은 신뢰와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
으며 특정한 리더십 없이 비폭력, 선동 거부, 자기 통제 및 협력의 방법으
로 시위 현장을 지켰다. 특히 이 기간 동안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혁명 이
전과 이후에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성희롱이나 성폭력 사건이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
1월 25일 혁명의 과정에서 무슬림형제단은 간부들에게 시위에 개인적
으로는 참가하되 대표로는 참가하지 말 것을 주문하였다. 그들이 공식적
으로 시위에 참여하게 될 경우 무바라크 체제로 하여금 이러한 시위가 이
슬람주의자들에 의한 정권 전복의 시도라고 호도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첫 금요집회부터 무슬림형제단의 젊은 대원들은
타흐리르 광장을 지키며 시위대의 최전선을 방어하였다. 1월 28일, 그리
고 2월 2일 대규모 시위 당시 무슬림형제단들은 진료실을 설치하여 약품,
초기처방, 앰뷸런스를 제공하는 등 눈에 띄는 활약을 펼쳤다(Ghabra
2015, 209).
이집트에서 ‘아랍의 봄’이 일차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군부가 무바라크 정권에 반기를 들었던 점을 들 수 있다. 군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도입으로 자신들의 경제적 기득권을 침해하려는 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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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바라크와 그 측근들의 권력 승계를 원치 않았다. 2011년 2월 10일 군


사최고위원회(SCAF)는 비밀회의를 통해 무바라크 대통령에 대한 지지
를 철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군부의 결정에 따라 이튿날 무바라크
대통령은 하야성명을 발표하면서 군사최고위원회에 전권을 이양하였다5)
(박찬기 2014, 44). 무바라크의 퇴각 이후 이집트의 질서회복을 떠맡은
군부는 이집트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드러내면서 혁명의 과도기를
주도하였다.

3. 혁명의 과도기, 민주주의의 패러독스

혁명의 과도기 상황에서 군사최고위원회는 민심수습의 차원에서 무슬


림형제단의 도움을 받기 위해 모종의 정치거래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무슬림형제단은 복지시설의 운영, 봉사활동, 종교 활동 등으로 일반 국민
들 사이에서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조직 면에서도 월등하게 유
리한 위치에 있었다(박찬기 2014, 45). 따라서 군사최고위원회는 치안이
붕괴되어 무정부 상태에 빠질 경우 무슬림형제단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결국 군부는 무슬림형제단이 혁명의 전면에 나서
지 않을 경우 혁명 이후 정치활동을 전면 허용한다는 합의를 해 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Ghabra 2015, 209).
2월 12일 군사최고위원회는 30년 동안 작동되던 비상계엄사태의 중단
을 선언하면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과
도정부를 이끌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곧이어 군사최고위원회는 이집트
국회 해산과 1971년 헌법 중지를 선언하고 개헌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
였다. 주로 이슬람주의자들로 구성된 개헌위원회가 제시한 가장 중요한
사항은 국회의원선거 실시 이후 신헌법 제정을 위한 제헌위원회를 구성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의회에서 무슬림형제단이 다수의 의
석을 차지할 것이라고 확신하였고 결국 신헌법 제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군사최고위원회는 3월 19일 위원회의

5) 1971년 이집트 헌법에 따르면 무바라크가 권력을 군사최고위원회에 넘긴 것은 불


법이다. 헌법은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경우 하원의장이, 그리고 하원의
장도 부재할 경우 헌법재판소장이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랍의 봄’ 전후의 정치와 젠더화 - 이집트를 중심으로- 51

이러한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붙였고 무슬림형제단은 이를 이슬람의 위상


에 대한 투표로 왜곡시켰다. 소위 ‘우선 헌법’ 전략을 주창하였던 세속주
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이 개정안은 국민투표에서 77%의 찬성으로 승인
되었다(Selim 2014, 22-23).
혁명의 과도기 동안 군사최고위원회는 구체제를 거의 변화시키지 않았
다. 전 대통령 무바라크는 샤롬 알 쉐이크(Sharum al-Shaykh)에서 ‘강
요된 은퇴’를 즐기고 있었고 그의 측근들은 기소를 면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국민들의 시위가 지속되자 군사최고위원회는 9월 28일 국회의원선
거를 관장할 새로운 선거법을 발표하였다. 결국 2월 28일을 시작으로 하
원의원(Majlis al-Sha‘b)선거는 3단계에 걸쳐 진행되었고, 상원의원
(Majlis al-Shura) 선거는 두 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다.6) 투표를 하지 않
은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한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전체 유권자의 62%가
참여하여 높은 투표율을 보였다. 반면, 벌금이 부과되지 않았던 상원의원
선거의 투표율은 10%로 떨어졌다.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벌금부
과로 이전에 투표를 해 본 적이 없는 가난한 계층과 농촌인구가 대거 투
표에 참여하면서 하원의원 선거는 이슬람정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Selim 2014, 25-27).
선거 결과 두 이슬람정당, 즉 자유정의당(FJP)과 극단적 보수주의 누
르당(al-Nur)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무슬림형제단을 대표하는 자유
정의당은 508석 가운데 235석을, 누르당은 121석을 차지한 반면, 세속주
의 정당이 차지한 의석은 35석에 불과하였다. 세속주의 정당이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반이 약한 상태에서 신앙심 깊은 보수적 유권자들은
두 이슬람정당에 표를 몰아준 것이다(Moghadam 2013, 402). 의회 의석
의 3분의 2가 이슬람주의자들로 채워졌다는 것은 바로 혁명의 주요 세력
이 주변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랍의 봄’을 反이슬
람적이라고 비난했던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 의석의 1/4을 차지했다. 새
로 선출된 의회는 긴급한 사회, 경제 문제를 해소하기 보다는 이집트의
‘이슬람화’에 초점을 맞췄다. 결국 2012년 6월 14일 헌법재판소는 개인

6) 투표가 하루에 실시되었던 튀니지에서와는 달리 이집트에서는 여러 날에 걸쳐 투


표가 진행되었고, 또 각 단계의 투표 결과가 즉시 공표되어 그 다음 단계의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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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를 위한 의석수를 무시하였다는 점을 들어 국회의원선거를 위헌으로


판결하였고 이어 군사최고위원회는 국회를 해산시켰다.
한편, 2012년 5월과 6월 사이 두 단계에 걸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는 무바라크 대통령 시절 수상을 지낸 아흐마드 샤피끄(’Ahmad Shafiq)
를 3% 차이로 누르고 무슬림형제단을 대표하는 무함마드 무르시가 당선
되었다.7) 무르시는 2012년 6월 30일 혁명 이후 처음으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민선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무르시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친 이슬
람주의 정책을 추진하다가 시위대와 군부에 의해 1년 만에 실각하였다.
무르시는 막대한 권력을 떠안고 여성의 권리를 무시하는 헌법을 밀어붙
였다. 그리고 공공 서비스를 복원하고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실천
하지 못했다. 결국 2013년 7월 무르시 정권을 붕괴시킨 장본인이었던 시
시가 2014년 5월 실시된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이슬람정권은
막을 내렸다(박찬기 2014, 49).

Ⅲ. ‘아랍의 봄’ 전후 여성과 정치

‘아랍의 봄’ 전후 여성과 정치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이슬람세력의


집권이라는 상황을 맞은 이집트의 ‘아랍의 봄’이 가져온 젠더화와의 비교
를 위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본 장에서는 무바라크 시대의 국가
페미니즘, 그리고 혁명의 전조라 할 수 있는 탈권위주의 페미니즘, 그리
고 ‘아랍의 봄’과 그 이후에 대해 연구하고자 한다.

7) 무르시의 정적이었던 샤피끄는 군사최고위원회가 몇 시간 전에 자신에게 승리를


알렸다고 주장하였으나 선거관리위원회는 최종적으로 무르시의 승리를 확정하였
다. 무리시가 승리하지 못할 경우 무슬림형제단이 내전으로 몰고 갈 것을 우려하
여 선거결과를 왜곡하였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선거가 끝난 후 샤피끄는 가족과
함께 아부다비로 정치망명 하였다(Selim 2014, 29).
‘아랍의 봄’ 전후의 정치와 젠더화 - 이집트를 중심으로- 53

1. 무바라크 시대 권위주의와 국가페미니즘

1990년대는 이집트 여성의 권리 및 관련 이슈들이 과잉으로 쏟아져 나


왔던 시기였다. 1990년대 경제적 압박이 거세지자 무바라크 체제는 공적
영역에 NGO를 참여시킴으로써 국가발전 프로세스를 돕도록 결정하였다.
이에 여성단체를 포함한 NGO단체들이 급격하게 증가하였으며 1998년
약 1만개 정도였던 NGO단체는 2008년에는 3만 개 정도로 증가하였다.
무바라크 정권은 NGO단체를 매개로 국제사회에서 정권의 합법성을 인정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제 무바라크 정권은 NGO단체의 자율성을 보장
하기 보다는 NGO단체의 운영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여성단체 역시 국가
의 관료조직과 깊숙이 연관되면서 진정한 의미의 페미니즘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결국 무바라크 체제는 국가주도의 여성단체를 이끌면서 젠더를 ‘기능
적 도구’가 아닌 ‘장식적 도구’로 이용하였다. 무바라크 체제는 국가가 민
주화되었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 여성과 관련된 모든 국제협약을 비준
하였다. 무바라크 체제는 여성 이슈와 관련된 특정한 이미지를 추구하는
한편, 여성단체를 비롯한 NGO단체가 반체제운동에 동원될 것을 두려워
하며 이들 단체의 노력이나 성과를 억압하였다(Abouelnaga 2015,
36-37).
따라서 이집트 여성에게 주어진 다양한 권리는 국가가 주도하는 국가
페미니즘의 결과였으며 정치와 여성문제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렇듯 이집트 여성의 권리는 전통과 문화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권위주의 체제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정치체제가 바뀔
경우 언제라도 흔들릴 수 있는 불안한 형태였다. 더 나아가 독재적, 권위
주의적 체제의 이념을 거부하는 다른 정치체제가 들어설 경우 긍정적인
의미의 여성의 권리도 전 체제의 이념과 결부되어 언제라도 폐기될 수 있
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무바라크 체제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비전을 이슬람의 가르침과 일치
시킴으로써 국가주도의 페미니즘을 강화시켰다. 당시 이집트 사회에 만
연되어 있던 종교적 보수주의는 체제로 하여금 여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54 중동연구 제35권 1호

종교기관과 결탁하도록 하였다. 무바라크 체제의 후견인과 다름없었던


이집트 최고의 종교기관 아즈하르(al-’Azhar)는 파트와(fatwah, 법적 견
해)를 통해 여권의 신장과 이슬람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확인
해 줌으로써 체제의 여성 정책에 부응하였다(Sika 2014, 64).
2011년 이전 이집트의 국가페미니즘은 여성관련 이슈를 독과점 함으
로써 다양한 여성의 목소리를 담을 수 없었다. 대통령의 영부인이 여성의
권리를 대변하는 대표주자가 됨으로써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왜곡
될 수밖에 없었다. 2000년 초 무바라크 정부는 여타 여성단체와 협력하
는 ‘국가여성위원회’(NCW)를 설립하여 영부인 수잔 무바라크(Suzan
Mubarak)에게 의장직을 맡겼다. 그 결과 여성문제와 관련된 많은 법들이
정부 주도로 제정되었다. 2000년 여성들이 혼인계약 시 받은 재정적 권
리를 포기할 경우 이혼을 먼저 제기할 수 있는 쿨으(Khu‘)법이 제정되었
다. 2004년에는 신랑신부가 혼인 시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
의 혼인계약서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같은 해 제정된 가족보험 및 이혼
수당펀드는 이혼당한 여성들이 겪는 재정적 부담을 완화시켜 주기도 하
였다. 또한 이혼 시 자녀의 나이가 15세가 될 때까지 어머니가 자녀를 양
육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양육법이 제정되는가 하면, 어머니도 자녀들에
게 자신의 국적을 넘겨줄 수 있는 국적법이 통과되기도 하였다. 또한 여
성할례(FGM) 시술을 불법화함으로써 여성 신체에 대한 주권을 회복시
켜 주기도 하였다. 한편, 2007년 개정된 헌법은 정치 분야에서 여성들이
오랜 동안 요구해 오던 여성의원 할당제를 부여하였다. 2010년 UN새천
년개발목표에 따라 여성들은 국회에서 64석을 추가로 할당받았다. 그러
나 2011년 1월 25일 혁명과 더불어 국회가 해산되면서 전 정권이 약속
한 여성의원 할당제 역시 폐기되기에 이르렀다(Sika 2014, 64).
이렇듯 무바라크 시대의 정치와 여성은 밀접한 상관관계에 놓여 있었
으며 여성 이슈는 주로 체제에 의해 이용당했다. 체제의 하수인 역할을
하던 종교기관 역시 여성문제에 관한 정부정책을 지지함으로써 무바라크
시대의 국가페미니즘은 권위주의 체제, 서구를 추종하는 체제를 상징하
는 대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 결과 아랍의 봄 이후 과도기를 지나고
무슬림형제단이 집권하였을 때 새로운 정부는 전 체제의 영향력에서 벗
어나기 위한 최우선의 조치로 여성의 권리를 부인하는 ‘페미니즘의 역설’
‘아랍의 봄’ 전후의 정치와 젠더화 - 이집트를 중심으로- 55

이라고 부를법한 정책과 법을 쏟아냈다.

2. ‘아랍의 봄’ 이전의 탈권위주의 페미니즘

무바라크 정권 주도의 국가페미니즘과 더불어 이집트에는 2000년대


초부터 탈권위주의적 페미니즘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초 급
격히 늘어난 정치시위에는 여성들의 참여가 눈에 띄게 증가하였으며
2004년 시작된 ‘키파야’ 운동에도 여성 활동가들이 즉각 반응하였다. 키
파야 운동은 거리시위를 통해 무바라크 체제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이
집트 역사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정치운동이 되었다. ‘거리는 우리의 것’
이라는 키파야 운동의 슬로건은 이런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2005년 5월 키파야 운동의 일환으로 여성 활동가들은 카이로 시내에
서 소규모 시위를 벌였다. 민족민주당 추종자들과 폭력배들은 이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희롱과 성폭력을 자행하였고 경찰들은 이를
방관하였다. 이에 여성 활동가들은 언론인연합회 앞에서 시위를 벌었으
며 여성에 대한 차별과 성폭력에 대한 책임을 물어 내무장관 하빕 알 아
들리의 사퇴를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성 활동가들은 소셜네트워크
를 통해 여성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시위 동원 정보는 인터넷의 웹상이
나 휴대폰을 통해 유통되었으며, 정치참여의 경험은 없으나 이제 뭔가를
하길 원하는 여성들은 네트워크를 통해 이를 확산시켰다. 여성 활동가들
은 여성운동에 경험이 있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어떤 활동도 한 적이 없는 다양한 여성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또한 여성
활동가들은 이슬람주의자, 좌파, 페미니스트, 세속주의자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정치, 사회 세력을 동원함으로써 무바라크 체제의 장기집권과 잔
악성에 대항하는 여론을 형성할 수 있었다. ‘거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캠
페인을 이끌어냈던 키파야 운동 및 시위는 민주주의를 향한 자발적 형태
의 탈권위주의 페미니즘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비록 키파야 운동이 오랜
기간 지속되지는 못했으나 이에 따른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 이슈를 ‘젠더
와 발전’이라는 전통적 국가페미니즘적 접근 방식이 아닌 탈권위주의적
논쟁으로 옮아가게 하는 전환점을 마련하였다(Sika 2014, 65-66).
56 중동연구 제35권 1호

이렇듯 이집트에서 새로운 형태의 탈권위주의 페미니즘 운동은 거리에


서 시작된 정치 시위운동과 더불어 자라났다. 그리고 일부 여성단체들은
나세르시대 이후 작동되던 전통적 페미니즘 운동에서 떨어져 나오기 시
작하였다. 여성 활동가들은 무바라크 시대의 국가주도 페미니즘에서 벗
어나 정치시위를 통해 권위주의적 권력구조에 저항하는 방법을 익혀나갔
다. 예컨대, 2006년 마할라 방직공장에서 일어났던 파업에서 여성노동자
들은 인상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2006년 12월 파업은 3천 명에 달하는
여성노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첫 번째 파업이 있은 지 2년 후인
2008년, 정치활동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여성 활동가 이스라 압둘 팟타
흐(’Isra’ ‘Abd al-Fattah)는 마할라 노동자들과 연대하서 총파업을 촉구
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러한 방식의 여성운동은 국가가 주도하
던 페미니즘 방식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남성들에 의한 전통적 동원
방식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이스
라의 새로운 동원전략은 권위주의 체제의 종식을 주창하였던 ‘4월 6일 젊
은이 운동’에서뿐만 아니라 ‘아랍의 봄’ 전후의 시위 동원 과정에서도 사
용되었다(Sika 2014, 66).

3. ‘아랍의 봄’의 발발과 여성, 그 이후

앞서 ‘아랍의 봄’의 불씨는 튀니지 중부의 소도시 시디 부지드에서 과


일노점상을 하는 무함마드 부아지지의 분신자살 시도로 촉발되었다고 언
급한 바 있다. 그러나 무함마드 부아지지를 자살로 몰고 간 사건 뒤에는
파디야 함디(Fadiyah Hamdi)라 불리는 여성경관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사건의 발단은 여성경관 파이야 함디가 무함마드
부아지지의 뺨을 때린 것에서 비롯되었다. 여성경관으로부터 모욕을 받
은 부아지지는 결국 2010년 12월 17일 분신 사망하였다. 아이러니컬하
게도 부아지지를 모독한 사람은 여성경관이었고, 그가 여성에게서 받은
모욕으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종종 간과되고 있다(Olimat 2014,
10).
부아지지가 여성에 의해 모욕을 당했다는 사실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의
‘아랍의 봄’ 전후의 정치와 젠더화 - 이집트를 중심으로- 57

존엄성뿐만 아니라 남성성을 모독당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성에 의한


이러한 모독은 이슬람문화에서 용인되거나 용서될 수 없는 것이었다. 여
성으로부터 뺨을 맞은 후 부아지지는 시청으로 달려가 불만을 제기하였
으나 해답을 얻지 못하자 시장 동료 상인들에게 가서 자신이 모욕당한 처
지를 알렸다. 그리고 시내로 가서 자신의 몸에다 페인트 시너를 붓고 분
신하였다. 부아지지가 분신을 한 뒤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가는
과정은 모두 촬영되었다. 한 블로거가 이를 페이스북에 올리자 알자지라
방송은 이 비디오를 메인 뉴스로 방영하였다. 그러자 부아지지의 고향사
람들은 시위를 벌였고 억압과 탄압의 상징인 정부청사를 공격하였다. 경
찰은 여느 때처럼 강경진압을 하였으나 시위는 결국 전국에 걸쳐 빠르게
번졌고 부아지지는 사건이 일어난 지 3주 만에 사망하였다(Olimat 2014,
10). 이렇듯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랍의 봄에 불씨를 당긴 것은 남성
이 아닌 여성, 아니면 지극히 젠더화된 사회 관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성에 의해 촉발된 아랍의 봄 이후 과거 체제를 부정하려는 무슬림형
제단 정권에 의해 이집트 여성은 암흑기를 맞았다. 무바라크의 퇴진 이후
치러진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성 의원할당제는 취소되었고 약 2%에
불과한 여성들만이 하원과 상원에서 당선되었다. 2012년 1월, 26명의 장
관으로 이루어진 내각에서 여성들은 3명에 불과하였다. 입법부와 행정부
에서 여성이 낮은 비율을 차지하였다는 것은 이제 여성 이슈가 새로운 체
제의 어젠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주었다. 국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자유정의당과 누르당은 페미니즘 역설적인 법안을 통과시키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는 쿨으법의 폐지, 여성 성희롱 방지 관련 형법의 폐지, 마흐람
(mahram)8) 없이 여행할 수 있는 권리의 폐지, 이혼 시 자녀가 15세가
될 때까지 어머니가 양육할 수 있는 권리의 폐지, 국적법의 폐지, 여성할
례의 합법화, 혼인최소연령의 폐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Sika 2014,
68).
포스트 무바라크 시대 전환기 시대에서 여성의 권리와 관련된 유일한
성과는 여성가장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의료혜택뿐이었다. 결론적으로
아랍의 봄 이후 이집트 여성들은 공적영역에서의 진출이 억제되고, 보호

8) 남편, 혹은 여성이 혼인할 수 없는 아버지, 아들, 삼촌과 같은 가까운 남자친척


58 중동연구 제35권 1호

받는 여성으로서의 권리는 향상됨으로써 젠더화된 역할만을 부여받았다.


이렇듯 젠더 유토피아로 시작된 혁명은 정치와 사회 속에서 여성의 역할
을 젠더화시킴으로써 여성들에게는 민주주의의 역설이 되었다.

Ⅳ. ‘아랍의 봄’과 젠더화

젠더란 ‘여성과 남성의 적합한 역할에 대한 관념을 사회적으로 만들어


내는 문화적 구성물’이다. 젠더를 통한 정체성의 형성과 그에 따른 권력
관계의 구성은 근대정치의 기본적인 틀을 만들어낸다. 특히 근대성의 중
심적인 테마로서 공과 사의 분리 및 성적 정체성, 그리고 그에 근거한 공
적영역의 작동 방식인 대의제의 문제 등은 젠더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충
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는 것들이다(홍태영 2004, 137-138). 정치적
혁명으로 간주되는 ‘아랍의 봄’ 역시도 젠더적 측면에서 고찰되지 않을
경우 그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여성과 젠더는 혁명과 반혁명의 과정에
서 주변적이지 않는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1. 혁명과 젠더, 유토피아에서 디스토피아로

이집트인들이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라고 간주하는 2011년 1월 25일부


터 2월 11일까지의 18일 동안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배경을 가
진 여성들이 대거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며 이들은 타흐리르 광장에서 남
성들과 나란히 시위와 농성에 적극 가담하였다. 일차적으로 정치참여가
이루어지는 거리와 광장은 이슬람에 의해 구축된 젠더라인에 의해 공적
영역, 즉 남성의 영역으로 인정되어 왔다. 이집트 여성들이 이러한 공적
영역에 참여한 것은 무슬림 여성이 수동적이고 종속적이라는 일반적 스
테레오 타입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이집트의 정치와 사회 속에는
여성의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가 팽배하였다. ‘충분해’, ‘존엄성’ 등의 기치
하에 남성과 여성 모두는 협력하는 듯하였다. 그리고 수 세대동안 이어져
내려온 뿌리 깊은 사회적 터부, 즉 공적영역에서 모르는 남녀가 섞이는
‘아랍의 봄’ 전후의 정치와 젠더화 - 이집트를 중심으로- 59

이크딸라뜨(Ikhtilat)의 금기에 도전하는 듯하였다. 젠더, 혹은 젠더라인


을 뛰어넘는 남녀 시위자들 간의 연대와 유대감은 여성 활동가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여성들과 남성들은 시위에서 동료가 되었다.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이집트에서는 믿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수백만 명의 사람
들이 한 장소에 모였으나 여성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남성 시위자들은
여성을 완벽하게 존중하였고 완벽하게 지원하였다. 이들 간에는 완벽한
연대가 있었다.”(Johansson-Nogues 2013, 394).
매우 복잡하게 붐비고 변덕스러운 상황이 계속되는 타흐리르 광장에서
수주일 동안 남녀가 섞여 있으면서 여성들은 안전하다고 느꼈으며 자신
들이 그렇게 존중받아 본적이 없다고 토로하였다. 즉 공적영역 타흐리르
광장은 이집트 사회에서 전염병처럼 번졌던 성희롱에 대한 두려움 없이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되었다. 여성들이 상당히 붐비는
공간에서 남성들과 함께 함으로써 타흐리르 광장은 존경과 통합이 존재
하는 유토피아가 되었다. 심지어 여성들이 아이들까지 데리고 가서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타흐리르 광장은 안전하였다. 이 순간 여성들은 이익
단체로 조직화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특별한 젠더적 요구사항을 내걸지
도 않았다(Wael 2014, 483-484).
사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타흐리르 광장은 진정한 유토피아는 아
니었다. 당시 여성들은 수동적으로 움직였고 특별한 복장규정을 지킬 때
에만 공적공간에서 자유롭게 섞일 수 있었다. 여성은 큰 목소리를 내서도
특별한 요구를 해서도 안 되었다. 그들은 남성들이 정해 놓은 규정과 규
칙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여성들은 특정한 규칙 하에서만 공적공간에 존
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공적공간에 대한 소유권은 여전
히 남성들에게만 있었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18일 동안의 젠더 유토피아가 젠더 디스토피아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월 11일 이후 타흐리르 광장에
서 남녀 활동가들에 대한 당국의 체포작전이 시작되면서 유토피아는 사라
졌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나온 ‘새로운 여성’을 껴안은 ‘새로운 이집트’는
신기루로 변해 있었다. 군중들이 흩어지자 활동가들에 대한 체포가 이어
졌고 사회, 문화적 관행에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였던 열망은 곧 도전받았
다. 여성들은 거리에서 시위자로서 더 이상 환영받지 못했다. 문화와 정치
60 중동연구 제35권 1호

의 교차로에서 여성들은 존재해야 할 공간을 잃게 되었다(Abouelnaga


2015, 42).
혁명 초기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더 많은 여성들을 필요로 하였다. 더
많은 수의 시위 참가자가 있을 때 체제에 대한 더 큰 압력을 가할 수 있
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시위 참여는 특히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라는 점에서 필요했다. 그러나 무바라크가 권좌에서
내려오자 대중적 압력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으며 혁명은 곧 정치 투
쟁으로 변질되었다. 그 결과 무바라크가 축출되고 난 이튿날부터 타흐리
르 광장의 여성 우호적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하였다. 2011년 2월 11일
타흐리르 광장에서 발생한 네덜란드 여기자 라라 로간(Lara Logan)의 성
폭력 사건이 이를 잘 반영해 준다. 시위 장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점
차 확대되었으며 이는 정부기관원들은 물론 일반시민들에 의해서도 종종
자행되었다.
2011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수백 명의 여성들이
성차별의 종식과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남성들과 함께 카이로 시내에서
행진을 벌였다. 그러자 일부 군중들은 이슬람적 규정의 준수를 요구하며
이들 시위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한편, 시위에 가담한 여성들은 붙
잡혀 협박이나 모욕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성희롱을 당했다. 이 날의 시위
는 여성들이 혁명 이후 처음으로 자유, 평등이라는 젠더적 요구를 한 행
사로 그 결과는 참혹하였다. 이튿날 남녀 시위자들은 타흐리르 광장에서
다시 모였으나 결국 체포되었다. 남성 시위자들이 이집트 박물관이나 군
사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있는 동안, 여성 시위자들은 더 큰 몫의 모
욕을 감당해야 했다. 여러 명의 남성 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체포된
여성들은 처녀성 테스트를 받았다. 그 후 사회적, 정치적 통제 수단으로
육체를 억압하는 것은 여성 시위자들에 대한 조직적 관행이 되었다. 남성
에 대한 육체적 학대와 고문은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되었고, 여성의 신체
에 대한 모든 형태의 학대는 사회적, 문화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처
녀성 테스트를 받아야했던 여성들은 침묵하였고 오직 사미라 이브라힘
(Samirah Ibrahim)이라 불리는 여성만이 군사최고위원회를 상대로 고소
를 하였다. 사미라의 이러한 용기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성희롱과 성폭력
을 공개적인 담론으로 바꾼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Abouelnaga 2015,
‘아랍의 봄’ 전후의 정치와 젠더화 - 이집트를 중심으로- 61

43-44).

2. 혁명 이후 전환기, 국가페미니즘 代 정치이슬람

앞서 언급하였듯이 무바라크 시대에는 영부인 수잔 무바라크가 주도하


는 ‘국가여성위원회’의 강력한 지원을 바탕으로 상당히 진보적인 여성 관
련법이 제정되었다. 혁명 이후 무슬림형제단의 영향력이 강화된 전환기
에서 부패한 전 체제가 국가주도의 페미니즘을 강화시켰다는 사실은 향
후 여성의 권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무슬림형제단은
전 체제가 여성들에게 서구식 가치를 강요함으로써 이슬람의 전통적 가
치를 훼손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일반적으로 여성의 권리
를 제한하기 위해 개발도상국(South)들이 사용하는 정치적 방편이다. 서
구식 이데올로기로 비춰지는 페미니즘에 비난을 가함으로써 여성들을 가
족과 문화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은 물론 ‘혁명적 투쟁’으로부터 소외시키
기 위한 것이다(Wael 2014, 487). 결국 이집트 여성들은 ‘아랍의 봄’ 이
후 정치이슬람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혁명 이전에 얻었던 법적 권리조차
박탈당하는 결과를 안게 되었다.
더 나아가 포스트 무바라크 시대 이집트에서 여성의 권리 및 젠더 평
등에 대한 논의는 정치적 갈등의 중심 이슈가 되었다. 즉 여성 이슈는 정
치이슬람과 무바라크 시대의 정책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여성 권리의 퇴
행은 역사적 문맥에 관계없이 이슬람 텍스트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과
동일시되는가 하면, 무바라크 시대에 나온 것은 어떤 정책이든 ‘잘못된’
것으로 폄하되었다. 무바라크의 정책을 공격하는 것은 혁명의 동력이 된
反무바라크 정서에 의해 합리화되면서 여성들의 권한과 젠더 평등은 구
조적으로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바라크의 영부인 수잔의 이름을 따
서 관련법 자체를 ‘수잔법’이라고 명명한 것 자체가 매우 상징적인 의미
를 가졌다. 일부 정치이슬람 진영에서는 여성의 특정 권리를 향상시키는
것을 정치이슬람을 탄압하기 위한 시도로 보았다. 이는 무바라크라는 이
름 자체가 이집트에서는 정치이슬람에 대한 탄압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
문이다. ‘정치이슬람’ 대 ‘무바라크 시대의 정책’이라는 잘못된 방향은 유
62 중동연구 제35권 1호

감스럽게도 이데올로기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자리 잡았다(Morsy 2014,


216).
이슬람정당은 이전 권위주의 체제를 ‘서구에서 수입된, 이국적인’ 이데
올로기로 비판하였다. 이전 체제에서 존중받던 여성들은 역설적이게도
그 체제를 붕괴시키는 핵심요소로 작용하였다. 수잔 무바라크를 부패한
정치권력과 연결시키려는 대중의 인식을 바탕으로 지난 10여 년간 쌓아
온 여성의 법적 지위, 특히 가족법에서의 여성의 법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법과 법절차는 폐기되었다.
구체적으로 자유정의당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국가여성위원회를 폐지
하고 여성의 권리 어젠다를 ‘가족 어젠다’로 변경할 것을 주장하였다.
2012년 2월 국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자유정의당은 국가여성위원회
가 ‘가족적 유대와 연대를 파괴하는 전 체제의 도구’였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자유정의당은 국가여성위원회를 개편하려던 군사최고위원회의 결
정에 반대하였다. 결국 2013년 5월 의회의 극단적 이슬람 보수주의자들
은 국가여성위원회의 해체를 요구하고 그 예산을 국가인권위원회나 국가
어린이모성위원회로 돌릴 것을 주장하였다(Morsy 2014, 216-217).
한편, 2011년 7월 군사최고위원회는 상원과 하원 선거에 관한 두 개의
수정 법안에 서명하였다. 이 두 법은 이집트 국민들이 염원해 오던 것으
로 민주주의를 향한 과도기를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이 법의 가장 핵심
적 사안 가운데는 정당비례의석과 투표의석의 50대 50 비율 조정9), 하
원 후보의 최소 입후보 연령을 30세에서 25세로 하향 조정, 상원 후보의
최소 입후보 연령을 35세로 하향조정, 노동자와 농부를 위한 과반의석
확보, 여성의원 할당제 폐지, 비례대표명단에서 여성 순위에 대한 규정
폐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Morsy 2014, 217). 즉 혁명 이후 전환기에
서는 전 체제가 규정해놓은 여성의원 할당제가 폐지되었음은 물론, 비례
대표명단에도 여성의 순위가 고정되지 않음으로써 여성의 정치영역 진출
은 거의 닫혀버렸다고 할 수 있다.

9) 그 전에는 투표의석이 25%, 정당비례의석이 75%였음.


‘아랍의 봄’ 전후의 정치와 젠더화 - 이집트를 중심으로- 63

3. 민족주의와 젠더

민족주의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남성적인 사고와 희망을 채택하는 남성


적 프로젝트이다. 민족주의는 국가를 위해 희생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
조함으로써 집단적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주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모든 유형의 억압, 독재, 젠더 간 불평등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
신을 심어준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민족주의 운동에서 이익단체나 압
력단체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혹은 시민으로서만 참여한다. 젠더라는
것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억눌린 여성의 정체성의 일부라는 점에서 여성
들은 젠더 이슈보다는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다른 이슈들을
우선시 한다. 그러나 목표가 달성될 경우 민족주의 운동은 이내 정치 투
쟁으로 변질되어 여성의 기여를 인정하지도 여성의 이슈에 관심을 가지
지도 않는다. 그 결과 여성들은 무시되고 주변화된다(Wael 2014, 481-
482).
크게 보면 이집트 여성들은 2011년 1월 15일 이래 두 개의 큰 혁명에
참여하였다. 대중동원은 2011년 1월 ‘고개를 높이 들어 올려라 당신은
이집트인이다’라는 구호로 시작되었다. 시위대들은 거리로 나와 ‘빵, 존엄
성, 자유, 정의, 평등’ 그리고 ‘공정한 몫’을 외쳤다. 여성과 남성, 가난한
자와 부유한자, 무슬림과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즉 혁명 초기 여성들은 국가의 대의를 위해 남성들과 함께 하였
으며 자신들을 위한 어젠다는 없었다. 혁명이 일어난 지 1년이 채 되질
않아 집회와 시위 중에 여성에 대한 성희롱과 성폭행 사건이 계속되자 시
위 구호는 ‘우리의 존엄성과 자유는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나일의 딸들
은 레드라인(Red Line)이다’로 바뀌었다. 그리고 2013년 6월 여성들은
다시 거리와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으며 그들의 주요 슬로건은 ‘이집트 여
성의 목소리는 혁명이다’로 바뀌었다(Morsy 2014, 211). 이는 ‘아랍의
봄’ 혁명의 과정에서 이집트 여성들이 무시되고 주변화되는 과정을 잘 보
여준다.
인간의 삶에 대한 기본적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을 통해 ‘아랍의 봄’ 이
후 이집트인들의 의식 속에는 민주주의와 사회정의에 대한 인식이 자리
64 중동연구 제35권 1호

를 잡았다. 이러한 투쟁에 참여하였던 이집트 여성들 또한 자신들의 권


리, 특히 정치적 권리에 대한 열망을 키웠으나 혁명 이후 공적영역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여성들은 새로운 헌법개정10) 과정에서 소외되었으
며 무바라크 하야 이후 군부와 협상하기 위한 어떠한 위원회에서도 포함
되지 못했다. 여성들은 다양한 정당에서 정치적 협상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집트 여성들은 투표자, 후보자, 지지자 등 다양한 역할로 정치활동에
참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도권으로의 진입은 어려웠다. 앞서 언급하였
듯이 여성의원 할당제가 폐지되었고 비례대표명단에서도 여성후보의 순
위가 확실하게 규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따르
는 국회의원선거에서 여성들이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
였다. 무소속 여성후보들 역시 제한된 자원과 네트워크, 그리고 남성후보
지지자들의 협박으로 종종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그 결과 2012년 국회에
서 여성들은 498석 가운데 8석만을 차지하였다. 국회의원으로서의 여성
대표권은 아랍의 봄 이전 12%에서 2%로 대폭 하락하였다. 대통령 선거
에서는 13명의 남성들이 입후보하였으나 여성후보자는 없었다. 그러나
투표자로서의 여성의 정치활동은 강화되었다. 1월 25일 혁명 직후에 여
성의 투표율은 64%로 증가하였으며 대통령 선거에서의 여성 투표율은
83%에 달했다. 이렇듯 이집트 여성들은 국민투표, 국회의원선거, 대통령
선거 등의 공적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의사결정권자의 지위에
이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타흐리르 광장에서 시작되었던 이집트의 ‘아랍의 봄’은 여
성이나 종교적 소수자들에게는 ‘봄’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민족주
의적 저항운동이 반드시 성, 종교, 계층, 나이 등을 초월하여 완전한 평등
을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민주주의를 지지하
는 민족주의 운동이 반드시 민주적 제도나 문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
는 사실이 이집트의 ‘아랍의 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결국 이집트의
여성들이나 종교적 소수자들은 혁명을 통해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으며,

10) 2011년 판사 따리끄 알 비쉬리(Tariq al-Bishiri)는 헌법개정안 초안을 만드는


과정을 주도하였다. 그는 이 위원회에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하여 소수집단인 콥틱
기독교인을 포함한 정치, 법 전문가를 임명하였으나 단 한 명의 여성도 포함시키
지 않았다.
‘아랍의 봄’ 전후의 정치와 젠더화 - 이집트를 중심으로- 65

전 체제에 의해 얻었던 권리조차도 박탈당했다.

4. 이슬람정당의 집권과 젠더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일반적 개념과 적용은 이슬람정당 ‘자유정의당’


의 인식과 충돌된다. 정치적 이슈를 이슬람적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서구식 민주주의와 모순이 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통
치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슬람정당은 정치를 포괄하는 이데올
로기로서의 이슬람과 非이슬람 국가나 환경에서 만들어진 민주주의의 개
념을 통합하고 싶어 한다. 즉 이슬람정당은 민주주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거나 혹은 민주주의 개념 모두를 포기하는 입장에 서 있지 않다. 그
들은 민주주의가 인간이 축적한 위대한 경험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
하면서도 이슬람적 이데올로기와의 절충을 시도하고 있다(Atawna 2014,
890).
무슬림형제단의 이데올로기나 자유정의당의 정치적 시각에서 보면 모
든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동등하다. 이슬람적 이데올로기도 국적, 인종,
피부색, 종교로 인한 인간 간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정
의당은 이슬람적 가치와 원칙에 근거하여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선언
하였다. 인간은 평등하지만 다만 젠더 간의 차이, 즉 다름이 있다고 주장
하였다. 그들의 관점에 따르면 젠더 간의 평등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
는 개인의 특성을 존중하는 한편, 개인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거나 개인이
해야 할 일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여성에게 남성과 똑같은 일을
하도록 요구하거나 똑같은 의무를 지도록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입
장이다(Atawna 2014, 892).
새로운 헌법, 주로 무슬림형제단과 자유정의당의 지지를 받아 만들어
진 새로운 헌법 33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동등하다. 모든 국민은
차별 없이 동등한 공적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무슬림형제단과 자유정의당이 적용하는 평등의 원칙에 대
해 여러 면에서 의구심이 제기되었다. 첫째, 非무슬림 소수 공동체를 불
평등하게 다룰 수 있다는 의심이었다. 예컨대 세속주의자들은 무슬림형
66 중동연구 제35권 1호

제단과 자유정의당이 집권을 하게 되면 非무슬림들에게 과거 이슬람제국


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두세 지즈야(Jizyah)를 부과할지 모른다고 의심하
였다. 그러나 무슬림형제단은 이 제도가 오늘날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
을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둘째, 여성과 非무슬림이 대통령에 오를 자격이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평등권이나 시민권의 개념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
으켰다. 첫 번째 이슈에 대한 입장과는 달리 이 부분에 대한 이들의 입장
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지 않았다. 셋째, 무슬림형제단과 자유정의
당은 여성에게 적용되는 민주주의적 평등원칙에 대해 의심을 받았다. 민
주주의는 여성을 ‘성숙한 성인’으로 ‘자유롭고 동등한’ 개인으로서의 권리
를 가진다고 인정하고 있다. 무슬림형제단과 자유정의당도 이론적으로
이러한 정의에 동의하면서도 여성의 진정한 역할은 자녀의 양육과 가사
라고 강조하였다(Atawna 2014, 892-893).
이렇듯 이집트 여성들은 민족주의 운동의 특성으로 인해 일차적으로
공적영역에서 소외되었고 이차적으로는 민주주의와는 다른 젠더적 정의
를 가진 이슬람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더욱 주변화 되었다. 무슬림형제단
관련 위원회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없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2012년 치러
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정의당은 56명의 여성 후보들을 내세워 총 3
명의 여성의원을 당선시켰다. 당시 당선된 여성의원은 모두 4명이었고
그 가운데 3명이 자유정의당 출신인 셈이었다. 젠더 역할에 대한 무슬림
형제단의 입장을 비난하던 사람들은 무슬림형제단과 자유정의당이 선거
에서 여성들을 이용한 후 선거가 끝나게 되면 이들을 다시 가정으로 되돌
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전 체제에서 부여한 여성의 다양한 권리를 부패한
서구식 이데올로기로부터 수입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폐기를 요구하
였다. 심지어 무슬림형제단 출신 여성의원들조차 여성의 권리를 유린하
는데 일조하였다. 한편, 2012년 헌법은 여성의 복지에 대해 관대한 반면,
젠더 평등이나 여성의 정치참여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한 입장을 보였다.
헌법 10조는 국가가 여성가장, 이혼녀, 미망인에게 특별한 관심과 보호를
제공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국가는 남편이 죽거나 부재한 여성을 보호
하고 혼인한 여성은 남편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에게 부
여한 이러한 복지조치들은 결국 여성에게 어머니, 딸, 아내로서의 젠더화
‘아랍의 봄’ 전후의 정치와 젠더화 - 이집트를 중심으로- 67

된 역할만을 부여한다는 의미이다(Wael 2014, 487-488).

Ⅴ. 결론

여성들이 적극 참여하였던 이집트의 ‘아랍의 봄’은 여성들에게는 ‘아랍


의 겨울’, 혹은 모래바람이 불어 닥치는 ‘캄신의 봄’이 되었다. 전 정권에
의해 주도된 국가페미니즘은 혁명 이후에 오히려 여성에게 독으로 작용
하였다. 혁명 이후 전환기에서 전 체제를 부인하는 것은 전 체제가 강화
시킨 여성의 지위를 원상 복귀시키는 것과 동급이 되었다. 근본적으로 남
성성이 강한 민족주의 혁명 이후 여성들은 공적영역에서 다시 한 번 소외
되었다. 또한 이슬람정당의 집권 이후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개념과는
다른 이슬람적 이데올로기가 작동되면서 이집트에는 결국 ‘민주주의의
역설’ 혹은 ‘젠더에 기반을 둔 반쪽짜리 민주주의’가 등장하였다. 젠더와
관련된 확고한 이데올로기를 가진 이슬람정당은 어쩌면 민주주의를 실현
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랍의 봄’이라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바 있는 이집트 여성들은 더
이상 이등시민의 지위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아랍의 봄’을 통해 이집
트 국민들이 ‘자유, 민주주의, 인권, 존엄성’을 요구하였듯이 이집트 여성
들 또한 삶의 전 영역에서의 평등과 존엄, 특히 공적영역에서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모든 민족주의 혁명 뒤에 반드시 여성
의 권리 및 평등이 실현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젠더화된
이집트에서의 반쪽짜리 민주주의는 곧 저항에 부딪혀 구세력에게 다시
정권을 양보하는 반혁명적 결과를 가져왔다.
혁명 이후 이집트 국회에서 여성국회의원이 고작 2%에 불과한 데 비
해 2013년 튀니지 국회에서 여성의원이 27%를 차지한 것은 주목할 만하
다. 유엔은 정책결정과정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준으
로 여성이 국회에서 30% 이상의 의석을 차지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여
타 MENA 국가들에 비해 여성의 국회대표권이 잘 보장되고 있는 튀니지
가 ‘아랍의 봄’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고, 젠더화된 이데올로기
68 중동연구 제35권 1호

를 정착시키고자 했던 전환기 이집트 정권이 혁명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


아간 것은 우연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MENA지역에서 여성들이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서 오랜 기간 소외된
것은 민주화의 제3의 물결이 이 지역을 비켜간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였
다. 따라서 여성의 정치적 권리와 참여는 이 지역의 민주화 과정에 박차
를 가하게 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질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
을 것이다. 이집트 여성들은 민주화 운동의 참여를 통해 이미 민주주의와
평등에 대한 인식과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더 이상 위로부터 선물로 주
어지는 여성의 권리와 평등이 아닌 여성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이러한 권
리와 평등을 얻어낼 때 비로소 젠더화되지 않은, 반쪽짜리가 아닌, 완전
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이집트에서도 정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주제어: ‘아랍의 봄’, ‘무슬림형제단’, 젠더, 젠더화, 이집트 여성, 여성의


정치참여, 민주주의, 민주화
‘아랍의 봄’ 전후의 정치와 젠더화 - 이집트를 중심으로-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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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선
소 속 :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이메일 : chohs@mju.ac.kr

투 고 일: 2016. 04. 30
심 사 일: 2016. 05. 15∼06. 14
게재확정일: 2016.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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