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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 453~495쪽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 마카오를 중심으로*171)
홍 성 화** 172)
목차 Ⅰ. 머리말
Ⅱ.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정착 과정
Ⅲ. 포르투갈인의 중일무역
Ⅳ. 맺음말
❚ 국문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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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국면을 타개하고 왜구 세력을 분산하기 위하여, 포르투갈 세력을 체제
내로 포섭하기로 방침을 바꾸기 때문이다. 이로써 왕직 등을 비롯한 후기왜
구 세력과 포르투갈 세력은 분리되었고, 포르투갈 세력 역시 嘉靖33年(1554)
부터 이러한 정책 변화에 화답하여 중국에 대한 무력 사용을 완전히 포기하
여, 뇌물을 바치거나 명조의 정책에 순응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해외 교역에 대한 수요의 분출구로서 광동지역에서는 마카오, 복건지역에서
는 월항이 각각 선택되었다. 그리고 그 무역의 담당자 역시 포르투갈인과 왜
구 세력이 배제된 중국인들이 선택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로서는 중일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가, 月港의 중국인들
해상집단으로서는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활
짝 열렸다. 이러한 황금기는 1570-1600년대까지 약 30년에 걸친 것으로
1600년대 이후에는 일본의 朱印船과 絲割符 제도의 성립,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참여, 더구나 중국 해상 세력의 일본 무역 참여 등으로 인하
여 사양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종교 문제까지 겹치면서 1639년 에
도 막부는 포르투갈의 일본 내항까지 금지시키게 되었다. 이로서 포르투갈인
은 마카오-나가사키 루트에서 최종적으로 축출되었던 것이다.
Ⅰ.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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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리스본부터, 인도
의 고아(Goa)를 거처 일본의
나가사키에 이르는 극히 광
대한 범위까지 미치고 있었
다.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明
初까지 비교적 단순한 형태
의 동아시아 역내 네트워크
(그림1)는 매우 다양하고 복
잡하면서도 긴밀한 형태로
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림 1] 明初 環中國海의 주요 항로
명대 포르투갈의 교역 활
동에 대해서 보통 세 시기로 구분하곤 한다.2) <제1기> 1514-1522
년 - 廣州 연해 무역 시기, <제2기> 1522-1549년 - 복건과 광동
연해 무역 시기, <제3기> 1549-1557년 – 마카오 정착시기. 본고에
서는 특히 <제2기>에서 <제3기>까지의 기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1550년대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대체로 서로 다른 4개의 학설이 있다.3) 즉 ‘차지설(借地說, 마카오를
빌렸다는 설)’, ‘혼입설(混入說. 다른 집단들과 섞여 들어갔다는 설)’,
‘점령설’, ‘대가설(報酬說, 왜구를 토벌한 노고에 대한 대가로 거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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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가 받았다는 설)’ 등을 들 수 있다. 일례로 丁順茹는 포르투갈이 明
朝의 海防 체제가 해이해졌고, 아울러 廣州가 외국 상인에 대해서 개
방하기로 하였던 틈을 타서 마카오에 다른 집단들과 함께 섞여 들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4) 顔廣文은 명정부가 이이제이 정책을 실시하
였고, 포르투갈인이 공손한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에 명정부가 포르투
갈인의 마카오 租借를 허락한 주요한 원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5) 한
편 劉學祥의 설명에 따르면 명나라는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장기 점유
를 허락한 중요한 가장 원인은 포르투갈이 지닌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몽골을 비롯한 북방민족에 대한 위협을 중시
하여 북방민족을 위주로 한 민족 정책을 실시한 결과였다고 하고 있
다.6)
다른 한편 盛菊과 李令彬은 포르투갈인들이 장기간 마카오에 거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중국
왕조는 전통적으로 자만하여 포르투갈을 해외의 소국으로 간주하여
안중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통상으로 인한 경제적 이
익, 특히 광동 당국이 지니고 있던 매우 커다란 흡입력 때문이라고
한다.7) 차오 산투스(査烏‧山度士)는 중국은 마카오의 ‘할양’을 통하여
아래와 같은 이익을 거두었다고 적고 있다. 즉 “海盜를 종식시키고,
남방을 안정시켰으며, 상업을 촉진하고, 華人의 出洋을 막고 洋人의
입경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하고 중국이 마카오를 통해서 얻은 이익
이 결코 적지 않다고 적고 있다.8) 佐久間重男의 경우, 간단히 포르투
갈인들이 중국 관헌의 해적 토벌에 협조하여 마카오 거주권을 획득하
였다고 하고 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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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포르투갈의 마카오 점유 과정을 明朝가 처한 대내외적
환경 속에서 이를 다시 고찰하고자 한다. 많은 개설서에서는 嘉靖36
年(1557)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었던 계기는 중국 지방
관에 대해서 뇌물을 썼기 때문이라고 하고, 중국 정부에서는 암묵적
으로 이를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여러 사정을 종합해 보면, 이는 유력 지방관이나 명조정의
암묵적 묵인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1570년부터 1600년대까지 약30년간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나카사
키 루트를 독점하여 막대한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황금 노
선에 1600년대 이후부터는 네덜란드 상선과 중국인, 그리고 주인선
(朱印船)들이 참여하여 다극적인 무역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그렇다
면 도리어 어떻게 1570년부터 1600년까지 포르투갈인들이 이 황금
루트를 홀로 독점할 수 있었는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본고에서는 우선 포르투갈인들이 어떻게 마카오에 정착하게 되었
는가를 서술하고, 이것을 명조의 해외정책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그 다음으로 마카오-나가사키 루트를 중심으로 한 중·일간의 교역에
서 마카오를 중심으로 한 포르투갈인들의 교역 실태에 대해서 서술하
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위의 서술을 기반으로 1570년대부터 1600년
대까지 포르투갈인들이 어떻게 중일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고, 1600
년대부터 그 독점 지위가 동요되다가 1639년에 마침내 종언을 고하
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정착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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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초 포르투갈인은 이미 중국 주변에 도달하였다. 1515년 포
르투갈을 섬기던 이탈리아 항해가 Giovanni de Empoli(1483-1518)
는 그의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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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에게 국교를 구하였으나, 이는 실패로 끝이 났다. 그 뒤 중국과 포
르투갈 사이에 충돌이 벌어져 1521년과 1522년, 제1차·2차의 屯門海
戰이 발발하였는데, 여기에서 포르투갈은 패배를 맛보고 광주항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12)
屯門海戰 이후, 嘉靖年間 초기까지 포르투갈 세력과의 무역을 포함
한 밀무역 전반에 대한 엄한 금령이 빈번히 시행되었다.13) 반면 嘉靖
年間 중기부터는 해금 정책의 기조는 유지되었지만, 실행이라는 측
면에서 점차 해금이 이완되는 모습이 현저해졌다.14) 이러한 상황하에
서 연해 주민들은 다시 외국 상인들과 결탁하여 밀무역을 진행하기
시작하였다.15) 그리고 여기에 중요한 거점으로 등장한 것이 福建 月
港과 浙江 雙嶼港이었다.16)
1521년과 22년의 屯門海戰 이후, 廣州에서 물러난 포르투갈인들은
이러한 해금 이완 추세에 발맞추어 寧波 앞 바다의 雙嶼港까지 진출
하였다.17) 여기에서 포르투갈인들은 雙嶼港에서 다시 그 행동반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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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혀서 복건성 장주까지 그 행동 영역을 넓혔다.18) 당시 포르투갈세
력은 왜구 등과 어울려서 약탈 등을 일삼았기 때문에 특히나 중국인
들로부터 ‘蕃鬼’19)라 불리며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요컨대
‘왜구적 상황’20)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550년대에는 극
적으로 명조와의 화해가 다시 이루어져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포르투갈인들이 嘉靖36年(1557)부터 항구적인 기지로서
점유하게 된 마카오는 대체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마카오의 원래 이름은 ‘濠鏡澳’로서 廣東省 香山縣에 속하였고, 縣城
과는 135리에서 140리 정도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어촌에 불과하였
다.21) 그러나 廣州府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한다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하여 嘉靖年間부터 南洋 여러 나라에서 조정 몰래 수많은 밀무역이
이루어지던 장소로 변모하게 되었다.22) 이 때문에 1535년에는 광동
18) Boxer, C. R., South China in the Sixteenth Century: being the
narratives of Galeote Pereira, Fr. Gaspar da Cruz, O.P. (and) Fr.
Martín de Rada, O.E.S.A. (1550-1575), (London, Hakluyt Society,
1953), p.192; ガスパール・ダ・クルス, 日埜博司 譯, クルス『中國誌
: ポルトガル宣教師が見た大明帝國(東京, 講談社, 2002), 252쪽.
19) Boxer, C. R., South China in the Sixteenth Century, p.191; ガス
パール・ダ・クルス, クルス『中國誌 : ポルトガル宣教師が見た大明帝
國, 249쪽.
20) 荒野泰典, 石井正敏, 村井章介, 「時代區分論」 アジアのなかの日本史1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1992).
21) 印光任, 澳門記略上卷 「形勢篇」, 龔翔麟(1658—1733)의 珠江奉使記
에 따르면 “今之澳門, 卽舊名濠鏡.”이라고 하여, 澳門의 예전 이름이 ‘濠
鏡’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澳門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張
甄陶(乾隆14年(1745) 進士)의 澳門圖說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澳門在廣州府香山縣之東南, 去縣治陸路一百四十里, 水路一百五十
里, 凡海中依山可避風, 有淡水可汲曰澳, 又其東南大十字門, 西有小十字門,
海舶由以出入, 因呼曰澳門.” 澳門의 영문 표기인 Macau 등의 유래에
대해서는 Boxer, C.R., Fidalgos in the Far East, 1550-1770: Fast
and Fancy in the History of Macau(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8), pp.3-4. 참조.
22) 澳門記略上卷 「澳蕃編」 “嘉靖中又移濠鏡者, 則有暹羅, 占城, 爪哇, 琉
球, 渤泥諸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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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박사가 마카오에 설치되었고, 1537년에는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
무역에 섞여 들어오기 시작하였다.23) 즉 마카오에서 외국인과의 무역
이 시작된 것은 1535年(嘉靖14)부터였고24), 외국인이 항구적으로 정
착하기 시작한 것은 1553년부터였다. 이러한 사정은 아래의 사료에
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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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만에 마침내 廣州 부근에서 합법적인 무역을 이루어낼 수 있
었던 것이고, ‘왜구적 상황’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곳을 포르투갈 기지로 할 것인가는 확정되지 않은 상
황이었다. 비로소 嘉靖36年(1557)이 되면서 포르투갈인은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554년에 정식으로 포르투갈
이 마카오에 정착하였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28)
1550년대를 통하여 포르투갈인들의 교역 중심지는 광동성을 중심
으로 ① 上川島(Sao Joao) → ② 浪白澳(Lampacau) → ③ 마카오
(Macau) 순서로 변화하였고29), 광주에서 멀리 떨어진 섬들인 ①과
②에서 비교적 광주부에서 가까운 반도인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었
다. 즉 명조와의 교섭 정도에 따라서 廣州府城에서 멀어지거나 가까
워졌던 것이다. 그들이 마카오에 정착했던 모습은 아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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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시 계절풍에 의존하는 항해 관습상, 계절풍의 방향에 따
라서 이동해야 만하는 상황에서 마카오에 최초로 항구적인 주거지가
탄생한 것31)도 이 嘉靖36年(1557)의 일이었다. 즉 1557년을 계기로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에 비로소 항구적인 정착지를 마련할 수 있었
다. 그리고 원래 참파나 자바 등에서 온 동남아시아 상인들도 마카오
에서 거래를 했지만, 그 뒤로는 모두들 포르투갈인들을 두려워해서
오로지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를 독점하게 되었다고 한다.32)
그런데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언제 정착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중국측 사료를 보면 그 서술이 조금씩 차이가 나서, 혼란을 야기하곤
한다. 이하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포르투갈
의 마카오 정착에 대해서 가장 유명한 중국측 사료는 아마도 萬曆
廣東通志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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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時’와 ‘後’가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인지 불명확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그에 따르면 이 사료에 의거하여 嘉靖32年에 포르투갈인들
이 마카오에 정착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가스파 다 크루즈(Gaspar da Cruz)의 中國誌(A
Treatise of China)의 서술과 日本一鑑의 서술과 대조한 끝에 ①
중국 정부와 화해가 이루어진 것은 1554년임이 틀림없으나, ② 무역
이 이루어진 곳은 廣州이지 마카오가 아니라고 하여, 1554년설을 배
격하고 있다. 다시 張廷茂는 포르투갈의 기록을 조사하여 1555년 포
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출입한 것은 확실하지만 계절풍이 끝난 뒤에
는 또 다시 축출되었다고 지적하고, 嘉靖36年(1557)에서야 포르투갈
인들의 항구적인 정착이 시작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34) 이 과정을
표로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포르투갈인들의 마카오 정착 과정
중국 정부와의 화해가 이루어짐
嘉靖33年(1554)
(=Luso-Chinese agreement of 1554)
廣州에서 무역이 이루어짐. 마카오에서 무역도 이루어졌으나
嘉靖34年(1554)
계절풍에 따른 일시적인 것
嘉靖36年(1557) 마카오에서 항구적인 거주지 마련
萬曆元年(1573) 海都副使에 대한 뇌물이 정식으로 地租로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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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지방관과 상인들이 암묵적으로나마 모두 인정한 것이 더욱 크
게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포르투갈의 마카오 점유에 대해서 명정부는 어떠
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기존에는 海道副使 汪栢의 뇌물 제
공 등으로 간단히 처리하고 이에 대한 명확한 정책까지는 없었던 것
으로 간주되고 있다. 실제로 그러한지 검토해 보기로 하자. 殊域周咨
錄 卷9 「佛郞機」條에서는 1522년 포르투갈인들을 축출한 이후에 대
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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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는 점이다.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安南
(베트남) 등의 동남아시아 무역선들도 광주를 멀리하고 함께 절강성
과 복건성을 중심으로 무역을 하였던 것도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단
순히 광주에서의 교역뿐만 아니라, 市舶司를 통한 관세 수입, 그리고
그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뇌물 등이 끊기게 되면서 “公私가 모두 匱
乏”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배경에는 正德年間 이후 명조의 재정악화라는 근본적인 사
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37) 명조로서는 祖法에 따라서 조공무역만을
허용하고 싶어도 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商稅 수입에 대한 유혹
에서 끝내 벗어나기 어려웠고, 포르투갈인들이 가져오는 풍부한 무역
수입에 대한 높아지고 있던 지역 여론을 억누를 만한 힘이 부족했다.
兩廣巡撫 林富가 위의 상주를 올렸을 때는 嘉靖9年(1530)의 일로
서 포르투갈의 정착이 실현된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부터 포르투갈
정착과 무역을 허가하라는 광동 지역의 여론은 이미 어느 정도 형성
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38) 다시 말해서 1557년 포르투갈의 마카
오 거주는 단순히 海都副使 汪栢에 의한 자의적 판단뿐만 아니라, 포
르투갈 세력과의 互市를 통한 무역 수입을 원했던 광동 지역의 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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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鄭舜功, 日本一鑑의
서술을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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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구입하였다. 이들은 이러한 통상 방식을 통해 마닐라의 상인이나 네
덜란드 동인도회사보다 훨씬 커다란 이익을 얻고 있다. 이들은 오랫동
안 중국에 거주하면서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구
입하는 물품의 질이 다른 상인들보다 우수하고 양이 많으며 종류도 다
양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특정한 수요에 맞
게 주조된 물품을 구입할 수도 있다. 그들은 비단의 넓이나 길이, 무늬,
중량 등을 정하여 일본과 동인도나 포르투갈 시장의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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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던 것 같다. 1550년대 중후반 이후 佛郞機는 광동지방관의
암묵적인 승인 아래서 비공식적 대외교역 기구로서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포르투갈인들이 갖추고 있던 상업적 능력과 함포, 여기
에 명조정의 암묵적인 승인이 더해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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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무역을 통하여 포르투갈인들은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그 이익의
상당 부분은 역시 뇌물로서 광동지방관을 통하여 명조정까지 흘러들
어 갔으리라 추측된다. 다시 萬曆年間 마카오의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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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되면서, 명정부에 매우 유순한 태도를 취하였다. 더 이상 약탈
등의 비합법 수단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즉 명조정으
로서는 포르투갈의 마카오 정착은 포르투갈을 통한 해외무역의 이익
과 시박사의 관세 수입의 증가, 그리고 포르투갈의 유순화 등의 다목
적 카드로서, 월항 개항에 못지않은 체제내 포섭 효과를 가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중계무역항
으로서, 점점 무역체제를 확립하여 갔고,47) 끝내 광주 해안가의 많은
지역을 누르고 마카오가 무역 중심 지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48)
Ⅲ. 포르투갈인의 중일무역
[표 2] 16세기 중반 중일 교역 중 주요 사건
嘉靖27年(1548) 朱紈, 雙嶼港 공격, 王直, 五島로 본거지를 옮김.
王直, 복건 광동의 군도를 결성하여 100여척을 동원하여 절강
嘉靖32年(1553) 전지역을 위협. 王直 히라도(平戶)로 이동 히라도를 밀무역의
근거지로 삼음.
嘉靖29年(1550) 포르투갈 선박 히라도 입항.
嘉靖36年(1557) 王直 포로로 잡힘.
嘉靖38年(1559) 王直 伏誅
隆慶元年(1567) 月港 開港
隆慶5年(1571) 포르투갈 선박 나가사키 입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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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도록 하자. 당시 일본에 대한 왕직의 영향력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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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거주하는 주민들이 드물었으나 요즘은 많은 상인들이 거주하고 있
어서, 20년 동안 番舶의 淵藪가 되고 있다(平戶島昔鮮人居, 今居商衆.
二十年來爲番舶之淵藪).”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다. 즉 王直은 히라
도나 고토(五島) 제도를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이곳에 모여든 番舶과
番夷들을 지휘하는 입장에 섰던 것이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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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는 부를 쌓으니 夷人이 크게 믿고 따랐다. 그를 五峯船主라 하였
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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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인들이 광주 부근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이러한 행적은 嘉靖
27年(1548) 雙嶼港의 괴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
다. 쌍서항이 괴멸된 이후에는 다시 좋은 항구를 찾을 수밖에 없었는
데 王直의 배들은 정크선60)으로 수심이 얕은 해안에도 무리 없이 접
안할 수 있고, 연안 주민들과 굳건한 네트워크를 지녔기 때문에 장소
에 비교적 구애를 받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포르투갈인들
은 나우선(Nao da Carreira da India)61)을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수심이 깊어야 하고, 연안 주민과의 네트워크도 그렇게 강하
다고는 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항구가 그들에게
는 필수적이었다고 추측된다. 쌍서항의 괴멸 이후, 포르투갈인들로서
는 다시 좋은 항구를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미 왕직 등의 왜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이루어지고, 海禁이 강화된 상태에서는 이것이
더욱 곤란하게 되었고, 이렇게 되면 다시 廣州 부근으로 남하할 수밖
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보면 어째서 1554년부터 명조와 포르투갈 사이에 화해 분
위기가 조성되었는지 분명해 진다고 생각된다. 바로 전해인 1553年
(嘉靖32)이라는 시기는 바로 王直이 복건과 광동의 群盜를 결집시키
고, 선박 100여척을 동원하여 절강성과 강소성 일대를 대대적으로 위
협했던 해였다.62) 일종의 準전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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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투갈인들은 王直과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아무리
약탈을 자행하였던 않았던 포르투갈인들로서도 이러한 상황에서는 본
업인 교역 그 자체까지 도저히 영위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63)
그래서 명군과 왕직 사이의 戰線을 피하여 1554년부터 다시 廣州 인
근의 上川島로 남하해 올 수밖에 없었다. 반면, 정책 당사자인 明朝로
서는 1550년 북으로는 ‘庚戌의 變’64)을 겪은 바 있고 남으로는 1555
년 왜구가 南京을 침범하는 남북의 위기상황을 적극적으로 돌파할 필
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지점부터 王直과 포르투갈인들의 운명이 엇갈리게 된다. 주지하
다시피, 嘉靖36年(1557) 王直이 포로로 잡혔고, 다시 2년 뒤인 嘉靖
38年(1559)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왕직
의 남은 잔당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籌海圖編에
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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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명조의 왜구와 해상세력에 대한 토벌로 인하여 王直의 잔
존 세력까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어 ‘왜구적 상황’은 이제 소강상태
를 맞이하였다. 이를 포르투갈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의 견제
세력 혹은 라이벌들도 이제는 사라지게 된 것이다.
1560년대에는 왕직뿐만 아니라, 그 밖의 해상세력도 철저하게 진
압되어 왜구 토벌이 최종 국면을 맞이하였다. 嘉靖45年(1566)에는
明軍이 漳州 지방까지 거의 진압하여, 隆慶元年(1567)에는 月港을 龍
溪縣에서 분리하여 海澄縣을 새로이 건설하였다. 또한 명정부는 일본
인들을 배제하고, 중국 상인들에게는 교역허가증서인 ‘商引’을 발급받
는 조건으로 해외 출항을 인정하였다.66) 明初 이래 祖法인 ‘해금’이
완화된 것이다. 이후 漳州는 이후 동남아시아 교역의 중심지67)로 변
모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마카오에서는 포르투갈인들이 주로 일본과의 교역을
담당하고, 일본 상인이 배제된 월항에서는 중국 상인들이 주로 동남
아시아와의 루트를 맡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마카오 점유는 月港 개
항과 마찬가지로 명조정에서 현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朝貢一元論’을
대신하여, ‘非朝貢互市’에 대해서 상세를 부과하고, 그 상세를 수익으
로 삼으며 나아가 商舶(私貿易船)과 寇舶을 체재 내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68)
또한 앞서 인용한 嘉靖 浙江通志를 다시 살펴보면, 왕직의 활동
루트는 일본과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것이었고, 이를 뒷받침
한 것이 중국인 해상세력이었으며, 그 휘하에 일본인 등을 거느리고
있었고, 중국 연해의 해상무역을 상당 부분 독식하고 있었다고 생각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조의 방침은 왕직 세력에 대한 타도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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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일본인) 세력의 배제라는 강경책과 아울러서 이들을 대체할 만한
파트너를 찾고, 해외 교역에 관한 여론을 수습하기 위하여 안정적인
해외 교역 출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즉 포르투갈 세력 역시 嘉靖33
年(1554)부터 이러한 정책 변화에 화답하여 중국에 대한 무력 사용
을 완전히 포기하여, 뇌물을 바치거나 명조의 정책에 순응하는 것으
로 바뀌었다.69)
명조는 단순히 마카오의 거주를 허락하는데 그치지 않고 포르투갈
인들을 적극적으로 관리하였다. 마카오를 관리하는 ‘守澳官’ 이라는
하급관원을 두었고 海道副使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萬曆2年(1574)
중국 본토와 마카오 사이에 閘門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포르투갈인들
이 본토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고, 역시 중국인이 마카오로 들어가
는 것을 금지하였다. 갑문은 5일에 한 번씩, 매월 6차례 갑문이 열리
고 마카오에 식량과 일상용품을 공급하였다. 나아가 만력42년(1614),
주둔 군인을 1,000명으로 증원하였고, 參將을 그 책임자로 임명하였
다. 천계원년(1621)에는 마카오에 대한 수비를 더욱 엄밀히 하여 갑
문을 지키는 군대 이외에도 手兵 1,200여명, 把摠 3명, 哨官 4명, 哨
官, 크고 작은 哨船 5척을 증설하기도 하였다.70)
이러한 통제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교역에 대해서 명조정은 포르
투갈선에 대해서 매우 유리한 교역조건을 제공하였다. 200톤의 화물
을 싣고 광주에 입항하는 각국의 선박은 통상 5,400량을 납부해야
했지만, 포르투갈 선박의 경우, 1,800량의 세금을 납부하고, 그 다음
번에는 그의 1/3인 600량을 납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선박을 호위
하는 군함의 경우, 다른 나라 선박은 통상 세금이 징수되었지만, 포르
투갈 선박의 경우는 이마저도 면제를 받았다.71) 확실히 포르투갈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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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은 명조로부터 이례적인 우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포르
투갈은 매년 2만량을 상세로 납부하였다고 한다.72)
앞서 서술하였듯이 포르투갈인들은 광주에서 봄과 가을에 한 번씩,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攬頭’라고 하는 중국인 상인
(일종의 매판)을 중개로 하여 교역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일에 종사한
것은 복건 상인73)들이 많았다고 하고 이들은 36行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74)
嘉靖36年(1557) 왕직 세력을 타도하고 嘉靖45年(1566)에는 漳州
을 진압하여 강경책은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해외 교역의 분출
구로서 광동지역에서는 마카오, 복건지역에서는 월항이 각각 선택되
었다. 그리고 그 무역의 담당자 역시 포르투갈인과 왜구 세력이 배제
된 중국인들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마카오의 포르투
갈인들로서는 중일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가, 月港의 중국인들
해상집단으로서는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
회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마카오와 나가사키간의
항로를 독점하는 길은 포르투갈인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셈이었다.
[표 3] 마카오와 月港의 비교
주요민족
구 분 위치 개항시기 주요항로
구성
嘉靖36年 나가사키, 마닐라,
마카오 廣東省 香山縣 포르투갈인
(1557) 말래카
隆慶元年
月港 福建省 漳州府 중국인 마닐라
(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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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말래카-마카오-나가사키>에 이르는 장대한 노선이 비로소 성립
되었다.76) 명조의 입장으로 볼 때 마카오와 月港은 하나의 경제 특구
와도 같은 지역으로, 마카오는 포르투갈인들을 배치하여 일본과 마닐
라와의 교역을 할 수 있었고, 특히 일본과의 교역은 1600년대 이전
까지 거의 독점 상태에 있었다.77) 아마도 명조의 입장에서는 관리하
기 무척 어려운 일본인(왜구) 세력의 파트너로 역시 귀찮은 존재인
포르투갈을 선택・배치함으로써 해외 교섭으로 인한 모순과 알력을
본토로부터 분리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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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마카오에서 충분한 물자를 적재한 포르투갈 선박은 5월, 6월 남방
계절풍을 이용하여 다시 일본으로 출발하였다. 포르투갈 선박은 대체
로 보름에서 20일 동안 항해하여 7,8월에 나가사키에 도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여기에서 거래를 마칠 때까지 일본의 항구에 3,4개월
간을 체류하여 무역이 완료되자 북방 계절풍이 불어오는 것을 기다려
서 돛을 올렸다. 따라서 11월에서 12월에 일본을 출범하여 이듬 해
1월이나 2월에 마카오에 최종적으로 돌아왔다.78)
중일무역의 주요 교역품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마카오에서 나가사키
로 보내는 수출품으로서는 우선 生絲, 鹿皮, 羅紗 등을 들 수 있고,
거꾸로 나가사키에서 마카오로 보내진 수출품으로서는 銀, 구리, 도검
등을 들 수 있다.79) 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은 유럽이나 인도로부터 운반된 白銀이나
화물을 중국에 판 후에, 중국에서 生絲, 견직물, 금속(납, 주석, 수은),
한방약의 재료(사향), 직물 등을 싼 값에 구입하였고, 나아가 유럽이
나 인도의 골동품, 무기, 향료, 포도주, 면화 등을 추가하여 나가사키
로 운반하였다.
포르투갈 상인이 광주에서 사들였을 때의 가격과 나가사키에서 이
를 팔았을 때의 가격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이 점은 주요
상품인 견직물이나 銀 모두에 해당하였다. 따라서 포르투갈 상인은
마카오에서 나가사키로 화물을 운반하여 판매하면 운반비와 관세를
지불하고도 거액의 이윤을 남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80) 예를 들면 萬
曆6年(1578) 마카오에서 나가사키로 1,600擔(piculs)의 생사가 운반‧
판매되었는데, 현지인 광주에서 1擔 당 90듀카트(ducats)에 구입하여
나가사키에서는 140듀카트에 팔렸다고 한다.81) 마카오 상인의 평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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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1546-1639년까지 포르투갈 선박의 일본 내항 척수
(資料來源 : 李隆生, 2006, 84쪽. 표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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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포르투갈 상인은 생사를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판 뒤에,
일본의 금, 백은, 칠기, 조선용의 목재 등과 교환해서 마카오로 가지
고 가서 다시 중국에 매우 비싼 가격으로 판매하였다. 나가사키에서
마카오로 운반된 화물은 은(銀)이 중심이었는데, 1585년부터 1640년
까지 나가사키로부터 마카오로 들어 온 銀은 평균 135만량에 달했
다.85) 특히 1615-1625년 사이, 약10년 동안 350-400만냥의 은이
수출되었는데, 이는 일본의 은 수출량 가운데 6%-23%에 달했다고
한다.86) 이처럼 포르투갈 상인에게 축적된 막대한 은은 인도 고아
(Goa)로 가는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중국 시장에 투하되었다.87)
일본은 금 매장량도 매우 풍부하여 유럽이나 인도의 향료, 면, 모
직물, 특히 중국의 생사나 그 기타 상품과 교환할 때에 사용되었다.
그 결과 금이 일본으로 마카오로 운반되었던 수량도 상당하여 포르투
갈 상인과 일본의 무역이 최전성기에는 금의 연간 수출량은 300톤에
달하였다.
이와 같은 번영도 1600년대에 들어와서는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변화의 요인을 하나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중
국인 해상세력이 다시 중일 무역에 뛰어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림
3)에서 볼 수 있듯이, 포르투갈에 의한 중일 교역이 1616년을 계기
로 급작스럽게 확대된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환경이 중국인들이 중
일 교역에 뛰어들게 된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더구나
1620년대는 鄭芝龍의 해상 선단88)이 다시 활약을 개시한 시기이기
도 하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1600년대에 들어오면서 명조의 해
금 정책이 다시금 해이해져서 무역허가증인 ‘商引’을 매개로 한 무역
통제의 이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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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년 奸民들이 일본과의 무역 이익이 呂宋(=필리핀)과의 이익의 두
배라고 여기고, 여러 지방의 관원들에게 아부하여 (관원들이) 멋대로
(일본으로 가는 통항증명서인) 票引을 지급하여 마음대로 海禁을 열고
있다(‘開洋’). 높은 돛과 거대한 선박을 타고 倭國과 왕래하고 있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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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와 나가사키를 운항하는 경우도 있었다.93) 그리고 1631년부터
일본 막부에서는 견직물에 대해서 가격을 제한하는 제도, 즉 絲割符
제도를 통하여 포르투갈인들을 견제하려 하였다. 朱印船과 絲割符 제
도의 실효는 1620년대 점점 분명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총
生絲수입은 1,000-1,600擔에서 3,000擔으로 증가하였으나, 도리어
포르투갈인들의 이익은 1/3로 줄어들었다.94)
[그림 4] 1611-1639년까지 일본 내항 중국 선박 숫자
(資料來源 : 岩生成一, 1953, 11쪽. 표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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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대신하여 아시아 지역의 전체 무역과 운송을 독점하면서 서태평
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 결과 포르투갈인이 70여년간 경
영해온 마카오와 고아·리스본의 무역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520년부터 시작된 포르투갈의 對아시아 무역은 16세기 후반 그
절정에 이르렀다가, 17세기 초 서양으로부터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라는 적수를 맞이하여 커다란 어려움을 맞이하였고, 그리고 가장 중
요한 무역상대인 일본으로부터 추방되면서 對아시아 무역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이제는 일본이 아닌 동남아시아 무역으로 그 중심을
전환하였다. 그 이후, 동아시아 역내 무역은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중
심으로 타이완-나가사키를 잇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그 주인공이
바뀌게 되었다.
1580년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병합되었는데, 포르투갈은 이 합병에
실질적인 이익을 누리는 것은 거의 없고,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걸친
대국 스페인의 적을 그대로 자신의 적으로 마주대할 수밖에 없는 불
리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스페인 무적함대가 괴멸된 1588
년 이후는 특히 신흥 강자인 네덜란드 세력과 직면하였기 때문에 더
욱 불리해 질 수밖에 없었다.96) 16세기 말이 되면 포르투갈의 무기
나 항해술은 다른 나라가 이를 모방하였기 때문에, 포르투갈은 이제
는 쫓기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각지의 요새 유지비용은
증가하였지만 무역 이익은 그만큼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포르투갈
해상제국은 점점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97) 이러한 상태에 대해서 네
덜란드인들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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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요소는 – 인용자) 이미 그들을 크게 약화시켰고, 더구나 그들과 다
른 나라와의 무역을 크게 파괴하였다. 현재 그들은 중국 이외에 어떠한
국가에서도 이익을 얻을 수 없다.98)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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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접한 제휴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嘉靖27年(1548) 쌍서항이 명군
의 공격으로 파괴되고, 그 반동으로 嘉靖31年(1552)부터 嘉靖35年
(1556)까지 왜구 세력의 중국 연안에 대한 약탈 활동, 즉 ‘왜구적 상
황’이 계속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조는 국면을 타개하고 왜구 세
력을 분산하기 위하여, 포르투갈 세력을 체제내로 포섭하기 시작하였
다. 이에 발맞추어 1550년대 포르투갈인들의 교역 중심지는 ① 上川
島(Sao Joao) → ② 浪白澳(Lampacau) → ③ 마카오(Macau) 순서로
점점 중국 연안에 접근하였고, 최종적으로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었
다. 그리고 廣州府城에 직접 들어가서 교역을 할 수 있게도 되었다.
이로써 왕직 등을 비롯한 후기왜구 세력과 포르투갈 세력은 분리
되었고, 포르투갈 세력 역시 嘉靖33年(1554)부터 이러한 정책 변화
에 화답하여 중국에 대한 무력 사용을 완전히 포기하여 뇌물을 바치
거나 명조의 정책에 순응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嘉靖36年(1557) 왕
직 세력을 타도하고, 嘉靖45年(1566) 漳州를 진압하는 등, 명조의 강
경책은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그 과정에서 해외 교역에 대한 수요의
분출구로서 광동지역에서는 마카오, 복건지역에서는 월항이 각각 선
택되었다. 그리고 그 무역의 담당자 역시 포르투갈인과 왜구 세력이
배제된 중국인들이 선택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마카오의 포
르투갈인들로서는 중일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가, 月港의 중국
인들 해상집단으로서는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절호
의 기회가 활짝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포르투갈의 마카오 점유는 月港 개항과 마찬가지로 ‘朝貢一元論’과
商舶ㆍ寇舶들과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조정이
현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朝貢一元論’을 대신하여, ‘非朝貢互市’에 대
해서 商稅를 부과하고, 그 상세를 수익으로 삼으며, 나아가 商舶(私貿
易船)과 寇舶을 체재 내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명조의 후원에 힘입어 포르투갈 세력은 마카오-나가사키
간의 항로를 개척하였고, 여기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러한 황금기는 1570-1600년대까지 약 30년에 걸친 것으로 16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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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이후에는 일본의 朱印船과 絲割符 제도의 성립,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참여, 더구나 중국 해상 세력의 일본 무역 참여 등으
로 인하여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크리스트교 禁壓이라
는 종교 문제까지 겹치면서 최종적으로 1639년 에도 막부는 포르투
갈의 일본 내항까지 금지시키게 되었다. 이로서 포르투갈인은 마카오
-나가사키 루트에서 최종적으로 축출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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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Hong, Sung-Hwa*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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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uguese and Chinese excluded Japanese power were selected as
counterpart for the trade. That is, opportunaties of monopoly in
Chinese-Japanese trade for Portuguese in Macau and in East-southern
Asia trade for Chinese marine merchants in Yuegang(月港).
Owing to this support from Ming dynasty, ‘Macau-Portuguese
Power’ pioneer a pathway between Macau and Nagasaki and got a
huge amount of benefits from it. This golden age lasted 30 years from
1570s to 1600s. Since 1600s, it went down it’s luck with Red seal
ships(朱印船) of Japan, establishment of Ito-Wappu(絲割符) system,
participation of Dutch East India Company and Chinese marine power
into Japanese trade. Further to this, Edo Bakufu banned internal
navigation of Portuguese’ in Japan with religious issue. Finally,
Portuguese got expelled from Macau-Nagasaki route.
논문투고일 : 2017. 11. 17. 논문심사일 : 2017. 12. 09. 게재확정일 : 2017.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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