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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경계』105 (2017.12.

), 453~495쪽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 마카오를 중심으로*171)
홍 성 화** 172)

목차 Ⅰ. 머리말
Ⅱ.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정착 과정
Ⅲ. 포르투갈인의 중일무역
Ⅳ. 맺음말

❚ 국문초록

1521년과 22년의 屯門海戰 이후 廣州를 떠나 浙江省 雙嶼港을 중심으로


비합법적·약탈적 무역을 진행하던 포르투갈 세력은 嘉靖36年(1557) 明朝의
허락을 얻어 마카오에 정착하고, 1571년 규슈의 나가사키가 개항되자 마침내
마카오-나가사키 루트가 성립되었다. 많은 개설서에서는 嘉靖36年(1557) 포
르투갈이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었던 계기는 중국 지방관에 대해서 뇌물을
썼기 때문이라고 하고, 중국 정부에서는 암묵적으로 이를 인정했기 때문이라
고 서술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여러 사정을 종합해 보면, 이
는 유력 지방관이나 명조정의 암묵적 묵인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嘉靖大倭寇’ 시기, 명

* 이 논문은 2015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5S1A5A8017527).
**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부교수/ cantell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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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국면을 타개하고 왜구 세력을 분산하기 위하여, 포르투갈 세력을 체제
내로 포섭하기로 방침을 바꾸기 때문이다. 이로써 왕직 등을 비롯한 후기왜
구 세력과 포르투갈 세력은 분리되었고, 포르투갈 세력 역시 嘉靖33年(1554)
부터 이러한 정책 변화에 화답하여 중국에 대한 무력 사용을 완전히 포기하
여, 뇌물을 바치거나 명조의 정책에 순응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해외 교역에 대한 수요의 분출구로서 광동지역에서는 마카오, 복건지역에서
는 월항이 각각 선택되었다. 그리고 그 무역의 담당자 역시 포르투갈인과 왜
구 세력이 배제된 중국인들이 선택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로서는 중일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가, 月港의 중국인들
해상집단으로서는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활
짝 열렸다. 이러한 황금기는 1570-1600년대까지 약 30년에 걸친 것으로
1600년대 이후에는 일본의 朱印船과 絲割符 제도의 성립,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참여, 더구나 중국 해상 세력의 일본 무역 참여 등으로 인하
여 사양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종교 문제까지 겹치면서 1639년 에
도 막부는 포르투갈의 일본 내항까지 금지시키게 되었다. 이로서 포르투갈인
은 마카오-나가사키 루트에서 최종적으로 축출되었던 것이다.

주제어 明代, 포르투갈, 마카오, 王直, 中日貿易

Ⅰ. 머리말

1521년과 22년의 屯門海戰 이후 廣州를 떠나 浙江省 雙嶼港을 중


심으로 비합법적·약탈적 무역을 진행하던 포르투갈 세력은 嘉靖36年
(1557), 드디어 明朝의 허락을 얻어 마카오에 정착하고, 그 뒤 1571
년 규슈의 나가사키가 개항되자 마침내 마카오-나가사키 루트가 성
립되었다.1) 즉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 네트워크는

1) ‘마카오 ↔ 나가사키’ 무역에 대해서는 黃啓臣 外, 박기수ㆍ차경애 역, 


마카오의 역사와 경제(서울, 성균관대출판부, 1999), 22-24쪽 참조. 그
밖에도 矢野仁一, 支那近代外交關係硏究 - ポルトガルを中心とせる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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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리스본부터, 인도
의 고아(Goa)를 거처 일본의
나가사키에 이르는 극히 광
대한 범위까지 미치고 있었
다.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明
初까지 비교적 단순한 형태
의 동아시아 역내 네트워크
(그림1)는 매우 다양하고 복
잡하면서도 긴밀한 형태로
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림 1] 明初 環中國海의 주요 항로
명대 포르투갈의 교역 활
동에 대해서 보통 세 시기로 구분하곤 한다.2) <제1기> 1514-1522
년 - 廣州 연해 무역 시기, <제2기> 1522-1549년 - 복건과 광동
연해 무역 시기, <제3기> 1549-1557년 – 마카오 정착시기. 본고에
서는 특히 <제2기>에서 <제3기>까지의 기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1550년대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대체로 서로 다른 4개의 학설이 있다.3) 즉 ‘차지설(借地說, 마카오를
빌렸다는 설)’, ‘혼입설(混入說. 다른 집단들과 섞여 들어갔다는 설)’,
‘점령설’, ‘대가설(報酬說, 왜구를 토벌한 노고에 대한 대가로 거주를

清外交貿易(東京, 弘文堂, 1928); Chang Tien Tse, Tianze Zhan,


Sino Portuguese Trade from 1514 to 1644: A Synthesis of
Portuguese and Chinese Sources(Leiden, Ams Pr Inc, 1978(張天澤,
姚楠 外譯, 中葡早期通商史(北京, 中華書局, 1988)); Souza, G.B.,
The Survival of Empire: Portuguese Trade and Society in China
and the South China Sea, 1630-1754(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참조.
2) 張增信 明季東南中國的海上活動(上篇)(臺北, 臺北東吳大學, 1988),
323-324쪽.
3) 李隆生 晩明海外貿易數量硏究-兼論江南絲綢産業與白銀流入的影響(臺北,
秀威資訊科技股份有限公司 2006), 26-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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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가 받았다는 설)’ 등을 들 수 있다. 일례로 丁順茹는 포르투갈이 明
朝의 海防 체제가 해이해졌고, 아울러 廣州가 외국 상인에 대해서 개
방하기로 하였던 틈을 타서 마카오에 다른 집단들과 함께 섞여 들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4) 顔廣文은 명정부가 이이제이 정책을 실시하
였고, 포르투갈인이 공손한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에 명정부가 포르투
갈인의 마카오 租借를 허락한 주요한 원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5) 한
편 劉學祥의 설명에 따르면 명나라는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장기 점유
를 허락한 중요한 가장 원인은 포르투갈이 지닌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몽골을 비롯한 북방민족에 대한 위협을 중시
하여 북방민족을 위주로 한 민족 정책을 실시한 결과였다고 하고 있
다.6)
다른 한편 盛菊과 李令彬은 포르투갈인들이 장기간 마카오에 거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중국
왕조는 전통적으로 자만하여 포르투갈을 해외의 소국으로 간주하여
안중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통상으로 인한 경제적 이
익, 특히 광동 당국이 지니고 있던 매우 커다란 흡입력 때문이라고
한다.7) 차오 산투스(査烏‧山度士)는 중국은 마카오의 ‘할양’을 통하여
아래와 같은 이익을 거두었다고 적고 있다. 즉 “海盜를 종식시키고,
남방을 안정시켰으며, 상업을 촉진하고, 華人의 出洋을 막고 洋人의
입경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하고 중국이 마카오를 통해서 얻은 이익
이 결코 적지 않다고 적고 있다.8) 佐久間重男의 경우, 간단히 포르투
갈인들이 중국 관헌의 해적 토벌에 협조하여 마카오 거주권을 획득하
였다고 하고 있다.9)

4) 丁順茹, 「明季葡萄牙殖民者佔據澳門緣由管見」 學術雜誌 1999-6期.


5) 顔廣文, 「再論明政府允許葡人租借澳門的原因」 中國邊疆史地硏究
1999-2期.
6) 劉學祥, 「從明朝中期的民族政策看葡萄牙殖民者竊佔澳門得逞的原因」 中國
邊疆史地硏究 2000-36期.
7) 盛菊‧ 李令彬, 「從賃居到强佔」 淮北師院學報(哲社版) 1999-4期.
8) 査烏‧山度士, 「十六‧十七世紀圍繞澳門的葡中關係」 文化雜誌 1989-7‧8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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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포르투갈의 마카오 점유 과정을 明朝가 처한 대내외적
환경 속에서 이를 다시 고찰하고자 한다. 많은 개설서에서는 嘉靖36
年(1557)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었던 계기는 중국 지방
관에 대해서 뇌물을 썼기 때문이라고 하고, 중국 정부에서는 암묵적
으로 이를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여러 사정을 종합해 보면, 이는 유력 지방관이나 명조정의
암묵적 묵인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1570년부터 1600년대까지 약30년간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나카사
키 루트를 독점하여 막대한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황금 노
선에 1600년대 이후부터는 네덜란드 상선과 중국인, 그리고 주인선
(朱印船)들이 참여하여 다극적인 무역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그렇다
면 도리어 어떻게 1570년부터 1600년까지 포르투갈인들이 이 황금
루트를 홀로 독점할 수 있었는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본고에서는 우선 포르투갈인들이 어떻게 마카오에 정착하게 되었
는가를 서술하고, 이것을 명조의 해외정책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그 다음으로 마카오-나가사키 루트를 중심으로 한 중·일간의 교역에
서 마카오를 중심으로 한 포르투갈인들의 교역 실태에 대해서 서술하
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위의 서술을 기반으로 1570년대부터 1600년
대까지 포르투갈인들이 어떻게 중일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고, 1600
년대부터 그 독점 지위가 동요되다가 1639년에 마침내 종언을 고하
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포르투갈인의 마카오 정착 과정

9) 佐久間重男, 日明關係史の硏究(東京, 吉川弘文館, 1992), 3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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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초 포르투갈인은 이미 중국 주변에 도달하였다. 1515년 포
르투갈을 섬기던 이탈리아 항해가 Giovanni de Empoli(1483-1518)
는 그의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포르투갈인들은 중국을 발견했습니다. 중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


한 국가입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백인(white people)이며, 그들
은 마치 독일인처럼 옷을 입고 있습니다. … 그들은 질서와 법을 잘 따
르고 있으며, 우리들에게 매우 친절합니다. 이 나라는 아주 질 높은 생
사(生絲)가 풍부하며, 가치는 매필 30크루자도(cruzados) 정도입니다.
… 따라서 만약 이들 중국 물건들을 말래카로 가져와 판다면, 30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10)

여기에서 엠폴리는 중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이며 자


신들과 같은 백인, 그리고 질서와 법을 잘 따르고 있다고 적고 있다.
특히 중국산 생사를 어떻게 무역에 이용할 것인가 대해서 일찍부터
주목하고 있었다. 중국산 물품으로 이익을 얻기 위하여 포르투갈인들
은 적극적으로 중국과의 교역에 나섰다. 한편, 중국 사람들은 포르투
갈인과 처음 대면한 후 이들을 ‘佛郞機’로 표기하였다.11)
1513년 조르즈 알바레스는 말래카를 출발하여 마카오와 홍콩 사이
의 屯門에 상륙하였다. 그가 중국 본토에 상륙한 최초의 포르투갈인
이었다. 1517년 국왕의 정식 사절인 토메 피레스가 광주에 입항하여

10) Ferguson, Donald., “Letters from Portuguese Captive in Canton”,


The Indian Antiquary, 30(1901), p.423.
11) 마테오 리치는 佛郞機 표기의 기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
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중국 해안선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도착하였다.
섬에 사라는 사람들은 그들을 프랑크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는 회교도가
모든 유럽인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중국 문자에는 R 발음이 없다. 동시
에 자음은 단독으로 발음이 나지 않는다. 따라서 실제로는 FRANK를
FURANCI로 발음했다. 이후 그들은 유럽의 무기를 프랑크라고 불렀다.”
마테오 리치, 신진호 외역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문사철, 2011),
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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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에게 국교를 구하였으나, 이는 실패로 끝이 났다. 그 뒤 중국과 포
르투갈 사이에 충돌이 벌어져 1521년과 1522년, 제1차·2차의 屯門海
戰이 발발하였는데, 여기에서 포르투갈은 패배를 맛보고 광주항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12)
屯門海戰 이후, 嘉靖年間 초기까지 포르투갈 세력과의 무역을 포함
한 밀무역 전반에 대한 엄한 금령이 빈번히 시행되었다.13) 반면 嘉靖
年間 중기부터는 해금 정책의 기조는 유지되었지만, 실행이라는 측
면에서 점차 해금이 이완되는 모습이 현저해졌다.14) 이러한 상황하에
서 연해 주민들은 다시 외국 상인들과 결탁하여 밀무역을 진행하기
시작하였다.15) 그리고 여기에 중요한 거점으로 등장한 것이 福建 月
港과 浙江 雙嶼港이었다.16)
1521년과 22년의 屯門海戰 이후, 廣州에서 물러난 포르투갈인들은
이러한 해금 이완 추세에 발맞추어 寧波 앞 바다의 雙嶼港까지 진출
하였다.17) 여기에서 포르투갈인들은 雙嶼港에서 다시 그 행동반경을

12) 이 과정에 대해서는 홍성화, 「전쟁과 사절-屯門海戰과 明朝의 대외정책


변화」 사림61(2017). 참조.
13) 明世宗實錄 卷154 嘉靖12年(1533) 9月辛亥 “兵部其函檄, 浙福兩廣各
官督防勦一切違禁大船盡數毁之, 自後沿海軍民私與市賊, 其隣舍不擧者連
生, 各巡按御史速査連年縱寇及縱造船, 官具以名聞.” 한지선, 「嘉靖年間
東南沿海社會와 月港의 開放」 중국사연구90(2014), 140-141쪽. 참
조.
14) 萬表, 海寇議 “近年海禁漸弛, 貪利之徒勾引番船, 憤然往來, 而海上寇盜
亦紛然矣.”
15) 兪大猷, 正氣堂集卷7 「論海勢宜知海防密書」“數年前徽州浙江等地方之番
徒, 引誘西南番至浙江雙嶼等處爲貿易. 藉以免避廣東市舶司之稅.”
16) 施存龍, 「葡萄牙人與Liampo考證」 文化雜誌42, 2002; 籌海圖編 卷
12 「開互市」 “福人導之改泊海倉月港. 浙人又導之改泊雙嶼. 毎歲夏季而
來, 望冬而去.”
17) 쌍서항에 대한 당시 포르투갈인들의 묘사에 대해서는 페르낭 멘데스 핀
투, 이명 역, 핀투 여행기상(서울, 노마드북스, 2005), 369-371쪽; 同,
핀투 여행기하, 639쪽. 참조. 岡本良知, 十六世紀日歐交通史の硏究
(東京, 原書房, 1974(原刊, 1942)) 제3장 「支那に於けるポルトガル人の
貿易港の推移」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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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혀서 복건성 장주까지 그 행동 영역을 넓혔다.18) 당시 포르투갈세
력은 왜구 등과 어울려서 약탈 등을 일삼았기 때문에 특히나 중국인
들로부터 ‘蕃鬼’19)라 불리며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요컨대
‘왜구적 상황’20)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550년대에는 극
적으로 명조와의 화해가 다시 이루어져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포르투갈인들이 嘉靖36年(1557)부터 항구적인 기지로서
점유하게 된 마카오는 대체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마카오의 원래 이름은 ‘濠鏡澳’로서 廣東省 香山縣에 속하였고, 縣城
과는 135리에서 140리 정도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어촌에 불과하였
다.21) 그러나 廣州府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한다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하여 嘉靖年間부터 南洋 여러 나라에서 조정 몰래 수많은 밀무역이
이루어지던 장소로 변모하게 되었다.22) 이 때문에 1535년에는 광동

18) Boxer, C. R., South China in the Sixteenth Century: being the
narratives of Galeote Pereira, Fr. Gaspar da Cruz, O.P. (and) Fr.
Martín de Rada, O.E.S.A. (1550-1575), (London, Hakluyt Society,
1953), p.192; ガスパール・ダ・クルス, 日埜博司 譯, クルス『中國誌
: ポルトガル宣教師が見た大明帝國(東京, 講談社, 2002), 252쪽.
19) Boxer, C. R., South China in the Sixteenth Century, p.191; ガス
パール・ダ・クルス, クルス『中國誌 : ポルトガル宣教師が見た大明帝
國, 249쪽.
20) 荒野泰典, 石井正敏, 村井章介, 「時代區分論」 アジアのなかの日本史1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1992).
21) 印光任, 澳門記略上卷 「形勢篇」, 龔翔麟(1658—1733)의 珠江奉使記
에 따르면 “今之澳門, 卽舊名濠鏡.”이라고 하여, 澳門의 예전 이름이 ‘濠
鏡’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澳門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張
甄陶(乾隆14年(1745) 進士)의 澳門圖說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澳門在廣州府香山縣之東南, 去縣治陸路一百四十里, 水路一百五十
里, 凡海中依山可避風, 有淡水可汲曰澳, 又其東南大十字門, 西有小十字門,
海舶由以出入, 因呼曰澳門.” 澳門의 영문 표기인 Macau 등의 유래에
대해서는 Boxer, C.R., Fidalgos in the Far East, 1550-1770: Fast
and Fancy in the History of Macau(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8), pp.3-4. 참조.
22) 澳門記略上卷 「澳蕃編」 “嘉靖中又移濠鏡者, 則有暹羅, 占城, 爪哇, 琉
球, 渤泥諸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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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박사가 마카오에 설치되었고, 1537년에는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
무역에 섞여 들어오기 시작하였다.23) 즉 마카오에서 외국인과의 무역
이 시작된 것은 1535年(嘉靖14)부터였고24), 외국인이 항구적으로 정
착하기 시작한 것은 1553년부터였다. 이러한 사정은 아래의 사료에
서도 확인된다.

明初, 占城(=참파) 등의 여러 나라는 조공을 바치지 않고 (중국과) 互


市를 열었다. (明朝廷에서는) 市舶提擧를 설치하여 이를 주지하도록 하
였다. 그러나 화물을 적재하여 싣고 와서 互市가 끝나면 돌아갔기 때문
에 澳門(=마카오)에 盤踞하는 자는 없었다. (반거하는 자가 – 인용자)
생긴 것은 嘉靖32年(1553)부터였다.25)

그러나 포르투갈과 명조와 화해가 정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嘉靖33


年(1554)부터라고 생각된다.26) 1554년에 포르투갈인들은 廣州府城에
당당히 입성하여 교역을 하고, 市舶司에서 抽分27), 즉 商稅를 납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의 교섭은 주로 海道副使 汪柏과 카피
탄 몰(Capitão-mor)인 레오넬 드 수자(Leonel de Sousa)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루어진 화해를 “Luso-Chinese agreement of
1554”라고 부르기도 한다. 포르투갈이 명나라의 문호를 두드린 지

23) 黃鴻釗, 澳門史綱要(福州, 福建人民出版社, 1991), 62쪽.


24) 澳門記略上卷 「官守編」 “都指揮黃慶納賂, 請於上官, 移舶口於濠鏡, 歲
輸課二萬金, 澳之有番市, 自黃慶始.”
25) 王以寧, 東澳疏草 卷5 「條陳海防疏」
26) 포르투갈 선교사 가스파 다 크루즈(Gaspar da Cruz, 1520-1570)에 따
르면 “1554년부터 중국에서의 교역은 매우 평온하면서도 어떠한 위험도
없이 이루어졌다. 예전에는 많은 배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1554년)부터 지금까지 어떤 참사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면 한 척의 배
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1554년을 중국과 포르투갈 간의 무역
에서 매우 중요한 해로 기록하고 있다. Boxer, C. R., South China in
the Sixteenth Century, p.248; ガスパール・ダ・クルス, 2002, 248쪽.
27) 明代 시박사의 抽分 관행에 대해서는 홍성화, 「전쟁과 사절-屯門海戰과
明朝의 대외정책변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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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만에 마침내 廣州 부근에서 합법적인 무역을 이루어낼 수 있
었던 것이고, ‘왜구적 상황’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곳을 포르투갈 기지로 할 것인가는 확정되지 않은 상
황이었다. 비로소 嘉靖36年(1557)이 되면서 포르투갈인은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554년에 정식으로 포르투갈
이 마카오에 정착하였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28)
1550년대를 통하여 포르투갈인들의 교역 중심지는 광동성을 중심
으로 ① 上川島(Sao Joao) → ② 浪白澳(Lampacau) → ③ 마카오
(Macau) 순서로 변화하였고29), 광주에서 멀리 떨어진 섬들인 ①과
②에서 비교적 광주부에서 가까운 반도인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었
다. 즉 명조와의 교섭 정도에 따라서 廣州府城에서 멀어지거나 가까
워졌던 것이다. 그들이 마카오에 정착했던 모습은 아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날 아침 무렵 산차웅(=上川島, 인용자)을 떠난 일행은 해길 무


렵 6리그 떨어진 북쪽 섬 람파카우(=浪白澳, 인용자)에 도착하였다. 그
것은 1557년부터 칸통(=廣州)의 귤 거래가 시작되던 때부터 포르투갈
과 중국의 무역이 시작된 곳이다. 그 지방의 상인들은 포르투갈과의 무
역을 원했고, 항구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지금까지도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30)

28) 張廷茂, 明淸時期澳門海上貿易史(澳門, 澳門周刊出版有限公司 2004),


65쪽.
29) Boxer, C.R., Macau na Epocoa da Restavcao, 1942, p.27(鄧開頌‧黃
啓臣 編, 港史資料彙編 (廣州, 廣東人民出版社, 1991), 86쪽. 재인용)
30) 페르낭 멘데스 핀투, 이명 역, 핀투 여행기하, 노마드북스, 2005, 638
쪽. 上川島는 현재 廣東省 江門市 台山 앞에 있는 섬으로 1552년 프란
치스코 사비에르 신부가 임종한 곳으로 유명하다. 浪白澳는 포르투갈어
로 “Lampacao”라고 표기하였는데, 마카오 남쪽 부근의 섬으로 주하이
진완 공항(珠海金湾空港) 부근에 해당한다고 한다. 光緒 香山縣志의
기록에 따르면 “浪白竈淤淺不能停泊.”라고 하여 이미 퇴적으로 인하여
청말에는 항구로서의 기능은 정지된 듯 하고, 현재는 지형 변화로 인하
여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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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시 계절풍에 의존하는 항해 관습상, 계절풍의 방향에 따
라서 이동해야 만하는 상황에서 마카오에 최초로 항구적인 주거지가
탄생한 것31)도 이 嘉靖36年(1557)의 일이었다. 즉 1557년을 계기로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에 비로소 항구적인 정착지를 마련할 수 있었
다. 그리고 원래 참파나 자바 등에서 온 동남아시아 상인들도 마카오
에서 거래를 했지만, 그 뒤로는 모두들 포르투갈인들을 두려워해서
오로지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를 독점하게 되었다고 한다.32)
그런데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언제 정착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중국측 사료를 보면 그 서술이 조금씩 차이가 나서, 혼란을 야기하곤
한다. 이하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포르투갈
의 마카오 정착에 대해서 가장 유명한 중국측 사료는 아마도 萬曆 
廣東通志가 아닐까 한다.

嘉靖32年(1553), 舶夷 가운데 壕鏡에 온 자가 배가 풍랑으로 균열이


생겼고 (중국에 바칠) 貢物이 물에 젖었으니, 잠시 땅을 빌려서 (화물
을) 말리길 원하였다. 海都副使 汪柏이 뇌물을 받고 이를 허락하였다.
당시(‘時’)에는 초가집 수십 칸 정도였으나, 후(‘後’)에 상공업자 등 이익
을 도모하는 자들이 점점 벽돌이나 목석을 운반해 와서 집을 지으니,
취락의 모습이 완연했다. 이로부터 여러 澳는 황폐해지고 오로지 壕鏡
만이 舶藪가 되었다.33)

반면, 이에 대해서 張廷茂는 ① 舶夷가 구체적으로 佛郞機를 가리


키는지 불명확하고, ② 汪柏이 과연 거주까지 허락했는지 불명확하며,

31) 葉權, 賢博編(北京, 中華書局, 1987), 44쪽) “蓋海市當就船上交易, 貨


完卽行, 明年又至可也. 舍船而屋居岸上, 夷性變詐, 叛賊亡人各相煽惑, 知
中國短長, 一水竟達城下, 其勢何可久哉.” 마카오에 정착하기 이전 포르
투갈의 주요 근거지 가운데 하나였던 雙嶼港 역시 계절에 따른 거주의
변동이 있는 곳이었다. 籌海圖編 卷12 「經略」2 「御海洋」 “福人導之
改海滄月港, 浙人又導之改泊雙嶼, 每歲夏季而來, 冬而去.”
32) 明史 卷325 「外國傳」 「佛郞機傳」 “諸國人畏而避之, 遂專爲所居.”
33) 萬曆 廣東通志 卷69 「澳門」(鄧開頌‧黃啓臣 編, 港史資料彙編,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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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時’와 ‘後’가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인지 불명확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그에 따르면 이 사료에 의거하여 嘉靖32年에 포르투갈인들
이 마카오에 정착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가스파 다 크루즈(Gaspar da Cruz)의 中國誌(A
Treatise of China)의 서술과 日本一鑑의 서술과 대조한 끝에 ①
중국 정부와 화해가 이루어진 것은 1554년임이 틀림없으나, ② 무역
이 이루어진 곳은 廣州이지 마카오가 아니라고 하여, 1554년설을 배
격하고 있다. 다시 張廷茂는 포르투갈의 기록을 조사하여 1555년 포
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출입한 것은 확실하지만 계절풍이 끝난 뒤에
는 또 다시 축출되었다고 지적하고, 嘉靖36年(1557)에서야 포르투갈
인들의 항구적인 정착이 시작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34) 이 과정을
표로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포르투갈인들의 마카오 정착 과정
중국 정부와의 화해가 이루어짐
嘉靖33年(1554)
(=Luso-Chinese agreement of 1554)
廣州에서 무역이 이루어짐. 마카오에서 무역도 이루어졌으나
嘉靖34年(1554)
계절풍에 따른 일시적인 것
嘉靖36年(1557) 마카오에서 항구적인 거주지 마련
萬曆元年(1573) 海都副使에 대한 뇌물이 정식으로 地租로 변화.

전체적으로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정착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우여곡절이 많았고, 명조와 화해(“Luso-Chinese agreement of
1554”)가 이루어진 뒤에도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그리고
포르투갈의 마카오 거주 허가는 지방관에 대한 뇌물35)도 물론 작용
을 하였겠지만, 포르투갈과의 무역으로 얻을 수 있는 막대한 이익을

34) 張廷茂, 明淸時期澳門海上貿易史, 65쪽.


35) 1578년 이후에도 포르투갈인들은 광주의 지방관들에게 매년 4,000량의
뇌물을 바쳤다고 한다. 李隆生 晩明海外貿易數量硏究-兼論江南絲綢産業
與白銀流入的影響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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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지방관과 상인들이 암묵적으로나마 모두 인정한 것이 더욱 크
게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포르투갈의 마카오 점유에 대해서 명정부는 어떠
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기존에는 海道副使 汪栢의 뇌물 제
공 등으로 간단히 처리하고 이에 대한 명확한 정책까지는 없었던 것
으로 간주되고 있다. 실제로 그러한지 검토해 보기로 하자. 殊域周咨
錄 卷9 「佛郞機」條에서는 1522년 포르투갈인들을 축출한 이후에 대
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詔書를 내려서 佛郞機人들(=포르투갈인)이 進貢하지 못하도록 하였


다. 아울러 각국의 海商 역시 通市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番
船은 (광주에 - 인용자) 오지 않고 앞 다투어 福建의 漳州로 향했고, 廣
東‧廣西의 公私가 모두 匱乏해졌다. 嘉靖年間에 巡撫都御史 林富가 다음
과 같이 上書하였다. “… 모든 (해외 무역의) 이익을 근절해 버리면, 軍
國의 자금이 없어지고, 遠人의 마음을 잃게 될 것이니, 廣東 역시 市舶
을 폐하게 될 것입니다. … 正德年間에 불랑기인들이 광동에 도착하였
는데 사납고 무도하여 조정에 이를 보고하니, 국경 밖으로 내쫓도록 하
였습니다. 이로부터 (광동의) 有司들이 安南과 말라카 여러 番舶들을 근
절시키니 모두 福建 漳州府 연해지방으로 몰려갔습니다. 行商들의 이익
은 모두 福建으로 돌아가고 광동지역의 市井은 모두 蕭然해졌습니다.
… 番舶이 통행하였을 때는 公私가 모두 풍요로웠고, 창고에는 番貨가
가득하였습니다.… (祖訓이나 會典의 조공의 예로서 佛郞機와의 互
市를 허락하면 – 인용자) 중국으로서는 懷柔에 방법이 생기는 것이고
公私가 서로 편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에 따랐
다. 이에 番舶이 廣州에 다시 이르렀다.36)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1522년 포르투갈인들이 광주에서 쫓겨나 절


강성 쌍서나 복건성 장주 등지로 그 근거지를 옮긴 뒤에 광동지역의

36) 殊域周咨錄 卷9 「佛郞機」 林富의 이 상주문은 明史 「佛郞機傳」이나


顧炎武, 天下郡國利病書 33冊 「交趾西南夷」條에도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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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는 점이다.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安南
(베트남) 등의 동남아시아 무역선들도 광주를 멀리하고 함께 절강성
과 복건성을 중심으로 무역을 하였던 것도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단
순히 광주에서의 교역뿐만 아니라, 市舶司를 통한 관세 수입, 그리고
그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뇌물 등이 끊기게 되면서 “公私가 모두 匱
乏”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배경에는 正德年間 이후 명조의 재정악화라는 근본적인 사
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37) 명조로서는 祖法에 따라서 조공무역만을
허용하고 싶어도 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商稅 수입에 대한 유혹
에서 끝내 벗어나기 어려웠고, 포르투갈인들이 가져오는 풍부한 무역
수입에 대한 높아지고 있던 지역 여론을 억누를 만한 힘이 부족했다.
兩廣巡撫 林富가 위의 상주를 올렸을 때는 嘉靖9年(1530)의 일로
서 포르투갈의 정착이 실현된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부터 포르투갈
정착과 무역을 허가하라는 광동 지역의 여론은 이미 어느 정도 형성
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38) 다시 말해서 1557년 포르투갈의 마카
오 거주는 단순히 海都副使 汪栢에 의한 자의적 판단뿐만 아니라, 포
르투갈 세력과의 互市를 통한 무역 수입을 원했던 광동 지역의 여론

37) 續文獻通考 卷30 「國用」1 “正統時, 天下歲徵入數共二百四十萬兩, 出數


共一百餘萬兩, 自正德後, 出多入少國用盡不支矣.” 또한 嘉靖年間의 사례
를 보면 萬曆會計錄 「重修凡例」 “各邊餉年例浩繁, 多係嘉靖酉年以後增
加之數.”라고 하고 있는데, 嘉靖28년, 즉 1549년 전후로 유명한 알탄
칸에 의한 ‘庚戌의 變’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였다. 이른바 ‘北虜南倭’ 현
상이 본격화되던 시기로서 이로 인하여 재정이 더욱 압박받던 시기였다
고 할 수 있다. 명대 중기 군사비 지출과 재정 위기에 대해서는 黃仁宇,
阿風 外譯, 十六世紀明代中國之財政與稅收(北京, 三聯書店, 2001); 全
漢昇・李龍華, 「明代中葉後太倉歲出銀兩的研究」, (香港中文大學)中國文化
研究所學報 6卷 第1期, 1973; 賴建誠, 邊鎮糧餉:明代中後期的邊防經
費與國家財政危機, 1531-1602(臺北, 聯經出版公司, 2008) 등 참조.
38) 복건지역의 경우, 엄격한 해금정책하에서도 밀무역의 주도적인 세력은
鄕紳層이었다는 점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원정식, 「명청시대 복건의
상인과 국가권력」 명청사연구13, 2000; 片山誠一郞, 「明代海上密貿易
と沿海地方郷紳層」 歷史學硏究 64, 195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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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鄭舜功, 日本一鑑의
서술을 보도록 하자.

甲寅年(1554, 嘉靖33년), 佛郞機國의 夷船이 광동 해상에 와서 정박


하였다. 배마다 周鵉이라고 하는 客綱이 있었는데, (佛郞機임을 속이고)
다른 蕃夷로 사칭하여 海道(副使)에게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例에 따라
서 抽分을 하고 (海道)副使 汪栢이 고의로 通市를 허락하였다. 周鵉 등
은 작은 배로 蕃夷들을 꼬여서 함께 蕃貨를 싣고 와서 廣東城(=廣州府
城)에서 교역을 하였고, 入城하여 교역하기도 하였다.39)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포르투갈인들이 다른 蕃夷의 이름으로


사칭(‘冒名’)하여 보고를 했고, 海道副使 역시 이를 알면서도 묵인해
주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정식으로 抽分을 하여 互市를 허락했다는
점이다. 즉 1554년, 명조와 포르투갈 사이에는 아직 애매한 형태이지
만 어느 정도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 포르투갈인들의 廣州府城 출입이다.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에서
의 거주를 허락받은 직후, 광주부성에서 열리는 市集에 직접 참여하
여 교역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행은 상당 기간 유지된 듯하다. 1629년 대만에 주재하는
네덜란드인 누츠(Pieter Nuyts, 1598-1655)는 타이완의 질란디아
성40)에서 보낸 서신에서 마카오 주재 포르투갈인들의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이들은 많은 예물과 귀중한 선물을 헌상하고 몇 차례 사절을 파견한


후, 중국 정부로부터 마카오에 거주하는 것을 허가받았고, (포르투갈인
들은-인용자) 1년에 두 차례 커다란 시장(市集)이 서는 광주에서 물건

39) 鄭舜功, 日本一鑑 「窮河話海」 卷6 「海市」


40)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질란디아성에 대해서는 이화승·홍성화, 전쟁과
교류의 역사 - 타이완과 중국 동남부(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12),
32-38쪽. 참조.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 마카오를 중심으로 ·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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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구입하였다. 이들은 이러한 통상 방식을 통해 마닐라의 상인이나 네
덜란드 동인도회사보다 훨씬 커다란 이익을 얻고 있다. 이들은 오랫동
안 중국에 거주하면서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구
입하는 물품의 질이 다른 상인들보다 우수하고 양이 많으며 종류도 다
양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특정한 수요에 맞
게 주조된 물품을 구입할 수도 있다. 그들은 비단의 넓이나 길이, 무늬,
중량 등을 정하여 일본과 동인도나 포르투갈 시장의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41)

포르투갈인들은 廣州府城의 市集에서 얻는 상품을 바탕으로 일본


나가사키와의 교역에 나섰던 것이다. 아마도 1년에 두 번이라는 횟수
는 포르투갈인들의 중요한 교역 기간을 의미하는 것 같다. 후술하겠
지만, 당시 마카오 무역은 계절풍에 크게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
상품을 항시적으로 구입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일본과 마닐라로 가기
전에 한 번씩 대량으로 구입하였기 때문에 1년에 2번이라고 서술한
것 같다. 그렇지만 당시 ‘北虜南倭’의 엄중한 상황에서 포르투갈인들
이 廣州府城에 입성하여 교역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것이며 廣州지역의 지방관, 나아가 조정의 암묵적인 승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는 점은 명확하다. 이 점은 明史 卷325 「佛郞機」전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朱紈이 죽은 뒤에 해금이 다시 이완되었고, 불랑기가 해상을 종횡하


여 두려운 바가 없었다. 香山澳와 壕鏡에서 시장을 벌여서, 집을 짓고
성을 건설하여 海畔에 웅거하기에 이르렀는데 마치 한 나라와 같았다.
將吏 가운데 불초한 자들은 도리어 (佛郞機를) 外府처럼 보고 있다. 壕
鏡은 香山縣 남쪽 虎跳門 밖이다.

아마도 이 ‘불초한 자들’이 도리어 광동지역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

41) 廈門大學鄭成功歷史調査硏究組編, 鄭成功收復臺灣史料選編(福州, 福建


人民出版社, 1982), 106쪽.

468 · 역사와 경계 105 (20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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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던 것 같다. 1550년대 중후반 이후 佛郞機는 광동지방관의
암묵적인 승인 아래서 비공식적 대외교역 기구로서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포르투갈인들이 갖추고 있던 상업적 능력과 함포, 여기
에 명조정의 암묵적인 승인이 더해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嘉靖14年(1535) 指揮 黃慶이 뇌물을 받고 상관에게 청하여 마카오로


市舶司를 옮겼다. 매년 2만량을 징세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 佛郞機가
섞여서 들어 올 수 있었다. (그 후) 높은 처마와 기와집이 즐비하게 마
주 보고 서 있는데, 閩粤 상인들이 마치 집오리처럼 이곳을 향해 재촉
해 왔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불랑기에서 오는 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여러 나라사람들은 (불랑기를) 두려워하여 오로지 이들만이 웅거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42)

그리고 이러한 발전은 萬曆年間(1573-1620)에도 마찬가지였다.

만력년간에 루손섬(呂宋)을 파멸시켰고, 복건과 광동의 해상이익을


남김없이 독점하여서 그 세는 나날이 번성하였다. 萬曆34年(1606) …
番人이 축성하여 해외의 雜番들을 모두 불러 모았는데, (마카오에서 그
숫자가) 만여 명에 달했다. 이 지역의 관리들은 모두 (포르투갈인을) 두
려워하여 힐문하는 자가 없었고, 보화를 통해 얻는 이익이 많아서 겉으
로는 (그들을) 금지하였으나 몰래 (통상을) 허락하였다.43)

루손섬을 식민지로 한 것은 에스퍄냐 제국이고, 아마도 1580년 포


르투갈이 에스퍄냐 제국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서술이 이루어
졌다고 생각된다. 뒤에 좀 더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마카오-나가사키

42) 明史 卷325 「外國傳」 「佛郞機傳」 “嘉靖十四年, 指揮黃慶納賄, 請於上


官, 移之壕鏡, 歲輸課二萬金, 佛郞機遂得混入. 高棟飛甍, 櫛比相望, 閩․粵
商人趨之若鶩. 久之, 其來益衆. 諸國人畏而避之, 遂專爲所據.”
43) 明史 卷325 「外國傳」 「佛郞機傳」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 마카오를 중심으로 ·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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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무역을 통하여 포르투갈인들은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그 이익의
상당 부분은 역시 뇌물로서 광동지방관을 통하여 명조정까지 흘러들
어 갔으리라 추측된다. 다시 萬曆年間 마카오의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萬曆) 34年(1606)에 물 건너 靑州에 사원을 건설하였는데, 높이가


7·8장으로 門敝가 중국풍은 아니었다. 知縣 張大猷가 그 높은 담을 헐
기를 청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다음 해 番禺의 擧人 盧庭龍이 會試를
보러 북경에 들어와서 澳中의 여러 番夷를 모두 浪白澳 밖으로 내 쫓고
濠鏡을 반환하도록 청하였으나, 담당 관리들은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없
었다. 番人이 이미 성을 쌓고 해외의 雜番들을 모아서 무역을 매우 널
리 확장하였는데 (雜番들이) 만 명에 달하였다. 지방 관리들은 무서워서
감히 (그에 대해서) 힐문하지 못하였다.44)

마카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도 물론 많았지만, 마치 근대시기 개


항장처럼 이미 광동에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
다. 반면 여전히 京師로의 朝貢은 여전히 굳게 금지되었다.45) 연해
지역에서 본토인들과 단절되어, 본토와 무역은 행하면서 入朝는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明朝 치하의 마카오의 위치는 마치 조선후기 倭館
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포르투갈인들의 마카오 정착은 포르투갈인들의 위상 역시 변화를
가져 왔다. 籌海圖編 등의 사료를 보면, 마카오에 정착하기 이전
포르투갈 세력들이 중국 연안에서 많은 약탈 행위를 자행하였다는 점
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46) 그러나 포르투갈이 1557년 마카오에 정착

44) 明史 卷325 「外國傳」 「佛郞機傳」


45) 康熙 廣東通志 卷28 「番夷」 “萬曆二十六年八月初五日, 呂宋經抵濠鏡澳
住舶, 索請開貢, 都督司道謂其越境違例, 議逐之. 澳夷亦謹守澳門, 不得
入.”
46) 明經世文編 卷205 朱紈 「海洋賊船出沒事」 “常年于南風迅發時月, 糾引
日本諸島, 佛郞機, 彭亨, 暹羅, 諸夷, 前來寧波雙嶼港內停泊. 內地姦人,
交通接濟, 習以爲常. 因而四散流劫, 每甚一年, 沿海茶毒, 不可勝言.”

470 · 역사와 경계 105 (20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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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되면서, 명정부에 매우 유순한 태도를 취하였다. 더 이상 약탈
등의 비합법 수단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즉 명조정으
로서는 포르투갈의 마카오 정착은 포르투갈을 통한 해외무역의 이익
과 시박사의 관세 수입의 증가, 그리고 포르투갈의 유순화 등의 다목
적 카드로서, 월항 개항에 못지않은 체제내 포섭 효과를 가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중계무역항
으로서, 점점 무역체제를 확립하여 갔고,47) 끝내 광주 해안가의 많은
지역을 누르고 마카오가 무역 중심 지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48)

Ⅲ. 포르투갈인의 중일무역

당시의 중일간 교역 과정 가운데 주요한 사건을 연표로 간략히 나


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 2] 16세기 중반 중일 교역 중 주요 사건
嘉靖27年(1548) 朱紈, 雙嶼港 공격, 王直, 五島로 본거지를 옮김.
王直, 복건 광동의 군도를 결성하여 100여척을 동원하여 절강
嘉靖32年(1553) 전지역을 위협. 王直 히라도(平戶)로 이동 히라도를 밀무역의
근거지로 삼음.
嘉靖29年(1550) 포르투갈 선박 히라도 입항.
嘉靖36年(1557) 王直 포로로 잡힘.
嘉靖38年(1559) 王直 伏誅
隆慶元年(1567) 月港 開港
隆慶5年(1571) 포르투갈 선박 나가사키 입항

일단 여기에서는 王直과 포르투갈 세력이 일본에 정착하는 과정을

47) 元邦建·袁桂秀, 澳門史略(香港, 中流出版社, 1998), 31쪽.


48) 屈大均, 廣東新語 卷2 「地語」 「澳門」 “諸澳悉廢, 而濠鏡爲舶藪”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 마카오를 중심으로 · 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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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도록 하자. 당시 일본에 대한 왕직의 영향력은 다음과 같았다.

(王直이 큐슈의) 사츠마의 마츠우라진(松浦津)에 거하면서 (그곳을)


제멋대로 ‘日京’이라고 하고, 스스로를 徽王이라고 하였다. (王直 아래)
부서와 관속이 모두 이름이 있었고, 요지를 제어하니, 36島 (蕃)夷가 모
두 그의 지시에 따랐다. 때때로 (蕃)夷와 漢兵을 파견하여 연해 군현을
약탈하니, (그 범위가) 수천리에 달하였고, 모두 커다란 피해를 입었
다.49)

위의 籌海圖編에는 구체적인 시기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도


이 시기는 雙嶼港이 진압되어 王直이 큐슈 지역으로 본거지를 옮긴
뒤의 일이라고 추측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三十六島之夷, 皆其
指使.”라는 구절과 “時時遣夷漢兵十餘道”라는 구절이다. 36島夷가 구
체적으로 어디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王直은 중국인 해적 이
외에도 여러 島夷들을 지시하여 중국 연안을 습격하게 할 정도로 위
세를 떨쳤다고 할 수 있다.
포르투갈과 王直의 관계를 알려주는 가장 유명한 사료는 「鐵砲記
」50)인데, 이 사료에 따르는 한 1543년 王直은 포르투갈과 매우 밀접
한 관계에 있었고, 1550년대초까지도 분명히 王直과 포르투갈 세력
은 매우 밀접한 협력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51) 이 점은
日本一鑑 卷4 「風土記」의 다음과 같은 서술, 즉 “히라도는 예전에

49) 籌海圖編 卷9 「擒獲王直」 “居蕯摩州之松浦津, 僣號日京. 自稱徽王. 部


署官屬. 咸有名號. 控制要解, 而三十六島之夷, 皆其指使. 時時遣夷漢兵十
餘道, 流劫瀕海郡縣, 延袤數千里, 咸遭茶毒.”
50) 歷史學硏究會 編, 日本史史料 2 <中世>(東京, 岩波書店, 1998),
415-416쪽. 南浦文集 卷1, 「鐵炮記」, “天文癸卯八月二十五日丁酉, 我
西村小浦有一大船, 不知自何國來, 船客百余人, 其形不類, 其語不通, 見者
以爲奇怪矣. 其中有大明儒生一人名五峯者, 今不詳其姓字, 時西村主宰有織
部丞者, 頗解文字, 偶遇五峯, 以杖書於沙上云, 船中之客, 不知何國人也,
何其形之異哉, 五峯即書云, 此西南蠻種之賈胡也.”
51) 핀투에 따르면, 뀌아이 판장(Quiay Panjao)이라는 중국 해적이 포르투갈
30여명을 부하로 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핀투 여행기 상, 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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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거주하는 주민들이 드물었으나 요즘은 많은 상인들이 거주하고 있
어서, 20년 동안 番舶의 淵藪가 되고 있다(平戶島昔鮮人居, 今居商衆.
二十年來爲番舶之淵藪).”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다. 즉 王直은 히라
도나 고토(五島) 제도를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이곳에 모여든 番舶과
番夷들을 지휘하는 입장에 섰던 것이다.52)

광동 해적의 우두머리에 陳思盻가 있었는데 자신도 선단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서 왕직과 화합하지 못하였다. 왕직이 계책을 써서 그를 掩
殺하니, 이로부터 海上의 도적들이 왕직의 통제를 받지 않고서는 존립
할 수 없었다. 이로써 왕직의 이름은 海舶에 떨치게 되었다.53)
동남지역의 士民들은 王直의 지시인지 의심을 하였지만, 누구도 따져
묻지 못했다.54)

종합적으로 볼 때, 王直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중국 연해 지역에서


그의 지시가 절대적이었고, 해외 밀무역 역시 왕직이 거의 독점하였
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르투갈인들 역
시 王直에게 협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아마도 포르투갈인
들은 王直에게 조총(鐵砲) 등을 제공하였으리라 생각되는데 다음과
같은 기사가 주목된다.

嘉靖19年(1540), 당시는 해금이 아직 이완된 상태였는데, 王直과 葉


宗滿은 광동에서 巨艦을 만들고 유황이나 生絲, 견직물 등의 (법률로서)
반출이 금지된 물품을 가지고 일본이나 暹羅, 西洋 여러 나라에 (판매하
기 위하여) 가곤 하였다. (왕직은) 5,6년 동안 거래를 하여 이루 헤아릴

52) 明世宗實錄 卷350 嘉靖28年(1549) 7月戊辰 “初巡視浙福右副都禦史朱


紈既報浯嶼擒獲夷王之捷 … 至於見獲佛郎機國王三人亦宜審其情犯大彰國
法. … 初起於內地奸商王直徐海等常闌出中國財物與番客市易.”
53) 籌海圖編 卷5 「浙江兵防官考」 “廣東賊首陳思盻, 自爲一䑸與直弗協, 直
用計掩殺之. 由是海上之冦, 非受直節制者不得自存, 而直之名始振聾海舶
矣.”
54) 籌海圖編 卷5 「浙江兵防官考」 “東南士民雖疑爲王直主使, 而莫可致詰.”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 마카오를 중심으로 · 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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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는 부를 쌓으니 夷人이 크게 믿고 따랐다. 그를 五峯船主라 하였
다.55)

그렇지만 왕직이 크게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그 후, 嘉靖27年


(1548) 朱紈이 雙嶼港 공격하여 괴멸시키고56), 그에 대한 반동으로
嘉靖31年(1552)부터 嘉靖35年(1556)에 걸쳐서 절강해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왜구의 공격이 있었을 때부터였다. 이른바 “嘉靖大倭寇”가 바
로 그것이다.
본고에서는 王直이 그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설명을 간략히 하
고, 포르투갈과의 관련에만 집중해 보도록 하자. 일본과 관련해서 포
르투갈인의 행적이 뚜렷이 나타난 것은 일본 큐슈의 平戶港 입항이었
다. 이는 포르투갈인의 최초 히라도(平戶) 입항은 雙嶼港이 괴멸된 지
2년 뒤인 嘉靖29年(1550)의 일이다.57) 당시 히라도 옆 고토(五島)에
는 아직까지 王直이 건재하였기 때문에 아마도 王直의 지시나 권유로
平戶港에 입항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58) 그리고 嘉靖32年(1553) 왕
직 역시 히라도로 이동하여 그곳을 밀무역의 근거지로 삼았다.59)
그러나 앞서 서술하였듯이, 嘉靖31年(1552)부터 嘉靖35年(1556)에
걸쳐서 절강해역에서 대규모 ‘왜구적 현상’이 뚜렷해진 시기에 포르투

55) 嘉靖 浙江通志 卷60 「經武志」 王直과 조총(철포)에 대해서는 太田弘


毅, 「倭寇王王直をめぐる火器と軍需物資・再論」 藝林43-1, 1994. 참
조.
56) 가스파 다 쿠르즈는 당시 분위기에 대해서 “1549년부터 중국 함대 사령
관에 의한 해안 경비는 한층 더 강화되어 엄격해졌고, 중국의 여러 항구
나 門戶에 대한 감시는 더 강해졌다. 때문에 포르투갈인들이 화물이나
식량을 구할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Boxer, C. R., South China in
the Sixteenth Century, p.194; ガスパール・ダ・クルス, クルス『中
國誌 : ポルトガル宣教師が見た大明帝國, 255쪽.
57) 長崎縣史 對外交涉編(東京, 吉川弘文館, 1986), 36쪽.
58) 外山幹夫, 松浦氏と平戶貿易(東京, 國書刊行會, 1987), 111쪽.
59) 日本一鑑 卷6 「窮河話海」 「流逋」 “明年癸丑(嘉靖32年, 1553) … 乃議
王直以爲東南禍本, 總兵擊之於烈港, 追至長途, 次馬蹟潭, 銃聲驚起螫龍,
風浪大作, 兵船漂散, 王直不能泊, 於夏六月, 乘風逃去之平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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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인들이 광주 부근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이러한 행적은 嘉靖
27年(1548) 雙嶼港의 괴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
다. 쌍서항이 괴멸된 이후에는 다시 좋은 항구를 찾을 수밖에 없었는
데 王直의 배들은 정크선60)으로 수심이 얕은 해안에도 무리 없이 접
안할 수 있고, 연안 주민들과 굳건한 네트워크를 지녔기 때문에 장소
에 비교적 구애를 받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포르투갈인들
은 나우선(Nao da Carreira da India)61)을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수심이 깊어야 하고, 연안 주민과의 네트워크도 그렇게 강하
다고는 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항구가 그들에게
는 필수적이었다고 추측된다. 쌍서항의 괴멸 이후, 포르투갈인들로서
는 다시 좋은 항구를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미 왕직 등의 왜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이루어지고, 海禁이 강화된 상태에서는 이것이
더욱 곤란하게 되었고, 이렇게 되면 다시 廣州 부근으로 남하할 수밖
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보면 어째서 1554년부터 명조와 포르투갈 사이에 화해 분
위기가 조성되었는지 분명해 진다고 생각된다. 바로 전해인 1553年
(嘉靖32)이라는 시기는 바로 王直이 복건과 광동의 群盜를 결집시키
고, 선박 100여척을 동원하여 절강성과 강소성 일대를 대대적으로 위
협했던 해였다.62) 일종의 準전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포

60) 명대 정크선의 크기에 대해서는 李金明, 明代海外貿易史(北京, 中國社


會科學出版社, 1990), 114-115쪽 참조. 일반적으로 정크선이 서양 선박
에 비해서 船積 등의 측면에서 적었다. 小葉田淳, 金銀貿易史の硏究
(東京, 法政大學出版局, 1976), 254쪽.
61) 1617년 이전까지 마카오↔일본을 항해하는 포르투갈 선박은 나우선
(Nao da Carreira da India)으로 중량이 800톤에서 심지어는 1,200톤
이나 1,600톤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선체가 매우 커서 활동에 민첩한
배는 아니었다(Boxer, C.R., Fidalgos in the Far East, 1550-1770,
pp.12-13. 참조).
62) 明世宗實錄 卷396 嘉靖32年(1553) 3月甲戌 “海賊汪直, 糾漳廣群盜勾
集, 各梟倭夷大擧入寇. 連艦百餘艘. 蔽海而致, 自台寧嘉湖以及蘇松至於淮
北瀕海數千里, 同時告警.”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 마카오를 중심으로 ·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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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투갈인들은 王直과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아무리
약탈을 자행하였던 않았던 포르투갈인들로서도 이러한 상황에서는 본
업인 교역 그 자체까지 도저히 영위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63)
그래서 명군과 왕직 사이의 戰線을 피하여 1554년부터 다시 廣州 인
근의 上川島로 남하해 올 수밖에 없었다. 반면, 정책 당사자인 明朝로
서는 1550년 북으로는 ‘庚戌의 變’64)을 겪은 바 있고 남으로는 1555
년 왜구가 南京을 침범하는 남북의 위기상황을 적극적으로 돌파할 필
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지점부터 王直과 포르투갈인들의 운명이 엇갈리게 된다. 주지하
다시피, 嘉靖36年(1557) 王直이 포로로 잡혔고, 다시 2년 뒤인 嘉靖
38年(1559)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왕직
의 남은 잔당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籌海圖編에
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王直의 부하들 역시 반드시 용서 없이 주멸되었다. … 풍문에 따르면


공격을 받아서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고, 왕직의 무리(黨)는 완전
히 사라졌다.65)

63) 雙嶼港을 비롯한 지역을 대상으로 왜구 토벌이 본격화되자 왜구와 포르


투갈인들의 무역루트는 대폭 南進하였다. 일례로 福建 浯嶼(廈門 근처)
로 옮겨서 이곳이 새로운 근거지가 되었고, 嘉靖32年(1553) 무렵부터
행정구역은 廣東省이지만 실제로는 福建省 경계와 매우 가까운 南澳島
가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왜구들은 浯嶼와 南澳島에서 가까운 漳州와
광동까지 왕래하며 무역을 하였다. 즉 왕직 등이 명군과 전투를 벌이는
사이에 무역 루트는 크게 남하하였던 것이다. 왜구들은 매년4월 북동풍
이 불어 올 때 도착을 하고, 5월이 끝날 무렵 시장을 열었다. 거래가 끝
나고 5월말에는 남서풍을 타고 일본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宮崎市定, 「
倭寇の本質と日本の南進」, 宮崎市定全集22(岩波書店, 1993), 37-39쪽.
참조.
64) 홍성구, 「明代 北邊의 互市와 朝貢」 중국사연구 72, 2011. 참조.
65) 籌海圖編 卷5 「浙江兵防官考」 “王直之羽翼爪牙也必誅無赦.… 風所擊無
有存者而王直之黨盡㓕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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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명조의 왜구와 해상세력에 대한 토벌로 인하여 王直의 잔
존 세력까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어 ‘왜구적 상황’은 이제 소강상태
를 맞이하였다. 이를 포르투갈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의 견제
세력 혹은 라이벌들도 이제는 사라지게 된 것이다.
1560년대에는 왕직뿐만 아니라, 그 밖의 해상세력도 철저하게 진
압되어 왜구 토벌이 최종 국면을 맞이하였다. 嘉靖45年(1566)에는
明軍이 漳州 지방까지 거의 진압하여, 隆慶元年(1567)에는 月港을 龍
溪縣에서 분리하여 海澄縣을 새로이 건설하였다. 또한 명정부는 일본
인들을 배제하고, 중국 상인들에게는 교역허가증서인 ‘商引’을 발급받
는 조건으로 해외 출항을 인정하였다.66) 明初 이래 祖法인 ‘해금’이
완화된 것이다. 이후 漳州는 이후 동남아시아 교역의 중심지67)로 변
모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마카오에서는 포르투갈인들이 주로 일본과의 교역을
담당하고, 일본 상인이 배제된 월항에서는 중국 상인들이 주로 동남
아시아와의 루트를 맡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마카오 점유는 月港 개
항과 마찬가지로 명조정에서 현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朝貢一元論’을
대신하여, ‘非朝貢互市’에 대해서 상세를 부과하고, 그 상세를 수익으
로 삼으며 나아가 商舶(私貿易船)과 寇舶을 체재 내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68)
또한 앞서 인용한 嘉靖 浙江通志를 다시 살펴보면, 왕직의 활동
루트는 일본과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것이었고, 이를 뒷받침
한 것이 중국인 해상세력이었으며, 그 휘하에 일본인 등을 거느리고
있었고, 중국 연해의 해상무역을 상당 부분 독식하고 있었다고 생각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조의 방침은 왕직 세력에 대한 타도와 왜

66) 佐久間重男, 日明關係史の硏究, 325쪽. 명대 후기 월항 무역의 구체적


인 내용과 제도에 대해서는 小葉田淳, 金銀貿易史の硏究, 「付論1 明
代漳泉人の海外通商發展」 참조.
67) 李金明, 明代海外貿易史, 121쪽. 佐久間重男, 日明關係史の硏究 327
쪽.
68) 홍성화, 「전쟁과 사절-屯門海戰과 明朝의 대외정책변화」 참조.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 마카오를 중심으로 ·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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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일본인) 세력의 배제라는 강경책과 아울러서 이들을 대체할 만한
파트너를 찾고, 해외 교역에 관한 여론을 수습하기 위하여 안정적인
해외 교역 출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즉 포르투갈 세력 역시 嘉靖33
年(1554)부터 이러한 정책 변화에 화답하여 중국에 대한 무력 사용
을 완전히 포기하여, 뇌물을 바치거나 명조의 정책에 순응하는 것으
로 바뀌었다.69)
명조는 단순히 마카오의 거주를 허락하는데 그치지 않고 포르투갈
인들을 적극적으로 관리하였다. 마카오를 관리하는 ‘守澳官’ 이라는
하급관원을 두었고 海道副使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萬曆2年(1574)
중국 본토와 마카오 사이에 閘門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포르투갈인들
이 본토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고, 역시 중국인이 마카오로 들어가
는 것을 금지하였다. 갑문은 5일에 한 번씩, 매월 6차례 갑문이 열리
고 마카오에 식량과 일상용품을 공급하였다. 나아가 만력42년(1614),
주둔 군인을 1,000명으로 증원하였고, 參將을 그 책임자로 임명하였
다. 천계원년(1621)에는 마카오에 대한 수비를 더욱 엄밀히 하여 갑
문을 지키는 군대 이외에도 手兵 1,200여명, 把摠 3명, 哨官 4명, 哨
官, 크고 작은 哨船 5척을 증설하기도 하였다.70)
이러한 통제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교역에 대해서 명조정은 포르
투갈선에 대해서 매우 유리한 교역조건을 제공하였다. 200톤의 화물
을 싣고 광주에 입항하는 각국의 선박은 통상 5,400량을 납부해야
했지만, 포르투갈 선박의 경우, 1,800량의 세금을 납부하고, 그 다음
번에는 그의 1/3인 600량을 납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선박을 호위
하는 군함의 경우, 다른 나라 선박은 통상 세금이 징수되었지만, 포르
투갈 선박의 경우는 이마저도 면제를 받았다.71) 확실히 포르투갈 세

69) 黃曉峰, 「澳門開埠時期的歷史觀察」 文化雜誌 1997-3期.


70) 黃鴻釗, 澳門史(香港, 商務印書館香港分館, 1987), 59쪽; 黃啓臣, 「
16-19世紀中葉中國政府對澳門海閘的管理」 文化雜誌 1998-34期.
71) 黃鴻釗, 澳門史, 102쪽; 莊國土, 「略論早期中國與葡萄牙關係的特點
1513-1613」 文化雜誌 1994年-18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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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은 명조로부터 이례적인 우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포르
투갈은 매년 2만량을 상세로 납부하였다고 한다.72)
앞서 서술하였듯이 포르투갈인들은 광주에서 봄과 가을에 한 번씩,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攬頭’라고 하는 중국인 상인
(일종의 매판)을 중개로 하여 교역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일에 종사한
것은 복건 상인73)들이 많았다고 하고 이들은 36行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74)
嘉靖36年(1557) 왕직 세력을 타도하고 嘉靖45年(1566)에는 漳州
을 진압하여 강경책은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해외 교역의 분출
구로서 광동지역에서는 마카오, 복건지역에서는 월항이 각각 선택되
었다. 그리고 그 무역의 담당자 역시 포르투갈인과 왜구 세력이 배제
된 중국인들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마카오의 포르투
갈인들로서는 중일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가, 月港의 중국인들
해상집단으로서는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
회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마카오와 나가사키간의
항로를 독점하는 길은 포르투갈인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셈이었다.

[표 3] 마카오와 月港의 비교
주요민족
구 분 위치 개항시기 주요항로
구성
嘉靖36年 나가사키, 마닐라,
마카오 廣東省 香山縣 포르투갈인
(1557) 말래카
隆慶元年
月港 福建省 漳州府 중국인 마닐라
(1567)

이처럼 隆慶5年(1571) 포르투갈인들은 나가사키에 거점을 건립하


여, 기존의 <말라카-漳州-큐슈(九州)> 루트75)를 대신하여 <리스본-

72) 李隆生 晩明海外貿易數量硏究-兼論江南絲綢産業與白銀流入的影響 29


쪽.
73) 黃鴻釗, 澳門史, 105-6쪽.
74) 彭澤益, 「淸代廣東洋行制度的起源」 歷史硏究 1957年-1期.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 마카오를 중심으로 · 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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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말래카-마카오-나가사키>에 이르는 장대한 노선이 비로소 성립
되었다.76) 명조의 입장으로 볼 때 마카오와 月港은 하나의 경제 특구
와도 같은 지역으로, 마카오는 포르투갈인들을 배치하여 일본과 마닐
라와의 교역을 할 수 있었고, 특히 일본과의 교역은 1600년대 이전
까지 거의 독점 상태에 있었다.77) 아마도 명조의 입장에서는 관리하
기 무척 어려운 일본인(왜구) 세력의 파트너로 역시 귀찮은 존재인
포르투갈을 선택・배치함으로써 해외 교섭으로 인한 모순과 알력을
본토로부터 분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림 2] 마카오를 중심으로 한 在동아시아 포르투갈 교역 네트워크

明末 마카오의 무역 루트는 주로 ① 나가사키, ② 말래카, ③ 마닐


라 등이었지만, 본고에서는 일단 나가사키나 히라도를 중심으로 한
中日교역에 대해서만 집중해 보고, 우선 그 항로에 대해서 살펴보도
록 하자. 마카오에서 나가사키로 갈 때는 다시 남방 계절풍이 불어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마카오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출항하기
위해서 약 9개월 동안 마카오에 체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사
이에 말래카와 중국 사이의 중계무역을 한 번 정도 시행하였다. 이렇

75) 關周一, 「東アジア海域の交流と對馬·博多」 歷史學硏究 703, 1997.


76) 張廷茂, 明淸時期澳門海上貿易史, 59쪽.
77) 李金明, 明代海外貿易史, 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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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마카오에서 충분한 물자를 적재한 포르투갈 선박은 5월, 6월 남방
계절풍을 이용하여 다시 일본으로 출발하였다. 포르투갈 선박은 대체
로 보름에서 20일 동안 항해하여 7,8월에 나가사키에 도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여기에서 거래를 마칠 때까지 일본의 항구에 3,4개월
간을 체류하여 무역이 완료되자 북방 계절풍이 불어오는 것을 기다려
서 돛을 올렸다. 따라서 11월에서 12월에 일본을 출범하여 이듬 해
1월이나 2월에 마카오에 최종적으로 돌아왔다.78)
중일무역의 주요 교역품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마카오에서 나가사키
로 보내는 수출품으로서는 우선 生絲, 鹿皮, 羅紗 등을 들 수 있고,
거꾸로 나가사키에서 마카오로 보내진 수출품으로서는 銀, 구리, 도검
등을 들 수 있다.79) 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은 유럽이나 인도로부터 운반된 白銀이나
화물을 중국에 판 후에, 중국에서 生絲, 견직물, 금속(납, 주석, 수은),
한방약의 재료(사향), 직물 등을 싼 값에 구입하였고, 나아가 유럽이
나 인도의 골동품, 무기, 향료, 포도주, 면화 등을 추가하여 나가사키
로 운반하였다.
포르투갈 상인이 광주에서 사들였을 때의 가격과 나가사키에서 이
를 팔았을 때의 가격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이 점은 주요
상품인 견직물이나 銀 모두에 해당하였다. 따라서 포르투갈 상인은
마카오에서 나가사키로 화물을 운반하여 판매하면 운반비와 관세를
지불하고도 거액의 이윤을 남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80) 예를 들면 萬
曆6年(1578) 마카오에서 나가사키로 1,600擔(piculs)의 생사가 운반‧
판매되었는데, 현지인 광주에서 1擔 당 90듀카트(ducats)에 구입하여
나가사키에서는 140듀카트에 팔렸다고 한다.81) 마카오 상인의 평균

78) 幸田成友, 日歐通交史(東京, 岩波書店, 1942), 65쪽; 李金明, 明代海


外貿易史, 185쪽.
79) Boxer, C.R., Fidalgos in the Far East, 1550-1770, p.16.
80) 黃啓臣 外, 마카오의 역사와 경제 36-37쪽.
81) Boxer, C.R., The Great Ship from Amacon: Annals of Macao and
the Old Japan Trade, 1555-1640(Centro de Estudos Historicos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 마카오를 중심으로 ·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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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1546-1639년까지 포르투갈 선박의 일본 내항 척수
(資料來源 : 李隆生, 2006, 84쪽. 표 변용)

이윤율은 100% 이상이었다고 생각된다. 포르투갈인들은 여기에서 막


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일례로 Alessandro Valignano는 “한 번에 일
본으로 가는 항해로 인하여 사령관은 5만 듀카트(ducacts)에 달하는
이익을 거두었다.”82)고 쓰고 있다. 이러한 교역을 통하여 16세기 후
반, 매년 포르투갈인이 일본에 수출하는 生絲는 1,000擔~1,600擔에
달했다. 崇禎11年(1638)에도 나가사키에 수출된 견직물은 무려
2,1000여담에 이르렀다고 한다.83)
16-17세기 중국의 경우 金銀比價는 1대 5.5~7이였는데, 일본의
경우는 1 대 10, 유럽의 경우는 1 대 10~20까지로 중국의 경우 銀
價가 매우 비싼 편이었다.84) 따라서 일본에서 값싸게 은을 획득한 뒤
중국에 비싼 가격으로 팔 수 있었고, 포르투갈로서는 두 지역의 銀價
차이를 이용하여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Ultramarinos, 1963) p.39.


82) Boxer. C.R., The Christian Century in Japan, 1549-1650(Californ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ress, 1951) p.106.
83) Boxer, C.R., The Great Ship from Amacon: Annals of Macao and
the Old Japan Trade, p.156.
84) 譚文熙, 中國物價史(湖北人民出版社,1994),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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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포르투갈 상인은 생사를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판 뒤에,
일본의 금, 백은, 칠기, 조선용의 목재 등과 교환해서 마카오로 가지
고 가서 다시 중국에 매우 비싼 가격으로 판매하였다. 나가사키에서
마카오로 운반된 화물은 은(銀)이 중심이었는데, 1585년부터 1640년
까지 나가사키로부터 마카오로 들어 온 銀은 평균 135만량에 달했
다.85) 특히 1615-1625년 사이, 약10년 동안 350-400만냥의 은이
수출되었는데, 이는 일본의 은 수출량 가운데 6%-23%에 달했다고
한다.86) 이처럼 포르투갈 상인에게 축적된 막대한 은은 인도 고아
(Goa)로 가는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중국 시장에 투하되었다.87)
일본은 금 매장량도 매우 풍부하여 유럽이나 인도의 향료, 면, 모
직물, 특히 중국의 생사나 그 기타 상품과 교환할 때에 사용되었다.
그 결과 금이 일본으로 마카오로 운반되었던 수량도 상당하여 포르투
갈 상인과 일본의 무역이 최전성기에는 금의 연간 수출량은 300톤에
달하였다.
이와 같은 번영도 1600년대에 들어와서는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변화의 요인을 하나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중
국인 해상세력이 다시 중일 무역에 뛰어들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림
3)에서 볼 수 있듯이, 포르투갈에 의한 중일 교역이 1616년을 계기
로 급작스럽게 확대된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환경이 중국인들이 중
일 교역에 뛰어들게 된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더구나
1620년대는 鄭芝龍의 해상 선단88)이 다시 활약을 개시한 시기이기
도 하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1600년대에 들어오면서 명조의 해
금 정책이 다시금 해이해져서 무역허가증인 ‘商引’을 매개로 한 무역
통제의 이완이 있었다.

85) 黃啓臣 外, 마카오의 역사와 경제 40쪽.


86) 岩生成一, 「近世日支貿易に関する數量的考察」 史學雜誌 62-11, 1953.
87) 張廷茂, 明淸時期澳門海上貿易史, 94쪽.
88) 鄭芝龍의 해상 활동에 대해서는 한지선, 「明末 鄭芝龍의 海上制覇 過程」
명청사연구 34(20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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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년 奸民들이 일본과의 무역 이익이 呂宋(=필리핀)과의 이익의 두
배라고 여기고, 여러 지방의 관원들에게 아부하여 (관원들이) 멋대로
(일본으로 가는 통항증명서인) 票引을 지급하여 마음대로 海禁을 열고
있다(‘開洋’). 높은 돛과 거대한 선박을 타고 倭國과 왕래하고 있다.89)

뿐만 아니라, 1603년 수립된 에도 막부 역시 중국 선박의 내항을


크게 환영하는 정책을 취하였는데90) 이 점 역시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1665년 일본에 입항하는 중국인 선박은 크게 ① 중국 연
안 지역에서 출발하는 경우, ② 베트남이나 타이완에서 출발하는 경
우.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91) 이러한 루트는 16세기말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된다. 1611년부터 1639년까지 중국 선박의 일
본 내항 횟수를 아래와 같이 표로 나타내 보았다(그림4). 그림4에 따
르면 시기마다 변동은 있지만 중국 선박의 來日이 크게 증가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편, 1612년 11월 히라도 네덜란드 商館長 Jacques Specx는 이
해에 히라도에 내항한 중국선박이 30척이나 되며, 그에 따라서 중국
산 生絲의 가격이 크게 내려갔다고 적고 있다.92) 따라서 중국산 생사
를 일본에 팔러 온 포르투갈 상인들도 커다란 손해를 보게 되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이 해에 한정된 것은 아니고, 그 뒤에도 줄곧 지속
되었다. 중국선의 일본 내항으로 포르투갈인들은 라이벌들의 등장에
직면하게 되었고 아울러서 커다란 손해를 맛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朱印船 무역과 에도 막부의 통제이다. 에도 막부는 중국
과 일본 사이에서 포르투갈인들이 지나치게 많은 이익을 차지하고 있
는 것을 목격하고 1602년부터 자신들도 ‘朱印船’으로 이 무역에 참가
하려 하였다. 주인선은 주로 동남아시아를 무대로 하였으나, 직접 마

89) 明神宗實錄 卷476 萬曆38年(1610) 10月 丙戌


90) 佐久間重男, 明代海外貿易史 1992, 368쪽.
91) 岩生成一, 「近世日支貿易に関する數量的考察」 9쪽.
92) 岩生成一, 「近世日支貿易に関する數量的考察」 9쪽.

484 · 역사와 경계 105 (20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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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와 나가사키를 운항하는 경우도 있었다.93) 그리고 1631년부터
일본 막부에서는 견직물에 대해서 가격을 제한하는 제도, 즉 絲割符
제도를 통하여 포르투갈인들을 견제하려 하였다. 朱印船과 絲割符 제
도의 실효는 1620년대 점점 분명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총
生絲수입은 1,000-1,600擔에서 3,000擔으로 증가하였으나, 도리어
포르투갈인들의 이익은 1/3로 줄어들었다.94)

[그림 4] 1611-1639년까지 일본 내항 중국 선박 숫자
(資料來源 : 岩生成一, 1953, 11쪽. 표 변용)

세 번째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95) 崇禎14年(1641)에 네덜


란드인이 말래카를 점령하고 그 선단이 남양해역의 항로를 장악하면
서 마카오와 고아의 교통로가 막히게 되었다. 네덜란드인은 포르투갈

93) 岩生成一, 1953, 6쪽. 주인선 무역에 대해서는 永積洋子, 朱印船(東京,


吉川弘文館, 2001) 참조.
94) Souza, G.B., The Survival of Empire: Portuguese Trade and
Society in China and the South China Sea, 1630-1754, p.54; 마테
오 리치, 마테오 리치의 중국견문록 221쪽.
95) 黃鴻釗, 澳門史, 104쪽.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 마카오를 중심으로 · 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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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대신하여 아시아 지역의 전체 무역과 운송을 독점하면서 서태평
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 결과 포르투갈인이 70여년간 경
영해온 마카오와 고아·리스본의 무역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520년부터 시작된 포르투갈의 對아시아 무역은 16세기 후반 그
절정에 이르렀다가, 17세기 초 서양으로부터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라는 적수를 맞이하여 커다란 어려움을 맞이하였고, 그리고 가장 중
요한 무역상대인 일본으로부터 추방되면서 對아시아 무역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이제는 일본이 아닌 동남아시아 무역으로 그 중심을
전환하였다. 그 이후, 동아시아 역내 무역은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중
심으로 타이완-나가사키를 잇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그 주인공이
바뀌게 되었다.
1580년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병합되었는데, 포르투갈은 이 합병에
실질적인 이익을 누리는 것은 거의 없고,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걸친
대국 스페인의 적을 그대로 자신의 적으로 마주대할 수밖에 없는 불
리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스페인 무적함대가 괴멸된 1588
년 이후는 특히 신흥 강자인 네덜란드 세력과 직면하였기 때문에 더
욱 불리해 질 수밖에 없었다.96) 16세기 말이 되면 포르투갈의 무기
나 항해술은 다른 나라가 이를 모방하였기 때문에, 포르투갈은 이제
는 쫓기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각지의 요새 유지비용은
증가하였지만 무역 이익은 그만큼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포르투갈
해상제국은 점점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97) 이러한 상태에 대해서 네
덜란드인들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의심할 나위 없이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으로서 인도(=아시아)에서


유일한 기둥은 중국 무역이다. 우리들은 도처에서 그들에 대해서 전쟁
을 도발하였고, 게다가 그들은 일본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이러한 두

96) 永積昭, オランダ東インド會社(東京, 近藤出版社, 1971), 26쪽.


97) 松竹秀雄, 「朱印船時代とそれ以後の長崎の海外貿易 (1)」 經營と經濟
69-2, 1989,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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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요소는 – 인용자) 이미 그들을 크게 약화시켰고, 더구나 그들과 다
른 나라와의 무역을 크게 파괴하였다. 현재 그들은 중국 이외에 어떠한
국가에서도 이익을 얻을 수 없다.98)

이러한 상황에서 1633년부터 39년에 걸쳐 에도 막부가 내린 일련


의 鎖國令으로 더 이상 포르투갈 선박은 일본에 내항할 수 없었다.
물론 중국선박을 이용하여 여전한 교역은 가능했지만, 포르투갈인에
의한 직접 경영은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되었으며, 설령 중국 선박
을 이용하더라도 그 이익은 전성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1550년대 포르투갈이 마카오의 정착 이후, 1600년대
까지 중일무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이
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운이 늘 지속될 수는 없었다.
1600년대 이후부터 중일무역에는 많은 변화가 발생하였는데, 첫 번
째는 중국 해상세력의 참여, 두 번째로는 에도 막부의 견제와 朱印船
무역의 등장, 세 번째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등장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이 누리던 호경기는 종언
을 고하였고, 끝내 1639년 에도 막부의 쇄국령에 의해서 중일무역에
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마카오는 주로 동남아시아와 중국과
의 교역에 집중하게 되었다.

Ⅴ. 맺음말

1521년과 22년의 屯門海戰 이후 포르투갈 세력은 정식 교역을 허


가 받지 못한 채, 浙江省 앞바다의 섬 雙嶼를 무대로 밀무역과 약탈
을 자행하고 있었고, 王直을 비롯한 중국인 해상세력(‘後期倭寇’)과

98) 廈門大學鄭成功歷史調査硏究組編, 鄭成功收復臺灣史料選編, 1982,


107쪽.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 마카오를 중심으로 · 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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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접한 제휴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嘉靖27年(1548) 쌍서항이 명군
의 공격으로 파괴되고, 그 반동으로 嘉靖31年(1552)부터 嘉靖35年
(1556)까지 왜구 세력의 중국 연안에 대한 약탈 활동, 즉 ‘왜구적 상
황’이 계속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조는 국면을 타개하고 왜구 세
력을 분산하기 위하여, 포르투갈 세력을 체제내로 포섭하기 시작하였
다. 이에 발맞추어 1550년대 포르투갈인들의 교역 중심지는 ① 上川
島(Sao Joao) → ② 浪白澳(Lampacau) → ③ 마카오(Macau) 순서로
점점 중국 연안에 접근하였고, 최종적으로 마카오에 정착할 수 있었
다. 그리고 廣州府城에 직접 들어가서 교역을 할 수 있게도 되었다.
이로써 왕직 등을 비롯한 후기왜구 세력과 포르투갈 세력은 분리
되었고, 포르투갈 세력 역시 嘉靖33年(1554)부터 이러한 정책 변화
에 화답하여 중국에 대한 무력 사용을 완전히 포기하여 뇌물을 바치
거나 명조의 정책에 순응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嘉靖36年(1557) 왕
직 세력을 타도하고, 嘉靖45年(1566) 漳州를 진압하는 등, 명조의 강
경책은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그 과정에서 해외 교역에 대한 수요의
분출구로서 광동지역에서는 마카오, 복건지역에서는 월항이 각각 선
택되었다. 그리고 그 무역의 담당자 역시 포르투갈인과 왜구 세력이
배제된 중국인들이 선택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마카오의 포
르투갈인들로서는 중일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가, 月港의 중국
인들 해상집단으로서는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절호
의 기회가 활짝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포르투갈의 마카오 점유는 月港 개항과 마찬가지로 ‘朝貢一元論’과
商舶ㆍ寇舶들과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조정이
현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朝貢一元論’을 대신하여, ‘非朝貢互市’에 대
해서 商稅를 부과하고, 그 상세를 수익으로 삼으며, 나아가 商舶(私貿
易船)과 寇舶을 체재 내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명조의 후원에 힘입어 포르투갈 세력은 마카오-나가사키
간의 항로를 개척하였고, 여기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러한 황금기는 1570-1600년대까지 약 30년에 걸친 것으로 1600년

488 · 역사와 경계 105 (20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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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이후에는 일본의 朱印船과 絲割符 제도의 성립,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참여, 더구나 중국 해상 세력의 일본 무역 참여 등으
로 인하여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크리스트교 禁壓이라
는 종교 문제까지 겹치면서 최종적으로 1639년 에도 막부는 포르투
갈의 일본 내항까지 금지시키게 되었다. 이로서 포르투갈인은 마카오
-나가사키 루트에서 최종적으로 축출되었던 것이다.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 마카오를 중심으로 ·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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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A Study On the Rise and Fall of Portuguese Trade


to East Asia in the Sixteenth and Seventeenth
Century in Macau

Hong, Sung-Hwa*99)

After Tamao Battle(屯門海戰) in 1521 and 1522, Portuguese had


committed smuggling and plundering in an island Shuangyu Port(雙嶼),
the front sea of Zhejiang Province. Like this, in ‘Japanese pirates’
situation’, Portuguese power seemed have a close cooperative
relationship with Chinese marine power(‘後期倭寇’) such as Wangzhi(王
直). However, in 1548, Shuangyu Port(雙嶼) was destroyed by attack
of Ming Dynasty’s army and as a reaction to this Japanese power
plundered on the Chinese seashore from 1552 to 1556. In this
circumstances, Ming Dynasty is supposed that changed its direction to
intrigue Portuguese power in their system for dispersing Japanese
power as a breakthrough. Following this,  in 1550s, trade center of
Portuguese had been changed as the following. ① Sao Joao(上川島) →
② Lampacau(浪白澳) → ③ Macau(澳門). Finally, they settled in Macau
and traded directly into Canton Castle.
At last, post-Japanese pirates power seperated from Portuguese
power. Since 1554, Portuguese power responded this changed policy
without the use of armed force, offering briberies and following the
policies of Ming Dynasty. Ming’s strong policy succeeded in defeating
왕직 power in 1557 and  suppressing Zhangzhou(漳州) in 1566). In this
process, Macau in Guangzhou region and Yuegang(月港) in Fujian(福建)
region were selected as outlets for demand in foreign trade.

* Associate Professor, Dept. of History Education, Pusan National


University / cantelli@gmail.com

494 · 역사와 경계 105 (20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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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uguese and Chinese excluded Japanese power were selected as
counterpart for the trade. That is, opportunaties of monopoly in
Chinese-Japanese trade for Portuguese in Macau and in East-southern
Asia trade for Chinese marine merchants in Yuegang(月港).
Owing to this support from Ming dynasty, ‘Macau-Portuguese
Power’ pioneer a pathway between Macau and Nagasaki and got a
huge amount of benefits from it. This golden age lasted 30 years from
1570s to 1600s. Since 1600s, it went down it’s luck with Red seal
ships(朱印船) of Japan, establishment of Ito-Wappu(絲割符)  system,
participation of Dutch East India Company and Chinese marine power
into Japanese trade. Further to this, Edo Bakufu banned internal
navigation of Portuguese’ in Japan with religious issue.  Finally,
Portuguese got expelled from Macau-Nagasaki route.

Key Words Ming Dynasty, Portugal, Macau, Wang Zhi, Sino-Japanese


Trade.

논문투고일 : 2017. 11. 17. 논문심사일 : 2017. 12. 09. 게재확정일 : 2017. 12. 18.

16-17세기 포르투갈의 對동아시아 무역의 성쇠 : 마카오를 중심으로 · 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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