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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3/5)
2p - 스페인의 시작
(3/12 + 3/19) 2p~8p
2p - 스페인 로마화의 결과
3p - 오현제 배출
- 로마의 분열 -> 문화적 차이
- 봉건사회(5~15c)
4p - 서고트 왕국의 성립과정
5p - 아랍 민족의 이베리아 정복시 특징 -> 꼰비벤씨아 모자라베인
with 종교개종, 그리스관대
6p - 신대륙 발견
- 1492년도 스페인은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가졌다
7p - 1469년, 결혼 통합
- 스페인의 몰락 과정, 이유(8가지)
8p - 합스부르크 왕가의 성립 과정, 카를로스 1세
- 펠리페 2세
(3/26)
8p - 17세기=스페인의 몰락-> 원인과 과정
9p - 제국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발전
- 18세기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성립과정
- 나폴레옹
(4/2 + 4/9)
10p - 제 2공화국 성립과 통치과정
11p - 제 2공화국에 대한 평가
- 상식모음
12p - 1957년 이후 스페인 경제 정책과 성공요인
- 프랑크 죽고, 스페인 민주화의 과정
(4/30 + 5/7)
13p - 소수민족(vasco 민족주의 <-> cataluna 민족주의)
14p~18p – 돈키호테
(5/14 + 5/21)
18p - 근세 회화의 흐름 : El Greco(16세기), Velazque(17세기), Goya(18-19세기)
- <El Greco> -> 16세기
19p - <Diego Velazquez> -> 17세기 (시녀들)
- <고야> -> 18~19세기 초반 / 스페인 근대 회화의 출발점
20p - <스페인 미술이 유럽에 알려진 시기>
- <Pablo Picasso(1881~1973) : 20세기 현대 미술의 선구자>
21p - <Juan Miro와 카탈루냐 정체성 그리고 초현실주의>
- <Salvador Dali의 초현실주의>
(5/28)
22p - 플라멩코와 투우(투우의 몰락원인)
(6/4)
23p - <축제의 특성>
- <스페인의 관광 산업>
24p - <스페인 관광산업의 성공요인과 특징>
(3/5)
<스페인 시작>
1. 스페인은 어떤 나라?
-> 스페인은 묘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 입니다.

2.스페인 역사의 핵심은 무엇인가?


-> 스페인 역사는 다양성이 공존하고 있다.
그 예시로, 스페인에는 열정, 축구 등의 상투적 이미지와 반대되는 이미지들이 합쳐져
있다. 또한 스페인 예술에서는 주변적이고 왜곡되고 배제된 것을 중심인물과 주변인물까지
예술적 실재로 통합시키는 능력이 뛰어남

3.스페인의 초창기 역사의 특징?


-> 스페인은 다양성이 공존하는 문명의 교차로였다.
이베르족, 켈트족 등의 토착문화 + 그리스,페니키아, 카르타고, 로마, 아랍등
->독특한 정체성을 확립
cf)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 됨 ex) 알타미라의 동굴벽화

(3/12 + 3/19)
<스페인 로마화의 결과>

로마가 약 700년간 스페인 지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언어, 법령, 종교, 예술, 문화,
정치, 사회 등의 로마화되었다.

1.문자, 철학, 종교, 예술 및 이념적 요소가 중요한 역할

2.로마인들은 타라고나, 사라고사, 발렌시아, 레온 등 훌륭한 도시를 많이


건설하였고, 이 지역들은 곡창지대이자 지중해를 바로 보고 있어 당시 올리브기름,
양모, 금, 포도주 등을 수입하는 무역지대로 각광받았다.

3. 토지사유제 -> 귀족들이 주로 토지를 가짐

4. 노예제도 도입 (노예는 생산계급->귀족과 평민을 먹여살림)

5. 아버지와 장남 위주의 가부장제 가족 확산

6. 화폐 경제 발달

7. 스페인 출신의 유능한 인물이 로마 중앙에서 활약하였다

-> 스토아 학파 철학자 세네카 (스페인에서 태어나서 로마로 유학감) (세네카


알아둬)
<오현제 배출> (알아두도록 합시다)

: 로마가 제국 시대에 접어들자 히스파니아는 완전히 바뀌어 로마의 오현제(5명의


훌륭한 황제) 중 2명의 황제 배출

->황제를 배출할 정도라는 것은 로마 제국의 본토인 이탈리아 다음으로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재정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번영되었다는 뜻임

<로마의 분열 ( 서로마 vs 동로마) -> 문화적 차이>

1.서로마

ㄱ.5세기에 멸망

ㄴ,정교에서 비롯된 가톨릭을 믿음.

ㄷ,라틴어사용 + 로마가 중심지이다

2. 동로마

ㄱ.15세기 멸망

ㄴ.정교

ㄷ.그리스어 사용+ 비잔티움이 중심지이다

<봉건사회> (5c~15c) (5~7c사이에 노예사회에서 봉건사회로 전환됨) 알아두도록

1.봉건 사회는 계약에 의한 사회를 의미한다. (중요해)

-> 계약이 끊어진다면 더 이상 상하관계는 유지안됨

ex) 왕이 자율권과 보호를 해주지 않는다면 귀족과 농노들은 반란을 일으켜도 되고,
귀족과 농노들이 충성을 하지 않거나 세금을 내지 않고, 반란을 일으킨다면 왕은
자율권과 보호권을 박탈해도 됨

2.사회제도

: 귀족,성직자의 귀족계급의 지배계층 + 혼혈종족의 자유민계급, 시민 +다수의


농노계급

->각 지방은 총독 또는 대리관이 지배

<서고트 왕국의 성립과정> (잘알아둘것)

1. 409년부터 서고트 족 이베리아 반도로 이동

2.414년, 로마시대의 종말 이후, 게르만 민족이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함

-> 프랑스 남부 아키텐을 정식으로 양도받아 건설한 게르만 부족 국가인 서고트


왕국이 만들어짐 (414-711) (스페인 역사 상 최초의 국가의 틀을 가짐)

3.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게르만계열의 수에비족, 반달족, 고트족이 더욱


거세게 이베리아 반도에 유입됨

4.이들은 이베리아를 두고 대결하다 결국 서고트족 승리 -> 수에비족과 반달족을


복속시킴

5. 494년부터 20만 명의 인구가 스페인 지역으로 대 이동되어 별 저항 없이


497년 지배권을 확립

6. 560년 톨레도를 수도로 한 통일 왕국을 수립

7. 585년경 반도 전역 장악

8.. 레카레도 왕이 586년 즉위하자 가톨릭 세례

-> 기존의 로마 사람들과 새롭게 들어온 게르만족을 지배하기 위해서 589년에


Toledo 종교회의에서 가톨릭을 신봉하기로 합의하고 가톨릭을 국교로 선언

9. 종교상의 경계가 무너지자 서고트족과 히스파노 로마인과의 동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져 구분이 없어짐
10. 서고트 왕국 : 당시 서유럽에서 상당히 선진화된 문물을 가지고 있었음

BUT 서로마 붕괴 직후 게르만족이 스페인지역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중세 게르만 문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게르만 직속의 독일이 아닌 스페인에 가장 화려하게 남아있음

야만인들이었기 때문에 면확한 정치이념X(그렇게 알아두도록하고)

<아랍 민족의 이베리아 정복시 특징> -> 꼰비벤씨아 모자라베인 with


종교개종,그리스관대

1.꼰비벤씨아 (공존) with 모자라베인, 그리스 받아드림 (이건 알아둬) ----> 발전

: 모자라베인은 이슬람의 통치를 받고 있긴했지만 고 라틴어를 사용하고 기독교를 계속


믿으며 종교적인 자유뿐만 아니라 언어, 관습, 문화 등 그들 특유의 사회 조직을 보존하던
기독교를 믿던 고트족이다.아랍은 종교 개종에 관대 했기 때문에 이들의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어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아도 되었으나 불이익은 존재했다. 그 예시로 인두세,
토지세 등의 다양한 세금을 납부해야만 했고 사회 상류층 공직자는 될 수 없는 신분적
불이익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차별은 자신의 종교 신념을 지키기위해서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아랍 민족이 이베리아를 정복했을때,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타는


문화의 특성이 이교도에 대한 관용과 개방성으로 인한 꼰비벤씨아(공존)의 전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서로 다른 요소들이 단순하게 존재했던 공존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상호관계를 중시했다.

또한 이 시기에 아랍 민족은 스페인의 종교인 기독교 뿐만 아니라 금지되어진 그리스 문물


조차 받아들이며, 그리스 및 동방의 철학, 수학, 천문학, 의학 등을 발전 시켰다.

따라서 이들은 고대 지중해와 동방의 문화유산을 계승 발전하여 과학, 예술, 문화분야를


중심으로 세련되고 수준 높은 문명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아랍인들의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이게 된 10~11세기의 이베리아 반도는 당시


서유럽 세계에 동방(아랍)의 선진 문명이 흘러들어 가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중요하다)
이를 통해 스페인은 놀라울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할 수 있었다.

2 국토 회복 전쟁 (레꼰끼스타) -> 중요해 알아둬 (ㄴ이 제일 중요)

국토 회복 전쟁(레꼰끼스타)는 아스투리아스 왕국과 아랍의 전쟁을 통해 이베리아 반도를


기도교화로 회복하는 것이다.

ㄱ. 계기 : 아랍인들이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 지역의 정복을 포기하였는데, 이는 큰 실수


였다. 왜냐하면 이 두 지역에서 뻬라요를 중심으로 기독교인들의 핵심 세력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설하여 국토회복전쟁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ㄴ, 기독교와 이슬람이 항상 적대적이었던 건 아님 -> 알아두도록 해 ****

: 이때 국토 회복 전쟁(레꼰끼스타)가 있다 할지라도 기독교와 이슬람 두 문화가 항상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예시로 기독교 기사들이 칼리프 군대에서 용병으로
근무하였다. 또한 상인들이 양 지역을 오가며 물품을 매매하였다. 그리고 남부의
모사라베들은 북부로 건너가서 남쪽의 문화들을 전해줌으로써 기독교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고로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경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문화를
용인해주었고, 따라서 두 문화가 공존하였다.(공존공존공존!!!)

ㄷ. 역사적 과정 (혹시나 해서 적어둠)

국토 회복 전쟁(레꼰끼스타)의 과정에서, 피레네 산맥에서 바스키 인들이 나바라 왕국을


건설하였고, 국왕 산초 3세 이후에 나바라왕국은 게르만 민족의 관습대로 3명의 왕자들에게
분할 되어, 나바라 왕국은 나바라,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왕국으로 분할 되었다. 이때
나바라 왕국이 제일 힘이 컸었지만 무너진 후, 카스티야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강자로
등장하였다.국토 회복 전쟁(레꼰끼스타)는 9세기 까지 활발하지 않다가 11~13세기 사이에
활발하였다. 먼저 11세기 초에는 후기 우마이야 왕조가 붕괴하고, 이슬람 지역이 여러
소왕국들로 분열하였다. 분열된 소왕국들은 기독교로 통합되어져, 스페인이 군사적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 후 11세기 후반에서 13세기에는 나바라 왕국의 우위가 무너졌다. 이때
카스티야레온 엽합왕국과 아르곤 연합왕국이 주도하여 새로운 정치체제를 설립하였고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알폰소6세는 톨레도를 탈환하였다.

<신대륙 발견> - 1492 콜롬부스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아르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가 결혼하여 두 왕국의 정치
통합 이후, 그들은 국토 회복의 열망을 표명하였다. 이때 이들의 업적 중에서 제일 큰 것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다. 콜럼버스가 인도를 향해 1492년 8월 3일, 조미료를
구하러 인도쪽으로 가기 위해 항해를 시작하여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제도에
있는 산살바도르섬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유럽에 아메리카 대륙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신대륙은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개발되었다.
콜롬버스는 죽을때까지 아메리카 대륙이 서인도 인 줄 알았다.

***<1492년도 스페인은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가졌다>


1. 빛
ㄱ.1492년 레꼰끼스타가 완료되었다.
ㄴ. 엄청난 영토, 상당히 전쟁 경험이 풍부한 훈련을 잘 받은 군사 뿐만 아니라 신대륙을
발견하여 영토에서 들어오는 자금 등으로 경제적 기반을 이룩하여, 스페인의 근대화 및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ㄷ.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의 '스페인어 문법' 발간이 되었다.

2. 동시에 그림자도 있다.


ㄱ. 꼰비벤씨아가 사라졌다. (꼰비벤씨아가 뭔데?)
ㄴ. 동시에 유대인과 이슬람 인들의 추방으로 기독교 지역에서는 레꼰끼스타가 종료된
이후에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화되었다.
ㄷ. 1492년 그라나다 칙령으로 유대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베리아를 떠나야하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이러한 사회적 상황으로 피의 순혈성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법칙과 관습으로 자리잡고 종교적 순혈성 강조되었다.
ㄹ. 구교도와 신교도 간의 갈등이 있었다.
ㅁ. 중세 시대 다양한 철학과 학문, 사상과 종교과 공존하던 이베리아 반도는 중세가 막을
내릴 무렵 오히려 타 문화,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기 속에서 근대를 맞이하였다. 그
과정에서 사회에서 과학, 기술 분야와 경제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의 추방하였고 스페인 경제가 몰락하였다. 이는 추방된 유대인들을 받아들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은 우수 인력의 확보로 수공업과 상공업의 발전을 이룬 것으로
보았을 때, 유대인 및 아랍인 들의 추방이 스페인 경제 몰락에 큰 영향을 끼첬음을 알 수
있다.

<1469년, 결혼 통합>
: 까스티야 왕의 계승자인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이 결혼하여 두 왕국이
통합됨
-> 두 왕국은 같은 군주를 갖기로 합의하였지만, 두 왕국의 통합은 진정한 통합이 아니었다.
WHY?
두 지역의 경제나 행정을 통일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이 독자적인 법과 제도 유지 되었다.
따라서 하나의 통일된 형태로 혹은 중앙집권적인 형태로 발전 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고,
그저 여러 정치체들의 집합체에 불가하였다. (알아두도록 합시다)

또한 교회를 개혁하였으나 종교재판소를 창설하였다. 또한 유대인이라는 당시 사회의 가장


역동적이고 능력있는 집단을 추방하였다. 이는 스페인이 세계 대 제국으로 올랐으나,
100년정도 밖에 이어나가지 못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스페인의 몰락 과정, 이유> (8가지)-> 교수님 끄적끄적 / 그만큼 중요하다는거지

1.유대인과 이슬람인 추방

2.전쟁이 까스티야 사람들에게 일상이 될 정도로 ‘레꼰끼스타’라는 수백년에 걸친 전쟁으로,


사회는 용기, 인내, 명예라는 군사적 덕목을 강조하였고 그 과정에서 육체 노동과 자본
축적을 경멸하는 대규모 전쟁귀족층이 형성됨

3. 평민들도 이와 같은 가치관(육체노동, 자본 축적을 경멸) 을 수용함

-> 전리품과 토지 획득을 위해 많은 농민들과 장인이 군대로 몰림.


-> 스페인의 생산 계층이 무너짐 (WHY? 군인은 생산 계층이 아님)
4. 더불어 군사적, 귀족적 이상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침투되어 생산계층인 평민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침
5. 아메리카를 비롯한 식민지들을 관리 하는데 비용이 엄청 나게 많이 들었다.
6.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드니까 성직자가 많이 증가함. but 성직자들은 생산계층이
아니다보니, 생산게층이 점점 줄 었다
7. 전쟁, 흑사병이라는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감소하여 생산 계층이 줄어들었다.
8. 황제는 자신의 임무를 스페인의 국익을 챙기는 것 보단, 프로테스탄트 이단과 이슬람
이교도들에 맞서 그 당시 스페인의 최대 이데올로기인 로마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는 것으로
믿었으며, 황제는 가톨릭의 수호자로 자처했음
->유럽 내 개신교도들(영국, 네덜런드, 독일 북부,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과 막강한
위세를 자랑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의 이슬람 세력과 갈등
-> 스페인 국부의 대규모 유출
-> 즉 황제 개인적 관심사에 스페인의 국가적 이해가 희생되었음

***<합스부르크 왕가의 성립 과정, 카를로스 1세> -> 작년 문제 / 노트 끄적끄적

: 아라곤지역의 페르난도 왕과 카스티야 지역의 이사벨 여왕이 결혼하여 후안, 아나,


이사벨, 후아나라는 자식들이 있었는데, 후아나 빼고 모두 젊은 시절에 사망하여, 이사벨
여왕이 사망 한 후 후아나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였음.
이때 후아나는 유럽의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막스밀리아노 황제와
부르고뉴대공 지역의 마리아가 결혼해서 낳은 펠리페와 결혼함. 그 후 후아나의 정신
상태가 악화되어 이사벨 여왕이 사망 한 후에 카스티야 지역은 후아나 대신에 남편
펠리페가 섭정을 하게 됨. 하지만 남편 펠리페가 사망하여, 후아나의 아빠인 페르난도 왕이
카스티야 지역을 섭정하였지만, 1516년 페르난도 왕 마저 사망하게 되어, 후아나와
펠리페의 아들이었던 카를로스 1세가 젊은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최초로
스페인에서 합스부르크 왕가를 이루게 됨. 더불어 1519년, 친할아버지인 막시릴리아노
황제가 사망후,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기 까지 하였다.
결국 카를로스 1세는 할아버지로부터는 신성로마제국 왕위 계승받고, 할머니로부터는
네덜란드, 프랑크 공국 및 부르고냐 백장령지역을 계승받고, 외할아버지로부터는 아르곤
연합 왕국과 나폴리, 시칠리아 및 세르데냐 등의 이탈리아 영토를 계승받고,
외할머니로부터는 카스티야 왕국과 신대륙을 계승 받았다. 따라서 카를로스 1세는 세계
최대의 영토를 지배하는 세계 최고의 군주가 되었다.
이때 카를로스 1세는 친할머니(마리아)가 다스리던 플랑드르 지역에서 태어났음. 그래서
스페인어는 못하고 네덜란드어만 구사했는데, 즉위 이후 플랑드르 사람들을 대거 등용해서
정부를 이뤘음. 따라서 스페인 사람들의 불만으로 민중 봉기가 많이 일어났다.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 ->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 -> 펠리페 2세때는 이게
중요해
제국의 영토와 정통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는 까를로스 1세의 신념을 계승하여 국가의
종교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3/26)
**<17세기=스페인의 몰락 -> 원인과 과정> -> 잘 정리해두도록 합시다. 2번
반복함

:16세기 말 영국과의 일전에서 패한 스페인은 17세기에 쇠퇴하였다.

1.17세기 스페인 몰락의 중요 원인으로 스페인 군주들의 유약함과 무능함을 들 수


있다

-> 먼저 펠리페 3세때에는 수확의 증가와 아메리카에서 온 은으로 경제가 약간


회복 양상을 보였다.하지만 1627년-1628년 사이에 2차 위기가 오게 되고, 1640년
경에 정치적으로 제 3차의 심각한 위기가 일어났다. 그 결과 1678년부터 1683년
사이, 펠리페 4세때 다시 제 4차 위기가 오게 되었다. 즉 스페인은 17세기 내내
위기의 연속이었다.

2. 또 다른 몰락 요인으로는 경제활동의 쇠퇴와 재정 결핍, 군사력의 약화,


지나치게 방대한 영토로 유지 비용 부담 증가, 잦은 전쟁, 평민들의 아메리카로의
이주로 인한 생산인구 감소, 성직자의 증가, 전염병, 인구 및 산물 감소가 있었다.
3.또한 스페인 왕실 행정과 의회에서 왕과 귀족들 간의 대립때문에 비효율적으로
운용되었고, 귀족들은 자신들만의 이익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 마지막으로 독립을 계속 시도하던 플랑드르와 독립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투과정에서 인력 자원과 경제적 자원을 많이 소비하였기에 국가는 패망의 길로
가게 되었다. 또한 전쟁으로 농촌이 황폐화되고, 평민들이 군인으로 끌려갔기
때문에 산업화는 정체되었다.

<제국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발전> 중에서 교수님이 언급한 부분 (그나마 중요해서


별표)

: 아메리카에서의 귀금속 유입량의 괄목할만한 증가에도 불구하고,그 수입의


대부분은 지역 산업에 재투자되기보다는 유럽 다른 지역에서 제조업 제품을
수입하기 위해 곧바로 유출되었다.

**<18세기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성립과정>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 없이 몸이 약하여 사망한 후, 카를로스 2세의 누나와 결혼한


프랑스의 루이 14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그랑 도팽 마저 아버지인 루이 14세보다 일찍
죽어서, 그랑 도팽의 아들 3명이 왕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랑 도팽의 아들 중
부르고뉴 공작이랑 베리 공작도 일찍 죽어서 앙주 공작으로 불리는 펠리페 5세만이
유일하게 살아있었다. 또한 그랑 도팽의 장남인 부르고뉴 공작에게는 아들 루이 15세가
있었다. 따라서 왕위를 이을 사람은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5세 (앙주공작)와 증손자인
루이 15세 밖에 없었다.

이때 카를로스 2세는 죽기 전에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 펠리페 5세(앙주공작)를 계승자로


지명하였으나 펠리페 5세가 동시에 프랑스 왕이 되지는 못하도록 유언을 하고 사망하였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스페인과 프랑스를 하나로 합치려는 야심이 있었고, 결국 루이 14세는
카를로스 2세의 유언을 무시하고 펠리페 5세가 프랑스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결국 이 과정에서 1701년 부터 1714년까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 (스페인 프랑스 vs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가 승리하고 프랑스와 스페인이 패배하여 펠리페 5세는
프랑스의 왕위를 포기하고 스페인 왕위만을 계승하였다. 이때 펠리페 5세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의 증손자인 루이 15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어 스페인은
펠리페 5세가 지배하고, 이와 분리되어 프랑스는 루이 15세가 지배하게 된다.
->펠리페 5세때부터 스페인에 최초의 부르봉 왕가가 시작되었다.

또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유트레히트 조약”을 체결하는데


-> ㄱ. 프랑스는 북 아메리카 식민지인 루이지아나 지역을 영국에 이양
ㄴ. 스페인은 아메리카의 식민지 만을 보유하고 유럽 내의 다른 지역은 포기했다.
그리고 지브랄타와 마요르카를 영국에 양도하여 유럽의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모든
전략적 요충지와 상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와 달리, 영국은 지중해와 대서양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나폴레옹>
1808년 5월,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와 이 사람 아들인페르난도를 모두 폐위시키고
자신의 형인 호세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과 나폴리 왕으로 앉혔고, 카를로스 4세는 여생을
망명지에서 보내게 된다.결국 스페인은 1808년부터 1817년까지 호세 보나파르트가 왕이
되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됨
(4/2 + 4/9)
<제 2공화국 성립과 통치과정> -> 끄적끄적
: 알폰소 13세는 장군에게 내각의 구성을 의뢰하여, 1931년 실시된 의회 선거로 왕정이
폐지되어 알폰소 13세 국왕이 프랑스로 망명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이때 스페인 제
2공화국이 세워졌다. 알폰소 13세 국왕은 프랑스로 망명한 후에도 로마로 옮겼으며
왕정복고 운동이 실패한 후, 1941년 왕위 청구권을 포기하고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하였다.

1931년 12월, 제 2공화국이 공포한 헌법 제 1조의 내용이 스페인은 노동자들의


공화국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정신을 이어서 토지개혁의 정책으로 공익을 위한
토지를 수용하고, 귀족의 폐지,주권재민,전쟁포기를 헌법에 규정하고 여성의 투표권을
허용해주었다.또한 바스크, 카탈루냐, 갈리시아에 자치권을 부여하였고, 카탈로니아 자치를
헌법에 규정하였다.그리고 대부분의 스페인 국민에게 악덕, 위선, 우열 등을 상징하던 로마
가톨릭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규정하고, 종교단체인 예수회를 해산시켜 그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켰다. 결국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고위층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보수세력은 크게 반발하고, 소수의 부유한 자본가들은 자신의 재산을 은행에 동결시키거나
해외로 유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제 2공화국 총리 마누엘 아자냐는 가톨릭 교회와 군대를
가장 중요한 개혁 대상으로 생각하였다. 특히나 그는 군대를 무능하며 천박하고 허세부리는
집단이라고 생각하여 군대 내의 장교 수를 감축하고,공화국에 우호적인 새로운 병력 창출을
시도하였으나 많은 반발이 일어났다.또한 당시 스페인 전 국토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국고로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땅을 재분배해주는 토지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 구체적 방안으로 지주들에게 일정액의 보상금을 지불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절충안을 선택하였으나 어느 쪽도 만족을 시키지 못한 채 불만들이
가득하여, 토지개혁을 놓고 정국이 갈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3년에 총선이
시행되었고, 우파 세력이 승리하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우파 세력은 교회에 특권을 부여하고 지방 자치를 폐지하였다. 또한 토지


개혁을 모두 보류하여, 무정부 주의자,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들의 원성이 가득하였으며
아수트리아스 지역의 무정부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진압을 하기도 했다.

이때 스페인 좌파들은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사민주의, 중도세력 등으로 분열되어있었는데,


무정부주의자라서 선거에 불참하는 무정부주의의 노동조합이 좌파 중 가장 비중이
컸기때문에
안정적인 좌파 정권 창출이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파 정권 3년 동안 좌파가 탄압을
당하자, 노동조합은 다른 정파들과 타협하지 않고는 우파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선거에 참여하기로 결정해서, 무정부주의자까지도 총괄한 좌파 연립 정파인
인민전선( Frente Popular)을 결성
하였고, 결국 1936년 총선에서 ‘Frente Popular’ 로 대단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Frete Popular’내각은 토지 개혁, 지대 인하, 조세 개혁 등의 농민 보호정책과 노조 설립,


임금 인상 등의 노동자 권리 증진 정책을 실시하였고 정치범을 석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 정책들은 가톨릭 교회, 군부, 지주 등의 보수세력의 반발로 이어졌으며 이들은 군부
쿠테타 음모를 만들거나, 노조를 향한 백섹테러를 하는 등 좌파 정부의 정책을 대놓고
방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공화국이 새로 창설한 국가헌병대 조직이었던 돌격 경찰대 대원들이


왕당파의 지도자를 암살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이를 구실로 1936년 7월 17일에 모로코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좌파 정부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주축으로 한 우파 세력의 반란군 사이의 스페인 내전이 1939년까지 계속된다. 그 결과,
팔랑해 당의 우파 반란군이 승리하여 스페인 제 2공화국은 붕괴되었다.
<제 2공화국에 대한 평가 >-> 알아두기 핵심임 개 중요
1. 긍정적인 평가
ㄱ. 제 2공화국은 유의미한 민주주의와 최초로 세속주의 헌정 질서에 대한
실험을 했다. 정치질서를 만들기 위해 최초로 가톨릭을 배제한 실험을 했다.
ㄴ. 공화국 이념의 근대성은 우파 내에서도 내전 발생 직전까지도
받아들였던 경우가 많았다.
ㄷ. 스페인의 정치적, 사회적, 제도적, 교육적, 문화적인 근대화를 시도를
했다.

2 부정적인 평가
ㄱ. 제 2공화국 시기에 좌파 및 우파 정부는 극도로 분열을 일으켰다. (31년
- 33년까지 좌파 / 33년 - 36년까지 우파 / 그리고 36년에 다시 좌파가
승리를 거두고 내전이 일어남)
ㄴ. 무정부주의자나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 공화주의와 전혀 거리가 먼
인물들도 많았다. (즉 지나치게 과격분자들이 많았다). 이들에 대한 통제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ㄷ. 많은 정치 세력의 인정을 받지 못한 공화국 정권은 농민들도 불만 일
정도로, 정치적 기반이 굉장히 취약했고, 이런 분열상과 정권의 취약성으로
국가적인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ㄹ. 가톨릭 교회와의 화해도 이루지 못했다.
ㅁ. 카탈루냐나 바스크의 지방 정부는 독립을 목표로 중앙정부와 마찰이
있었다.
ㅂ. 제2공화국 체제의 좌파나 우파는 모두 선거에서 지면 언제나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는
민주주의의식이 성숙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ㅅ. 특히 내전 중에 제2공화국의 민주주의는 사실상 소련과 공산당,
까바예로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후안 네그린에 유린당하다시피 되었기
때문에 반대파에 대한 숙청과 암살을 하였다.
<상식모음>
1.1898 = 스페인 몰락의 해
: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섭정시기 중 1898년에, 스페인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마지막 식민지였던 쿠바와 필리핀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는 스페인 제국의 마지막 보루마저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스페인 국민들은 상실감에 빠졌고, 심한 집단적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였다.

2.. 세계 2차대전 ( 파시스트(극우)vs 반파시스트(승리) )


따라서 유럽 사람들은 극우를 상당히 싫어했음. 그런데 스페인만 유일하게 프랑코 체제로
인해 파시스트체제가 유지되었다. 이 시기동안 다른 유럽 국가들은 스페인을 유럽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이때 프랑코 체제 후반에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경제 성장을 이루어내서 살아남을 수
있었음을 알아두자. 원래 제거 대상이었음. 프랑코가 사망한 후, 유럽연합에 가입 될 수
있었다. 1986년 후에 국제 기구에 가입할 수 있었다.

3. 프랑코 체제의 정부조직: 스페인 의회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나 정당 활동의


자유가 없었고 프랑코 스스로 총신 총통에 취임하여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체제를
운영했다
-> 이러한 프랑코 독재가 스페인 역사에 새로운 경제와 사회 질서를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그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승자의 논리만 주입했다.

<1957년 이후 스페인 경제 정책과 성공요인> -> 끄적끄적

스페인은 1957년에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여 신자유주의 기술관료들로 경제팀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자립경제체제를 해체하고 외국투자유치등 경제개방을 시도했는데, 그


결과로 1961년부터 1974년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 성장률 이뤄냈다.

1970년대 초에는 서유럽의 경제 붐이라는 환경의 영향도 있지만 경제 정책변화의


영향으로 서유럽 소비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성장은 사회적 변화를 수반하였다. 그 예시로 국내외 이주가


늘어나면서 인구구조가 바뀌고 관광객이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또한 사회의
근대화와 세속화가 이루어졌다.

<프랑코 죽고, 스페인 민주화의 과정>

먼저 1978년 사회민주주의적 법치 국가와 의회군주제, 지방자치제 등을 주요


원리로 하는 새로운 헌법이 개정되었다. 그 후 1979년 3월 새 헌법에 따라 다시
국회를 구성하고 4월에 지방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며, 독재자가 사망한 지 4년 만에
프랑코 독재 체제가 현대적인 다원민주주의 체제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스페인 민주화는 사회개혁에 대한 대중들의 강한 열망과 정치 지도자들의


양보와 타협으로 가능 할 수 있었다,

1. 먼저 스페인 대중들은 불행한 과거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치적 양극화와 내전은


다시는 되풀이 되서는 안되는 참혹한 역사였기 때문에 사회개혁에 강한 열의를
보여주었다.

2. 1930년대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정치인들은 대화하고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ㄱ. 이에 대한 예시로 극우 집단을 대표하는 국민연합과 ETA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정당들은 모든 정치범들을 석방하는 사면법이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한
국민화해의 수단이라고 하며 사면법을 환영하였다. 이때 사면대상에는 독재체제에
저항을 하다가 구속된 민주 인사들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폭력과 고문을 자행한
경찰들도 사면 대상에 포함되었다.

ㄴ. 우파는 프랑코 체제의 원칙과 기득권 포기하였고, 좌파는 점진적 개혁에


동의하였다. 이러한 양보와 타협으로 스페인은 과격한 단절이 아니라 타협에 의한
단절을 통해 독재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성공적으로 이행하였다. 그러나 군부의
반발로 1978년과 1981년 쿠데타 시도하였지만 국왕이 최고 군사령관에게 쿠데타를
지지하지말라는 연락을 했고 스페인 최고 군사령관은 이 쿠데타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고 이것은 불법쿠데타라고 말하며 이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국민들은
국왕Don juan carlos의 역할이 컸다고 말하며 국왕은 많은 지지를 얻었다..

(4/30 + 5/7)
<소수민족>
1.1931년 제 2공화국이 성립되자 macia는 공화주의자들과 협상을 통해 카탈루냐
지역 임시 정부인 ‘Generalitat’을 구성하고 초대 의장에 취임 (이때 generalitat를
알아두자~)
-> 즉, 1931년대, 카탈루냐 지역은 ‘만코무니타트’에서 ‘generalitat’로 세력이 바꿔짐.
-> why? 당시 스페인은 지역자치를 폭넓게 지지해줌

2.Vasco 민족주의 <-> Cataluna 민족주의 차이점 when 19c후반 산업화


: Vasco 민족주의는 스페인이 추구하는 근대화에 반발하고 저항함.
그러나 Cataluna민족주의는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는 스페인 국가의 무능함에 대한
산업화 세력의 반발의 성격을 보였다.

3.Vasco 민족주의 <-> Cataluna 민족주의 차이점 when 20세기 초


Vasco민족주의는 반근대화와 반산업화, 인종주의와 전통주의를 지향함
그러나 Cataluna민족주의는 근대화와 산업화를 지향하며 문화적 언어적 성격을
가짐.
+)이 시기 vasco 민족주의 추가 설명
Vasco지역은 19세기 광산업과 중공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됨.->산업노동자
계층 출현->이주 노동자 유입. 근데 이들은 스페인화와 스페인으로의 통합을 주장->지역의
이해나 대의명분에는 별 관심이 없음
그러나 산업이 서로 연계된 몇몇 가문으로 이루어진 도시 과두 귀족의 수중에 집중
또한 이주 노동자들은 대부분 PSOE나 신한 노조 UGT 소속 (좌파적이고 반교회주의적
성향)
->VASCO의 전통과 유대를 심각하게 약화
-> 결국 VASCO 민족주의 출현을 위한 조건이 됨
VASCO 민족주의 운동의 지지자들은 산업화에 치여 몰락을 거듭해 간 농촌 유지층과
전통적 수공업자와 하급 성직자와 일부 농민이었고, 이들은 산업화, 산업 엘리트의 부상,
외부 산업 노동자 유입을 위협으로 간주함

<sabino arana Goira>


1.vasco민족주의 운동의 이데올로기 창건자
2.vasco지역을 지칭하는 말로 Euskadi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보편화 시킴
3. vasco 민족주의 핵심을 만들어 냄
-> 인종적 순수성-> 스페인인과 결혼한 Vasco인 비난
why? 비도덕적이고 비가톨릭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외국인(다른 지역의 스페인 인
포함)의 침입으로 vasco 가 절멸의 위기에 처했다고 믿음
->so vasco에 다른 지역 사람들이 들어오고, 그들과 vasco 인들의 결혼을
금지하고, 전통적인 도덕을 되살리고, 자유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영향을
차단시켜 줄 수 있는 방법으로 vasco 독립을 추구

-> 처음부터 독립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자치를 추구한 Cataluna과 다름.

4.Vasco 민족주의 <-> Cataluna 민족주의 차이점 when 1970년대


Cataluna민족주의: 문화적, 근대적, 진보적인 성격->cataluna언어와 문화를 증진->
내전에서 유래한 원한을 뛰어넘어 타혐에 기반을 둔 화해와 절제의 원칙->온건하고
민주주의적인 민족주의
그러나 Vasco민족주의: ETA(바스코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 단체)의 출현과 ETA가
취한 무장투쟁-> ETA는 PNV의 보수적 성향에 반발하여 뛰쳐나간 민족주의적
혁명단체->자치보다는 완전한 독립을 추구-> 중앙정부와의 타협이 아니라 무력
투쟁과 대중 의 혁명적 열기를 통해 독립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

5.Vasco 민족주의 <-> Cataluna 민족주의 차이점 when 프랑코 사후


Cataluna민족주의: 스페인 국가라는 틀에 머물며 Cataluna 독립을 주장하는 대신
최대한 자치를 보장받겠다는 강한 실용주의
vasco 민족주의는 두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먼저 PNV는 Euskadi의 분리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표명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애국적
좌파는 무장 투쟁조직인 ETA와 분명한 연계가 있었고, Euskadi의 완전 독립과
사회주의, 프랑스 내 영토를 포함하는 모든 vasco 영토의 재 통일을 주장했다.

6. 21세기 cataluna의 현황
현행 스페인 헌법상으로는 Cataluna 단독으로 독립 찬반투표를 실행하거나 독립을
선언할 권한이 없음. 따라서 단독으로 독립 찬반투표를 시행하거나 독립 선언을
하는것은 모두 불법임.
-> 결국 스페인 정부로부터 합법적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면 스페인 전체의 여론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서 헌법을 개정하건, 스페인 전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국민투표에서 독립을 보장받건 해야하는데, 그러려면 독립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우선 될 필요
->결국 카탈루냐 주정부의 독립 방법은 외교 독립론 아니면 무력 독립론 뿐

1.돈키호테는 최초의 근대소설이다.(엄청중요)


-> 근대성= 인물 묘사와 인물의 발전과정에있다.(근대 = 17c)

: 원래 ‘로망스’->로망스의 기사는 중세 사회의 이상을 반영하는 그리고 숭고한


목적(나라를 구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영웅적인 인물)

but 돈키호테 : 고상하고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인물로, 신비화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인간적인 약점을 가진 인물로 제시

-> 늙음, 볼품없게 생김, 늠름놉, 신체적 능력없음

-> 전형적인 기사의 유형에서 벗어남, 광기에 사로잡힘, 실수 투성이


-> 전형적인 기사의 유형에서 벗어나, 광기에 사로잡혀 실수를 연발하는 기사라는
새로운 인물 유형을 만들어냄-> 문학과 현실의 거리를 좁혀놓았다.(매우 중요)

-> 돈키호테의 인물 : 중세적 허구와 근대적 사실주의적 성격이 공존하고


있으며(이떄 완전한 사실주의는 아님! 사실주의적!!) 전시대에 대한 중세적 특성이
조롱, 풍자 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함

2. <돈키호테> 의 이야기의 역동성

: 인물과 이야기의 내적 역동성을 효과적으로 나타냄 ( 일단 적어놔)

-> 이야기의 역동성, 심리적 진행’ 측면에서 전시기 소설(데카메론)과 확연히 구별

-> 인물과 이야기의 내적 역동성(잘 알아두도록해요)

-> (사건에 따라 이야기가 변함)

->최초로 소설 문학에 도입한 뛰어난 기교, 장치

cf) Boccaccio 역시 근대 소설의 위대한 창시자: 작품 “Decarmeron (1492) “

-> 그의 인물들은 평면적인 사회적 전형

-> 사건이 그들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그들에게’ 발생함

-> 따라서 인물의 성장 발전 과정은 무시됨

3. 돈키호테 1부

: 1부에서 돈키호테는 책을 많이 읽어서 정신이 이상하게 되어 자기가 편력 기사라


생각하고 (정의가 떨어진 이유가 기사들이 많이 없기 때문에 불의가 판을 치고
다닌다 생각하여) 불의를 무찌르고 기사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모험을 찾아 세상으로 나간다.(돈키호테가 등장)

->혼자서 잘먹고 잘살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사회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고생길로 나갔다.(자신의 믿음=순고한 목적으로 나감)
4. <돈키호테>의 인물의 발전과정 (전시대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요소들이 들어있다는 것 알아두자)

ㄱ. 인물이 발전하는 모습 : 사건에 따라 깨달음을 통해 사람이


변해감(근대소설에서 새로운 특징)-> 인물들이 변함으로써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서로를 보완하고 서로에게 반응을 보이면서 인물이 성장을 해감

ㄴ. 작가 의도: ‘만인을 즐겁게 해 줄’ 기막힌 이야기

-> 재미는 있지만 점점 인간의 가장 심각하고 본질적인 문제들로 바뀐다

ㄷ. 가상과 실체,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 속으로

돈키호테와 산초는 이 문제의 양면을 각각 대표

-> (돈키호테=가상, 비존재 / 산초= 실체, 존재를 각각 대표함)

ㄹ. 인간 실존에 대한 진리를 배움 -> 그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인물을 더욱


실감나게 표현함. (나도 책을 읽어가면서 공감하고 변할 수 있음) -> 근대 소설가의
작가적 성장 과정의 모범

5. <1부와 2부의 차이점>

주제, 형식, 주인공도 같지만 차이가 존재

1부: 돈키호테는 모든 것에 대한 환상을가지고 사물을 대한다.

2부: 돈키호테는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환상의 세계를 구축 ->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정체성 혼란 등 당대의
17세기 바로크적 정신적 방황을 잘 구현함

6. 해석2: ‘이성’이라는 새로운 정신 ( 이성=인간의 가장 큰 본질)

1.16세기 르네상스: 유비적 사유 (유사성 = 동일성(비슷한 것을 같은 것으로 여김) )


-> 인간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동일하다고 믿음

2..17세기 합리주의에서 유비적 사고방식은 사라지기 시작하고 이성만능 시대의


시작됨

-> ‘이성’, ‘분별력’에 의해, 유사하다고 곧 동일한 것은 아님을 알게됨

-> ‘동일성’과 ‘차이’에 따라 사물을 분류

3. 돈키호테의 유비적 사유

but 돈키호테는 현실과 허구 사이를 분별하지못함(16c의 유비적인 사고= 현실과


허구 사이의 차이를 깨닫지 못하는 착란)

ex) 가축 떼 = 군대 / 하녀 = 귀부인 / 여인숙 = 영주의 성 / 풍차 = 거인

->시대에 뒤쳐진 사람이다라며 조롱을 당함.

7, 해석 4 : 오늘날의 의미

1.광인의 시대착오가 우리를 매혹

2.왜 그럴까?

3.디지털 혁명으로 허구에서 있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남

-> 허구와 실재의 구별이 흐려지고 있는 현대

4.많은 선지적 지식인들이 돈키호테와 같은 모험을 즐기고 있다.

5.이성이라는 틀로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억누르는 사회에서, 이상을 향해서


끊임없이 도전하는 무모하지만 가장 순수한 낭만주의 영웅의 모습

->19세기 이전에 돈키호테는 미친 노인네->그런데 19세기부터는 어떠한 시련과


고난이 있더라도 자신의 이상(스페인을 정의롭게 만듬)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지성의 표상
6. 20세기는 성실한 사람이 성공, 21세기는 창의적인 사람이 성공

7. 이상과 꿈을 향해서 끊임없이 도전하는 무모하지만 가장 순수한 인간의 모습

8. 인간 평등 정신이 제시됨 -> 하녀와 주인이 같이 밥을 먹음

자유정신이 제시 됨 -> 여기서 세르반데스의 위대성을 찾아볼 수 있다 ->


돈키호테

9.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나타냄

예술tip: 5-15세기 중세(신에게 모든 것들을)/ 16세기-르네상스(인간적인 측면강조)/


17세기 바로크시기(과학혁명의 시기)/18세기 신고전주의(계몽주의시기, 이성중시,
합리성 중시)/ 19세기 낭만주의(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철학적, 정치적인 측면)

(5/14 + 5/21)
<근세 회화의 흐름> : El Greco(16세기), Velazque(17세기), Goya(18-19세기)

1.근세 스페인 회화의 시기


= 일반적으로 felipe 2세(16세기 중반) ~ 고야(19c 초반)의 활동기

<El Greco> -> 16세기: 최대로 중요!!!!!!


1.미켈란젤로의 <피에타>라는 조각상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인체표현과 자세를 응용한 그림을 그림
->예수의 인간성을 나타냄
cf)미켈란젤로tmi: <피에타>이후, 화가, 조각가들이 구체적인 인체적 특징으로 예수를 표현함

2.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 상당히 중요한 작품입니다


a. 엘 그레코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
b. 내용: 호르가스 지역의 영주인 오르가스 영주가 사망하여 매장할 때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스테피노(거의 1000년 전에 사망한 인물)가 나타나 손수 시신을 안치했다는 전설을 그렸음
c. 그림은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로 양분함
-> 위 (예수를 정점으로 성 베드로, 요한, 성 토마스를 비롯한 성자들이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
묘사됨
-> 아래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스테파노가 백작의 시신을 관에 넣으려고 하고 장례를 집전함
d. 한 화폭에서, 수직구조를 주축으로 천상세계와 수평구도가 지배하는 지상세계를 연결시킴
e. 집단 초상화와 종교화를 결합함
-> “종교화와 초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형식의 작품이다”라는 평가

+17세기 특징
1. 적극적인 미술후원으로 스페인에 미술가들이 많이 모였으며, 16세기말 르네상스를 거쳐 17세기의
바로크시대로 넘어가서 서로 다른 화풍의 그림들을 동시에 접할 기회가 많았다.
-> 그래서 17세기는 혼성적*이고 독창적*인 화풍이 발전했다.
-> 엄격한 자연주의를 강조했던 16세기와는 달리 17세기에서는 화려한 화풍으로 바뀜.(본격적인
변화)
2. 당시 스페인의 미술 중심지 = 톨레도(이때 톨레도는 미술 중심지이자 종교중심지), 마드리드,
세비아
-> 성당을 비롯한 새롱누 건축물들이 세워지고 미술품에 대한 수요도가 높아짐
3. 종교화뿐만 아니라, 판화, 풍경화, 장르화(가정생활의 일상적 그림)등의 세속화가 높아짐

<Diego Velazquez> -> 17세기 : 상당히 중요, 반드시 기억!!!


1.혁신적인 자연주의 화풍으로 주목받음
2.주로 ‘보데곤’이라는 장르화(가정생활의 일상적 그림)을 많이 그림
->평범한 서민들과 일상적인 정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함
->플랑드르(네덜란드의 지역)의 장르화와 정물화의 전통을 이어받음
3. <바쿠스 축제> : 새로운 장르 -> 혼합성 (신화 + 일상성)
4. Palacio Real de El Pardo에 Torre do la Parada를 세우고 미술품으로 장식
->벨라스께스는 이곳을 위해 펠리페 4세, 카를로스 왕세자, 페르난도 추기경의 초상화, <이솝>,
<메니푸스>, <마르스>, <사냥>, <난쟁이>등을 그림
-> 이후 FElipe IV의 미술 고문관이자 궁전 장식 책임자로서 활동
5. <시녀들>
a.정교한 원근법과 등신대(같은 비율로 정교함)
b.원래 화가와 대상은 마주 보고 그려야 하는데 화가가그림안에 있으므로 사람들 앞에 거울을
세워두고 자신과 대상을 보고 그림 -> 그림 속 장면을 화가가 방안에서 목도하는 것과 같은 효과 ->
새로운 시점 (거울)
c.작은 거울에 보이는 펠리페4세와 펠리페4세의 왕비가 작업실에 도착한 상태

6. <Francisco de Zurbaran> -> 사람임

a.”처음부터 세비야와 주변 지역의 수도원과 성당 등 종교기관의 주문으로 종교화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화가”였음을 알아두도록 합시다.

b.벨라스케스는 궁정의 후원을 받았지만, 쓰루바란은 궁정이 아닌 교회의 후원으로 성공하였다.

c.<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수도> - 섬세한 세부 묘사와 극단적인 명암대조법을 구사

<고야> -> 18~19세기 초반 / 스페인 근대 회화의 출발점

a.18세기의 당시 배경

->부르봉 왕가 시작->더 화려하도록 새로운 이미지 창출 ex)로코코양식

->이탈리아풍에서 프랑스풍으로 변화->프랑스 출신 화가를 기용

b. <1808년 5월 3일> 이라는 작품을 기억해 둡시다 ->1808년 5월 2??일에 일어난 봉기와 민중
학살

-> 독립 전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을 그림

: 나폴레옹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독립운동이 일어남. 그 민중들이 프랑스 군인들에게 잡혀서
처형을 당한 사건 ->독립전쟁이 일어남 -> 프랑스가 쫓겨나 가니까 속죄하는 차원에서 벌을 받지
않기위해 그림.
c. 고야의 새로운 측면이자 의의 (중요하고요~)

<>근대기로 이행하는 격동의 스페인 사회를 새로운 형식의 미술을 통해 민감하게 반영

<>표면적인 사실을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음

d. <카를로스4세 가족의 초상>

<스페인 미술이 유럽에 알려진 시기> -> 알아두도록 하자

->근세 스페인 회화에 대한 관심이 파리 화단에서 증폭

->19세기부터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스페인을 점령하면서 스페인 미술작품들을 가져가게 되면서


알려졌다

<20세기>

<Pablo Picasso(1881~1973) : 20세기 현대 미술의 선구자>


1.청색시기: 인간의 고독과 사랑의 비애, 인생 자체에 대한 고뇌를 작품화

2.<아비뇽의 처녀들> by 피카소


: 이 작품은 “20세기 현대 미술의 시발점(1907년도 작품)으로 평가 받음”을 잘알아 둡시다
-> 입체주의 큐비즘의 시작

3. 이미지와 기호 : 종합적 큐비즘 시기


: 1912년 <나는 에바를 사랑해>를 통해 분석적인 큐비즘 이탈을 선언하였다.
-> 이것은 현대미술에서 피카소가 이룬 두번째 성과인, 현대 미술에서 언어 사용, 미술에 나타나는
이미지를 기호로 파악하는 시발점이 됨.
->대표적 작품으로 (기타, 악보, 유리잔)이라는 작품이 있음
: 이는 회화적 전통에서 벗어나 종이나 벽지를 붙여서 제작하는 콜라주 기법에 의존한 작품이다. 이를
통해 비재현적인(cf. 재현적= 있는 걸 그대로 ) 요소를 이용한 모호한 이미지를 나타냈다.
-> 언어적 요소, 성적인 요소, 시각적인 요소를 콜라주를 통해 실험한 최초의 예술가

<Juan Miro와 카탈루냐 정체성 그리고 초현실주의> : 후안미로는 개 중요><


1.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화가이다.
초기: 야수주의, 큐비즘, 카탈루냐 민중미술의 영향을 받음

2.바르셀로나 출신 -> 작품에 정치성이 있었음 -> 카탈루냐의 정체성을 많이 드러냄 을 알아두세요
-> <당나귀가 있는 채소밭>과 <농장>
: 이 작품을 그리던 당시는, 카탈루냐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초기 단계이자 매직리얼리즘,
시적인 리얼리즘의 단계였다.
대지는 동물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며,
나무와 하늘, 집 등은 카탈루냐 풍경과 연관된 내용으로 ‘땅으로의 회귀’를 알려주는 정치적
풍경화이다.

3. 초현실주의
-> <어릿광대의 사육제> <달을 보고 짖는 개>
초현실주의자들이 추구한 무의식적인 꿈의 세계보다 공중에서 부유하는 연체동물로 변형되는 곤충의
세계나 코믹한 생물의 세계에 관심

4.후안 미로의 태도
파리 거주시기: 미생물의 세계, 어린이 회화 - 신나는 그림
사실주의와 반대되는 반회화적, 반미학적 태도를 취함.
“나는 회화를 암살하고 싶다.”: 사실주의적인 측면을 가진 전통회화로부터의 이탈하고 싶음
회화가 서양미술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공격 (여러 장르들 중 서양미술에서 회화가 차지하는
중요도가 제일 높음)
->계몽기 이후 고급/저급미술로 분리되었는데 후안 미로는 이를 싫어했음
( 회화와 조각 : 엘리트 분야 vs 판화, 포스터, 사진 등 : 저급 분야)
-> 새로운 미술, 미학을 창출해보려는 욕망을 가짐.: 콜라주, 아상블라주, 드로잉, 회화를 한 화폭에
섞으면서 전통회화를 공격함. 또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전통 미술을 암살하려는 욕망이 있었음

<Salvador Dali의 초현실주의>

1.프로이트의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지향하며 ‘자동기술법’을 이용했음을 알아두도록 하세요.


(자동기술법 : 이성적이지 않고 논리적이지 않은, 머리속에서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것)
-> 1929년 초현실주의에 가담
초현실주의자 : “도덕적, 미학적 목적이나 이성적인 영역에서 자유로운 사고의 과정을 발견하고자
‘자동기술법’이라는 순수한 심리적 상태를 추구한다”고 언급
2. 무의식
a.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수인 미노타우어를 인간 무의식의 상징체로 파악
->오르페우스, 오시리스 신화 등을 탐색
b.무의식적인 꿈의 세계를 화면으로 옮기기 위해 정신분석학적인 접근
->’우연의 효과’에 의존
->초현실주의자 막스 에른스트는 프로타주와 콜라주를 혼합한 기법을 사용하면서 이 효과로 생기는
우연적인 이미지로 신선한 충격을 줌
c.달리는 편집광적 비판 방법을 이용 -> 현실을 인식하는 방법
-> ‘해석의 망상’에 바탕을 둔 비이성적인 지식을 만들기 위한 작업
-> 이 방법으로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다고 믿음
-> 똑같은 대상에서 다양한 이미지를 읽어 낼 수 있는 방식으로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이미들이
표면화 될 수 있다고 생각
ex)<빵 바구니> <봄의 첫 날들> <평범한 관료> <만 종> <삶은 콩으로 세운 부드러운 구조물(내란의
전조)>
<기억의 지속>-> 가장 유명한 작품

(5/28)
<플라멩코 + 투우>
1.플라멩코와 투우에서 보는 스페인 문화의 역동성?
: 플라멩코와 투우는 스페인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왜냐하면 스페인 문화의
독특함은 다양한 문화적 유입과 혼합인데, 플라멩코와 투우 둘 다 문화의 유입과 혼합의
대표적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 투우: 단순히 소를 죽이는 행위가 아니라 정교한 의식이 가미된 열정적인 삶의 축제
->피의 난폭함이 난무하는 장엄하고도 예술성 높은 행위 양식

2. 플라멩코의 정의 + 플라멩코의 주 무대
: 플라멩코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벌어진 역사적 과정을 대변하는 음악이자 춤이다.
플라멩코의 주 무대는 안달루시아였는데, 이 지역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새로운 문화를 형성할 수 있던 곳이었다.
3. 플라멩코의 기원
: 안달루시아를 오래 동안 지배했던 아랍족 영향 + 11세기 경에 들어온 동방 정교 의식 +
유태인들의 예배의식 + 집시 -> 이처럼 서로 다른 4개의 요소들이 어울러져서 플라멩코를
이룸
- 음악과 춤의 형상화에 집시들의 절대적인 영향력이 컸음
- 먼저 노래를 만들어냈고 여기에 손과 발로 만들어내는 리듬을 가미

4.집시들의 음악의 특징 (잘 알아 둡시다)


: 음표가 고정되거나 한정되지 않고, 자유롭고 분방한 악상과 에드리브가 특징
+) 집시 설명 추가
이란 최대 민족시인 페루두시(940-1025년경)는 대 장편 서사시<왕의 서>에서 집시로
여겨지는 루리족 음악가들에 대한 공상적인 설화를 이야기함. 이때 루리족음악가(=집시)는
농업을 몰라 정착하지 못하고 이동생활을 하는 이들은 음악에 정열적이고 천부적인 재능
가졌음. 그들은 이동 중에도 항상 악기들을 가지고 다니면서 연주하였음.

5. .투우의 역사?
: 먼저 12세기, 즉 역사상 Reconquista때에 El Cid가 투우를 했고, 16세기에 Carlos 1세가
Felipe 2세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발라오리드 광장에서 투우를 죽이는 행사를 거행했다.
그리고 18세기까지 투우는 귀족들의 행사였고 말을 타거나 짧은 창검으로 소를 죽였다. 그
후 18세기에 직업적인 투우사가 등장하고 땅에서 투우와 싸우기 시작하면서 현대적인
투우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때 투우사들은 평민이지만 귀족들의 딸들과 결혼을 해서 신분상승을 하는 유일한
가난한 사람들의 출세길이었다.

6. 투우의 위기
-2007년 스페인 전역에서 2500회 이상 열린 투우 경기는 2013년 500회이하로 급감
-바스크 자치주와 카탈루냐주는 법적으로 투우를 금지
-발상지인 안달루시아에서도 투우장을 찾는 관객 감소
-심지어 일부 투우사들은 투우장을 나와 관광명소에서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고 생계

7. 투우의 몰락원인? (*교수님 노트 끄적끄적함.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지~)


-> tip : 몰락원인은 4가지임

A. 첫 번째로, 5년이나 지속된 경제위기를 들 수 있다.


-> 반박 : 투우의 인기 감소가 경제위기와 무관하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 근거로 투우는
투우협회의 재정도 건실하며 입장료가 평균 10~20유로 수준이지만, 프로축구는 40억
유로(약 6조원)의 빚더미 위에서 치르는 돈 잔치에 입장료만 50~300유로로, 프로축구는
투우보다 더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지만 지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을 보았을 때
인기 감소와 경제위기는 무관하다는 주장이 더욱 강력해진다.

B. ‘현대’와의 충돌으로 인해 몰락되었다. 오락거리가 없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 축구, 농구,


테니스와 같은 현대 스포츠가 등장하면서 투우가 그에 밀려 도태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씨름처럼, 오랜 전통이 과학적 마케팅을 앞세운 현대스포츠에 밀려 도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세대가 지날수록 투우의 인기는 하락하고 있다.

C.세 번째 원인으로 스페인과 스페인 중앙정부에 반감을 갖고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지역간의 “지역 갈등”을 들 수 있다. 우선 투우 금지 지역으로는 카나리아 제도, 바스크
자치주 일부 도시, 카탈루냐주가 있다. 물론 카나리아 제도는 원래 투우가 제대로 정착하지
않은 곳이어서 투우의 몰락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스크 자치주 일부도시,
카탈루나주는 둘 다 관광산업이 활달한 지역으로 투우산업을 활성화시키기에 제격인
지역이지만, 두 지역은 스페인 중앙정부에 반감을 갖고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 두 곳의 정치인들은 “투우가 카스티야 중심 스페인 민족주의의 상징”이라며
투우를 금지시켰다. 물론 이에 대해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위해 투우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비판이 존재하지만, 결과적으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지역에서 투우를 금지시킨
것은 투우 이미지와 투우 산업에 치명적이었고, 이러한 지역 갈등이 투우의 몰락 원인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존재한다.
D. 네 번째로, 국제 동물 권익 보호단체들의 로비와 압박이 투우의 몰락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국제 동물 권익 보호단체들은 수십 년간 투우를 야만적인 스포츠로 선전해왔기
때문이다.
->반박: “당신이 먹는 식용 소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 한 두 살 사이에 처참하게 도축
당한 것이다. 고기를 먹는 이상 투우의 잔혹성에 대해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6/4)
<축제의 특성>
1.축제는 걱정이나 속박 혹은 억압에 대한 저항을 집단적 은유로 표현하기도 한다.
(알아두자)
2. 축제에서는 권위와 질서로부터의 일탈과 전복적인 성향이 있다. (알아두자)
-> 지역 공동체를 둘러싼 불안과 억압에 대항하거나 그들 자신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한 행동 양식
3.축제의 사회적인 기능 (알아두도록)
-> 민중들이 억압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함으로써, 사회 안정망을 구축함으로써 체제를 수호하고 사회
안전을 도모함
-> 정치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축제의 의미이기 때문에 지배계층이 축제를 용인해줌
4 스페인의 경우는 종교적인 측면이 강한 축제가 많음 (잘 알아두자)
5. 현대의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정체성을 찾아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 축제가
우리를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려주는 매체로 작용할 수 있다.

<스페인의 관광 산업>에 대해 잘 알아두도록 합시다 -> 노트 끄적끄적


1.스페인의 관광산업은 산업, 비즈니스/은행, 부문 다음으로 국가 경제의 3번째로
큰 기여 할 정도로 중요하다.
2. Franco의 통치 말년에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서유럽의 북유럽 국가들의 여름
휴가지로 각광받으면서 인프라 확충 -> 1960년대와 1970년대 이후로, 스페인은
여름 휴가 시즌의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이자 스페인의 외국인 관광 산업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규모로 성장
3. 2017년에 스페인은 세게에서 두 번째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한 국가였으며,
8,200만 명의 관광객을 기록해 5년 연속 기록적인 관광객 수를 기록함
4. 스페인은 세계 경제 포럼이 2017년,2018년에 발행한 관광 경쟁력 지수에서
136개국 중 1위를 차지하며 세계관광기구는 마드리드에 본부가 있다.
5. 2018년 스페인 관광산업(PIB국내 총생산)의 경제적 기여가치는 1780억 유로로
스페인 전체 GDP의 14.7%
*PIB: 기업과 고객을 대상으로 자산관리서비스와 기업금융·IB금융 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는 특화된 금융 서비스 모델 (일단 알아놓으라고 함 pib)
6.전년대비 성장률은 +2.4%로 세계 평균 (+3.9%), 유럽평균(+3.1%)낮았으나 자국
경제의 7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스페인 관광산업의 경제적 가치는 중요한 것으로
나타남(알아둘것)
7. 스페인 관광산업은 전체 고용의 14.7%에 해당하는 280만명의 고용
8. 스페인의 내국인/외국인 관광기여도는 각각45%/55%로 이상적인 비율
9. 유럽과 전 세계 평균 해외관광기여도는 각각35%, 29%로 스페인의 경우
다른나라에 비해 해외 관광객으로부터 벌어들인 이익이 큼.
10. 비지니스 여행부문의 비중은 12%로 유럽평균인 21%보다 낮아 해당
부문에서의 개발여지가 큼.
<스페인 관광산업의 성공요인과 특징> -> 특히나 이 부분 중요/ 끄적 -> 작년 기출

1.태양과 해변
ㄱ.세계경제포럼이 평가한 ‘세계 여행 -관광산업 경쟁력’ 1위
ㄴ.연중 300일을 넘는 일조일: 스페인은 태양을 팔아 먹고 사는 나라
ㄷ.지중해와 대서양에 면한 1만 킬로미터가 넘는 긴 해성성들이 해변으로 이어져
있음
ㄹ,태양과 해변이 스페인 관광의 대표 콘셉임 -> 그 정도로 해변이 많고(why?
삼면이 바다) 태양이 발달 되어 있음
ㅁ.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는 전 지중해 지역의 특징: 튀니지, 모로코-자연환경만
보면 스페인 못지 않음- 실제로 스페인 물가 상승으로 일부 유럽 관광객이 이들
지역으로 가는 경향이 있음.
->그러나 관광산업의 성공에는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유산, 치안과 물가,
숙박과 교통 인프라, 오락과 여흥 등 관광객을 우인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결부되어있음. 앞서 설명한 튀니지, 모로코 등 보다 스페인이 더 잘 되어있음
ㅂ. 특히 북아프리카 지역은 2011년 소위 ‘아랍의 봄’으로 알려진 소요사태 이후
정치, 사회적인 불안과 알카에다와 IS등의 과격단체의 테러 위험까지 겹쳐
관광산업에 심각한 지장
ㅅ..스페인 관광객 중 80%이상은 유럽국가의 국민임 -> 특히 영국, 프랑스, 독일
국민이 약 50%를 차지함 -> 이는 재방문율이 높다는 뜻
ㅇ.관광객이 선호나는 지역 : 까딸루냐, 까나리아 제도, 바레알레스 제도 등 ‘태양과
해변’의 컨셉을 지닌 곳 ~ 전체 관광객 60% 이상이 이 3지역으로 많이 감
ㅈ,.또한 해변에서의 휴양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관광객들의 체류기일은
상대적으로 긴 편 -> 단기 체류자들이 많은 이탈리아나 프랑스보다 관광수입이
많은 이유가 됨

2. 자연과 문화유산의 연결
ㄱ.스페인은 이탈리아와 중국과 함꼐 세계에서 인류문화유산을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
ㄴ.전국에 산재해 있는 역사문화유적 중에는 ‘태양과 해변’에 연계되어 관광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장소가 많은데 이렇게 자연관광과 문화유적이
가까이 있다는 점은 다른 국가들이 보유하지 못한 큰 장점이다
ex) 남부에 세계적인 휴양지 Costa de Sol에서 차로 두시간 정도면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Granada, Al Andaluz의 수도 였던 Cordoba, 17세기 유럽 최고의 도시
Sevilla에 도달
->아랍 풍의 요소와 기독교 풍의 요소가 혼합된 곳으로 타유럽에서는 보기 어려운
이국적인 측면이 있으며 특히 알함브라 궁전은 세계 유일의 중세 이슬람 궁전임
ex) 또한 까딸루나 지방의 꼬스따 브라바에서 해수욕과 일광욕을 즐긴 후, 바로
인근에 있는 바르셀로나로 이동하여 수많은 문화 유산을 볼 수 있음
ㄷ. 싸구려 Hostal에서 고성 등 문화재급 건물을 고급 숙소로 개조한 Parador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숙박시설이 있다.
ㄹ.육지와 바다에서 건져 올린 신선한 먹거리
ㅁ.따뜻하고 친절하며 유쾌하고 쾌활한 국민성
ㅂ.밤늦게 거리를 활보해도 별 문제없는 안전한 치안 상태 (요런것들 중요하고)
ㅅ.여름철이면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긴 일조 시간
ㅇ.밤 문화 발전
-> 이런 요소들이 외국 관광객들을 유치하는데 유리한 요소된다는 걸 알아두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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