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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이란 무엇인가?

이 명칭은 머나먼 고대 그리스의 메가라(Megara) 출


신인 비자스(Byzas)에 의해 세워진 도시의 이름으로서 역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흑해와 지중해가 교차하는 해협에 세워진 이 식민도시는 오랫동안 양
바다의 무역을 중개하면서 조그만 규모를 유지했다. 이 도시의 운명이 뒤바뀐
것은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e I, 306-337)의 한 결단이 내려
졌을 때의 일이다. 로마제국의 새로운 후반생인 비잔티움 시대는 이렇게 시작되
었다.

1. 군인황제시대
서기 192년, 로마의 소위 5현제에 속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후계자 콤모두스(Commodus, 180-192)가 암살되면서 로마제국은
유력한 군인들이 서로 앞을 다투며 대권에 도전하는 혼란에 직면했다. 본디 국
가의 최고통치자로서 옛 로마황제들은 즉위식 때마다 대대적인 인준 행사를 통
하여 황제 자신의 통치를 약속하는 황제법(lex de imperio)의 갱신 의식을 치러
왔다. 로마시민들의 인준 절차를 거치면서 황제는 황제로서의 권한을 확보하게
된다. 이는 역대 로마법률의 편찬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확인된 원칙이기도 했
다.

황제는 법률을 통하여 그의 제위를 취득한다.
- 가이우스, 『법학제요』, 1권 2장 6절.

  인민과 원로원의 법률적 권위는 국가의 복리를 위해 황제에게로 이관되
었다.
- 유스티니아누스, 『법학제요』1부 17권 1장 7절.

하지만 군인들이 대권을 서로 빼앗듯이 주고받는 과정을 거치는 와중에 이런


황제법 체제는 유지될 턱이 없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군인황제의 시대는 장기간
지속되면서 로마제국의 정치적 혼란을 극대화시켰다. 정치적 정통성을 보장받을
길이 없는 군인 통치자들은 새로운 군인 실력자들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가 없었다. 그렇기에 설사 유능한 군주가 배출된다고 하더라도 그 통치가 장기
적인 유익을 낳을 길은 까마득했다.
이런 혼란에 조금 안정의 가닥이 잡히기 시작한 시점은 디오클레티아누스
(284-305)부터였다. 그는 285년, 제국을 동서의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자신이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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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 크고 중요한 제국동부를 책임지는 형태로 국가 운영방식을 전환했다. 그리고
는 방위의 효율을 위하여 다시 동서 양쪽의 정부를 둘로 나누었다. 이 조치가
단행된 293년에 이르러 로마제국은 2명의 황제(Augustus)와 그 아래 각각의 부
황제(Caesar)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체제를 4두정(Tetrarchy)이라고 부른다. 그
러나 각자의 실력으로 할거하기 쉬운 느슨한 체제는 오로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같이 도전받을 여지가 없는 확고한 통치자 아래에서나 유지될 수 있었다. 이외
에도 국가의 필요 경비를 체계적으로 조달하게 한 세제개혁과 현실적인 군제개
혁을 통하여 3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그나마 당면한 위기는 돌파한 것으로 보였
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305년, 돌연 퇴임하자 안정된 체제가 아니었던 국
내정치의 균형은 무너졌다. 네 명의 황제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결국
다시 무한정한 내전으로 빠져갔다. 그 중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은 서부제국의
부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는 312년에 로마를 점령하고 서부제국의 유일
한 황제로 거듭났으며 그 다음해인 313년에는 동방황제인 리키니우스(Licinius)
와의 합의 아래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
유를 인정했다. 그리고 316년부터는 다시 동방제국과의 전쟁에 돌입, 324년 최
종적으로 로마제국을 재통합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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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방으로 옮겨지는 중심
324년 로마제국은 재통합되었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옛 수도 로마로 돌아갈 생
각이 없었다. 군인통치기가 시작되면서 황제법이 무너졌고, 황제의 권력에서 시
민 인준의 비중이 사라진 이후 수도 로마의 입지는 크게 약해져 있던 상태였다.
4두정 시절에도 이미 각지에서 분립한 황제들이 메디올라눔(Mediolanum), 니코
메디아(Nicomedia) 등 지역의 여러 요충지에 자신들의 거점을 정하고 있던 터
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던 해역 근교에 위치한
비잔티움의 요충지적 입지를 접하며 이 도시를 자신의 새로운 수도로서 결정하
였다.
330년 5월 11일, 약 6년의 공사 끝에 비잔티움 시는 새 건설을 마무리하고
새 로마(roma nova)로서 봉헌식을 거치며 새 도읍이 되었다. 새 로마는 수도로
서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옛 로마와 마찬가지로 원로원이 설치되었다. 특기할만
한 점은 옛 로마와 달리 새 로마에서는 시내 중심부에 여러 교회당이 설치되었
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와 함께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조금씩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그리스도
교 후원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하자 다시 제국은 그의 세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337-340),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 그리고 콘스탄스 1세(337-350)에게
분봉되었다. 그러나 이 형제들 간에도 불화가 존재했고 군대는 강력한 콘스탄티
누스 1세가 부재하게 되자 수시로 여러 실력자들을 제위로 올렸다. 이러한 구조
적 불안정은 4세기를 넘어 5세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361년, 군대의 추대와 콘스탄티우스 2세의 급사로 인해 통합제국의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Ioulianus, 361-363)는 콘스탄티누스 1세 이래로 점점 빠르게 진행
되고 있는 국가적 그리스도교화를 경계하며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종래의 그리
스로마 신앙을 장려했다. 하지만 이미 도시빈민들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세력을
크게 강화하고 있던 그리스도교에 비해서 옛 그리스로마 신앙은 전통의례 이상
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율리아누스는 열성적으로 제사를 거행하거나 그
리스로마 신앙의 체계화를 꾀했으나 이에 대한 사회적 반응이 전혀 없다시피 하
여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경험으로 그가 페르시아 원정 도중 죽은 이
후로는 옛 전통종교를 되살리고자 하는 로마황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
다.
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족의 변경분쟁도 4세기 말에 이르러 심각한 문제로 대
두했다. 훈족이 동유럽 지방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여 고트족을 압박하자 이 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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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로마국경 안으로 들어와 보호를 요청해왔다. 로마정부는 이러한 요청을 보통
은 물리치기보다는 새로운 인적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간주하곤 했
다. 이 때도 마찬가지여서 당시 황제였던 발렌스(Balens, 374-378)는 그들의 수
용을 지시했지만 지방관과 고트족 사이에 불거진 분쟁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2년간 전쟁이 이어지다가 378년, 아드리아노플(Adrianople)에서 벌어진 전투로
발렌스 황제를 비롯한 대병력이 궤멸되었다.
이 위기를 해결한 것은 서방황제 그라티아누스(Gratianus, 374-383)가 임명한
새 동방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79-395)였다. 그는 빠르게 고트
족 문제를 평화롭게 마무리했으며 상시 불안정한 동방전선에도 관심을 돌렸다.
387년 아르메니아 분할조약의 완료를 통해 페르시아와도 분쟁요소를 줄임으로
서 테오도시우스는 국내안정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380년 칙령을 통해 그리
스도교의 국교화를 자신의 뜻으로 굳혔고 391년에는 실제로 국교로 확정했다.
경제적으론 감세정책을 실시하고 가격통제를 폐지하며 시장의 기능을 좀 더 의
지하여 경제정상화에 임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394년에 이르러 서부제국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 제국
을 통합시켰지만 395년 1월, 후속작업을 처리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다시금 제
국은 그의 두 어린 아들인 아르카디우스(Arcadius, 395-408)와 호노리우스
(Honorius, 395-423)가 각기 동서의 양 지역을 맡아 다스리게 되었다. 그렇지
만 이들은 어렸으며 예전처럼 시민의 절차적 지지에 정통성의 근거를 두지 못하
였기 때문에 유력한 지휘관인 스틸리코(Stilicho)의 전적인 옹위를 받아야 했다.
이후 서방제국은 연이은 이민족들의 침략과 내부의 권신, 유력 군인들의 집권
이 교차하는 가운데 혼란이 이어지며 점점 수습이 어려워져갔다. 동방제국은 주
도적으로 테오도시우스 법전(lex Theodosianus)을 편찬하는 등 서방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곳 역시 450년대 이후로는 이민족 출신 동방군
총사령관 아스파르(Aspar)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게르만 족의 일파인
아스파르는 자신의 부하인 레오(Leo)를 황제로 추천했다. 원로원의 의견까지 꺾
으며 추대된 레오 1세(457-474)는 자신에게 부족한 정통성의 보충을 위하여 콘
스탄티노플 대주교 아나톨리우스 1세(Anatolius I)가 집전하는 대관식을 치렀고
아스파르를 제거하며 군인의 영향력을 줄여나갔다.
레오 1세가 474년 죽고 그의 친손자인 레오 2세도 어린 나이에 곧 사망하자
다음 황제는 레오 1세의 이민족 사위이자 레오 2세의 아버지인 제논(Zenon)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로마제국의 주류 종파와 신조가 다른 단성론을 신봉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시민권을 취득하지 얼마 되지 않은 외래종족의 부족장 출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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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연달아 격렬한 내전이 발생하였으며 그 대표자들도 왕실을 중심으로 많이
나왔다. 그러는 사이 476년, 서방제국은 게르만족 출신의 군인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붕괴되었다. 오도아케르는 서방황제의 휘장을 제논에게 반환하였고 자신을
귀족으로 자처하였으나 제논은 동고트족에게 이탈리아를 내주는 방식으로 사안
을 정리했다.

491년 4월 9일 제논이 사망하였다. 이 시점은 로마제국에서 상당히 중요한 때


이기도 하다. 제논의 사망소식을 접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일제히 대경기장
에 집결하였으며 제논의 아내인 아리아드네(Ariadne)에게 정통 그리스도교인이
자 로마시민을 후계자로 결정할 것을 요구하여 수용시켰다. 아리아드네는 원로
원 및 총대주교와의 논의 끝에 관료 출신의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를 차기
후계자로 낙점했다. 이후 아나스타시우스는 대경기장에서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
데 갈채로서 만장일치의 상징적 승인 절차를 밟으며 아나스타시우스 1세
(491-518)로서 제위에 오른다.
이러한 아나스타시우스의 즉위 일화는 하나의 상징이자 교차하는 두 시대의
경계점으로 작용했다. 콤모두스 사후 주요 황제들은 정변을 통해 집권하는 군인
인 경우가 다반사였고 그게 아니라면 이미 집권해 있는 군인 출신 황제의 지명
을 받은 동일 가문 출신의 인물 또는 마찬가지 군인 출신의 인물이었다. 디오클
레티아누스가 그랬고 콘스탄티누스도 마찬가지였으며 테오도시우스도 다르지 않
았다. 개인의 실력과 카리스마에 의지해 이루어진 찬탈과 집권은 그 후손의 불
안한 혈연에 의해서 지탱되기에는 불안정하였다. 레오 1세는 이런 문제점을 인
식하고 당시 점점 공고해지고 있던 교회와 신앙의 힘을 빌려 정통성을 확립하기
를 바랐으나 역시 이 조치에도 한계는 있었다.
이러한 군인황제시대의 불안정한 체제는 491년 제논에서 아나스타시우스로 정
권이 옮겨질 때 들고 일어나 변혁을 요구한 콘스탄티노플 시민에 의하여 비로소
사라지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시작하여 5현제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즉
위와 관련되어 황제법이라는 계약이 갱신되었던 옛 전통은 이제 대경기장에서
치러지는 대중의 인준이라는 새 전통으로서 되살아나게 되었다. 시민을 대표하
여, 시민의 공동체인 국가(politeia-res publica)를 책임진다는 옛 의미로서의 황
제 개념이 다시금 제국 체제 내에 확립되는 순간이었다. 비잔티움 시대 로마제
국(Byzantine-Roman)이라는 틀이 형성되는 분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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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대의 여명
아나스타시우스 1세(491-518)가 단성론과 관련된 종교분쟁을 제외하면 평화
로운 시기를 향유한 이후 로마제국에는 상당기간 번영이 찾아왔다. 518년에는
노년의 근위대장인 유스티누스(Ioustinus)가 황제로 선출되어 통치를 하다가 527
년에 자신의 조카인 유스티니아누스(Ioustinianus)에게 넘겨주고 죽었다. 이가 바
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Ioustinianus I, 527-565)다.
오늘날 유스티니아누스는 주로 그 자신의 야심찬 서방 원정으로 유명하다. 하
지만 그의 치세에는 오랫동안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법률들이 드디어 법학자들
의 제대로 된 체계화 작업을 통해 합리적으로 정리된 일을 빼놓을 수 없다. 바
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다. 이후의 모든 로마법은 바로 이 유스티니아누스 법
전을 근간으로 하며 수정과 첨가, 삭제가 가해진 채로 1천 년 동안 사용되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이래로 유지되고 있는 이름뿐인 관직들을 대거 제거했다. 전
통 때문에 오랫동안 이름을 유지해오고 있던 집정관(consul)직 역시 540년을 기
하여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고대 후기(Late Antiquity)와 중세(Medieval Era)의 경계선에 있던 고대 사람
이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이제 평화를 통해 축적된 국력을 동원하여 로마세계의
버려진 옛 서방을 수복하려 했다. 그 작업은 처음에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
다. 첫 단계였던 북아프리카의 반달왕국은 분열과 공작 등을 통해 손쉽게 제압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전역은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후반기까지 지속되
며 극렬한 소모전으로 치달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540년과 541년을 시작으로 지중해 지역을 강타하기 시작한
페스트로 인한 극적인 변화 때문이었다. 541년 콘스탄티노플만 해도 절정이던
시점에 하루 1만 6천 명의 시민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서기 165
년에서 168년 사이에 로마제국을 엄습하여 최소 수백만 명을 앗아간 안토니우
스 역병 이후 일어난 최대의 위기였다. 이로 인해 인력, 물력 모두가 급속도로
소진되었고 한창 지속되고 있던 이탈리아 전역 역시 장기화되었다. 더군다나 줄
어든 조세수입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세할당량이 늘어남에 따라 특히 이탈리아
지역은 황폐화되었다. 550년대에 이탈리아 수복전쟁은 끝났지만 그 와중에 로마
인들의 힘은 극도로 취약해졌다. 결국 568년 이후 북쪽의 롬바르드(Rombard)
족이 대거 남하하였을 때 로마 지배하의 이탈리아는 크게 위축되었다. 제국이
사방을 보호할 수 있는 힘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면서 고대적인 세계관에 종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점차 고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그리스도교화의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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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은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었다. 이미 391년부터는 그리스도교인만이 공직
에 진출할 수 있었고 이 무렵에 들면 종교적인 주제가 심각한 논쟁을 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 내적인 체화가 진행된 상태였다. 고대 철학의 중심지였던
플라톤의 아카데미아(Academia)도 이 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곳의 종교적 불순함을 의심하여 529년에 이 유서 깊은 학원을 폐지했다. 그러
나 이러한 조치가 곧 학문 전반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스티니아누스는 반지성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는 가운데 법학도를 위한 교재로 학설휘찬(Institutiones)을 펴내었
고 신학토론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나 각 법학
교 교수들을 포함해서 많은 학자들 역시 새 시대에도 적응하며 후학 양성에 봉
사하고 있었다. 시대가 달라지고 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점 역시 많았다. 요
컨대 이 즈음에는 학문에 종사하는 학계 자체가 그리스도교의 신조를 받아들인,
전환이 일어나 있었던 셈이다.
565년 유스티니아누스가 사망한 뒤 원로원과 대중의 양해 아래 그의 조카였
던 유스티누스 2세(Ioustinus II, 565-578)나 관료 출신의 티베리우스 2세
(Tiberius II, 574-582)가 정국을 이끌었다. 동쪽에서나 서쪽에서나 대단한 도전
은 없어보였다. 게르만족과의 충돌은 언제나 있었던 일이고 동방에서 일어나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좀 더 심각한 도전 역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일에 불과해
보였다. 하지만 지속적인 페스트는 국세를 극도로 위축되게 하였다. 더군다나
북쪽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말년부터 시작된 슬라브인들의 대거 남하로 다
뉴브 강을 기점으로 삼은 국경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하여 합리적으로 설계된 조세제도 역시 한계에 부딪히
기 시작했다. 국가의 필요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필요 액수를 정한 뒤 각 가
정의 재무 상황에 맞추어 조세액을 내는 것이 이 체제의 핵심이었다. 그 다음에
도시나 읍락 별로 세금을 총합하여 각 단위별로 결산케 함으로서 재정이 운용되
었다. 문제는 국가 경비는 유지되어야 하는데 세입원이 줄어든다는 점이었다.
이에 따라 남아있는 구성원들이 부담하는 조세액은 갈수록 증가할 수밖에 없었
다.
582년에 유능한 장군으로서 황제에 오른 마우리키우스(Mauricius, 582-602)
는 사방의 적이 날로 늘어나고 조세 수입은 날마다 줄어드는 상황에 대응해야
했다. 최대한의 절약을 부르짖으며 마우리키우스는 통상적으로 수도에서 치러지
는 전차경주 등의 상징적 유흥의식까지 축소하면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내분에
개입, 전선을 안정시키는데 분주했다. 그러나 그에 따라 상대적으로 대우가 열
악해진 군대와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대중여론은 그에 대하여 등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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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게 되었다. 602년, 다뉴브 강 전선의 병력들에게 복귀를 허락하지 않고 이민
족의 땅에서 겨울을 보내도록 한 그의 조치는 결국 군인들의 불만을 폭발시켰으
며 그가 폐위, 살해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602년에 군대의 추대를 받아 오
른 포카스(Phokas, 602-610)는 막연하게 국내 불만을 돌리기 위해 유대인을 공
격하고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숙청에 몰두했다. 결국 국내 유대인들의 대규모
반란이 발생했으며 정치적인 무능력과 페르시아의 거침없는 진격이 겹쳐짐에 따
라 국내의 통제력이 사실상 붕괴로 들어갔다.
카르타고 총독으로서 임관하고 있던 헤라클리우스(Heracleus)와 그 아들 헤라
클리우스는 질서를 수복한다는 명분으로 카르타고 군대를 거느리고 콘스탄티노
플로 진군했다. 610년, 아들 헤라클리우스(610-641)는 포카스를 처형한 뒤 황
제에 올랐다. 국내의 질서는 그럼에도 회복이 멀어보였다. 오히려 611년부터는
사산조의 군대가 개입하여 시리아, 팔레스타인 그리고 더 나아가 소아시아와 이
집트를 큰 어려움 없이 제압해버렸다. 617년이 되자 페르시아의 군대는 콘스탄
티노플 코앞에까지 진출하며 많은 도시들을 파괴해버렸다. 이런 상황은 당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라클리오스(이 시점부터 그리스어가 표준어가 되어 헤라클리우스를
이라클리오스로 표기)는 지연전을 벌이며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는데 성공하였으
며 이를 기반으로 반격을 준비하고자 했다. 다만 슬라브족을 상대로는 서부지역
의 군대가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무력한 상태가 되었다. 결국 카르
타고로 다시 천도하고자 추진하였으나 콘스탄티노플 시민과 교회의 강력한 반대
를 이기지 못하고 남게 되었다. 대신 622년부터 626년에 걸쳐 4년간 이라클리
오스는 페르시아 국내 깊숙이 진격하는 등 전선에서의 활동에 들어갔다. 626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대패를 당했고 그 이후부터 서서히 국내의 불안정한
정치질서가 맞물려 무너지기 시작한 사산조는 627년 자국 중심부와 가까운 니
네베에서까지 대패를 당했다. 결국 628년, 사산조는 기존 점령지를 반환하고 평
화조약을 체결하는데 동의했다.
628년부터 이슬람 제국이 발흥하기 직전의 짧은 시간을 보내며 이라클리오스
는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분열된 여론을 가라앉히기 위한 방법으로 종
교적 타협까지 동원하였으며 행정조직의 재편에도 힘썼다. 그러나 632년부터는
이슬람 제국이 급격히 팽창하며 불패의 신화를 이룩했다. 이라클리오스는 부족
한 국내의 힘을 감안하여 다시금 지연전을 벌이며 후퇴를 시작했다. 한 시대가
바야흐로 지나가고 있었다. 시대의 땅거미가 내리깔리고 있던 636년에 치러진
야르무트 전투는 확실히 로마와 페르시아가 양분하던 고대의 질서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탄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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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생존 투쟁
이집트가 이슬람 제국의 위협에 직면하였다는 보고를 받으며 이라클리오스는
641년 2월 11일,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존망의 위협은 이제부터 시작에 불과했
다. 642년에 이집트가 함락되고 643년에 로마 해군이 잠시 알렉산드리아를 수
복하기도 했지만 644년에는 최종적으로 이슬람 제국이 주인이 되었다. 이 와중
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최종적으로 붕괴되고 불타버렸다. 이 도서관의 운명
은 전란으로 끝나버린 고대문명의 한 상징이 되었다.
잠깐 동안 후계자 형제들의 권력암투가 있은 뒤 641년 9월부터 원로원의 섭
정을 받으며 막내 콘스탄스 2세(Constans II, 641-668)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콘스탄스 2세는 이슬람 제국의 거침없는 진격을 결코 저지하지는 못했다. 다만
변함없이 야전군을 보존하는 정책이 이어졌으며 동방에서 후퇴한 군대를 소아시
아 곳곳의 요충지에 정착시키는 군관구(Theme) 조직을 체계화시키기 시작했다.
교회는 사회 내부의 분위기도 단속하기 위해 부친 이라클리오스 때 도입된 단의
론 및 단성론을 정죄하였다.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대주교가 항의해왔지만 당장
중요한 것은 위기에 처해있고 남아있는 영토인 소아시아와 유럽의 종교문제였
다.
최대 위기는 콘스탄티노스 4세(668-685)의 시대에 들어와서 닥쳐왔다. 서기
674년, 이슬람 제국의 대함대가 해상에서부터 수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시리아 출신의 기술자인 칼리니코스(Kalinikos)가 개발한 그리스의 불을
비롯한 신무기와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튼튼한 방위에 힘입어 적을 막아내기에
이르렀다. 이 승리는 서전에 불과하였으나 그 상징은 사뭇 작지 않았다. 그리스
도교 세계를 적으로부터 방어하였다는 관념은 하나의 의식으로도 남아 잔존하였
다. 더 나아가 이후 매년 이 전투가 있었던 즈음에는 당시 총대주교 요안니스 5
세(669-675)가 작곡 및 작사한 노래와 함께 전례가 집전되었다. 그리스도교 제
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억의 전통’이 만들어진 것이다.
전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무슬림들과의 교류 역시 이어졌다. 686년, 우
마이야 제국과의 휴전기 콘스탄티노플 시청 앞의 거리에 세워진 무함마드 모스
크는 그런 교류의 산 증거였다. 상업교류가 이어지고 양 지역을 오가는 이들이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간첩들도 증가했다. 이를 적절하게 통제하기 위해 무역이
제한되기도 했고 이를 색출하기 위한 방첩활동도 치열해졌다. 계속되는 전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영위하여야 할 일상생활의 모순적인 조화. 그것은 폐허
가 된 고대의 터 위에 덩그러니 놓인 중세 사람들이 적응해야 했던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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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라클리오스 왕조(610-711)의 후반기에는 기존 조세제도의 한계가 더
욱이 역력해졌다. 급기야 징세관과 납세자의 증언이 서로 달라 재무성 장관이
직접 양자를 고문하고 대질심문해야만 횡령의 주체를 파악할 수 있을 지경이 되
어가고 있었다. 기존과 달리 더 이상 화폐로는 세금을 낼 수 없을 정도가 되어
현물로 납세하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만큼 도시의 규모는 대폭 감소하였으며
이에 따라 시장의 기능은 약해지고 자급자족적인 농촌의 역할이 증가했다. 반면
사람들이 대거 감소함에 따라 고대 내내 위축되었던 삼림은 다시 늘어났다.
관료제, 화폐유통, 도시규모 등의 지표들이 일제히 악화됨에 따라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은 부분은 교육 부문이었다. 전쟁이 급해짐에 따라 콘스탄티노플 소재
대학의 운영지원은 중단되었으며 4세기 이래로 현재진행형으로 여러 도시에 개
설되어 있던 병원들 역시 기능이 정지되거나 추가 개설이 정지되었다. 도시의
기본적인 기능들이 정지되는 현상은 당시 로마사회가 맞닥뜨리고 있었던 심각함
을 피부로 느끼게 했을 요인들이다. 특히 교육의 중단으로 인한 문해 능력의 치
명적인 악화는 최소한의 행정을 위한 요원 양성에도 어려움을 초래하였다. 기본
적인 글쓰기가 가능한 인원조차 최저점의 시점에서는 제국 전체를 통틀어 3천
명 정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 정도다.
이라클리오스 왕실의 마지막 군주이자 이라클리오스의 증손자인 유스티니아노
스 2세(Ioustinianos II, 685-695, 705-711)의 시기에 들어 로마 정부는 파탄이
난 고대 말기의 제국을 인구적으로 재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스와 펠로폰
네소스를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는 슬라브족의 남하가 두드러졌다. 별 도리가 없
는 정부가 지방을 방치하자 원주민들이 도시와 요해처로 들어가 장기 농성에 들
어가 있는 한편, 틈틈이 군대는 슬라브인들을 포로로 잡아 소아시아에 정착시키
며 재건을 도모하였다. 농촌에서는 위기에 몰린 농민들이 더욱 더 서로에 협력
하며 공동체를 구성하고 자위, 자족하는 공고한 기반을 만들었으며 정부는 의도
적으로 이들에게 행정의 일부를 위임하거나 통제를 느슨하게 적용하면서 여민휴
식을 추구했다. 그래서 도심지와 중앙정치계에서 이 시기에 발생한 격변에도 불
구하고 상대적으로 주변부는 심한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생존투쟁의 장은 그러나 머지않아 두 번째로 다시 찾아왔다. 폭압적으로 변해
가는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대중의 저주를 받는 가운데 유력한 장군인 레온티
오스(Leontios, 695-698)에 의해 폐위되고 코를 베인 뒤 유배된 것이다. 이후
비교적 이전에 비해서 짧기는 하지만 20여년에 걸쳐 군인황제시대를 방불케 하
는 또다른 혼란이 일어났다. 유력 장군이 각자 떨쳐 일어났으며 급기야 나중에
는 소아시아에 정착한 옛 동방정규군의 후신인 수도권 군관구 병사들이 들고 일
어날 때마다 황제가 뒤바뀌는 지경에 이르렀다. 6명의 황제가 즉위하거나 복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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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가 폐위되었으며 4명이 결국 처형되었다. 마지막에 그 자리를 차지한 것
은 옵시키온 관구 병사들에 의해 강제로 옹립된 평범한 학자 출신 테오도시오스
3세(715-717)였다.
로마제국이 이렇듯 혼선에 빠져 있는 한편 우마이야 제국은 두 번째의 콘스탄
티노플 공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때 소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아나
톨리콘 군관구의 지휘관인 이사우리아 사람 레온(Leon the Isaurian, 685~741)
은 이슬람 군대의 지휘관인 마슬라마(Maslama)나 아르메니아콘 군관구 지휘관
아르타바스도스(Artabasdos, ?~743)와 내통한 끝에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무력
한 테오도시오스는 항복하고 퇴진하였고 레온이 자리를 취하니 그가 바로 레온
3세(Leon III, 717-741)였다. 마슬라마 등 이슬람 군대 지휘부는 레온 3세와의
내통을 기대했었으나 황제가 된 그는 이제 원래대로 마음을 바꾸어 그들을 적대
하였다.
680년대의 우마이야 제국은 내전에 빠져 있었고 이에 따라 로마제국과 임시
로 휴전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690년대로 들어오면서 내전은 종식되었고 유스
티니아노스 2세의 도발로 인해 692년부터 양국 사이의 전쟁은 재개되었다. 로마
제국은 여기서 연전연패하여 아르메니아, 코카서스 등지를 상실하였고 7-8세기
전환기의 혼란에 빠져 방위상태도 부실해졌다. 우마이야 제국은 이제 전쟁을 종
결하기 위해 로마군 전체 병력을 넘어서는 대병력을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압박했다. 그러나 717년 여름부터 시작된 포위전은 로마군의 저항에 부딪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718년 초겨울을 지나면서 물자부족과 악랄한 겨울에
맞닥뜨려 우마이야 군대는 치명타를 입었다. 우마이야 본국에서는 증원을 파견
했으나 해상에서는 로마 해군에 저지당했고 육로에서도 각개격파를 당하기 일쑤
였다. 마침내 원정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우마이야군은 퇴각하였으며 더 이상 콘
스탄티노플을 공격하지 못하게 되었다.
소아시아에서는 이후 740년까지 잦은 빈도로 우마이야조의 침탈이 계속되었
다. 후반기 레온 3세의 치세에는 로마 정부 역시 소아시아 방위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740년, 아크리논(Acroinon)에서 로마군은 2만 명의 우마이야 군과 격돌,
13,200명을 살해하고 마침내 승기를 잡았다. 지속적으로 다른 전선에서 타격을
받은 것과 함께 이러한 충격까지 받은 우마이야 제국은 결국 아바스 가문에게
찬탈 당했다. 이제 소아시아는 간간이 일어나는 침략과 약탈을 제외하면 전반적
으로 안정상태에 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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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3세의 시대에는 또 다른 변화도 있었다. 먼저 전반적으로 학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과 관련한 조치가 있었다. 법학을 능통하게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들었던 까닭에 설사 법관이라고 해도 법률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이 당시에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 대응하기
위하여 로마인들은 가장 흔하게 쓰이는 법조문을 따로 발췌하여 간단한 안내서
형식의 책자를 만들어 배부했다. 이를 ‘발췌’(Ecloga) 법전이라고 한다. ‘발췌’
법전은 이후 계속해서 증보, 수정되어 ‘발췌 증보’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발췌
전용 증보’ 법전으로 개수되며 활용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원래 로마법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조항들도 추가되었다. 가령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전쟁포로가
되어 잡혀간 사람들의 시민권 복구와 그 환속에 대한 여러 규정이 이 시기에
처음으로 로마 법률에 모습을 드러냈다.
700년대에 들어와서는 사회도 전반적으로 저점을 찍고 다시 활기를 찾기 시
작했다. 페스트는 아직 때때로 발생하곤 했지만 서서히 그 위력이 꺾이고 있었
다. 이에 맞추어 711년부터는 납세대상자들의 재무제표(Financial statements)를
거두어 납세능력을 파악하고 이에 맞추어 국가 1년 경비를 책정하는 새로운 재
정제도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는 재정학적 차원에서 양출제입적 체제에서 양
입제출적 체제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필요시에 제때 대응하지 못할 가능성은 있
지만 안정적인 국가운영과 시민의 조세부담을 적절히 조정할 수 있었다. 변화하
는 제도에 맞추어 대대적인 인구조사 역시 8세기 전반기에 실행되었다. 바야흐
로 조금씩 로마도 위기로부터 정상으로 환원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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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체성 투쟁
군사적으로 일진일퇴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던 726년, 레온 3세는 돌연히 성상
숭배금지령을 반포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국내외에서 상당한 파장을 불러왔으며
100년을 가볍게 뛰어넘는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크고 작은 분열을 초래했다.
이 문제는 단순히 레온의 신념과 관련이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오히려 레온 그
자신은 아주 노회하게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편이었다.
문제는 전쟁의 와중에 동쪽으로부터 몰려온 피난민들이 상대적으로 이슬람의 우
상숭배론에 친숙하였으며 이에 따라 종래 수도권과 그 주변부에서 신앙의 매개
체로 이용되던 성화상 혹은 성상을 중대한 오류로서 제기하고 나섰다.
정통 그리스도교회 역시 우상에 대한 원칙에 있어서는 원론적으로 성상파괴파
와 동일하였으나 과연 성화상을 우상으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입장이 달랐
다. 그러나 동방군대와 피난민들의 분노가 너무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정부로서
는 일단 이를 수용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황궁 정문인 칼케 대문의 모자이
크화에 대한 공격을 이유로 먼저 정부는 이 모자이크화를 철거하고 반응을 살폈
다. 그 뒤 공식적으로 칙령을 내려 성상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교회와 수도사를 기반으로 비교적 서쪽에 기반을 둔 사람들은 이 조치에 강력
하게 반발했다. 바다 건너 교황청 역시 이런 조치에 반발했다. 그러나 전반적으
로는 레온 3세의 카리스마적 지도력과 또한 기존 성화상 신앙에서 조금씩 나타
나고 있던 성화상 자체에 대한 우상숭배적 측면에 대한 자성의 차원에서 성상파
괴령에 대한 동조가 상당했다. 이후 788년까지 성상파괴는 완급을 달리하면서
지속되었다. 레온 3세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노스 5세(741-775)는 더욱 강경한
성상파괴를 밀어붙였다. 많은 문화재들이 우상숭배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파괴되
었으며 모자이크들도 대대적으로 회칠을 당했다. 이런 조치에 불복하는 이는 주
교와 수도사를 막론하고 거친 형벌을 당하거나 유폐되기도 했다.
내적인 소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콘스탄티노스 5세의 시대에는 북쪽
에서 밀고 내려오는 불가르 유목민들과 10년에 걸친 전쟁이 이어졌다. 콘스탄티
노스는 압도적인 공격으로 불가르족을 없애버리려고까지 했으나 결국 오랜 전쟁
끝에 불가르족의 정착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건강까지 악화된 끝에
콘스탄티노스 5세는 죽었으며 레온 4세(775-780)의 짧은 통치를 거쳐 레온 4세
의 아내인 이리니(Irene, 780-802) 황제가 섭정하는 가운데 콘스탄티노스 6세
(780-797)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사우리아 왕조(717-802)의 말엽에 들어서 나
타나기 시작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서서히 성화상공경파가 성상파괴파와 대등한
힘을 가지고 대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이리니는 그러한 조류의 대표자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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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787년, 이리니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잠시나마 성상파괴를 공식적으로 중지
시키는 조치를 공의회를 통해 끌어냈다. 반면 그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는 전통
적인 성상파괴신앙을 통해 남아있는 동부군과 동부지역 시민들의 여론을 대표했
다. 한동안 정치에서 물러나야 했던 이리니는 790년대에 점차 다시 정권을 잠식
하였다. 반면 콘스탄티노스 6세는 대중여론으로부터 외면당하는 행동으로 서서
히 고립되어갔다. 결국 797년 이리니는 콘스탄티노스 6세를 폐하고 눈을 멀게
했다.

800년경 유럽에서는 모친이 아들을 죽이는 외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특히


서로마 궁정이 와해된 이후 끊임없이 영향력을 확대해가던 프랑크 왕국에서 주
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바로 교황 레오 3세(795-816)가 프랑크왕 카롤루스
(768-814)에게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씌워준 것이었다. 그 연원은 상당한 기간
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미 8세기에 들어오면서 동방제국과 교황청 사이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지고 있었다. 성상파괴령의 문제에서부터 시작된 갈등은 콘
스탄티노스 5세의 시대에 이르러 급기야 라벤나 총독이 로마 교황을 체포하려
고 몇 번이나 시도했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거기에 보다 시급한 우마이야
제국과의 전선에 집중하느라 로마 정부가 동부에 집중하고 있었던 까닭으로 방
치되어 있던 이탈리아 방면은 롬바르드족과 프랑크족이 급속도로 세를 불리고
있었고 바다건너 우마이야 군대의 침입도 염려해야 했다. 교황청은 자연스럽게
자체의 방위를 위해서라도 프랑크 왕국과 결연하는 선택을 고려하게 되었다. 프
랑크 왕국이 일찍부터 동고트나 다른 종족들과 달리 아리우스파가 아닌 정통신
앙을 선택하였던 점도 하나의 긍정적인 고려를 가능케 했던 요인이었을 것이다.
카롤루스 대제는 9세기로 접어드는 시점까지 대대적인 동진을 실시하여 오늘
날의 독일, 모라비아는 물론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인근까지 영향력을 행사하
게 되었다. 또한 남쪽으로도 피레네 산맥을 중심으로 남쪽의 이슬람 군대에 대
한 장벽을 형성하였다. 이렇듯 서유럽에서 프랑크 왕국은 단연코 패자를 자처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여기서 ‘로마’라는 이름이 가지는 두 가지의 의미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먼저 로마제국이 실재하는 특정 국가라는 차원에서는 콘스탄티노플에 위치한 국
가를 의미한다. 이런 경우의 ‘로마적 정통성’이라고 함은 순전히 콘스탄티노플의
동방제국만이 보유하는 특성이 된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권인 유럽에
서 또 하나의 다른 함의를 가졌다. 그것은 바로 유럽의 질서를 주도하는 패자로
서의 추상적인 개념이다. 이 경우에는 해당 개념이 어떤 고정적인 국가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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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전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 한정
으로 패권국으로서의 로마제국의 지위가 이전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던 셈이다.
이는 곧 동방제국으로부터 로마의 이름을 빼앗는 일이 아니라 서유럽의 패자를
상징하는 서로마의 지위를 카롤루스에게 준다는 성격의 행동이 된다. 그리고 그
것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용된 현실적 논지가 콘스탄티노스 6세가 죽었으나
그 뒤를 이은 남성 혈육이 없다는, 살리카 법의 조항일 뿐이었다.
실제로 교황의 대관식을 받은 이후 카롤루스는 지속적으로 콘스탄티노플에 대
사를 파견하여 자신을 로마인의 황제(imperator romanorum)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리니 단독 치세(797-802)에는 이리니와의 결혼까지 제안하였다.
그러자 이리니의 통치 실패와 카롤루스와의 결혼으로 인한 심각한 문제 대두를
염려한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은 802년 정변을 일으켜 이리니를 폐위, 유배시켰
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재무성 장관 출신의 니키포로스 1세(Nikephoros I,
802-811) 역시 프랑크 제국과 갈등을 벌이면서도 타협을 계속 추구했다. 806년
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카롤루스의 군대가 달마티아와 베네치아를 공격하기도 했
다. 어찌되었든 810년 늦가을부터 양국은 협상에 들어갔다. 결국 815년 정식으
로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크 제국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그 속주, 이스트리아 연
안의 도시들(오늘날 이탈리아 동북부)과 달마티아 해안(오늘날 크로아티아 해안)
의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였다. 그 대신 로마제국은 프랑크 제국을 승인하고 공
식 문서에서 황제를 표기하는 것을 허용했다.
815년에 공인된 이 질서는 소위 니키포로스의 평화(pax Nikephoroi)로 불린
다. 이를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유럽에 두 개의 로마제국이 공존
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서 중세 유럽의 정치질서가 그 기본적인 맥락
을 만들어내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별개로 동방의 로마제국은 자신의 북부 경계 안에서 세력을 강화하고
있는 불가르인들과의 끝없는 전쟁을 이어나갔다. 니키포로스 1세는 콘스탄티노
스 5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슬라브인 포로들을 아나톨리아에 지속적으로 사민시
키면서 809년에는 불가리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811년 7
월 24일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군은 불가르군의 매복에 걸려들어 대패하였으며
니키포로스 본인도 전사하였다.
811년부터 820년까지의 짧은 시간동안 로마인의 제국에서는 다시 정변이 연
속으로 이어졌다. 레온 5세(Leon V, 813-820)는 불가르와의 전쟁을 계속 이어
가야 했으나 불가르 칸이었던 크룸(Krum, 803-814)이 죽자 곧 평화를 되찾았
다. 프랑크 제국과도 815년부터는 공식적인 평화관계를 이룩하였고 니키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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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 시대 내내 싸움이 이어졌던 아바스 제국과의 전쟁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
다.
레온 5세는 또한 787년부터 계속되어온 성화상공경 신조를 다시 뒤집어엎었
다. 다만 그는 콘스탄티노스 5세처럼 강경하고 철저한 성상파괴를 주장한 인물
은 아니었다. 전쟁이 잠잠해지고 성상파괴 신념이 강한 동방군대의 이반을 염려
하였기에 이들을 달래기 위하여 성상파괴를 입안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주 교
묘한 방식으로 정부는 성상파괴령을 발동시켰으며 대신 공공장소에서의 문제가
아닌 한 성상파괴령을 집요하게 강요하거나 잔인한 처벌을 가하지 않았다.
820년 12월 성탄절에 레온 5세가 친구인 아모리아 사람 미하일(Michael)과의
갈등 끝에 살해당하고 미하일 2세(Michael II, 820-829)가 제위에 올랐지만 기
본적인 정책 논조는 레온 5세와 다를 것이 없었다. 슬라브인 토마스(Thomas)라
는 군장성의 대규모 반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이 틈을 탄 사방의 침략으로
크레타(Crete)와 시칠리아(Sicily)에 무슬림 해적들이 판을 치는 피해가 잇따랐으
므로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제2차 성상파괴령은 이 시기에 들어 많이
잠잠해졌으며 유대인에 대한 탄압도 앞 시대와 마찬가지로 많이 감경되었다.
성상파괴주의의 마지막 시대인 테오필로스(829-843) 시기는 성상파괴파의 현
저한 약화가 뚜렷하게 관측된다. 788년 이후 제한적이지만 비교적 낮은 계층의
사람들 역시 글을 쓰고 읽을 줄 안다는 증거들이 점점 더 많이 발견된다. 또한
769년 이후 다시 국세를 금화로만 걷기 시작하면서 화폐의 국내 유통이 급속도
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아르메니아에서 발견된 대규모 금광맥은 국내 유통시
장의 확대로 인한 금 수요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였다. 747년
에 발생한 마지막 대규모 페스트 유행 이후에는 인구 역시 가파르게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전반적인 사회분위기의 반전과 학문의 부흥이 시작됨에
따라 과격한 반지성주의로까지 비쳐질 수 있는 성상파괴주의는 사양세로 접어들
었다. 테오필로스 황제 자신 역시 성상파괴파에 속했지만 역시 성화상공경파에
대한 탄압은 아주 제한적으로만 시행되었고 공개적인 경우 혹은 정부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 대한 것으로 한정되었다. 842년 1월 20일 테오필로스가 이질로 요
절하자 더 이상 국내에 성상파괴를 강제할 만한 이유는 없어졌다. 이에 따라
843년에 열린 종교회의에서 성화상공경은 공식적으로 복원되었다. 공의회가 열
린 이 날은 현재까지도 ‘정통신앙의 날’이라는 축일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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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확장의 시대
우마이야 제국(661-750)이나 아바스 제국(750-1258)의 초창기 시절까지 로마
인의 제국은 대체로 수세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체제개편 작업은 워낙 시일이
오래 걸리는 일이기도 했고 국내 정치적으로도 분열과 혼란이 틈틈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구도에 변동이 감지되기 시작하는 과도기적 시대가 테오필
로스 정부가 있던 830년대였다. 8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던 여러 체제개혁은 802
년경에 이르러 토지대장 작성까지 완료되면서 일단락되었다. 테오필로스가 죽고
그 아내인 테오도라(Theodora) 황제가 섭정을 종료하며 원로원에 고별사를 남
길 즈음에는 수백만 단위의 금화를 비축고로 남겨둘 수 있을 정도로 재정도 호
조였다.
비록 830년대의 확장정책은 838년 아바스 제국의 반격에 밀려 큰 실패로 끝
났지만 이는 단지 시작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850년대에 들어 로마군은 수륙
양면으로 천천히 확장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일진일퇴의 반복이었지
만 853년 시리아 해역에서 로마 함대가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후 10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300척에 달하는 대함대가 시리아 해역을 원정했다. 미하일 3세
(Michael III, 842-867)는 기존의 인구재편 정책도 지속했다. 795년 이리니의
명령에 따라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원정으로 콘스탄티노플 정부는 거의 100년
넘도록 방치되고 있던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등 발칸 각 지역에 대한 통제력 회
복에 나서고 있었다. 당시 이 지역의 농촌은 거의 슬라브인들의 점유가 되어 있
었기에 기본적으로 외래 종족이며 고분하지 않은 슬라브인들을 대거 소아시아로
옮겨 중앙의 통제에 용이하게끔 편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까닭에 미하일 3세
시대에도 이 작업은 계속되었다. 최종적으로는 856년부터 863년 사이 아바스
제국 변경에서 발생한 내전에도 개입했다. 소아시아 동부에 있는 멜리테네
(Melitene) 토후 우마르 알 아크타(Umar al-Aqta)가 소아시아의 로마 영토를
침탈하였으나 863년 오히려 로마군의 반격으로 궤멸되었다. 이제 더 이상 아바
스 제국은 국경을 압박하거나 노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867년 미하일 3세의 동료로서 공동황제가 되었던 마케도니아의 농민 바실리
오스(Basileios I)가 미하일을 살해하고 단독군주가 되었다. 곧 6대에 걸쳐서 공
고한 권력기반을 확보하는 마케도니아 왕실(867-1056)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사건사적인 차원에서의 폭력적 정권교체와는 달리 거시적으로나 미시적으로나
로마인들의 제국이 다른 길을 나아가지는 않았으며 오랜 기간을 거쳐 형성된 노
선을 계속 이어갔다. 바실리오스 1세(867-886)의 시대에는 이탈리아 남부를 점
령하고 있던 무슬림 군주들에 대한 공격이 카롤루스 대제의 후예들은 물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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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로마 제국에서도 시작되었다. 871년, 신성로마황제인 루트비히 2세
(850-875)의 군대는 로마군과 함께 연합작전을 펼쳐 이탈리아 남부의 항구도시
인 바리(Baris)를 탈회한다. 로마군은 876년에 이 도시를 넘겨받은 뒤 독자적으
로 작전을 수행한 끝에 880년, 칼라브리아(Calabria) 지방 거의 전체를 장악함
으로서 남부 이탈리아 원정을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이는 단순히 남부 이탈리아
의 안정 뿐 아니라 교황청이 위치한 중부 및 북부 이탈리아 그리고 후방에 위
치한 아드리아 바다 및 달마티아 해안을 무슬림 해적으로부터 방어할 능력이 마
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915년, 교황청과 로마제국은 남이탈
리아의 군주들과 공동작전을 펼쳐 로마 근교 가릴리아노(Garigliano) 강변에서
무슬림 군대를 격파함에 따라 이탈리아 내에서 로마제국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
되었다.
마케도니아 정권의 시대는 행정의 정비와 법률의 재정비 역시 대대적으로 진
행되어 점차 발전하여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사회에 대응하는 모습이 연출되었
다. 군사령관에게 민정권까지 주어 행사하게 하였던 이전 시대와 달리 이 무렵
부터는 변경지역이 아닌 한 법관(Krites)을 지방의 수령으로 파견하여 민정장관
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법관이나 조세공무원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능력을 갖
춘 사람들이 교육의 복구와 함께 점차 늘어났다. 최소한 읽기, 쓰기 및 기초적
인 기하학을 다루는 초등교육은 농촌이나 산간과 같은 오지에서도 비교적 듣기
쉬웠다. 보다 큰 도시로 유학을 가게 되면 본격적으로 교재를 가지고 고전과 시
학을 배울 수 있었다.
사회가 다시 활기를 되찾고 복잡해지기 시작하자 새로운 법령제정의 필요성
그리고 더 이상 필요 없는 낡은 법이나 중첩되는 법률을 일소해야 할 필요가
나타났다. 또한 라틴어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점차 감소추세에 있었던 까
닭으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그리스어로 번역할 필요도 있었다. 이런 여러 이
유로 인해 바실리오스 1세부터 레온 6세에 이르는 시기에 대대적인 법률 편찬
작업이 이루어졌다. 『입문』(epanagoga), 『편람』(procheiron)과 같은 법률 서
적이 출판되었으며 결국 9세기가 끝날 즈음 『제국법전』(ta basilika)이 총 60
권, 600책으로 구성된 완역증보판으로서 간행되었다. 또한 레온 6세는 법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반영하듯이 총 113개조에 달하는 『신칙법』(Novels)을 공
표하였다.
이러한 법률 정리 작업이 주목되는 이유 중 하나는 단순히 군주들이 나서서
지시했다는 것 이상의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법률의 명의를 공권력을 상
징하는 황제의 이름에 걸어놓은 상태에서 서술을 시작하였지만 주요한 법리의
서술과 여러 판단에서는 법학자들과 법조계 공무원들이 전면으로 나서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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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비상시국(State of emergency)이 아닌 한 로마의 황제들은 행정 전면에
나서지 아니하고 법학자와 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체계 운용을 전유한다는 논지
로서 최근에 활용되고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중기와 후기 비잔티움에서는 더 이상 혁명적 변화가 없었다. 그러


므로 입법행위로 황권을 확립해야 할 필요성은 거의 없었다. (중략)
나머지 대부분의 시대에서 입법은 주로 변호사, 법관이나 공무원에
의해 실행되었다. (중략) 로마법은 변호사와 법관이 잘 운영하는 것
이었다. 초대받지 않고 이 영역에 들어와 사생활과 사회생활을 입법
으로 통제하고자 한 황제들은 그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 마리아 테레스 푀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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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중왕조의 전조
레온 6세(Leon VI, 886-912), 로마노스 1세(Romanos I, 920-944)와 콘스탄
티노스 7세(Constantine VII, 913-959), 로마노스 2세(Romanos II, 959-963)
에 이르기까지 로마인들의 반격은 이어졌다. 10세기 초엽까지는 간간이 아바스
제국이나 그 주변부 무슬림 국가들의 강한 반격도 잇따랐지만 그 뒤에는 거의
로마제국의 공세가 주류를 이루었다. 961년 무슬림 해적으로부터 크레타를 수복
하기에 이르러서 이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이런 팽창의 전조들이 곳곳에서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가운데 내부적으로도
원숙한 대중정치와 의사결정구조가 일상생활로서 정착되었다. 이전에는 비잔티
움 시대의 원로원(senatus)에 대하여 사실상 어떤 기능도 하지 못하는 유명무실
한 기구로 보는 인식이 많았다. 그 증거로 제시된 전거는 보통 레온 6세의 신법
령 46, 47, 78호였다. 각각의 내용은 원로원과 지방 도시의 참사회로부터 집정
관이나 총독 임명 권한을 보장하는 법령과 원로원의 포고사항을 정식 법령으로
시행하는 관습을 금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꾸준한 연구에 따라 오늘날에는 이러
한 입법이 원로원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집정관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540년을 기하여 폐지되었기에 그 임명 권한이 있
다는 법조문은 사문(死文)에 불과한 내용이었다. 따라서 법률의 간소화 과정에
서 삭제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원로원의 포고사항을 법령으로 시행하지
않도록 한다는 법령은 원로원의 결의를 금지한다는 내용이 아니라 입법의 최종
권한은 오직 행정부의 최고 대표인 황제의 명의로만 시행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갖는 조항이다.
오히려 실제 기록상에서는 주요 행정, 법조계 공직자들이나 일정한 품직(品職)
이상을 보유한 영향력 있는 명사 또는 학자들로 구성된 원로원이 실제 정책을
구상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이 간간이 포착된다. 또한 정부의 정책을
표결하거나 비상시 섭정의 역할을 대리하기도 하였다. 레온 6세가 임종에 다다
라 원로원 회기에 출석하여 자신의 사후를 부탁하는 연설을 하는 일화라거나 미
하일 3세의 모후인 테오도라 황제가 정부 비축 금액을 보호하기 위해 원로원에
정보를 공유하였다는 일화는 이러한 기능의 실재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인민 대중의 정치체라는 공화국적 정치원리 역시 점점 그 궤도에 오르고 있었
다. 913년 6월에 변경에서 장군으로 복무하던 콘스탄티노스 두카스(Constantine
Doukas)가 시도했던 정변은 이를 잘 보여준다. 두카스는 원로원과 총대주교가
임시로 섭정을 맡던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 밤중에 수도로 잠입하였다. 그는 전
통적으로 황제의 인준 절차가 치러지는 대경기장을 장악하고 황제 선언을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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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자신의 지지파를 거느리고 달려갔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이미
소식을 접하더니 경기장으로 몰려와 농성 중이었다. 격렬한 공방전 끝에 두카스
는 황궁으로 방향을 돌려 궁정을 침노하였지만 섭정단의 반격에 부딪혀 패배하
고 사망했다. 이는 이보다 앞서 섭정단이 대경기장에서 민회를 소집, 차기 후계
자로 낙점되어 있는 콘스탄티노스 7세를 옹호해줄 것을 요청하고 기꺼이 그러
겠노라는 동의를 얻은 데서 기인한 상황으로 보인다. 심지어 찬탈자조차도 궁정
의 장악보다는 인준(Acclamation)이 치러지는 대경기장을 최우선적인 탈취 대상
인 기관으로 봤다는 점은 분명히 당시의 사회에 관해 함의하는 바가 적지 않다.
콘스탄티노스 7세의 일화들은 이 외에도 예외적인 경우가 많고 또한 그렇기에
평상시의 기록에선 발견할 수 없는 다양한 정치적 행위주체들에 대한 이야기들
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사례는 물론이거니와 920년도에 정변을 일으
켜 집권하게 된 로마노스 1세가 정부 내에 자신의 굳건한 입지를 마련했음에도
24년 동안 콘스탄티노스를 사위로 만든 것 이상으로는 건드리지 못했던 것으로
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심지어 944년 12월, 로마노스의 두 아들 스테파노스
(Stephanos)와 콘스탄티노스가 친위정변을 일으켜 부친 로마노스는 물론 콘스탄
티노스까지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콘스탄
티노플 시민들은 이때 시위군중을 형성하고 궁정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콘스탄
티노스를 연호하였으며 결국 주요 외국대사들까지 이 무리에 합류함에 따라 친
위정변을 와해시키는데 성공했다. 콘스탄티노스가 궁정의 전례와 각종 의식을
집대성한 『전례에 관하여』(de ceremoniis)에서 대관의례에 포함되는 시민의
인준절차나 시민들의 여론을 관찰할 수 있는 축일의 공식 행진과 같은 의례를
중요하게 기록해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요컨대 대중 여론을 세심하게 관찰하
면서 이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안정된 통치를 구가하는 대중왕조의 시대, ‘정치’
가 정상적으로 작용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런 안정성의 구가를 바탕으로 삼아, 10세기 중반으로 접어드는 로마제국은
본격적으로 국경 전반에 걸쳐 공세에 들어갔다. 920년대부터 아르메니아 지방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오늘날 터키 동부국경과 이란 서부국경 지역으로까지
확장이 이어졌다. 940년대부터는 시리아 알레포(Aleppo)에 근거를 둔 함단 왕조
와 전쟁에 들어갔으며 950년대가 끝나기 직전에 알레포를 복속시키기에 이르렀
다. 961년에는 근 1천척에 달하는 함대를 동원, 오랫동안 에게 바다의 치안을
곤란하게 만들던 크레타의 무슬림 해적집단을 토벌하는데도 성공했다. 아바스
제국은 이 시기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함단 왕조 역시
방어에 급급했다. 이들이 시리아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음이 분명해짐에 따라
960년대에는 로마제국이 오랫동안 상실했던 안티오히아(Antiocheia)와 같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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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지역도 수복하게 될 것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토지소유 불균형 또는 대토지겸병의 문제로 불리는 현상이
정치권의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다. 대토지로 구성된 대농장을 운영하는 지주들
이 소농들의 토지를 자신의 소유로 확보하고 대신 기존 소농들을 소작임대의 형
태로 끌어들이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행정부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중앙정
부의 세수파악을 어렵게 하며 세수부담을 임차 농민에게 지우는 위험성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에 따라 여러 토지소유 보호 법안이 발표되었다. 기근이 엄습
하였을 때 토지를 저렴하게 사들이는 일이 엄격한 통제를 받았으며 대개의 경우
이미 완료된 거래까지 소급하여 적용했다. 이는 10세기의 주요 현안이었던 ‘정
의로운 계약’을 위한 정책이기도 했다. 『제국법전』에서도 노동자의 임금지불에
관하여 일부 조항을 할애하기도 하는데 10세기의 한 법령에서도 정부의 적극적
인 거래 정의에 대한 개입을 의식하는 모습이 보인다. 11세기 이후 자생적인 토
지재편과 시장의 운용에 대해 정부가 통제를 어느 정도 포기하기 전까지 유지되
는 태도이다.

사적인 계약은 개인에게 있어서나, 사회 전체의 복리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 어떤 사회생활이 추호의 계약도 없이 발생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언제나 소수의 신뢰할 수 없고 도덕적으로 해
이하며 부도덕한 자들은 존재한다. 그렇기에 황제의 임무는 계약을 보
다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드는 법적인 조치를 제공하는 것이
다. 그 법적인 수단은 바로 위규인 것이다.
- 파트리키오스 시메온

대중왕조의 모습이 출현한지 반세기가 지나자 정치질서에는 또 다른 변화가


감지되었다. 콘스탄티노스 7세의 아들인 로마노스 2세가 젊은 나이로 963년 사
망하면서 정권과 왕조에 도전이 닥쳐온 것이다. 963년 3월 당시 원래대로 후계
를 계승한 이는 로마노스 2세의 어린 두 아들로 각기 7살과 5살에 지나지 않았
다. 963년 8월, 유력한 변경의 지휘관으로서 시민의 신망을 사고 있던 니키포로
스 2세 포카스(Nikephoros II Phokas, 963-969)가 군부의 실력자로서 대권을
장악하였다. 그가 여론정치를 무시하다가 969년 군부의 동료 실력자인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Ioannes I Tzimiskes, 969-976)에 의해 찬탈당하긴 했지만 그와
요안니스 1세에 의해서 이 시기 로마제국에는 군주의 ‘미덕’에 변형이 가해졌다.
그것은 군주가 끊임없이 전방의 전선에서 활약하고 군대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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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의무였다.
니키포로스 2세와 요안니스 1세와 같은 군인 출신 황제의 등장은 이전과 달리
로마황제에게 다시금 군사지도자로서의 능력과 존재감을 미덕으로서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적어도 황제가 군대를 지도할 수 있다는 지도력을 입증하여야
군사령관들의 도전을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로마노스 2세의 후계자
로서 976년부터 단독통치에 들어간 바실리오스 2세(963-1025)는 자신의 옛 후
견인이었던 군인 출신 황제들의 표본을 충실히 수행하며 방어적 확장을 견인하
였다. 그러나 그러기까지는 많은 피해와 노력이 잇따랐다. 976년부터 989년까지
는 삼촌인 환관 바실리오스의 섭정이 있었는데 군대 통솔의 주체의 자리를 두고
서 변경지방인 카파도키아(Cappadocia)에 근거를 둔 군사령관들의 반란도 이어
졌다.
바실리오스 2세는 황제의 군인적 미덕이라는 시대적 가치 자체를 변화시키지
는 못했으며 오히려 그에 가장 충실하게 적응했다. 어느덧 대중에게 그러한 미
덕이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까닭이었다. 심지어 바실리오스가 60대 후반이던
1020년대에 들어서조차 황제가 죽은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 때 이를 돌파하
기 위한 방법으로 전쟁과 군부대 사열을 적극 사용하기도 할 정도였다. 한편으
로는 카파도키아 출신의 군부 인사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새로운 친위 인사들을
군부 내에 육성하였다. 이들은 파플라고니아(Paphlagonia) 지방에 근거를 두어
파플라고니아계 군부로 분류된다. 달라시노스(Dalasenos) 가문이나 콤니노스
(Komnenos)와 같은 가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바실리오스의 후광을 근거로
1050년대 이후에 정계로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국내 정계의 향방과는 무방하게 외부적인 팽창이 절정에 다다른 때가 또한 10
세기 말과 11세기 초였다. 960년대 말에 이르러 함단 왕조로부터 시리아의 여
러 요충지를 빼앗은 뒤 알레포 토후를 예속화시킨 로마인들은 이집트와 팔레스
타인에 세력을 뻗친 파티마 제국(Fatimid)과의 대치에 들어갔다. 소아시아 동부
에 펼쳐진 동부전선에서도 무슬림 군주인 마르완(Marwan) 토후를 제후로 편입
하였고 이란 서부 변경으로도 진입했다. 동북방에서는 이베리아(Iberia, 오늘날의
조지아·아르메니아 인근 지역)의 여러 자생 국가들을 정복하거나 예속시키는 방
식으로 주로 방어에 적합한 경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의 치세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불가리아의 완전한 평정이었
다. 불가리아는 8세기 말에 발칸에 정착한 이래로 9세기 말에 한때 발칸의 2/3
이상을 차지하는 등 강한 세력을 자랑했다. 이들은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황제
의 도시(Tzargrad), 즉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자신들이 로마가 될 것을 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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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에 이르렀다. 불가리아를 군사력으로 완전히 제압하는데 번번이 실패하던
로마정부는 860년대에 외교적인 요소가 개입된 선교사업을 성공시키면서 그리
스도교화된 불가리아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키예프 공국이 불가리아를 잠시
멸망시킨 사이 키예프 군대를 물리쳤던 로마군은 974년 이후 동부 불가리아 지
역을 병합했다. 그러나 잔존한 불가리아 세력은 980년대에 들어 서부 불가리아
를 중심으로 다시 재기하였다. 이들은 986년에 바실리오스 2세의 친정군을 격파
하고 99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를 포함한 발칸 전 지역을 거침없이 침
략했다. 로마군은 이에 대한 반격 차원으로 10년 이상 전역을 수행하였다. 교구
조직을 기록해 두는 『교구정보』(Notitiae Episcopatuum)의 11세기 초 간행본
이나 『듀클리아 주교 연대기』(letopis popa Dukljanina)의 해당시기 기록으로
보아 1004년에 이르러 불가리아와 로마는 상호평화조약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0년간 평화를 유지하던 양국은 1014년에 다시 충돌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바실리오스 2세는 방어적으로 유럽 영토의 경계선을 지키는데 뜻이 있었
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해에 뜻하지 않은 대승리로 불가리아가 치명적
인 피해를 입게 되자 정책의 방향이 전환되었다. 1018년, 4년의 전쟁 끝에 불가
리아 왕국은 완전히 제압되고 북방 유목민을 저지하기 위한 일종의 완충지로서
전략적으로 재편되어 병합되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후에도 1021-23년에 걸쳐 조지아-아르메니아 접경지역
에 대한 두 차례의 원정을 단행하였고 말년에는 시칠리아에 대한 원정까지 계획
했다. 그의 집요한 ‘친정’에 대한 고집은 위에서도 거론되었던 군지도자로서의
황제라는 이미지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의 문제라면 그 자신의 후
계를 이을 아들이나 딸을 두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후계 문제를 두고 휘하 장군
들이 반란을 짧게나마 시도한 사례는 이렇듯 10세기 후반 이후 재편된 황제 이
미지가 갖는 군사적 카리스마가 갖는 위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잦은 전쟁을 지탱하기 위한 세금부담이 상당하였다. 더군다나
일정 조세단위(episkepsis)에서 어떤 사람이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면 동일 단위
의 여유 있는 사람에게 체납세금을 대납하도록 의무화하는 법령까지 신설되어
많은 원성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도 성장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기후
의 특성상 수년에 한 번씩 발생하는 기근을 제외하면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또한 소농들에 대한 국가장악력을 지키기 위해 대지주들의 토지소유 확
대를 경계하는 조치도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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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중정치의 전성기
1025년 12월 15일에 바실리오스 2세가 죽자 그 자리는 동생이자 62년간 함
께 군주의 자리에 있었던 콘스탄티노스 8세(1025-1028)에게로 이어졌다. 짧은
시기동안 바실리오스 2세 시대에 있었던 부담스러운 조세 연대지불을 폐지하고
체납 혐의로 수감되었던 많은 사람들을 석방했다. 그에게는 왕실의 마지막 후예
로 조이(Zoe)와 에브도키아(Eudocia)라는 두 딸이 계승 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
었다. 이 중 맏이였던 조이는 1028년 11월, 원로원의 대표가문 중 하나인 아르
기로스(Argyros) 가문의 로마노스와 결혼하면서 제위를 공동으로 상속했다. 이
로써 마케도니아 왕실은 원로원 세력과의 연합체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로마노스 3세(1028-1034)는 바실리오스 2세와 같이 군지도자로서의 황제라는
이미지를 구현하는데 노력했다. 바실리오스가 사망하자 강력한 지도력이 부재한
다고 생각한 군부 일각에서는 이미 콘스탄티노스 8세 때부터 이미 반란을 꾀하
여 발각되기도 했다. 로마노스 3세는 980년대와 990년대에 전쟁을 치렀다가 평
화를 유지하고 있던 파티마 제국과 대리전을 치르면서 군에 대한 통솔력을 과시
하고자 했다. 시리아 전역은 성공했지만 친정은 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로마노
스는 파플라고니아계 군부의 견제도 받아야 했다. 이 시기에는 달라시노스 성씨
의 사람들이 주로 문제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원로원의 집단지도체제에서 파플라
고니아 군부를 경계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034년 4월, 조이 황제는 자신의 불륜 대상자인 파플라고니아 출신 평민 미하
일을 끌어들여 남편 로마노스를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미하일은 곧 미하일
4세(1034-1041)가 되어 파플라고니아 왕실을 열었다. 파플라고니아 출신 군부
인 콘스탄티노스 달라시노스는 대놓고 이러한 후계구도를 비판했다. 반면 원로
원에서는 논의 끝에 파플라고니아계 평민을 중심으로 정권을 구성하면 파플라고
니아 군부를 견제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이들은 전혀 통치
능력이 입증되지 않은 미하일 4세를 받아들였다. 미하일 4세를 조이에게 소개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국립고아원 원장(orphanotrophos)까지 역임하고 있던
미하일의 큰 형 요안니스였다. 이후 요안니스는 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조세
제도를 개정, 대규모 경비가 필요할 경우 조달할 수 있도록 품직, 즉 명예작위
를 일종의 국채와 같은 투자제도로 사용하는 방법을 창안했다. 이 제도는 11세
기 내내 유지되어 유용한 세원조달책이 되었다. 또한 정권의 안정을 위해 왕실
인사를 중심으로 주요 최고위급 관리직을 장악하기까지 이르렀다.
미하일 4세 시대에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시칠리아에 대한 원정(1038-1041)을
감행하여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로마노스 3세 시절부터 시작된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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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제국과의 전쟁을 마치기 위하여 평화조약 체결 논의를 진행시켜 최종 마무리
하였다. 미하일이 한센병의 발병으로 대응이 거의 불가능한 탓에 세르비아의 부
족들이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일은 막지 못했지만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은
쉽게 진압했다. 미하일 4세의 조카가 미하일 5세로서 1042년에 뒤를 잇자 파플
라고니아 왕실은 공고한 입지를 확보한 것으로 보였다. 미하일 5세는 대중여론
을 확고한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는 것으로서 통치를 시작한다. 축일행진을 하
면서 자신에 대한 지지를 확인한 뒤 미하일 5세는 군부와의 의사소통과 원로원
간의 균형을 통해 통치를 안정시켜갔다. 그러나 1042년 4월, 마지막 걸림돌이라
고 생각한 조이 황제를 유폐하려던 시도가 대중의 분노를 사 시민봉기에 직면하
고 말았다. 시민군과 정부군의 시가전이 진행되며 도합 3천 명이 사망한 후 미
하일 5세는 시민군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조이와 동생 에브도키아의 공동통치가
복구되었다.
조이는 그 직후 또 다른 대가문 출신의 원로의원인 콘스탄티노스 모노마호스
(Constantine Monomachos)와 결혼하여 정치를 위임했다. 콘스탄티노스 9세
(1042-1055)가 된 그는 자신의 불륜 대상과 열애에 빠졌다가 시민들의 항의를
받은 것을 제외하면 대중여론을 살피는데 게으른 바가 없었다. 특히 그는 이전
까지의 황제들과 달리 군사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황제의 미덕으로서 간주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에 그로 인해 부족할 수 있는 정통성을 시민을 더욱 끌어들임
으로서 보충하려 했다. 그는 교육제도 혁신을 통해 고급교육과정에 속하는 철
학, 법학 및 공증인 교육과정을 정립하고 무산층의 사람들도 접근 가능하도록
손을 보았다. 이 과정에서 그 역시 대학 강의에 들어가 철학대학장 미하일 프셀
로스(Michael Psellos)의 교육을 받고 필기를 하기도 하면서 몸소 학문의 부흥에
모범을 보이고자 했다. 또한 원로원의 신분제한을 철폐하여 기존의 명문대족 출
신이 아니어도 명목상으로는 노동자 역시 원로원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
었다. 이로서 시민대중과 원로원을 긴밀하게 연결하고 통치의 근간을 이룩하고
자 하였다. 이는 성공적으로 작용하여 1047년에 발생한 군부의 반란이 거세고
수도에 병력이 거의 없었음에도 대중이 자발적으로 시민군을 조직하는 등 정변
이 실패로 돌아가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모노마호스 시절은 또한 균형외교가 추진되었다. 먼저 1046년에 파티마 제국
과 동맹조약을 정식으로 체결하여 평화를 튼튼히 만들었다. 이후 파티마와의 관
계는 상당히 개선되어 1050년대 이집트에 기근이 발생하자 인도적 차원에서 로
마정부가 2만 8천 톤에 달하는 곡물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건넬 정도가 되었
다. 문제는 이 시기에 이란, 이라크 지역으로 셀주크 인들이 대거 옮겨와 정권
을 차지하면서 제3의 세력으로 부각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1048년 9월,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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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과 셀주크군은 아르메니아 변경에 있는 카페트론(Kapetron)에서 충돌하면서
새로운 국제구도가 형성되고 있음을 입증했다.
1050년에 셀주크와 평화조약을 논의하면서 로마정부는 바그다드에 소재한 아
바스 왕조와의 아주 오래된 외교경로를 재개했다. 이는 셀주크가 기존 아바스
왕조를 대신하여 이 지역을 호령하던 부와이드(Buyaid) 가문을 밀어내고 아바스
칼리프의 충실한 신하를 자처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로마정부가 시도
한 외교적 접촉은 별다른 성과는 얻지 못했지만 발 빠르게 3자 구도에 대처하
기 위한 대응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 시기 이슬람 세계에서 이슬람 신앙의 수호자로 이미지를 굳힐 수 있는 방
법 중 하나는 콘스탄티노플에 소재한 무함마드 모스크의 관리권을 확보하는 것
이 있었다. 우마이야 제국 시절인 686년에 지어져서 당시에도 이미 400년 가까
이 존속되고 있는 이 모스크는 특히나 비이슬람 세계의 대표적 도시로 간주되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다는 점 때문에 비이슬람 세계의 무슬림들을 상징하는 장소였
다. 이곳을 관리하고 보호할 수 있다면 수니와 시아를 넘어서는 이슬람 신앙의
최고 수호자로 간주될 수 있었다. 무함마드 모스크의 중요성은 이후에도 계속
남아 있을 것이었다. 파티마 제국은 이미 로마제국과 예루살렘 성묘교회의 관리
권을 교환하는 형식으로 989년부터 해당 모스크의 관리권을 얻으며 이슬람 세
계에 유용하게 이를 선전하고 있었다. 아바스 칼리프는 이에 항거하지 못하다가
셀주크의 보호를 받게 되어 정치적 힘을 확보함에 따라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셀주크가 광범위하게 동부 전선을 위협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우려한 콘스탄
티노스는 1050년 셀주크와의 평화조약을 통해 무함마드 모스크의 관리권을 아
바스 칼리프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파티마와의 동맹을 무시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그렇기에 1052년 북아프리카의 지리드(Zirid) 왕조
가 파티마 제국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선포하고 대신 바그다드에 지지를 요청하고
나섰을 때 바그다드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지리드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
던 것이다. 이렇듯 동맹과 강한 제3국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콘스탄티
노스 9세의 정책기조는 한동안 후계자들도 유지하여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
다.
하지만 국내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면서도 상당한 전쟁도 감수해야 했다. 북쪽
에서는 페체네그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어 약 7년간 발칸 북부의 지역을 두고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셀주크와의 외교전 및 밀고 당기는 국지전과 동
시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재정에도 상당한 타격을 주는 일이었다. 가까스로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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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에 30년 한정 평화조약을 체결하였으나 페체네그족이 발칸 북부의 영토 내에
자리를 잡게 되어 상시적인 분쟁의 단초가 마련되었다.
이탈리아 방면으로도 상황은 마냥 좋지는 않았다. 남부 이탈리아에 용병으로
들어와 있던 노르만족의 병사들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노르만족
을 대상으로 로마제국은 교황청과의 연계를 꾀했다. 그러나 양자가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았으며 특히 교황 레오 9세가 파견한 훔베르트 추기경 이하 교황청 사
절단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Micahel I Keroulrarios)와
충돌 끝에 서로를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1054년 동서교회대분열로 설명되는 사
건이다.
콘스탄티노스는 서쪽으로는 교회의 문제와 국가의 일을 나누어서 접근하는 시
도를 계속했으며 동쪽으로도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의 대립 문제에 최대한 끼
어들지 않고 국가 대 국가의 외교 문제에 한정하여 위험요소를 최대한 통제 아
래 두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한편으로는 동쪽을 침탈하는 통제받지 않는
튀르크 유목민들을 제압하기 위한 강경책으로 서쪽의 예비 병력을 동쪽으로 옮
겨놓기도 했다. 다만 전비 지출이 잇따르고 경제의 확장으로 인한 금화수요의
증가로 금화의 순도를 낮추는 문제는 딱히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전반적으로는 평화와 번영이 이어졌던 시대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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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원로원과 군부의 투쟁
콘스탄티노스가 죽자 약간의 후계분쟁이 일어난 뒤 마케도니아 왕실의 마지막
여성 후예인 에브도키아가 복귀하여 7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약 1년 8개월
동안 통치를 했다. 그 뒤에는 원로원과 관료들의 협의에 따라 국방성 내 군대
임금을 관리하는 군사국(Stratiotikon) 국장을 지냈던 노인 미하일이 자리를 이
어받았다. 이 두 명의 군주는 콘스탄티노스 9세의 기조를 거의 그대로 지켰다.
다만 이들의 지지층이 분열되는 양상을 보인 것은 우려할 만한 점이었다. 원로
원과 주요 관료들은 원로원의 문턱이 너무 낮아졌다면서 경계했으며 원로원의
주도를 마땅하지 않게 생각하는 대중여론 역시 원로원을 경계하면서 지지할 만
한 다른 파벌을 찾기 시작했다.
1057년 6월 초여름이 되자 파플라고니아 군벌의 일원이었던 이사키오스 콤니
노스(Isaakios Komnenos, 1015-1060)가 군대에 대한 푸대접을 명분으로 반란
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지지층인 동부군 내에서조차 그를 저버리고 정부군에
합류하는 분열이 일어났다. 이사키오스는 파플라고니아 군부 및 원래는 경계하
는 사이였던 카파도키아의 군부까지 연합시킨 다음 전술적 능력으로 정부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이
사키오스의 심각한 정치적 부담으로 계속 작용하였으며 더 나아가 동부 지역의
방위능력을 전반적으로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키오스는 끝내 반란을 성공시키고 미하일 6세로부터 정권을 양도받았다.
이사키오스 1세(1057-1059)가 된 사령관은 연이은 전쟁 등으로 재정수지가
악화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에 골몰했다. 이를 위하여 옛 정권들에서 여
러 가지 이유로 제공하였던 면세지들에 대한 면세 혜택을 강제로 취소하였으며
일체의 항의를 무시하며 강제로 대지주나 수도원의 토지 및 자산을 국고로 환수
시키고자 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관계가 악화된 총대주교를 강제력을 동원해
퇴임시켰고 자신의 경쟁자가 될 만한 사람들에 대한 억압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대중의 여론이 급속도로 냉각되었으며 이사키오스 1세는 갑작스러운 병과
여러 정치적 부담을 의식하여 1059년 11월에 수도사로 은퇴하고 동료였던 콘스
탄티노스 두카스(Constantine Doukas)에게 자리를 넘겼다.
역시 동부 출신 군부인사에 속하는 콘스탄티노스 10세(1059-1067)는 다시금
원로원과 군부를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들고자 했다. 또한 대중여
론의 지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원로원을 불러 취임일성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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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전하는 가장 위대한 명예를 공유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천
상의 임금으로부터 지상의 일을 맡도록 지명 받았습니다. 그분과의
계약을 실패하지 않고 자연의 섭리와 본을 따라 친절하고 열정으로
임함으로써 젊은이들에겐 아버지와 같이, 동년배에게는 형제와 같이,
노인에게는 지팡이와 자식과 같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나의 치세 동안 번영을 누릴 것이며 예언자들의 예언이
성취됨을 목격할 것입니다. 이는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
에서 굽어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그 어떤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슬픔과 비탄, 불리한 박탈로 인하여 고통 받지 않게 될 것입
니다.

그러나 처음의 장밋빛 전망과 달리 군부는 배신감을 느꼈다. 이들은 아마도


이사키오스 1세의 복위를 목적으로 1060년 4월 23일 성 요르요스 축일에 맞추
어 해군까지 끌어들여 수도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난은 진압되었지만 콘
스탄티노스 10세는 군부의 제어를 위하여 동부군들에 대한 보급과 임금 지불을
아주 엄격하게 때로는 가혹하게 제한하였다. 하지만 1057년 군사반란 이후 틈이
나기 시작한 동부변경의 방위체제는 1062-3년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튀르크
유목민들의 지속적 침공에 의해 피해를 누적해갔다. 중앙정부는 이러한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지방의 방위체계를 보다 통제하기 쉽고 비용소모가 적은 방향
으로 재편하려 했다. 결국 이런 태도는 1064년에 발발한 셀주크와의 전쟁 이후
국경방위능력이 철저하게 붕괴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국제정세도 시일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안정해졌다. 1050년대 중반, 이라크에
서는 셀주크족에 밀려 소외되고 있던 부와이드 왕실이 이라크 내부의 시아파와
손을 잡고 항거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시아파의 대부를 자처하는 파티마 제국과
연합하여 셀주크 및 아바스 연합에 대항했다. 이에 따라 1050년대 중반에 이르
러 파티마 제국은 아바스와 셀주크를 일시적으로나마 압도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1인자를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에 콘스탄티노플 정부를 압박하면서 무
함마드 모스크 관리권의 양도를 촉구했다. 이를 위해 시리아에서 전쟁이 수년간
이어져 많은 인적, 물적 피해가 있었다. 1057년에도 계속되던 이 갈등은 1058
년에 들어 셀주크의 토그릴 벡(Togrul Beg)의 반격으로 파티마가 이라크 내부의
세력을 상실함에 따라 가라앉았다. 반면 이제는 셀주크의 대공세가 시작될 차례
였다. 1062년에 토그릴 벡을 이어 계승한 그의 조카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
은 1060년대에 아르메니아-조지아 일대를 정복한 데 이어 시리아의 파티마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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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 역시 축출해버렸다.
반면 로마제국의 대응능력은 점점 악화되었다. 1065년 10월에 그나마 황제까
지 와병하자 그 능력은 더욱 나빠졌다. 1067년 5월에 그가 죽고 아내 에브도키
아(1067)와 아들 미하일 7세(1067-1078)가 뒤를 이었지만 시민여론은 이제 원
로원과 왕실을 떠나 카파도키아 군부로 향하고 있었다. (반면 파플라고니아 군
벌은 이사키오스 1세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로 인해 더욱 혐오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이에 에브도키아는 카파도키아 군부의 대표자 중 하나인 로마노스 디오
예니스(Romanos IV Diogenes)와 결혼함으로써 왕실도 지키고 국가 방위도 충
실히 하고자 했다. 로마노스 4세는 실제로 몇 차례 직접 원정을 단행하면서 이
에 부응하는 듯 했지만 국내정치에서 무능함을 드러내 결국 파탄에 이르렀다.
1071년 8월, 그는 대 원정을 이끌고 나가 셀주크에 치명타를 입혀 평화를 강제
하려다가 내부의 정치적 배반과 외부적인 전략, 전술적 실패로 인해 거꾸로 몰
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실권하자 그는 거꾸로 콘스탄티노플을 치려다가 궁지로
몰리게 되어 1072년에 실명의 형벌을 받고는 곧 사망했다.
미하일 7세가 재상 니키포로스를 기용하여 재정을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게 재
건하며 군대를 동원하여 튀르크족을 저지하고자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으며 동시
에 여론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1078년 3월, 카파도키아의 또다른 군장성인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Nikephoros Botaneiates)가 아나톨리콘 관구의 병력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키자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시민봉기가 일어나 미하일 7세를
폐위했다. 시민군의 추대를 받은 니키포로스는 곧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
는 전반적인 재정위기에 직면했고 사방에서 이어지는 페체네그, 튀르크, 노르만
의 침공에 적절히 대응하는데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결국 1081년 4월 부활절에 파플라고니아 군부 출신이자 총사령관인 알렉시오
스 콤니노스(Alexios Komnenos)가 반란을 일으켰다. 시민군이 조직되어 자신들
이 증오하는 파플라고니아 군벌을 상대로 맞서 싸웠으나 알렉시오스는 방어의
허점을 이용하여 콘스탄티노플을 방어선을 함락시켰다. 이후 벌어진 싸움으로
많은 시민군이 살해되었으며 니키포로스 3세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정권을 포기하였다.
1060년대 이후 북쪽에서는 페체네그족이 발칸 전역을 대상으로 전쟁을 벌이
기 시작했고 동쪽에서는 소아시아 전역이 튀르크족의 공격에 직면했다. 시장유
통망이 단절되면서 물가도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화폐 품질이 관리되지 않아 조
세 역시 멋대로 널뛰기하여 이 시기 주민들의 생활은 애로사항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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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대중왕조의 복귀
알렉시오스 1세(1081-1118)가 즉위함에 따라 원로원과 두 개의 군부집단 사
이에서 오락가락하던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알렉시오스로서는 당장 집권
에 큰 걸림돌이 되는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그가 시민군을 학살하고 휘하 부대
의 약탈을 허용함으로써 여론을 심각하게 적으로 돌려놓았다는 것이었고 또 다
른 하나는 두카스 왕실의 보호자로서 집권한 터라 자신의 가문을 왕실로 만들기
는 어렵다는 점이었다.
첫 번째의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총대주교 코스마스 1세가 알
렉시오스의 요청에 따라 소집한 종교법정에서 정변주도세력은 유죄선고를 받았
다. 그리고는 약 40일 동안 참회과정을 거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가까스로
불만이 폭발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아주 오래전 군인
황제시대의 군사정변과 달리 이 시대의 군사정변은 사뭇 다른 모습으로 파악된
다. 군인황제시대에는 군사정변이 주요 세력 간 전투를 거쳐 종료되면 그것으로
서 권력의 향방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알렉시오스는 무력으로 시민군을 억누르
면서까지 자리에 올랐지만 이후에는 철저하게 기존 정치원리대로 움직여갔다.
시민의 청원과 이의제기와 같은 오래된 전통 역시 그대로 지켜갔다. 어떤 통치
자나 집단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굳세게 자리 잡은 전통적 심성을 이길 수는 없
다는 방증이겠다.
하지만 어쨌든지 당시 알렉시오스는 대체로 너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지방 각지에서는 유력자와 장군들의 반란이 계속되었다. 여기에 1080년대 내내
이탈리아 남부의 노르만 공국과 페체네그족의 침입으로 국운을 건 공방전이 이
어졌다. 1083년 라리사 전투로 노르만족을 저지한 알렉시오스는 페체네그족과
소아시아 서부 해안에 근거를 둔 차카 베이(Chaka Bey)의 연합공격을 각개격파
했다. 1080년대 마지막 시기와 1091년에 이르는 기간에는 10여만을 헤아리는
페체네그의 대군을 부족한 병력과 온갖 책략 및 용력을 동원하여 격파할 수 있
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통치력과 책임감을 유감없이 보여준 알렉시오스는 콘
스탄티노플에서의 지지를 확보하였으며 마침내 1092년을 기하여 자신의 장남
요안니스를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공동황제로 인정을 받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
로서 콤니노스 가문이 두카스 가문을 제치고 왕실로 올라섰다.
직후 알렉시오스는 오랜 전란으로 파편화되어버린 국내 유통경제를 재건하는
계획을 세웠다. 무엇보다도 자본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그는 베네치아와의 협력
을 기획했다. 베네치아에 통상특권을 과감하게 부여하고 이를 통해 베네치아의
막대한 자금투자를 유도하는 것이 그 계획의 골자였다. 여기에는 또한 베네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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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력까지 상시적으로 지원하는 조치까지 포함되었다. 이는 성공적인 정책으로
입증되며 12세기 로마제국 경제의 유래 없는 대 부흥을 견인한 원인으로 지목
된다.
한편 내정개혁에서도 상당한 노력이 투사되었다. 1092년부터 1109년까지 17
년 동안 화폐개혁이 추진되어 혼란스럽던 화폐가치를 안정시키는데 성공했으며
또한 늘어난 화폐수요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체제설계까지 이루어냈
다. 1094/5년도에 이르러서는 화폐안정화 작업에 맞추어 조세제도 역시 대거
개정함으로써 조세제도가 납세인들을 몰락시키는 일이 더 이상 없도록 조처했
다. 이런 작업을 거친 뒤 정부는 재정이 확보 되는대로 군사력 강화에 투자함으
로서 소아시아 방면에서 계속 이어지는 군사활동을 보조할 수 있었다.
1095년은 외교사적으로도 중요한 해였다. 소아시아의 탈환을 목적으로 하고
있던 로마제국은 이 시기 부족한 군사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교황청에 사절을 파
견, 동방 그리스도교인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수사학적으로 묘사하며 용병이
나 지원군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들의 수사법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으며 1095년 8월, 교황 자신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서유럽 신자들
에게 더욱 깊은 인상을 주는 연설을 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기대하지 않은
거대한 십자군의 서약이 이루어졌다. 로마제국으로선 기대 이상의 수확이기도
했으며 뜻하지 않은 사고를 불러오는 원인도 되는 일이었다.
민중 십자군은 십자군에 대한 이미지를 악화하는데 일조했지만 본격적으로 1
차 십자군이 시작된 1097년부터는 극적인 진전이 이루어졌다. 십자군은 소아시
아에 정착한 룸 셀주크(1077-1307)를 연달아 격파하며 시리아로 넘어갔다. 로
마군 역시 십자군의 보급과 군사적 지원을 주로 담당하면서 동시에 1097-8년에
독자적 원정을 실시하여 대규모 영역을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십자군으
로 인한 이 지역 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로마제국으로서도 상당한 곤란을 겪게
만드는 요인도 되었다. 무엇보다 십자군과 그 고국이 되는 서유럽 각국에서는
기존 로마제국이 이슬람 국가들과 해왔던 정략외교를 수상하게 바라보았다. 특
히 안티오히아 수복과정이나 롬바르디아 십자군(1101)이 겪었던 고초 관련해서
안티오히아 공작 보에몽(Bohemond)과 같은 반 로마파 세력들의 뒷공작도 심각
한 부작용을 낳아 십자군 세력과 로마제국의 외교관계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
게 형성된 반로마적 구호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12세기 말에 벌어지는 4차
십자군 사변의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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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오스 1세의 사후 로마제국은 요안니스 2세(1118-1143)와 마누일 1세
(1143-1180)의 3대를 이어가며 재건을 통해 유럽 정치질서의 한 축으로 부상했
다. 소아시아에서는 튀르크 유목민들을 처음에는 해안에서 그리고 저지대에서
몰아내는 작업이 100년간 꾸준하게 진행되었으며 동시에 룸 셀주크 왕조를 봉
신 혹은 예속적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또한 시리아와 팔레스
타인에 새롭게 등장한 십자군계 국가들과의 연계 작업에도 주력하여 분열된 레
반트 지역의 강력한 뒷배 세력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더군다나 예루살렘 왕국을
후원하면서 자국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인 결과, 이를 바탕으로 교황과 서유럽 국
가에 대한 새로운 역할까지 인식시키는 성과도 거두었다.
마누일 1세의 시대인 12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 프리드리히 1세(1152-1190)
치세의 신성로마제국이 십자군 이슈를 장악하고 더 나아가 유럽 그리스도교권의
패권자의 상징인 ‘로마제국’ 개념을 선점하고자 시도했다. 이에 맞서 로마제국
역시 신성로마제국과의 중간지대인 헝가리 왕국과 세르비아를 복속시켰으며 교
황청,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사 공화국, 노르만 공국, 프랑스 왕국
등과 집단적 안보체제를 구성했다. 1160년대에는 북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을 후
원한 끝에 신성로마제국에 맞서는 롬바르디아 도시동맹을 창출하기도 했다. 마
누일 1세는 더 나아가 서유럽의 인사들을 외교와 경제 부문을 중심으로 많이
기용하고 서유럽과의 교류를 대대적으로 확충했다. 1180년에는 마침내 프랑스
왕국과의 결혼을 이끌어내면서 유럽관념으로의 편입을 더 가속화했다.
이러한 영향력 확대를 뒷받침한 바탕 중 하나로 해군력의 급격한 증대도 있었
다. 원래 로마제국은 군관구제의 실시 이후 해상의 여러 군관구별로 독자적인
함대가 운영되었으나 전란의 와중에 관리가 부실해져 곧 쇠퇴해버렸으며 연합작
전에도 시간이 오래 소비되는 단점이 있었다. 알렉시오스 시대에 이를 타파하기
위해 베네치아 등의 제도를 참고하여 통합해군 육성을 시작했다. 사전단계로 해
군총사령관(megas doux)직이 창설되었다. 1122년에서 26년 사이 실패하기는
했지만 베네치아의 해로침입이 있은 후, 요안니스 2세 시대에는 재무성 관료인
푸차 사람 요안니스(Ioannes of Poutza)가 추진한 푸차개혁으로 해군을 육성하
는 전용예산이 할당되고 통합해군 체제가 작성되었다. 또한 지중해 어느 방면으
로도 해군을 즉각 투입할 수 있게끔 로마 지배하의 해안지대 곳곳에 요새와 식
수시설, 군량창고를 건설해두었다. 이로서 1140년대부터는 월등히 신속한 속도
로 대규모 함대를 지중해 각 방면으로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게 된다.
1169년에 150척의 갤리함대를 동원, 수륙양면으로 파티마 제국 치하의 이집트
다미에타(Damietta)를 공격하거나 1177년도에 재차 예루살렘 왕국과의 합동공
격을 위해 대함대를 파견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원동력이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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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는 지중해 연안의 정세가 안정됨에 따라 무역의 확장 속도가 그 어
느 시대보다도 가팔랐다. 농촌에서는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환금성 작물의 재
배가 증가하였고 농촌경제 자체도 급속도로 화폐화가 진전되었다. 농업의 발달
과 더불어 공업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장이 관찰된다. 도기와 유리제품의 생산이
국내공급의 범주를 넘어서 이집트와 베네치아 및 기타 서유럽 지역으로 활발하
게 수출되는 제품이 되었다. 비단, 특히 그 중에서도 금실이나 은실로 화려하게
장식한 자수비단은 외교상의 공물로도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정도로 제품 가치
를 널리 인정받았다. 그리스 비오티아(Boiotia) 지방의 티베(Thebe)는 이 비단생
산으로 특히 정평이 났으며 비단공장을 운영하기 위하여 많은 직조공을 수용하
는 도시로 거듭났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인들이 많은 투자비용을 들여 이곳의
비단을 독점하였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던 이곳의 비단생산에는 티베 인구 1만
2천 명의 17%에 달하는 2천여 명의 유대인들 상당수가 기술자로서 근무하였으
며 현지의 여성들도 다수 직공으로 근무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티나(Athens)
에서는 유리공업과 비단염색 공업이 성행하여 장차 베네치아의 유리공업에도 상
당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으로는 1차 산업 제품과 2차 산업 제품의 수출항으로
알미로스(Halmyros)라는 신도시가 베네치아의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건설되기
도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부흥에 힘입어 도시의 규모도 한층 거대해졌다. 12세기의 저자
들은 고대의 번영을 뛰어넘었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1170년경 콘스탄티노플은
인구 40만을 넘어섰고 제2의 도시로 유명한 테살로니키도 인구 15만을 넘어섰
다. 펠로폰네소스에서는 크고 작은 50여개의 도시가 번창하였으며 소아시아에서
도 주요 도시들을 재건하고 요새를 쌓아 유목민의 진로를 통제하면서 1160년대
부터 급속도로 성장을 경험하였다.
이런 경제적 부흥은 유대인과 여성의 생활에도 많은 변혁을 가져왔다. 11세기
에 비해 유대인들의 국내 유입이 증가하였는데 12세기에는 총 7만 5천에서 10
만에 달하는 공동체 소속 유대인들이 파악되어 시리아와 이집트 소재의 유대인
숫자를 능가하게 된다. 이 시기 사회의 인구구조 역시 핵가족 위주로 재편되어
평균 4명이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주택의 구조 역시 여성의 공간이 고립되
어 있던 고대와 중세 초기와는 다르게 가족과 개인 단위의 사생활을 강조함에
따라 개방되어가는 양상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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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0년 마누일 1세가 사망하고 어린 후계자인 알렉시오스 2세(1180-1183)가
그 뒤를 이었다. 마누일 1세는 왕실을 단순히 하나의 가문이 아니라 통치 질서
의 한 축으로 만들기 원했다. 이에 따라 콤니노스 3대에 걸쳐 진행된 법률 개정
과 개혁이 지속되었고 황제와 왕실의 이미지 구축을 위한 선전체제가 든든하게
섰다. 하지만 제위를 단순히 혈연이 아니라 공적인 대상으로서 확립하려던 마누
일의 시도는 미완으로 끝났다. 오히려 그 이후 콤니노스 가문 내부에서 반역을
획책하던 마누일의 사촌 안드로니코스(Andronikos Komnenos, 1122-1185)의
음모가 실제 정변으로 이어짐에 따라 왕권이 가문 사유물로 간주되는 듯한 모습
이 연출되었다. 안드로니코스 1세(1183-1185)는 약 2년의 교묘한 정치활동과
선전선동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원로원과 각종 위원회들이
대의적 정통성을 담보하는 역할을 하는데, 12세기 후반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유력자들이 민회와 표결을 통해 자체적으로 대의적 세력을 확보하는 양상과 유
사하다. 하지만 안드로니코스는 독재적 처사에 저항하는 푸르사(Prousa)를 공격,
시민을 학살하는 과오를 저질렀으며 결국 1185년 시민봉기에 직면하여 사로잡
힌 뒤 조리돌림을 당하고 죽었다.
1185년 이후 로마제국은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콤니노스 체제의 축을 세
웠던 콤니노스 왕실은 붕괴되었으며 이를 대신해 일어난 앙겔로스 왕실은 이전
까지 잘 유지되어 왔던 지방-중앙세력의 균형이 흔들리는 상황을 조정할 힘이
없었다. 시민군이 추대하여 자리에 오른 이사키오스 2세(1185-1195)는 친위세
력을 정부에 확산시키는데 집중하였다. 하지만 의심이 많았던 이사키오스는 곧
군주로서의 광범위한 지지를 상실하였고 적절하지 않은 조세제도로 불만을 사고
심지어 불가리아에서 유목민들의 대대적 반란에 직면했다. 군사적으로 유목민들
의 이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 전쟁에서도 패배가 계속되어 국내에 많은
피해가 누적되었고 2차 불가리아 제국의 이탈을 방관해야 했다.
외교적으로는 시칠리아의 노르만 왕조나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 같은 강대국
과의 동맹을 통해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를 견제하려 했다. 하지만 교
황청에는 필요할 때만 접촉을 시도하여 의심을 사야했고 십자군 대상인 아이유
브 왕조와의 동맹 때문에 서유럽 외교계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했다. 결국 1195
년에 신성로마제국이 노르만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탈리아 남부를 제압하는 시점
에 이르러서 아군으로 할 만한 세력이 사실상 전무한 지경에 이르렀다.
1195년 4월에 결국 이사키오스는 폐위되고 그 형인 알렉시오스(Alexios
Angelos, 1195-1203)가 알렉시오스 3세로 자리에 올랐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
는 이사키오스에 반기를 든 전국의 반란세력조차 기세등등하여 진압이 어려운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적극적인 대외, 대내활동이 불가했다. 알렉시오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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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신성로마제국의 패권에 굽히는 방식으로 시간을 벌고 불가리아를 상대로는
수세로 일관했다. 국내에서는 부패관리에 대한 불만이 시민봉기로 이어지곤 했
지만 알렉시오스 3세는 그 이전 두 명의 군주(안드로니코스, 이사키오스)에 비
해 훨씬 대중여론에 민감하게 대응했다. 그의 시대에는 무분별한 정치범 수용이
나 살인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시민들이 얼마든지 황제를 찾아
와 격의 없이 불만을 토로할 수도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알렉시오스의 정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외려 천천히 토대를 다질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힘을 모은
뒤 로마정부는 1201년부터 1202년까지 군사작전에 들어가 내부의 반란군들 다
수를 진압하는데 성공한다.
외교적으로도 이전 시대의 착오를 바로잡는 과업이 수행되었다. 1198년부터
교황청과 지속적인 외교협상이 진행되어 3년 만에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하는 장
기적인 동맹관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베네치아와의 상업분쟁을 정리하
는 목적으로 1198년에 통상동맹조약을 체결하였고 베네치아를 다시 견제하기
위하여 피사나 제노바와의 통상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1200년 중엽에는
루스 키예프 대공국의 사절단으로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로만 므스티슬라비치
(Roman Mstislavich), 갈리치아(Galicia) 공작을 동맹으로 끌어들이는데도 성공,
2차 불가리아 제국의 주요 병력원인 쿠만족을 압박하는데도 성공했다. 결국 로
마제국 내부의 잠재적인 협상자인 반란군과의 연계도 상실하고 병력원인 쿠만족
의 지원도 잃어버린 불가리아 제국은 1202년, 평화조약을 제안해왔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약 8년 만에 제국 내에 만연했던 혼란이 다소나마 가라앉
았다. 물론 아직도 국내에 반란자들이 다수 존재하였지만 추가적인 위기가 발생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짐을 던 셈이었다. 이를 입증하듯이 12세기의 마지막 시
대와 13세기 초 몇 년의 기간에는 도기 생산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더 많은
도기를 건조, 가열, 적재하기 위한 특수 도구까지 고안되는 등 번영이 다시 시
작되는 징조가 보였다.
그러나 콤니노스 체제의 주요한 약점이었던 왕실 구성원들의 착각과 과도한
욕망이 여기에 제동을 걸었다.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이었던 알렉시오스 4세가
서유럽으로 도주하여 자신을 무력으로 도와줄 것을 호소하고 다녔던 것이다. 로
마정부는 즉각 교황청에 대사를 파견하여 설득했고 결국 알렉시오스 4세를 지
원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1202년 11월 말경에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알
렉시오스 4세는 당시 베네치아의 선적료를 지불하기 위해 베네치아의 요청에
따라 달마티아의 도시 자라(Zara)를 점령한 십자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십자군 지휘부는 알렉시오스 4세가 주장하는 정통성은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
었지만 그가 약속한 파격적인 약속을 속는 셈 치고 믿기로 결정했다. 금화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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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개 및 성지에 기사 1만 명을 영구주둔 시키겠다는 알렉시오스의 약속은 너
무나도 얼토당토 없는 사기 약속이었지만 십자군은 이를 쉽게 받아들였다. 십자
군 내부에서도 이에 대해 분열이 일어나 이탈자가 발생한 끝에 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군했다.
콘스탄티노플은 갑작스러운 십자군의 출현에 크게 사기가 꺾였다. 알렉시오스
3세는 흔들리는 민심에 밀려 출전을 감행하기도 하였고 피해를 입었지만 시내
로 침입한 적군을 물리치는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민심은 혼돈으로 빠져들어갔
으며 알렉시오스 3세는 구원군을 얻기 위해 수도를 벗어났다. 이후 이사키오스
2세와 알렉시오스 4세가 공동황제가 되고 십자군은 그 동맹자로서 근교에 주둔
했다. 하지만 양측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으며 이제 막 혼란을 벗어나던 제국
정부는, 그나마 알렉시오스 3세가 이탈시킨 지역으로 인해 보상금을 지불할 여
력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 알렉시오스 4세는 제위찬탈을 노리는 ‘음울한 자 알
렉시오스’(Alexios Mourtzouplos)라는 관료의 말에 넘어가 노련한 아버지 이사
키오스를 사실상 유폐시켰고 콘스탄티노플에 반십자군 정서를 주입시켰다.
결국 1203년 11월 양측의 충돌로 대화재가 발생, 수도 상당지역이 불탄 이후
콘스탄티노플과 십자군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틀어지게 되었
다. 1204년 1월, 분노한 시민군중은 원로원과 주교단을 압박한 끝에 알렉시오스
4세를 폐위하고 니콜라스 카나보스(Nicholas Kanabos)라는 인물을 자체 황제로
선출했다. 혼란의 와중에 음모를 획책한 ‘음울한 자 알렉시오스’는 결국 혼돈의
와중에 어부지리로 알렉시오스 5세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 역시 십자군을 상
대로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는바, 콘스탄티노플과 십자군의 관계를 악화시킨 주
동자였으며 콘스탄티노플 내에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었던 그로서는 타협도, 방
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침내 1204년 4월 13일,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고 점령했다. 알렉
시오스 5세는 그 직전에 도주하였다가 알렉시오스 3세에 의해 실명당하고 추후
콘스탄티노플로 송환, 공식적으로 처형되었다. 알렉시오스 3세는 불가리아와 갈
리치아 공국까지 직접 방문하며 원병을 요청하고서 수개월 동안 그리스에서 지
연전을 펼치며 항전을 벌였지만 1204년 8월에 포로가 되었으며 그리스 최후의
저항도 1205년 여름에 있었던 쿤두로스(Koundros) 전투를 끝으로 붕괴되고 말
았다. 잊을 수 없는 외세지배의 시작이었다. 십자군은 플랑드르(Flanders) 백작
이었던 보두앵을 로마황제로 옹립한다. 소위 라틴-로마제국의 황제인 보두앵 1
세(1204-1205)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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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잊을 수 없는 경험
1204년 4월 이후 곧바로 로마제국의 모든 통치체계가 붕괴된 것은 아니다. 콘
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에도 거의 1년 이상은 모든 지방에서 저항군이 조직되고
십자군에 대한 대응이 관찰된다. 먼저 비교적 정통성을 갖추고 있는 알렉시오스
3세가 로마-불가리아 접경지역에서 원조협상을 하고 있다가 사태의 심각함을
확인한 뒤 남하하여 십자군과 대치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한 요인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1203년 7-9월경, 알렉시오스 3세가 탈출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막
내사위인 테오도로스(Theodoros Laskaris) 역시 수도를 벗어나 아시아의 니케아
(Nicaea)로 이동, 이곳에서 황제 대리를 자처하며 방어준비에 몰입했다. 여기에
비슷한 시기 콘스탄티노플에서 석방된 아시아 소재 필라델피아(Philadelphia)의
유력자 테오도로스 만카파스(Theodoros Mankapas)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반십자군 세력을 형성했다.
1204년 5월 이후 알렉시오스 3세는 모시노폴리, 테살로니키, 라리사(Larissa),
테르모필리(Thermophylae)와 코린토스(Corinthos) 등 남서쪽으로 몽진하면서
계속하여 세력을 모으고 십자군에 저항했다. 8월에 결국 알렉시오스 본인은 포
로가 되었지만 펠로폰네소스 각지의 요충지는 짧게는 1205년 말이나 1211년,
심지어는 모넴바시아(Monemvasia)와 같은 요해처는 1248년까지 십자군의 공격
에 저항했다.
그동안 재정비를 마친 아시아의 로마군은 1205년 3월 19일, 푸르사 인근에서
십자군 부대를 격파하였고 수도권의 여러 도시들 역시 1205년 늦봄부터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에 보조를 맞추어 불가리아 제국 역시 알렉시오스
3세가 남겨놓은 정예병과 연합하여 남하했다. 이때부터 다시 1년 동안 십자군과
이들이 장악한 라티움-로마제국은 사방에서 공격에 직면했다. 4차 십자군 본대
는 이 과정에서 연이은 대패 끝에 사실상 전멸해버렸다. 그러나 그동안 로마제
국의 나머지 지방 역시 중심이 되는 황제를 잃어버렸고 분열이 가시화되기 시작
했다. 불가리아 제국은 변경의 로마 도시들을 제압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로마
시민권자들을 살육하여 수도권 지역의 독립의지를 꺾어버렸다.
이후 로마제국의 나머지 지역들은 빠르게 지방 세력으로 재편성되었다. 니케
아에 머물던 황제대리 테오도로스는 1205년부터 서서히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
기 시작했다. 이어서 1207년에 황제를 자처하며 소아시아 각지에 자신의 통치권
을 강요했다. 당시 옛 수도권의 디디모티콘(Didymoteikon)에 망명 중이던 옛
총대주교는 테오도로스의 초청을 거부하였다. 그러다 1208년에 이르러 정식으로
총대주교까지 지명하여 대관식을 치렀다. 황제호는 테오도로스 1세였다.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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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오스 3세는 서유럽으로 끌려갔다가 1209년에 귀국하였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하여 오랜 동맹인 룸 셀주크 술탄과 연합, 1211년에 니케아 제
국을 향해 진격하였으나 대패를 당한 뒤 두 눈을 잃고 수도원에 유폐되어 곧
사망했다.
아시아에서 니케아 제국이 입지를 다지는 사이, 유럽 지역의 서부에 해당하는
이피로스(Epeiros)에서는 알렉시오스 3세에 충성을 다짐하고 친왕 작위를 받았
던 미하일 두카스(Michael Doukas)가 독립국을 세웠다. 그의 후손들은 1220년
대에 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를 탈환하고 이곳의 여론을 동원,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1230년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무
너지기 전까지 로마제국의 옛 영토 내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자랑했다.
니케아 제국은 반면 1210년대와 1220년대에 사선을 넘나드는 경험을 겪어야
했다. 룸 술탄국과 트라페준타(Trapezounta) 지방의 자체 독립국 그리고 라틴-
로마제국이 서로 동맹까지 맺으며 펼친 견제에 허덕여야 했던 것이다. 테오도로
스 1세의 사위인 요안니스 3세(1221-1254)에 이르러서야 니케아 제국은 반격
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념상 중요한 니케아보다 안정적인 국가운영이 가능한
남부 내륙의 님페온(Nymphaion)으로 천도한 것은 그 시작이었다. 1220년대에
니케아 제국은 룸 술탄국과의 전쟁을 통해 프리기아(Phrygia)와 비티니아
(Bythinia)와 같은 소아시아의 주요 영지를 방어하였다. 몽골의 침입을 피해 망
명한 쿠만 유목민들을 정착, 동화시키는 한편으로 국내적으론 보호무역을 천명
하면서 농업을 강조하며 독려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과 같은 상업국가들이 이
시기 사실상 무제한에 가까운 상태로 옛 로마제국의 영역에 공격적으로 침투하
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요안니스 3세 본인도 직접 영지의 농사를 지으면서 왕실
과 국가의 재정을 운영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계란을 팔아 만든 ‘계란제관’을 유
용한 선전책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여민휴식 정책의 일환으로서 세금은 최저수
준으로 억제하고 막대한 왕실 영지의 수입을 중심으로 국가운영경비를 책정했
다. 1210년대에 궤멸된 상태였던 야전군(Field Army)은 별다른 팽창재정 없이
도 1250년대 중반에 이르러 8,500명까지 회복되었다.
이렇게 증강된 국력은 실제적인 영토 팽창으로서 실현되었다. 1230년대에 몽
골의 침략으로 아시아와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일제히 혼란에 빠진 가운데 침
략을 모면하였던 니케아 정부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각지를 제압하고 콘스탄
티노플의 라틴 제국을 사실상 포위하게 되었다. 12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발칸
에 소재한 여러 십자군 국가들과 세르비아, 불가리아가 모두 연합해도 니케아
단독 세력을 저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게추가 기울어지게 되었다. 1256년경에
이르러 니케아 제국은 세금을 걷기 시작하고 대대적인 모병을 실시하였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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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1259년에 벌어진 펠라고니아(Pelagonia) 회전에서 니케아가 5개국 연합군을
격퇴함으로서 성공적인 정책으로 입증되었다. 이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제외
하고 라틴 제국을 도와줄 만한 국가가 없게 되었다.

요안니스 3세를 계승한 테오도로스 2세(1254-1258)는 국가와 중앙정부의 강


한 역할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던 정치철학자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는 지
방토호의 기반 위에 세워진 니케아 제국의 중앙통제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
했다. 그의 시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세금 징수가 재개되어 야전군을 대폭 증
강하여 다가오는 전쟁의 시대를 대비했다. 더욱이 그러면서도 그는 강경하게 토
호와 귀족들을 압박하고 주요 행정직과 군관료직을 역임하는 이들을 소외시키고
자 크게 이름이 나지 않은 중간층 귀족들을 기용하였다. 특히 황제의 친구이자
명문대족들의 대표자로서 그 명망이 사뭇 높았던 미하일 팔레올로고스(Michael
Palaiologos, 1223~1282)는 테오도로스 정권의 표적이 되어 주된 탄압을 받아
야 했다.
1258년 8월 18일, 뇌전증에 시달리던 테오도로스 2세가 젊은 나이로 요절하
자 정국의 추이가 달라졌다. 불과 9일 뒤인 8월 27일 테오도로스 2세의 영결식
이 거행되던 소산드라(Sosandra) 수도원에서 명문대족들은 정변을 일으켜 테오
도로스 2세의 친위세력을 살육하고 실권을 차지했다. 섭정 역할을 맡고 있는 총
대주교 아르세니오스(Arsenios Autorianos, 1255-1258, 1261-1267)는 테오도
로스의 어린 후계자인 요안니스 4세(1258-1261)를 보호하며 미하일의 대두를
견제하다가 급기야 총대주교로서 지방 수도원에 은거하며 저항했다.

이 시기에는 단일경제권의 통일성이 깨어지고 대단위 서유럽 경제권에 예속된


소규모 파편화된 경제권들이 늘어선 구조로 재편이 이루어졌다. 베네치아 공화
국은 에게 해 각지에 조계와 영토를 받고 영구적인 상업식민지를 창출했으며 상
업적 이익을 위하여 라티움 제국을 적극 보호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니케아
제국은 1261년 3월 13일 체결한 님페온 조약으로 제노바의 상업활동을 적극 독
려하였다. 이후에는 제노바의 해운업이 본격적으로 에게 해에서 공격적인 전략
을 펼치며 활동을 시작했다.
상공경제에서는 많은 변화와 위기가 있었지만 농업경제는 크게 변화를 겪지는
않았다. 부침이 극도로 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사회가 안정되어 있지는 않았으
나 주로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국가 대 국가의 간략한 전쟁구도였기에 14세
기 초까지 전반적인 경제성장 자체는 끊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통합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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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운용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점차 각 지역의 정치적 이탈까지도 보다 쉬워
지는 양상을 낳았다.
문예의 측면에서는 1204년 이후 공립교육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렇기에 니
케아와 같은 망명정부는 문예인사들을 초빙하는 방식으로 공교육의 재건을 시도
해야 했다. 13세기의 주요한 학자들과 교육자들을 중심으로 사학교가 설립되었
고 이곳의 교육을 토하여 13세기 후반 수복된 로마제국을 운영하게 될 인재들
이 배출되었다. 당대의 석학으로서 수도 탈환 이후에까지 명망을 떨친 니키포로
스 블렘미디스(Nikephoros Blemmydes, 1197-1272)와 같은 학자의 경우는 니
케아 시기부터 시작되는 중앙정부의 통제력 강화 조치 및 황제권 강화 기조에
맞서 공적 황제 관념을 강조하는 등 국가와 일정한 거리를 두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특이할만한 사항으로는 10세기와 11세기 이후로 완연하던 종이의
우위가 실종되고 양피지가 다시 주요한 기록수단으로 애용되었다는 점이 있다.
이는 국가의 관공서에서 취급하던 종이의 생산이 중단됨에 따른 변화로 추측된
다. 더욱이 니케아 제국이 위치하였던 소아시아 내륙에서는 목축업이 성하였기
때문에 양피지 수급이 훨씬 쉬웠던 점도 이에 한 몫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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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정치의 파탄
니케아 제국의 실권을 독점하게 된 미하일 8세(1259-1282)는 1260년에 무위
로 돌아갔지만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시도했다. 그리고 1261년 7월에 일단의 정
찰대를 파견하였다가 뜻하지 않게 수도를 공략하는데 성공했다. 1261년 8월 15
일에 정식으로 환도 의식을 거행한 미하일은 화해의 행동을 취하여 아르세니오
스 대주교를 콘스탄티노플로 초빙하는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끝끝내 왕조를 개
창하려는 야망이 양자의 관계를 파탄 내는데 이르렀다. 1261년 크리스마스에 니
케아에 방치되어 있던 요안니스 4세는 15세 생일을 맞음과 동시에 두 눈을 잃
고 수도 근처의 요새에 유폐되었다.
이러한 사태는 공히 구 니케아 제국에 살던 주민들에게 강한 충격을 안겨주었
다. 그 직후부터 소아시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미하일 8세에 대한 반대운동이
목격된다. 니케아 근교의 트리코키아(Trikkokia) 주민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콘
스탄티노플에서는 미하일을 암살하기 위한 비밀결사가 조직되고 정부를 비방하
는 책자가 유통되었다. 이 비밀결사는 1265년에 실행단계로 옮겨지다가 발각되
며 공안정국으로 이어져 많은 이들이 고초를 당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강력한
저항은 교회로부터 나왔다. 아르세니오스 총대주교는 요안니스 4세 폐위가 발생
한 직후 미하일 황제를 공식적으로 파문하였으며 정부의 집요한 압박과 회유에
도 이를 철회하지 않았다.
약 4년간의 대치가 계속된 끝에 아르세니오스를 라스카리스 복위파로 간주하
게 된 미하일 8세는 강제로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아르세니오스를 해임, 유배시
켰다. 유배지에서조차 아르세니오스는 파문철회와 주교사임을 거부하였다. 교회
내부에서도 갑론을박이 계속되다가 무려 7년이 지난 1267년에 이르러서야 황제
에 대한 파문이 철회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절차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르세니
오스가 1273년에 유배지에서 사망하자 그의 반부패, 반패륜적인 구호들은 각지
에서 반팔레올로고스 세력을 만들어냈다. 서로의 의사교환과 공동체 의식으로
유지되던 ‘정치’는 이 시기에 파탄에 이르렀다. 1261년부터 시작된 아르세니오
스 분열(Arsenite Schism)은 무려 반세기를 끌며 1314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는 단순한 교회내부의 분열이거나 사회의 분열이 아니었다. 로마의 황제들
이 정통성을 담보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공동체로서의 국가(politeia)를 운영할
수 있도록 시민 전체의 ‘박수갈채’라는 상징적 만장일치의 인준을 받았기 때문
이었다. 이제 그 양도된 권력이 발원하는 근원, 그것도 많은 이들로부터 군주의
권한이 부정당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 이는 애국주의를 요구할 당위성도 사라
짐을 의미하였다. 계약에서 풀려난 인민들은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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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로 움직이더라도 아무런 귀책이 없는 터였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소아시
아에서 튀르크 유목민 부족들이 성전의 전사(Gazhi)라는 이슬람다운 명목을 가
지고 침공을 개시했을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 결과 고도로 요새화되고 무
장된 소아시아는 아르세니오스 분열이 존재하던 반세기 동안 급속도로 와해되었
다. 소아시아가 절반 이상 무너지자 비로소 아르세니오스 분열에 종지부가 찍혔
다는 점은 이미 이탈할 사람은 다 빠져나갔음을 함의한다고 볼 수도 있는 부분
이다.
1260년대부터 발칸에서의 대대적인 수복작전에 들어간 로마정부는 동시에 일
한국의 압박에 밀려 서쪽 소아시아로 쳐들어오는 튀르크 유목민들을 상대로 번
번이 군사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내적분열이 심화되고 피해가 오랜 기간에
걸쳐 누적됨에 따라 민간의 힘과 방위력에 서서히 균열이 오고 있었다. 재정수
지의 악화에 맞물려 1260년에 정부에서 파견한 카데노스(Cadenos)란 관료가 실
시한 재무재평가 사업과 이어지는 특별세 징수는 소아시아의 경제력을 상당수
저해하였으며 소아시아의 주민들은 정부가 반항하는 자신들에게 처벌성 세금을
부과한다고 간주했다. 이런 양자의 간극은 1290년대 정부차원에서 시도된 소아
시아 방위정책 개혁까지 방해하게 되었다. 방치되던 소아시아 방위력 개선사업
은 1302년 오스만 튀르크와 로마군이 격돌한 바페온(Baphaeon) 전투로 파탄에
처했다. 전투 패배의 여파가 소아시아 전체를 뒤흔들고 주민과 지방행정관료 심
지어 군대까지 피난길에 올랐다. 여러 극단적인 조치가 시도되었지만 이마저도
전부 무위로 돌아갔다. 급한 마음에 정부는 1304년에 각 지역 수비대까지 동원
하며 재차 야전을 시도했고 이때 오스만에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
오스만은 무너져가는 방위선을 뚫고 로마 영토인 소아시아 서부 평원들을 제압
했다. 로마정부는 다급하게 일한국, 마물루크 왕조 심지어 스페인 카탈루냐의
용병대까지 고용하여 사태 진화를 시도하였지만 방위비용 징발로 인한 국내의
대규모 봉기와 카탈루냐 용병대의 반란으로 인해 그나마 남아있던 발칸에서까지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며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낭비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소
아시아는 일부 고립된 지역을 제외하면 완전히 튀르크 유목민들의 지배 아래 들
어가게 되었다.

미하일 8세가 소아시아에 십자군을 부르는 것과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 왕


국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저지하는 목적으로 교회통합논의를 벌이던 1270년대
이후에는 그나마 국가의 지도력을 따르고 있던 교회와 나머지 사회에서조차 분
열을 초래했다. 정부 주도의 교회통합파는 반통합파를 강력하게 탄압하면서 약
10년간 분열된 사회를 이끌어갔다. 1282년에 미하일 8세가 사망하자 교회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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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곧바로 취소되었고 아예 미하일 자신도 파문과 추방령을 받아 수도 외곽에
암매장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아들인 안드로니코스 2세(1282-1328)는 46년의
기간 동안 두 개의 분열을 치유하는데 골몰해야 했으며 잦은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농촌사회의 재건에 노력했다. 그 와중에 튀르크 유목민과 불가리아, 세르
비아 및 베네치아, 카탈루냐 용병대에 이르는 갖은 적과 싸우거나 외교적인 불
리를 감수해야 했던 것은 덤이었다. 하지만 1300년대 초에 연속된 붕괴에도 불
구하고 1320년대에 이르러 농촌경제를 재건하였으며 재정역시 어렵사리 안정화
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금이 서유럽으로 유출되는 당대의 여건상 금본위를 유
지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1304년부터는 시험적인 은본위 화폐제도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베네치아의 경제패권의 구조 속에서 시장의 안정을 꾀하였던
셈이다.
1320년대가 되어 재정이 안정되자 육군과 해군의 증강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자인 안드로니코스 3세(1328-1341)가 명문대족 자제들과
함께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조부 세대의 조심스럽고 신중한 정책에 반대하
며 강경한 대외노선을 주장했다. 이들의 계층적 기반 때문에 1320년대에 벌어진
세 차례의 내전은 늙은 황제의 정부와 그를 지지하는 농민, 중산층 상공업자들
그리고 젊은 황제 일당의 대상인과 대지주, 명문대족의 대결구도로 변해갔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조세경감을 공약으로 세우며 농민층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결국 내전에서 승리했다. 1330년대에는 이 새로운 세대의 통치 집단이 주도가
되어 발칸 곳곳에서 실지수복 전쟁이 진행되었고 여러 지역이 병합되었다.
1340년대에 들어 이 집단은 중심이 되는 안드로니코스 3세가 일찍 사망하면
서 권력을 두고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집단의 2인자였던 요안니스 칸타쿠지
노스(Ioannes Kantakouzenos, 1297~1383)는 자신이 보좌하는 어린 요안니스 5
세(1341-1391)의 섭정을 자처하며 분열을 막고자 했다. 하지만 해군총사령관인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Alexios Apokaukos)는 칸타쿠지노스와 그 배후가 되
는 대상인, 대지주, 명문대족들이 시민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선전
하면서 내전의 단초를 열어젖혔다.
당시 제국 내부에서는 대상인, 대지주, 명문대족들이 자본과 권력을 이용하여
급속도로 부를 팽창시키는 현상이 걱정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특히 식자들뿐만
아니라 노동자에 이르는 하위계층의 사람들까지 이러한 빈부격차가 국가의 시민
적 질서를 해치고 있다며 강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칸타쿠지
노스가 국가의 공적으로 선언되면서 여러 도시에서는 대대적인 시민봉기가 발
생, 자치정부를 마련하고 정부의 통치를 거부하고 나섰다. 특히 이피로스 제국
당시에 자체적으로 황제를 선출하는 역할도 맡아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경쟁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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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있던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가 여러 원인이 겹쳐 격심한 혼란에 빠졌다.
1342년 6월에 테살로니키는 정부의 행정관을 추방한 뒤 스스로 민회와 입법위
원회를 구성하고 집정관 2인을 선발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소위 테살로니키 코
뮌이라고 부르며 1349년 9월에 내외부의 압박으로 무너지기까지 7년 3개월 동
안 독자적인 정부를 운영했다.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지만 아드리아노플과
같은 주요 대도시에서도 1344년이나 1345년까지 자체 정부가 설립되어 칸타쿠
지노스파로 불리는 이들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이 대립하던 현대 냉전 시기에는 주로 마르크스주의
적 관점의 연구에서 이러한 코뮌 운동을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 계급운
동으로서의 성격이 조명되었으며 정치적 개혁운동으로 바라보았다. 반면 자유주
의 진영의 학계에서는 기존 사회에 불만을 품은 열성분자들에 의한 과격한 폭동
으로서 조망되었다. 이는 지극히 20세기적인 이념구도를 중세에 대입한 결과물
이었으며 오히려 20세기의 사상사를 바라보는데 적합한 연구물들이었다. 14세기
중반 당시의 코뮌 운동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와 로마의 공화주의적 전통이 풍
부하게 보존되었던 지역에서 발생했다. 또한 관료도 역임한 알렉시오스 마크렘
볼리티스(Alexios Makrembolites)와 같은 학자들이 남긴 저술을 통하여 당시의
봉기군중들이 단순히 폭도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부의 불균형한 분포와 시민적
질서의 붕괴를 염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구체적인 개혁책을 시행하
였는지는 알 수 없고 상당부분 부정적인 평가도 가능하지만 결국 이들로서는 로
마국가의 주권을 가진 주권자, 국체의 이상을 담은 실현이라는 시민권자의 입장
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했을 뿐이다.
팔레올로고스 왕실이 집권을 시작한 이래 콘스탄티노플 정부는 이전 콤니노스
시대의 교묘하고 강력한 선전책에 미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식인들에 대한 회
유와 통제를 재가동했다. 먼저 이들은 니케아 제국의 통치가문이었던 라스카리
스 가문 통치기의 정통성을 지방정부 수준으로 격하시켰다. 반면 미하일 8세는
원로원과 시민의 추대를 받아 ‘선거왕정’의 충실한 구현을 통해 제위에 올랐음
을 강조하는 수사적 연설의 전통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선거왕정 사상은 팔레올
로고스 정통성을 주장하는 강력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 후계자인 안드
로니코스 2세 시대 이후로는 선거왕정 사상이 공식적으로 사양세로 돌아섰다.
왜냐하면 상당수 식자들과 관료들이 선거왕정 개념을 근거로 팔레올로고스를 부
정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실제로 정부의 통제에 대한 강력한 반격 근거로 사용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궁정연설과 같은 선전책에서는 선거왕정의 사용
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하지만 궁정과 관청에서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인민의
인준에 의한 황제 선출이라는 오래된 전통 자체는 계속해서 무의식과 의식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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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을 가리지 않고 유지되었다. 오랜 내전을 끝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요안
니스 6세로서 제위에 오른 1347년에 다시 한 번 인준절차를 밟았다. 1353년 유
명한 신학자인 니콜라스 카바실라스(Nicholas Kavasilas)가 남긴 언급은 이러한
전통의 궤적을 끝까지 보여주고 있다.

부끄러운 사람들은 왕실의 혈통을 뽐냅니다. 하지만 계보란 것이


황제라는 공직을 주장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니콜라스 카바실라스

1325년의 로마제국은 경제적으로 최후의 절정에 다다랐다. 그 중심은 농촌경


제였다. 인구는 자연적인 한계선상까지 늘어나 포화상태가 되었다. 전란이 간간
이 농촌과 도시를 가리지 않고 할퀴었으나 농업기술과 생산성 향상에 힘입어 생
산력 자체는 발전을 거듭했다. 이 시기에는 구릉지를 넘어 산간에 이르기까지
촌락이 형성되었고 아무리 작은 농촌마을에도 가족이 운영하는 상점이 두어 곳
에 대장간까지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이 두드러졌다.
문제는 인구가 포화 상태에 달하고 농경지와 과수원 개간을 위하여 수없이 넓
은 삼림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1280년 즈음에 미하일 8세가 소아시아의 비티
니아로 순행을 나갔을 당시에 언급되었던 사항이지만 이미 그 즈음에도 평지 근
처의 언덕들까지 야생림이 사라지고 과수원과 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소아시아
에서는 이러한 벌목으로 울창한 산림이 소멸함에 따라 유목민들의 침공을 더욱
쉽게 만들어주는 경향도 있었다.
1346년에 들이닥친 흑사병은 더욱 파괴적이었다. 당시 제국이 심각한 내전 상
태여서 언급은 제대로 되지 않지만 흑사병은 로마인 사회를 완전히 내부적으로
붕괴시키는 직접적 역할을 했다. 그리스 지방에서는 아예 방위능력이 마비되어
이후 세르비아 제국의 침입에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원인도 제공했다. 1347
년에 집권한 요안니스 6세(1347-1354)는 이런 상황을 맞아 내전의 뒷수습을 맡
으면서 상업세 분야를 재조정하며 재정자립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 작업은 성공
적으로 마무리되어 14세기 중후반의 위기를 그나마 지탱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반면 세르비아 방면 외교에 대해서는 간신히 현상유지 및 일부 영토 수
복에 만족해야 했고 제노바와는 통상 분쟁도 겪었다. 여기에 내부 왕실의 분쟁
이 내전으로 터져나오고 이에 오스만 튀르크가 개입함에 따라 위기가 재현되었
다. 결국 1354년 3월 2일, 트라키아 대지진으로 혼란이 이는 가운데 오스만 튀
르크가 발칸 반도에 영토를 확보하면서 로마제국의 마지막 100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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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최후의 100년
1352년부터 발칸에 거점을 두기 시작한 오스만 튀르크는 해당 거점인 침피
(Tzympe) 요새의 반환을 두고 로마제국과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로마제국과 오스만 공국의 관계는 과히 나쁘지 않았다. 안드로니코스 3세
와 요안니스 6세의 세대는 1329년 오스만 공국과 일전을 치른 뒤, 소아시아의
튀르크 공국들과 타협하는 쪽으로 외교노선을 전환했다. 요안니스 6세는 오스만
의 오르한(1326-1362)과 통혼하고 사루한(Saruhan) 등의 여러 튀르크 소국들이
종교적인 성전에 입각하지 않고 현실외교적인 감각에 익숙해지도록 영향력을 행
사하는데 힘썼다. 1340년대와 50년대 초의 전쟁에 튀르크 동맹군이 세르비아의
전쟁에서 지원군 역할을 한 것은 그로 인한 긍정적 작용이었다.
하지만 1354년에 들어 요안니스 6세는 실권하였으며 튀르크 강경책을 요구하
는 요안니스 5세와 지지자들이 정권을 차지했다. 1354년 3월 2일에 발생한 트
라키아 대지진은 이런 상황을 크게 악화시켰다. 대튀르크 방어의 기점에 해당하
는 칼리폴리(Kalipolis)가 지진으로 완파되자 오스만 튀르크가 이곳을 점령한 뒤
자신들의 영토로 선언한 것이다. 요안니스 6세는 이 문제를 외교협상으로 해결
할 것을 주장했지만 요안니스 5세 등 정부는 강경책으로 전환했다. 그러자 오스
만 공국은 다시 성전을 선포하고 여러 튀르크 유목민들을 끌어들여 트라키아로
쏟아져 들어왔다. 로마군이 10여년에 걸쳐서 치열하게 맞서 싸웠다. 하지만 내
전의 연속으로 지방의 역량은 소진되어 있었다. 1359년에 디디모티콘이 함락되
었다가 수복되었으며 얼마 뒤 재차 함락되었다. 1362년에 트라키아 지역에서 군
사도시에 해당하는 아드리아노플이 함락되자 사실상 트라키아밖에 소유지가 없
었던 로마제국은 도시국가 수준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요안니스 5세는 초기의 기세등등하던 모습과 달리 사방으로 동맹자와 구원군
을 모색했다. 1361년경을 전후해서는 이집트 마물루크 왕조나 우크라이나 지방
과 결연, 부족한 식량을 구입하였고 1365년부터는 헝가리 왕국이나 교황청과의
협상을 통해 지원군을 얻고자 했다. 1371년에는 황제 본인이 직접 베네치아와
로마를 방문하여 종교적인 사안을 대폭 양보하였지만 국내의 불만을 야기하기만
했을 뿐 유의미한 소득은 없었다. 이 와중에 오스만 왕조는 1371년 마리차 강
전투로 세르비아인들을 복속시켰다. 훗날 돌아온 요안니스 5세는 결국 자구책으
로 방향을 바꾸어 1373년, 오스만 제국에 예속을 하게 된다. 이 시점 이후로는
로마제국이 자체적으로 무언가 해볼 수 있는 역량은 사실상 사라졌다. 요안니스
5세의 둘째 아들인 마누일 2세(1350~1425)가 테살로니키를 중심으로 오스만에
저항전선을 펼쳤지만 홀로 고립되었다가 1387년 테살로니키를 뺏기면서 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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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물러났다. 오스만 제국은 1389년 1차 코소보 전투로 발칸의 저항세력을 일
소했다. 1391년 황제가 된 마누일 2세는 예속정책을 이어가다가 1394년에 존망
의 위기를 감지하고 저항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1394년부터 1402년까지 8년간
콘스탄티노플에 공성전이 벌어졌고 1395년에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하는 등 발
칸의 그리스도교 세력은 급속하세 스러져갔다. 1398년에 있었던 니코폴리스 십
자군은 호왈 10만에 이르는 세력이었음에도 쉽게 격파되었다.
티무르 제국이 급속하게 오스만 제국을 공격한 끝에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은 일시적으로 붕괴되었고 내전에 빠져들었다. 마누일 2세는
오스만의 내전에 개입하여 제한적이지만 상당수 영토를 수복하고 세력을 수습했
다. 군주의 권위를 확보하는 조치가 취해진 뒤에는 외조부 요안니스 6세가 고안
했던 ‘그리스로부터의 반격’을 계승한 마누일 2세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미스
트라(Mystras)를 중심으로 제2의 근거지를 만들었다. 이곳은 1429년까지 펠로폰
네소스 통일전쟁이 벌어지는 현장이 되었으며, 통일된 국토를 기반으로 1440년
대 콘스탄티노스 11세(1449-1453)가 오스만을 상대로 후방전쟁을 수행하는 근
거지가 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회복속도는 훨씬 빨랐다. 1416년에 베네치아 해군의 공
격으로 함대를 모조리 잃기도 했지만 1420년대에 들어 국력을 급속도로 추스르
고 내정을 안정시켰다. 1421년에 로마정부는 마누일 2세의 장남 요안니스 8세
(1425-1448)의 주장에 따라 오스만에 내전을 일으키려 개입했다. 이 시도가 쉽
게 저지되자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압박하였다. 1425년에 콘스탄티노플
은 예속을 재확인한 대신 안전을 얻었지만 테살로니키는 베네치아에 운영을 위
탁했음에도 불구하고 1430년에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었다. 로마제국은 마지막
수단으로 동서교회통합을 다시 승부수로 내놓았으며 1444년, 로마 교황청은 폴
란드, 헝가리와 함께 바르나 십자군을 시작했다. 십자군은 결과적으로 오스만에
참패하였다. 1448년에는 헝가리의 후냐디 장군과 세르비아 잔존세력이 시도한
제2차 코소보 전투까지 오스만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1449년 즉위한 콘스탄티
노스 11세는 오스만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간주, 승부수를 띄웠다. 그 결과
는 1452년 겨울부터 사전작업이 시작된 오스만의 포위전이었다. 1453년 4월 2
일 시작된 공방전은 5월 29일 동틀 무렵까지 계속되었으며 명맥을 유지하던 로
마제국은 그렇게 사라졌다.

최후의 100년 동안에는 경제사정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1300년대 전반


의 최고의 불안정을 경험한 뒤에는 은화 중심 화폐제도를 통해 경제 변동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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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제하는데 성공하였다. 시험적인 은본위제도의 운용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1367년부터는 금화 생산을 중지하고 은화 생산에 집중하였다. 다만 이 시기에도
지출비용은 많고 조세수입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 공화국에 상당수
부채를 져야 했다. 1453년 망국 당시에는 표준은화 34,000개의 부채가 남아 있
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당시 파편화되어 있는 여러 고립 영토나 콘스탄티노
플 자체에도 해상공화국들의 경제적 침투는 여전했다. 특히 로마시민권을 얻고
국내 상업 활동에 나선 베네치아 출신자들에 대한 베네치아 측의 세금 부과를
두고서 로마 공권력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갈등이 존재하였다.
14세기 후반의 인물인 토마스 마기스트로스(Thomas Magistros)는 시무책을
제언하여 전문 병사들의 양성을 주장했다. 15세기 전반의 학자인 플레톤
(Phleton)과 같은 사람들은 펠로폰네소스의 미스트라 지역을 부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이런 상업적 침투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업을 최대한 진흥하며
병농일치 형식으로 병력을 양성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외에도 1400년 전후한
시점까지 국내 이자율 문제의 해결을 위한 종교법정의 논의 등을 통해서 비록
이미 국가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었지만 사회개혁에 대한 의지는 끊어지지 않았
다.
14세기 후반에 들어서 콘스탄티노플은 14세기 전반의 팔레올로고스 르네상스
와 같은 문화적 힘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반면 펠로폰네소스의 중심이 되는 미
스트라 지방은 도시의 규모를 확대하면서 학자와 예술가들의 마지막 중심지로
발돋움하였다. 비잔틴 양식의 건축이 최종적인 발전형을 드러낸 곳이 바로 미스
트라이기도 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콘스탄티노플과 그 인근이 쇠퇴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배출한 크리솔로라스(Chrysololas)와 같은 학자는 서유럽에
서 그리스 고전학을 취급하는 강의를 개설하면서 외교활동에도 전념하였다. 마
누일 2세가 1400년 전후한 시점에서 서유럽을 방문하였을 때에는 벌써 그리스
로마 문화에 대한 소양이 깊어진 서유럽인들이 그의 방문을 반기며 많은 교류를
남겼을 정도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이 두드러졌다. 1440년대에는 튀르크족 출
신의 의사가 황실병원장을 맡기도 했으며 여전히 우수한 제도를 보유하고 있던
로마제국의 병원은 진료기록체계나 병원 간 네트워크 조직의 측면에서 피렌체
(Firenze)의 새 성모 마리아(Santa Maria Nuovo) 병원 등 서유럽 병원의 체계
적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460년 미스트라, 1461년 트라페준타의 함락으로
비록 정치사적인 로마제국은 멸망해버렸지만 서유럽에 망명한 학자들과 함께 이
러한 영향력은 결코 그냥 사라지지 않았으며 르네상스기 유럽에도 상당한 유산
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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