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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연구 (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51호 (2017.6) pp. 159∼190

1930년대 중반 불교계의 뺷金剛山뺸


잡지 발간과 그 의의
이경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glib14@korea.kr

I. 머리말 III. 뺷金剛山뺸의 발간과 그 의미


II. 식민지 조선의 금강산 ‘발견’ IV. 맺음말

요약문
금강산은 다양한 전승이 혼재하며 장구한 역사를 지닌 공간이다. 식민지기에 들어서
금강산은 근대 관광의 최전선으로, ‘동양의 신비’를 간직한 상업적 위락 공간으로 변모
했다. 식민지의 민족주의자들은 식민지 조선의 역사, 민족혼에 대한 향수를 금강산에서
발견했다. 금강산은 문명과 자연이 혼거하며, 다양한 표상들의 경합장이 되어갔다.
이러한 가운데 불교는 삼국시대 이래 금강산의 문화 전승자로서 존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강산의 불교는 새로운 관광주체와 근대 지식인들의 시선 속에서 고대의 유물,
고정된 경관으로 인식되었다. 금강산에 대한 국내외의 폭발적 관심과 예찬, 언설의 홍
수 속에 불교측은 금강산에 대한 관점을 재정립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천명할 필요가 있
었다. 이러한 계기에 의해 1935년 뺷금강산(金剛山)뺸 잡지가 발간되었다고 보았다. 즉, 잡
지 발간은 금강산이라는 주제에 대한 1930년대 중반 불교계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응
답이었다. 금강산 표훈사가 발간한 뺷금강산뺸은 1930년대 불교계 중앙기관지가 중단된
가운데, 몇몇의 개인과 지방의 사찰 또는 불교 단체들이 잡지를 간행한 맥락 속에 위치
한다. 불교계의 다양한 주체들이 성장하여 잡지라는 근대 매체에 목소리를 담아가기 시

1930년대 중반 불교계의 뺷金剛山뺸 잡지 발간과 그 의의 159


작한, 1930년대 중반 불교문화사의 풍경 속에 뺷금강산뺸이 출현한 것이다.
뺷금강산뺸은 금강산 지명과 전설의 불교적 해석, 조선시대 전통의 발굴에 주력했다.
식민지 개발에 의해 첨단의 관광지로서 새롭게 태어나 식민지 권력에 의해 발견된 비경
으로, 압도적 자연미의 산실로 여겨졌던 금강산에 대해, 불교계는 불교라는 전통에서
금강산을 표상화할 것을 잡지 뺷금강산뺸을 통해 전하려고 하였다. 뺷금강산뺸은 금강산에
대한 다양한 논의 분출과 상업화의 흐름 속에서, 금강산에서의 불교 입지를 드러내고자
한 시도로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금강산, 뺷금강산뺸 잡지, 표훈사, 금강산 관광, 근대 불교잡지, 금강산불교, 최원허

I. 머리말

금강산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를 갖은 산으로 우리


역사에 남아있다.1) 금강산이 명성 높은 유람지로서 주목받은 것은 고려 말 이
후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까지 금강산에는 수많은 지배층들의 발걸음이
이어졌지만, 보다 많은 대중이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이
다. 이 시기에 철도를 비롯한 숙박, 편의시설 등 근대 관광의 인프라가 본격적
으로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에 들어 금강산은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새롭게 표상되었다. 동양의 신비를 희구했던 서구인들과, 식민지에서 관광자
원의 가능성을 찾은 식민지 경영자들의 시선 속에서 금강산은 근대 관광지로
서 새로운 위상을 찾을 수 있었다. 한편, 식민지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금강산
을 과거 조선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간직한 그리운 ‘과거’로서, 또는 조선적
심상과 혼의 산실로 표상하였다.

1) 시대적 흐름에 따른 금강산의 표상을 다룬 논고는 다음과 같다. 테사 모리츠 스즈키, 「금강산」 뺷동
아시아 기억의 장뺸 (삼인, 2015); 龍野沙代, 「金剛山 傳說의 文獻傳承 硏究 : 宗敎的 表象性을 中心으로」
박사학위논문(서울대학교대학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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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운데 불교는 삼국시대 이래 금강산의 수많은 사찰을 유지하며 전
통의 계승자로서 존립하고 있었다. 조선시대까지 금강산 사찰과 승려는 유람
의 인프라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조선시대까지 유람자가 사찰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승려들이 메는 남여(藍輿)를 타고 이동하며 지로승(指路僧)의 안내
를 받는 것은 매우 일반적이었다.2) 그러나 조선시대까지 수많은 유람자들이
금강산을 주제로 한 시문과 서화를 남기는 동안, 승려들이 금강산에 대해 발언
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저 사족들의 유람관련 시문 속에 불교적 전승은 간
접적으로 전해질 뿐이었다. 근대에 들어 금강산은 더 이상 승려들만이 산을 지
키고, 유람자들이 인적 드문 산길을 헤매는 곳이 아니었다. 이제 수많은 ‘속세’
사람들이 넘나들며 산중 상권을 점령하고, 대규모 관광객이 열차에서 내려 호
텔, 여관에 머물다가 줄지어 ‘등산’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금강
산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과 예찬, 언설은 홍수를 이루었다.
이렇게 급변한 상황에서 금강산내 불교의 위상은 큰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
었다. 이에 불교계는 1935년 금강산 표훈사(表訓寺)가 중심이 되어 뺷금강산(金
剛山)뺸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였다. 필자는 불교계가 잡지를 통해3) 금강산에 대
한 자신들의 목소리를 직접 표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았다.
이제까지 근대 금강산과 불교의 관계는 물론 잡지 뺷금강산뺸에 관심을 기울
인 연구는 전혀 없었다. 따라서 금강산에 관한 잡지 출현의 배경과 그 의미를
주목하지 않았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뺷금강산뺸의 발간 배경과 의미를 중심으

2) 이경순, 「17-18세기 士族의 유람과 山水空間 인식」 박사학위논문(서강대학교대학원, 2013),


pp.155-162.
3) 불교계 잡지 발간은 불교근대화의 지표로서 이해되어왔다. 근대 불교잡지의 개설적 연구는 아래
를 참고할 수 있다. 김기종, 「근대 불교잡지의 간행과 불교대중화」 뺷한민족문화연구뺸 26호(2008);
김성연, 「일제강점기 잡지 뺷佛敎뺸의 간행과 그 성격」 뺷선문화연구뺸 5호(2008); 조명제, 「1910년대
식민지조선의 불교근대화와 잡지 미디어」 뺷종교문화비평뺸 30호(2016)
한편, 불교잡지에 수록된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당대 불교 문학장의 주체와 그 특징을 고찰한 최근
김종진의 연구가 주목된다. 당대 불교문학계의 전경(全景)뿐 아니라 불교잡지를 문화적 텍스트로
분석한 의미있는 성과이다. 김종진, 「1920년대 뺷불교뺸지에 나타난 불교유학생의 문학활동-백성
욱・김태흡・이영재를 중심으로-」 뺷불교연구뺸 42호(2015); 「1920년대 뺷불교뺸지 문학장 형성의 주
체와 동력-동력의 중심, 권상로와 대승사・김용사 인맥」 뺷동악어문학뺸 64호(2015); 「 뺷불교뺸지 문
학지면의 연대기적 고찰」 뺷한국문학연구뺸 51집, 동국대한국문학연구소(2016); 「1930년대 뺷불교뺸
지 문학장 구성과 문학적 실현 양상-편집인과 직원・기자를 중심으로-」 뺷불교학연구뺸 48호(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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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뺷금강산뺸을 고찰하기로 하겠다. 이를 위해 먼저, 근대기 금강산에 나타난
변화를, 근대 관광지로의 변모와 금강산에 대한 다양한 언설들을 검토하면서
살펴보겠다. 다음으로, 잡지로서 뺷금강산뺸의 발간 경위와 기사 내용을 분석하
면서 뺷금강산뺸 발간의 목적과 의미를 살펴 볼 것이다. 이를 통해 1930년대 중
반 불교계 잡지 운영의 실태는 물론 당시 불교계가 금강산의 변화에 대해 어떻
게 대처하였는지, 식민지기 금강산에서 불교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
지를 밝히고자 한다.

II. 식민지 조선의 금강산 ‘발견’

1. 금강산, 조선 최대의 근대 관광지

뺷금강산뺸의 발간 배경으로서 근대에 들어서 금강산에서 일어났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금강산은 고려 말 이후 조선후기까지 최고의 유람지였다.
수많은 시문과 서화가 이상적 산수이자 조선 최고의 실경으로서 금강산을 다
루었다. 근대에 들어서 조선을 여행한 선교사를 비롯한 몇몇 서양인들이 인상
적인 여행기를 남겼고4) 식민지 초기부터 금강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제국주의와 근대의 산물로서 근대 관광이 탄생한 시점부터 금강산은 가장 주
목받는 관광지가 되었다.5)
1910년대부터 일본관광업계는 일본 내지인과 서구에 금강산을 소개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일본여행협회 조선지부는 1915년 금강산의 풍경을 3색으로
인쇄한 그림엽서를 제작 배포한바 있으며, 1916년 일본여행협회는 <금강산안
내>를 영문과 러시아어로 발간하였다. 또한 기관지 뺷ツーリスト뺸에 조선관광
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고 금강산을 여러 차례 소개하였다. 한편, 만철(滿鐵)

4) C.W 캠벨(C.W. Campbell), 이사벨라 비숍(Isabell Bird Bishop),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헬렌 포스터 스노(Helen Foster Snow) 등의 여행기가 대표적이다. 이에 관해서는 테사 모리스 스즈
키, 앞의 논문, pp.398-405. 참조.
5) 조성운,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근대 관광의 탄생」 뺷한국민족운동사연구뺸 56호(2008), pp.10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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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관리국이 발행한 금강산안내서에는 금강산지도와 금강산 경치 사진을
실었다. 이러한 안내서에는 장안사나 표훈사, 유점사 등에는 일본어를 잘 하는
승려들이 있어 도움 받을 수 있으며 말휘리, 온정리, 보현동 등에는 헌병이 배
치되어 일본어를 잘 아는 헌병의 안내 겸 호위를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일본 관
광객을 유치하고자 하였다.6) 또한 1910년대 후반 일본의 명사들과 조선총독
이 금강산을 방문하였고, 대규모의 러시아 관광객을 유치하기도 하였다.7)
이러한 금강산에 대한 관심고조와 더불어 금강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첫 단계는 철도의 개통이었다. 1914년 경원선 철도가 건설되면서 금강산 접근
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용이하게 되었다. 곧이어 사철(私鐵)인 금강
산철도회사(金剛山鐵道會社)가 1919년 설립되어 전기철도를 건설하고 노선을
확장해 가다가, 1931년 마침내 철원에서 내금강역까지 확장 개통하였다.8) 이
로써 경성역에서 출발한 여행자가 7, 8시간 만에 금강산 입구에 도착할 수 있
었다. 또한 조선철도국은 경원선의 안변역에서 분기하여 흡곡(歙谷)까지 이어
지는 동해북부선을 1929년에 개통하였다. 1932년에는 외금강역에서 고성까
지 전 노선이 개통 완료되었다. 이러한 철도노선의 완비에 따라 1930년대 초반
금강산에 대중관광이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26년 금강산 탐승객 수는
2천 정도이고 금강산 철도를 이용한 승객은 881명이었지만, 철도가 내금강역
까지 확장된 1931년에는 탐승객이 15,219명 1939년에는 24,892명으로 늘어났
고9) 1933년에는 4만 명에 이르렀다.10)
금강산 주변에는 금강산 철도 건설과 함께 역사(驛舍) 건물과 새로운 숙박시

6) 서기재, 「금강산, 기이한 세계로의 초대」 뺷조선여행에 떠도는 제국뺸 (소명출판, 2011), pp.238-246.
7) 서기재, 앞의 논문; 李良姬, 「日本植民地下の觀光開發に關する硏究」 뺷日本語文學뺸 24집(2004), pp.469-472
참조.
8) 금강산 철도는 1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 경제의 호황기에 계획되고 전후에 착공된 사철로, 금강산
철도회사는 철도사업과 함께 발전소 건설을 통한 전원 개발과 전력 공급을 주력 사업으로 하였다.
경원선 철원역에서 시작된 금강산 철도는 김화를 거쳐 내금강역에 이르기까지 총연장 116.6km
로, 1919년에 착공되어 1924년 1차로 철원-김화간이 개통되고 1931년 전 구간이 완공되었다. 靑木
英一, 「解題」 뺷金剛山電氣鐵道20年史뺸 (金剛山電氣鐵道株式會社, 1940), p.2.
9) 서영채, 「최남선과 이광수의 금강산 기행문에 대하여」, 뺷민족문학사연구뺸 24(2004), p.248.
10) 大熊瀧三郞 發行兼編輯, 뺷金剛山探勝案內記뺸 (印刷一合資會社, 1934),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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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속속 등장하였다. 내금강역사 건물은 한국사찰의 외양으로, 외금강역사
는 북유럽식으로 건축하여 그 자체를 볼거리로 만들었다. 장안사 입구, 온정
리, 내강리 등 상업지구에는 남만주철도국에서 운영하는 내금강 장안사 호텔,
외금강 온정리호텔 등 일본인들이 이용했던 고급호텔이 들어섰고, 역 주변에
는 여관, 요리점, 온천이 번창하였다. 또한 산내 관광 기점에도 찻집, 산장이 들
어섰는데11), 이러한 상업시설을 경영하는 것은 일본인들이었다.12) 또한 산내
에 카츠라기신사(葛木神社)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신사들이 서구식 건축물의
교회 수련관과 더불어 곳곳에 위치하여 불교 일색이던 금강산의 종교지형에
도 변화가 찾아왔다.
한편, 금강산내 탐승객을 위한 탐승로도 개발되었다. 종래 내외금강산을 오
가려면 상당한 거리를 우회하여 온정령이나 내외무재령을 넘어야 했었지만
금강산전철회사는 1929년 최고봉인 비로봉으로 넘어가는 탐승로를 개설하였
다. 탐승로와 연결된 비로봉 인근 용마석에 휴게소와 매점을 겸한 숙박소도 설
치하였고, 구성동 등 새로운 구역을 관광지로 개발하였다. 사선교에는 탐방객
을 위한 캠프장이 설치되었고 온정리와 신계사간 전화선이 개통되었다. 한편,
말휘리와 세동간, 온정리와 삼가리간 자동차도로도 건설되었다.13) 이렇게 철
도, 도로, 숙박, 각종 편의시설 등 금강산을 근대 관광지로 만들기 위한 인프라
는 1930년대 초반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금강산 안내책자는 다양하게 제작, 배포되었다. 1915년 만주철도주식
회사 경성관리국의 뺷朝鮮鐵道旅行案內 附 金剛山探勝案內뺸, 1928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펴낸 뺷世界的名山金剛山探勝案內뺸 등 총독부, 철도국에서 탐승객

11) 1935년경 만폭동, 분설담, 묘길상, 비로봉, 구룡폭, 선담, 육화암, 만상계, 만상정, 온정령 입구, 입
석리에 茶店이 있었다고 한다. 산장으로는 비로봉 정상에 위치한 久米山莊이 대표적이다.
12) 이광수의 기행문(뺷금강산유기뺸, 1924, 시문사)에서도 관광객을 맞는 일본인 찻집이나 음식점이
자주 등장한다. 수학여행단이나 문인들의 기행문에는 등산 도중 다점 주인의 오사카 사투리를 듣
는다던지, 비로봉 근처 산장에서 싸준 도시락이 히노마루 모양이었다는 등의 경험담이 등장한다.
원두희, 「일제강점기 관광지와 관광행위 연구: 금강산을 사례로」, 석사학위논문(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11), p.105.
13) 岡本曉翠, 뺷京城と金剛山뺸 (京城眞美會, 1932), pp.31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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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을 위해 발간한 책자 외에도 도쿠다(德田) 사진관이나 가메야쇼텐(龜屋商
店), 금강산협회(金剛山協會)를 비롯하여 개인 발행까지 금강산에 대한 책은 그
수가 수십 권에 달하였다.14) 조선총독부철도국에서는 조감도로 유명한 화가
요시다 하츠사부로(吉田初二郞)와 마루야마 반카(丸山晩霞)에게 금강산 지도
제작을 의뢰하여 인쇄물로 판매하거나 금강산 안내책자에 게재하였고 1930
년대가 되면 별도의 안내인 없이 교통시간, 요금, 지도 등 상세한 정보가 담긴
안내책자만으로도 금강산 탐승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제반 사업과 발맞추어 1932년 조선총독부와 강원도청, 금강산전철
회사의 협의에 의해 재단법인 금강산협회(金剛山協會)가 출범하였다. 협회장
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政務總監)이 추대되어, 당시 이마이(今井田)총감이 초
대 협회장을 맡았다.15) 금강산협회는 금강산의 경승보존과 이용증진과 관련
된 시설경영을 위한다는 취지를 내세우고, 금강산의 조사, 소개 및 선전, 강연・
전람회의 개최, 각종 숙박・오락・별장・안내 시설 경영을 사업내용으로 하였
다. 금강산협회는 금강산 국립공원화를 염두에 두고 사업을 추진하였다.16)
이렇게 식민당국과 일본 여행업계가 금강산에 보였던 관심과 그들에 의해
이루어진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식민지기에 들어서 금강산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식민지 개발의 전형으로서 철도를 비롯한 근대적 관광 인프라가 구
축되고,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변모했다는 점이다. 이로서 1930년
대 전반 금강산은 본격적인 대중관광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2. 금강산에 대한 언설과 표상

14) 금강산 관광 안내 책자에 대해서는 서기재, 앞의 책, pp.261-264에 수록된 목록을 참고할 수 있다.
15) 岡本曉翠, 앞의 책, pp.293-310 ; 「金剛山協會組織으로 天下에 名勝紹介」 뺷동아일보뺸 1932.4.21.
16) 1931년 국립공원법이 제정되면서 일본 내지에서는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규슈의 운젠(雲仙), 하
코네(箱根)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선정하자 조선총독부는 금강산을 국립공원으로 선포하려는 계획
을 세우게 되었다. 「國立公園領制定し金剛山を指定 施設費は國庫負擔」 뺷大阪朝日新聞뺸 1936.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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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의 최대 관광지로 개발된 금강산에 대한 다양한 언설 속에 금강
산과 금강산 사찰이 어떻게 표상되는지 살펴보자. 일본의 저명 문필가들의 금
강산에 대한 탐방이 늘자 그 가치에 대한 기술도 이어졌다.

후지산에 오르지 않은 자와 함께 산수에 대해 논할 수 없다고 이야기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알프스에 오르지 않는 자와 함
께 산수에 대해 논할 수 없다고 이야기됐다. 그러나 이제는 금강산을 오르
지 않는 자와 함께 산수를 논할 수 없다고 이야기되는 시대가 왔다.17)

오마치 게이게츠(大町桂月)가 쓴 시에는 금강산은 한복을 입었지만 속에는


양복, 그 옷 안에는 야마토 남성의 혼이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한편, 오카모
토 교수이(岡本曉翠)는 젊은이들이 정신을 수양하고 의지를 단련하는 데 금강
산 경승을 관람할 것을 권하였으며, 마에다 히로시(前田寬)는 금강산이 후지
산, 일본 알프스와 견줄 수 있는 일본 3대 풍경으로 설명하였다.18) 이렇게 금강
산은 식민지 조선이라는 범위를 넘어서 제국의 자랑할 만한 자연유산으로 평
가되었다.
한편, 일본인에 의해 제작된 금강산 안내서에는 때 묻지 않은 동양의 신비로
서 금강산이 소개 되었다. 이것은 19세기 말 서구 탐험가들의 시선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쓰여진 서양인들의 기행문 속
에서, 금강산은 환상적인 풍경과 고대 사원이 결합된 모습으로 신비한 타자의
이미지와 딱 들어맞아 ‘오리엔트의 화신’으로 묘사된 바 있었다.19)
또한 금강산 안내서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조선시대에 잘 알려지지 않
았던 금강산이 근대 서구인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1926년 마츠모토 다
케마사(松本武正)와 가토 쇼린(加藤松林)에 의해 발간된 금강산 안내서 뺷金剛山

17) 大町桂月, 뺷滿鮮遊記뺸, 1919(뺷大正中國見聞錄集成뺸 제8권, ゆまに書房, 1999, pp.1~2)


이 글에서 알프스는 ‘일본 알프스’를 말한다. 19세기 후반 영국의 선교사 W.웨스턴이 일본 혼슈의
히다, 기소, 아카이시 산맥을 탐험하고 명명한 것이다.
18) 岡本曉翠, 앞의 책; 前田寬, 뺷金剛山뺸 (朝鮮鐵道協會, 1931).
19) 테사 모리츠 스즈키, 앞의 책,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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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勝案內뺸에서는, 금강산은 삼국시대 때부터 명소였지만 억불정책을 썼던 조
선시대를 거치면서 세인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소수의 시인 묵객들만이 방
문하는 곳으로 변화하였고 그런 금강산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1894년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 여행가 비숍이었으며, 서울 주재 독일 영사이자 여행가였던 크
뤼거가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유럽에 알림으로써 금강산은 새롭게 국제적 명
소로 부각하기 시작하였다고 기술하였다.20)
이러한 기술 속에 금강산은 전기철도의 개통과 유럽풍의 호텔이라는 문명
개발과, 신비에 둘러싸인 원시 그대로의 자연이 공존하는 장소로 이미지화되
었다. 이것은 근대 관광이라는 대중적이며 정서적 소비를 이끄는 원천이었다.
또한 금강산 안내문에서는 자연의 풍경이나 고대 불교 유적만이 강조되고 그
사이의 문화사는 드러내지 않았다. 이러한 금강산의 이미지 속에 금강산의 사
찰들은 고대로부터의 전승이 박제화 되어 남을 뿐 그 이후의 역사와 실제 생활
은 철저히 소거되었다.
이러한 논조는 금강산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왜곡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
금강산에는 삼국시대 이래 역사와 전승을 간직한 수많은 사찰이 근대까지 존
재하고 있었으며, 특히 조선후기에는 산수유람의 전성기를 맞아 금강산 유람
이 대유행을 이루었다. 금강산에 대한 근대 여행안내서의 내용은 금강산에 뿌
리를 내리고 상주하고 있던 불교세력이나 조선시대의 산수유람 활동, 그로 인
한 수많은 문화적 성과를 무시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역사성을 배제하고 서
구에 의해 발견된, 때 묻지 않은 신비한 장소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특
히 고려시대에는 금강산 탐승객이 많았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쇠락했고 20
세기에 와서 크게 변화를 맞았다고 한 기술은, 조선인들이 제대로 지켜오지 못
한 금강산을 일본이 개발시킨다는 명분과 식민지 개발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설파되었다.
한편, 식민지 조선의 많은 문필가들도 금강산을 찾았다. 대표적인 이가 이

20) 서영채, 앞의 논문, pp.246-247에서 재인용.

1930년대 중반 불교계의 뺷金剛山뺸 잡지 발간과 그 의의 167


광수(李光秀), 최남선(崔南善)인데 이들의 기행문을 분석한 연구에서는 근대주
의자 혹은 식민자의 시선과, 민족주의자의 시선을 대비하였다.21) 이광수가 금
강산의 자연미에 대해 ‘합리적 관찰자이자 심미적 분석가’로서 입장을 취했던
것에 비해, 최남선의 태도는 아래와 같다.

조선인에게 금강산은 그저 풍경이 아름답고 수려할 뿐인 지상의 현상만


은 아닙니다. 실상 朝鮮心의 실물적인 표상이자 조선 정신의 구체적 표상
으로 조선인의 생활, 문화 및 역사에 장구하게 긴밀한 관계를 갖는 성스
러운 존재입니다.22)

최남선은 금강산을 조선적인 것의 물적 표상, 조선정신의 구체적 표상으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잡지 뺷금강산뺸에서의 불교 지식인들이 금강산을
불교 혹은 불교의 이상과 동일시하고 한 것과 유비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현진건(玄鎭健), 문일평(文一平), 한설야(韓雪野) 등23) 당대 문필가들의
기록을 비롯하여 다양한 기행문에 나타난 공통점은, 금강산의 자연미에 대한
예찬으로 금강산을 이상적 자연으로 표상화한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문명과
근대적 개발에 의해 훼손되어 가는 금강산에 대한 아쉬움이 드러나 있다. 불교
인들도 금강산이 원래 신비적 명산이자 장엄한 도량으로 이곳을 참배하려면
수삼일의 재계가 필요했던 곳인데, 이제 금강산이 ‘평범적, 보통적’으로 개방
되어 안타깝다는 감상을 남겼다.24)
특히 불교사찰에 대한 감상은, 금강산의 사찰, 특히 장안사(長安寺)가 관광
지화에 따라 세속적으로 변했다는 아쉬움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태도는 고아
한 옛 모습이 유지되고 있는 표훈사에 대해 칭찬을 한 부분에서도 찾을 수 있
다.25) 이들의 정서는 금강산에 대한 전면적인 관광 개발과 상업적 위락시설의

21) 서영채, 앞의 논문, p.257.


22) 최남선, 뺷金剛禮讚뺸, 1927 (문성환 옮김, 경인문화사, 2013, p.15).
23) 현진건, 「一日半의 金剛山」;문일평, 「東海遊記」; 한설야, 「金剛山遊記」.
24) 一記者, 「金剛山의 開放은 一大恨事라」 뺷鷲山寶林뺸 제2호(1920. 4).

168 불교학연구 제51호


확대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히지만, 한편으로는 식민화 이전을 신성시하고 그
로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민족주의적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26) 하지만 금강산 불교사찰의 ‘훼손’을 비판하고 그 이전 상태를 그
리워하는 정서의 표출에도, 금강산 불교의 구체적 역사, 혹은 근대화의 물결
속에 개혁을 꾀하고 있던 당대 불교현실 역시 고려되지 않았다. 탐방객의 시선
에서 불교는 그림 속에 고정된 옛 경관과 정취로 희망되고 소비되는 대상이었
던 것이다.

III. 뺷金剛山뺸의 발간과 그 의미

1. 뺷금강산뺸 의 간행 경위

금강산 기행문이나 관광 안내서 성격의 책자는 많았지만 금강산을 주제로


한 잡지는 유일하게 불교계에서 발간되었다. 1935년 9월에 금강산 표훈사가
창간한 뺷금강산뺸이 그것이다. 뺷금강산뺸은 1936년 4월까지 통권 10호까지 발
행되었다. 이 잡지의 발간은 금강산 표훈사의 주지 최원허(崔圓虛)가 주도하였
다.27) 창간호에서 마지막호까지 편집 겸 발행자는 권상로(權相老), 인쇄자 유
국종(劉國鍾)였고, 인쇄소 중앙인쇄소, 발행소 금강산사, 정가 10전, 총판매소
표훈사로 판권장에 기록되었다.

25) 현진건, 「一日半의 金剛山」, 뺷동아일보뺸 (1935.8.18.)


26) 에드워드 W. 사이드, 뺷문화와 제국주의뺸, 김성곤・정정호 옮김(창, 2015), pp.64-69.
27) 최원허는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 한학을 수학하고 기독교인으로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안
성 청룡사 용허의 영향으로 불교에 입문하였다. 20세 무렵 금강산 표훈사에서 출가하고 안변 석왕
사 불교전문강원을 졸업하고 6・25전쟁 때까지 금강산 사찰에서 수십 년간 수행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 원허는 범어사와 선암사 등지에서 수행하였으며 1954년 이후 불교정
화운동에서도 비구측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962년 불교정화이후 통합종단 설립 당시 비구측
대표로서 활약하다가 1966년 입적하였다. 최원허는 1935년 당시 표훈사라는 대찰의 주지로서, 출
가이후 줄곧 금강산 사찰을 지킨 인물이다. 또한 잡지에 수록된 최원허의 글은 모두 다섯 편인데,
순 한글을 쉬운 구어체로 기록되었다.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법문이나 강연의 내용을 채록한 것이
아닌가 한다.

1930년대 중반 불교계의 뺷金剛山뺸 잡지 발간과 그 의의 169


창간호가 나오기 이전 원래 잡지 명칭은 ‘金剛’이었지만 일본에 동명의 잡지
가 있어 ‘금강산’으로 개명할 수밖에 없었다.28) ‘금강산’이라는 이름을 채택함
으로서 금강산의 장소성을 더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
다. 그렇다고 해서 금강산이 금강산내 사찰 또는 표훈사의 기관지로서 성격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잡지의 면면은 금강산을 중심으로 하되 불교종합지의 성
격을 가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30년대 중반 잡지발간을 금강산내 일개 사찰인 표훈사에서 주도
한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당시는 중앙기관지인 뺷佛敎뺸조차 휴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1930년대 들어서 문식률이 높아지고, 신문사 창간의 잡지들이 등장
하면서 잡지시장이 크게 확대되고 있었던 반면, 불교계는 중앙기관지가 휴간
된 상태로 1930년대 중반에는 뺷佛靑運動뺸, 뺷禪苑뺸 정도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
었다. 그러던 것이 1935년을 기점으로 불교계에서도 새로운 잡지들의 창간이
이어졌다. 뺷금강산뺸의 창간 한달 전인 1935년 8월에 뺷佛敎時報뺸가 창간되었
고29), 뒤이어 뺷금강산뺸을 필두로 지방에서 지역적 특수성을 내세운 불교잡지
의 간행이 기획되었다. 1936년 경남 고성군 옥천사(玉泉寺)에서는 뺷佛報뺸의 발
간 계획이 알려졌고, 경북지역에서는 뺷慶北佛敎뺸가 탄생했다.30) 이어 보현사
의 뺷琢磨뺸(1938), 봉선사의 뺷弘法友뺸(1938)가 뒤를 이었다. 이러한 지방 사찰,
지역 불교계가 잡지를 발간한 선례는 1920년대에는 1920년 통도사에서 발간
한 뺷鷲山寶林뺸, 뺷潮音뺸이 유일했고, 1930년대는 뺷關西佛敎뺸 (1931)정도를 들 수
있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지역불교의 단위에서 잡지가 본격적으로 등장
한 것은, 1910년대 이후 불교계의 근대 교육의 확대, 승려들의 일본 유학의 경
험, 불교청년운동 등으로 인해 대중매체로서 잡지의 저변이 지역단위까지 확
산된 영향이며, 1930년대 팽창한 잡지시장에 자극받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31)

28) 「金剛山創刊及 第二號出來」 뺷佛敎時報뺸 제3호(1935. 10).


29) 김태흡이 주도한 뺷佛敎時報뺸는 심전개발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끈 매체로서, 1930-40년대 사실상 불
교계 언론의 역할을 담당했다. 김광식, 뺷불교 근대화의 이상과 현실뺸 (도서출판 선인, 2014), p.100.
30) 뺷佛敎時報뺸 제9호(1936. 4).
31) 이러한 현상은 중일전쟁 발발이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민간 출판시장이 부흥기를 맞

170 불교학연구 제51호


이러한 시대적 여건 속에 금강산 표훈사에서 뺷금강산뺸 이 창간되었다. 발간
주체인 표훈사 주지 최원허는 금강산 표훈사에만 30년을 거주하면서도 금강
산을 위하여, 불교를 위하여 뚜렷한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는 자괴감을 극복하
기 위하여 금강산불교회(金剛山佛敎會)를 조직하고 뺷금강산뺸을 창간하였다고
밝혔다.32) 금강산이라는 장소적 특수성, 금강산에 대한 출판물의 홍수는, 깊은
산중에서도 잡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문화적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금강산불교회는 1935년 9월 7일 경성부 수송동 각황교당 내에서 권상로의
사회로 창립식을 가졌다. 이때 참석자는 22인이었고, 임원으로는 최원허, 안진
호(安震湖), 김태흡(金泰洽) 3인이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김태흡이 발간한
뺷普德閣氏의 緣起뺸, 뺷法起菩薩의 緣起뺸 의 저술과 권상로가 편집한 뺷금강산뺸 잡
지가 금강산불교회의 사업임을 보고하였다. 또 금강산불교회의 사무실은 표
훈사이며 출장소를 경성에 둔다고 하였는데 불교회의 설립 목적을 금강산을
중심으로 조선불교를 연구, 선전한다고 기술하였다.33)
어떤 연유에서인지 금강산불교회 창립이후 잡지 발간이 이루어진 것이 아
니라 창간호 및 김태흡의 책이 발간된 직후로 금강산불교회의 창립이 늦춰졌
다.34) 이것으로 보아 최원허는 이전부터 금강산 잡지를 창간할 목표를 세우고
꽤 오랫동안 권상로, 김태흡과 접촉하며 출판 사업을 기획했을 가능성이 있다.

았던 정황에서도 그 배경을 살펴볼 수 있다. 민족주의 열풍에 의한 국내 작가 작품의 구독, 전시경


제의 활성화로 출판계의 활황이 이어지면서 출판시장이 확대 되었던 것이다. 방효순, 「일제시대
민간서적발행활동의 구조적 특성에 관한 연구」, 박사학위논문(이화여대대학원, 2001), pp.160-162.
한편, 김수진의 연구에서는 1927년에서 1930년대 중반까지 출판계의 특징으로, 총독부의 사회주
의 운동에 대한 단속과 출판물 검열의 강화되고 조선어잡지가 대중지를 표방하는 한편, 일본어 출
판물에 대한 의존이 심화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김수진, 뺷신여성, 근대의 과잉뺸 (소명출판, 2009),
p.104
32) 최원허, 「서원의 말씀」 뺷금강산뺸 2호(1935.10).
33) 「금강뉴스」 뺷금강산뺸 2호(1935.10).
34) 뺷금강산뺸 창간 한달 전 나온 뺷불교시보뺸에는 최원허가 잡지 발간은 물론 다음과 같은 출판계획까
지 수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금강산 표훈사 주지 최원허화상은 금강잡지를 출판하는 동시에 금
강산에 대한 傳說 혹은 史話를 거두어 팜푸레트식의 단책을 발행하기로 하고 이를 본사주간 김태
흡선생의게 위탁하야 준비중에 우선 제1차로 「觀音菩薩靈驗錄 普德閣氏의 緣起」라는 제로 보덕각
씨에 대한 信仰叢書를 印刊中인데 제2차, 제3차로 五十三佛의 渡東緣起, 麻衣太子 出家緣起 등을 출판
하리라더라.”
「金剛山傳記의 短冊發行」 뺷佛敎時報뺸 제1호(1935.8).

1930년대 중반 불교계의 뺷金剛山뺸 잡지 발간과 그 의의 171


또한 출판의 성과가 먼저 나오고 금강산불교회라는 단체를 구성하는 것이 보
다 잡지발간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뺷금강산뺸 전호의 발행 상황은 아래와 같다.

<표 1> 뺷금강산뺸 발행 상황


권호 간행연월일 본문 면수 정가 비고
1 1935.9.1 32 10전 창간호
2 1935.10.1 32 10전
3 1935.11.1 32 10전
4 1935.12.1 32 10전
5 1936.1.1 56 10전 신년 특대호
6 1936.2.1 32 10전
7 1936.3.1 32 10전
8 1936.4.15 32 10전 발간일을 15일로 변경
9 1936.5.15 31 10전
10 1936.6.15 32 10전 종간호

매월 발간되는 월간지로서 매월 1일 발간되다가 8호부터 15일로 발간일을


늦추었다. 5호는 1936년 신년 특집호로 꾸며졌다. 본문 면수는 신년호를 제외
하고 32면이었고 평균 기사 수는 9.5편이었다. 면수가 적은 대신 정가는 10전
이었는데 이것은 잡지의 가격 자체로만 본다면 상당히 낮은 가격으로 보인다.
1930년대 신문사가 발행하는 이른바 ‘신문잡지’가 대거 출현하면서 보인 현상
중 하나는 잡지 가격이 낮아지고 잡지 시장이 확대되었다는 점이다.35) 1924년
창간된 뺷불교뺸가 정가 20전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10여년 후 발간된 잡지가 지
면이 축소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20년 전인 1910년대 불교잡지의 가격
으로 돌아간 셈이다.
한편, 이 뺷금강산뺸의 발행비용은 어떻게 충당했을까. 우선은 최원허의 원력
으로 표훈사가 1차적인 화주역할을 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뺷금강산뺸

35) 뺷동아일보뺸의 뺷신동아뺸(1931.11) 뺷조선중앙일보뺸 뺷중앙뺸(1933.11), 뺷매일신보뺸의 뺷월간매신뺸


(1934.2), 뺷조선일보뺸의 뺷조광뺸(1935.1) 등이다. 1920년대 40-50전대 잡지들이 1930년대 20전대로
가격이 오히려 인하되었다. 정진석, 뺷한국언론사뺸 (나남출판,1990), pp.273-275.

172 불교학연구 제51호


지에서는 광고의 면면과 분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면 광고비가 제작비의
상당부분을 충당했다고 추정되는데 1호의 경우 기사는 32면인데 광고가 12면
을 차지한다. 이 밖에 3호는 16면, 5호인 신년 특대호에는 무려 28면의 광고가
실렸다. 그러나 1호, 3호, 5호에서 보인 집중적인 광고는 이후 권 호에서는 찾
을 수 없게 되었다. 광고주 발굴과 후원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광고주체는 <표 2>와 같다. 교계 기관, 지역 사찰들은 물론, 각종 단체장, 신
도, 사업체들이 광고를 실었다.

<표 2> 뺷금강산뺸 게재 광고 주체


1호 2호 3호 4호 5호 6호 7호 8호 9호 10호 합계
교계기관 2 3 5
금강산내 사찰/신도 6 1 1 7 15
경성 사찰 및 포교소 4 6 10
지방사찰 및 포교소 4 1 41 46
서점/출판사 4 4 5 3 7 3 2 2 2 3 35
공직자/사회단체장 5 1 7 1 14
신도 9 2 3 1 12 27
여관 1 13 12 1 1 28
기타 사업체 8 1 4 2 15 30
합계 43 9 34 6 104 3 3 2 2 4 210

<그림 1> 뺷금강산뺸 광고 종류 및 비중

<표 2>와 <그림 1>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1930년대 중반 불교계의 뺷金剛山뺸 잡지 발간과 그 의의 173


은 지방 사찰 및 포교소이다. 이것은 뺷금강산뺸이 금강산과 경성에 국한된 사업
이 아니라 전국을 무대로 뺷금강산뺸의 보급에 힘썼음을 말해준다. 또한 숙박업
체를 포함한다면 사업체의 광고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즉 전체 광고의
27%가 사업체 광고이다. 이러한 광고는 경성의 큰 여관을 비롯해 금강산 주변
의 다양한 사업체들이 총 망라되었다. 즉 내금강의 여관들, 외금강사진동업조
합, 외금강안내조합, 외금강노동조합, 찻집, 외금강 온정리 숙옥영업조합(宿屋
營業組合), 내금강번영회 등이 광고로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금강
산이 처한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금강산은 이미 교계는 물론 다양한 층위
관민의 관심과 더불어 금강산에서 수익사업을 벌이고 있는 상업적 기구들로
중첩된 공간이었던 것이다.
한편, 뺷금강산뺸 잡지의 배포방식은 당시 일반적인 방법으로 구독자를 대상
으로 한 우편 판매가 주가 되었을 것이다.36) 하지만 지사 혹은 분매소를 모집
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잡지의 보급과 판매수익의 증대를 위해 금강산
과 경성주변 연고지를 중심으로 <표 3>과 같이 지사 및 분매소를 설치하고 지
사장을 두었다.37)

<표 3> 뺷금강산뺸 支社 및 分賣所


지사 및 분매소 지사장
1 경성부 누하동 金剛山社
2 외금강 온정리 京城旅館 文明鎭
3 외금강 神溪寺 宣日峰
4 경성부 관동 佛敎時報社
5 경성부 서대문정 卍商會 (安震湖)
6 경성부 동대문밖 창신동 安養庵
7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 寶月庵

또한 뺷금강산뺸 9호 사고(社告)에는 잡지 대금 납부를 촉구하면서 지분국(支

36) 조명제, 앞의 논문, p.99.


37) 뺷금강산뺸 4호(1935.11), p.31.

174 불교학연구 제51호


分局) 설치 지원을 받는다고 알렸다. ‘부수를 청구하였다가 그 다음달에 판매
된 현금(3할 할인)과 남은 부수를 송부하는’ 조건이었다. 이러한 지사 및 분매
소의 설치에도 불구하고 발행비용을 감당하기에 힘이 부쳤던 것 같다. 종간호
인 뺷금강산뺸 10호에도 종간을 알리는 어떠한 보고나 기미도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나왔던 뺷불교시보뺸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렸다.

「金剛山雜誌의 休刊」
금강산불교회장 표훈사 최원허화상의 간선으로 권상로선생이 편집하
야오든 월간 금강산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7월호부터 당분 휴간
케 되엿다.
… 金剛山은 本報가 出生한 후 한달을 뒤떨어져서 나와 가지고 무던하게
도 열달이나 쫓아왔는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十號로서 終結을 지을는지
도 모른다고 하니 同業者로서 참으로 가슴이 아픈 일이라 이만큼 끌어온
것도 崔圓虛, 權相老 其他 여러 先生님네의 힘이었지만은 文章보다도 熱誠
보다도 金錢을 가져야 일이 되는 데에 있어서는 여러 先生님께 더 어떻게
하시여 보시라고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金剛山誌의 배경이 金剛
山 四寺이니만치 이 四寺의 諸位가 무슨 方針으로든지 이것을 좀 더 살릴
才幹이 없으신가? 考慮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38)

결국 뺷금강산뺸은 10호로써 종간되었는데 그 이유는 발간비용의 문제였음


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기사를 통해 금강산의 4개 주요사찰 중 표훈사를 제
외하고, 교구 본사인 유점사를 비롯한 장안사, 신계사 등이 과연 이 뺷금강산뺸
지의 발간에 얼마나 힘을 보탤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궁금하다. 금강산 사찰을
대표하고 31본산 중 하나였으며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했던 유점사가 발간 주
체로 나서지 않았던 정황39), 최원허 주지가 표훈사를 내세워 금강산을 홍보하

38) 뺷佛敎時報뺸 제12호(1936. 7).


39) 유점사는 식민지기 31본산체계에서 건봉사와 함께 금강산을 대표하는 본산으로서 31본산 중에
서도 경제력이 상위에 속했다. 1915년 30본산연합사무소를 설립하고 각 본사를 사세에 따라 9등
급으로 나누고 분담금을 등급별로 거두었는데 유점사는 당시 1등지인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다
음인 2등지로 분류될 정도였다. 한동민, 「사찰령 체제하 본산제도 연구」 박사학위논문(중앙대학

1930년대 중반 불교계의 뺷金剛山뺸 잡지 발간과 그 의의 175


려 했던 것은, 금강산내 사찰들의 위상에 대해 면밀한 고찰이 필요한 부분이
다. 당시 총독부가 주관한 심전개발운동의 연사로 전국을 누비게 된 권상로의
바쁜 일정도 편집업무를 지속하기 어려웠던 요건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김
태흡이 금강산의 주요 4개 사찰의 협력과 발간 의욕을 부추겼지만 이후의 성과
는 나오지 않았다. 뺷금강산뺸은 발간 10개월 만에 10호로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2. 금강산 불교 전통과 역사성의 복원

뺷금강산뺸의 구성과 기사 내용을 중심으로 잡지 발행의 목적과 의미를 살펴


보기로 하겠다. 뺷금강산뺸 간행한 금강산불교회의 설립 취지는 다음과 같이 기
술되었다.

이러한 名山을 더 값있게 되기는 그 敎理가 廣大하고 그 思想이 深奧한 佛


敎가 이 山의 主人公으로 安住하면서 붙어이니...더욱이 그 일홈이 높아진
同時에 金剛山은 佛敎의 산經典이 되고 만 것이다... .朝鮮의 金剛山은 그 自
體가 萬古의 傑作인데다가 그우에 佛敎의 魂을 너코 佛敎의 衣裳으로써 그
몸에 맛당한 裝飾을 하엿스니 그 일흠이 얼마나 들녓겟느냐. 朝鮮안에 山
岳처노코는 佛敎寺刹 없는곧이 別로히 없지마는 金剛山처럼 일흠을 드날
린 寺刹은 없다고 하여도 過言이 아닐 것이다. 世人으로서는 이 山을 싸고
돌며 여러 가지의 名目으로 金剛山의 이모저모를 巧妙히 宣傳하야 利得을
取하기에 汲汲하는 이가 不少하되 金剛山의 眞面目인 佛敎의 理想을 널리
宣傳하야 天下人사람의 머릿속에 金剛山을 紹介시켜서 永遠한 金剛種子의
씨를 뿌리는 이가 없으니...40)

이 글에서는 불교야말로 금강산의 주인공이며, 금강산은 불교의 산 경전이라


고 하면서 금강산 사찰들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금강산을 둘러싼 세인들의 선
전과 이익 추구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금강산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는

교대학원, 2005), pp.191-192.


40) 「金剛山佛敎會趣旨書」 뺷금강산뺸 2호(1935.10), pp.30-31.

176 불교학연구 제51호


불교의 이상을 선전하여 사람들에게 금강산을 소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5호에 실린 김태흡의 「新年과 金剛山佛敎會의 使命」에서는, 금강산의
위용과 묘상은 금강산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인지할 수 없어서 금강산불교회
를 중심으로 금강산잡지를 펴내어 금강산의 자신상을 드러내고 설명하는 것
이며 외지신문과 잡지들이 금강산에 대해 맞지 않는 사실을 과장 선전 소개하
고 있음에 대해 천하 사람이 금강산에 모이면 모일수록 금강산의 정신적, 신앙
적 내용을 알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1)
이것은 금강산불교회와 뺷금강산뺸 잡지가 등장한 목적과 의도를 설명해 준
다. 1930년대 금강산철도의 완공과 더불어 관광객의 폭발적 급증, 관광객의 금
강산에 대한 세인의 관심과 쏟아지는 정보, 그러한 가운데 불교의 역사와 전통
이 무시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불교계가 적극적 대응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
이다. 일본의 문화예술인의 저술을 비롯하여 각종 언론과 관광안내서에 나타
난 금강산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평가를 불교의 입장에서 바로잡고 불교가 주
도적 입장에서 금강산의 진면목을 밝히겠다는 것이다. 불교와 금강산을 동일
시할 정도의 주체적 의지를 가지고 금강산에 대한 실상을 널리 선전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이러한 의도 하에 잡지 구성은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금강산 전문지로서
의 성격이 반영되었다. 전 호의 표지는 당연히 금강산내 다양한 비경과 사찰의
전경 사진으로 꾸며졌다.42) 기사의 구성은 금강산과 관련된 경전, 역사, 설화,
문학, 기행 들이 주요한 주제였다. 기사 성격을 중심으로 분류해 보면 <표 4>와
같다.

41) 뺷금강산뺸 5호(1936.1), pp.2-3.


42) 표지사진으로 등장하는 금강산의 비경과 사찰은 다음과 같다. 비로봉(창간호), 만물상(2호), 유점
사(3호), 장안사(4호), 묘길상(5호), 표지설명 없음(6,7호), 마하연(8호), 정양사(9호), 해금강 만물
상(10호).

1930년대 중반 불교계의 뺷金剛山뺸 잡지 발간과 그 의의 177


<표 4> 뺷금강산뺸 수록 기사 종류와 수
1호 2호 3호 4호 5호 6호 7호 8호 9호 10호 합계
금강산관련
2 3 1 2 5 1 2 3 2 2 23
교리해설/평론
논설 금강산의 전승 1 1 3 1 6
불교일반 1 4 3 3 4 1 4 4 24
심전개발 2 1 3
기행문 2 2 3 1 2 10
수필
책소개 1 1 1 2 5
시 1 2 1 4
문예
희곡 1 1 1 1 1 1 1 1 8
인물기사 2 2
기사 문답 1 1 1 3
소식 1 1 1 1 1 1 1 1 1 9
합계 6 11 7 9 17 9 12 9 8 9 97

<표 4>에서 논설류 중 금강산 관련 교리・논평, 역사・설화, 수필류 중 책 소


개, 그리고 문예류는 거의 금강산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기사들은 금
강산의 인문적 전모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불교일반 논설류 기사 비중이
금강산 관련 논설 비중과 비슷하다. 불교일반에 대한 논설의 대두는 4호부터
두드러졌으며 이러한 현상은 뺷금강산뺸이 금강산 전문지면서 한편으로 종합
불교지로서의 성격을 강화했던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또 다른 배경으로는
바로 당시 총독부가 추진하던 심전개발운동에 불교계가 적극적으로 참여하
면서43) 불교지식에 대한 저변확대라는 요구가 커지고 그러한 요구를 수용하
면서 이루어진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전체 10호 중 심전개발을 주제로 한 논설
이 별도로 3편이 실렸고, 4호 편집후기에는 “부녀자와 어린이, 농촌에 불교의
상식을 보급시켜서 심전개발에 도움이 될까하여 한글 철자법을 폐지하고 재
래의 표음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고” 밝혔다.44) 당시까지는 불교계 심전개발운

43) 불교계 심전개발에 대해서는 김순석, 「1930년대 후반 조선총독부의 ‘心田開發運動’ 전개와 조선불
교계」 뺷한국민족운동사연구뺸 25호(2000); 조성운, 「 뺷佛敎時報뺸를 통해 본 心田開發運動」 뺷한국민
족운동사연구뺸 67호(2011.6) 등을 참고할 수 있다.
44) 「編輯하고서」 뺷금강산뺸 4호(1935.12). 당시 일반 대중들이 조선어학회에서 제정한 한글철자법
(1931)에 익숙지 않은 사정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종진, 「근대 불교잡지의 한글인식과 한

178 불교학연구 제51호


동의 초기로서 논설 내용은 심전개발의 취지, 불교적 근거 등을 밝히는 수준이
었다.

<표 5> 뺷금강산뺸 수록 기사 종류별 비중


종류 논설류 수필류 문예류 기사류 합계
기사수 56 15 12 14 97
구성비율 57.7% 15.4% 12.3% 14.4% 100%

그런데 전체 기사의 거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논설류가 압도적인 것은 일


반 종합지와는 다른 불교잡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45) 이렇게 논설류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 잡지의 간행의도가 금강산에 대한 경전적 설명, 불교
인문학적 고찰, 불교 교리와 이상의 전파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이 잡지의 타겟 독자가 불교인이든 비불교인이든 지식인층이었음을 보
여준다. 수필, 문예류가 12% 정도이고 기사류도 14% 수준으로 대중에게 친근
한 읽을거리로서의 매력에 크게 주력하지는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김태흡의 희곡들과 최원허 주지의 순한글 기사들, 교리에 대한 문
답을 담고 있는 「決疑」(5-7호)에서는, 잡지의 대중성과 부녀자층, 한글만을 독
해할 수 있는 독자층을 배려한 면모가 드러난다.
또한 불교계나 금강산 주변의 현실을 반영한 취재 기사류의 비중이 적은 것
은 뺷금강산뺸의 큰 한계로 지적할 수도 있다. 인물기사는 2종으로 당시 금강산
지장암에서 선불장(選佛場)이라는 수행공동체를 운영하던 백성욱(白性郁)의
근황을 소개한 기사와46) 동화사(桐華寺) 화원포교소(花園布敎所)이 설립자인
김영옥(金英玉)의 타계에 대한 기사이다.47)
이러한 인물기사와 기행문류를 제외하고는 당대의 현장성을 드러낸 기사

글문화운동」, 뺷불교학연구뺸 43호(2015), p.160 참조.


45) 1920~30년대 대중 잡지 중 하나인 뺷신여성뺸, 뺷별건곤뺸의 기사 종류 구성 중 논설류는 23.9%인 반
면 취미기사나 기사류가 60%이상을 차지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김수진, 앞의 책, p.165. 참조.
46) 「地藏庵에서 傳해오는 消息」 뺷금강산뺸 8호(1936.4), pp.16-19.
47) 卞雪醐, 「普願居士의 出世」 뺷금강산뺸 8호(1936.4), pp.20-21.

1930년대 중반 불교계의 뺷金剛山뺸 잡지 발간과 그 의의 179


는 찾아보기 힘들다. 즉 뺷금강산뺸은 논설류로서 경전과 역사적 측면에서 금강
산의 위대성과 금강산과 불교의 유관성을 역설한 반면, 1930년대 중반 금강산
에서 벌어지고 있던 생생한 현실을 담아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금
강산 사찰들의 소식이나 주변 환경의 변화에 대한 기사는 「금강 뉴-스」를 통해
극히 제한적으로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즉 금강산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지닌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생동감 있는 현장성을 보여주지는 못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뺷금강산뺸의 필자들은 당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불교 지식인이었
다.(<표 6>) 가장 많은 글이 수록된 이들은 김태흡, 권상로, 박한영이다. 이들은
근대 불교잡지의 출현시기부터 당대까지 불교잡지의 주체로서 활약해왔던
인물들이다.48) 이들은 뺷금강산뺸의 지상(紙上)에서 금강산이라는 주제를 불교
적 관점으로 다루었다.

<표 6> 뺷금강산뺸 필자와 글 편수

기사
필자 기사명(권호) 편수 비고
(종류)
金剛山의 奇聞(1), 心田開發과 金剛不壞信(2)
布施功德(3)(4), 宇宙의 光明과 釋尊의 悟道(4)
金泰洽 新年과 金剛山佛敎會의 사명(5) 금강산불교회
1
=釋大隱 금강산이약이(5), 싸우지를 말앗드면(5) 15(12) 임원
心燈點火와 無盡登의 運動(6), 降魔의 밤(6)(7)
覺醒과宗敎(8),布施太子(8)(9),自力更生과佛敎(10)
權相老 山으로 본 金剛經(1)~(8),(10),금강산시(번역)(2), 金
편집겸
2 =雲陽沙門 剛禮讚(5), 雲峯山의 一週(7), 人間淨化(8) 14(6)
발행자
=雲達山人 實生活과 信仰(9)
金剛觀(1)(2), 金剛山傳說漫評(5)
3 朴漢永 7(4)
輔翼金剛(7)~(9), 此山의 主人公은 是誰오(10)
靑春無常(4)~(6), 「大般涅槃」私記(7)(9)
4 朴允進 6(3)
朝鮮高僧傳編纂에 對하여(10)

48) 권상로와 박한영은 1910년대부터 불교잡지의 운영 및 편집인으로 활약했으며, 김태흡은 1920년


대 중반부터 불교잡지의 기자 및 투고자로 왕성한 활동을 해온 인물이다. 상세한 논의는 김종진,
「1930년대 뺷불교뺸지 문학장 구성과 문학적 실현 양상-편집인과 직원・기자를 중심으로-」 뺷불교학
연구뺸 48호(2016)을 참고할 수 있다.

180 불교학연구 제51호


기사
필자 기사명(권호) 편수 비고
(종류)
5 之一 聖中聖(1) 海西金剛行(3)~(7) 6(2)
금강산잡지를 만들러서 세상에 내여노키까지(2)
社主
보덕각씨와 법기보살을 발행한 뒤의 감상(4)
6 崔圓虛 5(5) 금강산불교회
다시사룹는말슴(4), 새해에 對한 希望과 感想(5)
임원
마음밧츨 가는데 가장 조흔 서적 추천(6)
7 金敬注 불교의특색(4),萬有如是觀(5),佛敎의女性觀(9)(10) 4(3)
安震湖 금강산불교회
8 甚矣라 歷史에 無關心이여(2)(3)(5) 3(1)
=晩悟生 임원
9 白寅榮 佛法中要를 紹介함(6)(7) 2(1)
10 김재주 인생과 종교(9)(10) 2(1)
11 雲山人 金剛山第一큰行次(3)(5) 2(1)
12 金宥信 名勝古蹟地 浮石寺紀行(2) 1(1)
13 편집부 地藏庵에서 傳해오는 消息(8) 1(1)
白陽桓民
14 金剛山初對面(5) 1(1)
=梁世煥(?)
15 朴容浹 金剛山刊行에 對한 雜感(8) 1(1)
16 蒺藜園人 法起菩薩과 普德閣氏 兩緣起를 읽고서(2) 1(1)
崔就墟
17 心田開發我老農歌(2) 1(1)
=蓮邦頭陀

江田俊雄
18 太古の法脈の錯亂を論ず(1) 1(1)
(에다토시오)

19 崔南善 山王推戴(1) 1(1)


20 徐炳宰 經마다 如是我聞은 잘못이 아님닛가(5) 1(1)
21 崔雲耕 僧侶의 削髮하는 理由는 무엇임닛가(6) 1(1)
22 金振宇 八萬藏經이모다佛說이라함은誤論이아님닛가(7) 1(1)
23 裵成敦 案頭狂譫(7) 1(1)
24 양섭 名僧術試合(7) 1(1)
25 卞雪醐 普願居士의 出世(8) 1(1)
26 包光 화엄종과 금강산(5) 1(1)
27 金映遂 寺刹이라는 名義는 이러하다(4) 1(1)
28 尹基元 宗敎와 信仰의 價値(10) 1(1)
29 金魚水 牛耳洞園遊記(10) 1(1)

가장 많은 글을 수록한 이는 김태흡이다. 김태흡은 이미 뺷금강산뺸의 발간 작


업과 동시에 간행한 두 책 뺷普德閣氏의 緣起뺸, 뺷法起菩薩의 緣起뺸로 금강산 관련
불교 설화를 저술하였다. 또한 뺷금강산뺸보다 한 달 앞서 창간한 잡지 뺷불교시
보뺸의 발행인이기도 했다. 그는 심전개발운동의 명강사로서 교계에서 누구보

1930년대 중반 불교계의 뺷金剛山뺸 잡지 발간과 그 의의 181


다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김태흡은 금강산 설화와 심전개
발, 금강산불교회, 여러 편의 희곡 등 다방면의 주제로서 15편에 달하는 글을
남겼다. 그는 금강산과 관련된 설화를 각색하여 대중이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형식으로 만들어서 대중잡지로서 뺷금강산뺸을 자리매김하는데 큰 공헌을 했
다고 할 수 있다.
편집자 권상로 역시 14편의 글을 실었다. 9호만 제외하고 1호부터 10호까지
연재한 「山으로 본 金剛經」은 금강산을 비유의 근거로 삼아 금강경을 번역하
고 해석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다.

世尊은 글자 그대로 세상에서 높으시니라는 말이니 福과 慧가 具足하사


人間天土 에 가장 높으시다. … 성현중에는 부처님이지만 산악중에는 금
강산이다. 이 상에 寶藏이 많은 것은 곧 福의 具足이오. 靈異가 많은 것은
곧 慧의 具足이다.49)

金剛山이 如來의 眞身인가 아닌가는 차치하고서 이 金剛山王如來가 正編正


覺을 얻은 바가 있는냐 없는냐를 한번 생각해 볼 것이오....50)

이 밖에 박제가(朴齊家), 안축(安軸), 법희거사(法喜居士)의 시를 번역해서 실


었고, 「金剛禮讚」에는 조선시대부터 전해진 금강산을 칭송하는 속담과 당시에
금강산을 예찬한 글들을 초록하였는데 대부분 일본 명사들의 저술과 신문들
에 남긴 금강산 예찬을 번역한 것이다. 결국 권상로의 글들은 창작이라기보다
는 경전 및 고전, 외국어의 번역과 해설을 통해 금강산과 관련된 자료를 발굴
하고 금강산을 칭송할 근거를 마련한 것이었다.
박한영은 1924년 최남선과 함께 금강산을 여행한 바 있으며 최남선의 민족
주의적 국토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51) 박한영은 1918년 「유심

49) 「山으로 본 金剛經」, 뺷금강산뺸 1호(1935.9), p.13


50) 「山으로 본 金剛經」, 뺷금강산뺸 7호(1936.3) p.5
51) 최남선은 “조선의 국토는 산하 그대로 조선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며 정신”이라며 국토를 예찬

182 불교학연구 제51호


은 즉 금강산이 아닌가」라는 글로서52) 이미 독특한 금강산 입론을 선보인 바
있었다.53) 그 이전과 이후에도 박한영과 같이 금강산에 대한 전통, 인문, 예술,
선리(禪理)를 총합화한 글을 쓴 사람은 없었다. 그는 뺷금강산뺸에서 특유의 박
람강기(博覽强記)로 불교경전, 고금의 고전과 뉴스를 종횡무진 누비며54) 금강
산에 대한 다양한 인문적 지식을 담은 글들을 남겼다. 「金剛觀」, 「輔翼金剛」,
「此山의 主人公은 是誰오」가 그것이다. 이러한 글을 통해 금강산의 종교적, 예
술적 전통을 개관하고, 금강산과 주변 승지(勝地)를 논하며 금강산과 관련된
역사인물과 현재의 인물들을 다루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사찰에 관한 사료의 수집과 사적 조사에 나섰던 안진호의 기행문
과55) 금강산에 대한 경전적 근거를 주목한 포광의 「華嚴宗과 金剛山」, 최남선
의 뺷금강예찬뺸에 수록되었던 「山王推戴」, 조선시대 태조와 세조의 금강산 여
행을 다룬 「金剛山第一큰行次」) 등을 주목할 수 있다.
이러한 글들을 통해 알아 볼 수 있는 뺷금강산뺸의 전략은 금강산 지명과 전설
의 불교적 해석, 조선시대 전통의 발굴이었다. 식민지 개발에 의해 첨단의 관
광지로서 새롭게 태어나 식민지 권력에 의해 발견된 비경으로, 압도적 자연미
의 산실로 여겨졌던 금강산에 대해, 불교계는 불교라는 전통에서 금강산을 표
상화할 것을 뺷금강산뺸을 통해 전하려고 하였다. 뺷금강산뺸은 금강산의 뿌리 깊
은 불교적 전통과 역사, 그 중에서도 경전과 교리, 그리고 특히 간과되었던 조
선시대의 시문과 역사적 사실들을 언급하면서 서구인, 또는 일본 지식인들의

한 뺷尋春巡禮뺸(1926)를 박한영에게 헌정하였다.


52) 朴漢永, 「惟心은卽金剛山이안인가」, 뺷惟心뺸 2호(1918.10).
53) 이에 관해서는 고재석, 「한국 근대불교와 문학의 상관성」, 뺷민족문화연구뺸 45호(고려대학교 민족
문화연구원, 2006) 을 참고할 수 있다.
54) 최남선은 박한영을 ‘고사에 대한 깊은 조예와 통철한 식견으로 내경과 외경전을 꿰뚫어 보았다’
고 평하였다. 최남선, 「서」, 뺷석전시초뺸(동명사, 1940).
55) 안진호는 1920년대부터 여러 사찰을 답사하고 뺷불교뺸에 여러 기행문을 남겼다. 안진호의 사찰 답
사는 역사적 자료의 소개뿐 아니라 당대 사찰의 생생한 실상을 보고한 기록으로 ‘사찰의 역사를
발굴 한국불교의 역사적 자취를 복원하려는 당대 불교지성의 염원을’ 실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
다. 김종진, 「1920년대 뺷불교뺸지 문학장 형성의 주체와 동력-동력의 중심, 권상로와 대승사・김용
사 인맥」 뺷동악어문학뺸 64호(2015), pp.320-324.

1930년대 중반 불교계의 뺷金剛山뺸 잡지 발간과 그 의의 183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소거되었던 금강산의 실제 역사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
다.
또한 당시 금강산내 찻집이나 음식점, 여관을 경영하는 일본인이 다수인 가
운데, 금강산 사찰이 조선시대까지 가지고 있었던 관광의 인프라로서의 역할
이 점차 축소되고 있었다. 산내 숙식이 여관과 다점으로, 승려의 남여역(藍輿
役)은 유료 교자(轎子)꾼으로 교체되는 시속에서56), 사찰은 관광객의 시선 속
에 고대의 유물, 고정된 경관의 하나로서 머물렀다. 이에 불교계는 금강산에서
당시까지 살아 숨 쉬고 있던 불교의 활약상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요
구에 따른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움직임이 근대적 미디어의 활용, 즉 뺷금강산뺸
의 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권말에 실린 「金剛山 뉴-스」는 4호까지는 금강산 주변 사찰 소식을 실
었으나 5호부터 전국사찰의 소식을 싣게 되었다. 즉 관보에 실리는 주지이동,
사유토지매각허가 등을 포함한 교계소식을 실은 것이다. 이는 뺷佛敎뺸지도 종
간되고 당시 불교계가 ‘수삼년간을 언론보도와 문화기관 없이 침식상태’였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935년 후반 이후 불교일반에 대한 논
설이 증가하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교계를 대표하는 필진이 참여한 뺷금강
산뺸은 뺷불교시보뺸와 더불어 사실상 교계를 대표하는 잡지 역할을 자처했다고
볼 수 있다.

IV. 맺음말

금강산은 고대로부터 장구한 역사와 문화가 전래되어 온 곳이다. 삼국시대


이래 불교가 뿌리를 내렸고, 조선시대에는 산수유람 문화의 전성기를 맞아 조
선 최대의 유람지로 높은 명성을 차지했다. 그에 따라 금강산을 제재로 한 다
양한 문화적 산물도 집적되었고, 조선의 이상적 산수로서, 친근하고 자랑스러

56) 「金剛山轎子賃改正」 뺷동아일보」1920.6.20.

184 불교학연구 제51호


운 영토로서 조선인의 심상 속에 금강산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근대에 들어서 금강산은 식민지 근대가 창출한 근대 관광의 최전선으로,
‘동양의 신비’를 간직한 채 근대의 위용을 더한 상업적 위락 공간으로 변모했
다. 식민지의 민족주의자들은 식민지 조선의 역사, 민족혼에 대한 향수를 금강
산에서 발견했다. 금강산을 통해 ‘조선적인 것’의 심상지리를 재구축하였던
것이다.57) 금강산은 문명과 자연이 혼거하며, 다양한 표상들의 경합장이 되어
갔다.
새로운 시대의 관광주체 등장, 관광 인프라의 확충, 각종 언설들의 홍수 속
에 금강산 불교의 역사성은 소거되고 위상은 급격한 변화를 맞지 않을 수 없었
다. 1935년 뺷금강산뺸의 발간은 1930년대 금강산에서 본격화된 대중 관광시대
에 대한 불교계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응답이었다. 잡지는 불교적 전통과 역
사, 전승을 되살리면서 금강산의 주인이 불교임을 역설하였다. 오리엔탈리즘
과 상업화에 의해 왜곡된 금강산의 이미지에 불교계가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
것이었다.
물론, 잡지 뺷금강산뺸은 10개월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10호 발간에 그쳤
다. 또한 당대 금강산의 현장성을 전하는 대신, 불교경전이라는 권위와 ‘위대
한’ 과거를 드러내는 퇴영적 방식을 선택한 한계가 있다. 하지만 잡지는 금강
산의 역사를 되살리고 불교적 정체성을 드러내며, 금강산의 불교를 1930년대
중반의 현재로 호출할 수 있었다. 뺷금강산뺸은 금강산에 대한 다양한 논의 분출
과 관광 대중화의 흐름 속에서, 금강산에서의 불교 입지를 드러내고자 한 시도
로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통시적 관점에서 본다면 뺷금강산뺸의 발간은 조선시대까지 금강산의
상주자로서, 전통의 계승자였지만 제 목소리를 표출하지 못했던 불교계가,
1930년대 들어 잡지라는 근대적 미디어를 통해 최초로 불교적 시각에서 금강
산을 언표 하였다는 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또한 1930년대 중반 지역불교의

57) 근대 문학사에서 조선적인 것의 심상지리 구축에 관한 논의는 박진숙, 「식민지 근대의 심상지리
와 뺷문장뺸파 기행문학의 조선표상」 뺷민족문학사연구뺸 31호(2006)을 참고할 수 있다.

1930년대 중반 불교계의 뺷金剛山뺸 잡지 발간과 그 의의 185


주체들이 잡지 발간을 꾀하던 불교 문화적 맥락과 맞물려서 그 의미는 새롭게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186 불교학연구 제51호


참고문헌

1. 1차 자료

∙ 뺷金剛山뺸 뺷佛敎時報뺸 뺷鷲山寶林뺸(한국근현대불교자료전집, 민족사, 1996).


∙ 뺷동아일보뺸

2. 2차 자료

∙ 岡本曉翠, 뺷京城と金剛山뺸, 京城眞美會, 1932.


∙ 김광식, 뺷불교 근대화의 이상과 현실뺸, 도서출판 선인, 2014.
∙ 김수진, 『신여성, 근대의 과잉』, 소명출판, 2009.
∙ 大熊瀧三郞 發行兼編輯, 뺷金剛山探勝案內記뺸, 印刷一合資會社, 1934.
∙ 에드워드 W. 사이드, 뺷문화와 제국주의뺸, 김성곤・정정호 옮김, 창,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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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____, 「1930년대 뺷불교뺸지 문학장 구성과 문학적 실현 양상-편집인과 직원‧기자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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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효순, 「일제시대 민간서적발행활동의 구조적 특성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대학원 박
사학위논문, 2001.
∙ 서기재, 「기이한 세계로의 초대:근대 <여행안내서>를 통해 본 금강산」 뺷일본어문학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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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두희, 「일제강점기 관광지와 관광행위 연구: 금강산을 사례로」, 한국교원대학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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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석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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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불교학연구 제51호


Abstract

The Publication and Its Significance of the Buddhist


Magazine Kumkangsan in the Mid 1930s

Lee, Kyungsoon
Curator
National Museum of Korean Contemporary History

This article focuses on the background and significance of the publication of a


monthly magazine Kumkangsan in mid 1930s. Kumkangsan was recognized at the
time as the first magazine on Mt. Geumgangsan (or Kumkangsan) and the first
Buddhist magazine published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Not only Mt. Geumgangsan had been the most popular site among travellers
through the history of Korea, but also a significant colonial tourist attraction in the
modern era. In the early 1930s, a tourist railroad to Mt. Geumgangsan was
completed and a commercial tourist town was developed around the mountain.
While Mt. Geumgangsan gained popularity among Japanese people and Westerners
as one of the oriental, or mystical sight of nature, it evoked nostalgia of
Joseon-period for Koreans under the Japanese rule.
Korean Buddhists residing in Mt. Geumgangsan, who had retained their long
tradition and relics until the modern period, realized that numerous tourist guide
books and travelers’ journals about the mountain omitted or ignored information or
discourses about Buddhist traditions. Having found a need to reestablish their status
in Mt. Geumgangsan and to disclose some of their ancient preservation to public,
some Buddhist intellectuals and monks in the mountain got together to publish a
magazine, Kumkangsan. In the magazine, they emphasized Buddhist origin and
identity in naming the mountain, presented historical events and Joseon-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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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products, and published Buddhist literary works. Despite Kumkangsan’s
short-lived publication of only ten issues, the magazine represented an active
response to commercialization and touristification of Mt. Geumgangsan and an
attempt to revive Buddhist identity of the mountain.

Keywords
Mt. Geumgangsan, Kumkangsan magazine, Buddhist publication, Buddhist tradition in Mt.
Geumgangsan, Mt. Geumgangsan railroad

2017년 04월 28일 투고


2017년 06월 11일 심사완료
2017년 06월 16일 게재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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