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essional Documents
Culture Documents
2 0 2 0
<금동관음보살입상 金銅觀音菩薩立像
>
7세기 전반백제 시대, 높이 26.5cm
월간 우리문화 별별마당
vol.284 | 2020 06
4 테마기획Ⅰ
발행인 김태웅
6.25전쟁 70주년 기념 _ 다시 유월에
발행일 2020년 6월 1일
편집고문 권용태
10 테마기획Ⅱ
편집주간 한춘섭
편집위원 곽효환, 김 종, 김찬석, 오광수, 자신의 조국처럼 대한민국을 지킨 참전용사 / 정유지
오양열, 장진성, 지두환
편집담당 음소형 14 시와 사진 한 모금
발행처 한국문화원연합회 돌아선 하늘이여 흐르지 않는 강이여 _ 6.25전쟁 70주년에 부쳐 / 이근배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9(도화동, 성우빌딩) 12층
전화 02)704-4611 | 팩스 02)704-2377
홈페이지 www.kccf.or.kr
등록일 1984년 7월 12일
문화마당 Cultural Encounters
등록번호 마포,라00557
기획편집번역제작 서울셀렉션 02)734-9567 16 옹기종기 Iconic Items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솟대’ / 이행림
Sotdae: Bridging Heaven and Earth / Lee Haengrim
52 문화보고
“언능 와보랑께~” “버얼써 가봤당께!” _ 강진 와보랑께 박물관 / 김종
56 조선 人 LOVE ⑥
과부, 그 고단한 삶에 놓인 사랑의 징검다리 / 권경률
24 60 오! 세이
덩굴장미 아래서 목 놓아 너를 부르리라 / 오광수
우리마당
62 불현듯
제주 불교 석조미술품은 무엇을 말하는가 / 엄기표
32 66 북한사회 문화 읽기 ⑯
변화하는 북한 TV방송 / 오양열
70 문화달력
한국문화원연합회, 지방문화원 일정
72 NEWS, 편집후기
46
ISSN 1599-4236
■ 원고 투고나 《우리문화》에 대한 의견, 구독신청 등은 편집부(eumso@kccf.or.kr)로 보내주세요.
■ 게재된 기사 및 이미지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 책자는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아 제작합니다.
별별마당 ㅣ 테마 기 획 Ⅰ
6 . 2 5 전 쟁 7 0 주 년 기 념
다 시 유 월 에
4
한강 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국군 제1사단 소속 병사
한국군 부대 중 유일하게 미 1군단에 배속되어 한미 연합작전을 펼쳤던 1사단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전에 참가,
당시 세계 최강의 기계화 부대인 미 제1기갑사단을 제치고 평양에 제일 먼저 입성한 부대가 된다.
5
6.25 동란, 짓밟힌 산하여!
6
7
추락한 북한 전투기의 잔해 위에 올라
손을 흔들고 있는 소년
8
이 지면의 사진들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발간된 사진집 《1950》(저자 존 리치)에서 저자
측의 허락을 받아 발췌하여 게재했습니다. 《1950》은 개전부터 휴전까지 한국전쟁을 지켜본
미국 종군기자가 촬영한 세계 최초의 한국전쟁 컬러사진집입니다. 코닥사의 전설적인 필름,
코다크롬으로 촬영하여 70년 전 한국의 모습을 생생하고 선명하게 전달합니다.
9
별별마당 ㅣ 테마 기 획 Ⅱ
10
자신의 조국처럼
대한민국을 지킨 참전용사
“내가 죽은 후 유골을 전우들이 잠들어 있는
한국의 격전지 931고지에 뿌려 달라.”
6.25전쟁에서 목숨 바쳐 대한민국을 지킨 어느 한 프랑스 참전용사의 유
언 중 한 구절이다. ‘전사戰士에게 있어 최고의 영광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임을 자랑스럽게 여긴 나폴레옹의 후예다운 유언이 아닐 수 없다.
11
단장의 능선 931고지와 ‘모리스 나바르’ 어 4차 공세가 한창이던 1951년 2월에 일등병으로
931고지는 851, 894고지와 함께 강원 양구군 동 처음 참전하여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
면 사태리에 있다. 당시 이 고지는 금성金城 지구에 위 지 23일간 철원, 김화, 평가 일대 철의 삼각지대에 대
치한 적의 후방 기지 상황을 그대로 식별해낼 수 있 한 유엔군의 대대적 공세 작전에 투입됐고, 이어서
었고, 동부 전선에 절대적 영향을 주는 국군 진격 작 미 2사단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는 단장의 능선 전투
전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고 에 참전했다. 그는 10월 12일 전투 막바지 밤 10시경,
지를 놓고 벌인 쟁탈전에 유엔군 3,700여 명과 북한 적 마지막 저항선인 851고지에서 유탄을 가슴에 맞
군 25,000여 명이 죽거나 다친 것으로 추산될 정도 아 부상을 입었다. 그는 1952년 2월 프랑스로 귀국
로 치열한 전투지였다. 때문에 이 고지는 단장斷腸 ; 창 해 치료를 받고 나서, 1953년 3월 한국전에 다시 참
자가 끊어질 듯 괴롭다의 능선으로 불린다. 단장의 능선 위 전했다. 휴전을 앞둔 고지 쟁탈전일명 고지전 시기였다.
로 뿌려진 6.25전쟁 프랑스 참전용사 고故 모리스 나 1953년 10월 하사로 귀국하기 전까지 여러 전투에서
바르Maurice Navarre의 풍장 소식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전공을 세워 여러 차례의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그
사람인 필자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의 여운을 남겼다. 는 프랑스로 귀국하자마자 1954년 5월 베트남의 승
지난 2007년 9월 22일 낮 12시 30분 단장의 능선에 리로 끝난 인도차이나 전쟁에도 참전했다. 그는 평생
서는 프랑스 대사 부인, 주한 프랑스 무관 나스 대령, 단장의 능선 전투를 잊지 못하는 노병이었다. 2004
나바르 용사 부인 등 프랑스 측 대표 5명과 21사단 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유골을 전우들
사단장 강한석 소장을 비롯한 장병들이 참석한 가운 이 잠들어 있는 한국의 격전지 931고지에 뿌려 달라”
데 ‘프랑스 참전 기념비’ 제막 행사와 함께 유골을 바 는 유언을 남김에 따라 나바르의 부인이 주한 프랑스
람에 날리는 풍장風葬이 거행되었다. 때는 한·불 수교 대사관에 그 뜻을 전달했다.
121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유골로 돌아온 모리
스 나바르 용사는 그렇게 단장의 능선에 잠든 전우들 목숨 걸고 고지를 지킨 프랑스 참전용사
품으로 돌아갔다. 프랑스는 6.25전쟁이 발발했을 무렵 인도차이
모리스 나바르는 중공군 3차 공세와 1.4후퇴에 이 나에서도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도와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1950년 7월 22일
구축함 1척을 파견한 데 이어, 9월 18일 현역과 예비
역들의 지원을 받아 파병을 위한 보병 1개 대대를 편
성했다. 프랑스 지상군은 그해 11월 29일 부산에 도
착했다. 해병대와 공수부대, 외인부대, 수도방위부대
출신으로 이뤄진 최정예 부대였다. 특히 프랑스군을
이끈 대대장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 중령은 외인
부대 출신의 예비역 중장이었으나, 6.25전쟁에 참전
하기 위해 5계급 강등을 자청한 인물이었다. 프랑스
대대는 미 제2사단 23연대에 배속돼 1951년 1월 10
일 원주쟁탈전에 처음 참전했다. 2월 10일 지평리 인
프랑스 참전용사
근에서 진행된 쌍터널 전투에서 프랑스 대대는 연대
'모리스 나바르' 단장이
능선에 잠들다. 규모의 중공군과 피 튀기는 백병전을 펼치며 방어 고
12
지를 끝까지 사수하고, 1,300여 명에 달하는 적들을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1993년 방한 당시
사살해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부대는 이 프랑스군 참전기념비를 찾아
13
별별마당 ㅣ 시와 사진 한 모 금
돌아선 하늘이여
흐르지 않는 강이여
- 6.25전쟁 70주년에 부쳐
얼굴을 돌린 하늘이었다
산도 물도 고이 잠들고
배달겨레 한 핏줄 고운 꿈길 건너던
1 9 5 0 년 6 월 2 5 일 이른 새벽
이 무슨 하늘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날벼락이리오
북위 3 8 도선 북 방 경 계 선 에 서
그날로부터 이 겨레 보금자리
눈부시게 문화 꽃피우던
나라안팎의 병사들이며
온 땅을 피로 적시었어라
어찌 이루 다 이르리오
14
꼬박 1 천백스무이레 동안 치렀던 이근배
1 9 5 3 년 7 월 2 7 일
휴전선 1 5 5 마일 다시 갈라선 이 나라
어느덧 일흔 해가 되었구나
더는 기다릴 수가 없구나
산과 물이 하나 되고
8 천만 얼싸 부둥켜 춤추는
15
문화마당 ㅣ 옹기 종 기
16
Cultural Encounters ㅣ I c onic I tem s
고즈넉한 시골길을 걷다 보면 간혹 마을 어귀에 세워진 긴 As you walk along quiet country roads in Korea, you may come
장대와 그 위에 내려앉은 새 한 마리를 볼 수 있다. 노을과 함께 across a bird perched atop a long pole erected at a village entrance.
그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진짜’ 새인 양 착각할 수 있지만, 이 새 Viewing the scene against the twilight, you might mistake the bird
는 장대 위에 붙어있는 ‘조각’이다. ‘솟대’라고 불리는 이 나무 조 for the real thing—but it is a sculpture affixed to the top of the pole.
형물은 삼한 시대에 신을 모시던 장소인 소도蘇塗에서 유래한 것 Known as a sotdae, this wooden decoration takes its name from
으로, 전라도에서는 ‘소주’, ‘소줏대’, 함흥 지방에서는 ‘솔대’, 황 “sodo” (蘇塗), a place where gods were honored during the Samhan
해도·평안도에서는 ‘솟댁’, 강원도에서는 ‘솔대’, 경상도 해안 지 era. It goes by the names of “soju” or “sojutdae” in Jeolla-do, “soldae”
방에서는 ‘별신대’ 등으로 부른다. in the Hamhung region, “sotdaek” in Hwanghae-do and Pyongan-do,
or catch. The people of old believed that the sotdae would serve as a
솟대 위 새를 ‘오리’라 칭하는 마을이 대부분이지만, 지역에 따 “divine pole” bridging heaven and earth, and thus defending against
라 기러기, 갈매기, 따오기, 왜가리, 까치, 까마귀 등으로 부르기 fire, drought, disease, and other calamities.
도 한다. 솟대의 제작 시기 역시 마을마다 다르다. 해마다 마을 제 In most villages, the bird atop the sotdae is referred to as a duck,
의에 즈음하여 제작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솟대가 부러져야 다시 but it can also variously be a goose, gull, ibis, heron, magpie, or crow,
만들거나 윤년이 들 때마다 새로 세우는 곳도 있다. depending on region. The dates of the sotdae’s creation also vary
from one village to the next. Some of them are produced around the
솟대의 새는 주로 나무로 조각되나, 쇠 또는 돌로 만들기도 한다. time of annual village rites, while others are raised to replace broken
새의 모양이나 마릿수, 머리 방향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 ones or erected at every leap year.
는데 한 기둥에 새가 두 마리인 경우, 서로 마주 보고 있거나 같 The birds on the sotdae are normally sculpted from wood,
은 곳을 응시하기도 한다. 또 한 마리씩 여러 개의 솟대가 있는 although some are made from metal or stone. The birds hold
경우 같은 곳을 보고 있는가 하면 한 마리는 마을 안, 다른 한 마 different meanings depending on their shape, number, and
리는 마을 밖을 각각 향하고 있기도 하다. direction—for instance, two birds on a single pillar may be facing
each other or gazing upon the same place. In some cases, there are
several sotdae, each with a single bird looking at the same place;
other times, one bird is looking inside of the village while another is
looking outside.
17
문화마당 ㅣ 한국 의 서 원 ③
안동 도산서원 전경
Panoramic view of Dosan Seowon in Andong
18
Cultural Encounters ㅣ Korea’s Seowon
조선조 최고의 유학자를 꼽으라면 대부분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 If asked to name the greatest Confucian scholar of the
〜1570을 떠올릴 것이다. 퇴계는 성리학을 체계화해 ‘동방의 주자’ Joseon Dynasty, most people would think of Yi Hwang
라고 불린 조선의 대학자로, 평생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경북 (1501–1570), also known by the pen name Toegye.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과 Toegye was a great Joseon-era scholar who devoted his
고을 선비들이 퇴계가 도道를 강론하던 도산서당에 서원을 세워 life to research, earning the appellation “Zhuzi of the East”
야 한다며 1574년에 조성한 것이다. for his systematization of neo-Confucian ideas. Dosan
Seowon in Andong, Gyeongsangbuk-do, was created
after his death in 1570 by students and local Confucian
scholars who felt that a seowon should be built on the site
where he had expounded upon the do (Way).
멀리서 본 시사단
Sisadan Stele seen from afar
19
도산서당 영역과 도산서원 영역 in Chinese is conducted in honor of it.
현재의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At the entrance leading to Dosan Seowon is a well inscribed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영역과 퇴계 사후에 선생의 학문과 with the name Yeoljeong (“clear well”). Used to provide drinking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나뉜다. 서원 전체 water for the Dosan Seodang, it takes its meaning from the jing (well)
영역의 앞쪽에 자리 잡은 도산서당, 농운정사, 하고직사 등은 도 hexagram in the Book of Changes (I Ching), one of the Confucian
산서당 영역에 속하고, 그 뒤편에 들어선 건물들은 퇴계가 타계 classics. A well cannot be moved when one leaves a village, nor does
한 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574년 제자들이 건립한 도산서 its water diminish as it is taken. Accordingly, the name expresses the
원 영역에 속한다. idea of having to cultivate one’s body and mind through constant
퇴계는 1558년 58살이 되던 해에 집을 짓기 시작하여 1560년에 도 effort, just as one draws from the inexhaustible spring of knowledge
산서당을 완성하였다. 도산서당 자체는 3칸밖에 안 되는 작은 규 one bucketful at a time.
모의 남향 건물이다. 건물을 남쪽으로 향하게 한 까닭은 행례行禮,
즉 예를 행함에 있어 편하게 하고자 함이고, ‘재齋’를 서쪽에 두고 Areas of Dosan Seodang and Dosan Seowon
‘헌軒’을 동쪽에 둔 것은 나무와 꽃을 심을 뜰을 마주하며 그윽한 The current Dosan Seowon is divided into two areas: Dosan Seodang
1 열정이라 이름 붙여진 우물 (village school), where Toegye taught students while deeply exploring
A well named Yeoljeong ("clear well")
neo-Confucian scholarship, and Dosan Seowon proper, which was
2 농운정사
Nongunjeongsa Dormitory built after his death to honor his scholarship and virtue. The Dosan
and completed what is now Dosan Seodang in 1560. The school itself
kan, or sections between columns. The reason the building was built
1
facing south was to make it more convenient for the performance of
rituals; the reason it has a jae (residential and study area) to the west
and a heon (area for official business and the entertaining of guests)
looked out upon a field where trees and flowers would be planted.
20
전교당(도산서원에 있는 강당)
Jeongyodang Lecture Hall in Dosan Seowon
운치를 숭상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Amseoheon floor. Planted with apricot blossoms, bamboo, pines,
퇴계는 건물뿐만 아니라 뜰에도 공을 들였다. 퇴계가 쓴 《도산잡 and chrysanthemums, the garden was called Jeorusa. The design
영병기》에 따르면 앞마당의 동쪽 구석에 작은 방지를 파서 ‘정우 connecting the scenery from the Amseoheon hall past Jeongudang
당淨友塘’이라 하고 연꽃을 길렀고, 개울 건너에 작은 터를 닦고 ‘몽 Pond and Jeorusa to the Nakdonggang River could ultimately be
천蒙泉’이란 샘을 만들었다. 샘 위의 산기슭에는 평평한 단을 쌓아 seen as an excellent illustration of Toegye’s neo-Confucian ideas
암서헌과 마주 보게 하고, 그 위에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를 regarding nature, and the aim of ultimately becoming one with it.
심어 ‘절우사’라 불렀다. 암서헌 대청에서 정우당, 절우사를 지나 Across from Dosan Seodang, eight dormitory rooms (sa) were
낙동강으로 경관이 이어지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자연과 하나가 built for students; individually known as the Siseupjae, Jisungnyo,
되려는 퇴계의 성리학적 자연관을 잘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and Gwannanheon, the buildings were collectively referred to as
도산서당 건너편에는 유생들을 위해서 ‘사舍’ 8칸을 지었는데, 각 “Nongunjeongsa.” The Nongunjeongsa buildings consisted mainly of
각 ‘시습재時習齋’, ‘지숙료止宿嶚’, ‘관난헌觀瀾軒’이라 이름 지었고 이 a floor and individual rooms, which were divided in two along the
를 합해서 ‘농운정사隴雲精舍’라 하였다. 농운정사는 크게 마루와 same lines of the tradition division of seowon academies into “east”
방으로 되어 있는데 마치 일반 서원이 동재와 서재로 나누어져 and “west” dormitories. At the same time, these two spaces were
있듯 이들도 둘로 구분되어 있다. 하지만 이 두 단위 공간 사이에 connected with parquet floors (jjokmaru). The floor plan followed an
쪽마루가 놓여 있어 서로 이어지기도 한다. 농운정사는 평면이 “H” shape, which was not often used with ordinary homes because it
‘工’자로, 뒷방 쪽에 햇빛이 들지 않아 일반 민가에서는 잘 짓지 did not allow sunlight into the rooms in back. Yet Toegye insisted on
않는 형식이다. 그러나 퇴계는 직접 설계도를 그리고 짧은 처마 this design, sketching the plan himself and making use of short eaves
를 사용하여 빛을 받도록 배려하면서 이 형식을 고집하였다. 그 to ensure that light would enter. This was also an expression of the
것은 工자형 집이 기숙사 건물로 적합하며 ‘공부工夫한다’는 뜻도 aim of study, as he deemed a home shaped like the Chinese character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for “work” or “study” (gong, 工) to be suited to use as a dormitory.
21
문루가 없는 것은 스승에 대한 존경의 뜻 Lack of a gatehouse as sign of respect
도산서원의 특징은 크고 높은 문루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가 존재 One of the distinctive aspects of Dosan Seowon is its lack of a large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원 영역 입구에 문루가 있다면 전체 시 and tall gatehouse (mullu) structure atop its outer gate. When a
각의 중심이 된다. 한마디로 문루가 기존 도산서당 영역을 지배 gatehouse is introduced at the entrance to a seowon’s precincts,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문루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스승인 퇴 it becomes the center of the general field of view. In short, the
계를 제자들이 위에서 굽어보는 불경을 범하지 않겠다는 뜻과 다 gatehouse comes to dominate the existing school grounds.
름없다. Essentially, the decision not to build a gatehouse was a way for
도산서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곳은 동광명실과 서광명실 Toegye’s students to declare that they would not commit the
로 나뉜 두 채의 광명실이다. 광명실은 서책을 보관하던 곳으로, irreverence of looking down on him from above.
왕이 하사한 서적, 퇴계가 보던 서적과 철폐된 역동서원易東書院에 The place seen as holding the greatest importance in Dosan
서 옮겨온 서적, 그리고 퇴계의 문도文徒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의 Seowon was Gwangmyeongsil, a library divided into two sections
문집을 모아두었다. 이곳에서 보관 중인 책은 모두 907종 4,338 (East Gwangmyeongsil and West Gwangmyeongsil). A place for
책이나 된다. 이처럼 서원은 유생들을 가르치는 곳이기도 하지만 storing books, Gwangmyeongsil was used to assemble texts bestowed
도서관의 구실도 했으며, 보관 중인 책을 바탕으로 다시 책으로 by the king, books that had been read by Toegye, books transferred
엮어내는 출판사의 구실도 했다. from the discontinued Yeokdong Seowon, and collections by
22
Okjingak Pavilion: Sensing the spirit of Toegye
The pride of Dosan Seowon is Okjingak Pavilion, which is used as a
exhibits that allow visitors to sense the hand of the teacher, including
23
문화마당 ㅣ 지역 문 화 스 토 리
“실록을 임금처럼···”
조선왕조실록과 적상산 사고史庫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시대 제1대 왕 태조太祖에서부터 제25대
왕 철종哲宗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
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역사서로, 총 1,893권완질은 1,717권 888책
에 이를 만큼 방대하다. 완성된 실록은 재난에 대비하고자 춘추
관 사고서울, 정족산 사고강화, 태백산 사고봉화, 오대산 사고평창, 적
상산 사고무주의 전국 5대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24
Cultural Encounters ㅣ L oc a l Culture Stories
복원된 적상산 사고
The reconstructed Jeoksangsan Archive
25
《조선왕조실록》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역사 기록물 Historical records with few parallels
《조선왕조실록》은 권질卷秩의 방대함과 아울러 조선 시대 거 In addition to the vastness of their volumes, the Annals are seen as
의 모든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에서도 유례를 a historical record with few parallels anywhere else in the world,
찾아보기 힘든 역사 기록물로 꼽힌다. 또한 국왕조차 함부로 기 encompassing historical facts related to nearly every aspect of the
록을 열람할 수 없었기에, 기록에 대한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Joseon Dynasty. As even the king was not permitted to read the
높은 편이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73년 12월 31일, 정족산 records at his leisure, the records are also seen as highly accurate
사고본 1,181책제151-1호, 태백산 사고본 848책제151-2호, 오대산 사고 and credible. In recognition of this value, a total of 2,077 books were
본 27책제151-3호, 기타 산엽본 21책제151-4호, 도합 2,077책을 국보로 designated as National Treasures on December 31, 1973, including
지정했으며, 1997년 10월 1일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 the 1,181 books of the Jeongjoksan Archive text (No. 151-1), the 848
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books of the Taebaeksan Archive text (No. 151-2), the 27 books of
《조선왕조실록》은 태종 13년1413에 《태조실록》을 편찬한 것이 처 the Odaesan Archive text (No. 151-3), and 21 other assorted texts.
음이며, 이어 세종 8년1426에 《정종실록》을, 5년 후인 1431년에 On October 1, 1997, they were listed alongside the Hunminjeongeum
《태종실록》을 편찬했다. 《태종실록》 편찬 직후 보관의 필요성이 (Proper sounds for the instruction of the people) in the UNESCO
제기되면서, 삼조실록三朝實錄; 태조, 정종, 태종은 고려 시대 실록이 보 Memory of the World Register.
관돼 있던 충주 사고史庫에 봉안됐다. 하지만 충주 사고는 민가 The first portion of the annals consisted of the Annals of King
밀집 지역에 위치해 화재 위험이 크다는 우려가 있었고 이에 Taejo, which were compiled in the 13th year of King Taejong's regin
1439년 6월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새로 설치한다. 이후 1445년 (1413). This was followed by the Annals of King Jeongjong in the
11월까지 삼조실록은 3부 더 복제본을 만들어 총 4부를 춘추관과 eighth year of King Sejong’s reign (1426) and the Annals of King
충주·전주·성주 등 4곳의 사고에 각기 1부씩 봉안한다. 그러나 Taejong five years later in 1431. After the Annals of King Taejong were
26
Chungju and Seongju archives were all lost as a result of the Japanese
and relocated the records at their own expense, moving them from
were preserved for around one year before being returned to the
27
From the 1,400 books enshrined in the Seonwonbogak
had worked tirelessly for 296 years to preserve Joseon history from
the first monarch King Taejo to the 25th monarch King Cheoljong—
saw its role gradually fade away. Some of the Jeoksangsan Archive
were taken to North Korea after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on
June 25, 1950, and are reportedly part of the collection of the Kim Il
28
사고본 실록을 발견하였고, 지난 2019년 6월 26일 조선왕조실록 enshrinement ceremony, the official responsible was the supervisor
정족산 사고본의 누락본 7책, 적상산 사고본 4책과 오대산 사고 (chongjaegwan) of the Sillokcheong (Office for Annals Compilation),
본 1책, 봉모당본 6책, 낙질 및 산엽본 78책 등이 추가로 국보 지 but for enshrinement ceremonies at outside archives such as the one
정되었다. at Jeoksangsan, the “palace-ascendable official” (dangsanggwan)—a
29
4
3, 4 봉
안 행렬
Reenacted procession of enshrinement officials
5, 6 관
아 보관식
Temporary storage ceremony at the government office
30
7 8
7, 8 적
상산 사고 봉안식
Enshrinement ceremony at the Jeoksangsan Archive
members to the right. In the center were a baeansang (a box used
to apply the state seal), a chaeyeo (a sedan chair for carrying royal
향을 올리기 위해 단 위로 올라오면서 실록 봉안 의식이 시작된 effects), and seori (officials in charge of document recording and
다. 전의가 향로에 향을 세 번 올리는데 전통적으로 ‘3’은 음양의 administration). The annals’ enshrinement ritual would begin as
일치, 화합과 조화 등을 의미한다. the officiating jeonui (a steward in charge of procedures) ascended
전의가 향을 올린 후 봉안사 일행이 앞으로 나가 네 번 절사배; 四拜 the altar to place the incense. The jeonui would place the incense in
을 하는데, 봉안사들만 절을 하고 다른 참석자는 절을 하지 않는 the burner three times—the number “three” traditionally connoting
다. 사배를 마친 당상관이 실록궤를 사고에 넣기 위해 단 위로 올 alignment of yin and yang, concord, and harmony.
라서면 서리가 채여에서 실록궤를 들고 중계로 올라와 배안상에 After the jeonui placed the incense, the enshrinement officials’
올림으로써 실록 봉안 의식이 모두 끝난다. group would come forward to perform four ritual bows; these bows
한편, 지난해 11월 2일 무주문화원은 ‘2019 지방문화원 원천콘텐 were performed only by the enshrinement officials and not the
츠 발굴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왕조실록 적상산 사고 봉안 other attendees. Having completed his four bows, the dangsanggwan
재연’ 행사를 개최하고, 적상산 사고 실록 봉안행렬과 봉안식 등 would ascend the altar to place the box of records in the archive;
을 재연하였다. the enshrinement of the Annals concluded as the seori took the box
31
문화마당 ㅣ 느린 마을 기 행 ②
32
Cultural Encounters ㅣ Slow City T ravel
산촌형 슬로시티
푸른 솔의 고장 ‘청송’
푸른 솔의 고장 청송靑松은 험한 산세 탓에 비록 교통은 불편하지
만, 그 덕택에 자연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산촌형 슬로시티’
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남보다 한 걸음 더 빨리 목적한
바를 이루려고 경쟁하는 시대에, 청송은 가파른 산세를 통해 “천
천히”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자연의 속도
대로 사는 슬로시티 청송의 파천면과 부동면을 찾았다.
경북 청송 주산지
Jusanji Reservoir in Cheongsong, Gyeongsangbuk-do
33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삶 A life spent adapting to nature’s serene flow
청송 가는 길은 꽤 멀다. 서울에서 세 시간을 달려 고속도로 It took me a while to get to Cheongsong. After a three hour drive
를 빠져나와서도 한참을 더 달려야 청송에 닿을 수 있다. 청송은 down from Seoul, I had to drive for a long time even after exiting
유난히 산지가 많다. 산지가 80% 이상을 차지할 정도다. 서쪽에 the highway. There are an unusually large number of highland areas
는 안동과 의성, 북쪽에는 영양, 동쪽에는 영덕, 남쪽에는 포항과 around Cheongsong. In fact, the highlands take up more than 80
영천이 이웃한다. 주변 인근 도시까지는 도로망이 잘 갖춰져 있 percent of the area. Cheongsong’s neighbors include Andong and
다. 그러나 청송에 인접하면 도로가 구절양장처럼 휘감기고 롤러 Uiseong to the west, Yeongyang to the north, Yeongdeok to the east,
코스터를 타듯 오르락내리락한다. 청송을 에워싼 산악지형 탓이 and Pohang and Yeongcheon to the south. Roads are well built and
다. 이런 연유로 청송사람들은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살아야 smooth in these cities and their surroundings; however, once you
했고, 자연이 허락한 터전에서 지금껏 살고 있다. 자칫 고립될 수 approach Cheongsong, the road winds through the mountains like
도 있을 법한 악조건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청송만의 독특한 문 yarn, pitching up and down like a roller coaster. For this reason,
화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자연환경이다. 주왕산국립공원은 people living in Cheongsong have had to adapt to the flow of nature
The lifestyles of people here show how precious they think their
environment is, and this has earned their town the international
National Park.
the mountain’s sheer rocky cliffs may seem to be solely the haunt of
34
by seniors and those with disabilities. Juwangsan is one of the lowest
a national park was largely because of its massive rocks and the
the course includes all the best sights to see on Juwangsan. The
35
특히 대전사에서 용추폭포까지 가는 주방계곡 구간은 휠체어로 reservoir appear to have protected the mystery of the ancient
오갈 수 있는 무장애 탐방로로 유명하다. past. Standing there, I came under the illusion that I was looking
상의탐방지원센터를 지나자 대전사에 이른다. 대웅전 뒤로 우뚝 at a part of the world that had existed long before human beings.
솟은 기암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참을 보고 있어도 그저 놀라 The reservoir was actually built in August of 1720—the year King
울 따름인 풍광이다. 대전사를 지나 계곡을 끼고 숲길에 들어서 Gyeongjong (1688–1724) gained the throne—and in October of the
면 놀랄만한 풍경이 또 한 차례 펼쳐진다. 시선은 물론 마음마저 next year Jusanji Pond was built for agricultural use. They say that
가로채 가는 기암들의 풍모가 그것이다. 계곡물을 퍼 올린 급수 the reservoir has never been dry enough to see its bottom. Jusanji
대, 청학과 백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학소대, 주왕이 숨어 살 Pond became famous after it was featured in the movie Spring,
았다는 주왕굴, 주왕이 무기를 감추었다는 무장굴 등 경승지가 Summer, Fall, Winter . . . and Spring.
이어진다. 제왕의 위엄이 느껴지는 거대한 암벽 사이에 서서 자
연의 경이로움에 감탄, 또 감탄한다. 그중 급수대는 뜨거운 화산 The place to stay in Deokcheon Village
암이 갑작스럽게 식으면서 수축으로 틈이 생긴 절리다. 그것도 After driving about 20 kilometers from Juwangsan Mountain,
수직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기둥처럼 생긴 주상절리다. I reached a village where I ended up wanting to stay for much
기상천외한 바위와 협곡, 폭포를 지나 호젓한 산책로를 따라 30 longer than a night. The traditional Korean houses of Deokcheon
여 분을 걸으면 왕버들과 물안개가 어우러진 주산지에 닿는다. Village look the same as they did when they were first built in the
물안개 자욱한 저수지에 뿌리를 내린 300년 수령의 왕버들 나무 Joseon Dynasty. Starting with its entrance, the village is full of these
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듯하다. 사람이 존재하기 이전, 지구의 traditional houses, ranging from the House of Songso (National
어느 한구석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경종1688~1724 재 Cultural Heritage No. 250), considered the symbol of wealth in the
위 원년인 1720년 8월에 착공해 이듬해 10월에 준공한 농업용 저 village with 99 kan, to the House of Songjeong (Gyeongsangbuk-
수지인 주산지는 준공 이후, 지금까지 바닥을 완전히 드러내고 do Cultural Heritage Site No. 631), which is where General Yi
마른 적이 없다고 한다. 주산지는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 Beomseok, the hero of the Battle of Cheongsalli (Qingshanli), stayed
고 봄>의 주 배경지로 알려지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multiple times. The village is the hometown of the Cheongsong Sim
36
기암을 배경으로 자리한 대전사
Daejeonsa Temple at the base of a stately rock formation
를 ‘ㄱ’자 형태의 내외담남녀의 공간을 구분하는 경계에 조성한 담이 가로막 naeoedam was a barrier to divide the women’s space from other parts
고 있다. 조선 시대는 유교에 따라 ‘남녀유별男女有別’이라 하여 남 of the house. What is interesting is that a small window was made in
녀가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은 건축에도 적용됐는데, this co-gender space to allow the women to see guests coming and
특히 여성의 공간은 가장 깊숙한 곳에 두어 외부로부터 보호했 going from the men’s quarters. For a moment, I felt like one of the
다. 내외담은 여성의 공간을 외부로부터 분리하는 일종의 가림벽 women from the past who tried to see the world through this tiny
인 셈이다. 재밌는 것은 내외담에 구멍을 뚫어 사랑채를 오가는 hole. The House of Songso was turned into a living exhibition in
손님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잠시나마 막힌 틈에 구멍을 뚫어 2002 and is open to the public.
세상을 보고자 했던 옛 여인들의 마음이 되어본다. 송소고택은
Written and photographed by Im Unseok, travel writer
2002년부터 고택 체험시설로 개방 중이다.
•Travel Tip In Deokcheon Village, there are several courses, including the
Village Story Path (6.2 kilometers), which stretches along the mountain
여행 정보 behind the village and the nearby river levee; the Manseokjigi Mountain
Path (3.3 kilometers long); and the Morning Sunlight Path (2.9 kilometers),
•여행 팁 덕천마을에는 뒷산과 하천제방 6.2km를 정비한 ‘마을 이야기길’과 which is a path in the mountain behind the village used in the past by
‘만석지기 산책로(3.3km)’와 지겟길로 이용했던 마을 뒷산 오솔길인 ‘아침 porters carrying Korean A-frames.
햇살길(2.9km)’이 있다. •What to Eat Water from the Dalgi Mineral Spring is a gift of the gods and
•별미 하늘이 내린 물, 달기약수는 미네랄 함량이 높다. 달기약수로 밥을 지 chock full of minerals. If you make rice using Dalgi Mineral Spring water,
으면 찰밥처럼 맛있는 영양밥이 된다. 또 달기약수로 끓인 닭백숙은 청송의 you get delicious and nutritious rice. Whole chicken soup boiled in the
대표 음식이라 할 정도로 유명하다. water is one of Cheongsong’s most famous dishes.
•문의 주
왕산국립공원(054-870-5300) •Contact J uwangsan National Park (82-54-870-5300)
덕천마을 송소고택(054-874-6556) House of Songso in Deokcheon Village (82-54-874-6556)
37
문화마당 ㅣ 팔도 음 식
‘꿩 먹고 알 먹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모처럼 짬을 내어 떠 “Eat a pheasant, then eat the egg too” is a Korean proverb
나는 여행길, 이런 속담에 딱 들어맞는 상황이 펼쳐진다면 더할 equivalent to “Kill two birds with one stone.” Imagine an
나위 없이 좋을 텐데, 경북 청송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닭백숙 excursion that will perfectly fit this proverb during a road
을 만나러 가는 길이 그렇다. 유서 깊은 샘물 ‘달기약수탕’의 톡 trip you finally made the time to take, because surely
쏘는 물맛을 보며 피로를 풀고, 이 약수에 온갖 약재를 넣어 고 you will, on a trip to Cheongsong, Gyeongsangbuk-do,
아낸 닭백숙을 먹으며 건강을 챙기는 여정이다. 달기약수와 닭 the famous home of dakbaeksuk (whole chicken soup).
백숙을 맛본 후에는 주왕산 바위 계곡 트레킹을 즐기거나 왕버 A trip to Cheongsong is one that begins with drinking
들 우거진 주산지의 연초록 경치를 감상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 sparkling mineral water at the historical Dalgi Yaksutang
으니 ‘꿩 먹고 알 먹은 뒤,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여정이라 할 만 Mineral Spring Site (“yaksu” literally means “medicinal
하다. water” in Korean) to detoxify the body, then eating
dakbaeksuk made with the spring water and a handful of
medicinal herbs to recharge. After enjoying Dalgi yaksu
and dakbaeksuk, there await activities such as trekking
through the Juwangsan Mountain rock valley and taking
in the willow-green scenery of Jusanji. This double
delight of good-for-the-body food and drink and good-
for-the-soul sightseeing certainly qualifies this trip as
“eating a pheasant, then eating the egg too.”
철종 때부터 이어진 ‘달기약수’ Dalgi yaksu dates back to King Cheoljong’s time
닭백숙을 만나러 가기 전, 먼저 달기약수탕을 만나는 게 좋다. It is best to visit the Dalgi Yaksutang Mineral Spring Site before
달기약수탕은 청송읍 부곡리 괘천 상류 물길을 따라 암반 10여 heading to eat dakbaeksuk. Dalgi Yaksutang refers to the series
곳에서 솟는 ‘약수터 무리’를 일컫는다. 조선 철종 때 금부도사를 of some dozen mineral springs in the bedrock along the upper
지낸 권성하가 낙향해 살면서 수로 공사 중에 바위틈에서 솟는 약 Gwaecheon Stream in Bugok-ri, Cheongsong. It is said that Gwon
수를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70~200m 간격의 하탕, 신탕, 중탕, Seongha, former Uigeumbu (Correctional Tribunal) officer, first
천탕, 상탕 등이 상류 쪽으로 이어진다. 주요 탕들은 지붕을 덮어 discovered the yaksu flowing from between the rocks while working
38
Cultural Encounters ㅣ Pr ovinc ial Cuisine
39
on the village waterways upon his return home from royal duty.
springs are spread 70 to 200 meters apart, leading toward the upper
stream. Some of the main springs are roofed for protection while
others like Cheontang and Sangtang out in open air on the rocky
streamside.
springs, and while the water at Hatang has the strongest kick, the
difference is rather meager. At any spring, you will see rocks and
waterways turned red from the iron in the water and carbonic acid
leaves a tingly twinge inside the mouth. Cook rice with Dalgi yaksu,
and the rice will gain a bluish tinge and a higher glutinosity. Since
ancient times, the water has been known to mitigate the symptoms
40
예로부터 달기약수는 위장병, 피부병, 부인병, 빈혈, 안질 등을 다 dakbaeksuk early in the morning before tourists huddle at the
스리는 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전해온다. 주민들은 매년 음력 3월 springs.
30일 원탕인 하탕에서 달기약수를 처음 발견한 권성하의 공을 기 There are largely two types of dakbaeksuk served at
리고 약수가 끊이지 않기를 기원하는 ‘달기약수 영천제’를 지낸다. restaurants around the Dalgi Yaksutang Mineral Spring Site:
제를 지낼 때는 양념을 하지 않고 달기약수로만 끓인 닭백숙을 제 regular tojongdakbaeksuk made of Korean native chicken and
상祭床에 올린다. 청송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은 ‘달기약수닭백 neungitojongdakbaeksuk with neungi mushrooms (shingled
숙’이 여기서 시작됐다. hedgehogs). The list of ingredients differs by restaurant, but most
41
문화마당 ㅣ 한국 을 보 다
으로!
한국 적
식은
하 게, 음
글 로 벌
o c a l !
생각은 E atL
ob a l,
i n k Gl
Th
42
Cultural Encounters ㅣ T hr ough Foreign Eyes
한국은 서구와 다른 식습관으로 육류는 물론, 동물 단백질 전반 With an eating habit distinguished from that of the West,
의 소비가 낮은 다양한 음식과 요리에 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 Korea has culinary knowledge that helps reduce the
다. 과도한 육식 소비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현재, 한식은 consumption of meat, or even animal proteins in general,
건강에 좋을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식문화이기도 하다. which is behind many of the world’s problems. Korean
food is not just healthy, it’s sustainable!
20여 년 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 What was striking when I first came to Korea over twenty years ago
은 다름 아닌 음식 냄새였다. 이방인인 나에게 익숙지 않은 된장 was the smell. Not just any smell, the smell of food! In each street,
찌개, 생선찌개, 생선구이 냄새가 마늘과 김치의 독특한 냄새와 whether from homes or restaurants, wafted the unfamiliar smell of
뒤섞여 거리 곳곳의 가정과 식당에서 풍겨 나왔다. 물론 친구나 doenjang, of fried or simmered fish in spicy broths, mingling with
가족이 모일 때면 으레 즐기는 한국의 대표적 별미인 각종 고기 the savory scents of garlic and kimchi. Not to mention, of course, the
구이 냄새도 빠지지 않는다. many grilled meats, those great contributors to Korean gastronomic
43
지난 10년간 채식 추구하는 이가 10배나 늘어 Buddhism. There is an episode engraved in my memory of a hike in
한국의 육류 소비는 나라가 부유해지면서 특히 1980년대부 the hills around Cheongju where, during a visit to a temple, a monk
터 본격적으로 증가했다. 여전히 프랑스보다는 많지 않지만 최근 was kind enough to offer me a meal in which no animal-based food
수십 년간 꾸준히 증가 추세다. 그런데 다른 한편 지난 10년간 채 was present.
식을 표방하는 사람의 수가 10배나 늘었다. 현재는 백만 명이 넘
는 한국 사람이 채식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다. 채식주의는 그 개 Vegetarianism has grown tenfold in the last decade
념이 유동적이다. 어떤 사람은 육류 섭취만 삼가고, 어떤 사람은 Increased meat consumption was born with the country’s
동물에서 유래한 모든 음식을 먹지 않는 등 채식주의자의 단백질 enrichment, especially since the late 1980s. Koreans still consume
소비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후자가 완전 채식주의자비건에 less meat than the French do, but the volume has grown steadily in
가까우며,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가죽이나 동물의 털 같은 recent decades. However, over the past decade, the number of people
모든 동물 유래 제품을 거부한다. who claim to be vegetarian has increased tenfold. Today, more than
채식주의 식단은 환경 보호뿐만이 아니라 동물 학대 방지를 위해 a million Koreans declare themselves vegetarians; some abstain
서도 선택되곤 한다. 봉준호 감독의 유명한 영화 <옥자>가 한국 only from the consumption of meat, while others eliminate all food
사회의 이러한 인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채식주의 시장 of animal origin. The latter are similar to vegans, who additionally
이 번성하면서 많은 기업이 육류의 대체재로 혹은 색다른 먹거리 refuse all products of animal origin such as leather or wool.
로 채소 위주의 상품들을 개발하고 있다. 서울 곳곳에 채식 식당 These diets are often adopted for the defense of the environment,
과 채식 매장들이 있으며, 채식 메뉴를 제공하는 비非한식 음식점 but also to combat animal abuse. Bong Joon-ho’s famous film Okja is
들도 흔해졌다. 대형 패스트푸드 체인인 롯데리아는 최근 버거를 an illustration of this awareness in Korean society.
비롯해 여러 비건 메뉴를 출시했다. 이뿐 아니라 기존 식당들에 Veganism and vegetarianism have become a buoyant market,
서도 고기를 빼 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 and many companies are developing plant-based products, both
44
meat substitutes or entirely new products. There are also vegan
restaurants.
show the rest of the world the means to eat differently and reduce its
try to satisfy my appetite and dine with the desire to eat properly
육류 소비는 일산화탄소 배출, 동물 착취, 과체중과 비만, 삼림 파 without being predatory on the environment. I rarely eat meat and
괴 등 우리 사회의 각종 문제를 일으킨다. 한국은 서구와 다른 식 enjoy Korean food, tasty and locally produced, especially dishes
습관으로 육류는 물론 동물 단백질 전반의 소비를 줄일 방법을 featuring tofu and plant-based meat substitutes. But the most
세계에 제시할 수 있는 다양한 음식과 요리에 대한 지식을 보유 important thing is to make this gesture an ode to nature rather than
하고 있다. 또 한식은 건강에 좋을뿐더러 지속 가능하기도 하다. a simple thoughtless habit!
오늘날 지방과 설탕, 육류가 잔뜩 든 공산 식품의 소비가 증가하 Korean food culture is centered on vegetables and seafood,
는 모습을 보면 어찌나 실망스러운지!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 which takes on extra meaning today as humanity faces a pandemic
만 ‘육식 소식주의자’라 생각한다. 환경을 침해하지 않고 입맛을 that originated from the consumption of meat. Let us meditate on
충족시키면서 적당히 먹으려고 노력하며, 고기는 거의 먹지 않 this!
고 한국에서 생산된 맛있는 한식을 즐긴다. 무심코 기존의 습관
을 답습하기보다는 이런 행위를 자연에 보내는 송가로 삼고 있다
고나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한국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두부와
식물성 고기를 먹는 것이다.
채소와 해산물 위주의 한식문화는 온 인류가 육류 소비에서 비롯
된 전염병으로 시름하고 있는 오늘날이야말로 더더욱 그 의미가
크다. 이 점을 숙고하자!
글 파트리스 제르망 주한 프랑스 학교 교사 Written by Patrice Germain, teacher, Lycée Français de Séoul
사진 파트리스 제르망, 아이클릭아트 Photographs courtesy of Patrice Germain, iclickart
45
공감마당 ㅣ 삶과 문화
전통을
파고
들다
전통을
넘어
가다
우리 옷
연구가
이
기
연
46
시작은 ‘해소되지 않는 궁금증’이었다.
끊임없이 머릿속을 헤집는 ‘왜?’라는 생각이 그림에서 무형예술로,
우리 옷으로, 사회 운동으로, 결국엔 삶의 문화로 그를 이끌었다.
‘생활한복’ 전문 브랜드 ‘질경이우리옷’을 설립하고
37년째 이끌고 있지만, 그의 세계는 ‘옷’으로만 한정할 수 없을 만큼
넓고 다양하며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는 정리의 시기”라고 겸손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눈이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며 열정으로 반짝인다.
47
48
2층에서 내려다 본 매장.
옷과 같은 원리로 개발된
질경이의 신발이 전시되어 있다.
‘전통’으로 불리는, 이른바 ‘우리 것’에 애착을 지닌
듯하다. 지난 1984년부터는 ‘우리옷입기운동’을 펼
쳐온 것으로 알고 있다.
한때 사람들끼리 모여 입고 있는 옷을 벗고 그
안에 적힌 영어 글자를 모두 세어보았다. 한 사람
의 옷 안에서 280자에 달하는 영어 글자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손목시계 뒤편에도 있고, 속옷에도 있
고, 특히 가슴 앞에 있는 말들은 자신을 비하하는
말인데도 뜻도 모르고 달고 다니고 있었다. ‘이거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우리옷입기운동’이다. ‘우리옷입기운
동’을 펼치며 점차 입소문이 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49
그 이야기를 들으니, 지난 2011년 어느 한 호텔 뷔페 상징을 앗아가려 한 것이다. 그런 일을 이른바 지
에서 ‘한복 출입금지’ 논란을 일으켰던 것이 생각난다. 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민족을 ‘개량해야 한다’며 앞
일제강점기 때도 우리나라 사람에게 흰 바지 장서서 했다. 그래서 나는 ‘개량한복’이란 말을 싫
저고리를 입지 말라고 강요하지 않았나. 흰옷을 입 어한다.
지 말라고 해도, 조선인들이 계속 흰옷을 입고 다
니니까 검은 먹물을 바가지로 붓기도 하고 흰옷을 최근에는 성북문화원에서 선보인 <여성독립운동가
입은 사람은 관공서 출입을 막기도 했다. 그렇게 열전1>과 <여성독립운동가열전2> 공연의 예술감독
해도 입으니까 일본에서 디자이너들을 데려와서 을 맡았다.
색복으로 이뤄진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그게 ‘색 <여성독립운동가열전1>은 정정화·이은숙·조
복 입기 운동’이다. 우리의 혼과 정신, 우리 민족의 화벽 이렇게 세 분을, <여성독립운동가열전2>는
강주룡·김마리아·김알렉산드라·권애라·박자혜·
박차정·부춘화·오광심·정칠성·허정숙 이렇게 열
1 <여성독립운동가열전1,2>는 영상, 무용, 음악, 전통의상이 어우러진 상징적인 작품으로 탄생했다.
2 독립운동가 조화벽(배우: 황재희). 강원도 양양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주역이다. 분을 담아냈다. 두 극 모두 ‘융복합 창작 무용극’이
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100여
년 전 식민지 시대를 이야기하는데 ‘대사로만’ 전
달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오감으로 느낄
수 있도록 ‘융복합극’을 만들었다. 독립운동가의
자료 영상을 찾아내고, 없는 부분을 창작하고, 영
상과 연결해 춤을 추고, 대사를 만들고, 또 그 인물
을 상징하는 의상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독립운동
가 허정숙의 옷을 만들면 연극 공연 안에 움직이는
‘스토리텔링 패션쇼’를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겠나. 나는 역사적 인물을 주제로 하는 패션을
새로운 유행으로 만들고 싶다. 역사적 인물의 행동
1
과 놓였던 환경, 상황, 결단 등을 생각하면서 그를
상징하는 옷을 만들고, 관객들은 특별히 역사 공부
를 하지 않아도 끌리는 옷을 발견했을 때 ‘내가 왜
이 옷에 끌렸을까?’를 생각하면서 그 인물에 대해
지식으로가 아니라 느낌으로, 감성으로 다가가도
록 하는 것이다. 나는 비싼 ‘명품 옷’이 아니라 역
사와 인간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옷을 만들고 싶
다. 그게 진정한 명품이라 생각한다.
50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낸 이들에게 관심이 간
다. 사실 처음에는 ‘우리 시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
았지만,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이
들의 말을 대신 전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여성독립
운동가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두
번 공연에 걸쳐 13명의 여성독립운동가 이야기를
올렸는데, 100명의 이야기까지 해보려고 한다.
말이 있다면?
우리 문화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과 대담 한춘섭 편집주간
정리 음소형 편집팀
거에는 서구권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취재사진 김정호 사진작가
그래서 일부러 해외로 나가 전시를 하고 열정을 쏟 공연사진 성북문화원·모다트
51
공감마당 ㅣ 문화 보 고
52
핍진한 느낌 살리기엔 사투리만 한 것 없어
‘와보랑께 박물관’은 강진군 도룡리 들녘에 자
리를 틀고 있었다. ‘쬐끄만한’ 다리를 건너자마자
달랑 한 채의 박물관 건물이 한가하게 들어앉아 있
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인기척을 보냈더니 김
성우(73) 관장이 우리를 반겼다. 그동안 코로나19
의 여파로 문 닫았던 박물관이 긴 동면에서 기지개
를 켠 듯 빗장을 풀고 우리에게 개문開門한 셈이다.
박물관 안마당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까맣게 잊고
지낸 필자 유년시절의 언어들이 고스란히 숨 쉬고
있었다. 고향을 찾아온 듯 반가운 마음이었다. 박물
관은 ‘거시기하게 거시기한 것들’로 건물 입구에서
부터 두 팔 벌려 방문객을 맞이한다. 전라도 사투
리들이 팻말로 서서 시위하는가 하면, 벽면이나 자
투리 공간까지도 원도 한도 없을 만큼 사투리로 도 사투리가 가득한 팻말
배되어 있다.
사실 현재 교육 현실에서 사투리는 잘못된 언어라 이보다 ‘멋대가리’ 없는 표현이 어디 있는가. 보다
는 인식으로 취급당해 왔다. 그래서 사투리를 ‘졸 핍진逼眞한 느낌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하기
업하지 못한’ 사람은 품위나 세련미가 떨어지는 촌 에는 사투리만 한 것이 없을 터다. 표준어는 통일
뜨기쯤으로 여겨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가장 지방 된 언어이기는 해도 마치 ‘제복 입힌’ 군인을 보는
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도 있듯 사투리도 것 같기도 하다. 그 때문에 간절한 느낌에는 한계
‘탯말’이라는 또 다른 호칭을 얻으면서 그 본연의 가 있다. 표준어는 교육적 견지에서는 가치가 있을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널리 아는 것처럼 표준 지 몰라도 인간의 본성을 표현한 느낌의 언어로는
어란 교양 있는 서울 사람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 아무래도 어머니 태내에서부터 배우고 익힌 고향
말로 정하고 있다. 이와 상대되는 사투리는 사용자 의 언어-필자는 사투리를 ‘탯말’로 표기함-인 사투
가 저급한 것도 아니고 비속하거나 후진한 언어는 리가 아니겠는가.
더더욱 아니다. 사투리도 통용지역에서는 자타가
인정하는 ‘표준어’이다. 그리 보면 표준말도 사용 인간이 지구에서 ‘지존’으로 살아가는 이유, ‘말’
지역의 언어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투리의 경우와 벌써 30년도 지난 일본에서의 일이다. 당시 필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는 일본 동지사대학에서 연구하며 틈만 나면 여
이제 사투리는 시집이나 소설책이 아니면 좀처럼 러 지역의 이런저런 박물관과 미술관, 문학관, 영
접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사투리가 가장 화 촬영지 등을 살피곤 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
맛깔나게 통용되는 무대는 문학작품이다. 강진이 라도 언젠가 이 정도의 문화 콘텐츠를 갖추고 이를
낳은 천재 서정시인 김영랑의 <오매 단풍들것네> 보여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들을 곱씹곤 했다. 그
도 사투리가 거둔 표현의 백미이다. 이걸 표준표기 후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 러시아, 프랑스, 이태리,
로 바꾸면 <아아, 단풍 들 것 같구나>쯤 일 것이다. 인도네시아 발리, 영국 등지를 살피는 짧은 여행
53
1
2 3
1 만지지 말고 보기만 하시라는 중에도 시간만 나면 박물관이나 미술관, 문학관 등 은 착각이 들 만큼 반가웠다. 고향에서 살던 어린
경고문이 사투리로 적혀있다.
2 사투리 외에도 3천여 점에
을 둘러보았고 그 나라만의 정신과 문화적 깊이를 시절에는 그리도 입에 달고 살았던 말들이니 이들
이르는 민속품을 함께 전시 살피고자 했다. 단어를 얼마나 맞출 수 있는지 스스로 테스트를 해
중이다.
3 표준어와 여러 지역의 사투리
어찌 보면 그 일의 연장선상으로 사투리의 공간인 가며 읽어갔다. 신기하게도 아직 촉이 살아있던지
‘와보랑께 박물관’을 찾게 된 것이다. 이 박물관이 모두를 맞출 수 있었다.
‘이 집을 찾는 손님들이 어떤 전라도 사투리와 대 영화 <말모이>에는 “사람이 모이면 말이 모이고 말
화를 나누는가’를 살피기 위해 꼼꼼히 읽어갔다. 이 모이면 생각이 모이고 생각이 모이면 독립을 이
와따매오매, 어머, 폴새벌써, 아따못마땅할 때 내는 소리, 맬 룰 수 있다”는 대사가 나온다. 그렇다. 사람은 말言
갑시아무 이유 없이, 꼬꼽항께인색하니까, 뜬금없이갑작스럽 을 만든 최초의 동물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통해
고 엉뚱하게, 지스락처마, 느자구싹수, 암디서나아무 데서나, 상대에게 의사를 전달하고 자기 뜻을 관철해가는
싸가지소갈머리, 우짜다가어쩌다가, 염빙하네염병하네, 워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말들이 인간이 오늘의 지구
메어머, 뽀짝바짝, 겅게반찬, 언능오랑께얼른 오라니까, 생 에서 지존至尊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이상여, 지까심김칫거리, 촐래피리, 짚새기짚신, 개댁이고
양이, 허천병무조건 먹는 병, 저범젓가락, 차댕이자루, 오매 강진은 예로부터 ‘남도 답사 일번지’
땀시로어머니 때문에…. 끝도 없이 사투리가 이어졌다.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는 강진은, 원래부터
전라도가 고향인 필자를 버선발로 마중 나온 것 같 놓치기 아까운 여러 볼거리가 운집한 고을이다.
54
5
4 6
4~6 사투리로 이뤄진 그래서 일찌감치 ‘남도 답사 일번지’라는 칭예를 하던 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로 표류하였다가 서울
예술작품
얻은 터다. 몇 가지만 주워섬겨도 ‘가우도 출렁다 로 압송된다. 서울에서 효종을 알현한 그는 그 자
리’, ‘다산기념관’, ‘고려청자 박물관’, ‘백련사 동백 리에서 일본으로 돌아가길 청하였지만 거절되고
나무숲’, ‘하멜 기념관’, ‘전라병영성’ ‘영랑생가’와 만다. 결국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히고, 그 벌로
‘시문학파기념관’ 등등이 동맥처럼 병영 주변의 흐 병영면 전라병영성에 유배되어 성의 축조에 동원
름을 이어간다. 되었다. 하멜 일행은 1656년부터 7년간 이곳에서
병영은 태종 17년1417 남해에서 노략질하는 왜적을 머물며 담장을 조성하였는데, 그 때문에 이 지역에
막아내기 위해 ‘병마절도사가 주재하는 병영兵營’을 서는 ‘하멜식 돌담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세운 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조선 시대에는 전라병 푸르고 상큼한 여름의 냄새가 돋아나는 초여름, 잠
영을 설치하여 병마절도사가 지휘하던 군사요충지 시나마 사투리의 세상으로 필자를 유인했던 강진
였으며 특히, 이곳 병영은 전라남북도는 물론이고, 을 떠나 원래 있던 제자리로 돌아간다. 타는 저녁
제주까지를 관할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놀을 바라보며, 들러 들러 돌아오는 귀갓길은 마을
2006년 6월 9일 등록문화재 제264호로 지정된 마다 술이 익고 있었다.
‘강진 병영마을 옛 담장’에는 사연이 있다. 1653년,
우리나라에서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하멜이 탑
글 김종 시인, 화가
승한 상선 스페르웨르호가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 사진 김종, 김성우 와보랑께 박물관장
55
공감마당 ㅣ 조선 人 LO V E ⑥
56
“혼자 사는 것도 뼈가 저리게 설운데, 이놈의 세상, 머릿기름 한분 바릴라 캐도 남의 눈치 보고, 옷
한분 갈라입을라 캐도 남의 눈치 보고,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믄 또오, 남정네들 보믄 마주칠까 길을
돌아가고, 이것저것 귀찮아서 남을 기忌하고 살믄 신들 다 카고, 말도 많고, 어이구 과부 팔자!”
박경리, 《토지》-‘광대같은 삶들’ 중
과부, 그 고단한 삶에 놓인
사랑의 징검다리
서러운 추문에 시달린 과부 팔자
소설 《토지》에서 과부 마당쇠댁네와 야무네가
분통을 터뜨리며 대화를 나눈다. 또 다른 과부 복
동네가 터무니없는 소문에 가슴앓이하다 양잿물
마시고 세상을 하직했다. 과거 최참판댁 종과 잠자
리를 같이했다는 소문인데, 알고 보니 마을 영감이
제 딸을 보호하려고 덮어씌운 누명이었다. 남의 일
같지 않다. 세상인심이 원통하고 절통하다. 임자 없
는 멸시려니, 과부 팔자 서럽다. 그들에게 사랑은
삶을 파괴하는 추문이기 십상이었다.
‘과부寡婦’는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여자를 일컫는
다. ‘미망인未亡人’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자 그대
로 풀이하면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에는 죽은 남편을 따라 아내가 목숨을 끊
으면 ‘절부節婦; 정절을 지킨 여인’라고 칭송했다. 나라에
서 표창하고 열녀문까지 세워줬다. 그렇지만 거꾸
로 보면 ‘미망인’이라는 단어에는 은근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남편이 죽었는데 너는 왜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느냐’는 무서운 질책이었다. 조선 시대
미망인은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었다. 양잿물 마
시고 싶을 만큼 괴롭힘을 당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남편과 사별한
여인이 다른 남자와 사귀거나 결혼하는 게 흠이 아
니었다. 부유한 과부들은 원하는 상대를 고르기도
했다.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고려 시대의
57
영향이다. 15세기 문신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서 말이고, 홀아비는 이가 서 말이라고 했던가.
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하지만 15세기 말에 유교 통치 체제가 완성되고,
선비 정모鄭某가 아내를 잃었는데, 남원 부잣집에 16세기 들어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보급되면서 과부
과부가 있다는 말을 듣고 후처로 삼으려고 했다. 는 사회적으로 극심한 제약을 받는다. 과부의 사랑
날을 가려 중매자를 정하고 정 선비가 먼저 예물을 과 재혼은 실행失行, 즉 정절을 잃는 것으로 간주했
갖추어 남원부에 이르렀다. 그러자 과부는 계집종 다. 본인은 부정한 여자로 찍혔고, 자손은 출셋길이
을 보내어 그의 행색을 살피게 했다. 계집종이 돌 막혔다. 과부는 죄인 아닌 죄인의 처지로 전락했다.
아와 “수염이 덥수룩하고 털모자를 썼으니 늙은 병 이리저리 눈치 보며 죽은 듯이 살아야 했다. 친정
자임이 틀림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과부가 실망 재산의 상속도 장남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출
하여 “내가 젊은 장부를 얻어서 늘그막을 즐기려고 가외인인 여식은 시댁만 바라보고 살았고, 남편이
했는데, 이런 늙은이를 어디다 쓰겠는가?”라고 하 세상을 떠나면 생계가 막막했다.
였다. 저녁이 되자 남원부의 관리들이 횃불을 켜고 과부를 넘보는 남자들도 문제였다. 18세기 문인 임
정 선비를 과붓집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과부가 문 매의 《난실만필蘭室漫筆》에 흥미로운 송사가 나온다.
을 닫아걸고 열어주지 않으니, 집에 들어가지도 못 경성의 양갓집 과부가 머슴을 부리면서 혼자 살았
하고 돌아왔다. 다. 과부는 머슴을 인간적으로 대우했는데 스스럼
이야기 속에서 남원 부잣집 과부는 정 선비가 재혼 없이 집안일을 의논하고 철마다 옷을 해주었다. 그
대상으로 적합한지 살펴보고 나이가 너무 많다면 런데 머슴은 오히려 흑심을 품고 둘이 은밀한 관계
서 퇴짜를 놓았다. 그리고는 연하의 남편을 얻어서 라는 추문을 퍼뜨렸다. 급기야 과부가 자기와 정을
늘그막을 즐기려 한다는 소망을 밝힌다. 재혼 여부 통하다가 관계를 끊으려 한다며 형조에 고발까지
와 대상을 스스로 선택하며 행복을 추구한 것이다. 했다. 당시 법률에 양갓집 여자가 사사로이 정을
조선 전기에는 이처럼 재력을 갖춘 과부들이 적지 통하면 남녀 모두 장형杖刑;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을
않았다. 친정 부모로부터 남자 형제와 똑같이 재산 내리고, 여자는 노비로 만들어 그 남자에게 주는
을 상속받았으며, 남편이 죽은 후에도 알뜰하고 규 조항이 있었는데 머슴이 그걸 노린 것이다.
모 있게 재산권을 행사한 덕분이다. 과부는 은이 재판이 열리자 머슴은 과부가 정표로 줬다면서 철
58
마다 해준 옷가지를 증거로 제시했다. 과부는 결백 밤마다 남몰래 만나 정을 나누는 사이가 된 것이다.
을 증명하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머슴이 형조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과부댁은 행여 들킬까
아전들을 매수해 상간으로 몰았기 때문이다. 벼랑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홀아비 집에 갔다. 하루는 어
끝에 몰린 과부에게 문득 꾀가 떠올랐다. 과부는 머니의 밤마실을 수상하게 여긴 아들이 뒤를 밟았
판관에게 주위를 물려달라고 한 뒤, 자신의 배에 다. 개울에 이르자 과부댁은 첨벙첨벙 물을 건넜다.
손바닥만 한 화상 흉터가 있는데 은밀한 관계라면 옷이 다 젖는데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간 것이
머슴이 알 테니 물어봐달라고 요청했다. 이윽고 재 다. 아들은 어머니가 홀아비와 정분이 난 것을 눈
판이 재개되었고 판관이 흉터에 대해 질문했다. 머 치챘지만 오히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젖은 옷을
슴은 의외로 자신만만하게 답변했다. 아전이 엿듣 말리려고 애쓰는 어머니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졌
고 귀띔해준 것이다. 이때 과부가 벌떡 일어나 옷 다. 그는 아내와 의논해 근처 골짜기에서 큼지막한
을 벗었다. 배에는 아무런 흉터도 없었다. 머슴을 돌을 날라 개울에 징검다리를 놓았다. 이 사실을
속이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결국 과부의 기지와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징검다리에 ‘홀어미 다리’
용기로 진상이 밝혀졌고, 간교한 머슴은 엄벌에 처 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들 내외의 효성을 칭송했다.
해졌다. 하동 옥종면에도 닮은꼴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덕
골에 사는 과부가 도덕천을 건너 정인을 만나러 가
과부의 사랑을 응원한 징검다리 효도 는데, 엄동설한에 버선을 벗어든 채 뼛속까지 시리
정절을 중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과부가 봉변 게 개천을 건너는 어머니를 보고 아들이 징검다리
당하지 않으려면 남자를 멀리하는 게 상책이었다. 를 놓아줬다는 구전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 다리를
안쓰럽다고 이웃에서 도움을 줘도 모른 척해야 한 ‘효자도’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을과 개천 이름이
다. 수작 걸거나 집적대면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각각 ‘도덕골’, ‘도덕천’인 점이 이채롭다. 역설적인
힘이 모자라면 식칼이라도 들어야 한다. 안 그러면 작명이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정절을 여성의 으
여자들이 들고일어난다. 제 남자 홀렸다고 머리채 뜸 덕목으로 제시했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적인 욕
잡히기 일쑤다. 그쪽에서 손이야 발이야 빌어도 어 망을 인정하고 본연의 행복을 추구하는 게 진정한
림없건만 덮어놓고 헐뜯는다. 가만있는 과부, ‘몹쓸 도덕이 아니냐고 이야기는 반문한다.
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조선 시대 과부의 다른 이름은 여성 가장이었다.
불구하고 인간 본성에 충실한 여인들도 있었다. 그 시선은 따가웠고 생계는 막막했지만, 그들은 가장
들을 따뜻이 감싸주고 응원한 것은 가족이었다. 김 의 무거운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남의 논밭을
제 청도원마을에는 ‘홀어미 다리’가 있다. 옛날 이 부치고 호롱불에 삯바느질하고 밤새 베틀을 돌리
마을에 청상과부가 살았다.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면서 자식들을 키워냈다. 잔칫집에 가서 허드렛일
억척스럽게 남매를 키운 여인이었다. 자녀들을 출 하고 고기와 떡을 얻어와 부모를 봉양했다. 과부
가시키자 마음 붙일 곳이 없어진 과부댁은 홀로 쓸 팔자 서럽다지만 애면글면 온 힘을 다해 독립적인
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봄날 개울 건너 여성의 길을 걸어갔다. 그 고단한 삶에 놓인 사랑
밭에 씨 뿌리러 갔다가 그녀는 한 동네에서 나고 의 징검다리가 정겹고 애틋하다.
자란 농부를 만났다. 그이도 아내를 여의고 혼자 사
는 처지였다.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안다고, 두 사람
글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은 밭둑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다가 눈이 맞았다. 그림 정윤미 일러스트레이터
59
공감마당 ㅣ 오! 세이
60
5월에 불렀던 그 노래를 6월의 햇빛 아래서도 불렀 윤동주가 사랑했다는 시인 프랜시스 잠을 읽다 보
다. 어느 해는 넥타이부대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행 면 장미가 품고 있는 가시조차도 잊고 덩굴장미 속
진하면서 불렀고, 어느 해에는 노동자들이 파업 현 에 파묻히고 싶다. 노란 송홧가루가 날리던 이 땅
장에서 핏줄을 세워 불렀다. 이 계절에 떠나보낸 의 산천에 아카시아 향이 진동할 때면 괜스레 마음
청춘도 여럿이었다.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었던 그 이 바빠진다. 들판에서는 모내기한 모포기들이 무
청춘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순국했다. 그래서 더욱 럭무럭 자라고, 헛헛한 봄날 시작한 사랑은 무르익
더 이 계절엔 누구든 그 무엇을 향한 열망으로 가 기 시작한다.
득하다. 그 열망들이 모여 금세 뜨거운 여름이 오
는 걸 보면서 우리는 천천히 늙어왔다. 그 열망처 ‘동구 밖 과수원 길 /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
럼 빨간 덩굴장미가 담을 타고 피는 걸 보는 일도 하아얀 꽃 이파리 / 눈송이처럼 날리네 / 향긋한
이 계절에 누릴 수 있는 호사다. 떠나보낸 봄꽃들 꽃냄새가 / 실바람 타고 솔 솔 / 둘이서 말이 없네
에 대해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정도로 붉은 장미 / 얼굴 마주 보며 쌩긋 /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
는 강렬한 유혹이자 넘치는 위로였다. 먼 옛날의 과수원 길.’
- <과수원길>
61
우리마당 ㅣ 불현 듯
제주 불교 석조미술품은
무엇을 말하는가
62
1 2
3 4
63
육지와의 교류를 시사하는 수정사지 그리고 원당사 수정修淨이라는 스님이 머물고 있었다는 재밌는 기록이 전해진다.
수정사는 출토된 유적과 유물들로 보아 고려 초기에 창건되 이 암자의 북편 한적한 곳에는 지금도 어느 승려의 사리와 유골
어 조선 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던 것으로 파악되어 제주에서는 을 봉안하기 위한 승탑으로도 불리는 부도가 세워져 있다. 제주
상당히 유서 깊은 사찰로 밝혀졌다. 그리고 제주에서는 생산되 의 현무암으로 제작되었는데, 견고하면서도 상당히 정교한 솜씨
지 않는 점판암으로 제작된 청석탑이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확인 를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인 모양이나 돌을 다듬은 기법이 육지
되었다. 청석탑은 육지에서도 재료를 구하기 힘들고, 고급스러운 에 건립된 조선 후기 부도들과 친연성을 보이며, 그 양식으로 보
귀족 취향의 색깔 등으로 인해 왕실이나 귀족들의 후원에 의한 아 17~18세기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주에 살고 있
중요 사찰에 많이 건립되었다. 그러한 청석탑이 수정사에 건립되 던 우수한 석공에 의해 설계 시공되었을 터인데, 주인공은 알 수
었다는 것은 당시 제주지역에서 수정사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없지만 조선 후기에 존자암에 머물면서 수행했던 유력한 스님의
또한 부재의 표면에 ‘칠七’ 또는 ‘남南’으로 숫자나 방향이 새겨져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주시 애월읍에는 언덕에 태암사지泰岩
있는 것으로 보아 육지에서 조립식으로 제작하여 어느 정도 시뮬 寺址가 있는데, 현재 옥개석과 상륜부가 남아 있지 않아 돌로 만든
레이션을 해 본 후에 옮겨와 건립한 것으로, 당시 건립 과정과 함 북으로도 소개되고 있다. 전체적인 구조와 형태로 보아 스님의
께 육지와의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부재의 표면에 조 유골이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승탑으로 보인다.
각상과 함께 범자가 새겨져 있어 밀교와 관련된 진언다라니 신앙
에 의하여 조성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어 주목된다. 다만 수정 토속적인 요소가 강하게 느껴지는 ‘동자복’과 ‘서자복’
사지 청석탑은 부재들이 파손되거나 결실된 상태로 일부만 수습 제주시 건입동과 용담동에는 현무암으로 조각된 2구의 조각
되어, 전체 규모와 층수 등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어 아쉽다. 상이 남아 있다. 거의 동일한 규모와 양식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
원당사는 제주 삼양동에 위치한 사찰로 창건 이후 일시적으로 폐 고, 마치 한 쌍처럼 마주 보고 서 있는데, 현재 건입동의 만수사지
사되었다가 다시 중창되어 현재까지 법등을 잇고 있는 제주지역 萬壽寺址에 서 있는 조각상은 동자복東資福, 용담동의 해륜사지海輪寺
의 대표적인 고찰이다. 《탐라지耽羅志》 기록에 의하면, 원나라 기 址는 서자복西資福으로 불리고 있다. 모두 복신미륵福神彌勒으로 불
황후가 북두北斗의 명맥이 비친 삼첩칠하봉三疊七下峰에 탑을 세우 리는 미륵불로 먼 미래에 나타나 그때까지 구제되지 못한 중생들
고 불공을 드려야 태자를 얻을 수 있다는 승려의 계시를 받고, 순 을 구제한다는 미래부처이다. 그런데 두 조각상은 부처상보다는
제에게 간청하여 불탑을 세우고 사자使者를 보내 불공을 드린 결 조선 시대 왕릉이나 사대부가의 묘역에 조성된 문인석과 닮았다.
과 태자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이 석탑은 전체 부재가 현무암으 그리고 과장되게 표현된 얼굴의 눈과 코, 원형의 관모를 쓰고 있
로, 제주의 지역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산이자 는 표현 기법 등은 제주에서 성행한 돌하르방과도 유사하다. 그
석조미술품이다. 석탑의 탑신이나 지붕돌은 간략하게 다듬었지 래서 전체적인 형상이 무덤에 세워졌던 문인석을 대형으로 조각
만, 기단부에 꽃문양을 장식하는 등 돌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하 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돌하르방이 풍선처럼 확대된 것 같
여 정연한 인상을 주고 있다. 1층 탑신 정면의 한가운데에는 사각 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두 조각상이 사찰에서 예불의 대상으로
형 구멍을 새기고 그 안에 공간감실; 龕室을 마련했는데, 소형의 불 조성된 것은 분명한데, 전형적인 돌로 만든 불상이라기보다는 민
상이나 사리구 등을 봉안하기 위한 시설로 이 탑이 생명력 있는 간신앙의 대상으로 야외에 세워진 민불民佛에 가까운 형상이어서
신앙의 대상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탑의 재료와 지역 토속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것
은 다르지만 고려 시대 육지에 건립된 석탑들과 동일한 양식과 으로 보아 두 조각상은 전문적인 안목과 식견을 갖춘 석공에 의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하여 조각되었다기보다는 돌하르방을 조각해 본, 제주도에서 오
존자암尊者庵은 한라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데, 《탐라지》에 의하 랫동안 살았던 능숙한 장인이 지역적 특성을 나름대로 반영하여
면 원래는 이곳에 영실靈室이 있었다고 하며, 《유한라산기遊漢拏山 조선 시대에 조각한 불상으로 보인다. 민간신앙과 외래 종교가
記》에는 띠로 지붕을 얹은 판잣집을 법당으로 삼아 외국 승려인 결합 되고, 제주만의 지역적 특성이 강하게 반영된 유의미한 조
64
각상이라 할 수 있다. 사해 준다. 나아가 고급스러운 탑신석 표면에 범자를 새겨 육지
이처럼 제주지역에 남아 있는 불교 관련 석조미술로는 수정사지 에서도 많지 않은 밀교적인 신앙이 반영된 석탑이라는 점도 주목
청석탑 부재, 원당사지 5층 석탑, 존자암과 태암사지의 부도, 동 된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수천 기의 화강암 석탑이 건
자복과 서자복으로 불리는 조각상 2구 등이 있다. 한편 이경억李 립되었는데, 원당사지 5층 석탑은 제주라는 지역적 특성이 가장
慶億의 시에 의하면 존자암에 고탑孤塔이 있었다고 했는데, 발굴 조 잘 반영된 현무암으로 제작된 고려의 유일한 석탑이다. 그리고
사 때 탑지가 확인되어 기록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또한 제주시 동자복과 서자복은 제주지역의 불교 관련 석조문화가 지역의 고
에 탑동塔洞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현재 사찰은 없지만 탑이 건립 유한 특성을 바탕으로 외래적인 요소를 반영해 슬기롭게 융합된
된 고찰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지명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 모습을 보인다. 한국 불교를 통불교通佛敎라고 하는데, 이는 진리
직 제주에서는 삼국과 통일신라 시대의 불교 관련 유적이나 유물 와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고자 하는 불교 본래의 목적과 벽사적이
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그 당시에 불교가 전해지지 않 고 기복적인 고유한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조화롭게 불교화한 측
았다거나 신앙 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현재까 면을 의미한다. 동자복과 서자복은 통불교적인 한국 불교의 특징
지 제주에서 조사된 유적들로 보아 오래전부터 육지와 많은 교류 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삼국 시대 이후에는 육지와 한편 김상헌의 《남사록南槎錄》에 의하면, 날이 저물어 투숙할 곳을
의 교류 사실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해지고 찾다가 수정사를 찾았는데, 승려들이 모두 처자를 거느리고 있다
있기 때문이다. 당시 제주지역과 백제와의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 고 하였다. 또한 그는 제주에 비구니가 없으며, 대개 절에서도 처
던 것으로 보아 백제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 자를 거느리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육지와 다른 제주
제 성왕이 바다 건너 멀리 일본까지 불교를 전해주었던 것을 보 지역 불교의 차별화된 측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주지역도 육지
면, 그 중간에 있었던 제주지역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에 와 마찬가지로 불교가 전해진 이후, 때에 따라 어려움을 겪기도
무게를 실을 수밖에 없다. 했지만 불교 신앙이 지속되면서 예불의 주요 대상이었던 탑과 불
상 등 여러 유형의 석조미술품이 조성되었다. 다만 제주는 현무
제주지역 불교 관련 석조미술품의 의미 암만 생산되는 지역적인 특성으로 인해 불교 관련 석조미술품이
통일신라 시대에는 항해술의 발달로 여러 지역과 많은 교류 많지 않은 편이다. 제주지역이 오래전부터 육지와 마찬가지로 불
가 이루어졌고, 동아시아의 모든 지역에서 불교가 중심적인 종교 교가 성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상응할 만큼 불교 관련 유적
로 자리 잡았다. 당시 제주지역에 살았던 사람들도 이러한 사실 이나 유물이 많지 않다는 것은 아쉽지만 앞으로 많은 자료가 발
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고, 다양한 루트를 통하여 불교가 전래되 굴되기를 기대한다.
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대 시대에 제주지역에서 불교 신앙이 없
었던 것이 아니라, 육지처럼 규모가 큰 전형적인 사찰이 건립되
지 않았거나, 관련 유적이나 유물이 전해지지 않았거나, 현재 우
리가 밝혀내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크게 성행하면서 제주지역도 수정사와 원
당사 등 여러 사찰에 석탑이 건립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두 석탑
만 남았지만 이 석탑들은 제주지역뿐만 아니라 한국 석탑사에서
조영 기법과 재료 등 여러 면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
다. 수정사지 청석탑은 현존하는 제주지역의 불탑 중에서 건립
글 엄기표 단국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시기가 가장 빠르며, 점판암이 없었던 제주지역에도 청석탑이 건
사진 국립제주박물관, 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 문화재청,
립되었다는 것은 당시 불교문화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을 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65
우리마당 ㅣ 북한 사 회 문 화 읽 기 ⑯
변화하는
북한 전역에 방송되는 유일한 TV방송, ‘조선중앙TV’
북한의 방송체계는 조선중앙방송 라지오라디오, 조선중앙방송
북한 TV방송
텔레비죤텔레비전, 제3방송주민대상 유선스피커 등의 대민 방송체계, 대
남 선전용 방송인 평양방송, 평양FM방송, 구국의소리방송, 그리
고 각종 외국어로 방송하는 국제 방송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TV방송에 중점을 두어 보다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북한 전역에 방송되는 유일한 TV방송인 조선중앙TV는 1963년
3월 평양TV방송으로 출범하여 1970년 4월 현재의 명칭으로 바
뀌었고, 1974년 4월 15일 김일성의 62회 생일을 기해 컬러 방송
북한에서 방송과 출판은 선전·선동의 유력한 수 을 시작했다. 우리의 경우는 과소비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아시아
단으로서, 정권 초기부터 당이 완전히 장악하여 대부분의 국가보다도 늦은 1980년 12월 1일부터 컬러 방송 송출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 방송통제 시스템을 보 이 이루어졌다.
면, 당 선전선동부는 방송의 편성과 그 내용을 직 조선중앙TV는 뉴스, 영화, 음악, 스포츠, 어린이, 교양 프로그램
접 통제하고, 당 조직지도부는 간부 인사권을 통 등으로 편성하나, 내용적 측면에서는 정치·경제적인 선전·선동
해 방송계 전반을 통제하며, 통일전선부는 대남방 을 중시하며, 평일 15~23시, 토요일 12~23시, 일요일공휴일 09~23
송을 통제한다. 관리·행정적 차원의 방송정책 집 시에 방송한다. 한편 1983년 1월 외국인과 일부 특수계층의 평양
행은 내각 문화성 산하 조선중앙방송위원회가 수 시민만을 대상으로 개국한 만수대TV는 2016년 5월부터 모든 주
행하고, 시설과 기자재는 내각 체신성이 담당하는 민에게 개방했다. 주말 09~13시와 16~22시에만 방송하는데, 국
등 역할이 당과 내각의 각 기관에 분담되어 있다. 제 소식, 외국영화, 스포츠 등 문화프로그램 위주로 방영하여 시
북한에서 방송계 근무 경험이 있는 한 탈북자의 민들에게 인기가 높다. 만수대TV는 1988년 무렵부터 7년간 일요
증언에 따르면 최소 일곱 번 이상 검열과 통제가 일마다 <톰과 제리><우둔한 고양이와 꾀 많은 생쥐>로 방영를 1~2편씩 방송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며, 방송사고 발생을 우려하 한 적도 있다.
여 생방송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룡남산TV는 1997년 김정일 생일에 개국한 교육문화TV가 2012
년 9월에 전환한 것이다. 월·수·금요일 19~22시에 방송하는 이
TV방송도 평양시에서만 볼 수 있고, 외국 영화와 드라마, 외국어
교육, 철학·경제학 등 교양프로그램 위주로 방영하여 대학생들에
게 특히 인기가 높다. 체육TV는 2015년 7월 만수대TV가 잠시 폐
국된 기간에 2015년 8월 15일 조국해방광복 70주년을 기념해 만
66
들어진 방송이다. 김정은이 특히 관심이 많은 스포츠 전문 채널 소재의 변화 꾀하되, 체제선전 주제는 결코 포기 않아
로,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19~22시에 방송하고 있다. 북한에서 TV드라마가 주민들로부터 본격적인 인기를 끌기
북한의 TV드라마와 예술영화극영화에 삽입되는 음악들은 1958년 시작한 것은 1993년에 방영한 〈석개울의 새봄〉부터라고 할 수 있
5월에 창단한 ‘영화및방송음악단’이 전담하여 만들고 있는데, 이 다. 천세봉이 창작한 같은 제목의 장편소설1955~1960년 발간을 원작
음악단은 <아리랑>, <빛나는 조국>, <인민의 나라>와 같은 ‘대집 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전쟁 직후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군軍
단체조와 예술공연’의 배경음악, 각급 학교 교가, 화면반주음악 출신의 한 농촌관리위원장이 북한의 집단농장화 정책을 관철한
들도 연주·녹음한다. 다는 것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당 정책 선전이라는 진부한 주제
북한에서 ‘영화문학’시나리오은 ‘영화문학창작사’가 창작하고, ‘텔 의 작품임에도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강한 개
레비죤극문학’ TV드라마 대본 은 ‘텔레비죤극창작사’가 창작한다. 성으로 갈등과 대립을 반복할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
1973년 7월에 창설된 텔레비죤극창작사가 제작하는 북한의 TV 기가 극의 재미를 더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크게 TV소설, TV극, TV영화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 1990년대 이후 북한에서 크게 인기를 끈 TV드라마들은 대부분
TV소설은 소설 낭독자의 화술과 화면이 배합되어 형상이 창조되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가미된 작품들이다. 1995년 1월에 방
며, 묘사문학으로서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비해 TV극은 대 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TV드라마 〈백금산〉 역시 전체적으로는
사를 기본수단으로 하여 형상한 극적인 생활을 보여주는 특징이 체제 찬양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스토리의 전개가 빠르고 남녀
있다. 한편 TV영화는 TV로 방영할 것을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로, 간의 사랑 이야기가 적당히 가미되어 있다. 남대현의 소설1987년 작을
행동의 예술로서의 영화적 특성을 보인다. 바탕으로 1995년에 TV드라마로 제작, 방영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67
끌었던 〈청춘송가〉 역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들어 있다. 체 한류 등 국외 콘텐츠 유입 등으로 TV방송 형식 변화
제선전 영상물에 지친 주민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마치 당의정과 북한의 TV방송은 2013년부터 SD급 디지털 방송을 시작하
같이 체제선전물을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포장함으로써 사 여 2015년 초에 SD와 HD 겸용 송출방식에서 풀 HDFull HD급으
상적으로 교양하려는 북한당국의 의도가 읽히는 부분이다. 로, 그리고 우리보다 10년 정도 늦은 2017년 12월 4일에는 16 : 9
2001년 10월에는 이혼 문제를 다룬 TV연속극 〈가정〉을 방영했 비율의 풀 HD급 디지털 방송으로 전환했다. 2012년 12월 31일
다. 이 연속극은 남편이 아내에게 욕설과 함께 무자비하게 때리 우리의 TV방송이 전면적인 디지털 방송으로 전환할 당시 재미있
고 살림살이를 부수는 모습, 전처의 자식을 구박하는 후처, 부부 는 에피소드가 있다. 우리의 지상파 아날로그 TV방송이 일제히
싸움으로 상처받는 자녀들의 모습 등 북한에서 좀처럼 볼 수 없 종료되자, 북측 강원도 지역과 황해도 지역 주민들이 “삶이 고단
었던 장면들이 대담하게 다루어졌다. 결국 방영 9일 만에 중단되 하지만 저녁이면 KBS 〈6시 내 고향〉이나 드라마 등을 보면서 마
기는 했지만, 이러한 파격적인 변화는 당시 북한사회에 유행한 음의 위안을 삼았는데, 이제 무슨 재미로 저녁을 보내겠느냐”며
‘신사고’적인 시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식상한 주제 몹시 서운해했다는 것이다《데일리 NK》, 2012.10.28.. 이러한 소식이 국
로 인해 주민들로부터 외면 받는 예술작품에 리얼리티를 부여이른 내에 전해지자 우리 정부는 관계 당국 회의를 열어 북한으로 송
바 ‘지성도의 향상’해 주민들의 심성에 다가감으로써 예술의 사상교양 출하는 TV전파만은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을 유지한 바 있다《중앙
적 기능을 강화해 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이후 오늘날에 이르 일보》, 2012.12.26..
기까지 북한의 TV드라마는 시청자들의 의식 수준에 맞춰 형식과 근래 북한은 TV방송 기술의 발전 추세에 맞춰 방영 형식상에서
소재의 변화를 꾀하되, 체제선전과 경제선동, 그리고 우상화라는 도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촬영에 드론과
주제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오고 있다. 이러한 북한 액션 카메라 등 최신 장비를 활용하는가 하면, 3차원 CG를 통
방송계의 기본입장은 드라마뿐만 아니라 모든 방송 콘텐츠에서
확인된다.
68
해 가상현실 장면을 방영하는 등의 새로운 기법들을 선보이고 있
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프로그램의 형식에도 변화를 주고 있
다. “다양해진 화면, 속도감 있는 편집, 감각적이고 역동적인 구
성”KBS, 2019.4.15.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뉴스보도의 경우 과거
의 전투적인 말투와 고압적인 표정에서 벗어나 보다 친근하고 부
드러운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젊은 남녀 아나운서방송원가 나와
1
대화 형식으로 뉴스를 진행하는가 하면, 다양한 현장 르포를 통
해 현실감을 강조하기도 한다. 뉴스의 배경화면도 입체화하거나
동영상을 깔고 있다.
일기예보날씨도, 연합뉴스TV2019.4.29.의 표현을 빌리면, 딱딱한 어
투로 날씨를 ‘낭독’하기만 했던 과거의 방식을 탈피하여, 날씨 관
련 그래픽에 손짓을 써가며 친절히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
다. 이와 같은 북한 TV방송의 형식상의 변화는 장마당의 활성화
2
로 ‘한류’ 등 해외콘텐츠의 유입과 함께 주민들의 의식 수준과 미
적 감각이 높아짐에 따라 북한당국이 이에 대응하는 측면이 강하
다고 하겠다. 그러나 북한 TV방송 콘텐츠들은 내용상으로는 예
나 지금이나 여전히 당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변함없이 체
제선전과 경제선동, 대외비방, 김일성 3대 우상화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 간 방송 교류는 문화 차이 이해를 위해 중요 3
69
SUN MON TUE
CA LENDER
1 2
문화달력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서울 동대문문화원] 2020 동대문구민 문예공모전 원고 접수
7 8 9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14 15 16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한문연] 지역문화행정과정 3차(서울여성
플라자)
[서울 동대문문화원] 2020 동대문구민 문예공모전 원고 접수
21 22 23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28 29 30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8.9.)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8.9.)
[한문연]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접수(~8.7.)
70
WED THU FRI SAT
3 4 5 6 현충일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서울 동대문문화원] 2020 동대문구민 문예공모전 원고 접수
■ [인천 연수문화원] 인천시민대학(섬 스 ■ [인천 연수문화원] 인천시민대학(먼우 ■ [서울 도봉문화원] 절기따라 놀이따라
토리텔러 및 유튜버 양성) 금 마을 이야기 교육 및 지역사회 아카 (망종)(창동역사문화공원, 14:30)
이빙)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시민기
록단
10 11 12 13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어린이극 <괴물신드롬> _학산소극장
■ [인천 연수문화원] 인천시민대학(섬 스 ■ [인천 연수문화원] 인천시민대학(먼우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시민기 ■ [광주 서구문화원] 5·18역사문화탐방
토리텔러 및 유튜버 양성) 금 마을 이야기 교육 및 지역사회 아카 록단 (40주년, 오월 서구로(路))
이빙) ■ [인천 연수문화원] 꿈다락토요문화학교
‘꼬마작곡가’
■ [인천 연수문화원] 전통문화예절학교
17 18 19 20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한문연] 지역문화행정과정 3차(서울여성
플라자)
[서울 동대문문화원] 2020 동대문구민 문예공모전 원고 접수
■ [인천 연수문화원] 인천시민대학(섬 스 ■ [인천 연수문화원] 인천시민대학(먼우 ■ [광주 서구문화원] 제17회 전국 애송 ■ [인천 연수문화원] 꿈다락토요문화학교
토리텔러 및 유튜버 양성) 금 마을 이야기 교육 및 지역사회 아카 시 낭송대회 본선(빛고을국악전수관, ‘꼬마작곡가’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시민극단 이빙) 14:00) ■ [인천 연수문화원] 전통문화예절학교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시민기
록단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주인공원, 예
술로 잇다
24 25 26 27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한문연]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접수
71
02-704-2322
그네뛰기
Geunettwigi
ISSN 1599-4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