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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관음보살입상 金銅觀音菩薩立像
>
7세기 전반백제 시대, 높이 26.5cm

금동관음보살입상은 1907년 부여군 규암면에서 발견되었다. 한 농부가 땅을 파다가 쇠솥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


두 구의 보살입상이 있었다. 이 중 하나는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293호 부여 규암리 금동관
음보살입상이다.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일본인인 이치다 지로市田次郞가 가지
고 있었는데, 1945년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2년 전 일본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금동관음보살입상은 반드시
빠른 시일 내에 국내로 환수해야 할 국보급 문화재이다. 부드럽게 아래로 흘러내린 옷, 허리를 살짝 틀은 우아한
자세, 특히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신비하고 미묘한 웃음은 미美의 정수를 보여 준다. 관음보살은 자비慈悲의 상징
이다. 그는 늘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도 대자비심으로 용서하고
구원하는 보살이다. 현존하는 동아시아의 금동보살상 중 이보다 더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 주는 작품은 없다. 이
관음보살의 순진무구한 웃음은 자비와 포용, 이타심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글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소장 일본 개인
목차•Contents
U RIM U N HWA
A KORE AN LOCAL
C U LT U R E M O N T H LY

월간 우리문화 별별마당
vol.284 | 2020 06
4 테마기획Ⅰ
발행인 김태웅
6.25전쟁 70주년 기념 _ 다시 유월에
발행일 2020년 6월 1일
편집고문 권용태
10 테마기획Ⅱ
편집주간 한춘섭
편집위원 곽효환, 김 종, 김찬석, 오광수, 자신의 조국처럼 대한민국을 지킨 참전용사 / 정유지
오양열, 장진성, 지두환
편집담당 음소형 14 시와 사진 한 모금
발행처 한국문화원연합회 돌아선 하늘이여 흐르지 않는 강이여 _ 6.25전쟁 70주년에 부쳐 / 이근배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9(도화동, 성우빌딩) 12층
전화 02)704-4611 | 팩스 02)704-2377
홈페이지 www.kccf.or.kr
등록일 1984년 7월 12일
문화마당 Cultural Encounters
등록번호 마포,라00557
기획편집번역제작 서울셀렉션 02)734-9567 16 옹기종기 Iconic Items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솟대’ / 이행림
Sotdae: Bridging Heaven and Earth / Lee Haengrim

18 한국의 서원 ③ Korea’s Seowon


퇴계의 성리학적 자연관 담긴 안동 도산서원 / 이종호
Dosan Seowon in Andong: Expressing Yi Hwang’s Neo-Confucian Ideas on Nature /
Lee Jongho

24 지역문화 스토리 Local Culture Stories


“실록을 임금처럼···” 조선왕조실록과 적상산 사고史庫 / 맹갑상
“Treat the Records as You Would the King”: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Jeoksangsan History Archive / Maeng Gapsang

32 느린 마을 기행 ② Slow City Travel


산촌형 슬로시티 _ 푸른 솔의 고장 ‘청송’ / 임운석
Cheongsong: Slow City in the Mountains / Lim Unseok

38 팔도음식 Provincial Cuisine


탄산 약수와 함께 즐기는 청송 ‘달기약수닭백숙’ / 이병학
우리 놀이문화 _ 그네뛰기
A Healthy Meal Made with Sparkling Mineral Water: Cheongsong’s Dalgi Yaksu
표지 이야기 Dakbaeksuk / Lee Byunghak
큰 나뭇가지에 나무를 가로질러 두 줄을 맨 뒤,
줄 아래 걸쳐놓은 발판 위에 올라서서 42 한국을 보다 Through Foreign Eyes
앞뒤로 흔들며 노는 놀이 생각은 글로벌하게, 음식은 한국적으로! / 파트리스 제르망
표지 그림 박수영 일러스트레이터 Think Global, Eat Local! / Patrice Germain
공감마당
04 46 삶과 문화
전통을 파고들다, 전통을 넘어가다 _ 우리 옷 연구가 이기연 / 한춘섭

52 문화보고
“언능 와보랑께~” “버얼써 가봤당께!” _ 강진 와보랑께 박물관 / 김종

56 조선 人 LOVE ⑥
과부, 그 고단한 삶에 놓인 사랑의 징검다리 / 권경률

24 60 오! 세이
덩굴장미 아래서 목 놓아 너를 부르리라 / 오광수

우리마당

62 불현듯
제주 불교 석조미술품은 무엇을 말하는가 / 엄기표

32 66 북한사회 문화 읽기 ⑯
변화하는 북한 TV방송 / 오양열

70 문화달력
한국문화원연합회, 지방문화원 일정

72 NEWS, 편집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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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599-4236
■ 원고 투고나 《우리문화》에 대한 의견, 구독신청 등은 편집부(eumso@kccf.or.kr)로 보내주세요.
■ 게재된 기사 및 이미지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 책자는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아 제작합니다.
별별마당 ㅣ 테마 기 획 Ⅰ

6 . 2 5 전 쟁 7 0 주 년 기 념

다 시 유 월 에

철모에 진달래를 꽂은 채 봄을 기다리고 있는 소년 병사

많은 병사들이 곳곳에 핀 진달래를 보며 혹독했던 겨울의 끝을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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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국군 제1사단 소속 병사

한국군 부대 중 유일하게 미 1군단에 배속되어 한미 연합작전을 펼쳤던 1사단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전에 참가,
당시 세계 최강의 기계화 부대인 미 제1기갑사단을 제치고 평양에 제일 먼저 입성한 부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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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동란, 짓밟힌 산하여!

어머니의 왼쪽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는 아버지의 부재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당시 대부분의 성인 남자는 남한이나 북한 어느 한쪽으로부터 징집을 당했고,
이는 피난민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깍지 낀 두 손으로 막내를 끌어안은 아이의 시선이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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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한 북한 전투기의 잔해 위에 올라
손을 흔들고 있는 소년

이 소련제 야크기는 전쟁 초기 잠깐 맹위를 떨쳤으나,


유엔군은 곧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한반도 상공의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국군 포병대 소대원이 포격을 가하고 있는 모습

초창기 휴전 회담이 열렸던 개성의 시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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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면의 사진들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발간된 사진집 《1950》(저자 존 리치)에서 저자
측의 허락을 받아 발췌하여 게재했습니다. 《1950》은 개전부터 휴전까지 한국전쟁을 지켜본
미국 종군기자가 촬영한 세계 최초의 한국전쟁 컬러사진집입니다. 코닥사의 전설적인 필름,
코다크롬으로 촬영하여 70년 전 한국의 모습을 생생하고 선명하게 전달합니다.

사진 출처 존 리치의 《1950: 한국전쟁 70주년 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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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테마 기 획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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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조국처럼
대한민국을 지킨 참전용사
“내가 죽은 후 유골을 전우들이 잠들어 있는
한국의 격전지 931고지에 뿌려 달라.”
6.25전쟁에서 목숨 바쳐 대한민국을 지킨 어느 한 프랑스 참전용사의 유
언 중 한 구절이다. ‘전사戰士에게 있어 최고의 영광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임을 자랑스럽게 여긴 나폴레옹의 후예다운 유언이 아닐 수 없다.

외국 참전용사들, 이들은 며칠 후 낙동강 방어선의 최전선으로 배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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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의 능선 931고지와 ‘모리스 나바르’ 어 4차 공세가 한창이던 1951년 2월에 일등병으로
931고지는 851, 894고지와 함께 강원 양구군 동 처음 참전하여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
면 사태리에 있다. 당시 이 고지는 금성金城 지구에 위 지 23일간 철원, 김화, 평가 일대 철의 삼각지대에 대
치한 적의 후방 기지 상황을 그대로 식별해낼 수 있 한 유엔군의 대대적 공세 작전에 투입됐고, 이어서
었고, 동부 전선에 절대적 영향을 주는 국군 진격 작 미 2사단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는 단장의 능선 전투
전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고 에 참전했다. 그는 10월 12일 전투 막바지 밤 10시경,
지를 놓고 벌인 쟁탈전에 유엔군 3,700여 명과 북한 적 마지막 저항선인 851고지에서 유탄을 가슴에 맞
군 25,000여 명이 죽거나 다친 것으로 추산될 정도 아 부상을 입었다. 그는 1952년 2월 프랑스로 귀국
로 치열한 전투지였다. 때문에 이 고지는 단장斷腸 ; 창 해 치료를 받고 나서, 1953년 3월 한국전에 다시 참
자가 끊어질 듯 괴롭다의 능선으로 불린다. 단장의 능선 위 전했다. 휴전을 앞둔 고지 쟁탈전일명 고지전 시기였다.
로 뿌려진 6.25전쟁 프랑스 참전용사 고故 모리스 나 1953년 10월 하사로 귀국하기 전까지 여러 전투에서
바르Maurice Navarre의 풍장 소식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전공을 세워 여러 차례의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그
사람인 필자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의 여운을 남겼다. 는 프랑스로 귀국하자마자 1954년 5월 베트남의 승
지난 2007년 9월 22일 낮 12시 30분 단장의 능선에 리로 끝난 인도차이나 전쟁에도 참전했다. 그는 평생
서는 프랑스 대사 부인, 주한 프랑스 무관 나스 대령, 단장의 능선 전투를 잊지 못하는 노병이었다. 2004
나바르 용사 부인 등 프랑스 측 대표 5명과 21사단 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유골을 전우들
사단장 강한석 소장을 비롯한 장병들이 참석한 가운 이 잠들어 있는 한국의 격전지 931고지에 뿌려 달라”
데 ‘프랑스 참전 기념비’ 제막 행사와 함께 유골을 바 는 유언을 남김에 따라 나바르의 부인이 주한 프랑스
람에 날리는 풍장風葬이 거행되었다. 때는 한·불 수교 대사관에 그 뜻을 전달했다.
121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유골로 돌아온 모리
스 나바르 용사는 그렇게 단장의 능선에 잠든 전우들 목숨 걸고 고지를 지킨 프랑스 참전용사
품으로 돌아갔다. 프랑스는 6.25전쟁이 발발했을 무렵 인도차이
모리스 나바르는 중공군 3차 공세와 1.4후퇴에 이 나에서도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도와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1950년 7월 22일
구축함 1척을 파견한 데 이어, 9월 18일 현역과 예비
역들의 지원을 받아 파병을 위한 보병 1개 대대를 편
성했다. 프랑스 지상군은 그해 11월 29일 부산에 도
착했다. 해병대와 공수부대, 외인부대, 수도방위부대
출신으로 이뤄진 최정예 부대였다. 특히 프랑스군을
이끈 대대장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 중령은 외인
부대 출신의 예비역 중장이었으나, 6.25전쟁에 참전
하기 위해 5계급 강등을 자청한 인물이었다. 프랑스
대대는 미 제2사단 23연대에 배속돼 1951년 1월 10
일 원주쟁탈전에 처음 참전했다. 2월 10일 지평리 인
프랑스 참전용사
근에서 진행된 쌍터널 전투에서 프랑스 대대는 연대
'모리스 나바르' 단장이
능선에 잠들다. 규모의 중공군과 피 튀기는 백병전을 펼치며 방어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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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를 끝까지 사수하고, 1,300여 명에 달하는 적들을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1993년 방한 당시
사살해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부대는 이 프랑스군 참전기념비를 찾아

공로로 미 대통령 부대 표창과 프랑스 육군 부대 표 헌화하였다.

창을 받았다. 곧이어 2월 13일 미 23연대와 함께 지


평리 전투에 참여한 뒤 중공군 3개 사단의 포위 공격
에 맞서 3일간 혈전을 벌여 유엔군 전선을 양분하려
던 중공군의 2월 공세를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
를 했다. 이후에도 부대는 단장의 능선 전투, 화살머
리고지 전투 등 치열한 전투에서 많은 희생을 치르면 유엔군에게 있어 조국은 바로 실제 전투가 벌어지는
서도 맡은 고지를 끝까지 방어해내는 활약을 펼쳐 휴 전장 그곳일 수밖에 없었다. 전사戰士로 다시 태어나
전회담에서 우리가 유리한 입지를 점할 수 있도록 기 게 만드는 전장이야말로 전사의 조국인 것이다. 삶과
여했다. 프랑스 대대는 미 2사단 23연대에 배속되어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에서 장렬하게 산화하는 것을
6.25전쟁에 약 3,400여 명이 참전했다. 그리고 6.25 최고의 영예로 여겼던 전사에겐 그 전장이 영광스러
전쟁에서 전사 269명, 부상 1,350명, 포로 12명, 실종 운 제2의 조국일 수밖에 없다는 말인데, 6.25전쟁 당
7명이라는 큰 피해를 보았다. 특히 단장의 능선 전투 시, 그 전장이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2007년 고故 모
에서만 260명의 부상자와 6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 리스 나바르의 ‘단장의 능선’ 귀환과 동시에 그의 풍
다. 프랑스에서는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해 매년 10월 장 의식이 전해주는 전사적·역사적 의미는 새롭게 인
파리 개선문에서 ‘단장의 능선 행사’를 치르고 있다. 식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유엔군의 희생을 단순히 남
이때 참전용사들과 그 가족들이 제복을 입고 참여하 의 나라 장병의 희생이 아닌 전사의 조국으로서 대한
고, 프랑스 군악대의 의전과 함께 당시 참전용사들을 민국의 수호를 위해 희생했다는 측면으로 재해석해
위로하는 뜻깊은 시간을 갖기도 한다. 야 한다.

‘전사의 조국’이 된 ‘대한민국’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유엔 참전용사들의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이다. 6.25전쟁은 온전 숭고한 희생을 대한민국은 영원히 기억할 것입
하게 대한민국 국군과 북한 인민군만 싸운 전쟁이 아 니다.(We will remember the noble sacrifice
니다. 대한민국 국군 109만 911명 외에 미군 48만 명 of the soldiers who joined the UN forces to
등 총 22개국 1,719,575명이 참전하였다. 최대 참전 fight for the freedom and peace.)”
국인 미군은 36,574명이 전사하고 103,284명이 부
상하였으며 3,737명이 실종하는 큰 피해를 보았다. 용산 전쟁기념관 내 전시관 글귀이다. ‘전사의 조국’,
6.25전쟁은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 한 나라대한 대한민국은 아직도 세계 각지에서 온 모리스 나바르
민국를 돕고자 지원한 것으로 기록된 전쟁이며, 이러 같은 영웅들이 수없이 지키고 있는 신성한 곳이다.
한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전쟁이기도 하다. 한반
도는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아프리카, 유럽, 아
메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 각지에서 유엔군으로 글 정유지 경남정보대 국방계열 교수, 《6.25전쟁과 펜의 전
쟁》 저자
파병된 장병들의 고귀하고 값진 희생의 대가로 오늘
사진 정유지, 국가기록원
날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사진 출처 한국전쟁 70주년 사진집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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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시와 사진 한 모 금

돌아선 하늘이여
흐르지 않는 강이여
- 6.25전쟁 70주년에 부쳐

얼굴을 돌린 하늘이었다

거꾸로 흐르는 강이었다

산도 물도 고이 잠들고

배달겨레 한 핏줄 고운 꿈길 건너던

1 9 5 0 년 6 월 2 5 일 이른 새벽

이 무슨 하늘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날벼락이리오

북위 3 8 도선 북 방 경 계 선 에 서

어둠을 찢고 산하를 흔들며

터져 나온 동족상잔의 포성이 울렸다

그날로부터 이 겨레 보금자리

장엄한 역사 일으켜 세우고

눈부시게 문화 꽃피우던

금수강산은 불길에 휩싸이고

나라안팎의 병사들이며

어질고 착한 백성들 앗기고 다친 목숨들

온 땅을 피로 적시었어라

어찌 이루 다 이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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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1 천백스무이레 동안 치렀던 이근배

그 고난, 그 비극, 그 참상을 시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오직 잃은 것만 있고 얻은 것 없이

1 9 5 3 년 7 월 2 7 일

휴전선 1 5 5 마일 다시 갈라선 이 나라

서로 갈리인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딸

통일을 바라 뼈를 녹이고 살을 여윈지

어느덧 일흔 해가 되었구나

더는 기다릴 수가 없구나

하늘이여 얼굴을 돌려다오

강물이여 소리높이 울어다오

산과 물이 하나 되고

8 천만 얼싸 부둥켜 춤추는

통일의 새날을 열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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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옹기 종 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솟대’


Sotdae: Bridging Heaven and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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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I c onic I tem s

고즈넉한 시골길을 걷다 보면 간혹 마을 어귀에 세워진 긴 As you walk along quiet country roads in Korea, you may come
장대와 그 위에 내려앉은 새 한 마리를 볼 수 있다. 노을과 함께 across a bird perched atop a long pole erected at a village entrance.
그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진짜’ 새인 양 착각할 수 있지만, 이 새 Viewing the scene against the twilight, you might mistake the bird
는 장대 위에 붙어있는 ‘조각’이다. ‘솟대’라고 불리는 이 나무 조 for the real thing—but it is a sculpture affixed to the top of the pole.
형물은 삼한 시대에 신을 모시던 장소인 소도蘇塗에서 유래한 것 Known as a sotdae, this wooden decoration takes its name from
으로, 전라도에서는 ‘소주’, ‘소줏대’, 함흥 지방에서는 ‘솔대’, 황 “sodo” (蘇塗), a place where gods were honored during the Samhan
해도·평안도에서는 ‘솟댁’, 강원도에서는 ‘솔대’, 경상도 해안 지 era. It goes by the names of “soju” or “sojutdae” in Jeolla-do, “soldae”
방에서는 ‘별신대’ 등으로 부른다. in the Hamhung region, “sotdaek” in Hwanghae-do and Pyongan-do,

“soldae” in Gangwon-do, and “byeolsindae” along the Gyeongsang-


솟대는 과거 급제 등 경사가 있을 때 축하의 뜻으로 세운 것도 있 do coast.
지만, 액막이와 풍농·풍어 등을 기원하며 세운 것이 일반적이다. Sotdae were sometimes erected in celebration of events such
옛사람들은 솟대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간 역할을 하여 화 as residents passing the state examination. Normally, however, they
재, 가뭄, 질병 등 재앙을 막아줄 거라 믿었다. were raised to ward off evil spirits and wish for an abundant harvest

or catch. The people of old believed that the sotdae would serve as a
솟대 위 새를 ‘오리’라 칭하는 마을이 대부분이지만, 지역에 따 “divine pole” bridging heaven and earth, and thus defending against
라 기러기, 갈매기, 따오기, 왜가리, 까치, 까마귀 등으로 부르기 fire, drought, disease, and other calamities.
도 한다. 솟대의 제작 시기 역시 마을마다 다르다. 해마다 마을 제 In most villages, the bird atop the sotdae is referred to as a duck,
의에 즈음하여 제작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솟대가 부러져야 다시 but it can also variously be a goose, gull, ibis, heron, magpie, or crow,
만들거나 윤년이 들 때마다 새로 세우는 곳도 있다. depending on region. The dates of the sotdae’s creation also vary

from one village to the next. Some of them are produced around the
솟대의 새는 주로 나무로 조각되나, 쇠 또는 돌로 만들기도 한다. time of annual village rites, while others are raised to replace broken
새의 모양이나 마릿수, 머리 방향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 ones or erected at every leap year.
는데 한 기둥에 새가 두 마리인 경우, 서로 마주 보고 있거나 같 The birds on the sotdae are normally sculpted from wood,
은 곳을 응시하기도 한다. 또 한 마리씩 여러 개의 솟대가 있는 although some are made from metal or stone. The birds hold
경우 같은 곳을 보고 있는가 하면 한 마리는 마을 안, 다른 한 마 different meanings depending on their shape, number, and
리는 마을 밖을 각각 향하고 있기도 하다. direction—for instance, two birds on a single pillar may be facing

each other or gazing upon the same place. In some cases, there are

several sotdae, each with a single bird looking at the same place;

other times, one bird is looking inside of the village while another is

looking outside.

글 이행림 편집팀 Written by Lee Haengrim, editing team


참고자료 한국민속신앙사전 ‘마을신앙’ 편 Reference: “Village Faiths,” Encyclopedia of Korean Folk Beliefs
사진 아이클릭아트 Photographs courtesy of iclick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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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의 서 원 ③

안동 도산서원 전경
Panoramic view of Dosan Seowon in Andong

퇴계의 성리학적 자연관 담긴


안동 도산서원

Dosan Seowon in Andong: Expressing Yi Hwang’s


Neo-Confucian Ideas on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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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Korea’s Seowon

조선조 최고의 유학자를 꼽으라면 대부분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 If asked to name the greatest Confucian scholar of the
〜1570을 떠올릴 것이다. 퇴계는 성리학을 체계화해 ‘동방의 주자’ Joseon Dynasty, most people would think of Yi Hwang
라고 불린 조선의 대학자로, 평생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경북 (1501–1570), also known by the pen name Toegye.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과 Toegye was a great Joseon-era scholar who devoted his
고을 선비들이 퇴계가 도道를 강론하던 도산서당에 서원을 세워 life to research, earning the appellation “Zhuzi of the East”
야 한다며 1574년에 조성한 것이다. for his systematization of neo-Confucian ideas. Dosan
Seowon in Andong, Gyeongsangbuk-do, was created
after his death in 1570 by students and local Confucian
scholars who felt that a seowon should be built on the site
where he had expounded upon the do (Way).

멀리서 본 시사단
Sisadan Stele seen from afar

유학의 중심지, 도산서원 Dosan Seowon: A hub of Confucian scholarship


도산서원은 서원이 세워진 다음 해인 1575년 선조로부터 ‘도 The academy was bestowed the name “Dosan” by King Seonjo
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1576년 2월에 퇴계의 신위를 모셨 (r. 1507–1608) in 1575, the year after it was built, and Toegye’s
다. 이후 도산서원은 사림의 온실이자 영남학파의 산실로서 무려 ancestral tablet was enshrined there in February 1576. A hothouse
360여 명의 이름난 문인들을 배출했다. of Sarim (community of neo-Confucian scholars) and the birthplace
도산서원 입구의 넓은 마당에 도착하면 우측으로 멀리 안동호의 of the Yeongnam School, the academy would go on to produce no
시사단試士壇이 보인다. 시사단은 정조 16년1792 정조가 평소에 흠 fewer than 360 noted literary figures.
모하던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 As you approach the broad courtyard at the Dosan Seowon’s
해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다. 이를 기념하 entrance, you can see Sisadan Stele far off to the right by Andongho
기 위해 비를 세우고 단壇을 모았는데, 비문은 당대의 영의정이었 Lake. Sisadan Stele is the location where King Jeongjo (r. 1776–1800)
던 번암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 그러나 안동댐 수몰로 송림이 없 had a special government examination (the Dosan byeolgwa) held by
어지자 현 위치에서 지상 10m 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 royal order in the 16th year of his reign (1792) to honor the learning
를 보았던 자리를 표해두고 있는데, 현재 이를 기리기 위해 매년 and virtue of Toegye—a figure of admiration for him—and raise
전국 한시 백일장이 열린다. morale among local Confucian scholars. To commemorate this, a
도산서원으로 향하는 입구에는 열정洌井이라 새겨진 우물이 있다. stele was erected and an altar assembled, with an inscription by Chae
도산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것으로,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역 Je-gong (pen name “Beonam”), a chief state councilor (yeonguijeong)
경》의 정괘井卦에서 의미를 취했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도 옮겨가 at the time. After the pine forest was inundated by Andong Dam,
지도 못하고 퍼내어도 줄지 않는다. 이처럼 무궁한 지식의 샘물 however, an embankment was built at the current location at a
을 두레박으로 하나하나 퍼내어 마시듯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height of ten meters, with location of the government examination
심신을 수양해야 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 indicated at the top of it. Every year, a nationwide contest for poetry

19
도산서당 영역과 도산서원 영역 in Chinese is conducted in honor of it.
현재의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At the entrance leading to Dosan Seowon is a well inscribed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영역과 퇴계 사후에 선생의 학문과 with the name Yeoljeong (“clear well”). Used to provide drinking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나뉜다. 서원 전체 water for the Dosan Seodang, it takes its meaning from the jing (well)
영역의 앞쪽에 자리 잡은 도산서당, 농운정사, 하고직사 등은 도 hexagram in the Book of Changes (I Ching), one of the Confucian
산서당 영역에 속하고, 그 뒤편에 들어선 건물들은 퇴계가 타계 classics. A well cannot be moved when one leaves a village, nor does
한 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574년 제자들이 건립한 도산서 its water diminish as it is taken. Accordingly, the name expresses the
원 영역에 속한다. idea of having to cultivate one’s body and mind through constant
퇴계는 1558년 58살이 되던 해에 집을 짓기 시작하여 1560년에 도 effort, just as one draws from the inexhaustible spring of knowledge
산서당을 완성하였다. 도산서당 자체는 3칸밖에 안 되는 작은 규 one bucketful at a time.
모의 남향 건물이다. 건물을 남쪽으로 향하게 한 까닭은 행례行禮,
즉 예를 행함에 있어 편하게 하고자 함이고, ‘재齋’를 서쪽에 두고 Areas of Dosan Seodang and Dosan Seowon
‘헌軒’을 동쪽에 둔 것은 나무와 꽃을 심을 뜰을 마주하며 그윽한 The current Dosan Seowon is divided into two areas: Dosan Seodang

1 열정이라 이름 붙여진 우물 (village school), where Toegye taught students while deeply exploring
A well named Yeoljeong ("clear well")
neo-Confucian scholarship, and Dosan Seowon proper, which was
2 농운정사
Nongunjeongsa Dormitory built after his death to honor his scholarship and virtue. The Dosan

Seodang area includes Dosan Seodang, Nongunjeongsa Dormitory,

and the Hagojiksa (caretaker’s quarters), which are located in front

of the general seowon precincts. The buildings behind them belong

to the Dosan Seowon area, having been built by Toegye’s students in

1574 after his death to commemorate his achievements.

Toegye began building a home in 1558, the year he turned 58,

and completed what is now Dosan Seodang in 1560. The school itself

is a small-scale southern-facing structure consisting of just three

kan, or sections between columns. The reason the building was built
1
facing south was to make it more convenient for the performance of

rituals; the reason it has a jae (residential and study area) to the west

and a heon (area for official business and the entertaining of guests)

to the east was said to be a way of revering the quiet elegance as it

looked out upon a field where trees and flowers would be planted.

In addition to the building, Toegye also took pains with the

field. According to his collection Dosan jabyeong byeonggi, he dug

a small pond to the courtyard’s east, which he dubbed Jeongudang

Pond and used to plant lotuses. He also cleared a small space

across the stream to create a spring called Mongcheon. On the


2 foothills above the stream, a flat platform has been built facing the

20
전교당(도산서원에 있는 강당)
Jeongyodang Lecture Hall in Dosan Seowon

운치를 숭상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Amseoheon floor. Planted with apricot blossoms, bamboo, pines,
퇴계는 건물뿐만 아니라 뜰에도 공을 들였다. 퇴계가 쓴 《도산잡 and chrysanthemums, the garden was called Jeorusa. The design
영병기》에 따르면 앞마당의 동쪽 구석에 작은 방지를 파서 ‘정우 connecting the scenery from the Amseoheon hall past Jeongudang
당淨友塘’이라 하고 연꽃을 길렀고, 개울 건너에 작은 터를 닦고 ‘몽 Pond and Jeorusa to the Nakdonggang River could ultimately be
천蒙泉’이란 샘을 만들었다. 샘 위의 산기슭에는 평평한 단을 쌓아 seen as an excellent illustration of Toegye’s neo-Confucian ideas
암서헌과 마주 보게 하고, 그 위에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를 regarding nature, and the aim of ultimately becoming one with it.
심어 ‘절우사’라 불렀다. 암서헌 대청에서 정우당, 절우사를 지나 Across from Dosan Seodang, eight dormitory rooms (sa) were
낙동강으로 경관이 이어지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자연과 하나가 built for students; individually known as the Siseupjae, Jisungnyo,
되려는 퇴계의 성리학적 자연관을 잘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and Gwannanheon, the buildings were collectively referred to as
도산서당 건너편에는 유생들을 위해서 ‘사舍’ 8칸을 지었는데, 각 “Nongunjeongsa.” The Nongunjeongsa buildings consisted mainly of
각 ‘시습재時習齋’, ‘지숙료止宿嶚’, ‘관난헌觀瀾軒’이라 이름 지었고 이 a floor and individual rooms, which were divided in two along the
를 합해서 ‘농운정사隴雲精舍’라 하였다. 농운정사는 크게 마루와 same lines of the tradition division of seowon academies into “east”
방으로 되어 있는데 마치 일반 서원이 동재와 서재로 나누어져 and “west” dormitories. At the same time, these two spaces were
있듯 이들도 둘로 구분되어 있다. 하지만 이 두 단위 공간 사이에 connected with parquet floors (jjokmaru). The floor plan followed an
쪽마루가 놓여 있어 서로 이어지기도 한다. 농운정사는 평면이 “H” shape, which was not often used with ordinary homes because it
‘工’자로, 뒷방 쪽에 햇빛이 들지 않아 일반 민가에서는 잘 짓지 did not allow sunlight into the rooms in back. Yet Toegye insisted on
않는 형식이다. 그러나 퇴계는 직접 설계도를 그리고 짧은 처마 this design, sketching the plan himself and making use of short eaves
를 사용하여 빛을 받도록 배려하면서 이 형식을 고집하였다. 그 to ensure that light would enter. This was also an expression of the
것은 工자형 집이 기숙사 건물로 적합하며 ‘공부工夫한다’는 뜻도 aim of study, as he deemed a home shaped like the Chinese character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for “work” or “study” (gong, 工) to be suited to use as a dormitory.

21
문루가 없는 것은 스승에 대한 존경의 뜻 Lack of a gatehouse as sign of respect
도산서원의 특징은 크고 높은 문루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가 존재 One of the distinctive aspects of Dosan Seowon is its lack of a large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원 영역 입구에 문루가 있다면 전체 시 and tall gatehouse (mullu) structure atop its outer gate. When a
각의 중심이 된다. 한마디로 문루가 기존 도산서당 영역을 지배 gatehouse is introduced at the entrance to a seowon’s precincts,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문루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스승인 퇴 it becomes the center of the general field of view. In short, the
계를 제자들이 위에서 굽어보는 불경을 범하지 않겠다는 뜻과 다 gatehouse comes to dominate the existing school grounds.
름없다. Essentially, the decision not to build a gatehouse was a way for
도산서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곳은 동광명실과 서광명실 Toegye’s students to declare that they would not commit the
로 나뉜 두 채의 광명실이다. 광명실은 서책을 보관하던 곳으로, irreverence of looking down on him from above.
왕이 하사한 서적, 퇴계가 보던 서적과 철폐된 역동서원易東書院에 The place seen as holding the greatest importance in Dosan
서 옮겨온 서적, 그리고 퇴계의 문도文徒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의 Seowon was Gwangmyeongsil, a library divided into two sections
문집을 모아두었다. 이곳에서 보관 중인 책은 모두 907종 4,338 (East Gwangmyeongsil and West Gwangmyeongsil). A place for
책이나 된다. 이처럼 서원은 유생들을 가르치는 곳이기도 하지만 storing books, Gwangmyeongsil was used to assemble texts bestowed
도서관의 구실도 했으며, 보관 중인 책을 바탕으로 다시 책으로 by the king, books that had been read by Toegye, books transferred
엮어내는 출판사의 구실도 했다. from the discontinued Yeokdong Seowon, and collections by

Confucian scholars, including Toegye’s own students. In all, 907


퇴계 선생의 숨결이 느껴지는 옥진각 books are collected there in 4,338 volumes. While the seowon was
도산서원의 자랑은 옥진각玉振閣이라 불리는 유물전시관으로 a place for teaching students of Confucianism, it was also a library,

and it served additionally as a publishing house, using the books in

its collection to compile new texts.


동광명실(서책을 보관·열람할 수 있던 곳)
East Gwangmyeongsil, where books were stored

22
Okjingak Pavilion: Sensing the spirit of Toegye
The pride of Dosan Seowon is Okjingak Pavilion, which is used as a

gallery to display many items related to Toegye. The name “Okjin”

is short for jipdaeseong geumseong okjin, an expression meaning

“Synthesis is the sounding of metal and jade.” Okjingak includes

exhibits that allow visitors to sense the hand of the teacher, including

the pillow and bedding that Toegye used, a cheongnyeojang cane

made with rolled goosefoot, and stationery items that include

an apricot blossom inkstone, jade paperweight, and document

혼천의(천문관측기) box. Also on display are the Seonghaksipdo (Ten Diagrams on


Honsang celestial globe and honcheonui armillary sphere (astronomic devices)
Sage Learning), created for King Seonjo in 1568 with illustrations

showing ten major systems of Confucian philosophy in the hope that


퇴계와 관련한 많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옥진’은 ‘집대성 금성 he might serve as a sage ruler; the Toegye seonseong sujeok (Traces
옥진集大成 金聲玉振’을 줄인 말로, ‘집대성했다는 것은 금소리에 옥 from the Hand of Master Toegye), a collection of drafts by Toegye;
소리를 떨친 것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옥진각에는 퇴계가 Mui Gugokdo (Painting of the Nine Bends of Wuyi), a painting
생전에 쓰던 베개와 자리, 명아주대를 말려 만든 지팡이인 청려 in which he imagined the valley of nine bends at Mount Wuyi in
장, 매화벼루, 옥서진, 서궤 등의 문방구 등이 전시되어 선생의 손 Chong’an County within China’s Fujian Province; and a painting of
길을 느낄 수 있다. 이 밖에도 퇴계가 1568년 선조가 성군이 되길 Dosan Seowon produced by Kang Se-hwang in the 27th year of King
바라며 유교 철학의 주요 체계 10가지를 그림으로 나타내 올린 Yeongjo’s reign (1751).
상소문 <성학십도>, 퇴계의 초고 등을 모은 《퇴계선생수적退溪先生 Okjingak Pavilion is also home to a distinctive scientific
手蹟》, 중국 복건성 숭안현에 있는 무이산의 구곡계곡을 상상해서 instrument: the honcheonui armillary sphere. An astronomic
그린 <무이구곡도>, 영조 27년1751 강세황이 그린 <도산서원도> device used to estimate the movements and positions of celestial
등이 있다. bodies, the honcheonui is also known by the names “honui” and
옥진각에 특이한 과학기재도 있는데 바로 ‘혼천의’다. 혼천의는 “seongiokhyeong.” Built by Toegye for educational purposes, it is the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천문기기로 혼의渾儀 또는 선 oldest astronomical instrument currently existing in Korea.
기옥형璇璣玉衡이라고도 한다. 퇴계가 교육용으로 제작한 것으로 Dosan Seowon is one of 47 seowon academies that remained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천문기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intact without being damaged or demolished when Prince
도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도 훼손되거나 사라 Regent Heungseon Daewongun abolished the establishments. It
지지 않고 존속된 47곳의 서원 가운데 하나다. 서원은 1969년 사 was designated in 1969 as Historic Site No. 170 and underwent
적 제1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69년과 1970년에 대대적으로 보 large-scale repairs in 1969 and 1970. Until 2005, the 1,000-won
수했다. 2005년까지 발행된 천 원구권에는 한 면에 이황의 초상, note featured a portrait of Yi Hwang (Toegye) on one side and a
다른 한 면에 도산서원 전경이 들어있다. panorama of Dosan Seowon on the other.

Written by Lee Jongho, author of UNESCO World Heritage: Korea’s Seowon


글 이종호 《유네스코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저자, 前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 Academies, former member of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회> 위원 Return Committee
사진 이종호, 도산서원관리사무소, 아이클릭아트 Photographs courtesy of Lee Jongho, Dosanseowon, iclick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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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지역 문 화 스 토 리

[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지원 사업 ]

“실록을 임금처럼···”
조선왕조실록과 적상산 사고史庫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시대 제1대 왕 태조太祖에서부터 제25대
왕 철종哲宗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
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역사서로, 총 1,893권완질은 1,717권 888책
에 이를 만큼 방대하다. 완성된 실록은 재난에 대비하고자 춘추
관 사고서울, 정족산 사고강화, 태백산 사고봉화, 오대산 사고평창, 적
상산 사고무주의 전국 5대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 Regional Cultural Content Development Project ]

“Treat the Records as You


Would the King”: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Jeoksangsan History
Archive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Joseon wangjo sillok)
are a historical document that proceeds through 25
rulers and 472 years (1392–1863) by day, month, and
year, from the first Joseon Dynasty monarch King Taejo
to the 25th, King Cheoljong. They are accordingly vast,
encompassing 1,893 volumes (1,717 of them complete)
in 888 books. Once finished, the records were stored in
five history archives across Korea in case of disaster: the
Chunchugwan Archive in Seoul, the Jeongjoksan Archive
in Ganghwa, the Taebaeksan Archive in Bonghwa, the
Odaesan Archive in Pyeongchang, and the Jeoksangsan
Archive in Muju.

24
Cultural Encounters ㅣ L oc a l Culture Stories

복원된 적상산 사고
The reconstructed Jeoksangsan Archive

25
《조선왕조실록》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역사 기록물 Historical records with few parallels
《조선왕조실록》은 권질卷秩의 방대함과 아울러 조선 시대 거 In addition to the vastness of their volumes, the Annals are seen as
의 모든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에서도 유례를 a historical record with few parallels anywhere else in the world,
찾아보기 힘든 역사 기록물로 꼽힌다. 또한 국왕조차 함부로 기 encompassing historical facts related to nearly every aspect of the
록을 열람할 수 없었기에, 기록에 대한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Joseon Dynasty. As even the king was not permitted to read the
높은 편이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73년 12월 31일, 정족산 records at his leisure, the records are also seen as highly accurate
사고본 1,181책제151-1호, 태백산 사고본 848책제151-2호, 오대산 사고 and credible. In recognition of this value, a total of 2,077 books were
본 27책제151-3호, 기타 산엽본 21책제151-4호, 도합 2,077책을 국보로 designated as National Treasures on December 31, 1973, including
지정했으며, 1997년 10월 1일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 the 1,181 books of the Jeongjoksan Archive text (No. 151-1), the 848
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books of the Taebaeksan Archive text (No. 151-2), the 27 books of
《조선왕조실록》은 태종 13년1413에 《태조실록》을 편찬한 것이 처 the Odaesan Archive text (No. 151-3), and 21 other assorted texts.
음이며, 이어 세종 8년1426에 《정종실록》을, 5년 후인 1431년에 On October 1, 1997, they were listed alongside the Hunminjeongeum
《태종실록》을 편찬했다. 《태종실록》 편찬 직후 보관의 필요성이 (Proper sounds for the instruction of the people) in the UNESCO
제기되면서, 삼조실록三朝實錄; 태조, 정종, 태종은 고려 시대 실록이 보 Memory of the World Register.
관돼 있던 충주 사고史庫에 봉안됐다. 하지만 충주 사고는 민가 The first portion of the annals consisted of the Annals of King
밀집 지역에 위치해 화재 위험이 크다는 우려가 있었고 이에 Taejo, which were compiled in the 13th year of King Taejong's regin
1439년 6월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새로 설치한다. 이후 1445년 (1413). This was followed by the Annals of King Jeongjong in the
11월까지 삼조실록은 3부 더 복제본을 만들어 총 4부를 춘추관과 eighth year of King Sejong’s reign (1426) and the Annals of King
충주·전주·성주 등 4곳의 사고에 각기 1부씩 봉안한다. 그러나 Taejong five years later in 1431. After the Annals of King Taejong were

compiled, the need for storage was raised,

and the Annals for the three kings (Taejo,


1 1, 2 《조선왕조실록》 적상산 사고본. 국보 제151-4호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preserved at the Jeongjong, and Taejong) were enshrined
Jeoksangsan Archive (National Treasure 151-4)
in a historical archive in Chungju where

the records of the Goryeo Dynasty were


2 kept. The Chungju archive, however, was

located in an area with numerous homes,

and concerns about the high risk of fire

led to the establishment of new history

archives in Jeonju and Seongju in June

1439. Between then and November 1445,

three more copies of the annals for the

three kings were produced, and one copy

each was enshrined in the four history

archives at the Chunchugwan and in

Chungju, Jeonju, and Seongju. But the

copies at the Chunchungwan and the

26
Chungju and Seongju archives were all lost as a result of the Japanese

invasion in year 25 of King Seonjo’s reign (1592). In June of that

same year, An Ui and Son Hong-rok, Confucian scholars in Taein,

Jeolla-do, heard of the Japanese army’s advancement to Geumsan

and relocated the records at their own expense, moving them from

the Jeonju archive to Naejangsan Mountain in Jeongeup, where they

were preserved for around one year before being returned to the

government. At the time, 259 volumes of the Annals for 13 kings—

from King Taejong to King Myeongjong—were stored at the Jeonju

archive, along with other books.

1938년 적상산 사고 Four Jeoksangsan Archive texts discovered, made National


The original Jeoksangsan Archive, 1938
Treasures
After receiving the Jeonju archive records that had been stored at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인해 춘추관과 충주, 성주 사고 실록 Naejangsan Mountain, the government relocated them in July 1593,
은 모두 소실되고 만다. 한편 그해 6월, 금산에 왜군이 침입했다 storing them first at Haeju, then Ganghwado Island, and finally
는 소식을 들은 전라도 태인의 선비 안의와 손홍록은 개인 재산 Myohyangsan Mountain. Located in the north, the Myohyangsan
을 털어 정읍 내장산으로 전주 사고 실록을 옮기고 이를 1년여 동 Archive was threatened by the souring diplomatic relationships
안 지키다 정부에 반환하였다. 이때에 전주 사고에는 《태종실록》 with the newly established Houjin (Qing) in Manchuria, along
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 실록 259책과 기타 소장 도서들이 보 with the risk of holdings being lost due to neglect by archive
관돼 있었다. administrators. The relocation of the Annals to a safer location

in the south was discussed, and in 1612 Jeoksangsan Mountain


적상산 사고본 4책 발견해 국보化 in Muju was designated as the location. Construction on the
1593년 7월, 내장산에서 보관하던 전주 사고 실록을 넘겨받은 archiving location began in 1613, and the Sillokgak (Archive for
정부는 이를 해주와 강화도를 거쳐 묘향산으로 옮겨 보관했다. Annals) was established in the sixth year of the reign of King
한편, 북방에 위치한 묘향산 사고는 만주에서 새로 세워진 후금청 Gwanghaegun (1614). Four years later, in September of the 10th
과의 외교 관계 악화로 위협을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고 관 year of King Gwanghaegun’s reign (1618), the Annals of King Seonjo
리 소홀로 소장 도서를 잃어버릴 우려에 놓여있었다. 이에 남쪽 were enshrined. By year 12 of the reign of King Injo (December,
의 안전한 장소로 실록을 옮기자는 논의가 이뤄졌고, 이후 1612 3, 1634), the collection of the Myohyangsan Archive—259 books
년 무주 적상산으로 장소를 확정했다. 1613년 사각을 짓기 시작 from the Annals of King Taejo to the Annals of King Myeongjong—
했으며 광해군 6년1614에 실록각實錄閣을 건립했다. 4년 뒤인 광 and 39 books from the Gwanghaegun ilgi (Daily Records of King
해군 10년1618 9월 《선조실록》을 봉안했다. 그리고 인조 12년1634 Gwanghaegun’s Reign) had been relocated and enshrined there. The
년 12월 3일까지 묘향산 사고에 있던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 Seonwongak Archives were built in the 19th year of King Injo’s reign
지 실록 259책과 춘추관에 봉안돼 있던 《광해군일기》 39책을 함 (1641), and with the enshrinement of the Seonwollok (a lineage of
께 이곳으로 옮겨서 봉안했다. 이후 인조 19년1641에는 ‘선원각璿 the Joseon royal house), the Jeoksangsan Archive was a full-fledged
源閣’을 건립하고, 조선 왕실의 족보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함으로써 archive of both history and lineage.

27
From the 1,400 books enshrined in the Seonwonbogak

Archives as of 1910, it can be estimated that the Jeoksangsan

Archive previously housed as many as 5,500 books. During Japan’s

occupation of Korea, however, the Jeoksangsan copies of the

Annals and books were relocated by the Japanese to the Yi Wangjik

Jangseogak (Yi Royal Library), and the Jeoksangsan Archive—which

had worked tirelessly for 296 years to preserve Joseon history from

the first monarch King Taejo to the 25th monarch King Cheoljong—

saw its role gradually fade away. Some of the Jeoksangsan Archive

copies of the Annals were lost from Jangseogak in a theft that

occurred shortly after Korea’s liberation; the remaining portions

were taken to North Korea after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on

June 25, 1950, and are reportedly part of the collection of the Kim Il

Sung University Library today.

As a result of these developments, it was believed that no Annals

copies from the Jeoksangsan Archive remained in South Korea. But


부산진구 전포동에 있는 황령산 봉수대
Hwangnyeongsan Mountain beacon station, Daeyeon 3-dong, Nam-gu, Busan a thorough investigation by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between 2017 and 2018 uncovered a total of four volumes of the

Jeoksangsan Archive copies that had been stored at the National


1872년 무주부 지도 Museum of Korea and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Jangseogak
Map of Muju-bu, 1872
collection. On June 26, 2019, additional National Treasure designations

were conferred upon seven missing books from the Jeongjoksan


적상산 사고는 선사 양각을 갖춘 완전한 ‘사고’로서 역할 한다. Archive’s copy of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four books from
1910년 선원보각에 1,400여 책이 봉안되었음을 볼 때 적상산 사 the Jeoksangsan Archive, one from the Odaesan Archive, six from the
고에는 5,500여 책이 보관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Bongmodang Archive, and 78 incomplete and assorted texts.
일제강점기에 의해 적상산 사고본 실록과 서책들은 ‘이왕직 도서
관장서각’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이후 조선 제1대 왕인 태조에서 제 Transporting the Annals: A solemn state ritual
25대 왕인 철종까지의 역사를 피와 땀으로 296년간 온전히 지켜 Since the Annals were themselves symbolic of the king, the rituals
왔던 적상산 사고도 점점 그 기능을 다하게 된다. 장서각에 보관 performed whe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were enshrined in
해 오던 적상산 사고본 실록은 광복 직후 실록 도난 사건으로 일 an archive were grand and solemn. The procession of enshrinement
부분이 흩어져 없어지게 되었고, 이마저도 1950년 6.25전쟁 당시 officials is believed to have traveled from Hanyang and visited
북한으로 유출되어 현재는 김일성종합대학도서관에 소장되어있 Gwacheon, Cheonan, Yeosan, Jeonju, Jinsan, and Geumsan in
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같은 사건들로 인해 적상산 사고본 실 turn before reaching Muju; as an occasion devoted to invaluable
록은 국내에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문화재청 state historical records, it had attendant guards positioned at the
이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일괄 조사를 한 결과 국립중앙박물관 procession’s front and back. Central officials accompanied the records
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서 보관 중인 총 4권의 적상산 as they were being transported. In the case of the Chunchugwan

28
사고본 실록을 발견하였고, 지난 2019년 6월 26일 조선왕조실록 enshrinement ceremony, the official responsible was the supervisor
정족산 사고본의 누락본 7책, 적상산 사고본 4책과 오대산 사고 (chongjaegwan) of the Sillokcheong (Office for Annals Compilation),
본 1책, 봉모당본 6책, 낙질 및 산엽본 78책 등이 추가로 국보 지 but for enshrinement ceremonies at outside archives such as the one
정되었다. at Jeoksangsan, the “palace-ascendable official” (dangsanggwan)—a

Grade 3 position—held immense responsibilities. Following behind


실록의 이동은 엄숙한 국가 의례 the dangsanggwan was the Chunchugwan’s copyist (gisagwan), who
한편, ‘실록’은 그 자체가 곧 왕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 was in charge of historical records and compilation; behind him
에 《조선왕조실록》을 사고에 봉안할 때 행해지던 모든 의식은 웅 was an administrator from the Gwansanggam department, which
장하고 장엄하게 거행됐다. 한양에서 과천 → 천안 → 여산 → 전 established the dates for the records’ enshrinement. According
주 → 진산 → 금산 등을 거쳐 무주를 찾은 것으로 추정되는 봉안 to historical documents, the district magistrate (busa) of Muju
사 행렬은 국가의 귀중한 역사자료인 실록을 모시는 자리인 만큼 traveled from the local government office to the village entrance
행렬 앞과 뒤에 호위군이 자리했다. 실록을 운반할 때는 중앙관 to await the enshrinement procession. Waiting outside the office
리들이 동행하는데, 춘추관의 봉안식은 실록청의 총재관이 책임 to greet the arriving enshrinement procession carrying the Annals
자지만, 적상산 사고 같은 외外사고 봉안식에는 정3품급인 당상 from Hanyang, the Muju magistrate organized a lavish musical
관이 봉안사로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다. 당상관 뒤에는 역사의 display and an honor guard including military officials, rank-and-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는 춘추관의 기사관이 그리고 그 뒤에는 실 file soldiers, and local clerks and petty officials. The records being
록 봉안 날짜를 잡는 관상감 관원이 따른다. 고증에 의하면 무주 brought by the enshrinement officials were viewed as equivalent to
부사는 지방 관아에서 마을 어귀까지 나가 봉안사 행렬을 기다려 the king, and the officials made sure to appear in advance and ensure
맞이했다고 한다. 한양에서 실록을 운반해 온 봉안사 일행을 관 the maximum decorum. When the enshrinement officials arrived,
아 밖에서 맞이하는 무주 부사는 군관과 군졸, 아전을 비롯한 의 they proceeded to the Muju government office under the magistrate’s
장대와 악대까지 성대하게 갖춘다. 봉안사 일행이 가져온 실록 guard to temporarily store the records in the office prior to their
은 마치 임금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미리 나와 최상의 예를 갖추 enshrinement in the Jeoksangsan Archive. This temporary storage
는 것이다. 봉안사 일행이 도착하면 무주 부사의 호위를 받으며 also followed prescribed procedures.
무주 관아로 가게 되는데 실록을 적상산 사고에 봉안하기에 앞서 After their temporary storage at the Muju office, The Annals
무주 관아에 임시 안치하기 위해서이다. 이 임시 보관 또한 정해 of the Joseon Dynasty were transferred to the Jeoksangsan Archive
진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according to dates and times selected as auspicious by the
무주 관아에 임시 보관된 《조선왕조실록》은 봉안사 일행 중 한 Gwansanggam administrator within the procession. The government
명인 관상감 관원이 길일을 잡아 택한 날짜와 시각에 맞춰 적상 office would prepare an enshrinement journey for the selected
산 사고로 옮겨진다. 정해진 길일에 관아에선 봉안 행차를 준비 auspicious date, and the enshrinement official would travel to the
하고, 봉안사는 무주 부사를 비롯한 관민들과 함께 사고로 향한 archive with the Muju magistrate and other officials and members of
다. 봉안사 마중 때와 마찬가지로 의장대로 취타대의 풍악에 맞 the public. As with the reception of the enshrinement officials, they
춰 행진한다. would march as an honor guard to music played by a traditional
적상산 사고에 도착하면 무주 부사 일행은 단의 왼쪽, 당상관을 marching band (chwitadae).
포함한 봉안사 일행은 단의 오른쪽, 배안상국새를 찍을 때 사용하는 상과 Arriving at the Jeoksangsan Archive, the group would assume
채여왕가의 물품을 옮기던 가마, 서리문서의 기록과 관리를 맡던 관리들은 중앙에 positions of reverence: the Muju magistrate’s delegation to the left
경건하게 자리한다. 의식을 집전하는 전의절차를 도맡아 진행하는 집사가 of the altar, the dangsanggwan and other enshrinement procession

29
4

3, 4 봉
 안 행렬
Reenacted procession of enshrinement officials
5, 6 관
 아 보관식
Temporary storage ceremony at the government office

30
7 8

7, 8 적
 상산 사고 봉안식
Enshrinement ceremony at the Jeoksangsan Archive
members to the right. In the center were a baeansang (a box used

to apply the state seal), a chaeyeo (a sedan chair for carrying royal
향을 올리기 위해 단 위로 올라오면서 실록 봉안 의식이 시작된 effects), and seori (officials in charge of document recording and
다. 전의가 향로에 향을 세 번 올리는데 전통적으로 ‘3’은 음양의 administration). The annals’ enshrinement ritual would begin as
일치, 화합과 조화 등을 의미한다. the officiating jeonui (a steward in charge of procedures) ascended
전의가 향을 올린 후 봉안사 일행이 앞으로 나가 네 번 절사배; 四拜 the altar to place the incense. The jeonui would place the incense in
을 하는데, 봉안사들만 절을 하고 다른 참석자는 절을 하지 않는 the burner three times—the number “three” traditionally connoting
다. 사배를 마친 당상관이 실록궤를 사고에 넣기 위해 단 위로 올 alignment of yin and yang, concord, and harmony.
라서면 서리가 채여에서 실록궤를 들고 중계로 올라와 배안상에 After the jeonui placed the incense, the enshrinement officials’
올림으로써 실록 봉안 의식이 모두 끝난다. group would come forward to perform four ritual bows; these bows
한편, 지난해 11월 2일 무주문화원은 ‘2019 지방문화원 원천콘텐 were performed only by the enshrinement officials and not the
츠 발굴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왕조실록 적상산 사고 봉안 other attendees. Having completed his four bows, the dangsanggwan
재연’ 행사를 개최하고, 적상산 사고 실록 봉안행렬과 봉안식 등 would ascend the altar to place the box of records in the archive;
을 재연하였다. the enshrinement of the Annals concluded as the seori took the box

of records from the chaeyeo and stood on a lower platform to place

them in the baeansang.

On November 2, 2019, the Muju Cultural Center held a

reenactment of the enshrinement of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t the Jeoksangsan Archive as part of the 2019 Regional Cultural

Content Development Project. This included reenactments of both


글 맹갑상 무주문화원장
사진 무주문화원, ,무주사진가협회, 문화재청 the enshrinement procession for the Jeoksangsan Archive records as

well as the enshrinement ceremony.

By Maeng Gapsang, director, Muju Cultural Center


‘지역N문화’ 누리집에서 Photos courtesy of the Muju Cultural Center and Cultural Heritage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Administration, Muju Photo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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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느린 마을 기 행 ②

32
Cultural Encounters ㅣ Slow City T ravel

산촌형 슬로시티
푸른 솔의 고장 ‘청송’
푸른 솔의 고장 청송靑松은 험한 산세 탓에 비록 교통은 불편하지
만, 그 덕택에 자연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산촌형 슬로시티’
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남보다 한 걸음 더 빨리 목적한
바를 이루려고 경쟁하는 시대에, 청송은 가파른 산세를 통해 “천
천히”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자연의 속도
대로 사는 슬로시티 청송의 파천면과 부동면을 찾았다.

Cheongsong: Slow City


in the Mountains
Cheongsong, known for its abundant green pine trees,
is difficult to access, deep within rugged mountains, but
this geographical feature has allowed it to preserve its
natural beauty. In a time when everyone is competing
to get ahead of everyone else, Cheongsong’s steep
mountains seem to be telling everyone, “slow down.”
With that in mind, I unhurriedly embarked on a journey
to Cheongsong’s Pacheon-myeon and Budong-myeon,
“slow cities” where life goes at “nature’s pace.”

경북 청송 주산지
Jusanji Reservoir in Cheongsong, Gyeongsangbuk-do

33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삶 A life spent adapting to nature’s serene flow
청송 가는 길은 꽤 멀다. 서울에서 세 시간을 달려 고속도로 It took me a while to get to Cheongsong. After a three hour drive
를 빠져나와서도 한참을 더 달려야 청송에 닿을 수 있다. 청송은 down from Seoul, I had to drive for a long time even after exiting
유난히 산지가 많다. 산지가 80% 이상을 차지할 정도다. 서쪽에 the highway. There are an unusually large number of highland areas
는 안동과 의성, 북쪽에는 영양, 동쪽에는 영덕, 남쪽에는 포항과 around Cheongsong. In fact, the highlands take up more than 80
영천이 이웃한다. 주변 인근 도시까지는 도로망이 잘 갖춰져 있 percent of the area. Cheongsong’s neighbors include Andong and
다. 그러나 청송에 인접하면 도로가 구절양장처럼 휘감기고 롤러 Uiseong to the west, Yeongyang to the north, Yeongdeok to the east,
코스터를 타듯 오르락내리락한다. 청송을 에워싼 산악지형 탓이 and Pohang and Yeongcheon to the south. Roads are well built and
다. 이런 연유로 청송사람들은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살아야 smooth in these cities and their surroundings; however, once you
했고, 자연이 허락한 터전에서 지금껏 살고 있다. 자칫 고립될 수 approach Cheongsong, the road winds through the mountains like
도 있을 법한 악조건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청송만의 독특한 문 yarn, pitching up and down like a roller coaster. For this reason,
화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자연환경이다. 주왕산국립공원은 people living in Cheongsong have had to adapt to the flow of nature

and, to this day, continue to live in an environment commanded by


기상천외한 바위가 태곳적 모습을 연상시킨다. nature. While it may seem like they live in isolation, this seeming
The stupendous rocks bring to mind prehistoric times.
disadvantage has actually created a culture unique to Cheongsong.

A prominent example of this unique culture is the area’s natural

environment. Juwangsan National Park is a “geopark” that allows

visitors to experience how human beings and nature coexist. The

park was recognized for its geological value and certified as a

national geopark in 2014 and a UNESCO Global Geopark in 2017.

The lifestyles of people here show how precious they think their

environment is, and this has earned their town the international

“Slow City” designation. Specifically, the moniker “Slow City” refers

to Deokcheon Village in Pacheon-myeon, which is where the House

of Songso is located, and Budong-myeon, home to Juwangsan

National Park.

Juwangsan National Park: Protecting ancient mysteries


Juwangsan Mountain’s peak is surrounded by bizarre-looking

rocks that stretch out like a folding screen. The overwhelmingly

large rocks dominate the mountain’s 721-meter height, as grand as

some of the most magnificent landscapes in Korea. Some people

even include Juwangsan Mountain as part of Korea’s three great

“rock mountains,” along with Seoraksan and Wolchulsan. While

the mountain’s sheer rocky cliffs may seem to be solely the haunt of

expert rock climbers, the mountain is actually very climbable even

34
by seniors and those with disabilities. Juwangsan is one of the lowest

mountains designated as a national park in Korea, and it is also one

of the smallest by area. The reason Juwangsan Mountain was named

a national park was largely because of its massive rocks and the

waterfalls that flow between them.

The best course to take on Juwangsan Mountain is to start

from the Sangui Information Center and pass by Yongchupokpo

Falls to view the Jeolgupokpo and Yongyeonpokpo waterfalls before

returning back to the information center. Covering 7.4 kilometers,

the course includes all the best sights to see on Juwangsan. The

Jubanggyegok Valley section of the course that goes from Daejeonsa

Temple to Yongchupokpo Falls is famous for being able to

지질공원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용연폭포 accommodate travelers who use wheelchairs.


Yongyeonpokpo Falls flaunting the natural beauty of Juwangsan National Park,
designated as a Global Geopark
After passing by the Sangui Information Center, I finally

reached Daejeonsa Temple. I was captivated by the craggy rocks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느낄 수 있는 지질공원이다. 2014년과 that shoot straight up behind Daeungjeon Hall—it is an incredible
2017년에는 지질학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국가지질공원 및 유 site to behold no matter how long you stand there. After passing
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았다. 또, 자연의 소중함을 몸으 by Daejeonsa and entering a forest path in a valley, I was again
로 체득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일군 터전은 국제 슬로시티라는 수 confronted with another breathtaking view of nature. The beauty
식어를 얻었다. 슬로시티 청송은 주왕산국립공원을 중심으로 한 of the strange-looking rocks captivated both my eyes and my
부동면과 송소고택이 자리한 파천면 덕천마을을 가리킨다. heart. Picturesque places soon appeared to me in succession: the

Geupsudae (meaning “water supply) Columnar Joint, which is filled


태고의 신비 간직한 주왕산국립공원 with the valley’s water; Haksodae, which is where a mystical blue
주왕산은 721m라는 높이가 무색할 정도로 웅장한 기암이 병 crane and white crane were said to have lived; Juwanggul Cave,
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숨 막힐듯 압도적인 바위는 우리나라 그 where Juwang, the self-appointed king of Zhou, a failed rebel and
어떤 산의 것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혹자는 이러한 산세를 refugee from China took refuge, according to legend; and Mujanggul
설악산이나 월출산과 어깨를 견줄 만한 우리나라 3대 암산巖山이 Cave, where Juwang was thought to have hidden weapons. I exclaim
라고 했다. 게다가 암벽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질 것 같은 절 in wonder once and then again at the beauty of nature as I stand
경을 노약자나 장애인에게도 선뜻 허락하다니 더욱더 고마운 산 between the massive rock faces that exude a royal dignity. The
이다. 주왕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 중에서 높이가 비교적 Geupsudae Columnar Joint was formed through water pressure
낮고, 면적도 좁은 편이다. 그런데도 주왕산이 국립공원에 오를 when hot lava suddenly cooled. It now stands like a tall, vertical
수 있었던 것은 거대한 바위와 바위틈으로 흐르는 폭포의 공이 column.
크다. After passing by the bizarre-looking rocks, canyons, and
주왕산 탐방은 상의탐방지원센터에서 용추폭포를 지나 절구폭포 waterfalls, and after walking for 30 minutes along a quiet path, I
와 용연폭포를 보고 원점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으뜸으로 꼽는다. reached the Jusanji Pond, which boasts red leaf willows and moist
왕복 7.4km에 주왕산의 진면목이 옹골차게 들어앉았기 때문이다. fog. The 300-year-old red leaf willows with roots in this foggy

35
특히 대전사에서 용추폭포까지 가는 주방계곡 구간은 휠체어로 reservoir appear to have protected the mystery of the ancient
오갈 수 있는 무장애 탐방로로 유명하다. past. Standing there, I came under the illusion that I was looking
상의탐방지원센터를 지나자 대전사에 이른다. 대웅전 뒤로 우뚝 at a part of the world that had existed long before human beings.
솟은 기암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참을 보고 있어도 그저 놀라 The reservoir was actually built in August of 1720—the year King
울 따름인 풍광이다. 대전사를 지나 계곡을 끼고 숲길에 들어서 Gyeongjong (1688–1724) gained the throne—and in October of the
면 놀랄만한 풍경이 또 한 차례 펼쳐진다. 시선은 물론 마음마저 next year Jusanji Pond was built for agricultural use. They say that
가로채 가는 기암들의 풍모가 그것이다. 계곡물을 퍼 올린 급수 the reservoir has never been dry enough to see its bottom. Jusanji
대, 청학과 백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학소대, 주왕이 숨어 살 Pond became famous after it was featured in the movie Spring,
았다는 주왕굴, 주왕이 무기를 감추었다는 무장굴 등 경승지가 Summer, Fall, Winter . . . and Spring.
이어진다. 제왕의 위엄이 느껴지는 거대한 암벽 사이에 서서 자
연의 경이로움에 감탄, 또 감탄한다. 그중 급수대는 뜨거운 화산 The place to stay in Deokcheon Village
암이 갑작스럽게 식으면서 수축으로 틈이 생긴 절리다. 그것도 After driving about 20 kilometers from Juwangsan Mountain,
수직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기둥처럼 생긴 주상절리다. I reached a village where I ended up wanting to stay for much
기상천외한 바위와 협곡, 폭포를 지나 호젓한 산책로를 따라 30 longer than a night. The traditional Korean houses of Deokcheon
여 분을 걸으면 왕버들과 물안개가 어우러진 주산지에 닿는다. Village look the same as they did when they were first built in the
물안개 자욱한 저수지에 뿌리를 내린 300년 수령의 왕버들 나무 Joseon Dynasty. Starting with its entrance, the village is full of these
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듯하다. 사람이 존재하기 이전, 지구의 traditional houses, ranging from the House of Songso (National
어느 한구석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경종1688~1724 재 Cultural Heritage No. 250), considered the symbol of wealth in the
위 원년인 1720년 8월에 착공해 이듬해 10월에 준공한 농업용 저 village with 99 kan, to the House of Songjeong (Gyeongsangbuk-
수지인 주산지는 준공 이후, 지금까지 바닥을 완전히 드러내고 do Cultural Heritage Site No. 631), which is where General Yi
마른 적이 없다고 한다. 주산지는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 Beomseok, the hero of the Battle of Cheongsalli (Qingshanli), stayed
고 봄>의 주 배경지로 알려지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multiple times. The village is the hometown of the Cheongsong Sim

clan, which produced 12 government ministers, four sons-in-law of


그곳에 가면 머물고 싶다 the king, and four queens during the Joseon Dynasty.
주왕산에서 20km 정도를 달리면 하룻밤, 아니 그보다 오랫 The House of Songso was built by Sim Hotaek (pen name
동안 머물고 싶은 마을이 나온다. 조선 시대 한옥이 옛 모습 그대 Songso) around 1880. Sim was a prosperous man who was as rich
로 남아 있는 덕천마을이다. 이 마을은 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as “Rich Man Choe” in Gyeongju. The soseuldamun (tall gate) of the
아흔아홉 칸 저택 송소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250호과 청산리전투의 영 House of Songso is decorated with hongsal, which is meant to bring
웅 이범석 장군이 여러 차례 머문 송정고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31호 good fortune and chase away evil spirts. Upon entering the house,
등 동네 초입부터 한옥이 즐비하다. 이 마을은 청송 심씨의 본향 I was confronted by rectangle-shaped men’s and women’s quarters,
으로 그들은 조선 시대 정승을 열셋, 부마와 왕비를 각각 넷씩 배 and between these two quarters there was a ㄱ-shaped wall called
출한 명문가다. naeoedam that divides men’s space and women’s space. In accordance
송소고택은 1880년 무렵에 송소 심호택이 지은 것으로, 그는 경 with the tenants of Confucianism, men and women could not
주 최부자와 어깨를 겨루는 만석꾼이었다. 송소고택 솟을대문 use the same spaces during the Joseon Dynasty. This concept was
은 홍살로 꾸며져 있다. 복을 부르고 악귀를 쫓겠다는 뜻이다. 집 adapted into the era’s architecture, and women’s spaces were typically
안으로 들면 ‘ㅁ’자 형태의 사랑채와 안채가 나오는데 그 사이 built in the deepest part of houses to protect from the “outside.”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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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을 배경으로 자리한 대전사
Daejeonsa Temple at the base of a stately rock formation

를 ‘ㄱ’자 형태의 내외담남녀의 공간을 구분하는 경계에 조성한 담이 가로막 naeoedam was a barrier to divide the women’s space from other parts
고 있다. 조선 시대는 유교에 따라 ‘남녀유별男女有別’이라 하여 남 of the house. What is interesting is that a small window was made in
녀가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은 건축에도 적용됐는데, this co-gender space to allow the women to see guests coming and
특히 여성의 공간은 가장 깊숙한 곳에 두어 외부로부터 보호했 going from the men’s quarters. For a moment, I felt like one of the
다. 내외담은 여성의 공간을 외부로부터 분리하는 일종의 가림벽 women from the past who tried to see the world through this tiny
인 셈이다. 재밌는 것은 내외담에 구멍을 뚫어 사랑채를 오가는 hole. The House of Songso was turned into a living exhibition in
손님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잠시나마 막힌 틈에 구멍을 뚫어 2002 and is open to the public.
세상을 보고자 했던 옛 여인들의 마음이 되어본다. 송소고택은
Written and photographed by Im Unseok, travel writer
2002년부터 고택 체험시설로 개방 중이다.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Travel Course

•Travel Tip In Deokcheon Village, there are several courses, including the
Village Story Path (6.2 kilometers), which stretches along the mountain
여행 정보 behind the village and the nearby river levee; the Manseokjigi Mountain
Path (3.3 kilometers long); and the Morning Sunlight Path (2.9 kilometers),
•여행 팁 덕천마을에는 뒷산과 하천제방 6.2km를 정비한 ‘마을 이야기길’과 which is a path in the mountain behind the village used in the past by
‘만석지기 산책로(3.3km)’와 지겟길로 이용했던 마을 뒷산 오솔길인 ‘아침 porters carrying Korean A-frames.
햇살길(2.9km)’이 있다. •What to Eat Water from the Dalgi Mineral Spring is a gift of the gods and
•별미 하늘이 내린 물, 달기약수는 미네랄 함량이 높다. 달기약수로 밥을 지 chock full of minerals. If you make rice using Dalgi Mineral Spring water,
으면 찰밥처럼 맛있는 영양밥이 된다. 또 달기약수로 끓인 닭백숙은 청송의 you get delicious and nutritious rice. Whole chicken soup boiled in the
대표 음식이라 할 정도로 유명하다. water is one of Cheongsong’s most famous dishes.
•문의 주
 왕산국립공원(054-870-5300) •Contact J uwangsan National Park (82-54-870-5300)
덕천마을 송소고택(054-874-6556) House of Songso in Deokcheon Village (82-54-874-6556)

37
문화마당 ㅣ 팔도 음 식

탄산 약수와 함께 즐기는 A Healthy Meal Made


청송 ‘달기약수닭백숙’ with Sparkling Mineral
Water: Cheongsong’s
Dalgi Yaksu Dakbaeksuk

‘꿩 먹고 알 먹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모처럼 짬을 내어 떠 “Eat a pheasant, then eat the egg too” is a Korean proverb
나는 여행길, 이런 속담에 딱 들어맞는 상황이 펼쳐진다면 더할 equivalent to “Kill two birds with one stone.” Imagine an
나위 없이 좋을 텐데, 경북 청송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닭백숙 excursion that will perfectly fit this proverb during a road
을 만나러 가는 길이 그렇다. 유서 깊은 샘물 ‘달기약수탕’의 톡 trip you finally made the time to take, because surely
쏘는 물맛을 보며 피로를 풀고, 이 약수에 온갖 약재를 넣어 고 you will, on a trip to Cheongsong, Gyeongsangbuk-do,
아낸 닭백숙을 먹으며 건강을 챙기는 여정이다. 달기약수와 닭 the famous home of dakbaeksuk (whole chicken soup).
백숙을 맛본 후에는 주왕산 바위 계곡 트레킹을 즐기거나 왕버 A trip to Cheongsong is one that begins with drinking
들 우거진 주산지의 연초록 경치를 감상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 sparkling mineral water at the historical Dalgi Yaksutang
으니 ‘꿩 먹고 알 먹은 뒤,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여정이라 할 만 Mineral Spring Site (“yaksu” literally means “medicinal
하다. water” in Korean) to detoxify the body, then eating
dakbaeksuk made with the spring water and a handful of
medicinal herbs to recharge. After enjoying Dalgi yaksu
and dakbaeksuk, there await activities such as trekking
through the Juwangsan Mountain rock valley and taking
in the willow-green scenery of Jusanji. This double
delight of good-for-the-body food and drink and good-
for-the-soul sightseeing certainly qualifies this trip as
“eating a pheasant, then eating the egg too.”

철종 때부터 이어진 ‘달기약수’ Dalgi yaksu dates back to King Cheoljong’s time
닭백숙을 만나러 가기 전, 먼저 달기약수탕을 만나는 게 좋다. It is best to visit the Dalgi Yaksutang Mineral Spring Site before
달기약수탕은 청송읍 부곡리 괘천 상류 물길을 따라 암반 10여 heading to eat dakbaeksuk. Dalgi Yaksutang refers to the series
곳에서 솟는 ‘약수터 무리’를 일컫는다. 조선 철종 때 금부도사를 of some dozen mineral springs in the bedrock along the upper
지낸 권성하가 낙향해 살면서 수로 공사 중에 바위틈에서 솟는 약 Gwaecheon Stream in Bugok-ri, Cheongsong. It is said that Gwon
수를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70~200m 간격의 하탕, 신탕, 중탕, Seongha, former Uigeumbu (Correctional Tribunal) officer, first
천탕, 상탕 등이 상류 쪽으로 이어진다. 주요 탕들은 지붕을 덮어 discovered the yaksu flowing from between the rocks while working

38
Cultural Encounters ㅣ Pr ovinc ial Cuisine

달기약수 토종닭백숙 상차림


A Dalgi yaksu tojongdakbaeksuk table setting

39
on the village waterways upon his return home from royal duty.

From Hatang, Sintang, Jungtang, and Cheontang to Sangtang, the

springs are spread 70 to 200 meters apart, leading toward the upper

stream. Some of the main springs are roofed for protection while

others like Cheontang and Sangtang out in open air on the rocky

streamside.

Hatang is known to be the source spring, which is why it’s the

most popular, always bustling with people looking to draw yaksu.

The water from Hatang is purportedly richer in carbonic acid and


1
iron and has more fizz. I’ve personally tasted Dalgi yaksu at different

springs, and while the water at Hatang has the strongest kick, the

difference is rather meager. At any spring, you will see rocks and

waterways turned red from the iron in the water and carbonic acid

bubbles endlessly rising to the water surface. Containing various

minerals in addition to the iron and carbonic acid, Dalgi yaksu

leaves a tingly twinge inside the mouth. Cook rice with Dalgi yaksu,

and the rice will gain a bluish tinge and a higher glutinosity. Since

ancient times, the water has been known to mitigate the symptoms

of gastrointestinal, dermatological, and gynecologic diseases, not

to mention anemia and oculopathy. Every year on March 30 of the


2
lunar calendar, villagers gather around Hatang, the source spring,
1 찹쌀녹두죽
and perform Dalgi Yaksu Yeongcheonje, an ancestral ceremony
Chapsalnokdujuk (glutinous rice and mung bean porridge)
2 닭떡갈비(닭불고기) commemorating Gwon Seongha, who first discovered the spring,
Daktteokgalbi (also called dakbulgogi, minced chicken seasoned with sauces)
in hopes that the yaksu will never dry up. At this ceremony, an
관리하지만, 천탕과 상탕 등 일부 샘은 하천가 바위 노천에 자리 unseasoned dish of dakbaeksuk made of only chicken and Dalgi
잡고 있다. yaksu is offered on the sacrificial table, and this is how Dalgi yaksu
하탕이 원탕으로 불리는데, 그 때문에 약수 뜨려는 이들로 가장 dakbaeksuk found its place as Cheongsong’s hallmark dish.
붐빈다. 탄산과 철분 함량이 높아 다른 곳보다 쏘는 듯한 물맛을
더 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직접 여러 탕의 물맛을 비교해 보니 하 The rich and mild taste of Dalgi yaksu dakbaeksuk
탕이 그중 센 맛이긴 하나 그리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어느 탕에 To describe the taste of Dalgi yaksu dakbaeksuk, it’s “a combination
서나 철분 성분으로 물길과 주변 바위가 붉게 물든 모습, 그리고 of a mild, rich broth and unbelievably tender meat.” Additional
보글보글 끓어오르듯 탄산가스 물방울이 끊임없이 솟아올라 기포 ingredients and medicinal herbs that go into the broth differ from
를 터뜨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철분과 다양한 미네랄 성분에 더 one household to another, but Dalgi yaksu is a constant and basic
해 탄산까지 함유하고 있어 입안을 찌르르하게 하는 쏘는 맛이 느 ingredient. “Dalgi yaksu helps eliminate the odor of chicken and
껴진다. 이 달기약수로 밥을 지으면 철분 성분으로 인해 푸르스름 tenderizes the meat,” says the owner of a dakbaeksuk restaurant near
한 빛을 띠고 찰기가 더해진다. Hatang. Restaurant workers draw the yaksu they need to prep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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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달기약수는 위장병, 피부병, 부인병, 빈혈, 안질 등을 다 dakbaeksuk early in the morning before tourists huddle at the
스리는 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전해온다. 주민들은 매년 음력 3월 springs.
30일 원탕인 하탕에서 달기약수를 처음 발견한 권성하의 공을 기 There are largely two types of dakbaeksuk served at
리고 약수가 끊이지 않기를 기원하는 ‘달기약수 영천제’를 지낸다. restaurants around the Dalgi Yaksutang Mineral Spring Site:
제를 지낼 때는 양념을 하지 않고 달기약수로만 끓인 닭백숙을 제 regular tojongdakbaeksuk made of Korean native chicken and
상祭床에 올린다. 청송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은 ‘달기약수닭백 neungitojongdakbaeksuk with neungi mushrooms (shingled
숙’이 여기서 시작됐다. hedgehogs). The list of ingredients differs by restaurant, but most

places brew medicinal herbs such as eomnamu (castor aralia),


진하고 부드러운 ‘달기약수닭백숙’ danggwi (dong quai), ogapi (Siberian ginseng), cheongung (Cnidium
달기약수닭백숙의 맛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순하고 진한 officinale Makino), and ginseng, and boil a whole chicken in the
육수와 부드럽기 한이 없는 고기 맛’이다. 닭백숙에 들어가는 한 herbal water with glutinous rice, mung beans, garlic, onions, jujubes,
약재 등 보조 재료는 집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달기약수가 기본이 and ginkgo nuts. Some use rice steamed in lotus leaves or yam roots.
되는 건 매한가지다. “달기약수로 닭백숙을 하면 잡내가 없어지 Most restaurants serve the rice porridge from dakbaeksuk in a
고 육질이 한결 부드러워져요.” 하탕 옆 한 닭백숙 식당 주인의 말 separate bowl. Top a spoonful of the porridge made of glutinous rice
이다. 식당들에선 관광객이 몰리는 낮 시간대를 피해 이른 아침에 and mung beans with deboned chicken meat and you’ll be feeling
약수를 받아와 음식을 준비한다. energized in no time. Side dishes comprising seasonal greens and
달기약수탕 부근 식당의 닭백숙은 크게 두 가지다. 일반 ‘토종닭 pickled veggies are also quite tasty. In the words of one restaurant
백숙’과 능이를 곁들인 ‘능이토종닭백숙’이다. 식당마다 조금씩 차 owner: “A chicken boiled in Dalgi yaksu with medicinal herbs is so
이는 있지만, 대개 엄나무나 당귀, 오가피, 천궁, 인삼 등 한약재를 tender that it melts inside the mouth—men and women of all ages
달인 물에 찹쌀과 녹두, 마늘, 대추, 은행 등을 곁들여 닭 한 마리 love it. It’s especially good for restoring energy in seniors and people
를 통째로 삶아낸다. 연밥이나 마 뿌리 등을 넣는 식당도 있다. with weak digestion.”
닭백숙을 주문하면 죽을 따로 담아 내주는 곳이 많다. 녹두가 듬 Another popular dish is daktteokgalbi (also called dakbulgogi)—
뿍 들어간 찹쌀죽에 발라낸 닭고기를 곁들여 먹으니 금세 몸이 건 boiled chicken wings, deboned, minced, and marinated in a
강해지는 느낌이다. 제철 나물류, 장아찌류 등 밑반찬들도 맛깔스 gochujang sauce, then cooked flat in a grill net. The combination of
럽다. 한 식당 주인은 “달기약수에 갖은 한약재를 넣어 고아낸 닭 the spicy heat and the tender yet chewy texture has no match, and
백숙은 살살 녹을 정도로 부드러워서 남녀노소가 다 좋아한다”면 it is served with lettuce, perilla leaves, spicy chili, and garlic to be
서 “특히 소화 기능이 약한 사람이나 어르신들의 원기 회복에 아 enjoyed in wraps as well.
주 좋다”고 말한다. This June, as nature dances in green leafy waves, why not “kill
닭백숙과 함께 인기를 끄는 음식으로 닭떡갈비닭불고기가 있다. 삶은 two birds with one stone” and take a restorative trip to Cheongsong?
닭의 날개살 등을 발라 다지고 고추장 양념을 한 뒤 넓적하게 펴 석
쇠로 구워낸 것이다. 매콤하고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일품인데, 상추,
깻잎, 청양고추, 마늘과 함께 제공돼 떡갈비 쌈을 싸 먹을 수 있다.
온 세상이 초록 잎 물결로 넘실대는 6월, ‘일거양득’ 청송 건강 여
행으로 다스려보는 게 어떨까.

Written and photographed by Lee Byunghak, culture reporter, The


글·사진 이병학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 Hankyor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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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을 보 다

으로!
한국 적
식은
하 게, 음
글 로 벌
o c a l !
생각은 E atL
ob a l,
i n k Gl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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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T hr ough Foreign Eyes

한국은 서구와 다른 식습관으로 육류는 물론, 동물 단백질 전반 With an eating habit distinguished from that of the West,
의 소비가 낮은 다양한 음식과 요리에 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 Korea has culinary knowledge that helps reduce the
다. 과도한 육식 소비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현재, 한식은 consumption of meat, or even animal proteins in general,
건강에 좋을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식문화이기도 하다. which is behind many of the world’s problems. Korean
food is not just healthy, it’s sustainable!

20여 년 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 What was striking when I first came to Korea over twenty years ago
은 다름 아닌 음식 냄새였다. 이방인인 나에게 익숙지 않은 된장 was the smell. Not just any smell, the smell of food! In each street,
찌개, 생선찌개, 생선구이 냄새가 마늘과 김치의 독특한 냄새와 whether from homes or restaurants, wafted the unfamiliar smell of
뒤섞여 거리 곳곳의 가정과 식당에서 풍겨 나왔다. 물론 친구나 doenjang, of fried or simmered fish in spicy broths, mingling with
가족이 모일 때면 으레 즐기는 한국의 대표적 별미인 각종 고기 the savory scents of garlic and kimchi. Not to mention, of course, the
구이 냄새도 빠지지 않는다. many grilled meats, those great contributors to Korean gastronomic

fame, that we indulge in at all hours, with family or friends.


한반도 사람들은 신석기 시대부터 해산물과 갖가지 채소 섭취
밥상에 함께 나오는 반찬들이 이방인에게는 신비롭기 그지 An ancient culinary tradition of seafood and vegetables
없다. 이름 모를 갖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반찬들은 한 입 거리로 As a foreigner, there is an air of novelty around the many dishes
다듬어 차려지며 채소 위주지만 해산물 종류도 많다. 대개 매운 that we share, arranged around the table, each featuring bite-sized
양념이 다채롭게 되어 있는데, 전혀 맵지 않고 밍밍할 정도로 담 morsels of unknown ingredients—generally vegetables, but also many
백한 반찬도 꽤 있다. 이런 미묘한 맛을 처음 접하는 서양인의 미 types of seafood. While many hit various points on the spectrum of
각으로 그 맛을 즐기기가 쉽지 않다. 어쨌거나 결론적으로 한 가 spicy, it is also not uncommon to find more mild—almost bland—
지 분명한 사실은 그 유명한 한국식 돼지고기, 소고기구이를 제 culinary elements that balance out the spicy dishes. With such
외한다면 한국의 맛있는 요리들에 대체로 고기가 안 들어간다는 subtle taste, a Western palate may at first struggle to appreciate these
점이다. 육류 위주의 서구식 식단을 탈피하고자 하는 사람과 동 nuanced, delicate flavors.
물성 식품의 소비를 줄이고자 마음먹은 사람들에게 이런 희소식 However, in the end, one thing is clear: Apart from the famous
이 또 있을까! pork and beef barbecues, Korea’s tasty cuisine contains little meat.
한반도 사람들은 신석기 시대부터 열량원, 특히 단백질 공급원으 And isn’t that a relief for those who seek to escape the meaty food
로 주로 해산물과 갖가지 채소를 섭취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of the West and who are ready to make some concessions on the
‘조류潮流’와 ‘해초’ 그리고 두부나 된장 등으로 섭취하는 ‘콩류’다. consumption of animal origin!
이렇게 한국 식단에서 동물 단백질, 특히 포유류의 소비가 낮게 The inhabitants of the peninsula have, since the Neolithic era,
유지되는 데 기여한 문화적 요인이 있다면, 그건 아마 불교일 것 acquired their protein predominantly from sea products and from
이다. 필자는 청주 근방에서 등산하던 중 한 사찰에 들렀다가 인 numerous plant origins, the most representative, perhaps, algae and
자한 스님으로부터 동물성 음식이 전혀 없는 식사공양를 대접받은 seaweed, but also soy in such forms as tofu or doenjang.
적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그 일이 기억에 오래 남을 만큼 인상적 If there is a cultural factor that reinforces this minimal use of
이었다. animal proteins in the Korean diet (in particular, mammals) it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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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간 채식 추구하는 이가 10배나 늘어 Buddhism. There is an episode engraved in my memory of a hike in
한국의 육류 소비는 나라가 부유해지면서 특히 1980년대부 the hills around Cheongju where, during a visit to a temple, a monk
터 본격적으로 증가했다. 여전히 프랑스보다는 많지 않지만 최근 was kind enough to offer me a meal in which no animal-based food
수십 년간 꾸준히 증가 추세다. 그런데 다른 한편 지난 10년간 채 was present.
식을 표방하는 사람의 수가 10배나 늘었다. 현재는 백만 명이 넘
는 한국 사람이 채식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다. 채식주의는 그 개 Vegetarianism has grown tenfold in the last decade
념이 유동적이다. 어떤 사람은 육류 섭취만 삼가고, 어떤 사람은 Increased meat consumption was born with the country’s
동물에서 유래한 모든 음식을 먹지 않는 등 채식주의자의 단백질 enrichment, especially since the late 1980s. Koreans still consume
소비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후자가 완전 채식주의자비건에 less meat than the French do, but the volume has grown steadily in
가까우며,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가죽이나 동물의 털 같은 recent decades. However, over the past decade, the number of people
모든 동물 유래 제품을 거부한다. who claim to be vegetarian has increased tenfold. Today, more than
채식주의 식단은 환경 보호뿐만이 아니라 동물 학대 방지를 위해 a million Koreans declare themselves vegetarians; some abstain
서도 선택되곤 한다. 봉준호 감독의 유명한 영화 <옥자>가 한국 only from the consumption of meat, while others eliminate all food
사회의 이러한 인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채식주의 시장 of animal origin. The latter are similar to vegans, who additionally
이 번성하면서 많은 기업이 육류의 대체재로 혹은 색다른 먹거리 refuse all products of animal origin such as leather or wool.
로 채소 위주의 상품들을 개발하고 있다. 서울 곳곳에 채식 식당 These diets are often adopted for the defense of the environment,
과 채식 매장들이 있으며, 채식 메뉴를 제공하는 비非한식 음식점 but also to combat animal abuse. Bong Joon-ho’s famous film Okja is
들도 흔해졌다. 대형 패스트푸드 체인인 롯데리아는 최근 버거를 an illustration of this awareness in Korean society.
비롯해 여러 비건 메뉴를 출시했다. 이뿐 아니라 기존 식당들에 Veganism and vegetarianism have become a buoyant market,
서도 고기를 빼 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 and many companies are developing plant-based products, both

채소를 함께 즐기는 한식문화


Koreans enjoy abundant vegetable side dis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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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at substitutes or entirely new products. There are also vegan

restaurants and shops in Seoul. It has become common to see non-

Korean restaurants offering vegetarian menus. For instance, the

large food chain Lotteria recently launched a vegan menu including

a meatless burger. In addition, of course, there’s always the option of

asking for dishes to be prepared without meat in many traditional

restaurants.

Korea offers a range of foods and culinary knowledge that can

show the rest of the world the means to eat differently and reduce its

consumption of meat, or even animal proteins in general, which are

behind many of the problems in our society: carbon emission, animal

exploitation, excess weight and obesity, deforestation. . . Korean food

is not just healthy, it’s sustainable! What a disappointment, then, to

see today the increased consumption of industrial food products full

of fat, sugar, and meat.


한국 곳곳을 돌며 한국적 음식을 즐기는 파트리스 제르망
Patrice Germain travels Korea to savor the culinary culture. I am not a vegetarian, but I consider myself “reducetarian.” I

try to satisfy my appetite and dine with the desire to eat properly
육류 소비는 일산화탄소 배출, 동물 착취, 과체중과 비만, 삼림 파 without being predatory on the environment. I rarely eat meat and
괴 등 우리 사회의 각종 문제를 일으킨다. 한국은 서구와 다른 식 enjoy Korean food, tasty and locally produced, especially dishes
습관으로 육류는 물론 동물 단백질 전반의 소비를 줄일 방법을 featuring tofu and plant-based meat substitutes. But the most
세계에 제시할 수 있는 다양한 음식과 요리에 대한 지식을 보유 important thing is to make this gesture an ode to nature rather than
하고 있다. 또 한식은 건강에 좋을뿐더러 지속 가능하기도 하다. a simple thoughtless habit!
오늘날 지방과 설탕, 육류가 잔뜩 든 공산 식품의 소비가 증가하 Korean food culture is centered on vegetables and seafood,
는 모습을 보면 어찌나 실망스러운지!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 which takes on extra meaning today as humanity faces a pandemic
만 ‘육식 소식주의자’라 생각한다. 환경을 침해하지 않고 입맛을 that originated from the consumption of meat. Let us meditate on
충족시키면서 적당히 먹으려고 노력하며, 고기는 거의 먹지 않 this!
고 한국에서 생산된 맛있는 한식을 즐긴다. 무심코 기존의 습관
을 답습하기보다는 이런 행위를 자연에 보내는 송가로 삼고 있다
고나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한국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두부와
식물성 고기를 먹는 것이다.
채소와 해산물 위주의 한식문화는 온 인류가 육류 소비에서 비롯
된 전염병으로 시름하고 있는 오늘날이야말로 더더욱 그 의미가
크다. 이 점을 숙고하자!

글 파트리스 제르망 주한 프랑스 학교 교사 Written by Patrice Germain, teacher, Lycée Français de Séoul
사진 파트리스 제르망, 아이클릭아트 Photographs courtesy of Patrice Germain, iclick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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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삶과 문화

전통을
파고
들다
전통을
넘어
가다
우리 옷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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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해소되지 않는 궁금증’이었다.
끊임없이 머릿속을 헤집는 ‘왜?’라는 생각이 그림에서 무형예술로,
우리 옷으로, 사회 운동으로, 결국엔 삶의 문화로 그를 이끌었다.
‘생활한복’ 전문 브랜드 ‘질경이우리옷’을 설립하고
37년째 이끌고 있지만, 그의 세계는 ‘옷’으로만 한정할 수 없을 만큼
넓고 다양하며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는 정리의 시기”라고 겸손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눈이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며 열정으로 반짝인다.

‘우리 옷 연구가’로 이름나 있지만, 사실은 옷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관심과 애정을 쏟는 것으로 알
고 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
옷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맞지
만, 출발을 따져보면 나는 ‘그림쟁이’다. 그림에서
출발해서 여기까지 왔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만 따 옷 사이에 걸려있는 작고 독특한 천연염색 스카프.
옷감의 느낌을 체험하게 하기 위해 만든 특별기획 상품이다.
라갔으면 아마 ‘옷’으론 오진 않았을 거다. 돌이켜
보면 10대와 20대는 ‘궁금증’에 휩싸여있었던 시
기였다. 그림은 기본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생각이라든가, 그 사람의 총체적 감성이라든가, 시 해답을 찾기 위한 방황. 그게 내 모든 것의 출발점
대와 역사, 그 나라의 환경 등이 반영되어야 하는 이었다.
데 당시 우리나라 미술은 대부분 서구의 사조를 복
제하거나 아류작을 만들어 내는 데 불과했다. 아무 정말 다양한 문화 분야를 공부했다. 수많은 길이 있
리 고민해도 ‘왜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 었을 거라 생각되는데, ‘옷’을 업業으로 삼은 이유가
을 맹목적으로 따라가야 하지?’라는 궁금증이 해 궁금하다.
소되지 않았었다. 해답을 찾기 위해 미대를 진학했 사업할 생각은 상상도 못 했다. 회사를 만들고
는데 조금 앞장서서 아류를 따라갈 뿐, 전혀 다를 경영하고, 이런 것은 내 계획에 전혀 없던 일이다.
것이 없었다. ‘그럼 도대체 우리 것’은 어디에 있을 그림을 공부하면서 ‘그림이 굉장히 소외되어 있다’
까?’라는 궁금증에 온 미술관과 박물관 등을 다녔 는 것을 느꼈다. 예술이 고립되고 소외되어서 소수
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좋은 그림과 문화재가 역사 의 감상 거리로밖에 역할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
의 과정을 거치면서 외국에 모두 뺏긴 것을 알게 래서 예술을 우리의 생활 반경 안으로, 우리 의식
되자 자연스럽게 역사를 공부하게 되고, 미학을 공 주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림을 ‘작품’으로
부하게 되고, 철학을 공부하게 되고…. 결국 대혼란 제작하지 않고, 손수건에 그리거나 판화를 그려 많
의 시기에 빠졌다. 눈에 보이는 답을 얻을 수 없으 은 사람에게 나눠줬다. 옷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랬
니 고전 무용과 탈춤 등 ‘무형’의 문화로 넓혀 갔다. 더니 옷이 ‘움직이는 전시장’ 그 자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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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서 내려다 본 매장.
옷과 같은 원리로 개발된
질경이의 신발이 전시되어 있다.
‘전통’으로 불리는, 이른바 ‘우리 것’에 애착을 지닌
듯하다. 지난 1984년부터는 ‘우리옷입기운동’을 펼
쳐온 것으로 알고 있다.
한때 사람들끼리 모여 입고 있는 옷을 벗고 그
안에 적힌 영어 글자를 모두 세어보았다. 한 사람
의 옷 안에서 280자에 달하는 영어 글자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손목시계 뒤편에도 있고, 속옷에도 있
고, 특히 가슴 앞에 있는 말들은 자신을 비하하는
말인데도 뜻도 모르고 달고 다니고 있었다. ‘이거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우리옷입기운동’이다. ‘우리옷입기운
동’을 펼치며 점차 입소문이 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뜻깊은 운동이다. 기존의 생각이나 관습을 타파하면


서 동시에 전통에 다가간다는 점이 인상 깊다. ‘우리
옷입기운동’을 펼치며,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면?
한동안은 관심과 격려, 비난과 욕설 양쪽을 모
두 다 들었다. 한쪽은 ‘전통문화의 현재화’는 전통
을 망치는 것이라는 평가를 했고, 동시에 다른 한
쪽은 새로운 문화운동으로 받아들여 청년 문화운
동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우리옷입기운동’과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첫 번째 행사를
서울 대학로에 있는 ‘흥사단’에서 열었는데 그때
어느 한 시골 우체국장이 와서 우리 옷을 사 갔다.
그냥 ‘보통 옷’이었다. 그런데 그 우체국장이 다음
날 우리 옷을 입고 출근을 했다가 상부로부터 경고
장을 받았다고 하지 뭔가. 깜짝 놀라서 무슨 죄목
이냐고 물었더니… ‘풍기문란죄’였다는 것이다. 그
게 1984년~1985년 사이의 일이다. 최근에 흥사단
이사장님을 만나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성함까지
기억을 하셨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故 김명수라는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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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를 들으니, 지난 2011년 어느 한 호텔 뷔페 상징을 앗아가려 한 것이다. 그런 일을 이른바 지
에서 ‘한복 출입금지’ 논란을 일으켰던 것이 생각난다. 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민족을 ‘개량해야 한다’며 앞
일제강점기 때도 우리나라 사람에게 흰 바지 장서서 했다. 그래서 나는 ‘개량한복’이란 말을 싫
저고리를 입지 말라고 강요하지 않았나. 흰옷을 입 어한다.
지 말라고 해도, 조선인들이 계속 흰옷을 입고 다
니니까 검은 먹물을 바가지로 붓기도 하고 흰옷을 최근에는 성북문화원에서 선보인 <여성독립운동가
입은 사람은 관공서 출입을 막기도 했다. 그렇게 열전1>과 <여성독립운동가열전2> 공연의 예술감독
해도 입으니까 일본에서 디자이너들을 데려와서 을 맡았다.
색복으로 이뤄진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그게 ‘색 <여성독립운동가열전1>은 정정화·이은숙·조
복 입기 운동’이다. 우리의 혼과 정신, 우리 민족의 화벽 이렇게 세 분을, <여성독립운동가열전2>는
강주룡·김마리아·김알렉산드라·권애라·박자혜·
박차정·부춘화·오광심·정칠성·허정숙 이렇게 열
1 <여성독립운동가열전1,2>는 영상, 무용, 음악, 전통의상이 어우러진 상징적인 작품으로 탄생했다.
2 독립운동가 조화벽(배우: 황재희). 강원도 양양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주역이다. 분을 담아냈다. 두 극 모두 ‘융복합 창작 무용극’이
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100여
년 전 식민지 시대를 이야기하는데 ‘대사로만’ 전
달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오감으로 느낄
수 있도록 ‘융복합극’을 만들었다. 독립운동가의
자료 영상을 찾아내고, 없는 부분을 창작하고, 영
상과 연결해 춤을 추고, 대사를 만들고, 또 그 인물
을 상징하는 의상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독립운동
가 허정숙의 옷을 만들면 연극 공연 안에 움직이는
‘스토리텔링 패션쇼’를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겠나. 나는 역사적 인물을 주제로 하는 패션을
새로운 유행으로 만들고 싶다. 역사적 인물의 행동
1
과 놓였던 환경, 상황, 결단 등을 생각하면서 그를
상징하는 옷을 만들고, 관객들은 특별히 역사 공부
를 하지 않아도 끌리는 옷을 발견했을 때 ‘내가 왜
이 옷에 끌렸을까?’를 생각하면서 그 인물에 대해
지식으로가 아니라 느낌으로, 감성으로 다가가도
록 하는 것이다. 나는 비싼 ‘명품 옷’이 아니라 역
사와 인간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옷을 만들고 싶
다. 그게 진정한 명품이라 생각한다.

여성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5년에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
2 운동가, 박차정朴次貞 의사의 군복을 재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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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게 인생을 살아낸 이들에게 관심이 간
다. 사실 처음에는 ‘우리 시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
았지만,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이
들의 말을 대신 전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여성독립
운동가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두
번 공연에 걸쳐 13명의 여성독립운동가 이야기를
올렸는데, 100명의 이야기까지 해보려고 한다.

2013년에는 삼청동에 ‘질경이생활문화원’ 일명 ‘무


봉헌’을 지었다.
‘우리 옷’을 만들며 3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
고 나니 이제는 나눌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래서 30년 기념으로 삼청동에 한옥을 지었
그의 사무실은 치열한 삶의 흔적이 가득 담겨 있다.
다. 당호는 서예가 성재 황방연 선생이 사임당의
시 <사친>에서 춤출 무舞에 꿰맬 봉縫 두 글자를 빌
려와 지어주고 글씨도 직접 써주었다. 무봉헌은 나
자신에게 한 선물이다. 옷이 인간을 담는 작은 그 고 그랬다. “이걸 봐, 우리 문화가 이렇게 대단하
릇이라면, 집은 큰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이 원리가 지?”를 말하고 싶었던 거다. 지금은 인생에서 ‘정리
똑같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만든 옷 안 의 시기’를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정리하지 않
에는 소통과 공유의 원칙이 있다. 그 원칙이 이 무 아도, 주변에서 내가 지나왔던 과정들을 대신 정리
봉헌에도 들어갔다. 무봉헌에서는 생활문화 교실 하고 있다. 과거 크나큰 사회 변혁을 맞으며 그렸던
을 열어 전통 발효음식, 차, 시음, 시식회와 만들기, 그림들이 지금에 와서 조망되기도 했다. 그런데 정
작은 영화, 바느질 등 다양한 강좌를 연다. 또 젊은 작 내가 정리해야 하는 것은 뭘까. 그런 고민을 한
작가들을 발굴해 ‘인큐베이팅incubating’ 전시회를 연 지가 오래됐다. 이젠 ‘어떻게 잘 사라져야 하는가’
다. 1년에서부터 7년에 이르기까지 작가와 같이 이 를 준비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동안은 ‘어떻게 눈
야기하며 뜯고 고치고를 함께 한다. 패턴과 제작을 에 잘 보일 것인가’를 찾아내는 게 업인 줄 알았는
하고 원단과 재료를 주기도 한다. 이런 전시를 개 데(웃음). 남기고 싶은 말이라기보다 올해를 맞으
관 이후 16번 정도를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올해 며 생각했던 말을 전하고 싶다.
기획한 전시는 모두 미뤄졌다. ‘선공후사先公後私; 사사로운 일보다 공익을 앞세움’와 ‘도리지
하 자연성혜桃李之下 自然成蹊; 복숭아와 배꽃이 피어 향기가 나면
그야말로 열정의 삶을 살았다. 후대에 남기고 싶은 자연히 길이 생긴다’.

말이 있다면?
우리 문화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과 대담 한춘섭 편집주간
정리 음소형 편집팀
거에는 서구권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취재사진 김정호 사진작가
그래서 일부러 해외로 나가 전시를 하고 열정을 쏟 공연사진 성북문화원·모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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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문화 보 고

“언능 와보랑께~” “가서 봉께로 어쩝디여?” “좋습디다.” “뭐시라?” “사투리가!” “아니 요새 시상


에 사투리 좋단 사람도 다 있네 잉.” “그러지라우, 거그에는 내 아부지 엄니도

“버얼써 가봤당께!” 지겠고 번듯헌 내 고향산천이나 반갑다 손잡고 안부 묻던 깨복쟁이 친구덜이


모다 모타있응께 그라지라….”
사투리는 짚어갈수록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우리 고향의 말이다. 어머니 뱃속
강진 와보랑께 박물관 에서 배웠던 말이기도 하고 자라면서 고향 사람들과 소통하며 익힌 말이기도
하다. 점차 잊히는 사투리가 아쉽고 아까워 사투리 박물관, 와보랑께 박물관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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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진한 느낌 살리기엔 사투리만 한 것 없어
‘와보랑께 박물관’은 강진군 도룡리 들녘에 자
리를 틀고 있었다. ‘쬐끄만한’ 다리를 건너자마자
달랑 한 채의 박물관 건물이 한가하게 들어앉아 있
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인기척을 보냈더니 김
성우(73) 관장이 우리를 반겼다. 그동안 코로나19
의 여파로 문 닫았던 박물관이 긴 동면에서 기지개
를 켠 듯 빗장을 풀고 우리에게 개문開門한 셈이다.
박물관 안마당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까맣게 잊고
지낸 필자 유년시절의 언어들이 고스란히 숨 쉬고
있었다. 고향을 찾아온 듯 반가운 마음이었다. 박물
관은 ‘거시기하게 거시기한 것들’로 건물 입구에서
부터 두 팔 벌려 방문객을 맞이한다. 전라도 사투
리들이 팻말로 서서 시위하는가 하면, 벽면이나 자
투리 공간까지도 원도 한도 없을 만큼 사투리로 도 사투리가 가득한 팻말

배되어 있다.
사실 현재 교육 현실에서 사투리는 잘못된 언어라 이보다 ‘멋대가리’ 없는 표현이 어디 있는가. 보다
는 인식으로 취급당해 왔다. 그래서 사투리를 ‘졸 핍진逼眞한 느낌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하기
업하지 못한’ 사람은 품위나 세련미가 떨어지는 촌 에는 사투리만 한 것이 없을 터다. 표준어는 통일
뜨기쯤으로 여겨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가장 지방 된 언어이기는 해도 마치 ‘제복 입힌’ 군인을 보는
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도 있듯 사투리도 것 같기도 하다. 그 때문에 간절한 느낌에는 한계
‘탯말’이라는 또 다른 호칭을 얻으면서 그 본연의 가 있다. 표준어는 교육적 견지에서는 가치가 있을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널리 아는 것처럼 표준 지 몰라도 인간의 본성을 표현한 느낌의 언어로는
어란 교양 있는 서울 사람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 아무래도 어머니 태내에서부터 배우고 익힌 고향
말로 정하고 있다. 이와 상대되는 사투리는 사용자 의 언어-필자는 사투리를 ‘탯말’로 표기함-인 사투
가 저급한 것도 아니고 비속하거나 후진한 언어는 리가 아니겠는가.
더더욱 아니다. 사투리도 통용지역에서는 자타가
인정하는 ‘표준어’이다. 그리 보면 표준말도 사용 인간이 지구에서 ‘지존’으로 살아가는 이유, ‘말’
지역의 언어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투리의 경우와 벌써 30년도 지난 일본에서의 일이다. 당시 필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는 일본 동지사대학에서 연구하며 틈만 나면 여
이제 사투리는 시집이나 소설책이 아니면 좀처럼 러 지역의 이런저런 박물관과 미술관, 문학관, 영
접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사투리가 가장 화 촬영지 등을 살피곤 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
맛깔나게 통용되는 무대는 문학작품이다. 강진이 라도 언젠가 이 정도의 문화 콘텐츠를 갖추고 이를
낳은 천재 서정시인 김영랑의 <오매 단풍들것네> 보여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들을 곱씹곤 했다. 그
도 사투리가 거둔 표현의 백미이다. 이걸 표준표기 후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 러시아, 프랑스, 이태리,
로 바꾸면 <아아, 단풍 들 것 같구나>쯤 일 것이다. 인도네시아 발리, 영국 등지를 살피는 짧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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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지지 말고 보기만 하시라는 중에도 시간만 나면 박물관이나 미술관, 문학관 등 은 착각이 들 만큼 반가웠다. 고향에서 살던 어린
경고문이 사투리로 적혀있다.
2 사투리 외에도 3천여 점에
을 둘러보았고 그 나라만의 정신과 문화적 깊이를 시절에는 그리도 입에 달고 살았던 말들이니 이들
이르는 민속품을 함께 전시 살피고자 했다. 단어를 얼마나 맞출 수 있는지 스스로 테스트를 해
중이다.
3 표준어와 여러 지역의 사투리
어찌 보면 그 일의 연장선상으로 사투리의 공간인 가며 읽어갔다. 신기하게도 아직 촉이 살아있던지
‘와보랑께 박물관’을 찾게 된 것이다. 이 박물관이 모두를 맞출 수 있었다.
‘이 집을 찾는 손님들이 어떤 전라도 사투리와 대 영화 <말모이>에는 “사람이 모이면 말이 모이고 말
화를 나누는가’를 살피기 위해 꼼꼼히 읽어갔다. 이 모이면 생각이 모이고 생각이 모이면 독립을 이
와따매오매, 어머, 폴새벌써, 아따못마땅할 때 내는 소리, 맬 룰 수 있다”는 대사가 나온다. 그렇다. 사람은 말言
갑시아무 이유 없이, 꼬꼽항께인색하니까, 뜬금없이갑작스럽 을 만든 최초의 동물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통해
고 엉뚱하게, 지스락처마, 느자구싹수, 암디서나아무 데서나, 상대에게 의사를 전달하고 자기 뜻을 관철해가는
싸가지소갈머리, 우짜다가어쩌다가, 염빙하네염병하네, 워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말들이 인간이 오늘의 지구
메어머, 뽀짝바짝, 겅게반찬, 언능오랑께얼른 오라니까, 생 에서 지존至尊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이상여, 지까심김칫거리, 촐래피리, 짚새기짚신, 개댁이고
양이, 허천병무조건 먹는 병, 저범젓가락, 차댕이자루, 오매 강진은 예로부터 ‘남도 답사 일번지’
땀시로어머니 때문에…. 끝도 없이 사투리가 이어졌다.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는 강진은, 원래부터
전라도가 고향인 필자를 버선발로 마중 나온 것 같 놓치기 아까운 여러 볼거리가 운집한 고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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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 6

4~6 사투리로 이뤄진 그래서 일찌감치 ‘남도 답사 일번지’라는 칭예를 하던 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로 표류하였다가 서울
예술작품
얻은 터다. 몇 가지만 주워섬겨도 ‘가우도 출렁다 로 압송된다. 서울에서 효종을 알현한 그는 그 자
리’, ‘다산기념관’, ‘고려청자 박물관’, ‘백련사 동백 리에서 일본으로 돌아가길 청하였지만 거절되고
나무숲’, ‘하멜 기념관’, ‘전라병영성’ ‘영랑생가’와 만다. 결국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히고, 그 벌로
‘시문학파기념관’ 등등이 동맥처럼 병영 주변의 흐 병영면 전라병영성에 유배되어 성의 축조에 동원
름을 이어간다. 되었다. 하멜 일행은 1656년부터 7년간 이곳에서
병영은 태종 17년1417 남해에서 노략질하는 왜적을 머물며 담장을 조성하였는데, 그 때문에 이 지역에
막아내기 위해 ‘병마절도사가 주재하는 병영兵營’을 서는 ‘하멜식 돌담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세운 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조선 시대에는 전라병 푸르고 상큼한 여름의 냄새가 돋아나는 초여름, 잠
영을 설치하여 병마절도사가 지휘하던 군사요충지 시나마 사투리의 세상으로 필자를 유인했던 강진
였으며 특히, 이곳 병영은 전라남북도는 물론이고, 을 떠나 원래 있던 제자리로 돌아간다. 타는 저녁
제주까지를 관할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놀을 바라보며, 들러 들러 돌아오는 귀갓길은 마을
2006년 6월 9일 등록문화재 제264호로 지정된 마다 술이 익고 있었다.
‘강진 병영마을 옛 담장’에는 사연이 있다. 1653년,
우리나라에서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하멜이 탑
글 김종 시인, 화가
승한 상선 스페르웨르호가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 사진 김종, 김성우 와보랑께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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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조선 人 LO V E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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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것도 뼈가 저리게 설운데, 이놈의 세상, 머릿기름 한분 바릴라 캐도 남의 눈치 보고, 옷
한분 갈라입을라 캐도 남의 눈치 보고,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믄 또오, 남정네들 보믄 마주칠까 길을
돌아가고, 이것저것 귀찮아서 남을 기忌하고 살믄 신들 다 카고, 말도 많고, 어이구 과부 팔자!”
박경리, 《토지》-‘광대같은 삶들’ 중

과부, 그 고단한 삶에 놓인
사랑의 징검다리
서러운 추문에 시달린 과부 팔자
소설 《토지》에서 과부 마당쇠댁네와 야무네가
분통을 터뜨리며 대화를 나눈다. 또 다른 과부 복
동네가 터무니없는 소문에 가슴앓이하다 양잿물
마시고 세상을 하직했다. 과거 최참판댁 종과 잠자
리를 같이했다는 소문인데, 알고 보니 마을 영감이
제 딸을 보호하려고 덮어씌운 누명이었다. 남의 일
같지 않다. 세상인심이 원통하고 절통하다. 임자 없
는 멸시려니, 과부 팔자 서럽다. 그들에게 사랑은
삶을 파괴하는 추문이기 십상이었다.
‘과부寡婦’는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여자를 일컫는
다. ‘미망인未亡人’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자 그대
로 풀이하면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에는 죽은 남편을 따라 아내가 목숨을 끊
으면 ‘절부節婦; 정절을 지킨 여인’라고 칭송했다. 나라에
서 표창하고 열녀문까지 세워줬다. 그렇지만 거꾸
로 보면 ‘미망인’이라는 단어에는 은근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남편이 죽었는데 너는 왜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느냐’는 무서운 질책이었다. 조선 시대
미망인은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었다. 양잿물 마
시고 싶을 만큼 괴롭힘을 당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남편과 사별한
여인이 다른 남자와 사귀거나 결혼하는 게 흠이 아
니었다. 부유한 과부들은 원하는 상대를 고르기도
했다.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고려 시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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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이다. 15세기 문신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서 말이고, 홀아비는 이가 서 말이라고 했던가.
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하지만 15세기 말에 유교 통치 체제가 완성되고,
선비 정모鄭某가 아내를 잃었는데, 남원 부잣집에 16세기 들어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보급되면서 과부
과부가 있다는 말을 듣고 후처로 삼으려고 했다. 는 사회적으로 극심한 제약을 받는다. 과부의 사랑
날을 가려 중매자를 정하고 정 선비가 먼저 예물을 과 재혼은 실행失行, 즉 정절을 잃는 것으로 간주했
갖추어 남원부에 이르렀다. 그러자 과부는 계집종 다. 본인은 부정한 여자로 찍혔고, 자손은 출셋길이
을 보내어 그의 행색을 살피게 했다. 계집종이 돌 막혔다. 과부는 죄인 아닌 죄인의 처지로 전락했다.
아와 “수염이 덥수룩하고 털모자를 썼으니 늙은 병 이리저리 눈치 보며 죽은 듯이 살아야 했다. 친정
자임이 틀림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과부가 실망 재산의 상속도 장남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출
하여 “내가 젊은 장부를 얻어서 늘그막을 즐기려고 가외인인 여식은 시댁만 바라보고 살았고, 남편이
했는데, 이런 늙은이를 어디다 쓰겠는가?”라고 하 세상을 떠나면 생계가 막막했다.
였다. 저녁이 되자 남원부의 관리들이 횃불을 켜고 과부를 넘보는 남자들도 문제였다. 18세기 문인 임
정 선비를 과붓집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과부가 문 매의 《난실만필蘭室漫筆》에 흥미로운 송사가 나온다.
을 닫아걸고 열어주지 않으니, 집에 들어가지도 못 경성의 양갓집 과부가 머슴을 부리면서 혼자 살았
하고 돌아왔다. 다. 과부는 머슴을 인간적으로 대우했는데 스스럼
이야기 속에서 남원 부잣집 과부는 정 선비가 재혼 없이 집안일을 의논하고 철마다 옷을 해주었다. 그
대상으로 적합한지 살펴보고 나이가 너무 많다면 런데 머슴은 오히려 흑심을 품고 둘이 은밀한 관계
서 퇴짜를 놓았다. 그리고는 연하의 남편을 얻어서 라는 추문을 퍼뜨렸다. 급기야 과부가 자기와 정을
늘그막을 즐기려 한다는 소망을 밝힌다. 재혼 여부 통하다가 관계를 끊으려 한다며 형조에 고발까지
와 대상을 스스로 선택하며 행복을 추구한 것이다. 했다. 당시 법률에 양갓집 여자가 사사로이 정을
조선 전기에는 이처럼 재력을 갖춘 과부들이 적지 통하면 남녀 모두 장형杖刑;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을
않았다. 친정 부모로부터 남자 형제와 똑같이 재산 내리고, 여자는 노비로 만들어 그 남자에게 주는
을 상속받았으며, 남편이 죽은 후에도 알뜰하고 규 조항이 있었는데 머슴이 그걸 노린 것이다.
모 있게 재산권을 행사한 덕분이다. 과부는 은이 재판이 열리자 머슴은 과부가 정표로 줬다면서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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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 해준 옷가지를 증거로 제시했다. 과부는 결백 밤마다 남몰래 만나 정을 나누는 사이가 된 것이다.
을 증명하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머슴이 형조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과부댁은 행여 들킬까
아전들을 매수해 상간으로 몰았기 때문이다. 벼랑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홀아비 집에 갔다. 하루는 어
끝에 몰린 과부에게 문득 꾀가 떠올랐다. 과부는 머니의 밤마실을 수상하게 여긴 아들이 뒤를 밟았
판관에게 주위를 물려달라고 한 뒤, 자신의 배에 다. 개울에 이르자 과부댁은 첨벙첨벙 물을 건넜다.
손바닥만 한 화상 흉터가 있는데 은밀한 관계라면 옷이 다 젖는데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간 것이
머슴이 알 테니 물어봐달라고 요청했다. 이윽고 재 다. 아들은 어머니가 홀아비와 정분이 난 것을 눈
판이 재개되었고 판관이 흉터에 대해 질문했다. 머 치챘지만 오히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젖은 옷을
슴은 의외로 자신만만하게 답변했다. 아전이 엿듣 말리려고 애쓰는 어머니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졌
고 귀띔해준 것이다. 이때 과부가 벌떡 일어나 옷 다. 그는 아내와 의논해 근처 골짜기에서 큼지막한
을 벗었다. 배에는 아무런 흉터도 없었다. 머슴을 돌을 날라 개울에 징검다리를 놓았다. 이 사실을
속이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결국 과부의 기지와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징검다리에 ‘홀어미 다리’
용기로 진상이 밝혀졌고, 간교한 머슴은 엄벌에 처 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들 내외의 효성을 칭송했다.
해졌다. 하동 옥종면에도 닮은꼴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덕
골에 사는 과부가 도덕천을 건너 정인을 만나러 가
과부의 사랑을 응원한 징검다리 효도 는데, 엄동설한에 버선을 벗어든 채 뼛속까지 시리
정절을 중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과부가 봉변 게 개천을 건너는 어머니를 보고 아들이 징검다리
당하지 않으려면 남자를 멀리하는 게 상책이었다. 를 놓아줬다는 구전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 다리를
안쓰럽다고 이웃에서 도움을 줘도 모른 척해야 한 ‘효자도’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을과 개천 이름이
다. 수작 걸거나 집적대면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각각 ‘도덕골’, ‘도덕천’인 점이 이채롭다. 역설적인
힘이 모자라면 식칼이라도 들어야 한다. 안 그러면 작명이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정절을 여성의 으
여자들이 들고일어난다. 제 남자 홀렸다고 머리채 뜸 덕목으로 제시했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적인 욕
잡히기 일쑤다. 그쪽에서 손이야 발이야 빌어도 어 망을 인정하고 본연의 행복을 추구하는 게 진정한
림없건만 덮어놓고 헐뜯는다. 가만있는 과부, ‘몹쓸 도덕이 아니냐고 이야기는 반문한다.
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조선 시대 과부의 다른 이름은 여성 가장이었다.
불구하고 인간 본성에 충실한 여인들도 있었다. 그 시선은 따가웠고 생계는 막막했지만, 그들은 가장
들을 따뜻이 감싸주고 응원한 것은 가족이었다. 김 의 무거운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남의 논밭을
제 청도원마을에는 ‘홀어미 다리’가 있다. 옛날 이 부치고 호롱불에 삯바느질하고 밤새 베틀을 돌리
마을에 청상과부가 살았다.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면서 자식들을 키워냈다. 잔칫집에 가서 허드렛일
억척스럽게 남매를 키운 여인이었다. 자녀들을 출 하고 고기와 떡을 얻어와 부모를 봉양했다. 과부
가시키자 마음 붙일 곳이 없어진 과부댁은 홀로 쓸 팔자 서럽다지만 애면글면 온 힘을 다해 독립적인
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봄날 개울 건너 여성의 길을 걸어갔다. 그 고단한 삶에 놓인 사랑
밭에 씨 뿌리러 갔다가 그녀는 한 동네에서 나고 의 징검다리가 정겹고 애틋하다.
자란 농부를 만났다. 그이도 아내를 여의고 혼자 사
는 처지였다.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안다고, 두 사람
글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은 밭둑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다가 눈이 맞았다. 그림 정윤미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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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오! 세이

피고 지던 봄꽃들의 기운이 모여 진초록이 되 시인이 아니더라도 가는 봄은 누구에게나 아쉽다.


면 여름이 머리를 내민다. 아직 봄을 떠나보내기 1953년 전쟁이 할퀴고 간 이 산천의 봄을 떠나보내
싫지만 야속하게도 내리꽂히는 햇빛은 하루하루가 며 백설희가 처연하게 부른 노래였다. 그 뒤로도 수
다르다. 지난봄은 우리에게 거리 두기를 강요했다. 십 번의 봄을 보내면서 많은 가수들이 불렀고, 시인
살면서 처음 겪어본 바이러스 공포 속에서 꽃과 사 들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로 손꼽기도 했다.
람 사이에 차단막이 설치되고, 사람들과도 마음만 꽃은 남쪽에서부터 진다. 개나리와 목련, 벚꽃과
나눠야 했다. 라일락, 진달래꽃과 철쭉이 휙휙 지나가면서 봄날
은 갔다. 지는 꽃은 여전히 황홀했지만, 그 어느 해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오늘도 옷 보다 서러웠다. 뻐꾸기가 울고 아카시아가 피는 이
고름 씹어가며 / 산제비 넘나들던 성황당 길에 / 계절의 속살에도 사연들이 가득하다. 지난 세월 겪
꽃이 피면 같이 웃고 / 꽃이 지면 같이 울던 / 알뜰 어야 했던 전쟁도, 혁명도 이쯤에서였다.
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 백설희 <봄날은 간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
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세월은 흘러가
덩굴장미 아래서 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
목 놓아 너를 부르리라 자여 따르라.’
- 꽃다지 <임을 위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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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불렀던 그 노래를 6월의 햇빛 아래서도 불렀 윤동주가 사랑했다는 시인 프랜시스 잠을 읽다 보
다. 어느 해는 넥타이부대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행 면 장미가 품고 있는 가시조차도 잊고 덩굴장미 속
진하면서 불렀고, 어느 해에는 노동자들이 파업 현 에 파묻히고 싶다. 노란 송홧가루가 날리던 이 땅
장에서 핏줄을 세워 불렀다. 이 계절에 떠나보낸 의 산천에 아카시아 향이 진동할 때면 괜스레 마음
청춘도 여럿이었다.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었던 그 이 바빠진다. 들판에서는 모내기한 모포기들이 무
청춘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순국했다. 그래서 더욱 럭무럭 자라고, 헛헛한 봄날 시작한 사랑은 무르익
더 이 계절엔 누구든 그 무엇을 향한 열망으로 가 기 시작한다.
득하다. 그 열망들이 모여 금세 뜨거운 여름이 오
는 걸 보면서 우리는 천천히 늙어왔다. 그 열망처 ‘동구 밖 과수원 길 /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
럼 빨간 덩굴장미가 담을 타고 피는 걸 보는 일도 하아얀 꽃 이파리 / 눈송이처럼 날리네 / 향긋한
이 계절에 누릴 수 있는 호사다. 떠나보낸 봄꽃들 꽃냄새가 / 실바람 타고 솔 솔 / 둘이서 말이 없네
에 대해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정도로 붉은 장미 / 얼굴 마주 보며 쌩긋 /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
는 강렬한 유혹이자 넘치는 위로였다. 먼 옛날의 과수원 길.’
- <과수원길>

‘집은 꿀벌과 장미꽃으로 가득하리라 / 오후에는


사원의 종소리가 들려오리라 / 그리고 보석처럼 답답했던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잉잉대는 벌들의
투명한 포도송이는 / 햇볕을 받고 어둑한 그늘 속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아카시아 활짝 핀 그 길을 한
에서 자는 듯 보이리라 / 거기서 내가 얼마나 너를 없이 걷고 싶다. 움츠렸던 마음들을 활짝 펴고, 넘
사랑할 것이랴 / 나는 너에게 올해 스물네 살 된 이 치는 사랑의 말을 주고받으면서 녹음 우거진 숲길
마음과 / 이 얄궂은 영혼과 나의 사랑과 / 백장미 을 같이 걷고 싶다. 누구인들 어떠랴. 이 땅에 숨 쉬
같은 나의 시를 바치리라…’ 고 함께 살아가는 그 누구라도 좋다. 그렇게 한참
- 프란시스 잠 <집은 장미꽃과 꿀벌로> 을 걷다가 어느 대폿집 골목에 이르러서 막걸리 한
잔에 목을 축여야겠다. 어느새 봄처럼 후딱 지나간
청춘을 천천히 곱씹어 봐야겠다. 오징어 다리를 씹
듯 질겅질겅.

글 오광수 시인, 경향신문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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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불현 듯

제주 불교 석조미술품은
무엇을 말하는가

제주는 탐라耽羅, 담라儋羅, 탐모라耽牟羅, 탁라乇羅, 도라度羅, 섭라涉 고려 시대에 건립된 제주 3대 사찰


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주’라는 명칭은 고려 시대부터 사용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고대 문화의 주류는 불교문화였
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육지에서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다. 불교가 삼국 시대에 공인된 이후 중심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
있는 섬을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제주가 오래전부터 육지 으면서 불교문화도 크게 융성하게 된다.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와는 다른 문화를 가졌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기도 하다. 하지 국시國是로 채택되어 전국에 걸쳐 많은 사찰이 창건되거나 중창되
만 최근 많은 유적이 조사되면서 선사 시대 이후 육지와 동일한 었다. 제주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려 후기에는 제주가 중요
문화가 향유되었음을 확인 시켜 주고 있다. 지역으로 부상하면서 여러 사찰이 건립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시
대에는 중앙정부 차원의 억불숭유 정책으로 제주의 불교계도 전
반적으로 위축되었다. 특히, 제주지역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목
사였던 이형상 등에 의해 제주만의 폐불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
면서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찰이 파괴되었다.
제주지역에 창건된 수정사水精寺, 원당사元堂寺, 법화사法華寺는 제주
3대 사찰로 고려 시대에 건립되었다. 이외에도 규모는 작지만 여
러 사찰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를 통해 고려 시대 이후
신앙과 예불을 위한 불교 관련 석조미술품이 많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훼손되어 제주에 남아 있는
석조미술품은 고려 시대의 수정사지 출토 청석탑 부재와 원당사
지 5층 석탑, 조선 시대의 존자암 부도존자암지 세존 사리탑, 동자복, 서
자복으로 불리는 조각상 정도이다. 제주지역의 면적과 역사에 비
제주시 외도동 수정사터 청석탑 부재(1998년 발굴) 하면 많지 않은 편이다.

62
1 2

1 원당사지 5층 석탑 2 존자암지 세존 사리탑(부도) 3 동자복 4 서자복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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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와의 교류를 시사하는 수정사지 그리고 원당사 수정修淨이라는 스님이 머물고 있었다는 재밌는 기록이 전해진다.
수정사는 출토된 유적과 유물들로 보아 고려 초기에 창건되 이 암자의 북편 한적한 곳에는 지금도 어느 승려의 사리와 유골
어 조선 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던 것으로 파악되어 제주에서는 을 봉안하기 위한 승탑으로도 불리는 부도가 세워져 있다. 제주
상당히 유서 깊은 사찰로 밝혀졌다. 그리고 제주에서는 생산되 의 현무암으로 제작되었는데, 견고하면서도 상당히 정교한 솜씨
지 않는 점판암으로 제작된 청석탑이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확인 를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인 모양이나 돌을 다듬은 기법이 육지
되었다. 청석탑은 육지에서도 재료를 구하기 힘들고, 고급스러운 에 건립된 조선 후기 부도들과 친연성을 보이며, 그 양식으로 보
귀족 취향의 색깔 등으로 인해 왕실이나 귀족들의 후원에 의한 아 17~18세기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주에 살고 있
중요 사찰에 많이 건립되었다. 그러한 청석탑이 수정사에 건립되 던 우수한 석공에 의해 설계 시공되었을 터인데, 주인공은 알 수
었다는 것은 당시 제주지역에서 수정사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없지만 조선 후기에 존자암에 머물면서 수행했던 유력한 스님의
또한 부재의 표면에 ‘칠七’ 또는 ‘남南’으로 숫자나 방향이 새겨져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주시 애월읍에는 언덕에 태암사지泰岩
있는 것으로 보아 육지에서 조립식으로 제작하여 어느 정도 시뮬 寺址가 있는데, 현재 옥개석과 상륜부가 남아 있지 않아 돌로 만든
레이션을 해 본 후에 옮겨와 건립한 것으로, 당시 건립 과정과 함 북으로도 소개되고 있다. 전체적인 구조와 형태로 보아 스님의
께 육지와의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부재의 표면에 조 유골이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승탑으로 보인다.
각상과 함께 범자가 새겨져 있어 밀교와 관련된 진언다라니 신앙
에 의하여 조성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어 주목된다. 다만 수정 토속적인 요소가 강하게 느껴지는 ‘동자복’과 ‘서자복’
사지 청석탑은 부재들이 파손되거나 결실된 상태로 일부만 수습 제주시 건입동과 용담동에는 현무암으로 조각된 2구의 조각
되어, 전체 규모와 층수 등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어 아쉽다. 상이 남아 있다. 거의 동일한 규모와 양식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
원당사는 제주 삼양동에 위치한 사찰로 창건 이후 일시적으로 폐 고, 마치 한 쌍처럼 마주 보고 서 있는데, 현재 건입동의 만수사지
사되었다가 다시 중창되어 현재까지 법등을 잇고 있는 제주지역 萬壽寺址에 서 있는 조각상은 동자복東資福, 용담동의 해륜사지海輪寺
의 대표적인 고찰이다. 《탐라지耽羅志》 기록에 의하면, 원나라 기 址는 서자복西資福으로 불리고 있다. 모두 복신미륵福神彌勒으로 불
황후가 북두北斗의 명맥이 비친 삼첩칠하봉三疊七下峰에 탑을 세우 리는 미륵불로 먼 미래에 나타나 그때까지 구제되지 못한 중생들
고 불공을 드려야 태자를 얻을 수 있다는 승려의 계시를 받고, 순 을 구제한다는 미래부처이다. 그런데 두 조각상은 부처상보다는
제에게 간청하여 불탑을 세우고 사자使者를 보내 불공을 드린 결 조선 시대 왕릉이나 사대부가의 묘역에 조성된 문인석과 닮았다.
과 태자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이 석탑은 전체 부재가 현무암으 그리고 과장되게 표현된 얼굴의 눈과 코, 원형의 관모를 쓰고 있
로, 제주의 지역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산이자 는 표현 기법 등은 제주에서 성행한 돌하르방과도 유사하다. 그
석조미술품이다. 석탑의 탑신이나 지붕돌은 간략하게 다듬었지 래서 전체적인 형상이 무덤에 세워졌던 문인석을 대형으로 조각
만, 기단부에 꽃문양을 장식하는 등 돌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하 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돌하르방이 풍선처럼 확대된 것 같
여 정연한 인상을 주고 있다. 1층 탑신 정면의 한가운데에는 사각 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두 조각상이 사찰에서 예불의 대상으로
형 구멍을 새기고 그 안에 공간감실; 龕室을 마련했는데, 소형의 불 조성된 것은 분명한데, 전형적인 돌로 만든 불상이라기보다는 민
상이나 사리구 등을 봉안하기 위한 시설로 이 탑이 생명력 있는 간신앙의 대상으로 야외에 세워진 민불民佛에 가까운 형상이어서
신앙의 대상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탑의 재료와 지역 토속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것
은 다르지만 고려 시대 육지에 건립된 석탑들과 동일한 양식과 으로 보아 두 조각상은 전문적인 안목과 식견을 갖춘 석공에 의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하여 조각되었다기보다는 돌하르방을 조각해 본, 제주도에서 오
존자암尊者庵은 한라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데, 《탐라지》에 의하 랫동안 살았던 능숙한 장인이 지역적 특성을 나름대로 반영하여
면 원래는 이곳에 영실靈室이 있었다고 하며, 《유한라산기遊漢拏山 조선 시대에 조각한 불상으로 보인다. 민간신앙과 외래 종교가
記》에는 띠로 지붕을 얹은 판잣집을 법당으로 삼아 외국 승려인 결합 되고, 제주만의 지역적 특성이 강하게 반영된 유의미한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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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상이라 할 수 있다. 사해 준다. 나아가 고급스러운 탑신석 표면에 범자를 새겨 육지
이처럼 제주지역에 남아 있는 불교 관련 석조미술로는 수정사지 에서도 많지 않은 밀교적인 신앙이 반영된 석탑이라는 점도 주목
청석탑 부재, 원당사지 5층 석탑, 존자암과 태암사지의 부도, 동 된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수천 기의 화강암 석탑이 건
자복과 서자복으로 불리는 조각상 2구 등이 있다. 한편 이경억李 립되었는데, 원당사지 5층 석탑은 제주라는 지역적 특성이 가장
慶億의 시에 의하면 존자암에 고탑孤塔이 있었다고 했는데, 발굴 조 잘 반영된 현무암으로 제작된 고려의 유일한 석탑이다. 그리고
사 때 탑지가 확인되어 기록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또한 제주시 동자복과 서자복은 제주지역의 불교 관련 석조문화가 지역의 고
에 탑동塔洞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현재 사찰은 없지만 탑이 건립 유한 특성을 바탕으로 외래적인 요소를 반영해 슬기롭게 융합된
된 고찰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지명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 모습을 보인다. 한국 불교를 통불교通佛敎라고 하는데, 이는 진리
직 제주에서는 삼국과 통일신라 시대의 불교 관련 유적이나 유물 와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고자 하는 불교 본래의 목적과 벽사적이
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그 당시에 불교가 전해지지 않 고 기복적인 고유한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조화롭게 불교화한 측
았다거나 신앙 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현재까 면을 의미한다. 동자복과 서자복은 통불교적인 한국 불교의 특징
지 제주에서 조사된 유적들로 보아 오래전부터 육지와 많은 교류 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삼국 시대 이후에는 육지와 한편 김상헌의 《남사록南槎錄》에 의하면, 날이 저물어 투숙할 곳을
의 교류 사실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해지고 찾다가 수정사를 찾았는데, 승려들이 모두 처자를 거느리고 있다
있기 때문이다. 당시 제주지역과 백제와의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 고 하였다. 또한 그는 제주에 비구니가 없으며, 대개 절에서도 처
던 것으로 보아 백제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 자를 거느리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육지와 다른 제주
제 성왕이 바다 건너 멀리 일본까지 불교를 전해주었던 것을 보 지역 불교의 차별화된 측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주지역도 육지
면, 그 중간에 있었던 제주지역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에 와 마찬가지로 불교가 전해진 이후, 때에 따라 어려움을 겪기도
무게를 실을 수밖에 없다. 했지만 불교 신앙이 지속되면서 예불의 주요 대상이었던 탑과 불
상 등 여러 유형의 석조미술품이 조성되었다. 다만 제주는 현무
제주지역 불교 관련 석조미술품의 의미 암만 생산되는 지역적인 특성으로 인해 불교 관련 석조미술품이
통일신라 시대에는 항해술의 발달로 여러 지역과 많은 교류 많지 않은 편이다. 제주지역이 오래전부터 육지와 마찬가지로 불
가 이루어졌고, 동아시아의 모든 지역에서 불교가 중심적인 종교 교가 성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상응할 만큼 불교 관련 유적
로 자리 잡았다. 당시 제주지역에 살았던 사람들도 이러한 사실 이나 유물이 많지 않다는 것은 아쉽지만 앞으로 많은 자료가 발
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고, 다양한 루트를 통하여 불교가 전래되 굴되기를 기대한다.
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대 시대에 제주지역에서 불교 신앙이 없
었던 것이 아니라, 육지처럼 규모가 큰 전형적인 사찰이 건립되
지 않았거나, 관련 유적이나 유물이 전해지지 않았거나, 현재 우
리가 밝혀내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크게 성행하면서 제주지역도 수정사와 원
당사 등 여러 사찰에 석탑이 건립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두 석탑
만 남았지만 이 석탑들은 제주지역뿐만 아니라 한국 석탑사에서
조영 기법과 재료 등 여러 면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
다. 수정사지 청석탑은 현존하는 제주지역의 불탑 중에서 건립
글 엄기표 단국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시기가 가장 빠르며, 점판암이 없었던 제주지역에도 청석탑이 건
사진 국립제주박물관, 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 문화재청,
립되었다는 것은 당시 불교문화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을 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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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북한 사 회 문 화 읽 기 ⑯

변화하는
북한 전역에 방송되는 유일한 TV방송, ‘조선중앙TV’
북한의 방송체계는 조선중앙방송 라지오라디오, 조선중앙방송

북한 TV방송
텔레비죤텔레비전, 제3방송주민대상 유선스피커 등의 대민 방송체계, 대
남 선전용 방송인 평양방송, 평양FM방송, 구국의소리방송, 그리
고 각종 외국어로 방송하는 국제 방송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TV방송에 중점을 두어 보다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북한 전역에 방송되는 유일한 TV방송인 조선중앙TV는 1963년
3월 평양TV방송으로 출범하여 1970년 4월 현재의 명칭으로 바
뀌었고, 1974년 4월 15일 김일성의 62회 생일을 기해 컬러 방송
북한에서 방송과 출판은 선전·선동의 유력한 수 을 시작했다. 우리의 경우는 과소비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아시아
단으로서, 정권 초기부터 당이 완전히 장악하여 대부분의 국가보다도 늦은 1980년 12월 1일부터 컬러 방송 송출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 방송통제 시스템을 보 이 이루어졌다.
면, 당 선전선동부는 방송의 편성과 그 내용을 직 조선중앙TV는 뉴스, 영화, 음악, 스포츠, 어린이, 교양 프로그램
접 통제하고, 당 조직지도부는 간부 인사권을 통 등으로 편성하나, 내용적 측면에서는 정치·경제적인 선전·선동
해 방송계 전반을 통제하며, 통일전선부는 대남방 을 중시하며, 평일 15~23시, 토요일 12~23시, 일요일공휴일 09~23
송을 통제한다. 관리·행정적 차원의 방송정책 집 시에 방송한다. 한편 1983년 1월 외국인과 일부 특수계층의 평양
행은 내각 문화성 산하 조선중앙방송위원회가 수 시민만을 대상으로 개국한 만수대TV는 2016년 5월부터 모든 주
행하고, 시설과 기자재는 내각 체신성이 담당하는 민에게 개방했다. 주말 09~13시와 16~22시에만 방송하는데, 국
등 역할이 당과 내각의 각 기관에 분담되어 있다. 제 소식, 외국영화, 스포츠 등 문화프로그램 위주로 방영하여 시
북한에서 방송계 근무 경험이 있는 한 탈북자의 민들에게 인기가 높다. 만수대TV는 1988년 무렵부터 7년간 일요
증언에 따르면 최소 일곱 번 이상 검열과 통제가 일마다 <톰과 제리><우둔한 고양이와 꾀 많은 생쥐>로 방영를 1~2편씩 방송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며, 방송사고 발생을 우려하 한 적도 있다.
여 생방송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룡남산TV는 1997년 김정일 생일에 개국한 교육문화TV가 2012
년 9월에 전환한 것이다. 월·수·금요일 19~22시에 방송하는 이
TV방송도 평양시에서만 볼 수 있고, 외국 영화와 드라마, 외국어
교육, 철학·경제학 등 교양프로그램 위주로 방영하여 대학생들에
게 특히 인기가 높다. 체육TV는 2015년 7월 만수대TV가 잠시 폐
국된 기간에 2015년 8월 15일 조국해방광복 70주년을 기념해 만

※ 이 글의 인용문은 북한 맞춤법 규정에 따라 표기한 것으로


우리나라 맞춤법 규정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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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진 방송이다. 김정은이 특히 관심이 많은 스포츠 전문 채널 소재의 변화 꾀하되, 체제선전 주제는 결코 포기 않아
로,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19~22시에 방송하고 있다. 북한에서 TV드라마가 주민들로부터 본격적인 인기를 끌기
북한의 TV드라마와 예술영화극영화에 삽입되는 음악들은 1958년 시작한 것은 1993년에 방영한 〈석개울의 새봄〉부터라고 할 수 있
5월에 창단한 ‘영화및방송음악단’이 전담하여 만들고 있는데, 이 다. 천세봉이 창작한 같은 제목의 장편소설1955~1960년 발간을 원작
음악단은 <아리랑>, <빛나는 조국>, <인민의 나라>와 같은 ‘대집 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전쟁 직후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군軍
단체조와 예술공연’의 배경음악, 각급 학교 교가, 화면반주음악 출신의 한 농촌관리위원장이 북한의 집단농장화 정책을 관철한
들도 연주·녹음한다. 다는 것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당 정책 선전이라는 진부한 주제
북한에서 ‘영화문학’시나리오은 ‘영화문학창작사’가 창작하고, ‘텔 의 작품임에도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강한 개
레비죤극문학’ TV드라마 대본 은 ‘텔레비죤극창작사’가 창작한다. 성으로 갈등과 대립을 반복할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
1973년 7월에 창설된 텔레비죤극창작사가 제작하는 북한의 TV 기가 극의 재미를 더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크게 TV소설, TV극, TV영화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 1990년대 이후 북한에서 크게 인기를 끈 TV드라마들은 대부분
TV소설은 소설 낭독자의 화술과 화면이 배합되어 형상이 창조되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가미된 작품들이다. 1995년 1월에 방
며, 묘사문학으로서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비해 TV극은 대 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TV드라마 〈백금산〉 역시 전체적으로는
사를 기본수단으로 하여 형상한 극적인 생활을 보여주는 특징이 체제 찬양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스토리의 전개가 빠르고 남녀
있다. 한편 TV영화는 TV로 방영할 것을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로, 간의 사랑 이야기가 적당히 가미되어 있다. 남대현의 소설1987년 작을
행동의 예술로서의 영화적 특성을 보인다. 바탕으로 1995년에 TV드라마로 제작, 방영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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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었던 〈청춘송가〉 역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들어 있다. 체 한류 등 국외 콘텐츠 유입 등으로 TV방송 형식 변화
제선전 영상물에 지친 주민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마치 당의정과 북한의 TV방송은 2013년부터 SD급 디지털 방송을 시작하
같이 체제선전물을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포장함으로써 사 여 2015년 초에 SD와 HD 겸용 송출방식에서 풀 HDFull HD급으
상적으로 교양하려는 북한당국의 의도가 읽히는 부분이다. 로, 그리고 우리보다 10년 정도 늦은 2017년 12월 4일에는 16 : 9
2001년 10월에는 이혼 문제를 다룬 TV연속극 〈가정〉을 방영했 비율의 풀 HD급 디지털 방송으로 전환했다. 2012년 12월 31일
다. 이 연속극은 남편이 아내에게 욕설과 함께 무자비하게 때리 우리의 TV방송이 전면적인 디지털 방송으로 전환할 당시 재미있
고 살림살이를 부수는 모습, 전처의 자식을 구박하는 후처, 부부 는 에피소드가 있다. 우리의 지상파 아날로그 TV방송이 일제히
싸움으로 상처받는 자녀들의 모습 등 북한에서 좀처럼 볼 수 없 종료되자, 북측 강원도 지역과 황해도 지역 주민들이 “삶이 고단
었던 장면들이 대담하게 다루어졌다. 결국 방영 9일 만에 중단되 하지만 저녁이면 KBS 〈6시 내 고향〉이나 드라마 등을 보면서 마
기는 했지만, 이러한 파격적인 변화는 당시 북한사회에 유행한 음의 위안을 삼았는데, 이제 무슨 재미로 저녁을 보내겠느냐”며
‘신사고’적인 시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식상한 주제 몹시 서운해했다는 것이다《데일리 NK》, 2012.10.28.. 이러한 소식이 국
로 인해 주민들로부터 외면 받는 예술작품에 리얼리티를 부여이른 내에 전해지자 우리 정부는 관계 당국 회의를 열어 북한으로 송
바 ‘지성도의 향상’해 주민들의 심성에 다가감으로써 예술의 사상교양 출하는 TV전파만은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을 유지한 바 있다《중앙
적 기능을 강화해 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이후 오늘날에 이르 일보》, 2012.12.26..

기까지 북한의 TV드라마는 시청자들의 의식 수준에 맞춰 형식과 근래 북한은 TV방송 기술의 발전 추세에 맞춰 방영 형식상에서
소재의 변화를 꾀하되, 체제선전과 경제선동, 그리고 우상화라는 도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촬영에 드론과
주제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오고 있다. 이러한 북한 액션 카메라 등 최신 장비를 활용하는가 하면, 3차원 CG를 통
방송계의 기본입장은 드라마뿐만 아니라 모든 방송 콘텐츠에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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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가상현실 장면을 방영하는 등의 새로운 기법들을 선보이고 있
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프로그램의 형식에도 변화를 주고 있
다. “다양해진 화면, 속도감 있는 편집, 감각적이고 역동적인 구
성”KBS, 2019.4.15.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뉴스보도의 경우 과거
의 전투적인 말투와 고압적인 표정에서 벗어나 보다 친근하고 부
드러운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젊은 남녀 아나운서방송원가 나와
1
대화 형식으로 뉴스를 진행하는가 하면, 다양한 현장 르포를 통
해 현실감을 강조하기도 한다. 뉴스의 배경화면도 입체화하거나
동영상을 깔고 있다.
일기예보날씨도, 연합뉴스TV2019.4.29.의 표현을 빌리면, 딱딱한 어
투로 날씨를 ‘낭독’하기만 했던 과거의 방식을 탈피하여, 날씨 관
련 그래픽에 손짓을 써가며 친절히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
다. 이와 같은 북한 TV방송의 형식상의 변화는 장마당의 활성화
2
로 ‘한류’ 등 해외콘텐츠의 유입과 함께 주민들의 의식 수준과 미
적 감각이 높아짐에 따라 북한당국이 이에 대응하는 측면이 강하
다고 하겠다. 그러나 북한 TV방송 콘텐츠들은 내용상으로는 예
나 지금이나 여전히 당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변함없이 체
제선전과 경제선동, 대외비방, 김일성 3대 우상화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 간 방송 교류는 문화 차이 이해를 위해 중요 3

오늘날 북한사회에서는 단속이 강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 보도(뉴스) 장면


어떤 방법으로든 외국 방송을 통해 정보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경 2 CG(컴퓨터 그래픽) 활용
3 일기예보 모습
향이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강원도, 황해도, 평
양과 평안도, 동해안의 함흥, 청진 일부 지역에서 남한의 지상파
TV방송이 수신되면서 많은 북한 주민이 몰래 남한 TV방송을 직
접 시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북한당국은 남한의 TV, 라디 확보하지 못하고 정치·군사적 상황에 따라 크게 요동쳐 왔다. 또
오 방송 청취를 막기 위해 도마다 설치된 과학기술총국과 국가안 한 남에서 북으로의 일방적 교류에 그쳤다는 한계를 보여 왔다.
전보위부 27국을 통해 채널이나 주파수를 땜질로 고정하고 은박 북한 주민들이 음성적으로 ‘한류’의 유통을 통해 남한문화를 학
지로 리모컨 센서를 막아 놓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막대기’라 습하고 있지만, 남한 주민들은 북한문화를 접할 기회도, 의지도
부르는 리모컨을 하나 더 추가로 구입해 사용하기 때문에 땜질이 없다는 사실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불균형적 상황은 결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고 한다. 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이에 대한 우리 정책당국의 관심과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이와 같은 남북 간 방송 교류는 상대편 사 국민적 각성이 필요한 때이다.
회의 문화적 이질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통일 이후 남북 사회문
화공동체 형성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글 오양열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초빙석좌연구위원
그러나 지금까지의 공식적인 남북 방송 교류는 독자적인 동력을 사진 출처 조선중앙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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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MON TUE
CA LENDER
1 2
문화달력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서울 동대문문화원] 2020 동대문구민 문예공모전 원고 접수

7 8 9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서울 동대문문화원] 2020 동대문구민 문예공모전 원고 접수

14 15 16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한문연] 지역문화행정과정 3차(서울여성
플라자)
[서울 동대문문화원] 2020 동대문구민 문예공모전 원고 접수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동네, 살아지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동네, 살아지


다(판그림) 다(사진·드로잉)

21 22 23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서울 동대문문화원] 2020 동대문구민 문예공모전 원고 접수


[서울 노원문화원] 노원청소년역사문화예술제(경춘선 숲길 가득 희망의 노래) 전시(경
춘선 숲길)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동네, 살아지 ■ [인천 연수문화원] 인천시민대학(공동


다(판그림) 체 민주시민교육)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동네, 살아지
다(사진·드로잉)

28 29 30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8.9.)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8.9.)
[한문연]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접수(~8.7.)

[서울 동대문문화원] 2020 동대문구민 문예공모전 원고 접수(~6.30.)

[서울 노원문화원] 노원청소년역사문화예술제(경춘선 숲길 가득 희망의 노래) 전시(경춘선 숲길, ~6.30.)


■ 한국문화원연합회
■ 지방문화원 ■ [서울 성북문화원] 만해 한용운 선사 ■ [인천 연수문화원] 인천시민대학(공동
76주기 추모 다례재(심우장, 11:00) 체 민주시민 교육)
※일
 정은 변동되거나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동네, 살아지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동네, 살아지
다(판그림) 다(사진·드로잉)
취소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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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 THU FRI SAT

3 4 5 6 현충일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서울 동대문문화원] 2020 동대문구민 문예공모전 원고 접수

■ [인천 연수문화원] 인천시민대학(섬 스 ■ [인천 연수문화원] 인천시민대학(먼우 ■ [서울 도봉문화원] 절기따라 놀이따라
토리텔러 및 유튜버 양성) 금 마을 이야기 교육 및 지역사회 아카 (망종)(창동역사문화공원, 14:30)
이빙)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시민기
록단

10 11 12 13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어린이극 <괴물신드롬> _학산소극장

[서울 동대문문화원] 2020 동대문구민 문예공모전 원고 접수

■ [인천 연수문화원] 인천시민대학(섬 스 ■ [인천 연수문화원] 인천시민대학(먼우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시민기 ■ [광주 서구문화원] 5·18역사문화탐방
토리텔러 및 유튜버 양성) 금 마을 이야기 교육 및 지역사회 아카 록단 (40주년, 오월 서구로(路))
이빙) ■ [인천 연수문화원] 꿈다락토요문화학교
‘꼬마작곡가’
■ [인천 연수문화원] 전통문화예절학교

17 18 19 20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한문연] 지역문화행정과정 3차(서울여성
플라자)
[서울 동대문문화원] 2020 동대문구민 문예공모전 원고 접수

■ [인천 연수문화원] 인천시민대학(섬 스 ■ [인천 연수문화원] 인천시민대학(먼우 ■ [광주 서구문화원] 제17회 전국 애송 ■ [인천 연수문화원] 꿈다락토요문화학교
토리텔러 및 유튜버 양성) 금 마을 이야기 교육 및 지역사회 아카 시 낭송대회 본선(빛고을국악전수관, ‘꼬마작곡가’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시민극단 이빙) 14:00) ■ [인천 연수문화원] 전통문화예절학교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시민기
록단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주인공원, 예
술로 잇다

24 25 26 27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한문연]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접수

[서울 동대문문화원] 2020 동대문구민 문예공모전 원고 접수

[서울 노원문화원] 노원청소년역사문화예술제(경춘선 숲길 가득 희망의 노래) 전시(경춘선 숲길)

■ [인천 연수문화원] 인천시민대학(먼우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시민기 ■ [광주 서구문화원] 5·18역사문화탐방


금 마을 이야기 교육 및 지역사회 아카 록단 (40주년, 오월 서구로(路))
이빙)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주인공원, 예 ■ [인천 연수문화원] 꿈다락토요문화학교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시민로 술로 잇다 ‘꼬마작곡가’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음악회 <강 드-역사를 거닐다 ■ [인천 연수문화원] 전통문화예절학교
산제 심청가 - 淸, 바다로 떠나다>(학산 ■ [인천 연수문화원] ‘연수시티투어’(송도
소극장, 19:00) 국제도시)
■ [인천 연수문화원] 인천시민대학(섬 스 ■ [서울 노원문화원] 창작극과 함께 하는
토리텔러 및 유튜버 양성) 우리마을 역사문화 골든벨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시민극단 ■ [서울 성북문화원] 만해 한용운 선생 추
모 창작 뮤지컬 <심우>(심우장, 13:00,
15:00)

71
02-704-2322
그네뛰기
Geunettwigi

ISSN 1599-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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