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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우리 고미 술 을 만 나 다
〈경작도 〉 耕作圖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
1796년, 종이에 수묵담채, 26.7 × 31.6cm

〈경작도〉는 1796년 봄, 김홍도가 그린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에 들어 있는 그림이다. 김홍도는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시대를 대표하는 최
고의 도화서 화원이었다. 특히 그는 풍속화를 잘 그렸다. 이 그림은 그가 그린 풍속화 중 하나이다. 〈경작도〉의 화면 전경前景에는 시냇물
이 졸졸 흐르고 여러 각진 돌들이 흩어져 있다. 잡석雜石 더미 너머로 한 농부가 황소를 이용해 열심히 밭을 갈고 있다. 한국의 전통 쟁기
는 크게 호리쟁기와 겨리쟁기로 나뉜다. 소 한 마리가 끄는 쟁기를 호리쟁기 또는 호리라고 한다. 논밭을 갈기가 수월했던 중부 이남의
평야 지대에 호리쟁기가 주로 사용되었다. 반면 토양이 거친 곳에는 두 마리 이상의 소가 끄는 쟁기인 겨리쟁기 또는 겨리가 쓰였다. 〈경
작도〉에는 호리쟁기를 사용해 밭을 갈고 있는 농부와 힘겹지만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는 소가 그려져 있다. 농부는 맨발로 쟁기를 밀
고 있다. 이 장면을 한가롭게 바라보는 검둥개의 뒷모습이 인상적이다. 화면 오른쪽에는 큰 나무가 솟아있다. 나무 밑에는 정담을 나누
는 노인 두 명이 보인다. 나무의 윗부분에 앉아 있는 까치는 자신이 만든 둥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나무에 잎이 없는 것을 보면
막 봄이 시작되는 시절임을 알 수 있다. 목가적牧歌的인 분위기가 화면에 가득하다.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우경牛耕은 신라新羅의 지증왕
智證王, 재위 500~514 3년502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소는 1,500년 이상 이 땅에서 논밭을 갈아왔다. 즉, 소는 우리 겨레와 역사를 같이해 온 고
마운 동물이다. 소는 살아서는 사람을 위해 농사를 도와주고 죽어서는 뼈, 고기, 가죽을 남긴다. 결국 소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동물이다. 소는 자기희생, 우직함, 성실함, 정직함의 상징이다. 올해는 소의 해다. 코로나로 살기가 너무 어려운 시절이지만 소처럼
우직하게 힘든 시간을 견디고 극복해나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글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그림(소장) 삼성미술관 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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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Contents
U RIM U N HWA
A KORE AN LOCAL
C U LT U R E M O N T H LY

별별마당
월간 우리문화
vol.291 | 2021 01 1 우리 고미술을 만나다
〈경작도耕作圖〉 / 장진성
발행인 김태웅
발행일 2021년 1월 1일
4 새해 인사
편집고문 권용태
한국문화원연합회 새해 인사 / 회장 김태웅
편집주간 한춘섭
편집위원 곽효환, 김종, 김찬석, 오광수,
6 테마기획
오양열, 장진성, 지두환
편집담당 음소형 조선 왕들의 뜻깊은 새해맞이 / 신병주
발행처 한국문화원연합회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9(도화동, 성우빌딩) 12층 12 시와 사진 한 모금
전화 02)704-4611 | 팩스 02)704-2377 안택고사安宅告祀 / 곽효환
홈페이지 www.kccf.or.kr
등록일 1984년 7월 12일
등록번호 마포,라00557
기획편집번역제작 서울셀렉션 02)734-9567
문화마당 Cultural Encounters

16 옹기종기 Iconic Items


그릇의 품격, 유기鍮器 / 안유미
Yugi: Tableware with Class / An Youmee

18 한국의 서원 ⑩ Korea’s Seowon


지역 사회 교육기관 역할 이어가는 서악·용연·화산 서원 / 이종호
Seoakseowon, Yongyeonseowon, and Hwasanseowon: Carrying on the Mantle of
Community Education / Lee Jongho

24 지역문화 스토리 Local Culture Stories


역사와 전설이 공존하는 충북 명소의 숨은 이야기 / 김희찬
Where History Meets Legend: The Hidden Stories of Chungcheongbuk-do’s
Tourist Attractions / Kim Hee-chan

32 느린 마을 기행 ⑨ Slow City Travel


생명의 땅, 갯벌을 품다 _ 천사의 섬, 신안 증도 / 임운석
Embracing a Land of Life: Sinan’s Island of Angels, Jeungdo / Im Unseok

38 팔도음식 Provincial Cuisine


부드럽게 쪄낸 ‘홍어찜’과 돌돌 말아 불맛 입힌 ‘낙지호롱’ / 최갑수
우리 놀이문화 _ 윷놀이 Hongeojjim and Nakjihorong: Softly Braised Skate and Smoky Grilled Octopus
Skewers / Choi Gapsu
표지 이야기
4개의 윷가락을 던지고 그 결과에 따라 말馬을 42 한국을 보다 Through Foreign Eyes
사용하여 승부를 겨루는 민속놀이.
정성으로 행복 빚는 한국의 돌잔치 / 사카베 히토미
표지 그림 박수영 일러스트레이터 Doljanchi, a Family’s Greatest Effort to Bring Happiness / Hitomi Sakabe
공감마당
18 46 서울 스케치
한양은 하나의 성이다 / 김형근

48 이달의 인물
파도를 닮은 화가, 일랑 이종상 / 한춘섭

54 오! 세이
희망이라는 고통 / 정용준

24 56 조선 人 LOVE ⑬
조선이 추구한 천륜의 사랑, 효孝 / 권경률

60 바다너머
소원을 살 수 있는 라파스의 신년 축제 ‘알라시타’ / 김혜은

우리마당

64 칼럼

32 위드With 코로나 시대, 다시 여행을 기획하다 / 김태현

66 북한사회 문화 읽기 ㉓
김정은 시대, 북한의 국제 문화교류 ② - 영화, 교예, 미술 및 도서 부문 / 오양열

70 문화달력
한국문화원연합회, 지방문화원 일정

72 NEWS, 편집후기
《임실의 돌문화》 등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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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599-4236
■ 《우리문화》에 대한 의견은 편집부(eumso@kccf.or.kr)로 보내주세요.
■ 게재된 기사 및 이미지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 책자는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아 제작합니다.
별별마당 ㅣ 새해 인사

존경하는 문화 가족 여러분,
2021년 신축년辛丑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항상 한국문화원연합회를 위해 애써주시는 문화 가족과
성원해주시는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한국문화원연합회는 지난 한 해 코로나19로 급격히 도래한 ‘비대면 시대’를 맞아


‘국민의 시낭송의 밤’과 ‘실버문화페스티벌’, 한국문화원연합회 부설 정책연구소의
심포지엄 ‘포스트 코로나, 지방문화원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등을
온라인 및 방송 송출을 통해 선보였습니다.
비록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직접 여러분을 만나 뵙고 선보이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문화로 따뜻해진 온기만큼은 나눌 수 있었기에 작게나마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올해는 그동안 지방문화원이 생산·발굴한 지역문화자원을 각 문화원에서도


관리·활용할 수 있도록, 지방문화원과 연합회가 함께 사용하는 통합자료관리시스템이 구축될 예정입니다.
스스로 성장하고 진화하는 지역문화정보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문화 가족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2021년은 신성한 기운을 지녔다는 흰 소의 해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유례없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신성한 소의 기운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하길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2021. 1.

한국문화원연합회 회장 김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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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

의 덕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가 딸 명안공주에게 보낸 새해 안부 편지〉

“새해에 잘 지내는지 안부 알고자 하며 먼저 적은 편지 보고 든든하고 반가워하노라. 새해부터는 무병장수하고 재채기 한 번 아니하고


푸르던 것도 없고 숨도 무궁히 평안하여 달음질하고 날래게 뛰어다니며 잘 지낸다고 하니 헤아릴 수 없이 치하 가득하구나.”

조선 시대에는 새해 덕담 인사를 ‘완료형’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새해 복 많이 받으신다고 하니 축하드립니다”라고 확정하여 표현한 것이다.
조선 왕조 18대 왕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가 딸 명안공주에게 보낸 신년 편지에서도 이같은 표현이 잘 드러나 있다.

글 음소형
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어문생활사연구소
사진 오죽헌/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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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테마 기 획

조선 왕들의
뜻깊은 새해맞이

옛 조선 왕실에서는 어떻게 새해를 맞이했을까. 정조 때의 학자 홍석모洪錫


謨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당시의 행사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영의정 이하 문무백관의 신하들이 모두 모여 왕에게 새해를
축하하는 문안 인사와 함께, 이를 글로 담은 전문箋文과 표리表裏: 옷감의 겉과 속
를 바치고 정전正殿의 뜰에서 조하朝賀를 올렸다. 요즈음의 신년하례식인 셈
이다. 지방의 관리들 또한 축하 글과 함께 지방의 특산물을 올렸다. 왕은
신하들에게 회례연會禮宴을 베풀어 음식과 어주, 꽃 등을 하사하면서 지난
해의 노고를 치하하고 새해를 축하하였다.

영조가 새해맞이를 위해 행차한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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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모두 토산물을 빠짐없이 올렸다. 왕은 면복을 입고
‘세종’의 새해맞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상왕 전하께 나아가 하례를
1418년 8월 조선의 네 번째 왕으로 즉위하여, 거행하고, 의복과 안장을 갖춘 말을 올리고, 또 대비
1419년 1월 1일 왕으로서는 첫 새해를 맞은 세종 에게 안팎 의복을 올렸다”고 하여 먼저 명나라 황제
1397~1450, 재위 1418~1450. 그의 하례식 모습은 《세종실 에게 정조 하례를 한 후, 창덕궁 인정전에서 신하들
록》에 잘 기록되어 있다. “왕은 면복冕服 차림으로 여 의 하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러 신하를 거느리고 멀리 황제에게 정조 하례를 드 하례식에는 아라비아 사람과 왜인들까지 참석했음
린 다음, 원유관을 쓰고 강사포를 입고, 인정전에서 도 알 수 있는데, 사대교린 정책이 구체적으로 적용
여러 신하의 하례를 받았다. 승도僧徒, 회회回回: 아라비 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하례를 받은 후에는 여러 신
아, 왜인倭人들까지도 예식에 참례하였다. …각 도는 하와 함께 당시 상왕으로 있던 부친 태종과 어머니인
대비 원경왕후에게 새해 인사를 올리고, 옷감과 말
등을 선물하였다.
세종 25년1443 1월 1일의 《세종실록》 기록에는 “왕이
세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중국 황제의 정조正朝를
멀리서 하례하고, 근정전에 나아가 세자와 여러 신하
의 조회를 받았다. 각도에서는 전문箋文과 토산물을
진상하고, 왜인 조전早田·광궤光軌·등구랑藤九郞 등과 알
타리斡朶里의 마구음파馬仇音波 등이 반열에 따라 토산
물을 바쳤다. 또 근정전에서 회례연을 베풀었다”라고
나와 있다. 이를 보면 세종이 새해를 맞이하여 특히
명나라와 일본과의 외교에 노력을 기울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세종 27년1445 새해의 기록에는 “왕이 면복 차림으로
왕세자와 문무의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망궐례를 의
식대로 행하고, 강사포 차림으로 근정전에 나아가서
조하를 받았다. 왜인·야인野人과 귀화한 회회인回回人
과 승려, 기로들이 모두 조하에 참여하였다. 의정부
에서 안장 갖춘 말과 옷의 겉감과 안찝을 바치고, 여
러 도道에서는 하전賀箋과 방물을 바치었다. 근정전에
서 왕과 신하가 함께 연회하기를 의식대로 하고, 날
이 저물어서야 파하였다”고 하여, 여진인, 아라비아
인, 승려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가운
데 근정전에서 새해를 맞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하
와 백성들의 축하 속에 새해를 시작한 600년 전 세
종,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보면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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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성도(壽星圖)〉(조선 후기, 김유성 作)


2,3 〈십장생도(十長生圖)〉(작자미상)
 선 시대에는 새해를 축하하고 안녕을 기원하며 임금이 신하에게, 혹은 가까인 지인끼리 그림을 선물했다.

이를 세화(歲畵)라고 한다. 송축의 의미로 주로 그려진 〈수성도〉(왼쪽), 〈십장생도〉(오른쪽).

조선의 중흥기를 이끈
‘영조’의 새해맞이
조선의 최장수 왕인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가
70세를 맞이한 새해는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영
조 39년1763 1월 1일의 《영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는 영조의 새해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경희
궁 경현당에서 새해 첫날을 맞이한 영조는 여러 신하
들이 성수聖壽가 칠순에 올랐다 하여 천안天顔: 용안을
우러러 뵐 것을 청하니 이를 허락하고 진시辰時: 오전 7
시~9시에 선왕과 왕비의 위패가 모셔진 종묘에 거둥했
다. 이 거둥에는 도승지 심수, 좌승지 김효대, 우승지
이유수 및 사관史官 홍검, 이승호 등이 수행했다. 종묘
에 행차한 영조는 선왕들의 신위에 참배한 익선관과
곤룡포 차림으로 연輦: 왕의 가마을 타고 시가로 나왔다.
1 시가로 들어선 국왕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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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영조가 처음 불러들인 이들은 왕에게 문안을 드 독려하였다.
리기 위해 나온 노인들이었다. 노인들을 본 영조는 영조는 백성들과 직접 만나 소통하는 것을 좋아했
왕의 앞으로 나오게 한 뒤 나이 순서대로 서게 하고 던 대표적인 왕이었다. 1752년 균역법을 시행할 때는
고마움을 전했다. 이어 영조는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밖 창경궁 홍화문 밖에 나와 백성들의 의견을 물었고,
으로 나가 가마를 멈추게 하고 지방 향리의 우두머리 1760년 청계천 준천 사업을 시행할 때도 준천의 시
인 각 읍 호장戶長들을 앞으로 나오도록 했다. 영조는 행 여부를 직접 백성들에게 물었다. 영조와 백성들과
재임 중 궁궐 앞문 밖까지 나가 백성들을 자주 만났 의 소통은 1763년 새해 첫날부터도 이루어졌다.
는데, 이날도 지방이 백성들을 만난 것이다. 영조는 영조는 이어서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진 종
“내가 비록 칠순이지만 마음만은 오막살이집과 같아 묘 참배에 나섰다. 영조는 신위가 모셔진 전각을 살
오늘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하물며 삼남 지방경상, 전 핀 뒤에 수리가 필요한 부분을 직접 만지며, 영의정
라, 충청을 생각하는 나의 마음은 더욱 절실하다. 해가 신만申晩 등에게 고칠 것을 지시했다. 이어 영조는 종
시작되기 전에 모두 진휼賑恤을 베풀었는데, 지금 백 각에서 잠시 머물며 시전 상인들의 애로 사항을 들은
성들은 근심이 없는가?”라고 물었고, 나주 호장戶長은 후 책임자에게 문제점 해결을 지시할 것을 약속했다.
“진휼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흩어지 시전 상인과의 면담을 들은 후에 영조는 기로소耆老所
는 근심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영조는 왕 의 기영각耆英閣으로 갔다. 기영각은 연로한 고위 문신
앞에서 의례적으로 하는 말임을 알아채고, “너희 말 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기구인 기로소에 들
이 이와 같지만 어사가 보고하는 것과 서로 다르다. 어가는 것을 기념해 만든 전각이다. 유교 사상의 핵심
내가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다. 오늘의 거둥은 중 인 경로사상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왕은 60세가 넘
요한 바가 있으니, 지난해 애휼愛恤의 뜻을 생각하여 은 후에 기로소에 들어갔는데, 영조는 51세에 기로소
너희들을 소견 하는 것이므로 품은 바가 있으면 말하 로 들어갔다. 태조와 숙종에 이어 세 번째였으니 기로
도록 하라”고 하며 솔직하게 힘든 상황을 말할 것을 소에 대한 영조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기영각에
들어간 영조는 이곳의 방문을 기념하여 ‘기영각전 칠

“ 이날 영조가 처음 불러들인 이들은


왕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나온 노인들이었다.
순군신耆英閣前七旬君臣’이라는 글씨를 직접 남겼다.
새해를 맞이한 왕의 거둥은 당시에는 폐허가 된 건
노인들을 본 영조는 왕의 앞으로 나오게 한 뒤 물로 남아 있던 경복궁으로 이어졌다. 영조는 경복궁
나이 순서대로 서게 하고 고마움을 전했다. 행차를 통해 이곳이 여전히 국가의 상징임을 기억시

” 켰다. 영조는 숭현문을 거쳐, 생모인 숙빈 최씨를 모


신 사당인 육상궁毓祥宮을 찾아 사적인 예를 다하였다.
육상궁은 영조가 후궁 출신인 어머니를 위해 지은 사
당으로 현재는 청와대 경내에 있다. 육상궁 방문 후
영조는 신무문을 거쳐 사정전의 옛터에 이르러 작은
막차를 세우고 근정전 쪽으로 향했다. 근정전 앞에서
신하들의 진하陳賀를 받은 후에는 사면령을 내렸다.
영조의 행보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고, 새해를 맞이했
던 거처인 경희궁으로 돌아오면서 영조의 70세 새해
첫날의 긴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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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愛民군주
‘정조’의 새해맞이
정조 15년1791은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가

40세 되던 해였다. 새해 첫날 정조는 먼저 역대 왕의


어진御眞: 왕의 초상을 봉안한 선원전에 나아가 인사를
올렸다. 이어 예조 관리들의 인사를 받고, 4일에 종묘
와 경모궁景慕宮: 사도세자를 모신 사당에 나아가 예를 표할
것을 지시하였다. 정조는 종신宗臣으로서 가장 나이가
많은 서계군에 대해 별도로 음식물과 옷감을 주었다.
나이가 많은 재상들에게는 새해 음식인 세찬을 하사
하였다. 정조는 특히 노인들을 배려했다.
교서에서는, “판부사 이복원과 좌상은 대신이자 각신
閣臣이다. 나이가 모두 70이 넘었지만, 젊은이와 다름
이 없다. … 두 대신의 집에는 원래의 정식 외에 더 보
내주고 이어서 낭관으로 하여금 문안하게 하라”고 지
시하였다. 이어 “신하로서 나이가 70이 넘었고, 내외
“ 새해 첫날 정조는 먼저
역대 왕의 어진을 봉안한 선원전에 나아가
가 해로하는 자가 자그마치 13명이나 된다. 이런 경 인사를 올렸다.
사스러운 때를 맞아 축하하는 일로는 노인을 공경하
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면서, 여러 기로의 집에는

별도로 쌀과 고기를 주고 안사람들에게는 명주를 주
고, 관리들이 이들을 문안하도록 할 것도 지시하였 권농 윤음을 내린 것은 곧 삼가 열성조께서 근본을
다. 정조는 1789년 부친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재의 중시하고 농사에 힘쓰셨던 거룩한 법도를 계승한 것
수원으로 옮기고 몸소 효의 실천을 강조했는데, 부친 인데, 이해 이달에는 더욱더 간절하다. 원량이 나라
에 대한 효심이 새해의 경로사상 강조로 이어졌음을 의 근본이 되듯이 백성도 나라의 근본이니 백성이 편
알 수가 있다. 안해야만 나라가 평안한 법이다. 둘의 관계가 떼려야
새해를 맞아 정조는 팔도에 농사를 장려하는 윤음綸 뗄 수 없을 정도로 하나의 이치로 연결되어 있다는
音: 왕이 백성이나 신하에게 내리는 글을 내리기도 했다. 농업 것은 자명하면서도 명백하다”고 하면서, ‘권농’ 두 글
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농사를 최우선으로 할 것을 자를 첫째가는 급선무로 삼겠다고 다짐하였다.
각 도의 관리들에게 당부한 것이다. 정조는 “내가 하 선왕에 대한 예를 다하고, 노인들을 우대하며 민심을
늘과 조종祖宗의 보살핌과 도움을 받아 지난해 경술 챙기는 가운데 새해를 맞이하였던 세종, 영조, 정조,
년1790에 나라에 원량元良: 세자을 두게 되었고 가을에 그들을 통해 우리는 또 한 번 보게 된다. 조선을 대표
는 풍년이 들었다. …그 경사를 함께하면서 백성을 하는 왕다운 면모를, 그리고 여전히 뜻깊고 설레는
사랑하는 일념은 언제나 은혜를 널리 베푸는 데 있고 새해를.
거듭 풍년이 들었으면 하는 바람은 금년에 더욱 간절
글 신병주 역사학자,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하다”면서 세자후의 순조를 얻은 기쁨을 표하였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셔터스톡
정조는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 새해에는 언제나 그림 양예람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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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시와 사진 한 모 금

안택고사 安宅告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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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 무서리가 내린 날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은 고요하다 못해 섬뜩했다
이른 아침부터 여인들만이 집안 곳곳을 들고 났고
외할머니는 대문에 왼새끼로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렸다
해가 설핏 기울자 어둠이 안개처럼 밀려왔고
차랑차랑한 물에 씻어 올린 붉은 팥으로
시루떡을 앉히고 나물 만들고 밥 짓던
여인들의 손길과 발걸음은 더욱 분주해졌다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넘긴 쪽진머리 할매는


우두커니 앉아 손에 쥔 북채로
간간이 북을 두드리며 독경을 이어 나갔다
비구니도 무당도 아니라는
멀지않은 승방에서 왔다는
그녀에게서 정갈한 비린내가 났다

깨끗하게 정리된 부뚜막에


촛불을 켜고 진설한 떡시루와
숟가락을 꼽은 밥솥, 나물, 과일, 견과, 정화수
그리고 조왕신에게 올리는 막걸리 몇 사발
할매는 여전히 북을 치며 독경을 했고
머리칼이 성성한 같이 온 중늙은이 아낙은
조왕소지를 올린 다음
차례로 가족소지를 올렸다

터주신이 산다는 장독대에서는


불밝이쌀을 넣은 당산시루와
정화수와 막걸리를 진설하고
다시 독경을 하고
당산소지와 칠성소지를 올린 다음 가족소지를 살랐다
천장이 높은 대청마루에서는
대나무가지로 만든 성주대를 쌀통에 꽂고
성주신을 맞았고
뒤이어 제석신과 조상신을 맞아
또 독경을 하고 소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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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국 세 그릇, 막걸리 세 잔과 떡 세 접시,
구운 생선과 삼색나물, 과일과 정화수
어둠을 밝히는 촛불과 향을 피운
안채와 사랑채를 갈마들며
외할머니와 외숙모들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허리를 숙이며
액운을 쫓고 발복을 비손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북소리와


지신경地神經, 칠성경七星經, 당산경堂山經 소리에
조왕신과 터주신과 문신門神과 성주신과 제석신과 조상신이
어우러져 소리 없이 흥성거리는 밤은 깊어가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숨죽여 살피던 아이들은
어느새 하나둘 스러져 쌕쌕 깊은 잠에 들었다
서리와 추위를 부르는 찬바람을 타고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어느 밤은 점점 깊어가고
제물들을 나누어 담은 바가지를
대문 앞 내전상에 올려놓자
쪽진 할매는 독경을 멈추고
벼락같이 대문을 향해 칼을 던졌다
칼끝이 문밖을 향하자
밤 깊도록 서성이며 비손하던
여인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늦은 밤 따뜻한 바닥에 화기애애하게 둘러 앉아
고사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추위에 언 고단한 몸과 허기를 달래자
멀리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튿날 한낮이 지나고 나서야


외할아버지와 외삼촌들과 행랑채 일꾼들이 차례로
집에 돌아왔다

곽효환
시인
2002년 《시평》으로 등단
시집 《인디오 여인》, 《지도에 없는 집》, 《슬픔의 뼈대》, 《너는》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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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추억의 기록 50년 전 내가 만난 한국, 사진 속 순간들》(서울셀렉션)

15
문화마당 ㅣ 옹기 종 기

그릇의 품격,

유기 鍮器

유기鍮器는 ‘놋쇠’로 만든 그릇을 말한다. ‘놋쇠’는 구리에다 주석


이나 아연을 섞은 합금으로, 청동기 시대의 ‘청동’도 놋쇠의 일종
이다. 놋쇠의 오래된 역사만큼, 놋그릇의 역사도 아주 오래되었
다. 신라에서는 전문적으로 놋그릇을 다루는 철유전鐵鍮典이라는
상설기구를 설치한 바 있고, 고려 시대에도 각종 생활 용기가 놋
유기화로(鍮器火爐)(조선 시대) 쇠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 조선 시대에는 초기부터
Yugi brazier (Joseon Dynasty)
유기의 생산을 장려한다. 《경국대전》의 〈공조工曹〉편을 보면, 유
기를 전담하여 놋그릇을 생산하는 유장鍮匠: 놋쇠의 장인이 있었다고
나와 있다.

Yugi:
Tableware with Class
유기탕기(鍮器湯器)(일제 강점기) The term yugi refers to tableware made from bronze. An
Yugi soup bowl (Japanese colonial era)
alloy produced by mixing copper with tin or zinc, bronze
is a material historically associated with the Bronze Age.
The history of bronzeware dates as far back as bronze
itself. During the Silla era, the Cheoryujeon (Office of Iron
and Bronze) was established as a permanent institution
specializing in bronze; various daily items are also
believed to have been made from bronze during the
Goryeo era. Yugi production was prevalent during the
early stages of the Joseon era as well, with the "Gongjo"
(Ministry of Public Works) section of the Gyeongguk
방짜 유기 식기(현대) daejeon (National code) making reference to yujang
Bangjja yugi tableware (modern)
(bronze artisans) who produced bronzew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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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I c onic I tem s

유기 중에서도 으뜸은 ‘방짜 유기’ Bangjja: The pinnacle of yugi


유기는 제작기법에 따라 방자方字와 주물鑄物, 반방자半方字 등 Yugi is classified into different forms based on production technique,
이 있다. 그중 가장 질 좋은 것으로 알려진 것이 ‘방짜 유기방자유 with varieties such as bangjja, cast, and banbangjja (“semi-bangjja”).
기’다. 방짜 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78:22의 정확한 비율로 합금하 Among these, bangjja yugi was known to boast the greatest quality.
여 도가니에 녹인 엿물로 바둑알과 같은 둥근 놋쇠 덩어리를 만 Bangjja yugi was produced through a technique in which copper
들고, 이 덩어리를 불에 달구어 메질망치질을 되풀이해 얇게 늘여 and tin were mixed together at a precise 78:22 ratio and melted in
가며 형태를 잡아가는 기법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방짜 유기는 a crucible. The resulting product was then made into a rounded
휘거나 잘 깨지지 않으며 변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쓸수록 윤기 bronze lump resembling a go stone, which was heated in a fire and
가 나는 장점이 있다. repeatedly hammered until thin. Not only was the resulting bangjja

yugi resistant to warping, cracking, or discoloration, but it also had


식기류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사용된 유기 the advantage of growing in luster the more it was used.
유기, 즉 놋그릇의 종류로는 크게 식기류·혼사 용구·제사 용
구·불기류·난방 용구·등잔류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식기류 Not just tableware: Yugi put to a multitude of uses
는 숟가락·젓가락 외에 칠첩반상기七─飯床器·구첩반상기九─飯床器 Among the different types of yugi are tableware, wedding and
가 있다. 칠첩반상기란 그릇의 종류가 모두 뚜껑까지 32개가 한 ritual items, Buddhist paraphernalia, heating tools, and lanterns.
벌로 된 밥상의 식기를 말한다. 혼사용 유기로는 식기 대접 두 벌, In addition to spoons and chopsticks, the tableware category also
숟가락·젓가락 두 벌, 사랑요강·안방요강, 큰 세숫대야, 작은 세 includes seven-dish and nine-dish sets. A seven-dish set is a table
숫대야 등이 있으며, 제사용 놋그릇으로는 구삼벌·제주발·갱기· setting with a total of 32 types of dishes, including lids. Sets of yugi
수저·제잔·잔대·탕그릇·적틀·편틀·포틀·약기·제종지·제접시· items for weddings included two bowls, two spoon and chopstick
모사기·퇴줏그릇·주전자 등이 있다. 놋그릇은 시간이 지나면 푸 sets, chamber pots for the reception room and main room, and large
른 녹청이 생기기에, 이를 깨끗하게 닦는 것이 옛 여인들의 일과 and small washing basins. Bronzeware for ancestral rites consisted
이자 풍속이었다. of incense and candle sets, assorted rice bowls, soup bowls, spoons,
유기는 특히 겨울철에 요긴했는데, 우리 조상들은 여름에는 깨끗 chopsticks, assorted cups, cup rests, broth bowls, kebab vessels, rice
하고 시원해 보이는 사기그릇을 사용하였고, 겨울에는 놋그릇을 cake vessels, dried meat vessels, medicine vessels, assorted sauce
사용해 음식의 보온을 철저히 하였다. bowls, assorted dishes, grass and sand vessels, sacrificial wine vessels,

and teapots. As the bronzeware would acquire a greenish tinge over

time, it was both a custom and a part of daily life for women to

polish it.

Yugi was especially important during the winter. While the

ancestors of today’s Koreans would use fresh and clean-looking

porcelain in the summer, they would employ bronzeware in the


winter to carefully maintain their food’s temperature.

Written by An Youmee, editing team


글 안유미 편집팀 Photographs courtesy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Pixabay@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Pixabay@KOOBONSIL KOOBONS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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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의 서 원 ⑩

지역 사회 교육기관 역할 이어가는
서악·용연·화산 서원

Seoakseowon, Yongyeonseowon, and Hwasanseowon:


Carrying on the Mantle of Community Education

경북 서악서원은 고택스테이, 전통문화체험 등 문화재 활용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Seoakseowon puts historic monuments to active use with overnight stay and traditional cultural immersion progr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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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Korea’s Seowon

고종 1년1864 흥선대원군은 사원에 대한 조사를 명령한 후 1868 In 1864, the first year of King Gojong’s reign, Prince
년과 1870년 서원에 대한 훼철을 명령한다. 1871년에는 학문과 Regent Heungseon Daewongun ordered a survey of
충절이 뛰어난 인물에 대하여 ‘1인1원一人一院’ 이외의 모든 첩설疊 temples. He would follow this in 1868 and 1870 with
設: 거듭하여 설치함 서원을 일시에 훼철하여 전국에 47개 사원만 남 orders to abolish seowon academies. In 1871, all seowon
겨놓는데, 이때 살아남은 서원과 사우를 ‘신미존치辛未存置 47서 considered to be superfluous beyond the one each
원’이라 부른다. 이 중 북한에 소재한 11개소와 한국전쟁으로 소 permitted to figures boasting outstanding scholarship
실된 강원도 김화의 충렬서원, 철원의 포충사를 제외한 34개소 and loyalty were abolished all at once, leaving just 47
가 남한에 있다. 지난해 본지 4월호부터 12월호까지 유네스코 remaining nationwide. The seowon and sau (shrines)
세계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을 소개했으니, 아직도 25개 서원이 spared at the time have been referred to as the “47
남은 셈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지 않았다고 하여 남 survivors of the Sinmi year (1871).” Among these, 11 are
은 서원들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주 located in what is now North Korea and two in Gangwon-
목할 만한 서원 3곳을 추가, 선정하여 소개해본다. do—Chungnyeolseowon in Gimhwa and Pochungsa in
Cheorwon—were destroyed in the Korean War, leaving just
34 in South Korea. The nine seowon academies registered
on the UNESCO World Heritage list were introduced in
the April to December issues of this magazine last year,
which leaves unaddressed 25 additional seowon. The fact
that they have not been registered on the UNESCO World
Heritage list does not mean that the remaining seowon
are any less valuable. To prove this, we will be introducing
three more noteworthy seowon this month.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을 기리는 ‘서악서원’ Seoakseowon: Honoring Kim Yu-sin, a key figure in unifying
서원이 조선 시대에 탄생한 것이니 기본적으로 조선 시대 인 the Three Kingdoms
물 위주로 배향하지만, 특이하게 서악서원西岳書院, 경상북도 기념물 제19 Having first emerged in the Joseon era, seowon primarily honor figures
호은 삼국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인물을 모시고 있는데, 그 인 from that period. Seoakseowon (Gyeongsangbuk-do Monument
물이 바로 김유신金庾信이다. 명종 16년1561 당시의 경주부윤 이정 No. 19) is peculiar in that it enshrines a figure who dates all the way
李楨이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을 기리기 위해 선도산 아래에 back to the Three Kingdoms era—namely, Kim Yu-sin. In 1561, the
서악정사西岳精舍를 세웠고, 이후 이곳에 신라인 문장가 설총薛聰과 16th year of King Myeongjong’s reign, Yi Jeong, the mayor (buyun)
최치원崔致遠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였다. 퇴계 이황이 서악정사라 of Gyeongju, had a jeongsa (practice hall) built beneath Seondosan
이름하고 친필 현판을 써주었고, 서원과 당재堂齋의 명칭 또한 모 Mountain in honor of Kim, a key figure in the unification of the
두 이황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현재의 Three Kingdoms. Later, memorial tablets would also be enshrined
위치경북 경주시 서악동로 옮겨 신축했고, 인조 1년1623 ‘서악西岳’이라 there for the eminent Silla writers Seol Chong and Choe Chiwon. Yi
고 사액 되었다. Hwang (pen name Toegye) bestowed the hall with the name “Seoak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로 후면에 사당, 앞에는 강당인 jeongsa” and hand-produced a calligraphy signboard; the names of

19
시습당時習堂을 배치하고, 영귀루詠歸樓를 맨 앞에 두었다. 영귀루는 the seowon, hall, and buildings were all reportedly given by Yi as well.
앞면 5칸에 옆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커다란 누각인데, 좌우에 After being destroyed in the Imjin Waeran (1592 Japanese invasions
판벽을 드리우고 트인 사면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of Korea), they were rebuilt in their current location (the Seoak-dong
시습당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이며 왼편으로 진수재進修齋, 오른편 neighborhood of Gyeongju, Gyeongsangbuk-do) and royally named
으로 성경재誠敬齋를 두었다. 또한 5칸의 절차헌切嗟軒, 5칸의 조설헌 “Seoak” in King Injo’s first year (1623).
譟雪軒, 3칸의 전사청奠祀廳, 4칸의 고자실庫子室, 도동문道東門·외문外 The structure is a typical example of jeonhak humyo, meaning
門·내문內門 등이 있어 김유신의 위상에 걸맞은 크기라 할 만하다. “places of learning in the front and the shrine at the rear;” the shrine
강당인 조설헌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강 is located in the rear section, with the Siseupdang lecture hall toward
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시습당과 절차헌은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 the front and the Yeonggwiru pavilion located at the very front.
처하던 곳이고, 전사청은 향례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던 곳이다. 경 Yeonggwiru is a large gable-roofed structure spanning five kan (spaces
내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겹처마 between columns) in front and one kan on its side. It has wood siding
맞배집으로 전퇴前退: 집채의 앞쪽에 다른 기둥을 세워 만든 조그마한 칸살가 없 walls on its left and right, with a gyeja railing along its open sides.
다. 특이하게 사당 앞에 투호投壺가 있으며 각 품계에 따른 배례석 The Siseupdang building measures five kan along its front and
이 있다. 서악서원은 숙박 체험, 고택음악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 three kan along its side, with the Jinsujae building to its left and
으로 지역 사회에서 활발히 활용되고 있다. the Seonggyeongjae building to its right. Other structures include

Jeolchaheon (five kan), Joseolheon (five kan), Jeonsacheong (three

kan), and Gojasil (four kan), along with Dodongmun Gate and an

1 서악서원 시습당 outer and inner gate—truly a scale befitting someone of Kim Yu-sin’s
Seoakseowon’s Siseupdang lecture hall
stature.
2 서악서원 서재
Seoakseowon’s west wing Joseolheon is the auditorium, which was used for various
3 서악서원 정료대
Torch stand at Seoakseowon academy events, Confucian gatherings, and academic lectures.

Confucian scholars lived and studied in the Siseupdang and

Jeolchaheon buildings, while ritual food offerings (jesu) for

20
ceremonies were prepared in Jeonsacheong. Representative of the

most important building on the precincts, the shrine measures three

kan in the front by two on the side and has double-layered eaves and

a gabled roof with no jeontoe (a small space created by positioning

columns in front of a structure). Unusually, there are arrow-pitching

pots in front of the shrine, along with bowing stones demarking

use by different government employment grades (pumgye). Today,

Seoakseowon is used by the community for various programs

including overnight stay activities and classical home music recitals.


2

Yongyeonseowon and Hwasanseowon in Pocheon


Oseong and Haneum, two of the best-known figures from Joseon-era

folktales, were in fact real people. The reason their stories have been

passed down until today is because of the countless amount of tales

the two lifelong friends left behind. The story of Oseong (Yi Hang-

bok, 1556–1618) is particularly amusing. One day, he told Haneum

(Yi Deok-hyeong, 1561–1613) in jest that he had been intimate with

Haneum’s wife. Hearing of this, Haneum’s wife invited Oseong over


3 and fed him rice cakes with excrement in them, telling him that “feces

belongs in lying mouths.” Similarly entertaining is the “persimmon

tree story” involving Oseong and General Gwon Yul. A twisting


포천의 ‘용연서원’과 ‘화산서원’ branch on Oseong’s persimmon tree wound its way into Gwon’s home,
조선 시대 민담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오성과 한음’ and Gwon’s family claimed the persimmons it bore. In response,
으로, 이들은 실존 인물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현재까지 전해지 Oseong thrust his fist into Gwon’s room and asked, “Whose fist is
는 것은 그 둘이 어려서부터 친구로 지내며 수많은 일화를 남겼 this?” Gwon replied, “It’s yours. Whose else would it be?” Oseong
기 때문이다. 특히 오성이항복, 1556~1618의 이야기가 재미를 주는데, then proceeded to accuse Gwon of stealing his persimmons. These are
어느 날 오성이 장난으로 한음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한음이덕 just a few of many amusing stories involving Oseong and Haneum.
형, 1561~1613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한음 부인은 오성을 초청해 Beyond these tales, Oseong and Haneum made names for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인 뒤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 themselves through other contributions. They were particularly
어가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권율 장군과 오성의 감나무 이 active during the Imjin Waeran; Oseong served five times as minister
야기 역시 재미있다. 오성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휘 of war, rising to the position of prime minister for his efforts in
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율 집에서 차지하자, 오성 reorganizing the military and fending off enemy forces, while
은 권율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 주먹이 Haneum likewise rose to become prime minister due to his laudable
오?” 하고 물었다. 권율이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냐”라고 말 service fighting off foes alongside Oseong. Some of the surviving
하자 감을 가로챈 일을 추궁하였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오성과 seowon in Korea today honor them. One of these is Yongyeonseowon
한음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Gyeonggi Tangible Cultural Property No. 70), which was built

21
4

4 용연서원 사당
Yongyeonseowon’s shrine
in 1691, year 17 of King Sukjong’s reign, by Yi Sa-sang and other

Confucian scholars from the “Southerner” (Namin) faction to honor


이러한 설화를 떠나 오성과 한음이 이름을 떨친 것은 그들이 세 the scholarship of Haneum and Jo Gyeong. The following year, it
운 공 때문이다. 오성과 한음은 특히 임진왜란 때 맹활약했는데, was royally bestowed the name “Yongyeon,” which was taken from
오성은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군대를 정비하고 왜 a pond considered a premier attraction in Pocheon. Famed as the
적 퇴치에 주력하여 영의정에 올랐으며, 한음도 오성과 함께 왜 only southern faction base within Gyeonggi-do, it was spared during
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워 영의정에 올랐다. 현존하는 서원 Heungseon Daewongun’s efforts to abolish seowon.
가운데는 이들을 기리기 위한 곳도 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용연 The precinct buildings included a shrine, lecture hall, and east
서원龍淵書院, 경기유형문화재 제70호은 숙종 17년1691 이사상李師相 등 남인 and west wings, but these burned to the ground during the Korean
계 유도儒道를 닦는 선비들이 한음과 조경趙絅의 학문을 기리기 위 War. The shrine, naesammun (inner three-door gate), lecture hall,
해 세웠으며, 다음 해에 곧바로 ‘용연’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oesammun (outer three-door gate), and hongsalmun (spike-topped
용연은 포천의 명소인 연못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특히 경기도 red gate) have all been restored since 1986. The east and west
안에 있는 남인南人 세력의 유일한 근거지로 유명하며 대원군의 wings, which were important to the function of the seowon, have
서원철폐 때에도 화를 면했다. unfortunately yet to be restored, although they hopefully will be in
경내 건물로는 사당·강당·동재·서재 등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the near future.
불타 버리고, 1986년 이후 사당·내삼문·강당·외삼문·홍살문 등 The shrine is a gable-roofed structure measuring three kan
만 복원되었다. 서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재와 서재가 복 along its front and two along its side with wooden roof tiles. It holds
원되지 않은 것이 아쉽지만 근간 복원될 것으로 기대한다. memorial tablets for Haneum and Jo Gyeong and ancestral rites are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목조기와 건물이다. held there each spring and autumn. Yongyeonseowon has continued
한음 이덕형과 조경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해마다 봄·가을에 to support local education in recent years, providing instruction
제사를 지낸다. 최근까지도 용연서원에서는 인근 초등학교 학생 on traditional etiquette as well as scholarship funds to students
들에게 전통 예절을 교육하고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지역 교육에 attending nearby elementary schools.

22
5

5 화산서원 동강재
Donggangjae at Hwasanseowon
Also located in Pocheon, Hwasanseowon Academy (Gyeonggi

Monument No. 46) was built in honor of Oseong’s scholarship and


도움을 주고 있다. virtue following discussion amongst local Confucian scholars in
같은 포천시 내의 화산서원花山書院, 경기기념물 제46호은 오성의 학문 year 13 of King Injo’s reign (1635). While it was built nearly 55 years
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인조 13년1635 지방 유림의 공의公議로 before Haneum’s Yongyeonseowon, it was royally bestowed with its
창건되었다. 한음의 용연서원보다는 거의 55년이나 먼저 태어났 name over 30 years later in year 46 of King Sukjong (1720). Unlike
으나 사액을 받은 해는 숙종 46년1720으로 용연서원보다 30여 년 Yongyeonseowon, Hwasanseowon actually was closed down after
이 늦다. 또한 화산서원은 용연서원과는 달리 흥선대원군의 서원 Heungseon Daewongun’s seowon abolition order; it was through
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71년 복원되어 다시 제 위치를 찾았 a 1971 restoration that it returned to its present condition. The
다. 현재 복원된 건물은 4칸의 인덕전仁德殿, 내신문內神門, 동서 협 currently restored structures include Indeokjeon (four kan), the
문夾門, 각 3칸의 필운재弼雲齋와 동강재東岡齋·외신문外神門 등이 있 Naesinmun gate, the eastern and western side gates, and the Pirunjae
는데, 용연서원보다는 건실하다. 동강재와 필운재는 강당을 겸한 and Donggangjae buildings and Oesinmun gate, each of them
재실齋室로 현재도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 measuring three kan. It is more sturdily built than Yongyeonseowon.
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사당인 인덕전에는 오성의 위패가 봉안 Serving both as lecture halls and residential buildings, Donggangjae
되어 있다. and Pirunjae are used today as venues for various events, Confucian

gatherings, and academic discussions. The shrine of Indeokjeon


includes a memorial tablet for Oseong.

Written by Lee Jongho, author of UNESCO World Heritage: Korea’s Seowon


Academies, former member of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글 이종호 《유네스코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저자, Return Committee
前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 위원 Photographs courtesy of the Silla Culture Center, Pocheon Culture and
사진 신라문화원, 포천시 문화체육과 문화유산팀,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 Sports Department’s Cultural Heritage Team, and the Gyeongju Tou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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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지역 문 화 스 토 리

[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지원 사업 ] [ Regional Cultural Content Development Project ]

역사와 전설이 공존하는 Where History Meets


Legend: The Hidden
Stories of
Chungcheongbuk-do’s
Tourist Attractions

명소名所, 사전적 의미로 경치나 고적, 산물 따위로 널리 알려진 A tourist attraction is a place widely known for its
곳이라 한다. 쉽게 말해 ‘자랑할 만한 곳’, ‘보여주기 충분한 곳’, landscape, historical heritage, or local specialties. In
‘가성비(?) 최고의 장소’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렇지만, simple terms, it is a place worth taking pride in, a place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충북 명소 worth showing to others—the kind of site that offers
의 숨은 이야기》 집필 작업에 참여하면서, 쉽게 느껴졌던 ‘명소’ the best reward for visitors. But as I began taking part
가 어렵게 다가왔다. 함께 집필한 조혁연 교수와 몇 차례 회의를 in the writing of The Hidden Stories of Chungcheongbuk-
거쳐 청주의 무심천無心川과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보은의 속리 do’s Scenic Sites for the Regional Cultural Content
산, 영동 한천팔경, 괴산 산막이옛길과 연하구곡, 충주 탄금대와 Development Project, the once-simple idea of the tourist
수안보온천, 제천 의림지, 옥천 청산, 괴산 목도리, 단양의 구단 attraction started to seem more complex. Over the course
양, 진천 농다리와 김유신, 음성 가섭산 등을 명소로 선정했다. of several meetings with my co-author, Professor Cho
그중에서 충주, 제천, 단양, 괴산, 음성, 진천을 되짚어 보면서 이 Hyeok-yeon, we selected the scenic sites of Musimcheon
야기를 엮어 본다. Stream and Platanus Road in Cheongju, Songnisan
Mountain in Boeun, the Eight Scenic Views of Hancheon
Stream in Yeongdong, Old Sanmagi Trail and Nine Bends
of Yeonha in Goesan, Tangeumdae Terrace and the
Suanbo Hot Springs in Chungju, Uirimji Lake in Jecheon,
Cheongsan in Okcheon, Mokdo-ri Village in Goesan, Old
1 〈구름이 머물다간 월류봉〉, 월류봉은 충북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에 있는 봉우리로,
영동 한천팔경의 제1경이다. Danyang in Danyang, Nongdari Bridge and the General
“Clouds Passing by Wolryubong Peak.” The first of eight scenic views in Hancheon,
Yeongdong, Wolryubong Peak can be found in Wonchon-ri, Hwanggan-myeon, Kim Yu-sin area of Jincheon, and Gaseopsan Mountain
Yeongdong-gun, Chungcheongnam-do.
in Eumseong. In particular, we have been looking at
2 〈솔밭 상고대〉, 충북 보은군 임한리 솔밭공원의 상고대(나무나 풀에 내려 눈처럼 된
서리)의 모습. Chungju, Jecheon, Danyang, Goesan, Eumseong, and
“Pine Forest Park’s Hoarfrost.“ Hoarfrost forms in snow-like ice crystals on the trees
and grass of Pine Forest Park in Imhan-ri, Boeun-gun, Chungcheongbuk-do. Jincheon, weaving their stories together as we go.

24
Cultural Encounters ㅣ L oc a l Culture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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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geumdae Terrace: The sacred home of the Hangang River

dragon
Located in the Chilgeum-dong neighborhood of Chungju,

Tangeumdae Terrace was designated as Scenic Site No. 42 in 2008.

Chungju is a historic city dating back many years, but Tangeumdae’s

story dates back beyond history.

As legend goes, there was a goddess named Mago who put the

world back in order after the creation of the world and a great flood.

After cleaning up the mess created by the flood, she sat by the river at

Tangeumdae to wash her clothes. As she was washing, a hill floated


3
down along Dalcheon Stream from Songnisan Mountain. According
3 충북 충주 탄금대와 남한강(일제 강점기)
Tangeumdae Terrace and the Hangang River in Chungju, Chungcheongbuk-do to the story, she struck it with her laundry mallet as it floated past
(Japanese colonial era)
her, which is how it came to be where it stands now.
한강 용이 사는 신성한 곳, ‘탄금대’ King Jinheung of the Silla Kingdom, who set the stage for the
충주시 칠금동에 있는 탄금대는 2008년에 명승 제42호로 uniting of the Three Kingdoms, visited Chungju in the year 551.
지정된 곳이다. 충주가 오래된 역사도시歷史都市이지만, 역사 이전 Ureuk, a native of Gaya who had moved to Chungju, performed at
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도 탄금대이다. Harimgung Palace, and Tangeumdae Terrace was the setting for this
천지가 개벽하고 큰 물난리가 난 뒤에 세상을 다시 정돈하는 여 special performance.
신 마고할미가 있었다. 물난리에 지저분한 곳곳을 청소하고 더럽 Over a millennium later in 1592, Japanese forces began to
혀진 옷을 빨래하려 앉은 곳이 탄금대 합수머리다. 빨래하던 중 invade in the Imjin Waeran and a general named Sin Rip was
에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달천을 따라 산 하나가 둥둥 떠내려왔 hurriedly dispatched to Chungju. He abandoned the “natural
다. 마고할미 앞에까지 떠내려온 그것을 빨랫방망이로 툭 쳤더니 fortress” of Joryeong to take a last stand at Tangeumdae. It ended in
지금의 그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defeat, and the general lost his life. This story led to the emergence of
이곳에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 진흥왕 때인 551년, 진흥왕이 충주 the name Yeoldudae (Terrace of Twelve).
를 방문했다. 충주에 옮겨 살고 있던 가야 사람 우륵于勒의 하림궁 Despite its unassuming external appearance, Tangeumdae
河臨宮 연주가 있었다. 우륵의 특별공연이 펼쳐진 무대가 곧 탄금 is a sacred ritual site. The Goryeosa (a history of the Goryeo
대彈琴臺였다. Dynasty compiled in the early Joseon period) includes a reference
시간이 흘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신립申砬 장군이 충주 to Yangjinmyeongso, a deep pond located beneath Tangeumdae
로 급파되었다. 천혜의 요새라는 조령을 포기하고 탄금대에서 배 or Yeoldudae. While it can no longer be seen today due to the
수진을 쳤다. 결국, 패하고 장군마저 순절했다. 당시의 이야기가 construction of Chungju Dam, Yangjinmyeongso was the setting
탄금대에 포개져 ‘열두대’란 이름이 생겨났다. for a state ritual known as the Yangjinmyeongsoje which was
겉보기와 달리 탄금대는 신성한 제의공간祭儀空間이다. 《고려사》조 held twice every spring and once every autumn. It was also the
선 전기에 편찬된 고려 시대 역사서에는 ‘양진명소楊津溟所’가 등장한다. 탄금 setting for giuje rituals to pray for rain during droughts; gicheongje
대 또는 열두대 아래에 있는 깊은 소沼: 연못를 일컫는 말이다. 지 rituals to pray for flood waters to recede; gigoje rituals of prayers
금은 보조댐이 만들어져 볼 수 없는 공간이다. 양진명소는 국가 to the gods when misfortune befell the royal family; and goyuje
제사인 양진명소제楊津溟所祭를 매년 봄에 2번, 가을에 1번 올리던 announcement rituals when a new magistrate (moksa)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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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물 때면 비 내리기를 기원하던 기우제祈 appointed in Chungju. The shrine at Yangjinmyeongso was known
雨祭를, 홍수 때면 날이 들기를 기원하던 기청제祈晴祭를, 왕실에 변 by the name Yangjinmyeongsosa. After the Imjin Waeran ended, a
고가 있을 때 신께 치성드리던 기고제祈告祭를, 또는 충주목사로 memorial ceremony was also held in 1602 at Yangjinmyeongso and
새로 부임하면 찾아서 고하던 고유제告由祭를 올리던 곳이 바로 양 Yangjinmyeongsosa to console the spirits of those lost in battle.
진명소였고, 그 사당이 양진명소사楊津溟所祠였다. 임진왜란이 끝나 Yangjinmyeongso was further believed to be the home of a
고 1602년에는 전사한 장졸들의 넋을 위로하던 위령제가 열렸던 dragon that served as a water spirit in Daecheon Stream along the
곳이 양진명소였고, 양진명소사였다. upper course of the Hangang River. For this reason, it has also been
또한 양진명소는 한강 상류 대천大川의 수신水神인 용龍이 사는 곳 known by the names Yongchu (dragon pond) and Yongdang (hall
이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용추龍湫라고도 하고 용당龍堂이라고도 of the dragon). The original name of the place where Tangeumdae’s
한다. 탄금대 충혼탑이 세워진 곳의 본래 이름도 용미봉龍眉峰으 Chunghontap Tower was built was Yongmibong, or dragon’s eyebrow
로, 용의 눈썹 자리였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용의 존재를 믿지 peak. Today, people no longer believe in dragons. Yet a dragon still
않는다. 그러나 용은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고, 여전히 탄금대를 lives there, silently greeting visitors to Tangeumdae Terrace; the
찾는 이들을 소리 없이 반기고 있다. 다만 사람들이 용을 잊었을 people have merely forgotten about dragons, and so Tangeumdae’s
뿐이다. 탄금대의 용도 그렇게 잊혔다. 그래서 역사와 전설이 공 dragon too has been forgotten. Tangeumdae Terrace now exists as a
존하는 잊힌 명소로 탄금대가 자리한다. forgotten scenic site where history and legend coexist.

4 탄금대 북쪽 남한강 변 절벽 위에 있는 바위, 열두대


Boulder on the cliffs by the Hangang River at Yeoldudae, north of Tangeumd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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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양에 열린 선계仙界의 문, 우화교羽化橋 Uhwagyo Bridge: An open gateway to another world in Old
‘우화羽化’라고 하면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을 연상한다. 사람의 Danyang
몸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된다는 뜻이다. 구단양 The name Uhwa reminds many of the line from Su Shi’s Former
에 놓인 다리 이름이 바로 ‘우화교’이다. 신선계와 인간계의 경계 Ode on the Red Cliffs that reads yu hua er deng xian (羽化而登仙),
가 바로 그곳이다. referring to a person who “sprouts wings and ascends to heaven
아쉽게도 단양을 이야기할 때,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구단양 이 to become an immortal.” The name Uhwagyo has been given to a
야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 40년 이전까지 단양의 모든 역사와 이 bridge in Old Danyang known to be a boundary between the human
야기 중심이 구단양인데 말이다. 그래서 구단양을 단양의 명소로 world and the world of immortals.
선정했고, 그 경계의 신비감을 간직한 우화교를 떠올렸다. Unfortunately, people who talk about Danyang typically do
마을의 2/3가 수몰선 아래여서 황량함마저 느낄 수 있다. 그냥 not mention Old Danyang, which was flooded after the building of
보아선 알 수 없는 곳이기에 1914년에 측량된 지적원도를 채색하 Chungju Dam, even though Old Danyang was the center of all of
고 이어붙여 답사 밑그림을 그렸었다. 지적원도에 표시된 길들이 Danyang’s history up until 40 years ago. This is why we selected Old
그나마 구단양의 이모저모 윤곽을 그리는 데 도움을 준다. Danyang as a tourist attraction in Danyang, and this in turn made us

think of Uhwagyo Bridge, which embraces all the mysteriousness of


5 단양 우화교(1930년 촬영)
the boundary between new and old, history and legend.
Uhwagyo Bridge in Danyang (1930)
6 단양향교 With two-thirds of the village having had sunk beneath
Danyang Hyanggyo
floodwaters, one can sense a certain desolation in Old Danyang.

Since it’s impossible to navigate by looking at it, I sketched out an

outline for a survey based on measurements from 1914 by piecing

together and coloring in an original cadastral map. The roads

indicated on the cadastral map helped to indicate the general

contours of Old Danyang.

Danyang Hyanggyo is one remaining symbol of the older

setting. While most hyanggyo (Confucian schools) are closed and

not easily accessed today, Danyang Hyanggyo launched a cultural

program in 2020 to keeps its doors open to visitors at all times. Its
5
front gate building—known as Punghwaru—offers a glimpse at

the knowledge and effort expended to successfully construct the

hyanggyo within a narrow mountain valley village. The elegance

starts with the modest red spike-topped gate built at the school’s

entrance.

It takes less than 30 minutes to stroll through the old side streets

around the school. All you need is a map to get a sense of the space.

One must-see is Bongseojeong, a pavilion restored in 2013. Also, a

small flood memorial built on the corner leading to the Danyang


6 Jeokseongbi stone stele remembers and honors the painful 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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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7 단양을 상징하는 대표적 누정, ‘봉서정’. 1910년을 전후해 사라졌지만 지난 2013년 단양군이 복원했다.
Bonseojeong, Danyang’s main pavilion. Though destroyed around 1910, it was restored in 2013 by Danyang-gun.

오래된 공간의 상징으로 삼을만한 것이 단양향교다. 대부분의 향 associated with flooding in Danyang. The stele itself is worth the
교가 닫혀있어 들어가기 쉽지 않지만, 단양향교는 2020년부터 brief walk up to see. As you look out toward Jungnyeong Pass in the
문화프로그램을 시작하여 언제나 문을 열어놓고 찾는 이를 반기 distance, you can imagine the panorama of history. If you’re up for
고 있다. 특히 향교 정문인 풍화루風化樓를 보면, 좁은 산골 마을에 the hike, you may want to walk as far as Jungnyeong Pass, too.
서 최대한 형식을 갖추기 위해 애쓴 모습과 지혜를 엿볼 수 있다. After visiting Uhwagyo Bridge and recalling the forgotten
입구에 작으나마 홍살을 세웠는데, 그것부터가 운치 있다. glories of Old Danyang, perhaps you can embark on another new
향교를 중심으로 옛 골목을 잠깐 걸으며 둘러보는 데는 채 30분 experience by beginning a full-scale visit to the Eight Scenic Sites of
이 걸리지 않는다. 공간을 가늠할 수 있는 지도 한 장이면 충분하 Danyang.
다. 2013년에 복원한 봉서정鳳棲亭이 있다. 또한 단양적성비 가는
길목에 수몰기념관이 작게나마 만들어져, 단양 수몰의 아픔을 기 Suanbo Hot Springs: Natural alkalinity at 53℃
리며, 기억하고 있다. 단양적성비 또한 잠깐 오를 만한 곳이다. 거 Cold weather is the true charm of any winter journey, but it can be a
기서 멀리 보이는 죽령竹嶺을 바라보면, 역사의 파노라마를 상상 good idea to bask in the warmth of nature, too. Suanbo Hot Springs
할 수 있다. 내친걸음에 죽령까지 가보는 것도 괜찮다. is the perfect place to do this. In 2005, the township of Sangmo-
구단양의 잊힌 영화를 되새기고, 우화교를 나서서 단양팔경丹陽八 myeon, where the hot springs are located, was renamed “Suanbo-
景 구경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되지 않을까? myeon.” If you learn about the hot spring’s history before bathing

there, your trip will be all the more rewarding.


53℃ 천연 알칼리성 수안보온천 The first records of a hot spring in Suanbo date back to the
겨울 여행의 참맛은 추위이지만, 천연 그대로의 따뜻함에 몸 Goryeosa. It has been variously recorded in texts as “Yeonpyung-
을 맡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러기에 딱 좋은 곳이 수안보온천 oncheon,” “Yeonpung-onjeong,” “Anbu-onjeong,” “Anbuye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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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상모면上芼面이라 불리다가 수안보면水安堡面으로 고친 것도 oncheon,” and “Anbu-oncheon.” Anbuyeok station was located
2005년의 일이다. 온천욕을 즐기기에 앞서 온천의 역사적 배경 nearby, and Suanbo boasted a state-run inn named “Onjeongwon,”
을 알고 가는 것은 여행의 덤이 될 것 같다. too.
수안보에 온천이 있다는 기록은 《고려사》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Most of the stories associated with Suanbo Hot Springs have
때로는 ‘연풍온천延豊溫泉’이나 ‘연풍온정延豊溫井’, ‘안부온정安富溫井’, to do with the treatment of illnesses, including claims that Hansen’s
‘안부역온천安富驛溫泉’, ‘안보온천安保溫泉’ 등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disease patients and people with skin diseases who visited were
인근에 안부역安富驛이 있었고, 수안보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던 여 healed completely, or that wounded storks spent the winter there.
관인 온정원溫井院이 있었다. The Joseon wangjo sillok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includes
수안보온천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로 나병 환자가 완쾌되었다거 records of noted Joseon-era figures who visited Suanbo Hot
나, 다친 황새가 겨울을 났다거나, 피부병 환자가 완쾌됐다거나 하 Springs and bathed in its healing waters. In spring of 1453, King
는 등 병 치료와 관련된 것들이 주를 이룬다. 《조선왕조실록》에서 Sejong’s second son-in-law, Ahn Maeng-dam (known by the title
도 조선 시대 유명 인사들이 치유治癒를 목적으로 수안보온천을 찾 Yeonchangwi) became the first of these figures to do so. Prince
아 온천욕을 했던 기록들을 찾을 수 있다. 1453년 봄, 세종의 둘째 Yangnyeong (Yi Je) visited for convalescent bathing in spring 1462,
사위였던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을 시작으로, 1462년 봄에는 양녕 three months before his death. In autumn of 1665, General Yi Wan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가 죽기 3개월 전에 정양靜養: 몸과 마음을 안정하여 휴 visited to cleanse away the fatigue of war before returning to political
양함했고, 1665년 가을에는 훈련대장訓練大將 이완李浣이 정쟁에서 지 life. Suanbo Hot Springs is also where Gwon Sang-ha (pen name
친 몸을 추스르고 정계에 복귀했다. 또한 1689년 초겨울, 수암遂菴 Suam) recovered in early winter 1689 after completing funeral

8 2020년 수안보온천 전경
Panoramic view of the Suanbo Hot Springs (2020)

30
9 10

9 온천교 내탕 표석. 1931년 새로 놓은 온천교의 표석 중 하나다.


Stone marker for the naetang, or indoor bath. This marker is one of many used at Oncheongyo since 1931.
10 온천리 성황당
Seonghwangdang, Oncheon-ri

권상하權尙夏가 그의 스승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모든 장례절차 procedures for his mentor Song Si-yeol (pen name Uam).
를 마치고 원기를 회복하며 요양한 곳도 수안보온천이었다. Hot spring development in the Onjeongwon area truly began
온정원 부근을 중심으로 온천수 개발이 본격화된 것은 1905년 in 1905 with an excavation by the Japanese military forces stationed
일본군이 주둔하며 굴착한 것부터다. 다시 1910년 이후 일제 강 there. Further full-scale development under Japanese leadership took
점기에는 일본인들의 주도로 본격적인 개발이 있었다. 그 연장으 place from 1910 onward. This led to a golden age following Korea’s
로 광복 후, 특히 1970년대부터는 황금기를 이뤘다. 그러나 88서 liberation and during the 1970s in particular. But the liberalization
울올림픽 이후 해외여행 자유화와 여행 패턴의 변화 등으로 점점 of overseas travel and the changing travel patterns in the wake of the
불황기에 들어서며 지금에 이르렀다. 1988 Summer Olympics in Seoul ushered in a downturn that has
중부내륙철도 공사가 한창이다. 그 연장에 수안보역이 만들어진 continued until today.
다. 다시 53℃ 천연 온천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기를 수안보 사람 Construction is currently underway on the Jungbu Naeryuk
들은 기대하고 있다. ‘왕의 온천’은 아니지만, ‘손님을 왕처럼 모 (Center Inland) railway line, and a station is being built at Suanbo as
시겠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빨 part of this. Residents of Suanbo are looking forward to the revival
리 끝나기를 기다리며…. of their 53℃ natural hot springs’ reputation. They await new visitors

to come experience what were once the “hot springs of kings” but are
글 김희찬 (사)충북향토사연구회 사무국장
now “hot springs where the customer is king.” Here’s to a swift end to
사진 김희찬, 이정호 충북사진협회 초대작가, 국립중앙박물관, 김재현-한국
관광공사, 윤정근-한국관광공사 the COVID-19 pandemic.

Written by Kim Hee-chan, secretary-general of the Chungbuk Local History


Research Association
Photographs courtesy of Kim Hee-chan, Lee Jeong-ho (Chungbuk
‘지역N문화’ 누리집에서 Photography Council invited artis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and Kim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Jaehyeon and Yun Jeonggeun, Korea Tourism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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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느린 마을 기 행 ⑨

생명의 땅, 갯벌을 품다
천사의 섬, 신안 증도
1,00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신안. 그 가운데 ‘천사의 섬’이라 불리는 증도.
2007년 담양, 완도와 함께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국내 최대 규모의 광활한 태평염전과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드넓은 갯벌은 증도의 비경 중 비경이다.
느린 걸음이 행복한 섬, 중국 송·원나라 때 난파선이 발견된 보물섬, 증도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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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Slow City T ravel

Embracing a Land of Life:


Sinan’s Island of Angels, Jeungdo
Jeungdo Island, also known as “Angel Island,” is one of the 1,004 islands that make up Sinan (in the Korean language, the
number “1,004” and the word “angel” are the same characters). In 2007, Jeungdo was designated as one of the first Slow
Cities in Asia alongside Damyang and Wando Island. It offers the wonders of Taepyeong Salt Farm, the country’s largest
salt field, as well as vast mudflats that hold the mysteries of life. Let’s head off to Jeungdo, a happy, slow-moving island
of the Chinese Song-Yuan Dynasties’ shipwreck cargo.

바둑판처럼 광활하게 펼쳐진 태평염전


View of Taepyeong Salt Farm’s vast, grid-shaped 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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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함께해 온 소금의 대서사시, 증도 태평염전로 이어지다 Jeungdo’s Taepyeong Salt Farm unveils an epic on salt,

소금은 인류의 오랜 식생활과 함께해온 소중한 자원이다. 소 humanity’s historic companion

금은 단순한 조미료가 아닌, 그 이상이었다. 음식의 변질을 막고 Salt is an invaluable resource that has been an ever-present part of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어 장거리 여행을 가능케 했으며, 때로는 the human diet throughout history. More than just a condiment,

무기와 화폐로도 사용됐다. 그 결과 소금으로 인해 문명이 전달 it prevents food spoilage, with salt-preserved food enabling long-

됐고 발전했다. distance travel. At other times in history, salt has acted as both

예부터 우리나라는 소금을 절대자의 권위와 힘의 상징으로 여겼 a weapon and currency. It is clear to see that salt has been an

다. 조선 시대 세종1397~1450은 백성을 위한 복지정책의 하나로 소 important factor in the development and prosperity of human

금전매 관청을 설치했다. 소금을 독점 생산·유통함으로써 국가의 civilization.

재정과 권력을 확보해 백성에게 다시 베풀었다. 하지만 일제 강 Salt has long been regarded as a symbol of absolute authority

점기 당시 일본은 소금 전매령을 공포해 조선 왕실의 재원을 빼 and power in Korea. King Sejong (1397–1450) of the Joseon Dynasty

앗고 천일염 생산지를 확대했다. 이후 소금의 대서사시는 증도로 established a salt monopoly office as a public welfare policy in which

revenue gained through the exclusive production and distribution

of salt was channeled back to serve the people. During the Japanese
태평염전에서 직접 생산한 천일염
Bay salt from Taepyeong Salt Farm occupation, the Japanese seized this resource from the Joseon royal

family, assumed monopoly, and expanded the areas used for salt

harvesting. This leads us to Jeungdo, one of the pioneering Asian

Slow Cities accredited in 2007 and home to a pristine natural

environment that hosts Taepyeong Salt Farm, established in 1953

after the Korean War to settle displaced refugees and boost the

production of solar salt, or salt made by solar evaporation. At 46,280

square meters or 1.4 million pyeong, twice the total area of Seoul’s

Yeouido, Taepyeong Salt Farm is the largest single salt farm in Korea
and is registered as a Modern Cultural Heritage site. Accounting

for 0.1% of global salt consumption, this natural ecological paradise

produces top-tier premium sea salt.

Salt crystals made with sun, wind, and time


It is dawn and a mysterious energy lingers over Taepyeong Salt Farm,

which has not yet stirred from its slumber. Salt plains stretching over

three kilometers form a 360-degree panoramic view. A farm laborer

starts the day by pulling a salt cart to the front of a warehouse that

has been weathered by time. He is not the one making the salt. It

is the sun and wind that heat and cool sea waters. Just as regular

farmers rely on sunlight, wind, and rain for their fields and paddies

throughout the year, salt farmers depend on sunshine and 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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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졌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자연환경을 보존한 증도는 2007 to bloom seawater into salt crystals. Solar salt is not just salt; it is a

년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으로 오랜 역사를 간직 repository of trace minerals essential to life.

한 태평염전이 있다. 태평염전은 1953년 한국전쟁 이후 실향민의 There is plenty to see and experience around the salt farm. One

정착과 소금생산 증대를 위해 증도에 세워졌다. 국내 최대 규모 can review salt’s role within anthropological history in the farm’s

46,280㎡140만 평의 단일염전으로 여의도 전체 면적의 2배에 달하 salt museum that is housed in an original salt storage building. Next

며 염전 전체가 근대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door is Taepyeong Halophyte Garden, a unique tidal flat designated

갖춘 생태 천국에서 세계 0.1% 안에 드는 명품 천일염을 생산하 as a UNESCO biosphere reserve and where colonies of glasswort

고 있다. unleash a sight more spectacularly crimson than typical fall foliage.

To to take in the salt farm’s entire scale, one must ascend the farm’s

햇볕과 바람, 시간이 만들어내는 소금꽃 observatory. While not particularly high, the steep steps up to the

이른 새벽 태평염전은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아 신비로운 observatory gradually quicken my breathing. At the top, there is an

기운이 감돈다. 길이가 무려 3km에 달하는 염전. 사방으로 시야 expansive view of endless salt fields. A central road divides the fields

가 트여 광활하다. 오랜 세월 빛바랜 소금창고 앞으로 한 염부가 into a grid that resembles a baduk board and a familiar movie scene

소금 수레를 끌며 하루를 연다. 소금은 염부의 손으로 만들어지 floats to mind as I gaze at the salt warehouses lining the road. The

는 게 아니다. 햇볕과 바람이 바닷물을 익히고 식혀야 한다. 농부 overwhelming beauty is reminiscent of a road trip scene across the

가 논밭에서 사계절 햇빛과 바람, 비에 의지해 농사를 짓듯, 염부 United States’ Great Plains.

는 소금밭에서 햇볕과 바람에 의지해 땀방울로 소금꽃을 피워낸


다. 이렇게 만들어진 천일염은 단순한 소금이 아니라 생명을 살 Lively mudflats by Jeungdo Mosil-gil’s trails

리는 천연 미네랄의 보고다. Jeungdo boasts the world’s first “ecological grand slam,” being the

태평염전 인근에는 보고 느낄 게 많다. 염전에서 운영하는 소금 first to accept the three honors of Slow City, UNESCO biosphere

박물관은 옛 소금창고를 그대로 사용해 세운 곳으로 인류와 함께 reserve, and Ramsar site. To view Jeungdo’s noteworthy nature, let us

해온 소금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박물관 옆에는 이색적인 갯벌 stroll along Jeungdo Mosil-gil’s trails. There are five walking courses,

이 전개된다. 태평염생식물원인데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


로 지정된 곳이다.
가을 단풍보다 색이 고운 태평염생식물원
가을에는 단풍보다 더 붉은 함초가 군락을 이뤄 장관이다. 태평 The crimson hues of the Taepyeong Halophyte Garden

염전의 거대한 규모를 보려면 소금밭 전망대에 올라야 한다. 높


지 않은 곳이지만 계단이 가파른 탓에 호흡이 점차 거칠어진다.
탁 트인 전망 뒤로 끝없이 소금밭이 펼쳐진다. 바둑판처럼 늘어
선 염전을 나누는 것은 중앙대로이다. 소금창고들이 중앙대로를
따라 늘어선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낯선 듯 익숙하다. 미국
의 대평원을 가로질러 로드무비를 찍는 것처럼 이국적인 풍경이
시선을 압도한다.

증도 모실길 따라 만나는 생명의 갯벌


증도는 슬로시티 외에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 람사르
습지 등 세계에서 인정한 최초의 ‘생태 그랜드슬램 달성’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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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타이틀을 지녔다. 그런 증도의 참모습을 보려면 ‘증도 모 the shortest of which, Course 1, leads visitors on a “Thousand-

실길’ 따라 자박자박 걸어보자. 총 5코스 중 가장 짧으면서도 증 Year Forest Walk” through the area’s natural surroundings. Starting

도의 참모습을 즐길 수 있는 길은 1코스 ‘천년의 숲길’이다. 짱뚱 at Jjangttungeodari (Mudskipper) Bridge, this saunter passes the

어다리에서 시작해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인 증동리 갯벌과 Jeungdong-ri mudflats, a UNESCO biosphere reserve area, as

우전해변 해송 숲을 지나 슬로시티 방문자센터로 이어진다. 총길 well as Ujeon Beach’s Haesong Forest before ending at the Slow

이 4.6km에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짱뚱어다리는 갯벌 위에 떠 City Visitor Center. This particular trail is 4.6 kilometers long and

있는 470m의 목교로 갯벌 생물을 관찰하는 증도의 명물이다. 짱 takes approximately an hour and a half to complete. The wooden

뚱어는 청정갯벌에서만 서식하는데 증도에서는 짱뚱어가 유독 Jjangttungeodari Bridge takes visitors along a 470-meter-long path

많이 잡힌다. 짱뚱어다리에 올라 갯벌을 내려다보면 썰물과 밀물 above the mudflats and is known to be the best spot to observe

때 서로 다른 모습이다. 썰물 때는 바다의 허파인 양 숨골이 곳곳 their inhabitants; mudskippers only live in clean mudflats and are

에 보이고 햇살 아래 느긋이 일광욕을 즐기는 참게들도 만날 수 exceptionally easy to find here. The view of the mudflats from the

있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마음뿐이다. 이따금 bridge changes drastically between the tide’s ebb and flow. The sea

뛰어오르는 짱뚱어의 익살맞은 댄스도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water recedes during low tide, exposing sunbathing horseshoe crabs

천일염을 제대로 체험하고 싶다면 3코스 ‘천일염 길’을 추천한다. and the intricacies of the seabed. I refrained from reaching out

노두길 입구를 출발해 소금전망대와 소금박물관, 태평염생식물 to grab the crabs, although I could have. The occasional comical

원을 거쳐 증도대교에 이른다. 10.3km 구간으로 3시간 남짓 소요 mudskipper dance is another must-see.

된다. 노두길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증도에서 섬과 섬을 이어 For a more comprehensive salt experience, I recommend Course

주는 징검다리와 같은 것으로 섬 주민들이 직접 돌을 주워와 쌓 3, the “Sea Salt Route.” This path sets off from Nodu-gil’s entrance

은 길이다. 요즘은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도록 콘크리트로 길을 놓 and passes the salt observatory and museum and Taepyeong

아 편리하게 건널 수 있다. 물론 이전과 같은 정감은 사라졌지만. Halophyte Botanical Garden, eventually reaching Jeungdo Daegyo

노두길의 묘미는 갯벌에 물이 빠져야만 건너갈 수 있다는 점에서 Bridge. This 10.3-kilometer section requires over three hours. Its

섬 속의 섬을 여행하는 특별함에 있다. 노두길 옆으로 광활하게 starting point, Nodu-gil, is a stone walkway that connects the islands

and was stacked by residents who themselves collected its blocks of

stone. The landscape here varies between the tides. Today, a single-
증도의 명물 짱둥어다리
Jeungdo’s scenic Jjangttungeodari Bridge lane concrete road laid over the stones offers the convenience of car

commute, but the feeling from the old days is long gone.

Nodu-gil’s charm lies in the uniqueness of island hopping that

can only be done when the tide goes out. Jeungdo’s vast tidal flats

spread out around Nodu-gil are home to numerous marine life

forms. Here, one can truly appreciate why UNESCO has recognized

this reserve. At low tide, mudskippers, sand crabs, and ghost crabs

make appearances on the flats’ muddy surface. Enjoy quick and easy

touring along Nodu-gil by borrowing bicycles for free from the Slow

City Visitor Center. Just be sure to confirm the tide times to avoid

being trapped on an island when the tide comes in.

36
펼쳐진 증도의 갯벌은 수많은 해양생물의 생활 터전이다. 이곳에 Tracing a martyr’s footsteps across a treasure island

서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승인된 생명의 땅, 증도 갯벌의 Although Jeungdo is small and secluded, those curious to see

진가를 느낄 수 있다. 물이 빠지면 짱뚱어, 농게, 칠게 등이 갯벌 how bustling the town gets can take Course 5, “Treasure Island

위로 올라와 장관을 연출한다. 슬로시티방문자센터에서 무료로 and Martyr’s Footsteps.” Just don’t expect that this route will steer

빌려주는 자전거를 이용하면 좀 더 빠르고 편리하게 여행할 수 you through a typical busy downtown. Establishments such as

있다. 노두길을 이용할 경우 물때를 꼭 확인할 것. 자칫 물이 차오 the Jeungdo-myeon district office, the public health center, and

르면 섬에 갇힐 수 있다. Nonghyup Bank are all concentrated in one area, but it’s unlikely

to encounter more than two people on these streets on any given

보물섬·순교자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 day. The “Treasure Island and Martyr’s Footsteps” route starts from

작고 한적한 섬이지만 증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을 챙겨보고 the Marine Archaeology Monument and continues to the Jeungdo-

싶다면 5코스 ‘보물섬·순교자 발자취 길’을 추천한다. 번화한 곳 myeon district office, the monument and memorial hall for martyr

이라 해서 일반 도시를 상상했다간 큰 오산이다. 증도 면사무소 Moon Jun-kyung, then onward to Jjangttungeodari Bridge. The total

와 보건소, 농협 등이 밀집해 있지만, 온종일 거리에서 만나는 사 distance is seven kilometers and it takes about two hours.

람은 두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보물섬·순교자 발자취 길’은 해 The Moon Jun Kyung Missionary Martyrdom may be one of the

저유물발굴기념비를 출발해 증도면사무소, 문준경순교비와 전시 most noteworthy buildings in Jeungdo. Locals speak unreservedly

관, 짱둥어다리로 이어진다. 총거리는 7km이며 소요 시간은 2시 of Moon Jun-kyung, calling her “mother of Jeungdo.” Until she was

간 정도다. martyred at age 59 at the hands of the North Korean army during

증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면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 the height of the Korean War in 1950, Preacher Moon travelled

관이다. 증도 섬 주민들은 문준경 전도사를 ‘증도의 어머니’라 스 Sinan-gun’s islands, established close to 100 churches, and took care

스럼없이 말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59세의 나이로 of the sick and poor, even acting as a midwife when necessary. Her

북한군에 의해 순교하기까지 문준경 전도사는 신안군 일대 섬을 maternal nature extended beyond her death, with salt even being

두루 다니며 100여 개소에 달하는 교회를 세우고 가난한 사람들 given to mourners at her funeral. Because Moon led the life of an

과 병자들을 돌봤는데 때로는 산파가 되기도 했고, 장례식장에서 angel who loved her islanders, it is not only because of the 1,004

는 염까지 해주며 섬사람들의 진정한 어머니로서 역할을 톡톡히 islands that Jeungdo is called “Angel Island;” it is also for her.

해낸 까닭이다. 증도를 천사의 섬이라 부르는 이유 속에는 1,004


Written and photographed by Im Unseok, travel writer
개의 섬뿐만 아니라, 섬 주민을 사랑했던 그의 천사와 같은 삶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Travel Course
여행 정보
•Contact
•문의 신안군청 문화관광과 061-240-8357 Contact: 061-240-8357 (Culture and Tourism Department, Sinan-gun Off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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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팔도 음 식

부드럽게 쪄낸 ‘홍어찜’과
돌돌 말아 불맛 입힌 ‘낙지호롱’

Hongeojjim and Nakjihorong: Softly Braised Skate and


Smoky Grilled Octopus Skewers

홍어삼합 상차림
A meal of hongeosamhap, three delicacies with sk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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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Pr ovinc ial Cuisine

홍어와 낙지는 우리 조상들이 즐겨 먹었던 음식이다. 두 음식은 Skate (hongeo) and small octopus (nakji) were well
모두 전라도를 대표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곰삭은 맛이 특징인 홍 enjoyed by Koreans of yore, and to this day, the two
어는 회뿐만 아니라 찜으로도 즐겨 먹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살살 seafoods remain local specialties of Jeolla-do. Known
녹는 맛이 일품이다. 세발낙지를 돌돌 말아 양념장을 발라 구운 for its fermented, pungent flavor, skate is often served
낙지호롱은 맛도 맛이지만 먹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raw; when braised to make hongeojjim, it becomes a
delicacy that softly dissolves on the tongue. Nakjihorong
describes octopus glazed with seasoning and grilled
on a skewer. While the taste itself is excellent, the fun of
unwinding the octopus makes it even better.

한 번 중독되면 헤어나기 힘든 맛, 홍어 Hongeo: skate’s addictively powerful taste


전라도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홍어고, 홍어 하면 떠오르는 Jeolla-do conjures thoughts of its famous skate along with the famed
곳이 신안 흑산도다. 전국 곳곳에 자리한 홍어집에서 흑산도 홍 skate fishing grounds of Heuksando, Sinan-gun. Out of skate from
어는 특급 대우를 받는다. 값도 비싸게 치는데 아르헨티나나 칠 all the providers across the nation, skate from Heuksando is prized
레 등 수입산 보다 두세 배는 비싸다. for its top quality, securing prices that run two to three times higher
홍어는 생선 중에 유일하게 삭혀 먹는 어종이다. 독한 냄새 때문 than skate imported from Argentina or Chile.
에 꺼리는 사람이 많지만 한 번 중독되면 그 맛에서 헤어나기가 Skate is the only fish in Korea that is served fermented. While
어렵다. 홍어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는 체내에 있는 다량의 요소 its pungent odor deters many would-be eaters, the fish proves
가 암모니아로 변하면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세균이 증 strongly addictive once tasted. Fermented skate gets its strong odor
식할 수 없어 삭힌 홍어를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다. 진한 암모니 from the ammonia produced from a naturally released uric acid.
아수는 우리의 피부를 상하게 하는데, 별로 뜨겁지 않은데도 홍 Since ammonia acts as a preservative, fermented skate remains
어찜을 먹다가 입천장을 데는 사고가 생기는 것도 이 암모니아 edible without going bad. However, concentrated ammonia solution
성분 때문이다. is abrasive on the skin, which is why even mildly warm braised skate
사실 홍어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의 뒷골목에 포진한 음식 can burn the roof of one’s mouth.
이었다. 홍어와 신김치, 막걸리를 ‘홍어삼합’이라고 해서 주당들 Fermented skate was served in small eateries in the back alleys
이 안주 삼아 즐겨 먹었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 막걸리 자리를 돼 of Seoul well into the 1980s. A combination of skate, sour kimchi,
지고기가 꿰차면서 요리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홍어의 시금퀴퀴 and rice wine was a popular order called hongeosamhap (three
한 맛과 돼지고기의 고소하고 담백한 맛, 신김치의 산뜻하면서도 delicacies with skate) with the skate eaten as a snack or side dish with
곰삭은 맛이 어우러져 한바탕 축제를 벌인다. 사실, 홍어는 크게 drinks. This changed when pork belly began replacing the rice wine,
마음먹거나 격식을 차리고 먹는 음식은 아니다. 어스름 무렵 문 making hongeosamhap a proper dish. The tangy skate, savory pork,
득 생각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야, 오늘 막걸리에 홍어나 한 and freshly sour kimchi meld together in an explosion of taste that
접시 하자”해서 먹는 그런 음식이다. bursts in the mouth. Skate is certainly not a formal dish requi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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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도 즐긴 홍어 ceremony. It is a food that makes you ring up a friend in the evening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권극중1585~1659은 그의 시문집 《청 to suggest casually, “How about some rice wine with skate?”
하집》에서 홍어에 대한 시를 남겼다.
“남국의 아름다운 모습 / 광주리에 담긴 최고의 맛 / 홍어는 바 A dish savored by Koreans of yore
다의 신선한 맛이고 / 시골의 술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네 / 대나 A poem about skate by mid-Joseon Dynasty neo-Confucianist
무 숲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내니 / 어제 내린 눈이 갠 후 매화가 scholar Gwon Geuk-jung (1585–1659) appears in his book of poetry
아름답다.” and prose Cheonghajip. It reads, “The beauty of the southern lands
역시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옥담 이응희1579~1651는 《옥담사집》 / succulent flavor in a basket / skate is the fresh relish of the sea /
에서 “부드러운 뼈는 씹기 좋고 넉넉한 살은 국 끓이기 좋아라” provincial wine is ambrosial / a bamboo forest offers warmth in the
라고 홍어를 노래했다.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에도 “나주 사람 winter / after yesterday’s snow, plum trees bloom in beauty.”
들은 삭힌 홍어를 즐기는데, 탁주를 곁들여 먹는다”라는 기록이 Another civil official of the mid-Joseon Dynasty, Lee Eung-
있고, 소설가 황석영도 홍어를 처음 먹은 후 “참으로 이것은 무어 hui (pen name Okdam, 1579–1651), praised the fish in his poetry
라 형용할 수 없는 혀와 입과 코와 눈과 모든 오감을 일깨워 흔들 collection Okdamsajip. Lee wrote, “The soft bones are easy to chew
어 버리는 맛의 혁명”이라고 극찬했다. and the plump flesh makes good soup.”
홍어찜은 생 홍어나 살짝 말린 홍어를 쪄서 양념장을 끼얹어 내 Jeong Yak-jeon recorded in his book Jasan eobo (Register of
는 음식이다. 홍어는 회로도 먹지만 쪄서 찜으로도 먹는데 톡 쏘 Heuksan fish) that “Naju locals enjoy fermented skate with rice
는 자극적인 풍미와 퀴퀴한 맛이 더하다. 식감도 차이가 나서 홍 wine” while novelist Hwang Sok-yong remarked upon his first taste
어회가 육질이 찰지다면 홍어찜은 훨씬 부드럽다. 한 점 입에 넣 of skate, “This is a revolutionary taste beyond description that jolts
으면 혀 위에서 스르르 녹아내리는데 마치 구름을 먹는 느낌이라 awake the tongue, mouth, nose, eyes, and all the five senses.”
고나 할까. 봄에 잡은 홍어는 연한 보리싹보릿순을 넣어서 국으로 Hongeojjim or braised skate is a dish made of fresh or slightly
도 끓여 먹는데 이를 홍어앳국이라고 부른다. dried skate that is braised and topped with seasoning. While skate

is often enjoyed raw, its tangy, pungent flavor grows stronger when

it is braised. The texture changes as well; raw skate slices are chewy

while braised skate is tender. A piece of braised skate will melt on the

tongue like a softly dissolving cloud. Additionally, skate caught in


회로 즐기는 홍어
A slice of raw skate the spring are stuffed with barley sprouts and boiled to make a soup

called hongeoaetguk, meaning skate barley liver soup.

Nakjihorong: the fun of unraveling food


Another of Jeolla-do’s unique dishes is nakjihorong, or skewered

octopus. Young common octopus heads are skewered on bamboo

chopsticks or bunches of straw with the legs wound around the

length of the skewer; once coated evenly with a seasoning made of

soy sauce, minced green onions and garlic, sesame oil, and sesame

seeds, the skewered octopus is then grilled over a grate. Young

common octopus makes the best nakjihorong. Also called ppeollak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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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지호롱
Nakjihorong, skewered octopus

먹는 재미 쏠쏠한 낙지호롱 (mud flat octopus), the seballakji or young common octopus gets
낙지호롱이라는 독특한 음식도 있다. 대나무 젓가락이나 짚 its name from the Chinese character se meaning “thin,” not to be
묶음에 세발낙지의 머리부터 통째로 끼워 돌돌 감은 다음 간장· confused with the homonymic Korean word se meaning “three”—the
다진 파·마늘·참기름·통깨 등을 넣어 만든 양념장을 골고루 발 name means thin-legged octopus, not three-legged octopus. Though
라 석쇠 위에 올려 구운 음식이다. 낙지호롱은 세발낙지로 만들 small in size, the young common octopus is prized for its tender,
어야 제맛이다. 흔히 ‘뻘낙지’라고 부르는 세발낙지는 발이 세 개 pleasantly chewy texture. While other dishes such as sliced raw
달린 낙지가 아니라 발이 가는細:세 낙지를 뜻한다. 크기는 작아도 octopus dipped in sesame oil, beef rib and octopus soup (gallaktang),
부드럽고 차진 맛으로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참기름에 and whole octopus boiled with garlic and green onions (yeonpotang)
찍어 먹는 산낙지나 갈비와 낙지를 함께 넣어 끓인 갈낙탕, 낙지 all offer unique ways of enjoying octopus, the delectable nakjihorong
를 통째로 넣어 마늘과 쪽파를 썰어 넣고 만든 연포탕도 일품이 slowly unraveled from a skewer is definitely well worth a meal.
지만, 한 번쯤 돌돌 감긴 것을 풀어가며 먹는 낙지호롱도 경험해 Regarding the small octopus, the Jasan eobo notes, “A cow
볼 만하다. on the brink of collapse will regain its strength when fed three or
“쓰러져가는 소에게 낙지 서너 마리를 먹이면 곧 강한 힘을 갖게 four small octopuses.” Although this cure is only proverbial, the
된다.” 《자산어보》에서 낙지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쓰러진 소도 considerable amounts of taurine and histidine contained in the
벌떡 일어나게 한다는 낙지는 강장에 탁월한 타우린과 히스티딘 young common octopus exhibit tonic properties and earn it the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바다의 인삼’이라 불리기도 한다. nickname “ginseng of the sea.”

Written by Choi Gapsu, travel writer, author of A Day’s Travel, Another Day’s
글 최갑수 여행작가, 《하루 여행 하루 더 여행》 저자 Travel (2020)
사진 최갑수, Getty Images Bank Photographs by Choi Gapsu, 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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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을 보 다

정성으로 행복 빚는 상다리가 휘어지게 과일과 떡이 차려진 돌상 앞에 아기가 앉아


있다. 아기를 비롯하여 부모와 형제들 모두 밝고 차분한 톤의 한

한국의 돌잔치 복을 맞춰 입었다. 평범하고 전형적인 돌잔치의 장면이다. 하지


만 이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 나에게 로망이자 일종의 사명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필자가 직접 그린 돌상 앞에 아기 그림
The author’s illustration of a baby
sitting before a dolsang table

Doljanchi, a Family’s A baby sits in front of a low table brimming with plates of
rice cake and fruit. The baby and his parents and siblings

Greatest Effort to Bring are all dressed in hanbok, the colors bright and serene.
This is a typical image from an ordinary Korean doljanchi

Happiness (first-year birthday party). But at one time, it was both my


dream and my personal ambition to recreate this scene
with my own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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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T hr ough Foreign Eyes

아기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는 것은 만국 공통 A universal wish for the happiness and health of infants

과거에는 일본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아기가 첫돌을 맞 In Japan, an infant’s first birthday was historically a matter for great

을 수 있는 것이 특별한 경사였다. 이 때문에 첫 생일을 성대하게 celebration, just as it is in Korea. For this reason, special practices have

축하하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been adopted to mark the occasion. When a baby is a month old,

일본에서는 아기가 태어나 한 달이 되면, ‘오미야마이리お宮参’라 the family worships at a local shrine and receives blessings for the

고 하여 그 지역의 신사에 참배하고 기도를 받는다. 첫 생일에는 baby, a practice called omiyamairi. Then, on the child’s first birthday,

잇쇼모치一升餅라고 하는, 2kg 정도의 떡을 아기가 매게 하고 지켜 there is the custom of weighing a baby down with a two-kilogram

보는 관습이 있다. 아기는 일어서거나 앉거나 넘어지는데, 어떤 isshou mochi (rice cake) strapped to his back as the family watches.

행동을 해도 다 나름대로 좋게 해석한다. 일어서면 입신立身, 즉 Whatever he does—whether he rises to his feet, sits, or falls over—

출세하고, 앉으면 부모 곁을 오래도록 지키며 가업을 이어줄 것 his actions are given a positive spin. If he stands up, it means he will

이며, 넘어지면 액막이를 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오히려 아 rise in the world and achieve success; if he sits it means he will abide

기가 일어서면 빨리 부모 곁을 떠난다고 하여, 지역에 따라서는 by his parents and continue the family business; and if he falls over,

아기가 못 일어날 때까지 떡을 더 얹거나 넘어뜨리기도 했다. it means he has shaken off misfortune. In the past, standing up was

나에겐 일곱 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동생 첫 생일에 같이 사시던 interpreted to mean leaving the nest early, and so depending on the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잇쇼모치 행사’를 했다. 갓 걸음마를 뗄 region, people would trip the baby or add rice cakes until he could

까 말까 하는 동생의 작은 등에 무거운 떡을 지우는 광경이 어린 no longer stand.

마음에 위태롭고 안쓰럽게 여겨졌나 보다. 결과는 기억이 안 나 I have a brother seven years my junior. We observed the isshou

고 불편했던 마음만 기억에 남아 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 mochi tradition on his first birthday, together with our grandparents

르는지 어른들은 깔깔 웃고 계셔서 혼란스러웠던 그 날의 기억이 who were living with us. Seeing my brother’s small shoulders laden

첫 생일 축하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with a heavy rice cake when he could hardly walk must have been

돌잡이처럼 아이의 장래를 점치는 ‘에라비토리選び取り’도 있다. 물 sad and disturbing for me. I have no recollection of it other than my

건과 그것이 의미하는 내용이 한국과는 조금 다르다. 붓은 공부나 feelings of discomfort. I don’t know if the adults were aware of my

지식을, 돈은 유복함을 의미하는 점은 같다. 그러나 한국에서 일 feelings, but my confusion at their laughter is the only memory that

반적으로 놓는 실이나 국수, 쌀, 마패나 활 등은 없다. 대신에 장 remains with me of the first birthday festivities.

사를 잘하는 주판이나 계산기, 먹을 복을 타고나는 수저, 성격이 We also have a ritual called erabitori for telling the child’s future,

꼼꼼하여 큰 집을 짓게 될 자, 손재주가 뛰어나 옷 부자가 되는 가 like the Korean first-year birthday celebration’s doljabi. The ritual

위 등을 놓는다. 사실 일본의 경우, ‘잔치’라기보다는 집에서 하는 items and what they symbolize are a little different than in Korea. In

생일 파티에 가깝다. 상차림이나 복장도 전통적으로 하기보다는 both rituals, a scholar’s brush represents learning and knowledge,

케이크를 중심에 놓고 가족끼리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에라비 and money represents affluence. However, items commonly found

토리도 그림이 그려진 카드로 대체하는 등 간소하게 하기도 한다. in the Korean tradition such as thread or fine noodles, grains of rice,

이렇게 시기와 방법은 달라도 아기의 성장과 건강을 기원한다는 medallions, and archer’s bows, are absent. Instead, in Japan, there

점에서는 두 나라가 모두 같다. 우리 아이들은 둘 다 한국에서 태 is an abacus or calculator to represent success in one’s business, a

어나 오미야마이리와 잇쇼모치 대신 백일잔치와 돌잔치를 치뤘다. spoon and chopsticks to represent a bountiful table, a ruler for a

meticulous personality and measuring out a large house, and scissors

돌잔치를 더욱 특별하게 해주는 한복 to represent great handiwork skills and a full closet of clothes. In

한복을 보고 있자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단아함’이다. Japan’s case, the celebration is more like a small-scale birthday pa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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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쉬운 강렬함과 화려한 장식 대신 절제와 정제에서 나오는 은은 than a feast. Rather than following tradition with costumes and table

한 기품을 음미하는 한국의 독특한 미의식을 느낄 수 있다. 마치 settings, immediate family members celebrate by gathering around

싱거운 듯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을 숨기고 있는 육수처럼 그 매력 a cake. The eribatori ritual is also simplified through the use of cards

이 잊히지 않고 두고두고 생각난다. representing objects rather than the objects themselves.

옷감 표면에는 우유를 풀어놓은 듯한 부드러운 진줏빛 광택이 돈 Through these traditions, both countries pray for the health and

다. 옷감의 두께도 여리고 얇아 여러 겹으로 겹쳐 입는다. 많은 색 development of their infant children even though the timing and the

도 쓰지 않는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큰 색 면을 곡선과 직선 method may differ. Since our two children were both born in Korea,

들이 야무지게 가로지르며 옷맵시를 완성한다. 한복을 개면 마치 we observed the 100-day celebration and doljanchi rather than

종이를 접은 것처럼 각 잡힌 평면이 된다. 이 납작한 색 면들이 omiyamairi and isshou mochi.

사람 몸에 감기는 순간 직선은 날이 되고, 가장 큰 색 면은 360도


로 활짝 펼쳐져 우아한 곡선을 뽐내는 치마가 된다. Made more special with hanbok

‘디자인’을 설계, 즉 무엇을 계획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과정으 One word comes to mind when looking at a hanbok: elegance.

로 본다면, 기나긴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에 의해 계승되어 내려 Korea’s unique aesthetic can be clearly seen in a hanbok, valuing

온 것은 요즘 말로 ‘빅데이터’이며, 한복은 이 빅데이터를 기반으 refinement and restraint over intensity and adornment. The beauty

로 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 of hanbok is lasting. It is like yuksu, a deceptively bland Korean broth

의 손을 타고 내려오면서 이어져 온 것. 그 긴 세월을 견뎌내고 that hides a surprising depth of flavor.

걸러진 정수. 전통에는 그런 빅데이터로 검증받은 것과 같은 ‘신 The surface of hanbok fabric has a soft pearly sheen. The texture

뢰’가 있다. 돌상에도, 한식에도, 한복에도, 전통 돌잔치의 풍경 is light and delicate, so it is worn in multiple layers. One color is used

곳곳에는 그 정수의 은은한 빛이 서려 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 per part of the garment. These monochromatic pieces of cloth could

서는 이런 한복을 입을 수 있는 기회가 인생에 몇 번 없다는 사실 become dull, but they become animated with crisscrossing curves

이 이날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and lines when worn. Hanbok are folded just like paper, flat, with

angular corners. The moment these flat pieces of cloth are draped

아이를 위해 정성으로 만든 보호막, 돌잔치 around a person’s body, the edges become sharp creases, and the

요즘 들어 가까운 친지끼리만 치르는 일이 많아지긴 했어도, longest piece of solid-colored cloth unfurls 360 degrees to become a

돌잔치는 결혼식처럼 가족 외의 사람들도 초대할 수 있는 어엿한 skirt with an elegant curve.

사회적인 행사이다. 풍족하게 차려진 돌상을 보고 있으면 나도 If you consider “design” to be a process of planning, selecting,

모르게 ‘정성’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정성’이라는 말에는 간절함 and deciding what to design, and adopt the contemporary term

이 묻어 있다. 마음속 깊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며, 오랜 시간을 들 “big data” to describe thousands of people handing things down to

여, 힘든 절차를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어떤 노력이라도 기꺼이 their descendants over a long period of time, wouldn’t you say that

감수하겠다는 마음. 돌잔치 날에 우리는 평소에 하지 않는 일을 the production of hanbok is based on big data? Tradition has been

많이 한다. 평소에 입지 않은 한복을 차려입고, 진수성찬을 차리 formed over many years and passed down through generations.

고, 평소에 모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부러 시간을 내어 한자리 It has lasted over time and so it has been distilled to its essence.

에 모여 아기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준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관 Through big data, people trust in tradition, and this trust is like a

심을 가지고 마음을 모으는 일이 정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verification. The essence of tradition glows softly in various places

한 사람이 다른 누구를 생각하는 마음에는 분명 어떤 힘이 있 at a traditional doljanchi: at the dolsang (main table setting), in the

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라 동서양을 hansik (Korean food), and in the hanbok. Also, a doljanchi offers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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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the few chances to wear hanbok in modern life, making the day all

the more special.

The doljanchi as one’s best efforts to protect one’s child


As time passes, more celebrations are observed with only close kin

present, but the doljanchi, like a wedding, remains a full-fledged

social occasion to which acquaintances outside of the family may be

invited. When I see a well-decorated dolsang, the word “jeongseong”

comes to mind. Jeongseong means our best efforts, deeply imbued

with sincerity. We take time, we don’t shrink from difficult steps, we

submit to the demands of the day with willing hearts and do many

아이의 돌잡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필자(맨 왼쪽) things at a doljanchi that we do not do in our ordinary lives. We wear
The author (left) watching her child’s doljabi
hanbok, we prepare a feast, and we deliberately make time to meet

with people we don’t ordinarily see to pray for a child’s health and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공유되는 듯하다. 소설 《해리포터》를 보면, happiness. If the act of many people taking an interest and coming

주인공이 그를 헤치려는 세력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together like this doesn’t represent jeongseong, then I don’t know

어머니가 그를 위한 강력한 사랑으로 독특한 흔적을 남겼기 때문 what does.

이다. 작가 롤링은 등장인물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적었다. “그렇게 I believe there is power in caring for another person. This belief

깊은 사랑은,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람이 죽는다 해도, 우릴 영원 is not unique to me and seems to be widely shared in both the East

히 보호해 준단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에는 and West. In the case of the Harry Potter series, a mother’s love left

한문 선생님 홍인표가 ‘거대한 에너지 장막’으로 보호되고 있다 a distinctive mark on a hero and this saved him from hostile forces.

는 표현이 나온다. 그를 매우 사랑했던 누군가가 죽어서도 ‘강력 In the words of JK Rowling, “To have been loved so deeply, even

한 의지’를 남긴 것이라고. though the person who loved us is gone, will give us some protection

나에게 돌잔치를 치르는 것은 바로 아기에게 이런 보호막을 만들 forever.” In Chung Serang’s novel School Nurse Ahn Eun-young,

어주는 것과도 같은 귀하고 특별한 일로 느껴졌다. 아이를 위해 Chinese character teacher Hong In-pyo is protected by a “great

정성으로 빚어내는 보호막. 나의 보호막도 모양은 조금 다르고 energy shield” left by someone who loved him so much that even

못났더라도 용서가 되었기를 바란다. 전통의 힘을 빌려, 단아함 after their death, their will remained a powerful force.

의 결정체인 한복을 입고, 간절한 마음으로 빚어냈으므로. I felt that holding a doljanchi for my children was a special, rare

act, like making a protective shield wrought for them through my

best efforts. Even if my shield took a unusual shape, and even if it

was lacking, please forgive me. I partook in tradition, dressed myself

in hanbok, the essence of grace, and celebrated in all earnestness.

Written and photographed by Hitomi Sakabe, professor of Graphic Design,


글·사진 사카베 히토미 그림책 《외갓집은 정말 좋아!》, 에세이 《아이와 나》 Keimyung University, author of picture book Great Time at Mama’s Hometown,
저자, 계명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 and essay Me and My Ch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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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서울 스케 치

한양은 하나의 성이다


관 민 운 명 공 동 체 정 신 돋 보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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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길은 겨울이 제 맛이다. 색이 변한 돌들과 능선
길의 앙상한 나뭇가지에 부는 북풍이 딱 어우러져 세월
과 역사를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성곽의 돌 틈 사이
로 내려다보이는 서울시내는 날 좋은 겨울날 햇볕을 받
아 안온하고 고즈넉하다. 조선시대 때 한양은 어떤 모습
이었을까. 마음속 시계를 600여년 되돌려보니 불쑥 북쪽
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숙정문, 흥인지문동대문, 숭례문남
대문, 돈의문지금은 터만이 보이고, 그 가운데 경복궁이 근엄
하게 자리하고 있다. 나지막한 건물들 사이로 한양도성
이 허리띠인양 도성과 바깥의 경계를 짓고 있다. 경복궁
앞 육조거리관청가와 그 밑의 운종가상점가를 개미처럼 부
지런히 오가는 흰옷 입은 백성들과 버섯 같이 솟아있는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으로 인해 한양은 마치 스머프
마을 같다.
한양도성은 조선 개국 직후인 태조 5년에 축조돼 한일합
병 때까지 한양을 보위했다. 현존하는 전 세계 도성 중 가
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한
다. 한양은 지형지물을 이용한 천연의 요새로 설계됐다.
앞서 언급한 네 개의 산내사산을 성으로 연결하고, 출입문
을 설치, 적의 공격을 쉽게 방어할 수 있었다. 전국의 백
성들19만7천4백여명이 동원돼 석 달여 만에 18.6킬로미터에
달하는 도성을 완성했다. 당시의 인구나 산악지역의 공
사 난이도를 감안했을 때 엄청난 추진력이다. 비록 세종
때와 현대에 들어 개보수를 진행했지만, 624년이 지난
지금도 도성의 70%가 남아 있다.
경복궁은 개방적으로 건축하고, 한양 전체를 하나의 성
으로 만들어 방어의 단위로 바라보았다는 점은 국난 시
에도 임금과 백성들이 함께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조선 시대와 그 이후에도 그 의지를 지키지 못해 오욕의
역사가 잦긴 했지만, 그 관민 ‘운명 공동체’의 정신만큼은
오늘날 우리가 한양도성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
고 있다. 취재와 사진 촬영 장소는 서울 종로구 삼청동 말
바위안내소 인근이다.

글 김형근 편집팀
말바위안내소 인근 사진 김정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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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이달 의 인 물

파도를 닮은 화가,
일랑
이종상

자택 앞에 선 이종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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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와 시대를 막론하고, ‘최초’와 ‘최연소’ 타이틀을 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 일랑一浪 ‘첫 파도’라는 본인의 호號처럼 수많은 ‘최초’의 역사를 써 내려간 이가 있다.
바로 동양화단의 원로 작가, 이종상 화백이다. 그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사람은 있겠지만,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그의 작품을 모르거나 보지 못한 이는 없다.
우리나라 화폐 5천 원권과 5만 원권에 담긴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영정이 그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국내 유일의 현행 화폐 영정 화가이기 때문인지, 매해 1월이면 인터뷰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신년에 그를 보면 재복財福이 생긴다는 우스갯소리 때문인 듯하다. 그런 그를 마침 우연히 신년에 만나보았다.

‘문화 자생력’, 평생의 화두가 되다


화폐 속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 영정의 유명세
‘덕분’ 혹은 ‘때문’인지 그는 흔히 ‘화폐 영정 화가’
로 불린다. 그러나 그를 규정하기엔 한없이 부족한
말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도 그림이 존재하는 화폐
의 기술처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을지언정 그의
이력은 이미 우리나라 곳곳에 새겨져 있다. 1 신사임당 영정. 이종상 화백作

“대학교 2학년 때, 4.19혁명이 일어났어요. 미대생


이었지만 유도부였기에 학생들을 보호하고 경호하
기 위해서 맨 앞에 나섰어요. 그러다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서 다리에 총알이 스치는 상처를 입고 수
배당해 피신 생활까지 했어요. 당시엔 학교까지 못
다니게 될 줄 알았어요. 그 정도 각오를 하고 싸웠
는데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거예요. 적개심과 의분
이 들끓었죠. 그때 마침 제가 대학교 3학년으로서
국전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혁명의 메시지를
그림에 담아 전달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무뎌진 연
장을 불로 달구고 망치로 때려 새로이 태어나게 하
는 대장간처럼, 민주화의 기능을 다시 살리자는 뜻
을 담아 일부러 동년배 학생들이 등장하여 대장간
일을 하는 작품을 그렸어요. 그런데 그 뜻을 파악하
지 못했는지 오히려 국전에서 특선을 받았지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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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61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3학년 재학 중
제10회 국전에 출품한 작품으로 특선을 차지하고
이어 11회 국전 내각수반상, 12회 국전 문교부장관
상을 받으며 국전 사상 최연소 추천 작가가 된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그린 그림으로 처음
국전에 발을 디뎌서일까, 1961년 이후 역사의식에
대한 고민과 실천 의식은 그의 평생의 화두인 ‘문
화 자생력’이 된다.

우리 문화의 원류原流, 고구려를 연구하다


2 〈장비〉, 화선지에 수묵 담채, 1963년 국전 출품작
“4.19혁명 이후 복학해서 전공을 동양화로 선
택한 이후부터 우리나라 고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자연스레 고구려 벽화에 흥미
를 느끼게 되었죠. 우리나라의 미술과 문화, 의상
등은 고구려벽화에서부터 찾을 수 있거든요. 그런
데 교과서에는 고구려벽화인 〈수렵도〉가 꼭 등장
하면서 막상 벽화에 관한 재료 기법 연구와 벽화기
법 연구는 하지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 거예요. 고
구려 문화를 꼭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고대벽화의
사적고찰과 신벽화의 재료 및 기법에 관한 연구〉
논문을 썼어요. 이 논문은 1972년 한국민족문화논
총에 33인 우수 논문으로 실리기도 했지요.”
고구려를 연구하면 북한 정권을 찬양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지던 분단 시기였다. 공공연하게 ‘혁명’을
주제로 국전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던 그가 고구
려 연구에 매진하니 그를 보는 눈이 어땠을까.
“남들은 돈을 받아도 고구려 연구를 안 하겠다고
하던 시절이었어요. 저 또한 남영동에 끌려가서 간
첩 아니냐고 고문을 당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우리
나라 문화의 원류를 연구하지 않고 외국문화를 수
용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요. 그래서 중국이
문호를 개방하자마자 중국으로 가 고구려 고분 대
부분을 조사했고 다른 나라의 동굴 벽화도 모두 연
구하며 비교했어요. 이를 통해 습기가 가득한 동굴
에서도 몇천 년을 버텨낸 고구려 벽화의 독자적인
기법을 알아내기도 했지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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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를 알아본 것은 다름 아닌 북한이었다. 그
는 1999년 8월 말 김용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 겸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당시의 공식 초청
을 받아 미술계 인사 10여 명과 함께 북한을 방문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이기준 서울대 총장당시이 절 불러 3

요. 갔더니 제 이름이 적힌 입북허가서를 내밀면


서 북한에서 왜 미대 교수를 초청하냐고 묻는 거예
요. 저도 영문을 모르는데 대답할 수가 있나요? 그
저 모른다고 대답할 뿐이죠. 평양에 가니 그 이유
를 알 수 있었어요. 북한에서는 이미 중국의 동북
공정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고구려 고분을 서둘
러 유네스코에 등재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제
가 고구려 벽화를 연구하는 걸 알았던 것 같아요.
북한에선 남북한이 문화 운동을 같이 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러던 와중에 서울대에서는 저 모르게
뒷조사를 했었나봐요(웃음). 저를 조사하면서 인문
학 박사 학위가 있는 걸 알았던 거죠. 제가 원효대 4

사 영정을 그리려고 동국대 대학원까지 들어가서 3 중계동 불암산 학도암 바로 밑에 있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그린
〈송령학수도〉.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원효의 기신론을 공부하다가 철학박사 학위까지 4 2019년 5월 19일 독도체험관에서 진행한 ‘이종상 화백과 함께하는 내가 그린 독도’ 행사를 통해 완성된
그림. 이종상 화백과 30여 명의 아이들이 함께 그렸다.
받았었거든요. 그래서인지 절 서울대학교 박물관
장 자리로 취임시켰어요. 제가 북한에서 9월 9일에
내려왔는데 취임은 이미 9월 1일 자로 되어있었죠.
미대 교수로 박물관장을 맡은 건 최초였어요. 당시
엔 인문학 교수들만 박물관장을 하던 때였거든요.
박물관장을 맡고 처음 기획해 개최한 전시가 바로
고구려 유물 전시회 〈고구려-한강 유역의 고구려 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화가가 선택된다. 만일 화
요새〉였어요. 남북한 통틀어서 최초로 기획된 고구 폐 영정을 그린 화가가 불명예스러운 논란을 일으
려 유물전이었죠. 그 전시의 의미를 아는 이는 당 키면 화폐를 전량 회수하고 재발행해야 하기 때문
시에 없었을 거예요.”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화백은 그의 나이 37
세 때 오천원권의 율곡 이이 영정을 맡는다.
영정, 인품을 담다 “원래는 조선 최후의 화원畫員이자 순종 어진을 그
화폐 영정 작가가 되기 위해선 천운이 따라야 린 이당 김은호1892~1979 선생이 그리기로 하셨어요.
한다고 한다. 작가뿐만 아니라 친인척 재산과 금전 이미 오죽헌에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 모자 영정을
관계까지 모두 확인 절차를 거치고 통과되어야 하 그리셨기 때문에 이당 선생께서 맡으셔야 했죠. 그
기 때문이다. 또한 당대 최고의 화가 중 ‘살아온 날 런데 당시 몸이 편찮으셔서 그릴 수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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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은 그림자 영影에 그림 족자 정幀을 쓴다. 그림
족자 안에 그림자를 담아야 한다는 뜻이다. 초상화
는 사람의 외형만을 보고 충분히 실제와 똑같이 그
릴 수 있지만, 영정은 다르다. 그 사람의 살아온 삶
과 인품, 혼을 액자에 담아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는 영정 기법
이 있어요. 바로 ‘육리북채肉理北彩’입니다. 육리 즉
해부학적인 인품의 이치를 말합니다. 피부 안에 있
는 얼굴 근육을 파악해서 그리는 거지요. 우리나라
영정 그림들을 떠올려보세요. 무표정인데 그 사람
의 인품이 느껴지지 않나요? 웃는 것을 잘하는 사
람은 웃는 근육이 발달하고 화가 많은 사람은 화를
품은 근육이 발달하는 것처럼 그 사람의 삶과 인품
을 보고 해부학적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육리문입니
5 다. 육리는 점을 찍어 선을 만들어 표현해요. 이처
럼 아주 옛날부터 우리나라엔 점묘법이 있었지만,
현대 사람들에게 점묘법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
서양화가인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를 이야기할 겁
니다. 하지만 점묘법의 최초 격이 육리문이죠. 북채
는 배채라고도 하는데, 등 배背에 채색 채彩, 종이 뒷
면에 색을 칠하는 화법입니다. 인품은 겉모양새가
6
그럴듯하다고 나타나는 게 아니지요. 내면을 드러
5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화폐 기념첩을 들고 있는 이종상 화백.
뒤편에는 그의 작품인 〈독도의 기Ⅱ〉(1982)가 보인다. 내기 위해 화선지 뒤쪽에서 그리는 것이 배채법입
6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화폐 기념첩
7 이종상 화백(오른쪽)이 자택 앞에서 한춘섭 《우리문화》 편집주간(가운데)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니다. 이러한 기법은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습니다.”

오천원권과 오만원권은 표준영정과 독립적인 작품


화폐를 제작할 땐 정부가 정한 ‘표준영정’을
토대로 한다. 그러나 사실 표준영정을 그린 영정
그래서 한국은행은 율곡 선생의 동상을 사진으로 작가들의 친일 행적 때문에 논란이 뜨거운 상태다.
찍어 영국화폐제조사로 보내 제작 의뢰를 했는데, 이당 김은호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표준영정
받고 보니 완전히 서양인 같은 겁니다. 결국 그 화 을 그렸지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
폐는 유통되고 며칠 만에 바로 회수가 됐지요. 다 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이름이
시 화폐를 그릴 사람을 수소문했는데 이당 선생께 올라있다. 또 그의 제자인 장우성1912~2005과 김기창
서 저를 추천하셨어요. 한국은행에선 ‘너무 젊다’ 1913~2001은 각각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표준영
는 이유로 거절하다 제 금융 조사를 끝마치곤, 제 정을 그렸는데, 이들 작가 모두 친일 논란이 있다.
가 맡게 됐어요.” “제가 그린 오천원권의 율곡 이이와 오만원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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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영정 그림이 표준영정을 참고해 그렸다 지금까지 독도 그림이 600여 점이 넘어요. 울릉도
며, 그렇기에 이 또한 친일파 작가의 그림이라고 에 있는 독도박물관에 가면 독도로 진경전을 열었
이야기되고 있는데, 저는 표준영정을 참고해 그린 던 1977년 제 전시 도록이 진열되어 있어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싶습니다. 다른 화폐의 영정 그는 문화로 독도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독도
은, 화폐 영정을 그린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화 문화심기운동본부’를 결성하고 많은 중견 화가들
가들이 문중의 의뢰를 받고 화폐로 제작되기 전에 과 독도 그림 전시회를 꾸준히 개최하고 있다. 지
그린 것입니다. 저는 화폐용으로 따로 의뢰를 받고 난 2015년에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개최한 〈동
그린 것이지요. 또한 율곡 이이 화폐 영정을 그릴 해·독도 특별 기획전- 독도 오감전〉에서 북한 미술
당시만 해도 이당 선생이 살아계실 때였는데 그때 계의 거장으로 불리는 선우영1946~2009 작가의 독도
당신의 작품을 참고하지 말라고도 하셨어요. 신사 작품과 함께 전시되기도 했다.
임당 영정도 표준영정과는 독립된 제 작품이에요. 그는 우리나라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
표준영정을 보면 나이가 들어 보이는데, 저는 45세 심을 가지고 이를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지켜내야
전후로 그렸죠. 신사임당이 50대가 안 되고 돌아가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실천 방식은 멀리 있는
셨으니까요. 의상도 시기에 맞춰 16세기 옷으로 그 것이 아니라 가까이, 심지어 화폐를 사용할 때도
렸습니다. 머리, 의상 모두 다 따로 고증을 거친 작 실천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품이에요.” “화폐를 볼 때 숫자나 장수를 보지 말고 그곳에 있
는 인물의 인품을 보세요. 그 인물이 어떤 삶을 살
그의 이력엔 늘 ‘최초’가 있다 았는지, 하루에 단 1초라도 생각하면서 쓰면 우리
한 번의 파도가 치고 난 후 물결과 파동이 잇 의 인품도 올라가고 우리나라의 인문학적 의식과
따르듯, 그의 걸음 이후엔 늘 변화가 뒤따랐다. 특 사명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화폐는 바로 그것을
히 그는 1977년 독도에 입도하여 처음 독도를 그린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최초의 독도 화가’로, 독도문화심기 운동을 이끌
고 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독도를 그린 사람이 없
다는 걸 알았어요. 혹시 이미 겸재 정선이 그리지
않았을까 싶어 찾아보았는데 없었지요. 일본 쪽에
서 독도를 그린 화가가 있을까 싶어 다시 조사를
해봤는데 일본에도 없었어요. 만약 겸재 정선이, 아
니 그 누구라도 조선 시대 때 독도를 그린 작품이
여러 장 있었다면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더욱더 7

강력하게 말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 아쉬움이


들어 치안본부에 허가를 받아 1977년 독도에 처음
방문했어요. 〈독도는 우리땅〉 노래가 1982년에 처
음 나왔으니까, 그 노래가 나오기 5년 전 일이지요.
대담 한춘섭
그때만 해도 독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그렇게 크
글 음소형
진 않았을 때였어요. 그때부터 독도 그림을 그려 사진 김정호 사진작가, 이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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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오! 세이

희망이라는
고통

새해가 됐다. 당신은 다이어리를 펼치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제우스는 화가 났다. 우매한 인간이 프로메테우스의 도움으
않은 종이를 바라본다. 작년은 쉽지 않았다. 애를 썼지만, 나름 노 로 현명해지고 발전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
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살지 못했고, 원하는 만큼 걸 어쩌지. 어떻게 인간에게 복수를 해야 할까. 제우스는 고민하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새로운 날이다. 새로 시작할 수 있 다가 좋은 수를 생각해낸다. 아름다운 인간을 만들어 선물이 가
고 새로 계획할 수 있고 새로 다짐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망 득 든 상자를 맡기자. 그렇게 탄생한 아름다운 인간. 판도라는 제
설인다. 어째서인지 다시 희망을 품는 것이 두렵다. 경험으로 안 우스의 선물이 든 상자를 들고 지상의 세계에 내려온다. 제우스
다. 겪어서 깨달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적어 내린 계획과 다짐의 는 말한다.
문장을 검게 지워버린 단 하나의 단어. 실패. “절대로 상자를 열어봐서는 안 돼.”
하지만 제우스는 알았다. 인간은 호기심이 많고 어리석은 선택을
희망하지 않으면 절망할 일도 없다. 올라가지 않으면 떨어질 하며 능력도 없으면서 헛된 꿈을 꾼다는 것을. 판도라는 긴 시간
리 없고, 도전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지. 학습된 패배감과 크고 상자를 열지 않았으나 금기보다 강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상자
작은 상실과 절망이 희망의 문장을 써 내려가는 것을 막아서며 를 열고 만다. 제우스의 복수가 시작된 것이다. 상자엔 재앙이 가
말한다. 득했다. 질병. 고통. 통증. 슬픔. 눈물. 시기. 질투. 우울.
‘뭘 그렇게까지 애쓰는 거야? 그냥 살아. 적당히 살아. 괜찮아.’ 아, 비겁하고 간교한 신의 방식을 보라. 재앙을 마련해놓고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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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인간은 늘 불평하고
만족을 모르는 동물이지만 방법을 찾고 더 나은 환경을 개척하는
존재다. 모르지만 배운다.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현실에
없는 것을 상상하고 그 상상이 때론 현실이 되는 마법을 만들어
낸다.

희망은 본질적으로는 재앙이다. 그러나 인간은 운명을 싫어


하고 한계를 믿지 못하는 생물이다. 최악의 재앙을 최선의 미래
로 바꾸는 존재인 것이다. 제우스는 기가 찬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만다. 막을 수가 없고 말릴 수가 없는 골칫덩어리. 그것이
바로 희망을 품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다이어리에 하나씩 계획을 적는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소망. 불가능한 꿈을 대책 없이 써 내려간다. 곧 실패
할 것을 알면서, 때문에 무너지고 엉엉 울 거라는 것을 알면서,
1번. 2번. 3번. 그리고 10번. 계속 희망을 적어간다. 프로메테우스
가 인간에게 준 선물은 불이었다. 뿔도 없고 빠른 다리도 없고 날
카로운 이빨도 없고 근력도 약한 인간이 생존하고 마을을 이루고
가장 강력한 생물로 거듭난 것은 바로 이 불 때문이었다. 프로메
테우스가 준 다른 불도 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심어
놓은 불이 있다. 불꽃도 보이지 않고, 불빛도 보이지 않는, 마치
꺼져있는 숯처럼 은밀히 숨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숨 쉴 때마다
스스로 재앙을 초래하도록 만들었다. 상자 가장 밑바닥에 가장 희미하게 빛난다. 꿈꿀 때마다 열기를 낸다. 그것은 ‘열심’. 고통
끔찍한 재앙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의 이름은 희망. 희망을 상 스러운 희망을 달콤한 열매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의 단어가 바
자에 넣은 제우스는 중얼거렸다. 로 ‘열심’인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마음에 열이 있는 상태다.
“나약한 인간은 감히 얻지 못할 것을 원하게 되리라. 사랑해서는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움직이고 말하고 애쓰고 애쓰는 엔진과도
안 될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능력보다 큰 것을 꿈꾸며 감히 신처 같은 불이다.
럼 높아지길 원하게 되리라. 그렇게 절망하고 실패하게 되리라.”
당신이 적은 희망찬 계획 앞에 ‘열심’을 붙여 한 해를 살자.
희망. 우리는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희망 그것은 그저 희망으로만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당신의 무엇을 적
때문에 ‘현실’과 ‘지금’은 불만족스럽다. 쥐고 있는 것은 작아지 었나. 내가 적은 희망은 다음과 같다.
고, 누리고 있는 것들은 누추해지며, 아름다움은 시시해진다. 자 - (열심히) 쓰기
꾸 남의 삶을 꿈꾸고 여기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진다. 맞다.
그것은 과욕이며 탐욕이며 분수를 모르는 꿈이다. 하지만 제우스
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제우스가 생각한
것처럼 그저 나약하게만 만들지 않았다. 어리석고 우매한 상태를 글 정용준 소설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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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조선 人 LO V E ⑬

조선이 추구한
천륜의 사랑, 효 孝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이다.


사람은 다른 동물보다 낳고 기르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데, 부모는 아무런 조건 없이 한없는 사랑을 베
푼다. 부모를 향한 자식의 사랑도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주위를 돌아보면 살아생전 보답하지 못하고 뒤늦게
후회하며 아파하는 자식들도 많다.
조선은 유교 국가답게 충忠, 효孝, 정貞을 삼강三綱으로 삼아 나
라의 질서를 짰다. 이 세 가지 강령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친
것은 효였다. 그것은 부모의 사랑에 실천적으로 응답하는 것
이다. 삶에서 사랑을 배우고 익히는 첫걸음이다. 조선은 효
를 인륜人倫의 근본으로 삼고 천륜天倫을 인간 세상에 펼치고
자 했다.

손가락 깨물고 허벅지 살 베는 효자들


그렇다면 효는 어떻게 행해야 할까? 세종대왕의 명으로 지
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사례들이 실려 있다. 1428년, 자식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터지자 세종은 엄벌 이전에 가르침이
필요하다며 이 책을 간행해 보급하도록 했다. 1434년에 나온 〈삼
강행실도〉에는 충신, 열녀와 함께 역대 효자 110명의 행실이 수
록되었다. 중국과 한국의 옛 사례들을 그림과 함께 알기 쉽게 소
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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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나온 효행孝行들은 난이도가 무척 높다. 부모를 소생시키기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천륜을 실행하기 위해 그들은 손가락을
위해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먹이는 ‘단지斷指’, 허벅지 살을 베어 깨물고, 대변을 맛보고, 대신 죽으려 했다. 조선 시대의 효는 아름
서 병구완하는 ‘할고割股’, 부모의 변을 맛보고 치료 대책을 세우 답고 처절한 사랑 이야기였다.
는 ‘상분嘗糞’, 제 수명을 위중한 부모와 바꾸는 ‘수명치환壽命置換’, 경기도 포천시 어룡동에 있는 정문은 조선 숙종 때의 이름난 효
한겨울에 얼음을 깨서 잉어를 잡아드리는 ‘부빙剖氷’ 등 희생과 헌 자 오백주생몰년 1643~1720년를 기린 것이다. 그는 23세의 나이로 무
신의 극치다. 조선의 효자·효녀들은 그 어려운 사랑법을 기꺼이 과에 급제했으며 청렴한 공직자로서 뭇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
실행에 옮겼다. 무엇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는데 아버지가 중한 병에 걸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는 조선 후기에 살았던 효자 남궁지와 부인 리자 돌로 제단을 쌓고 날마다 기도한 끝에 병을 고쳤다고 한다.
하동 정씨, 아들 남궁조의 효행담이 전해져 내려온다. 남궁지는 오백주의 효행담에는 이색적으로 호랑이가 등장한다. 하루는 아
아버지의 병이 위중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였고 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집에 가는데 축석고개에
부친의 대변을 혀에 대며 병세를 살폈다. 그의 처 하동 정씨도 아 서 호랑이 한 마리를 만났다. 그는 두려움을 다스리고 큰소리로
이를 출산했지만, 남에게 맡기고 시아버지 병시중에 정성을 기울 호령했다. “편찮으신 아버님을 뵙고자 가는 길인데 한낱 짐승이
였다. 어찌 앞을 가로막는가?” 바위에 앉아 있던 호랑이는 오백주의 위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맑은 법이다. 두 사람의 아들 남궁조도 엄에 눌려 꼬리를 내리고 물러갔다.
지극한 효자였다. 어머니가 몸져눕자 그는 옷차림을 경건히 하고
정성으로 약을 달였다. 밤에는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어머니 대신
자기가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아버지처럼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행실이 조정에 알려지면
서 고종 30년1893년 효자를 표창하는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대를 이
은 효행으로 두 개의 문이 세워졌다. ‘쌍문동雙門洞’이라는 동명은

5) 복숭아를 나무에 달려있는


58 장면으로 수정 가능할까요?
이윽고 집에 당도하여 아버지의 병환을 살피니 과연 심각한 상태 이야기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였다. 의원이 그에게 한 가지 처방을 일러주었다. 산삼을 캐서 석 그러나 이 효행담에는 비극적인 반전이 있다. 구전에 따르면 기
청石淸에 찍어 먹으면 낫는다는 것이었다. 다만 둘 다 구하기가 어 력을 회복한 어머니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물에 빠져 죽었다고
려웠다. 산삼이야 당연히 하늘의 별 따기고, 석청도 벌들이 바위 한다. 정자근노미는 자기 잘못이라며 울부짖다가 어머니가 빠진
틈에 저장하는 꿀이라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오백주는 아버지를 곳에 몸을 던졌다. 마을 사람들은 모자母子를 불쌍히 여겨 양지바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산에 들어가 산삼과 석청을 찾아 헤맸다. 른 길목에 묻어주었다. 희한한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영약을 구하려고 고생하는 그이 앞에 호랑이가 또 나타났다. 축 어느 날 고을 사또가 이 무덤가를 지나가는데 말이 무릎을 꿇고
석고개에서 만난 그 녀석이었다. 호랑이는 자세를 낮추고 오백주 주저앉는 게 아닌가. 서리로부터 효행담을 전해 들은 사또는 명
에게 등을 갖다 댔다. 그가 올라타자 바위를 뛰어넘으며 나는 듯 을 내려 삼월 삼짇날에 모자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 사람들은 효
이 달려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놀랍게도 그곳에 산삼이 있었 자가 죽은 뒤에도 어머니 제사를 살뜰히 챙겼다고 칭송했다. 정
다. 효자는 산삼을 캐고 나서 산신령에게 감사드렸다. 이때 벌 한 자근노미 효행비는 원래 있던 곳이 댐 공사로 수몰되는 바람에
마리가 날아와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 벌을 따라가 보니 바위 1985년 야사리로 옮겨졌다.
틈에 벌집이 숨어있고 석청이 가득한 게 아닌가. 효행은 성별도 초월한다. 효녀 이야기는 오히려 효자보다 뿌리가
오백주는 산삼과 석청을 들고 하산해 아버지에게 올리고 병환을 깊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효녀 지은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낫게 했다. 이 소문은 숙종 때 널리 퍼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 위해 날품을 팔다가 자신을 종으로 넘긴다. 고대 무가巫歌의 주인
다. 마침내 경종 3년1723 나라에서 정문을 세워주고 효행의 모범 공 바리공주는 자길 버린 아버지가 중병을 얻자 신묘한 약을 구
으로 삼았다. 오백주가 만난 호랑이는 천륜을 가로막는 인간 세 하러 여행을 떠난다. 효녀 지은과 바리공주는 세월 속에 변주되
상의 탐욕을 상징한다. 그래서 조선 선비들은 ‘극기복례克己復禮’, 면서 조선 시대까지 각양각색의 효행담을 파생시켰다.
곧 이기심을 극복하고 예를 되찾으라는 가르침에서 효에 이르는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에는 효녀와 약샘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
길을 찾았다. 다. 어린 소녀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살
았다. 이웃집 잔치를 거드는 등 품팔이를 해서 아버지 약값을 마
부모님 약 구하러 길을 떠나는 효녀들 련하고 병구완하는 효녀였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
조선 시대의 효는 신분을 뛰어넘는 가치였다. 전라남도 화순 의 병이 위독해져 신음하고 있었다. 소녀가 어찌할 바를 몰라 울
군 이서면에 전해지는 효자 정자근노미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 기만 하자 지나가던 나그네가 딱하게 여겨 푸른마을의 약샘을 알
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신분이 미천한 사람이었지만 효행은 려 주었다. 그 물을 마시기만 하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아름답고 숭고했다. 18세기 중반 전국의 읍지를 엮은 소녀는 약샘을 찾아 길을 떠났다. 산을 두 개나 넘어 마을에 들어
책 《여지도서》에 그이의 효행담이 나온다. 선 효녀는 그만 탈진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어린 소녀를 발견한
“정자근노미는 양인이다. 병든 어머니가 한겨울에 잉어를 먹고 마을 사람이 사연을 듣고 갸륵한 효성에 감동했다. 그의 배려로
싶다고 하자 울면서 강의 얼음을 쪼개니 잉어가 놀라 스스로 나 효녀는 약샘의 물을 구해 무사히 집에 돌아갔다. 그녀는 바리공
왔다. 또한 눈 오는 날 복숭아를 찾으매 강가 나무 아래에서 구하 주처럼 아버지 약을 찾아 고난의 여행에 나섰고, 효녀 지은 같이
여 어머니의 병환을 낫게 하였다. 이 일이 알려져서 집에 부과된 사람들을 감동하게 해 문제를 해결했다.
부역을 면제받고 비를 세우게 되었다.” 자기희생은 반전을 일으킨다. 죽도록 정성을 다하면 반드시 하늘
정자근노미는 화순 보암마을에 살면서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했 이 응답한다고 조선 사람들은 믿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 그것
다. 겨울날 얼음을 깨서 잉어를 잡고, 눈밭에서 복숭아를 찾아다 이 바로 효행의 원리였고, 조선이 추구한 천륜의 사랑법이었다.
녔다. 하늘이 감동하여 잉어를 보내주었고, 복숭아 있는 데도 꿈
글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으로 가르쳐줬다. 아들의 지극 정성에 어머니의 병환은 나았고 그림 박찬우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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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바다 너 머

소원을 살 수 있는 라파스의
신년 축제 ‘알라시타’
새해에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코로나 극복? 안락한 집? 멋진 신형 자동차? 대기업 취직? 삶을 함께 헤쳐나갈 동반자 만나기?
나와 배우자를 쏙 빼닮은 득녀, 득남? 아니면 배낭 메고 세계 일주? 써도, 써도 마르지 않을 화수분 같은 지갑? 이러한 간절한 소원을
기다리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볼리비아 라파스의 거리 곳곳에서 펼쳐지는 알라시타Alasita 현장이다.

Feria de la Alasitas

볼리비아 라파스의 전통축제 '알라시타'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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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환경 속에서 원주민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볼리비아
추운 겨울을 나고 있는 한국. 그 정반대 편에 볼리비아가 있다.
남반구에 위치한 남미 최빈국 중 하나인 볼리비아는 계절이 한국과
는 반대로 여름이다. 볼리비아 행정수도인 라파스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수도이기도 한데, 하늘이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그곳의 하늘은 유독 쨍하고 진한 푸른빛을 띤다. 거기에 시시각각
극적으로 움직이는 구름은 그냥 흰색이 아니라 형광 빛을 띤 흰색으
로 푸른 하늘과 강렬한 대비를 만들어내 인상적이다.
볼리비아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30여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모
습을 보여준다. 낡고 오래된 건물들과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울퉁
불퉁한 도로들, 시커먼 매연을 가차 없이 뿜어내는 자동차들을 보고 1

있노라면 한국과 동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 1 라파스의 남쪽 지역으로 부촌이 조성되어 있다. 라파스의 하늘은 일 년 내내 쨍하고
푸르다.
다. 라파스를 비롯한 주변 도시들은 자연환경 또한 매우 척박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발 4,000여 m 위에 넓게 펼쳐진 알티플라노 고
원 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리상의 척박함 때문인지 매년 1월 24일은 알라시타가 시작되는 날
스페인 정복자들이 볼리비아에는 많이 정착하지 않아 남미에서도 매년 1월 24일은 라파스의 대표 원주민인 아이마라인들의 큰
원주민 비율이 가장 높고, 원주민의 풍습이나 문화를 상당 부분 유 축제인 알라시타Alasita가 시작되는 날이다. 알라시타는 농사의 풍년,
지하고 있다. 풍요 그리고 행운을 빌던 축제로 스페인 식민지 이전부터 지켜지던
것이니 꽤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오래된 축제는 지난 2017년
붉은 벽돌집, 그리고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만나볼 수 있는 라파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하였다.
라파스는 알티플라노 고원에서 밥공기처럼 푹 꺼진 곳에 자리 알라시타는 아이마라어로 ‘쇼핑’을 뜻하는데, 다가오는 새해에 자신
한 도시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4,000m, 낮은 곳도 3,400m에 이 이 가지고 싶거나 이루고 싶은 것들의 미니어처를 ‘사는’ 축제다. 지
르는 공기마저 희박한 고산도시이다. 동네만 들어도 사는 형편을 대 금은 아이마라인들뿐만 아니라 파세뇨라고 불리는 라파스 사람들,
략 유추할 수 있는데, 부유할수록 낮은 곳에 살고, 가난할수록 높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볼리비아 전역에서 즐기는 축제가 되었지만, 축
곳으로 올라가 다닥다닥 모여 살기 때문이다. 가난한 동네에는 붉은 제다운 큰 축제가 펼쳐지는 곳은 라파스의 구도심인 ‘센트로’다. 이
벽돌로 대충 짓다 만 집들이 대부분이다. 벽돌 외벽에 페인트칠하거 곳에서는 거의 한 달 가까이 축제가 이어진다.
나 다른 외장재로 마감할 경우에는 더 비싼 세금을 내야 하는 관계 축제가 있는 일요일, 그러니까 시장의 일요일은 보통의 일요일과는
로 일부러 미완성의 집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전 전혀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일요일에는 문을 닫던 상점들이 축제가
부가 붉은 벽돌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붉은색 일색이다. 세 있는 날에는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이한다. 각종 노점상까지 빼
금을 덜 내려는 고육지책의 결과이긴 하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 곡히 자리를 차지해 그 인근은 어느새 차와 사람들로 북적인다.
다. 라파스만의 분위기는 그곳 원주민들의 의상에서도 드러난다. 풍 시장에는 많은 사람이 꿈꾸는 집과 자동차를 비롯해 볼리비아 지폐
성한 긴 치마의 ‘촐리타’라는 전통 의상과 모자, 길게 땋은 머리 등을 와 달러가 있고, 결혼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신랑, 신부 미니어처가
두고 하는 말인데, 그렇다고 청바지나 미니스커트와 같은 현대식 복 있고, 아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아기 미니어처가 준비되어 있
장과 부조화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 의상과 현대식 복장이 한자리에 다. 그뿐만 아니라 해외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여권과 달러가
어우러져 있어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 곳, 오히려 자연스러운 가득 든 미니어처 가방이 있고, 학위가 필요하거나 시험에 합격하길
곳이 라파스이다.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미니어처 학위증이 있다. 또 신용카드 만들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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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돼지에 지폐 미니어처가 꽂혀있다. 볼리비아에서도 돼지는 부를 상징한다.


3 아기를 간절히 바라는 부부들을 위한 예쁜 아기 미니어처
4 운전면허증을 따기도 어렵고, 자동차 사기도 어려워 더욱 인기 있는 자동차 미니어처
5 지폐 미니어처에 둘러싸인 코파카바나의 검은 성모상
6 아추마니 시장에서 집과 자동차 미니어처도 인기 품목 중 하나다.

어려운 나라라 그런지 신용카드 미니어처도 등장해 눈길을 끈다. 사 카드에 둘러싸여 있는 미니어처이다. 성전 앞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람들은 이처럼 다양한 미니어처 상품 중에서 자신이 새해 꿈꾸는 것 을 내쫓았던 예수님이 돈과 신용카드로 장식된 성모 마리아를 보고
을 고르고 산다. 그런다고 당장 꿈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 있다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자못 궁금해진다. 전
가는 이루게 되길 희망하며 기꺼이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체 국민의 95%가 가톨릭 신자인 볼리비아지만 가톨릭과 원시 신앙
이 묘하게 혼재되어 있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성모 마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검은 얼굴 성모 마리아 미니어처 리아 미니어처가 대표적으로 그런 현실을 보여준다.
알라시타의 중심에는 ‘에케코Ekeko’라고 불리는 작고 뚱뚱한 난 가지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들의 미니어처를 구입하고 나면 한쪽에
쟁이 캐릭터가 있다. 이 캐릭터를 두고 아이마라 사람들은 풍요와 서 전통 의상 차림으로 대기하고 있는 주술사에게 그것을 가져가 그
부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주로 전통 의상을 입고, 입에는 담배를 물 들의 축복을 받는다. 주술사는 숯불을 피우면서 그 연기 속에서 미
고, 몸에는 지폐나 여행 가방 그리고 술병 등을 주렁주렁 매단 모습 니어처를 흔들며 축복을 의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기도를 드린다. 그
을 하고 있는데, 축제 기간이 아니어도 많은 상점에서 쉽게 볼 수 있 과정에서 향신료나 강한 알코올 등을 뿌리기도 해, 주술사들이 모여
다. 하지만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에케코가 아니라 남미에서 가장 있는 자리에는 매캐한 연기가 가득하다. 주술사들의 축복을 받기 위
큰 호수이자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인 티티카카의 항구도시인 해 매캐한 연기 속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
코파카바나에서 유명한 검은 얼굴 성모 마리아가 각종 지폐와 신용 노라면, 자율주행 자동차가 다니고 드론이 물건을 배달하는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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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있는 다른 나라들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여겨진다.
주술사의 축복을 받았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성당으로 몰려가 신부님의 축사까지 받는다. 이
처럼 스페인 정복자들이 전파한 가톨릭이라는 종교와 원주민들이
조상 대대로 믿어온 토착 신앙이 묘하게 섞여 있는 모습은 언제보아
도 흥미롭다.

알라시타를 기다리고 즐기는 모든 이에게 축복이 있기를!


라파스 사람들은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매해 알라시타를
기다렸다가 자신들이 원하는 미니어처를 사는 데 지갑을 연다. 가진
것이 없을수록 가지고 싶은 것이 더 많은 웃픈(?) 현실 때문에 미니
어처를 사느라 꽤 많은 돈을 쓰기도 한다. 처음 그런 모습을 보았을
때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매해 원하는 미니어처를 사고, 주
술사의 축복으로도 모자라 신부님의 축사 기도까지 받고도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원망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하지
만 라파스에서 몇 해를 보내면서 ‘삶의 의지를 새롭게 하는 것’, 그것
이 그들이 알라시타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고원지대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오랜 시간 살아 5

온 라파스 사람들에게 경제적 ‘부족’이나 ‘결핍’은 공기 속 낮은 산소


만큼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그런 팍팍한 현실 속
에서 일 년에 한 번 펼쳐지는 알라시타 축제는 가지고 싶고, 이루고
싶은 미니어처를 구매하는 행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 이상
의 의미, 즉 새해를 살아갈 새 힘을 얻는다는 점에서 알라시타에서
의 지출은 남는 장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것 말고
도 알라시타는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축제다. 알라시타가 수
백 년 동안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건 그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이 원하
는 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이루어지지 않
은 꿈을 매해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꿈을 꾸고 희망을 가지는 볼리비
아 사람들의 긍정의 힘이 덕분에 알라시타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
다는 생각도 든다.
알라시타 축제 동안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구매하는 미니어처들
이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라파스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길, 그 희망
이 꿈의 실현으로 이어져 그들의 삶이 평안해지길 주술사도 신부님
도 아니지만 빌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 김혜은 자유기고가

사진 김혜은, 셔터스톡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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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칼럼

위드With 코로나 시대,


다시 여행을 기획하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을 빼앗은 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여행사들의 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이제는 코로나19가 종식되기를 기
대하기보단, ‘함께’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를 고
민해야 할 때인 듯하다.

“코로나 이전의 여행으로 돌아갈 수 없다” 말했다. 여행사들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고 찾아내
하늘길이 막히고 여행사들은 작년 초 대혼란의 시기를 보내며 야만 한다.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다.
생존을 위해 급하게 국내 여행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행 서비스 콘텐츠를 살펴보면 매력적인 국내 여행콘텐츠가 생각 로컬 여행콘텐츠는 무궁무진한 기회 있는 셈
보다 많지 않다. 이는 국내 여행콘텐츠가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이 코로나19가 발발한 후, 어느 한 여행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종식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국내 국내 여행 콘텐츠를 급하게 찾는 전화였다. 서비스를 살펴보니 해외
여행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일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행 중심의 여행콘텐츠가 국내 여행콘텐츠로 바뀌어 있었다. 위기
여행산업의 판이 바뀐다는 것이다. 에어비앤비의 공동창업자 브라 에 굴하지 않고 빠르게 결단을 내리고 사업모델을 바꾸는 것에 감탄
이언 체스키는 “다시는 코로나 이전의 여행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해외여행아웃바운드 콘텐츠를 기획하다 국내 여행콘텐츠를 갑자
기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해외여행과 국내 여행은 그 대상
의 성격과 타겟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향후 몇 년간은 국내 여
행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이고, 해외여행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의
관심 끌 수 있는 로컬 여행콘텐츠를 만들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내야 한다.
최근 여행업계에서 다양한 여행콘텐츠가 만들어지고 있는데, 콘텐
츠 소비 패턴이 매우 다양하다. 영화관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여행지
를 경험해보는 콘텐츠, 퇴근 후 즐기는 전문 가이드 여행콘텐츠, 온
라인으로 지역 축제에 참여하는 콘텐츠, 랜선 라이브 여행 등 새로
운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위기에 빠르게 적응하
고,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컬 여행콘텐츠가 이렇게 높은 관심을
받았던 적이 있었나 싶다. 다시 말해, 오히려 로컬 여행콘텐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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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무진한 기회가 있는 셈이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서 나만의 경쟁 악플이 달릴 정도였는데, 우려와는 달리 전국 일주 상품이 완판되며
력 있는 콘텐츠를 만든다면 코로나 이후 새로운 판의 주인공이 될 고객들의 응원 댓글이 쏟아졌다. 여행업계 관계자들 모두가 놀라워
수 있을 것이다. 했던 상품이었다. 이 여행상품은 왜 완판되었을까? 물론, 코로나19
로 여행을 가지 못해 억눌렸던 사람들의 보상심리로 소비가 일어난
온라인 콘텐츠는 선택 아닌 필수 것도 있겠지만, 이 여행상품을 만든 대표자의 진정성이 콘텐츠에 잘
지난해 10월, 약 8개월간 중단했던 로컬 투어 운영을 재개하려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45인승 버스
고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진자 증가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2.5단 에 최대 25명 출발로 안전성을 강조했고, 여행 일정 중 방역에 대해
계로 격상되면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준비했던 투어를 취소하거 서 철저히 준비하며 고객들에게 신뢰를 얻은 것이다. 코로나19로 다
나, 온라인 콘텐츠로 변경하는 방법뿐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단 2주 른 사람과의 접촉에 예민해진 사람들에게 여행상품을 판매하기 위
였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급하게 온라인 랜선 여행으로 콘텐 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방역 지침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것을 콘
츠를 변경했다. 계획에 없었던 온라인 여행콘텐츠 준비를 위해 카메 텐츠에서 보여주어야 하고, 안전한 여행이라는 것도 어필해야 한다.
라와 마이크, 삼각대 등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태국 방콕의 한 리조트에서는 체크인부터 체크아웃 때까지 코로나
못한 상황에 밤을 새우며 라이브 방송 장비를 공부하고 온라인 방송 19를 대비하는 전체 과정을 보여주는 홍보영상을 만든 사례도 있다.
을 연습하며 불안감이 엄습했다. 랜선 여행을 준비하며 온라인 콘텐 현재 그 리조트는 예약이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한다. 앞으
츠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코로나19 상황이 로는 코로나19 방역이 여행을 떠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
예측 불가능하기에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콘텐츠 을까 예상한다. 고객이 믿고 갈 수 있는 여행이 되려면, 콘텐츠에 고
를 준비해야 한다. 객의 안전을 최우선 하는 진정성이 담겨야 한다. 진심은 통한다는
숙박 공유업체 에어비앤비는 지난해 온라인 체험 상품을 판매하며 말을 믿는다. 2021년에는 힘든 시기를 겪은 여행·문화업계에 좋은
전 세계 고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화상회의 플랫폼 ‘줌’을 통해 전 세 소식이 들려오길 기대해본다.
계 여행객과 호스트를 연결해주는 것인데, 이탈리아 할머니의 파스
타 요리 레시피를 온라인으로 배우는 체험이 주간 $2,000약 220만 원
의 매출을 만들 정도로 인기가 좋다고 한다.
온라인 콘텐츠는 시공간을 초월해 누구나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
라, 코로나 시대에 가장 적합한 경험 콘텐츠이다. 다만, 오프라인에
서 느꼈던 여행의 현장감과 감동, 만족을 주기에는 부족할 수 있어
고객 만족도를 끌어올릴 수 있도록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또한,
온라인 콘텐츠를 기획할 때 스트리밍 라이브 방송으로 진행하거나,
화상회의를 이용해 진행하는 방법 중 때에 따라 적절한 플랫폼을 선
택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온라인 랜선 여행에 대
한 사람들의 관심과 반응이 크지는 않지만, 점점 이런 콘텐츠에 익
숙해지고 있는 듯 보인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다양한 소셜미디어
채널을 이용해서 쉽게 시작할 수 있다.

‘위드 코로나’, 콘텐츠에 진정성을 담아서


지난해 가을,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24박 25일 국내 전국 일주
여행 상품을 출시한 여행사가 있었다. 처음에는 '미친 것 아니냐'는 글 김태현 푸디온(foodieon)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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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북한 사 회 문 화 읽 기 ㉓

1987년 9월, ‘쁠럭불가담 및 기타 발전도상 나라들의 평양영


화축전’으로 시작된 ‘평양국제영화축전Pyongyang International Film
Festival, PIFF’은 북한 유일의 국제영화제이다. ‘자주, 평화, 친선’을

김정은 시대, 이념으로 내세우는 이 영화제는 2002년 이후 짝수 해에만 개최


해 왔는데, 북한 당국은 돌연 2018년에 이어 2019년에도 축전제

북한의 국제 문화교류 ② 17차을 진행하면서, 앞으로는 매년 개최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근


래 북한 영화계가 ‘제2차 조선영화혁명’《조선예술》 2018년 2호 운운하

- 영화, 교예, 미술 및 도서 부문 고 있어, 심하게 위축되어 있는 북한 영화예술계를 다시 부흥시


키기 위한 방책 중 하나인지,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이 글의 인용문은 북한 맞춤법 규정에 따라 표기한 것으로 우리나라 맞춤법


규정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14년 제14차 평양 국제영화축전 대회의 개막식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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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적으로 외화外畫 상영되는 평양국제영화축전 화제에서 상영된 적이 있고, 국내 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다.
평양국제영화축전은 통상 9월 중순부터 8일간 개최되는데, 주민들이 당국의 눈을 피해 스마트폰, 컴퓨터 등 각종 개인기기
장편과 단편 예술영화극영화 경쟁, 기록영화다큐멘터리와 만화영화 를 통해 한국과 미국의 영화를 감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경쟁, 특별상영과 통보상영, 그리고 북한 영화 구입과 합작을 위 북한에서 축전 외에 공개적으로 외국영화가 상영되는 경우는 극
한 영화교류회와 북한 영화 시사회가 진행된다. 북한 언론들은 히 드물다. 조선중앙TV에서 중국이나 소련 등 구 공산권 국가의
축전에 대해 매번 “나라들 사이의 영화예술 창조에서 이룩한 성 영화를 방영해 주는 경우가 가끔 있고, 우호국과의 상호 협정체
과와 경험을 나누고 교류와 협조를 강화하며, 진보적 영화예술의 결 기념일을 맞이하여 간혹 진행하는 ‘영화상영주간’ 행사가 있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데 이바지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반 을 뿐이다.
복해 오고 있다. 축전 기간에는, 주로 개·폐회식이 진행되는 평양
국제영화회관은 물론, 대동문영화관, 개선영화관, 락원영화관, 청 예술 장르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서커스교예’
년중앙회관, 봉화예술극장에서 북한의 영화애호가들과 외국 손 북한에서는 서커스Circus: 곡예를 ‘기교예술’을 줄여 교예巧藝라
님들이 출품된 영화들을 관람한다. 고 부르는데, 예술 장르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북한이
한편 평양국제영화축전에 참가하는 나라와 단체 수, 그리고 출품
작품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 언론
매체들은 2012년 제13차 축전 당시 50여 개 나라·단체에서 300 북한 국립교예단 공연

여 편을 출품했다고 밝혔고, 2014년제14차에는 40여 개 나라·국제


기구에서 100여 편을 출품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2016년
이후에는 구체적인 규모는 밝히지 않은 채, “수십 개 나라들에서
영화들이 출품되였다”, “우리 공화국과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출
품한 많은 영화들이 상영된다”고만 보도했다. 선전에 능한 북한
언론의 특성상, 그리고 국제사회의 냉각된 대북 시선과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 등을 고려할 때, 영화제의 규모는 계속 축소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축전 참가자들은 참관관광과 친선유희 오락경기대성산유원지, 묘향산, 평
양시체육촌 등지, 연회를 갖는데, 그동안의 참관 코스는 금수산태양궁
전, 만경대김일성 생가, 주체사상탑,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 혁명
사적관, 영화촬영거리, 만경대학생소년궁전, 평양교원대학, 태권
도 성지관, 자연박물관 등이었다. 영화제의 대상인 최우수 영화
상은 모두 예술영화극영화 부문에서 나왔다. 제13차와 제14차는 독
일 영화, 제15차는 북한 영화〈우리 집 이야기〉가 받았고, 제16차는 중
국 영화, 제17차는 이란 영화가 받았다. 지난해 열릴 예정이던 제
18차 축전은 취소되었다.
김정은 정권이 출범한 2012년, 제13차 축전에서 연출상을 받은
북한·벨기에·영국 합작 〈김동무는 하늘을 난다Comrade Kim goes
flying〉가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그리고 특별상을 받은 북중 합작
〈평양에서의 약속平壤之約〉이 베이징국제영화제와 상하이국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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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예를 중시하는 것은 “통속성의 보장을 통해 작품의 인민성을 두 단체 모두, 해외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들 단체의 단원들 대부
높임으로써 예술의 인식·교양적 가치를 극대화한다”는 문예정 분은 평양교예학교1972년 6월 설립 출신으로, 10세 안팎에 선발되어
책 노선에 따른 것인데, 특히 교예가 인간의 창조적 노동의 산물 9년 과정의 전문교육을 거치게 된다.
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예술적 위상과 당국 북한은 교예를 체력교예, 희극교예, 요술, 동물교예로 분류하고
의 육성 의지에 힘입어 오늘날 북한 교예는 세계 최정상 수준에 체력교예는 다시 지상, 공중, 빙상, 수중에서 하는 교예로 나누고
올라 있다. 매년 각종 국제교예축전에서 최고상을 받고 있는데, 있는데, 국제대회에서의 수상은 모두 공중 체력교예 종목에서 나
김정은 정권이 출범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매년 3개, 그리고 오고 있다. 2012년 이후 최고상을 받은 국제교예축전횟수, 명칭 중 ‘국
2015년에는 무려 5개 국제대회에서 최고상을 획득했다. 2016년 제교예축전’ 생략은, 러시아 ‘이돌’5회, 중국 ‘우차오吳橋’4회, 스페인 ‘금
부터 2019년까지는 각각 2개, 3개, 4개, 2개 대회에서 최고상을 코끼리상구 휘궤라스’3회, 러시아 ‘이 스크’2회 및 2017년 특별상, 중국 ‘우
받았다. 한武漢’2회, 모나코 ‘몽떼까를로’1회 및 2013년 은상과 특별상, 이탈리아 ‘골
북한은 1994년부터 유럽 등지에서 개최되는 상업적 성격의 국제 덴 씨르쿠스’1회, 스페인 ‘발렌씨아’1회, 프랑스 ‘그레노블’1회, 프랑
서커스대회에 참가해 오고 있는데, 국립교예단대외명칭 ‘평양교예단’, 스 ‘마씨’1회, 벨라루시 ‘민스크’1회, 러시아 ‘제1차 국제교예예술축
1952년 6월 창립과 조선인민군교예단대외명칭 ‘모란봉교예단’, 1989년 2월 창립 전’ 1회 등이다. 북한 교예가 강점을 보이는 부문은 공중비행 부문

2010년 북한이 세네갈에 건립한 〈아프리카 르네상스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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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얼마 전 세계 최초로 ‘뒤로 다섯 바퀴 돌아 잡기’ 기술에 성 동상, 건축물들을 건설해 왔다. 만수대창작사 해외사업부Mansudae
공했다고 발표한 것으로 보아, 북한 교예의 국제대회 금상 행진 Overseas Project Group of Companies가 주도하는 이 사업을 통해, 북한은
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2000년 이후 1억 6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중 가장 거대한 조형물은 2010년 4월 초에 개막한 세계
2016년 이후 미술 부문 교류는 단절 수준 최대의 조각품높이 52m 〈아프리카 르네상스 기념비〉세네갈 다카르이
북한에서는 ‘시각예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미술’ 다. 북한은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을 내세워 아프리카 국가들 외
이라는 용어로 시각예술 전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김정은 정권 에도 중동, 동남아, 유럽, 쿠바 등에서도 수주, 외화벌이를 해 왔
출범 이전부터 북한 당국은 미술 부문 국제교류에 상당한 의욕을 으나, UN 제재와 더불어 캄보디아 씨엠립주에 건립한 〈앙코르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2007년과 2008년에 만수대창작사 주도 전경화관全景畵館〉2015년 12월 초 개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추가 사업
로 베이징에 창작관창작 공간과 미술관전시·판매 공간을 개관한 데 이 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어, 2010년에는 미술관 신관을 개관했다. 또 2011년에는 중국 헤
이룽장성黑龍江省 무단장시牧丹江市에 북한화가 중국창작기지를 설 언론보도용 행사, 충성경쟁 차원에서 수없이 개최
립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중국이 개최한 국제미술전에 출품하 북한 언론들은 김일성 3대를 우러르는 도서나 북한 체제를
여 연이어 최고상을 받는가 하면, 북한화가 개인 전시회도 가졌 찬양하는 도서, 그리고 김일성 3대가 집필했다는 《불후의 고전적
다. 중국 위주로 진행되기는 했지만 러시아, 유럽 등지에서도 북 로작》들이 여러 나라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거나 신문이나 인터
한미술 순회전과 경매를 진행했고, 일본, 호주와도 한두 차례 미 넷에 게재되고 있다고 선전해 오고 있다. 또 러시아, 중국, 동남아
술 교류를 했다. 시아 국가들에서 북한도서 기증식을 진행하고는 이를 꼼꼼히 보
그러나 북한의 미술 부문 국제교류는 김정은 정권이 출범한 이후 도하는 한편, 재외 북한대사관 공관 등지에서 개최하는 소규모
에도 여전히 중국 편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2년부터 도서, 그림, 수공예품 전시행사나 우상화나 체제선전 위주의 영
2015년 사이에는 중국 내 몇몇 시市에서 북한미술 전시회와 경매 화 상영회까지 국제 문화교류 행사로 선전하고 있다. 이 행사들
가 이루어졌고, 베이징 조선투자사무소 내에 과학기술문화교류 은 김일성 3대와 관련된 계기생일이나 각종 직위 취임 기념일 등나 정권·당
중심해외문화원 역할을 설치했으며, 상해 도자기예술박람회 수상, 조 창건일 등에 맞춰 현지의 북한 대사관과 제3세계의 공산주의계
일朝日 어린이그림 전시회 재개, 영국주재 북한대사관 미술전시회 열 단체, 주체사상 연구조직, 북한과 거래하고 있는 민간기업, 친
등의 행사가 진행되었다. 한편 조선미술박물관에 있어야 할 ‘국 목회, 기타 비정부단체가 주최한 대내외 선전용, 언론보도용 행
보급’ 미술품이 중국 경매장에 나타나는 등 모작과 위작 시비가 사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행사들은 서구 이외의 나라에 주재하는
잇따르자, 북한은 2011년 이후부터 북한 내 200여 곳의 미술창작 북한 대사관들이 충성경쟁 차원에서 매해 수도 없이 개최하고 있
사 중 만수대창작사, 백호창작사, 문화성의 3곳만 미술품의 해외 는데, 북한 언론들은 이를 빠짐없이 보도하여 마치 여러 나라와
반출을 허용하고 있다고 한다. 지역의 주민들이 김일성 3대를 우러르고 존경하고 있는 것처럼
2016년 이후에는 UN 안보리가 주도한 대북제재가 본격화됨에 포장, 선전하고 있다. 이와 같은 ‘허접한’ 전시회와 상영회의 진행
따라, 미술 부문 국제교류도 거의 단절되었다. 2016년에 영국 민 과 보도가 과연 국내외적으로 얼마나 체제를 선전하는 효과가 있
간단체의 도움으로 평양에 장애인디자인학교가 개교했고, 2019 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년에 평양에서 북한 학생들과 재일동포 학생들의 어린이그림전,
베이징에서 김정은의 중국방문 1돌 기념 북한 문화전람회, 중국
내 몇몇 시市에서 조중북중외교관계 설정 70돌 기념 북한 문화전
람회가 진행되는 정도에 그쳤다. 한편 북한은 1975년 소말리아
글 오양열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초빙석좌연구위원
에 〈하싼왕 기마동상〉을 건립한 이래, 아프리카 각국에 기념비와 사진 연합뉴스, flickr@Uri Tours,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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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 LENDA R
문 화 달 력 2021 01
SUN MON 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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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화원연합회
■ 지방문화원

※ 코로나19로 인해
1월 행사가 취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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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 THU FRI SAT
1 신정 2 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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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4 15 16

20 대한 21 2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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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 W S 《임실의 돌문화》 집필 이상훈 ㅣ 발행처 임실문화원

U RIM U N HWA
예로부터 돌은 인간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일

상생활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무덤에 쓰여 사후의 안주처로 이용되

기도 하였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의 생활 속에 돌은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특

히 임실군은 신평면 상가마을 윷판형 암각화, 신평면 호암마을 호석, 신덕면 수

천마을 거북돌 등 다양한 돌문화가 남아있는 고장이다. 임실문화원은 관리 소

홀로 사라져가는 문화유산을 기록하고자 임실의 돌 문화를 중점적으로 조사하

여 《임실의 돌문화》를 발간하였다. 이번 조사는 바위나 작은 돌을 인위적으로

가공하거나 자연적으로 있으면서, 마을을 수호하거나 뜻이 있어 문자 없이 세

워놓은 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하였다.

《신미동학시 영덕 수호에 관한 시첩》 엮은이 권호기 ㅣ 발행처 영덕문화원

고종 8년1871 3월 10일, 동학도가 한밤중에 영해寧海 아헌衙軒으로 난입하여

부사府使 이정을 살해하고 영덕 읍성으로 진입하려 하자, 당시 영덕 현령

정중우가 관민 300여 명과 합심해 7일 동안 전투를 벌여 큰 피해 없이 영

덕을 수호했다. 이후 향내 인사를 불러 관아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를

열고, 승리의 사실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향내 선비들과 시를 지었다. 영덕

문화원은 그때 지은 시들을 모아 《신미동학시 영덕 수호에 관한 시첩》을

발간하였다. 시첩에는 무기를 들고 읍성을 수호하는 장면을 그린 읍성지

도와, 사변의 전말을 간략하게 적은 정중우의 서문, 선비 신홍철을 비롯해

총 52인이 지은 칠언율시 54편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문화》 과월호를 찾습니다~!


한국문화원연합회는 2022년 창립 60주년을 앞두고 《우리문화》 영인본 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
해 《우리문화》 과월호를 찾고 있사오니, 책장 깊숙이 자리한 월간 《우리문화》를 발견하시면 02-704-4611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찾고 있는 《우리문화》
① 1989년 1월호(통권 3호) ② 1991년 7월호(통권 33호) ③ 1997년 9월호(통권 107호) ④ 1998년 2월호(통권 112호)
⑤ 1998년 12월호(통권 122호) ⑥ 1999년 10월호(통권 132호) ⑦ 2013년 여름호(통권 239호) ⑧ 2014년 여름호(통권
243호)

편집후기

소처럼 여유롭게, 편집주간 한춘섭

매일 뉴스마다 확진자 통계발표가 공포의 수준이 되고 있다. 제발, 새해는 악몽이듯 사라졌으면 좋겠다.
2021 01

문화 가족의 신축년辛丑年 희망 메시지는 멋진 한복을 입고, 마을 길 서원書院 가는 길 따라, 팔도 음식 맛집

을 찾는 문화인들의 정서를 위해, 큰 대문 활짝 열어 맞이하고자 한다. 이달의 특별 인터뷰는 일랑一浪 이종

상 화백의 올곧은 삶을 살펴보았다. 붓 하나로 나라 사랑의 신념을 그려 온 소중한 뜻을 《우리문화》에 실었

다. 기회에 독자들도 수준 높은 문화 향기를 가득 담아 가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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윷놀이
Yunnori

ISSN 1599-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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