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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R IMU N H WA

우리문화 2 0 2 1 0 9
202 1 0 9

6 VO L .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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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돌 Maetdol 존

|

곡식을 가는 데 쓰는 기구. 맷손을 돌리면 두 맷돌 사이로 곡식이 곱게 갈린다.


©국립민속박물관



09
여름 끝자락에 먹은 콩국수는
어릴 적 할머니가 맷돌에 갈아준 콩물 맛이 났다.
느릿느릿 돌아가는 둥글넓적한 돌 사이로 흘러나오던 콩물은
고소하고 담백하면서 자잘한 콩 알갱이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맷손’이라는 손잡이를 돌려 곡식을 갈던 맷돌에는
콩국수 한 그릇이라도 겸손하게 비우게 하는 힘이 배어 있다.
표지 이야기

맷돌은 마른 곡식을 갈아 가루로 만들거나 물에 불린 곡식을 갈 때 쓰이는 방아기구다. 두 개의 위짝암쇠과 아래짝수쇠 돌을 마주 놓고


벗어나지 않도록 한 다음, 구멍에 곡물을 넣고 맷돌채를 잡고 위짝을 돌리면, 갈린 곡물이 맷돌 아래의 함지로 흘러 떨어진다. 맷돌의
형태는 지방에 따라 다양하며, 강원도 산간에는 통나무로 만든 나무맷돌도 있다. 콩이나 팥, 메밀 등의 곡식을 갈아 부드럽게 먹을 수
있도록 돕는 맷돌은 천천히 오래 돌려야 한다. 한 바퀴, 두 바퀴… 맷돌이 정성스럽게 거둔 곡식을 잘고 연하게 갈아 놓는다.
사진. 최호식 — 소장처. 국립민속박물관
다름과 닮음

닿다
4 시선 1 20 우리 고미술을 만나다 MEETING OUR OWN ANCIENT ART
전통문화의 ‘한’골탈태 | 조인선 추림쌍치 | 장진성

A Pair of Pheasants in an Autumn Forest | Chang Chinsung


6 시선 2
지키고, 활용하고, 뛰놀고, 2021세계유산축전 | 채소라 22 방방곡곡 유랑기 WANDERING AROUND THE COUNTRY
도심 속 쉼표, 성북동 골목을 걷다 | 김소연
14 곁엣사람
사그라지지 않는 유일함으로 낙화의 명맥을 잇다, A Reprieve in the City Walking the Alleys of Seongbuk-dong | Kim Soyeon

김영조 낙화장 | 강진우


30 지역문화 이야기 LOCAL CULTURE STORIES
소슬바람 불어오면 제주인은 촐을 거두고 | 고광민

When the Autumn Winds Blow, Chol is Harvested on Jeju Island | Go Gwangmin

38 문화탐구생활 CULTURAL EXPLORATION


중생의 목마름 덜어주는 자비의 상징 ‘정병淨甁’ | 신명희

Kundika: A Symbol of Benevolence That Relieves Sentient Beings of Their Thirst


| Shin Myeonghui

44 한국 삶 LOVING KOREA

14
팬데믹 시대의 고독 끌어안기 | 나오미 응

Embracing solitude during a pandemic | Naomi Ng

30

월간 우리문화 vol. 299 | 202 1 09


ISSN 1599-4236
* 《우리문화》에 대한 의견은 편집부(eumso@kccf.or.kr)로 보내주세요.
* 게재된 기사 및 이미지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 책자는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아 제작합니다.
U R I MU N HWA * 이 책은 환경을 위해 FSC 인증을 받은 종이(한솔제지 인스퍼M러프)와
친환경 펄프로 생산한 종이(무림제지 네오스타 백상지)를 사용하였으며
A KOREAN LOCAL CULTURE
MONTHLY MAGAZINE 콩기름 잉크로 인쇄하였습니다.
나아가다
70 문화, 지금
언제 어디서나 따로, 함께 OTT파티 | 라제기

74 문화에세이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물다 | 김수정

78 숨은 문화 찾기

50
소중한 우리 동네 문화재,
평택 용이·죽백동 유적 | 이우진
동해와 송림을 발밑에, 울진 월송정 | 박지성

80 문화소식
문화소식 및 편집후기

70
동하다

48 시와 사진 한 모금
집 | 이선식

50 문화원 탐방
새로운 문화와 역사의 융합, 세종 | 김소연

58 지역문화 확대경
서산 볏가릿대 세우기 | 남향

62 맛있는 한국
천 가지 근심 잊는 전통주 한 잔 | 이성희

66 문화끼리
이름을 남기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인장과 사인 | 오민준

66
발행인 김태웅
발행일 2021년 9월 1일
편집고문 권용태
편집주간 한춘섭
편집위원 곽효환, 김두섭, 김시범, 김종, 유경숙, 장진성, 지두환
편집담당 음소형
발행처 한국문화원연합회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9(도화동, 성우빌딩) 1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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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1984년 7월 12일
등록번호 마포,라00557
기획·디자인·제작 (주)에이지커뮤니케이션즈 02-763-8600
시선 1

전통문화의
‘한’골탈태
韓 骨 奪 胎

<아리따운 우리 한복전>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아리’가 입은 한복을,
국가무형문화제 4인과 한국화 작가가 협업해 실제 한복으로 재탄생시켰다.

‘새로움’과 ‘전통’은 이질적인 의미로 대립할 것 같지만, 최근 우리 전통문화가


다채롭게 펼쳐지는 양상을 보면 과연 ‘한’골탈태라 할 만하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미디어의 발달이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욱 다양한 콘텐츠로 나타나면서 전통문화 역시, 젊은 세대를 기반으로
새롭게 소비되며 주목받고 있다.

4
전통과 디지털이 만나다 한복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또한 명장들의 제작 여정을 담은
‘환골탈태換骨奪胎’는 낡은 제도나 관습 따위를 고쳐 모습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가 하면 《보그코리아》를 통해 매력적인
나 상태가 새롭게 바뀐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사자성어다. 갑 한복 화보를 공개하기도 했다. 화보에는 한복의 아름다운 디자
작스럽게 이 단어를 꺼낸 이유는 최근 MZ세대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 인은 물론, 전문 모델과의 협업을 통해 게임 속 캐릭터가 한복을
로부터 확산해 K-힙HIP으로 급부상한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뜨 입은 실존 인물로 환생한 듯한 이색적인 모습을 담아 냈다.
거운 관심을 보여줄 수 있는 단어로 적절해 보이기 때문이다. 옛
것, 전통, 전통문화는 고루하고 진부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가상과 실제를 넘나드는 전통의 미래
한국을 넘어 세계 시장에서 한류를 대표하는 장르로, 세계인을 증강현실이란, 정보통신기술ICT을 기반으로 인간의 오감
사로잡고 있는 현상은 전통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함과 아울러 ‘한 을 극대화해 실제와 유사한 경험을 제공하는 미디어 기반의 몰
골탈태韓骨奪胎’라 부를 만한 수준이다. 입형immersive 콘텐츠를 말한다. AR증강현실: Augmented Reality, XR확장
이전까지만 해도 한옥이나 한복, 의례, 공예, 회화, 한식, 전통주, 현실: Extended Reality 등이 증강현실 콘텐츠에 해당한다. 2차원 중심
국악, 연희 등 다양한 분야의 전통문화 신scene에서 중요시된 가치 의 기존 미디어의 한계에서 벗어나 시야, 각도, 형태 등을 극대화
는 ‘보존과 계승’이었다. 하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미디어가 급속 해 3차원 혹은 3차원처럼 구현되는 콘텐츠를 통해 이질적으로
히 발달하고 그 필요성이 절실해지면서, 다양한 매체를 통한 확 느껴지는 시각적 혼돈이 새로운 감각을 자극하는 것이다.
장성을 바탕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관람과 소비가 가능한 디지털 필자는 한복을 주제로 AR기술과 연계한 융복합 미디어 체험을
콘텐츠로 전환해 문턱을 낮추고, 적극적인 소통에 나선 것이다. 기획한 바 있는데, 올해 호주 시드니 초청 전시에 이어 지난 8월
다시 말해 현장감現場感을 중시하는 전통문화와 임장감臨場感이 극 17일부터 29일까지 남산한옥마을에서 개최한 〈AR 사극 한복
대화된 디지털 산업이 만나 가상공간에서 전통을 경험하는 독특 展〉이 바로 그것이다. TV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성균관 스
한 시너지를 통해 전통예술계의 유례없던 빅뱅이 일어난 것이다. 캔들〉·〈구르미 그린 달빛〉, 영화 〈안시성〉·〈간신〉 등 K-드라마
와 영화의 인기와 더불어 해외에서도 반응이 좋았던 한국 전통
한복 명장의 캐릭터 한복 사극 드라마와 영화의상의 제작 과정을 아카이빙해 전시하고,
VRvirtual reality이라고 하는 가상현실은, 어떤 특정한 환경이 관람객은 이 의상을 감상하며 증강현실AR 전용 앱을 통해 전시
나 상황을 컴퓨터그래픽스로 구현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마 된 의상이 등장한 영화 속 명장면과 OST, 작품에 대한 정보 등
치 실제 주변 상황·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는 것처럼 만들어 주는 을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인터페이스를 말한다. 컴퓨터나 모바일을 통해 가상의 공간에서 미디어에 등장한 한복을 새로운 방식으로 감상할 수 있는 실감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VR 콘텐츠가 바로 게임이다. 콘텐츠·디지털 기술과의 접목을 통해 관객은 가상의 공간과 실
최근 게임 캐릭터가 입은 한복을 한복 명장과 협업해 직접 제작 제 공간을 오가며 전통과 미래를 넘나드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하고 디지털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콘텐츠의 외연을 넓힌 있게 된다. 국내 시장을 넘어 세계 시장에서 더욱 강력한 영향
사례가 있다. 라이엇 게임즈의 ‘리그 오브 레전드LOL’의 게임 캐 력이 더해져 ‘감상하는 전통’에서 ‘소통하는 전통’으로 진화하고
릭터 중 구미호 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캐릭터인 ‘아리’가 입은 있는 한국 전통문화의 ‘한골탈태’에 MZ 세대는 열렬히 화답하
한복을 국가무형문화재 4인과 한국화 작가가 함께 작업해 실제 고 있다.

글. 조인선 전통예술 디렉터 — 사진. 라이엇게임즈코리아

5
시선
2

지키고, 활용하고, 뛰놀고


2021 세계유산축전

6
유네스코 등재 세계유산을 주제로 펼쳐지는 세계유산축전이 2021년 제2회를 맞이했다.
지난해에 이어 세계유산을 활용한 전통 행사, 공연, 전시, 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이번 축전은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 시작해 안동, 수원 화성 그리고 제주까지 이어진다.

1 하회마을 만송정 앞에서 부용대까지 이어지는 섶다리. 태풍으로 유실되면서 현재는 안전상 철거되었다.

7
지난해 열린 제1회 세계유산축전이 제주와 한국 공주-부여-익산을 잇는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
의 서원,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개최돼 유네스코에 등 문화의 꽃이라고 불리며, 백제 역사의 흔적이 숨 쉬
재된 국내 세계유산을 알렸다면, 올해는 4개 지역 4개 듯 살아 있는 지역이다.
주제로 세계유산을 활용한 다양한 시도를 선보인다는 지난 8월 13일부터 29일까지 열린 ‘2021 세계유산축
점이 특징이다. 유산이 지닌 역사적 가치를 조명함과 전 백제’에서 현재는 세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져
동시에 세계유산을 활용하는 현대적 관점을 제시한다. 있지만 하나로 연결되는 백제 역사의 흐름을 축전 곳
궁중문화축전으로 대표되는 수도권의 문화유산 활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특히 팬데믹 상황에서 온라
용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것에 힘입어 세 인 축제가 강화되는 상황을 도리어 활용한 점이 주목
계유산축전은 국내 전역에 흩어져 있는 세계유산이 할 만하다. 개·폐막식 등을 공주·부여·익산에서 비대
거점이 되어, 팬데믹 상황 이후에는 관광산업까지 연 면으로 동시 생중계하며, 공산성·정림사지·미륵사지
결할 수 있는 전국적인 문화 축제로 확대될 가능성을 로 대표되는 백제 지역의 세계유산을 한눈에 보여주
보여 준다. 스토리가 있는 유산과 축제가 만났을 때, 었다.
그 확장성은 무한하다.

2
안동

하회마을

선유줄불놀이 하회별신굿 길놀이 무용극 〈로터스 러브〉 Heritage Stage


강가에 배를 띄우고, 세계유산축전의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경성구락부와
자연을 벗 삼아 서로에게 시작을 열어주며 흐르는 하회마을 조선블루스, 정민아 등
술잔을 건네고, 흥이 유산이 가진 가치와 부용대의 절경에서 세계유산을 사랑하는
절정에 오르면 불꽃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허도령과 김씨처녀의 국악팝 아티스트 공연

2021년 9월 4일~9월 26일 향연이 펼쳐진다. 하회별신굿탈놀이 애틋한 무용극 9월 4일, 11일, 25일
9월 4일, 8일, 11일 9월 5일, 18일, 21일, 25일 9월 18일~22일 08:00~19:00
19:30-21:00 18:00~19:00 19:00~20:30
하회마을 부용대앞 백사장 하회마을 하회마을 부용대 특설무대

3 4

2 노을이 지는 안동 하회마을 전경
3 선비들의 시회 〈선유줄불놀이〉
4 안동 하회마을 부용대

8
안동, 그 유구함의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아름다운 건축물과 찬란

역사를 따라서 한 문화에 가치가 있다면, 안동 지역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하회마을은 우리 민족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통의 흐름을 보여 주는 세계유산이다.
세계유산의 가치가 단순히 오랜 시간 남아 있는 건물
또는 장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원과 마을을 중
심으로 이어져 내려온 정신과 전통적 삶에 있는 것이
다. 안동의 축전 역시 이러한 역사적 시대정신을 발
휘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체험자들을 만난다. 서원
체험 프로그램과 선비 정신을 체감해 보는 명상길 걷
기 등 안동에서만 경험하는 세계유산의 가치를 조용
히 되뇌어 볼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기다린다.

5 도산서원 병산서원
6
7
도산서원의 하루 음악회 도산12곡 병산서원에서의 3일
퇴계 이황과 도산서원에서 퇴계선생의 도산 12곡에 서원을 알고 나를
생활했던 유생들의 곡을 붙이고 재해석한 찾는 서원에서의
삶을 재조명하고 다양한 퍼포먼스 공연 3일 체험프로그램
체험하는 프로그램 9월 18일, 19일, 21일 9월 3일, 10일, 24일
9월 18일, 19일, 21일 20:00~21:00 13:00
11:00, 15:00 도산서원 병산서원
도산서원
“특집 라디엔티어링”- 음악극 풍류병산
퇴계 명상길을 걷다 격조와 아름다움을 가진
9월 18일 병산에서 류성룡 선생의
11:00~15:00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음악극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
9월 4일, 5일, 25일, 26일
퇴계명상길 → 도산서원
17:30~19:00
병산서원

5 허도령 탄생설화를 모티브로한 현대무용극 〈로터스 러브〉


6 퇴계선생과 선비의 삶속으로 들어가보는 시간 〈도산서원의 하루〉
7 격조를 지키며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안동의 병산서원의 만대루

9
세계유산과 자연유산,
수원 화성과 제주
4개 지역에서 연달아 진행되는 세계유산축전 인도 체험할 수 있는 특별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은 다양한 종류와 배경을 가진 세계유산을 경험할 수 비공개 지역인 점을 고려해 소수의 인원만 참여할 수
있다는 것에 그 재미가 있다. 특히 국내에서 첫 번째 있지만, 신비의 순간은 더욱 크게 다가올 것이다.
로 세계자연유산을 보유한 제주는 한라산 천연보호 올해 세계유산축전의 마무리를 하게 될 수원은 정조
구역과 성산일출봉,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등이 ‘제주 와 수원 화성, 의궤를 바탕으로 이번 축전을 화려하
화산섬과 용암동굴’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에 등 면서도 풍성하게 그려 낸다. 축전 기간에 화성 일대
재돼 있다. ‘신비의 섬’이라는 별명을 증명하듯 축전 를 정조 시대로 돌려 놓을 여러 프로그램을 선보인
기간에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구간을 공개한 다. 전통을 바탕으로 한 과거의 재현과 미디어아트
다.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평소에는 접근할 수 없는 길 등, 현대 기술을 접목한 프로그램의 조화가 축전 현
과 만장굴, 벵뒤굴의 비공개 구간을 특별 공개해 일반 장을 한층 더 멋스럽게 할 예정이다.

화성행궁

묵적여실, 필묵으로 띄운 만 개의 달
황금갑옷이 상징하는 정조의 이상향과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역사로 거듭난 의궤
기록의 위대함을 표현한 주제공연
10월 24일
19:30~21:00
화성행궁(낙남헌)
수원 화성

2021년 10월 2일 ~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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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행궁광장

정조의 성곽 순행
수원 화성의 밤을 걷다
전기수(傳奇叟)와 수원 화성 성곽을
둘러보며 화성성역의궤, 수원 화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야경을 감상하는 프로그램
10월 2일~10월 23일
회차별 시간 상이
수원 화성 일대

1840명의 장인이 쌓은
의궤 속 장인열전
화성성역의궤 속 등장하는 화성건축의
숨은 주역, 축성 장인들의 직업과
역할에 대해 알아보는 프로그램
10월 2일~10월 23일
13:00~19:00
장안공원 일원

원행을묘정리의궤 이야기
1795, 그날의 화성행궁을 걷다
을묘년 원행행차가 끝난 다음 날 참여객이
화성행궁에 방문한 설정으로, 이야기꾼이
원행과 정조의 뒷 이야기를 들려주고
소규모 연극 및 공연으로 재현하여
보여주는 이동식 공연 프로그램
10월 2일~10월 23일
회차별 시간 상이
화성행궁 일원

신득중정어사
단결의 활, 불꽃 명중하다
정조대왕과 신하들의 활쏘기와
매화포 의식을 그림으로 기록한
‘득중정어사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시각 예술 전시 프로그램
10월 2일~10월 24일
13:00~21:00
화서공원 일원
*기타 프로그램은
2021 세계유산축전 수원 화성 누리집 확인

9
10
11

8 수원 화성의 방화수류정 밖 작은 섬, 용연
9 ‘수원 화성문화제’ 미디어아트쇼
10 주제공연, 방화수류정의 기록 ‘묵적여실(墨跡如實)’
11 수원 화성의 야경을 감상하는 ‘수원 화성의 밤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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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2021년 10월 1일-10월 17일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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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오름용암동굴계

세계자연유산 워킹투어 세계자연유산 특별탐험대 Heritage tour


‘불의 숨길, 만년의 시간을 걷다’ 라는 주제로 만장굴 전 구간 ‘공생’ 이라는 주제로 세계유산축전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보호구역을 걸을 수 1946년 김녕초등학교 교사인 부종휴 선생과 제주의 세계자연유산마을로 지정된 7개의
있는 트레킹 코스. 이 코스는 세계유산축전 그의 제자 30명으로 구성된 탐사대가 마을이 함께, 축전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제주를 위해 축전 기간 동안에만 한시적으로 최초로 만장굴을 발견했다는 이야기의 세계자연유산마을 연계 프로그램.
개방된다. 거문오름에서 시작된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특별 탐험 프로그램 7개의 세계자연유산마을 일대 및 지정 장소
용암의 흐름을 따라 월정리 해안까지 약 〈탐사코스〉 만장굴 3입구 → 만장굴 2입구→ (선흘1리, 선흘2리, 덕천리, 행원리, 월정리,

26km에 이르는 코스로, 4개의 구간으로 만장굴 1입구 김녕리, 성산리)

나누어져 있으며, 각 구간별로 서로 다른 9월 10일~12일 / 10월 8일~ 10일 *확정 일자와 장소 및 운영시간은 누리집 참조

만장굴 & 김녕굴


자연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불의 숨길 아트 프로젝트
1구간: 시원의 길
거문오름용암동굴계의 대표 동굴이라고 ‘불의 기억 - 자연, 인간, 생명의길’이란
2구간: 용암의 길
3구간: 동굴의 길 할 수 있는 만장굴과 김녕굴을 주제로 거문오름용암동굴계, 한라산,
4구간: 돌과 새 생명의 길 탐험하는 특별탐험 프로그램 성산일출봉의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
2021. 10월 1일~17일 중 〈탐사코스〉 만장굴 2입구 → 만장굴 미공개 상층부 마련되는 특별한 야외조각전시
*단체와 일반인 참가 일정이 다르니 상세내용은 200m 지점 → 만장굴 미공개 하층부 전체 → 만장굴
2021세계유산축전 제주 누리집 참고 1입구 → 김녕굴 내부 / 4시간 코스
10월 2일, 6일, 8일, 13일, 15일

벵뒤굴
세계적으로 가장 복잡한 미로형
동굴에 속하는 벵뒤굴을 전문가와
함께 탐험하는 특별탐험 프로그램
12 사전에 선발된 12명만 참여하는 만장굴 탐험대
13 한라산에서 성산일출봉까지 〈탐사코스〉자연유산센터 → 벵뒤굴 일원 →
6박 7일 동안 걷는 세계자연유산 순례단 벵뒤굴 및 주변 소형 굴 내부
14 2020 세계유산축전 3시간 코스
불의 숨길 아트프로젝트 ‘불의 기억’ 전시작품, 10월 2일, 6일, 8일, 13일, 15일
부지현 〈비추고 반사하다〉 *모든 프로그램은 누리집 사전예약 14

유산의 가치 확장과 활용 필요
지난 7월, 한국의 갯벌이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
됐다는 소식이 연일 보도되었다. 이는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이후 국내에서는 14년 만에 두 번째로 등재
된 세계자연유산이다. 과거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산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이 현대의 의무로 인식
됐다면 지금은 그 가치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활용해
유산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게 힘써야 한다는 인식
이 확산하고 있다. 인식의 변화에 맞춰 세계유산을 그
대로 보존하는 것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유산의 가치
확장과 활용 방안에 대해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
올해 세계유산축전은 세계유산의 가치를 발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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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과 활용 두 가지 방향성을 모두 가져갈 수 있는 기
한라산 세계자연유산 순례단 회로 도약하기를 바란다.

거문오름에서 시작된 용암동굴계의 길과 한라산, 성산일출봉을 대국민


글. 채소라 한국문화재재단 PD — 사진제공. 세계유교문화축전
공모로 선정된 30명이 6박 7일의 기간동안 함께 직접 걷고 야영하며
(사진 1~7), 수원문화재단(사진 9~11),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축전
세계자연유산의 가치를 학습하고 확산시키는 종합 순례 프로그램 사무국(사진 12~14), 김현민(사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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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엣사람

사그라지지 않는 유일함으로
낙화의 명맥을 잇다
국내 유일의 국가무형문화재 낙화장, 김영조

오랜 세월, 전통 예술로 인정받지 못했던 두세 겹으로 붙인 이합지나 삼합지입니다.


낙화를 우리나라 대표 문화재 반열에 올린 이가 있다. 수행이 부족하면 이마저도 구멍이 뚫리거나
지난 201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36호로 인정된 농담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국내 유일의 낙화장, 김영조 장인이 그 주인공이다. 한지의 손상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적당하게
그는 오늘도 변함없이 인두를 잡는다. 태워서 내가 원하는 색감과 깊이를
애써 피워 낸 낙화烙畫의 꽃이 낙화落花하지 않도록. 구현해 내는 것, 이것이 낙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통’에서 스타벅스 텀블러까지


종이를 태우면 나타나는 신세계 낙화는 종이 외에도 나무, 비단, 가죽 등 불에 타
김영조 낙화장의 수묵화에는 붓과 먹이 없다. 그 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든 재료로 활용할 수 있다. 그
의 뜨거운 열정을 닮은 숯 화로와 달궈진 인두가 그 자 렇기에 낙화는 회화인 동시에 공예의 면모도 갖추고
리를 대신한다. 뻘건 인두와 한지가 맞닿으면 불타 버 있다. 김영조 낙화장은 그중에서도 한지를 가장 선호
리는 게 당연하지만, 그가 잡으면 다르다. 정밀 기계 한다. 한지를 그을리면 나오는 특유의 갈색이 그의 마
처럼 매우 섬세한 손놀림으로 한지를 그을리며 수묵 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우리
화의 농담을 표현하는가 하면, 서양풍의 세밀화도 멋 나라의 전통 산수화와 민화에 집중돼 있다. 그렇다고
지게 완성한다. 50년 낙화 외길 인생을 통해 쌓은 그 해서 전통에만 천착하지는 않는다. 2015년 청주국제
의 내공은 이렇듯 멋지게 빛을 발하고 있다. 공예비엔날레에서 시연한 작품 〈視시, See〉는 사진인
지 낙화 작품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정교함을 자
“아무리 한지라도 뜨거운 인두를 가져가면 랑한다. 또 지난 2018년에는 스타벅스코리아와 함께
견디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낙화 작업에 주미대한제국공사관 헌정 텀블러에 낙화 작품을 반
사용하는 한지는 일반적인 한지를 영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14
작업 중인 김영조 낙화장

15
1 이인문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를 12폭짜리 병풍으로
1
2 3 재현한 작품
4 2 3 김영조 낙화장의 〈강산무진도〉 부분
4 중국의 굴정이 그린 수묵화를 낙화로 재구성한 〈하산도〉
5 전통 한지 위에 재탄생시킨 〈맹호도〉
6 2015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에서 시연한 작품 〈視(See)〉
7 스타벅스코리아와 협업한 주미대한제국공사관 헌정 텀블러

16
5 “낙화는 최소 20년 동안 수련해야 튼튼한
밑바탕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6
7

저 역시 오랜 시간 다양한 기법을
연습하면서 낙화를 알리려고 애써 왔는데요.
문화예술계의 여러 장르를 오가며
국내뿐 아니라, 해외 예술제에서도 낙화의
진면목을 널리 알릴 수 있어 기쁩니다.”

작품 속에 녹아든 끈기와 몰입
낙화의 작업 과정은 일반적인 그림보다 지난하
다. 작품을 구상한 후 스케치하는 데까지는 여느 회화
와 똑같지만, 이후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먼저 화로
에 고품질의 참숯을 올린 후 풍로를 돌려 불을 피워야
한다. 인두를 달구기 위해서다. 인두는 점과 선을 그
릴 때 쓰는 앵무부리인두 한 개와 너른 면을 표현할 때
쓰는 평인두 두 개가 한 조인데, 이러한 구성을 3세트
준비해야 한다.

“달궈진 인두를 쓰다 보면 여러 가지
찌꺼기가 달라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0분마다 인두를 바꿔야 합니다.
숯에 불이 잘 붙었다면 그림을 그릴
차례입니다. 인두를 적절한 온도인
800~1000℃까지 높이는데요.
그리기 전에 먼저 인두를 얼굴 가까이
가져가서 적당한 온도인지 체감적으로
파악합니다. 이후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
인두닦개에 인두를 두세 번 문지른 뒤
그림을 그립니다.”

인두는 한 번 달구면 20여 초밖에 사용하지 못


한다. 온도가 낮아지면 재료를 제대로 그을릴 수 없기
때문. 따라서 20초마다 인두를 계속 달구고, 온도를
체크하며, 인두닦개로 표면을 닦은 뒤 그림을 그린다.
한편 그림을 그릴 때도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조
금만 방심해도 한지가 필요 이상으로 타 버린다. 뜨거
운 작업 환경에서의 몰입을 극대화하다 보니, 한 시간
작업하면 30분은 족히 쉬어야 한다. 듣기만 해도 힘든
이 과정을 50년 동안 반복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절
로 고개가 숙여진다.

17
짧게는 1시간, 길게는 1년까지 걸리는 작품을 하다 보면
그림이 안 돼 힘들 때도 물론 있다. 그럴 때마다 김영조 낙화장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다니며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손질을 하면 할수록 더 좋은 작품으로 거듭나는 낙화는
그의 말대로 ‘미련해야’ 한다. 세상의 잣대나 타인의 기준을 대기 전에
먼저 자기 스스로 떳떳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
모두가 인정하는 작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7
4

5
6

① 평인두 낙화 작업의 기본이 ④ 화로 인두를 달구는 데


되는 우리나라 전통 쓰는 작은 화로. 화로가
인두. 넓은 쪽으로 면의 없으면 낙화 작업이
농담을 표현하거나 불가능하다.
옆날로 선을 그릴 때
⑤ 참숯 얼마 전까지 쓰이던
사용한다.
먹탄보다 화력이 세고
② 앵무부리인두 뾰족한 끝부분을 냄새가 덜 나며 불똥이
이용해 세밀한 선을 덜 튀는 고품질의 참숯.
그리거나 점을 찍을
⑥ 풍로 불을 피우거나 숯의
때 사용하는 인두.
화력을 높일 때 화로에
연필꽂이처럼 모양이
바람을 불어넣는
있는 재료에 낙화를
역할을 한다.
그릴 때 더욱 유용하다.
⑦ 인두닦개 인두에 붙은 찌꺼기를
③ 인두받침대 인두를 안정적으로
제거할 때 쓰는 도구.
사용하기 위해 쓰는
인두의 상태에 따라
도구. 동그란 부위에
짚과 사포를 번갈아
인두를 걸어 주면
가며 문지른다.
한층 세심한 작업이
가능하다.

18
“그 과정이 번거롭지만, 낙화의 전통을 이어
가기 위해 이러한 방식을 고수합니다.
한 작품을 그리는 시간도
상당히 긴 편인데요. 2007년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작품 〈강산무진도〉의 경우, 작품 완성까지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작품의
원화 사진을 구하기 힘들었을뿐더러,
세세하게 그려진 대작이다 보니 이를
한지에 그대로 본뜨기까지의 시간도 굉장히
오래 걸렸죠.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개척자의 마음으로 청사진을 그리다


김영조 낙화장은 201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
136호로 인정받았다. 이로써 그는 낙화를 시작한 지
47년 만에 국내 유일의 국가무형문화재 낙화장으로
올라섰다. 크나큰 영광이자 기쁨이지만, 자부심보다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낙화가 우리나라 예술
계의 제도권에 진입한 만큼 이제는 여기에 걸맞은 발
전과 외연 확대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려고 합니다. 낙화의 전승과 보전,
후학 양성에도 힘을 써야겠죠. 재능 있는
후배들이 배출되려면 낙화에 비전이
있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 줘야 합니다.
낙화장으로서 앞으로 더욱 밝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예술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한다. 코로나19로 각종 강


연과 행사가 취소된 요즘, 김영조 낙화장은 오히려
작품 활동하기가 좋다며 그간 구상해 놓은 여러 대작
에 손대고 있다. 1820년, 박창규라는 장인의 등장으
로 낙화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당시 각 사대부 집
안에서 낙화 병풍을 한 점씩은 다 가지고 있었을 정
도였다고. 김영조 낙화장은 조선 시대의 영광이 오늘
날 다시 재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글. 강진우 편집팀 — 사진. 김현민 — 사진제공. 김영조(사진 1~7)

19
우리
고미술을
만나다

추림쌍치 A Pair of Pheasants


秋林雙雉 in an Autumn Forest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는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Kim Hongdo (1745–after 1806) was a court painter who
worked at the Bureau of Painting during King Jeongjo’s
시대에 활동한 최고의 도화서圖畫署 화원畵員이다. 그는 하 reign (1776–1800). Born into a family of middle people
급 무관武官 벼슬을 지낸 중인中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 (jungin; technical specialists and administrative clerks) who

홍도는 10대 후반에 도화서에 들어가 20대 후반부터 두 held government posts as low-ranking military officers, Kim
entered the Bureau of Painting in his late teens and began
각을 드러냈다. 1776년에 정조가 등극한 후 그는 도화서 to distinguish himself as an outstanding painter in his late
를 대표하는 최고의 궁중宮中 화가가 되었다. 왕실과 조정 20s. After King Jeongjo ascended the throne in 1776, Kim
朝廷에 필요한 그림과 관련된 모든 일은 그가 맡았다. 김홍 became the best court painter in the Bureau of Painting,
taking charge of everything pertaining to paintings for the
도는 인물, 산수, 도석道釋, 꽃, 과일, 동물, 곤충, 물고기 그 royal family and court. He was outstanding in every genre
림에 이르기까지 모든 그림 분야에서 탁월했다. 강세황姜 and subject matter. Kim was excellent at painting portraits,
世晃, 1713~1791은 김홍도를 타고난 천재 화가라고 높게 평 landscapes, Daoist and Buddhist subjects, flowers, fruits,
animals, insects, and fish.
가하였다. 일반적으로 김홍도는 풍속화의 대가로 알려져 Considered by Gang Sehwang (1713–1791) to be a
있다. 그러나 그는 풍속화뿐 아니라 다른 그림 분야에서도 painter with natural genius, Kim is generally known as the

뛰어났다. 그가 1796년52세에 그린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master of genre painting. However, he excelled not only at
genre paintings, but other pictures as well. His Album of
속 그림들을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다. 《병진년화첩》에는 Paintings in the Byeongjin Year, painted at age 52 in 1796, is
옥순봉玉筍峯, 사인암舍人巖 등 충청북도 단양丹陽의 명승지 clear evidence of this. The album contains a wide variety of
名勝地를 그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배를 타고 가는 인물들, paintings, including true-view landscapes (topographical
landscapes) that capture the scenic spots of Oksun Peaks
소를 타고 냇물을 건너는 소년, 쟁기로 밭을 가는 농부 등 and Sain Rock in Danyang, Northern Chungcheong Prov-
을 묘사한 풍속화, 매화나무에 앉아 있는 까치들, 논을 가 ince; genre paintings that portray people on a boat, a boy

로질러 나는 백로들을 표현한 화조화 등 다양한 그림들이 crossing a stream on an ox, and a farmer plowing a field; and
bird-and-flower paintings that depict magpies perching on
들어 있다. plum tree branches or white herons flying over rice paddies.
김홍도가 화조화에도 걸출한 능력을 지녔음은 이 화첩에 One of these pieces, A Pair of Pheasants in an Autumn

들어 있는 〈추림쌍치秋林雙雉〉에서 살펴볼 수 있다. 어느 가 Forest, clearly demonstrates Kim’s remarkable talent in


bird-and-flower paintings. The painting shows a mountain
을날 깊은 산속에 개울물은 콸콸 소리를 내며 아래로 흐르 gorge on an autumn day. A stream flows downward, while
고 있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암꿩과 수꿩은 서로 호응呼應 its loud gurgling sound is almost audible. On either side

하고 있다. 커다란 바위 위의 암꿩은 몸을 돌려 수꿩에게 of the stream, a pair of pheasants, a cock and a hen, call to
each other. The hen, sitting on a large rock, has its head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수꿩은 이에 화답하고 있 turned backward as if it is talking to the cock, who appears
다. 암꿩 뒤로는 단풍이 든 나무들이 보인다. 화면 뒤쪽의 to be responding. Behind the hen stand trees tinged with

바위산은 안개에 잠겨 있는 듯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이 autumn foliage. Even further into the background, a rocky
mountain is faintly visible, as though it is enveloped in fog.
그림에 나타난 전경前景과 후경後景의 강렬한 농담濃淡 대 As evidenced in the strong light-dark contrast between the
비, 서로 대화를 나누는 암꿩과 수꿩을 포착하는 데 활용 foreground and the background; the dramatic diagonal

된 극적인 대각선 구도, 서정抒情적인 화면 분위기는 김홍 composition used in depicting the two pheasants, as if in
conversation; and the lyrical atmosphere, this painting is
도가 화조화 분야에서도 대가였음을 보여준다. undeniable proof that Kim Hongdo was a master of bird-
and-flower painting..

Written by Chang Chinsung, Professor of East Asian art in the Department


글.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of Archaeology and Art History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20
MEETING OUR OWN ANCIENT ART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 Kim Hongdo (1745–after 1806), “A Pair of Pheasants in an Autumn Forest,”
〈추림쌍치(秋林雙雉)〉,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Album of Paintings in the Byeongjin Year, 1796,
1796년, 26.7×31.6cm, 삼성미술관 리움 26.7×31.6cm, Leeum, Samsung Museum of Art

21
방방
곡곡
유랑기

도심 속 쉼표,
성북동 골목을 걷다
도심 안에 있다는 것을 잠시 잊게 하는 곳이 있다. 이웃과 이웃 사이의 쉼표처럼,
드문드문 들어선 집들과 한양도성의 풍경이 전하는 평온함. 골목을 따라
자박자박 걸어 보고 싶은 성북동에서 조금 더 느리게 걷는 법을 배운다.

22
WANDERING AROUND THE COUNTRY

A Reprieve in the City:


Walking the Alleys of Seongbuk-dong
Some places make you forget that you’re in the city. Like commas separating one neigh-
borhood from the next, the houses planted here and there, as well as Seoul City Wall, will
bring you serenity. In Seongbuk-dong, whose paths tempt you to walk down them and
explore, you will learn to walk a little slower.

1 6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 모습을 유지해 온 한양도성
Seoul City Wall, which has
retained its original shape
for over 600 years

23
부촌의 상징, 아름다운 공동체로 진화 2 한양도성에서  he evolution of a wealthy neighborhood
T
내려다본 성북동 into a beautiful community
‘한양도성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이 북정마을
Seongbuk-dong was named for being the village
3 만해 한용운의 유택,
름 붙여진 성북동은, 흔히 ‘부촌’으로 먼저 인식되는 to the north (buk) of Seoul City Wall (or Hanyang-
심우장
곳이다. 1980~1990년대 안방 드라마에 나오는 부잣 doseong, hence seong). Widely perceived as a rich
4 심우장 입구에
neighborhood, Seongbuk-dong was so often seen
집의 주소는 죄다 성북동이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설치된 한용운 동상
as a symbol of affluence in the 1980s and 1990s that
5 지난 2019성북동
성북동은 부촌의 상징이었다. 성북동은 예부터 한양 it served as the setting for practically every wealthy
문화재 야행
중심부와 가깝고, 산이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마을로 프로그램에 참여한
house in K-dramas at that time. Seongbuk-dong
시민 모습 maintained its long-standing reputation for being
정평이 났지만, 토질이 좋지 않아 농사짓기 좋은 조건 a beautiful village near Hanyang (an old name for
은 아니었다. 영조英祖, 1694~1776는 이곳에 사람을 살 Seoul) and being surrounded by mountains, but due

게 하려고 그들의 생업을 보장하는 방법을 택했다. 성 to the poor soil quality, it’s never been suitable for
farming. In the 17th century, in order to make the
북동에서 쑨 메주와 포백삶고 볕에 말려 표백한 포목을 국가 area residential, King Yeongjo (1694–1776) decided to
가 값을 보장하고 사 주기로 한 것이다. 지금도 남아 guarantee employment to residents by purchasing

있는 〈성북동포백훈조계완문절목城北洞曝白燻造契完文節 and fixing the price of the fermented soybeans and


bleached drapery produced there. The document
目〉은 바로 이것을 보장한 문서다. 교통의 편리함, 산 that recorded this, Seongbuk-dong pobaekhunjogy-
과 물이 어우러진 훌륭한 자연환경을 갖춘 성북동은 ewanmunjeolmok, remains in existence to this day.

중산층이 이룬 마을 공동체와 문화예술인, 가난한 서 Endowed with convenient transportation and a sce-
nic natural environment with mountains and water,
민 모두 어우러지는 마을로 발전해 왔다.

2 3 4

24
Seongbuk-dong has developed into a neighborhood
where an established middle-class community, art-
ists, and common people live in harmony.

 rom Han Yongun’s Simujang to


F
Lee Taejun’s Suyeon Sanbang
In the 1930s, Seongbuk-dong became known as a
“literature village” thanks to the many literary fig-
ures that lived there. Kim Kijin, a central figure of the
artist group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KAPF)
and Lee Taejun, a leader in the opposing group Guin-
hoe (Circle of Nine) both lived in this neighborhood.
Han Yongun, a well-known independence fighter,
poet, and Buddhist monk, was also a Seongbuk-dong
resident.
5
2 Seongbuk-dong’s Bukjeong Village as seen from
Walking up a narrow, steep path, one will find
Seoul City Wall
Simujang, where Han Yongun once stayed. His
3 Simujang, widely known as a place where Han
friends secured this space for him when he didn’t
Yongun (pen name Manhae) stayed
have enough money to buy even the smallest piece
4 A statue of Han Yongun at Simujang
of land. The Ten Ox Herding Pictures is a series of
5 Citizens participating in Seongbuk-dong Cultural
images often used as decoration in Buddhist temples
Heritage Night in 2019
that begins with the scene commonly known as

한용운의 심우장에서
이태준의 수연산방으로
1930년대 초반에 이미 ‘문인촌’으로 불릴 만큼
성북동에는 많은 문인이 살았다. 카프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의 중심인물이던 김기진, 이와 대척점에
있던 구인회의 중심인물인 이태준은 모두 한동네 사
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며
승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만해 한용운도 이곳 성북
동 주민이었다.
비좁고 가파른 골목을 따라 오르다 보면,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물렀던 심우장을 만날 수 있다. 집을 지을
땅 한 평조차 마련할 길이 없었던 선생을 위해 지인들
이 힘을 모아 마련해 준 공간이었다. 사찰 장식으로도
많이 쓰이는 열 장의 소 그림. 그 시작에는 ‘잃어버린
소를 찾는’ 장면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소牛에 비유해
잃어버린 나를 찾는다는 뜻의 ‘심우’. 선생은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이곳에 ‘심우장
尋牛莊’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5
6

7
단편소설의 선구자라 불리는 상허 이태준은 성북동 6 7 소설가 이태준이
이름을 짓고 머무른
자택을 수연산방壽硯山房,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1호이라 수연산방. 현재는
이름 짓고 1946년 월북하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찻집으로 운영되며
시민을 맞고 있다.
“벼루가 다 할 때까지 글을 쓰겠다”는 이름 뜻에 걸맞 Suyeon Sanbang,

게 당시, 수연산방은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선생은 named by its occupant,


writer Lee Taejun.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 철원의 모습을 성북동에서 발 It currently welcomes
citizens as a teahouse.
견했고, 바로 그곳에서 문인들과 꿈을 키우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1998년부터 찻집으로 운영
되고 있는 이곳을 찾을 때마다 순수한 행복감에 기꺼
이 사로잡히고야 만다.

마음의 평안을 따라 길상사에서


우리옛돌박물관으로
7천여 평의 대지와 40여 동의 건물을 법정 스님에
게 시주한 김영한. 서울 도심의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
원각이 길상사가 된 이유가 법정 스님의 저서인 《무소

26
8 9 성북동 북악산
자락에 위치한
석조 전문 simu, or “searching for a lost ox.” The word simu also
우리옛돌박물관. means “to find oneself”—an analogy comparing the
일본으로부터
human mind to the elusive ox. Han Yongun gave the
환수한 석물 등
place this name so that he could carry on his pursuit
1,250점의 유물과
전통 자수 작품이
of enlightenment.
전시되어 있다. Lee Taejun, known as a pioneer of short stories,
The Korean Stone lived in Seongbuk-dong until he moved to North
Art Museum, Korea in 1946. His house, now designated as Seoul
located at the Future Heritage No. 11, was called Suyeon Sanbang.
foot of Bugaksan
The name literally means, “Many people gather
Mountain in
Seongbuk-dong.
to read and study in the woods,” and just as this
1,250 artifacts, suggests, Suyeon Sanbang was used as a guest room
including those for literary figures at the time. Lee saw aspects of
recovered his hometown Cheorwon, Gangwon-do, in Seong-
from Japan buk-dong, where he fostered apprentices and wrote
and traditional
prolifically. Whenever I visit this house, which has
embroidery
been operating as a teahouse since 1998, I am over-
works, are on
display at the come with pure joy.
museum.
 rom Gilsangsa Temple to the
F
Korean Stone Art Museum
Kim Yeonghan, a gisaeng (courtesan) donated
approximately 7,000 pyeong (around 23,140 square
meters) of land and over 40 buildings to the Vener-
able Beopjeong, a renowned Buddhist monk. She
was deeply touched by Beopjeong’s book Musoyu
8
9 (Non-possession). It is widely known that Daewon-
gak, one of these buildings that had once been the
most luxurious restaurant in Seoul, became Gilsang-
sa Temple. The temple’s Goddess of Mercy statue

유》에서 받은 감동 때문이라는 일화는 유명하다. 길상 draws attention, reminiscent of Catholic statues of


Mary. It was enshrined by Catholic sculptor Choi
사 안 천주교의 마리아상을 떠올리게 하는 관음보살상 Jongtae at the request of Beopjeong, who longed for
이 눈길을 끈다. 종교 간 화합을 염원했던 법정 스님이 harmony between religions.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에게 의뢰해 봉안했다. “Non-possession doesn’t mean not owning
anything; it means not owning unnecessary things.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 The clear poverty that we choose is much more valu-
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able and nobler than wealth.”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Regardless of religious beliefs, all visitors are
welcome to come and ponder over Beopjeong’s
종교를 떠나 누구나 마음 편히 법정 스님의 무소유 철 philosophy, stroll in peace, and look into their mind.
학을 되새기며 조용히 산책으로 마음을 들여다보기 Just a 10-minute walk up the hill, one can find the

좋은 곳이다. 이곳을 나와 10분만 더 걸어 올라가면 Korean Stone Art Museum. This 5,000-pyeong site
(around 1653 square meters) boasts about 1,250
우리옛돌박물관까지 둘러볼 수 있다. 5천 평이 넘는 stone relics, modern and contemporary paintings,
공간에 1,250점에 이르는 석조 유물과 근현대 회화, needlework items, and more. It has an especially

자수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숲과 석물들이 어우러진 beautiful garden where stone figures complement
the surrounding forest beautifully. Visitation is cur-
박물관 내 정원이 특히 아름답다. 코로나19로 인해 사 rently reservation-only due to the pandemic, so you
전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으니, 누리집에서 운영 규정 might want to check out the notice on the website

을 살펴본 후 방문하는 것이 좋다. before dropping by.

27
예술과 사람, 문화와 문화재가 있는 곳 10
11
성북동 곳곳의 고택과 문화재를 천천히 둘러보
면서 한성대입구역으로 내려오다 보면 최순우 가옥
국가등록문화재 제268호을 만날 수 있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이자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


리고, 문화재 보존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해곡兮
谷 최순우 선생이 살던 곳이다. 손수 심은 나무와 단정
한 목가구, 백자와 달항아리에는 선생의 안목이 고스
란히 담겨 있다. 우리나라 첫 시민문화유산으로 알려
진 이 고택은 시민들의 힘으로 지켜 낸 근대문화유산
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더 깊다. 좁은 골목 안쪽에 자
리 잡은 선생의 집은 시민의 성금으로 복원과 보수 과
정을 거쳐 2004년부터 개방되었다.

10 11 무소유를 설파한 법정 스님이 기거했던 곳으로 유명한 길상사


12 우리나라 첫 시민문화유산으로, 소중하게 지켜지고
있는 최순우 고택
10 11 Gilsangsa Temple, known as the place where the Venerable
Beopjeong, who taught musoyu (non-possession), stayed
12 The Choi Sunu House, known as the first Citizen Cultural
Heritage of Korea

12

28
13

 place where art and people,


A
culture and cultural heritage coexist
On a slow stroll down to Hanseong University Sta-
tion, you’ll be able to admire many old hanok houses
and cultural heritage sites. One such place is the
Choi Sunu House (National Cultural Heritage No.
268). Choi was the author of Leaning Against an En-
tasis Column of the Muryangsujeon Hall at Buseoksa
Temple, and strove to introduce Korean culture
around the world and preserve aspects of cultural
heritage. His appreciation for art lives on in the
trees he planted and Korea’s neat wooden furniture,
white porcelain, and moon jars. Known as the first 14

Citizen Cultural Heritage of Korea, his house gained


meaning as a modern cultural heritage site thanks
to citizens’ effort to maintain it. The house, located
13 다양한 문화유산을 성북동은 조선 초기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
보고 한양도성 길을
down a narrow alleyway, was opened to the public in 걸으며 사색에
화재가 마을과 공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마을
2004 after it was restored and repaired using funds 잠길 수 있는 의 매력을 알리고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기 위해 매년
raised by citizens. 성북동은 야경도
Various cultural heritage sites from the early 아름답다. ‘성북동 문화재 야행’이 열리는데, 올해는 코로나19를
Joseon Dynasty to modern and contemporary 14 2019년 성북동 고려해 행사 규모를 축소한 ‘성북동 야행’이 10월에
문화재 야행
times coexist in Seongbuk- dong. Every year, 개최될 예정이다.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어느 저녁,
프로그램 모습
Seongbuk-dong Cultural Heritage Night shares the
13 In Seongbuk-dong,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여러 시간의 결을 느낄 수 있는
village’s attractions with more and more people.
seen here at night,
This year’s festival, to be held in October, will be one can encounter
성북동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는 건 어떨까.
simplified due to the pandemic. On a ripe autumn many cultural
evening, I recommend talking a walk through Seong- heritage sites and
buk-dong, where you can feel the grains of time. walk along Seoul
City Wall.

Written by Kim Soyeon 14 A program from


Photographs courtesy of Kim Hyeonmin(photos 1–4, 6, 7), Seongbuk-dong 글. 김소연 ― 사진. 김현민(사진 1~4, 6, 7),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
National Geographic Traveler Korea (photos 10, 11), Cultural Heritage 한국판(사진 10, 11), 우리옛돌박물관(사진 8, 9), 성북문화원(사진5,
the Korean Stone Art Museum (photos 8, 9), and Seongbuk
Night in 2019
Cultural Center (photos 5, 12–14) 12~14) ― 자료제공. 성북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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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문화
이야기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지원 사업
Regional Cultural Content Development Project

소슬바람 불어오면
제주인은 촐을 거두고
음력 8월이면 여름 내내 불어오던 남동풍 더운 바람이 꺾이고 어느새 북쪽에서 소슬한 바람이 당도한다.
가을이 온 것이다. 바람이 바뀌고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하면 식물의 생장이 바뀌고, 동물의 생태도 달라진다.
백성들이 삶에 필요한 것들을 산야, 밭, 바다에서 마련했던 원초 경제사회에서
제주 서귀포 사람들은 어떻게 자연에 대응하며 가을을 맞이했을까.

30
LOCAL CULTURE STORIES

When the Autumn Winds Blow,


Chol is Harvested on Jeju Island
In the eighth month of the lunar calendar, the hot southeasterly winds of the summer finally cease,
making way for autumn winds from the north. Autumn arrives. As the wind changes and the temperature drops,
plants change their way of growth and animals adapt ecologically to the weather. In a primeval economic society in
which the necessities of life came from the hills, fields, and sea, how did the residents of
Seogwipo, Jeju Island, prepare for the winter while coexisting with nature?

31
촐을 거두다 Gathering chol
The most important task to be done in the eighth
음력 8월의 가장 중요한 일은 부지런히 ‘촐’을 거 month of the lunar calendar was to gather chol, a

두는 것이었다. ‘촐’은 소의 사료가 되는 건초乾草를 type of hay used as cattle fodder. People would
busily stockpile chol to feed their cattle through the
말한다. 곧 들이닥칠 겨울에 소가 먹을 ‘촐’을 비축하 fast-approaching winter. On the Korean Peninsula,
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한반도는 전 경지면적 중 논 rice paddies took up 57 percent of the land used

이 57%를 차지하지만, 제주도는 전 경지면적 중 논이 for cultivation, but on Jeju, they covered only 0.5
percent. Thus, on the mainland, cattle spent their
0.5%를 차지한다. 논이 많은 한반도 사람들은 소의 winters eating straw produced in the plentiful rice
월동 사료인 볏짚을 논에서 마련하였고, 논이 몹시 귀 paddies, while on Jeju, where paddies were extreme-

한 제주도 사람들은 소의 월동 사료인 ‘촐’을 ‘촐왓’에 ly rare, people had to get chol from cholwat, which
refers to the fields where chol was grown. There are
서 마련하였다. ‘촐왓’은 ‘촐’이 자라는 밭이라는 말이 three kinds of chol: jagol (sensitive pea), sosae (pam-
다. ‘촐’은 ‘자골차풀’, ‘소새솔새’, ‘새띠’로 구성되었다. 한 pas grass), and sae (silver grass). Whereas the winter

반도의 소 월동 사료가 볏짚으로 쑤어 만든 소죽이라 fodder for the cattle on the peninsula was porridge
made of straw, cattle on Jeju ate the dry grass chol.
면, 제주도의 소 월동 사료는 건초인 ‘촐’이었다. The residents of Seogwipo would harvest chol
서귀포 사람들은 추분 때 ‘촐왓’에서 ‘촐’을 거두어들 from cholwat on Chubun, the autumnal equinox,

였다. 암소 한 마리는 30바리, 그리고 수소 한 마리는 which fell around September 23. It took 30 loads of
chol to feed a cow and 50 loads to feed a bull in order
50바리의 ‘촐’을 먹어야 겨울을 넘길 수 있었다. ‘촐왓’ to pass the winter. An 800-pyeong cholwat (spanning
800평 정도에서 30바리의 ‘촐’이 생산되었다. 서귀포 around 2645 square meters) produced about 30

사람들은 어떻게 ‘촐’을 생산하였을까. loads of chol. How, then, did the people of Seogwipo
produce enough chol?

1 촐 운반(1960년대, 제주도). 소와 사람이 소의 월동 사료 ‘촐’을


지어 나르고 있다.
A farmer and cow transporting chol, used as winter fodder
for cattle (Jeju Island, 1960s)
2 올레길에서 마차로 촐 나르는 농부(1971년)
A farmer transporting chol by carriage on an olle trail (1971)
3 눌굽과 초가집. 마당 귀퉁이에 ‘눌’이 쌓여 있다. ‘눌’은 짚이나
‘촐(목초)’을 보관하기 위하여 둥그렇게 쌓아 올린 더미를
말한다.
A thatched house and nulgup (the foot of a haystack).
Nul, the round piles in which straw or chol are stored, can be
seen in the corner of the front yard.

1 2

32
B e t we e n S a g ye - r i , A n d e o k- mye o n , a n d
Inseong-ri, Daejeong-eup, stands Bagumji Oreum
Volcanic Cone, also known as Dansan Mountain
(elevation: 158 meters). The ridge of this mountain
separates the two villages—one to the north and
one to the south. The residents of Sagye-ri called the
southern part of the mountain Aboreum. Aboreum
was home to seven cholke, as the cholwat on Bagumji
Oreum were called. Cholke belonged to everyone and
were divided by estimation. A rock or a boulder at
the top of the mountain, for instance, would be used
as a point to divide up the land. Every cholke had a
name. Although he couldn’t remember every single
one of them, Sagye-ri local Yi Wontaek (b. 1933) could
3 remember the details of Seotke, a cholke he jointly
owned.
Seotke was the westernmost cholke in Aboreum

안덕면 사계리와 대정읍 인성리 사이에는 ‘바굼지오 and was jointly owned by six people. The other six
cholke were also owned by about six people each.
름’158m이 있다. 두 마을의 경계는 바굼지오름 능선을 The seven cholke belonged to one greater communal
따라 남북南北으로 나누어졌다. 사계리 사람들은 ‘바 organization headed by a leader called the jipgang,

굼지오름’ 남쪽 일대를 ‘앞오름’이라고 하였다. ‘앞오 with the seosu one step below. The cholke owners in
Aboreum would hold a meeting in the first month of
름’에는 모두 7개의 ‘촐왓’이 있었다. 사계리 사람들은 every year during which they would elect leaders.
‘바굼지오름’에 있는 ‘촐왓’을 ‘촐케’라고 하였다. ‘촐 The leaders received honor, not pay. Every year,

케’는 여러 사람 공동소유의 것이었다. ‘촐케’의 구획 they would appoint someone to be the watcher of
Aboreum. The watcher was called the kejigi, which
은 가늠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바굼지오름’ 꼭 literally means “one who guards ke.” The kejigi
대기에서 어떠한 바위나 암벽으로 가늠 지점을 잡으 would watch over all seven cholke of Aboreum

며 구획하였다. ‘촐케’마다 이름이 있었다. 서귀포시 at once. Some people would bring their cattle to
graze in the cholke on foggy days with low visibility.
안덕면 사계리 이원택1933년생, 남 씨는 그것을 모두 기 During the summer sowing period early in the sixth
억할 수 없었지만, 이 씨가 공동으로 소유하였던 ‘섯케’ month of the lunar calendar, some would harvest

라는 ‘촐케’에 대해서는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chol for cattle fodder. Some would also selectively
harvest the grass to use in tying bunches of barley
‘섯케’는 ‘앞오름’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촐케’였다. ‘섯 during the barley harvest season. The kejigi would
케’는 6명 공동소유의 ‘촐케’였다. 나머지 여섯 개의 be devoted to keeping track of such cases. Another

‘촐케’도 계원의 수는 6명 안팎이었다. ‘촐케’ 7개는 다 kejigi duty was to send messages to other members
when the chol harvest date was selected on Chubun.
시 하나의 공동 조직을 갖추었다. 그 으뜸을 ‘집강執綱’ Kejigi were paid in chol, around 10 loads, making the
이라고 하였다. 그 밑에는 ‘서수書手’가 있었다. ‘앞오 position ideal for those who didn’t have cholke and

름’에 있었던 ‘촐케’의 계원은 해마다 정월에 회의를 therefore couldn’t prepare their own fodder, but still
wanted to raise cattle to escape from poverty. There
열었다. 그때 임원도 선출하였다. 임원은 무보수 명예 were a few of such people, so the competition for the
직이었다. 임원은 해마다 ‘앞오름’의 감시인을 선임選 kejigi position was fierce.
任하였다. 감시인을 ‘케지기’라고 하였다. ‘케지기’는
‘케를 지키는 이’라는 말이다. ‘케지기’는 ‘앞오름’ 7개
의 ‘촐케’를 동시에 감시하였다. 안개가 자욱하여 시
야가 흐린 날을 골라 ‘촐케’에 소를 풀어놓아 먹이는
이도 없지 않았다. 또 음력 6월 초순 여름 농사를 파종
할 때 일소에게 주려고 ‘촐’을 베어가는 이도 없지 않

33
4

‘케지기’는 소의 월동 사료를 마련할 ‘촐케’는 없지만, 기어코 소를 키워


가난의 굴레를 벗어 버리고 말겠다며 이빨을 깨문 이들의 일거리였다.
Kejigi were paid in chol, around 10 loads, making the position ideal for
those who didn’t have cholke and therefore couldn’t prepare their own fodder,
but still wanted to raise cattle to escape from poverty.

5
4 바굼지오름(단산). 았다. 또 보리 수확 때 보릿단을 묶을 띠만 골라 베어
Bagumji Oreum Volcanic Cone
(Dansan Mountain) 가는 이도 없지 않았다. ‘케지기’는 이런 이를 집중적
5 제주목사 이형상은 1702년에 그린
으로 단속하였다. 또 추분 때 ‘촐’을 수확하는 날이 정
《탐라순력도(耽羅巡曆圖)》에
‘바굼지오름’을 ‘파군산’(破軍山)이라고 해지면 계원들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였다. ‘케지기’의
표기하였다. 그 당시에도
보수는 ‘촐’로 주고받았다. 그 수량은 ‘촐’ 10바리 안팎
‘바굼지오름’에는 한 그루의 나무도
자라고 있지 않았다. 그 당시 이었다. ‘케지기’는 소의 월동 사료를 마련할 ‘촐케’는
‘바굼지오름’은 소의 월동 사료인 ‘촐’을
없지만, 기어코 소를 키워 가난의 굴레를 벗어 버리고
생산하는 ‘촐왓’이었기 때문이다.
Jeju magistrate Yi Hyeong-sang 말겠다며 이빨을 깨문 이들의 일거리였다. 그런 이가
referred to Bagumji Oreum Volcanic
Cone as “Pagunsan Mountain” in his
많았던지 ‘케지기’도 경쟁의 대상이었다.
1702 painting Tamna sunnyeokdo.
Even then, not a single tree grew on
Bagumji Oreum Volcanic Cone due to
it being used as a cholwat to produce.

34
꿩을 잡다
음력 8월의 서귀포 산야에서는 꿩 사냥이 이뤄
졌다. 꿩은 소서7월 7일경부터 추분9월 23일쯤까지 털갈이
를 하였다. 이런 모양을 ‘털 다’고 하였다. ‘털 다’의
‘믜다’는 “털이 빠져 살갗이 드러나다”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무렵의 꿩은 멀리 날지 못하였다. 그렇다
고 하늘을 나는 날짐승을 간단히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 사는 오남종1939년생, 남 씨
의 이야기에 따르면 수산리 사람들은 암꿩과 수꿩이
털갈이할 때 하는 꿩 사냥을 ‘부종끗 사냥’이라고 하
였다. ‘부종’付種은 소서7월 7일경 때 집중적으로 이루어
지는 여름 농사 파종이라는 말이다. ‘부종끗
사냥’은 소서부터 추분까지 이루어지는
데, 이때 8명이 공동으로 꿩 사냥을 한다.
꿩 사냥은 구성원마다 역할이 다르다. ‘부종끗 사냥’
Catching pheasants 의 총지휘자 한 사람을 ‘패장’牌將, 사냥개를 데리고 다
In the eighth month of the lunar calendar, the
people of Seogwipo would hunt pheasants in the
니면서 풀 속에 숨어 있는 꿩을 모는 세 사람을 ‘보권’,
mountains and fields. Pheasants molted between 높은 오름이나 동산에서 꿩이 날아가 숨은 방향과 장
Soseo (literally “minor heat,” a seasonal period that 소를 살피는 두 사람을 ‘망꾼’ 그리고, 사냥개를 데리
falls around July 7) and Chubun. During this period,
people used the expression “teol muinda” to refer to
고 다니면서 꿩을 물어 잡게 하는 두 사람을 ‘목지기’
the pheasants’ featherless skin. Having molted, the 라고 한다. 포획한 꿩은 구성원과 분배하는데, 이를
birds couldn’t fly far, but that didn’t mean that it was ‘분육分肉’이라고 한다. 꿩 사냥은 조직적인 협동 작업
easy to catch them in the air.
According to Oh Namjong (b. 1939) from
이었으며 그 포획물은 공평하게 나누었다.
Susan-ri, Seongsan-eup, Seogwipo, the people of
Susan-ri used the term “sowing hunt” to refer to
hunting pheasants during the molting period. Sow-
ing was usually done between Soseo and Chubun,
and was performed by eight men in a group.
Each member of the group had a role: the
paejang was the overall leader of the sowing hunt; 암꿩과 수꿩이 털갈이할 때 하는
three bogwon would each bring along a hunting dog
to corner the pheasant if hiding in a thicket; two
꿩사냥을 ‘부종끗사냥’이라고 하였다
mangkkun would identify the area and direction in “Sowing hunt”was used to
which the pheasant flew when on a high mountain refer to hunting pheasants during
or hill; and two mokjigi would use hunting dogs to the molting period.
kill and catch the pheasant. The group would split
up the pheasants they caught among the members.
This was called the “division of meat.” Pheasant
hunting was a systematic, collaborative job, and
what was caught was divided equ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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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기를 조물다
음력 8월, 바다에서 해녀들은 ‘고지기’를 ‘조물았
다’. ‘고지기학명: Sargassum coreanum J. Agardh’는 바닷물 속에
서 자라는 큰잎모자반이라는 거름풀을 말하며 ‘조물
다’는 “해녀들이 물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다”
라는 제주 말이다. 그런데 ‘고지기’는 먹거나 팔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주도 해녀들은 이때 ‘고지기’
를 조물고 보리밭에 밑거름으로 주었다. ‘고지기’는
익어야 거름이 되었다. 그 시기는 처서8월 23일경부터
추분9월 23일경까지였다.
그렇게 부지런히 고지기 거름을 서귀포 해녀들은 물속으로 들어가 ‘종게호미’라는 낫
깔아 준 밭에서는 이듬해 봄, 으로 ‘고지기’를 베어 냈다. 서귀포 해녀들은 고지기
보리가 실하게 여물 것이다. 조무는 일을 ‘고지기물에’라고 하였다. 그렇게 부지런
In fields where fertilizer made of gojigi was 히 고지기 거름을 깔아 준 밭에서는 이듬해 봄, 보리
liberally applied, barley would grow
가 실하게 여물 것이다.
abundantly in the following spring.

6 해녀 어멍의 삶
Life as haenyeo
7 해녀들이 물속에서 바다풀을 베어 내는 낫인 ‘종게호미’
Jonggehomi, a sickle used by haenyeo to harvest plants
underwater

6 7

36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
Diving for gojigi
Women sea divers called haenyeo would dive for and
harvest (an activity expressed by the Jeju dialectal 현금난(1932년생) 씨의 사례
word jomulda) gojigi in the eighth month of the lunar 해녀 1∼2명과 사공 한 사람이 ‘터우’라는 뗏목
calendar. Gojigi (Sargassum coreanum J. Agardh) is a
plant that grows underwater in the ocean. However,
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고지기 어장에 닻을 드리우고
haenyeo didn’t pick gojigi to eat or sell, but to use as ‘터우’를 세웠다. 해녀는 ‘종게호미’를 들고 물속으로
fertilizer in barley fields. Gojigi could be used as fer- 들어가 고지기를 베어 냈다. 사공은 ‘터우’ 위에서 해
tilizer only when they were ripe, which was between
Cheoseo (literally “limit of heat,” a seasonal period
녀가 따 낸 고지기를 ‘공쟁이’라는 갈퀴에 걸어 끌어
around August 23) and Chubun. 당겼다. 그리고 고지기를 뭍으로 운반하여 널어 말리
The haenyeo of Seogwipo would dive underwa- 고 4등분으로 나누었다. ‘터우’ 몫으로 1등분, 사공 몫
ter and harvest gojigi with a sickle called a jongge-
homi. They called this process gojigi mure. In fields
으로 1등분, 해녀 몫으로 각각 1등분씩 나누었다. 오
where fertilizer made of gojigi was liberally applied, 조리 사람들은 고지기를 보리를 파종할 때 밑거름으
barley would grow abundantly in the following 로 주었다.
spring.

서귀포시 남원읍 태흥리


 he case of Hyeon Geumnan (b. 1932)
T 정○○(1932년생, 여) 씨의 사례
from Ojo-ri, Seongsan-eup, Seogwipo
One or two haenyeo went out to the ocean on a
태흥리 해녀들은 각각 물속으로 들어가 ‘종게호
raft called teou with a ferryman. The ferryman cast 미’로 고지기를 베어 냈다. 베어 낸 고지기는 ‘고지기
an anchor at the gojigi fishery. The haenyeo dove 망사리’에 담아 나갔다. 남자들은 해녀가 따 낸 고지
into the water holding jonggehomi and harvested
gojigi. Up on the teou, the ferryman hooked the gojigi
기를 갯가에서 뭍으로 지어 날랐다. 태흥리에서 고지
on a rake called a gongjaengi and pulled. Then they 기의 이용은 두 가지가 전승되었다. 고지기를 젖은 채
carried the gojigi ashore, hung them up to dry, and 로 ‘통시’돼지우리에 넣어 거름을 만들기도 하였고, 고지
divided them four ways: one-fourth for the teou,
one-fourth for the ferryman, and one-fourth for
기를 말려 두었다가 보리를 파종할 때 밑거름으로 주
each of the haenyeo. The people of Ojo-ri used gojigi 기도 하였다. 고지기를 보리밭 밑거름으로 줄 때는 반
as a fertilizer when they sowed barley seeds. 드시 도리깨로 타작하였다.

 he case of Jeong OO (b. 1932, female)


T
from Taeheung-ri, Namwon-eup, Seogwipo
글. 고광민(서민생활사 연구자) — 사진. 홍정표(사진 1),
The haenyeo of Taeheung-ri all dove underwater
제주학연구센터(사진 2, 3), 김지호-한국관광공사(사진 4),
and harvested gojigi with jonggehomi. They put what
고광민(사진 5), 김정선-한국관광공사(사진 6), 제주특별자치도-
they had harvested in a net called a gojigi mangsari.
공공누리(사진 7) — 그림. 김진이 일러스트레이터
The men carried the gojigi ashore on their backs. Goji-
gi were used in two ways in Taeheung-ri. One way was
to make a fertilizer by leaving the wet gojigi in a pigsty,
and the other was to dry it out and use it as fertilizer
when sowing barley. In the case of the latter, it was
always threshed with a flail beforehand.

Written by Go Gwangmin, researcher of the history of ordinary


people’s lives
Photographs courtesy of Hong Jeongpyo (photo 1), the Center for Jeju '지역N문화' 누리집에서
Studies (photos 2, 3), the Korea Tourism Organization’s Kim Jiho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photo 4), Go Gwangmin (photo 5), Kim Jeongseon (photo 6), and
the Jeju Special Self-Governing Province–Korea Open Government
License (photo 7)

37
문화
탐구
생활

중생의 Kundika:

목마름
A Symbol of
Benevolence
덜어 주는
That Relieves
Sentient Beings of

자비의 상징
Their Thirst

‘정병淨甁’
정병淨甁은 깨끗한 물을 담는 A kundika is a ritual ewer that contains
clean water. In India, it was known as one
물병이라는 뜻이다. 인도에서
of the 18 items carried by practicing Bud-
수행하는 승려들이 지니는 18가지 dhist monks. Kundika were introduced
물건 중 하나였다고 한다. 정병은 to China by Chinese monks returning
인도를 방문한 중국 구법승부처의 진리를 from pilgrimages to India, and their use
구하는 승려을 통해 중국에 알려졌고,
has expanded as they became one of the
ceremonial vessels in which clean water is
부처 앞에 깨끗한 물을 담아 바치는
offered to the Buddha at the altar.
불교 공양구로 쓰이면서 그 쓰임새의
폭이 점점 넓어졌다.

1 청자 상감 모란 국화 무늬 정병.
상감 기법으로 표현된 고려 시대 정병은
다채로운 무늬로 깊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Celadon Kundika with Inlaid Peony
and Chrysanthemum Design
This celadon kundika from the Goryeo
Dynasty displays its profound beauty
through various designs achieved using an
inlay technique called sanggam.

38
CULTURAL EXPLORATION

2 금동 관음보살 입상(국보 제127호)


부처의 진리에 목마름을 해소한다는
의미가 더해져 정병은 관음보살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었다.
Gilt-bronze Standing
Avalokiteśvara Bodhisattva
(National Treasure No. 127)
Kundika became the
representative symbol of
Avalokiteśvara Bodhisattva
by acquiring the meaning of
relieving sentient beings of their
thirst for Buddhist truth.

39
40
맑고 깨끗한 물을 담아 바치다 Offering clean and pure water
Kundika used to resemble standard water bottles, but their
정병은 일반 물병과 모양이 비슷했지만, 주둥이가 하나인 shape has changed over time, developing from having one spout
모양에서 물을 넣는 곳과 따르는 곳이 분리된 모양으로 변화했 to two. One spout, called gwittae in Korean, acts as the opening

다. 몸통 옆에 물을 따르는 부리처럼 생긴 입구귀때로는 물을 담으 into which water is poured, and the second, cheomdae, is a long
bottleneck. The gwittae resembles a bird’s bill and sits on the
며, 윗부분에 있는 긴 대롱 모양의 첨대尖帶로 물을 따른다. 일반 shoulder of the vessel, and the cheomdae at the top is where
적인 주자의 사용법과 다른 것이 특이하다. 이러한 전형적인 모 water is poured out. The usages of kundika can be considered

양의 정병은 7세기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며 점차 유행하는데, 중 peculiar, as they differ from that of ordinary kettles. Two-spout
kundika first appear in seventh-century records, and this shape
국 당나라 이후 많이 제작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에 따르 gradually became popular—they have been produced in large
면 우리나라에 정병이 전해진 시기는 7세기 말기로 보이지만, 정 quantity since China’s Tang Dynasty. According to a record in

병이 처음 등장한 것은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석굴암의 범천상 the Samguk yusa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it seems
that kundika were first introduced to Korea around the late
이 들고 있는 것이다. 이후 경상북도 군위군 인각사 터에서 출토 seventh century, yet they don’t seem to physically appear until
된 정병은 남북국 시대통일신라인 9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the mid-eighth century, as one is depicted in the hand of the

데, 모양은 고려 시대의 전형적인 정병과 비슷하다. Brahma-Deva in a stone relief at Seokguram Grotto, which was
constructed at that time. A kundika excavated from the Ingaksa
정병은 우리나라의 관음신앙의 유행과 함께 남북국 시대에 나타 Temple site in Gunwi-gun, Gyeongsangbuk-do, is speculated to
나, 고려 시대에 널리 유행했다. 전형적인 모양의 정병은 고려 말 have been created in the ninth century during the Unified Silla

기부터 점차 사라져 갔고, 조선 시대에는 고려 시대 물병 양식과 (Northern and Southern States) period. Its shape is similar to
typical ritual ewers from the Goryeo period. The appearance
정병의 모양이 혼합되거나 간략화한 주전자 모양의 정병이 많이 of kundika in the Unified Silla period likely correlates with the
제작되었다. popularity of Avalokiteśvara beliefs in Korea at the time; during

불․보살佛菩薩이 지니는 정병은 단순히 깨끗한 물을 담는 병의 의 the Goryeo period, kundika became widely prevalent. Standard
two-spout kundika gradually disappeared after the late Goryeo
미를 넘어 부처의 진리에 목마름을 해소한다는 상징성이 더해지 period, and during the Joseon period, kettle-shaped kundika,
면서 구제자를 나타내거나 자비慈悲의 상징이 되었다. 특히 정병 which mixed the water bottle style with the standard two-spout

안의 감로수甘露水로 중생衆生의 목마름을 덜어 주고 고통과 병을 shape or borrowed simplified aspects of each, were produced in
large numbers.
낫게 해 준다는 관음보살의 정병은 점차 관음보살의 대표적인 상 Kundika borne by the Buddha or a bodhisattva held
징이 되었다. 《청관음경請觀音經》에는 관음보살이 버드나무 가지 meaning. More than just an ewer that contained clean water,

와 깨끗한 물로 나쁜 병에 걸린 사람을 고쳤다고 적혀 있다. 삼국 such vessels gained the added narrative of having relieved thirst
in the name of Buddhist truth and came to represent relief or
시대에 만들어진 관음보살은 보주寶珠, 연꽃, 정병 등 다양한 물건 benevolence. Avalokiteśvara’s kundika, in particular, gradually
을 들고 있는데, 남북국 시대에는 점차 정병만 들고 있는 보살상 came to be seen as the representative symbol of the figure

이 늘어난다. because the spring water it contained was purported to relieve


sentient beings of their thirst and suffering and cure their ill-
nesses. In Qing guanyun jing (Sutra of the pure Avalokiteśvara),
it is written that Avalokiteśvara cured people of severe diseases
with a willow branch and clean water. In imagery created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Avalokiteśvara bore a variety of
items such as a cintamani (wish-fulfilling gem), lotus flower,
3 국보 제92호 청동 은입사 물가 풍경 무늬 정병(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 and kundika, but the bodhisattva statues from the Unified Silla
금속 표면을 파낸 자리에 은실을 박아 넣어 무늬를 새겼다. 병의 긴 목에는 period increasingly bore only a kundika.
구름무늬, 동체의 어깨와 굽 주위에는 여의두무늬(如意頭文), 귀때에는 풀
무늬(草文)가 입사되었다. 고려 시대 금속공예 기술의 정수를 보여 주는
걸작이라 평해진다.
Bronze Kundika with Silver Inlaid Landscape Design (Bronze Kundika
with Silver Inlaid Willow and Waterfowl Design; National Treasure No. 92)
Silver thread has been inlaid into the grooves engraved on this kundika’s
metal surface. The long tube-shaped neck is adorned with clouds,
the spout features vines, and the shoulder and foot boast a design of
repeated ruyi symbols.

41
고려 시대 공예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다  epresentative of the essence of
R
Goryeo Dynasty craftsmanship
고려 시대 정병은 다양한 종류의 금속뿐만 아니라 도자기나 Goryeo-period kundika were made with a wide variety of metals
토기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여기에 여러 가지 공예 기법을 사용 as well as ceramics and earthenware. Using a number of tech-

해 다양한 무늬를 표현했다. 청자 정병은 양각이나 음각으로 무 niques, craftspeople expressed diverse designs on the vessels.
Some celadon kundika featured engraved or raised patterns, but
늬를 새긴 것도 있지만, 대부분 상감기법으로 무늬를 표현한 것 their designs were mostly achieved through an inlay technique
이 많다. 상감기법은 청자의 표면에 무늬를 새기거나 무늬 면을 called sanggam. This technique involved engraving or carving

파내고 성분이나 색이 다른 흙자토, 백토을 메워 넣은 후 유약을 발 patterns on the surface of the celadon, filling in the etchings
with various types of red or white clay, glazing the kundika, and
라서 구워 서로 다른 색의 무늬를 만들어 내는 기법이다. 검은색 then firing it in a kiln to create patterns in different colors. The
과 흰색이 조화를 이룬 무늬는 청자 본연의 색과 어우러져 오묘 resulting harmonious black-and-white design against the natu-

한 분위기를 낸다. 상감 기법으로 표현된 물가 풍경 무늬를 비롯 ral color of the celadon gave the vessels a subtle and mysterious
feeling. In addition to waterside landscapes, a popular type of
해 국화, 모란, 연꽃당초, 모란당초, 구름, 새 등 다채로운 무늬는 design achieved through this inlay technique, diverse patterns
정병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한다. from images of chrysanthemums to peony, lotus-and-scroll,
peony-and-scroll, cloud, and bird designs decorated kundika
beautifully.

4 청자 양각 갈대 기러기무늬 5 청동 은입사 물가 풍경


정병(보물 제344호). 무늬 정병. 전형적인
수양버들 아래 노닥거리는 고려 시대 정병의 형태.
원앙 한 쌍 등 한가로운 물가 버드나무 잎을 따로
풍경이 새겨져 있다. 국보 표현하지 않고 구불거리는
제92호 ‘청동 은입사 물가 긴 선으로 줄기를 표현한
풍경 무늬 정병’의 양식을 점이 특이하다.
청자 양각으로 재료를 Bronze Kundika with
바꾸어 시도한 작품으로, Silver Inlay and Designs
매우 닮아 있다. Depicting Waterside
Celadon Kundika with Scenery
Reeds and Wild Geese in A typical form of Goryeo-
Relief (Treasure No. 344) period kundika, this
This vessel features an vessel is unique in its
idyllic waterside landscape expression of willow
with willows and a happy leaves as long twisty lines
pair of mandarin ducks. It instead of separate leaves.
bears a remarkable
resemblance
to the Bronze
Kundika with Silver
Inlaid Landscape
Design (National
Treasure No. 92), in
an apparent attempted
transition from using the
silver inlay technique
on bronze to using it on
celadon.

42
Typically, metal kundika do not have designs, but some 대부분 금속으로 만든 정병은 무늬가 없으나 일부 입사入絲 혹은 상
featured images of dragons or watersides with reeds, willows,
감기법(象嵌技法)를 이용해 갈대, 버들, 물새 등이 어우러진 물가 풍
and birds. Ipsa, an inlay technique similar to the one used on
celadon, was also used in crafting metal kundika. Grooves 경 무늬나 용무늬를 표현한 것이 있다. 입사는 일종의 상감 기법
were engraved into the metal surface and thin wire was set into 으로 금속 표면에 음각선을 파고 그 파낸 자리에 가늘게 만든 금
the grooves to create designs. When silver wire was used, the
technique was called silver inlay. Silver inlay was used partic-
속 실을 박아 넣어 무늬를 만들어 내는 기법으로, 은실을 사용하
ularly often to decorate Buddhist craftworks such as kundika 는 경우에는 은입사라고 한다. 은입사는 특히 정병이나 향완 같
or incense burners. At the time, these metal craftworks were 은 불교 공예품에 많이 사용했다. 이러한 고려 시대 금속공예품
considered to represent the essence of craftsmanship and the
height of metalcraft technique with their delicate and extrava-
은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로 당대 공예품의 정수로 꼽히며 금속공
gant designs. 예 기술의 절정을 보여 준다.

물가 풍경 무늬 정병, 염원을 그려 담다
Kundika with waterside landscapes portray
people’s aspirations
Of the various types of designs engraved on Goryeo-period 고려 시대 정병에 새겨진 다양한 무늬 중 중국에서도 찾아
kundika, one that is unique to Korea—unable to be found in 볼 수 없는 고려만의 독자적인 무늬가 바로 물가 풍경 무늬蒲柳水
China—is the waterside landscape. Kundika that feature water-
禽文이다. 물가 풍경 무늬는 가지를 늘어뜨린 버드나무나 부들, 갈
side landscapes elaborately depict picturesque shores, featuring
willows with draping branches, plants such as reeds and cattails 대 같은 물가에서 자라는 식물과 물 위를 헤엄치거나 날고 있는
growing by the water, and ducks, wild geese, and lovebirds 오리, 기러기, 원앙 등 물새를 소재로 하여 물가 풍경을 한 폭의 그
peacefully hovering and floating about.
The waterside landscape is an original type of design that
림처럼 묘사한 것이다.
can only be found in Goryeo-period craftworks. These land- 물가 풍경 무늬는 고려 시대 공예품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창
scapes became widely popular as they were used on a variety 적인 무늬로, 여러 기물에 다양하게 사용되며 널리 유행했다. 이
of objects. Some consider this trend to be closely linked to the
Buddhist worldview that was shared by many contemporaries,
를 당시 사람들의 불교적 세계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while others attribute it to a Taoist philosophy that was a fad at 보기도 하고, 같은 시기 유행하던 도교 사상에서 기인한 것으로
the time. However, with the lack of concrete evidence, the origin 추정하기도 하는데, 구체적인 근거가 없어 원류와 유행의 이유는
of and reason for waterside landscapes’ popularity are not clear.
Yet, since the design was particularly popular in Buddhist cere-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물가 풍경 무늬는 청자로 만든 일
monial objects (except for a few celadon household items), it is 부 생활 도구 외에 불교 의식구에서 유독 많이 나타나서 불교와
speculated to have a deep connection to Buddhism. It has come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고려인들의 불안한 현
to be identified as the representative symbol of Avalokiteśvara,
a figure that helped the people of the Goryeo Dynasty overcome
실을 극복하게 해 준 관음보살의 대표 상징물이 되었으며, 관음
the instability of reality. Waterside landscapes are probably a 보살이 머무르는 보타락산을 이상향으로 꿈꾸던 이들의 이상향
reinterpretation or expression of Potalaka Land, a utopia that 을 물가 풍경으로 재해석해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불교에서
people dreamed of and believed Avalokiteśvara to reside in.
The original symbolic images expressed in Buddhist lore were
표현하는 본래의 상징적 이미지를 자신들이 바라는 이상향으로
perhaps reinterpreted by the people of the Goryeo Dynasty to 새롭게 그려 낸 고려 시대 사람들의 염원이 물가 풍경 무늬 정병
project their aspirations onto the notion of utopia—a theory that 에 오롯이 담긴 것이라 여겨진다.
is faithfully reflected in kundika with waterside landscapes.

Written by Shin Myeonghui, curator, National Museum of Korea —


Photographs by National Museum of Korea 글. 신명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 사진제공. 국립중앙박물관

43
한국

팬데믹 Embracing
시대의 Solitude

고독 During
끌어안기 a Pandemic

코로나19로 일상에 많은 변화가 COVID-19 has changed many aspects


일어났다. 한국은 혼자 지내기에 of my daily life. In Korea, well-developed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모든 서비스가 online services can give you access to nearly
발달했지만 누군가와 악수를 everything, but I have begun to long for
나누고 서로의 미소를 바라보는 일, simple things that one can take for granted,
당연하게 여기던 작은 행동들이 like shaking hands with a new acquaintance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or seeing a smile light up a person’s
un-masked face.

44
LOVING KOREA

편리한 생활 속, 사람에 대한 그리움 Longing for people in a convenient life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공공장소에서 마 In public, everyone wears face masks and hand sani-

나오미 응(필자)
Naomi Ng (author)
tizer is virtually everywhere. With the government’s
스크를 착용하고 손 세정제를 사용한다. 정부가 광범 widespread testing and aggressive contact tracing, I
위하게 검사를 시행하고 적극적으로 접촉 경로를 확 feel safe knowing that everyone is doing their best to

인하는 등 모든 사람이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prevent the virus from spreading further.
It is also incredibly convenient to do everything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에 크게 안심이 됐다. from the comfort of my own home. Ordering deliv-
또 하나 대단한 것은 집 안에서 편안하게 대부분의 일 ery on my phone takes less than three minutes and

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휴대전화로 음식 배달 when it arrives, I often find handwritten Post-it notes
telling me to “hang in there” that put a smile on my
을 주문하는 데 3분도 채 걸리지 않고, 집 앞에 도착한 face. Sometimes, I find an extra side dish or can of
음식에는 손글씨로 적은 “힘내세요” 메모가 붙어 있 soda given by the restaurant free of charge, an act of

다. 그걸 보면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 ‘서비스’라 generosity known as “service.” Once, I was surprised
to find a KF94 face mask with my order of tteokbokki.
는 이름으로 캔 음료나 사이드 메뉴를 덤으로 받을 때 When I am sick of delivery, I can order groceries on
도 있다. 한번은 배달 온 떡볶이에 서비스로 KF94 마 an app in the evening and they will appear at my

스크가 함께 들어 있어 깜짝 놀란 적도 있다. 배달 음 front door before 7 a.m. the next morning, thanks to
Korea’s advanced round-the-clock delivery system
식이 질릴 때면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장을 봤다. 저 and its workers.
녁쯤 주문하면 다음 날 아침 7시 전에 현관 앞에 도착 Like many others around the world, I have seen

해 있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한국의 선진적인 the pandemic as an opportunity to self-reflect or curl


up with K-dramas on Netflix and brush up on my
24시간 배달 서비스와 배달 기사님 덕분이다. Korean skills. I enjoy spending time at home alone,
세계 이곳저곳의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이번 코로나 but as they say, you can have too much of a good

사태를 기회로 삼아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넷 thing. I definitely haven’t been able to get used to the
loneliness and emotional toll of social distancing,
플릭스로 한국 드라마를 보며 한국어 공부도 다시 하 especially as a foreigner living thousands of kilome-
고,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을 즐겼다. 하지만 아무 ters away from my home Hong Kong and my loved

리 좋은 것도 너무 많이 하면 물리기 마련이다. 사회 ones.

적 거리 두기로 인한 정서적 어려움과 외로움에는 쉽


게 익숙해질 수 없었다. 특히 고향 홍콩과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타지에 사는 ‘외국
인’이었기에 더욱 더 힘들었다.

45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보았던 한강의 야경은
홍콩의 마천루를 떠올리게 했다.
The night view of the
Hangang River, which I saw while
biking, reminded me of the
skyscrapers in Hong Kong.

한강에서 즐기는 ‘나’와의 데이트 A date with myself along the Hangang River
어느 날 밤, 집에 틀어박혀 있자니 도저히 견딜 Frustrated with being stuck at home one night, I
decided to take a bike ride using Seoul’s bike rental
수 없었다. 서울시의 공공자전거 서비스인 ‘따릉이’를 service Ttareungi, riding wherever the wind took me.
이용해 자전거를 타기로 마음먹고 마음 가는 대로 페 I hadn’t gone far when I reached the Hangang River,

달을 밟았다. 집에서 나온 지 얼마 걸리지 않아 어느 with its magnificent night views of sparkling lights
that reminded me of the brightly lit skyscrapers back
새 나는 한강변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반짝이는 불빛 home. It was a short trip but an enlightening lesson
과 아름다운 야경을 보니, 고향 홍콩의 눈부신 마천루 on the importance of self-care.

가 떠올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를 돌보는 일이 얼 Since then, I have made sure to go biking regu-
larly, when the weather permits it. Biking has turned
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out to be the perfect way to stay physically active
그날 이후 날씨가 허락하는 한 주기적으로 자전거를 outdoors while maintaining a socially safe distance

타려고 했다. 자전거는 여전히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 from people. Zipping along on two wheels, I enjoy
mindlessly watching the scenery go by as I listen to
천해야 하는 상황에서 안전하게 야외 활동을 즐길 수 my favorite podcast or playlist. Even after a tiring
있는 완벽한 해결책이었다. 좋아하는 팟캐스트나 음 day at work, a bike trip is always rewarding and ener-

악을 들으며 무심히 지나치는 경치를 바라보는 일이 gizing for the body and the soul.

즐거웠다. 일 때문에 피곤한 날에도 자전거는 내 몸과

46
When biking, I feel free as a bird, uncaged by 마음을 위한 보상이었고 활력이었다.
the four walls of my small apartment—even with
a stuffy face mask clinging to my sweaty face. The
비록 땀에 젖은 얼굴에 마스크가 달라붙어 있지만, 사
Hangang River isn’t just a romantic date spot for 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아파트를 벗어나니 기분
couples, it’s also the perfect place for going on dates 은 날아갈 듯 자유로웠다. 한강은 그저 연인들이 로맨
with yourself.
틱한 데이트를 즐기는 장소인 것만은 아니다. 나 자신
One step outside of my comfort zone 과의 데이트를 위해서도 완벽한 장소다.
Having made sure I was staying active, my second

새로운 것을 향한 한발
goal for self-care was to do something outside of my
comfort zone. I had ordered a bouquet of flowers for
a friend’s birthday and saw that the florist offered 삶의 활력을 유지하기 위한 두 번째 목표는 익숙
beginner classes on making floral arrangements. It 함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친구에게 줄 생일 선물로 꽃
was a foreign concept to me, but I decided to take the
plunge anyway.
다발을 주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초심자를 위한 꽃꽂
I signed up for five weeks of one-on-one classes, 이 강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에게는 매우
where I learned how to arrange flowers in hand-tied 낯선 일이었지만 어찌 됐든 한번 해보자고 결심했다.
bouquets, vases, baskets, and even as table center-
pieces. I learned the names of numerous flowers
일대일 수업의 5주 과정을 등록했다. 작은 꽃다발 만
and how to mix and match colors and shapes. Even 들기부터 꽃병, 꽃바구니, 나아가 테이블 장식까지 배
though it was only one hour a week, I looked forward 울 수 있었다. 수많은 꽃의 이름을 익히고 색과 모양
to every Saturday, realizing the joy it brought me to
be able to create beautiful floral arrangements and
을 적절히 배합하는 법을 배웠다. 매주 토요일, 고작
brighten up my home for a while. Most of all, I was 일주일에 한 시간뿐이었지만 그 시간이 무척 기다려
proud that I had taken a step outside of my comfort 졌다. 아름다운 꽃장식을 만드는 재미에 푹 빠졌고 내
zone, albeit a small one.
공간을 밝혀 주는 꽃의 화사함도 알게 됐다. 무엇보다
As the world tries to make its way out of the 아주 작은 걸음일지라도 익숙함에서 벗어나, 한발 내
COVID-19 pandemic and return to normalcy, I know 디뎠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the feelings of loneliness won’t completely dissipate.
But learning to be comfortable with oneself is both
an opportunity for growth and a lifelong process. At 전 세계가 팬데믹 위기에서 벗어나 일상을 회복하려
the end of the day, even as I live alone in a foreign 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고독을 완벽하게 없애기
country, I take comfort in knowing that COVID-19
won’t last forever and that I’m not really alone—
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편안해지는 법
my friends and family are always close in heart and 을 배우는 일은 평생의 과정이자 성장의 기회다. 나는
usually just a call or text away. 이렇게 외국에 홀로 살고 있지만 코로나19가 영원하
지 않으리라는 사실과 내가 오롯이 혼자인 것은 아니
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 내 마음속에 항상 친구와
가족이 존재하고, 전화와 문자로 언제나 서로의 곁을
지키기에.

Written by Naomi Ng, editor, Korea Herald 글과 사진. 나오미 응 코리아헤럴드 에디터

47
시와
사진

모금

세상은 온통 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헌 집을 대수선하다 그걸 깨닫습니다
사람의 집 속에 무수히 많은 집이 있다는 걸
흙벽 속에 나나니벌과 호리병벌의 집이 있고
나무 속에는 좀벌레의 집이, 빈틈마다 거미들의 집이
처마 밑에는 새들의 집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사랑도 하고 새끼도 치고 살아갑니다
지금 내가 내 집만을 짓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집을 짓다 잠시 망치를 내려놓고 생각합니다
좋든 싫든 많은 생명이 깃들어 살 일 생각하니
내가 그들의 성주신이라도 된 기분입니다
다른 생명도 살 수 있는 환경이라야
사람에게도 이롭다는 말을 떠올립니다
그들이 살 수 없어 떠난다면
사람도 그 집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내가 몇 년째 짓고 있는 집, 기실은
내 안에 당신의 집을 짓는 일입니다
당신이 깃들어 살 때 나도 비로소 집이 됩니다
폐가를 뚝딱뚝딱 고쳐 짓는 일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선식 시인, 199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시간의 목축》, 《귀를 씻다》 등이 있다. ― 사진. 박하선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삶의 중간보고서》, 《天葬》, 《천불천탑》, 《발해의 恨》, 《太王의 증언》 등

48
49
문화원
탐방

50
세종
새로운 문화와 역사의 융합

世宗

새로운 변화의 중심 도시로 떠오른 세종특별자치시.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된 곳일 것 같지만 오랜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세종이 걸어온 길을 따라
천년의 역사 위로 흐르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 운주산에 있는 삼국시대 사찰 비암사

51
2

다양한 변화가 있는 곳, 세종 이름을 갖게 되었지요. 신도심과 현재 문화원이 있는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나는 조치원역. 천안과 대 원도심의 거리가 15km 정도 떨어져 있기에, 신도시에
전 사이 위치한 아담한 원도심에 세종문화원이 자리 잡 정착한 시민들과 함께할 방법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
고 있다. 백제 부흥군의 아픈 역사와 거대한 산성이 남 어요. 신도시의 주 연령층이 젊은 세대인 만큼 새로운
아 있는 운주산, 국보와 보물이 나온 고찰 비암사. 그리 변화에 발맞춘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함께하고자 노력
고 국내 최대의 인공 호수인 세종호수공원과 유리온실 하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국립세종수목원이 어우러져 새로운 문화 세종문화원의 길미숙 사무국장은 전통과 신문화의 접
와 옛 정취가 조화를 이루는 곳. 다른 어떤 곳보다 다양 점을 찾기 위한 문화원의 다양한 활동을 소개했다.
한 변화를 겪어 오는 세종이기에 새로운 문화와 간직해
온 역사의 융합을 이루는 데 대한 고민이 더욱 깊다.
2 금강의 강물을 끌어와 조성한 세종호수
“세종시라는 곳이 신도시인 만큼 문화원에도 크고 작
3 4 5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국립세종수목원의 온실
은 변화가 있었어요. 조치원문화원에서 연기문화원으
6 다양한 문화행사로 시민들의
로, 그리고 2012년에 들어와 지금의 세종문화원이라는 뜨거운 호응을 얻은 세종단오제

52
6

잊힌 축제를 화합의 장으로,


세종단오제
창포로 머리를 감고 이웃과 하나 되어 강강술래도
즐긴 한국의 3대 명절인 단오. 현대에 와서는 거의 잊힌
단오제를 되살리고, 지역 축제를 통해 화합의 장을 만
들고자 세종문화원이 나섰다.
지난해와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개최되지 못했지만,
2019년까지 활발하게 진행돼 온 세종단오제는 다양한
문화행사로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꿈의 오케
스트라 세종’의 식전 공연을 시작으로 남사당놀이, 줄타
기, 체험마당과 전통민속놀이 등의 행사가 이어진다.

3 “‘꿈의 오케스트라 세종’에 대한 시민들의 호응과 참여


도는 정말 뜨겁다고 할 수 있어요. 바이올린·비올라 등
의 현악기를 비롯해 목관악기와 타악기까지, 세종시 지
역의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
어 활동하고 있어요. 아름다운 음악을 자양분으로 성장

4 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파트별로 연습을 이어가는 모습


5
이 참 보기 좋아요. 많은 단원이 대부분 신도심에 살기
때문에 문화원의 연습실과 거리가 있는데도 열심히 참
여하는 모습에 저희도 힘이 납니다.”
길미숙 사무국장은 인터뷰를 진행한 세종문화원의 서
가에서도 파트별 연습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세종단오제가 열리는 세종호수공원은 축구장의 62배
크기를 자랑하는 국내 최대의 인공 호수다. 전월산을
한 폭의 그림처럼 두르고 있으며, 주변에는 국립세종도
서관과 국립세종수목원이 있어 쉼과 문화의 기회를 모
두 제공한다. 또한 호수 주변에 조성된 산책로와 자전
거도로, 5개의 인공섬은 누구나 쉬어가기 좋은 최적의
휴식 공간이다.

53
충절의 정신을 되새기는 독락문화제 8
9
세종시를 관통하며 흐르는 금강. 금강은 강변에서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과 더불어 나성동
독락정 역사공원이 있어 문화유산까지 품고 있다. 독락
정은 300여 년 전 건립된 정자로 부안 임씨의 상징적인
유적이면서 동시에 세종대왕의 ‘사패지賜牌地’로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1437년에 지어진 후 여러 차례 고쳐
지어졌는데, 주변에는 큰 소나무가 우거져 있고, 앞에
는 반짝이는 금강의 물결을 바라볼 수 있다.
인근에는 공공기관과 아파트가 밀집한 신도심이 보여
시공간을 초월하는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곳이기도 하
다. 독락정은 임난수 장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
된 것으로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때 벼슬을 지낸 임난수 장군은 국권이 조선으로
넘어가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뜻을 품고 벼슬을
사양했다. 이후 세속에서 벗어나 금강 인근에 은거하며
16년을 지내다 타계했고, 아들이 그의 충절 정신을 기
리기 위해 독락정을 건립했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세종문화원은 독락문화제를 개최
해 장군의 기개를 되새기고, 시민이 함께할 수 있는 프
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임난수 장군 연극 공연, 청소
년 예능 장학생 시상과 축하 공연 등을 통해 함께 지켜
야 할 정신적 유산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54
800년이 넘은 느티나무 고목과 중엽 지방 사찰 불전의 시대 특성과 지역색을 잘 간직
비암사 한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는 비암사는 세종시 가되고 있다.
의 대표 사찰로 삼국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 고즈넉한 운주산에 위치한 비암사에는 800년이 넘는
다. 비암사란 이름과 관련해 ‘뱀’을 뜻하는 충청도 사투 느티나무 고목이 언제나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리의 ‘비암’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된 전설이 있다. 흉년에는 새잎이 가지의 밑에서부터 피어오르고, 풍년
비암사에 젊은 청년이 매일 저녁 찾아와 밤새 탑을 돌 에는 위에서부터 새잎이 돋아난다는 신비한 느티나무.
다가 아침이면 사라졌다. 궁금하던 스님이 밤새 탑돌이 마당을 잔디로 조성해 둔 덕분에 정돈된 고풍스러운 공
를 하는 이유를 물어도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어 스님 원을 걷는 기분을 선사한다. 비암사 입구의 계단에는
은 청년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바위굴로 들어가는 청 시선을 사로잡는 현판이 하나 걸려 있다.
년을 쫓아가니 커다란 구렁이가 한 마리 있었다. 구렁 ‘아니 오신 듯 다녀가소서’ 쉬이 지나칠 수 없는 세월이 묻
이는 스님을 보고서,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해 왔는데 어 있는 현판 앞에 멈춰 서서, 저 멀리에서 더디지만 분명
들켜버려 소원을 이룰 수 없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 히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낀다. 묵묵히 운주산을 수행하
다. 잘못된 호기심에 구렁이의 환생을 막게 된 스님이 듯 지켜 온 느티나무의 짧은 인사가 긴 여운을 남긴다.
평생 구렁이를 돌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뱀절’이라
7 2019년에 개최된 독락문화제 중 임난수 장군 연극 공연
는 뜻의 ‘비암사’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다.
8 금강변에 위치한 독락정 풍경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1호 ‘비암사 극락보전'
9 2019년 독락문화제 중 헌다례
은 세종시의 건축문화재 중 첫 국가지정 '보물'이다. 올 10 비암사 앞마당의 삼층석탑과 극락보전
해 보물 제2119호로 지정된 비암사 극락보전은 17세기 11 800년 넘게 비암사 입구를 지키는 느티나무

10 11

55
세종문화원

문화가
피어나는 곳에서

2030년 완공을 목표로 짧은 기간 안에


많은 변화가 이뤄지는 세종시. 벌판이었던
곳에 공공기관과 주거단지가 들어오고
많은 이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문화도
함께 성장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가
주축이 되는 세종신도시를 위해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개설하고 12

운영하는 세종문화원. 동시에 읍면 지역의


원도심을 위한 특화된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앞장서고 있다.

 라 위해 싸운

선조 기리는
연기대첩제
13

매년 10월이면 세종시에서는 ‘연기대첩제’가 열


린다. 1993년 당시 조치원문화원이었을 때 시작된 제
례 행사로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1291년 고려를
침략해 금강까지 밀고 내려온 원나라의 반란군을 물리
친 연기대첩을 기념하는 행사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적군을 크게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이들의 정신을 이어
받고자 한다.

12 세종문화원 전경
13 2019년에 열린 제19회
연기대첩제 중 연극 공연 모습

56
 른과 함께
어 14

성년을 축하하는 성년례

성인으로서의 의무를 알려주고, 진정한 성인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부여하기 위해 치러지는 성년례.
잊혀 가는 전통문화를 일깨우고자 세종문화원에서는
지역 내 고등학생 또는 대학생에게 성년례를 치러준
다. 학문과 덕망이 높은 어른들을 모시고 치러지는 성
년례는, 큰손님 맞이를 시작으로 성년자 입장과 성년
선서, 술의 의식 등을 진행한다. 특히 학생들을 오래도
록 가르쳐 온 교사가 직접 학생 개개인을 위한 ‘자’를 부
14 지난 2019년 성년례에서 선서를 하는 모습
여해 주며, 학생들이 성년례를 평생 특별하게 기억할 15 꿈의 오케스트라 〈2019 정기연주회〉
16 꿈의 오케스트라 〈2020 향상음악회〉
수 있도록 돕는다.

15  나가 되어 가는

과정을 배우는
16

꿈의 오케스트라 ‘세종’

‘꿈의 오케스트라’는 2012년 베네수엘라 엘시스


테마와 업무 협약을 맺고 전 세계 엘시스테마 교육기관
과 활발한 교류를 전개하는 프로그램이다. 청소년들이
저마다 선택한 악기를 활용해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면
서 협동심과 상호 학습을 다면적으로 배울 수 있는 프
로그램으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최하고 한국문화
예술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하는 문화예술 교육 사업이
다. 세종시에서는 2016년부터 세종문화원에서 운영하
고 있다.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진 청소년들이 모여 하
나의 호흡으로 연주하는 과정을 통해, 문화와 예술로
하나 되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뤄 가고 있다.

글. 김소연 편집팀 ― 사진. 김현민(사진 1~5, 8~12) ―


사진제공. 세종문화원(사진 6~7, 13~16)

57
지역
문화
확대경

풍년의 소망, 하늘에 전하는

서산 볏가릿대
세우기
오늘날 서산의 대표적 민속의 하나로 ‘볏가릿대 세우기’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볏가릿대 세우기가 서산을 비롯한 내포 지방에서만 전승돼 온 것은 아니다.
1960~1970년대만 해도 충남·호남·영남 지방의 벼농사 지대에서는
볏가릿대를 세우는 마을이 적지 않았다.

58
아직 서산 지역에선 볏가릿대 세워져 1 2018년 제2회 서산 볏가릿대 세우기는 음력 정월 대보름 아침,
한 해 농사의 성공을 빌기 위해 볏가릿대를
볏가릿대 한마당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다른 지역의 볏가 2 볏가릿대

릿대 세우기는 빠른 속도로 쇠퇴·소멸해 갔다. 그러 (서산시 온석동) 대상으로 고사를 올리는 민속이다.
3 오곡주머니 안에
나 유독 서산과 그 인근 지역에서는 지금도 많은 마을 넣어 둔 곡식
(서산시 운산5리)
에서 볏가릿대를 세우고 있다. 예컨대 서산의 북부 지
역인 대산읍 기은1리·운산5리·독곶리, 지곡면 환성3
리·도성리·연화리·장현2리·무장1리·중왕리, 성연면 으로 고사를 올리는 민속이다. 그리고 농사가 본격적
명천리, 운산면 여미리 등에서 여전히 전승되고 있다. 으로 시작되는 2월 초하루음력 2월 첫째 날에 다시 한번
또한 서산의 남부 지역인 인지면 야당리, 서산시 온석 고사를 올리며 볏가릿대를 내린다.
동·장2동, 부석면 마룡리, 음암면 도당6리, 해미면 동
암리, 부석면 창리·송시1리 등에서도 매년 볏가릿대 장대에 매는 오곡은 도정하지 않아
를 세우고 있다. 이는 이곳 내포 지역이 아주 오래전 마을 사람들은 음력 정월 보름날 아침부터 모여
부터 전통적으로 볏가릿대 세우기 문화의 중심이었 서 볏가릿대를 만들 준비를 한다. 하루이틀 전에는 샘
음을 시사한다. 을 깨끗이 품어 놓는다. 부잣집 안마당은 삼삼오오 모
볏가릿대 세우기는 음력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 아침 여 앉은 일꾼들로 붐빈다. 동아줄은 세 사람이 있어야
에, 한 해 농사의 성공을 빌기 위해 풍년을 상징하는 튼튼하게 꼴 수 있다. 한 사람은 줄이 틀어지는 방향
오곡주머니를 긴 장대 위에 매달아, 부잣집 마당이나 으로 짚을 계속 넣어 주고, 한 사람은 멀찍이 떨어져
우물가 또는 마을 한복판에 세우고 볏가릿대를 대상 서 같은 방향으로 줄을 돌린다.

2 3

59
오곡은 도정搗精하지 않은 알곡으로 쓴다.
도정하면 곡식은 생명을 잃기 때문이다.

줄이 길어지면 가운데에서 또 다른 한 명이 줄을 잡아
준다. 그래야만 튼튼하게 줄을 드릴 수 있다. 외줄 2개
로 쌍줄을 만들고, 2개의 쌍줄을 다시 한번 엮는다.
볏가릿대의 장대는 굵은 소나무를 잘라서 마련한다.
보름 동안 세워 두어야 하므로 대개 4~6m 정도 되는
튼튼한 소나무로 준비한다. 장대의 꼭대기에는 벼·
콩·조·보리·수수 등 오곡을 각각 백지에 싸서 매단다. 4 5 6

오곡은 도정搗精하지 않은 알곡으로 쓴다. 도정하면


곡식은 생명을 잃기 때문이다. 벼에는 생명이 있지만,
쌀에는 생명이 없다. 이처럼 오곡주머니를 달고, 장대
에는 흰 천이나 백지에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농사가 천하의 큰 근본’이라고 쓴 깃발을 매단다.

정월 보름날, 볏가릿대를 세우고 나면 풍물패가 신나


게 풍장을 치며 흥을 돋운다. 제관은 볏가릿대 앞에
고사상을 차린다. 제물은 옥수, 팥시루떡, 돼지머리,
삼색실과, 포 등이다.
옥수玉水는 큰 동이에 떠 놓는다. 조그만 종지나 그릇
에 담은 청수淸水와 대비된다. 옥수는 단순한 청수가
아니다. 최고의 신령에게 바치는 지극히 맑은 물이다.
도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신령이 옥황玉皇이다. 민속
상에서는 대체로 하늘의 신령에게 바치는 청수를 옥
수라 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고사상 앞에 풍년을 비는
뜻에서, 나락이 달린 볏단을 지게 위에 실어서 볏가릿
대 옆에 가져다 놓기도 한다.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에


볏가릿대 내리기
그렇게 보름이 지난 뒤 2월 초하루가 되면 볏가
릿대를 내린다. 이날은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는 시
기로 ‘농군의 날’, ‘머슴의 날’이라고도 한다. 한 해 농
사를 시작하면서 마지막으로 하루를 놀며 쉬는 것이
다. 이처럼 볏가릿대를 내리는 날은 농군의 날과 맞물
려 있다. 7

60
볏가릿대를 내릴 때는 어느 방향으로 쓰러뜨릴지 판 4 볏가릿대 새해의 농사 시작’과 연계돼 있는 것이다.
(서산시 환성3리)
단한다. 대개는 삼살방三煞方: 세 가지의 불길한 살(煞)이 낀 방 5 오곡주머니
볏가릿대의 본질은 오곡주머니와 장대이다. 종이나
위이 없는 쪽으로 쓰러뜨린다. 일부 마을에서는 볏가 (서산시 환성3리) 헝겊에 싼 오곡은 볏가리를 상징한다. 볏가리는 단순
6 볏가릿대를
릿대가 쓰러지는 방향에 있는 마을에 풍년이 든다고 쓰러뜨리기 전에
히 볏단을 쌓아 놓은 가리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벼
도 여겼다. 그래서 일부러 마을 안쪽을 향해 넘어뜨리 정성을 들이는 를 비롯한 여러 곡식의 가리도 동시에 의미한다. 볏가
주민들
려고도 했다. (서산시 환성3리) 리는 풍년의 표상이다.
이날도 볏가릿대를 세울 때처럼 풍장패가 한판 쇠를 7 2018년 제2회 서산 이러한 볏가리를 하늘 높이 솟아오르게 하여 풍년의
볏가릿대 한마당 중
부수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돈다. 상쇠는 볏가리대 앞에 지신밟기 소망을 하늘에 전달하고, 아울러 풍년의 의지를 세상
간단한 고사상을 차리고, 헌작獻爵·재배再拜를 한 후에 에 알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장대이다. 얼핏 보면
볏가리대를 내린다. 어떤 마을에서는 볏가릿대를 세 볏가릿대의 장대는 단순한 장대에 불과하지만, 여기
울 때가 아니라 내릴 때, 가가호호 방문해 지신밟기를 에는 고대로부터 전 세계적으로 보편성을 지니며 전
하기도 했다. 승되고 있는 우주축 또는 우주목의 희미한 모습이 서
려 있다.
무형 유산의 가치가 주목되는 볏가릿대 요컨대 볏가릿대 세우기에는 한국의 전통적 신간 문
볏가릿대가 지닌 무형유산상의 가치는 무척 주 화, 진정한 새해의 첫날인 음력 대보름과 본격적 농사
목된다. 그 근원적 배경에는 ‘우주목宇宙木 또는 세계 개시일인 2월 초하루 관념, 풍년의 상징인 볏가리를
수世界樹로서의 장대’와 ‘풍년을 기원하고 보장하는 볏 하늘 높이 게시해 풍년과 평안을 하늘에 빌고 아울러,
가리’가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볏가릿대는 신간神竿 그렇게 되도록 힘쓰자는 집단적 의지, 오곡주머니로
신앙의 한 갈래이기도 하다. 그리고 볏가릿대를 세우 보는 농점農占과 풍년에 대한 신념 등이 상호 연계돼
는 시간은 진정한 새해의 시간인 대보름에, 볏가릿대 형성된 탁월한 가치를 지닌 무형문화유산이다.
를 내리는 시간은 본격적인 농사의 시점인 2월 초하루
글. 남향 (재)금강문화유산연구원 ―사진 .남향(사진 2~6),
에 맞물려 있다. 곧 볏가릿대는 시간상에서도 ‘진정한 서산문화원(사진 1, 7)

61
맛있는
한국

1 2

천 가지 근심 잊는

전통주 한잔
우리의 전통주는 곡물로 지은 고두밥과 누룩, 물을 넣어 발효한 술로
흔히 ‘약주’라 한다. 발효 과정을 반복하는 횟수에 따라, 곡주로 거르는 방식에 따라
우리 약주의 종류와 도수, 쓰임 등은 다양하기가 말로 다 할 수 없다.

62
밥은 봄과 같이 술은 겨울과 같이
조선의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은 주당酒黨으로
도 유명한데 1504년 《연산군일기》를 보면 “막걸리 한
잔으로 천 가지 근심을 잊어버린다”고 쓰여 있다. 또
궁의 산해진미보다 고향의 음식을 그리워한 철종이
궁중에 막걸리가 없음을 한탄하자, 철종비철인왕후가
친정 노비에게 직접 막걸리를 구해 왕께 바쳤다는 이
야기도 전해 온다. 노비부터 왕까지 시름을 달래고 입
을 즐겁게 한 막걸리는 그야말로 특별한 곡주임이 틀
림없다.
우리의 전통주는 청주淸酒, 탁주濁酒, 소주증류주로 나
뉜다. 대부분 발효주이고 곡주穀酒로 거르는 방식에
따라 청주와 탁주가 있다. 그것을 증류해 순수 알코올
만 추출하면 도수 높고 맑은 소주燒酒가 된다. 술의 품
질은 발효 과정을 반복하는 횟수에 따라 단양주·이양
주·삼양주가 있고, 이양주 이상을 중양주라 했다. 보통
우리나라 술은 두 번 담그는 이양주가 대부분으로, 발
효제로는 밀 누룩을 많이 썼으나 보리 누룩을 쓰기도
했다. 조선의 기록으로 보면 남아 있는 누룩 종류만 50
여 종에 이르니 조선의 가양주가 얼마나 다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쌀로 만든 이화곡과 녹두로 만든 향온
국 등 특수 누룩으로 빚어낸 고급술의 향취는 매우 높
았으나 양반의 집안이나 부유한 집안에서나 마실 수
있었다.
3
1700년대 기록인 《부녀필지》를 보면 “밥은 봄과 같
이 먹고, 국은 여름과 같이 먹고, 장은 가을과 같이 먹
고, 술은 겨울같이 하라”고 기록돼 있다. 즉 술은 차게

이화곡 앉히며 마셔야 음식 궁합이 맞다는 뜻으로, 일본식으로 데워

배꽃을 기다리나니 서 마시는 방법은 전통문화 말살 정책의 흔적이라 하

구멍떡 만들어 겠다. 우리의 전통 청주는 씨 누룩을 넣어 발효하기에

이화주 빚으면 코지, 효모, 주모를 쓰는 일본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 뉘랑 마실꼬? 전통 청주는 다양한 맛과 뛰어난 향기가 특징이고, 청

-청연靑蓮 주의 종류만 1,000종이 넘는다.

1 2 필자가 직접 담근 이화주를 올린 소반
3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 중 〈주막〉

63
목적과 때에 맞게
다양하게 빚은 가양주
양반가의 가양주는 보통 스무 가지 이상을 보유했는
데, 제사와 차례를 지내는 풍속이 있어 제주祭酒: 제사에
쓰이는 술목적의 술과 손님 접대와 농사일에 중요한 일꾼

들을 위한 농주農酒를 따로 빚어 대접했다. 부모 공양
과 어른 공경의 반주飯酒 접대 문화는 예부터 우리 선조
들이 지켜 온 음주 문화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절기에 따라 마시는 절기주節氣酒도 있었다. 대보름의
이명주耳明酒는 오곡밥, 보쌈, 진채식, 아홉 가지 부럼
과 함께 귀밝이술이라 했다. 농사철이 시작되는 2월
초하루 중화절식과 농주農酒가 있었다. 또, 3월 삼짇날
의 두견주杜鵑酒, 동지 후 105일째 되는 한식날 성묘에
쓰는 청명주淸明酒, 단오절의 창포주菖蒲酒, 7월 보름 백
중날百中日의 부의주浮蟻酒라 하는 동동주, 추석의 햅쌀
술, 중구重九, 음력 9월 9일의 국화주菊花酒, 시제時祭의 청
주淸酒까지 계절에 맞게 우리 술을 빚었다.
또 명가명주名家銘酒라는 말이 있는 만큼 우리의 가양
주, 전통주는 130여 가지로 가가호호 술 빚는 시기와
방법이 달랐다. 제사에 올릴 것인지 빈객 접대를 위한
가양주를 상비하는 것인지 등에 따른 집안의 사정에
알맞게 술을 빚었다.

배꽃 필 때 빚던 이화곡
탁주는 술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
고 있다. 애환을 달래 주는 막걸리의 유래는 단군이
소를 잡아 신농제神農祭를 지낼 때 햇곡식으로 빚은 술
을 올려 신농주神農酒로 본다. 탁주와 청주 중 어느 것
이 먼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부터 구
별되어 빚어졌고, 빚는 방법에서 보면 탁주가 먼저였
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시대 선비의 문집文集 등에
서 ‘막걸리’로 추측되는 기록이 확인되며, 조선 시대
《규합총서》, 《음식디미방》 등의 조리서에서 막걸리의
45

4 막걸리를 거르는 모습
5 전통 누룩

64
제조 방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당대 절기 풍속으로 배꽃이 만발할 때 집마다 빚던 고급 탁
한글 소설 등에서 막걸리의 한글 표현이 확인된다. 일 주다. 이때 사용하는 누룩은 멥쌀로 동그랗게 성형해
일주一日酒, 삼일주三日酒 같은 속성주나 미인주美人酒, 솔잎에 앉혀 한지로 덮고 지푸라기를 깔고 열기 없는
지주旨酒 같은 술이 탁주에 속한다. 구들장에서 발효시킨 이화곡이다. 이화주는 멥쌀 누
이화주는 이화곡이라 부르는 쌀누룩을 배꽃이 피는 룩을 쓰고 물이 들어가지 않으며 구멍떡, 백설기 등으
계절에 구멍떡으로 빚는 막걸리로, 고려 시대부터 떠 로 빚어낸다.
먹던 ‘성인용 요구르트’라 할 만하다. 지금은 사라진 막걸리는 물과 쌀, 누룩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
이 쉽게 접할 수 있었고, 서민의 애환을 달래 주는 술
의 대명사가 되었다. 농사꾼들 사이에서는 “같은 품삯
을 받더라도 새참으로 나오는 막걸리가 맛있는 집으
로 일하러 간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농번기에는 농
민의 땀과 갈증을 해소하는 농주農酒로 기능하였다.
또한, 막걸리는 예로부터 마을 공동체의 생업·의례·
경조사에서 빠지지 않는 요소였다. 오늘날에도 막걸
리는 신주神酒로서 건축물의 준공식, 자동차 고사, 개
6 이화곡은 멥쌀을 동그랗게 빚어
업식 등 여러 행사에 제물로 올릴 정도로 관련 문화가
구들장에서 발효시킨 쌀누룩이다.
7 배꽃이 필 때 마시던 계속 유지되고 있다.
고급 탁주 이화주
우리나라에서 막걸리는 많은 국민이 즐기고 향유하
6 는 대중적인 술이다. 조선 시대까지 막걸리는 집마다
7
가양주家釀酒로 빚어 집안 특유의 술맛을 유지해 왔으
며, 김치, 된장과 같이 각 가정에서 직접 만들어 먹던
발효 음식의 하나였다. 근대 이후 국가 정책의 흐름에
따라 가양주 대신 양조장 막걸리가 일반화되고 재료
가 변화하기도 하였지만,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2000년대 이후에는 막걸리
열풍이 불면서, 자가 제조도 증가하는 추세다.

세계적인 바이러스 난세에 비대면非對面 문화까


지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요즈음, 전통주와 누룩에
관한 이야기가 얼마나 와닿을지 알 수 없으나, 지나간
시간 속의 주향酒香과 인향人香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
유산인 것만은 분명하다.

글. 이성희 반가음식요리가 ― 사진제공. 이성희(사진 1, 2, 6, 7),


국립중앙박물관(사진 3), 국립민속박물관(사진 4), 문화재청(사진 5)

65
문화
끼리

인장 과 印章 이름을
Sign
남기는
사인 인간의
행위에
대해

문화는 시대 흐름과 사회적 필요에 따라 변화한다. 고대에서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간단하면서 편리한 표현 방법이 두드러지고,
물질문명의 발달로 소재 또한 다양해지면서 발전과 변화가 거듭되는 가운데,
쇠퇴와 소멸 후 새롭게 다시 생성되기도 한다.
개개인을 구별해 알리는 표지標識도 예외는 아니다.

66
인터넷이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들어오면서 우리 인장을 찍어야 작품의 완성
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자 본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도장은 인장 문화에서 비롯되
로그인을 하고, 서류에 결재하거나 카드를 사용할 때 었다. 인장印章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서명을 한다. 최근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특수 사용 주체에 따라 관인官印과 사인私印으로 구분하고,
한 상황을 맞아 공공장소를 방문할 때에는 QR코드를 사용 목적에 따라 실용 인장과 예술 인장으로 나뉘기도
이용해 출입한 사람의 정보를 남기는 일이 필수가 되 한다. 서화 작품에 사용되는 인장을 흔히 낙관이라 하
었다. 불과 십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상에서 주로 사용 는데 이는 낙성관지落成款識*의 줄임말로, 서화 인장**
하던 개인 표지가 도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 과 낙관의 용어는 구별해서 사용해야 한다.
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도장을 지참하고 도장에 인주 서화 작품에 인장을 사용하게 된 역사는 중국 명·청 시
를 묻혀 찍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보다 펜으로 간편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청대에 전문 서예가들이 대
하게 서명하면 끝나는 사인의 편리함이 선택받은 셈 거 출현하면서 작품에 이름을 쓰고 인장을 찍는 게 유
이다. 그러나 아직도 중요한 서류나 계약서에는 사인 행이 되었다. 그전에는 정보 전달이란 실용 목적의 기
보다 날인捺印, 곧 도장을 찍는 것을 선호하며 중요도 록에 중점을 두었으므로, 대부분 글쓴이의 이름을 남
에 따라 인감증명서와 인감도장을 요구한다. 기지도 인장을 찍지도 않았다. 그러나 글씨를 예술적
으로 다루는 전문 서예가들에게 글씨는 곧 작품이었
1 《이인상서화첩》으로 알려져 있는 이 첩에서는 다양한
고, 작품에 품격을 더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인장을
형태의 소장인을 볼 수 있다.
2 흥선대원군이 제일난실(第一蘭室)이라 적은 편액. 찍음으로써 작품이 완성된다고, 진정한 작품이 된다
편액 오른쪽에는 난초 문양과 함께 둥근 두인(頭印)이 하나
고 생각했다. 그 결과 날인 여부가 완성과 미완성을 구
있고 왼쪽에는 대나무 문양과 함께 대원군의 호 석파(石坡)와
대원군장(大院君章)의 인장이 날인되어 있다. 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 서화 작품을 완성한 후에 그 작품을 쓴 연유(緣由)와


내역 그리고 완성된 연월일과 장소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아호와 이름 밑에 음각(성명인)과 양각(아호인)의 인장을
압인(押印)하는 전체 과정을 이르는 말이다.
** 서화 작품에 쓰이는 인장은 성명인(姓名印), 아호인(雅號印),
두인(頭印), 유인(遊印), 당호인(堂號印) 등이 있다.

67
3 4

4 백자 사자 모양 인장
3 개인의 개성과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는 사인. 5 보물 제1618-3호 국새 유서지보
순서대로 대통령 문재인, 피카소, 빌 게이츠, 미켈란젤로, 6 추사 김정희 인장
배구선수 김연경, 필자 오민준 7 필자가 새긴 서화용 인장

68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현대성을 추구하는 작품이 늘
어나면서 기존 서화 작품의 날인 방식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성명인 또는 아호인만 찍거나 하나
의 인면印面에 이름과 아호를 함께 새겨 날인하는 경우
도 있으며, 양각과 음각의 구분 없이 새겨서 사용하기
도 한다. 굳이 기존의 격식만을 최고라 여기며 고집할
필요는 없다. 다만 애초에 인장을 사용하게 된 이유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인 만큼, 최소한 작품
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지는 서체로 새기고 날인하는
위치, 크기, 모양 등을 고려해 사용해야 한다.
흥미로운 건 최근 일반인 사이에서 돌에 새긴 수제 도장 8 최근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되는 수제 도장
8

이 유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이들은 소장품에 날


인하는 장서인藏書印이나 수장인收藏印으로 수제 도장을
사용하는데 전문 서화가들의 것과 같은 형태의 도장을
소유해 사용하고 싶은 욕구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추측
한다. 또한 대중적으로 인기 높은 캘리그라피의 영향도 이름을 남기는 것은 신중하게
적지 않을 것이다. 상아나 벽조목을 사용한 전형적인 인 유명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한 번쯤 멋진 사인을
감도장 대신 연질의 돌에 전통적인 인장 형태를 새기고, 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이름을 한글·영문·한자로 다
측면에는 현대적 미감의 그림을 가미한 퓨전Fusion 스타 양하게, 여러 형태로, 이리저리 쓰면서 연습한 적이 있
일의 도장이 각종 기념일이나 축하 선물로 주목받으면 을 것이다. 자신만의 필체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것
서 새로운 형태의 도장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이다. 도장도 마찬가지다. 격조 있는 도장이든, 이색적
인 스타일의 도장이든 자기만의 도장을 소장해 특별
하나의 개인 브랜드가 된 사인 해지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인
동양의 작가들이 작품을 마무리하며 서명으로 장과 사인이 갖는 진정한 의미다. 인장과 사인에는 이
인장을 사용했다면, 서양의 작가들은 사인을 사용했 름이 들어 있다. 이름이란 다른 것과 구별돼 불리는 나,
다. 일반적으로 사인은 날짜와 작가의 이름을 서명하 곧 또 다른 자신이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름
며 그 사인은 작품의 진위를 판단하는 중요한 요인이 은 그 사람 자체로 간주돼 누군가를 축복하거나 저주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인은 단순히 이름을 쓰는 수준 할 때 반드시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하물며 이름을
이 아니라 독창적으로 구상돼 고유한 형태를 띠기도 유형화해 남기는 인장과 사인이랴. 어른들이 종종 하
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사인은 개인의 정체성을 드 시는 말씀이 있다. “함부로 도장을 찍으면 안 된다. 패
러내는 일종의 로고 디자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중 가망신한다.” 그만큼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행위에는
에게 이름이 알려진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들을 생각 크나큰 책임이 따른다. 법적 근거 자료가 되는 날인과
해 보자. 가끔 팬 사인회가 열릴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서명에 대해 신중 또 신중해야 할 것이다.
몰리는가. 같은 친필 사인이라도 사회적 인지도나 유
명세에 따라 그 가치는 하늘과 땅 차이다. 사인은 하나
글. 오민준 오민준글씨문화연구실 대표 ― 사진제공.
의 개인 브랜드인 것이다. 실제로 많은 유명인이 자신
국립중앙박물관(사진 1, 2, 4), 국립고궁박물관(사진 5),
만의 독특한 사인을 갖고 있다. 오민준(사진 6, 7), 새김소리(사진 8)

69
문화,
지금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OTT는 전파나

언제 케이블이 아닌 인터넷망으로 영상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을 일컫는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TV 앞에 앉아
감상하는 기존 콘텐츠와 달리, 시간과

어디서나 장소의 구애 없이 다른 사람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장점으로 젊은 소비자층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70
따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ver The Top, OTT가 대세다.
새로운 플랫폼으로 주목받다가 코로나19 확산 여파
로 덕을 봤다. OTT의 대표 격인 넷플릭스는 전 세계
유료 계정 수가 2억 900만 개에 이른다. 닐슨코리안

함께
클릭 집계에 따르면 한국에선 지난 1월 이용자 수가
895만 명에 달했다. 이후 이용자 수가 감소세이나 토
종 OTT인 ‘티빙’과 ‘웨이브’ 이용자 수가 증가했다. 극
장 관객은 코로나19로 예년에 비해 70%가량 주저앉
았다. 극장 관객 감소와 OTT 이용 증가는 반비례 관
계라 볼 수 있다.
OTT 이용 증가는 ‘파티’라는 수식이 붙는 비대면 집

OTT
단 관람 문화 활성화로 이어졌다. 여럿이 따로 그리고
함께 온라인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문화는 코로
나19 유행 이전부터 있었지만, 코로나19로 실내 활동
이 늘면서 ‘OTT파티’ 문화가 더 널리 퍼졌다.

파티 OTT라고 혼자 봐야 하나
OTT 콘텐츠 함께 보기 서비스는 미국 ‘텔레파티
Teleparty’가 시초다. 넷플릭스 등 OTT 유료 계정만 있
으면 이용할 수 있다. 여러 명이 함께 동시에 넷플릭스
등에 접속해 정해진 콘텐츠를 보면서 채팅을 나눈다.
OTT를 혼자 볼 때의 고립감을 해소할 수 있고, 콘텐츠
를 끊김 없이 ‘완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1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의 대표 격인 넷플릭스의 텔레파티 극장 관람은 수고와 불편이 따른다. 대체로 차를 타
고 이동해야 하고, 티켓을 끊어야 한다. 처음 보는 옆
자리 사람과 팔걸이를 두고 신경전을 펼칠 수도 있고,
수다스러운 관객이 주변에 앉으면 관람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영화가 생각보다 재미없다고 자리를 털고 일
어나기가 쉽지 않다. 요컨대 극장 관람은 기회비용이
높다.
코로나19 유행 이전 여러 수고와 불편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극장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큰 화면과 웅
장한 사운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사람들은 여러
명과 함께 어두운 공간에서 동시에 영화를 보는 행위
를 즐기기도 한다. 친구들과 어느 영화를 볼 것인지
대화를 나눈 후 관람 영화를 선택하고, 영화를 본 뒤
1 에는 여러 이야기를 교환한다. 집에서 OTT 콘텐츠를

71
2 3
2 시각적 콘텐츠 개념인 OTT 서비스 이용자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
3 영화를 본 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을 OTT 콘텐츠를 통해 느낄 수 있다.

혼자 볼 때 느끼기 힘든 재미다. ‘OTT파티’는 이런 허 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체험하도록 해 주려는 목적이


점을 메우려는 움직임이다. 담겼다. 국내에서는 OTT 왓챠가 자체적으로 운영하
무엇을 볼지 고민하다 시간을 허비한다는 ‘넷플릭스 는 ‘왓챠파티’가 이에 해당한다.
증후군’도 파티 문화 형성에 영향을 줬다. 모르는 이 국내에도 텔레파티처럼 여러 OTT를 함께 즐길 수 있
가 어떤 영화나 드라마를 골라 방을 열면, 콘텐츠를 는 서비스가 있다. ‘스크리나’가 대표적이다. 스크리
고르는 수고를 덜고 바로 영화나 드라마를 즐길 수 있 나에서는 넷플릭스와 왓챠, 웨이브, 티빙을 비롯해 유
어서다. 튜브, 비메오, 도라마일본 드라마 전문 OTT, 라프텔애니메이
션 전문 OTT의 콘텐츠를 비대면으로 집단 관람할 수 있
늘어나는 OTT, 다. 스크리나를 이용하기 위해선 해당 OTT마다 유료
늘어나는 비대면 ‘단관’ 계정이 있어야 한다. 스크리나는 커뮤니티를 운영해
‘OTT파티’는 서비스 제공자에 따라 구분 지을 사람들이 영화나 드라마 등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수 있다. 텔레파티는 넷플릭스 등과는 별도로 운영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근거지 역할을 하려 하고 있다.
는 회사다. 텔레파티를 통해 넷플릭스 이외에도 여러 유명 영화평론가 등 영상에 대한 조예가 깊은 사람들
OTT를 즐길 수 있다. ‘시너Scener’라는 서비스도 유사 과의 집단 관람을 추진해 이용자의 충성도를 높이려
하다. 는 전략도 취한다.
미국 OTT 아마존 프라임과 디즈니플러스, 훌루 등
은 별도로 ‘파티’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홈페 코로나19와 OTT 시대가 만든 새 유행
이지에 들어가거나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면 비대면 OTT파티 문화의 유행 요인으로는 OTT 확산을
집단 관람이 따로 가능하다. OTT별로 가입자 수 증대 우선 꼽을 수 있다.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처럼 다
와 더불어 가입자 이탈을 막기 위해 제공하는 부가 서 종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대형 OTT가 대중의 사
비스다. 가입자들에게 단순히 콘텐츠만 제공하는 것 랑을 받는 동시에 전문적인 OTT 역시 등장하고 있다.

72
OTT파티 문화의 유행 요인으로는 ‘무비Mubi’라는 예술영화 전문 OTT가 시네필들 사이
OTT 확산을 우선 꼽을 수 있다. 넷플릭스나 에서 성업 중이고, 예술영화 DVD 제작 판매로 유명

디즈니플러스처럼 다종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한 크라이티리언은 지난해 북미 지역에서 OTT 서

대형 OTT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동시에 비스를 개시했다. 국내에서는 여성 영화를 전문적으

전문적인 OTT 역시 등장하고 있다


로 소개하는 ‘퍼플레이’가 여성들에게서 인기를 끌
고 있다.
OTT가 늘면서 선택의 폭이 지나치게 넓어졌고, 누군
가가 골라 준 콘텐츠를 함께 보고 싶은 욕구가 늘었
다. 넷플릭스 등이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이용자의
이용 이력을 추정한 후 맞춤형으로 작품을 추천해 준
다고 하나 한계가 있다. OTT가 늘어나고 제공 콘텐츠
가 급증하면서 커뮤니티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며, 영
상 분야에 대한 지식과 식견을 가진 이의 안내가 더 필
4 OTT 콘텐츠를 누릴 수 있는 국내 서비스, 스크리나
5 퍼플레이는 여성 영화를 전문으로 제공하는 OTT 사이트다.
요해졌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실내 활동 증가는 비
대면 단체 관람에 대한 욕구를 더 부추겼다.
4
5 기성세대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채팅을 하는 문화
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시청 집중도가
떨어질 수 있는데 번거롭게 키보드를 치면서 채팅까
지 하느냐고 의문을 품기 십상이다. 기술에 대한 세대
차이가 존재한다. MZ세대는 어려서부터 전화 통화보
다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 사용이 익숙하고 심리적
으로 더 편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비대면 집단 관람, ‘OTT파티’는 아직 비주류다. 즐기
는 세대가 젊은 층에 한정돼 있기도 하다. 하지만 기술
은 새 문화를 만들고, 문화는 새 기술의 발달을 자극한
다. 불편한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으면서도 접촉
과 소통을 갈구하는 젊은 세대들의 행동 방식을 고려
했을 때, 비대면 집단 관람은 곧 주류로 떠오를 가능성
이 크다. 현실 같은 가상 세계를 추구하는 메타버스의
발달은 이런 경향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글. 라제기 한국일보 영화전문기자 ― 사진제공. 셔터스톡(사진 2),


셔터스톡-wutzkohphoto(사진 3)

73
문화
에세이

장애와
비장애의

74
경계를
를 배리어프리barrier free는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허물다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도로·공공시설·서비스 등과 같은
물리적 장벽뿐만 아니라, 정보·문화 등
심리적 장벽을 허무는 운동을 의미한다.

2000년 아트선재센터 영화팀장으로 일하고 있


을 때 일이다. 하루는 농아인협회 국장님이 찾아오셔
서 장애인영화제를 준비하고 있으며 처음 하는 일이
니 도와 달라고 하셨다. 한 달에도 몇 건의 행사를 진
행하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승낙했고 영화제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영화제였다. 이제
껏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지 못하던 시각장애인, 청각
장애인을 영화관으로 초청하는, 그야말로 ‘대단한’ 일
이었다. 아나운서는 영화의 장면을 설명하는 음성 해
설을 현장에서 읽어 주고 관객들은 소풍을 온 것처럼
삶은 달걀과 귤을 까먹으며 영화를 즐겼다.
그런 관객들을 보며, 나는 밤잠을 설치며 기다리던 소
풍처럼 영화를 대한 적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반문했
다. 나에게는 일상인 영화 보기가, 누군가에게는 ‘바
라고 기다려야’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꼈다.

‘장애인’용 아니라
‘누구나’ 볼 수 있는 영화
2010년 가을, 배리어프리영화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일본 사가시에서 열리는 ‘배리어프리 사가영화
제 2010’에 참석했다. 배리어프리영화는 기존의 영
화에 화면을 설명해 주는 음성 해설과 화자 및 대사,

1 국내 대표 배리어프리 공연인 〈페스티벌 나다〉의 한 장면


1 (2019년). 가수 크라잉넛이 관객과 수어로 노래하고 있다.

75
2 일반 버전 영화 스틸컷(예시) 2 3
3 화면을 설명해 주는 음성 해설과 화자 및 대사, 음악,
소리 정보를 알려 주는 배리어프리 영화 스틸컷

음악, 소리 정보를 알려 주는 배리어프리 자막을 넣어 어프리’라는 용어가 쉬운 말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당


시·청각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함께 볼 수 있 시에도 배리어프리보다는 ‘무장애’ 등의 용어로 번역
는 영화를 말한다. 당시 일본의 배리어프리영화도 시 되어 사용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배리어프리
작 단계였으며, ‘배리어프리 사가영화제’는 일본에서 영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어떤 선
처음으로 열리는 배리어프리영화제였기 때문에, 일 입견도 갖지 않고, 배리어프리영화를 ‘영화’로 봐주길
본에서 활동하는 배리어프리영화 관계자들이 모이는 바라는 데 있었다.
자리였다. ‘장애인’용 영화가 아니라 ‘누구나’ 볼 수 있는 편한 영
사가현의 현도인 사가시는 젊은 층이 떠난 고령화된 화로 인식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사용한 ‘배리어프
지방 도시였다. 도서관이 있는 복합문화센터의 극장 리영화’에 대해 설명한 지 10년이 되었다. 지난 10년
에서 열리는 영화제는 아주 소박했다. 하지만 그 누구 간 우리가 배리어프리영화를 꾸준히 만들고 있는 이
도 구분하지 않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한국에서 온 유는 배리어프리영화를 보는 관객이 온전히 영화를
우리를 반기는 주민들의 자연스러움에 들뜨게 되었 즐기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다. 〈워낭소리〉를 보고 나온, 눈이 보이지 않는 할머
니는 집에서 기르던 소 이야기를 하시며 우시기도 했 불편해도 함께하는 게 좋다!
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온 손자 손녀들도 함께 배리어프리영화를 만들고 보여 주는 일을 하면서,
영화제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자연스레 영화를 만드는 영화감독도 만나고 장애인 관
함께 간 한국 동료들과 나는 그런 모습을 한국에서 객도 만나게 된다. 창작자와 수용자로 서로 다른 자리
도 보길 바랐고,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배리어프리영 에 서 있는 이들이지만 배리어프리영화를 맞이하는 마
화제를 만들게 되었다. 2011년에는 건축에서만 쓰던 음은 같았다. 영화감독들은 본인의 영화가 더 많은 관
‘배리어프리’라는 용어를 일본에서처럼 한국에서도 객과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배리어프리영화 제작
사용할지를 두고 내부에서 많은 토론을 거쳤다. ‘배리 에 참여한다고 했다. 안 보이고, 안 들리는 관객을 위해

76
기업의 1년이 훨씬 큰 영향을 준다는 점이 약간 씁쓸
하지만, 넷플릭스를 보는 10대, 20대의 배리어프리 콘
텐츠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는 점은 고무적인 일이다.

공감하고 표현하면서
문화는 확산된다
코로나19가 가져온 또 다른 영향은 연극에서 배
리어프리를 가속화했다는 것이다. 간간이 배리어프
리 공연이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2020년 공연이 극장
4
4 실시간으로 수어 통역, 문자 통역이 제공되는 에서 열리지 못하고 공연 영상을 만들게 되면서 배리
댄스필름-아티스트 토크 프로그램 현장 진행 모습
어프리 버전 제작이 급증했다. 공연계도 이제 배리어
프리 공연 제작의 첫걸음을 뗀 것이고 방법론을 찾아
가게 될 것이다.
지난 8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무장애예술주간
어떻게 영화를 설명할지 고민을 많이 한다. 프리뷰’를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이어 11월에는 ‘무장
2018년 배리어프리영화의 극장 상용화를 위해 여러 애예술주간’을 진행한다. 이때 음성 해설과 수어 통역
가지 시스템을 시연하고 평가하는 사업을 한 적이 있 을 함께 진행하는 행사가 마련되어 있다. 이제 공연계
다. 청각장애인 60여 명과 시각장애인 60여 명이 참 는 배리어프리 공연을 진행해야 한다는 공감을 갖게
여해 각자에게 주어진 기기를 통해 영화를 보며 평가 된 것이다.
해 주었다. 이 사업에서 거의 모든 참가자는 기기를 BTS의 뮤직비디오 속 수어 댄스가 전 세계 농인들에
사용하더라도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영화를 볼 수 게 위안을 준 것처럼 문화는 공감하고, 공감을 표현하
있다면 기기를 사용하겠다고 답했다. 친구, 가족들과 면서 확산한다. 동시대를 산다는 것은 문화를 공유하
같이 볼 수 있어서 좋다고도 답했다. 기기를 사용하는 는 것이다. 사는 지역은 달라도 BTS의 음악으로 공감
불편함이 있더라도 함께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것 하고 전 세계에 팬들이 각국의 언어로 가사를 번역하
이다. 고, 그들이 나오는 영상의 자막을 기꺼이 달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은 각자의 집에 갇혀서 온라 청각장애인들은 음악을 모를 거라는 편견을 깨고 수
인으로 즐기는 콘텐츠에 위안을 얻고 있다. 그중에 우 어로 댄스를 구성하면서 청각장애인 팬들과도 함께
리 생활 가장 깊숙이 들어온 것이 넷플릭스다. 넷플릭 하고자 하는 아티스트의 마음에 팬들은 또 답을 하는
스는 배리어프리 콘텐츠의 인지도를 단숨에 높였다. 것이다. 예술과 문화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소통하
2017년 미국 내에서 새로운 모든 콘텐츠를 배리어프 는 가운데 만들어진다. 배리어프리는 약간 특별한 소
리로 서비스하겠다는 선언을 한 넷플릭스는 전 세계 통 방법일 뿐이다.
시·청각장애인을 위해 음성 해설과 폐쇄자막 CC, Closed
Caption 서비스를 하고 있다. 이제는 핫한 드라마, 영화
를 함께 보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글. 김수정 (사)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 대표 ― 사진제공. 페스티벌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가 10년간 기울인 노력보다 대 나다(사진 1), 김수정(사진 2, 3), 한국장애인문화예술위원회(사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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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여러분의 문화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문화 문화체험, 역사탐방 등 우리 문화와 가까이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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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우리 동네 문화재,
평택 용이․죽백동 유적

2년 전에 안성에서 평택으로 이사를 왔는데, 사실 집 주변에 용이․죽백동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마을은 중앙의 해발
있는 문화재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아들과 자전거를 타고 산 55m 구릉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구릉 정상을 감싸고 1호 환
책하다가 내가 사는 용이동 근처에 문화유적지가 있다는 사실을 호가 있고, 그 바깥으로 구릉 능선과 사면을 따라 집터가 곳곳에
알게 되었다. 아들과 주말마다 자전거를 타고 배다리 생태공원으 자리를 잡고 있으며, 마을 주변은 구릉 하단부를 따라서 8자 형태
로 산책하러 가면서 꼭 들르는 곳이 있는데 바로 평택 용이․죽백 로 2호 환호를 감싸고 있다. 특히 1호 환호는 마을 중앙의 제사나
동 유적이다. 의례 관련 시설을 보호하고, 2호 환호는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설
평택 용이동 근처에 있는 용이․죽백동 유적은 평택 용죽 도시개 치한 것으로 보인다.
발 사업 과정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청동기시대부터 조선 시대까 주말마다 아들과 함께 평택 용이․죽백동 유적을 산책하면서 역
지 각 시대의 다양한 유적이 출토된 대단위 복합유적지다. 여러 사 과목에서 배우는 간접 지식보다는 이렇게 밖으로 나와 실제
가지 집터에서부터 건물지, 돌널무덤, 돌상자무덤, 구덩무덤, 저 유적지를 보고, 느끼며, 관찰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 교육이라고
장시설 등 생활 시설과 무덤이 총 1,354기나 출토되었다.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도심 주변에 이렇게 가치 있는 유적공원이
그중에서도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청동기시대의 가장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잘 알지 못하고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
대표적 마을 시설인 환호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인공 도랑이다. 알다 가 많아 안타까웠다. 따라서 평택 용이․죽백동 유적공원이 시민
시피 청동기시대 전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환호 시설은 비교적 규 들에게 역사 공부와 더불어 편안한 삶의 안식처를 제공하면 좋을
모가 커서 이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 것 같다. 한편으로는 유적공원에 산책하러 왔다가 음료수병과 쓰
으로 보인다. 따라서 환호의 규모와 시설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간 것은 참 보기가 싫었다.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용이․죽백동 마을은 청동기시대 전기에 이 지역사회에서 배려하고, 가치 있는 유적지가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우
가장 대표적인 중심 마을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특히 대형 환 리 시민들도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
호 2기 주변에서는 집터 90기, 돌널무덤 3기, 기둥 구멍 35기 등
총 130기의 다양한 유적이 출토되었다. 글·사진. 이우진 경기도 평택시

78
동해와 송림을 발밑에,
울진 월송정

월송정. 세 음절을 입안에서 밖으로 내던지듯 발화發話하면, 나면 시야가 좁아질 정도로 빠듯하게 우거진 해송림이 펼쳐진다.
나는 자연스럽게 어떤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초록색 소나무와 푸 소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향을 맡으며 걷다 보면, 얕은 계단
른빛 바다, 백금색 모래와 뒤엉켜 피부를 스치는 시원하고 습한 이 나오고 계단을 딱 ‘기분 좋을 정도만’ 걸어 올라가면 월송정이
바람, 나부끼는 듯한 아이들의 까르륵 웃음소리. 여러 이유와 개 두 눈에 넘치도록 꽉 차게 담긴다. 그렇게 도착한 월송정에 올라
인적인 연緣 덕분에 적어도 나는 월송정을 지금까지 열 번은 족히 가면 짙푸른 동해와 바다 코앞까지 자라난 소나무, 그리고 따뜻
찾은 듯하다. 대부분은 가족들과 함께였다. 신라 시대부터 화랑 하고 온화한 모래사장이 마치 나만을 위해 기다려 온 듯 순식간
들이 찾아 송림에서 달을 즐겼다는 과거의 명성에 비해, 지금의 에 펼쳐진다. 그렇지만 이 여정의 마침표는 월송정에 도착한 것
월송정은 관광지로 크게 주목받는 곳은 아니다. 세월의 변화로 으로 찍히는 게 아니라, 월송정에서 내려와 한적한 백사장을 걸
찾는 이가 줄어든 월송정에는 고독이 고였고, 나는 이 고독을 내 을 때 찍힌다. 정말 운이 좋다면 이 완벽한 바다를 방해하는 사람
휴식의 기회로 삼은 덕에 마음 편히 동해를 발밑에 두고 즐겼다. 없이 오롯이 혼자서 즐길 수도 있다.
관동팔경 중 하나로 꼽히는 월송정은 고려 시대 충숙왕 13년1326 월송정에서 걸어서 35분, 차로 5분 거리에는 구산해수욕장이 있
때 창건되어 조선 중기 관찰사 방원종이 중건했으나, 오랜 세월 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던 구산해수욕장은 몇 해 전 핑
이 흘러 낡고 퇴락해 유적으로만 존재하던 것을 1933년 향인 황 클 멤버들이 출연한 JTBC 방송 프로그램 〈캠핑클럽〉에서 소개되
만영 등이 다시 중건했다. 그 후 일제 말기 제2차 세계대전 중 일 면서 이제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동해뿐만 아니라 지친 몸을
본군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9년 이 지역 출신의 재일교포들 녹일 수 있는 온천, 신선하고 맛있게 즐길 수 있는 풍부한 해산물
로 구성된 금강회가 철근콘크리트로 현대식 정자를 신축했으나, 을 갖춘 울진. 모두 한번 가 보시라.
옛 모습을 살필 수 없어 1979년 헐어버리고, 1980년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
수많은 명승지 중에서도 내가 유달리 월송정을 좋아하는 이유
글. 박지성 서울시 마포구 ― 사진. flickr(@Republic of Korea),
는, 기승전결이 있어서다.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너른 들판을 지 김지호-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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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소식

《사진으로 보는 전라감영 복원 기록》 《옹진섬 민요집》


글·사진 손상국│감수 나종우·홍승재│발행처 전라북도문화원연합회
집필 이소라│발행처 옹진문화원

전라북도문화원연합회는 전라도
역사의 상징과도 같은 전라감영
을 복원하며, 복원의 전 과정을 사
진과 해설로 생생하게 기록한 《사
진으로 보는 전라감영 복원 기록》
을 발간했다. 조선 초기에 창건되
어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광주광역시, 제주
도까지 관장했던 전라도 최고 통치기관이었던 전라
감영은 1951년 6.25전쟁 중 폭발 사고로 완전히 사라졌고 1956년,
전라감영지에 전라북도청사를 다시 건립했다. 전주시와 전북도는
2017년부터 총 104억 원을 투입해 옛 전북도청사를 철거하고 동쪽 옹진문화원은 1987년과 1988년 옹진군 토민들을 방문하여 사라져
부지에 선화당 및 관풍각, 연신당, 내아, 내아행랑, 외행랑 등 7개 핵 가는 전래 민요를 녹음하고 현재까지 보충 녹음과 연구를 지속해온
심 건물을 복원했다. 이 책을 엮은 손상국 PD전 JTV 편성국장는 2017 이소라 민족음악연구소 대표와 함께 《옹진섬 민요집》을 발간하였
년 11월 기공식을 시작으로 2020년 10월 준공식을 치를 때까지 다. 발간된 《옹진섬 민요집》은 백령·대청·연평면 지역이 담긴 ‘서해
3년여의 복원 과정 중 7천여 컷의 사진을 촬영하였는데 이 중 450 5도 편’과 북도·덕적·자월·영흥면 지역이 담긴 ‘근해도서 편’으로 총
여 컷을 엄선하여 복원 순으로 책에 수록하였다. 2권이다. 민요집은 옹진군에 전해 내려오는 어로요, 농요, 노동요,
동요, 유희요, 흥민요, 의식요를 발굴·조사하여 악보, 가사, 사진 등
으로 담아 냈다. 한편 민요는 음원 편집을 거친 후 CD로도 함께 제

《면불일기》 작되어 옹진섬 민요 계승·발전에 토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집필 박시순│국역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발행처 당진문화원

백제 시대부터 1914년까지 2000


년간 군郡이었던 충남 당진 면천
면은, 한때 22개 면을 관할하던
웅군으로 당시 당진의 행정 및 역
편집후기
사·문화의 주요 거점이었다. 당진
시에서는 지난 2007년부터 면천
읍성 복원사업을 진행하며 면천 열정만 한 스펙은 없다
의 역사·문화를 연구, 발굴하는 우리를 지치게 한 폭염에도, 코로나19 전염병에도 배롱나무 붉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당 꽃그늘 아래서 한여름을 넘겼다. 배롱나무꽃이 백일이나 피어 있
진문화원이 최근 발간한 《면불일 어서 백일홍이 아니라, 꽃이 백일 동안 지고 피면서 이어져 목백일

기》는 지난해 당진시 문화재팀이 홍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처럼 쉼 없이 피고 지듯 《우리문화》


도 통권 300송이의 꽃을 피우려 한다.
국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한 것으로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
여름 산이 키운 다래, 머루, 잔대, 으름 열매가 각각의 맛을 내고 있
소에서 국역을 맡아 일반 대중이 알기 쉽게 풀어낸 책이다.
듯, 9월호 《우리문화》 필진의 다양한 글을 실어 보았다. 장진성 교
《면불일기》는 고종 16년1894 31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서학
수의 ‘우리 고미술을 만나다’ 연재가 기다려지며, 읽어도 다시 읽고
교수, 우통례, 우승지, 면천군수, 임실군수, 장연군수를 역임한 박시 싶은 ‘방방곡곡 유랑기’-‘문화탐구 생활’-‘한국愛 삶’ 내용은 산바람
순朴始淳, 1848~1907이, 1894년부터 면천 군수로 재직하며 9개월간279 물바람 스치듯 청량감을 느끼게 한다.
일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록한 일기로 향토사 복원과 연구를 위 편집주간 한춘섭

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80
U R IMU N H WA

우리문화 2 0 2 1 0 9
202 1 0 9

6 VO L . 296
29 9



맷돌 Maetdol 존

|

곡식을 가는 데 쓰는 기구. 맷손을 돌리면 두 맷돌 사이로 곡식이 곱게 갈린다.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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