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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RI MUNH 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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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과 닮음
|비 움 과 채 움
“나전의 빛깔을 보세요. 좌측에서 보는 것, 우측에서 보는 것, 그리고 위에서 볼 때, 
아래에서 볼 때가 다 달라요. 보는 각도에 따라 나전의 빛이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손대현 명장이 말하는 나전의 아름다움입니다. 
보석을 능가하는 우리 나전칠기의 빛이 곳곳에서 반짝이길 바라봅니다.

“Look at the color of mother-of-pearl.


It looks different depending on one’s
viewpoint—whether from the left, right,
top, or bottom. The color of mother-of-
pearl subtly changes depending on the
angle from which you view it.”
This is the beauty of mother-of-pearl
craft as described by Master Sohn
Daehyun. We hope that the light of
Korean lacquerware inlaid with mother-
of-pearl, which surpasses that of jewels,
can shine in every corner of the world.
표지 이야기

Starting with wooden furniture in its raw state made by a wooden 자개를 붙일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소목장이 짠 백골원목 상태
furniture maker, one must wait three days after applying a natu- 의 가구나 기물에 생칠을 바르고 사흘을 기다려야 한다. 이것으로
ral lacquer made from the sap of the lacquer tree to create a sur-
face for inlaying mother-of-pearl. The process of creating moth- 시작되는 나전칠기의 작업 공정은 바르고, 말리고, 벗겨내고, 갈
er-of-pearl-inlaid lacquerware (najeon chilgi) begins with this 아 내며 석 달에서 길게는 반년이 걸린다. 옻액을 흡수하고 두꺼
first step and can take from three months to as long as six months 운 칠을 입은 나무는 더는 나무가 아니다. 고려의 나전칠기처럼
to complete by applying, drying, wiping off, and sanding the lac-
천년을 가는 극진한 기술과 아름다움이 더해진 예술품이 된다.
quer several times. Wood that has absorbed the sap and become
covered in thick layers of lacquer is no longer just wood. Like the 손대현 명장 작품 — 사진제공. 수곡공방

mother-of-pearl-inlaid lacquerware from the Goryeo Dynasty, it


becomes a work of art that, through devoted technique, lasts for a
millennium and is endowed with exquisite beauty.
Work by Master Sohn Daehyun
Photographs courtesy of Sugok Workshop
30
14
닿다
다름과 닮음

4 시선 1 20 우리 고미술을 만나다 MEETING OUR OWN ANCIENT ART


꿈을 꾸는 시간 | 이만교 계산적적도 | 장진성
Streams and Mountains of Tranquility | Chang Chinsung
6 시선 2
균형 있는 삶을 위한 비움과 채움 | 장윤미 22 방방곡곡 유랑기 WANDERING AROUND THE COUNTRY
금강 따라 흐르는 백제의 서정시 | 김소연
14 곁엣사람
The Lyricism of the Baekje Kingdom
옻칠로 비우고, 나전으로 채우다 | 강진우
Flows along the Geumgang River | Kim Soyeon

30 지역문화 이야기 LOCAL CULTURE STORIES


오래된 어제와 오늘, 미래의 전통이 있는
이천 수광리 오름가마 | 김희정
The Ascending Kiln in Sugwang-ri, Icheon: Where the Tradition
of the Ancient Past, Present, and Future Resides | Kim Hee Jeong

38 문화탐구생활 CULTURAL EXPLORATION


불로장생을 염원하며, 청자 신선 모양 주자 | 강경남
The Desire for Perennial Youth and Long Life:

38
Celadon Taoist Figure-Shaped Ewers | Kang Kyung-nam

44 한국 삶 LOVING KOREA
순천에서 보낸 7개월 | 알제린
Seven Months in Suncheon | Santiago Arjelyn

월간 우리문화 vol. 302 | 202 1 1 2


ISSN 1599-4236
* 《우리문화》에 대한 의견은 편집부(hwi@kccf.or.kr)로 보내주세요.
* 게재된 기사 및 이미지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 책자는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아 제작합니다.
U R I MU N HWA * 이 책은 환경을 위해 FSC 인증을 받은 종이(한솔제지 인스퍼M러프)와
친환경 펄프로 생산한 종이(무림제지 네오스타 백상지)를 사용하였으며
A KOREAN LOCAL CULTURE
MONTHLY MAGAZINE 콩기름 잉크로 인쇄하였습니다.
50 62
동하다

나아가다
48 시와 사진 한 모금 70 문화, 지금
차마객잔 | 장만호 21세기 상형문자, 이모지 | 김지윤

50 문화원 탐방 74 문화 에세이
12월의 끝과 시작을 함께한 서천 | 김소연 인장과 함께 살아온 나날 | 이재인

58 지역문화확대경 78 해외문화연수기 | 김장응


온 마을을 축제로 만드는 용인의 거북놀이 | 김정희
80 문화소식
62 맛있는 한국 문화소식 및 편집후기
마음까지 덥혀 주는 따끈한 국물 요리 | 이성희

66 문화끼리
협동과 조화의 산물, 동서양의 현악기 | 김효진

58 발행인
발행일
편집고문 권용태
김태웅
2021년 12월 1일

편집주간 한춘섭
편집위원 곽효환, 김두섭, 김시범, 김종, 유경숙, 장진성, 지두환
편집담당 박휘영
발행처 한국문화원연합회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9(도화동, 성우빌딩) 12층
전화 02-704-4611 | 팩스 02-704-2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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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1984년 7월 12일
등록번호 마포,라00557
기획·디자인·제작 (주)에이지커뮤니케이션즈 02-763-8600
시선 1

소설을 쓸 때, 비움과 채움의 시간은  나는 매일 조금씩이라도 쓴다


한 문장 한 문장 새로 찾아 나가면서 교차한다.  내게는 글을 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써지지 않아
긴장도가 매우 높다.  도 써보는 것이다. 억지로 써보는 것이다. 매일 한 단락이라도 써
하다못해 놀음에라도 바짝 몰입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보는 것이다. 분명 쓰기 전에는 딱히 쓸 말이 없었는데, 쓰다 보면
몰입과 긴장에는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쓰고 싶은 말이 생기곤 한다. 드물게는 ‘써보지 않았으면 어떡할
꽤 수고스럽다. 뻔했어!’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덩굴처럼 따
라 올라오기도 한다.
둘째는 저절로 써지는 것이다. 문득 쓰고 싶은 말이 떠올라, 청탁이
나 마감이 없어도 쓰게 되는 경우다. 흔히 “필이 왔다”, “영감이 떠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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랐다”, “글감이 생겼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몰입에 중독되는 습관이 제일 좋은 것 같다. 그냥 하는 거다. 결과
첫째보다 둘째 경우가 더 행복하지만, 그러나 수차례 비교해 보 는 그다음이다. 돈 좀 땄다고 놀음꾼이 그만두는가. 더 할 것이다.
았는데, 둘째 경우는 매우 드물고, 심지어 둘째 경우가 첫째 경우 게임 레벨 좀 업되었다고 게임 마니아가 게임을 그만두는가. 더
보다 더 나은 글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조금 할 것이다.
씩이라도 써본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노력이란 게 말처
내게 글쓰기란 ‘더 나은 생각 문장을 찾는 것’이다. 내게 글을 써본 럼 쉽지 않다. 에너지가 무척 많이 들어서, 많은 사람이 결심만
다는 것은, 내가 해볼 수 있는 최선의 생각과 최상의 상상을 해보 하고 실천은 못 한다. 하지만 몰입 중독은 저절로 노력하게 해준
는 일이다. 발표는 그다음 문제다. 최선의 생각, 최상의 상상을 하 다. 습관을 만들기까지가 힘들지, 습관이 들면 저절로 하게 된다.
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노력만으로, 나쁜 생각이나 상상을 하지 않 중독은 습관보다 더 효과적이다. 하지 말라고 해도 한다. 좋아서
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매일 조금씩이라도 써보는 걸 선호한다. 절로 한다. 체력만 허락한다면, 점점 더 강하게 한다.
더 나은 생각, 더 나은 상상을 할라치면 마음은 바빠진다. 나는 그래서 나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뭔가에
그중에서도 글 쓸 때의 몰입도가 제일 강한 것 같다. 운전하다 보 중독돼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운동에, 게임에, 술에, 공부에, 일
면 고속도로 운전조차 얼마간 습관적으로 수행할 수 있지만, 글 에, 연애에 중독돼 있는 사람은 옆에서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쓰기는 언제나 한 문장 한 문장 새로 찾아 나가야 하기 때문에 습 함께 행복하다.
관적으로 수행할 수가 없다. 충만의 느낌은 소유보다 몰입에서 온다. 소유에서 오는 충만도
뭔가에 바짝 —하다못해 놀음에라도— 몰입해 본 사람은 알지 좋긴 하지만, 몰입에서 오는 충만감은 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만, 몰입과 긴장에는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꽤 수고스럽다. 는 충일에 젖게 만든다. 어쩌면 소유를 좋아하는 사람들조차 소
유할 때의 충만한 맛에 중독된 사람일 것이다.
충만의 느낌은 소유보다 몰입에서 온다 글쓰기가 내게 가장 강한 몰입과 긴장을 준다면, 책읽기는 그다음
하지만 이 몰입과 긴장이 있어야 사는 맛이 난다. 몰입과 긴 의 강한 몰입과 긴장을 준다. 물론 모든 책이 그렇진 않다. 강렬하
장에 맛을 들이면, 몰입과 긴장이 없는 하루는 시시하고 허망하 지 않은 책은 오히려 실망만 준다. 한 문장 한 문장 낯설고 새로운,
다. 나는 매일 초저녁에 잠들어, 자정쯤 일어나 새벽 6시 무렵까 혹은 놀랍고 뜨거운 글이 좋다. 좋은 문장은 에너지와 같다. 그런
지 읽거나 쓰는데, 그래서 내 정신은 매일 새벽 두세 시쯤이 가장 글을 만나면 감전되는 것처럼 내 정신도 팽팽하게 살아난다.
활달하다. 아마 이 시간대에 자기공명영상 촬영을 하면 게임 중 어쨌거나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정부터 새벽까지 나 혼자
독에 빠진 사람이나 놀음 중독에 빠진 사람처럼 나오지 않을까. 깨어 읽거나 쓰는 걸 나는 제일 좋아한다. 아마 아무에게도 방해받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써보지 못했거나, 제대로 읽을거리를 찾 지 않으려다 보니 이 시간대에 읽고 쓰는 습관이 든 건지 모르겠다.
지 못한 채 새벽을 맞는 날은, 도박판에 끼지 못한 도박꾼처럼 초 밤을 새운 나는 식구들이 일어나는 아침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
조하다 못해 억울하다. 모르긴 몰라도 나처럼 이삼십 년째 글을 아내는 밤을 새운 나를 보며 매우 큰 수고를 하고 잠드는 줄 알지
써온 작가들은, 게다가 글로 돈벌이를 해온 작가들은, 다 나와 같 만, 사실 아내와 나는 똑같은 일을 한 것이다. 아내도 밤새 꿈을
은 중독성 몰입감을 얼마간 즐기는 사람들일 거다. 꾸었고, 나도 밤새 꿈을 꾼 것이니까.

글. 이만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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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2

균형 있는 삶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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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말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욕망이 있다고. 
삶의 욕망인 에로스와 죽음의 욕망인 타나토스. 먼저 삶을 욕망한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저장해야 한다. 생존하기 위해 음식을 저장해야 하고, 
심장이 뛰기 위해 사랑을 저장해야 한다. 반대로 죽음을 욕망한다면
최대한 많이 비워야 한다. 곡기를 끊어 속을 비워야 하고, 
관계를 정리해 마음을 비워야 한다.

1 옛 궁궐의 건축 형태는 주로 빛이 들도록 하는 비움과 눈과 비를 받아들이는 채움의 미학이


공존한다. 사진은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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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인 기쁨을 주는 행위여야 한다 니라 완벽하게 갖추지 못한 나의 처지 때문이라는 생
핵심은 저장이든 비움이든 어느 하나에만 집중 각을 지울 수 없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쪽에 집중한다는 것은 실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부터 완
곧 거기에만 과도하게 에너지를 쏟는다는 것이고, 그 벽히 갖추고 시작하면 된다. 여기엔 너도 마음만 먹
렇게 되면 열이 오르다 못해 활활 타버려 결과적으로 으면 언제든지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되도록 빨리,
‘번 아웃’ 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되도록 많이 아이템을 사서 풀-세팅하라고 부추기는
존재를 해치는 방법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기업들이 있다. 기업의 역할은 소비자의 불안함을 자
채우는 것도 비우는 것도, 모두 나를 위해 필요한 행 극해 물건을 사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위다. 여기에 즐거움과 뿌듯함이라는 보상이 동반된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건 바로 이 상품이라고, 이 상
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다. 그러려면 조건이 붙 품이 당신을 빛나게 해줄 거라고, 사지 않으면 당신
는다. 그 행위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은 결국 질 거라며 불안을 자극한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저장하는 첫 번째 목적이 생존이라면 그것만큼이나
내가 하는 행동이 지속적인 기쁨을 주는 행위인지, 큰 목적은 과시와 성취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끌려 하는 일회적 행 인으로부터 부러움을 얻고 싶고, 또 인정받고 싶다.
위는 아닌지. 안 하면 불안하다는 이유로, 또는 타인 그러려면 실패하지 않아야 하고, 빈틈이 없어야 한
의 감시와 평가를 이유로, 그것도 아니면 남들은 다 다. 누가 공격해도 완벽하게 방어할 수 있을 만큼. 세
하니까 나도 한번 해보겠다는 호기심으로 하는 건 아 상에서 가장 달콤한 말 중 하나는 당신은 완벽하다는
닌지 곱씹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혹 어떤 이유인지 칭찬, 능력자라는 칭찬이므로.
모르겠다면 나를 가장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것 그런데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보통의 장비만으로는
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그게 곧 나를 움직이게 만 특별할 수 없다. 아니 뭐, 이런 것까지 필요하나 싶을 만
드는 이유다. 큼의 섬세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수록 진짜 전문가답
다. 멀리서 보면 필요 없을 것 같은 물건도 몰라서 못 쓴
완벽해지고 싶다는 욕망 거지 꼭 필요한 아이템이라며 각종 ‘광고’를 통해 증명
일대일 경쟁에 나섰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경쟁 하는 데 넘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다. 완벽해지고 싶다
자가 이른바 풀-세팅을 하고 등장해 주변의 시선을 면, 독보적으로 되고 싶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장비
강탈한다면, 실력은 둘째치고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 발, (아이)템발이란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
껴지는 걸 어쩔 수가 없다. 실력만 있으면 된다고 스 이 행동이 자신의 내부를 향하지 않고, 외부의 시선에
스로 다독여 보지만, 한번 쪼그라든 의욕은 도대체 돌 만 닿아 있거나 맹목적인 경우엔 문제가 된다.
아올 줄을 모른다. 동력을 상실했으니 실패할 가능성 맥시멀리스트와 종종 함께 언급되는 부류 중에는 ‘호더’
도 당연히 크다. 이쯤 되면 내가 진 이유는 실력이 아 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최대한 많이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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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는 것도 비우는 것도, 모두 나를 위해 필요한 행위다. 
여기에 즐거움과 뿌듯함이라는 보상이 동반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다.

2 무언가를 채우고 비우는 행위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볼 때 완성된다. 타인의 기준에서 볼 때 '완벽하다'는 칭찬은 맹목적으로 무언가를 취하거나 버리게 한다.
사진은 북촌요가원 수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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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짐보다 쓰임이 더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더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 중요하다.” 
건축가 승효상은 ‘빈자(貧者)의 미학’이란 철학으로 
건축을 설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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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모은다는 점에서 맥시 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멋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사
멀리스트와 비슷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우선 호 고, 모으고, 저장하고 보니 생각보다 훨씬 지치고 힘
더는 물건에 대한 집착은 강하지만 그것을 쓸모 있게 이 든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상하고 변해 가치
분리하거나 저장하지 못한다. 상품이 가치를 잃지 않 가 떨어지는 저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한심함도 밀려
으려면 보관이 중요한데 호더는 모으는 것에만 집착 온다. 처분할까 싶은 생각이 들긴 하지만 들인 돈도
할 뿐 보관하는 방법도, 쓸모에 따라 구분하고 저장하 아깝고, 혹시나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쉽
는 능력이 부족하다. 그렇다 보니 정작 필요할 때 찾 게 버릴 수도 없다. 하지만 상해서 버릴 때 느껴야 하
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찾았다고 하더라도 상품의 가 는 찝찝함은 얼마나 불쾌한지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치가 떨어져서 쓸모가 없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잘 알 것이다.
내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 맹목적 호더가 아니라 ‘괜 나를 증명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쉽고 편리한 방법은
찮은’ 사람이라면 나에게 집중하자. 만약 내 앞에 쌓 내가 가진 도구로 나를 대신하는 것이었는데 대량 생
인 물건이 사라진다고 생각했을 때 설명할 수 없는 산되면서, 같은 물건이 많아지면서, 게다가 물건의
불안과 공포가 밀려온다면 마음에 문제가 발생했다 값이 싸지면서 도구로 나를 증명하는 것이 예전만큼
는 징후이자 증상일 가능성이 크다. 그건 나라는 존 쉽지 않게 되었다. 어지간히 좋은 물건이 아니고는
재 가치가 물건으로 옮겨 갔다는 의미고, 그 불안을 시선을 끌 수 없게 되었고, 더 치열해진 경쟁에서 이
억압하기 위해 물건을 모아야 한다는 강박의 표현이 길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는 생각에 더 불안해진다.
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를 위해서 모은 것들이 어느 순간 오히려
나를 압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숨이 막혀 온다.
비움엔 용기가 필요하다 내 숨을 죄는 것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에너지보존법칙에 따르자면 내가 쓸 수 있는 에 절박함이 밀려온다. 비움의 시기가 온 것이다.
너지는 정해져 있고, 어느 한 곳에 나의 에너지를 쓰 사실 비움은 채우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불
게 되면 다른 곳에 쓸 에너지는 부족하게 된다. 이 경 안은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무지에서 발생하는 위험
우, 발생하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번 아웃이다. 번 아 신호라면, 그리고 이 위험 신호를 감지하고 하는 행
웃은 한 가지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동이 저장과 채움이라면 불안은 분명히 긍정적이다.
신체적·정신적 피로로 무기력증·자기혐오 등에 빠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느끼는 불안의 대부분
는 증후군이다. 즉,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골고루 분 은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과 고민 탓에 만들어진 경
배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증상이다. 우가 많다는 걸 안다면, 저장의 많은 부분 역시 필요
다다익선이 미美이자 선善이라고 선언하는 자본주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버리는 데에는 용기가 필
사회에서 착하고 좋은 사람이란 최대한 노력하고, 많 요하다. 과감하게 선택할 용기, 본전을 생각하지 않
이 모으고, 저장하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 을 용기, 곱씹지 않을 용기.

3 승효상 건축가의 대표적인 건축물, 하양 무학로 교회(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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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살 때는 이유라도 있었지만 버릴 때는 쓸 곳 비우고, 버릴 때 생각할 것들
이 없다는 핑계 말고는 딱히 없다. 이런 내 마음을 알
① 정리의 90%는 마인드다.
고 있기라도 하듯이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곤도 마리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정리를 해놓아도
에,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2016라고 속삭인다. 설레는 마음 원상태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의 기준은 오로지 내 마음에 달렸다. 논리도 이성도 인생에서 한 번쯤은 진지하게 정리해 보자고
결심이 섰다면 시작해 보자.
필요 없다. 내 마음이 설레지 않으면 버릴 명분은 충
분한 것이다. 뭐 곤도 마리에는 비우기 위해서는 내 ② 장소별이 아니라 물건별로 정리한다.
똑같은 물건이 다른 방에 또 있다면 얼마나
물건을 사라는, 뭔가 모순적인 행동을 해서 공분을
가졌는지 파악할 수 없다.
사기도 했지만 수많은 사람에게 버릴 용기를 준 것만 이런 일을 피하려면 같은 카테고리의 물건을
큼은 분명하다. 한꺼번에 모아 정리해야 한다.

차마 용기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등장한 훌


③ 가족의 물건을 마음대로 버려서는 안 된다.
륭한 방법도 있다. 바로 ‘중나중고나라’, ‘당근당근마켓’과 4세 이상이라면 어린아이라도 설렘을

같은 중고 거래 방식이다. 중고 거래는 선순환의 좋 기준으로 옷을 골라낼 수 있다.


버릴 생각이 없다면 옷을 개는 방법을 가르쳐
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버리는 데 돈을 쓰는 대신 돈
주어 세로로 수납하게 하면 된다.
을 벌 수 있는 건 물론, 나에게는 쓸모없는 물건이 누
④ 올바른 순서로 정리한다.
군가에는 꼭 필요한 물건이 될 수도 있다는 신선함은
의류, 책, 서류, 소품, 추억의 물건 순으로 정리하라.
덤이다. 게다가 차마 비싸서 사지 못했던 물건을 생
남길 것과 버릴 것에 관한 판단도 빨라지고
각지도 못한 저렴한 비용으로 살 수 있어 기뻐하는 다시 저저분해지지 않는다.

사람들을 보면 괜히 뿌듯해지면서 기분도 좋아진다.


⑤ 만졌을 때 설레는지 스스로 물어본다.
비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 주변을 돌아봐야 한 버릴지 남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만졌을 때 설레는가’이다.
다. 오늘은 무엇을 또 비울까 고민하라는 것이 아니 하나하나 만져 보면 물건에 따라 몸의
반응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 그 가치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는 의
미다. 하지만 이것도 유행을 타면서 ‘하루 하나씩 버 ―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중에서 ―
리기 미션’이라든지 ‘비움 인증샷’ 같은, 보여주기식
비움만 넘치는 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최종 목
적은 극단적 미니멀리스트가 아니라 ‘괜찮은’ 사람이
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4 5

4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책 표지. 곤도 마리에 저, 더난출판사


5 중고 물품을 사고 파는 당근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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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할 수 있다면 그것이 좋은 것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에
다른 나라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 게 맞는 걸 찾아가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 맥시멀리스트니 미니멀리스트니 하는 건 자발적, 내 삶을 양이나 개수로 평가하는 대신, 그 행위가 나
자의적이라기보다 유행의 흐름처럼 느껴진다. 따라 에게 지속적인 행복과 의미를 주는지 생각하는 것이
해야 하는 것, 따라 하지 않으면 촌스러운 것, 꼰대 같 필요하다. 이 행위가 지금 당장의 기분을 위로하는
은 것. 한때는 맥시멀리스트가 온갖 영상을 장악하더 것으로 그치는지, 아니면 오랫동안 행복을 주는 것인
니, 이제는 미니멀리스트들이 등장해 당신의 옷장과 지 생각해 볼 것. 내게 불편을 주지 않는 삶이 가장 좋
주방을 비우라며 부추긴다. 완벽하게 준비된 자를 칭 은 삶이다.
찬할 때는 언제고, 설레지 않는 물건을 두고도 버릴까
글. 장윤미 문화평론가 — 사진제공. 셔터스톡(사진1) 이로재(사진3),
말까를 고민하는 사람을 딱하게 바라본다. 김현민(사진 6)

6 서울시 종로구 서촌의 한옥스테이, '일독일박'에서는 한옥에서


머무르며 책을 읽고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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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엣사람

옻칠로 비우고, 나전으로 채우다


대한민국 나전칠기 제1호 명장 손대현 장인

원목의 가구에 시간과 노력을 갈아 켜켜이 옻칠을 올리고, 


총천연색의 전복과 소라 껍데기를 세공해 얹는다. 빨려들 듯 검고 깊은 옻칠 바탕에 새겨진 
나전 문양은 그곳에 있음으로써 더욱 빛을 발한다. 
손대현 장인의 지난 60여 년이 빚어낸 비움과 채움의 미학이다.

60년 세월을 거쳐 명장 반열에 오르다 “그 작업장은 합성 도료인 캐슈로 칠을 하고


나전은 전복과 소라의 겉껍데기를 갈고 원하는 있었는데요. 이왕이면 우리나라의 ‘진짜 옻칠’을
문양대로 잘라 칠의 표면에 붙이는 공예 기법이다.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조선 시대의 마지막
한편 칠기는 어떤 형태의 물건에 옻칠을 켜켜이 입힌 나전칠기 장인 전성규 선생을 사사한 저의 스승
물건을 뜻한다. 예로부터 중국은 조칠기법옻칠을 두껍게 민종태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이후 스승님과
올려 조각하여 마감에 강했고, 일본은 옻칠에 일가견이 있 함께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고, 스승님이 전성규
는데, 우리나라는 둘을 융합해 나전칠기라는 고유하 선생에게서 물려받은 호 ‘수곡’을 이어받아 
고 매혹적인 문화유산을 탄생시켰다. 3대 수곡으로서 전통 기법의 나전칠기를 
그간 수많은 사람을 홀려 온 나전칠기는 열다섯 살의 만들고 있습니다.”
한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
든 소년 손대현이었다. 심부름꾼으로 일하던 회사와 1964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전칠기에만 매달
같은 건물에 나전칠기 작업장이 있었는데, 어느 날 리다 보니 어느새 옻칠의 대가가 됐다. 1991년 대한민
작업자들이 자개 박힌 보석함과 쟁반을 상자에 담고 국 나전칠기 명장 제1호 선정, 1999년 서울시 무형문화
있었다. 소년 손대현은 그 영롱함과 마주하자마자 나 재 제1호 옻칠장 인정 등이 이를 방증한다. 그가 1986
전칠기에 매혹돼 그 분야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년 만든 나전칠기 작품은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됐고,

14
15
1 2
3
4 1 나전칠 모란당초무늬 이층장
2 나비당초문건칠 호리병
3 팔각 모란문 과기
4 모란당초문이층장

16
손대현 장인은 “공간을 채우는 행위 자체에 
의의를 두면 안 된다”고 말한다. 
채우는 행위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해야 
전체적인 작품을 조화롭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전 작업을 할 때 질서와 자연스러움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여기에 위배되는 오브제는 
과감하게 변화를 주거나 빼버린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유럽 7개국을 순방할 때 상대 국


가 원수에게 선물할 나비당초문 서류함을 만들었다.
일본의 일왕,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도 그의 작품
을 앞에 두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세계적 자동차 기업
BMW의 의뢰로 자동차 내장을 나전칠기로 꾸민 ‘나전
칠기 BMW750Li’를 2011년 서울모터쇼에서 선보이
기도 했다. 나전칠기의 매력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순간순간에 그의 작품이 자리해 있었다.

천년의 아름다움에 담긴 장인 정신
나전칠기는 ‘천년의 예술’이다. 제대로 만들어낸
나전칠기는 부서지거나 뒤틀리지 않고, 원형 그대로
의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간직한다. 12세기 고려조에
만들어진 작품이 미국의 한 미술관에서 여전히 찬란
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옻액 특유
의 성분과 우리나라 고유의 정성스러운 칠 기법이 변
치 않는 매력으로 승화한 것이다.
나전칠기의 제작 과정은 그야말로 지난하다. 먼저 나
전칠기의 밑바탕이 되는 옻칠을 해야 하는데, 원목 상
태의 기물이나 가구인 ‘백골’에 옻액이 잘 흡수되도
록 생칠을 묽게 배합해 골고루 바르고 사흘 정도를 말
린다. 그 위에 목재가 뒤틀리지 않도록 삼베를 붙이는
데, 찹쌀풀과 생칠을 섞은 천연 접착제 호칠로 발라준
다. 만리장성을 쌓을 때에도 쓰였을 만큼 접착력이 강
하며, 덕분에 백골과 삼베의 결속력이 매우 강해진다.

17
5
6

5 2011 서울모터쇼에서 공개된 손대현 장인의 나전칠기


장식을 적용한 BMW 750Li
6 손대현 장인의 작업 도구

① 귀얄: 풀이나 옻을 칠할 때에 쓰는
솔의 하나로, 털의 종류는 주로 여
성의 머리카락이나 말총 등을 사용
하며 이를 넓적하게 묶어 만든다.
② ② 숫돌: 옻칠 작업 과정 중 표면을
갈아 낼 때 쓰는 도구로, 표면적이
다른 여러 종류의 숫돌을 상황에
맞게 번갈아 사용한다.

③ 주걱: 백골 상태의 기물 위에 삼베

④ 등을 펴 바를 때 사용하며, 이 또한
① 상황에 맞춰 여러 크기의 주걱을
번갈아 쓴다.

④ 칼: 옻칠 아래에 덮여 있는 자개의


모양을 드러내기 위해, 옻칠 표면
을 세밀하게 긁어 낼 때 사용하는
도구다.

18
“여기에서 끝나면 좋겠지만, 사실 이제부터가 “공간을 채우는 행위 자체에 의의를 두면
시작입니다. 까칠한 베 표면을 사포로 밀어 안 됩니다. 채우는 것 하나하나에 그럴 만한
다듬은 다음, 생칠을 하고 그 위에 옻액과 고운 의미를 부여해야 전체적으로 작품을 바라볼 때
황토를 섞은 토회를 바른 뒤, 마르면 또 한 번 조화로움이 유지됩니다. 그렇기에 저는 나전
얇게 토회를 바르고 숫돌로 표면을 곱게 갈아 작업을 진행할 때 질서와 자연스러움을 가장
냅니다. 이후, 표면의 미세한 구멍을 토회로 메운 먼저 생각합니다. 여기에 위배되는 오브제는
뒤 정제한 옻을 바릅니다. 이를 ‘초칠’이라고 과감하게 변화를 주거나 빼버립니다.”
하는데요. 칠한 면이 마르면 숫돌로 또다시
표면을 고른 뒤 ‘중칠’을 하고, 숯가루를 사용해 나전이 채움이라면, 옻칠은 비움이다. 옻칠은 나
중칠 표면을 곱게 갈아 낸 뒤 마지막으로 전의 밑바탕인 동시에, 나전의 빛깔을 더욱 부각할 수
‘상칠’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상칠 표면을 있도록 돕는 든든한 조력자다. 하지만 나전에서 조금
백일홍 혹은 상추나무로 만든 숯으로 고른 만 시선을 돌려 보면, 까맣게 비워져 있는 옻칠에 깊
뒤에야 비로소 옻칠 작업이 끝납니다.” 이 있는 매력이 녹아들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만약 순수하게 옻칠만 한 칠기가 아니라 자개를
더한 나전칠기를 만들고 싶다면, 초칠에 들어가기 전 “나전이 새겨져 있지 않은 옻칠 부분은 
모양대로 자른 자개를 일일이 아교로 붙이고, 그 위에 여백의 미학을 보여주는 동시에, 작품을
생칠을 발라 접착력을 높인 뒤 자개 두께만큼 황토를 바라보는 사람의 상상력의 원천이 됩니다. 
입히고 표면을 갈아 낸다. 이후 중칠, 상칠의 과정이 예를 들어 ‘십장생운학문이층장’을 보면,
더해진다. 꼬박 두세 달이 걸리는 과정이다. 왜 이렇 십장생이 섬에 떠 있고 학이 그 위를 날아가고
게까지 한 작품에 엄청난 공을 들이는 것일까. 있는데요. 그렇다면 옻칠한 까만 부분의
아래쪽은 바다가 될 수 있고, 학이 날아가는
“바로 여기에 보존성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위쪽은 하늘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나무는 수분을 머금으면 뒤틀리고 취약한데요. 그 사이 어딘가에 수평선이 펼쳐져 있겠죠.
이렇게 겹겹이, 공들여 옻칠을 하면 방충, 방습 이렇듯 옻칠은 그 자체로 비움인 동시에, 
성능이 비약적으로 높아집니다. 목재 특유의 보는 사람의 상상력에 의해 채움의 역할을
뒤틀림도 막을 수 있죠. 칠 과정을 하나라도 맡기도 합니다. 나전칠기에 비움과 채움의
생략하거나 대강 넘기면 언젠가는 하자가 미학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알 수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옻칠을 채우고 비우는 있는 대목이죠.”
과정을 오래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죠.”
얼마 전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연락이
나전칠기와 꼭 닮은 인생 궤적 왔다. 올 12월에 나전칠기를 선보이는 기획 전시를 준
나전칠기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영롱한 빛깔 비 중인데, 작품을 구매해 전시할 수 있는지를 물었
로 사람들을 홀린다. 하지만 무조건 나전을 많이 쓴다 다. 기꺼이 네 점을 제작해 배에 실어 보냈다. 나전칠
고 해서 사람들의 미적 감각이 채워지는 건 아니다. 같 기에 깃든 비움과 채움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릴 수
은 문양이 반복되는 당초문이라도 줄기와 잎의 배치, 있는 또 한 번의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심혈을 기
꽃의 위치 등에 따라 눈이 피로할 수도, 편안할 수도 울인 작품을 통해 나전칠기에 대한 관심을 채우고 낯
있다. 이를 면밀하게 살피지 않고 무작정 채우다 보면 섦을 비우고 있는 손대현 장인. 그는 나전칠기를 꼭
아무리 공을 들였더라도 졸작으로 전락하고 만다. 닮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글. 강진우 편집팀 ― 사진. 김현민 — 작품 사진제공. 수곡공방

19
우리
고미술을
만나다

계산적적도 Streams and Mountains


溪山寂寂圖 of Tranquility
김수철金秀哲, ?~1862년 이후은 매우 개성個性적인 화풍 Kim Sucheol (?–after 1862) was a painter of the late Jo-

을 구사한 조선 말기의 화가이다. 그의 가계家系에 대해서 seon dynasty (1392-1910) with a notably unique painting
style. Although little is known about his family history
는 알려진 것이 없다. 또한 그의 삶에 대해서도 구체적으 and the details of his life, Kim is said to have shown
로 밝혀진 것이 없다. 김수철은 산수 및 화훼花卉 그림에 뛰 outstanding talent in landscape and flower paintings.

어났다고 한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김수철이 ‘솔이지 According to Kim Jeonghui (1786–1856), Kim Sucheol
produced great landscape paintings using a method
법率易之法’을 사용해 산수화를 잘 그렸다고 평가하였다. 솔 called sorijibeop which means “simple and abbreviated
이지법은 간결하고 생략적인 화법畵法을 말한다. 〈계산적 brushwork.” Streams and Mountains of Tranquility, also

적도溪山寂寂圖〉는 그의 솔이지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known as Winter Landscape or Rivers and Mountains with
the Forest of Plums, excellently shows Kim’s use of this
이 그림은 〈동경산수도冬景山水圖〉 또는 〈강산매림도江山梅 method. In the top right of the painting is his inscription
林圖〉로도 불린다. 화면의 오른쪽 위에는 “개울물과 산은 that reads: “The streams and mountains are tranquil.

지극히 고요하여 물어볼 사람이 없어도, 임포 처사의 집을 There is no one to ask [for directions]. Yet one easily finds
one’s way to the house of the recluse Lin Bu.” A poet from
잘도 찾아가네溪山寂寂無人問 好訪林逋處士家”라는 제시題詩가 China’s Northern Song Dynasty (960–1127), Lin Bu (967–
적혀 있다. 임포林逋, 967~1028는 북송北宋 시대960~1127의 시 1028) chose to retire from the world and live a solitary life

인으로 대략 40세 이후 항주杭州의 서호西湖 지역에서 세상 in Xihu (West Lake), Hangzhou, around age 40. Despite
losing his parents at a young age and living in poverty,
을 등지고 은거隱居 생활을 하였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 he is known to have vigorously pursued his education.
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학문에 힘써 박학다식博學多識했다 Erudite and unmarried, Lin Bu lived alone, growing

고 한다. 임포는 결혼도 하지 않고 매화와 학을 기르며 살 plum trees and raising cranes. To later generations, he
became widely known as a person who considered “plum
았다. 그는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은梅妻鶴子” 인 blossoms to be his wife and cranes to be his children.” A
물로 후대에 널리 알려졌다. 〈계산적적도〉를 보면 전경前 river flows in the foreground of Streams and Mountains
景에 강물이 흐르고 있으며, 화면의 중앙 왼쪽에는 거대한 of Tranquility. In the center-left of the composition is a
small house flanked by enormous rocks. A figure dressed
바위들 사이에 있는 작은 집이 보인다. 그 안에는 붉은 옷 in red sits inside, gazing out the window. This man is Lin
을 입고 밖을 쳐다보는 인물이 앉아 있다. 이 인물은 임포 Bu, observing the plum trees around his house in full

이다. 집 주변에는 눈송이처럼 활짝 꽃이 핀 매화나무들이 bloom. Their blossoms resemble snowflakes. In the cen-
ter-right of the painting, a guest can be seen crossing the
나타나 있다. 화면 중앙의 오른쪽에는 임포를 찾아오는 손 bridge to visit Lin Bu. A towering and rocky mountain, a
님이 다리를 건너고 있다. 화면 상단에는 높이 솟은 암산巖 small house at the bottom of a cliff, and a tranquil river
山, 절벽 아래에 있는 작은 집, 고요히 흐르는 강이 그려져 form the upper part of the composition. Kim concisely
depicted mountains and rocks using simple outlines,
있다. 김수철은 간략한 윤곽선, 작은 점, 엷은 먹, 담채淡彩 small dots, and light ink washes and pale colors. This
를 사용하여 산과 바위를 간결하게 묘사하였다. 이 그림은 painting is both a masterpiece and a clear example of the

그의 간략하고 단순한 필치, 즉 솔이지법이 무엇인지를 알 simple and abbreviated brushwork (sorijibeop).

려주는 수작秀作이다.
Written by Chang Chinsung, Professor of East Asian art in the Department
글.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of Archaeology and Art History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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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金秀哲, ?~1862년 이후),
MEETING
OUR OWN ANCIENT ART

21
Kim Sucheol (?–after 1862),
〈계산적적도(溪山寂寂圖)〉, 19세기 중반, Streams and Mountains of Tranquility, mid-19th century,
종이에 수묵 담채, 119.0 × 46.0 cm, 국립중앙박물관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119.0 × 46.0 cm, National Museum of Korea
방방
곡곡
유랑기

백제의 서정시
금강 따라 흐르는

천 리 길 금강의 반짝이는 물줄기가 굽이굽이 흐르는 땅. 


아름다운 계룡산 자락 아래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보듬고 있는 곳. 
역사와 문화의 고리를 잇는 문화재를 돌아보며 
여행의 감각을 일깨울 수 있는, 충청남도 공주를 찾았다.

1 공주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Geumgang River as seen from Gongsanseong Fortress in G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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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DERING AROUND THE COUNTRY

The Lyricism of the Baekje Kingdom


Flows along the Geumgang River
Where the sparkling, winding waters of the near 400-kilometer-long
Geumgang River run, a treasure trove shining with the glorious culture of the Baekje
Kingdom sits at the foot of the magnificent Gyeryongsan Mountain.
Awakening travelers’ senses through its displays of invaluable cultural assets that weave
together history and culture, this is Gongju, a city in Chungcheongnam-do.

23
2

발굴 50주년,   he 50th anniversary of the excavation


T
세상 밖으로 나온 무령왕릉 of King Muryeong’s tomb:
The royal chamber in the sun
1971년 7월, 충남 공주 송산리고분군에서 기적 In July 1971, a miraculous discovery was reported
같은 일이 일어난다. 배수로 공사를 하는 도중에 발 from the Songsan-ri Tombs in Gongju, Chung-

견된 벽돌무덤 하나, 그것은 백제의 역사는 물론 동 cheongnam-do: the royal tomb of King Muryeong
2 무령왕과 왕비
had been unearthed during water drainage work.
아시아사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무령왕릉이 목관. 왕 목관은
255kg, 왕비
The brick chamber opened up a new chapter in the
었다. 이에 무령왕의 유산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전 목관은 226kg에 study of the history of the Baekje Kingdom as well

시하기 위해 1973년, 국립공주박물관이 새롭게 지 달한다. as that of East Asia. To safely preserve and exhibit
3 무덤을 지키고 King Muryeong’s heritage, a branch of the National
어졌다. 죽은 사람의 Museum of Korea was built in Gongju in 1973, later
당시 무령왕릉은 먼저 발견된 백제의 무덤과는 달리 영혼을 신선 becoming Gongju National Museum in 1975.
세계로 인도하는
도굴당하지 않은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어 주목을 받 Particularly noteworthy was the fact that King
역할을 한
Muryeong’s tomb, unlike previously discovered Baek-
았다. 백제의 무령왕 부부가 잠들어 있던 왕릉이 발 진묘수(국보
제162호) je-era graves, was found intact without any signs of
견되어 발굴, 조사된 지 50주년을 맞아 새로운 반세 robbery. In celebration of the 50th anniversary of the
4 왕비의 머리
기를 준비하며 국립공주박물관에서는 특별 전시를 부근에서 발견된 excavation of the royal tomb, and in preparation for the
높이 15cm의 은잔 next half century, Gongju National Museum presents
열고 있다. 이 전시에는 기존의 상설 전시와 연계해 a special exhibition of its entire collection of archae-
5 6 무령왕과 왕비
출토 유물 5,232점 전체를 공개하고 있다. 금제관식 ological findings—a total of 5,232 artifacts including

24
3 5
4 6

those on show in its permanent exhibition hall. This is 1971년 발견 이후 무령왕릉 출토 유물 전체를 한자리
an unprecedented opportunity to appreciate the relics
from King Muryeong’s tomb, as all the findings have
에서 공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더욱 소중한
not been available for public viewing since their dis- 기회다. 국보로 지정된 왕과 왕비의 부장품들을 새롭
covery in 1971. Enhancing the value of the royal tomb, 게 선보이고, 지금까지의 연구 과제를 중심으로 기획
which was the symbol of the Baekje Kingdom during
the Ungjin period, the exhibition is based on recent
되어 웅진백제의 상징인 무령왕릉의 가치를 더한다.
comprehensive research and newly unveils national 백제의 웅장한 역사를 품은 공주에서 시간의 경계마
treasures worn by the king and queen. This rare exhibit 저 허물어 버린 빛나는 문화를 만날 수 있다.
celebrates Gongju as the home of the splendid history
of the Baekje Kingdom, providing an encounter with
the kingdom’s glorious culture that transcends time.

 ncovering Korea’s lost Paleolithic culture


U 2 King Muryeong and the queen’s wood coffins. The king’s
in the Seokjang-ri remains coffin weighs 255 kilograms and the queen’s 226 kilograms.
What does it mean to be human? Since Paleolithic times Animal Figure for King Muryeong’s Tomb (National
3 
Treasure No. 162) served as the guardian of the tomb and a
and through today, humans have been undergoing the
guide for the souls of the deceased to the world of shenxian
infinite process of evolution. Paleolithic archaeologists
(transcendental humans in Daoism).
seek the lost links between the moments in history 4 
A 15-centimeter-tall silver cup discovered near
when human beings started to walk upright, make the queen’s head
tools, create languages, and develop arts and culture. 5 6 Gold crown ornaments from the tomb of King Muryeong

25
7 8
7 A straw-thatched hut at the Archeological Site in Seokjang-ri,
where the first remains of Paleolithic residences in Korea were
7 우리나라 최초의 구석기시대 주거지 모형이 발견된 석장리 discovered
유적지의 움집(막집) 8 Various Paleolithic hunting tools
8 구석기인들의 다양한 사냥 도구 9 A vivid representation of the lifestyle of Paleolithic people
9 구석기인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 놓았다. 10 11 Hwangsaebawi Martyrium
10 11 황새바위 순교성지

잃어버린 구석기 문화를 되찾은 The ancient remains at the Archaeological Site

석장리 유적지
in Seokjang-ri have been systematically studied
over a dozen excavations, during which each of the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구석기시 excavated sites were numbered and locations where

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끝없는 진화 과정 속에 있다. relics were uncovered were expanded. The findings
unearthed here revived the Old Stone Age, which was
두 발로 걷고, 도구를 제작하고, 언어를 만들어 마침 once lost on the Korean Peninsula, by proving how
내 예술문화를 꽃피우기까지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layers of culture had piled up and disappeared over

찾는 것이 구석기 고고학의 공통된 관심사이다. a long period of time. The culture of a prehistoric
riverside society began to be revealed when the bank
석장리 유적은 12차례의 발굴을 통해 체계적으로 연 of the Geumgang River collapsed in a flood in 1964.
구되어 왔다. 발굴 구덩이에는 번호가 매겨졌고, 유물 At a time when signs of Paleolithic culture in Korea
9 seemed to be almost non-existent, the Seokjang-ri
이 발견되면 구덩이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
remains revived this period of ancient history. Here,
다. 한반도가 잃어버린 구석기 시대의 바탕이 된 곳으 we can encounter the traces of history that, like the
로, 여러 문화층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지고 사 rings of a tree, grow wider as time goes on.

라졌음을 밝혀준 곳이기도 하다. 강가를 중심으


 wangsaebawi Martyrium: The sacred
H
로 생활했던 선사시대의 인류 문화는 1964년 site with the most martyrs in Korea
홍수에 의해 강둑이 무너지면서 발견되기 시작했다. “I am very afraid to die, but I am 1,000 times more

불모지와 같았던 우리의 구석기 문화를 되찾아 준 afraid to deny God, who is my lord and father.” These
are the words that Thomas Son Chasuhn spoke when
공주 석장리 유적. 이 땅에 켜켜이 쌓인 시간만큼 he was pushed to renounce his Catholic faith. The
깊어진 역사의 나이테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saint was born to a third-generation Catholic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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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 had included several martyrs before him, and 한국 최대의 순교자 기록, 
after he voluntarily revealed that he was a Catholic, 황새바위 순교성지
Son was cruelly tortured by government officials who
even ordered him to bite his own arms to affirm his
“나는 솔직히 죽는 것을 몹시 무서워합니다. 그
refusal to deny his credo. He would obey, bleeding. 러나 나에게 죽는 것보다 몇천 배 더 무서워하는 것이
Son was one of the many Catholic martyrs who sacri-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나의 주님이시요, 아버지이신 하
ficed themselves at Hwangsaebawi, where the faithful
were executed by beheading. The notorious sandy
느님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beach, where the waters of the Geumgang River and 3대째 천주교를 믿으며 순교자를 배출한 신앙의 가정
Jemincheon Stream meet, is said to have been touted 에서 태어나고 자란 ‘성인 손자선’의 고백이다. 관가에
as the best place for public executions. As many as 337
people, the largest number of Catholic martyrs killed
찾아가 천주교 신자임을 스스로 밝힌 후 갖은 고문을
at a single site in Korea, were beheaded on the beach. 당했다. 배교하지 않겠다는 증표로 자신의 살점을 물
I have never thought about sacrificing my life 어뜯어 보라는 관장의 요구에 양팔을 물어뜯어 피가
for my beliefs, making the depth of the martyrs’ faith
nearly impossible to fathom. Instead, I feel shame
흐르게 했다는 토마스 손자선. 그 또한 바로 이 황새바
for my lack of such a deep longing and passion. 위 순교성지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들 중 한 명이다.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참수 처형으로 대표되는 순교
 emembering Gongsanseong Fortress in
R
historical tales 성지이다. 금강과 제민천이 만나는 모래사장이었던
In 1624, when Yi Gwal rebelled against the Joseon 이곳은 공개 처형지로는 최적의 장소였다고 알려져
Dynasty’s King Injo, the king left Seoul to take refuge 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희생된 숫자는 무려 337명
at Gongsanseong Fortress. One day, a man named Im
living in what is now Useong-myeon, Gongju, offered
으로 한국 최다의 순교자를 기록하고 있다.
rice cakes coated with bean powder to the hungry 신념과 생명을 바꿔보지 못한 자이기에, 성인들이 끝
king, who enjoyed the dish. When the king asked 까지 지켜내고자 했던 신앙의 깊이를 가늠하기는 불
around for the name of the rice cake, nobody could
answer him, so he named it imjeolmi, which literally
가능하다. 다만 그 무언가를 향한 그토록 뜨거운 갈망
means “Im’s very tasty rice cake.” As time passed, 과 열정을 가져보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할 뿐이다.

10 11

27
역사가 말하는 존재, 공산성 it became injeolmi, the name by which we know it
today. This story is commemorated at Ssangsujeong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인조는 공산성에 머물 Pavilion, which was built in 1734 on the site where its
고 있었다. 지금의 공주시 우성면에 살고 있던 임씨가 events took place.

콩고물에 무친 떡을 진상했고, 시장한 참에 왕은 떡을 Long ago, Gongju was known by the name
Gomanaru. Written as 熊津 in Chinese characters,
맛있게 먹었다. 왕이 떡의 이름을 물었지만 아는 이가 the name came to be Ungjin as pronounced by
없었고, 다만 임씨 성을 가진 자가 올렸다는 말에 “임 Koreans. After losing its capital of Hanseong (mod-

씨가 진상한 떡이 절미로다”라 하여 ‘임절미’가 되었 ern-day Seoul) to the Goguryeo Kingdom, the Baekje
Kingdom moved to Gongju for its revival, settling
다. 그것이 오늘날 인절미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on Gongsan Mountain, which seemed to have been
공산성의 쌍수정에서 비롯되었다. created to overlook the Geumgang River and whose

공주의 옛 이름은 ‘고마나루’, 한자로는 ‘웅진熊津’이 steep slopes formed a natural fortress. The remains
of the palace where the king would reside are located
다. 백제의 도읍이었던 한성이 고구려에 의해 함락되 in front of Ssangsujeong Pavilion. This royal resi-
면서 백제는 공주에 웅진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부흥 dence had a view of nearly all of Gongju, including

기를 열고자 했다. 마치 금강을 조망하기 위해 생겨난 the city center and King Muryeong’s tomb.

듯한 공산公山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기에 자연적인 요


새의 역할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왕이 살았던 왕궁지
는 인절미의 유래가 된 쌍수정 앞쪽에 자리했다. 왕궁
12 삼국시대 포곡식으로 축조된 백제의 성곽, 공산성
지에서는 공주 시가지는 물론 무령왕릉까지 한눈에
Gongsanseong Fortress, constructed by the Baekje in the valley-encircling style
담긴다. (pogoksik)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28
Magoksa Temple: Clearing a cluttered 고요로 마음을 씻다, 마곡사
mind with serenity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마곡사는 고즈넉
Magoksa Temple, a UNES CO World Heritage
site, boasts the perfect harmony of a tranquil,
한 천년 고찰과 돌다리, 그리고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time-honored Buddhist temple, a stone bridge, 풍경 소리가 완벽한 조화를 이뤄낸다. 마곡사의 전각 중
and the tinkling of windchimes. Among the several 대광보전에는 한 앉은뱅이 이야기가 전해 온다. 앉은뱅
buildings that form Magoksa Temple, its main hall
Daegwangbojeon is the subject of a story about a
이의 삶을 거두고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매일같이 소원
man who could not stand or walk. Though he prayed 을 빌던 이가 있었다. 그러다 자신이 지은 억겁의 죄를
daily for the ability to walk, one day, he felt ashamed 두고 일치감치 그렇게 큰 소원을 빌었다는 것에 커다란
for having dared to make such a grand plea without
doing anything about his sin, which had accumu-
부끄러움을 느끼고 깊은 참회의 시간을 보냈다.
lated for an eternity. He decided to spend days in 걷지 못하는 것에 대한 원망과 슬픔보다 들꽃이 가진 생
repentance, appreciating life and the value of all 명의 가치와 살아 있음 자체에 소중함을 깨닫고, 그것만
living things such as wildflowers, instead of feeling
sorrowful and frustrated about his inability to walk.
으로도 감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00일이 채워
Every day, he visited the hall to bow earnestly, and 지던 날 정성을 다해 절을 올리고 법당을 나오던 그는,
on the 100th day, he realized that he was leaving the 자신도 모르게 뚜벅뚜벅 걷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욕심
hall after finishing his bows by taking big steps. The
message this tale may carry is that one’s wishes are
을 내려놓고 더 가치 있는 것들에 감사하는 삶을 살기
realized only when one becomes free of greed and 시작하자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 이 아
appreciates things for their true value. Today, people 름다운 이야기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쩌면 지금 우리
are still touched by this beautiful story—perhaps
because they need such a miracle, too. As soon as
에게 동화 같은 기적이 필요하기 때문은 아닐까.
the man sensed that he was walking unconsciously, 의식하지 못한 채 걷고 있음을 알게 된 그는 세상을 감싸
he deeply understood the enormous goodness that 안고 있는 거대한 선함을 깊이 있게 체험하게 된다. 살아
shrouds the whole world. Magoksa Temple is a place
12 있는 모든 것을 향한 경이로움, 하늘과 숲이 부르는 바람
where people can find awe in all living things and
hear the song sung by the sky, wind, and forest. We 의 노래를 만날 수 있는 마곡사.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
go there in search of something invisible and come 갔던 공주에서, 마음을 가득 울리는 감사를 담아간다.
back filled with heartfelt appreciation.
글. 김소연 프리랜서 에디터 ― 사진. 김현민 (사진 1, 7~12),
Written by Kim Soyeon, freelance editor
Photographs by Kim Hyeonmin (photos 1–10) 국립공주박물관 제공(사진 2~6)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특별전


‘무령왕릉 발굴 50년,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
2021.09.14.~ 2022.03.06
국립공주박물관(기획전시실&웅진백제실)

Special Exhibition on the 50th Anniversary of the Excavation of King Muryeong’s Tomb
50 Years of Excavation: Preparing for a New Half Century of the Tomb of King Muryong
September 14, 2021–March 6, 2022
Gongju National Museum
(Special Exhibition Hall & Ungjin Baekje Hall)

29
지역
문화
이야기

오래된 어제와 오늘, 미래의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지원 사업
Regional Cultural Content Development Project

전통이 있는
이천 수광리 오름가마
신비로웠다. 대부분의 물건은 불 속에 오래 있으면 한 줌의 재가 되는데,
이것은 오히려 형태가 뚜렷해진다. 빛이 나고 단단해진다. 700~800℃에서 한 번,
그리고 1,200℃가 넘은 고온에서 또 한 번, 그렇게 두 번을 불가마 안에서 꿈쩍하지 않고 버틴다.
이어 뜨거운 불이 꺼지면 컴컴한 가마 안에서 또 견뎌낸다. 도자기陶瓷器 이야기다.
도자기의 생명력은 깨뜨려 폐기하지 않는 한 1,000년도 넘게 이어진다.
가히 장수의 아이콘이다.

30
LOCAL CULTURE STORIES

The Ascending Kiln in Sugwang-ri, Icheon:


Where the Tradition
of the Ancient Past, Present, and Future Resides
It was mysterious. While most things turn to a handful of ashes when placed in a fire a for long time,
in the case of pottery, the form actually becomes more distinct.
A piece of pottery becomes shiny and solid while sitting unperturbed
inside a kiln through two firings—first at a temperature of 700–800°C
and then again at the extremely high temperature of over 1,200°C.
When the blazing fire goes out, it endures yet again inside the dark kiln.
Pottery can last for over 1,000 years unless broken or discarded,
making it indeed a symbol of longevity.

31
1 2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657호 1 1960년대 Sugwang-ri Ascending Kiln: Registered


‘수광리 오름가마’
도공들이 광주요에 Cultural Heritage No. 657
있는 수광리
In regards to pottery, the kiln is yet another mystery.
도자기와 관련해 또 다른 신비로움이 있다. 가 오름가마에서
A kiln is a facility designed for firing pottery, bricks,
도자기를 굽기 위해
마kiln이다. 가마는 도자기나 벽돌, 기와 등을 굽는 시 불을 때는 풍경 or roof tiles. Since the fire in the kiln is considered

설이며, 도자기의 완성은 가마의 불이라고 할 정도로 2 1960년대 초창기


the element that completes the pottery, it is a signifi-
1)
1) 수광리 오름가마 cant part of the process. The ascending kiln (oreum
중요한 영역이다. 가마 가운데 오름가마 는 대한민 gama) is one of Korea’s representative traditional
전경
국 대표 전통 가마이다. 등요登窯라고 하여 구릉에서 3 1960년대 광주요 types of kiln. It is a long, connected series of cave- or

여러 개의 굴이나 터널 모양의 가마를 위로 길게 이


창업 초기 풍경 tunnel-like chambers built on a slope in an ascend-
4 기와를 얹은 ing fashion. Since it is fueled with firewood, it is also
어가는 형태를 띤다. 장작을 땐다고 해 장작가마라고 수광리 오름가마 called the firewood kiln (jangjak gama).
도 한다. 지붕(2021년 풍경) The ascending kiln is used to fire objects made

오름가마는 가마의 칸 안에 흙으로 빚은 기물을 넣고 of clay by putting the objects in the chambers and
stoking the fire in the firebox. Among all ascending
아궁이봉통에서 불을 때면서 그 기물을 굽는 시설이 kilns, just Sugwang-ri Ascending Kiln is a Regis-
다. 오름가마 가운데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가마가 있 tered Cultural Heritage. Owned by KwangJuYo (a

다. 이천시 신둔면 광주요廣州窯에 있는 ‘수광리 오름 Korean traditional ceramic brand), it is located in


Sindun-myeong, Icheon. Recognized as a special
가마’이다. 이 가마는 이천의 근현대 전통 도예 문화 cultural artifact that provides insight about Icheon’s
를 알 수 있는 특별한 문화 사료로 인정받아 2016년 traditional ceramic culture during the modern

2월 15일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657호로 지정됐다. and contemporary periods, it was designated as
Registered Cultural Heritage No. 657 on February
등록문화재 가마 가운데 김제 부거리 옹기가마에 이어 15, 2016. It is second among Registered Cultural
두 번째이며, 지금도 사용할 수 있다. 궁금하지 않은가. Heritages only to the earthenware kiln in Bugeo-ri,

앞서 밝혔듯 흙덩이가 도자기가 되는 원리는 간단해 Gimje, and is still functional. Intriguing, right? The
principle behind a lump of clay turning into pottery
보이는데 대한민국 등록문화재가 되다니. 하지만 이 as described above seems relatively simple, yet this
가마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kiln has been designated as a Registered Cultural

32
3 4

2)
Heritage. However, when you take a close look at the 1 Potters kindling a 이 가마는 원래 홍재표 선생이 1949년 자기와 칠기
fire in Sugwang-
kiln, you will probably find yourself nodding your 漆器 검은 자기. 1960년대 초까지 서민들이 주로 부엌이나 일상에서 사용
ri Ascending Kiln
head before you know it.
to fire pottery at 한 생활자기를 굽는 전통 가마로 제작했다. 이후 광주요
Originally built in 1949 by Master Hong
KwangJuYo in the
2)
Jaepyo , the kiln was used traditionally for firing 1960s 설립자인 조소수 선생이 이 가마를 인수해 1962년 도
porcelain and lacquerware (which refers to dark-col- 2 An early 자기 전용 가마로 개축했다. 이 가마는 개축 당시 원
ored kitchen- and tableware used mostly in daily life panoramic view
until the early 1960s). In 1962, KwangJuYo founder of Sugwang-ri 형 그대로인데, 한국 전통 오름가마 제작 방식에 근대
Ascending Kiln in
Master Jo Sosu took over the kiln and reconstructed 식 가마 제작법을 접목해 한국화된 현대 장작가마의
the 1960s
it to be exclusively used for pottery. Today, it retains 초기 양식으로, 이천이 한국 전통 도자기의 맥을 잇는
3 An early view of
its original shape from the time of its reconstruction, KwangJuYo in the
which demonstrates the style of early “Korean-
고장이 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60s
ized” modern firewood kilns that integrated the 4 The roof of 수광리 오름가마는 열역학과 기체역학, 수학과 과
production methods of traditional ascending kilns Sugwang-ri
학 등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제작
Ascending Kiln
and modern kilns. Sugwang-ri Ascending Kiln has
capped with roof 됐다. 불에 의해 발생하는 도자기의 팽창과 수축 정
played a crucial role in allowing Icheon to carry on
tiles in 2021
the legacy of traditional Korean pottery. 도, 불에 의한 유약의 변화는 물론 날씨와 기온, 습도
The kiln required an extensive knowledge and 와 바람 등 자연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이를 토
thorough understanding of thermodynamics, gas
dynamics, mathematics, and science to be built. It
대로 제작한 수광리 가마의 전체 길이는 약 27m, 경
reflects an acute comprehension of how ceramics ex- 사는 22~25도, 가마 칸은 총 12칸이다. 1번 칸의 내벽
pand and contract and glazes change when exposed 폭은 1.65m, 가장 위 칸인 12번 칸의 내벽 폭은 3m

1) ― Ascending kilns have been mostly used in East Asia. Built with clay
1) ― 주로 동양에서 사용했고, 조선 시대 진흙과 망댕이로 제작한
and mangdaengi, they became the primary form of kiln in Korea.
가마가 주를 이루면서 우리나라 전통 가마로 자리 잡음.
2) ― It is speculated that the origin of Sugwang-ri Ascending Kiln dates as far
2) ― 수광리 오름가마의 모태는 9년 더 빠른 1940년으로 유추해 본다.
back as 1940. Master Hong Jaepyo’s father, the late Master Hong Sunhwan,
established a lacquerware kiln at the current KwangJuYo site in 1940,
홍재표 선생의 부친인 고(故) 홍순환 선생이 1940년 현 광주요 자리에
while Master Hong Jaepyo started learning to produce pottery, including 칠기가마를 만들었고, 홍재표 선생은 1946년 즈음
lacquerware, around 1946. There used to be a smaller kiln next to the current 이 가마에서 칠기 등 도예를 배웠다. 현재 수광리 오름가마 옆에 작은
Sugwang-ri Ascending Kiln, but it is said to have collapsed in 2015. 가마가 더 있었는데, 그 가마는 2015년에 허물어졌다고 한다.

33
5 6

to fire, as well as a deep understanding of natural

로 위로 올라갈수록 내벽 폭이 넓어지고 천장은 높아 conditions such as weather, temperature, humidity,


and wind. The kiln, built based on all these factors, is
지는 계단식 칸 가마이다. 아궁이는 망댕이로 쌓았 about 27 meters long, and its 12 chambers sit on a 22-
다. 망댕이는 망생이라고도 하며, 직경 약 15cm, 길 to 25-degree slope. The width between the interior

이 20~25cm의 원통형 흙벽돌을 말한다. 이는 가마 walls of the first chamber is 1.65 meters, and that of
the 12th chamber, which sits at the top of the slope,
가 1300℃ 이상의 고온에서도 견디게 하는 비결 중 하 is three meters. A continuous tunnel, it ascends the
나이며, 전통 가마는 아궁이부터 아치형의 가마 내부 slope in steps, and the width between the interior

를 망댕이와 진흙으로 제작한다. 반면, 수광리 가마는 walls of the chambers widens and the ceilings are
raised as it ascends. Each chamber’s firebox is built
근대에 발달한 내화벽돌과 진흙으로 가마 내벽 및 천 by stacking cylindrical compressed-earth bricks
장을 축조한 후 외부는 점토를 두껍게 발랐다. 내화벽 around 15 centimeters in diameter and 20 to 25 centi-

돌은 1,500〜2,000℃ 정도까지 견딜 수 있고, 불을 때 meters in length called mangdaengi (or mangsaengi).


They are one of the secrets that allow the kiln to en-
면 소나무 재에 의해 가마 내부가 코팅되면서 가마는 dure over 1300°C temperatures. Both the firebox and
더욱 단단해진다. 또 가마 칸마다 칸문도공이 기물을 넣고 the arch-shaped interior of Korea’s traditional kilns
5 수광리 오름가마
빼내는 출입구. 1960년대 개축 당시 도공의 체형에 맞게 제작함과 불보 are built with clay and mangdaengi, but in the case
전경
of the Sugwang-ri kiln, the interior walls and ceilings
기 창이 있어 칸마다 불을 땔 수 있으며, 온도 조절이 6 2021년 5월 수광리
were constructed with clay and refractory bricks that
오름가마에서
가능해 청자와 백자 등을 구분해 구울 수 있다. 그 덕 실시한 등요제에서
were developed in the modern period, with a thick

에 이 가마는 60여 년 동안 전통과 현대의 기술이 어 초벌구이한 도자기 layer of clay on the exterior. Refractory bricks can
7 2021년 수광리
withstand temperatures of 1,500°C to 2,000°C, and
우러져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예술적인 도자기를 생 as the interior walls of the kiln are coated with pine-
오름가마에서
산하고 있다. 실시한 등요제 wood ashes, the kiln becomes even more harde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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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ch chamber of the kiln has a window to watch the 5 A panoramic view 역사는 흐르고 세월을 견디면 자기의
세월이 온다
fire and a kanmun (a door built to suit the stature of of Sugwang-ri
Ascending Kiln
the potter at the time) through which users can stack
6 Bisque created 수광리 가마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받기까지 견
and remove objects. Each chamber can be fueled
at Sugwang-ri
separately, which allows the temperature to be con- Ascending Kiln 딘 세월이 있다. 1950년대 우리나라 가마는 앞다퉈
trolled in individual chambers, and, thus, the kiln during Deungyoje, 부서지고 허물어졌다. 이천에 있던 가마도 별반 다르
can fire ceramics of different types such as celadon an ascending kiln
and white porcelain at once. With the integration of festival held in May 지 않았다. 일제의 조선도자 말살 정책과 6.25전쟁이
2021
traditional and contemporary technologies, the kiln 남긴 상흔이었다. 너나없이 먹고살기에 급급한 시절
7 Deungyoje, an
has been producing one-of-a-kind artistic ceramics 이기도 했다. 1955년 서울 성북동에 설립된 한국조형
ascending kiln
for over six decades. festival held
문화연구소의 일명 성북동 가마, 1956년 서울 대방
at Sugwang-ri
 istory flows: If one endures the test of
H Ascending Kiln in 동에 세워진 한국미술품연구소의 일명, 대방동 가마
time, one’s own time is sure to arrive 2021
도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그로 인해 당시 고려청자
Sugwang-ri Ascending Kiln had already endured a
long period of history when it was designated as a
와 조선백자 등을 재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일급
Registered Cultural Heritage. In the 1950s, Korean 도예 장인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그러던 중 1950년대
kilns were smashed and torn down in waves, and 말 “이천에 가면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가마가 있다”
kilns in Icheon were not exempt from this phenom-
enon, fueled by an imperial Japanese policy to oblit-
는 소문이 돌았다. 그 기쁜 소문의 주인공이 바로 현
erate Joseon ceramics as well as the ensuing Korean 재 광주요에 있는 ‘수광리 오름가마’와 ‘수광1리미나리
War. It was also a time during which most people 가마현재 존재하지 않음’였다.

35
8 9

8 광주요 ‘목부용문’ 전통 식기, 8 KwangJuYo’s traditional tableware line Mokbuyongmun features a cotton rosemallow
‘나무에 피는 연꽃’이라는 뜻으로, design. The name literally translates to “lotus flowers growing on trees,” implying ideals
이상이 현실에서 꽃 핀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 blossoming in reality.
9 이천시 신둔면 수광리 광주요에 있는 9 The interior of KwangJuYo Cultural Center, located at KwangJuYo in Sugwang-ri,
‘광주요문화관’ 실내 풍경 Sindun-myeon, Icheon

그 시절 이천 사람들은 두 가마를 ‘칠기가마’라고 불 could barely make ends meet. A kiln in Seong-
렀다. 이 가마에서는 한 달에 5~6회씩 불을 땔 정도 buk-dong, Seoul, established by the Art Society of

칠기를 많이 생산했기 때문이다. 칠기는 고려청자와 Korea, closed in 1955, and a kiln in Daebang-dong,
Seoul, established by the Research Center for Korean
제작 과정이 비슷했는데, 이는 도예 장인들이 이 가 Artwork, closed in 1956 due to financial difficulties.
마를 사용할 수 있는 큰 이점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Due to this series of events, many master potters

도예 장인이 이 가마를 빌려 분청 화분, 화병, 술병 등 who were struggling to maintain the production
of Goryeo celadon and Joseon white porcelain lost
을 굽고 청자, 백자 등을 실험했다. 신둔면은 원적산 their jobs. Then, in the late 1950s, a rumor began that
과 정개산 아래에 있어 소나무 장작과 점토, 사토 등 there was a kiln in Icheon where people could fire

좋은 흙을 구하기 수월한 점도 도예 장인들에게는 큰 their ceramics. The leading roles in this joyful turn
of events were held by Sugwang-ri Ascending Kiln,
매력이었다. 1958년 홍재표 선생은 수광리에 대방동 which currently belongs to KwangJuYo, and the
가마 출신인 지순택1966년 고려도요 설립 선생, 고영재 Sugwang 1-ri (Mina-ri) kiln, which no longer exists.
전 동국요 공장장 선생과 함께 ‘수금도요’를 열고 조선백 Around this time, residents of Icheon called
these two kilns the “lacquerware kilns,” as they
자와 분청, 진사 등의 재현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 produced enough lacquerware to be operated five to
해 조소수 선생은 수금도요 도자기 등 이천 도자기 six times a month. The production of lacquerware

의 우수성을 일본에 소개하고 일본 수출의 길을 열 is similar to that of Goryeo celadon, which became a
great advantage for the master potters who wanted
었다. 1959년 유근형 선생도 고승술·이현승 선생이 to use the kilns. Soon, many master ceramicists
운영하던 미나리 가마에서 고려청자 재현에 성공하 were renting these kilns to fire flowerpots, vases,

고, ‘해강고려청자연구소’를 설립한다. 이후 조소수 and liquor bottles in buncheong ware (green-colored


vessels that are one of the representative ceramic
선생은 수금도요를 인수하고, 1963년 그 자리에 광 types of the Joseon Dynasty), and experiment with
주요를 설립한다. 광주요는 조선 시대 왕실 자기와 celadon and white porcelain. Sindun-myeon’s

36
location at the base of Wonjeoksan Mountain and 우리 고유의 도자 문화 전통을 잇는다는 비전 아래 각
Jeonggaesan Mountain made it easy for potters to 공정을 일급 도예 장인들에게 맡겨 우리 전통 도자기
obtain pine firewood, and the rich clay-filled and
sandy soil was a primary attraction as well. In 1958,
제작에 매진하고 있으며,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
Master Hong Jaepyo opened Sugeum Pottery Studio 고 있다. 1960년대 이천도자기는 일본 수출의 문을
with Master Ji Suntaek (founded Goryeo Pottery 열어 전통 도자의 부활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어 전국
Studio in 1966 and previously work at the Dae-
bang-dong kiln), and Master Go Yeongjae (former
에서 뛰어난 도예인들이 이천으로 모여들었다. 국내
factory manager for Dongguk Pottery Studio), and 최대 도자공예 인프라를 구축하게 된 이천은 2010년
together, they successfully recreated Joseon white 유네스코로부터 공예 및 민속예술 분야 창의도시로
porcelain, buncheong ware, cinnabar porcelain,
and other traditional pottery types. The same year,
지정받았다. 2019년 이천의 도자 공방은 500여 곳으
Master Jo Sosu introduced the excellence of Icheon 로 늘어났고, 국내 도자(공예) 업체의 70%가 이천에
ceramics to Japan, including examples produced 밀집하면서 이천시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대표 공예
by Sugeum Pottery Studio, and opened the path
to Japanese exportation. In 1959, Master Yu Geun-
도시로 자리매김한다. 이 과정에서 수광리 오름가마
hyeong succeeded in reproducing Goryeo celadon 는 늘 함께했다. 역사는 흐르고, 흐르는 세월을 견디
at the Mina-ri kiln run by Master Go Seungsul and 면 자기의 세월이 오는 것이다.
Master Yi Hyeonseung, and established the Hae-
gang Research Institute; Master Jo Sosu took over 글. 김희정 프리랜서 작가 — 사진제공. 광주요— 그림. 김진이
Sugeum Pottery Studio and established KwangJuYo
on its site. KwangJuYo strives to produce traditional
Korean ceramics by involving first-class ceramics
artisans in every step of the process with the vision '지역N문화' 누리집에서

of carrying on the cultural tradition of royal Joseon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ceramics and uniquely Korean ceramics. This tradi-


tion is upheld to this day, and by opening the door to
the exportation of ceramics to Japan, we have seen
the onset of a revival period for traditional ceramics.
Outstanding potters from all over the country
now gather in Icheon, which has established the
largest ceramic art infrastructure in Korea and was
designated as a UNESCO City of Crafts and Folk Art in
2010. As of 2019, some 500 ceramic studios are located
in the city, and 70 percent of Korea’s (craft) ceramics
manufacturers are concentrated in Icheon, the repre-
sentative crafts city of Korea in both name and reality.
Sugwang-ri Ascending Kiln has always been a part of
this journey. History flows, and if one withstands the
test of time, one’s own time is sure to finally arrive.

Written by Kim Hee Jeong, freelance writer


Photographs courtesy of KwangJuYo
Illustrated by Kim Jinyi

37
문화
탐구
생활

불로장생을 
염원하며

청자 
신선 모양 
주자
1971년, 대구광역시 
근교에 위치한 과수원에서 
푸른색 옥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청자 주자 
한 점이 발견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주자의 모양이 아니라 
높은 관을 쓴 사람이 
양손에 복숭아를 가득 든 형태여서,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최고급 고려청자가 당시 
최대 소비지였던 수도 
개경이 아닌 남쪽 지방에서 
나온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도교적 이상세계를 꿈꾸었던 
고려 시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보여 주는 
좋은 안내자임은 분명하다.

38
CULTURAL EXPLORATION

The Desire for Perennial


Youth and Long Life:

Celadon Taoist
Figure-Shaped
Ewers
In 1971, a piece of a celadon
pitcher that looked as if it had
been carved out of green jade
was discovered in an orchard
near Daegu Metropolitan City.
Unlike ordinary pitchers, it was
shaped like a figure wearing
a tall crown and holding
peaches with both hands,
which was quite uncommon.
It is unclear why a premium
Goryeo-period celadon
artifact was found in the
southern part of Korea
instead of the dynasty’s capital
city Gaegyeong, its biggest
consumer area; nevertheless,
the pitcher can now serve as
a guide to the spiritual world
of the people of the Goryeo
Dynasty who dreamed of a
Taoist ideal world.

39
고려, 신선 세상을 꿈꾸다 Goryeo-period dreams
도가道家 사상은 중국 철학자 노자老子, 생몰년 미상와 장자莊子, of the world of shenxian
Taoism is a philosophy that has inherited and
BC 369~BC 289년 무렵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자연의 developed the ideas of Laozi (birth and death date
실상을 깨달은 참지혜를 통해 무위無爲의 삶을 추구한다. 자연을 unknown) and Zhuangzi (circa 369–289 BC). Taoists

거스르지 않는 경지에 있는 이를 신선神仙이라 하고, 신선이 되어 pursue wuwei, literally translated as “inexertion” or
“effortless action,” by seeking the true wisdom of un-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오르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을 최고의 경지로 여 derstanding nature. Those who reach the ideal state
겼다. in which one does not go against nature are referred

도가 사상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때는 고려 시대였다. 당시 사람 to as shenxian, or transcendental humans, and the


highest level that one can reach in Taoism is to be-
들은 유학, 불교, 도가 중 어느 하나만을 취하지 않고, 모두 받아 come a shenxian, grow wings, and ascend to heaven.
들여 일상생활의 지침으로 삼았다. 도가가 종교화된 도교道敎는 In Korea, Taoist ideas expanded most fully

예종睿宗, 재위 1105~1122 때에 크게 번성하였다. 도교에서 소원을 in the Goryeo Dynasty. During this period, people
did not choose between Confucianism, Buddhism,
빌며 신들에게 올리는 제사인 재초齋醮, 또는 초제, 초례를 매달 거행 and Taoism, instead accepting them all as the
하는가 하면, 도교를 깊이 믿던 북송 휘종에게 도사 2명을 청하 guiding principles for daily life. Taoism in particular

기도 하였다. 고려의 궁중 도서관 격인 청연각에서 학자들에게 flourished as a religious form during the reign of
King Yejong (r. 1105–1122). People prayed to Taoist
《도덕경》을 강론케 한 것도 예종이었다. 재초의 축문 격인 청사 deities through monthly fasting and by offering rites
靑詞는 김부식이나 이규보와 같은 글 잘 짓는 뛰어난 문신들이 지 known as zhaijiao, jiaoji, and jiaoli (K. jaecho, choje,

었고, 경전을 낭독하거나 청사를 푸른 종이에 써서 불태우는 등 and chorye), and King Yejong even asked Emperor
Huizong of China’s Northern Song Dynasty, who was
재초 의례 전반을 집전하는 일은 도사道士가 맡았다. 국가가 주도 a devout Taoist, to send two Taoist masters to Korea.
해 도관과 도사를 두고 왕실과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을 관방도교 It was also King Yejong who ordered lectures on
官方道敎라 하는데, 고려 시대가 바로 관방도교의 전성기였던 셈 the Daodejing be held at Cheongyeongak, the royal
library. Cheongsa, short pieces of writing equivalent
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은 고려 사람들이 쓰던 그릇인 청자 to chukmun (written formulaic invocations in Confu-
에도 투영되었고, 그중 하나가 바로 ‘청자 신선 모양 주자’국보 제 cian ancestral worship) were penned by outstanding
167호이다. civil officials known as excellent writers such as Kim
Busik and Yi Gyubo to open the aforementioned
Taoist rite zhaijiao. Taoist masters were in charge
신선 모양으로 만든 고려청자 of officiating the overall process of the Taoist rites,

‘청자 신선 모양 주자’는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장식이 화려 including reciting scripture and writing cheongsa
on pieces of blue paper before burning them. The
한 도포를 입고서 구름 모양 대좌에 앉아서 복숭아 여섯 개가 올라 Goryeo Dynasty was the so-called golden age of
가 있는 쟁반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형상이다. 이처럼 사물의 state-administered Taoism, which refers to when
a government is equipped with Taoist temples and
masters and takes charge of praying for the good
fortune of the royal family and the state. This his-
torical moment is reflected in the celadon objects
used by people at the time, including Celadon Taoist
Figure-Shaped Ewers (National Treasure No. 167).

A Taoist figure in Goryeo-era celadon


Like its name, Celadon Taoist Figure-Shaped Ewers
is a celadon ewers shaped like a Taoist figure seated
1 청자 신선 모양 주자, 고려 12~13세기,
높이 28cm, 국보 제167호, on a cloud-shaped pedestal. The figure holds a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tray of six peaches with both hands, dressed in an
exquisitely adorned robe and a tall crown. This
Celadon Taoist Figure-Shaped Ewers

kind of celadon artifact, which is modeled after a
(National Treasure No. 167),
12–13th century (Goryeo Dynasty), particular object or figure, is referred to as celadon
height 28 cm with figurative design. A hole through which water

40
1

41
형태를 본으로 삼아 만든 것을 상형청자象形靑磁라고 한다. 인물 can be poured into the vessel can be found on the
이 쓰고 있는 관에 구멍을 뚫어 물을 넣을 수 있는데, 뚜껑은 전 figure’s head, though the lid is missing, and one of

해지지 않는다. 가장 앞부분에 배치된 복숭아에는 액체류를 the peaches serves as the spout. There is also a han-
dle attached to the figure’s back. Minute details all
따를 수 있는 주구가 있다. 손잡이는 인물의 등에 달았다. 곳곳에 over the pitcher show just how much effort went into
서 확인할 수 있는 세밀한 장식은 이 주자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 crafting the piece. White clay decorates the crown,

였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머리에 쓴 관, 도포의 옷깃, 쟁반에 담긴 the collar of the figure’s robe, the peaches, and the
fingernails of both hands as if pearls have been in-
복숭아, 양손의 손톱 등에 진주알 새겨 넣듯이 하나하나 백토白土 cised into the celadon. Harmoniously blended with
를 찍어서 장식성을 더하였다. 도포 문양에 사용된 음각 기법과 the engraving technique applied to the patterns on

어우러져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려 시대의 수준 높은 미 the robe, the white clay gives the piece a luxurious
air. The pitcher is a prime example of celadon ware,
감과 청자 제작 기술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최고급 청자이다. demonstrating a high awareness of aesthetics and
이 주자에는 도교 사상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 주자 자체인 이 인 the finest celadon production techniques that were

물은 새가 장식된 높은 관, 소매 폭이 넓고 깃털이 장식된 도포, 구 practiced at the height of the Goryeo Dynasty.
The pitcher strongly reflects Taoist philosophy.
름 모양 대좌 등으로 보아 도교와 관련된 인물로 추정된다. 좀 더 The primary figure’s attire of a tall crown resem-
앞서 나간다면, 곤륜산崑崙山 정상에 살면서 신선 세계를 주관하 bling a bird (phoenix) and a robe with wide sleeves

는 최고 여신인 서왕모로 볼 수도 있다. 서왕모는 3000년에 한 번 adorned with feathers, plus the fact that it is seated
on a cloud-shaped pedestal, are evidence that sup-
열매가 맺힌다는 복숭아를 길렀는데, 이 복숭아를 먹으면 신선이 port speculations that the figure is related to Taoism.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선을 꿈꾸던 이들에게는 누구보다 To further this theory, the figure can be considered

신성한 존재였다. 즉 이 주자의 인물은 도교의 최고신 서왕모일 to be the Queen Mother of the West (C. Xiwangmu),
a leading Taoist deity who oversees the world of
가능성이 크고, 주구에서 흘러나오는 술은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shenxian from the top of the Kunlun Mountains. The
서왕모의 복숭아라는 조형적 장치를 통한 것이어서 그 의미가 매 Queen Mother of the West was said to grow peach

우 특별했을 것이다. trees that bore fruit once every three millennia, and
these peaches, if consumed, were believed to turn
eaters into shenxian; hence, she was esteemed as a
신선이 장식된 또 다른 고려청자 sacred being who existed above all others. In other

신선이 장식된 또 다른 청자 주자가 있다. 투각透刻 음각陰刻, words, it is highly likely that the figure is the Queen
Mother of the West, the highest deity within Taoist
양각陽刻, 상형象形, 첩화貼花 등 다양한 장식 기법이 베풀어진 주자 beliefs, and that the liquor that would have been
로, 연꽃이 장식된 받침이 한 벌로 구성되었다. 주자의 몸체는 무 poured from the pitcher’s spout represented her

늬만 남기고 바탕 면을 모두 도려내는 투각으로 장식해 매우 화 peaches, which held special meaning as a symbol of
perennial youth and long life.
려하다. 이 기법은 그릇 성형 후 조각하기 쉽도록 어느 정도 건조
된 상태에서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장식 기법으로, 그 예가 매우 Another Goryeo-era celadon Taoist figure
Another celadon pitcher decorated with a shenxian
figure from this period exists. Actually a pitcher
and saucer set, it makes use of diverse decorative
techniques including openwork, engraving, relief,
figurative design, and a petaled flower design. The
body of the pitcher displays an extremely extravagant
design rendered by the use of the openwork technique,
in which the artisan cut out much of the background.
This decorative technique was rare due to the great skill
2 청자 투각 동자 연꽃 넝쿨무늬 주자와 받침,
고려 12세기, 높이 17.7cm, it required, as artisans would have to carve out the pat-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tern after the pottery was formed and dried to the point
that the clay could be cut out easily. A lively design of
 eladon Pitcher and Saucer with
C
seven boys and lotus scrolls is carved into the pitcher’s
Openwork Boys and Lotus Scrolls Design,
12th century (Goryeo Dynasty), surface, and the engraved details of the lotus petals and
height 17.7 cm leaves and the boys maximize the sense of re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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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e decorations on the knob of the pitcher’s lid 드물다. 동자 7명과 연꽃 넝쿨무늬가 생동감 넘치게 투각되었고,
are also eye-catching. A rising cloud is engraved on 연꽃과 연잎, 동자의 세부를 음각선으로 마무리하여 사실감을 극
the side of the lid, and a Taoist figure holding peach-
es with both hands is placed on top. The head of the
대화하였다.
figure is currently missing, but the wide-sleeved 이 주자의 뚜껑 손잡이 장식이 눈길을 끈다. 뚜껑 옆면에는 피어
robe that seems to be fluttering in the wind and the 오르는 구름무늬를 음각하였고, 윗면에는 복숭아를 두 손으로 받
tray of peaches are reminiscent of the figure in the
aforementioned .
쳐 들고 있는 신선 조각상을 배치하였다. 현재 머리 부분은 결실
Looking at Goryeo-period celadon artifacts 되었지만, 소매가 넓은 도포와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옷자락, 쟁
decorated with Taoist figures holding peaches, one 반 가득 복숭아를 든 모습은 ‘청자 신선 모양 주자’의 신선 모습을
is bound to acknowledge the fact that people in the
Goryeo Dynasty were not so different from contem-
떠올릴 수 있다.
porary people in their desire for perennial youth and 복숭아를 들고 있는 신선이 장식된 고려청자를 보면, 불로장생을
long life. Let us find small moments of consolation in 염원했던 고려 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our daily lives by reflecting on the manifold cultural
implications of the past through articles of cultural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에서 그
heritage passed down from our ancestors. 시대의 다양한 문화적 함의를 잠시 생각해 보는 것도 일상의 작
은 기쁨이 될 것이다.
Written by Kang Kyung-nam, curator,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Photographs courtesy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글. 강경남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 사진제공. 국립중앙박물관

43
한국

순천에서 보낸 7개월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산다는 것이 무지갯빛일 수만은 없다. 


몸이 좋지 않은 날도, 향수에 사무치는 날도 있지만, 
친구들이 있어서 순천에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자 
절친한 친구이고,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어 주었다.

내가 사는 도시, 순천 현재 내가 사는 도시는 순천이다. 순천은 행정구역상


인천공항에 도착한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생 전라남도에 있으며, 서울에서 버스나 자동차로 4시간
생하다. 이곳에 있기 위해 온갖 힘든 시간을 거쳐왔다. 반 정도 소요된다. 순천은 도심 녹지 공간과 청정한
다행스럽게도 나는 잘 극복했고 지금 여기에 있다. 대기질, 다수의 관광지를 통해 비상하는 생태도시로
고국을 떠난 지 벌써 일곱 달째다. 아는 사람 하나 없 이름을 알리고 있다. 순천만습지와 순천만국가정원,
이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낯선 곳으로 이 BBC 다큐멘터리에도 소개된 와온 해변의 갯벌은 순
주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영위 천의 대표 볼거리이다.
하는 삶은 불확실한 동시에 설레는 것이기도 하다. 가 이 도시에 처음 왔을 때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내가
령 여행 가방을 꾸리고 다른 문화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리던 도시 생활과는 너무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대
1 순천만국가정원
더 넓은 세상으로 크게 한 걸음 내디딜 때 느끼는 설렘 도시의 북적대는 번화가와 다르게, 순천에서는 삶이 전경
같은 것 말이다. 훨씬 느리게 흘러가는 듯했다. 2 와온해변의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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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ING KOREA

Seven Months in Suncheon


Living away from home is not always all rainbows and unicorns.
There are days when I don’t feel my best and days when I get homesick,
but my friends keep me going. They have become my constant, people to listen to me rant,
my confidants, and a shoulder for me to lean on.

Suncheon: The city where I live


The moment I landed at Incheon International
Airport is still vivid in my memory. Every rejection
and setback I went through just to be here rushed
through every pore of my being. I had overcome, and
now I was finally here.
It has been seven months since I left my home
country. Moving to an unfamiliar place, not knowing
anyone, and having no idea what lay ahead was
scary. But the uncertainty that came with it was also
thrilling—packing my suitcases, meeting people
with different cultures, and taking a big step into a 2
broader horizon.
Suncheon, the city where I currently live, is lo-
cated in Jeollanam-do, approximately 4.5 hours away rushing off to work in a frenzy, every morning I
from Seoul. It is known as a rising eco-city because of its am greeted by the sound of chirping birds and the
urban green spaces, good air quality, and many tourist magnificent view of mountains right in front of
attractions. Some must-see places here are Suncheon- my window. Living in Suncheon allows me to take
man Bay Wetland Reserve, Suncheonman Bay National a break from my hectic lifestyle and slow down to
Garden, and the mudflats at Waon Beach, which were enjoy life. I have met friends from all over the world
even featured in a BBC documentary. and together, we have discovered the hidden charms
When I first came to this city, I was a bit frustrated of this city. Suncheon offers not only splendid natu-
because it was the total opposite of the city life I pictured ral wonders but also interesting glimpses of cultural
in my head. In contrast to the bustling streets of bigger heritage. During the first few months of my stay, I
1 A panoramic view
cities, life in Suncheon seemed to be more slow-paced. made a list of all the places I wanted to visit here.
of Suncheonman
Of course, Suncheonman Bay Wetland and Sun-
Bay National
 uncheonman Bay Wetland Reserve and
S cheonman Bay National Garden were at the top. The Garden
Suncheonman Bay National Garden wetland reserve is famous in Korea for its tall reeds 2 Sunset at Waon
Instead of tall buildings, cars honking, and people and flocks of rare migratory birds. When I visited in Be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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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습지와 순천만국가정원 3

매일 아침 나를 맞이하는 것은 고층 빌딩이나 여
기저기서 경적을 울려대는 자동차, 정신없이 일터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저귀는 새소리와 창문
밖으로 바로 보이는 산들이 이루는 비경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니 빡빡한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휴
식을 취하며 여유롭게 삶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세
계 각지에서 온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들과 순천의 숨
은 매력을 발견했다. 순천은 빼어난 자연경관뿐만 아
니라 흥미로운 문화유산을 간직한 도시이다. 순천에
살면서 처음 몇 달 동안 가보고 싶은 장소를 빠짐없이
목록으로 작성했다. 단연 순천만습지와 순천만국가
정원이 가장 가보고 싶은 명소였다. 순천만습지는 우
거진 갈대숲과 희귀 철새 떼로 한국에서 유명한 곳이
다. 내가 방문했던 3월은 갈대밭이 황갈색이었다. 바
람에 일렁이는 누런 갈대밭에 햇살이 닿으면 황금빛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다음으로 친구들과 나는 경전
철 스카이큐브에 올라탔고 순천만국가정원으로 향했
다. 순천만국가정원은 작은 테마 정원으로 이뤄진 대 March, most of the reeds were brown and yellow and
became a spectacular view of golden reeds dancing
규모 공원이다. 각양각색의 꽃이 만개해 눈길이 닿는 with the wind when rays of sunlight hit them just
곳마다 그림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right. Next, my friends and I hopped onto the Sky
Cube train towards Suncheonman Bay National Gar-

과거로의 추억 여행을 떠나다


den, a humongous park made up of smaller themed
gardens. At the time, a variety of flowers were in full
순천을 대표하는 두 관광지 외에 낙안읍성에도 bloom and everywhere I looked was a picturesque

다녀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 sight.

된 옛 마을로, 한국에서 가장 잘 보존된 민속촌으로 Traveling back to the memories of the past
꼽힌다. 흥미롭게도 이 마을에는 지금도 여전히 다수 Aside from these two famous attractions, I have also

의 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마을의 초가집 been to Naganeupseong Folk Village, a UNESCO
World Heritage Site that is one of the most well-pre-
주변을 산책하며 전통놀이, 옷감 짜기, 염색 같은 다 served folk villages in Korea. Interestingly, some
양한 문화 체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나는 마을의 families still live in the village today. However, tour-

성곽과 농경문화 유산이 600년 넘는 세월 동안 원형 ists are welcome to take a walk around its thatched
roof houses and participate in some cultural activi-
에 가깝게 잘 보존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ties such as traditional games and weaving and dy-
K-드라마 팬으로서 순천 드라마 촬영장도 내 여행지 ing fabrics. While roaming around this village, I was

목록에서 빠질 수 없는 명소이다. <강남1970>, <에덴 amazed by how its residents were able to preserve
not only the fortress town but also their agricultural
의 동쪽>, <늑대소년> 같은 다양한 한류 작품이 이곳 3 순천의 유명
관광지인
heritage for over 600 years.
에서 촬영되면서 관광 명소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이곳 와온해변의 갯벌 Of course, as I am a K-drama fan, Suncheon

에는 1950~80년대 한국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돼 있 일몰 Open Film Set was a must-see on my list. Gaining
Sunset at the popularity as various Hallyu K-dramas such as
는데, 즐길 거리 중 백미는 옛 교복을 빌려 입고 촬영 mudflats at Waon Gangnam Blues, East of Eden, and A Werewolf Boy
Beach, a famous
장 곳곳에서 맘껏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교복 체험 were filmed there, the location mirrors what Korea
tourist attraction in
이다. 나 역시 50년 전 가옥들과 자갈 깔린 골목길을 looked like from the 1950s to the 1980s. One of its
Suncheon
highlight activities is renting retro school unifor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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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taking as many selfies as possible on every 거닐면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뜻깊은 시간을 누렸
corner. It was a perfect chance for me to channel my
inner child while wandering around cobblestone
다. 마치 과거로 추억 여행을 떠난 기분이었다.
pathways surrounded by houses that were built half
a century ago. I truly felt like I was traveling back to 소중한 친구들을 만나게 해준 순천
the memories of the past!
순천의 꼭 가봐야 할 여행지 목록은 여기서 끝나

알제린(필자)
Santiago Arjelyn (author)
The city where I have met lifelong friends 지 않는다. 와온 해변도 빼놓을 수 없다. 해수욕과 일
The list of must-visit places in Suncheon doesn’t end 광욕을 즐길 수 있는 그런 해변은 아니지만, 숨이 멎
there. There’s also Waon Beach, which is not actually
a beach in the sense that you can’t swim and sun-
을 듯한 갯벌의 일몰로 관광객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bathe there—it’s a mudflat famous among tourists 내가 사는 곳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였다. 갯벌에 다가
for its breathtaking sunset. I traveled 30 minutes by 선 순간, 갯벌의 물길 위로 비친 산들의 절경에 전율이
bus to get there, and as I approached the mudflat, I
was thrilled by the view of the mountains reflected
느껴졌다. 우리는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낙조 시간에
in the wet ground. Luckily, we showed up at just the 잘 맞춰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친구들과 나는
right time; the sun was just about to set. My friends 한참을 말없이 스러지는 낙양의 아름다움을 감상했
and I took a long moment of silence to appreciate
the beauty of the setting sun, watching as the sky
다. 하늘의 텅 빈 화폭은 맑고 푸른 하늘에서 환상적인
changed colors. The sky became a perfect empty 파스텔 팔레트로, 붉게 타오르는 오렌지빛 노을로 채
canvas that shifted from a clear blue to a dreamy 워졌다. 기억에 남을 만한 여행이 되려면 여행지 자체
pastel to a red and orange sunset.
They say that more than the places you visit, it
보다는 함께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나
is the people you go with that makes a trip memora- 는 생면부지의 이 도시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하
ble. I came to this unfamiliar city without knowing 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실을 잊고 지냈다. 우리는
anyone, but as the days passed, I unknowingly met
good friends. We have traveled to different places
함께 여러 곳을 여행하고 다양한 한국 음식을 먹어 보
together, tried a variety of Korean dishes, and shared 고 재미있는 농담에 웃으며 많은 순간을 나눴다.
moments of laughter over funny jokes. 몇 개월 후면 나는 순천대학교에서 한국어 연수 과정
In just a few months, I’ll be completing my Ko-
rean language course at Suncheon National Universi-
을 마친다. 그러고 나면 다른 도시로 건너가 석사 과
ty. After that, I’ll be moving to another city to pursue 정을 밟을 예정이다. 분명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자
my master’s degree. I am definitely going to miss this 연의 따스함과 온화한 산들바람의 신성한 공기를 맘
calm and serene city where I can enjoy the warmth of
nature and the gentle breeze of fresh air. I am going
껏 누릴 수 있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 도시를, 동천
to miss walking to the nearby Dongcheongang River, 강 근처까지 걸어가 죽도봉에서 사찰을 둘러보고 화
climbing up to Jukdobong Park to look around a tem- 려한 불빛의 도시 야경을 감상했던 일을. 무엇보다 내
ple, enjoying the fresh air, and beholding the view of
the bright city lights at night. But most importantly,
친구들이 가장 그리울 것이다. 우리는 내 평생의 보물
I am going to miss the friends with whom I visited 이 될 소중한 추억을 함께 만들었다.
all these places. Together, we have created precious
memories that I’ll treasure for a lifetime.

Written and photographed by Santiago Arjelyn 글과 사진. 알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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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진

모금 차마객잔

올라도 올라도
허공의 답보 같은 스물여덟 굽이의 벼랑길이다
옛날엔 차와 말을 바꾸러 다녔다는 고도는
홍콩발 무협 영화의 흔한 장면처럼
천 길 낭떠러지의 급류와 답설무흔의 구름들을
연이어 잘랐다

이어 붙인다
사람을 베어본 적 있어요?
말 위에서,
추락을 겁내는 나에게
은퇴한 검객처럼 가이드는 묻는다

천장사天葬士를 구하지 못한 가난한 집안의 부탁으로


그는 사람을 베었다고 한다
베었을 뿐 아니라 여러 번 쪼개고 발랐으며
하늘을 배회하는 식욕들이 조각난 영혼을 건네받는 것을 보며, 그는
그의 생도 한 순간 찢어지는 것을 느꼈다고
그래도 이만하면
가이드 한 번 잘 한 것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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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호도협에서 불어난 어둠이
추녀까지 차오른 저녁의 차마객잔에
나를 가만가만 부려놓는다.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별빛들이


마당에 뽀드득 쌓이는 그 밤에
나는
사람은 한 번도 밟은 적이 없다는
설산의 산정을 보며,
머리카락만 남기고
나머지 영혼은 모두 먹어치운다는 설산의 독수리들과
조각난 제 영혼을
기워 맞추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는데

객잔은 가슴 섶의 오래된 경전을 꺼내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장만호 시인, 1970년생. 200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등단, 김달진문학상 젊은시인상 수상,
시집 《무서운 속도》, 현재 경상국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사진. 박하선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삶의 중간보고서》, 《天葬》, 《천불천탑》, 《발해의 恨》,
《太王의 증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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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원
탐방

서천
12월의 끝과 시작을 함께한
舒川

50
현재의 모습과는 다른 서해의 옛 풍경을 기억하고 있는 충남 서천. 
꿈길처럼 유유히 흐르던 금강의 뱃길은 밀물과 썰물에 따라 바닷물이 들고 나며 강과 바다의 경계를 넘나든다. 
포구를 따라 흐르던 지역의 삶과 문화는 시간과 어우러져 머물고 싶은 풍경으로 남았다.

1 서천 군함바위 일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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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것은 아름답다,  언제 찾아도 시기와 어울리는 매력을 전해준다. 특히
신성리 갈대밭 금강에 얼음이 맺히는 때가 되면 겨울 철새들이 어김
너른 들판 가득 초겨울 바람이 갈대와 함께 여 없이 이곳을 찾아와 겨울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풍경
물었다. 을 완성한다. 강변에 펼쳐진 갈대밭과 금강하굿둑 주
해발고도 100m 이하의 낮은 언덕과 분지를 형성하고 변에 잘 보존된 생태계는 서천이 가진 낭만적인 풍경
있는 금강 하구에는 호남평야와 연결되는 광활한 옥 에 신비함을 더한다.
토가 숨 쉬고 있다. 수많은 영화 속에 한 장면으로 소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충남 서천이 가진 문화 콘텐
개되며 서천 신성리 갈대밭은 사계절 사람들이 찾아 츠를 잘 보존하고 육성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가치가
오는 명소가 되었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문화적인 잠재의식을 기반
금강과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여름이면 광활한 푸르 으로 지역 주민들의 문화 활동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
름을, 가을이면 황금빛 갈대의 흔들림을 볼 수 있어 기에 더욱 힘이 납니다. 지역의 특색을 발굴하고 그것

52
을 더욱 발전시키려는 자발적 움직임은 천혜의 자연
환경을 토대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까
지 서천이 간직하고 아껴온 자연유산이 있었기에 오
직 이 고장만이 가진 특색있는 콘텐츠가 발전할 수 있
었고, 지금도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
니다.”
과거에는 단순히 무성한 갈대숲이었지만, 자연훼손
을 막기 위해 면적의 일부분만 개방하고 나머지는 보
존하고 있다. 고려 말 최초로 화약을 가지고 왜구를
소탕했던 진포해전이 있었던 곰개나루터는 이제 신
성리 갈대밭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
고 있다.

모시가 거래되는 유일한 전통시장,


한산오일장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천의 한산모시는 국
가무형문화재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국내에서 모
3
시가 거래되는 유일한 전통시장으로 알려진 한산오
일장. 매월 1, 6으로 끝나는 날이면 한산터미널과 한
산초등학교 사이, 소박하지만 알찬 장이 열린다. 50년이 넘은 철물점과, 1910년부터 문을 열고 삼대
1926년, 정기시장으로 등록되었지만 이미 그전에 개 가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는 대장간, 낡은 연통과 양동
설된 것으로 전해지는 이곳은 한때 현재의 4배 규모 이가 시간의 흐름을 가늠케 하는 함석집이 오일장의
에 달하는 거대한 장터였다. 상시 문을 여는 골목 상 역사를 말해 준다. 일반적으로 장이 서는 시간은 오전
점들과 장날 좌판을 펴는 난전상인들이 함께 한산오 9시 정도지만, 이곳의 명물인 모시전을 보려면 6시 전
일장을 가득 메운다. 싱싱한 제철 야채를 구입할 수 에 모시 거래장에 도착해야 한다. 그 이유는 어둠 속
있는 채소전을 지나면 어물전과 잡화전이 이어진다. 에서 백열등에 비춰보아야 모시의 품질을 정확하게
아담하지만 역사가 있는 장터에는 오랜 시간 가업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천에서 전통 오일
이어가고 있는 이들이 여전히 골목을 훈훈하게 지키 장을 보고 싶다면 한산오일장에 들러 지역 특산품을
고 있다. 로컬의 가장 최전선에서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4 5

2 사계절 관광 명소인
서천 신성리 갈대밭
3 4 5 한산오일장 풍경

53
6

잔설 위에 놓인 붉은 점,  해 바다의 일몰을 보기 위해 많은 사진작가들이 찾아


마량리 동백나무숲 오고, 특히 연말연시에는 일몰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
충청남도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서천의 마 도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량진에는 한국 종교 역사에 뚜렷하게 남은 사건이 일 서천문화원의 이관우 원장은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어난 곳이다. 1882년, 서해안 탐사차 마량진 해안에 동백꽃의 아름다움과 바다가 어우러진 마량의 겨울
닿은 영국해군이 당시 마량진 첨사였던 조대복에게 풍경을 서천의 대표적인 볼거리로 꼽았다. 바닷바람
한국 최초로 성경을 건네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을 살며시 피한 언덕의 동쪽 자락, 500년의 긴 수령을
마량리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성경전래지 기념관과 지닌 80여 그루의 동백나무숲은 우리가 지키고 가꾸
더불어 서천군의 대표적인 명소인 마량리 동백나무숲 어야 할 소중한 서해안의 자연유산이다.
이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동백
나무숲은 사철 푸르름을 자랑하며 가장 먼저 꽃을 피 숲과 바다 사이, 장항 송림산림욕장
워 부지런히 봄을 알린다. 숲속에는 중층누각인 동백 “서천에 오셨으면 장항 송림산림욕장은 꼭 방문
정이 있어 서해 바다의 시원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하셨으면 합니다. 사계절 다 좋은 곳이지만 저희 문화
이곳에서 만나는 일몰 또한 무척이나 깊고 붉다. 원에서 소나무숲에 시화전을 열고 있어 산책길이 더
“마량리 동백나무의 붉은 동백꽃이 살포시 내린 눈과 욱 즐거우실 겁니다. 해안가를 따라 솔숲이 조성된 곳
만나는 시기가 있습니다. 꽃잎 위에 내려앉은 설경은 들을 종종 볼 수 있지만 장항 송림산림욕장은 규모나
너무나 아름답죠. 동백정 앞바다에 있는 무인도와 서 풍경 면에서 압도적이지요. 앞서 말했던 서천이 지켜

54
7 내고자 하는 우수한 자연유산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8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신성리 갈대밭, 서천특화시장과 함께 장항 송림산림
욕장에서도 시화전이 열리고 있다는 박은희 사무국
장의 안내에 따라 솔향이 가득한 산림욕장을 찾았다.
장항의 송림산림욕장은 해안을 따라 울창하게 조성
된 소나무가 시야를 가득 채우는 곳으로 바다와 숲,
하늘과 바람 사이를 산책하는 듯한 청명한 기분을 전
해 준다. 하늘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뿌
리내린 소나무는 추운 겨울에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막아 주고 여름에는 뜨거운 태양을 걷어 낸다. 산책로
사이사이를 연결하듯 고운 시선이 담긴 시화전이 겨
울바람 앞에서도 발길을 멈추게 만들고 있었다.

돌팔매

바다에 끝없는
6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마량리 동백나무숲 물결 위로
7 동백나무숲의 붉은 동백 내, 돌팔매질을 하다.
허무에 쏘는 화살 셈치고서
8 동백정 노을
9 서천의 대표적인 자연유산, 장항 송림산림욕장

돌안은 잠깐

9 물연기를 일고
금빛으로 빛나다
그만 자취도 없이 사라지다

오오 바다여,
내 화살은
어디에 감추어버렸나

바다에,
끝없는 물결은,
그냥 가마득할 뿐…

- 석초申石艸.1901~1975 ‘돌팔매’ 중

서천이 낳은 한국의 대표 근대 시인인 신석초 선생의


시선과 솔향이 만나 겨울의 정취와 어우러지는 지점.
숲과 바다 사이, 12월과 1월 사이 그 어디쯤인가 아쉬
움 너머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55
서천문화원

풀뿌리
문화의 힘

서천문화원은 1965년 
설립 후로 60년 가까이
서천의 지역문화를
보존하고 새롭게 발견하는
데 있어 중심 역할을 
해 왔다. 일몰의 명소를
간직한 아름다운 자연의
서천에 그곳의 주민과 함께
문화와 역사를 지키는
10

서천문화원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신석초 문학제
신석초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
해 열리는 신석초문학제는 매년 서천문화원이 주최
11
하고 있는 의미 있는 행사이다. 전국 시인과 시낭송가
를 대상으로 하는 신석초문학상, 신석초 시낭송대회
와 관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리기, 붓글씨, 백
일장 대회가 함께 열린다.
한국 시문단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서천 출
신의 신석초 선생의 본명은 ‘응식’으로, 시조 명칭 창
시자로 알려진 석북 신광수 선생의 7대 후손이기도
하다. 2016년부터 열린 이 행사는 당시 신생 문학상
임에도 많은 시인들의 참여와 관심을 받으며 계속되
고 있다.

10 서천문화원 전경
11 신석초 문화제에서 진행된 '청소년 그리기, 붓글씨 대회'

56
충남문화원연합회 주관
2021 올해의 문화원상 대상
올가을 진행된 제1회 충남도민문화의 날에서 서
천문화원이 ‘올해의 문화원상 대상’에 선정되었다. 다
양한 생활문화 강좌와 특색을 살린 지역 축제를 함께
운영하며 특히, 지역의 자랑인 모시의 맥 잇기 등 다양
한 분야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보여 왔다. 모시문화제
의 태동인 저산문화제를 시작으로 읍, 면지의 발간 등
다양한 콘텐츠를 발굴하고 발전시켰다. 인구 대비 전
국에서 가장 많은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서천문화원은
그간의 활발한 활동과 운영 평가를 토대로 올해의 문
화원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12 서천의 한산모시관 전시품


13 《어르신 합동자서전》 출판 기념회
14 2014년에 출간된 《고난의 길, 보람의 길》

12

13  난의 길, 보람의 길 

《어르신 합동자서전》
14

지역 어르신들의 생생한 삶이 그대로 담겨 있는


특별한 자서전. 서천문화원이 각 읍·면의 추천을 받은
어르신들과 작가들을 연계해 집필을 지원하고 있는
어르신 합동자서전 사업이다. 서천에서 울고 웃고 사
랑했던 어르신들의 지난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내는
의미 있는 작업은 2014년 ‘고난의 길, 보람의 길’이라
는 타이틀로 시작되었다.
자서전의 주인공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커다란 선물
이 되고, 지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박하고 진솔
한 이야기는 잔잔한 감동을 전한다.

글. 김소연 편집팀 ― 사진. 김현민(사진 1~5, 10, 12, 14),


서천문화원 제공(사진 6~9, 11, 13)

57
지역
문화
확대경

온 마을을 축제로 만드는

용인의 거북놀이
음력 8월 한가위 보름달이 떠오르면 거북놀이 일행은 동네 입구에 거북을
모셔 놓은 단을 에워싸고 치성을 드린 다음, 거북 탈을 쓰고 길놀이할 채비를
한다. 길놀이를 하면서 마을의 우물 앞에 도착하면 질라쟁이의 신호에 맞춰
길놀이를 멈추고 우물 고사를 드린다. 예부터 장수의 상징인 거북과 함께
무병장수와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가 시작된다.

장수의 아이콘 거북과 함께, 거북놀이 에 용인을 대표하는 놀이로 소개된 것으로 보아 조선
거북놀이는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추석날 시대에는 널리 행해진 민속놀이로 추정된다. 하지만
저녁에 하는 민속놀이로, 거북 모양을 만들어 집집마 명확한 기록이 없어서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고
다 다니면서 무병장수와 안녕을 빌어 주고 음식을 대 증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농사를 짓는 데 필수적인
접받던 놀이다. 거북이 다녀간 집은 복이 온다고 하여 비를 상징하는 거북을 통해 수확에 감사하고 다음 해
누구나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꽤 오래전부터 만들어
거북은 장생불사를 표상한 십장생 중 하나로, 바다 동 진 놀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물 가운데 가장 오래 살고, 병이 없는 동물로 알려져 있
다. 거북놀이는 장수長壽의 아이콘인 거북처럼 마을 사 질라쟁이와 한바탕 춤판을 벌이자!
람들의 무병장수를 빌며 각 집과 마을의 풍년을 기원하 거북놀이는 경기도 평택·용인·이천·여주와 충청
고, 마을의 잡귀를 쫓기 위해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도의 예산·천안·음성 등 한강 남쪽 내륙 지방에서 행
이러한 거북놀이가 언제부터 연희가 되었는지는 알 해지는 놀이로 알려져 있다.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조선의 향토오락》1) 거북놀이는 질라쟁이마부, 거북, 잽이, 광대와 관객구
경꾼으로 구성된다. 거북놀이를 행하기 약 일주일 전
부터 마당이 넓은 집 사랑방에 모여 수숫잎을 따다 엮
1) 일제는 식민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민속 조사를
실시하고 우리의 민속신앙을 미신으로 몰아세웠다. 이러한 어서 거북 탈과 질라쟁이가 입을 옷을 준비한다. 질라
목적하에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조선의 민간신앙 연구에 종사한
쟁이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수숫잎을 엮어서 뒤집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에 의해 정리된 조선의 향토 오락 조사
자료. 1936년 발간 어쓰고 수수비를 들고서는 거북을 몰고 다닌다. 거북

58
1 동천동 은행나무 민속놀이 한마당에서 거북놀이를 1
재현하는 전통연희원

의 몸통은 수숫잎을 마대에 꽂아서 만들며 짚으로 용 음력 8월 한가위 보름달이 떠오르면 거북놀이 일행은
마름을 틀어 등의 무늬를 만들고, 수숫대를 묶어 만든 동네 입구에 거북을 모셔 놓은 단을 에워싸고 치성을
배에 꼬리를 단다. 그 안에 3~4명이 들어가게 되는데, 드린 다음, 거북 탈을 쓰고 길놀이할 채비를 한다. 길
앞에 있는 사람은 머리 역할을 맡고 중간에 있는 사람 놀이를 하면서 마을의 우물 앞에 도착하면 질라쟁이
은 몸의 움직임을 표현하며, 맨 뒤에 사람이 꼬리를 맡 의 신호에 맞춰 길놀이를 멈추고 우물 고사를 드린다.
는다. 잽이는 상쇠, 부쇠, 징, 북, 장고 등 8명의 잽이로 “7년 가뭄에도 맑은 물이 철철 흐르고 9년 장마 홍수
이루어지며 광대와 관객들인 구경꾼도 필요하다. 2) 에도 깨끗한 물 나게 하사, 이 물을 먹는 만인간 수명
장수 발원이요.”라는 고사담이 끝나면 가락에 맞추어
세 번 절한 다음, 마을 입구에서 가까운 순서로 정해
2) 하주성.1987년. 《내고장 민속》 19~20쪽. 진 집을 향해 떠난다. 정해진 집 대문 앞에 도착한 일

59
행은 “주인, 주인, 문 여시오! 수명장수 들어갑니다.”
하고 장단에 맞추어 문 안으로 들어가면 집주인이 나
와 일행을 맞이한다. “여보시오, 주인. 이 거북이 압록
강을 건너 여기 용인 땅까지 와서 용궁으로 가는 중에
들피져서 쓰러졌으니 먹을 것을 좀 주시오!” 머리끝
부터 발끝까지 수숫잎을 뒤집어쓴 질라쟁이가 수수
비를 들고 큰소리로 이렇게 외치면 집주인은 술과 음
식을 내놓아 대접한다. 질라쟁이가 거북에게 술을 한
잔 부어주며 “거북아, 이제 먹을 것이 나왔으니 한바
탕 놀고 가자!”라고 소리치면 쓰러져 있던 거북이 일
어나 부엌으로 들어간다. 거북이 “누르세. 누르세. 조
왕지신을 누르세.”라고 외치면 일행이 전부 따라 들어
와 부엌 바닥을 꼭꼭 밟은 다음 뒷마당의 터줏가리로
간다. 일행은 터줏가리를 맴돌며 “누르세. 누르세. 터
주지신을 누르세.”를 외치며 땅을 꼭꼭 밟는데, 이러
한 이유는 집안의 모든 잡귀를 밟아서 나오지 못하도
록 하고 초복을 위한 방법으로 풀이된다. 개인 우물이
있는 집은 우물에 가서 “뚫어라. 뚫어라. 샘구멍 뚫어
라.”를 외치며 생명의 근원이고, 일상생활의 근간인
물이 마르지 않기를 빌었다. 다시 마당으로 나온 일행
은 대청의 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절한 후, 고사
창을 부르면서 한바탕 춤판을 벌인다. 신명이 난 구성
원들에 의해 대청마루가 부서진 때도 있었다고 한다.
춤판이 끝나면 질라쟁이는 집주인에게 덕담과 함께
무병장수를 빌어 주고, 다음 집으로 이동한다. 한 집
2

3 4
2 
용인민속예술제에 참가한
용인전통연희원의 거북놀이
3, 4 거북 탈을 직접제작하는 모습
5 
동천동 은행나무 민속놀이
한마당에서 거북놀이를 재현하는
전통연희원

60
에서 20~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는데, 30~40여 호
의 집을 방문하다 보면 거북놀이는 밤이 늦도록 끝나
지 않았다.

체험과 참여로 탈바꿈 중인 거북놀이


거북놀이가 추석에 행해졌다는 점은 줄다리기
같은 승패 놀이보다는 지신밟기처럼 집집마다 다니
며 축원을 해주는 연희적 속성이 강한 놀이임을 알게
한다. 이 민속놀이는 주로 아이나 청소년들이 주체가
되어 음식을 대접받고 덕담과 복을 빌어 주는 작은 마
을 축제였다.
거북놀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져 갔다. 현재
는 경기도 이천이나 여주, 충남 천안과 당진, 충북 음
성 등에서 거북놀이를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어
지고 있으며, 규모가 갖춰진 오늘날과 같은 어른들의
놀이로 변화하는 과정을 겪었다. 거북놀이의 주도층
이 어린이들로부터 어른들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판
굿과 농악이 개입되었는데, 이런 변화 과정은 민속경
연대회나 민속예술축제 등에 출품하려는 시도와 밀
접한 관계가 있다. 어린이가 주동이 된 거북놀이의 경
우에는 놀이의 형식이 없었지만, 이들과 결합하면서
제의와 판굿의 연희 방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현재의
거북놀이는 대개 이런 틀로 고정화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 특히 연희의 변화 양상이 지역 민속문화의 특징
을 알릴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 참여 방식으로 탈바꿈
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단순히 연희되는 것뿐만
아니라 거북이 만들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
여 활용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고 있는데, 전통 민속놀
이의 계승·발전에 유의미한 면이라고 하겠다.
20~30년 전만 해도 용인 곳곳에서 펼쳐졌을 민속놀
5
이가 급격한 산업 발전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현재
용인시 민속놀이보전회와 용인전통연희원이 뜻을 모
아 사라진 용인 지역의 민속놀이를 찾아 고증을 통해
재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용인의 거북놀이도 이러
한 고증을 통해 동천동이나 동백동의 마을 축제에서
선보이고 있다.

글. 김정희 용인문화원 부설 용인학연구소 연구위원 ―


사진. 용인전통연희원

61
맛있는
한국

62
마음까지 덥혀 주는

따끈한 국물 요리

더운 국에 국수사리 풀어지듯 심신이 지칠 때 난방 문화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따뜻한 국물은 마음까지 풀어 준다. 우리가 국물 요리
흔히 ‘탕’이라고 하는 단어는 국의 높임말이다. 국이란 고기나 해물, 채소 등을 물에 넣어 끓여
국은 ‘갱羹’,‘갱탕’,‘메탕’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간을 맞춰 먹는 액상 요리의 총칭이다. 한국은 구들이
국보다 건더기가 많고 국물이 진하면 찌개라고 라는 난방 문화가 발달했었고, 아궁이가 있었기에 때
한다. 찌개보다 건더기가 더 많고 국물이 적으면 문에 수많은 국물 요리가 만들어졌다. 또한 전분이 많
전골이라 한다. 우리 식문화는 국물을 먹기 은 자포니카 쌀을 먹는 우리는 국물 없이 밥을 삼키기
위해 숟가락이 발달했다. 조개껍데기를 이용한 어려운 것도 국의 발달 요인일 수 있다. 한반도 역사
것이 숟가락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서 상 식사량을 불리고자 국을 끓였을 수도 있다. 실제로
전해진 숟가락은 우리나라에서 발달을 거듭했다. 식재료를 구하기 힘든 지역일수록 국물 요리가 발달
사계가 뚜렷하던 시절에는 계절국도 있었을 만큼 해 왔다. 주재료에 물 붓고 소금으로 간만 맞춰도 국
우리 음식에는 다양한 국이 있었다. 옛 속담에 이 된다.
“가을 아욱국은 계집 내어 쫓고 먹는다.” 했으니 사계가 뚜렷하던 시절의 봄국은 토장 국물에 지천에
아욱토장국이 얼마나 맛이 있었으면 사람을 피어나는 봄나물을 뜯어 끓였다. 전라도에서는 홍어
내쫓고 먹고, 가을 전어는 집 나갔던 며느리를 애탕에 보리순을 넣고 통영에서는 쑥을 넣어 끓였다.
돌아오게 했을까 싶다. 북어 대가리, 멸치, 보리멸, 새우, 닭, 소고기, 생선, 표
고, 다시마 등으로 육수를 내고 쑥, 보리순, 톳, 유채
잎, 봄동, 고사리, 물쑥 등을 넣어 끓인 봄국은 향기를
1 여름 복달임국, 민어탕
2 박과의 동아를 저며 끓인 동아송이탕 머금은 에너지 자체라 할 만하다.

63
3 사계절 푸짐한 건강식, 감자탕 34
4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먹는 설렁탕

여름에는 오이, 콩나물, 미역냉국도 좋지만 오히려 따 두를 불려 죽을 쑤어도 좋다. 또 삼복에는 오리나 흑
뜻한 국물로 보양식을 먹었다. 삼복절 식국에는 육개 염소를 끓인 탕도 좋다. 흑염소는 기름기가 적어 성인
장, 임자수탕荏子水湯, 개장국, 삼계탕, 민어탕 등이 땀 병이 우려되는 현대인에게 적합하다.
흘리고 지친 몸에 좋았다. 특히 민어탕은 여름 복달임 가을에는 아욱국 외에도 가을걷이한 들깨를 갈아 넣
음식이었다. 모시조개로 육수를 내고 배추와 호박, 대 고 끓인 들깨미역국이나 들깨, 버섯, 소고기 등을 넣
파, 애호박, 무, 표고버섯, 쑥갓, 고추를 넣어 끓였다. 어 끓인 들깨탕도 별미다. 겨울이면 동태탕 생각이 난
삼계탕은 닭뼈로 육수 내고 닭가슴살을 말아 꼬치로 다. 원반에 둘러앉아 가족들과 먹는 동태탕은 생선과
꽂아 끓이면서 6년근 수삼, 생땅콩, 햇밤, 대추, 은행 채소를 함께 먹기에 좋은 국물 메뉴이고 추억의 음식
을 넣어 만들었다. 서양인들도 치킨수프를 솔푸드soul 이다. 지금은 우리나라 명태가 씨가 말랐고 거의 러시
food로 여기며 감기 걸렸을 때 먹는데 닭육수를 끓여 아산産이기 때문이다.
얼려 두었다가 닭가슴살로 계삼탕을 끓이고, 찹쌀·녹

64
겨울철 보양식, 

우리의 탕요리
그 외 많은 사랑을 받은
동아송이탕과 설렁탕, 감자탕까지
동아송이탕은 지금은 잊힌 박과의 동아를 저며
서 박국 끓이듯 만든 음식이다. 조상들은 박이 나는
철에 송이 난다고 두 재료를 넣어 탕을 끓였다. 동아
는 박이나 무 대신 탕의 부재료로도 좋다. 중국인들의
재래시장에 가면 동아를 잘라서 판다. 그들은 동아를
탕, 볶음 등에 쓴다. 《음식디미방》에는 동아로 만두피
대신 빚은 동아만두가 있다. 또한 정과 재료 중 첫눈
을 밟는 듯 아삭한 식감의 동아정과는 가히 아름다운
맛이다.
설렁탕은 대중적이면서도 이름 자체가 유명한 탕이
다. 설렁설렁 끓여 고기가 설렁설렁 떠 있다고 설렁탕
이라는 유래와 선농단설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요구
되는 설렁탕을 백성에게 먹이고자 선농단에서 바로
끓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몽고의 슐루라는 고기 가득
넣어 끓이는 국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서민적인 감자탕은 뼈해장국에 통감자를 넣어 감자
탕이라 한다. 값싼 돼지등뼈와 우거지, 감자를 넣고
끓이는 감자탕은 값싸고 푸짐한 건강식이다.

궁중에서 먹었던 탕
조선 시대 대궐의 탕에는 ‘금중탕’이 있는데 닭,
쇠고기, 해삼, 전복, 양 등을 넣어 진하게 끓인 보양탕
이다. 궁중에서는 국을 ‘탕’이라 하였고, 신선로는 ‘열
구자탕’이라 하였다. ‘곽탕’이라 했던 미역국은 곰탕
과 함께 수라상에 전골과 함께 1년 내내 올랐다. 그 외
5
6 에도 골탕, 잡탕, 양탕, 초계탕 등이 궁중 수라상에 올
7
랐던 국이다. 우리 민족은 산과 들, 바다에서 캔 온갖
것들로 국물을 만들었다. 탕 문화는 우리 식탁에서 쉽
사리 사라질 수 없는 따뜻함과 시원함을 품고 있다.
5 모둠조개탕은 갖은 조개를 넣어 육수가 따로
필요 없는 국물로 감자수제비를 넣어 끓였다.
수제비조개탕은 한 끼 식사로도 좋다.
6 콩탕은 콩물 또는 콩가루를 찬물에 풀어 끓이다가
순두부처럼 콩물이 엉기면 채소를 넣어 끓인다.
7 장어탕은 민물장어, 바닷장어를 쓸 수 있고
우거지를 넣어 끓여 부추를 잔뜩 올려 먹어도
좋다. 글과 사진. 이성희 반가요리전문가

65
문화
끼리

협동과
조화의 산물 동서양의
1

66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악기는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타악기가 뭔가 원초적인
느낌을 강하게 주는 데 반해, 현악기는 
좀 더 문명의 산물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악기이건 간에 현악기는
조율이라는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2

문화 발전과 긴밀하게 연결된 현악기 다. 당연히 사람들은 음향의 세기에 주목했다. 왜냐하
현악기는 현을 팽팽히 조여주거나 조금 느슨하 면 교회의 예배당이나 귀족의 거실을 벗어나 더 넓은
게 만들어 줌으로써 음의 공명과 피치가 달라지는 결 공간에서 음악이 연주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
과를 만든다. 만돌린, 기타,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현악기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모두에게 증명했다. 그
하프, 시타르, 비파, 거문고, 가야금, 아쟁, 대금 등 동 것은 바로 사운드의 크기이다. 국가적 행사로서 음악
양과 서양의 현악기는 이 조율의 단계 없이는 존재할 이 발전한 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공통이라고도 할
수가 없다. 바로 이러한 점으로 인해 현악기는 문화 수 있는데 음향의 크기를 세세하게 다룰 수 있고, 또
의 발전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 요컨대 타악기는 원시 한 다양한 악기의 조합을 통해 사운드를 발전시킬 수
적인 문명에서도 나타날 수 있지만, 구조적으로 복잡 있는 특성 때문에 현악기는 더욱 각광받았다.
한 현악기는 문명이 어느 정도 고양된 다음에나 가능
하다. 그리고 대표적인 서양 현악기인 바이올린이나 “아니, 양의 창자가 사람을 
비올라 또는 첼로 같은 경우에도 오케스트라처럼 여 홀리게 하다니?”(셰익스피어, 〈헛소동〉)
럿이서 함께 연주함으로써 협동 정신을 기를 수 있다. 서양음악은 19세기에 들어와 공공의 영역으로
음악은 동양과 서양 모두 종교에서 시작되었다. 음악 들어가서 발전하게 된다. 이른바 대중 앞에서 열리는
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단시간에 움직이게 하는 매체 콘서트 형식의 음악회가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기 시
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의 경우 중세를 지나 바로크 작했고, 서양음악은 종교의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었
시대까지도 교회 안에 머물러 있었다. 베토벤 시대에 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는 이러한 시장의 변화를 이
들어와서야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 끌어낸 악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보통 악기의 여

1 명주실을 꼬아 만든 여섯 개의 줄을 ‘술대’로 치거나


뜯어 연주하는 거문고
2 서양의 대표적인 현악기인 바이올린
현악기
67
3 4

왕이라는 말로 바이올린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악기 시대의 바람이었던 것이다.


는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탄생했고, 바로크 시대 바이올린의 몸통은 가문비나무나 단풍나무로 만들었
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악기로 떠올랐다. 바이올린은 고, 활대와 활털은 브라질에서 수입한 페르남부쿠 나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에서 탄생했는 무와 말의 꼬리털로 만들었다. 바이올린의 현은 서두
데, 탄현악기인 기타에 비해 활로 현을 비벼서 소리 에 인용했듯이 양의 창자를 말린 다음, 여러 가닥을
를 만들어 낸다. 이른바 칠현악기에 속한다. 바이올린 꼬아서 만들었다. 물론 지금은 이런 식으로 현을 만들
이 나오기 전의 현악기는 사운드가 멀리 퍼져 나가지 지 않고 주로 금속으로 된 현을 사용하고 있다. 바이
못했는데, 바이올린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바야 올린을 연주할 때는 악기의 몸통 끝부분을 왼쪽 턱 밑
흐로 바이올린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현악기가 된 것 에 고정하고 왼쪽 팔을 들어 악기의 얇은 목 부분을 잡
이다. 새로운 시대의 청중은 새로운 음악을 했고 바로 는다. 오른손으로는 활을 잡아서 악기 위의 4현을 빠
이 작지만 알차고 소리가 쭉 뻗어나가는 바이올린이 르게 운궁하면서 음향을 발생시킨다. 비올라도 마찬
많은 이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몬테베르디 같은 작곡 가지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바이올린보다 악기가 살짝
가가 그의 작품을 연주할 때 이 신묘한 악기를 사용하 크고 살짝 낮은 음역을 담당할 뿐이다. 여기에 첼로의
도록 요구한 것은 단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경우도 상당히 비슷한데 이 악기는 모두가 알고 있다

68
3 얀 리번스, ‘바이올린 연주자’(1625)
4 선비가 비파를 연주하는 장면을 그린 김홍도의 ‘포의풍류도’
5 가야금 연주가 윤혜진의 연주 모습

시피 바이올린처럼 어깨 위에 올려놓고 연주할 수가


없다. 무릎 사이에 악기를 놓고 연주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악기의 크기 자체가 크다.
우리가 보통 바이올린 두 대와 비올라 한 대 그리고 첼
로 한 대로 구성된 음악을 현악 사중주라고 한다. 이
중 제1바이올리니스트가 음악의 템포와 리듬 그리고
강세 등을 결정하고 이끌어 가는데, 한국의 사물놀이
도 원리는 비슷하다. 제1바이올리니스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상쇠이고, 제2바이올리니스트 역할을 하는
것이 부쇠이다. 사물놀이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비
로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김덕수를 비롯
한 최초의 사물놀이 멤버들은 서양의 현악 사중주단
을 참고했다. 사물놀이는 장르나 음악의 형태가 아니 5

라 사물놀이라는 팀의 이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받은
현악기는 ‘비파’
우리나라에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야금이나 은 현악기도 드물 것이다. 가야금이나 거문고 정도만
거문고를 비롯한 여러 현악기가 있다. 그리고 모든 것 이 비파의 인기를 위협할 정도이며, 다른 현악기들은
이 그러하듯이 악기도 유행을 타면서 주목을 받거나 비교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비파의 인기에 가려져 있
사라지기도 한다. 사실 문화처럼 유행에 민감한 것도 다. 18세기 말, 50대의 김홍도가 그린 <포의풍류도布
없다. 비파의 경우 지금은 한국에서 아무도 이 악기를 衣風流圖>에도 선비가 비파를 연주하는 장면이 눈에 띈

연주하지 않지만,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지속 다. 사대부 가문의 지체 있는 선비조차 비파를 일상적


적으로 사랑받은 현악기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金 으로 가까이 둔 채 연주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으
富軾은 “본래 북쪽 오랑캐들이 말 위에서 연주하던 현 로 인식되어 있다는 점은 우리 시대의 관객에게는 좀
악기인데, 손을 밖으로 밀어서 소리 내는 것을 비琵라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현재 삼
고 했고, 안으로 끌어들여서 소리 내는 것을 파琶라고 성 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했다.”라고 설명하는데 《고려사》에도 이 악기가 등장
하며 조선 시대에 출판된 《악학궤범》에서도 비파를
글. 김효진 마르코폴로출판사 대표 ― 사진. 문화재청
찾아볼 수 있다.
국가유산포털(사진 1), 셔터스톡(사진 2), 필자 제공(사진 3),
그만큼 천 년 이상 동안 비파만큼 한반도에서 사랑받 공유마당(사진 4), 이수원 사진작가(사진 5)

69
문화,
지금

21세기

상형문자,
70
구글에 따르면 전 세계 인터넷 사용 인구의
90%가 이모지를 사용한다. 하트, 웃는 얼굴부터

이모지
동물, 음식, 건물뿐만 아니라 마법사, 좀비,
인어까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대부분의
개념이 이모지로 존재한다. 현재 공식적으로
등록된 이모지는 3,633개에 달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이모지가 제작되고 있다.

텍스트, 그 이상을 담기 위해
다양한 디지털 기기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소통
할 수 있는 방법은 텍스트다. 디지털 텍스트에서 표정
을 드러내기 위한 시도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네^0^,
네:-), 네 ㅠㅠ 처럼 같은 말이어도 붙이는 이모티콘
에 따라 모두 다른 대답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
가 실제로 대화하는 것과 같은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
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인간은 복합적인 감정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경제적으로 표현하기 위
해 ‘이모지’라는 형태에 도달하게 되었다.
만국 공통어인 ‘이모지’는 현존하는 언어 중 가장 빠
르게 성장하는 언어다. 손을 모은 이모지를 붙여서 위
트와 약간의 정성을 표현하기도 하고, 체크나 손가락
이모지 등을 구분자로 사용하기도 하며, 단지 이목을
끌기 위해 마케팅 메시지에 이모지를 덕지덕지 붙이
기도 한다.

:-)
이모지의 경제성
동굴벽화나 쐐기문자, 중국 문자 등 실제 사물을
본뜬 그림문자, 상형문자는 인류 최초의 문자였다. 새
로운 개념을 매번 그림으로 표현해야 하다 보니 경제
적이지 않았고, 추상적 개념을 표현하기 어렵다 보니
점차 표음문자로 변화했다. 하지만 인간은 기술의 발
전으로 다시 문자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시대로 돌아

71
인간은 기술의 발전으로 다시 문자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이모지는 Emotion과는 전혀 상관없고, 
그림을 뜻하는 회絵와 문자文字의 합성어인데, 이름 뜻 그대로 ‘상형문자’다.

가고 있다. 이모지는 Emotion과는 전혀 상관없고, 그 위해 젠더 뉴트럴Gender Neutral 이모지를 제안했고, 우


림을 뜻하는 회絵와 문자文字의 합성어인데, 이름 뜻 리는 현재 같은 이모지여도 세 가지 버전의 이모지를
그대로 ‘상형문자’다. 최초의 문자와 현대의 문자가 볼 수 있게 되었다.
만나는 이 순간이 참 역설적이다. 2012년엔 이성애 커플 외에 동성애 커플 이모지가 등
2015년 옥스포드 영어사전에서 선정한 올해의 단어 장했고, 2015년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표현하기
는 글자가 아니라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의 위해 다섯 가지 피부색이 추가되었다. 올해 트위터는
미하는 이모지였고, 글로벌 랭귀지 모니터에 따르면 장애인을 위한 이모지를 제작하기에 앞서 사용자의
2014년 가장 인기 있는 단어는 글자가 아니라 하트 이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성과 장애, 인종을 평등하게
모지였다. 이제 텍스트 기반 문화에서 가장 많이 사용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이모지가 생겨나고,
되는 것은 글자가 아니라 이모지다.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모지는 문화를 반영하는 문자이기도 하지만, 역으
문화를 반영하는 이모지 로 인류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알 수 있는 지표가 되기
2016년만 해도 여자 경찰, 남자 신부, 머리 다듬 도 한다. 코로나로 인해 바이러스, 주사기 이모지가
는 남자, 여자 탐정, 여자 노동자가 없었다. 이모지 또 급격하게 많이 사용되었다. 2022년에는 K-팝의 영향
한 성 편향적으로 제작돼 온 것이다. 구글은 성평등을 으로 한국의 손가락 하트가 새로운 이모지로 추가된
위해 유니코드 이모지 위원회에 새로운 이모지 세트 다고 한다. 이처럼 자주 사용되는 이모지와 새로 추가
를 제안했고 여성, 남성 둘 다 존재하는 직업 이모지 되는 이모지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지금
를 발표했다. 이후 2019년엔 애플이 성소수자 인권을 무엇이 화두인지 알 수 있다.

이모지의 시작
이모지의 근원은 이모티콘이다. 이모티콘은 활
자 조합으로 형태를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며, 이미지
자체가 문자로 취급되는 이모지와는 다르다. 세상이
디지털화될 무렵인 1970년대, 이메일이라는 것이 등
장했고, 화면의 글자로 어조와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1980년대엔 컴퓨터 사용자들이 기존 문
자에서 얼굴을 만들기 위해 이모티콘을 작성하기 시
2 작했는데, 1982년 카네기멜런 대학교의 전산학자인

72
2 2015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선정한
스콧 펠만이 최초로 이모티콘을 제안한 사람으로 알
올해의 단어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의미하는 이모지 려져 있다. 그때 그가 문장 끝에 붙인 것이 웃는 얼굴
3 최초로 이모티콘을 제안한 스콧 펠만
:-) 이었다.
4 다양한 문화를 반영하는 이모지의 진화

언어로서의 이모지
이모지도 언어다 보니 사용자들이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무궁무진하게 이모지를 활용하는데, 이모
지끼리 조합해 소설을 만든다거나, 이모지들로 그림
을 그리기도 하고 이모지를 합성해 새로운 개념을 창

3
조하기도 한다. 지구상에 이렇게 함께 만들어 나가는
4
언어는 이모지가 유일할 것이다. 언어이기 때문에 디
자인보다 중요한 것이 보편성이다. 많은 사람이 새 이
모지를 보고 ‘새’라고 인지하려면 다른 기업들의 새는
어떻게 생겼는지,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새를 어떤 형
태로 떠올리는지, 그것이 :bird:라는 이모지 명칭과
맞는 것인지 등 기호학적으로도 접근할 수 있어야 한
다. 이모지 제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말끝에 ㅋㅋㅋㅋ, ㅎㅎㅎㅎ가 없으면 왠지 심심


한 메시지, 이모지를 달지 않으면 왠지 삭막해 보이는
문자, 의성어 의태어가 범람하거나 띄어쓰기와 어법
이 맞지 않아도 소통되는 구조 등 오늘날의 텍스트 소
통은 글쓰기보다는 일반적인 대화에 가깝다. 온라인
으로 소통하는 상황이 폭발적으로 많아진 지금, 사회
에서 이모지는 인간의 미묘한 억양과 감정을 담아 내
고, 표현을 강화하는 수단이 된다. 디지털 환경에서
소통해도 우리가 휴머니즘과 위트를 가질 수 있는 이
유이기도 하다. 이모지는 인간의 인지와 행동을 바꾼
강력한 매체이며, 인간이 소통하는 방식 자체를 바꾼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글. 김지윤 브랜드 디자이너 ― 사진제공. 셔터스톡(사진 1, 2),


김지윤(사진 3, 4)

73
문화
에세이

인장과 한국문인인장박물관은

함께 2000년에 개관한 국내 유일의


도장 테마 박물관이다.
문인들이 자신의 책을 발행한
뒤, 그 책 뒤에 낙관처럼
사용했던 인장들을 모아 전시한
이색 전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살아온
나날
1

74
특화된 작은 박물관, 인장의 소재들
한국문인인장박물관 고려 시대 고급 인장들은 주로 청동으로 제작되
소년 시절, 나는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소설가 었다. 간혹 도자인도 있기는 하나 그리 흔하지는 않
오영수의 제자가 되었다. 그때 스승님께 흥선대원군 다. 도자인은 청자인으로서, 귀족이나 호족들이 제작
의 인장을 물려받은 것을 인연으로 지금까지 인장을 해 사용했다. 도자인은 글자, 즉 자형이 목조각처럼
수집하였고 박물관을 짓기에 이르렀다. ‘악어새’를 집 살아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필하는 등 작가였던 까닭에 문인들로부터 인장을 얻 조선 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떡살을 백자로 구워 사
기가 수월했다. 지금도 애지중지 여기는 흥선대원군 용하였다. 민속박물관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다. 이 또
이하응의 인장부터 한국 근현대 문학사를 대표하는 한 문양이나 대소 자형이 예술적으로 되살아나지 못
문인들인 박목월, 조지훈, 염상섭, 현진건, 김유정, 이 하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연적 옆이나 밑변에 낙관을
상, 서정주, 김동리, 박두진 등의 도장 등 그 수가 이미 새겨 찍었던 모습들은 인장 박물관에 전시, 보존되어
1,000여 과를 넘었다. 있다.
이렇게 모은 인장 대부분은 ‘거저 얻은 것’이라 할 수 고려 이전에도 인장이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단군 신
있다. 덴마크 국왕실의 문장은 구구절절 편지를 써서 화에도 천부인이 거론되었고 성경에도 인장을 찍었
보내 얻었다. 그러한 이유로 박물관의 입장료를 받지 다는 내용이 있고 반지인까지 등장하며 인장의 기원
않는다. 문인들이 오면 그 문인들의 인장 또는 물품을 을 밝혀 준다.
입장료 대신 받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름이 새겨진 인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출생신고를 해야 한다.
장뿐만 아니라 문인들의 얼굴이 새겨진 인장, 문학·문 그러려면 신고서에 신고인의 인장을 찍어야 한다. 초
인들과 관련된 소품, 조각품 등도 전시하고 문학인 축 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어도 지원자의 인장, 보호자의
제, 각종 체험 활동, 문학 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인장이 필수였다. 그리고 학생이 입학하면 우편저축
통장을 개설했다. 그러려면 면 소재지 옆 대서소에 위
치한 도장방을 찾게 되는 고졸한 모습이 옛 풍경이었
다. 이뿐만이 아니다. 중학교 진학, 고등학교 진학, 고
등학교에서 대학으로 가려면 원서를 제출하게 되어
1 한국문인인장박물관 있어 반드시 막도장이라도 있어야 했던 지난날이 있
인장
2 한국문인인장박물관
었다.
전경 필자의 집에도 뒤주 위 도장 보관통에 몇 개의 막도
장이 옛 사연을 머금고 누워 있다. 막도장은 주로 나
무가 소재이다.
인장 소재로는 모과나무, 목백일홍이 단단하여 자획
이 떨어져 나가지 않아 나무가 이용된다. 그다음으로
는 인조목으로 불리는 플라스틱이 뒤를 이었고 귀족
이나 호족들은 물소 뿔이나 코끼리 상아를 구해 인장
2 을 새겼다. 무소의 뿔은 단단한 강질로 자획이 마모되

75
3 수입된 상아 인장을 소재로 선택했다.
4
우리나라 왕조사에 독자적인 옥새를 사용한 임금이
세 분 있다. 고려 시대 광종과 조선 시대 고종, 순종께
서는 독자적인 국새를 제작하여 사용했다. 이는 대단
한 용단이었고 자주적인 행보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의 영향을 벗어나고자 하는 결단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사후이지만 오늘날 세 분의 왕을 우리는 감사
하며 기억해둘 만하다.

소설가들의 인장
우리 소설가의 인장 가운데 한용환 선생의 인장
이 사이즈 기준으로 보면 가장 크다. 어린아이 주먹만
하다. 중국의 황석으로 누군가 여행 중에 맞춤으로 선
물한 마스코트용을 필자에게 건네주었다. 원로 여류
소설가 송원희 선생님의 낙관은 화가 오수환 교수의
부친이신 서예가께서 각을 하셨다. 서체도 작가의 독
특한 스타일의 방법으로 다른 사람이 모방을 할 수 없
는 높은 수준의 작품이다. 정연희 소설가의 장서인은
회양목 고목의 뿌리를 예술적으로 살려서 달필과 필
법이 조화를 이룬 명작으로, 대번에 정연희 선생의 고
상한 아취를 느낄 수 있다. 또한 김주영 선생의 것도
중국의 이름 높은 공훈예술가의 작품이라고 생색내
면서 건네준 인장이다.
소설가 박광서 선생의 낙관은 옥돌도 출중하지만 전
서에 일가를 이룬 익숙한 솜씨로 품격이 높다. 소설가
이문구 선생의 음각 낙관은 글씨가 깊이 새겨져 음이
강해 양과 함께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 인장인
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상아보다도 값이 저 데, 한 벌을 기증해야 하는 아쉬움이 앞선 인장이다.
렴하다. 반면에 상아는 화장실 가까운 곳에 보관하면 손영목 선생의 인장은 상아 소재인데, 서툰 것 같으면
갈라지고 튀는 단점이 있다. 그러니 인장 소재를 잘 서도 익숙한 칼솜씨에서 그윽한 맛이 느껴진다. 그러
선택해야 할 것이다. 쇠붙이나 돌의 재료는 흔하다. 나 상아 인장은 화장실 가까운 곳에 두면 암모니아의
돌 가운데에서는 황옥, 청옥, 흑옥이 있는데 옥은 단 영향으로 인장 몸피가 갈라지는 것이 상아의 취약점
단하여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다. 서민이 부담하기에 이다. 김태호 작가의 인장 경우 한 번에 흘려 파지 않
는 짐일 수가 있다. 그러나 근세 조선 시대 귀족들은 고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한 칼맛이 이채롭다. 가는 선

76
3 4 한국문인인장박물관 전시실 내부
5 송원희, 정연희, 김주영, 박광서, 최창학,
박양호, 이동하, 이동희 순서로,
작가들의 인장

이 날렵하여 기계가 아님을 강조한 솜씨이다. 작가의 인장처럼 자유로운 비상을 꿈꾸고 미지의 세
최창학 소설가의 인장은 종로의 명인이 새긴 음양오 계를 꿈꾸는 형상이 보기에도 좋을 듯하다. 보기 좋은
행을 반영하였는데, 선과 각을 지나치게 흘린 까닭에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처럼 말이다.
인기의 편중으로 아쉬운 인장이다. 오찬식 작가의 경 이러한 도장들은 인감이라기보다는 책이 출판되면
우는 예총을 드나들던 서각가의 솜씨인데, 단순한 예 판권에 찍어 붙이는 실용적으로 쓰인 도장들의 집합
서로 마지못해 새긴 억지 춘향의 몸짓이 아쉽다고나 체라 할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하나하나가 문화유
할까. 박양호 소설가의 인장은 한글 이름을 새긴 것이 산이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지는 것이 많듯이 도
다. 한글 도장의 경우, 전서체는 어울리지 않는다. 우 장들도 사라져 가고 있지만, 자신을 인증하고 대신하
리글로 낙관을 새기는 경우에는 훈민정음체라면 이 는 신표인 도장의 의미를 다시 새겨 보았으면 한다.
는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새긴 이가 느끼지 못해
아쉽다. 이동하 선생의 인장은 전형적인 전통 서각가
의 솜씨인데, 글씨가 경직되어 점잖기는 하지만 낭만
적인 데가 부족하다고나 할까? 유재용 선생의 인장은
글씨가 너무나 호방하고 칼이 자유롭게 움직여서 입
체적인 느낌이지만 적절한 공간 배열이 아쉽다. 이동
희 선생의 인장도 이와 유사하다. 소설가들은 윤후명 글과 사진. 이재인 한국문인인장박물관장

77
해외
문화
연수기

역사와 예술 그리고 정열의 나라, 스페인


-「해외문화기반시설 현장연수」를 다녀와서-

지난 11월 3일부터 11월 12일까지 7박 10일간 진행된 15명 쉬면서 비행을 할 수 있었다.
의 문화원장 스페인 해외 연수는 한마디로 감동의 연속이었다. 인천공항에서 스페인까지는 아부다비 공항을 거쳐 장장 23시간
코로나19로 해외 나들이가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스페인 연수 의 여정이었다. 마드리드는 우리나라와 8시간 정도의 시차가 있
가 계획되었을 때 과연 갈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부터 났었지만, 어서 도착했을 때 점심쯤이었으며, 우리나라와 기후도 비슷해서
출발 날짜가 다가오고 차질 없이 진행된다는 공지에 호기심 반, 약간 춥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썰렁했다.
설렘 반,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스페인’ 하면 ‘역사와 예술의 나라’, ‘정열의 나라’라는 정도만 알
고 있었는데, 이번 연수에서 느낀 것은 스페인 국민들의 순박함
여유롭게 낭만과 예술을 즐기는 스페인 과 여유만만한 자세, 서두르지 않는 모습, 길거리와 관광지의 풍
인천공항에 모였을 때 처음 느낀 것은 코로나19가 창궐하 요로운 분위기가 스페인을 녹이는 것 같았다. 또한 스페인에서
기 전 인천공항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사람이 많지 가장 눈에 띈 것은 올리브나무가 많다는 것과 거대한 성당 그리
않다는 것이었다. ‘코로나가 대단하기는 대단하구나’라는 생각이 고 투우장, 스페인의 민속무용 ‘플라멩코’ 춤이었다. 전 국토의 면
들었고, 기내에선 세 사람이 앉는 자리를 한 사람이 차지할 수 있 적이 남한 땅의 네다섯 배가 되는데, 인구는 4,000만이 안 되기 때
어 편했다. 우리나라 시각으로 자정이 넘어서는 앉아서 쪼그리고 문에 스페인 국민들이 여유롭게 낭만과 예술을 즐기는 것이 아닌
자는 사람, 세 개의 의자에 다리를 쭉 뻗고 자는 사람 등 여유롭게 가 생각이 든다.

78
현장 연수 중 든 생각 몇 가지를 정리해 본다. 우선 비행기 안 면 그 나무가 5년 동안 자라고, 그 뒤 열매를 수확한다. 우리나라
에서 승무원들이 승객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자세와 노력이 의 과일나무는 농부가 가지치기를 하고 소독도 하지만 스페인의
역력했다. 심지어는 승무원들이 비행기 안 화장실 문을 소독하 과일나무는 가지치기는커녕, 그냥 내버려 둬도 잘 자라서 올리브
면서 닦고 또 닦으면서 세심하게 코로나에 대비하는 모습이 눈에 수확량이 많고, 올리브 기름이나 올리브 제품이 많이 생산된다는
띄었다. 얘기에 놀라웠다.
스페인의 투우장을 방문했을 때는 투우사와 소가 실랑이하는 모 톨레도 대성당과 이슬람 회교사원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 규모라
습이 눈에 선하듯 운동장에 핏자국이 보였고, 이곳저곳의 광경이 는 메스키타 사원, 그라나다의 알람브라궁전, 발렌시아 대성당
어마어마하다는 말밖에는 표현이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대단함 등을 구경하면서는 성당의 규모나 궁전의 모습에서 그 어마어마
을 느낄 수가 있었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투우사와 소가 실랑이 한 건축물이 어떻게 지어졌나 하는 신기함과 기술에 놀라지 않을
를 할 때, 소 여섯 마리가 나와서 반드시 네 마리가 그날 죽어야만 수가 없었다. 특히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가족 성
소싸움 경기가 끝난다는 말을 들었는데, 역시 열정이 넘치는 스 당을 보면서는 150년 동안 지어진 성당이 아직 미완성이고, 200
페인 사람들의 승부욕을 느낄 수가 있었다. 년은 더 지나야 완공된다는 가이드의 말에 저절로 감탄의 함성이
예닐곱 시간을 버스 안에서 바깥 풍경을 구경하며 달리는 동안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우디와 구엘의 합작품으로 이루어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올리브나무뿐이었고, 수만 평 되는 빈 구엘 공원이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가족 성당을 비가 주룩주
밭은 밀을 심을 예정이라고 했다. 올리브나무는 한번 심어 놓으 룩 내리는 와중에도 한 가지라도 더 보여주려고 애쓰는 가이드와
여행사 사장님께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린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 연수를 마치며


연수 중 방문했던 스페인 한국문화원에서는 우리 일행을 위
해 이곳저곳을 설명하고 안내를 해주었고, 현대문화센터에서는
브리핑 자료를 영상물로 소개해 주었다. 특히 통역을 통해 상세
하게 알려 주고 싶어 하는 마음과 현장 체험장을 손수 안내하면
서 구석구석을 설명해 주어 감명을 받았다. 마지막 날, 귀국길에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올림픽 경기장 바로 앞 ‘몬주익공원’에 있
는 황영조 선수의 동상 또한 기억에 남는다. 1988년 서울올림픽
에 이어 개최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올
림픽 스타디움에 마라톤 1등으로 골인하면서 관중을 향해 손을
휘젓던 모습이 눈에 선해,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동상을 통해
일말의 애국심을 느끼게 한다.
비록 짧은 7박 10일의 연수였지만 보람과 감격으로 점철되었던
것은 김태웅 한국문화원연합회 회장님의 열정과 사무처 직원들
의 희생, 그리고 여행사의 세심한 배려와 10여 분 원장님들의 협
조라고 생각되어 이번 연수는 ‘대성공작’이라고 자평하고 싶다.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방문화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글
을 마친다.

글과 사진. 김장응 충청북도문화원연합회장, 증평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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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소식

2021 제19회 국민의 시낭송의 밤 청주문화원


“희망은 시처럼 온다” 《1500년 청주 역사 한 바퀴
성안길 백년손님》 발간
글 변광섭·김정애│그림 이유중│사진 구연길│발행처·문의 청주문화원

청주문화원은 2021년 청주읍성


큰잔치를 개최하며, 1500년 청주
읍성의 역사 문화와 성안길 일원
의 골목길 풍경 등을 《1500년 청
주 역사 한 바퀴 성안길 백년손
님》을 통해 다루었다. 1부는 ‘생
명의 모항 돛을 올려라’라는 주제
로 청주읍성의 탄생에서부터 크
고 작은 역사적인 사건을 글, 그
림, 사진으로 재미있게 소개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원연합회는 코로나19로 몸과 마음이 2부 ‘성안길 백년 손님’은 ‘본정통’
지친 국민에게 시詩로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전달하기 위해 ‘2021 에서 ‘성안길’로 명칭이 바뀐 것을 시작으로, 육거리시장, 한복문화
제19회 국민의 시낭송의 밤’을 개최했다. 비대면 온라인 방식으 의 거리, 가구 및 웨딩거리 등 성안길과 주변의 골목길 풍경을 담았
로 진행되는 ‘희망은 시처럼 온다’ 공연은 시詩 기반의 다양한 문 다. 또한 청주의 백년가게와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문화재생 공간도
화예술 공연은 물론, 시낭송과 토크쇼 등 알아볼 수 있다.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공연은 사전 녹화로 진행되었으며, KTV
국민방송을 통해 11월 24일(수) 문화가 있
는 날 특별 방영되었다. 한국문화원연합회
네이버TV 채널을 통해 2022년 11월까지 시
청할 수 있다.

편집후기

종로문화원, 《종로의 학교》 발간


송년호를 내면서
집필 조성린│발행처·문의 종로문화원
나쁜 경험 하나를 극복하려면, 좋은 경험은 네 번이나 필요하다는데.
종로문화원에서는 올해 향토사료집 《종로의 학교》를 발간했다. 이
우리는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두 해나 보내고 있다. 이럴 때일 수
번 자료집은 종로구에 소재하고 있 록 사람들의 정서를 보듬고 갈 그 무엇이 더욱더 절실하다.
는 학교, 종로구에 소재하다 다른 지 문화로 수준 높은 삶의 맛을 느낄, 활력 넘치는 새 기운 담긴 새해에
역으로 이전한 학교 등을 심층 연구· 도, 모든 문화원 가족에게 골고루 누려지도록, 글 한 편, 잡지 한 권

조사하여 발간하였다. 최초의 정부 의 출판 과정을 전 편집위원들 모인 지혜를 빌리려 한다. 이에 지방


문화원 모두의 소통과 신뢰, 사랑과 나눔이 풍성해지길 바란다.
가 설립한 학교가 지금 종로의 교동
세상이 소용돌이치며, 광기 넘치는 물살로 어지럽다고 하여도, 모
초, 매동초이며, 선교사들이 설립한
든 삶은 편도이기에 지나치는 순간순간을 소중히 살아야 할 의무
것이 경신중고, 배화여중고등학교
가 있다.
다. 이처럼 과거부터 이어져 온, 또는 융성한 문화의 튼튼한 가지를 피워 줄 좋은 세상을 기대하는 새해!
이제는 사라지거나 이전한 종로 학 문화가족의 평안을 얹어 본다.
교의 역사와 전통, 교육의 변천사를 편집주간 한춘섭

다루었다.

80
모란당초문 흑주칠과기 
‘나전칠기’는 옻칠한 목제품에 얇게 간 조개껍데기를 여러 형태로 붙여 만든다.

Black-and-Red-Lacquered Snack Container with Peony Scroll Design


Mother-of-pearl-inlaid lacquerware (najeon chilgi) is
created by inlaying thin layers of
mother-of-pearl in various shapes onto lacquered 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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