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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1 07
다 름과 닮음
| 화려함
과소 박함
예부터 강화 완초장의
정교한 솜씨는
우리나라 최고로
인정받았습니다.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한명자 완초장은
완초 본연의 질감에
색과 무늬를 더한 기교,
그 둘을 조화롭게 엮는
균형감각으로
완초 공예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완초 공예는 완초왕골라 불리는 풀을 재료로 자리류와 용기류 등의 공예품을 만드는 민속 공예의 한 영역이다. 완초는 논 또는 습지에
서 자라는 1~2년생 풀로, 줄기로는 자리·방석·모자 등을 만들고 속을 말려 신·바구니·노끈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재료의 특성상 질
기고 투박한 멋이 있는 완초 공예품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중국과 교역 시 없어서는 안 될 중요 품목 가운데 하나였을 정도로 그
가치와 예술성을 충분히 인정받아 왔다. 완초장莞草匠은 완초를 선별하고 건조, 염색, 엮는 과정을 통해 무늬를 배치하고 색을 넣는 예
술적인 아름다움까지 부여해 기물을 완성한다. 우리나라의 소박한 풀로 전통과 현대의 감각을 날실과 씨줄처럼 교차하는 생활문화
유산인 완초 공예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더욱 사랑받길 바란다.
완초장 한명자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 17호 완초장 보유자) — 사진. 김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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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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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미술을 만나다 MEETING OUR OWN ANCIENT ART
태종대 | 장진성
장상교
4 시선 1 Tteoksal and Dasikpan: Pressed Patterns and Infused Dreams | Jang Sanggyo
색色, 영원한 생명의 노래 | 이동국
44 한국 삶 LOVING KOREA
6 시선 2 본질의 색 | 엘렌 드장드르
생활 속에서 보고 느끼는 오방정색 | 문은배
Color and Essence | Helene Desand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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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곁엣사람
본질을 해치지 않는 질박한 아름다움,
한명자 완초장 | 이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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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을 실천하는 것, 이게 내 스타일이야 | 김송희
80 문화소식
문화소식 및 편집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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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하다
48 시와 사진 한 모금
쑥 | 유안진
50 문화원 탐방
1897년 근대 목포로 와보랑께요 | 김소연
58 과거를 쌓다 미래에 닿다
결국엔 아카이빙 결국엔, 문화원 | 음소형
62 지역문화 확대경
여성으로만 치러진 장례
연도여자상여소리 | 정남식
66 맛있는 한국
여름의 맑은 맛, 음청류 | 윤숙자
70 문화끼리
가면假面, 그 참을 수 없는 자유 | 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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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김태웅
발행일 2021년 7월 1일
편집고문 권용태
편집주간 한춘섭
편집위원 곽효환, 김두섭, 김시범, 김종, 유경숙, 장진성, 지두환
편집담당 음소형
발행처 한국문화원연합회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9(도화동, 성우빌딩) 12층
전화 02-704-4611 | 팩스 02-704-2377
홈페이지 www.kccf.or.kr
등록일 1984년 7월 12일
등록번호 마포,라00557
기획·디자인·제작 (주)에이지커뮤니케이션즈 02-763-8600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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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
색 ,
영원한 생명의 노래
한국의 근현대는 흑백에서 컬러로, 그야말로 색의 대전환이었다.
이렇게 색으로 세상이 칠해진 이유는 일제 강점기라는 실존을 겪은 우리의 마음에 있다.
암흑천지의 세상이라 할지라도 화려한 색으로 망국亡國의 슬픔을 밝혀 이겨내고자 하는 염원.
작가들은 붓끝에 이것을 녹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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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다이스 조선> 8곡병풍, 장지에 석채, 123 ×356cm, 개인소장. 500년 조선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이상향을 향한 바람이 세 번째 폭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오색영롱(五色玲瓏)한 옷을 휘감은 봉황(鳳凰)이 모란 위를 빙빙 돌며 내려앉을 태세다. 봉황은 군주를, 모란은 부귀영화를 상징한다.
정도과 윤갈潤渴: 필획에 먹물의 젖음과 마름의 차이로 무한대의 색과 마티에 뇌라는 인간의 주관에 의해 천변만화하는 색으로 번역된다. 극단
르까지 일체로 머금고 있는 동양의 먹, 묵墨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적으로 푸른 나뭇잎이 울긋불긋한 단풍이 돼도 색맹色盲에게는 언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황혜홀혜한 현상세계 제나 흑백으로 해석된다. 화장化粧에서 보듯 아름다움이 속임수나
와 요혜명혜한 본질의 존재 세계가 둘이 아님을 여기서 확인한다. 조작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예술 자체를 회의하게 된다. 즉 인간
의 지고지순한 영혼·정신세계를 그려낸 궁극의 그림도 물감 자체
색을 가지고 노는, 색계色界를 주무르는 예술 가 자연을 조작한 인조물이라는 점에서 색은 늘 주관적으로 해독
하지만 여기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물감 자체의 된다. “예술은 사기다”라고 한 백남준의 말대로라면 색이라는 물
성격이다. 안료나 식품 착색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오일이든 먹 질, 즉 물감에서부터 ‘사기’인 셈이다.
이든, 심지어 석채나 천연염료마저 예외 없이 자연의 빛을 인공 물론 여기서 ‘사기’는 ‘창조’라는 이름으로 작가가 자연의 질서 그 자
적으로 ‘조작造作’해낸 색소에서 비롯된 물감이다. 인간은 이런 물 체가 되는 과정에서 동반되는 처절한 고뇌와 싸움의 결정이다. ‘창
감을 가지고 내면세계와 외부세계, 즉 대상을 추상에서 구상까지 조創造’는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되는 유일무이한 길·도道로도 볼 수 있
마음대로 색칠하면서 시대와 사회를 재해석해 왔다. 그것이 바로 다. 그래서 색을 가지고 노는, 색계를 주무르는 예술이라는 이름으
예술의 역사이자 인류 문화이고 문명이기도 하다. 로 치는 사기는 무혐의로 뒤바뀐다. 인간과 자연이 색으로 결국 물
우리는 막연하게 상찬해 온 미美에 대한 기존 생각을 색이라는 잣 아일체物我一體가 되는 지점에서 치는 사기는 생명의 빛으로 직통한
대로 뒤집어 볼 수도 있다. 색 자체가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 다. ‘사기’가 ‘창조’로 도약하는 한가운데에서 시시각각 바뀌는 색으
이 감각하는 색은 이미 태양에서 출발할 때의 색 그대로가 아니다. 로 영원한 생명을 노래하는 예술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꿈이 된다.
서로 다른 파장의 빛은 물체에 선택적으로 흡수·반사되면서 눈과 글과 사진.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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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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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 上 南
적 상 남
靑 左 東 白 右 西
청 좌 동 백 우 서
黃 中
황 중
黑 下 北
흑 하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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혓소리
치음
어금닛소리 잇소리
3 각음 상음
입술소리
궁음
목구멍소리
우음
3 오방정색과 훈민정음의 자음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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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입었다. 궁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궁 밖에서도 아이들은 신화에서 유래한 검은 물을 건너 검은 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색동옷을 입고 기녀들도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는 등 우리나라 죽음을 무섭고 어둡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복
는 한·중·일 삼국 중 가장 우수한 염색 기술을 보유한 민족이었 은 물론이고 상복으로도 백의를 널리 입었다. 이 세상을 떠나 태
다. 그런데도 백의를 즐겨 입고 항상 옷을 정갈하게 한 데는 이유 어나기 전 있었던 밝고 신성한 하늘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죽음
가 있다. 여러 이유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면, 우선 우리 민족은 에 담았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는 서양 문화가 많이 받아들여
신을 숭상한다. 즉 하늘을 숭상하고 떠받들기 때문에 우리나라 져 검은색 상복을 입는 경우가 많은데 죽음에 대한 해석으로 볼
의 산 정상은 대부분 ‘천봉’이고 높은 산의 이름에 백두산, 백악 때 우리 민족의 문화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산, 백록담흰사슴처럼 흰색이 들어간 경우가 많다. 신성한 것을 몸
에 두르고자 하는 사상이 급기야 백색 신앙까지 번져 순결과 결 자연을 닮은, 생활을 담은 ‘색’
백의 상징, 복록福祿의 상징, 지고무상의 신앙적 색깔로 굳어지게 상징색과 나란히 언급될 수 있는 색은 자연에서 오는 색이
되었다민속학회 1990. 자 우리의 살림과 함께했던 살림집의 색이다. 이 살림집의 색은
오행의 동쪽인 청색을 이기는 것이 백색이므로 금극목의 원리 단순하게 지역 재료를 사용했다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의 철학을
에 따라 동쪽의 청색 기운을 서쪽의 흰색이 이기고 살아가는 원 담고 있다. 단청 건물이 상위 문화와 상징체계의 색에 속한다면
리를 실천한 것이다. 생활과 관계된 문화의 색은 살림집의 소박하고 자연을 담은 색이
중국에서는 오히려 기근이 크게 들거나 홍수나 가뭄이 들면 임 다. 어느 지역에나 그 지역을 담고 생활의 문화를 담은 색이 존재
금이 백의를 입는다. 흰옷을 불길한 옷으로 여긴 중국인의 색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색을 보고 지역의 특성과 생활을 느낀다.
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 색들은 시간이 오래되고 폐쇄성이 강할수록 더욱 특색 있게
한편 서양에서는 검은 옷을 상복으로 입는데 이는 그리스 로마 나타난다. 우리의 살림집으로 보이는 초가와 소박한 꽃담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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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오방정색을 바탕으로 세상의 원리를 표현한 오승윤 작가 작품. <금강산>, 130×162.2cm, 2005, 캔버스에 유채
8 한글 ‘평창’의 자음과 눈꽃 모양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오방정색을 활용한 평창동계올림픽 엠블럼(왼쪽)과 평창동계패럴림픽 엠블럼(오른쪽)
9 제주도의 초가. 지역색과 자연색을 담고 있는 살림집
10 친화적 옹기의 색채. 지역의 흙으로 빚은 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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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다. 현대에 와서 어떤 건축 기술이 발달하고 새로운 시도로 환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순치란 무엇인가? 순치는 자연을 길들여
경을 건설하려 해도 자연적으로 지속 가능하고 한정된 지역에서 사람에게 맞도록 하는 것이다. 밭을 만들어 경작하고, 흙을 반죽
존재하기 위해서 결국, 지역 고유의 자연색을 닮아가기 마련이 하고 구워 옹기를 만드는 것이 모두 해당한다. 바로 이 순치의 과
다. 지역의 소재와 자연 형태에 따라 생성된 것이 지역색이며, 민 정에서 지역성과 자연 친화적 아름다움이 경작 생활과 함께 지
족적 색채가 되고 지역의 특성을 강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역 색채를 결정하게 된다. 강한 자연은 강하게, 약한 자연은 약하
우리의 살림집 역시 이런 특성이 있으며, 황토와 짚과 적송의 색 게 우리에게 맞도록 순치되며, 사람 또한 자연에 순치된다. 외세
을 담은 자연과 조화되는 색이 되었다. 이런 색이 만든 것이 상징 의 영향이 적을수록 지역색은 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이렇게 억
적인 청자, 백자와 다른 생활 속의 옹기 색이 된 것이다. 옹기는 지로 만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자연 순치는 살림집의
계층을 초월한 실용적인 도자로 현대에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 서까래, 서원이나 기와집의 큰 기둥이 자연의 형태를 거스르지
옹기가 놓인 환경은 흰색과 검은색이 주조를 이루는 반가의 실 않고 원래의 모양인 휜 채로 사용된 것에서 볼 수 있다.
내가 아닌, 뒤뜰의 토담 아래 자리 잡은 뜰이다. 환경과 아무런 살림집의 색채는 그 지역의 흙을 견고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세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합하고 균형이 맞는 자리에 놓 가지의 흙과 짚을 섞어서 삼화토三和土를 만들어 토담과 벽을 세웠
은 것이다. 그리고 가장 편안한 공간이기도 하다. 다. 지역의 재료로 만들어진 삼화토는 당연히 지역과 생활의 색이
좀 더 깊이 있는 생활의 색과 살림집의 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되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세계적인 환경 색채 학자들이 지
‘한정限定’과 ‘순치馴致’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한정은 자연 역의 흙색에 집착하고 연구하고 수집하는 목적이 여기에 있다.
의 상태를 그대로 두고 자신의 영역을 정해서 터무니를 그린 것 간단하게 언급했지만 우리 민족의 색을 이야기할 때 항상 거론되
이다. 즉 자연에서 자신이 사용하고 빌려 쓸 영역을 한정해서 사 는 상징성과 내면세계는 오방정색과 생활 속의 자연색에서 찾을
용하겠다는 약속이며 최소한의 사용에 대한 스스로의 규정이다. 수 있다. 우리 문화를 이해하고 한결 심도 있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가끔 자신의 영역을 강조해서 배타적인 영역의 표시로 오해하는 상징색과 자연의 색을 차별성 없이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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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엣사람
본질을 해치지 않는
질박한 아름다움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7호 한명자 완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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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말린 완초에 염색을 한 후 선별하는 작업이 끝나면 도안을 참고해 끊임없이 날줄과 씨줄을 엮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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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탁월하다. 습기에 약하긴 하지만 잘 삶고 여러 번 조금 일찍 수확하고, 무늬가 없는 초석에 쓰이는 질
말린 덕분에 일반 가정에서 관리하는 데에는 문제가 긴 완초는 완전히 자라서 줄기가 누런색이 될 때까지
되지 않는다. 특히 강화 지역 완초는 부드럽고 촉감이 기다렸다가 수확한다.
좋아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교동도 주민 대부분이 집 완초장은 완초를 재배한 후 선별 가공하는 기능, 완
에서 완초 작업을 했기에, 한 완초장은 어릴 때부터 초에 물감을 들이는 염색처리 기능, 염색 완초의 적
자연스럽게 집안 어른들이 완초 만지는 모습을 보고 절한 배열로 미적인 요소를 살려내는 기능까지 3단
자랐다. 계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장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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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으며, 2008년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7호 기능
보유자로 지정됐다. 또 강화군 농업대학과 김포시 엘
리트농업대학에서 완초공예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
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여성복지관과 근로청소년복
지관에서 완초 공예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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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용품은 물론 찻잔, 화병, 테이블 등 실생활에 사 한 완초장은 반세기 가까이 시간을 보냈지만 완초가
용할 수 있는 완초 공예품도 만들고 있다. ‘여전히’ ‘아직도’ ‘미치도록’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완
초 공예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보존해야 한다는
‘기승전완초’, 사명감을 가슴에 품고 있다. 한명자 완초장이 어릴 때
그렇게 완초장이 된다 부터 자연스럽게 완초를 접해 완초장이 된 것처럼, 지
금 두 아들도 그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인천무형문화
“우리 부모님 세대가 활동하던 재 전수교육관에서 항상 함께하는 남편 최낙원 씨도
1950~1960년대 완초 공예는 깨끗하고 완초 공예 이수자다.
단조로운 방식을 추구했어요.
종류도 자리나 방석, 함 정도였죠. “유치원 때부터 제 무릎에 앉아
하지만 현재는 못 만드는 게 없어요. 완초를 만지면서 자란 큰아들은
전통 방식을 기반으로 엮는 기법은 완초만큼 매력적인 재료가 없다고 해요.
그대로지만 문양, 테크닉, 섬세함 같은 염색과 형태에 따라 화려함과 질박함을
부분에서 다양해졌어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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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미술을
만나다
국립중앙박물관
종이에 담채(淡彩), 32.8×53.4 cm,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1757년경,
강세황(姜世晃, 1713~1791), <태종대(太宗臺)>,
태종대 太宗臺
1713년 강세황은 남소문동에서 예조판서를 지낸 강
현姜鋧, 1650~1733의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강
백년 姜柏年, 1603~1680 또한 예조판서를 지낸 고위 관료였
다. 이와 같이 명문가에서 태어난 강세황의 인생은 순조
로울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당파黨派가 소북小北이었
시원한 시냇물에 왼발을 담그고 있는 인물이 보인다. 그 옆에 ther Gang Baeknyeon (1603–1680) was a high-ranking govern-
ment official who had also held the post of Minister of the Board
는 너무 더워서인지 체면 불고하고 웃통을 벗은 사람이 보인 of Rites. Born into such a distinguished family, Gang Sehwang’s
다. 양반兩班도 더위는 참을 수 없는지 이 사람은 아예 갓도 버 life was expected to be an easy one. However, during the reign
렸다. 더위는 누구도 참기 힘들다는 것을 이 그림은 보여준 of King Yeongjo from 1724 to 1776, with the Old Doctrine faction
(Noron) dominating the political landscape and Gang Sehwang’s
다. 한편 이들 옆에는 두 명의 시동侍童이 보인다. 화면 앞에는 clan being affiliated with the Lesser Northerners (Sobuk), his
그림을 그리려고 종이 두루마리를 펼쳐 놓은 채 앉아 있는 인 family was completely alienated from politics. As a result, Gang
물이 나타나 있는데 이 사람은 강세황 자신으로 생각된다. 바 Sehwang forewent his political ambitions of government service
and in 1744, at the age of 32, moved to Ansan, Gyeonggi-do, where
위에는 먹의 농담濃淡을 통해 명암이 잘 표현되어 있다. his in-laws’ home was located. In 1756, his wife, Lady Ryu, who
글.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had been the breadwinner of the impoverished family, ca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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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TING OUR OWN ANCIENT ART
an infectious disease while suffering from malnutrition and died degree holders) nobleman with his left foot resting in the cold
at age 44. Saddened and depressed by his wife’s death, Gang stream, possibly due to the heat. Next to him is another nobleman
traveled to Songdo (present-day Gaeseong) the following year in sitting topless, at the risk of dishonor, probably because he could
1757, his age 45, at the invitation of the Magistrate of Songdo, O not endure the insufferable heat as well. Heat obviously being
Suchae (1692–1759). After visiting many scenic spots in Songdo unbearable to even an aristocrat, this man has taken off his gat
and its vicinity, he produced the album Journey to Songdo, which (Korean traditional hat) entirely. This painting shows that hot
is a record of that trip. This album contains paintings by Gang weather is intolerable for everyone regardless of rank. Meanwhile,
Sehwang using the methods of chiaroscuro and one-point per- two young attendants are seen standing next to the noblemen. In
spective (or linear perspective), indicating that he had acquired the foreground of the painting is a seated man with a paper scroll
a deep understanding of Western painting techniques prior to rolled out, ready to make a painting, who presumably represents
1757. Taejong Terrace, a leaf from the album, shows his masterful Gang Sehwang himself. Using the tonal gradations of ink, he elab-
use of chiaroscuro. Taejong Terrace, a scenic location on Mount orately depicted the light and shade of the rocks.
Seonggeo in the north of Gaeseong, is famous for clear streams,
flat rocks, enormous boulders, and eccentric old pine trees. Por-
Written by Chang Chinsung, Professor of East Asian art in the Department of Ar-
trayed on the right side of the painting is a yangban (officials and chaeology and Art History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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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
곡곡
유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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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DERING AROUND THE COUNTRY
익산에서 시간의 길을 잃다
익산은 자세히 봐야 진가를 드러낸다. 초록이 무성한 너른 들판 곳곳에 백제의 숨결이 녹아 있고
매일 지나치는 시장 골목에는 근대사가 우뚝 서 있기도 하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재미가 더해지는 익산 여행은 현재의 시간에서 찬란한 흔적을 찾는 보물찾기와도 같다.
1 백제의 염원만큼이나
웅장하고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춘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멀리 보이는 동탑
The west stone pagoda
(front) and the east stone
pagoda (back) at the
Mireuksa Temple Site
flaunt a structural aesthetic
as grand and beautiful
as the Baekje Kingdom’s
ho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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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ksan National Museum and Mireuksa Temple Site
stand as one
Iksan is famously representative of the culture, art, and technology
of the Baekje Kingdom. As I visited the grounds of the Mireuksa
Temple Site (Historic Site No. 150), I yearned to sense the Baekje
people’s fervent hopes for their kingdom’s revival 1,500 years ago.
Across the green fields and slopes of Mireuksan Mountain,
signs reading “under excavation” and “currently being restored”
outlined a leisurely landscape. Only traces of the Baekje Kingdom
remain today, which means that some information is needed to fill
in the many blanks. Fortunately, Iksan National Museum, at the
entrance to the Mireuksa Temple Site, can help in this task.
Opened in January 2020, Iksan National Museum is
closely integrated with its neighboring historic site, located just
2 to the southwest of the site of Mireuksa Temple—the largest
Buddhist temple from the Three Kingdoms era. The museum
‘미륵사지와 한 몸처럼’, was designed so as not to detract from the temple’s landscape;
국립익산박물관
indeed, from a distance, it simply looks like an expanse of grass.
As visitors follow the long path downhill into the museum, they
익산은 백제 문화와 예술, 기술이 집약된 곳으로 are greeted by a model of the temple’s wooden pagoda. The
유명하다. 1,500여 년 전, 백제 부흥을 향한 백제인의 model was produced at 1/20th scale, showing what the pagoda is
believed to have looked like based on what remains of it on the
뜨거운 염원을 마주한다는 기대감으로 미륵사지사적 temple grounds. Even so, I could sense the grandeur. I walked a
제150호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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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p around the model pagoda—as though performing the ritual 4
of pagoda circling (tapdori in Korean)—and then headed toward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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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visioning the Baekje Kingdom’s hopes
Recalling the things I had seen at the museum, I made
my way to a location where I could view the Mireuksa
Temple Site directly. The view consists of two ponds,
a pagoda, and the tall green heights of Mireuksan
Mountain in the background. I walked slowly toward
the temple grounds, the two ponds on either side of
me. Just as I began to feel a bit disappointed at the lack
of lotus flowers on the ponds, I spotted a willow tree,
its branches waving in the wind. Back when the tem-
ple grounds were being excavated, the pond’s bed was
surveyed. Analyzing a section of the pond’s bed with
layers of clay and leaves, it was revealed that the leaves
had come from willow trees. I found myself marveling
at the vitality of the trees that had stood in one place,
watching over a history that dated back to the Baekje
era—or possibly even earlier.
Past the ponds, I arrived at the temple’s stone
flagpole pillars (National Treasure No. 236), which
mark the temple’s entrance. I took a long look, re-
calling a model of Mireuksa Temple that I had seen
in the temple exhibition section. Like something out
of a TV show or movie, I turned my eyes and saw the
wall, the pagoda, and the temple proper appear in
front of me. It was humbling to imagine the scale of
it: its gates (east, central, and west), its wooden pago-
6
da and two stone pagodas, its three main buildings—
all of that and more filling an area measuring around
마음으로 그려보는 백제의 염원 25,000 pyeong (or around 83,000 square meters).
박물관에서 살펴본 내용을 되새기며 미륵사지 Today, you can find the two stone pagodas on the
temple grounds: the east pagoda and the west pagoda,
를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두 the latter also known as the Stone Pagoda at Mireuksa
개의 연못과 탑. 그 뒤를 받치고 있는 높고 푸른 미륵 Temple Site, Iksan (National Treasure No. 11).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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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93년에 복원된 동탑 way they look today is very similar to their original 고개가 숙여진다.
7 미륵사지를 굳건하게 appearance. While the east pagoda has been restored 현재 미륵사지에는 2개의 석탑이 있다. 동탑과 익산
지키고 있는 동탑과 and appears intact, one side of the west pagoda has
서탑
crumbled away. There is a sad historical reason for this: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인 서탑이다. 동쪽과 서쪽에
8 보물 제1991호 익산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concrete was 놓인 석탑은 원래 똑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복원을
미륵사지 서탑 출토
poured to keep the collapsed portion from crumbling 통해 완전한 모습을 보이는 동탑과 다르게 서탑은 한
사리장엄구
any further. Between 2001 and 2017, meticulous resto-
9 미륵사지 석탑의
ration efforts in which the concrete was removed and
쪽이 흘러내린 모양새다. 여기엔 아픈 역사가 있다. 일
네 귀퉁이에 놓인
미륵사지 석탑 석인상
the original stone was used to recreate the pagoda were 제 강점기에 무너진 것을 콘크리트를 쏟아부어 무너
carried out. In the process, a śarīra reliquary was found 지지 않게만 유지해 왔다. 이후 2001년부터 2017년까
in 2009 in the pillar stone (simjuseok) of the first tier.
This meant that sacred remains of the Buddha (jinsin
지 콘크리트를 제거하고 원래 있던 돌은 살리는 정밀
sari) had been enshrined inside the temple’s stone 한 복원 작업을 진행하던 중 2009년, 1층 심주석에서
pagoda. Encountering traces not only of the Baekje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는 미륵사지 석탑에 진
Kingdom but also of the Buddha himself left me feeling
like I was walking through time.
신사리가 봉안되었음을 의미한다. 백제는 물론 부처
To those who seek an even more mysterious 의 흔적까지 만나 보니 시간의 한가운데를 걷는 기분
6 The east pagoda
journey through time, I recommend heading toward 이 든다.
restored in 1993
the temple site’s tile kiln. If you travel about 20 me-
7 The east and west 조금 더 신비로운 시간여행을 하고 싶다면 미륵사지 기
pagodas keep careful
ters toward the mountain, you will see a hiking trail
watch over the between the fences. Passing along the narrow forest 와 가마터로 향하는 것도 좋다. 미륵산 방향으로 20m
Mireuksa Temple Site trail, you will come to Hwasanseowon. This seowon 정도 이동하면 울타리 사이로 미륵산 둘레길이 이어진
8 The śarīra reliquary (Confucian academy) was first built in 1657 to com-
excavated from the memorate Joseon-era scholar Kim Jangsaeng. It was
다. 좁은 숲길을 지나면 화산서원이 나온다. 화산서원
west pagoda at the demolished in 1868 after Prince Regent Heungseon 은 1657년, 조선 후기 김장생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된
Mireuksa Temple Site
Daewongun ordered the abolition of all seowon; in 후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없어졌
(National Treasure
1968, it was restored. Today, it serves to enshrine
No. 1991) 다가 1968년 복원됐다. 지금은 위패를 모시는 사당 구
ancestral tablets. Behind Hwasanseowon are several
9 One of four stone
forest trails leading toward Mireuksan Mountain, as 실을 하고 있다. 화산서원 뒤로는 미륵산으로 향하는
markers placed at
the corners of the well as a bamboo trail that takes one to Guryong Vil- 여러 숲길과 구룡마을까지 대나무숲길이 이어진다. 역
west pagoda at the lage. Both are excellent options for those who wish
Mireuksa Temple Site to enjoy a trek through history and nature.
사와 자연이 함께하는 트레킹을 즐기기 좋은 길이다.
8 9
27
10 11
100년 전 시간이 멈춘 곳,
A century-old moment frozen in time
I made another leap in time, this one taking me back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 to the present. The mouth-watering smell of fried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현재로 돌아왔다. 침샘을 chicken had me thinking my time-traveling had
finished. But as I walked through Iksan’s side streets
자극하는 치킨 냄새가 가득하니 시간여행이 끝났다 and discovered the buildings there, I could feel my
고 생각했다. 하지만 골목을 걸을수록, 건물들을 발견 eyes widening. I had gotten lost in time again in
할수록 눈이 점점 커진다. 100년 전 모습으로 현재를 Somri Modern History and Culture Space, where the
city exists today the way it looked 100 years ago.
살아가는 ‘익산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에서 시간의 Back in the days when Iksan was known as Iri,
길을 잃은 것이다. Somri Market was established as people gathered
익산이 이리裡里로 불리던 시절, 1914년 들어선 동이 around East Iri Station, which was built in 1914.
Known today as Nambu Market, it was the historical
리역을 중심으로 사람이 모이면서 솜리시장이 형성 backdrop for a demonstration for Korean indepen-
됐다. 현재 남부시장으로 불리며 1919년 4.4 만세운 dence that took place on April 4, 1919; today, it faces
동이 펼쳐진 역사적 장터로, 3.1 독립운동기념공원과 a park commemorating the March 1 Movement.
After Korea’s liberation, streets devoted to silk and
마주 본다. 광복 이후 남부시장 주변으로 주단거리, sewing cropped up around Nambu Market, which
바느질거리 등이 형성돼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continue to operate today. Despite the passage of
시간이 지났지만, 이곳은 곳곳에 그때의 흔적을 고스 time, evidence of past eras can be found all around.
Ten buildings are designated as National Registered
란히 남겨두었다. 그중 역사,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 Cultural Heritage Nos. 763-1 through 763-10 in rec-
은 건축물 10채가 국가등록문화재 제763호로 지정 ognition of their historical and cultural value, and
됐고, 익산시 인화동 일대가 익산 솜리 근대역사문화 the area around Iksan’s Inhwa-dong neighborhood
is now known as the Somri Modern History and
공간으로 지정됐다. 국가등록문화재 제763-1호부터 Culture Space. The ten buildings can all be reached
10호는 모두 도보로 이동할 수 있지만, 안내판이 눈에 on foot, although the signage is not obvious, and it is
28
12 13
10 The old Shinshin Department Store building is
characteristic of the local commercial district and
architecture at the time
11 The patjuk (red bean porridge) served at Seungjin Bajirak
Kalguksu makes a perfect snack
Farms building, which belonged to a Japanese farm
12 Seoul Yanghaeng, a dye company, built their Iksan building
based at East Iri Station. No. 763-2 is the former in the 1960s at the height of the market street’s prosperity
Shinshin Department Store building, which offers 13 The entrance to the Somri Modern History and Culture
an excellent illustration of the characteristics of Space walk at the March 1 Movement Memorial Park
commercial architecture at the time. Nos. 763-3
through 763-7 are modern mixed-use buildings, that
show the different structural characteristics and
spatial composition of buildings that represent the 구舊대교농장 사택으로 동이리역을 거점으로 활동했
transition that took place as the modern era gave way 던 일본인 농장이다. 2호는 구舊신신백화점 건물로 당
to the contemporary one. No. 763-8 is the old drying
warehouse of the Bohwadang Korean Medicine
시 상업건축물의 특징과 형식을 잘 보여준다. 3호부
Clinic. Its masonry walls, wooden roof trusses, and 터 7호는 근대상가주택으로 근대에서 현대로 전환하
ventilation windows remain well preserved, and the 는 시점이자 과도기적 건물의 공간 구성과 다양한 건
site has an extra element of scarcity value as a drying
warehouse for Eastern medicines. No. 763-9 is the
축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8호인 보화당한의원 구舊건
former Iri Financial Association building, a struc- 조 창고는 조적조 벽체와 지붕 목조 트러스트, 환기창
ture built in 1925 that shows the typical architectural 등이 잘 남아 있으며 한약재 건조 창고라는 희소성까
style of a financial association building. No. 763-10 is
a two-story concrete and rebar structure that offers
지 지니고 있다. 9호는 1925년 건립된 구舊이리금융
a well-preserved example of a 1960s-era commercial 조합 건물로 금융조합 건물의 전형적인 건축 형식을
building, with its tile finishing in front and mortar 보여준다. 10호는 철근콘크리트조 2층 건물로 앞쪽
finishing in back. Visitors are also recommended
to catch the annual Baekje Cultural Heritage Week
은 타일, 뒤쪽은 모르타르로 마감한 1960년대 상가건
from July 8 to July 14 or the 2021 Baekje World 물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아울러 익산과 충남 공
Heritage Festival (which takes place in Gongju and 주·부여에서는 매년 7월 8일부터 14일까지 백제문화
Buyeo, Chungcheongnam-do, as well as in Iksan)
from August 13 through 29. Those who enjoy history
유산주간이 개최되며, 오는 8월 13일부터 29일까지는
and architecture can spend a pleasant few hours ‘2021 세계유산축전 백제’ 행사가 열린다. 역사와 건
exploring this area. 축을 좋아한다면 즐거운 나들이가 될 것이다.
Written by Oh Miyeon, editing team
Photographs by Kim Hyeonmin(photos 1, 2, 4–7, and 9–13)
글. 오미연 편집팀 ― 사진. 김현민(사진 1~2, 4~7, 9~13) ― 사진 제공.
Photographs courtesy of Iksan National Museum (photo 3), and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photo 8) 국립익산박물관(사진 3),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사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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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문화
이야기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지원 사업
Regional Cultural Content Development Project
함경남도
조선고무
평양
동해
평양고무
서울
대륙고무
서해(황해)
부산
선만고무, 일영고무
신발이 쌓아 올린 부산의 역사
고무신에서 나이키까지
100년 전 그때는 고무신이 신발의 최첨단이었다. ‘신발’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에서 최첨단이었다.
고무신은 요즘으로 치면 반도체였고 최신식 스마트폰이었다. 부유층이 아니면 사 신기도 어려웠다.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다. 국내에 고무신 공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죄다 고가의 일제 수입품을 사용했다.
한국 신발 산업은 2019년 100주년을 맞이해, 올해로 102년이 되었다.
30
LOCAL CULTURE STORIES
Busan:
History Built on Shoes
From rubber shoes to Nike
A hundred years ago, the rubber shoe was new in the
footwear industry, if not in industry in general—
it was today’s semiconductor and cutting-edge
smartphone. Only the rich could afford rubber shoes;
the poor could only dream of having a pair of their
own. Before the establishment of the first domestic
rubber shoe factory, all rubber shoes in Korea were
imported from Japan at great expense.
Now 102 years old, Korea’s domestic footwear 2
31
3 대륙고무신공업주식회사의 장화, 고무신,
시화(市靴) 등을 소개하는 광고지
A Daeryuk Rubber advertisement for boots, rubber shoes, and city shoes.
4 1920년대 말 고무신 가게 풍경
A rubber shoe store in the late 1920s.
5 1948년 부산 신발가게 풍경
A rubber shoe store in the late 1920s.
터 서울에 한성고무·서울고무·반도고무·경성고무·대 of their men’s shoes and the pointy toe of their women’s shoes,
창고무·중앙상공·조선고무·조일고무 등이 들어섰다. thus creating harmony between tradition and modern style.
As Daeryuk and Pyongyang took charge of the Korean
부산에는 선만鮮滿고무·일영日榮고무 등이, 평양에는 footwear industry, Joseon Rubber opened in Hamgyeongnam–
서선西鮮고무·동아고무·정창正昌고무 등 고무신 공장 do in 1920. Beginning in 1921, Seoul saw the emergence of many
임금과 복지는 열악했다. 여공이 대부분인 신발 공장 yang had Seoseon Rubber, Donga Rubber, and Jeongchang
Rubber.
에선 폭행과 성희롱까지 더해졌다. 저임금, 임금 삭감 The rapid emergence of rubber shoe manufacturers led to
과 미지급, 부당 해고, 노동 시간 단축, 여공 폭행, 신 heated competition among the companies as well as rampant
체 검색 등에 여공들은 파업으로 맞섰다. 이 시대 여 labor exploitation. The intensity of the labor increased and wag-
es and welfare declined. Rubber shoe factories were operated by
공 파업은 생존권 보장은 물론 일제에 대한 저항의 의 a workforce of largely female laborers, who often faced violence
미가 컸다. 일종의 독립운동이었다. and sexual harassment. These workers staged multiple strikes to
protest low wages, wage cuts, failure to deliver payment, unjust
6.25전쟁,
dismissal, shortened hours, assault, and frisking. The strikes
were not only aimed at securing the workers’ rights to live but
부산 신발 산업 도약에 기폭제 were also meaningful as protests against Japanese colonial rule;
1945년 일제 강점기가 끝나자 한국 신발은 일대 they were a kind of independence movement for the nation.
전환기를 맞이한다. 1940년대까지 80%를 차지하던 일 he Korean War: A catalyst for the Busan footwear
T
제 자본에 누수가 생기면서 신발 자본은 삼파전 양상 industry
을 보였고, 그러한 경향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웠 The Korean footwear industry reached a turning point in
1945 with the withdrawal of imperial Japan from the Korean
던 부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시대 부산 신발 Peninsula. As Japanese capital, which had accounted for 80
을 들여다보면 한국 산업사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 percent of the total investment in the footwear industry, began
32
4 5
to recede, three kinds of capital flowed into the field; this was 광복 이후 부산의 신발 자본은 세 부류였다. 일제 강
most visible in Busan due to its geographical proximity to Japan. 점기 적산 공장을 물려받은 기업과 토착 자본으로 설
A closer look into Busan’s footwear industry provides a realistic
picture of Korea’s industrial standing during this period. The
립한 기업, 그리고 광복 후 신흥 자본이 설립한 기업
capital that controlled the footwear business in post-liberation 이었다. 숫자로는 1949년 기준 신흥 자본 업체가 63
Busan came from three sources: companies that had inherited 곳으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이 적산 기업 6곳, 일제 강
factories previously operated by the Japanese, companies estab-
lished by Korean capital during Japanese rule; and companies
점기부터 있었던 토착 자본 기업은 2곳이었다.
launched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 As of 1949, there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은 부산 신발 산업이 도약하
were as many as 63 newly launched companies, followed by six 는 데 기폭제가 됐다. 남한은 물론 북한 곳곳의 신발 공
inherited companies and two supported by Korean capital.
The Korean War, breaking out in 1950, became a catalyst
장이 동란을 피해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사람이 모여
for the success of Busan’s footwear industry as shoe producers 들고 자본이 모여들고 시설이 모여들고 기술이 모여
from around the Korean Peninsula found refuge in the port city. 들면서 부산은 그야말로 한국 신발의 메카로 급부상
The influx of people, capital, equipment, and techniques made
Busan into a mecca of Korean footwear—a status that remains
했다. 지금도 그 위상은 여전하다. 매일매일 몰려드는
intact today. The war refugees that flocked to the city daily were 전쟁 피란민은 신발의 공급자이면서 수요자였다. 그
both suppliers and consumers of shoes. They provided suffi- 들은 노동집약형 산업인 신발에 풍부한 노동력을 제
cient manpower for the labor-intensive footwear industry while
functioning as a steady pool of consumers; they both made the
공했으며 안정적인 수요층을 이뤘다. 만드는 것도 그
shoes and bought them. Thanks to the abundant workforce, 들이었고 사 신는 것도 그들이었다. 노동력을 풍부하
footwear manufacturers in Busan solidified their businesses, 게 확보한 부산의 신발 공장은 군화를 비롯한 군용화
producing and supplying combat boots and other military
footwear. However, in the meantime, corrupt practices were
를 생산하고 납품하면서 사업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
rampant in the purchase and delivery of the shoes. 다. 그렇지만 납품 비리 등 부조리도 적지 않았다.
Dongcheon Stream, which cuts across Busan’s Jin-gu and 부산 중심지에 해당하는 부산진구와 동구를 가로지르
Dong-gu districts, also accelerated the development of the foot-
wear industry. While no boats traverse this stream today, it was
는 신발 발전의 또 다른 동력이었다. 지금의 동천은 배
used as a canal during Japanese colonial rule. Materials like rub- 라곤 다니지 않는 하천이지만, 일제 강점기만 해도 배
33
6 7 8
가 다니는 운하였다. 이 운하를 통해 고무나 섬유 같은 ber and textiles were imported through the canal and many big
원자재를 수입했다. 그 때문에 당시 동천 주위에는 굵 companies, including Samhwa Rubber and Joseon Textile, were
established along its banks. Samhwa enjoyed booming business
직굵직한 기업들이 들어섰다. 대표적인 게 조선방직과 and for several decades post-liberation, it played a leading role
삼화고무였다. 삼화고무는 이른바 ‘잘나갔’다. 광복 이 in the Busan footwear industry, like the eldest son of a family of
도 나이키는 ‘보따리상’ 수준이었다. 처음 주문 의뢰 only accepted orders for 30,000 pairs of sneakers or more, but
Nike’s first order was only for 3,000 pairs. In accepting the
를 받은 삼화고무에서도 ‘그런 회사가 있나?’ 하고 생 order, Samhwa undertook a kind of risky adventure, one that
각할 정도였다. 첫 주문량은 3천 켤레였다. 3만 켤레, turned out to be the beginning of a success story. In the 1980s,
5만 켤레는 돼야 주문을 받아주던 삼화고무는 모험을 Korea was the world’s most powerful footwear manufacturer
and one axis of a global market in which Italy and Taiwan were
감행했고 이는 성공 신화로 이어졌다. 1980년대 한국 known for leather and plastic shoes, respectively. Korea became
신발은 세계 최강자였다. 세계시장의 한 축을 이루었 famous by producing premium leather sneakers. At the time,
다. 세계 시장에서 이탈리아는 구두, 대만은 플라스틱 Busan was home to all of Korea’s major footwear companies. For
about three to four decades, beginning in the 1960s when other
화, 그리고 한국은 고급 가죽革製 운동화로 명성을 얻 Korean industries were struggling to break into the export mar-
었다. 그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신발 대기업은 모두 ket, the footwear industry was a sort of breadwinner for both
부산에 있었다. 다른 산업이 수출 시장에서 두각을 나 Busan and Korea, and acted as a pillar of the domestic industry.
Seven of the footwear companies in Busan in the 1980s
타내지 못하던 1960년대부터 30~40년 동안 신발 산 were quite big. In addition to Samhwa and Bosaeng, which had
업은 부산을 먹여 살리고 한국을 먹여 살리던 효자 산 been in operation since Japanese colonial rule, there were Kukje
업이었고 기둥 산업이었다. Rubber, Taehwa Rubber, Tong Yang Rubber, Daeyang Rubber,
and Chin Yang Chemical. Kukje, the predecessor of today’s
1980년대 부산의 신발 대기업은 모두 일곱. 삼화고무 Kukje Corporation, was established with Korean capital after
를 비롯해 보생고무, 국제고무, 태화고무, 동양고무, the nation’s liberation from Japanese rule and acted as a brother
대양고무, 진양화학이었다. 삼화고무와 보생고무는 company to Chin Yang. Taehwa and Tong Yang (which later be-
came Hwaseung) had escaped to Busan during the Korean War.
일제 강점기부터 있었다. 국제상사의 전신인 국제고 Daeyang was founded in Busan in 1953.
무는 광복 이후 토착 자본으로 자수성가했으며 진양 The companies each had their own trademarks. When
34
9
6 삼화고무 ‘범표’ 신발 광고. 범표에 이어 ‘타이거’ 운동화를 선보였다.
A Samhwa Rubber shoe advertisement featuring its beompyo tiger trademark. Later, Samhwa produced sneakers under the brand name “Tiger.”
7 1961년 신발 광고 달력. 모델은 태현실
A 1961 calendar featuring model Tae Hyeonsil in a promotional image for shoes
8 1980년대 신발 공장 작업 모습
Shoe factory workers in the 1980s
9 1980년대 동양고무 작업 광경. 케미컬슈즈는 동양고무 성공 신화의 발판이었다.
Tong Yang Rubber in the 1980s. Tong Yang’s “Chemi Shoes,” made of artificial leather, acted as a stepping-stone to huge success.
it came to exports, products were manufactured on original 화학과는 형제 회사 격이었다. 태화고무와 화승의 전
equipment manufacturer (OEM) contracts to meet foreign or- 신인 동양고무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
ders, and this practice hindered the Korean footwear industry’s
growth. However, business was solid in the domestic market,
란을 왔고, 대양고무는 1953년 부산에서 창업했다.
and companies established their own trademarks and symbols. 신발 회사는 저마다 고유의 상표를 갖고 있었다. 비록
Samhwa was represented by the beompyo, or its tiger trademark; 수출품은 외국 업체 주문에 맞춰 생산하는 OEM 방식
Bosaeng by a tire; Kukje by the Chinese letters “王者,” meaning
monarch; Taehwa by a horse; Tong Yang by a train; Daeyang by
을 취했고 결국 이것이 한국 신발 산업의 발목을 잡았
a “supercomet”; and Chin Yang by “진양,” its company name 지만, 자체 상표를 내세운 내수 시장만큼은 기반이 탄
written in Korean. 탄했다. 회사별 대표 상표는 다음과 같았다. 삼화-범
Once there was footwear, now there is Korea 표, 보생-타이어표, 국제-왕자표, 태화-말표, 동양-
Busan was once a city of footwear. Advertisements for 기차표, 대양-슈퍼카미트, 진양-진양.
shoes dominated TV and newspapers and most commuter b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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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1 12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외국 근무를 선호하는 “And then, I received my first salary.
대학 졸업자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It was 8,200 won. I paid 2,000 won in boarding fees
“…그러다가 첫 월급을 받았습니다.
and put the rest in a savings account.
I set aside only 500 won for miscellaneous expenses
8200원을 주더군요. 저는 그 돈으로
each month. That meant that in September 1972,
기숙사비 2000원을 주고 나머지 돈으로
I was able to send 25,000 won to my family back
무조건 저축했습니다.
home in for the first time,
한 달 잡비는 500원으로 최대한
five months after I had left home.
줄였습니다.
The amount was small but I wanted to do my duty as
그 결과, 1972년 9월 객지 생활 5개월
a member of my family.
만에 2만 5000원을 고향 집에 부쳤습니다.
As I left the post office, smiling with a sense of pride
적은 액수일망정 우리 집의 기둥이라는
and satisfaction, the faces of my parents and brothers
역할을 조금이라도 해보기 위하여
and sisters came to mind . . .”
부친 것이었습니다. 우체국을 나오면서
저도 모르게 흐뭇한 마음으로 아버지, Shoes symbolized tears of both pain and joy. The young
어머니, 동생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게 female workers who filled the shoe factories were mostly from
떠올랐습니다….”
rural families. Barely able to afford a high school education,
they found jobs at footwear companies in Busan en masse.
The girls would travel to Busan on buses sent by the footwear
신발은 눈물이었다. 그리고 기쁨이었다. 공장마다 어린 companies right after middle school graduation. They lived in
여공이 넘쳤다. 이들은 대개 시골 출신이었다. 처지가 company dormitories and attended night school. As seen in the
어려워 상급학교 진학이 여의치 않자 부산의 신발 회사 quote above, they would diligently save their earnings and send
the money home—every single one of them. They were tough,
에 무더기로 취직했다. 중학교 졸업식을 마친 직후 신 resilient.
발 회사에서 보낸 통근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왔고 기숙 The tough girls’ money helped their families fare better.
36
10 부산진구청 근처에 있는 신발 동상. 부산 신발 산업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2015년 세워졌다.
A bronze statue of shoes erected near
Busanjin-gu Office in 2015 to commemorate
the footwear industry in Busan.
11 ‘누나의 길’ 표지판
A rubber shoe store in the late 1920s.
13
12 국내 최초 신발 박물관인 한국신발관의 내부 전시실 모습
Exhibition halls at the K-Shoes Center,
the first footwear museum in Korea.
13 영화 <1987>에서 이한열 열사 역할을 맡은 강동원
배우의 신발이 삼화고무 타이거 운동화다. 영화 제작진이
부산경제진흥원 신발산업진흥센터에 복원을 의뢰해
제작했다. 복원된 신발(사진)은 한국신발관에 진열됐다.
In the film 1987, the character Lee Hanyeol, played
by actor Gang Dongwon, wore a pair of Samhwa’s
“Tiger” sneakers. The shoes were specially recreated
by the Busan Economic Promotion Agency’s Footwear
Industry Promotion Center upon the request of the
film production team. The recreated sneakers (photo)
are on display at the K-Shoes Center.
Feeling sorry for their faraway daughters, many fathers stopped 사에서 생활하며 야간학교에 다녔다. 당시 수기 내용대
drinking and became new men. Some bought rice paddies and 로 한 달 몇천 원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 고향 집에 보냈
others cows. The girls’ money enabled their younger brothers
and sisters to go to school. As their families blossomed, so did
다. 누구랄 것 없이 그랬다. 모두가 ‘억순이’었다.
their provinces and the entire nation. In Busan, there are many ‘억순이’가 보낸 목돈으로 시골집은 재기했다. 아버
places that celebrate and remember these female workers. A 지는 딸에게 미안해 술을 끊고 새사람이 됐으며 누구
narrow alley they would take to and from work has been turned
into the “Elder Sister’s Path” and a statue of shoes and the
는 논을 사고 소를 샀다. 동생은 진학했다. 집안이 일
K-Shoes Center have been established there. The fourth floor of 어섰고 지역이 일어섰으며 한국이 일어섰다. 부산에
the Samhwa Rubber building maintains the workers’ old board- 는 이들을 기리는 공간이 곳곳에 있다. 여공들이 출퇴
ing facilities as they were when the girls lived there.
The footwear industry should be remembered, cherished,
근하던 좁은 골목길엔 ‘누나의 길’이 만들어졌고 신발
and commemorated for a long time. At a time when Korea 동상과 한국신발관이 세워졌다. 삼화고무 4층 기숙사
lacked money and technology and faced a great shortage of 는 지금도 원형 그대로다.
resources, we had footwear, which helped us become who we
are today and turn our nation into an economic power. Let us
신발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리며 기념해야 할 산업
look back on all the factory workers who devoted their youth to 이다. 돈 없고 기술 없고 자원조차 태부족하던 한 시
a better tomorrow, and the shoes that embraced them, with the 절, 신발이 있었기에 지금 여기의 우리가 있고 경제부
utmost respect and most heartfelt thanks.
국 한국이 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하며, 여
Written by Dong Gilsan, poet
Photographs courtesy of Dong Gilsan (photos 6–8, 10–11), the National Folk Museum 기보다 나은 저기를 기약하며 청춘을 송두리째 바쳤
of Korea (photos 1–3), the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of the
United States (photo 5), the Busan Museum (photo 4), the Busan Chamber of 던 모든 ‘공순이·공돌이’에게, 그리고 그들을 품었던
Commerce and Industry (photo 9), and K-Shoes Center (photos 12–13)
신발에 존경과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37
문화
탐구
생활
떡살은 문양을 새긴 틀판, 틀판을 포함하고 있는 틀, 그리고 손잡이로 구성된다. 틀판은 원형·화형·장방형 등의 형태로 제작된다.
A tteoksal that consists of a mold, a frame in which the mold is held, and a handle. The mold features different shapes, including circles, flowers, and rectangles.
38
CULTURAL EXPL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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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집牧隱集》에 팔관회에서 쓴 다식의 맛이 연하고 좋 and early Joseon periods, a poem describes the dasik
재로 만든 떡살은 대개 방형과 장방형의 떡살에서 많 There are many variations of tteoksal, some made
of wood and others of porcelain. Wooden tteoksal are
이 볼 수 있으며, 복합 문양으로 구성돼 있다. 도자로 often square or rectangular and feature many complex
제작된 떡살은 주로 원형의 떡살에서 볼 수 있으며, 단 patterns. Porcelain tteoksal are mostly circular and
일 문양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다식판은 목재로 feature a single elaborately engraved pattern. Dasik-
pan are usually made of wood, and rather than being
만든 것이 대부분으로, 하나의 모양 틀에 문양을 복합 comprised of a set of complex patterns, also often
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단일 문양을 섬세하게 표현한 contain a single pattern elaborately carved into their
판은 크게 틀형과 판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틀형은 type and block type. Frame-type dasikpan consist
of a top and bottom frame; round, protruding molds
아래쪽과 위쪽으로 틀이 나뉘며, 아래쪽 중앙에는 철 carved with patterns, resembling the Chinese char-
凸자형으로 문양을 새긴 둥근 모양 틀을 한 줄 혹은 두 acter 凸 (K. cheol), form one or two lines at the center
줄로 구성돼 있고, 위쪽은 아래쪽의 둥근 모양 틀에 맞 of the bottom frame, while the top frame has holes
into which the round molds on the bottom frame fit
는 구멍이 뚫려 있어 다식의 모양을 잡을 수 있게 했 to shape the dasik. Block-type dasikpan have concave
다. 판형은 다식의 모양을 잡을 수 있게 요凹자 형태로 molds, resembling the Chinese character 凹 (K. yo),
구멍을 파고, 구멍의 바닥에 문양이 새겨져 있다. with designs engraved inside the holl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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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이 새겨진 아래판과 모양을 잡아주는 위판으로 구성되는 틀형 다식판이다.
화문, 문자문 등 다양한 문양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A frame-type dasikpan composed of a bottom frame with engraved patterns
and a top frame used to mold the dasik. Various patterns featuring flowers
and characters have been delicately carved into the frame.
and realistic patterns over geometric shapes, and are 현세적 욕구의 염원을 담아
expressed in a more ornate, exaggerated fashion.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맞이하는 제 문제를 극
It is common to classify tteoksal and dasikpan
patterns by subject matter. For example, there are such
복하는 문화적 장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인간
categories as geometric pattern, animal pattern, plant 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야기되는 갈등을 해소
pattern, and written character pattern. Symbolism and 하기 위한 방법으로 초자연적 존재의 힘을 빌리고자
meaning can variously overlap among the categories.
For example, the linear nature of geometric patterns
하는 신앙적 세계관으로부터,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symbolizes longevity, deriving from the implicit 현세적 삶의 질곡을 타개하기 위한 적극적인 의도로
composition of lengthiness or the concept of contin- 써 주술적인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치관과
uousness. As for triangle patterns, which belong to
the geometric pattern category, since Koreans have a
이에 따른 의미가 형성됐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에 대
deep-rooted notion of the number three representing 한 표현 방식의 하나가 문양이라고 할 수 있다.
perfection, this pattern accordingly represents auspi- 떡살과 다식판에 새겨진 문양은 다종다양하며 여러 상
ciousness, abundance, and fertility.
Tteoksal and dasikpan patterns can be catego-
징을 담고 있다. 떡살 문양은 기하학적인 도형· 동식물·
rized by symbolic meaning, such as longevity, abun- 문자 등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으며, 사실적이고 설명
dance, fertility, wealth, honor, casting out evil spirits, 적인 것보다는 추상적이고 도안화된 형태를 많이 볼 수
and praying for good fortune. The chrysanthemum
is a representative symbol that communicates a wish
있다. 단독으로 새겨지기보다는 제작자의 의도나 소망
for longevity. It seems that chrysanthemum patterns 에 따라 복합적으로 구성된다. 반면에 다식판의 문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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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식의 모양을 잡아주는 구멍 바닥에
꽃과 물고기 문양을 새긴 판형 다식판이다.
A block-type dasikpan, featuring flower and fish patterns in
the bottom hollows, which are used to mold the dasik.
기하학적인 도형보다는 꽃, 문자 등 섬세하고 사실적인 came to symbolize longevity after being derived from
문양을 선호하고 한층 과장해 화려하게 표현했다. the ancient Chinese tale of Zhu Ruzi, who is said to
have become a Taoist immortal (C. shenxian) after
떡살과 다식판의 문양은 같은 유형의 소재를 묶어서 drinking brewed chrysanthemum. As the flower of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컨대 기하문·동물문·식 longevity, chrysanthemums are often used in banquets
물문·문자문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같은 유형의 or 60th and 61st birthday celebrations, accompanied
by phrases wishing one a long life such as “boxthorns
소재라도 문양이 가지고 있는 상징과 의미는 다양하 and chrysanthemums bring longevity,” (K. giguk
게 중첩돼 나타난다. 이를테면 기하문에 속하는 직선 yeonnyeon) and “pines and chrysanthemums bring
‘삼三’에 대해 완벽하다는 관념이 깊은 우리 민족에게 butterflies have been frequently portrayed in folk
paintings. In the late Joseon Dynasty, painters such
는 길상적 의미를 담고 있어 풍요·다산을 상징한다. as Sin Saimdang enjoyed painting flowers and butter-
떡살과 다식판의 문양에 대해 상징적 의미를 기준으 flies and left behind many works that feature them.
로 구분해 보면, 장수·풍요·다산·벽사·부귀·초복 등으 Also, deriving from the symbolism of marital bliss,
butterflies regularly appear on items that relate to
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장수를 기원하는 대표적 문양 marriage. For instance, we can see butterfly patterns
으로 국화꽃을 들 수 있다. 국화 문양이 장수를 상징 on a variety of objects, from chests to folding screens,
하는 의미를 지니게 된 데에는, “옛날 중국의 주유자 bedding, and pillow ends. Another pattern is that of
the Buddhist swastika (K. man), an ancient religious
라는 사람이 국화를 달여 마시고 신선이 되었다”는 고 icon that carries the meaning of defeating evil spirits.
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It is said to be the symbol that appeared on Sakyamu-
풍요다산의 염원을 담은 문양으로 나비 문양이 있는 ni’s chest when he was born, recognized by posterity
as an auspicious mark. A glimpse into this perception
데, 이는 금실 좋은 부부·기쁨과 환희를 상징한다. 이 can be seen in shamanism, in which a flag with a
러한 상징성 때문에 나비는 민화의 소재로 많이 그려 swastika design is often hung in front of a sham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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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강녕(壽福康寧)의 문자 문양이 새겨진 떡살로
장수와 복을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Tteoksal that embody wishes for longevity and good
fortune with the engraved characters for longevity,
happiness, health, and peace.
house, representing the spiritual power of a deity. 졌다. 또한 금실 좋은 부부를 상징한 데서 혼수품에
Such a flag marks the home of a shaman who serves as 나비 문양이 많이 보인다. 이를테면 함을 비롯해 병
a representative of a deity, identifying a divine space
and casting away evil spirits.
풍·침구류·베갯모 등에 나비 문양이 사용된 것을 볼
Fish patterns embody a wish for wealth and hon- 수 있다. 벽사의 의미를 담은 문양으로 ‘만卍’자 문자
or, symbolizing scholarly eminence, rising up through 문이 있다. ‘만’자 문양은 석가모니가 탄생할 때 가슴
the ranks in life, or making a name for oneself by being
ranked the highest in the national civil service exam-
에 있었던 문양이라고 전하며, 후세 사람이 이를 길상
ination. These meanings originate from a Chinese 의 표지로 인식했다고 한다.
folktale about a golden koi fish in the Yellow River that 부귀의 소망을 담은 물고기 문양은 학문적 명성 또는
swims upstream every March and successfully leaps
over a waterfall called the Dragon Gate (C. Longmen),
장원급제를 통한 입신양명을 상징한다. 중국의 민담
eventually transforming into a dragon itself. In Korean 에 “황하의 황어는 매년 3월이면 물줄기를 거슬러 오
folk paintings, an ascending carp represents aspiring 르는데, 그때 용문의 급류 통과에 성공하면 용으로 변
to a rise in status. Another pattern that reflects wishes
for good fortune is that of the Chinese character for
신한다”고 전해지는 것에서 유래했다. 우리나라 민화
“blessing” (K. bok). This symbol is often used to direct- 에는 잉어가 승천하는 그림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신
ly convey a sense of auspiciousness by engraving the 분 상승의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초복을 기원하는 문
character in various calligraphic styles or incorporat-
ing it into a compound design with other patterns.
양으로 ‘복福’자 문자문이 있다. ‘복’자 문양을 여러 가
Tteoksal and dasikpan patterns are not simply 지 서체로 새기거나 다른 문양과 복합적으로 구성해
aesthetic; they are an expression of worldly desires 직접적으로 길상적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that embody sincere devotion and diverse aspirations,
leading to many different formed meanings and types
떡살과 다식판의 문양은 단순히 미적 심성에서 비롯
of symbolism depending on their use. 된 것이 아니라, 현세적 욕구의 표현으로 정성과 다양
한 염원을 담고 있어, 그 쓰임새에 따라 의미와 상징
이 형성됐다.
Written by Jang Sanggyo, curator,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Photographs courtesy of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글. 장상교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 사진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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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삶
색의 향연이 펼쳐치는 한국
나는 늘 색에 끌렸다. 밝은색, 어두운색, 은은한 색, 선명한 색.
어릴 적부터 취미로 그림을 그렸는데,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
은 없어서 어떤 색을 쓸지, 어떻게 색을 조화롭게 섞을지 결정하 1
펼쳐진 황금빛 논, 가을에 노랗게 물드는 은행나무, 붉은 단풍나 way. When it came to looking into the importance of thought in
art, I resisted (or maybe I was just lazy). Only technique and aes-
무… 도시도 자연만큼이나 다채롭다. 상점의 무지갯빛 네온사인, thetics caught my attention. What would be the point of think-
휘황찬란한 뮤직비디오나 광고를 내보내는 그야말로 거대한 전 ing about thinking itself? I already had to deal with complicated
그림, 특히 민화에 사용된 빨강, 초록, 노랑, 파랑의 표현이었다. an incredibly blue sky; pink cherry blossoms blooming in spring;
green leaves under the stormy skies of summer; expansive rice
나는 거의 7년을 한국에서 지냈고 앞으로도 되도록 오래 머물 계 fields; gingko trees changing from green to yellow in autumn;
획이지만, 어쨌거나 이곳에서 지내는 기간을 이용해 한국화 수업 and red maples. The cities are as exceptional as the nature.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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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ING KOREA
But it was the demonstration of red, green, yellow, and 게다가 한지에 물감이 그런 식으로 퍼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
blue used on palace walls and ceilings and in Korean traditional 다. 종이 자체가 나에게 익숙한 수채화나 유화에서 쓰던 종류와 전
paintings that left the strongest impression on me, especially in
minhwa (Korean folk art) paintings.
혀 달랐다. 민화는 여러 겹으로 물감을 덧칠할수록 색이 더욱 선명
I've been in Korea for six, almost seven years now. I plan to 해지지만, 수채화에서는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색이 칙칙해진다.
stay as long as possible. I decided to take advantage of being here 물 양 조절과 적합한 색과 종이, 붓의 선택이 대단히 중요하다.
by signing up for Korean painting lessons. What better place to
learn Korean painting could there be other than Korea itself?
민화에서는 도구 외에 주제도 중요하다. 사실 모든 유형의 한국
After years of not picking up a brush, I gave it another go. 화가 다 마찬가지다. 한국화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데만 그치
At first, I was a little bit thrown by the technical terms; apart 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 이런 상징의 개념은
from “water,” all the terminology was unfamiliar. Moreover, the
diffusion of paint on hanji paper (Korean traditional paper made
내가 그림을 그릴 때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민화
from mulberry bark) is unpredictable, and the paper itself is to- 는 본래 나 같은 비전문가가 그리는 것이기에 그런 두려움을 내
tally different from the kinds of paper used for the watercolor or 려놓을 수 있었다. 민화를 그릴 때면 사실적인 기법에 집착하지
oil painting that I was used to. In terms of technique, the process
of overlapping layers of paint makes colors become more vivid
않고 의미에 집중할 수 있었다. 민화에서는 사물의 특징이 투박
in minhwa painting, but if you do this with watercolor paints, 하게 묘사된다. 즉 단순하고 과장되게 표현된다. 때로는 커다란
the colors get sad. Controlling the amount of water and choosing 눈과 기다란 이빨, 날카로운 발톱을 한 호랑이가 사람과 같은 자
the right colors, paper, and brushes are of great importance.
Aside from the tools, subject matter is also important in
세를 취하거나 모자나 곰방대 같은 물건을 사용하는 모습으로
minhwa painting, and indeed in all types of Korean painting. 의인화되기도 한다. 까치는 장난기 많고 수다스러우며 덩치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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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작가 미상, <호랑이와 까치(호작도)>, 조선 시대 4 5
A painting of a tiger and a magpie by an unknown artist, Joseon Dynasty 6
짐승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런 주제들에서 Painters in these fields create not only because they want to paint,
전달되는 정서적인 인상은, 처음에 받은 기술적·시각적인 인상을 but, even more so, because they want to convey meaning. This
was what I feared the most when I was drawing: the notion of sym-
압도한다. 그리고 이 변형된 모습에 더해진 색채로 민화는 강렬 bols. But minhwa painting allowed me to overcome this fear as
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풍기며 때로는 익살스럽다. 그러나 이러 these paintings are originally the work of non-professionals, like
한 작풍에는 의도가 담겨 있다. 예컨대 화가는 호랑이가 지닌 명 me. Minhwa painting allowed me to put aside my obsession with
realistic technique and focus on meaning. In minhwa painting,
확한 특징들을 부여하여 그리는 대상이 호랑이로 인식되게끔 하 features are coarser—more simplified or exaggerated. Tigers with
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사람들이 호랑이 big eyes and long teeth and sharp claws are sometimes anthro-
에 대한 두려움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 기운을 느끼도록 한다. pomorphized through their posture or with human accessories
such as hats or pipes. Magpies are portrayed as playful, talkative,
이처럼 민화에서는 표상과 기법의 선택으로 특정한 메시지의 전 and not afraid of bigger predators. The emotional impression
달이 가능하다. conveyed by these subjects surpasses the initial technical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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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impressions. And with the addition of color to these trans-
formed bodies, minhwa paintings become explosive, surreal, and
sometimes even comical. However, these artistic decisions have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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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진
한
모금
쑥 너 있어
오늘의 나도 너다
냄새 한번 맡아봐
내 살肉과 피血냄새를
척추도 쑥대궁 일 걸
내 또래는 누구나 쑥과의 혼혈세대混血世代
쑥국 쑥죽 쑥밥 쑥개떡 쑥나물....
보리누름 재촉하는 노고지리 우짖어도
봄마다 춘궁기春窮期
국토國土는 어디든 엉망진창 쑥대밭
해마다 높아지던 보릿고개를
쑥대머리 귀신형용 얼크러 설크러 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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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원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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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근대 목포로 와보랑께요
도시와 거리에 흘러간 시간은 이야기가 되고, 역사로 남는다.
1897년 개항 이후, 남부권 최고의 항구도시로 떠오른
목포의 이야기를 따라 걷는 길.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곳에서,
100여 년 전의 지도를 들고 낯설지만 아름다운 골목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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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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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항구를 마주한 목포 구도심은 가주택과 옛 벽돌 창고를 지나는 동안 독특한 경관을
근대 역사 문화 그 자체이다.
지닌 유달산과 원도심의 조화로움에 매료된다. 옛 호남
3 목포 근대역사관 2관으로
운영되는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은행 목포지점을 시작으로 옛 화신연쇄점, 옛 일본인
목포지점
상가거리, 목포진 역사공원, 옛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
4 일제 강점기에 부두와 가까운
지역에서 화물을 보관하기 위해 을 지나 옛 일본영사관으로 이어지는 ‘1897 목포역사의
지은 해안로 붉은벽돌 창고
길 투어’는 목포문화원이 이끄는 문화 프로그램이다.
5 목포문화원사로 사용된 옛
호남은행 목포지점. 일제 강점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목포 원도심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문화공간입
6 목포 근대역사관 1관으로 사용
니다. 1990년대 목포문화원은 지금의 목포 근대역사
중인 옛 일본 영사관
7 목포 구도심에 남아 있는 관옛 목포일본영사관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목포의 근대
근대역사문화공간을 한눈에 건축물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옛 일본영사
보여주는 골목 지도
관은 목포시청, 목포시립도서관을 거쳐 목포문화원으
로 활용되었습니다. 원형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
기에 옛 목포일본영사관은 마침내 목포 근대역사관으
로 쓰이게 되었죠.”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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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문화원과 2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해 온 조
상현 사무국장은 더 많은 근대역사문화공간을 보존
하고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몇 해 전,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 등장하며 목포 관광의 필수 코스로 떠오른
목포 근대역사관은, 이곳의 문화를 지키고 계승해 온
목포문화원의 전신이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까지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된 옛 호남은행 목포지점도 그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1929년 건립된 옛 호남은행 목포지점은 일본 자본에
대항한 호남 지역 인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순수 민
족 자본으로 설립된 은행 건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근대 문화유산인 동시에 목포에 남아 있는 유일
한 근대 금융계 건축물이기도 하다.
무심히 산책하듯 걷기에는 골목마다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담은 문화재들이 있다. 그렇기에 목포 원도 8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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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일제 강점기에 불교사원으로 지어졌다가 광복 후 1957년부터 교회 예배당으로 사용된
옛 동본원사 목포별원. 지금은 오거리문화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9 오거리문화센터에서 열린 백남준 작가 전시회
10 목포 최초의 교회인 양동교회로 오르는 길
11 목포 구도심 골목에 위치한 갤러리 카페 ‘만호’의 전시 공간
12 유달산을 풍경처럼 두르고 있는 목포 구도심의 오후
멋스럽게 느껴지는 건축물도 원도심과 어우러져 조 을 선사합니다. 지금은 상상이 되지 않겠지만, 언덕을 내
화를 이룬다. 목포청년회관은 일제 강점기 목포 청년 려가면 매립 전까지 바로 물길이 있던 곳이랍니다.”
들의 문화 사랑방이자, 목포 최초의 시민회관 기능을
했던 공간이다. 돌로 만들어진 이 자그마한 건물은 주 조상현 사무국장은 교회 언덕 아래 아스팔트를 바라
권을 빼앗겼던 어두운 현실에 놓인 청년들이 작은 힘 보며 골목의 옛 모습을 설명한다. 자동차가 바삐 지나
을 모았던 의미 있는 장소다. 가는 현재의 도로는 무심할 만큼 세월의 흔적을 모두
목포 최초의 교회인 양동교회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워낸 모습이다. 힘차게 흐르던 물길이 멈추고, 수많
등록된 석조건물이다. 언덕배기에 유달산을 바라보 은 삶이 이곳을 스쳐 가는 것을 지켜보았던 유달산만
듯 우뚝 서 있는 이 교회는 1910년 신자들이 유달산의 은 여전히 같은 얼굴로 목포 원도심의 배경이 되어주
돌을 직접 옮겨다 세운 광주·전남 지역 최초의 교회로 고 있었다.
알려져 있다. ‘아픈 역사’와 ‘눈물의 항구’로 대변되던 목포는 근대문
화유산을 간직한 보물 같은 도시로 일어서고 있다. 100
“함석지붕을 인 교회 본당 정면에는 아름다운 종각이 있 년도 넘는 시간을 한나절 산책으로 돌아본다는 것은
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30여 년 전 교회를 지키던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종각은 철거되고 말았지요. 유달산과 마주할 수 있는 이 목포 원도심을 산책한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오래된
언덕은 신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감탄사가 나오는 풍경 미래를 간직할 수 있는 꽤 멋진 시간이 될 것이다.
55
아따 거시기 목포문화원은 사랑이랑께
15 노적봉 앞 광장에서 열린
강강술래 공연
16 전남민속예술축제의
강강술래 공연
15
여그 목포에는 목포문화원이 있제
목포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발굴하고 발전시키는
데 힘쓰고 있는 목포문화원은 1965년 설립 이후 옛 일
본영사관과 옛 호남은행 목포지점 건물을 거쳐 올해
봄, 새로운 건물에 둥지를 틀기까지 수많은 교류를 통
해 목포의 문화를 알리고 계승해왔다.
특히 지역향토문화 연구의 요람으로서 역할을 충실
히 해왔는데, 연구 성과를 책으로 묶어 《근현대신문
자료집성》, 《유달산》, 《유달산 아래 작은 섬, 고하도》,
《목포의 땅이름》, 《목포의 근대건축》, 《근현대신문자
료집성》, 《목포의 근현대표상》, 《목포역사문화지도》,
《무안보첩》, 《완역 목포부사》, 《목포풍아집》, 《초정
집 1. 2》, 《호남보인사시고》 등을 발간했다. 목포문화
원이 보유하고 있는 풍부한 지역향토문화 관련 자료
는 목포와 문화원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정보
를 제공한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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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암말 말고 목포로 오시오
18
목포문화원은 지역문화를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
고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개최
한다. 4.8독립만세운동 재현 기념으로 기획된 원도심
유적을 돌아보는 ‘역사의 거리걷기대회’가 대표적이
다. 목포문화원이 주관하는 이 행사는 목포시민은 물
론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또한 이충무공 호국정신 선양을 위한 모충서예휘호대
회, 민족 명절인 한가위에 열리는 ‘목포시민 한마당 잔
치’, ‘지역역사문화 아카데미’ 등의 행사도 개최한다. 매
년 11~12월에 열리는 ‘전라도 사투리 구연대회’는 토
속 문화를 보존하면서 큰 즐거움을 선사하는 행사다.
5월과 10월에는 두 차례에 걸쳐 문화유적지 및 자매결
연도시를 탐방하고 이를 통해 문화 교류도 활발히 진
행한다.
도울 건 돕고 지킬 건 지켜야지라
목포문화원은 노인 일자리 사업 운영기관으로서
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실버남도소리 순회공
연을 통해 민요와 판소리를 알리고 있다. 또한 실버관광
도우미 과정을 운영해 관내 지역의 주요 관광지를 안내
하고 해설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배출해 시니어층의 일
자리 확충에 앞장선다. 이 밖에도 연중 근대문화유적을
조사하고 향토사 연구소를 운영하며 목포 문화유산 수
집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옛 사진과 문서 등의 전산화
과정을 통해 소중한 향토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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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쌓다
미래에
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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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아카이빙
결국엔、문 화 원
“
20여 년간 수집한 자료,
문화원 신축의 ‘명분’돼
지하엔 수장고, 1층엔 향토사료전시관, 2층엔 공연장, 3층
엔 문헌자료실…. 언뜻 들으면 도서관 혹은 박물관인가 싶지만
지난 2017년 지어진 태안문화원의 신축 원사院舍다. 태안문화원
은 1990년 태안읍내 상가 건물에서 시작해 두 번의 이사를 거쳐
지금은 충남 태안군 태안읍 백화로192에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건물로 자리 잡았다.
“신축 원사는 어떻게 보면 ‘자료들’ 덕분에 세워졌다고도 할 수 있
습니다. 1990년 읍내 상가 건물 안에 개원할 당시, 문화원에 많은
자료가 쌓여 있기는 했지만 열악한 환경과 인력으로 도저히 관리
할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수집하거나 배부받은 도서
를 특별히 분류하지 않고 창고에 쌓아놓는 것이 전부였죠. 그나
마 다행히 1996년 단독 원사가 신축되며 공간이 생겼고 2002년
부터 본격적으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도서와 자료를 정리하는 것은 집중력과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
다. 결국엔 전담 인력이 있어야 한다. 정지수 사무국장은 문화원
입사 때부터 자료의 분류와 정리, 보존에 깊은 고민을 해왔다. 당
”
자료의 포화상태를
시엔 정책적으로 ‘인턴사원’이라는 제도와 ‘대학생 직장체험지원
프로그램’이 있어 젊은 대학생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렇게 3~4년
간 방학마다 학생들을 활용했고, 2002년부터 2016년까지는 향
토민속도서관 운영이라는 사업을 통해 인력을 충원하고 도서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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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파수도의 돌을 지킨 한 한국인의 12
실제 이야기를 그린 만화책 《파수도의 돌》
2 태안문화원 지하 수장고에서 보관 중인 갖가지 유물
이자 국가적 과제로 거론되는 시대에서, 지역문화의 거점인 문화 증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 점의 유물을 받기 위해 10여 년간 주
원이 지역 기록물의 수집, 관리, 활용에 중점 기관이 돼야 하는 것 민과 지속적인 교류와 소통도 마다하지 않았다.
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향토 자료의 수집, “일제 강점기에 전국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태안에 있었어요. 그
보존의 역할은 잘 이뤄지지 않기도 한다. 고질적 문제인 공간과 증손자분이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셨는데, 집안에 있는 유물이나
인력 부족 때문이다. 한계를 극복하며 문화원이 한 걸음씩 내딛 자료를 가끔 문화원으로 가져와서 자랑하셨죠. 10여 년 동안 자
는 방안은 무엇일까. 랑을 들어드렸어요. 절대 자료를 달라고 쫓아다니지 않았죠. (웃
“만약 어디서부터 자료 수집과 관리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문 음) 그러다가 자료를 관리하기 어려운 시점이 왔고, 결국 문화원
화원이 있다면 우선은 ‘분류’부터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 에 기증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다. 보유한 모든 자료와 유물을 범위가 넓은 분류체계로 분류해 그는 문화원에 지금 당장 자료가 쌓여 있지 않더라도 조급해하지
야 합니다. 분류 작업을 통해 우리 문화원만이 수집하는 자료가 말라고 말한다. “언젠가 자료를 기증할 수도 있는 ‘잠재된 인적자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고 어느 주제의 자료가 넘치고 부족한지 원’을 관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눈앞의 자
알 수 있죠. 이를 통해 문화원이 앞으로 수집할 자료의 주제를 선 료 축적에 조급해하지 않으면 나아갈 길이 점차 보이기 마련이
정하고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또 공간의 한계에 부 다. ‘예산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라는 그의 생각
딪히면 남길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할 근거가 되기도 하죠.” 도 이와 닿아 있다.
태안문화원은 20여 년 동안의 수서收書, 수증受贈, 수탁受託 등을 통 “문화원에서 하는 모든 일을 자료 생산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습
해 700~800여 종과 1500여 점의 자료·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비 니다. 예를 들어 연례행사를 개최하더라도 반드시 산출물을 만들
용을 지불해 구입하는 것은 지양하고 대부분 기증받는다. 하지만 고 축적해 자료로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죠.”
처음부터 지역 주민들이 마음을 열고 개개인의 소중한 물건을 기 태안문화원에서 매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백일장과 그
60
3 하지 못한 《우리문화》마저 태안문화원 서고에서 발견되는 일도
4
있었다. 태안문화원이 건립된 이후, 발간된 《우리문화》를 모두
목록화해 관리한 덕분이다.
믿지 못할 사연도 있다. 태안 안면읍에는 내파수도라는 작은 섬
이 있다. 그 섬은 몽돌이 천연방파제를 이루는 특이한 지형으로,
일제 강점기부터 도자기 연마제로 돌이 수탈되었으며, 광복 이
후에도 국내 광산개발업자가 허가를 내고 돌을 반출하고자 했
다. 하지만 단 한 명의 노인이 집념과 노력으로 투쟁한 끝에 내파
수도의 돌을 지켜냈다. ‘내파수도의 돌’ 이야기는 태안 내에서도
공식적인 역사 기록 대신 미담 정도로만 전해졌었다. 세월이 흐
른 후 내파수도를 지켜낸 노인은 돌아가셨고, 그가 법정 투쟁하
며 모은 모든 기록은 흘러흘러 서울의 한 인쇄소로 전해졌다. 인
쇄소는 오랜 기간 이 자료를 창고 한쪽에 두었다가 처분하기 직
전 태안의 한 학교 교사와 거래하면서 이 자료를 건네주었고, 그
교사는 이후 자료를 태안 내 인쇄소에 전달한다. 인쇄소 대표는
자료를 보관하다가 태안문화원의 기증 캠페인을 어렴풋이 알고
3 2002년도 태안문화원 향토사료도서관 정리 모습 있던 차에 친분이 있던 태안문화원장과 사담을 하던 중 자연스레
4 2014년 당시 태안문화원 서고 모습
해당 자료에 관해 이야기했고, 결국 자료는 태안문화원으로 이관
됐다. 자칫하면 사라질 뻔한 귀한 자료가 문화원으로 수집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원의 적극적 자료 수집이 지역 내 널리 소문난
덕분일 것이다.
림대회의 원본을 귀하게 보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 중 지역 기록물 수집, “결국엔 문화원밖에 없다”
단 한 명이라도 세계적인 대작가가 나온다면 어린 시절 작품의 2000년대 초중반부터 지역에서 다양한 교육기관, 문화기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관, 도서관의 사업 확대, 각종 문화시설이 생겨나면서 문화원의
영역이 축소됐다. 더군다나 전문적인 광역단위 문화연구기관의
수집 정책이 없는 것이 정책 활동으로 인해 향토사에 대한 전문성도 많이 위축됐다. 하지만
여러 문화 사업을 함께 펼치는 문화원인 만큼 공간의 한계 문화원의 고유 기능과 향토 사료의 양 그리고 역사적 측면에서
가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수집 정책을 세울 수밖에 없지만, 태 문화원과 경쟁할 단체나 기관을 찾기 어렵다.
안문화원은 최대한 자료 수집에 제한을 두지 않고 기증 의사를 “공공 기록이 ‘선택된 역사’라면 개인의 기록과 민간의 기록은 지
밝힌 모든 이의 기증품을 받는다. 제한을 두고 기증받으면 기증 역 역사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기록을 수집, 보존하는 것은 지역
자가 기증을 마음먹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문화의 자산을 가꾸는 일이지요. 비록 각 문화원의 상황과 한계,
몇 해 전 태안 최초의 문방구 ‘백화당’이 폐업하면서 문화원에 연 역할이 모두 다르고 일의 경중을 따질 수 없기에 ‘아카이빙에 몰
락했다. 이 중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한걸음에 달려 두하세요’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역의 정체성을
갔는데 형광등을 비롯해 모든 물건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골라 지닌 알짜배기 자료를 생산하고 수집하고 관리하는 것, 결국엔
가져가지 않고 모두 실어 왔다. 비록 95%가 버려지고 5%의 물건 문화원밖에 없습니다.”
이 남았지만 “문화원을 불렀더니 좋은 것만 골라 가져갔어”라는 그는 문화원이 위기라는 말에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미 문화원은 충분히 많은 자원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열과 성을 다해 자료를 수집하고 수집한 자료는 최대한
글. 음소형 《우리문화》 편집팀 ― 사진. 김현민 사진작가(사진 1~2) ―
문화원 내에서 관리하다 보니 한국문화원연합회에서 미처 보관 사진 제공 태안문화원(사진 3~4)
61
지역
문화
확대경
그 옛날 경남 창원시 진해구에는
앞소리꾼부터 상여꾼까지 연도여자상여소리라는 장례 풍습이
여성으로만 치러진 장례 있었다. 연도여자상여소리는
연도에서 우리나라 조상 대대로
이어온 이 섬만의 독특한 장례
상여소리 드문 일에 속한다.
62
섬 여인의 숙명적 애환이 스며 있는 본고에서는 연도 95번지에서 1940년에 출생해 마지
독특한 장례 풍습 막 연도상여소리 장례를 치른 경험이 있는 박용출81세
연도에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약 선생의 실제 장례 절차를 소개하고자 한다.
400년 전쯤이지만, 지금은 1995년 시작된 신항만 공
사로 섬이 육지화되면서 ‘연도’라는 명칭만 남고 소멸 연도의 마지막 장례
됐다. 소멸되기 전까지 주민들은 4~5대에 걸쳐 살아 1981년 12월, 박용출 선생의 부친이 72세를 일
왔다. 제덕동괴정으로부터 4km 동남 지점에 있는 낙 기로 부산에서 운명하셨다. 주검은 고향 연도에 있는
도였던 연도는 산이 가파르기 때문에 섬사람들은 채 할아버지 묘지 옆에 안장하기로 했다. 문상객은 부산
소, 밀, 콩 등 농작물과 미역, 파래, 물고기 따위를 웅 에서 맞이하고 웅천 괴정 부두에 오전 10시까지 운구
천장에 팔며 삶을 이어왔다. 남자들은 4월이 되면 조 하는 계획을 세웠다.
기잡이 하러 연평도나 전라도 위도까지 가서 어로 작 부산에서 영구차에 관을 모시고 괴정 부두에 도착해
업을 하고는 8월이 돼야 돌아왔다. 만선을 하고 돌아 미리 준비한 관과 상여를 결합한 후, 배에 올라 연도
온 배는 용왕기나 태극기를 달고 꽹과리와 징을 울리 본가 앞 모래사장에 도착했다. 이때 고향 배들이 애도
면서 앞바다를 한 바퀴 돌고는, 해변에 세우고 돈 가 의 만선기를 달아주었다. 친척과 마을 사람들의 조문
마니를 선주 집으로 이동하기도 해, 연도를 한때 ‘돈 을 위해 다시 발인제를 하고 부산에서 온 많은 조객弔
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客과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엿소리가 시작됐
연도는 워낙 작은 섬이었기에 묘를 쓸 곳이 없어 섬 건 다. 앞소리꾼 김학곤이 쇠를 내려치자 상두꾼들은 상
너편에 있는 솔섬무인도에 장지를 정하고 상여는 작은 여 방틀에 섰다. 앞소리꾼의 구령에 따라 “하나, 둘”
배에 싣고 운구했다. 연도에서 여자가 상여를 메게 된 하면 상두꾼은 일제히 상여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이유는 1986년 당시 강국술70세 씨의 증언에서 잘 알 상여 균형을 유지하고 멜빵을 걸쳤다. 앞소리꾼이 한
수 있다. 소절씩 사설하면 상두꾼은 “에호, 에호, 에가리 넘자,
“여자들이 상여를 메고 장사를 치른 것이 별시런 뜻이 에호” 하고 후렴을 받는다. 앞소리꾼이 개울에 이르러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닙니다. 섬에 사는 남정네들이 고 상여를 뒤로 밀치면서 사설을 하고 상두꾼은 앞으로
깃배 타고 바다로 나간 건 먹고살기 위해 그런 거라 쳐 밀면서 후렴을 받는다. 그러고는 상여 어루기를 한다.
도, 젊은 장정들이 있는 대로 징용에 뽑혀 나가던 태 상여 어루기는 원래 발인 전날 밤 선소리꾼과 상여꾼
평양 전쟁 당시는 참말로 이 섬에 남자라 카는 것은 코 들이 미리 모여 빈 상여를 메고 발을 맞추거나 상주와
빼기도 보기가 어려운 판이니 초상이 나면 우짭니꺼. 유족을 위로하는 과정인데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여자들이라도 장사를 지내야지.”
연도여자상여소리는 발인제, 운구, 봉분 작업 등 일체 이것도 개울인데 노잣돈 없이 어찌 건너나(후렴)
를 여자들만이 시행하는 독특한 장례 풍습이다. 여인 찬아兒名 찬아 우리 찬아 내 장남 불쌍하네(후렴)
들이 부르는 상엿소리는 망자를 애도하는 애절함을 아홉 살 때 엄마 잃고 고생고생 다하다가(후렴)
한층 더 깊게 해준다. 장례 의식이 모두 끝나면 여인 당산할매 덕분으로 자식 낳고 잘 살구나(후렴)
들은 흥겨운 풍물 가락으로 봉분 주위를 돌며 상주를
위로하는 한편, 고된 장례 행사의 피로와 슬픔을 털어 개천을 건너고 상여 일행은 집 앞 모래사장에서 사당
낸다. 이처럼 연도여자상여소리는 비극적인 슬픔 속 에 있는 당산할매를 향해 상여 앞머리를 두어 번 들었
에서도 ‘내일’을 살아야 하는 섬 여인들의 숙명적 애 다 놓았다 하는 인사를 했다. 집 앞 모래사장을 한 바
환이 스며 있는 독특한 장례 풍습이다. 퀴 돌아 다시 배에 오를 때 앞소리꾼이 묘지로 떠나자
63
고 하면, 상여 배를 예인할 발동선이 용왕기, 만선기 루를 거쳐 마당으로 운구된다. 제상이 차려져 헌작하
를 달고 대기했다. 고 축을 고하며 곡을 하여 발인제를 지낸다. 망인이
장지는 연도 뒷산이지만 돌아가는 길이 없어 다시 배 정든 섬을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애도하는 자리다.
에 올라타 서쪽 해안에 접안해 힘을 모아 상여를 당김 제3과장은 ‘상여 운구’로, 상여는 망자의 집 앞에서 왼
줄로 이끌고 언덕을 올랐다. 묘혈 장소에 도착해 하 쪽으로 세 번 돌고 집을 향해 묵례하듯 숙였다가 출발
관 준비를 하고 상주는 옷섶으로 흙을 골라 관 위에 뿌 한다. 배는 장지인 이웃 솔섬을 향하는데 섬 앞에 이
렸다. 김학곤 앞소리꾼은 미리 준비한 화투를 관 위에 르러 연도를 바라보며 타원을 그리며 연도와 하직 인
묻었다. 평소 고인이 심심풀이 음료수 내기용으로 사 사를 한다. 제4과장은 ‘상여 안장 및 평토제’로, 배가
용하던 화투다. 저승에 갔어도 심심하지 말라는 마음 솔섬에 닿으면 미리 파둔 묘혈까지 비탈진 산길을 오
을 담은 것이다. 연도가 생긴 이래 가장 감명 깊고 아 르는데 이때 상두꾼뿐만 아니라 문상객까지 앞에서
름다운 장례라고 주민들이 입을 모았다. 줄을 끌어 운구한다. 다음은 흙이 귀한 솔섬에서 봉분
1981년, 이 장례 의식을 끝으로 연도상여소리는 막을 을 만들기 위해 여인들이 바지게, 삼태기, 함지 등으
내렸다. 그러나 진해문화원이 지난 4월 진해민속예술 로 흙과 잔디를 운반해 산에서 마지막 제사를 지낸다.
전수관에서 진해문화원 부설 연도여자상여소리전통 마지막 제5과장은 ‘귀환과 뒤풀이’다. 진혼 의식을 모
상례보존회 현판식을 했다. 본격적으로 연도여자상 두 끝낸 다음 상주와 슬픔을 함께한 모든 사람이 빈 상
여소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될 것인데, 박용출 선생 부 여를 싣고 오면서 망자의 혼을 위로하고 상주와 유가
친 이후로 또 다른 상여 장례가 있었다는 진술이 있었
으므로 연구가 진행된다면, 이후의 새 자료가 나올 가
능성이 있다.
64
족의 슬픔을 달래주려 흥을 한껏 돋운다. 그동안의 노
역과 슬픔을 잊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우스갯소리와 육담으로 치상治喪을 마을 축제의 장으
로 만들면서 비로소 막을 내린다.
65
맛있는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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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맑은 맛
전통 음청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삼국 시대에 식생활이 체계
화되면서 주식, 부식, 후식이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전통 음료는
후식류로 발달하게 됐다. 《양서梁書》의 <제이전 고구려조>에는
“고구려인들은 윤수潤水를 마신다”고 했는데, 이는 골짜기 물을
음청 의미했다. 이를 통해 과거에는 자연의 감수甘水를 가장 원초적인
음료로 즐겨 마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원시 식물의 꽃이나
열매를 음료 재료로 사용한 예를 중국 양대의 본초학이나 송대의
《본초도경》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대의 음청류 문화는 조선
시대에 차茶가 쇠퇴하면서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곡류
각종 의례에 따른 식생활이 반영돼 변화해 온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종류와 형태︑조리법이 다양했다 이
한국의 전통 음료는 예부터 차︑화채︑밀수
소화제로 좋은 음료 중 으뜸은 식혜
한국의 후식류이자 여름철 대표 전통 음료 중 하나인 식혜
飲
는 독특한 단맛과 우아한 고유의 향기를 가지고 있는 음청류다.
. 는 일상식︑절식︑제례︑대 소
淸
데, 생선에 곡물·소금·향신료 등을 넣어 삭혀 먹는 발효식품인 식
蜜水︑식혜︑수정과︑탕︑갈수︑즙︑타락 우유 등
해食醢에서 비롯됐다.
식혜의 맛은 엿기름가루에 달려 있다. 엿기름은 보리를 싹틔워
만든 것을 말한다. 엿기름가루가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당화 효소
인 아밀레이스Amylase, 아밀라아제가 많이 들어 있어 당화 작용을 일
으키고, 생성된 엿당Maltose은 식혜의 독특한 맛에 기여해 풍미를
·연회식 등
67
사랑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동 지역과 같이 고춧가루를 넣어 빨갛게 만든 식혜와 더불어
최근에는 밤을 넣어 만든 밤식혜나 고구마식혜, 단호박식혜 등
다양한 재료를 첨가한 형태의 기호 식품으로 상품이 출시되면서
젊은 층도 많이 찾는다.
68
56
78
69
문화
끼리
假
각 종교의 수호신에게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고 놀이를 거행하는 의식을
통해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한다.
축제에는 가면을 활용한 사례를
面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가면은 풍농
기원의 제의, 악귀를 쫓는 벽사 의식과
나례儺禮, 치병을 위한 무속적 제의
등에 폭넓게 사용되므로 그 의미와
기능이 매우 다양하다.
그 참을 수 없는
자유
70
티베트와 부탄의 참Cham 가면 부탄의 가면극 참은 체추Tshechu 축제에서 연행된다. 부 1 부탄의 가면극 참
〈죽은 자들에 대한
전 세계적으로 가면극을 테마로 한 축제는 많이 탄어로 ‘열째 날’이라는 뜻인 ‘체추’는, 부탄의 여러 지 심판의 춤〉 중
발견된다. 우선 티베트에서는, 매년 티베트력으로 6월 역에서 거행된다. 규모가 가장 큰 파로 체추 축제에서 빨간 황소 머리
가면의 락사
이 되면 달라이 라마의 여름 궁전인 노브링카 공원에 는 5일에 걸쳐 춤과 야외극, 전통음악 연주 등이 성대 랑고(왼쪽)와
71
2
2 인도네시아 발리섬 다섯 가지 번뇌, 또는 신위와 길상의 상징이다. 기반으로 하는 가면무용극으로, 두르가 여신이 악마
마스의 타만 프레
힌두사원에서 열린
선상가면은 대부분이 세속 인물로 수성壽星·화상·아 마히사수라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것을 이야기하
축제 쿠닝안의 와양 동·유학승 등이며, 면상이 평화로운 신들이다. 동물가 는 내용이다. 주제는 악을 상대로 한 정의의 승리다. 정
웡 〈라마야나〉
공연 장면. 왼쪽 면은 대체로 날짐승·길짐승·어류 등 세 가지 유형으로 의는 마하깔리두르가, 쿠마리, 마하락슈미 등 세 여신으
한가다(빨간원숭이), 나눌 수 있는데, 밀종의 많은 신이 모두 여기서 변화해 로, 악은 악마 daitya로 표현된다.
가운데 라마와
락스마나 오른쪽 만들어졌다.
하누만(하얀 원숭이).
주민 모두의 축제, 와양 웡
카트만두 계곡의 가면무용극, 인도네시아에서는 와양 웡Wayang Wong, 와양 또뼁
마하깔리 퍄칸 Wayang Topeng, 짤론Calon, 아랑Arang 등의 가면극이 전승
네팔의 인드라 자트라 축제 기간에 연행되는 마 된다. 발리섬에서 힌두사원의 생일 축제인 오달란은
하깔리 퍄칸Mahakali Pyakhan은 카트만두 계곡에서 전승 마을 주민 전체의 축제다. 주민들이 모두 신에게 바치
돼 온 가면무용극이다. 이 축제 기간에 마하깔리 퍄칸, 는 제사 음식을 준비해 오고, 경건하게 기원하면서 가
풀루 키시 춤, 바이라브 춤, 라케 춤, 개 춤, 어린이들의 면극인 또뼁, 그림자 인형극인 와양 쿨릿, 가면춤인 자
막대 춤, 대쉬 아바따라, 그리고 쿠마리의 가두행렬도 욱Jauk, 사자탈춤인 바롱 등을 관람한다. 발리섬의 우붓
연행한다. 마하깔리 퍄칸은 힌두교의 종교 텍스트인 에서 가까운 마스Mas의 마을 사람들은 쿠닝안 축제가
《마르칸데야 뿌라나》의 67장 ‘두르가 사프타샤티’를 열리는 동안 4일에 걸쳐 와양 웡 가면극을 공연한다.
72
이는 마을 사원의 생일 행사의 일환으로 펼쳐지는데, 프랑스에서는 이것이 ‘마르디 그라’라는 축제로 발전했 3 태국 ‘피(Phi) 타(ta)
콘(Khon)’ 축제의
내용은 인도 서사시인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를 다. 이 축제 기간에는 신분이나 성, 빈부에 따른 차별이 가면 가두 행렬.
연극화한 것이다. 사라졌는데, 자신을 숨긴 채 자유를 느끼고 싶어 하는 4 멕시코 우에호징고
카니발 퍼레이드의
인간의 욕구가 가면 축제로 발현된 것이다. 원주민 인디오 대대.
영혼 가면 축제, 태국의 피 타 콘 중미와 남미에는 현재 많은 가면무용과 가면극이 활 등에 박제된 동물,
과일, 짚단을 멨다.
태국 러이Loei 지방의 단사이Dansai 지역에는 ‘분 발하게 전승된다. 특히 멕시코, 과테말라, 볼리비아 등
루앙Bun Luang’이라는 3일간의 의식 중 일부로 거행하 지에서는 카니발, 수호성인 축제 등 여러 축제가 벌어
는 ‘피Phi 타ta 콘Khon’이라는 가면 관련 축제가 있다. ‘영 질 때 많은 가면무용 단체가 참가한다.
혼 가면 축제’라는 뜻으로 ‘피’는 영혼 혹은 유령을 뜻 멕시코 우에호징고 카니발에서는 행렬이 진행되는 가
하고, ‘콘’은 가면을 뜻한다. ‘피 타 콘’ 축제는 태국의 운데 등장인물의 가면과 의상, 총 따위의 도구를 통해
북동 지역에서 인기 있는, 지역적 의식의 일부로 음력
6월에 거행된다. 이때 수많은 사람이 가면을 쓰고 퍼
레이드에 참가하는데, 이 가면 퍼레이드가 ‘피 타 콘’
축제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다. 34
단사이는 오래된 국경 지방의 마을로 두 개의 오래된
왕국, 즉 태국의 아유다야와 라오스의 란창, 루앙프라
방이 만나는 지역이다. 원래 ‘피 타 콘’은 공동체 의식
의 일부로서 라오스의 란창에서 온 씨족들의 조상과
수호자 영혼들을 대접하기 위한 행사였다. 이 의식은
부처님의 전생담과 관련된 불교 관습과 결합해서, 영
혼들Phi을 거리로 내보내 함께 즐기는 공동체 축제의
일부가 됐다. 축제가 끝날 무렵 연희자들은 모두 가면
과 의상을 강으로 던진다. 이는 나쁜 것슬픔을 던져버리
는 의미를 담고 있다.
73
5
다. 이 전투는 다양한 형태의 멕시코 군대와 프랑스 군 을 몰아내고 상서로움과 길함을 불러오는 데 있다.
대의 행렬을 통해 재현되는데, 이들은 화약총을 요란 일본의 경우도 마을이나 고을 축제에 해당하는 각 지
하게 쏘아대며 푸에블라 전투를 재현한다. 토착 인디 역의 가구라神樂에서 가면극을 연행한다. 일반적으로
오는 익스틀리ixtle, 열대 아메리카산 용설란과의 섬유 일본의 가구라에서는 일본 전통 종교인 신도神道의 신
로 만든 긴 가발을 착용하며 등에는 박제된 동물이나 을 비롯해 불교적인 신, 조상신 등을 연극적으로 형
과일과 함께 큰 짚단을 멘다. 상화해 공연한다. 거기에서 천손계의 왕권 신화가 자
리하는 비중이 높다. 신화의 이야기를 극화해 보여주
중국의 나희와 일본 가구라 가면극 면서 국가체제에 대한 당위성과 정통성을 강조한다.
중국에서는 가면극을 나희儺戱라고 하는데, 대부 가구라에서 연출되는 이야기는 대부분 황실을 중심으
분 마을이나 고을 축제에 해당하는 원소절 무렵 연행 로 전개되는 문헌 신화의 내용이다. 특히 일본 신화의
된다. 나희는 지역에 따라 나당희儺堂戱·지희地戱·관색 전승지인 미야자키현에서는 시이바촌椎葉村의 〈다케
74
6 강릉관노가면극의 양반과 소매각시
6
7 7 봉산탈춤의 먹중들이 춤을 추는 장면
75
문화,
지금
하는
것
이게
내
스타일
1
이야
76
1 연진영 작가의 패딩 재고를 활용한 의자. 2 3
대림미술관에서 7월 25일까지 개최하는 <TONG’s VINTAGE 기묘한 통의 만물상> 전시의 출품작 중 하나다.
2 헌 물건에 주목해 전시를 기획한 대림미술관 외관
3 폐플라스틱을 새로운 활용 가치를 지닌 물건으로 재탄생시킨 ‘Playful Plastic’ 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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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윤리적 소비라고 일컬어지던 미닝아웃정치적·사회 로 벽면을 꾸며 따뜻하고 쾌적한 카페 공간처럼 꾸몄
적 신념과 같은 의미를 소비행위로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소비자운동이 다. 이들의 소비자 타깃이 인스타그램에 자랑할 수 있
지금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는 예쁜 공간에 민감한 20·30세대이기 때문이다. 아
행해지는 것이다. 특히 친환경적인 비건, 제로 웨이스 웃도어 스포츠 브랜드 파타고니아가 20대에게 인기
트Zero Waste에 민감한 20대들의 SNS에는 “동물실험 있는 것은 이 브랜드가 환경운동을 하기 때문만은 아
을 하지 않는 화장품으로 바꾸려고 하는데 비건 화장 니다. 폐플라스틱으로 만든 티셔츠가 아무리 의미가
품 추천해 주세요” 혹은 “OO라면 함량표 보니 비건이 좋다고 해도 예쁘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 지구를 구
아니네요. 고객센터에 문의하려고요” 등의 글을 심심 하자는 캠페인을 하는 브랜드의 디자인이 예쁘고 로
찮게 볼 수 있다. 천연 화장품이라 광고하는 브랜드의 고는 힙하니, 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인기 있는 기업
립스틱에도 알고 보면 뱀기름 등의 동물성 원료가 들 들은 메시지만 강조하지 않고 세련된 디자인과 사용
어갈 수 있기에 요즘 젊은 소비자들은 진짜 비건인지 감, 매력적인 카피로 유행을 선도한다.
더 꼼꼼하게 따지고 친환경 인증에 민감한 국가의 인
증표도 세심하게 챙긴다.
친환경적으로 예쁘고, #
친환경적으로 힙해야 한다
플라스틱에 대해서도 요즘 소비자는 민감하다. 4
실
천
5
경쟁이 치열한 새벽배송 업체들이 앞다투어 ‘친환경
포장’을 내세우는 것도 버려지는 플라스틱과 보냉제
에 대해 소비자들이 피로감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특
히 젊은 여성들의 트렌드에 민감한 화장품 브랜드들
은 친환경으로 진즉에 태세를 전환했다. 아모레퍼시
픽은 다 쓴 플라스틱 병을 가져오면 내용물만 채워갈
수 있는 리필스테이션을 오픈했고, 아로마티카 역시
가로수길에 제로스테이션을 열었다. 아로마티카 제
로스테이션에서는 업사이클링 작가들의 상품도 판매
하고, 버려지는 병뚜껑을 모아 비누 받침대를 만드는
공작 공간, 복잡한 플라스틱 분리수거법을 상세히 소
개하는 공간도 따로 존재한다. 이 화장품 기업들은 공
간을 머물고 싶은 카페처럼 조성했다. 식물과 원목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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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웨이스트
#줍깅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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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소식
《고령의 재실·정자·서원》
편저 이동훈│발행처·문의 고령문화원
한국문화원연합회
2021 제4차 이사회
한국문화원연합회는 6월 8일(화) 서울스퀘어 3층 회의실에서 제4
차 이사회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에는 김태웅 한국문화원연합회장
의장 등 이사 27명이 참석했으며 감사 2명이 배석했다. 이어진 회
의를 통해 ‘한국문화원연합회 정관 개정안 심의의 건’, ‘지방문화원
(표준) 정관 개정안 심의의 건’ 등 총 6개의 의안이 모두 원안대로
승인됐다. 한편 이번 이사회에서는 지방문화원과 연합회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이수영·염상덕·송시종 이사제30대 한국문화원연합회 회
장단에게 공로패 전달이 있었다.
2021 운영위원회
지난 6월 15일(화), 2021년 운영위원회 회의가 한국문화원연합회
회의실에서 개최됐다. 연합회 운영위원은 김진호서울 강서문화원장,
손영수부산 사상문화원장, 정군섭인천 서구문화원장, 우관제경기 파주문
화원장, 주기창강원 고성문화원장, 이관우충남 서천문화원장, 김현진전남
보성문화원장, 성수현경남 의령문화원장 등 8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날 회의에는 이관우 원장을 제외한 총 7명이 참석하여 2021 연
합회 주요 사업 및 발전 방안 등을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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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초 공예 Wancho crafts
완초(왕골) 공예는 여러 날 바래고 말린 완초를 엮는 손의 감각과 기술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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