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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RI MUNH WA

202 1 07

다 름과 닮음
| 화려함
과소 박함
예부터 강화 완초장의
정교한 솜씨는
우리나라 최고로
인정받았습니다.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한명자 완초장은
완초 본연의 질감에
색과 무늬를 더한 기교,
그 둘을 조화롭게 엮는
균형감각으로
완초 공예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명자 완초장 작품, <자연과 사람>,


조형미를 특징적으로 부각한
장식품으로 때에 따라
꽃병 기능도 겸한다.
표지 이야기

완초 공예는 완초왕골라 불리는 풀을 재료로 자리류와 용기류 등의 공예품을 만드는 민속 공예의 한 영역이다. 완초는 논 또는 습지에
서 자라는 1~2년생 풀로, 줄기로는 자리·방석·모자 등을 만들고 속을 말려 신·바구니·노끈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재료의 특성상 질
기고 투박한 멋이 있는 완초 공예품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중국과 교역 시 없어서는 안 될 중요 품목 가운데 하나였을 정도로 그
가치와 예술성을 충분히 인정받아 왔다. 완초장莞草匠은 완초를 선별하고 건조, 염색, 엮는 과정을 통해 무늬를 배치하고 색을 넣는 예
술적인 아름다움까지 부여해 기물을 완성한다. 우리나라의 소박한 풀로 전통과 현대의 감각을 날실과 씨줄처럼 교차하는 생활문화
유산인 완초 공예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더욱 사랑받길 바란다.
완초장 한명자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 17호 완초장 보유자) — 사진. 김현민
6

닿다
20

6
우리 고미술을 만나다 MEETING OUR OWN ANCIENT ART
태종대 | 장진성

Taejong Terrace | Chang Chinsung

22 방방곡곡 유랑기 WANDERING AROUND THE COUNTRY


익산에서 시간의 길을 잃다 | 오미연

Wandering Through Time in Iksan | Oh Miyeon

30 지역문화 이야기 LOCAL CULTURE STORIES


신발이 쌓아 올린 부산의 역사 | 동길산

Busan: History Built on Shoes | Dong Gilsan

38 문화탐구생활 CULTURAL EXPLORATION


떡살과 다식판, 살을 박고 염원을 담고 |
다름과 닮음

장상교
4 시선 1 Tteoksal and Dasikpan: Pressed Patterns and Infused Dreams | Jang Sanggyo
색色, 영원한 생명의 노래 | 이동국
44 한국 삶 LOVING KOREA
6 시선 2 본질의 색 | 엘렌 드장드르
생활 속에서 보고 느끼는 오방정색 | 문은배
Color and Essence | Helene Desandre

38
14 곁엣사람
본질을 해치지 않는 질박한 아름다움,
한명자 완초장 | 이은자

14

월간 우리문화 vol. 297 | 202 1 07


ISSN 1599-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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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R I MU N HWA * 이 책은 환경을 위해 FSC 인증을 받은 종이(한솔제지 인스퍼M러프)와
친환경 펄프로 생산한 종이(무림제지 네오스타 백상지)를 사용하였으며
A KOREAN LOCAL CULTURE
MONTHLY MAGAZINE 콩기름 잉크로 인쇄하였습니다.
나아가다
76 문화, 지금

50
친환경을 실천하는 것, 이게 내 스타일이야 | 김송희

80 문화소식
문화소식 및 편집후기

62
동하다

48 시와 사진 한 모금
쑥 | 유안진

50 문화원 탐방
1897년 근대 목포로 와보랑께요 | 김소연

58 과거를 쌓다 미래에 닿다
결국엔 아카이빙 결국엔, 문화원 | 음소형

62 지역문화 확대경
여성으로만 치러진 장례
연도여자상여소리 | 정남식

66 맛있는 한국
여름의 맑은 맛, 음청류 | 윤숙자

70 문화끼리
가면假面, 그 참을 수 없는 자유 | 전경욱

66
발행인 김태웅
발행일 2021년 7월 1일
편집고문 권용태
편집주간 한춘섭
편집위원 곽효환, 김두섭, 김시범, 김종, 유경숙, 장진성, 지두환
편집담당 음소형
발행처 한국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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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1


색 ,
영원한 생명의 노래
한국의 근현대는 흑백에서 컬러로, 그야말로 색의 대전환이었다.
이렇게 색으로 세상이 칠해진 이유는 일제 강점기라는 실존을 겪은 우리의 마음에 있다.
암흑천지의 세상이라 할지라도 화려한 색으로 망국亡國의 슬픔을 밝혀 이겨내고자 하는 염원.
작가들은 붓끝에 이것을 녹여낸 것이다.

눈을 뜨는 순간 인간은 색의 노예가 된다. 색을 떠나서는 단 눈이 부시거나 아득한, 황홀과 요명


한순간도 존재할 수가 없다. 우리가 평소 “밥을 먹고 옷을 입는 야채野菜가 자연에서 온 색이라면, 옷감이나 물감은 인공으
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색을 먹고 입는 것이다. 색동치마저고 로 만든 색이다. 자연의 색은 말 그대로 태양에서 온 색이다. 더 정
리도 상추쌈도 모두 색이다. 확히는 서로 다른 파장의 가시광선이 물체에 반사되면서 인간의
미술 전문 잡지 《아트인컬처》 6월호에 ‘이건희 컬렉션 근대 걸작 몸, 즉 눈과 뇌를 통해 색으로 감각되는 것이다. 무지개가 그 예다.
선’ 특집으로 소개된 작품은 유화油畵, 수채화 할 것 없이 온통 컬 이런 맥락에서 물질 그 자체가 색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색이 물질
러다. 클로드 모네 <수련>은 말할 것도 없고, 이중섭 <황소>, 백 을 규정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물체 고유의 색 또한 없다.
남순 <낙원>, 서진달 <나부>, 천경자 <꽃과 나비> 등에 이르기 요컨대 해가 뜨면 광활한 대지 위에 산과 나무, 들과 풀, 바다와 강
까지 색의 향연이다. 먹그림은 단 한 점도 소개되고 있지 않다. 필 들이 일제히 총천연색의 옷을 갈아입고 생명의 노래를 불러 젖힌
묵筆墨의 몰락 시대라 할 만하다. 다. 그야말로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 인간의 감각 세계는 황혜
한국의 근현대는 흑백黑白에서 컬러로 색의 대전환이었다. 일제 홀혜恍兮惚兮*한 황홀경에 빠져든다. 반대로 해가 지고 깜깜한 밤이
강점기라는 망국亡國의 슬픔을 이겨내고자 하는 작가마다의 염원 되면 아득하고 아득한 요혜명혜窈兮暝兮*의 우주 속에서 삼라만상
이 붓끝에 녹아나왔기 때문이리라. 전복적인 조형 언어를 자유 도 인간의 감각도 모두 잠에 빠져든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가물가물
자재로 구사하는 19세기 한국의 민화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한 현지우현玄之又玄*, 색의 심연이다. 마치 농담濃淡: 먹색의 진하고 연한
된다. 더 나아가서 빛의 이면인 색을 키워드로 보면 민화의 색은 * 황혜홀혜와 요혜명혜는 《노자》 21장에 나오는 말이다. 도(道)가 형상과 물체로
드러났을 때의 아름다움을 황홀한 색으로, 그윽하면서도 어두운 세계에 생명이
동시대 빛을 재발견해 낸 모네나 세잔, 고흐와 같은 서구 인상파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요명한 색으로 노래하고 있다. 현지우현은 《천자문》 중
작가들의 시각언어 혁명과도 궤를 같이한다. ‘천지현황(天地玄黃)’의 ‘검을 현(玄)’을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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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다이스 조선> 8곡병풍, 장지에 석채, 123 ×356cm, 개인소장. 500년 조선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이상향을 향한 바람이 세 번째 폭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오색영롱(五色玲瓏)한 옷을 휘감은 봉황(鳳凰)이 모란 위를 빙빙 돌며 내려앉을 태세다. 봉황은 군주를, 모란은 부귀영화를 상징한다.

정도과 윤갈潤渴: 필획에 먹물의 젖음과 마름의 차이로 무한대의 색과 마티에 뇌라는 인간의 주관에 의해 천변만화하는 색으로 번역된다. 극단
르까지 일체로 머금고 있는 동양의 먹, 묵墨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적으로 푸른 나뭇잎이 울긋불긋한 단풍이 돼도 색맹色盲에게는 언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황혜홀혜한 현상세계 제나 흑백으로 해석된다. 화장化粧에서 보듯 아름다움이 속임수나
와 요혜명혜한 본질의 존재 세계가 둘이 아님을 여기서 확인한다. 조작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예술 자체를 회의하게 된다. 즉 인간
의 지고지순한 영혼·정신세계를 그려낸 궁극의 그림도 물감 자체
색을 가지고 노는, 색계色界를 주무르는 예술 가 자연을 조작한 인조물이라는 점에서 색은 늘 주관적으로 해독
하지만 여기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물감 자체의 된다. “예술은 사기다”라고 한 백남준의 말대로라면 색이라는 물
성격이다. 안료나 식품 착색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오일이든 먹 질, 즉 물감에서부터 ‘사기’인 셈이다.
이든, 심지어 석채나 천연염료마저 예외 없이 자연의 빛을 인공 물론 여기서 ‘사기’는 ‘창조’라는 이름으로 작가가 자연의 질서 그 자
적으로 ‘조작造作’해낸 색소에서 비롯된 물감이다. 인간은 이런 물 체가 되는 과정에서 동반되는 처절한 고뇌와 싸움의 결정이다. ‘창
감을 가지고 내면세계와 외부세계, 즉 대상을 추상에서 구상까지 조創造’는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되는 유일무이한 길·도道로도 볼 수 있
마음대로 색칠하면서 시대와 사회를 재해석해 왔다. 그것이 바로 다. 그래서 색을 가지고 노는, 색계를 주무르는 예술이라는 이름으
예술의 역사이자 인류 문화이고 문명이기도 하다. 로 치는 사기는 무혐의로 뒤바뀐다. 인간과 자연이 색으로 결국 물
우리는 막연하게 상찬해 온 미美에 대한 기존 생각을 색이라는 잣 아일체物我一體가 되는 지점에서 치는 사기는 생명의 빛으로 직통한
대로 뒤집어 볼 수도 있다. 색 자체가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 다. ‘사기’가 ‘창조’로 도약하는 한가운데에서 시시각각 바뀌는 색으
이 감각하는 색은 이미 태양에서 출발할 때의 색 그대로가 아니다. 로 영원한 생명을 노래하는 예술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꿈이 된다.
서로 다른 파장의 빛은 물체에 선택적으로 흡수·반사되면서 눈과 글과 사진.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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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2

생활 속에서 보고 느끼는 오방정색


1

한국의 아름다움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오방정색이다. 더불어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는 상징성 역시 함께 이야기된다.
이런 상징적 색채관 뒤에는 한국의 살림집에서 볼 수 있는
생활의 색色도 존재하는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소중히 한 우리 민족의 마음이 담겨 있다.

1 경복궁 광화문의 3개 홍예문 중 중앙 홍예문 천장에 그려진 주작 한 쌍.


입에 염화보주를 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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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 上 南
적 상 남

靑 左 東 白 右 西
청 좌 동 백 우 서

黃 中
황 중

黑 下 北
흑 하 북

청·적·황·백·흑의 오방정색 도인 태극도에 그 원리가 기록돼 있다. “무극이 태극이며…”로


우리의 색을 대표하는 전통색은 오색·오정색·오방색·오채 기록된 우주의 생성 원리다.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지만, 정식 명칭은 황윤석의 《이수신편理數 이때 양이 동하고 음이 정하여 생성된 것이 5개의 기본 원소이자
新編》에 기록돼 있듯이 ‘오방정색五方正色’이다. 즉 논리와 철학 그 원리이며 이것이 오방정색의 근원이 된다. 이 근원은 청·적·황·
리고 우주의 원리에서 창조와 화합을 의미하는 완전체를 말한다. 백·흑의 다섯 가지 색으로 표현된다. 오방정색의 다섯 가지 색
여기에서 모든 것이 결합하고 분리되는 과정을 거쳐 만물이 만들 은 5계절과 5방위, 인생의 사주팔자 단계를 모두 설명한다. 그리
어지는 것이다. 음양의 원리는 중국의 제자백가 시대의 음양가에 고 이 다섯 가지 색이 상생과 상극의 원리대로 합해져 열 가지 간
서 시작됐지만 삼한 시대에 도입된 이후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 색을 만드는데 상생색으로는 훈색·규색·암색·정색·불색이 있고,
를 거쳐 조선 시대에는 그 철학과 상징성이 절정을 이루게 된다. 상극간색으로는 녹색·홍색·벽색·유황색·자색이 있다. 상생의 색
오방정색은 음양을 기초로 하는 주자의 철학인데 조선에서는 성 은 자신을 희생해 상대를 살리는 원리이고, 상극의 색은 상대를
리학의 대가인 퇴계 이황의 《퇴계집》에 기록된 성학십도의 제1 이겨서 자신을 나타내는 색이 된다.

2 오방정색의 개념도. 5개의 방위와 색채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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혓소리
치음

어금닛소리 잇소리
3 각음 상음

입술소리
궁음

목구멍소리
우음

오행의 질서와 원리를 따르다 신성한 색을 몸에 두르는 백의민족


대표적인 열다섯 가지의 상징색은 조선 시대 건물 단청이나 우리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색은 흰색이다. 우리나라는 예
색동옷 그리고 공식 행사에 사용되는 모든 기구와 장신구, 의복 로부터 흰옷 입기를 좋아하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이었다. 그 기록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공식적인 자리와 형식을 은 중국 문헌인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 부여인들이
지켜야 할 때 의도적으로 이런 오행의 원리와 오방정색을 철저하 백의를 입고 있었다는 데서 시작된다. 지금처럼 생활 속에서 색
게 적용해 의미를 부여했다. 세종대왕 때 창제된 훈민정음 역시 옷을 많이 입게 된 것은 광복 이후로 보는 경우가 많다.
오행의 원리와 질서에 따라 연관성 있게 창제됐으며, 소리의 기 흰옷은 색옷에 비해 더러워지기 쉽기 때문에 즐겨 입지 않는 것
본도 궁·상·각·치·우 5음계로 구성했다. 특히 5개의 자음은 4방위 이 보통인데 우리는 왜 백의를 즐겨 입었을까? 염색 기술이 부
와 중앙, 사계절과 늦여름, 물을 비롯한 나무·불·흙·쇠의 5원소와 족해서? 그렇지 않다. 1750년대의 궁중 옷을 보면 색에 대한 기
일치하며 색채와도 연관돼 있다. 신체 구조와 소리, 음양오행과 록이 1,400여 건 있으며 그중 홍색 계통이 915건을 차지한다. 나
색채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머지는 감색, 자색, 청색, 녹색 등으로 다양한 색상의 옷을 만들

3 오방정색과 훈민정음의 자음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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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입었다. 궁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궁 밖에서도 아이들은 신화에서 유래한 검은 물을 건너 검은 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색동옷을 입고 기녀들도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는 등 우리나라 죽음을 무섭고 어둡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복
는 한·중·일 삼국 중 가장 우수한 염색 기술을 보유한 민족이었 은 물론이고 상복으로도 백의를 널리 입었다. 이 세상을 떠나 태
다. 그런데도 백의를 즐겨 입고 항상 옷을 정갈하게 한 데는 이유 어나기 전 있었던 밝고 신성한 하늘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죽음
가 있다. 여러 이유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면, 우선 우리 민족은 에 담았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는 서양 문화가 많이 받아들여
신을 숭상한다. 즉 하늘을 숭상하고 떠받들기 때문에 우리나라 져 검은색 상복을 입는 경우가 많은데 죽음에 대한 해석으로 볼
의 산 정상은 대부분 ‘천봉’이고 높은 산의 이름에 백두산, 백악 때 우리 민족의 문화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산, 백록담흰사슴처럼 흰색이 들어간 경우가 많다. 신성한 것을 몸
에 두르고자 하는 사상이 급기야 백색 신앙까지 번져 순결과 결 자연을 닮은, 생활을 담은 ‘색’
백의 상징, 복록福祿의 상징, 지고무상의 신앙적 색깔로 굳어지게 상징색과 나란히 언급될 수 있는 색은 자연에서 오는 색이
되었다민속학회 1990. 자 우리의 살림과 함께했던 살림집의 색이다. 이 살림집의 색은
오행의 동쪽인 청색을 이기는 것이 백색이므로 금극목의 원리 단순하게 지역 재료를 사용했다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의 철학을
에 따라 동쪽의 청색 기운을 서쪽의 흰색이 이기고 살아가는 원 담고 있다. 단청 건물이 상위 문화와 상징체계의 색에 속한다면
리를 실천한 것이다. 생활과 관계된 문화의 색은 살림집의 소박하고 자연을 담은 색이
중국에서는 오히려 기근이 크게 들거나 홍수나 가뭄이 들면 임 다. 어느 지역에나 그 지역을 담고 생활의 문화를 담은 색이 존재
금이 백의를 입는다. 흰옷을 불길한 옷으로 여긴 중국인의 색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색을 보고 지역의 특성과 생활을 느낀다.
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 색들은 시간이 오래되고 폐쇄성이 강할수록 더욱 특색 있게
한편 서양에서는 검은 옷을 상복으로 입는데 이는 그리스 로마 나타난다. 우리의 살림집으로 보이는 초가와 소박한 꽃담이 그

4 경복궁의 단청. 오행의 원리에 따라 음양의 조화로운 색채로 구성돼 있다.


5 경복궁 강녕전 내부. 외부는 단청으로 화려해도 내부는 백색으로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다.
6 국보 제135호 《신윤복 필 풍속화 화첩》 중 <계변가화(溪邊街話)>에 담긴 빨래하는 아낙네의 모습. 하얀 옷이라 수시로 빨래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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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오방정색을 바탕으로 세상의 원리를 표현한 오승윤 작가 작품. <금강산>, 130×162.2cm, 2005, 캔버스에 유채
8 한글 ‘평창’의 자음과 눈꽃 모양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오방정색을 활용한 평창동계올림픽 엠블럼(왼쪽)과 평창동계패럴림픽 엠블럼(오른쪽)
9 제주도의 초가. 지역색과 자연색을 담고 있는 살림집
10 친화적 옹기의 색채. 지역의 흙으로 빚은 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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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0

예다. 현대에 와서 어떤 건축 기술이 발달하고 새로운 시도로 환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순치란 무엇인가? 순치는 자연을 길들여
경을 건설하려 해도 자연적으로 지속 가능하고 한정된 지역에서 사람에게 맞도록 하는 것이다. 밭을 만들어 경작하고, 흙을 반죽
존재하기 위해서 결국, 지역 고유의 자연색을 닮아가기 마련이 하고 구워 옹기를 만드는 것이 모두 해당한다. 바로 이 순치의 과
다. 지역의 소재와 자연 형태에 따라 생성된 것이 지역색이며, 민 정에서 지역성과 자연 친화적 아름다움이 경작 생활과 함께 지
족적 색채가 되고 지역의 특성을 강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역 색채를 결정하게 된다. 강한 자연은 강하게, 약한 자연은 약하
우리의 살림집 역시 이런 특성이 있으며, 황토와 짚과 적송의 색 게 우리에게 맞도록 순치되며, 사람 또한 자연에 순치된다. 외세
을 담은 자연과 조화되는 색이 되었다. 이런 색이 만든 것이 상징 의 영향이 적을수록 지역색은 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이렇게 억
적인 청자, 백자와 다른 생활 속의 옹기 색이 된 것이다. 옹기는 지로 만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자연 순치는 살림집의
계층을 초월한 실용적인 도자로 현대에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 서까래, 서원이나 기와집의 큰 기둥이 자연의 형태를 거스르지
옹기가 놓인 환경은 흰색과 검은색이 주조를 이루는 반가의 실 않고 원래의 모양인 휜 채로 사용된 것에서 볼 수 있다.
내가 아닌, 뒤뜰의 토담 아래 자리 잡은 뜰이다. 환경과 아무런 살림집의 색채는 그 지역의 흙을 견고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세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합하고 균형이 맞는 자리에 놓 가지의 흙과 짚을 섞어서 삼화토三和土를 만들어 토담과 벽을 세웠
은 것이다. 그리고 가장 편안한 공간이기도 하다. 다. 지역의 재료로 만들어진 삼화토는 당연히 지역과 생활의 색이
좀 더 깊이 있는 생활의 색과 살림집의 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되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세계적인 환경 색채 학자들이 지
‘한정限定’과 ‘순치馴致’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한정은 자연 역의 흙색에 집착하고 연구하고 수집하는 목적이 여기에 있다.
의 상태를 그대로 두고 자신의 영역을 정해서 터무니를 그린 것 간단하게 언급했지만 우리 민족의 색을 이야기할 때 항상 거론되
이다. 즉 자연에서 자신이 사용하고 빌려 쓸 영역을 한정해서 사 는 상징성과 내면세계는 오방정색과 생활 속의 자연색에서 찾을
용하겠다는 약속이며 최소한의 사용에 대한 스스로의 규정이다. 수 있다. 우리 문화를 이해하고 한결 심도 있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가끔 자신의 영역을 강조해서 배타적인 영역의 표시로 오해하는 상징색과 자연의 색을 차별성 없이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글. 문은배 청운대학교 교수, 한국색채학회 이사, 《한국의 전통색》, 《색채디자인


교과서》 등 저자 ― 사진 제공.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사진 1, 6),
문은배(사진 2~5, 9~10), 광주시립미술관(사진 7), 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및
동계패럴림픽대회 기념관(사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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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엣사람

본질을 해치지 않는
질박한 아름다움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7호 한명자 완초장

‘質勝文則野질승문즉야, 文勝質則史문승질즉사, “1970년대에는 서울 남대문에서 강화


文質彬彬문질빈빈 然後연후 君子군자’. 교동까지 완초 공예품을 사러 장사꾼들이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말이다. 직접 왔었어요. 언제까지 만들어달라며
바탕이 문양을 넘어서면 거칠어지고, 미리 선불을 주고 가는 장사꾼도
문양이 바탕을 넘어서면 겉치레가 되니, 있었고. 그러면 할아버지부터 부모님,
본질과 형식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저희 형제들까지 모두 매달려서 완초
‘완초왕골’라는 풀의 질박한 본질에 색을 입히고 엮어 공예품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어릴 때부터
최상의 형식으로 아름다움을 갖추게 하는 사람, 자연스럽게 완초를 접하게 됐어요. 그때
하루 16시간을 그렇게 앉은 자리를 지키는 사람, 완초로 만든 컵받침이 50원, 100원 했는데,
한명자 완초장을 만났다. 제가 만든 걸 팔아서 용돈벌이도 했죠.”

한명자 완초장은 완초 공예의 발상지로 알려진


강화도 교동도 출신이다. 우리말로 ‘왕골’이라 하는
완초는 뿌리, 잎, 줄기, 이삭과 꽃으로 구분하는 1~2
년생 풀이다. 화문석 재료로 쓰이는 줄기는 일반적으
로 1.5~2m까지 자라지만 종류에 따라 다르다. 조직
이 질기고 탄력이 좋은 것이 특징인데, 줄기의 속은
빈 공간이 있어 부드럽고 푹신하기 때문에 공예 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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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말린 완초에 염색을 한 후 선별하는 작업이 끝나면 도안을 참고해 끊임없이 날줄과 씨줄을 엮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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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탁월하다. 습기에 약하긴 하지만 잘 삶고 여러 번 조금 일찍 수확하고, 무늬가 없는 초석에 쓰이는 질
말린 덕분에 일반 가정에서 관리하는 데에는 문제가 긴 완초는 완전히 자라서 줄기가 누런색이 될 때까지
되지 않는다. 특히 강화 지역 완초는 부드럽고 촉감이 기다렸다가 수확한다.
좋아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교동도 주민 대부분이 집 완초장은 완초를 재배한 후 선별 가공하는 기능, 완
에서 완초 작업을 했기에, 한 완초장은 어릴 때부터 초에 물감을 들이는 염색처리 기능, 염색 완초의 적
자연스럽게 집안 어른들이 완초 만지는 모습을 보고 절한 배열로 미적인 요소를 살려내는 기능까지 3단
자랐다. 계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장인을 말한다.

“내후년이면 제가 완초에 입문한 지 “완초 공예품은 100% 수작업으로 만들어요.


50년이에요. 완초 냄새도 맡기 싫은 완초를 논에 심고 재배해서 수확하고,
침체기도 있었지만, 햇볕에 말려 바래는 과정을 거칩니다.
지금도 완초를 잡으면 설레고 재밌어요. 그 후에 잘 말린 완초에 화려한 색으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고. 염색을 하고, 구상한 작품에 맞는
완성된 작품을 보면 내가 만들어놓고도 완초를 선별해서 날줄을 꼬아놓으면
‘내가 이걸 어떻게 짰을까’ 싶은 게 많아요.” 재료 준비는 끝입니다.
이제 도안을 참고해서 날줄과 씨줄을
더 많은 사람에게 엮어나가면서 짜는 일만 남은 거죠.”
완초 공예 알리고픈 사명감
완초는 벼농사와 함께 우리나라 여름 기후에 가 화장실 갈 때와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16시간
장 알맞은 작물로 벼와 마찬가지로 모판에서 따로 모 을 꼼짝 않고 앉아 있던 적이 허다했다. 예전에는 완
를 기른 다음 논에 옮겨 심고 가꾼다. 그러나 벼농사 초에 많이 찔리고 베였는데, 이젠 그것도 인이 박였노
보다 재배 방법이 쉽고 생육 기간이 짧아 물 빠짐이 좋 라고. 완초 공예는 인내심과 참을성 그리고 지난한 시
지 않고, 유기물량이 너무 많아 벼농사에 알맞지 않은 간의 결과물이다. “내 머릿속에 디자인을 그려놓고 그
논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수확할 때가 그림대로 짠다”는 한 완초장의 기술은 화려한 색의 조
되면 쓰러지지 않도록 줄기를 묶어주고, 논에 물을 빼 화와 정교한 짜임새로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건조시켜야 한다. 한명자 완초장은 최고의 실력만큼이나 화려한 경력
보통 남부지방에서는 6월 상순에서 중순경에 수확 을 자랑한다. 1994년, 1996년 전국공예품대회 동상,
하고 중부지방은 8월말 전후인데 시기는 용도에 따 2000년 전국공예품대회 한국무역협회회장상, 2006
라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화문석에 쓰는 년 인천시 공예품대회 대상 등 총 70여 회의 상을 받
완초는 색이 선명하고 염색이 잘 되어야 하기 때문에 았다. 2002년에는 문화예술 부문 신지식인으로 선정

17
됐으며, 2008년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7호 기능
보유자로 지정됐다. 또 강화군 농업대학과 김포시 엘
리트농업대학에서 완초공예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
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여성복지관과 근로청소년복
지관에서 완초 공예를 가르쳤다.

“제가 여러 대회에서 상을 타면서


개인적인 이력은 화려해졌지만,
대중은 여전히 완초 공예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이러다가는 완초 공예가 사장死藏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에 학교 강의도 하고,
복지관에서 수업도 했어요.
그때 가르쳤던 제자들이 대회에 나가서
상도 타고, 완초 공예 작가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죠.”

《삼국사기》에 왕실에 필요한 자리나 공예품을 제작


해서 납품하는 전담 기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
으로 보아 완초 공예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
라간다. 또 조선 시대에는 완초가 중요한 교역품으로
자주 등장하면서 완초 공예품의 수준이 높았음을 짐
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서둘러 변화했고, 완
초는 강화도의 지역 특산품으로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한 완초장은 더 많은 사람이 완초 공예품을 실생활에
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전에 완초 공
예품은 ‘깔 것’과 ‘용기’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완초의
염색과 굵기의 조절에 따라 다양한 제품을 만들 수 있
다. 실제로 한 완초장은 목걸이, 머리핀, 보타이처럼

한명자 완초장은 더 많은 사람이 완초 공예품을 실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은 장식품과 완초 공예품으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수막새문양방석, 다과용기와 접시류, 꽃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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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용품은 물론 찻잔, 화병, 테이블 등 실생활에 사 한 완초장은 반세기 가까이 시간을 보냈지만 완초가
용할 수 있는 완초 공예품도 만들고 있다. ‘여전히’ ‘아직도’ ‘미치도록’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완
초 공예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보존해야 한다는
‘기승전완초’, 사명감을 가슴에 품고 있다. 한명자 완초장이 어릴 때
그렇게 완초장이 된다 부터 자연스럽게 완초를 접해 완초장이 된 것처럼, 지
금 두 아들도 그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인천무형문화
“우리 부모님 세대가 활동하던 재 전수교육관에서 항상 함께하는 남편 최낙원 씨도
1950~1960년대 완초 공예는 깨끗하고 완초 공예 이수자다.
단조로운 방식을 추구했어요.
종류도 자리나 방석, 함 정도였죠. “유치원 때부터 제 무릎에 앉아
하지만 현재는 못 만드는 게 없어요. 완초를 만지면서 자란 큰아들은
전통 방식을 기반으로 엮는 기법은 완초만큼 매력적인 재료가 없다고 해요.
그대로지만 문양, 테크닉, 섬세함 같은 염색과 형태에 따라 화려함과 질박함을
부분에서 다양해졌어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고요.”

실제로 한 완초장이 완초 공예 체험 프로그램을 한명자 완초장은 제자(이수자, 전수 장학생)와 일반


진행하는 인천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완초 공방에는 인을 대상으로 개인 지도와 작품 활동을 병행한다. 또
목걸이, 보타이, 머리핀처럼 장식품은 물론 찻잔, 화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과 인천무형문화재 전수
병, 차 테이블 등 상상도 못 한 다양한 작품이 전시돼 교육관에서 열릴 <전통 공예의 미탐구Ⅲ>와 <풀에 색
있다. 을 입히다>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완초 공예 입문
50주년이 되는 2023년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개인
“완초는 겉면이 매끄럽고 광택이 있습니다. 전시회를 열 계획인데 이것도 틈틈이 준비한다.
부드럽고 질기지만 유연한 힘을 지니고 있죠. 다시 인터뷰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그가 입은 화려한 한
각양각색으로 물든 완초를 복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완초를 말
한 올씩 엮어가다 보면 완초 본연의 하는 그의 얼굴이, 인터뷰 내내 작업을 멈추지 않던 손
질박한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어요. 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렇게 그는 완초장이 된다.
완초 공예품은 골방망이질을 하면서 생긴 그
형태가 오랫동안 견고하게 유지됩니다.”

글. 이은자 편집팀 — 사진. 김현민

19
우리
고미술을
만나다

국립중앙박물관
종이에 담채(淡彩), 32.8×53.4 cm,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1757년경,
강세황(姜世晃, 1713~1791), <태종대(太宗臺)>,
태종대 太宗臺
1713년 강세황은 남소문동에서 예조판서를 지낸 강
현姜鋧, 1650~1733의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강
백년 姜柏年, 1603~1680 또한 예조판서를 지낸 고위 관료였
다. 이와 같이 명문가에서 태어난 강세황의 인생은 순조
로울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당파黨派가 소북小北이었

National Museum of Korea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32.8×53.4 cm,
from Journey to Songdo, datable to 1757,
Gang Sehwang (1713–1791), Taejong Terrace,
던 그의 집안은 노론老論이 정국政局을 주도하던 영조英祖, 재
위 1724~1776시대에 정치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그 결
과 강세황은 벼슬할 뜻을 버리고 32세 때인 1744년에 처
가가 있는 경기도 안산으로 이주하였다. 1756년 궁핍한 가
정의 생계를 책임진 아내 류씨柳氏가 영양실조로 고생하다
가 전염병에 걸려 4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아내의 죽음
으로 충격에 빠진 강세황은 그 이듬해인 1757년45세에 송
도유수松都留守 이던 오수채吳遂采, 1692~1759의 초청을 받아
송도현재의 개성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송도와 그 주변의 명
승지를 관람하고 이 여정을 기록한 《송도기행첩松都紀行
帖 》을 제작했다. 《송도기행첩》 안에는 명암법明暗法 과 일
점투시도법一點透視圖法이 사용된 그림이 들어있다. 따라서
1757년 이전에 강세황이 이미 서양화법西洋畵法에 대한 깊
은 이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도기행첩》에 들어있는
Taejong Terrace
<태종대太宗臺>는 그가 명암법을 어떻게 구사했는지를 잘 보
여준다. 태종대는 개성 북쪽에 있는 성거산聖居山의 명승지名
In 1713, Gang Sehwang was born the youngest son of the nine chil-
勝地 중 하나로 맑은 시냇물, 편평한 바위, 거대한 입석立石, 기 dren of Gang Hyeon (1650–1733), who served as Minister of the
이한 노송老松으로 유명했다. 화면 오른쪽에는 더위 때문에 Board of Rites and lived in Namsomun-dong, Seoul. His grand-fa-

시원한 시냇물에 왼발을 담그고 있는 인물이 보인다. 그 옆에 ther Gang Baeknyeon (1603–1680) was a high-ranking govern-
ment official who had also held the post of Minister of the Board
는 너무 더워서인지 체면 불고하고 웃통을 벗은 사람이 보인 of Rites. Born into such a distinguished family, Gang Sehwang’s
다. 양반兩班도 더위는 참을 수 없는지 이 사람은 아예 갓도 버 life was expected to be an easy one. However, during the reign

렸다. 더위는 누구도 참기 힘들다는 것을 이 그림은 보여준 of King Yeongjo from 1724 to 1776, with the Old Doctrine faction
(Noron) dominating the political landscape and Gang Sehwang’s
다. 한편 이들 옆에는 두 명의 시동侍童이 보인다. 화면 앞에는 clan being affiliated with the Lesser Northerners (Sobuk), his
그림을 그리려고 종이 두루마리를 펼쳐 놓은 채 앉아 있는 인 family was completely alienated from politics. As a result, Gang

물이 나타나 있는데 이 사람은 강세황 자신으로 생각된다. 바 Sehwang forewent his political ambitions of government service
and in 1744, at the age of 32, moved to Ansan, Gyeonggi-do, where
위에는 먹의 농담濃淡을 통해 명암이 잘 표현되어 있다. his in-laws’ home was located. In 1756, his wife, Lady Ryu, who
글.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had been the breadwinner of the impoverished family, caught

20
MEETING OUR OWN ANCIENT ART

an infectious disease while suffering from malnutrition and died degree holders) nobleman with his left foot resting in the cold
at age 44. Saddened and depressed by his wife’s death, Gang stream, possibly due to the heat. Next to him is another nobleman
traveled to Songdo (present-day Gaeseong) the following year in sitting topless, at the risk of dishonor, probably because he could
1757, his age 45, at the invitation of the Magistrate of Songdo, O not endure the insufferable heat as well. Heat obviously being
Suchae (1692–1759). After visiting many scenic spots in Songdo unbearable to even an aristocrat, this man has taken off his gat
and its vicinity, he produced the album Journey to Songdo, which (Korean traditional hat) entirely. This painting shows that hot
is a record of that trip. This album contains paintings by Gang weather is intolerable for everyone regardless of rank. Meanwhile,
Sehwang using the methods of chiaroscuro and one-point per- two young attendants are seen standing next to the noblemen. In
spective (or linear perspective), indicating that he had acquired the foreground of the painting is a seated man with a paper scroll
a deep understanding of Western painting techniques prior to rolled out, ready to make a painting, who presumably represents
1757. Taejong Terrace, a leaf from the album, shows his masterful Gang Sehwang himself. Using the tonal gradations of ink, he elab-
use of chiaroscuro. Taejong Terrace, a scenic location on Mount orately depicted the light and shade of the rocks.
Seonggeo in the north of Gaeseong, is famous for clear streams,
flat rocks, enormous boulders, and eccentric old pine trees. Por-
Written by Chang Chinsung, Professor of East Asian art in the Department of Ar-
trayed on the right side of the painting is a yangban (officials and chaeology and Art History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21
방방
곡곡
유랑기

22
WANDERING AROUND THE COUNTRY

익산에서 시간의 길을 잃다
익산은 자세히 봐야 진가를 드러낸다. 초록이 무성한 너른 들판 곳곳에 백제의 숨결이 녹아 있고
매일 지나치는 시장 골목에는 근대사가 우뚝 서 있기도 하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재미가 더해지는 익산 여행은 현재의 시간에서 찬란한 흔적을 찾는 보물찾기와도 같다.

Wandering Through Time in Iksan


Iksan needs to be viewed up close for its true value to reveal itself.
The history of the Baekje Kingdom lives on in its broad, green fields
and modern history stands proud in the market streets its residents walk through every day.
With more enjoyment to be discovered the more you see and learn, a visit to Iksan is like a treasure hunt in
which seekers find splendid traces of the past within the present.

1 백제의 염원만큼이나
웅장하고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춘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멀리 보이는 동탑
The west stone pagoda
(front) and the east stone
pagoda (back) at the
Mireuksa Temple Site
flaunt a structural aesthetic
as grand and beautiful
as the Baekje Kingdom’s
hopes

23
I ksan National Museum and Mireuksa Temple Site
stand as one
Iksan is famously representative of the culture, art, and technology
of the Baekje Kingdom. As I visited the grounds of the Mireuksa
Temple Site (Historic Site No. 150), I yearned to sense the Baekje
people’s fervent hopes for their kingdom’s revival 1,500 years ago.
Across the green fields and slopes of Mireuksan Mountain,
signs reading “under excavation” and “currently being restored”
outlined a leisurely landscape. Only traces of the Baekje Kingdom
remain today, which means that some information is needed to fill
in the many blanks. Fortunately, Iksan National Museum, at the
entrance to the Mireuksa Temple Site, can help in this task.
Opened in January 2020, Iksan National Museum is
closely integrated with its neighboring historic site, located just
2 to the southwest of the site of Mireuksa Temple—the largest
Buddhist temple from the Three Kingdoms era. The museum
‘미륵사지와 한 몸처럼’, was designed so as not to detract from the temple’s landscape;

국립익산박물관
indeed, from a distance, it simply looks like an expanse of grass.
As visitors follow the long path downhill into the museum, they
익산은 백제 문화와 예술, 기술이 집약된 곳으로 are greeted by a model of the temple’s wooden pagoda. The

유명하다. 1,500여 년 전, 백제 부흥을 향한 백제인의 model was produced at 1/20th scale, showing what the pagoda is
believed to have looked like based on what remains of it on the
뜨거운 염원을 마주한다는 기대감으로 미륵사지사적 temple grounds. Even so, I could sense the grandeur. I walked a
제150호를 찾았다.

푸른 들판과 녹음이 우거진 미륵산, 군데군데 발굴・


복원 중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한가로운 풍경을 이루
었다. 백제의 흔적만 남아 여백이 많은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 다행히 미륵사지 초입에
‘국립익산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 1월 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은 삼국시대 최대
규모의 불교사원인 미륵사지 남서쪽에 자리한 유적
밀착형 박물관이다. 멀리서 보면 잔디밭으로 보일 만
큼 미륵사지 문화재의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조화
롭게 설계되었다. 긴 내리막길을 따라 국립익산박물
관에 입장하면 미륵사지 목탑 모형이 관람객을 반긴
다. 미륵사지에 터만 남아있는 목탑의 형태를 추정해
20분의 1로 축소했음에도 웅장함이 느껴진다. 탑돌
이 하듯 미륵사지 목탑 모형을 한 바퀴 돌아본 뒤, 전
시실로 향한다. 상설전시실은 익산백제실, 미륵사지
실, 역사문화실로 순서대로 관람하면 된다.

2 국립익산박물관 로비에 전시된 미륵사지 목탑 모형


3 미륵사지 문화재의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조화롭게 설계된 국립익산박물관
4 익산 왕궁리유적 오층석탑 기단부 주춧돌의 사리 구멍에 안치되어 있던
‘왕궁리유적 오층석탑 부처’
5 고구려부터 조선까지 다양한 시대의 막새기와를 살펴볼 수 있는 미륵사지실

24
lap around the model pagoda—as though performing the ritual 4
of pagoda circling (tapdori in Korean)—and then headed toward 5

the exhibitions. There are three permanent sections, which


can simply be viewed in order: “The Bakeje Kingdom in Iksan,”
“Mireuksa Temple Site,” and “History and Culture.”
The section “The Bakeje Kingdom in Iksan” details the
history of Iksan, which was a new city when Baekje’s capital
was the city of Sabi, and the culture of the late Baekje era, when
the kingdom reached the peak of its maturity and elegance.
“Mireuksa Temple Site” displays a pair of ridge-end tiles (chimi)
that resemble two enormous wings. Inside, it provides a vivid
account of the temple’s history from the Baekje era through the
period after the Imjin Waeran in the late 16th century. “History
and Culture” includes relics from the Bronze Age and early Iron
Age, offering an opportunity to observe the ancient history
and culture of Iksan and the northwest part of Jeollabuk-do.
There is also a special exhibition section that hosts limited-run
exhibitions on particular themes; running through August 29,
2021, is an exhibition titled Iron Buddha Sculptures in Gangwon
and Jeonbuk. As I moved through the sections, I was impressed
by the well-organized viewing routes based on topic and era,
the high level of focus on the relics, and the use of audiovisual
materials in addition to the items on display.

2 A model of the wooden pagoda at the Mireuksa Temple Site


displayed in the lobby of Iksan National Museum
3 The Iksan National Museum was designed to blend
seamlessly into the landscape of the Mireuksa Temple Site
4 A figure of Buddha that was found enshrined inside a śarīra
reliquary in the cornerstone of a five-story stone pagoda at
the Wanggungni Historic Site in Iksan
5 Different maksaegiwa (antefixes) from the Three Kingdoms
period to the Joseon Dynasty on display in Iksan National
Musuem’s Mireuksa Temple Site Room

익산백제실은 사비 백제의 신도시였던 익산과 가장


완숙하고 우아한 백제 후기의 문화에 관해 알려준다.
거대한 날개처럼 보이는 한 쌍의 치미가 있는 미륵사
지실은 백제부터 임진왜란 이후까지 미륵사의 역사를
생생히 전한다. 역사문화실은 청동기, 초기 철기 유물
까지 전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익산과 전북 서북부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특별전시실에서는 일
정 기간 특별한 주제를 가진 기획전시를 선보이는데,
올해 8월 29일까지 <불심 깃든 쇳물, 강원과 전북의
철불> 특별전을 개최한다. 전시실마다 주제와 시간에
따른 관람 동선이 잘 정리돼 있고 유물에 대한 높은 집
중도, 전시물과 시청각 자료의 활용이 인상 깊다.

25
Envisioning the Baekje Kingdom’s hopes
Recalling the things I had seen at the museum, I made
my way to a location where I could view the Mireuksa
Temple Site directly. The view consists of two ponds,
a pagoda, and the tall green heights of Mireuksan
Mountain in the background. I walked slowly toward
the temple grounds, the two ponds on either side of
me. Just as I began to feel a bit disappointed at the lack
of lotus flowers on the ponds, I spotted a willow tree,
its branches waving in the wind. Back when the tem-
ple grounds were being excavated, the pond’s bed was
surveyed. Analyzing a section of the pond’s bed with
layers of clay and leaves, it was revealed that the leaves
had come from willow trees. I found myself marveling
at the vitality of the trees that had stood in one place,
watching over a history that dated back to the Baekje
era—or possibly even earlier.
Past the ponds, I arrived at the temple’s stone
flagpole pillars (National Treasure No. 236), which
mark the temple’s entrance. I took a long look, re-
calling a model of Mireuksa Temple that I had seen
in the temple exhibition section. Like something out
of a TV show or movie, I turned my eyes and saw the
wall, the pagoda, and the temple proper appear in
front of me. It was humbling to imagine the scale of
it: its gates (east, central, and west), its wooden pago-
6
da and two stone pagodas, its three main buildings—
all of that and more filling an area measuring around
마음으로 그려보는 백제의 염원 25,000 pyeong (or around 83,000 square meters).

박물관에서 살펴본 내용을 되새기며 미륵사지 Today, you can find the two stone pagodas on the
temple grounds: the east pagoda and the west pagoda,
를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두 the latter also known as the Stone Pagoda at Mireuksa
개의 연못과 탑. 그 뒤를 받치고 있는 높고 푸른 미륵 Temple Site, Iksan (National Treasure No. 11). The

산이 전부다. 천천히 미륵사지를 향해 걸으면, 양옆으


로 연못이 파여 있다. 연꽃 없는 휑한 연못이 아쉽게 7
느껴질 때,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미륵사지 발굴 당시, 연못 바닥을 조사했다. 바닥 단
면에 층층이 쌓인 점토와 낙엽을 분석한 결과 버드나
무의 낙엽으로 밝혀졌다. 백제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한자리에서 모든 역사를 지켜본 나무라니 그 생명력
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연못을 지나 사찰 입구를 알리는 미륵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236호 앞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미륵사지 전시실
에서 본 미륵사 복원 조형물을 떠올리며 다시 바라본
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듯 눈을 돌리는 곳에 담이 생
기고 탑이 쌓이고 사찰이 생긴다. 약 2만 5,000평 위에
동문, 중문, 서문, 목탑과 2개의 석탑, 3개의 금당 등이
빼곡히 지어졌을 것을 생각하면 미륵사의 규모에 절로

26
6 1993년에 복원된 동탑 way they look today is very similar to their original 고개가 숙여진다.
7 미륵사지를 굳건하게 appearance. While the east pagoda has been restored 현재 미륵사지에는 2개의 석탑이 있다. 동탑과 익산
지키고 있는 동탑과 and appears intact, one side of the west pagoda has
서탑
crumbled away. There is a sad historical reason for this: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인 서탑이다. 동쪽과 서쪽에
8 보물 제1991호 익산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concrete was 놓인 석탑은 원래 똑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복원을
미륵사지 서탑 출토
poured to keep the collapsed portion from crumbling 통해 완전한 모습을 보이는 동탑과 다르게 서탑은 한
사리장엄구
any further. Between 2001 and 2017, meticulous resto-
9 미륵사지 석탑의
ration efforts in which the concrete was removed and
쪽이 흘러내린 모양새다. 여기엔 아픈 역사가 있다. 일
네 귀퉁이에 놓인
미륵사지 석탑 석인상
the original stone was used to recreate the pagoda were 제 강점기에 무너진 것을 콘크리트를 쏟아부어 무너
carried out. In the process, a śarīra reliquary was found 지지 않게만 유지해 왔다. 이후 2001년부터 2017년까
in 2009 in the pillar stone (simjuseok) of the first tier.
This meant that sacred remains of the Buddha (jinsin
지 콘크리트를 제거하고 원래 있던 돌은 살리는 정밀
sari) had been enshrined inside the temple’s stone 한 복원 작업을 진행하던 중 2009년, 1층 심주석에서
pagoda. Encountering traces not only of the Baekje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는 미륵사지 석탑에 진
Kingdom but also of the Buddha himself left me feeling
like I was walking through time.
신사리가 봉안되었음을 의미한다. 백제는 물론 부처
To those who seek an even more mysterious 의 흔적까지 만나 보니 시간의 한가운데를 걷는 기분
6 The east pagoda
journey through time, I recommend heading toward 이 든다.
restored in 1993
the temple site’s tile kiln. If you travel about 20 me-
7 The east and west 조금 더 신비로운 시간여행을 하고 싶다면 미륵사지 기
pagodas keep careful
ters toward the mountain, you will see a hiking trail
watch over the between the fences. Passing along the narrow forest 와 가마터로 향하는 것도 좋다. 미륵산 방향으로 20m
Mireuksa Temple Site trail, you will come to Hwasanseowon. This seowon 정도 이동하면 울타리 사이로 미륵산 둘레길이 이어진
8 The śarīra reliquary (Confucian academy) was first built in 1657 to com-
excavated from the memorate Joseon-era scholar Kim Jangsaeng. It was
다. 좁은 숲길을 지나면 화산서원이 나온다. 화산서원
west pagoda at the demolished in 1868 after Prince Regent Heungseon 은 1657년, 조선 후기 김장생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된
Mireuksa Temple Site
Daewongun ordered the abolition of all seowon; in 후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없어졌
(National Treasure
1968, it was restored. Today, it serves to enshrine
No. 1991) 다가 1968년 복원됐다. 지금은 위패를 모시는 사당 구
ancestral tablets. Behind Hwasanseowon are several
9 One of four stone
forest trails leading toward Mireuksan Mountain, as 실을 하고 있다. 화산서원 뒤로는 미륵산으로 향하는
markers placed at
the corners of the well as a bamboo trail that takes one to Guryong Vil- 여러 숲길과 구룡마을까지 대나무숲길이 이어진다. 역
west pagoda at the lage. Both are excellent options for those who wish
Mireuksa Temple Site to enjoy a trek through history and nature.
사와 자연이 함께하는 트레킹을 즐기기 좋은 길이다.

8 9

27
10 11

10 당시 이 지역의 상권과 상업 건물의 특징을 보여주는 예전 신신백화점 건물


11 출출함을 채워주는 ‘승진바지락칼국수’ 가게의 팥죽
12 1960년대 주단 거리가 번창하면서 신축된 상점 건물인 서울 양행 건물
13 익산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의 출발점이 되는 3.1 독립운동기념공원

 omri Modern History and Culture Space:


S

100년 전 시간이 멈춘 곳,
A century-old moment frozen in time
I made another leap in time, this one taking me back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 to the present. The mouth-watering smell of fried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현재로 돌아왔다. 침샘을 chicken had me thinking my time-traveling had
finished. But as I walked through Iksan’s side streets
자극하는 치킨 냄새가 가득하니 시간여행이 끝났다 and discovered the buildings there, I could feel my
고 생각했다. 하지만 골목을 걸을수록, 건물들을 발견 eyes widening. I had gotten lost in time again in

할수록 눈이 점점 커진다. 100년 전 모습으로 현재를 Somri Modern History and Culture Space, where the
city exists today the way it looked 100 years ago.
살아가는 ‘익산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에서 시간의 Back in the days when Iksan was known as Iri,
길을 잃은 것이다. Somri Market was established as people gathered

익산이 이리裡里로 불리던 시절, 1914년 들어선 동이 around East Iri Station, which was built in 1914.
Known today as Nambu Market, it was the historical
리역을 중심으로 사람이 모이면서 솜리시장이 형성 backdrop for a demonstration for Korean indepen-
됐다. 현재 남부시장으로 불리며 1919년 4.4 만세운 dence that took place on April 4, 1919; today, it faces

동이 펼쳐진 역사적 장터로, 3.1 독립운동기념공원과 a park commemorating the March 1 Movement.
After Korea’s liberation, streets devoted to silk and
마주 본다. 광복 이후 남부시장 주변으로 주단거리, sewing cropped up around Nambu Market, which
바느질거리 등이 형성돼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continue to operate today. Despite the passage of

시간이 지났지만, 이곳은 곳곳에 그때의 흔적을 고스 time, evidence of past eras can be found all around.
Ten buildings are designated as National Registered
란히 남겨두었다. 그중 역사,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 Cultural Heritage Nos. 763-1 through 763-10 in rec-
은 건축물 10채가 국가등록문화재 제763호로 지정 ognition of their historical and cultural value, and

됐고, 익산시 인화동 일대가 익산 솜리 근대역사문화 the area around Iksan’s Inhwa-dong neighborhood
is now known as the Somri Modern History and
공간으로 지정됐다. 국가등록문화재 제763-1호부터 Culture Space. The ten buildings can all be reached
10호는 모두 도보로 이동할 수 있지만, 안내판이 눈에 on foot, although the signage is not obvious, and it is

띄지 않아 잘 살펴보아야 한다. easy to miss them if you aren’t looking carefully.


The Somri Modern History and Culture Space
익산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 산책은 3.1 독립운동기 walk begins in front of the March 1 Movement Me-
념공원 앞에서 시작한다. 등록문화재는 제763-1호는 morial Park. Heritage No. 763-1 is the former Daegyo

28
12 13
10 The old Shinshin Department Store building is
characteristic of the local commercial district and
architecture at the time
11 The patjuk (red bean porridge) served at Seungjin Bajirak
Kalguksu makes a perfect snack
Farms building, which belonged to a Japanese farm
12 Seoul Yanghaeng, a dye company, built their Iksan building
based at East Iri Station. No. 763-2 is the former in the 1960s at the height of the market street’s prosperity
Shinshin Department Store building, which offers 13 The entrance to the Somri Modern History and Culture
an excellent illustration of the characteristics of Space walk at the March 1 Movement Memorial Park
commercial architecture at the time. Nos. 763-3
through 763-7 are modern mixed-use buildings, that
show the different structural characteristics and
spatial composition of buildings that represent the 구舊대교농장 사택으로 동이리역을 거점으로 활동했
transition that took place as the modern era gave way 던 일본인 농장이다. 2호는 구舊신신백화점 건물로 당
to the contemporary one. No. 763-8 is the old drying
warehouse of the Bohwadang Korean Medicine
시 상업건축물의 특징과 형식을 잘 보여준다. 3호부
Clinic. Its masonry walls, wooden roof trusses, and 터 7호는 근대상가주택으로 근대에서 현대로 전환하
ventilation windows remain well preserved, and the 는 시점이자 과도기적 건물의 공간 구성과 다양한 건
site has an extra element of scarcity value as a drying
warehouse for Eastern medicines. No. 763-9 is the
축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8호인 보화당한의원 구舊건
former Iri Financial Association building, a struc- 조 창고는 조적조 벽체와 지붕 목조 트러스트, 환기창
ture built in 1925 that shows the typical architectural 등이 잘 남아 있으며 한약재 건조 창고라는 희소성까
style of a financial association building. No. 763-10 is
a two-story concrete and rebar structure that offers
지 지니고 있다. 9호는 1925년 건립된 구舊이리금융
a well-preserved example of a 1960s-era commercial 조합 건물로 금융조합 건물의 전형적인 건축 형식을
building, with its tile finishing in front and mortar 보여준다. 10호는 철근콘크리트조 2층 건물로 앞쪽
finishing in back. Visitors are also recommended
to catch the annual Baekje Cultural Heritage Week
은 타일, 뒤쪽은 모르타르로 마감한 1960년대 상가건
from July 8 to July 14 or the 2021 Baekje World 물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아울러 익산과 충남 공
Heritage Festival (which takes place in Gongju and 주·부여에서는 매년 7월 8일부터 14일까지 백제문화
Buyeo, Chungcheongnam-do, as well as in Iksan)
from August 13 through 29. Those who enjoy history
유산주간이 개최되며, 오는 8월 13일부터 29일까지는
and architecture can spend a pleasant few hours ‘2021 세계유산축전 백제’ 행사가 열린다. 역사와 건
exploring this area. 축을 좋아한다면 즐거운 나들이가 될 것이다.
Written by Oh Miyeon, editing team
Photographs by Kim Hyeonmin(photos 1, 2, 4–7, and 9–13)
글. 오미연 편집팀 ― 사진. 김현민(사진 1~2, 4~7, 9~13) ― 사진 제공.
Photographs courtesy of Iksan National Museum (photo 3), and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photo 8) 국립익산박물관(사진 3),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사진 8)

29
지역
문화
이야기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지원 사업
Regional Cultural Content Development Project

함경남도

조선고무

평양
동해
평양고무
서울
대륙고무

서해(황해)

부산
선만고무, 일영고무

신발이 쌓아 올린 부산의 역사
고무신에서 나이키까지

100년 전 그때는 고무신이 신발의 최첨단이었다. ‘신발’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에서 최첨단이었다.
고무신은 요즘으로 치면 반도체였고 최신식 스마트폰이었다. 부유층이 아니면 사 신기도 어려웠다.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다. 국내에 고무신 공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죄다 고가의 일제 수입품을 사용했다.
한국 신발 산업은 2019년 100주년을 맞이해, 올해로 102년이 되었다.

30
LOCAL CULTURE STORIES

Busan:
History Built on Shoes
From rubber shoes to Nike
A hundred years ago, the rubber shoe was new in the
footwear industry, if not in industry in general—
it was today’s semiconductor and cutting-edge
smartphone. Only the rich could afford rubber shoes;
the poor could only dream of having a pair of their
own. Before the establishment of the first domestic
rubber shoe factory, all rubber shoes in Korea were
imported from Japan at great expense.
Now 102 years old, Korea’s domestic footwear 2

industry celebrated its centennial in 2019.

 orea’s first footwear company was a rubber shoe


K
factory
The first footwear company in Korea was a rubber shoe factory
called Daeryuk Rubber Industry. It was officially founded on Au-
gust 1, 1919, in 1-Jeongmok, Wonhyojeong, Gyeongseong, which 우리나라 최초의 신발 회사는
now is Wonhyoro 1-ga, Yongsan-gu, Seoul. The manufacturing of 고무신 공장
rubber shoes was an extremely new industry and, naturally, the
company’s founder Yi Hayeong was a very rich man. He had ac-
한국 최초의 신발 회사는 고무신 공장으로, 이름
cumulated his wealth serving as the minister of external affairs 은 대륙大陸고무공업주식회사이하 대륙고무이다. 1919년
and the minister of justice in the government of the Korean Em- 8월 1일 경성 원효정 1정목에서 창업했는데 지금의
pire. Yi was later listed as a pro-Japanese, anti-national figure.
For some time, Daeryuk was unrivaled, and business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자리다. 고무신 제조는 당시
thrived. The manufacturing of rubber shoes truly was a so- 최첨단 산업이었던 만큼 창업주는 엄청난 재력가였
called blue ocean. Adopting the advertisement slogan “Koreans 다. 대한제국기 외부대신, 법부대신 등을 역임하며 부
buy and use things made by Koreans,” Daeryuk reflected Korean
animosity towards imperial Japan, which had grown stronger
를 쌓은 이하영친일반민족행위자이었다.
after the March 1 Movement, to appeal to the public. Even 대륙고무는 승승장구했다. 한동안은 경쟁자 전무全無
though Daeryuk’s rubber shoes lacked in quality compared to 의 블루오션이었다. 광고 문구가 민심을 파고들었다.
Japanese products, they sold like hotcakes. Daeryuk’s success
prompted other rich men to enter the footwear industry. In 1919,
삼일운동 직후라 일제에 대한 반감이 강했으므로 “조
Pyongyang Rubber Company was established in Pyongyang. 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사 쓰자”를 헤드
Funded by an affluent man named Choe Gyubong, the actual 카피로 내세웠다. 일제에 견줘 품질은 떨어졌지만 만
manufacturing was overseen by Yi Byeongdu. Pyongyang
Rubber introduced design into the rubber shoe manufacturing
드는 족족 팔렸다. 대륙고무의 성공은 갑부들을 자극
process, looking to traditional straw shoes to create the heel 했다. 1919년 그해 평양에도 고무신 공장 ‘평양고무’
가 들어섰다. 평양 갑부 최규봉이 자본을 대고 이병두
가 기술을 맡았다. 평양고무는 고무신에 디자인 개념
1 2 동양고무공업에서 생산한 기차표 고무신(여성용). 밑창에 학, ‘囍’, ‘기차표
을 도입했다. 짚신 뒷부분을 남자 고무신에, 코신을
Chami 동양고무’가 찍혀 있다.
A pair of women’s rubber shoes made by Tong Yang Rubber, featuring its 여자 고무신에 적용하면서 전통과 현대를 접목했다.
train trademark. Printed on the sole are a crane motif; “囍,” the Chinese
대륙고무와 평양고무는 한국 신발 산업을 견인했다.
character for “joy”; and “train trademark” and “Tong Yang Rubber”
written in Korean, framing the word “Chami” written in English. 1920년 조선고무가 함경남도에 들어섰고, 이듬해부

31
3 대륙고무신공업주식회사의 장화, 고무신,
시화(市靴) 등을 소개하는 광고지
A Daeryuk Rubber advertisement for boots, rubber shoes, and city shoes.
4 1920년대 말 고무신 가게 풍경
A rubber shoe store in the late 1920s.
5 1948년 부산 신발가게 풍경
A rubber shoe store in the late 1920s.

터 서울에 한성고무·서울고무·반도고무·경성고무·대 of their men’s shoes and the pointy toe of their women’s shoes,

창고무·중앙상공·조선고무·조일고무 등이 들어섰다. thus creating harmony between tradition and modern style.
As Daeryuk and Pyongyang took charge of the Korean
부산에는 선만鮮滿고무·일영日榮고무 등이, 평양에는 footwear industry, Joseon Rubber opened in Hamgyeongnam–
서선西鮮고무·동아고무·정창正昌고무 등 고무신 공장 do in 1920. Beginning in 1921, Seoul saw the emergence of many

이 속속 들어섰다. rubber shoe companies such as Hanseong Rubber, Seoul Rubber,


Bando Rubber, Gyeongseong Rubber, Daechang Rubber, Joseon
그러나 고무신 공장이 늘고 경쟁 체제가 되면서 노동 Rubber, Joil Rubber, and Jungang Commerce and Engineering.
력을 착취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노동 강도는 세지고 Busan had Seonman Rubber and Ilyeong Rubber, and Pyong-

임금과 복지는 열악했다. 여공이 대부분인 신발 공장 yang had Seoseon Rubber, Donga Rubber, and Jeongchang
Rubber.
에선 폭행과 성희롱까지 더해졌다. 저임금, 임금 삭감 The rapid emergence of rubber shoe manufacturers led to
과 미지급, 부당 해고, 노동 시간 단축, 여공 폭행, 신 heated competition among the companies as well as rampant

체 검색 등에 여공들은 파업으로 맞섰다. 이 시대 여 labor exploitation. The intensity of the labor increased and wag-
es and welfare declined. Rubber shoe factories were operated by
공 파업은 생존권 보장은 물론 일제에 대한 저항의 의 a workforce of largely female laborers, who often faced violence
미가 컸다. 일종의 독립운동이었다. and sexual harassment. These workers staged multiple strikes to
protest low wages, wage cuts, failure to deliver payment, unjust

6.25전쟁,
dismissal, shortened hours, assault, and frisking. The strikes
were not only aimed at securing the workers’ rights to live but
부산 신발 산업 도약에 기폭제 were also meaningful as protests against Japanese colonial rule;

1945년 일제 강점기가 끝나자 한국 신발은 일대 they were a kind of independence movement for the nation.

전환기를 맞이한다. 1940년대까지 80%를 차지하던 일  he Korean War: A catalyst for the Busan footwear
T
제 자본에 누수가 생기면서 신발 자본은 삼파전 양상 industry
을 보였고, 그러한 경향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웠 The Korean footwear industry reached a turning point in
1945 with the withdrawal of imperial Japan from the Korean
던 부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시대 부산 신발 Peninsula. As Japanese capital, which had accounted for 80
을 들여다보면 한국 산업사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 percent of the total investment in the footwear industry, began

32
4 5

to recede, three kinds of capital flowed into the field; this was 광복 이후 부산의 신발 자본은 세 부류였다. 일제 강
most visible in Busan due to its geographical proximity to Japan. 점기 적산 공장을 물려받은 기업과 토착 자본으로 설
A closer look into Busan’s footwear industry provides a realistic
picture of Korea’s industrial standing during this period. The
립한 기업, 그리고 광복 후 신흥 자본이 설립한 기업
capital that controlled the footwear business in post-liberation 이었다. 숫자로는 1949년 기준 신흥 자본 업체가 63
Busan came from three sources: companies that had inherited 곳으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이 적산 기업 6곳, 일제 강
factories previously operated by the Japanese, companies estab-
lished by Korean capital during Japanese rule; and companies
점기부터 있었던 토착 자본 기업은 2곳이었다.
launched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 As of 1949, there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은 부산 신발 산업이 도약하
were as many as 63 newly launched companies, followed by six 는 데 기폭제가 됐다. 남한은 물론 북한 곳곳의 신발 공
inherited companies and two supported by Korean capital.
The Korean War, breaking out in 1950, became a catalyst
장이 동란을 피해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사람이 모여
for the success of Busan’s footwear industry as shoe producers 들고 자본이 모여들고 시설이 모여들고 기술이 모여
from around the Korean Peninsula found refuge in the port city. 들면서 부산은 그야말로 한국 신발의 메카로 급부상
The influx of people, capital, equipment, and techniques made
Busan into a mecca of Korean footwear—a status that remains
했다. 지금도 그 위상은 여전하다. 매일매일 몰려드는
intact today. The war refugees that flocked to the city daily were 전쟁 피란민은 신발의 공급자이면서 수요자였다. 그
both suppliers and consumers of shoes. They provided suffi- 들은 노동집약형 산업인 신발에 풍부한 노동력을 제
cient manpower for the labor-intensive footwear industry while
functioning as a steady pool of consumers; they both made the
공했으며 안정적인 수요층을 이뤘다. 만드는 것도 그
shoes and bought them. Thanks to the abundant workforce, 들이었고 사 신는 것도 그들이었다. 노동력을 풍부하
footwear manufacturers in Busan solidified their businesses, 게 확보한 부산의 신발 공장은 군화를 비롯한 군용화
producing and supplying combat boots and other military
footwear. However, in the meantime, corrupt practices were
를 생산하고 납품하면서 사업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
rampant in the purchase and delivery of the shoes. 다. 그렇지만 납품 비리 등 부조리도 적지 않았다.
Dongcheon Stream, which cuts across Busan’s Jin-gu and 부산 중심지에 해당하는 부산진구와 동구를 가로지르
Dong-gu districts, also accelerated the development of the foot-
wear industry. While no boats traverse this stream today, it was
는 신발 발전의 또 다른 동력이었다. 지금의 동천은 배
used as a canal during Japanese colonial rule. Materials like rub- 라곤 다니지 않는 하천이지만, 일제 강점기만 해도 배

33
6 7 8

가 다니는 운하였다. 이 운하를 통해 고무나 섬유 같은 ber and textiles were imported through the canal and many big

원자재를 수입했다. 그 때문에 당시 동천 주위에는 굵 companies, including Samhwa Rubber and Joseon Textile, were
established along its banks. Samhwa enjoyed booming business
직굵직한 기업들이 들어섰다. 대표적인 게 조선방직과 and for several decades post-liberation, it played a leading role
삼화고무였다. 삼화고무는 이른바 ‘잘나갔’다. 광복 이 in the Busan footwear industry, like the eldest son of a family of

후부터 30~40년간 부산 신발 산업의 ‘맏형’이었다. many children.

Nike orders sneakers from Samhwa Rubber


나이키도 삼화고무에 It was in 1974 that Nike placed its first order for Kore-
운동화 생산 주문 계약 맺어 an-made footwear. While it is now a well-known global sports
brand, then, Nike was thought of as no greater than a common
나이키Nike는 1974년 한국에 처음 신발을 주문 shoe peddler. Upon receiving its first order from Nike, Samhwa
했다. 지금은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지만 그때만 해 wondered if it would be a reliable partner. At the time, Samhwa

도 나이키는 ‘보따리상’ 수준이었다. 처음 주문 의뢰 only accepted orders for 30,000 pairs of sneakers or more, but
Nike’s first order was only for 3,000 pairs. In accepting the
를 받은 삼화고무에서도 ‘그런 회사가 있나?’ 하고 생 order, Samhwa undertook a kind of risky adventure, one that
각할 정도였다. 첫 주문량은 3천 켤레였다. 3만 켤레, turned out to be the beginning of a success story. In the 1980s,

5만 켤레는 돼야 주문을 받아주던 삼화고무는 모험을 Korea was the world’s most powerful footwear manufacturer
and one axis of a global market in which Italy and Taiwan were
감행했고 이는 성공 신화로 이어졌다. 1980년대 한국 known for leather and plastic shoes, respectively. Korea became
신발은 세계 최강자였다. 세계시장의 한 축을 이루었 famous by producing premium leather sneakers. At the time,

다. 세계 시장에서 이탈리아는 구두, 대만은 플라스틱 Busan was home to all of Korea’s major footwear companies. For
about three to four decades, beginning in the 1960s when other
화, 그리고 한국은 고급 가죽革製 운동화로 명성을 얻 Korean industries were struggling to break into the export mar-
었다. 그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신발 대기업은 모두 ket, the footwear industry was a sort of breadwinner for both

부산에 있었다. 다른 산업이 수출 시장에서 두각을 나 Busan and Korea, and acted as a pillar of the domestic industry.
Seven of the footwear companies in Busan in the 1980s
타내지 못하던 1960년대부터 30~40년 동안 신발 산 were quite big. In addition to Samhwa and Bosaeng, which had
업은 부산을 먹여 살리고 한국을 먹여 살리던 효자 산 been in operation since Japanese colonial rule, there were Kukje

업이었고 기둥 산업이었다. Rubber, Taehwa Rubber, Tong Yang Rubber, Daeyang Rubber,
and Chin Yang Chemical. Kukje, the predecessor of today’s
1980년대 부산의 신발 대기업은 모두 일곱. 삼화고무 Kukje Corporation, was established with Korean capital after
를 비롯해 보생고무, 국제고무, 태화고무, 동양고무, the nation’s liberation from Japanese rule and acted as a brother

대양고무, 진양화학이었다. 삼화고무와 보생고무는 company to Chin Yang. Taehwa and Tong Yang (which later be-
came Hwaseung) had escaped to Busan during the Korean War.
일제 강점기부터 있었다. 국제상사의 전신인 국제고 Daeyang was founded in Busan in 1953.
무는 광복 이후 토착 자본으로 자수성가했으며 진양 The companies each had their own trademarks. When

34
9
6 삼화고무 ‘범표’ 신발 광고. 범표에 이어 ‘타이거’ 운동화를 선보였다.
A Samhwa Rubber shoe advertisement featuring its beompyo tiger trademark. Later, Samhwa produced sneakers under the brand name “Tiger.”
7 1961년 신발 광고 달력. 모델은 태현실
A 1961 calendar featuring model Tae Hyeonsil in a promotional image for shoes
8 1980년대 신발 공장 작업 모습
Shoe factory workers in the 1980s
9 1980년대 동양고무 작업 광경. 케미컬슈즈는 동양고무 성공 신화의 발판이었다.
Tong Yang Rubber in the 1980s. Tong Yang’s “Chemi Shoes,” made of artificial leather, acted as a stepping-stone to huge success.

it came to exports, products were manufactured on original 화학과는 형제 회사 격이었다. 태화고무와 화승의 전
equipment manufacturer (OEM) contracts to meet foreign or- 신인 동양고무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
ders, and this practice hindered the Korean footwear industry’s
growth. However, business was solid in the domestic market,
란을 왔고, 대양고무는 1953년 부산에서 창업했다.
and companies established their own trademarks and symbols. 신발 회사는 저마다 고유의 상표를 갖고 있었다. 비록
Samhwa was represented by the beompyo, or its tiger trademark; 수출품은 외국 업체 주문에 맞춰 생산하는 OEM 방식
Bosaeng by a tire; Kukje by the Chinese letters “王者,” meaning
monarch; Taehwa by a horse; Tong Yang by a train; Daeyang by
을 취했고 결국 이것이 한국 신발 산업의 발목을 잡았
a “supercomet”; and Chin Yang by “진양,” its company name 지만, 자체 상표를 내세운 내수 시장만큼은 기반이 탄
written in Korean. 탄했다. 회사별 대표 상표는 다음과 같았다. 삼화-범

Once there was footwear, now there is Korea 표, 보생-타이어표, 국제-왕자표, 태화-말표, 동양-
Busan was once a city of footwear. Advertisements for 기차표, 대양-슈퍼카미트, 진양-진양.
shoes dominated TV and newspapers and most commuter bus-

신발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이 있다


es belonged to footwear companies. Shoe manufacturing mo-
guls topped the list of highest-paying taxpayers and one in every
two or three Busan families’ source of income was footwear. At 한 시절, 부산은 신발의 도시였다. 방송이나 신문
a time when it was rather difficult to travel abroad, footwear 엔 온통 신발 광고였고, 통근 버스는 온통 신발 회사 버
companies were eyed hungrily by college graduates who wished
to work overseas.
스였다. 세금 납부자 앞 순위는 신발 기업인이 차지했
으며 두세 집 건너 한 집이 신발로 밥을 먹었다. 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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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1 12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외국 근무를 선호하는 “And then, I received my first salary.
대학 졸업자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It was 8,200 won. I paid 2,000 won in boarding fees
“…그러다가 첫 월급을 받았습니다.
and put the rest in a savings account.
I set aside only 500 won for miscellaneous expenses
8200원을 주더군요. 저는 그 돈으로
each month. That meant that in September 1972,
기숙사비 2000원을 주고 나머지 돈으로
I was able to send 25,000 won to my family back
무조건 저축했습니다. 
home in for the first time,
한 달 잡비는 500원으로 최대한
five months after I had left home.
줄였습니다. 
The amount was small but I wanted to do my duty as
그 결과, 1972년 9월 객지 생활 5개월
a member of my family.
만에 2만 5000원을 고향 집에 부쳤습니다.
As I left the post office, smiling with a sense of pride
적은 액수일망정 우리 집의 기둥이라는
and satisfaction, the faces of my parents and brothers
역할을 조금이라도 해보기 위하여
and sisters came to mind . . .”
부친 것이었습니다. 우체국을 나오면서
저도 모르게 흐뭇한 마음으로 아버지, Shoes symbolized tears of both pain and joy. The young

어머니, 동생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게 female workers who filled the shoe factories were mostly from

떠올랐습니다….”
rural families. Barely able to afford a high school education,
they found jobs at footwear companies in Busan en masse.
The girls would travel to Busan on buses sent by the footwear
신발은 눈물이었다. 그리고 기쁨이었다. 공장마다 어린 companies right after middle school graduation. They lived in
여공이 넘쳤다. 이들은 대개 시골 출신이었다. 처지가 company dormitories and attended night school. As seen in the

어려워 상급학교 진학이 여의치 않자 부산의 신발 회사 quote above, they would diligently save their earnings and send
the money home—every single one of them. They were tough,
에 무더기로 취직했다. 중학교 졸업식을 마친 직후 신 resilient.
발 회사에서 보낸 통근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왔고 기숙 The tough girls’ money helped their families fare better.

36
10 부산진구청 근처에 있는 신발 동상. 부산 신발 산업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2015년 세워졌다.
A bronze statue of shoes erected near
Busanjin-gu Office in 2015 to commemorate
the footwear industry in Busan.
11 ‘누나의 길’ 표지판
A rubber shoe store in the late 1920s.
13
12 국내 최초 신발 박물관인 한국신발관의 내부 전시실 모습
Exhibition halls at the K-Shoes Center,
the first footwear museum in Korea.
13 영화 <1987>에서 이한열 열사 역할을 맡은 강동원
배우의 신발이 삼화고무 타이거 운동화다. 영화 제작진이
부산경제진흥원 신발산업진흥센터에 복원을 의뢰해
제작했다. 복원된 신발(사진)은 한국신발관에 진열됐다.
In the film 1987, the character Lee Hanyeol, played
by actor Gang Dongwon, wore a pair of Samhwa’s
“Tiger” sneakers. The shoes were specially recreated
by the Busan Economic Promotion Agency’s Footwear
Industry Promotion Center upon the request of the
film production team. The recreated sneakers (photo)
are on display at the K-Shoes Center.

Feeling sorry for their faraway daughters, many fathers stopped 사에서 생활하며 야간학교에 다녔다. 당시 수기 내용대
drinking and became new men. Some bought rice paddies and 로 한 달 몇천 원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 고향 집에 보냈
others cows. The girls’ money enabled their younger brothers
and sisters to go to school. As their families blossomed, so did
다. 누구랄 것 없이 그랬다. 모두가 ‘억순이’었다.
their provinces and the entire nation. In Busan, there are many ‘억순이’가 보낸 목돈으로 시골집은 재기했다. 아버
places that celebrate and remember these female workers. A 지는 딸에게 미안해 술을 끊고 새사람이 됐으며 누구
narrow alley they would take to and from work has been turned
into the “Elder Sister’s Path” and a statue of shoes and the
는 논을 사고 소를 샀다. 동생은 진학했다. 집안이 일
K-Shoes Center have been established there. The fourth floor of 어섰고 지역이 일어섰으며 한국이 일어섰다. 부산에
the Samhwa Rubber building maintains the workers’ old board- 는 이들을 기리는 공간이 곳곳에 있다. 여공들이 출퇴
ing facilities as they were when the girls lived there.
The footwear industry should be remembered, cherished,
근하던 좁은 골목길엔 ‘누나의 길’이 만들어졌고 신발
and commemorated for a long time. At a time when Korea 동상과 한국신발관이 세워졌다. 삼화고무 4층 기숙사
lacked money and technology and faced a great shortage of 는 지금도 원형 그대로다.
resources, we had footwear, which helped us become who we
are today and turn our nation into an economic power. Let us
신발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리며 기념해야 할 산업
look back on all the factory workers who devoted their youth to 이다. 돈 없고 기술 없고 자원조차 태부족하던 한 시
a better tomorrow, and the shoes that embraced them, with the 절, 신발이 있었기에 지금 여기의 우리가 있고 경제부
utmost respect and most heartfelt thanks.
국 한국이 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하며, 여
Written by Dong Gilsan, poet
Photographs courtesy of Dong Gilsan (photos 6–8, 10–11), the National Folk Museum 기보다 나은 저기를 기약하며 청춘을 송두리째 바쳤
of Korea (photos 1–3), the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of the
United States (photo 5), the Busan Museum (photo 4), the Busan Chamber of 던 모든 ‘공순이·공돌이’에게, 그리고 그들을 품었던
Commerce and Industry (photo 9), and K-Shoes Center (photos 12–13)
신발에 존경과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지역N문화' 누리집에서 글. 동길산 시인 — 사진 제공. 국립민속박물관(사진1~3),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부산광역시립박물관(사진 4),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사진 5),
부산상공회의소(사진 9), 동길산(사진 6~8, 10~11),
한국신발관(사진 12~13)

37
문화
탐구
생활

떡살은 문양을 새긴 틀판, 틀판을 포함하고 있는 틀, 그리고 손잡이로 구성된다. 틀판은 원형·화형·장방형 등의 형태로 제작된다.
A tteoksal that consists of a mold, a frame in which the mold is held, and a handle. The mold features different shapes, including circles, flowers, and rectangles.

38
CULTURAL EXPLORATION

Tteoksal and Dasikpan: 떡살과 다식판,


Pressed Patterns and 살을 박고
Infused Dreams 염원을 담고
In Korea, there is an old saying that goes,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라는
“Rice cakes that look good will also taste good.” 옛말이 있다. 이 말은 먹는 음식에도 아름다운
Perhaps what this proverb means is 모양을 내어서 그 맛을
that making food look beautiful is an extension of one’s 더욱 풍성하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음식에 아름다운 모양을 내는
efforts to enhance its taste and flavor.
Among the Korean kitchen utensils used in making food
조리 용구로 떡살과 다식판이 있다.
beautiful are tteoksal (rice cake molds) and dasikpan (tea
cookie molds). Certain rice cakes and tea cookies are 떡과 다식은 일상적으로 식용하던
not consumed routinely, but have been eaten in Korea 음식은 아니지만 오랜 세월 동안
as ceremonial food for a long time. 의례 음식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teoksal for rice cakes,


T 떡에 살을 박는 떡살,
다식의 모양을 잡는 다식판
dasikpan for tea cookies
Tteoksal, the name of which literally refers to press-
ing sal (pattern) into tteok (rice cake), are a kitchen 떡살은 ‘떡에 살을 박는다’는 뜻으로, 곡물로 만
utensil used to add patterns to jeolpyeon, a type of 든 떡을 눌러 문양을 찍어내는 조리 용구다. 가래떡과
pounded rice cake that is long and cylindrical like
garaetteok. Jeolpyeon did not appear in historical
같이 길거나 둥근 형태의 절편에 모양을 내기 위해서
records until diaries, culinary books, and books on 사용된다. 절편에 대한 문헌 기록은 조선 시대에 편
rituals from the Joseon Dynasty were compiled. 찬된 일기류 혹은 조리서나 의례서 등에 나타난다. 조
Records of consuming jeolpyeon first appeared in
Mukjae ilgi, which offers a glimpse into life during
선 시대 중기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묵재일기黙齋
the mid-Joseon Dynasty. An entry in Mukjae ilgi 日記》에 절편을 소비했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보인다.
(January 3, 1547) describes a gift of jeolpyeon being 《묵재일기》 1547년 1월 3일의 기록을 보면 정초에 노
sent through a servant as part of a New Year ’s
greeting. Although there are no records of tteoksal,
비를 보내 문안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절편을 선물했
based on the records of jeolpyeon, it can be inferred 다는 내용이 있다. 비록 떡살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that tteoksal were in use at least by the 16th century. 절편의 기록을 통해 적어도 16세기에 떡살이 사용되
Dasikpan, which are used differently than tteoksal,
are a utensil used to shape and press patterns into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떡살과는 조리 방법이 다른 다
dasik, a tea cookie made by kneading flour (made 식판은 다식茶食의 형태를 잡고 문양을 찍어내는 용구
from pine pollen, soybean, or black sesame seeds) 다. 다식은 송홧가루나 콩가루, 흑임자가루 등을 꿀에
with honey that developed as part of Korea’s tea
culture. In Mogeunjip, a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버무려 만든 것으로 차를 마시면서 곁들이던 음식이
by Yi Saek, a scholar and politician in the late Goryeo 다.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이색의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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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집牧隱集》에 팔관회에서 쓴 다식의 맛이 연하고 좋 and early Joseon periods, a poem describes the dasik

았다고 묘사한 시가 실려 있는데, 이로 보아 고려 시 offered at a Palgwanhoe (the Buddhist Festival of


Eight Vows) ceremony as soft and tasty, suggesting
대에 이미 다식을 의례용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that dasik were used in ceremonies as early as the
떡살은 목재로 만든 것과 도자로 제작된 것이 있다. 목 Goryeo period.

재로 만든 떡살은 대개 방형과 장방형의 떡살에서 많 There are many variations of tteoksal, some made
of wood and others of porcelain. Wooden tteoksal are
이 볼 수 있으며, 복합 문양으로 구성돼 있다. 도자로 often square or rectangular and feature many complex
제작된 떡살은 주로 원형의 떡살에서 볼 수 있으며, 단 patterns. Porcelain tteoksal are mostly circular and

일 문양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다식판은 목재로 feature a single elaborately engraved pattern. Dasik-
pan are usually made of wood, and rather than being
만든 것이 대부분으로, 하나의 모양 틀에 문양을 복합 comprised of a set of complex patterns, also often
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단일 문양을 섬세하게 표현한 contain a single pattern elaborately carved into their

것이 많다. 다식판은 여러 개의 모양 틀로 구성돼 있으 surface. A single dasikpan usually includes multiple


decorative molds, each with a different delicately
며, 각각의 모양 틀에 다른 문양을 섬세하게 새겨 여러 engraved pattern, to produce dasik in varying designs.
가지 문양을 지닌 다식을 만들 수 있게 제작됐다. 다식 Dasikpan can be largely divided into two types: frame

판은 크게 틀형과 판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틀형은 type and block type. Frame-type dasikpan consist
of a top and bottom frame; round, protruding molds
아래쪽과 위쪽으로 틀이 나뉘며, 아래쪽 중앙에는 철 carved with patterns, resembling the Chinese char-
凸자형으로 문양을 새긴 둥근 모양 틀을 한 줄 혹은 두 acter 凸 (K. cheol), form one or two lines at the center

줄로 구성돼 있고, 위쪽은 아래쪽의 둥근 모양 틀에 맞 of the bottom frame, while the top frame has holes
into which the round molds on the bottom frame fit
는 구멍이 뚫려 있어 다식의 모양을 잡을 수 있게 했 to shape the dasik. Block-type dasikpan have concave
다. 판형은 다식의 모양을 잡을 수 있게 요凹자 형태로 molds, resembling the Chinese character 凹 (K. yo),

구멍을 파고, 구멍의 바닥에 문양이 새겨져 있다. with designs engraved inside the hollows.

Embodying aspiration and worldly desire


Cultural devices for overcoming the problems that
human beings face throughout the course of their
lives take many forms. Throughout the world, vari-
ous sets of values and ensuing meanings have been
established, ranging from religious worldviews that
borrow power from supernatural beings as a way of
resolving conflicts between humans and nature (or
humans and other humans), to shamanic worldviews
that differ by harboring an active goal to break the
fetters of worldly life. One mode of expression through
which we communicate symbolic meaning is pattern.
Through patterns, human beings aim to express
and communicate certain meanings using association to
various symbols and subject matters, from every object
that exists in nature, such as animals, plants, mountains,
rivers, valleys, the sun and moon, clouds, wind, water,
and rocks, to every event that happens in human life.
The patterns engraved in tteoksal and dasikpan
are multifarious and hold a wide variety of symbolic
meanings. Tteoksal patterns take diverse forms, fea-
turing geometric shapes, animals, plants, and written
characters, and often are more abstract and stylized
장방형의 목제 떡살로 기하문·화문·문자문 등 복합 문양으로 구성돼 있다.
than realistic and explicit. Those who craft tteoksal
Rectangular wooden tteoksal that feature compound designs that also often combine patterns rather than engraving
incorporate flowers, characters, and geometric patterns. just one. However, designs on dasikpan favor del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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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이 새겨진 아래판과 모양을 잡아주는 위판으로 구성되는 틀형 다식판이다.
화문, 문자문 등 다양한 문양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A frame-type dasikpan composed of a bottom frame with engraved patterns
and a top frame used to mold the dasik. Various patterns featuring flowers
and characters have been delicately carved into the frame.

and realistic patterns over geometric shapes, and are 현세적 욕구의 염원을 담아
expressed in a more ornate, exaggerated fashion.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맞이하는 제 문제를 극
It is common to classify tteoksal and dasikpan
patterns by subject matter. For example, there are such
복하는 문화적 장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인간
categories as geometric pattern, animal pattern, plant 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야기되는 갈등을 해소
pattern, and written character pattern. Symbolism and 하기 위한 방법으로 초자연적 존재의 힘을 빌리고자
meaning can variously overlap among the categories.
For example, the linear nature of geometric patterns
하는 신앙적 세계관으로부터,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symbolizes longevity, deriving from the implicit 현세적 삶의 질곡을 타개하기 위한 적극적인 의도로
composition of lengthiness or the concept of contin- 써 주술적인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치관과
uousness. As for triangle patterns, which belong to
the geometric pattern category, since Koreans have a
이에 따른 의미가 형성됐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에 대
deep-rooted notion of the number three representing 한 표현 방식의 하나가 문양이라고 할 수 있다.
perfection, this pattern accordingly represents auspi- 떡살과 다식판에 새겨진 문양은 다종다양하며 여러 상
ciousness, abundance, and fertility.
Tteoksal and dasikpan patterns can be catego-
징을 담고 있다. 떡살 문양은 기하학적인 도형· 동식물·
rized by symbolic meaning, such as longevity, abun- 문자 등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으며, 사실적이고 설명
dance, fertility, wealth, honor, casting out evil spirits, 적인 것보다는 추상적이고 도안화된 형태를 많이 볼 수
and praying for good fortune. The chrysanthemum
is a representative symbol that communicates a wish
있다. 단독으로 새겨지기보다는 제작자의 의도나 소망
for longevity. It seems that chrysanthemum patterns 에 따라 복합적으로 구성된다. 반면에 다식판의 문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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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식의 모양을 잡아주는 구멍 바닥에
꽃과 물고기 문양을 새긴 판형 다식판이다.
A block-type dasikpan, featuring flower and fish patterns in
the bottom hollows, which are used to mold the dasik.

기하학적인 도형보다는 꽃, 문자 등 섬세하고 사실적인 came to symbolize longevity after being derived from

문양을 선호하고 한층 과장해 화려하게 표현했다. the ancient Chinese tale of Zhu Ruzi, who is said to
have become a Taoist immortal (C. shenxian) after
떡살과 다식판의 문양은 같은 유형의 소재를 묶어서 drinking brewed chrysanthemum. As the flower of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컨대 기하문·동물문·식 longevity, chrysanthemums are often used in banquets

물문·문자문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같은 유형의 or 60th and 61st birthday celebrations, accompanied
by phrases wishing one a long life such as “boxthorns
소재라도 문양이 가지고 있는 상징과 의미는 다양하 and chrysanthemums bring longevity,” (K. giguk
게 중첩돼 나타난다. 이를테면 기하문에 속하는 직선 yeonnyeon) and “pines and chrysanthemums bring

으로 표현된 무늬는 ‘길다’라는 암시적 구도 또는 끊어 longevity.” (K. songguk yeonnyeon).


Among patterns that embody the aspiration for
지지 않고 이어지는 ‘연속적이다’라는 관념으로 인해 abundance and fertility, butterflies symbolize conju-
장수를 상징한다. 같은 기하문에 속하는 삼각무늬는 gal harmony, felicity, and joy. Due to such symbolism,

‘삼三’에 대해 완벽하다는 관념이 깊은 우리 민족에게 butterflies have been frequently portrayed in folk
paintings. In the late Joseon Dynasty, painters such
는 길상적 의미를 담고 있어 풍요·다산을 상징한다. as Sin Saimdang enjoyed painting flowers and butter-
떡살과 다식판의 문양에 대해 상징적 의미를 기준으 flies and left behind many works that feature them.

로 구분해 보면, 장수·풍요·다산·벽사·부귀·초복 등으 Also, deriving from the symbolism of marital bliss,
butterflies regularly appear on items that relate to
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장수를 기원하는 대표적 문양 marriage. For instance, we can see butterfly patterns
으로 국화꽃을 들 수 있다. 국화 문양이 장수를 상징 on a variety of objects, from chests to folding screens,

하는 의미를 지니게 된 데에는, “옛날 중국의 주유자 bedding, and pillow ends. Another pattern is that of
the Buddhist swastika (K. man), an ancient religious
라는 사람이 국화를 달여 마시고 신선이 되었다”는 고 icon that carries the meaning of defeating evil spirits.
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It is said to be the symbol that appeared on Sakyamu-

풍요다산의 염원을 담은 문양으로 나비 문양이 있는 ni’s chest when he was born, recognized by posterity
as an auspicious mark. A glimpse into this perception
데, 이는 금실 좋은 부부·기쁨과 환희를 상징한다. 이 can be seen in shamanism, in which a flag with a
러한 상징성 때문에 나비는 민화의 소재로 많이 그려 swastika design is often hung in front of a sham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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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강녕(壽福康寧)의 문자 문양이 새겨진 떡살로
장수와 복을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Tteoksal that embody wishes for longevity and good
fortune with the engraved characters for longevity,
happiness, health, and peace.

house, representing the spiritual power of a deity. 졌다. 또한 금실 좋은 부부를 상징한 데서 혼수품에
Such a flag marks the home of a shaman who serves as 나비 문양이 많이 보인다. 이를테면 함을 비롯해 병
a representative of a deity, identifying a divine space
and casting away evil spirits.
풍·침구류·베갯모 등에 나비 문양이 사용된 것을 볼
Fish patterns embody a wish for wealth and hon- 수 있다. 벽사의 의미를 담은 문양으로 ‘만卍’자 문자
or, symbolizing scholarly eminence, rising up through 문이 있다. ‘만’자 문양은 석가모니가 탄생할 때 가슴
the ranks in life, or making a name for oneself by being
ranked the highest in the national civil service exam-
에 있었던 문양이라고 전하며, 후세 사람이 이를 길상
ination. These meanings originate from a Chinese 의 표지로 인식했다고 한다.
folktale about a golden koi fish in the Yellow River that 부귀의 소망을 담은 물고기 문양은 학문적 명성 또는
swims upstream every March and successfully leaps
over a waterfall called the Dragon Gate (C. Longmen),
장원급제를 통한 입신양명을 상징한다. 중국의 민담
eventually transforming into a dragon itself. In Korean 에 “황하의 황어는 매년 3월이면 물줄기를 거슬러 오
folk paintings, an ascending carp represents aspiring 르는데, 그때 용문의 급류 통과에 성공하면 용으로 변
to a rise in status. Another pattern that reflects wishes
for good fortune is that of the Chinese character for
신한다”고 전해지는 것에서 유래했다. 우리나라 민화
“blessing” (K. bok). This symbol is often used to direct- 에는 잉어가 승천하는 그림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신
ly convey a sense of auspiciousness by engraving the 분 상승의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초복을 기원하는 문
character in various calligraphic styles or incorporat-
ing it into a compound design with other patterns.
양으로 ‘복福’자 문자문이 있다. ‘복’자 문양을 여러 가
Tteoksal and dasikpan patterns are not simply 지 서체로 새기거나 다른 문양과 복합적으로 구성해
aesthetic; they are an expression of worldly desires 직접적으로 길상적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that embody sincere devotion and diverse aspirations,
leading to many different formed meanings and types
떡살과 다식판의 문양은 단순히 미적 심성에서 비롯
of symbolism depending on their use. 된 것이 아니라, 현세적 욕구의 표현으로 정성과 다양
한 염원을 담고 있어, 그 쓰임새에 따라 의미와 상징
이 형성됐다.
Written by Jang Sanggyo, curator,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Photographs courtesy of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글. 장상교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 사진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43
한국

본질의 색 Color and Essence


한국에서 산 지 거의 7년이 돼가던 즈음에, 나는 After living in Korea for almost seven years,
한국화 수업을 받기로 결심했다. I decided to take a Korean painting class.
한국 말고 한국화를 배우기에 더 좋은 곳이 What better place is there
어디 있겠는가? to learn Korean painting than Korea itself?

색의 향연이 펼쳐치는 한국
나는 늘 색에 끌렸다. 밝은색, 어두운색, 은은한 색, 선명한 색.
어릴 적부터 취미로 그림을 그렸는데,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
은 없어서 어떤 색을 쓸지, 어떻게 색을 조화롭게 섞을지 결정하 1

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미술에서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들여다보는 일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아니면 그저 내가 게을렀던
건지. 아무튼 나는 오로지 기법과 미학에만 관심이 있었고, 생각
자체에 대해 생각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일상생활
에서 처리해야 할 복잡한 생각만으로도 이미 벅찼다. 하지만 이
건 옛날이야기다.
한국에서는 무한한 색채의 향연이 펼쳐진다. 궁궐 천장의 단청과 A feast of colors unfolds in Korea
전통 의상, 밥상을 그득하게 채운 오색 반찬들, 티 없이 새하얀 겨 I have always been drawn to colors: bright, dark, pastel, or vivid.
I have been drawing for pleasure since I was young. Without for-
울, 누렇게 마른 풀과 청명한 푸른 하늘의 대조, 봄에 피어나는 분 mal drawing lessons, my biggest problems were deciding which
홍 벚꽃, 태풍이 몰아치는 여름 하늘 아래의 초록 나뭇잎, 드넓게 colors to use or how to combine colors in the most harmonious

펼쳐진 황금빛 논, 가을에 노랗게 물드는 은행나무, 붉은 단풍나 way. When it came to looking into the importance of thought in
art, I resisted (or maybe I was just lazy). Only technique and aes-
무… 도시도 자연만큼이나 다채롭다. 상점의 무지갯빛 네온사인, thetics caught my attention. What would be the point of think-
휘황찬란한 뮤직비디오나 광고를 내보내는 그야말로 거대한 전 ing about thinking itself? I already had to deal with complicated

광판, 심지어 처음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진 화장품 가게의 한없 thoughts in everyday life.


In Korea, colors are endless: Buddhist paintings on palace
이 다양한 색깔의 매니큐어까지. ceilings; traditional clothing; 1001 banchan spread on a table;
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고궁의 벽과 천장 그리고 한국의 전통 immaculate white winters; dry, ocher-hued grass contrasting with

그림, 특히 민화에 사용된 빨강, 초록, 노랑, 파랑의 표현이었다. an incredibly blue sky; pink cherry blossoms blooming in spring;
green leaves under the stormy skies of summer; expansive rice
나는 거의 7년을 한국에서 지냈고 앞으로도 되도록 오래 머물 계 fields; gingko trees changing from green to yellow in autumn;
획이지만, 어쨌거나 이곳에서 지내는 기간을 이용해 한국화 수업 and red maples. The cities are as exceptional as the nature. The

을 받기로 했다. rainbow-colored neon lights on storefronts, giant—really giant—


screens displaying all kinds of brightly colored music videos or ad-
붓을 놓은 지 한참 만에 다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처음엔 전 vertisements, and even the endless selection of nail polish colors
문적인 용어에 살짝 당황했다. ‘물’ 외에는 모든 용어가 낯설었다. in stores surprised me when I first saw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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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ING KOREA

1 엘렌 드장드르(필자)Helene Desandre (writer) 2 3


2 3 신사임당 <초충도>, 16세기 Paintings of plants and insects by Sin Saimdang, 16th century

But it was the demonstration of red, green, yellow, and 게다가 한지에 물감이 그런 식으로 퍼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
blue used on palace walls and ceilings and in Korean traditional 다. 종이 자체가 나에게 익숙한 수채화나 유화에서 쓰던 종류와 전
paintings that left the strongest impression on me, especially in
minhwa (Korean folk art) paintings.
혀 달랐다. 민화는 여러 겹으로 물감을 덧칠할수록 색이 더욱 선명
I've been in Korea for six, almost seven years now. I plan to 해지지만, 수채화에서는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색이 칙칙해진다.
stay as long as possible. I decided to take advantage of being here 물 양 조절과 적합한 색과 종이, 붓의 선택이 대단히 중요하다.
by signing up for Korean painting lessons. What better place to
learn Korean painting could there be other than Korea itself?
민화에서는 도구 외에 주제도 중요하다. 사실 모든 유형의 한국
After years of not picking up a brush, I gave it another go. 화가 다 마찬가지다. 한국화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데만 그치
At first, I was a little bit thrown by the technical terms; apart 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 이런 상징의 개념은
from “water,” all the terminology was unfamiliar. Moreover, the
diffusion of paint on hanji paper (Korean traditional paper made
내가 그림을 그릴 때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민화
from mulberry bark) is unpredictable, and the paper itself is to- 는 본래 나 같은 비전문가가 그리는 것이기에 그런 두려움을 내
tally different from the kinds of paper used for the watercolor or 려놓을 수 있었다. 민화를 그릴 때면 사실적인 기법에 집착하지
oil painting that I was used to. In terms of technique, the process
of overlapping layers of paint makes colors become more vivid
않고 의미에 집중할 수 있었다. 민화에서는 사물의 특징이 투박
in minhwa painting, but if you do this with watercolor paints, 하게 묘사된다. 즉 단순하고 과장되게 표현된다. 때로는 커다란
the colors get sad. Controlling the amount of water and choosing 눈과 기다란 이빨, 날카로운 발톱을 한 호랑이가 사람과 같은 자
the right colors, paper, and brushes are of great importance.
Aside from the tools, subject matter is also important in
세를 취하거나 모자나 곰방대 같은 물건을 사용하는 모습으로
minhwa painting, and indeed in all types of Korean painting. 의인화되기도 한다. 까치는 장난기 많고 수다스러우며 덩치 큰

45
4 작가 미상, <호랑이와 까치(호작도)>, 조선 시대 4 5
A painting of a tiger and a magpie by an unknown artist, Joseon Dynasty 6

5 특징을 기교 없이 묘사하는 데 집중한 봉숭아꽃(필자 작품)


In this painting of balsam flowers, Helene Desandre focused on depicting the subjects in an honest and rhetoric-free manner
6 익살스러운 호랑이(필자 작품)
A humorous painting of a tiger by Helene Desandre

짐승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런 주제들에서 Painters in these fields create not only because they want to paint,

전달되는 정서적인 인상은, 처음에 받은 기술적·시각적인 인상을 but, even more so, because they want to convey meaning. This
was what I feared the most when I was drawing: the notion of sym-
압도한다. 그리고 이 변형된 모습에 더해진 색채로 민화는 강렬 bols. But minhwa painting allowed me to overcome this fear as
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풍기며 때로는 익살스럽다. 그러나 이러 these paintings are originally the work of non-professionals, like

한 작풍에는 의도가 담겨 있다. 예컨대 화가는 호랑이가 지닌 명 me. Minhwa painting allowed me to put aside my obsession with
realistic technique and focus on meaning. In minhwa painting,
확한 특징들을 부여하여 그리는 대상이 호랑이로 인식되게끔 하 features are coarser—more simplified or exaggerated. Tigers with
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사람들이 호랑이 big eyes and long teeth and sharp claws are sometimes anthro-

에 대한 두려움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 기운을 느끼도록 한다. pomorphized through their posture or with human accessories
such as hats or pipes. Magpies are portrayed as playful, talkative,
이처럼 민화에서는 표상과 기법의 선택으로 특정한 메시지의 전 and not afraid of bigger predators. The emotional impression
달이 가능하다. conveyed by these subjects surpasses the initial technical and

46
visual impressions. And with the addition of color to these trans-
formed bodies, minhwa paintings become explosive, surreal, and
sometimes even comical. However, these artistic decisions have a

‘예술’ 이상으로 다가온 한국화


purpose: while keeping the distinctive features of the tiger, for ex-
ample, so that it can be recognized as one, an artist might also give
it an idiotic appearance in order to reassure people and take away 한국화를 통해 우리는 현실로 현실을 도피할 수 있다. 덕분
their fear of tigers, thus bringing them some strength. In minhwa 에 나는 으레 그래 왔던 대로 표면에만 머물러서는 어디에도 도
painting, choices about representation and technique enable the
conveyance of a particular message.
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과거에 나는 기법에만 관심을 둘 뿐 그
림이 전달하는 서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예술에 숨겨진
Korean painting as more than just art 메시지가 피상적인 기법과 미학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정서적 인상
Through Korean painting, one can use reality to escape reality
itself. This made me realize that staying on the surface, as I usually
을 전달할 수 있음을 깨닫고, 한국화에 대해 더 배워보고 싶은 마
did, wouldn't get me anywhere. Before, I was only interested in 음이 들었다.
technique and had no interest in the narratives conveyed by paint- 민화 수업을 들을 때 수묵화를 배우는 학생이 맞은편에 앉았었는
ings. But as I realized that hidden messages in art can deliver much
more powerful emotional impressions than superficial techniques
데, 솔직히 나는 그녀가 왜 똑같은 나뭇잎을 반복해서 그리고 또
and aesthetics, I came to want to learn more about Korean painting. 그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자신이 그린 조그만
In my minhwa painting lessons, there was a student sitting 이파리에 만족한 적이 있기나 한지 궁금했다. 몇 시간이고 똑같
opposite me who was taking sumukhwa (ink wash) painting lessons.
To tell the truth, I did not understand why she painted and repaint-
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녀 자신보다 그 모습을 보는 내가 훨씬
ed the same leaf over and over again. I wondered if she was ever 더 지칠 지경이었다. 내 눈에는 처음 그린 나뭇잎과 112번째로 그
satisfied with her tiny leaf. It was much more tiring for me to watch 린 나뭇잎이 하나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나에게 예술이란 단순
her doing the same thing for hours than it seemed for her to do it. In
my eyes, there was no difference between the first painted leaf and
히 화가의 개성을 전달하는 것이었기에 옳고 그름이 있을 수 없
the 112th one! For me, art had always simply conveyed an artist’s 었다. 그러나 민화 수업을 정기적으로 들으면서 나는 그림의 대
personality, so there could not be a right or wrong. However, through 상이 화가의 정체성보다 앞선다는 점을 이해하게 됐다. 화가는
regular minhwa painting lessons, I understood that the object of
a painting comes before an artist’s identity. One must be aware of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에 앞서, 그리는 대상이 나타내는 바를
what the object of one’s painting represents and understand what 알고 무엇이 대상의 본질을 구성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constitutes its essence before revealing one’s own identity. 호기심과 매력에 이끌려 나는 수묵화 과정에도 등록했다. 색에만
Out of curiosity and fascination, I also signed up for su-
mukhwa painting classes. I must say that I didn’t expect much, as
관심이 있었던 터라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민화를 그릴
I was interested solely in colors. But it was extremely difficult to 때처럼 먹과 물, 종이를 다루기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게다가 수
control the ink, water, and paper, just as it was in minhwa paint- 묵화에서는 잘못 그린 부분을 덧칠로 가릴 수 없었다. 나는 어떤
ing. In addition, when doing sumukhwa painting, it is impossible
to cover up errors by with additional layers of paint. I came to
선이 좋은 선이고 어떤 선이 안 좋은 선인지 알아갔고, 화법을 통
realize that some lines are simply good and some simply bad, and 달하려면 반복 연습이 불가피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수묵화
that repeated practice is inevitably necessary to master the style. 에는 타협이란 없다. 첫 획을 제대로 긋지 못하면 처음부터 다시
Sumukwha painting is uncompromising; the lines must be right
from the start, otherwise one has no choice but to start over.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Korean minhwa and sumukhwa painting open one up 한국의 민화와 수묵화는 새로운 정서와 열망, 욕구를 일깨워주
to novel emotions, desires, and needs. They teach patience, 며 인내와 호기심, 구성과 성찰을 가르쳐준다. 이 그림들은 배경
curiosity, organization, and reflection. With action taken away
from the background, they direct focus toward the fundamen-
에서 행위를 제거함으로써 근본적인 것에 초점을 두며 본질로 회
tal, staging a return to the essential. Korean painting has given 귀한다. 한국화는 단순한 예술과 아름다움 이상의 무언가를 내게
me much more than just art and beauty. Korea’s seasons, food, 심어주었다. 한국의 계절과 음식, 자연과 그림의 색채는 이를 관
nature, and the colors of its paintings will make everyone who
observes, loves, and respects them someone with substance,
찰하고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사람을 실체와 근거, 사유와 감성
reason, thoughts, and emotions. 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Written by Helene Desandre, student, Department of French Language and
Literature, Seoul National University
글. 엘렌 드장드르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재학생 —
Photographs by Helene Desandre (photos 1, 5, and 6) and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photos 2–4) 사진 제공. 엘렌 드장드르(사진 1, 5~6), 국립중앙박물관 (사진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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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진

모금

쑥 너 있어
오늘의 나도 너다
냄새 한번 맡아봐
내 살肉과 피血냄새를
척추도 쑥대궁 일 걸
내 또래는 누구나 쑥과의 혼혈세대混血世代

쑥국 쑥죽 쑥밥 쑥개떡 쑥나물....
보리누름 재촉하는 노고지리 우짖어도
봄마다 춘궁기春窮期
국토國土는 어디든 엉망진창 쑥대밭
해마다 높아지던 보릿고개를
쑥대머리 귀신형용 얼크러 설크러 넘었는데

계절의 진미, 도다리쑥국 사먹으며


쑥이 넘겨준 보리고개가 그립다니?
국그릇에 떨어지는 문득 눈물방울
약藥쑥의 핏물, 내 어머니의, 내 할머니웅녀熊女의.

유안진 시인, 1965년 《현대문학》에 박목월 시인의 3회 추천으로 등단, 첫 시집 《달하》부터


《다보탑을 줍다》, 《거짓말로 참말하기》, 《둥근 세모꼴》, 《터무니》 등 18권의 신작 시집과
《세한도 가는 길》 등 12권의 시선집, 《지란지교를 꿈꾸며》 등 다수의 산문집이 있다.
한국시인협회상·박목월문학상·정지용 문학상·소월문학상특별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 사진. 박하선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삶의 중간보고서》, 《天葬》, 《천불천탑》, 《발해의 恨》,
《太王의 증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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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문화원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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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근대 목포로 와보랑께요
도시와 거리에 흘러간 시간은 이야기가 되고, 역사로 남는다.
1897년 개항 이후, 남부권 최고의 항구도시로 떠오른
목포의 이야기를 따라 걷는 길.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곳에서,
100여 년 전의 지도를 들고 낯설지만 아름다운 골목을 걸었다.

1 근대 건축물이 골목골목 남아있는 목포의 구도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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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흐른다! 역사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인


‘근대’라는 시기는 가장 가까운 과거이지만, 한 천과 군산 못지않게 근대의 풍부한 역사를 품고 있는
편으론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수탈의 역사 목포는 자주적 개항으로 문을 연 항구도시다.
를 강요당하며 많은 것을 상실한 시대의 이야기는 오 하지만 목포가 근대유산을 만날 수 있는 관광지로 크
늘날, 저마다의 의미가 있는 공간으로 우리 곁에 남았 게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김 원장은 아름다
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온 길 위에 존재하는 역사의 운 풍경과 고유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이것을
무게는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인 셈이다.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지원이 꾸준히 이어지지
목포 원도심은 세계를 향해 활짝 문을 연 개항장인 않았음을 아쉬워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동시에 일제 침략의 교두보이기도 했다. 아픈 역사가 까지, 근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는 이곳은 2018년에야
도시에 생채기를 내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고, 바 비로소 ‘목포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문화재 등록을
다를 향해 뻗은 길은 근대 역사를 만나는 문화공간이 마쳤다.
되었다.
과거와 현재의 우아한 공존,
“북항에는 만선이 된 고깃배가 들어오고, 건해산물을 ‘1897 목포역사의 길 투어’
사고팔기 위해 북적이던 사람들이 목포 일대를 가득 일제 강점기 일본인 거주지와 조선인 거주지가
채웠었죠. 아마도 ‘목포는 항구다’라는 말은 이 도시 경계를 이루어 형성되었던 근대역사공간은 목포 문화
의 전성기를 뜻하는 표현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조금 재야행 프로그램 중 하나인 ‘1897 목포역사의 길 투어’
은 낡고, 오래된 골목 사이사이 보물처럼 만나는 목포 를 통해 한층 더 현실감 있게 되살아났다. 문화재 야행
의 옛이야기는 어느 도시에서도 만날 수 없는 독특한 기간에는 더욱 많은 이들이 이곳의 골목골목을 거닐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며 누구나 시간 여행자가 되고, 과거와 현재를 모두 만
나며 목포를 더 깊이 알 수 있다.
목포문화원 김정기 원장은 언제 어디에서나 목포의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옛 골목길과 일본식 가옥,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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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항구를 마주한 목포 구도심은 가주택과 옛 벽돌 창고를 지나는 동안 독특한 경관을
근대 역사 문화 그 자체이다.
지닌 유달산과 원도심의 조화로움에 매료된다. 옛 호남
3 목포 근대역사관 2관으로
운영되는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은행 목포지점을 시작으로 옛 화신연쇄점, 옛 일본인
목포지점
상가거리, 목포진 역사공원, 옛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
4 일제 강점기에 부두와 가까운
지역에서 화물을 보관하기 위해 을 지나 옛 일본영사관으로 이어지는 ‘1897 목포역사의
지은 해안로 붉은벽돌 창고
길 투어’는 목포문화원이 이끄는 문화 프로그램이다.
5 목포문화원사로 사용된 옛
호남은행 목포지점. 일제 강점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목포 원도심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문화공간입
6 목포 근대역사관 1관으로 사용
니다. 1990년대 목포문화원은 지금의 목포 근대역사
중인 옛 일본 영사관
7 목포 구도심에 남아 있는 관옛 목포일본영사관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목포의 근대
근대역사문화공간을 한눈에 건축물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옛 일본영사
보여주는 골목 지도
관은 목포시청, 목포시립도서관을 거쳐 목포문화원으
로 활용되었습니다. 원형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
기에 옛 목포일본영사관은 마침내 목포 근대역사관으
로 쓰이게 되었죠.”

지난 2009년 목포문화원은 옛 호남은행 목포지점으


로 이전하게 되는데 그 건물 또한 등록문화재로 지정
되어, 올 4월 현재의 공간목포시 수강로 12번길 41에 자리를
잡았다. 김 원장은 “목포문화원이 머물렀던 곳들이 모
두 역사적인 공간이었기에 그 또한 자랑스러운 연혁”
이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특히 문화원이 근대역
사관 건물에 있었을 당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목
포문화원과 활발히 소통하며 교류했던 일은 언제 돌
이켜보아도 뿌듯한 일이라고.
3
4
5

6 7

53
목포문화원과 2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해 온 조
상현 사무국장은 더 많은 근대역사문화공간을 보존
하고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몇 해 전,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 등장하며 목포 관광의 필수 코스로 떠오른
목포 근대역사관은, 이곳의 문화를 지키고 계승해 온
목포문화원의 전신이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까지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된 옛 호남은행 목포지점도 그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1929년 건립된 옛 호남은행 목포지점은 일본 자본에
대항한 호남 지역 인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순수 민
족 자본으로 설립된 은행 건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근대 문화유산인 동시에 목포에 남아 있는 유일
한 근대 금융계 건축물이기도 하다.
무심히 산책하듯 걷기에는 골목마다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담은 문화재들이 있다. 그렇기에 목포 원도 8 9 10

심 길 투어는 그 어떤 곳보다 드라마틱하다. 굴곡진


역사의 고비마다 문화와 예술에 기대어 다시금 일어
섰기에, 이제 이곳은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예향의 도
시가 되었다.
11
12

오래된 미래를 만나는


꽤 멋진 도시, 목포
오랜 역사는 물론 독특한 외관으로 시선을 사로
잡는 건물도 많다. 그중 옛 동본원사 옛 목포별원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만든 목포의 첫 불교사원이
다. 광복 후 주인이 사라진 일제의 불교사원은 대부분
국가 소유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교회로 용도가 바
뀌게 되었는데, 본래 불교사원이 교회가 되었다는 이
색적인 이력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7년까지 교회 예배당이었던 동본원사는 현재 ‘오거
리문화센터’로 탈바꿈해 전시 및 문화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방문한 6월 당시 백남준 작가의 전시회 <나의 예
술적 고향>이 목포에서 처음 선보이고 있었다.
종교적인 공간으로 시작해, 한때는 배움의 장소로 쓰
였고, 민주 항쟁 당시에는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장
소이자 치열한 저항의 현장이기도 했다. 앞마당에는
‘6월, 민주주의 꽃이 피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민주항
쟁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이곳이 목포 민주화 운동의
거점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외에도 견고한 돌로 지어져 세월의 흔적이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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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일제 강점기에 불교사원으로 지어졌다가 광복 후 1957년부터 교회 예배당으로 사용된
옛 동본원사 목포별원. 지금은 오거리문화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9 오거리문화센터에서 열린 백남준 작가 전시회
10 목포 최초의 교회인 양동교회로 오르는 길
11 목포 구도심 골목에 위치한 갤러리 카페 ‘만호’의 전시 공간
12 유달산을 풍경처럼 두르고 있는 목포 구도심의 오후

멋스럽게 느껴지는 건축물도 원도심과 어우러져 조 을 선사합니다. 지금은 상상이 되지 않겠지만, 언덕을 내
화를 이룬다. 목포청년회관은 일제 강점기 목포 청년 려가면 매립 전까지 바로 물길이 있던 곳이랍니다.”
들의 문화 사랑방이자, 목포 최초의 시민회관 기능을
했던 공간이다. 돌로 만들어진 이 자그마한 건물은 주 조상현 사무국장은 교회 언덕 아래 아스팔트를 바라
권을 빼앗겼던 어두운 현실에 놓인 청년들이 작은 힘 보며 골목의 옛 모습을 설명한다. 자동차가 바삐 지나
을 모았던 의미 있는 장소다. 가는 현재의 도로는 무심할 만큼 세월의 흔적을 모두
목포 최초의 교회인 양동교회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워낸 모습이다. 힘차게 흐르던 물길이 멈추고, 수많
등록된 석조건물이다. 언덕배기에 유달산을 바라보 은 삶이 이곳을 스쳐 가는 것을 지켜보았던 유달산만
듯 우뚝 서 있는 이 교회는 1910년 신자들이 유달산의 은 여전히 같은 얼굴로 목포 원도심의 배경이 되어주
돌을 직접 옮겨다 세운 광주·전남 지역 최초의 교회로 고 있었다.
알려져 있다. ‘아픈 역사’와 ‘눈물의 항구’로 대변되던 목포는 근대문
화유산을 간직한 보물 같은 도시로 일어서고 있다. 100
“함석지붕을 인 교회 본당 정면에는 아름다운 종각이 있 년도 넘는 시간을 한나절 산책으로 돌아본다는 것은
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30여 년 전 교회를 지키던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종각은 철거되고 말았지요. 유달산과 마주할 수 있는 이 목포 원도심을 산책한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오래된
언덕은 신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감탄사가 나오는 풍경 미래를 간직할 수 있는 꽤 멋진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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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거시기 목포문화원은 사랑이랑께

15 노적봉 앞 광장에서 열린
강강술래 공연
16 전남민속예술축제의
강강술래 공연

15

여그 목포에는 목포문화원이 있제
목포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발굴하고 발전시키는
데 힘쓰고 있는 목포문화원은 1965년 설립 이후 옛 일
본영사관과 옛 호남은행 목포지점 건물을 거쳐 올해
봄, 새로운 건물에 둥지를 틀기까지 수많은 교류를 통
해 목포의 문화를 알리고 계승해왔다.
특히 지역향토문화 연구의 요람으로서 역할을 충실
히 해왔는데, 연구 성과를 책으로 묶어 《근현대신문
자료집성》, 《유달산》, 《유달산 아래 작은 섬, 고하도》,
《목포의 땅이름》, 《목포의 근대건축》, 《근현대신문자
료집성》, 《목포의 근현대표상》, 《목포역사문화지도》,
《무안보첩》, 《완역 목포부사》, 《목포풍아집》, 《초정
집 1. 2》, 《호남보인사시고》 등을 발간했다. 목포문화
원이 보유하고 있는 풍부한 지역향토문화 관련 자료
는 목포와 문화원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정보
를 제공한다. 16

56
17 암말 말고 목포로 오시오
18
목포문화원은 지역문화를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
고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개최
한다. 4.8독립만세운동 재현 기념으로 기획된 원도심
유적을 돌아보는 ‘역사의 거리걷기대회’가 대표적이
다. 목포문화원이 주관하는 이 행사는 목포시민은 물
론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또한 이충무공 호국정신 선양을 위한 모충서예휘호대
회, 민족 명절인 한가위에 열리는 ‘목포시민 한마당 잔
치’, ‘지역역사문화 아카데미’ 등의 행사도 개최한다. 매
년 11~12월에 열리는 ‘전라도 사투리 구연대회’는 토
속 문화를 보존하면서 큰 즐거움을 선사하는 행사다.
5월과 10월에는 두 차례에 걸쳐 문화유적지 및 자매결
연도시를 탐방하고 이를 통해 문화 교류도 활발히 진
행한다.

17 전남문화예술지원사업 중 ‘수묵 콜라보 축제’ 전통은 겁나 재밌는 것인디, 아요?


18 목포 구도심 골목에 남아 있는 일본식 가옥 내부
목포문화원은 다채로운 발간 사업을 통해 목포
19 목포문화원에서 주최하는 ‘전라도 사투리 구연대회’
20 최근 이전한 목포문화원 전경 의 역사를 소개하고 보급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부설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향토문화연구소, 강강
술래보존회, 자문위원회 등과 유기적으로 소통하며
향토문화 예술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또 논어, 맹자
등 동양고전 강좌를 진행하고, 민요와 한춤, 생활 그
림 교실, 장구, 북, 공예와 같은 전통문화강좌는 목포

19 문화학교를 통해 운영한다. 이와 함께 《목포문화》라


20
는 이름의 목포문화원 자체 발간지를 통해 지역문화
를 조사하고 전승해 가고 있다.

도울 건 돕고 지킬 건 지켜야지라
목포문화원은 노인 일자리 사업 운영기관으로서
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실버남도소리 순회공
연을 통해 민요와 판소리를 알리고 있다. 또한 실버관광
도우미 과정을 운영해 관내 지역의 주요 관광지를 안내
하고 해설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배출해 시니어층의 일
자리 확충에 앞장선다. 이 밖에도 연중 근대문화유적을
조사하고 향토사 연구소를 운영하며 목포 문화유산 수
집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옛 사진과 문서 등의 전산화
과정을 통해 소중한 향토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

글. 김소연 편집팀 ― 사진. 홍덕선(사진 1~14, 18~20) ― 사진 제공.


목포문화원(사진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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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쌓다
미래에
닿다

태안문화원 문헌자료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정지수 사무국장

58
결국엔 아카이빙
결국엔、문 화 원

20여 년간 수집한 자료,
문화원 신축의 ‘명분’돼
지하엔 수장고, 1층엔 향토사료전시관, 2층엔 공연장, 3층
엔 문헌자료실…. 언뜻 들으면 도서관 혹은 박물관인가 싶지만
지난 2017년 지어진 태안문화원의 신축 원사院舍다. 태안문화원
은 1990년 태안읍내 상가 건물에서 시작해 두 번의 이사를 거쳐
지금은 충남 태안군 태안읍 백화로192에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건물로 자리 잡았다.
“신축 원사는 어떻게 보면 ‘자료들’ 덕분에 세워졌다고도 할 수 있
습니다. 1990년 읍내 상가 건물 안에 개원할 당시, 문화원에 많은
자료가 쌓여 있기는 했지만 열악한 환경과 인력으로 도저히 관리
할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수집하거나 배부받은 도서
를 특별히 분류하지 않고 창고에 쌓아놓는 것이 전부였죠. 그나
마 다행히 1996년 단독 원사가 신축되며 공간이 생겼고 2002년
부터 본격적으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도서와 자료를 정리하는 것은 집중력과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
다. 결국엔 전담 인력이 있어야 한다. 정지수 사무국장은 문화원
입사 때부터 자료의 분류와 정리, 보존에 깊은 고민을 해왔다. 당


자료의 포화상태를
시엔 정책적으로 ‘인턴사원’이라는 제도와 ‘대학생 직장체험지원
프로그램’이 있어 젊은 대학생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렇게 3~4년
간 방학마다 학생들을 활용했고, 2002년부터 2016년까지는 향
토민속도서관 운영이라는 사업을 통해 인력을 충원하고 도서 관

꿈꾸는 태안문화원 리를 전담하도록 했다. 도서 자료가 정리되니 향토 사료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는 지역신문사와 함께 향토 사료
기증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펼쳐 다양한 지역 유물을 수집할 수
한국인의 민족성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이 있었다. 수집한 자료를 보관할 공간이 없자 컨테이너 세 대를 연
있다. ‘기록의 민족’. “기록하지 말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는 결해 서고를 만들고 인근 박물관 수장고를 임차해 사료를 보관하
왕의 말조차 기록된 《조선왕조실록》과 수원 화성을 축성할 기도 했다. 이처럼 오랜 기간 태안의 자료와 유물을 수집해 온 덕
당시 계획, 인력의 인적 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분에 문화원 역할에 대한 이해도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고,
예산과 임금賃金까지 상세히 기록한 《화성성역의궤》1801년 그것이 태안문화원 신축의 명분이 됐다.
등을 보면 왜 우리를 ‘기록의 민족’이라 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기록의 ‘생산’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관리와 아카이빙의 첫걸음은 ‘분류’
보존이다. 일찍이 자료의 수집과 관리, 보존에 대한 <지방문화원진흥법>에 따르면 지방문화원의 수행 역할로
중요성을 깨닫고 20여 년 동안 아카이빙에 몰두해 온 지역문화의 계발·보존 및 활용뿐만 아니라 지역문화향토자료의 발
정지수 태안문화원 사무국장을 만나보았다. 굴·수집·조사·연구 및 활용을 규정한다. 아카이빙이 중요한 이슈

59
1 내파수도의 돌을 지킨 한 한국인의 12
실제 이야기를 그린 만화책 《파수도의 돌》
2 태안문화원 지하 수장고에서 보관 중인 갖가지 유물

이자 국가적 과제로 거론되는 시대에서, 지역문화의 거점인 문화 증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 점의 유물을 받기 위해 10여 년간 주
원이 지역 기록물의 수집, 관리, 활용에 중점 기관이 돼야 하는 것 민과 지속적인 교류와 소통도 마다하지 않았다.
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향토 자료의 수집, “일제 강점기에 전국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태안에 있었어요. 그
보존의 역할은 잘 이뤄지지 않기도 한다. 고질적 문제인 공간과 증손자분이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셨는데, 집안에 있는 유물이나
인력 부족 때문이다. 한계를 극복하며 문화원이 한 걸음씩 내딛 자료를 가끔 문화원으로 가져와서 자랑하셨죠. 10여 년 동안 자
는 방안은 무엇일까. 랑을 들어드렸어요. 절대 자료를 달라고 쫓아다니지 않았죠. (웃
“만약 어디서부터 자료 수집과 관리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문 음) 그러다가 자료를 관리하기 어려운 시점이 왔고, 결국 문화원
화원이 있다면 우선은 ‘분류’부터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 에 기증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다. 보유한 모든 자료와 유물을 범위가 넓은 분류체계로 분류해 그는 문화원에 지금 당장 자료가 쌓여 있지 않더라도 조급해하지
야 합니다. 분류 작업을 통해 우리 문화원만이 수집하는 자료가 말라고 말한다. “언젠가 자료를 기증할 수도 있는 ‘잠재된 인적자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고 어느 주제의 자료가 넘치고 부족한지 원’을 관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눈앞의 자
알 수 있죠. 이를 통해 문화원이 앞으로 수집할 자료의 주제를 선 료 축적에 조급해하지 않으면 나아갈 길이 점차 보이기 마련이
정하고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또 공간의 한계에 부 다. ‘예산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라는 그의 생각
딪히면 남길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할 근거가 되기도 하죠.” 도 이와 닿아 있다.
태안문화원은 20여 년 동안의 수서收書, 수증受贈, 수탁受託 등을 통 “문화원에서 하는 모든 일을 자료 생산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습
해 700~800여 종과 1500여 점의 자료·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비 니다. 예를 들어 연례행사를 개최하더라도 반드시 산출물을 만들
용을 지불해 구입하는 것은 지양하고 대부분 기증받는다. 하지만 고 축적해 자료로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죠.”
처음부터 지역 주민들이 마음을 열고 개개인의 소중한 물건을 기 태안문화원에서 매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백일장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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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지 못한 《우리문화》마저 태안문화원 서고에서 발견되는 일도
4
있었다. 태안문화원이 건립된 이후, 발간된 《우리문화》를 모두
목록화해 관리한 덕분이다.
믿지 못할 사연도 있다. 태안 안면읍에는 내파수도라는 작은 섬
이 있다. 그 섬은 몽돌이 천연방파제를 이루는 특이한 지형으로,
일제 강점기부터 도자기 연마제로 돌이 수탈되었으며, 광복 이
후에도 국내 광산개발업자가 허가를 내고 돌을 반출하고자 했
다. 하지만 단 한 명의 노인이 집념과 노력으로 투쟁한 끝에 내파
수도의 돌을 지켜냈다. ‘내파수도의 돌’ 이야기는 태안 내에서도
공식적인 역사 기록 대신 미담 정도로만 전해졌었다. 세월이 흐
른 후 내파수도를 지켜낸 노인은 돌아가셨고, 그가 법정 투쟁하
며 모은 모든 기록은 흘러흘러 서울의 한 인쇄소로 전해졌다. 인
쇄소는 오랜 기간 이 자료를 창고 한쪽에 두었다가 처분하기 직
전 태안의 한 학교 교사와 거래하면서 이 자료를 건네주었고, 그
교사는 이후 자료를 태안 내 인쇄소에 전달한다. 인쇄소 대표는
자료를 보관하다가 태안문화원의 기증 캠페인을 어렴풋이 알고
3 2002년도 태안문화원 향토사료도서관 정리 모습 있던 차에 친분이 있던 태안문화원장과 사담을 하던 중 자연스레
4 2014년 당시 태안문화원 서고 모습
해당 자료에 관해 이야기했고, 결국 자료는 태안문화원으로 이관
됐다. 자칫하면 사라질 뻔한 귀한 자료가 문화원으로 수집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원의 적극적 자료 수집이 지역 내 널리 소문난
덕분일 것이다.

림대회의 원본을 귀하게 보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 중 지역 기록물 수집, “결국엔 문화원밖에 없다”
단 한 명이라도 세계적인 대작가가 나온다면 어린 시절 작품의 2000년대 초중반부터 지역에서 다양한 교육기관, 문화기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관, 도서관의 사업 확대, 각종 문화시설이 생겨나면서 문화원의
영역이 축소됐다. 더군다나 전문적인 광역단위 문화연구기관의
수집 정책이 없는 것이 정책 활동으로 인해 향토사에 대한 전문성도 많이 위축됐다. 하지만
여러 문화 사업을 함께 펼치는 문화원인 만큼 공간의 한계 문화원의 고유 기능과 향토 사료의 양 그리고 역사적 측면에서
가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수집 정책을 세울 수밖에 없지만, 태 문화원과 경쟁할 단체나 기관을 찾기 어렵다.
안문화원은 최대한 자료 수집에 제한을 두지 않고 기증 의사를 “공공 기록이 ‘선택된 역사’라면 개인의 기록과 민간의 기록은 지
밝힌 모든 이의 기증품을 받는다. 제한을 두고 기증받으면 기증 역 역사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기록을 수집, 보존하는 것은 지역
자가 기증을 마음먹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문화의 자산을 가꾸는 일이지요. 비록 각 문화원의 상황과 한계,
몇 해 전 태안 최초의 문방구 ‘백화당’이 폐업하면서 문화원에 연 역할이 모두 다르고 일의 경중을 따질 수 없기에 ‘아카이빙에 몰
락했다. 이 중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한걸음에 달려 두하세요’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역의 정체성을
갔는데 형광등을 비롯해 모든 물건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골라 지닌 알짜배기 자료를 생산하고 수집하고 관리하는 것, 결국엔
가져가지 않고 모두 실어 왔다. 비록 95%가 버려지고 5%의 물건 문화원밖에 없습니다.”
이 남았지만 “문화원을 불렀더니 좋은 것만 골라 가져갔어”라는 그는 문화원이 위기라는 말에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미 문화원은 충분히 많은 자원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열과 성을 다해 자료를 수집하고 수집한 자료는 최대한
글. 음소형 《우리문화》 편집팀 ― 사진. 김현민 사진작가(사진 1~2) ―
문화원 내에서 관리하다 보니 한국문화원연합회에서 미처 보관 사진 제공 태안문화원(사진 3~4)

61
지역
문화
확대경

그 옛날 경남 창원시 진해구에는
앞소리꾼부터 상여꾼까지 연도여자상여소리라는 장례 풍습이
여성으로만 치러진 장례 있었다. 연도여자상여소리는
연도에서 우리나라 조상 대대로
이어온 이 섬만의 독특한 장례

연도여자 풍습이다. 우리나라의 도서 지역만


해도 무수히 많을 것이고 시대 배경
또한 비슷할 것인데, 유독 여자들이
주축이 돼 장례문화를 만든 경우는

상여소리 드문 일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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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여인의 숙명적 애환이 스며 있는 본고에서는 연도 95번지에서 1940년에 출생해 마지
독특한 장례 풍습 막 연도상여소리 장례를 치른 경험이 있는 박용출81세
연도에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약 선생의 실제 장례 절차를 소개하고자 한다.
400년 전쯤이지만, 지금은 1995년 시작된 신항만 공
사로 섬이 육지화되면서 ‘연도’라는 명칭만 남고 소멸 연도의 마지막 장례
됐다. 소멸되기 전까지 주민들은 4~5대에 걸쳐 살아 1981년 12월, 박용출 선생의 부친이 72세를 일
왔다. 제덕동괴정으로부터 4km 동남 지점에 있는 낙 기로 부산에서 운명하셨다. 주검은 고향 연도에 있는
도였던 연도는 산이 가파르기 때문에 섬사람들은 채 할아버지 묘지 옆에 안장하기로 했다. 문상객은 부산
소, 밀, 콩 등 농작물과 미역, 파래, 물고기 따위를 웅 에서 맞이하고 웅천 괴정 부두에 오전 10시까지 운구
천장에 팔며 삶을 이어왔다. 남자들은 4월이 되면 조 하는 계획을 세웠다.
기잡이 하러 연평도나 전라도 위도까지 가서 어로 작 부산에서 영구차에 관을 모시고 괴정 부두에 도착해
업을 하고는 8월이 돼야 돌아왔다. 만선을 하고 돌아 미리 준비한 관과 상여를 결합한 후, 배에 올라 연도
온 배는 용왕기나 태극기를 달고 꽹과리와 징을 울리 본가 앞 모래사장에 도착했다. 이때 고향 배들이 애도
면서 앞바다를 한 바퀴 돌고는, 해변에 세우고 돈 가 의 만선기를 달아주었다. 친척과 마을 사람들의 조문
마니를 선주 집으로 이동하기도 해, 연도를 한때 ‘돈 을 위해 다시 발인제를 하고 부산에서 온 많은 조객弔
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客과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엿소리가 시작됐
연도는 워낙 작은 섬이었기에 묘를 쓸 곳이 없어 섬 건 다. 앞소리꾼 김학곤이 쇠를 내려치자 상두꾼들은 상
너편에 있는 솔섬무인도에 장지를 정하고 상여는 작은 여 방틀에 섰다. 앞소리꾼의 구령에 따라 “하나, 둘”
배에 싣고 운구했다. 연도에서 여자가 상여를 메게 된 하면 상두꾼은 일제히 상여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이유는 1986년 당시 강국술70세 씨의 증언에서 잘 알 상여 균형을 유지하고 멜빵을 걸쳤다. 앞소리꾼이 한
수 있다. 소절씩 사설하면 상두꾼은 “에호, 에호, 에가리 넘자,
“여자들이 상여를 메고 장사를 치른 것이 별시런 뜻이 에호” 하고 후렴을 받는다. 앞소리꾼이 개울에 이르러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닙니다. 섬에 사는 남정네들이 고 상여를 뒤로 밀치면서 사설을 하고 상두꾼은 앞으로
깃배 타고 바다로 나간 건 먹고살기 위해 그런 거라 쳐 밀면서 후렴을 받는다. 그러고는 상여 어루기를 한다.
도, 젊은 장정들이 있는 대로 징용에 뽑혀 나가던 태 상여 어루기는 원래 발인 전날 밤 선소리꾼과 상여꾼
평양 전쟁 당시는 참말로 이 섬에 남자라 카는 것은 코 들이 미리 모여 빈 상여를 메고 발을 맞추거나 상주와
빼기도 보기가 어려운 판이니 초상이 나면 우짭니꺼. 유족을 위로하는 과정인데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여자들이라도 장사를 지내야지.”
연도여자상여소리는 발인제, 운구, 봉분 작업 등 일체 이것도 개울인데 노잣돈 없이 어찌 건너나(후렴)
를 여자들만이 시행하는 독특한 장례 풍습이다. 여인 찬아兒名 찬아 우리 찬아 내 장남 불쌍하네(후렴)
들이 부르는 상엿소리는 망자를 애도하는 애절함을 아홉 살 때 엄마 잃고 고생고생 다하다가(후렴)
한층 더 깊게 해준다. 장례 의식이 모두 끝나면 여인 당산할매 덕분으로 자식 낳고 잘 살구나(후렴)
들은 흥겨운 풍물 가락으로 봉분 주위를 돌며 상주를
위로하는 한편, 고된 장례 행사의 피로와 슬픔을 털어 개천을 건너고 상여 일행은 집 앞 모래사장에서 사당
낸다. 이처럼 연도여자상여소리는 비극적인 슬픔 속 에 있는 당산할매를 향해 상여 앞머리를 두어 번 들었
에서도 ‘내일’을 살아야 하는 섬 여인들의 숙명적 애 다 놓았다 하는 인사를 했다. 집 앞 모래사장을 한 바
환이 스며 있는 독특한 장례 풍습이다. 퀴 돌아 다시 배에 오를 때 앞소리꾼이 묘지로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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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면, 상여 배를 예인할 발동선이 용왕기, 만선기 루를 거쳐 마당으로 운구된다. 제상이 차려져 헌작하
를 달고 대기했다. 고 축을 고하며 곡을 하여 발인제를 지낸다. 망인이
장지는 연도 뒷산이지만 돌아가는 길이 없어 다시 배 정든 섬을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애도하는 자리다.
에 올라타 서쪽 해안에 접안해 힘을 모아 상여를 당김 제3과장은 ‘상여 운구’로, 상여는 망자의 집 앞에서 왼
줄로 이끌고 언덕을 올랐다. 묘혈 장소에 도착해 하 쪽으로 세 번 돌고 집을 향해 묵례하듯 숙였다가 출발
관 준비를 하고 상주는 옷섶으로 흙을 골라 관 위에 뿌 한다. 배는 장지인 이웃 솔섬을 향하는데 섬 앞에 이
렸다. 김학곤 앞소리꾼은 미리 준비한 화투를 관 위에 르러 연도를 바라보며 타원을 그리며 연도와 하직 인
묻었다. 평소 고인이 심심풀이 음료수 내기용으로 사 사를 한다. 제4과장은 ‘상여 안장 및 평토제’로, 배가
용하던 화투다. 저승에 갔어도 심심하지 말라는 마음 솔섬에 닿으면 미리 파둔 묘혈까지 비탈진 산길을 오
을 담은 것이다. 연도가 생긴 이래 가장 감명 깊고 아 르는데 이때 상두꾼뿐만 아니라 문상객까지 앞에서
름다운 장례라고 주민들이 입을 모았다. 줄을 끌어 운구한다. 다음은 흙이 귀한 솔섬에서 봉분
1981년, 이 장례 의식을 끝으로 연도상여소리는 막을 을 만들기 위해 여인들이 바지게, 삼태기, 함지 등으
내렸다. 그러나 진해문화원이 지난 4월 진해민속예술 로 흙과 잔디를 운반해 산에서 마지막 제사를 지낸다.
전수관에서 진해문화원 부설 연도여자상여소리전통 마지막 제5과장은 ‘귀환과 뒤풀이’다. 진혼 의식을 모
상례보존회 현판식을 했다. 본격적으로 연도여자상 두 끝낸 다음 상주와 슬픔을 함께한 모든 사람이 빈 상
여소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될 것인데, 박용출 선생 부 여를 싣고 오면서 망자의 혼을 위로하고 상주와 유가
친 이후로 또 다른 상여 장례가 있었다는 진술이 있었
으므로 연구가 진행된다면, 이후의 새 자료가 나올 가
능성이 있다.

장사壯士가 되면 악인이 된다는 전설


1 연도 장지로 오르는 운구 행렬(1981)
2 2009년 6월 23일~24일 거제종합운동장에서
연도에서 여자가 상엿소리를 하게 된 데는 “장 열린 제35회 경상남도민속예술제 중
연도여자상여소리 재현 모습
사가 되면 악인이 된다”는 연도의 전설과도 관련이 있
1
다. 옛날 연도 동쪽에는 ‘장사샘’이라는 것이 있었다 2

고 한다. 이 샘물을 마시면 장사壯士가 되거나 몸을 쓸


수 없는 불구자가 됐는데, 오히려 장사가 되면 반드시
뱃길을 괴롭히는 악인이 됐으므로 이런 화를 면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아예 장사샘을 메워버렸다. 하지
만 그 뒤로도 연도에선 힘센 남자를 기피하는 분위기
가 생겼고, 자연스레 여성들이 생활을 주도하게 됐다.
그래서 여성들이 상여를 메고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
었다는 것이다.
연도여자상여소리 장례 절차는 전체 5과장으로 구성
돼 있다. 제1과장은 ‘전야제하직 인사’로, 출상 전날 밤
여자 상두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횃불을 앞세워 동네
를 돌며 망자가 이웃들에게 하직 인사를 하게 한다.
제2과장은 ‘발인제’로, 발인하는 날 안방에서 관이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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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의 슬픔을 달래주려 흥을 한껏 돋운다. 그동안의 노
역과 슬픔을 잊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우스갯소리와 육담으로 치상治喪을 마을 축제의 장으
로 만들면서 비로소 막을 내린다.

선소리꾼부터 상여꾼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여성 중심
연도여자상여소리의 특징은 선소리꾼부터 상여
꾼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여자 중심의 장례 풍습이라
는 것이다. 또한 상엿소리는 망자를 애도하는 의식요
儀式謠의 성격과 운구와 봉분 등 힘든 일을 견디는 노
동요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다. 이와 함께 장례 절
차를 마친 뒤의 흥겨운 뒤풀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어주다가 단절시켜 살아남은 자들의 삶에 대한 다
짐을 되새기게 하고, 장지를 이웃 섬인 솔섬에 둠으로
써 주민들의 유일한 보금자리인 섬을 지키는 한편, 망
자의 마지막 길인 뱃길이 주민들이 삶이라는 여정에
서 건너야 할 숙명적인 통과의례임을 알게 한다.
진해문화원에서는 1984년 박차생 원장 재직 당시 진
해시 공보계와 함께 연도여자상여소리를 발굴해 향
토민속예술 발굴 및 창작 경연대회인 경남민속예술
제 출품작으로 출전했다. 이후에도 지금까지 매년 연
도여자상여소리 보존을 위한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지난해 새로 부임한 우순기 원장과 함께 도道 문화재
지정을 위해 애쓰고 있다.
지금은 사라진 연도의 넋을 위해 연도여자상여소리
의 제소리 찾기는 아무리 파도가 치고 비바람이 불어
도 상여 실은 배는 사고가 없다는 속설처럼 면면히 이
어져야 하리라.

글.정남식 진해문화원 이사 ― 사진. 박용철(사진 1),


사진 제공. 진해문화원(사진 2) ― 그림. 김진이 일러스트레이터 ―
참고문헌. 염기용, <외딴 섬을 지키는 여자 상여꾼>,
월간문화재사 《전통문화》, 4월호 (1986)·
박용출, <고향을 떠나도 마음은 고향에 산다>,
진해문화원 《진해문화》, no.10 (2012)·
박용출, <연도여자상여소리의 올바른 전승을 위하여>,
진해문화원 《진해문화》, no.11 (2013)·
박상아 <연도여자상여소리 전승 현황>, 진해문화원 《진해문화》,
no.1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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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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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맑은 맛
전통 음청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삼국 시대에 식생활이 체계
화되면서 주식, 부식, 후식이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전통 음료는
후식류로 발달하게 됐다. 《양서梁書》의 <제이전 고구려조>에는
“고구려인들은 윤수潤水를 마신다”고 했는데, 이는 골짜기 물을
음청 의미했다. 이를 통해 과거에는 자연의 감수甘水를 가장 원초적인
음료로 즐겨 마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원시 식물의 꽃이나
열매를 음료 재료로 사용한 예를 중국 양대의 본초학이나 송대의
《본초도경》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대의 음청류 문화는 조선
시대에 차茶가 쇠퇴하면서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곡류
각종 의례에 따른 식생활이 반영돼 변화해 온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종류와 형태︑조리법이 다양했다 이
한국의 전통 음료는 예부터 차︑화채︑밀수

를 젖산 발효시킨 뒤 물을 첨가해 마시거나, 더운 여름날 물에 꿀


을 타서 먹는 등의 방식이 사용됐다. 또한 일상 식생활의 과학적
합리성이 높아지고 약식동원藥食同源 사상이 발달하면서 한약재
를 음식에 많이 사용하게 됐고, 이 결과로 식혜·화채·수정과·밀수
등 다양한 음료류가 발달했다.

소화제로 좋은 음료 중 으뜸은 식혜
한국의 후식류이자 여름철 대표 전통 음료 중 하나인 식혜


는 독특한 단맛과 우아한 고유의 향기를 가지고 있는 음청류다.
. 는 일상식︑절식︑제례︑대 소

엿기름물에 멥쌀이나 찹쌀로 지은 밥을 넣어 삭혀 만든 음료인


데, 생선에 곡물·소금·향신료 등을 넣어 삭혀 먹는 발효식품인 식
蜜水︑식혜︑수정과︑탕︑갈수︑즙︑타락 우유 등

해食醢에서 비롯됐다.
식혜의 맛은 엿기름가루에 달려 있다. 엿기름은 보리를 싹틔워
만든 것을 말한다. 엿기름가루가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당화 효소
인 아밀레이스Amylase, 아밀라아제가 많이 들어 있어 당화 작용을 일
으키고, 생성된 엿당Maltose은 식혜의 독특한 맛에 기여해 풍미를
·연회식 등

높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음식을 먹은 후 소화제 역


할을 하는 음료로 식혜를 으뜸으로 꼽았다고 한다.
《규합총서》에 나와 있는 식혜 만드는 방법을 보면 “좋은 쌀을 옥
玉같이 씻어 시루에 찌되 잘 익히고, 솥뚜껑을 시루 위에 안쳐놓
고 숯불을 많이 담아 위까지 고르게 익혀 항아리에 넣고, 엿기름
가루를 더운물에 담고 한참 만에 체에 맑은 물을 받아 그 물을 밥
에 잠길 만큼 넣고 종이로 봉하여 온돌에 두되, 가령 초저녁에 두
면 새벽 2시경에 내어놓아 익히고, 냉수에 꿀을 섞어 항아리에 붓
고, 또 대추·밤·백자·배 등을 넣으면 맛이 산뜻하고 감칠맛이 있
1 우리나라의 대표적 음청류인 수정과.
다. 유자는 온채로 넣으면 향기가 비상하니라.”라고 쓰여 있다. 지
수정과의 깊은 맛은 건시의 품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의 식혜 제조법과 별 차이가 없어 전통 방식의 식혜가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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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동 지역과 같이 고춧가루를 넣어 빨갛게 만든 식혜와 더불어
최근에는 밤을 넣어 만든 밤식혜나 고구마식혜, 단호박식혜 등
다양한 재료를 첨가한 형태의 기호 식품으로 상품이 출시되면서
젊은 층도 많이 찾는다.

향긋한 국물과 곶감의 달콤한 맛, 수정과


수정과는 일본이나 중국 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
라 특유의 음청류다. 19세기 말 조리서인 《시의전서》를 보면 ‘수
정과부’라는 표현으로 곶감수정과·배숙·화채 등의 음청류가 소
개돼 있는데, “수정과는 좋은 건시를 냉수에 담그되, 물을 넉넉히
부어 흠씬 불린 뒤 생강을 진하게 달여 체에 밭쳐 붓고 꿀을 넣고
잣을 띄워 만든다”라고 돼 있는 것을 보아, 현재의 형태를 갖추기
이전에는 각종 재료를 넣어 달여 차게 먹는 음료의 형태가 수정
과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정과의 깊은 맛은 건시의 품질에 달렸다. 단감으로 만들어 씨
가 적고 촉촉한 주머니 곶감이 좋다. 너무 마르지 않고 시설곶감 겉
면에 생기는 흰 가루이 뽀얗게 보이는 것을 골라 꼭지를 떼고 씨를 발
라내어 사용한다. 곶감을 처음부터 넣어 달이면 국물이 혼탁해지
고 청량감이 덜하므로, 따로 준비해 수정과 국물에 불려 부드러
워지면 띄워내는 방법이 좋다. 특히 수정과를 만들 때 생강과 통
계피를 끓여 쓰는 방법도 있지만, 각각 끓이고 걸러서 혼합하면
특유의 향과 맛을 더욱 살릴 수 있다.

더위에 지친 여름에는 밀감화채


식혜와 수정과 외에도 여름철 대표 음청류로 빠질 수 없는
것이 화채다. 화채는 자연의 변화에 맞게 계절 감각을 반영했다
는 큰 특징을 가지고 있다. 봄에는 매화와 더불어 진달래꽃을 따
다 오미잣국에 띄운 화채로 봄기운을 느꼈고, 여름에는 화사한
장미와 연꽃을 비롯해 가장 먼저 수확하는 열매인 앵두로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 가을에는 배와 유자, 겨울에는 한 해 동안 갈무리
해 온 곡류를 비롯해 꽃과 잎, 열매, 과실 등을 이용해 만들었다.
화채 중 여름을 대표하는 것이 하밀감으로 만드는 밀감화채다.
2
3
4

2 여름철 대표 전통 음료로 꼽히는 식혜


3 밀감으로 만든 화채는 더위에
지친 몸에 활력을 주는 음청류다.
4 오미자물로 만든 전통 화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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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우리나라 음식 만드는 법》에서는 “밀감을 까서 속 알맹 얼음과 함께 사과효소액 한 잔


이를 다 잘게 떼어서 설탕을 넣어 화채 그릇에 담고, 꿀물이나 오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음료는 효소 음료다. 효소는 몸의 신
미자물 혹은 딸기즙에다 빛과 맛을 적당히 만들어서 화채 그릇에 진대사를 촉진해 에너지를 내거나 유해 물질로부터 우리 몸을 보
붓고 실백을 띄워놓으라”고 하여, 밀감을 이용한 화채 만드는 법 호할 때 필요한 요소로 다양한 재료에 설탕을 넣고 오랜 기간 숙
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미자나 딸기를 넣는 것은 유기산 성시켜 만든 효소액을 통해 섭취할 수 있다. 여러 효소액 중 젊은
의 신맛이 입맛을 돋우고, 붉은색을 내는 안토시안 색소는 시각 세대가 많이 찾는 사과효소액은 사과를 설탕에 버무린 후 저온에
적 자극을 주어 구미를 당기게 한다. 밀감은 피로 해소에 좋은 비 서 1년 이상 숙성 시켜 만든다. 사과는 섬유질이 많아 배변 활동
타민C와 카로틴을 다량으로 함유하고 있어 더위에 지쳤을 때 먹 을 돕고 콜레스테롤 감소, 비만, 당뇨 고혈압 예방에도 효과적이
으면 좋다. 특히 밀감 속의 비타민P는 모세혈관에 투과성의 증가 며 기억력 감퇴에도 도움이 된다. 잘 발효된 사과효소액을 얼음
를 억제하고 취약성을 회복해 주기 때문에 동맥경화와 고혈압을 과 함께 시원한 냉수에 타 먹으면 맛이 일품이다.
예방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땀을 많이 흘리고 기력을 회복해야 하는 여름철에는 다양한 종류
의 음청류를 자주 마시는 것이 좋다. 코로나19로 심신이 지쳐 있
고, 면역력 증강이 중요한 요즘 우리 전통 음료 한잔으로 한여름
사과효소액 만들기 을 건강하게 보내길 권한다.
5 적당한 사과를 골라 깨끗이 씻는다.
6 사과를 설탕에 버무린다.
7 설탕이 완전히 녹을 수 있도록 2~3일에 한 번씩 저어주고 공기와
접촉하는 윗부분이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금도 약간 뿌려준다. 글. 윤숙자 한국전통음식연구소 대표. 저서 《조선요리제법》, 《동국세시기》 등 ―
8 2~3개월 후 절여진 사과에서 가스가 올라오지 않고 좋은 향이 사진 제공. 김지호-한국관광공사(사진 1), 윤숙자(사진 2~3, 5~8),
나면 저온에서 1년 이상 숙성시킨다. flickr(@Republic of Korea)(사진 4)

69
문화
끼리

가면、 세계 여러 나라의 축제에서는


각 종교의 수호신에게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고 놀이를 거행하는 의식을
통해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한다.
축제에는 가면을 활용한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가면은 풍농
기원의 제의, 악귀를 쫓는 벽사 의식과
나례儺禮, 치병을 위한 무속적 제의
등에 폭넓게 사용되므로 그 의미와
기능이 매우 다양하다.

그 참을 수 없는
자유

70
티베트와 부탄의 참Cham 가면 부탄의 가면극 참은 체추Tshechu 축제에서 연행된다. 부 1 부탄의 가면극 참
〈죽은 자들에 대한
전 세계적으로 가면극을 테마로 한 축제는 많이 탄어로 ‘열째 날’이라는 뜻인 ‘체추’는, 부탄의 여러 지 심판의 춤〉 중
발견된다. 우선 티베트에서는, 매년 티베트력으로 6월 역에서 거행된다. 규모가 가장 큰 파로 체추 축제에서 빨간 황소 머리
가면의 락사
이 되면 달라이 라마의 여름 궁전인 노브링카 공원에 는 5일에 걸쳐 춤과 야외극, 전통음악 연주 등이 성대 랑고(왼쪽)와

서 한 달 동안 설돈절雪頓節을 거행한다. 이 축제의 중 하게 펼쳐지는데, 특히 승려들과 민간의 전문 연희자 몸에 많은 방울을


달고 있는 검은
심은 민간 가면극인 라모 공연이다. 이 기간에 라모를 들이 화려한 전통의상을 갖춰 입고 추는 가면극인 참 악마(중앙).

포함한 12개의 단체가 모여 공연을 펼친다. 설돈절은 은 파로 체추의 꽃이다.


원래 티베트불교인 라마교의 하안거가 끝나는 시기에 티베트와 부탄의 ‘참’ 가면은 대체로 흉상가면, 선상가
거행하는 축제로 불교의 우란분재에 해당하는 행사였 면, 동물가면 등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흉상가면
다. 그런데 5세 달라이 라마와 일부 라마승려들이 연극 은 각종 호법신으로 그 형상이 사납고, 위맹하며, 신비
과 가무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설돈절 기간에 일부 로워서 일체의 귀괴와 요마를 항복시키고, 불법을 수
가면극 단체와 가무 단체를 모으고 공연하게 함으로 호하는 자가 된다. 호법신장들의 가면 위에는 대부분
써 흥을 돋우었다. 5개의 두개골이 달린 관이 부착돼 있다. 이는 인간의

71
2

2 인도네시아 발리섬 다섯 가지 번뇌, 또는 신위와 길상의 상징이다. 기반으로 하는 가면무용극으로, 두르가 여신이 악마
마스의 타만 프레
힌두사원에서 열린
선상가면은 대부분이 세속 인물로 수성壽星·화상·아 마히사수라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것을 이야기하
축제 쿠닝안의 와양 동·유학승 등이며, 면상이 평화로운 신들이다. 동물가 는 내용이다. 주제는 악을 상대로 한 정의의 승리다. 정
웡 〈라마야나〉
공연 장면. 왼쪽 면은 대체로 날짐승·길짐승·어류 등 세 가지 유형으로 의는 마하깔리두르가, 쿠마리, 마하락슈미 등 세 여신으
한가다(빨간원숭이), 나눌 수 있는데, 밀종의 많은 신이 모두 여기서 변화해 로, 악은 악마 daitya로 표현된다.
가운데 라마와
락스마나 오른쪽 만들어졌다.
하누만(하얀 원숭이).
주민 모두의 축제, 와양 웡
카트만두 계곡의 가면무용극, 인도네시아에서는 와양 웡Wayang Wong, 와양 또뼁
마하깔리 퍄칸 Wayang Topeng, 짤론Calon, 아랑Arang 등의 가면극이 전승
네팔의 인드라 자트라 축제 기간에 연행되는 마 된다. 발리섬에서 힌두사원의 생일 축제인 오달란은
하깔리 퍄칸Mahakali Pyakhan은 카트만두 계곡에서 전승 마을 주민 전체의 축제다. 주민들이 모두 신에게 바치
돼 온 가면무용극이다. 이 축제 기간에 마하깔리 퍄칸, 는 제사 음식을 준비해 오고, 경건하게 기원하면서 가
풀루 키시 춤, 바이라브 춤, 라케 춤, 개 춤, 어린이들의 면극인 또뼁, 그림자 인형극인 와양 쿨릿, 가면춤인 자
막대 춤, 대쉬 아바따라, 그리고 쿠마리의 가두행렬도 욱Jauk, 사자탈춤인 바롱 등을 관람한다. 발리섬의 우붓
연행한다. 마하깔리 퍄칸은 힌두교의 종교 텍스트인 에서 가까운 마스Mas의 마을 사람들은 쿠닝안 축제가
《마르칸데야 뿌라나》의 67장 ‘두르가 사프타샤티’를 열리는 동안 4일에 걸쳐 와양 웡 가면극을 공연한다.

72
이는 마을 사원의 생일 행사의 일환으로 펼쳐지는데, 프랑스에서는 이것이 ‘마르디 그라’라는 축제로 발전했 3 태국 ‘피(Phi) 타(ta)
콘(Khon)’ 축제의
내용은 인도 서사시인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를 다. 이 축제 기간에는 신분이나 성, 빈부에 따른 차별이 가면 가두 행렬.
연극화한 것이다. 사라졌는데, 자신을 숨긴 채 자유를 느끼고 싶어 하는 4 멕시코 우에호징고
카니발 퍼레이드의
인간의 욕구가 가면 축제로 발현된 것이다. 원주민 인디오 대대.
영혼 가면 축제, 태국의 피 타 콘 중미와 남미에는 현재 많은 가면무용과 가면극이 활 등에 박제된 동물,
과일, 짚단을 멨다.
태국 러이Loei 지방의 단사이Dansai 지역에는 ‘분 발하게 전승된다. 특히 멕시코, 과테말라, 볼리비아 등
루앙Bun Luang’이라는 3일간의 의식 중 일부로 거행하 지에서는 카니발, 수호성인 축제 등 여러 축제가 벌어
는 ‘피Phi 타ta 콘Khon’이라는 가면 관련 축제가 있다. ‘영 질 때 많은 가면무용 단체가 참가한다.
혼 가면 축제’라는 뜻으로 ‘피’는 영혼 혹은 유령을 뜻 멕시코 우에호징고 카니발에서는 행렬이 진행되는 가
하고, ‘콘’은 가면을 뜻한다. ‘피 타 콘’ 축제는 태국의 운데 등장인물의 가면과 의상, 총 따위의 도구를 통해
북동 지역에서 인기 있는, 지역적 의식의 일부로 음력
6월에 거행된다. 이때 수많은 사람이 가면을 쓰고 퍼
레이드에 참가하는데, 이 가면 퍼레이드가 ‘피 타 콘’
축제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다. 34
단사이는 오래된 국경 지방의 마을로 두 개의 오래된
왕국, 즉 태국의 아유다야와 라오스의 란창, 루앙프라
방이 만나는 지역이다. 원래 ‘피 타 콘’은 공동체 의식
의 일부로서 라오스의 란창에서 온 씨족들의 조상과
수호자 영혼들을 대접하기 위한 행사였다. 이 의식은
부처님의 전생담과 관련된 불교 관습과 결합해서, 영
혼들Phi을 거리로 내보내 함께 즐기는 공동체 축제의
일부가 됐다. 축제가 끝날 무렵 연희자들은 모두 가면
과 의상을 강으로 던진다. 이는 나쁜 것슬픔을 던져버리
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욕구, 카니발


유럽의 유명한 가면 축제인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카니발, 프랑스의 니스 카니발, 벨기에의 뱅슈 카니발
은 원래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현
대적 의미의 카니발은 13세기 무렵 가톨릭 국가에서 사
순절 기간이 오기 전에 맘껏 먹고 마시고 놀던 축제에
서 시작됐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두고 40일간 술과 고
기를 먹지 않으며,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기간을 말
한다. 카니발 기간에 사람들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신나게 놀았다. 카니발은 일상생활의 규율과 질서에서
벗어나는 기간이었는데, 요란한 가면 퍼레이드, 대규모
의 가면무도회, 풍자적인 연극 등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73
5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세 가지 역사적 사 희關索戱·제양희提陽戱·사공희師公戱·동자희僮子戱·선고 5 중국 지주시 나희 중


〈화관색전포삼낭〉
건이 재현된다. 그 사건은 첫째 최초로 가톨릭 예식에 잡희扇鼓雜戱 등 다양한 명칭을 갖고 있다. 에서 나무다리를
따라 거행된 인디오 여인의 결혼식, 둘째 산적 두목 아 나희의 주요 배역은 모두 가면을 쓴다. 나희는 원래 나 하고 말을 타는
흉내를 내는
구스틴 로렌조의 우에호징고 시장 딸 납치 사건, 셋째 례儺禮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상연 중에 구나驅儺: 역귀를 고교마(高蹺馬).

1862년 5월 5일 발발한 프랑스와 멕시코 군대의 전투 쫓던 일 활동을 많이 삽입하는데, 그 목적은 잡귀와 역병

다. 이 전투는 다양한 형태의 멕시코 군대와 프랑스 군 을 몰아내고 상서로움과 길함을 불러오는 데 있다.
대의 행렬을 통해 재현되는데, 이들은 화약총을 요란 일본의 경우도 마을이나 고을 축제에 해당하는 각 지
하게 쏘아대며 푸에블라 전투를 재현한다. 토착 인디 역의 가구라神樂에서 가면극을 연행한다. 일반적으로
오는 익스틀리ixtle, 열대 아메리카산 용설란과의 섬유 일본의 가구라에서는 일본 전통 종교인 신도神道의 신
로 만든 긴 가발을 착용하며 등에는 박제된 동물이나 을 비롯해 불교적인 신, 조상신 등을 연극적으로 형
과일과 함께 큰 짚단을 멘다. 상화해 공연한다. 거기에서 천손계의 왕권 신화가 자
리하는 비중이 높다. 신화의 이야기를 극화해 보여주
중국의 나희와 일본 가구라 가면극 면서 국가체제에 대한 당위성과 정통성을 강조한다.
중국에서는 가면극을 나희儺戱라고 하는데, 대부 가구라에서 연출되는 이야기는 대부분 황실을 중심으
분 마을이나 고을 축제에 해당하는 원소절 무렵 연행 로 전개되는 문헌 신화의 내용이다. 특히 일본 신화의
된다. 나희는 지역에 따라 나당희儺堂戱·지희地戱·관색 전승지인 미야자키현에서는 시이바촌椎葉村의 〈다케

74
6 강릉관노가면극의 양반과 소매각시
6
7 7 봉산탈춤의 먹중들이 춤을 추는 장면

노에다오가구라嶽の枝尾神樂〉를 비롯해 대부분의 가구


라에서 일본 신화의 이야기를 연극화한 내용이 많다.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한 한국의 탈


한국 축제의 아이템으로 등장하는 가면극은 마
을 축제 별신굿에서 연행된 하회별신굿탈놀이, 고을
축제 강릉단오제의 강릉관노가면극, 단오제의 봉산탈
춤, 봄철 축제 사또놀음의 통영오광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한국 가면극은 주로 현실 문제를 풍자하고 비판
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가면도 양반, 말뚝이양반의 하인,
영감, 할미, 노승, 상좌, 소무기생, 취발이술 취한 중, 신장
수, 먹중속이 검은 중 등 현실적인 인물을 형상화한 형태
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양반과장에서는 양반을 조
롱하기 위해 첫째 양반은 쌍언청이, 둘째 양반은 언청
이, 종가집 도령 가면은 얼굴과 코가 비뚤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거부하고 양반
층의 특권을 비판하는 민중의식을 드러낸다. 물론 백
사자, 비비, 영노 등 일부 상상의 동물과 연잎, 눈꿈쩍
이 등 신적인 존재도 등장하지만 매우 적은 편이다.
세계의 축제나 가면극에서는 나라마다 종교가 다르고
문화도 차이를 보이지만, 공동체의 삶을 중시하는 정신
과 계층 간의 화합을 도모하는 정신이 공통적임을 간파
할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이 개인의 삶이 강조되고, 경쟁
과 이해타산으로 따뜻한 인간관계가 점점 소멸돼 가는
현실에서, 전통적인 축제 정신과 가면 문화는 서로를 충
분히 이해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인정이 가득한 사
회를 만들어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전경욱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 사진 제공. 전경욱(사진1~5),


IR 스튜디오-한국관광공사(사진 6), 이윤미-한국관광공사(사진 7)

75
문화,
지금

커피숍에 갈 때마다 텀블러를 준비하고,

친환경을 제로 플라스틱 실천을 위해 다 쓴 샴푸통을 들고


리필 스테이션을 찾는 것,
여간 부지런하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실천 하지만 MZ세대는 그 귀찮음을


현재에 꼭 필요한 멋진 취향으로 받아들인다.

하는

이게

스타일
1

이야
76
1 연진영 작가의 패딩 재고를 활용한 의자. 2 3
대림미술관에서 7월 25일까지 개최하는 <TONG’s VINTAGE 기묘한 통의 만물상> 전시의 출품작 중 하나다.
2 헌 물건에 주목해 전시를 기획한 대림미술관 외관
3 폐플라스틱을 새로운 활용 가치를 지닌 물건으로 재탄생시킨 ‘Playful Plastic’ 섹션

환경은 유행의 첨단 ‘2021 P4G 정상회의’ 개최를 위해 대림미술관과 외교


전국의 힙스터들이 주말마다 줄을 서서 입장하 부가 공동주최했다. 환경에 대해 심각하고 무거운 이
는 대림미술관에서 현재 진행 중인 전시는 해외의 유 야기를 건네기보다는 폐기물로 버려져 온실가스를 배
명한 사진작가, 혹은 기상천외한 회화나 설치미술 출할 운명에 처한 물건들이 신진 아티스트의 아이디
이 아니다. 일상의 오브제들이 아티스트들의 손길 어를 만나 새롭게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을 거쳐 작품으로 재탄생되는 특별 전시 <TONG’s 고 한다. 가장 현대적인 동시대 예술을 소개하며 유행
VINTAGE 기묘한 통의 만물상>이다. 지난 5월 26일 의 첨단을 걸어온 미술관은 환경을 주제로 한 젊은 작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종로구를 방문한 이유도 바로 가들의 전시에 주요 전시관을 선뜻 열어줬다.
이 전시를 보기 위해서였다. 친환경 수소차를 타고 대
림미술관을 찾은 영부인은 오래된 한복 치마를 리폼 선한 의지만으로는 바뀌지 않아
한 의상을 입고 폐자동차 시트를 재활용한 가죽 지갑 ‘나’가 아닌 ‘우리’, 전 세계인과 나아가 미래 세대
을 들고 있었다. 를 위한 선한 행동이 지구 환경 보호라면, 선한 의지만
문화계에서 가장 힙한 작가들의 전시를 발 빠르게 큐 가지고 행동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출근 시각에 늦었
레이팅해 통의동을 힙스터 성지로 만들었던 대림미 는데, 환경을 위해 자동차를 포기하고 도보나 자전거
술관이 2021년에는 폐기되는 쓰레기를 업사이클링해 를 탈 수 있을까. 이틀에 한 번은 고기를 먹어줘야 힘
작품으로 만드는 젊은 아티스트들을 소개하는 이유 이 나는데, 육식을 위한 비윤리적 동물 사육과 산림 파
는 무엇일까. 피스모아, 구오듀오, 로우리트 콜렉티브, 괴에 반대해 비건Vegan을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
위켄드랩…. 전시에 참여한 아티스트 집단은 SNS에 니다. 커피숍에 갈 때마다 텀블러를 준비하고, 제로 플
서 꽤 유명한 이름들이다. 젊은 미술 작가들이 팬데믹 라스틱 실천을 위해 다 쓴 샴푸통을 들고 리필 스테이
시국에 내다보는 가장 시급한 미래 당면 과제는 ‘환경’ 션을 찾는 일 역시 여간 부지런하지 않으면 실천하기
이다. 이들은 모두 자기 작품을 통해 그 해결법을 제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MZ밀레니얼&제트 세대는 그 귀찮
하고 예술의 신대륙을 개척하고 있다. 사실 이 전시는 음 역시 꼭 현재에 필요한 멋진 취향으로 받아들인다.

77
과거 윤리적 소비라고 일컬어지던 미닝아웃정치적·사회 로 벽면을 꾸며 따뜻하고 쾌적한 카페 공간처럼 꾸몄
적 신념과 같은 의미를 소비행위로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소비자운동이 다. 이들의 소비자 타깃이 인스타그램에 자랑할 수 있
지금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는 예쁜 공간에 민감한 20·30세대이기 때문이다. 아
행해지는 것이다. 특히 친환경적인 비건, 제로 웨이스 웃도어 스포츠 브랜드 파타고니아가 20대에게 인기
트Zero Waste에 민감한 20대들의 SNS에는 “동물실험 있는 것은 이 브랜드가 환경운동을 하기 때문만은 아
을 하지 않는 화장품으로 바꾸려고 하는데 비건 화장 니다. 폐플라스틱으로 만든 티셔츠가 아무리 의미가
품 추천해 주세요” 혹은 “OO라면 함량표 보니 비건이 좋다고 해도 예쁘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 지구를 구
아니네요. 고객센터에 문의하려고요” 등의 글을 심심 하자는 캠페인을 하는 브랜드의 디자인이 예쁘고 로
찮게 볼 수 있다. 천연 화장품이라 광고하는 브랜드의 고는 힙하니, 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인기 있는 기업
립스틱에도 알고 보면 뱀기름 등의 동물성 원료가 들 들은 메시지만 강조하지 않고 세련된 디자인과 사용
어갈 수 있기에 요즘 젊은 소비자들은 진짜 비건인지 감, 매력적인 카피로 유행을 선도한다.
더 꼼꼼하게 따지고 친환경 인증에 민감한 국가의 인
증표도 세심하게 챙긴다.

친환경적으로 예쁘고, #
친환경적으로 힙해야 한다
플라스틱에 대해서도 요즘 소비자는 민감하다. 4


5
경쟁이 치열한 새벽배송 업체들이 앞다투어 ‘친환경
포장’을 내세우는 것도 버려지는 플라스틱과 보냉제
에 대해 소비자들이 피로감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특
히 젊은 여성들의 트렌드에 민감한 화장품 브랜드들
은 친환경으로 진즉에 태세를 전환했다. 아모레퍼시
픽은 다 쓴 플라스틱 병을 가져오면 내용물만 채워갈
수 있는 리필스테이션을 오픈했고, 아로마티카 역시
가로수길에 제로스테이션을 열었다. 아로마티카 제
로스테이션에서는 업사이클링 작가들의 상품도 판매
하고, 버려지는 병뚜껑을 모아 비누 받침대를 만드는
공작 공간, 복잡한 플라스틱 분리수거법을 상세히 소
개하는 공간도 따로 존재한다. 이 화장품 기업들은 공
간을 머물고 싶은 카페처럼 조성했다. 식물과 원목으

4 아로마티카 제로스테이션에서는 빈 용기를 가져와 제품을


리필해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5 병뚜껑, 투명 페트, 유색 페트 등 플라스틱 분리수거법을
교육하는 공간
6 제로 웨이스트에 동참하려면 텀블벅, 친환경 도시락, 에코백
등은 필수다.
7 등산을 하며 쓰레기를 줍는 ‘줍깅’은 운동과 취미에 윤리를 더한
친환경 실천이다.

78
#제로
웨이스트

#줍깅 6 7

#실천 #제로웨이스트 #반려식물 석하고 가방에는 항시 텀블러와 채소가 들어 있는 밀


#플랜트버거 #줍깅 프랩Meal-prep 도시락을 구비한다. 소비할 때에는 이 물
과거에는 같이 식사할 때 “비건이라 고기를 먹지 건이 어디에서 출발해 어떤 동물에게 피해를 준 것은
않는다”고 하면 예민하고 깐깐한 사람으로 바라보거 아닌지, 노동착취나 불공정 이슈가 있었던 기업은 아
나, 비건 식품은 맛이 없다는 편견도 존재했다. 그러나 닌지도 따져본다. 동물 가죽 대신 선인장으로 만든 식
최근에는 비건 소비자의 선택지도 훨씬 넓어졌다. 햄 물성 지갑을 구매하고, 한 벌 살 때마다 남극 펭귄에
버거를 파는 패스트푸드 전문점에서도 플랜트 버거식 게 기부가 되는 티셔츠와 플라스틱 물병을 업사이클
물성 버거를 론칭했고, 편의점에도 비건 전문 식품칸이 링해 특수 공법으로 만들었다는 샌들을 구매한다. 그
따로 있을 정도다. 동네마다 식물성 재료로 맛과 건강 리고 이 모든 행위를 SNS에 #실천 #제로웨이스트 등
까지 잡은 훌륭한 비건 전문 식당들도 문을 열었다. 윤 의 해시태그를 달아 공유한다. 이 모든 행위는 착할
리적 선택으로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건강 뿐 아니라 세련됐고, 유행을 앞서나간다는 인상까지
을 위해 비건을 실행하는 사람 역시 늘어났다. 준다. 설교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그저 멋있다는 인상
집을 플랜테리어식물을 이용한 인테리어로 꾸며놓고, 인스 을 줄 것. 유행이 젊은 세대에게 퍼지는 방식은 이런
타그램과 유튜브에 반려식물을 키우는 법, 분갈이하 것이다.
는 법 등을 공유한다. 주말에는 러닝크루와 한강을 뛰
글. 김송희 《빅이슈코리아》 편집장 ― 사진 제공. 대림미술관(사진
거나, 산에 가 ‘줍깅모임등산을 하며 쓰레기를 줍는 모임’에 참 1~3), 아로마티카(사진 4~5), 셔터스톡(사진 6~7)

79
문화소식

《고령의 재실·정자·서원》
편저 이동훈│발행처·문의 고령문화원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선현의 학덕이나 덕행을 추


모하는 재실을 건립하였으며, 주변 경관과 자연
이 잘 조화된 곳에 정자를 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유산이 관리 소홀과 풍우 등으로 건물 원형
보존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 아니라, 중건기·중
창기 등의 문헌도 건물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이
에 고령문화원은 문헌 보존과 향토사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고령의 재실, 정자, 서원의 기문, 상량문, 중창기, 이건기 등
의 문헌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적어 그 유래 및 연혁을 기술한 《고
령의 재실·정자·서원》을 발간하였다.

한국문화원연합회
2021 제4차 이사회
한국문화원연합회는 6월 8일(화) 서울스퀘어 3층 회의실에서 제4
차 이사회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에는 김태웅 한국문화원연합회장
의장 등 이사 27명이 참석했으며 감사 2명이 배석했다. 이어진 회
의를 통해 ‘한국문화원연합회 정관 개정안 심의의 건’, ‘지방문화원
(표준) 정관 개정안 심의의 건’ 등 총 6개의 의안이 모두 원안대로
승인됐다. 한편 이번 이사회에서는 지방문화원과 연합회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이수영·염상덕·송시종 이사제30대 한국문화원연합회 회
장단에게 공로패 전달이 있었다.

2021 운영위원회
지난 6월 15일(화), 2021년 운영위원회 회의가 한국문화원연합회
회의실에서 개최됐다. 연합회 운영위원은 김진호서울 강서문화원장,
손영수부산 사상문화원장, 정군섭인천 서구문화원장, 우관제경기 파주문
화원장, 주기창강원 고성문화원장, 이관우충남 서천문화원장, 김현진전남
보성문화원장, 성수현경남 의령문화원장 등 8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날 회의에는 이관우 원장을 제외한 총 7명이 참석하여 2021 연
합회 주요 사업 및 발전 방안 등을 논의하였다.

반년 지난, 신축년 앞길,


편집후기

7월에 피는 하늘나리, 꽃창포 한창인데, 벌써 한 해의 반을 보내고 있


다. 몇 번씩이나 《우리문화》 300호 기획을 검토했지만, 만남이 통제
되는 현실에서는 지난날 한국문화 반성과 미래를 고심 또, 고심 중이
다. 하니, 숨겨진 지역문화 현장 일꾼들의 절실한 육성을 기념호로
꾸려볼 참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흘러가는 시간
을 아쉽게 생각하며, ‘한국문화 보존의 궤적軌跡이 책갈피에 남도록
땀과 호흡을 담으려 한다. 편집주간 한춘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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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초 공예 Wancho crafts
완초(왕골) 공예는 여러 날 바래고 말린 완초를 엮는 손의 감각과 기술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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