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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
>
정선鄭敾, 1676~1759
1751년, 종이에 수묵, 79.2 × 138.2㎝, 국보 216호

정선은 금강산, 영남 지역, 한양 일대의 명승명소名勝名所를 직접 방문하고 자신이 본 실제 경치를 그린 진경산수화


로 조선 시대 산수화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화가이다. 정선은 1711년36세에 처음 금강산을 다녀왔으며 이 해에 《신
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제작하였다. 당시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청운동 일대에서 동네
화가로 활동하며 살았다. 40대 이후 그의 명성은 점차 높아졌고 50대 이후 그는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화가가 되
었다. <인왕제색도>는 1751년 5월 하순양력 6월에 비가 내린 후 날이 개기 시작한 인왕산의 웅장한 모습을 정선이
북악산 쪽에서 포착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을 그렸을 때 그의 나이는 76세였다. 정선은 물기가 남아있는 인
왕산의 거대한 암벽을 진한 먹을 사용해 순식간에 묘사하였다. 그는 산등성이 표현에는 미점米點을 사용하였다. 화
면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나무 역시, 그는 매우 빠르게 그렸다. 정선은 진한 먹과 엷은 먹을 번갈아 써서 화면에
활력과 생동감을 부여하였다. 산허리를 감도는 구름과 안개는 비 온 후의 습윤한 느낌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눈앞에 성큼 다가온 거대한 인왕산의 위용, 묵면墨面으로 처리된 암벽의 육중한 괴량감塊量感, 활기 넘치는 화면, 호
방豪放한 필묵법筆墨法은 만년에도 정선이 얼마나 뛰어난 화가였는지를 보여준다.

글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그림(소장) 삼성미술관 리움
목차•Contents
U RIM U N HWA
A KORE AN LOCAL
C U LT U R E M O N T H LY
별별마당

4 한문연 이슈
월간 우리문화 지방문화원진흥법 2020년 6월 9일 개정 공포 / 음소형
vol.285 | 2020 07
6 테마기획Ⅰ
발행인 김태웅
발행일 2020년 7월 1일
조선 시대, 능을 지킨 사람들 / 김영자
편집고문 권용태
편집주간 한춘섭
10 테마기획Ⅱ
편집위원 곽효환, 김 종, 김찬석, 오광수, 근현대 인물 잠든 망우역사문화공원 / 지태진
오양열, 장진성, 지두환
편집담당 음소형 16 시와 사진 한 모금
발행처 한국문화원연합회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 / 김소연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9(도화동, 성우빌딩) 12층
전화 02)704-4611 | 팩스 02)704-2377
홈페이지 www.kccf.or.kr
등록일 1984년 7월 12일
문화마당 Cultural Encounters
등록번호 마포,라00557
기획편집번역제작 서울셀렉션 02)734-9567 18 옹기종기 Iconic Items
한국을 빛낸 한국의 등燈 / 안유미
Deung, Korean Lamps of Yore / An Youmee

20 한국의 서원 ④ Korea’s Seowon


유네스코 세계유산 2관왕, 경주 옥산서원 / 이종호
Oksan Seowon in Gyeongju: Twice Recognized as a UNESCO World Heritage Site
/ Lee Jongho

26 지역문화 스토리 Local Culture Stories


한강의 역사를 대표하는 ‘황포돛배’ / 이상범
Hwangpo Dotbae, A Symbol of the History of the Hangang River / Yi Sangbeom

34 느린 마을 기행 ③ Slow City Travel


누구나 나그네 되고 방랑객 되는 슬로시티 영월 김삿갓면 / 임운석
Gimsatgat-myeon in Yeongwol: The Slow City Where Anyone Can Be a Wanderer
/ Im Unseok

40 팔도음식 Provincial Cuisine


세민의 밥상과 잔칫상을 오갔던 ‘메밀’ / 황광해
우리 놀이문화 _ 딱지치기
Buckwheat: A Staple that Graced the Tabletops of Both Humble Meals and Feasts /
표지 이야기 Hwang Gwanghae
종이로 접은 딱지를 땅바닥에 놓고
다른 딱지로 쳐서, 뒤집히거나 금 밖으로 나가면 44 한국을 보다 Through Foreign Eyes
따먹는 아이들 놀이
한국문화 속 시간에 대하여 / 로버트 J. 파우저
표지 그림 박수영 일러스트레이터 Time in Korean Culture / Robert J. Fouser
공감마당
06 48 그날 그때
역병, 선조들은 어떻게 극복했을까? / 정연식

50 조선 人 LOVE ⑦
조선 귀신 달래는 치유와 위로의 사랑 / 권경률

54 있다, 없다?
추억을 소환하는 양은도시락 / 문진영

26 56 오! 세이
우리의 2020년 / 백영옥

우리마당

58 삶과 문화
“개인의 삶 아닌, 향토사의 한 페이지로” / 한춘섭

34 62 북한사회 문화 읽기 ⑰
음악에서 주체를 세우기 위한 북한의 악기 개량 사업 / 오양열

66 한류포커스
K-게임의 비상을 꿈꾸며 / 심영섭

68 문화달력
한국문화원연합회, 지방문화원 일정

72 NEWS, 편집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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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599-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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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한문 연 이 슈

지방문화원진흥법 2020년 6월 9일 개정 공포

“지방문화원에 대한
실질적 지원 정책 마련”
정부는 지난 1994년 1월 7일 법률 제4718호로 <지방문화원진 개정을 건의, 제19대 국회에서 <지방문화원진흥법> 제11차 개정이
흥법>을 제정·공포함으로써, 지방문화원에 대한 국고보조금 지원 추진되었으나, 제20대 국회 마지막 임시국회 기간인 5월 20일 통
등 재정 강화와 특수법인으로서 법률적 위상을 높였다. 이 법의 제 과되어 6월 9일 공포하였다.
정 계기는 <지방문화사업조성법>1965년 7월 1일 법률 제1706호에 의거 시·
군에 설립 운영 중인 사단법인 지방문화원의 역량으로는 다가오는 글 음소형 편집부

문화의 시대를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는 정책 판단이 있었다.


이후 2002년 <지방문화원진흥법> 제4차 개정을 통해 지방문화원 제 정 1994. 01. 07. 법률 제 4718호

에 대한 정부의 지도·감독 권한이 시·도지사로 이양되었다. 또 당시 제 1차 개정 1997. 12. 13. 법률 제 5453호

정부의 분권교부세로 지원받고 있는 지방문화원 사무국장 인건비 제 2차 개정 1997. 12. 13. 법률 제 5454호

가 향후 한시법인 분권교부세법 자동폐지에 따른 사무국장 인건비 제 3차 개정 1999. 01. 21. 법률 제 5653호


지원 중단을 방지하고자, 2011년 <지방문화원진흥법> 제8차 개정 제 4차 개정 2002. 12. 18. 법률 제 6792호
에서 법 제7조 제3항을 신설, 지방문화원에 사무국을 설치하고 필
제 5차 개정 2007. 01. 30. 법률 제 8302호
요한 인원을 둘 수 있도록 하였다.
제 6차 개정 2007. 12. 21. 법률 제 8745호
이후 사회변천에 따른 문화 환경의 변화로 지역마다 문화재단과 생
제 7차 개정 2008. 02. 29. 법률 제 8852호
활문화 시설 등이 활발히 활동하는 것과 비교하여 지방문화원에 대
제 8차 개정 2011. 07. 21. 법률 제10883호
한 지원이 미흡하다는 문화원 관계자들의 의견이 비등하였다. 이에
제 9차 개정 2017. 11. 28. 법률 제15064호
따라 한국문화원연합회는 지방문화원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 정책
을 수립하도록 문화체육관광부에 <지방문화원진흥법>의 발전적 제 10차 개정 2018. 10. 16. 법률 제15824호

신구조문 대비표

종전 개정

제3조(지방문화원의 육성 등) ① (생 략) 제3조(국가 등의 책무) ① (현행과 같음)


②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지방문화원을 육성·지원하기 위하여 필요한 다음 ②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지방문화원을 육성·지원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책
각 호의 시책을 수립·추진하여야 한다. 을 수립·추진하여야 한다.
1. 지방문화원 육성·발전을 위한 기본계획에 관한 사항 <삭 제>
2. 지방문화원의 활동에 필요한 전문인력·프로그램·시설·재원 확충 등에 관한 <삭 제>
사항
3. 지방문화원과 지역 내 문화예술 기관·단체 간의 협력에 관한 사항 <삭 제>
4. 그 밖에 지방문화원 진흥 및 활성화에 필요한 사항 <삭 제>
③ (생 략) ③ (현행과 같음)

4
<신 설> 제3조의2(기본계획의 수립 등) ①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지방문화원을 지원·
육성하기 위하여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 및 특별시장·광역시장·특별자치시
장·도지사 또는 특별자치도지사(이하 “시·도지사”라 한다)와 협의하여 지방문
화원의 지원·육성에 관한 기본계획(이하 “기본계획”이라 한다)을 5년마다 수
립하여야 한다.
② 기본계획에는 다음 각 호의 사항을 포함한다.
1. 지방문화원 육성·발전을 위한 기본목표와 정책방향
2. 지
 방문화원의 활동에 필요한 전문인력·프로그램·시설·재원 확충 등에 관한
사항
3. 지방문화원과 지역 내 문화예술 기관·단체 간의 협력에 관한 사항
4. 그 밖에 지방문화원의 진흥 및 활성화에 필요한 사항
③문
 화체육관광부장관은 기본계획의 수립을 위하여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에게 관련 자료의 제출을 요청할 수 있다. 이 경우 자
료의 제출을 요청받은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특
별한 사정이 없으면 그 요청에 따라야 한다.
④ 시·도지사는 기본계획에 따라 시장·군수·구청장과의 협의를 거쳐 매년 지
역별 시행계획을 수립·시행하고, 수립한 시행계획을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⑤기
 본계획의 수립 및 제4항에 따른 시행계획의 수립·시행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제4조(지방문화원의 설립) ① 지방문화원을 설립하려는 자는 특별시장·광역 제4조(지방문화원의 설립) ① 지방문화원을 설립하려는 자는 시·도지사의 인
시장·특별자치시장·도지사 또는 특별자치도지사(이하 “시·도지사”라 한다)의 가를 받아야 한다.
인가를 받아야 한다.
② ∼ ⑦ (생 략) ② ∼ ⑦ (현행과 같음)
⑧ 지방문화원은 특별자치시·특별자치도·시·군 또는 자치구별로 1개의 원(院) ⑧지
 방문화원은 특별자치시·특별자치도·시·군 또는 자치구별로 1개의 원(院)
을 둔다. 을 두며, 필요한 경우 특별시·광역시·특별자치시·도 및 특별자치도(이하
“시·도”라 한다) 조례로 정하는 바에 따라 그 분원을 둘 수 있다.
⑨ 지방문화원의 설립과 운영 등에 필요한 사항은 특별시·광역시·특별자치시· ⑨제
 8항에도 불구하고 특별자치시·특별자치도·시·군 또는 자치구를 통폐합
도 및 특별자치도의 조례(이하 “시·도 조례”라 한다)로 정한다. 하는 경우에는 해당 지역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이미 설치된 지방문화원
을 유지할 수 있다.
<신 설> ⑩ 지방문화원의 설립과 운영 등에 필요한 사항은 시·도 조례로 정한다.

제4조의2(유사 명칭의 사용 금지) 지방문화원이 아니면 그 명칭에 지방문화 제4조의2(유사 명칭의 사용 금지) 이 법에 따른 지방문화원이 아니면 그 명칭
원이나 이와 유사한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 에 지방문화원이나 이와 유사한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

제12조(연합회의 설립) ① ∼ ③ (생 략) 제12조(연합회의 설립) ① ∼ ③ (현행과 같음)


④ 연합회는 지방문화원 간의 업무 협조와 제3항 각 호의 사업을 효율적으로 ④연
 합회는 지방문화원 간의 업무 협조와 제3항 각 호의 사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특별시·광역시·특별자치시·도 및 특별자치도에 지회(支 수행하기 위하여 시·도에 지회(支會)를 설치할 수 있다.
會)를 설치할 수 있다.
⑤·⑥ (생 략) ⑤·⑥ (현행과 같음)

제17조(관계 기관의 협조 등) ①·② (생 략) 제17조(관계 기관의 협조 등) ①·② (현행과 같음)


③ 국가는 지역문화를 균형있게 발전시키기 위하여 특정 지방문화원을 지정 ③문
 화체육관광부장관 또는 시·도지사는 지역문화를 균형있게 발전시키기
하여 따로 지원·육성할 수 있다. 위하여 특정 지방문화원을 지정하여 따로 지원·육성할 수 있다.

<신 설> 부칙 <법률 제17417호, 2020. 6. 9.>


이 법은 2021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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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테마 기 획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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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능을 지킨 사람들
옛말에 “조상 묘는 등 굽은 소나무가 지킨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는 조선 왕릉에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6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조선의 왕릉을 지킨 것은 소나무가 아니라
‘능지기’로 통하는 수복, 수호군 그리고 능참봉이었기 때문이다.

경기도 구리에 있는 목릉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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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봉보다 권한이 더 컸던 능참봉 일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였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일이 1년에 한 번
능참봉은 조선 시대 품관 관료 중 가장 하위직인 종9품직에 속 향축을 받아오는 일이었고, 일상적 업무 가운데 중요한 일은 왕릉의
한다. 그러나 왕릉을 수호한다는 점에서나 왕을 직접 마주할 기회가 곳곳을 잘 살펴 훼손된 곳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다른 직에 비해 많다는 점을 보아서나 변변찮은 벼슬미관말직로 볼 수 를 소홀히 해 벌을 받은 공릉恭陵 참봉이 있었다. 그는 중종 13년1518
는 없을 듯하다. 더욱이 능참봉의 권한 중에는 상당히 매력적인 부 2월에 들짐승이 능을 훼손한 것을 모르고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왕릉에 속해 있는 전답과 산을 관리하고 경 예조에 보고하였는데 예조에서는 봉심왕릉 및 정자각 등을 둘러보는 일도
영하는 일이었다. 제대로 하지 않고 조석분향까지 전폐하였으니 태만하기 짝이 없다
왕릉에서는 매년 왕과 왕후가 돌아가신 날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 하여 그를 파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를 ‘기신제’라고 한다. 조선 전기에는 기일 외에도 설, 한식, 단오, 추 《숙종실록》 기사에 따르면 참봉이 파직된 사건은 숙종 5년1679 10월
석, 동지 그리고 납일동지로부터 세 번째 미일에 왕이 직접 왕릉으로 가서 1일에도 있었다. 그 내용을 보면 정릉 참봉 안중현이 내맥來脈에 무

측면에서 본 선정릉 재실 선릉 수복방

제를 지내거나 세자를 보내 대신 지내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초하 너진 곳이 있는데 흉년으로 보수하지 못하고 있다가 매일같이 잔디
루와 보름에 제사를 올리는 삭망전까지 있었는데, 이 많은 제사에 필 를 입히고 어린 소나무를 심어서 보수했다는 것이다. 이에 예조판서
요한 물자들을 충당하기 위해서 왕실에서 주는 ‘능묘위전’이라는 전 가 날마다 고생하여 손상된 내맥을 살렸으니 참봉에게 상을 내려주
답과 왕릉을 안고 있는 산에 대한 관리 권한이 모두 능참봉에게 있 어야 한다고 숙종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정언 이수징
었다. 일례로 왕릉을 둘러싸고 있는 서울 불암산이나 남양주 주엽산 이 정릉 참봉에게 상 주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왜 그랬을까? 이
등에서 생산되는 땔나무, 숯, 횃불, 과실, 마초말 먹이로 쓰는 풀 등을 관리 유인즉슨 선왕의 백魄을 모셔놓은 왕릉의 모든 영역에 변고가 생기
하는 권한이 능참봉에게 있었다. 그 당시 능참봉이 매월 받았던 녹봉 면 우선 예조에 보고하여 허락을 받고 난 다음, 정자각에서 선왕께
이 쌀 열 말과 콩 다섯 말이었다는데 배보다 배꼽이 더 컸던 셈이다. 영면의 장소를 시끄럽게 하게 되어 죄를 짓게 되었으니 용서하여 주
시라고 보고 드리는 고유제를 올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사
실록 속에 등장하는 능지기의 수난사 사로이 처리한 것은 잘못된 처사라는 것이다. 결국 이수징의 말대로
능참봉은 수복守僕과 수호군의 도움을 받아 궁궐에서 향축을 받 정릉 참봉은 파직되었고 상을 주자고 건의한 예조판서는 시말서를
아오는 일, 고유제를 지내는 일, 삭망전을 올리는 일, 조석분향아침저 쓰게 되었다.
녁으로 정자각에서 제물 없이 향을 올리는 일과 더불어 제기들을 잘 간수하는 《순조실록》에 등장하는 순조 13년1813 11월 17일 자 사건은, ‘동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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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동구릉의 신어상神御床; 선왕의 혼이 앉는 상 방석 분실사건’이다. 겨울 왕릉의 역사를 이어온 능지기, 능참봉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 동오릉으로부터 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영조는 “모든 능참봉은 년소年少; 나이가 젊음하고 경력이 없는 자
능참봉이 예조에 보고를 올린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 로 차정差定; 임명하여 사무를 담당시킴한 것이 많아 모든 일이 허소虛疏 하
젯밤에 현릉顯陵, 숭릉崇陵, 혜릉惠陵, 원릉元陵의 정자각 신어상의 자주 니, 지식이 있는 자를 가려서 제수하라”고 하여 그 자격을 규정하였
색 요가 없어졌습니다. 너무나 놀라워 수직군守直軍을 풀어서 사방으 다. 임금을 대신해 선왕의 무덤을 수호하고, 제사를 담당하는 등 능
로 추적하다가 목릉穆陵의 홍살문 안에 이르러 훔쳐 간 자를 붙잡고 참봉의 임무가 막중하다 보았기 때문이다.
요도 찾았습니다.” 능참봉은 정식 과거를 통해 임용되기보다는 음직으로서 과거급제
그날 새벽에 신어상의 방석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사람 를 하지 않고 선대의 품계를 이어받는 대가代加나 명망 있는 사람을
은 정자각 동쪽에 있는 수복방에서 전날 밤에 숙직한 수복守僕 중 한 추천하는 삼망三望이라는 방법을 통해 임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
사람이었을 터. 수복은 수복방에서 자는 둥 마는 둥 새벽녘 일어나 선 후기에 “나이 70에 능참봉이 되고 보니 하루에 거둥이 29번이더

남양주 광릉 고양 서오릉 내 경릉

겨울 추위로 웅크렸던 몸을 길게 늘이며 고요한 왕릉을 둘러보고 천 라”는 말이 생긴 단초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말은 말년에 참봉이 되
천히 걸어 나와 정자각부터 살폈을 것이다. 정자각 서계로 올라 문 어 녹봉이나 받고 참봉의 권한이나 누려보려고 했는데 할 일이 태산
으로 들어서서 안을 살펴보니 신어상이 허전하게 비어있다. 곧바로 이었다는 뜻이다.
재실로 달려가 참봉을 깨워 이 사실을 알리고 다른 능의 수호군들과 능참봉은 상징적인 의미와 현실적인 권한으로 인해 보통의 선비에
함께 수색하다가 목릉의 홍살문 안에 이르러 도둑을 잡게 된다. 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자리였으나, 우암 선생은 장원급제하여 경
왕릉은 아무나 드나드는 데가 아닌데도 조선 후기 기록을 보면 도둑 릉 참봉에 제수된 지 한 달 만에 사직하였고, 남명 선생은 유학으로
이 들어와 왕릉의 기물을 훔쳤던 일들이 왕왕 있었던 모양이다. 현 헌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을 고사하였다. 능참봉의 일이란 것
종 8년에는 도둑이 몽둥이와 칼을 가지고 떼로 순릉順陵에 쳐들어와 이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그들에게는 하찮게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
제기고에 있던 은수저, 은기 등을 모두 훔쳐 갔고, 고종 2년에는 수 만 그 직이 어떻게 여겨졌든 능지기 능참봉이 있었기에 왕릉의 역사
릉綏陵 참봉이 향합, 쟁반, 숟가락, 젓가락을 도둑맞았다고 보고한 일 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있었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해 참봉뿐만 아니라 해당 지방관과 토포사도둑 잡는
글 김영자 (사)한국의 재발견 왕릉지킴이
일을 맡아보던 벼슬까지 처벌을 받았다. 사진 김영자, 전형준-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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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테마 기 획 Ⅱ

“오랫동안 근심을 잊을 수 있겠노라 ”


忘憂

근현대 인물 잠든 망우역사문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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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초입 ‘인물전시관유명인사 안내가벽’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뉜 두 갈래 길이 나온다. 두 길이 서로 통
하기에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지만 사색의 숲이 있는 서쪽 길로 진입해 동쪽 길로 나오는 것이 좋겠다
는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서쪽 길로 들어선다. 그러자 과연 초록의 나무들과 아카시아 꽃향기로 가득
한, 일명 ‘사색의 숲’이 펼쳐진다. 그리고 질곡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분들이 영면에 든 묘소들이 이어
진다. 그 길을 따라 자연과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생生과 사死에 대해 사유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순간 삶이
더 특별하고 소중해진다.
인물전시관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누어진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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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에서 역사문화공원이 되기까지 사의 설명도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한다.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이하 망우리공원은 “공원화 사업이 시작된 게 1990년대부터이긴 하지
망우산 일대 83만 2,800㎡의 공간에 조성된 묘지공 만 제가 해설사 활동을 시작한 2006년도만 해도 숲
원이다. 1933년 5월 27일부터 공동묘지로 사용되기 이 이렇게까지 우거지진 않았어요. 지금처럼 묘역마
시작해 1973년 3월에 4만7천여 기의 분묘로 가득 차 다 이정표나 안내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처음에
이장과 납골을 장려한 결과, 현재는 7천여 기의 묘가 는 우리 해설사들이 중랑구에서 나온 향토사학자분
남아 있다. 수천 기의 묘가 있다 하여 으스스한 분위 들과 묘지 발굴에 나서기도 하고 그랬어요. 지금 이
기의 공동묘지를 상상하면 곤란하다. 울창한 숲과 잘 렇게 좋아지고 나니까 뿌듯하죠. 4월에는 여기 산책
정비된 산책로, 애국지사와 저명인사의 묘역이 공존 로에 있는 벚꽃이 하트모양처럼 늘어지는데 그 모습
하는 망우리공원은 시민들의 쉼터이자 역사의 산 교 이 정말 예뻐요. 한여름에는 또 나무들이 무성하게
육장에 가깝다. 물론 옛날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우거져서 걷기에 덥지 않아 좋고요.”
1970년대만 해도 오로지 무덤뿐인 벌거숭이산이었 날로 좋아지고 있는 공원의 변천사도 흥미롭지만 그
지만 1997년부터 시작된 공원화 사업으로 숲이 조성 보다 더 관심이 가는 것은 역시, 이곳에 잠든 인사들
되고 산책로가 만들어지고, 이곳에 잠든 주요 인물에 의 이야기였다. 코로나로 전염병 극복이 화두가 되어
대한 연보비가 세워지고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이 버린 요즘이어서일까. 조선에서 천연두의 공포를 몰
더해지면서 자연과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공간 아낸 지석영 선생의 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의
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혜성 문화해설사이하 해설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본다.

지석영의 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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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학의 선구자 ‘지석영’
사색의 길을 걷다 만난 지석영池錫永; 1855 ~1935 선
생의 묘역 앞에서 이혜성 해설사의 해설이 시작됐다.
“지석영 선생님은 부인이랑 묻히지 않고 아들과 나란
히 묻히셨어요. 아들 지성주라는 분도 의사셨는데 지
석영 선생님보다 먼저 돌아가셨죠. ‘지석영 선생님’ 하
면 종두법을 도입해 천연두를 몰아낸 분으로 유명하
시잖아요. 당시 우리나라는 ‘마마’라고 불리는 천연두
때문에 많은 어린이가 목숨을 잃거나 얼굴이 곰보가
되곤 했어요. 그뿐만 아니라 왕궁에서도 천연두에 걸
려 죽기도 했다니까 정말 무시무시한 병이었죠.”
무서운 천연두를 예방한다는 종두법, 지석영 선생은 지석영의 묘(좌), 지석영의
장남, 지성주의 묘(우)
일찍부터 여기에 관심을 두고 영국인 제너Jenner가 쓴
《종두법》을 탐독했다. 이후 일본에서 우두법 관련 서 고 짐을 싸서 떠날 채비를 합니다. 그제야 장인이 마
적을 가져온 스승 박영선으로부터 구가久我克明의 《종 음을 바꿔 우두 시술을 허락하시죠. 허락은 받았지만
두귀감種痘龜鑑》을 전해 받은 뒤, 종두법을 배우겠다 처남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얼마나 긴장되셨겠어요.
는 일념으로 일본 해군이 세운 제생의원을 찾아 장장 아닌 게 아니라 시술 후 우두가 나타나기까지 걸린 3
20여 일을 걸어 부산에 도착한다. 도착해서도 일본 일간을 두고 훗날의 회고에서 그때의 긴장이 이루 말
어가 서툴러 ‘나는 종두법을 아는 일본 의사를 만나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셨다죠.”
러 왔습니다’라고 쓴 종이를 들고 부산 거리를 헤매 지석영 선생은 종두법을 우리나라에 보급한 근대의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에
세워진 지석영 동상
야 했던 선생은 결국 제생의원 원장 마쓰마에와 군의 학의 선각자이지만 국문 연구에 큰 공을 세운 한글학
軍醫 도즈카로부터 종두법을 배우고 두묘痘苗와 종두 자이기도 하다. 그 공적에 비하면 다소 소박하게 느
침 두 개를 얻게 된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껴지는 지석영 선생의 묘소 앞에서 더 많은 사람이
처가가 있는 충주에 들러 우두를 놓아주었는데, 이것 이곳을 찾아 지석영 선생의 발자취를 돌아보았으면
이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종두법 실시의 시초였다.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런데 여기에 얽힌 일화가 흥미롭다.
“우두법을 배워왔으니 임상 실험을 해야 하잖아요.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은 그 대상이 가족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 망우리공원에서 만난 일본인 이름, 아사카와 다
아요. ‘우리 가족에게 먼저 실험해 보아야 안심하고 쿠미淺川巧; 1891~1931. 그의 묘비에 ‘한국의 산과 민예를
쓸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록도 남기신 걸 보면요. 그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결혼은 했지만 자식이 없었어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적혀 있다.
요. 그래서 충주에 있는 장인 집에 들러 두 살 된 처남 “아사카와 다쿠미는 유복자로 태어났어요. 위로 노리
에게 종두를 실시하겠다고 하니 장인께서 ‘일본인이 타카와라는 형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없어서 형을 무
조선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든 약을 어찌 어린 처남 척이나 따랐다고 해요. 그래서 먼저 조선으로 건너와
에게 놓느냐’며 노발대발하신 거예요. 그러자 지석영 소학교 교원으로 일하고 있던 형을 뒤따라 조선에 와
선생이 ‘못 믿을 사위가 어찌 처가에 있겠습니까’ 하 조선 총독부 농공상부 산림과山林課에 취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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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와서 보니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너무 나 하였죠. 또, 개인 소장 공예품 3,000여 점과, 도편 30
쁜 짓을 해대서 처음에는 도로 갈까도 생각했었는데, 상자를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하셨어요.”
이왕 온 거 돌아가지 말고 대신 조선인들에게 잘하자 그렇게 한국을 사랑하고 아꼈던 아사카와 다쿠미는
고 생각하고 일본인한테 놀림받으면서도 조선말 쓰 죽음을 앞두고 “조선식으로, 조선인들 손으로 한복을
고, 조선 음식 먹고, 조선옷 입으면서 조선인들과 어 입혀, 조선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는데, 그의 유
울렸다고 해요. 또 산림과 직원으로 일하면서 조선인 언에 따라 치러진 장례식에서 30여 명의 이웃이 서
취직도 알선해주고, 아이들 장학금도 대주고 좋은 일 로 상여를 메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이장이 그중에
을 많이 하셨대요.” 서 10명을 골라야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국권 침탈의 한겨레 말살 통치 속에서 한국인과 한국 아사카와 다쿠미는 1937년 이문리동대문구 이문동 공동
문화를 아끼고 사랑했던 아사카와 다쿠미. 그는 산림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후 마을이 확대되면서 길이
과 직원으로 근무할 당시 ‘오엽송 노천매장법’이라는 나자 이문동 공동묘지는 다른 곳으로 이장을 추진하
획기적인 양묘법을 개발해 일본의 목재 수탈로 헐벗 게 되었고,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지는 망우리 공동
은 우리나라 산들을 다시 푸르게 만드는 데도 큰 역 묘지로 이장되었다. 1966년 6월 한국임업시험장 직
할을 했다. 원 일동의 명의로 ‘아사카와 다쿠미 공덕지묘’라고 새
“다쿠미는 무엇보다 조선의 산을 다시 푸르게 하는 긴 비석이 세워졌고, 1986년,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
것을 소명으로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전국의 산을 돌 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
며 한국의 산에 맞는 나무를 고르고, 심기를 거듭하 의 흙이 되다’라는 새로운 기념비가 세워졌다.
면서 식목사업에 헌신하셨죠. 그뿐만 아니라 조선의
민예품과 도자기에도 큰 관심을 갖고 몰두하셨는데 비운의 천재 화가 ‘이인성’
일제 강점기에 소홀하여 없어져 버릴 수도 있었던 것 동락천 약수터 오른쪽 위 좁은 길을 올라가면 독
들을 모으고, 관리한 뒤 그 소장품들을 조선민족미술 립지사 유상규의 묘가 나오고, 다시 오른쪽 위에 있
관 설립 때 기증해 후에 민속학자 송양하宋陽夏가 관 는 도산 안창호의 묘터를 지나 능선 길을 올라 오른
장이 된 국립민속박물관에 무사히 이관될 수 있도록 쪽으로 조금 가면 ‘근대 화단의 귀재 화가 이인성’이
라 쓰인 연보비와 함께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의 묘가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 나온다. “이인성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이렇게 시작
된 이혜성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인성은 1930년
대의 마라톤 영웅 손기정이나 무용가 최승희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
나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미술 재료 회사의 사환
으로 일하던 중 자신이 가진 그림에 대한 열망과 그
림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일본의 가장 권위 있는 제
국미술전람회에 나가 입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서
양화를 그려 일본인들을 물리치고 상을 탄, ‘조선 최
고의 화가’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조선미술전
람회’에서 6회 연속 특선하고, 이화여대에서 서양학
부 강사까지 하게 된 이인성은 그림을 가르쳐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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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찾고 있던 김옥순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이인성
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인성
은 김옥순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점점 사랑하는 사이
로 발전했고, 결국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대구에
서 알아주는 의사 집안이었던 김옥순에 비해 이인성
은 보통학교를 겨우 졸업한 처지였고, 때문에 결혼을
허락받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인성은 포기 하지
않고 끝내 결혼 허락을 받아내어 김옥순을 더없이 소
중하게 여기며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이에 처음엔 결
혼을 반대했던 장인도 사위가 된 이인성에게 자신의
병원 3층에 화실을 따로 마련해주는가 하면, 정원이
딸린 넓은 집을 선물해주기도 하는데 그 무렵 예쁜 1

딸도 태어나 이인성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 2

기였다. 그런데 이인성에게 시련이 다가왔다.


병으로 아들, 딸이 죽고 김옥순마저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이인성은 눈동자를 그리지 않거나 아예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그린 자화상 등을 통해 슬픔을 표
현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결국 술에 취한 채 경찰
이 잘못 쏜 총에 맞아 죽음을 맞게 된 화가 이인성. 동
시대 작가인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등이 대중들로
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을 때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인성은 빠르게 잊혔다. 그러나 이인성은 ‘조
선의 고갱’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거칠면서도 강렬한
필법과 치밀한 공간 구성 능력, 토속적인 색채로 식
민지 백성의 비애를 미적으로 승화시키며 일제 강점
1 화가 이인성의 묘
기 동안 그 누구보다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화가 2 이인성(1912~1950)

였다. 야기는 이곳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앞으로도 계속


그의 묘 주변을 둘러보다가 눈에 띈 해당화 나무. 그 될 것이기에 그의 묘소를 보며 ‘더는 외롭지 않으리
냥 심은 나무가 아니라는 이혜성 해설사의 설명이 이 라’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어진다.
“이인성 화가의 대표작 가운데 <해당화>1944년, 캔버스
에 유채가 있어요. 여기 있는 해당화는 이인성을 상징
하는 의미로 화가협회에서 심어놓은 것이죠.”
이인성은 그의 묘비에 새겨진 것처럼 절정의 기량을
글 지태진 편집팀
더 펼쳐보지도 못한 채 38세로 요절, 불꽃같은 생을
사진 이종호 사진작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인성기념사
마감했다. 하지만 이인성이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이 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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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시와 사진 한 모 금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

나는 선생님 댁 벽난로 앞에서 나무 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누군가 사과를 깎았고 누군가 허리를 구부려 콘솔 위의 도자기를 자세히 보았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무 타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갔다

누군가 창 앞으로 다가가 뒷짐을 지고 비를 올려다보았고 누군가 그 옆에 다가갔다

뭘 보는 거야?

비 오는 걸 보는 거야?

선생님 댁 벽난로에서 장작 하나가 맥없이 내려앉았다

다같이 빗소리 좀 듣자며 누군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때 말 벌 한 마리가 실내로 날아들었다

누군가 저것을 잡아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모두가 일제히 어깨를 움추렸다

처마 밑에 벌집이 있는데요? 119를 불러서 태워야 하지 않을까요?

김소연 시인
1993년 계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등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한글자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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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선생님을 처마 아래로 불러 세웠고 누군가는 날아다니는 말벌만 쳐다보았다

겨울이 되면 말벌이 떠나고 빈집만 남는댔어

가만히 기다리면 적의 목이 떠내려 온다구

선생님 댁 벽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옆에 와 앉으며 말벌의 독침은 연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 옆에 다가와서 누군가는 어린 시절 벌에 쏘인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은 2층으로 올라가서 벌집을 들고 내려왔다

이건 작년 겨울에 처마 밑에 있던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저 벌집도 내 차지야

벌집은 정말로 육각형이었다 까끌까끌했지만 보석 같았다

근데 말벌은 어디 있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가까이에 모여들었다

모두의 얼굴을 둘러 보며 선생님은 빙그레 웃었다

말벌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선생님은 2층에 벌집이 하나 더 있다며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 《시인수첩》 2020년 여름호 기발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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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옹기 종 기

한국을 빛낸 한국의 등燈
칠흑 같은 어둠을 이기는 유일한 것, 바로 ‘빛’이다. 머나먼 옛 시
절부터 빛을 담아 사람들의 눈을 밝혀준 ‘등燈’은 빛뿐만 아니라
은은함과 따뜻함을 품고 있다. 특히 우리 전통 등은 ‘어둠을 밝힌
다’는 표현보다는 ‘어둠을 감싼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은
은함과 따뜻함, 그리고 조화로움이 있다. 자연에서 재료를 취하
고, 사람의 섬세한 손끝에서 탄생하니 도시의 강렬한 불빛에서
느낄 수 없는 정서가 우리 전통 등에는 있는 것이다.

Deung, Korean Lamps of Yore


A single source of light can conquer pitch darkness.
Providing nighttime light since the days of yore, the
Korean lamp, or deung, also envelops its surroundings
in a glowing warmth. Better suited to the Korean phrase
“enveloping the dark” rather than “enlightening the dark,”
Korea’s traditional lamps emit a soft, subdued warmth
and harmonizing glow. Made of materials taken from
nature and fashioned by the skilled hands of artisans, the
deung is emblematic of traditional Korean sentiments
that are otherwise diminished in the intense glare of
urban ligh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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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I c onic I tem s

전통 등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뼈대가 보인다. 그 뼈대는 댓 The traditional deung’s frame is readily visible. The frame consists of
살대나무를 가늘게 쪼갠 오리을 이리저리 휘고 묶어 만든 것인데, 대나무 bamboo ribs (thinly trimmed strips of bamboo) that are woven and
가 나지 않는 지방에선 싸리나무나 수숫대, 갈대 등을 이용하기 knotted together. In regions where bamboo is scarce, bush clover,
도 했다. 뼈대를 감싸는 재료로 한지나 무명천, 비단 등을 이용하 sorghum straw, and reed take their place. The frame is wrapped
기도 했고 새의 깃털이나 나뭇잎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 with such materials as hanji, cotton, silk, and even feathers or leaves.
장 대표적이라 할 만한 재료는 단연 한지다. Needless to say, hanji is the most iconic material used for Korean

deung.
등을 이루는 재료가 다양했듯 그 쓰임과 의미도 다양했다. 먼저 Traditional deung made with an array of materials have a wide
등의 종류를 용도별로 나누어 보면 집안을 밝히는 데 썼던 각진 range of uses and meanings. Classified by purpose, there was the
형태의 등롱인 ‘좌등’이 있었고, 마루나 처마에 걸어두는 ‘괘등’, angled jwadeung used to brighten domestic interiors, gwaedeung
외출할 때 사용했던 ‘제등’, 행사나 특별한 경우에 쓰는 ‘조족등’ hung from raised wooden floor or eaves, jedeung carried on outings,
이 있었다. 이들은 등의 기능 중에서 ‘어둠을 밝히는 조명’의 역 and jojokdeung used for ceremonies and special occasions. These
할에 충실한 것들이었다. 이와는 조금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던 deung were faithful to the purpose of illuminating the dark. Apart
등 가운데 ‘청사초롱’이 있다. 청색 비단에 가두어진 촛불이라는 from these functional lamps, there was the cheongsachorong (meaning
뜻의 청사초롱은, 어둠을 밝히는 기능보다 사용하는 이의 지위와 “candle encased in blue silk”) that indicated the user’s status and
세도를 보여주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political authority, rather than providing light per se. Votive

lamps used to wish for plentiful blessings and progeny included


또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뜻에서 석류등, 수박등, 마늘등이, 무 the seongnyudeung (literally, pomegranate lamp), subakdeung
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거북등, 학등이 있었고 입신출세의 바 (watermelon lamp), and maneuldeung (garlic lamp); lamps wishing
람을 담고 있는 잉어등이 있었다. 이외에도 문헌에 남아있는 연 for longevity and health included geobukdeung (turtle lamp) and
꽃등, 칠성등, 오행등, 일월등, 난간등, 화분등, 가마등 등이 있다. hakdeung (crane lamp); and lamps wishing for successful careers

included ingeodeung (carp lamp). Historical records mention many


작은 불빛 하나가 귀하디 귀한 시절은 이제 지나왔지만 전통 등 other lamps, such as the yeonkkotdeung (lotus lamp), chilseongdeung
의 가치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빛뿐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 (seven stars lamp), ohaengdeung (five elements lamp), irwoldeung
서와 소망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우리 전통 등이 우 (sun and moon lamp), nangandeung (balustrade lamp), and
리 곁에서 오래도록 빛을 발하기를 기대해본다. gamadeung (palanquin lamp).

Sadly, gone are the days when people treasured even small

sources of light—yet the value of traditional deung lives on. More

than mere lamps, they project the hopes and sentiments of the

Korean people. May the softly shining traditional deung remain with
us for generations to come.

글 안유미 편집팀 Written by An Youmee, editing team


사진 셔터스톡 Photographs courtesy of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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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의 서 원 ④

유네스코 세계유산 2관왕


경주 옥산서원
Oksan Seowon in Gyeongju: Twice Recognized as a
UNESCO World Heritage Site

옥산서원 전경
Panoramic view of Oksan Se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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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Korea’s Seowon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위치한 옥산서원玉山書院은, 지난 Oksan Seowon (located in Oksan-ri, Angang-eup,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 Gyeongju, Gyeongsangbuk-do) has the distinction of
와 양동’에도 포함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2관왕을 차지한 곳이 having been recorded on UNESCO’s World Heritage list
다. 이는 옥산서원을 설명하려면 양동마을을 거론하지 않을 수 not once but twice. The first time was as part of Historic
없다는 뜻으로, 양동마을은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조선 시대 양 Villages of Korea: Hahoe and Yangdong, which was added
반들의 생활상과 주거 양식을 보여주는 반촌泮村이다. to the list in 2010. As this suggests, no explanation of
Oksan Seowon would be complete without mentioning
Yangdong Village. Alongside Andong’s Hahoe Village,
Yangdong offers a glimpse into the architectural tastes and
lifestyles of Korean aristocrats during the Joseon Dynasty.

양동마을과 회재 이언적, 그리고 옥산서원 Yangdong Village, Yi Eon-jeok, and Oksan Seowon
양동마을 주변으로 형산강이 흐른다. 형산강은 신라 시대에 Yangdong Village lies on the banks of the Hyeongsangang River.
굴연 혹은 굴연천이라 불렀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형강’이 During the Silla Kingdom, the river was called the Guryeon or
라 기록되어 있다. 한자 ‘말 물勿’자를 거꾸로 놓은 형상으로 생겼 Guryeoncheon. It is marked as the Hyeonggang River on Kim Jeong-
는데, 산세는 경주의 재물이 형산강의 안락천에 실려 양동마을로 ho’s Daedong yeojido map. Yangdong Village takes the shape of
모두 들어오는 형상이라고 한다.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본다는 the Chinese character mul (勿), with all of the goods of Gyeongju
배산임수형으로 물勿자형인 양동마을은 풍수지리상 문자형 명당 being brought through the village along the Allakcheon Stream, a
마을에 속하며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이다. 또 양동마을은 현 tributary of the Hyeongsangang River. Indeed, it is the only village in
존하는 단일 마을로 가장 많은 문화재 건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이 Korea categorized as a character-based auspicious site, according to
기도 하다. geomantic principles. Another auspicious feature of the village is that
옥산서원에 배향된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 1491〜1553은 양동마을에 it looks down on the water, with hills behind it. Yangdong Village
서 태어났다. ‘동방오현東方五賢’의 한 사람이자 전통 성리학의 수 also has more buildings registered as cultural heritage sites than any
호자로 추앙받는 이언적이지만 그의 관직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 other village in Korea.
다.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 One of the figures enshrined at Oksan Seowon is Yi Eon-
사사화 때는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jeok (1491–1553, pen name Hoejae), who was born in Yangdong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Village. Today, Yi is revered as one of the leading scholars of neo-
이언적은 사망한 지 13년 만에 사림의 신원 운동으로 복작復爵되 Confucianism during the Joseon Dynasty, but his public career was
었고, 선조 1년1568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선조 2년1569 종 full of challenges. He lived during a difficult period for the Sarim
묘의 명종明宗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광해군 2년1610에 ‘동방오현東 clique of neo-Confucian scholar-officials, a time when officials
方五賢’이라고 불리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문묘 were frequently purged. During the literati purge of 1545, Yi tried
에 종사 되었는데, 이들은 조선조 도학의 우뚝 선 봉우리로 평가 to intervene to prevent innocent scholars from being killed in a
받는다. struggle between the Sarim and power-hungry officials. However, he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이 창건된 해는 선조 5년1572으로, 이언 ended up being purged himself.
적이 사망하고 약 20년이 흐른 후다. 당시 경주부윤이었던 이제 A campaign by the Sarim led to Yi Eon-jeok’s rehabil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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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글씨인 옥산서원 현판
The signboard for Oksan Seowon hand-written by Kim Jeong-hui

13 years after his death, and he was posthumously named chief

state councilor on the Council of State Affairs in the first year of


민李齊閔은 안강 고을의 선비들과 더불어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독 King Seonjo (1568). His spirit tablet was placed in the hall of King
락당獨樂堂; 보물 제413호 아래에 사당을 세웠으며, 사액을 요청하여 Myeongjong at the Jongmyo Shrine in the second year of King Seonjo
선조 7년1574에 ‘옥산’이라는 편액과 서책을 하사받았다. 최초 사 (1569), and then added to the Munmyo Confucian Shrine alongside
액은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였으나 헌종 4년1838에 구인당이 화재를 the other four leading neo-Confucian scholars (Kim Goeng-pil, Jeong
입어 다시 사액을 받아 현전하는 것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Yeo-chang, Jo Gwang-jo, and Yi Hwang) during the second year of

King Gwanghaegun (1610). Together, the five are regarded as pillars


옥산서원을 특징짓는 구인당, 체인묘, 무변루 of neo-Confucian learning during the Joseon Dynasty.
옥산서원의 놀라운 점은 현재의 전사청, 문집판각장판각, 장서 Yi Eon-jeok’s spirit tablet is enshrined at Oksan Seowon, which
각, 고사 등 후대에 증축된 것을 제외한 나머지 중요 건물들은 대 was built in the fifth year of King Seonjo (1572), 20 years after Yi’s
부분 창건 때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death. Yi Je-min, the magistrate of Gyeongju, and the scholars of
옥산서원은 정문에서 차례로 문, 누, 강당, 사당 등이 일직선을 이 Angang built a shrine near Dongnakdang (Treasure No. 413) in
루는 중심축 선상의 마당을 중심으로 각각 고유의 영역을 구성하 order to honor Yi Eon-jeok’s memory. King Seonjo agreed to bestow
며 공간의 켜를 만들고 있다. 기하학적인 구성을 이루면서도 주 a set of books and a tablet bearing the name “Oksan” in his seventh
변 자연경관과 어울리는 배치다. 그중에서도 구인당, 체인묘, 무 year (1574). The calligraphy on the original name tablet was the
변루 일대의 외부공간은 전체 배치의 구심점이 되어 개별적인 영 work of Yi San-hae, but Guindang Hall was damaged in a fire in the
역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fourth year of King Heonjong (1838). The current tablet features the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求人堂 앞에, 이언적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calligraphy of Kim Jeong-hui (pen name Ch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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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의 2층 누각, 무변루
Mubyeonnu, a two-story pavilion in Oksan Seowon

Oksan Seowon’s Most Distinctive Structures: Guindang Hall,

Cheinmyo Shrine, and Mubyeonnu Pavilion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體仁廟가 뒤에 위치한 양식은 전형적인 ‘전학 One surprising thing about Oksan Seowon is that most of the main
후묘前學後廟’ 건축구조이다. 체인묘의 ‘체인體仁’은 어질고 착한 일 buildings date back to the time of its founding. The exceptions
을 실천에 옮긴다는 말로, 성리학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것이다. are those that were expanded later, including jeonsacheong,
서향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무변루가 나타난다. 무변 munjippangak (jangpangak), jangseogak, and gosa.
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중층 맞배기와집인데 마당에서는 5칸 From the gate, a pavilion, hall, and shrine run along a straight
으로만 인식된다. 1층의 어간御間은 대문을 달고, 양측은 2층 온돌 courtyard that serves as the central axis of the complex, with each
방의 구들과 아궁이로 이루어져 있다. 2층의 중앙에는 정면 3칸, structure constituting another unique spatial layer. Despite the
측면 2칸의 대청을 두고, 이 양측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 geometric construction, the structures are aligned to harmonize
을 하나씩 두어 한 동의 건물에 서로 다른 두 성격의 공간이 결합 with their natural surroundings. The exterior of Guindang Hall,
한 형식이다. 외부에서는 7칸, 내부에서는 5칸으로 인식되는 묘 Cheinmyo Shrine, and Mubyeonnu Pavilion can be seen as the
한 형식이다. focal point of the entire arrangement, forming their own individual

domain.
옥산서원의 백미, 독락당과 계정 Guindang Hall, the place of study, is in the front; Cheinmyo
옥산서원을 유명하게 한 것은 옥산서원에서 700m 정도 상 Shrine, the place of ceremonial rituals (where Yi Eon-jeok’s spirit
부에 있는 독락당獨樂堂; 보물 제413호과 계정溪亭이다. 이 역시 옥산서 tablet is kept), is in the rear. That reflects the Seowon architectural
원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되어 있는데 독락당은 convention of positioning the school in front and the cemetery in the
이언적이 낙향한 이듬해인 1532년에 지어졌다. 독락獨樂은 글자 rear. The phrase “Chein” in Cheinmyo Shrine means putting vir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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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홀로 즐겁다’는 뜻이다. into practice, which was regarded as the preeminent virtue in neo-
독락당은 보통의 사랑채와는 많이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Confucian thinking.
한국의 건축에서 정면 칸살은 대체로 3·5·7칸 등 홀수를 택한다. Just inside the western gate, which is called Yeongnakmun, is
그러나 독락당은 정면 칸살이 4칸으로, 일반적인 양식을 벗어나 Mubyeonnu Pavilion. Mubyeonnu is a two-story building with a
있다. 또한 개울을 향한 동쪽 지붕은 합각이 있는 팔작지붕이지 gabled roof made of tiles, measuring seven kan (the space between
만 안채와 맞붙은 서쪽은 맞배지붕으로 양쪽이 대칭을 이루지 않 columns) on the front and two kan on the sides, though only five
는다. kan can be seen from the courtyard. A door appears in the middle of
독락당의 별채이자 정자인 계정溪亭은 옥산서원을 더욱 돋보이게 the first floor, and the rooms on both sides of the second floor have
한다. 방 1칸과 계곡의 반석 위에 가느다란 기둥을 세워 쪽마루를 floor heating and furnaces. In the middle of the second floor is a
덧대고 있는 특이한 구조로, 몸채는 방 한 칸과 마루 두 칸을 들 daecheong (wooden porch) that measures three kan in front and two
이고 계곡을 면하여 쪽마루를 덧대어 계자난간을 두른 구조이다. kan on the sides. The heated rooms on both sides measure one kan
절반은 집 안에 있고 절반은 숲속에 있어 마치 집과 자연 양쪽에 in front and two kan on the sides. In short, two spaces with distinct
다 걸터앉은 형태와 같다. 계정이란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로 알 characteristics are combined in a single building. The design itself is
려져 있다. 학자들은 계정이야말로 계류를 따라 발달한 영남지방 unusual in that the building seems to measure seven kan from the
정자 문화의 한 규범이라고 평가하며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 outside and five kan from the inside.
관을 가진 정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The Highlight of Oksan Seowon: Dongnakdang House and

Gyejeong Pavilion

계정
Oksan Seowon’s claim to fame actually lies about 700 meters away:
Gyejeong Pavi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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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nakdang House (Treasure No. 413) and Gyejeong Pavilion. The

two structures were also inscribed on UNESCO’s World Heritage list

as part of Oksan Seowon. Dongnakdang was built in 1532, the year

after Yi Eon-jeok was banished to the countryside. The characters for

“Dongnak” mean “taking pleasure in being alone.”

The mood at Dongnakdang is different from that of a typical

sarangchae (men’s quarters). In traditional Korean architecture, the

front of a building generally consisted of an odd number of kan—

three, five, or seven, for example. But Dongnakdang has four kan in

front, a departure from the typical format. Another point of interest

is the asymmetry of its roof: the east side, facing the stream, is a

hip-and-gable, while the west side, adjoining the anchae (women’s

quarters), is gabled.

What makes Oksan Seowon stand out even more is its annex,

called Gyejeong Pavilion. The building has an unusual structure: a

one-kan room and a two-kan jjokmaru (narrow veranda) lined by

a balustrade and propped up by slender pillars that descend to the

rocks below. Half of the structure is in the house and half is in the
용소폭포 woods; it could be said to straddle the domestic and natural spheres.
Yongsopokpo Falls
Gyejeong’s name tablet reportedly bears the calligraphy of Han Seok-

bong. Scholars say that Gyejeong is a perfect example of the pavilion


이 밖에도 옥산서원 내에 5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하는 향나 culture of the Yeongnam region, which developed along woodland
무와 은행나무가 있으며, 외나무다리가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연 streams. They regard the pavilion as having the most beautiful view
결해주고 있는데, 주변에 용소龍沼;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 있는 깊은 of any in Korea.
웅덩이가 있고 작은 폭포가 있어 ‘용소폭포’라 부른다. 폭포는 깊 There are juniper and ginkgo trees around Oksan Seowon
이가 4m가 넘고 폭이 3m쯤 되며, 양쪽으로 깎아지른 암벽 사 that are estimated to be over 500 years old, and a plank bridge
이의 길이가 10m쯤 되는 용추龍湫는 옥산서원의 또 다른 자랑이 connects the seowon to Dongnakdang. Nearby is a waterfall called
기도 하다. Yongsopokpo, named for the deep pool beneath it. A 3-meter-wide

torrent dashes down a precipitous rock face for 4 meters until it hits

the 10-meter-wide pool below, offering one more reason to visit


Oksan Seowon.

Written by Lee Jongho, author of UNESCO World Heritage: Korea’s Seowon


Academies, former member of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글 이종호 《유네스코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저자, 前 ‘조선왕조실록 Return Committee
환수위원회’ 위원 Photographs courtesy of Lee Jongho, Seowon: Korean Neo-Confucian
사진 이종호, (재)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Academies, the Gyeongju City Tourist Attractions Images Download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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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지역 문 화 스 토 리

[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지원 사업 ]

한강의 역사를 대표하는


‘황포돛배’
한강은 구석기 시대 이래 삼국을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중부의 문화를 이루는 중추적 역할을 했다.
또 지금과 같이 도로를 이용한 운송체계가 갖추어지기 전,
물길은 물산의 이동 경로로서 ‘중앙문화’와 ‘지역문화’를
교차시키는 가교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 사람과 식량 등을 싣고
한강을 왕래하던 여러 배가 있는데
그중 ‘황포돛배’는 한강의 역사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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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L oc a l Culture Stories

[ Regional Cultural Content Development Project ]

Hwangpo Dotbae,
A Symbol of the History of the Hangang River
The Hangang River has played a pivotal role in
forming the culture of Korea’s central region,
from the Paleolithic Age and through the Three
Kingdoms period to the Joseon Dynasty. Before
the establishment of a system of modern overland
transportation, waterways were the main
transportation routes for local products and acted
as a bridge between the culture of the central region
and other local cultures. In the Joseon Dynasty, there
were several types of boats that carried passengers,
food, and other produce up and down Hangang
River. Among them, the hwangpo dotbae was
symbolic of the history of the Hangang River.

두물머리에 띄워진 황포돛배


A hwangpo dotbae floating at Dumulmeori

27
손낙기 선생이 만든 배, 1,200여 척에 달해 Master Son Nak-gi, builder of more than 1,200 vessels
‘황포돛배’는 말 그대로 ‘황토물을 들인 돛을 단 배’를 말한 Hwangpo dotbae literally means a sailboat (dotbae) that has a sail
다. 한강의 역사만큼이나 돛배의 역사도 길게 이어졌지만, 시대가 made of fabric dyed with red clay (hwangpo). The history of this type
변하고 물길이 차단되면서 예전의 풍경과 문화는 대부분 사라졌 of sailboat is as long as the history of the Hangang River. However, as
다. 나무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관련 기록과 기술 또한 time passed and waterways were blocked, the landscape and culture
명맥이 끊어질 위치에 처했으나 다행히 황포돛배의 명맥을 잇기 of the past gradually faded. As these wooden vessels disappeared,
위한 노력이 하남, 여주, 파주 등 여러 지역에서 이뤄지고 있다. associated records and technologies were also on the brink of being
하남 지역에는 한평생 한강 황포돛배를 지으며 살아온 손낙기 선 lost. However, efforts are being made to keep the relevant traditions
생이 있다. 그는 목상木商; 뗏목이나 장작, 재목 등을 팔고 사는 도매상이었던 alive in places such as Hanam, Yeoju, and Paju.
할아버지와 부친과 함께 배를 타고 한강을 오르내리는 생활을 하 Residing in the Hanam region is Master Son Nak-gi, who
면서 자연스럽게 배 짓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아픔 has spent his entire life building hwangpo dotbae on the Hangang
은 그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부평 조병창에 강제 River. He traveled up and down this river with his grandfather and
로 끌려가 광복이 올 때까지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만드는 노역 father, who were lumber dealers (wholesale merchants who sold
을 하기도 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국군으로 자원입대하여 군인 lumber, firewood, or rafts), and more or less automatically went
의 삶을 살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기도 into boatbuilding. However, he could not escape the nation’s tragic
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군을 제대한 그는 본격적으로 배 짓는 일 history. He was drafted into service in the armory in Bupyeong
을 배우고 평생 거룻배 만드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는 마재현 정약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1910–1945) and forced to
용 선생 유적지 마을의 ‘박성문’ 편수에게서 배 짓는 일을 전수 받았 make weapons for the Japanese empire until Korea regained its
는데, 박성문 편수는 당시 주변에서 ‘배를 최고로 잘 만들고 고치 independence. After this, he volunteered as a soldier during the
는 분’으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손낙기 선생이 만들어 우리나라 Korean War and fought in numerous battles. When the war was
강물 위에 띄운 배는 황포돛배와 유람선 그리고 낚싯배를 합쳐 over and he was discharged from the army, he began learning
현재까지 1,200여 척에 달한다. boatbuilding more seriously and dedicated his life to the craft. He

apprenticed under the master carpenter Park Seong-mun from


한강은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 다녀 Majae village (now the historical site of Jeong Yak-yong), who was
황포돛배는 강의 지역에 따라 배 모양과 구조가 다른 강선江船 famous for being unrivaled in building and repairing boats. The
으로 제작된다. 한강은 수심이 얕으면서 강물의 흐름이 빠르고 number of boats and ships that Master Son built, including hwangpo
여울목이 많아 자연적 조건에 적합한 배의 구조와 운행법이 발달 dotbae, cruise ships, and fishing boats, is more than 1,200.
하게 되었다. 한강에서 운행된 배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배의
밑바닥이 평평하면서 뱃전은 얕고 배의 길이가 긴 대신 폭은 좁 Flat-bottomed junks on the Hangang River
아야 했다. 이러한 구조를 지닌 배를 ‘평저선平底船’이라 불렀는데, For river travel, hwangpo dotbae were designed using different
평저선은 운행속도가 느린 대신 짐을 많이 실을 수 있었다. shapes and structures depending on the particular characteristics of
거룻배돛이 없는 작은 배는 한강에서 주로 사용되던 배로, 마포에서 sections of the river. As for the Hangang River, it was shallow, fast
소금과 새우젓 등을 싣고 중부 내륙지방 물길을 따라 오가며 물 flowing, and had many rapids, which thereby required vessels to be
물교환을 하였다 해서 ‘장삿거루’ 또는 ‘박꿈질 배’라고도 불렸다 tailored to these natural conditions. Taking these conditions into
고 한다. 이 거룻배의 규모는 승선 인원에 따라 ‘세손거루3인이 1조 consideration, the boats traveling the Hangang were flat-bottomed,
가 되어 모는 배’, ‘두손거루2인 1조로 모는 배’, ‘엇거루1인 단독배’ 등이 있다. long, narrow, and built with a shallow gunwale. Boats with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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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돛배 모형(손낙기 제작)
A hwangpo dotbae model produced by Son Nak-gi

거룻배의 운송량은 엇거루 기준 약 40~50가마 정도의 벼를 실어 structure were called “junks,” and while the junks moved relatively
나를 수 있다고 한다. slowly, they could carry significant loads.
거룻배를 만드는 재료로는 소나무를 최고로 친다. 춘양목, 적송, Georutbae, a small boat without a sail, were primarily used
해송, 무송 등 소나무의 여러 종류 중 춘양목이 가장 많이 사용되 on the Hangang River, and were often referred to as mercantile
었다. 춘양목과 적송은 나뭇결이 좋아 옹이가 적은 것이 특징이 boats (jangsat-georu) or barter boats (bakkumjilbae), as they moved
다. 해송 역시 비바람을 많이 견딘 나무로서, 배를 만들어도 틀어 between Mapo Port in Seoul and central inlands bartering salt and
지지 않아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salted shrimp that they carried from Seoul. Based on the number
소나무는 60~100년 이상 된 나무를 사용하는데, 옛날에는 나무 of people on board navigating the boat, they were either called a
운반에 어려움이 있어 ‘왼계톱쟁이’라 불리는 장인이 산지로 가 three-person boat (seson-georu), a two-person boat (duson-georu),
고 그 자리에서 소나무를 켜세로로 톱질하여 쪼개다 산골짝 개울에 물을 or a one-person boat (eot-georu). The amount of cargo that could be
막고 물길을 이용하여 큰 강 쪽으로 흘려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loaded on a standard one-person boat was 40 to 50 bags of rice.
흘려보내는 작업을 ‘적심’이라고 하며 물속에 오랜 시간 담가져 Pine trees were considered to be the best material for georutbae.
뗏목으로 내려온 나무를 ‘수상목水上木’이라 한다. 수상목은 배를 Of the different kinds of pine trees available to boatbuilders,
짓거나 집을 지을 때 최고로 치는 재료였다. 개울을 통해 큰 강으 including diamond pines (also known as chunyangmok in Korean),
로 모인 나무들은 떼를 엮고 한 달여에 걸쳐 흘러 서울한양에 도착 red pines, black pines, and the like, diamond pines were most
하는데, 이를 가지고 배를 지었다. commonly used. Diamond pines and red pines were characterized

29
1 2

3 4

30
또 다른 방법으로는, 배 만드는 편수가 소나무 산지인 정선이나 as being fine-grained and having fewer knots. Black pines were also
영월 근방에 직접 내려가 배를 지어 그 배를 타고 오기도 하였다 used a great deal in shipbuilding because they were less likely to
고 한다. 그러나 도로의 개설로 목재의 유통이 편리해졌고, 목재 warp in the elements.
소나 제재소가 활성화되면서 대부분 배를 지을 목재는 제재소에 Pine trees that were used to build ships were between 60 to
서 널을 켜 사용하였다. over 100 years old. Since in the past it was difficult to transport

lumber to the necessary location, there were artisans called “oengye


황토물로 염색한 광목은 썩지 않아 sawyers” who specialized in this work. They traveled to pine habitats,
‘강배河船’가 ‘바닷배海船’와 다른 점은, 강배는 얕은 강바닥을 cut down the trees, and blocked mountain valley creeks to redirect
고려하여 자갈과 돌멩이들을 헤치고 지나갈 수 있도록 바닥을 평 waterways to larger rivers in order to transport the large hewed logs.
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돌에 걸렸을 경우 쉽게 넘어갈 수 있도 The floating of timber down a river was called jeoksim, and the logs
록 배의 앞뒤가 유동성 있게 제작되는데, 가운데 부분의 목재는 carried down the river on floats were called susangmok (literally,
질기고 강한 참나무를 산에서 베어와 사용하였다. tree on the water). Susangmok were considered the best materials
돛은 주로 ‘황포黃布’를 사용했다. 황포 하나를 완성하는 데 필요 for building ships and boats, and even houses. After a month-long
한 광목은 50마碼 정도다. 돛의 길이는 10마9~10m 정도가 되며 너 journey by raft, the timber finally reached Seoul where it was used in
비는 4폭 반2m 정도가 된다. 황포 돛은 흰 광목을 물들여서 만드 boatbuilding.
는데 광목을 염색하려면 우선 황토가 필요하다. 황토 염료는 주 Another option for boatbuilding was for the master carpenter
로 두미강 위 강가에서 채취하였다. 채취한 황토를 큰 그릇에 넣 to travel to pine tree habitats near Jeongseon or Yeongwol. The
고 물과 황토를 휘젓는다. 이 황토물에다 광목을 넣으면 진하게 boatbuilder would complete the boat there and then return on that

vessel. Eventually, though, the construction of roads made it easy

to transport logs, and so most of the lumber was supplied after


1 돛대 세우기
Erecting the mast being chopped and trimmed into boards at busy lumber mills and
2 늘배 도면 중 돛부분
lumberyards.
The dot (sail) portion of the boat plan
3 배 만드는 연장들
Boat building tools
4 황포돛 제작 모습 Cotton cloth dyed with red clay does not decay
A hwangpo dot (sail) in the making
The crucial difference between river boats and sea boats is that the
5 황포돛배 도면
A plan for a hwangpo dotbae river boats are flat-bottomed. This design takes into account the

5
gravel and stones sitting on the shallow riverbeds. The bow and

stern of a river boat are made to be somewhat flexible, so that it can

navigate rocky waterways easily. The material for the central section

comes from sturdy, durable oak trees harvested in the mountains.

Sails are mostly made from hwangpo, cotton cloth dyed with

red clay. The amount of cotton cloth needed to complete one

hwangpo is about 50 yards. The sail is about 10 yards (9–10 meters)

long and approximately 4.5 yards (2 meters) wide. The sail is made

by dying white cotton cloth with a red clay mixture. The red clay

that is required to create the dye is collected from the riverbank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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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임진강 황포돛배(2003년)
A hwangpo dotbae on the Imjingang River in Paju (2003)

염색되는데 이를 건져 완전히 말린다. 이렇게 황토물로 염색한 Dumigang River. The collected red clay is added to a huge container
광목은 썩지 않아 10년 이상 오래 사용할 수 있었다. and mixed with water. When the white cotton is soaked in this

mixture of red clay and water, it turns a deep red clay color. The dyed
배 만드는 기술은 그 자체가 문화의 원형 cotton must be dried completely afterwards. Cotton cloth dyed in
배 만드는 일은 까다롭고 복잡한 기술이다. 사람과 물산을 red clay does not decay, which allowed it to be used for more than a
실어나르는 튼튼한 운송수단으로 역할 하기 위해서, 배를 만드 decade.
는 편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불량한 부품이
하나만 들어가더라도 배는 완성체가 되지 못한다. 이처럼 배 만 Boatbuilding techniques, a cultural prototype in and of itself
드는 기술은 그 자체가 기술의 집약이자 문화의 ‘원형’이라고 할 Boatbuilding is an intricate and complicated process. To create a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1970년대 댐의 건설로 물길이 차단되 vessel that can serve as a sturdy means of transportation carrying
었고, 더욱이 1980년대 들어선 한강종합개발에 의해 한강의 수 people and goods, the master carpenter must always take great care
로가 완전히 차단되면서 한강에서 거룻배를 보는 일은 점차 사라 from start to finish. If one defective part makes it into the boat, it
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손낙기 선생의 배 짓는 일 또한 낚싯배를 cannot be considered a complete whole. In that sense, boatbuilding
건조建造 하는 일 외에는 현저하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is, in and of itself, a technological integration and cultural “prototype.”
중 2000년대에 들어서며 손낙기 선생의 배 만드는 일은 다시 활 Unfortunately, with the construction of various dams in the 1970s,

32
Korea’s waterways were gradually diverted. By the 1980s, the water

routes on the Hangang River became completely blocked by the

Hangang Comprehensive Development Plan, and junks on the

Hangang River began disappearing. With the exception of fishing

boats, the number of Master Son Nak-gi’s boatbuilding projects

also decreased precipitously. However, by the 2000s, Master

Son’s boatbuilding activities returned to normal when several

local governments started ordering junks for display at cultural

preservation events and projects, or to use them in broadcasts of

culture and tourism programs. He also participated in producing


MBC 드라마 <어사 박문수> 촬영용으로 쓰인 황포돛배 앞에 선 손낙기 선생 sailboats for museum exhibitions. Starting with the production of
Son Nak-gi standing in front of the hwangpo dotbae used in the filming of the MBC
TV series Inspector Park Moon Soo mercantile junks for Han River, Running Through Korea, a special

exhibition held at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he went


기를 띠기 시작한다. 물길이 차단된 후 한강의 포구에서 사라진 on to produce hanseon, or traditional Korean vessels, for Korean
거룻배를 각 지자체에서 문화보존용 행사 및 문화관광 사업이나 Folk Village in Suwon, and hwangpo dotbae for the MBC and SBS
방송을 위해 주문하기 시작했고, 박물관의 전시용 돛배 제작에도 TV series Inspector Park Moon Soo and The Land. He restored and
참여하게 된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 특별전 <한강전>의 장사거 built numerous vessels, from a cruise ship at Jopo Port in Yeoju, a
룻배 제작을 시작으로 한국민속촌 전통 한선 제작, MBC 드라마 ferryboat at Mokgye Port in Chungju, a cruise ship at Imjingang
<어사 박문수>와 SBS 드라마 <토지>의 황포돛배 제작, 여주 조 River in Paju, a ferryboat at Buljeong Port in Goesan, a ferryboat
포나루 유람선, 충주 목계나루 나룻배, 파주 임진강 유람선, 괴산 at Cheongnyeongpo Port in Yeongwol, a ferryboat at Yeongsanpo
불정나루 나룻배, 영월 청령포 나룻배, 나주 영산포 나룻배, 전통 Port in Naju, and small fishing boats (nak-georu) for the Korea
견지협회 낚거루 등 수없이 많은 배를 복원·제작하고 난 후, 손낙 Traditional Gyeonji Association. When he completed these projects,
기 선생은 57년간 지속한 편수 일을 놓게 되었다. 이제는 연로하 Master Son finally packed up his tools after a 57-year career as a
여 배 만드는 일을 다시 할 수 없어 아쉬움이 남지만, 그의 저서 master carpenter. It is unfortunate that he can no longer go back
《편수의 거룻배 짓는 격식》과, ‘2019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 to boatbuilding due to his advanced age, but his book, A Master
굴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하남문화원에서 발간한 《한강 황포돛 Carpenter’s Formality in Boatbuilding, as well as the Son Nak-gi,
배 명장 손낙기》를 통해 그가 평생 해온 배 만드는 일이 기록되어 Master of Hwangpo Dotbae on Hangang River, a publication from the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Hanam Cultural Center as part of 2019 Regional Cultural Content

Development Project, are valuable materials that document his


lifelong contribution to boatbuilding.

글 이상범 하남문화원 사무국장


사진 손낙기, 하남문화원, 아이클릭아트

‘지역N문화’ 누리집에서 Written by Yi Sangbeom, secretary-general of Hanam Cultural Center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Photographs courtesy of Son Nak-gi, the Hanam Cultural Center, iclick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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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느린 마을 기 행 ③

34
Cultural Encounters ㅣ Slow City T ravel

누구나 나그네 되고
방랑객 되는
슬로시티 영월 김삿갓면
“죽는 날까지 /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의 <서시>처럼,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을 만큼 큰 죄를 지었다 여겨 평생을 삿갓을 눌러
쓴 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다간 인물이 있다. 바로 방랑시인 김
삿갓으로 알려진 난고 김병연1807~1863이다. 강원도 최초의 슬로
시티 영월에서 그의 굴곡진 생애와 문학세계를 마주한다.

Gimsatgat-myeon in
Yeongwol: The Slow City
Where Anyone Can Be a
Wanderer
Yun Dong-ju’s famed poem “Prologue” begins with
the following lines: “Oh, to gaze at the heavens / until
my dying day / without a hint of shame! / Even the
wind rising in the leaves / was painful for me.” There’s
a historical figure who believed he’d committed a sin
so serious that he didn’t dare look up at the sky and
spent the rest of his life atoning his sin, wearing a
conical bamboo hat known as a satgat. That figure is
Kim Byeong-yeon (1807–1863, pen name Nango), often
called Kim Satgat, the wandering poet. Kim’s checkered
fortunes and his literary output can be experienced at
Yeongwol, the first Slow City in Gangwon-do.

김삿갓면에 드리운 짙은 녹음
Daubs of leafy green cover Gimsatgat-myeon

35
천형天刑 짊어진 채 방랑한 김삿갓 Overcome with guilt, Satgat becomes a wanderer
유유히 흐르는 강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생명 그 자체다. 그 The gentle waters of the river are a source of life, invigorating
래서일까, 크고 작은 강이 유난히 많은 강원도 영월의 자연 풍경 creatures of all kinds. Perhaps that’s why Yeongwol-gun in Gangwon-
은 언제나 생기 넘친다. 녹음 짙은 여름에 특히 그렇다. 자연 만물 do, a county with an unusual number of waterways both big and
가운데 푸르지 않은 것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월군에는 small, always abounds with beautiful scenery. That’s especially true
우리나라에서 열한 번째, 강원도에서 첫 번째 슬로시티가 된 ‘김 in the verdant summer, which brings out the vibrant green in every
삿갓면’이 있다. 김삿갓면이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 plant. Yeongwol-gun is the site of Gimsatgat-myeon, the first Slow
노루목에는 방랑시인으로 더 잘 알려진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의 City in Gangwon-do and the tenth Slow City in Korea. As the name
주거지와 묘소가 있다. suggests, this is where the famous wandering poet Kim Satgat had
명문 안동 김씨의 일가로 태어난 김병연은 어려서부터 글공부에 his home and was laid to rest, in the village of Norumok.
남다른 재능을 보여 열 살 전후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 A scion of the powerful Andong Kim clan, Satgat displayed a
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스무 살 되던 해, 향시에 나가 급제를 하였 remarkable talent for book learning from a young age. By the age of
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여생을 죄인처럼 하늘을 보지 못한 ten, he apparently mastered the Four Books and the Three Classics,
채 살아야 했다. 그가 향시에 나갔을 때 출제된 시제는 ‘정시 가 Confucian texts widely used in Korean education at the time. In his
산 군수의 죽음을 논하고, 하늘에 사무치는 김익순의 죄를 탄식 twentieth year, he received top marks on the provincial government
하라’였다. 그는 평소 실력대로 시를 지었는데, 내용은 목숨을 바 exam, but that very success is what saddled him with guilt for the
쳐 절개를 지킨 정공을 칭송하고 적에게 항복한 김익순은 지조 rest of his life and kept him looking at the ground. In the exam, he
없는 비겁한 죄인이라며 신랄하게 비난한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was assigned to write a poem about the death of Jeong Si, county
어머니로부터 자신이 알지 못했던 집안 내력을 듣고 반역자 김익 magistrate of Gasan, and to lament the wicked sins of Kim Ik-sun.
순이 자신의 친할아버지임을 알게 되었다. 이후 김병연은 ‘자신 So Satgat wrote a poem with his typical talent in which he praised
은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고 자책하다가 결국, 전국을 방랑 Jeong Si for laying down his life and bitterly denounced Kim Ik-
하는 시인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김삿갓은 자신의 굴곡진 생애를 sun as a cowardly and dishonorable criminal. It was only later that
<난고평생시>를 통해 노래했다. Satgat learned the family secret from his mother: the traitor Kim Ik-

sun had been his paternal grandfather. Satgat was filled with guilt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어 보금자리가 있건만 for having brought shame upon his own grandfather and ultimately
내 평생 돌아보니 집도 없이 홀로 외로웠구나. spent his life as a poet roving the countryside. Satgat wrote a poem
짚신 신고 대지팡이 짚고 천 리 길 떠돌며 called “Nango pyeongsaengsi” about his tribulations:
물처럼 구름처럼 방랑하며 천지사방 가는 곳이 내 집이었다.
그러나 어찌 사람을 원망하고 하늘을 탓하랴. (중략)” Birds have nests and wild beasts have caves to shelter them

But for my entire life, I’ve been lonely, on my own without even
민중의 애환을 시 한 수에 담아 위로하다 a home.
김삿갓은 전국을 떠돌며 여러 편의 즉흥시를 남겼다. 내용은 I’ve traveled for hundreds of miles in my straw shoes, with my
당시 금기시하던 남녀의 사랑과 부패한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 bamboo staff.
는 것이 대부분이다. 형식 또한 매우 자유로워서 비속어를 쓰기 Wandering like the water, like the clouds, my home has been
도 하고 대상을 비꼬아 조롱하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그를 민중 the earth and sky wherever I roam.
시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김삿갓은 자신이 남긴 시처럼 질펀한 But how could I resent humanity or blame heaven?

36
Comforting poems that capture the joys and sorrows of the

Korean people
Satgat left behind a number of impromptu poems that he wrote while

journeying around Korea. Most of his poems poke fun at the rich

and at corrupt politicians, or they deal with the love of a man and a

woman, all subjects that were taboo at the time. His poems are also

formally relaxed, featuring slang and sarcastic jabs at their subjects.

For that reason, he is sometimes called a poet of the people. Satgat

lived a life that was as wide-ranging as his poetry and passed away

at the age of 57 at the Jeokbyeokgang River in Hwasun, Jeollanam-


do. His second son Ik-gyun recovered his remains and gave them a

permanent burial by the banks of the river at Norumok.

Satgat’s old home in Gimsatgat-myeon has been restored,

and the Nango Kim Satgat Memorial Hall was opened in 2003 to

spotlight his literary legacy. All these restoration projects were made

김삿갓이 무릉계라 칭한 '김삿갓계곡' possible by the research of Park Yeong-guk (pen name Jeongam),
The valley Kim Satgat canonized as paradise is now called “Gimsagat Valley”
who devoted his life to tracing Satgat’s footsteps.

The area around the memorial hall is dotted with artifacts


삶을 살다 57세의 나이로 전라남도 화순 적벽강에서 객사하였다. connected to the itinerant poet. Across a gurgling brook is a line
유해는 둘째 아들 익균이 수습해 김삿갓면 노루목 기슭에 이장하 of memorial stones inscribed with Satgat’s poetry. I slow down to
였다. read the poems on the stones, and I’m glad that I do. The poems
김삿갓면에는 김삿갓이 생전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곳에 주거 are wittily rendered in contemporary Korean, full of humor and
지가 복원되어 있으며 그의 문학세계를 재조명하는 난고김삿갓 levity. It becomes clear from reading Satgat’s poems that he saw the
문학관이 2003년에 문을 열었다. 이 모든 복원 사업은 김삿갓의 world differently from the rest of us. Without a doubt, he was a free
생애와 발자취를 좇아 일생을 바친 정암 박영국 선생의 연구에 spirit, unconstrained by the strictures of society. Perhaps this area
따른 결과물이다. was chosen to be a Slow City because Satgat had the wisdom to
김삿갓문학관 주변은 김삿갓 유적지로 꾸며져 있다. 맑은 물이 졸 walk slowly enough to look into the heart of things, without feeling
졸 흐르는 냇가를 건너면 김삿갓의 시비가 줄지어 이어진다. 시비 obliged to match the pace that the world expects.
앞에서 천천히 시를 읽어가며 걷는 통에 걸음이 느려진다. 하지만 The first floor of the memorial hall features information about
그 재미가 쏠쏠하다. 시비에는 현대어로 그의 시를 번역해놓았는 the life of Satgat and about Park Yeong-guk, who dedicated his life to
데 하나같이 재치가 넘치고 익살과 해학이 가득하다. 시를 읽으며 studying Satgat, while the second floor presents a reexamination of
걷다 보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뭇사람들과 다르다는 것 Satgat as a poet of the people. In addition to the materials on display,
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는 분명 세상의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 there are various other activities available: visitors can listen to
유로운 영혼이었으리라. 이곳이 슬로시티로 지정된 연유도 그가 Satgat’s poems set to original gugak (traditional Korean music) or try
세상이 원하는 속도에 맞추지 않고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걸으며 writing a poem of their own.
사물의 속을 들여다보는 혜안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A good option after leaving the memorial hall is going for a

37
1

1 김삿갓면에 조성된 슬로시티 조형물


An installation declaring Gimsatgat-myeon a Slow City
2 복숭아를 손에 든 김삿갓 조형물
A sculpture of Kim Satgat holding a peach
3 처자식을 등진 김삿갓의 삶을 묘사한 조형물
A sculpture depicting Kim Satgat's life after forsaking his wife and children
4 영월로 옮겨진 김삿갓의 묘소
The relocated grave of Kim Satgat in Yeongwol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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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1층에는 김삿갓의 일생과 김삿갓 연구에 평생을 바친 박 leisurely walk—a perfect choice for a Slow City. Walking at a snail’s
영국 선생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2층에는 김삿갓을 민중시 pace, I make my way to the Kim Satgat Literary Park. I pause before
인으로 재조명한다. 자료 전시는 물론이고 김삿갓 시 창작 국악 a peculiar statue: Satgat’s head emerges from the ground, which has
듣기, 시 문구 직접 써보기 등 다양한 체험을 겸하고 있어 알차다. been baked in the summer heat, and he holds a peach in his hand.
문학관을 나와서는 슬로시티에 어울리는 느림보 산책을 즐겨볼 This statue is inspired by one of his poems.
일이다. 달팽이처럼 느릿느릿한 걸음을 옮겨 김삿갓문학공원에
닿는다. 여름 볕에 뜨겁게 달궈진 대지를 뚫고 불쑥 얼굴을 내민 That old man over there doesn’t look human.
김삿갓이 복숭아를 손에 들었다. 그 이유가 삿갓에 적혀있다. I bet he’s an immortal who has descended from the sky.

His seven sons over here are all thieves


“저기 앉은 저 노인은 사람 같지 않으니 They’ve stolen the peaches of immortality from the Queen
아마도 하늘 위에서 내려온 신선일 테지. Mother of the West for their father’s sixtieth birthday party.
여기 있는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이니
서왕모의 선도 복숭아를 훔쳐다 환갑잔치에 바쳤네.” Satgat’s poems are sometimes humorous and sometimes

infuriating, but in the end, they’re a source of joy for everyone. The
김삿갓은 시를 통해 사람들을 웃게도 하고 화나게도 하지만 결국 humor here is that the mythical peach in Satgat’s hand is said to
에는 모두에게 큰 기쁨을 선사하는 시를 남겼다. 그가 들고 있는 appear once a millennium and give long life to the eater. I finish
복숭아는 천 년에 한 번 열리는 복숭아로 이것을 먹으면 장수한 my visit by reciting a poem while I envy Satgat’s life of leisure and
다고 하니 모두가 흥에 겨웠으리라. 끝으로 시 한 수 읊조리며 유 abundance.
유자적한 삶을 살다간 김삿갓의 여유를 탐해본다.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Written and photographed by Im Unseok, travel writer

Travel Course

•Travel Tip Slow City Gimsatgat-myeon offers a number of museums


to visit, which is to be expected for a county with as many museums
as Yeongwol. The Chosun Minhwa Museum (82-33-375-6100) boasts a
collection of some 3,000 minhwa (folk paintings) from the Joseon Dynasty
여행 정보
that capture the simple lives and emotions of the common people.
•여행 팁 슬로시티 김삿갓면에는 ‘박물관 고을 영월’답게 함께 돌아볼 박물 Contemporary pieces produced in imitation of that style are also exhibited
관이 여럿 있다. 조선민화박물관(033-375-6100)은 소박한 서민의 생활상 there. The African Art Museum (82-33-372-3229) displays various works of
과 정서가 담긴 조선 시대 민화 3천여 점을 비롯해 현대 민화작품도 함께 art that shed light on the lifestyle of a number of African tribes. Children
전시한다. 아프리카미술박물관(033-372-3229)은 아프리카 여러 부족의 gaze with curiosity at artifacts from unfamiliar cultures that they’re unlikely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미술품을 전시한다. 아이들은 쉽게 접할 수 to encounter elsewhere. Those interested in cooling off in the summer
없는 낯선 문화 앞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관람한다. 한여름 시원한 동 heat are recommended to visit Gossigul Cave (82-33-372-6870). In contrast
굴을 찾고 싶다면 고씨굴(033-372-6870)을 추천한다. 이 동굴은 다른 동 with other public caves, this one features a labyrinth of twisting passages
굴과 달리 몸을 숙여야 지나갈 수 있는 비좁은 미로 같은 통로가 많아서 동 that make visitors feel like veritable explorers. Some of the tunnels are
굴탐험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quite tight, so you may have to crouch down to pass through!

•문의 영
 월관광콜센터 1577-0545 •Contact Yeongwol Tourist Call Center 82-1577-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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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팔도 음 식

세민의 밥상과 Buckwheat: A Staple that


잔칫상을 오갔던 Graced the Tabletops of
‘메밀’ Both Humble Meals and
Feasts
메밀은 교맥蕎麥이다. 목맥木麥이라고도 한다. ‘맥麥’은 대맥大麥, 소 In Korean, buckwheat is memil, and in technical terms it
맥小麥, 교맥蕎麥 이렇게 세 종류다. 대맥은 보리, 소맥은 밀, 교맥 is gyomaek or mongmaek. “Maek,” a broad term referring
은 메밀을 말한다. 메밀은 흔히 구황식물이라고 불린다. 먹고 살 to wheat and barley, branches into three categories:
기 어려워 굶주리기까지 했던 시절, 식량 대용으로 사용했다는 daemaek (barley), somaek (wheat), and gyomaek
뜻이다. 과연 그럴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메밀은 식량 (buckwheat). Buckwheat is widely known as a hardy
‘대용’이 아니라 ‘식량’이었다. crop which people relied on in times of famine as a
substitute for their staple food. However, this is only half
true because while buckwheat could survive in difficult
conditions, it wasn’t necessarily a “substitute” for a staple;
it was a staple.

메밀은 상식常食의 식재료 Buckwheat was a daily ingredient


산이 깊은 강원도나 평야가 좁은 북쪽에서는 메밀이 주요한 In mountainous Gangwon-do and towards the north end of the
식량이었다. 쌀 대신이 아니었다. 메밀은 가뭄, 홍수 등으로 다른 Korean Peninsula where plains are scarce, buckwheat has been
먹을거리가 없을 때만 먹었던 것이 아니라 늘 먹는 상식常食의 식재 a major food source. It was never a substitute for rice nor was it
료였다. something people resorted to in times of drought or flooding, when
당연히 메밀로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었다. 그중 메밀국이 있다. there was nothing else to eat. Buckwheat has always been a part of
메밀로 국수를 만들어 장국 등에 말아먹는 것이다. 형편이 넉넉하 their daily meals.
면 메밀로 소주도 빚었다. 이른바 ‘교맥소주’다. 메밀쌀도 있다. 메 Naturally, many different recipes that incorporate buckwheat
밀은 껍질이 단단하다. 쌀을 도정하듯 메밀도 겉껍질을 벗겨야 먹 have developed, among which is memilguk (buckwheat soup)—
을 수 있다. 껍질을 한차례 벗긴 것을 ‘녹쌀’ 혹은 ‘메밀쌀’이라 부 buckwheat noodles dipped in jangguk (soy sauce-based soup). When
른다. 메밀쌀은 녹색 혹은 갈색을 띠는데, 이 상태로 밥을 지으면 living conditions were better, buckwheat was also used to brew soju,
메밀밥이 된다. 또 이것을 으깨면 메밀떡이 되는데, 먹는 것은 물 known as gyomaek soju. Buckwheat was even cooked like rice. Just
론 종기 등의 치료에도 사용했다. like rice, it needs to be removed of its tough husk and polished to
고려 말기 문인, 목은 이색1328~1396은 메밀에 대한 시를 남겼다《목은 become edible. Greenish brown in color, polished buckwheat is
시고》 제11권. 제목은 <정선군旌善郡의 풍경風景이 궁벽하다는 말을 듣 called nokssal (green rice) or memilssal (buckwheat rice), and when
고 이 시 3수를 짓다>이다. cooked, it becomes memilbap (cooked buckwheat rice). Mash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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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Pr ovinc ial Cuisine

메밀국수
Memil guk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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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ilbap and you get memiltteok (buckwheat rice cake), which not

only makes a great snack but can also be used to treat boils.

Late Goryeo literatus Yi Saek (1328–1396), known by his pen

name of Mokeun, wrote a poem on buckwheat, the title of which

translates to “A series of three poems written in response to the

comment that the scenery of Jeongseon is destitute”:

Walking towards the vault of heaven down the path cut across

a thousand layers of lush green mountains,

a puddle rightfully leads to the sea

and in the wind stands a crag worthy of a pavilion. . . .

On the high peaks sit snow from last yearend,

with evergreens constituting half of the dense woods.

People live by the waterside

with a pavilion near the rocks where they see off their guests.

How slippery is their buckwheat porridge

메밀부침 and how fragrant the pine honey by its own nature.
Memiljeon
(Mokeun sigo Vol. 11.)

“겹겹이 푸른 일천 산 가로지른 곳에 / 한 길을 따라 창공을 향해 The buckwheat porridge described in this poem was something
들어가니 / 물웅덩이 응당 바다로 통하려니와 / 바람 바위는 정 semin ate. Semin refers to the poor, the people of the lower class.
자를 지을 만하구나 / (중략) // 높은 봉우리엔 섣달 눈이 남았고 Regions in Gangwon-do like Jeongseon, Yeongwol, and Taebaek are
/ 빽빽한 숲엔 상록수가 절반일세 / 물 곁에 사람들이 살고 있고/ deep mountain valleys unfit for growing crops, still quite difficult to
바위 가엔 손님 보내는 정자 있네 // 메밀죽은 어이 그리 미끄러 access today. Yi’s poem describes Jeongseon as a secluded mountain
운고 / 송화꿀은 절로 향기가 있구나(후략).” village surrounded by thick woods with a climate so cold that snow

from the previous year’s winter sits unmelted on the peaks even into
이 시에 등장하는 메밀죽은 세민細民들이 먹던 음식이다. 세민은 late spring. It is no surprise that crops failed to thrive in this cold and
가난한 빈민을 말한다. 강원도의 정선·영월·태백 일대는 곡식 재 rocky setting. There is no mention of potatoes or corn in Yi’s poem
배가 힘든 깊은 산골로 지금도 접근이 쉽지 않다. 목은의 시에서 either. Potatoes were introduced to the Korean Peninsula in the 1820s
도 이 지역의 특성을 ‘깊은 산에 둘러싸인 궁벽한 산골’이라고 했 and popularized in the 20th century. Until then, the main crops grown
다. 또 봉우리의 겨울 눈이 봄을 넘겨도 녹지 않을 만큼 추운 곳이 in the Gangwon-do regions were buckwheat, sorghum, and millet.
기도 하다. 추운 산악지대, 작물이 제대로 자랄 리 없다. 목은의 시 Buckwheat porridge was an everyday meal for the common people
대에는 감자도, 옥수수도 없었다. 감자는 1820년대 이후 한반도에 in the area, and it seems buckwheat was also consumed in delicacies
상륙, 20세기에 널리 퍼진다. 영월, 정선, 태백 일대의 주요 작물은 because late Joseon period figure Kim Jeong-hui (1786–1856), under
메밀, 수수, 좁쌀 정도였다. 서민들에게는 메밀죽이 일상의 끼닛거 the pen name of Chusa, writes about buckwheat as follows:
리였다. 조선 후기 인물인 추사 김정희1786~1856도 다음과 같이 메 “Grizzly white spots of buckwheat flowers and plain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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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을 이야기했다. “메밀꽃 희끗희끗하고 은조좁쌀는 희다/온 산을 millet—covering the mountain are all ingredients for a dumpling.”
뒤덮은 것이 모두 만두의 재료《완당전집》.” (Wandang jeonjip).

‘메밀전병’은 언제 먹었을까? The occasions for memil-jeonbyeong


비록 세민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매일 죽만 먹고 살 수는 없 Even the semin were unable to live on porridge alone. During
는 법. 특히 관혼상제에는 귀한 음식을 내놓아야 한다. ceremonial occasions like a coming of age, a wedding, funeral, or
깊은 산중에도 혼사婚事는 있었다. 결혼식을 하면 친인척과 인근 ancestral rites, a special table ought to be set. There were weddings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다. 잔치에는 잔치 음식이 빠질 even in the deepest of valleys—feasts gathering family and
수 없었는데, 결혼식에는 국수麵, 떡餠, 전煎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neighbors. And what would be a feast without festive foods such
메밀로 국수를 만들고 떡을 빚었다. 그리고 번철솥뚜껑처럼 생긴 무쇠 그 as myeon (noodles), byeong (tteok or rice cakes), and jeon (griddle
릇에 전도 부쳤다. 전 위에 김치나 양념 등을 넣고 돌돌 말아서 썰 cakes)? People of Gangwon-do used buckwheat to make noodles,
어내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메밀전병이라 부른다. 전병煎餠은 우리 tteok, and even jeon. Memiljeon would often be rolled with kimchi or
말로 부꾸미다. 부꾸미는 ‘다목적’ 음식이다. ‘전’이면서 한편으로 a spicy sauce inside and then sliced. This type of jeon would be called
는 ‘병’ 즉 부침개이면서 떡이었다. jeonbyeong, or bukkumi in pure Korean. Bukkumi is a hybrid form of
메밀전병은 메밀부꾸미고, 수수반죽으로 부꾸미를 만들면 수수 food that’s jeon in a way and byeong in another, hence something in
부꾸미다. 수수부꾸미는 속에 김치나 채소 다진 것을 넣지 않고, between a griddle cake and a chewy rice cake.
대신 팥 등을 넣어 달게 만든다. 강원도 재래시장에서 파는 수수 Jeonbyeong made with buckwheat is memiljeonbyeong or
부꾸미는 예전 부꾸미를 개량, 발전시킨 것이다. memilbukkumi, and when made with sorghum, it is susubukkumi.
강원도 깊은 산속에서 만들었던 메밀전, 부꾸미 등은 귀한 음식이 Susubukkumi is often rolled with sweet fillings like red beans instead
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기름도 귀했다. 귀한 기름을 번철 of kimchi or seasoned vegetables. The susubukumi sold at traditional
이나 가마솥 뚜껑 등에 두르고 적당히 가열한다. 그 위에 메밀 반 markets in Gangwon-do are modernized and updated versions of
죽을 얇게 깐다. 타지는 않게, 그러나 두루 잘 익힌다. 군데군데 거 the traditional bukkumi.
품으로 인한 구멍은 있지만, 끊어지지도 뭉치지도 않는다. 이렇게 Memiljeon and bukkumi were rare dishes in the deep mountain
만들어진 메밀전과 부꾸미는 지금도 영월 재래시장 등에서 쉽게 볼 valleys of Gangwon-do. It may be hard to imagine from today’s point
수 있다. of view, but cooking oil was extremely rare and valuable back in the

day. This precious oil would be used to grease a griddle or a caldron

lid to make memiljeon and bukkumi, so you can imagine how special

these dishes must have been. A thin layer of the buckwheat batter

is spread onto the hot, greased griddle and cooked evenly just up

to the point when it is about to burn. There may be holes here and

there from the batter bubbling, but when cooked, the batter will not

break or lump up. Memiljeon and bukkumi can still be sampled today

at traditional markets in Yeongwol including the Deokpo 5-Day


Market and Yeongwol Minsok Sijang.

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Written by Hwang Gwanghae, food columnist


사진 아이클릭아트, IR스튜디오-한국관광공사 Photographs courtesy of iclickart, IR Studio: Korea Tourism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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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을 보 다

한국문화 속
시간에 대하여
Time in Korean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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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T hr ough Foreign Eyes

1983년, 대학을 졸업한 나는 한국으로 건너와 서울대학교에서 After graduating from university in 1983, I came to
1년간 한국어를 공부했다. 한 해 전, 아흐레간의 방문에서 한국 Korea to spend a year learning Korean at Seoul National
에 매료되어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공은 University. I had become fascinated with Korea during
일본어였는데 한국 친구들이 한국어가 일본어와 비슷한 점이 많 a nine-day visit in 1982 and wanted to the study the
아서 배우기 쉬울 거라고들 했다. 한국에 도착하기 전 한 친구가 language intensively. I majored in Japanese, and Korean
자기 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자기 집에서 지낼 수 있도 friends told me that Korean would be easy to learn
록 손써 주었다. 처음부터 나는 그 집 식구들과 잘 어울려 지냈 because it has similarities with Japanese. Before I arrived
고, 그해는 평생 잊지 못할 시간으로 남았다. 그때의 추억은 내 in Korea, a friend arranged for me to spend the year with
가 한국으로 되돌아와 대학 강의를 맡고 생활하는 계기가 되기 his family to practice English with his younger brothers.
도 했다. From the start, I got along well with everyone in the
family, and the year remains one of the most memorable
in my life. And because of that wonderful year, I returned
to live in Korea to teach at universities.

한국을 사랑하게 된 이유, 후한 시간 인심 Giving time generously builds bonds


왜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대 When asked why I became interested in Korea, I usually say that I
개 한국 사람들의 정과 호의에 끌렸다고 답한다. 1980년대 초만 was attracted to the warmth and friendliness of the Korean people.
하더라도 한국에는 외국인이 드물었는데, 한국 사람들은 정이 많 Foreigners were rare in Korea in the early 1980s, and people were
고 친절하여 이방인에게 흔쾌히 도움을 주었다. 대학에서 일본어 extremely helpful, generous, and kind. At university, I majored
를 전공했고 일본에서 시간을 보냈던 터라 내게는 일본인 친구가 in Japanese and had spent time in Japan and had many Japanese
많았는데, 일본 사람들이 정중한 태도로 늘 얼마간의 거리를 유 friends. Compared to the formal and always-somewhat-distant
지하는 데 비해 한국 사람들은 좀 더 따스하고 열려 있다고 느꼈 Japanese, Koreans seemed warmer and more open. Many of
다. 이후 근 40년간 한국에서 일어난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these impressions have stuck with me even as Korea has changed
이런 인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dramatically in the nearly 40 years since.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국의 시간관념도 독특한 것 같다. 시간을 But on further thought, another idea comes to mind: Time.
바라보는 한국인의 관점과 이를 소비하는 방식이 내게는 흥미롭 How Koreans view and spend time is interesting, and it explains
기 그지없으며, 내가 한국에 애정을 갖게 된 가장 큰 이유도 여기 much of my affection for Korea. As a student in the early 1980s, I
에 있다. 1980년대 초 학생 신분이던 나는, 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soon learned that spending time with a friend meant more than
커피나 맥주를 함께 마시며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것 이상의 의미 having a quick coffee or beer to kill time. Rather, it was an extended
가 있음을 이내 알아차렸다. 친구와의 만남은 잠시에 그치지 않 event, not a thoughtless moment, that was meant to build trust
는 장시간의 행사로, 거기에는 진실한 소통을 통해 신뢰를 쌓으 through genuine communication. Even if not expressed, meeting a
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친 friend was a serious commitment that took time.
구와의 만남은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하는 진지한 책무였다. For an American who was used to quick small talk over me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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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기숙사에서 식사하거나 토요일 밤 맥주 파티에서 잠깐씩 수 in the university dorm or at keg parties on Saturday nights, extended
다를 떠는 데 익숙했던 미국인인 나로서는 만나는 내내 심오한 meetings full of lots of deep talk took time to get used to. At times,
이야기가 오가는 기나긴 자리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I felt as if everybody I met was a political philosopher, and at other
때로는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정치사상가처럼 보였고 사생 times, I felt uncomfortable being asked about my personal life. As
활을 묻는 말들이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생활에 점차 익 I got used to living in Korea, I began to appreciate how generous
숙해지면서 한국 사람들의 시간 인심이 얼마나 후한지 그리고 떠 Koreans were with their time and felt thankful at each good-bye
들썩한 웃음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오랜 담소를 나누고 헤어질 after these long talks—usually over food and drink, and always
때마다 그들이 얼마나 흐뭇해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 punctuated by good laughs. And as I have grown older, those long
록 친구들과 보냈던 그 오랜 시간이 더더욱 소중해진다. 요즘 한 moments with friends became ever more precious. They are what I
국을 떠올릴 때면 가장 그리운 것이 그런 순간들이다. miss most about Korea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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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그래서 더 특별한··· Slowing down creates special moments
한국 사람들이 여가를 보내는 방식에도 넉넉한 시간관념이 At first glance, Koreans appear very, very busy. Seoul is one of
반영되어 있다. 얼핏 보면 한국인은 정신없이 바빠 보인다. 서울 the most fast-paced cities in the world, and everything feels a bit
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 중 하나이며 무슨 일이 rushed. People are quick to say that they are busy and are not shy
든 급하게 이루어지는 듯하다. 사람들은 툭하면 바쁘다고 말하 about asking for things in a hurry. Being busy is sometimes a sign
고 빠른 일 처리를 거리낌 없이 요구한다. 때론 한국에서 바쁘다 of success, of being valued, in society. But a closer look reveals that
는 것은 사회적 성공, 즉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the “busy world” is the world of business and work. It is the outside
한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쁜 세상’은 비즈니스와 world. The inside world of family and friends revolves around the
일의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외부 세계다. 가족과 친구로 generosity of time. The contrast is easy to see at mealtimes. Except
이루어진 내부 세계의 시간은 여유롭게 흘러간다. 이러한 대비는 for formal business meals, outside-world meals are usually simple
식사 시간에 쉽게 확인된다. 공적인 업무상의 식사를 제외한 외 and quick. Inside-world meals are slower and often include going to
부 세계의 식사는 대개 금세 간단하게 끝난다. 내부 세계의 식사 a café or bar afterwards. Koreans like to meet for meals because they
는 이보다 천천히 진행되며, 이후 카페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make is easier to talk and enjoy time together. Drinking with friends
서까지 이어질 때가 많다. 한국 사람들은 식사 약속을 즐겨 한다. almost always includes bar hopping, often stretching late into the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기 좋기 때문이다. 친구들과의 술자 night. These long drinking sessions are where Korean friends share
리는 백이면 백 2차, 3차를 거듭하며 밤늦게까지 이어지곤 한다. their worries and escape busy-world pressures.
이런 장시간의 술자리에서 한국인 친구들은 걱정거리를 털어놓 Weekends in Korea bring out the hikers and mountain
고 잠시나마 숨 가쁜 세상의 압박을 잊는다. climbers. Seoul and other major cities in Korea are surrounded by
한국에서는 주말마다 많은 사람이 산책이나 등산을 하러 밖으로 mountains. The cities also have rivers, streams, and seacoasts. These
몰려나온다.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대도시들은 대부분 산으로 둘 natural endowments create opportunities for long walks and hikes.
러싸여 있으며 강과 개천, 해변도 지천이다. 이런 자연환경 덕분 The commercial and residential areas, by contrast, are dense, and
에 오래 걷고 산책할 곳이 많다. 반면에 상업 지역과 거주 지역은 parks and greenery can be hard to find. So instead of flocking to
밀집해 있는 데다 푸르른 공원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한국 manicured city parks, Koreans take walks in the hills and mountains
사람들은 대개 깔끔하게 정비된 도시의 공원을 찾기보다 들로 산 and along rivers and streams. The walks are usually half-day or day-
으로, 강변과 개천 변으로 나가서 걷는 경우가 많다. 그런 도보 여 long events, and often include food and drink afterwards. These
행은 보통 반나절이 넘게 걸리며 대개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마무 outings are good exercise, but more importantly, they are a great
리된다. 걷기는 좋은 운동이기도 하고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팍팍 chance to share time with friends in an environment that contrasts
한 세상과 대비되는 자연 속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훌륭한 with the concrete busy world.
기회이기도 하다. Concepts of time vary greatly among cultures and within
시간관념은 문화마다, 또 같은 문화 내에서도 천차만별이다. 한 cultures. Koreans work notoriously long hours, and many are busy
국 사람들은 지독하리만치 장시간 일하고 주말에도 가족과 사회 with family and social obligations on the weekends. Spending time
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느라 분주한 경우가 많다. 친구들과 여유 generously with friends is not an everyday event, but that is what
로운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흔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기 makes those long evenings and weekend hikes so special.
나긴 밤과 주말 산책이 무척이나 특별하다.

By Robert J. Fouser, freelance writer, former associate professor at Seoul


글 로버트 J. 파우저 프리랜서 작가, 전 서울대학교 부교수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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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그날 그때

역병, 선조들은 목숨까지 위태롭게 했던 역사 속 질병들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어섰지만 불

어떻게 극복했을까? 과 100년 전만 해도 25세가 채 안 되었다. 평균 수명이 25세라는


말은 대개 25세에 죽는다는 말이 아니다. 어른들은 대부분 환갑
을 전후한 나이에 사망했지만, 세 살 이전에 죽는 아이들이 많았
기 때문에 전체 인구의 평균적인 수명이 그렇게 짧았다는 뜻이
다. 예전에는 성인 수명이 대략 60세였으니, 40세가 넘으면 ‘옹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翁’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정조는 47세 때에 자신의 호를 ‘만
큰 고통을 겪고 있다. 현대인들에게는 생애 처음 겪는 미증유의 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했다. 지폐에 그려진 사임당 신씨
상황이지만, 사실 이런 일들은 14세기 유럽의 페스트, 와 이이李珥의 초상화를 보면 꽤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실은 모자
20세기의 스페인독감처럼 역사 속에서 계속 있던 일이다. 가 모두 48세에 사망했으니 40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3년마다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얻은 통계가 인간의 수명이 오늘날처럼 길어진 것은 질병에서의 해방이 있
남아 있는데, 현종 때인 1669년에 516만이었던 전국 인구는 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던 병
3년 뒤 470만으로 50만 명 가까이 줄어들었고, 을 꼽자면 ‘마마’라 불렀던 천연두가 단연 으뜸이었다. 평생에 한
이어서 숙종 때인 1693년에는 720만 명이던 인구가 번 걸리는 병이지만 세 명에 한 명꼴로 죽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
3년 뒤 무려 140만 명이 사라져 580만 명이 돼버리고 만다. 로 치사율이 높고, 낫더라도 얼굴이 곰보가 되기에 십상인 무서
대기근과 그 뒤 찾아온 돌림병 때문이었다. 운 질병이었다. 정약용은 6남 3녀 가운데 여섯을 모두 세 살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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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잃었는데, 그 가운데 다섯을 마마로 잃었다. 아메리카 원주민 선조들의 역병 대처법은 치료, 격리, 치제致祭
을 멸종 위기에 내몰았던 천연두는 1977년 이후로 사라졌다. 그 현대에는 의학 기술이 발전하고 영양 상태가 좋아지고 위생
런데 목숨을 위태롭게 하지는 않지만 툭하면 찾아오는 질병이 있 환경이 개선되면서 어느 정도 전염병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고
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코에 불이 난 것 같다고 해서 ‘고뿔콧불’이 평균 수명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예전에
라 불렀던 감기와 고열, 오한, 경련이 며칠 간격으로 주기적으로 는 대응이 쉽지 않았다. 당시의 대책으로는 세 가지 방법이 있었
찾아오는 학질, 말라리아였다. ‘학을 떼었다’는 말은 예전 기록에 다. 치료, 격리, 치제致祭였다. 그런데 예전에는 의원을 만나기도
도 ‘이학離瘧’이라는 말로 남아 있는데 지긋지긋한 골칫거리가 사 쉽지 않았고, 약값도 비쌌을뿐더러 의술도 미약했기 때문에 치료
라졌다는 것을 학질이 떨어져 나았다는 말에 빗댄 것이다. 벼농 에 큰 기대를 걸기 어려웠다. 따라서 전염병이 돌면 격리시키는
사를 지어 먹고사는 몬순지대 동남아시아에서는 집 주변에 언제 것이 가장 우선이었다. 그것을 접촉을 피한다고 하여 ‘피접避接’이
나 논이 있었고 모기들이 그곳을 알을 낳아 장구벌레를 기르는 라 하였다. 환자가 발생하면 출입문을 봉쇄하고 남은 사람들은
요람으로 삼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감기나 학질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왕도 궁궐에 환자가 생기면 다른 궁으로,
과 달리 목숨을 위협하는 무서운 병들도 자주 찾아왔다. 19세기 때로는 사가私家로 몸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위 관원들은 근
에는 설사, 탈수 증상을 보이는 새로운 병이 전 세계에 퍼져서 우 처의 적당한 민가를 뒤져 제멋대로 남의 집을 수십 일 동안 차지
리나라에서도 수많은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전에 보지 못 하고 앉아서 말썽이 나기도 했다. 일반 백성이나 종들은 그럴 수
한 괴이한 병이라 하여 괴질怪疾이라 불렀던 이 병이, 한자로 호열 도 없었다. 대개 임시 거처로 비바람이나 가릴 정도의 허술한 피
라虎烈刺로 옮겨 쓰는 ‘콜레라’이다. 콜레라는 우리나라에서 20세 막避幕을 짓고 그곳에서 병이 저절로 나을 때까지 격리되어 지내
기 말까지 해마다 유행했던 전염병이었다. 그렇다면 콜레라만큼 야 했다. 오희문이 임진왜란 중에 쓴 일기 《쇄미록》에는 몸종으
위험하면서 콜레라와 같은 계절에 유행하되, 콜레라처럼 괴이하 로 부리던, 열 살도 채 안 된 어린 계집종 서대西代가 병이 나자 돌
지 않은, 친숙했던 유행병으로는 무엇이 있었을까? 복통과 고열 봐주는 사람도 없이 냇가에 움막을 지어 내보내었는데, 갈증으로
을 동반하는 장티푸스가 있었다. 옛날 노인들이 쓰던 욕설에 “염 목이 타자 물을 마시려고 냇가로 기어가다가 도중에 죽었다고 한
병할”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염병이 바로 장티푸스다. 가장 대표 탄하고 있다. 마지막 수단은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적인 돌림병이라서 전염병을 뜻하는 일반적인 이름 ‘염병染病’이 병으로 죽은 원귀, 즉 여귀厲鬼의 요악한 기운이 전염병을 퍼뜨린
특정 병의 이름이 되었던 것이다. 속칭 ‘장질부사’라고 하는 장티 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태종 때에는 여귀들을 깜짝 놀라게 해서
푸스는 괴이한 병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동남아시아 지역에 자리 내쫓는다고 대포를 쏘기도 했다. 그러나 여귀들이 그리 호락호락
잡고 있었던 풍토병이었다. 감기는 주로 추운 겨울에 찬 기운에 할 리 만무했다. 남은 수단은 달래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감응하여 생기는 병이라 하여 상한傷寒이라 불렀던 데 비해, 장티 고을마다 여단厲壇을 쌓아놓고 여귀에게 여제厲祭를 지냈다. 서울
푸스는 따뜻한 봄, 여름에 유행하여 온역溫疫, 瘟疫이라 불렀다. 에도 북쪽 창의문 밖에 여단을 두어 해마다 청명, 7월 보름, 10월
장티푸스가 봄, 여름에 유행한 데는 이유가 있다. 발병에는 기본 초하루에 제사를 지내고, 전염병이 돌면 임시 제사를 지내기도
적으로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병원체에 의한 감염과 그것을 이 했다.
겨내지 못하는 면역력의 약화이다. 그리고 면역력 약화의 중요한 어리석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영양, 위생, 의술이 예전과는
원인 중의 하나가 영양 상태의 부실이었다. 장티푸스가 봄에 유 비교도 안 될 만큼 높은 수준에 있는 지금도 코로나19에 휘둘려
행했던 것은 봄의 보릿고개에 수많은 사람이 영양실조로 면역력 쩔쩔매고 있으니 정말 제사라도 지내서 달래고 싶은 심정이다.
이 약해진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기근 뒤
에 어김없이 돌림병이 창궐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수인
성 전염병인 온역과 괴질이 여름에 유행했던 것은 큰물이 나면
사람이 온갖 오물과 균에 쉽게 접촉하게 되기 때문이다. 글 정연식 서울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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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조선 人 LO V E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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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무덤이 갈라지고 소복 입은 여자가 나타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꼭 감았다. 귀신은 그런 존재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어쩐지 주변을 서성일 것 같고,
원한을 풀겠다며 어디선가 앙칼지게 쏘아보고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여름이면 오싹하고 서늘한 기운으로 더위를 식혀주는 납량특집의 단골 소재가 된다.
조선 시대에도 귀신은 야담野談을 주름잡았다. “공자께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여 귀신을 공식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피했지만,
길흉吉凶을 점치고 화복禍福을 부르는 미지의 존재로 이야기와
일상생활에 끼어들었다. 심지어 귀신과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는데,
대체 조선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조선 귀신 달래는
치유와 위로의 사랑

귀신과의 하룻밤 인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지은 《어우야
담於于野談》에는 임진왜란 이후 민간에 떠돈 이야기들이 담겨 있
다. 임진왜란은 죽음이 창궐한 시기였다. 특히 갑오년1594에는 전
란으로 인한 기근이 극심하여 굶어 죽는 백성들이 쏟아져 나왔
다. 《어우야담》도 그 해에 아사餓死한 시체들이 길에 가득했다고
묘사한다. 그러면서 야담집답게 기이한 일화를 곁들인다. 바로
사람과 귀신의 사랑 이야기다.
유생 박엽은 지방으로 피난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쑥대밭이
된 집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나날이었다. 하루는 마시교馬市橋 남
쪽에 사는 친척을 찾아갔다가 용무가 길어져 밤중에 돌아왔다.
어두운 길모퉁이를 도는데 한 여인이 박엽의 옷깃을 스치며 지나
갔다. 자색 비단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 머리를 길게 땋은 처
녀였다. 박엽은 젊은 혈기에 그녀의 마음을 떠보기로 하였다.
“밤이 늦었는데 낭자는 어찌 길거리에 있는 것이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나온 것이랍니다.”
“누구 기다릴 것 없이 나를 맞이하는 것은 어떻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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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박엽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집에 이 와 보니 잠자던 종들도 사실은 모두 죽어 있었다. 박엽은 뒤도 안
르니 종들이 아무 데나 멋대로 누워서 자고 있었다. 이상한 광경 돌아보고 동구 밖으로 내달렸다. 마침 큰길가에 등불 켠 집이 보
이었지만, 굶주려서 그러는 것이려니 했다. 그녀는 집안에 대접 였다.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주인에게 사
할 게 없다며, 이웃집에서 새로 빚은 술을 얻어오겠다고 했다. 이 정을 얘기하는데 몸이 마구 떨렸다. 주인은 진정하라며 베개 옆
윽고 구리 주발에 ‘혼돈주渾沌酒’를 가득 담아왔다. 술을 몇 모금 의 술독에서 술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술 뜨는 주발이 아무리
마시자 박엽은 정신이 멍하고 흐릿해졌다. 미녀와 곡진한 애정을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술독 입구를 막아두었던 종이도 뚫려 있
나누고 이내 그는 단잠에 빠져들었다. 었다. 간밤에 여인이 술을 담아온 구리 주발을 떠올리고 박엽은
새벽에 목이 말라 잠에서 깬 박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옆에 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운 여자의 전신이 차갑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흔들어 날이 밝자 두 사람은 용기를 내서 다시 그 집에 찾아가 보았다.
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산 사람이 아니었다. 방에서 뛰쳐나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사족의 집이었는데 굶어 죽은 시체들로 가
득했다. 사족의 장성한 딸도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병들어 죽었
다. 비록 하룻밤 인연이지만 박엽은 비통했다. 오죽하면 귀신이
되어 밤거리를 헤맸을까.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도움 줄 사람을
기다린 것이다. 그는 관을 갖추고 수레를 세내어 그 집 사람들을
서쪽 교외에 장사지냈다. 또 여인을 위해 글을 지어 제사를 올려
주었다. 그 후 박엽은 과거에 급제하고 출셋길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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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의 본질은 서글프고 참담한 시대상 귀신은 죽은 뒤에도 흩어지지 않는 지극한 넋
이 일화의 주인공 박엽은 《어우야담》을 지은 유몽인과 동시 임진왜란 이후 귀신들은 자주 출몰했고 사람들은 사랑의 치
대에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문신이었지만 광해군의 신임을 받아 유에 나섰다. 《어우야담》에는 서울 훈련원에서 날이 저물도록 활
나라를 지키는 요직을 연이어 맡았다. 함경도병마절도사, 의주부 을 쏘던 무사가 종랑終娘이라는 처녀를 만나 하룻밤을 보낸 이야
윤, 평안감사로서 성을 정비하고 규율을 잡아 국방을 튼튼히 했 기도 나온다. 그녀의 집은 남산 아래 남부동南部洞에 있었는데 알
고 여진족이 세운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조선이 중립외교를 펼 고 보니 온 식구가 전염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종랑도 산 사람
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사는 관과 상여를 마련해 죽은 자들을 교
그는 누구보다 먼저 제거되었다. 인조는 거사 당일 도원수 한준 외에 묻어 주고 제를 지냈다. 사인이 전염병이라는 것만 빼고는
겸에게 명해 평안감사 박엽을 처형하도록 했다. 북방의 정예군을 박엽의 일화와 똑 닮았다. 무사가 과거에 급제해 영달했다는 것
움직일 수 있는 광해군의 측근이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까지 복사판이다. 결국 죽은 자들의 한을 풀어주고 사회적 트라
임금 아래서 대사간, 이조참판 등을 지낸 유몽인 역시 폐주廢主의 우마를 치유하는 데 앞장선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복위를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인조반정 이후 극형에 처했다. 때로는 오래 묵은 사건이 귀신을 등에 업고 나타나기도 한다. 한
유몽인이 쓴 박엽의 일화는 그래서 더 끌리고 신뢰가 간다. 연배 양의 화류계를 누비던 탕자蕩子 황건중은 강원도 철원에 있는 집
는 10여 년 차이가 났지만, 발자취가 겹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안 별장에서 1년의 절반을 머물렀다. 어느 날 밤 혼자 잠을 자고
에게서 귀신과의 사랑 이야기를 직접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있는데 갑자기 붉은색 베옷을 입은 미녀가 들어와 이불을 펴고
《어우야담》에 담긴 젊은 날의 박엽은 선비라기보다 호협豪俠에 가 베개를 나란히 했다.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깝다. 호탕하고 의협심이 많아 곤경에 처한 이를 외면하지 못한 엄동설한에 얇은 베옷을 입은 것이 괴이했다. 사람이 아님을 깨
다. 이야기 속에서 귀신의 선택(?)을 받은 이유다. 그이라면 예법 닫자 그는 정체불명의 미녀를 멀리했다. 하지만 귀신은 밤마다
에 얽매이지 않고 한밤중에 구애하는 게 어색하지 않다. 호협답게 침소에 찾아와서 동침을 호소했다. 미녀 귀신은 사실 태봉왕 궁
여자가 귀신이라는 것을 알고도 줄행랑 놓지 않고 도울 위인이다. 예가 철원에 도읍하던 시절의 궁녀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병란
이 일화의 본질은 서글프고 참담한 시대상에 있다. 전란이 몰고 온 을 일으켰을 때 목숨을 잃었는데 황건중의 선조가 양지바른 곳에
굶주림은 사신死神이 되어 조선을 덮쳤다. 양반이고 상민이고 가리 묻어줬다. 그때가 여름이라 얇은 베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지 않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 귀신은 오래전에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은인의 후손에게 보답하
러야 하는데 시신이 너무 많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장례는 인간이 고자 나타났다. 황건중은 귀신의 보답을 원치 않았다. 그는 개들
삶을 마감하면서 죽음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의식이다. 장례를 통 을 풀어 침소를 지키게 했고 태봉 궁녀는 어쩔 수 없이 떠났다.
해 죽은 자는 기억해야 할 존재로 사회에 자리매김한다. 또 다른 조선 사람들은 귀신과 함께하더라도 명분을 따졌다. 트라우마를
형태의 생존이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그렇게 삶을 이어가는 절 치유하고 사회적 의리를 실현하는 것은 용납했지만, 사사로운 정
차를 밟는다. 반면 아무도 모르는 죽음은 사회적으로 소멸을 의미 욕으로 이어지는 것은 ‘괴력난신’이라 하여 배척했다. 귀신은 죽
한다. 죽는 것도 서러운데 끔찍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자 귀신이 은 뒤에도 흩어지지 않는 지극한 넋이다. 그 넋은 사랑하는 이가
박엽에게 요구한 것은 장례요, 공인된 죽음이다. 이는 동시대의 이 진심으로 자기 죽음을 슬퍼하고 울어줄 때 비로소 달래진다. 어느
름 없는 수많은 죽음을 대변한다. 어디 굶어 죽은 사람들뿐인가. 시대든 그것이 죽은 자를 잠재우고 쉬게 하는 위로가 아닐까.
피난 갔다가 학살당한 양민들, 전쟁터에서 전사한 병사들, 산과 들
에 묻힌 그 무명의 죽음들이 우리를 기억해달라고, 누군가의 가슴
에 묻어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야기라는 거울에 비친
사회적 트라우마의 발로다. 박엽과 여귀의 사랑은 그 트라우마를
글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치유하는 과정을 이야기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림 한용욱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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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있다 , 없 다 ?

추억을 소환하는 지난 5월, 각 지역 교육청에서는 학생들의 가정으로 농산물 꾸


러미를 보내기 시작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등교가 보류된 상황

양은도시락 에서 학교 급식예산을 그렇게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 집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있어 농산물 꾸러미를 받아 보게 되
었는데 그것을 보며 요즘 아이들은 도시락이 아닌 급식을 먹는
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도시락 싸는 수고를 덜어주
어 급식처럼 고마운 게 없지만, 또 한편으론 도시락 먹던 시절이
그립기도 한 것이 도시락에 얽힌 추억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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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 언제부터 먹게 된 것일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는 모두 집에서 싸주는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가야 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며 학교 내 전
면 급식이 도입되었고, 그다음부턴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에 가는
일은 사라졌다.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하기 방식을
‘급식체’라고도 한다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가 일상으로 즐기던
집에서 싼 도시락은 어쩌면 요즘 아이들에겐 특별식의 다른 이름
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도시락은 언제부터 먹게 된 것일까? 사실 도시락의 시초를 정확
히 추정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여러 자료에 따르면 조선 전기
궁중 연회 때 사용하고 남은 궁중음식을 임금이 양반에게 그리고
다시 양반이 아랫사람들에게 꾸러미 형태로 전했다고 하는데 이
를 도시락의 시초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또 조선 후기 궁
중이나 관청에서 근무하는 이들을 위해 노비들이 집안에서 만든
음식을 ‘공고상’이라는 작은 식탁에 담아 머리에 이고 전달했는
데 이를 도시락의 시초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후 공고상 ‘양은도시락’의 부활
의 불편을 해소하고자 사기나 나무로 만든 찬합을 만들어 반찬이 이렇게 잊히는 듯싶던 양은도시락이 다시금 부활한 것은 복
나 밥 등을 나르거나 휴대하였고 이렇게 발전한 도시락은 목함이 고풍 바람 덕분이었다. 1970~198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이들이
나 ‘밥동고리’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밥동고리’는 도시락의 교실 한가운데 설치된 장작 난로 위에 양은도시락을 층층이 올려
옛말로 ‘도슭’, ‘밥고리’ 등과 함께 쓰였으며, 조선 시대 청구영언 두고 데워 먹었던 추억을 회상하며 식당에서 내놓은 ‘추억의 도
의 시조에서 “새암을 찾아가셔 점심 도슭 부시이고샘을 찾아가서 점 시락’을 찾기 시작한 이후로 점차 많은 사람이 너나 할 것 없이
심 도시락을 다 비우고”라는 구절이 나오는 걸 보면 어쩌면 도시락은 우 찾는 별식이 된 것이다.
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했는지도 모 ‘혼밥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요즘,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프리미
르겠다. 엄 도시락도 많지만, 우리가 여전히 이 양은도시락에 열광하고
근대로 접어들면서 나무나 사기로 만들어졌던 도시락은 양은도 그것을 소비하는 이유는 옛 추억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시락으로 대체된다. 양은도시락은 구리, 아연, 니켈 따위를 합금 양은도시락 밑바닥에 신김치를 썰어 넣고 참기름을 부은 후 밥을
하여 만든 금속 양은을 이용해 만들어진 도시락으로, 빛이 희고 넣어 뚜껑을 닫고 난로에 익힌 뒤 점심시간에 먹던 그 맛. 그 맛은
녹슬지 않으며 가벼워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어쩌면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의 맛일지도 모른다.
양은도시락을 가장 많이 사용한 계층으로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 양은도시락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보니 어쩐지 오늘 저녁엔
들이나 공장의 노동자들이었고 이들에 의해 전성기를 누렸다. 양 양은도시락을 꼭 먹어봐야겠단 생각이 든다. 분홍 소시지와 신김
은도시락은 1980년대 중반 보온도시락이 보편화되고 플라스틱 치, 멸치볶음이 흰밥과 적절히 섞여 있는 추억의 맛을 통해 소식
등 다양한 도시락 용기가 개발되면서 점차 우리들 곁에서 자취를 이 뜸해진 친구들과 안부 전화 한 통 주고받게 된다면, 더할 나위
감추었다. 없는 추억의 한 끼가 되리라.

글 문진영 스토리너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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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오! 세이

‘사람’이란 말이 둥글어지면 ‘사랑’이 된다. 어쩐지 내게 이 3개월간, 코로나19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창문 밖을 바
말은 선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처럼 느껴진다. 지난 라볼 때, 어쩐지 영영 봄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사람 없이 비어 있
몇 달간 외출하지 못하고 집 안에만 있으며 한 일은 그동안 밀어 는 뉴욕의 타임스퀘어와 텅 빈 파리의 에펠탑 광장, 생수보다도
두었던 시집을 읽는 일이었다. 허은실 시인의 《나는 당신에게 열 싼 마이너스 유가를 바라보는 충격과 생경함이 너무 낯설게 느껴
리는 책》에서 수집하듯 그렇게 몇 가지의 문장을 모았다. 졌다. 코로나19 이후, 세상은 어떻게 바뀌게 될까.
하지만 마침내 봄이 오고, 벚꽃이 피고 지
“제주에 가본 분들은 아시겠지요. 그곳의 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졌다. 여전
돌담들은 빈틈이 반입니다. 구멍이 숭숭해 히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팥빙수의 계절
서 바람이 드나들죠. 그런데 그 구멍 때문 우리의 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코로나19 때문에
에 태풍이 불어도 담은 무너지지 않습니 전 세계 많은 사람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
다. 집을 지키는 건 돌담이 아니라 구멍입
니다.” 2020년 지만 틀림없이 시간은 가고 또 오며 흘러
가고 있는 것이다.
제주 돌담을 떠올리며 비워내는 것에 대
돌담이 아니라 돌담 사이의 구멍이 집을 해 생각이 많은 요즘이다. 많이 가지고,
지킨다는 말에 밑줄을 그었다. 생각해보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지혜가 아니란 생
면, 도시에서 그런 구멍은 ‘공터’가 아닐까 싶다. 부동산 왕국 서 각도 든다. 외유내강이란 말도 자주 떠올린다. 부러지지 않고 부
울. 고층 아파트와 비좁은 건물로 빽빽하게 들어찬 도시에서 가 드럽게 휘어지는 것들에 대하여. 새가 그토록 오래도록 날아갈
끔 우리 눈앞에 거짓말처럼 나타나는 공터. 역설적으로 공터는 수 있는 건 바람에 맞서지 않고, 부드럽게 바람을 타기 때문이라
많은 것들로 가득 찬 도시 속에서 ‘간신히 비어 있는 것’으로 그 는 얘길 듣던 어느 비 오는 날도 기억한다. 때로 슬픔을 비우는
곳을 지켜낸다. 공원 한가운데의 커다란 호수, 도심 한복판의 숲 가장 좋은 방법은 억지로 덜어내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슬픔을 부
으로 우거진 공원, 이런 텅 빈 것들 말이다. 어서 컵에 담긴 물이 넘쳐흐르듯 흘러넘치게 하는 것이란 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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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미세 먼지가 적어져 창문을 자주 열어 둔다. 집 앞 꽃집에 올여름, 길을 걷는 동안 많은 카페에서 달고나 커피 메뉴를 발견
서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꽃을 산다. 다행히 확진은 아니었지만 했다. 황금빛 색깔의 달고나를 바라보면서, 나는 달고나에 대한
환자를 돌보다 병원 감염에 노출돼 자가 격리 중인 친구에게 꽃 내 기억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이제 어릴 적 학교 문방
을 자주 보냈다. 꽃을 함께 하지 못하니 꽃 사진을 더 많이 찍어 구 앞에서 아이들에게 달고나를 만들어 팔던 할아버지의 모습
보내기도 했다. 은 떠오를 것 같지 않다. 달고나 커피를 볼 때마다, 나는 아마도
3월 21일 이후, 뉴욕에서 자가 격리 중이었던 선배에게서는 ‘달고 2020년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마스크와 장갑을 낀 채 많은 것들
나 커피’ 사진이 왔다. 커피믹스와 약간의 물을 넣고 400번 휘저 을 해야 했던 날들 말이다.
어야 만들어진다는 이 커피가 체감상 4,000번을 저어도 만들어 컵은 이미 깨졌고 물은 엎질러졌다. 우리는 코로나 이전의 시대
지지 않는 것 같다는 메시지도 왔다. 임시휴업, 잠정 폐쇄가 일상 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화된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전 세계적으로 집 일은 하나가 아닌가. 깨진 컵을 주워 담고, 물을 닦는 것뿐. 나는
안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만든 노동집약적인 놀이가 유행했다. 이제 먼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시간을 좁혀 그저 오
그렇게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뭔가를 하는 중이었 늘 하루에 대한 생각을 하기 위해 더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오
다. 집 앞마당에서 자를 대고 일정 간격으로 잔디를 깎으며 시간 전 7시의 햇살과 열어놓은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 달빛에서 마
을 보내는 동영상도 보았다. 확진자 100만 명 이상이 나온 미국 시는 따뜻한 차 한 잔의 소중함을 깊이 기억하면서 말이다.
에서, 가장 많은 확진자가 나온 도시에서 선배는 3개월 넘게 집 세상이 내 예측과 예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이고 하루하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루 더 충실해지는 것. 선배의 말이 옳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
생 전체는 되는대로. 어쩌면 이 코로나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적
“코로나 블루와 갱년기 우울증이 함께 온 것 같아. 요즘은 내가 행 합한 말은 이것이 아닌가 싶다.
복한지 불행한지 따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그냥 사는 거.
어쨌든 시간을 견디는 거. 그렇게 흘려보내는 법을 익히고 있어.” 글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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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삶과 문화

처음 문화원과 인연이 닿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문화원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20년 전인 “개인의 삶 아닌,
2000년 경이었다. 그때는 ‘문화 향수권’이라는 말
이 우리 사회에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할 무렵이 향토사의 한 페이지로”
었는데, 당시 우리 문화원천안서북구문화원은 전국에서
이종석 한국문화원연합회 부회장
유례없는 ‘1시市 3문화원’에 속해 있었고, 시내 중
(천안서북구문화원장)
심부가 아닌 읍 지역인 ‘성환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자
리하면서 공간적으로나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 문
화센터로나 여러 제약과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때 지역 선후배분이 문화원 참여를 권유했
다. 처음에는 지역문화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식
이 그리 성숙하지 않았던 터라 힘든 점이 많았다.
특히 열악한 재정 상황은 문화원을 이끌어 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지금은 지역문화의 가치와
지방문화원의 중요성에 대해 대중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활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좋아져 한
결 나아진 편이다.

어느 때보다 ‘지역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천안 문화’는 어떻게 견고히 해야 할까?
물질적 풍요에서 정신적·감성적 풍요를 추구
하는 패러다임의 변화와 더불어 문화산업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면서 문화는 이제 지역을
넘어 전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이러한 때 천
안이 지닌 문화적 특성과 독자성, 정체성은 무엇이
며 어떤 방향을 견지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
각한다. 이제는 지역의 정체성을 담보한 문화를 만
들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천안이 충남의 대표 도
시로, 문화 중심 도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해결해
야 할 과제가 많다. 문화의 창조와 생산, 매개, 수용
과 소비라는 점에서 그 고리들을 어떻게 구축할 것
인지에 대한 논의와, 문화 교육·문화 산업 육성과
문화 관광 이미지 창출 관련 정책 개발 등이 요구
된다. 창작과 향유, 공감과 확산이라는 시대적 과제
를 슬기롭게 이루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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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서북구 지역만의 특성이 있다면? 1963년 창립된 천안서북구문화원은 어느새 창립
충청과 경기를 가르는 안성천 따라 펼쳐진 넓 60주년을 앞두고 있다. 긴 세월 속에서 문화원 역할
은 들판과 경부선철도, 1번 국도를 따라 근현대 문 에 대해 많이 고민해왔을 듯하다.
화의 중심을 이뤘던 천안 서북구는 가장 ‘천안다 그동안은 산업화와 현대화 속에서 잊히고 사
운’ 지역이기도 하다. 예부터 삼남대로를 포용했는 라지는 것들을 채록하고 전승하는 일과 지역주민
가 하면, 각 포구와 연결되는 정치·군사상의 요지 의 문화 향수권 신장, 애향 의식 고취, 지역사회 교
로, 지금도 경부·전라·호남선 등과 서해로 통하는 육 등 문화원이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주력해왔다.
장항선의 분기점이 된다. 아울러 경부고속도로와 지난해는 특별 기획 사업으로, 천안인들이 살아낸
1번 국도, 고속철도가 뻗어있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삶에 대해 직접 듣고 기록하여 하나의 책으로 엮는
하다. 이처럼 근현대 천안이 만들어지고 향토적 정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트렌드’로서 문화영
체성을 간직하는 고장으로 일컬어지기까지 이곳에 역 확산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기존의 문화원 활동
서 살았고, 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단순히 ‘개 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최
인의 삶’에 그치지 않고 향토사의 한 페이지로서 근에는 ‘공급자 중심’의 문화 전달이 아니라 ‘시민
역할 한다. 중심’의 체험 프로그램 전개에 방점을 두고, 전통
과 현대, 순수와 대중, 기층문화基層文化와 신세대 문
화 등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문화프로그램 30
여 개를 연중 운영한다. 특히 미래 세대 문화의 주
역인 청소년을 위해 관내 중·고등학교를 직접 찾아
가는 ‘청소년 인문학 강좌’,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
는 ‘청소년 문화탐방’ 등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문
이종석 부회장(가운데)이 한춘섭 편집주간(왼쪽에서 두 번째)과
화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천안서북구문화원 앞에서 직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천안 12경 중 제9경으로 이름난 왕지봉
배꽃길에서 ‘배꽃길 걷기대회’를 개최하며, 지역주
민의 문화 향유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천안서북구문화원을 이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원연합회의 부회장으로도 봉직하고 있다. 한국
문화원연합회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나
아가야 할까?
문화원은 법률에 따라 건립되고 존속하며 지
역문화의 거점이 되는 문화센터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문화원은 수많은 문화 단체 중 하나로 평가받
을 때가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혹은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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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서북구문화원에서 지난해 개최한 왕지봉 배꽃길 걷기대회

것이다’라는 말이 다시금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도 했다. 또 천안지역 특산물 축제 활성화 방안 연


지역문화의 시대에서 국가경쟁력은 무엇보다 각 구 등 지역사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아울러 문화
지역의 고유문화를 단단히 뿌리내리는 데서 출발 원 숙원이기도 한 다목적 원사 마련을 위해 천안시
한다고 본다. 따라서 한국문화원연합회는 지역문 와 논의하고 있다.
화의 발전을 선도하는 조직이 문화원이라는 사실
을 견지하고, 각 문화원이 오랫동안 쌓아온 노력과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문화원 가족들에게 응원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는 정책이 입안될 수 있도록 한 마디 부탁한다.
힘써야 할 것이다. 아울러 전국 지방문화원이 활발 코로나19라는 낯선 전염병으로, 모두가 불안
하게 문화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과 마주하고 있다. 마음과 현실이 삭막할 때, 위안
지원 체계가 확립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 을 얻을 수 있는 창구는 ‘문화’이지만 지금은 그마
야 한다. 저도 제한받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하지만 ‘이 또
한 지나가리라’는 확신으로 현실을 극복해 갔으면
올해 상반기는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때문에 한다. ‘일상’의 중요함과 소중함을 깨닫는 요즘이
모든 문화원 사업이 중단되다시피 했다. 천안서북 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모두 건강하고
구문화원은 어떻게 극복하고 있나? 건승하길 소망한다.
아무래도 문화원 회원들이 단체로 참여하는
활동에는 제약이 있기 때문에, 발간 사업과 자료
수집 등 내부적으로 밀려있던 일들을 찬찬히 살피
대담 한춘섭 편집주간
고 있다. 그간 발간되었던 각종 자료를 아카이브화 정리 음소형 편집팀
化 하기도 했으며, 문화정보지 《문향》을 발간하기 사진 김정호 사진작가, 천안서북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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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북한 사 회 문 화 읽 기 ⑰ ※ 이 글의 인용문은 북한 맞춤법 규정에 따라 표기한 것으로
우리나라 맞춤법 규정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음악에서 주체를 세우기 위한


북한의 악기 개량 사업

북한의 민족악기 개량사업은 1970년을 전후로 김정일이 <피바다식> 혁명가극에 배합관현악을 도입한 제1차 문학예술혁명을 주도하
면서 크게 활성화되었으나, 김정일이 정치 전면에 나선 1980년대 초부터 활기를 잃게 되었다.

전통 국악기민족악기 개량에 열정 들의 형태에서 고티나는 요소들”이라고 지적했다. 전통적인 5음


북한의 인터넷 선전매체 ≪메아리≫2020.3.31.와 ≪조선의 오 계로는 12반음계로 구성된 현대적 감각의 곡들을 연주할 수 없었
늘≫2020.4.26.은 국립악기연구소가 민족악기 개량사업에서 성과를 고, 탁하고 어두운 음색이 인민대중의 정서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이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본 것이다.
‘민족악기’란 우리 전통악기인 국악기를 지칭하는 북한 용어이
다. 위 인터넷 매체들은 국립악기연구소가 “민족악기의 맑고 부 1960년대 후반 크게 활성화… 지금은 주춤
드러운 음색을 살리면서 음역과 음량을 확대하는 데서 나서는 과 판소리에서의 ‘ 소리탁성, 수리성’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결과
학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했다면서, “이곳 연구사들은 콤퓨터컴퓨 적으로 북녘에서 판소리가 사라지게 만든 김일성의 다음과 같은
터지원 설계프로그람을 리용하여 수천 점에 달하는 악기 도면들 한마디는 민족악기 개량에 불을 붙였다. “우리의 민족음악을 현
의 수자화數字化, 디지털화를 실현하였으며, 악기음질 평가프로그람 대화하기 위하여서는 악기를 더욱 발전시키는 문제도 고려하여
≪보름달 2.2≫를 개발하여 예술교육부문과 전국의 악기공장들 야 합니다. 우리 민족악기의 결함은 탁성이 나는 것입니다. 창唱
에 도입하였다”고 밝혔다. 기사는 이어서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 에서 탁성을 냈기 때문에 악기도 탁성에 맞게 만든 것 같습니다.
학 교원, 연구사들도 수십 건의 가치 있는 논문 집필을 통해 민족 일부 동무들이 민족악기를 개량하는 것을 반대하는데, 그럴 필요
악기들을 개량·발전시키기 위해 애국적 열정을 바쳐가고 있다고 가 없습니다. 옛날 그대로의 조선악기를 가지고는 민족음악을 현
보도했다. 대화할 수 없으며, 우리 시대 인민들의 정서를 충분히 표현할 수
북한은 중국보다는 늦지만, 우리보다는 많이 앞선 1950년대 중반 없습니다.”≪김일성 저작선집 4≫, 1968. 기존 전통악기의 탁하고 어두운
부터 민족악기 개량사업을 시작했다. 주체사상의 등장과 함께 민 음색을 인민대중의 정서에 맞지 않는 민족악기의 결함으로 지적
족음악의 형식 문제가 제기되면서 악기 개량의 문제가 함께 떠올 한 것이다.
랐기 때문이다. ≪조선예술≫ 2001년 3월호의 한 기사에는 북한 결국 민족악기 개량사업은 1956년 4월 당 제3차 대회 이후 음악
에서 민족악기를 개량하게 된 보다 구체적인 이유가 잘 설명되어 에서의 주체를 세우기 위한 사업의 하나로 진행되고, 1961년 9월
있다. 당 제4차 대회를 계기로 민족악기의 복구·정비 사업이 전면적으
기사는 “재래식 민족악기의 제한성과 부족점은 음역이 넓지 못 로 추진된다. 이 과정에서 1962년 3월 11일 김일성은 민족음악을
하고 음량이 적으며 일부 탁성이 섞인 소리가 나거나, 일부 악기 민족적 바탕에서 현대화하고, 그것에 맞게 민족악기를 개량·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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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전통악기

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사대주의자들허무주의자들과 복고주의자들의


책동을 단호히 물리친 것으로 되어 있다≪조선예술≫, 1997년 7월호. 그
결과 1950년대 후반부터 추진되기 시작한 민족악기 개량사업은
1960년대 후반부터 크게 활성화된다.
개량사업은 국립악기연구소와 각 도 악기연구소, 평양음악무용
대학현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 민족기악과를 중심으로 여러 악기공장
에서 이루어졌다. 1961년 제4차 당대회 시 60여 점의 개량악기 아쟁

가 전시회에 나왔고, 1963년에는 이미 150여 점의 악기가 복구되


거나 개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민족악기 개량사업은 1960년대
말에 김정일이 등장하여 이른바 <피바다식> 혁명가극에 배합관
현악을 도입한 제1차 문학예술혁명을 주도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된다. 그러나 1980년대 초1980.10.에 김정일의 후계자 지위가
확정되고 김정일이 정치 전면에 나서면서 더 적극적인 진행은 이 피리

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도 간헐적으로 악기 개량의


성과가 나왔으나 과거의 활기는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한 개량악기의 효시, ‘어은금’


북한이 이룩한 민족악기 개량의 성과를 보면, 관악기군은 대
금고음저대, 중음저대, 저음저대, 개량단소, 피리대피리, 장새납 등 음률체계
를 5음계에서 12반음계 체계로 확대하고, 피리의 경우도 음역을
넓혔다. 현악기 중 발현탄현, 줄뜯음 및 타현줄때림 악기군은 개량 가
야금22현 가야금, 저음역대의 대가야금, 옥류금35현, 어은금4현, 양금44현 등
음역이 넓어지고 저음과 고음에 이르기까지 음량과 음색의 통일
편종
이 이루어졌다. 현악기 중 찰현궁현, 줄비빔 악기군은 소해금, 중해
금, 대해금, 저해금 등 기존의 해금보다 활을 줄이고 줄 수를 늘
렸으며, 통을 크게 하였다. 거문고, 아쟁, 퉁소 등 1960~1970년대
생황
까지 연주에 활용해 왔으나 만족할만한 개량 성과에 이르지 못해
개량이 중단된 악기는 더는 공연장에서 연주되지 않고 민족음악
연구를 위해 연주자와 악기를 보존했다. 이 밖에도 문헌 속에만
존재하던 고악기들, 예를 들면 수공후, 와공후, 월금, 비파, 조금,
조명금 등을 복원하고 개량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북한은 어은금, 옥류금 등 새로운 형태의 악기도 만들어 연주에
활발히 사용하고 있는데, 북한이 창안하거나 개량한 대표적인 민
족악기인 어은금, 옥류금, 개량단소, 장새납에 대해 좀 더 알아보
도록 한다. 북한의 민족악기 중 언론에 가장 자주, 그리고 반복적
가야금
으로 등장하는 악기는 ‘어은금’으로, 개량악기의 효시로 간주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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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개량 악기

어은금(於隱琴). 새로운 형태로 만든 악기

장새납. 새납(날라리, 태평소)을 개량

옥류금. 새로운 형태로 만든 악기

대피리. 피리를 개량

고음젓대. 대금을 개량

소해금(小奚琴). 해금을 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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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 어은금은 김정일이 대학 3학년 재학 시절 군사 야영훈련 성되였을 때 위대한 장군님의 공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음악
1962.8.20.~10.4, 평양시 룡성구역 어은동에 참가하여 도시락 통과 버려진 통 부문의 일군들은 악기 이름을 <2월금>이라고 달 것을 제기하였
신 와이어선으로 만들어 주법奏法을 지도하고 이름까지 지어 주었 습니다. 그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렇게 달 필요가 없다고 하
다는 악기이다. 기사에 따라서는 당시 강철선과 오동나무로 4도 시며 친히 <옥류금>이라고 지어주시였습니다.”
조현악기調絃樂器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기타와 만돌린의 장 그동안 항간에는 악기 소리가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것처럼
점을 살려 개량한 현악기인 어은금은 독주, 중주, 합주, 병창, 배 아름답다’고 하여 김일성이 직접 ‘옥류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합관현악 등 다양한 연주에 활용되고 있으며, 오늘날 북한에서 고 알려져 왔다. 옥류금은 오늘날 중국 북동부에도 전파되어 현지
가장 대중화된 악기 중 하나이다. 에서는 ‘위류친玉流琴/玉嚠琴’이라 부른다고 한다. 옥류금의 음역은
오늘날 어은금은 오동나무를 기본 재료로 하는 민족발현악기 저음구, 중음구, 고음구의 3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각각 가야금,
로 조롱박 형태의 울림통과 짚음판, 머리 부분으로 되어있고, 종 하프, 기타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음역이 넓어서 독주나 합주에
류로는 소어은금, 중어은금, 대어은금, 저어은금의 네 가지가 있 널리 이용되고 있다. 전통적인 뜯기뿐만 아니라 하프와 기타 주법
다. 북한 언론들조선중앙통신, 2019.9.2., ≪조선의 오늘≫, 2018.7.13., ≪로동신문≫, 을 변주적으로 응용할 수 있고,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하고 아름다
2017.12.17.은 어은금에 대해 한결같이 “매력 있는 맑은 음색과 풍부 운, 다시 말해 청아한 음색과 풍부한 음량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 표현성으로 하여 우아하면서 고유한 민족적 향취를 안겨주고 1960년대 민족악기 개량사업 초기에 완성한 ‘개량단소’는 평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어은금은 끊기, 뜯기, 복음 짚기 등 주법 율에 맞추는 보조키를 달기 위해 북한지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이 다양하고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대개 피크pick를 이용해 한 음, 참대쌍골죽를 흑단이나 자단으로 재질을 대체한 악기이다. 재질을
두 음 또는 몇 개의 음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반복해 긁는 트레 대체했음에도 전통적인 음색이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어 남한 예
몰로 기법이 많이 활용되며, 농혈弄絃도 가능하다. 술계도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본래는 참대의 밑 부분을 잘
김정은이 2014년 5월에 개최된 제9차 전국예술인대회 참가자들 라서 뒤에 한 개, 앞에 네 개의 소리구멍을 뚫은 5음계 악기였으
에게 보낸 서한을 계기로 민족악기 연주의 조기교육에도 변화가 나, 현재의 개량단소는 종래의 단소에 비해 음량과 음역이 확대
있었다고 한다≪조선신보≫, 2014.6.27.. 즉 2013년부터 평양시 경상유 된 12반음계 악기이다.
치원과 대동문유치원에서 어은금 조기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그 ‘장새납’은 1970년을 전후로 개량 발전시킨 민족목관악기로, 형
졸업생들이 평양음악학원 민족기악학부 소학반을 거쳐 전문부까 태는 새납날라리, 태평소과 비슷하나 길이가 길어졌다고 하여 이러한
지 교육 전 과정을 이수하게 되면 어은금 교육을 16년 동안 받게 이름이 붙여졌다. 종래의 새납은 음량이 크고 음색도 밝고 화려한
된다. 북한은 이미 2001년에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 민족기악학부 장점이 있지만, 음색이 너무 예리하고 음역이 한정되어 있어 합
와 각도 예술학원대학, 평양 금성제1고등중학교에 어은금학과를 주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새납보다 관대가 더 길어지고 음공이 더
설치했고, 만경대학생소년궁전, 평양학생소년궁전, 그리고 각 지 설치되었으며, 누르개장치가 도입되고 12평균율 반음계체계로
방의 학생소년궁전에도 어은금소조를 조직·운영해 오고 있다≪통 조율하도록 만들어짐으로써 전조조바꿈와 이조조옮김가 가능하게
일신보≫, 2001.9.29.. 되었다. 새납에 비해 음량은 적으나 음역이 넓고 소리가 부드러
워, 독주악기로서 뿐만 아니라 배합관현악과 중주곡에서 민족적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아름답다” 하여 ‘옥류금’ 색채를 살려내는 선율악기로 자주 쓰이고 있다. 남과 북의 전통악
‘옥류금’ 탄생에 관한 비화는 ≪로동신문≫ 2016년 12월 15 기 개량과 관련해서는 다음 호에서 한 번 더 다루도록 한다.
일 자 기사<숭고한 민족애가 낳은 새 민족악기>에 실려 있다. “1970년대 초
에 어느 한 예술단체의 민족기악 중주조를 지도하시던 위대한 장
군님김정일께서는 민족악기 와공후를 가야금처럼 눕혀놓고 연주
글 오양열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초빙석좌연구위원
하도록 만들어보라고 과업을 주시였습니다… 새 민족악기가 완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국립국악원

65
우리마당 ㅣ 한류 포 커 스

K-게임의 게임 산업에 대해 글을 쓰기 전, 관련한 몇 가지 수


치를 제시하고자 한다. 45억 5,000달러약 5조 782억 원.

비상을 꿈꾸며 2018년 우리나라 게임 콘텐츠의 해외 판매 수치다.


2018년 기준 음악5억 달러, 방송5억 5,000만 달러, 영화
4,000만 달러 등 장르별 수출액을 다 합쳐도 게임 산업
하나에 못 미친다. 같은 해 국내 게임 시장 규모는
14조2,902억 원으로 집계되었으며 2020년 전
세계 게임시장은 1,460억 달러179조 원로 예측된다.

수치와 순위로 보는 한국 게임 산업의 현주소 4등. 2019년 한국의 전 세계 게임 시장 점유율 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분석업체 ‘아이지에이웍 위다. 6.4%로 미국, 중국, 일본에 이어 4위를 차지
스’에 따르면 2016년 구글 플레이스토어 기준 전 했다. 잘한 것 같지만, 사실 잘한 게 아닌 것이 한때
체 모바일 게임 이용자 중 100만 원 이상 결제한 는 한국이 동남아시아와 중화권에서 부동의 1위를
상위 0.15% 이용자의 매출이 전체 매출의 41%를 차지한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현재의 게임 산업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음악, 방송, 영화는 전 국 은 일종의 위기라고 진단하는 기사가 넘쳐난다. 이
민이 골고루 보지만, 게임 업계만큼은 ‘고래’라고 러한 순위를 좀 더 상세히 들여다보자. 미국과 일
부르는 헤비 유저Heavy user 고객을 잡는 것이 절대 본은 의심의 여지없이 부동의 콘솔 게임 강자이다.
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어쩌면 이들 ‘고래’는 게임 콘솔이란 주로 비디오 게임 등을 플레이하기 위한
중독이라고 볼 수 있지만, 게임 회사는 ‘절대 고객’ 전용 전자기기를 뜻하는데, 소니의 ‘PlayStation’
이라는 이중 잣대를 들이댄다. 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 가정용과 휴대
3년간 0건. 이는 중국에서 우리나라 게임 콘텐츠에 용 게임기를 합친 하이브리드 콘솔인 닌텐도사의
발급한 중국의 판호 건수이다. 판호는 중국 미디어 ‘Switch’가 전 세계 콘솔 시장을 휩쓸고 있다. 중국
정책을 총괄하는 중국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이하 광 은 최근 들어 모바일 게임의 성장이 눈부시다. 스
전총국이 자국·외산 게임에 발급하는 일종의 서비스 마트폰의 확대와 함께 판호 허가 체제로 자국의 게
허가권이다. 판호는 중국에서 권고가 아닌 의무로 임 산업은 보호한다. 텐센츠 릴리즈 같은 게임 회
통한다. 중국은 광전총국 홈페이지를 통해 신규 판 사는 ‘라이즈 오브 킹덤즈’나 ‘기적의 검’ 같은 프
호 발급 현황을 발표하고 있는데, 판호 발급 기준 로그램을 내세웠고 그 여파로 국내 종합 모바일게
은 선정성, 폭력성 등에 대한 광전총국의 자체 심 임 순위 상위 5위 중 1·2·4위가 중국 게임이다. 한
의 결과라고 한다. 워낙 수입 게임의 판호 발급이 국의 경우는 PC게임, 그중에서도 ‘MMORPG다중 접
13% 정도로 낮은 데다 사드 사태 이후 대한민국 게 속게임’의 강자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리니지’와 ‘배
임은 현재까지 단 한 건의 판호도 받지 못하고 있 틀 그라운드’를 개발한 나라이고 전 세계에서 가장
다. 결과적으로 국내 게임 업계는 중국 수출길이 뛰어난 ‘스타크래프트’ 게이머를 보유한 나라이기
막혀 있는 상태다. 도 하다.

66
K-게임의 비상을 위한 돌파구 찾아야
앞의 수치와 논의를 종합해 보면, 우리나라 게
임 산업이 전 세계에서 각광받는 한류 콘텐츠임은
틀림없지만, 앞으로 수출 성장세를 이어가기 위해
서는 여러 가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
다. 그 첫 번째가 게임 콘텐츠의 다변화이다. 모바
일 게임이 대세가 되면서 이제 광고비를 많이 지불
하는 게임 회사의 게임만 사용자들에게 노출되고
선택받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렇다 보니 양질의
게임을 개발했으나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 개발사,
퍼블리셔들의 게임이 유저들에게 노출될 확률이
예전보다 더 낮아지고 비슷비슷한 게임이 판을 치
고 있다. 콘텐츠뿐만 아니라 플랫폼의 다변화도 시
급하다. 엔씨소프트와 넷마블을 비롯해 펄어비스,
액션스퀘어, 베스파 등의 중소 게임회사들이 콘솔
게임을 개발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게
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도 필요하
다. 스포츠 업계에서는 발 빠르게 게임을 e-스포츠
라 칭했고,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 게임에
선 시범 종목으로 선택되었다. 연산이 처리되고 유저의 단말기PC, 스마트폰는 이를
또 게임이 주는 다중 주체성과 상호작용성을 어떻 보여주기만 하는 구조이다. 이로 인해 낮은 사양의
게 사회적 기술을 습득하거나 청소년들의 정체성 기기에서도 게임을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5G가
을 탐색하는데 활용할 것인가? e-스포츠를 어떻게 활성화되면 기기의 사양과 장소에 상관없이 어디
지방 경제와 접목할 것인가? 이러한 게임에 대한 서든 고사양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문화적, 정치적 논의가 게임에 대한 다채로운 시선 게임이 지연되는 문제를 개선하고, 스트리밍과 데
과 활용을 가능하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이터 센터의 성장이 필수적인데, 이는 게임 콘텐츠
중국 시장에 대한 대응책 마련도 요구된다. 중국과 가 아닌 외부 환경의 개선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의
의 문제는 게임 업계가 아닌 정부 차원의 외교적인 미한다.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또한 업체들도 중국 시장 결국 게임 산업은 게임 콘텐츠 외에도 인식의 변
이 열리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릴 것이 아니라 대만, 화, 국가 간의 갈등 해결, 5G망의 확대 같은 다양한
일본, 인도, 북미, 유럽 등 시장을 다변화하고 성장 외부 환경이 동반되어야 하는 콘텐츠 산업이라 할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 수 있겠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지만, 늘 그 존재의
마지막으로 클라우드 게임 시장의 확대에 주목할 가치를 평가절하당했던 게임. e-스포츠의 자장 안
필요가 있다. 클라우드 게임은 게임을 서버에 저장 에서 K-게임의 비상은 오히려 지금부터 아닐까.
한 채 이용을 요구하는 단말기에 즉각적으로 스트
리밍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서버에서 게임의 주요 글 심영섭 심영섭아트테라피 대표,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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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 LENDER SUN MON TUE

문화달력

5 6 7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한문연]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접수
[광주 서구문화원] 제6회 광주시민연극제 참가 단체 모집
[서울 노원문화원] 생활 속 인문프로그램 지원 사업
[대구 달서구문화원] 제21회 전국문화사진
공모전·제14회 전국문화사진초대작가전 전
시(달서갤러리)

■ [경남 마산문화원] 제20회 마산휘호대


회(마산실내체육관)

12 13 14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한문연]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접수
[광주 서구문화원] 제6회 광주시민연극제 참가 단체 모집
[서울 노원문화원] 생활 속 인문프로그램 지원 사업

■ [인천 연수문화원] ‘오페레타 전문가 양


성 심화과정’ 참가자 모집(전화 및 방문
선착순 모집, 10:00~)
■ [인천 연수문화원] 문화예술교육사 인턴
십 지원사업-연수씨의 17가지 그림자

19 20 21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한문연]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접수
[광주 서구문화원] 제6회 광주시민연극제 참가 단체 모집
[서울 노원문화원] 생활 속 인문프로그램 지원 사업

■ [인천 연수문화원] 문화예술교육사 인턴


십 지원사업-연수씨의 17가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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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한문연]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접수
[광주 서구문화원] 제6회 광주시민연극제 참가 단체 모집
[서울 노원문화원] 생활 속 인문프로그램 지원 사업
[한문연] 지역문화행정과정 4차(서울여성플라자)
■ 한국문화원연합회
■ [인천 연수문화원] 문화예술교육사 인턴
■ 지방문화원 십 지원사업-연수씨의 17가지 그림자

※일
 정은 변동되거나
취소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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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 THU FRI SAT

1 2 3 4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한문연]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접수
[광주 서구문화원] 제6회 광주시민연극제 참가 단체 모집
[서울 노원문화원] 생활 속 인문프로그램 지원 사업

■ [인천 연수문화원] '연수시티투어' 및 '문 ■ [인천 연수문화원] 신중년 트로트 작곡 ■ [서울 성북문화원] 창작 뮤지컬 <심우>
화예술교육사 인턴십 지원사업' 접수(전 프로그램 <트롯은 인생을 싣고> (심우장, 13:00, 15:00)
화 및 방문 선착순 모집, 10:00~)

8 9 10 11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한문연]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접수
[광주 서구문화원] 제6회 광주시민연극제 참가 단체 모집
[서울 노원문화원] 생활 속 인문프로그램 지원 사업
[대구 달서구문화원] 제21회 전국문화사진공모전·제14회 전국문화사진초대작가전 전시(달서갤러리)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어린이극 <도깨비와 놀당갑서>

■ [대전중구문화원] 제22회 보문미술대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시민로 ■ [인천 연수문화원] 신중년 트로트 작곡 ■ [서울 성북문화원] 창작 뮤지컬 <심우>
전 출품작 접수(대전중구문화원 갤러리, 드-역사를 거닐다 프로그램 <트롯은 인생을 싣고> (심우장, 13:00)
10:00~17:00) ■ [인천 연수문화원] 생애전환문화예술학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동네인형
교-몸 그리고 쉼표 놀이단

15 16 17 18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한문연]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접수
[광주 서구문화원] 제6회 광주시민연극제 참가 단체 모집
[서울 노원문화원] 생활 속 인문프로그램 지원 사업
[한문연] 지역문화행정과정 3차(서울여성플라자)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시민로 ■ [인천 연수문화원] 신중년 트로트 작곡


드-역사를 거닐다 프로그램 <트롯은 인생을 싣고>
■ [인천 연수문화원] 생애전환문화예술학
교-몸 그리고 쉼표

22 23 24 25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
[한문연]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접수
[광주 서구문화원] 제6회 광주시민연극제 참가 단체 모집
[서울 노원문화원] 생활 속 인문프로그램 지원 사업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시민로 ■ [인천 연수문화원] 신중년 트로트 작곡 ■ [인천 연수문화원] ‘연수시티투어’(문학
드-역사를 거닐다 프로그램 <트롯은 인생을 싣고> 산 동남부와 승기천 일대)
■ [인천 연수문화원] 생애전환문화예술학
교-몸 그리고 쉼표

29 30 31
[한문연] 제3회 근현대민간기록물전 접수(~8. 9.)
[한문연] 제35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 접수(~8. 9.)
[한문연] 제1회 금남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접수(~8. 7.)
[광주 서구문화원] 제6회 광주시민연극제 참가 단체 모집(~7. 31.)
[서울 노원문화원] 생활 속 인문프로그램 지원 사업(~12. 30.)

■ [전북 장수문화원] 장수 깃절놀이 교육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시민로 ■ [인천 연수문화원] 신중년 트로트 작곡
(한누리전당, 19:00) 드-역사를 거닐다 프로그램 <트롯은 인생을 싣고>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가족음악 ■ [인천 연수문화원] 생애전환문화예술학
회 <꿈꾸는 가야금_소리를 그리다> 교-몸 그리고 쉼표

69
02-704-2322
국경의 하룻밤 심연수 애송 시 선집
NE W S
U RIM U N HWA 지은이 심연수 ㅣ 엮은이 남기택 ㅣ 발행처 강릉문화원

강릉문화원은 2018년부터 강원 강릉 출신의 민족 시인, 심연수1918~1945의 탄생 100주

년을 기념하며 ‘심연수 시인 문학사료 전집’을 발간하고 있다. 2021년까지 총 10권 발행

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1~5권(논문집, 육필시고집, 일기장, 육필산문집, 시 정

집) 등이 출간되었다. 별도로 선보인 《국경의 하룻밤, 심연수 애송 시 선집》은 심 시인의

방대한 시 작품 중 평론가, 강릉문인협회장 등 전문가가 엄선한 50편의 시를 현대어로

풀어쓴 시선집이다.

역해 은파유필
지은이 정만조 ㅣ 엮은이 박명희, 김희태 ㅣ 발행처 진도문화원

진도문화원은 진도의 역사문화 전통과 의미를 밝히고 이어가기 위해, 향토문화고전


의 한글화 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이번에 발간한 《역해 은파유필》은 무정 정만조 선
생의 시집으로, 1896년부터 1907년까지 12년간 진도에서 유배 생활을 보내며 남긴
기록 중 초반 4년기의 기록을 모은 것이다. 강강술래, 답교 놀이, 줄다리, 농악 등 당
시 민속을 노래한 114제 246의 시를 담고 있으며, 이중 강강술래에 대한 기록은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추정되고 있다.

편집후기

잔인한 폭파의 굉음소리-

우리만의 마음뿐, 꿈에서의 순진했던 소원들이

또 흙먼지 된 채로 떠나가는가. 약속의 진정성

도 믿음의 탑 쌓기도 또 원점으로 되감기는가.

맺고 푸는 과정도 예의가 있어야 하거늘......


송파문화원
긴 긴 날의 비통한 헤어짐이 또, 수화기 속에
비디오테이프 디지털파일 변환·저장 사업
편집후기
먹통이 되었다. 서로의 계산속이 다른 서약이
송파문화원은 1970년대 이후 현대사의 아날로그 자료

보존을 목적으로 비디오테이프VHS를 디지털파일로 변 무슨 소용이 있으려나. 그리고 우리는 언제까

환하여 USB에 저장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본격적인 지 멍하니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가. 모든 말
사업 시행에 앞서 지난 3월부터 사전 신청을 받아 총 잔치는 헛되다. 차라리, 말을 아끼면 평화가
326개의 비디오테이프를 디지털 파일로 변환하여 시범 오지 않을까 한다.
제공하였다. 코로나19로 휴강했던 문화원 강좌 재개강
근세에 들어 유례없는 바이러스 공격에 인류
2020 07

시 송파문화원 수강생을 대상으로 1개월간 무상으로 서


가 공포에 떨고 있다. 더구나 더위가 심해지는
비스를 제공한 후 전 송파구민을 대상으로 소정의 수수
때에 문화 가족의 여름 나기를 걱정해 본다.
료만 받고 서비스를 확대할 예정이다.

한춘섭 편집주간

72
딱지치기
Ttakjichigi

ISSN 1599-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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