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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제 1 부

맏 아 들
백 현 우

문학예술출판사
주체100(2011)

1
불은 빛과 열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불은 제철소가 살아있다는 생명의 상징이였고

건국의 기둥을 벼리는 담보였다

굳은 쇠와 차거운 돌을 녹이는 불도

그대앞에 머리를 숙였거니

그대는 불을 다루는 억센 사나이

불속에 살면서도 불이 그립던 그대를

따뜻이 품어 조국의 맏아들로 키워준 품은

새 조국을 세워주신 수령님의 품

자애로운 그 품속에서

이 나라 철의 력사가 시작되였고

새 인간이 태여났어라!

2
차 례

앞이야기. 눈물속의 할아버지들.................... ( 2 )

제 1 장. 아물지 못한 상처...................... ( 1 5 )

제 2 장. 파 혼.................................. ( 7 5 )

제 3 장. 기다리던 삼촌.......................... (121)

제 4 장. 닥쳐온 추위............................ (178)

제 5 장. 구름장을 뚫고 비쳐온 해빛 ............ (235)

제 6 장. 메워야 할 균렬들...................... (295)

제 7 장. 비끝에 돋은 달........................ (358)

제 8 장. 새 지향속의 모대김 .................... (397)

제 9 장. 사랑의 열정............................ (443)

제 1 0 장 . 시련의 또 한고비...................... (472)

제 1 1 장 . 맏이가 갈길............................ (524)

1
앞이야기

눈물속의 할아버지들

흐르는 물은 바다로 향하기마련이다. 천갈래만갈래 자기 곬을 따라 각


기 제멋대로 흘러가는 시내라 할지라도, 지어는 한 봉우리에서 시작되
여 정반대방향으로 갈라져나간 강이라 할지라도…
한치앞도 내다볼수 없는 뽀얀 안개속에 대동강은 유유히 흘렀다.
흐르는듯마는듯싶으나 순간도 흐름을 멈춘적 없는 강물이였다. 랑림
산기슭에서 샘으로 솟아나 대흥과 녕원, 덕천, 북창, 순천, 평양, 남포
등 거의 스무개나 되는 도시와 군을 적시며 서해에 이르는 천여리 긴강,
검은모루유적의 주인공들과 《력포사람》, 《덕천사람》, 《승리산사
람》들로 불리우는 인류발생초기의 사람-원인, 고인, 신인들이 살던 아
득한 그 시대로부터 고조선을 거쳐 고구려, 고려의 무사들이 강변에서
말을 목추기던 무훈의 빛나는 시절들과 비렬한 음모로 하루아침 왕권을
가로챈 후 한잔 술에 얼근하여 뜨는 달, 지는 해를 읊조리던 리조
500여년의 나날들을 모두 합쳐도 대동강이 흘러온 력사에는 비길바
가 못되였다. 오래고 오랜 세월 비바람 사나운 음산한 나날에도 눈보라
가 아우성치는 모진 겨울밤 두터운 얼음장밑에서도 변함없이 오직 바다
로만 흐른 줄기차고 도도한 흐름이였다.
병진(1916)년 봄 어느날.
안개가 걷히자 대동강기슭에 크지 않은 당두리 한척이 나타났다.
평양을 떠나 대진나루(은률)로 향하는 배였다. 사리발때여서 평양에
서 겨우 백리 벗어난 이곳까지 두물이면 오고 남건만 여섯물잡히는 지
금에야 배는 기진포를 떠난다.
소나무 많은 고장이여서 송림이라고도 하고 일명 화석시, 굴포라고도
부르는 여기 기진포에서 배는 어제 하루 정박했다.

2
무너져내리는 돌산처럼 나라운명이 기울면서 험악하게 급변하는 세월
은 조용하던 이곳 어촌마을을 너무도 놀랍게 변모시켰다. 대동강의
숭어와 서해의 조기, 칼치 등 비린것을 구하려 주변 농부들이 철따라 몇
사람씩 찾아들던 강기슭에 청일전쟁과 로일전쟁을 구실로 쇠벙거지를 뒤
집어쓴 왜놈들이 시꺼멓게 모여들더니 거리와 마을을 타고앉아 산림을
발가벗기고 논과 밭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1904년 2월 21일 일본군 참
모부는 침략의 길을 열기 위해 서울-신의주간철도를 건설한다는 구실
로 군용철도감부를 편성했고 일본군용철도감부는 1904년 10월 29일 송
림에 철도공장을 두기로 했다. 황주-기진포사이에 군수물자용달을
위해 20리안팎의 철길을 놓고나서 기진포주둔 일본군 공병대대장 와다
나베 겐지란 놈은 소좌밖에 못되는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린채 마치 새
로 정복한 대륙을 명명하는 장군들처럼 오만무례하게도 자기의 이름을
따서 《겐지호》(겸이포)란 지명까지 만들어냈다. 와다나베 겐지소좌가
도적질을 목적으로 용감무쌍하게 뚫어놓은 개구멍으로 미쯔비시재벌
을 비롯하여 《대일본제국》의 한다하는 온갖 협잡군, 장사군, 망나니,
지어 뚜쟁이, 기둥서방, 돌파리들까지 일확천금을 꿈꾸며 시체를 본 까
마귀떼처럼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겸이포는 황금에 굶주린 돈벌레들
이 욱실거리고 집잃고 땅떼워 이리저리 밀리우던 사람들이 인부로 끌려
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아우성치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송림에는 《겸
이포》대신 《게걸포》라는 또 하나의 이름이 붙기 시작하였다.
꽝- 꽝-
강기슭둔덕에서 발파소리가 울리였다. 대동강항로운영권을 통채로 거
머쥔 진남포 기선주식회사배들이 며칠째 실어들인 《사꾸라》표 화약상
자더미가 단번에 모두 터지는가싶은 요란하고 위압적인 소리였다.
꽝- 꽈르릉-
발파소리는 한동안 그칠줄 몰랐다.
출항을 서두르던 당두리우의 두 사공은 눈들이 화등잔만 해져 공사장
쪽을 바라봤다. 이곳 배우에서는 월봉산앞의 올망졸망한 산봉우리들
과 대동강둔덕에 한벌 깔리다싶이 한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그
상공에 뽀얗게 떠도는 먼지구름만 바라보였다. 자세히 보면 먼지만이 아
니였다. 공중에 뿌려진 돌쪼각, 흙덩이, 나무뿌리와 함께 발파에 질
겁한 까마귀, 까치, 솔새 등 여러 날짐승의 떼가 광풍에 쫓기는 구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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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흐르고있었다. 아늑한 보금자리를 순간에 잃어버리고 겨우 살아남
은 날짐승들은 수림깊은 월봉산과 송림산 그리고 강건너 룡강의 산발로
필사의 힘을 다해 산산이 흩어지고있었다.
발파의 굉음이 산울림을 일으키며 멀어져가자 날짐승들의 놀란 부르
짖음만 주변의 공간을 한가득 채웠다.
《형님, 이렇게 가선 세월이 없겠수다. 여섯물이면 금산포에 갔을
텐데…》
돛을 손질하던 까까중이달보 이물사공이 발파소리에 불안을 느끼듯 중
얼거리였다. 배길이 지금처럼 네물나마 늦어진것은 날씨나 배탓이 아니
였다. 측량기구궤짝들과 종이, 붓, 먹 등의 잡화를 가지고 배에 오른 짐
주인은 갈길이 급하다면서도 만경대에서 하루, 여기 기진포에서 또
하루 묵어가자고 했다.
배에는 검은 모직양복에 수박색중절모를 쓰고 개화장을 든 짐주인 말
고도 만경대에서 오른 또 한사람의 손님이 있었다. 열두새 무명바지저
고리에 광목두루마기를 입고 옥색숙수오리로 바지대님을 한 젊은 손님
이 이 배 운행의 진짜 주인격이였다. 양복차림의 짐주인이 배값을 물지
만 평양턱밑의 만경대에서 배를 하루 댄것도 이 손님을 태우기 위해서
였고 여기 기진포에서 묵게 된것도 이 손님이 하루일을 본 후 가자고 했
기때문이다.
고물사공은 이 모든것을 잘 알고있고 강기슭의 발파소리에 불안을 느
끼기는 이물사공과 매한가지였으나 아무 응대 안했다. 단발령이 내린지
만 십년이 되였건만 아직 고집스럽게 상투를 틀어얹은 고물사공은 이물
사공보다 십년맏이가 채 못되면서도 이미 철지난 북상투와 다부룩한 수
염때문에 그의 아버지벌로 겉늙어보이였다.
《아하… 바람새가 이거 원… 맞바람이나 치지 않겠는지…》
까까중이달보 이물사공은 까닭모를 불안과 위구가 배길이 늦어졌기때
문에 생겨나기라도 한것처럼 저 혼자 다시 두덜거리였다.
《어험-》
고물사공은 어른들이 하는 일에 오지랖 넓게 웬 참견이냐고 꾸짖듯 마
른기침을 하며 솥뚜껑만 한 껄껄한 손으로 가잠나룻을 썩썩 쓸어만졌다.
한물전에만 떠났어도 배는 꽁무니바람을 달고 지금쯤 남포 앞바다에
나섰을것이다. 바다와 하늘이 한품에 무르녹는 수평선을 바라보면 한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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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후련해지는 배군들이다. 그래서 사자밥을 지고 다니는줄 뻔히 알
면서도 바다를 못 떠나는 그네들이다. 빨리 바다로 나갔으면 하는 갈망
은 고물사공도 이물사공과 다를바 없었으나 그는 배에 오른 두 손님이
범상한 사람들이 아님을 낌새채고있었다.
고물사공은 순뜯이 살담배를 듬뿍 담았던 대통을 꾸룩꾸룩 빨고나서
창나무 한끝에 툭툭 털어 괴춤에 찔렀다.
공연히 퉁까지 맞아 속이 더 요글요글해진 이물사공은 마음속의 불안
과 분함을 삭이느라 꽁무니에 찼던 무명수건을 쭉 뽑아 머리에 질끈 동
이고나서 힘껏 마루줄을 챘다.
바람에 돛이 부풀어오른 배는 닻을 감아올리자 서서히 강물우를 미끄
러졌다.
이때 그치는가싶던 발파소리가 다시 잦아지며 비명 비슷한 소리가 들
려왔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온몸에 오싹 소름을 끼얹게 하는 애절한 소리가 점점 가까와지더니 강
기슭 둔덕의 다박솔밭에 베감투를 쓴 한사람이 나타났다. 한손으로는 흘
러내리는 바지를 쥐고 다른 한손을 머리우로 흔들며 그는 발파에 쫓기
듯 달려왔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그 사나이는 거쉰 목소리로 다급히 부르짖었다. 정신없이 뛰여오던 베
감투는 강기슭의 풀뿌리에 걸려 밑둥 찍힌 나무처럼 앞으로 쓰러졌다.
그 바람에 발에선 엄짚신 한짝이 벗겨져 풋뽈처럼 디굴디굴 굴었다.
엎어졌던 베감투는 땅에서 일어나더니 신을 찾을 경황이 없는지 한짝
짚신만 신고 배를 향해 뛰여왔다.
두 사공은 영문을 몰라 놀란 눈길을 강변의 베감투사나이한테 그루박
았다. 저고리 앞자락이 풀어져 동가슴을 드러내놓은채 한손으로 벗겨지
려는 베감투를 쥐고 한손으로 흘러내리는 바지를 춰올리며 뛰여오는 그
의 모습은 험상궂었다.
방창에 들어가있던 양복차림의 평양손님이 갑판우로 올라왔다.
《무슨 일입니까?》
양복차림의 손님은 개화장을 짚고 이물사공쪽으로 다가섰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처럼 구슬픈 곡소리가 들려오고 배를 향해 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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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사나이뒤로 상여가 바라보였다. 상여뒤로는 베옷입은 십여명의 사
람이 울며불며 따라왔다.
《아이고-아이고-》
《어이구-어이구-》
타고 쓰린 속을 발기발기 찢어내뱉는것 같은 녀인의 애처로운 울음소
리와 허물어져내리는 가슴속에 괴로움을 깊숙이 묻어두는 남정들의
구성진 곡소리가 한데 어울리여 강기슭으로 가까와온다.
고물사공은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배우의 짐주인을 바라봤다. 그는 양
복차림의 짐주인과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그 시선속에 담긴 뜻을 깨닫
고 이물사공을 향하여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닻 놔라!》
무거운 참나무닻이 갑판에까지 물똥을 튕기며 강물에 빠져들어가자 이
물사공은 물가로 다가오는 령구에 조의를 표하듯 서둘러 돛을 내리웠다.
강변의 베감투사나이는 가탈걸음으로 몇걸음 더 물역에 다가서더니 감
탕판에 무릎을 꿇고 풀썩 주저앉았다.
《어르신네 바쁜 길을 방해한 이 죄인을 용서하십시오.》
베감투는 헤쳐지는 두루마기앞자락을 왼손으로 움켜쥐고 오른손으
로 쓰러지는 몸을 지탱하여 작대기버티듯 땅을 짚고 꿇어앉아 머리를 조
아렸다. 수그린 그의 얼굴에선 땀과 눈물이 비오듯 했고 반쯤 헤쳐진 옷
자락사이로 드러난 그의 가슴은 터질듯 오르내렸다.
《왜 그러십니까?》
배우의 양복입은 손님이 물었다.
《네, 고인을 모실데가 없어 그럽니다.》
베감투는 흐느끼듯 뇌이고나서 코가 땅에 닿을듯 머리를 숙이였다.
발파에 놀라 떠들던 까마귀 댓마리가 까욱거리며 대동강지류인 12포
천 상공을 날아지나고 상여는 곡소리와 함께 물가로 점점 다가왔다.
《제철소공사가 선산에 벌어졌습니까?》
《네, 대대로 내려오는 송림 박씨네 무덤자리에 왜놈의 불가사리가 둥
지튼답니다.》
베감투사나이는 이런 변이 어디 있냐고 하소하듯 한손으로 가슴을 싸
쥐고 한손으로 땅을 쳤다. 한참 넉두리끝에야 베감투사나이는 땅에
꿇어앉은채 몸자세를 바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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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개구리 장사지내듯 고인을 물가로 모시게 된 죄인들을 불쌍히 여
겨주십시오. 장쇠형님은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 돌에 치워 돌아가시면서
자기 시체를 강물에 내버리라 유언하였습니다. 장쇠형님마음이 얼마
나 아팠으면 〈죽은 박씨네들이 모두 쫓겨났는데 나만 어떻게 고향땅에
묻히겠는가.〉고 했겠습니까?
하지만 박씨네 무덤을 파내고 제철소를 세우게 된것이 장쇠형님죄라
고 할수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조상을 알아본다고 해도 먹지 않고서야
살수 없으니 공사장에서 일할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조상들의 무덤을 지키지 못해 괴로와하면서 그 벌을 받으려고 한 장
쇠형님의 마음을 모른다고 할수도 없고 상제들의 도리로 고인을 물에 버
려 괴롭힐수도 없어 토론하던 끝에 고향에는 묻지 않되 고향이 빤히 뵈
며 물이 가까운 저 대동강건너 륙명산에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약속했
던 배를 쓰지 못하게 돼서 그러니 불쌍한 이 죄인들을 굽어살피시고 도
와주십시오.》
베감투는 무릎을 꿇고 두손으로 땅을 짚으며 절을 했다.
그러는새 관은 물가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배우에서 강기슭의 상제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양복차림의 곽
춘산은 굽도젖도 할수 없어 관두리에 떼지어 서있는 상제들과 두 사공
을 갈마봤다. 그는 지금 김형직선생을 모시고 가는 길이였다. 평남선이
개통된지 이미 6년, 남포까지 기차를 타고가서 남포에서 배를 구해 은
률로 갈수도 있었지만 김선생께서 이번 려행길에 미쯔비시재벌이 제철
소공사를 벌려놓은 송림읍과 작년 10월에 갓 조업한 구하라광업주식회
사 남포제련소에 들려보시겠다기에 배편을 구했었다. 지금 남포와 은률
에선 사람들이 김선생님을 손꼽아 기다리고있었다.
이물방창에서 언제 갑판우로 올라오셨는지 김형직선생님께서 곽춘
산과 고물사공가까이로 걸어오시였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길이 늦었지만 배머리를 돌립시다. 아무리
갈길이 급해도 한 겨레가 당하는 불행을 보고 그냥 지나칠수야 없지 않
습니까? 죽어서조차 묻힐수 없게 된 송림 박씨네 불행이 나라잃고 당하
는 우리 이천만 백의동포모두의 수난 그대로가 아닙니까.》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비할바없이 분하고 슬픈 마음을 애써 진정하시며
곽춘산과 배우의 두 사공을 향하여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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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보 이물사공은 차고오던 전마선 삭을 풀기 시작했다. 기슭에서
당두리우로 관을 날라오려면 전마선을 써야 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전마선이 물역으로 떠나가자 배머리로 향하시
였다. 눅눅한 강바람이 불어오며 흐린 강물우에 잔주름을 입히고
선생님의 두루마기고름과 옷자락을 날리였다. 선생님께서는 폭넓게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과 강기슭에 파도치며 뻗어간 야산줄기들을 더듬
으시며 배머리에서 움직이실줄 모르시였다.
선생님께서는 이 순간 웬일인지 얼마전 어느 신문에서 보신 금강산 류
정사에서의 금불상도난사건이 불쑥 생각나시였다.
지난 4월 6일 금강산 류정사에 안치되여있던 53개의 불상중에서
금으로 만든 16개의 불상을 도적맞힌것이였다. 일제무단통치의 엄격한
보도검열조건에서도 《한양신문》 등에 이 사실이 널리 소개된것은
도적놈이 칼찬 사무라이들자신이 아니라고 위장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을것이다.
지금 정세와 나라형편은 문화재도난정도가 아니였다.
여기 기진포에 미쯔비시재벌이 수천만원 자금으로 겸이포제철소건
설을 벌려놓은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일제가 지금 군수공업을 발전시키
기 위해 얼마나 피눈이 되여있는가를 잘 말해주고있었다. 일제는 조선
을 침략하기 위해 이미 지난세기말부터 군수공업발전에 박차를 가해왔
었다. 1897년에 1 920만원의 자금으로 야하다제철소를 건설한 군벌들
과 군수독점재벌들은 1899년 구례공창에 특수강로 2기를 설치하였고 시
모세화약제조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00년에는 오사까공창에서 4톤
평로를 조업하였으며 그 다음해에는 이 평로들을 전기로로 개편하여
2년후인 1903년부터 포신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에 미쯔비시재
벌이 미국과 도이췰란드의 재벌들을 등에 업고 벌려놓은 겸이포제철소
는 조선을 영원히 제놈들의 식민지로 만들며 나가서는 대륙침략을 준비
하려는 군벌들의 전략적기도와 결부되여있었다.
일제만이 아니였다. 유미렬강은 지금 세계도처에서 세력을 다투며 거
머쥔 식민지를 자기 손아귀에서 놓지 않으려고 피비린 살륙을 일삼고있
었다. 1916년 4월 26일 영국, 프랑스, 짜리로씨야는 메소포다미야, 씨
리야연안, 아르메니야 분할에 관한 비밀협정을 체결하였고 지난 4월
24일에 선포되였던 아일랜드공화국은 수만의 영국군대에 의하여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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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만에 자기 존재를 마치였다.
이런 형편에서 조선은 과연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수억만 피압박민
중이 살길은 어디에 있는가?
너무도 절박한 물음이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배전으로 밀려드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시
였다.
…누리의 모든 강물을 바다와 대양의 한품에 모으는 지구의 거대한 인
력처럼 온 겨레와 민중의 마음을 하나의 지향속에 결합시키는 그런 힘
은 과연 이 세상에 없을가?
제나름의 신념과 지향, 서로 다른 성격과 취미 그리고 각이한 생
활경로와 습성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합쳐지게 하
는 힘은 무엇이며 수천수만의 마음이 고이게 될 마음의 바다는 과연 무
엇일가?!…
선생님께서 모색하시는 사색의 갈피를 펼쳐보이듯 강바람은 강물우에
어린 당두리와 강변의 산그림자를 지우며 파문을 일으키고 파문은 끝없
이 일고 잦으면서 물속에 비낀 삼라만상을 깨뜨렸다가는 새로 붙여놓고
붙여놓았다간 또 깨뜨리군 하였다.
곡소리가 높아갔다.
높아가는 곡속에 령구를 배우로 끌어올리며 두 사공이 배소리를 했다.
《어야-지야-》
강물만 바라보시던 김형직선생님께서 곽춘산쪽으로 얼굴을 돌리시
였다.
곽춘산은 강건너 산발을 가리켰다.
《저 강건너편에 마주뵈는 산발끝을 애암갑이라 하고 그 맞은편 대안
을 철도라고 하는데 배사람들은 저기를 사공죽이라고 합니다. 배사람들
이 쩍하면 어야지야 소리를 하는것은 죽은 어가성을 가진 사공과 지가
성을 가진 사공을 찾는 소리랍니다. 전설속의 어가사공과 지가사공이 죽
은 곳이 저 애암갑입니다.》
《그렇습니까? 저도 어야지야의 유래에 대한 전설은 들었습니다만 사
공죽이란 곳까지 있는줄은 몰랐습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곽춘산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시며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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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강의 흐름은 마주선 산발앞에 이르러 두갈래로 갈라져나갔다. 왼
켠 갈래는 대동강에 흘러드는 재령강줄기이고 오른쪽이 애암갑을 에돌
아 서해로 향하는 대동강본류이다. 한때 재령강하구의 철도에 칡넝쿨과
딸기덩굴이 우거지고 애암갑에 나무가 무성해 바다에서 대동강흐름을 거
슬러올라오느라면 지류인 재령강보다 대동강본류가 좁아보였다고 한다.
그래 서울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향해가던 한 량반이 애암갑부근에
서 왼켠으로 꺾어올라가야 평양으로 간다는 어가성을 가진 사공과 지가
성을 가진 사공을 역적이라면서 죽여버리고 재령강을 대동강 본류인줄
알고 며칠이나 재령쪽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남겨놓았다.
애암갑과 재령강하구의 철도를 바라보시던 김형직선생님께서는 곽
춘산을 향해 서시였다.
《전설속의 그 어리석은 량반은 갈길을 헷갈려 애매한 사공 두사람을
죽이였지만 이제 우리가 옳은 길을 찾지 못하면 수많은 겨레가 피흘리
게 됩니다. 생활의 갈림길에서 길을 헛든 사람은 잘못하면 일생을 고생
하게 되고 자기가 갈길을 모르는 민족은 나라를 망하게 만듭니다. 갈길
을 옳바르게 가르쳐줄 위대한 령도자를 모셔야 우리는 오늘의 불행에서
벗어날수 있고 우리 민족은 억세여질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마디마디 말씀에선 애타는 절규가 울리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말씀을 끊으시고 곽춘산의 얼굴에 눈길을 못박으
신채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상제들이 서있는 물역으로 눈길을 돌리시며
힘있게 말씀을 이으시였다.
《이제 제철소가 일떠서면 땅잃고 집잃어 떠돌던 사람들이 수없이 여
기로 모여들것입니다. 그네들은 먹고 살기 위해 불속에서 고역에 시달
리겠지만 자기네들을 학대하는 일본 사무라이들과 모든 억압자들을
영영 묻어버릴 커다란 무쇠관을 부어내고야말것입니다. 불로 쇠를 다스
리는 억센 그네들의 힘을 당해낼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네들이야
말로 새로 태여나는 우리 조국의 믿음직한 맏아들이라고 말할수 있습니
다.》
곽춘산은 애타고 쓰린 가슴을 말끔히 씻어줄 소나기를 부르는 번개가
눈앞에 번쩍이는가싶었다.
(새로 태여나는 조국의 믿음직한 맏아들!)
곽춘산은 흥분으로 높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선생님의 말씀을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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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받아외웠다. 곽춘산은 선생님께서 바쁜 길을 여기서 지체하시고
안면없는 상제들의 하소에 그토록 귀를 기울이시는것이 박씨가문의
불행에 대한 단순한 동정때문만이 아니심을 이 순간에야 비로소 깨닫는
가싶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해묵은 갈대들이 설레는 황량한 이 강변
에 울려퍼지는 상제들의 구슬픈 곡속에서 죽어서조차 제 고향에 묻힐수
없게 된 겨레의 피맺힌 원한과 가슴찢는 불행을 호소하는 부르짖음만이
아니라 아직은 봄풀싹보다 연약하지만 세월의 풍파를 헤치고 대들보감
으로 자라날 조국의 맏아들들이 이제 멀지 않아 힘차게 울리게 될 탄생
의 고고성마저 들으시는것이였다.
곡소리와 사공들의 구슬픈 어야지야소리가 그치더니 잠시후 상여며 상
제들이 배우에 올랐다.
아까 강역으로 당두리를 따라오며 고함지르던 베감투사나이가 옷매무
시를 바로하며 배머리로 걸어왔다.
굴대장군같은 사나이는 김형직선생님과 곽춘산앞에 이르러 갑판우
에 덜썩 꿇어엎디여 큰절을 했다.
《귀인들을 만나 우리 형님을 고이 모시게 되였습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그의 곁에 가시여 모꺾어서신채 허리를 굽히
시였다.
《자, 일어서십시오.》
선생님께서 일어나라고 부축여주시였으나 굴대장군같은 사나이는
거듭 허리굽혀 절을 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인사는 이 배의 주인들께 하십시오. 우리는 이 배
에 오른 손님들입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그의 한손을 다정히 잡으신채 돛대옆에 서있는 두
사공을 가리키시였다.
고물사공은 불에 덴 사람처럼 와뜰 놀라며 돛달던 마루줄을 놓았다.
《아니올시다. 저희들은 삯내서 배를 부리는 배군들이올시다. 배주인
은 저 진남포에 있지요.》
북상투에 가잠나룻이 담상담상한 고물사공은 손사래까지 쳤다. 짠
물에 절고 습한 바람에 반들반들 닦이운 사공의 표정에서는 놀라움과 웬
만해 남의 말을 믿지 않으려는 록록치 않은 앙센 고집이 느껴졌다.

11
《아닙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뭇 단호히 부정하시였다.
《진남포에 있다는 그 선주는 돈을 내고 배를 샀을뿐입니다. 이 배의
진짜주인은 배를 다루는 사공들입니다.》
살다 처음 듣는 소리라는듯 두 사공의 눈은 더욱 커지고 자기 설음에
경황없던 상제들과 관을 따라온 사람들도 귀를 강구었다.
굴대장군의 베감투 리곽쇠는 베두루마기자락을 너풀거리며
김형직선생님과 배사공사이로 나섰다. 설음에 지쳤으나 아직 숫기만
은 다 죽지 않은 그였다. 흙이 게발리고 구겨진 베옷차림이였으나 걸까
리진 몸집과 쩍 벌어진 어깨 그리고 불찌같이 이글거리는 두눈에서는 대
바르고 담찬 혈기가 느껴졌다.
《진짜주인이 누구인지 소인은 딱히 알수가 없으나 어르신네들이
아니더라면 고인을 륙명산에 못 모실게 아닙니까. 고맙습니다.》
그는 모두걸이로 거듭 절을 하고나서 관옆에 맥없이 서있는 소년을 불
렀다.
《얘, 고마우신 어르신네들께 맏상제가 인사를 드려야지.》
배우의 모든 사람들은 관옆에 혹처럼 붙어서있는 소년에게로 눈길을
몰방질했다. 깡동하니 돌린 베두루마기밑으로 너덕너덕 기운 바지가
랭이가 몰풍스레 내보이고 두눈이 퉁퉁 부어있는 그의 얼굴에는 온통 노
랑꽃이 펴있었다.
소년은 목이 손회목처럼 가는데다 빳빳한 베두루마기깃에 목이 자꾸
쓸려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처럼 자기 머리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소년의 커다란 베감투는 자꾸만 눈두덩까지 흘러내렸다.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 반나마 허탈상태에 빠져버린 소년은 관습
의 힘으로 무척 힘겹게 나섰다. 어른들이 하라는대로 이미 수십번도 더
절을 하고 절을 받은 소년은 배우에서 제일 웃어른이라고 생각되는
김형직선생님과 곽춘산쪽으로 타박타박 걸어갔다. 두어깨를 푹 떨구
고 고개를 숙인채 힘겹게 움직이는 소년의 모습은 눈물겨웠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절을 하려고 갑판우에 엎디려는 소년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드시였다.
《몇살이지?》
《열셋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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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 비해 소년은 발육이 떴고 그늘아래에서 자란 풀싹처럼 생기도
없었다. 어울리지 않는 베옷과 감투가 소년을 더 잔약하고 가련하게 보
이도록 만드는지도 몰랐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험악한 세월이 이제부터 소년의 어깨우에 실어놓
을 생활의 중하를 함께 나누시는 심정으로 측은히 바라보시다가 조용히
뇌이시였다.
《네가 맏상제란 말이지?》
선생님의 목소리는 애닲게 떨리시였다.
지금까지 사람들의 등뒤에 숨어있던 소년의 어머니가 갑자기 애고소
리를 터뜨렸다. 어린 맏상제는 갑자기 몸을 획 돌리더니 고물쪽으로 달
려갔다. 거기에는 관이 놓여있었다.
송진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관우에는 박장쇠란 고인의 이름이 먹으로
큼직큼직하게 씌여진 발굵은 무명이 덮여있었다.
관옆에는 열살이 되나마나한 또 한명의 어린 소년이 서있었다. 남편
잃은 녀인의 곡소리와 아버지를 찾는 어린 형제의 울음소리는 사람들의
가슴을 허비며 한동안 그칠줄 몰랐다.
숫기좋던 굴대장군도 쿨쩍거리고 세파에 쪼들릴대로 쪼들리워 가물철
의 천둥지기 바닥처럼 감정이 깡그리 말라버린상싶게 목석같은 표정으
로 서있던 천광군들과 두 사공도 슬며시 왼고개를 틀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습기밴 강바람에 두루마기옷고름을 날리시며
갑판우에 서신채 강기슭에 줄느런히 늘어선 우죽비죽한 산봉우리너머 어
딘가 먼곳을 바라보시였다.
잠시후 선생님께서는 관을 안고 쓰러진 소년과 그의 동생에게로 다가
가시였다.
《얘들아, 진정하거라. 너희들은 이제부터 집안어른이다. 집안어른이
그래서는 안된다.》
선생님께서는 두 소년을 부축해 일으켜세우시며 뜻깊이 타이르시였다.
《너희들은 아버지를 잃었고 우리모두는 나라를 빼앗겼다. 목놓아
운다고 세상떠난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하고 망해버린 나라가 일어서지
못한다. 혀를 깨물고 슬픔을 이겨야 한다. 돈많은 놈들은 자기 돈을 믿
고 땅을 가진 지주는 자기 땅을 믿겠지만 빈주먹뿐인 우리야 자기 손발
밖에 믿을게 없지 않느냐. 이제는 너희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을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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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메야 한다.》
김형직선생님의 안광은 비분의 어둠속에서 별처럼 빛나시였다.
북상투 고물사공은 자기가 해야 할바를 스스로 깨달은듯 근엄하게 소
리쳤다.
《마루줄 채라!》
이물사공은 돛대꼭대기로 바싹 돛을 달아올렸다. 고물사공이 창나
무로 키를 틀고 이물사공이 배머리 삼각돛을 돌리자 배는 서서히 머리
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지줄 죄라!》
고물사공은 창나무를 쥐고선채 다시 불같이 호령했다.
맞바람이 불어왔으나 배는 비스듬히 누우며 륙명산을 향해 강물우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당두리는 두리저으며 기진포기슭에서 맞은켠
대안을 향해 점점 멀어져갔다.
장례는 늦게야 끝났다. 륙명산기슭을 떠나는 당두리의 배전에서는 홰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둠속의 당두리는 인간세상에 불을 가져오던
신화속의 프로메테우스처럼 이 땅에 칭칭 내려덮인 어둠을 불태워버리
려는듯 홰불을 담아싣고 월봉산대안으로 움직이였다.
그믐밤 강물우에서 타번지는 저 한점 불꽃이 이 나라 겨레의 가슴가
슴마다에 가득 고인 불행의 피눈물을 말끔히 가시여주고 굳은 쇠를 녹
여 버글버글 끓이며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게 될 그날까지는 오랜 세월
이 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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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아물지 못한 상처

세월은 흘렀다.
박씨네 무덤자리에는 괴물같은 제철소가 자리를 틀었다. 죽은 박씨네
들이 모여들었던 산마루와 그 주변일대의 골짜기, 산기슭에서는 흐린 날
이따금씩 낡은 무덤에서 피여나던 퍼런 린광대신 해탄로와 용광로,
평로들이 순간도 쉬지 않고 삼단같은 불길을 뿜어올리였다. 괴물의
혀바닥처럼 날름거리는 수백의 크고작은 그 불길들은 무덤에서 쫓겨나
정처없이 떠도는 외로운 혼들마저 태워버릴듯 주변하늘을 온통 불그레
물들이였다.
쫓겨난것은 죽은 박씨네들만이 아니였다. 두눈 뻔히 뜨고있던 김씨며
리씨, 송씨, 림씨를 비롯하여 송림산과 월봉산일대에 태를 묻고 살던 수
많은 사람들이 기름진 논과 밭, 숭어떼 욱실거리는 풍성한 어장과 사시
장철 푸르른 산림을 떼우고 집마저 잃은채 쫓겨났다. 수림깊은 월봉의
메부리들과 대동강건너 룡강의 골짜기들로 달아나 새로 굴을 파고 둥지
를 틀었던 산짐승들과 날짐승들마저 낮과 밤이 따로 없이 이글거리는 철
의 지구 불바다와 아츠러운 온갖 굉음에 불안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생명력은 검질긴것이였다. 제철소착공식때 발파에 날리워
강둔덕에 뿌려진 솔방울에서도 새싹이 돋아났다. 쫓기우고 밀리우다 더
는 물러설 자리가 없어 최후의 배수진을 친듯 검푸른 강물이 발치를 씻
는 바위틈에 뿌리내린 소나무, 외로운 이 소나무는 박씨네들의 무덤마
다에 올망졸망 서있던 수백의 비석들을 대신하여 흩날리는 쇠가루와 돌
가루, 탄가루속에서도, 검고 붉고 노란 온갖 빛갈의 매운 연기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 서른에 가까운 해돌이를 그려가고있었다. 이제 겨우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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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기를 맞이한 이 소나무 둘레에서 하나의 먹이를 보고 모여든 수십마
리 독사떼처럼 순간도 쉬지 않고 불혀를 날름거리던 철의 괴물-제철소
가 하루아침 갑작스레 숨통 끊기던 날은 오고야말았다. 상처입은 맹수
의 울부짖음을 무색케 하던 철의 굉음과 하늘마저 그슬리던 그 어마어
마한 불길들이 순간에 사라져버리였다.

1945년 8월말. 요즘 크지 않은 송림역구내는 사람들로 차넘쳤다. 가


는 사람, 오는 사람, 바래는 사람, 마중나온 사람…
사람들의 물결에 떠밀리우듯 역전거리 길목에 한 녀인이 서있었다. 사
람들속에 끼우기를 겁내는 모양으로 녀인은 역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길가에 선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핀다. 역전에서 시내로 향하는 길은
단 하나여서 방금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모두 녀인이 서있는 앞을 지
나갔다. 사람들의 물결에 말리워들었던 녀인의 모습은 썰물때 드러나는
강기슭의 바위처럼 역전거리가 조용해지면 다시 두드러졌다. 녀인은 어
디론가 잠시 사라졌다가도 기차가 도착할 시각이 되면 흰 무명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어김없이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났다. 수수한 차림에 코
째진 고무신을 실로 기워신었건만 녀인의 체격은 균형잡히고 탄력이 넘
치였으며 스물여덟이라는 젊음이 한창인 얼굴은 아릿다왔다. 그의 두눈
엔 웅심깊은 호수의 이끼앉은 바닥처럼 한가닥 애수가 진하게 깔려있었
다. 가슴아픈 상처를 가진 사람들에게서만 볼수 있는 그 짙은 애수에는
야릇한 불안과 오만가지 근심이 뒤엉켜있었다.
이 녀인을 박알뜰이라고 했다. 알뜰한 주부가 되여 남부럽지 않게 살
라고 부모들은 이름도 알뜰이라고 지었건만 부모들의 소박한 이 념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알뜰은 열여덟살나던 해에 일본 고주파중공업주
식회사 성진공장 건설장에서 도십장노릇을 한다는 사람한테 속히워
시집을 갔었다. 알뜰이보다 십년이나 손우인 남편은 바람쟁이였고 협잡
군이였다. 그는 절구통에 속치마가 걸린것만 보아도 입이 헤벌쭉해지는
사람이였고 술과 투전으로 나날을 보내는 위인이였다. 남편을 따라
머나먼 북관땅에 가보니 홀몸이라던 그한테는 세 자식을 거느린 처가 눈
이 시퍼래 살아있었다. 남편은 어디에 내놓아도 별로 빠지지 않는 알뜰
의 얼굴과 육체에 녹아 세방살이 한간을 따로 차려놓았으나 이것은 오
히려 더 큰 불행을 가져왔다. 포악하기 그지없는 본처는 알뜰을 샘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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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이 멀다하게 시앗싸움을 하러 왔다. 본처는 그릇이면 그릇, 밥상이
면 밥상 손에 잡히는대로 가산을 짓부시며 알뜰의 치렁치렁한 머리채를
잡아 태를 치며 피멍이 들도록 온몸을 꼬집고 물어뜯었다.
알뜰은 괴롭게 첩으로 사느니 죽고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번씩 치밀
었으나 그때는 이미 몸이 무거웠었다. 알뜰은 달리는 기차바퀴에 몸을
던지려고 철길까지 찾아갔지만 배속에서 꿈틀거리는 새 생명때문에
그러지 못하였다.
찬비를 맞으며 어둠속의 철뚝에 쓰러져있는 그를 집에까지 안아다준
사람은 남편밑에서 발십장노릇을 하던 고가였다. 알뜰은 살아났으나 고
기덩어리의 향락만을 바라던 남편은 점점 몸이 무거워가는 알뜰이한테
서 매력을 완전히 잃고말았다. 이때부터 남편은 알뜰을 본처와 한집에
살게 했다. 남편의 랭대와 본처의 구박을 받으며 알뜰은 이때부터 문서
없는 종노릇까지 해야 했다.
온몸에 소름돋는 지긋지긋한 싸움속에 자식이 태여나던무렵 투전과 군
계집질로 세월을 보내던 남편은 뜬계집 하나를 낀채 어디론가 달아나버
리였다. 젊은 넋과 육체를 괴롭히던 남편의 손길은 멀어졌으나 알뜰은
녀자를 오직 향락의 대상물로만 보는 패륜과 악덕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남편의 도십장자리를 노리며 아첨하느라 집에 부지런히 찾아
오던 발십장 고가는 알뜰이한테 눈독을 들이고 도십장이 된 후에도 발
길을 끊지 않았다. 본처의 구박에 시달리는 알뜰을 동정도 하고 산후탈
로 앓아누웠을 때 약까지 지어다주며 선의를 베풀던 고가는 황가의 본
처가 아이들까지 데리고 친정나들이를 떠난 어느날 한밤중 불쑥 알뜰이
앞에 나타났다.
그날 밤 고가는 점잖이 이렇게 말했다.
《철뚝에 쓰러진 당신을 인정상 집에 데려다주긴 했는데 불행에 우는
당신을 보게 될 때마다 나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되는구려… 내버
려둔게 오히려 당신한테 좋았을게 아닌가 하구… 원한다면 내 이제라도
당신이 고향에 돌아갈수 있게 힘껏 도와드리겠소.》
알뜰은 남편과 단짝이던 고가의 말이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비내리던
그날 죽으려고 철길을 찾아갔다가 고가의 품에 안겨 집에까지 온걸 생
각하면 고맙다기보다 창피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친절과 호의가 어쨌든
기쁘고 고마왔다. 친절과 호의는 목마르게 바라는 때 때마침 베풀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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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것이 언제나 값지고 효과있는 법이다. 알뜰은 서로 물고 뜯는 험난한
이 세상에서 지팽이에 의지할지언정 사람한테는 함부로 의지하지 말아
야 한다는 말을 여러 사람한테 들어왔었으나 물에 빠져 짚오래기라도 붙
잡으려는 절박한 심정으로 살아오던 때여서 고가의 친절을 받아들이기
로 했다. 알뜰은 어린애를 둘러업고 무작정 고가를 따라나섰다. 그날 밤
고가는 알뜰을 으슥진 뒤골목의 늙은 과부네 집으로 안내했다.
차표를 사가지고 인차 온다던 고가는 다음날 저녁때에야 늙은 과부네
집에 나타났다.
《야단났구만, 당신이 집을 나온 사이에 도적이 들었구만. 황가(알뜰
의 남편)의 녀편네는 당신이 가산을 모두 도적질해가지고 도망쳤다고 파
출소에 신고했소. 고향에 돌아가야 순사들이 가만있지 않을테니까 당분
간 몸을 피해있어야 할것 같소.》
알뜰은 도적의 루명까지 쓰고 불안에 떨어야 했다. 고가는 해쓱하게
질린 알뜰을 넌지시 넘겨다보더니 슬며시 손목을 잡고 어깨까지 두드려
주며 동정하듯 말했다.
《괴로운대로 며칠만 더 참소. 숨어있을만 한 좋은 자리를 얻어줄테
니… 소동이 잦아든 후 나랑 같이 고향에 가기요.》
어쩔수 없는 막다른 처지에서 알뜰이 순응하는 빛을 보이자 고가는 쌔
근쌔근 잠든 알뜰의 아들을 애무해주고나서 물러갔다. 그 시각부터
알뜰은 바깥출입마저 못하며 늙은 과부네 집에 온종일 갇혀있어야 했다.
며칠후 어느날 밤,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다 아들을 끼고 쪽잠이 들었던
알뜰은 앞가슴을 헤집고드는 우악스런 손길에 소스라치듯 놀라 깨여났
다. 같이 누웠던 늙은 과부는 온데간데없고 자기옆에는 흥분으로 얼굴
이 벌개진 고가가 누워있었다. 고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알뜰을
자기 품으로 끌어당기며 달래듯 중얼거렸다.
《내 황가보다 당신을 얼마든지 행복하게 해줄수 있소. 당신만 허락
한다면 난 처와 리혼해버리겠소. 내 당신한테 반한지는 오래였소. 래일
당장이라도 우리 이곳을 멀리 떠나 같이 가서 살기요.》
알뜰은 이때에야 고가한테 유괴당한 자신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고가
가 베푼 친절이 무엇때문이였는가 하는 그 검은 속심을 깨닫는 순간 알
뜰은 필사적으로 항거해나섰다. 그럴수록 고가는 폭력을 행사하려들
며 알뜰을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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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녀자가 없어 내 이러는게 아니야. 너한테 반해서 그러는
거지. 이제 고향에 가야 넌 도적년에 화냥년이라는 굴레를 못 벗어.》
고가의 말은 사실일수 있었다. 이제 고가와 산다고 해서 황가와 살던
때보다 더 나빠지거나 별로 못할것도 없었다. 청춘은 이미 시들었고 온
갖 행복은 산산이 깨져나간지 오래였다. 헌 걸레짝처럼 찢기고 짓밟힌
육체여서 알뜰은 자기 몸에서 누가 팔다리를 잘라간다고 해도 아플뿐이
지 아까울것은 없었다. 그러나 깨끗하게 살려던 마음마저 버리고싶지 않
았다. 돈때문에 순결한 첫사랑을 잃은것만도 분한데 이제 다시 폭력앞
에 유부녀의 정조마저 잃고싶지 않았다. 남편 황가가 헌놈이라고 자기
도 그럴수는 없었다. 죽어도 깨끗이 죽고싶었다.
알뜰은 구렝이처럼 자기 몸에 휘감긴 고가의 팔을 물어뜯었다. 그리
고 문을 차고 밖으로 뛰여나오며 고함을 질렀다.
그날 밤 알뜰은 아들을 둘러업고 정처없이 길을 떠났다. 갖은 고생끝
에 알뜰은 고향에 돌아올수 있었으나 어린 아들은 고가가 수욕을 못 채
운 밸풀이로 걷어차는 바람에 애매하게 화를 입고 커가며 끝내 병신이 되
고말았다. 병신아들은 지지리도 알뜰의 속을 썩이더니 죄많은 이 세상을
일찍 하직하고말았다. 병신아들을 언 땅에 내다묻던 눈보라 사납던 그날
부터 알뜰은 두 동생에 의지하여 살았다. 스물을 갓 넘긴 애젊은 나이에
자식도 없이 혼자 산다는것은 가슴아픈 일이였으나 알뜰은 다시 시집을
가지 않았다. 더없이 귀중하던 사람에게 바치지 못하고 유린당한 사랑과
삶의 단 하나 의탁점이였던 자식에게 못다 기울인 알뜰의 모성다운 정성
은 동생들한테로 고스란히 쏠려졌다. 동생 억봉에 대해서는 특히 그랬다.
억봉은 알뜰에게 있어서 마음의 기둥이였고 행복에 대한 동경과 미래에
대한 희망의 전부였다. 알뜰은 한많게 세상떠난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
하여 단순히 누이로서만 아니라 부모된 심정에서 억봉을 위하고 보살피
였으며 티없이 깨끗하고 순결하던 사랑을 파탄시키고 육체를 파멸시킨 사
회악과 향락의 노리개가 될것을 강요하는 패덕으로부터 보호해주기를 바
라는 연약한 녀성의 마음으로 동생을 믿고 의지했다.
세월은 동생들을 위하여 자기의 한생을 고스란히 바치려는 알뜰의 소
원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억봉은 작년에 징용으로 끌려가고말았다.
알뜰은 억봉이가 징용에 끌려가던 도중 도망쳤다는 소식에 뒤이어 황해
도 어느 광산에 숨어있다는 련락을 받았었다. 그간 몸만 성해있다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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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먼곳에 있는것도 아니니 억봉은 인차 집으로 돌아올것이였다.
알뜰은 징용에 끌려갔던 옆집사람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알뜰은 동생을 기다리다못해 요즘은 매일
이렇게 역전에 나온다.
알뜰이앞으로는 사람들이 쉼없이 흘러갔다. 해방과 함께 장마철에 산
골물나듯 억제할수 없이 불어나는 사람들의 대홍수다. 징용과 보국대,
징병에 끌려갔던 사람들, 살길을 찾아 부득이하게 고향을 떠나갔던
사람들… 쫓기우고 밀리우다 살 때를 만나 부모와 자식, 친척, 친우들
을 찾아 옛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흐름이다.
알뜰은 말뚝처럼 길섶에 우두커니 서서 방금 차에서 내린 사람들을 살
피였다. 기차가 도착하여 갑작스레 불어났던 사람수는 점점 적어져갔다.
차에서 내린 마지막사람들이 가물에 콩나듯 한사람, 두사람 역전 길거
리를 지나간 후에도 알뜰은 선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비여가는
거리에는 휴지쪼각들과 쓰레기만 지저분하게 널렸다.
알뜰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거밋거밋한 역사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송
림역은 두개 역밖에 되지 않는 곁가지 철길의 마지막역이여서 도착했던 렬
차가 잠시 머물렀다가 돌아서면 다음차시간이 될 때까지 조용해진다.
빽-
방금전에 도착했던 렬차는 벌써 되돌아간다.
알뜰은 이미 닫겨버린 나들문에 다가서서 떠나는 기차를 물끄러미 바
라봤다. 역구내도 비였다. 이번 차에도 동생은 오지 않았다.
알뜰은 허전하다못해 허물어지는것과 같은 서운한 심정으로 되돌아섰
다. 무거운 짐을 지고 역전기다림칸에서 나오던 짐군 하나가 알뜰을 보
고 알은체를 했다. 동생 억봉이와 함께 일하던 우학이였다. 우학은
앞으로 억봉이의 처남이 될 사람이다. 징용에 끌려가기 며칠전 억봉은
우학의 동생 계향이와 벼락약혼을 했다.
어리무던하고 수집음을 잘 타는 우학은 지게우에 무거운 트렁크를 올
려놓고 머리만 한번 끄덕해보이였다. 알뜰은 오늘따라 우학이한테라
도 말을 건네보고싶었으나 그보다 둬걸음 뒤떨어져오는 다른 짐군이 말
을 거는 바람에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였다.
《오늘 또 나왔나?》
빈 지게를 지고 덜렁덜렁 걸어오다 걸음을 멈추는 사람은 《걱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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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학섭이였다. 딸만 주런이 다섯이여서 남들이 아들없다 걱정을 해
주면 《걱정말게!》 하고 대답하군 해서 별명까지 그렇게 붙은 그는 성
미가 타고난 락천가였고 누구나와 잘 어울리는 푸접좋은 사람이였다.
《아저씨도 나오셨나요?》
알뜰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보이였다.
《별수가 있나. 지게라도 져서 로자를 벌어야지…》
요즘은 제철소에 불이 죽어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불때
문에 고생이던 이들은 불이 죽어 또한 고생이다.
《어디에 가시려구요?》
알뜰은 억봉이와 잘 아는 사람과 만난것만도 반가와 다심스러운 심정
으로 물었다.
《해방이 됐는데 고향에 가야 할게 아닌가. 십년만에 어떻게 빈손으
로 고향에 가겠나… 에에… 봉이 김선달 재주를 배웠어야 대동강물이라
도 파는걸…》
《걱정말라》는 슬픈 말도 우스개소리처럼 뇌이며 어깨에서 빈 지게
를 내려놓았다.
알뜰은 이곳 겸이포에서 십년나마 살아오던 《걱정말라》아저씨네
까지 떠난다는 말에 서운함이 북받쳐올랐으나 지금 억봉이도 로자때문
에 아직 못 올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혹시 동생몸에 무슨 일이라도 생
긴것이 아닌가 하던 위구와 근심이 다소 덜리기도 하였다.
《걱정말라》는 파리하고 해쓱해진 알뜰의 모습에서 그의 마음을
읽은 모양으로 담배를 붙여물며 위안하듯 말했다.
《나야 돈벌러 나다니지만 뭘하러 역전에 자주 나오나? 올 사람이야
어련히 오지 않을라구… 억봉이녀석이 뭐 세살난 아이나…》
핀잔하듯 하는 그의 말에서는 후더분한 인정이 느껴졌다.
《삼촌을 바래러 나왔다가…》
알뜰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변명을 했다.
《아니, 준길이가 어딜 갔어?》
《예, 평양에 좀 다녀오겠다구…》
《병치료하려구?》
《무슨 볼일이 있나봐요.》
《원, 사람두… 그 몸으로 어딜 간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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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의 삼촌 박준길은 해방이 되던 날 일본놈 해탄과장의 칼에 어깨
를 찔리웠다. 상처가 아직 아물지 못했건만 삼촌은 급한 일이 있다면서
오늘 아침 뿌등뿌등 길을 떠났다.
《걱정말라》는 담배꽁초를 내버리더니 땅에 내려놓았던 빈 지게멜바
를 한쪽어깨에 걸었다.
《자, 들어가자구… 빨리 억봉이녀석 잔치준비나 하라구. 돌아온
다음엔 늦어… 난 가두 억봉이녀석 잔치떡을 먹고야 갈테니까.》
알뜰은 주학섭을 따라 시내로 향했다.
역전장마당앞에서는 탈춤이 한창이였다. 탈을 쓴 춤군들이 북과 징을
치며 돌아가고 구경군들은 흥에 겨워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거리였다.
탈춤이 벌어진 역전장거리에는 《조선해방 만세!》, 《노래하고 춤추자!
해방의 이 감격을…》이란 글발이 허공에 걸려 바람에 펄럭거리였다.
알뜰은 환희로 들끓는 사람들을 보자 지금까지 초조하고 울적하던 마
음이 풀리면서 이제 멀지 않아 동생이 돌아오고 그와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과 기대가 부풀어올랐다.

불이 꺼진 제철소가 자리잡은 곳을 향해 렬차가 달리고있었다. 림시


변통으로 화차방통을 세개나 더 달았건만 렬차지붕에도 사람들이 하얗
게 붙어있었다.
《그러니 징용가가리(징용을 담당한 서기)하구 계집싸움이라두 했
나?》
렬차가 달리는 방향을 등진채 객차지붕에 모로 엎디여 한손으로 턱을
고인 사나이가 물었다.
《아니요.》
발 굵은 무명잠뱅이에 소매 짧은 적삼을 입고 렬차가 달리는 방향으
로 올방자를 틀고앉은 청년이 머리를 흔들었다.
《게걸포에 살다 녀자때문에 징용딱지를 받았다니 말일세.》
빡빡 머리를 깎고 병색도는 창백한 얼굴로 다리를 꼬부린채 엎디여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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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나이의 호기심은 사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흔히들 《게걸포》라 부
르는 겸이포에 사는 사람이면 너나없이 제철소에 붙어살기마련이였다.
겸이포제철소 직공이면 모두가 담배곽만 한 토목천에 금치훈장비슷한 그
림까지 새겨진 응징사표쪽을 앞가슴에 달고다녀 징용에서 면제되였다.
그들에겐 제철소로동자체가 현지징용이였고 전국각지에서 수많은 사
람들이 그리로 징용에 끌려오는 판이였다.
《벼락약혼을 한데다…》
병색도는 사나이는 청년에게 숨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벼락약혼을 하든 번개잔치를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일본놈 가족법이나 서양풍습엔 4촌누이하구두 살게 됐는데… 쪽발이
들은 자기 처가 죽으면 처제한테 다시 장가든단 말일세.》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는 그는 콩밥덕에 세상형편을 적지 않게 귀동
냥한 모양이였다.
《약혼 못하게 된 녀자였으니까요.》
《아니, 하구 못할 녀자가 어디 있어? 제 마음에 들면 앉은뱅이, 밴
대두 데리구 살구 벙어리, 곰보하구도 볼 재미 다 보는거지…》
살이 쪽 빠진 얼굴은 파리할 정도로 창백했으나 입담만은 거세기 그
지없었다. 감옥밥에 온몸이 쇠약해진 반면에 입만은 오히려 사나와지고
걸죽해졌다. 오뉴월의 시궁창 못지 않게 입이 건 이 사나이는 어느 정
도 식자도 있는것 같았다.
《그러게 억울하다는게 아니나요. 남의 녀편네 덮치구두 뻐젓이 활
개치는 놈은 활개치구 돈만 몇장 있으면 대낮에 기생집에 가서 낮거리를
하는 판에… 그래 내가 그 처녀 손목 한번 줴봤나요. 빌어먹게… 얼굴두
몇번 못 보구 벼락치듯 말혼례만 했는데 그게 왜 죄가 되나 말이예요?》
억봉은 빡빡 머리깎은 사람에게 밸풀이하듯 따지고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그게 잘 리해되지 않아서 자네한테 내 자꾸 묻는게
아닌가? 원참…》
억봉은 욱할 때 같아서는 자기 속을 모조리 드러내놓을것 같더니 길
게 한숨을 내쉬고나서 쓰거운지 입을 다물어버리였다. 그는 렬차주변으
로 흘러지나가는 벌판풍경만 더듬을뿐 고집스레 다문 입을 열려 하지 않
았다. 그는 채 아물지 못한 마음의 상처를 남에게 내보이고싶지 않은 모
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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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색도는 창백한 얼굴의 중머리사나이는 쓸데없는 지나친 호기심이 자
신의 인격에 손해된다고 생각했는지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사나이의 마음은 광고가 아니구 백화점 진렬매대에 벌려놓은 상품
이 아니지. 기쁨두 슬픔두 사나이는 계집처럼 입으로 내뱉을게 아니라
가슴속 깊숙이 묻어두어야 하네. 박군 자네처럼 말이야… 그러게 누군
가는 비밀 많은 사나이가 부러워할만 한 부자라구 하였지.》
그도 한동안 입을 다문채 규칙적으로 울리는 렬차바퀴장단에 귀를 기
울이였다. 우묵한 눈확에서 야릇하게 번들거리는 그의 두눈엔 생각이 깊
었다. 방금전 자신의 입으로 뱉어놓은 말마디에 그의 속마음이 그대로
비껴있는지도 모른다.
그옆에 앉아있는 억봉이도 저 멀리 푸른 하늘에 떠가는 흰구름만 바라
보며 두눈을 쪼프린채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가 실눈을 한것은 맑은 하
늘에서 내려비치는 해빛때문만이 아니였다. 둥실둥실 물결쳐간 높지
않은 구릉들과 누렇게 익어가는 벌판풍경이 가시처럼 아프게 두눈을
찌르기때문이였다. 이번에 렬차가 멎어서는 역에서 통근렬차를 갈아타고
두 역, 장정걸음에 둬시간이면 가닿을수 있는 지척에 고향이 있었다. 지
금까지 그리 먼곳에 가있지 않았건만 올래야 올수 없었던 고향이였다.
억봉은 징용에 걸려 일본으로 끌려가다 가시철조망을 헤치고 부산항
부두에서 도망치던 그날부터 오늘까지 숨어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때
부터 억봉은 농촌마을 야장간에서 대장쟁이노릇도 하고 부두에서 짐도
부리며 두루두루 떠돌아다니였다. 그러다 고향에서 200여리 되나마
나한 광산에 들어박히고말았다. 마가을 찬비가 내리던 그밤 함께 도망
치다 붙들린 4촌동생 기봉은 그후 어떻게 되였는지? 누이와 동생은 지
금 어떻게 살고있는지… 그리고 삼촌네는…
억봉은 모든것이 궁금하였다.
어느덧 렬차는 속력을 늦추기 시작했다. 렬차가 들어서자 역구내는 와
글와글 끓었다. 비좁은 승강대만으로는 어쩔수 없어 열려진 창문마다에
서 사람들이 빠져나오고 짐짝이 올라갔다. 사람들은 땅바닥이 보이지 않
을 정도로 구내에 한벌 쭉 깔리여 이리 밀리우고 저리 밀리웠다.
억봉은 렬차가 멎어서기 전부터 서둘렀건만 겹치고 겹친 사람떼를 헤
쳐나오느라고 온몸이 땀에 푹 젖고말았다. 억봉은 사람들을 뚫고나오기
바쁘게 꽁무니에 찼던 수건으로 땀을 씻고나서 동가슴이 드러나도록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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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짧은 적삼의 앞단추를 풀어제꼈다. 억봉은 어서 빨리 서늘한 그늘을
찾아가고싶었으나 맥빠져버린 필주가 포장도 하지 않은 역구내홈에
풀썩 주저앉는 바람에 어쩌지 못하고 불볕아래 서있었다. 필주는 명태
처럼 바짝 마른 제 한몸을 가누지 못해 고리삭은 늙은이처럼 등을 구부
리고 맨땅에 주저앉아 헐썩거리였다.
《기차 갈아타자면 둬시간 기다려야지?》
필주가 물었다.
《예.》
억봉은 괴나리보짐을 한쪽어깨에 걸고 서서 흥심없이 대답했다.
《자네 국수 좋아하나?》
《좋아하면 어쩌겠어요?》
《성은 왜 내나? 내 박군한테 한턱 쓰려고 그러는데…》
억봉은 필주가 귀떨어진 동전 한잎 없으면서 희떠운 소리를 하는것 같
아 쓰겁게 웃고말았다. 억봉은 삼촌한테 드릴 《미도리》라도 몇곽
사려고 아끼고아끼던 돈을 털어 필주와 함께 곽밥을 사먹고말았다.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는 필주는 기차안에서 까무라쳤었다. 옆에서 앓
는 사람을 모른다고 할수 없어 간호하느라 물도 떠오고 밥도 사먹인것
이 인연이 되여 억봉은 필주와 사귀였고 지금 역시 인정때문에 그한테
발목을 잡혀있는것이다.
필주는 엉치를 털며 땅에서 일어섰다.
《자, 장거리루 가세. 내 국수 사주지.》
《싫수다. 난 기차타지 않구 걸어가겠수다.》
《기차값이 없단 말이지? 걱정말게. 내 차비두 줄테니…》
《고형, 돈있으면 제몸이나 돌보슈. 맛있는 음식두 사자시구 약두 좀
쓰구…》
《여보게, 내가 그렇게 거지발싸개같아 뵈나? 지금까지 자네한테
신세지며 여기까지 왔는데 난 그래 신세도 갚을수 없단 말인가?》
필주가 성을 내는 바람에 억봉은 내키지 않는대로 그한테 끌려가고
말았다. 장마당은 역에서 가까왔다. 때마침 장날이여서 장은 흥성
거렸다. 필주는 장마당입구의 나무그늘밑에 억봉을 세워두며 신신
당부했다.
《박군, 어디 가지 말구 예서 꼭 기다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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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필주는 장마당안으로 사라졌다. 얼마후 나타난 필주를 보고
억봉은 두눈이 둥그래졌다. 빡빡 깎은 그의 머리우에는 고급맥고모가 얹
혀있었다.
《난 너무 더워 이걸 하나 샀네.》
필주는 맥고모를 벗어 몇번 부채질을 하고나서 도로 머리우에 올려놓
더니 안주머니에서 한뭉치의 돈을 꺼냈다.
《자 받게. 이걸 가지고 사고싶은걸 사게.》
《아니, 그 돈 어디서 났수?》
억봉은 초풍할 지경으로 놀랐다.
《달랬지.》
《누구한테서요?》
《사람한테서… 왜 의심스럽나?》
필주는 저고리 웃주머니에서 한장의 명함을 꺼내보였다. 거기에는 한
문으로 쓴 이름이 박혀있었다.

《일본제철주식회사 겸이포제철소 총무부 사원 송표》

다시한번 놀라는 억봉을 보고 필주가 물었다.


《자네 이 사람을 아나?》
《우리 송림땅에 뜨르르한 사람인데요. 그 사람 아버지는 삼화조합장
이구.》
《일본놈 갠가?》
《일본 순사들두 그 사람들앞에선 모자벗구 절했지요.》
《때가 되면 돌려주자고 이름을 알아두려 했댔는데 젠장…》
필주는 송표의 명함을 땅에 던져버리더니 발로 비비고나서 가래까지
돋구어 뱉었다. 억봉은 이 순간에야 필주의 돈뭉치가 송표의 호주머니
에서 털어낸것임을 눈치챘다.
필주는 억봉을 응시하며 돈을 내밀었다.
《아니, 난 싫수다.》
억봉은 필주를 떠밀듯 팔을 뻗친채 손사래를 쳤다.
《걱정말구 받아두라구.》
필주의 나직한 말에서는 복종을 강요하는 위압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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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날 좀도적으로 아는 모양인데 난 손때문이 아니라 머리때문
에 콩밥을 먹던 사람이야, 사상때문에… 내가 오늘 이 돈을 가져온건 옛
날버릇때문인게 아니라 려행길에서 사귄 자네와의 의리와 인정때문이란
말일세. 1년만에 고향에 간다면서 빈손으로 가는 자네 처지가 하두 딱
하구 또 많지도 못한 주머니의 마지막돈을 털어 나를 위해주던 그 마음
이 하두 고마와 빌려온거네. 그래 내 손에 돈이 생기면 돈임자한테 보
내주려구 그 친구 명함까지 뽑았단 말이야…》
필주가 성을 내자 억봉은 미안했다. 옷차림과 생김생김은 초라해도 자
기 인격을 지키려는 도고성엔 공감이 갔고 지난날의 허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솔직성도 마음에 들었다. 의리는 의리로 갚아야 한다는것이 아
버지가 유언처럼 넘겨준 생활신조의 하나였고 열살을 벗어나기 바쁘게
로동속에서 잔뼈가 굵어오며 억봉이자신이 스스로 배운 생활의 진리이
기도 했다. 그렇지만 필주가 주는 돈을 선뜻 받기 어려운 억봉이였다.
《로동판에서 굴러먹었다는게 왜 그렇게 염통이 작나? 금 판 돈두 돈
이구 똥 판 돈두 돈이야. 그러니 계집 손목 한번 못 줴보구 징용에 걸
렸댔지…》
필주의 말은 맞지 않았다. 억봉은 징용을 피해다녔지 징용에 끌려갔던
것이 아니였고 또 순전히 계향과의 벼락약혼때문에 징용딱지를 받았던것
도 아니였다. 하지만 그의 말이 억봉의 자존심을 허비기엔 충분했다.
《뭐라구요?》
억봉이 얼굴을 붉히며 싸움이라도 할듯 대들자 필주는 이죽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이 돈이 정 께름직하면 꾼셈치고 이담에 돌려주면 될게 아닌가?》
《좋수다. 꿔만 주겠다면 내 춤추구 받겠소.》
《그럼 그러세. 자네가 나한테 기차에서 사준 곽밥값만 제하구 돌려
줘야 하네.》
억봉은 돈을 받아쥐였다. 필주는 억봉의 손에 끝내 돈을 들려준게 무
엇이 그리 좋은지 흡족한 미소를 지울줄 몰랐다.
《내 돈 받으러 가겠네.》
두사람은 서로 주소를 알고나서 작별의 손을 잡았다. 이들은 려행길
에서의 이 상봉이 얼마나 공교로운것인지 그리고 자기들의 운명에 무엇
을 가져다주게 될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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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황주는 력사깊은 고장이다. 고구려때에는 동홀(혹은 우동어홀)이라 불


리우고 그후에는 취성군이라고 불리우다가 고려 초기에 황주라고 이름
이 고쳐졌다.
1395년에 서해도가 풍해도로 고쳐지고 1417년부터 풍해도가 황해도
로 불리우게 되였는데 당시 황해도의 도소재지는 황주였다. 리조실록 세
종 지리지에 의하면 황주목의 관할고을이 도호부 1개(서흥), 군이 4개
(봉산, 안악, 수안, 곡산), 현이 1개(신은)인 반면에 해주목의 관할
고을은 군이 1개(재령), 현이 4개(옹진, 장연, 강령, 신천)였을뿐이
고 도관찰출석사(리조시기 각 도에 파견된 지방장관)가 황주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송림은 황주군에 속해있던 면이였는데 제철소가 들어앉으면서 송림땅
에 겸이포읍이 생겨났다. 송림으로 가자면 황주를 거쳐야 하고 송림사
람들이 어디로 가자고 해도 대개 황주를 통과하게 된다. 력사적으로 보
나 지리적으로 따지나 송림은 황주에서 갈라져나간 고장이다.
제철소사람들은 오고가다 여기 황주땅에서 서로 만나는 때가 뜨문했
다. 이번에 억봉이 역시 그러했다. 고필주와 헤여진 후 곧바로 역에 나
와 차를 기다리던 억봉은 차시간이 되기 바쁘게 송림으로 가는 렬차에
남먼저 올랐다. 억봉은 바람이 잘 통하는 출입문 가까운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억봉은 방금전에 황주장마당에서 산 눅거리부채로 연방 부채질
을 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별로 크지 못한 역나들문은 그 무슨 거대한 뽐프처럼 굉장한 빨힘을 갖
고있었다. 나들문은 역사밖에 한마당 널려 서성거리던 사람들을 좁은
구멍으로 빨아들여 구내홈쪽으로 연방 토해놓았다. 뽐프가 뱉어놓은 물처
럼 나들문을 쉼없이 빠져나오던 사람들의 물결이 잠시 뜸해가던 때였다.
여름신사옷차림의 두사람이 전혀 서두르는 기색없이 의젓한 걸음걸이
로 통근렬차를 향해 나들문을 걸어나왔다. 그들이 렬차가까이로 다가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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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억봉은 그들모두가 낯익어보이였다. 억봉은 자기가 앉아있는 창문
가까이로 두사람이 다가오는 순간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저도 모르게 자
라목을 하며 차벽쪽으로 얼굴을 숨기였다. 그들은 송표와 차지훈이였다.
어디에 다녀오는지 두사람 손에는 자그마한 려행가방이 하나씩 들려있
었다. 억봉은 송표가 황주장마당에 나타난 사실을 고필주를 통해 이미
알고있었지만 그를 보자 얼굴이 뜨거워옴을 금할수 없었다. 억봉은
필주가 송표의 주머니에서 털어낸 돈을 받은게 새삼스레 께름직해지면
서 못할짓을 한것만 같은 기분이였다.
(나는 필주한테 돈을 꾸었을뿐이다.)
억봉은 량심의 가책을 덜려고 입속으로 몇번이나 같은 말을 곱씹었지
만 마음 떳떳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억봉이 송림행 통근렬차에 오
를수 있은것도 송표의 그 돈 덕택이라고 할수 있다. 필주한테서 돈을 받
지 않았으면 두정거장 타고갈 기차표마저 사지 못했을 억봉이다.
송표와 차지훈은 억봉이가 앉아있는 차창밖을 스쳐지나 사람들의
물결속에 유유히 사라졌다.
《빌어먹을…》
꽁무니에 수건을 차고있건만 억봉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저
혼자 두덜거렸다. 생각할수록 억봉은 자기 처지가 부아나면서 필주한테
서 빌린 돈을 휴지처럼 구겨 창밖으로 내던지고싶었다. 시간이 흐를수
록 강렬해가며 창대같이 뻗치는 이 반발심은 차지훈때문에 더하다고 할
수 있었다.
억봉은 어려서부터 지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억봉이 어린시
절 해탄구역 세탄장에서 속옷바람으로 쇠질통을 지고 석탄을 나르느라
땀에 미역감던 때 지훈은 흰 운동화에 산뜻한 교복을 입고 계집애들과
히히닥거리며 학교로 오갔었다. 그리고 억봉이 10여년간이나 피땀을 바
치며 애써 벌었던 해탄수리공자리에서 쫓겨나던 때 지훈은 사각모를 쓰
고 일본놈의 안내를 받으며 해탄직장에 기사로 배치받아왔었다. 억봉이
지금까지 징용올가미를 피해 가랑잎속에서 이슬을 맞으며 쪽잠도 자고
남의 집 웃간에서 입김으로 언손을 녹이였다면 지훈은 웬만해 조선사람
이 얼씬조차 못하는 일본인사택지구에서 자기 집을 쓰고 버젓이 살았다.
두사람이 살아온 길과 생활처지는 너무나 달랐다. 지훈에 대한 억봉의
인간적불신과 적대시감정은 누이 알뜰이때문에 더욱 격화되였다.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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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은 차지훈때문에 돌이킬수 없는 커다란 불행의 길을 걸었다.
알뜰은 억봉의 살틀한 손우누이였을뿐만아니라 일찍 부모를 여읜
그한테 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억봉은 누이가 지어준 밥을 먹고
그가 빨아주는 옷을 입으며 연약한 뼈를 굳혔다. 억봉이 징용을 피해다
니던 불우한 그 나날들에 누이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소중한 추억은
생에 대한 한가닥의 희망을 주고 불행에 얼어든 그의 가슴을 따뜻한 봄
볕처럼 어루만져주었었다.
하기에 억봉은 징용을 피해다니며 자기 한몸 건사하기 어렵던 그 나
날에 한푼두푼 모은 돈으로 누이에게 줄 치마감을 사서 여직껏 가지고
다니였다. 지금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의 괴나리보짐속에는 땀내에
절다싶이 하고 갈피갈피 접힌 자리가 바스라질 지경인 치마 한감이 들
어있었다.
통근렬차안은 떠들썩했다. 자기 생각에 흥분한 억봉은 언제 렬차가 떠
났는지 알지 못했다.
《빌어먹을…》
억봉은 송표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던 말쑥한 차지훈의 모습이 떠올라
저자신도 모르게 입속으로 다시 중얼거렸다. 해방이 되여 세상이 뒤집
혔건만 일본놈등에 업혀살던 송표와 차지훈은 여전히 거들먹거리고
자기는 그들한테 축잡혀 밀리운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했다.
《자 고무신 사시오, 고무신… 맵시있는 해창표 고무신.》
보따리장사군이 비좁은 통로를 헤치고 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배가 불
룩한 두개 자루의 아구리를 서로 마주 매서 어깨에 걸고 량손에는 검은
남자고무신과 흰 녀자고무신을 각각 하나씩 든채 보따리장사군은 어떻
게 해서든지 자기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무신 사시오, 고무신! 이 고무신 한컬레만 사서 신으면 천리길도
단숨에 가닿을수 있을것입니다.》
보따리장사군은 쉼없이 구수하게 엮어댔다.
억봉은 방금 황주장마당에서 동생한테 줄 운동화와 누이의 코고무신
을 사서 넣었건만 위축감에서 벗어나려는 반발심에 누이한테 줄 물건을
무엇이건 더 사고싶었다.
《신밖에 없소?》
억봉이 물음에 보따리장사는 벌쭉 웃더니 《왜 고무신밖에 없겠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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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하며 다가왔다. 보따리장사는 억봉이 옆사람한테 량해를 구하
더니 의자에 자루를 내려놓고 그속에서 수건을 꺼냈다.
《늙은이가 써도 좋고 젊은이가 써도 좋은 수건입니다.》
보따리장사는 빗이며 거울도 갖고 다녔다. 억봉은 장마당에서는 남보
기 부끄러워 외면했던 빗이며 손거울, 수건 등 녀자들의 물건을 누이한
테 주려고 샀다. 하지만 누구한테인가 업심을 당하고 수모를 받은것 같
은 분한 마음은 좀해 가라앉지 않았다.
억봉은 두정거장밖에 안되는 려행길이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한지
몰랐다.
억봉은 렬차가 송림역구내에 들어서서 채 멎기도 전에 승강대에서 닁
큼 뛰여내리였다. 도착한 손님들이 승강대에서 내리기 시작하던 때
억봉은 이미 나들문으로 향했다. 나들문밖에 진을 치고 서있던 사람들
중에서 한 지게군이 뛰여왔다.
《여보게, 억봉이!》
중년의 지게군은 빈 지게를 진채 덮칠듯 달려들어 억봉을 끌어안았다.
억봉은 한참만에야 주학섭을 알아봤다.
《아니, 〈걱정말라〉아저씨가 아니예요?》
《이녀석아, 죽지 않고 살아왔구나!》
주학섭은 격해오는 심정을 어쩌지 못해 억봉을 얼싸안고 돌며 그의 어
깨를 툭툭 때리였다. 두사람은 서로 잡은 손을 놓지 못한채 나들문으로
쏟아져나오는 사람들의 물결에 역전 한마당으로 떠밀리웠다.
《아저씨, 그간 건강했나요?》
《건강하지 않구.》
눈물이 글썽해 억봉을 바라보던 주학섭은 갑자기 혀를 내두르며 나무
람했다.
《원, 사람두… 그렇게 오륙이 성하구 눈이 시퍼래있으면서 집에
편지 한장 안했단 말인가. 어제두 자네 누이가 마중나왔댔어.》
억봉은 얼굴이 뜨뜻해왔다. 잔걱정 많고 마음약한 누이가 자기때문에
얼마나 속을 썩였을것인가. 억봉은 집을 떠나 오늘까지 누이나 동생한
테 편지 한장 못했다. 그럴 기회도 별로 없었지만 억봉은 성미가 그리
찬찬하고 다심한 축이 못된다.
억봉이와 마주서있던 학섭은 머리우에 올려놓은 낡은 작업중절모를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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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놓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헤식은 웃음어린 인사를 했다. 억봉은
주학섭이 마치 자기를 알아달라고 하는듯 한 표정으로 미소를 보내는 사
람들이 송표와 차지훈이라는것을 알아보고 눈살이 꼿꼿해졌다. 방금 차
에서 내린 두사람은 인사하는 주학섭을 못 보았는지 아니면 체면 깎일
가봐 알고도 모르는척 하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스쳐지나갔다. 주학섭은
맞갖지 않아하는 억봉의 눈치를 알아채고 변명하듯 중얼거리였다.
《저 사람들이 이제는 제철소에서 제일가는 나리들이네.》
《뭐라구요?》
《해방되자 일본놈들한테서 제철소를 넘겨받아가지고 저 송표씨가 운
영동지회를 조직했네. 차기사는 기술대표위원이지.》
너무도 놀라운 소식이였다. 조선사람이지만 돈과 기술을 휘두르며 제
철소안에서 일본인 못지 않게 세력을 쓰던 저네들이 아닌가.
갑자기 두눈이 퀭해진 억봉을 보고 주학섭은 한숨을 톺았다.
《팔자소관인걸 어떻게 하겠나? 해방이 됐지만 지게골태생이라구
나한테 이런 지게밖에 차례지지 않는걸…》
주학섭은 빈 지게를 추슬러올리였다. 억봉은 이 순간에야 주학섭이 지
고있는 빈 지게를 새삼스레 눈여겨보았다.
《뭘하려 여기까지 지게 지고 나왔나요?》
《해방이 됐다구 팔짱끼구 앉았으면 누가 코아래진상하겠대?》
《제철소에 운영동지회가 조직됐다면서요?》
《조직되면 뭘하나. 돈을 줘야 어쩌지… 아직 8월 초순 임금두 못 탄
판에…》
일제때 제철소로동자들은 한달로임을 두번에 나누어 받군 했었다.
9월달에 접어든 오늘까지 옹근 한달이나 돈 한푼 받지 못했으면 로동자
가정들에서 먹고 살 일이 야단이다.
《언젠 뭐 누가 순순히 돈을 줬소? 가서 내래야지…》
억봉은 주학섭의 빈 지게를 노려보며 당장 무슨 일이라도 칠듯이 욱
했다. 지난 세월 돈없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자기 손발을 놀려서야 먹고
살았지만 날품을 팔아야 하던 막벌이군들과 고정된 일자리를 가진 제철
소직공사이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품을 팔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제철소로동자들은 막벌이군들에 비해 오랜 로동경력을 가진 선배들이라
고 할수 있었다. 로동의 권리가 누구에게나 차례지지 않던 지난 세월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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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소로동자가 되자면 막벌이군을 거쳐 고정인부, 림시직공의 계단을 차
례차례 애써 톺아올라야 했고 로동의 매 계단마다에서 피땀흘리는것은
물론 십장, 오장, 계장 등 별의별 놈들한테 억울한 돈과 술, 뢰물을 먹
여야 했었다. 억봉은 주학섭이 지고있는 빈 지게를 보자 자기네들이 애
써 벌었던 로동의 권리가 차지훈이나 송표같은 제철소 운영동지회 나리
님들에 의해 빼앗긴것 같아 분했다.
억봉은 주학섭의 손목을 끌고 역전마당을 빠지기 시작했다.
역주변엔 지게군과 손달구지군, 소달구지군, 마바리군 그리고 인력거
군 등 물건을 날라주거나 사람을 태워주고 벌어먹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
이 욱실거렸다.
주학섭과 함께 사람들을 헤쳐나오던 억봉은 한 젊은 지게군을 보고 걸
음을 멈추었다. 작대기를 버텨놓고 지게가지우에 커다란 트렁크를 세개
나 올려놓은채 조우학이 지게꼬리를 매고있었다.
억봉은 조우학의 곁으로 다가서서 넙적한 그의 등을 손으로 절썩 때
렸다.
《야, 누렁바지-》
우학은 그제야 허리를 폈다.
《아니, 너 억봉이 아니야?》
《이녀석, 해탄직공이 역전에 나와 삯짐을 져?》
《그간 몸 성했니?》
두사람이 끝없이 상봉의 인사말을 펴놓기 시작하자 우학의 지게옆에
서있던 손님이 몇번 헛기침을 하더니 들으라는듯 중얼거렸다.
《난 시간이 바빠서 그러는데…》
손님은 흰 옷차림에 하얀 중절모를 쓰고 구두까지 흰것을 신어 머리
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새하얀데 손에 들린 단장 하나만이 유독 까맸다.
맞갖지 않게 쳐다보는 억봉의 눈길에 불안을 느꼈는지 신사는 허리춤에
서 회중시계를 꺼내들고 습관적으로 들여다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내 그대신 삯은 후하게 드리겠소.》
조우학이 미안스러워 어쩔줄 몰라하자 억봉은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억봉은 손님을 힐끔 쳐다보고나서 아무말없이 우학의 지게우에서 와락
와락 트렁크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내 삯을 곱으로 드리겠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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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차림의 신사가 사정하듯 하는 말에 억봉은 우학의 빈 지게 멜빵
을 자기의 한쪽어깨우에 걸치며 곱지 않게 대꾸했다.
《우린 제철소로동자지 짐군이 아니요.》
억봉은 우학이며 주학섭을 휘동해가지고 불 죽은 제철소가 자리잡은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걸어가는 길거리 좌우에는 힘있는 글
발들이 나붙어있었다.
《일제와 그 주구들을 타도하라!》
《제철소를 로동자에게!》
그 글발들에 고무되듯 억봉은 주먹을 부르쥐고 힘있게 걸음을 다
그쳤다.

알뜰은 12포천동뚝길로 허둥지둥 걸어갔다. 동뚝길은 제철소로 뻗어


있다.
라웅범이 제철소구내에서 억봉을 보았다는 소식을 집에 와서 전해준
지도 하루가 지났건만 아직까지 동생은 집에 오지 않았다. 억봉을 찾으
러 나간 석봉이도 여직껏 소식 없다. 알뜰은 온밤 뜬눈으로 밝히고나서
이렇게 집을 나섰다.
(왔으면 집에 올게지 어딜 그리 쏘다닌단 말인가?)
알뜰은 동생이 도무지 철있는것 같지 않았다. 집에서 누이가 눈이 까
매 자기를 기다린다는걸 그 애는 생각도 못하는 모양이다. 알뜰은 생각
할수록 동생이 야속스러웠다. 그런가 하면 뒤숭숭한 생각에 마음이
불안스럽기도 하였다.
며칠전 범바위골 아무개네 집에 북쪽에서 도망쳐나오던 일본놈패잔병
들이 달려들어 쌀을 몽땅 털어갔다는 소문이 아직도 짜하고 소우물 어
디선가는 변복한 왜놈헌병 세놈한테 온 가족이 죽었다는 끔찍스런 말도
떠돌았다. 먼데는 둘째치고 준길삼촌도 해방되던 날 한쪽어깨에 온통 피
칠갑을 해가지고 오지 않았던가.
아침해가 퍼진지 얼마 되지 않지만 볕은 벌써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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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메마른 동뚝길에서는 팔싹팔싹 먼지가 피여
오르고 고무신코등에는 어느덧 뽀얗게 먼지가 앉았다. 12포천동뚝길은
조용했다. 하루에 둬번씩 제철소와 석회광산을 오르내리던 빽빽이차
도 요즘은 다니지 않고 주변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오던 사람들도 없어
졌다. 무서운 전염병에 걸렸건만 치료할길 없는 사람들이 황천으로
가는 중간역 비슷한 병막촌으로 쫓겨가던 이 길이고 서로 사랑하면서도
부득이하게 갈라져야 하던 이곳 불고장 청춘남녀들이 괴로운 작별의 마
지막밤을 보내려고 찾아오군 하던 외진 여기다.
송림산과 월봉산에서 흘러내린 길지 않은 열두갈래의 물줄기가 모였
다는 12포천은 원래 제철소변두리를 적시였으나 제철소구내가 확장
되여 지금은 구내 한복판에 끼우고말았다. 그때로부터 맑던 이 물줄기
에는 병막촌의 병균과 주택지구의 오물 그리고 제철소의 페설물이 흘러
들어 강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시궁창이 되여버리였다.
굽이를 돌아서자 제철소의 철탑과 굴뚝들이 바라보였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그 어느 굴뚝에서도 연기는 보이지 않는다. 제철소우 하늘
은 세면이라도 하고난듯 멀끔하다.
알뜰은 황마산기슭에서 걸음을 늦추었다.
커다란 귀때물동이를 이고 한 처녀가 마주왔다. 치렁치렁 땋아내린 처
녀의 실한 머리태는 어깨에 흘러내려 한껏 부푼 흰 저고리 앞가슴에서
가락맞게 잉어뜀을 하고 동이주둥이에서 출렁대며 차넘치는 물방울을 터
느라 처녀의 한손은 물을 차는 제비처럼 부지런히 동이굽을 스쳐쓴다.
물동이를 이고 잽싸게 걸어오는 처녀가 계향임을 알아보고 알뜰은 걸음
을 멈추었다. 이렇게 계향이까지 만나게 해주려고 오늘은 이른아침부터
까치가 뒤울에 찾아와 깟깟 울어댄 모양이다.
《계향이!》
알뜰은 반가움을 억제 못해 나직이 불렀다. 어쩌면 억봉이가 어제 밤
을 계향이네 집에서 보냈는지도 모른다. 억봉은 계향이 오빠 우학이와
죽자살자 하는 사이다. 친구네 집이고 약혼녀가 있는 곳이고보면 아직
거기에 붙박혀있기 쉽다. 그래서 계향은 때아니게 이렇게 물동이를
이고 나섰을수도 있다.
《무슨 물을 이렇게…》
알뜰은 계향의 머리우에서 무거운 물동이를 받아 잠시라도 내려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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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싶었으나 계향은 사양했다.
《오빠옷을 좀 빨려구…》
계향의 대답에 알뜰은 다소 실망했다.
《오빠가 집에 있어?》
《삯짐진다구 어제 아침 나갔는데 밤에두 들어오지 않았어요.》
계향이 오빠가 집에 없으면 억봉이도 거기 없을것은 뻔했다.
《우리 억봉이 못 봤지?》
알뜰이 물음에 계향은 귀밑까지 빨개졌다. 알뜰은 자기가 공연히
물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계향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것이 분명했다.
《억봉이가 돌아왔대.》
알뜰이 속삭이듯 반가운 소식을 알려주었건만 계향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성격이 활발하고 개방적인 그여서 금시 울음이라도 터칠줄
알았는데 계향의 표정은 예상외로 차겁기까지 했다.
《저녁에 집에 오라구.》
알뜰의 따뜻한 청에도 계향은 역시 아무 대답 안했다.
《작은어머니랑 얼마나 기다리는지 몰라… 한번두 안 온다구.》
일이 별나게 되여 너무도 갑작스레 벼락약혼을 치르다보니 약혼 당일
에조차 작은어머니는 조카며느리될 계향을 보지 못했다. 할머니와 어머
니가 안계시는 알뜰이네 집안에서 작은어머니는 녀자치고 제일 웃어른
이다. 피치 못할 딱한 사정으로 번개불에 콩닦듯 약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긴 했지만 후에라도 집안식구될 웃사람들을 찾아왔어야 도리가 바르
다고 할것이였다. 작은어머니가 계향을 나무랄 때마다 그를 적극 두둔
해온 알뜰이였으나 그래도 서분함이 없는것은 아니였다. 랑군될 사람이
귀중하면 그의 가족과 친척들도 중할것이 아닌가?
《그럼 전…》
계향은 좋다싫다는 아무런 응대없이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알뜰은 물
동이를 이고 점점 멀어져가는 계향의 뒤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제철소쪽으로 걸음을 놓기 시작했다.
(무엇때문일가? 혹시 저 애가…)
야릇한 불안에 알뜰의 마음은 뛰놀기 시작했다. 억봉은 계향이와의 상
서롭지 못한 일때문에 어제 집에도 안 온게 아닌지…
알뜰은 새로운 불안이 덮쳐져 설레는 가슴을 안고 제철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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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소정문에는 《일철주식회사 겸이포제철소》라는 낡은 간판이
땅에 떨어져 아직도 딩굴고있었다. 해방되던 날 강철직장 용해공들이 뜯
어버린 간판이다. 쇠가루와 탄가루에 거밋거밋해진 담장과 쇠창살의 무
거운 철문을 바라보자 알뜰은 자기자신도 모를 위압감에 사로잡혔다.
처음 오는 곳이 아니면서도 올 때마다 낯설게 느껴지고 무더운 한여
름에조차 써늘한 기운이 도는 여기다. 교대가 바뀌는 날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동생들의 밥을 싸가지고 찾아오기 얼마였
으며 할퀴우고 뜯기우다 남은 귀떨어진 동전 몇잎의 품삯을 바라고 찾
아오기 또 얼마였던가. 철부지 소녀시절부터 제철소구내를 메주밟듯 해
오던 알뜰이였다. 알뜰은 남들이 따뜻한 봄볕아래 마당에 앉아 조가비
로 땅에 금을 그으며 놀던 한창나이 그 시절부터 장난감조약돌이 아니
라 집짓는데 써야 할 주먹만 한 슬라크자갈을 까기 위해 손에 어랭이와
망치를 들어야 했으며 먼지이는 제철소구내에서 시뻘건 광석이나 시꺼
먼 석탄이 아니면 파철장의 녹쓴 쇠붙이를 주물러야 했다. 제철소구내
는 철부지소녀의 동심과 꿈을 키워준 실생활의 소꿉놀이 유희터였고 숨
박곡질마당이였으며 좁은 부엌을 떠나 넓은 야외에서 시뻘건 쇠덩어리
나 돌덩어리우에 꽁꽁 언 점심밥을 올려놓고 음식 데우는 법을 배우던
동자질의 첫 숙련터였었다. 그러면서도 좀해 마음 붙이기 어려운 제철
소였다. 어머니가 삼십대 젊은 시절에 희고 실한 다리 한쪽을 허벅까지
짤리운 여기였으며 허우대 크고 힘꼴센 아버지가 늘쌍 녹초가 되여 한
숨쉬며 돌아오다 나중엔 뻣뻣한 주검이 되여 거적에 말리운채 들것에 들
려나온 여기였다.
주위는 쥐죽은듯 조용했다. 오가는 사람도 없고 귀가 멍멍해지던
기계들의 동음과 소음도 들려오지 않는다. 알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발볌발볌 출입문쪽으로 다가섰다.
수위간쪽에서 한사람이 뛰여나왔다. 발굵은 무명잠뱅이에 소매짧은 적
삼을 입은 그 사람은 다짜고짜로 알뜰이한테로 뛰여오며 소리를 질렀다.
《누이!》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알뜰은 자기 눈과 귀를 의심하며 걸음을 멈춘
채 마주오는 사람을 멍히 쳐다봤다. 감때사납고 심술고약한 검은 제복
의 수위들이 자리틀었던 곳에서 흰 옷차림의 사람이 나타나는것도 이상
했고 고함소리와 욕설소리만 울리던 여기에서 누이라는 다정한 부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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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는것도 좀해 믿기 어려웠다.
《누이!》
마주오던 사람이 앞을 막아선채 재차 소리를 질러서야 알뜰은 동생을
알아봤다.
《억봉아!》
알뜰은 억봉의 손목을 부여잡으며 갑자기 눈앞이 뿌예와 목갈린 소리
로 부르짖었다.
《누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얘, 그새 몸 성했니?》
두사람은 격정에 자기 말만 말이라고 하며 서로 붙안고 돌아갔다.
억봉은 알뜰을 수위막으로 손잡아끌었다. 오랜 세월 앞으로 스쳐지나
다니면서도 오늘에야 처음으로 들어와보는 곳이였다. 감옥처럼 무시
무시하게 생각되던 수위막안에서 알뜰을 제일먼저 반겨준 사람은 주학
섭이였다. 출입문쪽에 쭈그리고 앉았다 일어서는 사람은 우학이였다. 그
가 일어선 자리에는 역으로 품팔러 가지고 다니던 지게가 눕혀있었다.
방안에 빈 의자가 수두룩하건만 그는 지게등태를 깔고 앉았던 모양이다.
생김생김새가 어리숙하고 말이 적은 농촌태생의 그는 그제 역전에서 만
나던 때처럼 두눈만 끔뻑끔뻑하며 아는체를 했다.
방안사람들과 모두거리로 인사를 하고나서 알뜰은 억봉에게로 돌
아섰다.
《아니, 왔으면 집에 먼저 들릴게지.》
알뜰의 나무람에 억봉은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역전에서 사람들을 만나 곧바로 공장에 오다나니…》
알뜰은 일이 있고 사정이 그래서 억봉이가 집에도 아직 못 왔으리라
는 생각에 말머리를 돌렸다.
《석봉이 못 봤니?》
억봉은 싱긋 웃더니 대답대신 방안 한쪽을 턱질했다. 방안구석에 놓인
나무로 만든 긴 의자에는 한사람이 벌렁 드러누워 코까지 골고있었다.
《어제 형한테 얘기 듣느라구 꼬박 밝혔어.》
주학섭이 사람좋게 웃으며 석봉을 두둔하듯 말했다.
(형을 데려온다는게 여기 와 곯아떨어졌단 말인가.)
석봉을 알아보고 알뜰은 기가 찼다. 억봉은 씨물씨물 웃기만 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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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봉이가 누워자는 긴 의자앞으로 다가갔다. 억봉은 아이들 책보싸듯 둘
둘말아 꾸린 괴나리보짐을 들어 알뜰에게 내밀었다.
《자, 이 안에 누이 치마감이랑 신발이랑 있어.》
《원 애두… 작은어머니나 가져다드려라.》
《작은어머니거두 있지…》
알뜰은 동생의 인정에 가슴이 뭉클했다. 지금까지 죽을지경의 위태로
운 곳을 떠돌아다녔겠는데 언제 이런 생각까지 했단 말인가.
《누이, 이 짐 갖고 먼저 집에 가. 내 저녁에 들어갈게…》
억봉은 자기 보짐을 내밀었다.
《빨리 집으로 가자. 작은어머니랑 찾아와서 얼마나 기다리시게…》
알뜰은 인정헤픈 눈물을 보이고싶지 않아 억봉이가 내미는 보짐을 얼
른 받아안고 반쯤 돌아섰다.
《난 예서 좀 볼일이 있어, 누이가 삼촌어머니한테 말 좀 잘해-》
억봉은 더부룩한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우리 변호사노릇 해주려구 그런다네. 사실 억봉인 우리때메 집에
두 안 가구 역에서 곧바루 여기 왔는데 어디 운영동지회나리들을 만날수
가 있어야지. 이달 로임을 받아야 집에 갈 로자라도 보탤게 아닌가…》
《걱정말라》아저씨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건만 알뜰은 말귀를
알아듣기 어려웠다. 알뜰은 지금 제철소에 불이 꺼져 많은 사람들이 매
일처럼 여기를 떠나가고있으며 떠나는 사람마다 로자때문에 고생하고있
음을 모르는바 아니였으나 자기 동생 억봉이가 어디 가서 무슨 변호사
노릇을 해야 하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목총을 든채 방안 창문가에 앉아있던 젊은이가 누구에게라없이 소리
쳤다.
《저기 운영회가 온다.》
방안사람들의 뭇시선은 창문으로 쏠리였다. 사람들은 제철소 운영
동지회를 흔히 《운영회》라고 불렀다.
수위막 유리창문으로 제철소를 향해 걸어오는 두사람이 내다보였다.
맥고모를 쓴채 앞서 걸어오는 사람은 라웅범의 배다른 처남 송표였다.
그는 가느다란 실테안경을 해빛에 번쩍거리며 그림자를 앞세우고 자못
위풍있게 걸어왔다. 알뜰은 라웅범이네 집에 갔다 먼발치서 그를 본적
있었다. 알뜰은 송표와 함께 오는 사람도 낯이 익었다. 모시난방샤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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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의 그 젊은이는 한손에 부들부채를 들고 송표보다 반걸음 뒤로 떨어
져 조심스럽게 걸어왔다. 그가 제철소정문가까이로 다가왔을 때 알뜰은
차지훈을 알아보고 와뜰 놀랐다.
알뜰은 창가에서 둬걸음 떨어져있었으나 창문으로 그가 들여다볼가봐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억봉이와 주학섭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우학이도 벽에 기대여세
웠던 빈지게를 지고 그들을 따라섰다. 밖으로 나간 사람들은 송표와 차
지훈 둘레로 우구구 모여들었다. 잠시후 사람들은 제철소사무실쪽으
로 밀려갔다. 알뜰은 억봉이가 변호사노릇을 하기 위해 어제 집에도 오
지 않은 리유며 《걱정말라》아저씨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길목을 지
켜 기다린 일에 차지훈이 결부되여있다는것을 깨닫는 순간 상서롭지 못
한 예감에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돈을 내란 말이요, 돈!》


억봉은 송표의 책상을 두팔로 짚고서서 내뱉듯 말했다. 쭉 벌려 책상
을 짚은 그의 고동색팔뚝은 근육이 불거진채 두드리면 짱짱 쇠소리가 날
상싶다. 제철소운영동지회 회장격인 송표는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아 안
경알을 번뜩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여보게 억봉이, 내가 언제 자네한테 돈을 꾼적 있던가.》
《여보시오. 난 당신한테 꿔준 돈 받으러 오지 않았소. 죽도록 일시
킨 값을 내란 말이요.》
억봉의 말소리는 높아졌다.
《내가 언제 자네를 일시켰나?》
송표의 목소리는 높아지지도 커지지도 않았다. 침착하고 뜨직뜨직
한 그의 어조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야유와 멸시가 진하게 풍기였다.
《저… 이 사람은 우리때문에 왔시다.》
주학섭이 겁먹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한걸음 나서며 억봉을 훈수하
고나서 송표에게 멋적은 웃음을 지어보이자 억봉은 한손으로 그를 비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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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웠다.
《일본놈 법에두 일시키면 돈을 주게 됐구 일자리 떼면 퇴직금을 주
게 됐는데 그래 몽땅 잘라먹겠단 말이요?》
억봉은 기차타고 같이 오던 고필주의 말투를 흉내내여 일본법에 가져
다 걸었다.
《그러게 일본법대루 일본놈한테 가서 돈을 달래란 말이요. 나한테는
돈이 없소.》
말주먹이나 한다는 억봉이로서도 송표의 말휘갑을 당해내는수가
없었다.
《돈이 없다면서 어떻게 밤낮 료정에만 다니시오?》
억봉이네를 따라와서 문가에 서있던 더꺼머리 한 청년이 팔을 휘두르
며 삿대질을 했다.
《뭐요?》
송표가 가위다리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두손으로 의자팔걸이를 짚
었다.
《자, 가만- 진정들 하시오.》
지금까지 말없이 자기 책상에 앉아있던 차지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지훈은 점점 험악해가는 방안의 공기를 눅잦히기 위해 억봉이와 송표
의 사이에 끼여들어 로동자들을 설복하기 시작했다.
《여러분들의 딱한 사정은 충분히 리해할수 있습니다. 밀린 로임도 드
리고 집에 돌아갈 로자도 드렸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갓 조직
된 운영동지회에 무슨 돈이 있어야지요. 제철소가 돌아가야 돈도 생길
게 아닙니까?》
차지훈의 말은 틀린데 없었다. 하지만 억봉은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격으로 송표보다도 차지훈이 더 역스럽게 생
각됐다. 억봉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차지훈을 등진채 사람들쪽으로 돌
아섰다.
《가고맙시다. 여기 운영회엔 일본놈때 거들먹거리던 작자들만 모
였소. 일본놈앞잡이들이 우리 사정 봐줄게 뭐요.》
억봉은 소리치고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문쪽으로 걸어갔다. 밀린
로임과 퇴직금을 받으러 운영동지회에 밀려갔던 로동자들은 웅성거리며
복도로 쏟아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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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은 사람들을 휘동해가지고 분김에 밖으로 나왔으나 어디 가서 무
엇을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어제 역전에서 주학섭과 우학을 만나
던 때만 해도 제철소운영동지회에만 가면 밀린 로임과 퇴직금을 받
아내고 당장 무슨 일을 칠것 같은 기분이고 기세였으나 맹랑하기 짝없
었다.
집에도 가지 않고 송표나 차지훈 같은 작자들을 눈이 까매 기다린것
부터가 잘못이였다. 얼마전까지 일본놈한테 붙어살던 송표였고 간판
뿐인 제철소운영동지회였다. 이전 겸이포제철소 소장놈이나 못해도
회계과장 같은 놈을 붙들어 달고쳤어야 돈이 나오든 무슨 수가 생겼을
것이다.
혹시나 해서 억봉의 얼굴을 쳐다보던 사람들은 빈입을 쩝쩝 다시며 랑
패한 얼굴표정으로 흩어졌다.
《주인이 있어야 어쩌지.》
《새 주인이 와야 한다니께…》
사람들은 한숨속에 저마다 한마디씩 웅얼거렸다.
억봉은 답답한 가슴을 누를길 없어 구내산마루를 따라 해탄로가 자리
잡은쪽으로 향했다. 아버지와 삼촌이 걸었고 자기와 동생이 걷던 길, 징
용을 피해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 비오는 아침이나 눈내리는 저녁이나 어
차피 하루에 두번씩 걸어야 하던 길, 관습과 타성의 힘에 이끌리듯 억
봉은 저도 모르게 걷고 또 걸었다. 구내산을 내려서니 대동강기슭을 따
라 올망졸망 자리잡은 해탄로들이 바라보였다. 날마다 보던 로체들이였
고 자기 손금처럼 빤한 해탄지구였건만 이상하게도 눈에 보이는 모든것
마다가 낯설게 느껴졌다. 사시장철 뽀얀 먼지와 매운 연기속에 서있던
로체들에서 지금은 아무런 열기를 느낄수 없다. 상승관굴뚝마다에서 삼
단같은 불길이 솟구쳐오르고 탄화실 문짝들에서 역한 연기가 꾸역꾸역
피여나던 그때에는 범접하기 어려웠고 지금처럼 초라하지 않았다. 타르
에 게발리고 탄가루에 뒤덮인 로체며 세탄장건물, 허공중으로 오고간 연
기에 끄슬린 가스관들, 시뻘겋게 녹쓴 소화전차며 압출대차… 그 어디
에나 황량한 페허의 정적이 깃들었다.
강시처럼 굳어진 로체들을 보자 억봉은 자기자신도 모르게 분기가 울
컥 치밀어올랐다. 저 로체들에 불만 죽이지 않았더라면 한두달로임과 퇴
직금쯤은 식은죽먹기로 뽑아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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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이가 터벌터벌 걸어가는 옆으로는 빈지게 하나씩을 걸머진 주학
섭과 우학이 줄레줄레 따랐다. 억봉은 어제부터 빈지게만 지고 다니는
두사람을 보자 새삼스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대로 역전에서
삯짐을 지였으면 단 한푼이라도 벌어 로자를 보탰을것이 아닌가.
세사람이 해탄구역에 들어섰을 때였다. 난데없이 우학의 작숙 달모가
그들의 앞길을 막아나섰다.
《자네들이였구만.》
달모는 손에 몽둥이를 든채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작달막한
키에 앞이마가 쭉 벗어진 달모는 몸집이 체소해도 온몸에 강기가 흘렀
다. 달모는 무엇인가 경계하는상싶은 긴장을 아직 풀지 못하고있었다.
《왜 그래요?》
억봉은 걸음을 멈추며 의아히 물었다. 달모는 뻔히 세사람을 쳐다보
며 단숨을 몇번 내쉬고나서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지게 지고 작당해 나타나길래 난 단단히 털어가려 오는줄 알았지.》
《예?》
《글쎄 그제는 내가 잠간 뒤보러 갔다오는새 어느 녀석이 사무실현관
에서 전구알을 뽑아가지 않았겠나. 어제 밤엔 비우구 집에 가서 하루 잤
더니 세탄장지붕에서 함석을 다섯장이나 벗겨갔어.…》
억봉은 어제 기차에서 내리는 길로 해탄로에 왔을 때에도 달모를 만
났었다. 할일 없고 답답하니까 그저 여기에 있는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럼 형님은 우릴 도적으로 알았단 말이요?》
주학섭이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지게작대기 쥔 손을 들어 삿대질
을 했다.
《자꾸 도적을 맞히니까 어쩌겠나…》
달모는 변명처럼 웅얼거렸다.
《다 죽어자빠진 해탄로는 지키구 앉아 뭘해요?》
억봉은 아까부터 공연히 부아만 끓어올라 싸움이라도 걸고들듯 일부
러 곱지 않게 한마디 했다.
《그럼 어쩌겠어. 이 숱한걸 그냥 내버려둘수는 없구…》
달모는 괴롭게 한숨을 내쉬였다. 그는 자기 손으로 해탄로를 쌓은 사
람이였다. 이미 허물어버린 낡은 해탄로가 있던 그 시절부터 근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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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해탄로와 함께 불속에 살아온 그다. 어느 로체, 어느 설비나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고 그의 피땀이 깃들지 않은데란 없다. 그는
맏아들이 홍역으로 죽던 때 어느 설비를 조립했고 둘째가 태여나던 때
어느 기계를 보수했으며 마누라가 안질로 고생하던 그해에 무슨 사고가
났었다는 식으로 해탄구역의 모든 설비와 기계들의 경력을 횡하니 알고
있다. 자기 일생의 가장 귀중한 청춘시절이 바쳐진 여기고 잊을수 없는
가슴아픈 추억이 깃들어있는 곳이여서 달모는 모든것이 숨을 죽인 지금
에조차 떠나지 못하며 해탄로주변을 맴도는것이다.
《애당초 불을 끄지 말았어야지요. 왜 불을 껐나 말이예요?》
억봉은 로체들에 불을 죽인 책임이 마치 달모한테 있기라도 한것처럼
따지고들었다. 달모가 해탄로에서 일하던 조선사람치고 기술기능상으로
제일 좌상격이여서만은 아니였다. 이글거리는 해탄로에서 한번 불을 끄
면 그 로체는 허물고 새로 쌓아야 한다. 다른 기계들은 스위치를 껐다
가도 다시 넣으면 돌릴수 있으나 로체들은 그렇지 못했다. 한번 불을 지
피여 열을 높이면 그 로체를 허무는 그날까지 불을 끌수 없는것이 해탄
로를 비롯한 야금로들의 일반적인 특성이다.
행패하듯 억봉이가 들이대는 말에 달모는 가장 아픈 곳을 찔리운 사
람처럼 얼굴을 찡그리였다.
《이녀석, 불이야 일본새끼들이 끄고 달아났지 내가 껐어?》
달모는 얼굴을 붉힌채 마주 어성을 높이였다.
《왜 불을 끄게 내버려뒀나 말이예요?》
억봉은 단순한 승벽심때문이라기보다 분한 마음을 어쩔수 없어 가만
있지 못했다. 일본놈들이 도망가면서 아무리 조업을 중지시켜도 달
모같은 기능공들이 합심해나섰더라면 당분간 로체들을 유지할수 있
었을것이다.
《흥!》
달모는 어처구니없어하며 코방귀를 뀌더니 억봉을 등진채 돌아섰다.
생각할수록 억봉이같은 햇내기한테까지 시비듣고 괄세당하는것이 분
하고 억울한 모양이였다.
《망할것 같으니라구, 더운 밥 먹구 식은 소리 작작해… 무슨 수로 해
탄로를 돌리나 말이야… 해탄로가 뭐 너의 집 부뚜막같아뵈니? 다른건
둘째치구 그래 해탄로 먹일 석탄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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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모의 욕설에 억봉은 한마디도 대꾸를 못했다. 콕스를 구워내자면 석
탄이 이만저만 들어가지 않는다. 그 많은 석탄은 모두가 중국이나 일본
에서 실어오던것이였다. 일본이 망해 나자빠진 오늘 일본이나 만주에 가
서 석탄을 실어올수 없다는건 불을 보듯 뻔한노릇이다. 석탄 없는 해탄
로는 땔감 없는 부엌아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해탄로들에 불을 끄
지 않으면 안될 불가피한 사정과 리유들로 말하면 석탄 말고도 수백수
십가지라는것을 억봉이 역시 모르지 않았다.
달모는 지금까지 손에 들고있던 몽둥이를 획 집어던졌다. 주위에
고요한 정적이 서리고보니 나무때기가 세탄장 철문짝을 때리고 땅에 떨
어지는 소리가 귀에 자못 아츠럽게 들리였다. 달모는 손을 툭툭 털며 억
봉을 등지고 돌아서더니 뒤짐을 진채 가버리고말았다.
억봉은 자기가 공연히 싱거운 소리를 해 남의 아픈 속을 건드린것 같
아 미안했다. 모두가 할일 없어 떠나버리는 이때 오죽하면 혼자 이곳에
남아있으랴.
얼굴이 뻘개져 서있던 억봉은 달모가 있는쪽으로 걸어갔다. 달모는 뒤
짐진채 하염없이 해탄로들을 바라보고있었다. 불죽은 로체들을 바라
보며 움직일줄 모르는 그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아저씨, 내 밸난김에 생각없이 한마디 했수다.》
억봉은 사과를 했으나 달모는 아무 대꾸 안했다.
《형님, 뭘 그렇게 노여움 타슈. 속상해 한마디 한걸 가지구…》
주학섭이 달모옆으로 다가서며 반죽을 치자 달모는 더욱 푸들쩍거리
였다.
《눈앞에서 썩 사라지지 못하겠어?》
달모는 어성을 높이였으나 그쯤에 놀라 물러설 주학섭이 아니였다.
《간떨어지겠시다 원, 썩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형님 놔두구 혼자
가서 넘어가야 먹지요. 그러지 말구 속상한데 가서 한잔 카 합세다. 억
봉이녀석이 집에 돌아온 값으로 한턱 내겠대요.》
주학섭이 팔을 잡아끌자 달모는 침부터 꿀꺽 삼켰다. 술소리만 들어
도 입이 귀밑까지 째지는 달모다. 억봉은 달모한테 거듭 사과를 하고나
서 사람들을 모두 이끈채 자기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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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람들이 방안에서 모두 나가자 송표는 악의에 차서 부르짖었다.


《불한당같으니라구…》
송표는 의자에 앉은채 같은 말을 거듭 곱씹었으나 차지훈은 얼굴이 백
지처럼 하얘져 우두커니 서있다. 억봉이가 뱉아버린 말들은 비수처럼 지
훈의 가슴을 찌르며 자존심을 아프게 자극했고 인격을 발기발기 찢어놓
는것이였다. 지훈은 문을 차고 억봉을 따라나가 그의 멱살을 틀어잡고
조금전에 한 말을 어디 다시한번 해보라고 따귀라도 후려갈기고싶었으
나 애써 자신을 억제했다.
지훈은 기질이 전형적인 점액질이였다. 그는 보통때에는 침착하다
가도 일단 흥분하면 자신을 걷잡기 어려워했다.
지훈은 오늘 저녁에 운영동지회 회의가 있고 회의에서 자기가 제철소
설비실태에 대해 보고해야 한다는것을 잊어버린채 운영동지회사무실
을 나서서 구내산을 정신없이 걷기 시작했다.
일본천황 히로히또가 낮 열두시 방송에서 울며불며 항복연설을 하던
그 다음날 밤 송표가 제철소 운영동지회를 조직하고 기술상무로 초청했
을 때 지훈이 응했던것은 일본놈이 망한 이상 그 누구건 조선사람이 제
철소를 맡아나서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꼈기때문이였다.
지훈은 예나 지금이나 송표가 자기와 처지가 다르다는것을 모르지 않
았다. 지훈은 송표가 술과 녀자를 너무 좋아하며 협잡기가 많다는것도
잘 알고있었으며 사람됨됨을 두고서는 그를 지금까지 은근히 경멸해왔
다. 하지만 조선사람끼리 이 큰 제철소를 맡아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
자면 좋으나 싫으나 송표와도 손을 잡아야 했다. 한때 제철소총무부에
서 과장대리노릇까지 하던 송표였다. 그 누구도 제철소사람들의 기술기
능실태를 전반적으로 알고있지 못했으며 이 큰 제철소를 움직이는데 필
요한 관리운영경험과 지식을 갖고있지 못했다.
지훈은 발가는대로 제철소구내산을 거닐었다. 구내길엔 걸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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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썩풀썩 먼지만 일었다. 별로 흔하지도 무성하지도 못한 구내산의
풀대며 나무잎마다에는 쇠가루와 타르찌꺼기같은것이 날아와앉아 번
쩍거리고 눈길 닿는 곳곳에는 역스러운 갖가지 가스냄새가 아직 그대로
배여있다. 제철소구내산에는 마음을 진정시켜줄만 한 풍경이 없었다. 쇠
를 녹여내고 벼림질을 하느라 근 삼십년 오랜 세월 쌓인 먼지와 슴배인
쇠비린내, 가스냄새때문에 온 제철소가 불이 꺼진 지금에도 공기마저 별
로 맑지 못했다.
제철소구내를 빠져나온 지훈은 사람들과 만나기 싫어 조용한 뒤골목
으로 접어들었다. 지훈은 자기네 집이 있는 사택마을을 바라고 발맘발
맘 걷기 시작했다. 땅만 내려다보면서 발가는대로 걷던 지훈은 시야에
안겨오는 녀인의 치마자락과 코고무신을 보고 머리를 들었다. 서로 길
을 어기기 둬걸음 앞둔 지척에 한 녀인이 비켜서있었다. 물날은 무
명저고리에 까만 숙수치마를 입고 대동아전쟁에 열을 올리던 일철주식
회사측에서 《철강증산》이란 글자까지 박아 제철소직공들에게 하나씩
팔아준 눅거리 토목수건을 이마까지 푹 내려쓴채 서있는 녀인은 알
뜰이였다.
보따리를 끼고선 알뜰의 마디굵은 험한 손과 째진 곳을 꿰맨 고무신
앞코의 실밥에서는 생활의 고달픈 흔적이 뚜렷이 나타났으나 그의
탄력넘치는 몸매와 살결맑은 갸름한 얼굴에서는 아직도 푸르싱싱함
이 느껴졌다.
알뜰은 차지훈의 시선을 얼굴에 받자 몹시 거북해하며 공손히 머리를
숙여보이였다.
지훈은 방금전에 억봉이가 많은 사람들앞에서 자기를 일본놈앞잡이라
고 하던 모욕적인 말마디들이 귀전에 살아와서 알뜰의 인사를 받지 못
했다. 지훈은 가시돋친 눈길로 알뜰을 쳐다봤다. 지훈은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알뜰의 얼굴을 뻔히 바라보며 아무런 인사표시없이 그와
길을 어기였다.
알뜰이와 어기여 몇발자국 앞으로 걸은 후에야 지훈은 랭정한 리성을
찾았다.
(저 녀인에게야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그러지 않아도 시달림과 불
행속에 살아오는 녀인이 아닌가?)
옛날부터 등신들이 종로네거리에서 뺨맞고 으슥진 안국동 뒤골목에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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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눈을 흘긴다고 하였었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돌리였다.
알뜰은 경사진 둔덕길을 천천히 걸어올라가고있었다. 그렇게 보아
선지 머리를 푹 숙이고 땅만 내려다보며 걷는 그의 걸음걸음은 커다란
시름에 눌려 힘겨운듯싶었다.
지훈은 불시에 알뜰이가 측은하게 생각되면서 그한테 던지였던 차거
운 눈길이 가책되였다. 그러자 알뜰이와 억봉이를 처음으로 사귀게
되던 순결한 동심의 나날들이 걷잡을수없이 밀려오는 추억의 파도를 타
고 떠오르는것이였다.

지훈이 열세살 때였으니까 벌써 17년전 일이였다. 그날은 정월대
보름 이른아침이였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때였고 아버지가 경영
하는 철공소 일도 순조로울 때여서 그때 지훈네 생활에는 기름기가 돌
았었다. 세태풍속에 밝은 어머니는 그날 약밥을 지었고 지훈에게 아버
지와 함께 귀밝이술이나 한잔 나눌수 있게 외삼촌을 데려오라고 하였었
다. 어머니가 오늘은 이것을 먹어야 일년내내 이발이 든든하다면서
부스럼 깨물라고 날밤까지 한주머니 넣어주는 바람에 지훈은 이른새벽
집을 나섰다. 안과의사인 외삼촌은 개머루부근에 살았다. 심부름을
가느라고 부지런히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난데없이 뒤쪽에서 자기를
불렀다.
《여, 지훈이-》
지훈은 자기와 한반에 다니는 동무네 집이 여기 어디라는 생각에
《왜 그래?》 하고 대답하며 뒤로 돌아섰다. 지훈의 대답에 알지 못할
쪼꼬마한 녀석이 기다렸다는듯 《내 더위 사라.》 하더니 좋아라 깔깔
웃어댔다.
이때에야 지훈은 어머니가 심부름을 보내면서 길을 가다 누가 찾거든
함부로 대답하지 말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정월대보름날 누가 찾을
때 잘못 대답하면 그 사람이 자기 더위를 파는데 더위를 팔아버린 사람
은 무사해도 더위를 산 사람은 그해 여름 더위에 시달린다는것이였다.
늘쌍 불가까이에 살아야 하는 여기 철의 고장사람들에게는 추위보다도
더위가 더 야단이였다. 일하다 추우면 불곁으로 찾아갈수 있으나 무더
위는 피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아이들한테마저 더위팔기풍속이 류행
하는 이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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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날밤 까먹는 재미에 어머니의 당부마저 까
먹었던 자신을 깨달았으나 이제는 어쩌는수 없었다. 지훈에게 더위를 팔
아버린 꼬마는 커다란 어른저고리를 소매 걷어 입었는데 저고리자락은
외투처럼 무릎을 덮었고 토끼털귀걸이를 한쪽귀에만 걸고있었다. 장
난하다 한짝을 잃어버렸는지 아니면 애당초 한짝밖에 없는지 꼬마는 외
쪽귀걸이를 한채 더위팔아버린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지훈은 꼬마에게 주먹맛이라도 보이고싶었으나 그옆에서 새물거리
는 계집애때문에 그러지 못하였다. 누인상싶은 그 계집애는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얼굴이 꽤나 해사하게 생기였다. 지훈은 그 계집애가
몹시 낯이 익었다.
(망할자식, 어디서 내 이름을 알았을가?)
지훈은 저 혼자 두덜거리며 제 갈길을 가고말았다. 지훈은 그날 오후
학교에 가서야 외쪽귀걸이꼬마곁에 서있던 계집애가 바로 박알뜰이란 자
기네 학교 학생임을 알았다.
(저 계집애가 내 이름을 대줬구나.)
지훈은 괘씸했다. 그 연고는 아니나 그해 여름 지훈은 더위를 먹었고
그때문에 보름나마 고생을 했다. 그런데 박알뜰이 주먹같은 여름귤
몇알을 사들고 병문안을 올줄이야…
이것이 인연이 되여 지훈은 알뜰을 사귀였다. 병이 다 나아 학교에 나
오던 어느날 지훈은 청소바께쯔를 들고 물길러 나온 알뜰을 수도가에서
만나 이렇게 물었다.
《너 어디서 귤이랑 났니?》
《샀지 뭐.》
《어머니한테서 돈을 달래가지구?》
《아니, 노는 날 동생이랑 데리구가서 슬라크자갈을 깠어.》
지훈은 이때에야 제철소 슬라크처리장에 가서 자갈을 한궤짝만 까면
4전씩 벌수 있다는것을 알았고 어느 공일날에는 알뜰이와 함께 가서 자
기도 한나절 일한적 있었다. 그때 지훈은 일생 처음 자기 손으로 직접
번 돈을 가지고 학습장을 샀었다. 지훈은 그 학습장을 알뜰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알뜰은 함께 일해 벌었으니 꼭같이 나누어야 한다면서 말을 듣
지 않았다. 지훈은 그 다음해 정월보름날 알뜰을 다시 만났을 때 이렇
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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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동생 잘있니?》
알뜰은 불시에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알릴듯말듯 고개를 끄덕여보이였다.
《작년에는 정말 안됐어.》
지훈이 노여움을 푼지는 오래였건만 알뜰은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동
생을 대신해서 사과했다.
《안되긴 뭐, 그래서 앓았겠니…》
지훈은 마음이 비단결처럼 고운 알뜰을 한때나마 고깝게 생각해온 자
신이 뉘우쳐졌고 마음이 한껏 너그러워졌다.
《금년에는 더위먹지 말라구 우리 어머니가 묵은나물 많이 해줬어.》
지훈의 어머니는 정월보름날 묵은 나물을 먹어야 더위먹지 않는다면
서 말린버섯과 호박, 고사리를 기름에 맛있게 지져주었다.
《우리두 묵은 나물국 끓여먹었어.》
더위막는 풍속을 따르는데는 알뜰의 어머니가 지훈의 어머니보다
몇배 더 극성스러웠다. 알뜰의 어머니는 무더운 삼복철에조차 뜨거운 해
탄로우에 서있어야 하는 남편과 시동생을 위해 한여름부터 오이꼭지며
가지껍질, 무우잎 같은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정월대보
름날이 오면 더위를 막으라고 묵은나물국을 끓여 온 집안 식구들에게 한
사발씩 안겨주었다. 지훈이와 알뜰은 묵은나물이란 단어의 의미와 내용
을 서로 다르게 말하였지만 자기네 두집이 모두 꼭같은 풍속을 따랐다
는데서 더욱더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것이였다. 그들의 우정은 그해
봄철 학교운동회를 계기로 한결 더 깊어졌다. 운동회는 학교적으로
백군과 청군으로 나누어 진행했는데 알뜰은 지훈이보다 두학년 아래였
지만 같은 청군이였다. 축구경기에 나갔던 지훈은 자기가 뽈을 찰 때마
다 응원석에서 누구보다 응원에 열을 올리는 알뜰을 보았다. 이날 축구
경기에서 지훈은 뽈을 몰고 달려가다 상대방 방어수의 발에 걸려 넘어
지면서 발목을 곱질렀고 팔굽까지 깨졌다.
지훈은 후반전경기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남들은 모두 절정에 달한 축
구경기를 응원하며 열성껏 구경을 하였지만 지훈은 운동장 한구석에 홀
로 떨어져나와 나무둥치에 기대여앉아있었다. 지훈은 흙이 묻고 피가 발
린 팔꿈치를 씻어야겠으나 발목이 퉁퉁 부어올라 움직이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려고 애를 쓰던 지훈은 얼마전부터 알뜰이가 자
기를 안타깝게 남몰래 지켜보고있다는것을 알았다. 지훈은 알뜰에게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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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히 웃어보이였다. 그 웃음에 알뜰은 뒤로 픽 돌아서더니 학교 뒤마당
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잠시후 알뜰은 바께쯔에 찰찰 물을 담아가지고
달려왔다.
《손을 씻어.》
알뜰은 깨끗한 물과 함께 자기가 100메터달리기에서 일등을 하여 상
탔던 새 토목수건까지 내놓았다.
이들의 살틀한 우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지훈이 보통학교를 마치기
앞서 알뜰은 학비난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중학생모자를 쓰게 되면서
부터 지훈은 알뜰을 잊고말았다.
지훈은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아버지의 기업파산으로 학교를 그
만두지 않으면 안되였다.
아버지와 면목있는 잡화상주인은 자기네 상점에 점원으로 오라고
하였으나 지훈은 우유목장 배달원이 되였다. 이른아침 첫새벽에 우유를
배달하고나면 공부할수 있는 시간을 얻어낼수 있었다. 그 시절 지훈은
우유배달여가에 짬짬이 보게 되는 책에서보다 실생활에서 더 많은것을
배울수 있었다.
지훈이 일생을 두고 잊을수 없는 충격을 받았던 그 교훈은 우유배달
부의 평범한 하루생활에서 시작되였었다. 그날은 월말이여서 우유값
을 받아야 했었다.
지훈이 해탄수리계장네 집에 이르러 한달 우유값을 내라 했을 때 그
집 녀편네는 이달에 우유를 절반밖에 받지 못했다면서 값을 반만 내겠
다고 했다. 지훈은 억울했다. 지훈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정확히 우유
를 배달했었다.
다음날 지훈은 일부러 맨나중에 그 집으로 갔다. 자전거 우유구럭에
회수한 빈병만 가득찼을 때 지훈은 마지막우유병을 그 집 대문의 우유
받이턱에 내려놓았다. 그 집에서는 우유받이턱을 대문밖에 만들어놓
고 파란 뼁끼칠까지 해놓아서 그우에 올려놓은 하얀 우유병은 멀리에서
도 잘 나타났다. 지훈은 우유배달자전거를 뒤골목에 세워두고 우유도적
을 지키기 시작했다.
조금 있느라니 가무잡잡한 한 소년이 나타났다. 덕지덕지 옷을 기워
입은 맨발소년이 옷소매로 코를 쑥 훔치더니 해탄수리계장네 대문앞에
서 사위를 두리번거리였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것을 확인하자 소년은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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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져다놓고 그우에 올라서서 우유받이턱우에 놓인 우유병을 재빨리
내리웠다. 소년은 우유병을 품속에 감추며 해탄수리계장네 대문앞을 물
러나기 시작했다. 골목을 지키던 지훈은 소년의 뒤덜미를 덮치였다.
《이놈자식, 네가 우유를 챘댔구나.》
지훈은 해탄수리계장 녀편네한테 당한 모욕을 밸풀이하듯 소년의
뺨을 후려갈기였다.
《도적놈자식, 난 너때문에 우유값을 절반밖에 못 받았다.》
지훈은 고양이같이 생긴 불머리 수리계장 녀편네를 족쳐대는 심정으
로 소년을 또 한대 후려갈기였다.
《아이구, 잘못했어요.》
소년은 뺨을 싸쥔채 대굴대굴 땅에 굴었다. 지훈은 약한 마음에 소년
을 더는 때리지 못하고 어성을 높였다.
《엄살 말아. 이놈, 너 우유 얼마나 챘니?》
《서히 챘어요.》
《거짓말 말아! 해탄수리계장 마나님이 그러는데 열다섯병 챘다더
라.》
《아니예요. 서히만 가졌어요.》
《그럼 세병만 챘는지 열다섯병 챘는지 나리님댁에 가서 물어보자.》
지훈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앞에서 소년을 끌고 해탄수리계장네 집
으로 들어갈 생각이였으나 문을 열고 내다보던 그 집 녀편네가 대문을
걸어버리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였다. 지훈은 해탄수리계장 녀편네며 모
여든 구경군들이 들으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한참 욕설을 퍼붓고
나서 우유배달자전거를 남의 집에 맡긴채 소년을 끌고 그의 집으로 향
했다. 지훈은 소년의 부모에게 자식교양을 잘하라고 톡톡히 망신을
준 후 해탄수리계장네 집으로 데리고 오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면 누구
한테서든지 반달 우유값을 받아낼수 있을것이다. 발버둥치는 소년의 팔
목을 잡아끌고 그의 집에 이른 지훈은 아연해졌다. 소년에게는 어머니
가 죽고 없었다. 다 찌그러져가는 외주물집 부엌에서 젖달라고 칭얼대
는 한살잡이 어린 동생을 업고 동자질을 하다가 어머니를 대신하여 나
타난 소년의 누이는 뜻밖에도 알뜰이였다.
《이새끼, 누가 도적질을 하랬어?》
우유를 챈 소년의 형은 다짜고짜로 동생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언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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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정월대보름날 지훈에게 더위를 팔던 외짝귀걸이소년은 형이래야
열서너살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형구실을 하느라 억봉은 동생 석봉
을 개몰듯 했다.
《성(형)이야! 잘못했어. 나 먹을라구 안 그랬어. 막봉이 줄라구
그랬댔어.》
석봉은 형한테 맞아 코피터진 얼굴을 싸쥐고 땅에 주저앉아 용서를 빌
었다. 열한살 석봉이가 우유병을 가져온것은 주린 자기 배를 채우기 위
해서가 아니였다. 억봉은 동생을 용서하지 않았다. 억봉은 동생을 발길
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였다.
《억봉아! 내가 잘못했다. 석봉이를 때리지 말아.》
알뜰은 배고파 우는 젖먹이동생을 업은채 코피터져 마당에 대굴대굴
구는 석봉을 그러안고 함께 울었다. 그의 등에서는 엄마 잃은 어린것이
배고파 울고 그의 품에서는 철부지동생이 울었다. 동생을 위하려다
도적으로 몰리운 아픔이 어린 마음에도 뺨맞고 걷어채운 아픔보다 클것
이였고 그를 달래는 누이의 마음 역시 제자신이 매맞고 모욕당한것보다
더욱 쓰릴것이였다.
지훈은 증거물로 들고왔던 우유병을 토방우에 슬그머니 내려놓은채 도
망치듯 알뜰네 집을 떠났다.
그후부터 지훈은 기회가 생기는대로 알뜰이네 집에 우유를 배달했다.
하지만 알뜰이네 젖먹이동생은 얼마후 엄마를 뒤따라 이 세상을 떠나가
버리였고 지훈이 역시 배달부노릇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였었다.…
지훈은 돌부리에 걸채이는 바람에 생각에서 깨여났다. 자기는 지금 신
사(일제가 《황국신민화》를 위하여 만들어낸 귀신집)가 자리잡았던 산
릉선을 거닐고있었다. 매달 8일이면 강제로 사람들이 여기로 내몰리워
절을 했었다. 해방되던 날 압연공들이 달려들어 불태우고 부셔버린
신사는 잔해만 남아있다. 그 잔해옆으로는 불꺼진 제철소가 바라보였다.
모든 불길이 꺼지고 동음이 사라져버린 제철소는 하나의 공동묘지를 방
불케 했다. 거무틱틱한 건물들과 지붕들을 게걸스레 처먹다 죽어버린 일
본재벌들의 무덤에 비긴다면 그 주변에 우죽비죽 솟아오른 철탑과 굴뚝
들은 그들의 범죄를 기록한 저주의 비석이라 불러야 할것이였다. 쥐죽
은듯 조용한 제철소전경을 바라보는 지훈은 그 묘지속에 자신의 낡은 잔
해도 섞여있는듯 하여 공기 희박한 굴속에라도 들어선듯 가슴이 답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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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괴로왔다.
불은 불로써 끄는 법이다. 사람들의 모진 아픔도 기쁨이나 즐거움보
다 오히려 슬픔으로 다스려지는지 모른다. 지훈은 일제를 상징하던
신사가 불타버린 둔덕에서 불꺼진 제철소를 바라보며 자신에 대하여 느
끼는 아픔으로 하여 얼마전 억봉이한테 당한 모욕감을 달랠수 있었다.
지훈은 갑자기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자기 마음을 그렇게도 괴롭히던 억
봉의 말마디속에 포함된 정당성마저 시인하게 되는것이였다.
…내가 일본놈들밑에서 억봉이나 알뜰이네보다 잘산것은 사실이 아닌
가. 그 누구보다 천대받고 짓눌리운 그들이 일제를 저주하는것은 응당
할것이고 일본놈밑에서 일해온 나 역시 오해할수 있지 않는가. 매 시각
마다 생존권을 위협당하는 그들이 응당 받아야 할 돈을 내라 하는것도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가.
지훈은 마음을 무겁게 내려덮었던 두터운 얼음장이 봄시위때 쩡 하고
갈라져나가는듯 한 느낌이 들었다. 지훈은 이미 숨죽은 제철소설비와 기
계들을 생각하기에 앞서 사람들을 먼저 먹여살려야 하며 이것이 제철소
운영동지회가 풀어야 할 첫째가는 과업임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우선 자금문제를 풀어야 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라
도 보탬을 주고 떠날수 없어 이곳에 그냥 남아있는 사람들한테 단 몇끼
쌀값이라도 마련해주어야 했다.
지훈은 진저리치며 떠나온 제철소운영동지회 사무실을 향하여 어둠이
깃드는 산릉선을 내리기 시작했다.

기쁜 일을 당해서조차 근심이 앞서는 알뜰이였다. 알뜰은 억봉을


만나는 순간 동생의 몸이 성하다는것을 깨닫게 되자 오만가지 시름이 순
간에 풀리면서 상봉의 기쁨을 달래일 사이도 없이 어서빨리 라웅범네 집
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억봉이 돌아온 오늘같이 기쁜
날을 그냥 보낼수는 없었다. 이제 저녁이면 친척들과 동리사람들이
모여들것이고 또 동무 많은 억봉이 집으로 오면서 혼자 오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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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것도 뻔한 일이였다.
어제 웅범은 억봉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주면서 알뜰이더러
자기네 집에 왔다가라고 하였었다. 그 집에 가야 쌀되라도 들어올수 있
고 술도 몇병 가져올수 있다. 알뜰은 심보사나운 송설자를 생각하면 그
집에 발길 들여놓고싶은 마음이 꼬물만큼도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자기
를 각별히 위해주던 웅범을 생각해 그럴수 없었고 또 당장 사람들이 밀
려들 형편에서 어쩔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동생을 기쁘게 하여줄 생각때문에 때없이 설레이던 알뜰의 가슴에 찬
물이 끼얹어진것은 차지훈의 출현이였다. 알뜰은 제철소정문에서 유
리창문너머로 지훈을 알아보는 첫순간 이상하게도 불안한 예감이 들었
고 억봉이네가 운영동지회로 우르르 밀려가는것을 보았을 때 웬일인지
후두두 가슴이 뛰였었다. 어린시절부터 억봉이와 지훈은 사이가 그리 좋
지 못하였고 그것때문에 두사람 짬새에서 적지 않게 마음고생을 하
여온 알뜰이였다. 알뜰은 까닭을 알수 없는 불안에 서성거리며 오래도
록 제철소정문을 떠나지 못하다가 무거운 걸음으로 라웅범네 집으로 향
했다.
마음꺼려 순조로이 되는 일은 없었다. 웅범네 집으로 가는 길에서 피
해오던 지훈을 만나게 될줄이야.
알뜰은 자기 생각에 골똘했던탓으로 차지훈이 지척에 다가오도록
알지 못했다. 인기척을 느끼고 머리를 들었을 때 지훈은 땅만 내려다보
며 앞으로 걸어오고있었다. 외통길이고 너무도 가까운 거리여서 피할수
가 없었다. 알뜰은 길 한옆으로 비켜선채 그와 어기기를 기다렸다.
그가 머리를 드는 순간 알뜰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보였으나 인사에 대
한 대답으로 멸시에 가까운 차거운 눈길을 온몸에 받았을뿐이였다.
알뜰은 차지훈이 서리기운을 풍기며 자기 옆을 스쳐지난 후에야 떳떳이
마주보지 못한 자신이 후회되였다.
(내가 그 사람한테 무슨 죄라도 지었단 말인가?)
알뜰은 자기자신에 대한 반발과 함께 억봉이와 차지훈사이에 무슨 상
서롭지 못한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바로 그것때문에 지훈은 멸시하
듯 자기를 바라보았을것이다.
알뜰은 한때 지훈을 사랑했었다. 사랑해도 열렬히, 온 심장을 다해 사
랑했었다. 그 사랑은 지심깊이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자기자신도 어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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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북받쳐오르는 깨끗한 감정이였고 헌신적인 열정의 분출이였다.
알뜰은 귀중한 그 감정이 언제부터 자기 가슴속에 자리잡았으며 봄날의
새싹처럼 소리없이 자라올랐는지 알지 못하였다. 알뜰은 젖먹이막내
동생을 연약한 소녀의 몸으로 받아안던 설음많던 그 시절에 슬피 우는
자기를 말없이 위로해주며 생활의 중하에 비틀거리는 자기를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여주는 신비롭고 억센 힘이 이 세상에 있다는것과 그 힘에
대한 믿음이 자기 마음속에 깊숙이 뿌리박혀있다는것을 자기스스로
느끼고 깨달았을뿐이였다.
알뜰은 어머니가 로동재해를 당하던 그때부터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고 불구된 어머니를 대신하여 가정의 어린 주부가 되여야 했었다. 인
정많던 어머니는 무정하게도 젖먹이동생마저 알뜰에게 맡겨버린채 한많
은 세상을 떠나가고말았다.
이 시절에 알뜰이 생활의 무거운 짐을 이겨낼수 있은 힘의 하나는 차
지훈에 대한 열렬한 믿음과 사랑이였었다. 차지훈이 우유때문에 둘째동
생 석봉의 손목을 잡아끌고 집에 왔던 그 다음날 억봉은 토방우에 우유
병이 새로 나타난것을 보고 석봉이가 차지훈이한테 우유도적이라고
끌려오던 분한 마음이 삭지 않아 그것을 발길로 차버리고말았었다.
그 다음날에도 우유병은 토방에 또 나타났다. 매맞고 울던 석봉을 생각
하면 알뜰은 그 우유병에 손이 가지 않았으나 등에 업혀 배고파 우는 젖
먹이막내동생을 생각하면 그렇지 않았다. 젖없는 막내동생에게 그 우유
는 유일한 생명의 담보였다. 하루도 번지지 않다싶이 우유병은 거의 매
일 나타났다.
어느날 알뜰은 아버지에게 우유병의 모든 내막과 사연을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수굿이 머리를 숙인채 올방자를 틀고앉아 뻑뻑 담배만 들이빨
더니 다음날 꼬기꼬기 꾸겨진 돈을 알뜰에게 주었다.
《적지만 어쩌겠니. 이거라두 먼저 줘라. 후에 돈벌어 신세갚는다
고 말해라.》
다음날 알뜰은 아버지가 준 돈을 갖고 지훈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지훈은 언제 왔다가는지 만나기 어려웠다. 알뜰은 벼르고 벼르다 며칠
만에야 지훈을 만날수 있었다. 알뜰은 저고리고름에 싸고쌌던 돈을
내밀었으나 지훈은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후에 더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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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은 적은 돈밖에 줄수 없는 자신이 부끄러웠고 안타까왔다.
《이건 내가 빚진걸 갚는거요.》
지훈은 빙그레 웃었다. 알뜰은 지훈이 자기를 놀리려드는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거짓말이 아니예요. 후에 꼭…》
알뜰은 지훈이 자기 말을 믿지 못해 그런다는 생각에 그를 납득시키
려고 애썼다.
《아니요. 나도 거짓말이 아니요. 알뜰씨는 언젠가 무릎깨진 나에게 수
건을 주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난 아직 그걸 돌려드리지 못하였소.
또 내가 더위 먹었을 때 귤을 사온 신세갚음도 하지 못하구…》
알뜰은 보통학교시절의 운동회가 떠오르고 정월대보름날 더위를 팔던
놀음도 생각났다. 알뜰은 뽈을 몰고 뛰여가는 지훈을 보고 가슴조이던
일이며 그가 상했을 때 놀라던 일 그리고 억봉이한테 더위를 사던 그해
지훈이가 더위먹던 일들이 눈앞에 삼삼 그려졌다. 그때로부터 6년이란
세월밖에 흐르지 않았건만 오늘과 그때가 너무도 인연없어지고보니
알뜰은 모든것이 아득한 옛날일처럼 생각되였다.
그날 지훈은 자전거에 치고다니는 우유구럭에서 먹음직스러운 포도까
지 두송이 꺼내주고 돌아갔다.
알뜰은 잠든 동생을 업고 길에까지 따라나와 골목길로 사라지는 지
훈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했다. 가을도 저물어
가고있었으나 그때부터 알뜰의 가슴속에는 때아닌 봄이 옷자락을 펼치
기 시작했다. 락엽지고 된서리내리는 계절에도 알뜰의 마음속에는
지훈이가 주고간 청포도송이들이 푸르싱싱하게 자라며 나날이 달고 맛
있게 익어가는것이였다. 알뜰은 차지훈이 고맙게 생각될수록 그의
수고를 보상해주고 그한테 동생 우유값을 돌려주고싶었다. 알뜰은
지훈에게 우유값을 물어주기 위해 아버지와 삼촌이 가져다주는 돈을 푼
푼이 쪼개가며 아끼였고 젖먹이동생을 업은채 슬라크처리장에 가서 자
갈을 깠다. 알뜰은 성의껏 한푼두푼 모은 돈을 지훈에게 전할수 없
었다. 알뜰이 두달분의 우유값을 모았을 때 지훈은 우유배달부노릇
을 그만두었다. 망했던 아버지의 기업이 일어서기 시작하여 지훈은 다
시 학교로 가게 된것이다.
알뜰은 지훈이 다시 공부하게 된것이 자신의 일처럼 기뻤다. 알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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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싶었고 힘자라는껏 그를 위해주고싶었다.
지훈은 학교로 떠나기 전날 밤 알뜰을 찾아왔었다. 두사람은 12포천
동뚝길을 함께 거닐었다. 그날은 달도 몹시 밝았었다. 방울산봉우리
우에 걸린 둥근달을 바라보며 두사람은 동뚝우에 그려진 그림자를 이끈
채 걷고 또 걸었다. 말없이 거닐던 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뜰씨, 〈심청전〉을 읽으셨겠지요?》
《네.》
《〈심청전〉에 나오는 몽운사가 바로 저 방울산 맞은편 금산에 있지요.》
지훈은 놋쟁반같은 둥근달이 금시 굴러내릴듯 위태롭게 올라앉은 산발
을 가리켰다. 톱날같이 우죽비죽한 봉우리들은 환한 달빛아래 줄느런
히 파도쳐갔다. 알뜰은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서 황주 복숭아꽃동 심봉사
의 딸에 대한 이야기를 열번도 더 들었고 어느 추운 겨울날 어머니를 따
라 빨래터에 다녀오면서 심청이가 공양미 300석에 자기 몸을 팔게 된것
은 저 몽운사의 고약한 중놈들때문이라고 하면서 어머니가 몽운사쪽을 가
리켜주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였건만 난생처음 그 이야기를 듣는것처럼 지
훈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가 가리키는 곳을 넋없이 바라봤다.
지훈은 시를 읊조리듯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는 심청이같이 효성이 지극하고 마음씨 고운 녀인이 우리 고장에
태여난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부모와 동생들을 위하는 알뜰씨
의 갸륵한 마음이 심청이 못지 않다고 봅니다.》
《아이참…》
알뜰은 어처구니없어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하였다.
《아닙니다. 심청의 갸륵한 정성에 심봉사가 눈을 뜨게 되는것처럼 아
버지와 동생들을 위하여 몸바치는 알뜰씨의 갸륵한 마음에 꼭 행복의 날
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알뜰은 지훈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고맙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되
였으면 얼마나 좋으랴. 춥고 배고파 우는 동생들을 배불리 먹이고 뜨뜻
이 입힐수만 있다면 심청이처럼 자기 한몸을 주저없이 바치고싶었다.
알뜰은 달빛에 동뚝길이 대낮처럼 밝았건만 돌부리를 걷어찼다. 그바
람에 몸의 균형을 잃고 비칠거렸다. 넘어질 정도는 아니였으나 지훈은
옆에서 날쌔게 그의 팔을 부축했다. 알뜰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바로세
운 후에도 지훈은 붙잡은 팔을 놓지 않았다. 그러더니 한손으로 슬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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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의 손목을 잡으며 열에 떠 부르짖었다.
《알뜰씨, 저를 기다려주겠습니까?》
알뜰은 불에 데기라도 한것처럼 손이 화끈거려왔으나 물먹은 솜처럼
온몸이 나른해지는 바람에 꽉 붙든 지훈의 손에서 자기 손을 뽑아내지
못하였다.
《알뜰씨, 저를 기다려주겠다고 한마디만 대답해주십시오. 제 장원급
제하고 돌아오는 리몽룡이처럼 공부 잘해 성공해가지고 알뜰씨한테로 돌
아오겠습니다.》
알뜰은 가슴이 터질듯 활랑거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무슨 일이 생기거든 나한테 꼭 알려주오.》
알뜰은 차지훈이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긴채 공부하러 평양으로 떠나
간후에야 그한테 종시 우유값을 주지 못했다는것을 깨달았다. 학습장이
라도 사서 쓰라고 주머니에 넣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어째서 자기가 그
런 생각을 못하였는지 후회되였다.
그때부터 알뜰은 어서 방학이 되여 지훈이가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손
꼽아 기다렸다. 알뜰은 지훈에게 주려고 모았던 우유값을 싸고싸서
뻘겅뒤주 뒤구석에 깊숙이 넣어둔채 온 가족이 굶주리던 나날에도 그것
을 꺼내지 않았다. 막내동생이 끝내 어머니를 뒤따라가서 불쌍한 동생
을 어머니무덤곁에 묻어주고 돌아오던 가슴아픈 그날에도 알뜰은 지훈
이가 가서 공부하는 평양쪽하늘을 우러르며 마음을 위로하였고 장난세
찬 동생들때문에 속상해 울고싶던 때에도 달밝은 12포천 동뚝길에서 지
훈이가 꼭 행복의 날이 오리라고 하던 말을 생각하여 마음을 눅잦히였
다. 고달프나 그리움에 출렁이며 흘러오던 알뜰의 생활에는 돌연 낭떠
러지가 앞을 막아나섰다. 아버지가 가스중독으로 화상까지 입고 덜컥 눕
게 되자 집안살림은 기둥뽑힌 집처럼 기울면서 온갖 짐을 알뜰의 어깨
우에 지워놓았다. 아직 완전히 굳어지지 못한 알뜰의 연약한 두어깨는
생활의 무거운 그 짐을 혼자 걸머지기엔 너무도 무력하였다. 알뜰이가
앓아누운 아버지와 가정을 위하는 길은 단 하나 자기 몸을 파는것이였
다. 한창 피여나는 알뜰의 미모에 난봉군들과 중매쟁이들이 모여들었다.
잡풀속에 끼운 한떨기 아름다운 꽃송이처럼 젊음에 넘치는 알뜰의 아름
다움은 구차한 살림과 오히려 뚜렷한 대조를 이루어 더 나타났고 알뜰
은 타고난 그 싱그러움과 아름다움으로 하여 남다른 시달림까지 받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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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알뜰이네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중에는 많은 돈을 내놓는 사람들
이 있었다.
녀자는 나이차면 시집가기마련이라면서 작은어머니는 괜찮은 혼처
가 나섰을 때 알뜰의 혼사를 치르자고 했다.
알뜰은 빠질빠질 속이 탔다. 알뜰은 차지훈이 공부하러 떠나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한테 꼭 알리라고 신신당부하던 말이 생각났으나
공부하는 사람한테 쓸데없이 시름을 끼칠것 같아 써놓았던 편지를 발기
발기 찢어버렸다. 이제 얼마 있으면 방학이였다. 방학이 되면 차지훈이
돌아올것이였다. 손꼽아 기다리던 방학이 돌아왔으나 지훈은 알뜰을 찾
아주지 않았다. 어쩔수 없는 막다른 지경에 이르러 알뜰은 억봉에게 구
원을 청했다.
《지훈씨가 왔는가 집에 한번 가봐주렴. 오셨거든 내가 꼭 전할 말이
있다고 알려줘.》
억봉은 누이의 심부름을 하려고 말없이 돌아섰다. 억봉은 어깨가
쩍 벌어진게 벌써 총각꼴이 나기 시작했다. 억봉은 심상치 않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지훈이 장개 간대.》
《뭐라구?》
《잔치날까지 받아놨는데 지훈이가 달아나 소동이 났대.》
알뜰은 가슴이 철렁했다. 자기를 불행에서 구원해주리라고 믿어오
던 지훈자신이 불행에 빠져있을줄이야.
어딘가로 숨어버렸다던 지훈은 부모들이 받아놓은 잔치날을 며칠
앞두고 알뜰이한테 만나자는 쪽지를 보내왔다.
날이 어두우면 12포천 동뚝으로 나오라고 하였으나 알뜰은 지훈의 쪽
지를 받아쥐기 바쁘게 자기들이 처음으로 사랑을 속삭이던 곳을 향해 달
려갔다. 알뜰은 치마폭으로 두무릎을 감싸고 해저무는 동뚝에 앉아
지훈을 기다렸다.
동뚝의 누런 잔디우로 락엽을 굴리며 바람이 불어왔다. 마가을 찬바
람에 잎떨어진 관목의 잔가지들과 마른풀잎들이 애처롭게 떨었다. 차겁
고 쓸쓸한 늦가을의 동뚝이였으나 서쪽하늘가를 물들인 노을만은 아름
다왔다. 알뜰은 붉게 타는 노을을 보자 잊을수 없는 지난날이 걷잡을수
없이 떠올랐다. 차지훈이 우유배달자전거에 치고다니던 우유구럭에서 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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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포도 두송이를 꺼내주고 가던 그때도 저렇게 노을이 아름답게 불탔
었다. 알뜰의 가슴속에 지훈에 대한 그리움의 파도가 출렁이게 되고 희
망과 동경의 그 바다우에 사랑의 꽃구름이 피여나게 된것은 죽은 막내
동생을 위해 차지훈이 우유를 가져다주던 그때부터라고 할수 있었다. 배
고파 우는 동생에게 주라고 말없이 우유를 가져다주던 지훈을 생각할수
록 알뜰은 고마움을 금할수 없었다. 고마운 그 은정에 자기는 무엇으로
보답했던가. 자기 집 토방우에 놓이던 우유병을 생각할수록 알뜰의
두눈에서는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노을이 스러지며 황혼이 찾아왔다. 하늘에는 낮의 여광이 남아 아직
훤했으나 12포천 건너편 산기슭의 수림에는 밤이 갑작스레 찾아든듯 컴
컴했다. 희끄무레한 하늘을 배경으로 드러난 시꺼먼 산릉선은 하늘과 땅
을 가르는 경계만이 아니라 낮의 밝음과 밤의 어둠을 가르고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을 갈라놓는 그 무슨 경계선인상싶었다.
알뜰은 땅거미진 12포천 동뚝의 어둠속에 옹송그리고앉아 자기로
서는 감히 날아오를수 없는 훤한 하늘을 바라보며 울고 또 울었다.
어둠속에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소리는 알뜰이 가까이에
와서 멎었다. 알뜰은 자기옆에 나타난 지훈을 보자 자기를 불행의 어둠
속에서 구원해주려 죽었던 사람이 살아 나타나기라도 한것처럼 놀랍고
반가왔다. 두사람은 자기들이 처음으로 행복의 미래를 함께 꿈꾸던 12
포천 동뚝길을 다시 걸었다. 그밤의 그 길은 두사람이 함께 걸은 사랑
의 마지막밤길이였다. 지훈은 불덩어리같은 손으로 알뜰의 손목을 꼭 잡
은채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알뜰씨,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집에서는 지금 촌부자집 딸한테 장
가를 들라고 야단입니다. 제가 싫다니까 아버지는 이제부터 공부를
못한다고 위협이고 어머니는 양재물을 마신다고 야단입니다.》
알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지훈이가 물어보는 말은 알뜰이자
신이 그한테 묻고싶던 말이였다.
《아, 알뜰씨!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부모들의
말을 따르면 알뜰씨한테 죄를 지어야 하고 장가를 안 들자니 부모들한
테 죄를 지어야 하고… 돈! 돈이 무엇이길래 배움을 좌지우지하고 우리
의 사랑을 이렇게 갈라놓는단 말입니까? 아, 황금에 희생되느니 저
물에 빠져 제스스로 목숨을 끊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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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은 지훈이가 자기를 잊어버려달라고 가시돋친 말로 욕하였더라면
가슴이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을것이였다. 괴롭게 하소하는 그의 말마디
들은 알뜰의 가슴에 흘러들어 물에 섞인 쇠물처럼 무서운 폭발을 일으
켰다. 자신의 불행에 지훈의 불행까지 합쳐진 그 폭발은 자기 한몸 바
쳐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는 자기 희생성을 불러일으켰
다. 알뜰은 이 순간 자기가 지금까지 꺼리던 시집을 가는것이 응당하다
는것을 순간에 결심하게 되는것이였다. 많은 돈을 내놓으며 청혼해온 저
성진 어디선가 도십장을 한다는 사람한테 자기가 시집을 가야만 굶어죽
게 된 가족들을 먹여살릴수 있었고 지훈이도 부모들이 권한다는 녀자한
테 장가들게 할수 있었다. 돈냥이나 갖고있다는 촌부자집 딸한테 지훈
이 장가를 들면 목마르게 바라는 배움을 계속할수 있었고 기울어져가는
집안일도 바로잡을수 있었다. 지훈은 수재형의 총명한 사람이였다.
배우기만 하면 그는 얼마든지 재능을 활짝 꽃피우고 총명을 빛내일수 있
었다. 지금의 형편에서 알뜰이 지훈의 배움에 보탬하는 단 하나의 길은
그가 돈있는 집 딸한테 장가들게 하는것이였다.
알뜰은 꽉 붙들고 놓지 못하는 지훈의 손에서 자기 손을 살며시 뽑아
냈다.
《지훈씨, 저를 잊어주세요. 저는 지훈씨의 사랑을 받을만 한 그런 녀
자가 못된답니다. 저는 이미 돈에 팔리웠어요. 성진사람한테 시집을 가
야 한답니다.》
모든것이 이미 결정되기라도 한것처럼 알뜰의 입에서는 거짓말이
태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알뜰은 본의아닌 괴로운 거짓말을 하고나서 품
속에 소중히 간직했던 만년필을 꺼내였다. 지훈에게 우유값을 돌려주려
고 싸고싸서 보관했던 돈으로 알뜰은 얼마전 일본인백화점에 가서 이 만
년필을 샀었다. 사랑을 고백받던 순간에는 행복에 취하여 잊어버리였댔
으나 서로 영영 헤여져야 하는 괴로운 이 순간에만은 은혜를 잊고싶지
않은 알뜰이였다.
《언젠가 하시던 말씀처럼 공부 잘해 꼭 성공하세요. 부디부디 행복
해요.》
알뜰은 지훈의 학생복 웃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아주고나서 뒤로 돌아
섰다. 비오듯 쏟아져내리는 눈물을 보이고싶지 않아 알뜰은 어쩔수
없는 자기 운명의 길을 가듯 12포천 동뚝길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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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씨- 알뜰씨-》
지훈은 다급히 소리쳐불렀으나 알뜰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도망치
듯 어둠속으로 반달음치였다.…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때 알뜰이가 입었던 마음의 상처는 컸다. 자기 한몸을 주저없이 불
행에 떠맡긴 값비싼 희생은 새라새로운 불행만을 가져왔다. 새로운
아픔은 지난날의 아픔을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알뜰은 아픔으로
아픔을 달랠수 있었다.
사랑의 루각은 허물어져버린지 오래였고 그 루각이 솟아있던 들판마
저 세월의 풍파에 거칠어져버리였다. 우거진 잡초속에 흩어진 기와장들
처럼 아득한 추억의 쪼각들만 드문드문 남아있을뿐이다. 알뜰은 심한 열
병으로 고생하던 환자가 병을 나은 먼 후날 열병의 진통을 느끼지 않는
다 해도 자기가 몹시 앓던 그때를 잊지 못하듯 불행한 첫사랑을 지금도
말끔히는 못 잊고있었다. 그래서 알뜰은 오늘까지 지훈을 만나지 않으
려고 애써 피해왔었다.
모멸에 가까운 지훈의 눈길이 알뜰의 마음속에 던진 파문은 컸다.
알뜰은 가던 길을 잊고 한참이나 길가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먼지이
는 길바닥에 누운 그림자는 아까보다 퍽 길어졌다.
깟깟…
어디선가 저녁까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알뜰은 저녁차비가 늦어
질것 같아 라웅범네 집을 바라고 걸음을 다그쳤다.

해 잘 비치고 바람잔 월봉산자드락에 덩그랗게 솟아있는 기와집 한채


가 바라보였다. 몸채 두칸에 자그마한 사랑이 한칸 달린 그리 크지 않
은 집이건만 주위의 올망졸망한 초가들에 대조되여 까마귀무리속에
끼여든 학처럼 두드러져 대궐같다. 라웅범은 곱사등이 송설자를 처로 맞
는 값에 이 집을 벌었고 대여섯식구 밥술이나 벌어먹일수 있는 운송점
도 차려놓았다. 집과 조금 떨어져 거리쪽을 향해 길게 한일자로 뻗은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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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집이 그 운송점이다. 원래 이 운송점은 한때 차지훈의 아버지가 경영
했었다. 그런것을 여기 겸이포일판에서 이름이 뜨르르한 송기락이 넘겨
받아 시집가는 곱사등이 딸한테 례장감삼아 줘버렸다. 인부를 따로
두지 않고 송기락의 낡은 자동차 한대를 가져다 운송점을 차려놓은데다
장인이 경영하는 조합에 속해 그 운수부노릇을 하다보니 라웅범은 자동
차운전사격이였다. 라웅범은 자동차를 수리한다고 세워놓고 장인 모
르게 슬금슬금 도적짐을 실어서야 제 술값과 용돈을 뽑아냈다.
알뜰은 웅범네 집앞에서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대문은 빠끔히 열려있
었으나 웅범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몰라 알뜰은 선뜻 마당으로 들어서
지 못했다. 웅범의 처 송설자는 등에 커다란 바가지짝을 진것 같이 혹
이 난데다 늘쌍 방안에만 들어앉아있어 얼굴이 재물에 푹 삶아낸 빨래
처럼 하얬고 퍼릿퍼릿한 검버섯이 가득했다. 겉볼안이라고 속마저 잔뜩
꼬부라진 녀인이여서 알뜰은 송설자를 마주보기조차 두려워한다.
열려진 문틈으로 때마침 마당에 나오는 송설자가 보이고 남자의 목소
리가 두런두런 울려나왔다. 알뜰은 웅범이 집에 있는것 같아 조심스럽
게 대문을 열었다. 마당에 서서 사랑방에 앉아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
던 송설자가 표정없는 얼굴로 알뜰을 바라봤다. 알뜰은 머리숙여 공손
히 인사했다.
《아니, 어떻게 네가 다 왔니?》
송설자는 찌물쿠는 날씨인데도 두손을 겨드랑이에 끼며 들어오라
는 소리도 없이 빤히 쳐다봤다. 설자는 언젠가 알뜰이더러 가난한
살림에 군입도 하나 덜겸 자기네 집에 와서 밥이나 해주며 같이 지내
자고 했었다. 알뜰은 안잠지기노릇을 하며 턱찌끼나 얻어먹을바에야 딴
집에 가서 하지 무엇때문에 옹색하게 친척이나 다름없는 집에 와서 하
랴 하는 생각에 좋게 거절했었다. 그때부터 송설자는 알뜰을 더욱
미워했다.
《외삼촌 계시나요?》
《애개개, 조금전에 나갔는데…》
알뜰은 바쁜 구멍 메우려고 찾아온 이번 걸음이 헛물켰음을 직감했다.
알뜰이 인사나 하고 돌아서려는데 문이 열린 사랑방에서 백세루바지
에 발가는 고운 모시 여름옷을 입은 송표가 부들부채를 든채 퇴마루로
나섰다. 송표는 설자의 배다른 오빠다. 송표를 알아보는 순간 알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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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가슴이 섬찍했다. 포악하기 그지없는 제철소경비과의 일본인수위들
도 그만 나타나면 차렷해 서고 제노라던 과장들과 계장들이 추파를 던
지며 갑신거리던 송표다. 알뜰이 온몸이 서늘해져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이자 송표는 퇴마루에 버티고 선채 송설자쪽으로 누구냐고 묻는
눈길을 던지였다.
《시생질벌이 되네.》
송설자는 얼마나 알량맞게 생긴 친척이 찾아왔는가를 보라는투로
시답잖게 뇌이였다. 천만뜻밖에도 송표는 얼른 퇴마루아래로 내려서
며 살갑게 인사를 했다.
《아, 그렇습니까?》
송표는 제 혀라도 뽑아줄것 같은 표정이고 태도였다.
《자, 방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아마 요즘은 서늘하기가 방안이 바
깥보다 나을겝니다. 누인 뭘하고있소? 얼른 방으로 모시지 않구…》
송표는 부들부채 든 팔을 흔들어 삿대질까지 해가며 배다른 누이를 몰
아대는가 하면 알뜰에게 어서 퇴마루로 올라서라고 야단이다.
《전 집에 일이 있어서… 지나가다 들렸댔어요.》
《정말 댁에 기쁜 일이 생겼더군요. 징용피해 도망다니던 억봉군이 돌
아왔더군요.》
《네.》
알뜰은 얼마전 제철소정문앞에서 억봉이며 주학섭이네가 우르르 밀려
가 송표를 둘러싸던 일이 떠올라 마음이 불안스러웠으나 송표는 제철소
운영동지회사무실에서 있었던 억봉이와의 상서롭지 못한 일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정말 해방은 해방입니다. 일본놈이 망하는 바람에 집집마다 기쁨이
차례지지 않습니까.》
알뜰은 듣고보던바와는 다른 송표의 말과 행동에 어리둥절해졌다. 언
젠가 알뜰은 길을 가다가 일본기생집앞에 일본신사와 마주 서있는 송표
를 본적이 있었다. 술집에 가도 일본사람과만 다니던 그가 일본놈을 욕
한다는게 신기하고 놀라왔다.
송표는 곱사등이 누이에게 눈짓을 하더니 쌀을 한말이나 내오게 했고
지갑을 꺼냈다.
《얼마 되지 않지만 가져다 동생을 위해주십시오. 징용을 피해다니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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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고생인들 얼마나 많았습니까.》
송표는 뻘걱거리는 여러장의 돈을 쌀자루우에 올려놓으며 오히려
제편에서 미안해했다. 알뜰은 송표가 적다고 하는 돈의 많은 액수에 놀
랐고 무엇때문에 이렇게 선심을 쓰는지 리해되지 않아 어리둥절했다. 알
뜰은 무턱대고 남의 돈을 받을수 없어 사양을 했다. 퇴마루에 걸터앉아
부채질을 하던 송표는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이건 제가 드리는게 아닙니다. 외삼촌이 주는거지…
외삼촌이 집에 있었으면 빈손으로 보내겠습니까?
더구나 나는 억봉군과 모르는 사이가 아니랍니다. 방금전에도 만났댔
지요. 만나 돈소리도 했었지요. 억봉군한테 그 자리에서 돈을 쥐여주고
싶은 생각이 불같았지만 많은 사람앞이여서 그러지도 못하고… 빈손으
로 돌아가서 노여워할수 있는데 잘 말해주십시오. 억봉군과 같은 애국
청년들을 돕고싶은 마음이야 누구한텐들 없겠습니까. 억봉군이야 대
바르고 일본놈 미워하기로 이전부터 유명했지요. 억봉군이 일으킨 서사
사건을 제철소에서 일하던 조선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야 있을라구요.》
알뜰은 송표가 황국신민의 서사사건내막까지 알고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억봉은 그 서사사건때문에 제철소에서 해고됐고 그래서 징
용올가미를 썼다고 할수 있었다.
계향이와 벼락약혼을 한 다음날 억봉은 《황국신민의 서사》선창
을 할 차례였었다. 패망에 직면한 일제는 조선사람모두의 민족얼을 빼
앗고 천황숭배사상을 불어넣기 위하여 매일 아침마다 일을 시작하기 전
에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게 했는데 억봉이가 일하던 해탄수리계
에서는 계 전원이 정렬해서고 한사람이 대렬앞에 서서 선창을 하면 모
두가 따라하는 방법으로 하군 했었다. 당시 수리계장이였던 구마모
도 도꾸이찌는 모든 사람이 선서를 따라외우게 하느라고 매일 아침 다
른 사람이 선창을 하게 했다. 그날 억봉은 선창을 하다 첫줄부터 막혀
버렸다.
《〈황국신민의 서사〉도 모르면서 어떻게 황국에 충직할수 있는
가?》
도꾸이찌는 다짜고짜로 억봉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며칠후 도꾸이
찌가 서사 선창을 하게 됐다. 밤새 처먹은 술이 채 깨지 못하여 그도 선
창도중 막혀버리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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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신민의 서사〉도 잘 모르면서 어떻게 황국에 충직할수 있는
가?》
억봉은 며칠전 도꾸이찌가 한짓 그대로 면상을 후려갈겼다. 그러자 도
꾸이찌의 졸개들이 억봉이한테 달려들고 기봉이를 비롯한 조선로동자들
이 억봉이를 도와나서는 바람에 황국신민의 서사모임은 패싸움비슷이 번
져졌다. 그날 저녁 억봉은 기봉이와 함께 헌병대에 끌려가 사흘동안이
나 물매를 맞았고 벼락약혼내막까지 탄로나는 바람에 제철소에서 해고
되여 징용에 끌려나가게 되였으며 도꾸이찌는 《불온분자》를 색출한 공
로로 해탄과장이 되였었다.
알뜰은 억봉이때문에 준길삼촌까지 몇번이나 헌병대에 불리워다니
던 그 서사사건을 송표가 말하는 바람에 그에 대하여 지금까지 들어온
소문이 귀가 여린탓에 잘못 들은게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울 지경이였다.
송표는 알뜰이가 어리뻥뻥해하면서도 고마와하는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자
기 말에 귀를 주자 다시 말을 걸었다.
《삼촌이 상하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좀 어떻습니까?》
송표는 준길삼촌에 대해서도 알고있었다.
《네, 좀 나았어요.》
《지금 집에 계시는가요?》
《저… 평양에 가시였어요.》
송표가 집에서 치료받는가고 물어보는 말에 알뜰은 제나름의 대답을
했다.
《네… 저두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알고싶어 해주에 갔다 어제 왔습
니다. 해주에 가서 들으니까 인차 련합군이 상륙하고 모든 정권을 련합
군에 넘긴답니다. 그렇게 되면 제철소도 다시 돌아가게 되고 또 사람들
이 안착된 일자리를 얻게 될겝니다. 우리 백의동포는 서로 으르릉거릴
게 아니라 모두가 서로 돕고 의좋게 힘을 합쳐야지요.》
송표는 자기가 선심쓰는 몇푼의 돈이 련합군의 상륙에 도움이 되고 불
꺼진 제철소를 살려내여 모든 사람들한테 일자리를 주는데 무슨 밑천이
되기라도 하는것처럼 으시대였다.
알뜰은 얻어가진 몇푼의 돈을 갖고 장거리로 향했다. 술 몇병에 닭까
지 한마리 사들고 집으로 향하는 알뜰은 차지훈을 만나 뒤숭숭하던 마
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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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저녁때가 되자 대사집처럼 사람들이 모여왔다. 물이 설설 끓는 부엌


에선 삼촌어머니와 석봉이가 국수를 누르느라 야단이고 문이 활짝 열린
방안에서는 주학섭이며 우학이를 비롯한 억봉이네 패가 떠들어댔다. 알
뜰은 오늘에야 사람사는 집인것 같아 마음이 흐뭇했다. 그럴수록 알뜰
은 안주준비를 미처 못해 쩔쩔맸다. 아직 닭은 잡지도 못했다. 알뜰은
제 손으로 닭을 잡지 못한다. 겁이 많아 숨가진 짐승이면 웬만한 벌레
도 피하는 그다. 기쁜 일을 맞아 일손이 딸리고보니 계향이가 생각났다.
오늘 오전 제철소로 가던 길에 만나 집에 꼭 오라고 단단히 일렀는데 아
직 코도 내밀지 않는다. 알뜰은 큰마음 먹고 자기 손으로 닭을 한번 잡
아보려고 식칼과 피받을 그릇까지 들고나왔건만 용기가 나지 않아 날개
를 묶어 땅에 놓은 구수닭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때 억봉이가 뒤울
로 왔다.
《누이, 내 잡아줄가?》
억봉은 알뜰이가 닭을 잡지 못해 망설이는 꼴을 보았는지 싱글벙글거
리며 다가섰다. 억봉은 왼쪽발뒤꿈치로 엉치를 고인채 쭈그리고 앉더니
오른발로 얼룩점이 박힌 닭의 날개를 꾹 눌렀다. 어느새 억봉은 살진 닭
의 목을 잡아쥐고 한웅큼 털을 뽑아냈다. 억봉은 눈껌벅할새에 식칼로
닭의 멱을 따서 놋종발에 피를 받으며 능글거렸다.
《누인 아직 제 손으로 닭두 못 잡으니 어떻게 하나.》
《너의 색신 좋겠다. 제 서방이 닭 잘 잡아줘서…》
알뜰은 동생한테 반가운 롱지거리를 하며 종발에 차오르는 피를 안 보
려고 슬그머니 고개를 틀었다.
《체, 체니 없어서 제 손으로 닭두 못 튀는 색시 얻을가?》
《이제 보자, 너의 색시 얼마나 닭 잘 잡나?》
《두고보지, 안주감 좀 마련해라 하면 날아가는 닭두 채서 제꺽 잡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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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남매는 서로 마주보며 밝게 웃었다. 알뜰이 끓는 물에 닭
을 담아 털을 뽑을 때에도 억봉은 물러가지 않고 알뜰옆에 엉치를 든채
책상다리를 하고앉았다. 알뜰은 이것이 싫지 않았다. 동생과 이렇게 의
좋게 함께 있어본지가 그 언제였던가. 알뜰은 손가락만 하게 담배를 말
아 뻑뻑 들이빠는 동생을 곁눈질해보고나서 넌지시 물었다.
《얘, 너 계향이 만났니?》
《응?》
《네 약혼녀말이다.…》
《원… 약혼년 무슨 약혼녀.》
숫기좋던 억봉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거린다. 알뜰은
동생의 말이 이상스러웠다. 오늘 아침 만났을 때 계향은 어색해하며 알
뜰을 피했었다. 오늘같은 날 집에도 찾아오지 않는걸 보면 억봉이와 계
향의 사이가 상서롭지 못한것 같기도 했고 그의 오빠 우학이와 억봉이
가 계속 한데 붙어다니는것을 보면 안 그런것 같기도 했다.
억봉은 옹색스러운 처지에서 벗어나려는지 말머리를 돌리였다.
《누이, 송깔따구 아나?》
《송깔따구가 누구냐?》
《거 왜 송표라구 웅범외삼촌네 배다른 처남 있지 않아.》
《왜?》
《집에 오다 길에서 마주쳤는데 그 자식이 싱겁게 〈누님이 정말 미
인이시던데…〉하는게 아니야.… 빌어먹을 오입쟁이같은 새끼. 아직 으
시대며 다니는 꼴을 보면 눈꼴이 사나와서… 일본놈턱수염에 사금파리
처럼 붙어살던 자식들이 아직 으시덕거리구 다니니 씨…》
억봉은 성이 나 푸들쩍거리였다. 알뜰은 동생이 송표 한사람만을
욕하는게 아님을 깨달았다. 억봉이가 일본놈턱수염에 붙어먹던 사금
파리라는 사람들속에는 지금 제철소운영동지회에서 기술대표 위원으
로 일한다는 차지훈도 들어있을것이였다.
《얘, 너무 물덤벙술덤벙 그러지 말어.》
알뜰은 불같은 동생의 성미가 걱정스러웠다. 한번 욱하면 앞뒤를
가리지 않는 동생이다.
《왜 물덤벙술덤벙이야?》
억봉은 언제 오손도손했더냐싶게 툭 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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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1년이나 제철소를 떠나있지 않았니? 뭘 해두 삼촌을 만나 여기
사정을 들어나보구 해야지.》
알뜰은 억봉이가 낮에 제철소에서 그 무슨 일을 칠것처럼 송표와 차
지훈을 둘러싼채 우르르 운영동지회로 밀려가던 생각이 나서 귀띔하듯
타일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준길삼촌은 알뜰이나 억봉에
게 있어서 아버지격이였다.
《정말, 삼촌이 평양갔다 언제 온댔어?》
《한 댓새 걸릴거라구 하셨는데…》
《내 빨리 왔어야 도꾸이찌 그놈새끼를 잡는건데…》
억봉은 삼촌의 어깨에 부상을 입힌 구마모도 도꾸이찌한테 이를 갈았
다. 도꾸이찌때문에 자기가 징용올가미를 쓸번 했는데 삼촌까지 그놈의
칼에 맞을줄이야. 해방이 되던 날 도꾸이찌는 기술문건들을 불살라버리
려다가 준길삼촌한테 들키웠고 그것때문에 격투를 했었다. 돌아가신 아
버지도 도꾸이찌한테는 원한이 맺혀있었다.
억봉은 담배꽁초를 내버리고 우악스럽게 밟아버리더니 송표가 했다는
말이 내려가지 않는지 저 혼자 웅얼거렸다.
《송표새끼가 누이한테 눈독들이지 않았는지 모르겠어.》
《원 애두, 아까 라웅범외삼촌네 집에 들렸다가 만났댔다.》
알뜰은 동생한테 공연한 걱정을 시키지 않으려고 사실대로 일렀다.
《거긴 뭘하러 가?》
억봉은 벌컥 화를 냈다.
《뭘하러 가다니? 외삼촌 만나러 갔댔지.》
《뭘하러 시시하게 그런 집에 찾아다니나 말이야? 뭐 우리 진짜 외삼
촌이기나 해?》
알뜰이 말끝마다 외삼촌, 외삼촌 하지만 사실 웅범은 외삼촌이 아니다.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웅범외삼촌이 널 얼마나 생각한다구…
네가 돌아왔다구 집에 와서 제일먼저 알려준 사람두 웅범외삼촌이구 너
한테 주라구 이렇게 닭이랑 술이랑 쌀이랑 보내준 사람두 웅범외삼촌이
야.》
《정말 누이두… 너절하게 그런거 얻으러 다니지 말란 말이야.》
《얘, 너 망탕 말하지 말어.》
알뜰은 오래간만에 만난 동생과 다툴수 없어 나직이 말했으나 서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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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숨기지 못했다. 알뜰은 물건 얻으러 다닌다고 욕하던 소리보다 웅범
이 어디 진짜 외삼촌이냐고 한 말이 더 가슴아팠다. 웅범은 알뜰이나 억
봉에게 친외삼촌과 다름이 없고 일찍 부모잃은 설음을 같이 맛본 사람
이였다. 억봉이도 누이를 노엽히지 않으려 목소리를 죽였으나 자기
립장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누가 자본가 사위 되랬나? 그만큼 꼽댕이한테 장가들지 말랬는데…
해방이 된만큼 이제는 일본놈이나 그 앞잡이들과 회계를 따져야 한단 말
이야. 이게 계급투쟁이거던! 계급투쟁!》
억봉은 누이를 납득시키지 못해 안타까와했다.
알뜰은 이 순간에야 동생의 발에 칭칭 감긴 각반을 보았다. 아까 제
철소에서 만날 때만도 없었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그의 발에는 각반이 감
겨있었다. 일본놈 순사들과 헌병들이 치고다니던 누런 각반이다. 알
뜰은 놀라움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채 갑작스레 변한 동생의 차림
을 바라봤다. 이때 조우학이 뒤뜰로 고개를 내밀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남매의 다정한 정을 주고받을 사이도 없이 어색해지던 두사람의 대화는
우학이때문에 중단됐다. 그는 여기까지 지게를 지고왔다. 앉았던 억
봉이 일어서자 우학은 웅얼거리듯 말했다.
《난 가보겠네.》
《가다니요?》
알뜰은 말끔히 튀한 닭을 대야에 담아들고 일어섰다.
《집에 일이 있어 그래유.》
《그래두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인차 상차려드릴게 한잔 들구 가
요.》
《그러지 않아두 어제 밤새 억봉이한테 톡톡히 얻어먹었는데유… 자,
그럼… 잘 놀다가유.》
우학은 알뜰에게 머리를 숙여보이고 지게를 진채 어정어정 걸어나갔
다. 억봉은 우학을 말리다못해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울밖에서
두사람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한잔 하구 가라는데 왜 그래?》
《어제두 집에 안 들어갔는데… 내 짬봐서 밤에 다시 오겠네.》
《기다리겠어.》
세상 용한 우학이가 우락부락한 억봉이와 사귀여 어떻게 사이좋게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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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알뜰은 어정어정 걸어가는 우학의 뒤모습이 울너머로 바라보이자
그가 자기의 성의부족으로 그냥 가는것 같아 미안했다. 그가 걸어가는
쪽으로는 불꺼진 제철소가 바라보였다. 알뜰은 우학이한테 동생 계향이
를 데리고오라고 당부하지 못한것이 후회됐다.
어느덧 저녁 황혼이 깃을 펴기 시작했다. 어두워오는 밤하늘에 하나
둘 별이 돋아나 반짝거리였다. 별빛에 하늘은 희읍스름하게 밝아왔으나
그아래로 길게 누운 제철소는 여전히 캄캄했다.
불이 꺼져 시시각각으로 싸늘히 식어가는 제철소는 스산하고 살벌스
럽기만 하였다. 알뜰은 남모르게 닭의 뒤다리를 하나 남겨놓고 은근히
우학이와 계향이를 기다렸으나 그들은 종내 오지 않았다. 죽은줄 알았
던 동생이 살아돌아온 기쁨은 한량없이 컸건만 달게 잠들수 없는 이밤
이였다. 어머니노릇까지 해야 하는 누이의 다심한 마음이여서 이밤
알뜰이 혼자만 그런것은 아니였다.
일제가 도망가며 제철소에서 불을 꺼버리자 로체마다에서 이글거리던
불길은 처음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그대로 옮겨간상싶었었다. 해방이 되
였다는 소식에 늙은이, 젊은이, 어린이 할것없이 사람들은 저저마다 거
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고 기쁨에 못이겨 더덩실 춤들을 추었다. 거
리와 마을마다 매일매일 명절이 계속되였다. 하루 벌어야 하루를 먹고
사는 로동자부락에서마저 집집마다 지지고 볶았다.
단돈 한푼때문에 게거품을 물고 싸우던 장거리의 장사치들마저 마음
이 후해져 풋낯이나 아는 사람이면 군말없이 외상을 주었고 서로 의가
좋지 못하던 사람들도 길거리에서 만나 친구들처럼 반가와하며 호주머
니 돈을 털어 술집에 가자고 손목을 잡아끌었다.
《일년이 장 가위날만 같으십사.》하고 축원하던 조상들의 오랜 념원
이 요즘에야 이루어지는가싶은 나날이였다.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끓어번지는 감격과 환희는 일종의 불길과 비슷
했다. 불길은 땔감이 있어야 스러지지 않고 계속 타번진다. 하늘땅에 차
넘치는 해방의 기쁨은 나라와 민족 그리고 자기자신들과 온 겨레의 행
복에 대한 열렬한 갈망과 동경, 념원의 표시였다. 해방이 가져다준
충격이 컸던만큼 앞날의 행복에 대한 사람들의 지향도 그만큼 강렬했다.
해방직후의 복잡한 정세와 나라형편은 사람들의 이 요구와 지향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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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히 충족시켜주지 못하였다. 일제가 망했다는 소식에 뒤이어 별의별 소
문이 다 돌았다. 서울에서는 장군이 만주광야에서 백만관동대군
을 쓸어눕히고 혁명군을 거느리시여 서울역에 도착하신다는 소문이
돌아 8월 16일 이른아침부터 수만군중이 역전으로 물밀듯이 모여들
었다. 그런가하면 누군가는 지금까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상해망명
정부가 곧 돌아온다고 떠들었다.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영웅호걸이라 자처해나서고 사상가, 리론가들
이 자신의 총명과 유식을 뽐내며 저저마다 주의와 주장을 내놓는바람에
하나의 사실에 대한 정반대의 견해와 소식이 류포되였으며 온갖 억측과
류언비어들이 마구 뒤섞여 어느것이 허위이고 진실인지 가려내기 어려
웠다. 게다가 일제가 망했다는 기쁜 마음에 있는대로 털어먹다나니
이곳 로동자부락에서는 살림밑천까지 거덜나기 시작했다. 일제는 망
하여버리였어도 그가 남긴 죄악의 흔적은 곳곳에 그대로 남아있었고 사
람마다 입었던 마음의 상처도 아직 아물지 못하였으며 사람들은 제각기
갈길을 찾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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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파 혼

텅 빈 부두가에 두사람은 말없이 앉아있었다. 우학은 올방자를 틀고


앉아 허리를 구부린채 잔교를 치는 강물을 내려다봤고 억봉은 다리
를 쭉 펴고 두팔을 작대기처럼 뻗친채 뒤로 몸을 젖히고 우학과 모꺾
어앉아 해탄로쪽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들이 앉아있는 옆으로는 석탄더
미들과 감탕늪같은 석탄침전못들이 펼쳐졌고 그뒤로는 불꺼진 해탄
로가 보였다. 해탄로뒤로는 부산물공장들과 압연공장, 제강공장이
꼬리물고 늘어섰다.
잔교를 때리는 강물소리만 들려올뿐 주위는 쥐죽은듯 조용하다.
《난 글피쯤 떠나겠네.》
우학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옹진내기인 그는 징용에 걸려 3년전
에 여기로 왔다. 바다가 멀지 않은 고향마을에서는 세돐이 되여오도록
아직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귀여운 아들과 마음착한 안해가 기다리
고있었다.
《가야지.》
억봉은 털끝만큼도 주저하거나 꺼리는 빛없이 례사롭게 말했다. 요즘
은 모든 사람이 가겠다는 소리뿐이다. 오늘도 제철소운영동지회에서
는 집으로 돌아갈 사람들은 가라고 방송을 했다.
제철소에 불이 죽고보니 할일이 없어졌다. 제철소라면 흔히 쇠를
생각하나 불로 쇠를 다스리는 곳이 제철소다. 쇠를 녹이는 불을 만들고
그 불을 다루는 사람들이 해탄사람들이다. 불은 해탄사람들에게 있어서
농군들한테 땅과 같은것이였다. 불꺼진 제철소는 그네들에게 홍수에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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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버린 농부들의 땅이나 고기떼 사라진 어부들의 어장과 다름이 없었다.
불때문에 억봉은 이곳에서 대를 두고 고생해왔다. 억봉은 이 불때문에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도 잃었다.
온몸과 넋을 뜨겁게 지지려들던 저주로운 그 불이 지금은 모두 꺼져
버렸으나 억봉은 기쁨을 느낄대신 이상하게도 마음이 허전했다. 억봉은
어디론가 갈 곳만 있으면 자기도 불꺼진 이 제철소를 훌 떠나버리고싶
었다.
《후―》
우학은 회파람이라도 불듯 큰소리로 한숨을 내쉬였다. 우학을 따라 억
봉이도 길게 한숨을 쉬였다. 할일이 없는 제철소를 떠나가는것이 당연
하고 응당하지만 이제 서로 헤여져야 한다는 생각에 두사람은 마음이 좋
지 않았다.
두사람이 서로 알게 된것은 운하리저수지 공사때였다. 대동아전쟁
에 열을 올릴수록 철강재에 대한 수요는 늘어났고 제철소확장과 함께 물
에 대한 수요 역시 높아갔다. 사람들의 피와 땀은 물이 아니였으나 불
어나는 공업용수 충족을 위해 기업주들은 사람체내에서 액체마저 뽑아
그대로 그것을 순환시켜서라도 군수강재생산에 달아오른 로체와 기대들
을 랭각시킬 각오였다. 일본인기업주들은 《총독부》의 어마어마한
권력을 등에 업고 대동강지류인 황주천물줄기를 돌려 저수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새로 만드는 공업용수저수지에 전국 각지에서 징용에 끌려온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물과 함께 고이기 시작하였으니 저수지공사
가 벌어지던 그해 장마철 어느 하루에만도 순간에 수십명의 무리송장을
냈다. 낡은 나무배를 타고 범람한 강을 건느다 배가 뒤집혀 수많은 사
람들은 시뻘건 흙탕물에서 시체마저 찾을수 없게 되였으나 우학이 천만
다행으로 살아날수 있은것은 억봉이때문이였다.
우학은 억봉이 덕에 생명을 건져냈고 헤여져 오랜 세월 소식조차 모
르던 작숙도 찾았다. 살길을 찾아 만주로 가다 여기 겸이포에 와서 짐
을 풀고 주저앉은 우학의 작숙 달모와 억봉은 해탄로에서 함께 일했던
것이다.
억봉과 달모의 힘을 입어 우학은 웬만한 사람들이 빨라야 5~6년 걸
리는 직공까지의 제일 높은 로동벼슬자리에 해탄과장에게 닭 두마리와
술 한되를 바치고 비교적 쉽사리 올라섰다. 억봉은 우학의 생명의 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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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였고 힘겨운 생활에서 부축여주는 미더운 동무였을뿐만아니라 순박한
그를 골려주고 못살게 구는 장난군이기도 하였다.
우학은 직공이 되여 탄 첫임금으로 바지 하나를 샀었다. 광목으로 지
은 눅거리 바지였으나 우학은 처음 입어보는 양복바지여서 몹시 아끼였
다. 그럴수록 억봉은 우학의 바지를 덞게 만들려고 애를 썼다. 어느날
억봉은 우학을 배송장 철계단에서 넘어지게 만들어 바지가랭이에 타르
와 기름이 묻게 했다. 그날로 우학은 바지를 벗어 빨았다. 바지가랭이
에 발린 타르는 빠지지 않았다.
《임마, 그렇게 빨아서 질게 뭐야. 비누칠을 잔뜩 해서 해빛에 말리
우란 말이다. 그담에 물에 담궈 헤워야 기름때랑 타르가 말끔히 져.》
우학은 고지식하게 억봉이 하라는대로 했다. 그리고 풀해서 줄까지 잡
는다는게 바지혼솔을 따라가며 넙적하게 다려서 바지가랭이가 치마자락
만큼 넓어지게 해가지고 나타났다. 우학은 다시한번 사람들의 놀림가마
리가 되였고 비누칠을 해서 말리웠던 바지가랭이는 천이 모두 삭아 인
차 구멍이 뻥 뚫리고말았다. 이때부터 우학에겐 《헌바지》라는 별명이
생기였다. 거기다 《새 저고리 헌바지》니 《헌저고리 새 바지》니
하는 별명이 새끼쳤고 조가라는 남의 성까지 갈아 《황저고리》따위의
변종까지 생겼다. 그래서 언젠가는 깔따귀 오장도 조우학이란 이름대신
《황우학》하고 불렀다. 이런 일로 해서 우학과 억봉은 한때 사이가 벌
어지기까지 했었다.
이들의 사이가 다시 남달라진것은 계향이때문이였다.
그날은 교대가 바뀌던 때였다. 교대가 바뀌는 날이면 곱대거리에
걸린 로동자들은 하루 스물네시간 모두 일했다. 이런 때면 가족들이 집
에서 밥을 싸들고 제철소로 찾아왔다. 녀인들과 아이들이 밥을 싸가지
고 제철소출입문에 줄느런히 서있으면 남편과 오빠, 아버지나 아들, 형
님벌되는 남정네들이 와서 밥을 가져갔다. 이런 날 해탄사람들과 그 가
족들사이에선 희비극이 자주 벌어졌다.
그날 억봉은 누이 알뜰이가 밥을 가지고오겠다고 한 제철소정문으로
갔었다. 억봉이 정문을 나서서 누이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는데 외태머리
를 길게 따늘인 한 처녀가 달려왔다.
《오빠―》
처녀는 억봉을 자기 오빠로 잘못 안 모양이였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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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탄로동자들은 탄가루와 연기에 그슬리여서 방금 먹물속에 잠궜다
꺼낸 사람처럼 이만 하얗고 두눈이 반들거렸다. 언제 봐도 굴뚝소제부
같은 그들이여서 습관되지 않은 사람들은 제 집 사람마저 헛갈리기 쉬
웠다. 처녀는 무척 개방적인 성격이여서 대바람에 억봉이팔에 매달리는
것이였다.
《누구신지요. 전…》
억봉이 옹색스러워 웅얼거리고 억봉이한테 밥을 주려 다가오던 알뜰
이 어안이 벙벙해하는것을 보고서야 처녀는 자기의 실수를 깨달았다.
《어마나―》
처녀는 뿌리치듯 억봉을 밀쳐버리며 밥바리가 들어있는 다래끼를
옆구리에 낀채 저 멀리로 달아났다.
이때 우학이가 억봉이를 뒤따라 나왔다. 제철소정문앞 길거리에는 국
수며 비지, 밥, 국 등을 해가지고 팔러 나온 장사치들이 로동자들의 여
윈 주머니를 털어내려고 교대시간만 되면 흐린 날에도 장날처럼 모여들
었다. 저녁밥을 사먹으러 나왔던 우학은 뜻밖에도 동생을 만났다. 억봉
의 품으로 뛰여들던 그 처녀가 우학의 동생 계향이였다.
이날 억봉은 우학이네 남매가 당하는 너무도 가슴아픈 광경을 목격했
다. 검은 제복의 수위들은 밥을 받아가지고 들어가는 로동자들의 밥그
릇을 일일이 검사했다. 동생이 가져다준 밥그릇을 가지고 제철소울타리
안으로 들어서던 우학은 수위한테 걸려들었다. 우학의 밥그릇을 펼쳐보
고나서 털보수위는 돼지멱따는 소리를 질렀다.
《이 비상시국에 누가 야미쌀을 사라했는가?》
《예? 쌀을 사다니요?》
《그러면 팥이 어디서 났는가? 일본사람도 못 먹는 팥밥을 조선사람
네가 어떻게 먹을수 있는가 말이다.》
로동자들속에서 올빼미로 소문난 악착스러운 털보수위가 우학의 밥그
릇을 뺏아 다짜고짜로 땅바닥에 둘러메쳤다. 밥을 담았던 밥바리는
깨여져나가고 땅우에는 밥이 흩어졌다. 이런 때에는 아무리 리치를
따져도 소용이 없었다. 배급내주는 좀난 좁쌀이나 대두박밖에는 단
한알의 낟알이라도 다른것을 먹거나 더 먹으면 그것은 《전시법》에 위
반되였다. 동생이 오빠에게 맛보이려고 고향에서 들고온 한줌의 팥이 화
를 빚어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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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억봉은 불면 훅 날아날것 같은 강조밥 한복판에 된장술잔
을 박아넣은 자기의 저녁밥그릇을 들고 우학을 찾아갔다. 방금 우학이
가 있던 뽐프실에는 《걱정말라》주학섭밖에 없었다.
언제나 태평스러운 《걱정말라》주학섭은 문가까이에 발판을 경사
지게 놓고 낮은쪽으로 머리를 둔채 발판에 거꾸로 누워있었다.
《왜 그렇게 거꾸로 누웠나요?》
《밥이 내려가지 말라구.》
《밥이 내려가지 않다니요?》
《젠장, 자꾸 말시키네. 서있거나 앉아있으면 겨우 한술 얻어먹은 조
밥이 인차 미끄러져 아래로 내려갈게 아닌가, 그래 소화 안시키려구 두
발을 하늘쪽에 매단채 누워있단 말이야.》
《흥, 좋은 생각 해냈수다. 그럴바엔 안 먹구두 사는 재간 생각해내
구려.》
《그러지 않아두 지금 그 재간 생각중이야. 그 재간 알아낸 다음에 날
보구 배워달라 하지 말게.》
《걱정말라》는 경사진 발판에 거꾸로 누워 억봉을 올려다보며 계속
씨벌였다.
《걱정마슈. 배워주겠대두 안 배울테니… 누렁바진 어디 갔나요?》
《거전 안 대주겠네. 나 담배 한대 줘야지.》
요즘은 담배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이른아침부터 상점에 가서 꼬리
잡이를 해야 겨우 써레기 한봉지를 산다. 담배때문에 고생하던 억봉은
얼마전 큰 횡재를 했다. 며칠전 하선장에 석탄배가 들어왔는데 담배를
실었댔는지 부려놓은 석탄무지속에서 손바닥만큼씩한 엽초가 퍼그나 나
왔다. 억봉은 저탄장 석탄더미에서 담배가 나온다는 소리를 듣고 날쌔
게 손썼던탓에 노란 엽초를 둬근 잘되게 거두어모았다. 《걱정말라》는
지금 그 담배를 두고 말했다. 억봉은 비위좋고 검질긴 주학섭에게 담배
쌈지를 꺼내놓고야 배기였다. 《걱정말라》는 억봉의 쌈지에서 엽초
를 꺼내 엄지손가락만 하게 담배를 만 후 거기다 한줌이나 개평을 하고
서야 한다는 소리가 《조금전에 여기 있었는데 찾아보게.》했다.
억봉은 해탄구역을 거의 싸다니다 2호해탄로에 가서야 우학을 찾을수
있었다. 2호해탄로 가까운 산기슭에 우학은 저 혼자 앉아있었다.
《이 누렁바지, 여기서 뭘하구 앉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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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이 다가가 옆구리를 줴박아도 우학은 아무 대꾸 안했다.
《머저리, 땅에 버린 팥밥이 네 입에 들어올것 같아 그래?》
《…》
《야, 그러지 말구 밥이나 먹자.》
억봉은 우학을 위로하여 자기 밥그릇을 내밀었다. 2호해탄로에서는 방
금 또 한차례 압출을 했다. 텅 빈 탄화실에 새로운 장입을 하느라 열어
놓은 상승관 굴뚝에서는 삼단같은 불길이 타올랐다. 거대한 홰불처럼 그
불길은 밀려오는 밤하늘의 어둠을 불사르며 불혀를 날름댄다.
억봉은 그 불빛에 우학의 두눈이 번쩍이는것을 보았다. 우학은 저 혼
자 소리없이 울고있었다. 한줌의 조밥을 같이 나누자는 억봉의 인정에
가슴이 동해서만은 아니였다. 바람에 풍겨오는 역한 가스냄새때문에 눈
이 아려서도 아니였다. 억봉은 한참이나 이리 구슬리고 저리 구슬려서
야 우학의 입을 겨우 열게 했다.
《우리 계향이가 공출에 걸렸어.》
《너의 동생이?》
《처녀공출을 피해 여기루 왔단 말이야… 아, 내가 동생을 대신할수
있다면…》
우학의 가슴속에는 동생의 성의가 담긴 밥을 빼앗겨 구두발로 밟히운
그런 정도의 괴로움만이 아닌 근심과 슬픔이 자리틀고있었다. 군수물자
라고 매 집에서 놋밥바리와 숟가락까지 뺏아가던 일제는 기울어진 전쟁
의 운명을 바로잡아보려고 군대노리개로 처녀들까지 뽑아가는 묘한
생각을 해낸것이다.
억봉은 자기를 우학인줄 알고 오빠라고 부르며 달려오던 계향의 억실
억실한 얼굴이 떠올랐다. 억봉은 그 처녀가 길게 딴 외태머리를 출렁이
며 금시 자기 팔에 매달리는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너무도 꽃다운 열
여덟나이, 꽃망울처럼 젊음이 채 피지도 못한 처녀한테 차거운 서리가
내리고있었다.
동생에 대한 우학의 걱정도 억봉의 의분도 아무 소용없었다. 처녀공
출의 음험하고 흉악한 손길은 옹진반도 남단에서 이곳까지 뻗쳐왔다.
《방법이 없네, 시집보내야지. 시집간 녀잔 공출 안하거던.》
《걱정말라》는 우학과 그의 작숙 달모를 이렇게 훈수했다.
《어떻게 그렇게 벼락잔칠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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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모는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였다. 달모는 2호해탄로를 건설하던 때
구내산에 나타난 노루를 보고 맨손으로 뛰여가 붙든바 있는 무척 날랜
사람이였지만 자기의 처조카를 공출의 올가미에서 벗겨내는 재간은
없었다. 이제 하루이틀내로 잔치를 못하면 시집이 아니라 아이를 낳는
대도 죽은 다음에 청심환격이였다.
《왜, 신랑감이 없어서? 신랑감으루야 좀 좋은 우리 억봉이가 있
지 않나. 내 지금까지 억봉일 우리 사위 삼으려고 은근히 눈독들여
왔지만 형님이 조카사위 삼겠다면 물러서겠소. 우리 맏이는 째보구, 둘
째는 이제 겨우 열살이니 억봉이녀석이 나이찰 때까지 기다려줄것
같지 않구…》
《걱정말라》주학섭이 우스개삼아 던진 이 말은 점차 진담으로 번
져졌다. 이때 억봉의 삼촌 준길이마저 나타나게 되여 해탄로우에서는
말반찬만 가지고 벼락약혼식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어린 한 처녀
에게 닥쳐온 불행을 막아주고 동생때문에 근심이 산같은 우학을 위해주
려는 마음에서 사람들은 롱절반, 진담절반으로 억봉과 계향의 약혼을 선
포했다.
《뜨뜻한 이 해탄로우에 색시까지 데려다놓구 제꺽 한잔 카― 했으면
좋겠구만.》
《걱정말라》주학섭은 로상에 빙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새까매
반들거리는 얼굴에 흰이발을 내보이였다. 그러더니 비위좋게 달모한
테 손을 내밀었다.
《술은 저녁에 한잔 낸다쳐두 중매쟁이한테 우선 담배쯤이야 줘야 할
게 아닌가.》
달모는 오늘 아침 운수가 좋아 출근길에 잡화점에서 한곽을 통채로 사
넣었던 《흥아》곽을 내밀었다.
《자, 우선 신랑이 한대, 이건 신랑 삼촌 사돈한테 바치는 코아래진
상, 이건 색시 오빠, 이건 색시 고모부…》
《걱정말라》주학섭은 마치 자기 담배처럼 골고루 한대씩 권하고나서
나머지는 통채로 제 주머니에 넣으며 《이건 중매쟁이몫.》했다.
그날 저녁 억봉은 동생때문에 사색이 되여있는 우학을 위로하려고 그
의 작숙 달모네 집으로 갔다. 달모네 집에서는 그의 녀동생이 오빠와의
눈물겨운 작별을 준비하고있었다. 공출의 올가미를 피하려고 오빠를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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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왔던 계향은 자기가 오빠를 불행의 궁지에 몰아넣은것만 같아 징병떠
나기로 결심한것이였다. 자기 한몸 바치면 오빠를 형님과 조카한테로 돌
려보낼수 있다는 생각에 계향은 비장한 결심품고 작별을 준비했다.
이제 다시 만나지 못할수도 있는 오빠를 위해 처녀는 옷들을 모두 빨아
손질했으며 자기의 치마를 뜯어 오빠의 버선과 옷을 지어놓았다. 오빠
를 위하는데 보태려고 처녀는 자기의 치렁치렁한 머리태까지 자르려 했
다. 가위를 들고 거울앞에 앉아있는 계향을 보고 우학은 동생한테로 달
려가 붙들고 울었다.
《이 미련한것아, 네 무슨 독한 마음 먹었단 말이냐? 네 가길 어데로
가며 죽을데로 널 보내놓고 난 어떻게 산단 말이냐.》
서로 붙안고 슬피 우는 남매를 보다못해 억봉은 돌아섰다. 해탄로우
에서 주학섭이 벼락약혼을 선포하던 때만 해도 그것을 하나의 장난으로
받아들이였던 억봉은 동무를 위해주려는 의협심에 자기가 대신 징병에
라도 나가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억봉은 때마침 집에 들어서는 달모며
주학섭을 끌고 읍사무소로 가서 호적서기에게 허위혼인신고를 내는
한편 자기 약혼녀한테 공출딱지를 보낸 옹진촌것들의 처사를 신소했다.
그런 후 주학섭과 함께 달모네 집으로 가서 10전짜리 비지 한그릇씩 받
아다놓고 막걸리를 마시였다. 우학을 위로하기 위한 이 모여앉음이
허위혼인신고를 경축하는 벼락약혼식이였었다.…
두사람은 제각기 자기 생각에 잠겨있었다. 억봉은 쭉 폈던 두다리를
가드라뜨려 올방자를 틀더니 우학을 향해 느닷없이 물었다.
《언제 갈래?》
《글피.》
우학은 방금전에 자기가 한 말을 억봉이가 새삼스레 물어보는것이 계
향이때문이라는 생각에 한마디 덧붙였다.
《잔치까지 치르고 갔으면 좋겠는데…》
억봉이와 계향의 잔치가 발목을 붙들지만 않았어도 우학은 벌써 고향
으로 돌아갔을것이다. 지금까지 억봉이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린 우
학이였으나 지금형편에서 어쩌는수 없었다. 이제 얼마 있으면 가을을 한
다. 고향에 가서 쌀말이라도 지고와야 잔치도 할수 있다. 동생의 잔치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도 고향에 빨리 가야 하는 우학이였다.
억봉이한테서 아무 응대가 없자 우학은 안달이 났다. 억봉이와 계향

82
은 약혼을 했다면서도 지금까지 언제한번 얼굴을 맞대고 조용히 앉아도
못 보았다. 너무도 급한 일을 당해 번개불에 콩닦듯 입으로만 혼례를 치
른데다 억봉이 징용때문에 몸을 피하여 어쩔수 없었지만 도리상 안된 일
이였다. 우학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계향이가 제 손으로 밥을 지어
랑군될 억봉에게 한그릇 먹이게 한 후 이들 두사람을 한이부자리속에 들
게 만들어 서로 진짜혼인을 맺어주고싶었다. 그래서 우학은 작별을
앞두고 억봉이와 한잔 술도 나눌겸 여러 사람들이 모여앉은김에 잔치날
도 확정하려고 소박한 송별회를 준비하고있었다. 용하고 말주변없는 우
학은 자기 생각을 어떻게 표현했으면 좋을지 몰라 갑자르던 끝에 다시
웅얼거렸다.
《가두 치를 일은 치러야지…》
억봉은 불꺼진 해탄로만 바라보며 여전히 아무 응대 없었다. 우학은
속생각을 비슷이 억봉이한테 내비치고보니 자기 뜻을 몰라주는 동생 계
향이가 생각나 저도 모르게 다시 한숨을 내쉬였다.
지금 우학이가 안절부절 못하는것은 억봉이보다도 동생 계향이때문이
라고 할수 있었다.

계향은 우학이처럼 생각이 단순하지 않았다. 억봉에 대한 계향의


감정은 지금 미묘하고 복잡했다. 집에 돌아온 억봉은 기다리던 상봉의
기쁨대신 커다란 실망의 그림자를 던져주었다. 진통끝에 자리잡힌 계향
의 마음속에서 행복을 꿈꾸며 아름답게 피여나던 채색무지개는 그 그림
자때문에 빛을 잃었다.
계향은 억봉을 알게 되던 처음부터 그한테 마음 끌린것이 아니였다.
한때 계향은 억봉이가 처녀공출의 올가미에 걸려든 남의 불행을 리용하
여 자기의 리속을 채우려드는것 같아 괘씸하기까지 했었다. 동무에
대한 의리가 털끝만큼이라도 있다면 동무의 누이동생한테 닥친 불행을
이렇게 대할수 없었다. 전혀 모르는 남남사이라 해도 남의 불행을 자기
한테 리롭게 리용하는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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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은 동무의 누이동생한테 닥쳐온 불행을 진심으로 동정하는 선량
한 의도에서 벼락청혼을 하였을수도 있었다. 그런 경우라 해도 계향은
억봉의 됨됨에 공감할수 없었다. 계향은 나이가 어린탓에 사랑이나
결혼문제에 대하여 그리 생각해본적 없었지만 막연하게나마 억봉이보다
는 훌륭하고 뜻있는 사람을 자기 일생의 반려로 머리속에 그리고있었다.
계향은 소학교를 졸업하고 처녀공출딱지를 받을 때까지 그 학교에서
심부름을 하였었다. 계향이가 오빠를 찾아 이곳에 오기까지 많이 접촉
하고 보아온 사람들은 교원들이였다. 계향을 각별히 사랑해주던 마흔살
의 로처녀 음악교원한테는 소설책이 많았다. 계향은 그 녀교원한테서 남
만 못지 않게 련애소설도 빌려보았고 웬만한 중학교 중퇴생만 한 지식
도 얻을수 있었다. 계향이가 처녀공출딱지를 받았을 때 오빠와 작숙을
찾아 대담하게 탈출의 길에 오를수 있은것은 그때 본 책권들과 돈때문
에 실련을 당하고 일생을 혼자 살기로 결심한 로처녀 음악교원의 영향
때문이였다.
억봉은 지금까지 계향이가 책을 보며 머리속에 그려오던 그런 사람이
아니였다. 계향은 오빠의 밥을 갖고 제철소정문에 갔다가 누가 누군지
알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새까만 그를 단 한번 보았었다. 오빠인줄 잘
못 알고 팔에 매달렸던 구들쟁이같은 그 사람이 난데없이 약혼자로 되
였다는 말에 계향은 처음에 놀랐고 다음엔 아연했다. 새까만 얼굴에 두
눈이 반들거리고 이만 하얗던 억봉에 대한 계향의 인상은 오빠의 바지
사건내막을 알게 되면서 더 나빠지고말았다.
어느날 오빠의 짐보따리를 뒤적거리던 계향은 헌바지 하나를 찾아냈
다. 다른데는 성한데 한쪽 바지가랭이만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게 이상
했다.
《오빠, 이 우테 가장 한것 같은데 가랭인 왜 이렇게 됐어요?》
남매는 서로 마주앉으면 어린 때 쓰던 고향사투리가 저도 모르게 튀
여나온다.
《서답을 비누칠해 말리웠더니 그렇게 됐구나.》
《정말 오빠두… 그렇게 서답 말리우는 법 어디 있어?》
《그러게 말이다. 그게 다 네 랑군될 사람이 그렇게 만든거야.》
오빠의 말처럼 그것은 악의없는 하나의 장난이였다. 하지만 계향은 너
덜너덜해진 오빠의 바지가랭이를 통해 억봉의 저속한 면모와 무분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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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을 보는가싶었다. 계향은 힘을 뽐내는 사람보다 지혜로운 사람들을
존경했다.
억봉에 대해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것을 나쁘게 생각하던 계향이한테
그가 징용딱지를 받았다는 소식은 지금까지의 모든 감정과 견해를
뒤집는 하나의 마른벼락이였다. 계향은 자기가 살아나기 위해 남을 죽
음의 구렁텅이에 떠밀어넣는것만 같은 가책을 금할수 없었다. 처녀
공출의 올가미를 벗겨주기 위해 억봉이가 벼락약혼에 응해나서지 않았
더라면 그는 《징병과 징용을 반대하는 불온분자》라는 딱지가 붙어 제
철소에서 해고되지도, 징용에 걸려들지도 않았을것이였다. 이때부터 계
향의 가슴속에는 억봉에 대한 반감대신 동정과 련민의 정이 자라오
르기 시작했다.
억봉이가 고향을 떠나던 그 전날 밤 계향은 밤을 밝혀가며 자기 손으
로 버선 두컬레를 지었다. 계향은 생사를 기약하기 힘든 위험한 곳으로
떠나보내면서 음식 한그릇 따뜻이 대접하지 못하는것이 마음에 걸려 장
마당에 가서 떡 한그릇과 강엿 한덩어리를 샀다.
계향이 숨이 턱에 닿아 역에 이르렀을 때 렬차는 이미 떠나고있었다.
흰연기를 날리며 점점 멀어져가는 렬차를 바라보는 계향은 갈기갈기 가
슴이 찢기는듯싶었다. 일이 이렇게 될줄 알았으면 빈손으로라도 달려나
와 억봉을 바랬어야 할것이였다. 후회로 가슴저미는 이 순간 계향은 언
제한번 다정히 마주앉아 살뜰히 말 한마디 나누어본적 없는 억봉이가 이
세상에서 오빠 못지 않게 귀중한 사람으로 생각되는것이였고 어쩔수없
이 몸과 몸은 서로 멀리 떨어져있게 되여도 이제부터 마음만은 끊을래
야 끊을수 없는 인연으로 서리서리 얽혀 점점 더 가까와지고 하나로 합
쳐지는가싶었다.
계향은 산굽이를 돌아서는 기차를 바라보며 억봉이가 어디 가서 무
엇을 하든 그저 탈없이 건강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게 되는것이
였다.
《계향아.》
동생을 바래고 돌아서던 알뜰이가 역구내홈 한구석에 외롭게 서있는
계향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언니!》
계향은 알뜰을 소리쳐부르며 그한테로 달려갔다. 계향은 많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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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는 앞에서 알뜰의 품에 주저없이 얼굴을 묻으며 소리내여 흐느끼
기 시작했다. 서로 붙안고 놓을줄 모르는 두 녀인의 발부리에서는 계향
이가 억봉에게 주려고 밤새 만든 버선이며 길음식이 들어있는 보따리가
내버린 물건처럼 딩굴었다.
이때부터 계향은 억봉을 손꼽아 기다리였다. 까치가 깍깍 우는 소리
가 들리면 혹시 억봉이한테서 반가운 소식이라도 오는가 해 가슴을 울
렁거리였고 거미가 천정에서 줄을 늘이면 억봉이 소식을 전해줄 귀한 사
람이 어서 오라고 속으로 저혼자 빌기도 했다. 계향은 억봉이가 징용으
로 끌려가던 길에 무사히 도망쳐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온 하늘을
얻은듯 한 마음이였고 단숨에 그한테로 달려가고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계향은 억봉의 탈출이 이 세상에서 남들이 누구나 쉽사리 하지
못하는 그 무슨 장하고 영웅적인 행위처럼 생각되기까지 했다.
손꼽아 기다리던 상봉의 그날은 8.15해방과 함께 오고야말았다.
너무나 뜻하지 않게 들이닥친 그 상봉은 그 결과 역시 너무나 뜻하지 않
던것이였다.
억봉이가 고향땅에 발을 디딘 그날이였다. 바로 그날 계향은 고향의
형님한테서 오빠와 자기앞으로 보내온 편지를 받았었다. 형님은 편지에
서 어린 조카가 앓는다는 소식을 전했었다. 계향은 오빠가 어서빨리 집
에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저녁때가 다 되도록 오지 않았다. 계향은 기
다리다못해 오빠를 찾아 떠났다.
어느덧 서쪽하늘에 노을이 불타기 시작했다. 계향은 오빠가 혹시
이전에 일하던 해탄로에 가지 않았나 해서 곧장 그리로 향했다. 해탄로
주변 공지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언거번거하게 떠들어댔다. 해탄사람
들이였다.
계향은 저속에 자기 오빠가 끼여있을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쪽
으로 걸어갔다. 때마침 주학섭이 빈 지게를 지고 덜렁거리며 계향
이쪽으로 왔다.
《아저씨, 우리 오빠 못 봤어요?》
《아니 이거 달모조카 아니야?》
주학섭은 묻는 말에 대답은 않고 반가와하며 벙글거렸다. 학섭은
한잔 마신 사람처럼 기분이 좋아 만나자바람으로 계향을 놀리려 들었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정말 빠르긴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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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말이예요?》
《저것 보지… 능청스럽게 아닌보살하구 시치미를 떼는거.》
《원. 아저씨두… 남은 오빠를 찾지 못해 속상해죽겠다는데…》
《속상하던 일이 이제 님만 만나면 기쁜 일로 되는거지… 핑게핑게 도
라지 핑게 대구 님 만나러 간다더니 오빠 핑게 대구 님 만나러 내가 왔
소.》
계향은 어처구니없었다. 주학섭은 못마땅해하는 계향의 표정을 보
았는지 아니면 제풀에 흥이 삭았는지 익살을 거두었다.
《억봉이가 돌아왔어. 잘못되지 않나 해서 남들은 속이 까매있는데 그
녀석 글쎄 때벗이를 쭉 해가지고 왔단 말이야.…
오빠두 저기 있으니 가보라구… 난 억봉이녀석이 한턱 내겠대서 교섭
하러 가는 길이야… 이런 일엔 내가 나서야지 젊은것들은 동서남북을 모
르거던.…》
주학섭은 제멋대로 한참 씨벌이고 가버렸다.
혼자 남자 계향은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였다. 주학섭이 말끝마다 억
봉을 그렇게 춰올리지만 않았어도 계향의 마음이 지금같이 설레며 균형
을 잃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계향은 억봉이가 징용에 끌려 떠나던 날 그
를 바래주러 나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서던 일이 새삼스레 떠오르면서 얼
굴이 뜨거워왔다. 그때의 죄스럽고 빚진 그 심정때문에 지금 억봉을 만
나기가 더욱 옹색스럽고 난처했다.
계향은 무슨 회의라도 하듯 빙 둘러앉아있는 사람들의 눈에 띠울가봐
얼른 해탄로 굴뚝뒤로 돌아섰다.
《억봉이, 그러니 어떻게 하자는거야?》
누군가가 째는듯 한 목소리로 물었다. 억봉이라고 하는 말에 계향은
귀가 솔깃해졌다.
《운영동지회친구들 하라는대루 굽신거릴게 아니라 이젠 우리가 공장
을 타구앉아야 한단 말이야.…》
분명 억봉의 목소리였다. 그의 말마디는 퍽 씨가 여물었고 쇠소리가
났다. 그래서 고향에 오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인망을 한몸에 모았을것
이다.
계향은 자기가 무엇때문에 이곳까지 오빠를 찾아왔었다는걸 까마득히
잊은채 굴뚝옆에 우뚝하니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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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후 인기척이 들리더니 모여앉아있던 사람들중에서 누군가가 굴뚝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억봉이라는것을 알아보는 순간 계향은 숨이
딱 막히였다. 머리를 빡빡 깎은데다 얼굴이 상해 퍽 낯설어보이였으나
계향은 대번에 억봉을 알아봤다. 숱진 눈섭아래 불찌같이 이글거리는 두
눈이며 쩍 벌어진 어깨를 으시대듯 약간 추켜올리고 좌우로 흔들며 걷
는 걸음걸이는 예나 다름이 없었다.
계향은 얼굴이 숯불피듯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가슴이 널뛰듯 하여 자
기 한몸을 어떻게 가누었으면 좋을지 알수 없었다.
억봉이 가까이로 다가서는 순간 계향은 머리를 다소곳이 숙여보이며
숨이 차 겨우 한마디 인사를 했다.
《그간 고생많았겠어요.》
억봉은 걸음을 멈추며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계향을 한참이나 뻔
히 바라봤다.
《아, 우학이 동생이구만.…》
억봉이도 계향을 몰라보진 않았다. 억봉은 벌쭉 웃더니 굴뚝 저켠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 우학이, 동생이 찾아왔어.》
억봉은 머리를 끄덕해보이더니 씽하고 제 갈길을 갔다.
《억봉이, 같이 가자. 개잡는데야 나를 당하나?》
한 청년이 억봉을 뒤따라 굴뚝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순간 계향은 온몸에 모닥불을 뒤집어쓰는듯싶었다. 지금까지 상봉
을 앞두고 순정에 불타던 계향의 가슴은 모멸감에 타다못해 재가 되는
가싶었다.
그날 계향은 밤새 잠들지 못하였다. 뻔히 쳐다보던 억봉의 눈길이 떠
오르고 무슨 큰일때문에 바쁘기라도 한것처럼 씽 스쳐지나가며 오빠를
부르던 그의 목소리가 귀에 울리는 바람에 계향은 어처구니가 없어 저
혼자 코웃음을 치는가 하면 기가 차 한숨을 쉬기도 했다. 억봉의 시야
에 비쳐진 자기는 어리무던한 동무의 철부지 누이동생이였을뿐이다. 바
로 이런 일이 있은 직후여서 계향은 알뜰이가 억봉이 돌아온 소식을 알
려주었을 때 전혀 놀라와하지 않았으며 자기네 집으로 오라는 청에 응
하지도 않았다.
계향의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있는지 눈치조차 채지 못한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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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은 억봉의 집에 다녀오는 길로 동생한테 이렇게 말했다.
《얘, 너 억봉이네 집에 빨리 가봐.》
《내가 거긴 뭘하러 가요?》
《뭘하러 가다니? 억봉이네 집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갔
다구… 일손이 딸려 야단이더라.》
《그게 나하구 무슨 상관이예요?》
《너 그걸 말이라고 하니? 억봉이가 너때문에 죽다가 살아돌아왔
는데… 그리구 그 집에서 지금 널 얼마나 기다린다구…》
《흥, 귀머거리 제 속의 소리한다구 오빤 괜히 함자…》
계향은 울먹울먹해 내뱉고나서 부엌문을 나섰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계향은 고향에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계향
은 모아두었던 푼전을 털어 장에 가서 솥 하나를 사왔다.
《웬 노구쟁이냐?》
우학은 계향이가 들고온 작은 솥을 보고 눈이 둥그래졌다.
《성님 초매 한감 끊으려다 이게 나을것 같아서…》
《그걸 어떻게 가져간다구…》
《돈있으면 지비기(큰솥)랑, 대와(대야)랑 주게(주걱)랑, 쇠짝지비
(쇠버치)랑 다 사갖구 가겠다.》
계향이네 고향엔 쇠붙이가 발랐다. 쇠로 만든 그릇과 부엌세간들은 더
욱 없었다. 고향을 그리는 동생의 마음을 엿보고 우학은 저도 모르게 한
숨을 쉬였다.
《너야 여기 있어야지.》
《오빠 함자 가려구?》
《이제 인차 잔치를 해야지.》
계향을 달래면서도 우학이 역시 동생과 헤여진다고 생각하면 서분했
다. 그들은 부모없이 이 세상에 단둘이 남았다. 시집, 장가를 가면
서로 자기 살림을 꾸리기마련이지만 한이웃에 다정히 같이 살면 얼마나
좋으랴. 모든 사람에게 크고 단 참외가 차례질수는 없었다. 시집을
가면 동생은 어차피 이 고장 사람이 되기마련이다. 반겨맞아줄 사람도
없는 고향에 데리고 가서 동생을 고생시키느니 빨리 잔치를 해주어 자
기 보금자리를 꾸리게 만들어야 했다.
《상게 베를 안 벴을테니 내 가서 쌀이나 좀 얻어가지구 올라.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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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구 서히서 고향에 함께 가자꾸나. 가서 온천두 하구 감두 먹구, 서해
불거지(노을)도 보구…》
우학이네 고향에서 감과 온천은 커다란 자랑이라 말할수 있었다.
철과 불밖에 모르는 이 고장 태생인 억봉이한테 비누없이도 미끈미끈한
뜨거운 온천물에 목욕을 하게 하고 주먹같은 감을 안겨주면 대번에 두
눈이 휘둥그래질것이였다. 무연한 간석지우로 비낀 서해의 저녁노을
은 또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것인가.
계향은 자기를 기쁘게 해주려는 오빠의 말에 오히려 더 발칵 성을
냈다.
《오빤 야싸하게 나 함자 떨궈두고 가는게 그렇게 좋아요? 어서 오빠
함자 실컨 온천두 하고 감두 먹구 불거지도 보라요.》
계향은 고향에 가지고가겠다고 사왔던 자그마한 솥을 발부리에 내동
댕이치고나서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우학이가 억봉이와 계향이한테 진짜혼인을 맺아주려 벼르고벼르던 날


이였다. 우학은 남모르게 송별회를 차려놓고 억봉을 작숙네 집으로
손잡아끌었다.
달모네 집은 나지막한 황마산둔덕에 자리잡고있었다. 달모는 제철
소적으로 손꼽히는 기능공의 한사람이고 살림살이손탁도 드센 축이여서
두칸이나 되는 자기 집을 쓰고살았다. 지붕에 기와대신 기름종이를
덮었지만 비가 새는 일은 없었으며 집둘레로 파벽돌을 주어다 나지막하
게 담장을 쌓고 쇠장대를 박아 벽돌우로 얼기설기 쇠줄까지 얽어놓은것
이 로동자집치고는 얼싸했다.
이 집에 계향이가 업혀산다. 제철소에 불이 죽어 일자리가 없어
진 후부터는 우학이도 합숙에서 나와 고모네 집으로 왔다. 고모는 우
학이네 남매를 자기 자식들처럼 위했다. 안해한테 극진하고 별로
가까운 형제와 친척들이 없는 달모는 처조카들을 자식 못지 않게 사
랑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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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모네 집에는 주학섭이 한발 먼저 와있었다.
《이자들 오나?》
주학섭은 집주인처럼 웃방 문턱에 가위다리를 하고 앉아 우학이와 억
봉을 맞았다.
《빨리 오셨군요.》
우학은 주인노릇을 해야 할 자기가 늦어져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머리
까지 끄덕여보이였다. 우학은 오늘의 소박한 송별연을 위해 그간 자기
가 삯짐을 져 번 돈중에서 고향에 돌아갈 차비만 빳빳이 남겨놓고 나머
지는 몽땅 털어 술도 받아오고 안주감도 사오게 했다.
《삼촌은 언제 떠나시려우?》
억봉은 주학섭한테로 다가서며 오늘따라 그를 삼촌이라고 깍듯이
존대했다. 학섭은 억봉이보다 열여섯살이나 손우여서 삼촌벌이 되고 남
지만 웬만해 이렇게 부르지 않았다. 사람좋은 학섭은 언제한번 이것을
나무라거나 탓하지 않았으며 자기 나이보다 근 스무살이나 손아래인 또
래들과도 동무처럼 어울리군 하였다. 자기자신을 박대하는데 버릇된 사
람일수록 남의 존대에 예민하다. 학섭은 자기를 삼촌이라고 불러주는 억
봉의 별치 않은 말에 가슴이 쿡 찔리웠지만 자신의 슬픔과 눈물을 웃음
과 익살로 묻어두는데 습관되여있었다.
《아따, 색시네 집에 오더니 억봉이 갑자기 어른이 됐다. 그래 삼촌
이 가는 날 술 한잔 사주려나?》
학섭이 입씨름을 벌리는데 집주인 달모가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고기꿰미가 들려있었다. 묵직한 고기꿰미에서는 서너손가락넓이 잘되는
붕어들이 아직 살아 풀떡거렸다.
《야, 형님 그거 안주감 괜찮수다.》
학섭은 목젖 넘어가는 시늉을 하며 부러 생침을 꿀꺽 삼키였다.
말끝마다 술술 하던 학섭은 막상 붕어회까지 받쳐 술이 들어왔을 때
댓잔밖에 들지 않았다.
《형님, 난 가겠수다. 래일은 나두 떠나야겠는데 가서 준비해야지요.
그새 형님신세 정말 많이 졌수다.》
학섭은 평시의 그답지 않게 달모의 손을 잡고 울먹울먹해 말했다.
《삼촌,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갈 땐 가더라도 이 술 한잔 더 받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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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은 술을 한잔 부어가지고 학섭의 팔을 붙들었다.
《여보게 조카, 마음은 고맙네만 더 권하지 말라구. 오늘같은날
난 술먹으면 울어. 오늘같이 기쁘고 좋은 날 내 울어서 되겠나.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를 뜨지 않구 밤새도록 술마시며 놀구싶네. 또 여
기도 떠나가고싶지 않아. 여기 게걸포에 찾아와서 딸 다섯 낳도록
살았으니 미운 정일망정 톡톡히 들었거던. 고향에 간대야 나한테 땅이
있나 산이 있나, 배운 재간이 석탄 주무르구 쇠 다루는거니까 가서 딱
쇠노릇밖에 더 하겠어. 그런 일이 내 성미엔 맞지 않아. 하지만 일본
놈밑에서두 살았을라니 해방되였는데 살길이 생기겠지. 사람 정이란게
따져놓고보면 더럽단 말이야. 죽지 못해 살아오던 이 고장두 막상
떠나자니 서운하다니까…》
학섭은 술 받을 생각은 않고 장광설만 늘어놓았다. 술에는 취하지 않
았으나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여져야 한다는 생각에 학섭의 마음은 슬픔
으로 이미 잔뜩 취해있었다.
《땅에 정들어 그러겠나? 인정이 귀해 그러는게지.》
달모가 좌상답게 한마디했다. 머리가 반쯤 벗어진데다가 마흔다섯
이라는 나이에 비해 때이르게 귀밑머리가 희슥희슥해진 그는 이 순간 별
로 틀지고 위풍있어보이였다.
《형님, 형님 말이 맞수다.》
학섭은 억봉이가 자기한테 권하던 술잔을 뺏어 달모에게 주고나서 말
에 발을 달았다.
《형님말이 진짜요. 쩍하면 고향, 고향 하는데 그게 다 고향사람이 그
리워서지요. 난 고향에 내 땅이라군 송곳박을 자리두 없구 내거라군 나
무 한그루 없수다. 그래두 고향을 찾아가지 않나요? 여기두 그렇지요.
처음 왔을 땐 가지 못해 야단이였구 죽지 못해 살아왔는데 오늘은 떠나
자니 마음 아프군요. 형님이랑 이 억봉이 삼촌때문이지요. 내 어디
간들 형님네한테 받은 사랑을 잊겠소? 잊지 못하지요. 돌아가신 자네 아
버진 더욱 그래.》
학섭은 억봉의 팔을 끌어당기더니 그의 어깨를 두드리였다. 그는
달모가 권해도, 우학이가 권해도 술을 받지 않았다. 그러더니 좌중을 향
해 누구에게라없이 물었다.
《그래 잔치는 언제 하겠나?》

92
《가을에 해야지요.》
우학의 대답이였다.
《그럼, 금년가을에 해야지. 해방이 되였는데 해두 보란듯이 해야지.》
학섭은 아무말없이 앉아있는 억봉을 한참이나 뻔히 마주보더니 벌쭉
웃으며 그의 머리를 줴박고나서 달모쪽으로 머리를 돌리였다.
《형님, 그만하면 내 중매 잘 섰지요?》
《그럼―》
이미 취기가 오르기 시작한 달모는 그저 연방 머리만 끄덕거리였다.
달모는 무척 술을 좋아했지만 주량이 많지 못했다.
《내 중매비니까 마지막으루 색시가 부어주는 술이야 먹어야지, 잔치
날두 올지말지 하니까. 자, 새색시― 한잔 부으라구―》
학섭은 부엌에서 들으라고 크게 소리치며 빈 술잔을 들어올리였다. 부
엌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싫어요.》하는 계향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방에서 부엌으로 나가는 새문뒤에서 또렷이 들려왔
다. 부엌에 함께 있던 달모의 처가 계향이더러 방안에 들어가라고 떠미
는 모양이였다.
《오늘이 진짜약혼식이란 말이야. 색시없이 신랑만 앉히구 약혼하
겠어?》
주학섭이 마른주정을 했으나 계향은 부엌에서 들어오지 않았다. 우학
이 동생을 독촉하다못해 부엌으로 나갔으나 그도 인차 동생을 데리고 들
어오지 못했다. 한참만에야 계향은 우학이한테 강제다싶이 끌려들어
왔다. 방안에 들어와서도 계향은 술자리를 등지고 구석에 쭈그리고앉아
종시 술을 부으려 하지 않았다. 계향은 곤두세운 자기 무릎을 치마폭으
로 감싸고앉아 푹 머리를 숙이였다. 방안사람모두가 그가 쿨쩍거린다는
것을 알게 되였을 때 우학은 딱한듯 말했다.
《글쎄 이 철없는게 내가 고향에 가겠다니까 저두 덩달아 따라간다고
이러지 않나요.》
우학은 제가 금시 울음을 터칠듯 한 표정이였다.
《아니, 그럼 두고 가겠단 말인가? 시집올 땐 오더라도 갈 땐 가야
지…》
학섭은 어색해진 방안의 공기를 가시려고 반죽을 쳤다.
《새아기, 그러지 말구 한잔 부으라구. 나보다 신랑될 사람한테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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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어야지. 그 술루 검은머리 백발 되도록 서로 의좋게 살자구 백년가약
을 맺는단 말이야.》
주학섭이 아무리 능란하게 달래며 사정을 했으나 계향은 들은척도 하
지 않았다. 계향은 우학이가 술병을 자꾸 손에 쥐여주자 나중엔 탁 뿌
리치고말았다. 우학은 얼굴이 뻘개져 사람들이 없으면 자기 동생한테 금
시 주먹이라도 안길것 같았다. 이때였다. 주학섭과 달모사이에 말없
이 앉아있던 억봉이 나직이 말했다.
《우학이 동생! 그러지 말구 달모삼촌한테 한잔 붓소.》
크지 않은 그의 목소리는 자못 위엄있게 울리였다. 사람들은 모
두 숨소리를 죽이였고 방안의 공기는 금시 터질듯 팽팽해갔다. 계
향이가 억봉이말에 응한다면 그가 억봉을 자기의 약혼자로 인정한
다는걸 의미했고 그렇지 않다면 모든것을 부인한다는걸 말했다. 찌꾸
덩 새문이 열리더니 달모처가 방으로 들어왔다. 계향이를 달래는데는
자기가 낫다고 생각했는지 달모의 처는 계향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며
술병을 손에 쥐여주었다. 계향은 여전히 술병을 받아쥐려 하지 않
고 탁 밀쳐버리였다. 그 바람에 술병이 넘어지며 방바닥에 술이 쏟아
졌다. 억봉의 얼굴은 불타는듯 붉어졌다. 하지만 그는 아직 자기의 리
성을 잃지 않았다.
《부라는데 왜 그러오?》
억봉은 조용하나 강박하듯 물었다. 계향은 방구석에 사람들을 등지고
앉은채 아무 응대 하지 않았다. 억봉은 얼굴이 뻘개서 다시 뇌이였다.
《나한테 술달라는게 아니라 이 〈걱정말라〉아저씨한테 한잔 부란 말
이요. 오빠랑 작숙이랑 함께 고생하던 사람이 떠나가면서 작별의 정을
나누자는데 그 마지막부탁마저 거절해서야 되겠소? 그리구 뭔가 잘못 생
각하는것 같은데 난 동생때문에 오지 않았소. 떠나가는 동생오빠와
작별하자구 왔지…》
억봉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갔다. 그는 달아오른 목을 추기려고 제
손으로 술을 부어 쭉 들이키더니 방안사람들을 향해 다시 말을 이
었다.
《모두들 약혼이요 잔치요 하는데 난 일본놈 덕에 장가들고싶지 않소.
그때 명색일망정 벼락약혼을 하고 허위 혼인신고를 냈던것은 처녀공출
이 괘씸하구 속이 까매 돌아가는 우학이를 위해주느라 그랬던거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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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들자구 그랬던게 아니요. 우학인 내 동무구 동무가 제 동생때문에
안타까와하는걸 옆에서 보구 가만있을수 없어 연극놀았던거란 말이요.
일본놈때문에 억지로 했던 약혼이니 일본놈이 망한 오늘 그건 무효요.
오늘루 그 약혼은 파혼이란 말이요.》
억봉은 열에 떠서 부르짖었다. 일이 예상치 않던 방향으로 너무도 갑
작스레 변하는 바람에 방안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져 억봉이만 쳐
다봤다.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했던 달모는 술이 싹 깨여버리고 우학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학섭은 진담인지 주정인지 알아보려고 눈섭 하나 까
딱하지 않은채 억봉의 일거일동을 바라봤다. 억봉은 자기를 그렇게
눅거리로 알았댔는가 하고 묻는듯 한 표정으로 방안사람들을 둘러보며
피식 웃었다. 억봉은 등진채 돌아앉아있는 계향을 향해 개선장군의
관용성을 가지고 의논하듯 다시 말을 걸었다.
《우학의 동생! 어떻소? 해방이 됐으니까 이젠 낡은 둥우리에서 날아
가잔 말이요. 자기 가구싶은데루… 그런 의미에서 나한테두 한잔 붓겠
으면 부으란 말이요. 〈걱정말라〉아저씨한테는 작별인사루, 나한테
는 억지약혼 파혼값으루…》
억봉의 말에 계향은 정말 술을 부었다. 《걱정말라》주학섭의 잔에 술
을 붓고나서 계향은 부엌으로 뛰여나갔다.
억봉은 계향이가 주학섭한테 부어놓은 술을 제앞으로 끌어당겨 단숨
에 쭉 들이키더니 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여보게 헌바지, 고향에 갈 때 차비루나 보태. 떠나던 날 너한테 역
에서 주자던거야.》
억봉은 돈이 들어있는 봉투를 술상우에 내놓고나서 자리에서 일어섰
다. 고향에 오던 날 필주한테 꾸었던 돈중에서 남은 전부다. 억봉은 자
기 누이 알뜰에게 주려고 봉투에 몇번씩 손이 갔다가도 이제 곧 고향에
가야 할 우학을 생각해 지금까지 참아왔었다.
우학이 달려나와 붙들고 먼저 가겠다던 학섭이 못 간다고 앞을 막아
섰으나 억봉은 막무가내였다. 억봉은 모든 사람을 뿌리친채 어둠이 깃
든 거리로 나섰다. 하늘에서는 방금 돋아나기 시작한 별들이 반짝거리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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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차는 레루우를 서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올망졸망한 다섯딸


과 처를 데리고 메산자보따리를 둘러멘채 렬차에 오른 주학섭은 승강대
우에 서서 손을 들어올리였다.
《잘 있으라구.》
목메인 그의 목소리가 아프도록 알뜰의 귀를 찔렀다.
《몸성해요, 아저씨―》
알뜰은 갑자기 눈앞이 콱 흐려와 작별의 인사말을 저혼자 입속에서 웅
얼거렸다. 렬차가 점점 멀어져가자 알뜰은 주학섭과 헤여지는 서글픔에
또 하나의 괴로움이 짙은 안개처럼 밀려와 덮치는것이였다.
(파혼을 하다니? 우리 억봉이가 파혼을 하다니?)
알뜰은 텅 비여가는 역구내에 우두커니 서서 입속으로 자꾸만 같은 말
을 곱씹었다. 알뜰은 주학섭을 바래주려 임을 이고 역에 나와서야 이 사
실을 알았다. 롱하기 좋아하는 주학섭이 자기한테 어쩌나 보려고 해보
는 소린줄 알고 알뜰은 처음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학섭은 작
별의 마지막순간조차 눈물이 글썽해 억봉의 일을 근심해주었다. 롱에는
한도가 있다. 주학섭은 우스운 소리도 곧잘 하고 남을 골려주기 잘해도
절대 분수없거나 실없는 사람이 아니였다. 입담이 세고 말로는 노래기
회쳐먹게 비위를 부려도 마음이 어지여 모르는 집에 가서 물 한그릇 못
달라는 사람이다.
알뜰은 복잡하고 무거운 생각에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였다. 흰 연기
를 날리며 렬차가 산모퉁이로 사라진 후에도 알뜰은 그쪽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도시변두리 진펄쪽에서 불어왔다. 한소나기 내
리려나부다. 밤이면 선기가 나도 아직 한낮 볕은 따갑다.
바람에 흰옷고름을 날리며 뿌리박힌듯 서있던 알뜰은 억봉을 만나 모
든 사실을 속시원히 묻고싶은 생각에 집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96
역구내를 나와 거리에 들어서니 한무리의 청년들이 렬을 지어 걸어갔
다. 각이한 옷차림에 총대 하나씩을 둘러메고 씩씩하게 노래를 불렀다.
갓 조직된 자위대대렬이 지나가자 길거리에 크게 내다붙인 광고판옆에
서 키 큰 한사람이 모자를 벗어들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웨치는 소
리가 들리였다.
《여러분, 오늘 저녁 우리 무궁화영화관에서는 7시부터 도에서 내려
오신 선우치담선생의 시국강연이 있습니다. 우리 겸이포가 낳은 웅변가
선우치담선생은 제노라던 일본의 한다하는 변호사들을 수세에 몰아넣던
그 능란한 언변으로 여러분들이 애타게 찾고있는 우리 삼천만 백의동포
가 가야 할 길을 귀에 쏙쏙 들어오게 알려드릴것입니다. 우리 조선이 갈
길을 모색하는 애국자들과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열혈청년들은 시국
강연을 들으러 우리의 무궁화영화관으로 오시오. 시국강연이 끝난 후에
는 멋진 사랑의 영화가 상영됩니다.》
발걸음을 멈춘채 알뜰은 청산류수로 엮어대는 광고군의 말을 한참이
나 들었다. 광고군의 말재간에 귀가 홀려 한동안 발목을 붙들렸던 알뜰
은 다시 제 갈길을 걸었다.
억봉은 집마당에서 장작을 패고있었다. 어디 가서 끌어왔는지 마당에
는 낡은 침목이 석대나 딩굴었다. 집에는 억봉이 혼자 있었다.
《그 장작 어디서 났니?》
알뜰은 토방에 맥없이 주저앉으며 억봉에게 물었다. 억봉은 대답않고
씩씩 장작만 팼다. 요즘 알뜰은 병막골 뒤산에 자주 갔었다. 벌거벗은
주변산이건만 삭정이 하나라도 더 긁어들이려고 뜨문하게 이악을 떨어
야 했었다. 이것을 보다못해 억봉은 오늘 동생까지 휘여잡아가지고
운수부에 가서 낡은 침목을 얻어온것이다. 알뜰은 억봉이 장작을 패다
말고 잠시 숨을 태우는 틈에 다시 물었다.
《삼촌네 집엔 갔댔니?》
《못 갔어.》
억봉은 퉁명스레 대답하며 손에서 도끼를 놓았다. 억봉은 오늘따라 누
이가 치근치근 말붙이는 낌새를 눈치채고 패놓은 장작더미우에 덜썩 엉
뎅이를 놓았다. 지금까지 토방에 앉아 억봉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알뜰은 마침한 기회라고 생각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였다. 주변에는 자
기들외에 아무도 없었다.

97
《억봉아, 나 하나 좀 물어보자.》
알뜰은 무척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억봉은 담배를 태우려고 주머
니를 부스럭거리다 말고 누이를 바라봤다.
《너 파혼했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그게 정말이냐?》
알뜰은 그 누가 엿들을가봐 주저하듯 나직이 묻고나서 숨마저 죽인채
동생을 바라봤다.
《응.》
억봉은 픽 웃으며 단마디명창이다.
《너 그게 무슨 말이냐?》
알뜰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였다. 그런 일을 집안사람 아무와도
의논하지 않고 아이들 놀음처럼 이게 뭐란 말인가.
억봉은 약혼때도 그랬었다. 그때는 사정이 딱해 그랬으려니 하고
참았었고 약혼녀가 우학의 동생 계향이라는것을 알고는 색시감을 그만
하면 괜찮게 골랐다고 은근히 좋아도 했었다.
《집안에 부모님들은 안계신다만 삼촌두 계시구 삼촌어머니도 계시지
않느냐? 웃어른들한테 아무 의논하지 않고 너 그게 뭐냐? 이 사실을 아
신다면 아버지나 어머니두…》
알뜰은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옷고름을 눈에 가져갔다. 알뜰의 노여움
은 억봉이가 자기 일생의 중대사를 제멋대로 혼자 처리했다는데만 있지
않았다.
알뜰은 이 순간 계향을 생각했다. 알뜰은 누이로서 억봉의 편에만 설
수 없었다. 그는 녀자였다. 녀자로서 녀성의 권리와 인격을 지켜야
했다. 자신이 걸어온 피눈물나는 생활을 통해 이것은 알뜰에게 거의 본
능화된 감정이고 지향이였다. 알뜰은 녀자들과 흐지부지하는 사람들
을 제일 싫어했다.
알뜰에게 계향을 옹호하는 감정이 생긴것은 언젠가 제철소정문에
가서 억봉을 자기 오빠로 잘못 알고 뛰여가던 그를 보던 그때부터였다.
오빠를 위해 성의껏 지어온 밥이 수위놈의 구두발에 짓밟히우고 계향이
우는것을 보았을 때 알뜰은 이곳 실정을 알지 못하는 그한테 미리 귀띔
해주지 못한 자신을 탓하였고 말할수 없는 동정심을 느끼였었다. 억봉
의 저녁밥을 가지고 공장으로 가던 그날 알뜰은 거리에서 그를 만났었
고 제철소정문이 어데냐고 물어보는 그를 정문으로 데리고 갔었다.

98
팥밥을 해왔으면 그우에 조밥이나 수수밥을 덧씌워 수위놈을 속여야 한
다고 한마디 미리 귀띔만 해주었어도 그날 계향은 그처럼 가슴아픈 일
을 당하지 않았을것이였다. 알뜰은 그날 슬피 우는 계향을 위로하며 서
로 통성을 하였었고 여기 철의 지구 녀인들이 알아야 할바를 자기 아는
껏 가르쳐주기도 하였었다. 그리고 처녀공출바람에 그가 억봉의 벼락약
혼녀로 되였다는것을 알았을 때 알뜰은 억봉의 팔에 매달렸다가 얼굴이
빨개져 도망치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며 타고난 연분은 연분이라고 저혼
자 빙그레 웃기까지 했었다.
억실억실한 생김처럼 성미 역시 씨원씨원한 그, 오누이 성격이 서로
바뀌였으면 제격이라고 할 정도로 활량인 그는 새침데기보다 억봉이한
테 어울릴지도 몰랐다. 집안의 기둥격인 동생의 색시감이여서 녀자
로서는 지내 괄괄한 성격상의 약점마저 좋게만 생각해오던 계향이, 지
금까지 애정을 가지고 대해오던 이 처녀때문에 억봉이가 《징용반대 불
온분자》로 딱지가 붙어 징용에 걸리게 되였을 때 알뜰은 눈앞이 아뜩
했다. 집안의 기둥이 찍히였다는 분한 생각이 앞서면서 알뜰은 무작정
계향이가 미워났다. 하지만 억봉이가 고향을 떠나던 날 역에 따라나와
괴롭게 눈물짓는 계향을 보았을 때 알뜰은 그 뜨거운 눈물에 증오와 반
감이 말끔히 씻겨내리고말았다. 닥쳐온 불행은 두 녀인을 오히려 가깝
게 만들었다. 한숨과 눈물속에 두사람은 서로 의지했고 리해를 깊이했
다. 두사람은 불행의 검은구름이 어서 가셔지기만 바랐다. 해방과
함께 바라던 모든것이 뜻대로 돼가는가싶은 지금 파혼이라니 너무도 당
치 않았다.
알뜰은 북받쳐오르는 노여움과 자기 설음에 눈에서 옷고름을 떼지 못
했다. 억봉은 누이가 쿨쩍거리자 마음이 약해지고말았다.
《원 참, 누이두… 파혼, 파혼하는데 내가 언제 뭐 약혼을 했댔어?》
알뜰은 눈굽에서 옷고름을 내리우고 반쯤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너 그걸 말이라고 하니? 벼락약혼바람에 소문은 얼마나 냈구 값은
얼마나 물었냐? 1년이나 죽을 고생 다하고선 벌써 그걸 잊었단 말이
냐?》
《누이두… 그거야 장난으루 연극놀았던거지… 뺏아가다못해 나중
엔 체니까지 군대노리개로 끌어가는 일본놈이 미워서 잠간 연극논건데
그게 어디 약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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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할게 따로 있지 누가 그런 일생의 중대사를 가지고 장난한다더
냐?》
《그럼 어떻게 해? 공출에 끌려가 죽는가 사는가 하는 판에…》
《그러게 너때문에 계향이가 얼마나 속태우고 눈물흘린지 아니?》
누이의 말은 뜻밖이였다. 억봉은 이 세상에서 누이 아닌 다른 녀자가,
그것도 젊은 처녀가 자기때문에 속상해하며 눈물흘린다고는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었다.
《네가 떠나던 날 계향은 널 바래주겠다구 역에까지 따라나왔댔단다.
버선을 지어갖구… 엿이랑 떡이랑 꿍져가지구 나와 울기는 얼마나 섧게
운줄 아니?》
억봉은 누이의 말이 곧이 들리지 않았다. 억봉은 징용에 끌려 자기가
고향을 떠나던 때 일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자기를 바래주러 나왔던 여
러 사람들중에서 억봉은 계향을 본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하긴 머
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어수선하여 남에 대해서는 생각할래야 할수 없었
던 때여서 못 보았을수도 있었다.
억봉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알뜰은 가만있지 않았다.
《그리구 네가 징용에서 무사히 도망쳐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얼
마나 기뻐한줄 아니? 그 소식을 전해주니까 그 앤 글쎄 네거리에서 나
를 붙들고 빙빙 돌면서 동동 뛰더라…》
억봉은 누이를 통하여 계향이가 자기때문에 눈물도 흘리고 기뻐도 했
다는걸 알게 되자 마음이 이상했다. 지금까지 억봉은 계향을 사귀거나
리해할만 한 기회가 없었다. 서로 편지 한장 주고받은적도, 잠시나마 함
께 거닌적도 없었다. 이름이나 알고 풋낯이나 아는, 동무의 녀동생으로
여겨왔을뿐이다. 벼락약혼은 동무를 위해주려는 하나의 악의없는 장
난이였었다. 억봉은 면사무소 호적서기를 찾아가 거짓 혼인신고를 하던
그때만 해도 계향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했을뿐이지 그를 자기의 안해로
맞겠다는 생각은 꼬물만큼도 없었었다. 하건만 계향은 자기를 진짜
약혼자만큼 여긴 모양이다.
억봉은 자기가 애꿎게도 남의 처녀속을 태우고 어린 그 가슴에서 한
숨과 눈물을 짜냈다고 생각하니 기가 찼다. 억봉은 며칠전 해탄로 굴뚝
옆에서 우연히 계향을 만났던 일이 새삼스레 생각났다. 돌이켜보면
그때 다소곳이 머리숙여 인사를 하며 자기를 바라보던 그의 두눈에는 반

100
가움과 함께 이름하기 어려운 애틋한 정이 넘쳤었다. 그때 억봉은 그 어
떤 알수 없는 절절한 소망과 열정으로 반짝이던 그 눈때문에 서둘러 우
학을 찾으며 그옆을 떠나고말았었다.
누이의 공격에 할말이 없어진 억봉은 변명처럼 웅얼거렸다.
《괜히 그러느라 그런거지 계향이가 날 좋아할게 뭐야? 언제 봤
다구…》
억봉의 말에 알뜰은 속으로 흥하고 코방귀를 뀌고말았다. 계향이
가 억봉이를 마다할수 있단 말인가? 억봉이가 계향이보다 기운다면 공
부를 못한 그것 하나다. 계향은 소학교를 졸업했어도 억봉은 소학교
1학년밖에 다니지 못하였다. 돈이 없어 학교에는 못 다녔지만 억봉
은 남만큼 읽고 썼으며 총기도 있었다. 알뜰은 억봉이가 자기 동생
이래서 그런다기보다 실지로 어디 내놓아도 남한테 별로 기울지 않
는다고 믿었으며 억봉을 마음속으로 은근히 자랑해왔었다. 성미가
우락부락하나 그대신 뒤는 없었으며 미욱하지도 않았다.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하고 무엇이건 마음먹으면 결패있게 해내고야마는 성미
도 남자쌌다. 알뜰은 자기 동생이 절대 계향이보다 못하거나 그한테 기
운다고는 생각해본적 없었다.
《그럼 넌 짝이 기울어 파혼하자구 손들고 나앉았니?》
억봉은 점점 더 난처해지고말았다.
《누이, 계향이가 그렇게 정 마음에 드나?》
《난 계향일 꼭 우리 집사람으로 삼겠다고 마음둬서 그러는건 아니다.
네가 녀자들을 알길 우습게 알구 흐지부지하는게 안돼서 그러지…》
알뜰의 말마디는 맵고 짰다. 억봉은 누이마음 어느 구석에 이런 올곧
고 살찬데가 있었는가싶었다.
억봉은 별치 않게 생각해온 벼락약혼과 그 파혼이 우학이와 자기사이
는 물론 누이하고까지 관계를 미묘하게 만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내 원 정말…》
억봉은 엉뎅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힘
주어 도끼를 내리칠 때마다 굵다란 장작이 쩍쩍 짜개져 여기저기 흩어
지고 손바닥같은 도끼밥이 돌멩이처럼 날아가 문짝을 때리고 지붕우에
까지 날아올라갔다.

101
5

파혼으로 누구보다 커다란 마음의 부담을 지닌 사람은 계향이였다. 억


봉이가 징용에 끌려가던 그때부터 그한테 기울기 시작한 계향의 마음은
산에서 굴러내리는 돌처럼 걷잡을수 없어졌으나 그것은 동정에 뿌리박
은 상념적인것이였었다. 동정이 사랑을 낳을수는 있으나 그자체가 사랑
은 아닌것이다. 계향은 자기대신 징용올가미를 뒤집어썼다는 생각에 미
안함을 금할수 없었고 빚진것만 같은 이 죄의식때문에 억봉의 처지를 동
정해온것이였다. 계향에게 있어서 이성의 감정은 해방과 함께 억봉이가
고향에 돌아와 그에 대한 동정의 온갖 리유와 조건이 없어진 이후에 오
히려 더 촉발되였다. 계향은 오빠를 찾아갔다. 고향에 돌아온 억봉을 만
나던 그날 그가 자기를 한갖 동무의 녀동생으로밖에 대해주지 않은것이
얼마나 불쾌했는지 모른다. 이 불쾌감은 총각앞에 처녀로서 자기의
인격을 지키려는 자존심의 발현이였고 자기자신도 모르게 억봉에게
끌리기 시작한 순정의 역설적인 표현이였다. 그래서 언젠가 계향은
자기 오빠한테 저도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행패를 들이대다싶이 했었다.
이런 계향에게 억봉의 파혼은 또다시 가해진 하나의 호된 타격이 아
닐수 없었다. 계향은 억봉이한테 자기가 처녀로서 큰 허물을 입고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는 심정이였다.
순정이 싹터나던 처녀의 가슴에 입은 상처는 컸다. 그것은 너무도 괴
롭고 가슴아픈것이였다. 그럴수록 반발 역시 크고 강렬했다.
(어디 보자. 저만 잘난체 하는 사람, 석탄숯쟁이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으랴.)
계향은 혀를 깨물며 입속으로 저혼자 부르짖었다.
계향은 당장 이곳을 떠나가고싶었으나 막상 떠나자니 앞일이 막막했
다. 오빠를 따라 고향에 간다고 해도 어지고 용한 오빠의 가슴만 아프
게 해줄뿐 기쁘고 좋을 일은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공출바람에 오빠속
을 얼마나 썩이였던가.
괴롭게 모대기던 계향은 문득 차지훈이 생각났다.
102
지훈은 계향이한테 배움의 어섯눈을 틔워준 은인이라고 할수 있었다.
계향이 지훈을 알게 된것은 계향이가 고모8촌언니네 집에서 안잠자기
노릇을 하던 때였다. 그때 지훈은 계향의 8촌벌언니와 결혼한 직후였었
는데 방학을 리용하여 처가에 왔었었다. 지훈은 그때 자기네 처가집에
서 일찍 부모를 여읜 먼 일가집 불쌍한 아이여서 데려다 기른다는 계향
에게 남다른 관심과 동정을 돌려주었었다.
계향은 주인집아이를 보고 심부름을 하는 여가에 틈틈이 시간이 차례
지는대로 남의 어깨너머글밖에 익히지 못하였으나 소학교에 다니는
주인집 응석둥이인 지훈의 막내처남보다 국어와 산수를 썩 잘했다.
계향은 불을 때며 부엌아궁앞에서 글씨 쓰는 법을 익혔고 아이를 업고
잠재우면서 구구표를 외우군 했다.
지훈은 계향의 비상한 암기력과 향학열에 감탄하여 그를 처삼촌이 경
영하는 소학교에 심부름군으로 넣어주었다. 그 덕에 계향은 읽고 쓰는
법을 깨우칠수 있었고 웬만한 중학교중퇴생만 한 정도의 지식까지 얻을
수 있었다.
계향은 자기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준 은인으로 지훈을 존경했으며 학
교를 나온 이후에도 스승처럼 믿고 따랐다.
계향은 지훈을 이곳 송림에서 만날줄 알지 못했었다. 해방되던 날 길
거리에서 만났을 때 지훈은 몹시 반가와하며 자기네 집주소를 적어주었
었고 집에 놀러 오라고 몇번이나 당부하였는지 모른다.
계향은 지훈을 만나게 되면 좋은 조언이라도 들을수 있다는 생각에 그
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고래벌쪽으로 빨래를 나왔던 계향은 빨래함지를 고모한테 이워주고나
서 거기서 곧장 지훈네 집쪽으로 향했다.
다 찌그러진 길가집앞을 지나려는데 문이 열리더니 그안에서 억봉이
네 형제가 나왔다. 계향은 얼마전에 고모와 함께 빨래하러 이 집앞을 지
나가면서도 억봉이네가 여기 사는줄 알지 못했었다.
형보다 한걸음 앞서 대문을 나서던 석봉은 계향을 알아보고 먼저 꾸
벅 인사를 했다. 석봉은 계향이보다 한살이나 손우이건만 제법 형수대
접을 하려든다.
계향은 외로 고개를 틀고 찬바람이 씽 일도록 그앞을 스쳐지나고말았다.
《형,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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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봉은 얼굴이 뻘개져 못 본척 하는 계향을 턱질하며 형을 향해 두눈
을 끔적했다. 억봉은 계향을 알아보고 공연히 동생한테 화를 냈다.
《망할 자식, 별데 다 참견하겠다는거야, 가자…》
억봉은 바지주머니에 두손을 지르며 동생앞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하
면서도 그의 눈길은 계향이가 사라진쪽으로 저도 모르게 이끌렸다.
계향은 골목길로 점점 멀어져간다.
《내 원 참…》
억봉은 어처구니없어 코방귀를 뀌며 동생을 끌고 제철소로 향해갔다.
계향은 그 누가 뒤에서 덜미라도 덮치려드는것만 같은 촉박감에 사로
잡혀 걸음을 다그쳤다. 억봉이네 집 근처를 퍼그나 벗어나서야 계향은
확확 달아오르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였다. 계향은 공연히 부아가 끓어
오르고 화가 났다.
계향은 첫걸음부터 억봉이네 형제와 맞다들리는게 재수없다고 생각했
으나 지훈은 마침 집에 있었다.
《아니, 이거 계향이가 아니야? 그새 왜 한번도 꿈쩍 안했어? 그간 잘
있었나?》
어디에 가려는지 외출복차림으로 짐을 꾸리던 지훈은 계향을 여간만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지훈은 다 꾸려놓은 들가방을 한쪽으로 밀어
놓으며 계향에게 자리를 권했다.
《선생님, 어디 가시나요?》
《서울에 좀 다녀오려구.》
지훈의 대답에 계향은 잔뜩 흐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였다. 두무릎을
옆으로 뉘우고 방 한쪽구석에 앉아있던 계향은 옷고름을 매만지며 탄식
조로 중얼거리였다.
《선생님은 정말 좋겠어요.》
지훈은 계향의 한숨과 어조에서 무엇인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선생님, 전 어떻게 하면 좋나요?》
계향은 말도 하기 전에 두눈에 눈물부터 맺혔다. 계향은 벼락약혼과
파혼의 내막을 한참이나 안타깝게 이야기했다. 지훈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계향이는 일본놈때문에 처녀공출에 걸렸던게구 처녀공출을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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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니 벼락약혼도 하게 된거야. 그러니 그 벼락약혼을 파했다구 사회
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흠될것은 아무것도 없어.》
지훈은 안타까와하는 계향이한테 신통한 조언을 주지 못하고 뜨뜨미
지근한 소리밖에 할수 없는 자신이 한스러웠다. 지훈은 자신의 무능에
반발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래 파혼했다는 그 남자는 어디에 있나?》
《제철소에서 일하댔어요.》
《제철소?》
《예, 박억봉이라구… 이전에 해탄에서 일했는데…》
계향의 말에 지훈은 놀랐다. 세상은 넓고도 좁았다. 계향이와 벼락약
혼을 하였다가 파혼했다는 대상자가 억봉일줄이야… 지훈은 제철소
운영동지회사무실을 찾아왔다가 일본놈앞잡이들만 모여앉았다고 욕하며
돌아서던 억봉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수 없었다. 가슴아픈 그 말에 대한
반발심때문에 지훈은 지금 서울출장준비를 한다고 할수 있었다.
자기한테 한평생을 두고 잊기 힘든 모욕을 주던 억봉이, 그는 왜 또
이 나어린 처녀의 가슴에 못을 박아주었는가. 무분별한 열정에 동서남
북조차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그런 사람과 한생을 함께 지내기란 조련
치 않을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번 파혼이 계향이한테 오히려 천만
다행이라고 할수도 있었다. 지훈은 계향에게 파혼을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자기의 개인감정과 주관이 작용하는것 같아 무척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계향이, 결혼해서 몇년을 함께 살다가도 서로 의가 맞지 않으면 갈
라지는거야. 말로 약혼을 했다가 파혼한게 무엇이 흠이 되겠나? 더구나
일본놈때문에 어쩌지 못해 강요당했다가 그만둔게…
파혼은 파혼인게구 계향은 고향으로 갈 생각말구 여기 남아 나랑 같
이 일하자구… 그렇게 하는것이 계향의 발전을 위해 좋을것 같아. 해방
이 되였다고 저저마다 지금 모두 떠나가는데 그렇게 되면 제철소는 어
떻게 하겠나? 제철소에 불이 죽긴 했지만 할일이 좀 많아? 지금 있는 파
철만 녹이자구 해두 몇년은 걸려… 이제 혼란이 수습되구 나라가 서게
되면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제철소의 몫은 점점 더 커지지… 하긴 우리
나라에서 제철소를 돌리자면 퍽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하겠지만… 설사 해
탄로나 용광로를 못 돌리구 호미나 보습만을 벼리게 된다 해두 우리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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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농업국가니까 우리 나라 농업발전에서 이곳 제철소의 몫은 무시하
지 못해. 이곳에 남아있으면 계향은 얼마든지 발전할수 있구 큰일을 할
수 있어… 오빠는 처와 자식이 있으니까 고향으로 가야겠지만 오빠가 간
다고 계향이도 꼭 따라가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아. 또 오빠두 고향에
갔다가 처자를 데리고 다시 올수도 있는게구…
예로부터 범은 길러 산으로 보내구 사람은 길러 도회지로 보내라고 했
어. 예가 계향이네 고향에 대면 큰 도회지지 뭐… 내 이제 서울에 가서
자금을 해결해가지고 돌아올테니까 그때 와서 다시 구체적으로 한번 토
론하자구.》
지훈은 저녁차로 떠나야 했다. 서로 나누고싶은 이야기는 많았으나 시
간이 없었다. 계향은 자기 마음을 리해하여주는 지훈이 얼마나 고마운
지 몰랐다. 계향은 막연하게나마 한가닥 믿음이 생기는가싶었다. 자
기가 가야 할 길도 짙은 안개속의 오솔길처럼 희미하게나마 보이는것 같
았다. 역에까지 따라나가 지훈을 바래주고 돌아서는 계향은 한결 마음
이 가벼워지고 든든해졌다.

힘겨웁게 달려오던 기관차는 역구내에 들어서기 바쁘게 풀썩 주저앉


아버리듯 멎었다. 그리고는 맥빠져 헐썩거리며 솨솨 증기를 뽑았다. 종
착역이였다. 기차에선 사람들이 쉼없이 내리였다. 좁은 차안에 빼곡
이 들어찼던 사람들은 실꾸리 풀리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승강대를 빠
져나왔다.
지훈은 성냥가치처럼 사람들이 빼곡이 들어찼던 기차안에서 려객홈으
로 내려서니 막혔던 숨이 후 하고 터지면서 답답하던 가슴이 그제야 안
정되는것이였다. 사람은 아마 기차나 배를 타고 오랜 려행에 시달려보
거나 까마득한 철탑과 굴뚝꼭대기 같은 곳에 올라가보아야 그저 례사롭
게만 생각하는 일―땅에 발붙이고 산다는 그자체가 얼마나 다행인가 하
는것을 알게 될것이다. 지훈은 서른해나 살아오면서도 오늘에야 비로소
땅에 발짚고 살게 된 인간의 행운에 대하여 그리고 땅을 밟을수 없는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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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것이였다. 이번 려행길은 그만큼 힘들고
고되였다.
지훈은 지금 서울을 다녀오는길이였다. 제철소운영자금때문에 그는 오
늘까지 중앙은행과 식산은행을 발바닥에 불이 일도록 찾아다니였다. 제
철소에 남아있는 사람들한테 이제 잘하면 다문 몇잎씩이라도 쥐여줄수
있었다. 중앙은행에서 대부하여주겠다고 하는 돈은 큰 제철소를 움직이
자면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았고 제철소사람들의 한달 로임이 되나마나
했지만 그런대로 당분간 바쁜 구멍을 메울수 있었다. 다소나마 자금해
결의 길이 보여 제철소로 돌아오는 지훈의 머리에 먼저 떠오른 한사람
은 계향이였다. 자기가 서울로 출장을 떠나던 날 역에까지 따라나와 바
래주던 계향이다. 길게 땋아내린 머리태를 만지작이며 고개를 숙인채 신
발 앞코숭이로 땅을 비비던 계향의 측은한 모습은 려행길에 지쳐버린 지
훈의 발걸음을 다그치게 하는 힘이기도 하였다. 지훈은 계향이가 오빠
를 따라 고향으로 떠났는지 아니면 자기의 말대로 남아있는지 궁금하였
다. 자금이 해결되여 모든 로동자들에게 정상적으로 로임을 줄수 있다
면 계향의 오빠보고 고향에 가서 가족을 데리고 돌아오라고 권할수도 있
었다. 그렇게 되면 오누이가 헤여지지 않고 한곳에 모여살수 있었다. 자
금문제는 계향이네 남매뿐아니라 제철소에 남아있는 모든 사람들한
테 더없이 절박하고 절실했다. 그리하여 지훈은 서울에 도착하는 즉시
로 자금해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만 한 곳이면 주저없이 찾아다
니였었다.
기차에선 사람들이 계속 내리였다. 지훈은 물날은 려행용가방을 든채
사람들이 넘쳐나는 역구내를 스적스적 걸었다. 올해는 절기가 무척
빨랐다. 봄이 빨리 오더니 가을도 앞당겨왔다. 래일모레가 벌써 추석이
다. 파란 하늘은 나날이 높아만 간다. 아름다운 곤청색의 하늘에 마가
을 국화같은 하얀 구름송이가 동동 떴다. 늘 먼지와 연기로 어지러워지
군 하던 여기 불고장 상공에서는 보기 드문 상쾌한 날씨다.
역을 나서니 거리는 거리대로 끓었다. 오늘따라 거리엔 사람들이
넘쳐났고 갖가지 달구지들이 그 무슨 시위라도 하듯 여기저기 늘어섰다.
그 달구지마다에는 짐들이 실려있었다. 부뚜막에서 갓 뽑아낸상싶은 검
은 그을음투성이솥을 그대로 이고가는 늙은이며 가장집물이 담긴 궤짝
을 지고 가는 남정네들, 그런가 하면 그릇이 담긴 대야를 들고 어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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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따라가느라 종종걸음치는 아이들… 거리는 그 무슨 소동이 난것 같
았다.
지훈은 의외의 광경에 두눈이 둥그래져 낯선 고장에 처음 와서 갈길
을 찾지 못해 망설이는 나그네처럼 한동안 서성거렸다. 길 한가운데 한
참이나 우두커니 서있던 지훈은 마주오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일은 무슨 일이요. 이사가는길이지요.》
작업복차림의 그 젊은이는 이 한마디를 남긴채 빈 지게를 지고 씽 바
람을 일으키며 지훈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맞은편 골목에서 두 녀인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마이, 아주만넨 어디로 가우?》
《우린 북사택으로 가디요.》
《우린 동사택에 가네, 놀러 오게.》
《클마니, 내레 인차 한번 가가시요.》
낡은 함지에 부엌세간들을 담아이고 나오던 중년늙은이와 허리에
새끼오리를 질끈 동인 몸집좋은 녀인이 마주서서 주고받는 소리였다.
지훈은 두 녀인의 입에 오른 동사택이니, 북사택이니 하는 말을 듣고
서야 짐작이 갔다. 그 사택지구들은 얼마전까지 일본인들이 살던 곳이
였다. 일본인들은 자기들이 사는 마을을 《사꾸라동네》니 《복숭아
동네》니 하면서 조선사람들이 지나다니지조차 못하게 하였었다. 거
들먹거리던 일본놈들을 해방과 함께 그 고급주택지구들에서 모두 몰아
내였으나 배정문제가 말썽을 일으키는 바람에 이때까지 비워두었었다.
지훈이 서울로 다녀오는 사이에 그 주택들에 대한 배정이 시작된 모양
이다. 지금까지 집없이 떠돌거나 세방살이 아니면 찌그러진 움막속에 살
던 수백세대 사람들이 새집을 받아 저저마다 한꺼번에 이사를 하고보니
온 시내가 떠들썩할수밖에 없었다.
거리에 넘치는 활기는 그대로가 해방의 환희였다. 지훈은 거리에
차넘치는 소음이 그 무슨 기쁨의 환성처럼 들리였고 거리와 골목마다 지
저분하게 널린 쓰레기며 휴지쪼각 그리고 거리우에 뽀얗게 떠도는 먼지
마저 해방과 함께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낡은것을 털어내고 그와 결별
하는것처럼 생각되여 마음이 흐뭇했다. 지훈은 해방이라는 말의 구체적
의미와 뜻이 추상적인 개념으로써가 아니라 실생활로써 자기 눈앞에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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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하게 펼쳐지는가싶었다.
지훈은 오랜 려행의 피곤을 가시고 흥성거리는 거리 기분에 들떠서 활
개를 치며 걷기 시작했다.
앞에서 한 녀인이 이사짐 실은 달구지를 끌고갔다. 크지 않은 손달구
지에 세눈백이 물독까지 올려놓아 짐은 부피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욕
심스럽게 짐을 가득 실은 녀인은 별로 경사가 심하지도 않은 둔덕길을
올라가지 못해 애를 쓴다.
지훈은 손달구지를 끄느라 허리를 꾸부리고 힘을 쓰는 녀인의 뒤모습
에서 살림살이에 대한 녀인의 이악스런 욕심을 보는것 같아 들고가던 가
방을 손달구지우에 올려놓고 말없이 뒤에서 밀기 시작했다. 녀인이
앞에서 달구지채를 당기고 뒤에서 지훈이 떠밀어주자 손달구지는 언덕
받이를 데굴데굴 굴러올라갔다. 손달구지가 올리막에 올라선 후에도 지
훈은 자기가 가는 곳까지 녀인을 도와주고싶어 뒤에서 손달구지를
계속 밀었다. 경사받이에 올라서서 밋밋이 뻗어가던 길은 두갈래로 갈
라져나갔다. 왼쪽길을 따라가면 제철소에 이르고 오른쪽길로 가면
사택지구다.
《자, 좀 세워주시오.》
지훈은 손달구지우에 올려놓은 려행가방을 내리우려고 손달구지를 끌
고가는 녀인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넸다. 녀인은 손달구지를 멈추더니 지
훈이쪽을 볼 사이도 없이 인사부터 했다.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수건을 내리쓴채 앞에서 손달구지를 끌던 녀인이 허리를 펴며 수건을
벗었다. 작별인사나 하려고 녀인을 바라보던 지훈은 놀랐다. 손달구
지를 끌던 녀인은 천만뜻밖에도 알뜰이였다.
《알뜰씨군요. 오늘 이사를 하십니까?》
《아니…》
알뜰이도 당황해하는 빛을 감추지 못했다. 둔덕길에서 자기 손달구지
를 밀어주던 사람이 지훈인줄 어떻게 알았으랴.
《어디 가셨댔습니까?》
알뜰은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씻으며 다시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보이
였다.
《네, 지금 서울에 갔다 돌아오는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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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은 손에 묻은 먼지를 터느라고 두손바닥을 썩썩 마주 비비고나서
손수건을 꺼내였다.
《정말 안됐습니다. 손까지 다 마추셔서…》
《안될게 있습니까. 이사하느라 정말 수고가 많겠습니다.》
두사람은 이사짐 실은 손달구지를 사이에 놓고 갈림길에 마주선채 서
로서로 어색함을 느끼며 인사를 나누었다.
《정말 일전에는 안됐습니다. 그때는 제가 생각이 복잡하던 때여서 그
만… 인사받고 지나쳐서야 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었습니다. 많이 욕
하셨을줄 아는데 널리 량해해주십시오.》
지훈은 려행용가방이 앞으로 오게 두손으로 손잡이를 쥐고 선채 억봉
이가 돌아오던 날에 있은 일을 사과했다.
《원 별말씀을…》
알뜰은 억봉이가 오던 날 웅범네 집으로 가다 차지훈을 만나던 때가
생각났다. 알뜰은 그때 지훈이 자기를 그렇듯 차겁게 쏘아본것이 억봉
이와의 상서롭지 못한 일때문이라는것을 짐작 못한바가 아니였고 또 선
의를 가지고 대하는 지금 이 순간에조차 석연하지는 못하지만 일종의 경
계심을 버리지 못하는것도 억봉이때문이였다.
몇마디 수인사를 하고나니 두사람은 서로 말밑천이 모자랐다.
《자 그럼―》
《정말 수고하셨어요.》
두사람은 갈림길에서 헤여졌다. 지훈은 배가 불룩한 물날은 려행용가
방을 든채 제철소쪽으로 갔으며 알뜰은 손달구지를 끌고 주택지구로 향
했다. 지훈은 자기 집에 들려 가방이나 놓아두고 제철소로 가고싶은 생
각이 없지 않았으나 자금이 해결될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한시빨리 사
람들한테 알려주고싶었으며 또 알뜰과 함께 나란히 주택지구를 걷기도
뭣해 제철소로 곧장 가는 길을 택한것이였다.
지훈은 제철소를 향해 몇걸음 걷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알뜰은 이사짐 손달구지를 끈채 지훈네 집이 있는쪽을
향해 천천히 움직여갔다. 지훈은 제철소에 배치받아오던 그때부터 지금
알뜰이네가 이사오는 주택지구에서 살았다. 기사여서 지훈은 조선사
람이지만 몇몇 선발된 사람들과 함께 일본인주택지구에 끼워살수 있었
다. 그러니 이제는 알뜰이네와 한마을에서 살게 된것이 아닌가. 한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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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길게 늘어선 벽돌집은 렬을 맞추어 아득히 늘어섰다.
골목골목엔 휴지며 새끼오리들이 널리고 바람은 지저분한 그 모든것
을 이리저리 굴리다 제철소쪽으로 몰아간다.
지훈은 알뜰의 뒤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제철소를 향해 다시 걸음
을 옮기기 시작했다.

알뜰이 손달구지를 끌고 마당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듯 석봉이가


마주 달려나왔다.
《누이, 지금 오나?》
《억봉인 어디 갔니?》
《삼촌네 집으로 갔어.》
알뜰은 맥이 빠져 부엌문을 열고 들어와 새문 문턱에 풀썩 주저앉았
다. 쓸만 한것이라고는 개뿔도 없건만 바른 살림에 장작개비 하나라도
버리자니 아까와 알뜰은 이른아침부터 극성스레 짐을 나르고 또 날랐다.
《누이, 내 갈게촌에 다녀올게.》
석봉은 준길삼촌네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준길삼촌네도 오늘 이사
를 한다. 일본놈 오장이 살았댔다는 알뜰네 바로 옆집을 삼촌네가 받았
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삼촌네와 나란히 살게 됐다. 평양에 간 준길삼
촌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억봉인 이른아침부터 삼촌네 집으로 갔다.
《힘든데 거긴 뭘하러 가겠다구 그러니. 이제 오겠는데…》
《그래두…》
석봉은 지쳤건만 뿌등뿌등 떠날 차비다. 알뜰은 동생의 심정을 리해
하고도 남았다. 삼촌네까지 대궐같은 집을 받았으니 오늘같은 날 잠시
라도 가만있을수는 없다.
《내 인차 갔다올게.》
동생은 끝내 집을 나서고야말았다.
《조심히 다녀와.》
알뜰은 자기가 갔다올게 동생더러 집에 있으라고 그러고싶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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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았다.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안하고는 못 배기는 극성스러운 성미는 석
봉이도 억봉이와 다름이 없다.
삼촌네가 사는 갈게촌에 가자면 여기서 한참이나 걸린다. 제철소가 생
겨 근 30년이 되여오는데 회사측에서 조선인로동자들을 위하여 처음이
자 마지막으로 꾸려준 주택지구를 사람들은 《갈게촌》이라고 했다. 진
펄에 걸써 말뚝을 박고 그우에 오두막짓듯 수수대로 집을 지어서 토방
과 부뚜막은 물론 구들에까지 갈게가 구멍을 뚫는 집, 비가 조금만 오
면 기름종이를 씌운 지붕에서 떨어지는 비물로 구들에 앉아 샤와를 해
야 하는 집, 가마뚜껑만 열어놓고 일나갔다 돌아오면 솥안에 한사발씩
갈게가 들어앉아 아궁에 불만 때면 된다고 《갈게촌》이라 부르는 부락
에 준길삼촌네가 살았다. 문짝이 없어 가마니 한장을 드리우면 그만인
이런 집마저 모든 로동자들에게 차례진것은 아니다.
알뜰은 손달구지에 마지막으로 실어온 이사짐을 부리울 생각은 않고 문
을 활짝 열어놓은채 새문 문턱에 앉아 움직일줄 몰랐다. 대궐같은 텅빈
집에 혼자 있게 되고보니 알뜰은 오늘따라 어머니생각이 간절했다. 제집
만 쓰고살았어도 어머니는 세상떠나지 않았을것이다. 어머니는 기차방통
에서 광석을 부리우다 기차바퀴에 한다리를 잘리우던 그해 해산을 했다.
그때 알뜰네 여섯식구는 남의 웃방에서 세방살림을 했었다. 어머니에
게 닥친 불행으로 몇달째 집세를 못 물게 되자 주인집 로파는 가만있지
않았다. 어느날 호물데기 집주인로파가 어머니를 찾아왔다.
《님자 해산달이 언제나?》
집주인로파는 권연을 꺼내물며 문턱에 걸터앉아 이렇게 물었다.
《이달이예요.》
어머니말에 로파는 손에 들었던 담배가치를 떨구며 기겁을 했다.
《아이구, 이를 어쩌나… 우리 새애기도 이달이 해산인데… 한용마루
아래서 두 태줄을 끊으면 한사람은 죽는다던데…》
집주인로파는 몇달째 집세도 내지 못하는 가난뱅이네 자식때문에
자기 손자의 명이 짧아지기를 바라지 않았고 태여날 자기 손자에게 화
가 미치게 될가보아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걱정말아요. 한용마루에서 두 태줄을 끊지 않게 할테니…》
어머니는 자기의 말대로 했다. 나갈 곳이 없어 이사를 못 가게 되자
어머니는 저혼자 해산하러 떠나갈 차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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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어머니는 알뜰이더러 자기와 가자고 했다. 알뜰은 멋도 모르
고 헌 포대기가 든 보따리를 인채 어머니를 따라갔다. 쌍지팽이를 짚고
어머니가 악을 쓰며 해산하러 찾아간 곳은 슬라크처리장의 거지움막이
였다. 아직도 날씨가 차거운 때여서 거지들은 밤마다 슬라크처리장에 모
여들었다. 슬라크를 갓 내버린 곳만 찾으면 그 돌물이 다 식을 때까지
뜨뜻해서 집없는 사람들이 하루밤 지내기는 제격인 여기다. 불속에서도
불이 그립던 고장, 불을 다루는 사람조차 자기 한몸 덥힐 불이 없던 시
절이였다. 어머니는 아직 채 식지 않은 바위만 한 슬라크덩어리옆에 맞
춤한 장소를 골라잡더니 어제 밤 어느 거지가 자고 간듯싶은 곳에서 가
마니 한장을 얻어왔다. 어머니는 가마니우에 포대기를 펴고 그우에
드러누웠다. 알뜰은 어머니의 의도를 그제야 깨닫고 놀랐다. 시뻘건 돌
물은 하루에도 몇번씩 내다버렸다. 빽빽이기차로 돌물남비를 언제 끌고
나와 어디에다 버릴지 모른다. 슬라크덩어리틈새에 끼워 굳잠들었던 거
지들이 그 돌물에 한둘만 타죽지 않았다. 슬라크자갈을 까러 나왔다가
채 타지 않은 사람의 손과 발을 보고 알뜰이자신도 놀란적 있었다.
《어머니, 그러다 여기 와서 돌물을 쏟으면 어떻게 해요?》
기겁해 부르짖는 알뜰의 말에 어머니는 너무나 태연히 말했다.
《그러게 넌 망을 좀 봐라!》
알뜰은 추위와 공포에 떨던 슬라크처리장의 무시무시한 그밤을 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새벽녘에야 해산을 했다. 어머니는 깊은 한밤
슬라크처리장에서 새로 태여난 막내의 태줄을 제 손으로 끊었다.
알뜰은 세월이 흘러서야 슬라크처리장에 찾아가 해산을 하던 어머니
의 심정을 리해할수 있었다. 세방살이 웃방에서 어린애를 낳았으면
같은 달 한용마루아래서 두 태줄을 끊게 된다고 집주인한테 온 식구가
한지로 내쫓기웠을것이다. 이미 태여난 세 자식과 남편을 위해 어머니
는 찬서리를 맞으며 거적때기우에서 해산을 했다. 그때 입은 산후탈로
어머니는 그해 여름 세상을 떠났고 알뜰이네 온 식구는 남의 집 귀한 손
자가 태여난 해에 상서롭지 못한 일만 빚어놓는다고 세방살이 웃간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안되였었다.…
알뜰의 두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어머니가 해산하러 찾아왔
던 곳이 지금 이사온 여기 주택지구 어디였다. 회사측에서는 거지떼와
집없는 사람들이 모여들군 하던 슬라크처리장에 그후 주택지구를 일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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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웠다. 슬라크로 진펄을 메워 번듯하게 닦아놓고 세워놓은 이 일본인
주택지구에 그후로는 거지는커녕 조선사람이면 누구도 얼씬하지 못
했었다.
너무도 가슴벅찬 기쁜 일을 당하여 구슬픈 추억에 잠기였던 알뜰은 사
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생각에서 깨여났다. 알뜰은 새문문턱에서 일
어나 밖으로 나왔다. 한무리의 사람들이 알뜰이네 집쪽으로 오고있었다.
앞서오던 키꺽다리 한사람이 알뜰에게 귀띔했다.
《도에서 내려오신 전권대표선생이 지금 주택지구를 시찰하시오.》
알뜰은 펄쩍 정신이 들어 다가오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아래우 하얀
백색세루양복에 모자며 신발까지 하얀 신사가 눈에 띄였다. 신사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하얀데 목에 맨 나비넥타이며 들고있는 단장만
이 까맸다.
《수고하십니다.》
도에서 내려온 전권대표는 집주인 알뜰에게 깍듯이 례의를 표했다. 알
뜰이가 가볍게 머리를 숙여보이자 도전권대표는 단장을 만지작이며
말을 걸었다.
《그래 이사온 집이 마음에 드오?》
《예.》
《적산은 얼마나 있습디까?》
《예?》
《가장집물 말이요. 우리가 지시할 땐 일본놈들을 알몸뚱이로 내쫓으
라고 했소. 재산을 모두 자기 살던 집에 남겨놓고…》
알뜰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알뜰이네가 이사해온 집엔 깨
여진 그릇쪼박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알뜰은 집만 받은것도 너
무나 황송했다.
도전권대표는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싶은지 집안문을 열고 방안을
기웃기웃 들여다봤다. 쓸만 한 물건이 집안에 하나도 없음을 알고 그는
분개했다.
《지시한대로 하지 않고 일들을 너절하게 한단 말이요.》
그의 욕설에 따라왔던 한사람이 공손히 대답했다.
《적산을 철저히 몰수하느라 하긴 했는데 집들을 비여둔새 그만 도적
을 맞히구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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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게 인차 집들을 나누어주지 않았나 말이요?》
《제철소운영동지회가 트는 바람에…》
《운영동지회는 무슨 말라죽은 운영동지회요? 누가 그자들한테 제
철소를 운영할 권한을 주었나 말이요?》
그의 불호령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때 억봉이며 석봉이가
소달구지를 몰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삼촌네 이사짐이다. 알뜰은 얼
른 동생한테 뛰여가 나직이 귀띔했다. 그러는새 도전권대표는 소고삐를
쥐고 서있는 억봉이앞으로 다가왔다.
《제 동생입니다.》
《그렇소? 내 도에서 내려온 전권대표요. 선우치담이라고 하오.》
알뜰의 소개에 선우치담은 주저없이 손을 내밀었다. 선우치담은 억봉
이며 석봉이와 일일이 인사를 하고나서 억봉을 한참이나 뜯어보더니 갑
자기 아는체를 했다.
《내 도에서 내려오던 날 역전에서 나보구 탕탕 소리치던 동무 아니
요?》
억봉은 얼굴을 붉히며 뒤더수기를 긁적거리였다. 알뜰은 물인지 불인
지 모르는 억봉이가 무슨 일을 저지른게 아닌가 해서 선우치담과 억봉
을 근심스레 갈마봤다. 선우치담은 반들거리는 깜장단장을 들었다놓
으며 같이 온 일행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이 동무가 말이요, 내 도에서 내려오던 날 역에서 만났던 동무요.
무거운 트렁크를 세개씩이나 가지고왔는데 어쩌는 재간이 있소. 마침 역
전에 지게 지고 나온 사람이 있길래 난 그 사람한테 짐을 부탁했댔소.
그런데 이 사람이 다가와서 지게우에 실어놓은 내 짐을 와락와락 내려
놓으며 하는 말이 〈우린 짐군이 아니외다. 제철소 로동자지.〉하더
란 말이요.》
《전 그때 부르죠안줄 알구…》
억봉은 얼굴이 뻘개져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날 부르죠아로 보았단 말이지? 하하… 그 사람이 부르죠아인가
아닌가 하는것은 옷차림에서 나타나는게 아니라 사상에서 나타난단
말이요. 하여튼 계급성이 높으니 좋소. 그때는 내가 좀 불쾌했댔지만 앞
으로 서로 손잡고 일하기요. 우리에게는 동무같이 계급성이 높은 사람
들이 필요하단 말이요. 난 동무를 알게 되여 기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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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치담은 호탕하게 웃으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보면 선우치
담은 무척 도량넓고 호방한 사람같았다. 조금전에 수행원들에게 지시한
대로 일하지 않는다고 잔등에 식은땀이 내돋도록 호령을 치더니 이번엔
억봉에게 이런 넓은 아량을 보이는것이였다. 알뜰이네 집을 돌아보고나
서 선우치담은 한무리의 사람들을 거느린채 길건너켠 다른 집쪽으로 걸
어갔다. 온통 하얀 모습에 유독 까만 단장이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해빛에 번쩍거렸다.

알뜰이가 새집에 이사와서 사귄 첫 사람은 여섯살짜리 계집애였다. 마


당에 넘어져 울고있길래 잡아일으켜 세워주고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
었더니 다음부터 가는데마다 알뜰의 뒤를 졸졸 따랐다.
한참 집안을 거두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집에 간줄 알았던 계집애는
마당에 그냥 서있었다. 계집애는 서너살난 총각애의 손목을 쥐고서서 알
뜰의 눈치만 본다. 언제 세면을 했는지 총각애는 얼굴이 까맣고 손에 역
시 때가 재들재들했다. 닦아주고 거둬주면 무척 귀여울 사내애였다.
《동생이냐?》
알뜰의 물음에 계집애는 머리를 까딱해보이며 두볼에 보조개를 팼다.
총각애나 계집애나 옷차림이 그만하면 괜찮은 축이였으나 때오르고
구겨진걸 보면 거둬주는 손이 부족했다.
《에구, 네 얼굴이 그게 뭐냐?》
알뜰은 사내애를 닁큼 안아 수도로 데리고갔다. 알뜰은 수도물에
사내애를 말끔히 씻어주고나서 계집애도 닦아주었다. 찰찰 묻어돌며 계
집애가 무척 붙임성있게 놀아 알뜰은 계집애의 머리도 빗겨주었다.
어른의 손이 가니 계집애와 사내애는 순간에 멀끔해졌다.
《너희들 어머니가 무척 바쁘신 모양이구나.》
귀여운 어린 남매를 나란히 앉히고 알뜰은 삼촌네 이사짐을 실으러 다
시 간 억봉이와 석봉이한테 맛보이려고 남겨두었던 풋강냉이 한이삭씩
을 그들의 손에 쥐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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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만 없어.》
계집애는 제 몫으로 차례진 강냉이이삭을 꺾어 절반을 동생의 손에 더
쥐여주며 종알거렸다.
《너희 엄만 어디 갔냐?》
《우리 엄만 죽었어.》
범상스럽게 대답하는 계집애 말에 알뜰은 가슴이 철렁했다.
《너희 엄마가 언제 없었냐?》
알뜰은 측은한 동정심을 가지고 조심스레 물었다.
《앓다가 봄에 죽었어.》
《그럼 집에 누구랑 있냐?》
《할머니랑.》
《아버진 안계시냐?》
《응, 울아버진 먼데 갔어.》
아이의 말만 들어서는 뭐가뭔지 알기 어려웠다. 아버지가 먼곳에
일하러 갔다는 소린지, 아니면 아버지마저 없다는 소린지 정확하지
않았으나 알뜰은 어린 남매에게 동정심을 금할수 없었다. 알뜰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아들생각이 불쑥 치밀었다. 어려서는 돌이 채 못되여 어
머니를 잃어버린 막내동생때문에 가슴을 얼마나 쥐여뜯었던가. 죽은 아
들과 막내동생에 대한 생각으로 알뜰은 어린 남매한테 순간에 정이 들
고말았다.
《너희 집이 어디지?》
《저거.》
계집애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알뜰이네 집과 나란히 서있는 옆집을
가리켰다. 오늘 아침 알뜰은 옆집늙은이가 어린애를 업고 어디론가
나가는것을 보았다. 그러니 이 어린 남매에게는 손아래로 또 동생이 있
었다. 알뜰은 반나절이나 어린애들과 함께 보냈다. 그들을 구들에 앉혀
놓은채 알뜰은 부엌에서 자기 할일을 했다. 저녁때가 다 되여 알뜰은 아
이들을 할머니가 찾을것 같아 그들을 불렀다.
《얘 두옥아, 세철아.》
알뜰은 이사와서 아직 인사도 하지 못한 옆집할머니를 찾아도 볼겸 두
남매의 손을 잡고 마당에 나섰다. 가기 싫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알뜰을
따라나서던 계집애가 갑자기 알뜰의 손목을 뿌리치더니 새되게 소리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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렀다.
《아버지―》
계집애는 구을듯 달려갔다. 사내아이도 알뜰의 손목을 뿌리치고 《아
버지― 아버지―》하며 자기 누이를 따라갔다.
《아버지 온다―》
저쪽마당에서 놀던 열살정도 나보이는 남학생아이가 껑충껑충 뛰며 자
기 집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질렀다. 사랑에 굶주렸던 세 자식은 자기 아
버지한테 주렁주렁 매달렸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차지훈이라는것을
알아보는 순간 알뜰은 마음이 이상했다. 사람들의 운명은 얼마나 공교
로운 일인가? 얼마전에 자기 품에 주렁주렁 매달렸던 아이들이 차지훈
의 자식이고 그네들과 한이웃에서 살게 될줄이야…
지훈은 한팔에 한 아이씩 안고 자기 집을 향해 걸어갔다. 열살짜리 맏
이는 아버지의 가방을 받아든채 그옆으로 따라선다. 두 동생에게 아버
지를 빼앗겨버린 맏이는 한손에 가방을 들고서도 한손으로 아버지의 옷
자락을 거머쥔채 놓지 않는다. 알뜰은 지훈을 피해 부엌으로 슬며시 들
어서고말았다.
《이제야 오냐?》
어린애를 업고 마당에 선채 어머니가 자기 아들에게 묻는 소리가 들
린다.
《그새 어머니 수고 많으셨겠습니다.》
지훈이가 자기 어머니에게 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고보면 지훈은 역
에서 내리는길로 곧장 제철소로 갔다가 지금에야 집에 오는 모양이다.
알뜰은 말소리가 더 들리지 않게 부엌문을 꼭 닫아버렸다.
차지훈의 두 어린것은 다음날에도 알뜰을 찾아왔다. 알뜰이 빨래하러
갔다가 마당에 들어서니 두 어린것은 기다렸다는듯 쪼르르 달려왔다.
《아주마이.》
두옥은 제켠에서 먼저 알은체 하며 반겨준다. 알뜰은 사랑에 한껏 굶
주린 두 어린것이 측은하면서도 그들과 처음 사귀던 때처럼 살틀한 정
이 없어졌다. 두옥이와 세철이가 차지훈의 자식이라는것을 알게 되던 순
간부터 알뜰은 웬일인지 순진한 그들과의 사이에 미묘한 감정의 실금이
생겨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아주마이, 빨래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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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옥은 두눈을 반짝이며 귀엽게 물었다. 알뜰은 그렇다는듯 그저
가볍게 머리를 끄덕여보이였다.
《아주마이, 이거―》
두옥은 자기와 친하자는듯 주머니에서 병아리모양의 납작한 과자를 꺼
냈다.
《동생과 나눠먹어라.》
《세철이도 있는데 뭐, 울아버지 과자랑 사탕이랑 많이 사왔다.》
《좋겠구나.》
어린것은 알뜰의 심드렁한 대답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지 기어
이 과자를 받으라고 손을 내밀었다. 알뜰은 철모르는 어린것에게 자기
가 너무도 무정하게 그러는것 같아 과자를 받아 그의 치마주머니에 슬
며시 도로 넣어주었다.
《너 용쿠나.》
알뜰이 빨래함지를 내려놓고 마당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채 두옥을
안아주자 세철이도 알뜰의 품을 파고들었다. 어머니를 그리는 두 어린
것의 정에 알뜰은 지고말았다. 알뜰은 한팔에 하나씩 두 어린것을 끼고
잠시 마당에 쭈그린채 앉아있었다.
이때였다. 억봉이 털썩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누이, 삼촌 안 왔어?》
《아니, 준길삼촌이 왔니?》
알뜰은 무릎우에 올려놓았던 두 어린것을 내려놓고 일어서며 되
물었다.
《갈게촌 옛날집에 들렸댔다는데…》
억봉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집을 몰라 그러는게 아니냐?》
삼촌이 없는새 이사를 했으니 삼촌은 아직 새집을 모른다. 이곳에 태
를 묻고 살아오는 삼촌이 그리 넓지도 않은 시내바닥에서 아무려면 집
을 못 찾으랴고 생각은 하면서도 알뜰은 은근히 걱정이 됐다.
《원, 별걱정을… 누이, 돈이나 있으면 좀 달라.》
억봉은 어색해하며 알뜰을 바라봤다. 담배값이 떨어진 모양이다.
요즈음 한푼도 벌어들이는것 없이 억봉이와 석봉은 서로 번갈아 담배값
을 내라고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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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은 주머니에서 마지막동전잎을 털어냈다. 억봉은 누이한테 돈
을 받아 웃주머니에 쑥 집어넣더니 안됐는지 머밋거리다 알뜰의 치마꼬
리에 붙어서있는 두 어린것을 가리켰다.
《얘들은 누구야?》
《옆집아이들이다.》
알뜰은 경계하는 눈초리로 억봉을 바라보는 두 어린것의 머리를 쓰다
듬었다.
《차지훈네?》
억봉은 낯빛이 단번에 달라졌다.
알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이제는 집으로 가보
라고 알뜰은 슬며시 등을 떠밀었다. 두 어린것은 억봉을 힐끔거리며 자
기네 집쪽으로 걸어갔다. 억봉은 강동강동 걸어가는 두 어린것과 알뜰
을 갈마보더니 저혼자 두덜거렸다.
《정말 눈꼴 사나와서… 누가 저희들한테 제철소운영권을 줬다구
으시덕거리는지…》
억봉은 분명 제철소운영동지회며 차지훈을 념두에 두고 말했다. 언젠
가도 억봉은 이 비슷한 말을 했었고 어제 주택지구를 돌아보던 도 전권
대표 선우치담도 송표가 조직한 제철소 운영동지회를 두고 욕하였었다.
그러고보면 억봉의 두덜거림이 개인적인 감정때문만은 아니였다.
억봉은 들어오던 때와 마찬가지로 털썩거리며 제철소쪽으로 걸어갔다.
알뜰은 동생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이고 진정하기 어려울수
록 준길삼촌이 기다려졌다. 준길삼촌만 만나면 파혼후로 더욱 푸들쩍거
리는 억봉의 마음도 풀어줄수 있을것 같았고 주학섭아저씨를 비롯해 지
금까지 믿고 의지해오던 사람들과의 작별로 해서 생겨난 허전하고 뒤숭
숭한 마음도, 차지훈때문에 불안스러운 감정도 모두 바로잡히고 가라앉
을상싶었다. 알뜰은 억봉이가 사라진 제철소쪽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다가 빨리 저녁밥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부엌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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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기다리던 삼촌

억봉은 어두운 구내길을 걷고있었다. 희미한 별빛에 그의 어깨우로 삐


쭉이 솟아오른 총대가 보였다. 억봉은 어제부터 공장자위대에 들어갔다.
그는 지금 준길삼촌을 찾아가는길이다. 먼길을 다녀왔지만 삼촌은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 집에도 들어오지 못했다. 억봉은 동생한테서 삼촌이
해탄로에서 밤을 밝힌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사도 할겸 평양소식을 듣고
싶어 이렇게 찾아떠났다.
억봉은 이밤 구내길이 생소하기만 하였다. 구슬픈 소년시절을 여기 제
철소구내에서 끝냈고 곡절많은 청춘시절을 이곳에서 맞았으나 지금
억봉은 웬일인지 거리사람이 산골밤길을 가는듯 한 기분이였다.
불천지던 제철소구내에 지금은 끝모를 캄캄한 어둠과 싸늘한 정적만
무겁게 내리덮이였다. 굳고 차겁던 쇠와 돌이 녹아 열기를 뿜으며 흐르
고 쇠물, 돌물빛에 하늘마저 물들던 여기, 도처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에
기계와 설비들이 뜨겁다고 소리치듯 저저마다 울부짖던 여기, 높은 열과
빛으로 이채롭던 제철소에 지금은 불이 없다. 일제는 도망가며 모든
불을 꺼버렸다. 제철소구내에서 불은 단순한 빛과 열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철소구내의 불은 제철소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생명의 상징이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의 결정이였다. 생체내 모든 세포들에 생명을
주는 피처럼 불은 용광로나 평로를 비롯한 야금설비들이 살아숨쉬게 하
였으며 이 불이 있어 사람들은 굳은 쇠를 다스리고 길들일수 있었다.
불이 꺼진 제철소는 말라버린 저수지와 다름없었다. 바닥이 드러났던
늪에는 다시 물을 채울수 있어도 한번 불이 꺼져버린 제철소는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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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했다. 사람의 심장이 한번 멎으면 그만인것처럼 야금설비들은 열이 식
어 굳어지면 다였다. 제철소의 생명력은 순간도 불이 꺼지지 않게 하며
높은 열도를 얼마나 오래 유지하는가 하는데 있었다.
일제는 한그람의 쇠라도 더 많이 략탈하기 위해《래일의 백톤보다 오
늘의 한톤이 더 귀중하다》는 구호아래 설비들을 마구 혹사해오다 패망
과 함께 순간에 불을 꺼버림으로써 로체마다 돌물, 쇠물이 얼어붙고 깨
져나가게 만들었으며 각종 수단과 방법을 다해 기계들을 파괴하고 도면
과 기술문건들을 소각해버리였다.
억봉은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페허의 구내길을 괴로운 심정으로 걸었
다. 희읍스름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아득한 절벽처럼 검은 형체가 앞을 막
아나섰다. 불이 꺼진 해탄로였다. 상승관굴뚝에서 홰불처럼 타오르던 불
길은 보이지 않고 지금은 그우 하늘에서 애기별 몇개가 아물거린다.
하얀 증기가 구름발처럼 피여나군 하던 콕스식힘탑도, 이글거리는 불
을 안고 달리던 콕스식힘차도, 우뚝 치솟아 연기를 뿜어올리던 굴뚝도 이
밤엔 모두 빛을 잃고 그 무슨 괴물처럼 웅크렸다. 불을 다루던 곳이여서
밝은 대낮보다도 오히려 어둠속에서 파괴상이 더 두드러지고 강조되는가
싶은 해탄지구다. 오직 한곳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단 하나 살아남
은 불씨처럼 그 전등불빛은 주위의 어둠과 외로이 싸우고있었다.
억봉은 불빛을 보자 깊은 밤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이다 인가를 찾
았을 때처럼 반가왔다.
억봉은 불이 비치는 건물안으로 들어섰다. 책상앞에 앉아 도면과
기술문서들을 정리하다 일어서는 한사람의 옆모습이 창문으로 보이였다.
그는 자기앞에 무둑히 쌓여있는 문서더미를 들다말고 상우에 쏟뜨리였
다. 그는 오른손으로 자기의 왼쪽어깨를 붙들고 불편한 자세로 쭈그리
고 굳어져 움직일줄 몰랐다.
《아이구―》
한참만에야 그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어
깨를 붙안은채 조심스럽게 의자에 기대여 앉았다. 그제야 억봉은 유리
창너머로 준길삼촌을 알아보았다. 도꾸이찌 칼에 맞았다더니 상처가 저
려나는 모양이다. 억봉은 벌컥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삼촌!》
준길은 붙잡았던 어깨를 놓고 얼굴을 돌렸다. 아픔에 이그러졌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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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얼굴엔 웃음이 피여났다.
《아니, 너 억봉이로구나.》
준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쪽으로 마주왔다.
《삼촌!》
억봉은 달려가 준길의 한팔을 붙들었다.
《이게 얼마만이냐? 고생이 많았겠구나.》
준길은 억봉이 못지 않게 반가와 어쩔줄 몰라했다.
《고생이랄게 있어요. 제 한몸 거두면 되는데… 삼촌 하라는대로
했더니 쉽게 도망쳤어요.》
억봉이 징용에 걸렸을 때 도망치라고 귀띔해준 사람은 준길이였고 도
망해서 숨어있을 믿을만 한 사람도 삼촌이 소개해주었었다.
《정말 혼났겠다.》
준길은 끝내 징용을 피한 조카를 여간만 대견해하지 않았다. 삼촌은
불과 한해사이에 퍽 늙은것 같았다. 이마에 주름살도 깊어지고 이전에
는 볼수 없었던 흰 머리칼이 관자노리 여기저기에 나있었다.
《삼촌, 안됐어요. 기봉이를 못 데리구 와서…》
억봉은 징용에 끌려가던 때 4촌동생 기봉이와 같이 도망치려 애를 썼
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억봉은 자기 불찰로 어린 기봉을 징용터에
혼자 남겨두고 자기만 온것 같아 삼촌을 대하기 미안했다.
《해방이 되였으니 이젠 그 애두 오겠지.》
《무슨 소식이 있나요?》
《금년봄에 한번 소식이 오긴 했는데…》
준길의 얼굴색은 어두웠다. 그의 얼굴에는 자식에 대한 걱정만이
아닌 병색이 완연했다.
《삼촌, 몸이 좀 어때요?》
《다 나았다.》
《도꾸이찌 그놈새낄 붙들어 해탄로에 처박아야 하는건데…》
억봉의 두눈에서는 불이 펄펄 일었다.
《자, 앉아라.》
준길은 자기 상처를 걱정해주는 조카한테 아무렇지 않다는듯이 가슴
을 쭉 펴보이고나서 제먼저 의자에 앉았다.
억봉은 삼촌이 권하는 의자에 앉을 생각은 않고 상우에 무둑히 쌓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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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문서며 도면들을 바라봤다. 구겨지고 기름때 묻은 이 많은 기술문
서며 도면들이 모두 해방되던 날 해탄과장 도꾸이찌한테서 빼앗아낸것
이리라. 삼촌은 이것을 위해 목숨걸고 싸웠고 피를 흘렸다. 그리고
열흘이나 집을 떠나 평양에 다녀와서도 그사이에 이사한 새집에 들리지
도 못하고 또 이렇게 이것들과 마주앉았다. 준길은 억봉이가 상우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자 그를 고무하듯 말했다.
《이젠 이것들을 네가 좀 맡아 건사해라.》
《모두 불이 꺼졌는데 이건 해서 뭘하게요?》
억봉은 상우에 펼쳐진 콕스압출일지를 턱질했다. 몇시 몇분에 어느 해
탄로 어느 탄화실에서 콕스를 얼마 압출했다는 이 기록들은 지금 아무
소용 없다.
《중요한걸 건사해두면 콕스 만들 때 필요할게다.》
《원 삼촌두… 무슨 재간으루 이제 해탄로에 불을 때요?》
해탄로에서 근 십년이나 밥을 먹은 억봉이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콕스생산리치는 둘째쳐두고 몇몇 사람 힘으로는 해탄로를 도저히 어쩌
는 수가 없다. 수백수천사람의 마음이 맞고 손발이 맞아야 콕스를 만든
다. 또 해탄로는 얼마나 엄청나게 입이 크고 까다로운지 모른다. 일제
는 해탄로 입을 채우려고 일본과 만주에 사흘이 멀다 하고 뻔질나게 사
람을 보내였고 여러 나라에서 실어온 석탄마저 쓴다, 못 쓴다 시비가 많
았었다. 먹을것이 없어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을 이제 무슨 수로 다시 모
으며 그 엄청나게 크고 까다로운 해탄로의 입을 어떻게 틀어막는단 말
인가. 이 모든것을 억봉이보다도 몇배 더 잘 아는 삼촌이건만 태연했다.
《해방이 되였으니 이제 다시 불을 지펴야지. 콕스를 구워야 쇠를 녹
일게구 쇠를 뽑아 벼려야 나라를 세울게 아니냐. 남들이 쇠를 뽑아 대
포를 만들구 자동차를 만들 때 봉건량반들이 갓쓰고 하늘소를 타고다니
면서 술마실 생각만 하다보니 결국은 쪽발이들한테 나라가 먹히우지 않
았댔냐.》
억봉은 새삼스레 삼촌을 쳐다봤다. 남들이 자기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있을 때 삼촌은 많은 사람들이 할일없어 하는 이곳 제철소 구
내에서 혼자 바빠했고 식어가는 로체들을 다시 살리지 못해 안타까와하
고있었다. 삼촌은 보고 생각하는것이 확실히 달랐다. 삼촌은 어려서 서
당에도 다녔고 작은할아버지한테 배워 한문도 적지 않게 알고있었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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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보면 잊지 않는 총기가 있어 특별히 배운것은 없어도 기술이 능했으
며 이것저것 보고들은것이 많아 같은 나이또래들인 주학섭은 물론 손우
인 달모한테서도 어른대접을 받았다. 거기다 정의감과 의리가 강해
벗바리가 좋았다. 삼촌주위엔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든다. 억봉이도
어려서부터 삼촌을 따르고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집안에서 삼촌을 누구
보다 제일 무서워하기도 하였다. 삼촌은 좋을 땐 세상에 더없이 좋다가
도 맺고 끊을 땐 칼로 두부모 자르듯 했다.
억봉은 철부지소년시절 파철원료장에서 있은 일이 지금도 눈에 선했
다. 다리를 잘리운 어머니가 산후탈까지 겹쳐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있
던 그때 억봉은 누이와 함께 파철을 고르러 원료장에 간적이 있었다. 그
날은 억봉의 일생에서 가장 큰 횡재를 하였던 날이였다.
그날 파철원료장에는 만주에서 실어온 파철이 세방통이나 들어왔었다.
억봉은 그날 화차방통에 실려있는 파철가마니에서 튀지 않은 탄알을 두
개나 얻어냈다. 온종일 파철을 골라야 35전밖에 못 벌지만 튀지 않
은 탄알 하나를 얻어 바치면 1원이나 주었다. 억봉은 너무 기뻐 알뜰에
게 탄알을 자랑하고나서 감독에게 그것을 가져다 바치려고 했다.
이때 파철방통을 따라왔던 삼촌이 억봉이한테로 다가왔다.
《억봉아, 네 주머니거 내놔라.》
《왜요?》
《왜라니… 내놓으라는데…》
《이거 갖다 팔아서 어머니 약 사려고 그래요.》
《나두 알아.》
삼촌은 억봉을 붙들고 다짜고짜로 탄알을 빼앗더니 평로로 실려가는
파철바가지에 내던지는것이였다.
그날 저녁 삼촌은 입이 한발이나 나와있는 억봉이 손에 돈 3원을 쥐
여주었다. 억봉은 후날에야 그 돈이 삼촌이 병원에 가서 자기 피를 뽑
은 값임을 알았다.…
억봉은 상우에 쌓여있는 문서더미를 바라보며 생각이 많았다.
준길은 억봉을 혼자 생각에서 깨우듯 말을 이었다.
《이번에 평양에 가서 들으니까 장군님께서 조국에 돌아오
시였다더라.》
《예? 장군님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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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은 삼촌쪽으로 의자를 바싹 끌어당겨 앉았다. 지금 항간에는
소문이 너무도 구구했다. 누구는 장군님께서 지금 백두산에 계신
다고 말하는가 하면 누구는 백마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천황》
한테 지난 40여년간 일제가 조선에서 저지른 죄행을 하나하나 따지
는중이라고 했다.
《이번에 평양에 가서 리선생을 만났댔다.》
《예?》
《리선생은 너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을 극진히 돌봐주시
였단다. 그분이 해방되여 감옥에서 나왔더구나.》
《야―》
억봉은 리선생을 한번도 만나본적 없으나 그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번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할아버지랑 함께 일했다는 그분 말이지요?》
《그래, 여기서 용해공노릇을 했었지. 기미년 만세때 순사 한놈을 까
고 도망갔지. 저 만주루, 연해주루 안 가본데 없단다. 감옥에두 두
번이나 갔댔구. 일본놈때문에 정말 고생을 많이 한분이란다. 그 리
선생이 그러는데 장군님께서 조국에 돌아오시여 백두산에서
데리고 싸우던분들을 지금 조선팔도 각지에 보내시였다더라. 리선생은
장군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이미 만나보았대.》
삼촌의 두눈은 광채로 빛났다.
《야―》
억봉은 재미난 이야기에 홀린 아이처럼 삼촌의 말에 귀가 항아리만해
져 연방 감탄을 금치 못했다.
《리선생이 그러는데 장군님께서는 흩어지지들 말구 빨리
공장들을 복구정비하라 하셨대. 산업은 건국의 기초구 우리 제철소는 산
업의 기둥이야. 우선 무엇보다도 중요한건 나쁜 놈들의 파괴로부터
제철소를 지키는거야. 네가 돌아오자 자위대에 들어간건 정말 잘했다.》
억봉은 삼촌의 말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억봉은 공기 희박하고 어둠
침침한 굴속에 들어가있다가 시원하고 해빛밝은 밖으로 나온 때처럼 가
슴이 후련해지면서 멎어섰던 로체마다가 금시 불을 뿜어올릴것만 같은
심정이였다.
《넌 래일부터 젊은 사람들이 자위대에 모이도록 해라. 젊은 너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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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철소를 지켜야지 누가 지키겠니.》
《알았어요. 삼촌, 그건 걱정말라요.》
억봉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삼촌은 상우에 무둑히 쌓인 기술문건
속에서 골라낸것들을 자기앞으로 끌어당기였다. 억봉은 얼른 자리에
서 일어나 삼촌을 돕기 시작했다. 흥이 나서 삼촌을 도우며 주요문건들
을 고르던 억봉은 부주의로 삼촌의 왼쪽어깨를 건드렸다. 준길의 입에
서는 저도 모르게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튀여나왔다.

억봉이가 념려하던 일은 벌어지고야말았다. 몸단속을 안하던 삼촌


은 상처가 도져 자리에 누웠다. 삼촌 치료에 온 가족이 속을 태웠지만
잔정깊은 알뜰은 더욱 그랬다. 치료비를 보태느라 억봉이가 집에 올 때
가져왔던 치마감이며 작은어머니와 알뜰에게 사주었던 흰고무신 두컬레
마저 장에 들고나간터여서 집에 남은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새집을 받
아 방은 넓으나 석자막대 휘둘러도 거칠것없는 집안이다.
알뜰은 헌 농짝에서 깊숙이 간직했던 은반지를 꺼내였다. 시집갔다 남
은것은 이 가락지뿐이다. 알뜰은 너무도 허무하게 흘러가버린 애달픈 자
기 인생에 대한 표적으로 오늘까지 이것을 간직해왔다. 이 혼인반지를
받아쥐던 그 순간부터 알뜰은 열여덟살 애젊은 나이에 처녀시절을 끝내
야 했고 고향을 떠나 낯설은 고장에서 설음 많고 곡절 많은 인생의 가
시덤불길을 헤쳐야 했었다.
알뜰은 짝으로 된 은가락지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눈물과 한숨으로 얼
룩진 자신의 지난날을 더듬는 심정으로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알뜰은 대충 맨드리를 하고나서 장거리로 향했다. 장거리는 복잡했다.
제철소에 불이 꺼져 할일 없어진 사람들이 모두 떨쳐나선듯 골목골목은
사람들로 넘치였다. 아무것이나 손에 잡히는대로 들고나온 사람은 많아
도 사자는 사람은 적은 시절이였다. 때도 때려니와 제철소가 생겨나면
서부터 사람 입은 많고 먹을것은 발라진 고장이다.
알뜰은 장거리에서 은장방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누군가 등뒤에서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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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를 쳤다.
《너 어떻게 여기 왔냐?》
라웅범이였다. 알뜰은 사람들이 욱실거리는데서 사정보따리를 펼수가
없어 그저 인사만 했다.
《어디 아프냐?》
《아니요.》
《넌 언제 봐야 마음고생이니까… 얼굴색이 말 아니구나. 정말, 준길
형님 병세는 어떠냐?》
《그저 그래요.》
《한번 가본다가본다하면서두…》
알뜰에 대해 끔찍하게 생각해주는 웅범이다. 웅범은 장거리에 주런이
나앉은 음식장사들앞으로 알뜰을 다짜고짜 잡아끌었다.
《전 늦게 점심을 먹었어요.》
《온 식구 뒤바라지하는 네 입에 들어갈게 뭐 있다고 그러니…》
웅범은 잘 아는 지짐장사한테서 막부치를 열점이나 외상받았다. 알뜰
은 할수없이 맨땅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귀떨어진 소반을 마주하고 웅
범과 막부치 둬점을 같이 들었다.
《전 배불리 먹었어요.》
알뜰이 두가리에 담긴 지짐을 반도 축내지 못한채 저가락을 물리자 웅
범은 측은하게 알뜰을 바라보았다.
《너 또 동생들이랑 사돈형님이랑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웅범은 지짐장사한테서 종이와 함께 덤으로 돈지짐 두점을 억지다싶
이 얻어내여 그것마저 싸게 했다. 알뜰은 지짐장사옆을 떠나 사람 뜸한
곳에 와서야 옷고름에 꼭 싸가지고나온 은가락지를 꺼내였다. 웅범은 은
가락지를 받아쥐더니 길게 한숨을 톺았다.
《안됐구나. 이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찾아올게지. 장사물계 모르
는 네가 장으루 들고 나올게 뭐냐. 요즘은 금가락지, 은가락지값이
푹 떨어졌다. 잘못하다간 본전두 못 받아.… 곬을 알아야지.… 가락
진 내한테 맡겨라. 요즘 장인령감태기가 금붙이랑 은붙이랑 귀중품을 사
들이고있으니 내 후하게 값을 받아낼라.… 억봉이녀석한테랑 로임을 받
아오래라. 남들은 비료랑 콕스랑 물건으루 잘만 받아오더구나. 그걸 내
다 팔면 돈이 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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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범은 쯧쯧 혀를 찼다. 알뜰의 딱한 일을 두고 동정하게 될수록 남
자라고 우들쩍거리기만 하면서 집안일을 돌보지 않는 억봉이나 석봉을
괘씸히 여기는 웅범이였다. 생각같아서는 있는대로 알뜰에게 돈을 쥐여
주고싶으나 요즘은 운송점문을 닫아 녀편네주머니를 털어내지 못하면 단
골집에 가서 외상술을 먹거나 중노미처럼 남의 술판에 붙어야 한다. 웅
범은 자기 일이나 알뜰의 일이 시원스레 펴이지 못하고 노상 배배 꼬이
는게 화가 났다. 웅범은 《단풍》한대를 꼬나물더니 담배끝에 손가락같
은 불찌가 달리도록 뻑뻑 들여빨았다.
《결국 인생이란게 배부르다 고팠다, 울다 웃다 죽고마는건가부다. 하
지만 너한텐 배부른 때보다 배고픈 때가 더 많구 웃을 일보다 울 일이
더 많구나.》
웅범은 탄식조로 저 혼자 중얼거렸다.
억봉이가 알뜰이한테 시시한 일로 찾아가지 말라던 웅범은 제발로 찾
아와 은가락지값을 후하게 주었다. 보통은장방에서 사는 값에 근 배반
이나 되게 값을 받아다주었지만 그 돈은 새발에 피였다. 작은어머니는
쌀을 보태려고 이른아침 집을 떠나 해종일 주변농촌을 찾아다니며 고구
마줄거리를 걷어왔다. 요즘은 알뜰이며 작은어머니가 집안의 남정네
들을 먹여살리는셈이다. 참다못해 알뜰은 어느날 억봉이며 석봉이한
테 바가지를 긁었다.
《삼촌병세만 웬만 해도 내 너희들한테 이런 말을 안하겠다. 너희들
은 밤낮 제철소에 붙어산다면서 귀떨어진 동전 한잎 안 들여다주니 어
떻게 하라는거냐.》
웃방에서 어디론가 또 나갈 준비를 하던 억봉은 멋적게 웅얼거렸다.
《똥항아리같은 그 운영동지회나리들이 저희 처먹을 생각만 하지
어디 돈을 줘야 어쩌지…》
《너는 그저 밤낮 운영동지회구나. 운영동지회가 그렇게 보기 싫으면
제철소엔 뭣하러 밤낮 나가니? 남들처럼 지게를 져서라도 좀 밥벌일 하
지. 남들은 돈을 잘만 타오더구나. 비료랑 콕스랑 물건으루… 그거
내다 팔면 돈이 되는거지.》
알뜰은 웅범이한테서 들은 말을 자기도 모르게 그대로 옮기였다.
장지문곁에 앉아 발에 각반을 치던 석봉이 누이와 억봉의 다툼을 말리
듯 두사람사이에 끼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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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정말 우리두 콕스 달랄가. 로임줄거라면서 어제부터 비료를 실
어내기 시작했다.》
해탄부산물공장에서 나오던 비료가 창고에 아직 쌓여있는것을 얼마전
에 억봉이도 보았었다.
《정말이야?》
억봉은 일어서서 저고리단추를 채우다말고 동생에게 물었다. 객지
로 떠돌아다니며 붙은 버릇인지 그는 꽁무니에 늘 수건을 차고다녔다.
지금도 저고리뒤꽁무니는 수건때문에 권총이라도 찬것처럼 불룩했다.
《정말아니구. 오늘 해탄구역에 갔다가 송표가 비료를 두통이나 실어
내는걸 내 눈으로 봤는데…》
《왜 그런것 보고 안했어?》
억봉은 얼마전부터 공장자위대 정문초소장이 됐다. 석봉은 지금 그밑
에서 정문을 지킨다.
《체, 기차 빠지는거야 남문에서 보게 됐지 우리 정문에서 보나?》
《그런것두 이젠 아는대로 보고해. 남문것들은 운영동지회패거리란 말
이야. 빨리 우리 로동조합이 틀어쥐여야지.…》
억봉은 모든 책임이 동생한테 있기라도 한것처럼 윽박질렀다.
지금 공장에는 행정관리기구인 운영동지회와 로동자들의 사회조직
인 로동조합이 조직되여있었는데 이 두 단체는 사업한계가 서로 명확하
지 못하였을뿐아니라 크고작은 많은 문제에서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다.
송표가 틀어쥔 운영동지회는 유지들과 지식인들속에 뿌리박고있었고 박
준길이 지도하는 로동조합은 로동자들의 리익을 대변하고있었다.
알뜰은 자기가 공연히 돈이야기를 꺼내서 두 동생이 서로 싱갱이질을
하지 않을가 은근히 신경썼으나 석봉은 형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자, 가자.》
억봉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자 석봉은 데림추처럼 군말없이 따라나
섰다. 알뜰은 부엌문가에 선채 어둠속에 사라지는 두 동생의 모습을 바
라봤다. 어제날 사람축에 끼여들지 못하던 그들이 오늘은 팔에 완장까
지 두르고 제노라 활개치며 무슨 큰일이라도 하는것처럼 공장일에 바빠
돌아간다.
그날 밤 억봉이와 석봉은 닭지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동생들
을 기다리다 어설풋이 여윈잠에 들었던 알뜰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닭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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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소리에 깨여났다. 제철소에 불이 죽은 후부터 10여리밖 막촌농가에
서 기르는 닭울음소리가 이곳 주택지구에까지 들려온다.
알뜰은 오늘따라 아침 일찍 밥을 지었다. 아침 먹으러 들어온 억봉은
방안에 들어서기도 전에 문고리를 잡고 떠들었다.
《누이, 우리두 오늘 로임 타.》
억봉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석봉이 뻐기듯 말했다.
《삼촌거두… 한사람이 콕스 두가마니씩이야.…》
그날 알뜰은 콕스 판 돈을 손에 쥐기 바쁘게 장마당으로 가서 검정닭
한마리와 찹쌀 한되를 샀다.
집에 오니 두 동생이 모두 있었다. 알뜰은 억봉이와 석봉이 어디로 나
갈가봐 닭부터 잡게 했다.
《내 입엔 한점도 안 들어올거 나보구 잡으래.》
억봉은 부러 게정을 부렸다.
《삼촌 약쓰려고 그러지 않니. 내 오늘은 너희들한테 비지 한그릇씩
사다가 주마.》
알뜰은 동생이 우정 그러는 소린줄 뻔히 알면서도 지는척했다.
《야, 내 잡아…》
누이가 제 손으로 닭을 못 잡는줄 석봉이도 아는지라 소매를 걷고 나
섰다. 세 남매는 삯빨래하러 나간 삼촌어머니가 돌아오기 전에 제꺽 닭
곰을 하려고 부엌과 마당에서 제각기 부산을 피웠다. 기운낮이 되여 알
뜰은 곰한 닭을 통채로 쟁반에 받쳐들고 삼촌한테로 갔다. 삼촌은 알뜰
이 손에 들린 통닭을 보고 눈이 둥그래졌다. 원래 수염이 많은 삼촌은
그새 면도를 하지 못해 귀얄잡이가 되고말았다. 준길은 군침을 꿀꺽 삼
키더니 텁석나룻을 쓸어만졌다.
《삼촌, 식기 전에 어서 들어요.》
《고맙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났냐?》
《어디서 나긴요? 장에서 사왔지요.》
《사온줄이야 모르겠니? 돈이 어디서 났나 말이지.》
《원 삼촌두… 다 잡수면 대드려요, 호호…》
《정말 안됐다. 이젠 같이 살게 되니까 나까지 너한테 업히게 되는구
나.》
《원 삼촌두… 삼촌 로임탄거루 곰한건데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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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로임?》
《예, 억봉이랑 석봉이랑 오늘 모두 공장에서 로임타왔어요.》
《공장이 멎었는데 무슨 돈이 있어 로임을 준단 말이냐?》
《어제부터 물건으루 배급주기 시작했대요. 우린 콕스루 받았대요.》
《뭐, 콕스루?》
알뜰은 갑작스레 달라지는 삼촌의 모습에 놀랐다. 준길은 어두워
진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알뜰이더러 억봉이와 석봉을 데려
오라고 했다. 때마침 억봉이와 석봉이가 삼촌이 자리펴고 앉은 방으로
들어왔다. 삼촌 식사나 한 다음에 오라고 알뜰이 타이르는 바람에 지
금까지 마당에서 어정거리던 그들이다. 그들은 삼촌을 위해 오늘 자기
네가 무슨 장한 일을 한것만 같은 심정이다. 준길은 조카들이 앉기 바
쁘게 물었다.
《공장에서 물건배급준다는게 무슨 소리냐?》
《예, 밀린 임금 대신 물건으루 내줘요.》
억봉은 올방자를 틀고앉아 써레기를 말며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누가?》
속내의바람으로 이불우에 있던 준길은 억봉이 앞으로 나앉았다.
《누군 누구겠나요. 들이대니까 동지회것들이 로임대신 물건을 주
는거지요.》
《우린 한사람이 두가마니씩 콕스루 받았어요.》
석봉은 형이 손가락만 하게 담배를 말아 춤질을 하느라 입에 가져다
댄 틈에 말에 발을 달았다.
《뭐라구? 너희들 총대 들구 공장 지키랬지 누가 공장물건 내오랬냐?
당장 공장에 콕스를 도로 가져가―》
준길은 처음에 어성을 높였으나 점차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그의
어조에는 앓고난 뒤 쇠약에서 오는 신경질이 어느 정도 포함되여있었으
나 발작은 아니였다. 그의 말과 표정에는 너무도 여유가 있었고 말마디
에 씨가 들어있었다. 억봉은 록록히 휘여들려 하지 않았다.
《누가 공장물건 거저 내왔나요. 일한 값으루 주는거 가져온건데…》
《너처럼 저저마다 공장물건 들어내면 깉어날게 있겠냐? 콕스로 쇠를
녹인다는걸 너희들이 모른단 말이냐?》
삼촌은 목소리를 낮추었으나 그의 말마디는 여전히 날카로왔다. 알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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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얼른 부엌으로 내려서서 새문뒤에서 방안의 동정을 엿보았다. 삼촌
을 기쁘게 해주려던 일이 이렇게 화나게 만들고 온 집안에 불집을 일궈
놓을줄은 몰랐다.
이윽고 방안에서 삼촌이 억봉이와 석봉을 타이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왜 너희들 심정을 모르겠냐. 콕스를 공장에 도로 가져가거라.
쓴 돈은 할수 없지만 어디 갖다 팔았는지 남은 돈을 갖고가서 도로 물
려라. 지금은 용광로가 얼어붙었어두 이제 쇠물을 뽑게 될게다. 콕스야
그때 가서 쇠를 녹이는데 써야지. 우리 땅에서 콕스탄이 나오는것두 아
니구 다른 나라에 가서 가져다 힘들게 만든건데…》
알뜰은 소반을 들고 새문앞에 서서 방안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움
직이지 못했다.

세 벽면에 유리창문이 나있는 위원장방은 아이들이 뽈을 찰수 있을 정


도로 넓었다. 방 한가운데는 요란하게 큼직한 방주인 책상과 응접탁이
놓이고 그 주위로는 벽면을 따라가며 고급안락의자들이 책상을 옹위하
듯 놓여있었다. 까맣게 높은 천정에서는 우유빛갓속에 든 촉수높은
전등들이 방안을 대낮처럼 밝히였다. 이 방에 새로 부임한 공장위원장
이 들었다. 도에서 전권대표로 내려왔던 그는 송표의 제철소운영동지회
를 해산시켜버리였다.
지금 불빛 환한 방안에는 세사람이 앉아있었다. 번들거리는 가죽의자
에 혼자 앉은 사람은 공장위원장 선우치담이고 그와 응접탁을 사이에 둔
채 모꺾어 나란히 앉은 사람은 준길이와 억봉이다. 공장위원회 위원장
선우치담은 제철소운영동지회성원들에 대한 처리문제차로 제철소로동조
합위원장 박준길과 그의 조카를 불렀다. 선우치담은 공장위원회 위원장
으로 부임되면서 억봉을 공장자위대 대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니 로동조합위원장동무는 아직 8월달봉급두 못 받았겠습니
다?》
선우치담은 담배를 꼬나문채 의자등받이에 기대여앉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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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길은 의자 한끝에 앉아 무릎우에 두손을 올려놓고 아무 대답 안했다.
준길은 억봉이와 석봉이가 콕스를 받아오던 날 그들을 설복하다못해 자
신이 나서서 콕스를 도로 공장에 실어갔고 그때부터 공장에 다시 나왔
다. 준길이 공장에 나오게 되자 그새 즘즛했던 조합은 다시 활기를 띠
기 시작했다. 로동조합두리에 사람들이 모일수록 운영동지회협잡사건이
드러났다. 로동자들에게 로임을 준다고 비료를 뽑아 간상배들에게 눅게
주고 뢰물을 받아먹은 사실이며 많은 강재를 뒤꽁무니로 빼돌린 사실이
발각되여 투쟁이 벌어지고 송표가 판을 치던 운영동지회는 해산에 이르
렀다. 새로 부임한 위원장 선우치담이 운영동지회성원들에 대한 처리문
제를 두고 준길을 부른것도 이때문이였다.
준길의 표정을 살피던 선우치담은 너그럽고 여유있는 표정으로 덧붙
였다.
《안됐습니다. 이젠 내가 제철소관리를 책임졌으니까 내가 지불해
드리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제철소 로동자들을 대표하는 간부
인 로동조합위원장동무 일을 모른다고 할수야 없지 않습니까? 운영동지
회란게 이렇게 의리두 도덕두 없이 일을 했으니…》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준길이 이 방에 들어와앉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난 위원장동무네 일가의 그 혁명성이 마음에 듭니다. 자
위대장동무두 내가 여기 처음 오던 날 옷을 깨끗이 입었더니 짐도 못 싣
게 하더군요, 부르죠아지라구.… 그래서 억봉군의 그 혁명성이 마음
에 들어 오자마자 난 이렇게 자위대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선우치담은 호탕하게 웃었고 억봉은 얼굴을 붉히며 뒤더수기를 긁적
거렸다. 그는 새 위원장방으로 오면서도 팔에《자위대》라고 쓴 완장을
그대로 끼고 손에 장총까지 든채 왔고 지금도 그 총을 두무릎새에 세워
놓았다. 표정에 변화가 없는 사람은 박준길뿐이였다. 준길은 원래 흥분
해 말문이 터지기 전에는 입이 무거운 축이지만 로동조합사업을 하게 되
면서부터 더 신중해졌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줄도, 자기 생각을
속깊이 묻어둘줄도 아는 사람이였다.
선우치담의 웃음은 습관되지 않은 어마어마한 주위환경때문에 굳어져
있는 준길이와 억봉의 몸자세를 편하게 해주었고 방안의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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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치담은 아량있는 표정으로 두사람을 살피며 이야기에 발을 달
았다.
《어떻습니까? 운영동지회성원들에 대한 처리문제가 모두 명백한데 차
지훈에 대한 의견이 구구해서… 난 우리 제철소 로동자정치계대표라고
할수 있는 위원장동무와 우리 공장의 프로레타리아독재 대표라고 할수
있는 자위대장동무의 의견을 듣고싶습니다.》
그의 표정에서는 결심채택을 못해서라기보다 아래사람들의 의견을 참
고삼아 듣고싶어하는 웃사람다운 여유가 느껴졌다. 위원장의 말이 떨어
지기 바쁘게 억봉은 무릎새에 끼워세운 총대를 매만지며 불끈했다.
《두말할게 있습니까? 무자비하게 쳐야 합니다. 그는 일제때부터 으시
대던 기사였구 또 이전 제철소운영동지회장의 오른팔격이였습니다.》
《역시 자위대장은 젊구 프로레타리아식이야.》
선우치담은 시물거리며 억봉을 바라보다가 준길이쪽으로 얼굴을 돌렸
다. 준길이 아무런 의사표시 없이 묵묵히 앉아있자 선우치담은 억봉을
상대로 다시 말씨름을 벌렸다.
《그래두 듣자니 차지훈은 운영동지회장격이던 송표와 다르다던데…
로동자들 로임을 주겠다구 서울루 뛰여두 다녔구…》
《어쨌든 그는 부르죠아지입니다.》
《자위대장은 나두 부르죠아지로 보지 않았댔나?》
잠시 엉거주춤했던 억봉은 가만있지 않았다. 벌써 얼굴이 붉어지기 시
작한 억봉은 의자에서 엉뎅이까지 들었다놓으며 선우치담의 턱을 올려
받치듯 불같은 말마디를 내뱉었다.
《지난날에 배워준 사제지간의 정때문이 아닙니까?》
여유있던 선우치담의 표정은 굳어졌다. 선우치담이 이곳 겸이포바
닥에서 국민학교 교원노릇을 하던 때 차지훈을 두핸가 가르친것은 사실
이였다. 선우치담이 대학에 다니던 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사상열병
을 떼느라고 재정지원을 끊었었는데 그 바람에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이
곳에 와서 한동안 교편을 잡지 않으면 안되였었다.
앞뒤를 재지 않고 자기가 생각는바를 곧이곧대로 내던진 억봉의 말마
디들은 튀지 않은 폭탄처럼 방안분위기를 긴장시켰고 권투시합때의
강타처럼 선우치담의 얼굴을 정면으로 후려갈기는것이였지만 그쯤에 놀
랄 치담은 아니였다. 선우치담은 굳어졌던 표정을 풀고 웃사람의 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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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조금도 잃지 않은채 억봉을 타이르듯 말했다.
《내가 한때 차지훈을 배워준건 사실이요. 하지만 모든 사실을 그렇
게 형이상학적으로 볼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보아야 진실을 밝힐수
있지.》
억봉은 반박하고싶었으나 아무런 대꾸도 할수 없었다. 형이상학이
니 변증법이니 하는 까다로운 말마디들에 앞서 억봉은 어른이 아이와 말
하듯 하는 선우치담의 표정과 태도에 위압되고말았다.
지금까지 말없이 앉아만 있던 준길이 이미 결판난 싸움에서 이긴 사
람을 돕듯 선우치담을 훈수해나섰다.
《맞았수다. 나두 위원장동무와 동감이요. 차지훈기사는 송표와 다르
지요.》
준길의 말에 선우치담은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역시 로세대의 프로레타리아트가 다릅니다. 로동자문관이 우리
젊은 세대의 로동자무관보다 문제를 깊이 봅니다.》
선우치담은 담배를 꼬나물고 한손으로 뒤짐을 진채 방안을 뚜벅뚜벅
거닐기 시작했다. 준길이와 억봉을 등진채 넓은 방안 한쪽으로 걸어가
던 그는 획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더니 입에서 담배를 뽑아들고 웅변조
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레닌은 네쁘때, 다시말해 신경제정책때 부르죠아인테리리용에 대한
문제를 내놓았소. 지난날 우리 프로레타리아트는 배우지 못했기때문
에 경제건설분야에서 일정한 단계까지 부르죠아지의 경험과 지식을
리용하지 않으면 안되오. 난 로동조합위원장동무가 레닌의 저서를 읽었
기때문에 나의 립장을 지지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생활상의 오랜 경
험과 체험속에서 자기스스로 진리를 찾았다고 봅니다. 생활로써 깨달은
이 진리는 책에서 배운것보다 귀중합니다.》
앉아있는 두사람쪽으로 걸어온 선우치담은 걸음을 멈추더니 억봉이앞
에서 약간 허리를 굽히였다.
《젊은 로동자무관, 난 동무의 솔직성과 혁명성이 마음에 듭니다. 나
역시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오랜 생활체험과 경험들로 체득된 우
리 프로레타리아트의 로세대 로동자문관에게서 우선 배워야겠소.》
억봉은 얼굴이 벌개져 이번에도 아무 대꾸 못했다. 억봉은 자기를 어
린애 데리고놀듯 하려는 선우치담보다도 삼촌에게 더 반발심을 느끼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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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삼촌이 차지훈을 두둔해나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밀
린 로임을 타도록 해주겠다는 선우치담의 달콤한 말때문에 그런다고 볼
수 없는 삼촌이다. 삼촌이 어떻게 차지훈을 편역들수 있단 말인가.
순결한 사랑을 저버리고 점잖게 누이를 불행에로 떠민 사람, 남이 어려
서부터 땀흘리며 일하던 때 편히 공부하며 잘살아왔고 왜놈들한테서 대
우받으며 기사노릇을 하던 사람, 해방이 되여서도 사기와 협잡으로
남의 등을 쳐먹던 송표와 같은 놈들과 제철소운영동지회에서 일하던 모
호한 사람, 어떻게 그와 손잡을수 있단 말인가.
억봉은 준길삼촌이 같이 가자고 하였으나 자위대에 볼일이 있다는 핑
게를 대고 선우치담의 방을 먼저 나오고말았다.

억봉은 욱하는 대신 뒤가 없는 성미였으나 이번 일만은 그렇지 않았


다. 차지훈때문에 준길삼촌과 생겨난 감정의 실금은 쉽사리 가셔지지 않
았다. 찔린 가시가 티눈으로 박히듯 한 이 감정의 티눈은 콕스봉급때부
터 생겨났다. 억봉은 삼촌을 위한다던노릇이 노여움만 샀다고 생각하니
맹랑하기 짝없었다. 그보다도 그때 한번 눈에 나서 삼촌이 계속 자기를
잘못보는게 아닌가 하고 옥생각마저 품게 되는것이였다. 억봉은 자기의
짧은 이 생각이 사실이기를 바랐다. 부모들과 손우사람들은 자기 자식
들과 손아래사람들이 다 자라 어른이 된 다음에도 아이적 생각이 앞서
는 나머지 그들의 옳은 생각마저 미숙하게 여기고 도리상 타당하며 정
당한 행위마저 미타하게 여기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억봉은 차지훈에
대한 자기의 태도와 립장을 삼촌이 못마땅하게 여기는것도 이런 일종의
로파심에서 나온 편견이라면 얼마나 좋으랴싶었다.
억봉은 선우치담의 방에서 준길삼촌과 헤여져 먼저 나오던 그날 집에
도 들어가지 않았다. 자위대사무실에서 밤을 보내고나서 억봉은 한낮이
다되여서야 아침겸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왔다.
쇠는 열려있었으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억봉은 누이가 삼촌네
집으로 가지 않았나 하여 삼촌네 현관앞에까지 갔다. 삼촌네 집에는 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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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걸려있었다. 삼촌어머니는 요즘 아침부터 저녁까지 역전에 붙어산다.
화물역에는 량곡을 실었던 빈 방통들이 구내 한구석에 멎어있었는데 마
대에 넣지 않고 방통에 보리를 그냥 실었댔는지 이중으로 된 화차벽과
널판자 틈사리에는 보리가 퍼그나 끼여있다고 했다. 억봉은 어제 삼촌
어머니가 그 기차방통에서 얻어왔다는 보리로 지은 밥을 먹었다. 온종
일 파내야 몇홉 되는게 아니고 그것마저 늘쌍 있는것이 아니건만 삼촌
어머니가 매일이다싶이 역전에 나가는것은 아들 기봉이가 돌아오기를 바
라는 마음에서였다. 징용에 끌려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왔건만 기봉
은 아직 소식이 없다.
삼촌네 집에 자식이라고는 기봉이 혼자다. 아들 셋에 딸 둘이 되였으
나 이렇게 떼우고 저렇게 떼우다 기봉이 혼자만 남았다. 억봉은 삼촌이
나 작은어머니를 대할 때마다 기봉이를 데리고 함께 오지 못한게 늘 가
슴에 맺히였다. 둘이서 같이 도망치던 그때 자기가 붙들리고 기봉이가
무사했더라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것이다.
억봉은 삼촌네 집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뒤울로 들어가니 누이가
그곳에 앉아있었다. 억봉은 호젓이 생각에 잠겨있는 누이를 보자 갑자기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허드레옷차림으로 멍히 앉아있는 누이의 모습
은 서른전나이에 비해 퍽 겉늙어보이였다. 요즘은 삼촌어머니까지 아
들생각에 집일을 통 잊다싶이해서 두 집 살림이 모두 누이한테 지워졌다.
억봉이가 밥 달라고 누이한테 선뜻 소리치지 못하고 집모퉁이에 서있
는데 차지훈네 집쪽에서 두 어린 남매가 타박타박 걸어왔다. 억봉이네
는 지훈네와 한지붕아래 한마당을 쓰고 산다. 네 세대가 함께 살게 된
집채 맨끝에 차지훈네가 살고 한집 건너 나란히 두 세대가 삼촌네와 억
봉이네 집이다. 억봉은 지금까지 지훈네 식구들과 접촉이 없었다. 차지
훈이 금년봄에 상처했다는것과 지금 그의 어머니가 네 손자를 돌본다는
이야기를 누이한테 얼결에 들었을뿐이다.
차지훈네 두 어린것은 마당에 앉아있는 알뜰을 보더니 저희끼리 방긋
웃었다. 어린 계집애는 사내동생한테 조용하라고 손짓을 해보이고나
서 알뜰의 뒤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차지훈네 아이들은 그사이 알뜰이
와 퍼그나 친밀해진 모양이다. 알뜰의 뒤로 다가선 계집애는 자그마한
두손으로 알뜰의 눈을 가리우며 제법 장난을 하려 했다.
《해해… 아주마이, 누군지 맞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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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누굴가? 세철이나?》
알뜰은 어린것의 장난을 그대로 받아주었다.
《아니.》
《네옥이냐?》
《아니.》
《그럼 두옥이구나.》
《해해…》
두옥이는 알뜰의 두눈을 가리웠던 손을 풀고 알뜰의 품에 뛰여들었다.
그러자 사내아이도 자기 누이한테 질세라 알뜰의 품을 파고든다. 두 어
린것은 자기네 할머니가 젖먹이막내동생 하나만도 돌보기 바빠한다는걸
알고 남는다. 사랑에 굶주린 봉창을 알뜰이한테 하려고 두 어린것은 승
벽내기로 매달렸다.
억봉은 보지 말아야 할것을 본것 같아 슬며시 돌아섰다. 한이웃에 살
면서 어머니없는 철부지어린것들의 응석을 받아주는것은 마음착한 누이
로서 당연하고 응당한 소행이였지만 그 아이들이 다름아닌 차지훈네 아
이여서 억봉은 마음이 이상했다.
(누이는 아직도 차지훈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게 아닐가? 누이의 가
슴속에 제 먼저 사랑의 불길을 질러놓고 황금의 힘앞에 동요하다 주저
앉은 사람, 그 비겁성과 우유부단함을 증오할 대신 동정하고 측은히 여
기다가 자기의 일생을 망치고서도 누이는 아직도 지훈을 못 잊는단 말
인가?)
억봉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억봉이 앞마당쪽으로 걸어나오는데 차
지훈네 집 현관문이 열리며 두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집에서 먼저 나오는 사람은 차지훈이고 그를 뒤따라 나오는 사람은 까
만 치마에 흰저고리를 입은 계향이였다.
억봉은 쫓기듯 자기네 집 현관안으로 쑥 들어섰다.
차지훈의 어머니가 밖에 따라나와 계향을 바래였다.
《그럼 또 놀러 오라구.》
《네, 어머니, 자주 들리겠어요. 그럼 편안히 계셔요.》
차지훈의 어머니와 계향이가 서로 주고받는 인사소리가 억봉의 귀에
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이윽고 마당을 나와 큰길로 걸어가는 두사람의
모습이 반쯤 열린 현관문으로 내다보였다. 차지훈과 계향은 공장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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뻗은 길을 따라 나란히 걸어갔다. 억봉은 함께 걸어가는 두사람을 보는
순간 온몸의 피가 얼굴로 치밀어오르는가싶었다.
억봉은 파혼하던 때 아무런 미련이 없었으며 지금 역시 그랬다.
단순하게 동무의 누이동생으로 대해오던 계향이가 징용으로 피해다니
는 자기때문에 한동안 적지 않게 마음 썩였다는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
한테 안됐다는 정도의 미안한 생각을 품기 시작한데 불과했다.
벼락약혼마저 파했으니 이제는 정말 인연없는 사이였다. 그가 하는 일
에 참견하거나 신경쓸 필요와 리유란 꼬물만큼도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억봉은 계향의 행동에서 뺨을 한대 줘맞는것 같은 모욕과 아픔을 느끼는
것이였다. 억봉이 서슴없이 파혼을 선포했던것은 해방된 새세상에서
계향이가 아무런 구속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기를 바라서였었다. 우학
은 이미 고향으로 돌아갔건만 오빠따라 고향에 간다던 그는 이곳에 남아
이렇게 보란듯이 차지훈네 집으로 드나들고있다. 억봉은 그가 무엇때
문에 이곳에 남았으며 왜 차지훈네 집으로 드나드는지 알고싶지 않았으
나 그의 행동이 차지훈과 결부되여있다는것으로 하여 비위가 상했다.
억봉은 계향이보다도 지훈이가 더 밉고 괘씸했다. 억봉은 누이 알뜰
을 통하여 어린시절부터 지훈을 안다고 할수 있었다. 지훈은 자기보다
십년이나 손아래인 처녀를 유혹할 정도로 철면피하지도, 담이 크지도 못
하였다. 설사 계향이한테 마음이 끌린다 하더라도 지훈은 나이 많고 자
식 많은 홀아비가 철없는 처녀를 유혹한다는 사회적비난때문에 그리고
지난날 그의 보호자로 자처해온 체면때문에 자기스스로 단념하고 물러
설 사람이였다. 억봉은 이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차지훈이 괘
씸한것은 우선 첫째로, 계향이가 자기를 홀시하는 반면에 지훈을 부모
이상으로 여긴다는 사실이였다.
오빠따라 고향에 간다던 그는 차지훈의 영향으로 이곳에 남았다.
억봉은 차지훈이가 계향이한테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있으며 영향력이 이
만저만 아니라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억봉은 일제때 으시대던
지훈이한테 해방된 오늘까지 축잡히며 눌리우고싶지 않았다. 둘째로, 누
이를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이 차지훈이라고 생각하면 억봉은 지금도 눈
에 불이 일었다. 이 반감은 뿌리깊은것이여서 쉽사리 풀릴수 없는 감정
의 매듭이였다.
억봉은 불맞은 소처럼 길길이 뛰여오르는 자기의 감정을 어떻게 달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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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 좋을지 알수 없었다. 억봉은 갑자기 현관안이 비좁고 답답하게 느
껴졌다. 발로 문을 차고 밖에 나오니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지훈
과 계향이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억봉은 앞마당에서 어정거리다가
집모퉁이를 돌아 뒤마당으로 걸어갔다.
뒤마당에서는 누이가 아직도 차지훈네 아이들과 놀고있었다. 계집
애는 고사리같은 손으로 알뜰의 목을 그러안고 자기한테로 끌어당기고
알뜰은 그의 애무에 자기 몸을 내맡긴채 작은 사내애를 간지럼피웠다.
어린것들은 좋아라 깔깔거리고 알뜰의 얼굴에는 무의식중에 갈망하던 모
성애특유의 미소가 넘쳐나는가싶었다. 억봉은 자식없이 혼자 사는 누이
의 마음을 모르는바 아니였으나 그가 현실과 너무나 담을 쌓고 꿈속에
헤매는것 같아 기가 찼다. 억봉은 자기가 이미 오래전에 밥을 달라고 했
는데 누이가 아이들과 노느라 정신팔려 그 말을 까먹기라도 한것처럼 역
증을 섞어 소리쳤다.
《누이, 밥 안 줄래?》
억봉이가 푸르딩딩하게 버티고서서 고함을 버럭 지르는 바람에 알뜰
이가 놀라고 아이들이 놀랐다. 알뜰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며 두눈
이 둥그래 억봉을 바라봤고 차지훈네 아이들은 보호를 바라듯 그의 치
마꼬리에 매달렸다.
알뜰이가 대답할 사이없이 누군가 등뒤에서 억봉의 어깨를 철썩 갈기
였다.
멋없이 소리지르는 억봉의 어깨를 마디굵은 손으로 때린 사람은 준길
이였다. 준길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여느때없이 싱글거리며 억봉이와 장
난이라도 할 표정이였다. 억봉은 삼촌이 자기를 놀려주는것 같아 귀까
지 뻘개졌다.
《야, 나두 밥 한그릇 빨리 주려마. 아침을 설때렸더니 배가 고프다.》
준길은 어색스러운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롱처럼 알뜰에게 말을 건
네고나서 집으로 먼저 들어갔다.
억봉은 마당에 버티고서서 저 혼자 씩씩거리였다. 차지훈네 아이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알뜰은 밥을 차리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때
까지 뒤마당에 우두커니 서있던 억봉은 자기가 밥먹으러 집에 왔으며 방
금전 누이한테 빨리 밥을 주지 않는다고 투정까지 했다는걸 갑자기 잊
어버렸는지 제철소를 향해 어정어정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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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 아침이였다. 억봉은 팔에 자위대완장을 끼고 발에 각반을
친채 이른아침부터 제철소정문에 버티고 서있었다. 자위대 대장이여
서 자기가 직접 보초를 서지 않아도 되건만 억봉은 아침출근시간이면 제
철소에 나오는 사람들을 사열하듯 이렇게 정문에 나와 서군 하는것이 요
즘 하나의 습관처럼 되고말았다.
시간이 되자 제철소정문으로는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이 밀려왔다. 수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어도 아직 제철소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들중에는 할일이 없지만 갈 곳이 없어서 제철소에 그냥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네들은 바쁜 일이 없으면서도 아침만 되면 제시간에 꼬
박꼬박 모여들었다. 1년내내 하루도 쉬지 못하고 꼭두새벽 제철소에 나
와야 하던 지난날의 습관때문이라기보다 불을 잊을수 없어서였다. 이미
모든것이 싸늘히 식어버렸으나 자기네들이 다루던 로체를 보면 그대로
한결 마음이 훈훈해져 제철소구내로 찾아드는 그네들이다.
제철소로 모여들던 사람의 흐름이 뜸해가던 때였다. 억봉이가 서있는
정문으로 한 처녀가 걸어왔다. 치마저고리를 입고 시간이 늦어질가봐 서
두르듯 다가오는 처녀는 계향이였다.
《뭘하러 왔소?》
억봉이 계향의 앞을 막아서며 필요없는 사람은 들어갈수 없다는 투로
곱지 않게 물었다. 계향은 억봉을 알아보고 걸음을 멈추더니 반쯤 외면
한채 마지못해 대답했다.
《일보러 왔어요.》
《무슨 일을 본단 말이요?》
《무슨 일은 무슨 일이예요, 내가 할 일이지.》
억봉은 못마땅하게 계향에게 힐끔 눈총을 쏘고나서 다시 물었다.
《동문 왜 고향에 가지 않았소?》
계향은 그 무슨 모욕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지더니 이
른아침부터 왜 남의 앞길을 막아서며 희떱게 노는가고 따지는 투로 되
물었다.
《가고 안 가는거야 저의 자유지요. 그런것두 자위대에 승인받아야 하
나요?》
높지는 않았으나 그의 말마디는 고추처럼 매웠다.
이때 아침출근길에 오른 공장위원장 선우치담이 제철소정문으로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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섰다. 선우치담은 일하러 공장에 출근한다기보다 그 무슨 연회장에라도
가듯 산뜻하게 가을양복을 차려입었다.
계향의 앞을 막아서있던 억봉은 차렷해서며 모자채양끝에 한손을
올려다붙이였고 계향은 한옆으로 물러서며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보이였
다. 선우치담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더니 계향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
었다.
《왜 여기 서있소?》
계향은 대답대신 다시금 얼굴이 빨개지며 머리를 숙이였다.
《단속중입니다.》
계향을 대신하여 억봉이가 대답했다.
《아, 내가 실수를 했구만. 자위대에 미처 알려주지 못했소. 새로 온
내 서기동무요.》
선우치담은 앞으로는 다시 그러지 말라는듯 훈시조로 억봉이한테
이르고나서 계향이쪽으로 돌아섰다.
《서기동무, 미안하게 됐소. 내 불찰로 공연히 시끄러운 일을 당했구
만. 자, 어서 들어갑시다.》
선우치담은 계향을 앞세운채 제철소정문으로 들어섰다. 억봉은 어
안이 벙벙해서 그들을 바라봤다.
(계향이 선우치담의 서기가 되다니…)
억봉은 본사무실쪽으로 뻗은 콩크리트포장도로를 따라 어깨나란히 걸
어가는 선우치담과 계향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패배당한 쓰거움을 뱉어
버리듯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억봉이가 밥먹으러 집에 오기 싫어하자 석봉이도 형을 본따려들었다.


석봉은 제철소에서 먹고 자는것을 그 무슨 멋처럼 생각했다. 그 바람에
모든 부담은 알뜰한테 지워졌다. 알뜰은 일 바쁜 삼촌밥까지 세사람분
을 하루에 두번씩 제철소로 날라야 했다. 알뜰은 일찍 저녁밥을 해서 광
주리에 담아 이고 제철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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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와 골목골목에는 이전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구호와 프랑카드들
이 내걸리였다.
《일제 악질주구들과 민족반역자들을 소탕하라!》
《온 민족이 단결하여 민주주의 새 조선을 건설하자!》
힘있는 글발들은 오고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중에서도 붉은
천에 흰 글씨로 또박또박 박아쓴 네거리의 프랑카드는 노을빛에 불길처
럼 황황 불타며 사람들의 마음을 숭엄한 격동으로 끓게 했다.
《우리 민족의 영명한 령도자 장군 만세!》
알뜰은 글발을 곱씹어 읽을수록 거리와 마을들에 그 무슨 기류처럼 떠
도는 생활의 활기와 약동이 가슴벅차게 느껴졌다. 거리는 나날이 새롭
게 달라져갔다. 일제놈의 광고와 간판들이 사라진 대신 조선글이 나붙
고 일본인들만 드나들던 곳에서 조선노래와 조선말로 부르짖는 구호가
기운차게 울려나왔다. 로동자와 청년학생들의 시위대렬이 자주 거리
와 골목을 누비고 학교운동장과 강당을 비롯해 사람들이 모일만 한 장
소들에서는 사흘이 멀다하게 각종 모임들이 벌어졌다.
알뜰이 제철소정문에 이르니 두 동생이 마침 모두 있었다. 억봉의
사무실은 정문보초소 바로 옆이다. 두 면이 유리벽으로 된 정문초소와 잇
달려 나지막한 콩크리트건물이 있는데 거기가 자위대본부였다. 알뜰이 정
문초소에 들어서기 바쁘게 석봉은 밥광주리를 받았다. 석봉은 우락부
락한 형에 비해 사근사근하고 말이 적으면서도 여간 쩍쩍이가 아니다.
《야, 배고프네.》
석봉은 밥광주리에서 풍기는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며 닭알같은 침을
삼키였다. 억봉은 방 한쪽벽면에 기대여놓은 의자에 찌글서하니 앉아 알
뜰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알뜰은 오늘 아침 억봉이와 계향이사이에 상서롭지 못한 새 일이 있
었다는것을 알수 없었으나 어제부터 동생의 기분상태가 이만저만 아니
며 그것이 차지훈이나 계향이와 련결되여있다는것을 짐작 못하는바
아니였다. 알뜰은 억봉을 슬며시 곁눈질해보고나서 광주리에서 밥그
릇을 꺼냈다.
《삼촌한테 밥을 좀 가져다줘라, 식기 전에…》
《야, 밤 열두시가 돼야 교대하겠는데…》
《난 이제 어디 좀 급히 갈데가 있어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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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형이 순찰가다 좀 갖다줘.》
석봉의 말에 억봉은 아무 대꾸 안했다. 억봉은 누이와 동생을 반쯤 등
지고 앉아 유리창너머로 서쪽하늘에 불타기 시작하는 노을을 내다보고
있었다.
《기봉이한테서 기별이 왔다, 인차 온다구…》
《뭐, 기봉이한테서?》
석봉이가 나꾸채듯 되묻는 말에 알뜰은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그제
야 억봉이도 자리에서 일어나 누이쪽으로 걸어왔다. 억봉은 동생보다 먼
저 누이손에서 편지를 뺏어냈다. 억봉이가 정신없이 사촌동생의 편지를
읽기 시작하자 알뜰은 돌아갈 차비를 서둘렀다.
《삼촌한테 밥 갖다줄 때 편지랑 전해라.》
《예, 이제 형이 순찰나가는길에 갖다줘요.》
석봉은 편지 읽는 억봉을 등지고 서서 누이한테 눈을 끔쩍해보였다.
억봉은 편지 읽는 정신에 누이와 동생이 지금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삼촌한테 보내려고 꿍꿍이한다는걸 알지 못했다.
억봉은 알뜰이가 돌아간 후 삼촌을 찾아 떠났다. 밥만 가져다주는 일
이라면 억봉은 동생을 심부름시켰을것이다. 사촌동생 기봉이의 편지
를 받고보니 억봉은 요새 줄곧 흐려만 있던 기분이 한결 밝아졌다. 억
봉은 자기가 잘못해 사촌동생을 떨궈두고 혼자 고향에 온것 같아 삼촌
이나 작은어머니한테 늘 죄스럽던 마음이 지금에야 풀리는것 같았다.
삼촌이 일하는 로동조합사무실은 압연공장 한가운데 자리잡고있다.
이전 압연공장사무실이 들어있던 건물을 그대로 로동조합에서 쓴다. 삼촌
의 방에는 쇠가 걸려있었다. 밥만이면 문손잡이에 비끄러매놓고라도 가겠
으나 편지를 그렇게 할수는 없었다. 옆방들도 모두 걸렸다. 삼촌을 기다
려 복도에 서서 담배 한대를 다 피우고나서 억봉은 할수없이 돌아섰다.
오늘은 아침부터 재수가 없더니 일이 코코마다 꼬이는가싶다. 억봉은
아침에 계향이가 선우치담위원장과 함께 보란듯이 고개를 쳐들고 본사
무실로 들어가던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부아가 치밀었다. 보나마나 계향
은 차지훈의 힘을 입어 공장위원장의 서기가 되였을것이다. 억봉은
지금까지 자기가 하는 자위대일이 하찮다고는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었
다. 하지만 자기는 밤낮으로 사람단련을 받으며 먼지이는 밖에서 제철
소를 지켜야 하는데 계향은 자기네가 지켜주는 불빛 환한 방에 공장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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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이며 차지훈네들과 함께 편안히 들어앉아있다고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하고 부아가 치밀었다.
억봉은 오른쪽어깨에 장총을 걸고 왼손에 삼촌의 밥보자기를 든채 텅
비여있는 압연공장안을 거닐었다. 4천마력원동기가 있는 곳에 전에
없이 불이 환했다. 억봉은 불빛이 비치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억봉은 4천마력원동기주변에 사람들이 모여앉아있는것을 보고 걸음을 멈
추었다. 사람들이 강괴우며 땅바닥에 빙 둘러앉아있고 한사람이 일어서
서 말하고있었다. 멀지 않은 거리여서 억봉은 사람들앞에 서서 연설하
는 준길삼촌의 얼굴을 똑똑히 알아볼수 있었다. 억봉은 콩크리트기둥옆
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준길삼촌의 말소리가 억봉이 서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우리들은 제철소의 첫 공산당원들이라는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랑에 넘치는 삼촌의 말마디에서는 강한 호소가 울리였다. 억봉은 삼
촌이 이렇게 연설까지 할줄은 몰랐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제철소로동
자들속에 공산당원들이 있다는것도 지금 이 순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였다. 억봉은 좀더 가까이로 가서 삼촌의 말을 듣고싶었으나 강괴
더미우에 올라앉아있는 사람을 보고 망설였다. 그 사람은 삼촌두리에 앉
아있는 사람들과 떨어져 억봉이쪽을 등진채 앉아있었는데 가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는게 무슨 망을 보는것 같았다. 그가 지금 삼촌말에 정
신이 팔려있으니 그러지 억봉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날에는 거리가 가
까와 단번에 드러날것이다. 억봉은 다른쪽으로 에돌려고 돌아섰다.
이때 웬 사람이 억봉의 앞을 막아섰다. 망을 보던 사람은 강괴더미우에
올라앉아있던 사람만이 아니였다.
《누구요?》
철도모자를 삐딱하니 쓴 키가 후리후리한 젊은이였다. 젊은이는 경계
하는 눈초리로 억봉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며 첫마디부터 엄하
게 따지고들었다.
《보면 모르오? 난 공장자위대요.》
억봉은 자존심이 상해 어깨에 멘 총을 추켜올렸다.
《자위대면 자위대지 여긴 뭘하러 왔나 말이요?》
키가 후리후리하고 힘꼴이나 쓸것 같아보이는 로동자가 따지는 바람
에 억봉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제철소구내에서 남을 단속하는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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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대원들이다. 억봉은 자위대장인 자기가 제철소구내에서 마음대로 다
니지 못할 곳이 있으며 남한테 단속을 받기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본적
없다. 억봉이와 철도로동자가 다투는 소리에 강괴더미우에 올라앉아
있던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어깨가 쩍 벌어지고 근육이 툭툭 불거진게
웬만한 사람 한둘은 당하고도 남을 장사였다. 그의 손에 몽둥이까지 쥐
여있는것을 보고 억봉은 자신도 모를 위축감을 느끼였다.
《어디서 렴탐하러 왔는지 모르겠수다.》
철도로동자청년이 다가오는 장사에게 하는 말이였다.
《자, 저기로 좀 갑시다.》
철도로동자청년은 억봉을 죄인 다루듯 하려들었다.
《이거 정말, 난 공장자위대장이야. 자위대장도 몰라.》
억봉의 어성은 높아졌다. 회의가 끝났는지 4천마력원동기주변공지
에 모여앉아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웅성거리였다.
《뭐요?》
다른 사람이 억봉이가 서있는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어디서 파견했는지 우리 야체이까(세포)회의를 엿듣길래 단속했
습니다. 자위대장이라면서 떡떡 맞서는게 아무래두…》
다가오는 사람은 무슨 책임자인 모양이였다. 억봉을 단속하던 키가 후
리후리한 철도로동자가 그한테 보고하자 새로운 사람이 되묻는 소리가
들렸다.
《뭐, 자위대장?》
억봉은 새로 다가온 사람쪽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그쪽에서 먼저
억봉을 알아보았다.
《아니, 네가 어떻게 왔니?》
준길은 한쪽어깨에 총을 메고 한쪽손에는 밥싼 보자기를 들고 밸이 나
씩씩거리는 억봉을 바라보며 웃고나서 그를 단속한 사람들에게 량해를
구했다.
《공장자위대장노릇하는 내 조카요.》
《아, 그렇습니까? 난 또 어디서 발쇠군이 왔나 해서…》
억봉을 단속하던 키가 후리후리한 철도로동자청년이 뒤더수기를 긁적
거렸다.
《비서동무, 우린 가보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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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근깨투성이의 체격좋은 중년사나이가 작업모로 쓰는 채양좁은 낡은
중절모를 들었다놓으며 머리를 끄덕여보이였다.
《오늘 수고 많았습니다.》
준길은 그들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억봉은 단속하던 사람들이
물러가고 삼촌과 단둘이 남자 무슨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분해했다.
《아무때구 걸려만 봐라. 우리 초소 안 걸치구 제철소에 못 들어
오겠지…》
억봉은 공연히 총을 어깨우로 추켜올리며 중얼거렸다.
《하하… 총을 메고 단속당해 분하단 말이지?》
준길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한참이나 웃었다.
《분하지만 할수 없어.… 당에는 자위대장두 복종해야 돼.》
준길은 같이 가자고 억봉의 팔을 끌었다. 준길은 해탄로에서 일하던
때 목안에 먼지가 들어가지 말라고 감군 하던 수건을 지금도 그 무슨 목
도리처럼 걸고 뒤짐을 진채 걸었다. 억봉은 삼촌을 따라 발자국을 떼며
불만이 가셔지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삼촌이 우리 제철소 공산당책임자야요?》
《얼마전에 우리 제철소에 공산당세포가 조직됐다. 당원들이 나를 야
체이까(세포)비서로 선거했구나.》
《그런데 난 왜 공산당에 안 받아줘요?》
억봉은 지금까지 삼촌에 대해 참아오던 불만을 터뜨렸다. 준길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준길은 불만으로 이그러진 조카의 얼굴을 한참
이나 바라봤다.
《네가 오늘 중요한걸 묻는구나. 그러지 않아도 내 너를 만나 좀 이
야기하고싶었댔다.》
준길은 제품하적장에 되는대로 쌓여있는 산형강더미 한쪽에 자리잡으
며 억봉이더러 앉으라고 했다. 억봉은 잔뜩 볼이 부어 마지못해하는 표
정으로 맨땅에 쭈그리고앉았다.
준길은 주머니에서 담배곽을 꺼내들고 억봉이한테도 권한 후 깊숙이
담배연기를 한모금 삼키였다가 내뱉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이란 려관처럼 돈만 내면 누구나 다 들어가는 그런데가 아니야.
우리 당은 장군님께서 창건하신 로동계급의 당이다.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 로동계급의 리익을 위해 싸우는 투사들이 모인데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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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당이야.》
《그럼 나같은 로동자는 못 들어간단 말이나요?》
억봉은 삼촌의 말을 새겨듣지 못했다. 공산당이 지난날 억압받고
천대받던 사람들의 편이며 로동계급의 리익을 위해서 싸운다는 정도는
억봉이도 알고있었다. 그리고 공산당원들이 보통사람과는 구별되는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믿기에 억봉이자신도 공산당원이 되고싶어하는
것이였다.
《왜 못된단 말이냐? 그러지 않아두 너를 공산당원으로 받아들이자는
의견들이 없지 않았다. 그런걸 내가 반대했다.》
억봉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억봉은 아버지가 돌아간 이후부터 삼촌
을 집안의 제일 큰 웃어른으로, 마음의 기둥으로 믿고 섬겼으며 따랐었
다. 제 자식을 내여놓고 제일 가깝다고 할수 있는 조카를 도와주지는 못
할망정 차버린다는것이 억봉이로서는 리해되지도 납득되지도 않았다.
준길은 담배를 몇모금 다시 빨았다.
《넌 원쑤들을 누구보다 증오하구 일에서 결패스럽구… 좋은 점을 꼽
자면 많지. 하지만 내가 보기엔 공산당원이 되자면 아직 부족점이 많아.
넌 전번에 공장위원장실에서 그게 뭐냐? 사제지간의 정이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삼촌의 말마디는 차고 매웠다. 억봉은 선우치담 방에서 있었던 차지
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참지 못했다.
《내가 뭐 못할 말을 했나요, 없는 말을 꺼냈나요? 물어보길래 대답한
거구 사실대루 말한건데… 변증법이니 형이상학이니 하지만 공장위원장이
차지훈과 전혀 모르는 사이라고 해봐요. 쳐내깔리지 않구 가만두나…》
억봉은 선우치담앞에서 기가 눌려 못했던 말을 지금 봉창하려는가싶
었다. 억봉은 선우치담이 차지훈의 소개로 계향을 자기의 서기로 받았
다는것까지 말하려다가 자존심이 상해 입을 다물고말았다.
《위원장이 아는 사이로 따진다면 차지훈보다도 제철소운영동지회
회장격이던 송표를 더 잘 알게구 그와 더 가까울게다. 듣자하니 송표는
새로 온 공장위원장네와 처가쪽으로 친척이 된다더라. 멀긴 하지만
처가편인 운영동지회 회장은 철직시켜 내쫓구 남남이래두 차지훈기사는
공장에서 그대로 일을 보게 한거야. 다는 모르겠다만 내 새 위원장이 이
번에 차지훈기사에 대해서는 일을 바로 처리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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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의 말에 억봉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전 운영동지회 회장격이던
송표가 새 공장위원장의 처가벌 친척이라는 말은 듣다 첫소리였다.
그러고보면 차지훈에 대한 선우치담의 문제처리가 공명정대할지도 몰랐
다. 하지만 억봉은 자기의 패배를 인정하거나 자기가 내놓았던 의견을
철회하고싶지 않았다. 오랜 세월 축적된 감정이 이를 허락치 않았다. 억
봉은 땅바닥에 올방자를 틀고 사타구니에 두손을 찌르고 앉아 아무 응
대 안했다. 준길은 자기 말을 새기지 못하는 조카를 어떻게 해서든지 납
득시키려고 애를 썼다.
《억봉아, 내 요즘 너한테 자꾸 잔소리를 하는것 같다만 좀더 말해야
겠다.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두 안 주구 쌀두 안 주는데 제철소
에 나오냐. 이젠 이 제철소가 우리것이니까 제스스로 지키구 복구하러
나오는게 아니냐. 시키는 일을 마지못해 하던 옛날에는 자기 밸대로 살
아 무방했지만 우리 로동자가 주인된 새세상에서는 그래서 안돼. 전체
로동자들의 리익에 자기를 복종시켜야지. 이런게 단결이거던. 자기한테
는 비록 싫구 나빠두 여러 사람한테 리로우면 좋다구 해야 하는거야. 성
이 나두 참을줄 알구 괴로와두 묵묵히 새길줄 알구… 나두 우리 알뜰이
가 차지훈이때문에 가슴아픈 일을 당했구 네가 그것을 잊지 않고있다는
걸 모르지 않아. 하지만 그건 우리 집안 일이야. 지금은 자기 집을 먼
저 생각하구 자기를 먼저 생각할 때가 아니야. 불꺼진 제철소를 생각하
구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지. 그래야 공산당원이 될수 있어. 제철소에 불
을 살려 하루빨리 쇠를 뽑아내는 사람들이 애국자구 장군님께서
밝혀주신 건국의 큰뜻을 위해 자기 목숨도 주저없이 바칠 각오가 되여
있는 사람들이 공산당원이야.》
삼촌의 조용조용한 말마디들은 억봉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억봉
은 그 아픔을 새길만 한 마음의 준비가 부족했다. 침묵속에 두사람은 제
각기 자기 생각에 잠기였다. 두사람은 서로 생각하는것이 달랐으나
불 죽은 제철소때문에 마음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제철소에 불이 꺼
지지 않았으면 지금 자기들이 앉아있는 주변도 시뻘겋게 달아오른 강편
들과 가열로에서 피여오르는 불길에 대낮처럼 밝을것이였다. 지금까
지 이 세상에 살아온 해수가 달라도 자기 생의 대부분을 여기 철의 지
구 불바다에서 살아온 이들이고 가까운 이웃들과 일가친척모두가 쇠물,
돌물의 열기속에 살아온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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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군들이 바다를 그리듯 이들은 불을 그리워하고있었다. 이 공통된 그
리움으로 하여 억봉은 잘 넘어가지 않는 삼촌의 아픈 말마디들을 쓴약
먹듯 할수 있었다.
《가자꾸나.》
다 타버린 꽁초를 버리고 준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네가 훌륭한 당원이 꼭 되리라고 믿는다.》
준길은 억봉의 어깨를 툭 쳤다.
억봉은 그제야 기봉이한테서 온 편지가 생각났다. 억봉은 저녁밥과 함
께 기봉의 편지를 삼촌한테 내밀었다.
삼촌은 별로 놀라거나 반가와하는 기색이 없이 아들의 편지를 받아 주
머니에 넣었다. 억봉은 지금 자기가 전하는 편지가 어제 이미 삼촌이 받
았던 편지라는것을 알리 없었다. 어제 준길은 아들의 편지를 받고 여간
만 기뻐하지 않았고 이 기쁨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고싶어 점심때 밥먹
으러 집에 일찍 들어갔었다. 어제 억봉이가 점심도 안 먹고 툴툴거리며
제철소로 나온 후 준길은 알뜰에게 억봉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신신당부
했고 석봉이한테 전화를 걸어 누이가 저녁밥을 가져오면 형을 보내라고
련락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억봉이를 삼촌한테 가게 하려고 누이가 사
촌동생 기봉의 편지를 리용했다는걸 알리 없었다. 억봉은 삼촌이 조용
히 함께 이야기를 나눌 오늘의 이런 기회를 마련하려고 오래전부터 벼
르어왔다는것을 퍽 후에야 알수 있었다.

새날의 동음은 아직 채 물러가지 않은 밤의 어둠속에 시시각각으로 걷


잡을 사이없이 커만 갔다.
알뜰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삼촌과 두 동생의 길떠날 밥을 해가지고
집을 나섰다. 어제 저녁밥을 가져갔을 때 억봉은 밥을 신새벽에 해오라
고 얼마나 당부했는지 모른다. 오늘 평양에서는 장군님의 조국개
선을 환영하는 평양시군중대회가 열린다. 그 군중대회에 제철소사람
들도 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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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의 거리는 사람들로 웅성거리였다.
《자― 빨리빨리 따르시오.》
거리쪽에서 석쉼한 목소리가 어뜩새벽대기를 헤가르며 높이 울리였다.
길가집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한무리의 사람들이 프랑카드와
기발을 들고 렬을 지어 급히 걸어가는게 보이였다. 알뜰은 많은 사람들
이 자기보다 퍽 부지런하다는것을 깨닫게 되자 날이 흐린걸 밝지 않는
다고 잘못 안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엔 새별이
반짝거리였다. 알뜰은 다급히 제철소로 향했다.
《형이랑 삼촌밥은 도로 가져가.》
외등도 꺼지기 전에 아침밥을 가져왔건만 석봉은 알뜰에게 푸접없이
신경질을 부리였다. 알뜰은 석봉이가 밥이 늦어져 그러나부다하는 생각
에 미안했다.
《벌써 갔니?》
알뜰은 밥이 늦어진것을 사죄하듯 조용히 물었다.
《좋은덴 저희들만 가면서, 씨…》
석봉은 형과 삼촌에 대해 참아오던 불만을 애매한 누이한테 모두 털
어놓았다. 알뜰은 그제야 석봉의 두덜거림이 밥이 늦어져서라기보다 형
과 삼촌이 자기를 따돌린데서 옴을 알았다.
《석봉아, 이제 빨리 밥 갖고 가면 안되니?》
알뜰이 말이 끝나기 바쁘게 석봉은 앉았던 자리에서 용수철 튕겨나듯
일어났다.
《누이, 여기 잠간 있을래?》
알뜰은 석봉이가 삼촌과 형한테 밥을 가져다주고 오겠다는 소린줄 알
고 생각없이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석봉은 걷잡을새없이 밖으로 뛰여나
갔다.
《얘, 밥을 가지고 가, 밥을…》
알뜰은 밥광주리를 들고 동생을 따라나섰다.
《내 인차 갔다올게… 형이랑 아직 못 떠났을거야…》
석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철소구내로 달려갔다. 인차 온다던
석봉은 날이 밝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날이 밝자 제철소구내 여기저기
로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이 보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알뜰은 안달이 났
다. 제철소정문에 혼자 남은 알뜰은 이제 사람들이 오면 어떻게 하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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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생각에 자기가 가지 않고 남은것이 후회되였다. 알뜰은 석봉이가 열
어놓고 나간 문을 닫지도 못한채 정문초소안에 우두커니 서서 동생이 달
려간쪽을 눈이 빠지게 바라봤다.
어둠이 스러지자 우죽비죽한 용광로철탑이 드러났다. 검푸른 하늘
을 배경으로 용광로철탑은 자못 서슬푸르게 솟아있다. 외등은 빛을
잃으며 점점 뿌예가고 하늘을 찌를듯 서있는 굴뚝과 철탑들의 어마어마
한 모습이 두드러져간다.
불안과 초조속에 한초한초는 더디게 흘러갔다. 벽에 걸린 전화종이 갑
자기 울리였다.
따르릉― 알뜰은 와뜰 놀라 벽에 걸린 전화기를 바라보고나서 석봉이
가 오지 않나 해 밖으로 뛰여나왔다. 제철소정문주변은 조용했다. 사방
을 두리번거리던 알뜰은 할수없이 초소안으로 다시 들어섰다.
그때까지도 전화종은 몸까지 부르르 떨며 성난듯이 계속 울렸다.
알뜰은 어쩌지 못해 주저주저하며 전화기앞으로 다가섰다. 보통학교
시절 언젠가 알뜰은 교원실에 소제하러 들어갔다가 전화를 꼭 한번 받
아본적 있었다. 그때 마침 방에 들어왔던 담임선생은 알뜰에게 전화거
는 법을 친절히 가르쳐주었었다. 그때로부터 근 20년, 그 기간 알뜰은
한번도 전화를 걸어보거나 받아본적 없었다. 알뜰은 자꾸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전화기에 데룽 매달려있는 수화기를 조심스럽게
벗기였다. 새까만 수화기밑면은 채처럼 구멍이 숭숭 뚫렸는데 거기서 성
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정문, 정문, 정문초소―》
알뜰은 수화기를 손에 들고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이나 들
여다보기만 하다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아무도 없어요.》했다.
수화기에서는 성난 말소리가 그칠줄 몰랐다.
《석봉아, 석봉아… 나 형이다, 형이야…》
알뜰은 수화기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의 임자가 억봉이라는것을 알자
다소 마음이 가라앉았다.
《억봉아, 내다. 누이야.》
억봉은 알뜰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빌어먹을… 누구야? 말 좀 크게 하라. 송화기에다 바싹 입을 가져
다대구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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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은 화가 나는지 계속 욕만 했다.
《나 누이라는데…》
알뜰이가 수화기에 대고 크게 말한 소리가 상대방에 가닿은 모양이였다.
《누이야? 송화기에다 대구 말해. 누이, 송화기에다 입을 대구 말하
라는데…》
알뜰은 한참만에야 벽에 걸려있는 전화기에 달린 번들거리는 나팔통
이 말하는 통임을 알아보았다. 그제야 전화가 통했다.
《누이, 석봉이하구 전화 바꾸라.》
《석봉인 너 찾으러 갔다.》
《뭐라구? 거기 누구 다른 사람 없어?》
《나 혼자다. 빨리 오너라. 큰 야단났다.》
억봉이 두덜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후 전화는 끊기고말았다.
조금있더니 목탄차 한대가 부르릉거리며 제철소로 달려들어왔다.
화물자동차는 제철소정문앞에 와서 먼지를 일으키며 급정거를 하였다.
자동차적재함에는 사람들이 빼곡이 올라앉아있었다. 자동차가 멎기
바쁘게 적재함에서 억봉이 뛰여내리더니 알뜰이가 어떻게 할바를 모르
고 우두커니 서있는 정문초소안으로 뛰여들어왔다.
《석봉인 어디 갔어?》
《너 찾으러 아까 갔는데…》
《망할 자식, 초소를 비워놓고 어디로 쏘다니는거야?》
억봉은 허리에 두손을 올려짚고 문앞에 버티고선채 석봉이가 이곳을
떠난것이 전적으로 알뜰이한테 책임있는것처럼 말했다. 운전칸문이
열리더니 앞에 앉았던 준길삼촌이 자동차에서 내렸다. 준길삼촌은 정문
초소안에 걸려있는 벽시계를 바라보며 억봉에게 다급히 물었다.
《석봉이 안 왔니?》
《빌어먹을 자식…》
억봉은 동생이 앞에 있으면 뺨이라도 후려갈길듯 성이 났다. 준길삼
촌은 벽시계며 억봉을 갈마보고나서 초소막밖에 서있는 자동차를 내다
보며 단호히 말했다.
《그러단 모두 늦겠다. 넌 여기 남아 일을 수습해라.》
《예?》
억봉은 금시 울상이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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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남아서 제철소를 지켜야 할게 아니냐. 오늘같은 날일수록 적
들이 준동할수 있으니 바싹 정신을 차려야 한다.》
삼촌은 억봉에게 더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칼로 베듯 잘라말하고나서
밖으로 나갔다.
《정말, 씨… 석봉이 이 자식, 아야…》
억봉은 방안을 왔다갔다하며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였다.
알뜰은 삼촌이 떠난 후 밥이 담긴 광주리를 그냥 끼고 서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알뜰은 의자에 앉아 담배만 뻑뻑 빨아대는 억봉을 곁눈질해
보고나서 상우에 슬며시 광주리를 내려놓았다. 밥그릇뚜껑이 벗겨지
는 딸가닥소리에 억봉은 누이쪽을 바라봤다.
알뜰은 억봉의 분기가 한결 사그러진것 같아 귀띔하듯 말했다.
《밥 먹으렴―》
억봉은 아무 대꾸 안하고 담배꽁초를 땅에 버리고나서 발로 비벼끄더
니 의자에서 일어섰다.
《누이, 내 석봉이 찾아올게 여기 좀 있으라.》
아까 석봉이가 하던 식 그대로다.
《얘, 싫다. 내가 가서 찾아보마.》
알뜰은 석봉이때문에 너무 혼이 나서 채머리를 저었다. 이때 한사람이
제철소정문초소안으로 들어섰다. 억봉이가 며칠전 삼촌밥을 가지고 갔을
때 강괴더미에 올라앉아 당회의 보초를 서던 몸집좋은 사람이였다.
《누구요?》
《날 모르겠소?》
《뭘하러 왔나 말이요?》
억봉은 당회의때 보초서던 사람을 알아보았으나 그네들이 자기를
단속하던 식으로 따지고들었다.
《하하… 어디 보자고 벼른다더니 아직 성이 안 가라앉았구만.》
그는 억봉이가 그날 삼촌한테 한 말마저 알고있었다. 준길삼촌이
아마 그들한테 자기 말을 그대로 옮긴 모양이였다.
《자위대장동무, 알고지내기요. 난 오윤보라구 하는데 삼촌과 로동조
합에서 같이 일하오. 이전엔 용광로에서 쇠를 뽑았구.》
그는 사람좋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억봉은 웃는 낯에 침을 뱉을수
없어 마지못해 그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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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뿌둥해 그러지 말구 빨리 가보라구. 삼촌이 동무하고 교대해주라
구 보내서 왔네.》
《예?》
억봉은 단번에 입이 귀밑까지 째지였다. 억봉은 용해공출신의 오윤보
가 거짓말 한다는걸 알지 못했다. 그는 박준길이 보내서가 아니라 제스
스로 온것이다. 자기네 로동조합위원장이며 당세포비서인 박준길이
장군님을 환영하는 평양시군중대회에 참가하러 떠나면서 따라
가고싶어 야단인 자기 조카를 떨궈두는것을 보고 당원인 자기가 남고 억
봉을 보내려고 달리는 자동차에서 뛰여내린것이였다.
《빨리 운수부로 가보라구. 거기 가면 자네가 어디 한번 보자구 벼르
는 그 철도모자가 있을거네. 아직 안 떠났을거야. 거기 가서 그 친구의
기관차를 타라구.》
《고마와요.》
억봉은 너무 좋아 꾸벅 절까지 했다.
오윤보는 기뻐 어쩔줄 모르는 억봉을 보며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누이두 같이 가지 그래.》
오윤보는 억봉을 튕겨주듯 출입문쪽에 밥광주리를 들고 우두커니
서있는 알뜰을 눈짓했다.
《정말, 누이두 같이 가자.》
억봉은 오윤보에게 다시 머리를 숙여보이고나서 알뜰을 독촉하며
제철소정문초소안을 나왔다.
어느덧 아침해는 동산에 솟아올라 금빛해살을 뿌리기 시작했다. 굽인
돌이를 돌아서니 기관차 한대가 멎어서있었다. 낡은 구내화차 한대를 앞
에 달고 기관차는 칙칙 하얀 증기를 내뿜었다. 키낮은 구내화차에는 사
람 댓명이 올라있고 멎어선 기관차주변에는 사람 대여섯명이 빙 둘러앉
아 언거번거 야단이였다.
억봉이와 알뜰이가 기차옆으로 다가서자 기관차주변에 모여앉았던 사
람들이 확 흩어지며 화차우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중 한사람은 번들거
리는 쇠붙이를 들고 기관차우로 오르려고 했다. 철도모자를 삐딱하게 쓰
고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은 키가 꺽두룩한 사람은 억봉에게 알은체
를 했다.
《여 자위대친구, 차타레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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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차로 오르는 평북도사투리는 오윤보와 같이 당회의 보초서던
철도모자청년이였다. 그는 지금도 철도모자를 삐딱하니 쓰고있었다. 억
봉은 렴탐군이라고 바가지 쓰던 생각이 났으나 대답할 사이가 없었다.
《누이―》하고 소리치며 석봉이가 화차우에서 뛰여내려왔다. 형을 찾
아오겠다고 보초막을 나온 그는 평양에 간다는 화차우에 올라가있었다.
《야, 넌 근무 안 서구 어디 와있어?》
억봉은 동생한테 으름장을 놓았다. 그제야 석봉은 형을 알아보고
안절부절 못했다. 석봉은 누이를 앞세우고 여기까지 자기를 데리러
온줄로 아는 모양이였다.
《야, 이거 정말…》
《빨리 가서 정문을 지켜.》
억봉은 동생이 쩔쩔매는게 보기 좋은지 우정 다시 을렀다멨다.
《자, 빨리 오르구레. 떠나겠소.》
철도모자청년은 기관차우에서 억봉이네 세 남매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억봉이가 먼저 화차우로 올랐다. 그러자 석봉은 형의 옷을 꽉 붙들고 사
정했다.
《형, 나두 가자마.》
알뜰은 여러 사람들앞에서 징징거리는 동생이 보기 딱했다.
《형이 괜히 그런단다. 정문에는 다른 사람이 교대하러 왔어. 삼촌이
보내줘서…》
《정말?》
《정말 아니구…》
《야.》
석봉은 화차우로 날쌔게 오르더니 알뜰을 부축해주려고 손을 내밀었
다. 그들이 화차방통에 오르기 바쁘게 기관차는 덜컹거리며 화차를
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철소구내를 벗어난 기관차는 벌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기차길옆
에서는 강줄기가 해빛에 번쩍거렸다. 강기슭의 갈대며 새초들이 누렇게
익어 바람에 설레인다. 강건너편 산발들엔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었고 푸
른 하늘에는 목화송이같은 구름들이 소담히 피였다. 어디를 바라보나 가
을빛은 한껏 무르녹았다. 억봉은 달리는 화차옆으로 펼쳐지는 가을풍경
에 마음이 여간만 흡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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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칙 폭폭 칙칙 폭폭…
기관차의 고르로운 장단은 이 철길우에 흘러간 눈물의 지난날을 불러
도 오고 다가올 미래를 속삭여주는것 같기도 했다.
(장군님은 어떤분이실가?)
억봉은 느닷없이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어떤 사람은 장군님이
백발로인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구척장신의 중년장군이라고도 했다.
어려서부터 전설처럼 들어오던 장군님을 오늘 평양에 가면 뵈올
수 있다. 억봉은 한껏 마음이 부풀어올랐다.
억봉은 기적소리에 생각에서 깨여났다. 곧추 뻗은 두줄기 철길을
따라 기차가 마주오고있었다. 앞에서 억봉이네를 향해 달려오는 기차는
정기 려객렬차였다. 려객렬차는 길을 비키라는듯 거쉰 소리로 기적을 울
리였다. 제철소구내기관차는 마주 기적을 울리며 속력을 늦추기 시작했
다. 제철소구내기관차가 멎어서서 다급히 기적을 계속 울렸으나 려객렬
차는 멈춰서지 않았다. 정기렬차운행시간표에 예견되여있지 않는 차, 제
철소구내를 멀리 벗어나 제멋대로 본선에까지 나온 구내기관차를 깔아
짓뭉개려는듯 려객렬차는 서리발수염같은 연기를 날리며 육박해왔다. 외
통철길이여서 피할 길은 없었다. 려객렬차가 멎어서지 않으면 충돌은 불
가피했다.
구내기관차는 철길에 앙버티고선채 해볼테면 해보자는듯 칙칙 증기만
내뿜었다.
구내화차에 올라탔던 사람들은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미
급한 사람들은 화차에서 땅으로 뛰여내리기 시작하였으나 억봉은 누이
가 팔을 꽉 붙드는 바람에 어쩌지 못하고 무개화차우에 서있었다.
려객렬차의 시커먼 동체는 점점 커가며 시시각각으로 육박해왔다. 위
기일발의 순간이였다. 태연한 사람은 오직 기관사 한사람뿐이였다.
기름때 묻은 철도모자를 삐딱하니 쓴채 기관사는 창밖으로 반쯤 몸을 내
밀고 다가오는 렬차를 뻔히 마주봤다.
려객렬차는 귀청이 떨어질듯 지척에서 기적을 울렸다. 그러자 구내차
기관사는 맞받아 기적을 울린다.
깔아짓뭉개일듯 마주 달려오던 려객렬차는 제철소구내기관차와 이
마를 맞대다싶이하고 급히 멎어섰다. 기차가 멎어서기 바쁘게 려객렬차
에서 두사람이 굴러떨어지듯 땅으로 뛰여내리더니 제철소구내기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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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향해 달려왔다.
《뭐야?》
달려온 두사람은 제철소구내기관차를 향하여 고함을 질렀다.
《우린 제철소구내차요.》
억봉은 키낮은 화차우에 버티고선채 땅우의 려객렬차기관사를 향해 소
리쳤다.
《누가 제철소기관찬줄 몰라서 그래? 누가 함부로 본선에 나오라고 했
나 말이야. 죽고싶어 그래?》
굴대장군같은 려객렬차기관사는 작업복단추를 모두 풀어놓은채 허
리에 두손을 올려짚고 금시 누구를 때리기라도 할듯이 펄펄 뛰였다.
《게사니고길 먹었소? 왜 왝왝 고면서 그래…》
제철소구내화차우에서 누군가 한사람이 맞불질을 했다.
《뭐야? 어느 자식이야. 내려오라.》
려객렬차기관사는 몹시 성미가 급한 사람이였다.
《여, 어쨌단 말이야…》
구내화차우에 올라있던 청년도 만만치 않았다. 몸매 다부진 그는
주저없이 화차에서 땅으로 뛰여내렸다. 그를 뒤따라 화차우의 사람들이
내려서고 이미 화차에서 내렸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려객렬차에서 한무리의 사람들이 밀려왔다. 정거장도 아닌 벌판에
기차가 멎어서자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싶어 우르르 달려왔다. 몸매 다부진
청년쪽으로는 제철소에서 떠난 사람들이 서고 려객렬차기관사뒤로는 려
객렬차를 타고오던 사람들이 진을 쳐 늘어섰다. 겨우 피한 렬차충돌은
여차하면 사람들의 싸움으로 번져질수 있었다. 이때 몸매 후리후리한 제철
소구내차기관사가 사람들을 비집고 려객렬차기관사앞으로 나섰다.
《형님, 왜 그러오?》
제철소구내차기관사는 팽팽한 분위기를 늦추려고 낮추 붙었다.
《야, 네가 이 구내차기관사야?》
려객렬차기관사는 분노의 창끝을 구내차기관사에게로 돌렸다.
《그렇소.》
구내차기관사는 배심좋게 받았다.
《야, 이 자식아, 너 환장을 했니? 철도복을 입은 녀석이 본선에 나
오면 안되는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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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객렬차기관사는 삿대질을 하며 금시 주먹이라도 먹일 기세다. 그럴
수록 구내차기관사는 심평좋게 늘어진다.
《형님, 급한 사정이 있어 그렇게 됐소.》
《급한 사정이구 뭐구 너 모가지가 몇개야… 본선으로 탕탕 기차몰구
나오면서…》
《안됐게 형님형님 하지 않소. 우린 평양에 급히 가는 길이요.》
규정이 법으로 되여있는 기관사들에게는 그들 특유의 례의와 도덕이 있
었다. 리유는 어떻든지간에 규정을 어긴 사람이 머리를 숙이기마련이다.
정기렬차를 몰아오던 려객렬차기관사는 기고만장해 소리쳤다.
《당장 기차를 뒤로 뽑아―》
려객렬차기관사의 말은 폭탄과도 같았다. 이제 제철소구내차가 뒤
걸음치기 시작하면 제철소구내까지 열키로나 밀려가야 한다. 려객렬
차가 물러서면 얼마 못가 역이 있지만 정기려객렬차가 구내화차한테 길
을 양보할리 없다. 구내기관차를 타고오던 제철소사람들은 아무 말을 못
했다. 억봉은 갈길이 급하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했다.
《먼길 온 우리가 어떻게 물러선단 말이야.》
억봉의 이 말은 려객렬차를 타고오던 수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일시에
터뜨려놓았다.
《야, 저 친구봐라. 우리보구 물러서래.》
《허가없이 본선에 뛰여들어 남까지 못 가게 만들구선 뭐… 낯가죽이
내 발뒤축보다 더 두터운 친구일세.》
려객렬차를 타고오던 친구들이 억봉을 욱박지르며 이구동성으로 떠들
어댔다. 제철소구내차기관사의 인내력으로 늦춰지던 분위기는 억봉이때
문에 다시 긴장해졌다. 징용갔다 돌아오는 젊은 패들이 떠들어대는
바람에 사태는 더욱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인원수로 보아도 제철소사람들은 려객렬차사람들한테 밀리우지 않
을수 없었다. 형세는 점점 불리해갔다.
제철소구내차기관사가 억봉이한테로 다가오더니 다짜고짜로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억봉은 그가 싸움을 말리려드는것 같아 팔을 뿌리쳤다. 아
무리 사람수가 적어도 비겁하게 뒤로 뺑소니치고싶지는 않았다. 저쪽에
서 완력으로 나오면 같이 주먹을 내밀판이다. 억봉은 늘 가지고다니던
총을 오늘따라 못 가져온게 후회되였다. 제철소구내차기관사는 억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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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한쪽팔을 집게처럼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여보게 친구, 욱욱해야 맨발로 바위차기야. 내레 시키는대로 하
라구.》
제철소구내차기관사는 억봉의 팔을 잡아끌고 화차우로 올라갔다.
정기려객렬차를 타고오던 젊은 패들은 제철소사람들이 바빠맞으니
까 화차우로 피하는줄 알았는지 화차주위로 죄여들었다. 제철소구내
차기관사는 화차우에 오르더니 길다란 두개의 장대끝에 돌돌 만 프랑카
드를 풀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이 장대를 좀 들구레.》
제철소구내차기관사는 장대기 하나씩을 억봉이와 알뜰이한테 나누
어주면서 프랑카드를 펼치라고 했다. 억봉이와 알뜰이가 장대를 들어올
리자 붉은 프랑카드가 활짝 펼쳐졌다.
몸매 후리후리한 제철소구내차기관사는 화차 한끝으로 나서며 주변에
모여 욱욱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이 글발을 보시오.》
떠들던 군중은 그의 말에 모두 프랑카드를 바라봤다. 억봉이와 알뜰
이가 하나씩 장대를 들고 서있는 붉은 프랑카드에는 이런 글발이 씌여
져있었다.
《우리 민족의 영명한 령도자 장군 만세!》
소란스럽던 군중의 시선이 프랑카드에 쏠리자 제철소구내차기관사는
연설하듯 군중을 향하여 웨치였다.
《여러분, 장군님이 조국에 돌아오시였습니다. 오늘 평양에
서는 장군님의 조국개선을 환영하는 군중대회가 있습니다. 우리
는 지금 장군님을 뵈오려 평양으로 가는 길이요.》
방금전까지만 해도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욕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문채 제철소구내차기관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였다. 이때였다. 군
중들속에서 구내화차를 향하여 한사람이 새되게 소리를 질렀다.
《형―》
고함을 지른 청년은 사람들을 비집고 구내화차쪽으로 다가왔다. 프랑
카드를 매단 장대기를 들고 화차우에 서있던 억봉은 자기한테로 쏠려있
는 수백군중의 비발치는 뭇시선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얼굴이 붉
어진채 장대기만 꽉 틀어잡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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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
화차우로 올라서는 청년이 이번에는 알뜰을 찾았다. 억봉이와 알뜰은
자기들의 귀를 의심했다. 화차우로 올라서는 젊은 청년은 천만뜻밖에도
사촌동생 기봉이였다.
《야, 기봉아…》
억봉이가 한손으로 프랑카드장대기를 쥐고 한손을 내뻗치며 고함질렀다.
《야, 형님…》
《기봉아―》
《누이―》
네남매의 감격적인 상봉은 화차우 프랑카드아래에서 벌어졌다. 려
객렬차와 제철소구내기관차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 무슨 구경이라도
하듯 네남매의 상봉을 바라봤다.
성이 나서 우르락푸르락하던 사람들의 입가에 어느덧 느슨한 미소가
피여났다. 기봉은 알뜰의 옆으로 다가서서 그가 들고서있는 프랑카드대
를 한손으로 잡으며 화차아래에 서있는 자기 동행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 우리두 평양에 갔다가 집에 가자.》
기봉의 말에 대여섯명의 젊은 패들이 우르르 구내화차로 올랐다.
차림차림으로 보아 징용이나 징병에 끌려갔다가 지금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틀림없었다. 그네들도 제철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거나 겸
이포에서 살던 사람들이였다. 그러자 려객렬차를 타고 제철소쪽으로 오
던 사람들중에서 구내화차로 오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처음엔 얼마 타
지 않았던 제철소구내차에 잠간새에 사람들이 하얗게 올랐다.
《여 객차― 객차― 빨리 뒤로 뽑으라.》
려객렬차에서 구내화차로 옮겨탄 사람들은 제철소에서 나오던 사람들
과 합세하여 이구동성으로 떠들어댔다. 려객렬차가 길을 양보하는것
은 하나의 기정사실처럼 되고말았다.
《아…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할게지.》
그때까지 허리에 두손을 올려짚고 성이 나 서있던 려객렬차기관사는 입
에 물었던 반도 타지 않은 담배를 훅 뱉어버리더니 구내차기관사를 흘기
고나서 자기 기관차로 올랐다.
빽―
길게 기적을 울리고나서 려객렬차기관사는 솨― 솨― 증기를 내뿜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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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얼마후 려객렬차는 뒤걸음질하기 시작했다. 구내화차우에 오른
사람들속에서 환성이 일어났다.
《구호를 활짝 펼치라.》
화차우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알뜰이가 들고서있는 프랑카드장대를 기
봉이가 곁들이로 붙잡았다. 붉은 프랑카드에 새겨진 글발은 그들의
머리우에서 빛났다.
《우리 민족의 영명한 령도자 장군 만세!》
어느덧 제철소구내기관차는 사람들이 몇곱으로 불어난 구내화차를 앞
세운채 뒤걸음질하는 려객렬차를 따라 레루우를 서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제철소구내기관차가 전진하면 전진하는것만큼 려객렬차는 그 기세
에 위압당하여 쫓기듯 뒤로 물러섰다. 크기로 따지면 두 기차는 서로 대
비도 되지 않았다. 차에 오른 사람머리수로 보아도 그랬다. 모든데서 엄
청나게 차이가 나건만 작은 구내기관차가 큰 려객렬차를 떠밀어제끼는
요술과 같은 힘은 구내화차우에서 불길처럼 타번지는 붉은 프랑카드의
힘있는 글발에 있는상싶었다. 낮은 구내화차우에서는 손에손에 받들
리운 붉은 프랑카드가 바람에 기발처럼 펄럭이였다.

《특수렬차 출발!》
《특수렬차 긴급통과.》
억봉이네 제철소구내기관차가 프랑카드를 펄럭이며 경의본선에 들
어서자 렬차가 지나가는 모든 역 사령전화통들엔 불이 일었다. 기본렬
차들이 대피선에 들어서고 정지를 알리던 붉은 신호기들은 팔을 드리웠
으며 조역들은 흰 장갑까지 끼고 홈에 나와 차렷자세로 즉시통과신호를
하였다. 하지만 억봉이네가 탄 구내기관차가 평양역에 들어섰을 때에는
아쉽게도 환영군중대회가 끝난 뒤였다.
평양하늘에는 비행기가 날며 장군님의 조국개선을 환영하는 평
양시군중대회소식을 삐라로 알리였고 환영군중대회에 참가하였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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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은 자기네 일터와 집으로 돌아가며 또다시 가두시위를 벌리였다.
평양역으로는 장군의 조국개선소식을 듣고 평양시 주변공장
과 농촌들에서 달려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끝없이 모여들었다. 역구내와
역전광장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그들의 손과 손마다에
환영군중대회에 가지고갔던 프랑카드와 기발이 그대로 들려있고보니 이
제 다시 환영대회와 가두시위가 벌어지는것 같은 기분이였다. 군중의 환
호와 열정은 아직도 끓고있었다. 사람들은 군중대회에서 받아안은 흥분
을 억제못해 역구내와 역전광장에 물결치며 저저마다 장군의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역이란 원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고 사람들은 제나름
의 화제거리를 갖고있기마련이건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평양역이 생
겨나 40년, 이날처럼 사람들로 붐비고 넘쳐난적은 없었으며 그 많은 사
람들이 하나의 이야기거리로 떠들어대고 그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이때
처럼 환희가 어려있은적은 일찌기 한번도 없었다. 남포에서 신새벽에 자
전거를 타고왔다는 젊은이, 백리길을 꼬박 걸어왔다는 늙은이, 평양
에 아들을 찾아왔다가 장군님이 개선하시였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째 묵으며 기다렸다는 함흥할머니…
억봉은 애써 평양에까지 왔다가 환영군중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고
돌아서니 서분하기 그지없었다. 억봉은 환영군중대회에 참가한 십여
만사람축에 자기네 형제들중 누구도 끼우지 못한 아쉬움을 버리기 어려
울수록 삼촌에 대한 서분한 생각이 걷잡을수없이 마음 한구석에 밀려드
는것이였다. 공장로동조합위원장인 삼촌은 사업위치로 보아 제철소에서
공장위원장 다음간다고 할수 있었으며 사람들의 존경과 기대는 그보다
더 크다고 할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삼촌은 자기 조카들마저 아직 입당
시켜주지 않았다.
억봉은 당회의하는 곳에 가서 기웃거리다 단속된 그날 왜 자기를 당
에 안 받아주는가고 들이대자 삼촌이 당이란 려관처럼 돈만 내면 누구
나 들어오는 그런데가 아니라고 간격두고 하던 말이 지금도 가슴에 못
박혀 내려가지 않았다. 그리고 삼촌이 오늘같이 뜻깊은 날에마저 자기
네들을 슬며시 빼돌린것 같아 은근히 분했다.
억봉은 땅거미가 짙어갈무렵에야 제철소정문초소로 돌아왔다. 뒤미처
준길삼촌이 들어섰다. 철부지의 마음이 되여 억봉이가 심란해하던 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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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길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날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뜻깊고 기쁜 날
들중의 하루였다.
《어디? 어디?》
준길은 문고리를 쥐고 문가에 버티고 선채 방안을 향해 큰소리로 부
르짖었다. 토목저고리밑에서 그의 넓은 가슴은 흥분을 억제하지 못해 쉼
없이 오르내렸다.
정문초소막안 긴의자우에 앉아있던 기봉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기봉은 아버지앞에 둬걸음 못미처 깊숙이 허리굽혀 인
사를 했다. 준길은 그때까지도 문가에 한모양, 한본새로 버티고 서있었
다. 그는 처음보는 사람처럼 아들을 말없이 바라봤다.
《아버지―》
기봉은 아버지앞으로 다가섰다. 준길은 기봉의 머리며 들먹거리
는 어깨를 한참이나 쓸어만져주고나서 그를 자기의 품에서 떼여내
듯 팔을 뻗치고 두손으로 기봉의 어깨를 꽉 잡았다. 아들을 한참이나
다시 바라보고나서 준길은 충격적으로 와락 껴안으며 그의 어깨를 쓸
어만졌다.
《난 네가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아무렴, 돌아오구말구…》
준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였고 그의 두눈에는 물기가 돌았다.
준길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온 아들과 회포의 정을 나눌 시간이 많
지 못했다. 그가 환영군중대회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제철소에 남
아있던 사람들이 찾아왔다. 달모를 비롯한 십여명의 해탄사람들이 한꺼
번에 우르르 밀려오는 바람에 제철소정문초소는 비좁아 사람들이 모두
들어설수 없었다. 석봉이가 초소안에 있는 긴의자를 밖에 내다놓자
달모는 준길의 팔을 잡아 그를 의자에 끌어앉히며 어서 평양시군중대회
에 다녀온 소식을 이야기하라고 독촉했다. 준길은 달모와 같이 긴의자
에 앉아 주위에 빙 둘러선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사뭇 기분좋아 입
을 열었다.
《이제부터 우리 제철소에서 할일이 참으로 많아졌습니다. 오늘
장군님께서는 환영군중대회에서 우리 전체 인민이 힘있는 사람
은 힘을 내구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구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서 일
제놈들이 파괴해놓고 달아난 공장과 농촌을 하루빨리 복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습니다. 그러니 우리 제철소부터 우선 돌려야 할게 아닙니까.》

167
준길이 옆에 앉았던 달모가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여보게, 오늘 정말 장군님을 만나뵈웠나?》
사람들의 시선은 준길의 얼굴로 쏠리여 못박히였다. 준길은 가슴을 쭉
펴보이며 《만나뵙지 않구요. 우린 주석단 가까운 맨앞에까지 비집구 나
갔댔는데요.》했다.
《야.》
준길이가까이에 서있던 기봉이와 석봉은 거의 동시에 탄성을 터치였
다. 달모를 비롯한 중년들과 로인들의 호기심도 젊은이들한테 지지
않았다.
《장군님이 흰말을 타시구 오셨던가?》
준길은 달모가 물어보는 말뜻을 정확히 깨닫지 못하여 뻔히 그의 얼
굴만 쳐다봤다.
《장군님은 구척장신의 백발이시라지?》
준길이 미처 대답을 고르지 못하자 달모는 또 다른것을 물었다.
《체, 아저씬 알지도 못하면서…》
석봉이 짜증섞인 소리로 달모를 면박했다.
《뭐가 아니야. 장군님이 흰수염을 날리시며 흰말을 타실 땐 번개같
다던데…》
《체, 아니라는데요.》
석봉은 어서빨리 삼촌의 이야기를 듣고싶은데 달모가 자꾸 곁가지를
쳐놓는게 성가시다는 투로 내뱉었다.
《넌 장군님을 뵙지도 못하구 왜 아저씨말씀만 자꾸 탓하는거냐.》
보다못해 알뜰이 동생을 나무랐다.
《그러게 말이다. 평양까지 갔다가 장군님을 뵙지도 못했다는 녀석이…》
알뜰의 편역에 달모는 그대로 열을 올리였다. 지금까지 젊은이들의 타
발에 별로 나무람타지 않던 그가 오늘따라 극성스레 그러는것은 자기 생
각에 그만큼 열중한탓이였다.
준길은 달모와 석봉의 다툼을 중재하듯 소리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 석봉이 말이 옳수다. 장군님은 젊으셨어요. 나도 지금까지 여
러 말을 들어왔는데 내 눈으로 직접 보니까 장군님은 아주 젊으셔요. 곤
색천으로 양복을 지어입으시고 연단앞에 서시여 〈친애하는 동포여러
분!〉 하고 10여만군중을 향해 인사를 하실 땐 환하게 미소가 넘쳐

168
나던데 일본놈들을 욕하실 땐 막 눈에서 번개불이 이는것 같습디다.
장군님의 젊으신 모습을 뵈오니까 막 힘이 나더라구요.》
준길은 성미가 그리 상냥한 축이 못되였으나 이 순간만은 자기보다 두
살 손우인 달모를 깍듯이 형님으로 대접했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한테 다
정다감한 빛을 숨기지 않았다.
《형님, 우리 기봉이가 제때에 돌아왔지요?》
준길은 기봉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달모에게 물었다. 달모는
술마신 사람처럼 얼굴이 벌개져 연방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잠시후 사람들이 흩어져가고 준길이주위엔 억봉이네 형제만 남았다.
의자에 앉아 아들과 조카들을 둘러보던 준길은 누구에게라없이 담배가
없는가고 물었다. 동생들보다 둬걸음 떨어져 찌뿌둥한 얼굴로 서있던 억
봉은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냈으나 삼촌한테 제가 주지 않고 기봉이한
테 내밀었다. 준길은 아들한테서 담배갑을 받아 한대 입에 꼬나물더니
나머지를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준길은 담배를 불붙여 물고나서 반쯤
외면해 서있는 억봉을 넘겨다봤다.
《망할녀석, 평양에 안 데리구 갔다구 입이 한발이나 나와 아직 들
어가지 않았구나. 사내자식이라는게 속통이 왜 그리 작아? 마음같아서
는 내가 경비를 서구 너를 보냈으면 좋겠지만 대렬을 책임졌으니 그러
지두 못하구… 누구든 남아서 공장을 지켜야 할게 아니냐. 모두 평
양에 가고싶어하는데 책임자인 나로서야 너희들을 남기는수밖에 더 있
냐. 사람은 어려운 일에서 앞장서야 하지만 기쁘고 좋은 일에선 뒤
에 설줄 알아야 해. 기둥감인줄 알았더니 넌 아직 서까래감밖에 못
되는구나.》
준길은 기봉이와 석봉이만 평양에 가고 억봉은 공장에 그냥 남아있은
줄 알았다. 그는 자기네 로동조합서기가 억봉을 대신하여 경비서주고 억
봉은 동생들과 같이 평양에까지 갔다가 시간이 늦어서 돌아섰다는것을
몰랐다. 준길은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억봉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
를 절썩 갈겼다.
《빨리 집에 가서 밥먹구 석봉이랑 기봉이랑 데리구 영화관에 가. 영화
관에서 오늘 시국강연회를 한다. 강연회 뒤끝엔 연예공연두 있구… 오늘 밤
경비는 우리 당원들로 조직해놓았으니 제철소엔 다시 안 나와두 돼.》
준길은 억봉에게 당부하고나서 로동조합사무실쪽으로 향했다.

169
8

온 겨레가 감격과 환희로 밤도와 설레이던 이밤 적들도 잠들지 않았


다.《대동아공영권》의 낡은 꿈에서 아직 깨여나지 못한 일본군국주
의잔당들과 국내의 친일파, 민족반역자, 반혁명분자들은 물론 뉴욕의 억
만장자들로부터 런던과 빠리의 한다하는 정계인사들에 이르기까지 우익
세력들은 모두가 뒤숭숭한 이밤을 보내였다.
장군님의 조국개선은 반만년 유구한 조선민족사에서뿐만아니라
세계적인 사변이였다.
당시 아이젠하워와 함께 미국을 군사적으로 떠받치는 쌍기둥의 하나
였던 미극동사령관 맥아더는 평양시환영군중대회소식에 접하여 한 정치
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군이 평양성에 입성하였소.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그
가 조선반도를 다 차지할것이요. 그러나 일본제국을 녹여낸 그가 제주
도까지 붉게 하는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다고 봐서는 안되오. 많은 약소
국가들이 그를 구세주처럼 바라보고있소. 대통령이였던 후버가 벌써 오
래전에 이에 대해 말한 일이 있소.》
자기 한생을 허장성세와 위선속에 살아온 그가 이때만은 진실을 말하
였다고 할수 있었다.
반만년 오랜세월 목마르게 기다리던 혁명의 위대한 수령을 맞은 인민
의 환희와 기쁨이 크고 영명한 수령의 령도따라 건국의 새길을 가려는
인민의 결의와 지향이 확고하면 할수록 반동들의 저항과 준동 역시 그
만큼 크고 격렬하였다. 파괴된 제철소에서도 력사발전의 이 법칙은
그대로 작용했다.
준길은 억봉에게 동생들을 데리고 강연회에 가보라고 당부하였으나 억
봉은 분한 마음이 삭지 않아 식사를 하기 바쁘게 집으로 돌아갔다. 기
봉이가 돌아왔다고 삼촌어머니가 떡을 하는 바람에 모두 삼촌네 집에 가
서 저녁을 먹고 알뜰이와 석봉은 떨어졌으나 억봉은 혼자 제집으로 돌
아와 웃방에 자리펴고 누웠다. 늘 형한테 쥐여살던 석봉이가 기봉이가
170
오는 바람에 형이라고 으쓱해져 시국강연회에 갔다가 돌아와서 잠자리
에 누운 후에도 알뜰은 삼촌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이 생각, 저 생각에
잠들지 못하였다.
닭은 벌써 두번째 홰를 친다. 초저녁에 한잠 자고난 작은어머니가 부스
럭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앉았다. 알뜰은 작은어머니쪽으로 돌아누웠다.
《너, 상게 안 자냐?》
버선을 신던 작은어머니가 채 깨지 않은 묵은 잠을 터느라 하품을 하
며 묻는다.
《자다 깼어요.》
《더 자려무나.》
《잠이 오지 않아요.》
《오늘은 나도 잠이 오지 않누나.》
작은어머니는 버선을 신더니 말코지에서 치마를 벗겨입고 머리에
수건까지 썼다.
《작은오만, 왜 그래요?》
알뜰은 자리에 누운채 물었다.
《내 황주 친정집에 좀 다녀와야겠다.》
《예?》
알뜰은 속치마바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앉았다.
《기봉이녀석까지 오구보니 이젠 기봉이 아버지 몸이 제일 걱정이구
나. 할일은 많은데 몸이 씨원치 않으니… 내 일전에 황주친정집에 개를
좀 얻어달라 부탁했더니 누런 개를 얻어놨다구 기별이 왔구나. 빨리 가
져다 엿을 하든 뭐 어떻게 해야지…》
작은어머니는 끌끌 혀를 찼다. 한생을 오로지 자식과 남편을 위해 묵
묵히 바쳐오는 작은어머니다. 한 자식 시름을 잠시라도 놓게 되면 다른
자식이나 남편에 대한 시름으로 또 속을 태우게 되는것이 어머니되고 안
해된 녀인들의 마음이다. 그래서 출가후 녀인의 기쁨은 남편과 자식들
을 위한 쓰리고 아픈 마음에 있다고 하는지… 알뜰은 준길삼촌을 위해
백여리 먼길을 다녀오려는 작은어머니가 측은하기만 했다.
작은어머니가 새벽길 떠날 차비를 서두르던 바로 이 시각 제철소쪽에
서 한방의 총소리가 울리였다. 그 총소리에 뒤이어 여러방의 총소리가
연거퍼 들리였다. 주택지구에는 그뒤에 일어난 날카로운 웨침소리며 호

171
각소리, 다급히 뛰여가는 구두발소리들이 들려오지 않았으나 깊이 잠들
었던 사람들을 놀래웠다.
총소리에 깨여난 기봉이와 석봉이가 다급히 문을 열고 뛰여나갔다.
《얘, 어디를 간다고 그러냐?》
알뜰이 따라나서며 동생들을 만류하였으나 두 동생은 들은체만체
했다. 두 동생은 총소리가 들려온 제철소구내쪽을 향해 어둠속으로
급히 사라졌다. 총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후 삼라만상은 려명전야의 괴자누룩한 정적속에 또다시 끝모르게
잦아들었어도 한번 놀란 알뜰의 가슴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먼동
이 채 트기 전에 작은어머니가 기어이 길을 떠나겠다고 하였을 때 알뜰
의 불안은 극도에 달하였다.
《작은오만, 어딜 간다구 그래요?》
《다 늙은 나야 뭐라냐?》
《그래두 부디 오늘같은 날 갈건 뭐예요?》
《기봉이 아버지 몸을 빨리 추세워줘야지. 너희 삼촌이 지금 공장의
큰일을 하는것 같은데…》
알뜰은 작은어머니의 완고성이 단순한 고집때문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구차한 생활속에 체질로 굳어지다싶이 한 작은어머니의 이악성에 남편
에 대한 안해의 사랑 그리고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한 공감과 긍지까지 합
쳐진것이다. 하루 벌어야 하루 먹고 사는 로동자였던 삼촌이 해방과 함
께 제철소로동조합위원장이 된것은 온 일가의 자랑이였다.
《얘, 날이 밝거든 늦지 않게 빨리 조반을 해다줘라.》
작은어머니는 문을 열고 집을 나서며 알뜰에게 제철소에 나가있는 남
편과 아들, 조카들의 아침밥을 분부했다. 아래우 흰 치마저고리에 흰 머
리수건을 쓰고 려명이 다가오는 새벽대기속에 서있는 작은어머니의
기상은 근엄하였고 분부 역시 엄엄하였다.
알뜰은 삼촌어머니가 떠나간 후 불길한 예감에 가슴을 조이며 어서 날
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알뜰이 아침밥을 지으려고 방안에서 부엌으로 내
려서던 때였다. 고요한 새벽대기를 울리며 다급히 뛰여오는 발자국소리
가 들리였다. 점점 가까와오던 쿵쿵소리는 지척에서 그치는가싶더니 갑
자기 덜커덕 부엌문이 열리였다.
《작은오만… 작은오만…》

172
석봉이 문가에 나타나 숨이 차 헐썩거리며 작은어머니를 찾았다.
열려진 문으로 찬 새벽기운이 쓸어들며 알뜰의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
았다. 하건만 석봉의 얼굴에선 땀이 비오듯 했다.
알뜰은 동생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삼촌이, 삼촌이…》
석봉은 반나마 혼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응?》
《삼촌이 총에 맞았어.》
《뭐라구?》
석봉은 누이의 물음에 대답은 않고 뒤로 획 돌아서더니 비칠거리며 어
디론가 뛰여갔다. 알뜰은 자기 집으로 달려가 억봉을 두드려 깨웠다.
《뭐라구?》
억봉은 너무도 뜻밖의 소식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허겁
지겁 옷을 입고 제철소로 달려나갔다.
준길의 운명은 이미 경각에 달해있었다. 목과 가슴에 붕대를 하고 해
탄과사무실 긴 탁자우에 누워있었다. 언젠가 억봉이가 평양에서 돌아온
삼촌을 만나던 그 방이였다. 바로 그날 준길삼촌은 이 방에서 리선생을
만나던 이야기며 평양 다녀온 소식을 전해주었었다. 준길삼촌은 징용에
끌려나갔던 기봉이가 돌아온 어제같은 기쁜 날에조차 자식과 한자리에
마음편히 있지 못하고 제철소에서 밤을 밝히더니 지금 이렇게 사무실 탁
자우에 가쁜숨을 몰아쉬며 누워있었다.
어제 밤 제철소구내에선 반동들의 준동이 있었다. 준길이 제철소구
내를 돌아보다 이곳 해탄사무실에 들리였을 때 반동들은 그를 향해 두
발의 권총을 발사했다. 총탄 한발은 그의 심장가까운 페부를 뚫었고 한
발은 목을 스쳤다. 준길을 저격한 적들은 그가 지금까지 간수해오던 배
송기도면을 비롯하여 주요 해탄설비들에 대한 기술문건까지 가져갔다.
솜저고리로 등을 고인채 백지장같은 얼굴로 누워있던 준길은 억봉을
알아보았다.
《너 왔냐?》
삼촌은 해쓱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삼촌.》
억봉은 삼촌의 손을 덥석 잡아쥐며 억이 막혀 아무 말도 못했다. 불

173
과 몇시간사이에 삼촌은 체격마저 작아진것 같았다. 탄탄하던 근육은 맥
이 풀렸으며 윤기없는 살결은 거칠었다. 해쓱하여진 얼굴에 광대는
툭 불거지고 눈확은 깊어졌다. 깊숙한 그 눈확에서 두눈만 이상할 정도
로 광채를 뿜었다. 이마우에 몇오리 드리운 머리칼에는 흰오리가 섞여
있었다. 귀밑머리에도 흰 머리칼은 많았다. 총이 센 그 오리오리 흰 머
리칼은 억봉의 두눈을 아프게 찔렀다. 억봉은 험한 일에 트고 으깨진 삼
촌의 꽛꽛한 손을 쓸어만지며 애써 울음을 참았다.
억봉은 가쁜숨을 몰아쉬는 삼촌한테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줄지 몰라 붕대 처맨 가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삼촌은 가벼이
머리를 흔들었다. 폭풍전야에 고요한 정적이 찾아오는것처럼 림종이 눈
앞에 다가올수록 모든 아픔을 잠시나마 잊게 되는것인지, 아니면 이제
는 그 무엇으로도 자기의 아픔과 고통을 덜어낼수 없다는걸 자각한 강
한 체념때문인지 순간이나마 그의 얼굴표정에서는 푹 자고난 사람같은
안정감이 느껴졌다. 준길은 자기 가슴우에 놓인 억봉의 손등을 조심스
럽게 잡아쥐였다.
《너 어제 강연회에 갔댔니?》
준길은 그윽히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 억봉은 삼촌의 마음을 위로
하자면 갔었다고 대답해야 한다는걸 모르지 않았으나 거짓말을 할수가
없어 머리를 저었다.
《갈걸 그랬구나.》
삼촌은 기대가 어긋남을 서운해했다.
《어제 그 강연회는… 장군님의… 조국개선을 환영하여…
우리 제철소… 공산당원들이 조직한거란다.》
삼촌은 숨이 가빠 토막토막 말마디를 끊었다. 그는 자기가 이 모든것
을 조카한테 미리 똑똑히 말해주어 꼭 참가시키지 못한것을 못내 후회
했다. 억봉은 어제 자기가 강연회에 가지 않아 삼촌한테 예상치 않았던
부담을 주고 아픔을 주게 되는것이 괴로왔다. 지금까지 자기가 해온 모
든 일은 삼촌한테 걱정만을 끼쳤다고 할수 있었다. 어려서는 파철원료
장에서 주었던 튀지 않은 탄알때문에 그리고 해방이 되여서는 콕스봉급
때문에 그랬었다. 그리고 차지훈때문에 삼촌과 얼마나 엇섰으며 당에 받
아주지 않는다고 얼마나 투덜거리였던가. 억봉은 이 모든것을 삼촌한테
빌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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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길은 억봉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려는듯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억봉아, 배송기도면이랑… 해탄실설비문건들을 너한테 맡기려 했었
는데 놈들이 모두 가져갔구나.… 네가 당에 받아주지 않는다구… 날 원
망했는데… 입당두 못 시키구…》
준길은 자책으로 눈길을 흐린채 억봉을 바라봤다.
《삼촌!》
억봉은 삼촌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채 엉엉 소리내며 울고싶었다.
준길은 억봉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준길은 갑자기 몸을 비틀었다. 잠
시 멎었던 아픔이 도지는가싶었다.
《삼촌!》
억봉은 준길의 품에 쓰러졌다. 준길의 둘레에 서있던 사람들이 모여
들고 의사가 응급대책을 취하였으나 준길의 고통은 점점 심해갔다.
준길은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헛소리를 시작했다.
《삼촌!》
《아버지!》
억봉이와 기봉은 울음섞인 소리로 번갈아가며 찾았으나 준길은 혼수
상태에서 깨여나지 못했다. 이때 석봉이가 또 한명의 의사를 데리고 방
안에 들어섰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엄습하는 죽음과 싸우듯 준길은
두손을 휘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압출! 압출하란 말이야!》
준길은 그 누구를 위협하듯 주먹을 휘두르며 같은 말을 곱씹었다.
《압출! 압출하란 말이야!》
억봉은 지금 삼촌이 다 익은 콕스를 어서 꺼내라고 한다는걸 알았다.
림종의 이 시각 삼촌은 콕스를 보고싶어했다. 한생을 불속에서 살아온
그였다. 다 익은 콕스의 불기둥이 탄화실에서 식힘차로 무너져내리며 폭
포치는 콕스압출장면은 해탄로동의 절정이였다.
그 순간을 위해 로체공들은 온종일 뜨거운 해탄로우를 떠나지 않는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기관차는 수천수만리 머나먼 곳에서 석탄을 쉬임
없이 실어오는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의 등짐과 손 그리고 수많은 기계와
설비들의 힘을 입어 석탄이 해탄로에 장입되는것이며 수십공정의 긴장
된 작업이 쉼없이 맞물려돌아가는것이다.
삼촌은 계속 헛소리를 했다. 기봉은 가슴을 태우며 준길의 헛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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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다못해 소리쳤다.
《아버지! 이제 콕스를 뽑아요.》
준길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속에서도 아들의 말소리를 가려들은
모양이였다.
《응?》
준길은 기봉이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순간 준길은 정신을 차렸다. 준
길은 아들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나직이 물었다.
《너희 어머니두 왔니?》
기봉은 두눈에서 줄줄이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훔치며 머리를 흔들
었다.
《내 너희 어머닌 못 보구 갈것 같구나.》
《아버지!》
《어머니 잘 모셔라. 너희 어머닌 나때문에 고생만 했지.》
《아버지!》
기봉은 아버지의 손을 부여잡은채 울음을 터뜨렸다. 준길은 아무런 표
정없이 한참이나 아들을 바라보더니 한손을 들어 아들의 얼굴에서 눈물
을 닦아주었다. 아들의 얼굴을 훔쳐주는 마디굵은 손가락은 파르르
떨리였다.
억봉은 삼촌에게 죽음이 이제 더는 어쩔수없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준길이자신도 이것을 불을 보듯 명백히 알고있었다. 억봉은 한순간만이
라도 삼촌을 위안해주고싶었다.
《삼촌! 왜 그래요? 작은어머닌 삼촌 약구하러 갔어요.》
준길은 억봉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표정없던 그의 얼굴에 한가닥
미소가 어리는가싶었다. 준길은 물끄러미 억봉을 바라보며 이제는 늦었
다는듯 머리를 흔들었다.
《억봉아, 넌 집안의 맏형이라는걸 잊지 말라, 맏형이라는걸…》
억봉은 삼촌이 곱씹는 맏형이라는 말마디속에서 자기에 대한 기대와
당부를 느끼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무엇때문에 자주 꾸짖었으며 기쁘고
좋은일보다 질궂고 험한 곳에 세우려 했는가를 희미하게나마 깨닫는가
싶었다.
《삼촌!》
억봉은 혀를 깨물며 참아오던 울음을 끝내 터치고야말았다.

176
준길은 다시 의식을 잃었다. 괴롭게 몸부림치며 그는 계속 헛소리를
했다.
흐려가는 눈동자가 갑자기 맑아지기 시작했다. 준길은 꿈틀거리며 창
문쪽을 향해 손질을 했다.
《창문 열어!》
억봉은 삼촌이 답답하니 창문을 열어달라고 그러는것 같아 누구에게
라없이 소리쳤다. 억봉의 말에 주위에 서있던 알뜰이와 석봉이가 거의
동시에 창문쪽으로 달려가 문을 활짝 열었다. 준길은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억봉이와 기봉이가 량쪽에서 각각 한쪽어깨를 조심스럽게 받쳐 탁
자우에서 반쯤 몸을 일으켜주자 준길은 그제야 안정되는듯 창문을 바라
봤다. 열려진 창문밖으로는 길게 늘어선 해탄로가 바라보였다. 거무
틱틱한 해탄로옆에는 까마득한 굴뚝과 뒤집어놓은 거대한 깔때기를
련상시키는 콕스식힘탑이 서있었다. 굴뚝에선 연기가 피여나지 않았다.
콕스식힘차가 이글거리는 콕스를 가득 담아싣고 들어서면 식힘탑에서 뭉
게뭉게 타래쳐오르군 하던 하얀 증기도 보이지 않는다. 벨트콘베아며 배
송기가 돌아가는 소리, 장입차며 압출대차가 오가는 소리… 쇠를 끓일
불을 다스리는 로동의 동음은 하나도 들려오지 않는다. 불꺼진 해탄로
를 멍히 바라보는 준길의 눈길은 생의 마지막열정이 타번져 이글거렸다.
《장군님을 모시구… 내 나라를 위해… 콕스를 뽑자 했더니…》
준길의 눈에서는 광채가 사라지더니 몸이 무겁게 늘어졌다.
《아버지!》
《삼촌!》
목메인 소리로 기봉이와 억봉이가 소리쳐부르고 창가에 서있던 알뜰
이와 석봉이가 달려와 삼촌의 몸을 잡아흔들었으나 준길은 아무런 대답
도 하지 않았다.
바로 이 시각 자기의 귀중한 남편이 이미 세상을 하직하였다는것을 알
지 못하고 작은어머니는 부지런히 걸음을 다그치고있었다. 래일의 쾌청
을 알리며 서쪽하늘에 띠처럼 흘러간 붉은 노을을 이고 백여리 먼길을
단숨에 다녀오는 그의 머리우에는 이제 가마에 넣어 끓이기만 하면 될
보약재가 들어있었다.
황혼을 타고 불어오는 쌀쌀한 가을바람이 걸음을 다그치는 녀인의 흰
옷고름을 날리였다.

177
제4장. 닥쳐온 추위

격동의 나날엔 세월의 흐름마저 빠른것 같았다. 짙어가던 가을빛은 어


느덧 퇴색하고 겨울이 소리없이 은빛옷자락을 펼치기 시작했다. 월봉산
기슭에 새로 생겨난 준길의 무덤에도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풀 한대 돋
아나지 못한 봉분을 장식해주려는듯 강서리는 무덤과 그 주변을 기기묘
묘한 문양으로 수놓아진 거대한 대처네처럼 포근히 덮었다. 아직 송진
내가 그대로 풍기는 끝빠른 나무비석에도 서리가 앉았다. 《고 박준길
의 묘》란 비문의 먹글씨는 방금 퍼지기 시작하는 아침해빛을 받아 뚜
렷이 부각되였다.
무덤주변의 키낮은 소나무와 마른 풀잎에 레스처럼 얹혀있던 서리가
해빛에 반짝거리다 이슬로 맺히던 때 억봉이네 네남매는 준길의 무덤을
찾았다. 석공에게 부탁했던 돌비석이 얼마전에 완성됐다. 래년 청명
때 새 비석을 세우자고 의견이 없지 않았으나 억봉은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세우려는 자기 주장을 기어이 관철했다. 래일 기봉은 공
청의 추천을 받아 공부하러 평양에 가고 석봉이 역시 도강습소에 석달
강습을 받으러 간다. 이제 청명때 다시 모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불
같은 이 세월에 비석을 세우겠다고 모여든다면 삼촌은 땅속에 누워서도
좋아하지 않을것이다. 고정한 삼촌은 자기 비석을 세우지 못하더라도 자
식과 조카들이 맡은바 건국사업에 헌신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을것
이다.
준길의 희생으로 억봉은 삼촌어머니나 기봉이 못지 않게 마음의 상처
를 입었다. 억봉은 삼촌이 살아있던 때 자기가 너무나 철없이 굴었고 삼

178
촌한테 마음의 부담을 끼친것 같아 죄스러운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알
뜰이도 그랬다. 알뜰은 억봉의 권고로 삼촌이 돌아간 후부터 로동조합
에 일하러 나갔다. 로동조합에 가서 알뜰이가 하는 일이래야 방안청소
를 하고 난로에 불을 때며 이것저것 심부름을 하는것이였으나 그 모든
것이 삼촌이 하던 일과 결부되여있는것 같아 알뜰은 정성을 다했다.
사람들은 해방이라는 거창한 력사적사변속에서 급속도로 의식화되
기 시작했다. 전국각지 농촌들에서는 3.7제투쟁이 벌어졌고 공장, 기업
소들에서는 파괴된 설비와 기계들을 복구하는 사업과 함께 건국생산운
동이 전개되였다. 해방된지 얼마 안되여 조선화학공장이 작업을 개시하
였으며 문평제련소의 로동계급은 장군님의 조국개선을 환영하
는 평양시환영군중대회소식을 듣고 첫 쇠물을 뽑아냈다. 그후에는 전국
적범위에서 철도로동조합이 창립되고 그 다음날에는 평남석탄관리국
이 창설되였다. 나날이 높아가는 대중의 혁명적열의속에 제 민주정당,
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서고 건국의 봉화가 활화산처럼 타번지
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생활의 기슭에 밀려나있던 억봉이네 네남매도 새
생활의 바다를 향해 사품치는 시대의 격류속에 뛰여들었다.

끌끌한 세 청년이 일에 손을 적시자 비석 세우는 일은 잠간사이에 끝


났다. 화강석으로 만든 조그마한 비석이였으나 새 비석을 세우고보니 무
덤은 한결 틀잡히고 위풍있어보이였다.
얼마후 네남매는 월봉산을 내렸다.
산자드락 갈림길에서 네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억봉이와 알뜰은 제
철소로 가야 하고 석봉이와 기봉은 집에 들렸다가 기차를 타러 역으로
나가야 한다.
《난 역에 못 나갈것 같구나.…》
억봉은 아수해하며 기봉의 손목을 잡았다. 억봉은 오늘 밤 야간순찰
을 해야 한다.
《바쁜데 역에는 뭣하러 나온다구 그러나요.》
기봉은 아버지를 잃기 바쁘게 형들과 헤여지는 서운함을 애써 숨기
였다.
억봉은 두 동생과 헤여진 후 알뜰과 함께 제철소로 가다가 느닷없이
말했다.

179
《누이, 역에 나갈 때 북문에 들려.》
《왜?》
《내 칼줄게.》
《칼?》
《기봉이랑 석봉이랑 가지구가서 쓰라구 칼 하나씩 만들었어.》
알뜰은 새삼스레 동생을 바라보았다. 준길삼촌이 돌아간 이후로 억봉
은 확실히 생각이 많아지고 이전보다 말과 행동이 퍽 심중해졌다. 욱하
는 성미는 여전했으나 성을 내도 앞뒤를 가리고 따져보는것이였고 자신
을 억제하려 애를 썼다.
빵― 빵―
자기 생각에 잠겨있던 억봉은 자동차경적소리에 머리를 들었다. 초소
유리창문으로 차단봉앞에 멈춰선채 발동도 끄지 않고 부르릉거리는
화물자동차가 내다보였다. 라웅범네 운송점차다. 요즘 웅범은 후생과에
동원되여 월동용석탄을 실어나른다. 억봉은 의자에서 일어나 완장을 바
로 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억봉은 공부하러 가는 두 동생한테
주려고 부탁했던 칼을 단조장에 가서 가져오라고 북문초소동무를 심부
름 시키고나서 그대신 보초를 서는중이다.
《너냐?》
웅범이 운전칸문을 열고 억봉을 내다봤다. 억봉은 석탄반출지도서
를 달래려고 자동차에 다가섰다.
《석봉이랑 떠났냐?》
《밤차로 간대요.》
《그래? 잘못하면 못 만나겠구나.》
웅범은 작업복 웃주머니에서 장갑낀 손으로 구식회중시계를 꺼내보더
니 자동차앞길을 막은 차단봉을 올리라고 독촉하듯 운전칸문을 닫으려
했다. 웅범은 석봉이가 떠나기 전에 다문 얼마라도 용돈을 쥐여주고싶
었다. 요즘 괜찮은 벌이가 생겨 돈푼이나 들어오게 되고보니 얼마전에
불상사까지 치른 억봉이네 형제들을 생각하게 되는 웅범이다. 억봉은 떠
나려고 서두르는 웅범한테 손을 내밀었다.
《반출증 줘요.》
웅범은 운전칸문을 닫으려다 말고 억봉을 빤히 쳐다보며 의아히 되물
었다.

180
《어제 너한테 주지 않았니?》
《거기 석탄은 다 나갔는데요, 스무자동차나…》
억봉의 말에 웅범은 알았다는듯 머리를 끄덕거렸다.
《맞았다. 여섯자동차 추가루 더 뗐다. 너희 집에 가져갈거랑…》
《그런건 내가 몰라두 되니까 추가지도서만 내요.》
《아직 추가지도선 못 받았다.》
억봉은 이전같으면 안된다고 한마디로 툭 내쏘았을것이지만 애써
참았다. 월동용석탄을 날라다주고 그대신 후생과에서 운반료를 받는 웅
범은 그저 하라는대로 할것이다. 억봉은 자동차운전칸문을 잡고선채 웅
범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가서 떼오라요.》
《아직두 실어낼게 많은데 후에 떼오자꾸나.》
《그건 안돼요.》
《뭐라구?》
웅범은 억봉이가 공연히 차를 붙들어세워놓고 귀한 목탄을 쓸데없이
하늘로 날려보내게 만드는것도 화가 났지만 여러 사람들앞에서 자기 체
면을 깎으려드는것 같아 더욱 그랬다. 적재함에 올라있는 상하차인
원들이 석탄가루에 새까매진 얼굴로 두사람을 재미난다는듯 내려다
봤다.
웅범은 상하차로력들을 보자 많은 사람들앞에서 억봉이와 다툴수가 없
어 가까스로 참았다.
《이 석탄은 기술대표위원네 집으로 가져갈거다.》
공장위원회 기술대표위원은 차지훈이다. 그의 산하에 기술과와 연
구실, 설계실이 있다. 동지회 회장으로 후생부 대표위원사업까지 하
던 송표가 쫓겨난 후 새 사람이 나지 않아 지훈은 지금 후생부까지 겸
해보고있다. 웅범은 제철소안에서 공장위원장 선우치담 다음으로 세
도가 당당하다고 할수 있는 차지훈을 억봉이 무시하려드는것 같아 어처
구니없어했다.
《그래도 안됩니다.》
억봉은 목석같은 표정으로 고집스레 곱씹었다.
《아니, 너 요즘 헴이 좀 든다 했더니 여전하구나, 여전… 옛말 그른
데 없느니라. 지어먹은 마음 사흘 못 가지, 못 가…》

181
웅범은 가시돋친 소리로 웅얼거리며 자동차운전칸에서 땅으로 내려섰
다. 억봉은 이그러진 얼굴로 버티고서서 끄떡하지 않았다. 억봉의 성미
와 고집을 잘 아는 웅범은 쾅소리가 나게 자동차운전칸문을 닫았다. 웅
범은 초소옆에 자동차를 세워놓은채 할수없이 차지훈을 찾아 떠났다. 억
봉은 분을 삭이느라 입을 꾹 다물고 초소옆에 세워놓은 자동차를 등진
채 돌아섰다. 생각같아서는 자동차에 실어놓은 석탄을 모두 당장 와락
와락 부리우게 하고싶었다. 이전같았으면 억봉은 웅범의 욕설을 지금같
이 대꾸 한마디없이 들어내지 못하였을것이다.
《죽었소 하구 참으니까, 씨…》
억봉은 초소안으로 들어와서야 남이 듣지 못하게 저 혼자 중얼거렸다.
억봉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격분을 참느라 꽉 부르쥔 주먹이 우들우
들 떨렸다. 이때 알뜰이가 역으로 나가던 길에 억봉을 찾아왔다. 초소
안에서 자기 혼자 씩씩거리는 동생의 험악한 기상을 보고 알뜰은 심상
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북문초소옆에 세워놓은 목탄차는
라웅범네 운송점자동차가 분명했다.
《외삼촌네 차가 아니냐?》
알뜰은 유리창문으로 내다보이는 자동차를 가리켰다.
《반출증도 없이 석탄을 내가겠다는게 아니야, 정말 내…》
억봉은 누이한테 밸풀이를 하듯 참아오던 욕을 퍼부었다. 알뜰은
동생과 웅범사이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다는것을 알았으나 잘못하
다가는 동생의 부아만 돋구어놓을것 같아 말머리를 돌리였다.
《난 가보겠다. 기봉이한테 주겠다는 칼이나 다우.》
알뜰의 말에 억봉은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 친구 왜 아직 안 올가?》
억봉은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리더니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기차
가 떠날 시간까지는 아직 넉넉하다.
《누이, 여기서 잠간 기다려. 내 가서 칼 가져올게.》
억봉은 알뜰이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열었다.
억봉은 문을 연 다음에야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서더니 당부하듯 말
했다.
《외삼촌이 반출증 떼가지고 오면 내보내구 안 떼오면 뭐라구 그래두
내보내지 말어. 모른다 하구 내가 오도록 기다리게 해.…》

182
2

차지훈을 찾아가는 웅범은 억봉이가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더 실


어내야 할 여섯자동차의 석탄중에는 억봉이네 집에 실어갈 석탄 한차와
웅범의 몫이 두차 있었다. 웅범은 운송료중에서 그 일부를 두 자동차의
석탄으로 받게 했지만 실은 콕스를 실어낼 생각이였다. 석탄출하원과는
이미 사업을 해놓았으니 자위대에서 말썽을 부리지만 않으면 된다.
웅범은 해주에서 배 가지고 콕스를 사러온 장사군한테 그 콕스를 넘겨
준 후 요즘 한참 값이 오른 붉은 지페를 받기로 했다. 그러면 거기서 생
기는 리익만도 며칠째 땀흘리며 번 운반료의 절반은 나온다.
요사이 웅범이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기를 쓰는것은 자기자신만을 위
해서가 아니였다. 웅범은 자기를 길러준 억봉의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
다 부모없는 알뜰이나 억봉에게 단돈 한푼이라도 쥐여주지 못해 속을 태
웠다. 박준길이 죽은데다 석봉이까지 공부하러 간다니 그 모든 부담은
억봉이나 알뜰한테 가기마련이다. 웅범은 쩍하면 우둘쩍거리는 억봉
이만이라면 별로 돌아다보지 않겠으나 알뜰을 생각하면 측은하기 그지
없었다.
웅범은 자기를 위해주려는 남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위대완장
을 꼈다고 우쭐렁거리는 억봉이가 쑥대에 오른 민충이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억봉이가 말썽을 부려 손해날 사람은 저자신과 웅범이뿐이다.
밑질 돈도 돈이지만 억봉이가 의리를 헌신짝처럼 차던지는게 더 가슴아
팠다. 웅범은 지금까지 친누이나 다름없는 라봉희의 자식들을 위해서라
면 자기가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해왔다.
웅범은 억봉의 친외삼촌과 성과 본이 같고 나이가 같은 결의형제였다.
이웃에 살던 두 집 부모들은 험난한 세상에 서로 의지하라고 돌잔치를
함께 차려주면서 동갑회를 무어주었다. 강보에 싸여 결의형제가 된
이들은 걸음마를 같이 배웠고 수수대말도 같이 탔다. 부모들사이가
무척 자별난데다 생김새마저 서로 비슷해 동리사람들은 이들을 결의쌍
둥이라고 했다. 억봉이와 알뜰은 어렸을 때 누가 진짜 외삼촌인지 구별
183
을 못한채 두사람을 다 외삼촌이라고 불렀다.
원료장에 파철을 고르러 갔던 억봉의 외삼촌이 강괴에 치워죽던 해 웅
범은 전염병으로 부모들을 하루아침 잃고말았다. 그때부터 웅범은 억봉
이네 외가에서 살았다. 억봉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세상떠난 후에
는 계동생의 누이였던 알뜰의 어머니 손에서 컸다. 웅범은 제철소구내
소년로동치고 못해본 일이 없었다. 상하차작업장에 가서 석탄과 광석짐
을 지는가 하면 원료장에 가서 파철을 고르기도 했다. 눈썰미 있고 손
기빠른 웅범은 무슨 일에서나 막히지 않았고 남들한테 지지 않았건만 고
아의 설음과 고달픔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알뜰의 어머니는 죽은 동생
을 생각해서 기회가 생기는대로 웅범의 옷을 빨아주고 찬밥 한숟갈이라
도 더 주지 못해 애를 썼지만 친누이 못지 않게 사랑이 아무리 극진하
다 하여도 아버지나 어머니의 품을 대신할수 없었다. 웅범은 고아의 설
음에 마음이 안착되지 못하여 한때는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였다.
그 과정에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장난도 하게 되였고 남을 속이며 일
하기 싫어하는 건달기도 생기였다. 웅범은 언젠가 소매치기패에 걸려 상
습적인 쓰리군으로 일생을 망칠번도 하였으나 알뜰의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때문에 륜락의 길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웅범은 철이 들면서 나쁜
손버릇을 고칠수 있었으나 건달기만은 종내 뿌리빼지 못했다. 억봉의 아
버지는 웅범이한테 해탄공무수리 견습공의 일자리를 애써 얻어주었으나
웅범은 시꺼멓게 기름때 묻어 심부름이나 해야 하는 견습공일보다 낚시
대를 들고 강가를 찾아가기 좋아했다. 대동강어부였던 아버지의 피줄을
타고나선지 웅범은 고기를 여간만 잘 잡지 않았다. 큼직한 숭어를 몇마
리만 잡아 일본놈고관네 집에 가져다 팔면 그것으로 하루이틀 밥값쯤 벌
수 있다는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웅범은 노상 강가에 붙어 살다싶이했다.
어느날 웅범이 낚시대를 둘러메고 자기가 늘쌍 고기를 잡던 강기슭을 찾
아오니 그곳에는 웬 일본신사 한사람이 앉아있었다. 낚시터를 떼운
웅범은 할수없이 강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맥고모를 쓰고 검은 안경을 쓴
그 일본신사는 낚시대와 줄로부터 접이의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값진
새것이였으나 그날 한마리도 고기를 잡지 못했다. 약이 오르는지 그 일
본신사는 낚시를 거두어가지고 장화를 해빛에 번쩍거리며 웅범이가
고기잡는 곳으로 왔다. 때마침 웅범은 반키로가 잘되는 숭어를 낚아올
리였다.

184
《야, 그 고기 나한테 팔아라.》
일본신사는 빈 고기망태를 들고가기 안됐는지 주머니에서 맵시있는 돈
지갑을 꺼내였다. 그날 웅범은 시장가격보다 세배가 넘는 돈을 벌었다.
뜻하지 않던 횡재에 웅범은 다음날 일찌감치 고기를 잡으러 다시 강에
나갔다. 강가에서 웅범은 어제 만났던 일본신사를 만났다. 그날 일본신
사는 자기 역시 괜찮게 고기를 잡았지만 후하게 돈을 주고 웅범이 고기
까지 자기 망태에 쏟아넣었다. 셋째 날도 역시 그랬다. 그날 일본신사
는 여느때없이 더 후하게 5원짜리를 주었을뿐아니라 낚시도구주머니
에서 낚시며 낚시줄까지 꺼내주었다. 일본신사는 자기의 명함쪽지를 주
며 이렇게 말했다.
《다음부터 고기를 잡으면 우리 집에 가져와. 래일부터 나는 시간이
없어 낚시질을 못할것 같다.》
《예.》
웅범은 코가 땅에 닿아라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웅범은
이 일본신사를 만나는 바람에 숭어 몇마리를 가지고 제철소로동자들의
근 반달로임에 달하는 횡재를 했다. 웅범은 뜻하지 않은 횡재를 기념하
여 낚시대나 사려고 상점에 가서야 상점주인을 통해 강가에서 만났던 일
본신사가 제철소 소장 기또 마사오임을 알았다. 그해 명치절을 앞두고
웅범은 괜찮게 물고기를 잡았다. 웅범이 그 고기를 모두 가지고 기또 마
사오를 찾아갔을 때 마사오는 10원이라는 큰 돈을 주었다.
《아니, 전 그간 입은 신세를 갚고싶어 나리님께 변변치 못한 이 고
기를 들고왔습니다.》
웅범은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허리를 깊이 숙이였다. 참대로 만
든 둥글회전의자를 마당에 내다놓고 포도덩굴아래 앉아있던 기또는
누울듯 의자등받이에 기대이며 웅범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는 눈을 쪼
프린채 웅범의 진속을 타진하듯 물었다.
《정말인가?》
웅범은 머리를 들지 못한채 다시한번 조아려보이였다.
《예.》
팔자수염을 기른 기또 마사오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피여올랐다.
《돈만 아는 놈인줄 알았더니 너도 네나름의 의리가 있구나.》
《황송합니다. 그간 나리님께 입은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185
《좋다. 나도 지금까지 너를 낚시동무로 대해왔다. 그래서 언제나 제
값보다 후하게 돈을 줬지. 오늘은 고기를 그냥 받겠다.》
기또는 자기의 등글개첩 유미를 불러 웅범에게서 고기를 받으라고 했
다. 기또는 큰 물고기 한마리를 꺼내 개한테 던져주었다. 말같은 사냥
개는 덥석 고기를 받아물고 그 자리에서 쩝쩝 먹기 시작했다. 웅범은 자
기의 수고와 노력이 모욕당하는것이 분하였으나 으리으리한 황금의
권력앞에 어쩌지 못했다. 기또는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의자에서 일어
났다.
《우리의 낚시질우정을 기념하여 너에게 무엇인가 기쁜 일을 해주고
싶다. 어떻게 해주어야 기쁘겠냐?》
웅범은 그 말에 다시 머리를 푹 숙이며 빌듯 말했다.
《나리님, 좋은 일자리 하나를 얻어주십시오.》
《무슨 일을 하겠냐?》
《기계를 돌리고싶습니다.》
웅범은 기술을 배워야 자기도 세도를 쓸것 같아 기대공이 되겠다고 하
였다.
《좋다, 지금 일공로동하는 해탄에서 마음대로 골라라. 소장이 주
선했다는것을 명심하고 내 명예를 더럽히지 않도록 해라.》
《예,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웅범은 젊은 시절에 조선사람으로서는 하늘의 별따기격인 해
탄압출기운전공이 될수 있었다. 웅범은 자기의 밥자리를 지키기 위해 틈
틈이 낚시질을 했고 잡은 물고기를 기또네 집으로 날라다 바쳤다.
어느날 웅범은 물고기를 가지고 기또네 집에 갔다. 호화롭고 커다란
기또네 집에는 등글개첩 유미가 혼자 있었다. 유미는 가까이에 다가서
면 온몸 솜털까지 그대로 다 빤히 들여다보일것만 같은 천으로 옷을 해
입고도 부족한지 하얀 젖가슴을 절반이상이나 드러내놓고있었다. 유
미는 텅빈 집에 혼자 있기가 여간 적적하지 않았던 모양이였다.
《총각, 오래간만이구만.》
유미는 웅범을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던것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유
미는 웅범이가 들고온 물고기꿰미를 받아놓더니 친절하게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얼마후 유미는 방금 랭동고에서 꺼낸 칼피스 한잔과
과자접시를 식반에 받쳐들고 나타났다. 웅범은 이때에야 유미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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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서 정면으로 처음 보았다. 살결이 뽀얗고 보동보동한 유미는 무
척 아름다왔다.
유미는 새물새물 웃더니 이렇게 물었다.
《총각, 고기를 살게 잡을수 있나?》
《예, 낚시에 걸렸다구 인차 죽는게 아닙니다. 얼마든지 산채로 가져
올수 있습니다.》
《좋아, 그러면 닷새후에 고기를 산채로 가져와. 내 값을 배로 줄테
니까…》
《예,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나하구 약속했어. 그리구 오늘은 다른걸 좀 도와줘.》
《예.》
《빨리 목욕물을 데워야겠는데 수도가 말썽을 부려서 그래.》
웅범은 유미가 바라는것이라면 황소라도 쥐구멍으로 끌 심정이였다.
유미는 웅범을 목욕탕으로 안내했다. 웅범은 이때에야 이 세상에는
보통사람들의 새색시방보다 열두배나 화려하게 꾸려진 목욕탕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벽면에 대문짝같은 거울이 몇개씩 붙어있고 욕조며 세
면대, 화장대, 의자 등 없는것 없이 다 갖추어진 목욕탕은 으리으리했
다. 스뎅도금을 한 수도꼭지가 제대로 닫기지 않아 욕조에선 물이 계속
넘쳐났다. 수도틀개가 마사져서 물을 막자면 할수없이 고무줄로 비끄러
매야 했다.
《수도꼭지를 바꿔야겠는데요.》
《망할것들, 전화했는데 어디 와…》
유미는 수도물을 멈춘것만으로도 만족해했다.
웅범은 안경쟁이 젊은 신사가 찾아오는 바람에 기또네 집에서 서둘러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웅범은 목욕탕 수도꼭지를 완전히 고쳐주지 못
한것이 못내 후회되였다. 웅범은 언젠가 제철소 수도과에 놀러 갔다가
기또네 목욕탕 수도꼭지와 꼭같은것을 본 기억이 났다. 웅범은 자기가
그것을 구해다 맞춰줌으로써 유미부인을 기쁘게 해주고싶었다.
웅범은 기또네 집을 퍼그나 멀리 떠나와서야 그곳에 자기 작업모를 벗
어놓고 왔다는걸 깨달았다. 보긴 허줄해도 그것이 없으면 래일부터
일할 때 야단이다. 기또네 목욕탕 수도꼭지를 손질할 때 창턱에 벗어놓
았었는데 덤벼치다 잊어버린것이다. 모자는 틀림없이 목욕탕 뒤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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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떨어졌든가 창턱에 그냥 놓여있을것이다. 하지만 이제 모자를
가지러 가기는 멋한노릇이였다.
(에라, 소뿔은 단김에 빼랬다구 수도꼭지를 얻어다 맞춰주고 모자
도 찾아오자. 수도꼭지가 큼직한 고기를 낚아낼 민지없는 낚시가 될지
알겠냐?)
웅범은 그길로 제철소 토목부 수도과에서 일하는 동무를 찾아갔다. 웅
범은 둬시간만에 수도꼭지 하나를 얻어가지고 기또네 집으로 다시 갔다.
《주인님 계십니까?》
현관에는 빨간 자주빛의 남자신발 한컬레와 녀자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나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웅범은 왔던김에 모자라도 찾아가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목욕탕이 있
는쪽 뒤울로 갔다. 집모퉁이를 돌아서니 목욕탕창문아래 땅바닥에 떨어
져 딩구는 모자가 보였다. 웅범은 모자를 주으려고 목욕탕창문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목욕을 하는중인지 목욕탕에서 물소리가 나더니 유미
의 간드러진 말소리가 들렸다.
《아이, 아파… 좀 살살 밀지 않구…》
뒤이어 남자의 궁글은 소리가 났다.
《옥상두… 살살 밀면 간지럽대, 빡빡 밀면 아프대…》
목욕탕안에서 울리는 남자목소리의 임자는 얼마전에 찾아왔던 그
안경쟁이신사가 틀림없었다.
웅범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욕조안에
벌거벗고들어가 앉아있는 두 남녀의 몸뚱이가 들여다보이고 서로 주고
받는 말소리가 울려나왔다.
《아이, 아프다는데… 소상이 이젠 제법 녀자를 다를줄 안단 말이야.
우리 령감태긴 아직 한주일은 있어야 돌아와.》
《그러면 옥상을 만날수 있는 행운이 이번주에 한번은 더 차례지겠는
데요.》
《날 자꾸 찾아오면 미래의 인사과장 마님이 좋아해?… 아야야…》
시퍼런 대낮에 욕조안에 들어앉아 남의 계집을 희롱하는 사내는 제철
소 총무부인사과의 송가였다.
(개같은 쌍년이로구나.)
웅범은 목욕탕 창밑에 떨어진 모자를 집어들고 돌아서며 무엇엔가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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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당한듯 한 심정으로 저 혼자 유미를 욕했다. 하지만 웅범이 아무리 분
개하고 죽어라 된욕을 해도 그것은 하늘에 주먹질하기였다. 발짧은
그 욕이 유미의 귀에 닿을리 없었고 설사 가닿는다 하더라도 쉰살이 넘
은 늙다리남편한테 불만족인 그의 욕정을 감소시켜주거나 도덕적으로 그
를 개준시켜줄리 없었다.
웅범은 유미가 물고기를 산채로 잡아오라 하던 그날 기또네 집에 다
시 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웅범이 나무통에 물을 담아 붕어며 잉어를 넣
어가지고 기또네 집앞에 이르렀을 때 대문밖으로 안경쟁이신사가 나왔
다. 전번에 보았던 인사과의 그 송가란 녀석이였다.
그날도 유미는 집에 혼자 있었다. 밖은 밝은 대낮이였으나 방안에는
방금전에 깃들었던 야밤의 환락이 구석구석에 쪼박으로 남아 아직 냄새
를 진하게 풍기는것 같았다.
헝클어진 머리를 손질도 하지 않은채 앞가슴을 반나마 풀어헤치고 나
른해 긴의자에 앉아있는 유미를 보았을 때 웅범은 골려주고싶은 충동이
북받쳐올랐다.
《옥상, 미래의 인사과장님이 댁에 자주 오십니다.》
《주인과 인간적으로나 사업상으로나 가까운 사이니까…》
《예, 그래서 소상은 옥상과 목욕까지 같이하는 특권을 누리누만요.》
《뭐라구? 누굴 놀리는거야?》
유미는 대번에 얼굴이 빨개져 소리쳤다.
《놀리다니요. 전번날 수도꼭지 얻어갖구 왔다가 내 눈으로 봤는데
요.》
《망할자식, 경찰을 부르겠어.》
《부르시지요. 전 기또 마사오소장님께 모든걸 사실대로 말씀드리
겠는뎁쇼.》
웅범이 능글거리며 반기를 들자 오히려 겁에 질린것은 위협하던 유미
였다. 유미는 발딱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안길듯 웅범이앞으로 다가와 팔
목을 꼭 붙들었다.
《총각, 우리 화해하자구. 내 총각을 섭섭하게는 해주지 않을테니까.》
이 순간부터 웅범의 도덕적타락이 시작되였다고 할수 있었다. 패륜과
타락의 감염력은 무서운것이였다. 문둥병을 치료하던 의사자신이 몹
쓸 그 병에 걸리는 경우가 있는것처럼, 돈을 빨아내기 위해 자기보다 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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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아래인 부자집 자식을 붙들어놓고 고기덩어리의 향락을 즐기는 유
미를 규탄하는 립장에 서있던 웅범은 힘들게 일하니보다 유미한테서 자
기도 공짜로 돈을 좀 벌어야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다. 군것질을
눈감아주는 값으로 술이며 담배, 용돈을 받아내는 재미에 틈틈이 유
미를 찾아다니던 웅범은 어느날 건달을 부리다가 압출기를 레루에서 탈
선시키는 엄중한 사고를 빚어냈다. 해탄과장은 당장 일자리를 뗀다고 야
단이였고 공장헌병대에서까지 오라가라 하였으나 웅범을 살려준 사람은
천만뜻밖에도 인사과의 젊은 안경쟁이였다. 인사과장자리를 꿈꾸며
유미의 욕정을 만족시켜주느라 돈뭉치까지 들고 찾아다니던 그 젊은 안
경쟁이는 제철소 소장의 특별지시라면서 웅범이가 계속 압출기를 탈
수 있게 해주었다. 웅범은 총무부 인사과의 송가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
랐다.
이무렵 알뜰이네 집에서는 불상사가 꼬리물고 일어났다. 로동재해
로 알뜰의 어머니가 다리를 짤리우더니 산후탈로 덜컥 세상까지 떠났다.
알뜰의 어머니는 혈육의 정을 그리워하던 웅범에게 있어서 생활의 유일
한 의탁점이였었다.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다 고아의 설음만을 잔뜩 안
고 찾아가면 알뜰의 어머니는 죽은 동생을 생각하며 눈물흘리였고 그의
자식들은 《외삼촌》, 《외삼촌》하면서 반겨주었다. 알뜰이네 집안
식구들의 따뜻한 인정은 고아의 쓰라린 눈물로 얼어든 웅범의 가슴을 녹
여주었으며 웅범이가 게걸포를 저주하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주저앉아 살
게 하는 생활의 유일한 기쁨의 원천이기도 했었다.
빚때문에 알뜰이가 돈에 팔려 시집가게 된다는걸 알았을 때 웅범은 참
지 못했다. 건달기는 있어도 의리가 강한 웅범은 자기가 지금까지 뼈아
프게 체험한 고아의 설음을 생각해서라도 알뜰이네를 도와야 한다는 충
동을 느끼였다.
웅범은 더 생각할사이없이 인사과의 안경쟁이 송가를 찾아갔다.
《나리님,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웅범은 돈이 많고 인정 또한 작지 않아보이는 안경쟁이 송가한테 돈
을 좀 꾸어달라고 딱한 사정을 한참이나 호소했다.
《돈이 필요하단 말이지?》
멸시로 싸늘해졌던 그의 입가에 한줄기 가느다란 미소가 떠돌더니 눈
에 이상한 광채가 번쩍했다. 돈이라는 말마디가 그의 눈에 지펴놓은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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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바람난 고양이눈의 야생적이며 육욕적인 광채와 너무나 흡사했다.
웅범은 인사과의 안경쟁이가 조선말을 하는 바람에 펄쩍 놀랐다.
그가 조선사람이라는것을 알고서는 더욱 그랬다. 그는 웅범을 빤히
쳐다보며 몇번이고 머리를 까닥거리더니 당장 돈을 줄수는 없어도 자기
가 소개하는 돈주머니한테 장가들라고 했다. 그가 소개한 녀자는 자기
의 배다른 누이동생 송설자였다. 웅범은 송설자가 자기보다 다섯살이나
손우이며 곱사등이라는것을 알고 펄쩍 뛰였다.
웅범을 노려보던 송표는 쓰겁게 뇌이였다.
《너무 응석을 받아주었더니 네 처지를 까맣게 잊어버렸구나. 네가 유
미부인한테 용돈 뽑아내러 다니는걸 알고 당장 없애치우려다가 네 노는
꼴이 아무때건 써먹을데 있을것 같아 지금까지 살려두었어.》
그의 위협에는 등골이 오싹해지다못해 온몸을 빳빳이 얼게 하는 차고
독한 기운이 있었다. 웅범은 이때에야 송표의 덫에 자기가 든든히 걸렸
음을 깨달았다. 송표가 압출기사고를 낸 웅범을 살려준것은 유미와
자기의 관계를 눈감으라는 단순한 회유가 아니였었다.
웅범은 고민끝에 곱사등이 설자한테 장가들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첫
째로, 자기 한몸을 희생하면 어머니잃고 불쌍해진 알뜰이네를 도와줄수
있다는 타산과 리유때문이였다. 웅범은 지금까지 자기를 위해주던 알뜰
의 어머니 은정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리와 자신이 체험해온 고아의
괴로움을 생각해서라도 어머니잃은 알뜰이네 남매들을 도와야 한다는 의
협심을 버릴수 없었다. 둘째로,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보자, 살
다가 싫으면 녀편네 버리고 도망치면 될게 아니냐.》하는 배심때문이였
다. 셋째로 별로 품을 들이지 않고 쉽게 돈과 재산을 벌어보자는 횡재
욕때문이였다. 횡재를 꿈꾸는 이 갈망과 지향은 웅범이 송설자한테
장가들기로 결심한 여러가지 리유와 타산중에서 가장 기본적인것이였으
며 그의 주되는 인생관의 하나이기도 했다.
황금이 사람마저 죽이며 살린다는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웅범은 자신
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재물을 하나도 모을수 없다는것도 뼈아피 깨달았
다. 그때부터 웅범은 횡재를 바라게 됐다. 일하기가 싫어지고 낚시질에
재미를 붙이게 되면서부터 웅범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낚시로 고기를 낚듯 돈도 낚을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큰 고기를
잡으려면 낚시질의 묘리를 알아야 하고 인내력이 있어야 하지만 요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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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바라지 않으면 안된다. 인생 역시 그렇다. 욕망과 노력만으로 어쩔
수 없는 고달픈 삶이다. 노름에선 손속이 좋아야 하고 인생은 번호가 맞
아야 한다. 행운의 기회란 쉽사리 차례지지 않고 사람들은 차례진 그 기
회마저 놓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웅범이여서 송표가 곱사등이 자기 누이한테 장가들라고 했을 때
오강뚜껑으로 뜨물 마시는 기분이면서도 이런 결심을 하게 됐다.
(병신이 아니라면 어느 돈많은 녀자가 나한테 시집오겠다고 하겠는가.
돈을 보고 곱추한테 장가든다는건 부끄러운 일이여도 가난한 나한테는
일생에 단 한번밖에 차례질수 없는 커다란 행운의 기회이다. 아무래도
매맞을바에는 은가락지 낀 손에 맞으라고 했는데 돈이 제일인 이 세상
에서 우선 돈부터 벌고보자.)
웅범은 송설자와의 결혼문제를 두고 자기나름으로 따져보고 여러모로
재보았지만 송표가 자기의 정부일뿐아니라 비밀상급인 유미한테서 《병
신누이를 똑똑한 사람한테 주기는 그른이상 돈많은 반편보다 가난해도
똑똑한 사람을 매부로 고르라.》는 과업을 받았다는것 그리고 이 과업
이 일본해군성 방첩거물들의 의사와 어떻게 결부되여있는가 하는것을 알
지 못하였다. 그리고 유한 부인인 유미가 매달 일본해군성 아시아국의
특수지령을 받고있으며 총독직속경제조사과의 비밀요원이라는것을 알리
없었고 타산하지 못하였다.
장인은 웅범에게 밥술이나 먹을수 있는 가산을 넘겨주며 이렇게 말하
였다.
《내 자네를 사위로 고른것은 자네한테 떨거지들이 없기때문이네. 내
얼마든지 자네 한몸은 남부럽지 않게 해줄수 있으니 멀건가깝건 친척들
과 이제는 인연을 끊게. 돈을 쥐게 되면 별게 다 아는체를 하구 있는지
없는지 알수 없던 사돈의 팔촌들두 세상 가까운 친척처럼 궁둥이를 들
여미는 법이야.》
웅범이가 바라고 타산했던 모든것은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웅범은 알뜰이네 가정에 닥쳐온 불행을 자기 힘으로 꼬물만큼도 덜어줄
수 없었으며 그네들은 눈물겹게 잘라낸 용돈을 가져다주어도 별로 반가
와하지 않았고 랭대하며 멸시하려들었다.
자식들이 태여나게 되면서부터 웅범은 마깝지 않으면 녀편네를 버리
고 도망치겠다던 배짱도 사그라들고말았다. 웅범은 밥술이나 먹을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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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였지만 장인과 녀편네의 돈을 그림속의 떡처럼 쳐다보지 않으면 안
되였다. 웅범은 자기의 도덕적파멸이 괴로왔으나 점차 돈맛을 알게
되면서 그 아픔을 잊게 되였으며 지금까지 멀게 대해오던 생활에 점차
순응하기 시작했다.
(권세없고 돈없으면 못사는 이 세상이다. 두주먹만 가지고 태여난 사
람은 어차피 자기보다 힘있고 돈있는 사람한테 업혀살기마련이다. 어려
서는 부모한테 그리고 늙어서는 자식한테 의지해사는것이 어쩔수 없는
인간생활 아닌가. 고아의 괴로움은 자기 삶의 의탁점이 없는데 있다.)
해방과 함께 급변하기 시작한 새생활의 파도는 의리와 도덕에서 탈선
된 자기자신에 대한 가책과 모대김이 이제는 앙금처럼 가라앉아 굳어진
웅범의 생활에도 미쳐왔다. 덕지덕지 딱지 앉아가던 묵은 종처를 쑤셔
놓는 새생활의 아픈 타격은 친조카나 다름없는 억봉이한테서부터 가해
지기 시작하였다.…
웅범은 석탄가루가 묻은 작업복차림으로 손기척도 없이 차지훈의
방에 들어섰다. 저물녘의 해빛이 창문으로 흘러드는 사무실에는 지훈이
마침 혼자 앉아있었다. 지훈은 책상우에 펴놓은 도면을 들여다보며
숙인 머리를 들지 않았다. 지훈의 어진 성미와 착한 마음을 잘 아는 웅
범은 첫마디부터 두덜거렸다.
《석탄을 실어내다 걸려서 왔수다.》
지훈은 도면에서 눈을 뗐으나 생각은 아직 도면속의 동그라미며 크고
작은 각종 모형과 선들에 포로되여있었다. 지훈은 웅범을 알아보고
자리를 권했지만 웅범은 장갑도 벗지 않고 방 한가운데 버티고서서 게
정을 부리였다.
《전표 없다구 어디 추가된 석탄을 내가게 합디까?》
《아, 주택들에 공급할 월동용석탄 말이군요.》
지훈은 그제야 머리를 끄덕거렸다. 추가된 월동용석탄중에는 겸이
포제철소 기술부장이였던 야마다한테 줄것이 들어있다. 그한테 월동
용석탄을 공급할데 대한 문제는 이미 공장위원회위원장 선우치담과
토의되고 합의되였다.
《왜 못 내가게 합니까?》
지훈은 얼마전까지 들여다보던 도면의 수자와 부호들이 아직도 머리
속에 맴돌고 눈앞에서 아물거려 천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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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었다.
《추가전표가 없어서 그런다지 않습니까?》
웅범은 벌컥 화를 냈다. 파란곡절 많은 생활속에 웅범은 어떤 사람한
테는 화를 내고 두덜거려야 하며 어떤 사람한테는 굽신거리며 빌붙어야
하는가를 배웠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고 그의 반발은 효과적이였다.
《아, 전표 말인가요? 아직 어느어느 집에 실어가지 못했습니까?》
선잠 깬것 같던 지훈의 표정은 찬물로 세수를 하고난것처럼 단번에 달
라졌다.
《바로 나리님네 집에 실어가다 걸렸지요.》
웅범은 갑자기 말투가 공손해지면서 지훈을 높이였다. 웅범은 이런 경
우에 상대방을 높이며 낮추붙는것이 보다 효과적이라는것을 자신의
지난날 생활경험을 통해 잘 알고있었다.
《아니, 말씀을 낮추십시오. 이거 정말 안됐습니다. 우리 집 석탄때
문에 고생을 하누만요.》
지훈은 미안해 어쩔줄 몰라했다. 지훈은 웅범에게 몇번이나 사과를 하
고나서 자초지종을 거듭 캐여물었다.
《그러니까 석탄을 아직 야마다네 집에 실어가지 못했겠습니다?》
지훈은 연필등으로 책상을 똑똑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물
었다.
《예.》
웅범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머리까지 끄덕여보이였다.
《우리 집에 실어가댔다는 석탄을 우선 야마다네 집으로 돌리십시
오.》
《석탄을 제철소밖에 내가야 돌리든지 굴리든지 하지요.》
《그건 제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지훈은 웅범이가 바라던대로 북문초소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통을 들
고 된벼락을 내릴줄 알았던 지훈은 사정하듯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북문초소입니까? 제 기술대표위원 차지훈입니다. 아, 박알뜰동무입
니까? 어떻게 거기에 와계십니까? 예, 다름이 아니라 단속했던 석탄
을 좀 내보내달라구 전화를 걸었습니다.》
물렁팥죽같은 차지훈의 말에 수화기에서는 알뜰의 대답이 또박또박 울
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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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대사람이 지금 없습니다.》
웅범은 가만있지 못했다.
《아닙니다. 내가 여기 올 때 억봉이녀석이 있었습니다. 욕먹겠으
니까 없다구 피하는거지… 아야 버릇 떨어지게 다그라요.》
지훈은 웅범의 말이 송화기로 들어갈가봐 얼른 손바닥으로 가리웠다.
송화기를 가리운채 한참이나 가만있던 지훈은 웅범의 독촉에 어쩌지 못
해 딱한 표정으로 사정하듯 말했다.
《자위대장동무가 오게 되면 잘 말해주십시오. 위원장동무가 지금 도
에 출장가고 없어서 그러니 이미 다 토의되고 결론된 문제라고 말입니
다. 다른것들은 후에 전표를 뗀다 해도 지금 단속한 석탄을 빨리 내보
내라구 말입니다.》
제철소구내안에서 물건들을 내가자면 공장위원장의 수표를 받아야 한
다. 위원장 출장기간 그의 사업을 차지훈이 대리하고있었고 또 지금 후
생대표위원사업까지 겸해보고있다. 지훈은 추가된 석탄 여섯자동차를 지
체시키지 말고 곧 내보내라고 지시할수도 있었으나 그중에 자기 집으로
갈 석탄이 들어있어 그러지 않았다. 지훈이 송수화기를 놓기 바쁘게 웅
범은 그앞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아니, 그럼 나머지 석탄 다섯차는 어떻게 합니까?》
《그건 위원장동무가 온 다음에 전표를 뗍시다.》
웅범은 더욱 화만 나가지고 자동차를 세워놓은 곳으로 돌아왔다.
북문초소에는 자동차를 지키는 사람처럼 알뜰이가 서있었다. 웅범은 애
매한 알뜰이한테 밸풀이를 하듯 노려보고나서 자동차로 다가섰다. 알뜰
은 딱해 어쩔줄 모르더니 사정하듯 조용히 물었다.
《외삼촌, 좀 있으면 억봉이가 오겠는데 그때 가면 안되나요?》
알뜰의 말에 웅범은 벌컥 화를 냈다.
《뭐라구? 너희들은 어쩌자구 나한테 그렇게 악사냐? 기른 개 발뒤축
을 문다더니 그래 너희들은 쌀 한줌이라도 날라다 먹인 공을 갚지는 못
할망정 그래 나를 물어뜯어 망하게 할셈이냐?》
웅범은 무섭게 욕설을 퍼붓고나서 자동차에 올랐다. 웅범은 버릇없는
억봉이며 물렁팥죽같은 차지훈을 줴박는 심정으로 자동차철문을 쾅
닫고나서 야마다네 집으로 차를 몰았다. 야마다의 처가 연방 고개를 갑
삭거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야마다가 달려나와 손목을 잡아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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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혀라도 뽑아줄듯 그러는 바람에 웅범은 거기서 술까지 대접받고 밤
저녁이 되여서야 야마다네 집을 떠났다.
(해방은 해방이로구나. 야마다가 나한테 굽신거리구…)
야마다네 집에서 얻어먹은 술 몇잔으로는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히
기 어려웠다. 웅범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길가의 단골 내외술집앞에
차를 세우고 다시 한대포 한 후 자정때 집에 들어섰다. 집에서는 송표
가 기다리고있었다.
《괜찮구만, 약주만 마시구…》
송표는 올방자를 틀고 방안에 들어앉아 양담배를 피워문채 빈정거렸
다. 웅범은 송표얼굴에 술내를 확 끼얹으며 그앞에 앉아 담배갑에 손을
내밀었다.
《래일부터 차를 세우구 정비해. 아버지가 이제 해주루 장사 가겠
대.》
웅범은 아니꼽게 뇌까리는 송표의 말에 정신이 펄쩍 들었다. 장인은
오래전부터 금, 은붙이들을 모아들이며 가산을 정리했다. 웅범은 장
인의 이번길이 단순한 장사길이 아니라 남으로 나가려는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웅범은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채 송표의 얼굴을 빤히 쳐다
봤다.

알뜰은 웅범이 성이 나서 욕설을 퍼붓고 돌아가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 각별히 자기를 위해주던 웅범이였고 어린시절에 친외삼촌이
상으로 따라다니던 알뜰이였다. 알뜰은 동생을 찾아왔다가 애매한 두
꺼비 떡돌에 치웠다는 억울한 생각보다도 억봉이가 버릇없이 놀아 라웅
범과의 친외삼촌 못지 않는 정을 깨버리는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웅범을 생각하면 억봉을 욕해야겠지만 공장재산을 지키려는 억봉을 나
쁘다고 할수도 없었다. 알뜰은 앓는 준길삼촌을 위하려고 봉급대신
콕스를 받아와 그를 노엽히던 일이 지금도 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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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기봉이와 석봉에게 줄 칼을 가지러 갔
던 억봉은 그대로 알뜰에게 화를 냈다.
《누이 정신이 있어? 반출전표없이 왜 내보내냐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하니, 차지훈이 전화로 내보내라는데…》
《누인 왜 차지훈의 말이라면 아직두 귀가 항아리만 해 그래?》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알뜰은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였다.
《무슨 말이 뭐야? 지금 도적놈들이 공장물건 얼마나 내가는줄 알아?
어제두 모타를 3대나 채서 배에 싣구 달아나던 불량배들을 해상자위소
대에서 붙들었단 말이야. 오늘 해주에서 야미쌀 싣고온 장사배를 단속
했는데 그 장사군들이 여기 와서 쌀 판 대신 콕스를 가져갈 꿍꿍이를 하
구있단 말이야. 뭐, 누인 세상 돌아가는거 알기나 해? 자위대 아닌
누이한테 초소를 봐달라 하구 자리 뜬 내가 잘못이지… 원, 원…》
억봉은 자기 말이 누이한테 지나치다는걸 모르지 않았으나 참지 못했
다. 억봉은 준길삼촌이 희생된 후 심중해지고 말이 적어진 반면에 어떤
점에서는 더 거칠어졌다. 그의 가슴에서는 삼촌을 죽인 원쑤들에 대한
복수의 일념이 강하게 불타고있었다.
알뜰은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서서 항변하듯 입속으로 《뭐, 내가
차지훈의 말이라면 아직두 귀가 항아리만 해 듣는다구?》 하고 저 혼자
곱씹었을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참만에 머리를 들어 억봉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동생에 대한 노여움과 원망이 눈물로 그렁그렁
고이였다. 알뜰은 분기가 삭지 않아 아직 불찌처럼 이글거리는 억봉의
두눈이 자기쪽으로 향하는 순간 급히 외면하며 자위대사무실을 뛰쳐나
왔다. 억봉의 말마디들은 십년 들었던 정이 하루아침에 뚝 떨어져나가
게 차겁고 매웠다.
알뜰은 기봉이와 석봉을 바래주러 역에 나가지 못했다. 밤새 잠도 들
수 없었다. 알뜰은 날이 밝은 뒤에도 밥지을 생각마저 잊은채 멀뚱멀뚱
천정만 올려다보며 자리에 누워있었다.
어뜩새벽에 선창으로 김장에 넣을 비린것을 사러 나갔던 작은어머니
가 문을 열고 들어서며 근심스럽게 말했다.
《얘, 너희 외삼촌이 어제 저녁에 야마단지 뭔지 하는 일본고관네 집
에 석탄을 실어다주었다누나.》

197
《예?》
알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자 선창에 갔다가 북사택에서 온 늙은이한테 들었는데 그 소문이
벌써 짜하게 났더라.》
작은어머니는 라웅범이 무슨 민족반역행위라도 한것처럼 생각되는
지 자못 불안스러워했다. 알뜰은 무엇인가 부닥치는 예감이 있어 그길
로 북사택을 찾아갔다.
제철소에서 주택을 배정하던 때 이웃에 살던 집이 북사택으로 이사를
갔다. 그 집은 야마다네와 이웃하고있었다. 알뜰은 그 집을 통하여 갈게
촌으로 쫓겨났던 야마다네가 해방전에 살던 자기네 집으로 얼마전에
다시 옮겨왔으며 어제 저녁에는 라웅범이 석탄을 실어왔다는걸 알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알뜰은 우정 야마다네 집앞을 지나
갔다. 해방전부터 살댔다는 야마다네 집 석탄창고에는 석탄이 한가득 쌓
여있었고 채 거두지 못한 그 주변에는 자동차바퀴자리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제철소로 향하는 알뜰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차지훈은 어제 이 야마다네 집에 석탄을 가져다주려고 전화를 걸었단
말인가. 알뜰은 줄곧 이 한가지 질문만을 곱씹었다. 알뜰은 어제 저녁
동생이 경비실에서 차지훈이 말이라면 왜 그렇게 귀가 항아리만 해서 잘
듣냐고 모욕주던 말마디가 귀에 쟁쟁 살아났다. 알뜰은 자기 가슴에 예
리한 칼날처럼 들어박히여 밤새 괴롭히던 동생의 말이 얼마나 옳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동생에 대한 노여움이 해빛아래 살얼음처럼 소리
없이 풀리는것이였다. 그 대신 새로운 분노가 가슴가득 괴여오르면서 온
갖 불만의 창끝이 차지훈에게로 향해지는것이였다. 추운 날이 바득바득
다가오는데 아직 겨울나이준비를 못한 세대가 거리에는 얼마든지 있었
다. 젖먹이어린애들과 움직이기 어려운 늙은이들이 잘못하다간 이해 겨
울에 집안에서 동상을 입어야할 형편이다. 차지훈은 수백세대의 이
모든 사람들을 외면하고 어떻게 야마다한테 월동용석탄을 공급할수
있으며 그가 옛날에 살던 집을 그대로 줄수 있는가.
분한 생각때문에 어제 자위대사무실을 뛰쳐나왔던 알뜰은 이른아침 제
스스로 억봉을 찾아갔다. 하루밤사이에 그의 모습은 무척 늙고 맥빠져
버린것 같았다. 푹 꺼진 두눈에는 고민의 빛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198
고열에 시달리는 열병환자처럼 알뜰은 입술이 마르고 까실까실 트기까
지 했다.
억봉은 풀이 죽어 나타난 누이를 보고 아연했다. 억봉은 백여명 넘
는 자위대원들이 두눈에 불을 켜고 밤낮으로 지키건만 어떻게 된 일
인지 온갖 협잡군들이 제철소에서 공장물건을 계속 내가는데 화가 나서
어제 자위대원도 아닌 누이한테 활쏘듯 말했었다. 그 말마디들이 누이
한테 그처럼 커다란 충격을 주고 가슴에 아픈 못을 박게 될줄 억봉은 몰
랐다.
자위대사무실안에는 억봉이 한사람뿐이였으나 알뜰은 문가에 어색
히 서있었다.
억봉은 서리맞은 호박잎처럼 하루새에 생기를 잃어버리고 주눅든
누이의 모습을 놀랍게 바라보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억봉은
적산으로 몰수한 보위색군복을 입고 다리에 각반까지 친데다 어디서 군
화까지 한컬레 얻어신어 자못 어마어마한 차림이다. 날파람있는 동작으
로 누이앞에 다가선 억봉은 다짜고짜로 그의 손을 잡았다.
《누이, 내 어젠 너무했어.》
억봉이 사과를 하자 알뜰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네 말이 맞았다.》
알뜰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그의 표정은 침착했다.
《누이 뭘 그래, 내가 잘못했다는데…》
《아니라는데… 내가 잘못했다.》
알뜰은 서글픈 표정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알뜰의 푹 가라앉은
침착한 표정과 조용조용한 어조는 호된 채찍처럼 억봉의 마음을 아프게
후려갈기면서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억봉은 가정에서 돌이킬수 없는
커다란 불행을 당하고 큰일을 치른 녀인의 표정으로 서있는 알뜰을 보
자 마음이 약해졌다.
《누이, 내 못된 성미 알지 않아. 그래서 내 누이한테 생각없이 마구
아픈 말을 한거지…》
《아니라는데…》
알뜰은 단호한 어조로 억봉의 말허리를 자르며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
다. 지금까지 잠에 취한 사람처럼 풀려있던 그의 얼굴근육은 긴장되였
고 자책으로 흐려있던 두눈에는 광채가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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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항아리만 하다는 네 말이 옳다. 어제 외삼촌이 야마다네 집으로
석탄을 실어갔더구나. 차지훈이 내보내라구 전화건 그 석탄을 말이다.》
《뭐, 야마다네 집에?》
억봉은 대바람에 얼굴표정이 바뀌며 나꾸채듯 물었다.
《내 눈으로 봤다.》
《정말이야? 야마다새끼네 집에 석탄을 실어갔단 말이야?》
억봉은 분노로 이를 갈았다. 억봉은 철부지 어린시절에 본 야마다의
독기어렸던 그 얼굴을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잊을수 없었다.

…박씨네 무덤자리에 용광로가 들어앉던 때 함께 건설에 착수한 탄


화실 50기에 일산 450톤능력의 월포트식해탄로는 청부업자들의 협
잡으로 10년이 못되여 기초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대륙침략을 준비하
던 일본의 군벌들은 미쯔비시재벌에게 아무리 손해가 막심하더라도 대
포와 땅크, 군함제조에 필요한 철강재를 얻기 위해서는 새 해탄로를 세
워 야금용콕스를 생산하여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전쟁준비책동의 일환
으로서 겸이포제철소에는 새 해탄로 건설공사가 벌어지게 되였다.
1928년 3월 2일에는 일산 220톤능력의 월포트식 2호해탄로가,
1930년 11월에는 일산 350톤능력의 월포트식 3호해탄로가 일떠섰다.
일제는 일본의 제철공업을 합동하여 일본제철주식회사를 창설하고
겸이포제철소를 그 휘하에 넣었다. 낡은 해탄로를 털어버린 자리에
1937년 5월에는 탄화실 35기를 가진 일산 310톤능력의 구로다식해탄로
를 세웠으며 그해 10월에는 또다시 310톤능력의 4호해탄로를 세웠다.
바로 이 시절에 억봉은 소년잡부로 해탄로공사에 동원되였다. 억봉이 야
마다를 알게 된것은 이때였다. 억봉은 어느날 밥을 가지고 아버지와 삼촌
이 함께 일하는 배송장에 간적이 있었다. 넓다란 배송장건물안에는 흐
린 날도 아니고 지붕이 새는것도 아닌데 천막 비슷한 커다란 풍이 쳐져있
었다. 집안에 천막같은것이 있는것도 이상했지만 그 풍밖에서 구멍으로 정
신없이 그안을 들여다보고있는 두사람의 행동 역시 수상쩍었다. 저안에 무
엇이 있길래 몰래 곡마단 구경하는 아이들처럼 어른들이 저렇게 들여다볼
가. 억봉은 소년다운 호기심이 부쩍 동해 배송장안으로 들어섰다.
드리웠던 천막 후장이 들리더니 버쩍 메마르고 키가 꺽두룩한 일본인
이 풍안에서 나왔다. 풍막안을 들여다보던 두 로동자는 일본인기사가 자

200
기들옆에 다가서는것도 알지 못하였다. 일본인기사는 장갑을 벗더니 그
두사람한테 다가서며 고함을 질렀다.
《이 자식들이?!》
그는 기름묻은 장갑으로 두 로동자의 얼굴을 각각 후려갈겼다. 두 로
동자의 얼굴에는 기름장갑에서 묻어난 손가락자리가 났다. 억봉은 이때
에야 일본인기사한테 매맞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준길삼촌임을 알았
다. 이때 일철주식회사 빠찌문양이 새겨진 검은 옷을 입은 일본인현장
감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감독은 뭘하는거야. 저놈들한테 버릇을 가르쳐.》
일본인기사는 현장감독한테 거만하게 호령했다.
게다짝을 달달 끌고 기사앞에 나타난 일본인현장감독은 욕먹은 벌충
을 하려는지 다짜고짜로 아버지와 삼촌의 따귀를 갈기였다. 억봉은
퍽 후날에야 배송장안에 쳐놓은 천막속에는 뜯어놓은 배송기가 들어있
었으며 아버지와 삼촌이 천막밖에서 그안을 들여다본것때문에《기술
을 도적질하댔다.》는 죄명을 쓰고 매맞았다는것을 알았다. 멸시와
조롱에 찬 미소를 머금고 입에 권연을 문채 거만하게 서서 매맞는 아버
지와 삼촌을 바라보던 그 일본인기사가 야마다였다. 그후 야마다는
제철소안에서 세도가 당당한 기술부장노릇까지 했다.…
《네가 그런짓을 하댔구나.》
억봉의 분노는 지훈에게로 향해졌다.
《누이, 내 가서 당장 석탄을 실어오겠어. 가져다 대동강물에 처넣으
면 처넣었지 그래 일본놈새끼한테 줘?》
억봉은 당장 야마다네 집으로 갈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날
억봉은 자위대원들을 앞세운채 야마다네 집으로 찾아갔고 자기의 말처
럼 그 석탄을 회수하여 제철소로 실어왔다.

《차선생! 무슨 일을 그렇게 처리하시오?》


도에 회의갔다 돌아온 공장위원장 선우치담은 소란스러워진 월동용석
201
탄공급문제를 두고 빈정거리듯 물었다.
차지훈과 단둘이 있을 때면 언제나《차군》하든가《자네》라고 부
르던 치담이다. 선우치담이 교편을 놓은지는 20년이 되여오지만 차
지훈과 사사로운 일에서는 사제지간의 관념이 강하게 앞선다.
선우치담은 제철소 운영동지회를 해산하고 새로 공장위원회를 조직하
던 때 차지훈을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 나누며 이렇게 말한적이 있었다.
《옛날부터 훈장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했지. 그건 훈장들 속이 그
만큼 타고 상한다는 소리야. 훈장중에서도 못해먹을건 소학교 훈장이지.
체통 큰 어른이 코흘리개들 보고 밤낮 왝왝거리면서 싸우기란 정말 싱
겁고 맥빠지는노릇이야. 힘든 그만큼 보람 또한 크구 얻어놓은 영예가
오래 간다고 할수 있지. 중학교 훈장이나 대학선생은 소학교 훈장보다
일해먹긴 편해도 먼 후날 제자들이 자기보다 출세해가지고 찾아오면 먼
저 자리에서 일어나 절하며 맞아야 한단 말이야. 하지만 소학교 훈장은
자기 제자가 도지사쯤 출세해가지고 찾아와도 방안에 올방자를 틀고앉
아 문턱을 넘어서는 옛 제자한테 〈너 아무개 왔냐?〉하지.》
차지훈은 그때 선우치담이 거나해서 하던 이 말을 아직 기억하고있었
다. 이 말은 차지훈이 자기를 잘 공대해야 한다는 점잖은 귀띔이였고 또
자기가 아래사람인 지훈을 하대한다고 해서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어
그러지지 않는다는것을 은근히 암시하는 일종의 훈시였다. 그런 선우치
담이 오늘 자기 사무실에 단 둘이 조용히 앉아 지훈을 비꼬느라 깍듯이
《선생》이라고 부르는것이다.
지훈은 선우치담이 앉아있는 으리으리한 사무용책상과 T형으로 놓인
응접탁앞에 그와 모꺾어앉아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였다.
구내기관차가 지나가며 길게 기적을 울리였다. 기관차의 동음이 왼쪽
에서 들려온 후 오른쪽으로 멀어져가는것으로 보아 제선지구에서 강철
지구나 해탄구역쪽으로 향하는 차다. 기적소리에 놀라기라도 한듯 갑자
기 어디선가 꽝꽝 철판을 두드려대는 소리가 멀어져가는 기관차의 동음
에 섞여 선우치담의 사무실 유리창문을 흔들었다. 자개를 박아 옻칠을
올린 까맣고 윤기나는 길다란 응접탁 한쪽모서리만 내려다보고있던
차지훈이 머리를 들었다.
《선생님, 전 설계를 하든가 현장기술자노릇을 해야지 후생사업이
나 행정사무같은것은 아무래도 맡을 재목이 못됩니다.》

202
차지훈이 게면쩍어하며 하는 말에 선우치담의 대답은 면도칼로 자르
듯 단호하고 예리했다.
《그렇소.》
선우치담은 책상에 기대여 앞으로 숙이였던 몸을 뒤로 젖혀 회전의자
등받이에 기대여앉으며 의자팔걸이에 두팔을 올려놓더니 그 무슨 령감
의 계시라도 받듯 두눈을 쪼프린채 천정을 바라봤다. 면도발 퍼런 조개
턱을 번쩍 쳐들고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문채 한참이나 천정을 올려다보
던 선우치담은 차지훈쪽으로 눈길을 돌리였다.
《어느 책에선가 난 이런 글을 본적 있소. 〈싸움마당에서 죽지 않고
영웅이 되려거든 군의가 되고 평화시절에 영웅이 되려거든 후생일군이
되라.〉 참 그럴듯한 말이요. 난 차선생이 이 말의 의미를 하나도 모르
고있으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것을 오늘에야 놀랍게 알게
됐소. 현단계 우리 제철소에서 기본은 공장을 지키는 자위대일과 후생
사업이요. 그래 난 지금까지 차선생이 맡아보던 기술대표위원사업보
다 내가 와서 맡긴 후생대표위원사업을 더 중시해왔소.》
차지훈은 선우치담의 말을 첫마디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부정하고
싶었다. 애당초 희생없이 영웅이 되기를 바라지부터 말아야 할것이다.
나라와 만사람을 위해 그리고 의로운 일을 위해 자기 한몸 주저없이 바
칠줄 아는 사람이 영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현단계 제철소앞에 나선
기본 두가지 일중의 하나가 후생사업이라는 말도 수긍되지 않았다.
극도로 곤난하고 혼란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생활을 보장하는 문제가 중
요한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도 제철소실태를 하루빨리 조사장악하고 불
꺼진 로들에 숨결을 살리기 위한 준비사업을 다그치는것이 더 중하고 급
하지 않겠는가.
열변을 토하던 선우치담은 차지훈의 표정에서 자기 말에 대한 반감을
알아챘는지 지체없이 정면공격을 가하였다.
《생각해보오. 야마다에 대한 석탄공급문제는 단순히 월동대책을
취해주는 생활상문제인게 아니라 앞으로 제철소정비와 복구에서 일본인
기술자들을 어떻게 리용하겠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란 말이요. 심각하고
중요한 이 문제를 소홀히 다루어 풀기 어렵게 해놓았으니 그 책임을 어
떻게 지겠소?》
지훈은 이 말에 대해서만은 아무런 변명도 하고싶지 않았고 또 그 책

203
임에서 벗어나고싶지도 않았다. 제철소 공장위원회앞에 야마다의 리
용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차지훈이였다. 콕스화학을 전문해온 차지훈
한테 제일 큰 약점은 제철소안의 야금설비들에 대한 파악이 부족한것이
였다. 해탄설비들에 대한 파악도 부족했지만 평로나 용광로설비들에 대
해서는 정말 캄캄이였다. 지금 제철소에 불이 죽은 조건에서 콕스화학
기사인 자기가 할 일이란 별로 없었다. 앞으로도 해탄로복구는 당분간
불가능했다. 모든것이 파괴된 지금형편에서 파철이나 녹여먹는 방법
밖에 없었다. 파철을 녹이자면 우선 평로를 알아야 했다. 해방되기
얼마전부터 제철소 기술부장노릇을 한 야마다는 원래 야금설비전문가였
고 평로설비들에 대해서는 특히 밝았다. 지훈은 평로를 복구하고 파철
을 녹이는데 필요한 지식을 뽑아내기 위하여 야마다한테 해방전에 살던
집을 그대로 주며 월동대책을 비롯하여 생활조건을 보장해줄데 대한 문
제를 제기하였다. 선우치담은 차지훈의 이 제의를 쾌히 접수하였었다.
《선생님!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차지훈은 무릎우에 두손을 올려놓고 공손히 머리를 숙이였다. 선우치
담이 바라던것은 바로 다름아닌 자기 말에 대한 차지훈의 무조건적인 복
종이였으나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동무에게 지난날의 훈장으로 말하는게 아니라 공장위원
장으로 말하고있소. 지난 10월 22일 각 탄광 로조대표들의 회의에서는
1인관리제를 채용할데 대한 문제를 결정했소. 이번 국영공장책임자회의
에서도 이 문제가 중요하게 론의됐소. 우리 제철소도 이제 국영기업소
로 이관되고 지배인 1인관리제를 채용하게 되오.》
선우치담은 자기가 곧 제철소지배인으로 임명되리라는것을 암시했다.
선우치담은 지훈의 모습을 책상너머로 바라다보며 자기의 타격이
정확했음을 깨닫고 만족의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치담은
지체없이 새로운 반격을 준비했다. 정치적적수이건 과학적론적이건
적수와의 싸움에서는 병법을 적용해야 한다. 예로부터 명장들은 적이 퇴
각하면 지체없이 공격에로 이행해야 하며 그 공격속도가 빠르고 맹렬할
수록 좋다고 하였었다. 치담은 지훈을 다루는데서도 이 병법을 적용하
고싶었다. 하지만 공격방법만은 조금전과 달리했다.
《나는 자네가 야마다 리용문제를 제기했을 때 원칙적으로 동의하면
서도 자네가 야마다와 이전부터 잘 아는 사이라는것을 고려하지 못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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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네가 야마다와 모르는 사이고 자기한테 배정된 석탄까지 그한테
돌려주는 친절만 베풀지 않았어도 이번 일이 이렇게 복잡해지지 않았을
걸세.》
치담이 갑자기 말투를 바꾼것은 충분한 고려에서였다. 개도 빠질
구멍을 내주고 몰아야 달아나지 막다른 곳에 몰아넣으면 돌아서서 물려
고 덤빈다. 치담은 친절한 말투로써 지훈에게 복종과 굴복의 길을 틔여
주고싶었다.
지훈은 항거하듯 머리를 들었다. 우선 선우치담의 말은 부정확했다.
지훈은 자기 집에 실어가게 되였던 석탄을 야마다네 집에 먼저 가져가
도록 하였을뿐이지 자기 몫까지 두몫을 야마다에게 준것이 아니였다. 또
지훈은 이전에 야마다와 겨우 풋낯이나 아는 정도였다. 제철소 기술부
장이던 그와 해탄현장기사였던 자기는 모든데서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심했다. 그리고 야마다와 아는 사이건 모르는 사이건 일본인기사네
집에 월동용석탄을 날라다주었다고 하면 억봉이가 반기를 들것이였다.
지훈은 월동용석탄을 공급하면서 해방된 우리 인민이 지난날의 압제자
들에 대하여 가지고있는 강렬한 증오심을 고려하지 못하였었다. 야마다
한테서 기술과 자료들을 뽑아낼 외곬생각만 했지 시대감정과 사회적분
위기를 고려하지 못한것은 자기의 커다란 실수였다.
선우치담은 지훈이 덤덤히 앉아있는 표정을 보고 그의 자존심과 인격
을 후려갈기던 채찍질을 그만두었다. 그만큼 때렸으면 이제는 달래여야
했다. 치담은 너그럽게 말을 이었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 내 야마다네 집에 석탄을 도로 실어가도록 대
책을 취하지. 그리고 오늘부터 후생대표위원사업에서 손을 떼게.》
치담의 말은 그 자리에서 효과를 나타냈다.
《고맙습니다. 정말 안됐습니다.》
지훈은 황송해했다. 선우치담은 그제야 담배를 붙여물며 지훈에게
도 권했다. 어디선가 함마로 철판을 두드려대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쇠와 쇠가 부딪쳐 울리는 소리는 방안에 앉아있는 두사람의 신경을 긁
으며 마음을 불안하게 해주었다. 치담은 신경질적으로 담배불을 끄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쇠소리가 어디에서 나는가를 알아보기라도 할
것처럼 뒤짐을 진채 창문쪽으로 걸어갔다. 카텐을 걷어놓은 창문밖으로
는 거밋거밋한 용광로철탑이 바라보였다. 한동안 울리던 철판 두드

205
리는 소리가 그쳤을 때 선우치담은 한손만 뒤짐을 진채 지훈이쪽으
로 돌아섰다.
《오늘부터 자네는 해탄보이라 한대를 책임지고 해체해야겠네. 날
씨가 이렇게 추운데 도산업처에서 아직 보이라를 못 놓아 증기를 못 돌
린다누만. 그리고 배송기도 한대 뜯어야겠네.》
《예?》
배송기는 해탄로의 심장이다. 해탄로가 복구된다 하여도 배송기가 없
으면 콕스를 생산할수 없다.
《이건 산업국의 지시네. 표부국장이 그러는데 패망직전에 일철주
식회사에서 우리 제철소로 실어오던 압연설비들이 지금 인천항에 그대
로 쌓여있다네. 미군정에서 해탄배송기를 주면 그 설비들을 보내주겠다
고 한다는거야.》
기분주의가 농후한 선우치담이였지만 지훈은 그의 말이 즉흥적인
기분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알았다. 지훈은 선우치담을 통하여 산업경제
감독처의 요직에 있던 표정갑이 갓 조직된 행정 10국의 모모한 간부로
소환되였다는것과 선우치담이 려순공대에 다니던 때 그와 함께 공부했
다는것을 이미 들은바있었다. 그리고 대동아전쟁에 열을 올리던 일제가
전쟁의 장기화를 준비하기 위하여 일본본토에 있던 일철주식회사 산하
의 일부 야금설비들을 조선으로 옮기려다가 망하였으며 박판기계들을 비
롯한 압연설비가 이송도중 인천에 머물러있다는것도 모르지 않았다. 지
난날 일제는 광석을 녹여 반제품으로 선철을 실어가는데 급급하였고 군
함을 만드는데 필요한 몇가지 두터운 철판에만 관심하면서 얇은 철판을
비롯하여 생활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여러 압연강재들을 뽑을수 있는 설
비를 하나도 꾸려놓지 않았다. 용광로와 해탄로를 앞으로도 퍽 오래동
안 내버려두지 않으면 안되는 지금의 형편에서 쓸모없는 그것들을 통채
로 가져다주더라도 평로를 돌려 파철을 녹이고 호미와 낫이라도 벼릴수
있는 강재를 얻어내도록 대책을 취하는것이 기업소관리운영상 현명한 조
치였다. 콕스화학전문가로서 이것을 시인한다는것은 괴로운 일이 아
닐수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피하거나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아무리 시
체를 붙들고 울어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용광로나 해탄로는 도저
히 살려낼수 없는 강시에 불과했다. 오늘날 아무 쓸모없는것이라면
지난날 그것이 아무리 귀중했다 하더라도 골동품에 지나지 않았으며 필

206
요하다면 대담히 그것을 내버려야 했다. 지훈은 해탄로의 심장이라
할수 있는 배송기의 불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수록 기사인 자기
가 제철소관리운영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방편으로 자신의 괴로움을
위로했다.
원래 기사라는 말의 원어는 재능이라는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서 그 의미는 재간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였다. 이 세상에 없는것을 만들
어내고 물질적부를 창조할수 있도록 자신의 재능으로 그를 담보하는 사
람들이 기사였다. 지훈은 기술자로서 자기가 할바를 있는 힘껏 다하는
것이 마음 편하고 정당하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달안으로 해체를 끝내 발송해야 하오.》
선우치담의 말속에는 참혹한 현실이 제기하는 쓰거운 진실이 내포되
여있다고 믿었기에 지훈은 흐린 얼굴로 그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며칠후였다.
지훈은 해탄배송장 앞마당에 서있었다. 그는 앞길을 막아선 까마득한
절벽앞에 오도가도 못한채 서있는 길손처럼 거무틱틱한 해탄로체들을 멍
히 바라보며 움직일줄 몰랐다. 간밤을 배송장에서 뜬눈으로 보낸 그의
얼굴은 부석부석하였고 두눈엔 벌겋게 피발이 져있었다.
빽―
주위의 정적을 깨뜨리며 기적이 울리였다. 지훈은 놀라듯 기적소리가
들려오는쪽으로 눈길을 돌리였다.
기차는 레루우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배송기를 싣고 떠나는 기차다.
어제 밤새 배송기를 실어놓은 화차방통 하나를 끌고 기차는 흐릿한 하
늘로 증기를 뿜어올리며 서서히 해탄구역을 떠나간다. 구내기관차는 배
송기방통을 이제 곧 남문구역까지 끌어갈것이다. 그러면 렬차가 편성되
여 개성까지 단숨에 간다. 그 다음일들에 대해서는 지훈이도 알지 못한
다. 지훈이가 공장위원장 선우치담에게서 받은 과업은 끝났다. 이제
는 집에 가서 뜨뜻한 물에 몸을 씻고 밀렸던 잠을 푹 잘수도 있고 사랑
207
에 굶주린 자식들과 즐거운 휴식의 한때를 보낼수도 있건만 지훈은 발
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기차는 점차 속력을 놓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달리는 기차를 향해 한사람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젊
은 그 사람은 달리는 렬차바퀴에 자기 몸이라도 던질 비상한 결심을 품
었는지 기차앞으로 주저없이 뛰여드는것이였다. 그는 자기 몸으로 육중
한 기차를 앙버티고 선채 그 무슨 비상신호라도 하듯 한팔을 높이 추켜
들었다. 너무나 분한 일을 당한 나머지 살아서 무엇하랴 하는 독한 마
음까지 먹었다가 눈앞으로 한치한치 다가드는 렬차를 보는 순간 생에 대
한 본능적인 애착이 살아올라 렬차를 세워달라고 저도 모르게 팔을 들
어올렸는지 아니면 달리는 렬차앞에 위험이 도사리고있어 자기 한목숨
바쳐서라도 렬차를 세우려는것인지…
그는 한팔을 들어올린채 온몸이 굳어져 움직일줄 몰랐다. 기차가
몰아온 바람이 그의 온몸에 들씌워지며 옷자락을 뒤로 잡아챘다.
온몸 그대로가 하나의 조각상처럼 부각된 그의 모습이 검은 차체에 가
리워지는 순간 지훈은 무쇠몽둥이로 땅하고 뒤통수를 줘맞은듯싶으면서 눈
앞이 아찔했다. 다음순간 구내기관차가 급정거를 하며 화차방통과 부딪치
는 절컹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배송장과 해탄로주변에 서서 떠나는 기차
를 바라보던 사람들속에서 비명소리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멎어선 기관차
앞으로 욱 밀려갔다. 순간에 사람들은 기관차주변에 빙 둘러 진을 쳤다.
지훈은 배송기방통을 끌고가던 기관차앞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좀 비키시오, 비키시오.》
지훈은 사람들을 비집고 겨우 기관차앞으로 나섰다. 천만다행으로 사
고는 없었다. 달리는 기관차앞으로 뛰여든 사람은 뜻밖에도 억봉이였다.
억봉은 얼굴이 불덩어리처럼 상기되여 기관차와 마주선채 힘내기라도 하
듯 가쁜숨을 몰아쉬고있었다.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하게 헤워진 저고
리밑에서 가슴이 터질듯 오르내리고 부릅뜬 눈에서는 섬광이 번쩍거리
였다.
《무슨 일이요?》
지훈은 서둘러 물었다. 억봉은 지훈을 알아보는 순간 뚫어져라 그를
쏘아보며 어깨에서 흘러내린 총을 추켜올릴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
하였다. 온몸의 피가 얼굴로 쏠린듯 붉어졌던 그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

208
지며 경련으로 파르르 떨리였다. 가쁜숨을 몇번 몰아쉬고나서 억봉은 겨
우 짧은 한마디 말을 했다.
《안돼!》
밑도끝도 없는 말이였으나 지훈은 배송기를 두고 말함을 깨달았다. 지
훈은 무슨 사고라도 생겼나 해서 놀랐던 가슴이 억봉에 대한 반감과 분
노로 차오르기 시작하였으나 애써 자신을 진정하며 말없이 억봉을 바라
봤다.
이때 떼지어 모여선 사람들을 향해 누군가가 고함을 지르며 뛰여오는
소리가 들리였다.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뛰여온 사람은 기관차앞에 빙 둘러선 사람들을 헤집으며 정신없이 소
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놀라 물러서며 그한테 길을 비켜주었다. 씩씩 증
기를 내뿜는 기관차앞에는 지훈이와 억봉이만 마주서고 그 주변에 서있
던 사람들은 뒤로 한걸음씩 물러났다. 사람들을 헤집으며 나타난 사람
은 알뜰이였다. 알뜰은 렬차앞으로 뛰여든 동생이 잘못된줄 알았던
모양이다. 알뜰은 기관차앞에 차지훈과 마주서있는 억봉을 보자 맥이 풀
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버리였다. 창백했던 얼굴에 피기가 돌기 시
작했으나 알뜰은 너무도 긴장했던탓에 근육이 무기력해져 일어서지
못했다.
알뜰의 출현은 억봉에게 자기가 해야 할바를 깨우쳐준듯싶었다.
《왜 배송기를 끌어내?》
억봉은 어깨에서 총을 내리우며 험상궂게 고함을 질렀다. 비에 젖은
각반을 치고 허리에 넓은 혁띠를 후렁후렁하게 맨채 총을 들고 서있는
그의 온몸에서는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같은 위험이 느껴졌다. 누구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누가 배송기를 떼가나 말이요?》
억봉은 총대를 앞으로 비껴든채 자기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으면 당
장 찌르기라도 할것 같은 기세였다. 지훈은 억봉의 성난 모습앞에 오히
려 마음이 옹골차졌다.
《배송기를 해체하라는것은 공장위원회 위원장의 지시요.》
지훈은 될수록 침착해지려고 애를 쓰며 분별없는 오해와 불신의 감정
을 풀려고 차근차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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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구? 공장위원장이?》
억봉은 여전히 총을 비껴든채 지훈을 노려봤다.
《그렇소, 배송기는 오늘중으로 발송해야 하오.》
지훈은 윽박지르는 억봉의 반문에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허튼소리 말아. 언젠 일본놈새끼한테 석탄을 끌어내다주더니 오
늘은 배송기를 가져다 누구한테 주려는거야?》
억봉은 오랜 세월을 두고 온몸에 배인 증오를 갖고 야비할 정도로 지
훈을 모욕했다.
지훈은 삽시에 얼굴이 파래지고 흥분으로 볼편이 실룩거리였다. 그래
도 자제력은 잃지 않았다.
《나는 지금 공장위원회 위원장의 지시를 집행하고있소.》
지훈은 말마디를 또박또박 씹었다.
《뭐라구? 위원장의 지시를 집행한다구? 죽고싶으면 어디 집행해봐.》
억봉은 쓰겁게 웃더니 총을 들어올려 절커덕 장탄을 했다. 억봉은 지
훈을 노려보며 총구가 그의 가슴을 향하도록 천천히 총을 들어올리였다.
시퍼런 총창은 지훈의 가슴앞 불과 한자되나마나한 공간에서 번뜩거리
였다.
지훈은 훅 불면 뒤로 넘어져 쓰러질것만 같은 모습이였으나 이상하게
도 뒤걸음질치지 않았다. 평상생활에서 비겁하고 나약하던 사람도 돌연
용감스러워지는 때가 있다. 더는 물러설수 없는 막다른 지경에 다달으
면 평시보다 몇갑절 용감스러워지는것이 자기 방위의 본능이라 할수 있
다. 지훈은 지금까지 자기가 데리고 일하던 많은 사람들앞에 모욕당한
인격을 고수하기 위하여 뒤걸음치지 않았다.
억봉은 더욱 만만치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결패스럽게 행동에 옮길
줄 알며 자기가 옳다고 믿는 한에 있어서는 담벽도 문이라고 내미는 그
다. 으스러져라 총대를 꽉 틀어쥐고 지훈의 앞가슴에 총창을 겨눈채 서
있는 억봉은 어느 순간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때까지 땅에 앉
아있던 알뜰은 겨우 일어섰다.
《얘, 말로 해라, 말로…》
알뜰은 크게 소리치면 동생이 놀라면서 얼결에 총이라도 쏠가보아 속
삭이듯 중얼거렸다. 중한 병을 앓고있는 환자처럼 알뜰은 반허탈상태에
빠져 억봉이와 차지훈을 갈마보며 같은 말을 곱씹었다.

210
211
《말로 하라는데, 말로…》
서로 마주노려보며 서있는 억봉이와 지훈은 그 누구도 물러서거나 양
보하려 하지 않았다. 주위의 분위기는 폭발의 한계점을 향해 점점 더 압
축되여갈뿐이였다.
이때 빙 둘러선 사람들을 헤집고 계향이가 억봉이와 차지훈의 사이로
뛰여들었다. 까만 치마에 눈이 실 정도로 하얀 동정을 단 검은 저고리
를 입고 자기 온몸으로 차지훈을 가리우며 계향은 억봉의 총구를 막아
나섰다. 계향은 두팔을 벌려 총구앞에 선채 숨이 차 헐썩거리며 억봉을
설복했다.
《왜들 이래요?… 차선생의 말씀은 정말이예요… 전 오전중으로 배송기
를 발송하라는… 위원장의 지시를 다시 전달하기 위해서 여기로 왔어요.》
계향은 울상이 되여 억봉에게 애원했다.
《비켜.》
억봉은 단마디로 잘라맸다.
《비키겠어요. 하지만 말로 하세요.》
계향은 억봉의 고함소리에 질겁한듯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다 침목에
발을 걸채우며 밑둥 찍힌 나무처럼 모짜로 넘어갔다. 넘어가는 계향을
부축해준 사람은 알뜰이였다. 알뜰이 아니였으면 계향은 레루우에 가슴
을 짓쪼으며 넘어질번 하였다. 계향은 알뜰을 알아보고 그의 팔에 안긴
채 자기를 구원해줄 가장 가깝고 미더운 사람이라도 만난듯 속삭였다.
《언니, 언니가 좀 말려요. 말루 하라구…》
계향은 놀라 파들파들 뛰는 가슴으로 알뜰의 품에 안긴채 눈물이 글
썽해 쉬임없이 속삭이였다. 계향의 애원은 절절하였고 알뜰이 역시
억봉이가 지훈이와 맞서서 총질하기를 바라지 않았으나 어쩌고저쩌고 할
사이가 없었다. 억봉은 자기와 지훈의 사이를 가로막았던 계향이가
물러서자 적의에 번뜩이는 눈길로 지훈을 무섭게 노려보며 그앞으로 한
걸음 더 육박했다.
《물러서지 못하겠어? 기차를 돌려세우지 못하겠나 말이야?》
억봉은 지훈에게 최후의 통첩을 했다. 지훈은 억봉을 마주볼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훈은 억봉이와의 화해가 불가능하며 자기가
이 자리에 남아있어야 꼬물만큼도 리될것이 없다는것을 충분히 깨닫고
남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두사람의 열기띤 눈길은 번쩍 번개를 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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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며 허공에서 서로 맞부딪쳤다. 순간 억봉은 자신을 더는 억제하
지 못하였다. 그는 기운차게 총을 꼬나올리며 하늘을 향해 방아쇠
를 당기였다.
꽝―
뢰성치듯 요란스러운 총소리가 울리더니 탄피가 알뜰이와 계향의
발부리에 떨어졌다.
《악―》
계향은 자기자신이 총에 맞기라도 한것처럼 새된 비명을 질렀다.
지훈은 쓰러지지 않고 서있는것이 자기로서도 이상하였다. 죽은 사람처
럼 피기 하나 없이 얼굴이 창백해있던 지훈은 감았던 눈을 떴다.
《모든걸 책임질줄 아오.》
지훈은 위협하듯 이 한마디 말을 남긴채 비칠거리며 걸어갔다.
《책임질테니 걱정말라. 그리고 다시 나타나지 말라, 개자식!》
억봉은 두손에 총을 들고 선채 지훈의 등뒤에 대고 약을 올리였다. 기
관차주위에서 물러선것은 차지훈이만이 아니였다. 대담하게 억봉의
총구를 막아나섰던 계향이도 달아나고 무슨 일인가 해 기차앞에 모여들
었던 많은 사람들이 확 풍기듯 흩어지며 철길밖으로 멀찌감치 물러섰다.
기관차앞에 남아있는 사람은 알뜰이와 억봉이뿐이였다.
억봉은 자기 누이가 비록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리였으나 그 자리에 버
티고 서있는것을 보자 힘과 용기를 주듯 시무룩 웃어보이였다. 억봉의
웃음에 주위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늦춰졌다. 호기심많은 젊은 축들과
억봉이와 잘 아는 사람들이 한걸음한걸음 기관차앞으로 모여들기 시작
했다. 억봉은 주위의 사람들을 향해 한팔로 총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여러분! 일본놈이 망하였으니 제철소는 우리것입니다. 우리 공장을
우리가 지킵시다.》
억봉의 호소에 군중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옳소! 찬성이요.》
억봉을 제일먼저 호응해나선 사람은 이전에 해탄로에서 함께 일하던
태주먹이다. 부모들이 그를 낳았을 때 너한테 물려줄건 벌건 두주먹뿐
이라고 이름마저 그렇게 지었다는 태주먹은 태씨성이기도 했지만 손이
이만저만 크지 않았으며 주먹 또한 셌다. 그래서 그의 주위에는 그의 주
먹에 쥐여있는 친구들이 늘쌍 붙어다닌다. 태주먹의 호응에 그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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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이구동성으로 억봉을 찬성해나섰다.
《배송기를 보내선 안된다.》
《절대 보내지 말라!》
태주먹을 비롯해 해탄출신의 젊은 친구들이 떠들어대자 어리무던하게
생긴 공무과의 한 중년사나이가 불안스럽게 중얼거리였다.
《위원장이 지시한건데 그러다 큰일나지 않겠어?》
그 사나이옆에 있던 귀밑머리 허연 한 로동자가 대바람에 그를 면박
주었다.
《큰일은 무슨 놈 큰일, 이 이상 큰일이면 무슨 더 큰 일이 있을라
구… 난 주물쟁이여서 잘 모르긴 하겠소만 배송기를 떼가면 해탄로를 허
물어버린다는 소리가 아니야.》
그옆에 있던 해탄로체공들이 그를 적극 훈수했다.
《령감 말이 맞았수다.》
그러자 어리무던하게 생긴 공무과의 중년사나이도 가만있지 않았다.
《여보시오 령감, 남의 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할게 있소. 옆에서 가만
히 구경하다 떡이나 먹으면 되는거지… 그런 일은 우리가 참견 안해도 웃
사람들이 다 생각해서 어련히 한단 말이우다. 중뿔스레 모나가지구 그러
단 정밖에 맞을게 없어요. 우린 그저 시키는 일이나 하면 된다구요.》
공무과의 중년사나이 말에 수긍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지금
사람들의 관심은 모두 배송기에 쏠려있어 저저마다 자기 주장과 견해가
옳다고 떠들어댔다.
억봉은 태주먹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지지하여주는 바람에
배짱이 든든해지면서 기운이 생겼다. 억봉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제철소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이거나 정의감이 강한 젊은 사람들이였는데
그들은 배송기 실은 화차를 통채로 둘러메고라도 갈듯 한 기세였다.
《혼날 땐 혼나더라도 할일은 해야지요. 우리가 제철소를 지켜야지 누
가 지키겠습니까? 우리 손으로 제철소를 지킵시다.》
억봉은 군중을 향해 다시 호소하고나서 총을 어깨에 둘러메며 기관차
발판에 한발을 올려놓았다. 열려진 기관차창문으로 놀랍게 밖을 내다보
던 기관사는 억봉이한테 알은체를 하며 머리를 끄덕여보이였다.
《여보게, 기관차를 뒤로 뽑으라구.》
억봉의 말에 기관차는 방금전에 떠나온 해탄 배송장쪽으로 서서히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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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치기 시작했다. 억봉은 전철원들처럼 발판에 올라서서 뒤걸음치
는 기관차에 한팔로 매달렸다. 철길밖에 서있던 많은 사람들이 기관차
를 따라 욱 밀려갔다.
칙― 칙…
배송기화차와 사람들이 밀려가는 서남쪽하늘에서는 비를 머금은 구름
이 쉬임없이 밀려왔다. 떼지어 밀려드는 먹장구름에 갑자기 아침이
물러가고 저녁이 다가오듯 사위는 한결 컴컴해지였다.

억봉이와 지훈의 격렬한 충돌은 섶단에 던져진 하나의 불씨였다.


불씨는 불을 일으키기마련이다. 걷잡기 어려운 드센 불길은 그들의
충돌이후에 일어났다.
억봉은 공장위원회 위원장실로 급히 오라는 련락을 받았다. 배짱
든든해하던 억봉의 마음은 새로 꾸려놓은 공장위원회 위원장방 대기실
에 들어서는 순간 위압되고말았다. 공장위원장방 대기실은 한다하는 일
본재벌들과 고관들만 상대하던 일본놈 제철소소장이 이만저만 꾸려놓지
않은데다 선우치담이 자기 취미까지 가미해놓아서 으리으리했다. 방
바닥에는 제철소에 주둔하던 일본헌병대 대장방에서 적산으로 몰수한 붉
은 주단을 가져다 깔아놓았고 창문가까이에는 어른키만 한 고무나무화
분과 그에 못지 않게 큰 종려나무화분을 세워놓았다. 길다랗게 생긴 대
기실 한가운데는 하얀 꽃무늬보를 씌워놓은 원탁 세개를 일정한 간격으
로 가지런히 놓고 벽면을 따라가며 값진 의자들을 주런이 마주놓았는데
원탁우에도 룡설란이며 범꼬리란 등 남방화초들을 놓아서 의자에 앉으
면 원탁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였다.
억봉이가 들어서자 기다렸다는듯 위원장서기 계향이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 기다리세요.》
억봉은 이때에야 남방화초들로 가득찬 공장위원회 위원장방 대기실 한
쪽에 놓여있는 계향의 사무용책상을 알아보았다. 위원장사무실로 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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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는 문가까이에 맵시있는 책상이 놓이고 그우에 등갓 노란 탁상등이며
잉크단지, 전화기를 비롯하여 각종 서류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계향이가 서기로 온 이후 선우치담의 방에 처음 오는 억봉은 모든것
이 낯설었다.
계향은 오늘 아침 출근할 때에 분명 검은 목세루치마저고리를 입고 흰
고무신을 신었었는데 지금은 밝은색양복차림에 까만 구두를 신고있었다.
억봉은 공장위원장 선우치담이 자기 서기에게 《촌티나는 조선옷대신 될
수록 양복을 입으라.》고 권고했으며 후생과에 과업을 주어 몰수한
적산중에서 계향이한테 어울리는 빛갈의 양복천과 구두를 가져오게
했다는걸 알리 없었다. 몰라보게 쭉 때벗은 그한테서 억봉은 어색스러
움과 자기로서도 알수 없는 적의만을 느꼈을뿐이였다.
계향은 방음장치를 한 크고 두툼한 문을 소리없이 열더니 한뭉치의 서
류를 들고 선우치담의 방으로 들어갔다.
대기실에 혼자 남자 억봉은 값진 의자우에 털썩 주저앉았다. 억봉은
작업복차림으로 호화로운 의자에 두다리를 쭉 펴고앉아 방안꾸밈새에 어
울리지 않게 담배쌈지를 꺼내들었다.
잠시후 계향이가 위원장방에서 나왔다.
《들어가보세요.》
계향은 자기 책상앞에 앉으며 실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억봉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선우치담의 방안으로 들어섰다. 선우치담은 검은 각테
안경을 끼고 머리를 수굿한채 서류들을 내려다보며 책상에 앉아있고 그
앞에 놓인 넓다란 응접탁 좌우에는 차지훈을 내놓고 공장위원회 상무성
원들 거의모두가 모여있었다. 억봉이 방안에 들어선지 몇분이 지나도록
선우치담은 책상우의 서류에 눈길을 못박은채 머리를 들지 않았다.
한동안 방안에는 사람들의 숨소리만 울리였다.
《앉으시오.》
치담은 억봉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억봉이 출입문쪽 벽면에
기대여놓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기 바쁘게 선우치담이 머리를 들었다.
《동무가 배송기화차를 못 끌어가게 한게 사실이요?》
선우치담은 첫마디부터 엄하게 따져물었다. 억봉은 선우치담이 전
혀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묻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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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못 끌어가게 했는가?》
선우치담의 어성은 높아졌다. 치담은 당장 집어삼킬듯 한 노한 표정
으로 억봉을 바라봤다. 눈확우로 툭 두드러져나온 눈때문에 그는《멱자
구위원장》이라는 좋지 못한 별명까지 듣는다.
《배송기를 가져가니까 그랬지요.》
《배송기를 가져가든 해탄로를 가져가든 그게 동무가 상관할 일인가?》
《자위대가 그런걸 상관하지 않으면 뭘 하란 말입니까? 차지훈은… 자
기 집 석탄을 가져간다 하구 야마다네 집에…》
선우치담은 갑자기 억봉의 말허리를 끊었다.
《좋소, 사건내막이 이제야 리해되오.》
그는 머리를 끄떡거리며 지우개가 달린 연필로 책상을 똑똑 두드리였다.
선우치담은 배송기반출사건에 대한 보고를 듣는 순간 몹시 노발대발했다.
누가 이 제철소구내에서 자기의 지시에 이렇게 도전해나선단 말인가.
요즘 나라에 제철소를 이관할 준비를 하면서 1인관리체계를 세우기 위
해 몹시 신경쓰는 선우치담이다. 산업국의 친우들을 통하여 제철소가 국
영으로 넘어가면 자기가 지배인으로 임명되리라는것을 암시받은 선우치
담은 회의에서 돌아오는 즉시로 자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위원들을 다
긏고있었다.
선우치담은 옹졸하게 행동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배송기
이설작업을 방해해나선 사람이 억봉이라는것을 알고 그가 자기의 지시
로 진행하는 사업이라는것을 모르고 그랬을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이미 오래전부터 악화되여있는 차지훈과 억봉의 개인감정이 이
사건을 계기로 폭발되였을수 있는것이다. 선우치담은 몇마디 말을 건네
보고 자기의 추측이 비슷했다는 생각에 표정과 어조가 다소 누그러졌다.
《그러니까 동무는 차지훈이가 배송기를 가져가기때문에 그랬다는
거지?》
억봉이 그렇다고만 대답했으면 어마어마하게 틀을 차려놓고 벌리
려던 이 심문이 이것으로 끝날수도 있었다. 차지훈과 억봉의 풀리지 않
는 개인감정과 알륵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선우치담이 별로 신경쓸게
없었다.
《아닙니다, 단순히 차지훈에 대한 개인감정때문에 그런게 아닙니다.》
억봉은 흥분을 억제 못하여 붉어진 얼굴로 자기의 생각을 총알 내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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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 뱉아놓았다. 선우치담은 억봉에게로 긴장한 눈길을 돌리였다. 자
기의 흥분을 억제할줄도, 남이 보지 못하도록 숨길줄도 아는 그는 여전
히 실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그러면 뭐요?》
《전 차지훈이 혼자서 배송기를 뗐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소. 그건 산업국과 토의하고 내가 지시했소.》
선우치담의 대답에 억봉은 눈앞이 아뜩했다. 억봉은 배송기문제에 산
업국까지 관계되여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배송기를 떼가면 해탄로를 어떻게 돌립니까?》
억봉이 긴장해 물어보는 말에 선우치담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왕청같
은 말을 했다.
《동무야 자위대장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공장 지키는 일이나 잘할게지 무슨 참견이야?》
《해탄로를 돌리구 쇠물을 뽑자구 공장을 지키지 뭘하러 지킵니까?》
억봉은 단호하게 반문했다.
《그럼 동무도 공장위원이란 말인가?》
선우치담은 쓰겁게 웃더니 억봉을 한참이나 멀거니 바라보고나서
갑자기 상을 탕 쳤다.
《여긴 뭐 동무만 못한 머저리들이 들어앉아있는줄 아는가? 다 생각
이 있고 타산이 있어 하는 일이란 말이야.》
선우치담은 위엄있게 선언하며 방안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억제
해오던 흥분이 터지는 순간이면 항용 그러하듯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
어섰다. 선우치담과 일상적으로 자주 접촉하는 공장위원회 위원들은 그
가 이제 곧 일장의 연설을 하리라는것을 알았다. 선우치담은 방안에 억
봉이 한사람뿐이라면 그를 상대로 절대 열변을 토하지 않았을것이다. 그
는 아직 공장위원회 위원들중에 자기의 경제전략과 리론을 리해 못하
고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생각으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 나라는 농업국가요. 우리 제철소는 농민들에게 보습과 농쟁기
를 대여줘야 하오. 보습과 농쟁기정도는 해탄로와 용광로없이 파철만 녹
여가지고도 얼마든지 만들수 있소. 우리는 우선 농업을 발전시켜야
그것을 밑천으로 장차 공업도 건설할수 있소. 때가 되고 필요하면 동무

218
가 걱정하지 않아도 지금의 낡은 해탄로나 용광로가 아니라 현대적인 야
금설비일식을 선진국가에서 가져오게 된단 말이요.》
선우치담은 더 리론적으로 조리있게 경제학의 원리들을 력설하고싶
었으나 억봉을 상대로 구구히 말한댔자 소귀에 경읽는 격이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공과대학을 다니였으나 사회학을 전문하는 사람들 못지
않게 경제학에 밝은 그다.
선우치담은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고 경제학의 초보조차
리해 못하면서 어디에 덤비냐고 묻는듯 한 표정으로 억봉을 바라봤다.
그의 말마디들에 위압당해선지 아니면 평범한 말마디속에 담겨있는
심오한 리론의 씨앗들을 애당초 감득조차 못했는지 억봉은 물론 방안사
람들모두는 아무 말이 없다. 선우치담은 눈망울이 툭 두드러진 두눈으
로 방안사람들을 쭉 훑어보고나서 억봉에게 단호히 명령했다.
《빨리 가서 배송기를 발송하시오.》
선우치담은 억봉이가 이제는 순순히 복종하리라고 타산하고 가벼이 지
시했다. 다소 주눅이 들어 서있던 억봉은 가만있지 않았다.
《그건 안됩니다.》
《뭐라구?》
뜻하지 않게 타격을 받은 선우치담은 주먹으로 쾅 하고 책상을 내리
쳤다. 그 바람에 책상우의 재털이며 색연필이 껑충 뛰여올랐다가 떨어
졌다. 그는 억봉을 무섭게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 배송기를 인천으로 가져가야 압연설비들을 가져오고 압연설비들
을 가져와야 건국에 필요한 강재를 민단 말이야. 건국을 방해하는가?》
지금까지 선우치담은 고분고분하지 않는 억봉을 고깝게 여기면서도 그
한테 정면으로 욕하거나 인격에 매질하는 방법을 피하여왔었다. 욕해서
수그러들면 별문제지만 무지막지하게 대여들거나 반발하면 망신밖에 당
할게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일 대 일로 맞서서 싸움하는 방법을 피해
한수 높이 억봉을 다루어왔지만 이번에는 리성을 잃어버리였다.
《나가! 나가란 말이야. 죽은 삼촌을 생각해 어야어야 해주니까…
동무같은 사람은 필요없소. 동무 아니면 자위대장 시킬 사람이 없는
줄 아는가?》
선우치담은 볼편까지 실룩거리며 노려봤다. 그러지 않아도 불거진 그
의 두눈은 지나친 흥분때문에 금시 눈확밖으로 툭 튀여나올것만 같았다.

219
7

억봉은 선우치담 방을 나와 해탄로로 향했다. 그는 선우치담이 나가


라고 소리치던 때 못 나가겠다고 마주 소리 못 친게 후회되였다. 아무
리 따져봐도 억봉은 선우치담의 말이 리해되지 않았다. 까다롭고 유식
한 그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해탄로가 필요없다는 소리였다. 해탄
로가 필요없다면 용광로도 소용없다. 그러면 제강소지 제철소가 아니다.
당장은 해탄로를 복구하지 못한다치더라도 아무때든 콕스를 구워야
할것이고 그러자면 배송기가 있어야 한다. 쓰지 않는다고 빼돌렸다가 필
요할 때 가져오느라 번잡을 부리면 건국이고 안 그러면 건국을 방해하
는거란 말인가.
억봉은 자기가 선우치담 방에서 조리있게 들이대지 못하고 개몰리우
듯 했다고 생각하니 분하기 그지없었다.
제선구역을 에돌아 중앙변전소가 자리잡은 릉선에 올라서니 대동강기
슭에 나지막이 솟아오른 개항산이 바라보였다. 개항산옆에 침전못이 길
다랗게 누워있고 그앞으로는 여러갈래의 철길이 뻗어있다. 억봉은 철길
을 따라 해탄공장이며 압연지구가 펼쳐진 제철리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대동강쪽으로 치우친 해탄구역에서 제일 두드러지는것은 해탄로굴뚝
들이다. 지붕과 지붕이 서로 잇닿아 파도치는 그우로 금시 출항을 서두
르는 거대한 군함의 마스트처럼 굴뚝들은 하늘을 찌를듯 솟아있다.
굴뚝밑으로 세개의 올막졸막한 해탄로들이 일렬종대로 늘어서고 그
종대를 거느린 책임자처럼 종대옆에 또 하나의 해탄로가 서있다. 해탄
구역은 조용했다.
억봉은 해탄로주변을 한바퀴 돌고나서 대동강쪽세탄장으로 갔다.
억봉은 배송기화차를 철길이 끝난 세탄장 한쪽구석에 끌어다세웠다. 이
제 레루 몇장만 걷어내면 화차는 오도가도 못한다. 억봉은 배송기화차
에 웃동을 벗어던지고 못뽑이로 레루못을 뽑기 시작했다. 일에 열중하
자 억봉은 모든 잡념을 잊고말았다.
억봉은 기차레루를 들어내려고 레루못을 뽑고 또 뽑았다. 철길우에 잔
220
뜩 허리를 구부리고 못뽑이로 지레대질을 하는 억봉에게로 달모가 다가
왔다. 억봉은 그가 오거나말거나 본체만체 하며 자기 일만 했다. 옆에
우두커니 서서 뻑뻑 담배를 태우며 억봉을 바라보던 달모는 그가 맥빠
져 헐썩거리자 말을 걸었다.
《좀 쉬구 하지.》
억봉은 대답을 안했다. 달모는 해탄로일치고 막히는데가 없었으며 해
탄설비들에 대해서는 일본인기사들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었다. 억봉
이도 이 달모의 손에서 해탄설비수리에 대한 기능을 견습받았다. 계향
이와 파혼한 후로 억봉은 그를 대하기 서먹서먹해 될수록 피해왔다.
달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늘 아침 그가 달리는 화차앞으로 뛰여
드는것을 본 후부터 일종의 존경심을 품게 되는것이였다. 배송기를 해체
하던 때 달모는 자기의 한쪽팔을 잘라내는것만큼이나 가슴이 뻐근했었다.
달모는 억봉이가 자기의 아픈 마음을 알아주고 풀어준것이 고마왔다.
억봉은 담배를 피우고싶어 침목우에 못뽑이를 놓고 허리를 폈다.
달모는 억봉이가 내려놓은 못뽑이를 집어들었다.
《건 왜 가져갈라구 그래요?》
《가져가다니… 레루못을 뽑자구 그러네.》
《아저씨가 레루못은 뽑아 뭘해요?》
《그래야 레루를 걷어낼게 아닌가.》
《제 손으로 떼구두 이젠 못 가져가게 해요?》
억봉은 담배쌈지를 주머니에 도로 넣고 달모의 손에서 못뽑이를 빼앗
았다. 달모는 배송기해체작업에 참가했다. 억봉은 배송기운전공인 달모
가 배송기를 제 손으로 떼놓은게 괘씸해 담배도 안 피운채 다시 레루못
을 뽑기 시작했다.
《망할 녀석.》
달모는 억봉의 괄세에 화를 냈지만 물러가지 않았다. 달모는 억봉이
한테 못뽑이를 빼앗긴게 분한지 넉두리를 그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 웃사람이 옆에 와 딱 버티고 서서 해체하라는데…》
억봉은 가만있지 못했다.
《그러게 누가 뭐라구 그래요? 웃사람이 옆에 와서 눈알 내라 하면 어
서 가져가시우 하구 눈알두 파내서 주라구요.》
《이녀석이 점점 한다는 소리가…》

221
달모는 팔소매를 걷어붙이며 때릴듯 억봉이옆에 다가섰다.
《이녀석 그 못뽑이를 내놓지 못하겠어?》
달모는 꽥 소리를 지르더니 억봉이를 콱 밀쳐버리고 그의 손에서 강
제다싶이 못뽑이를 빼앗았다. 그러더니 달모는 가슴속에 차넘치는 울분
을 못뽑이에 쏟아붓듯 낑낑거리며 레루못을 뽑아냈다. 레루못을 뽑는 그
의 모습은 험상궂었다. 이제 잘못 접어들었다가는 쇠장대에 줘맞아
정갱이 하나가 부러져나가든지 무슨 변이 날것 같았다. 달모는 억봉이
가 뽑던 레루못을 다 뽑고나서 다른 레루못을 또 뽑으러 갔다. 억봉은
자기가 너무한것 같아 달모옆으로 다가섰다. 달모는 억봉이가 못뽑이를
달라고 그러는줄 알았던지 레루못 뽑는 못뽑이가 귀중한 그 무엇이기라
도 한것처럼 등뒤로 감추었다.
《너무 그러지 말라구… 배송기를 떼낼 때 내 속은 편한줄 아나?》
달모의 두눈에는 물기가 핑 돌았다.
억봉은 가슴이 뭉클했다. 아무것도 할일이 없건만 매일처럼 해탄로주
변에 붙어사는 달모다. 그는 억봉이가 자기 일을 돕지 못하게 하자 그
것을 해탄로와 함께 살아온 자신에 대한 그 무슨 모욕처럼 받아들이는
것이였다.
《아저씨, 내가 너무했어요.》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달모는 억봉을 등지고 돌아서더니 침목에서 레루못을 또 뽑기 시작했
다. 달모는 침목에 꽉 들어박혀 녹쓴 레루못을 또 하나 뽑고서야 자기
설음에 지친듯 중얼거렸다.
《나살이나 꽁무니에 차가지구 하라는대로 배송기를 뗐으니 젊은
너한테 욕먹어 싸지. 하지만 나한텐 너처럼 총들구 기차를 막아설 그런
담은 없단 말이야. 나한텐 처가 달려있거던.… 로친네를 생각하다나면
할것두 못할 때가 많단 말이야. 나두 이게 안타까와… 그래 난 아직 당
에두 못 들었지. 같이 일하던 자네 삼촌은 로동조합위원장노릇까지
했지만… 내가 어떻게 당원인 자네와 같겠나?》
억봉은 가슴이 아팠다. 달모는 자기를 당원인줄 알고있었다. 억봉
은 이 순간 언젠가 준길삼촌한테 자기를 왜 당에 받아주지 않는가고 두
덜거린것이 새삼스레 생각났다. 그때 억봉은 당이란 누구나 마음대로 들
어오는데가 아니라고 하면서 당원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부족점을 하나

222
하나 타이르던 삼촌에 대해 노엽게 생각하였었다. 억봉은 지금에 와서야
당원이던 준길삼촌과 자기사이에 가까운 친척이라는 혈연적련계만으로는
메울수 없는 간격이 있음을 깨닫는가싶었다. 삼촌은 해탄로와 제철소
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건만 자기는 아무것도 한것이 없었다. 총을 들고
제철소를 지킨다는 자기가 얼마나 구실을 못했으면 해탄설비문건들을 반
동들에게 다시 탈취당했으며 삼촌의 목숨까지 잃게 했겠는가. 자신을 자
책하는 달모의 말마디들은 정면으로 면상을 후려갈기는것보다 억봉을 더
욱 아프게 매질했다. 억봉은 얼굴이 벌개져 달모앞으로 다가섰다.
《아저씨, 나두 아직 당에 못 들었다구요.… 하지만 이제 해탄로에 불
을 지펴놓구선 당에 받아달라 찾아갈래요.》
억봉은 달모한테서 못뽑이를 넘겨받아 이번에는 자기가 레루못을
뽑았다. 두사람이 교대로 일을 하니 푹푹 자리가 났다. 이때 태주먹이
며 젊은 패들이 배송기화차쪽으로 우르르 밀려왔다.
《여, 억봉이 어떻게 됐어?》
태주먹은 억봉이가 공장위원회로 불려갔던 일이 궁금한 모양이였다.
《어떻게 되긴, 배송기를 도로 당장 가져가겠다는거지.》
《그래서 이렇게 레루장을 들어내나?》
태주먹은 허리에 두손을 올려짚더니 같이 온 동무들에게 고개짓을 하
며 획 회파람을 불었다. 태주먹의 회파람소리에 젊은 친구들은 억봉이
와 달모를 밀어내고 그들이 하던 일을 자기들이 와락와락 하기 시작했
다. 여러 사람이 일에 손을 대니 잠간사이에 한 줄에서 석대씩 여섯장
의 레루를 뜯어내고 침목까지 말끔히 걷어냈다. 로반에서 걷어낸 레루
와 침목을 모두 세탄장 한구석에 쌓아놓고 석탄까지 덮어 숨겨놓았을 때
태주먹은 작업복 앞단추를 풀어놓은채 버릇처럼 허리에 두손을 올려짚
더니 미타하다는듯 중얼거렸다.
《화차를 저렇게 움직이지 못하게 할바엔 아야 창고로 만들어야 할게
아니야, 지붕두 해씌우구…》
그의 말은 옳았다. 배송기에 눈비를 맞히지 않으려면 화차우에 무엇
이건 덮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화차 앞뒤로 발대목 여섯대를
기둥처럼 세우고 웃설미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철판을 주어
다 지붕을 올리고 가마니까지 빙 둘러치니 화차는 그럴듯한 창고가 되
였다. 아수한건 지붕을 절반밖에 못 씌운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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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래일 운하리에 가서 함석을 뜯어오자.》
태주먹의 선동에 모두가 찬동했다. 제철소 남쪽변두리 운하리에는 일
본놈군대들이 쓰던 함석 씌운 병실이 있었다. 가시철조망을 두르고
개 한마리 얼씬하지 못하게 하던 그곳에는 요란하게 만들었던 포진지마
다에 진짜대포는 하나도 없고 나무로 만든 가짜대포만 있었다. 해방후
사람들이 나무대포를 들어내다 패서 불땠지만 나무포진지를 위장하려고
보초서던 놈들이 쓰던 병실은 아직 그대로 비여있었다.
배송기방통주위에서 사람들은 담배를 한대씩 피워물었다. 담배를
피우던 태주먹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억봉이가 철판으로 만들어 단 배
송기화차문짝앞에 다가섰다. 담배를 꼬나문채 태주먹은 주머니에서
곱돌을 꺼냈다. 해탄로가열공들은 로체온도를 연필이나 펜으로 종이
우에 기록하는것이 아니라 곱돌로 석판에 쓴다. 가열공이였던 태주먹의
주머니에는 아직 곱돌이 있었다. 태주먹은 곱돌을 꺼내들고 로체온도를
측정하고나서 쓰던 때처럼 락서를 하기 시작했다.

품명―배송기
보낼 곳―해탄배송장
화주―해탄사람들
※ 승인없이 오르거나 손대지 말것.

태주먹의 락서는 화차방통주위에 모여선 모두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


했다.
저녁때가 되자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갔다. 화차방통근처에 남아 어
정거리던 억봉은 지붕을 마저 씌우지 못한게 마음에 걸려 걸음을 멈추
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높은 구름으로 흐려있었다. 억봉의 심정
을 알았는지 그옆에서 따라오던 달모가 중얼거렸다.
《오늘 밤엔 비가 오지 않아. 저 해탄로꼭대기를 보라구.》
억봉은 달모가 가리키는대로 해탄로우를 올려다봤다. 해탄로우로는 상
승관굴뚝들이 줄지어 나란히 서있다. 상승관옆 안전란간에는 까막까
치들이 까맣게 내려앉아있었다. 해탄로화실굴뚝이라 할수 있는 상승
관에서 불길이 피여나던 때는 그 주변에 범접도 못하던 날짐승들이다.
구내에서 보기 어렵던 날짐승들이 어디에서 그렇게 모여들었는지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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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옆 안전란간에 다닥다닥 줄지어 앉았다. 날이 추워오니 날짐승들도 온
기가 그리운 모양이다. 기와집이 무너져 삼년이라고 해탄로에 불이
꺼진지 여러달이 되건만 천여도로 달아올랐던 산악같은 로체는 미적지
근하게나마 아직 열기를 보존하고있다.
《빌어먹을…》
억봉은 불이 죽었다고 날짐승들마저 해탄로를 얕보고드는것 같아
땅에서 돌을 집어들고 팔매질을 하려 했다.
《그러지 말라구. 저놈들이 모여들어야 날씨가 맑거던. 맑은 날에
야 저놈들이 불을 쬐려 저렇게 모여든단 말일세.》
해탄로에 불이 꺼진 후에도 노상 로옆에 붙어사는 달모는 모여드는 까
막까치에 어느덧 정이 들었다. 하긴 그랬다. 불꺼진 로체들에 제일
위험한것은 습기였다. 비가 오면 비물이 탄화실에 스며들지 못하도록 장
입구뚜껑이며 태움칸뚜껑관리를 해야 한다. 래일의 맑은 날씨를 예고하
며 로체우에 까막까치들이 모여들면 그런 근심을 안해도 된다.
달모가 말렸지만 억봉은 끝내 돌팔매질을 했다. 억봉이가 던진 주먹
만 한 돌은 3호해탄로에 못미처 떨어졌다. 그러나 그 돌이 해탄로문짝
을 때리자 그와 가까운 안전란간에 앉았던 까막까치들이 놀랐다.
억봉은 손에 잡히는대로 해탄로를 향해 돌을 몇개 더 집어던졌다. 그
중 하나가 상승관을 요란스레 때리자 3호해탄로우 안전란간에 앉아있던
까막까치들이 삽시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떠오른 까막까치수는 놀라
울 정도로 많았다. 온 하늘을 덮을듯 까막까치떼는 3호해탄로우를 빙빙
돌더니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1호, 2호해탄로쪽을 향해 날아갔다. 까막
까치들은 언제 다시 돌이 날아올지 몰라 위험하긴 하여도 해가 떨어지
면 엄습하는 추위를 막기엔 해탄로꼭대기가 제일인지 잠시후 다시 한마
리, 두마리 내려앉았다.

서쪽하늘에 노을이 불타기 시작했다. 계향은 달모를 찾아 해탄공장으


로 향했다. 오늘은 고모부의 생일이다. 고모부는 어제도 집에 들어오지
225
않았다. 계향은 어떻게 해서든지 오늘 고모부를 집에 데려갈 생각이다.
그가 들고있는 가방속에는 술과 안주가 들어있다. 후생과에 술 몇병을
부탁했더니 선우치담을 신주 모시듯 하는 후생과장은 위원장서기한테도
잘 보이는게 나쁠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급술 두병에 통졸임을 받쳐가
지고 사람편에 보내까지 주었다.
해탄로주위는 쥐죽은듯 조용했다. 아직 날이 채 어둡지 않았으나
너무도 인적이 없고보니 계향은 버럭 무섬증이 났다. 계향이 콕스식힘
탑을 돌아서자 2호해탄로가 서있는 산쪽으로 걸어가는 한사람의 뒤모습
이 보였다.
《여보세요.》
계향은 소리쳐부르며 그한테로 무턱대고 다가갔다. 그 사람은 계향이
가 찾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바쁜 걸음으로 그냥 가기만 했다.
《저, 여보세요.》
양복차림의 그 사람은 계향이가 가까이 다가가며 다시 불러서야 걸음
을 멈추었다. 그는 계향을 향해 돌아서더니 옷과 같은 천으로 만들어쓴
캡을 벗으며 알은체를 했다.
《아니, 위원장서기아씨가 어떻게…》
한입 가득 문 금이발을 내보이며 어색하게 인사하는 사람은 송표였다.
계향은 차지훈을 통해 송표가 겸이포제철소 총무부에서 한때 인사과 대
리과장노릇까지 했었고 해방직후 제철소운영동지회 회장으로 총무부 및
후생부 대표위원까지 겸했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지금 그는 제철소
와 인연없는 사람이였다.
《저, 우리 달모작숙 못 보셨나요?》
《못 봤는데요.》
송표는 어색히 웃으며 사위를 두리번거리였다.
《미안합니다, 안됐습니다.》
《안될게 있습니까. 자 그럼…》
송표는 다시 반쯤 모자를 벗어보이더니 성큼성큼 걸어갔다.
계향은 그와 헤여져서야 무엇때문에 그가 여기로 왔을가 하는 생각을
했다.
세탄장건물을 돌아서니 뒤마당에 한사람이 쭈그리고앉아 멍청하
니 대동강을 바라보고있었다. 고모부였다. 고모부는 아무것도 할일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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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외진 여기에서 강건너 먼산이나 바라보며 있기가 갑갑하지도 않은
지, 이렇게 먼산바래기나 할바에야 무엇때문에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는지…
《작숙!》
《아니, 네가 어떻게 왔니?》
달모는 여간만 반가와하지 않았다. 달모는 처조카를 친딸처럼 대한다.
계향이가 제철소 공장위원회 위원장의 서기가 된 후부터 자기네 집안에
벼슬하는 굉장한 사람이 처음 나왔다는 생각에 더욱 그를 끔찍이 위했다.
《작숙 데리러 왔어요. 오늘까지 집에 안 들어오면 고모가 내쫓겠대
요.》
집에서 녀편네한테 쥐여사는 달모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옷 갈아입구 같이 가자꾸나.》
계향은 세탄장도 구경할겸 달모를 따라섰다. 세탄장입구에서 멀지 않
은 곳에 화차 한대가 서있었다. 함석지붕을 씌워놓은 못 보던 화차였다.
《저건 뭐나요?》
《배송기다.》
《예?》
계향은 배송기가 해탄로조업에서 매우 중요한 기계라는 인식보다도 이
번에 온 제철소가 들썩하도록 말썽이 생겼다는 점에서 인상이 더 강했다.
《작숙, 저 기계가 왜 여기 있나요?》
《억봉이랑 끌어다뒀지.》
《오늘도 저 기계때문에 위원장실에서 얼마나 야단했는지 몰라요.》
《그래?》
《작숙, 저 일엔 아예 관계말아요.》
못박듯 계향이가 눌러놓는 말에 달모는 눈이 둥그래졌다. 달모는
배송기화차를 지키는 억봉을 동무해주느라 요즘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
다. 계향이가 공장위원장서기노릇을 하면서부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
며 좋건싫건 그의 의사를 존중하는데 습관되다싶이한 달모는 이것을 계
향이가 알가봐 은근히 걱정했다.
달모는 세탄장기계실 한켠에 꾸려놓은 휴계실로 계향을 데리고갔다.
이전 해탄과장 도꾸이찌방에 가서 장의자를 세개나 가져다 침대를 만들
고 방 한가운데 무쇠난로를 벌겋게 피워놓아 먹을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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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 있는 여기다. 자기 한당대 이곳에서 먹고살기라도 할것처럼 억봉
은 오늘 회벽칠까지 했다. 창문이 하나도 없고 철판으로 만들어 단 커
다란 출입문만 있는 방이여서 한낮에도 불을 켜야 하지만 방안은 아늑
했다.
《자, 여기 좀 앉아있거라.》
달모는 계향에게 의자를 가리켜보이고나서 작업복을 벗으려고 옆방으
로 향했다. 계향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가방을 상우에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가방속에서 술병이 서로 맞부딪쳐 달가랑거리였다. 그 소리
에 달모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쩍게 계향을 바라봤다. 계향은 호기심어
린 달모의 눈길과 마주치자 참지 못했다.
《작숙한테 드리려고 술을 샀어요.》
《뭐 술을?》
달모의 두눈에 생기가 돌았다. 좋아하는 달모를 보자 계향이도 기
뻤다.
《작숙,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글쎄…》
《호호… 오늘이 작숙 생일이예요. 그래서 고모가 얼마나 기다리는지
몰라요.》
달모는 우두커니 서서 벌쭉벌쭉 웃기만 하더니 계향이쪽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얘, 무슨 술인지 좀 보자꾸나.》
《옛날에 일본놈 고관들만 마시던 고급술이래요.》
《그래? 어디?》
달모는 계향이가 가방을 올려놓은 탁자앞으로 바싹 다가서며 눈을 끔
쩍해보이였다. 계향은 집에 가서 상우에 술과 통졸임을 꺼내놓아 작숙
을 깜짝 놀래우려던 생각을 까마득히 잊은채 그의 성화에 못이겨 가방
을 열었다. 가방아구리로 삐죽이 모가지 내민 술병을 보자 달모는 저도
모르게 꿀꺽 군침을 삼켰다. 달모는 순간 시장기를 느끼였다. 오늘
아침 늦게 억봉이와 함께 한술 끓여먹은 후 아직 점심도 못 먹었다. 달
모는 가방으로 손을 뻗쳐 술병 하나를 꺼내들고 전기불에 이리저리 비
쳐보며 좋아했다.
《얘 계향아, 컬컬한데 한모금 맛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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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모는 두병씩이나 되는데 하나 먼저 터쳐도 일없지 않느냐고 하는 표
정으로 가방속의 술병을 눈질했다.
계향은 달모가 하도 간절히 하는 말이여서 어기기 어려웠다. 계향은
고모부가 여기서 술판을 벌려놓으면 야단이라는 근심이 없지 않았으나
고모부한테 주려고 산 술인데 여기서 한모금 마신다고 나쁠게 없다는 생
각과 또 술 한말을 지고는 못 가도 앉은자리에서 다 마시고 간다는 작
숙의 주량에 대해 고모한테서 이미 여러번 들은터여서 승낙하고말았다.
달모는 술병마개를 따다말고 술병을 탁자우에 내려놓았다.
《내 잠간―》
달모는 술병을 탁자우에 놓아둔채 부리나케 옆방으로 갔다. 평시에 느
릿느릿하던 그의 동작은 몹시 재빠르고 탄력있었다. 달모는 잠간새에 기
계실로 가서 작업복을 벗어버리고 말끔히 세수까지 하고 나타났다.
달모는 그 무슨 성대한 의식이라도 하는듯이 정중한 표정으로 마개를 따
고 술병주둥이에 입을 가져다대였다.
이때였다. 철문이 열리며 장총을 들고 팔에 완장을 두른채 억봉이가
방에 들어섰다.
계향은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고 달모는 손에 든 술병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했다. 술군일수록 술동무를 중하게 여긴다. 달모는 어
머니 몰래 찬장에서 맛있는 음식을 채먹다가 들킨 어린아이처럼 얼굴이
붉어져 몸둘바를 몰라하더니 손에 든 술병을 억봉에게 내보이며 멋적게
말했다.
《우리 계향이가 내 생일이라구 이걸 갖구 찾아왔네그려.》
억봉은 아무말없이 총을 벽에 기대여놓았다.
계향은 억봉을 피하듯 기계실쪽으로 물러나 그를 외면한채 돌아섰다.
여기 와서 억봉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파혼이후
로 계향은 억봉을 될수록 피해왔다. 계향은 차지훈의 권고로 이곳 제철
소에 남던 때 벼락약혼에 대해 들은 사람들이 그 구체적인 내막은 알지
도 못하면서 자기를 이미 몸을 버린 헌 녀자로 알가봐 그것을 제일 두
려워했고 이 두려움때문에 억봉이가 자기한테 처녀로서의 순결성에
그 무슨 허물이라도 입히는 위험대상처럼 생각되였다. 억봉에 대한
계향의 이 경계심과 적대감정은 자기 생활의 은인이며 스승격인 차지훈
과 억봉이가 엇서있다는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더 강렬해졌다. 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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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이가 지훈의 가슴에 총을 겨누는것을 본 후부터는 더욱 그랬다.
달모가 억봉에게 반발하는 계향의 심정을 눈치챈것은 잠시후였다. 계
향이가 억봉을 등진채 돌아서고 억봉이가 얼굴이 벌개져 방안에 장승처
럼 버티고서자 달모는 한손에 술병을 든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했
다. 두사람을 갈마보며 그들사이에 서있던 달모는 술병을 탁자우에
내려놓고 우선 억봉이더러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억봉은 아무말없이 의
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는 오늘 밤 배송기화차를 지켜 여기에 있어야
한다.
달모는 억봉을 힐끔 곁눈질하고나서 계향이쪽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얘, 너 저기 좀 들어가있으렴.》
달모는 계향이가 억봉이 안 보이는데 있어야 마음편해할것 같아 기계
실쪽을 가리켰다. 계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모가 가리키는 기계실
로 쑥 들어가버리였다.
억봉이와 단둘이 남자 달모는 헤식게 웃으며 억봉이가 앉아있는 탁자
앞으로 다가가서 그한테 술병을 턱질해보이였다.
《싫수다. 난 안 마시겠수다.》
억봉이가 머리를 흔들자 달모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그 무슨 모욕처
럼 받아들였다. 술군은 자기한테 술을 권하는걸 좋아할뿐아니라 남이 자
기가 권하는 술을 받지 않을 때 싫어한다. 파혼후로 버성겨졌던 달모와
억봉의 사이는 배송기사건이후로 다시 가까와지기 시작하였다고 할수 있
었다.
달모는 억봉을 자기의 처조카사위로 삼고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원래
달모는 억봉을 나쁘게 보아오지 않았고 또 억봉이의 아버지나 삼촌과 결
의형제를 뭇고 형님, 동생 하던 사이였다. 처음에 다섯이서 무었던
결의형제중에서 얼마전에 억봉의 삼촌 준길이가 죽고《걱정말라》주
학섭까지 떠나고보니 이제는 달모 혼자 남았다. 어느모로 보든지 달모
는 억봉이와 나쁘게 지내고싶지 않았다.
《버릇없이… 이 술은 내 술이지 계향이 술이 아니야. 어제두 날 업
수이 여기는걸 참았는데…》
달모는 식기에 술을 쏟아부어가지고 그 술이 무슨 친목과 화해의 약
이기라도 한것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억봉에게 먹이려고 애를 썼다.
억봉은 달모가 부어준 술을 마지못해 쭉 들이켰다. 한잔 마시고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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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부어주는 두번째 잔도 들지 않을수 없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지만 술이 술을 마시게 되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말은 그
른데 없었다. 빈 속에 안주 한점 없이 독한 술을 반병씩 마셔버린 달모
와 억봉은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에에… 입만 배렸수다.》
억봉은 빈병을 탁자우에 내려놓으며 객적은 소리를 했다. 독한 술을
거의 한식기나 마시고보니 속에서 불이 일었다.
《뭐 입맛 배렸다구?》
달모는 자기한테 차례졌던 술식기를 다 비우고나서 의자에서 벌떡 일
어섰다. 그는 벌써 거나했다. 달모는 뚜껑을 열어놓은채 닫지도 않은 계
향의 가방으로 손을 뻗쳤다. 집에 가서 술동무없이 혼자 술을 마신다는
건 멋적은 일이다. 입댄김에 억봉이와 함께 나머지 술도 마시고싶었다.
달모는 계향의 들가방에서 새 술병을 꺼냈다. 달모는 그때에야 계향의
가방에 들어있는 통졸임통을 보았다.
《아니, 이게 뭐야.》
달모는 입이 째져 억봉에게 소고기통졸임을 흔들어보였다. 달모는 지
체없이 새 술병마개를 뗐고 억봉은 주머니칼을 꺼내 통졸임통뚜껑을 따
기 시작했다.
텅 빈 기계실안에 갇힌 사람처럼 혼자 들어가있던 계향은 화가 나서
휴계실로 나왔다. 그때는 두사람이 통졸임까지 터쳐놓고 새 병의 술을
마시기 시작한 뒤였다.
《작숙, 나 가겠어요.》
계향은 앵돌아져 내쏘았다.
《얘, 좀 있다 나랑 같이 가자. 밖이 벌써 어두웠을게다.》
계향은 달모의 만류에도 뿌등뿌등 휴계실을 나왔다. 고모부한테 애당
초 술병을 보인것부터가 잘못이였다. 계향은 어디에다 화풀이를 해야 할
지 몰라 휴계실창문을 쾅 닫아버리고 세탄장건물밖으로 나섰다.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밖은 먹물을 풀어놓은것처럼 캄캄했다. 인적
드문 곳이여서 무시무시하기 그지없다. 당장 혼자 갈것처럼 분김에
밖으로 뛰쳐나왔으나 계향은 발이 땅에 얼어붙었다. 점차 어둠에 눈이
익으며 저탄장에 쌓아놓은 석탄더미들과 세탄장건물륜곽이 알리였으
나 계향은 혼자 집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곳 해탄구역은 별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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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않던 곳이여서 방향조차 찾기 힘들었다. 한동안 어둠속에 서있던
계향은 용기를 내여 발 가는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볌발볌 걷
던 계향은 땅에 널린 철근에 발부리를 걸채웠다. 계향은 앞으로 쓰러지
는 몸의 균형을 가까스로 잡았고 걷어채운 철근은 가까이에 있던 철판
을 때리며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부시럭소
리가 났다. 틀림없는 인적이였다.
《거기 누구 있어요?》
계향은 부시럭소리가 들려오는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가 어
둠속으로 뛰여가는 소리가 났다. 어둠속 멀지 않은 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계향은 온몸에 소름이 쭉 돋았다.
《작숙―》
계향은 새된 소리를 지르며 불빛이 내비치는 세탄장쪽으로 뛰여갔다.
계향이 숨이 턱에 닿아 휴계실철문을 잡아당기는 순간까지도 달모와 억
봉은 술병을 놓고 탁자에 마주앉아있었다.
《작숙, 저기 웬 사람이 왔어요.》
계향이 다급한 소리를 했으나 달모는 태평스러웠다.
《이제 담배 한대만 피우고 같이 가자는데…》
동문서답격인 달모의 말에 계향은 악이 받쳐 부르짖었다.
《저 배송기화차근처에 웬 사람이 있어요.》
그래도 달모는 꿈만해했다.
《이 어두운데 저탄장에 무슨 사람이 온단 말이야. 무서우면 모든게
헛보이는 법이란다. 나랑 같이 가자.…》
달모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으나 술기운때문에 자유롭지 못했다. 계
향은 단지 자기가 무서움때문에 휴계실로 다시 돌아온것처럼 여기는게
화가 나서 내쏘듯 다시 말했다.
《아까 어둡기 전에 여기로 오다 송표두 만났댔어요. 저 산쪽으로 가
는걸 봤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계향은 달모를 찾아오다 해탄로근처에서 만난 송표
가 떠올라 이자 밖에서 느낀 인기척이 그일지도 모른다는 억측으로 두
서없이 말했다. 계향을 등진채 앉아 그의 말을 들은척도 않던 억봉이가
벌떡 일어섰다.
《송표가 왔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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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은 벽에 세워놓았던 총을 잡았다. 억봉은 얼굴이 벌개도 취한 사
람같지 않았다. 계향은 그의 행동과 표정에서 긴장감을 느끼며 덩달아
마음의 탕개가 죄여졌다. 억봉은 총을 든채 밖으로 뛰여나갔다. 앉아있
을 때엔 일없었으나 밖에 나와 갑자기 찬바람을 쏘이며 몸을 움직이자
그도 취기가 오는 모양이였다. 어둠속으로 뛰여가는 그의 발걸음은
비칠거렸다.
《누가 왔다구 그래?》
달모도 억봉을 따라 밖에 나가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말았다.
《서라! 누구야? 섯.》
밖에서 억봉이가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소리가 나더니 땅 하는 총소리
가 터지였다.
잠시후 요란한 굉음이 울리였다. 배송기를 습격하러 왔던 적들이
도망가면서 배송기화차에 수류탄을 던진것이다.
폭음이 사라진 후 대동강쪽에서는 갑자기 들이닥친 추위를 예고하는
차고 매운 바람이 쉼없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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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구름장을 뚫고 비쳐온 해빛

날씨는 차지였다. 그새 춥지 못한것을 벌충하려는지 갑자기 들이닥친


추위는 물웅뎅이마다를 얼구고 계절을 헛갈려 월봉산과 송림산 양지바
른 둔덕에서 망울져오르던 개나리를 사나운 얼음이발로 무자비하게
물어뜯었다. 살소매로 스며드는 강바람은 살을 에이는듯싶었으나 억
봉은 부두가에 서서 움직일줄 몰랐다. 한밤중 해탄구역 세탄장에서
터진 수류탄은 배송기만 파괴하지 않았다. 뚜껑이 깨져나가고 날개에 금
이 가서 배송기가 못쓰게 되였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입은 상처에 비하
면 아무것도 아니였다. 억봉은 배송기파괴의 모든 책임을 졌다. 억봉은
배송기를 이설할데 대한 상급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건국사업
을 파탄시켰다는 어마어마한 책임을 지고 자위대장에서 철직되였다. 억
봉은 자위대장자리를 내놓은것보다도 총을 떼운것이 더 분하였다. 억봉
은 여지없이 죽지를 잘리웠다.
억봉은 해탄로를 등진채 검푸른 대동강물결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방
금 밀물이 끝난 때여서 강물은 잠시 흐름을 멈출 시각이건만 사나운 바
람에 파도를 일으켰다. 바람에 어쩌지 못하여 흐름마저 바꾼듯 강물은
제철소쪽으로만 밀려왔다. 강물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쉬임없이 제철
소부두를 때린다.
제철소가 생겨나던 그때로부터 30년가까운 오랜 세월 사람들의 피
땀으로 굳어진 쇠덩어리와 철판이 바다건너 저 멀리 일본으로 실려가고
만주와 일본에서 석탄을 실어오던 부두다. 억봉은 소년시절의 적지 않은
나날들을 여기 부두에서 흘러보냈다. 배에 실려온 석탄을 쇠질통에 담아
지고 어린 등뼈가 휘도록 달리고달려야 했던 지난날, 시커먼 쇠질통에 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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뼁끼로 써넣은 번호는 인부들의 대명사였었다. 고리눈을 가리우려고
실테안경을 끼고 저울대앞에 앉아있던 일본감독놈은 억봉이가 질통지
고 올라선 저울의 눈금에서 자기 수첩에 적혀있는 번호의 중량을 감함으
로써 운반한 석탄량을 계산하군 하였었다. 그리고 하루 일한 값을 계산
할 때에는 감옥간수가 죄수들을 찾듯 이름대신 쇠질통번호를 불렀었다.
지난날의 가슴쓰라린 추억마저 모두 얼궈버리려는듯 맵짠 바람은
억봉의 옷자락을 잡아채며 기승스레 불어왔다. 바람에 밀리워 부두를 때
리는 소란스러운 파도소리는 귀를 멍멍하게 만들었다. 쉼없이 기슭을 때
리는 파도가 그대로 소쿠라지고 하루에 두번씩 밀려오던 대동강밀물이
사라질 이해의 막사리는 멀지 않았다.
억봉은 대동강을 등진채 돌아섰다. 꽁꽁 얼어붙은 석탄침전못이며 석
탄더미사이로 바라보이는 세탄장건물들과 해탄로들을 보자 억봉은 울컥
설음이 북받쳐올랐다. 저 해탄로에 언제 가야 불이 피여나겠는지…
저 해탄로의 불때문에 아버지, 어머니가 죽었으며 삼촌마저 원쑤들의 흉
탄에 피토하고 쓰러졌다. 불때문에 자기네 온 집안이 당한 괴로움과 고
통은 오직 불로써만 가셔낼수 있었다. 억봉은 돌아가신 부모들과 삼촌
을 소리쳐부르며 엉엉 울고싶었다. 그럴수록 자기를 불행에서 구원해주
고 손잡아 이끌어줄 따뜻한 손길이 그리워졌다. 자기를 품어주고 손잡
아주던 부모나 삼촌을 대신하여줄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더는 없단 말
인가.
《자, 이젠 들어가자구.》
달모가 추워 몸을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억봉이가 걱정되여 그를 뒤
따라나와 지금까지 그옆에 말없이 서있던 달모다. 배송기가 파괴되고 자
위대장에서 철직된 이후부터 억봉은 실성한 사람처럼 해탄로주변을
어정거렸고 자주 부두가에 나와 강물을 바라보며 한참씩 서있군 하였다.
달모는 억봉이가 자주 혼자 멍히 생각에 잠기면서 기가 죽어 지내는걸
보면 측은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다 정말 실성이라도 할것 같아 달모는
그것이 걱정이였다. 제정신없이 강물에라도 뛰여들것 같은 근심때문
에 달모는 억봉이가 강가로 나올 때면 겁이 나서 그를 따라나온다. 달
모는 억봉이가 이렇게 된데는 자기 책임도 크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
다. 생일날 자기가 세탄장에서 술을 마시지만 않았어도 억봉이가 지금
처럼 안되였을지 모른다. 달모는 술을 마신것이 억봉이가 철직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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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목의 하나라는 소리를 들었다.
《가자는데…》
달모가 떡떡 이를 쪼으며 재촉을 해서야 억봉은 말없이 발걸음을 옮
기기 시작했다. 달모는 그를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너무 상심말라구. 사람 한생이 별루 길지는 못해두 살아가느라면 별
일이 다 있는거야.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데 꼬이던 일이 펴일 때
두 있겠지. 우리 해탄사람 번호맞을 날두 이제 올거야.》
억봉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두사람은 해탄로쪽으로 걸어갔다. 바람을 등지니 추위가 한결 덜한것
같았다. 추위를 피하려는지 해탄로우에는 까막까치들이 여느때없이
일찍 모여들었다. 날짐승들은 바람과 추위를 피해 상승관뒤쪽에 벌써 일
렬로 줄지어 앉았다. 지금처럼 추위가 계속되면 로체가 완전히 식어 날
짐승들마저 자기의 잠자리를 잃어버릴것이다.
윙―윙
찬바람은 전선줄과 함석지붕을 울리며 구내길로 탄가루와 먼지를
휘몰아갔다.

오늘도 억봉의 생활에는 변화가 없었다. 파괴된 배송기가 실려있는 화


차와 해탄로주변을 빙빙 돌거나 그것들을 멀거니 바라보며 앉아있는것
이 억봉이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런다고 누구도 억봉에게 쌀을 주거
나 돈을 주지 않았다. 민중의 건국열의는 높아도 아직 혼란이 채 수습
되지 않아 제철소에 다니는 사람들마저 하루 둬끼 멀건 죽을 먹어야 하
던 시절이였다. 억봉의 정신적고통은 배고픈 설음을 동반해야 했다. 억
봉이가 하루아침에 밥통 떨어진데다 석봉이까지 강습중이여서 집살림은
말이 아니였다. 준길삼촌의 친우들과 억봉의 동무들은 그에게 어느
개인철공소를 알선해주기도 했고 있는대로 함께 나누어먹자면서 자기네
들한테로 오라고 하였으나 억봉은 모두 거절했다. 하는 일이 없지만 억
봉은 해탄로가까이에 있어야 그런대로 마음이 편했다. 억봉은 요즘
달모와 함께 편제없는 해탄로수위노릇을 하고있었다.
오늘은 눈이 내렸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저녁때가 다되도
록 그칠줄 몰랐다. 소리없이 펄펄 날리는 눈송이들은 하늘과 땅 그리고
온 우주공간을 한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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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이 빠지도록 눈이 내렸건만 해탄로주위에는 사람발자국 하나
나지 않았다. 억봉이가 드나드는 길을 내느라 쓸었던 길에도 언제 눈을
치웠냐싶게 또 내리였다.
《지독스레 퍼붓누나.》
억봉은 세탄장창문가에 서서 화가 나 중얼거렸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여름에도 비가 많이 온다고 했다. 이달에 접어들어 벌써 다섯번째
눈이다. 이번 겨울에 여느때없이 눈이 많은걸 보니 여름장마가 걱정되
였다. 불꺼진 로체들과 멎어선 기대들에 습기는 금물이다. 기대들엔 기
름이라도 칠해둘수 있으나 밖에 드러나있는 해탄로는 어쩌는 수가 없다.
그의 입에서는 괴로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억봉은 온몸이 꽁꽁 얼어서야 휴계실에 돌아왔다. 휴계실에는 태주먹
이 대여섯명 동무들을 거느리고 와있었다. 태주먹이 오소리굴이라고 부
르는 이 휴계실은 억봉이와 달모의 집이였을뿐만아니라 태주먹이랑
여러 사람이 찾아오는 심심풀이놀이터이기도 했다. 답답해 잡담을 하려
고도 찾아오고 장기를 두어도 여기 와서 둔다.
《여, 또 제사지내러 나갔댔어?》
태주먹이 시까스르는 말에 억봉은 대꾸없이 난로앞으로 걸어갔다. 억
봉이 멀거니 해탄로를 바라보거나 저 혼자 머리를 수굿해있는것을 보고
태주먹은 《해탄로를 제사지낸다》고 놀려준다.
《눈이 멎었습데?》
태주먹의 물음에 억봉은 그를 등지고 앉아 벌건 난로에 손을 녹이며
머리만 좌우로 흔들었다.
《저 친구 혀까지 얼어붙은게 아니야?》
억봉은 이번에도 대답을 안했다. 요즘은 말조차 하기 싫다.
《이번에 우리 공장이 정식 국영기업소로 이관됐대, 선우치담위원
장이 지배인으로 임명되고…》
태주먹은 억봉이더러 들으라고 씨벌이였으나 억봉은 달모한테 오늘 아
침 이미 소식을 들은 뒤였다. 달모가 집에 갔다오면 계향을 통해 그만
한 소식쯤 날라오고도 남는다. 하지만 낯 넓고 동무 많은 태주먹은 확
실히 소식통이였다.
《중앙에서 무슨 부국장인가 하는 큰 간부가 내려왔는데 그 간부가 오
늘 해탄로문제두 결론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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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주먹을 등지고 난로에서 불을 쪼이던 억봉은 홱 돌아섰다.
《뭐, 해탄로에 불을 땐대?》
억봉은 귀가 항아리만 해 물었다.
《다 죽은 해탄로에 어떻게 불을 땐단 말이야?》
태주먹은 아닌보살하고 앉아있던 억봉이가 느닷없이 말참녜를 하려들
자 퉁을 놓았다.
《그럼 뭘하러 왔대?》
《동무가 직접 가서 물어보게나.》
억봉은 얼굴이 벌개졌다. 태주먹은 억봉을 뻔히 쳐다보며 약을 올렸다.
《애당초 불을 죽이지 말았어야지… 해탄로를 기계처럼 껐다돌렸다 할
수 없다는걸 자네가 모르나? 해탄로밥을 한두해 먹지 않은 자네가 말이
야.》
태주먹의 말에 일리가 없는것은 아니였다. 가열공인 태주먹은 로체를
쌓은 벽돌의 성질이며 해탄로의 불에 대해 억봉이보다 선생이라고 할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한다는거야?》
《어떻게 하겠는지 내가 알게 뭐야? 밸대루 하라면 난 해탄로들을 모
두 와락와락 헐어버리겠네.》
《뭐라구?》
억봉의 두눈은 바람맞은 숯불처럼 갑자기 분노가 이글이글 피여났다.
《그럼 어쩌겠어? 자네 재간에 해탄로를 복구할것 같은가? 무슨 기술
루? 무슨 벽돌루? 또 복구해놓으면 뭘해, 석탄이 있어야 돌리지?》
태주먹의 말에는 하나도 그른데가 없었지만 억봉은 참지 못했다.
《입다물지 못하겠어?!》
억봉은 이 근래에 처음 이렇게 큰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억봉이가
약이 올라 푸들쩍거리자 태주먹은 놀랄 대신 좋아라 껄껄거리였다.
《됐어. 다 죽은줄 알았더니 아직 속이 살아있군그래. 비록 날개는 짤
렸지만 마음속에 불씨가 죽지 않았으니 됐단 말이야.》
《건방진 소리 작작해.》
억봉은 노여움을 삭이지 못했으나 태주먹은 여전히 좋다고 야단이다.
억봉은 자기를 등떠보느라고 태주먹이 우정 롱을 했다는것을 잠시후에
야 깨달았다. 태주먹은 밖에 나갔다오더니 장기판을 벌려놓은 자기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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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들에게 소리쳤다.
《여, 눈 그치기 기다리단 세월없겠어. 빨리 눈을 치자구.》
그의 말에 장기두던 젊은 친구들이 자리털고 우르르 일어섰다.
억봉이네 휴계실을 찾아온 그들의 손마다에는 눈넉가래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무슨 눈을 치려구?》
달모가 눈이 둥그래 물었다.
《어디 눈을 치겠나요? 해탄로에 쌓인 눈을 쳐야지…》
태주먹의 말에 억봉은 뺨을 후려맞는것만큼이나 뻐근했다. 자기는 이
곳 해탄로에서 먹고 자면서도 해탄로체우에 쌓이는 눈을 칠 생각은 못
했다. 억봉은 비자루를 들고 태주먹을 따라나섰다. 억봉은 태주먹과 같
이 2호해탄로쪽으로 향하며 아까 자기가 성낸것을 용서빌듯 말했다.
《고맙네. 동문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나?》
《뭘 말이야?》
《여러 사람 데리구 눈치러 올 생각 말이야.》
억봉이가 성낼 때 웃던 태주먹은 그가 칭찬하자 노여워했다.
《동무는 그게 탈이야. 왜 해탄로를 자기 혼자만 걱정한다구 생각하
나? 해탄로의 주인은 동무 혼자가 아니란 말이야. 우리 동무들을 보라
구. 내가 그들을 데리구 온줄 아나? 우리 제철소가 국영기업소로 이관
됐구 중앙에서 간부가 내려와 해탄로에 대해 결론한다는 말을 듣구 이
렇게 눈칠 생각부터 했거던. 그들이 넉가래 들구 나타나는 바람에 난 끌
려왔어.》
억봉은 새삼스레 태주먹을 바라봤다.
《태동무, 하여튼 고마와.》
억봉은 태주먹의 손을 잡았다. 태주먹은 억봉의 손을 잡고 놓지 않으
며 똑바로 얼굴을 쳐다봤다.
《고마와할건 없어. 난 동무한테 한마디 더 충고해야겠어. 동문 자위
대장에서 떨어졌다구 공청생활두 안할 작정인가? 자위대에서 나온 후로
는 왜 공청조직에 한번두 안 찾아가나? 동무 혼자 해탄로를 살릴수 있
을것 같애? 우리 해탄사람전체가 하나루 뭉쳐야지.》
억봉은 이 순간에야 태주먹이 동무들과 함께 자기한테 자주 온것이 단
순한 심심풀이가 아니였음을 깨달았다. 억봉은 태주먹이 이미 공산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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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영예를 지니였다는걸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달모에게도 당적영
향을 주고있으며 그한테 억봉이를 잘 돌보라고 이미 오래전에 과업 주
었다는것을 알리 없었다. 억봉은 가슴아픈 비판이였으나 종처를 터쳐놓
은듯 후련하기도 했다.
억봉은 태주먹과 함께 해탄로우의 눈을 말끔히 쓸어냈다. 하늘에서 쉼
없이 눈이 계속 쏟아져내렸으나 억봉은 해탄로로체우를 쓸고 또 쓸었다.
잠시도 손에서 비자루를 놓지 못하는 억봉의 마음은 중앙에서 내려온 간
부가 해탄로문제를 결론한다는 지배인실로 달리고있었다.

배꽃이파리같은 눈송이들이 소리없이 창가에 흩날리는 지배인실에


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행정10국에서 내려온 표정갑부
국장은 지금 지배인이하 새로 임명된 제철소의 각 부서책임자와 그 대
리인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고있었다.
《…에, 도이췰란드의 호프만교수는 자기의 공업단계설에서 공업
화의 단계를 세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즉 생산액적으로 생산수단과
소비재의 비률이 1:3.5~4.5일 때를 공업화의 1단계라고 했고
제2단계는 1:2.5±1인 경우, 셋째 단계는 생산수단이 1일 때 소비
재가 1.5(이 경우에도 1.5보다 하나 크거나 작은 즉 0.5나 2.5)인 경
우로 규정했습니다.
이 공업화의 단계설에 비추어볼 때 영국에서는 소비재에 비한 생산재
(생산수단)비중이 11.4프로에서 24.9프로 즉 1단계에서 2단계에로의 이
행이 1851년부터 1901년까지 50년 걸렸습니다. 미국에서는 생산재
비중이 18.2프로로부터 39.9프로에 이르기까지 다시말해 공업화의 2단
계에서 3단계에로의 이행이 1850년부터 1927년까지 77년 걸렸습니다.
공업화의 1단계로부터 2단계에로의 이행을 비교적 빨리 끝낸 일본에서
도 생산재공업의 비중을 12.4프로에서 24.9프로로 장성시키는데
1900년부터 1925년까지 25년 걸렸습니다. 이처럼 공업화의 한단계
에서 다른 단계에로의 이행은 매우 오래고 어려운 과업입니다.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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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 없는 경제학의 법칙입니다.
경제학자도 아닌 제가 이처럼 장황하게 말하는것은 이제부터 이 나라
경제의 기둥을 떠멘 저나 여러분들의 어깨가 이만저만 무겁지 않다는것
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쌓아진 토대를 가지고도 한걸음 움직이
기가 이렇게 힘든데 우리는 무에서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가
언제 가야 공업화의 1단계과업을 수행하게 될지 그것은 아직 먼 장래의
일입니다. 아다싶이 우리 나라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나라이며 악독
한 일제식민지통치밑에서 그나마 빼앗길대로 빼앗긴 나라입니다. 우
리 나라는 오랜 중병에 시달릴대로 시달린 환자와 다름이 없습니다. 또
이 나라의 공업을 책임진 우리들로서 가장 큰 불행은 우리 나라에 야금
용석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야금용고열탄과 원유가 없이 야금공업
을 세울수 없다는것은 불을 보듯 너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어차피 야
금용고열탄과 원유는 다른 나라에 가서 사오지 않으면 안되는데 아직 우
리는 나라조차 세우지 못했습니다. 나라가 일떠서야 다른 나라에 가서
사오든가 바꿔오든가 어떻게 마련을 할게 아닙니까. 또 설사 나라가 선
다고 하더라도 귀떨어진 동전 한푼 쥔것이 없습니다. 돈이 있어야 사오
고 자기가 가진 물건이 있어야 남하고 바꿔오겠는데 돈도 없고 가진 물
건도 없는 가난한 우리 민족입니다. 공업밑천이 없고 야금연료가 없을
뿐아니라 우리한테는 기술력량도 없습니다. 일제총독부가 1944년에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 야금기술자는 기수가 되나마나한 사
람까지 포함하여 143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나마 명색이 기술자지 제구
실을 할수 있는 사람은 절반도 안되며 또 그 대부분은 남에 있거나 달
아났습니다.
해방된지 반년이 되도록 우리가 아직 이 제철소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극도로 피페한 우리 나라 경제중에
서 피페할대로 피페한 우리의 공업이고 그 공업중에서도 가장 피페한 우
리의 야금입니다.
과연 이런 형편에서 우리는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우리가 살길은 과
연 어디에 있는가? 이 물음앞에 저나 여러분은 심사숙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많고 어려운 통계수자들을 휑하니 머리속에 집어넣은채 뜬금으로
쭈르르 내리엮던 표정갑은 여기서 잠시 말을 끊고 앞으로 약간 숙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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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상반신을 뒤로 젖히며 머리를 갑자기 올려챘다. 그 바람에 올빽으
로 길게 길러 앞이마에 거치장스럽게 드리웠던 윤기도는 까만 머리칼들
이 와뜰 놀라며 머리우로 올라가앉았다. 그는 귀를 덮었던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쓱쓱 쓸어올리며 자기 말에 대한 방안사람들의 반응을 타진하듯
군중을 바라봤다. 보위색승마바지에 번들거리는 가죽장화를 신고 번
쩍번쩍하는 가죽잠바를 입은데다가 넙적한 턱에 미처 깎지 못한 수염까
지 더부룩하고보니 그는 전장에서 갓 돌아온 무사같은 인상을 주었다.
지배인실 한쪽구석에 쭈그리고앉아있던 차지훈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
게 가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제철소 새 기구가 발표되면서 그는 배송기
를 이설하라는 선우치담의 지시를 집행하지 못한것때문에 화공부기사로
강직됐다. 새 기구표에 의하면 제철소 기술부장이던 그가 평기사로
떨어진셈이다. 화공부장이 결원이여서 그 대리로 참석했으니 그러지 기
사라는 직무로써는 이 어마어마한 중앙간부의 연설을 들으러 감히 이 자
리에 오지도 못했을것이다.
표정갑은 수염꺼칠한 턱을 자못 위엄있게 한번 쓸어만지고나서 방안
사람들을 둘러보며 연설을 계속했다.
《이런 사정은 우리들에게 선진적인 우방제국과 손잡지 않으면 안된
다는 결론을 줍니다. 환자가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하는것처럼 우리 나
라는 선진적인 우방제국의 방조와 도움을 받아야만 살수 있습니다.
어떻게 방조와 도움을 받겠는가. 이것은 이제 서게 될 정부가 결정할 문
제입니다. 하지만 명백한것은 우리 나라가 예로부터 농업국가였다는 사
정입니다. 이제 새로 서는 정부가 농업을 위주로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가든, 공업건설에 힘을 넣든 먹고 살자면 농업을 추켜세우지 않으면
안되며 또 공업에 필요한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농업에 모를 박지
않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이곳 제철소를 농업의 야장간으로 꾸려야
합니다. 제철소가 농업의 야장간으로 된다는것은 농사에 필요한 보습과
호미, 걸이대와 낫 등 농쟁기생산에 필요한 강재를 보장한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곳 제철소를 우선 제강소화하여야 하며 용광로와
해탄로를 허물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평로와 압연설비들을 살려야
합니다. 이것은 력사와 지금 우리가 처하고있는 당면한 사회경제형편이
저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앞에 부과하고있는 엄연한 과제입니다. 우
리는 친근하고 선진적인 우방제국의 도움을 받아 기어이 농업의 거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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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장간을 하루속히 꾸려놓아야 합니다. 이제 때가 되면 쏘련을 비롯하
여 우방제국에서 우리를 도와줄것입니다.》
표정갑은 흘러내린 머리칼을 올리느라 머리를 뒤로 다시 채며 위신있
게 한팔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표정갑으로부터 제일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선우치담이 앉은채 소리를 쳤다.
《옳소!》
그러고도 부족해 선우치담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박수를 치자 여
러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박수속에《옳소.》, 《동의요!》하는 환호성
이 몇번 울리였다.
지훈이도 얼결에 박수를 치기는 했으나 그의 입에서는 또다시 한숨이
흘러나왔다. 표정갑부국장의 말은 옳았다. 지훈의 불안과 위구는 콕
스화학기사로서의 운명이 끝났다는데 있기보다 제철소가 제강소화된 이
후 자기 위치와 일할 몫이 명확하지 못한데 있었다. 제철소의 제강소화
도 쉬운 일이 아니였다. 표정갑부국장은 선진적인 우방제국이 때가
되면 도울것이라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너무도 막연한 기대였다.
지훈은 얼마전 책에서 본 제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자
를 명백히 기억하고있었다. 쏘련으로 말해도 이 전쟁에서 2천만의
사람을 잃었고 2차대전참전국들중에서 제일 희생자가 적은 미국이나 영
국도 각각 32만을 잃었으며 프랑스는 52만, 도이췰란드는 천만에
가까운 970만의 사람들이 희생됐다. 어느 발전된 나라치고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나라는 없었다. 자기자신들이 입은 전쟁의 피해를 가
시기도 어려운 형편에서 언제 남을 돕는단 말인가. 친형제라고 하여도
자기 살림이 딸리면 형이나 동생의 살림을 돌볼 여유가 없는게 일반적
인 인간세상사다. 지훈은 오늘 표정갑의 연설을 통하여 선우치담의
해탄로홀시태도가 그의 즉흥적인 기분때문도 아니며 그의 개인의사만도
아님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지훈은 칼에 피묻은 원쑤 못지 않게 감정이 엇설대로 엇선 억봉이때
문에 자기가 처벌받고 강직되였다고 생각하면 억울하고 기가 찼다.
해탄로를 복구할수 있는 전망이 보인다면 지훈은 기술부장자리를 제스
스로 내여놓고 화공부기사가 될 용기가 없지 않았다. 능력이 딸리면서
제철소의 기술관리 전반을 맡아야 하는 중책을 지니기보다는 해탄로옆
에서 콕스화학기사로서 응당 해야 하며 할수 있는 일을 하는것이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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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도리였다. 표정갑은 연설을 계속했으나 자기 생각에 흥분한 지훈
은 그의 말을 하나도 들을수 없었다. 지훈은 표정갑의 연설이 끝나기 바
쁘게 지배인실을 나섰다.
밖에서는 여전히 푸실푸실 눈이 내렸다. 지훈은 집에 가려고 정문쪽
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제 자기 사무실로 돌아간대야 할일이 없다.
설사 일감이 밀리고 쌓였다 해도 지금같은 기분상태에서 일이 손에 잡
힐리 만무하다. 여느때같으면 벌써 어둑어둑해오련만 눈이 내려쌓여 주
위는 밝다. 헐벗고 떨던 제철소구내의 아카시아나무가지마다 휘여들 정
도로 눈이 앉았다. 거무틱틱하던 지붕과 탕크들, 지어는 세워놓은 빈 화
차에마저 폭신한 솜이불을 깔아놓은상싶게 한뽐은 되고 남을 눈이 쌓였
다. 제철소구내우로 지나간 가느다란 전선줄들도 눈때문에 쇠바줄만
큼이나 굵어졌고 용광로에서 해탄로쪽으로 향하는 벨트콘베아며 굵은 가
스관에도 눈이 내려덮였다. 모든것이 검던 이곳에 갑작스레 닥쳐온
근엄한 흰 세계에서 여느때같으면 기분이 한결 상쾌하련만 지훈은 눈내
리는 구내풍경에서 아무런 흥취도 느끼지 못하였다. 지훈은 색이 날대
로 난 외투주머니에 두손을 푹 지르고 올려세운 깃속에 반쯤 머리를 파
묻은채 맨머리바람으로 천천히 걸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무엇을 한다?)
지훈은 스스로 자신에게 물었다. 용광로나 해탄로 없이 평로에서
파철을 녹이자면 가스발생로들을 세워야 한다. 콕스화학전문가인 자
기와 제일 가까운 분야는 가스발생로라 할수 있다. 시험소에 들어앉아
분석을 할수도 있다. 이 넓은 제철소바닥에서 화학전문가로서 자기가 할
새 일은 해탄로를 내놓고도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지배인도 아직 자기
를 붙들어두는것이다. 하지만 지훈은 남의 뒤바라지나 하면서 별로
신통치도 못한 눅거리일을 하고싶지 않았다. 이곳에 남아 그런 일이라
도 하자면 억봉이나 알뜰이와 화해를 해야 했다.
《허튼소리말아. 언젠 일본놈새끼한테 석탄을 끌어내다주더니 오늘은
배송기를 가져다 누구한테 주려는거야?》
지훈은 자기 가슴에 억봉이가 총을 들이대고 고함지르던 이 말을 잊
을수 없었다. 지훈은 가슴에 총구를 대던 그것보다도 이 말이 더 가슴
아팠다. 일본놈 개몰듯 하던 그와 어떻게 다시 손을 잡는단 말인가. 억
봉이와 이처럼 엇서게 된것도 해탄로를 버리고 파철을 녹이지 않으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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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괴로운 필요성을 제스스로 남먼저 깨달은데 있었다.
지훈은 콕스화과정에 대해서는 남한테 별로 지지 않는다고 스스로 자
부하여왔으나 다른 야금행정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런대로 야금
의 일반물리화학적행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삐칠수 있었으나 설비들
에 대해서는 캄캄했다. 평로에 대해서는 특히 그랬다.
지훈은 평로관리와 그 운영에 필요한 지식과 야금설비들에 대한 자료
들을 뽑아내기 위하여 야마다에게 석탄만이 아니라 자기가 배급받은 쌀
도 남모르게 떼주었고 술과 고기도 몇번이나 사보내주었다.
자기는 못 먹고 미운 놈한테 먹여야 하는 지훈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
았다.
지훈은 야마다가 기술부장을 하던 때부터 그를 인간적으로 바로 보지
않았다. 야마다는 대학을 나왔다지만 야구선수생활로 배움의 나날을 보
낸 사람이였다. 그한테서는 지성인다운 면모보다 무지막지한 폭군다
운데가 더 많았다.
지훈은 해방이 된 오늘에 와서까지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격으로
그와 련계를 가지자니 속이 꿈틀거리는 때가 한두번 아니였었다. 자기
도 남못지 않게 일제놈들을 미워해왔고 남못지 않게 제철소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것을 다해왔으나 억봉은 자기를 일본놈앞잡이로, 해탄로의
파괴분자로 여기고있었다.
지훈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차거운 눈송이가 뺨을 스치고
때로 목깃에 파고들었으나 지훈은 그 차거움을 느끼지 못하였다.
제철소구내를 벗어난 그는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골목길 좌우에 늘어
선 올막졸막한 단층집들에는 벌써 불이 켜졌다. 집집의 창문에서 흘러
나오는 불빛이 골목길에 깔린 눈우에 누웠다. 사람이 갓 지나간 발자국
우에 눈이 내리고 그 눈이 다시 다져지면 그우에 또 눈가루가 뿌려진다.
집집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은 눈에 반사되여 달밝은 밤처럼
골목길을 밝혔다. 지훈은 머리를 숙인채 발걸음을 옮기며 다시 자신에
게 물었다.
하찮은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 남아 일본놈앞잡이라는 모욕까지 받아
야 한단 말인가. 그럴바하고는 어느 다른 도회지나 시골에 가서 교편을
잡든가 조용한 회사에 취직하는게 좋을것이다. 하지만 어디로 간단
말인가? 갈곳이 많은것 같으면서도 이 엄동설한에 반갑게 맞아줄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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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없는 지훈이다.
지훈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자기는 자운리와 대송리가 경계
를 이룬 골목길에 서있었다. 골목길갈래는 사방으로 나있었다. 지훈
은 골목 네거리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눈내리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
다봤다. 맨머리바람인 그의 머리칼에는 흰 솜모자처럼 눈이 수북이
내려앉았다. 눈송이들은 추위에 얼어들어 이미 아무 감각없는 얼굴에도
한송이 두송이 꽃잎처럼 뿌려졌다.
이때 어둠속에서 한사람이 지훈이쪽으로 다가섰다.
《지훈이 아닌가?》
불시에 그한테 다가서는 사람은 송표였다. 지훈이가 제철소정문을 벗
어나 우편국앞을 지나던 때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으로 그를 알아보
고 지금까지 뒤에서 말없이 따라온 그다.
《감기들겠네. 몸도 녹일겸 한대포 하러 가세나.》
송표는 다짜고짜로 지훈의 팔을 끼고 그를 으슥한 뒤골목으로 끌었다.

떠오른 아침해가 유리창문으로 술집방안을 빠끔히 들여다보며 면바로


얼굴을 비치던 때에야 지훈은 잠에서 깨여났다.
지훈은 소스라치듯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머리가 핑 돌았다.
그는 어제 밤 먹을줄도 모르는 독한 술을 송표가 주는대로 받아마시
다 곤드라졌었다.
《자, 빨리 아침을 먹자구.》
드르륵 웃방미닫이가 열리더니 송표가 얼굴을 내밀었다. 어제 밤
술시중을 하던 애젊은 계집을 웃방에서 끼고 잔 송표는 언제 일어나 세
면까지 했는지 말쑥한 얼굴로 싱글벙글거리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지훈은 대바람에 얼굴이 붉어졌다. 지훈은 어제 송표를 따라올 때만
해도 이 술집이 밀가루집인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한때 무당노릇을
하다 지금은 신딸, 신어미가 모두 술을 팔고 몸을 파는 이 집이 송표의
오랜 단골집이라는것을 지금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지훈이였다. 지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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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자기를 송표같이 여길가봐 창피스러웠다. 지금 그의 심정은
동정을 빼앗긴 숫총각 비슷했다.
녀자들에게 정조관념이 있듯이 남자들에게도 그 비슷한 관념이 있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순결한 사람일수록 자기의 순정을 아끼며 지키려고
애를 쓴다. 지훈은 지근거리는 골을 한손으로 싸쥐고앉은채 담배만
뻑뻑 피웠다.
《술먹어 골이 아플 때에는 해정술을 해야 하는거야. 해정술맛에
술을 마시는거구…》
지훈은 침을 탁 뱉고 밖으로 뛰여나가고싶었으나 밝은 대낮이여서 그
러지 못하였다. 그러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세상에 이보다 더
큰 망신은 없다.
지훈은 송표의 강권에 못이겨 세면도 안한채 조반상에 앉았다.
지훈은 다시 술먹고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너무나 골이 지근거려 송표
가 권하는대로 꽃소주 한잔을 받아들었다. 꽃소주는 이상스럽다고 할 정
도로 효험이 있었다. 송곳으로 쿡쿡 찌르는것 같던 머리가 점차 거뿐해
졌다. 그 바람에 지훈은 또 한잔 술을 들었다. 지훈은 자기도 모르는 사
이에 해정술에 다시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지훈의 낯빛이 불깃불깃해
지자 송표는 어제 저녁에 하던 말을 다시 꺼냈다.
《나하구 서울로 가자구. 여기 겸이포바닥은 우리 지성인들이 살기가
너무 비좁단 말이야. 자네야 재간이 있겠다, 무엇이 두렵나. 미국사
람들은 자네를 떠받들걸세. 미국은 〈지성의 왕국〉,〈자유의 왕국〉이
란 말이야. 난 일본놈때두 어떻게 하면 미국같은 나라에 못 가볼가 하
구 꿈꾸어왔었네. 그런데 미국사람들이 우리의 해방자루 조선에 올
줄이야…》
송표는 신이 나서 지껄이였으나 지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훈이 송표를 아는지는 오래였다. 지훈은 그를 지성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송표는 몇해 락제를 하다 세번째만에야 중학교라고 졸업한
위인이였다. 야심가이며 음모군인 송표가 지금 제 돈으로 술을 사먹일
때에는 무슨 꿍꿍이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지훈은 송표와 말하고싶은 생
각이 별로 없어 부지런히 안주를 집어먹고 술을 마셨다. 그 바람에 해
정을 한다는게 다시 취하고말았다.
기운낮이 되여올무렵 지훈은 잠도 깨고 술도 다시 깨였으나 술집밖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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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얼굴을 내밀기 창피스러워 송표와 바둑을 두며 어두울 때까지 그 자
리에 눌러앉아있었다. 지훈은 날이 어두워서야 송표의 달첩격인 단골밀
가루집을 나섰다. 지훈은 자기네 집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제 지배
인실을 나서 꼭 스물네시간만에야 집에 가는셈이다. 집에 오니 아이들
은 벌써 곤드라지고 어머니 한씨만 밥상을 챙겨놓은채 지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저녁 먹었어요.》
지훈은 서둘러 웃방으로 올라갔다. 웃방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아궁이 따로 있으나 석탄이 떨어져 불기를 끊은지 오래다.
《얘, 그 랭방에서 어떻게 잔다고 그러냐?》
한씨는 웃방에서 옷을 벗느라 버스럭거리는 지훈을 보고 지청구를 했
다. 자식이 넷이나 되고 서른고개를 넘기였으니 이제는 어른취급을
해야겠으나 어머니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얘, 편지 왔다.》
《내려간다는데요.》
지훈은 랭방에 쭈그리고앉아 뻑뻑 담배만 빨았다. 지훈은 웃방에서 잘
생각이였으나 손마저 곱아드는 바람에 어쩌지 못하고 아래방으로 내려
왔다. 어머니는 두살짜리 막내를 끼고 아래목에 벌써 잠이 들었다.
되는대로 누워자는 자식들을 보자 지훈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아래
방이래야 구들이 사람신세를 지려드는판이여서 별로 나은게 없지만
여섯식구의 체온에 한결 훈훈하다. 지훈은 어머니가 편지 왔다고 하던
말이 생각나서 방안웃목에 놓은 앉은뱅이책상앞으로 다가갔다. 상우
에 놓여있는 편지는 뜻밖에도 장인한테서 온 편지였다. 지훈은 이상하
게도 가슴이 후두두 뛰였다.
죽은 처와 자식들앞에 남편으로, 아버지로 량심상가책을 느끼는 이 순
간에 공교롭게도 장인의 편지가 날아들줄이야. 장인의 편지 구절구절은
지훈의 가슴을 비수처럼 찔렀다.
《…하긴 이 세상에는 〈딸없는 사위〉,〈불꺼진 화로〉라는 말도 있
네. 하지만 넷이나 자식을 낳고 죽은 처를 그렇게 괄시하는 법이 어디
있나. 죽었을 때 부모들한테 알려주지도 않고있다가 댓달후에야 몇자 적
어보내주었으니 말일세. 난 자네가 우리 미옥이가 살아있던 때 의좋게
지내였더라면 이런 가슴아픈 말까지는 절대 적지 않았을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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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은 편지를 이 이상 더 읽어갈수 없었다. 편지에 적힌 글자 하나
하나가 살아뛰며 돌멩이처럼 지훈의 두눈을 아프게 때리였다.
지훈은 제철소운영동지회에서 일하던 때 자금해결차로 서울에 가
면서야 장인한테 처가 죽은 소식을 편지로 전했었다. 늙은 장인, 장모
한테 될수록 슬픈 소식을 알리고싶지 않아 미루고미루다 아무래도
출장길에 처가를 찾아가야겠기에 소식을 전한것이다. 자금해결차로
서울에 올라가던 때 지훈은 처가가 있는 옹진에 기어이 들릴 생각이였
지만 제철소에서 일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전 한푼 쥐여주지 못
한탓으로 억봉이한테 동지회안에는 일본놈때 으시거리던 사람들만
모였다는 가슴아픈 말을 들은 절박감때문에 서울로 곧장 올라갔었고 자
금이 다소 해결될 가망이 보이게 되자 처가에 들리는것을 뒤로 미룬채
다시 여기로 곧장 왔다.
편지 한장 띄워보낸 후 처가 죽은지 돌이 되여오도록 아직 찾아가지
못했으니 인간의 도리가 아니였다. 남의 귀한 자식을 데려다 살다
죽였으니 장인, 장모앞에 꿇어앉아 잘못했다고 빌기라도 했어야 인
사가 아니겠는가. 장인이 편지에 쓴것처럼 처가 살아있던 때 의나
좋았더라면 지훈의 마음이 지금처럼 아프고 가책에 갈기갈기 찢기지는
않을것이였다.
지훈은 자기보다 세살이나 손우인 마음없는 처녀한테 장가를 들었었
다. 아버지가 파산당하지만 않았어도 지훈은 절대 죽은 처 미옥한테 장
가들지 않았을것이다. 집안이 기울어 지훈이 중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우유배달부노릇을 하던 때 그가 알뜰이라는 가난한 집 어여쁜 처
녀에게 반했다는것을 알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본인의 의사를 무시
한채 돈냥이나 있는 집 딸한테 하루아침 장가를 들이고말았다.
지훈은 안해덕에 공부를 다시 했고 기사자격까지 얻을수 있었으며 기
울었던 집안형편도 어느 정도 바로잡을수 있었으나 안해에게 정을 붙이
지 못했다. 그래 스물전의 철없던 시절에는 애매한 처를 못살게도 굴었
고 리혼하자고 처를 구박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안해는 지훈에게 충실
했다. 지훈이 공부한다고 집을 떠돌아다니며 편지 한장 보내주지 않아
도 안해는 남편을 대신하여 가정을 돌보았고 매달 학비를 보내주었으며
방학때 어쩌다 집에 왔다갈 때에는 역에까지 따라나와 눈물을 흘리며 바
래주군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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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은 자식들이 태여나게 되고 한두살 나이들어갈수록 안해가 불쌍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많이 배우지 못했고 그리 잘생기진 못했지
만 안해는 별로 나무랄데 없는 녀자였다. 남편에게 성실했으며 시부모
들을 공대할줄도 알았다. 순종에 관습된 가련한 안해를 탓하기 앞서 봉
건적인 결혼을 강요한 아버지나 어머니를 탓해야 할것이고 부모들의 강
요에 굴복하여 사랑없이 장가든 자기자신을 탓해야 할것이였다.
지훈은 안해가 불쌍한 생각에 그와 헤여지지 못했다. 그때부터 지훈
은 별로 사랑은 없으면서도 가정생활을 하여왔었다. 피치 못할 운명에
순종하여 사랑없이 살기는 하면서도 자기의 지향을 리해할만 한 녀자가
못된다고 될수록 얼굴맞대기를 피해오던 안해, 남편과 함께 가정생활의
아기자기한 재미를 나누어보지 못하고 자식들을 키우며 시부모를 섬기
느라 묵묵히 자기의 꽃다운 청춘을 바친 안해, 지훈은 살뜰한 사랑을 이
렇다하게 언제한번 주어보지 못한 안해가 갑작스레 덜컥 세상을 떠나고
보니 아연했다. 지훈은 안해가 산후탈로 고생하던 때 병원에 입원만 시
켜놓고 몇번 찾아가 못 본게 못내 가슴에 맺혀 내려가지 않았다. 깊은
사랑은 없었으나 그가 이렇게도 갑자기 세상을 떠날줄을 몰랐고 그것을
꿈에서조차 바란적이 없었다.…
지훈의 두눈에서는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훈은 그날 밤
잠들지 못하였다. 가슴쓰라린 자책으로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뜬눈으
로 밤을 새웠다. 괴로운 모대김속에 지훈의 가슴속에서는 막연하고
희미하던 생각이 점점 또렷해지고 명확해가는것이였다.
온갖 괴로움을 이 악물고 참아온 값에 나에게 차례진것은 과연 무엇이
였단 말인가. 나는 알뜰이나 억봉이네를 위해 안해 잃은 슬픔을 눅잦히
며 처가에 들리는것마저 뒤로 미루고 제철소로 달려왔건만 그네들은
내 가슴에 총까지 겨누지 않았는가. 내 자식, 내 어머니를 배곯리며
얄미운 야마다한테 내 배급쌀을 잘라 보내주고 사랑하는 혈육들을 찬 구
들에 재우면서 내가 때야 할 월동용석탄을 보내준것이 무엇때문이였던가.
쌓이고쌓인 울분은 압축된 공기처럼 터져나갈 곳을 찾았다. 벌떡
자리에 일어나앉자 곤히 자는 어머니와 자식들을 굽어보던 지훈은 저혼
자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떠나자. 어디론가 떠나자. 더는 이곳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
그리 길지 않은 장인의 편지는 방축을 무너뜨리는 개미구멍과 흡사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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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송표가 온갖 친절을 다 베풀며 이곳을 떠나 서울로 가자고 그처럼
권하던 때에만 해도 마음을 도사리며 딱 네발을 앙버티게 되던 지훈이
였으나 장인의 편지라는 개미구멍에 이 나라의 야금을 위해 한생을 바
치리라고 이날이때까지 지훈이가 마음속에 쌓아온 방축이 와르르 무너
져내리고만것이다. 정거장쪽에서 새벽기차의 기적소리가 울려왔다.
그 기적소리는 지훈을 어서 오라 부르는듯 구슬펐다. 어머니가 일어나
아침밥을 지으러 부엌에 나간 후에도 멍히 천정만 올려다보며 자리에 누
워있던 지훈은 옷을 입었다.
이제 좀 있으면 아이들이 깨여날것이다. 아무래도 잠들지 못할바에는
밖에 나가 눈이라도 치고싶었다. 어제 밤에 오다보니 자기 집주변에만
아직 눈이 그득했다. 지훈은 지금까지 가정생활에 무관심해왔었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늙은 어머니한테 가정생활의 크고작은 부담을 모
두 지워왔다. 건강도 씨원치 않은 어머니가 네 손자를 돌보기만도 얼마
나 힘들랴.
지훈은 넉가래를 찾아들고 벅벅 눈을 쳤다. 자기 혼자생각에 골몰하
여 넉가래만 내려다보며 눈을 치던 지훈은 옆집쪽에서 마당을 쓸어나오
는 소리에 허리를 펴며 머리를 들었다. 마당을 쓸던 녀인도 지훈을 알
아보았는지 허리를 폈다.
새벽어스름속에 마주선 녀인은 알뜰이였다. 배송기렬차사건이후 지훈
은 알뜰을 처음 본다. 아침인사도 없이 지훈은 돌아섰다. 순간 알뜰이
도 아무말없이 돌아서더니 자기 집쪽으로 마당을 쓸어갔다. 두사람은 서
로 피했다. 그리하여 두집사이 마당엔 눈과 먼지가 그 무슨 뚝처럼 그
대로 남았다.

조용한 깊은 밤중이면 대동강에서 쩡쩡 강물 얼어터지는 소리가 강기


슭의 로동자부락에까지 들려왔다. 대한추위는 차겁고 굳은 얼음철쇄
로 강의 흐름을 완전히 비끄러매는가싶었다. 강이 얼마나 두텁게 얼어
붙었는지 남포에 사는 약삭바른 장사군이 평양으로 에돌아 송림에 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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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자동차로 곧장 얼음을 타고 대동강을 건너와 비료를 한 자동차 사
싣고 돌아갔다는 말이 항간에 떠돌았다. 그 말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딱히 알수는 없어도 대동강에 붙어사는 낚시질군들의 말에 의하면 강이
댓자나마 되게 얼었다고 했다. 이대로 가서는 강이 바닥까지 통채로 얼
어붙을지도 모를 일이였다.
추위는 범박골의 범바위와 룡암의 삿갓바위마저 쩍 빠개여놓을상싶게
지독스러웠지만 강의 흐름을 중단시키지 못하였다. 강의 흐름과 운동은
눈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썰물때가 오면 쩍쩍 버그러진 얼음장들이 기슭
으로 게바라오기라도 한것처럼 높이 드러났다가도 밀물때가 되면 활등
처럼 휘였던 강기슭의 그 얼음면이 다시 평평해지군 하는것이였다.
도에 가서 석달간의 강습을 마치고 돌아온 석봉은 시민청지도원이 되
였다. 그동안에 그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퍽 유식해졌고 말과 행동
역시 의젓해졌다. 억봉이한테 늘쌍 쥐여살아오던 그가 제법 형을 가르
치려들었다. 어느날 아침밥을 먹고나서 석봉은 형한테 물었다.
《형, 어제 신문 봤나?》
억봉은 대답대신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황해도농민대표들이 장군님을 찾아갔대.》
《뭐?》
《토지를 밭갈이하는 농민들한테 나누어달라구 말이야.》
《야!》
억봉이 놀라며 감탄을 금치 못해하자 석봉은 슬며시 형을 퉁놓았다.
《신문 한장 안 보니 그런것두 모르지.》
이전같으면 형을 가르치려든다고 울컥했을 억봉이였으나 뒤통수만 긁
적거리였다. 작년가을부터 주변농촌들에서 3.7제를 위한 투쟁이 벌
어지고 농민들의 기세가 날을 따라 높아간다는 소식을 억봉이자신도 듣
지 못한바 아니였지만 그들이 장군님한테까지 찾아갈줄이야. 소작료
를 3.7제로 낮추기 위한 첫 싸움에서 이기더니 농민들은 확실히 담
이 커졌다. 하긴 요즘은 민주건국의 새 력량이 비온 뒤 참대순처럼 쭉
쭉 자라며 활개치는 세월이였다. 모스크바3상회의결정을 반대하는 반동
들의 준동을 뒤집어엎기 위하여 얼마전 송림에서도 대대적인 군중시위
가 있었고 억봉이도 여기에 참가했었다. 억봉은 가까운 주위에서 꼬리
물고 벌어지는 격동적인 사변들을 목격하게 될수록 자기가 시대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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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동떨어져 담을 쌓고 혼자 사는것 같은 공허감을 금할수 없었다. 허
전하고 쓸쓸한 이 마음은 동생 석봉이가 강습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오
면서 더해졌다. 요즘 석봉은 매일같이 무슨 회의요, 강연조직이요,
웅변모임준비요 하면서 눈코뜰 사이없이 바쁘게 돌아치건만 자기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는 일없이 파괴된 배송기옆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억봉
은 동생이 부러웠다. 형이 자기 말에 귀를 주자 석봉은 한술 더 떴다.
《형, 강습 가라.》
《강습?》
《응, 우리 시민청에서 이번에 강습보낼 사람들을 골라.》
《나두 배웠으면 좋겠는데 그럴 겨를을 못내 그런다.》
억봉은 코방귀를 뀌며 시답잖게 뇌까렸다. 형의 말을 제나름으로 해
석한 석봉이가 억봉이앞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형이 강습 가겠다면 내 쌀 몇말 얻어줘.》
강습을 가자면 강습기간 먹고 쓸 모든것을 자기가 가지고 가야 한다.
며칠내로 알맞춤한 강습대상자를 고르라는 과업을 받은 석봉은 어떻게
해서든지 억봉을 끌어넣으려고 구슬렸다.
《네까짓게 어디서 쌀을 얻어.》
《체, 내 편지 한장이면 문제없어.》
석봉은 이번에 강습 갔다 사귄 봉산처녀를 념두에 두고 큰소리를 쳤
다. 강습기간 석봉은 그 봉산처녀와 이만저만 가까와지지 않았다.
《희떠운 소리 작작해라. 그런 재간 있으면 한말이래두 좋으니 집에
좀 얻어오려무나. 멀건 좁쌀죽만 훌훌 마시지 않게…》
《뭐 민청일군이 시시하게 제 집살림이나 꾸리는 사람인줄 아나? 혁
명을 해야지… 형은 밤낮 시커먼 오소리굴같은데 배겨있으니까 락후해
졌단 말이야.》
《임마, 나두 혁명을 하느라 시커먼 오소리굴에 배겨있는거야. 제
철소가 없어봐라. 너희 시민청이 뭐냐?》
형제는 출근준비를 하다말고 구들에 앉아 싱갱이질이다. 형제지간
의 승벽은 시와 제철소의 관계문제로까지 확대됐다. 알뜰은 아래목에 앉
아 머리를 빗으며 저 혼자 빙그레 웃었다. 그들의 승벽내기가 누구의 승
리로 끝나겠는가 하는 관심보다도 알뜰은 석봉의 발전이 빠른게 놀랍고
대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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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투가 그리 곱지 못해도 형제사이에 비교적 순하게 오고가던 말은 갑
자기 거칠어졌다. 억봉의 말에 석봉이가 벌컥 화를 내는것이였다.
《민청을 걸고들지 말어. 형은 민청원이 아니야? 나를 욕하는건 참을
수 있어두 우리 민청을 걸고들면 가만있지 않겠어.》
석봉은 두눈이 황황 타오르면서 숨결까지 거칠어졌다. 어린시절에
는 우락부락한 억봉의 밑에서 자란탓에 울고불고할 때가 아니면 별반 나
타나지 않던 석봉이다.
그날 저녁때였다. 아침에 다툴 때 같아서는 서로 원두쟁이 쓴외 보듯
하며 말도 할것 같지 않더니 억봉은 석봉이한테 아닌밤중 홍두깨 내밀
듯 물었다.
《야, 너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가 어디에 있는줄 아니?》
석봉은 불같이 대답을 독촉하는 형의 눈길과 마주치자 마지못해 되물
었다.
《그건 왜?》
《장군님께서 거기서 일보신다면서?》
《글쎄…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야 평양에 있지.》
《임마,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니…》
《내 원참, 그건 갑자기 알아서 무엇하겠다는거야?》
석봉이자신도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가 평양 어디에 있는지 딱
히 알지 못했지만 그보다도 형의 물음이 너무나 왕청떠 놀라왔다.
《장군님을 찾아가려구.》
《뭐?》
대바람에 석봉의 두눈은 커졌다. 롱으로 치기엔 형의 말뜻이 너무나
컸고 표정 역시 진중했다. 억봉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한참이나 석봉을
바라보더니 중요한 그 무엇을 귀띔하듯 말했다.
《농민들이 땅을 달라구 장군님을 찾아간다는데 우리두 장군님을
찾아가자꾸나.》
석봉은《자유황해》에서 본 소식을 오늘 아침 형한테 전한 생각이 났
다. 형이 요즘 신문 한장 제대로 보는것 같지 않아 자극을 주느라고 그
말을 했었는데 형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형은 점점 한다는 소리가… 농민대표들이야 토지개혁과 관련한
중요한 일루 진정하러 간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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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두 그 못지 않는 중요한 일을 진정하러 가잔 말이야.》
석봉은 형한테서 자못 놀라운 눈길을 떼지 못했다. 억봉은 동생이 의
아해하며 자기 말에 귀를 강구자 그 누구도 풀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의
답을 마치 자기가 찾아내기라도 한것처럼 말했다.
《해탄로에 불을 살리자면 장군님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어.》
억봉은 얼마전 산업국에서 내려왔던 부국장이란 사람이 제철소간부
들을 모아놓고 해탄로를 허물어버리여도 좋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산
업국의 큰 간부까지 그런다니 이제는 쥐뿔도 믿고 바랄데가 없었다. 지
금처럼 해탄로를 내버려두면 자연히 허물어져버릴것이고 제철소를 제강
소화하는 공사가 벌어지게 되면 해탄기계들과 설비들을 점점 더 다른데
돌려쓰기마련이다. 억봉이 오래동안 생각하고 모대기던 끝에 자못 심중
하게 한 말이였으나 동생은 시답지 않아했다.
《흥, 누가 그러면 좋은줄 몰라. 하지만 그건 자그마한 문제거던.》
동생이 퉁을 놓는 말에 억봉은 가만있지 못했다.
《왜 작은 문제란 말이야? 콕스를 구워야 쇠를 녹일게구 쇠를 뽑아야
나라두 세운단 말이다.》
언젠가 준길삼촌이 평양 리선생을 찾아갔다와서 자기한테 한 말이였다.
《토지개혁에 관한 문제는 온 나라 농민들의 세기적숙망에 대한 문제
구 온 나라 농촌에 관련된 문제거던. 하지만 해탄로복구문제는 아무리
중요해두 우리 제철소문제란 말이야. 해탄로가 온 나라에 다 있는것두
아니지 않아. 이런 한 공장안의 문제를 가지구 어떻게 장군님을 찾아뵙
겠다는거야?》
동생의 론박은 사리정연했다. 억봉은 동생의 말을 시인하면서도
장군님을 찾아가뵙고싶은 충동과 욕망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동생의 갖은 설복과 만류에도 억봉은 다음날 새벽 그예 평양으로 떠


났다. 억봉은 온종일 걸어 해질무렵에야 평양에 이르렀다.
평양은 한골짜기에 모두 들어앉은 송림과 달랐다. 동서남북조차 모르
면서 이 넓은 장안에 장군님이 어디에 계신줄 알고 찾아가며 설
사 안다 한들 장군님을 어떻게 만나뵈올수 있겠는가. 억봉은 평양의 거
리거리에 넘쳐나는 사람들을 보자 그들과 싸이기 어렵게 생각되면서 일
종의 불안과 위압감을 느끼게 되는것이였다. 억봉은 리선생부터 찾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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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 마음먹었다. 리선생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장군님을 만나뵈
올수 있는지 알수 있을것이다.
억봉은 언젠가 준길삼촌한테서 들었던 리선생의 주소를 기억으로
더듬어 밤새 골목골목을 헤매였으나 허사였다. 억봉은 다음날 한낮
리선생이 하숙하던 집을 찾았으나 리선생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이제는 어쩌는수 없이 장군님께서 일보신다는 북조선공산당 중
앙조직위원회로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억봉은 만나는 사람마다 길을 물어보며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청사가 자리잡은 곳까지 비교적 쉽사리 찾아올수 있었다. 어려운 일은
이제부터였다. 당중앙조직위원회청사정문에는 위엄있는 자세로 보초
가 서있었다. 억봉은 백여리 먼길을 주저없이 찾아왔으나 보초의 모습
을 보고 그앞으로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억봉은 약간 경사진 길을 따라 둔덕쪽으로 천천히 보초앞을 지나갔다.
보초와 눈길이 마주치면 굽석 인사를 하고 비위좋게 다가가서 말이라도
비쳐보련만 보초는 왼눈 한번 팔지 않았다. 억봉은 창광산쪽을 향해 천
천히 둔덕에 올라서자 방향을 바꾸어 온 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억봉은
보초가 자기쪽을 바라보라고 어험어험 마른기침을 했으나 보초는 여전
히 립상처럼 까딱하지 않았다. 억봉은 경사지를 다 내려와서 펑퍼짐한
곳에 이르자 다시 온 길을 되돌아 둔덕쪽으로 걸어갔다. 이러기를 몇번,
하지만 보초는 억봉이한테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억봉은 당중앙조직위
원회청사쪽을 바라보며 둔덕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공산당중앙조직위원회청사주위에는 엄숙한 정적이 깃들어있었다.
꼬리물고 급하게 달려오던 여러대의 승용차가 속력을 죽이더니 정문
보초앞을 지나 마당안으로 소리없이 미끄러져들어갔다. 서로 무엇인
가 속삭이며 걸어오던 두 중년부인이 옷깃을 여미며 청사정문으로 조용
히 다가서고 옆구리에 무슨 문건 같은것을 낀채 급한 걸음으로 다가오
던 젊은 사람이 당중앙조직위원회청사 가까이에 이르자 조심조심 걷는
다. 당중앙조직위원회청사주위에 어려있는 엄숙한 고요속에는 참신하고
줄기차며 긴장된 그 무엇이 느껴졌다.
억봉은 둔덕우에 우두커니 서서 당중앙조직위원회건물쪽을 바라보
며 움직이지 못했다. 억봉이가 서있는 옆으로 검은 외투를 입은 한사람
이 지나갔다. 인정 많고 인품 있어보이는 50대의 늙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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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은 그 사람한테 굽석 허리굽혀 인사부터 했다.
《누구신지요?》
지나가던 사람은 걸음을 멈추며 인사를 받았으나 당황해했다.
《저 미안하지만 말씀 좀 물읍시다.》
《예.》
《저기 저 집에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가 있습니까?》
억봉은 둔덕아래쪽 고층건물을 가리켰다. 나이지숙한 길손은 억봉
을 아래우로 한참이나 살펴보았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왔으나 차겁지 않
았다.
《예, 왜 그러십니까?》
손님은 공손히 되물었다.
《저 볼일이 좀 있어서…》
억봉은 얼결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같이 갑시다.》
길가에서 만난 사람은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에 무슨 일을
보러 오던 모양이였다. 청사정문에 다가서서 그가 증명서를 내보이자 큼
직한 개털외투를 입고 서있던 보초는 군말없이 그를 통과시켰다. 하지
만 억봉은 들어갈수 없었다. 보초가 련락하자 보초장이 나왔다. 보초장
은 그를 접수에 안내했다. 접수원은 억봉이한테 무엇때문에 어디서
왔는가를 무척 깐깐하게 따져물었다.
《장군님께 말씀드릴게 있어서 왔습니다.》
억봉을 한참이나 올리보고 내리보며 까다롭게 굴던 접수원은 벌떡 자
리에서 일어서더니 친절하게 의자를 권했고 기다리라면서 어디엔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한참만에 접수를 책임지고있는상싶은 한사람이 나
오더니 억봉을 찾았다.
《무슨 일로 장군님을 찾아오셨습니까?》
그 사람은 상냥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예, 제철소일루 진정하려구요.》
《다른 간부동지들을 만나시면 안되겠습니까?》
《예, 장군님을 꼭 만나뵈와야 하겠습니다.》
억봉이 축잡히지 않으려고 강경히 말하자 그는 딱해했다.
《그렇습니까? 지금 장군님께서는 계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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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은 점잖게 자기를 되돌려보내려는줄 알고 불신의 선입감이 앞
섰다.
《그럼 제 기다리겠습니다.》
억봉은 장군님만 만나뵈올수 있다면 사흘이고 나흘이고 여
기서 기다리고싶었다.
《장군님께서는 지금 먼데 가셨습니다.》
억봉은 그 사람의 말이 하나도 믿기지 않았다.
《그러지 말구 장군님을 잠간만이라두 만나뵙게 해주십시오.》
억봉은 낮추 붙으며 사정을 했다.
《동무, 내 말을 믿지 않누만요.》
《정말입니다. 한 십분만 만나뵙게 해주십시오. 몇마디만 말씀드리면
됩니다.》
《정말, 동무두…》
이때 당중앙조직위원회청사안에서 두사람이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중 한사람은 얼마전에 억봉을 접수까지 데려다주던 나이지숙한
사람이였고 한사람은 번들거리는 가죽잠바에 목긴 장화를 신은 사람이
였다. 억봉을 설복하던 접수책임자인상싶은 사람은 그들중 누구와 아는
사이인 모양이였다.
《비서동지!》
접수책임자는 정문밖으로 나가려는 두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접수
책임자의 부름에 아까 억봉이와 길에서 만났던 나이지숙한 사람이 걸음
을 멈추었다.
《비서동지! 제철소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비서라고 불리운 나이지숙한 사람이 접수로 다가왔다. 그러자 그와 동
행하던 가죽잠바도 접수쪽으로 걸어왔다.
《제철소로동자 한 동무가 장군님을 만나뵙겠다고 찾아왔는
데 지금 계시지 않는다니까 믿지 않아서 그러지 않습니까.》
비서라고 불리운 나이지숙한 사람은 억봉을 알아보고 악수를 청했다.
《동무였구만. 이전 겸이포제철소에서 왔습니까?》
《예.》
억봉의 대답에 그는 여간만 반가와하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알고지냅시다. 전 리석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그곳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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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비서로 가게 되였습니다.》
억봉은 아까 길에서처럼 다시한번 굽석 인사를 했다. 억봉은 이때에
야 그옆에 서있는 가죽잠바차림의 사람을 보았다. 얼마전에 자기네
제철소에 왔던 그 산업국 부국장이였다. 이 부국장은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가죽잠바를 입었었다. 억봉은 그가 제철소에 왔을 때 먼발치로
한번밖에 못 보았으나 그를 잊을수 없었다. 억봉은 그를 알아보는 순간
웬일인지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쓰는듯싶었다.
억봉을 눈여겨 바라보며 서있던 리석이 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억봉은 주저주저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장군님을 만나고싶어서요.》
《그렇습니까? 저도 지금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중
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지방을 현지지도하고계십니다.》
리석은 무척 친절히 말했으나 억봉은 사람들이 자기를 따돌리려 하는
것 같은 선입견이 확신으로 굳어지면서 야릇하게도 반발심이 불쑥 머리
를 쳐들었다.
《그러면 저도 장군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억봉은 오히려 잘됐다는듯이 부드러운 어조속에 뼈가 있는 대답을 했
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포착한 사람은 표정갑이였다.
《아따, 이 동무봐라.》
가죽잠바주머니에 두손을 지르고 리석뒤에 위엄있게 서있던 표정갑이
앞으로 나섰다.
《동무, 왜 장군님을 만나겠다는거야?》
표정갑은 첫마디부터 반말을 했다. 억봉은 호령기가 섞여있는 그의 물
음에 주눅이 들어 말끝도 제대로 여물구지 못했다.
《꼭 말씀드릴게 있어서…》
《동무 공산당원이나?》
《아닙니다.》
《공산당원두 아닌 사람이 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를 찾아왔다?》
표정갑이 비꼬듯 하는 말에 억봉은 말문이 막혀버리면서 얼굴에 모닥
불을 뒤집어쓰는것 같았다.
《이름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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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억봉입니다.》
《박억봉이라? 듣던 이름인데… 동무, 무슨 일하나?》
《저…》
《제철소에서 동무 뭘하나 말이야?》
억봉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갑자르던 끝에 힘겹게 입을 열
었다.
《자위대장노릇을 하댔는데…》
《자위대장을 한다?》
《지금은 아닙니다.》
《그럼 동무가 배송기사건때문에 철직됐다는 친구야?》
그러지 않아도 어성이 높은 표정갑은 대바람에 말투까지 거칠어졌다.
그는 기억력이 비상했다. 얼마전에 제철소를 돌아보러 갔다가 선우치담
한테서 들은 배송기사건의 내막이며 그 당사자의 이름을 아직 잊지 않
고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오늘 표정갑은 얼마전에 돌아본 제철소실태를
알려도 줄겸 새로 파견되는 시당비서 리석을 만나려고 이곳에 왔던것이
다. 억봉은 얼굴이 새파래져 아무 대답 못했다.
《부국장동지!》
지금까지 말없이 옆에 서있던 리석이 성미급한 표정갑을 진정시키듯
나직이 불렀다.
《내 이 친구 내막은 좀 아오. 상급의 지시를 거역하고 배송기를 반
동들의 손에 내맡겨 파괴시켰단 말이요.》
표정갑은 자기의 흥분을 변명하듯 리석에게 이렇게 말하고나서 주눅
든 억봉을 꼼짝달싹 못하게 오금까지 지지였다.
《동무, 여기가 어딘줄 알아? 여기가 뭐 동무같은 사람이 자기 개인
문제를 들구 버릇때기 없이 찾아다니는덴줄 알아?》
표정갑은 억봉이가 자기에 대한 문제처리때문에 무슨 신소라도 하러
온줄 아는 모양이였다. 억봉은 그런것이 아니라고 변명하고싶었으나 입
을 열지 못했다.
억봉은 자기가 리석이며 표정갑과 어떻게 헤여졌으며 공산당 중앙조
직위원회 청사 접수를 언제 나섰는지 알지 못했다. 억봉은 혹을 떼려다
붙이고 섭산적이 되도록 줘맞기까지 한것 같은 심정이였다.
억봉은 표정갑이 리석과 함께 차를 타고 떠나기 앞서 그한테 하던 말

261
이 귀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이번에 송림으로 내려가면 배송기사건내막을 좀 잘 알아봐주시오.
아무래도 노는 꼴들이 심상치 않단 말이요. 정 정신들을 못 차리면 몇
놈 잡아넣기라도 해야 할것 같소.》
억봉은 방한모도 쓰지 않은채 어두운 밤거리를 정신없이 터벅터벅 걸
었다. 해가 떨어지자 날씨는 여간만 차지 않았다. 맵짠 바람은 살을 에
이는듯싶었다. 아직은 겨울이 추위를 거느리고 온 산과 들, 거리와
마을마다에서 위엄을 부리는 계절이였다.

평양에 다녀온 이후부터 억봉은 영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통 말도 하


지 않았고 저 혼자 풀풀 한숨만 쉬였다.
알뜰은 일찍 출근하여 말끔히 청소를 끝내고나서 억봉에 대한 생각으
로 근심에 싸인채 사무실에 호젓이 앉아있었다. 문이 열리더니 직맹부
위원장 오윤보가 들어왔다. 준길삼촌이 죽은 이후 인차 로동조합은
직맹으로 개편됐다. 준길삼촌밑에서 로동조합부위원장을 하던 사람
이 직맹위원장으로 선거되고 장군님을 환영하는 평양시군중대
회가 있던 날 억봉이와 알뜰을 보내고 자기가 대신 경비를 서던 마음좋
은 그 오윤보가 지금은 공장직맹부위원장으로 일한다.
직맹위원장은 어제 도에 출장을 가고 지금 직맹에는 오윤보와 알뜰이
밖에 없다. 오윤보는 사람좋게 웃으며 알뜰이더러 시당에 같이 가자고
했다. 직맹 잡부격인 알뜰은 무슨 문건을 가져오자는줄 알고 순순히 따
라섰다.
그들이 시당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뒤에서 헐썩거리며 따라오던 중년
사나이가 그들을 불렀다.
《같이 가자구, 동포들!》
직맹부위원장이 시당정문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알뜰은 따라 멎
어선채 소리나는 뒤쪽으로 돌아섰다. 한손에 수첩을 들고 활개를 치며
걸어오는 중년사나이는 제철소사람들이 일할 때 작업모로 쓰군 하는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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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높은 채양이 좁은 구식의 낡은 중절모를 쓰고 지하족을 신고있었다.
상체가 큰데 비해 다리가 너무 짧은데다 턱에 가잠나룻까지 돋고보니 생
김생김부터가 무척 재미난 사람이였다. 그는 동무라는 말대신 동포라는
말을 즐겨쓰는 버릇이 있었다.
《녀맹바지, 잘있었소?》
오윤보가 다가오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동포, 여부가 있나. 우리 직맹 염소덕에 잘있구말구…》
다가온 사람이 직맹부위원장의 손을 잡았다놓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알뜰은 그가 늘쌍 담배를 손에 쥐고사는 용구뚜리 오윤보를 《직맹염
소》라고 하는 말은 리해되였으나 직맹부위원장이 그더러 《녀맹바지》
라고 부르는 별명은 무슨 소린지 알수 없었다.
시당청사정문에서는 제철소에서 왔다고 하자 더 묻지도 않고 회의실
로 가라면서 가는 길을 가리켜주었다. 회의실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사
람들이 가득했다. 알뜰은 처음 회의실에서 문건을 나누어주는가부다
고 생각했으나 아무리 살펴봐야 쌓아놓은 책무지나 문건이 보이지 않았
다. 회의실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자면 몇무데기 잘될터
인데 이상했다. 알뜰은 시당에서 책이나 문건을 나누어주기 전에 무슨
주의사항과 강습을 주려는것 같아 직맹부위원장에게 자기는 밖에 나가
기다리겠다고 했다.
《추운데 어딜 나가있는다구 그러나. 여기 있다 내주면 제꺽 문건 타
가지구 가야지…》
오윤보도 알뜰이처럼 시당에서 문건과 책자들을 내주기 전에 무슨 주
의사항을 집체적으로 알려주려나부다 생각는 모양이였다. 그도 시당
에서 무엇때문에 직맹사람모두를 오라고 했는지 몰랐다. 모두 오라는데
혼자 올수 없어 그는 직맹에서 심부름하는 알뜰이도 함께 데리고 온것
이다. 알뜰은 사양하다 어쩔수 없어 오윤보를 따라 회의실 한쪽끝으로
갔다.
《누이!》
석봉이가 알뜰을 알아보고 옆으로 다가오며 소리쳤다.
《너두 왔니?》
알뜰은 생소한 곳에 와서 동생을 만난게 여간만 반갑지 않았다.
《누이, 어떻게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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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문건이랑 책자랑 가져갈게 있다구 해서…》
《오늘 뭐 문건 내주나. 시안의 사회단체일군협의회를 한다는데…》
《그래?》
알뜰은 대바람에 얼굴이 빨개졌다. 알뜰은 자기가 올수 없는 장소에
왔다는것을 깨달았으나 밖으로 나가기에는 이미 때가 늦고말았다. 웅성
거리던 회의실안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주석단으로 여러 간부가 등장
하는것이였다. 석봉은 알뜰이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누이가 잘못하다 망
신을 당하게 될것 같아 왼심을 썼으나 제철소직맹부위원장은 밖으로 나
가려는 알뜰의 팔소매를 잡아 눌러앉혀놓고 마음편히 두눈만 끔벅끔벅
해보이였다.
알뜰은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뛰여들어가 숨고싶었다. 자기 앉을
자리, 설자리를 찾지 못했으니 실수도 이런 큰 실수는 없었다. 알뜰은
바늘방석우에 앉은 마음이 되여 붉어진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여러분들, 안녕하십니까.》
주석단가운데 앉았던 사람이 일어나 회의실안의 사람들을 향해 인사
말을 했다. 알뜰은 그제야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다. 검은 빛갈의 긴 탁
자 하나와 의자 몇이 놓여있는 주석단에 수수한 양복차림의 한사람이 서
있었다.
《제가 이번에 새로 온 시공산당비서 리석입니다.》
주석단의 간부가 회의장사람들에게 머리를 약간 숙여보이며 자기를 소
개했다. 검은 빛갈의 양복을 입고 머리를 시원하게 높이 쳐올린 시당비
서는 우람찬 체격에 비해 말소리가 조용조용했으며 손동작, 몸가짐
하나하나가 침착하고 확신성있었다. 시당비서의 자기 소개에 방안사
람들이 술렁거렸다.
《일본놈때 감옥에 두번이나 갔댔다누만.》
알뜰이 있는데서 한사람건너 옆에 앉은 녀맹바지가 오윤보의 귀에 대
고 소곤거리였다.
《젊었을 때 우리 제철소에서 일했대.》
녀맹바지는 새로 온 시당비서에 대해 아는것이 많았다. 알뜰은 녀맹
바지의 말이 참말인지 지어낸 소린지 알수 없었으나 새로 온 시당비서
가 웬일인지 제철소지배인 선우치담이나 얼마전에 제철소를 다녀간 가
죽잠바차림의 간부처럼 어렵게 생각되지 않았다. 첫인상에 면목있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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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처럼 다정하게 생각되고 친근감이 들었다.
시당비서 리석은 술렁거리는 회의장의 사람들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보내고나서 오늘 모임의 취지를 밝히였다.
《지금 이 자리에는 시안의 여러 사회단체에 관계하는분들이 모이였습
니다. 바쁜 때 이렇게 만나자고 한것은 서로 얼굴도 익히고 이야기를 좀
나누고싶어서였습니다. 제가 찾아가 인사를 해야겠는데 안됐습니다.》
리석은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대다수가 자기보다 퍽 손아래였으나
공손히 경어를 썼고 틀을 차리지 않았다.
알뜰은 무엇때문에 오라는지도 모르면서 자기까지 데리고온 자기네 부
위원장이 민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알뜰은 이제라도 밖으로 나갈수만 있
다면 슬그니 내빼고싶었다. 시당비서가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고 한사람한사람 일궈세우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알뜰의 불안은 극도
에 달하였다.
《농민청년동맹에서 누가 오셨습니까?》
시당비서가 상우에 놓은 종이장을 들여다보며 묻자 맨 앞쪽구석에 앉
았던 한사람이 일어섰다. 어리무던하게 생긴 농촌청년이였다.
《농청에서 무슨 일을 봅니까?》
《위원장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래 농민청년동맹에 맹원이 얼마나 됩니까?》
《스물세명입니다.》
《그렇게밖에 안됩니까?》
《여긴 워낙 로동판이여서…》
《한 스무나문명으루 일할 재미가 있습니까?》
시당비서 리석은 웃으면서 농민청년동맹위원장이라는 청년에게 물
었다.
《그래 우린 농사 많이 짓는 황주에 가서 붙을가 합니다.》
청년은 멋적은지 뒤더수기를 긁적거리였다.
《사회단체는 시, 군별로 조직하게 됐는데 다른 군에 가서 붙으면 어
떻게 합니까. 그래, 위원장동무는 장군님의 1월 17일 연설을 읽
었습니까?》
리석은 절대 자기의 의견을 강요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
하여 그의 생각을 충분히 리해하려 애를 쓰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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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런데 왜 민청에 들려 하지 않습니까?》
《민청에 가니까 농포들이라구 잘 받아주려 하지 않아서…》
청년은 다시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그가 자기 자리에 앉자 회의장
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가볍게 웃었으나 웃지 않은 사람은 시당비서뿐
이였다. 시당비서는 그 청년이 앉은 후에도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
에 잠겨있더니 회의장을 향하여 시민청위원장을 찾았다.
《시민청위원장동무 왔습니까?》
시당비서의 물음에 알뜰이가 앉은 곳에서 멀지 않은데 있던 한 청년
이 일어섰다. 어디서 얻었는지 물날은 쏘련군대외투를 입고 허리에
가죽혁띠까지 찬 무척 날파람있어보이는 청년이였다.
《위원장동무, 농민청년동맹위원장동무의 말이 사실입니까?》
《예.》
시당비서의 긴장된 질문에 민청위원장은 태연히 대답했다.
《위원장동무는 장군님의 1월 17일 연설을 읽지 않았습니까?》
《읽었습니다.》
《그런데 왜 공청을 민청으로 간판만 바꾸어놓았습니까?》
《예, 여긴 제철소도 있고 프로레타리아 핵심진지가 강한것만큼 될수
록 공청성분을 유지하라는 도의 지시가 있어서…》
방안사람들은 다소 긴장되였으나 시당비서는 씨물씨물 웃었다.
《그런데 왜 시민청에 제철소로동청년들보다 시안의 일반계층이 더 많
습니까?》
이 질문에 시민청위원장은 반기를 들었다.
《출신은 비록 프로레타리아가 아니라 해도 그들의 사상은 모두 맑
스―레닌주의로 무장되여있습니다.》
시민청위원장은 메마른 체격에 비해 대가 이만저만 실하지 않았다.
《도에서 조직적으로 지시를 받기 전에는 저희들도 마음대로 할수 없
습니다. 황해도민청결성대회때에는 민청을 공청의 외곽단체로 조직하고
공청을 해산하지 말라는 지시까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유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시당비서 리석은 단호히 그의 말을
막았다.
《그건 그릇된 지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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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석의 말마디는 칼날처럼 예리했다. 어지고 착해만 보이던 그는
이 순간 무척 날카롭고 엄엄했다.
《동무는 황해도민청결성대회 회의장에서 〈서울중앙〉의 지시라
면서 줴친 그릇된 소리는 아는데 그후 소식은 모르는것 같습니다.
그때 도공청일군들은 회의를 중지하고  장군님의 옳바른
가르치심을 받기 위해 그날 밤으로 자기들의 대표를 평양에 파견했
고 그 대표들은 오매에도 그리던 경애하는 장군님을 만나뵙는 영광을 지
니였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그들에게 공청을 민청으로 개편해야 할
필요성을 다시금 가르쳐주시고 회의를 계속하도록 고무해주시였습니
다. 그리하여 황해도에는 공청외곽단체로서가 아니라 모든 애국청년
들이 민주주의기발아래 뭉친 민주청년동맹이 결성되게 되였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작년 10월초 공청일군들의 협의회를 여시
고 민청결성준비위원회를 무어주신 이후 평안도, 황해도, 함남도 3도공
청일군협의회를 비롯하여 민주청년열성자대회,평남도민청결성대회,
평양시중학생이상 학생청년 대강연회 등 여러 기회에 왜 민청을 세워야
하는가에 대해 한두번만 간곡히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청년조직을 우경화해도 안되고 민청을 공청의 간판만 바꾸어단것이라
고 생각해도 안됩니다.
민청대렬을 어떻게 꾸리고 민청사업을 어떻게 해야 더 잘하겠는가 하
는 문제를 가지고 후에 관계자들만 모여 다시 토론합시다. 하지만 명백
한것은 우리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옳게 하려면 장군님의 높
으신 뜻으로 자기자신들을 철저히 무장해야 한다는것입니다. 영명하신
장군님의 높으신 뜻으로 무장된 사람만이 오늘 열렬한 혁명가로
될수 있고 조선의 참된 애국자로 될수 있습니다.》
리석이 격식없이 하는 말마디들은 조용조용했으나 힘이 있었다. 제기된
문제의 날카로운 성격으로 하여 회의장안은 침묵속에 어느덧 긴장되였다.
이때 굳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놓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시당
비서는 녀맹일군들이 왔는가고 물었다. 알뜰은 이 자리에 자기와 같은
녀성들중에서 당당한 참가자격을 가지고온 사람들이 부러웠고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녀자들도 이 장소에 있다는 생각으로 조마조마하
던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시당비서는 제철소녀맹위원장을 찾았다.
알뜰은 지금까지 제철소안에 녀맹이 조직되였다는 사실자체를 모르고

267
지내온 자신이 부끄럽게 생각되면서 누가 녀맹위원장인가 하는 호기심
에 회의장안을 두리번거리였다. 그런데 일어서는 사람은 시당접수에
서 만났던 녀맹바지라던 그 중년사나이였다.
《동무가 녀맹위원장입니까?》
시당비서는 뜻밖인듯 물었다.
《예, 제 이름이 장철옥이거던요. 그래서 그런지 글쎄 저보구 녀맹위
원장노릇을 하라지 않습니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내에선 와 하고 웃음이 터지였다.
시당비서자신도 호탕하게 웃었다. 알뜰은 자기네 직맹위원장이
그를 《녀맹바지》라고 부르던 별명이 이제야 리해되여 입을 가리
고 웃었다. 장내에서 어느 정도 웃음이 사그라지였을 때 시당비서
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제철소녀맹위원장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손
짓을 하며 말했다.
《빨리 그 싫은 바지를 벗는게 좋겠습니다. 녀맹이라는거야 녀성들의
조직인데 남자가 위원장을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녀자를 천하게
여기는 봉건사상을 없애고 새 조국건설에서 녀자들도 한몫하자고 녀맹
을 내왔는데 녀맹위원장까지 남자가 하면 되겠습니까?》
잠시후 시당비서는 제철소직맹위원장을 찾았다. 알뜰이옆에 앉아있던
직맹부위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위원장은 도에 회의가고 자기가 왔다
고 대답하는 순간부터 알뜰은 다시 가슴이 주먹만 해졌다. 시당비서는
알뜰이가 앉아있는쪽을 눈여겨바라봤다. 알뜰은 그러다 시당비서와
눈길이라도 마주치게 될것 같아 고개를 푹 숙이고 앞에 앉은 사람의 잔
등뒤로 몸을 숨겼다. 제철소직맹부위원장에게 공장형편을 이것저것
알아보던 시당비서는 느닷없이 이렇게 물었다.
《얼마전에 공장자위대장노릇을 하댔다는 박억봉이라는 사람이 아
직 공장에 있습니까?》
알뜰은 시당비서의 입에 자기 동생의 이름이 오르는 순간 갑자기 숨
이 딱 멎었다.
직맹부위원장은 몸을 옹송그리고 앉아있는 알뜰을 곁눈질하더니 자기
가 대답하는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저… 해탄에 나오긴 하는데…》
하고 말끝을 얼버무리였다.
《지금 해탄에 나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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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당비서는 다시 곱씹어물었다. 직맹부위원장은 발로 알뜰을 툭 건드
리였다.
알뜰은 가슴이 터질듯 활랑거려 고개를 푹 숙이며 몸을 더욱 옹송그
렸다.
《예.》
오윤보의 대답에 시당비서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더 묻지 않았다.
공장직맹부위원장은 자기 자리에 앉고 시당비서는 화제를 다른데로
끌고갔으나 알뜰은 다음부터 한마디도 들을수 없었다.
(무엇때문에 새로 온 시당비서가 억봉에 대해 물을가?)
알뜰은 번개치듯 이런 질문이 떠오르면서 새 비서가 이곳에 와서 제철
소형편을 료해하다 배송기사건에 대해 들었을것이라는 추측이 갔다.
새로 온 시당비서는 선우치담지배인이나 차지훈을 통해 배송기사건을 이
야기들었을것이다. 그들이 억봉에 대해 좋게 말했을리는 만무했다. 억봉
은 배송기때문에 지배인한테는 물론 시보안서에까지 불리워갔었다. 지금
까지는 그런대로 별일이 없었으나 일이 점점 커지고 배배 꼬여만 드는게
심상치 않았다. 풍문에 들은 소리여서 딱히 알수는 없어도 얼마전에
제철소를 다녀간 행정10국의 그 가죽잠바간부도 억봉에 대해 된욕을
했다는 말이 돌았다. 또 이번에 장군님을 만나뵙겠다고 억봉이 평
양에 다녀오더니 거기 가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알뜰은
지나친 흥분으로 가슴이 터질듯 활랑거리다 못해 심장 나쁜 사람이 마실
줄 모르는 술을 마신 때처럼 맥박이 점점 떠지면서 얼굴이 점차 창백해
져갔다. 알뜰은 고개를 푹 숙인채 옹송그릴대로 몸을 옹송그린채 시당비
서가 하던 말을 하나하나 곱씹었으나 억봉을 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리고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지 하나도 가늠이 가지 않았다.

위세를 부리던 추위는 대한고개를 넘어서기 바쁘게 기가 꺾이더니 립


춘이 다가오면서부터는 장수 잃은 군사들처럼 걷잡을수없이 도망가기 시
작했다.
269
억봉은 어제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알뜰은 이전같으면 억봉이가 세
탄장 한구석에 꾸려놓은 자기 오소리굴에서 지내려니 하는 생각에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을것이다. 알뜰은 직맹부위원장을 따라 얼결에 시당에
다녀온 이후로 억봉에 대해 순간도 마음놓을수 없었다. 억봉이한테서 평
양에 갔다온 이야기며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청사앞에서 산업국
의 그 어마어마한 가죽잠바 부국장과 시당비서를 만났댔다는 상서롭지
못한 이야기를 들은 후여서 더욱 그랬다.
알뜰은 아침 일찍 공장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날은 이미 밝은지 오
래였으나 이른새벽이여서 사위는 아주 조용했다. 알뜰이 자기네 집앞으
로 뻗은 골목길로 분주히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차지훈이 걸어왔다. 지
훈은 여느때와 달리 산뜻하게 지은 봄철외투를 입고 검은 중절모를 썼
다. 어데 나갔다가 밤을 딴데서 보내고 지금에야 돌아오는지, 아니면 이
른아침 어뜩새벽에 일보러 갔다 지금 오는지 그는 찬바람을 휙 풍기며
알뜰이옆을 지나갔다. 중절모를 이마까지 푹 내려쓴채 그는 알뜰을
본척도 하지 않았다. 얼마전에 이른아침 마당을 쓸다가 마주쳤을 때에
도 서로 인사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알뜰의 가슴속에서 충격의 파문은 그와 헤여진 후 일어났다. 지금 알
뜰의 마음속에 한가득 차있는 억봉에 대한 근심과 불안은 차지훈때문에
생겨난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운명은 이번에도 억봉이나 지훈을 서로 용
서할수도, 타협할수도 없는 대립 쌍방의 량끝에 세워놓았다. 배송기
사건이후로 이들은 하나의 천평저울 량쪽에 선듯 한 관계에 놓였다고 말
할수 있었는데 지훈이쪽으로 유리하게 저울팔이 기울어지면 억봉이쪽이
불리하게 저울팔은 올라가기마련이였다.
알뜰은 지훈이가 오늘 아침 여느때없이 산뜻한 차림으로 나선걸 보고
공연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러고보면 항상 찌프리고다니던 지훈의 얼
굴색이 오늘 아침엔 한결 밝은것 같았다. 배송기사건이라는 저울대팔의
원리를 놓고 따져보면 지훈의 얼굴에 피여난 웃음과 만족은 억봉이한테
쓰거운 한숨과 눈물을 의미했다. 억봉이나 지훈의 일이 다 잘되기를 바
라던 알뜰의 마음은 이 순간 동생편으로 기울어졌다.
알뜰은 치마꼬리에 바람이 일 정도로 제철소를 향해 걸어갔다.
숨이 턱에 닿아 해탄구역 세탄장 한구석에 꾸려놓은 억봉의 오소리굴
에 이르니 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덜컥 채워져있었다. 사위는 동굴속

270
처럼 조용했다.
(이 애가 집에도 안 들어오고 어디 갔을가?)
알뜰은 맥이 빠져 세탄장건물밖으로 나왔다. 세탄장건물 한쪽으로 세
워놓은 배송기화차가 바라보였다. 지붕이 훌 날아났던 화차우에 낡은 철
판들을 주어다 또 지붕을 해씌웠다. 화차로 만든 창고에도 억봉은 없었
다. 수류탄폭발로 뚜껑이 깨지고 발통이 떨어지고 날개에까지 금이
가서 이제는 파철이나 다름없이 된 이 헌 배송기를 억봉은 아직도 신주
모시듯 한다.
세탄장건물을 돌아서니 해탄로뒤산이 바라보였다. 방금 떠오른
아침해빛의 조명을 받으며 대동강기슭에 바싹 다가선 자그마한 산
봉우리가 묵묵히 서있다. 한때는 소나무가 울창하던 산발이였으나 지
금은 나무그루터기 하나 볼수 없다. 봄풀싹마저 머리를 내밀지 못
하여 산은 홀랑 알몸을 드러내놓은채 해바라기를 하며 졸고있다.
그 산자드락에서부터 강기슭과 평행선을 그리며 올망졸망한 네개의 해
탄로가 서있다. 아침해빛에 선명하게 드러난 거무틱틱한 해탄로의 잔
해는 여느때없이 처참했다. 지난해 늦가을과 초겨울에는 그처럼 새까
맣게 찾아들던 까막까치떼가 지금은 한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고목에
는 새도 앉지 않는다더니 이제는 완전히 식어버린 로체들이 까막까치
한테서마저 버림을 받았다. 아직 해탄로가 식지 않았다 해도 따사
로운 봄빛이 바야흐로 무르녹는 지금 날짐승들은 해탄로신세를 지
려 하지 않을것이다. 오랜 세월 독한 연기에 그슬리우고 석탄진이
라 할수 있는 진득진득한 타르에 게발리운 여기, 콕스가루며 석탄
가루, 재가루만 무겁게 내려앉은 해탄로와 그 주변은 다 파먹고 내버
린 페굴처럼 쓸쓸하기 그지없다.
알뜰은 해탄로와 그 주변에 드리운 무거운 정적과 그속에서 풍기는 싸
늘한 랭기를 새삼스레 느끼는 순간 서글픔이 북받쳐올랐다. 바야흐로 새
봄이 다가오고있었고 만물은 벌써부터 약동하고있었다. 해방된 새 조
국에 찾아오는 이 봄과 함께 온 나라와 온 겨레는 지금 얼마나 감격
과 환희로 들끓고있는가?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그 위원장으로 추대되시더니 얼마전 북조선림시인
민위원회에서는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발포하였다.
세기적숙망을 실현하는 농민들을 도우려 제철소에서만도 수백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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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이 농촌으로 달려갔다. 어제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라
는분이 토지개혁에 동원되는 제철소로동자들을 태우려 자동차까지 가지
고왔었다. 석봉이도 그중의 한사람이 되여 봉산으로 떠나갔다. 평양
에 가서 공부하는 기봉이한테서 자기도 평남도 어느 바다가마을에 토지
개혁을 도우러 간다는 편지가 왔다. 이 봄과 함께 제철소도 소생하고있
었다. 며칠전에는 신철공장이 조업을 시작하였다. 이제 곧 박판공장
도 시운전을 한다고 했다. 일제때는 박판을 만들지 못했다. 일제는
기계들을 가져다만 놓고 설치도 못한채 망하고말았다.
날에날마다 가슴뛰는 새 소식이 들리고 너나없이 모두가 어깨를 으쓱
거리며 춤출 일만 생기는데 어이하여 이 해탄로만 이렇게 주인없는 무
덤처럼 버림받아야 하는가.
알뜰은 괴로운 마음으로 해탄로주변을 한바퀴 돌았다.
대동강쪽에서 두사람이 걸어왔다. 앞사람 손에 들린 물건이 해빛에 반
사되여 번쩍했다. 알뜰은 잠시후에야 앞에서 건들건들 걸어오는 사람이
억봉이고 뒤에서 어정어정 따라오는 사람이 달모라는것을 알았다. 억봉
의 손에 들린것은 물고기꿰미였다.
《누이 왔나?》
억봉은 알뜰에게 손에 든 고기꿰미를 흔들어보이였다. 꿰미에는 둬뽐
나마 될 고기가 세마리나 됐다.
《맨 큰 이놈은 내가 잡은거야.》
억봉은 아직 살아 꿈틀거리는 커다란 메기 한놈을 손가락으로 쿡 찔
러보이며 자랑을 했다. 오늘 아침 고기가 예상외로 잘 물려 범잡은 포
수처럼 마음이 부푼 억봉이다. 시답지 않아하는 알뜰의 표정을 보고 억
봉은 누이가 못미더워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증인을 서라고 달모한테 추
겨댔다.
《정말이지요? 아저씨―》
《그래―》
달모는 씨물씨물하며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억봉은 자기 솜씨를 자랑
하듯 꿰미채 고기를 알뜰에게 내밀었다.
《누이, 정말 잘 왔어. 한번 맛있게 끓여줘. 우리가 끓여먹으니 어디
고기가 제맛 나야지…》
억봉은 배가 고픈지 알뜰이가 끼고온 밥보자기를 보더니 군침을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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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키며 제법 너스레를 떤다. 알뜰은 참고참았던 서글픔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남들은 토지혁명을 한다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동차를 타고 재
령나무리와 어러리벌로 달려가는데 집안의 기둥으로 믿어오던 동생은 여
기서 강가에 나가놀다 돌아오는 철없는 아이처럼 물고기를 잡아들고 기
뻐한단 말인가. 알뜰은 분하고 아픈 마음을 가슴깊이 묻어두며 얼굴에
그것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억봉이한테서 물고기꿰미를 받아들고 세
탄장 한구석에 꾸려놓은 휴계실로 향했다. 억봉이가 큼직한 쇠를 열고
철판으로 만든 문짝을 여는 순간 후끈한 열기와 함께 독한 담배내가 코
를 쿡 찔렀다. 통풍이 잘되지 않은 방안에서는 어제 밤 밤새 피운 담배
연기가 채 빠지지 않아 눈이 아릴 지경이였다.
《얘, 여기선 오소리가 아니라 곰두 잡겠다.》
알뜰은 억봉이가 거처하는 이곳을 사람들이 《오소리굴》이라고 놀려
주는것이 우연치 않다고 생각되여 공기 하나 제때에 갈지 않고 살아가
는 증판스러운 동생을 탓했다.
《담배 바른데 한번 피워 훌훌 내보내면 되겠어… 연기 못 빠지게 방
안에 꼭 잡아두었다가 담배피우고싶을 때 연기라도 마셔야지!》
억봉은 누이한테 롱을 하면서도 안됐는지 방안을 주섬주섬 거두기 시
작했다.
알뜰은 그들이 방안을 쓸어내는 사이에 고기꿰미를 기계실로 가지고
들어갔다. 수도가 있고 난로에 불이 벌겋게 피여있어 물고기는 잠시후
쟁개비속에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알뜰은 억봉이와 달모가 아침식
사를 마치였을 때 집안소식도 전할겸 푸념처럼 입을 열었다.
《석봉이가 그제 봉산에 갔다.》
오래간만에 아침식사를 하고난 억봉은 다 먹은 그릇을 탁자앞으로 밀
어놓고 손바닥으로 입을 썩 문지르며 기분좋아했다.
《그 자식 봉산체네한테 단단히 반한게 아니야.》
《넌 정말…》
알뜰은 어이없어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귀머거리가 자기
속에 있는 소리 한다는 옛말은 그른데 없었다. 오소리굴같은 이런데 들
어앉아 세상돌아가는 소식조차 제대로 못 들으니 마음편한 소리밖에 할
수 없었다.
《토지개혁 도우러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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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르듯 알뜰이 하는 말에 억봉은 그제야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 자식 좋겠는데…》
토지개혁소식은 억봉이도 들었다. 제철소에서 수백명 사람들이 토
지개혁방조로 농촌에 갔다는것도 모르지 않았다. 준길삼촌이 살아있
고 자위대대장노릇 하던 때 같으면 누구보다 그런 일에 불리웠을 그였
다. 억봉이가 자기 동생을 부러워하자 달모는 달모대로 농촌사람들을 부
러워했다.
《나도 고향에나 갔댔으면…》
고향에 갔었으면 이번 토지개혁혜택에 그도 토지를 분여받을지 모른
다. 제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다면 아무것도 하는 일없이 먼산 쳐다보
듯 불꺼진 해탄로나 바라보고 앉아있는 지금보다 얼마나 가슴뛰고 기운
뻗칠것이며 생활에 기쁨이 넘쳐날것인가.
세사람은 제각기 자기 생각에 잠겨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머리우에서
는 자기 상념에 빠져있는 그들을 굽어보며 낮전등이 비치고있었다.
단 하나인 창문에 추위를 막느라 철판을 대놓아서 불을 안 켜면 대낮에
도 어두운 여기다. 억봉이와 달모가 독한 마라초를 말아 피우기 시작하
자 알뜰은 먹고난 그릇이나 가시려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때 철판출
입문이 벌컥 열리더니 문가에 뜻밖에도 계향이가 나타났다.
《아이 깜깜이야.》
전기불을 켜놓았는데도 계향은 어둡다고 했다. 밝은 해빛아래 있다가
갑자기 이안에 들어서면 어둡기마련이다.
계향은 어둠에 눈이 익어서야 방안의 세사람을 알아보았다. 밝은
밖에서 어두운 세탄장건물안에 들어서다 바닥에 고인 물을 잘못 밟아 발
을 적셔버린 그는 양말까지 마친 밸풀이라도 하듯 억봉이를 향해 첫마
디부터 곱지 않게 뇌까렸다.
《빨리 지배인실루 오래요.》
계향은 그러고나서 자기 발을 굽어보며 신발에 묻은 석탄물을 터느라
발을 탕탕 굴렀다. 계향의 뜻하지 않던 출현과 그가 불쑥 내뱉은 한마
디 말은 방안에 던져진 튀지 않은 수류탄 비슷했다. 알뜰은 계향이가 신
발에 묻은 물을 터느라 탕탕 발구르는 소리가 가슴에 부딪쳐 쩡 울리였
다. 알뜰은 자기의 불안속에 위구하던 일이 지금에야 눈앞에 닥쳐왔는
가싶었다.

274
《누굴 말이요?》
억봉은 계향을 말시키려고 이죽거리였다.
《누군 누구겠어요? 동무지…》
계향은 바로 억봉이때문에 자기가 시답지 않은 심부름을 다녀야 하는
것이 골난다는 표정이다.
《왜 오랍디까? 이번엔 어디 고와 뭘 주겠다고 오랍디까?》
배송기때문에 지배인실에 한두번만 불리워가지 않았고 사건진상을 밝
히느라 시보안서까지 다녀온 억봉이여서 선우치담지배인이라는 말만 들
어도 요즘은 볼이 잔뜩 부어오른다.
《지배인한테 가서 직접 물어보세요.》
계향은 공연히 자기한테 행패하려드는 억봉이가 눈꼴사나운지 획
돌아서 나가고말았다. 알뜰은 손에 들었던 그릇들을 탁자우에 내려놓고
계향을 따라나갔다. 자기 운명에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이 시각 하
늘보고 도끼질하듯 동생은 무슨 우둔한짓을 하려드는것인가.
《계향이!》
알뜰이 따라가며 불렀으나 계향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알뜰은
세탄장건물밖에 나와서야 계향을 따라잡았다.
《계향이, 너그럽게 생각하라구.》
알뜰은 동생한테 닥쳐온 심상치 않은 일이 계향이로 해서 유리해질수
도 있고 불리해질수 있기라도 한것처럼 그의 손목을 붙들고 사정했다.
계향은 자기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내뱉는 성미여서 발끈하기도 잘했지
만 그만큼 성이 인차 사그라들기도 했다.
《언니, 정말 언니한텐 안됐어요.》
계향은 알뜰에게 자기의 엉성스런 행동을 사과했고 그가 묻는 말에 사
근사근 대답했다.
《무엇때문에 찾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제철소에 시당비서선생이 오
시였어요.》
계향의 말에 알뜰은 다시한번 가슴이 철렁했다. 억봉의 일이 점점 커
지면서 꼬이는게 틀림없었다. 알뜰은 강둥강둥 뛰여가는 계향의 뒤모습
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못했다.

275
7

알뜰은 억봉이한테 일이 심상치 않게 되였으니 이제라도 지배인실로


가보라고 일러야 할지 아니면 그냥 내버려두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며 세
탄장건물을 등진채 서있었다. 그가 서있는 세탄장건물뒤쪽으로는 엄
청나게 크고 넓은 대동강이 흘러갔다. 그리고 앞쪽으로는 갈길을 막아
선 깎아지른 절벽처럼 해탄로들이 가로놓여있었다. 해탄로뒤로는 박
판공장이며 후판공장을 비롯한 압연지구의 건물들과 강철공장건물지
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도쳤다. 제철리쪽 산기슭을 따라 파도쳐
온 지붕의 그 파도들은 방파제처럼 막아선 해탄로때문에 더는 앞으로 나
오지 못하는상싶었다. 알뜰은 뒤로 물러설수도, 앞으로 나갈수도 없
는 막다른 지경에 배수진을 치고있는 사람처럼 해탄로와 세탄장건물사
이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박판직장쪽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리더니 한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해탄로쪽으로 오고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온 때에야 알뜰은 시당비서
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가 자기를 바라본다는것을 깨닫는 순간 알뜰
은 획 돌아서서 세탄장건물쪽으로 달려갔다. 알뜰은 억봉이가 있는
휴계실까지 와서 문을 벌컥 열어제끼였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얘, 억봉아…》
알뜰은 문가에 선채 동생을 불러놓고 한참이나 헐떡거렸다. 그새
달모는 어디로 나갔는지 방안에는 억봉이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억
봉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알뜰을 멍히 바라봤다.
《얘, 사람들이 온다.》
알뜰은 문을 닫고 방안으로 들어서며 창백해진 얼굴로 조용히 뇌이였
다. 억봉은 누이의 말귀를 정확히 알아들을수 없었으나 떠오르는 자기
류의 생각과 부닥치는 예감에 반발심이 치밀어올랐다.
《그래서?》
아닌보살하는 억봉의 표정은 태연했다.

276
《그래서라니? 계향이가 지배인실로 오란다고 말하지 않더냐? 네가 가
지 않았으니 예까지 왔지…》
알뜰은 동생이 자기 고집대로 밸만 쓰면서 세상돌아가는 형편을 너무
도 모르는것 같아 짜증섞인 소리로 퉁명스레 내쏘았다.
《만나고싶으면 오라지… 뭐. 전 발이 없나?》
억봉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켕겨했다. 억봉의 말에 대
한 그 무슨 대답처럼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침착한 목소리가 울
리였다.
《들어갈만 합니까?》
출입문쪽에 서있던 알뜰은 화닥닥 놀라며 얼른 구석쪽으로 들어서고
억봉은 방금 자기가 뱉어놓은 말때문에 얼굴이 벌개졌다. 문이 열리더
니 시당비서 리석이 문가에 선채 방안사람들을 향하여 먼저 인사를 건
네였다.
《수고하십니다.》
털모자를 쓰고 깃에 털을 단 외투를 입은 리석은 발을 방안으로 성큼
들여놓았다. 방안에 들어온 리석은 아직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방안 한가운데 버티고 서있는 억봉에게 친절히 물었다.
《여기 세탄장안이 왜 이렇게 어둡습니까?》
말하는 투로 보아 그는 제철소가 전혀 생판은 아닌것 같았다. 억봉은
온몸이 굳어져 아무말도 못했다. 밝은 밖에 있다 어둑시근한 방안에 들
어온탓에 리석은 이때에야 어둠에 눈이 익어 억봉을 알아보았다.
《아니, 공산당 중앙본부앞에서 만났던 동무 아니요?》
억봉도 리석을 알아봤다.
《동무, 여기 해탄로에서 일하오?》
《예.》
리석은 정이 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억봉의 손목까지 친절히 잡아주었
으나 억봉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억봉은 해탄로를 복구하게 해달라고
장군님께 진정하러 갔다가 산업국의 그 어마어마한 가죽잠바부국
장을 만나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했다. 그가 리석에게 송
림에 내려가면 배송기내막을 잘 알아보라고 하던 말이 억봉은 지금도 귀
에 쟁쟁했다. 새로 온 시당비서는 틀림없이 그것때문에 남들이 오소리
굴이라고 비난하는 이곳까지 찾아왔을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 겁낼것은

277
없었다. 모든것은 이미 깨질대로 깨지고 찌그러진셈이였다.
리석은 방 한가운데로 걸어나오다 탁자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무엇을 합니까.》
《뭐 하는게 있나요.》
《아무것도 하는것없이 여기서 먹고 잡니까?》
억봉은 리석이 탁자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물었을 때에야 자기의 실수
를 깨달았다. 탁자우에는 아침을 먹고난 그릇이 그냥 놓여있었다. 아까
알뜰이 부시려다말고 계향을 따라가느라고 그냥 놓아둔대로 있는 그릇
들이다.
《답답하니까 먹구자며 해탄로두 돌아보구 배송기두 보구 그러는거지
요.》
억봉이 멋적게 중얼거리는 말에 리석은 여간만 반가와하지 않았다.
《그러니 여기서 먹고 자며 해탄로를 지킵니까? 정말 그새 수고가 많
았겠습니다.》
분에 넘친 치하에 억봉은 쑥스러웠다. 요즘 할일은 없고 답답해 하루
에 몇번씩 해탄로주변을 어정거리며 그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자기였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해탄로가 필요없다는데…》
억봉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동무도 〈제강소화리론〉을 들었습니까?》
부드럽던 리석의 얼굴은 엄해졌다.
《해탄로를 허물어버리라구 했다던데요. 그래서 장군님께 진정하려구
평양에까지 찾아갔댔는데…》
억봉은 더 말하지 못하고 머리를 푹 숙이였다.
《그렇습니까?》
리석은 가책으로 머리숙인 억봉을 생각깊은 눈길로 한참이나 바라보
더니 그 무엇을 부정하듯 단호히 머리저었다.
《본부당청사앞에서 동무와 만났던 그 다음다음날 저는
  장 군 님 의 부 르 심 을 받 는 영 광 을 지 니 였 습 니 다 . 그 날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 지금형편에서 파철만 녹여먹어도
대단하다면서 이곳 제철소를 제강소화하려는 일부 사람들의 립장을 단
호히 비판하시였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제철소가 나라의 생명
선이라고 하시면서 제철소를 일떠세워야 민주기지를 건설할수 있고

278
우리 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수 있다고 하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이
곳 제철소를 전망성있게 꾸리자면 야금의 첫공정인 해탄로부터 복구해
야 한다고 가르치시였습니다.》
《장군님께서요?!》
억봉은 막혔던 숨이 후하고 터지면서 십년묵은 체증이 뚝 떨어져나가
는것 같았다. 억봉은 불죽은 해탄로들에 뜨거운 숨결을 부어주시고
자기네 집안뿐아니라 해탄사람들모두의 념원을 그처럼 속속들이 헤아려
보시며 속시원히 풀어주시는 장군님께 진정 큰절을 드리고싶었다.
감격에 목메여 어쩔줄 모르는 억봉을 바라보는 리석도 흥분을 억제하기
힘들어했다.
《이곳 제철소에 커다란 의의를 부여하고계시는 장군님께서는
국영제철소로 이관할데 대한 조치를 취해주시던 때 이제는 인민의 제철
소가 되였으니 이름부터 새로 지어야겠다고 하시면서 친히 황해제철소
라고 이름지어주시였소.》
《황해제철소!》
억봉은 새 제철소의 이름을 입속으로 조용히 받아외웠다. 억봉은
가슴이 울렁거리고 두눈굽이 뜨거워왔다. 사람은 슬픔앞에서만 마음 약
해지는것이 아니다. 때로는 크나큰 기쁨앞에서도 슬픈 일을 당했을
때보다 몇갑절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기쁨보다는 슬픔을, 즐거움
보다는 고통을 많이 당해온 사람일수록 더 그런지도 몰랐다. 태여나 오
늘 이때까지 마음쓰라림만 당해오던 억봉이여서 너무도 갑작스레 차례
지는 벅찬 기쁨앞에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잡기 어려웠다.
리석은 감격에 목메여 어쩔줄 모르는 억봉을 바라보다 잠시후 이렇게
물었다.
《동무, 여기 해탄로에서 얼마나 일했소?》
《한 십년 됩니다.》
《그렇소? 그러면 알겠구만… 여기 해탄로에서 오래 일했구 해방직후
제철소로동조합위원장을 하다가 반동들한테 희생된 박준길이라는 사
람의 가족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오?》
억봉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우리 삼촌 말입니까?》
《네가 준길이 조카란 말이냐?》

279
리석은 억봉이보다도 더 놀라와했다.
《예.》
억봉은 시당비서가 무엇때문에 죽은 삼촌을 찾는지 몰라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그게 정말이냐?》
리석은 무척 다감한 표정으로 억봉의 두어깨를 그러잡았다.
《우리 삼촌을 아십니까?》
《알다뿐이겠냐. 알아두 잘 알지… 난 너의 할아버지하구두 가깝게 지
냈다.》
《예? 그럼 저 평양에 계신다던…》
《너의 삼촌은 날 평양 리선생이라구 부르군 했지. 해방직후 내 평양
에서 준길을 만났댔다.》
《선생님!》
억봉은 눈물이 콱 쏟아져나왔다. 백여리 먼길을 찾아갔다가 만나
지 못했던 그 리선생이 이곳에 장군님의 뜻을 받아안고 시당비
서로 올줄이야. 전번에 평양에 갔다가 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청사앞에
서 만났지만 그때는 이 사람이 자기가 그렇게 안타깝게 찾던 리선생일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준길삼촌이 남보다 먼저 눈을 뜨고 많은 사
람들한테서 존경을 받을수 있은것도 그리고 제철소를 위해 자기 한
몸 주저없이 바칠수 있은것도 이 평양 리선생의 영향을 떼여놓고 생각
할수 없었다.
《이녀석아!》
리석도 억봉이와의 상봉을 여간만 반가와하지 않았다. 그한테는 일점
혈육이 없었다. 리석은 일제경찰의 눈을 피해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다
가족을 모두 잃었다. 해방전에 리석은 지하사업임무로 잠간씩 고향을 몇
번 다녀갔지만 그가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난것은 근 20년전이였다.
《그래 너의 삼촌어머니랑 잘있냐?》
《예.》
《너희들 형제가 여럿이란 말을 들었댔는데…》
《예, 석봉인 토지개혁을 도우러 농촌에 가구, 누인 저 저기…》
억봉은 그때까지 출입문벽쪽에 기대여 서있는 알뜰을 손짓했다. 리석
이 뒤로 돌아서자 알뜰은 깊숙이 허리굽혀 인사를 했다.

280
《너였구나. 분명 이쪽으로 녀자 한사람이 왔는데 보이지 않아 이상
하게 생각했구나. 해탄로앞에서 널 보구 물어보려는데 네가 이리루
오길래 나두 따라왔지.》
리석이 웃으며 하는 말에 알뜰은 자기의 버릇없는 행동을 리선생한테
용서빌고싶었다.
《전 그만…》
《허허… 내가 무서워보이니까 도망쳤단 말이지?》
리석은 호탕히 웃었다. 그 웃음으로 하여 어둠침침하고 차겁던 방안
은 한결 밝아지고 따뜻해지는가싶었다. 리석은 억봉이와 알뜰의 손목을
한손에 하나씩 쥐고 대견하게 두사람을 갈마보며 감회깊은듯 말했다.
《준길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아팠댔는데 너희들을 보
니 그래도 한결 마음이 놓이누나. 너희들앞이래서가 아니라 준길인 훌
륭한 사람이였다. 일본놈들한테서 중요도면을 목숨바쳐 지켜냈고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공장을 지키다 희생됐다. 내 해방직후
평양에서 준길을 만나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전했더랬는데 이번에 여기
와서 보니까 그 가르치심대로 로동조합두 꾸려놓구 공장도 지키구 많은
일을 해놓았더구나. 우리는 이런 애국의 열의로 부강조국을 하루빨리 일
떠세워야 한다.》
억봉은 리석의 말을 들을수록 준길삼촌의 얼굴이 눈에 선히 떠올랐다.
림종의 순간에 해탄로를 보여달라던 삼촌이였다. 시시각각으로 싸늘
히 식어가며 굳어져가던 그의 망막에 어렸던것은 하늘에 물든 저녁노을
만이 아니였었다. 서쪽하늘에 띠처럼 흘러간 그 노을빛속에 해방된
새 조국의 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할 해탄로우의 밤노을을 그리던 삼촌이
였다. 억봉이 지금까지 깨진 배송기를 주무르며 이곳을 떠나지 못한것
은 삼촌의 이 뜻을 저버릴수 없었기때문이였다.

잠시후 세사람은 집으로 향했다. 온 집안이 모였으나 기봉이가 평양


에 공부가고 석봉이가 토지개혁에 동원되다보니 삼촌어머니까지 모두 네
281
사람이였다.
리석이 단고기국을 좋아한다는걸 알고있는 삼촌어머니는 어느새 단고
기국집에 가서 온 식구의 국을 받아왔다. 작은어머니는 리석이 일제경
찰의 눈을 피해가며 이곳에서 지하공작을 하던 때 그를 숨겨주고 남모
르게 밥을 날라다주군 하던 미더운 동정자들중의 한사람이였다.
소박하지만 마음기쁜 식사를 하고났을 때 리석은 설겆이를 하려고 부
엌으로 내려서는 녀인들을 만류하며 모두 앉으라고 했다. 사람들은
먹고난 두리반주위에 그냥 빙 둘러앉았다. 음식보다도 이야기와 정을 나
누고싶어 모인 자리여서 리석은 오늘따라 자꾸만 말하고싶어했고 억봉
이와 알뜰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싶어했다.
《정말 처음으로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앉았구나.》
리석은 시당비서라는 직책을 떠나 오래간만에 마음후한 할아버지의 마
음이 되여 흡족한듯 말했다.
《기봉이랑 석봉이까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기쁜가운데도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서분함을 숨기지 못하는 작은어
머니였다.
《이제 모두 모일 날이 있겠지.》
리석은 오래간만에 맛보는 단란한 가정적분위기에 취하고말았다.
저고리 웃단추를 풀어놓은채 올방자를 틀고 아래목쪽에 앉아있는 리석
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엔 날 곽쇠라구 했다. 난 장쇠형님이랑(너희들 친할아버지
말이다.) 어린시절을 이곳에서 보냈지. 산골이였지만 살기 좋은 오붓한
곳이였단다. 그런데 〈한일합방〉이전부터 왜놈들이 우리 고향에 드
나들며 땅을 측량한다, 철길을 놓는다 하더니 〈합방〉이 되기 바쁘게
글쎄 송림 박씨네 무덤을 파내고 그 자리에 제철소를 들여앉히지 않겠
냐. 지금 용광로가 서있는 그 뒤산이 그때는 송림 박씨네 무덤자리였다.
대대로 이곳 송림산일대에서 살아오던 박씨네는 들고일어났지만 맨손으
로 총칼 가진 일본놈을 당해내는수가 없었지. 울고불고하다 이곳에
제철소공사가 벌어졌을 때에는 글쎄 먹고 살기 위해 공사장에 나가 일
하지 않으면 안되였구나. 너희 할아버지는 용광로기초공사장에서 일
했다. 돌을 까내느라 남포질을 하다 너희 할아버진 상하게 됐지. 피토
하고 쓰러지면서 너희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자기 시체를 대동강물에 내

282
버리라는게 아니냐. 조상의 무덤을 지키지 못했으니 그 죄는 죽어서도
씻을수 없다면서 저 혼자 어떻게 고향땅에 묻히겠냐고 하는거지. 우리
는 토론하고 토론하던 끝에 너희 할아버지를 대동강 건너 륙명산에 묻
기로 했다. 고인의 유언대로 고향에 묻지 않되 고향이 빤히 건너다보이
구 물이 가까운 대동강기슭에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관을 메구 청개구
리 장사지내듯 대동강기슭으로 나갔구나. 그런데 이런 변이 어디에
있냐. 장사지내주겠다고 약속했던 배를 쓸수 없게 되였으니 말이다. 돈
벌이에 눈이 어두운 선주놈이 배를 다른데 돌리는 바람에 우리는 강기
슭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됐구나. 맨손으로 강을 건느는 재간은 없구 그
래 오락가락하는데 대동강기슭에 돛단 배 한척이 나타나더구나. 나는 무
작정 그 배를 향해 뛰여갔지. 그리구 관을 강건네달라구 사정을 했구나.
마침 배에는 고마운 한분이 타고있었다. 뜻있는 의로운분이였다. 그
분의 도움으로 우리는 배에 관을 실을수 있었단다. 그때 너희들 아버지
나이가 아마 열서너살되였을 땔게다. 내 나이 스물이였으니까. 그렇
지요?》
리석은 잠시 이야기를 마치며 이미 쿨쩍거리기 시작한 준길의 처를 이
야기에 끌어넣었다. 삼촌어머니는 옷고름으로 한참이나 눈굽을 찍어
내더니 목이 메여 대답했다.
《억봉이 아버지가 열셋나구 기봉이 아버지가 열살나던 때라고 했어
요.》
작은어머니는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갓 시집온 자기한테 해주던 이야
기를 지금도 잊지 못하고있었다. 험악한 그 세월에 어린 자식들을 혼자
데리고 남았던 시어머니의 가슴이 얼마나 쓰리였겠는가를 남편잃은
오늘에 와서 새삼스레 생각하게 되는 그였다.
리석은 이미 까마득한 30년전 옛일로 되여버렸으나 세월과 더불어 돌
처럼 굳어지며 가슴에 맺혀 내려가지 않는 그날의 슬픔을 새기듯 눈시
울을 쪼프린채 잠시 말이 없었다. 리석은 삼촌어머니한테 기대여앉아 온
신경을 두귀에 모두고있는 알뜰이며 얼굴이 벌개진 억봉을 천천히 더듬
어보고나서 말을 이었다.
《아버지관에 어푸러져 울기만 하는 너의 아버지와 준길을 보구 그때
배를 타고가던 의로운분은 이렇게 말했단다. 〈너는 아버지를 잃었구 우
리모두는 나라를 빼앗겼다. 목놓아운다고 세상떠난 아버지가 돌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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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하구 망해버린 나라가 일어서지 못한다.… 돈많은 놈들은 자기 돈
을 믿고 땅을 가진 지주는 자기 땅을 믿겠지만 빈주먹뿐인 우리야 자기
손발밖에 믿을게 없지 않느냐…〉 지내놓고보니 그분의 말씀은 정말 지
당하더라. 돈없는 우리가 믿을거란 자기 손발밖에 더 있더냐. 그분은 정
말 우리모두의 은인이였다. 그분때문에 죽어서조차 묻힐수 없게 되였던
너희네 할아버지를 장사지낼수 있었구 그분의 말씀을 명심한탓에 나두
오늘처럼 세상물정에 어섯눈이나 뜨게 됐구나. 그래서 곽쇠란 이름두 리
석으루 고치구 지하투쟁에 참가할수 있었지.》
리석은 올방자를 틀고앉은채 한손으로 자기 무릎을 자꾸만 쓸어만지
며 자못 감회깊은 어조로 말을 마쳤다. 억봉이와 알뜰은 황황타는 눈길
을 잠시도 리석의 얼굴에서 떼지 못했다. 억봉은 리석의 말이 끝나기 바
쁘게 숨가삐 물었다.
《선생님, 그분이 누구시나요?》
리석은 안타까운듯 긴 한숨을 톺았다.
《그러게 말이다. 찾아뵙고 큰절이라도 드리고싶다만 그분이 누구
신지 알수가 없구나. 배에 올라 같이 가던 곽춘산이란 사람이 김선생님
이라고 했는데… 그분은 그때 무슨 볼일이 있어 은률에 가시던 길이였
다. 후에 조선국민회사건이 터지였을 때 은률에서도 많은 사람이 체포
된걸 보면 틀림없이 그때 조선국민회 조직때문에 가던 길인것 같은데…
내 평양감옥에서 들으니까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신분이 김선생이라더라.
틀림없이 그분이야.
그때 김선생님을 모시고 가던 곽춘산이라는 사람을 내 기미년 만세후
에 잠시 만난적 있다. 그때 난 헌병 두놈을 까고 피해다니던 때였는데
곽춘산이란 사람이 하는 말이 일본놈들과 싸우겠으면 여기저기로 떠돌
아다니지 말고 고향에 있는 제철소로 돌아가는게 좋겠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박씨라는 그 사람을 장사지내던 그때 김선생님은 제철소가
일떠서게 되면 우리 로동자들이 일본사무라이들과 모든 억압자들을
영영 묻어버릴 무쇠관을 부어낼것이라고 하시면서 불로 쇠를 다스리게
될 그네들이야말로 새로 태여나는 믿음직한 조국의 맏아들이라고 하시
였소. 거기 가서 뿌리내리는게 좋겠소.〉 하는게 아니겠냐. 나는 그
때부터 곽춘산이란 그 사람의 지도밑에 싸우다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에
망라되게 되였지. 곽춘산은 조선국민회에서 김선생밑에서 일하던 사

284
람인데 국민회사건때 체포되였다가 감옥에서 나와 평북 어디론가 몸을
피하였지. 그후 나도 인차 체포되는 바람에 그분과 련계가 끊어지고말
았는데 들으니까 평북 어디에서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을 꾸리고 싸운다
고 했는데…
내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람을 찾아 만나보련다. 그러면 그 김선생님
이라는분에 대해서 더 잘 알수 있을게다. 김선생님은 큰 현인임에 틀림
이 없다. 아마 살아계신다면 김선생님께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지금도
큰일을 하고계실게다.》
리석은 확신에 넘쳐 말했다. 억봉의 눈앞에는 물결 출렁이는 배전에
흰두루마기를 입고 서있는, 리석의 옛말같은 이야기속에 나오는 은인의
영상이 우렷이 떠올랐다. 겨레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여기며 갈길
몰라 헤매이는 동포를 투쟁에로 불러준 은인, 슬픔에 지쳤던 사람들을
안아일으키며 억세고 슬기롭게 키워준 은인, 한번도 만나뵈온적은 없으
나 더없이 가깝게 생각되고 숭엄하게 우러르게 되는 거룩한 영상이였다.
그러나 이들은 그때 그분이 김형직선생님이시였다는걸 알길 없었다. 그
영광스러운 력사가 알려진것은 그후의 일이였다.
리석은 방안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고나서 열정적으로 부르짖었다.
《정말 자기 손발마저 믿기 어려웠던 우리들이였다. 아무리 손발을 부
지런히 놀려야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웠던 석탄숯쟁이 우리 로동자네
집안이 아니냐. 불 없으면 사람이 살수 없고 오늘의 현대문명도 있을수
없지만 불때문에 죽어가던 우리들이였지. 불쌍하고 가난하던 우리 겨레
에게 이제는 드팀없는 믿음이 생기였구나. 힘없고 나약하던 우리 인민
에게 이제는 억센 힘이 생기였구나. 우리 겨레의 믿음, 우리 인민의 힘
―이것은 바로 장군님이시란다.
장군님께서 나라를 찾아주신 덕에 불의 노예였던 우리들이 이
제는 불의 주인으로 될게다.
제철소라는게 불을 다루어 쇠를 뽑는데가 아니냐. 쇠를 다스릴 불이
바로 너희들의 손에 달려있어.》
방안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리석은 리석대로 생각에 잠기고
억봉이네 남매는 그들대로 생각에 잠기였다. 밖은 벌써 어두웠으나
억봉은 자기 가슴속에서 홰불처럼 황황 타오르기 시작한 불때문에 어두
운걸 알지 못했다. 리석은 밤새라도 이야기를 나누고싶었으나 그한테는

285
시간이 없었다. 오늘 밤 그는 제철소내 당원들과 담화를 해야 했다. 집
을 떠나기에 앞서 리석은 억봉에게 시당비서로서 한마디 했다.
《장군님께서는 지난 2월 15일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
회 제4차확대집행위원회에서 로동영웅운동을 활발히 벌릴데 대한 방
침을 밝혀주시였다. 제철소를 복구하기 위한 사업에서 너희들은 로동영
웅이 되여야 한다는 장군님의 말씀을 명심하기 바란다.》
(로동영웅!)
억봉은 장군님께서 하시였다는 말씀을 저 혼자 입속으로 받아외웠다.
로동이라는 말과 영웅이라는 말이 생겨난지는 무척 오래전이였고 하루
에도 몇번씩 몇천몇만사람의 입에 례사로이 올랐지만 이 두 개념은 하
나의 의미와 뜻으로 결합될수 없으며 불이나 물처럼 영원히 서로 갈라
져있어야 하는것으로 알아왔었다. 영웅이라면 빛나는 위훈으로 만사
람이 우러러보는 위인이였고 로동이라면 지금까지 가장 천하고 고된것
의 대명사로 알려졌었다. 가장 귀한 영예와 천한 칭호가 어떻게 되여 새
로운 하나로 련결될수 있었는지 그리고 이 말의 의미와 뜻이 얼마나 깊
으며 이 말의 위력이 얼마나 큰것인지 억봉은 아직 알수 없었다.
《래일 제철소에서 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토의하려고 한다. 그 회의
에서 해탄로문제두 토의하겠으니 오고싶어하는 해탄사람들은 다 데리고
오너라.》
《예.》
억봉은 너무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제철소회의실에서는 시당비서 리석이 조직한 협의회가 진행되고있


었다. 간부들이나 모이던 곳에 오늘은 용광로와 해탄로 로동자들중에서
참가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모두 참가시킨데다 공장직맹과 민청 등 여러
사회단체들에서까지 대표가 오고보니 넓은 회의실은 여느때없이 비좁았
다. 제철소간부들과 공장직맹위원장 등 사회단체일군들과 함께 주석단에
오른 리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철소복구와 관련한 장군님의 뜻을
286
전달하고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의사도 죽은 사람한테는 주사를 놓아주지
않는 법이라고 하시였습니다. 아직 숨이 붙어있거나 살 가망이 있는 사
람들에게만 약도 먹이고 주사를 놓아주기마련입니다.
우리는 우방국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우리 힘이 없으면 그들도 잘
도와주지 않을것이고 또 우리도 원조받을 체면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제철소를 하루빨리 복구
해야 합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제철소가 나라의 생명선이
라고 하시면서 제철소에서 민주조국건설의 첫걸음을 어떻게 떼는가에 따
라 조국의 미래와 우리 민족의 장래운명이 결정된다고 거듭 강조하시였
습니다.》
리석이 전달하는 장군님의 뜻은 말마디마디가 그대로 살아 펄펄 뛰는
가싶었다. 리석은 잠시후 자기 자리에 앉더니 누구에게라없이 좌중을 향
하여 이렇게 물었다.
《용광로와 해탄로를 복구하는데 무엇이 제일 걸렸습니까? 오늘은 우
리 서로 기탄없이 의견을 나눕시다.》
장내는 술렁거렸다. 리석이 장군님의 뜻으로 눈을 틔워주고 담
을 키워주자 사람들의 가슴마다에서는 바람안은 물결처럼 격정의 파도
가 솟구쳐오르는것이였다.
《로력이 제일 딸립니다. 다른데와 달라 제철소에서 일하자면 기술과
기능이 있어야 하니까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데려올수도 없구…》
공장직맹부위원장 오윤보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이야기했다.
《옳습니다. 모자라는 돈은 어디 가서 꿔라도 오겠지만 사람은 데려
올수 없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우리 민주기지건설에서 제일 애로
가 기술자와 기능자가 없는것이라고 여러차례나 말씀하시였습니다.
그래 해탄로엔 조선사람기술자가 몇명이나 있습니까?》
리석은 팔굽을 책상에 기대이고 앉은채 주석단에 오른 제철소기술부
장에게 물었다.
《차지훈이란 기사가 한사람 있었댔는데…》
《일제는 우리 조선사람들에게 기술을 배워주지 않았습니다. 하나
의 큰 공장이라고 할수 있는 해탄에 조선사람 기술자가 한사람밖에 없
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도 알수 있지 않습니까. 일제는 하나에서 백까

287
지 모든것을 빼앗아만 갔습니다.》
리석은 일제를 준절히 단죄하고나서 그 기술자에 대하여 기술부장에
게 다시 물었다.
《총명하고 재간은 있는데 요즘 동향이 나빠서…》
《어떻게 나쁩니까?》
《전 구체적인 내막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 기사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없습니까? 해탄에서 온 사람들이 좀
말해보십시오.》
기술부장과 이야기를 하던 리석은 좌중을 향해 물었다. 그는 제철소
간부들만이 아니라 평범한 로동자들의 의견을 듣고싶어했다.
억봉은 자기옆에 앉아있던 달모와 태주먹이 팔굽으로 옆구리를 찌르
는 바람에 할수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사람은 해탄로에서 배송기를 떼가려고 했습니다. 지난 겨울엔 일
본놈들한테 석탄두 날라다주구…》
억봉은 하나도 보태지 않고 자기가 보고 들은바를 사실그대로 이야기
하려고 애썼다. 리석은 편협하지 않았다.
《그게 사실입니까?》
리석은 자기옆에 앉은 공장직맹위원장에게 물었다. 그가《예.》하
고 대답하자 리석은 모를 일이라는듯 머리를 흔들었다.
《믿을수 없습니다. 그 기사가 어떻게 배송기를 떼가려 했단 말입니
까?》
《그건 저 지시가 있어서…》
《미군정과 교섭해서 압연설비를 바꿔오겠다고 그러던것 말이지요?》
리석은 제철소실태를 이미 깊이 료해하고있었다. 직맹위원장이 그
렇다고 머리를 끄덕이자 리석은 단호히 이야기했다.
《그 일이 잘된 일은 아니지만 책임을 그 사람한테 지울수야 없지 않
습니까? 기술자니까 시키는 일을 했겠는데… 하지만 일제가 망한 오늘
에도 일제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건 문제입니다.》
잘못을 꾸짖는 이 순간에조차 리석은 아직 한번도 만난적 없는 차지
훈을 아끼는 마음이 가득했다. 한사람밖에 없다는 그 기술자와 함께 손
잡고나가기를 바라는 심정은 너무도 절절했다.
이때 공장직맹위원장이 앉은자리에서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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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일을 잘못하다보니 아직 한번도 그 기사동무를 만나보지 못했
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발표한 민족반역자에 관한 규정에 비추어볼
때 그는 절대 민족반역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희생된 전로동조합위원장
박준길동무가 상급당에 보고하기 위하여 준비했던 자료를 보면 차기사
는 약점이 있지만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자리에 그냥 서있던 억봉은 직맹위원장의 이 말에야 펄쩍 정신
이 들었다. 장군님의 뜻을 옳게 받들기 위해 협의를 하는 이 마
당에서 자기 개인감정이나 편견을 말해서는 안될것이였다.
《솔직히 말해서 전 그 차기사와 어려서부터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연히 싸우다 우리 삼촌한테 욕을 먹은적도 있습니다.》
억봉은 이렇게 말해놓고서야 자기가 공연히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후
회가 들었으나 리석은 자못 심중히 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였던 리석
은 책상에 기대였던 몸을 뒤로 젖히며 조용히 뇌이였다.
《억봉동무의 말까지 듣고보면 확실히 전로동조합위원장 준길동무
는 그 사람을 나쁘게만 보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시당에 제기했던 자료
들을 보아도 그렇고…》
한 인간의 운명을 론하는 이 마당에서 리석은 한 성실한 당원으로서
준길이 살아있던 때 품었던 의견과 생각을 귀중히 여기고 참작하지 않
을수 없었다.
《그가 일본인기사 야마다에게 석탄을 공급했던것은 제철소복구에 그
를 리용할수 없을가 해서였습니다.》
공장직맹부위원장 오윤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이야기했다. 리
석은 말없이 한동안 머리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술자가 없이 용광로와 해탄로를 복구할수 없다는건 명백합니다.
장군님께서는 우리 조선의 지식인들이 식민지반봉건사회에서
살아온것만큼 발전된 자본주의나라 지식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고 가르쳐주시였습니다. 그들도 일제밑에서 민족적멸시를 받아왔습니다.
기술자가 바른데 민족반역자가 아닌이상 그들을 배척할것이 아니라
일깨워주어 같이 손잡고나가야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고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
여 새 민주조국건설에 떨쳐나서라고 호소하시였습니다. 그 기사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289
리석의 물음에 누구도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요즘 제철소에 일하러 나오지 않아서…》
기술부장이 떨떠름한 대답을 하며 말끝을 얼버무리였다.
《앓습니까?》
그의 물음에 이번에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직맹일군들과 함께 협
의회에 참가했던 알뜰은 공연히 가슴이 활랑거리였다. 알뜰은 어제
새벽에 제철소로 나오다 차지훈을 만난것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자리에
서 일어났다.
《저, 아닙니다.》
《그 기사가 있는 곳을 압니까?》
《우리 옆집에 삽니다.》
《그러면 그 기사한테 우리 조직부장동무를 좀 안내해주시오.》
리석은 그 자리에서 시당조직부장에게 협의회중이여서 자기가 못
가니 미안한대로 차지훈기사를 이곳에 데려오라는 과업을 주었다.

10

숨가삐 달려가는 알뜰이옆으로 승용차 한대가 다가왔다. 차문이 열리


며 채 멎지도 않은 자동차에서 시당조직부장이 뛰여내렸다.
《빨리 이 차를 타고갑시다.》
알뜰은 자기가 어떻게 자동차에 올랐으며 언제 자기네가 사는 주택지
구에까지 왔는지 알지 못했다. 알뜰은 차가 자기네 집근처에서 멎어서
기 바쁘게 뛰여내려 차지훈네 집으로 달려갔다. 이제는 이웃에 산지 반
년, 그동안 알뜰은 지훈네 집에 가거나 그 집 문턱을 넘어서본적 없었
다. 시당비서 리선생은 오늘 배송기사건을 지훈에게 책임지울수 없다고
했다. 한집안이나 다름없는 인연깊은 웃어른으로서보다 한개 시안의 공
산당조직을 책임진 일군으로서의 견해고 립장이였다. 그러고보면 석
탄공급문제에도 무슨 곡절이 있기 쉬웠다. 알뜰은 자기네 집에서 지훈
네 집에까지 가는 1분도 되나마나한 사이에 지훈네와 한 이웃에 살게 되
면서부터 오늘까지 있은 수많은 일들이 꼬리에 꼬리물고 떠올랐다.
290
새집을 배정받아 여기로 이사오던 날 짐실은 손달구지를 뒤에서 말없이
떠밀어주던 차지훈―그의 모습은 마음 어질고 녀성들을 존중할줄 아는
순박한 사람의 얼굴 그대로였다. 오래동안 먼곳에 다녀왔건만 사랑에 굶
주린 자식들을 뒤에 두고 먼저 공장으로 향하던 가방 든 그 모습―그것
은 맡은바 자기 일에 성실한 한 인간의 모습이였다. 끝없이 떠오르던 지
난날의 추억은 찌그러진 차지훈네 집 문짝이 얼굴을 막아서는 순간 깨
여져나갔다.
쾅쾅…
알뜰은 성하지도 못한 차지훈네 집 문짝이 부서져나가라 세차게 두드
렸다. 그 바람에 거북등처럼 쩍쩍 금이 가고 덕지졌던 문짝에 발라놓은
퍼런 뼁끼껍질이 어린애들 한줌은 실히 되게 떨어져내리였다.
알뜰이가 두드리던 문이 아니라 그옆 부엌문이 열리며 두옥이가 나타
났다. 두옥은 두눈이 올롱해 알뜰을 올려다봤다.
《아버지 있니?》
두옥은 두눈이 말똥말똥해 알뜰을 쳐다보며 살래살래 머리를 저었다.
《아버지 어디 갔니?》
《먼데 출장갔어.》
《뭐 출장?》
《우리 아버지 출장갔다올 때 맛있는거 많이 사다준댔어.》
《그래?》
알뜰은 어른을 만나야겠기에 무턱대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집에는 두
옥이와 세철이밖에 없었다.
《할머니 어디 갔니?》
《석탄 주으러 나갔어―》
《뭐 석탄?》
알뜰은 그제서야 집안이 별로 썰렁함을 느끼였다. 아래목에는 개지 않
은 두터운 이불이 깔려있었고 그우에서 두살잡이 막내가 모자를 쓴채 자
고있었다. 세철이도 집안에서 솜옷을 벗지 않은채 털모자까지 쓰고있었
다. 불이 죽었는지 구들은 싸늘했다.
《오빠는 어디 갔니?》
알뜰은 한철이라도 만나면 두옥이 말을 듣기보다 나을것 같아 큰아이
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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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빤 할머니랑 같이 석탄 주으러 갔어.》
《공부 안 가구?》
《오후반인데 뭐.》
《어디루 갔니?》
《제철소루―》
땔감이 떨어지면 이곳 사람들은 제철소로 찾아간다. 오랜 세월 수많
은 기차들이 콕스와 석탄을 싣고 다닌 곳이여서 구내철길에 떨어진 콕
스나 석탄덩어리만 부지런히 주어도 몇시간이면 하루 땔건 벌수 있다.
알뜰은 철모르는 두옥을 세월없이 붙들고 앉아있기보다 한씨나 한철이
를 만나는게 빠를것 같아 그들을 찾아갈 생각을 했다.
《할머니랑 오빠랑 석탄 가지러 어디로 갔는지 모르니?》
《역에.》
령리한 두옥은 많은것을 알고있었다. 알뜰이 싸늘한 구들에서 부엌으
로 나가려는데 잠들었던 막내가 깨여나며 울음을 터뜨렸다. 두옥이가 달
려가 동생을 안아주었으나 선잠 깬 어린애는 쿨렁쿨렁 기침을 하며 울
음을 그치지 않았다. 두옥은 구원을 요청하듯 알뜰을 바라봤다. 알뜰은
인정에 못이겨 얼른 어린애를 받아안았다. 어린애의 몸은 불처럼 뜨거
웠다.
《동생이 앓니?》
알뜰은 두살잡이 막내의 엉뎅이를 두드려주며 근심스레 물었다.
《감기왔어.》
막내는 알뜰의 품에 안겨 울음을 그치였으나 그대신 기침을 했다. 알
뜰이 오도가도 못해 망설이는데 부엌문이 열리며 머리에 석탄바께쯔를
인 한씨가 들어섰다. 알뜰은 막내를 두옥에게 넘겨주고 얼른 부엌으로
나갔다. 알뜰은 한씨의 머리에서 석탄바께쯔를 받았다.
《석탄이 떨어졌어요?》
《언제 있어봤어야 떨어도 지지.》
한씨는 발길 한번 얼씬하지 않던 알뜰이가 자기네 집에 온게 이상도
하고 세간살이 걱정해주는것이 고맙기도 해 어정쩡히 대답하며 한숨을
쉬였다.
《아니 작년겨울에 석탄을 받지 않았나요?》
《해방돼서야 언제 석탄을 받아봤나. 이 늙은 에밀 석탄고생까지

292
시키냐고 짜증을 써두 공장사정이 그러니 어쩌겠냐면서 어디 들은체나
하던가. 남들은 잘만 가져다 때던데 저만 머저리구실을 하면서…》
집안살림살이에 너무도 무관심한 아들에 대한 어머니 한씨의 불만은
이만저만 아니였다.
알뜰은 마음이 이상했다. 차지훈네 집에 석탄까지 떨어졌으리라고
는 생각지 못했던 알뜰이였다. 옆집에 살지만 억봉이와 지훈이가 잔뜩
엇서게 되면서부터 집에 누가 앓는지,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보려 하
지 않았다.
(그러니 차지훈은 작년가을 석탄공급때 월동용석탄을 받지 못했단 말
인가.)
한때 월동용석탄공급문제는 차지훈이 책임지고 주관해왔었다. 그
러니 야마다네 집에 보낸 석탄은 차지훈이 제 몫으로 차례졌던 석탄이
아닌가? 어린애는 할머니를 보자 쿨렁쿨렁 기침을 하며 울음을 다시 터
뜨렸다.
《어머니, 두옥이 아버지 어디 갔나요?》
예로부터 이웃사촌이라 해왔건만 옆집살림에 너무도 무관심해온 자신
을 탓하는 심정으로 알뜰은 조용히 물었다.
《출장을 갔네.》
《어디루요?》
《글쎄… 해주로 갔는지, 서울루 갔는지…》
《언제 갔어요?》
알뜰은 숨가삐 다그쳐물었다. 어제 새벽에 차지훈을 보았으니 가도 어
제밤차가 아니면 오늘 떠났을것이 아닌가.
《아침먹고 나갔는데… 왜 그러나?》
알뜰은 대답을 잊고 열려진 새문으로 방안벽에 걸린 벽시계를 바라보
았다. 구식의 괘종시계는 십분전 열두시를 가리키고있었다. 낮차로
간다면 이제 빨리 역에 나가 만날수도 있다. 알뜰은 한씨가 따라나오면
서 왜 그러냐고 불안스레 물었으나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종주먹을 부
르쥐고 역쪽으로 달려갔다. 밖에서 알뜰이가 나오기만 기다리던 시당조
직부장이 차에 발동을 걸고 그를 따라잡을 때까지 알뜰은 정신없이 앞
으로 내달리였다. 다시 차를 타고 역에 이르렀으나 방금 기차는 떠나고
있었다. 알뜰은 홈에까지 따라나온 시당조직부장옆에서 방금 떠나는 기

293
차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저 차루… 저 차루 떠나갔어요.》
알뜰은 석탄마저 떨어진 싸늘한 구들에 차지훈이 앓는 자식을 남겨두
고 떠나도록 만든것이 자기 책임인것 같아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억봉
이가 차지훈과 엇서게 된것도 자기때문이라 할수 있었다. 석탄반출문제
때문에 자기가 억봉을 부채질하지만 않았어도 억봉은 총대를 휘두르며
야마다네 집에 가서 석탄을 다시 회수해오지 않았을것이고 그런 일이 없
었더라면 차지훈은 자기가 받아야 할 월동용석탄을 단념한채 추운 겨울
을 보내려고 하지 않았을것이였다. 세전토끼처럼 한길밖에 모르는 억봉
이와 자기의 촌스러운 외곬생각과 편견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해야
할것이다. 떠나는 기차를 묵묵히 바라보던 시당조직부장이 알뜰에게 물
었다.
《우리 자동차로 황주까지 기차를 따라갑시다. 우리가 빨리 갈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황주에 가서 기차를 갈아타기마련이다. 알뜰은 시당조
직부장을 따라 다시 자동차에 올랐다. 최고속력을 놓은 자동차는 기차
보다 빨랐다. 통근렬차가 황주역구내에 들어서던 때 알뜰은 홈에 서서
기차를 맞이할수 있었다. 알뜰은 구내홈 한가운데 버티고서서 내리는 손
님마다를 두눈 부릅뜨고 살피였으나 차지훈을 찾을수 없었다. 알뜰은 역
기다림칸과 역사주변까지 샅샅이 뒤지였다. 남행렬차시간이 되여 손
님들은 다시 홈으로 나왔다. 남쪽으로 려행하는 사람들은 역구내에
그리 많지 않았다. 알뜰은 또다시 역구내를 눈여겨 살폈으나 지훈은 보
이지 않았다. 도착했던 남행렬차가 긴 기적소리를 울리며 떠난 후에도
알뜰은 렬차가 사라진쪽을 살피며 지훈을 찾았으나 그의 종적을 알수 없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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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메워야 할 균렬들

제철소구내 건국의 첫해 봄은 바람세찬 해탄로우에서 시작되였다. 대


동강기슭의 바위를 치받으며 작년 막사리때 소쿠라졌던 강얼음이 무너
져내리기 바쁘게 해탄로들은 울긋불긋 단장했다. 해탄로우에서 진종
일 바람에 펄럭이는 오색기들은 온 제철소구내에 생기와 활기를 넘치게
했다. 기발의 붉고, 푸르고, 노란 그 빛갈은 번져가는 불길처럼 온
구내에 퍼지였다. 강철공장의 평로복구현장과 녹쓸어가던 용광로철탑우
에서도 기발은 펄럭이였고 복구현장으로 오고가는 건국청년돌격대원
들의 대렬선두에서도 휘날리였다. 송림산과 월봉산의 양지바른 둔덕
에서 진달래가 피여나고 아직 벌건 살결을 그대로 드러내놓은 들판에서
는 민들레가 선참으로 묵은 잠에서 깨여났으며 개울가의 버들강아지는
따사로운 봄볕을 오리오리 젖꼭지처럼 물고늘어진채 토실토실 살쪄갔다.
나날이 푸르싱싱해가며 생기넘쳐나는 해방후 첫번째 봄이였다.
억봉은 해탄로우에 서서 흡족히 웃었다. 그의 왼쪽팔에는 흰 천에 먹
글씨로 박아쓴 《건국청년돌격대》란 완장이 끼여있었다. 그는 해탄
로복구가 시작되면서 공산당에 들었고 해탄과 건국청년돌격대 대장이 되
였다. 건국청년돌격대원들은 지금 탄화실에서 재파내는 작업을 했다. 일
제는 도망가며 해탄로에 콕스를 채워둔채 불을 꺼버리여서 지금 탄화실
에는 석탄재만 차있었다. 모로 겨우 들어서는 비좁은 탄화실에서 재를
뒤집어쓰며 일하던 돌격대원들은 휴식시간이 되자 모두 해탄로우로
올랐다.
해탄로꼭대기는 넓고 시원했다. 이곳에 서면 유유히 흘러가는 대동강

295
이 한눈에 바라보였고 제철소구내가 빤히 내려다보이였다. 억봉은 작업
복단추를 풀어헤친채 가슴흐뭇하게 강바람을 들여마시였다. 영영 버
림받는줄 알았던 해탄로를 이렇게 복구하게 되고보니 억봉은 감개무량
했다. 억봉은 해탄로를 복구할데 대한 장군님의 높은 뜻을 받아
안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에서 피가 끓었다.
갑자기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휴식하러 해탄로우에 올라온 돌격
대원들이 빙 둘러앉아 우스개를 폈다. 억봉은 웃고 떠드는 동무들을 보
자 《걱정말라》주학섭이 생각났다. 우스개 잘하는 주학섭이 있었으
면 이런 때 단단히 한몫 할것이다. 일터에서는 익살쟁이들과 우스개군
들이 언제나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보배덩이들이다.
고향에 가서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있는지… 억봉은 해탄로복구를 시
작하던 때 주학섭한테 장군님께서 해탄로에 불을 지피라고 말씀
하시였다는 소식과 함께 어서 제철소로 돌아오라고 편지를 했다. 해탄
로를 복구하려면 주학섭 같은 오랜 기능공들 없이 불가능하다. 산산이
흩어진 기능공들을 하루빨리 모이게 해야 했다. 주학섭의 고향은 그리
먼곳도 아닌 봉산땅이다. 억봉은 토지개혁을 도우려 봉산에 가있는
석봉이한테 어떻게 해서라도 짬을 내여 주학섭이네 고향에 가보라고 편
지를 보냈건만 동생한테서도 아직 아무 소식 없다.
억봉은 철계단을 따라 해탄로를 내리기 시작했다. 옹벽옆 로문수리장
에는 한무리의 처녀들이 모여있었다. 처녀들은 처녀들대로 언거번거 야
단이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깔깔거리던 처녀들중에서 얼굴 동그란
한 처녀가 큰길쪽을 가리키며 난데없이 소리쳤다.
《얘, 저기 개구리공주 온다.》
처녀들은 일시에 입을 다물고 큰길쪽을 바라봤다. 제철소구내로 곧게
뻗은 큰길을 따라 계향이가 걸어오고있었다. 계향은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고 다소곳이 머리를 숙인채 세탄장쪽으로 조심스럽게 걸
어왔다. 몸매는 날씬해도 걸음걸이는 여간 무겁지 않았다. 평소의 그답
지 않게 물에 담그어놓은 빨래처럼 풀이 죽고 맥빠진 계향의 모습이다.
계향을 알아보는 순간 억봉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억봉은 지배인 선
우치담을 두고 일부 사람들이 《멱자구지배인》이라고 한다는걸 모르지
않았으나 계향을 《개구리공주》라고 부르는것은 지금 들어 처음이다.
계향은 무엇때문에 자기 나이또래속에서 이렇게 돌림받고 따돌리워야 하

296
는지… 요즘 그에 대해서는 상서롭지 못한 소문이 돌았다. 지배인한테
배척을 받아 서기자리에서 쫓겨났다느니, 남으로 도망간 차지훈의 끄나
불이라느니 하는 좋지 못한 소리뿐이였다.
억봉은 어제 우학의 편지를 받은 뒤여서 그가 측은하게까지 생각됐다.
어제 억봉은 우학이가 써보낸 두통의 편지를 한꺼번에 받았다. 한통은
38도선에서 반년이나 묵은 편지였고 한통은 한달전에 써보낸 편지였다.
1946년 3월 15일 개성역구내에서는 해방후 처음으로 되는 북남우편물
교환이 있었다.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에서 미군정당국에 강경히 제기하
여 서로 교환된 30여만통의 우편물중에는 억봉에게 보낸 우학의 편
지가 두통 들어있었던것이다.
편지에는 가슴아픈 소식뿐이였다. 나중에 써보낸 편지가 더욱 그랬다.
우학은 서투른 글씨로 이렇게 썼다.

《…귀여운 자식을 약 한첩 못 써보고 죽였네. 북에선 가난한 사람들


두 잘살게 되였다던데… 가고싶지만 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못 그러네. 처
가 요즘 퉁퉁 부어 누워있네. 아이를 서는데다 앓기까지 하는 그를 데리
고 어떻게 가겠나… 우리 계향인 잘있는지? 파혼은 했지만 지난날 나와
의 의리를 생각해서 의지할데 없는 동생을 힘닿는껏 돌봐주기 바라네.》
억봉은 우학의 편지를 곱씹어 읽을수록 그가 떠나도록 내버려둔게 못
내 후회되였다. 그때 파혼만 안했어도 우학의 일이 지금과 달리 되였을
수 있었다. 파혼을 안했으면 우학은 잔치치르러 왔을것이였다. 해방
되던 그해 가을에 우학이가 이곳에 왔으면 억봉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를 붙들었을것이며 그때만 해도 38도선 왕래가 비교적 자유로왔으니 처
와 자식들을 데려오게 하였을것이다. 억봉은 파혼이 계향이와 자기사이
를 갈라놓았을뿐아니라 우학이와의 우정도 버그러지게 하였으며 이
간격이 우학이네 식구들을 불행에로 떠민것 같아 괴로왔다. 억봉은
우학이한테서 자기 동생을 잘 돌봐달라는 부탁까지 받고보니 생각되는
것이 많았다. 억봉은 계향이 오빠를 따라 고향에 가지 않고 이곳에 남
아 선우치담의 서기노릇을 하게 되고 차지훈의 비호속에 있다는것을 알
았을 때 손상당한 자존심때문에 가슴이 아팠으며 그가 밉기까지 하였었
다. 그러나 배송기때문에 차지훈의 가슴에 총을 내대던 그때 지훈을 막
아나서는 계향의 모습에서 남을 위할줄 아는 자기희생성을 보았으며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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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들이 습격해오던 날 배송기화차주변에 사람이 나타났다고 소리치던 모
습에서 해탄로를 걱정하는 깨끗한 마음을 엿볼수 있었다. 억봉은 세탄
장 오소리굴에서 달모와 가까이 지내게 되면서부터 그의 처조카에 대한
반감을 묵새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런 감정변화의 여러 원인들과
조건들중에서도 결정적인것은 해탄로복구가 시작된것이였다. 인연깊
은 리선생이 시당비서로 파견되여오고 해탄로를 살려낼데 대한
장군님의 뜻이 전해지게 되면서부터 선우치담지배인도 억봉을 무
시하지 못했다. 상처입고 이그러졌던 억봉의 마음이 순하게 펴이게
되면서부터 처녀에 대한 총각으로서의 관용성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억
봉은 계향을 두고 《개구리공주》라 부르는 처녀를 보자 공연히 남을 헐
뜯으며 몰아주는것 같아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어험!》
억봉은 처녀들이 들으라고 그들뒤로 다가서서 큰소리로 마른기침을 하
며 로보수용승강기앞으로 걸어갔다. 해탄로우로 벽돌이며 설비부속들을
실어나르는 그 승강기에는 종삼아 때리는 레루토막이 매달려있었다. 억
봉은 휴식시간이 아직 십분나마 있었으나 계향을 몰아대는 처녀들에 대
한 얄미운 생각으로 뗑강뗑강 종을 때리기 시작했다. 억봉이가 화가 나
서 두드려대는 작업종소리는 요란스럽게 울리였다.

땡―땡―
계향은 작업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광장주석단처
럼 높다란 해탄로 옹벽우 로문수리장에서 억봉이가 마치로 종을 때리고
그 주위에는 그를 옹위하듯 대여섯명 처녀가 서있었다. 계향은 억봉이
와 그 둘레의 처녀들을 보자 자기가 사람들한테서 따돌리우고 버림받은
것만 같은 괴로움을 금할수 없었다.
어제 총무부장이 계향을 찾았다. 총무부장은 이제부터 말썽많은 녀자
대신 남자를 지배인서기로 쓰게 되였다고 알려주었다. 계향은 《말썽많
은 녀자》라는 말이 여간만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계향은 총무부장이
298
제철소안에서 아무 직종이건 마음에 드는것을 골라잡으면 알선해주겠다
면서 자기네 부서에도 빈자리가 있다고 귀띔해주었으나 대답없이 돌아
섰다. 시키는대로 심부름이나 해야 하는 서기자리보다는 자기 마음대로
할수 있는 일자리를 고르는것이 좋다고 할수도 있었지만 계향은 이번 조
치가 지배인이 자기한테 가하는 일종의 압력이라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며칠전 선우치담은 이렇게 물었었다.
《차지훈이 그래 계향이한테도 아무 말 안하고 갔나?》
계향이 사실대로 《예.》 하고 대답하자 선우치담은 벌컥 화를 냈다.
《망할 녀석! 배은망덕해도 분수가 있지… 그녀석은 자기를 보증해준
사람들의 성의와 기대를 저버리고 남조선으로 달아났단 말이야. 제
지은 죄가 있으니까 발이 재려 달아났겠지만 그런 나쁜 녀석인줄 알았
나.》
계향은 지배인이 차지훈때문에 시당에도 다녀오고 산업국에서 여러번
전화로 꾸중들었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계향은 언젠가 선우치담이 차지훈의 실종과 관련하여 시당비서 리석
에게 이렇게 말하는것을 들은바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난 지훈이가 제자라고 해서 너무 어루만져주었습니다.
내가 겸이포제철소 운영동지회를 해산하고 공장위원회를 조직할 때
그를 제철소에서 내보내자는 의견이 없지 않았지요. 그러나 난 앞으로
써먹을수 있을것 같아 그한테 중요한 책임을 맡기였댔습니다. 그자가 달
아나고보니 제가 경각성이 부족했다는걸 깨닫게 됩니다.》
선우치담은 차지훈에 대한 지난날의 자기 과오를 청산하며 오늘의 결
백성을 시위하기 위해 차지훈과 련계있던 사람들까지 색안경을 끼고 보
았다.
계향은 이것이 분하고 억울했다. 계향은 지배인이 차지훈을 반동으로
모는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지훈은 착하고 어진 사람이였다. 그는 거짓
말을 할줄 몰랐으며 마음이 약해 남한테 모질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대로 량심껏 행동하는 사람이였다. 악의없는 그런 사
람이 어디 가서 나쁜짓을 할수는 없었다. 계향은 지훈이가 월남했다는
사실자체를 믿을수 없었다. 계향은 해탄로복구가 시작되면서 지금까
지 자기가 믿고 의지해오던 지배인에 대한 환상이 깨져나가고 반감이 걷
잡을수없이 자라올랐다.

299
계향은 총무부장의 방을 나서는길로 사무실에도 들리지 않고 곧장 집
으로 돌아오고말았다. 계향은 속에서 불이 일었다. 해방의 새봄을
맞아 모두가 가슴펴고 활개치는데 자기만 그 무슨 죄인처럼 취급되
고있었다. 계향은 오빠가 생각났다. 이런 때 오빠라도 곁에 있었으
면 얼마나 좋으랴.
계향은 자기 일을 의논하기 위해 고모부가 돌아오기를 눈이 까매 기
다렸으나 달모는 집에 오지 않았다. 계향은 기다리다못해 오늘 이렇게
달모를 찾아 해탄로까지 왔다.
땡―땡―
종소리는 그칠줄 몰랐다. 해탄로우 푸른 하늘로 끝없이 울려퍼지는 종
소리는 이상하게도 계향의 마음에 야릇한 파문을 일으켰다. 계향이가 온
것을 알고 달모가 해탄로우에서 내려왔다.
《어떻게 왔니?》
달모는 낡은 작업중절모를 벗어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계향에게로 다
가왔다.
《어제 밤 왜 집에 들어오지 않았나요?》
《왔다갔다하기 싫어서…》
두사람은 저탄장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저탄장밖으로 대동강이 흐
른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는 강기슭의 부두처럼 좋은 곳이 없다. 부
두가에 이르렀을 때 계향은 느닷없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작숙, 나 지배인서기 그만뒀어요.》
《뭐?》
달모의 두눈은 대뜸 커졌다. 달모는 계향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
보다 근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니?》
《아니요.》
계향은 신발앞코숭이로 땅만 허비였다. 달모는 부두가에 올방자를 틀
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입에서는 독한 담배연기와 함께 긴 한숨이 연
거퍼 흘러나왔다. 계향은 달모옆에 쭈그리고앉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작숙, 어디 가면 좋을가요?》
《글쎄.》
《현장으로 나오는게 어때요?》

300
《글쎄.》
《총무부에두 빈자리는 있다는데…》
달모는 계향이가 묻는 말에 이렇다할 대답을 줄수 없었다. 자기 생각
이 없고보니 그럴수밖에 없는 달모였다. 계향은 이야기를 건넬수록
가슴이 답답했다.
《전 가보겠어요.》
계향은 반발하듯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풀길 없고 하소할
길 없는 답답한 가슴을 부여안은채 부두에서 물러섰다. 해탄로에서는 건
국청년돌격대원들이 한창 일을 하고있었다. 탄화실에 들어가있는 그
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이 파서 밖으로 내던지는 석탄재는 쫘
르르 쫘르르 쏟아져내리며 뽀얀 먼지구름을 일구었다. 계향은 남들이 모
두 바쁘게 일하는데 자기 혼자만 빈둥거리는것 같아 머리를 푹 숙인채
걸었다. 갈 곳 없고 오라는 곳 없어도 계향은 그 무엇에 쫓기는 심정으
로 땅만 내려다보면서 잰걸음을 놓았다. 그가 해탄구역을 벗어나려
하던 때였다. 계향은 누군가의 그림자가 땅에 누워 자기 발앞으로 다가
오는것을 보았다. 한걸음만 앞으로 더 내여디디면 그 그림자를 밟아버
리게 될 순간이였다. 계향은 걸음을 멈추며 머리를 들었다. 억봉이가 작
업복바람으로 목에 광목수건을 건채 마주왔다.
《작숙한테 왔댔소?》
억봉의 별치 않은 인사말은 이상하게도 심금을 울리였으나 계향은 경
계하는 심정으로 아무런 내색없이 대답했다.
《예.》
억봉은 계향이가 상심해있는것이 오빠 우학한테서 보내온 편지때문이
라고 단정했다. 억봉은 머리를 숙이고 땅만 내려다보는 계향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위안을 했다.
《정말 안됐소. 소식을 듣고보니 나도 가슴이 아프오.》
억봉은 우학의 일을 두고 말했으나 계향은 자기가 지배인서기자리에
서 쫓겨난걸 이렇게 말하는줄 알았다. 우학의 일이나 계향의 일이나 잘
된것은 아니여서 억봉의 말에 별로 큰 모순은 없었으나 계향은 그의 말
이 납득되지 않았다.
(내 일을 가슴아파할 리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계향이가 지배인서기로 일할 때 내놓고 못마땅해하며 비웃던 억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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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계향은 억봉이가 자기를 놀리고 비꼬느라고 하는 말인것같이 느껴
져 도전하듯 머리를 들었다.
《서기에서 쫓겨난게 깨고소하다는 말씀이겠지요?》
바늘로 콕 찌르고 드는것 같은 계향의 눈총에 억봉은 당황했다. 지금
에야 비로소 계향이가 지배인서기노릇을 그만두었다는것을 알게 되는 억
봉이다. 억봉은 화가 나서 내뱉았다.
《지배인서기노릇 그만두었으면 그건 잘됐소.》
《잘됐다구요?》
《그렇소. 잘되지 않구…》
《고마와요. 잘됐다구 칭찬두 해주구 잘된 일을 가슴아파두 해주
구…》
억봉은 조금전에 자기가 안됐다고 한것은 우학이한테서 온 편지를 두
고 한 말이라고 이야기하고싶었으나 계향은 그한테 말할 틈을 주지 않
았다. 계향은 찬바람이 일도록 획 돌아서서 자기가 지금까지 오던 방향
으로 총총 걸어갔다.
지훈의 소개로 지배인서기가 된 후부터 계향은 한때 파혼이 오히려 잘
되였다고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여왔었다. 파혼하지 않았더라면 시집
살이나 했어야 한다. 스무살 꽃다운 청춘을 억봉이같이 무분별한 정열
에 뛰노는 사람을 위해 고스란히 바친다는것은 허무한노릇이 아닐수 없
었다. 그렇지만 계향은 이성에 눈뜨면서 자신도 모르게 움터났던 순결
한 첫정을 단 한번도 나누어보지 못한채 무시당하고 유린당한 분한 생
각을 버리기 힘들었고 그럴수록 배반당한 모욕을 앙갚음하고싶은 복수
심이 머리를 들군 하였었다.
계향은 악하거나 마음이 모질지 못하였다. 억봉이가 지훈의 가슴에 총
을 겨누는것을 보았을 때 최절정에 달하였던 그에 대한 증오와 반감은
배송기폭발과 함께 봄날 안개처럼 스러지고말았다. 배송기에 대한 반동
들의 습격이 있던 그날 자기가 작숙한테 술을 가져가지 않았으면 억봉
은 습격을 막아내였을지 모른다. 억봉이가 배송기파괴의 책임을 지고 자
위대장에서 철직되였을 때 계향은 이상하게도 잘코사니한 감정을 꼬물
만큼도 느낄수 없었다. 자기가 지배인한테 억봉에 대한 모든것을 나쁘
게 고해바친것때문에 그렇게 된것 같아 미안하기까지 했다. 계향은
억봉이가 자기때문에 징용올가미를 쓰던 때 비슷한 죄스러운 심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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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나기 어려웠다.
억봉이한테 자기가 빚진것만 같은 마음은 해탄로복구가 시작되면서 더
해졌다. 배송기 실은 기차를 몸으로 막아나선 그의 행동은 영웅적소행
으로 평가되였으며 억봉은 해탄건국청년돌격대 대장이 되였다. 계향
은 억봉의 일이 쭉쭉 펴이는 반면에 자기가 점점 개밥의 도토리신세로
되여가는것도 가슴아팠지만 자기가 옳다고 믿었던 모든것이 뒤집히는것
이 더 괴로왔다. 지훈과 억봉이 대립 쌍방에 놓여있을 때 계향은 무조
건 지훈을 지지했으며 억봉을 욕하여왔었다. 제철소복구에서 기둥이 되
리라 믿었던 지훈은 지금 어디에 가있는지조차 알수 없고 무지한 미련
둥이로 여기던 억봉이가 오히려 한몫 하고있었다. 지금까지 억봉에
대해 품어온 자기의 생각과 감정에는 확실히 무엇인가 모순이 있었다.
이것을 느낄수록 계향은 위축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런 위축감,
무엇인가 빚진것만 같은 죄의식에 처녀로서의 자존심까지 합쳐져 계향
은 억봉을 대하기가 언제나 옹색스러웠다.
계향은 억봉이와 헤여져 정신없이 걸었다. 북문을 빠져나온 계향은 북
사택지구를 벗어나 월봉산쪽으로 향했다. 조용한 산기슭에 이르러 계향
은 풀밭에 풀썩 주저앉았다. 계향은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저 혼자 쿨
쩍쿨쩍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설음이 북받쳐올랐으나 계향은 왜 우는지
자기도 딱히 알수 없었다.

앵돌아져 사라지는 계향을 바라보며 억봉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전


같으면 억봉은 맞받아 되게 욕질을 하든가 다른 사람한테라도 밸풀이를
하려 들었을것이다. 억봉은 요즘 자기자신도 억제하기 힘든 격정에
사로잡히거나 성낼 일이 생기게 되면 삼촌이 언젠가 성이 나도 참을줄
알고 괴로와도 묵묵히 새길줄 알아야 한다고 타이르던 말을 생각했다.
당원이 되고 건국청년돌격대 대장으로 일하게 되고보니 삼촌의 말처럼
옛날에 시키던 일이나 하던 때와는 달랐다. 자기를 생각하기에 앞서 다
른 사람들을 생각해야 했고 행동에 앞서 행동의 목적과 결과를 따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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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지난날엔 설사 무엇을 잘못해도 자기 혼자 욕먹고 책임지면 되였
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자기가 작업조직을 잘못하면 수많은 사람
들이 하루일을 공쳐야 했고 한쪽 말을 듣고 그 말대로 하면 저쪽에서 반
발이 생기거나 그쪽 일이 찌그렀다. 사람이 크건작건 책임을 진다는것
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해탄로의 주인이 되고 주인구실을 하기는 더욱 그랬다. 해탄로의
주인이 된다는것은 해탄로를 책임진다는것을 말했고 주인구실을 하자면
말 하나, 행동 하나 그리고 크고작은 모든 일에서 그것을 책임질만 한
힘과 능력이 있어야 했다. 억봉은 자기의 성격부터 고치려고 애를 썼다.
(에라, 내 한번 참는다.)
억봉은 저 멀리로 사라지는 계향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
거렸다.
다음날 아침이였다. 로체보수작업을 어떻게 조직해야 좋을지 몰라 억
봉은 달모를 찾아갔다. 잘하면 오늘중으로 2호해탄로 탄화실에서 재파
내는 작업이 끝난다. 그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지 억봉은 막연했다.
달모는 해탄로꼭대기 한쪽구석에 쭈그리고앉아 풀풀 한숨만 내쉬고있었
다. 얼굴이 벌개있는걸 보니 열이 나는것 같았다.
《아저씨, 어디 몸이 말째요?》
달모는 대답대신 독한 담배만 뻑뻑 빨았다.
《편찮으면 들어가 누우시지요.》
억봉은 달모가 앓을가봐 걱정이였다. 달모는 건국청년돌격대의 고
문이였다.
《아니, 일없네.》
달모는 로체바닥에 올방자를 틀고앉아 담배불을 끄며 절레절레 머리
를 흔들었다.
《열이 몹시 나는것 같은데요?》
《열? 아니야… 내 오늘 화가 나서 식전에 술을 좀 마셨네.》
억봉은 이때에야 그한테서 확 풍겨오는 술내를 맡았다. 막걸리 둬사
발만 마시면 하루종일 밥 한숟갈 안들고도 기분좋아하는 달모다.
《무슨 술을 아침부터 그렇게 많이 마셔요?》
억봉은 달모옆에 쭈그리고앉으며 언짢아했다.
《자넨 아직 몰라. 속에 불이 일 땐 술로 꺼야 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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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은 속에 일어났다는 그 불을 해탄로에 좀 잡아넣자고 롱처럼 골
려주고싶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달모는 억봉이가 입을 꾹 다물자
안됐는지 푸념바가지를 폈다.
《자네가 욕할줄 아네만 어쩔수 없어. 속이 상해 죽겠는데 어쩌겠
나?》
《무슨 속이 그리 상해요?》
《계향이때문에 그러지 않나. 그 애가 고향에 가겠다네. 어제 집에 들
어가니 갈 준비를 한다구 보따리까지 쌌더군.》
《뭐라구요?》
억봉은 저도 모르게 어성이 높아졌다. 억봉이가 화를 내자 달모는 그
래도 자기의 처조카를 감싸려들었다.
《지배인서기자리를 내놓구 너무 분해 그러겠지… 그 자리가 탐나서
그러는것보다두 괄세받구 업심을 당했으니까…》
《내 원참, 그런 맹꽁이라구야…》
《남자라면 몰라두 체니속이 왜 안 아프겠나?》
《체니구 남자구 그런 매깨비가 어디 있어요? 우학이 편지를 받구두
그래요? 우학인 여기 다시 오지 못해 야단인데…》
《아니, 뭐 우리 우학이한테서 편지가 왔어?》
《아직 못 받았어요?》
억봉은 자기의 백마디 욕설이나 설복보다도 우학의 편지 한장이 더 위
력있으리라는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제 자기가 우학의 일때문에 안됐
다고 걱정했을 때 계향이가 발끈한것도 리해되였다.
《아저씨, 내 머리다야찡 하나 갖다주니까 정신 쑥 들게 골통에다 좀
먹이라요. 도대체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군요. 38도선이 뭐
애들이 장난하느라 그어놓은 금인줄 아나요?》
억봉은 계향을 두고 별의별 욕을 다하였으나 달모는 그 욕설속에서 자
기의 처조카를 위해주는 마음을 읽고 성을 내지 않았다. 억봉은 한참 우
르락푸르락거리고나서 담배까지 한대 피우고야 자기가 왜 달모를 찾아
왔는가를 생각했다.
《아저씨, 탄화실에서 재를 다 파낸 담엔 어느 일을 할가요?》
《글쎄…》
《집기관에 엉킨 타르를 파낼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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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글쎄글쎄만 하지 말구 말 좀 하라요. 아저씬 나보다 그런거 더 잘
알게 아니나요?》
《아다뿐이겠나.》
《그러게 어느걸 하면 좋겠나 말이야요?》
《글쎄말이다.》
《또 글쎄타령이야요?》
《그럼 어쩌겠나. 15년이나 이곳에서 불구경했지만 막상 복구를
하자고보니 뭐가뭔지 모를게 너무 많단 말이야.》
억봉은 대꾸를 못했다. 건국청년돌격대에는 대부분이 억봉이또래였고
억봉이보다 해탄로를 잘 아는 사람들이 얼마 없었다. 모두 해탄로에 불
을 지피고싶은 욕망은 컸으나 밑천이 딸리였다. 억봉이가 쭈그러들자 달
모는 혼자소리로 웅얼거리였다.
《빨리 사람들을 데려와야지, 여기서 일하다 흩어진 사람들을…》
《알았어요. 아저씨, 우리 건국청년돌격대에서 이전에 여기서 일하다
간 사람들을 한사람씩 데려오게 편지두 하구 찾아두 가구 할래요.》
달모는 자기 말에 너무나 고분고분하는 억봉이를 의아히 바라보았다.
달모는 해탄로복구를 너무도 쉽게 여기는 그가 납득되지 않았다.
억봉은 달모한테서 글쎄타령끝에 괜찮은 말 한마디를 들어 앞으로 우
선 사람들부터 모아야겠다는것을 깨달았지만 계향의 일은 아무리 생각
해도 께름직했다. 달모는 자식들과 처조카를 끔찍이도 위했다. 그는 성
이 나도 자식들한테는 변변히 욕 한마디 못하고 저 혼자 끙끙 앓는 사
람이다. 사랑에 눈이 먼데다 용한 그가 자기 처조카를 정신이 번쩍 들
게 다그리라고 기대할수 없었다.
그날 밤이였다. 밤깊어 집에 돌아온 억봉은 바느질을 하고있는 누이
한테 다짜고짜로 이렇게 물었다.
《누이, 내 부탁 하나 좀 들어줄래?》
알뜰은 바느질감을 놓고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남의 의사를
알아보기 전에 덮어놓고 자기 의사부터 강요하던 동생이다.
《이 편지를 좀 전해줘.》
억봉은 웃방 앉은뱅이책상서랍속에 넣어두었던 한장의 편지를 꺼내 누
이한테 내밀었다. 알뜰은 우학이한테서 보내온 편지를 동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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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고 딱한 그의 일을 두고 한숨을 쉬였었다. 알뜰은 동생이 자기한테
온 이 편지를 누구한테 주라는지 몰라 두눈만 껌벅거렸다.
《계향이한테 래일 갖다줘.》
《계향이한테?》
알뜰은 불시에 두눈이 둥그래졌다. 알뜰은 억봉이가 계향이와 파혼했
을 때 계향을 측은하게 여기고 동정했었지만 그가 지배인서기노릇을 하
며 으시거릴 땐 미웠으며 그한테 반발하는 동생을 오히려 동정하였었다.
계향을 미워하던 그 순간에조차 알뜰이가 계향이한테 품었던 감정은 억
봉의 반감에 절반도 못되였었다.
《아, 글쎄 그 맹꽁이가 고향에 가겠다구 한다지 않아. 세상돌아가는
걸 아는지 모르겠어. 38도선이 뭔지 통 모른단 말이야.》
억봉은 38도선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계향을 욕했으나 알뜰이도 그것
이 무슨 도깨비감툰지 알수가 없었다. 련합군이 패망한 일제의 무장해
제를 위하여 군사적목적에서 림시로 설정한다던 가상적인 38도선이
고향에도 오고갈수 없는 분렬의 장벽으로 바뀌고 행복과 불행을 갈라놓
은 그 무슨 경계로 점점 더 변해간다는게 알뜰은 리해되지 않았다. 알
뜰은 동생의 걱정이 리해되고 남았지만 어쩌나 보느라고 우정 모르쇠를
했다.
《누이, 난 래일 석봉이한테 가야 돼.》
《뭐? 석봉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던?》
알뜰은 동생의 속을 떠보느라 지었던 롱기어린 표정을 모두 지워버리
였다. 지금 농촌에서는 반동들의 준동이 심했다. 토지개혁으로 땅을 떼
운 지주들은 발악을 했다.
《무슨 일이 생기긴… 무슨 아이가 편지두 안하니 그러지… 주학섭아
저씨한테 가보라구 편지했는데 망할 자식, 어디 꿈쩍이나 해. 암만해두
작년에 도에 강습갔다 사귀였다던 그 체니한테 단단히 녹아빠진것 같
애.》
억봉은 투덜거리며 담배를 피워물었다.
《원, 별걱정을 다 하구있구나.》
동생한테 무슨 좋지 못한 일이라도 생기지 않았는가 해서 속으로 은
근히 왼새끼를 꼬고 앉았던 알뜰은 억봉을 가볍게 힐난했다.
《공연한 걱정이 뭐야, 빨리 로보수를 시작해야겠는데 사람들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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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할게 아니야.》
《석봉이가 뭐 제맘대루 오고 안 오고 하니… 오래야 오는거지.》
《글쎄 저 못 오는건 할수 없는 노릇이라 해두 주학섭아저씨야 왜 못
보내나 말이야. 그리구 누이두 이젠 직맹심부름 그만두구 해탄로에 와.
해탄로에 불때려면 녀자들이 할 일두 좀 많아서…》
알뜰은 생트집같은 억봉의 말에 가슴이 띠끔했다. 해탄로를 불때는 아
궁이라 한다면 용광로나 평로는 가마라고 할수 있었고 가마에 익혀내는
갖가지 음식은 쇠라 할수 있었다. 음식을 만들자면 우선 아궁에 불을 때
야 하는것처럼 쇠를 얻자면 먼저 불을 달아야 했다. 제철소의 불은 해
탄로였다. 복구가 시작되면서부터 그러지 않아 자기도 해탄로에 나가 일
을 할가 하는 생각이 없지 않던 알뜰이다.
《그러지 말구 래일 누인 계향이한테 가서 단단히 일러. 난 주학섭아
저씨를 데려오구 석봉이녀석을 정신들게 하구 올테니…》
억봉은 빌붙으며 사정하듯 말했다. 웬만해서는 자기가 잘못하고서
도 머리를 숙이지 않던 억봉이다. 알뜰은 낮게 붙는 동생의 모습에서 해
탄로복구의 절박한 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꼭두새벽 차로 떠났건만 억봉은 한낮이 되여서야 동생이 와있는 농촌


마을에 이르렀다. 석봉이가 들어있다는 리민청부위원장네 집은 리소
재지에서도 십리나마 가야 했다. 몸채앞으로 사랑과 외양간, 허청간
이 일직선으로 달리고 사랑채와 외양간사이에 솟을대문을 해서 단 덩실
하니 큰 기와집이였다. 집주인의 드세차고 깐진 일솜씨를 말해주듯
흙매질도 곱게 해서 새로 지은 집처럼 안팎이 멀끔했다.
《주인님 계십니까?》
억봉은 대문앞에서 몇번이고 주인을 불렀으나 집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억봉은 찌꾸덩 대문을 열고 기웃이 마당안을 들여다봤다. 그제
야 대문소리를 들었는지 반기는 소리가 났다.
《에구, 이제야 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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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컥 부엌문을 열고 신을 끌며 마주 나오는 사람은 중늙은이였다.
손에 묻은 물기를 치마에 훔치며 달려나오던 안늙은이는 《애개개―》소
리를 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마도 집안사람 누구를 기다리던 모양이다.
《저― 이 집이 리민청부위원장동무네 집입니까?》
《예, 우리 막내가 리민청부위원장이웨다.》
예순이 아직 안됐을상싶은 안늙은이는 의아해하는 눈길로 억봉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저, 이 집에 토지개혁 도우려고 제철소에서 나와있는 박석봉이
라구…》
주인집 안늙은이는 억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되물었다.
《어디서 오셨수?》
《제철소에서 왔습니다.》
《그래유, 그런데 무슨 일루…》
《네, 동생을 좀 만나려구…》
《그럼 박석봉의…》
《네, 제가 형입니다.》
《아유, 그래요? 그 집 동생이 우리 집에 와있다우. 정말 이렇게 먼
길 찾아오실래게 수고가 많았겠시다.》
권씨는 달려와 수다스럽게 인사를 했다. 권씨는 억봉을 퇴마루에
앉으라고 하더니 끝없이 사설을 늘어놓았다.
《석봉이 그 사람이 우리 마을에 와서 토지개혁에 파종사업까지 지
도하느라 수고가 이만저만 아니라우. 장군님덕에 우리두 논
2 000평에 밭 2 000평을 분여받았시다. 세간 나간 맏아들네, 셋째 아
들네, 넷째아들네까지 모두 합치면 이번에 우리 집안에서 분여받은
땅이 모두 2만평은 될거웨다. 글쎄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나요. 옛
날로 치면 큰 지주지요.》
권씨는 입에서 침이 튀여나는줄도 모르고 열손가락까지 폈다곱았다하
며 자랑을 했다. 권씨는 숨돌릴 틈도 없이 석봉이 칭찬으로 넘어갔다.
《정말 사람이 의젓하구 잘나구… 내 아들 일곱을 낳아 셋을 죽이구
넷을 길렀는데 집의 동생같은 아들이 하나만이라두 있었으면 얼마나 좋
겠수… 동네방네 칭찬이 대단하다우. 난 아까 댁에서 온걸 글쎄 석봉이
그 사람이 오는가 했다우. 하루만 못 봐두 막 보구프지 않나요,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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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씨는 손을 들어올렸다내리며 철썩 자기 무릎을 때리였다.
《우리 동생이 어디 갔습니까?》
《어제 새벽 군으루 회의 갔수다. 어제 밤에 올줄 알았는데 아직 안
왔다우. 일밖에 모르는 성미에 어디 가서 때나 건느지 않는지 원…》
권씨는 석봉을 자기 아들 이상으로 걱정했다. 늙은이의 헤픈 말을 그
대로 다 믿기는 어려워도 석봉이가 이곳에 와서 그만하면 든든히 자리
잡은것 같았다. 억봉은 집 떠나 이곳에 와있는 동생을 자기 자식처럼 돌
봐주는 권씨한테 고맙다고 인사라도 드리고싶었다. 이때 대문이 열리더
니 머리를 치렁치렁 땋아드린 한 처녀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웬만한 장
정들 못지 않게 어깨가 쩍 버그러지고 키가 늘씬한 처녀는 모든 생김생
김이 우람찬 체격에 어울리게 억실억실하고 복스러웠다.
《우리 딸이야요.》
권씨는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딸을 향해 소리쳤다.
《얘, 인사드려라. 제철소에서 오셨다.》
처녀는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억봉에게 어줍게 머리를 숙여보이였다.
《에구, 갑자기 벙어리가 됐냐? 석봉이 형님이시라는데…》
권씨가 재차 귀띔해주는 말에 처녀는 귀밑까지 빨개졌다. 그렇지만 처
녀는 성격이 무척 활달했고 모든 행동이 씨원씨원하면서도 듬직했다.
《어마나, 어떻게 이렇게 오셨나요?》
처녀는 노래라도 하듯 부드러운 저음으로 말하더니 진정으로 반가와
하며 억봉이한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석봉동무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처녀는 목소리가 여간 곱지 않았다. 거쿨지고 우람찬 체격마저 이 목
소리때문에 한결 무던하고 복스러운 인상을 주는가싶다. 처녀는 손과 발
이 크고 코며 귀, 입 모두가 선이 굵고 큼직큼직했으나 모든 생김생김
이 독특한 하나의 녀성미로 통일되여있었다. 이 처녀가 리민청부위원장
이였다. 권씨가 점심준비차로 수선을 떨며 부엌으로 들어가고 처녀가 퇴
마루에 앉았을 때 억봉은 조용히 물었다.
《작년에 도에 강습갔댔습니까?》
《네. 석봉동무랑 공청강습을 같이 받았어요.》
처녀의 스스럼없는 대답에 억봉은 웬일인지 가슴이 철렁했다. 언젠가
석봉의 주머니에서 보았던 편지의 주인이 지금 자기옆에 앉아있었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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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 이 처녀를 믿고 언젠가 자기한테 도에 강습가라면서 쌀을 얻어주
겠다고 큰소리를 쳤을것이다. 억봉은 처녀가 첫인상에 그만하면 괜찮았
으나 석봉이가 지금 이 처녀네 집에 제집처럼 와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이 이상했다. 석봉이가 오늘중으로 올것 같지 못하다는 처녀의 이야기
를 듣고서부터는 동생이 괘씸하게까지 생각됐다. 석봉이가 들어있는 사
랑채는 신방처럼 깨끗하고 아담하게 꾸려져있었다. 곱게 다려 벽에
걸어놓은 석봉의 옷가지며 깨끗한 이불, 알른알른 닦아놓은 사기재털이,
구석구석에서는 주인집 어머니와 처녀의 알뜰하고 세심한 손길이 느껴
졌다. 억봉이가 떠날 차비를 하며 주학섭이네 고향마을로 가는 길을 물
었을 때 처녀는 펄쩍 뛰였다.
《어마나, 구연리가 여기서 몇리게 그러나요. 사리원에 가서 기차
를 타고가는게 빨라요.》
억봉은 주인집 안늙은이가 제법 사돈대접을 하려들고 주인집 처녀가
몹시 당황하고 미안해하며 만류했으나 뿌득뿌득 뿌리치고 길을 떠났다.
일이 이렇게 꼬일줄 알았더라면 기차타고 오다 사리원에 내리는게 훨씬
좋았을번 했다. 그랬더라면 군에서 석봉을 만났을수도 있고 동생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주학섭아저씨네 고향으로 찾아가기가 훨씬 쉬웠을것
이다.
(망할 녀석, 장가도 들기 전에 데릴사위노릇을 하다니…)
억봉은 석봉이가 이곳 생활에 정신이 팔려 오늘까지 주학섭아저씨한
테도 다녀오지 않은것 같이 생각되면서 동생이 있으면 줴박아대고싶을
지경이였다. 억봉은 군에서 비료를 실어다 부리우고 돌아가는 목탄차를
만나 사리원까지 쉽게 올수 있었다.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봉산에서도
맨 끝이라고 할수 있는 주학섭이네 고향까지 왔을 때는 날이 벌써 어두
워왔다.
억봉이가 기차를 타던 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줄 몰랐다. 오
는체없이 보슬보슬 내리기에 먼지잼이나 하려는줄 알았는데 벌써 호미
자락은 왔다.
날이 어두워가는데 따라 비발이 점점 굵어가며 제법 후둑후둑 소리를
내는걸 보니 비밑이 가벼울것 같지 않았다. 농사에는 약비였으나 초행
길의 밤나그네한테는 지꿎은 고생비였다. 동네사람들이 《제철소딱쇠》
라고 부르는 주학섭이네 대장간을 찾았을 때 억봉은 쥐여짤 정도로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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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락하니 젖었다.
주학섭이네 대장간은 마을에서 동떨어진 개울가에 자리잡고있었다. 이
전에 물방아간이던것을 야장간으로 꾸리고 그에 잇달아 크지 않은 집을
지었는데 거기서 주학섭이네 식구가 살림을 했다. 모루앞에 앉아 담배
를 피우던 주학섭은 물에 빠졌다 건져낸 사람같은 행색으로 대장간에 들
어서는 억봉을 보고 놀랐다.
《아니, 이게 누구야?》
놀란것은 주학섭이뿐만이 아니였다. 군에 회의갔다던 석봉이도 이
곳에 와있었다.
《아니, 형!》
동생을 여기 와서 만나게 될줄은 억봉이로서도 천만뜻밖이였다.
《아저씨!》
주학섭의 막내딸이 새된 소리를 지르고 달려오자 마누라가 《어디―
어디》 소리치며 나오고 그의 뒤로 올망졸망한 네 딸이 제가끔 억봉을
반기였다. 억봉은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억봉이 젖은 옷을 벗어놓고
주학섭의 옷을 갈아입었을 때 《걱정말라》는 숯불이 이글거리는 화로
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예 와서도 늘 이렇게 불하구 살지.》
주학섭은 화로를 내려놓고 해탄로에서 일하던 때 쓰군 하던 다 낡고
쭈그러진 벙거지 중절모를 벗어 말코지에 걸었다.
《오늘은 이거 어떻게 된거야. 형제가 동시에 날아들었으니…》
주학섭은 억봉이와 석봉을 번갈아 바라보며 헤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넌 정말 어떻게 여기로 왔니?》
억봉은 그새 혈색도 퍽 좋아지고 름름해진 석봉을 바라봤다.
《군에 회의갔다 곧장 왔지 뭐. 형이 편지했길래…》
억봉은 동생을 오래간만에 만났으나 형제의 정을 나눌 사이가 없었다.
《그래, 장군님께서 해탄로를 복구하라고 하셨다지?》
주학섭은 손에 곰방대를 든채 렴치도 없이 형제사이에 쐐기처럼 들어
박히였다.
《예.》
주학섭이 바싹 앞으로 나앉고 석봉이도 호기심이 동해 억봉의 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억봉의 둘레에는 주학섭이네 온 식구가 바싹 모여들

312
었다. 억봉은 주학섭의 막내딸을 무릎에 올려놓고 해탄로복구에 대한
장군님의 뜻을 받아안던 그때를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장군님께서는 빨리 해탄로를 복구하고 콕스를 뽑으라고 하셨대요.》
《야.》
석봉은 기쁨을 금치 못해했다.
주학섭은 곰방대에 불을 붙이고도 들여빨 생각을 잊었다. 어지러이 실
오리같은 연기를 피워올리던 곰방대에 불이 죽도록 학섭은 억봉의 얼굴
만 바라봤다.
《그래 해탄로복구를 시작했나?》
석봉이가 궁금한지 형한테 물었다.
《2호해탄로 탄화실에서 재는 벌써 다 파냈다.》
《야―》
석봉이가 탄성을 올리자 멋모르는 주학섭이네 딸들도 덩달아 좋아했
다. 여기 와서 산 반년을 빼여놓고 제철소와 함께 나이먹어온 그들이여
서 해탄로니 탄화실이니 하는 말들이 귀에 설지 않은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삼촌을 모시러 왔수다.》
억봉은 넌지시 한마디 내비치며 주학섭을 건네다봤다. 주학섭은 안됐
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빈입을 쩝쩝 다시더니 변명처럼 웅얼거리였다.
《자네 편지를 받았네. 석봉이녀석두 벌써 이렇게 두번째 찾아오
구…》
그간 석봉이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억봉은 이곳에 찾아오면서 속으로
혼자 동생을 욕하던게 생각나 미안한 마음으로 석봉을 바라봤다. 올방
자를 틀고앉아있는 동생의 모습은 의젓했다. 주학섭은 저 혼자 푸념을
계속했다.
《가고싶은 마음이야 내라구 왜 없겠나… 마음같아서는 벌써 갔지. 여
기 처음 와서 자리를 잡을 때 동네신세를 이만저만 졌어야지. 장군님 주
신 땅에 첫해농사를 짓는데 호미구 낫이구 내 할수 있는껏 농쟁기를 벼
려주구 가려구… 게다가 저 마누라가 어디 고분고분 말을 들어야지…》
주학섭은 곰방대 든 손으로 삿대질을 하며 마누라를 향해 찔끔 눈을
흘겼다. 주학섭의 마누라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눈섭 하나 까딱 안했다.
이글거리는 화로불에 억봉의 젖은 옷을 말리우며 본체만체 하는 그의 표
정에서는 비록 령감이 큰소리를 치지만 집안살림에서 주인은 자기라는

313
자신만만한 배심이 엿보이였다. 억봉은 주학섭이 꼭지를 떼놓은 말에 슬
며시 부채질을 했다.
《온 식구 자리 한번 옮기는게 어디 간단한 일이나요. 하지만 삼촌을
기다리다못해 이렇게 내가 왔수다. 아마 이제 어떻게 되면 달모아저씨
랑 또 올거예요.》
《아니, 그러지 말라구… 내 어련히 가지 않으리… 나살이나 꽁무니
에 간수해가지구 제 녀편네 하나 다스리지 못해 이렇게 자네들을 걱정
시키며 솥 뽑아놓구 삼년이네그려.》
《에구, 나때문에 못 간것 같시다 원.》
주학섭의 마누라는 남편의 지청구가 듣기 싫은 모양이였다. 억봉은 자
기가 내외싸움을 붙이는것 같아 은근히 조바심했으나 주학섭은 마누라
의 말 한마디에 쑥 들어가고말았다.
《됐네 됐어, 이 세상에 자기 마누라 이기는 남자가 없다니까 나두 지
구말아야지.》
주학섭은 푸념처럼 중얼거리며 곰방대를 붙여물었다.
밤저녁이 지나자 밝은 달이 바라지를 환히 비쳤다. 말리운 옷을 갈아
입고 억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억봉이가 밤차로 떠나겠다는 말에
주학섭은 억봉이가 처음 오던 때만큼이나 놀랐다.
《아니 이런 법이 어디 있어. 우리 집에 왔으면 하루밤 자고 가야지.
그래 나한테 오라는 말 한마디 하려고 이렇게 왔단 말인가?》
《그럼요. 그렇지 않구야 잠간시간두 아까운데 뭘하러 여기 오겠어
요.》
주학섭은 억봉을 붙들수 없다는걸 알았을 때 입버릇처럼 마누라를 욕
했다.
《님자, 보라구. 님자때문에 억봉이네 형제가 이 고생 아니나, 원…》
주학섭의 말에 그의 마누라는 마음에 짚이는바가 있는지 아무 소리 못
했다. 주학섭은 저 혼자 한참 두덜거리더니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걸치고나서 주학섭은 말코지에서 낡아빠진 작업중절모를 벗겨
머리우에 올려놓더니 마누라에게 말했다.
《난 아야 억봉이랑 같이 이제 제철소로 갈테니 님잔 아이들을 데리
고 천천히 따라오라구.》
바래주려고 주학섭이 따라나오는줄 알았던 억봉이와 석봉은 당황했다.

314
《원, 삼촌두… 하루이틀 다녀오는 길두 아니구 아주 살러 가는데 어
떻게 이렇게 떠난다구 그러나요. 떠날 준비가 되는 차례로 련락을 하라
구요. 내 모시러 올게.》
오히려 억봉이가 주학섭을 만류해야 했다. 그래도 주학섭이 뿌득뿌득
억봉을 따라 같이 가겠다고 하자 이번엔 마누라가 가만있지 않았다.
《좋수다. 그럼 내가 오늘 밤 먼저 갈게 령감이 아이들 데리고 천천
히 따라오시우.》
그의 마누라는 정말 억봉을 따라가기라도 할것처럼 뻘겅뒤주를 뒤지
였다. 말휘갑을 잘 채는 주학섭이건만 녀편네한테는 언제나 지기마련이
였다.
《좋네, 그럼 준비해서 같이 가자구.》
주학섭은 자기 처를 바라보며 어이없다는듯 웃고말았다. 서로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티각태각하지만 퍽 의가 좋은 주학섭네 내외를 보며 억
봉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 억봉은 이른새벽부터 밤늦도록 돌아친 피곤
이 그 웃음으로 모두 가시여지는상싶었다. 억봉은 잠시후 석봉이와
함께 주학섭이네 집을 나섰다. 주학섭이네 부부는 멀리까지 따라나와 억
봉이네 형제를 바래주었다. 말끔히 비에 씻긴 하늘에서는 달이 금빛을
쏟아부었다. 유난히도 달빛밝은 밤이였다. 비물에 불어난 개울물도
그네들을 잘 가라고 바래주며 속삭이듯 잠시도 쉬지 않고 주절거렸다.

억봉은 요즘 하루해가 어떻게 저무는지 알수 없었다. 춘분을 지나면


서부터 점점 길어지기 시작한 낮이 겨울해보다도 짧게 생각되는것은 이
상스러운 일이였다. 주학섭을 찾아 꼭두새벽에 집을 떠났던 억봉은
다음날 샐녘에야 돌아왔고 그길로 인차 제철소에 나갔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하루해가 또 다 지나갔다. 억봉은 기차간에서 졸며말며 한것외
에 따로 눈을 붙이지 못하였으나 진종일 피곤한줄 몰랐다. 주학섭한테
서 인차 제철소로 돌아오겠다는 확답을 받은것도 기쁘지만 석봉의 일도
그만하면 괜찮았다. 몸성할뿐아니라 우멍스럽게 색시감까지 하나 척 골
315
라놓지 않았는가. 누이한테 부탁했던 일 하나가 어떻게 되였는지 궁금
했다. 계향이가 이곳에 남아있는대야 별로 반가울건 없지만 그때문에 걱
정하는 달모나 우학이를 생각하면 내버려둘수 없다. 억봉은 퇴근하는 길
에 누이를 찾아 직맹사무실에 갔다. 텅 빈 집을 혼자 지키고앉았던 알
뜰은 동생을 반겼다.
《잘 다녀왔니?》
《그럼―》
《석봉이랑 잘있던?》
《신랑대접 받으며 아주 잘있어.》
알뜰은 동생이 주학섭이네 고향에 다녀온 소식을 이것저것 묻고나서
장한듯이 말했다.
《난 오늘 해탄로루 적을 떼옮길 수속 다했다.》
《뭐 벌써?》
억봉은 해탄로에서 먼지 하나라도 털어주겠다는 사람을 보면 요즘 그
저 반가왔다.
《정말 편지는 갖다줬나?》
알뜰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는지 우정 그러는지 억봉을 멀뚱멀뚱 쳐
다봤다.
《계향이한테 말이야.》
《애개개… 내 정신 봐. 편지를 집에 그냥 두고 깜빡 잊었구나.》
알뜰은 천연스럽게 대답했으나 그의 표정과 몸가짐은 어딘가 어색했
다. 억봉은 여느때 같으면 싫은 소리를 했겠지만 오늘은 기쁜 일이 많
아 아무 말 안했다.
억봉은 그길로 달모네 집을 찾아떠났다. 헌 양철쪼박을 주어다 만든
달모네 집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해가 질녘이면 아직 날씨가 쌀쌀하
건만 계향은 무더운 여름날 바람을 쏘이듯 허드레옷차림으로 퇴마루에
앉아있었다. 그의 무릎에는 무슨 종이 한장이 놓여있었다. 계향은 쓸쓸
한 표정으로 서쪽하늘을 바라보고있었다.
《어험―》
억봉은 헛기침을 하며 달모네 집마당으로 들어섰다. 계향은 퇴마루에
서 일어섰다. 얼굴은 부석부석했으나 그의 눈빛은 퍽 안정되여있었다.
《달모아저씨 들어왔소?》

316
《아니요.》
계향은 표정없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억봉은 집에 가서
우학의 편지를 가지고오지 못한게 후회됐다. 편지를 가져왔으면 주고 돌
아가면 되겠는데 이제는 할수없이 말이라도 해야 했다.
《동무 아직 정신 못 차리구 고향에 돌아갈 맹꽁이생각을 하구 앉아
있는게 아니요?》
발끈할줄 알았던 계향은 이상하게도 고개를 푹 떨굴뿐이였다. 자기 설
음에 지쳐 풀이 죽은 계향을 보자 억봉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으나 꺼낸
김에 마저 말을 하고싶었다.
《동무 오빤 다시 오지 못해 야단인데 동문 뭐요? 정치적각성이란 꼬
물만큼두 없이 38도선을 넘어가겠다는게 민청원이요? 동무때문에 동무
작숙이 얼마나 걱정하는줄 알기나 하는가 말이요. 지배인서기가 뭐게 그
만두면 둔거지… 그보다 얼싸한 일이 얼마나 많다구. 암만 녀자라두 기
능공학교 같은데 가서 기술을 배우면 기계두 돌리구 천정기중기 같은것
두 타구. 세상 별거 다하는건데 남조선에 가겠다니 내 원 참…》
고개를 푹 떨군채 토방밑에 서있는 계향의 두눈에서는 눈물이 금시에
뚤렁뚤렁 떨어졌다. 억봉은 계향이가 소리없이 우는 바람에 입이 얼어
붙고말았다.
《내 이제 동무 오빠 편지 가져다줄게 보우.》
할말이 없어진 억봉은 공연히 저 혼자 우둘거렸다. 오빠의 편지라는
말에 계향은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더니 부엌으로 뛰여들어갔다. 억봉
은 남의 집에 와서 공연히 집주인을 울려놓은것 같아 어떻게 했으면 좋
을지 알수 없었다. 억봉은 이때에야 아까 계향이가 무릎우에 놓고 앉았
다가 토방우에 내버려둔 편지를 보았다. 눈물로 얼룩진 그 편지는 우학
이한테서 자기에게 보내온 편지였다. 누이가 집에 놓아두고 잊어버렸다
던 그 편지는 계향이한테 와있었다.
《아니, 누이가 날 속였구나.》
억봉은 얼굴이 벌개져 달모네 집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점심시간에 계향이한테 들렸던 알뜰은 퇴근길에 다시 그를 찾아갔다.


계향은 두눈이 퉁퉁 부어 부엌에 앉아있었다. 알뜰은 조심스럽게 달모
네 부엌으로 들어섰다.

317
《계향이, 왜 그러니?》
부엌아궁앞에 두무릎을 곤두세우고 치마폭으로 감싸안은채 앉아있
던 계향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두눈에선 눈물이 비오듯 했다. 계향은
알뜰을 알아보고 고개를 돌리였다. 오빠의 편지때문에 마음이 아프겠지
만 계향은 그것때문에만 그러는것 같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니?》
걱정하여 물어보는 알뜰의 말에 계향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채 울음섞
인 소리로 매섭게 쐈다.
《언닌 뭘하러 또 왔어요? 그러지 않아두 이자까지 억봉동무한테
욕먹었는데…》
알뜰은 매정스럽게 따벌처럼 쏘는 계향의 말에 노여움보다 걱정이 앞
섰다. 자기가 동생한테 장난삼아 거짓말한게 말썽을 일으킨 모양이다.
억봉이가 이곳에 와서 계향이를 울려놓고 간게 틀림없었다.
알뜰은 계향이옆에 쭈그리고앉으며 자기의 실없는 롱질이 계향이한테
화를 입힌것 같아 그의 어깨를 살며시 그러안았다. 계향은 알뜰의 부드
러운 손길이 자기 어깨에 닿고 웃음어린 얼굴이 눈앞에 다가서는 순간
설음이 북받쳐올랐다. 계향은 알뜰을 뿌리치며 섧게 흐느꼈다. 알뜰
은 아무말없이 그의 어깨를 자꾸만 어루만져주었다. 울고싶을 땐 실컷
우는것도 나쁘지 않다. 커다란 슬픔을 눈물로 달래기는 어려워도 웬만
한 괴로움과 안타까움은 눈물속에 녹아내리는수도 있다. 얼마 울고나서
계향은 속이 좀 풀린 모양이였다.
《언니, 전 정말 맹꽁이지요?》
《계향이가 왜 맹꽁이란 말이야.》
알뜰은 진정으로 그를 위로해주고싶었다.
《아니예요. 전 정말 맹꽁이예요.》
알뜰의 말을 부정하며 자신을 질책하는 그의 어조는 퍽 어른스러웠다.
요사이 슬픔과 모대김속에서 계향은 마음속에 그 무슨 커다란 변화가 생
기고있었다. 계향은 자기 마음에 변화를 가져다준 그 충격이 아직 잦아
들지 않은것 같았다.
《전 오늘 낮에 언니가 가져다준 오빠의 편지를 보고 얼마나 울었는
지 몰라요. 그런데 얼마전에 억봉동무가 불쑥 마당에 들어서더니 다짜
고짜로 맹꽁이라고 욕하는게 아니예요. 민청원자격이 없다느니, 정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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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없다느니 하면서 말이예요. 가슴이 아프지만 억봉동무 말은 옳아요.
제가 왜 이곳을 떠날 생각을 했을가요. 고향만 생각했지 내 고향이
38도선이남이라는 생각은 왜 꼬물만큼두 안했을가요? 언니, 전 정말 맹
꽁이지요?》
물기어린 그의 두눈에서는 광택같은 그 무엇이 번쩍거렸다. 알뜰은 그
를 와락 껴안고 고무해주고싶었으나 슬며시 손목만 잡았다.
《전 기술을 배우겠어요. 기능공학교에 가서 공부할래요.》
《계향이, 정말 좋은 생각을 했어.》
알뜰은 계향의 손을 힘주어 꼭 잡은채 그를 바라봤다.
《제가 기술을 배워 기계를 척척 돌리게 되면 그때 가선 누구도 저보
구 맹꽁이라 못할거예요.》
계향은 억봉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도 그가 마구 내뱉고 간 말들이 가
슴에 맺혀 잘 내려가지 않는 모양이였다. 알뜰은 억봉이와 계향의 심상
치 않은 사이를 새삼스레 깨달았다. 파혼후 두사람사이는 오히려 가까
와지고있었다.
《우리 억봉인 성미가 불같아 욱하구 욕두 잘하지만 속까지 그렇게 거
친건 아니야. 요즘 너때문에 얼마나 속상해하는줄 아니? 전번날엔 글쎄
나보구 너한테 가보라는게 아니냐. 네가 생가슴을 앓는것 같다면서… 그
리구 그 애가 파혼한건 너를 나쁘게 생각해서라기보다 너한테 좋게 해
주려고 그랬던거야. 그 앤 지금 속이 알근해 야단이란다.》
계향은 사람 놀리지 말라는듯 아무 대꾸 안했으나 말일망정 위하고 생
각해준다는게 싫지 않은 표정이다. 알뜰이가 처음 찾아왔을 때에는 돌아
다보지도 않더니 그가 떠날 때 계향은 문밖까지 따라나와 바래주었다.
알뜰은 계향이네 집을 나와 장거리로 향했다. 일은 그만하면 잘된셈
이다.
억봉이가 계향이를 울리긴 했지만 그의 머리에 정통으로 다야찡을 먹
여 벌써 효과를 내는게 틀림없었다. 알뜰은 억봉이와 계향의 사이가 다
시 가까와지기를 은근히 바라게 되는것이였다. 억봉의 말을 들으면
석봉의 일은 이제 굿이나 보다 떡을 먹으면 된다고 했다. 석봉이를 장
가들이기 위해서라도 빨리 억봉의 일을 서둘러야 한다.
제철소가 국영기업소로 되고 복구가 본격화되면서 공장에서는 매달 봉
급을 주기 시작했다. 오늘은 봉급받는 날이여서 길거리는 여느때없이 흥

319
성거렸다. 사람들이 저저마다 봉급봉투를 주머니에 넣은채 상점으로, 음
식점으로, 장마당으로 모여든다. 남자들은 막걸리집이나 선술집을
즐겨찾고 처녀들은 잡화점에 들려 마음에 드는 물건 하나씩들 사들
고 오화탕이나 과자를 남모르게 깨물기 일쑤다. 국수집, 떡집, 지짐집,
비지집… 각종 음식점이 손님들을 부르고 온갖 상점들이 밤깊도록 활짝
문을 열어놓은채 닫길줄 모른다. 알뜰은 직맹에서 받은 마지막봉급으로
어물점에 들려 절인고등어 한쌈을 사들고 잡화점앞을 지나다 빨래비누
까지 한장 샀다. 흥겨운 마음으로 집을 향해 저녁거리를 지나던 알뜰은
국수집앞에 서있는 한사람을 보고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누런 승마바
지에 양복저고리를 입고 캡을 쓴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낯익었다. 저고
리앞단추를 풀어놓은채 바지주머니에 두손을 찌르고 국수집안을 들여다
보는 사람은 고필주였다.
《아니, 저 사람이 어떻게?》
알뜰은 와뜰 놀라며 저도 모르게 입속으로 부르짖었다. 알뜰은 자기
눈을 믿기 어려웠다. 불행에 빠진 자기를 동정하는척 하면서 유괴하여
릉욕하려던 고필주, 남편과 함께 늘쌍 술판에 마주앉고 투전판에 같이
밀려다니다가 남편의 도십장자리를 빼앗아냈고 동무의 녀편네까지 덮치
려들던 파렴치한 협잡군, 알뜰의 정조를 빼앗으려다가 알뜰의 귀한
자식까지 병신 만들어준 필주였다. 알뜰은 고필주가 이곳에 나타난것이
놀라왔다.
알뜰은 몇번이고 두눈을 슴벅이였다. 고필주는 입에 물었던 꽁초를 뱉
아버리더니 국수집안으로 쑥 들어가버리였다.
알뜰은 멈추었던 발걸음을 그제야 옮기기 시작했다. 알뜰은 국수집앞
을 지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안을 들여다보았다. 문을 활짝 열어놓
아 노란 장판까지 빤히 들여다보이는 국수집에는 여라문명의 손님이 길
다란 상에 마주앉아있었다. 방안에 필주 비슷한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잘못 보았겠지. 세상에는 이름이 같은 사람도, 얼굴이 비슷한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
고필주 비슷한 사람의 모습은 필주한테 유괴당하여 크게 욕을 볼번 한
치욕의 그밤만이 아니라 첩이 되여가지고 청춘을 유린당하던 가슴떨리
는 지난날을 모두 샅샅이 되살려놓았다.
알뜰의 뒤숭숭한 마음은 집에 돌아와서도 진정되지 않았다. 알뜰은 그

320
가 혹시 남편의 소식을 갖고 온게 아닐가 하는 이상스러운 예감이 들었
다. 알뜰은 고향에 돌아온 후 남편의 소식을 전혀 몰랐다. 뜬계집을 끼
고 돌아다니던 그가 본처한테 돌아왔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어느 공사
판에서 죽었다는 소식도 있었다. 예로부터 부모나 형제, 자식보다도 가
까운것이 부부사이라 했지만 일단 갈라지면 그 순간부터 원쑤처럼 멀어
지는것이 부부관계였다. 옛남편이 죽었든 살아있든 그것이 오늘 자기한
테 관계되거나 무슨 피해를 가져올리 없건만 알뜰은 앙금앉았던 물독을
휘저어놓은것처럼 잊어버리려고 애쓰는 과거의 지저분한 모든 일이
떠올라 마음이 흐리였다. 알뜰은 마음 한구석에 소리없이 끼쳐오는
불안을 가시려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걸싸게 부엌일을 했다. 국수집앞에
서있던 필주 비슷한 사람의 얼굴은 눈앞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알뜰은 버치를 들고 그릇 가셔낸 물을 수채구멍에 버리며 화가 나서 중
얼거렸다.
(필주가 이곳에 왔다면 어쨌단 말인가. 그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게.)
알뜰은 억봉의 저녁상을 따로 차려놓고나서 삼촌어머니와 함께 저녁
을 먼저 들었다. 김치독밑에 남아있던 무우를 꺼내 얼벌벌하게 메우고
고등어를 지져놓아 저녁은 여느때없이 풍성했다. 한참 저녁을 먹는데 밖
에서 인기척이 났다. 알뜰은 억봉이가 때마침 오는것 같아 자리에서 일
어나 부엌으로 내려섰다. 밖에서 나던 인기척은 문앞에 와서 멎더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주인님 계십니까?》
문밖에서 나는 남자목소리에 알뜰은 웬일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알
뜰은 부엌 한가운데 버티고 선채 물었다.
《뉘신지요?》
《저, 이 집이 박억봉동무네 집입니까?》
《예―》
알뜰은 억봉의 동무가 온것 같아 사이문을 닫고나서 부엌문을 열었다.
이미 어두웠으나 부엌에서 내비치는 전기불빛에 바깥사람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났다. 문밖에 서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고필주였다. 알뜰
은 필주가 자기 모르게 뒤를 밟아 집에까지 따라온것 같아 가슴이 섬찍
했다. 놀란것은 알뜰만이 아니였다.
《아!》

321
필주는 외마디소리를 내고나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채 온몸이
굳어져 알뜰을 바라봤다. 두사람은 한동안 마주 쳐다봤다.
《저… 억봉이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동생은 아직 안 들어왔어요.》
알뜰은 필주가 묻는 말에 대답을 마치기 바쁘게 문을 닫아버리였다.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 알뜰은 문가에 굳어진듯이 서있었다. 밖에
서는 아무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필주는 필주대로 문밖에 굳어져 서있었다. 쾅 소리를 내며 문이 코앞


에서 닫겨지자 얼굴에 바람이 훅 끼얹혀지고 어둠이 갑자기 주위를 내
리덮쳤다. 필주는 눈앞이 캄캄했다. 진종일 애쓰며 찾아와 이렇게 거지
몰리우듯 하고 려행길에서 우연히 사귀였던 억봉이가 한때 자기가 눈독
을 들이였던 녀자의 동생일줄이야… 필주는 오래동안 품들여 면밀히 그
물을 쳤다가 아차 실수해 알뜰을 놓친걸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고 아수
했다. 필주의 오른팔에는 그날 밤 알뜰이가 깨물었던 이발자리가 보기
흉하게 아직 남아있었다. 필주는 팔딴지의 그 허물을 볼 때마다 지난날
자기가 수많은 녀자들한테 저지른 죄악이 드러나는것 같아 팔소매를 끌
어당겨 남이 못 보게 가리우군 하였었다.
(빌어먹을…)
필주는 죽은듯 조용한 부엌문쪽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집앞에서 물러섰다. 필주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나서 어
둠속을 정처없이 걷기 시작했다. 걸음걸음마다 그의 입에서는 무서운 욕
설이 튀여나왔다. 그것은 매정하고 독스럽기 그지없는 알뜰에 대한
욕이라기보다도 나락으로 굴러내리기 시작한 자기 운명에 대한 일종의
한탄이였다.
필주의 지나온 생활은 자랑할만 한것이 못되였다. 필주가 태여나던 때
도청직원이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후 산골군수노릇까지 하였었다. 필
주는 아버지덕에 무척 호강하며 방종하게 자랐다. 그의 부모들은 자기
322
네 외아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킬 생각이였으나 필주는 너무 일찍 돈과 녀
자맛을 알게 되여 중학도 마치지 못하였다. 중학교 4학년때 술집녀자때
문에 한 장사군과 싸우고 학교에서 쫓겨나면서 필주는 자신을 이렇게 위
로했다.
(돈! 돈만 있으면 된다. 공부는 해서 무엇해!)
필주는 더 배우기를 단념하고 술집과 투전판에 붙어살았다. 아버지가
벼슬하며 긁어모았던 재산은 아버지자신이 대부분 탕진해버리였다.
아버지가 투전판에서 싸움끝에 칼맞고 죽은 후 필주는 아버지 친구라는
한 협잡군과 손잡고 가산을 팔아 투기업에 나섰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청부업도 해보고 투전판과 장사판에도 머리를 들여밀었으나 가산은
점점 기울어갔다. 그리하여 필주에게 처음 차례진것은 로동판의 발십장
자리였다. 이미 맛본 황금의 쾌락을 잊기 어려웠고 이른 나이에 술과 녀
자한테 붙인 버릇을 버릴수 없었다. 필주가 알뜰을 알게 된것은 일본고
주파중공업주식회사 성진공장건설장에서 발십장노릇을 하던 때였다. 필
주 우로는 도십장과 일본인청부업자가 있었고 필주 아래로는 이십여명
의 로동자들이 있었다. 필주는 자기 상급인 도십장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술병을 사들고 집에 찾아갔다가 겸이포바닥에서 데려왔다는 그의 첩이
고운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필주는 알뜰이한테 눈독을 들이고 도십장네
집에 더욱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필주는 도십장 황가가 알뜰이한테
싫증 느낀것을 알고 그가 좋아하는 술집계집한테 꾹돈을 찔러주며 황가
와 같이 성진에서 자리를 뜨도록 꾀하였다. 그리하여 황가의 도십장자
리를 타고앉은 필주는 그의 첩 알뜰이까지 자기 손에 넣으려고 하였으
나 끝내 뜻을 못 이루고말았다. 필주는 알뜰을 유괴하던 날 황가네 집
을 말끔히 털어내고 그 도적죄를 알뜰이한테 뒤집어씌움으로써 그를 낚
으려고 뿌리였던 돈의 대부분은 보상할수 있었으나 알뜰을 놓침으로써
수욕을 채우지 못하였을뿐아니라 한 열흘 데리고 놀다가 돈냥이나 있는
촌 홀아비한테 넘겨주고 받으려던 작지 않은 돈을 잃고말았다. 그후 필
주는 공사자금을 잘라먹은것이 탄로되여 자기산하 백여명 로동자의
보름분 품값까지 주머니에 넣은채 성진공장건설장을 자리뜨고말았다. 여
기저기를 떠돌아다니다가 필주는 청진제철소건설장에 가서 도십장노
릇을 하게 됐다. 이때 필주는 패싸움끝에 살인을 하게 됐다. 필주는 쓰
리군대장노릇도 하고 강도질도 하며 법을 피해다니다가 만주땅에서

323
붙들리고말았다. 필주에게 들씌워진 여러가지 항목의 죄를 벗겨주고 살
려준 사람은 기또 마사오였다. 필주는 일본제철주식회사 청진공장을 건
설하던 때 회사대표로 드나드는 기또를 몇번 본적 있었다. 당시 명목상
일철주식회사 만주국주재 대표로 활약하던 기또는 감옥에서 필주를
룡정의 어느 뒤골목료정으로 불러내여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는 너의 아버지가 대일본제국을 위해 한때 군수까지 했다는것
을 알고있다. 네가 이렇게 된것은 너와 너의 가문의 수치일뿐아니라 우
리 대일본제국의 수치이기도 하다. 네가 내 말만 듣는다면 모든 죄를 용
서해줄뿐아니라 너에게 한때 너의 아버지가 누리였던것보다 몇배 훌륭
한 부귀영화와 새로운 출세의 길을 가리켜줄수 있다.》
이날부터 필주는 기또의 비밀부하가 되였다. 필주는 며칠이나 배를 타
고 어딘지도 모르는 섬으로 실려갔다. 뱀만 욱실거리는 그 섬에서 보신
법이며 암호해득법, 통신련락방법 등을 배우고났을 때 기또는 필주를 불
렀다. 기또는 송별의 연회석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왕 죄를 지은 몸이니 자네는 조선으로 돌아가 감옥신세를 좀 지
라구. 그다음엔 겸이포에 가서 자리를 잡게. 차후 행동방향에 대해서는
이 유미상한테서 지시받으라.》
기또는 자기옆에 앉아있는 일본녀인에게 필주를 소개했다. 필주는 유
미의 안내를 받아 조선에 돌아왔고 재판이요 뭐요 하는 복잡한 법적형
식의 연극을 거쳐 서울감옥에 들어갔다. 감옥에 들어가던 날 유미는 필
주에게 마지막지령을 주었다.
《오늘부터 너의 대호는 HR―08이다. 5년이고 10년이고 자리잡고 기
다리느라면 지령이 닿을것이다.》
반년만에 일본은 망하고말았다. 필주가 감옥에서 나오기 며칠전 간수
는 집에서 왔다는 엽서를 전했다. 그 엽서는 유미한테서 온 암호지령이
였다.
《출옥후 자리잡으면 해주우편국 류치로 주소를 알리라. 그 주소로 돈
을 보내주겠다.》
용돈을 받기 위해서라도 겸이포지구에 가야 했다. 겸이포가 가까운 황
주에는 필주의 먼 일가집이 있었다. 일가집으로 오던 길에 필주는 징용
을 피해 도망다니다 돌아오는 억봉이를 만났었다. 필주는 먼 일가집에
자리를 잡고 해주체신소 류치로 편지를 보냈다. 그곳에선 정말 돈이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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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필주는 그 돈으로 누런 개를 세마리나 곰해먹고 꿀도 몇되 축낼수
있었다. 몸을 추세워가지고 필주는 오늘에야 송림땅에 들어섰다.

필주는 서둘러 주택지구를 벗어났다.
그는 인적드문 어두운 곳으로 정처없이 걸었다. 그는 불빛이 싫었고
사람들이 싫었다. 필주는 알뜰이와 정면으로 맞다들리는 순간 자기의 모
든 정체가 드러나는것 같아 눈앞이 아뜩했다. 알뜰이가 기또나 유미와
의 관계 같은것은 상상조차 못할것이지만 필주는 속이 께름직하였다.
(아니다. 그가 나를 알고있는 정도로서는 오히려 나한테 유리하다.)
필주는 자기 불안을 가시려고 모든것을 자기한테 유리하게 해석했으
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필주는 으슥한 뒤골목 려인숙에서 뒤숭숭
한 첫밤을 보내였다. 다음날부터 필주는 모든것을 잊고싶어 술집에
들어박히였다. 술집에서 필주는 술동무 하나를 사귀였다. 서로 술이 거
나해졌을 때 필주는 두루두루 이곳 형편을 알고싶어 그와 통성을 했다.
《로형, 이곳에 사신지 얼마나 되오?》
필주는 자기보다 손아래인 상대방을 깍듯이 존중했다.
《나 말이요? 난 이곳에 태를 묻은 사람이요.》
《그렇소? 이곳 실정을 손금보듯 훤히 아시겠소?》
《내가 알만큼은 알고 남지.》
《난 제철소를 복구한다는 소리를 듣고 타향에서 찾아온 사람인데 앞
으로 형님신세 많이 져야겠수다.》
필주는 서둘러 그한테 술 한잔을 권하고나서 좀 있다 슬쩍 이렇게 물
었다.
《여기 송표라는 사람이 있는가요? 이전에 겸이포제철소 총무부에 있
었다던…》
상대방은 눈이 둥그래져 필주를 쳐다봤다. 상대방이 무슨 말인지
말귀를 아직 알아듣지 못했을수도 있다는 생각에 필주는 한마디 더 귀
띔했다.
《그 사람네 집안이 여기 겸이포바닥에서 뜨르르했다던데…》
필주는 황주역에서 억봉이가 하던 말을 기억으로 더듬었다. 상대방은
두눈을 뚝 부릅뜬채 따지듯 물었다.
《자네 내 처남을 아나?》

325
필주와 술상에 마주앉은 사람은 웅범이였다. 술자리에서 사귄 사람이 송
표의 매부라는 말에 필주 역시 놀랐다. 송표는 필주가 여기 송림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였다. 필주는 손사래를 치며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여기 오니 그 사람 얘기가 많더군요. 첩이 댓씩 되구 일본
순사들두 그 사람만 보면 모자 벗구 절했다구…》
《뭐라구?》
술기운이 오른 웅범은 벌컥 화를 냈다.
《아니, 처남이라구 그러슈?》
필주는 가만있지 않았다. 언질을 쥐였으니 이제는 얼마든지 능갈치며
상대방을 수세에 몰아넣을수 있었다.
《처남이라지만 그놈은 개자식이야.》
《그래요?!》
필주는 얼른 웅범의 말에 긍정하는 뜻을 표해보이였다.
《곱땡이누이를 나한테 맡겨버리구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단 말이
야.》
웅범은 화가 나는지 제 손으로 술을 부어 꿀꺽꿀꺽 마셔버리였다. 필
주는 속이 철렁했다. 필주는 유미가 보내는 자금을 송표한테서 간접적
으로 넘겨받게 되여있었다. 필주는 자기 속을 전혀 내비치지 않은채 송
표의 행방을 알아내려 애를 썼다.
《죄많으면 제명을 못 살기 마련이지요. 우리 고장에서두 일본놈앞잡
이들을 여러놈 처단했지요. 그 사람두 처단됐나요?》
《왜 술맛 나쁘게 꼬치꼬치 캐물어? 그런거 내가 알게 뭐야. 38도선
을 넘어갔으니 이 세상 사람은 아니지.》
송표가 장사를 간다면서 운송점의 유일한 밑천이던 낡은 자동차까지
가지고 달아나는 바람에 쫄딱 망해버린 웅범이여서 송표의 말이 나오는
순간부터 속이 벌컥 뒤집힌것이다.
《원, 형님두… 나보구 성은 왜 내슈… 자, 이 술이나 드슈.》
필주는 더 필요없는 화제를 막아버리려고 웅범이한테 술을 권했다. 술
집에서 나와 그들이 길거리를 걸어가는데 낡은 승용차 한대가 천천히 옆
을 스쳐지나갔다. 다 낡은 도이췰란드제승용차 호리흐는 얼마 안 가더
니 멎어서고 차에서 신사풍의 한사람이 내리였다. 차에서 내리는 신사
는 뜻밖에도 선우치담이였다.

326
선우치담을 알아보고 필주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미색봄철
외투를 입고 중절모를 쓴 선우치담은 료리집에서 달려나와 인사하는 안
내원에게 끌려 안으로 들어가버리였다. 가까운 거리여서 필주는 어딘가
거만해보이는 그의 얼굴표정까지 똑똑히 살펴볼수 있었다.
《로형, 저 차는 누구 차요?》
《응, 저건… 이전에 겸이포제철소 소장이 타던 호리흐야. 미쯔비
시재벌이 도이췰란드쿠쿠회사하구 손잡은 기념으로 가져왔던 자동찬
데 이젠 다 낡아버렸어. 지금은 제철소지배인이 타지.》
《제철소지배인이 누군가요?》
《내가 알게 뭐나… 듣자하니 이름은 선우치담이라 하던데 나야 뭐 그
런 고관들과 상종을 해봤어야지.》
웅범은 술내를 확확 풍기며 자기가 아는껏 씨벌이였다. 필주는 선우
치담이 이곳 제철소지배인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트이였다. 필주는
감옥에서부터 선우치담을 풋낯이나 알고있었다.
(선우치담이 여기 지배인이라.)
필주는 저 혼자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그가 들어간 집을 바라보았다.
산뜻한 2층집에는 《무궁화식당》이란 간판이 걸려있었다.
보름후 필주는 선우치담네 집으로 찾아갔다. 모든 일에서 시작이
절반이라고 이번 일이 잘되면 여기 겸이포지구에서의 자기 일은 비교적
순조로와질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고생을 각오해야 했다. 길든짧든 대보
아야 할것이다. 내친 걸음이니 이제는 좋든싫든 운명이 가리키는대로 위
험한 길을 가야만 할 필주였다. 필주는 웅범이와 헤여진 후 선우치담네
대문을 두드리는 순간까지 보름동안 자기가 할수 있는껏 선우치담에 대
해 료해하고 연구했다.
모든 일은 그가 예견하던바 그대로 진행되였다. 선우치담은 쌀쌀하게,
그것도 무척 경계하며 필주를 맞아주었다.
《선생님은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선생님에 대해서 많이 들었습
니다. 저는 선생님밑에서 일하던 한복규와 서대문형무소에 같이 있었습
니다. 저는 한복규한테서 선생님이 〈자본론〉을 가지고 우리 나라
경제학계의 한다하는 권오주박사와 론쟁하여 이기시였다는 이야기도 들
었고 선생님께서 부유한 가정에서 어떻게 탈출하여 무산자의 리익을 위
해 싸우시였는가 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자기 일신

327
의 부귀영화와 행복을 버리고 무산자대중을 위해 평생을 바쳐오신 선생
님에 대한 존경을 금치 못했습니다.》
선우치담은 불쑥 자기 집에 뛰여든 정체모를 사나이가 자기를 등떠보
느라고 그러는지, 진정으로 하는 소린지 그 속내를 알수 없어 무표정하
게 듣기만 하였으나 그가 하는 말들은 대체로 정확했다.
《저는 그때 감옥에서 선생님이 지도하신 6.10만세 기념단식투쟁
에 참가했었습니다.》
필주는 무릎을 꿇고 앉아 가볍게 머리를 숙여보이였다.
《그래 무슨 일로 형무소에 들어갔댔나?》
《네, 경제사건으루… 표면상은 돈문제였지만 내막은 독립자금을
좀 보탤가 해서…》
선우치담은 상대방의 속내를 타진하듯 눈시울을 쪼프렸다. 선우치
담은 3.1운동 기념강연회를 열고 대일본제국을 비방중상하였다는 죄명
으로 체포되여 서너달동안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갔었다. 그때 형무소
에서 치담은 고문에 어쩌지 못하여 전향문을 썼다. 선우치담은 이것이
심히 께름직하였다. 치담은 아닌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나타난 자기앞의
사나이와 이 순간부터 좋으나싫으나 손잡아야 한다는걸 깨달았다. 고필
주가 전향건을 알고 나타났다면 어차피 그한테 코를 꿰우기마련이다. 그
렇지 않고 전향건을 모른다면 고필주는 선우치담의 가장 아픈 곳을 가
리워주는 훌륭한 위장물로 될수 있었다. 요즘 제철소안에서는 선우치담
의 위신이 이전같지 못했고 해탄로때문에 경제리론가로서의 체모를
적지 않게 깎이고있었다. 필주의 출현은 불씨 가늘어져가는 등잔불에 떨
어진 기름방울처럼 옥중투쟁이라는 꽃다발로 선우치담의 위신과 체모를
내세워줄수 있었다. 선우치담은 자기의 속내를 전혀 내비치지 않은채 자
기를 위해 필주가 어느 정도 쓸모있는 사람인가를 가늠하듯 한참이나 바
라봤다.
《그래 여긴 뭘하러 왔나?》
《예, 선생님한테 한번 가르치심이라도 받고싶어 고향으로 가던 길에
들렸습니다. 감옥에서 입은 상처때문에 전 이 근방 일가에서 치료를 받
다가 지금에야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고향이 어딘가?》
《저 청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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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군그래. 고향엔 부모처자들이 있나?》
《부모들은 일찍 돌아가시구 제가 이렇게 떠돌아다니는새 처는 어디
론가 달아났습니다. 우리 나라 금속공업을 어떻게 해야 한번 남같이 발
전시켜볼가 하는 젊었을 때 품었던 욕망을 내버리고싶지 않고 또 배운
일이 금속건설이라 제가 일하던 청진제철소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학교는 무슨 학교를 나왔나?》
《학비때문에 중학밖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일은 무슨 일을 했게?》
《청진제철소를 세울 때 해탄로두 건설했구 두루두루 금속건설토목로
동을 했습니다.》
필주를 넘겨다보던 치담은 이렇게 물었다.
《나하고 같이 일할 생각이 없나? 섭섭하지는 않게 해줄테니까…》
《제가 어디 선생님의 뜻을 받들만 한 능력이 있어야지요.》
필주는 목마르게 바라던것이였으나 일부러 사양했다.
《아니야. 제철소복구를 시작했는데 인재가 너무 없어 그러네.…
맨주먹만 가지고 복구를 하겠다 윽윽하는데 어디 사람이 있어야지.》
《선생님이 저를 가르쳐주시겠다면 전 여기 남아도 무방합니다. 청진
제철소보다 겸이포제철소는 규모도 전망도 크지 않습니까. 또 선생님 같
은분께 가르침을 받기란 누구에게나 차례지는 행운이 아니니까요.》
필주의 말에 선우치담은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하는 말과 태도로 보아
필주는 형무소에서의 전향건을 전혀 아는것 같지 않았다. 또 그 속내를 아
는 작자라 해도 지금같이 례의를 지키려든다면 별로 꺼릴것이 없었다.
《뜻을 같이하는 감옥동지를 만나니 정말 반갑네.》
선우치담은 전화통을 들어 국수집을 찾았다. 그가 국수배달을 청하였
을 때 필주는 펄쩍 뛰며 돌아갈 차비를 했다.
《선생님, 이러지 마십시오. 전 감옥에서 나오는 길이라 이렇게 맨손
으로 왔습니다.》
《그러지 말고 앉게. 고군! 난 자네가 술병이나 뢰물꾸레미 같은것을
들고 찾아왔더라면 상종하지부터 않았을거네. 오래간만에 감옥동지를 만
났는데 같이 이야기나 좀 하자구.》
선우치담은 가겠다고 일어서는 고필주를 붙들었다. 창밖은 어두웠다.
흐린 날씨여서 밖은 먹물을 풀어놓은것처럼 캄캄했다. 아직 밤저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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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날이 샐무렵까지 어둠은 점점 짙어만 갈것이였다. 별 하나 볼수 없
는 어두운 밤하늘에서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쉼없이 흘러가고 또 흘러
갔다.

해탄로복구현장에서 탄화실 재파내는 작업이 끝나던 날 토지개혁을 도


우려 여러 농촌에 파견되였던 제철소로동자들이 돌아왔다. 해탄로에
서 토지개혁방조사업에 동원되였던 사람만도 열명이 넘었다. 그들은 대
부분 오랜 기능공들이였고 선발된 사람들이여서 해탄로복구에서 믿음직
한 기둥감들이였다. 그들의 귀환은 하나의 경사였으나 해탄사람들은 이
기쁨을 누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미쯔비시, 미
쯔이재벌들이 경영하던 38도선이남회사들에서 일본인중역들이 도망가며
횡령한 돈이 1946년 3월 현재 드러난것만도 5 000만원에 달한다고 아
우성을 질렀으나 그것은 그들이 도적질한 돈의 극히 일부였으며 일제가
야만적으로 파괴하고 달아난 공장과 기계설비들의 피해액을 전국적으로
계산하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천문학적수자에 달하였다.
제철소복구가 진척될수록 일제의 야수적만행이 더욱더 명확히 드러났다.
해탄로만 놓고보아도 탄화실들의 파괴상은 말이 아니였다. 벽체마
다 쩍쩍 버그러지고 터진데다 작년 늦장마피해까지 입어 침수가 혹심했
다. 해탄로는 겉이 멀쩡해도 구새먹은 나무처럼 허울만 남았다. 위력한
폭탄도 로체들을 이처럼 철저히 파괴하기는 어려웠다. 오늘 해탄로파괴
실태를 조사하러 나왔던 기술감정그루빠는 다 낡은 로체들을 헐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결론했다.
탄화실청소만 끝나면 당장 불을 지필것 같이 욱욱하던 건국청년돌격
대원들의 사기는 피여나던 불길이 된소나기를 만난 격이였다. 지금
건국청년돌격대원들과 해탄로복구에 동원된 사람들은 로문수리장에
모여 여기저기 앉고선채 불안한 마음으로 떠들어댔다.
《로체들을 다 헐어버리면 지금까지 괜히 고생한게 아니야.》
뜯어서 내려놓은 탄화실문짝에 앉아있던 한 청년이 벌떡 일어서며 화
330
가 나서 두덜거렸다.
《해탄로복구가 그렇게 쉽게 될줄 알았나? 일본놈들두 해탄로대보
수를 할 때면 동경본사에다 전보를 친다, 기술자를 데려온다 얼마나 설
설 끓었다구…》
달모는 웅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였다. 건국청년돌격대 기술고문격인 달
모의 한숨소리는 주위의 분위기를 곱절이나 무겁게 했다.
《형님말이 맞수다. 기술자없이 우리끼리 무슨 수로 이 해탄로를
보수한단 말이웨까. 일본놈들두 용광로송풍기를 설치할 때 도이췰란
드에서 기술고문을 데려왔구, 우리 해탄배송기는 미국에서 사온거래요.
한다하는 일본기술자들두 도이췰란드기술자나 미국기사들앞에선 설설 기
면서 얼씬두 못했대요.》
엄태산이 달모의 한숨에 부채질을 했다. 그는 얼마전까지 평양으로 오
고가며 고무신장사를 했었는데 달모가 데려왔다. 입이 좀 헤픈 편이지
만 그는 해탄설비들에 밝았다. 해탄설비들을 다루고 수리하는데서는 달
모 다음가는 기능자라고 할수 있다.
억봉은 콕스가루가 깔린 땅바닥에 펑덩하니 앉아서 쓰겁게 담배만 피
웠다.
억봉은 엄태산한테 해탄로를 복구하지 못할바에야 고무신장사나 하지
뭘하러 여기로 왔는가고 내쏘고싶은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때 태주먹
이 사람들 모여있는 곳으로 왔다.
《여, 토목부장이 새로 왔다누만.》
그는 확실히 소식통이였다. 그는 언제 다 들었는지 새로 온다는 토목
부장에 대해 이것저것 많은것을 알아가지고 왔다.
《청진에서 해탄로 세울 때 일한 사람이래. 해탄로보수에 펄쩍 난
대.》
사람들은 기대어린 눈길을 태주먹의 얼굴에 못박으며 저저마다 한마
디씩 했다.
《그래서 지배인이 여기루 나온다는게 아니야?》
방금 지배인한테서 해탄로에 나가겠으니 모두 모이라는 련락이 왔다.
그래 지금 흩어지지 못하고 모두 이렇게 로체주변에서 서성거리고있는
것이다.
《아무리 펄쩍 난대두 용빼는수가 없어. 벽돌이 있어야 쌓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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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산이 다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해탄로를 쌓는데 필요한 수
천톤의 벽돌을 이전에는 모두 일본에서 가져다썼다. 로문수리장 한끝에
서있던 돌격대원 한 처녀가 새되게 소리를 질렀다.
《저기 와요!》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가 가리키는쪽으로 돌려졌다. 제철소본
사무실쪽에서 해탄구역으로 향하는 큰길을 따라 승용차가 달려왔다. 해
빛에 차체를 번쩍거리며 달려오는 도이췰란드제 구식승용차는 지배인의
차였다.

아직 해탄과에는 사람들이 모이거나 들어앉을만 한 회의실도, 휴계실


도 없었다. 해탄로와 세탄장건물사이의 빈땅이 사람들이 모일수 있는 제
일 맞춤한 장소였다. 콕스가루와 석탄가루들이 쌓이고쌓여 모래불을 걸
어갈 때처럼 버석버석 소리가 나는 그 빈땅에 해탄사람들과 해탄로복구
에 동원된 사람들이 모두 모이였다. 사무실에서 긴 탁자와 의자를 내다
가 주석단 비슷이 만들어놓은 곳에 지배인과 제철소기술부장 그리고 누
군지 알수 없는 한사람이 앉았다. 로동자들은 땅바닥에 앉고 일부는 주
석단쪽을 향해 반원을 그리며 옆으로 울바자를 치듯 섰다.
해탄로복구건설자들의 무슨 종업원총회 비슷했으나 회의는 아니였다.
선우치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위색모자를 그냥 쓴채 그는 무슨
연설을 할것처럼 위엄있는 표정으로 주위사람들을 둘러보고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 새로 부임한 토목부장동무를 소개하겠습니다.》
선우치담의 오른켠에 참하게 앉아있던 사람이 일어서며 좌중을 향해
가볍게 머리를 숙여보이였다.
《여러분들께서 앞으로 많이 사랑해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목소리는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억봉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선우치담지배인의 소개에 자리에서 일어
나 인사를 하는 사람은 고필주였다. 징용을 피해 돌아다니다 작년에 고
향에 돌아오던 때 기차에서 만났던 고필주가 토목부장이 되여 지배인옆
에 서있었다. 고필주가 다시 머리를 숙여보이며 자리에 앉자 지배인은
그에 대해 소개의 말을 했다.
《에― 새로 부임한 고필주씨로 말하면 야금분야의 토목공사에 경험

332
이 많으신분입니다. 그리고 일본놈때 감옥에서 고생도 많이 하시였습니
다. 복구가 시작되여 인재의 결핍을 느끼는 우리 제철소에서 고필주씨
와 같은분을 토목부장으로 맞게 된것은 제철소를 책임지고있는 저는 물
론 여러분들에게도 쉽게 차례질수 없는 행운인줄 압니다.》
선우치담은 손으로 이마를 자주 문대면서 모자를 벗기라도 할것처럼
채양이 하늘을 가리키도록 우로 올려밀며 일장의 연설을 시작했다.
그의 모자채양이 하늘을 가리킬 때면 몹시 기분이 좋은 때라는것을 말
했다.
《에― 복구사업에 좀더 박차를 가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일을 잘
하던 건국청년돌격대에서도 어제와 오늘은 건달을 쳤소. 로체야 허물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요? 각기 자기가 맡은바 일을 잘하는것이 제철소
복구를 다그치는 길이고 건국사업에 헌신하는것입니다. 돌격대장동무,
안 그렇소?》
선우치담의 물음에 억봉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가 말하다 도중에 이렇게 이름을 찍어 물어보는것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세를 부리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였다.
억봉은 선우치담의 말을 듣는둥마는둥 하면서 고필주를 바라보며
줄곧 자기의 생각을 좇았다.
(정말 저 사람이 우리 토목부장으로 왔단 말인가?)
억봉은 주위사람들이 웅성거리던 때에야 혼자생각에서 깨여났다.
탁자앞에 서있던 지배인과 그를 따라왔던 기술부장이며 고필주가 승용
차쪽으로 걸어가고있었다. 사람들은 량옆으로 갈라지며 그들에게 길
을 내주었다. 지배인은 승용차쪽으로 걸어가면서 자기한테 모자벗고 절
하는 사람들을 고필주에게 소개했다.
《아, 이 사람이 해탄건국청년돌격대장 박억봉이요.》
지배인이 억봉을 소개하자 필주는 여간만 반가와하지 않았다.
《박군, 잘있었나?》
필주의 인사에 억봉이도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가 자네를 찾아오겠다고 하지 않았나.》
《정말 반갑습니다.》
두사람이 주고받는 인사말에 지배인은 의아한듯 그들을 갈마봤다. 고

333
필주가 공손한 표정으로 지배인한테 사연을 이야기했다.
《박군과는 이미 아는 사이입니다. 감옥에서 나와 사귄 첫 동무지
요.》
선우치담은 아무 표정없이 머리를 끄덕여보이고나서 승용차가 서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박군, 후에 다시 만나자구.》
고필주는 억봉의 손을 잡아흔들고나서 급히 지배인을 따라갔다. 승용
차는 먼지를 휘말아올리며 해탄구역을 떠나갔다. 사람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지고 해탄로와 세탄장사이의 공간에 그대로 남아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승용차가 사라진쪽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는 억봉이한테로 알뜰
이 다가갔다. 알뜰은 동생의 옷소매를 잡아끈채 사람들이 없는 콕스식
힘탑쪽으로 가서도 주위를 둘러본 후에야 나직이 물었다.
《너 그 사람을 어떻게 아니?》
알뜰은 고필주가 억봉을 찾아 집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후 동생에게 이
말을 몇번이나 물어보려 하였지만 오늘까지 맞춤한 기회가 생기지 않았
었다.
《누구? 토목부장?》
알뜰의 속을 알리 없는 억봉은 그의 얼굴을 한번 힐끔 쳐다보고나서
심드렁하니 되물었다. 알뜰은 그저 머리만 끄덕여보이였다.
《고향으로 돌아오다 차안에서 사귀였어.》
《응?》
《내 집에 올 때 누이거랑 작은어머니거랑 고무신 사온 돈이 어디서
난줄 알아? 그 사람이 꿔준거야.》
《너 그가 누군줄 아니?》
알뜰은 자기도 모르게 동생한테 이렇게 되물었다.
《누이도 그 사람을 아나?》
동생의 물음에 알뜰은 기가 막혔다. 운명의 장난은 얼마나 공교로운가.
알뜰은 대답을 못하고 얼굴이 해쓱하게 질려 뒤로 돌아섰다. 승용차
가 사라진 본사무실쪽에서 구내산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에 탄가루가 날
리였다. 알뜰은 흰 옷고름을 날리며 먼지속으로 정신없이 걸어갔다.
《누이!》

334
억봉이 소리쳐불렀으나 알뜰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억봉은 어안이
벙벙해 누이의 뒤모습을 바라봤다.


《자, 옛소. 받소.》
자기 누이한테서 필주에 대한 말을 듣고 억봉이가 그를 만나자바람에
돈봉투를 내밀며 한 첫말이였다. 또한 이것은 필주에게 억봉이가 들이
댄 불의의 타격이기도 하였다. 억봉은 필주가 권하는 의자에 앉지도 않
고 책상앞에 버티고 서있었다. 필주는 당황하지 않았고 놀라지도 않았
다. 필주는 억봉이가 상우에 내던진 붉은 지페가 들어있는 돈봉투를 눈
시울을 쪼프린채 바라보며 귀먹은 사람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필주는 돈봉투를 들여다보며 한참만에 나직이 물었다.
《누이한테서 다 들었겠지?》
필주는 목석처럼 표정에 사소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책상우의 돈봉투만을 응시하고있었다.
《들었소.》
억봉이도 꺼리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누이를 덮치려 했다고 지금 와서 나한테 밸풀이하는건가?》
필주는 힐난조로 물으며 책상너머로 억봉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그렇소.》
억봉은 대들면 덮칠듯 한 자세로 필주의 책상앞에 버티고 선채 자기
생각을 그대로 내뱉았다. 필주는 당돌하고 솔직한 억봉의 말에 위압된
듯 슬며시 눈길을 피하였다.
《여차했으면 우리는 서로 처남매부사이가 되였을수 있었지. 나는 한
때 자네 누이한테 반하여 남자의 강권을 쓰려고도 하였네. 나는 세월이
흘러서야 나의 무분별한 사랑이 그러지 않아도 불행에 빠져있던 자네 누
이한테 괴로움만 끼쳤음을 깨달을수 있었네. 자네도 누이한테 들어
알겠지만 나는 나쁜 놈이였지. 나는 한때 내가 인간쓰레기였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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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고싶지 않네.》
지금까지 도도하던 표정이나 몸가짐에 어울리지 않게 필주의 목소리
는 자책으로 떨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기가 릉욕하려던 녀자의 동생
앞에서 자신의 지난날 잘못을 사죄하는 지금에조차 필주는 철면피하다
고 할 정도로 여전히 도고했다.
《그건 모두 지나간 일이네. 일본놈때 있은 일이지. 사람의 삶은 언
제나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네. 때로는 미래보다도 현재가 몇갑절
더 귀중한 때도 있네. 삶은 언제나 현재인 까닭이지. 나는 감옥밥을 먹
으며 자신의 지난날을 피로 속죄했구 뜻있는분들의 도움으로 새삶의 길
을 찾았네. 나의 과거를 비난하겠으면 얼마든지 비난하게. 피와 투쟁으
로 새롭게 얻은 오늘을 이미 내버린 과거로 헐뜯으려 한다는건 비렬한
짓이야. 용감한 무사는 자기 적수를 묶어놓고 칼로 찌르지 않네. 그건
일종의 암살이기때문일세. 적수의 손에도 칼을 쥐여주고 목을 베여눕혀
야 용감한 무사일세. 자네가 지금 지난날의 약점으로 나를 공격하는건
나의 오늘을 비난할수 없기때문인게구 자네가 암살은 할줄 알아도 결투
할 용기는 없기때문이지.》
억봉은 필주가 하는 말이 알듯 하면서도 무엇인가 벙벙했다. 그의 어
조와 표정은 그때 황주장마당에서 돈을 주면서 받기를 꺼리는 억봉을 공
격하던 식이였다. 억봉은 자기의 허물을 두려워하지 않을뿐만아니라 자
기의 약점으로 오히려 남을 공격하는 필주앞에 지고말았다.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와 완전히 결별한 사람만이 자기의 허물을 두려워하지도,
꺼리며 숨기려 하지도 않을수 있었다. 억봉은 솔직한 사람이여서 솔직
성의 무기를 든 필주한테 위압됐다.
억봉은 자기가 무기를 놓은 사람한테 칼을 들고 대여드는게 아닌가 하
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 졸렬하게 행동한것 같아 두눈을 내리깐채 아무
대꾸 안했다.
필주는 입을 다물고 까딱않고 앉은채 자기 책상우에 놓여있는 돈봉투
만 바라봤다. 필주는 돌연 머리를 들었다. 그때까지도 억봉은 머리를 수
굿한채 콩크리트방바닥을 내려다보고있었다. 필주는 억봉을 넘겨다보고
나서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전에 내가 줬던 돈이 내 손으로 번것이라면 절대로 받지 않았을
거네. 솔직히 말해 지금 역시 나에 대한 도전이 몹시 불쾌하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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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것을 탐내지 않는 정직성과 선량함에 머리를 숙이네.》
필주는 말을 마치기 바쁘게 억봉이가 상우에 내던진 돈봉투를 집어들
더니 그 자리에서 와락와락 찢기 시작했다. 필주는 돈을 봉투채 찢고나
서 그것을 손에 거머쥐고 난로옆으로 걸어갔다.
필주의 방에는 아직 난로가 놓여있었다. 필주는 난로뚜껑을 열더니 찢
어진 돈쪼박을 그속에 집어넣었다. 열어놓은 난로에서는 불길이 피여올
랐다. 그 불길은 난로속에 들어가지 않고 난로우에 떨어진 돈쪼박마저
태워버리며 한동안 춤을 추었다. 그 불길에 필주의 얼굴은 불그레 물들
었다. 필주는 불길이 스러지자 난로우에서 타버려 재가 된 돈쪼박마저
입으로 훅 불어 난로속에 넣고나서 덜커덕 소리를 내며 뚜껑을 닫았다.
그의 행동은 이 돈을 억봉이가 더럽게 여기는것처럼 자기 역시 돈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표시였을뿐만아니라 억봉이가 정직하고 선량하게 살기
를 바라는것처럼 자기 역시 깨끗이 살기를 바란다는 일종의 자기 선전
이고 시위였다.…
이 모든것은 어제 오후 필주의 방에서 있은 일이였다. 그때 그 자리
에는 억봉이와 필주 두사람뿐이였으나 알뜰은 동생을 이리 구슬리고 저
리 구슬려 이 모든것을 알아냈다.
알뜰은 생각에 잠겨 집으로 향했다. 하루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
다. 일할 때면 몰라도 혼자 있거나 조용한 기회가 생기면 자기자신도 모
르게 요즘 자주 필주며 죽은 남편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알뜰이였다.
가슴아픈 추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필주를 생각하면 그한테 붙들리였
다 도망쳐나와 고향으로 찾아오며 겪은 갖은 고생이 되살아나기도 하고
포악스런 본처한테 한줌이나 머리칼을 뽑히우던 끔찍스러운 일이며
밥에 돌이 들었다고 남편한테서 만삭이 된 몸으로 뺨을 줘맞던 첩살이
때가 선히 떠오르기도 했다. 필주가 이곳에 나타난 이후로 알뜰은 마음
의 안정을 잃고말았다. 알뜰은 꼭 무슨 무섭고 몹쓸 꿈을 꾸고났을 때
처럼 마음이 어수선하고 불안스럽기까지 했다. 알뜰은 일이 손에 잡히
지 않았으며 자기가 관여하는 모든 일이 꼬여드는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오니 작은어머니는 이미 저녁을 지어놓고 기다렸다. 저녁을
먹기 바쁘게 억봉이와 석봉은 어디론가 나가버렸다. 삼촌어머니는 이야
기를 주고받다 인차 잠들었다.
기봉이가 평양에 공부하러 간 후부터 삼촌어머니는 밤이면 집을 비여

337
두고 알뜰네 집에 와서 잔다. 별로 할일도 없건만 알뜰은 심란한 마음
으로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방안에는 아래방에서 잠든 삼촌어머
니의 고르로운 숨결소리와 벽시계소리만 차넘치였다.
똑똑…
밖에서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직장에서 돌아와서 아직 옷도 갈아
입지 않은채 방안에 앉아있던 알뜰은 얼른 일어나 현관으로 나갔다.
밤깊어 집에 찾아온 사람은 필주였다. 필주는 알뜰이가 현관문을
열자 옆구리에 무슨 종이꾸레미를 낀채 자기 집에라도 온듯 스스럼없이
현관안으로 들어섰다. 알뜰은 집에 자기 혼자였더라면 악 소리라도
지를 지경으로 놀랐다. 필주는 현관안에 들어서서야 손님다운 례절을 표
했다.
《집에 억봉이랑 없소?》
알뜰은 놀라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마음을 다잡고 쌀쌀히 대답
했다.
《없어요.》
알뜰의 대답은 돌아서서 나가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으나 필주는 꿈쩍
도 하지 않았다.
《집에 다른 식구들은 있겠지?》
필주의 물음에 대답하듯 아래방에서 삼촌어머니의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례한줄 알지만 나는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싶어 이렇게 찾아왔소.
낮에는 짬을 낼수 없구…》
필주는 갑자기 말투를 바꾸어 집주인과 같은 표정으로 말하고나서 신
을 벗었다. 알뜰은 달리 어쩔수가 없어 웃방미닫이를 열었다. 누비돗자
리를 깔아놓은 웃방은 억봉이와 석봉이가 거처하는 방이였다. 필주는 앞
선채 제가 먼저 방으로 들어섰다. 필주는 방안을 두루두루 살펴보고나
서 누비돗자리우에 올방자를 틀고앉았다. 알뜰은 웃방에서 현관으로 나
오는 미닫이를 그대로 활짝 열어놓은채 남의 집에 온 손님처럼 문쪽으
로 한구석에 쭈그리고앉았다. 알뜰은 필주가 지난날처럼 무슨 행패라도
할가싶어 마음을 도사린채 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필주는 창문쪽에 놓여있는 앉은뱅이책상우에서 제 손으로 재털이를 끌
어다놓고 뻑뻑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필주는 지내 오래다고 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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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담배 한대를 다 피우고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번에는 참 실례가 많았소. 억봉이를 찾아오던 때만 해도 난 억봉
이가 당신의 동생인줄은 꿈에도 몰랐댔소. 너무나 뜻밖의 일이여서
나로서는 어쩔바를 알수 없었소.》
필주는 태연하게 말하려고 애를 썼으나 겉과는 달리 속이 끓는 모양
이였다. 그는 방금전에 담배불을 껐건만 새로 담배를 또 피워물었다.
알뜰은 무엇때문에 왔는가고 따져묻고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
치고싶었으나 속이 떨려 입을 열지 못했다.
알뜰은 발끝까지 치마폭으로 감싼채 한쪽다리를 곤두세워 두팔로 붙안
고 앉아 활랑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려 애썼다. 필주는 새로운 담배를
몇모금 빨고나서 알뜰을 바라봤다. 알뜰은 서둘러 그의 눈길을 피했다.
《당신의 마음을 내 모르는바 아니요. 지금 나를 죽일 놈이라고 욕하
고있다는것도 잘 알고있소. 그래서 난 이렇게 사과하러 왔소. 나쁜
세월에 살며 나쁜 버릇을 배우다보니 나는 그때 당신한테 무례하게 놀
았댔소. 그때만 해도 난 혈기가 넘치던 때였고 자기 혈기를 어디에다
써야 할지 모르던 때였소. 그러나 단순히 색에 받쳐서만 당신한테 그랬
던건 아니요. 불행한 당신을 동정하던 나머지 반했던거구 젊고 아름다
운 당신한테 마음을 깡그리 빼앗기다보니 그렇게 리성없이 놀았던거요.
여하튼 죽을 죄를 지었으니 지난 일을 널리 량해하오. 나는 이미 과거
와 결별한지 오래오. 혁명투쟁을 돕다 감옥밥도 먹었소. 감옥에서 고생
을 좀 했지만 뜻있는분들을 만나 나는 새롭게 태여나 해방을 맞을수 있
었소. 난 당신한테 나의 철없던 지난날을 용서빌고싶어 렴치없이 이렇
게 찾아왔소.》
필주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알뜰은 까딱 않고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
다. 필주는 몇모금 담배를 들여빨고나서 반도 타지 않은 담배를 재털이
에 비벼껐다.
《정말, 당신 남편 소식 들었소?》
느닷없는 필주의 질문에 알뜰은 고슴도치처럼 온 신경이 가시돋쳐 몸
과 마음이 함께 옹송그려졌다.
《술먹고 공사판에 나왔다가 황씨는 기차에 치워죽었소.》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뜻밖의 일은 아니였고 옛 남편의 죽음이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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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을 가져다주는것도 아니였으나 알뜰은 가늘게 가슴이 떨리였다. 알뜰
은 필주가 무엇때문에 자기한테 이런 말을 하는지 알수 없었지만 례사
롭게 하는 말마디와 어조속에 그 무슨 위협적인 암시가 깃들어있는것 같
기도 했다.
필주는 점잖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자기가 끼고 왔던 꾸레미를
창문가의 앉은뱅이책상우에 내려놓았다.
《당신의 마음에 입힌 상처를 돈이나 물건으로 어떻게 씻어내겠소. 하
지만 자신을 뉘우치는 성의를 표하고싶어 가져왔으니 작은어머니 옷이
나 해드리오.》
알뜰은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도로 가져가요.》
알뜰이 필주한테 처음으로 하는 말이였다. 밖으로 나가려던 필주는 문
가에서 알뜰을 향해 돌아섰다. 필주는 두눈을 내리깔고 자기를 쳐다보
지도 않는 알뜰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어찌겠소. 당신이 나를 용서하지 않겠다니… 당신이 나 개인을
모욕하고 욕하는건 당신의 자유의사지만 옹친 감정때문에 공적일에까지
방해를 주어서야 안될게 아니요. 좋든싫든 이제는 억봉이와 내가 함께
일을 해야 할테니까 해탄로복구나 제철소일에 방해를 주어서야 되겠소?
지난날의 개인감정때문에 오늘의 공적일에 방해가 안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는 저것을 가져온거요.》
필주는 앉은뱅이책상우에 놓인 종이꾸레미를 쓰겁게 턱질해보이고
나서 알뜰이한테로 고개를 돌리였다. 여전히 두눈을 내리깐채 입술을 꼭
다물고 서있는 알뜰을 바라보는 필주의 두눈에서는 불이 일었다. 정욕
과 증오가 한데 엉켜 펄펄 불이 이는 눈길로 알뜰에게 눈총을 쏘고나서
필주는 현관으로 나가버렸다.
알뜰은 현관문이 닫기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때까지 방 한가운데 우두
커니 서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필주의 모습은 눈앞에서 사라졌으나
방금전까지 그가 피우던 담배연기가 방안에 실안개처럼 떠돌았다. 조용
한 방안에는 벽시계소리며 아래방에서 작은어머니가 코고는 소리만
울리였다. 잠시후 방안에서 필주의 체취가 가셔졌을 때 알뜰은 현관문
을 걸고 웃방으로 들어서며 미닫이를 닫았다. 순간 필주가 앉았던쪽에
놓여있는 재털이가 눈에 띄였다. 재털이에는 두개의 담배꽁초가 담겨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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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하나는 바싹 타버린 꽁초였고 하나는 반도 채 타지 않은 담배였
다. 알뜰은 얼른 재털이를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알뜰은 재를 쓰레기
통에 쏟아버리고 시원한 바깥공기를 들여마시였다.
밤하늘엔 뭇별들만 총총하였다. 별들이 은모래를 뿌려놓은듯 반짝
이는 밤하늘에서 긴 줄을 그리며 별찌가 흘러갔다. 알뜰은 안개처럼 뽀
얗게 은하수가 비껴간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축축한 밤
공기가 가슴 깊숙이 스며들어 페부를 적셔주자 정신이 한결 맑아지고 마
음도 안정되는가싶었다.
하늘 한복판에 비낀 은하수와 그 주위에서 반짝이는 별무리들을 올려
다보며 마당에 서있다가 방안으로 들어서던 알뜰은 방안 한쪽구석에 놓
여있는 종이꾸레미를 보았다. 필주가 놓고간 꾸레미를 보는 순간 알뜰
은 웬일인지 방안에 아직 담배연기가 자욱히 서려있고 재털이에는 그가
피우다 내버린 담배꽁초가 그대로 담겨있는것만 같았다.
(필주는 무엇때문에 3년전에 황가가 죽었다는 말을 했을가?)
알뜰은 느닷없이 이런 질문이 떠오르면서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이 안
정되지 않았다.

해탄로끝에 로체들과 떨어져 서있는 식힘탑은 멀리서 보면 깔때기를


엎어세워놓은것 같다. 여기서 이글거리는 콕스의 불을 끈다. 탄화실에
서 폭포를 이루어 쏟아져내린 시뻘건 콕스가 식힘차에 실려 탑안에 들
어오면 천정에서는 샤와가 쏟아지고 하얀 증기가 뭉게뭉게 피여오른다.
그 증기에 식힘탑벽체들은 하루에도 몇십번 한증을 해야 한다. 벽체들은
늘쌍 축축히 젖어 번들거리고 바닥에는 논판처럼 물이 고인다. 익살군들
이 《콕스목욕탕》이라 부르는 콕스식힘탑안은 지금 바싹 말라있었다.
콕스식힘탑안과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앉아 잡담으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있었다. 탄화실은 말끔히 청소해놓았으나 해탄로복구전망이 명확
치 않았다. 무엇부터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의견들이 구구한데다 해탄
로체를 허물어야 할지, 수리해야 할지 그것조차 결론이 안 나고보니 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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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놓을수밖에 없었다.
건국청년돌격대원들은 지금 지배인방에 간 억봉을 기다리고있었다. 해
탄로파괴실태를 조사하기 위하여 도와 중앙에서 각이한 이름을 가진 여
러 그루빠가 뻔질나게 내려오더니 이번에는 외국기술자대표단까지 왔다.
며칠동안에 걸쳐 해탄로를 돌아본 그들은 해탄사람들을 만나보고싶다고
했다. 억봉이며 달모 등 해탄대표들은 그들을 만나러 제철소본사무실에
갔다. 그들을 기다리는데 지쳐버린 사람들은 무료함을 덜려고 엄태산주
위에 둘러앉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였다.
《작년 이맘때 한밤중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대단했어. 시렁에서 사발
이 왱강쟁강 떨어져내리구 어느 장사군네 집에서는 벽시계가 떨어지며
오강을 때려서 오줌사태를 벌려놓구… 그런데 월봉산 최과부네 집에서
는 말이야…》
엄태산은 구미가 동하게 이야기꼭지를 떼다 말고 마라초를 뻑뻑 들여
빨았다. 온몸에 석탄재를 뒤집어쓰고 검댕이칠을 해서 너부죽한 그의 얼
굴에선 이새 넓은 흰 이발이 유표하게 드러났다. 어렸을 때 영화관에서
광고돌이도 했고 제철소에 다시 일하러 나오기 전까지 고무신장사를 하
던 그는 우스운 이야기를 많이 알고있었다. 엄태산은 담배연기를 몇모
금 빨고나서 자기가 한 말을 까먹기라도 한것처럼 둘러앉은 사람들을 향
해 일부러 물었다.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그래, 지진나던 날 최과부네 집에서 말이야요.》
한 청년이 엄태산한테 이야기의 실머리를 튕겨주었다.
《맞았어. 그날 밤 최과부네 집에서 말이야…》
엄태산은 사람들의 호기심에 불을 질러놓고나서 이야기에 발을 달았다.
《최과부가 대문을 닫아걸구 방금 자리에 들었을 때 지진이 일어났거
던. 그바람에 덜커덩 대문이 열리였지. 최과부는 대문 열리는 소리에 어
제 왔던 읍사무소 징용서기가 또 온줄 알았다 이거야. 읍사무소 징용서
기가 최과부한테 눈독을 들인지는 오래였는데 이리 구슬리구 저리 구슬
리다 안되니까 〈주인없이 혼자 사는 젊은 녀자들은 모두 징용에 가게
됐다. 너도 빨리 주인 하나를 맡아놓지 않으면 북해도탄광으로 가야 한
다.〉 하고 위협을 했지. 그바람에 최과부는 할수없이 〈당신이 날
맡아주구려.〉 했는데 그날부터 그녀석은 최과부를 과부공출에서 면

342
제시켜주느라구 거의 매일밤 찾아와 수고를 했지. 그런데 일이 안될 때
라 지진이 일어나던 그날 밤 최과부네 집에는 시아버지가 와있었다 이
거야. 과부공출에서 벗어나려구 아무도 모르게 헌놈을 붙이기 시작했는
데 시아버지가 있을 때 찾아오면 어떻게 하는가 말이야. 생각다못해 최
과부는 속곳바람으루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서며 〈도적이야.〉 하고 소
리를 질렀지. 그런데 참 공교롭게 됐거던…》
엄태산은 여기서 말허리를 끊고 담배를 피웠다. 그는 손끝이 따갑도
록 담배를 빨고나서 꽁초를 버린 후에도 목에 건 광목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입을 열지 않았다.
《제기랄, 그래서?》
성미급한 축들은 엄태산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다음이야기를 독촉했
다. 엄태산은 흡족한지 주위사람들을 바라보며 저 혼자 씨물씨물 웃고
나서 천천히 동을 이었다.
《공교롭게두 그때 마침 읍사무소 징용서기녀석이 그 집 대문앞을 지
나가고있었지. 최과부네 집 대문이 지진통에 벌컥 열리구 집안에서
〈도적이야.〉하구 소리치는 바람에 징용서기 그녀석은 최과부를 눈
독들인 다른 녀석이 온줄 알구 최과부네 마당으로 번개같이 뛰여들었지.
들어가보니 글쎄 토방에 남자신발 한컬레가 놓여있는게 아니겠나. 그
신발은 최과부의 시아버지 신발이였는데 징용서기녀석이 이걸 알택
있나. 징용서기녀석은 최과부네 시아버지가 누워있는 웃방문을 벌컥 잡
아채며 소리쳤지. 〈이녀석, 나오지 못하겠냐? 엉… 네녀석 끼구 자
라구 내가 최과부를 과부공출에서 면제시켜준줄 알았냐? 렴치없는 이녀
석, 불한당같은 녀석.〉 하구 말이야…》
엄태산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징용서기흉내를 내느라 꽥꽥 소리
를 지르며 몸세, 손세를 쓰는 바람에 주위사람들은 배를 그러안고 돌아
갔다. 콕스식힘탑안 한쪽구석에 벽체를 의지하고 앉아 책만 보던 석봉
이가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책에서 눈길을 뗐다. 석봉은 토지개혁에서 돌
아온 후 제철소민청부위원장사업을 하게 됐다. 제철소민청부위원장은 유
급이 아니여서 석봉은 해탄로에서 일을 하며 사회사업으로 민청일을 본
다. 이것은 제철소핵심들이 제철소로 돌아가게 하려는 상급의 의도적인
조치였으나 시민청지도원으로 정치사업을 전문하던 석봉은 자기 수준에
대한 평가처럼 생각되여 반발심으로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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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봉은 지금까지 보던 책을 덮어 옆에 끼며 웃고 떠드는 여러 사람들을
향해 한마디 했다.
《내가 내는 문제나 풀어들봐요. 세사람이 고기잡이를 갔는데 한사람
이 먼저 집에 갈일이 생겼거던. 그래서 그 사람이 잡은 고기를 세몫으
로 나누니까 한마리가 남았어. 그래 그 한마리를 저 멀리 내버린채 자
기 몫만 가지구 가버렸지. 두번째 사람은 첫번째 사람이 몫을 나눈줄 모
르구 고기를 또 세몫으로 나누었거던. 그랬더니 이번에도 또 한마리 남
았단 말이야. 그래 둘째 사람두 한몫만 가지구 나머지 한마리를 내버리
구 갔지. 세번째 사람두 와서 나머지를 또 세몫으로 나누었거던. 그랬
더니 이번에도 또 한마리가 남는다 이거야. 그래 그 사람두 나머지 한
마리 고기를 내버린채 자기 몫을 가졌지. 모두 몇마리를 잡았구 첫사람,
둘째 사람, 셋째 사람은 각각 몇마리씩 고기를 가졌겠나?》
석봉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엄태산이 어처구니없는투로 받았다.
《나머지를 왜 내버리나. 그 아까운걸… 제가 가지든가 남이 가지라
구 주면 될게 아니야.》
그의 말에 웃음헤픈 처녀들이 까르르 웃자 석봉은 점잖게 한마디했다.
《재담은 그만하시구 문제나 풀어요.》
《그까짓거 못 풀것 같나?》
회계에 밝은 엄태산은 계산을 해보느라 속으로 저 혼자 웅얼거리기 시
작했다. 호기심많은 젊은 사람들은 저마다 땅에 글을 쓰기도 하고 돌을
집어다놓고 제나름의 계산을 하면서 풀이를 시작했다. 쉬운줄 알았던 문
제는 슬그머니 까다로왔다. 여러 사람이 문제풀이에 달라붙었으나 누구
도 대답을 못하였다. 문제를 내놓은 석봉이가 할수없이 답을 내놓지 않
으면 안되였다.
《모두 스물다섯마리를 잡아서 첫사람은 여덟마리를 가졌거던요.
한마리를 내버렸으니까 나머지가 열여섯마리지요. 그러니까 두번째
사람은 다섯마리를 가지고 한마리를 내버렸지요. 셋째 사람은 나머지 두
몫 즉 열마리를 또 셋으로 나누어 세마리를 가지고 나머지 한마리를 버
리였지요. 스물다섯마리만 그런게 아니라 쉰두마리두 그렇구, 백여섯마
리두 그렇구 이런 수자는 얼마든지 많아요.》
《그거 어디 수수께끼야, 골머리 아픈 계산문제지.》
엄태산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석봉이가 한마디했다.

344
《그러게 공부를 해야 한단 말이예요. 맨주먹을 가지구 이 해탄로를
살려낼수 있을것 같애요?》
누구에게라없이 하는 석봉의 말은 그 무슨 선고 비슷했다. 콕스식힘
탑바깥에 녀자들과 같이 앉아 지금까지 남들이 주고받는 우스개를 듣고
있던 알뜰은 동생을 새롭게 바라봤다. 참하다고만 생각해오던 석봉이가
이처럼 씨먹은 말을 할줄 알지 못했다.
그사이 동생은 몰라보게 성장하였다. 알뜰은 석봉이한테서 무척 대견
하고 장하게 생각되던 그 불타는 향학열과 탐구력이 억봉이와의 충돌을
가져오게 될줄 알지 못했다.
하늘처럼 믿었던 외국기술대표단마저 해탄로체를 살려내기 힘들다
고 결론하고 떠나간 그날 밤이였다. 석봉은 저녁을 먹고나서 알뜰이와
억봉이가 다 있는 자리에서 불쑥 이렇게 말했다.
《나 학교 갈래.》
《뭐?》
억봉은 알뜰이와 마주앉아 모자라는 돌격대원완장을 몇개 더 만들려고
낡은 옷가지들을 꺼내놓고 뒤적거리다 말고 동생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3년짜리 갔으면 좋겠는데… 이번에 공장민청에서 1년짜리
기술양성소에 추천이 있어. 어디구 가서 좀 배워야지 까막눈노릇을 할
라니…》
석봉은 손에 들었던 책으로 자기 무릎을 철썩 때렸다. 요즘 신문들에
는 각급 학교설립에 대한 소식과 함께 신입생모집요강들이 자주 발표되
였다. 시내에서도 이제 멀지 않아 송림공업학교를 연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동생을 뻔히 바라보던 억봉은 아니꼽게 내쐈다.
《임마, 너 제철소에 돌아온지 얼마 됐게 또 어디 가겠다는거야? 그
새 둥둥 떠돌아다니더니 허파에 바람만 들었구나.》
《흥, 배우는게 허파에 바람든거라면 난 얼마든지 바람들겠다 원…》
석봉은 책상다리를 하고 벽에 기대여앉아 코방귀를 뀌였다. 억봉은 방
바닥에 앉은채 동생쪽으로 획 돌아섰다. 억봉의 어성은 대번에 거칠어
졌다.
《너 정말… 남들은 해탄로때문에 속이 새까매 뛰여다니는데 편안히
앉아 공부하겠단 말야?》
《빈주먹으로 윽윽해야 소용이 있어? 맨발로 바위차기지.》

345
억봉이가 어성을 높일수록 석봉은 잦아든 목소리로 딱딱 올려받쳤다.
억봉은 불끈했다. 그러지 않아도 해탄로복구가 기술적인 난관에 봉착하
고 지금까지의 수고와 로력이 허사로 돌아가는것 같아 신경이 날카로와
진 억봉이다. 억봉은 석봉의 말꼬리를 잡고 트집걸듯 소리를 내질렀다.
《뭐? 맨발로 바위차기? 맨발로 바위를 차서 깨야 해탄로가 돌아간다
면 백번이라도 차야지… 넌 해탄로에 불죽은게 가슴아프지도 않니?》
억봉은 석봉에게 금시 손이라도 댈것처럼 몸세, 손세까지 썼다.
《얘들아, 조용해라. 남들이 들으면 싸우는줄 알겠다…》
알뜰은 걱정스럽게 말하며 두 동생사이를 막아앉았다.
《내가 소리치나? 형이 저 혼자 다 일하는것 같아서 왝왝 고지…》
석봉은 올방자를 틀고 형을 등진채 돌아앉으며 계속 시까슬렀다.
목소리는 높지 않았으나 그의 얼굴은 억봉이 못지 않게 상기되여있었다.
《너 말 다했니?》
억봉은 완력으로 동생을 휘여잡던 어릴적 버릇대로 손찌검이라도
할 태세다. 알뜰은 얼른 억봉을 붙어잡으며 그를 웃방쪽으로 밀어냈다.
누이한테 밀려난 억봉은 씩씩거리더니 앉은뱅이책상앞에 펄썩 주저앉으
며 자기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이자식아, 난 뭐 배우면 좋은걸 모르는줄 아니? 콕스를 빨리 궈야
겠으니 그러는거지…》
억봉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갈리였다.
석봉은 어디 실컷 날쳐보라고 약을 올리듯 억봉을 등진채 올방자를 틀
고앉아있더니 자제해오던 흥분을 터치고말았다.
《난 뭐 삼촌이… 해탄로 보고싶다고 하던 말을 잊은줄 알아?》
석봉이도 억봉을 향해 돌아앉으며 마주 소리를 질렀다. 평상시에
말이 적고 참한 석봉이였으나 흥분하니 그렇지만도 않았다.
《형이 그래… 뻐그라진 탄화실에 불을 때보겠다구… 욱욱 과야… 무
슨 소용이 있나 말이야? 소가 힘세다구 왕노릇하구… 거부기가 오래 산
다구… 력사에 남는줄 아는 모양이지? 똥밸이나 쓰며 욱욱 고구… 저 혼
자 잘난체 하면서…》
석봉은 억봉이 못지 않게 목소리가 컸으며 우렁우렁하였다. 흥분하면
말마디를 자주 더듬는것이 형과 다를뿐이였다. 알뜰은 억봉의 말에도,
석봉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것 같아 어느 한쪽을 편역들기 어려웠다. 형

346
제가 서로 번갈아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삼촌어머니가 달려왔다. 억봉
이와 석봉은 서로 입을 다물었으나 그들의 언쟁은 무언속에 오래도록 계
속됐다. 어린시절에는 코피가 나도록 서로 싸우고서도 다음날이면 모든
것을 잊어버린채 미역감으러 함께 가고 귀떨어진 동전 몇잎을 벌려 슬
라크자갈까는 곳이나 파철장에 의좋게 가군 하던 이들이였지만 이번은
그렇지 않았다. 이제는 서로 제나름의 생각을 갖고있으며 자기가 옳다
고 믿는 한에서는 죽어도 머리를 숙이려 하지 않던 아버지의 성미를 그
대로 물려받은 억봉이고 석봉이여서 그런것만도 아니였다. 이들사이
의 감정마찰과 실금은 비록 하찮은것이라 해도 해탄로탄화실벽체에
생겨난 균렬이 사람들의 마음에 비끼고 옮겨간것이였다. 탄화실벽체
에 생긴 균렬은 큰것이라야 사람손이 겨우 들어갈만 한것이였고 어떤것
은 머리카락처럼 미세한것이기도 했으나 크고작은 이 균렬들은 해탄로
체전부를 아무 쓸모없이 만들어버리였으며 복구문제를 놓고 많은 사람
들의 호상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 가깝던 사람들의 사이
가 벌어지는가 하면 멀던 사람들의 사이가 가까와지기도 했다.

10

석봉은 형한테 허파에 바람 들었다고 욕먹은것이 잘 내려가지 않는 모


양이였다. 그는 될수록 형을 피했으며 어쩔수없이 한자리에 있게 되는
때에조차 등을 돌려대고 저 혼자 책을 보기 일쑤였다.
억봉이 역시 동생이 자기한테 가한 비난을 새기기 힘들어했다. 소와
거부기 어떻다느니 하면서 어느 책에선가 본 유식한 문구들을 가지고 들
이댄 공격에 억봉은 치명상을 입었다. 억봉은 동생이 도에 강습을 갔다
오고 민청사업을 하게 되면서부터 자기보다 퍽 유식해졌다는것을 인정
하지 않을수 없었으나 똥밸만 쓰면서 저 혼자 잘난체 욱욱한다는 말은
넘어가지 않았다. 억봉은 남들을 대할 때 성이 나도 참느라고 하였지만
누이와 동생을 대하는데서는 그렇지 못했다. 허물없는 집안식구들이
나 가까운 사람들속에서 성격상의 약점이 제일 잘 나타나기마련이고 또
자기 밸대로 하던 지난날의 약점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것은 사실이나 억
347
봉은 삼촌이 세상떠난 이후부터 자기 성격을 고치려고 무척 애를 썼다.
동생의 공격은 단순히 억봉의 성격상약점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 해탄
로복구에 림한 태도와 당적수양정도 그리고 새롭게 살려는 노력에 대한
평가라고도 할수 있었다.
형제사이에 서로 엇선 감정은 점점 격화되여갔다. 봉산에 있는 차진
옥이 써보낸 편지는 형한테 반발하는 석봉의 마음을 부채질하는 격이 되
였다. 차진옥이 석봉이한테 써보낸 편지에는 이런 멋진 문구가 들어있
었다.
《지식은 광명이고 무식은 암흑이다. 배우고 또 배우는자만이 진리의
높은 봉우리에 오를수 있고 민주건국에서 승리자의 월계관을 빛내일수
있다. 사람이 제일 탐내야 할것은 돈이나 재물보다도 지식이며 젊은시
절에 제일 경계하며 무서워할것은 배움에 대한 태만이다.》
차진옥이 자기 애인이 보다 발전하기를 바라는 소박한 념원으로부터
고향에서 교편을 잡는 둘째오빠의 비망록을 글자 한자 안 고치고 그대
로 베껴보낸 이 편지는 왕청같이 억봉이와 석봉이사이를 더욱 버그러지
게 하는 쐐기처럼 되고말았다. 문학을 좋아하는 차진옥의 둘째오빠가 어
느 책에선가 베껴두었던 이 명구가 들어있는 편지를 받고나서 석봉은 형
이나 누이와 상론없이 기능공학교 수속을 하기 시작했다. 입학수속을 하
느라 석봉은 그날 일에 나가지 못했다.
그날 저녁 일터에서 돌아온 억봉은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누이한테 짜
증섞인 어조로 물었다.
《석봉인 어디 갔어?》
《글쎄…》
알뜰은 동생한테 저녁을 차려주려고 부엌으로 내려서다 말고 의아하
게 억봉을 바라봤다.
《이자식은 일두 안 나오구 어디 이렇게 싸다니는거야.》
《어디 회의간 모양이지…》
석봉은 회의나 강습때문에 작업을 못하는 날이 한주일에 하루이틀은
잘된다. 알뜰은 우선 억봉의 기분을 눅잦혀야 하겠기에 석봉을 감싸듯
이렇게 변명했다.
《회의는 무슨 회의… 내 공장민청에다 알아봤는데…》
억봉은 동생 석봉이가 오늘작업에 빠진것때문에 여간만 골나하지

348
않았다. 요즘 해탄로복구가 난관에 부닥쳐 억봉은 신경이 곤두설대로 섰
다. 알뜰은 억봉이가 성났을 때에는 저 혼자 가만 내버려두는게 상책이
라는 생각에 부엌으로 나갔다. 방에 혼자 남은 억봉은 담배를 피우려고
주머니를 뒤적거렸으나 담배가 없었다. 억봉은 말코지에 걸어놓은 동생
의 옷을 뒤지였다. 석봉의 옷에서는 담배대신 차진옥의 편지가 나왔다.
편지에 공부하라는 소리만 잔뜩 적혀있는것을 보자 억봉은 얼마전에 동
생이 학교에 가겠다고 하던 말이 새삼스레 생각났다.
《망할 자식, 이래서 그러댔구나.》
억봉은 차진옥이가 석봉이를 꼬드기는것 같아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앉은뱅이책상서랍에서는 석봉이가 써놓은 기능공양성소 입학원서가
나왔다. 억봉은 지금 공장에서 제철소복구와 관련하여 청년들이 배울것
을 호소하고있으며 해탄에서도 당장 공장기능공양성소에 몇명 추천하기
로 되여있다는걸 모르지 않았으나 화가 꼭뒤까지 치밀었다. 배우는것은
좋지만 기능공학교에 가면 1년동안 작업에서 떨어져야 한다. 고양이손
발이라도 빌려써야 할 정도로 기술로력이 딸려 쩔쩔매는 지금 형편에서
몇년간의 현장경험을 가진 석봉이같은 사람을 학교에 보낸다는것은
경우에 맞지 않았다.
《이자식, 점점 하는짓이…》
억봉은 요즘 해탄로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것을 동생한테 밸풀이하듯
쓰겁게 뇌까렸다. 이때 석봉이가 집에 들어왔다. 억봉은 동생의 입학원
서를 손에 든채 첫마디부터 사납게 몰아댔다.
《너 어디 갔댔어?》
석봉은 오늘 기능공양성소에 다녀왔고 하루종일 입학원서를 썼다. 석
봉은 형의 말을 들은체만체하고 아무 대꾸 안했다.
《이건 뭐야?》
억봉은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모르는줄 아느냐고 윽박지르듯 손에
든 입학원서를 흔들어보이였다.
《보면 몰라.》
석봉은 문가에 버티고 선채 도전하듯 나직이 내뱉었다.
《이런 쓸개빠진 생각 말구 우선 아는것만큼 착실히 일해.》
억봉은 동생이 정성껏 또박또박 박아쓴 입학원서를 와락와락 구기였다.
《다야?》

349
석봉의 목소리는 이번에도 높지 않았다.
《다 아니구.》
억봉은 형으로서 동생의 행동을 통제하고 잘못을 징계할 당당한 권리
가 있다는것을 시위하듯 구겨진 입학원서를 방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해
쓱하게 얼굴이 질려 형을 노려보던 석봉은 방바닥에 떨어진 구겨진 입
학원서를 집어들며 아니꼽다는듯 뇌이였다.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하려 들지 말구 자기 할일이나 해. 내 형
신세 안 지구 공부할테니까.》
《자식, 벌써부터 녀편네등에 업힐 생각이야?》
억봉은 언젠가 동생이 자기보고 강습을 가라면서 쌀을 얻어주겠다고
말하던것을 빗대두고 이렇게 말했다. 억봉은 동생이 고분고분하지 않는
데 약이 오를대로 올랐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비록 부당한것을
요구한다 해도 그 요구에 순종하던 석봉이다. 억봉은 동생이 봉산처녀
가 하라는대로 일을 하지 않고 공부하겠다는것도 괘씸했지만 그보다도
요즘에 와서 동생이 딱딱 맞서면서 어린시절부터 내려오는 형의 권위를
무시하려드는것이 더 화가 났다.
《다 말했어?》
석봉은 참아오던 분노를 터뜨리며 갑자기 어성을 높이였다. 동생의 고
함소리에 억봉은 온몸의 피가 얼굴에 오르는가싶었다.
《아직 말할게 많지. 녀자한테 꼭 잡혀서 이러라면 이러구 저러라면
저러는 머저리구실 작작해. 반편같은거.》
억봉은 자기가 애매한 차진옥을 모욕하고있으며 그것이 지금 면상을
후려갈기는것보다도 더 동생의 인격을 매질하며 자극한다는걸 모르지 않
았으나 참지 못했다.
《뭐야?》
석봉은 두눈에 달이 떠서 형앞으로 한걸음 육박했다. 억봉은 어릴적
버릇대로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으나 석봉의 억센 손아귀에 팔목이 붙
들리고말았다. 석봉은 바이스처럼 억봉의 한쪽팔목을 한손으로 꽉 잡아
쥐고 허공에 굳어져 놓지 않았다. 억봉은 이 순간 힘내기를 한다고 해
도 동생이 만만치 않다는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완력으로 동생을 휘여
잡던 어린시절은 이미 끝난지 오래였다.
형제는 얼굴들이 시뻘개져 서로 노려보며 숨이 차 씩씩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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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이가 부엌에서 뛰여들어오지 않았으면 형제는 철부지 어린시절처럼
서로 맞붙어 딩굴었을지도 모른다.
《얘들아, 이게 뭐냐? 동리 소란스럽게…》
알뜰은 억봉이와 석봉의 팔을 붙든채 안타깝게 속삭이였다. 인정은 형
보다 동생이 헤펐다. 눈물이 글썽한 누이때문에 먼저 수그러든것은
석봉이였다. 석봉은 꽉 잡았던 형의 팔목을 놓으며 뒤로 밀쳤다. 억봉
은 제 기운에 방바닥에 궁둥방아를 찧었다. 억봉이 벌떡 일어서며 다시
동생한테 달려들자 알뜰이가 얼른 그의 허리를 그러안았다.
《억봉아, 형이 그러면 쓰니, 네가 참아라.》
참은 사람은 석봉이였다. 석봉은 어디 달려들겠으면 얼마든지 달려들
어보라는듯 방 한가운데 떡 버티고 서서 누이한테 붙들려 한쪽구석으로
밀려나는 형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내 참으니 그러지… 혼자 잘난체 하지 말어. 도끼를 휘둘러 하늘을
까겠다는 미련둥이같은거…》
석봉은 쓰겁게 뇌이고나서 와락 문을 잡아제끼고 밖으로 나갔다.
《얘, 석봉아!》
알뜰은 억봉을 방구석에 밀쳐놓고나서 석봉을 따라나갔으나 석봉은 뒤
도 돌아보지 않은채 어둠속 어디론가 사라지고말았다. 그날부터 석봉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억봉이가 한때 세탄장 오소리굴에 박혀살던것처
럼 석봉은 공장민청사무실이나 동무네 집으로 찾아다니며 여기서 하루
자고 저기서 하루 자며 애당초 집에 들어올 생각을 안했다. 억봉이도 웬
만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 동생이 서로 집에 들어오지 않는데다 삼
촌어머니까지 친정에 가서 알뜰은 며칠밤이나 텅빈 두집을 혼자서 지켜
야 했다. 형과 동생이 서로 소닭보듯 하게 되자 그들 짬새에 서있는 알
뜰의 마음은 편안치 않았다. 알뜰은 어린시절부터 두 동생사이에 자주
끼워야 했다. 손우누이라는 위치때문에 먹을것과 좋은것이 생기면 정확
한 분배자가 되여야 했으며 시비를 가릴 일이 생기면 공정한 심판관노
릇을 하여야 했다. 알뜰이가 일을 잘못 처리하거나 어진 마음때문에 인
정상 어느 한쪽을 편역들게 되는 일이 없지 않았지만 두 동생은 자기들
이 다같이 저지른 잘못을 부모앞에서 변명해주고 때로는 자기들때문에
억울하게 욕까지 먹어야 하며 또 자기한테 차례진 몫을 먹지 않고 꽁꽁
싸두었다가 슬그머니 손에 쥐여주군 하는 누이의 사랑때문에 불공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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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와 억울한 재판에도 두덜거리며 응하지 않을수 없었었다. 알뜰
이가 두 동생한테 보유하고있던 관습된 이 권위가 이번에는 통하지 않
았다.
억봉이와 석봉이사이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어정쩡하
게 중립을 지키던 알뜰의 마음은 짐이 무거운쪽으로 쏠리는 수평저울의
바늘마냥 불시에 억봉이한테로 기울고말았다. 길손을 부르는 어둠속
의 불빛처럼 괴로움에 타번지는 억봉의 온몸과 넋이 그대로 한점의 불
꽃으로 알뜰의 시야에 비쳐진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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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도 괴로와한 사람은 억봉이였다. 흥분이 잦아들었을 때 억봉


은 동생한테 손찌검을 하려든 자신이 뉘우쳐졌다. 하도 일손이 딸리고
일이 안돼 애먹으니 그러지 배우겠다는 그자체를 나쁘다고는 할수 없었
다. 더구나 동생한테 아버지노릇까지 해야 할 자기였다. 동생의 소원대
로 마음껏 공부시켜줄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억봉은 텅빈 해탄로체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기우는 저녁해빛을 받으
며 거무틱틱한 해탄로들은 묵묵히 서있다. 억봉은 2호해탄로우로 오르
는 철계단을 밟기 시작했다. 억봉은 해탄로앞쪽에 외랑식복도처럼 길다
랗게 달려있는 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해탄사람들은 탄화실에서 콕스를 받아 식힘차에 넘겨주군 하는 안내
차가 다닌다고 하여 여기를 안내차홈이라고 부른다. 안내차홈은 한메터
폭이 되나마나했다. 해탄로끝에서 끝까지 쭉 잇달린 이 콩크리트마루로
로체공들이 다니고 안내차가 왔다갔다한다. 콕스를 구워내는 때같으
면 로체가 풍기는 뜨거운 열기때문에 불에 단련된 사람들도 오래 서있
기 어려운 곳이건만 지금은 찬기운이 풍긴다.
억봉은 2호해탄로 안내차홈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탄화실은
앞문짝, 뒤문짝을 모두 뜯어내여 해탄로뒤쪽이 휑하니 들여다보이였다.
석탄을 콕스로 구워내는 숯가마라고 할수 있는 탄화실은 높이가 사람 두
길이 넘어도 넓이는 사람이 겨우 하나 들어설 정도밖에 안된다. 이런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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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좁은 스물다섯칸이 하모니카바람구멍들처럼 서로 쭉 잇달려있는것
이 2호해탄로다.
억봉은 탄화실앞에 서서 괴이한 굴간같아보이는 그속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나서 걸음을 옮기였다. 열려있는 탄화실아구리로 내다보이던
반대편 하늘은 벽체에 가리웠다가는 새로운 탄화실에서 나타나고 그랬
다가는 다시 사라지군 했다.
억봉은 한 탄화실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제일 말썽많은 구간의 3번
탄화실이였다. 이 구간 탄화실들의 균렬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였다. 억봉은 저도 모르게 3번탄화실안으로 들
어서서 게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억봉은 탄화실벽체가 얼기설기 터진것
을 새삼스레 바라봤다. 량옆 벽체 그 어디고 균렬이 안간 곳은 없었다.
진공을 보장해야 하는 탄화실이여서 벽체에 균렬이 가면 콕스를 구워낼
수 없다. 이 벽체의 균렬들때문에 억봉은 도와 중앙에서 내려온 여러 기
술자들과 일군들을 만났으며 외국에서 왔다는 기술자들도 만났다. 이 벽
체의 균렬들을 어서빨리 메워야 한다는 절박감때문에 억봉은 동생과도
싸웠다고 할수 있었다.
억봉은 검댕이가 묻어나는 탄화실벽체의 균렬들을 쓸어만지기 시작했
다. 각이한 크기와 넓이로 빠개진 벽체의 균렬이 손바닥에 느껴지자 억
봉은 자기 가슴마저 이 벽체들처럼 뻐개져나가는것만 같았다. 바닥이 드
러나 쩍쩍 갈라터진 높드리같은 이 벽체의 균렬들이 없어지고 해탄로가
살아나게 되여야 억봉의 괴로움은 풀리고 동생에 대해 품었던 노여움도
사라질것이였다.
좁은 탄화실안에서 게걸음치며 벽체를 쓸어만지던 억봉은 탄화실안이
어두워짐을 깨달았다. 누군가 탄화실아구리에 서있었다. 억봉은 한참만
에야 굴왕신이 되여가지고 탄화실에서 나왔다. 탄화실앞에 서있는 사람
은 누이였다. 억봉은 자기를 찾아온 누이를 보고 안내차홈에 털썩 주저
앉았다.
굴뚝막은 덕석같아진 얼굴에서 두눈만 반들거리고 흰 이가 유표하게
드러나는 동생의 모습을 보자 알뜰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알뜰은 억
봉을 위로해주고싶은 충동을 금할수 없었다.
《로체를 살릴 무슨 수가 생길것 같니?》
부드러운 알뜰의 목소리에서는 동정심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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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로는 몰라두 이 2호해탄로 하나는 딱 살릴수 있을것 같은
데…》
억봉의 말에서는 자신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터진 부뚜막을 물매질하구 깨진 독을 회떡해서 쓰는것처럼 탄화실
은 그렇게 해선 안된다던?》
알뜰은 어떻게 해야 동생을 도와주고 위로할지 알수 없었다.
《나두 그렇게 하자는건데 어디 된다는 놈이 있어야지… 언젠가 집기
관(로체우에 있는 가스가 모이는 관)에서 안수(암모니아가 섞인 물. 콕
스를 구울 때 집기관에 안수를 쓴다.)가 넘쳐나서 탄화실뒤쪽벽체들
이 깨졌을 때 수리해쓴적도 있는데…》
억봉은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만 자기 주장대로 하면 꼭 될것
같았다. 억봉은 자기의 주장과 의견이 남들한테 인정받지 못해 분해
했다.
서쪽하늘에 노을이 불타기 시작했다. 알뜰은 오늘따라 저녁노을빛
이 그 어떤 괴로움과 모대김의 상징처럼 쓸쓸하게 느껴졌다. 동정과 련
민의 정이 어린 측은한 눈길로 동생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서있던 알뜰
은 요즘 동생들이 집에도 안 들어오는것이 마치 자기때문이기라도 한것
같아 풀기없이 물었다.
《오늘도 집에 안 오겠니?》
억봉은 누이의 억양에서 꼭 와야 한다는 간절한 당부를 느꼈다. 억봉
은 자기가 동생과 싸운 후 집에 들어가지 않아 공연히 누이의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는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들어갈게.》
억봉의 한마디 대답에 알뜰의 얼굴엔 웃음이 피여났다.
《같이 가자꾸나.》
《누이 먼저 가. 작업총화 짓구 내 들어갈게.》
《꼭 와야 한다.》
알뜰은 거듭 다짐을 받고나서 그길로 석봉을 찾아갔다. 알뜰은 오늘
어떻게 해서라도 억봉이와 석봉을 서로 화해시킬 생각이였다. 알뜰은
2호해탄로에서 내려오는 길로 콕스식힘탑근처에서 석봉을 만날수 있
었다. 알뜰은 석봉을 붙들자 바람에 행패하듯 말했다.
《오늘 너 나랑 결판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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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봉은 아무말없이 누이를 쳐다봤다. 석봉은 억봉이보다 대가 약하고
인정이 많다. 석봉의 장점과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알뜰은 인정
에 호소하기로 마음먹은것이다.
《이게 무슨 망해빠진 집안이냐? 싸웠으면 싸웠지 형제지간에 무슨 칼
에 피묻은 원쑤라구 서로 원두쟁이 쓴외 보듯 하면서 집에도 들어오지
않구. 부모님들도 안계시는데… 누구보다 서로 믿구 의지할대신…》
말해놓고보니 알뜰은 정말 설음이 북받쳐올랐다. 이런 때 부모님들이
계셨으면 얼마나 좋으랴. 해탄로에서 한생을 살아온 아버지나 삼촌이 살
아계신다면 해탄로때문에 속썩이는 억봉이가 도움받을수 있을것이고 애
당초 형제사이의 반목이 생기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눈물이 글썽해진
누이를 보고 석봉이도 마음이 약해지고말았다.
《내가 뭐라나? 형이 괜히 푸들쩍거리니 그러지…》
《너 네 형 성미 몰라서 그러니? 형이 지금 해탄로때문에 얼마나 속
을 썩이고있냐. 이자두 보니까 저 탄화실안에 굴왕신이 되여가지고
들어앉아있더라. 깨진 벽체를 쓸어만지면서…》
《그러면 뭘해.》
《그럼 넌 해탄로를 콱 허물어버려야 속이 씨원하겠니?》
《허물긴 왜 허물어.》
《무슨 수가 있으면 형이랑 손잡구 같이하려무나.》
《그러지 못하니 안타깝다는거지… 형이 하자는대로 하면 되겠는데도
누가 그걸 인정하나 말이야. 발언권이 없으니까 애당초 왼귀로도 들으
려고 안하거던… 내가 뭐 괜히 공부하겠다나…》
서로 싸우긴 해도 석봉은 해탄로문제에서 형과 의견을 같이하고있었
다. 석봉이가 공부하겠다는것도 해탄로를 위해서였고 억봉이가 동생
을 탓하는것도 해탄로때문이였다. 한가마밥을 먹은 사람이 한울음 운다
더니 근본문제에서 두사람은 차이가 없었다. 알뜰은 이것을 깨닫자
반가왔다.
그러자 알뜰은 느닷없이 차지훈이 생각났다. 남들은 기술이 없어
서로 이렇게 싸우며 가슴을 쥐여뜯고있는데 지훈은 그 좋은 지식과 기
술을 가지고 해탄로를 떠나 어디에 가있는지… 알뜰은 차지훈만 있으면
억봉이와 석봉이가 서로 손잡고 허물어버려야 한다는 해탄로를 살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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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은 석봉이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어느덧 땅거미가 소리없이
스며들고있었다.
《배가 출출한데… 오늘 점심을 번졌더니.》
벌써 환하게 불을 켜놓은 국수집앞을 지나던 때 석봉이가 혼자소리처
럼 중얼거렸다.
《한그릇 먹고 가자꾸나. 나두 국수생각이 나는데…》
《아니―》
석봉은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누이가 자기때문에 괜히 입에
발린 소리를 한다는걸 석봉은 모르지 않았다. 석봉이 계속 걸어가는 바
람에 알뜰은 할수없이 따라섰다. 그들이 주택지구가 빤히 바라보이는 골
목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불빛 환한 가게방앞에 서있던 조꼬만 계집애
가 알뜰이앞으로 뛰여왔다.
《아주마이―》
어슬어슬해오는 골목길에서 불쑥 나타난 계집애는 두옥이였다.
《아니, 네가 어떻게 여기 왔니?》
알뜰은 두옥을 반기였으나 달려오던 두옥은 석봉을 알아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두옥은 입에 손가락을 문채 경계하는 표정으로 석봉을 바라
봤다. 지금까지 석봉이 역시 차지훈네 집안식구들과 전혀 접촉이 없었
었다. 석봉은 어린시절 지훈이한테 우유도적으로 몰리던 일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있었다. 칼끝만이 상처를 남기는것은 아니다. 차지훈이 석
봉에게 도적이라고 한 예리한 말마디는 칼보다 더 아프며 좀처럼 아물
지 않는 상처를 남기였다. 알뜰이도 이것을 모르지 않는다.
《자 두옥이, 이리 오너라.》
석봉은 무릎을 꿇고앉아 두손을 벌리며 두옥을 안아주려 하였으나 두
옥은 입에 손가락을 문채 비실비실 피했다.
《두옥아!》
알뜰이 손을 내밀며 찾아서야 두옥은 알뜰이한테로 왔다.
《너 어두워오는데 왜 여기 와서 노니? 어디 왔댔니?》
알뜰은 두옥이와 말을 하느라 허리를 굽히였다. 두옥은 경계하듯
석봉을 다시 할깃 바라보더니 알뜰에게 불빛 환한 가게방을 가리켜보이
였다.
《너 말누깔사탕이 먹고싶은 모양이구나. 아저씨가 사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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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 꺾고앉았던 석봉은 일어나 가게방앞으로 걸어갔다. 석봉은 주머
니돈을 털어 오화탕 댓알을 종이에 싸들고왔다.
《옛다.》
석봉은 두옥에게 사탕봉지를 내밀었다. 석봉은 사탕봉지를 받아드
는 두옥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두옥아! 이제부터는 아저씨하구두 친하자.》
두옥은 그제야 발씬 웃으며 머리를 까딱거렸다. 석봉은 두옥이를
안아 공중에 들어올려주고나서 그를 땅에 내려놓았다.
《누이, 먼저 가라. 난 아무래도 좀 들렸다 가야겠어.》
알뜰은 배고프다던 동생이 집에 다 와서 어디 가겠다는것이 이상했다.
《어디?》
《산소달구지 끄는 령감네 집에…》
제철소 산소달구지 끄는 령감네 집이라면 지금까지 온 길을 되돌아가
야 한다.
《그 령감한테 뭘하러 갑자기 가겠다는거냐. 가두 밥이나 먹구 가
렴.》
《내 인차 갔다올게. 래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두옥이네 석탄을 실어
와야겠어.》
석봉의 말에 알뜰은 생각되는바가 있었다. 며칠전 석봉이가 마당을 쓸
다 말고 두옥이네 탄창고를 기웃이 들여다보는걸 보았었다.
《자 두옥아, 먼저 가거라.》
석봉은 두옥에게 손을 들어보이고나서 오던 길을 되돌아섰다. 알뜰은
지금까지 철없게만 생각해오던 석봉이가 자기나름의 신념과 주장을
갖고있으며 그 역시 자기대로 해탄로를 위해 모대기며 안타까와하고있
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알뜰은 퍽 어른스러운 동생의 마음을 저물녘
의 어둠속에서야 비로소 처음 보는가싶었다. 알뜰은 어두운 골목길로 걸
어가는 동생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서있다가 두옥의 손을 잡은
채 집쪽으로 향했다.

357
제7장. 비끝에 돋은 달

종착역이였다. 렬차가 멎어서기 바쁘게 사람들은 차에서 내리려고 서


둘렀다. 별로 급한 일이 없으면서도 이제는 어차피 내려야 한다는 생각
에 남먼저 내리려고 공연한 승벽을 부리는가 하면 남을 따라 덩달아 덤
비게도 되는것이 아마 려행을 마치는 사람들의 마음인지 모른다. 오직
차지훈 혼자만 텅비여가는 차안에서 움직일줄 몰랐다. 그는 서두르는 기
색없이 출입문 가까운 곳에 앉아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창턱에 두팔을
올려놓고 한손으로 턱을 고인채 지그시 눈을 감고있었다. 두달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의 마음은 자못 복잡했다. 지훈은 사립전문학교 교
원자리 하나를 얻어놓고 가족들을 데리러 오는 길이다. 지훈은 바람도
쏘이고 세상돌아가는 형편도 알아볼겸 맞춤한 일자리 하나를 고르려고
송표를 따라 서울에 갔었으나 환멸의 비애만 뼈에 사무치게 느끼였었다.
그는 금속공업의 래일이 궁금하여 조선금속협회란 곳에도 고개를 기웃
해보았고 조선공업구락부에도 찾아가보았으나 빛좋은 개살구였다. 38도
선이남의 산업은 미군정청 광공국에 들여앉은 하급장교들에 의해 좌지
우지되고있었다. 미국당국은 《조선총독부》대신 들어앉힌 군정청을 마
치 저들의 어느 자그마한 남방섬을 다스리는 기관정도로나 생각는것 같
았다. 미군정청이 38도선이남의 유일한 《최고권력기관》이라지만 초대
미군정장관이였던 미제7보병사단장 아놀드나 그의 후임으로 금년초에 취
임한 러취는 모두가 장령이 된지 한해가 되나마나했으며 조선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 역시 일본이 망하기 두달전에야 중장으로 승진한 사람이였
다. 한나라의 절반땅과 한민족 절반이상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권한을 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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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있는 이들은 군사적권위로 보나 경력과 학식으로 보나 미국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한 존재들이였으며 백악관문앞에는 얼씬조차 할수
없고 미극동사령관한테도 수백걸음앞에서 머리숙여야 하는 하졸들이
였다. 그러나 그들은 남조선에서는 신과 같은 존재로 행세하였으며
또 실지로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있었다. 미국의 대조선정책의 실질적인
집행자들이며 조선주둔미군사령관과 군정장관의 심복들인 군정청의
국장이요 과장이요 하는 요란스러운 관직을 가진 사람들 역시 미제7보
병사단의 하급장교들에 불과하였으니 38도선이남의 과학과 기술, 교육,
문화전반을 책임진 초대학무국장은 한갖 대위에 불과했다.
해방이 되였지만 이 나라 민족의 넋은 여전히 짓밟히우고있었다. 일
제때 돈주머니를 뽐내고 권세를 휘두르던자들만이 여전히 활개치며 득
세하고있었다. 일제때 겸이포바닥에서 조선사람치고 일본인들과 제일
가까왔으며 돈주머니가 제일 컸던 송표의 아버지는 서울장안에 자
리틀고앉기 바쁘게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공장을 벌써 세개나 손아
귀에 넣었으며 조선공업계의 최고지도기관이라는 조선공업구락부
40여 발기인중 한사람으로 되였다. 서울은 1946년 5월 현재 120
만의 인구로 팽창하여 쌀소동 물가폭등으로 악마구리 끓듯 하면서 서
로서로 속이고 등치고 빼앗아먹으려 으르릉거리는 마당으로, 온갖 정
치적테로가 대낮에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현대범죄의 마굴
로 변해가고있었다.
지훈은 앞으로 조선이 련합국의 후견하에 얼마나 살게 될지 알수 없
었으며 모스크바 3상회의결정을 둘러싼 각이한 정치세력의 쟁론과 혈투
에서 누가 정당하며 누가 승리하게 될지 알고싶지 않았다. 과연 언제 가
야 이 나라가 선진국가의 대렬에 들어서고 이 민족이 강대민족으로 되
겠는가 하는것만이 안타깝고 괴로울뿐이였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되
지 못하였으며 경제력이 미약한탓에 싫어도 남이 하라는대로 하지 않으
면 안되는 가난하고 약한 이 나라이고 민족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지
훈은 자기가 헐벗고 굶주리는 이 나라 약소민족의 하찮은 한사람인까닭
에 현대문명에서 멀리 뒤떨어지고 경제력이 미약한 이 나라, 이 민족이
걸어야 할 수난의 길은 자기자신이 걸어야 할 가엾고 고된 삶의 로정이
라고 생각되였다. 하기에 지훈은 별로 마음에 드는것도 아닌 서울로 되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자기 처지를 숙명처럼 묵묵히 받아들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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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지훈은 그새 앓아 병원에 입원하지만 않았어도 두달씩이나 서울에 머
물러있지 않았을것이다. 그 기간 치료비와 밥값은 모두 송표의 주머니
에서 나왔다. 겨우 얻어놓은 사립전문학교의 교원자리도 송표가 알선해
주었다. 남한테 잔뜩 신세만 지고 남이 베푸는 성의를 거절하기 어려웠
다. 또 그 사립전문학교가 대학으로 발전할 가망이 크며 재능만 인정되
면 과학과 기술이 발전된 나라 구경도 할수 있고 류학도 갈수 있다니 그
때를 바라 교편을 잡는 길밖에 없었다. 외국류학과 참관의 유혹을 버린
다면 온 가족이 번잡스럽게 왔다갔다하는 고생을 버리고 고향에 눌러앉
아 아무데서나 교편을 잡을수도 있지만 그것은 억봉이며 선우치담네와
타협하고 손잡아야 한다는걸 의미했다. 억봉은 일제때 기사로 있었다는
한가지 사실만으로써도 자기에 대한 적의를 버리지 않을것이다. 선우치
담이나 산업국의 표정갑 같은 사람들은 일정한 시기까지 자기같은 기사
들한테서 지식과 기술을 짜내겠지만 때가 되면 늙은 소 푸주간에 보내
듯 할것이다.
《손님, 다 왔습니다.》
지나가던 렬차원은 지훈이가 깊이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어깨
를 살며시 건드리였다. 텅빈 렬차안에는 차지훈 혼자였다. 지훈은 고독
감과 외로움이 밀물처럼 걷잡을수없이 가슴 한가득 밀려들었다.
고대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기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말했었
다. 지훈은 의학도가 아니였으나 이 잠언을 숭상했다. 지훈은 파란곡절
많고 험난한 이 세상에서 자기 몸을 보호하는 수단은 오직 기술과 재능
밖에 없다고 믿어왔으며 자기의 기술과 재능을 련마하기 위해 애써왔었
다. 지금까지 자기가 닦아온 기술과 재능은 하찮은 자기 몸조차 보호하
기 무력했다. 이처럼 삶이란 허무하고 인간은 약한것이여서 어떤 사람
은 코와 귀, 입은 물론 일체 귀중한 모든것이 관으로 되여있다고 하면
서 인간은 착잡한 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는지 모른다.
지훈은 삶의 허무를 뼈아프게 느끼고보니 그 무엇엔가 의거하고싶은
심정이 생기면서 이런 허무와 고독때문에 현대과학과 기술이 그토록 발
전한 오늘까지도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가부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은 어려서 부모에게 의탁하고 젊어서는 부부가 서로 의탁하며 늙어
서는 자식에게 의탁한다 하여 예로부터 3거의탁이라 말해왔었다. 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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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안해마저 없는 자기가 믿고 의탁할 사람은 과연 누구며 무엇이겠는
가 하는 질문이 비수처럼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지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훈은 기차선반우에
올려놓았던 자기의 배낭을 내리웠다.
렬차안은 텅 비였으나 역구내엔 아직 사람들이 많았다. 지훈은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될가봐 중절모를 이마 깊숙이 눌러썼다.
자기가 맨마감으로 기차에서 내린줄 알았는데 뒤쪽방통에서는 지금에
야 내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아하니 한집안식구였다. 등에 잔뜩 짐을
진 사나이가 홈에 서서 승강대에서 내리는 어린 딸을 거들고있었는데 그
의 두리에는 이미 차에서 내린 올망졸망한 네딸이 저저마다 하나씩 보
따리를 이고진채 서있었다. 아버지같아보이는 그 사나이가 댓살난 계집
애를 안아내리자 이번에는 40대의 녀인이 커다란 보짐을 머리에 인
채 또 승강대에서 내려왔다. 사나이두리에서는 각이한 나이의 여섯
녀자가 묻어돌았다.
지훈은 홈을 건너막다싶이 한채 한줄로 벌려서서 역사쪽으로 걸어오
는 그들에게 길을 내여주려고 기차쪽에 바싹 붙어섰다. 다섯딸과 처를
거느리고 짐을 진채 걸어오는 사나이의 얼굴은 별로 낯이 익었다. 그 사
나이도 차지훈을 힐끔 바라봤다. 지나칠줄 알았던 그 사나이는 문득 걸
음을 멈추더니 그 자리에 짐을 벗어놓았다. 그의 온 가족도 짐을 이고
진채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짐을 벗어내려놓기 바쁘게 지훈한테로 달
려왔다.
《아니, 이거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지훈에게 모자를 벗어들고 허리굽혀 반갑게 절하는 사람은 《걱정말
라》 주학섭이였다.
《기사선생! 정말 안됐시다. 기사선생한테 가서 고향에 돌아갈 로
자를 달라고 버릇없이 욱욱한걸 용서해주시우다.》
주학섭은 다시한번 깊숙이 허리를 굽혀보였다. 지훈은 한손으로는 어
깨에 걸머진 배낭끈을 쥐고 한손으로는 중절모를 벗어쥔채 황급히 마주
인사를 했다. 차지훈이 당황해할수록 주학섭은 그대로 옹색해하며 미안
해했다.
《글쎄 남들은 건국을 하느라 배를 곯으며 제철소를 지켰는데… 난 지
금에야 이렇게 돌아옵니다. 나살이나 매달구 기사선생한테 밀려가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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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갈 로자를 달라구 했으니…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시다.》
주학섭은 계속 용서를 빌었다. 지훈은 작년 언젠가 주학섭이 억봉이
며 로동자들과 같이 제철소운영동지회 사무실로 찾아와 밀린 로임과 집
에 돌아갈 로자를 달라고 하던 일이 새삼스레 생각났다. 그때 지훈은 서
울에까지 갔었고 적지 않은 돈을 해결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에 와
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학섭은 지훈의 침묵을 자기식으로 해석한
게 틀림없었다.
《용서하시우다. 온다온다 하면서 어디 인차 오게 돼야지요. 금년 농
사할 쟁기를 좀 벼려주고 오다나니 이제야 오는군요.》
주학섭은 자기 혼자서만 사과해서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처와 자식
들까지 불렀다. 학섭은 자기 처를 향해 야단쳤다.
《뭘하고 섰어? 빨리 와서 인사를 하지 않구…》
주학섭의 말에 그의 처와 자식들은 이고지였던 짐을 내려놓고 지훈에
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지훈은 이때에야 주학섭이 자기를 아직도 제철
소에서 일하는줄 알고있으며 용서를 바라는 심정이 리해되였다.
지훈은 주학섭의 가족들과 서둘러 헤여져 도망치듯 홈을 나왔다.
나들문을 빠지니 도망군의 길목을 지키듯 역사 한쪽벽에 붙어있는 글발
이 지훈의 앞을 막아섰다.
《모두다 건국의 위업에 떨쳐나서자!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의 기둥 제철소복구
에 나서라!》
지훈은 박아쓴 담벽의 구호앞에서 발목을 붙들리운듯 한동안 움직이
지 못했다.
지훈은 주택구역에 들어서서야 지금까지 가족들에 대해 별로 생각하
지 못한 자기를 새삼스레 깨달았다.
(어머니와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지훈은 집을 떠나던 때 동전 한잎 남겨두지 못했다. 몸도 건강하지 못
한 늙으신 어머니가 철없는 어린 네 자식들을 거느리고 어떻게 사는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자기가 그간 서울에 가있은줄 알면 억봉이네 젊은
패들은 반역자네 가족 몰듯 했을수도 있으며 이제는 제철소사람이 아니
라고 제철소사택에서 나가라고 했을수도 있었다. 지훈은 집떠나기 전날
우연히 들여다보았던 텅텅 빈 석탄창고가 떠오르면서 석탄을 줏느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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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쯔를 이고 철길이며 제철소구내주변을 돌아치고있을 어머니며 맏아들
의 검댕이칠한 얼굴이 보이는가 하면 추운 구들에서 오돌오돌 떨고있을
자식들의 파릿한 모습이 눈에 삼삼 떠오르기도 했다. 나날이 더워가며
여름이 코앞에 다가섰건만 아직 한겨울처럼만 생각되는것은 자기가
집을 떠나던 때가 쌀쌀했기때문만이 아니였다. 지훈이 있을수 있는
온갖 최악의 상태를 그리며 예상하는것은 이제 곧 부닥치게 될 가족들
의 불행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지훈은 자기네 집이 바라보이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훈은
자기 집에 산뜻이 회가루칠을 하고 창문과 출입문마다에 뼁끼까지 새로
바른것을 알아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집앞에 길다랗게 꾸려진 화단이며
화단둘레에 하얗게 회칠까지 해서 세운 목책들에서는 낯선 손길이 느껴
졌다. 지훈은 지금까지의 온갖 불길한 예측이 그대로 현실로 눈앞에 펼
쳐지는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사택을 내여놓고 어디론가 갔구나!》
지훈은 발이 땅에 얼어붙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알뜰이네 집 출입문이 열리더니 방안에서 한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밖
에 나오다 말고 문고리를 쥐고선채 지훈을 반기는 사람은 억봉의 삼촌
어머니였다.
《어마나―》
억봉의 삼촌어머니는 반가와 어쩔줄 모르더니 방안을 향해 소리쳤다.
《얘, 두옥아! 너의 아버지 온다.》
억봉의 삼촌어머니는 집안을 향해 소리치고나서 지훈이앞으로 달려
왔다.
《지금 오는 길이나요?》
억봉의 삼촌어머니는 지훈의 손목을 덥석 잡아주고나서 서둘러 짐부
터 받았다. 지훈은 옆집에 살았지만 지금까지 별로 상종해보지 못한 억
봉의 삼촌어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자 후더운 인정에 코마루가 찡해올 지
경이였다. 지훈은 억봉의 삼촌어머니한테 배낭까지 뺏기고나서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그간 편안하셨습니까?》
《어디 갔다 이제야 오나요? 얼마나들 눈이 까매 기다렸다구.》
억봉의 삼촌어머니는 오래동안 떠나있던 집안사람을 맞이하듯 진정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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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반가와했다. 활짝 열려져있는 알뜰이네 집에서는 두옥이가 쪼르르 달
려나왔다.
《아버지!》
두옥은 신발도 못 신은채 맨발로 뛰여와 지훈의 품에 덥석 안기였다.
그뒤로 세철이가 아버지를 부르며 달려나왔다. 지훈은 허리를 굽힌채 두
자식을 그러안았다. 어린 두 자식의 얼굴이 자기 량쪽볼에 닿는 순간 지
훈은 마음이 약해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지훈은 두눈을 슴벅이고나
서 한팔에 하나씩 아들과 딸을 안은채 허리를 폈다.
《어떻게 모두 여기 와있니?》
《옆집 할마이한테 놀러왔지 뭐.》
두옥은 지훈의 목을 한손으로 꼭 그러안은채 한손으로 자랑하듯 억봉
의 삼촌어머니를 가리켜보이였다. 누이의 말에 세철이도 그 무슨 잘한
일을 자랑하듯 《나두.》했다. 지훈은 배낭속에 사넣은 사탕봉지가
생각났으나 억봉의 삼촌어머니는 이미 배낭을 인채 저만치 앞서 지훈네
앞마당에 서있었다. 지훈은 두 아이를 품에 안고 자기 집쪽으로 걸어갔다.
《두옥이 할마이, 누가 오나 보라요.》
억봉의 삼촌어머니는 지훈네 집 문을 열고 소리쳤다. 잠시후 집안에
서는 어머니가 신발을 끌며 나왔다. 어머니는 죽을 곳에 끌려갔다 살아
온 아들을 맞듯 반가와했다. 지훈은 눈물이 글썽해 자기를 맞아주는 어
머니의 귀밑머리에 이제는 검은 머리가 몇오리 남지 않았음을 새삼스레
보았다. 그간 어머니는 퍽 늙은것 같으나 얼굴만은 그래도 별로 축간것
같지 않았다.
어머니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서던 지훈의 눈길은 부엌 가까운 곳에 있
는 석탄창고로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문이 활짝 열려있는 석탄창고
에는 석탄이 가득차있었다. 집안에서도 그 이전에는 느끼기 어려웠던 부
드럽고 세심한 손길이 느껴졌다. 아래방에 새로 장판을 했는가 하면 아
이들의 손에 찢어지고 뜯어져 보기 흉하던 웃방에서 아래방으로 통하는
미닫이에도 곱게 도배지를 발랐다. 웃방벽에 걸려있던 거울에는 어느 상
표에서 오려낸 그림이 붙어있었다. 거울아래쪽으로는 활짝 핀 국화송이
가 붙고 웃쪽에는 나비 한마리를 오려붙이였다. 거울에 붙어있는 꽃과
나비를 보자 지훈은 불현듯 죽은 안해 생각이 났다. 죽은 처가 저렇게
고운 그림만 보면 여기저기 오려붙이기를 좋아했었다. 지훈은 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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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서 안해의 저속한 취미가 보이는것 같아 그리 달가와하지 않았었다.
지훈은 자기가 없는 사이 죽은 처가 살아와서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고
손질한것만 같은 생각이 들며 살아있던 때 별로 의가 좋지 못했던 안해
의 얼굴이 우렷이 떠오르는것이였다. 지훈이 웃방에 들어앉아 거울속의
그림을 멍히 들여다보며 눈길을 떼지 못하자 아들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어머니가 막내딸을 안고 웃방으로 올라왔다.
《며칠전에 옆집 알뜰이랑 그 집 작은어머니랑 다들 와서 이렇게 장
판도 해주고 집안을 꾸려주고 갔다.》
《예?》
지훈은 자기 가슴에 총부리를 내대며 몰아낸 사람네 식구가 자기가 없
을 때 집을 꾸려주었다니 곧이들리지 않았다.
《너 없는새 정말 옆집신세를 여간 지지 않았다. 옆집 둘째는 석탄을
실어오지 그 집 맏누이랑 작은오마닌 이렇게 장판을 해주었지… 어디 그
뿐인줄 아냐. 내가 그새 한 열흘 앓아누웠댔는데 아이들을 거들어주구
나를 시중해주느라 옆집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였단다.》
어머니는 아들이 없는 사이에 있은 일을 이야기하며 웬일인지 가느다
란 한숨을 내쉬였다. 지훈은 어머니가 내쉬는 한숨의 의미를 정확히 가
늠할수 없으나 그 한숨은 그의 가슴을 도려내듯 아프게 만들었다.
지훈은 약해지는 자기의 마음을 어머니한테 내보이고싶지 않아 얼른
막내딸을 받아안았다. 딸은 커가며 신통히도 죽은 자기 어머니를 닮아
갔다. 지훈은 새근새근 잠든 어린 딸을 품에 안고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가 어린애의 보동보동한 볼에 자기 얼굴을 가져다대였다. 부드럽고
축축한 촉감은 오랜 려행의 피곤과 가슴에 한가득 차넘치던 오만가지 시
름을 가셔내면서 평온한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는가싶었다. 그 안정의
순간은 너무도 짧았다. 지훈은 사선마저 넘어 애쓰며 찾아온 집에 그리
운 혈육들과 마주앉아있기가 웬일인지 옹색스러워지고 거북하게 생각되
는것이였다.
자기가 생각하며 상상하던것과 모든것은 달랐다. 자기가 집을 떠나있
은 기간 생활에는 확실히 그 무슨 변화가 있었다. 그 기간 쌀쌀하던 겨
울의 랭기는 말끔히 가셔지고 무르녹았던 봄도 기울어 바야흐로 여름이
다가오고있었다. 단순한 자연의 그러한 변화에는 비길수 없는 심각하고
거대한 그 무슨 변화가 생활의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나고있음이 틀림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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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지훈은 오래간만에 아버지를 만나 떨어지기 싫어하는 자식들의 응석
과 아들의 피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다심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지훈은 자기도 모르게 제철소를 향했다.

지훈은 제철소구내산마루에 올랐다. 계절의 변화에 둔감한 구내산


의 아카시아나무들에도 봄빛은 무르녹은지 오래였다. 바야흐로 신록
이 짙어가는 아카시아나무사이로 용광로철탑과 열풍로굴뚝이 바라보
였다. 용광로철탑과 열풍로우에서는 크고작은 오색기들이 바람에 찢
어질듯 펄럭거리였다. 그아래로 사람들은 쉼없이 오고갔다. 용광로복구
장으로 뻗은 길 좌우에는 속보판들이 병풍을 펴놓은것처럼 주런이 잇달
려놓이였는데 특대형속보판에 써붙인 글은 제철소구내산마루에서도
똑똑히 알리였다.
《모두다 건국의무로동에로!》
함마를 둘러메고 한손을 들어올린 로동자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림우
로 힘있게 씌여진 그 붉은 글발은 온 구내산의 나무마저 불태워버릴듯
이글거렸다.
용광로지구를 바라보던 지훈은 강철지구며 압연지구쪽으로 돌아섰다.
평로조업때문에 강철지구 역시 들끓었다. 주변엔 사람들로 한벌 깔리다
싶이 했는데 제철소적으로 단 두대뿐인 화물자동차가 모두 그곳에서 왔
다갔다했다. 강철지구와 잇달린 압연지구에서는 굴뚝마다 연기가 피
여올랐다.
변모된 제철소의 모습중에서 지훈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것은 복구를
시작한 해탄로였다. 아직 이렇다하게 일자리를 낸것 같지는 않지만
해탄로복구를 시작했다는 그자체가 놀라왔다. 선우치담이 필요없다던 해
탄로였고 앞으로도 퍽 오랜 세월 무시당하지 않으면 안되리라 생각했던
해탄로였다. 어떻게 되여 해탄로복구정비를 시작했을가?
지훈은 제철소남쪽으로 번뜩이며 흘러가는 대동강이며 그 기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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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쳐진 해탄지구를 바라보다 그쪽으로 발걸음이 이끌리였다. 만나는 사
람마다 지훈을 반갑게 대해주며 아는체를 했다. 풋낯이나 아는 사람들
은 마치 제철소사무실에서 간부가 현장에 나오기라도 한것처럼 정중히
인사를 했고 이전부터 지훈이와 알고지내던 사람들은 어디 가서 무슨 공
을 세우고 돌아오기라도 한것처럼 떠받들어주기까지 했다. 지훈은 사람
들이 진정으로 자기를 반겨주는것이 기쁘면서도 괴로왔다.
지훈은 옹색스러운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부두쪽으로 걸어나갔다.
그곳엔 사람들이 없었다. 정박한 배도 없어서 검푸른 물결만이 텅빈 부
두를 때리고있었다.
차지훈이 부두가를 거니는데 누군가 한사람이 걸어왔다. 옷차림은 수
수해도 몸체가 거쿨진게 함부로 상대방을 얕볼수 없게 하는 위풍이 느
껴지는 50대의 늙은이였다. 늙은이답지 않게 그의 온몸에선 젊은 혈기
와 열정이 넘치였다.
《차지훈기사선생이 아닙니까?》
그 사람은 차지훈쪽으로 다가서며 먼저 아는체를 했다.
《예.》
차지훈은 전혀 알수 없는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게 이상스러워 마
주 인사를 하면서도 경계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희슥희슥한 머리에 비해 퍽 날파람있어보이는 점잖은 사람은 차지훈
의 두손을 잡아 정력적으로 흔들어주고나서 자기를 소개했다.
《얼마전에 여기 온 시공산당비서입니다. 리석이라 합니다.》
지훈은 그의 말에 온몸과 마음이 긴장되였다. 그의 표정은 부드러웠
고 태도 역시 소탈하였으나 지훈은 공산당이라는 말에 웬일인지 가죽잠
바에 번들거리는 장화를 신고 수염이 꺼칠해 열기띤 얼굴로 서있던 표
정갑부국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리석은 차림도 말과 행동도 무척 소박
했다.
《차선생이 제철소로 나왔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해탄
기사니까 여기 해탄로에 와야 만나는군요.》
리석은 자기보다 퍽 손아래인 지훈을 깍듯이 선생이라 존대했다.
그는 자기가 먼저 담배 한대를 피워물고 지훈에게도 담배를 권하면서 바
쁘지 않으면 같이 앉아 이야기나 하자고 했다. 리석은 부두가의 콩크리
트바닥에 먼저 펄썩 주저앉았다.

367
《갔던 일은 다 잘됐습니까?》
《예.》
지훈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자기가 지금까지 서울에 가있었으며 그곳에 교원자리를 얻어놓고
가족들을 데리러 왔다는걸 안다면 리석은 지금처럼 온화하게 대해주지
않을것이였다. 리석은 올방자를 틀고앉아 담배를 피우며 이렇게 물었다.
《요즘 서울형편이 어떻습디까?》
지훈은 가슴이 섬찍했다. 상대방이 이렇게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며 말
하자고 할 때에는 허심히 속을 털어놓아야 도리상 옳다는것을 지훈은 모
르지 않았으나 무슨 말을 어떻게 꺼냈으면 좋을지 알수 없었다.
《한곳에 꾹 박혀있다나니…》
리석은 말하기 거북스러워하는 지훈의 심정을 알아채고 더 묻지 않
았다.
《해방후 점점 더 알다가도 모를 요지경속처럼 되여가는게 아마 서울
장안인가싶더군요. 나도 신문과 잡지는 부지런히 보는축인데 아무리 봐
야 뭐가 뭔지 알겠습디까.》
지훈은 리석이 말하는 취지를 리해했다. 하나의 사실에 대한 서로 대
립되는 정반대의 견해와 의견들이 출판물들에 발표되고 서로 자기 파의
주장이 옳다고 목청을 돋구는 바람에 어느것이 옳고그른지 판단하기 어
려운 란장판이 서울이였다. 미군정당국에서는 민주세력과 진영에 대
해 탄압을 가하면서 우익반동세력은 보호육성했다. 그런가하면 다년
간 미국에서 길러온 리승만을 지방에 내보내여 전라남도 정읍이라는 곳
에서 환영강연회를 벌리고 단독 남조선림시정부수립을 력설하게 했으며
지난 5월 23일 미군정청외무처에서는 38도선이북에로의 려행금지를 포
고했다.
리석은 서울에서 방금 돌아온 차지훈보다도 남조선정세와 형편을
더 구체적으로 명확히 알고있었다. 지훈은 리석과의 담화를 통하여
그간 서울에서 받았던 흐리멍텅하던 인상들이 명확해지고 혼잡되고
갈피를 잡을수 없었던것들이 비로소 차곡차곡 정리되는듯 한 느낌이 들
었다. 리석은 다 타버린 담배꽁초를 강물에 내던지고나서 지훈쪽으로 얼
굴을 돌리였다.
《제철소에 돌아와보니 인상이 어떻습니까?》

368
지훈은 리석의 조금전 질문들보다 대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그간 퍽 많이들 일했더군요.》
《그렇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제철소를 복구할데 대하여
주신 가르치심을 받들고 우리는 떨쳐나섰습니다.》
《장군님께서 말입니까?》
차지훈은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리석은 차지훈을 따라
천천히 일어섰다.
《예, 장군님께서는 이곳 제철소가 건국의 기둥이라고 하시면
서 나라의 생명선으로 되는 제철소를 전망성있게 꾸리자면 해탄로부터
복구해야 한다고 하시였습니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지훈은 다시한번 놀랐다. 리석이 그렇다고 대답해주었으나 지훈은 자
기 귀를 의심했다. 민족의 대강과 조국의 운명을 론하셔야 할
전설적영웅이신 장군님께서 해탄로복구같은 하찮고 기술실무적인
문제에 대해서까지 언급하시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지훈은 서
울에 체류하는 동안 작년말 평양에 와서 장군님을 만나뵙고
돌아간 서울기자들이 쓴 접견기가 실려있는 신문을 그 무슨 책자처럼 그
대로 보관하고있는 사람들을 여러명이나 만날수 있었었다. 우리 민족의
영웅이시고 절세의 위인이신 장군님에 대한 온 겨레의 동경과 흠
모는 실로 하늘과 땅에 차고넘치였다.
지훈은 두눈을 슴벅이며 꿈을 꾸는듯 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리석은
지훈의 곁으로 다가서며 한쪽팔을 다정히 꼈다. 장군님께서 제철
소복구방향과 그 방도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밝혀주시였다는 이야기
를 리석을 통해 전달받을수록 지훈은 감격으로 가슴이 터질듯 높뛰였다.
퍼렇게 이끼낀 잔교기둥을 쉼없이 치받는 물결을 바라보는 지훈의 눈앞
에는 웬일인지 자기 집 방안미닫이에 수놓아진 포도송이며 거울에 새겨
진 꽃송이가 선히 떠올랐다. 지훈은 이 순간에야 자기가 이곳을 떠나있
는 기간 제철소복구와 사람들의 생활에 그리고 각이한 성격과 취미, 제
나름의 생각과 지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되여 변화가
일어나게 되였는가 하는것이 리해되는가싶었다. 오랜 세월 반목과 적대
의 감정이 가슴속에서 사그라질줄 모르던 억봉이네 식구가 어떻게 되여
자기네 집에 석탄을 실어왔으며 자기 가슴에 아픈 상처를 남긴 미운 사

369
람네 집을 알뜰이가 어떻게 되여 그처럼 따뜻한 온정으로 성의를 다해
보살피고 도왔는가 하는것이 지훈은 지금에야 비로소 납득되였다. 따뜻
한 봄볕에 두터운 얼음장이 풀리고 얼음에 덮이였던 땅에서 온갖 꽃이
피여나듯 장군님의 은혜로운 손길아래 오랜 세월 한 이웃에 살면서도 풀
길 없었던 굳어진 오해와 반목의 감정마저 풀리고있었으며 사람들이 사
사로운 자기 개인감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건국의 거대한 한뜻으로 뭉
쳐가고있었다.
부두가를 거닐던 두사람은 제철소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리석은 자
기 생각에 잠겨 땅만 내려다보며 걷고있는 지훈에게 천천히 이야기를 계
속했다.
《지난 4월말에 장군님께서는 청진제철소를 찾아주시였습니다.
그곳 제철소에 가시여서도 장군님께서는 민주기지를 건설하기 위
하여서는 제철소부터 복구해야 한다고 하시였습니다. 오늘날 진실로 나
라를 사랑하고 우리 민족을 위하는 길은 민주기지건설에 자기의 몸과 마
음을 다 바쳐나서는것입니다. 일제는 패망하였으나 제국주의잔재세력을
철저히 소탕하지 않는다면 놈들은 〈대동아공영권〉의 옛꿈을 버리지 않
을것이며 어느때고 우리를 다시 넘겨다볼것입니다. 해방자로 자처하
는 미국도 그렇지요. 미국은 발전된 기술과 경제력을 휘두르면서 우리
나라를 마치 패전국처럼 취급하고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우리 조국
남반부를 자기들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꾀하고있습니다. 이런 형편에
서 민족분렬의 위험을 막는 길도 그리고 부강한 자주독립의 길도 민주
기지를 다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자면 우선 철을 생산해야 합니다.
철생산의 중요성은 나보다도 기사동무가 더 잘 알게 아닙니까.》
지훈은 문득 걸음을 멈추며 리석을 바라봤다. 지훈은 리석이 어떻게
그렇게 남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며 유능한 외과의사가 상처를 수술하듯
아픈 곳만 건드릴가 하는 생각에 그가 야속스럽기까지 했다. 리석은 지
훈에게 숨돌릴 틈도 물러설 자리도 주지 않았다.
《지난 5월 5일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에서는 건국의무로동에
관한 지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지금 도처에서 기술자들을 부르고있습
니다.》
리석의 열기띤 말은 뜻하지 않은 일로 갑자기 중단됐다. 해탄로주변
화학보이라쪽에서 갑자기 폭음이 일어났다.

370
꽝―
요란한 폭발이 일어나면서 굉음이 두귀를 멍멍하게 만들었다. 리석은
지훈이와 담화하던것을 잊은채 사고가 일어난 현장으로 뛰여갔다.
지훈은 리석을 뒤따라 해탄로쪽으로 달려갔다. 사고는 해탄로에서 화
학보이라로 가는 가스관을 청소하기 위하여 땅속에 묻힌 관을 파내던 작
업장에서 일어났다. 가스란 묘한것이였다. 해탄로조업을 중지한지 일년
이 되여오는데 땅속에 묻혀있던 그 관에는 아직 가스가 남아있었다. 곡
괭이날이 가스관에 부닥치면서 불꽃이 일어 그 관속의 가스가 폭발한것
이다.
요란한 폭발에 비해 천만다행으로 사고는 적었다. 주변에서 일하던 사
람들이 몇명 돌벼락을 뒤집어썼으나 모두 경상이였다. 곡괭이날로 가스
관을 때린 당사자 한사람만이 중상을 입었을뿐이다. 지훈이 리석을
따라 사고현장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은 부상자를 흙 나르던 들것에 담
아싣고 병원으로 뛰여가고있었다. 들것에는 한 녀인이 누워있었다.
치마가 찢기고 피투성이되여 담가에 실려가는 녀성로동자며 담가를
들고 뛰여가는 억봉을 알아보는 순간 지훈은 끝이 예리한 칼로 가슴을
찌르는듯싶었다.
작업현장에 기술관리일군이 단 한사람만 있었어도, 작업하는 사람
들이 가스를 취급하는 상식적인 기술규정만 알고있었어도 지금같은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것이다. 비워둔지 아무리 오래다 하여도 가스가
들어있던 그릇이나 관은 가스가 있는지 없는지 철저히 확인한 조건에서
작업하게 되여있었다. 해탄로가 불죽은지 오랜만큼 누구도 관속에 가스
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관속에 차있는 가스를 없애기 위한 대
책을 세우지 않고 일한데 사고의 원인이 있었다. 지훈은 이때처럼 기술
자의 량심상 가책을 뼈저리게 느껴본적은 없었다.
리석앞에 제일먼저 나타난 책임일군은 토목부장 고필주였다.
《부상자가 어떻소?》
리석의 물음에 필주는 얼굴이 벌개져 더듬더듬 대답했다.
《생명은 별로 위험할것 같지 않습니다만…》
《부상자가 누구요?》
《박알뜰이라구…》
《뭐, 박알뜰?》

371
리석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여 되물었다. 고필주는 부장으로서의 책임
때문에 리석 못지 않게 얼굴색이 변하였고 차지훈 역시 리석이나 고필
주 못지 않게 놀라며 가슴이 뜨끔했다. 지훈은 들것을 들고 사람들이 뛰
여가던 쪽으로 얼굴을 돌리였으나 그들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고향에서 지훈을 반갑게 맞아준 한사람은 계향이였다. 지훈이가 왔다


는걸 어떻게 알았는지 계향은 지훈네 집으로 달려왔다.
《선생님!》
계향은 지훈을 보자 새된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더니 그의 손을 붙잡
고 발을 동동 굴렀다.
《선생님! 그간 건강하셨나요?》
계향은 두눈에 눈물까지 글썽해 열정적으로 지훈의 손을 흔들었다.
《그래―》
지훈은 그토록 반가와하는 계향이한테 자기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했
으면 좋을지 알수 없었다.
《선생님! 우리 고향쪽에 가셨댔나요?》
계향은 반가움에 이슬로 젖은 두눈을 동그라니 뜨고 빤히 쳐다봤다.
지훈은 순결한 계향의 두눈을 마주볼수 없어 슬며시 고개를 돌리였다.
이곳을 떠나던 때만 해도 지훈은 처가에 들릴 계획이였었다. 남의 귀한
자식을 데려다 죽인것만도 죄스러운 일인데 초라한 행색으로 나타나면
장인이나 장모의 가슴만 더 아프게 해줄것 같아 후날로 방문을 미루고
말았다. 지훈은 자기의 복잡한 심정을 계향이한테 그대로 털어놓을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과 함께 웅얼거리듯 대
답했다.
《가보지 못했구나.》
지훈의 한숨소리에 동정심을 느껴선지 실망할줄 알았던 계향의 입에
서는 뜻밖에도 위로의 말이 튀여나왔다.
《안 가보시길 잘했어요. 편지로 오빠소식을 들었어요.》
372
지훈은 죽은 처와 처가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었으나 계향은 자기 오
빠를 생각했다. 지훈은 줄곧 자기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남의 기쁨
과 슬픔에 대해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지금의 자신을 새삼스레 뉘
우치며 계향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오빤 선생님처럼 왜 이렇게 오지 못할가요. 내라도 가서 데려
오고싶네…》
계향은 몹시 안타까와했다. 지훈은 구체적인 내막은 알수 없었으나 계
향의 어조에서 그의 오빠한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겼음을 눈치챘다.
지훈은 계향이한테 단 하나뿐인 가까운 오빠한테 닥쳐온 불행을 진심으
로 위로해주고싶었으나 입을 다문채 계향을 측은히 바라만 봤다. 계향
은 지훈의 눈길에서 자기에 대한 동정을 엿보았는지 흐리였던 얼굴표정
을 갑자기 바꾸었다. 자존심강한 계향은 언제나 남들한테서 값눅은
동정과 구원을 바라지 않았다. 계향은 밝은 얼굴로 자기 믿음의 정당성
을 자랑하듯 말했다.
《선생님, 전 선생님이 이렇게 돌아오시리라고 꼭 믿었어요. 선우
치담지배인은 선생님이 무슨 죄짓고 도망간것처럼 말했지만…》
지훈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나타내지 않았으나 가슴이 뜨끔
했다.
계향은 지훈의 심정을 알바 아니라는듯 자기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내
뱉었다.
《전 선생님때문에 톡톡히 값을 치르었어요. 욕두 먹구 서기자리에서
쫓겨두 났으니깐요. 마치 제가 선생님을 어디로 빼돌리기라도 한것
같이 그러더군요.》
계향은 자기 신상의 심상치 않은 일을 마치 지나는 길에 남에 대해 이
야기하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훈은 자기때문에 계향이까지 피해입
었다고 생각하니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계향이, 정말 안됐소.》
지훈은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자기 힘자라는껏 계향의 피해를 보상이
라도 해주고싶었다. 지훈이 심각한 표정으로 하는 말에 계향은 까르르
웃었다. 무슨 재미난 일이기라도 한것처럼 계향은 한참이나 웃고나서 머
리를 저었다.
《안될게 있나요. 처음엔 서분하더니 오히려 잘됐어요. 전 기능공

373
양성소에 들어갔는데 얼마나 재미난지 모르겠어요. 양성소를 졸업하
면 전 천정기중기를 타요. 집채같은 짐을 들고 하늘을 날지요. 호호…》
계향은 자기가 배우는 일에 무척 긍지를 갖고있었다. 오늘의 기쁨과
래일의 행복에 대한 믿음으로 하여 계향은 지난날의 모욕과 가슴아픔을
모두 잊어버린것이다. 지훈은 진정으로 계향을 축하해주고 그의 앞날을
축복해주고싶었다.
《계향이, 정말 잘했어.》
지훈은 불행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길줄 알고 가슴아픔도 제스스로
가셔낼줄 아는 계향이가 정말로 부러웠다. 무척 다감하며 열정에 넘치
는 계향은 무엇이건 한자리에 머물러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화제가
동강나자 계향은 인차 말머리를 돌렸다.
《선생님, 알뜰언니한테 가셨댔나요?》
지훈은 아니라고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다. 지훈은 알뜰이한테 병문안
을 가야 한다는 도의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아직 찾아갈 용단을
못 내리고있었다.
《선생님, 저랑 같이 가요. 전 알뜰언니한테 가던 길에 선생님 오셨
다는 이야길 듣고 달려왔어요.》
지훈은 이번에도 선뜻 찬성하지 못하였다.
《이번 사고를 두고 말이 많아요. 현장에 기술자만 있었어두 사고가
안난대요. 선생님한테두 책임이 커요.》
계향은 지훈의 아픈 곳을 사정없이 찔렀다. 그의 말은 백번 정당했다.
기술자로서 현장을 버리고 떠난데 대해서는 응당 책임을 져야 했다. 그
것보다도 자기가 집을 떠나있은 기간 가정을 성심성의껏 돌봐준걸 생각
해서라도 알뜰을 응당 면회갔어야 할것이였다. 그러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주저하게 되는 지훈이였다. 지훈이 알뜰의 병문안을 주저하게 되
는것은 가슴속에 옹쳐있는 낡은 감정의 티때문만이 아니였다. 지훈은 오
래동안 떠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자기 집 방안미닫이에 오려붙인 포도
송이며 거울에 붙인 꽃송이를 보게 되던 순간 죽은 안해를 생각하게 됐
고 처가 아닌 다른 한 녀성의 실질적인 존재를 새삼스레 느끼게 되는것
이였다. 이 느낌은 넘어설수 없는 그 무슨 경계선처럼 지훈의 행동을 구
속했다.
방안문이 열리더니 두옥이와 세철이가 밖으로 나왔다. 두옥은 계향을

374
알아보고 반갑게 소리치며 달려왔다. 세철이도 덩달아 소리치며 계향이
한테로 뛰여오더니 칭칭 감겨돌았다. 계향은 두옥이와 세철의 손목까지
잡아끌며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지훈은 어쩌지 못하고 계향이한테
끌려 알뜰의 병문안을 떠났다. 지훈은 환자한테 빈손으로 갈수 없어 길
거리의 가게방을 찾았다.
가게방에는 철이른 여름귤이 놓여있었다. 진렬대에 몇알 놓여있는 여
름귤을 보자 지훈은 느닷없이 철부지 어린시절이 생각났다. 정월대보름
날 지훈이가 억봉이한테서 더위를 사던 그해 공교롭게도 더위를 먹었을
때 알뜰은 저런 여름귤을 사들고 지훈을 병문안 왔었다. 지훈은 티없이
맑고 순진하던 어린시절의 자기며 알뜰을 돌이켜보는 심정으로 가게방
진렬대우의 여름귤을 들여다봤다. 지훈은 호주머니돈을 털어 여름귤
을 샀다. 두옥이며 세철이한테 붕어과자며 사탕까지 몇알씩 사서 들리
고 그들이 가게를 물러서던 때였다.
맞은편 골목길에서 술취한 한사람이 비칠거리며 걸어왔다. 술취한 그
사람은 차지훈을 알아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차기사가 어떻게?》
그는 놀랍게 묻더니 무엇을 꺼리는지 사위를 두리번거리였다. 라웅범
이였다.
《라형이시군요.》
지훈은 가볍게 머리숙여 인사를 했다.
《언제 왔나?》
웅범은 갑자기 술이 모두 깬듯 한 표정으로 조용히 물었다.
《한 사나흘 됐습니다.》
지훈은 웅범이가 자꾸 사위를 두리번거리는게 기분이 상했으나 전혀
그런 내색없이 친절히 대답했다. 지훈은 송표와 함께 서울로 가던 때 웅
범의 차를 타고 개성까지 갔었다. 웅범은 38도선너머 개성까지 차를 몰
아다주고 그곳에서 돌아섰고 지훈은 송표를 따라 서울까지 갔었다.
지훈을 바라보던 웅범의 눈길은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술기운때문
만이 아니였다. 멀거니 지훈을 바라보던 라웅범은 갑자기 주정이라도 하
듯 거쉰 소리로 말했다.
《난 망했어. 쫄딱 망했어… 차까지 다 떼우구…》
그때 웅범은 38도선까지만 짐을 실어다주고 돌아서기로 되여있었

375
었다. 마중나오게 되였던 차가 오지 않아 웅범은 차를 몰아 38도선
을 넘어서야 했고 자동차까지 송표한테 넘겨주고 빈몸으로 돌아서지 않
으면 안되였다. 웅범은 그것을 두고 지금 지훈에게 억울한 사정을 하소
하고있었다.
《제 짬내서 댁에 한번 찾아가지요.》
지훈은 길거리에서 술취한 그와 마주서있기 멋해 이렇게 밀막았다. 지
훈은 아이들의 손목을 잡은채 병원쪽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언니!》
입원실문을 열고 들어서기 바쁘게 계향은 소리를 질렀다. 계향은
구을듯 달려가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알뜰을 얼싸붙안고 그의 가슴에 얼
굴을 묻었다.
《아니, 이게 누구냐?》
알뜰은 침대에서 일어나다 붙들린채 자기 품에 안겨드는 계향을 붙안
았다.
《언니, 좀 어때요?》
《이젠 일없어.》
《일없어가 뭐예요. 정말 큰일날번 했구만요. 세상에 이런 변이 어디
있어요?》
계향은 종달새 열씨 까듯 잠시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주절거리며 눈
을 상해 붕대 처맨 알뜰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의 어깨며 손을 쓰다듬
었다. 비끝에 돋은 달이 더욱 유정하다고 서로의 승벽과 알륵후에 마음
의 장벽을 헤쳐놓아 지금처럼 다정해지고 가까와진 이들이다.
《언니, 누가 왔겠는가 맞혀봐요.》
계향은 씨름이라도 할듯 한참 붙안고 돌다가 알뜰을 놓아주며 이렇게
물었다.
《누구랑 같이 왔니?》
알뜰은 의아하게 되물으며 옷단추라도 벗겨지지 않았는가 해서 손으
로 옷자락을 더듬었다. 계향은 침대에 걸터앉은채 생글생글 웃으며
다리를 잠시도 쉬지 않고 흔들흔들했다. 얼굴에 온통 붕대를 처맨 알뜰
을 보고 무서운지 두옥이가 계향이한테로 다가서며 그를 불렀다.
《언니―》

376
알뜰은 제깍 두옥의 목소리를 알아맞혔다.
《아니, 너 두옥이 아니냐?》
두옥은 그제야 알뜰의 목소리가 귀에 익은지 그한테로 발볌발볌 다가
섰다. 알뜰은 침대에서 방바닥에 내려서서 무릎을 꿇고 손더듬으로
두옥을 찾았다.
《두옥아, 알뜰아주마이야.》
계향이가 귀띔해주자 두옥은 알뜰의 품으로 냉큼 뛰여들었다.
《아주마이―》
《두옥아, 잘있었니?》
알뜰은 얼마전 계향을 알아보던 때보다도 더 반가와했다.
《누나야―》
두옥이가 알뜰이한테로 가자 세철은 자기도 있다는것을 나타내듯
누이를 찾았다.
《아니, 너 세철이도 왔구나.》
알뜰은 한팔로 세철이까지 와락 끌어당겨안았다. 알뜰은 두 어린
남매를 자기 품에 껴안고 반가움에 어쩔줄 몰라했다. 두 어린것은 알뜰
의 품에 안겨 캐득거리며 좋아 야단이다. 두 어린것의 웃음소리로 하여
방안은 입원실이라는 생각보다 행복하고 단란한 어느 가정의 안방같은
감마저 들게 했다. 지훈은 여름귤 몇알이 들어있는 구럭을 든채 그때까
지 문가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아버지―》
두옥은 자기를 붙들고 간지럽히며 놓아주지 않는 알뜰의 품에서 벗어
나려고 버둥거리며 구원을 청하듯 지훈을 불렀다. 계향은 앞 못보는 알
뜰에게 아직 차지훈이 온것을 알리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두옥이 아버지두 오셨어요.》
귀띔하듯 나직이 일러주는 계향의 말에 알뜰은 와뜰 놀라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자기 옷자락을 매만졌다.
《좀 어떻습니까?》
지훈은 그제야 인사를 했다.
《어떻게 여길 다…》
알뜰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야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377
《원, 별말씀을… 오셨다는 얘기는 들었댔어요.》
《정말 안됐습니다.》
지훈은 늦게야 병문안 온것을 거듭 사과했다. 서로 겉인사만 주고받
으며 맴도는 두사람사이로 계향이가 뛰여들었다.
《글쎄 차선생님이 이리로 오기를 주저하는걸 내가 막 끌고왔지요 뭐,
언니한테 사죄시키려구. 언니가 부상당한데는 차선생 책임도 크니까요.
안 그래요?》
계향의 질문은 두사람한테 동시에 가해진것이였다. 털끝만큼도 숨
기거나 꺼리지 않는 계향의 당돌한 질문에 두사람은 모두 당황했다. 하
지만 서로 옹색하던 처지에서 순간이나마 벗어날수 있는 여유와 턱거리
가 생긴것은 다행이였다.
《애두 원…》
알뜰은 가볍게 계향을 힐난했고 지훈은 손에 들고있던 여름귤꾸레미
를 상우에 내려놓았다.
《이제 또 가셔야 하나요?》
옹색스러운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알뜰이가 무심히 꺼낸 이 질문은 지
훈을 더욱 딱하게 만들었다. 인사말이라면 인사말이라 할수 있는 이 질
문에 지훈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새 일자리를 얻어놓은 서울로 가야
할지 이곳에 남아야 할지 아직 결심을 못해서가 아니였다. 단순한 질문
속에 너무도 큰 의미와 수많은 사연이 담긴것같이 생각되는 지훈이였다.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요?》
지훈을 대신하여 계향이가 하는 이 대답은 알뜰에게만이 아니라 지훈
에게 가서는 안된다고 강박하는 말이기도 했다. 계향은 두옥을 붙들더
니 그와 말을 걸었다.
《두옥아, 너 또 아버지 멀리로 가는게 좋니?》
계향의 질문에 두옥은 야무지게 대꾸했다.
《싫어.》
《세철이 너는?》
《나두.》
《그럼 너희들 아버지 꼭 붙들어, 어디 못 가게…》
계향의 부추김에 두옥이와 세철이는 지훈한테로 달려갔다. 두옥이
와 세철은 의자에 앉아있는 지훈의 팔을 량쪽에서 저마다 하나씩 잡고

378
흔들며 자기 아버지가 금시 어디로 가는가싶어 야단을 했다.
《아버지, 어디 안 가지요?》
《나두 같이 갈래, 씨…》
두 어린것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지훈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디 안 간다는데.》
알뜰이가 지훈에게 했던 질문은 계향이와 두 어린것을 거쳐서야 대답
을 받은셈이였다. 두 어린것은 좋아라 환성을 질렀다. 두옥이와 세철의
환성이 잦아들자 계향은 느닷없이 이런 말을 꺼냈다.
《언니, 병원으로 오다가 언니네 외삼촌 만났어요.》
《우리 외삼촌을?》
《예, 한잔하구 가더군요. 일전에도 보니까 잔뜩 취해있던데…》
별생각없이 던진 계향의 말은 알뜰을 몹시 난처하게 만들었다. 얼굴
에 칭칭 감은 붕대때문에 그의 얼굴이 타는듯 붉어졌다는것을 계향이나
지훈은 알아보지 못하였다.

(매미 암놈은 울지 못한다? 응, 그러니 매미녀편네는 바가지를 못 긁


는다는 소리구만. 그래서 매미남편은 행복하다구 하누만.)
웅범은 텅빈 사랑방에 목침을 베고 누워 파리똥이 다닥다닥한 천정을
올려다보며 저 혼자 웅얼거렸다. 웅범이가 지금 음미해보는 말은 언젠
가 함께 술을 마시면서 고필주가 한 말이였다. 웅범이가 녀편네때문에
신세타령을 했을 때 필주는 유식을 자랑하듯 이렇게 말했었다.
《자네 처가 쏘크라테스의 악처만 한가보군그래. 쏘크라테스란 옛
날 사람 이름인데 고대그리스사람인지 로마사람인지 그건 나도 잘 모르
겠어. 유명한 학자였지. 그 사람 녀편네가 악처루 소문이 났다는거야.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못된 녀편네보구 쏘크라테스의 악처라 한다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매미남편보다는 행복할수가 없어. 매미 암놈은
애당초 울지부터 못하니까…》
필주가 어느 눅거리 잡지 한구석에서 본 서양신화를 한참이나 설명했
379
건만 웅범은 쏘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수 없었고 알고싶지도 않았
다. 못된 녀편네의 대명사로 그 사람 녀편네가 오랜 세월 사람들의 입
에 올랐으니 그 사람도 어지간히 녀편네고생을 했겠다는 정도로 리해했
을뿐이다. 웅범이가 오늘 새삼스레 이런 생각을 하게 된것은 아침부터
녀편네가 바가지를 긁어서만이 아니였다. 어제 낮 무궁화상점부근에
서 차지훈을 만나던 그 순간 웅범은 자기가 처남 송표한테 두눈 멍히 뜨
고 자동차를 뺏기운 심화가 도지였다. 지훈이와 헤여진 후 웅범은 또다
시 술집으로 향하였었다. 일이 안될 때에는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웅
범은 술집에서 또다시 부아 동하는 일을 당했다. 술집에서 웅범은 뜻밖
에도 고필주를 만났었다. 오래간만에 술친구를 만나 웅범은 반가와했으
나 필주는 알은체도 안했다. 웅범은 밤새 저 혼자 쓰겁게 술을 마시다
가 오늘 아침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이젠 출세했으니 나같은거하군 상대 안한단 말이지?》
아무리 필주를 꾸짖어야 그것은 하늘보고 주먹질하기였다. 처남한
테까지 속히우고 버림당하는 주제에 술자리에서 잠시 사귀였던 사람을
의리없다고 욕할 형편도 못되였다. 웅범은 점점 자기 환멸과 자포자기
의 감정에 빠지고말았다.
(이미 무너진 집이야. 용마루가 꺾어지고 기둥이 썩었으니 살잡이
하긴 글렀어.)
웅범은 천정만 올려다보며 저 혼자 중얼거렸다. 송표를 따라 개성까
지만 가지 않았어도 유일한 락이요, 재산이였던 자동차까지는 떼우지 않
았을것이다. 장인은 작년에 개성에서 헤여지던 때 한번만 더 수고를 해
주고는 화물자동차를 가지라고 했었다. 웅범은 처가의 등쌀에서 벗어나
고 평생을 남부럽지 않게 살수 있는 횡재를 하려고 38도선가까이로 다
니는게 위험한줄 알면서도 송표를 태운채 려현까지 갔었다. 38도선
에서 송표와 짐을 마중나온다던 자동차는 나오지 않았다. 송표는 웅범
이더러 개성까지 차를 몰고 나가자고 했다. 어떻게 되면 일생에서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수도 있는 리별의 마당에서 인정상 딱 잡아뗄수도 없
고 작년말에 장인을 태우고 개성에까지 갔던 일도 있고 하여 웅범은 눈
을 질끈 감고 차를 내몰았다. 38도선을 넘어서자마자 웅범은 개성지구
에 주둔한 미제7사 관하부대에 억류되고말았다. 송표의 교섭으로 사람
들은 풀려나오고 물건도 되찾을수 있었으나 자동차만은 이북으로 다시

380
갈수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 분해 어쩔줄 모르는 웅범에게 송표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우리의 해방자야, 서분하겠지만 오늘은 그냥 돌아가게.
내 아버지한테 말해 밑지지 않게 해줄테니…》
웅범은 잘못하다가는 자기마저 38도선이남에 억류될것 같아 송표
가 쥐여주는 금가락지 두개를 받아가지고 그의 주선으로 38도선을
다시 넘어섰다. 웅범은 억류의 위험이 사라져서야 송표한테 속히웠다는
걸 깨달았다. 웅범은 두눈만 끔벅거리며 여전히 방바닥에 드러누워있었
다. 몸채 안방문이 열렸다가 탕하고 닫기는 소리가 났다. 찰찰 신발뒤
축 끄는 소리가 사랑방쪽으로 가까와오더니 지게문이 벌컥 열리였다. 문
짝이 요란스레 담벽을 때리는 소리가 나고 문고리가 짤가당했다.
《오금이 졌다구 진종일 그렇게 눠만 있소?》
소란스러운 문소리를 무색케 하는 송설자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울렸
다. 웅범은 고개만 돌리고 밖을 내다볼뿐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이
떡심좋게 누워있자 설자는 방법을 달리했다. 설자는 따라나온 딸을
보고 해보기 시작했다.
《이년아! 넌 뭘하러 예까지 따라나와 야단이야?》
어머니가 절썩 볼기를 때리는 바람에 어린 딸은 왕 하고 울음을 터뜨
렸다. 웅범은 자기때문에 공연히 아이가 매맞는다는 애처로운 생각에 일
어나앉았다. 웅범이 설자와 헤여지지 못하고 울며 겨자먹기로 마지못해
사는 리유는 아이들때문이였다. 어려서부터 부모없는 고아의 슬픔을 뼈
아프게 체험한 웅범은 자식들에게 아버지나 어머니없는 설음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후아버지나 후어머니의 품에 그들을 맡기고싶지도 않았다.
설자는 아이한테 분풀이를 해선지 아니면 웅범이가 일어나 앉아선지 다
소 성이 사그라진것 같았다. 그래도 설자는 웅범을 몰아대는것만은
늦추지 않았다.
《그래 나가서는 술집에만 붙어있고 들어와선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대감님이라구 누가 쌀을 갖다바친답디까, 옷을 가져다 바친답디까?》
웅범은 귀먹은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담배를 피우려고 주머니를 부스
럭거렸다. 주머니에서는 담배가루밖에 나오지 않았다. 웅범이가 머리를
수굿하고 앉아 주머니에서 담배가루를 털어내자 설자는 깨고소한듯
다시 옹알거렸다.

381
《담배 얻어피우고 술 얻어마시러 밤낮 가는 과부네 집에 가시구려.
다리부러진 사람처럼 방안에만 들어앉아있지 말구…》
웅범은 정 귀가 솔아 한마디했다.
《그런 과부가 반쪽이래두 있었으면 좋겠다.》
웅범의 이 말은 설자의 성을 사그라뜨리는 효능높은 진정제와 비슷했
다. 설자의 얼굴에 어리였던 독기는 한결 사그라졌다.
《이렇게 앉아있다 벼락맞지 말구 빨리 어디 나가 사라지우, 또 찾아
오기 전에…》
방금전까지 자꾸 집에서 나간다고 야단이던 설자는 이번엔 집에 앉아
있지 말라고 트집을 걸었지만 아까처럼 악의에 젖어있지 않았다. 웅범
은 큰 바가지만 한 혹을 지고 서있는 설자한테로 의아한 눈길을 돌리였
다. 그러지 않아도 웅범은 지금 지훈을 은근히 기다리고있었다. 그는 어
제 헤여지던 때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웅범은 지훈을 만나 조용히 이
것저것 물어보고싶은것이 많았다. 웅범의 눈길이 자기한테로 향하자 설
자는 두손을 가슴우로 올리더니 팔깍지를 하고 량손을 겨드랑이에 끼며
악에 받쳐 옹알거렸다.
《그 알량맞은 조카따님이 오늘 또 오시겠답디다.》

바로 이 시각 지훈은 웅범이네 집 대문앞에 서있었다. 문을 두드리려


고 손을 들어올리였던 지훈은 집마당에서 울려나오는 설자의 성난 목소
리에 온몸이 굳어지고말았다.
웅범―왜?
설자―그 알거라지가 뭘하러 우리 집에 오겠소. 돈달라 손 내밀러 오
지.
웅범―뭐, 돈?
설자―치료비 보태달라구 간호원까지 데리구 왔습디다. 얼굴에 잔
뜩 붕대를 싸매가지구…
웅범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긴 한숨끝에 웅범이가 녀편네한테 하는 다리아래소리가 났다.
《나 돈 좀 줘.》
설자가 쨍하니 내쏘았다.
《닭이 알낳듯 내가 뭐 돈낳는줄 아우?》

382
《그럼 점심 굶기구 국수 사먹을 돈두 안 주겠단 말이야? 담배도 사
피워야지…》
《배집이 그렇게 편안하니 좋겠시다. 담배 사먹을 돈까지 달라?… 여
기 사랑방에서 우물대지 말구 빨리 썩 안방으로 들어가우. 점심은 먹여
줄테니. 밥먹구 거기 배겨있으라요. 누가 와두 내 문닫아걸구서 없다구
안 들여놓을테니… 주겠다는 놈은 하나두 없이 밤낮 거지떼들만 찾아드
니 내 원…》
지훈은 설자의 발자국소리가 대문쪽으로 가까와지는것 같아 얼른
뒤로 물러나 담장뒤로 비켜서고말았다. 남의 집 문앞에서 주인내외가 주
고받는 말을 우연히 엿듣게 된 지훈은 얼굴이 뜨거웠다.
땡가당…
대문에 달아맨 종이 놀라듯 소리를 내더니 대문에 빗장지르는 소리가
났다. 지훈은 웅범이네 집에 들어가기를 단념하고 돌아섰다. 오늘 지훈
은 송표가 보내는 편지를 전하려고 우정 품을 내여 웅범이네 집에 찾아
왔었다. 지훈이 서울을 떠나오던 때 송표는 웅범이한테 전해달라면서 편
지봉투 하나를 주었었다. 지훈은 그 봉투속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으며
그리고 송표의 편지외에 또 한장의 엽서가 그안에 들어있다는걸 알리 없
었다. 지훈은 도리상 남의 부탁을 들어주려 이곳까지 왔을뿐이다. 지훈
은 편지에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든가 기회가 생기는 다른 때 다시 오
는것이 상책일것 같았다. 지훈은 자기가 지금 전하지 못한채 도로 가지
고가는 편지가 후날 그렇게도 골치아프고 복잡한 말썽을 일으키게 될줄
은 꿈에도 몰랐다.
제철소쪽으로 향한 길을 따라 두 녀자가 마주왔다. 두사람은 서로 부
둥켜안은채 천천히 걸었다. 얼굴에 온통 붕대를 감고 더듬거리며 오는
사람은 알뜰이였고 옆에서 그를 부축하는 사람은 계향이였다. 웅범이네
집쪽으로 다가오는 두사람을 알아보고 지훈은 당황했다. 어제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서던 때 알뜰은 계향이더러 시간이 바쁘냐면서 자기를 좀 만
나고 가라 했었다. 지훈은 녀자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는가 해서 입원실
에 계향을 남겨둔채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나왔었다. 그때 아마 알뜰은
계향이더러 자기를 라웅범네 집까지 데려다달라고 부탁을 했는지 모른
다. 송설자의 말을 들으면 어제도 알뜰은 이리로 왔었다. 어제 왔다 웅
범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서 지금 아마 이렇게 또 오는것이 분명했다.

383
자기가 오는것을 그렇게 꺼리는 집에 알뜰은 남의 부축까지 받아가며 무
엇때문에 이렇게 불편하게 찾아오는것인지… 지훈은 갑자기 측은한
생각이 들어 알뜰이한테 웅범이네 집으로 가지 말라고 귀띔이라도 해주
고싶었으나 차마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계향은 알뜰이가 혹시 돌에라도 발부리를 채울가보아 그의 팔을 낀채
긴장해 땅만 내려다보며 걸었다. 두사람은 길 한켠으로 비켜서있는
지훈을 알아보지 못한채 스쳐지나더니 웅범이네 집쪽으로 다가갔다. 지
훈은 두사람이 굳게 닫아걸린 웅범이네 집 대문앞에서 걸음을 멈추는것
을 보았다. 지훈은 곱사등이 송설자가 알뜰이한테 집에 아무도 없다고
고아대는 소리가 금시 귀에 들리는것만 같았다. 지훈은 못 볼것을 본것
같아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 다음날이였다. 소녀풍이 불어오더니 잠시후 하늘은 갑자기 흐리였
다. 흐린 하늘에선 어느덧 콩알같은 비방울이 후두둑후두둑 떨어졌다.
아마 이달 그믐치는 월봉산 산돌림으로 굼때려는 모양이다. 길에서
갑자기 비를 만난 지훈은 할수없이 비를 잠시 그어가려고 길가의 남의
집 처마밑으로 뛰여들었다. 콩알같던 비방울이 작달비로 변하면서 잠간
새에 도랑마다 누런 물이 콸콸 차서 넘치고 길에는 물마가 졌다. 웃비
가 걷히였을 때 지훈은 드러난 땅을 골라짚으며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
다. 땅만 내려다보며 가던 지훈은 마주오는 두 녀인과 맞부딪칠번 했다.
지훈은 자기 코앞에 마주선 녀인을 보고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알뜰이
였다. 알뜰은 옷이 흠뻑 젖어있었다.
《알뜰동무가 어떻게?》
지훈은 얼결에 놀라듯 부르짖었다.
《저, 누구신지요?》
알뜰은 옆에서 자기를 부축하고 서있는 처녀쪽으로 붕대 처맨 얼굴을
돌리며 어줍게 물었다. 알뜰을 부축하고 서있는 똥똥하고 키가 작달막
한 처녀의 몸에서는 소독약냄새가 확 풍겨왔다. 그제 병원에 갔다가 병
원복도에서 만났던 위생복차림의 간호원처녀다.
《저, 차지훈입니다.》
《아니, 차선생님이세요?!》
알뜰은 반갑게 인사를 하고나서야 자기 행색에 생각이 미쳤는지 한손
으로 옷을 더듬었다.

384
《질궂은 날씨에 어딜 이렇게…》
지훈은 옆으로 한걸음 비켜서며 놀랍게 물었다.
《네, 외삼촌네 집에 좀 가려구…》
알뜰의 입에서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훈은 어제 알뜰이가 계향이와
함께 라웅범네 집에 갔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섰으며 그래서 오늘 또
다시 이렇게 간다는걸 알았다. 지훈은 알뜰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며
박대하는 송설자가 미워지면서 알뜰이더러 다시는 그 집에 가지 말라고
만류하고싶었다. 지훈은 알뜰이가 꼭 웅범을 만나야 한다면 자기가
대신 그 집에 가서 웅범을 데려다 알뜰이와 만나게 해주고싶었다.
알뜰은 참고참아오던 분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 부르짖었다.
《저는 이렇게 부상당해 일 못하구, 웅범외삼촌은 기술이 있으면서도
해탄로를 돌아다보지 않구… 우리 웅범외삼촌이 압출기도 타댔구 이 기
계, 저 기계를 얼마나 많이 아나요. 남은 일하구싶어두 할줄 몰라 못하
는데 우리 외삼촌은…》
알뜰의 말은 마디마디가 바늘처럼 지훈의 가슴을 찔렀다. 지훈은
알뜰의 뒤모습을 바래며 움직이지 못했다. 알뜰은 간호원의 부축을
받아가며 한걸음한걸음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으나 진
탕을 가리지 않았다.

거리는 잠든것 같이 조용하였다. 잠들지 못하는것은 창문에서 불빛이


꺼질줄 모르는 주택지구의 사람들이였다. 지훈은 벌써 담배를 석대째 붙
여물며 자기 집 웃방에 혼자 조용히 앉아있었다. 지훈이 마음을 진정하
지 못하는것은 진창길로 라웅범을 찾아가던 붕대 처맨 알뜰의 모습이 아
직 잊혀지지 않아서만이 아니였다. 지훈은 식구들을 데리고 조용히
돌아서려던 이번 길이 이렇게 마음에 동요와 불안을 일으킬줄 알지 못
하였다.
《가긴 어디로 간단 말이냐? 네 아버지 무덤이 여기 있는데… 내가 이
제 몇날 더 살겠다고 떠돌아다니다 객지귀신이 되겠느냐. 난 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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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묻히고싶다.》
지훈이 서울로 이사갈 의향을 넌지시 비쳤을 때 어머니가 한 말이였
다. 지훈은 서울에 일자리를 고르면서 고향을 떠나고싶어하지 않는
어머니의 심정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였었다. 자식된 도리로써 어머니의
마음을 모른다고 할수 없으나 그래도 이것쯤은 무시할수 있었다.
고향을 찾아오던 때 품었던 지훈의 결심에 금이 가는것은 지난 몇달
동안에 모든것이 너무나 달라지고 변한때문이였다. 그 기간 북반부에서
는 력사적인 토지개혁이 있었다. 지훈은 농사와 인연이 없었으나 반만
년의 유구한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이 세기적변혁에 가슴벅찬 흥분
을 금할수 없었다. 허물어버린다던 해탄로도 복구를 시작했다. 북조
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 장군님께서는 제철소가 나라의 생명
선이라고 하시면서 제철소를 전망성있게 발전시키자면 야금공업의 첫 공
정인 해탄로부터 복구하라고 하셨다지 않는가. 전번에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주되는 리유의 하나가 이제는 물거품이 되고말았다.
새로 부임한 시당비서 리석도 가죽잠바 부국장과는 첫인상부터가
판판 달랐다. 새 시당비서처럼 례절있고 아량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손잡고 일해볼만 했다. 지훈은 이 모든것을 생각하면 은혜의 한구석에
가시를 남겨둔 송표를 따라가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지훈은 담배불을 재털이에 비벼끄며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각주노릇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예로부터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는 바보를 두고 각주라고 해왔다. (배
를 타고 강을 건느다가 칼을 빠뜨린 사람이 칼을 떨군 자리를 배에 표
해놓은 후 물에 빠진 칼을 건지려 했다는데서 각주(배에 새긴다는 뜻.)
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지훈은 온 가족한테 부담을 주면서까지 이런 머
저리구실을 하고싶지 않았다.
순간 지훈은 자기 가슴에 총을 내대던 억봉의 성난 모습이 눈에 선히
떠올랐다. 그날 억봉은 하늘에 대고 총까지 쏘며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
고 고함질렀었다. 손해는 잊을수 있어도 모욕은 쉽사리 잊을수 없는 법
이다.
지훈은 새로 담배를 붙여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안을 몇걸음
걷느라니 벽에 걸린 거울이 앞을 막아섰다. 지훈은 거울에 비쳐진 자신
의 모습보다도 어느 상표에선가 오려내여 붙인 국화송이며 나비가 먼저

386
눈에 띄였다. 지훈은 뒤로 돌아서서 아래방쪽으로 걸어갔다. 아래방
과 웃방을 막은 미닫이도 자기가 집을 떠나있은 기간에 새로 창호지를
발랐다. 방안 구석구석에 깃든 알뜰의 세심한 손길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자 지훈은 마음이 한결 누그러지면서 억봉에 대한 어느 정도의 아량
이 생겨났다. 억봉의 증오와 반감은 해탄로복구가 시작된 오늘 한풀 꺾
이고 사그라들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지훈은 억봉이가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욱욱하던 그 순간에조차 그를 악한으로는 보지 않았었다. 지훈
은 무분별한 그의 분노가 무지에 기인한다고 생각하여왔었다. 무지가 결
코 누구한테나 도움이 못되고 리익을 못 주지만 그자체가 악은 아니였
다.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외곬으로 생각하고 행동할수밖에 없었
다. 하지만 친구의 찌프린 얼굴을 보느니 바보의 웃는 얼굴을 보는것이
낫다는 말도 있는것처럼 별로 친하지도 못한 억봉의 우거지상을 대하는
것이 마음편하고 좋을수는 없었다.
우두커니 서있던 지훈은 방바닥에 놓여있는 재털이에 재를 털려고 올
방자를 틀고앉았다. 지훈은 둘째손가락과 셋째손가락사이에 끼웠던
담배를 범아귀에 옮겨놓고 집게손가락으로 담배대를 필요이상 툭툭
때렸다. 지훈은 담배대끝에 그 무엇이 달려있기라도 한것처럼 바라보았
으나 그의 머리속에서는 아까부터 계속되는 생각이 순간도 중단되지 않
았다.
억봉이와 자기사이에 미움이 미움을 낳는 악순환은 왜서 생겨났던가.
쉽사리 가셔지지 않는 그 반감을 자기때문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억
봉이때문이라고 해야 할지… 잡았다 훌 놓쳐버린 참새가 수놈인지 암놈
인지 알기 어려운것처럼 이것을 밝히기는 어려웠다.
지훈의 착잡한 상념을 중단시키며 난데없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방안에 앉아있던 지훈은 인차 일어나 문을 열었다.
한밤중 찾아온 사람은 뜻밖에도 억봉이였다. 범이 자기 소리 하면 온
다더니 억봉은 지훈이가 그에 대해 생각하고있던 때 나타났다.
《밤깊어 찾아와서 안됐습니다.》
지훈은 한참이나 멍히 억봉을 바라보고 서있다가야 그더러 방안에 들
어오라고 했다. 억봉은 철부지 어린시절에 누이의 부탁을 받고 지훈네
집에 심부름을 온적은 있었으나 한이웃에 살면서도 지금에야 처음 온다.
억봉은 지훈을 따라 방안에 들어와 담배를 피워물며 힘겹게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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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렇게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셨겠지요?》
지훈은 억봉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무 대꾸 못했다. 한밤중에 억봉
이가 무엇때문에 이렇게 찾아왔는지 지훈은 알수 없었다. 지훈은 억봉
이와 얼굴을 맞대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것자체가 무슨 꿈을 꾸는듯 한
기분이였다.
억봉은 몇모금 들여빨던 담배를 불도 끄지 않은채 재털이에 집어
던졌다.
《저 역시 아침까지만 해도 제가 이렇게 기사선생님네 집에 찾아오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억봉의 말은 사실이였다. 그제 달모가 억봉에게 차지훈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주면서 2호해탄로탄화실 균렬문제를 그와 의논해보는게
어떤가고 물었을 때 억봉은 그러고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면서
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었다. 억봉은 자기 혼자서였다면 한밤중 이렇
게 지훈을 찾아 집에까지 오는 용단을 내리지 못하였을것이다. 시당비
서 리석은 오늘 낮 현장에 나와 건국청년돌격대원들한테서 해탄로복구
대책안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나서 억봉을 따로 불렀다.
《차기사가 돌아왔는데 너 만나봤니?》
억봉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자 리석은 노여운듯 이렇게 말했다.
《옆집에 나란히 살면서 그러면 되니? 도리는 둘째로 치구 먼데 가서
외국기술자까지 불러다 해탄로를 봐달라는 형편인데 옆집에 사는 기사
한테서는 왜 도움을 못 받아?》
억봉이 아무 대꾸 못하자 리석은 이렇게 못을 박았다.
《내가 료해한바에 의하면 차기사가 이곳 제철소를 떠나간 주요한 원
인의 하나가 너와의 불화야. 그 기사가 이곳 제철소에 남아 일하는가 다
시 서울로 나가는가 하는것이 인간적으로는 적지 않게 너와의 관계에 달
려있다. 네가 먼저 찾아가 만났으면 한다. 이건 시당비서로서 당원인 너
한테 주는 과업이다.》
억봉은 별로 마음내키지 않는 일이였으나 당적과업이라는 말에 불
평스런 내색조차 보이지 못했다. 그리하여 억봉은 이렇게 지훈을
찾아왔다.
《전 솔직히 말해 기사선생님네 집에 오기가 멋했습니다. 오면서도 마
음은 순하지 않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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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끝만큼도 숨기거나 꾸미지 않는 억봉의 이런 말까지 듣고보니 지훈
은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앞에서 이이상 입을 다물고있을수 없었다.
《내가 먼저 찾아가 인사를 했어야 할터인데… 제가 집을 버리고 떠
나있은 기간 우리 집을 돌봐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지훈의 말에 억봉은 모욕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얼굴을 확 붉히였다.
하지만 이전처럼 어성을 높이거나 우르락푸르락하지 않았다.
《그래서라면 전 애당초 찾아오지 않았을것입니다. 기사선생네 집
안일을 도운건 제 누이와 동생입니다. 저는 기사선생네 집에 장판도 해
주고 석탄도 실어다주는걸 보고 누이와 동생을 속으로 좋지 않게 생각
했댔답니다.》
지훈은 겨우 열렸던 말문이 얼어붙고말았다. 지훈은 무지막지하다
고 생각해오던 억봉이한테 이런 완강한 자기 신념과 론리가 있을줄은 몰
랐다. 예로부터 자기자신에 대하여 전심하지 못하는 사람과 자기 일에
골똘하지 못하는 사람은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며 들어도 듣지 못
하는 사람이며 먹어도 맛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왔었다. 억봉이한테는
지식이 부족할뿐이지 볼줄 알고 들을줄 알며 맛을 알수 있는 능력이 얼
마든지 잠재해있었다. 지훈은 억봉의 허심성과 솔직성에 위압당하고
말았다.
《전 우리 해탄로 건국청년돌격대를 대표해 왔습니다.》
억봉은 잠시 말을 끊고 담배를 다시 피워물었다. 담배를 끼워든 그의
손끝은 흥분때문인지, 지나친 긴장때문인지 알릴듯말듯 떨리였다. 억봉
은 담배를 몇모금 빨고나서 물었다.
《언제 떠나시겠습니까?》
억봉은 솔직했을뿐아니라 단도직입적이기도 했다. 지훈은 자기 마
음속의 가장 아픈 곳을 파헤쳐보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아직 결심하지 못했습니다.》
지훈은 궁색스러운 침묵을 굼때려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가실 땐 가시더라도 우리 건국청년돌격대를 좀 도와주십시오. 해탄
로체를 살려야겠는데 너무 의견들이 많아서 그럽니다. 장군님께서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구 기술있는 사람은 기술을 내구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서 민주건국사업에 떨쳐나서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희
들은 힘을 낼테니 기사선생은 기술을 내서 해탄로복구를 좀 도와주십시

389
오.》
억봉의 말은 이번에도 뜻밖이였다. 별로 길지 않는 몇마디 말밖에 안
했건만 그의 이마엔 흥건히 땀까지 내돋았다. 지훈은 다시는 눈앞에 얼
씬하지 말라면서 가슴에 총부리를 내대던 사람앞에 이렇게 자기 먼저 찾
아오기까지는 억봉의 마음이 어떠했으리라는것을 짐작하고 남았다.
《고맙습니다. 갈 때는 간다 해도 제 래일부터 제철소로 나가겠습니
다.》
지훈의 대답에 억봉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그러면 전 가보겠습니다.》
불쑥 나타났던 억봉은 갈 때 역시 그랬다. 현관에까지 나갔던 억봉은
방에 두고 나온 모자때문에 되돌아서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지훈은
억봉의 이 건망증이 그가 오직 한가지 생각에 골똘한때문임을 모르지 않
았다. 억봉은 인사를 마치기 바쁘게 자기네 집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옆집에서 문이 열리고 닫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발자국소리는
어두운 제철소쪽으로 점점 멀어져갔다.

자정이 다 되여오는 이 시각 시당비서 리석은 선우치담과 마주앉아있


었다.
《미련한 소도 한번 넘어진 곳에는 다시 넘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배반으로 보상받았던 저로서 차지훈을 다시 제철소에 받고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집에 돌아온 차지훈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한 리석의 물음에 선우
치담은 이렇게 대답했다. 선우치담의 완강한 저항에 리석은 한걸음도 뒤
로 물러서지 않았다. 리석은 선우치담과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부드러
운 목소리로 웃으며 사정하듯 말했다.
《모르고 한번 알고 한번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한번 더 속는셈치고
차지훈을 써보시지요. 지배인동무도 안타까우니까 일본인기사까지 제철
소복구에 써먹을 생각도 했었겠지요? 조선사람기술자가 일본인기사들보
다야 나을게 아닙니까. 민족의 넋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말입니다. 제가
듣고 료해한바에 의하면 차지훈기사한테 민족적량심은 있는것 같던데
요.》
선우치담은 어느모로 보든지 리석이 만만치 않음을 새삼스레 깨달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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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리석한테는 큰소리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을 자기 의사에 복종시킬
줄 아는 힘과 능력이 있었다.
《좋습니다. 비서동무가 보증하겠다면 제 다시한번 써보겠습니다.》
선우치담은 리석이 자기한테 찾아와서 이렇게 낮추 붙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런 승낙도 하지 않았을것이다.
《고맙습니다. 제 아직 차지훈에 대한 깊은 파악이 없습니다만 책임
지겠습니다. 앞으로 좀더 료해도 하고 도와도 주면서 말입니다.》
리석은 꼬리를 사리는 선우치담한테 주저없이 그 책임을 자기가 지겠
다고 하였다.

해탄로복구문제때문에 지배인방에서 아침부터 시작된 회의는 밤저


녁이 다 가도록 끝날줄 몰랐다. 2호해탄로 하나만이라도 헐지 않고 로
체를 복구하자는 억봉이네 의견은 기술적담보가 없었고 토목부장 고필
주를 비롯하여 기술부에서 들고나온, 낡은 로체를 모두 헐어버리고
대담하게 새로 쌓자는 주장도 실은 막연했다. 제철소에는 해탄로를
쌓을 규석벽돌이 없었다. 까다롭고 복잡한 수십종의 해탄로규석벽돌
을 지금은 제철소자체로나 국가적으로 생산할 형편이 못되였으며 어디
서 가져올 전망도 보이지 않았다. 대립되는 의견쌍방은 서로 욕망뿐이
여서 상대방을 납득시키거나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처음에 열을 올리던
사람들도 이제는 어지간히 지치고말았다. 해탄로복구문제를 둘러싼
론쟁은 결국 씨름군들이 둘다 맥빠져 자빠지는 바람에 승부없이 끝난것
처럼 되고말았다.
창밖에선 계속 비가 내렸다. 회의가 시작되던 때 내리기 시작한 비다.
회의가 끝나야 비가 그치겠는지, 비가 그쳐야 회의가 끝나겠는지…
지배인 선우치담은 방 한가운데 놓인 자기 사무용책상앞에 앉아 세 벽
면을 따라가며 말밥굽모양으로 빙 돌려앉아있는 회의참가자들을 천천히
더듬었다. 너나없이 모두가 어지간히 지친 표정이였다. 뒤줄에 앉아
있는 동력과장은 찌글서하니 앉아 벽에 머리를 대고 로골적으로 자고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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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선우치담은 만년필로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
《자, 어서 의견을 이야기하시오. 초저녁인데 벌써부터 자는 사람
들이 있습니다.》
주의를 주었지만 동력과장은 잠에서 깨여나지 못했다. 선우치담은 슬
며시 리석이 앉아있는쪽으로 눈길을 보내였다. 방 한가운데 주석단처럼
놓여있는 지배인책상에는 선우치담 혼자만 앉아있고 리석은 다른 회의
참가자들과 마찬가지로 지배인을 향해 벽쪽으로 앉아있었다. 선우치
담은 제철소를 책임진 주인이 자기라는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리석더러
책상앞에 나오라고 청하지도 않았다.
조용하던 방안에 갑작스레 이상한 소리가 났다. 요란스레 코고는
소리였다. 모든 사람들의 눈길은 코고는 소리가 들려온쪽으로 쏠리였다.
코를 고는 사람은 동력과장이였다. 그는 몇번 코를 골고나서 빈입을 쩝
쩝 다시더니 고개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선우치담은 잠자는 당사자보다
도 옆에 있는 사람들을 꾸짖으며 그를 불렀다.
《좀 깨우시오. 동력과장동무!》
동력과장은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옆구리를 찔러서야 깨여났다. 그는
벌떡 일어서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예, 하겠습니다.》
아마도 그는 지배인이 동력과앞에 제기된 과업과 관련해 자기를 불렀
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왕청같은 동력과장의 말에 방안사람들은 웃
음을 터뜨렸다. 동력과장은 사람들이 무엇때문에 웃는지 깨닫지 못하고
수첩을 펼쳐 한손으로 받쳐들며 말뜻은 애매하나 목소리만은 낮추지 않
은채 같은 말을 곱씹었다.
《해야지요. 어떻게 해서든지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방안에는 아까보다 더 큰 웃음소리가 터지였다. 지배인은
자기 말에 반박하거나 엇서는것을 제일 싫어했으며 약삭바른 부장,
과장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든 그앞에서 그가 하라는대로 덮어놓고 하겠
다고 대답하는것으로 바쁜 모퉁이를 굼때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동력
과장이 자기의 실수를 깨닫고 자리에 앉기 바쁘게 고필주가 벌떡 자리
에서 일어섰다. 그는 이 회의에서 벌써 세번째 발언한다.
《제 한가지만 더 말하겠습니다.》
필주는 공연히 뻘각뻘각 수첩 몇장을 넘기고나서 방안을 조심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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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본 후 입을 열었다.
《에, 우리들이 잘 아는바와 같이 한개 국가의 위력은 그 국가가 소
유하고있는 철강재량으로 판단할수 있습니다. 동시에 콕스가 이 철강재
생산의 불가결한 존재라는것도 두말할것 없습니다. 따라서 나라의 흥망
과 결부된 중요한 문제를 론하는 이 마당에서 우리 각자의 사명과 책임
은 크다고 생각합니다. 에, 규석벽돌이 아니라 금덩이를 가져다주어
도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해탄로를 세우기만 한다면 그자체로써 세계콕
스공업력사에서 기적이 아니라고 할수 없습니다. 그런것만큼 규석벽
돌과 복구자재문제는 국가적견지에서 론의되고 풀어야 할 문제지 우리
가 입장단을 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 문제야 지배인동지가 림시
인민위원회에 가셔서 풀어야지 우리보고 자꾸 해결방도를 내놓으라면 어
떻게 합니까?》
필주는 공격의 화살을 선우치담에게로 슬쩍 돌려놓았다. 선우치담
을 지명공격하는 필주의 말에 방안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의아해졌다.
더우기 놀라운것은 자기와 조금이라도 엇서는 사람한테는 무자비하게 보
복하는 선우치담이 필주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는것이였다.
《토목부장동무의 말이 옳소. 자재문제는 내가 풀어야 할 몫이요. 난
내가 할일을 동무들보고 하라 할 생각은 없소.》
지배인은 머리까지 끄덕여보였다. 지배인이 드러내놓고 고필주의
의견에 찬동을 표하자 기술부기술자들은 낡은 해탄로를 헐지 않으면 안
될 필요성을 력설하기 시작했다. 회의의 흐름은 점차 해탄로를 모두 헐
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락착되기 시작했다. 같은 말들이 계속 반복되자
그러지 않아도 지루한 회의는 사람들한테 졸음만 부채질했다. 회의참가
자들한테 졸지 말라던 지배인자신이 생각을 하는지 잠을 자는지 두눈을
지써 감고 앉아있었다.
《더 다른 의견들은 없소?》
선우치담은 번쩍 눈을 뜨며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좌중을 둘러보는
그의 표정은 오늘회의를 이제는 그만하는게 어떤가고 묻는듯싶었다.
《차지훈기사동무, 기사동무 생각은 어떻습니까?》
리석이 출입문쪽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리석의 물음에 출입문쪽
뒤자리에서 지훈이 일어섰다.
지훈은 억봉이가 한밤중 자기 집을 다녀간 그 다음날부터 제철소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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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그리고 필요한 임의의 시각에 자기가 가고싶은 곳으로 가도 무방
하다는 조건밑에 제철소에서 다시 일하라는 제의도 받아들였다. 선우치
담은 리석의 보증과 권유에 어쩌지 못하고 울며 겨자먹기로 그를 화공
부기사로 임명했다. 지훈은 그간 해탄로실태를 구체적으로 조사하는
것으로 자기의 사업을 시작했다. 지훈은 고개를 들어 방안을 천천히 한
번 둘러보고나서 말을 시작했다.
《우선 의견을 말하기에 앞서 해탄로의 력사를 잠간 말할 필요가 있
다고 생각합니다. 이곳 제철소에 해탄로가 처음 건설된것은 1918년
4월이였습니다. 이 해탄로는 청부업자들의 협잡으로 말미암아 건설직후
부터 기초가 내려앉기 시작하여 많은 탄화실을 사용할수 없게 되였습니
다. 그리하여 10년후인 1928년 3월 2일 일제는 1호로의 절반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해탄로를 세우고 2호해탄로라 하였습니다. 지금 론의
의 중심으로 되고있는 2호해탄로가 바로 이 로입니다. 제2호해탄로
는 1943년 3월 31일까지 약 14년동안에 96만 천여톤의 콕스를 생산하
고 낡아 대보수를 진행하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2호해탄로는 1943년
4월 1일부터 대보수를 시작하여 그해 10월 20일에 첫 압출을 하였으나
8.15해방과 함께 조업을 중지하였습니다.》
차지훈의 말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았으나 그렇지 않은 사
람도 있었다. 차지훈이 말한 내용을 이미 알고있거나 모른다 해도 거기
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지훈의 말이 길어질가보아 우려를 표
시했다.
《해탄로력사는 후에 듣고 오늘은 복구할수 없는가있는가 하는 문제
에 대해 중심적으로 이야기하시오.》
선우치담은 차지훈의 말을 중단시킨채 오늘회의의도를 상기시켰다. 차
지훈은 선우치담의 침을 맞아선지 이야기가 갑자기 고필주며 기술부기
사들이 제기한 의견쪽으로 기울어져갔다.
《일제는 전쟁시기에 2호해탄로를 보수하면서 공사를 서둘렀기때문에
축로자체에서 많은 결함을 발생시켰고 로를 말리우는 작업도 이전에는
보통 두달에 하던것을 한달이라는 짧은 기간에 무리하게 진행하였습니
다. 한번 열을 높여서 작업을 시작하면 그 해탄로가 못쓰게 될 때까지
작업을 중지하거나 열을 떨어뜨릴수 없는것은 해탄로체를 쌓은 규석벽
돌의 성질상 어쩔수 없는 요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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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탄로에서 갑자기 불을 끈 후 도망가버리였고 작년 8월 15일부터
오늘까지 2호해탄로는 불꺼진 그대로 있습니다.》
지훈의 말에 호기심과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은 실망하기 시작했고 필
주며 기술부기사들은 뜻하지 않게 위력한 지지자가 나타난것때문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금까지 차지훈이 말한 론리대로 한다면 2호해
탄로도 허물어버리고 새로 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밖에 나올수 없었
다. 그의 말에 끝까지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리석혼자뿐이였
다. 차지훈과 가까운 곳에 앉아있는 억봉이네 젊은패들이 술렁거리기 시
작하자 리석은 어서 계속하라고 고무하듯 차지훈한테로 부드러운 눈길
을 보내였다.
지훈은 가늘게 잔기침을 몇번 하고나서 씨름판에서 적수한테 깔리워
넘어가기 시작해서 승부가 이제는 결판났다고 생각하던 순간 묘하게도
몸을 빼며 상대방을 깔고 넘어가 사람들의 예상을 뒤집어놓듯 갑자기 말
머리를 돌리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조사해본바에 의하면 로체균렬이 예상했던것
보다는 적은편입니다. 이것은 불이 꺼진 후에 로체관리를 아주 잘했다
는것을 말해줍니다. 지금까지 확증한바에 의하면 벽체균렬이 로체가 식
으면서 생겨난것들이지 기초자체의 변화에 의해 생긴것은 아닙니다. 때
문에 균렬부위들을 철저히 때고 잘 말리운다면 2호해탄로 하나는 헐지
않고도 부분적수리로 살려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지훈의 말은 선우치담이나 고필주와 생각을 같이하던 사람들한테 가
해진 불의의 타격이였다. 반면에 2호해탄로를 헐지 말자고 주장하던 사
람들한테서는 환성을 불러일으켰다. 선우치담이 의도하던대로 결속되여
가던 회의는 차지훈의 발언으로 다시 복잡해졌다. 밤이 너무 깊어 회의
는 끝을 보지 못한채 후날로 미루지 않으면 안되였다.
회의가 끝나기 바쁘게 차지훈은 밖으로 나왔다. 오래동안 방안에
앉아있다가 신선한 대기속에 나오니 별로 마음이 거뿐했다. 오래동안 생
각해오던 문제를 많은 사람들앞에서 털어놓았고 그것이 적지 않은 사람
들한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생각으로 더욱 그랬다. 지훈은 천천히 걸
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누군가 성급히 뒤따라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리였
다. 지훈은 옆으로 다가오는 억봉을 알아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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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수다.》
억봉은 다짜고짜로 악수를 청했다. 억봉은 지훈의 손을 꽉 틀어잡더
니 마구 흔들며 놓지 못했다. 지훈은 아직 자기 흥분에서 완전히 깨여
나지 못한 상태여서 억봉이가 왜 이럴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였다.
《난 차선생이 우리를 지지해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수다. 정말 고맙
수다.》
억봉은 흥분한김에 불쑥 이렇게 말하고나서 자기의 돌발적인 행동이
자기로서도 멋적은지 지훈의 손목을 슬며시 놓았다. 두사람은 그림자를
앞세운채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날이 개였는지 하늘에는 달이
밝았다. 달빛은 밝았으나 하늘에서는 비를 머금은 구름장들이 쪼박쪼박
찢긴채 흘러갔다. 구름장들사이로 별들이 반짝거렸다. 아직도 많은
별들은 구름장에 가리워있었으나 습기머금은 구름장사이를 헤염치는 달
과 그가 거느린 별들은 여느때없이 유정했다. 진종일 비내린 뒤에 돋아
난 별이고 달이여서 더욱 그랬다.
말없이 걸어가던 두사람은 비에 젖은 땅우에 나란히 그려진 자기들의
그림자를 새삼스레 알아보았다. 언제 한번 같이 걸어본적이 없는 이들
이다. 아직 서먹서먹했으나 이밤 이들은 자기네 두사람 다가 달빛에 취
해있고 해탄로에 대해 생각하고있다는것을 서로서로 느낄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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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새 지향속의 모대김

탄화실마다 2층으로 발판까지 매놓아 2호해탄로는 멀리서 보면 눕혀


놓은 거대한 하모니카를 련상시켰다. 하모니카의 바람구멍같은 매 공간
마다에서는 지금 탄화실내부의 균렬을 메우는 작업이 진행되고있었다.
지훈은 2호로체를 허물지 않고 일부 수리하여 살려낼수 있는 기술적근
거를 밝혀냈고 콕스생산의 앞뒤공정모두를 책임진 림시화공부장으로 일
하게 됐다. 지훈은 2호로체 목지작업(균렬을 메우는 작업)을 빨리 끝내
려고 자신이 직접 목지칼(흙손 비슷하게 생긴 작업도구)을 잡았다.
어제 저녁 병원에서 나온 알뜰이도 아침부터 해탄로복구현장에 나왔
다. 알뜰은 2호해탄로벽체균렬을 메우는 작업에 참가하게 된것이 얼마
나 다행인지 몰랐다. 알뜰은 몰탈운반조에 속하여 쇠질통에 몰탈을
담아가지고 탄화실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갔다. 알뜰은 열흘이나 잃었던
광명을 되찾은 기쁨도 컸지만 허물어버린다던 2호해탄로를 다시 살리게
된 기쁨이 여간 아니였다. 알뜰은 차지훈이 고마왔다. 알뜰은 차지훈이
직접 목지칼을 잡았다는것을 알고 그가 일하는 7번탄화실 몰탈운반을 자
신이 담당했다. 힘자라는껏 지훈을 도와주고 그를 위해주고싶은 알뜰의
마음이였다. 병원생활에 긴장이 풀려 일이 고되였으나 알뜰은 이를
옥문채 해탄로전면에 실마루처럼 달려있는 안내차홈을 쉼없이 오고갔다.
7번탄화실에서 지훈에게 몰탈을 섬겨주던 태주먹은 알뜰이가 힘들어
하는것을 눈치채고 능청스럽게 꾀를 썼다.
태주먹은 알뜰이가 지고온 몰탈을 쏟아붓기 바쁘게 그한테 삽을 넘겨
주며 급히 어디에 다녀와야 할 바쁜 시늉을 했다. 알뜰은 할수없이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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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을 벗어놓고 태주먹 대신 몰탈을 섬기려고 삽을 잡았다.
지훈은 와이샤쯔바람으로 정신없이 목지작업을 하고있었다. 알뜰은 단
두사람뿐인 비좁은 탄화실에서 지훈에게 몰탈을 섬기려니 마음이 이상
했다. 이웃에 살지만 언제 마당 한번 같이 쓸어본적 없다. 금년초 언젠
가 눈내리던 그날에는 마당의 눈을 쓸다 저쪽에서 차지훈이 눈을 쳐오
는 바람에 아이들처럼 뿌루퉁해 돌아서고말았었다. 알뜰은 자기의 옹졸
한 생각들과 행동들이 지난날 지훈에게 적지 않은 마음의 부담을 준것
같아 그 모든것을 사죄하는 심정으로 삽에 듬뿍 몰탈을 퍼담았다. 몰탈
을 받으려고 흙받이를 내밀던 지훈은 알뜰을 알아보고 일손을 멈추었다.
《아니, 언제 퇴원했습니까?》
《어제요.》
《몸이 일없습니까?》
《예, 념려해주셔서 다 나았어요.》
《좀더 쉬지 않구…》
《뼈쏘도록 쉬였는걸요.》
알뜰의 말에 지훈은 빙그레 웃었다. 알뜰이도 지훈을 따라 마주보며
웃었다.
《그래도 몸을 돌보며 쉬염쉬염 일하십시오.》
지훈은 자기때문에 알뜰이가 애매하게 부상을 당했던것 같아 미안했
다. 알뜰은 자기를 걱정해주는 지훈의 말에 웬일인지 가슴이 뭉클했다.
철부지 어린시절 언젠가 지훈이 우유배달을 하던 그때도 알뜰을 이렇게
진정으로 걱정해준적 있었다. 우유값을 물지 못해 안타까와하는 알뜰을
위로하며 지훈은 그날 우유배달자전거에 차고다니던 구럭에서 푸른
포도 두송이를 꺼내주었었다. 그 포도송이때문에 알뜰은 모진 불행과 가
난속에서도 생활의 환희와 기쁨을 맛볼수 있었고 생활의 무거운 중하를
꿋꿋이 이겨낼수 있는 힘을 얻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푸른 포도 두송
이때문에 얼마나 가슴을 아프게 쥐여뜯으며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였던가.
차지훈이 이번에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에 찾아오던 때 사가지고 왔던
여름귤은 어린시절의 이 모든 추억을 되살려놓았다. 알뜰은 병원에
면회왔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입원실에 혼자 남았을 때 그 여름귤
을 쓸어만지며 어린시절 언젠가 자기가 더위먹고 누운 지훈이한테 병문
안 갔던것을 회상했다. 그때 알뜰은 슬라크자갈을 까서 판 돈으로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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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 몇알을 사가지고 갔었다. 알뜰은 차지훈이 어린시절에 진빚을 갚으
려고 이번에 일부러 여름귤을 사가지고 온것 같아 생각이 복잡했다. 빚
으로 따진다면 알뜰이 어린시절에 사가지고 갔던것은 귤 몇알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훈이 몇상자를 둘러메고 온대도 어린시절의 그 귤 한알에 깃
든 정성과 수고를 당하지 못할것이다. 알뜰은 두눈에서 붕대를 푸는 그
날까지 차지훈이 사가지고 왔던 여름귤을 보관했으며 그중에서 몇알은
퇴원하던 때 집으로 가지고왔다. 이미 쪼들쪼들 마르기 시작한 귤알들
을 알뜰은 집에 아직도 보관하고있었다. 마지못해 살던 남편을 못 잊어
서라기보다 너무도 허무하게 흘러가버린 자기 청춘에 대한 표적으로 간
직했던 그 혼인은반지처럼…
알뜰은 자기를 걱정해주는 지훈의 말에 대한 대답으로 그가 들고있는
흙받이에 몰탈을 듬뿍이 놓아주었다. 지훈은 벽체에 몰탈을 바르기
시작했다. 일에 정신이 팔릴수록 두사람의 손과 발은 이바퀴처럼 척척
맞물려돌아갔다. 지훈이 흙받이를 내밀기 바쁘게 알뜰은 규석가루에 물
유리를 섞어만든 진득거리는 몰탈을 알맞춤히 놓아주었고 그가 목지작
업을 하는 때면 알뜰은 몰탈을 날라오든가 통에서 삽으로 몰탈을 개였
다. 두사람은 시간이 가는줄 알지 못했다.
두사람이 벽체균렬을 메우며 탄화실입구가까이로 거의다 나왔을 때였
다. 보위색작업복에 맥고모를 쓴 지배인이 작업장에 나타났다. 알뜰
이 가볍게 인사를 하자 선우치담은 바지주머니에 두손을 찌르고 서서 고
개를 끄떡했다. 선우치담은 목지작업하는 사람이 차지훈이라는것을
알고 혼자소리처럼 《부장동무도 여기 있었구만.》했다. 그러더니 두사
람에게 갑자기 너스레를 떨었다.
《이웃에 살고 일도 함께 하고…》
선우치담은 부얼부얼한 얼굴에 능청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두사람을 갈
마봤다. 알뜰은 싸늘하게 식었던 주위의 해탄로벽체가 갑자기 달아오르
며 마치 열기를 뿜는것처럼 얼굴이 뜨뜻해왔고 온몸이 부자연스러워졌
다. 선우치담은 부끄러워하는 알뜰을 보자 재미나는듯 한술 더 떴다.
《해탄로복구가 끝나면 국수를 먹여주겠지?》
알뜰이 아무 대꾸없자 선우치담은 자기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
각했는지 물고기에 발까지 그려붙이는 식으로 안해도 좋을 말마저 서슴
없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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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새서방감 골라잡았단 말이야.》
《어마나, 지배인동지두…》
알뜰은 귀밑까지 빨개져 달아났다.
《아니, 내 국수 달라지 않겠소.》
선우치담은 급해서 달아나는 알뜰을 골리듯 소리치더니 껄껄 웃었다.
선우치담은 틀을 차리며 점잔을 빼던 평시의 그답지 않게 소리내여 한
참이나 웃고나서 뒤짐을 진채 안내차홈을 걷기 시작했다. 지훈은 하던
일을 마저 끝내고싶었으나 일손을 털고 그를 따라나섰다.
해탄로복구현장을 돌아 지훈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선우치담은 목소리
와 표정이 갑자기 변하였다. 선우치담은 책상앞에 놓여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첫마디부터 목소리를 높였다.
《부장일을 보는 사람이 좁은 탄화실안에만 들어가배기면 어떻게
하오?》
선우치담은 차지훈이 정식 부장이 아니라 림시로 부장사업을 맡아한
다는걸 상기시키듯 《부장일을 보는 사람》이란 말마디에 력점을
찍었다.
《사람들이 지금 화공부를 두고 뭐라는지 아오? 화공부는 〈전동기 푸
주간〉이요, 림시화공부장은 〈전동기백정〉이래…》
지훈은 머리를 수굿하고 서서 아무 대꾸 못했다. 요즘은 쩍하면 전동
기사고다. 전기에 대한 상식이 없어 스위치를 규정대로 안 넣는 바람에
전동기를 태워버리는가 하면 수리해놓고도 조립을 잘못해 구워먹기도 했
다. 이달에 들어와서 자그만치 전동기를 여섯대나 못쓰게 만들었다. 지
훈이자신도 기계나 설비들에 대한 파악이 부족한데다 해탄로에서 오래
동안 일해온 사람들도 전기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없었다. 지훈은 탄화
실에 들어가 일하기때문에 모든 사고가 발생한것처럼 말하는 지배인한
테 의견이 없지 않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여보, 전동기 구워먹구 배가 부르다구 이제는 상급의 지시까지
탁탁 내뱉겠소? 토공로력을 모두 토목부로 넘기라는 지시를 왜 집행하
지 않나 말이요?》
지금 적지 않은 부와 과들에 자기네들한테 필요한 토공로력을 따로 갖
고있었다. 이 모든 토공로력을 토목과에 집결할데 대한 지배인의 지시
가 내려온것은 얼마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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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체보수나 끝내구 넘길가 해서…》
《동무처럼 저마다 제 욕심만 채우려 들면 이 큰 제철소를 어떻게 운
영하겠나 말이요? 왜? 과부 내놓기 싫어서 그래?》
토공로력중에 혼자 사는 녀자들이 많은것은 사실이나 선우치담의
야비스러운 이 말은 분명 알뜰을 념두에 두고있었다. 지훈은 방금전 선
우치담이 로체에서 알뜰을 놀리던 말이 떠오르면서 지금 하는 말과 그
말이 서로 련결되여있음을 깨달았다. 선우치담의 말을 롱으로 받아들이
기엔 너무도 심했고 정담으로 받아들이자니 모욕당한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코밑에 노란 솜털이 보시시하던 철부지시절 지훈이 한때 알뜰을 사랑
했던것은 사실이였고 그 감정의 여파때문에 오랜 세월 그를 대하기 옹
색했던것도 사실이였다. 더구나 자기가 집을 떠나 방황하던 때 늙은 어
머니며 아이들을 돌봐준데 대해 지훈은 지금도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있
었다. 하지만 첫사랑이 파탄된 이후로 지훈은 알뜰에 대해 이성의 색다
른 감정을 품어본적 없었다. 배송기사건때문에 빗나갔던 감정이 정화되
고 증오대신 고마움과 친밀감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기 시작한 오늘에
조차 지훈은 그를 어린시절동무로, 마음씨곱고 어진 이웃으로밖에 생각
하지 않았다.
시집을 갔댔다고 하지만 알뜰에게는 자식이 하나도 없었다. 알뜰의 순
결한 가슴에 본의는 아니였다 해도 아픈 상처를 남기였던 자기가 어린
애가 넷이나 달린 오늘에 와서 장가들수는 없었다. 또 자기와 알뜰은 정
신적으로도 결합되기 어려웠다. 지훈은 알뜰의 아직 시들지 않은 용모
와 비단결같은 마음씨에 끌리는바가 없는것이 아니였으나 그가 자기의
지향과 고심을 리해할수 있는 녀자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지훈의 죽은 처도 생김새가 그리 밉던 녀자는 아니였다. 시부모와 남
편을 섬기고 가정생활을 꾸리는데서 별로 손색없는 녀자였다고 할수 있
었다. 하지만 그는 지훈의 지향을 리해하지 못하였으며 남편이 무엇을
고심하는지 알려 하지 않았다. 그림 한장을 놓고보아도 처가 아름답다
고 보는것을 지훈은 유치하게 보았으며 지훈이가 아름답고 숭고하게 느
끼는것을 죽은 처는 리해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의 차이때
문이 아니였다.
지훈이 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 공부하던 때 그림공부하는 한 동무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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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테 《모나리자의 미소》라는 인쇄그림을 선사한적 있었다. 지훈은 미
술을 전혀 알지 못하였으나 웃는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것 같기도 하며
어떻게 보면 성낸것 같기도 한 녀주인공의 미묘한 미소에 인차 매혹되
고말았다. 지훈은 방학때 집으로 오면서 책갈피속에 그 그림을 넣어가
지고왔다. 어느날 지훈의 책을 정리하다 처가 그 그림을 보고 묻길래 지
훈은 성의껏 설명해주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문예부흥시기의 그림이요.》
그림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처는 그림밑에 적혀있는 제목
이 리해되지 않는지 의심스러워하는 어조로 읽었다.
《모나리자의 미소?》
《모나리자란 나의 엘리자베트란 뜻인데 엘리자베트란 그 그림에
있는 녀주인공의 이름이요.》
《이 녀자가 어디 웃수?》
《그러게 묘하다는거요. 화가는 아주 묘한 미소를 포착했거던.…》
《원, 별게 다 묘하겠수.》
꽃수나 놓는 정도의 유치한 자기 그림재간을 자랑하듯 안해가 하는 말
에 지훈은 어처구니없어 아무 대꾸 안했다. 얼마후 지훈은 어린 아들이
그 그림을 찢어 딱지를 만들고 그옆에서 안해가 바느질하는것을 보았다.
생활의 크고작은 모든 면에서 안해가 지훈의 비위를 거슬려놓는것은
처가 단순히 몰상식해서만이 아니였다. 첫 아들이 다섯살나던 때 지훈
에게는 돈 몇잎이 생겼었다. 지훈은 아들의 생일을 기념하여 그 돈으로
눅은 류성기 하나를 사왔었다. 처는 쓸데없는데 돈을 써버렸다고 못내
아수해했으며 아들을 광대시키겠냐고 나무람까지 썼었다.
언젠가 지훈은 큐리부인전을 흥분해 읽고나서 안해한테 그 책을 읽어
보라고 준적 있었다. 과학의 세계를 리해하지는 못할망정 큐리부인의 높
은 리성과 참다운 열정을 백의 하나라도 배우기를 바라서였다. 처는 그
책을 세페지도 못 읽은채 씩씩 자버리고말았다.
이런것들때문에 지훈은 죽은 처와 그리 의가 좋지 못하였었다. 돈이
나 벌어다주면 좋아하고 자기를 애무해주면 그것에 만족하여 무상의 행
복을 느끼던 안해, 이런 안해의 저속한 취미와 유치한 감정때문에 지훈
은 안해를 리해하려 애쓰며 가정의 화목을 도모하려 모대기던 나날에조
차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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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놓고보면 알뜰은 죽은 처와 다를바가 없었다. 동일한 리
상과 하나의 지향속에 살며 기쁨과 슬픔, 괴로움모두를 함께 나눌수 있
는 사람, 알뜰은 그런 사람이 못되였다. 공고한 정신적결합없이 어떻게
참다운 부부간의 사랑이 있을수 있겠는가. 알뜰에 대한 지훈의 이런 홀
시감정은 어쩔수 없는것이였다. 지훈은 선우치담이 롱처럼 뱉아놓고 가
버린 말에 대한 반발심을 금할수 없을수록 알뜰을 경계하는 감정의 성
벽을 더욱 굳건히 다지였다.

알뜰은 국수먹자고 놀리는 말에 몰탈삽을 내버린채 탄화실을 뛰여나


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해탄로 북쪽 옹벽까지 왔다. 선우치담의 말은
입헤픈 사람의 말허물이 아니였고 별생각없이 내던진 롱말도 아니였다.
말속에 뜻이 있고 뼈가 있었다. 선우치담이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은 아
니라 해도 알뜰은 차지훈앞에서 이런 놀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가시에
허비우고 찔리운것처럼 아팠다.
알뜰은 여느때같으면 웃어넘기고말았을 별치 않은 말에 그처럼 놀라
고 부끄러워하며 분해한다는것을 깨닫는 이 순간 지훈에 대한 자기의 감
정이 범상하지 않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알뜰은 오랜 세
월 지훈에 대해 동생 억봉이가 품어오던 차거운 반목과 질시의 감정이
요즘에 와서 봄볕에 살얼음 풀리듯 하면서부터 그에 대한 신뢰의 정이
자기 가슴속에 더욱 깊이 자리잡기 시작하는것을 자신으로서도 어쩔수
없었다. 지훈을 위해주고싶은 마음은 그가 집을 떠나간 이후부터 걷잡
을수없이 자랐다고 할수 있었다. 랭정히 돌이켜보면 알뜰은 지훈을
저주하던 그 나날에조차 사랑의 애틋한 추억을 마음속에서 말끔히 가셔
내지 못했다고 할수 있었다.
달밝은 12포천기슭에서 알뜰은 자기를 잊어달라고 애원하듯 속삭
이고 지훈의 품을 떠나 도망치던 그 순간부터 그를 잊으려고 애썼다. 하
지만 결혼생활의 불행한 나날들에 첫사랑의 괴로운 추억은 때없이 불쑥
머리를 쳐들군 했었다. 알뜰은 운명의 불행을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
403
면 지훈이가 공부하러 다시 고향을 떠나기 전날 밤 뜨거운 손으로 자기
의 손목을 꼭 잡은채 기다려달라고 간절히 속삭이던 모습이 우렷이 떠
오르면서 순결한 가슴속에 꺼질줄 모르는 사랑의 불길을 질러놓은 그가
원망스러웠다. 알뜰은 지훈이가 부모들의 강요에 절절매면서 운명의 시
련앞에 그처럼 무력하고 나약하지만 않았어도 티없이 깨끗한 사랑을 자
기스스로 포기하지 않았을것이였다.
알뜰은 지훈의 행복을 위하여 청춘의 온몸과 넋을 주저없이 내버리였
건만 지훈은 행복하지 못했다. 알뜰은 지훈이가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
로 자기보다 별로 행복하지 못하다는것을 알았을 때 동정에 앞서 그가
저주로왔다. 그의 행복을 위해 자기가 지금까지 바쳐온 사심없는 희생
은 너무도 무의미하고 값이 없었다.
이성에 어섯눈을 뜨기 시작하던 그 시절 알뜰의 순박한 가슴속에 뿌
리내렸던 첫사랑의 감정은 너무나 검질기였다. 아무리 뿌리를 들춰내고
아지를 잘라내도 첫사랑의 푸른 포도넝쿨은 걷잡을수없이 또다시 돋아
나 알뜰을 괴롭히는것이였다. 해방되여 억봉이가 돌아오던 날 라웅범네
집으로 찾아가던 길에 차지훈을 만났을 때 그가 차겁게 바라본것때문에
마음의 부담을 느꼈던것도, 한 이웃에 살게 되면서 그의 자식들과 남다
른 인연을 맺게 된것도, 석탄반출사건과 배송기사건으로 동생 억봉이와
차지훈이가 서로 용납할수도 타협할수도 없는 대립쌍방에 놓이게 되였
을 때 그들사이에서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듯싶었던것도 모두 구슬픈
첫사랑의 쪼박들을 말끔히 쓸어내지 못한때문이였다. 알뜰은 선우치
담의 놀림을 받는 오늘에 와서야 자기자신마저 모르게 마음속에 남
아있는 그 감정의 잔뿌리가 또다시 자라났음을 가슴아피 깨닫게 되
는것이였다.
잠시후 해탄로에서 지배인과 차지훈이 내려왔다. 그들은 화공부사
무실쪽으로 점점 멀어져갔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알뜰은
자기가 일하던 탄화실로 돌아왔다. 알뜰은 뒤숭숭한 마음을 달래려고 차
지훈이 잡았던 목지칼을 들고 자신이 벽체의 균렬을 메우기 시작했다.
지훈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알뜰은 자기스스로 몰탈을 떠서 목지작
업을 해야 했다. 알뜰은 마음이 허전해지면서 갑자기 일이 힘들어지는
것이였다. 다음날도 알뜰은 2호해탄로벽체를 보수하는 목지작업에 동원
됐다. 지훈은 작업장에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404
이날 알뜰은 토목부로 적을 옮기라는 통고를 받았다. 알뜰은 적이야
어디에 속하든 해탄로복구를 위하여 일했으면 될게 아닌가고 스스로 자
신을 위로하였지만 믿어오던 사람들한테서 배척받고 따돌리운것만 같은
서분한 생각을 어쩌지 못해 차지훈을 찾아갔다. 로력조동은 부장이
직접 책임지고 관여하는 일이다. 지훈은 어디에 가려는지 마침 자기 방
에서 밖으로 나오는 길이였다. 알뜰은 마당에서 지훈을 붙들고 자기의
안타까움을 하소했다.
《우린 모두 해탄로를 떠나야 하나요?》
《상급의 조치여서…》
자기 직종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로력관리를 책임진 사람사이
에 드문히 오고가는 말이였지만 지훈은 알뜰을 대하기 무척 바빠했다.
《안 가면 안됩니까?》
알뜰은 잘못을 저지르고 부장한테 꾸중들으러 온 사람처럼 다소곳이
머리를 수그린채 괴롭게 물었다.
《글쎄…》
지훈은 물에 물탄것 같은 미적지근한 대답을 했다. 지훈은 옹색스러
운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회의시간이 다 돼서…》
지훈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알뜰은 화공부앞마당에 우두커니 버티
고 서서 멀리 사라져가는 지훈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모든 생각
과 감정을 부정하듯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와 나는 처지가 다르다. 서로 다른 처지때문에 그와 나는 이미 십
여년전에 모든 인연을 끊지 않았던가. 해방은 되였어도 그와 나의 차이
는 여전하다. 그는 기사이며 수백명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부장사업을 하
지만 나는 한갖 로동자다. 지난날 돈때문에 우리는 헤여지지 않으면 안
되였고 오늘은 자신의 명예때문에 그는 상급의 지시라는 구실로 나를 멀
리 보내려 하고있다. 깨여진지 오랜 그릇을 내버리지 못하는 내가 바보
다.)
오늘에 비로소 가지는 생각이 아니면서도 알뜰은 자신을 채찍질할수
록 마음이 허전하고 괴로왔다.
토공로력전부가 토목부에 자동적으로 적이 넘어갔으나 알뜰이가 속해
있는 작업반은 계속 2호해탄로복구사업에 동원됐다. 해탄로복구일을 하

405
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알뜰은 정들었던 해탄지구와 잘 아는 사람들을 낯
선 고장에 처음 온 나그네처럼 조심스러이 대하게 되는것이였다. 알뜰
은 이전에 기쁘고 즐겁던 일들이 힘겹게 느껴지며 일에 성수가 나지 않
았다.
알뜰이 토목부로 적을 옮긴지 사흘이 되던 날 저녁때였다. 알뜰은 집
에 가려고 제철소구내 산등성이로 뻗은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누군가
앞에서 한사람이 마주 걸어왔다. 알뜰은 마주오는 사람을 쳐다보지
않은채 길섶으로 비켜섰다. 지나쳐갈줄 알았던 사람은 알뜰이앞에 이르
러 걸음을 멈추었다.
《언제 퇴원했습니까?》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은 고필주였다. 제철소 본사무실에 다녀오는 길
인지 그의 손에는 굽도리가 모지라진 뚜껑 빨간 수첩이 들려있었다.
《한 열흘 됐습니다.》
알뜰은 가볍게 머리를 숙여보이였다.
《안됐습니다… 병원에 찾아가보지 못해서…》
필주는 사위를 두리번거리며 멋적게 중얼거리였다. 알뜰이 병원에 입원
하던 날 필주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병원에 갔으며 그후에도 실과꾸레미를
간호원에게 주어 환자한테 전해달라고 한것이 세번이나 되였다. 입원실에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을뿐 필주는 알뜰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돌려주었다.
알뜰은 어서 그와 헤여지고싶었으나 필주는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정말 운명은 공교롭군요. 이제는 한부서에서 일하게 됐으니…》
필주는 해탄토공로동자들이 토목과에 속하게 된것을 념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정말 운명의 장난은 지꿎었다. 알뜰이 고필주밑에서 일
하게 될줄이야… 필주는 할 이야기가 많은지 담배까지 피워물었다.
알뜰은 필주가 집에 다녀간 이후부터 될수록 그를 피해왔다. 지금도 알
뜰은 그가 하는 경우바르고 례절있는 모든 말마디가 하나도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필주는 아무런 반응없는 알뜰을 넘겨다보고나서 말을
이었다.
《동무가 토목부에 오게 된것을 달가와하지 않는것처럼 나도 가까이
에서 자주 동무를 보게 되는것이 마음에 그리 좋지 않소.》
갑자기 말투를 바꾸며 하는 그의 솔직한 말에 알뜰은 마음이 이상했
다. 그는 너무도 빤히 알뜰의 속을 넘겨다보고있었다. 필주는 길게

406
한숨을 내쉬며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소. 사사로운 감정때문에 공적인 제철소복구
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될게고… 난 지금 지배인동지한테 동무를 토목과
장으로 추천하고 오는 길이요.》
《예?》
알뜰은 펄쩍 놀랐다. 알뜰은 필주가 무엇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지 리
해되지 않았다. 자기한테 한개 과를 맡아 움직일만 한 능력이 없는것은
둘째쳐두고 그렇게 되면 필주와 거의 매일처럼 코를 맞대고 일해야 할
것이다. 토목부에 축로며 건설, 수도, 차길을 담당한 여러개 과가 있지
만 그중에서도 토목과장은 부장의 오른팔노릇을 해야 할 사람이다.
알뜰은 하루에도 몇번씩 필주와 얼굴을 맞대고 한방에 앉아있어야 한다
는것을 생각하는것만으로도 머리가 핑 돌았다. 알뜰의 놀람을 자기
식으로 해석한 필주는 비웃음에 가까운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놀랄게 있소? 해방이 되였으니 이제는 녀자들도 남자들과 꼭같은 공
장의 주인이 아니요. 토목과엔 대부분이 녀성로력이여서 그 책임자를 녀
자로 하자는 의견들을 제기하길래 아무모로 보나 적임자가 동무인것 같
아서 추천한거요.》
필주는 자기 마음대로 하라면 절대 그렇게 안하겠지만 사회적인 정의
를 위해 싫어도 그렇게 했다는 투로 말했다.
다음날이였다. 직장에서 집에 돌아오니 작은어머니는 여느때없이
소갈비국을 끓여놓고 알뜰을 기다렸다.
《작은어머니, 오늘은 어떻게 된거예요?》
알뜰은 밥상을 받아놓고 의아히 물었다.
《너희 직장에서 보내준거다, 너를 몸보신시켜주라구…》
《우리 직장에서요?》
《그래― 저 웃방엔 무슨 눈에 좋은 약이라는것두 한보따리 가져다놓
구 갔다.》
알뜰은 밥상에서 물러나 서둘러 웃방에 올라갔다. 직장에서 가져왔다
는 약은 결명자가루였다. 스무개나 되는 그 봉지마다에는 이런 설명서
가 씌여있었다.

품명: 결명자가루

407
용도: 음료로도 좋지만 눈을 밝게 하는데 특효가 있음.
용법: 더운 물에 타서 마신다.

알뜰은 결명자가루가 들어있는 봉지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말고 부엌에서 설겆이를 하는 작은어머니한테 소리쳐 물었다.
《작은어머니, 이거 누가 가져왔어요?》
《직장에서 보내는거라면서 너한테 주면 안다고 그러더구나.》
숭늉을 떠들고 방안으로 들어서며 작은어머니가 말했다. 다음날 점심
시간에 알뜰은 자기네 집에 고기와 결명자가루를 들고왔다는 토목부통
계원령감을 붙들고 다짜고짜로 따져물었다. 부러진 실테안경다리를
실로 처매서 끼고다니는 통계원령감은 도수높은 안경알너머로 알뜰을 물
끄러미 넘겨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 경리과장이 부장지시라면서 님자네 집에 가져다주라구 그러더
구만.》
더 알아보나마나했다. 소고기며 결명자가루는 필주가 보낸것이였다.
자기 손으로 직접 들고오기 거북스러우니까 아래사람들을 심부름시켰을
것이였다. 그날 알뜰은 총무부 인사과의 부름을 받았다. 인사과의 지도
원은 리력을 쓸 문건용지를 내주며 선망어린 눈길로 이렇게 말했다.
《알뜰동무는 좋겠습니다. 좋은 앞날이 약속되고있으니 말입니다.》
알뜰은 리력서용지를 받아야 할지 아니면 받지 않고 돌아서서 인사과
를 나서야 할지 결심하기 어려웠다.

억봉은 누이가 총무부 인사과에 다녀왔다는것을 알고 무작정 고필주


를 찾아 화공부로 향했다. 누이의 일은 점점 심상치 않게 되여갔다. 억
봉은 제철소안의 토목로력을 모두 토목부로 집결할데 대한 지배인의 지
시가 있었다는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지훈은 누이의 조동과 관련하여 사
전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로력조동과 조절은 전적으로 부장사업
권한에 속하는 문제지만 억봉은 누이와 지훈의 관계가 요즘 어딘가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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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해간다는것을 눈치채게 되고보니 십년전 일이 오늘에 와서 다시 그대
로 반복되는것 같아 신경이 곤두섰다. 지훈은 부모들이 반대한다는
구실로 누이의 사랑을 저버리던 십년전처럼 상급의 지시라는 핑게로 누
이를 해탄로에서 내보냈다고 할수 있었고 고필주는 고향에 돌아가게 해
주겠다면서 수욕을 채우려고 누이를 꼬이던 그때처럼 과장이라는 직위
로써 누이를 유혹한다고 할수 있었다. 억봉은 차지훈이나 고필주나
그 누구와도 누이가 결합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필주만 만나면 당장 행패라도 할것 같은 심정이던 억봉은 화공부 뒤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있는 그를 보았을 때 부글부글 끓던 속이 싸늘히
식어버리였다. 점심참을 리용해 목욕을 하고 빨래를 했는지 필주는
양말이며 런닝그 등 속옷가지들을 사무실 뒤마당 철봉대에 내다 걸고있
었다. 갓 목욕을 하고난 필주의 얼굴은 멀쑥했으나 살결에 피기가 없었
다. 고리삭은 늙은이처럼 그는 맥없이 굼뜨게 움직이였다. 억봉은 홀아
비살림의 궁색스러운 몰골을 보자 그가 측은하게 생각되면서 무분별한
분노를 죽이고 랭정한 리성을 찾았다. 지금의 그는 누이를 통해 듣고 알
던 지난날의 필주와 어딘가 달랐다. 지금 토목부안에는 필주가 아래사
람들의 뒤사정을 잘 봐준다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통계원
령감네 아들 잔치때에는 자기 로임을 봉투채 주었으며 수도과 과장네 어
머니가 돌아갔을 때에는 부장이 직접 팔걷고나서서 감장까지 해주었다
는 소문이 돈다. 감옥에서 구메밥을 먹어보았다니 인정이 귀한줄도
알게 되였을것이고 세상돌아가는 형편도 깨쳤을것이다. 그래서 오늘
은 제철소복구에서 중요한 한부분을 책임진 토목부장으로까지 사업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억봉은 필주를 등지고 돌아서며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또 오늘 실수를 할번 했구나. 필주가 누이를 토목과장으로 추
천했다고 그자체를 탓할수야 없지 않는가. 제철소복구를 위해 그 누구
건 토목과장의 중책을 지녀야 할것이고 누이한테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가 없는가 결정하는것은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필주가 지
난날처럼 순간의 노리개로가 아니라 안해로 맞아 새생활을 창조하려 한
다면 그자체를 내가 나쁘다고 탓할수도 없지 않는가.)
억봉은 온갖 낡은 편견을 버리고싶었다. 감정의 맹목적인 포로가
아니라 의지로 자신을 지배하는 새사람이 되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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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주를 피해버리였던 억봉은 다음날 그를 찾아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로동법령발포를 기념하여 시적으로 조직되는 시위에 참가하기 위하여 화
공부와 토목부는 대렬을 함께 무어야 했다. 화공부시위대렬을 책임진 억
봉은 시위대렬조직문제를 토론하기 위하여 토목부 사무실로 갔다. 토목
부마당에 들어서니 통계원령감이 사무실에서 물바께쯔를 들고나왔다. 통
계원령감은 억봉을 보자 무척 반가와했다.
《여보게 억봉이, 수도간에 가서 찬물 한바께쯔 좀 떠다주게. 난 얼
른 병원에 좀 갔다올게…》
《예?》
《우리 부장이 앓아서 그러네.》
통계원령감은 실로 처맨 안경다리를 습관적으로 매만지며 필주의
사무실을 턱질해보이고나서 부리나케 걸어갔다. 억봉이 수도에 가서 찬
물 한바께쯔를 떠가지고 돌아오니 통계원령감은 보이지 않았다. 억봉은
필주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통계원실과 잇달린 필주의 크지 않은 방
은 간막이를 놓아 두간처럼 꾸려져있었다. 통계원실과 잇달린쪽으로 사
무용책상과 의자, 낡은 서류함들이 놓이고 간막이 저쪽은 보이지 않았
다. 억봉은 문가에 물바께쯔를 들고 서서 잠시 망설이였다. 문이 열리
는 소리를 들었는지 간막이 저쪽에서 필주의 짜증섞인 소리가 났다.
《찬물 한바께쯔 떠다달라는데 왜 그렇게 꾸물거리오?》
필주는 아마 통계원령감이 들어온줄 아는 모양이였다. 억봉은 물바
께쯔를 든채 간막이한쪽으로 걸어갔다. 간막이한 방 한쪽구석으로 긴 나
무의자가 놓이였는데 의자를 침대삼아 벌건 얼굴로 필주가 누워있었다.
필주는 물바께쯔를 들고 나타난 억봉을 보고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다.
《열이 좀 나서…》
《어서 누우시오.》
억봉은 필주한테 일어나지 말라고 만류하며 물바께쯔를 그가 누워있
는 의자가까이로 가져갔다.
《안됐네. 저 수건이나 좀…》
필주는 긴 의자에 도로 누우며 벽쪽을 가리켰다. 벽을 따라 뻗어간 굵
다란 방열관우에는 수건이 걸려있었다. 억봉은 수건을 가져다 찬물에 적
시여 필주의 머리우에 놓아주었다.
《고맙네. 저기 좀 앉게.》

410
필주는 머리우의 젖은 수건에 손을 가져가며 억봉에게 의자를 권했다.
억봉은 자기를 뚫어지라고 바라보는 필주의 시선을 피해 의자를 끌어당
겨놓고 앉았다. 필주한테 빚갚으러 왔다간 이후로 억봉은 그와 이렇게
단둘이 마주 있어본적 없다. 두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오랜 침묵
끝에 필주는 억봉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지내놓고보니 일생이란 정말 허무하구만. 래일모레가 마흔인데
나한테는 일점혈육도 가까운 사람도 없네. 부모들은 일찍 죽었구 녀편
네는 내가 감옥에 간 사이에 어느 헌놈한테 시집을 가버렸지. 둘째아들
과 귀염둥이 딸은 앓다 죽구… 내가 젊은 시절에 바로 살았으면 다 키
운 맏아들은 떼우지 않는건데… 그때 난 투전판에 붙어살 때인데 여러
날째 집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녀편네라는게 날 데려오라구 아들을 보냈
더란 말이야. 돈을 떼워 화가 났던 참이라 난 아들을 욕해서 돌려보냈
지. 집에 돌아가던 아들은 나한테 욕먹은게 분해서 그랬는지 지나가는
개 배때기를 걷어찼다네. 그런데 그놈개가 미친개일줄이야. 아들은
미친개한테 물려 죽고말았네. 난 세월이 흐를수록 내가 그때 아들을 왜
욕해서 보냈던가 하구 후회를 하게 되네.》
필주는 주먹으로 자기의 가슴을 안타깝게 두드리였다. 앓으며 마음이
약해졌는지 그의 두볼로는 참회의 눈물이 쉼없이 흘러내렸다. 억봉은 자
기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것 같아 언짢은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
으나 흐느껴우는 환자를 내버리고 갈수 없어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있었
다. 필주의 흐느낌이 잦아들었을 때 억봉은 무뚝뚝하게 말을 꺼냈다.
《난 로동법령발포를 지지하는 군중시위조직때문에 왔댔수다. 시위대
렬책임자를 오늘중으로 나한테 보내주시오.》
억봉은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섰다. 그는 자기 등뒤에서 울리는 필주
의 애원에 가까운 이런 말을 들었다.
《누이한테 빨리 리력서를 쓰라고 하오. 인사과에서 독촉이 불같소.》
억봉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억봉은 진종일 마음이 무겁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억봉은 열오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사무실 한구
석에 쓸쓸히 누워있는 필주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서물거리였다.
그날 밤이였다. 집에 돌아오니 누이가 울적한 기분으로 웃방에 혼자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다. 억봉은 누이때문에 마음 썩이면서도 당사자인
누이와 마주앉아 언제 함께 서로의 생각을 나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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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
억봉은 여느때없이 살틀히 누이를 부르며 그옆에 올방자를 틀고앉았
다. 억봉은 어떻게 이야기꼭지를 떼였으면 좋을지 몰라 갑자르던 끝에
불쑥 이렇게 입을 열었다.
《오늘 시위대렬조직때문에 화공부에 가니까 누이 리력문건 안써온다
구 야단하더라.》
알뜰의 반발은 예상외로 컸다.
《얘, 난 그런거 모른다.》
알뜰은 첫마디부터 맺고 끊으며 탕 튕기였다. 웬만큼 성이 나도 자기
혼자 묵새기며 자기 생각과 감정을 남모르게 가슴속에 묻어두던 누이였
다. 억봉은 누이가 어쩌나 보느라고 실없이 한마디 덧붙였다.
《고씬 앓아누워서두 누이 걱정만 하고있던데…》
《뭐라구?》
알뜰은 고개를 돌려 억봉을 무섭게 바라보았다. 쏘는듯 한 그의 눈길
에선 분노가 빛발쳤다. 억봉이 아무 말을 못하자 알뜰은 자기 설음에 지
쳐 흐느끼듯 부르짖었다.
《넌 몰라. 아무것도 몰라.》
알뜰이 필주한테 반발하는것은 남한테 닥쳐온 불행을 리용하여 철면
피하게도 정조마저 서슴없이 뺏으려들던 그밤의 모욕을 못 잊어서만이
아니였다. 필주만 보면 치욕스럽던 첩살이의 나날들이 때없이 떠오르고
그 당시 마음에 입었던 아픔이 도져와서만도 아니였다. 알뜰은 필주때
문에 생활의 유일한 기쁨이며 행복의 전부였던 귀여운 아들을 병신 만
들었다.
…음흉하게도 호의와 친절을 베풀어오던 필주가 수욕을 채우려는 속
심을 숨기지 않던 그밤 알뜰은 필사의 반항으로 팔목을 물어뜯고 필주
의 품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문을 차고 밖으로 뛰여나온 알뜰은 불
이 났다고 동네방네 고함을 질렀다. 속치마바람으로 마당에 서서 깊은
밤의 정적을 깨뜨리며 사람들의 구원을 부르던 알뜰은 자지러지게
터지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경황없는 속에서도 알뜰은 자식
을 보호하려는 어머니의 본능으로 아들이 울고있는 집쪽으로 저도
모르게 한걸음 다가섰다. 알뜰은 문이 활짝 열려진 방안에서 필주가 옷
을 주어입으며 쌔근쌔근 잠든 철부지 어린것을 발길로 걷어차는것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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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필주의 발길에 어린 아들은 정통으로 어디를 채웠는지 울음을 그
치지 않았다.
그날 밤 알뜰은 정말 불이 난줄 알고 달려온 동네사람들에 의하여 구
원될수 있었다. 그길로 알뜰은 어린 아들을 둘러업고 필주가 자리잡아
주었던 늙은 과부네 집을 도망쳐나왔다. 역전 기다림칸에서 밤을 밝힌
알뜰은 날이 밝자 무작정 길을 떠났다. 알뜰에겐 기차 탈 돈이 없었다.
거지처럼 길가에서 남한테 빌어먹으며 남의 집 처마밑에서 자기도 해야
했고 동냥질의 멸시와 수모도 받아야 했다. 괴로운대로 이런것을 참고
견딜수 있었다. 야단은 어린 아들때문이였다. 필주한테 걷어채우던
그밤부터 아들은 자주 울었고 열이 좀해 내리지 않았다. 필주한테서 도
망친지 닷새째 되던 날 알뜰은 아들의 몸이 너무 뜨거워 길거리의 의원
을 찾아가서야 어린애 갈비대가 두개나 부러졌다는것을 알았다. 상한것
은 갈비대만이 아니였다. 아들은 커가며 팔과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
다. 필주의 발길에 채워 풋뽈처럼 굴러가던 아들은 벽에 기대여놓은 망
짝에 머리를 짓쪼았는데 그때 어느 신경이 상했는지 아들은 병신이 되
고말았다.…
《난 발길로 잠든 어린것을 걷어차던 잔인한 모습을 잊을수 없다. 그
리고 고향을 찾아오느라고 석달이나 로상에서 거지노릇한걸 생각하면…
내가 랭병때문에 지금도 고생을 하는것은 그때 병을 만난때문이다.》
알뜰의 두눈에는 눈물이 축축했다. 억봉은 아무 말을 못하고 담배만
뻑뻑 들여빨았다. 사람이 한평생을 곧은 길로만 갈수는 없었고 굴곡없
이 평탄하게 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누이의 말을 듣고보면 필주의 지
난 행동은 그 무슨 실수나 순간의 잘못에서 나온것이 아니였다. 억봉은
누이와 필주의 화해가 불가능하다는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고보니
누이를 화공부로 돌려버린 차지훈이 괘씸했다. 차지훈이 서울에서 돌아
온 이후로 2호해탄로를 살려내려고 애쓴것은 귀잡고 코잡고 절하고싶을
정도로 고마운 일이였으나 누이때문에 그어진 미묘한 감정의 실금은 아
직 가셔지지 않았다.
억봉은 누이를 당장 해탄로에 데려오고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마음 한구석에 은근히 근심이 서리는것이였다. 눈에서 멀어야 마음도 멀
어지기마련이다. 누이가 지훈을 잊으려면 될수록 그와 멀리서 일하는것
이 좋을것이다. 억봉은 누이가 병원에서 퇴원하던 때 지훈이가 사왔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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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귤을 집으로 가지고왔으며 그 껍질을 그 무슨 귀중한 약재처럼 아
직 보관하고있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억봉은 이것이 눈에 거슬렸다.
누이는 언제 가야 사랑의 굴종에서 벗어나려는지. 누이는 자기의 불행
이 황금의 권력앞에서 자기의 사랑을 지켜내지 못하고 동요하다 끝내 굴
복해버린 지훈의 우유부단성과 나약성에서 싹트기 시작했다는것을 아직
도 모른단 말인가. 누이는 지훈이한테 마음을 빼앗기여 눈이 멀었다고
밖에 볼수 없었다. 그러니 누이는 워낭소리 듣고 따라가는 눈먼 망아지
노릇밖에 할수 없었다. 억봉은 관습된 이 굴종정신이 싫었다. 억봉은 누
이처럼 사랑을 구걸하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누이는 해탄로에 오
게 해야 했다. 혼자 생각에 잠기였던 억봉은 단호히 말했다.
《누이, 해탄로에 당장 적을 떼와.》
선뜻 응할줄 알았던 알뜰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나두 해탄로곁에 있고싶다. 하지만 나때문에 너와 차기사사이가 나
빠지면 어쩌겠니…》
알뜰의 말마디는 억봉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자기는 지금까지
지훈이때문에 누이를 걱정했는데 누이는 오히려 나를 생각한것이 아닌
가. 억봉은 누이의 가슴속에 아직은 연약하나 새로운 그 무엇이 봄
풀싹처럼 머리를 들었음을 깨닫는가싶었다. 억봉은 알뜰이앞으로 다가
앉으며 자기 말을 믿어도 좋다고 담보하듯 누이의 손을 잡으며 중얼거
렸다.
《누이, 나두 이젠 당원이야.》
《나두 입당을 준비하고있다.》
억봉은 감격어린 눈으로 누이의 얼굴을 새롭게 바라봤다.

똑똑…
문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통계원령감이 커다란 종이꾸레미를 량옆구
리에 하나씩 낀채 방에 들어섰다. 고필주는 자기 책상앞에 앉아 차거운
눈길로 통계원을 바라봤다. 고필주는 통계원이 상우에 가져다놓은 커다
414
란 두개의 꾸레미에 의아한 눈길을 돌리였다. 들가방만 하게 꾸린 커다
란 꾸레미가 웬일인지 낯익었다.
《억봉이가 이걸 부장님한테 전하라면서 주더군요.》
통계원은 무슨 장한 일이라도 한것처럼 흡족해서 중얼거렸다. 고필주
는 무엇인가 탁 부닥치는 예감에 눈살을 쪼프린채 꾸레미에서 긴장된 눈
길을 떼지 못했다. 한참이나 상우의 꾸레미를 들여다보고나서 필주는 방
에서 나가도 좋다고 통계원에게 머리를 끄덕여보이였다. 통계원령감
은 혼자 있고싶어하는 부장의 눈치를 알아채고 필주가 앉아있는 상옆에
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큼직하게 꾸린 꾸레미속에서는 언젠가 알뜰한테 가져갔던 옷감과
신발이 나왔다. 그리고 다른 꾸레미속에서는 통계원을 시켜 알뜰에게 보
냈던 결명자가루가 나왔다. 그때 같이 보냈던 소고기대신 그속에서는 돈
이 나왔다. 모든것을 고스란히 돌려보낸다는 의미에서 소고기값으로 넣
어보낸 뻘건 지페를 보자 필주의 입에서는 호된 욕설이 튀여나왔다.
《개자식!》
누가 곁에 있으면 당장 손찌검이라도 할것같이 그의 기세는 험악해졌
다. 그의 두눈에서는 독기어린 퍼런 불이 펄펄 일었다. 지어먹은 마음
은 사흘을 가기 어려운 법이고 자기를 은페하는데 습관된 사람들도 누
가 보지 않는 때에는 본색을 드러내기마련이다. 고필주는 입술을 옥문
채 눈알을 곤두세우고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쌍 백당년! 개새끼!》
고필주는 성이 나서 억봉이와 알뜰이한테 된욕을 퍼부었다. 필주는 이
순간 알뜰이보다도 억봉이가 더 미웠다. 알뜰은 자기 혼자서라면 아무
리 싫다고 해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도전하려 들지 못했을것이다. 억봉
은 누이일을 가로타고앉아 모든것을 고스란히 돌려보냄으로써 지금까지
필주가 알뜰에게 표시해온 친절을 거절했을뿐만아니라 말없는 가운데 은
근히 비쳐보이였던 청혼의 의사에 침을 뱉었다.
《이놈새끼 어디 보자!》
필주는 악의에 차서 중얼거리며 상우에 놓인 물건들을 누가 볼가보아
서류함속에 와락와락 집어넣었다. 필주는 이곳 제철소에 와서 선우치담
을 만나는 바람에 토목부장이라는 중요한 자리를 쉽사리 차지할수 있었
으나 아직 가정을 꾸리지 못하였다. 새 활동무대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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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면 빨리 장가를 들어야 했다. 제일 적합한 대상자는 알뜰이였다.
고필주는 알뜰을 쟁취하려고 그앞에 무릎꿇고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도
빌어보았으며 동정을 사려고 억봉이앞에서 울기까지 하였으나 모든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고필주는 이것이 자기 운명의 그 무슨 불길한 조짐처
럼 느껴져 벼랑 한끝에 나선듯 머리칼이 곤두섰다.
창밖에서는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쫙쫙 쏟아졌다. 장마가 시작되려
나부다. 양철지붕에 비 떨어지는 소리는 소란하기 그지없다. 요란한 비
소리에 처음에는 귀가 멍멍하다못해 골까지 지근거리더니 점차 소음에
순응이 되고말았다. 분기가 사그라드는 대신 자기 운명의 앞날에 대한
허무감과 절망감이 점점 커갔다.
필주는 이곳에 와서 자기가 오기 이전에 제철소에서 정체불명의 사람
들에 의해 배송기도면습격사건이 벌어졌고 그때 알뜰의 작은아버지가 희
생되였다는것을 알았다. 그후에 진행된 두번째 배송기습격사건은 1차습
격의 성과를 담보하기 위해 기또와 유미가 조작한것이였다. 고필주는 이
모든 사건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파견되였다.
일본《천황》이 항복한지 한해가 되여오는데 기또와 유미는 지금
누구를 믿고 어느 구석에 들어앉아 이런 일을 벌리는지… 미국을 반대
하여 싸우던 그들은 지금 자기의 적국이였던 미국의 품에 안겨있을것이
다. 미국이 일본보다 부유하고 강대한것만큼 자기 운명을 의탁함에
있어서 어떤 점에서는 일본첩자노릇을 하기보다 좋을지 몰랐다. 하지만
돈주머니가 크다고 인심이 후한것은 아니였다. 부자들일수록 린색한 사
람들이 너무 많았다. 더구나 미국량반들과 자기는 한번도 상종해본적 없
었다. 언제한번 가까이에서 얼굴도 본적 없는 맥아더사령부의 씨.아이.
씨 장교들이 기또나 유미한테서 돈주고 산 첩자들을 위해 얼마나 인심
을 쓰겠는지 그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필주는 새벽 2시가 되여오도록 사무실책상앞에 앉아있었다. 아무런 기
척도 없이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였다.
필주는 와뜰 놀라 의자에서 일어섰다. 선우치담이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섰다.
《아니, 지배인동지가 이밤 어떻게…》
고필주는 온몸이 장작개비처럼 굳어져 중얼거렸다.
《지나가다가 방에 불이 켜졌길래 들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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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치담은 방수포비옷의 고깔을 뒤로 젖히며 문가에 선채 말했다. 필
주는 선우치담한테로 급히 달려가 비옷 벗는것을 거들어주었다. 선우치
담은 비에 젖은 고무장화발로 콩크리트바닥에 큼직큼직한 발자국을
내며 방금전 필주가 앉아있던 의자로 갔다. 고필주는 말코지에 지배인
의 비옷을 걸고나서 서둘러 그옆에 모꺾어앉았다. 선우치담은 필주를 힐
끔 건네다보더니 의자앞다리 두개가 방바닥에서 들리도록 등받이에
몸을 기대이며 뜻밖에도 칭찬을 했다.
《역시 감옥에서 단련된 사람이 다르오. 이 제철소구내를 아무리
뒤져야 아직까지 자기 방을 지키고있는 사람은 고부장 혼자란 말이야.》
자기 아래사람들을 웬만해선 칭찬할줄 모르는 선우치담이다. 고필
주에 대한 이 칭찬은 일종의 자화자찬이기도 하였다. 선우치담에게는 한
달에 한두번씩 이렇게 구내를 도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제철소구내 사
무실과 직장들을 돌면서 창문밖에서 방주인 모르게 방안을 한참씩 들여
다보는것이였다. 그러다 언젠가는 어느 과장방인가 해서 녀자목욕탕
을 기웃거리다가 망신을 당한적도 있었다. 방금전만 해도 선우치담은 비
내리는 밖에 서서 창문으로 이 방안을 5분나마 들여다보며 고필주의 행
동을 살펴보고서야 안으로 들어왔다. 선우치담은 이러는것을 하부사
람들을 장악통제하기 위해 지도일군들이 가져야 할 능숙한 수완과 방법
으로, 일종의 헌신적노력으로 간주하고있었다. 고필주는 선우치담의 칭
찬에 기쁨을 느끼기보다 경계심이 앞섰다. 언젠가도 고필주는 재밤중에
지금처럼 선우치담의 습격식방문을 받은적 있었다.
《지금까지 뭘했소?》
선우치담은 담배를 피워물며 물었다.
《네, 이것저것 생각이 좀 많아서…》
《옳소, 지도일군들은 생각을 많이 해야 하오. 이모저모로 열가지
를 생각해 한가지를 집행해야 한단 말이요.》
선우치담은 흡족해했다. 그는 지금까지 필주를 눈치빠르고 능력있
는 일군으로 여겨왔다. 선우치담은 자기가 믿는 사람한테서 밤늦도록 일
하는 헌신성까지 보게 된것이여서 아래사람들에 대한 자기의 파악이 정
확했다는 자부심을 새삼스레 갖게 되는것이였다.
《밤늦도록 일하는건 좋은데 몸도 돌봐야지. 아무리 뼈빠지게 일해야
이놈의 곳에선 알아주고 돌봐주는 사람이 별로 없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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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사람다운 아량을 갖고 필주를 걱정하는 이 말은 자기의 헌신성을 잘
알아주지 않는 산업국이나 시당위원회에 대한 은근한 불만이기도 했다.
하늘처럼 믿던 표정갑부국장이 대장간리론때문에 몰려난 이후부터 선우
치담은 산업국간부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데 대해 불만이 많았다.
선우치담은 의자에 앉은채 하품을 했다.
《피곤하실텐데 어서 들어가 쉬십시오.》
《고부장두 퇴근해서 이젠 좀 쉬라구.》
《저야 하숙집에 가나 여기 있으나 마찬가지지요. 현장에서 먹고자면
오고가는 시간도 절약하고 편안도 한걸요.》
《아직 가족을 안 데려왔던가?》
《데려올 가족이 어디 있어야지요.》
《정말 혼자라구 했지? 내가 동무사정을 너무 돌봐주지 않았구만. 부
장동문 빨리 장가를 들어야겠소. 아이없는 홀아비야 총각보다도 더
잘 팔리지. 금값이야. 동무야 마흔전이니 처녀장가두 얼마든지 들수 있
지 않나 말이야.》
선우치담은 금이발을 내보이며 헤벌쭉 웃었다. 인차 자리를 뜨려던 그
는 다시 담배를 피워물었다.
《어디 좋은 자리가 있으면 하나 골라주십시오.》
고필주는 자기 상급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고 무척 공손히 말했다.
《여보, 능청스럽게 그러지 말라구. 내 동무가 꽁무니 따라다니는 과
부 모르는줄 알아?》
선우치담은 고필주가 얼마전에 알뜰을 자기 산하의 녀성과장으로
추천하던 생각이 나서 능갈치듯 말했다. 그때도 선우치담은 과부한테 반
해서 환심사려는게 아닌가고 우스개삼아 말했었다. 필주도 그때말이 생
각나 얼굴을 붉히고나서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드는 녀자가 전혀 없는것은 아닙니다만…》
《왜 박알뜰이라고 꼬집어 말 못해?》
선우치담은 필주의 속을 들여다보듯 책상너머로 뻔히 바라보았다.
순간 필주는 눈앞이 아뜩했다. 일이 이렇게 된바 하고는 숨길 필요가
없다고 필주는 생각했다. 망신스러울 때에는 홀딱 발가벗고 나섬으로써
보는 사람이 오히려 무안을 당해 달아나게 만드는것이 필주의 수법이였
다. 잠시 망설이던 필주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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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와서 제가 지배인동지한테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제가 알뜰
이를 안지는 퍽 오래전입니다. 운명의 희롱과 장난만 없었으면 우리는
부부가 되였을수도 있었지요. 저는 철없을 때 일찍 장가를 들어 본처와
의가 나빴습니다. 그래 알뜰이한테 반해 따라다녔는데 알뜰은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와서 알뜰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
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헤여져있을 때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코를 맞대고
함께 일하게 되고보니 마음이 괴롭군요.》
《음―》
선우치담의 입에서는 신음소리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무의 심정을 알만 하오. 하지만 지금 역시 따라다니면서 자기 마
음에 둔 그런 녀자를 과장으로 추천할수 있는가 말이요?》
선우치담은 필주의 철면피성을 맞대놓고 공격했다. 필주는 그의 공격
에 반공격으로 나왔다.
《자기를 차버린 녀자를 과장으로 추천하는 내 마음인들 편안한줄 압
니까? 공적인 일을 위해 사사로운 저의 감정을 죽이니 그렇지… 오랜 로
동자의 딸이구 또 그의 삼촌이 제철소를 지키다 적들에게 피살되였다니
당적원칙으로 보아 키워야 하겠으니 참는거지… 저는 알뜰이가 미울수
록 그를 남보다 위해주었구 이것은 본인이나 주위사람들, 지어는 지배
인동지한테까지 오해를 사게 만들었습니다.》
고필주의 말을 듣고보면 그처럼 원칙성있고 강의하며 도량넓은 사람
은 없는상싶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방어가 아니라 맹렬히 공격하
는 고필주의 전술에 선우치담은 손을 들고 나앉았다.
선우치담은 인간적으로 필주를 동정하게 되였으며 그의 원칙성과
강의성에 탄복하게 되였다. 선우치담은 이제야 모든것이 리해된다는
듯 몇번이고 머리를 끄덕이였다.
《하지만 알뜰인 동무밑에서 과장으로 일하기보다 차지훈이 밑에서 평
범한 로동자로 일하겠대. 오늘 낮에 알뜰인 자기를 화공부로 돌려보내
달라고 인사과에 정식으로 제기했소.》
필주는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그의 두눈은 질투와 복수심으로 무섭
게 번쩍거리였다. 차지훈이 제철소에 돌아오기 전에 화공부사업까지 겸
해보던 필주였다. 차지훈이 제철소에 다시 나타남으로써 필주는 자기 사
업의 범위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을뿐아니라 해탄로에 대한 서푼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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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바닥나게 되였다. 그리고 필주는 알뜰이가 자기를 배척하는
리유의 하나도 차지훈때문이라는것을 깨달았다.
차지훈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에선 선우치담도 고필주와 서로 맥이 통
했다. 자기의 지반을 꾸리기 위하여 한때 차지훈의 보호자로 나섰던 선
우치담은 그가 서울로 나간 이후 상급으로부터 된추궁을 받게 되자 그
를 욕질하고 배척하는것으로써 발뺌했다. 그러다 차지훈이 제철소로 돌
아오게 되니 선우치담은 다시 곤경에 빠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가
2호해탄로를 살려내겠다고 함으로써 낡은 해탄로를 모두 헐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선우치담은 다시한번 립장이 딱해졌다. 더구나 차지훈이 선우
치담의 적수격인 시당비서 리석의 비호를 받아 림시 화공부장자리에 앉
게 된 후부터 더욱 그랬다.
이밤을 계기로 선우치담과 필주는 서로의 마음을 더욱 깊이 리해하게
되였다.

시당비서방에서는 입당심의가 진행되고있었다.


알뜰은 자기가 입당심의받을 차례를 기다리며 대기실에 앉아 시당비
서방으로 들어가는 큼직한 문쪽을 부러움에 찬 눈길로 바라보고있었다.
지금은 주학섭이 들어가 심의받는중인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시당비서방에서 웃음소리까지 흘러나오는것을 보니 우스개소리를 잘
하는 주학섭이 엄엄한 입당심의장소에서까지 웃음이 넘치게 만드는
모양이다.
이윽고 시당비서방문이 열리더니 주학섭이 대기실로 나왔다.
주학섭은 출입문가까이에 앉아있는 알뜰을 알아보고 벌개진 얼굴로 씽
긋 웃었다. 그는 꽁무니에 찼던 길다란 목수건을 뽑아 얼굴을 썩썩 씻
으며 중얼거렸다.
《에참, 땀뺐군. 뭐 모르는게 너무 많으니 물어보는걸 제대로 대답할
수가 있어야지.》
《무얼 물어보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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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학섭은 수건을 다시 꽁무니에 차더니 알뜰에게 눈을 끔뻑여보이며
무슨 큰 경험이라도 되는것처럼 자기가 당한 일을 말했다.
《지배인이 로동계급의 당에 들어오겠다면서 로동계급에 대해 잘
모른다고 욕을 하더군. 시당비서동지가 웃으며 차근차근 가르쳐주었
지.》
알뜰은 제철소지배인이 입당심의를 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가 입당
을 심의하는 이 자리에까지 참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알뜰은 가
슴이 두근거렸다.
알뜰은 주학섭에게 시당집행위원들이 어떤것을 물어보며 어떻게 대답
해야 만족해하더냐고 차근차근 물어보고싶었으나 그럴 사이가 없었다.
시당비서방 출입문이 열리더니 키큰 한사람이 나왔다. 알뜰이도 풋낯이
나 아는 시당조직부장은 대기실사람들을 향해 큰소리로 이제 심의를 받
아야 할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박알뜰동무.》
《예.》
알뜰은 시당조직부장을 향해 돌아섰으나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뛰였
다. 지배인 선우치담이 입당심의자의 한사람이라는것을 알게 된 이후부
터 웬일인지 알뜰은 자꾸만 불안스러웠다.
《들어오시오.》
키가 큼직한 시당조직부장은 출입문가에 서서 고개를 끄덕여보인
후 뒤로 돌아섰다. 알뜰은 그를 따라 조심스럽게 문턱을 넘어섰다.
할아버지처럼 따르는 리석이 일을 보는 방이였으나 지금에야 처음 와보
는 알뜰이다. 넓고 길다란 방 한가운데는 큼직한 응접탁이 놓이고 그 좌
우에 시당집행위원들이 두줄로 마주앉아있었다. 응접탁과 T자형으로 놓
인 사무용책상에는 책과 문건들만 수북이 쌓여있고 의자는 비여있었다.
시당비서 리석이 응접탁 첫머리에 앉아있고 그 맞은편에 제철소지배인
선우치담이 앉아있었다.
알뜰은 출입문쪽으로 놓인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시당조직부
장이 문건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시당집행위원들에게 알뜰의 이름이
며 나이, 경력을 간단히 소개했다.
시당비서 리석은 방안사람들을 둘러보며 질문을 하라고 했다. 알뜰에
게 제일먼저 물어본 사람은 각테안경을 낀 시당선전부장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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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당원이 되기 위해 자기자신이 노력하고 해놓은 일들을 좀 말
해보십시오.》
알뜰은 이 순간에야 지금까지 당원이 되겠다고 애는 써왔지만 해놓은
일들이 너무나 없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당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알뜰은 신문에 실린 장군님의 연설을 한자한
자 따져가며 읽는 버릇을 붙이였으며 세상돌아가는 형편에 관심을 돌리
기 시작했다. 그리고 출근이 빨라진 반면에 퇴근이 늦어졌다. 아침일찍
작업장을 청소하는것은 이전부터 해오던 일이였으나 알뜰은 사람들이 될
수록 기쁜 마음으로 불편없이 일하도록 비자루질을 하나 해도 정성을 다
하였으며 작업장에 물통을 마련해놓고 언제나 더운물을 떨구지 않았다.
알뜰은 해탄로복구에 손톱눈만큼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수고와 정
성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입당을 심의받는 이 순간 돌이켜보면 그것
들은 너무나 평범하고 하찮은것들이였다. 알뜰은 갑자르던 끝에 조심스
럽게 입을 열었다.
《장군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썼는데 별로 해놓은게 없습니
다. 2호해탄로에 불을 지피려고 그저 남들처럼 일했을뿐입니다.》
조는듯 한 얼굴표정으로 앉아있던 선우치담이 의자등받이에 기대였던
몸을 일으키며 맞갖지 않은 눈길로 알뜰을 바라보았다. 2호해탄로라는
말이 그의 비위를 건드린것이다.
《내 한가지 물어보기요.》
선우치담은 팔굽을 상우에 올려놓으며 알뜰의 말을 중단시켰다.
《동무 애인이 있소, 없소?》
너무도 뜻밖의 질문이였다. 알뜰은 선우치담이 무엇때문에 이것을 묻
는지 알수 없었다. 알뜰은 온몸에 뜨물을 뒤집어쓰는듯 한 기분이였다.
알뜰은 구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리석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머리를 수굿
하고 앉아 무슨 문건만 뒤적이고있었다. 알뜰은 모욕에 대한 반발로 활
랑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나직이 대답했다.
《없습니다.》
《따라다니는 사람두?》
선우치담은 분명 필주를 념두에 두고있었다. 알뜰은 선우치담이 자기
속내를 좀 더 로골적으로 나타내자 활랑거리던 가슴이 오히려 진정되면
서 잃었던 마음의 균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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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집을 갔다가 집에 돌아온 후 오늘까지 혼자 삽니다.》
《동무, 대답을 피하누만. 동무 남편이 죽었다는걸 누가 모르나? 아
직 젊었으니 시집을 다시 가야 할게구, 그러니 이 사람 저 사람 사귀게
도 될텐데 동무 립장이 어떤가 해 묻는거요.》
선우치담은 옴짝달싹 못하게 통장을 불렀다고 생각했는지 비꼬듯
느물느물 웃기까지 했다.
《전 아직 재혼문제를 두고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뼈가 있는 알뜰의 말에 선우치담은 눈살이 꼿꼿해졌다.
《동무, 여기가 어딘줄 아오? 당원이 되려면 당조직앞에 무한히 허심
하구 솔직해야지…》
《전 지배인동지가 물으시는 말씀의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알뜰의 대답은 선우치담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였다.
《자기 잘못을 모르겠다?》
선우치담은 잠시 말을 끊고 《이 자리에서 나하고 해보겠단 말인가?》
하고 따지듯 잠시 바라보았다.
《좋소. 모르겠다니 내가 말하기요. 왜 동무 여기 가서 꼬리치고 저
기 가서 꼬리치는가? 동무때문에 화공부장과 토목부장사이가 얼마나 복
잡해졌는가? 동무가 누구를 선택하는가 하는것은 동무 개인문제구 자유
의사에 속하지만 녀자로서 처신을 바로해야지.… 여기 가붙구 저기
가붙으면서 제철소간부들을 리간시키지야 말아야지. 동무 리간에 걸
려드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선우치담은 자기의 저속한 복수심이 될수록 전면에 나타나지 않게 하
려고 여유있는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알뜰이 너무 억이 막혀 아무 말
을 못하자 선우치담은 숨돌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건 사생활령역에 속하는 도덕상의 문제라치구… 입당을 하겠
다는 사람이 동무 어디 이뿐인가? 동무, 외삼촌네 집에 요즘 무엇때문
에 자꾸 가는가? 글쎄 해방전에는 못살았으니까 다문 한푼이라도 얻으
러 갔겠지만 해방된 오늘까지 무엇때문에 거기 기신거리는가. 판명된바
에 의하면 배송기를 습격한 두목이 동무 외삼촌의 처남 송표란 말이야,
응?》
선우치담의 이 말은 단순히 알뜰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였다. 입당자
격을 지니지 못한 사람을 인연깊은 사이라고 이 장소에 불러온 시당비

423
서 리석에 대한 일종의 타격이고 추궁이였다. 선우치담은 시당비서
리석이 제철소로동자들속에 나날이 깊이 침투해들어가며 영향력을 확대
해가는데 대해 은근히 위협을 느끼고있었다. 감옥에서 전향문을 쓴것때
문에 늘쌍 속이 켕겨있는 선우치담은 리석이 자기뒤를 캐는것 같아 불
안스러웠으며 제철소안에서 자기 위신이 떨어지는 반면에 그의 권위가
높아지는데 대해 앙심을 품고있었다.
선우치담은 알뜰을 망신시킴으로써 고분고분하지 않는 억봉을 복수할
뿐아니라 안면, 정실관계에 의하여 당장성사업을 하려 했다고 리석에게
공격을 들이댄것이다. 선우치담이 알뜰에게 가한 타격은 호된것이였다.
알뜰은 라웅범이 친외삼촌이 아니라고 말하고싶었으나 입이 열리지 않
았다.
《지배인동무, 좀 진정하는게 좋겠습니다.》
시당비서 리석이 선우치담의 주관주의적이며 독선적인 발언을 중지시
키고 그의 그릇된 작풍을 비판하기 시작하였으나 알뜰은 한마디도 알아
듣지 못하였다.
《그건… 그건 모두 거짓말이예요.》
알뜰은 선우치담을 향해 겨우 이 한마디를 하고나서 망신스러워 얼굴
을 싸쥔채 입당심의장소를 뛰쳐나오고말았다.

반년과 반만년, 시간의 길이로 따지면 꼭 만배였다. 민족사의 지난 반


만년동안에 이루어지지 못했던 민주개혁의 대부분이 이해 1946년 3월부
터 8월사이 반년동안에 실시되였다. 그러고보면 지난 반년동안의 매 하
루하루는 지난 반만년력사에 못한 일을 해제낀 거대한 변혁과 격동의 나
날들이였다. 토지개혁과 로동법령, 중요산업국유화, 남녀평등권법령
등 제반민주개혁들을 실시한 흥분들이 채 식지 않은 가슴에 사람들은 북
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하여 근로대중의 통일적정당 조선로
동당을 창건하였다는 소식을 또다시 접하였다.
사람들의 정치적관심과 자신들의 정치적생명에 대한 자각이 나날이 높
424
아가던 시절이여서 알뜰의 입당이 보류되였다는 소식은 온 제철소와 시
내에 쫙 퍼지였다.
알뜰의 입당보류는 억봉이한테도 하나의 커다란 타격이였다. 억봉
은 지금 로동당 새 당증을 교부받아가지고 제철소로 돌아가는길이였다.
시당에 함께 갔던 석봉이와 주학섭은 앞에서 걸었고 그들보다 댓걸음 뒤
떨어져 억봉은 태주먹과 함께 걸었다. 새 당증을 받아안고보니 억봉은
생각이 많았다. 누이의 입당이 보류당하지 않았으면 오늘 세남매가
모두 로동당원증을 함께 받았을것이다.
억봉은 누이일을 생각할수록 분하기 그지없었다. 누이는 필주나 차지
훈때문에 꽃다운 청춘을 눈물과 한숨으로 썩이였고 가슴저미는 불행과
고통을 당해야 했었다. 그들한테서 그 값을 받아내지는 못할망정 오늘
또다시 그들때문에 낡은 설음우에 새 눈물까지 흘려야 한단 말인가. 웅
범의 일도 그랬다. 어려서부터 외삼촌이라고 부르며 자별나게 지나온것
은 사실이지만 그가 송설자한테 장가든 후부터 모든 인연을 끊다싶이하
고말았다. 친외삼촌도 아닌데 왜 입당하는데까지 영향을 받아야 한단 말
인가.
억봉은 줄곧 땅을 내려다보며 걸었으나 걸핏하면 돌을 걷어차군 했다.
《뭘 그렇게 생각하나?》
태주먹이 넘어지려는 억봉을 부축하며 물었다.
《기쁨을 동무한테 알리면 둘이 되고 고통은 동무한테 알리면 반이 되
지.》
태주먹의 말에서는 억봉의 안타까움을 덜어주고싶어하는 진정이 느껴
졌다. 해탄로에서 오래동안 함께 일해오는 태주먹은 억봉의 입당보증인
이기도 하다.
《생각할수록 우리 누이일은 분하고 괘씸하거던.》
억봉은 자기의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지.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야. 남을 탓하
기 앞서 자기자신들을 먼저 돌이켜보아야 하는거야.》
태주먹은 억봉을 동정하면서도 반박했다. 태주먹은 말없이 몇걸음 옮
기고나서 억봉이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동을 이었다.
《동무 누이에 대해서보다 동무에 대해 말한다면… 우선 동무는 누이
를 혁명동지로 대함이 부족했어. 동무가 누이한테 좀더 옳은 당적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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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주었더라면 동무 누이가 입당심의장소에서 뛰쳐나오지는 않았을거야.
분하고 망신스러워도 참았어야지. 그리고 자기가 정당하다는것을 확
신한다면 왜 도망치는가? 당에 들겠다고 하면서도 이런 행동은 당에 대
한 존엄이 부족하다는것을 말해주는거야. 동무는 입당을 준비하는 누이
한테 장군님께서 창건하신 우리 당조직을 어떻게 존엄있게 대해
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어야 했어.》
태주먹의 말은 옳았다. 억봉은 지금까지 누이한테 사랑을 받아만
왔지 혁명의 전우로 누이를 따뜻이 대하고 위해주지 못했었다. 누이가
입당준비사업을 한다는걸 알고 당강령과 규약을 얻어다주었을뿐이였다.
자기가 누이의 입당준비사업을 잘 도왔더라면 아는 사이라고 시당비서
를 등대고 당조직을 존엄있게 대하지 않는다는 가슴아픈 비난까지는 절
대 듣지 않았을것이다. 태주먹은 억봉이가 몹시 괴로와함을 모르지
않았으나 엄한 추궁을 그치지 않았다.
《누이만이 아니구 일가친척모두에 대해서도 그렇지. 당에는 왜 드나?
혁명을 하기 위해서지. 혼자서는 장군님의 큰뜻을 다 받들수 없구 혁명
을 할수 없으니까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인데가 당이란 말이야. 그
런데 동무는 왜 외삼촌을 떼버리려고 하나? 외삼촌까지 떼버리구 혼자
서 혁명을 하겠다는건 좋은게 아니야.》
억봉은 태주먹의 이 말을 새기기 힘들었다. 누이는 라웅범네 집에 기
신거린다고 비난을 받았는데 태주먹은 왕청같이 말하고있다.
《라웅범은 우리 진짜 외삼촌이 아니야.》
《내가 그걸 모르는줄 아나? 동무 외할아버지와 우린 이웃에 살았
어.》
억봉은 말문이 막혀버리였다. 태주먹은 억봉이한테 숨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좋을 땐 외삼촌 하구 나쁠 땐 돌아선다면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아.
진짜외삼촌이건 아니건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내지 않았나. 잘 아는
사람일수록 손잡고 함께 나가야지. 라웅범은 어려서 고아가 돼가지고 고
생도 많이 했구 일본놈을 증오도 했네. 내 어렸을 때 보니 우리 형님이
라웅범보구 일본놈계집한테 얻어먹으러 다닌다구 놀려주니까 〈쪽발
이한테 돈 뺏으면 좋지.〉하구 오히려 으시대더란 말이야. 건달기가 있
긴 하지만 압출기를 타지 않았나. 압출기만 아니라 이 기계, 저 기계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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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루어보았는데 제철소복구에 나서면 건국에 도움이 됐지 손해될게
뭐나 말이야?
난 동무 누이가 병원에 입원해있으면서 그를 제철소에 일나오게 하려
고 찾아다닌건 잘했다고 봐. 라웅범이 아직 제철소에 일하러 나오지 않
으니까 그러지 이제라도 해탄로복구에 보탬이 되게 해보라구. 그러면 얻
어먹으러 찾아다닌다는 시시한 소리는 모두 없어지게 될거란 말이야. 듣
자하니 라웅범이 요즘 자리펴고 집에 누워있대. 병문안도 갈겸 찾아가
서 공격을 들이대란 말이야.》
억봉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누이나 라웅범에 대해 태주먹은
억봉이보다도 많이 알고있었다. 자기 누이가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라
웅범을 제철소에 일나오게 하려고 찾아다니였으며 요즘 라웅범이 집에
누워있다는것을 지금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억봉이였다. 하지만 이것들
보다도 해탄설비들에 대한 복구정비의 절박성이 태주먹의 말을 더 귀담
아듣게 했다. 로체보수는 이미 급한 고비를 넘기였다. 이제부터는 해탄
설비들에 대한 정비를 시작해야 한다. 배송기복구정비를 위해 대책을 시
급히 세워야 했으나 준길삼촌이 피살되던 때 모두 잃어버려 지금은 도
면 한장 변변한게 없었다. 압출기나 장입차를 비롯한 수많은 기계설비
들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능한 압출기운전공인 라웅범이 해탄로에
일하러 나오면 압출기 하나는 마음놓을수 있다. 자기는 왜 지금까지 라
웅범을 나쁘게만 보았지 이런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가.
그리고 라웅범은 일찍 부모를 잃고 기구한 운명의 길을 걸어온 사람
이였다. 부모들이 살아계시였더라면 웅범은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건
달패에 끼우지 않았을것이고 지금처럼 송설자한테 장가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억봉이네가 라웅범과 외삼촌, 조카 하면서 남다른 인연으로 얽
혀진것도 부모없는 설음을 어려서부터 함께 나눈데 있었다.
억봉은 태주먹의 말이 가슴아프면서도 생각할수록 고마왔다. 가장 좋
은 거울이 옛친구라는 말은 그른데 없었다. 억봉은 태주먹을 통하여 자
기의 약점이 무엇이며 걸린 고리를 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는
가를 새삼스레 깨닫는가싶었다. 이래서 예로부터 큰뜻을 품은 사람은 사
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하였을것이다.
《고맙네.》
억봉의 말에 태주먹은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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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기까지야 뭐. 한가지만 더 말한다면 난 동무한테 퉁탕퉁탕
막 말했네만 동무는 누이나 동생보구 너무 그러지 말라구. 동무는 너무
퉁탕거리는게 탈이야.》
억봉은 태주먹의 이 말도 수긍했다. 태주먹은 무척 대바르고 정의감
이 강해 성이 날 땐 무서웠으나 무분별하지 않았다. 마구 말하는것 같
아도 할 말만 골라했으며 남에 대해 요구성이 높은 대신 자기자신에 대
한 요구성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태주먹은 자기 생활의 표준점으로 무
엇이나 목표를 높이 세웠으며 그 목표를 이룩하기 위해 꾸준하고 이악
했다. 랭수마찰을 시작한 후 지난 10년동안 단 하루도 번진적 없는 그
다. 집이 대동강기슭에 있는 그는 오동지섣달에도 강에 나가 강얼음을
까고 마찰을 한다. 이런 규칙성과 원칙성, 완강성과 집요성은 억봉이가
태주먹한테서 언제나 값높이 사는 품성이였다.
《알겠네.》
억봉은 안심하라는듯 태주먹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시무룩 웃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억봉은 무겁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기계설비정비사업때문에 막막하던 앞길이 희미하게나마 트이는것 같
기도 했다. 억봉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걸음을 멈추었다.
《여, 주먹이! 동력과친구들이 대동강에서 전동기를 열대나 꺼냈다는
데 우리두 운하리강을 한번 뒤지지 않을래?》
일제는 도망가면서 많은 기계와 설비부속들을 강에 내다버리였다. 운
하리쪽에는 일제때부터 자그마한 가해탄로들이 여럿 있었다. 그쪽으
로 나갔던 해탄기계와 설비들이 많이 없어졌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일
제는 운하리강에 그것들을 마구 내버렸다고 했다.
《그게 좋겠어, 강에 나가 하루 휴식도 조직할겸.》
태주먹은 반가와하며 적극 지지했다.
그날 저녁이였다. 집에 돌아오니 누이는 방안에 혼자 앉아 호젓이 생
각에 잠겨있었다. 무덥건만 창문 하나 열지 않았다. 이전같으면 바느질
감이라도 손에 들고있으련만 알뜰은 멀뚱멀뚱 천정만 바라보고있었다.
입당을 보류당한 이후부터 알뜰은 무척 의기소침해졌고 생활에서 온갖
의욕을 잃어버린것 같았다.
알뜰은 억봉이가 들어서자 동생에게 저녁을 차려주어야 한다는 습관
된 의무감으로 소리없이 일어섰다. 억봉은 오늘따라 누이가 측은하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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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없었다.
《누이, 나 저녁 먹었어.》
억봉은 부엌에 나가려는 누이한테 종이에 싸서 들고온 꾸레미를 내밀
었다. 무엇이냐고 물어보는듯 한 누이의 눈길에 억봉은 벌쭉 웃었다.
《지짐이야. 지짐집에 갔다가 누이가 좋아하길래 둬그릇 받아왔지
뭐.》
알뜰은 억봉이한테도 이런 세심하고 삽삽한데가 있는게 의심스럽다는
듯 말없이 동생을 쳐다만 봤다.
《삼촌어머닌 어디 갔나?》
주학섭이네가 봉산에서 온 후 작은어머니는 집을 그들한테 넘겨주고
억봉이네 집으로 옮겨앉고말았다.
《마실 갔다.》
《석봉이랑 같이 가서 먹었으니 누이랑 작은 어머니랑 먹어.》
억봉은 누이가 동생생각에 지짐을 먹지 않고 남겨둘것 같아 이러며 웃
옷을 벗었다. 억봉은 태주먹과 이야기를 나눈 후 집안의 우울한 공기부
터 가시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동생과 함께 우정 지짐집에 갔었고 이
렇게 작은어머니와 누이몫까지 지짐을 받아가지고 온것이다. 억봉은 삼
촌어머니가 돌아오면 같이 먹겠다면서 부엌에 지짐을 내다두고 방으로
들어오는 누이한테 물었다.
《누이, 웅범외삼촌 생일이 언제더라. 이달이 아니야?》
《래일모레지.》
알뜰은 동생의 물음에 마지못해 대답은 하면서도 오늘따라 유별난 억
봉의 말과 행동이 의심스러운 모양이였다. 억봉은 누이가 무명실로
떠서 준 런닝그바람으로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여느때없이 살틀한
어조로 말했다.
《누이, 웅범외삼촌 생일을 이번에 우리가 한번 차려주자.》
《응?》
알뜰은 놀라움에 두눈을 흡떴다.
《얻어먹으러 기신기신 찾아다닌다는 말 듣구 가만 있을래? 우리
세남매가 달라붙어 한번 본때를 보이잔 말이야. 그리구 우린 얻어먹으
러 다니는게 아니라 외삼촌을 해탄로에 돌아오게 하려구 애쓴다는걸 시
위하잔 말이야. 외삼촌이 해탄로에 나가 압출기를 탄 다음에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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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은 오늘따라 동생이 지짐까지 사들고 돌아온 마음이 이제야 리해
되는가싶었다. 알뜰은 자기를 위해주고 힘을 주려는 동생의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고욤 일흔이 감 하나를 당할수는 없었다. 동생의 위로가 아무리 살틀
해도 이번 입당심의에서 알뜰이 입은 마음의 상처를 가셔내거나 그 아
픔을 대신하여줄수는 없었다. 하지만 알뜰은 꼭 당원이 되여야 한다는
동생의 고무와 당부를 다시한번 느낄수 있었다.

웅범은 요즘 자리펴고 집에 누워있었다. 아파서라기보다 한통의 괴이


한 편지를 받은때문이였다. 차지훈이 서울에 갔다오면서 전해준 처남 송
표의 편지봉투속에서는 처남의 편지외에 또 한장의 편지가 나왔다.
기또 마사오가 써보낸 그 엽서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나는 자네의 의리를 믿고 이 편지를 서울에 있는 일본인세화회에서
쓰네. 급히 겸이포를 떠나면서 유미가 나의 물건들을 가져오지 못했구
만. 별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한때 내가 애용하던것들이네. 우리가 강
가에서 처음 만나던 그 버드나무와 누운바위사이에 묻어두었다고 하니
잘 보관해주기 바라네. 일본으로 귀국하기 전에 내가 한번 가든가 사람
을 보내겠네.》
웅범은 편지를 보는 순간 눈앞이 아뜩했다. 웅범이 송설자한테 장가
든 후 얼마 있다 기또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청진제철소건설이 벌어지
면서 기또가 다시 조선에 건너왔다는 말이 들리기는 했지만 웅범은 그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수 없었다. 기또가 이곳을 떠나간 이후 새로 온
제철소 총무부장의 첩으로 계속 남아있던 유미가 해방을 앞둔 작년봄에
웅범이네 집을 제발로 찾아왔다.
《기또 마사오님이 부르시네.》
웅범은 순사한테 끌려가는 심정으로 유미의 안내를 받아 기또 마사오
가 들어있다는 영빈관 귀빈실로 불리워갔다.
그새 머리가 하얘지고 얼굴에 주름이 깊어진 기또는 유까다(일본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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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바람으로 웅범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난 네가 이곳에 아직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오래간만에
옛날 일하던 곳을 돌아보러 왔다가 네가 좋은 색시를 얻어 잘산다는 말
을 듣고 반가와 불렀다.》
《황송합니다.》
웅범은 자기가 아이들의 옛말에 나오는 도깨비한테 홀린게 아닌가 의
심스러울 정도였다.
《아직 낚시질을 하나?》
《예, 시간이 있으면…》
《하긴 낚시질에 재미붙이면 녀편네도 잊는다고 그랬지.… 내 후에 좋
은 낚시도구나 한조 내주지.… 오늘은 우리의 낚시질우정을 생각해서 술
이나 한잔 들자구.》
웅범은 자기도 모르게 무슨 죄를 지어 벼락맞으러 온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간이 주먹만 해있다가 그날 《마사무네》란 술까지 얻어먹고 집
으로 돌아왔다. 웅범은 기또가 자기한테 아무런 리유없이 베푸는 호의
와 친절이 리해되지 않았다. 기또는 빈말을 하지 않았다. 해방되기
한 보름전 유미는 뜻밖에도 또다시 웅범이네 집으로 찾아왔다.
《기또 마사오나리님이 보내온거네.》
그가 내놓고간 꾸레미속에서는 조립식으로 된 낚시대며 고급낚시줄,
각종 규격의 낚시 그리고 번쩍거리는 스뎅으로 간편하게 만든 접이의자
까지 들어있었다. 웅범은 기또의 편지를 받은 오늘에야 그의 낚시에 든
든히 꿰운 자신을 깨달았다. 그는 단순한 물고기낚시군이 아니였다. 그
가 매번 후하게 치르던 고기값이며 직업알선때문에 웅범은 송표와 설자
한테 걸려들었다고 할수 있었다. 웅범은 기또가 강가에 도대체 무엇을
묻었는가 하는 호기심에 한번 찾아가보고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그
것이 마치 자기가 해방전에 친일파노릇한것을 스스로 폭로하는것 같아
자신을 속이며 잊은체 하고말았다.
그러던 어느날 웅범은 오래동안 손놓았던 낚시질이라도 해야겠다는 생
각을 하게 됐다. 별로 할일도 없이 집에 있어야 녀편네 바가지 긁는 소
리밖에 들을게 없었다.
웅범은 깊숙이 넣어두었던 낚시도구들을 찾아가지고 강변으로 나갔다.
웅범은 자기가 이전에 늘쌍 즐겨찾군 하던 물후미에서 늙은 버드나무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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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를 알아보았다. 구새먹은 아름드리 그 버드나무 가까운 곳에는
누운바위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 누운바위에서 얼마 안 가면 바위츠렁
이다. 웅범은 바위츠렁을 배경으로 늙은 버드나무며 누운바위를 알아보
는 순간 기또의 편지가 생각났다. 기또가 편지에서 자기 물건을 묻어두
었다는 곳이 이곳이였고 웅범이 그를 처음 알게 된 곳도 바로 여기였다.
웅범은 다리가 후들거려 물가에 주저앉았다. 속을 진정하려 담배를 피
워물었으나 소태처럼 써서 피울수가 없었다.
웅범은 담배끝에 손가락같은 시뻘건 불찌가 달리도록 연거퍼 뻑뻑 들
여빨며 담배를 강물에 집어던졌다. 웅범은 주위에 누가 없는가 해서 사
위를 두리번거리였다. 주위는 쥐죽은듯 조용한게 개미 한마리 얼씬하지
않는다. 웅범은 마른 땅으로 엉금엉금 걸어나와 엉치를 깔고 맨땅에 풀
썩 주저앉았다.
(해방된지 언제라구 망해버린 일본놈을 무서워하다니…)
웅범은 용기를 내려고 저 혼자 중얼거리였다. 기또나 유미가 아무리
오고싶어도 이제는 다시 이곳에 오지 못할것이다. 무서운것은 자기가 지
은 죄였다. 웅범은 기또와 자기의 관계가 드러나면 사람들이 자기를 친
일파로 볼것 같아 그것이 제일 두려웠다. 그러지 않아도 송설자한테 장
가든 후부터 돈을 보고 병신한테 장가들었다고 조카나 다름없는 억봉이
까지 얼마나 멸시했던가.
웅범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후들후들 떨리던 속이 다소 진정되였다.
기또 마사오의 편지구절이 다시금 떠오르면서 여기 어디에 정말 물건을
묻었을가 하는 호기심이 동했다.
웅범은 호기심을 버릴수 없어 삽을 가지러 서둘러 집으로 갔다. 웅범
의 이날 낚시질은 주인없는 물건찾기로 바뀌였다. 웅범은 날이 어둡도
록 버드나무주변에서 누운바위쪽으로 길죽하게 도랑처럼 파나갔다.
그날부터 웅범은 매일처럼 그 역사를 벌리였다. 이틀만에 정말 버드나
무밑에서는 번쩍거리는 궤짝 하나가 나왔다. 트렁크만 한 그 늄궤짝은
무거웠다.
웅범은 밤이 깊었을 때 낑낑거리며 그 궤짝을 집으로 메여들이였다.
웅범은 늄궤짝을 처도 모르게 허청간안에 감추어두고 자정이 지나 저 혼
자 쇠를 뜯었다. 궤짝안에는 무슨 책과 도면 같은 종이들이 한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명주천으로 싸고 또 싼 맵시있는 함 하나가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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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칠을 한 쪼꼬마한 그 함속에는 금가락지며 금시계줄, 보석반지들과 함
께 의미심장한 글이 적힌 종이 한장이 들어있었다. 빨락빨락한 그 종이
에는 조선말로 이렇게 씌여있었다.

《남의 귀중품에 함부로 손을 대지 말라! 주인의 승인없이 이 귀중품


을 가지려 하는자는 목숨으로 그 대가를 지불할것이다.》

웅범은 더럭 겁이 나서 얼른 귀중품함뚜껑을 닫았다. 온몸은 식은땀


에 이미 푹 젖었다. 아무리 주위를 두리번거리여도 허청간안에는 자기
혼자밖에 없었다. 안으로 문을 닫아걸었으니 누가 들어올수는 없다. 웅
범은 귀중품함을 자기 두다리짬에 끼고앉아 초불을 밝히며 궤짝안을 다
시 샅샅이 뒤지였으나 다른것은 더 없었다. 그물거리는 초불에 궤짝에
서 나온 종이들을 뒤적거리던 웅범은 다시한번 놀랐다. 구체적인것은 알
수 없으나 궤짝안의 종이와 책들은 해탄로배송기도면과 문건들이였다.
그중에는 신문지 한장을 절반 접어놓은것만 한 증기배송기도면철도
있었다. 기름때가 오르고 굽도리가 모지라진 마분지뚜껑의 도면철에
는 손바닥만 한 시뻘건 겸이포제철소도장이 찍혀있었고 그옆에는 일제
때 해탄과장노릇을 하던 도꾸이찌이름을 뻑 그어놓은 대신 박준길이라
고 써놓은 이름이 있었다. 해방되던 때 박준길이 도꾸이찌한테서 빼앗
았다던 그 도면들이 분명했다. 웅범은 연필로 써놓은 박준길이란 이름
을 알아보는 순간 전류라도 통하듯 온몸이 쩌릿해왔다. 박준길이 반동
들한테 피살당하던 날 없어졌다던 배송기도면이 어떻게 이 궤짝에 들어
있단 말인가?
웅범은 도면과 기술문건들을 와락와락 늄궤짝안에 집어넣고 귀중품함
을 가슴에 품은채 허청간에서 나왔다.
웅범은 귀중품함을 벽장속에 깊숙이 찔러두고 자리에 누웠으나 잠을
들수 없었다. 귀중품함속의 금붙이와 귀중품을 내다 팔면 고래같은
기와집 몇채도 사고 남을것이다. 하지만 궤짝속의 도면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귀중품들을 가지자니 박준길의 피가 스민 도면과 기술문
서들이 가슴에 걸리고 그것들을 내놓자니 제발로 굴러들어온 재물을 내
놓기 아까왔다.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 모르는척 가만있을수도 있지만 그
렇게 되면 박준길을 죽인 놈들과 자기가 공범자로 된다는걸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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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제는 범꼬리 잡고 당기지도 놓지도 못할 딱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내 꼴이 이게 뭐란 말인가?)
귀중품과 도면들을 모두 내놓고 사실대로 말한다 해도 사람들이 자기
의 말을 믿어줄지 의심스러웠다. 한순간 재물에 유혹되였던 웅범은
량심의 가책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웅범은 끝내 자리펴고
눕고만것이다.

머리에 수건을 싸매고 누워있던 웅범은 바람이라도 쏘이려고 며칠만


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누워만 있다가는 정신이 나가든가 골병이
들어도 단단히 들것 같았다.
거리에 나왔던 웅범은 퇴근하는 달모를 만났다. 오래간만에 웅범을 만
난 달모는 여간만 반가와하지 않았다.
《자, 우리 집에 가서 담배라도 한대 피우구 가라구.》
달모는 웅범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한때 달모와 웅범은 같이 일했고 술을 마시러 함께 다니군 했다.
해탄로복구가 점점 본격화됨에 따라 기술과 기능의 부족을 가슴아피
느끼는 때여서 달모는 언제부터 웅범을 한번 만나려고 벼르던터다.
인정이 그립고 동무가 그립던 웅범은 달모한테 끌려 그의 집으로 갔다.
두사람이 퇴마루에 마주앉아 담배 한대를 피울가말가했을 때 계향이
가 집에 돌아왔다. 여느때없이 풀이 죽은 계향을 보고 달모는 퇴마루에
앉은채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 너 왜 그러니?》
처조카를 위로도 할겸 웅범이한테 인사시키려고 달모가 찾는 말에 계
향은 참고참아오던 분노를 왈칵 쏟아놓았다.
《작숙, 알뜰언니네가 저희 외삼촌때문에 망한다지 않아요. 알뜰언니
가 외삼촌때문에 입당을 못했대요.》
《응?》
퇴마루에 앉았던 달모와 웅범은 두사람 다 놀라며 바빠했다. 달모는
알뜰이 입당하지 못했다는 소식보다도 계향이가 알뜰의 외삼촌이 앞에
있는걸 알지 못하고 실수하는것이 급했고 웅범은 웅범대로 놀라움을 금
치 못해했다. 계향은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이 언젠가 차지훈과 함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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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으로 알뜰을 면회가다 길에서 만났던 알뜰이네 외삼촌이라는것을
알아보았으나 아무런 인사없이 지내온 사이여서 우정 모르는척 하고 일
부러 더 그런것이였다.
계향은 오늘 제철소에 현장실습을 나갔다가 알뜰의 입당청원이 보류
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향은 그 리유의 하나가 라웅범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격분을 금치 못했다. 계향은 알뜰이 병원에 입원해있던 때 눈
에 붕대를 처맨 그를 부축하여 두번이나 라웅범네 집에 갔었다. 고생하
며 찾아갔다가 대문안에도 들어서지 못하고 곱사등이한테 내쫓기우던 때
너무 분해 울기까지 하였었다.
계향은 자기가 들은 소식들이 믿어지지 않고 리해되지 않을수록 알뜰
의 외삼촌이 미웠다. 대바르고 의협심과 정의감이 강한 계향은 자기의
성미를 어쩌지 못해 웅범을 맞대놓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글쎄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알뜰언니가 외삼촌덕을 본게 뭐야요.
못산다구 수모만 받았지.》
《얘 계향아, 그만둬라.》
달모는 기겁해 계향을 만류했다. 그럴수록 계향은 분기가 치밀어올라
했다.
《그만둬라가 뭐예요. 알뜰언니가 입원했을 때 언니가 자꾸 데려다달
라구 해서 외삼촌넨지 뭔지 하는 그 집에 갔다가 얼마나 망신을 당했는
지 알아요? 눈에 붕대를 처매구 남의 부축을 받으며 조카가 찾아왔는데
외삼촌어머니란 사람이 글쎄 대문안에도 안 들여놓고 돌려보내는게
아니나요.… 그런 녀편네를 데리구 사는 외삼촌은…》
《얘, 제발 그만둬라.》
라웅범보다도 바빠맞은 사람은 달모였다. 계향이한테 언제한번 성
내본적 없는 달모는 지금도 빌듯 말했다.
《왜 그만둬요. 외삼촌이란 사람한테 그렇게 수모받은것만두 분한
데 그 잘난 외삼촌때문에 입당까지 부결됐는데 왜 가만있겠어요. 내가
그렇게 피해입었다면 당장 찾아가서 아야…》
계향은 자기의 모든 생각을 내뱉고야말았다. 웅범은 꾹 입을 다물고
가만 앉아있었으나 달모보다 더 속이 끓었다. 자기 처가 알뜰이나 억봉
에 대해 시답지 않게 생각하며 얄밉게 여긴다는것을 모르지 않았고 그
것때문에 밤낮 처와 다퉈오던 웅범이였으나 알뜰이가 눈을 부상당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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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찾아왔다가 들어오지도 못하고 갔다는것은 지금에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때문에 알뜰의 입당청원이 부결되였다는 소식도 지
금에야 들으니 처음이였다. 담배만 뻑뻑 빨며 퇴마루에 앉아있던 웅범
은 얼굴이 시뻘개서 담배를 뱉어버리고 벌떡 일어서 달모네 집을 나왔
다. 웅범은 달모네 집 대문밖에 나왔을 때 달모와 그의 처조카가 주고
받는 이런 말을 들었다.
《너 이자 왔던 사람이 누군줄 아니? 알뜰이 외삼촌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니?》
《누가 모르나요, 들으라구 우정 그랬는데…》
웅범은 다시한번 뒤통수를 되게 줘맞는듯싶었다.

달모네 집을 나선 웅범은 사람들을 꺼려 머리를 푹 숙인채 걸었다. 푸


접좋고 숫기 좋으며 웬만한 싫은소리쯤 한쪽귀로 들어 한쪽귀로 내보내
던 그가 계향의 비난을 받은 지금처럼 주눅들고 의기소침해진적은 별로
없었다. 웅범은 그래도 지금까지 자기가 알뜰이나 억봉의 형제들을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해왔다고 믿어왔었다. 오늘에 와서 곰곰히 돌이
켜보면 친조카처럼 그들을 위한다던 자기의 생각은 물거품에 지나지 않
았고 제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자신을 위안하기 위한 허울이였었다.
단돈 한푼 변변히 보태주지 못하면서 오히려 그들한테 마음의 부담만 끼
쳐온 자기였다. 이제 기또의 편지와 귀중품함내막까지 알려지는 날에는
억봉이가 도끼를 들고 달려올지 모른다. 웅범은 자기가 이제는 주위사
람들한테 영 쓸모없어지고 우환거리가 되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
왔다. 웅범이 어슬렁어슬렁 자기네 집 대문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집안
에서 악을 쓰는 안해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언제 나한테 술을 먹였다구 나보구 술값을 내라는거야?》
설자의 목소리에 뒤이어 웅얼거리는 웬 남자의 목소리가 났다. 웅범
은 그 목소리의 임자가 월봉동내외술집주인이라는것을 대번에 알았다.
그 술집에 웅범은 적지 않게 빚을 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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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쿠―)
웅범은 얼른 담장뒤로 몸을 숨기였다. 어두워오는게 천만다행이였다.
찌꾸덩 대문이 열리더니 월봉동내외술집주인이 된욕을 퍼부으며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났다.
《어디 보자. 술값을 안 내면 내 이 집이라도 헐어갈테다.》
잠시후 월봉동내외술집주인은 사라졌으나 웅범은 담장모퉁이에 붙
어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제 집에
들어서면 설자는 악이 나서 자기보고 해보자고 그럴것이다. 요즘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밥만 축낸다고 안해는 여간만 바가지를
긁지 않는다. 세 자식을 거느린 어머니이고보면 무위도식하는 남편에 대
한 그의 욕설에도 일리가 없는것은 아니다.
《후―》
웅범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였다. 웅범은 자기 처지가 생각할수
록 기막히고 눈물이 났다. 이전부터 잘 알던 사람들과 동무들 그리고 일
가친척과 다름없는 사람들한테까지 버림받다싶이 된 자기였다. 해방
이 되였다고 남들은 날마다 좋아 어쩔줄 모르는데 자기 일은 나날이 꾀
여만 드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일본놈이 망했다는 소식에 웅범도
남만 못지 않게 좋아 춤을 추었었다. 장인이 짐을 싸가지고 도망치던 때
이제는 처가집 등쌀에서 벗어나게 되였다는 생각에 속으로 저 혼자 은
근히 좋아도 했었다. 하건만 오늘도 가정생활에서 경제권은 여전히
안해가 틀어쥐고있으며 자동차마저 송표한테 짤리워 이제는 일자리도 잃
어버리였다.
웅범은 밤깊도록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다 자정이 지나서야 집으로
들어왔다. 새벽닭이 울도록 이리 딩굴 저리 딩굴 하던 웅범은 담배나 피
우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앉았다. 온 집안식구가 잠든 방안에는 처와
자식들의 고르로운 숨소리가 넘치였다. 웅범은 굵다랗게 만 독한 써레
기를 한모금 깊숙이 들여빨았다가 연기를 내뱉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였
다. 웅범은 지금의 자기 처지가 괴롭고 안타까울수록 해방되기 얼마전
유미한테서 기또 마사오의 낚시대를 전해받은게 후회되였다. 그때 공것
을 탐내지 않았더라면 기또 마사오는 자기의 물건을 웅범한테 부탁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아니, 낚시질만 나가지 않았어도, 호기심에 강변의
버드나무밑을 파보지 않았더라도 지금같은 올가미에는 걸려들지 않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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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이제 배송기도면을 몽땅 지고 해탄로복구장으로 나간다 해도 배
송기도면습격에 자기가 전혀 관계가 없음을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이불우에 올방자를 틀고앉아 담배만 들여빨던 웅범은 벽시계소리에 와
뜰 놀랐다. 벽시계가 석점을 쳤다. 얼마 있으면 또다시 새날이 밝아올
것이다. 새롭게 찾아오는 이 하루도 또다시 한숨과 괴로움속에 모대겨
야 한다고 생각하니 웅범은 끔찍했다. 웅범은 강변의 버드나무밑에서 파
왔던 기또 마사오의 늄궤짝을 그 자리에 도로 내다 묻어버리고싶은 생
각이 번개치듯 떠올랐다. 그 궤짝을 아무도 모르게 제자리에 내다버리
면 그 누구도 웅범이 그 궤짝속의 귀중품함을 꺼냈다는걸 알리 없을것
이고 자기는 배송기도면과 기술문건들때문에 시달리는 괴로움과 공포에
서 벗어날수 있을것이다.
잠들었던 막내딸이 세게 기침을 했다. 웅범은 주런이 누워 곤히 자는
세 자식을 보자 가장으로서의 자기 책임을 새삼스레 느끼였다. 아버지
라고 자기를 기둥처럼 믿고있는 순진한 세 자식들까지 자기때문에 욕보
게 만들수는 없었다. 부모없는 설음을 어려서부터 누구보다 뼈아프게 느
껴온 웅범이다.
웅범은 아버지된 의무를 새삼스레 깨닫자 저도 모르게 벽시계를 바라
보았다. 벽시계바늘은 세시 반을 가리키고있었다. 웅범은 방안에 뽀
얗게 떠도는 담배연기를 뽑으려고 바라지를 열어제끼였다. 초저녁에 얼
굴을 내밀었던 초생달이 자취를 감춘 하늘은 캄캄하다. 이제라도 서두
르면 날밝기 전에 기또의 늄궤짝을 제자리에 내다묻을수 있다.
웅범은 방안동정을 엿보고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웅범
은 굳게 쇠를 잠그어두었던 허청간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웅범은
허청간에서 기또 마사오의 궤짝을 꺼내느라 낑낑거리였다. 궤짝을 깊숙
이 감추느라 그우에 올려놓았던 장작단이며 허드레물건들을 소리나지 않
게 치우느라 웅범은 적지 않게 시간을 허비했다. 웅범은 지게우에 트렁
크만 한 늄궤짝과 삽자루를 올려놓고 만약을 생각해 낚시도구까지 꿍져
가진채 살며시 허청간을 나왔다. 언제 잠을 깼는지 대문 여는 소리에 설
자가 웅범의 덜미를 덮치듯 소리쳤다.
《날두 채 밝지 않았는데 어딜 가우?》
웅범은 금시 간이 철렁 떨어지는것 같았다.
《고기 좀 잡으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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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잡으러 간다면서 웬 궤짝을 지구가우?》
《고기 넣을 통이지…》
《고기통이요?》
설자는 보이지 않던 늄궤짝이 이상스러운 모양이다.
《고기잡으려고 빌려왔던거야. 고기라도 잡아다 팔아야 밥벌이를
하지…》
웅범은 어물쩍해 자기 처를 업어넘기고 도적놈 도망치듯 자기 집을 빠
져나왔다. 웅범은 발자국소리를 내지 않고 주택지구를 지나느라 여간만
애를 쓰지 않았다.
다행히도 길거리에서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벌써 먼동이 터왔다. 웅
범은 인적없는 강기슭에 이르러서야 한숨이 나왔다. 웅범은 다리가
떨려 잠시 쉬려고 강기슭에 주저앉았다. 석대나 줄담배를 피우고나서도
웅범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웅범은 한참만에야 날이 너무 밝은
것 같아 가까스로 일어섰다.
웅범은 이른새벽 강기슭으로 걸어오는 사람을 보고 와뜰 놀랐다.
너무 가까운 거리여서 이제는 피할수가 없었다. 웅범은 다리가 뻣뻣해
져 굳어지고말았다. 웅범의 온몸에선 식은땀이 또다시 비오듯 했다. 강
기슭에 나타난 사람은 인기척을 내느라 우정 기침을 하며 웅범이쪽으로
걸어왔다. 웅범은 자기 운명의 선고를 기다리듯 삽을 든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웅범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은 푸릿한 새벽대기속에서 소리
쳐 물었다.
《외삼촌 아니야요?》
웅범을 찾는 사람은 억봉이였다. 웅범은 눈앞이 아뜩했다. 제철소
자위대장까지 하던 억봉인것만큼 이미 오래전에 모든것을 알아채고
은근히 감시해오다가 현장에서 붙들려고 따라온지 모른다. 작년가을
엔가는 반출증을 떼오지 않았다고 응당 실어내게 된 석탄마저 못 싣게
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저 혼자 끙끙 속을 앓으며 숨겨오던 모든 비밀
이 어쩔수없이 세상에 드러나기마련이다. 망신스러운 일은 자기를 빤히
아는 사람들한테서보다 낯모르는 사람한테서 당하기가 한결 낫다. 웅범
은 두다리를 신장대 떨듯 하면서 멍히 억봉을 바라보았다.
《오늘같은 날 뭣하러 이렇게 고기잡으러 나왔어요?》
억봉은 여느때없이 반가와하며 다가오더니 웅범의 손에 삽이 있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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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삽은 뭘하러 가지고나오셨나요?》
《지렁이를 좀 팔가 해서…》
《야, 오늘 고기잡으려고 든든히 준비를 하셨군요.… 지게까지 가
지고나온걸 보니…》
억봉은 웅범이 벗어놓은 지게며 그우의 늄궤짝을 보고 무척 놀라와했
다. 아마 그는 웅범이 고기를 잡아 지고 가려고 지게며 늄궤짝을 가져
온줄 아는 모양이다. 억봉은 늄궤짝을 올려놓은 지게를 다짜고짜로
자기가 둘러메더니 어서 집으로 가자고 했다.
《출근하기 전에 만나려고 신새벽에 가니까 외삼촌어머니가 벌써
고기잡으러 나갔다지 않아요. 그래서 난 외삼촌이 이리로 올줄 알았어
요.》
그러고보면 억봉은 집에 들렸다가 이곳까지 따라왔다. 웅범은 반정신
이 나가 억봉이한테 끌리다싶이한채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알뜰이도 와있었다. 장마철하늘처럼 늘쌍 흐려있던 안해의 얼굴마저 말
끔히 개여 상글상글 웃으며 웅범을 반겼다.
《글쎄 오늘이 당신 생일이라구 조카들이 술을 받아가지구 한상 차려
왔군요.》
웅범은 그제야 오늘이 자기가 귀빠진 날임을 알았다.
잠시후 알뜰이가 검은 소반에 음식을 차려가지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소반에서는 남비채 올려놓은 숭어탕이 김을 문문 피워올렸고 술병이 음
식그릇사이에서 목을 삐죽이 내밀고 서있었다.
《외삼촌, 그새 나 욕많이 했지요? 용서하라요. 배꼽 떨어질 때부터
내 성미 못돼먹은줄 외삼촌 잘 알지 않나요.》
억봉은 상앞에 마주앉아 웅범에게 술을 부었다. 웅범은 자기가 꼭 무
슨 꿈을 꾸는것만 같았다. 웅범이 술잔을 받아들지 못하자 알뜰이가 독
촉을 했다.
《빨리 들어요. 그래야 나두 한잔 붓고 가서 밥먹지요.》
《외삼촌, 빨리 들라요. 그새 우리들이 조카구실 못했길래 이번 외삼
촌생일엔 석봉이까지 모두 데리구 셋이 다 오려 했는데 석봉인 어제 도
에 회의가지 않았나요. 내 석봉이 몫까지 오늘 술을 부어드릴테니까 나
한테 노염 품었던걸 모두 푸시구 해탄로복구하는데 나오시라요. 외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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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탄로에 나오시구싶어두 푸들쩍만거리는 내 꼴 보기 싫어서 안 나
온다는걸 내 알아요.》
웅범은 이 순간에야 억봉이네 형제들이 지금 자기가 제철소에 일하러
나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있는가를 새삼스레 깨달았다. 알뜰이
가 눈을 상해 병원에 입원해있던 때 남의 부축을 받으며 세번씩 찾아왔
댔다는것도, 오늘 이렇게 아침일찍 생일상을 차려가지고 억봉이까지 찾
아온것도 자기가 제철소에 일하러 나오기를 바라서였다. 이네들은 자기
가 기능있는 사람이여서 제철소복구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기보다도
어려서부터 부모없는 설음을 함께 겪으며 친척처럼 가까이 지내던 사람
이 남들처럼 떳떳해지기를 바라는 소망이 절절하기에 이럴것이였다. 웅
범은 입에 가져가던 술잔을 상우에 내려놓고 점도록 억봉을 바라보았다.
억봉의 두눈은 맑고 순진하게 빛났다. 열정에 타번지는 그의 눈길과 마
주치는 순간 웅범은 격정이 터져올랐다.
《얘, 억봉아!》
웅범은 한손으로 억봉의 한쪽어깨를 꽉 그러잡으며 울음섞인 목소리
로 이렇게 말하고나서 더 말을 잇지 못한채 고개를 외로 틀었다.
그의 속마음을 알길없는 억봉은 웅범이 공연히 너무 격해하는것 같아
이렇게 말했다.
《외삼촌, 빨리 한잔 드시구 고기잡을 좋은 자리나 하나 대달라요. 물
고기잡는데야 외삼촌이 펄 날지 않나요.》
《뭐 고길?》
《예, 우린 오늘 운하리강을 수색해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전동기랑
많은 기계를 일본놈들이 도망가면서 운하리강에 내버렸대요. 그것들
을 찾아낼겸 물고기를 잡아 어죽을 좀 쑤려구요. 해탄로복구를 시작해
서 우린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했거던요.》
웅범은 넓은 하늘에서 내린 벼락이 면바로 자기 정수리를 때리는가싶
었다. 이제 건국청년돌격대에서 운하리강을 수색하면 자기가 기또의 늄
궤짝을 파낸 자리가 드러날것이고 그러면 어차피 모든것은 점차 꼬리가
잡히기마련이였다. 이제는 시간상문제였다. 자기가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어도 모든 사실은 밝혀질것이였다.
이제라도 모든것을 억봉이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했다. 지난날 못살던
로동자, 농민들을 위하는 새세상과 자기가 등질 필요는 꼬물만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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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 설자한테 장가들기 이전까지만 해도 자기 역시 가난한 사람이
였고 돈 없고 배고픈 설음을 누구보다 뼈아프게 체험하였었다. 웅범은
땅 없는 농민들한테 땅을 주고 로동자를 공장의 주인으로 내세워주는것
이 조금도 싫거나 배아프지 않았다. 장인이나 송표처럼 남으로 달아난
다고 해서 자기한테 리날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자기가 밝은
새세상을 등지고 살아야 하며 일가친척과 다름없는 억봉이네들과 칼에
피묻은 원쑤로 되여야 한단 말인가.
《억봉아, 난 너희들이 부어주는 술을 먹지 못할 죽일 놈이다, 죽일
놈…》
이렇게 부르짖는 웅범의 두볼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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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사랑의 열정

흔히 옷이 날개라고들 한다.
로체들의 날개는 불빛과 열도인지 모른다. 백도 안되는 낮은 온도로
해탄로 탄화실들을 말리우기 시작하자 그 빛과 열만으로써도 해탄로는
미꾸라지가 갑자기 룡으로 된 격이였다. 콕스를 구워내자면 아직도
반년이상 오랜 세월 부엌아궁에 불을 때듯 탄화실마다에 궁색스럽게 석
탄불을 피워 벽체며 기초에 스민 습기들을 말리워야 했고 탄화실벽체가
천여도로 벌겋게 달아야 했으나 싸늘하게 식었던 탄화실들에서 미적지
근한 열기가 느껴지고 희미한 불빛이 보이자 사람들은 여간만 반가와하
지 않았다. 별로 춥지 않은 날에조차 사람들은 탄화실앞으로 불을 쪼이
러 모여들었으며 역스러운 탄내를 피해 달아날 대신 코를 벌름거리며 탄
화실에 불때는 아궁을 들여다보는것이였다. 불속에 살며 불을 다루던 해
탄사람들은 불을 그리고있었다. 낮은 온도로 탄화실을 말리우는 작업은
불을 그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만큼 더 안달게 했다.
탄화실마다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은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이 사
람들의 마음속에 지펴놓은 애국의 봉화가 비쳐진것이기도 했다. 위대한
수령  동지께서 1946년 11월 25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제3차확대위원회에서 지펴올리신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의 불길은 전국
도처에서 활화산처럼 타번지기 시작했다. 건국사상의 기치아래 정주
기관구 로동자들은 국내탄으로 기차를 움직이는데 성공하였고 부족되는
석탄을 해결하기 위하여 채탄돌격대를 무어 안주탄광을 지원하는 애국
의 봉화를 추켜들었다. 황해도 재령군의 애국농민 김제원은 30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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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의 쌀을 나라에 바침으로써 애국미헌납운동의 불꽃을 일으키였다.
경애하는 수령 동지께서 1946년 12월 13일 애국농민 김제원
과 황해도 재령군 농민들에게 보내주신 감사문 그리고 1947년 1월 20일
정주철도종업원들에게 보내주신 감사문을 비롯하여 건국사상을 새 조국
건설의 실천에 구현하기 위한 제반조치들은 애국운동의 불길을 더욱 거
세차게 타오르게 했다.
이 애국운동의 불길속에 해탄로복구작업은 점점 더 열기를 띠여갔다.
로체복구작업은 이미 마감단계에 들어섰다. 정주철도종업원들의 애국적
발기를 지지하며 건국사상의 기치아래 애국운동을 더욱 적극 벌리기 위
한 제철소적인 종업원회의가 있은 직후 해탄로복구현장에서는 기계설비
정비사업에 모를 박는 한편 배송기를 살려내기 위한 건국결사대를 따로
조직했다. 이 결사대를 수리계장 억봉이가 책임졌고 태주먹이며 달모,
석봉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망라됐다. 해탄로에 다시 돌아온
알뜰이도 여기에 참가했다. 웅범이가 운하리강에서 가져온 궤짝속의 배
송기도면은 어둠속에서 손더듬하는 격이던 배송기정비작업에 불빛이 되
고 지팽이가 되여주었다. 고민끝에 웅범이도 해탄로복구에 나오게 되여
해탄로엔 또 한사람의 기능자가 늘어나게 되였다.
모두가 사기충천하고 기뻐했으나 그 기쁨은 값비싼것이였다. 생남
의 기쁨이 산모의 진통끝에 차례지는것처럼 해탄사람들은 기쁨의 대가
를 치르어야 했다. 산모에겐 고통끝에 기쁨이 차례지지만 그네들은
기쁨을 먼저 맛본 후에 값을 물어야 했다. 웅범은 기또의 궤짝을 내놓
아 기술도면과 문건들이 해탄로복구에 리용되게 하였으나 귀중품함은 아
직 자기 집 허청간바닥에 깊숙이 묻어두고있었다. 억봉은 욕망에 비해
능력이 딸리였고 지훈은 능력에 비해 지향이 확고하지 못했다. 알뜰이
와 달모도, 석봉이와 계향이도 저저마다 자기 모대김이 있었다. 건국사
상총동원운동의 기치아래 힘차게 벌어진 해탄로복구투쟁은 일제식민
지통치의 온갖 낡은 사상잔재와 악습을 뿌리뽑고 생기발랄한 새 민주조
선의 민족적기풍을 창조하는 과정이였으며 해탄로복구에 참가한 모든 사
람들이 민주조선건설의 참된 주인공들로 태여나고 사상과 문화, 륜리와
도덕, 생활풍습과 습성 등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자기들의 됨됨을 새롭
게 변모시키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웅범이가 십년만에 해탄로에 다시 돌아온것을 누구보다 반긴 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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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달모였다. 웅범이가 해탄로에 일하러 나온지 얼마 되던 어느날 달모
는 얼굴이 벌개져 출근했다. 달모는 아침모임때 고개를 수굿하고 뒤구
석에 앉아있었다. 작업조직을 하던 억봉은 아침부터 얼굴이 벌건 달모
를 보자 작업배치를 끝내고나서 그만 자리에 남으라고 했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달모는 속이 켕기는지 억봉이곁으로 어슬렁
어슬렁 다가왔다.
《왜 그러나?》
《아저씨, 술마셨지요?》
달모는 억봉이가 직방으로 들이대자 당황해하면서도 숨기려고는 하지
않았다.
《응… 한잔…》
《한잔이구 두잔이구 술마시구 출근하면 어떻게 해요?》
《그런게 아닐세.… 그럴만한 일이 있었네.》
달모는 어제 밤 웅범이와 회포를 나누려고 술자리에 마주앉았었다. 달
모는 해탄로복구가 진척될수록 압출기기능공인 웅범을 일터에 데려내오
지 못할가 해서 은근히 저 혼자 기회를 엿보아왔었다. 그러다 모처럼 길
에서 만나 자기 집에까지 데리고 갔었는데 계향이가 된벼락을 안기는 바
람에 이야기꼭지도 변변히 떼보지 못한채 그와 옹색스럽게 헤여졌었다.
달모는 계향이한테 망신당한 웅범의 속도 풀어줄겸 앞으로 손잡고 일을
잘하자고 타일러주려고 퇴근후 그를 자기 집에 데려갔던것이다. 자기딴
에는 목적이 있어 술을 마셨던탓에 달모는 떳떳했다.
《내 라웅범이한테 건국사상공세를 들이댔어, 해탄로에 돌아온걸
축하두 해주구. 앞으로 일을 잘하자구 언약두 하면서 말이야.…》
억봉은 달모가 웅범이까지 걸고드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약간 어성이
높아졌다.
《어제 마신 술이 아직 안 깼단 말이나요?》
《아니, 아침엔 해정을 하느라구…》
《축하해서 마시구 해정하느라 마시구… 아저씬 아직두 정신 못 차리
구 밤낮 술독에 어푸라져 살겠어요?》
억봉은 그러지 않아도 술때문에 한번 달모한테 단단히 말하려고 벼르
던터여서 아프게 못을 박았다. 며칠전에도 달모는 점심시간에 어딘가 가
서 탁배기를 마시고 왔다. 달모는 술이라면 병적으로 오금을 못쓴다.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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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마시지도 못하면서 술마실 일이라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며
술소리만 들어도 공연히 좋아서 입이 헤벌쭉해진다. 달모는 술먹고
주정을 한다거나 어디 가서 도리에 어긋나게 실수하는것은 없지만 술마
시는 일이라면 때와 장소도 체면도 가리지 않는다. 배송기정비 건국결
사대에서 나이로나 기술기능으로나 좌상격인 달모한테서 딱 하나 이것
이 흠이였다. 달모는 오늘따라 억봉이가 별스럽게 아침부터 시비를
걸고든다는 생각에 기분이 상했지만 지은 죄가 있어 변명에 급급했다.
《해정하느라구 한잔 한걸 가지구 뭘 자꾸 그러나… 이래뵈두 내 정
신은 맑아, 똑똑하단 말이야. 이제 보라구. 내 오늘 본때있게 일하
는걸…》
《똑똑하구 흐리구 아저씬 오늘 일할 자격이 없어요. 일본놈땐 술마
시구 일나와두 무방했지만 해방된 오늘엔 안돼요. 세상이 바뀐걸 몰라
요?》
《뭐, 뭐라구?》
억봉이가 되게 다긏자 달모는 두눈이 올롱해졌다. 달모도 술마시고 출
근하면 안된다는걸 모르지 않는다. 일본놈밑에서 살며 속상해 마시고 귀
찮아 마시던 술, 달모는 술이 타락과 영탄의 위안물이라는것을 알아도
자기나름으로 잘 알고있다.
《뭐가 뭐예요. 작년에 반동들이 배송기습격왔을 때 술만 마시지
않았으면 그놈들을 붙드는게 아니나요?》
억봉은 그때 자기가 달모와 함께 술마신걸 후회해서 이렇게 말했지만
달모는 그렇게 듣지 않았다.
《뭐라구? 나때문에 반동들을 못 붙들었다구? 자넨 그럼 그때 왜 술
마셨어? 말이라구 하면 다되는줄 알아?》
달모는 단번에 얼굴이 해쓱해졌고 푸들거리는 그의 입에서는 침방울
이 튀여나왔다. 달모는 억봉을 등지고 팩 돌아서더니 배송장밖으로
걸어나갔다. 작년 배송기사고때 술을 마셨기때문에 반동들을 붙들지 못
했다는 억봉의 말은 달모의 신경을 여간만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지 않
아도 그것때문에 늘 빚진 심정으로 살아오는 달모다. 이것때문에 달모
는 벌써 한두사람한테서 말을 듣지 않는다. 파혼후로 실금이 생기였던
억봉이와 계향이가 다시 가까와지기 시작하고 중매군격이였던 주학섭까
지도 돌아와 은근히 기뻐하던 어느날 계향은 술을 마신 달모에게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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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말했었다.
《작숙, 이젠 술 좀 적게 마셔요. 남보기 창피해 막 죽겠어요. 작년
작숙 생일날 내가 현장에 술을 가져간것두 잘못했지만 그때 작숙이 술
을 마시지만 않았으면… 그날 작숙이 억봉동무한테 우정 술을 먹였다는
말까지 돌아요.》
계향의 이 말은 달모한테 맑은 하늘에서 떨어진 하나의 벼락과도 같
았다. 달모의 속이 뜨끔해지라고 계향이자신이 지어낸 소린지 어떤지 딱
히 알수는 없어도 반동들이 오는 날 억봉이한테 우정 술을 먹였다면 자
기가 반동들과 내통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입당하고 돌아오던 날 주학섭이도 달모한테 이렇게 말했었다.
《형님, 술 좀 적게 자시우다. 형님이야 벌써 입당했어야 할게 아니
나요. 작년에 반동들이 배송기습격왔을 때두 술을 자시구있었댔다면
서요?》
그런데 이번에 억봉이한테서까지 이런 말을 또 듣고보니 달모는 벌컥
속이 뒤집히였다. 좋은 말도 세번 들으면 귀맛이 없어진다고 했다.
달모는 좋지도 못한 꼭같은 욕을 벌써 세사람한테서 듣는다. 달모는 계
향이도 학섭이도 억봉이도 모두 자기를 걱정해서 이런 말을 한다는걸 모
르지 않았고 술때문에 자기가 지금까지 리익보다 손해본게 많다는것을
모르지 않는다. 술때문에 남의 시비를 들을 때마다 달모는 다시 술을 마
시지 않는다고 맹세도 했고 자기자신도 안타까와 가슴을 쥐여뜯은적이
한두번 아니였다. 하지만 그때뿐이였다. 술이 생기거나 술마실 일이 생
기면 달모는 눈물흘리며 다지였던 맹세를 까맣게 잊어버리군 했다.
달모는 너무도 일찍 술을 배웠다. 달모는 집안살림이 어려워 열살 어
린 나이때부터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어야 했다. 지주집에서 머슴을 살
다 읍으로 도망쳐나와 달모가 취직한 곳은 양조장이였다. 그때부터
달모는 장가들 때까지 근 십년이나 양조장에서 화부노릇을 했다. 먹을
것을 다루는 곳이여서 정 배고프면 술밥이라도 채먹어 주린 배를 달래
일수 있었으나 한겨울의 추위만은 어쩌는 수 없었다. 달모의 일터는 사
시장철 밖이였다. 달모는 박달나무도 얼어터진다는 모진 겨울날에도 이
른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홑옷 하나를 몸에 걸치고 밖에서 술가마에 불을
땠다. 손이 곱아 불에 손을 쬐면 등이 시리고 등을 아궁쪽에 돌려대면
무릎이 찼다. 그런대로 낮이면 술가마아궁지신세라도 질수 있지만 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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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그렇지 못했다. 술을 만들기 위해 불을 다루는 소년화부였던 달모에
게 당시 제일 그리웠던것은 자기 몸을 덥혀줄수 있는 따뜻한 온기였다.
추워 덜덜 떠는 달모에게 어느날 양조장에 술을 실러 왔던 늙은 마부가
이렇게 말했다.
《이녀석, 술가마에만 불을 때느라구 그러지 말구 네 입에도 불을 좀
때려무나.》
《그럴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요?》
《이런 고지식한 녀석 봤나. 사람몸엔 술이 불이야. 한고뿌 마셔보지,
단번에 속이 뜨뜻해지지 않나.…》
달모는 그날 호기심에 정말 술 한고뿌를 몰래 마셨다. 속이 메슥메슥
하고 머리가 핑 돌았지만 그래도 몸은 정말 후끈해졌다. 그때부터 달모
는 추위를 덜기 위해 몸에 불을 때느라고 쓴약먹듯 조금씩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몸을 덥히느라 술을 배웠지만 그후부터 달모는 생활의 고달
픔을 잊기 위해서도 마시였고 기분이 좋아서도 마시였다. 그리하여
달모는 점차 술이 몸에 인박히고말았다. 달모는 장가들어 양조장일을 그
만둔 후에도 술버릇만은 버리지 못했다.…
달모는 성이 나서 푸들쩍거리며 배송장밖으로 뛰여나왔으나 갈 곳이
없었다. 한생을 로동으로 살아온 달모에게 있어서 일하지 말라는 소리
보다 더한 욕은 없었다. 조금만 가만있어도 오금이 쑤셔 아무것이나 손
에 잡히는대로 일을 안하고는 못 배기는 그다. 이곳 해탄로에는 그 어
디에 가나 그의 피땀이 스미지 않은 곳이 없다. 이곳 해탄로에서 일자
리를 얻기 위해 달모는 스무키로나 되는 해탄로장입구 무쇠뚜껑을 두개
나 지고 해탄로주변을 뱅뱅 도는 힘내기시험도 쳤고 겨우 벌어놓은 고
정인부자리에서 림시 직공으로 올라가기 위해 앓는 자식에게 약 한알 못
사먹이면서 모은 돈으로 때려죽이고싶은 일본놈 수리계장한테 닭마리와
술되를 사다 먹여야 했으며 직공이 되기 위해 해탄과장네 변소간도 쳐
주고 발씻을 물도 떠다주어야 했었다. 달모의 지난 로동생활의 매 자욱
자욱은 한숨과 피눈물로 얼룩졌고 그 매 하루하루 로동의 권리는 자신
의 온 정력과 육체를 바쳐 피땀으로 벌었던 고달픈 생존의 권리였었다.
해탄로주변을 어정거리던 달모는 인적없는 4호해탄로옹벽으로 갔다.
4호해탄로탄화실에서는 아직 석탄재도 파내지 못했다. 강시처럼 되여버
린 4호해탄로옹벽옆에 우두커니 서있자니 달모는 자기 처지가 버림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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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탄로와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서글퍼졌다. 달모 나이는 이
제 멀지 않아 쉰이다. 거의 반백을 살았으니 이제는 자기 인생을 마무
리할 때였다. 얼마 남지도 않은 인생의 말기에 와서 젊은 사람들한테까
지 체신머리없다는 소리를 듣고보니 달모는 자기로서도 자신이 안타까
왔다.
(애당초 술을 배우지 말았어야 하는건데…)
달모는 모든것이 술때문이라는 생각에 저 혼자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어린시절에 자기한테 입에 불때라고 귀띔해주던 늙은 마부가 생
각났다. 그 늙은 마부가 아니였으면 달모는 열소리 하던 어린 나이에 그
렇게 일찍 술을 배우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망할 녀석! 제 살만큼 다 살구두 아직 철이 안 들어 젊은것들한테 욕
먹어.)
달모는 자신을 꾸짖으며 자기 손으로 자기 볼따귀를 철썩 갈기였다.
쩍소리가 나며 볼이 얼얼해왔으나 달모는 다른 볼편을 다시한번 때
리였다.
(이녀석! 정신들지 못하겠어?)
달모는 자기자신에게 화를 내느라고 자기뒤를 따라왔던 억봉이가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고있다는걸 알지 못했다.

그날부터 달모는 누구와도 휩쓸리지 않았다. 온종일 가야 말 한마디


없이 저 혼자 수걱수걱 일만 했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 가서 제스스로
자기 뺨을 치는 달모를 본 억봉이여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자기자신도
얼마나 안타까우면 그럴것인가. 억봉은 달모의 속을 풀어주어야겠다
는 생각에 기회만 엿보았으나 달모는 좀해 곁을 주지 않았다.
어느날 억봉은 달모가 혼자 일하는것을 보고 슬그미 그한테로 다
가갔다.
《아저씨, 담배 한대 피우고 일하라요.》
억봉은 담배곽을 내밀었으나 달모는 쳐다보지도 않은채 뒤로 돌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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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니 저쪽으로 가버리고말았다. 달모의 앵돌아진 속을 풀려면 무슨
수가 있어야 한다.
억봉은 할수없이 동생 석봉의 힘을 빌기로 마음먹었다. 석봉은 도에
회의갔다 돌아와 배송기복구결사대에 망라된 이후부터 달모와 퍽 가까
와졌다. 석봉은 달모의 기술을 배우려고 어디 가나 그림자처럼 따라다
녔으며 그의 마음을 사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래선지 두사람은 통했다.
점심시간이 되였을 때 억봉은 동생을 불렀다.
《얘, 달모아저씰 네가 좀 맡아라.》
석봉은 고개를 수굿한채 아무 대꾸 안했다. 입학원서때문에 형과
다툰 이후 석봉은 기능공학교입학을 포기했으나 아직 속이 내려가지 않
았다. 석봉은 형이 봉산처녀 차진옥까지 걸고든걸 생각하면 지금도
분해한다. 오늘은 그래서라기보다 형이 달모더러 술마시고 일을 나왔다
고 다근것때문에 일종 가책을 느껴서였다. 석봉은 달모한테서 기능을 하
나라도 더 많이 배우려고 그제는 남모르게 술까지 한되나 받아다주었다.
달모가 오늘 그 술을 먹고 나왔을는지도 모른다.
형제는 한참이나 말없이 마주서있었다. 이때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주학섭은 일에 몰려 지금까지 변변히 놀리지 못한 입
이 근질거리는지 억봉이네 형제곁에 걸음을 멈추더니 석봉의 꼬리를 물
고 늘어졌다.
《석봉이, 솔직히 말하는게 좋겠는데…》
오전작업을 끝낸 배송기복구 건국결사대원들은 낮밥을 먹으려 흩어지
려다말고 호기심에 주학섭과 석봉을 갈마보며 공연히 벙글거리였다. 주
학섭이 누구한테 치근거리기 시작하면 웃을 일이 생기기마련이다. 석봉
은 주학섭의 놀림가마리가 되지 않으려고 각성을 높인채 그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자네 정말 그렇게 부처님처럼 입다물고 아닌보살할텐가?》
주학섭은 노엽다는듯이 뒤짐을 지고 재판관다운 표정으로 석봉을
바라봤다.
《내 원참… 뭘 말하라는거나요?》
석봉의 침묵전술은 주학섭의 드센 입도끼질에 깨지고말았다.
《그러면 못쓰지… 남모르게 할일이 있구 그러지 말아야 할 일이 따
로 있는 법인데… 응당 남이 다 알게 해야 할 일을 그렇게 도적질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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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쓰나 말이야.》
주학섭은 눈을 흘기며 혀까지 찼다.
《내 원참…》
석봉은 어제부터 주학섭이 자꾸만 치근거리는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그를 피하려고 했다.
《내 지금까지 석봉이가 그런줄 몰랐는데 우멍스럽기 그지없거던. 도
적장가들구 뻑 수염을 씻는게…》
도적장가라는 말에 석봉은 발목을 잡히우고말았다.
《내가 언제 도적장가들었다구 그러나요?》
석봉은 대번에 얼굴이 빨개져 항변을 했다.
《저거 얼굴 붉어지는걸 보지… 내 그럼 증거를 댈가?》
주학섭은 능글거리며 자기 저고리 안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편지봉투 하
나를 꺼내들었다. 배송장안사람들의 호기심어린 눈길은 주학섭이 꺼
내든 봉투에로 몰방질리였다.
《증거를 대라 했으니 내 편지를 읽지.》
주학섭은 두눈을 끔뻑끔뻑하더니 편지봉투에 적힌 주소를 읽기 시작
했다.
《에…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둬걸음 떨어져 주학섭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서있던 석봉은 비호처럼
날쌔게 달려들어 그의 손에서 봉투를 나꿔챘다. 석봉은 누구도 어쩔 사
이없이 편지를 뺏어가지고 꽁지가 빳빳해 달아났다. 주학섭은 석봉을 따
라가며 기겁해 소리쳤다.
《이녀석아, 편지 주지 못하겠니? 그건 내 편지다. 네 색시한테서 온
게 아니야. 우리 처남한테서 온거라는데…》
주학섭은 흘러내리는 바지를 한손으로 붙잡고 석봉을 따라가며 우습
강스레 소리를 질렀다. 작업장엔 짜그르르 웃음이 터지였다. 사람들
은 주학섭이 사람들을 웃기느라 그러는줄 알았으나 정말로 그의 처남한
테서 온 편지였다. 이날 주학섭은 석봉을 놀려주려다가 처남의 편지를
잃어버리였고 석봉은 지금까지 숨겨오던 비밀을 많은 사람앞에서 제스
스로 폭로하고말았다.
억봉은 동생이 토지개혁을 총화짓고 제철소로 돌아오던 때 녀자네 집
안사람들한테 발목잡혀 장가들었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석봉은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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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먼저 결혼해서 안될 동생의 립장때문에 지금까지 이 사실을 숨기
여왔고 억봉은 동생을 장가보내며 형구실을 하지 못한 자책때문에 입다
물어왔을뿐이다.
석봉은 대사를 이틀 앞두고서야 자기의 잔치날자를 누이한테 알려왔
었다. 억봉은 동생이 지금까지 집안사람 누구와도 아무 의논 없다가 결
혼식에 오라는 초청장을 보내듯 편지만 한장 달랑 보내온것을 보고 화
가 나서 잔치에 가지 않았다. 벼락치듯 동생의 잔치를 준비하자니 손에
쥔것이 너무도 없었고 시간도 모자랐다. 두 부모가 한분도 앉아있지 않
는데 형이라는게 동생을 장가보내며 옷이라도 한벌 해주어야 할게 아닌
가. 동생은 둘째치고 제수한테 부끄러운노릇이였다. 손우누이와 형이란
게 시퍼렇게 살아있으면서 제수한테 인사를 차리지 못하게 되였으니 망
신도 이런 큰 망신이 없었다. 부모님들이 계시지 않는것만큼 녀자한테
축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성과 성의를 다해야 할 형이였다.
억봉은 잔치날자를 미리 알리지 않은 석봉을 괘씸스러워하였지만
동생의 깊은 속을 리해 못하는것은 아니였다. 형보다 먼저 장가가겠다
고 말하기도 딱하지만 궁색스러운 집안살림살이를 뻔히 알면서 미리 알
려야 누이나 형한테 부담을 주게 될것 같으니까 그랬을것이였다. 잔치
야 어떻게 하든 서로 의좋게 잘살면 되는것이고 또 녀장수같은 진옥이
가 성미 꽁하고 건강도 별로 좋지 못한 석봉이한테 그만하면 잘 어울린
다고 할수도 있었다.
억봉은 충분한 아량을 갖고 석봉의 립장을 리해하며 동정하면서도 한
편 서분하고 괘씸했다.
지난봄 억봉은 《걱정말라》 주학섭을 제철소에 데려오려고 그의
고향에 찾아갔다가 우연히 동생을 만나 함께 밤길을 걸으며 그한테 진
옥과의 관계를 진심으로 물은적 있었다. 그때 동생이 조금이라도 형을
존중했더라면 그저 친한 동무사이라고 그렇게 딱 잘라 말하지 않았을것
이고 그때 동생의 결혼의사를 비슷이라도 알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석봉이 장가들고 저 혼자 집에 돌아왔을 때 알뜰은 그런 법이 어디 있
냐면서 당장 색시를 데려오라 했고 억봉은 집에서 잔치를 다시 하자고
하였으나 석봉은 해탄로나 복구한 후에 잔치를 해도 다시 하며 안해도
그때에 가서 데려오겠다고 했다. 석봉의 고집이 보통 아닌데다 진옥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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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같은 립장이여서 알뜰이와 억봉은 지고말았다.
억봉은 동생의 결혼후로 생각이 많았다.
석봉은 크고작은 여러 일에서 억봉을 무시하려들었다. 동생이 형
모르게 하는 일은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설사 알게 하는 일이라 해도 석
봉은 형의 조언과 충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어떤 때는 내놓고 간
섭을 시끄러워하였다. 그런가 하면 반발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그 실례
가 기능공학교입학문제때문에 생겨난 충돌이라고 할수 있었다. 동생
에 대한 억봉의 영향력은 이전과 달랐다. 이제는 모두 어른들이 된것만
큼 동생과의 관계가 어린시절과 같을수 없었지만 억봉은 요즘 이 간격
이 너무도 빨리 커지고있는데 아연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날 석봉이한테는 난데없이 전보 한장이 날아들었다. 석봉이한테 차
진옥이 보낸 그 전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낮 2시차로 황주역 통과. 황주역에서 대기 요망. 진옥

이 전보는 석봉이가 보기 전에 억봉이 손에 먼저 들어왔다. 통계원이


석봉이한테 주라면서 억봉에게 전한것이다. 전보를 받아든 억봉은 어처
구니가 없었다. 열흘이 멀다하게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도 무엇이 부
족해 이렇게 전보까지 날리는지… 차진옥의 요구대로 하자면 석봉은 하
루 공가를 놀아야 한다. 낮 2시에 황주역을 지나가는 그를 만나러 가자
면 아침통근차를 타고 황주에 가야 하고 저녁통근차를 타고서야 돌아올
수 있다. 한공수 로력이 딸려 쩔쩔매는판에 기차타고 지나가는 그를 잠
간 만나보라고 석봉이한테 하루 공가를 줄수는 없다.
《흥!》
억봉은 코방귀를 뀌고나서 전보용지를 작업복 웃주머니에 구겨넣었다.
전보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였던 억봉은 다음날 석봉이가 통계원한테
서 이야기를 듣고 자기한테 온 전보가 있냐고 물었을 때에야 생각이 났
다. 작업복주머니를 뒤지였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전보가 없었다. 어디
서 흘린 모양이였다. 억봉은 전보를 잃어버린게 미안해 전보내용을
동생한테 전했다.
《별게 아니야. 너의 색시한테서 왔는데 오늘 낮 2시차로 황주역을 지
나가니 역에서 기다려달라는 시시한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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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구 빨리 줘.》
석봉은 형이 자기를 골리려고 그러는줄 알았는지 기름묻은 장갑을 매
만지며 사정했다.
《내가 그 전보 감췄다 국끓여먹겠니, 떡해먹겠니. 너한테 주려구 주
머니에 넣구다니다 잃어버려서 그러지…》
《다야?》
석봉은 자기한테 온 전보를 형이 정말 잃어버렸다는것을 알고 벌컥 화
를 냈다. 석봉은 전보 잃어버린것을 자기 인격에 대한 그 무슨 무시나
모욕처럼 받아들이는것이였다.
《전보내용이 그거 다라는데… 낮 2시차로 황주역 통과. 황주역에서
대기 요망. 진옥.》
억봉은 전보내용을 글자 하나 안 틀리고 곱씹어 다시 전했으나 석봉
은 분기를 누르지 못했다.
《남의 전보 가졌으면 빨리 줄게지 왜 끼구있다 잃어버리나 말이
야?》
성을 내면서도 석봉의 눈길은 작업장벽에 걸린 벽시계로 향했다.
배송기복구정비결사대를 조직하던 때 일본놈 해탄과장방에 걸렸던 벽시
계를 작업장에 내다놓았다. 벽시계는 낮 1시 30분을 가리키고있었다.
억봉은 벽시계를 바라보며 분해하는 동생의 눈길에서 그가 전보내용을
미리 알았더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황주역에 나갔으리라는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어쩌는 수 없다. 아무리 날고 뛰여도 기차가 지나가기 전에 삼
십리밖에 있는 황주역까지 가닿는 재간이 없다. 억봉은 동생한테 미안
한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정 보고싶으면 제 찾아오지 않으리.》
부끄러울 땐 저 혼자 두덜거려도 낫다. 무안함을 덜려고 억봉이 혼자
소리처럼 하는 말에 석봉은 약이 오를대로 올랐다.
《형, 정말 나보군 계속 그럴내기야?》
석봉은 별로 크지도 않은 소리로 쓰겁게 이렇게 따지더니 획 돌아서
버리고말았다.
동생의 반발을 통해 억봉이가 받는 심리적자극은 작지 않았다. 이 순
간에야 억봉은 지금까지 자기가 동생 석봉이와 달모와의 관계에서 느껴
오던 야릇한 불안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희미하게나마 깨닫는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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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이자신은 지금 배송기복구라는 무거운 짐에 실려 오직 하나 그
것밖에 모르며 그 무엇엔가 다급히 쫓기는 심정으로 살고있었으나
동생은 사랑에 가슴을 불태울 정신적인 여유가 있었다. 배송기복구
결사대원일뿐아니라 공장민청부위원장인 동생이 지고있는 부담은 이만
저만 아니였다. 남보다 땀도 많이 흘리고 밤낮 회의와 강습에 다니
면서도 석봉은 자기가 맡은 작업량을 어김없이 해냈고 자기 안해에
게 한주일에 한통정도는 편지를 썼으며 책도 많이 봤다. 자기 생활
의 참된 길동무를 사귀게 되면서부터 석봉의 가슴속에서는 사업과
생활에 대한 의욕과 열정이 부글부글 끓고있었다. 억봉은 동생처럼 자
기가 생활의 참된 길동무를 아직 찾지 못했을뿐아니라 감정이 메마
르고 내면생활이 단순하며 사업과 일에 대한 사기와 열정 역시 높지 못
하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달모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자기가 배송기복구정비작업을 행정적
으로 책임지고있지만 기술과 기능은 달모보다 어리였고 생활경험도
없었다. 사람들을 조직하고 동원할줄 아는 능력과 수완이 있는것도
아니였으며 사람들한테 존경받을만 한 지식과 인품을 갖고있지도 못했
다. 그러니 수리계장으로, 배송기복구정비책임자로 자기가 제대로 구실
할수 없는것은 당연했다. 복잡한 배송기속내를 알기도 힘들었지만 그보
다도 사람들을 다루기는 더 어려웠다. 한가마밥을 먹으며 한이불속에 자
란 동생과도 티각태각하면서 어떻게 제나름의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
을 속속들이 리해하고 이끌수 있단 말인가.
억봉은 이때처럼 자기의 됨됨과 능력을 두고 뼈아픈 자책과 환멸을 느
껴본적 없었다. 사람은 사회적으로나 가정생활에서나 응당 자기가 서야
할 위치에 서야 할것이고 그 위치에 서있을만 한 힘과 능력을 가져야 했
다. 사회적으로 손우사람답게 처신해야 가정에서도 동생들한테 손우
사람대접을 받을것이고 사회적으로 남한테 존경받을만 한 힘과 능력이
있어야 남보다 앞서나가면서 남을 이끌고나갈수 있을것이다. 아무리 참
된것이라 할지라도 지향을 갖는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참된 지향을 실현
할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진정 참된 인간이다. 남의 힘과
도움은 언제나 확실하지 못하다. 부족한대로, 작은대로 가장 확실한
것은 자기자신에게서 찾는 힘이였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답게 살자면 마
땅히 자기 힘을 키워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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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은 지난날 남이 시키는 일을 마지못해 해오던 자기가 해방이 되
여 자위대장노릇도 하고 건국결사대 대장으로 배송기복구정비사업을 책
임지게 되면서부터 긍지와 자부심이 생기고 열정이 솟구쳤지만 해방이
가져다준 이 새로운 신임과 기대를 감당해낼만 한 힘과 능력이 어느모
로 보든지 자기한테 부족하다는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것이였다. 억
봉은 동생이 사라진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움직이지 못했다.

아침에 계장들의 회의에 갔다가 점심때가 되여 작업장으로 돌아온 억


봉은 여느때없이 일터가 멀끔해진데 놀랐다. 창턱에는 활짝 핀 노란 국
화화분이 놓이고 화독주위에는 꽃밭둘레를 하듯 벽돌을 놓고 회칠까지
해놓았다. 억봉은 출입문쪽에 무둑히 쌓여있는 작업장바닥을 닦아낸 톱
밥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누이가 아침저녁으로 작업장을 청소하지만 이렇게 점심참에 한적은 별
로 없었다. 작업장 구석구석에서는 누이의 솜씨와 다른 색다른 체취가
풍기는가싶었다.
모두 점심을 먹으러 갔는지 작업장은 텅 비여있었다. 배송기정비가 끝
나가는것만큼 이제부터는 작업장을 잠시도 비워선 안된다고 단단히
일렀는데 한사람도 남아있지 않는것이 이상했다. 머리우에서 흥얼흥
얼 노래하는 녀자소리가 났다. 노래소리는 작업장 한쪽구석에 세워놓은
천정기중기에서 울려왔다. 누군가 천정기중기를 청소하고있었다. 유
리를 끼우지 않은 천정기중기창문으로 보이는 하얀 수건 쓴 머리는 아
무리 봐도 누이가 아니였다. 억봉은 천정기중기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
렀다.
《게 누구요?》
억봉의 고함소리에 천정기중기에서는 《아이, 깜짝이야.》 하는 호들
갑스러운 소리가 나더니 창문으로 녀자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계향이가
목에 길다란 목도리를 휘휘 둘러감고 눈을 동그라니 뜬채 놀란 표정으
로 내려다보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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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거기 뭘하러 올라갔소?》
계향은 억봉이 왝왝 하는게 못마땅스러운지 한참이나 말똥말똥 내려
다보더니 반발하듯 큰소리로 대답했다.
《청소하러 올라왔어요.》
《청소? 누가 청소하랬소? 누가 거기에 올라가라 했는가 말이요? 당
장 내려오지 못하겠소?》
계향은 억봉이가 하도 다급히 몰아대는 바람에 겁이 나 천정기중기에
서 내려왔다. 계향은 자기가 천정기중기를 잘못 청소해 무슨 사고라도
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숙이고 땅만 내려다봤다. 억봉은 계
향이와 단둘이 가까이에 마주서자 공연히 심사가 뒤틀리였다.
《동무, 여기 뭘하러 왔소?》
퉁명스레 내쏘는 말에 계향은 다소곳이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실습하러 왔어요.》
계향은 할끔 억봉이를 바라보고나서 두눈을 내리깔며 새침해 대
꾸했다.
《실습?》
억봉은 요즘 기능공양성소 학생들이 제철소안에서 실습중이고 해탄로
에도 오게 됐다는것을 모르는바 아니였으나 계향이가 이렇게 오리라고
는 생각지 못하였었다.
《동무가 여기 와서 무슨 실습을 한단 말이요?》
《천정기중기를 실습하지요.》
계향이한테서는 겁먹고 당황해하던 빛이 어느샌가 말끔히 가셔지고말
았다. 그대신 잔뜩 옹송그리고 가시돋군 고슴도치와 흡사한 앙큼하고 도
도한 기운이 그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흘렀다.
《실습을 한다? 승인두 받지 않구?》
《왜 승인을 안 받아요. 책임자의 지시가 있었는데…》
《책임자의 무슨 지시가 있었단 말이요?》
《실습을 보장하라는 지시지요.》
《아니, 이 동무가… 여기 책임자는 나요.》
《우린 동무보다 더 높은 책임자를 만났어요.》
계향이가 수그러들지 않는걸 보면 화공부전체를 책임지고있는 차지훈
을 만난 모양이다. 기능공양성문제는 부장이 직접 맡아본다. 또 어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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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장들의 협의회뒤끝에 차지훈한테서 기능공양성소 양성생 한명이 수리
계로 실습하러 온다는걸 말들었지만 계향이가 록록히 휘여들려 하지 않
아 우정 모르쇠를 했다.
《그럼 더 높은 책임자한테 가서 기중기를 타시오.》
그날 오후 억봉은 새로 작업포치를 하면서 계향은 전혀 념두에 두지
않았다. 누이더러 창고에 가서 차축유 두 초롱만 타오라고 말했을뿐이
였다. 계향은 알뜰이와 함께 나란히 기름초롱을 들고갔다. 목에 긴
털수건을 둘둘 감고 강동강동 걸어가는 그의 뒤모습은 이상하게도 억봉
의 눈을 찔렀다. 그의 걸음걸음은 무척 탄력있었고 온몸에선 젊음과 생
기가 넘치였다. 창고에 갔던 두사람은 얼마후 빈초롱을 들고 풀이 죽어
돌아왔다.
《뭐, 기름이 하나도 없대?》
《얼마 있어야 차축유가 들어올것 같다더구나.》
《어제 창고장 만났을 때 한도람통이나 있다구 했는데…》
《오늘 오전에 마지막 한초롱을 다 내줬다더라.》
알뜰은 억봉이한테 자기 말이 참말이라는것을 보증하라는듯 계향을 돌
아봤다. 계향은 알뜰이보다 서너걸음 뒤에 떨어져 억봉이쪽을 반쯤
등지고 모꺾어 서있었다. 억봉은 계향의 눈길이 자기쪽으로 향해지자 이
상하게도 온몸이 부자연스러워져 모자채양을 우로 밀어올리느라 손이 자
기도 모르게 머리우로 쑥 올라갔다. 손둘 곳을 몰라 취한 군동작에 그
의 이마에는 기름얼룩이 졌다. 알뜰은 머리에 썼던 수건을 벗어 동생한
테 내밀었으나 억봉은 자기의 작업복 팔소매로 뻑 문질렀다. 억봉의 얼
굴에는 더욱 우습강스레 기름광대가 그려졌다. 이것을 알리 없는 억봉
은 자기 분김에 두덜거리였다.
《기름도 없이 어떻게 일하라는거야.》
억봉의 말은 사실이였다. 모레부터는 부분품들을 조립해야 했고 그러
자면 차축유가 있어야 했다. 계향은 자기때문에 억봉이가 공연히 화를
낸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색이 변하더니 출입문밖으로 뛰여나가고말았다.
《젠장―》
억봉은 철없는 아이들처럼 노는 계향이보다도 자기자신에 더 화가 났
다. 억봉은 어제 창고에 가서 차축유를 가져오지 못한게 후회되였다. 제
철소복구가 본격화되자 얼마 되지 않던 창고의 자재와 설비부속들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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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이 나기 시작했다. 달라고 손내미는 사람은 많아도 볼트 하나라도 창
고에 가져다주는 사람은 없었으며 아직 건국의 첫걸음을 뗀데 불과한 나
라의 경제형편은 제철소복구와 정비에 필요한 자재와 설비들을 제대로
보장하기 힘들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기름을 기다려 팔짱끼고있을수는
없었다. 생각난김에 대책을 취해야 했다.
그날 저녁이였다. 일이 끝나자 억봉은 연유창고로 가는 기차굴에
가려고 홰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기차굴에 기름통을 실은 화차가 박
혀있었다. 일반기름창고로 가져가야 할 화차를 연유창고로 잘못 끌어왔
다가 돌려보내지 못한채 해방이 되였는데 각종 기름통들은 한동안 화차
에 실린채 버림을 받았다. 해방후 화차는 끌어냈으나 기름통들은 그 자
리에 부려놓았다. 이때부터 기차굴은 주인없는 기름창고가 되여버리
였다. 약삭바른 장사군들이 어떻게 이것을 냄새맡았는지 제철소구내
에 기여들어 기름통들을 야금야금 굴려내갔고 제철소복구가 시작되면서
이곳저곳에서 기름을 가져다 썼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곳에 기름이
적지 않았었다. 억봉은 사람들을 데리고갈가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으
나 그곳에 다녀온지 오래 되는것만큼 우선 정찰삼아 자기 혼자 가보기
로 했다.
하늘에선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잔뜩 흐린 날이여서 옆에서 누가
따귀를 때려도 모를 정도로 지독스레 캄캄했다. 기차굴이 가까운 산기
슭에 다가설수록 사위는 더욱 어두워지는가싶었다. 억봉은 불망치에 불
을 달고싶었으나 굴안에 들어가 켜려고 레루를 따라 발더듬을 하며 굴
가까이로 한걸음한걸음 다가섰다. 밤에 와보니 여간만 외진 곳이 아니
였다. 억봉은 무시무시한 생각까지 들었다. 해방직후 일본군대패잔병들
이 변장을 하고 이 근방 어디선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어 옷을 벗겼다
고 했었다. 그리고 해방되기 전전해에는 이 근방에서 칼에 맞아죽은 녀
자의 시체가 나졌었다. 한발로 레루를 짚고 한발로 침목을 밟으며 조심
조심 걸어가던 억봉은 발을 잘못 짚어 넘어지고말았다.
《빌어먹을…》
억봉은 굴에 가서 켜려던 홰불을 켰다. 굴아구리에 이르니 매캐한 기
름탄내가 쿡 코를 찌르고 굴안에서 타번지는 한점 불빛이 보이였다.
《아뿔싸!》
억봉은 홰불을 들고 굴안으로 들어갔다. 굴안사람은 억봉이가 퍼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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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가도록 인적을 느끼는것 같지 않았다. 굴아구리쪽을 등지고있던 그
가 갑자기 홰불을 높이 추켜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반갑게 소리
쳤다.
《언니야요?》
굴속의 녀인은 아마도 억봉을 자기 동무로 안 모양이였다. 억봉이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녀인은 투정부리듯 말했다.
《언니, 왜 이제야 와요?》
녀인의 목소리는 굴안에 쩌렁쩌렁 울리였다.
억봉은 어처구니없어 마주 물었다.
《동무 누구요?》
억봉의 물음에 녀인은 후닥닥 놀라며 허리굽혀 땅에서 무엇인가 집어
들더니 굴이 떠나갈듯 쨍하게 울리는 소리로 마주 물었다.
《동문 누구예요?》
억봉은 자기가 물어보는 말에 물음으로 대답하는게 괘씸해 상대방을
멸시하듯 대답했다.
《사람이요.》
억봉이 앞으로 한걸음 다가서자 녀인은 악쓰듯 소리를 내질렀다.
《다가서면 던지겠어요.》
홰불을 앞으로 쑥 내밀고 굴벽을 등진채 서있는 녀인의 손에는 수류
탄같은것이 들려있었다. 목에 휘휘 목도리를 감고 헝클어진 머리로
서있는 녀인의 긴장된 동작에서는 서리발같은 찬기운과 가슴섬찍해지는
적의가 느껴졌다. 억봉은 온몸이 오싹해졌다. 두사람은 홰불을 창처
럼 앞으로 내밀고 서로 상대방을 경계하며 마주서있었다. 두사람은
서로 상대방을 노려보며 움직이지 못했다. 긴장된 순간과 순간은 침묵
속에 흘러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억봉은 긴장된 마음에 다소 여유가 생
기였다. 억봉은 홰불을 들고 굴벽에 의지해 서있는 녀인이 웬일인지 낯
익어보이였다.
《난 저… 해탄수리계에 있는 박억봉이라는 사람인데 동문 누구요?》
억봉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굴벽에 의지하여 서있는 녀인의 입에서
《어마나.》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억봉은 녀인이 자기를 안다는걸 깨달았다. 땅에 주저앉은 녀인은
일어나지 않았다. 억봉은 자기를 아는 사람이라는데 힘이 생겼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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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인의 괴상스런 행동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조심조심 다가갔다. 억봉이
가 가까이에 다가서도록 녀인은 땅에 주저앉아 말똥말똥 쳐다만 봤다.
굴속의 녀인이 계향이라는것을 알아보는 순간 억봉은 다시한번 놀랐다.
《아니, 동무가 어떻게…》
《저기 기름을…》
얼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에선 식은땀이 비오듯 했다. 계
향은 억봉의 부축을 받아서야 일어섰다. 억봉은 그의 팔을 잡아당겨주
던 때에야 그때까지도 손에 들려있는 주먹만 한 돌을 알아보았다. 여차
하면 억봉이한테로 날아왔을 돌이다. 이때에야 억봉은 계향이가 얼마나
놀랐고 괴한처럼 자기를 얼마나 경계했는가 하는것을 깨달았다.
굴안에 나딩구는 도람통들엔 기름이 없었다. 계향이가 찾아낸 기름통
은 굴 저쪽 바깥땅속에 묻혀있었다. 누군가가 굴속에서 기름통을 꺼내
다가 반쯤 덜어가고 나머지는 묻어놓았던 모양이다. 도람통안에는 차축
유가 차있었다. 방금 파헤쳐놓은 도람통주변에는 곡괭이 한자루가 놓여
있었다.
《여기에 기름이 있다는걸 어떻게 알았소?》
《얼마전에 우리 학교에서 이 근방에 와서 기름을 두통이나 얻어갔어
요.》
《언제 여기로 왔소?》
《낮에 알뜰언니랑 왔어요.》
계향은 점심시간때 알뜰과 함께 여기로 왔었다. 저녁때가 다되여서야
그들은 기름을 찾아냈다. 그들이 땅속에서 기름통을 캐내였을 때는
날이 완전히 어둡고말았다. 알뜰이 사람들을 데리러 간 후 계향은 어둡
고 추운 이곳에서 지금까지 기름을 지키였었다.
억봉은 새삼스레 계향을 바라봤다. 숱진 눈섭아래에서 정열로 타번지
는 꾀있고 귀여운 눈, 오똑한 코며 앙큼스레 다물린 자그마한 입… 이
미 오래전부터 잘 알면서도 지금에야 비로소 처음 보는것 같아 전혀 새
로운 인상을 주는 계향의 모습이였다. 그 언젠가 겸이포제철소정문앞에
서 숯쟁이몰골을 한 자기앞으로 오빠인줄 알고 달려오던 계향이, 배송
기 실은 화차앞에서 차지훈의 가슴에 총을 겨누던 그때 주저없이 지훈
을 막아서던 처녀, 계향은 얼핏 보아 겁많고 철없는 응석받이같은가 하
면 담차고 어른스러운데가 있었으며 애록애록하고 말랑말랑스러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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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는가 하면 옹골차고 뼈마디센 속대가 있기도 했다. 그는 성미가 소
용돌이치며 흘러가는 강물처럼 한자리에 머물러있을줄 몰랐으며 변덕스
럽다고 할 정도로 변화무쌍했다. 생활의 굽인돌이마다에서 그의 모습이
매번 새롭게 비쳐지는것은 순간도 꺼질줄 모르는 열정의 분출때문일것
이였다. 억봉은 이때처럼 계향이가 미더웁고 돋보인적은 없었다. 목
에 휘휘 긴 목도리를 두르고 치마허리를 끈으로 가뜬하게 졸라맨채 황
황 타번지는 홰불을 들고 서있는 계향의 모습은 이 세상 더없이 아름다
와보이였다. 억봉은 계향의 존재를 새롭게 느끼는 이 순간 웬일인지 가
슴이 뭉클했다.

이후부터 억봉은 웬일인지 계향이만 보면 가슴속에서 더운 피가 스멀


거렸다. 간질간질한 기쁨에 가슴이 울렁거리는가 하면 짜릿짜릿한 슬픔
에 찢기는것 같기도 했다. 계향이란 이성에 한껏 취해버린 자신을 깨달
을수록 억봉의 입에서는 자주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세상의 수많은 처
녀들가운데서 사랑의 화살이 파혼한 처녀한테로 향해진것은 자신으로서
도 알수 없는 이상스러운 일이였다.
억봉은 랭정해지려고 애를 썼다. 마음 동했을 때 한번 놀아보자고 녀
자를 사귈수는 없었다. 억봉은 한번 마음을 주게 되면 한평생 서로 믿
고 의지하며 생활에서 힘이 되고 기쁨을 줄수 있는 그런 처녀를 사귀고
싶었다. 그런 처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처녀일것이였
다. 억봉은 이름난 사수가 자기 목표물을 단방에 맞히듯 아름답고 훌륭
한 자기 사랑의 그런 대상자를 단번에 고르고싶었다. 세상에서 제일 큰
것은 사람의 마음이였고 그것은 가장 귀한것이기도 했다. 참되고 진실
한 마음은 오직 하나였다. 억봉은 가장 깨끗하고 열렬한 심정을 자기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처녀에게 고스란히 바치고싶었다. 억봉은 계향이
가 자기가 지금까지 마음속에 그려왔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기쁨과
슬픔 모두를 거짓없이 나눌수 있는 그런 처녀인지 따져보고싶었다.
지금까지 안바에 의하면 계향은 장점이 많은 처녀였다. 계향은 대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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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고 정의감이 강했으며 솔직했다. 억봉이가 계향이한테서 무엇보다 값
높이 사는것은 거짓이 없고 가면을 쓸줄 모르는 그것이였다. 공부나 하
고 무엇을 좀 안다 하는 사람들은 자기 속을 웬만해 내비치지 않았으며
성격이 대체로 2중적이였다. 나쁘면 나쁘다고 자기 립장을 명백히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저 혼자 보따리에 꿍져두기 일쑤였으며 심한
경우에는 겉과 속이 다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신중하던 나머지 생활
의 크고작은 모든 문제에서 물에 물탄것 같고 덥지도 차지도 않게 립장
을 취하며 맥없이 살면서 자기만이 제일 청렴하고 량심적이라고 생각하
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계향은 책상물림이 아니였고 차지훈같은
지식인이라고도 할수 없었지만 여러해동안 소학교 교원들속에서 심부름
을 하며 살아왔고 책권이나 읽은 처녀치고 그런 티가 꼬물만큼도 없었
다. 어려서부터 남의 집 아이보개로 눈치밥을 먹으면 굴종에 관습되기
쉽고 자기 의사를 주장하기보다 남의 비위를 맞추며 눈치보는 사람들이
많건만 계향은 그렇지도 않았다. 계향은 자기 개성이 강한 처녀였다.
눈썰미 있고 손기빠르며 명랑한 계향이한테서 억봉이가 자기보다
낫다고 보아야 할 점은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억봉은 한가로운 시간이 잠시라도 생길 때면 저 혼자 자주 멍히 생각
에 잠기군 하였다. 길을 가다가 혼자생각에 전보대를 들이받는가 하면
집에 돌아오기 바쁘게 잠자리에 곯아떨어지군 하던 그가 밤새 이리뒤척
저리뒤척하면서 잠 못드는 때가 많아졌다.
어느날 밤 잠자리에 같이 누웠던 석봉이가 잠 못드는 억봉에게 물었다.
《형, 요즘 어디 아프나?》
얼마전 전보때문에 우르락푸르락할 때에는 당대 가야 말도 할것 같지
않더니 형제사이의 혈연관계는 어쩔수 없었다. 동생의 물음에선 살틀한
정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억봉은 동생을 등지고 돌아누운채 아무 대꾸
안했다.
《허허…》
석봉은 갑자기 저 혼자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하도 이상해 억봉은 동
생쪽으로 돌아누웠다.
《야, 너 돌지 않안? 자다가 한밤중에 웃으면서…》
《허허… 형 노는게 우스우니 그러지. 나보구 어쩐다어쩐다 시빌
걸지만…》

463
《뭐?》
《아무리 봐야 요즘 형이 꽃바람병 났단 말이야.》
《꽃바람병?》
《한자로 쓰면 화풍병인데 남녀사이에 서로 그리워하며 고민하다
생기는 상사병 말이야.》
《자식.》
억봉은 동생이 자기 속을 너무도 빤히 들여다보는것이 화가 나 중얼
거렸다.
《사랑은 감추지 못하는 법이야. 더구나 형같이 자기 생각과 감정을
얼굴표정이나 행동에 곧 옮기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지.》
《자식 싱겁게… 네가 뭐 안다구 그래?》
《흥, 그래두 사랑에선 형보다 내가 선배지…》
억봉은 아무 말도 못했다. 비위가 상했으나 동생의 말은 반박할 여지
가 조금도 없는 사실이였다. 속옷바람으로 누웠던 석봉은 자리에서
일어나 홰대에 걸어놓은 바지주머니를 뒤지더니 담배갑을 꺼내가지고 추
운지 이불속으로 다시 게바라들었다. 석봉은 베개로 가슴을 고이고
이불속에 엎딘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억봉은 아무래도 잠자기가 글
러 동생처럼 이불속에 엎딘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불을 껐으나 창
문으로 흘러드는 달빛에 방안은 등잔불을 켠것만큼이나 밝았다.
억봉은 담배 한대를 다 피우고나서 동생한테 느닷없이 물었다.
《야, 네가 보긴 어드래?》
동생도 뻔히 속내를 아는 이상 숨기거나 꺼릴것이 없었다. 아닌밤에
홍두깨 내밀듯 하는 말이였으나 석봉은 억봉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그만하면 괜찮은 처녀지뭐.》
《너무 겁이 많은거 같은데…》
《겁?》
석봉은 이렇게 되묻더니 형을 부정했다.
《겁없는 녀자가 어디 있어? 녀자의 품성중에서 제일 눈감을수 없는
약점은 게으름이구 제일 값높이 사야 할 품성은 부지런함이란 말이야.
부지런만 하다면 나약성정도의 결함은 보상하고 남아.… 내 보기엔
흠이라면 딱 하나 나이가 좀 작은건데…》
《녀자나이 스물하나가 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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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아무래도 형님대접을 받아야 할텐데 내 색시보다 나이가 많아
야 할게 아니야.…》
사람은 저저마다 자기나름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재여보기마련이다.
석봉은 형의 사랑을 훈수하는 이 마당에서도 자기의 안해를 척도로 삼
고있었다. 진옥은 계향이보다 한살 우이였다. 동생의 말에도 일리는 있
었다. 결혼후 형제들 사이의 화목은 적지 않게 그 안해들한테 달려있었
다. 억봉이 동생의 말을 두고 생각에 잠기자 석봉은 사랑의 선배연하며
형을 훈시하려들었다.
《하지만 크고 단 참외가 어디 있어, 마음에 들면 되는거지.… 심장
이 동하기 전에 이것저것 타산만 하는건 사랑이 아니거던. 사랑은 심장
에 당긴 불이란 말이야, 불! 그 불은 온몸과 넋을 불태우지. 콕스가 좋
아야 쇠를 잘 끓일수 있는것처럼 심장에 당긴 그 불이 뜨겁게 활활 타
오르구 어떤 비바람앞에서도 꺼질줄 몰라야 자기 마음과 넋을 잘 벼릴
수 있단 말이야. 사랑이 얼마나 참되고 값있는가 하는것은 심장에 당긴
그 불로 자기 마음과 넋을 얼마나 쓸모있게 벼릴수 있는가 하는데 의해
규정된단 말이야.》
이불속에 엎디여 동생의 말에 솔깃이 귀를 주던 억봉은 석봉이 자기
쪽으로 얼굴을 돌리자 멋적은듯 중얼거렸다.
《자식, 귀가 보배라더니 어디서 많이도 얻어들었구나.》
《동생의 말이래두 들을건 들어야 해. 옛날부터 현인은 혀가 한치라
면 귀는 세치라구 했어. 그러구 사람은 원래 생겨먹길 입은 하나지만 귀
는 둘이란 말이야. 두귀로 듣고 한입으루 말하라구…》
억봉은 다소 무안을 당한 표정이였으나 느물느물하며 이불속에서
담배를 다시 피워물었다. 석봉은 형이 자기 말에 수긍하는 뜻을 보이자
열을 올리며 말에 발을 달았다.
《심장이 동했으면 우물쭈물하지 말란 말이야. 요건 맥석이다, 요
건 철이다 하구 옴니암니 따질게 뭐 있어. 뜻만 맞는다면야 들입다 불
을 때서 녹여낼판이지… 그러면 맥석은 다 녹아빠지구 무쇠만 남을게 아
닌가. 그럴 욕망과 힘이 없다면 참된 사랑이 아니거던. 사람들은 흔히
주어진 행복을 바라는데 행복을 창조해야 한단 말이야. 행복을 창조할
수 있는 힘과 열정이 있으면 되거던. 그런 힘과 열정의 원천이 참된 사
랑이야. 그래서 사랑을 마음과 넋을 벼리는 불이라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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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은 동생의 말이 리해되고 남았다. 동생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게
될수록 사람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새삼스러워졌다. 석봉이 사랑
에 대해 제법 아는체를 하는것은 진옥이와 련애를 해보아서라기보다 많
은 책을 보았기때문일것이였다.
억봉은 얼마전에 자기가 진옥이한테서 석봉이한테 보내온 전보를
잃어버려 동생을 노엽히던 일이 새삼스레 생각났다. 사랑에 대해 자기
나름의 신념과 지향을 갖고있는 석봉이고보면 그것을 자기의 사랑과 인
격에 대한 무시로 받아들일만도 했다. 억봉은 사랑의 모대김을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지금에 와서야 동생의 사랑이 리해되였다. 억봉은 자기
의 참된 사랑을 찾은 동생이 새삼스레 은근히 부럽기까지 했다.
방안에는 두 형제가 몇대씩 연거퍼 빨아낸 담배연기가 뽀얗게 떠돌았
다. 유리창문으로 흘러드는 달빛은 방안에 안개처럼 서린 담배연기를 뚫
고 나란히 누운 두 형제의 머리맡을 밝게도 비치였다. 두 형제는 말없
이 이불속에 누워있었다. 머리맡을 비치던 달빛이 홰대보에 수놓은
함박꽃송이를 드러내던 그때까지도 억봉은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고 누
워있었으나 이밤 석봉이도 잠들지 못함이 분명했다. 밝은 달빛때문인지.
형의 사랑이 석봉이한테 자기 애인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왔는지… 눈만
붙이면 코를 드렁드렁 골던 석봉이도 새벽닭이 지치도록 코 한번 골지
않았다.
밤하늘에서는 이지러진 새벽달이 추위에 한껏 얼어든 대공을 누비며
혼자 유유히 헤염쳐갔다. 제철소구내를 찾아야 평로에서 이글거리는 쇠
물과 뻘겋게 달아오른 강괴들이 뿜는 열과 빛에 무색해지리라는것을 알
아선지 이밤 푸르스름한 달빛은 불꺼진 주택지구만을 유난히도 밝게 내
려비치는가싶었다.

이제 얼마 있으면 현장실습이 끝나리라 생각하니 계향은 마음이 복잡


했다.
실습이 끝나면 졸업이였다. 손꼽아 기다리던 졸업이였고 기능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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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에서의 배움을 결속짓는 뜻깊은 실습이였다. 실습의 이 나날들에 계
향은 교실에 앉아 교원의 강의를 들으며 책에서 배운것보다 더 많은것
을 보고듣고 깨달을수 있었다. 계향은 현장실습을 통하여 강의와 책에
서 배운 기술적인 원리와 개념들을 구체적인 산지식으로 익힐수 있었을
뿐아니라 지금까지 몰랐던 로동의 대하를 엿볼수 있었다. 로동현장에는
사람자체를 달라지게 만드는 확실히 새로운 그 무엇이 있었다.
달모작숙만 해도 그랬다. 평상생활에서 그렇게도 느릿느릿한 작숙
이 일할 때 보면 젊은이들 찜쪄먹게 펄펄 날았다. 하루일을 총화짓고 자
기 로동의 결과를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는 술을 한잔 마시고 기분좋아
하던 때 피여나군 하던 웃음에 비할수 없는 기쁨과 만족이 어리는것이
였다. 얼마전에 계향은 작숙이 자기 하라는대로 하지 않아 일을 망쳤다
고 석봉이한테 벌컥 화내는것을 본적 있었다. 계향은 집에서 고모한테
큰소리 한번 못 치는 작숙이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것은
공장민청부위원장이며 당원인 석봉이 공순하게 작숙의 꾸중을 들을뿐아
니라 자기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것이였다. 고주망태인줄만 알았
던 작숙한테는 일속에 자기의 기쁨과 분노가 있었고 현장사람들한테는
일을 통해 맺어지는 자기들 특유의 관계와 륜리가 있었다.
이뿐이 아니였다. 고된것인줄만 알았던 로동속에는 웃음이 있고 노래
가 있기도 했다. 주학섭아저씨는 일이 그대로가 익살이고 웃음이였고 배
송기복구정비를 위한 건국결사대의 젊은이들은 쉴참에 노래하며 춤까지
추었다. 늘쌍 우울해있고 언제한번 소리내여 웃어본적조차 있는것 같지
않은 알뜰이 작업의 쉴참에 저 혼자 흥얼흥얼거리고 그 목소리가 꾀꼬
리처럼 곱다는것을 알았을 때 계향은 자기가 지금까지 귀머거리, 소경
으로 살아온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였다. 자기가 지금까지 잘
안다고 믿어온 사람들의 모습이 로동속에서는 전혀 새롭게 비쳐지는것
이였다. 건국의 열의로 들끓는 사람들을 깊이 사귀게 될수록 투박하고
거칠게 보이던 사람들한테서 계향은 겉보다 훨씬 훌륭한 진속을 보게 되
는것이였다.
돌이켜보면 현장실습의 나날들은 기술과 기능을 숙달시켜주고 로동의
새 세계를 눈틔워준 뜻깊고 보람찬 나날이였다.
그러면서도 계향은 공연히 해탄으로 실습왔다는 후회가 없지 않았다.
작숙이 일하고 차지훈이 책임지고있는 곳에 오면 아는 사람들이 많아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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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조건을 원만히 보장받으리라는 생각에 우정 해탄을 실습장소로 택했
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마음에 야릇한 부담을 안겨줄줄 계향은 꿈에도 알
지 못했다.
(억봉동무는 왜 나만 보면 해보자고 그럴가.)
계향은 억봉이가 실습 첫날 청소하는 자기더러 천정기중기에서 내려
오라고 고함지르고 작업을 조직할 때나 무슨 일이 제기될 때 애당초 자
기를 사람값에 치지 않는것이 리해되지 않았다. 자기가 지배인서기에서
해임되여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던 그때에는 맹꽁이라면서 도적놈 몰
듯 하던 억봉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고향에 가지 않은것은 천만번
잘된 일이였고 그래서 기능공양성소에도 다니게 되였다고 할수 있지만
그것때문에 오늘까지 이렇게 멸시받고 인격을 무시당해야 한다고 생각
하니 계향은 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억봉이한테 빚지고
인격을 업신당한것 같은 심정인 계향이다.
계향은 반발심을 금할수 없었다. 계향은 억봉에 대한 이 반발심때문
에 알뜰과 함께 창고에 기름을 가지러 갔었고 창고에 기름이 떨어졌다
는것을 알고 기름을 구하러 떠났었다. 어두운 기차굴안에서 자기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던 그때 계향은 밤에 산골길을 혼자 가다 범이
라도 만난것만큼이나 놀랐었다. 공포가 사라진 뒤에도 놀라움만은 여전
했었다. 홰불들고 나타난 사람이 억봉일줄이야. 계향은 억봉이 손을 내
밀어 자기를 일으켜주던 때 자기의 손만이 아니라 온몸과 넋이 그의 억
센 손아귀에 드는듯 한 기분이였다. 그때부터 계향은 바이스에 물리운
소재처럼 자기가 억봉이한테 붙들리워 정신적으로 압착당하는듯 한
심정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 구속감은 현장실습이 끝나갈수록 점점
더해갔다.
계향의 현장실습이 끝나가던 어느날이였다. 알뜰이 일이 끝나기 바쁘
게 국수나 같이 먹으러 가자면서 계향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계향은 별
생각없이 알뜰을 따라갔다. 뜻밖에도 국수집에는 억봉이며 석봉이가 와
있었다. 국수를 먹기 바쁘게 석봉이와 알뜰이가 어디론가 새는 바람에
계향은 억봉이와 둘이 남았다. 오늘도 온 하루 작업장에 같이 있었건만
두사람은 웬일인지 어색스러웠다.
두사람은 제각기 자기 생각에 잠긴채 주택지구를 향해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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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밝은 밤이였다. 얼레빗같은 달은 동산릉선에 금시 미끄러져내릴
듯 위태롭게 올라있었다. 달은 비탈진 산릉선을 따라 아래로 미끄러져
내리는것이 아니라 봉우리쪽을 향해 점점 솟아만 올랐다.
억봉이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깨뜨렸다.
《실습이 끝나면 뭘하우?》
《졸업을 하지요.》
《그간 수고많았소.》
《제가 뭐 수고한게 있어요. 말썽군을 맡아 실습시키느라 계장동지가
수고했지요.》
계향의 야무진 말마디에서는 토라진 속내가 엿보였다. 억봉은 언젠가
조회때 있은 일을 두고 그러는것 같아 저 혼자 웃고말았다. 그날 누이
와 계향은 한 5분 지각을 했었다. 억봉은 조회끝에 지각하지 말라고 누
이를 지적했었는데 지명당한 누이보다도 계향이가 더 바빠하며 얼굴을
붉히였었다.
억봉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채 땅만 내려다보며 걷는 계향이쪽을 한
번 힐끔 넘겨다보고 황급히 눈길을 돌리며 끊어진 대화의 동을 이었다.
《그새 나한테 의견이 많았겠는데… 떠나기 전에 그 의견이나 말해주
구려.》
《제가 무슨 의견이 있겠나요.》
계향은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다. 억봉이 애써 이어놓은 대화는 계향
이가 신경을 도사리는 바람에 다시 동강나고말았다. 억봉은 계향이와 자
기를 남겨놓고 슬쩍 꽁무니를 뺀 석봉이와 누이가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억봉은 군기침을 하고나서 무슨 회의때 토론이나 하는듯 한 어조로 말
했다.
《그럼 내가 말하라우?》
《어서 말씀해줘요.》
《좋소. 그럼 내가 먼저 말하지… 동문 겁이 많은데 우선 이걸 좀 고
치오.》
《고마와요. 하지만 전 눈이 큰걸요. 그러니까 겁을 타고난가봐요.》
억봉은 계향의 어조에서 《작게 만들라면 눈까지 작게 만들지요.》하
는듯 한 야유조의 숨은 대답을 똑똑히 들었다.
《그건 사상문제란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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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은 계향의 반발에 불쑥 이렇게 말해놓고서야 자기 말이 어딘가 어
색함을 느끼였다. 어색함을 덜기 위해서라도 딱지 뗀 이야기에 발을 달
아야 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한다면 동무가 달모작숙을 좀 맡아달라는거요.
동무도 잘 아는것처럼 아저씬 다 좋은데 딱 하나 술버릇이 나쁘단 말이
요. 술을 마실수는 있지만 아무때나 마시구 술만 보면 옴짝못하는건 다
낡은 습성이란 말이요. 건국사상총동원을 하자면 일본놈들한테 물려
받은 이런 습성을 버려야 한단 말이요.》
억봉은 동무가 가까이에서 낡은 습성을 버리도록 잘 도와달라고 부탁
하고 하루빨리 동무도 로동당원의 영예를 지니기 바란다고 덧붙이고싶
었으나 계향이가 문득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말허리를 끊고말았다.
억봉은 언젠가 술마시고 출근한것때문에 지적한 이후로 달모와 사이
가 버성겨져 이것을 념두에 두고 말했으나 계향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
았다. 계향은 억봉의 말을 자기 인격에 대한 그 무슨 욕처럼 들은 모양
이였다.
《고마와요. 이것저것 많이 생각하구 걱정해주셔서…》
계향은 이 말 한마디를 내뱉은채 오던 길을 되돌아 제철소쪽으로 걸
어갔다. 달빛아래 멀어지는 계향의 뒤모습을 억봉은 어처구니없이 바라
보았다. 석봉이 알뜰이와 짜고 억봉이와 계향이한테 서로 조용히 이야
기하라고 만들어준 기회는 뜻하지 않게 깨져버렸다.
억봉이와 헤여져 계향은 정신없이 걸었다. 계향은 억봉이가 달모의 술
문제만 꺼내지 않았으면 그보다 열두배 더 아픈 말을 한대도 지금처럼
속이 벌컥 뒤집히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해방되던 해 반동
들이 배송기를 습격하던 날 현장에서 작숙한테 술을 준것때문에 지금까
지 자책을 버리지 못하는 계향이였다.
계향은 자기가 학생기풍개변대회의 비판무대에라도 나선듯 한 기분이
였다. 요즘 기능공양성소에서는 《생기발랄한 애국적학생기풍을 창조하
여 새 조선의 건설자가 되자》는 구호아래 건국사상으로 무장하기 위한
학습과 함께 사상투쟁이 벌어지고있었고 계향이자신도 달모작숙의 술버
릇이 싫었으나 억봉에 대한 반발심을 금할수 없었다.
밉든곱든 여러달 자기네한테 와서 실습하다 떠나게 되였는데 그런 말
이나 하자고 국수까지 먹자고 했단 말인가. 작숙의 술버릇까지 내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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떻게 책임지란 말인가.
계향은 반발심을 버리기 어려웠다.
계향이 기능공양성소를 졸업하던 날이였다. 계향은 배치담화를 하
던 때 해탄으로 가라는것을 공무과에 가겠다고 했다. 떼를 쓰다싶이해
서 공무과 천정기중기운전공으로 배치받아가지고 계향이 집으로 돌아오
니 고모가 한발 먼저 와있었다. 장마당에 다녀오는지 고모의 구럭에선
병모가지가 삐죽이 밖으로 나와있었다. 계향은 술병주둥이를 보자 신경
이 곤두섰다.
《고모, 이젠 작숙한테 절대 술 사다주지 말아요.》
계향은 고모한테서 당장 술병을 뺏을듯이 소리쳤다.
《얘, 그건 술이 아니라 식초다.》
고모는 계향이가 술인줄 알고 식초병을 꺼내 당장 땅바닥에 멨다칠줄
알았는지 기겁을 했다.
《식초면 됐어요. 이젠 나하구 고모하구 짜구서 작숙이 술마시지
못하게 하자요.》
계향은 불쑥 이렇게 말해놓고서야 자기가 지금까지 억봉의 말에 반발
해왔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의 의사대로 움직이는 자신을 새삼스레 깨달
았다. 그리고 억봉의 말이 몹시 가슴아프지만 비난할 구석이 없음도 동
시에 깨달았다. 이 깨달음과 함께 계향은 입속으로 부르짖었다.
(내 공무과에 배치받긴 했지만 이제부턴 일부러 더 해탄로를 찾아갈
테다. 내가 그래 억봉동무 무서워 해탄로에 못 갈가. 계장이면 계장이
지, 뚝쟁이같은거, 뚝쟁이같은거.…)
계향은 뚝쟁이라는 말을 몇번이나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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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시련의 또 한고비

살같고 불같은 세월이였다. 애국의 열의속에 어느덧 건국의 두번째 봄


이 화창하게 무르녹았다.
지훈은 배송장에 가려고 배송기도면을 한손에 둘둘 말아쥐고 창문가
로 다가섰다. 이제 얼마후면 정비를 끝낸 1호배송기시운전이 있다.
배송기시운전은 해방후 오늘까지 해탄로를 지켜왔고 복구정비해온 해탄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자랑이고 경사였다. 지훈은 박두한
2호해탄로조업을 위해 우선 성한 이 1호배송기부터 정비하도록 했다.
온전한 도면도 없이 배송기를 뜯었다 맞추는것은 철부지 어린애가 시계
를 뜯었다 제대로 맞추어야 하는 일에 비길수 있는 아름번 일이였었다.
하지만 억봉이네 건국결사대원들은 2호해탄로조업에 지장을 주지 않
도록 오늘까지 기어이 배송기정비를 끝냈다.
지훈은 창문을 활짝 열어제끼였다. 훈훈한 봄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히
며 방안으로 흘러들어 상쾌하게 페부를 적셔준다. 가없이 푸른 하늘엔
갓 타서 놓은 햇솜같은 구름꽃이 피여났다. 귀기울이면 어디선가 지종
지종 지저귀는 종달의 울음소리마저 들려올것 같다. 어쩌면 봄하늘이 저
렇게 높고 푸를가.
푸른 하늘아래로 나날이 젊어가며 생기넘치는 해탄로들이 즐비하게 늘
어섰다.
이제부터 제2호해탄로는 온도를 높여야 했다. 높은 온도로 벽체를 말
리우며 천여도까지 벽체를 달구는 작업은 두달이나 계속되여야 한다. 작
년 12월 7일 오후 두시부터 지금까지 반년이나 계속 백도아래의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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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온도로 로체를 말리워온것은 벽체를 달구기 위한 준비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벌써 200톤에 가까운 콕스와 근 30톤의 송진을 태웠으며 수천
공수의 로력이 들었다. 이 모든 수고와 공이 이제 어떻게 벽체를 달구
는가 하는데 의해 은을 낼수도 있고 물거품처럼 사라질수도 있었다.
콕스를 구워낼수 있게 로체를 달구는 작업은 로체축조와 맞먹을 정도
로 품이 많이 들뿐아니라 생명을 다루듯 조심스럽고 고도의 긴장을 요
구하는 까다롭고 힘겨운 작업이다. 해탄로는 아무리 설계가 잘되고
정확히 쌓았다 하더라도 제대로 말리우고 달구지 못하면 십년 공든 탑
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듯 되고만다.
지훈은 2호해탄로의 고온건류작업이 눈앞에 박두하고보니 가슴짜릿한
긴장감을 금할수 없었다. 지금 그의 심정은 적의 마지막지탱점을 향하
여 최후의 돌격선에 나선 병사와 비슷했다. 이제 고온건류작업이라는 불
뿜는 적의 화구를 까부시면 승리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
며 만세를 목청껏 부를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돌격전에서 수많은 병사
들을 잃고 패배의 무거운 책임으로 군사법정에 서지 않으면 안되는 패
전장군의 가련한 꼴이 될것이다.
지훈은 이 돌격전에서 자기는 비록 피토하며 쓰러진다 하여도 함께 돌
격하던 억봉이며 다른 사람들이 기어이 고지를 점령하고 산꼭대기에 승
리의 기발을 꽂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 확신으로 하여 지훈은 이 봄
에 들어서면서 1호해탄로복구도 내밀었다. 1호해탄로는 2호해탄로에 비
해 근 배반이나 클뿐아니라 완전히 헐고 새로 쌓아야 했다. 녀성들의 발
기로 구내 여기저기에서 한장두장 수집하기 시작한 규석벽돌은 해탄로
하나를 충분히 쌓을수 있으리만큼 모아졌으며 얼마전에 착수한 1호해탄
로 해체작업은 벌써 절반이상 진척됐다. 일제는 도망가면서 성한 해탄
로를 그대로 고스란히 넘겨주어도 조선사람들로서는 야금용콕스를 구워
낼수 없다고 장담했지만 2호해탄로복구는 벌써 결속단계에 이르러 조업
을 서두르고 또다시 1호해탄로복구에 착수한것이다.
봄을 맞은 새싹처럼 사람들의 담과 힘은 부쩍부쩍 자라고있었다.
현대과학과 기술문명에서 멀리 뒤떨어지고 버림받아왔어도 건국결사
대원들을 비롯하여 로동자들은 벌써 제 손으로 허물어진 로체를 쌓을수
있게 되였고 복잡한 해탄설비와 기계들을 제 손으로 복구정비하고있었
다. 지훈이자신을 놓고보아도 그랬다. 기사라고 하지만 일제때 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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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처지는 장기판에서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상대편에게 먹히우
는 서툰 장기군의 졸쪽비슷했었다. 장기판에 졸보다 위력한 차나 포, 상,
말들이 있듯이 지훈의 우에는 지식으로 보나 사업상위치로 보나 위력한
고급기술자들이 수두룩했었다. 해방은 지훈에게 해탄로복구의 최고기술
자라는 영예와 지위를 안겨주었다. 지훈은 자신의 지식과 기술이 딸린
다는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자기가 모든것을 기술적으로 책임진다는
긍지와 자부심때문에 사업의욕이 솟구쳤고 힘이 생겼다. 해보니 되였다.
신비한것은 없었다. 해탄로복구가 오늘만큼 진척된데는 지훈이자신의 기
술적지혜와 힘이 적지 않게 들어있었다.
지훈은 창가에 서서 맑은 공기를 페부 깊숙이 들여마시였다. 손기척
도 없이 갑자기 사무실출입문이 열리더니 계향이가 뛰여들어왔다.
《선생님, 빨리 오시래요.》
계향은 문가에 서서 방글거리며 잔치집에 초청하듯 지훈을 배송장으
로 불렀다. 공무과의 천정기중기운전공이면 해탄로배송기시운전과 별로
인연이 없었으나 계향은 배송기시운전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명절옷차
림으로 달려왔다. 계향은 까만 치마에 하얀 옥양목저고리를 동정귀가 꼭
물리게 입고 치렁치렁 땋은 머리에 갑사댕기까지 드리고보니 그네뛰러
나가는 차림그대로였다. 지훈은 여느때없이 젊음과 생기가 넘치는 계향
을 취하듯 바라봤다.
계향이 서너걸음뒤에는 알뜰이가 서있었다. 그 역시 곱게 다린 검은
치마에 흰 고무신과 옥양목버선을 산뜻이 받쳐신어서 경쾌한 인상을 주
었다. 입가에 알릴듯말듯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고 탄력있게 서있는
알뜰은 온몸에 다져지고 넘치는 기쁨때문에 계향이 나이또래 처녀같아
보이였다. 젊음이 넘치는 그 생기 밑바닥에는 계향에 비해 무척 다듬어
진 정교감과 차분한 안정감이 깔려있었다.
지훈은 알뜰이가 해탄로에 다시 돌아옴으로써 그를 토목부로 쫓아버
린것만 같던 자책감에서 벗어날수 있었으나 사람들한테서 오해를 살가
보아 그와의 필요없는 상종을 피해왔다. 알뜰이도 마찬가지였다. 알
뜰이도 웬만해 차지훈을 찾아오지 않았으며 차지훈을 만나야 할 일에서
조차 될수록 동생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내세웠다. 배송기시운전이라
는 기쁨은 두사람사이에 서로 넘어설수 없는 그 무슨 경계처럼 놓여있
던 미묘한 감정의 동뚝을 순간이나마 허물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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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은 차지훈의 방안에 들어올 생각은 없이 얼굴에 알릴듯말듯 한 가
느다란 미소를 머금은채 복도에 서있었다. 별로 차리거나 꾸민건 없건
만 두 녀인은 모든것이 검고 칙칙한 해탄지구의 주위 빛갈에 대조되여
눈속에 피여난 빨간 꽃송이처럼 두드러져 뭇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선생님, 빨리요. 모두 기다려요.》
계향은 먼저 가겠다는듯이 한팔로 문틀을 잡고 한발을 문지방에 올려
놓으며 지훈을 다시 독촉했다. 방금 잘 익은 콕스가 쏟아지는가싶은 기
쁘고 즐거운 시각이였다. 차지훈이 문지방을 넘어서기 바쁘게 두 녀인
은 서로 손을 잡은채 뛰여갔다. 지훈은 흰 옷고름을 댕기오리처럼 펄럭
이며 달려가는 두 녀자의 발걸음에 이끌리듯 배송기도면을 말아쥔 팔을
휘휘 내저으며 배송장으로 향하였다.
배송장에는 정중하고도 엄숙한 기운이 서리여있었다. 모든 사람들
은 졸업시험장소에서 시험문제를 가지고 들어올 교원을 기다리는 심정
으로 차지훈을 맞이하였다. 이번 배송기시운전은 배송기복구정비를
위하여 조직된 건국결사대원들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자기들의 사업과 성
실성을 검열받는 일종의 시험과 비슷했다. 그들의 시험문제는 배송기의
가동이라는 실천이였고 그들의 해답은 종이우에가 아니라 배송기의
성과적인 회전과 고르로운 동음속에 적어야 한다. 지훈은 철계단을
올라 큼직한 철문을 열고 배송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주위의 엄숙하고도
숭엄한 분위기에 감염되고말았다.
지훈은 문가에 걸음을 멈추고 서서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배송
장을 천천히 휘둘러보았다. 배송기는 둥그런 동체를 바닥에서 절반만 드
러내고 배송장 절반을 차지한채 웅크리고앉아있다. 누군가가 동체에 색
칠까지 해놓아 배송기는 새로 제작하여 조립한것 같았다. 바로 그옆에
는 2호배송기가 앉았던 기초가 아직 항하니 입을 벌리였으나 말끔히 정
비된 1호배송기로 하여 배송장은 면모를 일신했다. 창문마다 말끔히 먼
지를 털어내고 유리를 닦았으며 창문가까이에 놓인 대우에서는 분명 알
뜰이나 계향이가 꺾어다놓은상싶은 진달래가 함뿍 웃었다. 천정과 바닥
그 어디를 보나 사람들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은 없다.
결사대원들은 벽둘레를 따라가며 배송기주위에 빙 둘러서있었다.
그들모두의 눈은 배송기가 성과적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절절한 열망
에 한결같이 황황 불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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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은 길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나서 배송기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차지훈이 옆으로 억봉이가 그 무슨 검열관을 영접하듯 다가섰다. 지훈
은 억봉에게 언뜻 눈길을 보내고나서 배송기에 달려있는 압력계앞으로
다가섰다. 지훈은 아무말없이 무척 깐깐하게 각종 계기며 기구들을
살펴봤고 조작발브와 변들을 조심조심 만지였다. 모든 사람들의 눈길은
오직 지훈을 따라 움직이였다. 벌써 열두번도 더 확인하고 검열했으며
차지훈의 직접적인 감독하에 조립하였건만 그는 그 무슨 흠을 잡아내려
는 사람처럼 기계주위를 돌며 모든 부분들을 살피고 또 살피는것이였다.
나트, 볼트의 조임상태와 청소상태에 이르기까지 따지고드는 차지훈
의 검열은 무려 두시간이나 계속되였다.
알뜰이와 계향은 지친지 오래였다. 두사람은 이렇게 준비시간이 오래
걸릴줄 알았으면 소비조합상점에 먼저 다녀올걸 그랬다는 후회가 났다.
제철소 직맹에서는 해방후 두번째로 다가오는 5.1절을 계기로 상품
을 배정했는데 알뜰이와 계향은 다같이 목세루치마 한감씩 받았다.
두사람은 배송기시운전을 기념하여 둘이서 꼭같이 새 치마 하나씩 해입
을 계획이였다. 지금같아서는 오늘 상점에 다녀올 시간을 짜낼것 같지
않았다. 오늘 하루일이 끝나면 계향은 구락부에 써클을 련습하러 가야
하고 알뜰은 해탄에서 사회적으로 벌어지는 목욕탕건설사업에 동원되여
야 한다. 제철소에서는 5.1절을 앞두고 대대적인 써클공연을 준비했고
해탄에서는 5.1절을 뜻깊게 맞이하기 위한 위생문화사업의 하나로서 녀
자휴계실과 목욕탕을 새로 짓기로 한것이다. 알뜰이와 계향은 차지훈이
공연한 소심성과 로파심에서 꼼지락꼼지락거리는것 같이만 생각했다.
해이되여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듯 차지훈이 소리쳤다.
《자, 그럼 돌릴 준비를 합시다.》
지훈의 말에 배송장에는 갑자기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알뜰이와 계
향이가 극장에 와서 무대의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배송기시
운전의 시각을 기다려온것은 공연한짓이였다.
《필요한 성원들만 남고 모두 밖으로 나가시오.》
차지훈은 증기발브를 돌리기 직전에 엄하게 명령했다. 가슴조이는 흥
분으로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두눈에서는 파랗게 피여나는 도
가니의 숯불비슷한 날카로운 섬광이 번쩍이였다.
차지훈의 엄엄하고 차거운 표정에 억봉이가 지적한 주학섭이며 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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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 달모, 석봉을 비롯하여 몇몇 인원만 남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배
송장밖으로 밀려나왔다. 배송기시운전의 장쾌한 시각을 놓치지 않으
려고 우정 품을 내여 이곳까지 온 계향은 맹랑하기 그지없었다. 계향은
배송장철문밖으로 밀려나오자 분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는지 철계단
란간에 기대여서서 누구에게라없이 종알거리였다.
《아이참,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바로 이때였다. 철없이 불평하는 계향이를 정신있느냐고 꾸짖듯 배송
장안에서 요란한 폭발소리가 일어났다.
꽝―
마치 그 무슨 폭탄이 튀는것과 흡사한 굉음이였다. 배송장밖에 나와
서있던 사람들은 철문을 잡아제끼며 우르르 배송장안으로 뛰여들어갔다.
배송장은 증기가마속처럼 뽀얗게 증기가 차있었다.
《증기발브! 증기발브!》
뽀얀 증기속에서 차지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일생이 다 지나가도 지새일것 같지 않는 괴롭고 지루한 밤이였다.


불꺼진 방안 창문가에 한사람이 서있었다. 창밖에서는 주룩주룩 소리
를 내며 비가 쏟아지고있었다. 봄비치고는 너무도 사나왔다.
어두운 밤하늘을 헤가르며 채찍같은 번개가 번쩍하더니 온 천지가 그
대로 무너져내리는상싶은 우뢰가 꽈르릉 터지였다. 번개의 퍼르스름
한 섬광에 창문가에 서있는 사나이의 창백한 얼굴이며 초췌한 모습이 드
러났다.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비방울이 얼굴에 뿌려지였으나 그는
옷을 입은채 그 무슨 관수욕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두눈을 꼭 감고 움직
이지 않았다. 젖은 머리칼은 헝클어져 이마우에 드리웠고 창턱에 고인
비물은 뚝뚝 소리를 내며 마루로 떨어지면서 그의 신발마저 적시였다.
번개불빛이 사라지자 삼라만상은 다시 먹물을 풀어놓은것 같은 어둠
의 장막속에 잠겨들었다.
지훈은 불꺼진 방안 창문가에 우두커니 서서 찬비에 옷을 적시며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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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 서있었다. 지훈은 두손을 들어 세수를 하듯 얼굴에 흐르는 비물을 닦
고나서 창문가에 물러섰다. 젖은 바지가랭이가 무겁게 척 늘어지였으나
지훈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은 않고 어두운 자기 사무실안을 뚜벅뚜벅 걷
기 시작했다.
배송기폭발의 후과는 컸다. 천만다행으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폭
발로 증기시린다 뚜껑이 깨져나가는 바람에 단 하나 성한채로 남아있던
1호배송기마저 손상을 입었다. 이제 1호배송기를 살려내지 못하면 2호
해탄로조업은 불가능하다. 2호해탄로는 벌써 고온건조를 시작했다.
어렵고 까다로운 고온건조작업을 아무리 잘한다고 쳐도 배송기없이
콕스를 구워낼수는 없다. 해탄로체를 사람에 비유하면 배송기는 인체내
에 피의 순환을 보장하는 심장이라 할수 있다. 배송기가 제대로 돌아야
해탄로에서 가스의 순환을 보장하고 콕스를 구워낼수 있다. 배송기는 이
름그대로 해탄로에서 콕스 구울 때 생기는 가스를 빨아내여 제대로 콕
스가 익게 하여주고 로체가 폭발하지 않게 하여줄뿐아니라 콕스를 굽는
데 필요한 가스를 해탄로에 보내주기도 하는 말하자면 배풍기와 송풍기
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기계이다.
지훈은 어두운 방안을 쉼없이 걷다가 희끄무레한 벽이 막아서면 돌아
서고 그러다 반대편 벽에 부딪치면 다시 돌아섰다. 방안을 대각선방향
으로 벽에 걸린 시계추마냥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던 지훈은 지쳐버리여
긴 한숨과 함께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지훈의 괴로움은 이번 폭발사
고로 성한 배송기가 파괴되였다는데만 있지 않았다. 이번 폭발의 리유
는 증기시린다조립시 안전공차를 주지 않은데 있었다. 시린다의 왕복거
리를 타산하고 증기가 압축되여 폭발하지 않도록 안전공차를 정확히 주
어야 한다는것은 기술상의 상식이였다. 자기가 이 단순하고 상식적인 문
제를 놓쳐버린것이다.
(무엇때문이였던가? 왜 그것을 타산하지 못했는가?)
지훈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속으로 줄곧 같은 질문을 뇌이였다. 지
훈이가 안전공차를 타산하지 못한것은 바쁜 일에 몰리우며 덤빈때문도
아니였고 소홀히 하다 깜박 잊은것도 아니였다. 그리고 그 무슨 착오때
문에 삭갈린것도 아니였다. 량심적으로 솔직히 말해 지훈은 증기시린다
뚜껑조립에서 안전공차를 타산해야 한다는것자체를 모르고있었다. 하기
에 성의를 다하고 신중하게 따지고 또 따지였건만 폭발사고를 막을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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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누구도 기사인 차지훈이 이것을 몰랐다면 믿기 어려울것이다. 지
훈은 이것이 괴로왔다. 사고심의때 지훈이 자기가 소홀히 하다 까먹었
다든가 그 무슨 착오로 삭갈렸다고만 했어도 지금처럼 문제가 복잡해지
지는 않았을것이다.
《동무, 량심이 있는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그렇게 거짓말을 한단
말이요? 해탄에서 제일인자라고 자처하는 동무가 그것도 모른다는게 말
이 되는가?》
제철소적으로 조직된 사고심의회에서 지배인 선우치담은 책상을 두드
리며 내놓고 이렇게 공박했었다. 지훈은 배송기폭발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지 않았다. 책임은 책임대로 져야겠지만 사실은 사실대로 밝혀야겠기
에 지훈은 창피스럽지만 자기가 모르고있은것을 몰랐다고 말했을뿐이다.
기술에 어섯눈이 트면 누구나 상식으로 아는 문제를 지금까지 차지훈이
모르고있은것은 정말이였다.
지훈은 콕스화학전문가였다. 로체는 어느 정도 파악했어도 해탄설
비들과 기계들에 대해서는 전혀 캄캄이였다. 겸이포제철소때에도 지
훈은 콕스화과정을 담당했었고 해탄설비와 기계들에 대해서는 일본인기
사가 전적으로 맡아보았었다. 차지훈이 해방후 야마다에게 술과 고기를
사다먹이고 자기가 배급받은 쌀이며 석탄까지 돌렸던것도 야마다한테서
야금기계와 설비들에 대한 지식을 알아내기 위해서였었다. 이것때문
에 지훈은 일제앞잡이로 몰리우기까지 했으며 억봉은 지훈의 가슴에 총
까지 겨누었었다. 야마다가 그때 차지훈에게 넘겨준 배송기기술참고
자료는 만능의 《기술옥편》 비슷했다. 지훈은 배송기정비에서 걸린 문
제들에 대하여 여기에서 해답을 찾군 했었다. 크게 믿었던 야마다의 기
술과 그의 참고자료가 이번 폭발사고를 일으킬줄이야… 그 참고자료에
는 증기시린다의 폭발안전공차가 꼬물만큼도 언급되여있지 않았다.
지훈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훈은 또다시 불꺼진 방안을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지훈은 비내
리는 이날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그는 나날이 짧아만 가는 이 봄날 밤
이 동지 밤보다도 길게 생각되고 지어는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나날
의 밤들을 모두 합한것만큼이나 지루하게 느껴졌다. 날이 밝고 새날의
하루일이 시작된 후에도 지훈은 이렇게 자기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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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가에 알뜰이가 나타났다. 알뜰은 배송기
를 시운전하던 날처럼 치마저고리를 입지 않았다. 기름묻고 구겨진
작업복차림이였고 여느때없이 맥빠진 후줄근한 모습이였다.
《저…》
알뜰은 문가에 서서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알뜰은 손을 주무르며
한참이나 망설이던 끝에 힘겹게 입을 뗐다.
《저… 지배인실에서 전화가 왔어요… 빨리 오시라구…》
알뜰은 못할 말을 하듯 갑자르며 무척 옹색스러워하였으나 지훈은 아
무렇지도 않았다.
(전화가 왔다? 찾으면 가야지.)
지훈은 입속으로 저 혼자 이렇게 뇌였다. 모든 책임을 이미 각오하고
있는터여서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지훈은 알뜰이가 지배인한테서 전
화가 왔다는 말을 전하며 무엇때문에 저렇게 송구스러워하는지 리해되
지 않아 그를 멍히 바라봤다.
지훈은 알뜰의 얼굴에 비낀 불안과 동정의 빛을 알아보자 오히려 기
분나쁘고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무슨 죽을 죄라도 지었단 말인가. 무엇때문에 알뜰은 저렇게 나
를 동정한단 말인가.)
지금 그의 얼굴에 비껴있는 측은한 감정을 선우치담이 읽는다면 쓸데
없는 오해나 받고 놀림이나 당하기 쉬웠다. 멍청스럽던 차지훈의 눈길
이 갑자기 싸늘해지자 알뜰은 도망치듯 서둘러 문가에서 사라졌다.
뒤미처 우르르 밀려오는 사람들의 발자국소리가 복도로 가까와지더니 억
봉이와 여러 사람들이 나타났다.
《지배인실에 가겠습니까?》
억봉은 방안으로 들어서며 밑도끝도 없이 이렇게 물었다.
《가겠소.》
지훈은 자기 책상앞에 선채 침착하게 대답했다.
《우리랑 같이 갑시다.》
억봉은 방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복도에 그냥 주런이 서있는 건국돌격
대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지배인방에 가는데 동무들이 뭘하러 따라간단 말이요?》
차지훈이 내쏘듯 차겁게 던지는 말에 억봉을 따라 방안에 들어섰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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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어제 밤 보안원들이 와서 우리와 담화했수다. 차부장에 대해 자꾸
물어보는게 암만해두…》
지훈은 달모의 말에야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사무실로 뛰여온 리유를
깨달았다. 알뜰은 지배인실에서 찾는다는 전화를 본인에게 먼저 알려주
기 전에 배송장사람들한테 말한 모양이다. 어제 밤 보안원들이 배송기
폭발사건을 해명하기 위해 현장에 왔고 그들이 차지훈에 대해 물었다는
것을 알뜰은 이미 알고있었을것이며 그래서 지배인실에서 찾는다는
전화를 그렇듯 불안해하며 전했을것이다. 지훈은 자기를 걱정해주는 사
람들이 고마우면서도 싫었다.
《내 일은 내가 맡아할터이니 쓸데없이 참견하려 하지 말고 자기 일
들이나 하시오.》
지훈은 사람들을 향해 차겁게 말하고나서 억봉에게 다시한번 못박았다.
《억봉동무, 오늘중으로 깨진 증기시린다를 해체하시오.》
여느때없이 쌀쌀하게 말한 후 자기 방을 나서던 지훈은 그때까지 복
도에 우두커니 서있는 알뜰을 알아보았다.

지배인실에는 선우치담대신 낯모를 두사람이 앉아있었다. 한사람은 눈


빛이 무척 날카롭고 오돌찬 젊은이였으며 한사람은 유순하고 침착해보
이는 중년남자였다. 젊은 사람은 시보안서에서 온 사람이였고 중년은 도
보안일군이였다.
《바쁘신데 이렇게 만나자고 해서 안됐습니다.》
유순해보이는 도보안일군은 담배를 권하는가 하면 왕청같이 날씨
이야기를 꺼내면서 될수록 지훈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 하였지만 지
훈은 그들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보안일군은 줄곧 웃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은 배송기가 무엇때문에 폭발했다고 생각합니까?》
지훈은 칼로 베듯 단마디로 대답했다.
《저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기술적으로 옳게 타산하지 못하였으니까요.》
《달리 생각해보신것은 없습니까? 가령 그 어떤 외부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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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지훈은 도보안일군의 말허리를 서둘러 잘랐다. 그리고는 흥분으로 얼
굴이 벌개지며 반발하듯 뇌이였다.
《전적으로 제가 잘못해 배송기가 폭발했습니다.》
지훈은 예상외로 크게 문제가 번져지면서 보안일군들까지 개입된
배송기사고에 다른 사람들을 손톱만큼이라도 관여시키고싶지 않았다. 지
훈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자기가 지고싶었다. 지
훈의 흥분을 저지시키듯 도보안일군은 머리를 끄덕끄덕해보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배송기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겠습니다. 배송기사고에 대
한 선생님의 견해와 립장에 대하여 우리들은 이미 충분히 료해하였습니
다.》
그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 도보안일군과 차지
훈의 일문일답을 종이에 쓰던 오돌찬 젊은 사람이 자기의 가방을 열어
제꼈다. 반백의 도보안일군은 젊은 보안원이 내미는 편지봉투를 받아 그
속에서 한장의 엽서를 꺼내였다. 도보안일군은 진실여부를 타진하듯 지
훈을 물끄러미 넘겨다보며 엽서를 내밀었다.
《이것을 보신 기억이 납니까?》
지훈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면 이것은요?》
도보안일군은 봉투속에서 또 한장의 편지봉투를 꺼내였다. 지훈은 도
보안일군이 내미는 편지봉투를 받아 거기에 적혀있는 주소와 이름을 보
고 놀랐다. 그 편지는 자기가 서울에서 돌아오던 때 송표가 라웅범한테
전해달라던것이였다.(지훈은 웅범이가 기또의 늄궤짝과 함께 자기 처남
이 보내온 편지도 보안서에 바치였다는것을 알리 없었다.)
지훈은 봉투에 적혀있는 송표라는 이름을 알아보는 순간 독사라도 본
듯 가슴이 섬찍하여 뜯어진 편지봉투를 내뿌리듯 상우에 놓았다.
《이 편지는 제가 서울에 갔다 작년 5월 집으로 돌아오던 때 송표가
자기 매부한테 전해달라던 편지입니다.》
지훈은 손톱만큼도 숨기거나 과장함없이 모든것을 사실대로 이야
기했다.
도보안일군은 처음에 내보이던 엽서를 다시 집어들었다.

482
《이 엽서는 그 봉투속에 들어있던것입니다.》
지훈은 기또 마사오가 웅범에게 보낸 엽서가 어떻게 되여 자기가 서
울에서 가져온 송표의 편지속에 들어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가 웅범에게 전한 송표의 편지며, 그 편지속에 들어있었다는 기또
의 엽서가 지금 문제로 되여있는 배송기폭발사고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편지봉투속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저는 알수 없습니다. 저는 송표
가 전해달라던 편지를 뜯어보지 않았으니까요.》
지훈은 몹시 언짢아하는 표정으로 송표의 편지봉투를 손가락질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실을 정확히 확인하여야 할 필요가
제기돼서 그럽니다.》
도보안일군은 흥분하기 시작한 지훈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집에도 가지 않았어요.》
알뜰은 철문을 열고 배송장안으로 들어서며 누구에게라없이 모두거리
로 소리쳤다. 배송장 여기저기에 흩어져 퇴근준비를 서두르던 사람들은
두눈이 퀭해 알뜰을 바라봤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내밀듯 하는 말이였
으나 사람들은 모두가 알뜰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오늘 아침 지배인실로 불리워간 지훈은 저녁때가 되여도 돌아오지 않
았다. 그를 기다리다못해 사람들은 전화를 걸어보고 여기저기 물어보았
으나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 집에라도 가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억봉은 알뜰이더러 집에까지 가보라고 했었다.
《뭐, 집에두 안 갔단 말이야?》
석봉이 손에 기름통을 든채 알뜰이곁으로 다가섰다. 석봉의 등뒤에 서
있던 주학섭은 모를 일이라는듯 고개를 기웃거리며 혼자소리처럼 중얼
거리였다.
《아무래두 무슨 일이 생긴것 같군그래.》
울어야 할 일에서조차 웃군 하던 주학섭의 이 한마디 걱정은 밀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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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먹장구름처럼 작업장분위기를 갑자기 어둡게 만들었다. 너나없이 사
람들은 모두가 야릇한 불안에 시달리고있었다. 배송기시운전이 실패
로 돌아가자 별말이 다 돌았다. 그러지 않아도 배송기정비를 미타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은 맥놓고 주저앉았으며 이전부터 안된다고 하던 사람
들은 때라도 만난듯 기세를 올리였다. 언젠가 배송기복구가 힘들다고 한
마디 말했다가 많은 사람들앞에서 억봉이한테 면박을 당한 엄태산은 그
것을 복수하듯 공공연히 이렇게 말했다.
《억봉이 녀석이 배송기를 돌렸단 내 손에 장을 지지겠네. 차부장두
배송기문세는 몰라. 그게 어떤 기계라구…》
그러지 않아도 불안에 빠진 건국결사대원들에게 있어서 이 모든 비난
과 의혹들은 눈우에 내리는 서리격이였다. 배송기정비작업의 유일한 기
술고문격이였던 차지훈이 갖은 비방과 중상속에 동요하기 시작한데다 행
방마저 알수 없게 되고보니 건국결사대원들은 풍랑속에서 라침판을
잃어버린 배군들신세가 되였다.
《여, 이러구 멍청하니 있지 말구 우리두 가보자.》
석봉은 당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듯 손에 들었던 기름통을 내려놓
으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어딜 간단 말이야?》
《지배인한테두 가보구 차부장이 가있음직한 곳에 다 가봐야지.》
석봉은 한마디 물어본 태주먹을 윽박지르듯 면박했다. 배송기사고
심의때 선우치담지배인이 심상치 않은 말을 한 후여서 사람들은 여간만
마음이 불안하지 않았다. 석봉의 선동에 젊은 사람들의 마음이 둥둥 뜨
기 시작했다.
《어딜 간다구 그래? 자기 맡은 일을 할 생각은 않구.》
억봉의 말에 젊은 친구들의 흥분은 바람앞의 초불처럼 꺼지고말았다.
말소리는 낮았으나 그의 눈빛은 무서웠다. 성미는 조만해 어쩔수 없는
것이여서 억봉은 지금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전같으면 이런 일에
누구보다 팔걷고 앞장섰을 억봉이다.
이날 억봉은 작업총화를 여느때없이 깐깐하고 엄엄하게 했다.
《이런 때일수록 자기 맡은 일들을 더 잘해야겠습니다. 태주먹동무는
젊은 사람들을 데리구 오늘 밤 강안경비를 나가야겠습니다. 해상자위대
를 도와 오늘부터 우리가 강안경비를 서게 됐으니 책임성을 높여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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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습니다. 그리구 배송장경비두 잘 서야겠습니다. 오늘 밤 배송장경
비가 누굽니까?》
억봉의 물음에 달모는 보자기를 주무르다말고 고개를 들어 자기라고
끄떡해보이였다. 억봉은 달모가 보자기만 자꾸 만지는게 암만해도 미타
했다. 오늘 제철소에서는 종업원 한사람당 카바이드술을 한병씩 내주었
다. 달모가 지금 주무르고있는 밥보자기속에도 술이 들어있다. 억봉
은 배송장 여기저기에 흩어져 앉아있는 건국결사대원들을 잠시 둘러보
고나서 단호히 말했다.
《오늘 밤부터 우리 배송장두 특별경비를 서야겠습니다. 석봉이 네가
오늘 좀 달모아저씨랑 또 수고해줘야겠다.》
석봉은 어제 밤 경비를 섰다.
《그새 배송장경비는 나와서 잠이나 잤는데 오늘은 교대루 자구 한사
람은 깨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구 오늘 술이랑 내줬는데 경비서면서 술
마실 생각은 아예 말아야겠습니다.》
억봉은 야박하다 할 정도로 꼬치꼬치 찍었다. 공장을 지키는 자위대
가 있고 밤마다 직장경비를 따로 하는 조건에서 배송장경비는 한사람이
라도 된다. 하지만 억봉은 제철소에서 술을 내준 날 달모 혼자서 경비
세우는게 마음놓이지 않아 동생을 곱대거리로 오늘 밤까지 경비서게 한
것이다.
달모도 자기를 못미더워하는 억봉의 마음을 알고 남았다. 작업총화와
경비조직을 끝내였을 때 억봉은 무척 노엽고 불만스럽게 바라보는 달모
의 눈길을 느끼였다. 억봉은 그 눈길을 못 본척 하고 작업총화가 끝나
는 길로 지배인실을 찾아떠났다.
《동무 마침 잘 왔소.》
억봉이 지배인실문을 열고 들어서기 바쁘게 선우치담이 말했다.
하지만 반기는 기색은 없었다. 눈두덩이 툭 불거진 그의 두눈에는 피
발이 섰고 미처 깎지 못한 턱수염은 더부룩했다. 복잡한 일들에 드바삐
쫓기우고 밀리우다 이제는 맥이 빠지고 지쳐 악과 신경질밖에 남은게 없
는가싶은 선우치담이다. 선우치담은 억봉이와 인사할 겨를도 없었다. 탁
상우의 전화종이 귀따갑게 울리며 방주인을 찾았다.
《내 지배인이요. 아, 처장동지십니까?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선우치담은 갑자기 목소리가 부드러워져 도의 어느 상급한테서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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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전화를 받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선우치담은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목을 추기느라 방 한구석에 놓여있는 원탁앞으로
걸어가 물까지 한고뿌 떠마신 후 문가에 그냥 서있는 억봉에게 앉으라
는 말도 없이 다몰아치듯 물었다.
《동무네 정말 배송기 정비할 자신이 있는가?》
억봉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법앞에 책임질수 있는 책임적인 말을 듣고싶어서 그러는거요.》
선우치담이 튕겨주었으나 억봉은 마치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
을 대하듯 그를 향해 한동안 서만 있었다. 억봉은 대답을 재촉하는 지
배인의 눈길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해야지요.》
《정말이요? 차지훈 없이도 동무네끼리 할수 있단 말이지?》
《아니, 차지훈이 어디 갔습니까?》
《내가 알게 뭐요, 보안서에서 하는 일을…》
《예?》
억봉은 지훈의 일때문에 놀라듯 물었으나 선우치담은 왕청같은 말을
했다.
《차지훈이가 배송기에 대해선 쥐뿔도 아는게 없었소. 하지만 그는 어
쨌든 2급기사란 말이야. 동무넨 그한테 대면 더 한심한거구… 그런데도
자체로 배송기를 정비할수 있단 말이지? 자기 발언에 대해 법앞에 책임
져야 한다는걸 잊지 말아야 하오.》
선우치담은 법앞에서의 책임을 강조했으나 억봉의 신경은 다른데
가있었다.
《예, 책임지겠습니다. 그런데 차지훈이 어데 갔습니까?》
자기 혼자생각에 잠기며 창문쪽을 바라보는가싶던 선우치담이 억봉이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동무 나한테 그거 따지러 왔는가?》
억봉은 오늘 아침 차지훈이 지배인실로 불리워왔던 일이 심상치 않다
는것과 지금 선우치담이 배송기정비가 자신있는가, 법앞에 책임질수 있
는가 하고 따지는것이 모두 그것과 련관되여있다는것을 깨달았다. 맞갖
지 않게 억봉을 바라보던 선우치담은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다.
《동무, 누이의 입당이 보류됐으면 동무도 정신을 차려야 할게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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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차지훈이 서울갔다 오면서 뭘 가지구 온줄 알아? 반동의 편지를 들
고 왔단 말이야. 반동의 편지를 가지구 련락다니는 차지훈을 믿구 배송
기를 정비하겠어? 동무 한때 차지훈을 얼마나 미워했는가? 해방직후
의 그 높던 계급성은 어디에다 다 줴버리구 지금은 간첩혐의있는 사람
한테 자기 누이를 주지 못해 애를 빡빡 쓰는가? 응?… 누이만 각성이 없
는가 했더니 동무두 외삼촌생일날 상까지 차려가지구 찾아갔댔다면서?
차지훈이 누구한테 반동의 편지 들구 온줄 알아? 동무 외삼촌한테란 말
이야, 외삼촌!》
선우치담의 큼직한 입에서는 침방울이 튀여나왔다. 선우치담은 얼
마전 시당에 불리워갔던 고필주한테서 시당위원장 리석이 담화도중
선우치담의 옥중생활정형을 물었다는 귀띔을 들었다. 시공산당과 조
선신민당 시위원회가 통합하면서 리석은 시당위원장으로 눌러앉았다. 시
당위원장으로 부임한 이후부터 리석이 자기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는 생
각에 선우치담은 지금까지 그의 보호를 받아온 차지훈이며 리석과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보복선제타격을 가하기 시작한것이다.
억봉은 아연했다. 차지훈이 서울에 다녀오던 때 라웅범한테 송표의 편
지와 함께 기또의 엽서를 전했다는걸 편지 받은 당사자한테서 들었지만
그 편지가 배송기시운전실패와 련관되여있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
되지 않았다.
억봉의 침묵을 자기 식으로 해석한 선우치담은 승전고를 울리듯 못박
았다.
《그는 해탄로복구를 파탄시키기 위해 애당초 할수도 없는 배송기정
비작업과 로체수리작업을 자기가 책임지고 하겠다고 나섰고 열성스레 일
하는척 하면서 음으로, 양으로 파괴해왔소. 그러니 동문 지금까지 차지
훈이한테서 의심스럽게 생각되든가 수상쩍다고 느껴진걸 모두 보안서에
찾아가서 보고 들은대로 말하는게 좋겠소. 옆집에서 살지, 같이 일
하지… 동무가 모른다는건 말이 되지 않으니까… 입다물고있다는건
동무가 그의 공모자라는것을 말하는것으로 될게요.》
차지훈의 행방을 알려고 지배인을 찾아갔다가 어마어마한 위협공갈만
당하고 돌아서는 억봉은 괴로왔다. 억봉은 아무리 따져봐도 이번 배송
기폭발이 차지훈의 의식적인 파괴책동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배
송기정비는 차지훈의 기술적인 지도하에 진행되였다. 자기가 맡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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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하면서 사고를 내면 자기가 책임지기마련인데 어떻게 그렇게 한단
말인가. 그건 둘째치고 그는 배송기정비를 위해 누가 보건말건 자기의
힘과 지혜를 아끼지 않았다. 사람은 남을 속일수는 있어도 자기자신까
지는 절대 속이지 못한다. 그러기에 사람은 자기 혼자 있을 때가 가장
정직한 순간이라고 할수 있다. 억봉은 차지훈이 배송기정비를 위해
남모르게 밤을 밝히며 코피를 쏟고도 그런 내색조차 안하는것을 목격했
으며 생활상의 불편과 크고작은 애로를 말없이 저 혼자 꿋꿋이 이겨내
는것을 보기도 했다. 배송기정비사업이 마지막고비에 달하였던 어느
날 집에서 막내딸이 페염으로 사경에 달하였던 위험한 순간에조차 그는
배송기곁을 떠나지 않았었다. 지어먹은 마음 사흘을 가지 못한다고
진심으로 하는 일과 가면쓰고 하는 일은 어느모에서든지 나타나기마련
이다. 억봉은 지금까지 지훈과 함께 일하며 그한테서 털끝만 한 위선을
느껴본적 없었다.
그는 솔직한 사람이였다. 그는 부장들과 과장들의 협의회같은 때에 어
물쩍하거나 숨길수 있는것도 사실그대로 말하군 해서 안 먹어도 좋을 욕
까지 먹는 때가 많았으며 그가 선우치담의 눈에 난 리유의 하나 역시 고
지식하기만 하고 약삭바르지 못한데 있었다. 지나칠 지경으로 솔직하고
맡은바 자기 일에 성실한 차지훈이 위선자일수는 없었다.
억봉이 차지훈에 대한 감정의 티가 완전히 가시여지지 않았으나 오늘
까지 그와 손잡고 일해올수 있은것은 맡은바 일에 대한 이런 성실성때
문이였었다. 얼굴을 안다고 마음까지 다 알수는 없지만 억봉은 절대 차
지훈이 딴마음 먹고 배송기 증기시린다 폭발사고를 일으켰다고 믿을수
없었다.
억봉은 지배인실을 나오는길로 시당위원회로 곧장 향했다. 선우치
담의 전횡을 이 이상 더는 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선우치담은 자기 개
인감정으로 차지훈을 모해하려고 한다기보다 배송기정비사업전체를
방해하고있었으며 일단 자기가 안된다고 했던 해탄로복구사업이 진척되
는것을 자기의 그 무슨 권위훼손같이 생각하면서 해탄사람들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있었다.
《아니, 네가 어떻게 왔니?》
리석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억봉을 알아보고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섰
다. 그와 마주앉아있던 두사람도 따라일어서며 억봉이가 서있는 문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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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해 돌아섰다. 억봉은 배송기폭발사고때 현장확인을 하러 나왔던 두 보
안일군을 알아보았다. 리석은 량해하라는듯 두 보안일군을 바라보며 미
소를 짓고나서 억봉이한테로 걸어왔다.
《참말 오래간만이구나.》
알뜰의 입당심의가 보류되여 심의에서 제기되였던 문제를 가지고
한번 잠간 담화를 한 후 지금에야 비로소 억봉을 만나는 리석이다. 리
석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억봉이를 위해 시간을 내고싶었다.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는 그로서는 억봉이네 형제를 보는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기쁨이고 휴식이였다. 억봉은 리석의 얼굴에서 혈육들을 그리워하는 마
음을 읽었다. 억봉이 역시 그랬다. 억봉은 리석을 대하게 되면 시당비
서이라는 생각보다 할아버지같은 생각이 앞서는것이였다. 바로 이런 감
정때문에 억봉은 지금까지 리석을 찾아오지 못했다. 리석이 돌아가신 할
아버지나 준길삼촌과 인연깊은 사이가 아니였더라면 억봉은 벌써 몇번
도 더 이 방 문고리를 잡았을것이였다.
《전 급한 일로 왔습니다.》
억봉은 자기 방문의 공식성을 나타내려고 심각해 말했다.
《공적인 일루 시당위원장을 만나러 왔단 말이겠지? 좋소! 해탄건
국결사대장 박억봉동무! 여기 와서 앉으시오.》
리석은 손자를 대하는 할아버지같은 마음을 어쩔수 없는지 롱기를 거
두지 않았다. 억봉은 열기오른 얼굴로 리석을 묵묵히 바라만 봤다.
리석은 심상치 않은 억봉의 얼굴표정에서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웃음을
거두고 가까이 다가섰다.
《알뜰의 입당청원보류에 대한 문제가 이젠 다 해명됐다. 이제 곧 알
뜰의 입당청원을 다시 심의하게 될게다.》
리석은 기쁜 소식을 알려주었으나 억봉은 머리를 흔들었다.
《전 그때문에 오지 않았어요.》
억봉은 오직 한가지 자기 생각에 골똘한채 흥분을 누르지 못했다.
《차지훈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리석은 눈시울을 쪼프린채 한참이나 억봉이를 바라보고나서 나직이 물
었다.
《너도 그 문제때문에 왔니?》
리석은 이미 모든것을 알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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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고있습니다.》
《그러니 해탄사람들을 대표해 우리 시당위원회앞에 차지훈을 보증하
러 왔단 말이지?》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그 어떤 사사로운 감정이나 리기심때문에, 다시말해 시당위원장
과 잘 아는 사이니까 그 덕을 보러 온건 아니겠지?》
《그렇게들 생각할가봐 전 지금까지 오고싶어도 오지 못했습니다.》
《좋다, 나도 그래서 지금까지 너를 부르지 않았었다. 하고싶은 말이
많았지만…》
리석은 억봉이 어깨를 두드려주고나서 아직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있는 두사람의 보안일군을 향해 돌아섰다.
《어떻습니까, 우리 해탄로동자들의 의견을 들어보면서 배송기폭발사
고문제와 편지건을 같이 토의하는게…》
《저희들은 이미 억봉동무나 건국결사대원들의 의견을 충분히 료해하
였습니다.》
《그러니까 배송기폭발사건과 편지사건이 서로 련관없다는게 명백
하지 않습니까?》
리석의 물음에 보안일군은 동감의 뜻을 표시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저희들이 료해한바에 의하면 배송기폭발과 편
지사건이 하나로 련결되여있다는 제철소지배인동무의 주장은 무근거
합니다.》
리석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싶더니 제기된 문제에 대한 자기의 견해
를 표시했다.
《국가보안의 견지에서 아직 연구하고 해명해야 할 문제들은 많지만
문제해결의 정치적성격은 명백하다고 봅니다. 고난에 주저앉아 배송
기복구를 포기하느냐 아니면 자기 힘을 믿고 계속 해탄로복구를 추진시
키느냐, 문제는 이렇게 섭니다. 우리 힘으로 제철소를 복구할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금 자기 견해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수단과 방
법을 가리지 않고있습니다.》
억봉은 이때에야 배송기폭발사고에 대한 선우치담의 립장과 보안일군
들의 견해가 서로 다르며 시당위원회와 보안일군들은 같은 립장이라는
것을 깨달을수 있었다. 지금까지 선우치담때문에 차지훈이 보안서에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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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워갔다고 생각하고있었던 억봉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불쑥 이런 말
이 튀여나왔다.
《차지훈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보안원들과 담화를 마치고 나오는 지훈은 좀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지훈은 제철소구내 산릉선을 따라 대동강쪽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그
는 조용한 곳에 혼자 있고싶었다. 인적없는 곳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돌
이켜보고 스스로 그 의미를 따지며 음미해보고싶었다. 지훈은 한자리에
앉아있기보다 걸으며 생각하기를 즐기는편이다. 지훈은 발가는대로
걸음을 옮기며 스스로 묻고 대답하군 하였다. 한가지 물음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대답을 찾기 어려웠다.
(도대체 배송기사건과 송표의 편지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송표의 편지가 그 어떤 정치적목적을 추구하는것이라 해도 그것이 배
송기사건과는 련관될수 없었다. 배송기폭발은 증기압력계산과 결부된 순
수 기술실무상의 문제였고 차지훈 자기가 저지른 일이였다. 지훈은
보안일군들이 서로 다른 별개의 이 문제들을 하나로 련결시켜보는것만
같아 이것이 제일 불안스러웠다. 의문은 의문을 낳고 꼬리물고 새끼치
면서 단순하고 명백하던 문제들을 점차 복잡하고 아리숭하게 만들었으
며 의심이란 색안경을 끼고 천가지, 만가지를 오직 한빛갈로 보이게 하
는것이였다.
지훈은 자기가 제철소구내를 멀리 벗어났으며 오래전부터 누군가가 계
속 자기뒤를 따르고있다는걸 알지 못하였다. 누군가 한사람이 옆으로 다
가서며 어깨를 툭 쳤다. 산뜻한 봄철양복에 진한 수박색중절모자를
쓰고 옆에 나타나서 송표가 웃는것이였다.
《잘있었나?》
송표는 무척 놀라는 차지훈의 손목을 반갑게 잡아흔들었다.
《언제 왔나?》
지훈은 놀람과 의심이 어린 눈길을 송표의 얼굴에 못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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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왔네, 장사차루…》
송표는 심드렁히 대답했으나 지훈은 마음이 여간만 긴장되지 않았다.
아직 보따리장사군들이 어둠을 타서 더러 38도선을 넘나들었지만 여기
는 38도선과 가까운 곳이 아니였고 송표는 그런 좀장사나 할 사람이
아니였다. 송표는 지훈의 마음을 타진했는지 뱁새눈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네 어디 그렇게 돌아다니나? 난 화공부에도 갔댔고 자네 집에도
갔었지.》
지훈은 송표의 말이 하나도 믿기지 않았다. 송표는 너무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새빨간 거짓말을 눈섭 하나 까딱않고 했다.
《난 지금 동양해운회사에서 일하네. 우린 이번에 남북간의 상품교역
을 개척하러 왔네. 삼남의 쌀을 가지고와서 철근을 바꿔가려구… 자, 우
리 배에 가서 이야기하세.》
송표의 말에서는 위압기가 느껴졌다. 지훈은 놀라 사위를 두리번거리
였다. 제철소구내에서 너무나 멀리 벗어나 지금 자기는 인적드문 강기
슭에 서있었다.
지훈이 발걸음을 옮기려 하지 않자 송표는 강박하듯 느닷없이 이렇게
물었다.
《자네 나하구 서울로 안 가겠나?》
지훈은 대답대신 그를 빤히 바라봤다.
《자네가 가족들을 데리러 왔다가 공산당에 붙들렸다는 소리는 이미
들었네.》
송표의 얼굴에는 알릴듯말듯 교활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지훈은 두다
리를 벌려 앙버티듯 땅을 짚고서서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붙들린게 아니네.》
《그랬나? 그런걸 난 자네 집까지 얻어놓고 눈이 까매 기다렸네. 자
네도 이젠 어지간히 속까지 빨개졌네그려.》
가시돋친 눈길로 지훈을 쏘아보는 송표의 눈에는 야유와 조소의 한도
를 넘어선 적의가 번뜩이였다.
《아니, 난 아직 로동당원이 못됐네. 제철소복구와 이 나라 경제의 부
흥을 위해 누구보다 애쓰는 사람들이 로동당원이라는것을 깨닫기 시작
했을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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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의 얼굴에도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암만 그래야 자네는 리용물에 지나지 않아. 공산주의자들은 필요한
때까지 자네를 써먹다가 때가 되면 내버릴걸세. 고기를 다 뜯어먹구 뼈
다귀를 버리듯이 말일세.》
송표의 말에 지훈은 웬일인지 지배인 선우치담의 얼굴이 떠오르고 얼
마전에 만난 두 보안일군이 생각났다. 송표는 지훈의 얼굴표정에서
일어나는 자기 말에 대한 반응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강박을 그치지 않
았다. 남의 아픈점을 건드리고 그것을 기회삼아 상대방을 배지기뜨는데
무척 능란하고 경험많은 송표였다.
《자네가 선우치담한테 자기 운명을 의탁할수 있을것 같나? 천만에…
자네는 기술과 지식을 가진 일종의 인재루, 도덕과 량심을 가진 지성인
으루 자처하지만 선우치담으로서 보면 자네는 공명출세라는 쇠물을
끓이는데 쓰이는 하나의 콕스덩어리에 지나지 않아.… 자기 목적과
공명출세에 필요한 한방울의 쇠물을 위해 자네같은건 백개를 로속에 잡
아넣는대두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을걸세.》
선우치담에 대한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번 배송기사건이 지금
처럼 복잡해진것도 선우치담때문이라고 할수 있었다. 지훈은 요즘 자기
한테 선우치담이 가하는 압력이 자신의 혁명성을 과시함으로써 점점 불
안스러워져가는 지배인자리를 확고히 다지며 나가서는 산업국의 모모한
자리를 노리는데 있다는걸 모르지 않았다. 선우치담은 배송기폭발사
고때문에 가해질 상급의 추궁에서 벗어나며 자기의 혁명성을 과시하는
데 한치라도 도움이 된다면 차지훈을 법기관에 넘기는것도 주저하지 않
을것이다. 지훈은 이것을 모르지 않았다. 송표는 지훈이 아무 말을
안하자 삵의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서 이번에 내 자네를 모시고 가겠다는거네, 가족까지 모두.…》
지훈은 눈시울을 쪼프린채 송표를 바라보며 단호히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가족들까지 데리고 이곳을 훌 떠나버리면 배송기폭발이 의식적이
라던 선우치담의 말은 참말로 되여버릴것이다. 지훈은 자기가 선우치담
의 암수에 걸려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배송기를 의식적으로 파괴
했다는 더러운 루명을 쓰고싶지 않았다. 깨끗이 죽을지언정 더럽게는 살
고싶지 않은 지훈이였다.
송표는 위협하듯 지훈이앞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주위엔 인적이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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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습기를 머금은 찬바람만이 강기슭의 갈대밭을 지나 기슭으로 불어
올뿐이였다. 지훈은 이때에야 송표뒤에 서있는 깡패같은 두 사나이를 알
아보았다. 왁살스럽게 생긴 그들은 검은 안경으로 얼굴을 반나마 가리
운채 사위를 두리번거리며 송표뒤로 다가서고있었다. 지훈은 한걸음
한걸음 자기한테로 육박해오는 송표를 앙버틴채 창백해진 얼굴로 나직
이 도전했다.
《강박하는건가?》
《필요하다면…》
《말을 강에까지 몰고나갈수는 있지만 강제로 물을 먹이긴 힘들어. 사
랑과 노래는 강박해서 되는게 아니지.》
《잘 짖는다고 좋은 개가 아니고 말 잘한다고 현인이 아니야. 환경에
맞게 머리가 돌구 처신할줄 아는게 현인이지.》
두사람은 서로의 뜨거운 숨결이 얼굴에 느껴질 정도로 바투 마주섰다.
《옳바루 처신하면 대접을 받는거구 그렇지 않으면 욕보게 될걸세.》
송표는 씨근거리며 로골적으로 위협했다. 지훈이 혼자로써는 송표와
그의 뒤에 서있는 두명의 왈패들을 당하는수가 없었다. 지훈은 육체적
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이 못되였다. 마음이 모질지 못하여 자기
자신이 유리한 경우에조차 남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양보하군 하던 그였
다. 그러나 이 순간에만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정당성을 확신할
때 사람은 평상시의 자기보다 몇배나 강해지기마련이다. 지훈은 만일 송
표가 달려들면 그의 면상을 후려갈기기라도 할것처럼 주먹을 부르쥔채
부르짖었다.
《싫네. 그렇다면 더욱 싫네. 굴종의 대가로 대접을 받기보다 난 박
해를 받을지언정 내 의사대로 살고싶네.》
송표는 쓰겁게 비웃더니 뒤쪽의 사나이들을 향해 손짓했다. 두 괴한
은 어쩔사이없이 지훈에게 달려들어 량쪽에서 하나씩 그의 팔을 꼈다.
지훈은 두 괴한에게 량팔을 붙들리운채 마치 송표가 자기 팔을 붙들고
있기라도 한것처럼 분격해 소리쳤다.
《놓지 못하겠나? 이게 무슨 무례한짓인가?》
송표에겐 강도의 론리대로 자기를 정당화할 말마디가 없지 않았다.
《무례하다구? 전번에 네가 서울에 가서 쓴 돈이 얼만줄 알아? 남의
돈 떡 잘라먹듯 하겠다는건 도덕이 있는건가? 내 돈을 받아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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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도 난 너를 서울로 끌어가야겠다.》
송표는 송표대로 악이 나서 소리쳤다. 지훈을 붙든 두 괴한은 그가 소
리치지 못하게 지훈의 입에 수건까지 틀어막았다. 지훈은 아무리 요동
을 쳤으나 형틀에 묶이운것처럼 두 괴한의 손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대동강기슭의 으슥한 갈밭속에는 송표가 쌀 가지고 철근을 바꾸러 왔
다던 크지 않은 목선 한척이 숨어있었다. 겉은 초라했으나 속에는 군용
발동기를 설치한 쾌속정이였다.
송표는 강기슭에 버티고선채 차지훈을 감탕판으로 물건짝 끌고가듯 하
는 자기의 졸개들을 향하여 소리쳤다.
《야, 빨리 배밑창에 가둬놓구 너희들은 나와. 오늘 밤중으로 해탄로
심장을 도려내야 한단 말이야.》

잔잔하던 강물이 갑자기 수십길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며 폭포수를 이


루듯 사람들의 일생에는 지난날의 1년이나 2년, 지어는 10년과도 맞먹
는 사건과 충격들로 충만되고 거대한 변화의 계기점이 마련되는 그런 날
이 있다. 해탄로와 운명을 같이하여온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였다.
시당위원회를 나서는길로 억봉은 곧장 제철소로 향했다. 시당위원
회에서는 차지훈이 지배인실에서 보안일군들과 담화를 마치고 나온
이후 온데간데 없어졌다는것은 물론 그를 찾아 웬 친척된다는 젊은 사
람이 집에도 직장에도 찾아왔었다는것과 그런 친척이 그한테 없다는 사
실까지 알고있었다. 그리고 오늘 오후에 송표가 시내에 나타났댔다는 통
보도 들어왔으며 필요한 모든 조치가 취해지고있었다.
억봉은 자정이 다 되여서야 배송장에 이르렀다. 휴계실에 들어서니 석
봉이가 의자에 앉은채 책상에 엎디여 자고있었다. 책을 보다 방금 잠들
었는지 상우에는 책이 펼쳐진채 놓여있고 손에는 연필이 끼여있었다. 석
봉은 요즘 책과 이만저만 씨름하지 않았다. 학교에 가지 못한것을 어떻
게 해서든지 벌충하려고 석봉은 짬만 생기면 손에 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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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은 엎디여 잠든 동생의 머리맡에 놓여있는 기름때 묻고 보풀진 책
을 보자 지난 겨울 언젠가 그의 처한테서 온 전보를 잃어버려 동생을 노
엽히던 일이 새삼스레 생각났다. 지금 동생이 보다가 잠든 책도 그 전
보와 련관되여있다고 할수 있었다. 그때 차진옥은 아버지와 함께 애국
미를 바치러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찾아갔다가 평양에서 석봉이한테 필요
하다고 생각되는 책들을 한보따리 사가지고 돌아오며 전보를 쳤었다. 진
옥이한테 애국미를 바치라고 편지한 사람은 석봉이였다. 석봉은 진옥이
한테서 애국미 바치러 평양에 간다는 련락을 받고 돌아오던길에 책을 좀
구해오라고 련락했던것이다.
억봉은 그때 이런 내막을 알지 못했다. 억봉이 진옥의 전보를 잃어버
리는 바람에 석봉은 황주역에 나가지 못했고 진옥은 인편에 책과 함께
회중시계까지 보내주었다.
억봉은 세상모르고 곤히 자는 동생을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낮
에는 일에 딸려 뛰여다니고 밤이면 공부하느라 두눈을 쥐여뜯는 동생이
였다. 요즘 동생은 피곤이 몰려 두눈이 쑥 기여들어가고 입술까지 까실
까실 텄다. 인정많은 어머니가 살아계시여 녹초가 된 지금의 동생을 보
면 얼마나 가슴아파하시랴.
억봉은 지금까지 동생을 너무나 무정하게 대해온 자신을 새삼스레 깨
달았다. 동생한테 아버지구실까지 해야 할 자기건만 동생이 장가들
때 자기는 형구실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때는 사정이 그래서 그랬다
쳐도 자기는 언제 한번 동생을 따뜻이 대해주지조차 못하였다. 어른이
된 지금에도 쩍하면 욱박지르려 들었고 동생을 어리게 생각하는데 습관
된 나머지 그가 하는 모든것을 미타하게 여기며 마음싸하지 않았다. 동
생은 이것이 늘 불만이였었다.
색색 숨소리를 내며 곤하게 자는 동생의 모습은 볼수록 귀여웠고 천
진스러웠다. 아무리 봐야 장가든 사람같지 않다. 두볼에 발갛게 홍조가
핀 동생의 애어린 모습을 보고 누가 안해를 가진 대장부라 하랴.
하지만 석봉은 속에 령감이 들대로 들었다. 언젠가 억봉은 동생
한테 빨리 색시를 데려오라고 했었다. 그러자 동생은 《형이 장가
든 다음에…》 했다.
《너 장가든걸 세상이 다 아는데 네 색시 데려오는게 내 장가드는것
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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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두… 형이 장가들구 해탄로조업을 하면 다음날로 데려오지. 난
장가들면서 색시한테 치마 하나 해주지 못했어. 내가 색시한테 주는 례
장은 해탄로조업이거던…》
자기 속궁냥이 있는 소리여서 억봉은 어쩌지 못했다.
억봉은 단 하나뿐인 동생한테 잔치상 하나 차려주지 못하고 도적장가
들듯 하게 했다는 자책이 심하면 심할수록 자기 소원대로 마음껏 공부
나 시켰으면 얼마나 좋으랴싶었다. 작년에 1년짜리 기능공학교를 보냈
으면 석봉은 벌써 졸업하게 되였을것이 아닌가. 이번 2호해탄로조업이
나 하게 되면 하늘이 무너져도 동생을 학교에 보내야 했다.
불편하게 쪽잠든 동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서있던 억봉은 탈의함
쪽으로 걸어갔다. 억봉은 자기의 탈의함에서 작업복을 꺼내가지고 돌아
와 동생의 어깨우에 걸쳐주었다. 동생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주의했
건만 석봉은 잠귀가 밝았다. 석봉은 인기척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석봉은 형을 알아보고 잠이 깨지 않은 얼굴로 상우의 책부터 주섬주섬
거두기 시작했다.
《시간되면 깨우라고 그랬는데…》
석봉은 아마 형이 교대시간이 되였는데 잠만 잔다고 추궁하는줄 알았
는지 하품을 하며 변명이다.
《자식, 누가 뭐라고 그러니…》
억봉은 동생이 노는 꼴이 우스워 손가락으로 동생의 코를 툭 튕겨주
었다.
《아야.》
석봉은 손가락에 면바로 코를 줘맞고 우습강스레 얼굴을 찡그렸다. 억
봉은 동생의 턱밑에 손을 다시 가져갔으나 동생은 날쌔게 형의 손을 쳐
버렸다. 롱질을 하는통에 석봉은 잠이 말끔히 깨여났다. 그제야 석봉은
억봉을 등지고 슬며시 품에서 시계를 꺼내였다. 진옥의 부모들이 시계
를 사보내준 이후부터 석봉은 여간만 으쓱대지 않았다. 언젠가는 남들
처럼 손목시계를 만든다고 몸시계케스에 줄맬 고리를 붙이더니 작은 접
시만 한 그 회중시계를 손목에 척 차기까지 했었다.
《임마, 회중시계를 누가 손목에 찬다던?… 몸에 품어가지고다닌다구
해서 이름마저 회중시계인데…》
억봉이가 동생의 시계를 부러워하면서도 꼴불견이라고 면박을 주자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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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 팔목에 찬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며 《큼직한게 보기 좋기만 하다.》
하고 어깨까지 으쓱했었다. 그후 동생이 손목시계 만들었던 회중시계를
다시 품에 넣어가지고다니는걸 보고 억봉이가 《왜? 보란듯이 손목에 차
고다니려무나.》라고 했을 때 석봉은 《손목에 차고다니니까 자꾸 부러
워하며 빌려달래는 사람이 많아서 글렀어.》하며 형을 약올리였었다.
억봉은 지금 자기 몰래 동생이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보는걸 알고 저
혼자 시무룩이 웃었다. 억봉은 이밤따라 웬일인지 동생이 귀엽기만 했다.
《보나마나 시간이야 많지. 예 와서 좀 앉아.》
경비후반교대는 밤 2시부터다. 교대시간까지는 아직 시간반이 남아있
다. 억봉은 휴계실의자에 제먼저 앉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동생
한테 내밀었다. 시당에 찾아갔다가 리석한테서 얻어넣은 《금강》이다.
《야, 이거 형이 오늘 어떻게 된거야.》
석봉은 얼른 담배갑에서 담배 한대를 꺼내였다.
《그 담배 너 가져.》
억봉은 주머니에서 다른 담배갑을 꺼내 한대를 입에 물었다. 석봉은
고급담배 한갑을 형이 통채로 주자 오히려 인심쓰는것을 경계하며 도리
머리를 했다.
《싫어, 그러다 입 부르틀라구.》
《자식두, 내 오늘은 시계 빌려달라지 않을게…》
억봉은 지난날 동생한테 시계 빌려달랄 일이 생길 때마다 이런 수를
자주 쓰군 했었다.
《정말이지?》
《정말 아니구―》
석봉은 형한테서 다짐을 받고나서야 담배갑을 자기 작업복 웃주머니
에 집어넣었다. 석봉은 담배를 붙여물며 상우에 펼쳐놓은 책을 자기앞
으로 끌어당겼다. 억봉은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워문채 동생을 물끄러
미 바라보다 느닷없이 이렇게 물었다.
《석봉아, 개학을 9월달에 한다지?》
석봉은 형이 왜 그러나해 물끄러미 쳐다보며 고개를 끄떡했다.
《늦어두 이번 여름안으로 해탄로를 조업해야 할테니까… 2호해탄로
조업이나 하구 새 학년도부터 넌 학교에 공부하러 가라.》
《응? 어느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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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과 함께 길다란 의자 한끝에 앉아있던 석봉은 형쪽으로 바싹 다
가앉았다.
《너 가고싶은데루.》
《정말?》
《정말 아니구. 갈바엔 종합대학에 가.》
《뭐? 종합대학?!》
《오늘 시당위원장동지가 그러는데 작년 가을에 종합대학이 생
겼대. 종합대학엔 지난날 배우지 못한 로동자, 농민의 자식들을 위해 예
비과란걸 두었다더라.》
석봉은 이미 그것을 알고있었다. 석봉은 작년부터 알았으나 자기같은
로동자가 어떻게 대학까지 가랴 하는 위축감과 자기가 공부하겠다면 형
이랑 승인하겠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있었을뿐이다.
억봉은 페부깊숙이 들여마시였던 담배연기를 가벼운 한숨과 함께
밖으로 내보내며 자책하듯 말했다.
《해탄로를 복구하자고보니 몰라서 안타까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구나. 까막눈으로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손더듬하며 일할수
야 없지 않니… 기술이 있었으면 벌써 해탄로를 돌렸을게다.》
석봉은 형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게 이상스러운 모양이였다.
《형도 배울래?》
《나두 배워야지.》
《그러면 이번 가을에 둘이서 다같이 배우러 가자. 종합대
학에선 장학금두 준대.》
《한꺼번에 둘이 다 가서야 어떻게 배우겠니. 네가 먼저 가서 공부해
라. 네가 공부하고 돌아오면 나두 대학에 가겠다.》
《야, 그러면 우리 집안에서 공부한 사람이 셋이나 나오겠구나.》
기봉은 이미 평양학원을 졸업했다.
억봉이와 석봉은 자기네 형제가 지금 당장 대학생모자라도 쓰는듯 한
기분이였다. 해방전에는 대학은커녕 소학교울안도 넘겨다보지 못하던 자
기네 형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기만 똑똑하면 대학까지 얼마든지 공부
할수 있었다. 국가에서는 작년 봄부터 로동자, 사무원가정 학생들에게 국
가식량을 공급해주는 조치도 취해주었다. 억봉은 기뻐 어쩔줄 모르는 동
생을 보며 어떻게 해서든지 동생만은 기어이 종합대학을 나오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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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고 마음굳게 다지였다.
담배를 태우며 두 형제는 제각기 자기 생각에 잠기였다.
《형, 불이란 이름이 어때?》
석봉이 느닷없이 이렇게 물었다.
《응?》
억봉의 반문에 석봉은 얼굴이 빨개지더니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중얼
거렸다.
《진옥이가 래달 해산이래.…》
《뭐?》
억봉은 동생을 바라보며 벌쭉 웃었다. 한달후면 동생은 아버지가
된다. 세월은 빨랐다. 자기네가 발가벗고 뛰여놀던 때가 엊그제같은
데 벌써 자식이 생기다니… 장가를 들었으니 아버지가 되는것은 정해놓
은 리치지만 아버지구실을 옳게 한다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식을 낳
기보다 부모가 되기는 어려운 법이다.
억봉은 동생이 지금까지 습관되지 않았던 아버지된 의무를 이제부터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쁘면서도 뻐근했다. 동생을 장가보낼 때 아
무것도 해주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그 벌충을 단단히 해야 할것이다.
동생을 바라보며 벌쭉벌쭉 웃던 억봉은 석봉의 잔등을 철썩 갈겼다.
《자식, 좋겠구나. 네가 아버지되면 난 큰아버지가 되는게 아니야. 네
색시보구 아들을 낳으라구 그래라.》
《아들일게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꿈에 벌써 두번이나 봤는데 뭐…》
《그래서 불이라구 이름 짓겠다는거야?》
《응, 불을 다루는 사나이, 불고장의 원종자란 뜻에서 말이야.》
《그럴듯해. 하지만 이름은 아이 난 다음에 지어두 돼. 당장 급한건
아이어머니를 위하는거란 말이다. 너의 색시 뭘 좋아하니?》
석봉은 형이 묻는 말뜻을 몰라 멀뚱멀뚱 쳐다만 봤다.
《뭐 자꾸 자기 먹고싶은거 찾는다던데…》
《씨― 입쓰릴 뭐 지금 하나. 당장 해산하게 됐는데…》
《임마, 입쓰리가 지났으면 눈쓰리라두 시키자꾸나. 저 좋아하는거 잔
뜩 쌓아놓구 저 먹고싶은 때 먹으라구. 시집올 때 온반 한그릇 못 사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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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래일 당장 봉산으루 누이 보내자.》
억봉은 태여날 조카보다도 제수를 더 생각했다.
휴계실에 걸린 벽시계가 한점을 때리였다. 억봉은 밤새껏 동생과
마주앉아있고싶었으나 자리에서 일어섰다.
《얘, 난 강안경비하는데루 가보겠다. 넌 한잠 더 자, 책보느라 새우
지 말구… 이제 배울 날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요즘 너 되여가는 꼴 보
면 너의 색신 질겁해 아들은커녕 딸두 못 낳겠다.》
형이 걱정해주는 말에 석봉은 벌쭉 웃더니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형, 이 시계 차구 가.》
《시곈 해서 뭘해.》
《순찰돌 때 시계 있으면 좋지. 내 이제 공부하러 갈 땐 이 시계 형
한테 줄게…》
《시계야 공부하는 사람한테 더 필요하지. 너 대학 나올 땐 내 번쩍
거리는 손목시계 하나 사줄라.》
《야, 이거 형이 오늘 어떻게 된거야.》
석봉은 입이 귀밑까지 째지였다. 억봉은 동생이 갖고가라는 회중시계
를 끝내 사양했다. 동생은 그 시계를 여간만 귀중히 여기지 않는다. 억
봉은 지난날 자기가 동생의 시계를 뺏아가지고다니던 철없는 행동이 뉘
우쳐지면서 장인, 장모가 토지개혁혜택으로 분여받은 땅에서 처음으
로 농사지어 사준 시계를 고이 보관하게 하고싶었다.
《얘, 시내에 송표가 나타났어. 한잠 자구 경비 잘 서라.》
억봉은 동생에게 거듭 당부하고나서 휴계실을 나섰다.

석봉은 형이 떠나간 후에도 휴계실에 앉아 저혼자 벌쭉벌쭉 웃었다.


뚝박쇠인줄 알았던 형한테도 얼마나 웅심깊은 인정이 있는것인가. 석봉
은 형이 주고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석봉은 이제 자기가 멀지 않
아 아버지가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의 피가 스멀거리였다. 빨리 해탄
로를 조업하고 진옥을 여기로 데려와야 했다. 해탄로조업식땐 진옥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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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서 태여난 자식과 함께 해탄사람들이 제 손으로 처음 만든 콕스를
구경시켜야 할것이다. 그런 후 자기는 종합대학으로 공부하러 갈
것이다. 석봉은 대학생모자를 쓴 자기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였다.
작년말 이곳에도 종합대학 학생들이 왔었다. 석봉은 그때
공장민청에서 문맹퇴치사업에 동원되여온 대학생들을 만나보고 그들
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들모두가 자기와 같은 로동자, 농민
의 자식이라는것을 알고서는 더욱 그랬다. 욕망의 열은 정복의 만족만
으로써만 가셔지는 법이여서 배움에 대한 동경으로 부풀고 달아오른 석
봉의 가슴은 배움의 꿈이 실현되는 그날에야 안정될것이였다.
행복의 앞날을 꿈꾸며 기쁨에 한껏 취해있던 석봉은 자리에서 일어섰
다. 이제 잠자기는 글렀다. 석봉은 오늘같이 기쁜 날 남을 위해 무엇인
가 좋은 일을 하고싶었다. 석봉은 교대시간보다 일찍 배송장으로 나갔다.
달모는 배송장 한쪽벽에 기대여놓은 의자에 앉아있었다. 달모는 교대
시간도 아닌데 나타난 석봉을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불만스럽게 물었다.
《너두 검열왔니?》
《예?》
《시치미를 떼지 말어. 특별경빈데 술처먹구 자지 않나 해 검열나왔
다구 솔직히 말할게지…》
《원, 아저씨두…》
달모는 석봉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요즘 마음 한구석이 옹칠대
로 옹쳐있는 달모여서 어쩔수 없었다. 달모는 의자에서 일어나 부스럭
거리더니 보꾸레미를 들어 그속에서 병을 꺼내보이였다.
《자, 보라구. 내가 이 술을 한모금이라두 마시였나.》
달모가 흔들어보이는 술병속에는 술이 목까지 가득 차있었다. 석봉은
저녁때 경비를 조직하면서 형이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고 한 말을 달모
가 몹시 아프게 받아들였으며 자기 인격에 대한 그 무슨 모욕으로까지
느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아직 술을 갖고있는걸 보면 달모는 집에 갔
다오지 못한 모양이다. 술이란 말만 듣고도 십리밖에서 찾아온다던
술군이 술병을 옆에 끼고앉아 보기만 하자니 마음이 편하지 않을것이다.
《아저씨, 요즘은 계속 공연히 노여움만 쓰시누만요.》
석봉은 달모가 측은해 그를 위로하듯 말하며 의자 한끝에 주저앉았다.
《노여움 안쓰게 됐어? 난 뭐 귀가 없어 뒤에서 나보구 하는 소릴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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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줄 아나?》
달모는 술병이 들어있는 보자기를 의자에 내려놓으며 자기도 털썩 주
저앉았다. 술때문에 마음속에 입은 그의 상처는 곪길대로 곪겨있었다.
《누가 아저씨보구 뒤에서 뭐라드나요?》
달모를 위로하며 진정시키려던 석봉의 말은 오히려 그의 설음에 부채
질하는 격이 되였다. 달모는 언젠가 기분좋은김에 한잔 술을 마시고 출
근했다가 억봉이한테 되게 욕먹은것을 아직도 새기지 못하고있었다.
《해방되던 해 내 생일두 그렇지. 그날 난 내 생일날인것두 몰랐댔
구 우리 계향이가 내 생일 차려주겠다구 술을 사들구 날 데리러 왔던
건데… 그날 반동들이 습격올줄 알았으면 내가 술을 마시자고 했겠
나 말이야… 응? 그런데 뭐 내가 우정 억봉이한테 술을 먹였다구? 그래
나때문에 억봉이가 반동들을 붙들지 못했단 말이야?》
달모는 언젠가 계향이와 억봉이한테서 각기 들은 말을 한데 모아 석
봉이가 이 말들을 하기라도 한것처럼 따지고들었다.
《원, 아저씨두… 누가 그런 말을 하더나요?》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주듯 석봉이 유한 립장을 취할수록 달모는 석봉
을 도적놈 몰듯 하려들었다.
《오늘두 그렇지. 할소리 없으니까 특별경비라구 핑게대구 네 형이 나
한테 널 파수군으로 붙였지. 술먹나 안 먹나 감시하라구… 내 괘씸해 술
을 안 보내구 우정 이렇게 끼구앉아있네. 내가 오늘 술병 들구앉아 먹
나 안 먹나 눈있으면 좀 보라구.》
석봉은 껄껄 웃기만 했다. 달모의 푸념이 잦아들었을 때 석봉은 곡해
를 풀어주려고 자기 형이 시당위원회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지금 시내에 송표가 나타났대요.》
《뭐라구?》
달모는 그제야 정신이 든듯 대번에 두눈이 둥그래졌다.
《해방되던 해 배송기습격두 그놈이 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특별경비
를 조직한거지 할일없어 아저씨가 술먹나 안 먹나 감시하느라구 날 오
늘 경비서게 했겠나요 원.… 그렇다면 난 시시해서 애당초 경비를 서지
부터 않아요.》
석봉은 형을 두둔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달모를 위로하려고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달모는 고개를 수굿하고 앉아 담배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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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속이는게 아니겠지?》
달모는 담배를 말아 춤질을 하려고 담배대를 입에 가져다대며 다짐받
듯 물었다.
《그런 말두 거짓말을 하나요?》
그제야 달모는 속이 다소 누그러진 표정을 지어보이며 불을 붙이
려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석봉은 얼른 주머니에서 가치담배를 갑채로
꺼냈다.
《자, 이거 한대 태우시우.》
《싫네. 난 이게 좋아.》
《그러시지 말구 한대 태우시라는데요.》
석봉은 담배갑에서 담배 한대를 뽑아 달모의 손에 기어이 들려주고 불
까지 붙여주었다. 달모는 석봉이가 주는 담배를 뿌리치지 않았다. 석봉
은 착하고 어진 마음에 어떻게 해서든지 달모의 속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다.
《아저씨, 내 해탄로조업하는 날 술 한말 사지구 아저씨 찾아가지요.
그때 허리띠 풀어놓구 한번 맘껏 먹어보자요. 장가들면서두 내 아저씨
한테 술 한잔 대접하지 못했는데…》
달모는 석봉이가 자기를 철없는 아이 얼리듯 하려들자 안된 모양이였
다. 담배만 뻑뻑 들여빨던 달모는 꽁초를 내버리며 방금전에 자기가 애
매한 석봉이한테 화풀이하려든걸 사과했다.
《석봉이, 용서하라구… 늙어가면서 내 점점 주책이 없어지는가 보
네.》
달모는 두눈을 슴벅거리더니 의자우에 놓아둔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
기속의 밥바리에는 노랗게 콩보숭이를 묻힌 찰떡이 아직 반이나 담겨있
었다.
《아니, 웬 떡이야요?》
석봉은 고소한 콩고물냄새에 속이 벌컥 뒤집히는가싶었다. 그러지 않
아도 속이 출출하던 참이다.
《내가 오늘 경비선다구 우리 계향이가 가져왔더군. 계향이가 저녁 가
지구 왔다가 나한테 술이 있는걸 보구 자기가 가져가겠다는거야. 집에
가는것두 아니구 밤일을 나가면서 처녀가 뭘하러 술병 들구 다니겠냐구
내가 그랬더니 글쎄 계향이가 발칵 성을 내는게 아니겠나. 해방되던 해

505
내 생일날 제가 술병들고 해탄에 오지만 않았어두 그날 배송기 파괴하
러 왔던 반동들을 잡았을게 아닌가구. 자긴 그게 가슴에 맺힌다구.
어떤 사람들은 억봉이를 술취하게 만들려구 그날 우정 내가 술먹였다는
소리까지 한다는게 아니겠나. 언젠가두 이 말을 해서 내 가슴에 못을 박
더니 오늘 또 그러드란 말이야. 내 그 소릴 듣구 그만…》
달모는 자기의 처조카를 자기 자식들보다도 더 끔찍이 생각했고 그의
말이라면 황소를 쥐구멍으로 끌라고 해도 그대로 하려고 했다. 요즘 억
봉이와 계향의 사이는 남다르게 되여갔고 그들을 두고 해탄사람들은 적
지 않게 수군거렸다.
《억봉이 그 녀석 보통 엉큼하지 않단 말이야. 파혼합네 하더니 련애
만 하는게…》
《녀자는 그렇게 다뤄야 하는거야. 한번 때리구 찼다가 슬쩍 당겨서
어루만져주면서 말이야.》
억봉이를 놀리는 이런 말을 누구보다도 흡족해 듣군 하는 달모였다.
달모는 해방과 함께 서로 티각태각하며 새롭게 움터나는 억봉이와 계향
의 사랑이 자기때문에 피해입고 그늘질가봐 여간만 마음쓰지 않았다. 그
래서 억봉이와 계향이가 하는 말을 누가 하는 말보다도 곱으로 아프게
받아들인다. 석봉은 달모가 오늘 밤따라 심란해하며 안절부절 못해하는
심정이 지금에야 리해되는가싶었다. 억봉이와 계향의 일이 잘되기를 바
라는 심정은 석봉이도 달모와 다름이 없었다.
《아저씨, 이젠 그런 말 그만하구 떡이나 먹자요.》
석봉은 밥바리에서 찰떡 하나를 닁큼 집어들었다. 잠간사이에 밥바리
속의 떡은 말끔히 밑창났다. 두사람은 이것이 자기들이 이 세상에서 마
지막으로 함께 나눈 담배로 되고 음식으로 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
하였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돌발적이며 예고없이 부지불식간에 찾아
오는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구나 지나간 일을 돌이켜보기는 쉬워도
앞일을 예측하기는 어렵다. 두사람은 몇분후에 벌어질 일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저씨, 이젠 교대하자요.》
《아직 시간이 안됐어.》
《빨리 교대하구 자라요. 자기 전에 한고뿌 마시구. 그러면 피곤이 쭉
풀릴거예요.》

506
《그러다 욕먹을라구…》
《욕은 누구한테 욕먹는단 말이예요. 자기 교대 다 끝내구 자면서 마
시는데… 그런 걱정말구 래일 일 많이 할 걱정이나 하라요.》
석봉은 달모를 휴계실로 떠밀었다.

석봉이 달모와 경비를 교대한지 얼마후였다. 조용한 밤이여서 벽시계


가 두점을 치는 소리가 자못 요란히 들리였다. 서로 경비를 교대해야 할
이 시간에 석봉은 책을 들고 배송장에 앉아있었고 달모는 한고뿌 술을
마시고 기분좋아 휴계실에 곯아떨어졌다.
이밤 석봉은 가슴속에 넘쳐나는 기쁨때문에 피곤을 몰랐다. 책을
보다가는 미래를 꿈꾸며 공상에 잠기고 대학생이 되여 넓은 강의실에 앉
아있는 자기 모습을 그려보며 빙긋이 웃고나서 또 책을 보군 했다. 가
슴속에서 순간도 열정이 식을줄 모르는 너무도 꽃다운 스물세살의 석봉
이였다.
석봉이 펼쳐놓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형이 주고간 담배를 꺼내
려고 주머니를 부스럭거리던 순간이였다.
《꼼짝말아!》
난데없이 나지막한 호령소리가 울리더니 두 괴한이 배송장안으로
뛰여들어왔다. 석봉에게 달려들 기회를 노리며 두 괴한은 한손에 칼을
뽑아들고 한손에 권총을 꺼내든채 잔뜩 허리를 꼬부리고 살금살금 다가
왔다.
《야, 넌 빨리―》
뒤따르던 괴한이 앞선 괴한에게 나직이 명령했다. 앞섰던 괴한은
옆구리에 끼고왔던 점심곽같은것을 들고 배송기쪽으로 달려갔다. 석
봉은 그제야 한밤중에 달려든 이 괴한들이 지금 배송기파괴를 꾀함을 깨
달았다. 삼촌을 죽이고 도면을 빼앗기웠던 배송기, 해방되던 그해 초겨
울 수류탄을 던져 2호배송기를 못쓰게 만들더니 오늘은 바야흐로 정비
가 끝나 이제 증기시린다뚜껑만 깎아끼우면 되는 1호배송기마저 또
파괴하려고 적들이 달려든것이다. 석봉은 저도 모르게 배송기쪽으로 움
직여갔다. 그러자 석봉을 지켜서있던 악한이 앞을 막아섰다. 석봉은 그
제야 자기앞을 막아선 송표를 알아보았다. 한손에는 시퍼런 칼을 빼들
고 한손에는 총을 뽑아든채 달려들 기회를 엿보며 송표가 마주서있었다.

507
《네놈이였구나!》
석봉은 씹어뱉듯 뇌이였다.
《너였구나!》
송표도 석봉을 풋낯이나 알고있었다. 석봉은 지금까지 송표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기가 처음이였다. 지난날엔 멀리서부터 송표앞에 허리
를 굽혀야 했고 똑바로 바라볼수조차 없었다. 일본놈이상으로 으시대던
송표는 석봉이 같은 로동자들을 개나 돼지만큼도 여기지 않았었다.
석봉의 두눈에서는 송표의 손에 들려있는 칼끝에 반사되는 불빛보다도
예리한 섬광이 번쩍했다.
두사람은 상대방을 덮칠 기회를 엿보며 잠시 서로 노려만 봤다. 송표
는 칼을 빼든채 석봉이앞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석봉은 벽을 등진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잠시후에야 석봉은 소리쳐서 사람들께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저씨―》
석봉은 휴계실에서 자고있는 달모가 들으라고 배송장이 떠나갈듯
고함을 질렀다. 만신의 힘을 다해 다시 소리를 지르려던 석봉은 《어이
쿠―》하는 외마디비명소리와 함께 가슴을 싸쥐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송표가 던진 칼이 그의 가슴에 면바로 들어박힌것이였다. 석봉은 한순
간 눈앞이 아뜩했으나 의식을 잃지 않았다.
《빨리!》
석봉은 송표가 자기 부하를 독촉하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놈들은
몹시 서두르고있었다. 배송장에 반동들이 나타났다는것을 어떻게 해
서든지 알려야 했다. 석봉은 고함치고싶었으나 입을 틀어막히운것처
럼 이상하게도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석봉은 배송장철문이라도 두드려
야겠다는 생각에 문쪽으로 벌레벌레 기여가기 시작했다. 철문을 두드리
면 잠든 달모가 깨여날수 있고 밖에서 순찰을 도는 자위대원들한테도 알
릴수 있을것이다.
석봉은 철판으로 만든 문이 있는 곳까지 서너메터도 되나마나한 거리
가 천리처럼 멀게만 생각됐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움직일수가 없다.
석봉은 최후의 기력을 다해 철문가까이로 기여왔으나 두드릴것이 없었
다. 석봉은 출입문가까이에 세워놓은 지레대를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가까스로 쇠지레대를 손에 잡아쥐고 석봉은 땅에서 간신히 일어나 있는

508
힘을 다해 문짝을 때리였다. 철판문짝은 지레대에 얻어맞고 종처럼
쩡하고 울리였다. 다시 지레대를 머리우로 들어올리던 순간 석봉은
등뒤에서 무서운 타격을 느끼며 앞으로 다시 푹 꼬꾸라졌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지레대는 철판문짝을 더는 두드리지 못하고 콩크리트바닥을 때
리며 석봉이와 함께 땅에 떨어졌다. 송표와 같이 왔던 괴한이 석봉을 향
해 두번째로 칼을 던진것이였다. 하지만 석봉이가 지레대로 철판문짝을
때린 소리에 놈들은 극도로 당황해났다.
《빨리― 빨리―》
석봉은 희미해오는 의식속에서 놈들이 다급해하는 소리를 들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배송장밖으로 뛰여나가는 놈들이 보이였다. 이제
얼마후면 놈들이 설치해놓은 시한탄에 배송기가 하늘로 날아날것이다.
해탄사람들의 피와 땀이 스민 배송기가 파괴되게 할수는 없었다. 그리
고 놈들을 고스란히 그대로 돌려보낼수도 없었다. 아무리 이곳을 빠져
나간다 해도 놈들은 제철소구내에 있는 이상 독안에 든 쥐였다. 석봉은
최후의 기력을 다해 땅을 차고 다시 일어났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지레대를 잡아쥔채 석봉은 종처럼 철판문짝을 때리기 시작했다.
떵― 떵―
가슴과 등에 칼을 맞은채 석봉이가 철판문짝을 때리는 소리는 고요한
구내의 밤대기를 울리였다. 아무리 철판문짝을 두드려도 달모는 깨여나
지 못했다.
(아, 내가 왜 달모아저씨더러 한고뿌 마시고 자라 했을가.)
달모의 울적한 기분도 좋게 해주고 피곤을 풀게 하려고 그랬던노
릇이 이렇게 될줄이야. 피곤이 몰린데다 술까지 마셨으니 달모가 깨여
날리 없다.
석봉은 더는 철판문짝을 두드릴 힘이 없었다. 기력이 진해오며 온몸
이 그대로 땅에 잦아드는가싶었다.
얼마후 밖에서 총소리가 터지였다. 총소리에 뒤이어 다급하게 뛰여가
고 뛰여오는 사람들의 발자국소리가 울리였다.
잠시후 억봉이가 나타났다. 석봉은 형을 보고 간신히 속삭였다.
《놈들이 배송기에… 시한탄을…》
석봉은 억봉이의 품에 안겨 몇번이고 같은 말을 곱씹고나서 의식을 잃
었다.

509
시한탄은 처리되였으나 석봉의 생명은 시시각각으로 위험해갔다.
석봉은 림종의 마지막길을 걷고있었다.
《형, 내가 왜… 형이 하란대루 하지 않았을가?》
석봉은 달모한테 자기가 술마시고 자라고 한걸 몹시 후회했다. 석봉
은 어제밤 형이 경비를 조직하면서 애당초 술마실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자기가 그 말을 듣지 않고 달모한테 술을 마시라고 한것때문에
반동들이 그것을 알고 배송장에 달려들었던것만 같은 심정이였다.
석봉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은 달모뿐이였다. 달모는 사람들이 달려와
깨웠을 때에야 일어났다.
《이자식아, 난 꼭 한고뿌밖에 안 마셨는데…》
달모는 자기가 술마시고 자다가 깨여나지 못해 배송장이 반동들한
테 습격당하였고 석봉이가 참변을 당한것만 같아 자기의 가슴을 쥐여뜯
었다.
석봉은 억봉의 무릎우에 머리를 눕힌채 떨리는 손으로 달모의 손을 잡
았다.
《아저씨… 잘못은 나한테 있어요. 내가 마시라구 했으니까… 아
저씨… 이다음엔 절대… 마시지 말아요. 몸에 해로우니까요. 내 어느 책
에선가 보니까… 술잔은 크지 않아도… 술에 빠져죽은 사람이… 깊은 물
에 빠져죽은 사람보다 많다고 했어요.》
석봉은 해쓱해진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그리였다.
《아이구, 내 이젠 절대 술을 먹지 않을게… 너 툭툭 털구 일어나려
무나.》
달모는 자기 가슴을 쥐여뜯다가는 땅바닥을 때리였고 그러다가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쿵쿵 때리였다.
웃음짓던 석봉은 잠시후 고통으로 얼굴이 이그러졌다. 괴로와하는 동
생을 품에 안고있는 억봉은 나무칼로 자기 가슴을 쪼박쪼박 오려내는가
싶었다. 그렇게도 공부하고싶어하던 동생이였다. 동생이 기능공학교
에 가겠다고 하던 그때 자기가 입학원서를 찢어버리지만 않았으면 동생
은 지금 이 배송장에 있지부터 않았을것이였다. 전날 밤에 경비선 석봉
을 곱대거리만 시키지 않았어도 동생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것이였
다. 억봉은 철부지 어린시절 언젠가 석봉이 엄마잃고 배고파 우는 막내
동생한테 먹이겠다고 우유병을 들고오다 차지훈한테 도적으로 몰렸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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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라 하고 사정없이 발길로 걷어차며 석봉을 때리던 일이 생각나 지
금도 가슴이 얼얼했다. 나는 왜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살틀히 위해주지
못하였던가. 어머니도 안계시고 아버지도 안계신데 응당 자기가 부모노
릇까지 했어야 할것이 아닌가.
형의 품에 안겨 석봉은 석봉이대로 괴로와했다. 그의 입술은 바싹 마
르다못해 텄다.
《형, 왜 이렇게 답답하니?》
《이제 나을게다.》
억봉은 한손으로 동생의 작업복웃단추를 벗겨주며 겨우 대답했다. 석
봉은 형의 무릎우에 누워 물끄러미 형의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형, 2호해탄로 조업하게 되면… 나보구 대학에 가라구 그랬지?》
억봉은 동생의 물음에 그저 머리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정말아니구…》
《그러면 됐어. 진옥이한테 잘 말해줘.… 진옥인… 진옥인 좋은 동무
야.》
억봉은 기능공학교에 입학원서를 쓴것때문에 진옥이가 동생의 허파에
바람을 집어넣으며 꼬드긴다고 공연히 욕하던게 새삼스레 생각났다. 억
봉은 지난날 자기가 동생의 가슴에 너무나 아픈 못만 박았음을 새삼스
레 깨달았다.
《아, 배우고싶었는데… 꼭 종합대학에 가자구 했는데…》
석봉은 숨이 차 헐떡거리며 점점 더 괴로와했다. 그는 림종의 이 시
각 육체의 고통보다도 배움에 대한 갈망을 끝내 못 이룬것때문에 더 괴
로와했다. 석봉은 몸을 뒤척이더니 갑자기 맥없이 손을 늘어뜨리였다.
가빠하던 숨소리도 갑자기 뚝 그치였다. 석봉은 더는 몸을 움직이지 않
았다. 새날이 밝아오던 때 석봉은 억봉의 품에 안겨 시시각각으로
몸이 싸늘히 식어갔다. 이미 심장의 고동을 멈춘 석봉의 품에서는
배움에 대한 꿈을 부풀게 하며 그를 미래에로 부르던 회중시계가 잠시
도 쉬지 않고 착각거렸다. 너무도 꽃다운 나이에 귀중한 사랑과 꿈
을 남겨놓고 떠나간 석봉의 심장이 뛰던 소리를 마치 자기가 대신하기
라도 하려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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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지훈은 병원침대우에서야 눈을 떴다. 의식을 회복하는 첫 순간 지훈


은 아직도 자기가 배우에 묶이워있는듯 한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송표의 졸도들한테 랍치되여 지훈은 두손을 결박당한채 어두운 기관
실에 짐짝처럼 던져지고말았다. 기름냄새 역스러운 기관실에서 지훈
은 줄곧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였었다. 죽음의 공포는 배가 움직이기 시
작했을 때 절정에 달하였었다. 사람은 태여났다 아무때고 한번은 죽기
마련이지만 너무도 값없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지훈은 괴로왔다. 지훈은
닥쳐온 죽음을 현실적으로 눈앞에 보는 이때에야 지금까지 자기가 기술
을 배운 덕에 험난한 생활의 파도를 여러차례나 용이하게 이겨냈다고 믿
어온것이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자기가 필생의 힘을 다해 닦아온 기술과
재능의 보호능력이 얼마나 무력하고 보잘것없는가를 깨닫는가 싶었다.
돈과 녀자밖에 모르는 송표같은 량심도 도덕도 없는 악한들에게서 인간
의 기술과 재능이 존중받을수는 없었다. 송표같은 악한들이 없는 세상
에서만 인간의 기술과 재능에 대해 말할수 있었고 인간의 재능과 기술
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우선 송표같은 인간쓰레기들을 없애버려야 했다.
지훈은 송표를 따라 서울에 갔던 지난 일이 새삼스레 뉘우쳐지면서 그
과오가 오늘 자기 운명에 이런 비참한 종말을 가져왔다는걸 깨달았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해 얼마후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려왔다. 배우에 남
아서 송표를 기다리던 두놈은 총소리가 울리자 몹시 불안해했다. 놈들
이 기관에 발동을 걸지 않고 움직이는걸 보면 배가 아직 발동소리를 내
서는 안될 곳에 있음이 분명했다. 어디선가 기계소리가 들려왔다. 지훈
은 배가 제철소구내 가까운 강기슭에 있다는것을 확신하는 순간부터 자
기 입에 틀어막힌 수건을 뽑으려고 애를 썼다. 지훈은 벽에 박혀있는 못
에 수건 한끝을 가져다 걸고 입에서 수건을 뽑아낸 후 만신의 힘을 다
해 고함치기 시작했다.
《동무들! 악당들이 여기 있소.》
지훈은 제철소구내를 걸어가던 그 누구라도 들어주었으면 하는 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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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원으로 계속 고함을 질렀다.
《동무들! 악당들이 여기 있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지훈은 배우에 남아있던 악한이 뒤통수에 가
하는 타격을 받고 의식을 잃었었다. 하지만 차지훈이 지른 고함소리에
해상자위대원들은 적무장간첩선을 발견할수 있었고 차지훈도 구원해
낼수 있었다.
지훈은 정신을 차리는 순간 아직도 자기가 무장간첩들의 배우에 있는
듯 한 착각에 그때처럼 소리를 질렀다.
《동무들! 악당들이 여기 있소.》
침대에서 일어나는 지훈을 누군가가 부축했다. 지훈은 한참만에야 자
기를 부축하며 진정시키는 계향을 알아보았다. 계향은 조심조심 지훈을
침대에 다시 눕히였다.
《여기가 어디요?》
지훈은 계향을 뿌리치고 침대에서 다시 일어나려 했다.
《병원이예요.》
지훈은 계향의 대답에야 그옆에 서있는 알뜰의 모습도 알아보았다.
《선생님, 진정하고 누우세요.》
계향은 속삭이듯 나직이 말했다. 지훈은 알뜰이와 계향을 알아보고 자
기가 위험에서 구원되였음을 깨닫는 순간 초인간적긴장이 풀리면서
허탈상태에 빠지고말았다. 그때부터 지훈은 꼬박 하루나 잠을 잤다. 잠
에서 깨여나서야 지훈은 자기의 머리맡에 놓여있는 첫물딸기를 보았고
그것이 어제 병원에 면회왔던 알뜰이와 계향이가 가져온것이라는것을 간
호원을 통해 알았다.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지훈은 시당에서 찾는다는 련락을 받았다.
지훈은 갑작스레 지금까지 자기가 모대기며 고민해온 모든것이 어디에
서 무엇때문에 생겨났는가를 깨닫는상싶었다.
지훈은 지금까지 기사의 본분을 지켜 맡은바 기술문제들에 관계하고
능력껏 처리하려 하였건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자기가
관계해온 해탄로복구의 순수 기술문제들은 정치적문제로 확대되고 예리
화되였으며 자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기자신이 여기에 말려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번 배송기증기시린다폭발사고 역시 그랬다. 증기시
린다폭발은 증기압력을 잘못 타산한 순수 기술실무상의 착오라고 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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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지만 그 기술적착오를 낳은것은 야마다의 기술에 대한 숭배와 그가
준 참고자료들에 대한 절대화에 있었다. 무경각하게 야마다의 기술참고
자료대로만 하려고 하지 않았어도 배송기폭발사고를 내지 않았을것이다.
이번 폭발사고는 일본 자본주의기술에 대한 숭배와 사대로부터 생겨났
으며 이런 숭배와 사대는 기술과 재능을 절대화한데 뿌리박고있었다. 재
능절대화와 기술만능주의가 낳은 일본기술에 대한 숭배와 사대로부터 한
때 자기는 해탄로복구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믿었으며 제강소화방침에 동
조하여 콕스화학기사의 본분을 내버리려고까지 했다. 허무감에서 벗
어나고 살길을 찾기 위해 지훈은 야마다한테 쌀과 석탄을 보내주지 않
으면 안되였다. 야마다한테서 평로관리운영경험과 제철소야금설비들
에 대한 자료를 뽑기 위한 시도는 그 어떤 애국적이거나 민족적인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약삭바르게 자기가 살구멍을 뚫러놓으려는 감바리
의 비렬하고 리기적인 행위였다. 이것은 억봉이네한테서 배척을 받았고
좌경기회주의자들한테서 민족반역자라는 어마어마한 감투까지 뒤집어썼
다. 그리고 의도와는 상관없이 배송기폭발사고를 빚어냈으며 송표같
은 인간쓰레기들한테까지 리용당하지 않으면 안되였었다. 배송기폭발사
고는 물론 석봉의 희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은 자기가 져야 했다. 재
능제일주의와 기술만능의 사상에서 움튼 자본주의기술에 대한 숭배와 사
대― 이것은 배송기폭발사고를 일으켰고 이것때문에 적에게 리용당할번
한것이다.
지훈은 이 모든것을 깨닫고보니 마음이 한결 거뿐했다. 지훈은 이제
그 누가 자기더러 송표의 졸개라고 하여도 빚어진 참혹한 후과때문에 가
슴아프지만 변명하고싶지 않았고 석봉의 희생에 이르기까지 법앞에
그 모든 책임을 질 각오를 다지였다.
지훈은 시당에 가기 전에 옷이나 갈아입으려고 집에 먼저 들렸다. 집
은 텅 비여있었다. 집안식구를 한사람이라도 만나고싶었으나 그들을 앉
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지훈이 허전한 마음으로 자기 집을 나서는데
자기네 집앞 마당에 서있던 알뜰이가 다가왔다.
《언제 퇴원하셨어요?》
《방금 퇴원하는길입니다.》
《어머닌 아이들을 데리고 방금전에 장보러 가셨어요. 한철인 학교에
가구… 집에 들어가 기다리세요. 제 가서 어머니 모셔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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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은 금시 달려갈 차비였다.
《일없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오시거든 잘 말씀해주십시오, 못 뵙
구 간다구…》
《아니, 어디 가셔요?》
알뜰은 놀라 지훈을 빤히 쳐다봤다.
《오래동안 출장을 갔다와야 할것 같습니다.》
지훈은 알뜰의 얼굴을 쳐다볼수 없었다.
《어마나,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병원에서 나오시자 출장 떠나
구… 아이들이 얼마나 아버지를 기다린다구요. 가도 아이들을 잠간이라
도 만나시고 가셔야지.》
지훈은 알뜰이와 마주 서있을수록 자기 마음이 나약해진다는걸 깨달
았다.
《아닙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럽니다. 수고스러운대로 우리 집을
또 좀 돌봐주십시오.》
작별을 앞둔 이 시각 지훈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불쑥 이런 말이 튀
여나왔다. 운명의 위태로운 굽인돌이마다에서 알뜰에게 의탁하며 그
의 힘을 입게 되는것이 지훈은 자신으로서도 이상스러웠다. 지훈은
약해지는 마음을 알뜰에게 보이고싶지 않아 급히 돌아섰다.
지훈은 시당위원회 접수에서 시당위원장방으로 곧장 안내되였다.
시당위원장 리석은 지훈을 무척 반갑게 맞아주었다. 가슴이 울렁거리던
지훈은 그의 친절에 오히려 어리뻥뻥해졌다.
《자, 앉으십시오.》
리석은 지훈에게 담배를 권하고 불까지 붙여주었다. 지훈은 밝게
웃는 그를 보자 마음이 얼마간 진정됐다. 시당위원장방은 꾸밈새부터가
선우치담지배인방과 달리 소박하면서도 아늑했다. 지훈을 바라보며
웃기만 하던 리석은 걱정하듯 물었다.
《몸이 좀 어떻습니까?》
《예, 저는 병원에서 몸을 완쾌했을뿐만아니라 지금까지 내 머리를 좀
먹은 낡은 사상이 무엇인가도 깨달을수 있었습니다.》
지훈은 심각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두팔굽을 상우에 눕히고 앉았던 리
석은 몸자세를 바로하더니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었다.
《그랬다면 정말 반가운 일입니다. 장군님께서 작년 11월 건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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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총동원운동을 벌릴데 대하여 가르쳐주신것처럼 우리에겐 아직 낡은 사
상이 많습니다. 지난 40여년동안 일제가 뿌려놓은 그 낡은 사상을
하루빨리 뿌리빼야 건국사상으로 총동원될수 있고 장군님의 품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안고 우리자신들이 새로운 인간으로 태여날수 있습
니다.》
그의 마디마디 말에서는 신념과 열정이 넘치였다.
《고맙습니다. 저는 저의 낡은 사상이 빚어낸 모든 잘못과 그 후과를
달게 책임지겠습니다.》
지훈은 똑바로 리석을 바라보며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크나적으나 자기가 한 모든 일을 자신이 책임
져야 합니다. 말로써가 아니라 실천과 행동으로 말이지요.》
리석의 눈에서는 예리한 그 무슨 불꽃이 튀는가싶었다. 리석은 잠시
후 표정을 바꾸더니 말머리를 돌리였다.
《이번 벌어진 일들의 앞뒤이야기를 좀 들었습니까?》
《아직…》
《지훈동무를 랍치했던 무장간첩들은 일제가 길러서 미국에 판 고용
간첩들입니다. 지훈동무가 작년 5월 서울에서 돌아올 때 송표가 부탁했
다는 그 편지속에 들어있던 엽서를 쓴 기또 마사오는 한때 이곳 겸이포
제철소 소장노릇을 하다가 일본 해군성에서 방첩거물로 활동한 놈입니
다. 지금까지 판명된바에 의하면 송표는 제철소복구를 파괴할뿐아니
라 기또가 이곳에 뿌려놓은 첩자들에게 미중앙정보국의 새 지시를 전달
하기 위해 무장간첩일당을 거느리고 들어왔댔습니다. 무장간첩일당을 소
탕했는데 아쉽게도 송표는 놓쳐버리고말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곳
에서 접촉하려던 첩자들에 대해서도 아직 해명하지 못하였습니다.》
지훈은 자기가 얼마나 큰 올가미에 걸려들번 하였는가 하는 생각에 얼
굴빛이 창백해졌다.
《제가 사실 오늘 지훈동무를 만나자고 한것은 새 소식을 알려주자고
해서입니다.》
리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훈은 온몸이 긴장되여 자기자신도 모르
게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이나 지훈을 바라보던 리석은 천
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지훈동무가 제철소기사장사업을 맡아보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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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입니까?》
지훈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해탄로 하나 변변히 맡아보지 못한 자기
가 제철소전반을 기술적으로 책임진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장군님께서 그렇게 결론하시였습니다.》
《장군님께서요?!》
지훈은 너무나 큰 흥분과 충격에 금시 앞으로 쓰러질듯싶었다.
《어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제철소사업형편을 료해하시였습니
다. 제철소복구정형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신 장군님께서는 그새 퍽 많은
일을 했다고 만족해하시였습니다. 최근의 배송기폭발사고며 그후의
복잡한 형편들을 일일이 청취하시고나서 장군님께서는 해탄로를 책임지
고 일하는 기사가 해방후 제철소가 국영기업소로 되던 당시 말이 많던
그 기사냐고 물으시였습니다. 그러신 후 그이께서는 겸이포제철소를 황
해제철소라고 이름지어주던 그때 우리가 명백히 결론을 주었는데 왜 아
직 믿느니, 안 믿느니 하는 문제가 론의되느냐고 하시면서 그 기사가 마
음고생을 많이 했겠다고 말씀하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말로만 애국
을 부르짖을게 아니라 실천으로 건국에 이바지하는 사람들을 내세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전국적으로 기술자들을 다시 조사하고 등록하는 사업
을 벌릴데 대한 조치를 몸소 취하여주시였습니다. 그리고 지훈동무한테
대담하게 기사장사업을 책임지워 일시키라고 크나큰 신임을 베풀어주시
였습니다.》
지훈은 모든것이 꿈만 같았다. 지훈은 자기같이 하찮고 평범한 사람
의 사업과 생활이 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책임지신 장군님께까지 보
고된것부터가 믿기 어려웠다. 지훈은 장군님의 자애로운 사랑을 가슴뜨
겁게 전달받을수록 그 사랑, 그 신임을 절대 도용해서는 안된다는 자책
이 들었다. 마땅히 그처럼 크고 위대하며 자애로운 사랑과 신임을 받아
안을만 한 사람이 받아야 했다.
《시당위원장동무! 전 아직 당원이 아닙니다. 기술실무적능력은 둘째
쳐두고 당원도 아닌 제가 어떻게 이 큰 제철소를 책임진 기사장의 중책
을 지닐수 있겠습니까?》
지훈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다못해 타버릴상싶었다. 리석은 빙그레 웃
었다.
《내가 오늘 지훈동무를 만나보고싶었던 두번째 리유가 바로 그 문제

517
입니다.》
《적들에게 리용당할번 한 저같은 사람이 어떻게 로동당원이 되겠습
니까?》
지훈은 흥분을 조금도 새기지 못했다.
《우리 로동당원들은 누구보다도 조국과 인민앞에 충실한
장군님의 전사들입니다. 난 지훈동무가 지금까지 일제와 자본가
들을 미워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해왔으며 오늘 맡은바 건국사업에
헌신하고있을뿐아니라 자신의 사업과 생활에서 스스로 약점을 찾을줄 아
는것으로 보아 앞으로 훌륭한 로동당원이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훈은 뻥뻥하기만 했다. 자기의 사업과 생활은 해놓은것에 비해
너무도 값높이 평가되고있었고 자기의 사람됨됨과 자신의 준비정도에 비
해 너무나 크고 값높은 신임과 기대가 안겨지는것이였다. 지훈은 일생
에 오늘같이 커다란 신임과 기대를 받아안기 처음이였고 자기자신의 존
재를 지금같이 크게 느껴보기도 처음이였다.
《물론 지훈동무가 이 큰 제철소를 책임지기에 아직 정치적으로나
기술 실 무 적 으 로 부 족 하 다 는 것 을 모 르 지 않 습 니 다 . 그 렇 지 만
장군님께서 지훈동무에게 오늘 이처럼 크나큰 신임을 베풀어주시
는것은 지금까지 제철소복구를 위해 아글타글 애써온 지훈동무가 주저
앉지 말고 용기백배하여 더 잘 일하기를 바라시기때문이며 새 조국건설
에서 기술인재 한사람한사람을 참으로 귀중히 여기시기때문입니다.
또 기어이 우리 힘과 기술로 제철소를 복구하여 건국의 무쇠기둥을 벼
려야 하기때문입니다.》
리석의 말마디는 천근무게로 무척 의미심장하게 울리였다. 리석은 웃
으며 지훈의 어깨를 툭 쳤다.
《말이 난김에 우리 무릎을 맞대고앉아 그간 살아온 이야기랑 좀 더
흉금을 터놓고 나누지 않겠습니까? 난 지훈동무를 인간적으로 좀 더 깊
이 사귀고싶습니다.》
지훈은 그러자고 머리를 끄덕여보이였다.
《그럼 나랑 같이 가서 점심식사나 합시다. 그런 이야기를 하기엔 아
마 이 큼직한 사무실보다 제 숙소가 더 좋을겝니다. 전 합숙에 방을 하
나 따로 갖고있습니다.》
리석은 껄껄 웃으며 그와 어깨나란히 출입문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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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다행히도 모든 파괴와 암해책동은 미연에 방지되였다. 석봉이가 종처


럼 철판문짝을 때리는 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달아나던 무장간첩일당은
무사하지 못했다. 한놈은 총에 맞아 즉사했으며 한놈은 강가에서 해상
자위대에 의하여 체포되고말았다. 요행 살아남아 도망간 놈은 송표뿐이
였다. 놈들이 어떻게 되여 서울에서 이곳까지 기여들었는가 하는것은 아
직 흑막속에 묻혀 알려지지 않았다. 기또와 유미가 길러서 묻어놓은 선
을 타고 서울에 비상련락을 띄운 놈은 고필주였다. 라웅범이 배송기도
면을 내놓았을 때 필주는 누구보다 놀랐다. 필주는 배송기도면이 어떻
게 되여 현장에 나타나게 되였는가 하는 구체적인 내막을 알수 없었으
나 긴급지령으로 접수했다. 지금까지 잠복해있던 필주는 움직이지 않으
면 안되였다. 필주가 해주우편국류치로 써보낸 암호편지는 기또와 유미
한테서 그를 넘겨받은 씨.아이.씨의 새 상전들한테 지체없이 전달됐
고 그들은 기또가 이미 짜놓은 각본에 따라 특수임무를 지닌 무장간첩
일당을 파견하였다.
필주는 침투했던 무장간첩선이 나포되였으며 배송기폭파가 실패하
였다는 사실도 자기의 새 주인들에게 즉시 보고하였다. 필주는 위험을
무릅쓰고 두번이나 띄운 긴급보고덕에 이제부터는 새 지령이 있기 전에
일체 움직이지 말라는 일종의 표창휴가를 받았다. 필주는 안도의 숨이
나갔다. 활동하지 않는 이상 정체가 드러나고 꼬리가 잡힐리는 없는것
이다. 자신의 처지에 이미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 필주는 자기의 잠복기
가 하루라도 더 길기를 바랐으며 자신을 위장하기에 급급하였다.
음모는 저지되였고 범죄의 독침은 깊숙이 꼬리를 사리였으나 이번 습격
의 후과는 컸다. 석봉의 희생은 너나없이 모두의 아픔이고 타격이였다.
공기속에 살며 시시각각으로 산소의 혜택을 입으면서도 그것이 있는
지 없는지조차를 모르다가 공기 희박한 곳에 가서야 그 필요성을 절실
히 느끼게 되는것처럼 생활에는 있을 때보다 없어진 후에야 그 존재의
가치가 두드러지는 사물과 현상, 사람들이 있는것이다. 석봉이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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랬다. 살아있던 때에는 별로 나타나지 않은 그가 희생된 후에는 인연있
던 사람들의 가슴속에 잊을수 없는 존재로 점점 뚜렷이 자리잡히는것이
였다.
알뜰은 석봉이 금시 《누이―》하고 소리치며 집에 들어설것만 같아
밥을 푸다 저도 모르게 몇번이나 그의 몫까지 그릇에 담아놓기까지 했
다. 맛있는 음식이 생겨도 동생생각에 목이 걸리고 기쁜 일이 생기여도
그와 함께 나누지 못해 가슴이 저리였다.
억봉이한테도 마찬가지였다. 억봉은 자기의 한쪽팔이 뚝 떨어져나
간듯 한 심정이였다. 억봉은 석봉이 영영 돌아올수 없이 자기곁을 떠나
간 지금에 와서야 지금까지 동생이 생활에서 얼마나 미더운 방조자였으
며 든든한 의거점이였는가를 깨달았다. 동생은 생활에서 크고작은 문제
를 허물없이 의논하던 참된 상대였었다. 그는 엄격한 비난자였었고
진실한 조언자였었으며 사심없는 방조자였었다. 억봉은 지난날 하찮
게만 생각했던 동생과의 인정세말사마저가 생활에서 얼마나 귀중한것이
였던가를 요즘에 와서야 뼈저리게 느끼는것이였다. 억봉은 언젠가 동생
이 자기는 장가들며 처한테 치마 하나 못해주었다고 하면서 2호해탄로
조업을 안해한테 주는 례장으로 삼겠다고 한 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
때는 별로 귀담아듣지 못했던 이 말이 요즘에 와서는 점점 더 새로운 의
미와 뜻을 갖고 되살아나며 억봉을 채찍질하는것이였다.
달모도 석봉을 잊지 못했다. 그가 생명의 마지막순간에 자기더러
술을 먹지 말라면서 《술잔은 비록 크지 않아도 술에 빠져죽은 사람이
깊은 물에 빠져죽은 사람보다 많다.》고 한 말은 달모가 일생을 두고 잊
을수 없는 생활의 좌우명이 되였다. 가슴에 못박힌 그 말때문에 그는 절
대 술을 마시지 않으리라 맹세다지였으며 석봉의 장례때 자기 손으로 그
를 감장하면서도 술 한잔 입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 달모는 언젠가 석
봉이가 증기폭발로 깨져나간 배송기증기시린다뚜껑을 만들어보려고
긁적거리던 도면을 찾아냈고 기어이 자기 손으로 만들어 석봉의 꿈을 실
현하리라 마음 굳게 먹었다.
석봉의 희생은 그와 인연있던 많은 사람들한테 슬픔을 주고 충격을 주
었으나 차진옥이 가슴에 받아안은 상처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
였다. 석봉이 희생된지 얼마후 진옥은 아들을 낳았다. 기쁨을 주어야 할
탄생의 고고성은 장례의 구슬픈 곡소리에 묻히고말았다. 건강한 어머니

520
의 체질을 타고나 몸이 실하고 아버지의 목청을 닮아 굵직한 어린아이
의 힘있는 울음소리는 사람들의 가슴을 긁었다.
제철소구내산에 바야흐로 신록이 짙어가고 아카시아꽃향기가 진하
게 풍기기 시작하던 어느날 진옥은 아들을 업고 해탄로를 찾아왔다. 아
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아들에게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해왔고 목숨마
저 바치며 지켜낸 해탄로라도 보이고싶어 먼길을 온것이다. 모처럼
찾아온 석봉의 아들에게 해탄로는 콕스압출의 장쾌한 모습을 보여줄수
없었고 배송기의 우렁찬 동음도 아직은 들려줄수 없었다.
억봉은 어린 조카와 제수를 데리고 석봉의 무덤을 찾았다. 진옥을 위
로해주기 위하여 알뜰이며 계향이, 달모도 같이 갔다.
애젊은 녀인은 남편의 무덤앞에서 땅을 치며 목놓아 울었으나 어린 아
들은 두눈만 데룩거릴뿐 울지 않았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철부지 어린것은 벌건 주먹을 빨며 고모의 품에 안겨 벌쭉벌쭉 웃기
까지 했다. 어린것의 천진스러운 모습은 너무나 일찍 남편을 잃은 애젊
은 녀인의 통곡소리보다도 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허비였다. 제수
앞에서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다지였던 억봉이였으나
어린 조카의 얼굴에 어리는 티없이 맑은 웃음을 보고서는 슬며시 고개
를 틀어 손등으로 눈굽을 닦았다.
밀려왔던 설음의 파도가 잠시 뒤로 물러섰을 때였다.
다섯사람은 무덤가의 산릉선에 조용히 앉았다. 알뜰이와 계향은 차진
옥을 중심으로 좌우에 앉고 달모와 억봉은 알뜰이쪽으로 세 녀인과 조
금 떨어져앉았다. 세 녀인은 제각기 생각에 잠겨 제철소쪽을 바라봤고
달모와 억봉은 땅을 내려다보며 묵묵히 담배를 피웠다.
그들이 앉아있는 릉선에서는 신록속에 자리잡은 제철소가 빤히 바라
보이였다. 들크무레한 아카시아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실려왔다. 귀기울
이면 제철소구내를 오고가는 기관차의 기적소리며 서로서로 승벽내기로
돌아가는 기계소리마저 빤히 들려올상싶다.
달모는 잔디밭에 앉아 담배를 다 피운 후 신바닥으로 꽁초를 비벼끄
고나서 알뜰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뜰이 안고있는 석봉의 아들을 물
끄러미 바라보던 달모는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녀석 꽤 잘생겼구나.》
달모는 두팔을 내밀어 알뜰이한테서 석봉의 아들을 안아왔다. 아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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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며 코, 입이 신통히도 자기 아버지를 닮았다. 달모가 아이를 데려
오기 바쁘게 억봉은 조카를 나꾸채듯 자기 품으로 안아갔다. 억봉은 어
린 조카를 품에 안고보니 잠시 진정되였던 속이 다시 얼얼해왔다. 동생
이 이런 끌끌한 아들 하나라도 남긴것은 천만다행이였다. 어린 조카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억봉은 어린애가 마치 알아듣기라도 하는것처럼 큰
소리로 불렀다.
《얘, 불아.》
억봉은 조카의 이름을 불러놓고보니 석봉이가 희생되던 그날 밤 경
비를 서며 아들이름을 불이라고 지으면 어떤가고 묻던것이 새삼스레 생
각났다. 그가 바라던대로 아들이 태여났고 아들의 이름을 불이라고 지
었다.
《불아, 네 이름 뜻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아니? 넌 불의 원종자다.
네 아버지가 불을 다루던 사람이였으니 너도 불을 다스려야지. 불을 길
들이구 불의 주인이 되라구 네 이름을 그렇게 지었단 말이다.》
억봉은 어린 조카의 엉뎅이를 추슬러올리며 그가 마치 말을 알아듣기
라도 하는것처럼 한참이나 중얼거리고나서 조카를 머리우로 들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불아! 저기를 봐라. 저쪽이 불을 만드는 해탄로구 저쪽이 불로
쇠를 녹이는 용광로야. 불이란 네 이름이 저기서 생겼다.》
억봉은 두팔을 쭉 뻗치고 온몸그대로가 주추대로 되여 조카를 하늘높
이 들어올리였다. 어린것은 자기 큰아버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것처
럼 몸을 꼼지락거리며 제철소쪽을 바라봤다. 이곳 릉선에서는 번쩍이며
흘러가는 대동강을 한옆에 끼고 록음속에 자리잡은 제철소구내가 빤히
바라보였다. 마치 미래의 새 주인앞에 자기의 모습을 낱낱이 아뢰기나
하려는것처럼.
억봉은 흰구름 떠가는 푸른 하늘로 높이 떠올리였던 어린 조카를 한
참만에야 가슴에 안았다. 억봉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조카를 보듬은채 진옥이쪽으로 돌아섰다.
《제수, 이런 실한 조카를 낳아주어서 정말 고맙소. 수고스러운대
로 젖떨어질 때까지만 이 애를 좀 길러주시우. 그러면 이 애를 우리가
제 아버지처럼 불을 다루는 사람으로 키워놓을테니까…》
억봉의 말에 진옥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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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까지 놓구 제가 무슨 재미로 살겠나요. 제가 키우겠어요. 그 애
아버지가 배우지 못해 그렇게도 안타까와했는데 마음껏 공부두 시키구…》
그의 두눈은 벌겋게 피발이 서고 퉁퉁 부어있었으나 이미 설음을 이
겨내여 퍽 안정되여있었다. 진옥은 자기 아들을 억봉이한테 떼울가봐 겁
이라도 내는것처럼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은 치마에 흰저고리를
입은 그의 차림은 수수했으나 누구나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도도한 기
상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흘렀다. 그를 옹위하듯 알뜰이와 계향이도
일어섰다. 억봉이쪽으로 향해진 세 녀인의 눈길은 자식들에 대한 양육
이 함부로 그 누구한테나 양보할수 없는 어머니의 당당한 권리라는것을
시위하기라도 하려는것처럼 엄엄하기까지 했다.
억봉은 진옥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그리고 결혼식마저 축하해주지 못
한것때문에 진옥이한테 죄스러웠다.
《제수, 정말 고맙소. 우리 어떻게 해서라도 이 애만은 잘 키웁시다.
마음껏 공부두 시키구… 이 애 아버지는 나보구 늘쌍 자긴 장가들면서
불이 엄마한테 아무것두 해주지 못했다구 가슴아파하면서 2호해탄로
를 조업해 그것을 처한테 주는 례장으로 삼겠다구 했소. 이제 콕스를 뽑
게 되면 그것이 이 애 아버지 마음인줄 알아주오.》
억봉은 약해지는 마음을 녀자들한테 보이고싶지 않아 산아래쪽으로 성
큼 발걸음을 떼였다. 사람들은 억봉을 따라 제철소가 자리잡은쪽을
향해 산을 내리기 시작했다. 서로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넘겨주고 받
아안으며 불이를 보듬고가는 그들의 머리우에서는 나날이 뜨거워가는 둥
근해가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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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맏이가 갈길

출강종소리는 극장에서 막을 올리듯 용해장에서 어둠의 장막을 밀어


내는 그 무슨 신호비슷했다. 맑고 또랑또랑하게 출강종이 울리자 잘 익
은 쇠물이 폭포쳐내리며 용해장과 그 주변의 어둠을 말끔히 가셔냈다.
어둠속에 녹아 스러졌던 모든 물체가 뚜렷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흰 벽
체와 유리창문마다는 쇠물빛에 물들어 그대로 줄줄이 녹아내리는가
싶다. 쇠물의 불빛은 하늘마저 불그레 물들이였다. 아름답게 피여난 밤
노을은 하늘이란 거울에 비쳐진 쇠물의 장엄한 모습이였고 수천사람들
이 긴장된 로력과 창조적열정으로 가꾸어낸 건국의 거대한 꽃다발이기
도 하였다.
출강의 불빛은 용해장에서 퍼그나 떨어져있는 길가의 한그루 버드나
무마저 드러냈다. 나무밑둥은 어둠속에 잦아들고 록음우거진 둥그런 나
무갓만 불빛에 드러나 나무는 마치도 밤노을이 불타는 철의 지구 상공
을 둥둥 떠오르는 거대한 푸른 풍선을 련상시켰다. 불빛 그자체가 천가
지, 만가지 아름다움을 지니고있으며 주위의 이 세상 만물을 얼마나 아
름답게 만드는가를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으리라. 쇠물의 불빛으로
하여 아름답고 신비로운 제철소의 밤이였다.
이밤 해탄로배송장에서는 증기배송기 두번째 시운전이 있었다. 한
밤중에 진행한 시운전은 성공적이였다. 눈물겹고 가슴아픈 시련의 파도
와 파도를 헤쳐 마침내 이른 성공의 기슭이였다. 준길이와 석봉의 피가
스민 배송기, 애국의 그 넋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기어이 살려야 했던 배
송기다. 그뿐이 아니다. 2호해탄로는 이미 높은 온도로 열을 올리기 시

524
작했다. 작년 12월부터 시작한 반년남짓한 길고도 어려운 로건조작
업이 은을 내자면 배송기가 있어야 했다. 사람들은 제2해탄로의 조업을
담보하게 된 기쁨도 컸지만 그렇게 말썽많던 증기시린다뚜껑을 자체로
만들어낸 자부심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박두한 2호해탄로조업을 보장
하기 위하여 원래는 2호배송기에서 성한 증기시린다뚜껑을 떼내여 1호
배송기에 조립할 계획이였었다. 억봉은 파괴된 2호배송기를 그냥 내버
려두는것만도 가슴아픈데 성한것까지 각떠내면 어쩌랴싶어 선뜻 손대지
못했었다. 이때 달모와 태주먹이 밑져야 본전, 져야 개판인데 한번
자기네가 만들어보겠다고 발벗고나섰다. 깨져나간 증기시린다뚜껑을 둘
러메고 설계실로 찾아가 그대로 설계를 떠가지고 주물하는데로, 공작과
로 불이 나게 찾아다니더니 마침내 시린다뚜껑을 만들어왔다. 오늘
시운전에 그 뚜껑을 썼다.
기뻐 어쩔줄 모르는 결사대원들을 바라보는 억봉은 생각이 많았다. 그
는 오늘의 성공이 기쁘기도 했지만 증기시린다뚜껑을 생각하면 기가 차
기도 했다. 온 제철소에 소문을 내고 여러 사람들을 그렇게도 고민하게
만들었던 시린다뚜껑은 직경이 반메터도 못되는 두터운 가마뚜껑에
지나지 않았다.
잠간이면 주물해서 깎을수 있는 간단하기 그지없는 시린다뚜껑때문에
소란피운걸 생각하니 억봉은 자기가 그 무엇에 홀리웠던것 같기도 하고
속았던것 같기도 해서 어처구니없었다.
(난 왜 그걸 만들 생각조차 못했을가?)
억봉은 입속으로 줄곧 저 혼자 이렇게 뇌이였다. 겉만 보아오던 배송
기였고 귀동냥하거나 눈치로 알아둔 몇가지 밭은 밑천을 가지고 시작한
이번 일이였다. 크고작은 모든 일에서 두눈 뻔히 뜨고 소경노릇을 하며
가스찌꺼기와 녹을 벗겨내고 기름을 칠하는 단순한 일조차 복잡하고 어
렵게 여겼던 정비작업의 지난 나날이였다. 누구든지 기술을 조금만
알았어도, 배송기내속을 한번 보기만 했어도 그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았
을것이다. 지금까지 억봉이가 1호배송기정비작업을 책임질수 있는것
은 파괴된 2호배송기를 누구보다 많이 주물러본때문이였다. 기술에
능한 사람이 있었으면 1호배송기정비작업에 들인 품과 노력으로 2호배
송기복구까지 끝내였을것이다.
억봉은 이 순간 죽은 석봉이가 생각나면서 그가 무엇때문에 그렇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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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 배우려 했던가 하는 그 마음이 리해되는가싶었다. 동생은
무엇때문에 배워야 하는가를 자기보다 퍽 먼저 깨달았다고 할수 있었다.
사람들은 얼싸안고 돌아가며 만세까지 불렀다. 바쁜 시간을 틈내여 배
송기시운전에 참가했던 차지훈이 억봉이한테로 걸어왔다.
《억봉동무! 그새 정말 수고가 많았소.》
《수고랄게 있습니까. 기사장동무랑 잘 지도해준때문이지…》
두사람은 서로 손을 마주잡고 호탕하게 웃었다.
《과장동무! 1호배송기시운전이 끝났으니 이제는 빨리 해탄과 전반사
업을 밀어야겠소.》
지훈의 말에 억봉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얼마전에 제철기구
가 새로 개편되면서 억봉은 해탄과장사업을 하게 됐다. 주학섭이 로체
를 담당한 계장으로, 태주먹이 세탄계장으로 소환되고보니 배송기복
구정비를 위해 조직되였던 건국결사대핵심들은 다 빠졌다. 달모 혼자만
이 기능 없는 몇몇 사람들을 데리고 수리계장으로 눌러앉았다.
《기사장동지, 2호배송기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훈은 억봉의 느닷없는 질문이 자기 말에 대한 그 무슨 항변처럼 느
껴져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2호해탄로조업이 박두했을뿐아
니라 1호해탄로 낡은 로체를 허물어내는 작업도 이달이면 끝난다. 금년
내로 1호용광로복구까지 끝내고 쇠물을 뽑자면 2호배송기도 빨리 대책
을 세워야 한다. 2호해탄로 하나만 가지고는 커다란 용광로의 배를 채
울수가 없다. 빨리 1호해탄로를 복구하여 콕스를 생산하자면 2호배
송기가 없이는 안된다. 지훈이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였다.
《그 문제는 후에 다시 토론해봅시다.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좀
끄고…》
억봉을 바라보는 지훈의 눈에는 상급으로서 자기 말에 복종할것을 요
구하기보다 자기 사정도 좀 보아달라고 애원에 가깝게 사정하는 빛이 흘
렀다.
요즘 지훈의 부담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선우치담이 철직되는 바람
에 지훈은 요즘 지배인사업까지 대리해야 했다. 선우치담은 해탄로와 용
광로복구를 지연시키고 사람들의 가슴에 아픈 못을 박아 건국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었을뿐아니라 제철소의 지휘성원들을 자기의 심복들로 꾸리
려고 책동하였다. 거기다 감옥에서 일제앞에 변절투항한 사실이 폭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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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철직되였다. 선우치담이 감옥에서 전향한 사실을 폭로한 사람은
고필주였다. 고필주는 선우치담의 횡포앞에 굴복하고 아부아첨해온
자신을 철저히 비판하므로 토목부장위치에서 그대로 일하게 되였다. 당
시 제철소에는 임명 못하고 남겨둔 과장, 계장자리만도 기구직제의
근 3분의 1이나 되였다. 일제시기 1만 3천여명이던 종업원도 현재 5천
명이 되나마나했다. 원료와 자재, 자금 그 어느것도 없이 모두가 바르
고 부족하지만 제일 없는것이 사람이였고 그중에서도 기술자와 기능자
는 더욱 그랬다.
지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나서 오늘같이 기쁜 날에 더 기분을 상하
게 하고싶지 않아 억봉이한테서 눈길을 돌리였다.
흥성거리던 배송장안에 난데없이 녀자의 비명소리가 울리였다.
《어마나―》
배송기시운전을 구경하러 와서 출입문 가까운 곳에 서있던 계향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지훈이와 억봉은 무슨 일
인가 해서 그리로 다가갔다. 놀랐던 두사람은 어처구니없어 웃고말았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개구리 한마리가 계향이 가까운 곳에 두눈이 올롱해
앉아있었다. 2년이나 조업을 중지하고보니 구내주변 물웅뎅이마다에
는 개구리가 욱실댔다. 용하게 높다란 철계단을 뛰여올라 배송장안에까
지 들어왔던 개구리는 계향이보다도 더 놀랐다. 계향이가 발을 구르며
소리치는 바람에 개구리는 도망친다는게 배송장안으로 껑충껑충 뛰여들
어왔다. 태주먹이 껑충껑충 뛰는 개구리를 발로 걷어차려 하자 주학섭
이 그를 만류했다.
《놔두라구. 우리 개구리공주님이 배송기시운전을 구경오셨는데…》
그바람에 사람들이 겁많은 계향을 놀리듯 으하으하 웃어댔다.
《아이, 정말 간떨어질번 했네.》
계향은 올롱해진 두눈을 할기죽거리며 토달거렸다. 억봉은 해탄처
녀들이 계향을 두고 언젠가 《개구리공주》라고 놀리던 말이 생각나서
은근히 밸이 났다. 그때는 《멱자구지배인》이란 별명으로 불리우던 선
우치담의 서기노릇을 하던 때여서 그랬지만 오늘은 겁때문에 많은 사람
들한테 또다시 웃음가마리가 되는것이다.
《뭐, 간은 밥알루 붙이구 다니게 개구리보구두 떨어져, 제기랄…》
억봉이가 저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계향이가 들었다. 여러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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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보고 웃으며 놀려주는 바람에 그러지 않아도 멋적던 계향은 억봉이
한테 분풀이를 하려들었다.
《과장동진 남의 간을 밥알루 붙이구 다니든 실루 꿰매달아가지고 다
니든 별상관 다 하셔요.》
그바람에 또다시 웃음판이 터지였다. 지훈이도 소리없이 저혼자 벙긋
이 웃었다.
계향이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제철소에 남은것은 지훈의 설
복때문이라고 할수 있었다. 지훈은 자기가 계향이한테 선우치담밑에
서 지배인서기노릇을 하게 하여 마음고생시킨걸 생각하면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달모를 내여놓고 밭은 친척마저 가까이에 없는 계향이한테
억봉이같이 담찬 사람이 길동무로 되여준다면 얼마나 좋으랴. 해탄로와
별로 인연이 없는 공작과의 천정기중기운전공이면서도 배송기 시운전을
보겠다고 이렇게 한밤중 찾아온걸 보면 계향이와 억봉은 서로 끊을래야
끊을수 없는 인연으로 이미 얽혔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렇다면 억봉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계향을 발전시켜주어야 할것이다. 지훈은 공장전
반사업을 보게 되면서부터 대바르고 열정적인 계향이한테 책임적인
사업을 맡겨야겠다는 생각을 가지였으나 맞춤한 기회가 생기지 않아 오
늘까지 미루어왔었다.
배송장이 열리며 흰 위생모를 쓴 국수돌이가 국수그릇이 가득 담긴 목
판을 메고 배송장안으로 들어섰다. 뜻하지 않게 작업현장에 나타난
송림국수집 국수돌이 뒤에서 국수판을 맞들고 배송장안으로 들어서는 사
람은 알뜰이였다. 예상치 않았던 밤참을 보고 젊은축들은 여간만 좋아
하지 않았다.
《야, 이게 웬 호박이야.》
《야, 한잔 카― 할것까지 있으면 좋겠구나.》
사람들은 저저마다 국수 한그릇씩을 받아들고 떠들었다. 지훈이도 국
수를 받았다. 작업복차림으로 이렇게 현장기대곁에서 선채로 먹는 국수
는 별맛이였다.
알뜰은 국수 한그릇을 게눈감추듯 하는 젊은패들에게 덧국수를 주느
라 저가락을 들어보지 못했다. 알뜰은 무척 즐거운 표정으로 배송장안
을 팽이처럼 돌아갔다. 지훈은 국수를 먹다말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시
중하며 돌아가는 알뜰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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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은 자기가 시당위원회에 제철소기사장으로 임명받으러 가던 날 잘
못되는줄만 알고 알뜰이한테 집안일을 부탁했던것이 갑작스레 생각났다.
그때 지훈은 자기가 당장 감옥에라도 가는듯 한 심정이였었다. 지훈은
얼굴이 뜨뜻해와 알뜰이한테서 황급히 눈길을 돌리였다. 지금까지 그 누
구한테보다 페를 많이 끼치고 신세를 진 사람은 알뜰이였다. 신세를 갚
음하고 도와야 한다면 계향이보다도 알뜰이한테 먼저 그래야 할것이다.
어느모로 보든지 알뜰이한테는 계향이보다 책임적인 사업을 맡길수
있다. 제철소안에는 녀성간부들을 배치해야 할 빈자리가 많았다. 간
부사업은 기사장의 사업분야가 아니였으나 지금 지배인사업까지 대리하
고있는 조건에서 지훈은 시당위원회와 토론하고 알뜰이한테 알맞춤한 책
임적인 위치에 얼마든지 임명할수 있었다.
알뜰이한테 어떤 일자리가 알맞춤하겠는지… 하지만 아무리 어울리고
아무리 중요한 위치에 내세운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지금까지 자기
가 그한테 지워온 마음의 부담을 덜어줄수 없었다. 흰 종이우에 떨어뜨
린 먹물자욱은 지워낼수 있어도 사람들의 인격에 손상준 상처는 아물기
어렵다. 처녀시절의 순결한 가슴에 남겼던 아픔을 오랜 세월이 흘러 네
자식의 아버지가 된 지금에 와서 어떻게 풀어줄수 있단 말인가.
지훈은 알뜰이한테 죄짓고 살아오는 자신의 처지를 새삼스레 돌이켜
보게 되는것이였다. 이 자책으로 하여 지훈은 마냥 즐거워야 할 배송기
시운전의 이밤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기사장동지, 2호배송기복구문제를 빨리 결론주십시오.》
배송장을 떠나던 때 억봉이 잊지 말라고 강조하듯 꼬리를 달아놓은 이
말은 이밤 지훈의 마음속에 또 하나 던져진 그림자였다.

지훈은 계향의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지훈은 제철소 간부


회의에서 계향의 문제를 토론한 후 그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자, 앉으시오.》
지훈은 계향이한테 서둘러 자리를 권하고나서 자신은 의자에서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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났다. 지훈은 이제부터 자기가 계향이한테 해야 할 말들에 공식성을 부
여하려고 일부러 말투마저 평상시답지 않게 하고나서 방 한쪽구석에 세
워놓은 서류함곁으로 다가갔다. 서류함우에는 큼직한 벽시계가 놓여
있었다. 얼마전까지 제철소 기사장방에 걸려있던 시계다. 지훈은 벽
시계를 들고와서 계향이가 앉아있는 책상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계향은 현장에서 일하던 곤색작업복차림으로 무릎우에 두손을 포개여
놓고 의자끝에 걸터앉아 의아스럽게 벽시계를 바라봤다. 만든지 오랜 시
계였으나 시계의 단단한 참나무테는 세월의 중하를 끄떡없이 이겨내여
밤색의 빛갈 하나 변하지 않고 성성했다. 흰 문자판만이 약간 누르스름
해져 이 시계가 퍽 나이먹었음을 귀띔해줄뿐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미쯔비시재벌의 창시자인 이와사끼 야따로의 상속자가 외국에 특별히 주
문해서 겸이포제철소 초대소장에게 보내주었다는 시계다.
《다름아니라 이 시계를 줄 일이 생겨서…》
지훈은 계향이 앉아있는 응접탁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어떻게 이야
기꼭지를 떼야 좋을지 몰라 말끝을 얼버무리였다.
계향은 벽시계에 견주었던 눈길을 들어 지훈을 잠시 바라보고나서 두
눈을 내리깔며 《어째서요?》하는듯 한 표정을 지어보이였다.
《계향이가 이 벽시계를 가지고 공장탁아소에 가주었으면 해서…》
지훈은 말투를 바꾸었다. 잘 아는 사이에 공식적으로 말하자니 오히
려 더 어색했다.
《이제 말입니까?》
계향의 두눈은 이런 심부름이나 시키자고 일하는 사람을 불렀는가고
묻는듯싶었다.
《우리는 토론하고 토론하다 계향이한테 공장탁아소를 맡기기로 했
지.》
지훈은 가볍게 미소를 머금고 머리를 끄덕여보이였다. 차지훈이 벽시
계를 먼저 안겨주면서 계향을 탁아소 소장으로 임명하려는데는 그럴만
한 사연이 있었다. 선우치담이 지배인으로 있을 때 전번 탁아소 소장은
아이들에게 규칙적인 일과생활을 시키기 위해 탁아소에 벽시계를 하나
사달라고 제기한바있었다. 그때 선우치담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벽시계가 정 필요하면 손목시계 찬 사람을 탁아소에 받소. 돈주고
벽시계를 사야 맛이요? 공짜로 손목시계 생기면 더 좋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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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인의 말에 전번 탁아소소장은 정말 손목시계 찬 사람을 고르기 시
작했다. 손목시계를 찬 녀인들은 웬만해 공장탁아소에 들어오려 하지 않
았고 어쩌다 나타난 시계 찬 영양조리사는 밤낮 영양학만 부르짖으면서
무식한 소장을 비난했다. 전번 탁아소소장은 그 영양조리사한테 끝내 쫓
겨났고 소장자리를 가로타고앉았던 영양조리사가 그후 인차 어디론가 가
버리는 바람에 탁아소에는 소장도 시계도 없어졌다.
계향은 이런 내막을 하나도 알지 못하였으나 임명에 앞서 사업조건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 방의 시계까지 서슴없이 떼여주는 지훈의 마음을 리
해하고 남았다. 그러나 계향은 질겁해 머리를 흔들었다.
《어마나,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한다고 그러나요.》
그의 표정에서는 손쉽게 굽어들지 않으려는 앙큼스런 속내가 보이였
다. 지훈이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요, 우리는 계향동무가 어려운 그 일을 해내리라고 믿소.》
우리라고 말했지만 계향을 탁아소소장으로 추천한 사람은 차지훈자신
이였다. 어떤 면에서는 계향이보다 알뜰이 적임자라고도 할수 있었다.
지훈이 이번에 계향을 탁아소소장으로 임명하려는것은 여러모로 따지고
타산해서였다. 탁아소관리운영수준을 한계단 끌어올리자면 조금이라
도 배운 사람을 보내야 했다. 지금 탁아소에는 문맹을 퇴치하나마나한
사람이 대부분이였고 계산 하나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었다. 제철소에
는 계향이만큼 배운 녀자도 쉽지 않았다. 또 계향은 이악하고 열정이 있
는것만큼 옆에서 누가 이끌어준다면 자기앞에 차례진 일을 능히 해낼수
있을것이다. 지훈은 계향의 그 숨은 방조자가 억봉이리라는것을 믿어의
심치 않았다. 계향이 억봉이와 결혼만 한다면 실로 리상적인 적임자라
고 할수 있었다.
지훈은 책상너머로 계향을 잠시 건너다보고나서 말에 발을 달았다.
《탁아소일이란게 여간만 시끄럽고 귀찮지 않지만 여간 중요하지
않소. 아직 벽돌이 가공되지 못해 용광로를 쌓지 못하고있소. 벽돌가공
에 녀성로력을 많이 인입해야겠는데 그러자면 그들에게 일할 조건을 마
련해주어야 할게 아니요. 녀성로력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하게
나서오. 탁아소문제는 제철소복구나 생산과 떼여놓을수 없는 문제요.》
지훈의 열정적인 설복에 계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옹색스
럽거나 말이 딸릴 때 녀자들이 항용 그러듯 그는 옷고름을 매만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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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여물을 썰지 않았다. 계향은 생각깊은 눈길로 어딘가 방안의 한점
을 바라볼뿐이였다.
《계향이, 우리는 동무가 이 어렵고 중요한 일을 책임지고 맡아주었
으면 하오.》
지훈이 이제는 그만하자는듯 말끝을 꼭 눌러 덮어놓자 계향은 자리에
서 일어섰다.
《제철소전반을 돌보는 기사장동지의 고심을 모르는바 아니예요.
하지만 전 천정기중기를 타고싶어요.》
얼마전까지만 해도 지배인서기에서 해임된것을 서분해하던 계향이
였다. 탁아소소장이면 지배인서기보다 몇배 중요한 사업위치라고 할
수 있건만 계향은 머리를 흔들었다. 잠시 말을 끊고 책상모서리를 내려
다보던 계향은 조용하고 침착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제가 탁아소에 안 가겠다는건 그 일이 하찮구 시끄러워서가 아니예
요. 제 능력이 딸려서만도 아니예요.》
지훈은 빙그레 웃었다.
《뭐 한당대 처녀로만 있겠나?》
지훈은 처녀가 탁아소소장노릇하는것이 격에 맞지 않는다는 소린줄 알
고 우스개소리처럼 말했다. 계향은 귀밑까지 빨개졌다. 하지만 그것
은 처녀의 단순한 부끄러움때문이 아니였다.
《아이참, 기사장동지두… 기사장동지는 저의 심정을 너무도 몰라
주셔요. 이제 해탄로 2호배송기를 복구해야 할게 아니나요. 그러면
우리 공무과로 배송기를 가져오겠는데 전 그 일에 참가하고싶어요.》
계향의 두눈에서는 허물수없는 확고한 결심이 느껴졌다. 지훈은 롱처
럼 던진 한마디 우스개가 계향의 자존심을 이만저만 허비고 자극하지 않
았음을 깨달았다. 이번 석봉의 희생을 통하여 계향이 받아안은 충격은
크고 강렬했다. 준길이도 석봉이도 배송기때문에 희생되였다. 불에
타서 죽을지언정 불을 떠나 살수 없는 이들이기에 해탄로복구를 위해 목
숨마저 주저없이 바친것이였다. 지훈은 해탄로에 불을 지피기 위해
청춘도 생명도 바친 이들의 뜻을 귀중히 여기는 계향의 마음이 리해되
였다. 계향의 마음이 이러할진대 억봉이나 알뜰의 심정은 어떠할것인가.
지훈은 1호배송기를 시운전하던 날 2호배송기복구문제를 빨리 결
론달라고 하던 억봉의 말이 새삼스레 생각났다. 하지만 지훈은 탁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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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으로 가는것을 사양하는 계향의 심정이나 어서빨리 2호배송기복
구문제를 결론달라고 하는 억봉의 절박한 립장을 돌이켜볼 정신적여유
와 틈이 없었다. 계향이 돌아가기 바쁘게 지훈의 책상우에 놓인 전화는
그의 시급한 결론을 독촉하듯 귀따갑게 종을 울리였고 그의 사무실밖에
서는 1호용광로개축공사와 관련하여 기술협의회에 부른 사람들이 기
다리고있었다.
지훈은 마치 달리는 기차 창밖으로 미처 살펴볼 사이도 없이 언뜻언
뜻 스쳐지나가는 물체처럼 새라새로운 크고작은 일들이 꼬리물고 제기
되는 바람에 억봉의 당부며 계향의 일을 한동안 잊고말았다.
1호용광로 벽돌쌓는 작업은 벌써 절반이상 진척됐다. 지금 같아서는
금년내로 확고히 쇠물을 뽑을수 있었다. 금년 상반년안으로 끝내게 되
였던 제철소구내 하수도중축공사도 성과리에 결속지었다. 1호해탄로도
복구작업이 계획대로 절반이상 진척되였고 2호해탄로는 첫 조업의
시각이 눈앞에 박두했다. 평로중심의 생산도 이해부터 처음으로 시
작된 인민경제계획을 제대로 수행하고있었다. 전반적인 제철소사업
에서 제일 걸려있는 고리는 해탄로배송기였다. 지훈은 제철소라는
배가 해탄배송기라는 암초에 걸린 시각에야 억봉이와 계향의 일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계향이 탁아소소장임명을 거절해나섰을뿐아니라 억봉이도 지훈의
지시를 제대로 집행하지 않고있었다. 2호해탄로 온도상승곡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가슴을 조이고 해탄로와 함께 한생을 살아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일생에 몇번밖에 차례질수 없는, 로에 불을 달아야 할 시각이 박
두했건만 억봉은 과장으로서 해탄로 전반사업을 돌볼 대신에 2호배송기
만 붙안고 돌다싶이했다.
지훈은 억봉이한테 파괴된 2호배송기복구문제를 결론주지 못한 자신
을 자책하면서도 그의 일처리에는 의견이 없지 않았다. 배송기의 중요
성에 대해서는 억봉이보다도 지훈이자신이 더 절박하게 느끼고있다고 할
수 있었다. 1호배송기정비를 끝내였으니 불안스러운대로 2호해탄로
조업을 할수 있으나 2호배송기를 살리지 못하면 지금 한창 복구중인
1호해탄로 조업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금년도 인민경제계획에
조업이 예견된 1호용광로에 콕스를 대여줄수 없다. 그러나 엄청나게 파
괴된 2호배송기를 어떻게 복구한단 말인가. 수류탄폭발로 2호배송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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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스가 깨여지고 발통이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날개에까지 균렬이 갔다.
제철소안에서는 물론 국가적으로 보아도 갓 해방된 지금형편에서 아직
은 배송기케스와 날개를 만들지 못했다. 해방전에 일제도 이 기계를 미
국에 특별히 주문하여 만들어왔다.
지훈은 2호배송기를 살리는것이 행정실무적으로나 기술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자기한테 지워진 임무라는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그럴 힘과
능력이 없는 자신이 한스러웠다. 지훈은 기사장이라는 사회적인 책임감
에 앞서 인간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억봉이와 알뜰을 마음껏 돕고싶었다.
그들은 자기 생명의 은인이였고 정신적방황에서 자기를 건국의 길로 손
잡아 이끌어준 미더운 사람들이였다. 하기에 지훈은 오늘 실패할줄
알면서도 억봉이가 주장하는 배송기케스용접시험장에 나갔었다.
케스용접시험에서 실패하고 자기 방에 돌아온 지훈은 눈앞이 어찔하
고 가슴이 답답한게 터져나갈것 같았다.
《이제는 어떻게 할것인가?》
문두드리는 소리도 없이 방문이 열리더니 억봉이가 들어왔다. 배송기
케스용접시험장에서 그와 헤여진지 두시간도 되나마나하다. 억봉은
기름묻은 장갑을 벗어 어디에 둘지 몰라 망설이더니 그것을 옆구리에 끼
고 차지훈이 맥없이 앉아있는 쏘파곁으로 걸어왔다.
《기사장동무, 저… 암만 해봐야 용접으루는 안되겠수다.》
억봉은 방금전에 물질적으로 증명된 문제를 새삼스레 중얼거렸다. 지
훈은 의자도 권하지 않은채 졸음이 실린것 같은 멍한 눈길로 억봉이를
바라봤다. 억봉은 한걸음 다가서더니 앉아있는 지훈에게 그 무슨 중요
한걸 귀띔이라도 하듯 허리를 꺼꺼부정한채 말했다.
《그래서 철판을 덧대자는것입니다. 우리 누이 표현에 의하면 째진 바
지에 천을 덧대구 깁듯이 말입니다.》
지훈은 억봉의 뻐꾸기같은 소리에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소. 깁든 때든 2호배송기를 살릴수만 있다면
말이요.》
긴장되여가는 방안분위기를 눅잦혀주기라도 하려는듯이 전화종이
울리였다.
《기사장 차지훈 전화받습니다. 산업국입니까? 예? 오늘중으로 올
라오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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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받는 지훈의 낯빛은 창백해졌다. 산업국에서 지금 당장 평양
으로 올라오라고 지훈을 독촉하고있었다. 상반년도 생산실적과 용광로,
해탄로의 복구정형을 산업국에 가서 직접 총화지을 때가 되였다. 그 자
료들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 보고
될것이다. 지훈은 며칠밤을 새우며 만든 총화자료들을 상우에서 거두어
가방에 넣기 시작했다. 지훈은 들가방에 문건들을 잡아넣고 자기 방을
나가려 하던 때에야 그때까지 우두커니 서있는 억봉이를 알아보았다.
《2호배송기문제는 후에 다시 토론해봅시다. 내 이번에 국에 가서 대
책을 취해달라고 다시한번 단단히 제기하겠소. 해탄과장동무는 이제
부터 2호해탄로 첫 조업을 준비해야겠소.》
맺고끊는 지훈의 말마디는 쌀쌀했다. 2호해탄로조업을 준비하자면 파
괴된 2호배송기복구에서 손을 떼야 한다.
《기사장동진 언제 돌아오시겠습니까?》
《모르겠소, 며칠 걸릴지… 언제 석탄을 장입하겠소?》
《벽체온도가 거의다 올랐으니 오늘중으로 장입해야 할것 같습니다.》
《해탄로 자체가스를 순환시켜 불을 달 때가 제일 위험하니 각별히 주
의해야겠소.》
지훈은 억봉이에게 실무적인 작업지시를 주며 자기 방 문턱을 나서던
때에야 복도에 서있는 알뜰을 알아보았다. 알뜰은 억봉이와 함께 왔으
나 방에 들어오지 않고 지금까지 복도에 있은 모양이다. 지훈은 알뜰의
인사에 가볍게 머리를 숙여보이며 서둘러 마당으로 나갔다. 억봉이와 알
뜰은 지훈을 배웅해주려 마당까지 따라나왔다. 지훈이가 승용차에 오르
려고 하던 때였다. 난데없이 맏딸 두옥이가 지훈을 부르며 쪼르르 달려
왔다.
《아버지, 우리 래일 진급사진 찍는다.》
두옥인 벌써 소학교 1학년이다. 이제 몇달 있으면 2학년에 올라간다.
지훈은 차에 발을 올려놓다말고 딸을 측은하게 바라봤다. 엎친데 덮치
는 격으로 제일 바쁜 이 대목에 어머니가 앓아누웠다. 이전부터 시름시
름 앓던 병이 도지는 바람에 어머니를 평양병원으로 호송한지도 두달이
넘는다. 두옥은 집에 가야 할머니도 없으니까 학교에 다녀오면 이렇게
제철소로 아버지를 찾아와서 놀다가 사무실에 쓰러져 자기가 일쑤다.
《아버지, 래일 우리 학교에 가지?》

535
두옥은 아버지의 옷자락에 매달려 이슬기 머금은 머루알같은 까만 두
눈을 대룩거렸다.
《야단났구나, 아버진 출장간단다.》
《몰라, 몰라, 씨― 선생님이 고운 옷 입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꼭 데
리구 오랬는데…》
한껏 사랑에 굶주린 두옥은 어쩌다 만난 아버지를 붙들고 앙탈을 부
리였다. 저만큼 떨어져있던 알뜰이가 보다가 안됐는지 두옥을 불렀다.
《아주마, 래일 나랑 우리 학교에 가지?》
《응.》
《오늘 내 옷 곱게 빨아 다려줘야 돼?》
《응.》
그제야 두옥은 웃으며 자기 아버지를 놓아주었다. 지훈은 자기 딸의
성화를 받는 알뜰을 보자 부끄러웠다. 요즘 아이들은 알뜰이네 집에 업
혀산다. 막내만 탁아소 보육원들한테 맡겨버리고 나머지 세 아이는
알뜰이나 그의 작은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그들이 빨아주는 옷을
입는다.
《이럴줄 알았으면 할머니한테 보낼걸 좀 준비하는건데…》
알뜰은 두옥의 손을 잡고 승용차곁에 서서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리였
다. 배송기때문에 조금전까지 시뿌둥해 문가에 서있던 억봉이도 지훈에
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지훈은 웬일인지 가슴이 뭉클했다.
지훈은 자동차운전사더러 어서 떠나자고 독촉을 했다. 승용차는 사무
실마당을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꽁무니에 파르스름한 배기가스를 뿜어대
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승용차안에서마저 지훈은 시름을 놓지 못했다. 잎새많은 나무


바람 잘새 없다고 제철소 큰 살림을 맡아안고보니 어쩔수 없었다.
2호해탄로벽체 온도상승에 다른 변화는 없을가?
1호용광로 벽돌쌓는 일에서는? 소결로배풍기정비상태는?
536
지훈은 제철소의 생산공정을 따라 부족점을 하나하나 따지며 돌발적
으로 위험이 조성될수 있는 개소들을 점찍어보았다. 꼬리물고 떠오르는
오만가지 시름중에서도 제일걱정은 해탄로의 2호배송기였다. 하늘을 봐
야 별을 딴다고 배송기해결책은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훈은 제철
소기사장으로 임명된 후 북조선인민위원회로 직접 호출되여보기가 이번
이 처음이여서 공연히 가슴이 울렁거리였다.
산업부국장은 지훈을 여간만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기사장동무, 해탄로조업이 어떻게 됐소?》
《오늘 밤이나 래일 새벽쯤에 석탄을 장입합니다.》
《그렇소? 레루생산준비는?》
《이제 곧 생산을 시작하겠습니다.》
《선우대포처럼 꽝하는건 아니요?》
부국장은 지훈의 두눈이 둥그래지는걸 보고 껄껄 웃었다.
《선우치담이 이전에 너무 대포를 쏘군 해서…》
선우치담을 두고 하는 소리에 지훈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시험적으로 몇대 밀어보았는데 질이 괜찮습니다.》
《정말이요? 그러면 살았소.》
부국장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지훈에게로 다가와 손을 덥석 잡
았다.
《레루만 뽑으면 됐소. 동무네가 이전부터 제기하던 해탄배송기를 해
결해주겠소.》
《네?》
지훈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렇게도 애를 말리우던 배송기가 이렇
게 쉽사리 풀리리라고는 꿈결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렇소. 레루만 뽑아보내주면 배송기를 보내주겠다누만. 금년내
로 레루를 한 2 000톤 밀어 가져가면 금년말이나 래년초에 배송기가 들
어오오.》
《레루는 자신있습니다.》
지훈은 어린애들처럼 막 환성이라도 지르고싶었다. 국에 와서 이렇게
쉽사리 풀리는 문제를 공연히 속만 썩였구나 생각하니 억봉에게 어서 이
소식을 알려주고싶었다.
《정말,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하신것 같던데 어떻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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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좀 나았습니다.》
지훈은 부국장이 어떻게 어머니 입원한것까지 알고있을가 하는 고마
운 생각에 이렇게 대답했다. 어머니를 평양병원에 입원시킨 후 지훈은
두달이 돼오도록 아직 병원에 한번도 와보지 못했다. 한 보름전에 평양
에 출장왔다가 병원에까지 찾아가 어머니를 만나보고 돌아온 시당위원
장 리석을 통해 소식을 전해들었을뿐이다.
《아직 병원에 못 가봤겠지?》
《짬을 내여 들리겠습니다.》
《이제 병원에나 가보오. 부위원장동지는 강선에 나갔으니 밤에야 돌
아올게요. 혹시 밤에 부를지 모르니까 저녁에는 어디 가지 말고 려관에
서 기다리오.》
부국장은 너부죽한 얼굴에 사람좋은 미소를 그리였다.
《김책부위원장동지가 말입니까?》
《그렇소. 부위원장동지가 동무를 부르라고 지시했으니까…》
지훈은 김책부위원장이 자기를 직접 불렀다는 말에 고무풍선마냥
기쁨으로 둥둥 떠오르기만 하던 마음의 탕개가 죄여졌다. 김책부위원장
은 나라의 산업전반을 책임지고있을뿐아니라 항일혁명전쟁의 나날부
터 영명하신 장군님을 오래동안 보좌해온것으로 하여 인망이
높았다. 김책부위원장은 지훈이가 기사장으로 임명된 후에도 제철소
에 다녀갔으나 지훈은 도에 회의갔던 때여서 직접 그를 만나지 못했었
다. 김책부위원장이 수수한 작업복차림으로 작업현장에 찾아와 로동
자들에게 스스럼없이 담배를 권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둥, 호통치
기 좋아하는 어느 공장 지배인을 단단히 버릇 떼놓았다는둥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제철소안에서도 자자하게 돌았다.
부국장은 병원에 가보라고 하였으나 지훈은 더부룩한 머리를 만져보
고 우선 리발관에 찾아갔다.
지훈은 너그러우면서도 무척 엄한 김책부위원장이 단정하지 못한것을
제일 싫어하며 어느 회의에선가는 수염 꺼칠한 어느 도산업처장을 회의
에 참가시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바있었다.
지훈은 어머니병방문을 뒤로 미룬채 리발을 끝내자 숙소로 돌아와 총
화자료들을 뒤적거리며 부위원장과 만날 준비를 했다. 지훈이 리발관에
서 숙소로 곧장 돌아온것은 정말 잘한 일이였다. 밤에야 돌아오리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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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책부위원장은 날이 저물기 전에 지훈을 불렀다. 앞머리가 많이 벗어
지고 무척 칼칼하게 생긴, 그러면서도 너그럽고 인정많은 김책부위원장
은 지훈이와 몇마디 인사말을 나누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철소형편은 동무가 직접 장군님께 보고드리오.》
《장군님께 말입니까?》
《그렇소. 장군님께서 동무를 부르시오.》
지훈은 너무도 크나큰 격정의 파도가 우 하고 소리치며 가슴으로 밀
려들어 세차게 흉벽을 때리는 바람에 눈앞이 아뜩하고 귀가 멍멍해지면
서 일시에 온갖 감각을 잃는가싶었다. 지훈은 잠시후에야 정신을 차려
이미 저만큼 앞선 부위원장을 따라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떼였다.
(장군님께서 무엇때문에 몸소 나를 부르실가?)
지훈은 주단 깔린 복도와 계단을 따라 장군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걸
음을 옮길 때마다 북치듯 가슴이 쿵쿵 울리였다.
《부위원장동지, 들어가보십시오.》
장군님께서 계시는 집무실에 들어갔던 책임서기가 돌아나와 김책부위
원장에게 알리였다. 대기실의자에 앉아있던 김책부위원장이 습관적으로
옷을 매만지며 지훈이쪽을 바라보았을 때 지훈은 이미 용수철이 튀여나
듯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열병행진에 나가는 병사처럼 가슴을 쭉 펴고
서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계시는 집무실문이 소리없이 스르르 열리였다.
순간 방안에서는 그 무슨 광휘롭고 신비로운 빛발이 문밖으로 쏟아져나
오는가싶었다. 신비로운 그 빛이 장군님의 안광에 어리신 밝은 정기임
을 지훈이가 깨달은것은 잠시후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온 방안이 환해지도록 밝게 웃으시며 집무실문
가에 서계시였다.
《이 동무가 제철소 기사장동무입니다.》
로투사인 부위원장은 장군님을 늘쌍 몸가까이에 모시고있으면서도
그이를 뵈올 때마다 처음 뵙는것만 같은 심정이여서 자못 경건히 보고
드리였다.
장군님께서는 지훈의 온몸과 넋을 따뜻이 품어주실듯 두손을 내미신
채 활달히 걸어오시였다.
《정말 반갑습니다. 오늘 처음 만나지만 기사장동무에 대한 이야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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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여러번 들었습니다. 그새 정말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이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을 대하시듯 지훈의 손을 다정
히 잡아주시였다. 지훈은 그이께서 너무도 허물없이 대해주시며 치하만
해주시여 벼르고벼르던 절절한 축원의 인사말씀 한마디 변변히 올리지
못한채 그이의 안내를 받아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리 크지 않은 방
은 장군님의 검박하고 소탈하신 품성을 말해주듯 너무도 수수했다.
처음 오는 곳이면서도 늘쌍 다닌 곳처럼 친숙감이 느껴지는 깨끗한 방
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지훈의 두손을 잡으신채 응접탁앞으로 이끄시였다.
그이께서는 지훈에게 먼저 자리를 권하신 후 김책에게도 앉으라고 하시
였다. 그이께서는 집무용책상우에 두팔굽을 눕히고 앉으시여 지훈에
게로 따뜻한 정이 담긴 눈길을 보내시였다.
《제철소에서 레루생산에 성공하였다면서요?》
무릎우에 두손을 올려놓고 의자 한끝에 조심스럽게 앉아있던 지훈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그이께서는 웃으시면서 앉아서 그냥 이야기
하라고 손짓을 하시였다. 지훈은 불과 몇시간전에 산업부국장한테 한 이
야기가 김책부위원장을 거쳐 장군님께 보고되였다고 생각하니 제철소사
업에 대한 국가적관심이 얼마나 큰가 하는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이였다. 레루시험생산에 대한 지훈의 보고에 장군님께서는 매우 흡족
해하시였다.
《우리 제철소로동계급이 벌써 레루를 생산하게 되였다니 정말 장합
니다. 용광로복구는 어떻게 되였습니까?》
《지난 6월 14일부터 벽돌을 쌓기 시작했는데 금년내로 쇠물을 뽑겠
습니다.》
《해탄로는?》
《제2호 해탄로는 모레쯤 첫 콕스를 뽑습니다.》
《모레 말입니까?》
경애하는 장군님의 안광은 기쁨으로 빛나시였다.
《정말 장합니다, 기사장동무! 그새 정말 많은 일을 했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제철소에서 이룩된 성과가 모두 지훈이때문이
기라도 한것처럼 그를 치하해주시였다.
《지난 시기 제철소는 소재를 생산하는데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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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제철소를 빨리 복구개건하여 선철과 강철, 압연강재생산의 일관한 작
업공정을 꾸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것이 건국의 무쇠기둥을 세우는것
입니다.》
그이의 우렁우렁하신 말씀에서는 억년가도 드놀지 않을 나라의 무쇠
기둥과 대들보를 세우시려는 확고한 의지와 신념이 넘쳐나시였다.
그이께서는 지훈을 한껏 고무해주시고나서 벽쪽에 기대여놓은 의자에 지
훈이를 마주향해 조용히 앉아있는 김책에게로 눈길을 돌리시였다.
《부위원장동무! 모레 제철소에 나가야지요?》
《예, 하지만 장군님께서는 각급 학교 졸업생 환영대회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김책이 자리에서 일어나 단정한 자세로 말씀드리였다. 지훈은 이때에
야 긴장되였던 마음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풀리고 굳어졌던 몸가짐이
편해져 앉은자리에서 그저 례사롭게 장군님의 물으심에 대답해온 자신
을 깨달았다. 장군님의 눈길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부드럽
게 만들어주는 그 어떤 신비로운 힘이 있었다. 지훈은 그이의 자애로운
눈길이 자기쪽으로 향해지자 또다시 자신을 까맣게 잊어버린채 오직
그이의 이야기에 심취해버리였다.
《예, 알고있습니다. 올해에 졸업하는 북조선 각급 학교 13만명
졸업생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어 연설원고를 이미 써놓았습니다.》
그이께서는 해탄로조업식과 졸업생환영대회가 공교롭게 겹친것을
못내 아쉬워하시는가싶었다. 지훈이도 서분한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2호해탄로조업은 한개 기업소의 일부 생산공정과 결부되여있지만 졸
업생환영대회는 전국의 졸업생들을 대표하여 평양시적으로 진행되는 큰
행사였다. 조국의 미래를 위한 십여만명 청년들의 거대한 행사를 그리
크지도 못한 한개 해탄로조업때문에 미룰수는 없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는가싶더니 자애롭게 물으
시였다.
《그래 그 말썽많던 배송기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그이께서는 제철소에서 벌어지는 크고작은 일모두를 손금처럼 환히 헤
아리고계시였다.
《녜, 건국결사대에서 1호배송기를 기어이 정비해냈습니다.》
《그 심하게 파괴되였던 배송기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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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2호배송기는 아직…》
지훈은 2호배송기를 자기때문에 아직 복구하지 못한것 같아 말씀
드리기가 거북스러웠다. 지훈은 자기의 무능이 이때처럼 한스러운적은
없었다.
《2호배송기가 없으면 지금 복구중인 1호해탄로를 못 돌리지 않습니
까?》
《예.》
줄곧 밝은 웃음으로 빛나시던 장군님의 안색에 심려의 한점 구름이 비
끼는가싶었다.
《장군님, 2호배송기도 해결될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이의 안광엔 절절한 희망과 기대의 빛이 넘쳐났다.
《레루만 주면 산업국에서 금년말이나 래년초에 배송기를 사다주겠답
니다.》
지훈이가 심려를 덜어드리려고 올린 말씀에 그이의 안광에 비꼈던 희
망과 기대의 빛이 넘쳐났다.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습니다.》
그이께서는 몸을 의자등받이쪽으로 젖히시며 김책한테로 눈길을 돌리
시였다.
《많은 레루를 가져가고도 값이 모자라 돈을 더 주어야 한다지요?》
《예.》
지훈은 돈이라는 말에 눈앞이 아뜩했다. 지금은 한푼돈을 따지고
짜개서 써야 할 때였다. 국고는 아직 텅텅 비여있었고 재산이란 일본놈
들이 남겨놓고간 빈 장부밖에 없었다. 험난한 가시덤불길을 헤치며
건국의 첫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조국은 아직 가난했고 해야 할 일들은
너무나 많았다. 조국을 지키자면 군대도 창건해야 했다. 40여년간이나
일제에게 짓밟히고 빼앗겨 깨진 빈바가지밖에 없는 인민들의 생활과 살
림도 돌봐야 했다. 지훈이도 이것을 모르지 않았다.
장군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시여 조용히 창가로 가시였다.
그이께서는 온 나라 형편과 앞으로 조국이 가야 할 길을 굽어살피시듯
오래도록 창밖을 바라보시였다.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뜨겁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푹 숙이였다. 지훈은 자기 심장의 고동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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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온 방안에 한가득 차넘치는가싶었다. 이윽고 장군님께서는 방안의 두
사람을 향하여 창문을 등지고 돌아서시였다.
《동무들이 다 잘 아는것처럼 지금 나라형편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철소복구를 위해서라면 우리는 어떤 희생도 각오해야 합니다.
제철소는 나라의 생명선입니다. 하루빨리 제철소를 일떠세워 쇠물을 뽑
아내여야 민주기지도 건설할수 있고 나라도 통일할수 있습니다. 다시 토
론해보고 꼭 사와야 한다면 허리띠를 졸라매고서라도 사옵시다.》
그이의 안광에서는 번개와도 같은 섬광이 번쩍했다. 지훈은 폭풍때 설
레는 바다처럼 거세찬 격정의 파도가 가슴에 한가득 밀려들었다. 그 파
도를 타고 온몸이 그대로 하늘을 향해 둥둥 떠오르는가싶은 격정의 순
간이였다. 지훈은 자기 한생을 야금에 바치리라 결심한지 오래였지만 자
기가 하는 일이 이처럼 중요하며 영예로운 일이라고는 생각해본적 없었
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데 중요는 하지만 근육속에 묻혀있
는 뼈처럼 나타날수 없고 좀해 영광이 차례질수 없는 분야가 야금공업
이고 그중에서도 더한것은 콕스 만드는 일인줄로 알아온 지훈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창문가에서 집무상앞으로 걸어오시였다.
《부위원장동무! 배송기문제를 결론하기 위해서라도 제철소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2호해탄로조업식도 축하해줄겸 현장에 가보고 배송기문제
를 결론지읍시다. 모레 아침부터 예견했던 평양시 각급 학교 학생들의
환영모임시간을 오후로 미룹시다.》
《예.》
김책부위원장은 젊음이 넘치는 목소리로 기운차게 대답했다.
《기사장동무는 모레 나와 함께 제철소로 갑시다. 래일은 평양에서 일
을 보십시오. 기사장동무가 할 일은 우리 김책부위원장동무가 가르쳐줄
겝니다.》
지훈은 장군님을 몸가까이에 모신 시간이 너무도 빨리 꿈결처럼 흐른
것이 아수했다. 김책을 따라 장군님의 집무실을 나서니 마당에서는
지훈이가 타고왔던 차대신 다른 승용차가 기다리고있었다.
지훈은 어디로 무엇때문에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승용차에 올랐다.
(제철소에 가기 전에 내가 할 일이 무엇일가?)
승용차는 어느덧 어둠이 깃드는 수도의 거리를 누비며 달리기 시작했
다. 잠시후 승용차가 멎어선 곳은 어머니가 입원해있는 병원입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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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이였다. 어리둥절해 어쩔줄 모르는 지훈에게 함께 따라온 젊은
군관이 차에서 꾸레미 하나를 꺼내주었다.
《장군님께서 보내시는겁니다.》
《네? 장군님께서요?》
《기사장동지가 오래간만에 어머니병문안을 하는데 어떻게 빈손으
로 가겠는가고 하시면서 이 약재와 당과류를 보내주시였습니다.》
지훈은 어머니병문안을 마치고 그날 밤 려관으로 돌아온 후 밤깊어 찾
아온 김책부위원장을 통해서야 자기가 받아안은 크나큰 사랑의 전후사
연을 깨달을수 있었다.
《장군님께서는 며칠전에 제철소형편을 보고받으시면서 기사장동무의
사업과 생활정형도 료해하시였습니다. 그이께서는 지훈동무가 두달이 되
도록 한번도 병원에 가보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우리들에게 이렇
게 말씀하시였습니다.
〈일이 바쁘니까 어머니병문안을 하러 이곳까지 우정 오지는 않을겝
니다. 제철소형편도 료해할겸 한번 부릅시다. 맡은바 자기 일에 헌신하
는 책임성있는 좋은 기사장을 또 한사람 골랐습니다. 우리는 건국의 열정
이 높은 이런 동무들을 잘 보살피고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장군님의 이
과업을 받고 동무를 부르라고 내가 산업국에 지시했습니다.》
로투사는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조용히 이야기했다.
《장군님!》
지훈은 목메여 흐느끼듯 속삭였다. 지훈은 이 순간에야 갈길 몰라 헤
매이던 자기를 손잡아 이끌어준 재생의 품이 얼마나 크고 뜨거운것인가
를 희미하게나마 깨닫는가싶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지훈이 깨달은것
은 물우에 떠오른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소뿔도 꼬부라든다는 7월의 무더위때 불의 고장을 찾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3호해탄로우에 서계시였다. 철의 광장을 굽어보
는 주석단을 련상시키는 이곳 로체우에서는 세탄장 건물너머로 대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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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눈에 바라보이였다. 천여리 머나먼 길을 쉬지 않고 이곳까지 흘러
온 강물은 바다처럼 강폭이 넓어져 유유히 굽이쳤다. 그이께서는 강바
람에 옷자락을 펄럭이시며 강의 흐름과 함께 이 땅우에 새겨진 기나긴
력사를 더듬으시듯 해빛에 번쩍이는 강물을 바라보시였다.
사색깊으신 눈길로 대동강을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옆에 서있는
시당위원장 리석에게 나직이 물으시였다.
《시당위원장동무, 고향이 여기라지요?》
《예.》
《여기 송림에 박씨가 많습니까?》
《예, 송림산주위로 옛날부터 박씨네들이 모여살았습니다.》
리석은 이렇게 대답을 올리면서도 장군님께서 무엇때문에 이것을
물으시는지 알수 없었다.
《박씨가 많았다?》
그이께서는 조용히 뇌이시더니 다시 혼자생각에 잠기시였다.
오래도록 대동강을 바라보시던 장군님께서는 강을 등지고 제철소
구내쪽으로 돌아서시였다. 3호해탄로 맞은편에는 멀지 않아 첫 콕
스를 압출하게 될 2호해탄로가 서있고 그옆에는 한창 복구중인 1호해
탄로와 아직 불이 꺼져 싸늘히 식어있는 4호해탄로가 바야흐로 조업하
게 될 2호해탄로를 부러워하듯 서있었다. 줄지어 어깨나란히 서있는 세
개의 해탄로뒤로는 압연지구의 건물지붕이 파도쳐 펼쳐졌다.
그 지붕너머로는 평로굴뚝들이 하늘을 찌를듯 치솟았다. 제철소우 하
늘을 높이 떠밀어올린상싶은 그 까마득한 굴뚝마다에서는 건국의 기세
를 자랑하듯 연기가 뭉게뭉게 피여올랐다. 압연지구와 강철지구 오른편
에는 우거진 아카시아나무그늘이 서늘하고 그에 어울려 아름답게 수풀
이 자라오른 제철소구내산이 서있다. 구내산의 록음사이로 비죽비죽 솟
아오른 용광로의 철탑들과 열풍로굴뚝들이 보이였다. 압연, 강철지구와
용광로지구는 그사이 들어앉은 구내산때문에 동떨어진것같이 보였으
나 공중으로는 벨트콘베아선이며 아름드리 가스관들, 고압선들이 거
미줄처럼 서로 엉키여돌았다. 철탑과 굴뚝들, 무쇠빛 그대로인 광대
한 건물들이 백만평의 넓은 부지에 산악처럼 층과 층을 이루어 눈부리
아득하게 펼쳐진 제철소구내는 높고낮은 온갖 쇠소리가 차고넘치여
그 위용을 더욱 자랑하는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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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푸릿한 연기발속에 잠겨있는 제철소구내를 사
색깊은 눈길로 천천히 더듬으시고나서 수원들쪽으로 돌아서시였다.
《그사이 우리 로동자들이 정말 큰일을 해놓았습니다.》
그이께서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머금으시고 자못 만족해하시였다.
그이의 치하에 환호로 화답하듯 해빛에 번쩍거리는 강괴들을 싣고 기관
차가 내달리며 길게 기적을 울리였다.
이윽고 첫 압출신호종이 울리였다. 레루토막을 쇠바줄로 로체우에 매
달아놓고 마치로 다급히 두드려대는 종소리는 장중하거나 우아하진 못
했어도 째는듯 한 음향속에 강렬한 호소와 긴장되고 엄한 당부를 담고
있었다. 신호종이 울리기 바쁘게 로체공들은 첫번째로 콕스를 뽑게 된
탄화실문짝을 재빨리 뜯어냈다. 그러자 시뻘건 불덩어리로 가득찬
탄화실이 입을 쩍 벌리였다. 시뻘건 탄화실앞으로 안내차며 콕스식
힘전동차가 레루를 따라 스르르 와서 멎는다. 탄화실에 가득차있던 불
덩어리들이 기다렸다는듯 움씰하더니 불담벽전체가 서서히 앞으로
미끄러져나왔다.
불담벽은 이글이글거리며 콕스식힘차우로 무너져내리였다. 그것은 장
쾌한 불의 폭포였다. 해방된 이 땅우에 새롭게 피여난 첫 불이였다. 이
제부터 저 불의 후예들이 이곳 철의 지구를 불바다로 설레게 할것이였
고 굳고 차겁던 쇠덩어리들이 줄줄이 녹아 사품치게 할것이였다.
불! 불! 불이 흘렀다.
산발을 불태우고 하늘을 끄슬리는 화산의 불길도 저 불처럼은 뜨겁지
못할것이였다. 하늘에서 불사태가 쏟아져내린다 해도 저 불의 흐름처럼
장엄하진 못할것이였다. 사람들은 강의한 의지와 피타는 노력으로 저 불
의 흐름을 얻어냄으로써 쇠를 벼릴수 있게 되였고 현대문명에로 비약을
이룩할수 있었다. 저 타번지는 콕스의 불길이 쇠와 돌을 녹이도록 뜨거
운것은 저 불을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더운 땀의 온기와 온
기가 수백수천년을 두고 합쳐진때문일지도 모른다. 쇠를 다스리는 저 불
을 얻어낸것은 인류사회발전에서 커다란 공적이였으나 수많은 사람들이
저 불때문에 얼마나 오랜 세월 고역에 시달려야 했던가. 사람들의 피땀
속에 태여났고 피로 가꾸어진 불, 저 불때문에 하도 오랜 세월 하도 많
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했으니 그 선혈에 물들어 콕스의 불길은 저렇
게도 붉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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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거리며 콕스가 쉼없이 쏟아져내리였다.
콕스가 폭포쳐내리기 시작하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오늘의 이 순
간을 위해 힘과 지혜를 아끼지 않은 해탄로복구자들을 치하해주시듯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쳐주시였다. 만세의 환호성이 터져올랐다. 장군님을
모시고 3호해탄로우에 올랐던 사람들과 2호해탄로의 첫 조업을 구경하
기 위하여 모여온 사람들이 장군님을 우러러 목청이 터져라 만세를 불
렀다. 삽시에 해탄로주변은 꽃바다로 물결쳤다. 네개의 해탄로중 하
나를, 그것도 제일 작은것을 살려낸데 불과하지만 이것은 비약에로
줄달음치는 이 나라 공업의 미래를 담보하는 힘과 열정의 시위였고 건
국의 길우에 새겨진 첫 자욱이였다.
《만세!》
《만세!》
만세의 환호성은 잦을줄 몰랐다. 아직은 앞으로 일망무제하게 펼쳐질
불바다의 첫 한점 불꽃을 피운데 지나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신심과 용
기에 넘쳐 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다. 군중의 환호소리는 지금 이 시각
부터 영원히 꺼질줄 모르며 점점 커지고 넓어져 온 하늘을 불태우고 누
리를 덮게 될 불바다에 설레일, 불의 격랑을 알리는 전주곡이였고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치솟기 시작한 불의 파도소리였다.
군중의 환호에 답례하시던 장군님께서는 지훈이쪽으로 향하시였다.
《기사장동무! 그새 정말 수고많았습니다. 빨리 나머지 해탄로들도 복
구하고 용광로에서 쇠물을 뽑아야 하겠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지훈의 손목을 잡아주시고나서 대견하신듯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시였다. 2호해탄로 첫 조업이 끝났을 때 그이께서는
혁신자들을 만나고싶어하시였다. 조업식에 참가했던 혁신자들이 그이께서
계시는 3호해탄로우로 모여왔다. 그이께서는 2호해탄로조업에서 위훈을
세운 혁신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시며 그들모두를 축하해주시고나서 차
지훈쪽으로 돌아서시였다.
《해탄로의 심장이라는 그 기계가 어디에 있습니까?》
《저… 배송기장에 있습니다.》
지훈은 장군님의 물으심에 마음이 긴장됐다. 그제 장군님께서는 해탄
배송기에 대해 많은 심려를 하시였었다. 지훈은 장군님께 간단명료하게
말씀드릴수 있도록 배송기의 설비경력이며 공칭능력, 구조와 작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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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에 대하여 머리속으로 급히 더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이의 관심
은 기계에 있지 않으시였다.
《그 배송기를 지키다 두사람이나 희생되였다지요?》
《예.》
《그 가족들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장군님께서는 거듭 사람들에 대해 물으시였다.
장군님두리에 빙 둘러서있던 혁신자들속에서 억봉이 앞으로 한걸음 나
섰다.
《이 동무가 해탄과장 박억봉동무입니다. 희생된 전 로동조합위원
장 박준길동무의 조카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차지훈의 소개에 여간만 반가와하지 않으시며 억봉이앞
으로 걸어오시였다.
억봉은 바지혼솔에 두손을 가져다대고 깊숙이 허리숙여 인사를 드리
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억봉의 어깨를 껴안으시더니 허리굽혀 펼줄 모
르는 그를 바로세우시였다.
《박동무!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습니다. 해탄로를 복구하느라
그새 수고가 많았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주먹을 쥔채 흥분으로 굳어져 펴지 못하는 억봉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장군님!》
억봉은 목이 메여 이렇게 말하고나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군님의 품에 안겨 인자하신 모습을 우러를수록 억봉은 꿈을 꾸는게 아
닌가싶었다.
영채어린 안광, 만면에 환히 넘치는 웃음… 몸소 해탄로우에 오르시여
자기같은 석탄숯쟁이를 반갑게 대해주시는분이 과연 장군님이시란
말인가. 만민이 우러르며 그 이름 전설처럼 들어오던 장군, 먼발
치에서 한번만이라도 뵈옵고싶어 화차를 잡아타고 장군님의 조국개선을
환영하는 군중대회가 있다는 평양공설운동장에까지 찾아가지 않았던가.
그날 소원을 이루지 못한 서운함때문에 준길삼촌한테 노여움은 얼마나
품었던가. 준길삼촌은 림종의 마지막순간에 장군님을 모시고 내 나라를 위
해 콕스를 만들지 못하는걸 가슴아파하였고 오직 장군님께서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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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시는 길을 따라가라고 유언했었다. 장군님께서 몸소 로체우에
오르시여 해탄로조업을 축하해주시고 이미 세상떠난 삼촌과 동생을
찾으시며 바로 자기앞에 서계신다는 사실이 억봉은 좀해 믿기지 않았다.
《동무가 우리를 찾아 평양에 왔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방에
출장갔다 돌아와서 제철소로동자 한사람이 우리를 찾아왔다가 욕먹고 돌
아갔다는 보고를 받고 그 부국장동무를 공부 좀 시키라고 했습니다. 그
동무는 관료주의가 심할뿐아니라 무엇이나 남이 하는대로 하려는 경향
도 심했습니다.》
억봉은 해탄로를 허물라는 이야기를 듣고 장군님을 만나뵈
오러 무턱대고 평양으로 가던 일이 새삼스레 생각났다.
《장군님, 이렇게 해탄로를 복구해놓고 장군님을 해탄로우에서 만
나뵙게 되니 이제는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억봉은 장군님을 그렇게도 뵈옵고싶어하던 준길삼촌이며 석봉의 마음
까지 담아 진심으로 절절하게 말씀드리였다.
《나도 이렇게 동무를 만나니 정말 반갑습니다. 동무가 우리를 찾아
왔다가 관료주의자때문에 그냥 돌아갔다는것을 알고 마음이 좋지 않았
댔습니다. 우리를 찾아왔던 로동자가 제철소를 지키다 희생된 동무의 가
족이라는것을 알고서부터는 더욱 그랬습니다. 오래전부터 나는 동무
를 꼭 한번 만나보고싶었댔습니다.》
억봉은 눈굽이 뜨거워났다. 삼촌과 동생이 살아있어 오늘의 이 영광
을 함께 누리였으면 얼마나 좋으랴.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따뜻한 정이 실린 눈길로 억봉을 바라보시며
다정히 물으시였다.
《삼촌어머니랑 누이랑 집안식구들이 모두 잘있습니까?》
그이께서는 억봉이네 집안식구들을 이미 손금처럼 환히 알고계시였다.
《예.》
《형제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4촌동생은 평양학원을 나온 후 평양에 배치받았고 누이는 저랑 같
이 여기 해탄로에서 일합니다.》
《과장동무는 여기 해탄로에서 얼마나 일했습니까?》
《한 십년 남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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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입니다.》
《어려서부터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부모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아버지랑 삼촌이랑 모두 여기 해탄로에서 일했습니다. 우리 집안 식
구들은 어려서부터 해탄일을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정말 훌륭한 가정입니다. 동무의 삼촌과 동생이 새 조
국건설을 위해 그처럼 훌륭히 싸운것이 우연치 않습니다. 정말 부러워
할만 한 좋은 가정입니다.》
그이께서는 무슨 장한 일이기라도 한것처럼 억봉이네 가정을 치하해
주시였다. 억봉은 어리둥절해지고말았다. 지금까지 자기네 가정을 불쌍
히 여겨주고 동정해준 사람은 있어도 부러워하거나 훌륭하다고 치하해
준 사람은 없었다. 배꼽 떨어지면 먹을 걱정을 해야 하고 움직이면 벌
어야 하던 세월, 걸음마를 떼기 바쁘게 어린 등뼈가 휘도록 쇠질통에 석
탄을 담아지고 헐레벌떡거려야 하던 자기와 동생들, 한집안식구조차 웬
만해 얼굴을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검댕이칠을 해가지고 콕스를 구워야
했던 아버지와 삼촌… 입에 풀칠하기 위해 아득바득 애를 쓰다 피 토하
고 쓰러진 부모들이였고 자기네 집안사람들이였다.
《석탄숯쟁이네 집안에 뭐가 부러울게 있겠습니까?》
억봉은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며 멋적어했다.
그이께서는 온화하던 표정을 거두시였다.
《아닙니다. 힘든 일을 하느라 수고많은 사람들이 제일 훌륭한 사람
들입니다. 지난날엔 돈많은 놈들이 으쓱거렸지만 지금은 조국과 인민을
위해 어렵고 힘든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제일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로동자들을 내세우는것은 그들이 누구보다 어려운 일을 많이 하
기때문이고 그 과정에 조직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억세게 단련되였기때문
입니다. 동무네 집안이 지난날 그 누구보다 못살았고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새 민주조국건설을 위해 목숨바친 삼촌이나 동생 같은 애국자들
을 낳을수 있었습니다.》
그이의 안광에는 한생을 로동으로 살아오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크
나큰 믿음과 사랑의 정이 어리여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억봉을 고무격려해주시고나서 주위사람들을 둘
러보시며 누구에게라없이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반동들의 습격으로 파괴되였다는 그 기계를 보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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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은 눈앞이 아뜩했다. 파괴된 2호배송기는 해탄분창고로 실어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활달하고 확신성있는 걸음걸이로 어느덧 철계
단을 내리기 시작하시였다.

해탄설비분창고는 해탄구역치고도 제일 외진 구석이였다. 제철소에 일


다니는 사람들마저 공장구내에 이런 곳이 있다는것을 좀해 알지 못했고
웬만해 찾아오기 싫어했다. 주위엔 온통 석탄뿐이였다. 무득무득 쌓
여있는 석탄더미사이로 로반과 침목이 모두 탄가루에 묻힌 두줄기 철길
이 뻗어있어 분창고주변은 마치 어느 탄광의 저탄장 비슷했다.
수천평의 넓은 석탄밭 한구석에 오랜 세월 탄가루를 뒤집어쓴 건물 한
채가 서있었다. 그 건물 한옆에는 창고벽체를 의지하여 강괴덩어리와 철
판들로 벽을 만들었는데 창고벽체까지 벽이 모두 둘뿐인 이 건물의 세
번째 벽을 낡은 화차가 대신하고있었다. 비나 겨우 가리울수 있는,
야외나 다름없는 여기가 림시로 꾸린 2호배송기 수리장이였다. 무더운
복철이건만 무슨 불을 피우는지 그곳에선 연기가 꾸역꾸역 솟아났다. 불
볕이 타르칠한 철판지붕을 내리지지고 시뻘겋게 난로가 달아올라 수리
장에서는 열기가 확확 풍기여나왔다.
《수고들하십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모두에게 인사를 하시며 수리장안으로 성큼 들
어서시였다.
배송기수리장안은 어느 농촌야장간을 련상시켰다. 한쪽구석에서는 풍
구까지 달아놓은 도람통난로가 이글거리고 그 불에 무슨 쇠붙인가를 달
구고있었다. 바닥에는 큼직한 모루가 놓이고 그 주변에 메며 철판쪼박
들이 지저분하게 딩굴었다. 강괴덩어리우에 두터운 철판을 올려놓아 만
든 작업대앞에 블로크덩어리를 의자삼아 앉아 담배를 피우던 달모가 일
어섰다.
《이 동무가 해탄수리계장동무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억봉의 소개에 쇠녹이 벌겋게 묻은 달모의 손을 스스럼
없이 잡아주시였다. 그의 손에는 때묻은 붕대가 감아져있다.
《많이 상했습니까?》
장군님께서는 머리도 수염도 제대로 깎지 못한 그의 모습을 측은히 바
라보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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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에 좀 닿아서…》
달모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손을 움츠러뜨리였다. 2호해탄로조업식에
참가하였던 달모는 준길이며 석봉이가 목숨바쳐 지켜낸 배송기 하나를
끝내 살려내지 못하였다는 자책으로 저도모르게 알뜰이와 함께 이곳을
찾아왔다.
장군님께서 달모와 인사를 마치였을 때 작업장 한쪽구석 나무상자옆
에 서있던 알뜰이 인사를 드리였다. 사과상표딱지가 아직 그대로 붙어
있는 상자우에는 방금전까지 달모와 알뜰이 들여다보던 도면비슷한
종이가 펼쳐져있었다.
《이 동무가 해탄과장동무의 누이입니다.》
억봉을 대신하여 차지훈이 알뜰을 소개해드리였다.
장군님께서는 이번에도 여간만 반가와하지 않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알
뜰이와 친절히 인사를 나누고나서 다정히 물으시였다.
《지금 무슨 일을 합니까?》
《배송기를 복구하는데서 그저 심부름이나 합니다.》
《그렇습니까?》
그이께서는 알뜰의 대답에도 만족해하시였다.
《녀성들까지 이렇게 해탄로의 심장을 지켜나섰으니 얼마나 장합니까.
녀성들도 새 조국건설에 모두 떨쳐나서야 합니다.》
그이께서는 알뜰이 한사람만을 향해서가 아니라 온 나라 녀성들을 향
해 말씀하는듯싶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달모며 알뜰이와 인사를 나누시고나서 배송기
때문에 애써온 이들의 수고와 로력을 헤아려보시는 심정으로 수리장안
을 다시 천천히 살펴보시였다. 뒤짐을 지신채 수리장 한가운데 서시여
작업장을 더듬으시던 그이께서는 콩크리트벽체에 눈길을 멈추시였다. 콩
크리트 틈사리에 박혀있는 철근에는 중절모 하나가 댕강 매달려있었다.
주위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록색의 고급중절모였다.
《저건 뭡니까?》
《예, 배송기 바낑으로 쓸가해서…》
장군님의 물으심에 달모가 어줍게 대답드리였다. 순간 그이의 안광에
밝은 정기가 어리였다.
《여기서 배송기를 수리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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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이 두손을 앞으로 모두어쥔채 나직이 대답드리였다.
《네, 깨진 배송기케스를 붙여볼가 해서 그럽니다.》
《파괴되였다는 그 배송기 말입니까?》
《예.》
《그래 될것 같습니까?》
그이께서는 기대와 희망어린 눈길로 억봉을 바라보시였다.
《용접하려고 애를 썼는데 잘되지 않습니다.》
억봉은 풀이 죽어 죄송스럽게 대답했다. 그이께서는 실패를 위로하시
며 힘과 고무를 주시듯 말씀하시였다.
《헌옷을 뜯어고치기가 새천으로 옷을 짓기보다 어려운 법입니다.》
그이의 말씀에 힘과 용기를 얻은듯 억봉이가 한걸음 나섰다.
《그래 이번엔 깨진 부위에 철판을 덧대자고 그럽니다. 금간 날개에
는 짜개못을 주구…》
《될것 같습니까?》
《째진 옷에 천을 덧대구 깁듯 하면 될것 같습니다.》
이번엔 달모가 대답했다. 장군님께서는 이들의 착안이 기술적으로 어
떤가를 물어보시듯 지훈에게로 심려어린 눈길을 보내시였다. 지훈은
장군님께서 바라시는 뜻을 알고도 남았으나 선뜻 대답하지 못하였다. 지
훈은 억봉이와의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그리고 배송기때문에 희생된
준길이와 석봉을 생각해서라도 할수 있다고 힘있게 대답하고싶었으나 기
술자의 량심이 이를 허락치 않았다.
《덧대는 철판과 케스의 밀착을 보장하기 어려울것 같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아무 말씀없이 머리를 끄덕이시였다. 뒤짐을 지신채 그
자리에서 몇걸음 선자리걸음을 하시던 그이께서는 수원들을 향해 돌아
서시였다.
《외국것이라면 향수냄새만 나도 얼굴을 찡그리던 김책부위원장동
무가 이번에 배송기를 수입하자는 산업국의 제의를 듣고 나한테 결론받
으러 왔던 그 심정이 지금에야 리해됩니다.》
그이의 말씀에 김책부위원장은 아무 대답도 드리지 못하였다. 철색도
는 갱핏한 그의 얼굴에 그 어떤 자책과 괴로움이 소리없이 파도쳐 지나
가는가싶었다.
장군님께서는 사색에 잠기신채 천천히 작업장을 걸어나오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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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의 걸음걸음은 그 어느때없이 무거우시였다.
배송기수리장과 잇달려 낡은 화차가 레루우에 서있었다. 철판으로 지
붕을 해씌우고 가마니로 둘러막은 배송기이동창고였다. 배송기화차에 달
아놓은 철판문짝에는 2년전 태주먹이 곱돌로 써놓았던것을 여러 사람이
다시 쓰고 덧쓰고 한 락서가 아직 그대로 있었다.

품명―배송기
보낼 곳―해탄배송장
화주―해탄사람들
※ 승인없이 오르거나 손대지 말것

장군님께서는 반쯤 열린 배송기철판문짝에 씌여진 글을 한자한자


소리내여 읽으시였다. 억봉이가 배송기화차문짝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밝은 해빛이 배송기에 비쳐지며 화차안이 환히 드러났다. 건국의 2년세
월이 흘렀건만 파괴된 배송기는 여전했다. 세상이 바뀌고 강산이 변하
여 사람마저 새롭게 태여나는 기간에 유독 2호배송기만 시대의 흐름에
서 혼자 기슭으로 밀려났는가싶었다. 손바닥같이 두터운 철판도 세월의
중하를 어쩌지 못해 더 뻐그러지고 세월의 이끼처럼 녹만 잔뜩 뒤집어
썼다. 일제가 지난 40여년간 이 땅에 입혀놓은 상처와 저지른 죄악
의 흔적을 보시듯 파괴된 배송기를 바라보시는 장군님의 안색은 어두우
시였다. 그이의 안광에 짙어가는 심려의 어두운 빛을 뵙는 억봉의 가슴
은 빠개져나가는것 같았다.
《장군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어이 배송기를 살려내겠습니
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아무 말씀없이 억봉을 바라보시였다.
격해오는 심정으로 억봉을 바라보시던 그이의 눈길은 차지훈의 얼굴
에 머무르시였다.
《기사장동무, 배송기를 복구할 자신이 없습니까?》
지훈이 선뜻 대답을 드리지 못하자 그이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힘있게
울리기 시작했다.
《물론 힘들것입니다. 세계 기계공업력사에 아마 이 동무들처럼 철판
을 대고 기워 기계를 복구해보겠다고 한 사실이 없을것입니다. 산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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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제기한것처럼 배송기를 사다주면 지금처럼 동무들을 고생시키지 않
을수 있습니다. 아직 국고에 돈이 얼마 되지 않지만 제철소복구를 위해
서라면 배송기를 열대라두 사다줄수 있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여기서 잠시 말씀을 끊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새
로운 각오와 투지로 빛나는 주위사람들을 천천히 더듬으시고나서 말씀
을 이으시였다.
《하지만 나는 배송기를 복구하자는 의견입니다. 동무들이 하루이
틀도 아니고 오랜 세월 이 배송기때문에 고생하다가 집어버리게 되면 맥
이 풀려 다른 일도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엔 해탄로와 용광
로도 통채로 사와야 합니다.
이곳 제철소는 우리 나라 공업의 맏아들입니다. 집안에서 맏이가 제
구실을 해야 손아래동생들이 그 모범을 따르는것처럼 동무네가 제
구실을 해야 우리 나라 경제가 제발로 서고 우리 나라와 민족이 세상
에 가슴펴고 나설수 있습니다. 동무네가 지금 한걸음 물러서면 앞
으로 두걸음, 세걸음 물러서게 되고 온 나라가 열걸음, 스무걸음
물러서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자신의 힘과 지혜로 건국의 첫 자욱을 떼야 합니다.
우리는 제철소를 복구하는 과정에 사람들에게 자기의 힘과 지혜를 믿는
정신을 키워주고 현대과학과 기술로부터 유리되고 배척당하였던 로동자
들에게 과학과 기술을 배워주며 그들의 기능을 키워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민주조국의 미래를 떠메고나갈 우리 공업의 맏아들을 훌륭히
키워낼수 있습니다.
설사 1호해탄로조업이 늦어지고 용광로에서 쇠물뽑는 날이 좀 늦어지
더라도 배송기를 우리 힘으로 복구합시다. 그래야 불을 다루는 우리 조
국의 맏아들을 옳게 키울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것이 건국의 무쇠기
둥을 세우는것입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온 겨레와 민족이 가야 할 길을 가리켜보이시
듯 한손을 들어올리시였다.
《흑!》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억봉이가 참고참아오던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동생한테 형구실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기 한몸 제대로 건
사할수 없었던 그에게 영명하신 장군님께서는 온 나라의 떳떳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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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들이 될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려고 하시는것이였다.
지훈의 가슴도 뜨거웠다. 그는 지금까지 배송기는 보아왔고 콕스는 생
각하여왔지만 배송기를 돌려야 할 사람들과 불로 쇠를 다스려야 할 사
람들에 대해서는 보거나 생각지 못했었다. 하기에 어린시절부터 잘
알고있고 오늘은 한이웃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조차 그들의 지향을
리해하지 못하였으며 도와주지 못했었다.
이것을 깨닫게 되자 지훈은 눈앞에 번개불이 번쩍 일면서 요란한 천
둥소리가 온 가슴을 울리는가싶었다. 그 빛과 뢰성에 낡은 편견이 갈가
리 찢기고 불타버리면서 참신한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철을 리용해온 력사는 오랬다. 학자들은 인간이 이
미 6 000여년전부터 철을 리용해온 흔적을 땅속에서 찾아냈다. 철이 인
류문명의 개척자로 등장할수 있은것은 불때문이라고 할수 있었다. 하늘
의 철을 리용하던 인간이 (학자들은 하루에만도 이 지구상에 10만톤에
달하는 2 400만개의 운석이 떨어진다는것을 계산해냈고 태고적 인간들
이 그중에서 철운석을 리용했다는걸 밝혀냈다.) 땅우의 철을 리용하
는 두드림철의 시대에 들어설수 있은것은 광석속의 쇠를 녹여낼수 있는
불을 얻은때문이였다. 불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두드림
철의 시대로부터 용광로시대를 거쳐 오늘의 강철생산시대에 이를수
있었다. 이 각이한 철의 력사발전단계들은 철생산방식에서 서로 차이가
나도 인간이 철과 불의 노예로 되지 않으면 안되였다는 점에서 서로 같
았다. 불을 발견하고 불로 철을 다스려온 인간은 철과 불때문에 얼마나
고역을 당해야 했고 목숨마저 잃어야 했던가. 오늘에야 비로소 철보다도,
철을 다스리는 불보다도 로동하는 평범한 사람을 귀중히 여기는 새시대가
시작되고있었다. 조국해방을 안아오신 영명하신 장군님께서는
6 000여년의 오랜 철의 력사에서 처음으로 로동하는 평범한 사람들
을 철의 주인으로, 불의 주인으로 내세우시는것이였다. 지훈은 장군님의
마디마디 말씀이 장엄한 인간찬가처럼 귀전에 울리면서 위대하신 그이의
품속에서 지난날 억압받고 천대받던 사람들이 조국의 슬기로운 맏아들
로 태여나고 기술과 재능을 절대화하던 나머지 기술신비주의와 사대주
의에 빠져있던 자기마저 자신의 힘과 지혜를 믿을줄 아는 새로운 인간
으로 변모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왔다.
이야기를 마치신 장군님앞으로 부관이 절도있는 걸음걸이로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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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부관이 귀띔하는 말에 시계를 들여다보시였다.
시간이 없었다. 그이께서는 이제 오후 세시부터 진행되는 평양시 각급
학교 졸업생환영대회에 참가하시여야 했다. 장군님의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으려고 올해에 각급 학교를 마치는 온 나라 13만명 졸업생들의 대표
는 벌써 평양야외극장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시계를 들여다보시던
장군님께서는 부관과 수원들모두에게 말씀하시였다.
《로동자부락에 잠시라도 들렸다 갑시다. 점심시간을 좀 단축하면 로
동자주택을 몇세대 돌아볼수 있을것 같습니다.》
경애하는 수령님께서는 억봉이며 알뜰이, 달모까지 자동차에 태우
시고 로동자주택지구로 향하시였다. 달리는 승용차안에서 장군님께서는
지훈에게 이렇게 물으시였다.
《여기 송림에 박씨들이 많다지요?》
2호해탄로조업직전 3호해탄로우에서 그이께서 대동강을 바라보시
며 리석에게 물으시던 물음이였다.
《송림산뒤에 박촌이 지금도 있습니다.》
지훈은 장군님께서 무엇때문에 벌써 두번째로 이것을 물으시는지
몰라 어정쩡한 대답밖에 드리지 못하였다.
그이께서 이곳 박씨네들을 찾으시는 깊으신 뜻을 사람들이 알게 된것
은 이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현지지도는 열정의 화산을 터쳐놓은 분화구와도 같


았다.
그날부터 온 제철소는 건국의 열의로 쇠물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애국의 그 불길은 무쇠를 녹이는 콕스의 불담도 무색하게 할 지경이였
다. 한그람의 파철이라도 더 많이 끓여내고 용광로와 해탄로를 한시라
도 더 빨리 복구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낮이면 낮대로, 밤이면 밤대로 힘
과 지혜를 아끼지 않았다.
자기의 하루일을 끝낸 평로의 용해공들이 용광로와 해탄로를 밤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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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하러 나왔다. 제철소사람들만이 아니였다. 제철소에서 타오르기 시
작한 애국의 불길은 시와 도를 거쳐 온 나라에 번져가기 시작했다. 시
의 가두녀성들이 시원한 오이랭국을 풀어 이고 용광로를 찾아왔으며 석
봉이가 토지개혁을 도우러 갔던 봉산벌농민들은 돼지에 꽃굴레까지
씌워가지고 해탄로를 지원했다. 그런가하면 조국의 서북단 신의주 녀학
생들은 자기들이 성의껏 준비한 춤과 노래를 가지고 여름방학을 리용하
여 위문공연을 하러 왔다.
제철소의 로동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조국의 맏이로 내세워주시고
키워주시려는 장군님의 높으신 뜻과 크나큰 어버이사랑이 사람들마다의
가슴에 흘러들어 그것이 그대로 애국의 열의가 되고 충정의 열정이 되
던 감격의 날과 날이였다.
지훈은 2호배송기를 복구하기 위하여 공무과로 옮긴다는 련락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지훈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만 2년째나 화차에
실려 여기저기로 끌려다니던 2호배송기를 한창 부리우고있었다.
화차에서 배송기를 내리우는 작업은 억봉이가 직접 지휘하고있었다.
그는 모자를 한손에 든채 화차우에 올라가있었다. 화차우에 철판으로 만
들어덮었던 지붕이며 벽삼아 둘둘 둘러쳤던 가마니는 온데간데 없어졌
다. 지금 화차우에는 쇠바줄에 얽매인 배송기만 댕그랗게 놓여있고
그옆에 억봉이가 서있을뿐이다. 억봉이가 모자든 손을 들어올리자 천정
기중기가 쇠바줄을 감아올리기 시작했다. 지훈은 작업장에 들어서는 첫
순간 억봉이가 지휘하고있는 작업의 위험성을 한눈에 깨달았다. 지금 배
송기를 들어올리고있는 천정기중기는 들힘이 모자랐다. 억봉은 들힘
이 8톤밖에 안되는 천정기중기로 열톤이 훨씬 넘는 배송기를 통채로 들
려 하고있었다. 그리고 이 작업에 동원된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다루던
연공들이 아니였다.
(기중기에 어떤 보강대책을 취했는지?)
지훈은 불길한 예감이 번개치듯 했으나 이제는 어쩔수 없었다. 천정
기중기는 가쁜듯 가르릉거리며 배송기를 들어올린다. 화차를 무겁게 내
리누르던 배송기가 쇠바줄에 매달려 건둥 들리였다. 배송기가 화차우
에서 얼마간 떠올랐을 때 억봉은 천정기중기에 정지신호를 했다. 그와
동시에 머리우로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화차에 바줄을 매여놓고 기
다리던 사람들이 화차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이 화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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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고밀고하자 빈 화차는 레루우를 스르르 미끄러지였다. 모든 일이
예상외로 너무나 순조롭게 되는가싶은 순간이다.
화차꽁무니에 꽂혀있던 지레대가 화차에 실려가며 배송기를 슬쩍
건드렸다. 별로 크지 않은 힘이였으나 그것이 빚어낸 후과는 컸다.
충격받은 방향으로 천정기중기가 조금만 움직였어도 위험은 순간에
바로잡혔을것이였다. 배송기밑에서 화차가 빠져나가고 공중에 들린
배송기를 보자 기중기운전공은 불안감을 느꼈던지 당황하여 천정기중기
를 충격받은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 그 바람에 쇠바줄에 매달린 배송
기는 와뜰 놀랐다.
《야― 뜨라!》
억봉이가 천정기중기를 향하여 벼락치듯 고함을 질렀다. 고함소리
에 놀랐는지, 경험이 어려선지 기중기운전공은 배송기를 떠올린다는
것이 쇠바줄을 풀어놓았다. 위험은 시시각각으로 증대되고 배송기의 진
동에 천정기중기까지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뜨라는데!》
억봉은 목청이 터져라 고래고래 소리쳤으나 기중기운전공은 귀가
먹었는지 막무가내였다. 커가는 위험을 억봉이보다도 먼저 깨달은것
은 기중기운전공자신이였다. 천정기중기까지 떨기 시작하자 운전공은 시
동을 중지했다. 이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배송기는 마치도 거
대한 흔들이처럼 그네타듯 이리저리 흔들리였다. 끊어질듯 팽팽하게 헤
워진 쇠바줄은 뿌직뿌직 소리를 내며 기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지훈은 운전을 중지하고 천정기중기 창밖으로 얼굴을 내민 빨간 머리
수건의 운전공을 보고서야 그가 계향임을 알았다. 공포로 하여 그의 얼
굴은 석고로 빚어놓은 사람처럼 하얘졌다.
《세우지 말라!》
억봉이가 다시 고함치는 바람에 계향은 놀란듯 시동을 걸었다. 겁에
질리고 당황한 계향은 무작정 배송기를 땅우에 내려놓으려 했다. 그럴
수록 위험은 커갈뿐이였다. 쇠바줄이 끊어져 배송기를 땅우에 둘러메치
든가 아니면 천정기중기까지 허리부러질수 있는 위기일발의 직전이였다.
이 위기를 바로잡을수 있는 사람은 오직 계향이 한사람뿐이였으나 그는
경험이 너무나 어리였고 담이 작았다. 기능공양성소를 졸업하고 기중기
를 타기 시작한지 몇달밖에 안되는 그, 청개구리 한마리를 보고서도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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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해 온 작업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던 처녀, 마음은 깨끗하고 당돌
도 하지만 지금의 이 위기를 바로잡기엔 너무나 겁많고 마음약한 계향
이였다.
지훈은 쇠바줄에 매달려 흔들거리던 배송기가 면바로 자기 정수리에
떨어지는가싶은 환각에 두눈에 퍼런 불이 번쩍했다. 땅에 멨다꽂혀진 배
송기와 함께 천정기중기가 허리 끊어져나가고 지붕마저 와르르 무너지
는가싶었다. 천정기중기운전공을 왜 좀더 능숙하고 경험있는 사람으
로 선택하지 못했을가. 배송기를 통채로 들어올리지 않고 분해하도록 왜
저지시키지 못했는가. 아니, 배송기를 부리우는 작업에 무거운 물체
들을 다루어본 경험있는 연공들만 동원시켰어도 지금같은 위험은 미리
막아낼수 있었다. 그리고 증기기중기차만 동원시켰어도 지금같이 들
힘이 모자라는 천정기중기로 배송기를 들려고 모험하지 않았을것이다.
자기가 제때에 대책을 취하여주었더라면 지금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
을것이다. 지훈은 자기도 모르게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이때였다.
《계향이!》
맹수가 울부짖듯 억봉이가 천정기중기우의 계향을 소리쳐부르며 흔들
리는 배송기밑으로 뛰여들어가고있었다. 억봉은 자기 몸이 그대로 받침
대가 되여 배송기를 떠받치려는듯 배송기밑으로 뛰여들었다.
《악!》
놀란 울부짖음은 천정기중기우에서도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땅으
로 내려오던 배송기가 허공에 멎어섰다. 억봉의 머리우에서는 열톤이 훨
씬 넘는 무거운 쇠덩이가 위태롭게 흔들리였다. 언제 떨어질지 알수 없
는 위태로운 쇠덩이를 머리에 인채 억봉은 계향이에게 힘과 용기를 주
듯 소리쳤다.
《떠올리라!》
억봉의 고함소리는 그 무슨 돌격의 함성처럼 작업장에 찌렁찌렁 울려
퍼지였다. 다음순간 지훈은 자기자신도 모르게 배송기밑으로 뛰여갔다.
지훈은 억봉이와 둘이서 배송기를 몸으로 받치듯 그와 어깨나란히 배송
기를 밀기 시작했다. 어느덧 위험은 가셔지고 배송기는 수리장소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무과에 새로 꾸려놓은 수리장소에 배송기를 무사히 내려놓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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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였다. 모든 위험이 사라진 이 시각 머리우의 천정기중기우에서 녀자
의 다급한 웨침소리가 울리였다.
《억봉아!》
천정기중기에서 억봉을 소리쳐부르는 녀인은 알뜰이였다. 천정기중기
에는 운전공 계향이외에 또 한사람 알뜰이가 타고있었다.
《계향이가… 계향이가…》
알뜰은 천정기중기 창밖으로 얼굴을 내민채 구원을 청하듯 땅우의 사
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천정기중기 들갈구리에서 쇠바줄을 벗기던 억봉
은 얼굴에서 비오듯 흐르는 땀을 씻을 사이도 없이 천정기중기에 오르
는 철계단으로 달려갔다. 철계단까지 쉽게 갔어도 천정기중기에 이르
자면 위험했다. 천정기중기는 철계단에서 퍼그나 떨어져있었다. 철계단
에서 기중기로 가는 길은 천정기중기레루밖에 없었다. 천정기중기레
루는 까마득한 높이에 뻗어있고 주위로는 고압의 전류가 흘렀다. 억봉
은 바줄타기재주를 부리는 교예사처럼 주저없이 천정기중기레루로 올라
섰다. 땅우의 사람들은 억봉의 모험에 또다시 가슴을 죄여야 했다.
억봉은 작업장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올려다본다는걸 모르지 않았
으나 계향이때문에 불안에 빠진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억봉은 천정기중기레루를 타고 한발자국한발자국 기중기로 접근해
갔다. 이윽고 기중기에 이른 억봉은 땅으로 내려오는 철계단까지 천정
기중기를 운전해왔다. 잠시후 억봉은 의식잃고 쓰러진 계향을 가슴에 안
은채 조심스럽게 철계단을 내려왔다. 지나친 흥분과 긴장으로 계향은 배
송기 부리우는 작업이 끝나는 순간 정신을 잃은것이다. 배송기 부리우
는 작업을 함께 하던 사람들과 공무과에서 일하던 기대운전공들이 계향
을 안고오는 억봉이앞으로 모여왔다. 여러 사람들이 계향을 함께 부축
하려 하였으나 억봉은 계향을 품에 안을 권리가 오직 자기 혼자에게만
있기라도 한것처럼 누구에게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비키시오.》
태주먹이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막아서며 억봉에게 길을 틔워주
었다. 억봉은 계향을 두손으로 받쳐 품에 보듬고 창백한 그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좌우에 늘어선 사람들속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의 얼굴은 흥분과 긴장으로 한껏 상기되여있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배송기밑으로 뛰여들던 그 순간에도 억봉은 지금처럼 가슴을 조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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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오직 한가지 생각에 위험을 느끼지 못했
으며 한껏 긴장은 되였으나 지금처럼 가슴을 울렁거리지 않았다. 억봉
은 작업장 한쪽 조용하고 선선한 곳에 가서야 자기의 무릎으로 그의 머
리를 받친채 가만히 내려놓았다.
《계향아! 계향아!》
억봉이 옆에서는 알뜰이가 계향의 한쪽손을 꼭 잡아쥔채 잠을 깨우듯
그를 불렀다. 언니만 옆에 있어주면 무엇을 하든지 자기는 겁나지 않겠
다는 계향의 말에 주저없이 그를 따라 천정기중기에 올라갔던 알뜰이다.
알뜰은 배송기를 들어올리던 긴장한 그 순간 계향이옆에서 그한테 속삭
이던 말이 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는지 아직도 그 말을 속삭였다.
《기운을 내라구― 기운을 내―》
정신잃은 계향에게 할 말이 아니였으나 사람들은 누구도 알뜰을 탓하
지 않았다.
흰종이처럼 하얘졌던 계향의 얼굴에 한점 붉은 기운이 살아오르는가
싶었다. 자는듯 감고있던 처녀의 속눈섭이 바르르 떨리더니 잠시후
계향은 눈을 떴다. 그의 두눈은 자기를 지켜선 억봉의 얼굴에 못박혀 움
직일줄 몰랐다.
《계향아!》
알뜰의 속삭임에 계향은 그한테로 눈길을 돌렸다.
《언니!》
계향은 알뜰을 알아보고 그한테 손을 내밀었다. 계향은 지금 무릎으
로 자기 머리를 받쳐주고있는 사람이 억봉이라는것을 알아보고 부끄러
워 어쩔줄 몰라했다.
이때에야 지훈은 억봉이가 무엇때문에 기능 어리고 겁많은 계향이한
테 배송기를 들어달라고 하였는지 리해되는가싶었다. 억센 이 사나이는
자기가 사랑하는 처녀 역시 누구보다 억세여지기를 바랐을것이다. 불을
다루는 그네들의 사랑은 불처럼 뜨거웠다.
지훈은 억봉이며 알뜰이, 계향이네들을 등지고 돌아섰다.
지훈은 웬일인지 별로 허전해지는 자신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지금에 와서 지훈은 인간의 삶에 재능이나 기술보다 더 귀중하고 위
력한 그 무엇이 있음을 억봉을 통해 새삼스레 보는가싶었다. 누구나 값
없이 살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의 삶이 빛난것이 아니였다.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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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삶을 빛내자면 재능이 있어야 했고 기술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
식과 기술, 재능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했다.
지훈은 뒤짐을 진채 기계들사이에 난 통로를 따라 공무과 작업장을 빠
져나왔다. 서쪽하늘에는 저녁노을이 불탔다. 불타는 그 노을을 배경
으로 해탄로가 저 멀리 바라보였다. 해탄로를 바라보는 순간 지훈은 막
혔던 물목이 터지듯 지금까지 안타깝게 한자리에 맴돌던 생각이 나래를
폈다.
인간은 지식과 기술, 재능에 앞서 우선 참되고 억센 넋을 가져야 했
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억봉이네들에게 키워주시려는 자신의 힘과 지혜
를 믿을줄 아는 억센 넋이 있어야 기술도 재능도 빛날수 있었다. 가장
천대받고 억압받던 억봉이네들이 공장의 주인이 되고 나라의 맏이가 될
수 있은것은 장군님께서 심어주시는 그 억센 넋때문이였다. 이 억센 넋
에 지식과 기술, 재능이 안받침될 때 그 인간은 얼마나 위력하고 슬기
로와질것인가.
지훈은 이 순간에 와서야 영명하신 장군님께서 나라의 맏아들
에게 키워주시려는 그런 넋이 자기자신에게 없음을 깨달았다. 계향을 품
에 안고있는 억봉을 보며 지훈이 느끼는 허전한 생각은 이 깨달음때문
만이 아니였다. 자기에게는 자주의 억센 넋을 기름지게 하여줄 참된 사
랑도 없었다.
지훈은 뒤짐을 진채 제철소구내를 천천히 걸었다.

나날이 아름다와가는 제철소의 밤이였다. 이른봄 양지바른 둔덕에 혼


자 피여나는 진달래처럼 출강때 평로우에만 어리던 밤노을이 요즘은 한
여름에 온갖 꽃이 무성하듯 용광로주위에도 해탄로우에도 어리였다. 그
중에서도 해탄로우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볼만 했다. 상승관굴뚝에서 삼
단같이 솟아오르는 그 불길은 전설속의 거인이 들어올린 그 무슨 거대
한 홰불같았다. 이쪽 상승관에서 솟아오르던 불길이 콕스를 구워내려고
자맥질하듯 탄화실속으로 쑥 사라지면 다른 상승관에서 새로운 불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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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길이 솟아오르며 어둠을 불살랐다. 스물다섯개나 되는 2호해탄로우의
상승관굴뚝들은 마치 봉화행군에 참가하기 위하여 로체우에 어깨나란히
정렬하기라도 한것처럼 1렬로 늘어서서 잠시도 쉬지 않고 교대로 낮이
나 밤이나 기세를 돋구었다. 이 불길로 하여 깊은 밤에도 해탄로주위는
대낮처럼 밝아지고 그우 하늘까지 불그레 물드는것이였다.
이밤 철의 지구에 피여난 밤노을은 흩날리는 눈발로 하여 여느때없이
아름다왔다. 먹장같은 구름이 낮게 드리우거나 자욱히 안개가 밀려들 때
면 더욱더 붉어지고 멀리까지 비쳐지는 제철소의 밤노을이다. 땅우에 내
려쌓인 눈은 노을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면서 밤노을을 더욱 선명하게 해
주었다. 흩날리는 배꽃같은 눈송이들은 밤노을의 아름다움에 자신마
저 불그레 물드는가싶기도 했다. 하늘과 땅, 그 어디나 불천지인 여기,
출선구마다에는 쇠물꽃이 축포처럼 솟아오르고 높은 철탑에서 용접불꽃
이 폭포처럼 쏟아져내린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강괴며 줄줄이 녹아흐르
는 백색에 가까운 쇠물, 그런가하면 모양도 각이하고 빛갈 또한 색색인
온갖 불길이 구내 여기저기서 춤을 추며 재간을 부린다. 쇠와 불의 재
주며 률동을 반주하듯 수백수천의 기계들이 온갖 고음과 저음, 온갖 박
자와 장단으로 목청을 돋군다.
밤노을을 바라보며 내리는 눈속을 네사람이 걷고있었다. 추운 날씨건
만 솜옷도 입지 않고 목에 목도리만 두른채 걷는 두 녀인은 알뜰이와 계
향이였고 그들보다 앞서걷는 두 남정은 억봉과 지훈이였다. 이들은
역에 나가 불의 어머니 진옥을 바래주고 돌아오는 길이였다.
진옥은 대학에 공부하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이 그렇게도 가고싶
어하던 대학이였다. 아들이 자라 아버지가 바라던 그 자리에 설 때까지
오랜 세월 기다릴수만은 없었다. 종합대학으로 떠나기에 앞서 진
옥은 제철소에 들리였다.
《돌도 채 되지 못한 아들을 떼여놓자니 제 마음도 좋지는 않아요. 하
지만 이렇게 하는것이 애아버지의 뜻과 잇닿은줄 알아요.》
역에서 진옥이 남긴 마지막말이였다. 진옥은 떠나갔으나 그가 남긴 말
은 사람들의 귀가에 남았다. 그 말마디속에는 사랑이란 무엇이며 어떠
해야 하는가 하는 크나큰 암시가 깃들어있는가싶었다.
네사람은 제각기 자기 생각에 잠긴채 묵묵히 걸었다.
알뜰의 팔을 끼고 걷던 계향이가 문득 걸음을 멈추며 서너걸음 앞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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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봉에게 소리쳤다.
《저, 억봉동무!》
계향의 챙챙한 목소리가 밤대기를 울리였다. 앞서걷던 억봉과 지훈이
모두 걸음을 멈추었다. 두사람이 서있는 곳까지 다가온 계향은 지금까
지 붙들고오던 알뜰의 팔을 놓고 앞서가라는듯 살며시 등을 떠밀었다.
《언니, 미안해요.》
꺼리끼지도 숨기지도 않으며 계향이 억봉이와 조용히 둘이 거닐 뜻을
표시하자 지훈은 빙그레 웃으며 먼저 앞으로 발걸음을 내짚었고 알뜰이
도 할수없이 그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이제 얼마 있으면 억봉과 계향
은 결혼한다. 요사이 그들의 사랑은 얼음산을 미끄러져내리는 썰매처럼
결혼이라는 련애의 종착역을 향해 걷잡을 사이없이 너무도 빨리 돌진했
다. 그들은 사랑의 고백과 첫 포옹이라는 숨가쁜 순간을 따로 갖지 않
았다. 무릇 청춘남녀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처음으로 잡아보고
난생처음 이성을 포옹하면서 느끼는 련애의 숨가쁜 최절정을 억봉은 천
정기중기에서 정신잃은 계향을 품에 안아내리던 때 체험하였다. 그리고
사랑은 눈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것이여서 계향은 억봉의 품에 안
겨 의식을 회복하던 때 자기를 굽어보는 억봉의 눈길에서 가장 열렬한
사랑의 고백을 느끼고도 남았었다. 2호배송기는 억봉의 마음에서 계향
의 마음에로, 계향의 마음에서 억봉의 마음에로 가장 빨리 이르게 한 지
름길이 되여주었고 배송기복구의 나날들은 참사랑의 나루배를 띄우는 노
을비낀 호수의 금물결이 되였었다.
억봉은 계향이와 단둘이 남게 되자 지훈이와 누이가 있는데서 왜 그
렇게 남을 망신시키느냐 하는 투로 물었다.
《왜 갑자기 그래? 망측스럽게…》
《동무하고 같이 걷고싶어서요.》
《내 원참…》
억봉은 어처구니없어하며 멈추었던 발걸음을 앞으로 내짚었다. 계
향은 지훈이한테로 돌아가려는 억봉의 팔소매를 서둘러 붙들었다.
《참, 동무두… 누가 뭐 동무 보고싶어 찾은줄 알아요? 그렇게 눈치
두 없다구야. 저 좀 봐요.》
계향은 하얀 입김이 억봉의 얼굴에 끼얹혀질 정도로 입을 그의 귀가
에 가까이 가져다대고 속삭이며 앞선채 어깨나란히 걷기 시작한 지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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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을 눈짓했다. 억봉은 그제야 계향의 깜찍스런 속내를 깨달았다. 역
전에서 비치던 불빛도 퍼그나 멀어지고 주위에는 내려덮인 눈에서 비치
는 반사광뿐이여서 어둑시그레하였으나 억봉은 자기의 팔을 붙든 계향
의 손이 빨갛게 얼었음을 알아보았다. 억봉은 얼른 자기의 장갑을 벗어
들고 그의 언손으로 가져갔다.
《아이, 망측해.》
계향은 억봉이가 자기 손을 잡는다고 생각했는지 가볍게 물리쳤다.
《이 장갑을 끼라는데…》
《싫어요.》
억봉은 다짜고짜로 계향의 팔을 붙잡고 그의 손에 장갑을 끼우려
들었다.
《누가 보면 어쩔라구.》
《어두운데 보긴 누가 봐.》
어두운 길에 두사람만 남게 되자 여러 사람앞에서 당돌하던 계향은 오
히려 부끄럼을 더 탔다. 계향은 토달거리면서도 억봉의 손아귀에서
자기 손목을 뽑지는 않았다. 억봉은 그의 손에 장갑 한짝을 기어이 끼
워주고야말았다.
《그럼 서로 한짝씩만 끼자요.》
계향이가 마지못해 응하듯 이렇게 말하자 억봉이도 씽긋 웃으며 머리
를 끄덕이였다. 두사람은 각각 장갑을 한짝씩 낀채 걷기 시작했다.
눈은 쉼없이 쏟아져내리였다. 내려쌓인 눈은 벌써 신발등을 묻고
남았다. 역전에서 거리쪽으로 향하는 길은 외통길이여서 두사람은 지훈
과 알뜰에게 조용한 기회를 주려고 오던 길을 되돌아 반대쪽길을 택했
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길에는 발자국도 나지 않았으나 둘이서 함께
걷기엔 오히려 좋았다.
갑자기 계향이가 까르르 웃었다.
《왜 웃소?》
《동문 정말 괴짜예요.》
《내가?》
《그럼요. 언젠가 동문 우리 오빠 새 바지를 온통 못쓰게 만들어주었
지요?》
《언제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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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 언제예요? 옷에 묻은 기름은 비누칠을 해서 그냥 말리워야 한
다구…》
《오… 동무가 그걸 어떻게 아오?》
《뻥뻥 구멍난 그 바지를 제가 기웠댔으니까요.》
《그래?》
억봉은 우학을 붙들지 못한게 새삼스레 후회됐다. 억봉은 그때 계향
이더러 오빠따라 고향에 가겠으면 가라고 벼락약혼을 파혼하던 생각이
나면서 그때 계향이가 오빠를 따라 정말 고향으로 돌아갔으면 어쩔번 했
는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다 섬찍했다. 억봉은 자기도 모르게 계향의 손
을 힘주어 꼭 잡았다.
《우리가 결혼한다는걸 알리기라도 해야겠는데…》
요즘에 와서는 북남간의 서신거래마저 단절되였다. 억봉이와 계향
이가 다시 결합되였다는것을 안다면 우학은 얼마나 기뻐하랴.
《우리 오빠넨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계향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한숨속에는 오빠에
대한 단순한 걱정만이 아니라 언젠가 지배인서기에서 철직되였을 때 고
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던 지난날의 자신에 대한 뼈저린 후회도 깃들어
있었다. 계향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뜨거웠다. 억봉이가 맹
꽁이라면서 먹여준 머리다야찡때문에 계향은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고 할수 있었다.
《이제 그리운 혈육들과 일가친척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여 행복하
게 살날은 올거요. 그래서 38도선을 없애고 통일정부를 세우자는게 아
니요.》
억봉은 계향의 손을 잡아당겨 자기의 두손으로 꼭 감싸쥐였다. 계향
은 억봉이가 하자는대로 자기 손을 내맡겨버린채 그의 어깨에 가벼이 머
리를 가져다대이였다. 지훈이와 알뜰이에게 조용한 기회를 준다는노
릇이 자기들의 볼 재미를 위해 기회를 마련한셈이였다. 어깨나란히
걸어가는 두사람의 앞날을 축복하듯 밤노을이 피여난 하늘에서는 소담
스러운 눈송이들이 쉼없이 내리고 또 내리였다.

억봉이와 계향이가 뒤로 떨어지는 바람에 지훈과 알뜰에게도 함께 걷


는 조용한 기회가 마련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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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앞거리는 벌써 텅텅 비였다. 방금전에 진옥이 타고 떠나간 기차는
막차여서 차를 타고 떠나는 사람도, 기차에서 내린 사람도 얼마 없었다.
눈내리는 텅빈 거리로 지훈과 알뜰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지금까지 은
근히 바라왔고 모처럼 차례진 기회였으나 두사람은 좀처럼 입을 열지 못
했다.
지훈은 위험하게 흔들리는 배송기밑으로 뛰여들어 계향에게 힘을
주던 억봉의 모습을 보게 되고 아름답게 피여나는 두사람의 사랑을 알
게 되면서부터 느닷없이 이런 질문이 떠올랐었다.
나는 다시 새가정을 이룰수 없단 말인가? 지금처럼 늙은 어머니한테
네 자식을 그냥 맡길수야 없지 않는가?
한번 떠오른 질문은 좀해 사라질줄 모르며 지훈을 괴롭히였다. 안해
가 죽은지도 만 3년, 서른고개를 겨우 넘어가지고 평생 홀아비로 살수
는 없었다. 제철소에 새 지배인이 임명되여오고 제철소복구도 급한
고비를 넘어서서 걸머졌던 부담이 한결 덜리게 된 이후부터 지훈은 웬
일인지 가정생활에서의 불편이 점점 더 참을수 없어지면서 문득문득 안
해의 따뜻한 손길이 그리워지는것이였다.
길거리는 조용했다. 숫눈길이나 다름없어서 신발밑에 눈밟히는 소
리마저 별로 없었다.
《요즘 생활이 어떻습니까?》
지훈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재미나요.》
《자주 페를 끼치면서 한번도 신세는 갚지 못했군요. 하나도 도와드
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말씀만 들어도 고마와요. 뭐 별로 도움을 받아야 할만 한게 없어
요.》
기사장과 현장로동자의 대화로선 나무랄데 없었다. 나란히 함께 사는
이웃사이의 인사로서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그럴수록 지훈은 좀더
살틀하고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 갈망에 어색스러움을 느끼
였다.
《토목부로 적을 옮기게 했을 때 저를 무척 욕했겠지요?》
《서분했어요. 하지만 어떻게 하겠나요, 상급의 지시였는걸…》
지훈은 알뜰의 말뜻을 종잡기 어려웠다. 부드러운 말속에 야유섞인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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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 깃든것 같기도 했고 상급에서 하라는대로 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
때의 딱했던 립장에 대한 동정과 도량넓은 리해가 스며있는것 같기도 했
다. 공식적인 몇마디 말밖에 주고받지 못했건만 벌써 주택지구가 가까
왔다. 불빛환한 주택지구로 향하는 길목에 이르렀을 때 지훈은 걸음을
멈추며 용기를 내여 물었다.
《좀더 걷지 않겠습니까?》
알뜰은 잠시 무엇인가 주저하는가싶더니 지훈을 따라 주택지구를
등지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불빛밝은 주택지구가 점점 멀어지고
인적드문 12포천 동뚝길에 접어들었을 때 지훈은 첫사랑을 고백하던 순
박한 그 시절처럼 가슴이 쿵쿵 높뛰여왔다. 지훈은 이곳에서 불덩이처
럼 뜨겁게 달아오른 손으로 알뜰의 손목을 잡아쥐였었고 첫사랑의 달콤
한 속삭임을 나누었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면서도 헤여지지 않으면 안
되던 괴로움을 이곳에서 나누었었다.
동뚝길은 눈과 어둠속에 묻혀있었으나 지훈은 이 동뚝길에 묻혔던 순
결한 사랑의 파편쪼각들이 언땅을 헤집고 솟아나 본래의 자기 모습을 그
대로 그리는가싶었다.
말 한마디 없었으나 두사람은 12포천 동뚝길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서
로서로의 괴로움과 지난날의 쓰라린 상처를 가셔내고싶은 갈망을 리해
하고 남았다.
생각에 잠겨 걷던 알뜰이 눈속에 묻힌 돌부리를 걷어차며 몸의 균형
을 잃었다. 지훈은 알뜰이와 함께 난생처음 이 동뚝길을 걷던 달밝은 그
밤처럼 얼른 알뜰의 팔을 부축했다. 알뜰이 몸자세를 바로잡은 이후에
도 지훈은 털장갑낀 손으로 알뜰의 팔을 잡아쥔채 놓지 못했다. 지훈은
알뜰이 자기 손을 뿌리칠가봐 겁내듯 손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구구하게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모든것을 새로 시작하지 않겠
습니까.》
《무엇을 말이나요?》
알뜰은 지훈을 빤히 쳐다보며 오돌차게 물었다. 알뜰은 지훈이 꽉 붙
들고있는 자기 팔을 그가 제스스로 놓아주기를 기다리듯 뿌리치지는 않
았으나 그의 목소리는 쌀쌀했다.
《저는 지금까지 알뜰동무의 가슴에 너무나 아픈 상처만을 입혀왔습
니다. 오랜 세월 내버려둔 그 상처들을 제 손으로 가셔내고싶습니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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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하던 철부지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싶습니다.》
《제 마음의 상처는 아픈대로 아물었어요. 이미 흘러가버린 처녀시절
은 되돌아오지 않을게구… 저는 돈때문에 저의 순정을 사랑하는 사람한
테 바칠수 없었고 저의 몸은 이미 더러워졌어요.》
《저 역시 돈때문에 마음에 없는 장가를 들었댔습니다.》
《저는 돈때문에 몸이나 버렸지만 지훈동문 마음까지 잃었댔어요. 그
러니…》
순종에 관습된줄만 알았던 알뜰은 이 순간 더없이 도도했다. 지훈은
달아오른 자기 온몸이 그대로 얼음구멍에 빠지는가싶었다. 그리고 지금
까지 체소한줄만 알아온 알뜰이 산악처럼 더없이 크게 생각됐다.
지훈은 지금까지 꽉 붙들고있던 알뜰의 손을 저도 모르게 놓았다. 그
러고나서 자기로서 톺아오를수 없는 아아한 절벽앞에 서있는 심정으로
알뜰이앞에 머리를 푹 숙이였다.
《우리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여주지 못하겠소?》
지훈의 목소리는 떨리였다.
《지금 저한텐 그럴 힘이 없어요.》
인정헤픈 그였건만 지금 그의 목소리는 매정스러웠다.
어두운 밤하늘에서는 방금전에 있었던 상스럽지 못한 일을 어둠속에
영영 묻어버리기라도 하려는것처럼 쉼없이 눈이 쏟아져내리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이날도 눈이 내렸다. 눈내리는 이날 지훈네는 이사
짐을 쌌다. 지훈네가 새집을 받은지는 오래였다. 지훈네가 살던 집은 이
제 곧 새살림을 꾸리게 된 억봉이한테 배정하기로 되여있었다. 억봉이
가 장가들기 전에 집수리를 하자면 하루빨리 집을 내주어야 했지만 지
훈은 그보다도 이웃에 살며 알뜰을 대하기 급해 이사를 서둘렀다.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 이사짐을 빨리 쌌다. 이사짐을 다 실은 자동차
는 벌써 발동을 걸어놓고 부르릉거리며 어서 사람들이 나와 오르기를 기
다렸다. 이웃에 나란히 세해나 함께 살던 알뜰이네 집 식구들과의 작별
은 간단치 않았다. 멀리 가는것도 아니건만 웬일인지 두집 사람들은 헤
여지기 서운해했다. 제일 그런것은 아이들이였다. 할머니의 손을 잡
고 아장아장 걸어나오던 막내딸 네옥이가 알뜰을 알아보고 방긋 웃더니
그한테로 달려갔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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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은 구을듯 자기한테로 달려오는 네옥이를 얼른 안았다. 돌도
되기 전에 엄마를 잃었던 네옥이는 알뜰이의 손에서 절반이상 컸다.
《엄만 우리랑 같이 안 가니?》
네옥이는 고사리같은 손으로 알뜰의 목을 살틀히 그러안으며 물었다.
알뜰이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세철이와 두옥이가 그한테 달려들었다.
《아주마이, 우리랑 새집에 가자.》
《정말 같이 가자마.》
두 어린것들은 알뜰의 치마폭을 량쪽에서 각각 붙잡고 제가끔 당
기였다.
《내 이제 인차 놀러 가지.》
알뜰은 한손으로 네옥을 품에 안고 한손으로는 두옥이와 세철이를 달
랬다.
차지훈의 어머니는 보다가 안됐는지 손자들을 불렀다.
《얘, 이리들 오너라. 너희들은 떠나면서두…》
벌써 철이 들기 시작한 두옥이와 세철이는 마지못해 물러섰으나 네옥
이는 그렇지 못했다.
할머니한테 한쪽손목을 잡히운채 주머니에 한손을 지르고 서있던
세철이가 자기 동생 네옥이를 꾸짖었다.
《이 뻥짜야, 알뜰아주마인 우리 엄마 아니야.》
《아니야, 우리 엄마야. 그렇지, 잉?》
네옥은 누가 알뜰의 품에서 자기를 떼여낼가 꺼리듯 그의 목을 더욱
꼭 그러안았다.
《네옥아, 그러지 말구 이리 온.》
알뜰이곁에 다가온 지훈의 어머니가 손을 내밀었으나 네옥은 머리를
흔들었다.
《난 엄마하구 같이 갈래.》
알뜰은 서둘러 네옥을 눈우에 내려놓더니 집안으로 훌 뛰여들어갔다.
지훈은 못 볼것을 본것 같아 슬며시 외면하며 이사짐을 실은 자동차가
서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지훈은 좋은 새집으로 이사를 가건만 이상하
게도 그 무엇에 쫓기고 버림받는 심정이였다. 지훈은 이 순간에야 아직
도 알뜰을 잊지 못하는 자신을 괴롭게 깨달았다. 눈내리는 그밤
12포천기슭에서 남자의 자존심과 인격을 무시당한 생각을 하면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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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점이 떨어져나가도록 언뺨을 줘맞는것만큼 뻐근했으나 지훈은 이상하
게도 알뜰이가 밉고 괘씸한 생각보다 자신을 후회하며 자책하게 되는것
이였다.
억봉이와 계향은 이사를 도우려고 지훈네 식구들과 함께 자동차적재
함에 올랐으나 알뜰은 자동차가 떠나도록 종내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눈내리는 마당에서는 알뜰의 작은어머니와 주학섭의 마누라만 지훈네 식
구들을 손저어 바래주었다.
알뜰은 집안창가에 서있었다. 창가에서는 지훈네 식구들이 타고가
는 자동차를 빤히 내다볼수 있었으나 알뜰은 눈내리는 창밖을 등진채 움
직일줄 몰랐다. 그의 눈길은 집안에서도 지훈네가 가는 방향과 다른쪽
을 향해있었다. 그는 입속으로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고있었다.
《네옥아! 세철아! 두옥아!…》
아직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그가 입속으로 저 혼자 외우는 이 말을 들
을수 없었다.

1982. 2. 16.
―철의 도시 송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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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불을 다루는 사람들 제1부
(증보판)
저 자 백 현 우
편 집 김 강 휘
표지,삽화 박영갑, 최호철
편 성 한 금 주
교 정 김 연 옥
낸 곳 문 학 예 술 출 판 사
인 쇄 소 평양종합인쇄공장―2
인 쇄 주체100(2011)년 6월 10일
발 행 주체100(2011)년 6월 15일
ㄱ―16044 값 290원

c Korea Literature & Art Publishing House 2011


D P R Korea
ISBN 978―9946―22―3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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