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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강 1권
겨울의 강 1권
prologue
기우(奇遇)
침묵 속 안광 (1)
침묵 속 안광 (2)
prologue
“하아…….”
“…….”
탕, 탕!
“…….”
“씨발, 야! 거기 서! 저걸 쏴 죽일 수도 없고……!”
“아……!”
“살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아파요…….”
“…….”
“…….”
“짜잔!”
“왜 온 건데?”
“언제부터 그런 거 챙겼다고.”
“……바빠.”
“…….”
“……?”
“뭐야, 이게.”
“생일 선물.”
“…….”
“열어봐. 깜짝 놀랄걸.”
“씨발, 이게 무슨……!”
“도로 가져가.”
“…….”
“…….”
“이만 간다.”
“야!”
“…….”
“네, 아버지.”
“아버지.”
―애처럼 투정 부리는 거면 듣기 싫다. 주말에 시간 있으
면 얼굴 좀 비추러 오고. 이만 끊는다.
“…….”
“나와.”
“…….”
“나오라는 말 안 들려?”
“…….”
“…….”
“말은?”
“이름은 있고?”
“…….”
“대답 안 해?”
“…….”
남자는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니, 삶의 의욕
이 없어 보인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딱 파양당하기 좋은 성
향이었다. 이랬다간 가정집이고 뭐고 노예 장으로 끌려갈지
도 모르는데 말이다. 겨울은 꾹 다물린 입을 보다가 남자의
몸을 훑었다. 한겨울에 입은 듯 만 듯 한 실크 민소매에 얇은
반바지. 들개라더니 추위를 잘 타지 않는 건가. 숍에서 보송
보송하게 씻은 살결에는 그간의 고통이 드러났다. 군데군데
작은 흉터가 보였지만 제 알 바 아니었다.
“씨발…….”
***
“…….”
“주 팀장님 오셨어요?”
“네, 좋은 아침.”
“저… 주 팀장님.”
“네.”
겨울이 잘못 들은 건가 하고 되물었지만, 그는 눈치 없이
다 마신 종이컵을 꾸깃 구기며 손뼉을 쳤다.
“축하드립니다!”
“…….”
“그새 주 과장 왔다 갔어요?”
“아, 그게…….”
“공과 사는 좀 지키지?”
“그만하라고.”
“……어디까지 말했어?”
“어디까지 말했냐고.”
“걱정하지 마. 나도 생각 있는 놈이야.”
“…….”
“야!”
“……하.”
씨발, 깜짝이야.
“…….”
“……아.”
차르르륵.
“말할 마음은?”
“…….”
“…….”
“…….”
“난 네가 굶어 죽든 말든 신경 안 쓸 거니까.”
“…….”
“이름.”
“가람… 가람이에요.”
“…….”
“말할 줄 아네.”
“…….”
“나이는.”
“열… 아홉이에요.”
“……고맙습니다.”
“…….”
“대답.”
“……네…….”
***
‘그 새끼 어디 갔지.’
“…….”
“…….”
그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시선을 보내는 겨울은 심기가
굉장히 불편했다. 멍청한 수인. 억지로 일을 시키는 것도 아
니고 두 가지만 지키면 편히 놀고먹고 자게 해준다는데 그것
도 못 하는 건가.
“야.”
“…….”
“……야.”
“……네.”
“…….”
“그게…….”
“변명 듣고 싶어서 말한 거 아니야. 당장 자리 옮겨. 복도
더럽히지 말고.”
“…….”
“안 가고 뭐 해.”
“저기…….”
“…….”
“주, 주인님…….”
“주인? 누가 네 주인이야.”
“……리안.”
“…….”
“…….”
“야.”
“…….”
“리안……!”
“뭐?”
“…….”
“가람이에요…….”
“야, 안 닥쳐?”
“자, 잘못…….”
“……개 같은 새끼.”
***
“어, 안녕하세요!”
“산책이요.”
“……그러시구나.”
“네?”
“……네.”
“들개예요.”
“…….”
“꺼져, 좀.”
“어, 싫어.”
“우쭈쭈, 불쌍해라.”
“…….”
“…….”
“뭐 하는 거야. 그만해.”
“…….”
“…….”
“보내는 데 조건 없어?”
“뭐야, 진짜 보내게?”
“상관없어.”
“냉정한 주 팀장님.”
“들개야, 너 진짜 잘못 걸렸다.”
“…….”
“…….”
‘……욕실을 쓰긴 하는 건가.’
***
‘……괜찮으려나.’
오독오독…….
겨울은 넥타이를 매만지며 시선을 돌렸다. 가람은 어젯밤,
거의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저녁으로 준 사료를 지금
먹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꽤 불규칙했다.
“야, 이따 먹어.”
“…….”
“……알겠어요, 리안.”
“…….”
“네…….”
“……네.”
“맨발로 어딜 밟아.”
“…….”
발이 꽤 커 보여서 신던 운동화는 맞지 않을 것 같아 구석
에 처박아 놓은 볼품없는 슬리퍼를 꺼내 던졌다. 탁! 뒹군 슬
리퍼가 떨어지며 먼지를 풍겼다. 넣어두고 신지 않던 슬리퍼
라 새것이긴 해도 먼지가 많이 쌓인 상태였다.
“신고 나와.”
“……네, 리안.”
“야, 앞에 타.”
“이, 이거요……?”
“어, 당기라고.”
“어떻게…….”
“하…….”
겨울은 가람이 길게 당긴 안전벨트를 거칠게 빼앗아 반대
편에 철컥 꽂았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애인한테나 하는 짓
을 수인에게 하고 있는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 한심스러웠다.
겨울은 치밀어 오르는 자괴감을 억누르며 천천히 후진했다.
핸들을 돌릴 때마다 신기하단 듯 따라붙는 시선이 손가락에
진득하게 눌어붙었다. 이대로 운전했다가는 사고라도 날 것
같았다.
“네에…….”
“…….”
“너 씻었어?”
“네? 네…….”
“언제? 씻을 줄 알아?”
“네, 알아요… 밤에 씻었어요…….”
“…….”
“너 가서도 이런 식으로 굴면 그땐 내가 케어 못 해. 알아
서 한 번에 알아들어.”
“네, 리안…….”
“담당자님.”
“다행이네요.”
“예?”
***
“…….”
“아……!”
“죄, 죄송합니다…….”
“…….”
“휴게실이요?”
“12번, 나와!”
“…….”
“옷은…….”
“네.”
“…….”
“맞았냐.”
“…….”
“……미안해요, 리안.”
“네…….”
“리, 리안.”
“거기 가기 싫어요…….”
“…….”
“리안…….”
“…….”
“하…….”
“…….”
“발라.”
“……네?”
차르르륵.
“소, 손이 안 닿아서요…….”
“리, 리안.”
“……아파요.”
“네… 리안.”
***
“어머니… 있어요?”
“어머, 도련님!”
“괜찮기는!”
“……에휴.”
“크읏…….”
“…….”
에이든도 감기에 걸린 걸까. 겨울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와
중에 에이든이 걱정되었다. 새어머니가 무작정 데려온 그는
남들 앞에서 귀염받는 것 같아도 집 안에서는 찬밥 신세였
다. 주기적으로 병원에 간다지만 당장 그가 아프다고 해서
신경 쓸 자는 없을 것이다. 겨울은 왠지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해 계단 손잡이를 두드리며 그의 이목을 끌었다.
“에이든.”
“…….”
“에이든, 어디 아파?”
“에, 에이든…….”
“크으…….”
“…….”
“아주머니.”
“……아.”
“에이든?”
“에이든,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크르륵…….”
“읏……. 에이든!”
“…….”
“놓으라니까!”
“……아윽!”
***
“하…….”
겨울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신경 쓸 것이 너무나도 많
았다. 최근 들어 업무량이 늘었는데 수인까지 돌보려니 정신
적으로 피곤했다. 겨울은 책상 앞에 앉아 지끈거리는 관자놀
이를 문질렀다. 차라리 멋대로 집에 쳐들어온 주도훈과 말싸
움하는 쪽이 더 편할 듯했다. 한바탕 감정을 털어내면 한동
안은 후련했으니까.
“리안!”
“……발라주세요.”
“…….”
“아파요, 리안.”
“그래서?”
[주도훈]
“뭐 하냐, 지금?”
―차 좀 태워주라.
―걸어왔지.
“택시 타고 가.”
―그러지 말고 같이 출근하자. 너 보고 싶어서 걸어온 사
람한테 너무 매정하다.
“…….”
“내가 운전할까?”
“술 마셨다며.”
“미안해서 그러지.”
“……됐어.”
“…….”
“그만해. 운전하잖아.”
“…….”
“주겨울.”
“저것들한테까지 착한 척할 필요 없어.”
“그런 적 없어.”
“…….”
“야, 안 닥쳐?”
겨울이 빨간 신호에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언성을 높였다.
아슬아슬하다 싶더니 주도훈은 결국 선을 넘었다. 내부 공기
가 더욱 텁텁해졌다. 겨울은 히터를 끄고 창문을 내렸다. 좁
은 틈 사이로 침범한 칼바람이 분노로 달아오른 열을 재빠르
게 식혔다.
“너는 그게 문제야.”
“또 이상한 소리 할 거면…….”
“정이 너무 많아.”
***
“……싫어요.”
“리안.”
“……이거 안 놔?”
“안 가겠다고 해서요.”
“네.”
담당자는 가람을 향해 “어이!” 하고 호통쳤다. 작업장이 쩌
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였다. 작업 준비를 하던
수인들도 남자의 불같은 음성에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
고 눈치를 보았다.
“…….”
“……네.”
―바로 받네?
“뭔데.”
“끊는다.”
“싫어.”
“왜 못 가?”
“……내가 부탁했냐?”
“…….”
―안 들어주면 일 년간 출근 메이트.
“……자리는 끝까지 안 지킬 거야.”
***
띠링!
“…….”
***
끼아아악!
퇴근하고 내려온 생산부에 발을 들이자마자 들린 건 찢어
지는 비명이었다. 흠칫 놀란 겨울은 자리에 멀뚱히 서서 상
황을 관찰했다. 간간이 듣던 비명이지만 오늘은 담당자가 꽤
화난 눈치였다. 매번 덤덤해 보이던 그가 분노를 억누른 목
소리로 말했다.
“12번 비켜.”
“제발 그만……!”
“이게 진짜!”
“네.”
“괜찮으세요?”
“예? 아, 예.”
“따라와.”
“…….”
“……꼴불견.”
“…….”
“……네.”
“치료해, 네가 알아서.”
“…….”
“…….”
“어…….”
“…….”
똑, 똑.
“아, 씹……!”
“……리안.”
“리안……?”
“……배고파요.”
“뭐?”
“배… 배고파요.”
“…….”
“비켜.”
“리안……!”
“알았으니까… 비키라고.”
“네…….”
“리안은 안 먹어요……?”
“나더러 그걸 먹으라고?”
“……잘 먹을게요.”
오랜만에 밥을 보고 신이 난 놈이 예의 차리겠다고 나불거
렸다가 한 소리 들었다. 한심하긴. 겨울은 입 안 가득 사료를
욱여넣고 아작아작 씹는 가람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생수 한 병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맛도 모르고
오로지 살기 위해서 먹는 모습을 보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오늘 저녁은 패스다.
***
―겨울이 형!
“누구…….”
―뭐야, 내 번호 없어?
“최여준?”
―겨울이 형, 듣고 있어?
“수인 동참……?”
“여준아.”
“…….”
“……뭐야. 왜 나와있어.”
“…….”
“나와. 갈 곳 있어.”
“……네.”
“들개입니다.”
“그걸로 주세요.”
“아뇨.”
“…….”
백화점에서 파는 명품 못지않게 보들보들하고 질이 좋았
다. 이것도 수인용이려나. 겨울은 얇은 실크 조각을 펼쳐 살
랑살랑 흔들었다. 아이보리 색감의 스카프는 네모난 테두리
를 따라 검은 띠를 둘렀고, 그 가운데에 가늘고 간결한 로고
가 박혀있었다. 안 그래도 옷깃 사이로 상처가 보일 것 같아
학대 의심을 받으면 어떡하나 염려스러웠는데 잘됐다. 가람
이 입을 정장에 매도 어울릴 것 같았다.
“네, 주세요.”
“잠시만요.”
“잘 맞네요.”
“네, 알겠습니다.”
“…….”
‘머리 좀 잘라야겠다.’
“사람들을 만날 거야.”
“……네?”
“…….”
“그러니까 평소보다 더 예의 있게 굴어.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뭐든 나한테 허락부터 받아.”
“…….”
“대답.”
“……네, 리안.”
이럴 때 보면 눈치가 빠른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겨울
은 비싼 옷가지가 선물인 줄 알고 그저 좋다고 정신 팔린 가
람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제발 사고만 치지 말기를. 겉으로
는 얌전해 보여도 수인끼리 모였을 때 돌변할 수도 있어 걱
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 눈이다…….”
“하…….”
“눈 와요, 리안…….”
“이제 가는 거야?”
“여긴 왜 올라왔어.”
“이게 어때서.”
“할 말 다 했으면 간다.”
“잠깐만, 잠깐만.”
“…….”
“장난하냐?”
“정색하면 주름 생긴다.”
“그만 좀 만져!”
“……?”
“간다.”
“야, 잠깐.”
“재밌게 놀다 와!”
“아, 네.”
“먼저 가세요.”
“…….”
“…….”
“…….”
“몇 층 가세요?”
“……아, 제가 누를게요.”
“뻔한 대답이네요.”
“…….”
“네.”
“팀장님은 진짜 수인 싫어하세요?”
“사원증이요. 워낙 유명 인사시니까.”
“아…….”
“…….”
이게 다 주도훈 때문이다. 겨울은 사원증을 그러쥐며 아,
하고 침음했다. 조용히 다니고 싶은 마음을 알 리 없는 주도
훈이 ‘내 동생이다’하고 워낙 시끌벅적하게 돌아다니니 이상
한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
“…….”
“받으세요!”
“…….”
‘이게 왜 또 나와있지?’
“뭐야?”
“리, 리안.”
“아, 도망가려고?”
“……아니에요!”
“…….”
“가라니까?”
“리안… 저는…….”
“미안해요…….”
“따라 들어와.”
“…….”
“미안해요, 리안.”
“소, 손… 닦으라고…….”
“이리 와.”
“…….”
“그건 내가 보고 판단해.”
“네.”
“네……?”
“대답은 항상 말로 해.”
“……네.”
“……네.”
“내 말 명심해.”
“알았어요, 리안.”
“네.”
“난 그 새끼들 말릴 생각이 없거든.”
“리안, 이거…….”
“뒤에 놔.”
“…….”
“가방 안에 상자 꺼내봐.”
“솜사탕…….”
“혀가 아려요.”
“…….”
“좀 조용히 하고 먹을 수 없어?”
“깨물어 먹어.”
“주겨울!”
“겨울이 형!”
“잘 지냈어?”
“뒤에.”
“어, 그래.”
“윽!”
“…….”
“이게 무슨…….”
“…….”
“응, 재밌겠네.”
***
“후우…….”
“형, 계속 혼자 술만 마실 거야?”
“아니… 난 관심 없어.”
“…….”
갔을까요?”
“에이든.”
“아악! 컥, 끄흐윽……!”
“……불법이잖아.”
“왜?”
“…….”
“…….”
“뭐 해? 받아.”
“…….”
휘익! 탁!
“…….”
“서프라이즈.”
“어……. 괜찮아.”
“우리 7년 만인가?”
“…….”
“…….”
“거봐.”
“…….”
“…….”
“……저리 가.”
“형.”
“응, 겨울아.”
“꺼져…….”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사람한테 까칠하게 굴고 싶진 않았
는데 기어이 욕을 하게 만든다. 어차피 7년이나 왕래 없이 지
낸 사이라 앞으로 더 못 본다 해도 괜찮았다. 해외 지사에 몸
담은 놈이라 앙심을 품고 달려들 일도 없을 테고.
“…….”
“…….”
“그럴 일 없어.”
“……정신 나갔어?”
“이만 가야겠다.”
“어? 주도훈!”
“정말?”
“태오야, 말.”
“어.”
“너도 술 마신 거 아니야?”
“…….”
“이건 뭔데 여태 멀쩡해?”
“리안… 괜찮아요……?”
“윽……!”
“잠깐…….”
“흐윽!”
“후으… 태오 형.”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
“……응?”
***
“깼어요, 리안?”
“……아.”
“술 좀 깼어?”
“……응.”
“너 업고 병원 다녀오느라 허리 나갈 뻔한 건 기억 나냐?”
“…….”
“어… 내 차 타고 가든지.”
“어……?”
“크흣!”
“…….”
“……내버려 둬.”
“리안.”
“으으음……. 뭐… 하는 거야.”
“……네.”
“후…….”
“……리안?”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에 겁먹은 가람이 슬쩍
물러났다. 그러자 겨울이 붕대 감은 손을 까딱까딱 흔들었
다. 다가오라는 의미였다.
“야.”
“……네.”
“너 어디서 태어났어?”
“……산이요.”
“산? 숍이 아니라?”
“네……. 봄이 흐르는 강이 있는 곳이에요. 이곳에서는 천
악산이라고 불려요.”
“천악산…….”
“아니, 그 전에.”
“…….”
“…….”
“숍에서 온 놈이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엄마?”
“뭐……?”
“…….”
“죽었다고 생각해.”
“가져오라고.”
“……네.”
“꿇고 앉아.”
“……읏.”
“흐읏!”
“…….”
“붙일 줄 모르면 상자 뒤에 설명서 읽어. 글씨는 읽을 수
있지?”
“…….”
쿵쿵!
“……잠도 없나.”
“…….”
“생색내려고 왔냐?”
“…….”
“수인 가족이라니?”
“보통 그런 일은 없지.”
“왜 묻는데?”
“얼른 가. 춥다.”
겨울이 그를 억지로 차 안에 밀어 넣자 기사가 타이밍 좋
게 문을 닫아주었다. 인사도 없이 돌아서려는데, 창문이 스
르르 내려가고 주도훈이 말을 걸었다.
“주겨울.”
“또 왜.”
“…….”
“들개는 너 같은데.”
“뭐?”
“리안, 나는 가야 해요.”
“네?”
알아듣지 못한 가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를 찾는데
계약서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는 표정이었다. 겨울은 픽 코웃
음 치며 서재에서 노트와 펜을 갖고 나왔다.
“도망가지 않아요!”
겨울은 노트 한 장을 북 찢어 그 위로 펜을 휘갈겼다. ‘계
약서’ 의미 없는 세 글자였다.
“……리안이요?”
“전 가진 게 없는데…….”
“여기 이름 적어.”
“같이 찾는 게 아니에요?”
“나도… 조건 있어요.”
“지금 가요.”
“뭐?”
“천악산이요. 대신 지금 가요.”
“…….”
***
“스카프 매.”
“네?”
“네…….”
“엇……!”
“확인만 하고 오는 거야.”
“네.”
“없으면 더 찾지 않고 곧장 떠날 거야. 그땐 정말 죽었다고
생각해.”
“……네.”
“잠깐만.”
“됐다.”
“…….”
“리안……?”
“가자.”
“리안도 가요?”
“…….”
“나는 리안 믿어요.”
“……난 너 못 믿어.”
“해 지기 전에… 돌아올게요.”
“…….”
똑똑.
“예?”
“저, 잠시만……!”
“하아…….”
“후우…….”
“…….”
“해 지기 전에… 돌아올게요.”
***
“읏…….”
눈도 미처 뜨지 못한 채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려는데, 보
들보들한 무언가가 얼굴을 마구 간지럽혔다. 고급 카펫 같기
도 하고 커다란 인형 같기도 했다. 겨울이 형체 모를 털 뭉치
를 쥐며 눈을 떴다. 검고 부드러우며 오묘한 회색빛이 섞인
털이 자신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허억……!”
“가람……?”
겨울이 상체를 홱 일으켰다. 가느다란 햇볕이 앙상한 가지
사이로 눈을 찔렀다. 겨울은 손차양을 만들고 가람의 음성이
들리는 곳을 찾았다.
“어디 있는 거야…….”
“리안.”
“너…….”
“리안, 몸은 괜찮…….”
“나랑 장난해?”
“……늦어서 미안해요.”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온단 놈은 밤이 꼬박 지나서야 얼굴을
비췄다. 아무리 시간 개념이 없어도 자연에 살았던 놈이면
산중에 있는 자신의 집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는 알 텐데, 이
제야 나타났다는 건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떠났다는 것이
다.
“…….”
“너… 귀가…….”
“아……!”
넋이 돌아온 가람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문질렀다. 개의
귀처럼 봉긋 솟았던 것이 마구 짓누르는 손길에 스르르 형체
를 감췄다. 마치 마술을 보는 것 같았다. 당황한 겨울은 귀가
사라진 머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네가 그 짐승이야?”
“네?”
“미친 새끼…….”
“……조용히 해.”
“어, 왜.”
―어, 왜?
“아……. 그랬지.”
“못 만난다니까. 몸이 좀 안 좋다.”
―병원이야?
―주겨울!
말이 길어지기 전에 먼저 끊었다. 안 그래도 연말이라 레
스토랑 예약 잡기 힘들 텐데. 기대한 약속을 취소한 건 미안
하지만, 그간 당했던 것으로 대신하면 그렇게 미안하지도 않
았다. 하긴, 오늘 같은 날에 미워하는 이복동생이랑 시간 보
내는 게 이상하지. 친구 많은 사람이니 어련히 알아서 할 듯
했다.
약이 어디 있더라……. 겨울은 불도 켜지 않고 부엌 찬장
을 뒤져 약을 찾았다. 그리고 뭉텅이로 꺼낸 약상자에서 몸
살 약을 골라냈다. 하루 꼬박 굶은 빈속에 넘기려던 겨울은
뭐라도 먹기 위해 불을 켜고 돌아섰다.
“…….”
“야.”
“으응……. 네…….”
“저거 네가 그랬어?”
“네, 리안!”
“네…….”
“뭐?”
“…….”
“만들었다고?”
“…….”
겨울은 가람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쏟은 딸기잼에 정
신이 팔려 못 본 식탁 저편에 엉성한 토스트가 보였다. 토스
트라고 부를 수도 없는 모양새였다. 굽지 않은 흰 식빵에 딸
기잼이 엉성하게 발려 쌓여있었다. 부엌에 갈 때마다 뚫어져
라 쳐다보더니 눈으로 배우는 거였나 보다. 토스터를 사용할
줄 몰라서 그렇지, 얼핏 방법과 순서는 맞았다.
“리안?”
“네…….”
겨울이 젖은 헝겊을 툭 던지자, 가람의 입술이 빼죽 튀어
나왔다. 그리고 사료를 주워 담은 봉지를 익숙하게 싱크대
맡에 놓고는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고용인인 줄
알겠다. 같이 지낸 몇 주 동안 겨울의 행동을 빠짐없이 관찰
한 결과였다.
“……야, 들개.”
“가람이에요.”
“찾았어?”
“네?”
“네 가족. 찾았냐고.”
“……네.”
“……꼴값 떨지 말라고.”
“리안, 많이 아파요?”
“…….”
“리안. 리안…….”
“리안, 이거 먹어요.”
“흐으…….”
“푸흐, 켁……!”
“으, 우, 음…….”
“……가람이에요.”
“으…….”
“…….”
“뭐? 무슨 소릴…….”
“나를 때릴 거예요?”
“씨발… 우욱……!”
“켁!”
“씨발, 비켜!”
“에이든이 누구예요?”
“알 거 없어. 그 이름 입 밖에 내지 마.”
“리안은 내 반려니까요.”
***
째깍째깍. 남들이 활기차게 새해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동
안 적적한 집에선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만 났다. 무기력
하게 신년을 맞이한 겨울은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침대에
서 일어났다. 아직 컨디션이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아 오늘까
진 집에서 푹 쉬고 싶었다.
“너무…….”
“……?”
“그건……!”
“싫어요.”
“…….”
“……죽이는 거면 몰라도.”
“흣……! 리안……?”
“두렵지 않아요.”
“…….”
“죽음은 익숙한 존재예요. 그런 건 인간들이나 두려워하는
거예요.”
“…….”
“그럼 왜 항상 나를 지켜줬어요?”
“내가… 언제…….”
“헛소리 집어치워.”
“당신은 달라요.”
“아니, 나도 같아. 그 새끼들처럼 역겹고 수인이라면 끔찍
해한다고. 그런데 너 따위가 뭘 안다고 나불거려!”
“…….”
“……비켜.”
기운 빠진 겨울이 가람의 어깨를 치고 자리를 벗어났다.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유령의 집처럼 어지러운 바닥을 청소
해야 하고, 엉망으로 잘려 보기 싫은 가람의 머리를 수습해
야 했다.
“…….”
“고객님.”
“리안… 어때요?”
“…….”
***
“병이요?”
“……처음 들어요.”
겨울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병이라니. 가람이 생
산반을 다닐 때만 해도 문제가 없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생
긴 모양이었다. 하긴, 환기도 안 될뿐더러 휴식 시간도 제대
로 갖추지 않은 곳에서 병이 안 나고 배기겠는가. 여태 멀쩡
하게 돌아간 게 더 이상했다.
“생산반을 관둬?”
“…….”
“…….”
“저런 것도 내 핏줄이라고…….”
“……네.”
“갈게요.”
“어.”
“나랑 자고 가.”
“싫어.”
“……그냥 몸살.”
“…….”
설마 도망을……. 겨울은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창문을 열
고 정원과 담벼락 근처를 살폈다.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씨발…….”
“…….”
“리안, 왔어요?”
“여기서 뭐 하는 거야.”
“…….”
“……책을 읽었다고?”
“네.”
“그 산속에서?”
“네, 아는 게 생존이랬어요.”
“아는 게 힘이겠지.”
“아…….”
“…….”
“닮고 싶어요.”
“…….”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나와.”
겨울은 그가 나오자 아주머니께서 수인이 먹는 줄도 모르
고 정성스레 싸준 반찬통을 내밀었다. 맛있는 냄새를 맡은
가람의 표정이 한 단계 누그러졌다. 겨울은 제자리로 돌아가
는 그를 불러 세우려다 이내 단념했다. 그가 반찬 통과 함께
안고 간 책은 자신이 아끼는 책이 맞지만, 하루쯤이야 모른
척한다고 큰일이 날 것 같진 않았다.
***
“딱 일주일만 더 쉬면 좋겠어요.”
“뭔데요?”
“사표 내.”
“에라이……. 열심히 하겠습니다.”
“눈치 좀 그만 줘. 불편해하잖아.”
“…….”
“……어.”
“병원 한 번 더 가. 흉 질라.”
“괜찮다니까……!”
“안녕하세요!”
“…….”
“……가끔 옵니다.”
“안전 장비 없습니까?”
“예?”
“무슨…….”
“그러게…….”
“너 닮았다.”
“뭐?”
“…….”
“……재수 없는 놈.”
“아… 네.”
“아, 그러세요.”
“학생이신가 봐요.”
간단히 마무리 짓고 들어가려 했는데, 남자는 말을 쉬지
않았다. 액면가는 학생이 아니었지만 차마 백수냐고 물을 순
없었기에 예의상 건넨 대답이었다. 다행히 남자도 자신이 동
안인 줄 착각한 모양이다. 그가 머쓱한 듯 웃었다.
“주겨울입니다.”
“…….”
겨울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집 안에 있어야 할 가람
이 또 나와있었다. 저번처럼 정원 안쪽 담벼락 근처에서 서
성거리던 가람이 겨울을 마주하고서 살포시 미소 지었다. 도
망가려고 튀어나온 수인치고는 아주 여유롭고 평온해 보였
다. 오히려 자신을 반기는 눈치였다.
“……그래요.”
“네, 들어가세요.”
“너…….”
“담아! 나 왔다!”
바스락.
“히익!”
“왜 나와있었어.”
“리안 기다렸어요.”
가람이 고개를 갸웃 꺾으며 대답했다. 왜 묻는지 모르겠다
는 얼굴이었다.
“묻잖아!”
“…….”
“……그걸 말했다고?”
“아니요.”
“말했으면 좋겠어요?”
“…….”
“대답해!”
“리안, 손이!”
“대답이나 하라고.”
“뭐?”
“…….”
“네!”
“…….”
“앞으로 네가 쓸 곳이야.”
“내 공간이요……?”
“그래.”
“와…….”
“그럴 것까지야.”
겨울이 이불을 만지작대는 그를 주시하며 비아냥댔다. 그
리고 안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엎어졌다. 차라리 잘됐다. 잠
금장치는 없지만 감금처럼 방에 넣어두면 사고라도 덜 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쿵! 무언가 천장
을 두드렸다. 안방은 가람의 방 아래로 곧장 이어진 구조라
그가 허튼짓을 하면 곧장 눈치채기 쉽다. 그런데 5분도 채 지
나지 않아 층간 소음을 일으키다니. 영 조심성이 없는 수인
이었다.
‘성가신 새끼…….’
쿵!
“뭐 하는 거야. 그걸 옮겼어?”
“리안, 어디 아파요?”
“…….”
“너야말로 어디 안 좋아?”
“…….”
“……감기인가.”
“거짓말하지 마.”
“약국이요……?”
“…….”
“감기인 것 같습니다.”
“…….”
“네, 그럴 거예요.”
“네, 죄송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저기요!”
“네.”
***
‘……별일 없겠지.’
“예?”
“네!”
“겨울 씨!”
“……안녕하세요.”
“아…….”
“…….”
“리안!”
“야……! 미쳤어?”
‘건방지게…….’
뒤늦게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낀 겨울이 민망한 듯 헛기침
을 뱉으며 집에 들어왔다. 외투를 벗으며 슬쩍 뒤를 돌아보
았다. 맨발로 뛰어내렸으면서 씻을 생각은 안 하고 제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놈이 거슬렸다.
“어디 가요?”
“같이 갈래요.”
“안 돼.”
“같이 가고 싶어요.”
“안 된다고 했어.”
“예? 아…….”
“……대문 열 줄 알아?”
“가람입니다.”
“히익……!”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