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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prologue

기우(奇遇)

Twilight of The City (1)

Twilight of The City (2)

침묵 속 안광 (1)

침묵 속 안광 (2)
prologue

무더운 여름, 장마로 더위가 한풀 꺾인 숲속은 아주 소란


스러웠다. 파릇한 잎사귀를 때리며 진동하는 백색 소음과 그
아래서 잔열 가신 흙을 밟는 남자들. 사냥꾼과 사냥감의 추
격전이 한창이었다.

“하아…….”

두꺼운 나무 기둥 뒤에 숨은 남자가 거친 숨을 고르며 청


각을 곤두세웠다. 몇 시간을 뛰었는지 모르겠다. 새하얀 발
은 무수한 잡초에 베여 피가 송골송골 맺혔고, 머리카락은
비에 푹 젖어 이마에 쩍 달라붙었다. 땀인지 빗방울인지 모
를 노릇이었다. 갑작스러운 추격전에 온몸에 열이 후끈 달아
올라 눈앞이 흐릿했다. 역시 산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뛰는
건 힘들었다.

“이, 씨발 새끼, 어디 갔어……. 아아악!”

반면에 진짜 인간인 사냥꾼은 지칠 줄을 몰랐다. 제 성질


을 못 이겨 괴상한 소리나 질러댔다. 저벅저벅, 분노에 찬 발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

남자는 가슴팍을 들썩이며 잽싸게 눈을 굴렸다. 어둠에서


황금빛 호박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능숙하게 도망칠 길
을 찾았다. 한가하게 숨이나 고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구
름에 가렸던 해마저 진 지 오래였고, 빗줄기는 가느다랗게
변해 조금만 움직여도 발소리를 들키기 일쑤였다. 남자가 다
시금 맨발을 떼려고 긴장할 때였다.

탕, 탕!

하늘 위로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도망치려던 남


자의 발이 주춤했다. 큰일 났다. 더 많은 인간이 모여드는 것
은 이제 시간문제다. 사냥꾼이 총으로 동료를 불렀다.

“어차피 잡힐 거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거야, 어?”

“…….”

“몸도 걸레짝일 텐데 그만하고 나오자. 나랑 가면 치료도


해주고 좋은 집, 좋은 주인도 만날 수 있는데 왜 겁을 먹어?
내가 소리 질러서 그래? 나도 이제 힘들다. 화 안 낼게. 자,
얼굴 보여주자. 너 자꾸 그러면 가격 떨어진다?”

화만 내던 사냥꾼은 애써 다정한 목소리로 남자를 회유했


다. 물론 그가 찾는 건 상처투성이로 도망 다니던 수인이겠
지만, 남자는 처음 겪는 인간과의 대화에 몸이 바짝 굳었다.
축축한 발가락이 공포심에 꿈틀거리며 흙을 긁어모았다.

더더욱 잡히면 안 되는 이유가 생겼다. 말로만 듣던 이야


기가 사실이었다. 잡히면 팔려 가는구나. 절대로 포악한 사
냥꾼에게 생포당할 순 없다. 여기까지 온 이상 죽더라도 숲
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생각과 달리 잔뜩 겁을 먹은 남자
는 사냥꾼이 가까이 다가온 것도 모른 채 하도 짓씹어 부르
튼 입술을 벌벌 떨었다.

“어……? 너… 그 수인 새끼가 아니네? 어쩐지 성인 몸집


같더라니. 꿩 대신 닭도 좋지.”

안 돼……. 안 돼. 남자가 넋이 나가 희미하게 혼잣말을 중


얼거리던 순간이었다. 반대편 나무 기둥 옆에 선 사냥꾼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소름 끼치도
록 끔찍한 미소였다.

큰일이다. 커다란 몸을 나무 뒤에 숨기는 건 턱도 없었다.


남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조금씩 물러나던 발을 빠
르게 굴렸다. 그러자 눈치챈 사냥꾼이 사납게 소리쳤다.

“씨발, 야! 거기 서! 저걸 쏴 죽일 수도 없고……!”

모습을 들켰다. 차라리 네발로 뛰는 게 나았으려나. 아니


야, 안 돼…….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인간이 내리는 가치가
매겨지기에 섣불리 변해서는 안 되었다. 남자는 엄마에게 항
상 듣던 충고를 떠올리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뛰고
또 뛰었다.

“아……!”

발바닥에 뾰족한 가시가 박혔다. 남자는 빠르게 뒤를 살피


고 수풀 사이에 쪼그려 앉았다. 다행히 사냥꾼은 여기까지
따라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방심해선 안 된다. 정신
없이 뛰다 보니 기척도 살피지 못하고 길을 엉망으로 들어서
그가 불러들인 동료들이 근처에 왔을 수도 있었다.

“살려… 살려주세요…….”

남자가 손톱으로 깊게 박힌 작은 가시를 빼는 것에 열중하


는데, 수풀 안에서 미성이 들려왔다. 남자는 설마 하며 파릇
파릇하고 단단하게 얽힌 가지와 잎사귀를 걷어냈다. 그러자
비를 쫄딱 맞은 소년이 나타났다.

“도와주세요……. 아파요…….”

대체 어디서부터 도망쳐 온 걸까. 이 산에서 보던 얼굴이


아니었다. 남자는 소년에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옷은 찢길
대로 찢기고, 무슨 병이 걸렸는지 털 달린 귀는 한쪽만 튀어
나온 채 애처로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
하고 무작정 도움을 청하는 모습이 너무나 가엾었다. 그 수
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본인보다 어렸다. 아주 꼬질꼬질하고
연약해 보였다.

“…….”

남자는 이 소년이 사냥꾼이 찾던 수인임을 단번에 알아차


렸다. 고작 발바닥에 가시가 박힌 자신에 비해 몰골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였다. 종아리는 무엇에 찢
긴 듯 상처가 벌어져 피가 철철 새어 나오고, 젖살이 채 빠지
지 않은 얼굴에는 생채기가 가득했으며 후들거리며 제 상의
를 쥐어 잡은 손가락에는 손톱이 군데군데 빠져있었다. 너덜
거리는 몸뚱이를 보자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아직 성인도 채 되지 않은 아이를 이 지경으로 만들
어 놓다니. 울분이 치밀었다.

소년을 업고 도망가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남자는 선택해


야 했다. 같은 처지의 불쌍한 수인을 버려두고 가느냐, 억지
로라도 그를 업고 동굴까지 돌아가느냐. 어렵고도 쉬운 문제
였다. 소년을 보며 순식간에 남자의 눈에 고인 눈물이 정답
을 말해주었다.

남자는 희미하게 들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서둘러 소년을


수풀에서 꺼내 업었다. 앙상한 팔다리가 몸에 감겼다. 축 늘
어진 상태인데도 깃털처럼 가벼웠다.

남자가 미처 가시를 빼지 못한 발을 엉거주춤 한 걸음 내


디디려 할 때였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몸이 한껏 예
민해졌다. 수분을 머금은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냉기가 솜털
을 바짝 세웠다.
“찾았다.”

아무런 소음 없이 다가온 사냥꾼과 그의 동료들이 남자와


소년을 둥글게 둘러싼 채 기다란 총구를 들이밀었다. 낄낄거
리는 웃음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남자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
다. 인간들이 항상 소름 끼친다고 조롱하던 수인의 눈은 비
교할 것이 못 되었다. 사냥꾼의 표독한 웃음은 한밤중에 눈
을 번뜩이며 돌아다니는 수인보다 비교할 수 없이 공포스러
웠다.
기우(奇遇)

막 퇴근하고 돌아온 겨울은 대문 앞에 주차된 익숙한 차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요즘 뜸하다 했다. 오늘은
또 어떻게 염장을 지르려고 찾아오셨을까. 겨울은 차고에 차
를 밀어 넣고 나와 대문을 열었다.

“…….”

마당이 휑한 걸 보아하니 또 가정부 아주머니가 마음대로


들인 모양이다. 몇 번을 말해도 마음이 워낙 여리신 분이라
거절하기 어려운 듯했다. 그냥 새로운 사람으로 바꿔버릴까.
겨울은 실천하지도 않을 못된 생각을 하며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짜잔!”

“……왜 이래. 이상한 소리 할 거면 가. 피곤해.”

문을 열자마자 반갑지 않은 얼굴이 길을 막고 섰다. 겨울


이 구두를 벗으며 짜증스레 말했다. 이복형제인 주도훈이 기
분이 좋아 보일수록 제 기분은 반비례로 추락했다.

“새끼, 무심하게 굴래? 오랜만에 형 얼굴 봤으면 좀 웃기


라도 해라.”

“왜 온 건데?”

무심히 물으니 주도훈이 실실 웃으며 비켜났다. 그가 뿌린


진한 향수의 향이 코끝으로 묵직하게 퍼져나갔다.
“곧 네 생일이잖아. 가족이 모른 척하면 쓰나.”

“언제부터 그런 거 챙겼다고.”

“아버지가 주말에 좀 보자고 하시는데?”

“……바빠.”

“그렇지, 바쁘시겠지. 이번에 승진도 했잖아. 축하해. 스물


일곱에 팀장이라니. 내년이면 이사 하겠어?”

“…….”

축하치고는 한껏 비꼬는 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자기도


낙하산으로 아버지 회사에 다니고 있는 주제에 왜 이리 견제
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팀장이라는 직책이 언제 무엇으로
변할지 모르는 불안감 때문인가. 떡하니 과장 직위를 달고
있음에도, 주도훈은 한 살 어린 동생이 승진한 일이 못마땅
한 듯했다.

겨울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


질렀다. 아무래도 첩의 자식이라 무엇을 가져도 남이 가진
것만큼은 못해 보이는 모양이다. 겨우 몇 개월 차이면서 형
이라고 자칭하는 것도 웃겼다.

주도훈이 넓은 가죽 소파에 털썩 앉으며 발로 커다란 상자


를 툭툭 건드렸다.

“뭐… 본가 오는 건 네 의사고, 난 이거 주러 온 거야.”

“……?”

언제부터 상자가 저기 있었지. 빨간 리본에 둘러싸인 상자


는 거의 성인 남자 몸집만 했다. 마치 산타가 놓고 간 크리스
마스 선물 같았다. 저 정도로 큰 선물은 받아 본 적이 없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겨울은 가까이 다가
가 상자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묵직하기도 하고 위쪽은 텅
빈 듯 아무런 느낌이 없기도 했다.

“뭐야, 이게.”

“생일 선물.”

“…….”

“승진 선물로 해줄까?”

주도훈이 또 비아냥거리며 웃었다. 겨울은 그를 모른 체하


며 기다란 리본을 잡아당겼다. 걸리는 것 없이 수월하게 풀
린 끈이 바닥에 스르르 떨어졌다.

“……됐어. 뭔데 이렇게 커.”

“열어봐. 깜짝 놀랄걸.”

겨울은 상자를 열며 마른침을 삼켰다. 왠지 모르게 긴장된


다. 주도훈이 갑자기 선물을 줄 일도 없거니와 안에 좋은 물
건이 들었으리라 기대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는 자신을 놀리
고 골탕 먹이는 데 최적화된 인물이었다.

“씨발, 이게 무슨……!”

겨울이 상자를 마저 열다 말고 화들짝 놀라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그 모습에 주도훈이 예상했다는 듯 호탕하게 소파
를 때리며 낄낄 비웃었다. 정작 선물받은 당사자는 분노에
차있는데 눈꼬리에 맺힌 눈물까지 닦으며 웃다니. 턱주가리
를 한 대 갈기고 싶을 지경이었다.

“도로 가져가.”

겨울이 이를 악물며 낮게 읊조렸다. 정상적인 선물이 아니


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이상일 줄은 몰랐다. 그는 상상 이상
으로 미친 새끼였다. 골탕 먹이려고 준 것이라면 대성공이
다. 머리에 열이 바짝 올랐다. 겨울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주도훈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가 대수롭지 않게 어
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에이, 이걸 어떻게 가져가? 선물한 사람 성의가 있지.”

“그럼 지금 나보고 키우라는 거야?”

차마 상자를 건드릴 수 없어 그가 앉은 소파를 우악스럽게


발로 찼다. 그는 겨울이 수인 트라우마가 있는 걸 뻔히 알면
서 생일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수인을 선물했다. 그것도 자랄
만큼 자란 성인 수인. 주도훈, 그는 순 악질이었다.

“요즘 웬만한 집에 수인 없는 거 봤어? 너만 없어, 너만.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사인 줄 몰라? 그 별 같잖은 트라우마 이
제 극복할 때도 됐잖아. 언제까지 트라우마라고 변명할래?”

“…….”

겨울은 피가 날 듯 입술을 깨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


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안 그래도 몇 년 전부터 아버지가 집
에 수인을 들이라며 잔소리를 했는데, 그 말을 전해 듣고 이
짓을 꾸민 것 같았다. 본가를 나온 이유는 단 하나, 수인과
마주치기 싫어서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수인을 들이라니.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저 더러운 것을 제집에 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주도훈이 일어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예상한 반응도


봤겠다, 집에 돌아가려는 듯했다.

“아버지한테 말씀드려야겠다. 우리 겨울이가 드디어 집에


수인을 들였다고.”

“…….”
“이만 간다.”

“야!”

“네, 네. 아늑한 밤 보내세요.”

주도훈은 손을 흔들며 금세 집을 빠져나갔다. 닫히는 현관


문 사이로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울려 퍼졌다. 이복동생 자극
하고 아버지에게 점수 따는 것까지, 그에게는 일석이조인 일
이었다.

“…….”

겨울은 상자 안에서 고개를 푹 숙인 남자의 머리통을 보다


돌아섰다. 대체 저걸 얻다 갖다 버리라고……. 손도 대기 싫
다. 아주머니께 처리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도 이미 퇴근한
시간이라 오늘 밤은 이대로 거실에 놔둬야 할 듯했다.

드레스룸을 꼭 걸어 잠그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남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만큼 미동 없이 얌전히 앉아있었다.
머리가 길어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꾸만 신경이
쓰여 안방에 들어가려는데, 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액
정에 아버지라는 단어가 반짝였다. 주도훈이 그새 보고한 것
같았다.

겨울이 한숨을 삼키며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어, 도훈이한테 다 들었다. 들개를 들였다면서.

“……형이 마음대로 두고 간 거예요.”

―네 생각 해서 선물한 거라니까 잘 키워봐라. 수인 하나


있으면 업무에도 도움 많이 될 거다.

“아버지.”
―애처럼 투정 부리는 거면 듣기 싫다. 주말에 시간 있으
면 얼굴 좀 비추러 오고. 이만 끊는다.

“…….”

전화가 뚝 끊겼다. 일방적인 대화였다. 아버지의 귀에 들


어간 이상 저 쓸모없는 수인을 버릴 수도 없게 되었다. 이것
참 골치 아픈 상황이다. 겨울은 바닥에 흩어진 리본 줄을 주
우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다가간 것치고는 멀찍한 간격이었
지만, 다리를 쭉 뻗으면 닿을 거리긴 했다.

“나와.”

“…….”

남자는 반응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제 무릎을 꼭 끌어


안은 채 툭툭 치는 대로 흔들렸다. 결 좋은 까만 머리칼로 얼
굴을 숨기고 있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
았다. 무섭게.

“나오라는 말 안 들려?”

“…….”

겨울이 부러 살벌하게 말을 건넸다. 수인 트라우마가 있다


고 해서 수인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가 수인 생활용품 회사이기 때문에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아주 많았다. 수인을 애완견처럼 키우는 데 필요한 모든 물
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곳. 우리나라에서 JUONE 기업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사업 규모가 어마어마한 대기
업에서 겨울은 수인에 관한 모든 것을 공부했다.

남자는 겨울이 한 번 더 명령하기 전에 꼬물꼬물 움직여


상자를 빠져나왔다. 이제야 피가 제대로 도는 모양인지 기다
란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상자 치우게 비켜.”

“…….”

남자는 여전히 수그린 채 소파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렇지, 말은 알아듣나 보다. 수인은 가정집에 분양 가기 전에
철저하게 교육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사실인 듯했다. 게다가
주도훈이 떵떵거리며 카드를 내밀었을 테니 있는 집 자식을
알아본 주인장이 그중 가장 교육이 잘된 놈을 추천했을 수도
있겠고.

상자를 집 밖으로 내놓은 겨울은 거실 한편에 우두커니 선


남자 앞에 섰다. 저보다 훨씬 키가 큰 수인의 덩치에 당황했
지만, 티 내지 않고 단호한 시선을 보냈다. 몇 시간 동안 좁
은 곳에 웅크리고 있었는진 몰라도 그 사정을 봐줄 이유는
없었다.

“말은?”

말을 할 줄 아냐는 의미였다. 굳이 남자와 길게 말하기 싫


었다. 기죽은 남자의 어깨를 기분 나쁘게 건드리며 꿀 먹었
냐고 시비라도 걸고 싶었지만, 겨울은 참았다. 아버지의 감
시가 사그라질 때까지 한동안 같이 살아야 할 상황에 어쩌면
난폭할지도 모르는 수인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위험한 짓이
었다. 트라우마를 반복하기 싫었다.

“이름은 있고?”

“…….”

“대답 안 해?”

“…….”
남자는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니, 삶의 의욕
이 없어 보인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딱 파양당하기 좋은 성
향이었다. 이랬다간 가정집이고 뭐고 노예 장으로 끌려갈지
도 모르는데 말이다. 겨울은 꾹 다물린 입을 보다가 남자의
몸을 훑었다. 한겨울에 입은 듯 만 듯 한 실크 민소매에 얇은
반바지. 들개라더니 추위를 잘 타지 않는 건가. 숍에서 보송
보송하게 씻은 살결에는 그간의 고통이 드러났다. 군데군데
작은 흉터가 보였지만 제 알 바 아니었다.

“대답할 때까지 너한테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니까 알아서


해.”

겨울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안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물론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씨발…….”

겨울은 욕설을 뇌까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아직도 멍청하게 서있는 것 같았다. 계
획에도 없는 수인이라니. 겨울은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기 위
해 탁자에 놓인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창문을 활짝 열자 차가운 바람이 열을 식혔다. 불붙은 담


배 끝에서 피어오른 새하얀 연기가 한숨처럼 퍼져나갔다. 내
일은 회사에서 샘플 사료 몇 가지를 챙겨와야겠다. 수인 회
사에 다니는 주제에 수인이라면 질색하는 팀장이 생활용품
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 무슨 말이 돌까. 아마 낙하산으로 들
어온 제게 관심 많은 직원들 사이에서 재밌는 소문이 퍼질
것 같기도 하다. 제대로 엿 먹은 듯한 기분에 헛웃음이 튀어
나왔다.

유치한 복수를 다짐하려던 겨울은 이내 포기하고 창틀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오늘따라 살랑살랑 불어오는 겨울바람
이 위로하듯 이마를 간질였다.

그나저나 벌써 생일인가. 생일을 떠들썩하게 보낸 지 오래


라 잊고 있었다. 주도훈만 아니었어도……. 겨울은 담배를 비
벼 끄며 방문 밖에 선 남자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생일까
지 2주일은 더 남았지만, 닥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올해야
말로 최악의 생일이 될 게 뻔하다.

***

이른 아침, 출근 준비를 마친 겨울은 2층을 비롯한 집 안


의 모든 방문을 철저히 닫고서 차 키를 챙겼다. 거실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 잠든 남자가 굉장히 거슬리지만 저것 때문에
지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저 머리카락이라도 어떻게 했으면 좋으련만. 숍에서 미용


은 안 해주는 건가. 겨울은 소파에 닿아 흐트러진 남자의 긴
머리칼을 보며 미간을 살짝 구겼다. 아침이라 다행이지, 새
벽에 없는 정신으로 물 마시러 나왔다면 심장 마비라도 걸릴
법한 모습이었다.

무심히 발을 돌리려는데, 마침 들어온 아침 햇살에 검고


결 좋은 머리칼이 차르르 빛난다. 문득 저 커튼 사이로 가린
얼굴이 궁금해진 겨울이 주춤했으나 이내 호기심을 거뒀다.
수인을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한 게 벌써 십여 년이나 되어서
인지 저도 모르게 자신과 별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착각이
일었다. 겨울은 그 몹쓸 착각을 뒤로하고 현관문을 세게 닫
고 나왔다.
당분간 가정부 아주머니는 나오시지 말라고 전했다. 수인
을 처리할 때까지는 힘들더라도 집안일을 혼자 처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눈에 띄는 일 없도록 대
신 맡아달라고 하고 싶지만 나이 지긋한 분에게 저 커다란
수인을 떠미는 짓은 아무래도 무리일 듯했다.

배고프다고 난동 피우진 않겠지. 그럼 곤란한데. 겨울은


시동을 걸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모르겠다. 안 그래도
새로 생긴 업무를 신경 쓰느라 머리가 아픈데 처지 딱한 남
자까지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다녀오는 동안 도망이나 갔으
면 좋겠다. 겨울은 대문에 달아둔 방범 카메라를 힐끗 확인
하며 핸들을 꺾었다.

“주 팀장님 오셨어요?”

“네, 좋은 아침.”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일찍 출근해 티타임을 가지던 사


원 몇 명이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겨울은 그에 가볍게
대답하며 들어와 널찍한 제 자리에 가방을 툭 올려놓았다.

아직 정식 업무 시간이 아니라지만 오늘따라 사내 분위기


가 어수선하다. 자꾸만 힐끗대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도 같
고. 어젯밤 푹 잠들지 못해 예민한 겨울은 그 시선을 단번에
알아채고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마침 다가온
주임 하나가 쭈뼛대며 미소 지었다.

“저… 주 팀장님.”

“네.”

“집에 수인 들이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겨울이 잘못 들은 건가 하고 되물었지만, 그는 눈치 없이
다 마신 종이컵을 꾸깃 구기며 손뼉을 쳤다.

“축하드립니다!”

“…….”

축하드려요! 주임 뒤로 속삭대던 직원들도 한마디씩 거들


었다. 겨울은 시끌벅적한 축하 속에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숨을 짧게 내뱉었다. 겨우 반나절 만에 소문이 퍼졌을
줄이야. 들으나 마나 누구의 짓인지 뻔했다.

“그새 주 과장 왔다 갔어요?”

겨울이 웃음기 담긴 어투로 말했다. 기분 좋은 금요일 아


침부터 상사로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진 않았다. 말로는 축하
하면서도 눈치 보던 주임이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
했다.

“예! 주 과장님이 팀장님 생일 선물로 큰맘 먹고 선물하셨


다고…….”

“고작 수인 선물받은 거로 축하라고 하는 거 보면 대충 내


얘기도 들었나 봐요?”

“아, 그게…….”

주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직원


들이 나 몰라라 딴청을 피웠다. 그 광경을 보던 겨울은 억지
로 올렸던 입꼬리를 내리고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남의 일
에 관심이 너무 많다.

“축하는 고마운데 다들 아침 회의는 준비하고 떠드는 거예


요?”
막 9시 정각을 넘긴 시각이었다. 겨울이 서류를 뒤적대자,
모였던 인원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일부러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타다닥 크게 들렸다. 속이 뻔히 보
인다. 어린 상사의 약점을 듣고 싶은 거겠지. 업무를 제외하
고 사적인 수인 얘기에서 항상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것을 팀
원들도 느꼈을 테다. 오랫동안 이어온 궁금증에 주도훈이 불
씨를 지펴준 셈이고.

뜻대론 안 되지. 겨울은 서류 사이에서 찾은 USB를 전달


하며 일어났다.

“이 자료 띄워줘요. 십분 뒤에 회의실에서 봅시다.”

얼결에 건네받은 주임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겨울


은 많은 눈초리를 무시하고 주도훈이 있는 층으로 향했다.
꼰대라고 욕해도 좋다. 오늘은 심술 좀 부리고 싶은 날이었
다.

“공과 사는 좀 지키지?”

겨울이 마침 나온 주도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막


업무 시간이 되었는데 뺀질뺀질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참
철없어 보였다. 주도훈은 바닥에 구둣발을 툭툭 찍으며 여유
롭게 미소 지었다.

“와, 네가 여기까지 찾아온 건 처음 아니야? 효과 좋네, 이


거.”

“그만하라고.”

겨울이 낮게 경고했음에도 주도훈은 멈추지 않았다.


“왜. 난 그냥 형으로서 아끼는 동생한테 선물했다고 자랑
한 것뿐인데 뭐가 그렇게 불안해서 이 시간에 내려오셨을
까.”

“……어디까지 말했어?”

도대체 남의 팀원한테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


다. 못나게 굴어봤자 떨어지는 건 제 이미지뿐만 아니라 멀
쩡하고 화목하게만 보이던 집안 이미지인데, 주도훈은 그저
질투심에 사로잡혀 앞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뭐가 그렇
게 불안해서 귀한 몸뚱어리 들이밀면서 이 난리를 피우는 건
지 겨울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복형제라 해도 제 친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십여 년이 흘렀고, 그사이 재혼을 하고 현재 아
버지 옆을 지키는 분은 그의 어머니인데 말이다.

“어디까지 말했냐고.”

언론을 통해 많은 이에게 진정한 아들로 인정받은 건 주도


훈이었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에게 귀한 아들 대접을 받는
쪽은 겨울 자신이었다. 삐딱한 주도훈의 눈초리를 받기 싫어
서 괜찮다고, 신경 쓰시지 마시라고 몇 번을 말해도 주변 사
람들이 눈치챌 정도로 티가 나게 자신을 챙기고는 했다. 그
리고 정말 불편하게도 그 행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물론 아
버지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어머니와의 소중한 7년의
기억으로 자신을 더 챙겨주는 건 고마운 일이니까. 그 감정
을 완벽히 헤아릴 순 없지만 그저 진정한 사랑, 뭐 그런 것이
지 않을까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 나도 생각 있는 놈이야.”

주도훈이 아무렇게나 쓸어 넘겨 흐트러진 겨울의 머리칼


을 살짝 넘겨주며 대답했다. 겨울은 그 손을 까칠하게 쳐냈
다. 매번 말투와 행동은 다정하나 그 속의 담긴 저의가 마음
에 들지 않았다.

“여기 아버지 회사야. 어리게 굴지 마.”

“응. 오늘은 내가 잘못했어, 주 팀장.”

“…….”

팀원들에게 트라우마 운운한 건 잘못이고, 수인 선물한 건


죽어도 잘못이 아닌가 보다. 겨울은 대답 대신 그를 날카로
운 눈빛으로 쏘아보고서 돌아섰다. 곧 회의 시간이었다.

“그래도 발정 난 수인한테 당할 뻔한 건 입 뻥긋도 안 했


어. 잘했지?”

“야!”

“아, 이 상무님한테 가봐야 하는데 늦겠네. 먼저 간다!”

겨울이 화를 참느라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주도훈이 빠르게 옆을 스치며 정수리를 툭툭 가벼이 두드렸
다. 저게 마지막까지……. 겨울은 더러운 인성과 달리 부드럽
게 휘어지는 눈매를 보며 이를 꽉 물었다. 그리고 도착한 엘
리베이터에 올라타며 텅 빈 복도를 훑었다. 다행히 입에 오
르기 좋은 말을 들은 자는 아무도 없는 모양이다. 회의에 집
중할 수 있으려나. 아침부터 놀랄 일이 많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야근을 했다. 거의 밤 11시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한 겨울


은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현관문을 열었다. 일부러 야근
한 것은 아니다. 내일이면 주말이라 나머지 일을 다음 주로
미루기 싫어서 계속하다 보니 저녁도 못 먹고 이 시간까지
회사에 처박혀 있었다.

캄캄한 어둠 사이로 신발장 조명이 환히 빛났다. 아차, 아


주머니 안 오시지. 늦은 밤에 어둑한 집에 들어서는 게 싫어
서 항상 거실 불은 켜두고 퇴근하시라고 전했는데, 조명 한
개 꺼졌다고 오늘은 다른 때보다 몇 배는 더 고요한 듯했다.
오랜만에 완전히 혼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하.”

씨발, 깜짝이야.

불을 켜려던 겨울은 어둠 속에서 노란색으로 빛나는 두 눈


을 보고 놀랐다. 온종일 집을 지키던 남자가 여태 소파 옆에
주저앉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순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어두운 집


에 짐승이 있다는 걸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겨울은 놀라지
않은 척 침착하게 불을 켜고 천천히 거실을 훑었다. 어디 하
나 부서진 곳도, 어질러진 곳도 없었다. 긴 시간 동안 저 자
리만 굳건히 지키고 있었던 듯했다.

한 바퀴 휙 둘러본 겨울의 시선이 다시금 남자를 향했다.


남자는 갑작스럽게 불이 켜졌어도 전혀 눈부셔 하는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말똥말똥한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겨울은
마른침을 삼키며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남자의
눈꺼풀이 짧게 움찔거렸다. 드디어 말할 마음이 생긴 건가.

“……아.”

겨울이 탄식을 뱉으며 물러났다. 긴장감이 고조되었던 분


위기가 수그러들었다. 겨울은 차 키를 쥐며 다시 집을 나섰
다. 그리고 차 트렁크에 넣어둔 작은 박스를 가지고 돌아왔
다.

팀원들이 서프라이즈 선물로 챙겨준 수인 물품이었다. 급


하게 준비한 티가 났지만 이 정도면 당분간은 별걱정 없이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사료, 목욕용품, 옷 몇 벌 등 기본 용품
이 잔뜩 들어있었다. 겨울은 탁자에 상자를 올려두고 뒤적이
며 구경했다. 사료를 제외하면 자신이 쓰고 입는 것과 별다
를 바 없었다.

차르르륵.

겨울은 쓰지 않는 둥근 그릇을 꺼내어 샘플 사료 한 봉지


를 뜯어 담았다. 시리얼을 담는 소리가 났다. 한 알을 집어
냄새를 맡았다. 생긴 건 둥글둥글하고 짙은 갈색을 띤 개 사
료와 비슷했으나 냄새는 전혀 달랐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짭
조름하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조리를 안 한 인스턴트 음식
같았다. 맛은 모르겠지만.

겨울은 사료가 담긴 그릇을 들고 남자의 앞에 섰다. 남자


는 여전히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었다. 겨울은 긴장
감에 울렁이는 속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말할 마음은?”

“…….”

겨울의 눈꺼풀이 찌그러졌다. 여전히 없는 건가. 무언의


시위는 봐줄 마음이 없다. 겨울은 그릇을 살짝 흔들었다. 사
료가 그릇 속에서 부딪치며 남자의 주의를 끌었다. 분명 배
가 고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을 것이다. 입을 열지 않으면 손
해인 건 오로지 남자 쪽이었다.
커튼에 가렸던 얼굴은 예상외로 볼만했다. 아직 낯을 가려
서 인상이 예민해 보이긴 해도 전체적으로 사납다기보다 순
진하고 온순한 쪽에 가까웠고, 수인이라고 하지 않으면 이
얼굴에 달려드는 인간들이 꽤 있을 것 같을 정도로 반반했
다. 겨울은 남자의 오묘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먼저 질
문했다. 시간을 너무 끌었다.

“다른 데서도 이런 식으로 굴다 파양당했지?”

남자의 눈이 두어 번 빠르게 깜빡였다. 긍정인지 부정인진


몰라도 반응이 있다. 겨울은 단호함을 잃지 않았다.

“나는 너 파양 안 시켜. 사정이 좀 생겼거든.”

“…….”

아버지는 물론이고 주도훈 때문에 회사에도 소문이 훤히


퍼져서 어쩔 수 없이 남자를 데리고 있어야 했다. 중요한 해
외 계약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수인 트라우마를 가진
JUONE 기업 아들의 빠른 승진을 좋게 보는 사람은 없을 테
니까. 지금은 최대한 아버지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편이 옳
을 것이다.

겨울은 답답한 셔츠 옷깃을 끌어 내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묻는다.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

“난 네가 굶어 죽든 말든 신경 안 쓸 거니까.”

“…….”

“이름.”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묻자, 처음으로 남자의 눈빛이 흔들


렸다. 손바닥에 달라붙은 긴 머리칼이 부스스 흩어지고, 꼼
짝 안 하던 손가락이 맨살이 드러난 허벅지를 긁어내리며 붉
은 자국을 남겼다. 나름대로 큰 갈등을 겪고 있는 듯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피곤한 겨울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려


할 때였다. 쿵, 무릎이 바닥을 찍었다. 마지막 기회를 놓칠
뻔한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 당황한 얼굴로 겨울을 바라보았
다.

“가람… 가람이에요.”

“…….”

겨울은 제 발밑에서 꼼지락대는 새하얀 손가락을 응시하


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당혹스러울 만큼 부드러운 음성
이었다.

배가 고프긴 한가 보다. 바지춤에 닿을락 말락 하는 남자


의 손끝이 벌벌 떨렸다. 겨울은 그 손이 닿을세라 한 걸음 물
러났다. 그리고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말할 줄 아네.”

“…….”

“나이는.”

겨울이 기회를 틈타 정보를 줄줄이 물었다. 물론 가격을


지불한 주도훈이 잘 아는 정보일 테지만, 성격상 아랫사람을
시킬 놈이지 자기 발로 가서 사진 않았을 것 같았다. 무엇보
다도 그보다는 남자에게 직접 묻는 게 속이 더욱더 편했다.

가람이라는 이름 두 글자를 내뱉은 남자가 굽은 허리를 펴


며 겨울과 시선을 맞췄다. 이제야 제 위치를 파악한 모양이
다. 아무리 울고불고 소리를 쳐도 이곳에는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거니와, 몇 번이나 파양을 당하며 겪은 고통을 반
복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처량한 눈망울에서 우울감이 느껴
졌다.

“열… 아홉이에요.”

겨울이 생각보다 많은 나이에 음, 하고 목을 울렸다. 수인


이 열아홉이면 성인이다. 덩치와 키가 커서 어느 정도 나이
가 있겠거니 예상은 했다만, 주도훈이 성인을 사 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남자의 얼굴에도 아직 어린 티가 가
득해서 의외였다.

겨울은 조심스레 사료가 담긴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 쓸데없는 과거나 팔려 오기까지의 과
정은 궁금하지 않았다. 기본 정보만 알면 충분하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던 남자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감


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네가 머물 자리는 이곳이랑 저기.”

겨울이 거실에 딸린 욕실을 가리켰다. 께름직하지만 거실


화장실은 보통 가정부 아주머니만 사용해서 상관없었다. 이
왕이면 사람처럼 지냈으면 좋겠다. 웬만해서 수인이 짐승의
모습으로 변할 일은 없다지만, 간만에 대면하는 수인이라 쓸
데없는 걱정이 되었다. 돌발 상황만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식사 시간은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깨어있지 않으


면 없어.”

“…….”

“이대로만 지내. 그럼 너나 나나 편할 거야.”


입을 꾹 다문 남자를 보고 답답해진 겨울이 발로 그릇을
툭 건들며 말했다.

“대답.”

“……네…….”

쏟아질 듯 흔들거리는 제 식량을 잽싸게 붙잡은 남자가 미


적지근하게 대답했다. 겨울은 대답이 끝나자마자 안방으로
들어왔다. 비록 일방적인 소통이었지만 말도 섞었겠다, 앞으
로 얼굴 보고 대화할 일은 없을 것 같아 속이 한결 편안해졌
다.

안방 문을 꼼꼼하게 걸어 잠근 겨울은 셔츠 단추를 풀며


밖에서 들리는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사료 먹는 소리라든
지, 욕실을 사용하는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겨울은 저도 모
르게 집중하던 모습에 스스로 놀라 머리를 흔들었다. 신경
끄자. 필요한 건 모두 제공했으니 굶어 죽을 일은 없겠지.

그리고 숫기가 없어서 그렇지 나름대로 교육은 잘 받은 듯


하다. 존댓말도 잘하고 빠르게 말해도 잘 알아듣는다. 비대
면으로만 접하던 수인과 소파 옆에 웅크려 앉은 남자는 영
딴판이었다. 어쩌면 주도훈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오래전 트라우마 속 침 흘리며 날뛰던 수인의 모습
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

주말 아침이 밝았다. 겨울은 뜨끈뜨끈한 이불을 걷어내며


시계를 확인했다. 거의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주말이라도 9시엔 눈을 뜨곤 했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오래
잤다. 어젯밤 야근과 그간 쌓인 스트레스가 화근인 듯했다.

다행히 몸 상태는 좋았다. 겨울은 창문을 살짝 열어두고


침구 정리를 했다. 시간 아깝게 더 누워있을 생각은 없었다.
오늘은 집에서 프로젝트 준비와 연말을 대비하여 몰린 업무
를 대충 해놓을 계획이었다. 아랫사람을 시키면 될 일이지만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자리만 꿰차고 있다는 소리는 듣기 싫었
다.

샤워하고 나온 겨울은 가볍게 샌드위치나 만들어 먹을까


싶어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신선한 재료를 꺼내고 문
을 닫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새끼 어디 갔지.’

커다란 덩치가 눈에 안 띌 리가 없다. 그런데 부엌에 오는


동안 거실 소파 옆에 웅크리고 있어야 할 남자가 보이지 않
았다. 겨울은 도마에 재료를 던지듯 내려놓고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이상하게 불안했다.

“…….”

분명 자리를 정해줬을 텐데. 하루도 되지 않아 명령 불복


종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겨울은 그가 있던 자리에 놓인
빈 그릇을 챙겼다. 잘 나가는 수인 사료인 만큼 남자의 입맛
에도 잘 맞았나 보다. 그릇에는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겨울은 천천히 걸으며 집 안을 훑었다. 남자를 찾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서재로 향하는 복도에 안락
하게 누워 잠들어 있었다.

“…….”
그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시선을 보내는 겨울은 심기가
굉장히 불편했다. 멍청한 수인. 억지로 일을 시키는 것도 아
니고 두 가지만 지키면 편히 놀고먹고 자게 해준다는데 그것
도 못 하는 건가.

“야.”

“…….”

“……야.”

겨울이 목소리를 높여 두 번 부르자, 잠에서 깬 남자가 벌


떡 일어날 생각은 안 하고 느지막이 눈을 비비며 상체를 세
웠다. 겨울은 그 느릿느릿한 행동을 보며 들고 있던 그릇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게을러빠진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
는다. 들개 주제에 아침잠이 많은 것도 그렇고. 눈치를 주는
신호였으나 남자는 멀뚱멀뚱 겨울의 말을 기다릴 뿐 입을 열
지 않았다.

겨울이 짧은 한숨과 함께 날카로이 말했다.

“내가 부르면 기분 나쁘게 쳐다보지 말고 대답을 해.”

“……네.”

잠긴 목소리는 어제와 달랐다. 부드럽다기보다 조금 더 무


겁고 낮았다. 공손하게 허벅지 위로 모으는 남자의 손을 보
던 겨울은 딱딱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어젯밤에 말하지 않았나?”

“…….”

“네 자리는 여기가 아닐 텐데.”

“그게…….”
“변명 듣고 싶어서 말한 거 아니야. 당장 자리 옮겨. 복도
더럽히지 말고.”

“…….”

속사포로 말을 끝낸 겨울이 나가라고 짧게 턱짓했다. 그러


자 꾸물꾸물 일어난 남자가 뒤늦게 눈치를 살폈다. 할 말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겨울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차가운
인상을 일관했다.

“안 가고 뭐 해.”

“저기…….”

“…….”

겨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마치 행인을 대하듯 부르는 말


본새가 신경 쓰였다. 불현듯 주도훈이 남자를 데려온 숍이
어딘지 궁금해졌다. 확실히 고급스러운 곳은 아닐 듯하다.
은근히 버릇없고 성인이나 돼서 파양을 당하는 걸 보면 말이
다.

“주, 주인님…….”

그때 남자가 불경한 단어를 입 밖에 냈다. 난생처음 듣는


호칭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겨울이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
했다.

“주인? 누가 네 주인이야.”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요……?”

당돌한 건지, 멍청한 건지. 통상적으로 주인이 맞다. 남자


가 자연스럽게 부른 이유도 숍에서 교육을 받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껄끄럽고 절대로 집밖에 내보내지 않을 놈에게 저런
단어를 들을 이유도 없다. 주인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남에
게 보이기 위한 호칭이니까. 겨울은 오히려 거북했다.

“……리안.”

“…….”

주인도 아니고 이름도 아닌 호칭은 겨울이 유학할 때 쓰던


영어 이름이었다. 당장 생각나는 거라고는 이것뿐이었다. 사
용하지 않은 지도 꽤 되어 남자에게 알려줘도 괜찮을 것 같
았다. 대수롭지 않게 다른 이름을 알려준 겨울이 자신을 부
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서 말을 건넸다.

“그리고 뜸 들이는 버릇 고쳐. 너한테 쓸 시간 없어.”

오늘 날씨만큼이나 냉담했다. 남자는 빠릿빠릿한 대답 대


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해진 자리로 돌아가다 말고 몸을
돌려 말했다.

“밤에는… 저쪽 바닥이 더 따뜻해서 그랬어요…….”

“…….”

변명은 하지 말라 했건만 남자는 기어이 말대꾸를 했다.


성인이라 자존심을 못 죽이는 건가. 한겨울이어도 난방이 잘
되는 집이라 이불이 없어도 따뜻한데, 마음만 먹으면 털 달
린 짐승으로 변하는 수인이 정말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칭얼
거리니 어이가 없었다.

“야.”

“…….”

잠시 넋이 나갔던 겨울이 그를 불러 세웠다.

“내가 알아주길 바라지 마. 원하는 건 말로 해. 뭐든.”

“네……. 그럴게요, 리안…….”


“…….”

남자는 조금 전과 다르게 대답도 잘하고 토를 달지도 않았


다. 물론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겠지만 아침부터 인간이 아닌
것과 말씨름하긴 싫다. 더는 할 말이 없는 겨울이 다시금 부
엌으로 가려는 찰나였다. 남자가 다급히 겨울을 불렀다.

“리안……!”

겨울이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어도 몸은 절


로 반응했다.

“저도…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뭐?”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겨울이 얼결에 되묻자 남자가 조


곤조곤 설명했다. 머리카락에 가려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어
쩐지 흰 뺨이 붉어진 것도 같았다. 엄청나게 긴장한 듯했다.

“이름을 알려준 주인님은 처음이라… 저도 이름으로 불리


고 싶어서…….”

“…….”

“가람이에요…….”

“야, 안 닥쳐?”

듣다 못한 겨울이 언성을 높였다. 개라더니 정말 개 같은


소리만 지껄인다. 친절을 베풀었더니 맞먹으려 드는 태도에
열이 확 올랐다.

“자, 잘못…….”

겨울이 길게 내뱉은 숨에 분노가 담긴 것을 알아챈 남자가


중얼거리며 거실로 후다닥 사라졌다. 겨울은 기죽은 뒷모습
을 보다가 부엌으로 돌아와 그릇을 내팽개쳤다. 텅, 텅! 그릇
이 싱크대에 나뒹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플라스틱이어서
망정이지, 유리였다면 진즉에 깨지고도 남았을 테다.

“……개 같은 새끼.”

겨울이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욕설을 뇌까렸다. 한


집에 사는 들개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못 배워먹은 수인이
뭘 알고 그랬겠는가. 당연히 저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
도 순간 오른 열은 쉽사리 내릴 기미가 없었다.

분노는 원인을 제공한 주도훈에게 꽂혔다. 자잘한 스트레


스로 자신을 말려 죽이려는 속셈인가 보다. 입맛이 사라진
겨울은 서재에 처박혀 일만 하다가 결국 브런치를 먹었다.
물론 그때까지 반성은커녕 한가로이 창밖 풍경을 감상하던
남자도 쫄쫄 굶어야 했다.

***

주말은 굉장히 느리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일요일에도 여


전히 서재에 틀어박혀 일만 하던 겨울은 쨍쨍히 창문으로 내
리쬐는 햇빛을 보고 마당으로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얇은
상의를 뚫고 스며들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라지만
춥긴 추웠다. 겨울은 팔뚝을 쓰다듬으며 맨발에 슬리퍼만 신
은 차림으로 대문을 열었다.

“어, 안녕하세요!”

마침 지나가던 옆집 이웃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겨울도


예의상 미소 지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멈춰서 물었다.
“요새 통 안 보이셔서 이사라도 가신 줄 알았어요. 바쁘셨
나 봐요.”

“네, 일이 좀 많아서… 어디 다녀오세요?”

“산책이요.”

남자가 손에 들린 짧은 목줄을 흔들었다. 겨울의 시선이


튼튼한 줄을 따라 올라갔다. 목줄 끝에는 키가 작고 연약해
보이는 수인이 겨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
망울과 긴장한 듯 오물거리는 입술. 소년미를 물씬 풍기는
수인은 가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그러시구나.”

겨울이 성의 없이 대답했다. 기분이 이상하다. 상하 관계


가 뚜렷한 관계를 마주하는 것은 언제 봐도 기이한 광경이었
다.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몸이 경직되고 인상이 절로 찌푸려
졌다. 겨울의 눈에는 사람이 사람을 우롱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겨울이 수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자, 이웃 남자가 소


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년은 얌전히 손길을 받으며 고개
를 숙였다. 그가 아랫입술을 떨며 숨을 색색 내뱉을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추운가 보다. 오로지 이웃 남자의
취향에 맞춘 수인의 옷은 날씨와는 관계없이 예쁘고 얇기만
했다.

“아, 그런데 수인 키우지 않으세요?”

“네?”

남자가 갑자기 수인 사육 여부를 물었다. 어떻게 안 거지.


겨울이 부정하려 했으나 남자가 조금 더 빨랐다.
“그저께 수인 용품 들고 가시는 거 봤거든요. 맞죠?”

“……네.”

겨울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봤다는데 굳이 아


니라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남자는 손뼉을 한 번 짝, 치고서
관심을 보였다.

“종이 어떻게 돼요?”

“들개예요.”

“그래요? 교배는 안 되겠네. 크기도 훨씬 크겠다.”

“…….”

……교배라니. 아무리 수인은 수컷끼리라도 임신이 가능


하다지만 이 조그만 녀석을 우람한 들개에게 던지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발정 난 두 마리의 짐승을 볼 용기도 없었다. 겨
울이 앞서 나가는 남자를 응시하며 희미하게 미간을 구겼다.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아니다, 둘 다 갯과라서 되나? 얘는 여우거든요.”

“저기, 전 교배시킬 생각이…….”

주겨울! 겨울이 난처한 표정으로 남자와의 대화를 마무리


하려는 순간, 뒤에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주도훈
이었다. 차에서 내린 그는 잽싸게 달려와 겨울의 어깨를 감
싸며 이웃에게 인사했다. 안면이 있는 사람처럼 정말 자연스
러웠다.

당황한 겨울이 주도훈을 쏘아보자, 그가 천연덕스럽게 웃


으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소년이
놀란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귀엽게 생겼네. 몇 살이에요?”


“열다섯 살이에요.”

아아. 주도훈이 대충 반응하며 겨울을 바라보았다. 시원하


게 뻗은 눈매가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둥글게 휘었다. 씨발.
속으로 욕을 읊조린 겨울이 친근하게 걸친 그의 팔을 사납게
내쳤다.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았으면서. 직장인이 소중한 주
말을 낭비하며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뭘까. 단지 그것이 궁금
할 뿐이었다.

“우리 집 들개보다 어리네요. 주겨울, 그새 유기한 거 아니


지? 형이 그거 검사하러 왔다.”

“꺼져, 좀.”

청청한 날씨 덕분에 사라졌던 스트레스가 빠른 속도로 치


고 올랐다. 겨울이 대문 안으로 쏙 들어갔다. 티격태격하는
형제를 보며 당황한 이웃에게 인사를 할 새도 없었다. 대신
주도훈이 성격 좋게 웃어 보이며 동생이 워낙 까칠한 놈이니
이해 부탁한다고 마무리를 짓고서 겨울의 뒤를 쫓았다.

“우리 들개는 어디에 처박아 두셨을까.”

주도훈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두리번거렸다. 가람을 찾


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파 옆 바닥, 지정된 곳에서
덩치를 숨긴 채 눈치 보는 한 마리의 짐승과 단번에 눈이 마
주쳤다. 주도훈은 픽 웃으며 겨울을 자극했다.

“여태 저렇게 둔 거야? 학대야, 학대.”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안 굶기면 됐지.”

사실 화가 나서 몇 끼 굶기긴 했지만 털어놔 봤자 무시 받


을 것 같아 겨울은 말을 아꼈다. 주도훈은 제집인 양 부엌에
서 컵을 꺼내어 물을 따라 마시고서 긴 숨을 내쉬었다.
“아까 그 남자 못 봤어? 산책도 시키고 예쁜 옷도 입혀주
잖아. 그게 어려워?”

“어, 싫어.”

겨울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소년의 표정이 눈앞에 어


른거렸다. 산책을 하고 예쁜 옷을 입었는데도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던 얼굴. 인형 놀이도 아니고 생명을 가지고 대체
뭐 하는 건가 싶다.

“고집은. 시간 좀 쏟아봐라.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런 말 하러 온 거면 좋은 말 할 때 나가. 양심이 있으면


이 집에 몇 달은 발도 들이지 말아야지. 한 대 맞고 싶어서
그래?”

“이야, 주겨울 무섭다.”

주도훈이 겁먹은 척 어깨를 떨며 실실댔다. 겨울은 그냥


상종을 하지 않기로 했다. 무시하는 게 최선인 걸 알면서도
화가 울컥 올라와 자꾸만 말리게 된다. 무슨 말을 해도 귓등
으로 듣는 놈이라 기운이 쫙 빠졌다.

주도훈은 웅크린 가람의 앞에 앉아 턱 밑을 긁어주며 눈썹


을 늘어뜨렸다. 동정인지 비아냥대는 건지 헷갈렸다.

“우쭈쭈, 불쌍해라.”

“…….”

“들개야, 네 주인이 이름은 지어주든?”

“…….”

“이렇게 입 꾹 다물고 있으면 맞는 것도 안 알려주고?”

순간 표정을 굳힌 주도훈이 가람의 뺨을 짧게 내려쳤다.


힘이 들어간 소리는 아니었지만 따끔한 정도는 될 것이다.
난데없이 얻어맞은 가람의 고개가 홱 돌아가며 새까만 머리
칼이 흐트러졌다.

“들개야, 네 주인이 날 무시하니까 너도 내가 만만해 보


여?”

주도훈은 지금 일부러 가람을 자극하고 있다. 화난 들개의


얼굴과 짐승으로 변한 모습이 궁금한 것이겠지. 그리 짐작한
겨울이 다급히 그를 저지했다. 수인이 악한 마음을 품으면
화를 보는 쪽은 자신이었다.

“뭐 하는 거야. 그만해.”

겨울이 주도훈의 어깨를 잡아당기자 일어선 그가 혀를 쯧,


튕기며 말했다.

“겨울아, 수인 교육은 제대로 시켜. 진짜 물려 죽고 싶지


않으면.”

“……내가 알아서 해.”

“난 네가 트라우마 극복하라고 선물한 거지, 장식품처럼


구석에 처박아 두라고 준 거 아니야.”

“…….”

방법이 잘못되었다. 트라우마 극복은 병원에서나 할 일이


다. 교육 덜된 수인을 무턱대고 집에 들여놓고 극복하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일이 꼬였는데.
겨울이 속으로 주도훈을 탓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욕이라도
마구 퍼붓고 싶지만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꾹 참았
다. 발끈하면 지는 거다. 능글맞은 주도훈 앞에서는 항상 그
랬다.

“주겨울, 이거 생산반 보내는 거 어때?”


“……생산반?”

생산반이면 수인을 데리고 거의 막노동을 하는 곳이었다.


수인이 득실득실한 곳이라 겨울이 한 번도 드나들지 않았던
데다. 건너 들은 바로는 회사 지하에 위치한 그곳은 아주 바
쁘고, 어둡고 음침한 곳이라고 했다.

“직접 교육하기 싫으면 그런 데라도 보내. 일 날까 무섭다,


야.”

“…….”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생산반에는 수인을 교육하고 감시


하는 담당자가 있어 집에서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기본예절
이라든지 일쯤은 거뜬히 배워올 것이다. 자연스럽게 사회화
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겨울은 불긋하게 변한 제 뺨을 만지작대는 가람을 보며 마


른 입술을 축였다. 주도훈이 가볍게 내뱉은 말이 도움이 될
줄이야. 그는 공을 굴리듯 가람을 발로 툭툭 건드는 주도훈
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보내는 데 조건 없어?”

“뭐야, 진짜 보내게?”

주도훈이 겨울을 돌아보며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로 빈말이었나 보다. 그는 이내 수상쩍게 웃으며 친절히 대
답했다.

“주 팀장님이 데려온 수인인데 조건이 있을 리가. 밑바닥


부터 차근차근 교육시키라 하면 될 거야.”

지금도 수인을 나 몰라라 방치하는데, 설마 겨울이 이 들


개를 데리고 출근할까. 수인과 단둘이 있는 겨울의 상황이
너무나 궁금해서 찾아온 주도훈은 앞으로 회사에서도 볼 생
각을 하니 기대감에 가슴이 벅찼다. 일이 점점 재밌게 흘러
간다.

“근데 얘가 버틸 수 있을진 모르겠네. 이렇게 큰 놈들은 괜


한 자존심 세우다가 맞아 죽는 일도 가끔 있거든.”

“상관없어.”

“냉정한 주 팀장님.”

맞아 죽든 말든. 그건 제 책임이 아니다. 규칙을 어긴 수인


의 잘못이거나, 죽을 정도로 때린 담당자의 잘못이지. 겨울
은 일순 가람이 생산반에서 큰 사고를 당했으면 좋겠다는 못
된 생각까지 했다. 수인 유기죄로 기사에 실리느니 동정표를
받는 게 훨씬 이득이었으니까.

흐릿하게 올라가는 겨울의 입매를 본 주도훈이 무릎을 굽


혀 가람에게 낮게 속삭였다.

“들개야, 너 진짜 잘못 걸렸다.”

“…….”

가람은 얌전히 귓가에 쏟아지는 악마의 속삭임을 들으며


티 나지 않게 품에서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그 지옥에 가면 무조건 고분고분 굴어야 해. 알았지? 네


주인을 보고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충고야.”

“…….”

“그리고, 다음에 또 대답 안 하면 뺨 한 대로 안 끝난다.”

여태 장난기 넘치던 목소리가 단번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주도훈은 그 말을 끝으로 구겨진 바짓단을 툭툭 털며 허리를
세웠다. 주겨울이나 들개나, 분위기로 보아하니 둘 다 한 자
존심 하는 것 같아 사건이 터질까 내심 신경이 쓰였다.

주도훈이 떠나고, 겨울은 가람의 늦은 점심을 챙겨주었다.


가람은 푸짐하게 담긴 사료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온종일
앉아있어 배가 고프지도 않은가 보다. 아니면 곁에 사람이
있으면 먹기 싫은 걸지도 모르고. 자리를 비웠을 때만 텅 비
는 그릇을 보면 그러했다.

‘……욕실을 쓰긴 하는 건가.’

서재로 돌아가려던 겨울이 멈칫하며 굳게 닫힌 욕실 문을


바라보았다. 궁금하지만 확인은 하기 싫었다. 생산반 보내고
나서 고용인을 불러야겠다. 겨울은 자신이 떠나기만을 바라
는 가람의 뒤통수를 힐끗 보고서 다시금 걸음을 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서재 문틈으로 오독오독, 사료 씹는 소리
가 들려왔다.

***

‘……괜찮으려나.’

겨울은 아침 댓바람부터 고민에 시달렸다. 수인을 생산반


으로 데려가려면 차에 싣고 사람이 많은 로비를 지나 지하로
내려가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시선이 두려웠
다. 주도훈이 제안한 방법은 아주 좋았으나 막상 실현하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할 것 같았다.

오독오독…….
겨울은 넥타이를 매만지며 시선을 돌렸다. 가람은 어젯밤,
거의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저녁으로 준 사료를 지금
먹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꽤 불규칙했다.

누구는 자기 때문에 입맛 없어 죽겠는데 지금 밥이 입으로


들어가나? 진짜 거슬리네. 예민한 겨울이 가람을 말없이 쏘
아보았다. 그는 사료를 한 알씩 집어 깨작거리는 중이었다.
정말 맛없게도 먹는다. 겨울은 옷을 말끔하게 차려입고서 그
가 소중히 여기는 그릇을 발로 툭 건드렸다.

“야, 이따 먹어.”

“…….”

오독거리는 소리가 뚝 멈췄다. 가람이 씹던 사료를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키자, 만족한 겨울은 부엌에서 우유 한 컵을
따라 단번에 비웠다. 아침 대용이었다.

겨울은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고서 차 키를 챙겼다.


아직 출근하기 이르긴 하다만, 불편한 시선을 피하려면 지금
출발하는 게 좋을 듯했다. 겨울은 드레스룸에서 입지 않는
외투를 챙겨 나왔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날씨에 잠옷 차림
으로 수인을 데려갔다간 헛소문이 퍼질 게 뻔했다.

두툼한 패딩을 덥수룩한 머리 위로 홱 던졌다. 그러자 놀


란 가람이 옷자락을 쥐고서 겨울의 눈치를 살폈다. 조용한
거실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꿀꺽, 크게 들렸다.

“이따 먹으라고 했잖아. 말 같지 않아?”

겨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여태 사료를 먹고 있었다.


오독거리는 소리는 안 나도 방금 씹어 넘긴 것이 무엇인지는
알기 쉬웠다. 주인이라는 호칭을 부정해서 만만하게 생각하
는 건가? 입 안에서 녹여 먹는 잔머리까지 부릴 줄은 몰랐다.
겨울은 아예 그릇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데구루루 굴러
간 그릇에서 사료가 어지러이 쏟아졌다.

“……알겠어요, 리안.”

“…….”

제 입으로 알려준 이름이 이리 낯설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


다. 그의 잘못이 잊힐 만큼 당황스러웠으나 겨울은 표정을
관리하며 무심하게 명령했다.

“그거 입어. 나갈 거야.”

“네…….”

“도착할 때까지 입 열지 말고.”

“……네.”

대답은 잘한다. 겨울은 가람이 패딩에 팔을 끼워 넣는 것


을 보며 서둘러 외출 준비를 마쳤다. 새것과 같은 구두를 꺼
내 신으려는데, 따라 나온 가람의 발이 눈에 띄었다. 수인치
고 새하얗고 깨끗한 발 위에 영문 모를 작은 흉터가 곳곳에
나있었다.

“맨발로 어딜 밟아.”

“…….”

겨울은 무작정 자신을 따라 나오려는 가람을 저지하고서


신발장을 살폈다. 마음 같아서는 맨발로 데리고 나가고 싶지
만, 생산반을 돌아다니며 지저분해진 발로 집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아주머니도 못 나오시는데.

발이 꽤 커 보여서 신던 운동화는 맞지 않을 것 같아 구석
에 처박아 놓은 볼품없는 슬리퍼를 꺼내 던졌다. 탁! 뒹군 슬
리퍼가 떨어지며 먼지를 풍겼다. 넣어두고 신지 않던 슬리퍼
라 새것이긴 해도 먼지가 많이 쌓인 상태였다.

“신고 나와.”

“……네, 리안.”

겨울은 느릿느릿 신발을 신고 나온 가람의 등을 떠밀며 대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나와 추운지 가람의 발가락이 슬리퍼
안에서 꼬물꼬물 움직이는 게 훤히 보였다. 겨울은 애써 못
본 체하며 차고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집에만 있으면 몰
라도 앞으로 같은 회사로 출근시켜야 하니 멀쩡한 옷 몇 가
지는 구비해 둬야겠다. 수인 뒷바라지는 정말 하기 싫었는
데, 불가피하게 붙을 주인이라는 꼬리표를 감당하려면 수인
도 그에 맞게 꾸밀 수밖에 없을 듯했다.

겨울이 시동을 걸고 느려터진 가람을 기다리는 와중, 뒷좌


석 문이 벌컥 열렸다. 겨울은 그가 올라타기 전에 언성을 높
여 명령했다.

“야, 앞에 타.”

저게 진짜……. 말을 섞기 싫은데 꼭 하게 만든다. 겨울은


조수석에 올라타 멀뚱멀뚱 차 안을 구경하는 가람에게 손짓
하며 짜증스레 말했다.

“거기 안전벨트 당겨서 메.”

“이, 이거요……?”

“어, 당기라고.”

“어떻게…….”

“하…….”
겨울은 가람이 길게 당긴 안전벨트를 거칠게 빼앗아 반대
편에 철컥 꽂았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애인한테나 하는 짓
을 수인에게 하고 있는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 한심스러웠다.
겨울은 치밀어 오르는 자괴감을 억누르며 천천히 후진했다.
핸들을 돌릴 때마다 신기하단 듯 따라붙는 시선이 손가락에
진득하게 눌어붙었다. 이대로 운전했다가는 사고라도 날 것
같았다.

“……도착할 때까지 눈 감고 있어.”

“네에…….”

가람은 허벅지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린 채 살포시 눈꺼풀


을 닫았다.

“…….”

신호에 멈춘 겨울이 곁눈질로 가람을 흘끔거렸다. 생전 못


봤을 도시 광경이 궁금하긴 한지 브레이크를 밟을 때면 움찔
거리는 속눈썹이 꽤 웃겼다. 그나저나 씻겼어야 했나. 대강
사람답게 입히긴 했으나 관리 안 한 티가 날까 봐 걱정이었
다.

겨울은 초조한 듯 검지로 핸들을 두드리며 그를 찬찬히 훑


었다. 집에 온 지 며칠 된 지금,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는데
도 이상한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피부도 깨
끗하고… 머리카락이 기름지지도 않았다. 숍에서 씻는 방법
은 배워온 건가. 궁금해진 겨울이 대뜸 물었다.

“너 씻었어?”

“네? 네…….”

“언제? 씻을 줄 알아?”
“네, 알아요… 밤에 씻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다. 자신이 보기에도 꾀죄죄했던 모양이


지. 잠든 밤에 몰래 움직인 게 걸리지만 알아서 씻었으니 이
번은 넘어가기로 했다. 겨울이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는 가람
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눈 뜨라고 했나?”

“…….”

슬쩍 벌어진 눈꺼풀 사이로 마주한 눈망울이 흔들리고, 가


람이 눈을 꾹 감았다. 긴 속눈썹이 세찬 겨울바람을 맞는 갈
대처럼 바들바들 요동쳤다. 겨울은 시선을 거두며 부드러이
액셀을 눌러 밟았다.

“너 가서도 이런 식으로 굴면 그땐 내가 케어 못 해. 알아
서 한 번에 알아들어.”

“네, 리안…….”

가람이 기가 죽은 듯 고개를 푹 숙이자 긴 머리카락이 스


르르 쏟아지며 얼굴을 가렸다. 겨울은 섬뜩한 그 모습을 보
며 창문을 슬쩍 내렸다. 찬바람이라도 맞아야 정신이 들 것
같았다. 일단 저 소름 끼치게 긴 머리카락부터 어떻게 해야
겠다.

가람을 데리고 직원의 시선을 피해 겨우 로비를 통과한 겨


울은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긴 숨을 내쉬었다.
출입증도 끊었겠다, 당분간은 지하에서 바로 출근시켜야겠
다. 주도훈 말대로 자신이 데려온 수인이라 수월하게 경비를
지나올 수 있었지만, 회사까지 데려왔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추운 날씨에 식은땀이 났다.
24시간 내내 돌아가는 생산반은 소란스럽고 공기가 탁했
다. 지하 3층에 내려온 겨울은 당직인 담당자를 찾아 두리번
거렸다. 말로만 들었지, 처음 온 곳이라 굉장히 낯설었다. 열
심히 일하는 수인 사이에 위치한 사무실을 발견한 겨울은 발
을 빨리했다. 부딪치는 연장 소리, 수인들의 기합 소리 등 정
신 사나워서 오래 있을 곳은 못 되었다.

“담당자님.”

사무실에 들어온 겨울이 유리 벽을 두드리며 담당자를 불


렀다. 나태하게 의자에 눕다시피 앉아있던 남자가 몸을 벌떡
일으켜 겨울을 맞이했다.

“아이구, 어디에서 오셨어요?”

“경영기획팀에서 왔습니다. 주겨울 팀장이라고 합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김철중입니다. 위층 팀장님께서 여기


는 어쩐 일로……?”

기사에서나 봤던 ‘주겨울’이라는 이름에 놀란 김철중 주임


은 겨울이 인사치레로 내민 손을 맞잡으며 어리둥절하게 물
었다. 겨울은 자신을 졸졸 따라온 가람을 가리켰다.

“죄송하지만 수인 하나 작업에 투입할 수 있을까요?”

“수인이요? 주 팀장님 수인인가요?”

“네, 이력서는 여기. 밑바닥부터 교육시켜도 상관없습니


다.”

겨울이 가방에서 이력서를 꺼내 내밀었다. 전날 밤 대충


휘갈긴 이력서에 볼 만한 정보라고는 나이와 이름뿐이었다.
김철중이 흐음, 하며 백지와 비슷한 이력서를 훑었다.

“진짜 밑바닥부터 시켜야겠는데요? 어디 보자.”


김철중이 겨울 뒤에서 꼼지락거리는 가람의 패딩을 열고
몸 여기저기를 만지작댔다. 얼굴만 보고 깡마를 거라 예상한
몸은 의외로 두툼하고 단단했다. 이 정도 근육이면 경력은
없지만 몸으로 하는 일은 금방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성인 수인이 더 필요하기도 했고.

“자리 남는 곳이 있긴 한데… 일단 알겠습니다. 맡아두죠.”

“다행이네요.”

“그런데 주 팀장님이 아끼는 수인은 아닌가 봅니다.”

“예?”

겨울이 바닥에 발을 떡 붙인 가람의 등을 밀다 말고 되물


었다. 역시 복장에서 티가 났나.

“보통 기본예절이나 사회성 기르는 데 신경 좀 써달라고


하시거든요. 나 참, 여기가 수인 유치원도 아니고… 웃기지
않습니까? 역시 주 팀장님은 듣던 대로 좀 다르십니다.”

뭘 들은 건지는 몰라도 이번엔 좋은 얘기 같다. 그래 봤자


어린놈이 나쁜 소리 안 들으려고 독하게 일만 한다 했겠지.
위선적인 사람을 수두룩 봐온 겨울이 힘겹게 입매를 끌어올
리며 선한 미소로 많은 대답을 생략했다.

“……퇴근 시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인계 부탁드립니다.”

“예, 걱정 마세요. 들어가십쇼.”

으으, 피곤해. 퇴근 늦어지겠네. 사무실에서 나온 겨울이


덜 닫힌 문틈 사이로 들리는 김 주임의 혼잣말에 걸음을 멈
칫했다. 권력을 남용하는 주도훈처럼 군 적은 처음이라 마음
이 불편했다. 너무 급하게 결정했나. 이미 수인을 끌고 와서
생산반에 맡겼는데 살짝 후회가 되었다. 주도훈에게 말린 기
분이었다.

하지만 벌써 일어난 일이다. 겨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올라왔다. 앞으로 더욱 악독하게 굴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이깟 수인과 관련된 일에 감정 소모를 해서는 안
됐다.

어릴 적 수인과 안 좋은 기억 탓에 자꾸만 가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겨울은 억지로 그를 떠올렸다. 그리고 수인과 사람
을 가르는 선을 흐리지 않도록 계속 되뇌고 되뇌었다. 밑 빠
진 독이나 다름없었다.

***

겨울은 팀원이 모두 퇴근하고 느지막이 생산반에 내려왔


다. 이곳은 낮인지 밤인지 모를 정도로 여전히 바빴다. 사무
실에 가기 전에 둘러본 작업장에는 수인들이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그중 가람은 보이지 않았다.

“…….”

교육은 잘 받았으려나 모르겠다. 겨울은 뒤늦게야 막무가


내로 맡겨둔 가람을 떠올렸다. 애절한 눈빛과 가지 말란 듯
안쓰러운 손짓. 점심시간에 잠깐 업무에서 숨 돌릴 때 빼고
는 떠오르지 않던 얼굴이 생각났다. 담당자에게서 연락이 오
지 않은 거로 보아하니 사고는 안 친 듯한데, 앞으로 생산반
에 꾸준히 맡길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겨울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한 손으로 피곤한 눈


가를 꾸욱 눌렀다. 생산반은 조명이 워낙 세서 종일 컴퓨터
만 보던 눈이 지끈거렸다. 그리고 탁하고 퀴퀴한 공기 때문
에 호흡마저 답답했다. 정말 기분 나쁜 곳이다.

“아……!”

사무실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였다. 작업물을 들고 가던


수인 하나가 겨울과 부딪쳤다. 놀란 겨울은 아무런 타격도
없이 급히 물러났지만, 무거운 것을 들고 있던 수인은 무게
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죄, 죄송합니다…….”

겨울이 빤히 바라보자, 상대방이 수인이 아님을 확인한 그


는 안절부절못하며 사과를 건넸다. 겨울은 그와 닿은 부근을
툭 털어내며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수인 얼굴이 엉망이
었다. 작업을 하다 다친 건지, 담당자에게 교육받으며 혼난
건진 몰라도 앳된 얼굴에 긁히고 딱지 앉은 상처가 가득했
다.

“…….”

겨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치 보는 수인을 지나쳐 걸었


다. 사과를 받는 것도 웃길 거다. 누가 잘못을 했든 간에 사
회적으로 수인의 위치는 ‘을’이다.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벅저벅 걸으니 그제야 뒤에서 허둥
지둥 짐을 챙기는 수인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 아, 주 팀장님이시구나. 안녕하세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니 한가로이 컵라면을 먹던 담당


자가 먼저 겨울에게 알은체했다. 묵례로 가볍게 인사한 겨울
이 말문을 떼려 하자, 입을 닦던 그가 먼저 일어나 다시 사무
실 문을 열었다.
“주 팀장님 수인은 업무 시간 초과해서 휴게실에 앉혀뒀어
요.”

“휴게실이요?”

“예, 이쪽으로 오세요.”

겨울이 의아한 얼굴로 담당자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휴


게실이라니. 엄연히 작업장인 만큼 수인에게 제공하는 편의
시설도 있는 건가. 의외였다.

“12번, 나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던 것도 잠시였다. 어둑한 컨테이너


입구 앞에 멈춰선 담당자가 크게 소리쳤다. 휴게실이라고 해
서 상상했던 아늑한 곳과는 정반대였다. 컨테이너 안에 두
줄로 나열된 의자에 기운 없는 수인들이 드문드문 앉아있었
다.

“…….”

난데없는 고함에 놀란 겨울이 어둠 속에서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오는 남자를 주시했다. 자신의 수인인 가람이었다.
거친 명령에 억지로 발을 움직여 나온 그는 겨울을 보자마자
눈망울에 생기가 반짝 돌았다. 겨울은 기분 나쁜 눈빛에 그
가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자신을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옷은…….”

“아, 사복은 사무실에 있을 텐데 갖다드릴게요.”

가람의 옷은 오전과 달랐다. 담당자가 작업복으로 갈아입


힌 모양이었다. 점프 슈트로 보이는 옷은 오로지 노동을 위
한 것이었다. 인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겨울은 길이
가 짧아 발목이 드러난 가람을 길게 훑었다. 배설 기관 부분
만 여닫을 수 있도록 지퍼가 달린 옷에는 짙은 주황색으로
가슴과 등에 JUONE 기업 로고가 크게 박혀있었다.

“괜찮습니다. 이대로 갈게요.”

겨울이 거절하자 돌아서던 담당자가 멈칫하며 고개를 끄


덕였다.

“내일 퇴근할 때 12번 손에 들려 보낼게요.”

“네.”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담당자는 사무실에 불어 터진 컵라면이 신경 쓰였는지 뒤


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쿵! 사무실 문 닫히는 소리와 함
께 겨울도 걸음을 뗐다.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

아까까지 나지 않던 채찍 소리가 들리고 작업장에 낮게 깔


린 피비린내가 은은히 코끝을 맴돌았다. 비릿한 폭력의 냄새
였다.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집에 도착한 겨울은 곧장 제


자리를 찾아 쪼그려 앉는 가람을 응시했다. 첫 교육치고 너
무 얌전한 탓이었다.

“맞았냐.”

“…….”

지금 보니 뺨이라도 맞은 듯 오른쪽 얼굴이 발갛다. 겨울


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업복 지퍼를 내리고 힘을 주어
옷을 끌어 내렸다.
붉은 자국이 어깨너머 등까지 길게 나있었다. 고통이 느껴
진다. 보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학대 흔적이었다. 순
간 짜증이 난 겨울이 옷깃을 탁 내치자, 가람이 흔들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자존심 부려서 피해 보는 건 너야.”

“……미안해요, 리안.”

“처신 잘해. 난 고작 너 때문에 기사에 실리고 싶지 않거


든.”

“네…….”

오늘 교육이 효과가 있긴 한가 보다. 평소보다 대답이 빠


릿빠릿했다. 겨울은 작업복에 검게 묻은 먼지를 보며 돌아섰
다. 괜히 자신이 찝찝해지는 기분이었다. 저녁밥이고 뭐고
당장 샤워가 하고 싶어졌다.

그때였다. 가람이 겨울의 바짓단을 붙잡으며 말했다.

“리, 리안.”

“……뭐 하는 거야. 안 놔?”

겨울의 냉담한 반응에 놓을 듯 꼼지락거리던 가람의 손이


다시금 세게 말렸다. 빳빳하게 다린 바지에 주름이 졌다.

“거기 가기 싫어요…….”

“…….”

“안 가고 싶어요, 리안… 잘못했어요. 안 가면 안 돼


요……?”

가람이 애절한 음성으로 간청했다. 당황한 겨울은 빠져들


듯 검은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다 부담스러운 손을 쳐냈다.
“정신 나갔어?”

“리안…….”

“내가 그 부탁을 들어줄 거라 생각하는 거야?”

“…….”

가람이 입술을 감춰 물며 고개를 숙였다. 겨울은 자신에게


의지하는 수인이 불편하고 서먹했다. 첫날부터 이러면 곤란
한데. 얌전한가 싶더니 생산반이 두려워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자존심 센 수인이라도 매 몇 대면
빌빌 기는 모습이 신기하고도 보기 껄끄러웠다.

“하…….”

기어이 울먹이는 가람을 무시하고 안방에 들어온 겨울은


샤워를 하고 나와 머리를 탈탈 털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생산반에 맡기면 고민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가기 싫다고 떼
를 쓰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

거실에는 여전히 자신을 봐달라는 듯 주저앉은 상처투성


이 수인이 있었다.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보기 싫고 껄끄
러운데 신경은 온통 그에게로 쏠렸다. 씨발, 진짜. 속으로 욕
설을 읊조린 겨울은 발길을 돌려 거실 수납장에서 구급상자
를 꺼냈다. 그리고 상처에 바를 만한 연고를 찾아 가람의 앞
에 무심히 던졌다.

“발라.”

“……네?”

“상처에 바르라고. 내일도 징징거리는 거 보기 싫으니까.”

“……네. ……고마워요, 리안.”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 참고 느릿느릿 감사 인사를 전
한 가람이 연고를 손에 쥐자 겨울은 가차 없이 등을 보였다.
친절은 여기까지란 의미였다. 처음엔 힘들더라도 꾸준한 고
통이 무뎌지듯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수인이 다시
는 떼쓰는 아이처럼 굴지 않기를 바랐다.

차르르륵.

겨울은 오늘 회사에서 챙겨온 신상 사료를 그릇에 부으며


포장지를 읽었다. 필수 영양 요소가 듬뿍 들어갔다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래 봤자 맛은 더럽게 없겠지. 호기심에 먹었
다는 사원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사람 먹을 것은 못 된
다며 낄낄거리니 조용하던 사무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
었다. 겨울만 빼고서.

애초에 ‘수인’이라는 단어를 뜻풀이하면 짐승인간이지만,


의미와 다르게 세상은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
취급은커녕 괴물 또는 노예, 운 좋으면 애완동물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것을 못 본 체하며 지내온 겨울은 최근 들어 뼈
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 접근 금지라고 쓰인 팻말이 있는
곳에 스스로 뛰어든 기분이었다. 더럽고 찝찝하고 누군가 자
신을 미행하는 것처럼 불쾌했다.

이 길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무한한 어둠일까, 한 줄기 찬


란한 빛의 세상일까. 마음가짐에 따른 문제는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겨울은 텁텁한 사료 냄새 탓에 기침을 콜록대
며 겉만 번지르르한 포장지를 쓰레기통에 욱여넣었다. 그리
고 사료가 불도록 물 반 컵도 채워 넣었다. 생쌀을 퍼먹듯 오
독오독 씹어먹는 소리가 싫어서였다.

겨울은 저녁을 다 먹고 그릇을 건넸다. 콩알만 한 사료가


수분을 머금고 퉁퉁 불어있었다.
“뭐 해, 안 받고.”

“소, 손이 안 닿아서요…….”

가람은 연고를 바른 손가락을 등 어딘가에 문지르는 중이


었다. 하얀 연고가 작업복과 상처를 빗겨 난 곳에 엉망으로
묻었다. 그는 겨울이 빤히 쳐다보자, 연고를 내려놓고 예의
바르게 양손을 모아 내밀었다. 하지만 겨울은 그릇을 던지듯
내려놓고 가람이 벗다 만 작업복을 훌렁 벗겼다. 아까는 슬
쩍 봐서 몰랐지만, 상처가 꽤 크고 깊었다. 벌써 짙은 멍이
든 곳도 있었다.

“리, 리안.”

“덧나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나도 좋아서 해주는 거 아니


야.”

가슴팍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옷을 걷은 겨울은 손가락에


연고를 듬뿍 짜서 길게 난 상처에 바르기 시작했다. 그 전에
좀 씻으면 좋으련만 그걸 기다릴 만큼의 포용력은 없었다.
일찍 출근해서 원치 않은 야근까지 한 자신도 꽤 피곤한 상
태였으니 말이다.

“……아파요.”

살갗이 까진 부분에 연고를 옅게 바르자, 가람이 어깨를


움찔거리며 칭얼댔다. 겨울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수인
의 어리광 따위는 길고양이가 밥 달라고 우는 것보다 못했
다. 주인이 아니라고 괜히 말했나. 상황은 봐가면서 입을 열
어야지. 주도훈은 하필이면 이런 놈을 데려와서…….

겨울은 속으로 눈치 없는 가람을 힐난하며 손에 남은 연고


를 넓은 등짝에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근처에 널린 옷을 던
져주었다. 첫날 상자에 들어있던 여분의 옷이었다.
“갈아입어. 그리고 이왕이면 새벽 일찍 일어나서 씻어. 난
내 집 더럽게 만드는 꼴 못 봐.”

“네… 리안.”

“불 끌 테니까 사료는 알아서 챙겨 먹어. 볼 수 있잖아, 너


희는.”

가람이 짐승처럼 안광을 빛내며 어둠 속에서 사료를 씹어


먹는 상상을 하니 소름이 돋았다. 겨울이 잽싸게 거실 불을
끄고 아늑한 안방으로 들어갔다.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
었다.

달빛마저 구름이 가려 어둠 한가운데에서 노오란 눈이 반


짝였다. 가람은 쾅 닫힌 문을 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잘 자요, 리안.”

온기가 닿았던 살갗이 미지근히 식어간다. 그 어느 때보다


공허한 밤이었다.
Twilight of The City (1)

해가 뜨기 직전, 한없이 차가운 어둠 속에서 무겁고 짙은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새벽 기운에 바르르 떨던 겨울은 몸
을 웅크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후끈한 체온이 얼굴에 확
날아들었지만 끈적한 잠은 달아나지 않았다.

***

“어머니… 있어요?”

그날은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린 겨울이 일찍


조퇴를 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고작 12살의 몸으로 문제집이
가득 든 책가방을 메고 돌아온 아이는 방에 올라갈 힘도 남
아있지 않아 널찍한 소파에 몸을 뉘며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 도련님!”

하지만 아버지와 주도훈이 없는 집을 지킬 리 없는 새어머


니는 외출한 지 오래인 듯했다. 앓는 소리를 듣고 부엌에서
뛰쳐나온 아주머니가 겨울의 가방을 벗기며 안색을 살폈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집에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아이
가 심상치 않아 보인 탓이다.

“이걸 어째… 열이 펄펄 끓잖아. 금방 사모님한테 연락드


릴게요.”
“……괜찮아요.”

“괜찮기는!”

아주머니는 겨울의 앞머리를 홱 넘겨 이마를 다시 짚었다.


겨울은 차가운 기운에 어깨를 움츠렸다. 급히 나오느라 물기
를 제대로 닦지 않은 아주머니의 손이 이마를 시원하게 식혔
다.

“그냥… 약만 먹으면 될 것 같아요. 어머니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겨울이 아주머니의 손목을 붙잡고서 꿍얼꿍얼 속삭였다.


한창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에 당연하게 부려야 할
어리광은 꾹 참았다. 눈치가 보였다. 겉으로는 따스하나 실
은 굉장히 귀찮아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럴 바에 혼자
서 이겨내는 것이 훨씬 속 편했다.

“……에휴.”

중학생인 아들이 있다던 아주머니는 자기 자식이 생각나


는지 짙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알았다고 방에 올라가서 조금
만 기다리라며 겨울을 안심시켰다.

“크읏…….”

겨울이 힘없이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오르는데, 어


디선가 그르릉 목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내려다본
곳에는 6개월째 함께 사는 수인 에이든이 있었다. 에이든은
빛이 들지 않는 아래층 구석에서 등을 잔뜩 굽힌 채 헐떡거
렸다.

“…….”
에이든도 감기에 걸린 걸까. 겨울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와
중에 에이든이 걱정되었다. 새어머니가 무작정 데려온 그는
남들 앞에서 귀염받는 것 같아도 집 안에서는 찬밥 신세였
다. 주기적으로 병원에 간다지만 당장 그가 아프다고 해서
신경 쓸 자는 없을 것이다. 겨울은 왠지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해 계단 손잡이를 두드리며 그의 이목을 끌었다.

“에이든.”

“…….”

“에이든, 어디 아파?”

겨울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에이든을 확인하려고 얼굴


을 조금 더 내밀 때였다. 인기척을 느낀 에이든이 고개를 홱
틀어 위를 쳐다보았다.

“에, 에이든…….”

“크으…….”

겨울의 몸이 바짝 굳었다. 에이든의 눈빛이 아주 사나웠


다. 다시 한번 불렀다가는 곧장 계단을 올라와 제 목을 물어
뜯을 것 같았다. 입가에는 반질반질 침이 흐르고, 어느새 튀
어나온 기다란 꼬리가 사냥감을 홀리듯 공중에서 살랑살랑
춤을 췄다.

“…….”

긴장한 겨울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항상 순하게 굴던


에이든이 아니었다. 어딘가 아픈 게 분명했다. 그래서 본능
을 이기지 못하고 예민함을 잔뜩 뿜어내고 있는 듯했다. 겨
울은 그를 달래려고 용기 내 입을 뗐다.

“에이든, 아프면 말…….”


쿵!

그렇지만 에이든은 겨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잽싸게 좁은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세게 닫았다. 어찌나 빠른지 문
이 닫히고서야 그가 일으킨 바람이 휑 불었다. 감기만 아니
었어도 에이든 방으로 가서 상태를 마저 확인했겠지만, 겨울
은 그럴 기운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방으로 올라와 아주머
니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머니가 차갑게 적신 수건과 감기약


을 챙겨왔다.

“도련님. 도련님, 일어나 봐요.”

아주머니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이불을 대충 감싼 채 끙


끙 앓는 겨울을 억지로 일으켜 입에 알약을 들이밀었다. 겨
울은 더운 숨을 내쉬며 알약과 미지근한 물을 받아먹었다.
빈속에 꿀렁꿀렁 넘어가는 액체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에이든도 약을 먹여야 하는데…….

이마에 축축한 수건이 닿았다. 겨울은 저 대신 에이든을


챙겨달란 말도 하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머리에 오른
열이 몸으로 싸악 내려가는 바람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네 시간쯤 내리 잤을까, 겨울이 눈꺼풀을 스르르 들어 올


렸다. 아직 낮이었다. 아주머니가 쳐둔 커튼 사이로 환한 빛
이 여전히 내리쬐고 있었다. 겨울은 냉기가 식다 못해 미지
근해진 수건을 바닥으로 던졌다. 팔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
니 약을 먹은 효과가 있긴 한가 보다. 몸이 한결 가벼웠다.

손등으로 얼굴에 맺힌 식은땀과 물기를 대충 닦아낸 겨울


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이불만 덮고 누워있으려니
덥고 답답했다. 열이 내리니 슬슬 허기가 졌다. 지금 밥을 먹
으면 늦은 점심과 이른 저녁 사이라서 가족과 함께하진 못하
겠지만, 미련하게 참았다가 또 아프고 싶진 않았다.

“아주머니.”

1층으로 내려온 겨울이 아주머니를 찾았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지 부엌과 거실에는 보이지 않았다.
겨울은 혼자 챙겨 먹으려다가 아직 낫지 않은 몸을 움직이긴
귀찮아서 소파에 앉아 아주머니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
다. 밥 대신 누군가 정성스레 만들어주는 죽이 먹고 싶기도
했고. 항상 주변에서 의연하고 씩씩하다는 말만 들어온 겨울
도 가끔은 칭얼대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어리광은
새어머니가 아닌 아주머니께서 아주 잘 받아주었다.

“……아.”

멍하니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던 겨울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에이든은 괜찮을까. 아무리 친절한 아주머니라
도 수인인 에이든을 챙겨주진 않았을 텐데. 겨울은 방에 홀
로 있을 그가 신경 쓰였다. 아파서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었
다. 새어머니가 귀여운 인형처럼 다루는 에이든이 죽으면 집
안 분위기는 암울해질 거고, 그렇게 되면 제게 쏟아지는 눈
칫밥도 감당하기 어려워질 테다.

겨울은 창고나 다름없는 에이든 방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살며시 문고리를 돌렸다. 빛이 들지 않는 방은 낮인지 밤인
지 모를 정도로 캄캄했다.

“에이든?”

문밖에서 에이든을 불렀으나 대답은 없었다. 방에 없는 건


가 싶어 한 발자국 걷자, 바로 발에 무언가 채였다. 에이든의
다리였다. 그는 문 앞에서 가로로 길게 누워 잠든 것 같았다.
겨울이 그 다리를 툭툭 흔들며 그를 깨웠다.

“에이든, 일어나.”

후욱. 에이든이 자신의 이름에 반응하며 콧김을 거칠게 내


뿜었다. 겨울은 그 소리에 안도했다. 다행히 죽진 않은 모양
이다.

“일어나라니까.”

반복되는 명령에 에이든이 그제야 상체를 일으키며 어린


주인을 마주했다. 그리고 겨울은 흠칫 놀라 그에게서 몸을
물렀다.

“크르륵…….”

어둠에서 빛나는 에이든의 눈은 여전히 영화에서 나오는


괴물처럼 초점이 나간 상태였다. 게다가 보송보송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가 본래 가진 얼룩덜룩한 무늬가 피부 위로 옅
게 비치고 있었다. 사람과 짐승이 공존하는 얼굴은 너무나
기이했다.

“많이 아파? 약, 약 가져올게.”

겁먹은 겨울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아무렇지 않게 말


을 건넸다. 동물로 변하려는 수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
니, 처음일 수밖에 없었다. 수인은 원래 몸집이 작든 크든 본
능을 죽이고 인간으로만 살아야 한다. 순수한 짐승과 섞여
사회에 혼란을 주지 말고 요괴 같은 모습을 숨기고 조용히
살라는 것이다. 그 상식은 수인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다. 본능
으로만 살아가는 짐승이면 몰라도 어느 정도 인간의 지능이
있는 수인들은 자기 목숨에 위협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으
니까. 간단히 말하면 생존 본능이었다. 고로 수인은 인간에
게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

하지만 에이든은 그 통념을 몽땅 무시하고 자리를 벗어나


려는 겨울의 발목을 낚아챘다.

“읏……. 에이든!”

놀란 겨울이 넘어지며 그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에이든은 죽은 목숨이다. 명령 불복종도 모
자라 변이의 기미를 보이고 주인에게 겁을 주는 행위는 안락
사를 당해도 쌌다. 겨울은 덜덜 떠는 목소리로 불쌍한 그에
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왜 그러는 거야… 정신 차려, 에이든. 이거 놔. 나야, 겨울


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얼른…….”

“…….”

“놓으라니까!”

겨울이 발버둥 치자 에이든이 발목을 놓쳤다. 그 틈을 노


린 겨울이 잽싸게 뒷걸음질 쳤다. 앉은 상태라 얼마 가진 못
했어도 에이든과 거리를 벌릴 수는 있었다. 이제 일어나서
뛰기만 하면 되었다. 뛰어서 계단을 오르고 방에 들어가 문
을 잠그면 안전할 거다. 그리고 그동안 에이든이 사람으로
돌아오길 기다릴 계획이었다. 아버지에겐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서.

“……아윽!”

안광을 번뜩이는 에이든의 눈을 피하며 뒤돌아 뛰는 순간


이었다. 커다란 몸집이 겨울의 등을 덮쳤다. 높이 날아들어
잡은 탓에 단번에 무너진 겨울이 쿠당탕, 큰 소리를 내며 넘
어졌다. 겨우 초등학생이 견딜 무게가 아니었다. 에이든의
덩치 때문에 점차 숨이 막혔다.

“컥, 에, 에이든… 지금 뭐 하……! 아아악!”

에이든이 날카롭게 튀어나온 손톱으로 등을 마구 긁어댔


다. 얇은 여름 잠옷이 그의 손톱에 걸려 찢기고 그 사이로 드
러난 여린 살결에 기다란 상처를 남겼다. 몇 초도 되지 않아
너덜너덜해진 상의 조각이 바닥에 흩어졌다.

“흐, 으윽… 아악!”

공포가 극에 달한 겨울이 울며 비명을 질렀다. 죽음의 문


턱에 선 것 같았다. 비릿한 피 냄새를 맡고 헛구역질을 하자,
정신을 잃은 채 제 등을 공격하던 에이든이 숨을 헉헉거리며
목덜미에 코를 깊게 묻었다. 육식 동물은 사냥감의 목을 물
어 죽인다던데 그 순간이 머지않은 듯했다. 시퍼렇게 솟은
송곳니가 살결을 스쳤다.

“겨울아! 겨, 경비… 경비!”

겨울이 기침을 콜록대며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집안일을


마치고 거실로 돌아온 아주머니가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자
마자 집을 뛰쳐나가 경비를 불렀다. 얼마 안 가 들이닥친 경
비가 흥분한 에이든을 공격해 겨울에게서 떼어냈다. 그러던
중에 깜짝 놀란 에이든이 잡히지 않으려고 겨울의 허리를 콱
물기도 했다. 축 늘어진 겨울은 그 난장판을 지켜보다 서서
히 눈을 감았다. 등이 불타는 것 같은 와중에도 졸음이 몰려
왔다.

다행히 최악은 면했다. 운 나쁘게 들킨 바람에 앞으로 에


이든은 볼 수 없을 테지만 목숨은 건졌으니 되었다. 경비에
게 포박되어 끌려 나가던 에이든이 미안하다고 흐느끼는 소
리를 얼핏 들은 듯했으나, 겨울은 자신을 살피며 아버지에게
연락하는 아주머니의 호들갑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

왠지 모를 소음에 겨울이 잠에서 깼다. 시간을 보니 아직


알람이 울리려면 한 시간이나 더 남은 때였다. 정적 사이로
희미한 물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가람이 욕실에서 씻는 모
양이었다. 겨울은 간만에 시달린 악몽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쭈욱 켰다. 길고도 짧은 꿈이었다. 집에 수인을 들여서인지
정말 오랜만에 과거의 기억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몽롱하게
남은 불안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에이든이 날뛴 이유는 발정이라고 했다. 심한 상처 때문에


입원한 동안 부모님이 대화하는 것을 엿들어서 알고 있었다.
분노하며 책임을 떠넘기는 아버지와 왜 같은 수인이 아닌 아
이를 공격했냐고 의문을 품는 새어머니. 그 당시에는 두 분
모두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 같았으나 마냥 그런 것만은 아니
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사업을 물려받을 자식이 온전치 못함
에 불안해했고, 어머니는 관심을 받으려고 일부러 수인을 자
극한 것이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추측을 들이밀었다.

성인이 되어 생각해 보니 충분히 서운하고 화를 낼 만한


부분이었지만, 굳이 그 일을 끄집어내서 억지로 화목함을 유
지하는 집안을 망가뜨리고 싶진 않았다. 그랬다가는 주도훈
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겨울은 또 한 가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은 새


어머니가 깜빡 잊고 에이든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는 점.
수인이 발정기가 다가오면 병원에서 미리 약물 주사를 맞혀
그 시기를 억눌러야 하는데, 돈 많은 친구들과 놀기 바빴던
어머니가 병원에서 온 문자를 못 보고 넘겨 그 사달이 난 것
이었다.

물론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이제 와서 새어머니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허리와 등에 남은 흉터도 옅어진 지 오래고, 그
트라우마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싶진 않으니까. 얘기를 꺼내
는 순간 주도훈이 달려와 제 약점을 콕콕 들쑤실 게 분명했
다.

트라우마로 남은 그 사건은 조용히 넘어갔다. 나중에 주도


훈에게 듣기로는 에이든이 안락사 전에 아버지에게 죽기 직
전까지 구타를 당했다고 하던데 그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
겠다. 워낙 신뢰가 안 가는 놈의 말이라 가볍게 듣고 흘렸다.
또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할 분이 아니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 이후 몇 년간 본가에 수인을 들이는 일은 없었지만, 단지
두 아들의 학업을 위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겨울은 침구를 정리하고 가볍게 씻었다. 출근 준비하기엔


이르긴 하지만 찝찝한 기분으로 더 자는 건 무리였다. 어렴
풋이 떠오르는 에이든의 얼굴을 얼른 잊고 싶었다.

안방에서 나오자 말끔하게 씻은 가람이 겨울을 보고 반기


는 눈치였다. 이른 아침밥을 먹을 수 있어 좋아하는 것 같았
다. 겨울은 줄곧 따라붙는 시선을 무시한 채 서재로 향했다.
어젯밤에 미처 못 한 업무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를 스쳐 지나가는 동안 희미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


는 것이 느껴졌다. 멈추어 설 의지는 없었다. 아침 식사 따위
먹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하…….”
겨울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신경 쓸 것이 너무나도 많
았다. 최근 들어 업무량이 늘었는데 수인까지 돌보려니 정신
적으로 피곤했다. 겨울은 책상 앞에 앉아 지끈거리는 관자놀
이를 문질렀다. 차라리 멋대로 집에 쳐들어온 주도훈과 말싸
움하는 쪽이 더 편할 듯했다. 한바탕 감정을 털어내면 한동
안은 후련했으니까.

겨울은 해가 완전히 뜨고 나서야 서재에서 나왔다. 그리고


오늘도 생산반에서 고생할 놈에게 사료 한 접시를 건넸다.
먹는 소리가 듣기 싫어 옷을 갈아입으러 가려는데, 가람이
다급히 목소리를 냈다.

“리안!”

겨울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가람은 어제 자신


이 준 연고를 내밀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미 혼자서 시도
했었는지 길쭉한 손가락에 허연 연고가 덕지덕지 묻은 상태
였다.

“……발라주세요.”

“…….”

순간 헛웃음이 날 뻔했다. 누가 보면 동거인인 줄 알겠다.


당당한 태도에 얼이 빠져 연고를 받지 않고 눈짓으로 물으니
가람이 나지막이 한마디 덧붙였다.

“아파요, 리안.”

“그래서?”

대답이 날카롭게 튀어 나갔다. 겨울은 끈적한 연고를 손에


쥐기 싫었다. 다정한 주인인 양 수인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이 싫었다. 한 번이 두세 번 되기 쉽다는 소리가 거짓이 아
니었다. 가람은 이미 한 번뿐인 주인의 손길이 그리운 모양
이었다. 불쌍한 척 눈꼬리를 내려뜨리고 맞춘 시선에서 간절
함이 느껴졌다.

“담당자한테 부탁해 보든지. 그리고 빈속으로 일하기 싫으


면 배나 채우지?”

겨울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가람의 곁을 스치며 매정하게


말했다. 어디선가 주도훈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괜한
오기가 생겼다. 수인의 손을 거친 연고를 쥐는 순간 자존심
을 내려놓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주도훈]

양반은 못 되는 자의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그리고 동


시에 초인종 소리가 쨍하니 머릿속을 후려쳤다. 아침부터 무
슨 말을 하려고 전화질인지 모르겠다. 받을 가치도 없다. 스
트레스에 민감한 겨울이 관자놀이를 매만지다 핸드폰을 주
머니에 쑤셔 넣고서는 인터폰을 확인했다.

“뭐 하냐, 지금?”

인터폰 화면 속에 보이는 건 다름 아닌 주도훈이었다. 그


는 여태 울리는 핸드폰을 귓가에 댄 채 능청스레 씨익 미소
지었다. 평소에도 멋대로 집을 드나드는 놈이지만 수인을 들
인 뒤로 방문 횟수가 급격히 는 것 같다. 무시하고 인터폰을
끄려는데, 주도훈이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차 좀 태워주라.

뻔뻔하기는 세계 최강인 듯싶다. 겨울이 헛웃음을 내뱉으


며 대답했다.
“네 차는 어디 버리고 찾아온 건데?”

―어제 여준이네서 애들이랑 밤새 술 마셨어. 머리 아파서


핸들을 잡을 수가 없다.

“여준이? 지금 차 태워달라고 거기서 여기까지 택시 타고


온 거야?”

최여준은 주도훈이 자주 어울리는 망나니 무리 중 한 명이


다. 올해는 정신 좀 차리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주도훈이 장
난처럼 웃으며 사람을 울리는 편이라면 최여준은 제 지위와
재물로 한 인격체를 무참히 짓누르는 편이었다. 결은 다른
듯해도 유유상종이다.

―걸어왔지.

“이 날씨에? 그 새끼가 널 그냥 보냈다고?”

―그럴 리가. 여준이가 그럴 놈이야?

그가 최여준과 어울리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또 있다.


아무리 양아치처럼 놀아도 어르신들이 개입하지 않고 자잘
한 사고는 돈으로 입막음하는 까닭과 같았다. 집안끼리 엮였
기 때문이다. 서먹하고 멀어져서 좋을 게 없는 사이. 주도훈
은 정작 친목을 유지해야 하는 겨울 대신 즐기며 그 모임에
출석하는 중이었다.

주도훈이 추위로 발개진 코끝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기사 붙여준다는 거 거절하고 내 발로 왔어. 최여준, 네


옆 동네로 이사 왔다고 했었잖아. 반년도 더 됐는데. 모임을
안 나오니 네가 알 리가 있겠냐.

“택시 타고 가.”
―그러지 말고 같이 출근하자. 너 보고 싶어서 걸어온 사
람한테 너무 매정하다.

“…….”

항상 재수 없게 구는 주제에 말투는 사뭇 다정하다. 겨울


은 시계를 힐끗대며 고민했다. 옥신각신하며 그를 다시 돌려
보내는 쪽이 더 힘들고 시간 낭비일 것 같았다. 긍정의 침묵
을 눈치챈 주도훈이 카메라를 톡톡 두드리며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깨끗한 아침 공기가 입김으로 후욱 퍼져 나왔다.

―겨울아, 형 추워. 일단 문부터 열자. 응?

철컥. 대문 잠금장치가 풀렸다. 될 대로 되라지. 겨울은 그


가 마당을 가로질러 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서둘러 출근 준비
를 마쳤다. 정작 현관문은 열지 않자 문밖으로 너무하다느니
춥다느니 지각하겠다느니… 징징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
다. 그 탓에 답지 않게 허둥지둥하며 가람을 데리고 집을 나
섰다.

“조용히 좀 해. 아침부터 민폐 끼칠 일 있어?”

“빨리 준비하긴 했나 보네.”

주도훈은 겨울의 힐난에도 히죽히죽 웃으며 엉킨 앞머리


를 검지로 슬쩍 넘겨주었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동생의 흐
트러진 모습은 꽤 오랜만이라 반가웠다.

“내가 운전할까?”

“술 마셨다며.”

“미안해서 그러지.”

“퍽이나. 사고 나기 싫으면 입 닫고 있어.”


겨울은 주도훈이 가람에게 괜한 시비를 거는 동안 차고에
서 차를 꺼냈다. 그리고 싸늘한 내부 공기를 데우려고 히터
를 트는데, 주도훈이 조수석 문을 연 가람을 밀치고 자연스
럽게 옆자리를 차지했다.

“겨울아, 저거랑 같이 출근하는 거야? 회사 기숙사는 두고


뭐 해?”

“……됐어.”

언제는 트라우마 극복용이라며 잘 키워보라더니. 회사에


달린 수인 기숙사에 보내지 않고 뭐 하냐는 눈빛으로 바라보
는 주도훈이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얼핏 듣기로는 기숙사
자리도 모자라서 한 방에 여럿 욱여넣고서 식사도 변변치 않
다던데. 보육원이나 다름없는 곳에 보내서 욕을 먹느니 불편
함 조금 감수하고 같이 생활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쪽이
이미지 메이킹에도 한몫할 테니까.

“야, 들개. 너 인생 폈다.”

“…….”

주도훈은 백미러로 어깨를 쥐고서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


리는 가람을 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가람은 별 대꾸 없이 아
랫입술만 말아 물었다. 짓궂은 주도훈 탓에 상처에 자극이
간 듯했다.

“씨발, 저게 어디서 인상을…….”

“그만해. 운전하잖아.”

“…….”

겨울은 안전벨트를 매다 말고 몸을 돌려 위협하는 주도훈


을 제지했다. 주도훈은 화를 참는 듯 창문에 팔을 기대고서
정면을 응시했다. 그렇게 몇 분간의 갑갑한 정적이 이어졌
다.

“주겨울.”

침묵을 깬 사람도 주도훈이었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음성


이 한껏 낮아져 있었다.

“저것들한테까지 착한 척할 필요 없어.”

“그런 적 없어.”

착한 척이라니. 그런 적은 정말 없다. 보여줄 사람도, 얻을


것도 없는데 내가 대체 왜? 목줄 채우고 나란히 산책하는 비
상식적인 인간들도 많은데 겨우 출근 같이하는 일로 잔소리
듣기엔 억울했다. 모든 상황을 꼬아보는 그가 신기할 따름이
었다. 겨울이 눈치 주듯 그에게 고개를 돌렸으나 주도훈은
무심히 입만 놀려댔다.

“네가 지하에서 밤낮으로 돌려서 병들어 죽어도 겨우 하루


치 이슈 감이라고.”

“…….”

하루가 뭐야. 반나절 갈까 말까지. 오히려 사람들은 재벌


사는 것도 우리와 비슷하다며 좋아할지도 몰라. 품에서 담배
를 꺼내어 입에 문 주도훈이 낮게 웅얼댔다. 차에서 불붙이
는 비신사적 짓은 안 한다며 필터만 잘근대는 모습이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새 걸로 갈아치우면 그만인 걸 몇 년 동안 마음에 담아두


고 있잖아. 가족들이 그걸 모를 줄 알아? 트라우마로 치부하
는 것도 한두 번이지. 진짜 구멍 따인 것도 아니면서.”

“야, 안 닥쳐?”
겨울이 빨간 신호에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언성을 높였다.
아슬아슬하다 싶더니 주도훈은 결국 선을 넘었다. 내부 공기
가 더욱 텁텁해졌다. 겨울은 히터를 끄고 창문을 내렸다. 좁
은 틈 사이로 침범한 칼바람이 분노로 달아오른 열을 재빠르
게 식혔다.

“너는 그게 문제야.”

그 모습에 픽 웃은 주도훈의 입술 사이로 쌉싸름한 담배


냄새가 옅게 풍겼다. 와중에 농담하듯 여유 부리는 태도 하
나는 인정해 줄 만했다. 운전만 아니었으면 멱살을 잡았을
테다. 겨울은 마지막으로 인내하며 숨을 뱉었다.

“또 이상한 소리 할 거면…….”

“정이 너무 많아.”

역시나 경고는 통하지 않았다. 찬바람이 머리를 마구 두드


린다. 오히려 패배한 듯한 기분이었다.

***

주도훈은 제 할 말을 모두 털어놓은 뒤에야 얻어맞을까 무


섭다며 먼저 회사로 도망쳤다. 미친 새끼. 이러려고 최여준
의 친절을 마다하고 시간 써가며 걸어온 건가 싶다. 겨울은
주차한 뒤에도 클래식을 들으며 단시간에 오른 스트레스를
가라앉히고서 생산반으로 향했다.

피비린내 나는 생산반은 이른 시각에도 분주했다. 밤을 지


새운 얼굴과 교대하는 멀끔한 담당자를 보며 겨울은 가람의
등을 슬며시 밀쳤다. 하지만 아직 손을 덜 탄 가람은 고집부
리듯 다리에 힘을 주고 출근을 거부했다.

“……싫어요.”

“네가 싫으면 어쩌게.”

“리안.”

“너랑 실랑이할 시간 없어.”

“리안한테 부탁 안 할게요. 집에 얌전히 있을게요. 멋대로


자리 옮기지도 않을게요.”

“……이거 안 놔?”

오늘따라 쌍으로 지랄이다. 겨울이 가람에게 잡힌 옷가지


를 매몰차게 털어냈다. 그러고서 혹여나 주름이 졌을까 봐
어루만지며 걸음을 옮겼다. 집에서는 보는 이가 없으니 웬만
하면 넘어가겠다만, 회장 아들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버젓이
선 회사에서는 조금 더 조심해야 했다. 사소한 행동이 십여
줄의 기사로 뜨는 것은 금방이니 말이다.

겨울이 사무실 유리 벽을 똑똑 두드리자, 얼굴을 확인한


담당자가 자리를 정리하다 말고 급히 뛰어나왔다. 그는 겨울
이 꾸벅 묵례를 하니 버벅대며 말을 꺼냈다.

“주 팀장님, 아침부터 어쩐 일로……. 수인은 그냥 작업장


에 놓고 가시면 되는데. 시간 되면 인원 체크하거든요.”

“안 가겠다고 해서요.”

“예? 아… 교육이 덜 된 모양입니다. 종종 반항이 심한 놈


들이 있어요. 그래도 일주일이면 다들 군기 바짝 드니까 걱
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 녀석이죠? 맡기고 가세요.”

“네.”
담당자는 가람을 향해 “어이!” 하고 호통쳤다. 작업장이 쩌
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였다. 작업 준비를 하던
수인들도 남자의 불같은 음성에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
고 눈치를 보았다.

“이리 와. 팀장님 고생시키지 말고.”

담당자가 손끝을 까딱이며 가람을 불렀다. 주인 앞이라 그


런지 등에 생채기를 남기던 것과 다르게 친절한 말투였다.

“…….”

여전히 출입구 앞에서 망설이던 가람이 겨울과 담당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저히 이 무
시무시한 공간에서 벗어날 만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듯했
다. 고분고분한 태도에 담당자도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입꼬
리를 씩 올렸다.

“들어가세요. 이놈은 조금 더 신경 써서 교육하겠습니다.”

“……네.”

겨울은 고개를 푹 숙인 가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대


답했다. 가련한 옆모습을 보니 자신이 몹쓸 짓을 하는 것처
럼 느껴졌다. 순간 주도훈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정이 많
다고? 터무니없는 말이다. 고작 며칠 함께 산 수인에게 정을
붙였을 리가 있나. 우중충하고 퀴퀴한 곳에 제 물건을 놓고
가는 일이 떨떠름할 뿐이다.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상처를
내고 강제 노동을 시키는 것이 진정으로 맞는 걸까.

겨울은 답답했다. 어쩌면 자신이 불편한 이유는 겉모습은


인간과 별다를 바 없는 수인을 학대하는 것에 반발심을 느끼
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정이
아니라 정의다. 그리고 인격체를 존중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직접 몸에 생채기를 내지 않았을 뿐, 당연히 수인을 하대하
는 가치관이 깔려있는데 섣불리 나섰다가는 비웃음만 살 게
뻔할 테지.

착한 척한다는 주도훈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까닭을 깨


달았다. 자신은 위선자였다. 겨울은 담당자를 뒤따르는 가람
의 어깨를 쥐어 잡았다. 그 찰나 호박색의 눈동자에서 희망
이 스쳤다. 개가 긴 시간을 거치며 인간에게 의존하는 성향
이 뚜렷해진 듯 수인도 마찬가지였다. 덩치도 큰 놈이 겁은
어찌나 많은지 고작 손길 한 번에 눈꺼풀이 번뜩 뜨였다.

인기척이 없어 담당자가 의아하게 돌아보자, 겨울이 덤덤


히 입을 뗐다.

“상처가 심해요. 환복 전에 치료 부탁드립니다.”

친절은 이 정도면 족하다. 겨울은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트라우마 극복은커녕 저것을 선물받은 후로 혼란스러움이
배가되었다.

복잡할 때는 머리를 비우고 일만 하는 게 최선이다. 팀원


들이 하나둘 떠나고 퇴근 시간을 넘기면서까지 일만 하던 겨
울은 어느덧 어둑해진 창밖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높은 빌
딩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은 꽤 멋졌다. 아쉽게도 주말에 겹쳤
던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났다. 아직 거두지 않은 형형
색색의 조명이 쭉 뻗은 거리를 빛냈다. 냇물처럼 흘러가는
차들과 바삐 움직이는 행인들. 보기만 해도 텅 빈 마음 한구
석이 채워지는 듯했다.

하루가 참 빠르게 흘렀다. 겨울은 허기진 배를 문지르며


코트를 챙겼다. 점심을 간단히 때워서 위가 요동쳤다. 어떻
게 한 명도 안 남지. 고생했다며 저녁 한 끼 하고 들어가면
좋을 텐데.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향한다만 이럴 때 보면 너
무 눈치 안 보는 건 아닌가 싶다. 한숨이 절로 터졌다. 연말
이긴 한가 보다. 누구보다 열심히 보낸 하루지만 모두 해이
해졌을 때 혼자서 업무에만 몰두하다 보니 넓은 사무실이 오
늘따라 더욱더 쓸쓸했다.

피곤한 눈꺼풀을 비비며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였다. 한


가함은 기가 막히게 알아채는 주도훈에게서 전화가 왔다. 겨
울은 아침 일을 떠올리며 받을지 말지 고민하다 핸드폰을 귓
가에 갖다 댔다. 안 받으면 또 집으로 찾아올 것 같아서였다.

―바로 받네?

“뭔데.”

주도훈도 순순한 겨울이 놀라운지 음성이 높게 튀었다.

―바로 받아준 건 너무 감사한데 예쁘게 좀 받아주면 덧나


냐?

“끊는다.”

―알았어, 미안, 미안. 장난도 못 치네.

혹시 퇴근도 같이하자고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겨울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걸었다. 그렇지만 다행
히도 주도훈의 주변 소음이 컸다. 회사가 아니라는 의미다.
하여간 승진은 엄청 신경 쓰면서 유흥은 포기 못 하는 놈이
다.

―너 곧 생일이잖아. 애들이 생일 파티 겸 송년회 하자는


데 어때?

“파티는 무슨 파티. 그런 거 언제 챙겼다고.”


―그래, 언제 챙겼다고. 다 너 오라고 하는 소리지. 그러니
까 참석해.

“싫어.”

겨울은 즉각 거절했다. 가봤자 득 될 거 하나 없는 모임이


다. 생일 파티는 무슨. 뒤에서 뒷이야기나 늘어놓던 놈들이
라는 걸 정말 모르는 줄 아는 모양이다. 상상만 해도 불편했
다.

―이번에 내가 못 가서 그래. 송년회에 JUONE 기업이 빠


지면 되겠어?

“왜 못 가?”

―모임 날짜가 겹쳐서. 늦게 갈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것


도 확신 못 해. 참석할 거지? 그동안 내가 너 대신 먹은 술만
해도 다섯 짝은 될 거다.

“……내가 부탁했냐?”

갑자기 자기 탓을 하는 바람에 겨울이 발끈했다. 일은 잘


해도 사교 모임은 통 나가지 않아서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곤
했는데, 그 빈자리를 티 나지 않게 메꾸던 인간이 주도훈이
었다. 미안한 마음은 없어도 가끔 숙취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덕분에 간 건강은 유지할 수 있어 고맙긴 했다. 아주 살
짝.

주도훈이 소란스러운 자리에서 벗어났는지 소음이 줄어들


고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부탁한 적은 없지. 그런데 난 부탁 좀 하려고.

“…….”

―안 들어주면 일 년간 출근 메이트.
“……자리는 끝까지 안 지킬 거야.”

운전석에 앉은 겨울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승낙했다. 어쩔


수 없었다. 평생 안 볼 사이도 아니거니와 언젠가는 꼭 마주
해야 하는 모임이었다. 갑작스레 일정이 생길 줄은 몰랐지
만.

―꼭 촐싹대야 들어준다니까. 주겨울, 너 이런 거 은근 즐


기지?

주도훈이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겨울은 깔끔히 무시하고


서 말을 이었다. 가만 보면 자신을 아주 싫어하는 것 같다가
도 친형제처럼 굴 때가 있다. 그는 그 괴리감을 느끼는 자신
을 놀려먹는 걸 즐기는 듯했다.

“날짜랑 시간, 장소는 문자로 보내.”

―어, 최여준이 홀 빌렸다더라. 너도 마음에 들 거야. 그래


도 나 없이 너무 재밌게 놀지 마라.

“그럴 일 없어… 끊는다. 운전해야 돼.”

겨울은 큭큭대는 주도훈의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무언가 잊은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금세 털
어내고서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무엇을 잊었는지는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면서 생각


났다. 소파 옆을 지키던 커다란 몸뚱이가 없다. 생산반을 거
치지 않고 바로 주차장으로 간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겨울은 담당 부서에 연락하려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가 이
내 침대에 툭 던졌다. 신분을 밝히고 부서에 연락하는 과정
이 번거로웠다.
하루쯤이야 생산반에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시간을
보니 한참 전에 퇴근 준비시키려고 이름만 휴게실인 공간에
방치해 뒀을 게 뻔하다. 배곯긴 하겠지만 저녁 한 끼 거른다
고 죽는 것도 아니니 괜찮을 테고. 가람의 부재를 대강 넘긴
겨울은 곧 참석할 사교 모임에 신경이 쏠려있었다.

내일 퇴근하며 가람을 데려오기로 결정한 겨울은 간만에


마음 편히 밥을 차려 먹었다. 거슬리던 사료 씹는 소리와 뚫
어지듯 쳐다보는 시선이 없어서인지 소화도 잘되는 것 같았
다. 더불어 클래식을 크게 틀어놓으니 그간 쌓인 스트레스가
사르르 녹았다.

***

한밤중에는 폭설이 내렸다. 바깥이 유난히 고요하고 어둑


하다 싶더니 순식간에 마을이 새하얗게 변했다. 늦은 시각까
지 서재에 머물던 겨울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내려와 창문
앞에 섰다. 뽀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창을 뿌옇게 물들
였다.

‘운전해야 하는데……. 한 시간쯤 일찍 나가면 되려나.’

겨울은 감성에 젖을 틈도 없이 출근을 걱정했다. 그리고


싸늘한 생산반을 떠올렸다. 온풍기가 사무실에만 있어 공기
가 뜨뜻미지근했던 기억이 났다. 아무리 춥고 더워도 수인들
에게 나갈 전기료는 아까운 모양이다.

겨울은 휴게실에서 다른 수인들과 다닥다닥 붙어 앉아 조


는 가람을 상상했다. 작업복이 나름 두꺼워도 하루를 견딜
만큼 따뜻한 소재는 아니지만, 여럿이면 그나마 버틸 만할
것 같았다. 이참에 겨울옷과 작업복 몇 벌을 더 구비해 둬야
겠다. 매일 더러운 작업복을 손세탁하며 욕실을 더럽히긴 싫
으니까. 남들은 애완동물 키우는 기분이라던데 자신은 꼭 다
큰 아이를 입양한 기분이었다.

띠링!

찜찜한 감정으로 커피를 홀짝이고 있으니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몇 달 전부터 구독하던 신문사였다. ‘수인 혁명’이라
는 주제로 먼 프랑스에서 흥미로운 기삿거리를 제공하는 기
자는 별의별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꾸준히 펜을 놓지 않았다.

“…….”

이번에도 한 달 전과 비슷한 기사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수인들이 피를 보고 대거 구속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가볍게
훑어 읽은 겨울은 핸드폰을 침대에 홱 던졌다. 말이 좋아 구
속이지, 행적을 파헤치는 자도 없는 수인을 구속하여 무엇
하겠는가. 아마도 처형당했을 것이다.

매번 비슷한 내용이지만 어쩐지 불편하다. 겨울은 다시금


핸드폰을 집어 들어 기사 밑에 ‘놀라워요’라는 평가를 누르
고서 스르르 몸을 뉘었다. 어디선가 함박눈을 보고 뛰쳐나와
꺄르르 웃는 아이들의 함성에 위안을 얻긴커녕 가슴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괴리감에 또다시 찜찜한 어둠이 지속
되었다.

***

끼아아악!
퇴근하고 내려온 생산부에 발을 들이자마자 들린 건 찢어
지는 비명이었다. 흠칫 놀란 겨울은 자리에 멀뚱히 서서 상
황을 관찰했다. 간간이 듣던 비명이지만 오늘은 담당자가 꽤
화난 눈치였다. 매번 덤덤해 보이던 그가 분노를 억누른 목
소리로 말했다.

“12번 비켜.”

그리고 뿔난 그의 앞에는 가람과 넘어진 수인이 있었다.


가람을 방패 삼은 수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벌벌 떠는 중이
었다. 이미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듯 뺨에 길게 난 상처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아파요… 그만, 그만해요.”

“네가 맞아? 네가 아파? 끼어들어서 좋을 거 없어. 꼴에 같


은 수인이라고 감싸줬다가 뒤통수 맞은 것들 한두 번 보는
줄 알아? 피 보기 싫으면 곱게 비켜.”

담당자는 가람보다 한참 작은 키임에도 전혀 기죽지 않은


얼굴로 가람의 어깨를 툭툭 밀쳤다. 하지만 가람은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이 비켜나면 이 남자가 제 뒤에 주저앉은 동족
을 어찌할지 뻔히 보였기 때문에.

“얼씨구, 그렇게 돈독하면 저 새끼 대신 네가 맞을래?”

“제발 그만……!”

“이게 진짜!”

결국 담당자의 손이 번쩍 들렸다. 동시에 가람이 이를 악


다물었고, 그 모습을 본 그는 주먹을 세게 쥐었던 힘을 풀고
뺨으로 체벌을 대체했다. 짜악! 날카로운 파열음이 생산반을
울렸다. 그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게 작업을 이어나가는 수인
들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마치 감정 없는 기계 같았다.
“씨발, 이 정도로 끝나서 운 좋은 줄 알아. 회장 아들만 아
니었어도 넌 바로 실험행이야.”

더러운 것을 만진 듯 손을 탁탁 털어내며 욕설을 지껄인


담당자가 홱 돌아섰다. 그리고 겨울을 보고서는 못 볼 꼴을
보인 사람처럼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말을 늘였다.

“어… 주 팀장님 오셨습니까.”

“네.”

그제야 겨울도 셋을 향해 두어 발자국 다가갔다. 왜 이제


야 왔냐고 원망하는 듯한 가람의 미묘한 눈빛을 지그시 마주
하고 있으니 눈치 보던 담당자가 머쓱하게 웃으며 변명하려
애썼다.

“어제 안 오셨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12번이 예민해


진 것 같습니다. 조금 전 상황은…….”

“괜찮으세요?”

“예? 아, 예.”

겨울이 고개를 홱 돌리며 묻자 담당자가 말을 더듬었다.


주인 앞에서, 그것도 높은 분의 수인을 폭행한 적은 처음이
라 혹여나 잘리진 않을까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었는데 도리
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자신에게 안부를 물어 당황스러웠
다.

“교육하느라 고생하십니다. 얘는 제가 데려갈게요. 교대하


실 때 된 것 같은데 들어가 보세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


다.”
뒷머리를 긁적이던 담당자가 꾸벅 인사를 건네고서 재빠
르게 사무실로 몸을 숨겼다. 겨울은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
을 보고 나서야 천천히 가람을 바라보았다.

“따라와.”

“…….”

단호하게 통보하고서 뒤돌아 걷는데 이상하게 인기척이


나질 않는다. 겨울은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았다. 그는 여전히
다친 수인 앞을 지키는 중이었다.

“……꼴불견.”

“…….”

환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감히 명


령을 무시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겨울이 턱짓하며
물었다.

“그거 치료하고 싶어?”

“……네.”

끄덕끄덕. 가람이 고개를 흔들다 말고 뒤늦게 대답했다.


겨울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마저 입을 열었다.

“치료해, 네가 알아서.”

“…….”

“그 대신 집에 돌아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

“하나만 선택해. 여기 남을 건지 돌아갈 건지. 나는 이 뒤


로 여기 오는 일 없을 테니까.”
참으로 이기적인 선택지였다. 생산반에 남게 되면 기숙사
로 보낼 것이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다시는 집 밖으로 꺼내
지 않을 생각이었다. 수인에게 선택지를 주는 일 자체가 흔
치 않지만 찝찝한 마음으로 밤을 보낸 주인으로서 주는 기회
이자, 자연스럽게 책임을 회피할 방법이기도 했다.

겨울은 느긋하게 가람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쩌면 마지막


일 테니 그쯤은 해줄 수 있었다.

“어…….”

당연히 겨울 측에서 치료해 줄 거라고 예상한 가람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미동 없는 수인의 어깨를 흔들며 상태를 살피
기도 하고, 그사이 주인이 혼자 떠날까 봐 겨울을 몇 번이나
돌아보며 불안감을 표출했다.

지루한 겨울이 슬쩍 팔짱을 낄 때쯤이었다. 가람이 무릎을


굽혀 주저앉은 수인과 눈을 맞추었다. 하긴, 생산반에 보내
는 주인을 어느 수인이 좋아하겠는가. 고통을 함께 나눈 동
지가 더욱 소중할 테지.

“그게 네 선택이야? 이제 와서 바꿔도 소용없…….”

겨울은 더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가람에게 쌀쌀맞은 말


을 하다 말고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가람은 작업
복 주머니를 뒤져 나온 연고를 고통에 떠는 수인의 손에 고
이 쥐여주었다. 작은 연고는 그가 아침에 챙겨 나온 것이었
다. 오전만 해도 반 이상 남아있는 것 같았는데, 얼마나 발랐
는지 튜브가 벌써 홀쭉해져 있었다.

가람은 수인이 알아들을 때까지 연고를 손가락으로 뺨에


바르는 시늉을 하고서 일어났다. 그의 선택은 후자였다. 겨
울은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말간
얼굴을 보며 허, 하고 탄식을 뱉었다.

“……착한 척하지 마.”

겨울이 괜히 그를 힐난하며 돌아서자, 가람이 뒤에 따라붙


으며 나긋나긋 속삭였다.

“나는 리안이랑… 돌아갈 거예요. 정말 많이 기다렸어요.”

“…….”

“집… 나한텐 집이 없으니까…….”

말끝이 물기를 머금고 흐려진다. 겨울은 집에 가는 내내


가람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론과 실체의 간극이 자꾸만 감정
을 해쳤다. 처음 지은 미소가 그깟 싸구려 동정 때문이라니.
무의식적으로 짐승과 동일시하던 수인의 주도적인 모습을
보니 마냥 고집 센 늙은이처럼 천한 것을 하대하기 어려워졌
다.

겨울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꼬질꼬질한 가람을 욕실에 밀


어 넣고 씻으라고 명령했다. 온종일 생산반에서 구르다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작업복 여기저기에 시커먼 먼지가 묻고
화장실에서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퀴퀴한 구정물 냄새도 났
다.

“두 번씩 닦아. 그 꼴로 집 더럽히는 거 못 봐.”

문을 쾅 닫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겨울은 그제야 숨통이 트여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며 소파에
몸을 맡겼다. 지금은 안방까지 갈 기운이 없었다. 이성과 감
정이 바닥났다. 남들은 수인을 대체 어떻게 키우는 걸까. 고
작 하루 맡긴 게 이 정도인데 기숙사에 보냈으면 어땠을지
상상도 안 간다. 차라리 어디서 굴러들어 온 애 한 명 키우는
게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똑, 똑.

피곤함에 못 이겨 잠시 졸던 겨울이 허벅지와 무릎을 적시


는 냉기에 스르르 눈을 떴다. 그리고 물에 젖은 미역처럼 축
늘어진 검은 머리칼을 보고서 욕설을 읊조렸다.

“아, 씹……!”

심장이 쫄깃했다. 겨울은 더 물러날 곳도 없는 소파 등받


이에 몸을 바짝 붙여 가람을 위아래로 훑었다. 흰 가운을 입
은 그는 꼭 구천을 떠도는 유령 같았다. 그러고 보니 갈아입
을 옷을 챙겨주지 않아 욕실에 있던 가운을 입은 듯한데, 키
가 큰 그에게는 길이가 짧아 발목이 훤히 드러나 감탄은커녕
웃음을 사는 꼴이었다.

“……리안.”

잠이 확 깬 겨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용건이 무어냐 묻


자, 가람이 수줍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주제에 부끄러
움도 타는 모양이다. 그 야살스러운 음성이 듣기 거북한 겨
울이 슬금슬금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와중에 바지에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마저도 찝찝했다.

“리안……?”

겨울의 언짢은 기색을 빠짐없이 내려다보던 가람이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언제나 단단한 바위 같던 주인이 성난 아
이처럼 삐죽이는 얼굴이 신기했다.

“부르지만 말고 용건을 말해.”


겨울이 팔짱을 끼고 가람을 삐딱하게 흘겼다. 턱을 치켜들
며 빤히 올려다보긴 싫고 별거 아닌 말 들어주자고 일어나는
것도 귀찮았다.

배를 쥐고 망설이던 가람이 빨개질 정도로 물고 있던 아랫


입술을 놓았다.

“……배고파요.”

“뭐?”

“배… 배고파요.”

“…….”

겨울의 시선이 점차 미끄러졌다. 어쩐지 위가 요동치는 소


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게 지금 가운을 입고 나온 것
도 모자라서 밥 달라고 투정 부리는 건가? 겨울은 손님처럼
요구하는 가람에게서 황당한 눈빛을 떼지 못했다. 호의가 계
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더니. 역시 친절을 베풀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따가운 겨울의 시선을 못 느낀 가람은 얼굴 위로


물이 뚝뚝 흐르는 것도 마다하고 그를 보챘다.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그래서 너무 배고파요…….”

“비켜.”

“리안……!”

대답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가람이 겨울의 어깨를 무심


코 세게 쥐었다.

“알았으니까… 비키라고.”

덤덤히 대답한 겨울이 조심스레 손을 거두고 일어났다. 불


현듯 에이든에게 공격당했던 옛 생각이 나 심장이 쪼그라들
고 쿵쿵 뛰었다. 예상과 달리 훨씬 강한 힘에 호흡이 잠시 멈
출 만큼 놀랐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생산반에서의 선택
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일단 이걸로 갈아입어. 그리고 앞으로 머리는 다 말리고


나와.”

“네…….”

드레스룸에서 진정하고 나온 겨울이 여분의 옷을 건네고


돌아섰다. 무거운 옷가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걸 듣자
하니 그 자리 그대로 서서 옷을 갈아입는 것 같았다. 은근히
영리한 듯 보여도 부끄러워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을
못 하나 보다.

겨울은 부엌 구석에 처박아 둔 사료를 꺼내어 그릇에 담았


다. 사료 특유의 텁텁한 냄새가 훅 끼쳤다. 잠깐 물에 불려줄
까 고민했지만, 하루 넘게 굶은 놈이 그사이를 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사료를 수북이 담은 그릇을 소파 옆에 놓아두
었다.

“리안은 안 먹어요……?”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가람이 소파 옆에 주저앉으며 물었


다. 겨울은 눈썹을 찌푸렸다. 냄새만 맡아도 속이 안 좋은데
입에 넣는 상상을 하니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나더러 그걸 먹으라고?”

“아니요… 밥……. 리안은 안 먹어서…….”

“너 아직 배가 덜 고프지? 내 밥그릇 챙길 시간에 입 다물


고 먹기나 해.”

“……잘 먹을게요.”
오랜만에 밥을 보고 신이 난 놈이 예의 차리겠다고 나불거
렸다가 한 소리 들었다. 한심하긴. 겨울은 입 안 가득 사료를
욱여넣고 아작아작 씹는 가람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생수 한 병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맛도 모르고
오로지 살기 위해서 먹는 모습을 보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오늘 저녁은 패스다.

***

겨울은 가람을 집에 두고 출근했다. 아무래도 주도훈의 의


견에 급작스럽게 동의한 듯했다. 며칠 더 고민하고 결정했어
야 했는데 너무 성급하게 굴었다. 수인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것도 아니면서 교육을 목적으로 생산반에 보낼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폭력 때문에 반발심이 생기진 않을
까 걱정이었다. 또한 학대받으며 벌어온 돈이 내키지도 않았
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요.”

겨울은 6시 정각이 되자마자 슬금슬금 일어나는 팀원들과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오늘은 자신도 일찍 들어갈 예정이었
다. 출근 전에 두 끼의 사료를 챙겨주고 나오긴 했지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운전하는 도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신호에 맞춰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은 겨울이 반짝이는 액정 화면 위에
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생산반 담당자인가. 수인 결근 때문
에 확인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네, 주겨울입니다.”

―겨울이 형!

하지만 예상과 달리 발랄한 음성이 차 안을 쩌렁쩌렁 울렸


다.

“누구…….”

―뭐야, 내 번호 없어?

겨울이 조심스레 묻자 상대방은 말을 길게 늘이며 실망한


티를 냈다. 이 목소리는…….

“최여준?”

―응, 형 예전 번호로 전화했다가 없는 번호래서 놀랐잖


아. 도훈이 형이 알려줬어. 이번에 모임 나온다며?

“아, 어……. 왜 전화했어?”

반갑지 않은 전화였다. 사교성이 풍부한 최여준은 언제 어


디서 말을 섞어도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고 친근한 존재지만,
그 뒤에 가려진 본성이 대단한 놈이라 꺼림직했다. 어차피
때 되면 만날 텐데 굳이 안부 전화를 하는 점도 최여준다웠
다.

―우리가 꼭 일 있어야 전화하는 사이인가? 형 못 본 지도


꽤 오래됐잖아. 소식 듣고 반가워서 전화한 거지. 승진했다
며? 축하해. 시간 괜찮아? 바쁠까 봐 퇴근 시간에 전화한 건
데.

“응, 그런데 내가 운전 중이라 나중에 다시 연락…….”

―형, 너무 불편한 티 낸다. 저번에 집들이 초대 무시한 것


도 그냥 넘어갔는데 섭섭하게 왜 이래? 계속 얼굴 봐야 할 사
이인 건 형이 제일 잘 알면서.
“…….”

맞는 말이다. 못 본 사이에 줄어든 사회성을 몽땅 최여준


에게 빼앗긴 것 같았다. 겨울이 머쓱하게 핸들을 두드리고
있자, 최여준이 재촉하듯 물었다.

―겨울이 형, 듣고 있어?

“……어. 내가 좀 무심했어. 미안하다.”

―에이, 사과 듣자고 한 소린 아니야. 그냥 섭섭했다구. 아


참, 이번에 수인 동참인 건 알고 있지? 다들 형 수인 어떤지
궁금해해. 도훈이 형이 그러던데 들개라면서? 재밌겠다. 꼭
데리고 와.

“수인 동참……?”

사교 모임에 웬 수인이란 말인가. 기자라도 오는 건가? 그


렇지 않고서야 보여주기식으로 수인을 동참할 이유가 없었
다. 겨울의 난처한 기색에 최여준이 소풍 가기 전 신난 아이
처럼 말을 줄줄 읊었다.

―연말이니까 좀 특별하게 가기로 했어. 매번 우리끼리 술


만 마시는 것도 지겹더라고. 이참에 겸사겸사 신제품 리뷰도
하면 좋잖아.

“여준아.”

―형, 나 이만 끊어야 돼. 아무튼 데리고 오는 거로 안다?


드레스 코드는 화이트 앤 블랙! 수인도 정장 입혀서 와!

“…….”

수인 동참은 뭐고 정장은 또 뭐야.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 같다. 겨울은 거절할 새도 없이 잽싸게 끊긴 전화를 바라
보며 머리를 홱 넘겼다. 하필이면 이런 모임에 대타로 나가
게 되다니 벌써부터 지긋지긋했다.

동네에 도착한 차를 돌려 수인 몰로 가려다가 그대로 액셀


을 밟았다. 혼자 갔다가 사이즈 허탕이라도 치면 약속 날짜
까지 교환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겨울은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가람을 데리고 가기로 결심했다.

대문 앞에 차를 세우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리고 몇 발


자국 가지 않아 작은 정원 근처에서 가람을 발견했다. 놀란
겨울이 멈칫하며 물었다.

“……뭐야. 왜 나와있어.”

“…….”

가람 또한 흠칫한 표정이었다. 비밀번호를 모르는 이상 현


관을 벗어나면 다시 들어갈 수 없는데, 그는 바깥 날씨가 어
떤지 뻔히 알면서도 어젯밤 겨울이 건네준 얇은 티셔츠 한
장을 걸치고 나와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외로움이라도 타는 건가. 아니면 차 소리가 나서 방금 허


둥지둥 뛰쳐나온 건가. 그럴 정도로 우리가 유대감이 끈끈한
것 같진 않은데. 그가 언제 나왔는지도 추측하기 어려웠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던 겨울이 이내 상념을 떨쳐내고는 가람
에게 손가락을 까딱이며 손짓했다.

“나와. 갈 곳 있어.”

“……네.”

왠지 잔뜩 움츠러들었던 가람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선 겨


울의 뒷모습을 보고서 천천히 그를 따라 대문을 나섰다. 맨
살을 스치는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주인에게서 느껴지
는 쌀쌀함이 더욱 무서웠다.
딸랑. 문을 열자 작게 매달아 둔 풍경이 손님의 방문을 알
렸다.

“어서 오세요, S 부티크입니다.”

“이만한 수인이 입을 만한 정장 있습니까?”

“예, 그럼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겨울이 찾은 곳은 번화가 근처에 자리한 기성복 상점이었


다. 겨울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넓은 내부를 둘러보았다.
가격대가 높은 이 상점은 얼핏 보면 백화점과 별다른 것 없
지만, 엄연히 수인의 옷을 파는 곳이다. 자세히 보면 흔히 생
각하는 정장과 각각 다르게 생겼다.

“종족이 어떻게 되나요?”

“들개입니다.”

“들개면… 이쪽 라인은 무난하게 입을 수 있을 거예요. 신


상이라 사이즈도 많고 잘 나가는 디자인이거든요.”

겨울은 직원이 가리키는 라인의 옷을 스르륵 훑었다. 애초


에 수인에게 정장을 입히리라 생각도 안 했고, 단지 사이즈
만 맞으면 상관이 없기에 인기 상품이고 뭐고 눈에 차는 옷
이 없었다.

“정장 찾으시는 거 보니까 연말 행사나 모임 데려가시는


것 같은데 이런 디자인은 어떠세요?”

겨울의 무관심한 손길을 눈치챈 직원이 가장 잘 나가는 정


장 한 벌을 내밀며 미소 지었다. 겨울은 옷을 받아 들며 고개
를 끄덕였다. 제 수인이 입을 만한 사이즈가 있으면 아무렴
괜찮았다.
“키가 커서 잘 어울리겠네요. 한번 볼까요?”

직원이 멀뚱히 선 가람을 거울 앞으로 밀며 옷을 가까이


붙였다. 마치 점프 슈트처럼 한 벌로 된 정장은 작업복과 비
슷한 디자인이었다. 생산반에서 제공한 작업복처럼 배설 기
관 부분을 편히 여닫을 수 있지만, 거슬리는 지퍼는 숨길 수
있도록 설계된 세련미가 돋보이는 옷이었다.

“생각대로 무척 잘 어울리는데, 주인분이 보시기엔 어떠세


요?”

비싼 옷을 팔 생각에 말이 많아진 직원과 달리 딴청 부리


던 겨울은 자신을 멋쩍게 바라보는 가람의 시선을 알아차리
고는 거울 속에 비친 기다란 인영을 훑었다. 그제야 깔끔하
게 재단된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바탕에 희미한 줄
무늬가 들어있어 심심하지 않고 큰 키가 더욱 길쭉해 보였
다. 옷이 날개라더니. ……나쁘지 않다.

“그걸로 주세요.”

무심한 척 꼼꼼히 살핀 겨울이 품에서 지갑을 꺼내자, 옷


을 도로 걸어둔 직원이 카드를 받아 들며 친절하게 물었다.

“네, 알겠습니다. 사이즈는 알고 계세요?”

“아뇨.”

“그럼 빠르게 치수 재고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직원이 발 빠르게 드레스룸으로 가람을 데리고 사라졌다.


겨울은 그동안 새 옷 냄새 가득한 상점을 천천히 걸으며 구
경했다. 그리고 가지런히 장식된 액세서리 칸에서 스카프를
집어 들었다.

“…….”
백화점에서 파는 명품 못지않게 보들보들하고 질이 좋았
다. 이것도 수인용이려나. 겨울은 얇은 실크 조각을 펼쳐 살
랑살랑 흔들었다. 아이보리 색감의 스카프는 네모난 테두리
를 따라 검은 띠를 둘렀고, 그 가운데에 가늘고 간결한 로고
가 박혀있었다. 안 그래도 옷깃 사이로 상처가 보일 것 같아
학대 의심을 받으면 어떡하나 염려스러웠는데 잘됐다. 가람
이 입을 정장에 매도 어울릴 것 같았다.

“이것도 같이 계산해 주세요.”

겨울이 마침 새 상품을 갖고 나온 직원에게 스카프를 건넸


다. 그러자 직원이 머뭇거리며 되물었다.

“그건 작은 종족 액세서리인데… 그래도 하시겠어요?”

“네, 주세요.”

겨울이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예쁘고 잘 보이자고 매


는 것이 아니기에 상관없었다. 이곳에 온 이유부터 모임 조
건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꼬질꼬질한 차
림 그대로 동행하고 싶지만, 외적인 면에 미쳐있는 재벌가
놈들의 수군거림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모두 자신을
위한 소비였다.

“잠시만요.”

직원이 스카프를 동봉하려는 찰나, 겨울이 낚아채 고이 접


힌 스카프를 다시 펼쳤다. 그리고 얌전히 구경하는 가람의
목에 한 바퀴 둘러 가볍게 묶었다. 짧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알맞다. 작은 종족 액세서리는 다른 상품과 비교하여
여린 디자인 때문에 붙은 이름인 듯했다.

“잘 맞네요.”

“네, 주시면 다시 포장을…….”


“그냥 두르고 갈게요. 어차피 곧 착용할 거라서요.”

“네, 알겠습니다.”

겨울은 직원이 마저 결제하는 동안 가람을 힐끗 쳐다보았


다. 가람은 보드라운 실크가 신기한지 손으로 잡아당겨 킁킁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영문 모를 표정
을 지었다. 스카프에 입이 가려져 웃는 건지 삐죽 내민 건지
알 수 없었다.

“…….”

겨울은 순간 가람과 시선이 맞물렸다. 얼핏 흔들린 눈동자


를 보니 웃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어쩐지 혼란스러워 보였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호박빛 안광이 기분 나빠 저도 모르게
눈살을 구기니 가람이 기민하게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머리 좀 잘라야겠다.’

언뜻 오묘한 기류가 흘렀으나, 겨울은 치렁치렁한 가람의


검은 머리칼에 꽂혀 직원이 정성스레 건넨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부티크를 빠져나왔다.

“사람들을 만날 거야.”

“……네?”

“얌전히 듣기만 해.”

운전석에 올라탄 겨울이 대뜸 말했다. 가람은 스스로 안전


벨트를 매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태 입을 가린 실크
를 내리지 않아 마치 사극에서 본 공주가 두르는 베일 같았
다. 처음엔 경계하더니 스카프가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네가 상상할 수 없는 위치의 사람들이야.”

“…….”
“그러니까 평소보다 더 예의 있게 굴어.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뭐든 나한테 허락부터 받아.”

“…….”

“대답.”

“……네, 리안.”

이럴 때 보면 눈치가 빠른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겨울
은 비싼 옷가지가 선물인 줄 알고 그저 좋다고 정신 팔린 가
람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제발 사고만 치지 말기를. 겉으로
는 얌전해 보여도 수인끼리 모였을 때 돌변할 수도 있어 걱
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 눈이다…….”

“하…….”

“눈 와요, 리안…….”

설상가상으로 눈이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은 가


람이 창문에 바짝 붙어 눈을 구경하는 동안 최대한 빨리 집
에 도착하려고 조용히 액셀을 밟았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다
녹지도 않았는데… 내년에 일이 얼마나 잘 풀리려는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Twilight of The City (2)

파티 당일, 점심 이후 종무식이 끝난 사무실은 순식간에


텅텅 비었다. 서둘러 준비해야지. 최여준이 예약한 홀에 시
간 맞춰 도착하려면 게으름 피우지 않고 움직여야 했다. 겨
울이 마지막으로 가방을 챙기던 때였다. 유리 벽을 똑똑 두
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 가는 거야?”

주도훈이었다. 그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손을 작게 흔들


었다. 겨울은 그 인사를 무시하고는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꺼내 입었다. 아침에 가볍게 뿌린 향수 향이 기분 좋게 풍겼
다.

“여긴 왜 올라왔어.”

“오늘 약속 안 잊었지? 잠수 타면 안 된다.”

“바쁘다고 못 간다는 사람이 재촉하러 올 시간은 있나


봐?”

겨울은 당일까지 친히 올라와 압박하는 주도훈에게 비아


냥거렸다. 그래 봤자 별 타격도 없어 보이는 그는 되레 실실
웃으며 겨울의 자리로 다가왔다.

“내가 언제 바쁘댔나. 겹쳐서 못 가는 거랬지. 아직 여유


있어.”

“그러면 여기 청소나 좀 하든가. 난 바쁘다.”


“이렇게 입고 갈 거야?”

겨울이 앞을 막아선 주도훈의 어깨를 툭 밀치자, 주도훈이


재킷 옷깃을 정리해 주며 물었다.

“이게 어때서.”

겨울이 심통 난 표정으로 제 차림을 훑었다. 아이보리색


목폴라 티에 깔끔하게 걸친 짙은 색의 명품 재킷은 어딜 가
든 무난하게 통과할 만한 의상이었다. 안 그래도 가기 싫은
연말 모임인데 굳이 쇼핑해서 새 옷을 사거나 이보다 더 힘
주고 가고 싶진 않았다.

“아니, 예쁘다고. 잘 입었네.”

주도훈이 슈트 위에 앉은 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 겨울은


그 손길을 거부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오늘따라 향수 냄새
가 무겁다. 그는 자신과 달리 평소보다 힘 좀 준 모양새였다.
단정하게 이마를 덮었던 앞머리는 반쯤 넘어가 고정되어 있
고, 자주 보던 옷이 아닌 처음 보는 슈트를 입고 있었다. 원
체 유흥과 쇼핑을 즐기는 놈이라 연말이라고 카드 좀 긁었나
보다.

“할 말 다 했으면 간다.”

“잠깐만, 잠깐만.”

“…….”

어깨를 잡으면서까지 붙잡는 주도훈 때문에 멈칫한 겨울


이 다시금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넘겨서인지 선드러진 외
모가 유독 날카롭게 변해 시선을 사로잡았다.

“빨리 말해. 진짜 가야 돼.”


처음부터 목적이 있어서 온 모양이다. 겨울이 머뭇거리는
주도훈을 독촉했다. 그러자 그는 오늘 같은 날엔 머리를 넘
기는 게 더 세련되어 보인다며 시답잖은 소리만 해댔다. 바
빠 죽겠는데 헤어스타일이 문제인가. 겨울이 다정한 손길을
거부하며 눈을 삐쭉 떴다. 이러다 늦으면 모두 주도훈 탓으
로 돌릴 작정이었다.

“장난하냐?”

“정색하면 주름 생긴다.”

“그만 좀 만져!”

겨울은 주도훈이 억지로 넘긴 머리를 원상 복구하자, 주도


훈은 그제야 여유롭게 물러났다.

“내가 뭐 할 말이 있어야 오는 사람인가? 우리 동생 긴장


했을까 봐 긴장 풀어주려 온 거지. 짜증 내는 거 보니까 아무
렇지 않나 보네.”

“……?”

“간다.”

뭔가 수상하다. 설마……. 겨울은 주도훈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돌아서자마자 불러 세웠다.

“야, 잠깐.”

“‘야’가 아니라 ‘형’.”

주도훈은 밉살스럽게 대답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


다. 겨울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음성을 높였다.

“수인 동참인 거 알았어?”

주도훈은 대답 대신 어깨를 들썩였다. ……이 새끼가 진


짜. 짜증이 분노로 변했다. 알고 있었구나. 역시 괜히 올 놈
이 아니었다. 세상 걱정 없이 사는 푼수처럼 굴면서도 동생
괴롭히는 짓은 여전했다. 겨울은 빠른 걸음으로 제 반응을
보러 온 주도훈을 잡으려 했으나,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탄 주도훈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재밌게 놀다 와!”

“넌……. 나중에 보자.”

파티 당일까지 속을 긁는 주도훈 때문에 하루라도 스트레


스 안 받고 넘어가는 일이 없다. 겨울은 다른 엘리베이터에
터덜터덜 올라타 핸드폰 시각을 확인했다. 다행히 시간을 많
이 뺏기진 않았다.

눈이 피곤해 잠시 손으로 주변을 꾹꾹 누르며 기다리는데,


문이 스르르 열렸다. 주차장에 도착한 줄 알고 내리려던 겨
울이 멈칫하며 주변을 살폈다. 다른 층과 다르게 사무실이
방마다 따로 달린 곳이었다.

그때, 하얀 연구원복을 입은 여자가 전화로 욕을 중얼거리


며 올라타려다가 겨울을 보고서는 어색하게 눈웃음 지었다.

“씹, 한석원 그 씨발놈이 뭐랬냐면 잠깐만, 엘리베이터


왔… 아, 안녕하세요…….”

“아, 네.”

“먼저 가세요.”

“…….”

서먹한 눈빛을 주고받는 사이로 문이 닫혔다. 그리고 몇


초 조용하다 싶더니 한석원에게 퍼붓는 비난이 이어졌다. 듣
자 하니 실력이 좋아 스카우트 당해서 입사한 것 같은데 주
어진 절차를 따르지 않고 독단적인 행동으로 상사에게 몇 마
디 들은 모양이었다.

“한 부장 개새끼! 실력도 없는 게 갈굴 줄만 알지. 내가 들


어오고 싶어서 들어왔나? 이 회사 뜨는 날 뒤통수에 침이라
도 뱉고 만다. 아, 열 받아. 응, 괜찮아. 털어놨더니 후련하
네. 일단 남들 허술할 때 움직여야지. 밥부터 좀 먹어야겠다.
점심도 굶고 틀어박혀 있었더니 머리가 핑핑 돌아.”

연구원이 전화를 끊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어안이


벙벙한 겨울과 다시금 시선이 맞물렸다.

“…….”

“…….”

직원이 알게 모르게 상사 욕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은 적은 없다. 아주 놀랍고 색달랐다. 정적 끝
에 연구원은 아무렇게나 높게 묶은 머리 사이를 머쓱하게 긁
적이며 올라탔다.

“몇 층 가세요?”

“……아, 제가 누를게요.”

어쩐지 긴 통화 내용이 다 들린다 했다. 버튼을 누르지 않


고 바보처럼 서있었다. 겨울은 당황한 티를 숨기며 버튼을
눌렀다. 그제야 엘리베이터가 울렁울렁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가 실수를 좀 했는데 잘리진 않겠죠?”

소매로 안경을 비적비적 닦던 연구원이 대뜸 물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였다면 듣고도 넘길 질문이었지만, 단둘뿐이었
기에 겨울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뗐다. 팀원이 아닌 다른 부서
직원과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일하다 보면 실수할 때도 있죠. 다음부터 잘하면 돼
요.”

“뻔한 대답이네요.”

“…….”

겨울의 시선이 슬쩍 옆을 향했다. 연구원은 여전히 달그락


거리며 안경을 닦는 중이었다.

“그런데 뭐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네.”

“팀장님은 진짜 수인 싫어하세요?”

“네? 제가 왜 수인을……. 그나저나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들


었어요?”

진짜 수인을 싫어하는 건 맞는다만 팀원들도 쉬쉬하는 마


당에 다른 부서 직원이 자연스레 물을 질문은 아니었다. 첫
만남부터 어긋나도 한참 어긋났다. 무례하다고 해야 할지 당
차다고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저 알아요? 겨울이 눈짓으로 대답을 요구하자 연구원이 어


딘가를 슬쩍 가리켰다. 겨울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렸
다.

“사원증이요. 워낙 유명 인사시니까.”

“아…….”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사람들이 하도 말이 많더라고요.


난 본인한테 직접 듣고 싶었는데. 이렇게 뵐 줄은 몰랐네요.”

“…….”
이게 다 주도훈 때문이다. 겨울은 사원증을 그러쥐며 아,
하고 침음했다. 조용히 다니고 싶은 마음을 알 리 없는 주도
훈이 ‘내 동생이다’하고 워낙 시끌벅적하게 돌아다니니 이상
한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지고, 1층에 멈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동시에 연구원이 주머니에 쑤셔 넣은 핸드폰이 시끄
럽게 울렸다.

“싫어하지 마세요. 불쌍한 애들이잖아요.”

“…….”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눈치로 알아챈 모양이다. 겨


울이 대답하지 않으니 가벼이 미소 지으며 내린 연구원이 문
을 손으로 턱 잡아챘다. 닫히려던 문이 다시 입을 쩌억 벌렸
다.

“아, 잠시만요. 또 하나만 오지랖 부려도 돼요? 왠지 다신


못 뵐 것 같아서.”

“…….”

“수인들은 단 거 좋아해요. 이거 주면 끔뻑 넘어올걸요. 죄


송해서 드리는 선물이에요.”

연구원이 내민 것은 작은 상자에 담긴 솜사탕이었다. 수인


간식이 아닌 편의점에서나 파는 불량식품. 그것을 멍하니 바
라보고 있으니 답답함을 느낀 연구원이 상자를 홱 던졌다.

“받으세요!”

얼떨결에 잡아챈 겨울이 입을 작게 벌린 채 장난스럽게 웃


는 연구원을 바라보았다. 털털한 몸짓에 달랑거리는 사원증
이 눈에 띄었다.
‘조우희, 연구개발부’

“응, 제인. 보리스에서 허가 떴…….”

그는 뒤늦게 전화를 받으며 돌아섰다. 이번에는 업무 전화


인 듯했다. 상사를 욕하던 전과 달리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가까이서 그에게 집중하고 있던 겨울에게만 들릴 정도였지
만 목적지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차단하는 바람에 야무
진 목소리가 뚝 끊겼다.

“…….”

겨울은 그가 버리듯 선물한 솜사탕을 이리저리 관찰했다.


종이로 된 입구를 뜯으니 작은 솜사탕이 비닐에 포장되어 있
었다.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불량 식품을 뭐 하러 이중으로
포장했는지 모를 노릇이다. 솜사탕을 가방에 던져 넣은 겨울
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차를 대문 앞에 세워둔 겨울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주도훈


이 헝클어뜨린 머리를 손질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끼익, 철문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린 순간
이었다. 하얗고 커다란 형체가 정원에 떡하니 서있었다. 그
저께 맞닥뜨린 상황과 똑같았다.

‘이게 왜 또 나와있지?’

겨울은 잠옷 차림에 스카프를 두르고 나온 가람을 보며 눈


살을 찌푸렸다. 한 번은 실수였다 쳐도 두 번이나 반복하는
건 이해가 안 갔다. 당장 파티에 데려가야 하는데 사고 치기
직전의 반려견을 보는 것 같았다. 연구원과 있었던 사건 덕
분에 잠시 잊었던 분노가 슬금슬금 꼬랑지를 드러냈다.

“뭐야?”
“리, 리안.”

가람이 말을 더듬으며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에 수상함을


느낀 겨울이 그를 검사하듯 살폈다. 이제 보니 손이 더럽고
대문을 무언가로 긁은 듯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희미한 흠집
이 가득했다.

“변명할 생각 말고 똑바로 대답해. 왜 나왔어?”

“화… 내지 마요. 나는 집에…….”

“아, 도망가려고?”

“……아니에요!”

가람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도망이 아니라 집에 돌아가


려는 거라나 뭐라나. 겁먹은 놈이 웅얼거리는 바람에 잘 알
아듣지 못했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진심이 담긴 듯한 행동에
잠시나마 속을 뻔한 겨울은 이내 그를 비웃었다.

“네가 도망가는 건 상관없는데 들키질 말았어야지. 열어줄


게. 다시 가봐.”

문을 세게 밀자 벽에 부딪힌 대문이 쾅 소리를 내며 진동


했다.

“…….”

“가라니까?”

가람은 환히 열린 대문을 보고도 선뜻 발을 떼지 못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자신을 거둔 인간이 보는 앞에서 본래
의 모습으로 변하는 건 죽어도 싫었다.

“왜. 도망가라고 등 떠밀어 주는 건 싫어?”

겨울은 입술만 잘근거리는 가람을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당연히 도망가지 못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샛노란 눈의
수인이 길거리를 혼자 돌아다니면 즉시 체포된다. 최악은 사
살되는 것이고. 작은 종이 아닌 들개 정도면 후자를 택하는
게 시민을 위험에서 구했다는 기사를 써 내려가기도 좋을 테
다. 달에 한 번씩은 있는 소식이었다.

“네가 얼마나 인간을 무시하면 도망갈 생각을 할까.”

“리안… 저는…….”

“아니면, 그냥 나를 무시하는 건가?”

겨울은 혹여나 이웃 주민이 볼세라 대문을 닫고 단단히 걸


어 잠갔다. 현관문은 힘으로 밀면 열리는 구조였기에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대문은 아니었다. 수인이 도어 록을
다룰 수 없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미안해요…….”

“따라 들어와.”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겨울은 가람의 사과를 들은 체 만 체


흘려들으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하마터면 계획이 틀어질 뻔
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엉망진창인 연말을 보냈을 자신을 상
상하니 소름이 돋을 정도로 끔찍했다. 수인 트라우마라는 질
긴 인식표를 아직 떼지도 못했는데 또다시 사고를 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고작 들개 하나 때문에 위상이 떨어지는 건
더더욱.

“입는 방법 알지? 갈아입어.”

겨울이 정장이 들은 쇼핑백을 홱 던지며 말했다. 화는 나


지만 잔소리하고 화풀이를 할 시간은 없었다. 한 번에 들어
먹을 놈이었으면 탈출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터, 제 입만 아
플 것 같았다.
“뇌에 힘 좀 주자. 그냥 입을 생각이야?”

“…….”

“하……. 손부터 닦아.”

겨울은 쇼핑백을 엉거주춤 받아 들고 눈치를 보는 가람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먼지로 더러워진 손으로 정장을 만지
면 얼룩이 질 게 뻔한데 그걸 그냥 꺼내려고 한다. 다행히 만
지기 전에 제지해서 손은 닿지 않았지만 답답한 건 매한가지
였다.

“미안해요, 리안.”

쇼핑백을 발치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가람이 우물쭈물 사


과를 건넸다. 머리를 정리하려고 안방에 들어가려던 겨울이
목소리를 무겁게 깔았다.

“야, 내가 뭐라고 했어.”

“소, 손… 닦으라고…….”

“미안하다는 개소리 안 먹히니까 앞으로 나한테 그딴 말


지껄이지 마. 진짜 반성하는 거면 행동으로 증명하든가.”

끄덕끄덕. 가람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욕실에 들어갔다. 몇


번이나 예의 없게 고갯짓하는 게 싫어 다그치던 겨울이었지
만 다시 말하기도 입 아파 가느다란 한숨으로 갑갑함을 다스
렸다.

겨울은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추운 날씨에 열이 오른


사람은 자신밖에 없을 테다. 이미 촉박해진 약속 시각에 앞
머리를 적시는 건 비효율적인 행동이었으나 이렇게라도 하
지 않으면 두통에 시달릴 것 같았다.
겨울은 수건으로 얼굴과 젖은 머리카락을 톡톡 두드려 닦
으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며칠 사이에 피곤함이 스며든 얼
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주도훈이 왜 친히 찾아와 한 번씩 찔
러보는지 알 것 같았다. 에너지가 바닥난 자신을 건드리는
대로 즉각 반응하니 재밌을 만도 했다.

도망 안 갔으니 됐지. 그걸로 만족하자. 수인 없이 파티에


가서 어떠한 변명을 해도 그놈들은 역시 트라우마는 쉽게 극
복하지 못한다며 위로하는 척 안 믿어줄 게 뻔하니까. 겨울
은 수건에 얼굴을 묻으며 안위했다. 언젠가 한 번은 들개와
트러블이 날 줄은 예상하고 있었다. 애정 없이 거둬들인 수
인이 마냥 주인에게 충성할 수는 없는 법.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마음속에서 피어오른 분노의 불씨는 어떻게 가라앉
힐지 모를 뿐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익숙


하게 감정을 가슴 깊숙이 욱여넣었다. 불시에 튀어나오지만
않는다면 괜찮다. 항상 그래 왔으니 오늘도 잘 해낼 것이다.
겨울은 몇 분 전과 다른 말투로 가람을 불렀다.

“이리 와.”

단정하게 갈아입은 가람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도 그사


이에 반성을 마쳤는지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겨울은 정장
을 입느라 헝클어진 스카프를 풀어 다시 매듭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상처가 보이지 않도록 길게 빠진 꽁무니를 옷깃 안에
넣어 고정했다.

“이 집에서 나가고 싶으면 오늘은 피해. 중요한 날이니까.”

“…….”

“웬만하면 그 생각을 접는 게 더 좋겠지만.”


“……이제 안 그럴게요.”

“그건 내가 보고 판단해.”

부드러운 실크 감촉을 느끼며 모양을 마저 잡아주던 겨울


이 또 끄덕이려는 가람의 턱을 잡고 시선을 맞췄다.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당황한 가람이 눈동자를 되록 굴리자, 겨울은
수인치고 고생 한번 안 한 것처럼 생긴 뽀얀 얼굴을 빤히 바
라보며 말했다.

“네.”

“네……?”

가람이 겨울의 말을 작게 따라 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


하기 어려웠다.

“대답은 항상 말로 해.”

“……네.”

“너도 네 몸에 흉터 만드는 건 원치 않을 거 아냐.”

“……네.”

“내 말 명심해.”

“알았어요, 리안.”

느릿느릿 말을 늘이던 가람은 단호한 겨울의 눈빛을 보고


서 마음을 고쳐먹은 듯 또박또박 대답했다. 겨울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며 나갈 채비를 했다. 그리고 현관을 나서며 마
지막으로 충고했다.

“특히 네가 이 시간 이후로 만날 모든 인물한테 대꾸할 생


각 말고 복종하는 게 좋을 거야.”

“네.”
“난 그 새끼들 말릴 생각이 없거든.”

애초에 말린다고 말려질 놈들도 아니겠지만. 겨울이 어울


리는 모든 지인은 한자리 꿰찬 인물이거나 곧 꿰찰 인물, 두
부류이기 때문에 거의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다. 눈엣가시로
찍힌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든 나락을 보게 만들고, 흥미를
잃을 때까지 괴롭히는 놈들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아니라 수인이면 말이 달라진다. 소문을 통


해 건너 듣자니 학대는 기본이고 살생을 취미로 일컫는 놈도
있다고 했다. 사실인지 진위를 따질 정도로 관심이 없어 더
러운 기분으로 흘려들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조
심해서 나쁠 건 없을 테다.

“리안, 이거…….”

조수석에 올라탄 가람이 아무렇게 던져놓은 겨울의 가방


을 들고 눈을 끔뻑였다.

“뒤에 놔.”

“……안고 있어도 돼요?”

“…….”

겨울이 동네를 빠져나가다 말고 가람을 힐끗 바라보았다.


제 물건에 수인의 손길이 닿는 게 싫어도 무턱대고 갑자기
화를 내며 뒷자리에 가방을 던지는 것도 웃길 것 같았다. 마
음대로 하라는 의미로 입을 다물자, 가람은 살포시 미소를
띠며 가방을 인형이라도 되는 듯 품에 껴안았다. 차를 타고
멀리 움직이는 여정이 꽤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아침에 정신이 없어 사료를 챙겨준 적이 없었다.


겨울은 시간이 초저녁을 향해 가는 와중에야 그 사실이 떠올
랐다. 파티장에 수인 먹을거리도 있으려나. 엄연히 수인도
초대받은 입장이지만 못 미더웠다. 늦은 점심이라도 먹이고
나올 걸 그랬다.

“가방 안에 상자 꺼내봐.”

겨울이 조금씩 막히기 시작하는 도로를 보며 무심히 말했


다. 혹시 모르니 솜사탕이라도 먹이는 게 나을 듯했다. 가람
은 정말 이걸 열어도 되는지 조마조마한 눈빛을 보내다가,
이내 가방을 열어 작은 상자를 꺼냈다. 처음 보는 물건이었
다.

“이게 뭐예요, 리안……?”

“솜사탕. 뜯어서 먹어.”

“솜사탕…….”

이미 뜯긴 상자에서 비닐을 꺼낸 가람이 부스럭대며 솜사


탕을 꺼냈다. 분홍색의 작은 불량식품에서 단내가 폴폴 났
다. 가람은 폭신폭신한 솜사탕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았다.

“리안, 달콤한 냄새가 나고 이것처럼 부드러워요.”

그는 자신이 맨 스카프와 솜사탕을 비교하며 웃음을 흘렸


다. 텁터름하고 건조한 사료만 먹다가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나는 솜사탕을 선물받으니 기뻐 보였다. 겨울은 그가 솜사탕
을 조금씩 뜯어 먹으며 풍기는 단내에 머리가 지끈거려 창문
을 열었다. 시원한 저녁 냄새가 내부에 넘실넘실 들이찼다.

“혀가 아려요.”

“…….”

“그런데 맛있어요, 리안.”

가람은 솜사탕을 먹는 내내 재잘거렸다. 꼬마도 1분이면


해치우는 양을 몇 분씩이나 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태 무
시하던 겨울이 결국 입을 열었다.

“좀 조용히 하고 먹을 수 없어?”

“미안… 아니, 알겠어요, 리안…….”

도로록, 도로록. 이번에는 거슬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무


슨 소리인가 확인하니 입 안에서 사탕을 굴리는 소리였다.
붉은 혀가 끈적한 입술을 쓸며 모습을 드러냈다. 솜사탕 안
에 사탕이 들어있었나 보다. 가람이 호흡할 때마다 달짝지근
한 사과 향이 풍겼다.

“깨물어 먹어.”

겨울이 창문을 닫으며 명령했다. 곧 연회장에 도착하는데


입에 사탕을 물리고 입장할 수는 없었다. 오독오독. 그가 사
료를 먹을 때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

발레파킹을 맡기고 안내를 받아 연회장으로 걷는 동안 심


장이 이상하게 쿵쾅거렸다. 겨울은 남몰래 심호흡하며 직원
을 뒤따랐다. 지인을 오랜만에 만나는 탓에 저도 모르게 긴
장한 듯했다.

“주겨울!”

“겨울이 형!”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이 몽땅 겨울에게 쏠렸다. 겨


울은 환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동갑내기 친구, 동생, 누나와
형을 보며 형식적인 미소를 띠었다.

“잘 지냈어?”

“아니! 형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지. 다들 형만 기다렸어.


설마 잠수 탄 건가 하고 전화해 보려던 참이었다니까.”
제일 먼저 달려 나와 반긴 최여준이 겨울의 어깨를 감싸며
친근함을 표했다. 못 본 새에 운동을 열심히 했는지 체격이
더 커진 느낌이었다. 딱 붙은 몸이 단단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이 운동까지 했으니 얼마나 떵떵거릴지 보인다. 벌써
지겨웠다.

“길이 막혀서 조금 늦었어. 미안.”

“괜찮아, 저기로 가자. 수인은?”

“뒤에.”

최여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는 가람을 보더니 큰 탄


성을 지르며 이목을 끌었다. 겨울은 방관자처럼 머쓱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와… 들개라더니 존나 크네. 성깔 있게 생겼다. 이거 감당


할 수 있어?”

최여준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수인의 모습에 입을 떡


벌리며 가람의 주위를 맴돌았다. 들개치고는 꽤 큰 키와 덩
치라면서 아플 만큼 가람의 몸 여기저기를 툭툭 쳐댔다. 가
람은 그 거친 손짓을 꾹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상처가 다
시 터질 듯 아팠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수인일 때 이 정도면 짐승일 땐 늑대만 하겠는데? 도훈이


형 돈 좀 썼구나. 형, 수인은 나한테 맡기고 저쪽 자리에 가
있어. 금방 갈게.”

“어, 그래.”

겨울은 멀찍이서 자신을 부르는 친구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예상보다 장소도 잘 잡았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
다. 연회장이 인원에 비해 터무니없이 크긴 하지만 프라이버
시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라 납득이 갔다. 자신만 해도 질
나쁜 놈들과 어울렸다가 기사가 나면 어찌하나 전전긍긍하
니 말이다.

“윽!”

겨울이 둥그런 테이블에 모여 앉아 지인이 내민 와인을 받


아 들려는 때였다. 뒤에서 낮은 신음이 흘렀다. 분위기에 맞
지 않는 음성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가람이 스카프를 손에
꼭 쥔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겨울은 이미 최여준에게 배를 얻어맞은 듯 허리를 굽힌 가


람을 살폈다. 목에 둘러준 스카프는 온데간데없고 투박한 모
양의 은색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다. 가죽이 아닌 금속으로
만든 액세서리는 다른 용도가 있어 보였다. 보통 목걸이가
아닌 듯했다. 심각하게 응시하자, 최여준이 크게 소리치며
겨울을 안심시켰다.

“겨울이 형! 걱정하지 마. 저기 애들도 다 채운 거야.”

“…….”

겨울은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연회장


무대 앞에 도란도란 모여있는 수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
은 모두 가람의 목걸이와 똑같은 것을 한 채 주변을 서성거
리고 있었다. 왠지 한껏 주눅 든 표정이 안쓰러워 보였다.

“이게 무슨…….”

수인을 동참하라길래 단순히 제 트라우마를 시험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 심각했다. 수인 학대를 직접적
으로 보긴 처음이었다. 겨울이 눈썹을 구기며 수인을 주시하
고 있으니 어느덧 다가온 최여준이 잔을 부딪치며 웃었다.

“뭐야, 형. 저런 거 처음 봐? 우리 동준이 형이 개발한 제


품이잖아. 아직 출시는 안 됐는데 JUONE 그룹 아들이 경쟁
사 제품도 모르면 쓰나.”

“…….”

“아직 리뷰할 상품 많아. 기대해도 좋아, 형.”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억지로 수인 무리에 끼어들어


이쪽을 응시하는 가람과 시선을 맞추던 겨울은 이내 와인을
들이켰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 식도를 미지근히 달궜다.

“응, 재밌겠네.”

시작부터 말리면 답도 없다. 최여준과 주도훈이 작정하고


재미를 볼 겸 자신을 시험하는 듯했다. 최대한 어울리는 척
이라도 하자. 겨울은 그리 생각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시끌
벅적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먹먹히 흩어졌다.

***

파티장의 조명이 유난히 눈부시고 생각이 엉망으로 둔하


게 흘러간다. 이제야 슬슬 취기가 도는 모양이다. 겨울은 술
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 주문한 와인을 새로 따서 잔에 콸콸
들이부었다. 자줏빛의 와인이 출렁이며 쏟아졌다.

“후우…….”

온갖 고문에 의해 찢어지는 비명이 귀를 때렸다. 겨울은


와인잔을 한 번 빙글 돌리고선 입에 머금었다. 씁쓸한 맛이
비명과 어울렸다. 근처에 있던 수인과 눈이 마주쳤다. 언짢
아서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니 급하게 고개를 숙이는 몸짓
이 보인다. 힘에 겨운 고문자들이 숨을 고르자 주변이 조용
해졌다. 끔찍한 신음만 간간이 들렸다.
“…….”

끔찍하게 물든 천 쪼가리가 어디선가 굴러왔다. 기분이 더


러워 구둣발로 짓밟자 지켜보던 짐승이 흠칫 몸을 떤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간 미쳐버릴 것 같아 급하게 몸을 일으켰
다. 목에 체인이라도 건 것처럼 저를 따라오는 시선이 불길
해 겨울은 잠시 눈을 감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닌데도 오늘따라 취기가 느리게 돌


았다. 아직도 긴장이 덜 풀렸나. 겨울이 미지근한 뺨을 손등
으로 감싸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쌉싸름한 와인 향 때문에
머리가 핑 돌았다. 그래도 이곳에선 제정신이 아닌 게 나을
듯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귀빈 대접 받으며 다니는 것들이
하는 짓은 아주 가관이었다. 악마도 인간이길 포기한 놈들이
주최한 모임에는 끼기 싫을 것이다.

얌전히 앉아 술만 들이마신 겨울의 얼굴이 점차 발그레 달


아오를 즈음이었다. 누군가 겨울의 어깨를 누르며 다시금 앉
혔다.

“형, 계속 혼자 술만 마실 거야?”

다른 자리에서 열심히 수다 떨던 최여준이 친한 척 옆자리


를 꿰찼다. 주량이 센 그는 겨울이 와인 한 병을 다 비울 동
안 위스키 잔을 열댓 번 넘게 기울여 놓고도 멀쩡해 보였다.
겨울은 자연스럽게 제 어깨를 감싸고 작게 토닥이는 손을 걷
어냈다. 주도훈이랑 다니더니 하는 짓도 주도훈 같아 기분이
나빴다.

“좋은 거 많은데 재미없게 앉아있지만 말고 형도 하나 골


라봐. 야, 강태희! 뭐 하는 거야. 겨울이 형 혼자 있는 거 안
보여?”
하지만 겨울의 까칠한 태도에 관심조차 없는 최여준은 누
군가에게 소리치며 눈치를 주었다. 하인 부르듯 까딱까딱 움
직이는 손가락에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놀던 강태희가 테이
블에 놨던 상자를 들고서 곧장 달려왔다. 뻔히 보이는 서열
질에 기분 상할 법도 한데, 허겁지겁 도착한 강태희는 되레
사교성 좋게 겨울에게 상자를 불쑥 내밀었다.

“겨울 형도 할 생각 생겼어요? 전 이거 추천! 손에 착착 감


기는 게 타격감 대박이에요.”

“아니… 난 관심 없어.”

겨울이 어눌하게 늘어지는 발음에 힘을 꾹꾹 눌러 담아 대


답했다. 설마 마약이라도 건네나 싶었는데, 그가 건넨 상자
안에는 수인 물품이 한가득이었다. 최여준이 채운 목줄과 비
슷한 용도의 채찍과 소량으로 담긴 샘플 사료, 이상한 약물,
뿌리는 세정제 등 창고가 따로 없었다.

겨울이 강태희가 추천한 채찍을 꺼내지 않고 거절하자, 최


여준이 픽 웃으며 말했다.

“관심 없는 것치곤 계속 보고 있던데?”

“…….”

소란스러워서 어쩔 수 없이 본 것뿐이다. 비명과 웃음소리


가 한데 모인 게 너무나 괴이해서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아 보
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시선이 갔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는
항상 가람이 있었다. 다행히 지금까진 멀쩡했다. 취객을 피
해 구석 자리에서 시간을 때우는 그는 문득문득 집에 언제
돌아가냐는 의미의 눈빛을 보내왔다. 겨울은 그럴 때마다 자
연스레 회피하며 술을 들이켰다.
그래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자신과 떨어진 사
이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물론 직접 나서지 않아도 주
최자인 최여준 집안 선에서 조용히 마무리될 일이다. 하지만
겨울은 원치 않았다. 정 때문이 아니다. 단지 본능적으로 거
부감이 들었다. 언젠가 에이든이 한 말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주인님, 이웃집 데이지가 죽었대요. 데이지도 샤샤랑 다롱이가 있는 곳으로

갔을까요?”

에이든은 이웃집 폭군이 석 달에 한 번씩 수인을 갈아치우


는 것을 아주 두려워했다. 길거리에서 샤샤가 맞아 죽는 것
을 봐서 그런지 몸집도 큰 녀석이 겁은 아주 많았다. 에이든
은 아버지와 의붓어머니가 아닌 겨우 초등학생이었던 겨울
에게 의지를 많이 했는데, 그때 당시 이웃이 새로 들여온 지
며칠 안 된 데이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벌벌 떨던
기억이 났다.

“무서워요, 주인님. 주인님은 저를 죽이지 않을 거죠?”

“에이든.”

“주인님은 저를 끝까지 지켜주실 거죠?”

“당연하지. 걱정 마, 에이든.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아.”

그리고 얼마 못 가 에이든은 총을 맞고 사살당했다. 본능


을 이기지 못하고 달려들었던 에이든의 책임이었지만, 자신
이 아버지에게 한마디만 하면 분명히 살 수 있었다. 다시 집
에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을 테다. 겨
울은 가슴 깊은 곳에서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을 애써 모른
체하며 남은 와인을 몽땅 들이켰다. 다신 눈앞에서 수인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거니와 몽롱한 의식으로나마 이 자리
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내가 시범 보여줄게. 잘 봐, 형.”

어느새 옆에서 담배를 피워 물던 최여준이 겨울의 잔을 테


이블 중앙으로 길게 밀어놓고서 일어났다. 그리고 근처에 있
던 수인을 억지로 당겨 앞에 세웠다. 이미 곳곳에서 학대당
한 흔적이 가득한 수인은 자신을 당긴 인물이 최여준임을 확
인하고는 온몸을 벌벌 떨었다.

“이걸 이렇게 잡고 휘두르면서 이 버튼을 누르면 돼.”

최여준은 거의 다 피운 담배를 수인의 입에 물리고 상자에


서 채찍을 꺼내어 설명했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팔
을 크게 휘둘렀다. 휘익, 두꺼운 줄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섬뜩했다.

“아악! 컥, 끄흐윽……!”

수인이 무릎을 꿇고서 곧 기절할 것처럼 바르르 떨며 고통


에 몸서리쳤다. 평범한 채찍이 아니었다. 수인의 몸을 맞은
줄에서 전기가 번쩍 튀었다. 맞기 전부터 너덜너덜했던 옷
사이로 맞은 살점이 붉게 부어올랐다.

저 정도면 큰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겨울은 순식간에 벌


어진 일에 말을 잃었다. 최여준 본인의 수인이 아닌 듯했지
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이들이 생각하는 수인은 모두 똑같
이 열등한 존재니까.
겨울은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감추려 와인병을 쥐고 그
대로 들이켰다. 꽤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정신적 자극이 크다
보니 통 쉽게 취하질 않아 속만 쓰렸다. 겨울은 내일 자고 일
어나면 블랙아웃이 와있길 바랐다. 어중간하게 들이부었다
간 끔찍한 기억이 아른거릴 것 같았다.

“소동물은 이래서 재미없다니까. 너무 약해. 몇 대 맞았다


고 엄살은.”

최여준이 흥미가 떨어진 듯 바닥에 뒹구는 수인을 발로 툭


툭 찼다. 수인이 사나운 발길질에 꿈틀댔다. 그는 숨이 붙은
걸 확인하고서야 자리에 앉아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이참에 확 범이나 입양받을까?”

“……불법이잖아.”

이게 진짜 미쳤나. 겨울이 무거운 눈꺼풀을 힘주어 떴다.


호랑이와 사자같이 큰 육식성 포유동물 입양은 엄연히 불법
이다. 우리나라에선 진작 멸종된 수인이라 입양하려면 해외
에 문의를 해야 할 것이다. 커봤자 가람 정도의 들개까지 허
용되는 마당에 범이라니. 세상이 오냐오냐해 주니까 기어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다.

“걸리지만 않으면 되지, 뭐. 새끼들은 감추기도 쉬워. 그리


고 이건 비밀인데… 아는 형이 구해줄 수 있대서 고민 중이
야.”

“그러다 또 최 회장님 뒷목 잡으신다.”

“형이 우리 할아버지를 몰라서 그래. 막상 보면 제일 좋아


할 인간이 우리 할아버지야. 옛날에 산에서 호랑이도 잡아보
셨댔어. 그 가죽으로 만든 카펫이 아직도 서재에 깔려있다니
까?”
“그게 진짜 같아?”

손주 놀리려고 지어낸 이야기 같은데 허세 가득한 손주는


겉멋만 들어서 호랑이에 맞섰다는 할아버지의 배짱이 아닌
물욕에 눈이 먼 듯했다.

“몰라. 그런데 난 진짜였으면 좋겠어.”

“왜?”

“재밌어 보이니까. 할아버지가 한 거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

잘못 짚었다. 그는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카펫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소동물을 괴롭히는 것이 질린 최여준은 조금
더 크고 강한 수인을 살생하길 원했다. 말문이 막힌 겨울이
와인으로 축축이 젖은 입술을 혀로 쓸었다. 씁쓸한 것이 와
인 때문인지 기분 탓인지 정신이 흐리멍덩했다.

“이야기가 너무 샜다. 형, 이제 형 차례야.”

“…….”

“뭐 해? 받아.”

겨울은 그가 내미는 채찍을 받지 않고 주변을 천천히 돌아


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만취한 놈들의 만행은 가히 눈 뜨
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와인을 바닥에 쏟고 핥으라고 하
질 않나, 맛이 각각 다른 샘플 사료를 술에 섞어 먹이질 않
나. 심지어 강태희가 전달하고 다니는 약물을 먹여 억지로
교미를 시키기도 했다. 라벨지가 없어 소독약인 줄 알았건
만, 발정이 나게 만드는 불법 호르몬제였다. 속이 울렁거린
다. 미쳐 날뛰는 수인을 둘러싸고 열광하는 놈들의 웃음소리
를 들으니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겨울이 힘겹게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심호흡했다.

“…….”

인성 파탄 난 집안 자제들다운 행동이었다. 저것들을 인간


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냥 악질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
었다. 이것들은 인두겁을 쓴 괴물이다. 어둡고 더러운 사회
가 만들어낸 괴물들. 밑바닥에 있어야 할 쪽은 수인이 아니
라 이런 인간들이어야 했다.

겨울은 최여준이 직접 쥐여준 채찍을 들고 바닥에 납작 엎


드린 수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타는 냄
새가 난다 했더니 이 채찍 때문이었다. 살갗과 옷이 타들어
가며 단백질 타는 냄새를 풍겼다.

“형, 못 하겠어? 왜 이렇게 시간을 끌어.”

겨울이 채찍을 쥐고 망설이자, 최여준이 턱을 괸 채 삐딱


하게 말했다. 굼뜬 모습에 흥미가 떨어질 법도 한데, 좋은 구
경거리를 놓치기 싫은 모양이었다.

“형, 겨울이 혀엉, 듣고 있어?”

겨울이 기어코 최여준의 재촉에 눈을 질끈 감고 팔을 높게


들었다. 몇 시간 전 깔끔한 용모의 수인들은 이미 곤죽이 되
었다. 한 대 살짝 맞는다고 이보다 엉망이 되진 않을 테다.
자신이 때리지 않으면 또 최여준이 나설 게 분명했기에 채찍
을 내려놓을 수도 없었다. 혼란스러운 겨울은 그렇게 합리화
하며 기다란 줄을 휘둘렀다.

휘익! 탁!
“…….”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새어 나온다. 아무런 비명도, 환호도


없었다. 의아한 겨울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자신이 내려친
채찍은 겁먹은 수인의 몸뚱이 옆에 볼품없이 흐트러져 있었
다. 다행이다. 새하얘진 머릿속에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뭐야… 빗나갔잖아. 공포탄이야?”

앙코르! 앙코르! 실망감을 내비치던 최여준이 테이블을 두


드리며 다시금 겨울의 체벌을 재촉했다. 겨울은 옆에서 정신
없이 구는 놈 때문에 결국 헛구역질을 하며 채찍을 놓쳤다.
빈속에 마신 술이 한꺼번에 쏠리는 것 같았다. 입 안이 떫고
머리가 핑 돌았다.

“야, 최여준. 겨울이 비위 약한 거 모르냐?”

겨울이 어떻게든 올라오는 토기를 참으려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감싸 쥔 순간이었다. 누군가 최여준을 다그치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다정한 손길에 치솟던 멀미가 잠시나마 가라
앉았다. 겨울은 쭉 뻗은 눈꼬리 끝에 맺힌 눈물을 붉어질 정
도로 닦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다지 반갑지 않은 얼굴이
자신을 향해 씨익 웃고 있었다.

“서프라이즈.”

최여준이 장난꾸러기 같은 남자의 행동에 놀라 목청을 높


였다.

“한태오? 언제 왔냐? 내년에 귀국한다며!”

“형한테 한태오가 뭐야, 호칭 안 붙여?”

최여준이 막 도착한 한태오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며 물었


다. 해외에서 지내는 그는 내년에나 시간이 생겨 귀국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는데, 대체 언제
온 건지 내심 반가우면서도 놀라웠다. 최여준은 그가 내민
손을 턱 붙잡으며 일어났다.

“됐고, 난 겨울이 형 트라우마 고쳐주려고 한 거거든. 모르


면 빠지시지?”

“트라우마고 뭐고 겨울이 비위 약한 거 몰라? 애 하얗게


질린 거 봐라. 트라우마는 네가 만들고 있는 것 같은데?”

한태오가 위아래 없는 동생의 머리를 마구 헤집자, 최여준


이 몸서리치며 물러났다. 잔뜩 힘준 머리가 손길 한 번에 엉
망이 되었다.

“아… 진짜 재미없게 구네.”

그는 약 3년 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운 것도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자 한태오가 빈자리에 앉으
며 겨울의 등을 마저 두드려주었다.

“저 싸가지 언제 철드나. 겨울아, 좀 괜찮아? 속 안 좋아


보이는데.”

“어……. 괜찮아.”

겨울이 미지근해진 물을 들이켜며 대답했다. 덕분에 상황


은 중단되었지만 한태오도 그리 달가운 인물은 아니었다.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이더라……. 사교 모임에 통 참여를 안 했
던 탓에 그가 귀국할 때마다 모였던 멤버들보다 못 본 기간
이 더 길었다.

“우리 7년 만인가?”

“…….”

“매년 너 보려고 한국 오는 건데 이제야 보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하긴, 교복 차림으로 인사를
나눴던 것이 그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겨울은 새삼 달라진
그의 모습을 보며 세월을 실감했다. 서로 번듯한 직장을 갖
고 말끔한 슈트를 입고 마주하니 왠지 색달랐다.

“……찾아오지 그랬어. 나 이런 데 잘 안 오는 거 알잖아.”

겨울의 빈말에 한태오가 픽 웃음을 흘렸다.

“찾아갔으면 만나줬을 거야?”

“…….”

“거봐.”

“…….”

“넌 항상 앞에서 다가가면 멀어지더라. 이젠 오늘처럼 기


척 없이 와야겠다.”

겨울은 자연스럽게 제 손을 주물럭대는 한태오를 빤히 응


시했다. 7년이 지났는데도 좀 더 키가 크고 어른스러워진 것
빼고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 겨울아.”

겨울이 답지 않게 간지러운 말을 내뱉는 그가 부담스러워


손을 내빼자, 한태오의 짙은 눈썹이 순간 들썩 움직였다. 그
미동에 지겹도록 자신을 쫓아다녔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너무 간만이라 잊고 있었다. 그가 학창 시절에 당
당히 게이라고 커밍아웃한 이유가 자신에게도 프레임을 씌
우기 위해서라는 점이었다는 것도 기억났다. 한 살 터울이라
그가 졸업한 이후 1년은 조용히 다닐 수 있었지만 진실을 모
르는 친구들 사이에서의 평판은 그대로였고, 지금 보이는 한
태오의 눈동자에 스민 시커먼 흑심 또한 여전한 듯했다.
“나랑 나갈래?”

“…….”

“넌 이런 거 흥미 없잖아. 형이랑 나가서 바람도 쐬고 그동


안 못 했던 대화도 하자. 응?”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한태오는 술에 취해 힘이 빠진 겨울의 손을 제 허벅지에 턱
올려놓고 떼지 못하게 손으로 꾹 짓눌렀다. 단단한 근육 감
촉이 불쾌한 겨울이 팔을 크게 휘둘렀다.

“……저리 가.”

“말하는 건 여전히 귀엽다.”

한태오는 네가 내 첫사랑이라고 고백했던 그때처럼 히죽


웃으며 겨울의 찡그린 눈썹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첫사랑은
쉽게 못 잊는다는 속설이 맞나 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첫사
랑에 대한 집착 또한 크기가 커진 것 같았다.

한태오도 왔겠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된 모양이다. 겨울


은 꽤 오래 버틴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나 잠시 테이블을
짚고 어지럼증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덩달아 일어선 한태오
가 겨울을 부축하며 말했다.

“파티 재미없으면 당장 우리 호텔로 갈 수도 있는데 어


때?”

이게 끝까지……. 눈을 한 번 힘주어 뜬 겨울이 또렷한 시


선으로 그를 마주했다.

“형.”

“응, 겨울아.”

“꺼져…….”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사람한테 까칠하게 굴고 싶진 않았
는데 기어이 욕을 하게 만든다. 어차피 7년이나 왕래 없이 지
낸 사이라 앞으로 더 못 본다 해도 괜찮았다. 해외 지사에 몸
담은 놈이라 앙심을 품고 달려들 일도 없을 테고.

하지만 한태오는 그런 겨울의 속마음을 간파하기라도 했


는지 떠날 기색을 보이자 급히 몸을 치대왔다.

“나랑 한 번만 자면 진짜 떨어져 줄게.”

“…….”

“뒤끝 없이. 콜?”

대답할 가치도 없었다. 겨울은 얼굴을 들이민 한태오의 이


마를 쭉 밀어내며 술 냄새가 담긴 숨을 길게 내뱉었다. 기사
부르기 전에 나가서 담배라도 한 대 피워야 울렁이는 속이
진정될 것 같았다.

“이래 놓고 다들 뒤돌면 생각난다더라. 아무리 찾아도 너


만 한 얼굴은 없는데 아쉽네.”

“…….”

“혹시라도 나중에 혹하면 바로 연락해. 겨울이 너는 항상


유효하니까.”

“그럴 일 없어.”

어쩜 제 지인들은 다 이 모양 이 꼴인지 한탄스럽다. 겨울


이 테이블 위 핸드폰을 챙기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한태오
가 줄줄 내뱉는 말에 다시금 그를 홱 돌아보았다.

“사람 일 모른다. 나도 네 눈꼬리 끝에 찍힌 점 보면서 자


위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그게 얼마나 섹시한지
모르지? 아, 침대에서 네가 다 벗고 나 보기만 해도 바로 쌀
텐데.”

“……정신 나갔어?”

“어, 지금 그 눈빛. 딱 좋다. 나 그냥 여기서 바지 내릴까?”

술이 홀딱 깰 만큼 노골적인 언행에 겨울이 잠깐 취기를


잊고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벨트를 쥐고 흔들
던 한태오가 장난인데 왜 이렇게 예민하냐며 웃음을 흘렸다.

“이만 가야겠다.”

두통이 밀려온다. 한편에서 탐탁지 않은 재회가 이루어지


는 동안 각종 고문을 당하는 수인들의 날카로운 비명이 고막
을 찔렀다. 겨울은 조금 전 장난은 미안하다면서 손목을 붙
잡는 한태오를 떨쳐냈다. 말은 장난이라지만 마음은 진심인
게 분명하다. 블랙아웃을 위한 나머지 술은 집에서 마셔야겠
다. 더 있다가는 저 변태 새끼가 정말로 벗을 것 같았다.

“야, 태오야, 추하다. 그만해. 넌 오자마자 우리랑 인사는


안 하고 겨울이 꼬시고 있냐?”

“그래, 존나 추하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넌 취한 놈 데리


고 나가면 범죄야. 알아?”

“어? 주도훈!”

겨울이 구석에 숨은 가람을 데리고 나가려고 손짓하는 사


이, 지인과 어디선가 불참 예정이었던 주도훈이 나타나 자꾸
만 질척대는 한태오를 힐난했다. 한태오는 자신을 깎아내리
는 말에 타격도 없는지 오히려 오랜만이라면서 주도훈을 반
겼다.
사람 좋은 얼굴로 한태오의 적극적인 인사를 아낌없이 받
은 주도훈이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한 발짝 물러났다. 겉으
로 받아주는 듯해도 그 역시 겨울처럼 한태오가 탐탁지 않은
듯했다.

“겨울이가 잘생기고 군살 없이 몸매 잘빠진 건 알겠는데


내 동생한테 그러면 안 되지.”

“어어, 장난이라니까. 내가 겨울이를 얼마나 아끼는데.”

“정말?”

주도훈이 눈썹을 삐죽 올리며 되물었다. 그러자 한태오가


겨울을 진득한 눈길로 훑으며 대답했다.

“다른 놈이었으면 여기서 바로 까고 박았지.”

“태오야, 말.”

“아, 미안. 진짜 그런다는 건 아니야.”

“그렇지? 우리가 몇 년을 본 사이인데. 선은 지켜야지.”

한태오를 말리는 줄 알았더니 되레 부추기는 것 같다. 황


당한 대화를 듣던 겨울이 어눌한 말투로 주도훈에게 못 온다
면서 어떻게 왔냐고 물으니, 주도훈이 어깨를 위로 들썩이며
말했다.

“재미없어서 일찍 빠져나왔지. 너희 어떻게 노는지 궁금하


기도 하고. 그런데 벌써 가게?”

“어.”

“네가 가면 재미없는데 또……. 그럼 데려다줄게.”

“됐어… 기사 부르면 돼.”


발이 꼬이는 겨울을 가까이 있던 한태오 대신 덥석 잡아챈
주도훈이 겨울의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나 있는데 귀찮게 뭐 하러. 그냥 줘.”

“너도 술 마신 거 아니야?”

“늙다리들이랑 뭔 술을 마셔. 여기 오려고 같이 기울이는


척만 했어. 음주운전 아니니까 걱정 마.”

“…….”

아, 싫은데. 겨울은 그가 이 친절을 빌미로 말도 안 되는


부탁이나 생색을 내며 귀찮게 하진 않을까 걱정이었다. 하지
만 더는 거절할 힘이 나질 않았다. 느릿느릿 올라온 취기 때
문에 시야가 몽롱해졌다.

“이건 뭔데 여태 멀쩡해?”

주도훈이 귀가를 눈치채고 다가온 가람을 시큰둥하게 바


라보았다. 가람은 죽는 소리를 내는 수인과 달리 예쁘게 입
혀놓은 정장 차림 그대로였다. 오래 앉아있어 바지에 주름이
잡힌 것만 빼면 방금 도착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리안… 괜찮아요……?”

“야, 씨발. 얻다 손을 들이밀어. 안 떼?”

비틀대는 겨울이 옆에 서라고 손짓한 순간이었다. 주도훈


이 사납게 욕설을 읊었다. 반대편에서 저처럼 허리에 손을
얹고 부축하려는 가람 때문이었다. 당황한 가람이 잽싸게 거
리를 벌렸지만, 수인을 죽일 듯 노려보는 눈빛은 변함없었
다. 무엇이 그리 불만스러운지 취한 동생을 보며 휘었던 눈
이 섬뜩하게 변했다.

“도훈아, 이거 겨울이 거야?”


가람과 겨울, 그 중간을 비집고 선 한태오가 물었다.

“어, 다른 새끼들 꼴을 보고도 배우는 게 없나. 기어오르


네.”

“수인 들였다길래 소동물일 줄 알았는데 의외다. 머리도


길고…….”

“윽……!”

주변을 빙빙 돌며 구경하던 한태오가 가람의 긴 머리칼을


세게 잡아당겼다. 음침하게 얼굴을 가렸던 검은 커튼이 거둬
지고, 뽀얗고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예쁘장하네. 겨울이가 이런 얼굴을 좋아했구나.”

겨울은 졸린 눈을 비비며 상황을 관전했다. 워낙 살벌한


분위기라 뺨이라도 올려붙일 줄 알았는데 한태오는 의외로
가람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자신을 아낀다는 말이 거짓이 아
니었나 보다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집착을 의미하기도
했다.

“잠깐…….”

겨울의 시선이 점차 밑을 향했다. 꼼지락거리는 한태오의


손에 자신이 바닥에 버려뒀던 채찍이 있었다. 그는 가람이
서둘러 돌아서자마자 넓은 등에 채찍을 휘둘렀다.

“흐윽!”

“아악! 씹, 씨발… 아파……!”

채찍에 맞은 인물은 가람뿐만이 아니었다. 겨울이 손가락


을 붙들고 무너졌다. 저도 모르게 말리려고 뻗은 손에 채찍
이 스쳤다. 검지와 중지 끝이 불에 타는 듯 화끈하고 얼얼했
다.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그나마 취한 상태라 감각이 무
뎌져서 다행이지, 맨정신이었다면 기절할지도 몰랐다. 손가
락에서 찌릿찌릿하게 이어진 고통이 전신에 퍼지는 것 같았
다.

“야, 한태오! 미쳤어? 그렇게 가까이에서 휘두르면 어쩌자


는 거야!”

주도훈이 주저앉은 겨울의 상태를 살피며 한태오를 비난


했다. 와중에 반사 신경이 좋은 가람이 등을 둥글게 마는 바
람에 제대로 맞지 않고 대신 다친 동생의 상처가 더욱 심각
해 보여 화가 났다.

“그냥… 좆같잖아. 겨울이랑 친해 보이는 게…….”

되레 놀란 한태오가 웅얼거리다가 이내 채찍을 내던졌다.


매번 까이기만 하는 입장에서 겨울에게 들러붙는 수인을 보
니 배알이 꼴렸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홧김에 휘두른 것
이 겨울을 다치게 할 줄은 정말 몰랐다.

“후으… 태오 형.”

진한 충격에서 벗어난 겨울이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났다.


살점이 파인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흘렀고, 어느덧 큰 사고
에 달려와 핏자국을 지켜보던 이들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
왔다.

“어, 겨울아. 나 여기 있어. 괜찮아? 움직일 수 있겠어?”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

“……응?”

서느런 눈빛이 한태오를 꿰뚫었다. 시뻘건 피와 함께 분노


가 툭툭 튀어나왔다.

“진짜 죽여버릴 것 같으니까.”


“…….”

섬찟한 침묵 끝에 겨울은 가물가물한 정신을 붙들며 연회


장을 빠져나갔다. 주도훈과 가람이 비틀거리는 걸음을 뒤쫓
아 왔지만 넘어질지언정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생
애 최악의 파티였다.

***

“깼어요, 리안?”

가람의 어깨에 기대어 정신없이 자던 겨울이 천천히 눈꺼


풀을 들어 올려 주위를 살폈다. 익숙한 전경이었다. 어떻게
온 거지……. 씩씩거리며 연회장을 나온 이후로는 아무런 기
억도 나질 않았다. 뒷좌석에 앉아있는 걸로 보아 기사를 불
렀던 것도 같고… 막 잠에서 깬 터라 정신이 없었다.

“……아.”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찌릿한 감각이 혈관을 타고 올랐


다. 겨울은 오른손을 붙잡고 잠시 숨을 골랐다. 피가 흐르던
손가락에 흰 붕대가 칭칭 감겨있었다. 쓰라린 상처를 보며
애써 기억을 더듬으려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주도훈이 나타
났다.

“술 좀 깼어?”

그러고 보니 주도훈이 데려다준다고 했었지. 응급 처치도


그가 알아서 해준 모양이었다. 겨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
했다.

“……응.”
“너 업고 병원 다녀오느라 허리 나갈 뻔한 건 기억 나냐?”

“…….”

당연히 기억 안 난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긴장이 풀려 필


름이 완전히 끊겨버렸다. 주도훈은 겨울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픽 코웃음을 치며 늘어진 몸을 부축했다.

“됐다. 보답은 나중에 톡톡히 받을게. 일단 들어가서 자


라.”

“어… 내 차 타고 가든지.”

“그러려고 했어. 죽어도 자고 가란 말은 안 하네.”

주도훈은 겨울과 나란히 앉은 가람이 완전히 내리기도 전


에 등을 밀치며 문을 닫았다. 매너 없는 손짓에 휘청한 가람
이 반사적으로 그를 돌아보았으나, 주도훈은 태연히 내부 세
차할 때가 된 것 같다며 의미 없는 말만 해댔다.

기운이 쭉 빠진 겨울이 대문을 연 찰나였다. 그 뒤에 찰싹


붙어 주도훈이 가기만을 기다리던 가람의 스카프가 스르르
풀렸다.

“어……?”

순식간이었다. 매듭이 풀린 스카프가 세찬 바람에 휙 날아


갔다. 가람은 동시에 스카프를 잡으려고 자리를 벗어났다.
다행히 얼마 못 가고 바닥에 떨어진 스카프를 찾았다. 새벽
바람이 강해 하마터면 멀리 날아갈 뻔했다.

“크흣!”

가람이 길게 늘어진 스카프를 주우려고 손을 뻗은 찰나,


구둣발이 그의 손을 짓밟았다.
“이거 완전 꼴통이네. 주인이 한눈팔면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어?”

“…….”

가람은 주도훈이 스카프를 밟지 못하도록 손을 빼지 않았


다. 고통을 참는 입술에 잇자국이 깊게 팼다. 주도훈은 제 밑
에서 악물고 버티는 수인을 물끄러미 보다가 아직 들어가지
않은 겨울에게 휘적휘적 손짓했다.

“겨울아, 이거 목줄 안 채워? 딴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버려 둬.”

겨울이 무심히 대답했다. 그러자 신음조차 참던 가람이 입


을 뗐다.

“자, 잘못했어요, 리안. 저는 이게 날아가서……!”

“시끄러워. 머리 울리니까 그냥 들어와. 형도 그만 가고.”

겨울의 중재에 두 남자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한 놈은 간


만에 듣는 ‘형’ 소리에 놀라 발을 뗐고, 한 놈은 겨울이 제 행
동을 오해하지 않은 안도감에 말을 멈췄다.

철커덩, 대문이 열렸다. 겨울은 곧장 집으로 걸음을 옮겼


다. 울렁거리는 속을 달랜답시고 시린 바람을 들이켰더니 머
릿골이 띵했다. 위스키를 마셨어야 했나. 끊기려면 한 번에
끊길 것이지, 어중간하게 끊긴 기억이 뒤섞여 불안을 일깨웠
다.

“리안.”

가람이 나직한 목소리로 겨울을 불렀다. 수인인 저보다 만


신창이가 된 그는 안방 침대까지도 못 가고 소파에 늘어져
잠을 청했다. 난생처음 맡는 술 냄새가 역한 가람은 혹여나
겨울이 죽은 건 아닐까 걱정되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생
사를 확인했다. 긴 머리카락이 겨울의 코끝을 살랑살랑 간질
였다.

“으으음……. 뭐… 하는 거야.”

숨소리를 색색 내뱉던 겨울이 칭얼거리며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금색 눈동자가 핼러윈의 호박 유령처럼 자
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놀랄 법도 한데, 흐
릿한 의식으로 마주한 금안은 문득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 리안. 괜찮아요?”

“신경 끄고 잠이나 자…….”

“……네.”

겨울의 눈이 다시 감겼다. 가람은 그 옆에 서서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천천히 단추를 풀
고 등에 길게 난 지퍼를 내렸다. 아주 느릿느릿했다. 채찍을
막은 겨울과 단단히 몸을 감싼 정장 덕분에 크게 다치진 않
았지만, 등에 난 상처가 충격으로 인해 또 터진 것 같았다.

“후…….”

딱지에서 흘러나온 피가 굳어 옷이 잘 벗겨지지 않았다.


겨울이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방치한 탓에 피딱지와 옷이
그대로 달라붙은 모양이었다. 힘주어 떼면 얇게 생긴 딱지가
함께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가람이 환한 욕실에서 상태를
살필 겸 포기하고 옷을 다시 덮었을 때였다. 겨울이 언제부
터인지 몽롱한 표정으로 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안?”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에 겁먹은 가람이 슬쩍
물러났다. 그러자 겨울이 붕대 감은 손을 까딱까딱 흔들었
다. 다가오라는 의미였다.

“야.”

“……네.”

“너 어디서 태어났어?”

겨울이 늘어진 발음으로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


간 경계선 안에 고이 묻어뒀던 호기심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웃과 주변 지인이 돌보는 수인과 비교하면 가람은 꽤 많은
나이였다. 그간 아무리 파양당하며 살았다 해도 한계가 있단
말이다. 운 좋게 주도훈의 눈에 띄어 이 집에 올 수 있었지
만, 자존심 센 성인 수인을 입양하는 사람은 애초에 많지 않
아 궁금했다.

겨울은 얌전히 가람의 대답을 기다렸다. 술에 취해서인지


졸려서인지 수인과 처음으로 정상적인 대화를 하는데도 불
쾌감이 들지 않았다. 옛날에 에이든과 한방에서 도란도란 이
야기를 나눴을 적이 떠올랐다. 따뜻하고 정겨운 분위기. 그
와는 전혀 다른 생김새지만 추억의 향기가 났다. 창가에서
스며든 달빛이 가람의 옆태를 포근히 적셨다. 하늘에서 내려
온 에이든을 보는 것만 같았다.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산이요.”

흔한 숍 이름이나 수인 농장 지역을 말할 줄 알았던 가람


은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겨울이 삐딱하게 흘러내리는 자세
를 바로잡으며 되물었다.

“산? 숍이 아니라?”
“네……. 봄이 흐르는 강이 있는 곳이에요. 이곳에서는 천
악산이라고 불려요.”

“천악산…….”

지리에 익숙진 않지만 얼핏 들어본 듯한 산이다. 기억 속


산 목록에 없으니 등산 코스로 유명한 곳이 아닌 건 확실했
다. 산 이름을 곱씹던 겨울이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이게 중
요한 게 아니었다. 고향이 산이라는 것은 곧 야생으로 자랐
다는 의미였다.

“산에서 자랐는데 상처 하나 다룰 줄 몰라?”

하지만 두려운 티를 내선 안 되었다. 야생에서 자란 짐승


은 본능적으로 약점을 보이는 순간 먹잇감을 물어 챌 테니
까. 겨울은 왠지 허리에 있는 흉터가 간지러워 그 부근을 만
지작거렸다.

“도시엔 약초가 없잖아요…….”

대뜸 꾸중 들은 가람이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그의 손


에서 기다란 스카프가 찰랑거렸다. 바닥에 떨어져서 먼지가
조금 묻긴 했어도 찢어지거나 상한 곳은 없었다.

“도시에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리안.”

“그래서 도망가려고 했어?”

“그런 거 아니에요! 아깐 이게 날아가서 잡으려고……!”

“아니, 그 전에.”

“…….”

맞나 보다. 그는 파티 전에 대문 앞을 서성이며 도망갈 틈


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 식의 파티인 줄 알았으면 그냥 내버
려 둘걸. 주도훈 말대로 겨우 하루 반짝할 이슈인데 너무 예
민했다. 이미 연회장에서 분노를 터뜨리고 온 터라 화도 나
지 않는다. 겨울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가다가 들키면 사살이야.”

“…….”

“숍에서 온 놈이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알아요, 아는데……. 엄마를 찾으려고 했어요.”

“엄마?”

술이 깨는 듯 시야가 점차 선명해진다. 뜻밖의 단어였다.


수인에게도 당연히 가족이 있단 사실을 간과했다. 얼굴 한
번 못 보고 헤어진 사이가 빈번해서 가람도 그럴 줄 알았다.
겨울은 괜스레 죄의식에 사로잡혀 성이 났다.

“찾아서 뭐 하게. 이렇게 사는 거 보여주게?”

“……생사만 확인하려고 했어요.”

“너도 팔려 온 마당에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웃기지도 않는다. 수인이 가족 찾겠다고 떠도는 건 자살행


위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어리석어도 제 목숨은 부지할 줄
알아야지. 아니면 자존심 무릅쓰고 부탁이라도 하든가.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겨울이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달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나는 금안이 발을 사로
잡았다.

“아니요. 죽은 거였으면 좋겠어요.”

“뭐……?”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여태 어물쩍거리며 말하던 가람이 아니었다. 엄마를 찾겠
다고 도망가겠다더니 이제는 죽었으면 좋겠다고 살벌한 말
을 내뱉는다. 겨울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가시를 세
운 수인의 모습은 예상보다 더욱 사나웠다. 허리에 남은 흉
터가 간지럽다 못해 아릿해졌다.

“엄마가… 나처럼 아플까 봐 무서워요. 그런데 죽으면 걱


정 같은 거 안 해도 되잖아요.”

“…….”

“그래서 그것만… 그것만 확인하려고 했어요…….”

울먹이는 가람의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했다. 마치 연못에


비친 노란 달 같았다. 겨울은 그 눈을 가만히 마주했다. 고작
들개 잡종이 아니라 보름달 아래 선 늑대를 보는 듯했다.

“죽었다고 생각해.”

아름다운 감상평과 달리 겨울의 대답은 쌀쌀했다.

“그냥 하는 말 아니야. 중년 수인이면 진즉 사살되고도 남


았어.”

“흐윽……. 리안, 리안은…….”

그 말에 울음을 참던 가람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겨울은


무심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딱한 가족사가 있을 줄은 몰
랐다만, 언젠가 마주해야 할 슬픔이라면 빨리 짚고 넘어가는
게 나았다. 모두 경험에서 비롯된 깨달음이었다.

“질질 짜지 말고 똑바로 말해.”

“리안은 그렇게 말하면 마음이 편안해요?”

기어이 고인 눈물이 뺨을 적셨다. 그는 산에 돌아가지 못


하는 가람 본인 대신 충고 몇 마디 한 자신을 원망하는 듯했
다.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었다. 겨울은 어릴 적 재혼한 아버
지에게 멋도 모르고 대들었다가 비슷한 말을 들었다. 그때는
아버지가 그렇게 미웠었는데, 사춘기를 겪는 소년처럼 구는
수인을 마주한 지금은 어쩐지 그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했다.

“장식장 옆 서랍 안에 구급상자 있어.”

슬슬 지겨운 겨울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며 말했다. 가람


은 훌쩍이기만 할 뿐, 미동조차 없었다.

“가져오라고.”

“……네.”

낮게 갈라지는 음성에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은 가람이 곧


장 구급상자를 꺼냈다. 겨울이 제 앞에 손짓하며 명령했다.

“꿇고 앉아.”

“……읏.”

옷을 잡아당겨 앉히자, 소파에 등을 부딪친 가람이 신음했


다. 하지만 겨울은 태연하게 구급상자를 열어 소독약을 찾았
다. 그리고 상처와 달라붙은 가람의 옷 위로 소독약을 부었
다.

“흐읏!”

가람이 움찔하며 손길을 피했으나, 겨울은 아랑곳하지 않


고 축축해진 옷을 들어냈다. 말라붙었던 상처가 소독약으로
인해 부드러이 떨어졌다. 나을 만하면 자꾸만 덧나는 상처에
송골송골 피가 맺혔다. 다시 붙지 않도록 옷을 홱 젖힌 겨울
은 구급상자를 뒤적대며 치료할 만한 것을 휙 내던졌다.

“화상 연고랑 밴드.”

“…….”
“붙일 줄 모르면 상자 뒤에 설명서 읽어. 글씨는 읽을 수
있지?”

“네… 고마워요, 리안…….”

어느덧 울음을 그친 가람이 스카프에 얼굴을 묻으며 대답


했다. 덩치에 안 어울리는 짓은 다 하고 다니네. 기껏 데리고
가서 산 정장이 그을리고 상했다. 겨울은 품에서 담배를 꺼
내 물며 안방에 들어왔다. 물론 정장이야 다시 맞추면 되지
만, 이런 식으로 옷이 해지는 건 싫었다. 왜 싫지? 불현듯 떠
오른 의문의 해답을 곰곰이 생각하며 창문을 열었고, 뿌연
연기를 뿜으며 대충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였다.

……일종의 사치나 다름없으니까.


침묵 속 안광 (1)

이른 아침, 샤워를 마치고 나온 겨울은 모닝커피를 내렸


다. 고소하고 향긋한 커피 향을 맡으니 빈속에 맴돌던 술 냄
새가 싹 씻겨나가는 듯했다. 겨울은 거실 바닥에 몸을 말고
잠든 가람을 힐끗 바라보았다.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몸에 물부터 적셨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을 들고 서있
으니 어젯밤 일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파티에서 있었던 일은 취한 데다가 화가 나서 잠시 이성을


잃은 상태라 자고 일어나니 아무렇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놈들은 아닌 듯했다. 최여준, 한태오, 강태희 등 주변
지인에게 걱정 어린 문자가 많이 와있었다. 겨울은 붕대 감
은 손으로 더듬더듬 핸드폰을 확인했다.

대부분 치료는 잘 받았냐는 확인차 연락이었고, 그중 저장


하지 않은 번호로 온 문자 하나만 미안하다, 얼굴 보고 사과
하고 싶다며 밥 한 끼 하자는 둥 별 볼 일 없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이 문자의 발신자는 한태오가 분명했다.

겨울은 굼뜬 손가락을 움직여 문자를 삭제했다. 파티에서


있었던 일은 백번 양보해서 넘어갈 수 있다 해도, 그간 억눌
렀던 집착을 불쾌하게 표현한 것은 용서 못 한다. 빈말이 아
니라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인연을 끊은 건 처음인데 찜찜하긴커녕 속이
후련했다. 다행히 새해 전 이틀이나 주어진 휴일을 마음 편
히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일 이 시각이면 출근 준비로
바쁜데, 오늘은 서재에서 느긋하게 커피나 마시며 오전을 보
내야겠다.

쿵쿵!

겨울이 머릿속으로 늘어진 일정을 짜며 돌아선 때였다. 초


인종과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렸다.

달그락, 하마터면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겨울은 아슬아슬


하게 쥐고 있던 잔을 조심히 내려놓고 대문을 열었다. 인터
폰에 비친 인물은 다름 아닌 주도훈이었다.

“……잠도 없나.”

밤늦게 돌아갔으면서 해가 뜨자마자 찾아올 줄이야. 겨울


은 현관문을 열고 그사이에 비스듬히 섰다. 날이 추워 그를
마중하러 바깥에 나가긴 싫었다.

“굿모닝.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일찍 일어났네. 숙취 있


어?”

검지에 차 키를 달랑이며 걸어온 주도훈이 씨익 웃으며 인


사했다. 겨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열쇠를 받아 들었
다. 내 동생 참 부지런해. 칭찬을 중얼거린 주도훈은 자연스
레 집에 들어왔고, 겨울은 간밤에 고생한 그를 위해 모닝커
피를 내려주었다.

“나 아침에 커피 안 마시는데. 여태 한집에 살았으면서 그


것도 몰라?”

“마시지 말든가. 따로 내줄 건 없어.”


“그렇다고 줬다 뺏는 건 너무 하지. 음, 이건 맛있네.”

겨울이 잔을 빼앗으려 하자, 주도훈이 손길을 피해 한 모


금 마셨다. 그러고는 어수선해서 깬 가람이 눈에 띄었는지
성큼성큼 걸어가 발로 툭툭 건드렸다.

“야, 너 때문에 주인이 다쳤는데 어떻게 책임질래?”

“…….”

“그러게 그걸 왜 피해. 건방지게.”

그는 괜한 가람의 신경을 긁었다. 가람 또한 피해자인 건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미처 잠에서 깨지도 못한 채 불
벼락을 맞은 가람이 모른 체 눈을 비비적거리자, 주도훈은
기어코 주저앉아 뺨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전에 말한 경고를
무시한 탓이었다.

그 강도가 점점 강해질 즈음, 겨울이 주도훈의 어깨를 당


기며 중재했다. 가람의 고개는 조금도 돌아가지 않았다. 서
로 자존심을 빳빳이 세우는 모습에 기가 찼다.

“키 주러 온 거 아니야? 줬으면 얼른 가.”

“추운데 벌써 내보내려고? 아, 내가 어제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생색내려고 왔냐?”

“그건 아직 시작도 안 했고. 그래서 말인데 내일 시간 있


어? 마지막 날 처량하게 혼자 보내기 싫은데 형 대접 좀 해주
라.”

“…….”

또 무슨 꿍꿍이지. 휴일은 철저히 혼자서 보내려고 했는


데. 겨울은 굳이 올해의 마지막 날을 형과 보내기 싫었다. 대
답 대신 눈을 빤히 쳐다보자, 주도훈이 능글맞게 윙크하며
말했다.

“긍정으로 안다? 그리고 기사님 온댔어. 네가 준 커피는


다 마시고 가야지.”

그는 대문 앞에 기사가 도착할 때까지 입을 쉬지 않았다.


형제끼리 놀러 가는 건 처음이 아니냐며 겨울이 보는 앞에서
레스토랑 예약까지 했다. 꼼짝없이 일정을 붙잡힌 겨울은 그
저 한숨만 내쉬었다. 생색을 들어주지 않으면 정초부터 괴롭
힐 게 뻔했기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액땜할 겸 딱 내일 하루
만 참기로 했다.

“그런데, 수인 가족을 찾는 경우도 있어?”

기사가 도착하고, 주도훈을 배웅하는 도중 겨울이 물었다.


기사가 열어준 뒷좌석에 타려던 주도훈이 멈칫했다.

“수인 가족이라니?”

“말 그대로 숍에서 데려온 수인 가족을 찾아주는 경우도


있냐고.”

흐음, 주도훈이 미묘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겨울은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물어볼 만한 사람이 그밖에 없었
다. 아침에 문득 떠오른 기억이 여태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
젯밤, 집에 돌아와 가람과 대화를 나눈 기억만은 생생했다.
엄마를 찾는다고 했었나. 당연히 죽었을 거라고 험한 말을
전했지만 아무래도 믿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보통 그런 일은 없지.”

“찾는 방법이 없어서?”


수인은 모두 몸에 미세한 칩을 이식받기 때문에 가람을 낳
은 수인 인식 번호만 알면 일은 쉽다. 하지만 칩은 수인의 도
망, 사망 처리 등 서류상 작업을 할 때만 경찰 쪽에서 사용하
는 것이라서 마음만 먹는다고 해낼 문제는 아니었다. 수인을
싫어하나 언제나 그들을 가까이하는 주도훈의 의견이 궁금
했다. 하지만 미소를 머금은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겨
울은 그제야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는 걸 눈치챘다.

“왜 묻는데?”

“……우리 팀 직원이 물어보길래.”

겨울이 그럴싸하게 변명했다. 진실 뒤에 따를 수많은 의문


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상한 질문에 주도훈이 완전히
돌아섰다.

“별걸 다 묻네. 중년 수인은 드문 거 모른대? 어느 정도 나


이 차면 너도나도 다 유기해서 사살하는 마당에 뭔 가족이
야. 우스갯소리로 수인 수명은 서른을 못 넘긴다는 말도 있
잖아. 그거 물은 새낀 우리 회사에 어떻게 들어왔대? 이름 좀
알려줘 봐, 가서 묻게. 취업 조건 중 수인 분양은 필수인데
수상하게 구네. 아니면, 시험하는 건가?”

불똥이 애꿎은 팀원에게 튀었다. 겨울은 애써 덤덤한 척


그를 말렸다.

“……됐어,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해.”

“팀장이 무지하니까 팀원들도 닮아가지. 낙하산으로 들어


왔다고 다 봐주지 말고 관리 좀 해. 그렇게 한 방 두 방 먹다
가 자리 뺏기는 수가 있다.”

“얼른 가. 춥다.”
겨울이 그를 억지로 차 안에 밀어 넣자 기사가 타이밍 좋
게 문을 닫아주었다. 인사도 없이 돌아서려는데, 창문이 스
르르 내려가고 주도훈이 말을 걸었다.

“주겨울.”

“또 왜.”

“너 은근히 들개 새끼 감싸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데…….”

“…….”

“저거 에이든 아니야. 똑같은 실수 반복하지 마.”

어쩌면 눈치 빠른 주도훈이 의도를 알아차렸을지도 모르


겠다. 애초에 팀원을 보러오겠다는 소리도 빈말이었을 테지.
겨울은 다친 손으로 주도훈의 이마를 힘주어 밀어 넣으며 대
답했다. 최대한 무심하고 무감각하게. 고작 호기심으로 물은
것으로 의심을 사서는 안 됐다.

“들개는 너 같은데.”

“뭐?”

“개소리하지 말고 꺼지라고. 기사님, 조심히 가세요.”

“저게 형한테… 주겨울! 내일 연락받아야 돼! 잠수 타면 지


구 끝까지 쫓아간다!”

차가 슬슬 움직이자 다급해진 주도훈이 크게 소리쳤다. 다


행히 평소로 돌아왔다. 한시름 놓은 겨울은 담배를 피우는
듯 뽀얀 입김을 뿜어냈다.

그나저나 계획이 틀어졌다. 내년이면 더욱 바빠질 텐데 귀


한 휴일을 주도훈한테 바치게 생겼다. 갑자기 복잡해진 겨울
은 습관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느닷없이 꼬르륵대는 배
를 쓰다듬으며 토스트를 만들었다.
“……할 말 있으면 해.”

겨울이 대뜸 말했다. 토스트를 다 먹어가는 도중, 진한 시


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가람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
라보고 있었다. 먹기 전에 사료를 챙겨줬는데 부족한 건가
해서 그릇을 힐끗 살폈지만, 한 알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리안, 나는 가야 해요.”

고사 지내듯 그릇 앞에 무릎 꿇고 앉은 가람이 천천히 일


어섰다.

“……너는 그냥 내가 만만한 거구나.”

허기를 달래 좋아졌던 기분이 한순간에 추락했다. 겨울이


손을 닦으며 중얼거리자, 가람이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아니에요, 리안! 나는 엄마를 찾…….”

“난 너 못 내보내. 지금 그걸 나한테 예고하는 이유는 뭐


야? 수갑이라도 채워달라 이거야?”

겨울이 차분히 따져 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법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바보였다. 주도훈 말이 맞았다. 괜한 동
정이고, 괜한 행동이었다. 고분고분하게 지내면 여럿이 편안
한데 제 목숨 바쳐가며 낮은 신분으로 가족을 구하겠다고 나
서는 건 자유를 되찾겠다고 돌려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계약서라도 쓸래?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겨울이 비아냥대며 말했다. 이대로 두면 출근한 사이 그가


도망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종이와 글로라도 바보 같은 수인
을 잡아둬야 할 것 같았다.

“네?”
알아듣지 못한 가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를 찾는데
계약서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는 표정이었다. 겨울은 픽 코웃
음 치며 서재에서 노트와 펜을 갖고 나왔다.

“내 말이 못 미더워서 도망가겠다는 거잖아.”

“도망가지 않아요!”

“시끄러워. 네가 원하는 거 해줄 테니까 잠자코 듣기나


해.”

겨울은 노트 한 장을 북 찢어 그 위로 펜을 휘갈겼다. ‘계
약서’ 의미 없는 세 글자였다.

“네가 원하는 건 엄마의 생사 확인이지? 네 신분으로는 당


연히 실패할 거야. 그래서 지금 내가 직접 찾아주겠다는 계
약서를 쓰는 거야.”

“……리안이요?”

“그래, 내가. 대신 조건이 있어.”

겨울이 단호한 눈빛으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때까지 사고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수인
때문에.

“전 가진 게 없는데…….”

가람이 긴장한 듯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맨발로 뛰


쳐나갈 줄만 알지, 감히 대화로 풀어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
았다. 게다가 인간이 수인의 일을 맡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
어서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뭐든지 할게요. 뭐든지… 리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게


요.”
가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겨울은 스스로 낚인 수인
을 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고민하며 조건을 내걸 필요도
없었다. 평소답지 않게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라 마무리가 아
쉬울 뻔했는데, 덕분에 수월해졌다.

“여기 이름 적어.”

겨울이 계약서 끝에 대강 서명했다. 말뿐인 서약은 신뢰가


없다. 아무리 수인이라도 그가 애지중지하는 스카프처럼 쥐
여줄 것이 필요할 듯했다.

“생사 확인하면 알려줄 테니까 그때까진 허락 없이 나갈


생각 하지 마.”

“같이 찾는 게 아니에요?”

서명하려던 가람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깨달


은 듯했다. 물기 찬 눈망울이 꽤 비장해 보였다.

“나도… 조건 있어요.”

“네가 조건을 내걸 처지가 아닐 텐데?”

눈높이를 맞춰 줬더니 이젠 맞먹으려 한다. 화가 난 겨울


이 계약서를 빼앗아 내던졌다. 그러자 가람이 구겨진 종이를
펴며 반항했다.

“그럼 약속하지 않을 거예요. 죽든 말든… 혼자서라도 갈


거예요.”

“하……. 뭔데. 터무니없는 거면 계약은 없던…….”

“지금 가요.”

“뭐?”

겨울의 말을 끊은 가람이 서명을 마저 했다. 그리고 휘갈


긴 겨울의 글씨 밑에 제 조건을 눌러 썼다. 삐뚤삐뚤하고 사
선으로 이어진 글씨에 고집이 돋보였다.

“천악산이요. 대신 지금 가요.”

“…….”

주도훈의 충고가 환청처럼 스쳤다. 그는 에이든과 달랐다.


여태 봤던 모습과 달리 주도적이고 강단 있었다. 수인과의
계약이라고 너무 우습게 봤던 모양이다. 어렵진 않지만 성가
신 조건에 겨울이 입을 꾹 다물자, 가람이 불완전한 계약서
를 내밀었다.

“리안은 내가 죽지 않도록 지켜주는 사람이잖아요. 찾는


건 직접 할 거예요.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이내 겨울이 구겨진 노트 쪼가리를 받아 들었다. 이로써


계약 성사였다.

***

다른 산이면 몰라도 천악산은 거리가 꽤 멀다. 지금 다녀


오면 늦어도 초저녁은 되어야 올 수 있을 듯했다. 그깟 계약
조건 따위 무시하면 그만인데 내가 왜 운전을 하고 있는 거
지. 말려도 한참 말렸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른
것 같았다.

“스카프 매.”

“네?”

겨울은 고속도로를 달리며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는 가람


에게 말을 건넸다. 목줄 때문에 생긴 자국이 거슬렸다. 저 꼴
로 돌아다니면 불시 검문을 할지도 모르고 가족을 찾긴커녕
바로 철창신세일 테다.

“그거, 들고만 있지 말고 매라고.”

“네…….”

겨울의 명령에 가람이 꾸깃꾸깃하게 쥐고 있던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겨울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두른
게 아니라 대충 얹어놓기만 한 스카프는 바람이 불면 곧 날
아갈 모양새였다. 아마도 매듭짓는 방법을 모르는 듯했다.

라디오와 음악도 틀지 않고 장장 세 시간에 다다르는 거리


를 내리 달렸다. 겨울은 침묵 속에서 내려 상쾌한 공기를 듬
뿍 들이마셨다. 간만에 도시의 미세먼지가 아닌 자연의 공기
를 마시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겨울이 찌뿌둥한 몸을 풀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즈


음, 가람은 이리저리 두리번대며 주변을 경계했다. 누가 봐
도 수상한 인물처럼.

“엇……!”

겨울은 누가 의심할세라 가람의 뒤로 다가가 매다 만 스카


프를 단단히 묶어주었다. 가람이 놀라 버둥대자 겨울은 일행
인 척 다정하게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후줄근한 평소와 달리
패딩과 그 안에 두꺼운 기모 맨투맨을 입혀서 기껏 멀쩡한
사람 꼴 만들어 왔는데 초장에 들킬 수는 없었다.

겨울이 뒤에서 은밀하게 속삭였다.

“확인만 하고 오는 거야.”

“네.”
“없으면 더 찾지 않고 곧장 떠날 거야. 그땐 정말 죽었다고
생각해.”

“……네.”

가람의 엄마가 살아있다는 가정은 하지 않았다. 괜한 희망


을 주고 싶지도 않거니와, 있든 없든 수인은 자신과 함께 집
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이었다. 겨울은 가람의 목을 두른 연
붉은 목줄 자국이 보이지 않도록 스카프로 꼼꼼하게 감싸주
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낀 머리카락을 모조리 뒤로 뺐다. 진
작에 좀 잘라둘 걸 그랬다. 햇살에 결 좋게 빛나는 머리칼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잠깐만.”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겨울은 차에서 글러브 박스를 뒤


져 노란 고무줄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숱 많은 머리를 엉성
히 모아 하나로 세게 동여맸다.

“됐다.”

앞에서 보니 인정하기 싫지만 인물이 훨씬 산다. 손가락으


로 굵게 빗어 정수리 위로 보기 싫게 머리카락이 튀어나온
부분이 있어도 전체적으로 꽤 단정해 보였다. 항상 까만 머
리카락으로 가리고 있어 음침해 보이던 허연 얼굴이 볕을 받
아 빛났다. 정녕 제가 알던 수인이 맞나 싶다. 소파 옆에서
구질구질하게 잠을 청하는 사내와는 딴판이었다.

“…….”

겨울은 홀린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가람


을 빤히 바라보았다. 수인이라는 이유로 에이든과 같은 선상
에 놓은 것이 무색하게 이목구비가 아주 빼어났다. 물론 에
이든도 한 인물 하던 수인이었지만, 선이 굵은 그와는 전혀
다른 결이었다. 새하얀 도화지에 이목구비를 섬세하게 그려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느릿한 시선이 점차 아래를 향했다.
그림자에 가려 그늘진 금빛 눈동자를 시작으로 오목한 인중
과 부드러이 이어지는 붉고 도톰한 입술이 무척 고혹적이었
다. 꼭 들개가 아니라 전설 속 구미호를 마주한 듯했다.

“리안……?”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듯 겨울의 노골적인 시선에 부끄


러워진 가람이 눈을 끔뻑였다. 그는 휑한 목 언저리가 어색
한지 머쓱하게 목덜미를 만지작댔다. 열이 올라 뺨이 붉게
물들었다.

“가자.”

겨울은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섰다. 그리고 길을 찾았다.


목적지는 가람이 살던 동굴이었다. 하지만 등산로로 올라갈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산꼭대기 방향으로만 트인 길은 이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법 산행을
할 수도 없고. 여러모로 머리가 아팠다.

“리안도 가요?”

겨울이 등산로 대신 트인 길이 없나 둘러보던 찰나, 가람


이 물었다.

“그럼 혼자 가려고 했어?”

“길이 험해요. 리안이 다치는 건 싫어요. 나 혼자 가는 게


빠를 거예요.”

“내가 널 뭘 믿고 보내줘? 내가 헛걸음하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이거……. 리안이 원하는 건 뭐든 하겠다고 했어요. 거짓
말 아니에요.”

가람이 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은 계약서를 꺼냈다. 멍청


한 건지 순진한 건지……. 겨울은 쓰레기만도 못한 계약서를
보여주는 가람의 손을 탁 쳐냈다.

“내가 말 한마디 전하면 여기서 바로 사살할 수 있어.”

“…….”

“허튼 생각 하면 네 목숨도 날아간단 뜻이야.”

“나는 리안 믿어요.”

가람의 눈동자가 확신하듯 반짝였다. 겨울이 시선을 피하


며 대답했다.

“……난 너 못 믿어.”

“해 지기 전에… 돌아올게요.”

“…….”

겨울의 침묵을 긍정으로 여긴 가람은 곧장 돌아서 뛰기 시


작했다. 겨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가 뛰는 방향을 유
심히 관찰했다. 그는 출입 금지 현수막을 본 척도 않고 긴 다
리로 흙과 풀이 무성한 숲에 뛰어들었다. 천악산에 살았던
놈은 맞나 보다. 등산로가 아니면 모두 같은 길로 보이는데,
그는 우왕좌왕하지도 않고 길을 척척 찾아 나갔다.

이게 진짜 맞는 건가. 호의를 넘어선 행동이었다. 이런저


런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커다란 덩치가 순식간에 산에 잡아
먹혔다. 혼란스러운 겨울은 불도 붙이지 못하는 담배를 잘근
거리며 한참을 홀로 서있었다.
다행히 날이 추워 등산객이 거의 없었다. 애초에 등산하기
좋은 곳이 아닌 이유도 있겠지만, 수인 사냥꾼과 불법 산행
을 감행하는 이들에겐 좋은 소식이었다. 겨울은 히터를 미약
하게 틀어놓고 가람이 마지막으로 보인 곳에서 눈을 떼지 않
았다. 사라진 지 네 시간이 넘어가는데 털끝 하나 보이지 않
았다. 초저녁이라기엔 이른 시각이지만 해가 빨리 지는 계절
이라 불안했다.

똑똑.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겨울이 고개를 돌렸다. 웬 아


저씨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산은 범죄자가 도망가기에
도 좋은 장소라고 하던데……. 순간 경계심이 들어 시선을 피
하자, 그가 다시금 유리를 두드렸다.

겨울이 어쩔 수 없이 아주 조금 창문을 내렸다. 그러자 그


가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를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 차 세워두시면 안 돼요.”

“아… 죄송합니다. 혹시 근처에 주차장이 따로 있습니까?”

그는 이곳을 지키는 관리인이었다. 해가 슬슬 질 기미가


보이자 순찰하러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주차장은 저기 국립 공원 쪽 가면 있어요. 거, 등산객은


아닌 것 같은데 어쩐 일로 오셨어요?”

“아, 그게……. 잃어버린 게 있어서 찾으러 왔습니다.”

차마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말을 못 했다. 언제 올지도 모


르는데 괜한 말을 했다가 큰 파장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아이고, 분실물 찾다가 조난되는 사람이 을매나 많은데


요. 분실물은 저희 쪽에서 관리하니까 주차하시고 센터로 같
이 가시는 게 좋겠네.”

“예?”

“추워서 다시 걸어가기도 쫌 그런데 친절 좀 베풉시다. 잃


어버린 게 뭔진 몰라도 웬만한 건 다 있으니까 제가 잘 찾아
드릴게.”

“저, 잠시만……!”

겨울의 만류에도 멋대로 조수석에 올라탄 관리인이 출발


하라며 허벅지를 턱턱 두드렸다. 뭐 이런 직원이 다 있어. 겨
울은 불쾌함을 무릅쓰고 천천히 입구를 빠져나갔다. 그 사이
가람이 내려오지 않기만을 바라며.

“하아…….”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급하게 뛰어온 겨울이 숨을 고르며


캄캄한 어둠 속을 살폈다. 인기척 하나 없는 산은 아주 고요
했다. 설마 엇갈린 건 아니겠지. 눈살을 찌푸리며 곳곳을 둘
러봤지만 사람처럼 보이는 형체는 없었다.

주차만 하고 오려고 했으나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관리인


때문에 두 시간이나 허비했다. 적당히 변명한 분실물을 찾아
주겠다고 나서질 않나 따뜻한 차라도 마시며 몸 좀 녹이고
가라고 하질 않나. 혹여나 의심받을까 제때 거절 못 한 제 탓
도 있겠지만, 애먼 사람을 붙잡으며 게으름을 피우는 관리인
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겨울은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가람


은 보이지 않았다. 손전등을 끄고 천천히 불안한 마음을 가
라앉히자 서서히 시야가 밝아졌다. 느낌상 엇갈리진 않은 듯
했다. 그가 여기까지 와서 목숨을 버릴 것 같지도 않고.
시간 개념이 없는 놈이니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대
신 관리인이 다시 올지도 모르니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았
다. 겨울은 배터리가 거의 없는 핸드폰을 꺼두고 입구에서
보이지 않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후우…….”

하얀 입김이 뭉게뭉게 퍼졌다. 겨울은 팔짱을 끼고 몸을


말아 체온을 유지했다. 저녁이 되니 급격하게 떨어진 기온이
외투를 뚫고 들어와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차에 가서
기다릴 순 없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겨울은 추위에 얼은 손을 주물럭대다


가 핸드폰을 켜 눈부신 액정 화면을 확인했다. 초저녁이라고
불릴 시각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지금 혼자 집에 돌아가도
자정을 넘길 것이다.

“…….”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른다. 겨울은 뻣뻣해진 몸을 겨우 일


으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몇 걸음 내딛던 발을 멈춰 가람
이 사라진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오기였
다. 그것 말고는 제 행동을 설명할 수 없었다.

바스락, 음산한 기운에 바짝 긴장한 몸이 낙엽 밟는 소리


에 움찔 놀랐다.

“해 지기 전에… 돌아올게요.”

가람의 말이 생생히 떠올랐다. 원인 모를 배신감과 자괴감


이 뒤섞여 눈을 멀게 했다. 겨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
고 어둠 속에서 환히 빛날 수인의 눈동자를 찾았다. 이미 길
을 잃은 자신에게 지표가 될 만한 건 가증스러운 금색 눈동
자뿐이었다.

***

언제 놓았는지 모를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겨울이 움찔


대며 신음을 내뱉었다. 어젯밤 길을 잃고 잠시 쉬려고 낙엽
더미 근처에 몸을 뉘었는데 피곤에 절은 몸이 그대로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밖에서 잠들긴 난생처음이었다.

“읏…….”

눈도 미처 뜨지 못한 채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려는데, 보
들보들한 무언가가 얼굴을 마구 간지럽혔다. 고급 카펫 같기
도 하고 커다란 인형 같기도 했다. 겨울이 형체 모를 털 뭉치
를 쥐며 눈을 떴다. 검고 부드러우며 오묘한 회색빛이 섞인
털이 자신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허억……!”

화들짝 놀란 겨울이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어쩐지 몸이


따듯하더라니. 웬 산짐승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아끼고 있
었나 보다. 너무 놀라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숨죽인 겨
울이 조금씩 시선을 옮길 찰나였다. 짐승이 빠른 몸짓으로
사라진 수풀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리안! 저예요……! 가람이에요!”

“가람……?”
겨울이 상체를 홱 일으켰다. 가느다란 햇볕이 앙상한 가지
사이로 눈을 찔렀다. 겨울은 손차양을 만들고 가람의 음성이
들리는 곳을 찾았다.

“어디 있는 거야…….”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을 업었던 짐승도 없고, 환


청처럼 들렸던 목소리의 주인도 보이질 않았다. 겨울은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천천히 일어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기
저기서 짹짹거리는 소리를 듣자 하니 해가 뜬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리안.”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겨울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였다.


바스락거리는 수풀 뒤에서 그토록 기다렸던 가람이 나타났
다. 그토록 기다렸던 남자의 모습을 보자 겨울의 긴장이 탁
풀렸다.

“너…….”

“리안, 몸은 괜찮…….”

짜악! 성큼성큼 다가간 겨울이 사정없이 뺨을 내려쳤다.


가람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주도훈에게 맞으며 자존심을 부
리던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감기에 걸린 듯 이따금 갈라졌다.

“나랑 장난해?”

겨울이 얼얼한 손을 쥐었다 폈다. 상처가 터진 듯 붕대 안


쪽이 뜨끈했다. 추위로 굳었던 손이 피로 인해 조금씩 녹아
내렸다.

“……늦어서 미안해요.”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온단 놈은 밤이 꼬박 지나서야 얼굴을
비췄다. 아무리 시간 개념이 없어도 자연에 살았던 놈이면
산중에 있는 자신의 집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는 알 텐데, 이
제야 나타났다는 건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떠났다는 것이
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애당초 하질 마. 너 따위 거두는 것만


으로도 충분히 비참하니까.”

겨울이 날카로운 말로 비수를 꽂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저체온증으로 죽을 뻔했는데. 하마터면 최악의 소식으로 사
람들 입에 오를지도 몰랐다. 지난밤, 산속을 헤매며 묵혀둔
수많은 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멍청한 수인이라고
해서 참았다간 정말 화병이 날 것 같아 이렇게라도 말해야
속이 후련할 듯했다.

“…….”

하지만 예상외로 언짢았다. 수인이든 인간이든 주워 담지


못할 말을 하고 난 뒤는 항상 미묘한 후회가 뒤따랐다. 찝찝
한 기분을 안고 모르는 길을 앞장서 가던 겨울이 이상하게
고요한 뒤를 돌아보았다. 가람은 손찌검당한 모습 그 자리
그대로 서있었다. 단단한 손에 얻어맞은 뺨에 연붉은 자국이
올라왔다.

연속으로 맞아도 멀쩡한 놈이 기죽은 척은. 웃기지도 않는


다. 또 한마디 하려던 겨울이 무언가를 보고 멈칫했다. 가람
의 머리 위에서 털 달린 귀가 움찔움찔하며 주변의 작은 소
리에 반응하고 있었다.

“너… 귀가…….”

“아……!”
넋이 돌아온 가람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문질렀다. 개의
귀처럼 봉긋 솟았던 것이 마구 짓누르는 손길에 스르르 형체
를 감췄다. 마치 마술을 보는 것 같았다. 당황한 겨울은 귀가
사라진 머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보통 수인은 사람과 어울려 사는 동시에 본능적으로 본래


의 모습을 숨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 핍박받고 무시당하며
산다. 아무리 껍데기가 인간이라도 정체성은 수인이니까. 필
사적으로 정체를 숨기는 놈들의 정신을 짓밟아야만 계급을
뚜렷하게 나눌 수 있어 자연스럽게 생긴 사회적 관습이었다.

겨울은 어릴 적 순식간에 튀어나온 에이든의 날카롭고 뾰


족한 손톱을 보기 전까진 차이점을 몰랐다. 좋지 않은 기억
이라 잊고 살던 그들의 본능이 새삼 다가온 순간이었다. 추
위에 바들거리는 손이 긴장감에 뚝 멎고 호흡이 느려졌다.

“네가 그 짐승이야?”

“네?”

“네가 네 발로 나 업고 왔냐고 묻잖아.”

겨울이 사납게 따져 물었다. 그 짐승의 털 색과 사라진 가


람의 털 색이 매우 흡사했다. 가람이 나타나서 짐승이 도망
간 줄 알았다. 들개치고 몸집이 너무 커서 설마 가람일 거라
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네, 리안 몸이 안 좋아 보여서……. 빠르게 내려가려면 어


쩔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 ……많이 놀랐어요?”

“미친 새끼…….”

겨울이 작게 읊조렸다. 누가 목격이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교류 없이 산에서 살던 놈이라 위험성을 모르나 보다. 귀가
튀어나와서 놀라야 할 쪽은 수인인데 오히려 인간 쪽을 걱정
하고 있다. 이러다간 언젠가 반갑다고 꼬리까지 붕붕 흔들지
싶었다.

겨울은 그와 동떨어져 걸었다. 산 아래까지는 금방이었다.


가람이 어딘가에서 쓰러져 있던 자신을 업고 내려온 덕분이
긴 했지만,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아 그 노고를 인정하긴
싫었다.

어렵사리 차에 돌아와 잠시 손을 녹였다. 라디오도 켰다.


올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밤부터 전국적으로 한파가 온다는
소식이 줄줄 흘러나왔다. 멍하니 뉴스를 듣던 겨울은 작은
탄식을 내쉬었다.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한파로 눈이라
도 내려서 산에 꼼짝없이 갇혔을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몸도 어느 정도 녹았겠다, 슬슬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연


신 눈치 보던 가람이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리안… 아픈 것 같아요. 아픈 냄새 나요.”

“……조용히 해.”

겨울이 삐딱하게 대답하며 허허벌판인 주차장을 빠져나갔


다. 개라서 냄새도 잘 맡는 건가. 아픈 냄새는 뭐람. 몸이 무
겁긴 해도 운전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빨리 집에 돌아가
서 쉬고 싶은 마음이 커서 이깟 몸살 기운쯤은 참을 만했다.

아침의 시퍼런 하늘이 점차 햇살을 머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집이다. 겨울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라디오를 껐다.
아까부터 재미도 없는 난센스 퀴즈로 하하 호호 웃는 소리는
물론, 저와 달리 유심히 듣던 가람이 이따금 모르는 단어라
며 질문을 해오는 탓에 신경이 잔뜩 예민해졌다.
겨울은 주머니에서 잊고 있었던 핸드폰을 꺼내어 켰다. 바
닥인 배터리 창을 보며 급한 연락이 없었는지 확인하려는데,
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주도훈이었다.

“어, 왜.”

―어, 왜?

주도훈이 받자마자 대뜸 시비를 걸었다.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유치한 장난 받아줄 마음 없다. 겨울이 한숨지으며
끊으려 하자, 그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오늘 연락한다고 했잖아. 잊었어?

“아……. 그랬지.”

―잊은 사람치고 너무 뻔뻔한데?

“……미안한데 미루자. 나 지금 집 아니야.”

겨울이 번화가에 들어서자 막히는 도로를 보며 건조한 얼


굴을 쓸었다. 어제저녁부터 굶었지만 배고프진 않았다. 그저
쉬고 싶을 뿐이었다. 히터를 더울 정도로 틀어도 으슬으슬한
게 정말 몸살이 오는 것 같았다.

통화 너머로 무언가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주도훈이 심술부리는 짓이겠지.

―뭐야, 나랑 한 약속은 약속도 아니다 이거야? 어딘데?


그쪽으로 갈게. 아직 예약 시간까지 여유 있어.

“못 만난다니까. 몸이 좀 안 좋다.”

―병원이야?

“어… 가봐야 돼. 끊어.”

―주겨울!
말이 길어지기 전에 먼저 끊었다. 안 그래도 연말이라 레
스토랑 예약 잡기 힘들 텐데. 기대한 약속을 취소한 건 미안
하지만, 그간 당했던 것으로 대신하면 그렇게 미안하지도 않
았다. 하긴, 오늘 같은 날에 미워하는 이복동생이랑 시간 보
내는 게 이상하지. 친구 많은 사람이니 어련히 알아서 할 듯
했다.

성치 않은 몸으로 집에 도착해 없는 정신으로 샤워까지 했


다. 밥도 먹지 않고 침대에 눕기 무섭게 잠에 빠져들었고, 다
시 눈을 떴을 땐 어둑한 저녁이었다. 아직 몽롱한 겨울은 천
천히 거실로 나와 잠시 이마를 짚었다. 열이 올라 현기증이
휙 돌았다.

약이 어디 있더라……. 겨울은 불도 켜지 않고 부엌 찬장
을 뒤져 약을 찾았다. 그리고 뭉텅이로 꺼낸 약상자에서 몸
살 약을 골라냈다. 하루 꼬박 굶은 빈속에 넘기려던 겨울은
뭐라도 먹기 위해 불을 켜고 돌아섰다.

“…….”

겨울이 멈칫했다. 부엌이 엉망이었다. 분명히 토스트를 만


들고 묶어뒀던 식빵 봉투가 열려있고, 그 안에 든 식빵들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으며 바닥에는 오돌토돌한 빵가루가
흩날렸다. 그뿐만 아니라 식탁에는 딸기잼이 뭉텅이로 쏟아
져 있었다.

도둑이 들었다고 하기에는 허술한 광경이었다. 주도훈이


왔다 갔을 린 없고……. 겨울은 곧장 발길을 돌려 식빵만 훔
쳐 간 도둑의 허리께를 발로 툭 건드렸다.

“야.”
“으응……. 네…….”

소파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가람이 고개를 번뜩 들고


눈을 비볐다. 자는 사이 그도 씻었는지 행색이 말끔했다. 풀
어헤친 머리칼에서 포근한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겨울이 부
엌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네가 그랬어?”

“네, 리안!”

“내가 먹어도 된다고 했던가?”

“네…….”

“뭐?”

그런 적 없다. 이게 또 거짓말을 하나 보다. 뻔뻔할 만큼


쑥스러운 표정을 짓고 대답하는 놈이 황당해서 인상을 찌푸
리자, 가람의 눈동자에 멋모를 자신감이 반짝 빛났다.

“리안이 알아서 챙겨 먹으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스스로


먹었어요. 리안 것도 만들었구요.”

“…….”

“리안한테 아직도 아픈 냄새 나요…….”

가람이 킁킁거리며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계약서가 인간


족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겨울은 하룻밤 사이 제게 친근
함을 표하는 그가 불편했다. 매일 기력 없어 보이던 눈망울
에 생기가 돌았다.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것 같았다.

“만들었다고?”

“네, 저기에 뒀어요. 리안이 하는 거 보고 따라 했어요.”

“…….”
겨울은 가람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쏟은 딸기잼에 정
신이 팔려 못 본 식탁 저편에 엉성한 토스트가 보였다. 토스
트라고 부를 수도 없는 모양새였다. 굽지 않은 흰 식빵에 딸
기잼이 엉성하게 발려 쌓여있었다. 부엌에 갈 때마다 뚫어져
라 쳐다보더니 눈으로 배우는 거였나 보다. 토스터를 사용할
줄 몰라서 그렇지, 얼핏 방법과 순서는 맞았다.

“누가 이런 거 만들라고 했어? 네가 먹을 건 사료야. 얻다


함부로 손을 대?”

겨울이 사료 봉지를 바닥에 던지며 화를 냈다. 그러자 가


람이 황급히 굴러가는 사료들을 주워 담으며 말했다.

“안 먹었어요. 나는 리안이 항상 주는 거 먹었어요……. 정


말이에요.”

이제 보니 그릇에 쌓인 빵은 한 장이 아니었다.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에 이끌려 몰래 먹을 법도 한데, 거의 한 봉지를
쏟아부어서 몽땅 잼을 발라놓았다. 겨울은 다 먹지도 못할
식빵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아픈 동료를 보살피는 듯한
짐승의 친절 때문에 머리가 더 아파져 왔다.

겨울은 가람이 만든 토스트를 모조리 버렸다. 지금 이걸


나더러 먹으라고? 보기만 해도 달다. 거의 딸기잼 한 통을 쏟
아부어 눅눅해진 식빵을 보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리안?”

“이걸로 바닥이나 닦아.”

만들면서 떨어뜨리기라도 했는지 식탁과 바닥이 온통 끈


적끈적했다. 이대로 뒀다간 벌레 꼬이기에 십상이었다.

“네…….”
겨울이 젖은 헝겊을 툭 던지자, 가람의 입술이 빼죽 튀어
나왔다. 그리고 사료를 주워 담은 봉지를 익숙하게 싱크대
맡에 놓고는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고용인인 줄
알겠다. 같이 지낸 몇 주 동안 겨울의 행동을 빠짐없이 관찰
한 결과였다.

“……야, 들개.”

“가람이에요.”

겨울이 주도훈처럼 정 없이 가람을 불렀다. 꼼꼼하게 바닥


을 닦던 가람이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거부감이
훅 올라왔다. 항상 묘하게 불안정해 보이던 그는 산에 다녀
온 이래로 얼굴이 폈다. 정말 자신을 주인으로 인정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계약서를 찢어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겨울은 미지근한 물을 받아 약을 삼켰다. 일단
식을 줄 모르는 열과 두통이라도 잠재워야 할 듯했다.

“찾았어?”

“네?”

“네 가족. 찾았냐고.”

청소하는 가람을 감시할 겸 소파에 앉은 겨울이 지나가듯


물었다. 그러자 가람이 걸레질을 하다 말고 고개를 내저었
다.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질질 쓸렸다.

“아……. 아니요. 리안 말대로 죽었을지도 몰라요. 아니,


죽었을 거예요. 흔적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마음이 편해?”

“……네.”

“가족이 죽었는데 좋아하는 새끼는 처음 보네.”


수인이 그렇지, 뭐. 미약하게 헛웃음 짓던 겨울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동정이 필요 없는 짐승이었다. 처음부터 가족은
핑계고 도망가려다 실패했던 건 아닐까. 아니면 도망갔다가
이 집에서 사는 게 수만 배는 나을 것 같아 다시 돌아온 것일
까. 애초에 가람이 제 어미를 찾으러 간 이유는 온전히 자신
을 위해서였는데, 그 감성팔이에 홀린 자신도 멍청했다.

겨울은 뜨끈한 이마에 손을 얹으며 가람을 훑었다. 한마디


했다고 기가 죽었다. 아까처럼 귀가 튀어나왔다면 축 늘어졌
을 테다. 지금 보니 속이 훤히 보이는 여우 새끼 같았다.

“이제 와서 청승 부리지 말고 마저 닦아.”

“네, 리안. 그런데… 청승이 뭐예요?”

“……꼴값 떨지 말라고.”

말대꾸 아닌 말대꾸에 화내지 않고 대답해 준 겨울의 팔이


이마에서 툭 떨어졌다. 빈속에 약을 먹으니 더욱 기운이 없
었다. 잠이 오는 것도 아니고 영혼만 붕 뜬 것처럼 몽롱한 게
마약을 한다면 이런 기분일 듯했다. 손가락 끝에도 힘이 들
어가질 않았다. 몸이 축 늘어지고 눈이 감겼다.

“리안, 많이 아파요?”

“…….”

“리안. 리안…….”

집안일을 마치고 다가온 가람이 겨울의 상태를 살폈다. 미


약한 신음만 입 안에서 맴돌 뿐, 귀찮다고 미간을 찌푸리지
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가
람은 무언가 결심한 듯 자신이 열심히 주워 담은 사료를 그
릇에 우수수 쏟아부었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받아 사료를
불렸다. 인간 음식을 먹이고 싶지만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버린 식빵을 다시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리안, 이거 먹어요.”

“흐으…….”

“먹어야 해요. 아픈 냄새가 너무 많이 나.”

가람은 겨울이 평소에 쓰던 숟가락으로 불린 사료를 그릇


에 꾹꾹 눌러 뭉갰다. 이 정도면 의식이 희미해도 물과 함께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푸흐, 켁……!”

하지만 겨울은 그것마저 힘든지 몽땅 뱉어냈다. 기침이 끊


이질 않았다. 방법이 잘못된 건가. 어쩌지. 가람은 깨끗한 수
건으로 그의 입을 꼼꼼히 닦아주고서 음식을 넘기기 편하도
록 목덜미를 손으로 받쳤다. 그리고 으깨진 사료를 직접 입
에 담아 겨울과 입술을 맞댔다.

“으, 우, 음…….”

비릿한 맛을 느낀 겨울이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며 음식물


을 밀어냈다. 말캉하고 뜨거운 혀가 사료를 두고 이리저리
뒤섞이며 입술 사이로 타액이 줄줄 흘렀다. 하지만 가람은
억지로 겨울의 식도로 쑤욱 밀어 넣었다. 꿀꺽. 그제야 타액
과 함께 넘긴 겨울이 흐린 숨을 내쉬었다.

“흐으… 에이든……. 그만…….”

“……가람이에요.”

두 입째 입에 물고 고개를 숙이던 가람이 뾰로통하게 대답


했다. 그리고 겨울이 반항하지 못하도록 뒤통수를 쥐고 깊숙
이 입을 맞췄다. 제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은 듣고 싶지 않았
다.

“으…….”

오늘만 몇 시간을 잔 거지. 소파에서 자던 겨울이 몸을 벌


떡 일으켜 시간을 확인했다. 체감상 새벽은 된 줄 알았더니
겨우 10시 즈음이었다. 다행히 약이 효과가 돈 건지 몸이 가
뿐했다. 겨울은 식은땀이 마른 머리를 넘기며 주위를 돌아보
았다. 소파 옆에서 부스럭거리며 계약서를 읽던 가람이 인기
척에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어요? 이제 아프지 않죠?”

“…….”

내가 아프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비스듬한 눈길로 그를


지나친 겨울의 시선이 탁자에 놓인 사료 그릇으로 향했다.
물에 물린 사료가 반은 넘게 남아있었다. 의아했다. 밥을 주
고 잠들었던가. 갑자기 잠드는 바람에 사라진 몇 시간 동안
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러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가람이 소파 손잡이에 얼굴


을 기댄 채 시선을 마주해 왔다.

“먹어야 아프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뭐? 무슨 소릴…….”

“나를 때릴 거예요?”

기다란 속눈썹이 얄밉게 팔랑거린다. 겨울은 가람과 그릇


을 번갈아 보았다. 환한 부엌을 등진 그의 눈동자가 어둑한
거실을 밝히듯 노란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반짝거렸다.
겨울이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설마 지금…….

“나한테 이걸 먹였다는 거야?”

“리안을 위한 일이었어요. 말했잖아요. 리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고.”

“씨발… 우욱……!”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은 겨울이 곧장 화장실로 달려갔다.


금방이라도 게워낼 것 같아 안방에 달린 욕실까지 갈 수도
없었다. 어쩐지 입이 텁텁하더라니. 시키지도 않은 짓을 대
체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켁!”

헛구역질이 계속 이어졌지만 나오는 것은 없었다. 이미 소


화된 사료는 나오지 않고 맑은 타액만 나올 뿐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수인 사료를 먹일 줄이야. 복수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차라리 버린 식빵을 주워 먹이기라도 했으면 이 정
도는 아니었을 테다. 그만큼 역겹고 메스꺼웠다.

“리안, 괜찮아요? 이상하다. 아픈 냄새는 나지 않는


데…….”

“씨발, 비켜!”

겨울이 가람을 밀치며 안방에 들어와 칫솔을 물었다. 그놈


의 아픈 냄새가 도대체 뭐길래. 제 가족은 죽었으면 좋겠다
고 지껄이는 놈이 미운 인간 살리자고 자신이 먹는 사료를
먹인 행위가 의아스럽다. 어떻게 먹인 건진 몰라도 더 아픈
듯한 착각이 일었다.

불쾌한 사료 맛을 떨쳐내려고 두 번이나 양치질을 한 겨울


은 그제야 한숨 돌리며 거실로 나왔다. 차마 안방까진 침범
못 하는 가람이 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굴면 다시 생산반에 가는 수가 있어. 내


가 죽든 말든 네가 상관할 바 아니라고. 알아들어?”

겨울이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는 가람을 막아서며 말했다.


그러자 다가온 겨울의 냄새를 킁킁대며 맡던 가람이 표정을
굳혔다.

“……왜 상관하면 안 돼요? 리안을 위해서 한 일이었어


요.”

“그러니까 그건 시키는 것만……! 하, 아니, 내가 묻자. 무


슨 생각으로 돌아온 거야? 엄마가 죽은 건 맞긴 맞아? 또 거
짓말하면 그땐 그냥 안 넘어가.”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 답답한 겨울이 화를 내려다 말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어제오늘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다. 그
에게 화를 내는 감정도 아까웠다.

“리안이 아픈 거 싫어요. 죽을까 봐 무서워요.”

“왜. 그새 정이라도 들었어? 내가 너 찾겠다고 꼬박 밤새


운 게 만만해 보이기라도 해? 아니면 그깟 계약서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불쌍한 척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화를 내지 않겠다고 다짐한 겨울이 결국 가람의 머리채를


잡고 거칠게 젖혔다. 특유의 불쌍한 목소리로 입술을 떠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고개 숙였던 가람의 얼굴이 훤히 드러
났다. 두피가 당길 정도로 꽤 세게 쥐었음에도 가람은 아랑
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에이든이 누구예요?”

“……뭐? 네가 에이든을… 어떻게 알아.”


대뜸 남에게 듣는 에이든의 이름에 놀란 겨울이 한 걸음
물러났다. 머리채를 잡힌 가람도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등을 벽에 부딪힌 겨울과 가람의 사이가 조금 더 좁아졌다.
색색거리는 호흡이 미지근히 뒤섞였다.

“리안이 자면서 말했어요. 누구예요?”

“알 거 없어. 그 이름 입 밖에 내지 마.”

겨울이 떨리는 음성을 애써 가라앉혔다. 트라우마의 원인


을 강제로 끄집어내는 그가 순간 두려웠다. 에이든과 가람은
외모와 성격, 말투 등 닮은 점이 하나도 없는데도 이상하게
겹쳐 보였다.

“난 알아야 해요. 리안이 무척 고통스러워했어요.”

걱정돼요. 가람이 제 머리칼을 잡은 손을 풀어내며 속삭였


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지도 않은 채 겨울의 손을
소중한 듯이 붙잡고 살포시 입매를 올렸다.

“리안은 내 반려니까요.”

단연하고도 다정다감한 말투였다. 질겁한 겨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이내 어슴푸레하게 보이던 에이든의 환
영과 가람이 완벽하게 교차했다. 형형한 안광이 똑같았다.
제게 발정하며 달려들었던 그 눈빛. 긴장감에 숨이 턱 막히
고, 손을 얽은 뜨거운 체온이 혈관을 타고 올라 심장을 쿵쿵
때렸다. 다시금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
째깍째깍. 남들이 활기차게 새해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동
안 적적한 집에선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만 났다. 무기력
하게 신년을 맞이한 겨울은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침대에
서 일어났다. 아직 컨디션이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아 오늘까
진 집에서 푹 쉬고 싶었다.

겨울은 창문을 열고 상쾌한 바람을 들이마셨다. 어젯밤부


터 한파라더니 골머리까지 띵할 정도로 시린 공기였다. 정신
이 번쩍 들며 묘한 눈빛을 보내던 가람이 떠올랐다. 처음부
터 이용해 먹으려고 동거를 승낙한 건 자신인데, 상황이 꼬
여도 한참 꼬였다.

허, 반려? 조용히 내뱉은 겨울의 입에서 입김이 흩어졌다.


수인은 감히 인간을 제 짝으로 여길 수 없다. 애당초 믿을 수
도 없는 이야기이며 그래서는 안 되는 금기 사항이다. 이상
성욕을 가진 자들이나 딥웹에서 침 흘리며 보지, 엄연히 사
회 규범에 어긋나는 짓이다. 가람은 지금 인간인 자신을 ‘반
려’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평소와 달리 말수가 많
고 무조건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긴 하지만, 겨울은 불안했
다. 그가 선을 넘는 순간 트라우마는 반복될 것이다. 엄격히
다스리고 통제해야만 했다.

겨울은 건조한 손등을 쓸며 생각했다. 폭력과 비난이 난무


하는 시대에 사랑이란 없다. 보여주기식이면 몰라도. 항상
제 주변엔 부모가 점찍어 주는 인연과 기업의 명성을 유지하
기 위해 치르는 결혼이 대부분이었다. 긴 시간이 지나며 인
간에게 해가 되는 수인이 멸종한 것과 동시에 사랑도 멸종되
었다. 행복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느끼는 행복… 아니, 희열
이라고는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와 이복형을 한 대 먹였을
때. 그뿐이었다.
지금 이 시대는 겨울이다. 피바람이 몰아치며 상처 위에
상처를 덧댄다. 단지 겨울에 축복이 태어났다는 이유로 돌아
가신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과 반대로 삭막하게 살아가는 겨
울은 자신의 이름이 시대에 맞게 아주 잘 타고났다고 생각했
다.

샌님처럼 가만히 앉아 지켜보기만 하던 때는 지났다. 원치


않지만 직접 행동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겨울은 외출 준비
를 마치고 나와 오므라이스를 만들었다. 어제 밥을 먹지 못
해 간단하고 빠르게 만들 수 있는 점심이 좋을 것 같았다.

“너무…….”

“……?”

“너무 맛있어요. 고마워요, 리안.”

가람이 두 볼을 오물거리며 수줍게 웃었다. 겨울은 마지막


한 숟가락을 남겨두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기분 나빠. 사
료를 보기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몽땅 버리는 바
람에 어쩔 수 없이 둘이 먹을 양을 만들었는데 저렇게 좋아
할 줄은 몰랐다. 잡식이라 그런지 케첩 없이도 맛있게 잘만
먹었다.

“네가 착각하는 것 같아서 말해두는데, 난 네 반려가 아니


라 주인이야. 한 번만 더 반려니 뭐니 이딴 소리 지껄이기만
해.”

겨울이 그릇을 싱크대 안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당연히


겸상은 하지 않는데도 그와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이유만으
로 갑자기 입맛이 사라졌다.

“주인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네, 라고 대답만 하면 될 것을 가람은 밥을 먹다 말고 서운
한 티를 냈다.

“리안이 직접 말했어요. 주인이 아니라고.”

“그건……!”

“리안은 주인이 아니에요.”

말투가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겨울은 어안이 벙벙한 채


단호한 얼굴의 가람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일자로 다물었
다. 건방진 들개를 길들이려면 어떻게든 우위를 선점해야 했
다.

“날 주인으로 여기지 않을 거면 나가. 네가 도망가도 잡지


않을 테니까. 꺼져.”

“싫어요.”

가람이 낮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들개가 성질부리듯 으르


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송곳니를 드러내도 전혀 어색하지 않
을 상황이었다. 겨울이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레 그를 말로
찔렀다.

“왜. 죽기라도 할까 봐?”

“그야 리안을 돌봐야 하니까요. 내 반려를 위해선 뭐든 할


거예요.”

“…….”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천악산에 다녀온 일이 들개


의 야생성을 자극하기라도 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쌓인 정
이 사랑으로 승화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겨울은 혼란스러웠
다. 도통 수인의 속을 읽기 어려웠다. 자신 있게 열 걸음 나
아가면 은밀하게 다가온 산짐승이 어디선가 튀어나와 목덜
미를 물어 채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리안은 날 쫓아낼 수 없어요.”

어느새 일어선 가람이 겨울을 내려다보았다. 바늘로 찔러


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결연한 태도였다.

“……죽이는 거면 몰라도.”

꿀꺽,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겨울은 섬찟한 말을


하는 가람을 지나쳐 급히 서재로 들어왔다. 불안감에 하도
물어뜯은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도무지 그를 어떻
게 순육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서재에 박혀 영악한 들개의 코를 어떻게 짓누르면 좋을까


고민하던 겨울은 톱날처럼 날이 들쭉날쭉한 가위를 들고 나
왔다. 수인 용품 상자에 들어있던 가위였다. 옷더미 사이에
웬 무기가 들어있나 했더니 이발용이었나 보다. 미용실 가위
처럼 끝이 얇고 뾰족했다.

“흣……! 리안……?”

순식간이었다. 겨울이 성큼성큼 걸어가 가람의 머리채를


홱 휘어잡았다. 얌전히 겨울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가람이
은빛으로 번쩍이는 날에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겨울
은 투박하게 잡은 가위 끝을 뽀얀 목덜미에 갖다 대며 부러
낮게 속삭였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처럼 굴더니 그것도 연기였어?”

“두렵지 않아요.”

“…….”
“죽음은 익숙한 존재예요. 그런 건 인간들이나 두려워하는
거예요.”

거짓이 아닌 듯 가람은 아주 태연했다. 되레 겨울이 다치


지 않도록 날의 방향을 제 목을 정확히 겨냥할 수 있게 고개
를 돌려주었다. 겨울은 가위를 고쳐 잡았다. 오히려 위협하
는 자신의 손이 잘게 떨렸다. 무력으로라도 겁박하려던 계획
이 헛수고로 돌아갔다.

“정말 나를… 죽이고 싶어요?”

“…….”

“그럼 왜 항상 나를 지켜줬어요?”

“내가… 언제…….”

흉기를 쥔 손이 스르르 풀리려 하자, 가람이 겨울의 손목


을 받치며 뒤를 돌았다. 목에 닿은 날이 살갗을 긁으며 긴 자
국을 남겼다. 겨울은 고통에도 덤덤하게 구는 그를 보며 눈
살을 찌푸렸다. 수갑처럼 제 손목을 옥죈 체온이 뜨거워 금
방이라도 델 것 같았다.

“리안은 죽음이 두려운 거죠?”

가람은 침착했다. 처음부터 겨울이 자신을 죽이리라는 생


각은 하지도 않았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겠
는가. 온전히 겨울을 향한 믿음이 공포를 누그러뜨린 것뿐이
었다.

“리안은 따뜻한 사람이에요.”

“헛소리 집어치워.”

“당신은 달라요.”
“아니, 나도 같아. 그 새끼들처럼 역겹고 수인이라면 끔찍
해한다고. 그런데 너 따위가 뭘 안다고 나불거려!”

세뇌하듯 중얼거리는 가람이 불쾌했다. 겨울은 시선을 피


하며 머리채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리고 싹둑, 윤기 나는 머
리카락을 단번에 잘라냈다. 생명이 끊어지듯 수많은 가닥이
볼품없이 바닥에 흩날렸다.

어둠이 걷힌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노골적인 눈빛에 놀란


겨울이 손을 떨구자 툭, 떨어진 가위가 바닥에 세로로 꽂혔
다.

“……난 알 수 있어요. 리안에게선 찔레꽃 향기가 나거든


요.”

가람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마터면 가위가 발등에 찍


힐 뻔했으나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살포시 고개를 숙여
미지근히 나는 겨울의 체취를 맡았다. 부드럽고 은은한 향기
가 하얀 찔레꽃이 풍기는 향기와 퍽 비슷했다.

“신기했어요. 리안도 가시가 많아서 아픈데 좋은 냄새가


나서.”

“…….”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에요. 그러니까 리안이 나쁜 사


람일 리 없어요.”

가람이 상냥히 미소 지었다. 흥분한 겨울을 위로하는 듯했


다. 그리고 어제는 아픈 냄새가 좋은 향을 가려서 금방 알 수
있었다나 뭐라나. 뛰어난 후각을 자랑하는 말이 뒤따랐다.

“……비켜.”
기운 빠진 겨울이 가람의 어깨를 치고 자리를 벗어났다.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유령의 집처럼 어지러운 바닥을 청소
해야 하고, 엉망으로 잘려 보기 싫은 가람의 머리를 수습해
야 했다.

집 청소는 가람이 도맡았다. 겨울이 창고에서 던져준 청소


도구로 말끔하게 처리한 가람은 삐죽빼죽 못난 머리가 된 것
이 원망스럽지도 않은지 뿌듯한 미소를 내보였다. 겨울은 차
키를 챙기며 나오라고 고갯짓했다. 미용실에 갈 예정이었다.
학대당한 듯 길이가 모두 제각각인 헤어스타일을 내버려 두
자니 홧김에 저지른 행동이 자꾸만 떠오르는 탓이었다.
침묵 속 안광(2)

“주인분은 대기실에서 잠깐 기다려주시겠어요?”

도착한 미용 숍은 넓고 쾌적했다. 가람을 미용사 손에 맡


긴 겨울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대기실로 들어와 한숨 돌렸
다. 저처럼 머리를 엉망으로 잘라놓은 사람이 많은지 미용사
는 아무런 사연도 묻지 않고 친절한 태도로 일관했다.

“…….”

높은 건물에 위치한 미용 숍은 수인 전용인 것치고 내부가


고급스러웠다. 겨울은 가람을 기다리는 동안 한눈에 보이는
전경을 바라보았다. 창이 통유리로 되어있어 밖이 환히 보였
다.

낯선 상황의 연속이었다. 매번 차를 타고 바삐 이동하는


탓에 어렴풋이 스치던 광경을 처음 마주했다. 호흡이 어려울
정도의 목줄을 걸고 산책하는 사람과 저 멀리 공원에서 수인
을 죽도록 패는 사람들. 무엇이 그들을 화나게 만들었을까.
말 못 하는 짐승은 품에 싸고돌면서 인간과 다름없는 수인에
겐 너무나도 야박했다. 악에 받쳐 발길질하는 남자의 얼굴은
악마에 가까웠다. 자세히 보니 화난 표정이 아니라 환희에
찬 표정 같아 보이기도 했다.

행인 중 수인을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그


행위가 당연한 듯 방관하거나 비웃으며 스쳐 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수인의 편에 서는 순간 손가락질받을 테니까.
몇 년 전, 세간의 관심을 받으며 나타난 수인 변호사가 대
표적인 증거였다. 프랑스 정부의 무분별한 처형을 막기 위해
법정에 설 수도 없는 수인을 데리고 나타난 그는 많은 협박
과 비난을 이겨내고 끝내 승리했다. 하지만 수인 변호사는
그 이후 잠적했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단정 지었다. 그
럴 수밖에 없었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그들의 근황을 궁
금해하고 깊이 파고들수록 제 목숨을 깎아내리는 것과 마찬
가지였으니까.

그것이 현실이었다. 겨울은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 피 흘


리며 죽어가는 수인을 차마 끝까지 볼 순 없었다. 당연하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연하다고 여긴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
기 시작했다. 저렇게 짓밟고 무시해야 맞는 것인데, 눈 꼭 감
고 행하면 될 일을 망설이는 까닭은 뭘까. 아버지의 말씀대
로 나약하고 비정상적인 사고를 지녀서일까. 아무리 고뇌해
도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고객님.”

직원이 대기실 문을 두드리며 겨울을 찾았다. 가람의 미용


이 끝난 모양이었다.

“리안… 어때요?”

직원 뒤에 섰던 가람이 쑥스러운 듯 걸어 나왔다. 새로운


헤어스타일이 생소한지 시원하게 드러난 목덜미를 연신 만
지작거렸다.

“리안이랑 비슷해서 좋은데 짧으니까 허전해요.”

“…….”

겨울이 말없이 가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전혀 다른 인


물을 보는 것 같았다. 짧게 자른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짙은
눈썹과 불거져 나온 미릉골과 부드럽게 흐르는 높은 콧대.
여리게만 보였던 얼굴에 뚜렷한 선이 드러나자 예민함이 돋
보였다. 그늘이 걷힌 눈빛은 음침하긴커녕 칼날처럼 시퍼렇
고 차가웠다. 착각의 그늘 또한 걷혔다. 이제야 진정한 그를
마주한 듯했다.

***

어제 무작정 깬 주도훈과의 약속이 화를 불렀다. 부모님께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건지 아버지가 새해는 가족과 보내야 한
다고 호통치는 바람에 부랴부랴 본가에 도착했다. 겨울은 오
랜만에 보는 의붓어머니와 안부를 나누고서 자리에 앉았다.
새해라고 곱게 차려진 식탁이 꽤 알록달록하니 보기 좋았다.
모두 가정부 아주머니의 솜씨겠지만.

겨울은 조용히 밥만 먹었다. 묻는 말에만 간간이 답하고,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아버지와 식사 속도를 맞췄다.
주도훈처럼 실없는 얘기로 그들과 하하 호호 웃고 싶진 않았
다.

“병이 돈다더라. 겨울이 너도 들었니.”

주도훈의 이야기를 들으며 희미하게 미소 짓던 아버지가


물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다시금 근엄한 표정을 유지했다.

“병이요?”

“그래, 생산반에서도 몇 마리 나왔다던데.”

“……처음 들어요.”
겨울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병이라니. 가람이 생
산반을 다닐 때만 해도 문제가 없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생
긴 모양이었다. 하긴, 환기도 안 될뿐더러 휴식 시간도 제대
로 갖추지 않은 곳에서 병이 안 나고 배기겠는가. 여태 멀쩡
하게 돌아간 게 더 이상했다.

서먹한 부자를 주시하던 주도훈이 한마디 거들었다.

“독감인지 폐병인지 감염률이 높대요. 그래도 걱정 마세


요, 아버지. 매일 방역하고 있고 증상 보이면 바로 격리 조치
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뉴스에도 나지 않았고 회사에서도, 생산반 담당자에게서


도 못 들은 소식이었다. 말만 병이지 날이 추워지며 감기가
유행하는 듯했다. 이깟 일로 심각할 게 있나. 수인이 과로로
죽어 나가도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서. 겨울이 듣는 둥 마는
둥 딴청을 피우자, 아버지가 헛기침하며 주의를 끌었다.

“도훈이한테 듣자 하니 겨울이 너도 수인을 생산반에 보냈


다고 하던데 이참에 수인 검진 한번 받아봐라. 마침 한 회장
아들이 귀국했다던데. 겸사겸사 만나서 이야기 나누면 좋지
않겠니.”

“괜찮아요. 숍에서 데려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생산


반도 관뒀어요.”

겨울이 예의상 미소 지으며 거절했다. 한씨 집이라면 치가


떨린다. 물론 한 회장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제 손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인 그의 아들 한태오에게 있는 것이지.

“태오 형도 파티에서 인사 나눴구요.”

차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나가는 대학병원 원장이자 의


사협회 회장을 맡은 한 회장의 아들과 연을 끊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건강을 가장 중요시하는 아버지의 친한 친구의
소중한 아들이기 때문에.

“생산반을 관둬?”

아버지가 못마땅한 듯 눈썹을 꿈틀대며 말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아들이 사교 모임을 피하는 건 이해 가도 생산반은
아니었다. 책임의 문제였다.

“네, 수인이 적응을 너무 못해서…….”

“못할 것 같으면 보내질 말았어야지!”

“…….”

아버지가 크게 호통쳤다. 어머니와 주도훈이 진정하시라


며 그를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엄혹한 눈빛이 겨울을 꿰뚫
었다.

“기껏 팀장 자리 앉혀놨더니 그새 또 소문을 만들어? 잘할


마음이 있긴 한 거냐?”

“……죄송해요. 생각이 짧았습니다.”

“직원들이 대체 널 뭐라고 생각하겠니. 수인 없이 입사해


서 낙하산 소리 듣는 게 싫었으면 보란 듯이 마무리했어야
지. 언제까지 약해 빠진 행동만 할 거야.”

“…….”

“낙하산도 모자라서 뭐? 트라우마? 수인 갈아가며 세운 집


안에 말도 안 되는 정신병이 있는 것도 믿기 힘든 마당에 들
개 한 마리 적응을 못 시켜!”

쿵, 화를 주체 못 한 아버지가 식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러자 흥미로운 듯 눈치만 보던 주도훈이 웃음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며 그를 제지했다.
“아버지, 진정하세요. 너무 흥분하셨어요. 한 회장님이 혈
압 조심하시라고 그랬잖아요.”

“저런 것도 내 핏줄이라고…….”

“겨울이가 어련히 잘하겠죠. 저랑 다르게 수인 들인 게 너


무 오랜만이라 실수한 걸 거예요. 그렇지?”

주도훈이 얼른 대답하라는 듯 눈을 찡긋거렸다. 상대도 하


기 싫었지만, 겨울은 자존심을 무릅쓰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버지.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말뿐인 반성이었다. 사실 왜 죄송해야 하는지 몰랐다. 천


천히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말에 먼저 입사해서 경험을 쌓
으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도 그였고, 수인 보유 필수라는 면
접 조건을 넣은 사람도 그였다. 그럼에도 반항할 수 없는 자
신이 싫고, 누구보다 자신이 무너지길 바라면서 안타까운 척
바라보는 모두의 위선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 들개, 어디 굴릴 생각 하지 말고 끝까지 책임져라. 이


미지는 네가 만드는 거야.”

“……네.”

겨울이 한숨을 참으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분노하며 못 박


지 않아도 반려라고 떠드는 놈은 이미 제집에 뿌리를 내렸
다. 처치 곤란인 물건에 감시 카메라까지 생긴 셈이었다.

“갈게요.”

겨울은 아버지가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떠날 채비를 했다.


아주머니가 후식을 먹고 가라며 말렸지만, 얹힌 속이 울렁거
려 더는 못 먹을 것 같았다. 가람에게 줄 남은 음식만 챙겨
나왔다. 내일 가뿐하게 출근하려면 돌아가서 조금이라도 더
휴식을 취해야 했다.

“주겨울! 오랜만에 자고 가지. 벌써 가?”

“어.”

“나랑 자고 가.”

“싫어.”

겨울이 주도훈의 손길을 뿌리쳤다. 본가 2층에 나란히 달


린 방 두 개는 여전히 학창 시절에 쓰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주도훈이 있으면 꼭 방에 쳐들어와서 침대를 차지하고 끊임
없이 시비를 걸어대서 싫었다.

“오랜만에 아버지한테 혼났다고 삐쳤어? 새삼스럽다. 아


버지 화나면 속에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는 거 알잖냐.”

“그런 거 아니야. 피곤해서 그래.”

“아직도 아파? 병원에선 뭐래?”

“……그냥 몸살.”

“그래, 오늘은 내가 한 번만 떨어져 나가준다. 운전 조심


해. 집에선 들개한테 물리지 않게 조심하고.”

앙! 주도훈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무는 시늉을 하며 낄낄


거렸다. 하나도 재미없다. 겨울은 무시한 채 시동을 걸고 출
발했다. 창밖으로 가운뎃손가락을 내미는 것도 잊지 않고서.

거실은 캄캄했다. 겨울은 불을 켜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가람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
설마 도망을……. 겨울은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창문을 열
고 정원과 담벼락 근처를 살폈다.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씨발…….”

가람이 도어 록 여는 방법을 몰라서 방심하고 있었다. 겨


울은 불안한 듯 입술을 짓씹으며 다시금 집안 곳곳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버지 잔소리 때문에 성급해졌을 뿐이다. 반려
니 뭐니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그가 이리 쉽게 도망갈 리 없
었다.

욕실과 안방, 창고와 남는 방까지 샅샅이 뒤진 겨울이 마


지막으로 살짝 열린 서재 문을 밀었을 때였다.

“…….”

창문 밑에 기대어 앉은 가람이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꽤 집중한 눈치였다. 고독을 씹으며 책장을 넘기는 모습이
여느 대학생과 다름없었다. 겨울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
았다. 책을 읽는 수인. 역설적 표현 같았다. 무명 화가가 이
장면을 그려 판다면 단번에 재능을 인정받을 만큼 신비롭고
흥미로웠다. 배워야 할 나이에 배우지 못하고 호기심을 억누
르는 게 쉽진 않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그가 애처
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소란스러운 발소리에도 태연하게 책을 읽던 그가 겨울이


카펫을 밟자 고개를 번뜩 들었다.

“리안, 왔어요?”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겨울이 무겁게 말했다. 서재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


인데 가람이 함부로 들어와서 짜증이 났다.
“책 읽고 있었어요.”

“…….”

그 짜증도 점점 엇나가는 가람의 행동에 익숙해졌는지 분


노로 진화하진 않았다. 단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수인이
글을 안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숍에서 온 놈
이라 서사가 없을 거라고 여긴 자신이 바보였다. 가람은 예
상외로 지능이 높은 듯했다.

겨울이 눈썹을 구기며 나오라고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가


람이 책을 덮고 일어났다.

“그런데 이 책, 리안이 좋아하는 책이에요? 이 책만 접힌


자국이 많아서 궁금해요. 저도 엄마한테 받은 책 중에 좋아
하는 책만 유독 지저분해졌거든요.”

“……책을 읽었다고?”

“네.”

“그 산속에서?”

의문이다. 책을 구하려고 도시에서 산을 오가면 성인이 되


기 전에 진즉 붙잡혔을 텐데. 그간 엄마의 보살핌만 받으며
살았던 건가. 겨울이 코웃음 쳤다. 타잔이 아니라 산에서 수
양한 도련님이 따로 없었다.

“네, 아는 게 생존이랬어요.”

“아는 게 힘이겠지.”

“아…….”

틀리고 부끄러운 듯 얼버무리던 가람이 이내 부드럽게 눈


웃음 지었다. 수인이 아니었다면 꽤 똘똘한 학생으로 봤을
법한 미소였다.
“역시 리안은 똑똑해요.”

“…….”

“닮고 싶어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나와. 누가 말도 없이 들어와도 된


다고 했어?”

“그건… 잘못했어요. 하지만 리안을 위한 거였어요.”

가람이 어물쩍 대답했다. 겨울은 제 핑계를 대는 그를 못


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요새 부쩍 말대꾸가 늘었다. 반려라는
이유로 자신을 수인으로 여기거나, 인간이 되고 싶거나. 둘
중 하나인 듯했다.

“아는 게 힘이랬잖아요. 지금 나는 힘이 없어요. 리안을 지


키려면 여기를 채워야 해요.”

가람이 검지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어디서 배운 제


스처인지 참 자연스러웠다. 허, 기어이 겨울의 입에서 헛웃
음이 튀어나왔다. 인간과 눈만 마주쳐도 벌벌 떠는 수인과
달리 기어오르는 수준이 남달랐다.

“거기를 채우면 뭐가 달라져? 그래 봤자 넌 수인이야.”

“…….”

가람의 입이 꾹 닫혔다. 겨울은 되레 당황했다. 주제를 알


았으면 해서 평소처럼 별 뜻 없이 조롱한 건데, 어느 말에도
꼼짝하지 않던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의식적으로 가람
과 인간을 동일시하고 있었나 보다. 차라리 다행이다. 아버
지의 충고대로 그를 책임지려면 어느 정도의 채찍은 필요했
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나와.”
겨울은 그가 나오자 아주머니께서 수인이 먹는 줄도 모르
고 정성스레 싸준 반찬통을 내밀었다. 맛있는 냄새를 맡은
가람의 표정이 한 단계 누그러졌다. 겨울은 제자리로 돌아가
는 그를 불러 세우려다 이내 단념했다. 그가 반찬 통과 함께
안고 간 책은 자신이 아끼는 책이 맞지만, 하루쯤이야 모른
척한다고 큰일이 날 것 같진 않았다.

……저걸 어떻게 하지. 겨울이 답답한 붕대를 풀며 생각했


다. 수인이 아니라 막 사춘기에 접어든 떠돌이를 거둔 기분
이었다.

***

새해가 밝았다고 크게 변한 건 없었다. 올해 막 스무 살이


된 들개와 나란히 한 살씩 더 먹었다는 것과 정초부터 본가
에서 떡국을 챙겨 먹었다는 것뿐이었다.

오늘 구내식당에도 떡국이 나올 줄 알았으면 다른 식당에


갈 걸 그랬다. 몇몇 팀원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온 겨울은 점
심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항상 시끌벅적한 식당이 평소와
달리 묘하게 우중충했다.

겨울 근처에 둘러앉은 팀원들이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


렸다.

“딱 일주일만 더 쉬면 좋겠어요.”

“그래? 방법이 있긴 한데.”

“뭔데요?”

“사표 내.”
“에라이…….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온 팀원들도 유독 기운이 없었다.


겨울은 대리와 사원의 농담을 들으며 가볍게 웃었다. 내일이
면 바짝 차린 정신으로 돌아올 걸 알기에 가벼운 투정으로
받아들였다.

“주 팀장도 여기서 밥 먹네. 언제는 같이 먹자 해도 싫다더


니.”

익숙한 목소리에 국물을 떠먹던 겨울이 고개를 들었다. 주


도훈이었다. 인사만 하고 지나갈 줄 알았던 그가 식판을 식
탁에 가볍게 걸치자 팀원들이 순식간에 자리를 빠져주었다.
온기를 잃은 겨울이 허황한 눈빛으로 다른 테이블로 넘어간
그들을 바라보았으나, 팀원들은 식사 맛있게 하시라며 모른
체했다. 그게 나름 센스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
다.

“다들 밥 먹는데 뭐 하는 짓이야.”

겨울이 맞은편에 앉은 주도훈을 쏘아보자, 그가 어깨를 으


쓱이며 대답했다.

“내가 뭐라고 했나? 자기들이 알아서 떠난 게 내 탓이야?”

“눈치 좀 그만 줘. 불편해하잖아.”

“형제끼리 오붓하게 먹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걸.


뭘 또 예민하게 굴고 그러냐.”

“…….”

대충 배만 채우고 일어나야겠다. 북적이는 식당에서까지


말다툼하고 싶지 않은 겨울은 다시 수저를 들었다. 본가에서
혼나고 온 지 하루도 안 됐는데 아버지 귀에 이상한 소문이
들어가면 큰일이다.

하지만 주도훈이 얌전히 식사하는 겨울을 가만히 보고 있


을 리 없었다.

“손은 쓸 만해? 먹여줄까?”

“아,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겨울은 주도훈이 내민 계란말이를 피하며 입술을 삐죽였


다. 아버지 앞에서 떠는 내숭, 여기서도 좀 떨었으면 좋으련
만. 다들 신경 안 쓰는 것 같아도 은근히 이쪽을 주시하고 있
는데, 주도훈은 제집인 양 장난기가 넘쳤다.

“붕대는 왜 풀었어. 눈치 엄청 보면서. 팀원들이 왜 다쳤냐


고 안 물어봐?”

“……어.”

겨울이 젓가락을 엉성하게 쥔 손에 가벼이 힘을 주었다.


크게 눌어붙은 피딱지를 가리려고 임시로 밴드는 붙여놨지
만 벌어진 틈으로 상처가 훤히 보였다. 그러고 보니 호기심
많은 팀원들이 한마디도 없었다. 아직 못 물어본 걸 수도 있
겠지만.

“병원 한 번 더 가. 흉 질라.”

“뭐 이런 거로. 일주일이면 나아.”

겨울이 무심히 말했다. 얼얼한 통증도 가셨고, 움푹 팬 살


점도 서서히 차오르는 중이라 괜찮았다. 응급 처치로 충분했
다. 고작 손가락 다쳤다고 엄살 부리며 병원에 가고 싶진 않
았다.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 하면서 퍽도 낫겠다. 그냥 뒀다간
굳은살 박여.”

“내가 알아서 해.”

“답답한 새끼……. 한번 보자.”

“괜찮다니까……!”

짤그락! 주도훈이 팔을 홱 잡아당기는 바람에 겨울이 쥐고


있던 젓가락이 손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갔다. 젓가락이 소란
스럽게 떨어지며 식사하던 직원들이 힐끗 시선을 보냈다. 겨
울이 당황하며 젓가락을 주우려던 때였다.

“안녕하세요!”

“…….”

새하얀 연구복을 입은 조우희가 대신 주저앉아 젓가락을


주우며 발랄하게 인사를 건넸다. 순간 놀란 겨울이 고개만
대충 까딱이자, 그는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재잘대기 시작
했다.

“주 팀장님도 구내식당 이용하시는구나! 몰랐어요. 왜 이


제 봤지?”

“……가끔 옵니다.”

“그러셨구나. 손은 왜 다치셨어요? 수인이랑 사이가 안 좋


아요? 제가 준 솜사탕 효과가 없었나? 이상하다, 웬만한 수
인은 끔뻑 넘어가는데!”

“수인이랑 관계없어요. 그러는 조우희 씨는 얼굴이 왜 그


럽니까?”

겨울이 다친 손을 슬그머니 감추며 물었다. 조우희의 목소


리가 워낙 높고 커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대화를 엿듣고 손을
훔쳐보는 것 같았다. 그는 주도훈이 실실 웃으며 쉬이, 하고
목소리를 낮추라는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
굴을 감싸며 불쌍한 척 눈썹을 내려뜨렸다.

“지금 저 못났다고 까는 거예요?”

“아… 그런 게 아니고 상처가 보여서…….”

푸하학. 둘을 번갈아 보던 주도훈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


다. 그러자 조우희도 씨익 미소 지으며 볼을 씰룩였다. 심하
진 않지만 살갗이 까져 오돌토돌하게 딱지가 진 뺨이 눈에
띄었다. 그날 듣자 하니 상사에게 찍힌 것 같은데 설마 괴롭
힘을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농담이에요. 이거 그냥 일하다가 다쳤어요. 괴짜들은 그


냥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논문이나 쓰는 줄 알아요? 우리 일
도 꽤 힘들고 어렵거든요. 여기저기 상처 나는 거 비일비재
해요.”

“안전 장비 없습니까?”

“왜 없겠어요. 그런데 제가 성격이 많이 급해서 덜렁대다


그런 거니까 너무 신경 쓰는 척 안 하셔도 돼요.”

“예?”

겨울이 황당한 듯 되물었다. 신경 쓰는 척이라니. 다른 부


서긴 해도 엄연히 동료인데 당연히 신경 쓰이는 일이 맞았
다.

“보는 눈이 많잖아요. 저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무슨…….”

“헉, 벌써 30분이 넘었네. 농도 확인해야 하는데……. 저


먼저 가볼게요!”
손목시계를 확인한 조우희가 덤벙대는 걸음으로 식당을
달려 나갔다. 뒷모습이 꼭 동화 속에 나오는 시계 토끼와 비
슷했다. 자기 말만 하고 시간에 쫓겨 사는 시계 토끼. 그가
떠나자 주변이 유난히 고요하게 느껴졌다. 말 많던 주도훈도
그의 등장 한 번에 차분해 보일 정도였다.

“와, 특이하다. 그나저나 연구복 입고 막 돌아다녀도 되


나?”

“그러게…….”

“너 닮았다.”

“뭐?”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게 비슷해. 걱정을 해줘도 들


은 체 만 체.”

“…….”

내가 저 정도로 귀 막고 사는 스타일은 아닌데. 걱정은 받


아봤자 상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서 모른 체한 거고.
겨울이 속으로 열심히 해명했다.

“방금 공감했지? 내가 어떤 기분인지 좀 알겠냐?”

주도훈이 말없이 숟가락으로 불어 터진 떡만 찌르는 겨울


을 보며 픽 웃었다. 실수투성이인 신입 같다고 돌려 말한 말
에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듯해도 꽁하게 굴러가는 눈동자에
떡하니 기분이 상했다고 쓰여있었다.

“모르겠고, 주 과장도 나 너무 신경 쓰는 척하지 마.”

겨울이 식판을 들고 일어나며 한 소리 했다. 조우희가 어


떤 의미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악의적인 의
도는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여유 넘치는 주도훈이 턱을 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야, 형한테 정 없게 주 과장이 뭐냐. 지금 팀장 달았다고


유세 떠는 거야?”

“이미지 관리할 거면 가서 네 팀원들이나 챙겨. 눈치 없이


우리 팀 모여있는 데 끼어들어서 괜한 소문 만들려고 하지
말고. 먼저 간다.”

“……재수 없는 놈.”

겨울은 그가 중얼거린 말을 듣지 못한 채 식당을 빠져나갔


다. 간만에 한 방 먹인 것 같아 기분이 붕 떴다. 오늘 업무는
일찍 끝낼 수 있을 듯했다.

예상대로 정시에 퇴근한 겨울이 차고에 주차를 마치고 나


올 때였다. 지나가던 옆집 남자가 알은체를 해왔다.

“어어, 또 뵙네요. 이제 퇴근하신 거예요?”

“아… 네.”

겨울이 어색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 남자는 온종일 밖에


있는 건가. 출근할 땐 수인을 산책시키더니, 저녁인 지금은
그의 곁에 아무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 희미하게
맛있는 냄새가 났다.

“이제 저녁 드시겠네요. 전 방금 갈비 먹고 왔는데.”

“아, 그러세요.”

“요즘 집밥이 지겹더라고요.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기도 하


고. 이렇게 두 번씩 산책해야 속이 후련해요.”

“학생이신가 봐요.”
간단히 마무리 짓고 들어가려 했는데, 남자는 말을 쉬지
않았다. 액면가는 학생이 아니었지만 차마 백수냐고 물을 순
없었기에 예의상 건넨 대답이었다. 다행히 남자도 자신이 동
안인 줄 착각한 모양이다. 그가 머쓱한 듯 웃었다.

“아닌데. 집에서 일해요, 프리랜서. 남들처럼 출근을 안 할


뿐이지 나름 생활 패턴은 규칙적이에요.”

“그래서 아침에 산책하셨나 봐요.”

“네, 운동 겸. 그러고 보니까 우리 통성명을 안 했네요. 김


필호라고 합니다. 서른이에요.”

“주겨울입니다.”

겨울이 남자와 악수하며 고개를 까딱 숙였다. 그는 자신보


다 두 살 더 많았다. 솔직히 대여섯 살은 많아 보였는데 의외
였다. 또래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주겨울, 주겨울…….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김필호가 겨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혼잣말했다. 뉴스 사


회면에는 관심이 없는 편인가 보다. 겨울은 그가 JUONE 기
업을 떠올리기 전에 대문을 열었다. 들어가는 시늉을 하면
알아서 갈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가 붙잡듯 제안했다.

“나중에 시간 되면 이웃끼리 밥 한 끼 할래요? 오늘 다녀


온 갈빗집 진짜 맛있거든요. 수인 아르바이트생 쓰는 곳이라
재밌는 일도 많고. 저번엔 술에 잔뜩 꼴은 아저씨가 수인이
실수했다고 고기 판에 손을 지지는 거 있죠? 그런 건 처음 보
는데 거기 손님들 반응이 진짜, 와…….”

“…….”
겨울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집 안에 있어야 할 가람
이 또 나와있었다. 저번처럼 정원 안쪽 담벼락 근처에서 서
성거리던 가람이 겨울을 마주하고서 살포시 미소 지었다. 도
망가려고 튀어나온 수인치고는 아주 여유롭고 평온해 보였
다. 오히려 자신을 반기는 눈치였다.

“아, 아니면 우리 집 오셔도 되고요. 이래 봬도 제가 한식


조리사 자격증 있거든요. 친해지고 싶으니까 대접 한번 할게
요.”

주위를 기웃거리던 김필호가 겨울의 표정을 보고 착각해


다른 장소를 추천했다.

“……그래요.”

“그럼 나중에 봬요!”

“네, 들어가세요.”

남자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대문을 닫고 들어온


겨울이 성큼성큼 걸어가 가람을 마주했다. 오늘은 맨발이 아
니었다. 작정하고 나온 듯 신발까지 갖춰 신었다. 그래 봤자
발가락이 훤히 드러난 슬리퍼지만.

“너…….”

“기다렸어요, 리안. 해가 져서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시작도 못 한 잔소리가 멎었다. 가람이 어둑한 하늘을 바


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오늘 밤엔 눈이 올 것 같아요. 추운 냄새가 많이 나요.”

그의 목에 어설프게 동여맨 스카프가 살랑거렸다. 겨울도


그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저도 모르게 깊게 들이마신 바람
에서 겨울 특유의 시린 냄새가 물씬 났다. 그리고 그사이, 가
람이 풍기는 샴푸 냄새도 은은하게 섞여 흘렀다.

“담아! 나 왔다!”

옆집 남자가 대뜸 소리 질렀다. ‘담’은 그가 거둔 여우 수


인의 이름이다. 매일 산책할 때마다 담아, 담아 하고 다정하
게 부르니 알 수밖에 없었다. 이사를 가야 하나. 보통 담벼락
이 다닥다닥 붙어있진 않던데, 너머로 목소리가 다 들렸다.
참 이상한 동네다. 아무래도 이웃을 잘못 만난 듯싶었다.

바스락.

겨울이 가람을 데리고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담벼락 근처


에서 수상한 소리가 났다. 겨울은 가람을 밀치고 주변을 유
심히 살폈다. 두껍고 튼튼한 담벼락 위쪽에 구멍이 작게 나
있었다. 겨울이 언제 뚫렸는지 모를 구멍 사이에 눈을 가까
이하자, 힘껏 놀라는 음성이 들렸다.

“히익!”

재빨라서 자세히는 못 봤지만 몸집과 키가 작은 걸 보아하


니 옆집 수인인 것 같았다. 담이라는 소년은 여전히 그를 찾
는 김필호에게 후다닥 달려갔다.

“왜 나와있었어.”

겨울이 냉담히 물었다. 쫓아내도 이젠 싫다며 붙어있겠다


는 놈이 나와있는 것도 모자라, 우연히 구멍 난 담벼락 앞에
서 옆집 수인과 마주 보고 있었단 사실이 의심스러웠다. 대
체 무슨 꿍꿍인지 궁금했다.

“리안 기다렸어요.”
가람이 고개를 갸웃 꺾으며 대답했다. 왜 묻는지 모르겠다
는 얼굴이었다.

“여우 새끼랑 탈출 계획이라도 짰어?”

겨울이 주먹을 쥐었다. 개 팔자가 상팔자라더니. 며칠 전


만 해도 가족 찾겠다며 낑낑거리던 놈이 너무나 태평해 보여
배알이 꼴렸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겉보기엔 갑
이지만 아버지의 명령으로 그와의 계약에서 을이 된 듯한 찝
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당장 그가 사라져서 손해가 막
심한 쪽은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리안은 아직도 내가 도망갈 것 같아요?”

가람이 불안한 겨울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금방


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그의 몸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겨울
이 손을 떨쳐내며 소리쳤다.

“묻잖아!”

“담이는 여기가 좋댔어요.”

“…….”

예상대로 옆집 수인과 대화를 나눈 모양이다. 겨울은 알아


서 술술 부는 가람을 여차하면 뺨이라도 갈길 마음으로 벼르
듯 바라보았다.

“주인이랑 오래오래 지낼 거래요. 그래서 나도 반려랑 오


래오래 같이 있고 싶다고 했어요.”

“……그걸 말했다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웃 남자 귀에 들어가면 동네는


물론이고 아버지와 회사에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다. 날쌘 여
우 새끼를 몰래 납치해서라도 입을 막아야 했다.
“네.”

“네 반려가 인간이라는 것도 말했어?”

“아니요.”

가람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고는 겨울을 향해 살


짝 몸을 숙이며 물었다.

“말했으면 좋겠어요?”

설마 그가 옆집 수인과 교류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불안해진 겨울이 말을 더듬었
다.

“절대… 절대로 말하지 마. 반려라는 그 단어도 입 밖에 내


지 마! 알아들어?”

“…….”

“대답해!”

혹여나 누가 들을까 가람을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겨울


이 그를 다그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꾹 다문 가람이
못 미더웠다. 수인의 반려가 인간, 그것도 JUONE 그룹의 아
들이라는 소문이 퍼지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커리어와
이미지, 부와 명예 등 여태껏 쌓아온 소중한 재산이 무너지
는 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초조함에 말아 쥔 주먹 안으
로 짓눌리는 손끝이 얼얼하게 아파져 왔다.

“리안, 손이!”

“대답이나 하라고.”

“……내가 반려인 게 부끄러워요?”

황당한 질문이었다. 겨울이 헛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거칠


게 넘겼다. 이번 문제만큼은 그에게 달려있어 무작정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잖아. 애초에 인간이랑 수인


이 반려 사이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착각 좀 하지 마.”

“말이 안 되는 이유는 뭐예요?”

“뭐?”

가람이 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종이를 주섬주섬 펴서 내밀


었다. 겨울과 쓴 계약서였다.

“리안을 위해서 뭐든지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당신이 날


인정하지 않으면 나는 뭐가 돼요?”

“…….”

“리안이야말로 착각하지 마요. ……당신은 내 주인이 아니


야.”

단호한 말투에 집착이 엿보였다. 잃을 것이 없는 그는 온


전히 겨울에게 의지했다. 계약서를 빼앗아 찢으려던 겨울이
이내 포기했다. 고작 종이 쪼가리를 찢어 없앤다고 단단히
홀린 그를 설득할 순 없을 것 같았다. 고작 말 몇 마디로 뒤
바뀔 눈빛이 아니었다. 저를 위해 뭐든 한다던 들개는 그 자
체를 혼인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일단 알았으니까… 그런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마. 날 매


장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네!”

가람이 당차게 대답했다. 매정하게 돌아선 겨울은 거의 쓰


지 않던 2층 계단을 밟았다. 들개와의 사이에 변화가 조금 필
요할 듯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2층에 달린 방을 정리하던 겨울이 어
깨를 주무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르뎅뎅한 먹구름이 하
늘을 메우더니 머지않아 가람 말대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
했다. 환기하려고 창문을 열어젖히니 시원한 바람이 송골송
골 맺힌 땀방울을 앗아갔다.

“…….”

2층에서 바라보는 동네 전경은 색달랐다. 원체 집이 높아


1층 생활만 해도 만족스러웠는데 역시 조금 더 높은 곳은 달
랐다. 손님 전용으로만 쓰던 곳을 수인에게 내어줄 줄이야.
그렇지만 본인을 반려라고 여기는 놈을 위험하게 거실 한복
판에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청소를 마친 겨울이 가람을 방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앞으로 네가 쓸 곳이야.”

“내 공간이요……?”

“그래.”

“와…….”

가람이 감탄하며 방 안 곳곳을 구경했다. 그래 봤자 침대


와 스탠드, 작은 탁자밖에 없는 좁은 공간이었다. 감격한 듯
금빛 눈동자가 찬란하게 반짝이는 모습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조용히 지내. 이 동네에서 수인한테 개인 공간 줬다고 알


려지면 너나 나나 좋을 거 없으니까.”

“네, 리안. 소중히 쓸게요.”

“그럴 것까지야.”
겨울이 이불을 만지작대는 그를 주시하며 비아냥댔다. 그
리고 안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엎어졌다. 차라리 잘됐다. 잠
금장치는 없지만 감금처럼 방에 넣어두면 사고라도 덜 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쿵! 무언가 천장
을 두드렸다. 안방은 가람의 방 아래로 곧장 이어진 구조라
그가 허튼짓을 하면 곧장 눈치채기 쉽다. 그런데 5분도 채 지
나지 않아 층간 소음을 일으키다니. 영 조심성이 없는 수인
이었다.

‘성가신 새끼…….’

딱 한 번만 봐준다. 피곤함에 못 이긴 겨울이 저녁도 안 먹


고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

쿵!

또다시 소음이 울렸다. 험한 산에서만 살던 놈이라 걷는


데 힘 조절을 안 하는 모양이었다. 짜증을 머금은 겨울이 2층
을 올랐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눈살을 찌
푸렸다.

“뭐 하는 거야. 그걸 옮겼어?”

“네, 달빛을 몽땅 받고 싶어서요.”

가람이 배시시 웃었다. 햇볕이면 몰라도 달빛을 받고 싶다


는 놈은 처음이다. 방 중앙에 침대를 떡하니 옮겨놓아 흡사
다락방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창문 밑으로 가로로 놓인 침
대가 인상적이었다. 자기가 무슨 숲속의 공주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열심히 정리한 방이 엉망이 된 꼴을 보자 두통이
일었다. 겨울이 이마를 짚자, 잽싸게 다가온 가람이 손목을
그러쥐었다.

“리안, 어디 아파요?”
“…….”

반사적으로 뿌리친 겨울이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수인이


인간보다 높은 체온이긴 하지만, 이상하게 더욱 뜨거웠다.

“너야말로 어디 안 좋아?”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

가람이 두어 발자국 멀찍이 물러났다. 수상하다. 무언가


찔린 눈치였다. 겨울이 당황한 듯한 가람의 얼굴을 빤히 주
시했다. 어쩐지 뺨이 발그레한 것도 같고, 눈꺼풀이 조금 풀
린 것도 같았다.

“……감기인가.”

본가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수인 사이에서 병이 돈


댔는데… 아무래도 생산반에서 옮았나 보다. 아니면 근래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몸에 악영향을 준 걸 수도 있고. 어
찌 됐든 그가 아파서 좋을 일은 없으니 약이 필요할 듯했다.

“어디 가요, 리안? 나 하나도 안 아파요! 정말이에요…….”

“거짓말하지 마.”

겨울이 약국에 가려고 겉옷을 챙기자, 가람이 그 앞을 다


급히 막아섰다. 짐승은 아프면 무리에서 버림받는다더니. 본
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조금 자면 괜찮아질 거예요. 믿어주세요…….”

“약국 가는 거니까 귀찮게 굴지 마.”

“약국이요……?”

“나아야 할 거 아니야. 너한테 병 옮을 일 있어? 비켜.”


겨울이 가람을 밀치고 현관을 나섰다. 아까보다 눈발이 세
졌다. 동글동글한 눈송이가 검은 코트에 척척 달라붙었다.

“……그럼 같이 가요! 눈이 와서 위험할 거예요.”

“…….”

가람이 기어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겨울을 따라나섰


다. 슬리퍼에 외투도 갖춰 입지 않은 휑한 복장이었지만 표
정만은 밝았다. 이러고 집 밖에 나오니 감기에 안 걸릴 수가
있나. 겨울은 한심할 정도로 해맑은 그를 외면하며 약국으로
향했다.

약국은 가까웠다. 수인 약국은 처음인데 보통 약국과 별다


를 바 없었다. 똑같이 소독약 냄새가 나고 약장엔 수많은 약
이 줄지어 진열되어 있었다.

“감기인 것 같습니다.”

“음… 감기요? 잠시만요.”

겨울이 가람의 증상을 간단히 말하자, 약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옆에 선 가람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맥박을 짚었다. 기계 없이도 증상을 파악하는 모습을 보니
꽤 실력 좋은 약사인 듯했다.

“…….”

“아, 감기… 마, 맞는 것 같네요.”

신중히 증상을 살피던 약사를 무겁게 바라보던 가람이 손


목을 홱 뺐다. 그러자 놀란 약사가 어버버하며 감기약을 꺼
냈다. 겨울은 가람을 제 뒤로 보내며 카드를 내밀었다. 낯선
이의 손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항상 부드럽던 눈빛
에 날이 서있었다. 눈을 맞으며 오니 점점 열이 오르는 모양
이었다.

결제를 마친 약사가 속삭이듯 물었다.

“수인 접종은… 다 맞히셨죠?”

“네, 그럴 거예요.”

“……식후 하루 두 번 먹이시면 되고, 다음부터 수인 동행


시에 리드 줄은 꼭 채워주세요.”

“네, 죄송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다행이다. 약사의 반응을 보아하니 다행히 이상한 병은 아


닌 듯했다. 날씨가 급격하게 변하며 겪는 흔한 감기 증상은
사람과 똑같았다. 이럴 때 보면 그가 정말 수인은 맞나 싶다
가도, 머리 위로 튀어나왔던 귀를 떠올리면 참 아이러니했
다.

한시름 놓은 겨울이 문을 열었을 때였다.

“저기요!”

약사가 겨울을 불렀다. 겨울과 가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


자, 리드 줄을 하지 않은 가람과 주인을 번갈아 보던 약사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아니에요. 혹시 문제 생기면 또 들러주세요.”

“네.”

나 참, 별꼴을 다 보겠네……. 닫히는 문 사이로 약사가 중


얼거리는 말이 희미하게 들렸다. 아무래도 약사는 사람처럼
데리고 나온 가람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겨울은 희뿌
연 숨을 내뱉으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눈이 펑펑 내리는 길
가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다. 그제야 타인의 시선이
무척 신경 쓰였다.

***

쓱쓱, 이른 아침부터 수북이 쌓인 눈 치우는 소리가 빈번


히 들렸다. 밤새 눈이 그치질 않더니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
였다. 겨울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출근길이 막히기 전에 출
발해야 했다.

구두를 신으며 허전한 집 안을 둘러보았다. 넓은 거실 한


편을 차지한 짐짝이 보이지 않으니 좋으면서도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별일 없겠지.’

감기약의 효과는 셌다. 약을 먹고 잠든 가람은 지금까지


죽은 듯이 조용했다. 덕분에 층간 소음에 시달리지도 않고
그가 없던 여느 날처럼 평화롭게 출근할 수 있었지만, 시선
이 닿지 않는 곳에서 괜한 사고를 일으킬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겨울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2층 계단 위를 스르르 타고
올랐다. 출근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였는데도 아직 깨지 않았
는지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다들 자신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회사로 가는 도로가 꽉 막


혔다.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한 겨울은 많은 업무를 보면서
도 가람의 생각을 끊지 않았다. 대뜸 억울했다. 수인과 인간
의 대우가 뒤바뀐 느낌이었다. 수직이어야 할 관계가 점점
수평으로 내려앉는 듯했다. 모두 제 불찰이자 실수였다. 이
래서 주도훈이 무조건 짓누르고 본 건가. 폭력적이고 고약한
행동은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력으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수인을 스스로 방어한 거였
다. 정신적으로 그럴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도록 억누른 거
였다.

이제야 그들이 조금 이해가 갔다. 하지만 이미 틀어진 관


계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이대로 가다간 수인에 대한 책임
이고 뭐고 가람의 반려로 사회에서 매장당할지도 모를 텐데.
겨울이 볼펜을 딸깍거리며 상념에 빠졌을 때였다. 의견을 나
누던 팀원이 손바닥을 들어 제안했다.

“대표로 팀장님 수인은 어떠세요?”

“예?”

답지 않게 딴청 피우던 겨울이 자연스레 되묻자, 다른 팀


원이 동조했다.

“어, 맞아요. 다들 팀장님 수인은 한 번도 못 보지 않았어


요? 다들 한 번씩 순서 돌았고, 이참에 팀장님 수인 데려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듣자 하니 수인 동반 기간이 돌아온 모양이다. ‘수인 동반


기간’이란 두 달, 업무가 바쁘면 석 달에 한 번씩 수인을 동
반하고 출근하는 기간이다. 차례가 돌아온 팀원이 데려온 수
인은 온전히 주인이 케어하나, 회사의 공용으로서 동반한 이
유도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샘플 리뷰와 기획 보고서를 쓰
는 데에도 참고용으로 불려가기도 한다. 사실 이런 있어 보
일 법한 이유는 핑계고 일개 아르바이트생이 할 만한 잔심부
름이 목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회의가 끝나고 바뀐 주제를 빠르게 눈치챈 겨울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럴까요.”

“네!”

수인을 거뒀다는 소문도 퍼졌겠다, 인사팀에서 감시하는


기간을 마냥 피할 수만은 없었다. 상사로서의 모범을 보이기
좋을 기간이기도 하고. 마침 고민하던 가람과의 관계를 되돌
려 놓기에도 적절한 해결책이 될 것 같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겨울이 차고에서 나온 순간이었다. 동


네를 들어설 때부터 대문 앞에서 빗자루를 들고 얼쩡거리던
이웃 김필호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겨울 씨!”

“……안녕하세요.”

퇴근 시간대를 바꿔야 하나. 요즘 따라 많이 마주치는 느


낌이다. 겨울이 불편한 기색을 숨긴 채 인사하자, 그가 정적
이 깔리기 무섭게 말을 이었다. 무척 들뜬 목소리였다.

“오늘 시간 어떠세요? 따로 약속 없으시면 어제 말한 밥


한 끼 같이하실래요?”

“아…….”

“부담 가지실 거 없어요. 이미 다 준비해 뒀거든요. 아, 오


해하진 마세요. 딱히 겨울 씨를 기다렸던 건 아니고… 눈도
오고 맛있는 거 잔뜩 만들었는데 같이 먹자고 부를 친구가
없어서요. 제가 보기엔 이래도 외로움에 좀 약하거든요.”

“…….”

어지간히 심심한 모양이다. 겨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


였다. 이런 식으로 친분을 쌓는 건 처음인데 이웃과 척져서
나쁜 건 없으니 한 끼 정도는 괜찮을 듯했다. 마침 저녁을 거
를까 고민하기도 했고. 나중에 일이 생기면 가람을 맡길 수
도 있을 테니 다가온 친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준비하고 있을게요. 천천히 오세요!”

김필호는 쌓인 눈더미에 빗자루를 홱 내팽개치고서 사라


졌다. 무던한 첫인상치고 성격이 꽤 쾌활하고 친절했다. 조
금 귀찮긴 해도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긴장하는 버릇을 못
느낄 정도로 편안한 사람이었다. 겨울이 구둣발로 맨바닥을
슥슥 쓸었다. 제집 대문 앞에 쌓인 눈이 어느새 말끔히 치워
져 있었다.

“리안!”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2층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던


가람이 환히 웃으며 겨울을 반겼다. 몸이 반쯤 나온 게 곧 떨
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겨울이 짧은 한숨을 내쉬고 현관문을
열려던 찰나였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뛰어내린 가람이 차가
운 맨바닥에 정확히 착지했다.

“야……! 미쳤어?”

“리안이 절 못 본 것 같아서요. 많이 기다렸어요.”

“……그러다 어디 하나 부러지면 책임 못 져.”

겨울이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힐난했다. 그럼에도


가람은 샐쭉 웃으며 겨울의 얼굴을 감상했다. 견고한 눈빛과
어울리는 날렵하게 뻗은 눈꼬리와 쭉 뻗은 콧대, 어둑해진
정원에 켜진 조명에 빛나는 잡티 하나 없는 피부까지. 거의
하루 동안 기절한 듯 자기만 했던 제 행동을 반성하듯 아주
꼼꼼한 눈길이었다.

‘건방지게…….’
뒤늦게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낀 겨울이 민망한 듯 헛기침
을 뱉으며 집에 들어왔다. 외투를 벗으며 슬쩍 뒤를 돌아보
았다. 맨발로 뛰어내렸으면서 씻을 생각은 안 하고 제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놈이 거슬렸다.

“냉장고에 도시락 있으니까 앞으로 배고프면 알아서 챙겨


먹어.”

대용량으로 주문한 도시락은 가람만을 위한 음식이다. 도


무지 역한 사료 냄새를 못 맡아서 주문한 도시락은 분리수거
도 간단하고, 요리를 따라 하겠답시고 나서는 가람이 사고
칠 위험도 적어서 좋았다.

“어디 가요?”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문 앞에 멀뚱히 서있던 가람이 물


었다.

“잠깐 나갔다 올 거야.”

“같이 갈래요.”

“안 돼.”

“같이 가고 싶어요.”

“안 된다고 했어.”

아무리 성격 좋은 김필호라도 첫 대접인데 수인까지 달고


가면 싫어하지 않을까. 겨울은 고집부리는 가람을 억지로 밀
어 넣어 2층에 올라가는 것까지 보고서야 집을 나섰다. 지금
쯤이면 저녁 먹을 준비를 다 했을 듯했다.

해가 저무니 날이 더 쌀쌀해졌다. 초인종을 누르고 차가운


코끝을 문지르고 있으니 문이 벌컥 열렸다. 겨울을 반기는
김필호의 시선이 천천히 뒤를 향했다.
“겨울 씨 오셨어요? 뒤에는……?”

“예? 아…….”

뒤를 확인한 겨울이 당당하게 선 가람과 눈을 마주쳤다.


나오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어떻게 나온 거지. 인기척을 못
들을 정도로 내가 그렇게 둔한 건가. 차마 이웃 앞에서 화를
내지 못하는 겨울이 입술을 씹었다.

“제 수인인데 쫓아 나왔나 봅니다. 죄송해요.”

“아니에요, 안 그래도 겨울 씨 수인 데려오라는 말을 잊었


는데 잘됐네요. 들어오세요. 수인 음식도 넉넉해요.”

다행히 김필호는 가람까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겨울은


그를 따라 들어서며 가람에게 속삭였다.

“……대문 열 줄 알아?”

“네, 리안이 하는 거 봤어요.”

그 말인즉슨 어제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진즉 가고도 남았


다는 의미다. 현관문 여는 소리를 못 들은 건 또 2층 창문에
서 뛰어내렸을 테고. 잔디가 묻은 맨발이 그 증거였다.

겨울이 외투 주머니에서 꺼낸 카드 키를 건네며 무심히 말


했다.

“앞으로 뛰어내리지 말고 나오고 싶으면 문으로 나와. 들


어갈 땐 이거 쓰고.”

나오지 말란다고 들어먹었으면 뛰어내리지도 않았을 터,


카드 키를 준 건 나쁜 선택이 아닐 것이다. 네모난 카드 키를
받은 가람이 이리저리 살피며 미소를 띠었다. 선물인 줄 아
나 보다. 시간이 멈춰있던 소년이 차가운 계곡에 발을 담그
고 깨어난 듯 눈망울이 초롱초롱했다. 날이 갈수록 미운 정
이 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겨울은 뜻 모를 시선을 거두었다.

집에 들어서자 맛있는 밥 냄새가 폴폴 풍겼다. 김필호는


자신 있는 한식을 준비했다면서 된장찌개를 좋아하냐는 둥
심심한 질문을 해댔다.

“그런데 이 녀석은 이름이 뭐예요?”

“가람입니다.”

“잘 지으셨네. 우리 집에서 밥 먹고 매일 놀러 온다고 하면


큰일인데. 담아, 친구 왔다. 어, 여기 있었는데 그새 어디 갔
지.”

김필호가 거실에 소리쳤다. 하지만 담이는 보이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그가 곳곳을 뒤지며 이내 담이를 찾아냈다.

“뭐야, 거기서 뭐 해? 나와. 손님이 왔는데 인사는 해야


지.”

담이는 발코니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김필호


가 팔을 잡아당겨 억지로 끌어내고 문을 닫았다.

“얘가 왜 이러지. 어디 아픈가? 아프면 말을 해.”

“요즘 수인 사이에 감기가 돈다고 하던데요.”

“그래요? 큰일이네. 약 남은 게 있나……. 겨울 씨, 잠시만


요. 앉아서 기다리세요.”

김필호가 감기약을 찾으러 가자, 온기가 도는 거실에 침묵


이 흘렀다. 그의 수인 담이는 겨울 뒤에서 여전히 카드 키를
만지작대느라 정신없는 가람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겨울
은 그 모습을 의아하게 여겼다. 두꺼운 벽 두고선 잘만 떠들
더니 이제 와서 낯을 가리는 게 이상했다.
“…….”

겨울도 담이를 따라 가람을 훑었다. 다시 생각하니 실제로


마주하면 덩치가 커서 놀랄 수도 있겠다. 자그마한 여우 수
인인 담이와 달리 가람은 겨울보다 큰 키에 어깨가 넓어 은
근한 위압감을 주었다. 마냥 착해 보이는 인상도 아니라 성
인도 안 된 여우가 보기엔 무서울 법도 했다.

그래 봤자 덩치만 크지 별거 아니라는 듯 겨울이 눈빛을


쏘자, 담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히익……!”

담이는 제 입을 두 손으로 꾹 틀어막은 채 겨울에게 반쯤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러고는 소파 옆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제 몸을 숨기기 급급했다. 구면인 사이에 저렇게
겁을 먹을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묘하게 수상한 행동이었
다.

“겨울 씨, 일단 식사부터 해요. 감기약이 안 보이네요.”

“……네.”

겨울은 가람을 거실에 버려두고 김필호를 따라 걸음을 옮


겼다. 소파 밑에 앉은 가람과 가까워진 담이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들개의 주인인 겨울이 아니라 가람에게 잔뜩 쫄은
느낌이었다.

(겨울의 강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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