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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시야가 흔들리는 것이 기분 좋았다. 다리가 꼬인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걷고 싶었다.

“어디 가는데?”

이름도 모르는 여자가 붙잡아서 순간 휘청였다. 뒤를 돌아 여자를 쳐다보는데도,

여자의 얼굴이 흐릿하기만 했다. 누구더라? 생각이 날 듯 하면서 나지 않아서

나는 눈에 힘을 주려 애썼다. 얼굴을 보면 생각이 날 것도 같은데, 너무 흐려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어디 가는데? 많이 취했어.”

다정한 목소리에는 사심 없는 염려가 들어가 있었다. 나는 그 상냥함에 잠시 그녀를

다른 여자로 착각할 뻔 했지만, 다행히도 입밖으로 다른 이름을 부르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집.”

겨우 대답했는데 여자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떻게 갈건데?”

“걸어서.”

내 말에 내 손목을 잡은 여자의 손은 더욱 힘이 가해졌다. 걱정하고 있다. 그 것이 기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 걱정을 해주는 건 전부 여자들뿐이야. 여자고, 그리고 나와는 피 한방울

안 섞인 타인들. 그들만이 내 걱정을 해 준다.

“걸어서 집에 가는 것보다 걸어서 달에 가는게 더 빠를걸. 안돼, 저쪽에 가서 누워.”

부드러운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여자는 힘겹게 나를 부축해주었다. 좋은 여자야, 상냥하고 다정하고

부드러운…… 분명이 아까 이름을 소개받았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떠올리려 애써도

자꾸 다른 여자 이름만 생각이 나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술병이 나뒹구는 거실 구석에 그녀가 시키는대로 얌전히 앉자, 그녀가 자신의 무릎을 가리키며 “누워.”

라고 명령했다. 같은 명령조라도 이렇게 따듯할 수 있구나. 나는 순순히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착하네……”

착해, 정말 착하네. 당신이 여자라서 일까? 당신이 나와 완전한 타인이라서 그럴까?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관계에서 유독 다정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여자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것이 기분 좋았다. 내가 눈을 감자, 여자의 손가락이 내려와 내

속눈썹을 간질였다.

“간지러워……”

나는 그 손가락을 피하려 움찔거렸다. 여자의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어.”

“응? 뭐가?”

여자의 속삭임에는 목적어도 주어도 없었다. 주어는 뭔지 알 것 같은데 목적어는 알 길이 없어서

나는 여자를 올려다보려 애썼다. 불투명 유리에 비친 것 같은, 여자의 흐릿한 모습. 어딘가 닮았다.

그녀처럼 긴 생머리에 갸름한 얼굴이다. 마치 그녀같다.

“너. 처음부터 무척 마음에 들었어.”

“처음?”

여자의 얼굴은 제대로 생각나지 않지만, 언제 처음 만났었는지는 떠올랐다. 지금보다 더 난장판인 곳에

서였다.

엑스터시로 가득찬 실내에서 여자는 찌푸린 얼굴로 자신의 파트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이런 기억은 나는데 왜 여자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까?

“……솔브에서였지.”

이어진 내 말에 여자가 내 머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따듯한 팔, 좋은 냄새.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맞아.”

여자의 무릎은 기분 좋았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무릎 위라는 착각을 들게 했다. 눈을 감자, 어지러움이

더욱 강해졌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환상쪽으로 기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때 나를 봤어?”

나는 그 때도 이방인이었다. 늘 이방인이었지. 양아치들과 어울리면서도 마약을 죽어도 하지 않는 나였

다.

기업인 아버지와 교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면서도 공부는 지질나게 못하는 나였다.

그 바람둥이 부모들의 피를 받아서, 새 어머니를 사랑하는 나였다. 나는 늘 구석에서 조용히 배제되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선 밖에서 홀로, 선 안의 행복한 풍경들을 동경하는 것이다. 일생 그렇게 살다 죽겠지. 암


울해졌다.

“응. 네가 보였어.”

여자가 소곤소곤 속삭였다.

“남들은 엑스터시 하고 난교섹스할 때 넌 만화책 읽고 있더라.”

그랬었다. 나는 마음에 새 어머니가 있어서, 병신같이 섹스 한번 하지 못했다. 새 어머니를 미친 듯이

사랑한 것도 아닌데, 그녀는 내 마음도 모르는데, 그래도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다른 이에게 손 한번 내

밀 수 없었다.

과한 열기가 도리어 몸을 식게 만들었다. 다들 엑스터시를 흡입하고 미친 듯이 뒹구는 꼴이 싫었다.

그들이 좋았지만, 광경은 싫었다. 더욱이 내가 그 광경의 일부분이 된다는 생각은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신경을 끄고 만화책을 읽었던 것 같다.

“무슨 만화책이었어?”

여자가 물어서 나는 빙글빙글 도는 머릿속을 잡아채 멈춰보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잡으

려 해도

머릿속은 왈츠를 추듯이 하염없이 돌고 있었다.

“아마-”

한참 생각 끝에 나는 생각나는 만화책 제목을 아무거나 말했다.

“니나 잘해, 였나.”

내 말에 여자가 쿡쿡 웃었다.

“그 상황에 딱 맞는 만화책이네.”

여자가 웃길래 나도 킥킥거리며 웃었다. 나는 여자의 배쪽으로 파고들며 계속 웃었다.

“여하간, 네가 정말 마음에 들어. 나랑 사귀지 않을래?”

그녀랑 닮은 여자같다. 긴 생머리, 갸름한 얼굴. 그녀와 닮은 여자와 사귀면 행복할까?

외로워, 외로워서 죽어버릴 것 같아. 죽어버릴 것 같으면 그냥 죽으면 될텐데, 죽는 건 정말 죽을만큼

무서워.

아플까봐, 아무도 울지 않을까봐, 수많은 두려움이 나를 멈추게 해.

너와 사귀면 행복해질까?

“싫어.”

내 말에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여자의 손길이 멈췄다. 나는 싫은 이유를 말해주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상관 없어.”
여자가 대답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고, 쟁취한 사람이 임자잖아?”

“내가 원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움직일 수 있단 말이야?”

술이 깨는 것이 느껴졌다. 여자는 그녀가 아니었다. 바람둥이 남편을 기다리는 그녀가 아니었다.

여자는 당돌했고, 그래서 그녀가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저런 모습이 되길 지난 일년간 바래왔지만,

그녀는 저렇게 되지 않았다.

그녀의 무릎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기어가 벽에 기댔다. 차가운 벽 때문에 등이 시렵다. 그러자

술이 좀 더 깨는 기분이 들었다.

“너가 좋아하는 사람, 니네 새 엄마라며.”

잘도 떠들어댔군. 어떤 놈일지 짐작이 갔다. 덕분에 환상처럼 아련하고 기분좋던 감각들은 전부 사라졌

다.

“내가 마음에 안 들어?”

그녀가 물어서 다시 한번 그녀를 쳐다보려 애썼다. 표정은 고사하고, 얼굴도 여전히 흐렸다.

“마음에 드냐, 안드냐의 문제는 아니잖아.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리고 그 사람은 네가 아니야.

너는 사랑이 움직이는 거라고 하지만 나는 움직이고 싶지 않아. 나는 이대로 있겠어.”

“돌아봐 주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면서?”

“아니. 그냥, 내가 변하든 상대가 변하든 시간이 흘러 무언가가 변하길 기다리겠어. 이 세상에

일편단심이 어디 있어. 나는 그딴 거 안 믿어. 내가 믿는 건 시간이 흐르면 누구든 변한다는 것 뿐이

야.”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미친 듯이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냥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다른 이를 사귈 수 있

정도로 질긴 신경줄을 타고나지 못한 것일뿐이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짜증 나서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여자가 나를 잡지 않았고, 그

것이

서운해져 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스쳐지나가는 인간 대 인간의 다정함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쪽은 착

각이었나보다.

‘기대하지 말자.’라고 늘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뒤통수를 맞는 듯한 이 패턴이 지겨워서 견딜 수가 없


다.

걷는 건 무리야.

나도 알고 있다. 여기가 어디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척 오랫동안 차를 타고 왔었다는 기억은 분

명하게 났다.

무슨 팬션이었는데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점퍼를 잊고 그냥 나와서 공기가 차가웠다.

그래도 걸어가볼까. 여기서 집까지 걸어가면 당신에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당신을 무척 좋아했다고.

-나 결심했어.

내가 당신을 무척, 아주 많이, 좋아했다고.

-나, 네 아버지랑 헤어질려고. ……좋은 사람이 생겼어. 네 아버지같이 멋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정말 착

해.

그리고, 이젠 그만하고 싶어. 네 아버지를 기다리고, 상처받는 일.

나도 당신을 좋아했다고.

새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지겠다면서 내게 말했다. 내 방문을 열고 나가려다 문득 생각난 사람처럼.

나보다 네 살 위의, 일년간 어머니였던 그녀의 목소리는 그저 서글펐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네가 걱정돼.

걸어가 볼까? 당신에게 말해볼까? 당신이 힘들어하는 시간동안, 나는 당신 등만 바라보았다고.

당신에게 말할 수 있을까?

이대로 보내야 한다. 보내야 한다. 그녀는 조금 행복해보였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났다면

더 행복해질 수도 있겠지. 보내야 한다. 하지만, 아직 움직이지 않는 내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추운 게 좋았다.

벌벌 떨릴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좋았다. 모든 것을 얼려죽이겠다는 잔혹한 살의가 마음에 들었다.

죽고 싶었다. 아무것도 없는 내게, 세상은 잔인해지기만 하고 있다.

걸었다. 집과 반대 방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하염없이 걸었다. 마음이 아파서, 바람이 차가워

서,

다리라도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가 찾아왔다. 길을 잃은 것이다.

일단, 술이 깨자마자 얼어 죽을 것 같아서 팔짱을 끼고 몸을 움츠렸다. 내가 미쳤지, 12 월에 점퍼도

없이

산길을 걷다니. 돌았던 것이 틀림 없다. 머리가 돌았든 돌지 않았든, 지금 다리는 돌아가야 했다.

다는 뒤를 돌아 오던 방향으로 다시 걸어갔다.

새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울컥해버린다. 사실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녀를 보고


기가 막혀서 입이 벌어질 지경이었다. 아버지의 뭘 믿고 결혼하겠다는 건가. 스물 네 살의 여자가

쉰 셋의 남자와 ‘사랑’으로 결혼하겠다니. 게다가 그 쉰 셋의 남자가 내 아버지다. 바람둥이로 자자한,

나에게 그녀를 소개하는 순간에도 애매한 얼굴로 핸드폰을 받고 자리를 비키는 이 남자의 어디를 믿고

결혼한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그녀는 참 끈질기게 내 아버지를 믿었다. 아마도, 그녀가 완전히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믿지 않으면 무너질테니 믿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점에 끌렸다.

뻔히 결과가 나와 있는 게임을 고집스럽게 이어나가는 그녀의 약하고도 강한 모습이 인상깊었고

계속 보다보니 어느새 좋아하게 된 것이다.

추워.

제자리 뛰기를 할 정도로 춥다. 추워서 견딜 수가 없다. 빌어먹을 여기는 도대체 어디야?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더니 벌써 새벽 세시다. 추울 시간이긴 하다.

아무래도 직진으로 온 게 아니었나보다. 눈 앞에는 연못이 있었다. 얼어붙은 연못은 예뻤지만,

그 아름다움을 음미하기에는 현재 내 상태가 썩 좋지 못했다.

돌아가야 하는 거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빨리 결정을 내려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너무 추워서 머리

돌아가지 않고, 게다가 머리를 굴릴 선택지조차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그 때 마치 한줄기 광명이 보였다. 아니, 광명은 거짓말이고 전깃불이었다. 전깃불이라는 건 다시 말하

전기가 있는 곳이고, 인가가 근처에 있을 확률이 높을 거고,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만날

수 없다 하더라도 몸을 피할 곳은 있겠지.

문제는 이 무식하게 큰 연못을 어떻게 돌아가야 하냐는 건데, 산 속에 있는 연못이다 보니 돌아갈 길이

마땅치가 않았다.

일단 얼은 것으로 보여서, 나는 연못에 한발을 조심히 내딛었다. 완전히 얼어있었다. 두발을 내딛고도

제자리에서 뛰어보기까지 했다. 아, 확실하게 얼어있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얼은 연못위에서 스케이팅해보는게 소원이었는데.

온 몸이 덜덜 거리는 가운데도 장난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욱 미끄러졌다. 어두운 숲속에서

연못 위를 미끄러지는 것은 굉장한 쾌감을 주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재밌지?

그러나 그 쾌감은 일초짜리였다. 연못 중심부에서 갑자기 얼음이 깨져버린 것이다.

겨울에 강에 빠져서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일단 빠지면 표면이 얼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발이 빠지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나는 재빠르게 그 발을 빼내


얼음위로 올려놓았고, 중심부는 조금 깨졌을 뿐 얼음은 단단했다.

“큰일날 뻔 했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몰아쉬는데 어디서 쩌억-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황급히 내려다보자 발 밑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차가운 연못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얼음이 얼기 전에 나가야해, 라고 생각했지만 무언가가 끌어당기는 것처럼 발목을 잡아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끌어당기고 있다.

고통스러울 정도의 추위를 느끼며, 연못바닥으로 끌려갔다.

1. 달의 신부

내가 눈을 떴을 때, 처음 느낀 것은 안도감이었다. 살아있다. 맙소사, 나는 살아있었다. 한 겨울에 산

속의

연못에 빠졌는데도 나는 살아있었다. 따듯하고 기분좋은 이불에 파고들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어떻게 된 건가 싶어서 일어났을 때,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내 인생에 이렇게 화려한 방은 본 적이 없었다. 화려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차원인지도 의심스럽다.

아니, 정확히는 이것을 ‘방’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른 건 다 둘째치고라도, 방 안에 폭포가 있다. 인공 폭포로 보이지만 여하간 폭포라는 것에는 의심을

둘 수가 없었다.. 나는 그 폭포를 따라 위로 고개를 올렸고,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벌렸다. 롯데월드가 생각났다. 아니, 롯데월드 유리는 그냥 사각형의 유리였지만 이 방의 천장은

창살에 세심한 조각이 들어가 있었다. ‘세심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뭘 조각했는지는 모르겠다.

삼층정도의 높이일까. 천장이 상당히 높았다. 천장의 유리와 발코니로 이어지는 창에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햇살을 등지고 외국인 아주머니가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가 선해보이는 분이었

지만,

고상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옅은 화장을 하고 몸에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으신 분이 나를 쳐다보며 부

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나는 이 방에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방 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전부 여자였다. 그리고 아주머니를 제외한 여자들은 똑같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유니폼일지도 모르겠

다.
갈색 머리카락도 있고 붉은 머리카락도 있고 검은 머리카락도 있었다. 파란색 눈도 초록색 눈도 있었

다.

맙소사, 전부 외국인이다.

“익스큐으지 미.”

빌어먹을, 영어로 내가 몇마디나 지껄일 수 있을까. 나는 재빨리 나 자신에 대해 할 말을 정리해보았

다.

그러나 내가 미처 머릿속에서 단어들을 찾아내기도 전에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나이다.」

내가 놀란 것은, 저 아주머니가 한국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이것은 한국어가 아니었다. 귀

들어오는 생경한 발음은, 이것이 한국어가 아님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게 무슨 말인

지 알아들었다!

「아, 저기, 안녕하세요.」

혹시나 싶었는데, 나는 이 생소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맙소사, 이건 영어도 아니고 일어도 아니

다.

독어도 아니고 프랑스어도 아닌 것 같다. 맙소사, 이게 어느 나라 말이지? 그리고 나는 왜 이 말을 이

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거지?

「유브라데어를 하시는군요. 다행입니다. 혹시나, 월인께서 달의 언어로 말씀하시면 어쩌나 무척 걱정했

었는데,

한시름 놓았습니다. 처음뵙겠습니다, 황비마마. 저는 오늘부터 마마를 모시게 될 시녀장 라프라 라 데

인입니다.

라프라라고 불러주십시오.」

유브라데어 - 라는 것은 이 나라의 이름이 ‘유브라데’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유브라데? 그런 나라가

있었어?

아주머니는 상냥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월인. 달의 언어. 그리고, 황비. 황비?

「죄송한데……」

내 말에 아주머니가 싱긋 웃으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송구합니다. 눈을 뜨신 것이 너무나 기뻐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뭐가 결례라는 거지? 아주머니는 마치 패밀리 레스토랑 점원이 주문받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나

올려다보았다.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킨 나보다 눈높이가 낮아져서 나도 안절부절하게 되었지만 아주머니

당연한 것처럼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이러신거니 우선은 넘어가자.

「죄송합니다만, 여기가 어딘가요?」

내 말에 아주머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예?」

뭐야, 나는 저 쪽 말을 알아듣는데 왜 저쪽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 혹시나 싶어서 다시 한번 시도

했다.

「여기가 어디냐고요.」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놀랐던 것 같다. 아주머니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유……브라데입니다. 마마, 기억 아니 나십니까?」

그 마마 소리 안하시면 안되요? - 그렇게 말을 할까 하다 우선 제쳐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지금 중

요한 것은

‘마마’가 아니다. ‘호한’이면 또 어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유브라데요? 그게, 어디 있는 나라죠? 아시아는 아니죠?」

「아시아가 어딘지요? 드와나 안에 있는 곳인가요?」

「드와나요?」

상당히 불안해졌다. 맙소사, 그 펜션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관심이 없이 흘려 들었지만 기억하기

로는

충청북도인지 충청남도인지였던 것 같았는데. 여하간 충청도였던 것 같은데. 어디든 그곳이 대한민국일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움직인 것이 아니라 친구 찬성이의 차를 얻어탔으니까.

「예, 드와나 대륙의 유브라데입니다. 아래 대륙의 가장 위쪽에 있는, 현재 신의 길을 가지고 있는 나

라지요.

모르시겠습니까?」

전-혀 모르겠는데요.

내가 이 아주머니와 말이 통하고 있는걸까? 아니, 말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데, 무슨 뜻인지를 모르

겠다.

어쩌면 ‘통하고 있다’는 것은 내쪽의 착각일지도 모르지. 딱 봐도 외국인인데 나와 말이 통할 리가 있

느냔 말이지.

내 표정만으로도 대답을 알아들었는지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났다.


「자,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그리고 그녀는 황망한 걸음걸이로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여자 몇은 그녀를 따라나갔고, 몇은 남

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다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댄 모습이었다. 내가 동상이라

된 듯한 느낌이 들어서 나는 뭐라 말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아야 말

을 할 것 아닌가.

일단 방을 둘러보았다. 크다. 내 고등학교 운동장만 하다. 도대체 이렇게 큰 방이 누구의 방인 걸까?

아름다운 장미가 여기저기 장식되어 있다. 그러고보니 전체적으로 디자인이 여성의 방처럼 보이기도 한

다.

무식한 크기를 제쳐두고 부분 부분을 보면 분명히 여성스러운 느낌이 난다. 가구들도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고

무엇보다 크지만, 사주식 침대에 장식된 레이스라던가……전체적으로 여성의 방같다.

그러고보니 아까 분명히 ‘황비마마’라고.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나는 일단, 가장 시급한 걸 먼저 알아내기로 마음 먹었다.

여기는 어디냐? 그리고 집에는 어떻게 가야 하느냐. - 이 두가지이다.

세상에는 정말 쉬운 것이 없다. 하물며, 내 마음대로 이뤄지는 것은 더더욱 없다. 나는 몰려드는

절망감을 무시하지 않고 마음껏 절망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창밖은 이미 밤하늘과 어두운 나무들로

가득차 있었다. 이와중에도 나를 절망케하는 것은 내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밤하늘이었다.

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제쳐두고라도, 달이 두개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낮의 일을 다시 떠올리니 가슴이 무거워질 지경이었다.

낮에 아주머니 아니, - 이제는 ‘아주머니’라고 그녀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불러서 해결날 일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 나프라 시녀장이 데리고 온 남자는 약간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나는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잠시 놀라워했다가 그가 사람들이 다 아는 프랑스 축구선수 지단을

닮았다는 것을 깨닫고 김이 샜다. 아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긴, 외국인을 알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마마, 국무대신이옵니다.」

나프라 시녀장이 먼저 운을 떼었다. 그리고 지단 짝퉁이 시원스럽게 미소지으면서 시녀장과 함께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처음뵙겠습니다. 니타우 라 크리스티로, 유브라데의 국무대신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월인을 뵙게 되어, 그 영광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루 말하세요. - 솔직히 나는 좀 삐뚤어져 있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고, 그도 나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서로를 쳐다보는 민망한 짓 끝에 국무대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곳이 어디인지 모르시겠다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 어딘지 모르겠어요.」

나는 순순히 말했고, 그는 잠시 놀라워하다가 가지고 온 종이를 펼쳐보였다. 아니, 이건 종이가 아니었

다.

천……인가? 아니 가죽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재질에 우선 놀라워하다가, 국무대신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이것은 지도였다.

글자를 읽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국무대신을 쳐다보자, 그가 설명하기 시작

했다.

「여기가 바다입니다.」

빈 공간위에서 손가락으로 작은 원을 그리며 그가 말하고 다음에는 커다란 땅을 가리켰다. 그 커다란

땅은

처음에 각기 다른 땅으로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두개의 땅을 가는 선이 잇고 있었다.

「이 곳이 드와나 대륙입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두 개의 땅 중 아래에 있는 땅의 가장 윗부분의 노란색을 가리켰다.

「이게 유브라데군요.」

여기가 어디든은 이제 상관이 없어졌다. 중요한 것은 집으로 어떻게 가느냐였다. 그러나 여기가 어딘지

모르면 집으로 갈 수도 없다.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던 나는 갑자기, 이 사람들이 나를

어디서 발견했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래, 어디서 발견되었는지 알면 어떻게 가야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어디서 발견되었죠?」

내 말에 시녀장과 국무대신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시녀장쪽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하늘? 나는 시녀장을 멍하니 쳐다보았고, 시녀장은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국무대신이 진지하게

물었다.

「기억이 전혀 없으십니까?」

술 쳐 마시고 연못에 빠진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하늘에서 떨어진 기억은 없었다. 하늘이라니.

그 이상의 대화는 무리였다. 일단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자 국무대신은 「쉬시는게 좋겠습니다.」라며

나에게 휴식을 강요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시녀장은 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만 해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아서, 나는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집으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뭐라고 말을 듣기는 했는데 정리가

안 된다.

달이 두개다. - 그것은 여기는 지구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럼 여기는 어딜까? 나는 하늘에서 떨어졌

다고 한다.

그럼, 지구 밑의 행성일까? 맙소사, 그럴 리가 없잖아.

연못에 빠졌는데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 연못밑이 이 곳인걸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지하세계라던가, 이세계라던가, 뭐든 좋다. 여하간

이 하늘 위 어딘가에 그 연못이 이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행기가 존재할까? 그냥 보기에는 중세 시대 정도의 생활양식으로 보이는데. 일단 전기가 없다.

이 방을 비추고 있는 것은 램프였다. 맙소사, 비행기가 아니면 어떻게 저 하늘 위로 가야 한다는건가?

빌어먹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헤어질거야.

새 어머니가 생각났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좋아한다고 한 번 말해보는건데. 아니, 말하지 않은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지.

달이 두개니, 예쁘기는 하다만. - 숨이 막혔다. 이걸 어쩌면 좋을까. 두개의 달이 뜨는 밤하늘 아래에

서,

나는 무력하기만 했다.

그렇게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만을 하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안녕.」

남자의 모습은 놀라웠다. 머리카락이 땅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여자라도 저렇게는 길 수 없을텐데, 나

는 인상을 썼다.

그 머리카락이 땅을 빗자루처럼 쓰는 꼴을 보기 위해 시선을 내렸고 바닥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바닥

없는 곳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속에서 남자와 나, 둘 밖에는 없었다.

남자가 다가왔다.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 부드러운 움직임이 인상적이었지만, 경계심이 들었다. 나

단 한번도 이렇게 실제감이 느껴지는 꿈을 꾼 적이 없었다.

「혹시, 안녕이라고 말했을 때 침묵하는 상식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온 건가?」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래……

「이런……그렇게 따분한 세계가 있을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곤란하군. 일단은 유브라데를 비롯해

드와나 대륙이든 노크대륙이든 간에 이쪽 세계는 전부 안녕 이라고 인사하면 같이 안녕이라고 대답하는

일반 상식이야. 기억해둬.」

이쪽 세계?

「무슨 말씀이시죠?」

「나는 안녕,인사했어. 자, 너는 뭐라고 해야 한다고?」

드디어 가까워진 남자의 눈은 선명한 금색이었다. 너무나 선명하고 밝고 깨끗해서, 고양이 눈을 박아넣

은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말투는 도덕 선생같다.

「안녕.」

「처음부터 반말이야?」

남자가 싱긋 웃었다. 아름다운 남자가 미소까지 짓자, 주위가 환해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내가 반말을 썼지. 그래서 반말한거로군. 그건 그대가 옳아. 게다가 그대는 이세계(二世界)의 사

람.

나를 알 리가 없으니 당연하군. 현명해. 게다가 자존심도 높고. 운명의 여신은 보는 눈이 높아.」

꿈 속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남자가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거냐. 게다가 태반이 혼잣말이고, 말투는

고색창연하다.

머리카락도 길고. 왠지 닭살 돋았다.

「응? 내 첫인상이 좋지 않은 모양이군. 곤란한데.」

남자는 계속 싱글 싱글 웃었다. 순간, 나는 그가 나를 ‘이세계의 사람’이라고 지칭했다는 것을 깨달았

다. 그는

내게 달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다. 꿈치고는 너무 현실감있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던 것은 의식한 행동이 아니었다. 이 곳은 아까의 그 화려

찬란한 방이

아니고 어둠 속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었고, 그리고 여기는……

「어둠이 싫은가? 인간들은 대부분 어둠을 싫어하지. 어둠을 틈 타 손해를 끼칠 누군가를 두려워하지

만, 어째서

어둠까지 싫어하는지는 알 수가 없어. 여하간, 그대가 어둠이 싫다면 물리도록 하지.」

남자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어둠이 물러갔다. 아니, 불이 켜진건가? 그러나 램프들은 하나같이

꺼져 있었다.
기름이 다 된 것 같다. 창 밖이 보이고 어렴풋하게 물건의 형체들도 보인다. 그런데, 아까는 칠흙같은

어둠이었다.

눈 앞의 남자는 여전히 생글거리고 있었다. 하나는 분명히 알겠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

「저보러 이세계의 사람이라고 하셨잖아요. 그건, 제가 달에서 왔다는 뜻은 아니시죠?」

남자가 갑자기 성대하게 웃어제꼈다.

「그 계시를 벌써 들었나? 아- 재밌군. 아니, 그대는 달에서 온 것이 아니고 유브라데를 구원하기 위함

은 더더욱 아니야.」

계시? 누가 뭘 구한다고?

불안해졌다. 그러고보니 나는 왜 ‘황비’라고 불리고 있었지? 그냥 막연히 하늘에서 떨어져 그런가보다,

했는데. 내가 떨어진 하늘밑에는 뭐가 있었단 말인가?

머리가 아파왔다. 그리고 자고 싶었다. 일단은 휴식이 필요했다. 자고, 먹고, 그리고 생각하는 거다.

그런데 이 남자는 무슨 용건으로 나타난거지?

「용건은 없어.」

족집게다……

금발 남자는 진지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보니 이 남자 상당히 크다. 2m 가 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람같지 않은 키였다. 농구선수 같다. 아니, 농구선수도 이 정도로 큰 사람은 야오밍정도가 아닐까.

야오밍 키가 2m 20 이던가?

「재미있어. 이토록 삶이 강렬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대를 만나기 위해서 살아왔다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지금 시비거는 거냐.

그러나 이 남자가 나에게 시비를 걸든 말든 나는 이 남자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저는 어디에서 온거죠?」

내 질문에 그가 입술을 붙인채 시원스레 미소지었다.

「그대의 세계에서 왔지.」

「어떻게 돌아가야 하죠?」

그 말에 그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왜 차가운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연히 돌아가야 한다.

「돌아갈 수 없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 뺨에 자신의 손바닥을 갖다대었다. 분명히 사람의 손길인데도 기묘한 위화감에

오싹해졌다.

남자가 말했다.

「곧 그대는 나와 똑같이 생긴 자를 만날 것이다.」

「본인이 아니라는 이야기군요.」


그가 또 웃었다. 지나치게 잘 웃는 남자다.

「그대도 보면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거야. 나는 이만 돌아가야한다. 다음에 또 오지.」

「제가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뭐죠?」

내 질문에 멀어지던 그가 뒤를 돌아보더니 한다는 소리가.

「내가 방해할거니까.」

이 따위다.

닫힌 방문을 보며 그저 기가 막혀서 입을 벌리고 한참을 서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고, 말 뜻도 잘 이해가 가지 않고, 어딘지 굉장히 거부감을 느끼게 만들었던 금발 남자를

떠올리느라 늦잠을 자고 말았다.

「마마……」

눈을 뜨면 혹시 내 침대가 아닐까 싶었는데 역시 적응 안되는 사치스러운 방이었다. 시녀장의 목소리에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집에서는 이 시간이면 헬스장에 갔었지만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다. 조깅은

가능할 것도 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준비하시지요.」

무슨 준비를요?

나는 멀뚱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곧 실갱이가 시작되었다. 하느님 맙소사, ‘시녀’라는 직업을 가진

이 누님들(일지 동생들일지는 알 수 없지만)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내 옷을 벗기려 드는 것이 아

닌가.

「제 옷은 제가 벗어요. 제게 손 하나 까딱하지 마세요.」

일단 이 동네 옷이 기본은 지구와 똑같아서 정말 다행이다. 바지와 티셔츠. 다행이었다. 만약 옷도

이상한 거면 내가 입을 수나 있겠어? 내 반응이 오히려 생소하다는 얼굴을 한 누님들(일단 누님이라고

하자.)은

난처한 얼굴로 시녀장을 쳐다보았다.

「하오나 마마……」

시녀장도 당황한 얼굴로 침대에 옷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속옷으로 보이는 것에 민망함도 잠시 뿐,

그 개수에 질려버렸다. 맙소사, 이게 몇 개야?

일단 팬티로 보이는 것. 그리고 바지와 티셔츠. 그위의 랩스커트……일까? 맞을 것 같다. 맥주집

알바할 때 에이프런 대신에 둘렀던 긴 스커트. 조끼? 저걸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소매부분을 장갑처

잘라놓은, 호칭을 알 수 없는 것. 그리고 장신구들과 스카프.


맙소사, 이걸 다 입어야해?

지금 나는 티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이거면 됐지 않은가. 나는 결단코 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싫어요.」

「마마, 이것은 최소한의 차림이옵니다. 이 정도도 싫다 하시면……」

「무조건 싫어요. 무엇보다 제가 달에서 왔든 하늘에서 떨어졌든 전 여기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남사스러운 차림을 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여장이라니, 죽어도 싫다.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은 분명하나 저쪽도 나름대로 납득해 줄 수는 없었는지 시녀장의 얼굴도 곤혹

그 자체였다. 그 때 문이 열렸다.

「뭘 하는 거지?」

어제 그 작자였다! 금발머리, 금색 눈. 이 자식, 어제 너 뭐라고 했…… 멱살이라도 잡으려 했던 나는

당황해서 손을 내리고 말았다. 이 녀석도 크기는 했지만 어제의 그 남자처럼 압도적인 키가 아니다.

사람은 키를 줄이거나 늘릴 수가 없으니 이 남자는 어제 그 남자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곧 그대는 나와 똑같이 생긴 자를 만날 것이다.

그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마치 예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담담한 어조로.

-그대도 보면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거야.

이런 뜻이었군. 나는 그를 쳐다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나. 일란성 쌍둥이라도

되지 않는 한 이정도의 똑같은 생김새는 무리인데, 일란성 쌍둥이라면 이토록 키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

이다.

이 남자는 나보다 고작 10cm 정도 커 보일 뿐이었다.

내가 당황해서 서 있는 사이 남자는 내게 다가오며 시녀장에게 말했다.

「물러가라.」

그 말에 여자들이 전원 방을 나갔다. 나는 그제야 이 남자가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내 앞에 선 남자가 갑자기 내 목에 칼을 들이대었다.

「어디 사람이냐?」

섬뜩한 칼날의 느낌이, 이 남자가 진심이라는 걸 말해주는 듯 하다.

「말하면 알아?」

내 말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정신이 아니군. 이게 장난으로 보이나?」

「이쪽도 진심이야. 내가 말하면 아냐고.」

이 남자가 누군지는 알겠다. 이 남자는 유브라데의 황제다. 황비의 궁에 들어와서 시녀장에게 반말 짓

거리로

명령할 수 있다면, 그는 분명 황제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국민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복종할


어떤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들어보지. 내가 아는 곳인지, 아닌지.」

칼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목이 긁힐 것만 같다. 아프지 않은 것이 더욱 소름끼친다.

「대한민국, 서울.」

「뭐?」

「서울, 코리아. 강남구! 알아?!」

무언가가 치밀어올랐다. 이것이 분노인지 아픔인지 절망인지 알 수가 없지만, 갑자기 풍선처럼 부풀어

터져버린 그것이 잠깐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내가 소리를 지르자, 남자는 갑자기 싱긋 웃었다. 어젯밤의 남자와 완전히 겹쳐지는 미소였다. 미친 놈

같다 -

라고 생각한 내 마음을 모르는 남자는 혼잣말을 했다.

「역시, 사고였군.」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거뒀다. 자신이 들이밀고 있었던 것이 장난감 칼이라도 되었던 것 처럼.

떨지 않고 잘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칼이 거둬지자마자 무릎이 꺾여 주저앉고 말았다. 카펫이 좋긴 하

구나.

넘어져도 아프지 않고.

근데 뭐가 사고라는 거지?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나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김민후.」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침 먹으러 와. 절대로 그 꼴로 오지는 말고.」라고 말하더

나가버릴 기세였다.

「싫어.」

내 대답에 그가 걸음을 멈췄다.

「뭐가 싫어?」

「이 옷차림으로 갈거야. 아님 안 먹어.」

「왜?」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얼굴. 그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하다가 문득 이 나라에서 황제는 별게 아닌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반말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도 그는 개념치 않고 있다.

「한국에선 남자는 절대로 스커트를 안 입으니까.」

「그럼 뭘 입고 다니는데?」
「바지와 티셔츠.」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이 따위에 고집을 부릴 일이 아니야. -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꺾고 싶지 않았다.

「뭐 그래도 상관은 없는데……」

금발 남자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너네 나라 의복 양식이 그렇다면 나로서도 할 말은 없어. 하지만, 유브라데에서는 남창도 침대위에서

아니면 그렇게만은 입지 않아.」

윽, 강력한 한 방에 나는 넉다운되고 말았다.

결국, 그 망할 옷을 입기는 했지만 장신구는 하지 않았다. 안내된 곳으로 왔더니 황제와 국무대신이 앉

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정원에서 테이블을 펴놓고 앉아있는 그들 주위에는 경비병과 시종들이 드글거렸

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느 나라나 아침인사는 비슷한가보구나. 사교성이 좋아보이는 국무대신이 인사를 건넸다. 일단 나도

같은 인사를 건네려는데.

「앉아.」

싸가지 없는 황제가 고갯짓으로 빈 자리를 가리키며 말해서 인사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빈 자리에

앉자

각 자리마다 대기하고 있는 시종이 음식을 조금씩 덜어주었다.

맛은 있네.

뭉쳤던 마음이 조금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유브라데에서의 첫날 밤은 어떠셨는지요?」

생긴 건 지단인데, 하는 짓은 제비같은 국무대신이 물어서 나는 ‘최악이에요.’라고 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으며 「괜찮았어요.」라고 대답했다.

「얼굴하고 다른 말을 하는군.」

누구는 저렇게 사교술을 펼치는데, 황제라는 인간은 찬 물을 들이붓고 있다. 네가 내 얼굴을 어떻게 알

아? -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좀 더 고개를 푹 숙이고 음식을 떠먹었다.

「달에서는 다들 그러나보지?」

「달이 아니고 서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곳이 달이겠지.」
아, 말 안통하네. 내가 우주선을 타고 온 게 아닌 이상 달은 아니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그냥 스프만 떠먹기로 마음먹었다.

「정신 차리자마자 존댓말이냐. 월인도 별거 없군.」

저 새끼가 왜 깐죽거리는거야, 도대체. 한대 쥐어박으면 좋겠는데, 그러기에는 ‘황제’라는 명함이

너무 걸렸다. 그런데 황제도 그렇고 국무대신도 그렇고 상당히 어리다. 설마하니 ‘알고보면 이백살’ 이

런 건 아니겠지.

「이름은 들었고. 나이는 몇 살이지?」

황제가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물어와서, 순간 당황했다.

「스……」

20 살인데, 이 쪽은 외국인이니까, 그렇게 따지자면…… 열 아홉살이 되나보다.

「열 아홉살입니다.」

「나이는 적당하군. 유감이야.」

황제라는 것들은 다 이런건가? 자기만 알아들을 소리를 해 댄다.

「폐하는 몇 살이신데요?」

묻어가는 질문! 그런데 황제한테 나이를 물어도 되나? 황제치고는 꽤 무난한 성격인 듯 그는 바로 대답

해주었다.

「스물 일곱.」

우리나라 나이로는 스물 여덟이겠네. 생각보다 나이가 있다. 외국인들의 나이는 도통 모르겠다.

아주 어릴때를 제외하면 십대 중반부터는 늘 그 나이가 그 나이의 얼굴이다.

스물 여덟로는 안보였는데. 의외로 산전 수전 겪은 나이로군. 우리 나라로 치면 대학가서 군대도

다녀와 졸업하고 회사 다니는 나이 아닌가.

아무 생각없이 국무대신을 쳐다보았는데, 그는 용케도 알아듣고 대답해주었다.

「서른 다섯입니다.」

역시 외국인의 나이는 알 수가 없다. 아니지, 지단도 대충 삼십대잖아. 초반인지 중반인지는 헷갈리지

만.

하지만 그래도 어리다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황제는 세습제니까 제쳐두고라도 국무대신이라니.

그거 총리와 비슷한 것 아닌가? 정치인이 겨우 삼십대?

「실제로 월인이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되면 그 계시는 정말로 ‘계시’였던 건가.」

황제가 갑자기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나한테 하는 소리인가 싶어서 입만 달싹이고 있자니

국무대신이 대답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진짜였다면, 그토록 당황할 리가 없지요.」

「그건 그렇지. 그러나, 실제로 내 눈앞에 월인이 있지 않은가.」

본인을 앞에 두고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대는 거냐. 그리고 난 월인이 아니라니깐.


그래, 월인이든 뭐든 무슨 상관이냐. 스프는 맛있네.

「어떤 징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계시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나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폐하, 월인이 ‘남자’일 가능성이 그 계시에는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

다.」

「그 날은 정말 재밌었지. 라브만이 왔다면, 더 재미있었을텐데 아쉬웠어.」

「신성지 앞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라브만입니다. 계시의 장소에 나타날 리가 없지요.」

「정말로 라브만이 있기는 한건가? 3 인의 대신관들이 만들어낸 환상인물은 아닐지 의심스럽군.」

그래, 지껄여라.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

날씨는 좋고, 과일은 맛있고. 이게 무슨 과일인지, 이름이 뭔지, 과일일지 채소일지 전혀 모르겠지만,

여하간 맛있다.

아름다운 곳이다.

저 사람이 황제라면, 여기는 궁전일 것이다. 궁전이라고 말하기에 손색이 없는 규모가 큰 곳이었다.

그리고 잘 가꿔진 정원과 아름다운 가로수들도 예뻤지만 특히 이곳은 아름다웠다. 아까 안내받아 오면서

사실 감탄했었다.

내가 있었던 방도 호화롭고 아름다웠지만 이 곳만은 못하다.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곳은 큰 연못의 중심부에 있었다. 마치 섬처럼. 그리고 예쁜 조각들이 새겨진 석조 다리로 연못사이

이어주고 있었다. 연못은 깨끗했고 연꽃 사이를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이 다리를 지나면서도 보였다.

다리를 건너오면서 이쪽 궁전에 마음을 빼앗겼다. 아름다운 궁이었다. 유럽보다는 이슬람양식에

가까워보이는 건축물이었는데 섬세하고 유려한 모습이었다. 이 궁이 지구에 있었다면 분명 세계문화유산

되었을 것이다.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는 타지마할보다 이 쪽이 더 아름다웠으니까.

「기적인가.」

황제의 그 말은 의미심장한 울림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다른 생각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가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그는 웃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어젯밤의 무식하게 크던 남자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뭐든 좋겠지. 구원의 징조라도 좋고, 망국의 징조라도 환영이야. 」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내게로 걸어와 내 이마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설마- 라고

생각하며 굳어있는 나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뗀 황제가 아침 이슬을 받은 풀잎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상큼한지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유브라데는 그대를 환영한다. 월인 키미누.」

키미누? 그건 또 누구래?
「계시에 따라 그대를 비(妃)로 봉한다. 혼인식은 세달 뒤 성대하게 치러질 것이다. 」

「잠깐만요, 저는 남자인데요.」

내 말에 황제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비로 봉하는 것이다. 여자였다면 그대가 진정한 월인임을 알았다 하더라도 목을 베어 성 문

에 매달았을 것이다.」

이건 진심이다.

웃는 얼굴이 내뱉는 이 담담한 말투는 진심인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있어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얼굴.

맙소사, 이 남자는 진짜 권력자이고 여기는- 그의 나라이다. 시중을 들던 시종들도 국무대신도

경비병도 당연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너 호모냐?

두려워서 물어볼 수가 없다. 아니, 황제라면 호모라 할지라도 지가 좋은 남자를 멋대로 취할 수 있을텐

데.

나는 누가 뭐래도 평범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청년이다. 혹시 이 동네 미의식은 이상한건가?

넌 대한민국에서 계급 떼고 만났으면 나한테 죽은 목숨이야. 이렇게 속으로 이를 가는 수 밖에 없었다.

황제는 내 앞에 서 있다가 곧 국무대신과 자리를 떠났다.

「밤에 찾아가지.」

두려운 한마디를 남기고.

밤에 왜 찾아온다는 거냐.

결혼할 ‘남자’가 밤에 나를 찾아온다고 그러니 두렵기 그지 없다. 아니, 두려운 정도가 아니고-

거의 패닉상태였다. 덕분에 아름답다고 감탄하면서 왔던 그 길의 풍경을 전혀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일단 돌아가야 해.

그것을 필두로 생각하다 어제부터 계속 ‘돌아가야 한다’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나치도록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돌아가서 뭘 하지? 새 어머니가 재혼하는 걸 지켜볼까?

후회하지 않으려 애써도 후회스러웠다. 후회스러운 나머지 죽고 싶어졌다. 도대체 난 술 취한 주제에

왜 산길을 걸은거냐. 그 계집애 때문이다. 새 엄마를 닮은 그 여자애.

아니, 그게 왜 그 여자애 때문인가. 나때문이지. 남 탓하지 말자, 이건 순전한 내 탓이야.

혹시 꿈이 아닐까?

일어나면- 그냥 사라지는 꿈. 어쩌면 얼어죽어서 여기는 연옥인지도 몰……맙소사, 이거 은근히 설득력있

군.

더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그래, 우선은 살고 볼 일이야.


그런 의미에서, ‘밤’을 우선 떠올려보자.

오랫동안 진지하게 생각했다. - 정말 진지하게 생각했는데 아무런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닥치고나서 생각해봐야겠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사람이 온 줄도 몰라?」

으아아, 깜짝이야. 목소리에 놀라서 우선 창밖을 보았다. 어느 새 밤이다. 맙소사, 나 하루종일 생각만

한거야? 뭘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생각에 빠졌던 것 같다.

황제는 성큼 성큼 걸어왔고 나는 재빨리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뭐해?」

「아, 아무것도……」

그는 내 앞에서 서서 칼을 내밀었다. 자신이 날쪽을 잡고 손잡이쪽을 내민 것으로 보아 내게 받으라는

뜻 같다.

올려다보자 그가 말했다.

「받아.」

칼자루는 상아로 되어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그것을 잡았다.

「나만을 쳐다봐.」

순간 소름이 끼쳐서 올라오는데……

「아무도 믿지 마.」

황제가 진지하게 말했다.

「나만을 쳐다보고, 나만을 믿어. 그 외의 누구도 믿지 마. 그리고 이 칼을 항시 가지고 있다가

널 건드릴려는 자가 있으면 무조건 찔러넣어. 절대로 망설이지 마. 알았어?」

알긴 하겠는데 이게 왜 인지도 말해주면 안 될까?

「칼을 찔러넣으면 죽잖아요……?」

「내가 허락하니까 누구든 죽여도 돼. 너 자신을 지켜.」

정말 무섭다. 이 남자는 진심인데, 나는 그게 무서워. 도대체 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

야?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고, 믿을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새로운데, 칼을 들고 지켜야 하다니.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무서워졌다.

「왜냐고 물어봐도 될까요?」

내 말에 그는 눈을 깜빡이고나서 내게 물었다.

「니타우가 말해주지 않았어?」

뭘 말이야?

다음 날 아침식사시간에 국무대신은 당황한 얼굴로 「나프라 시녀장이 말씀드린게 아니었군요.」

라고 말하고, 잠시 침묵했다.
「이거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러면서 흘긋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는 묵묵히 식사만 하고 있었다. 그는 굉장히 난감한 얼굴로

「이야기가 깁니다.」라고 말하고 또 침묵했다. 아니, 이야기가 길면 어서 해야 할 것 아닌가.

성질 급한 한국인 속 터진다.

「신병이 돌고 있어. 잊을만하면 한번씩 마을 하나를 전멸시키지. 신이 내린 병이야.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대처도 할 수 없고. 과연. 신이 저지를 만한 짓이지.」

신이 왜 병을 내리지?

자비와 사랑. 이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핵심 이념 아니던가?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냥 넘어갔

다.

황제의 어투에서는 신에 대한 적의가 들어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알바 아니었다.

황제는 일단 운을 떼주었지만 더 이상은 말할 생각이 없는 듯 했고, 국무대신은 「제가 다시 찾아

뵙고 말씀드려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지금 당장 알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국무대신의 표정이

너무 안좋다. 그는 마치 경비병이나 시종들을 경계하는 얼굴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세요.」

내 말에 그는 진하게 미소지었다. 정말 느끼하다.

-아무도 믿지 마. 나만을 쳐다보고, 나만을 믿어.

황제는 어젯 밤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창문으로 나갔다. 그는 황제고, 이 궁의 주인일텐데, 고양이처

숨어들어와 내게 칼을 주고 갔다. 누구든 죽여라, 자신이 허락한다. - 이걸 믿어도 되는지도 헷갈린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이 동네, 꽤 살벌하다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을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곱게 컸다. 기업인 아버지와 교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정신적인 괴로움은 있었지

육체적으로 고달파본 적은 없는 것이다. 마음이 답답했다. 칼을 들고 지킬 정도로 험악한 곳에 오다니,

이왕이면 좀 좋은 곳에 떨어지면 좋잖아.

그나저나, 아무도 믿지 말라는 건 이 지단 닮은 느끼한 형님 포함인건가?

「키미누.」

「어제도 물어보려다 말았는데, 그거 혹시 제 이름인가요?」

내 말에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소개한 이름이잖아. 키미누.」

「김민후에요.」

「그래, 키미누.」

맞잖아,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을 보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국무대신도 뭐가 틀린건지 모르겠다는 표

정이다.
그들은 내 이름의 발음이 안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키미누’라고 말하고 있는것인가보다.

「틀렸나?」

황제가 묻는 말에 틀렸다라고 말하기가 애매했다. 그래, 이름 따위 뭐라 불리우면 어떠냐. 그래도

‘마마’라는 닭살돋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다.

「아니요, 뭐. 마음대로 부르세요.」

「좋아. 키미누, 세달 뒤에 혼인식을 치룰거니 이제 정신없이 바빠질 것이다. 그대는 꽤 까다로운 사람

으로 보이지만」

나 무난하다는 소리 듣고 사는 사람이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까다롭다는 평가를 받고 어이가 없었다.

문득, 스커트로 실갱이한 일이 생각났다.

……대한민국의 정신 멀쩡히 박힌 놈이면 누구나 그랬을거야.

억울한 심정으로 호소해봤자 먹히지 않겠지. 그래서 나는 속으로 궁시렁댔다.

「최선을 다해 협조해주기 바래. 그대는 달에서 정혼자가 있었나?」

정혼자, 라는 단어에 얼굴 하나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안돼, 생각하지 말자. 돌아갈 방법도 보이

않는데 그녀 생각을 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있었나?」

황제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의 얼굴에서 불쾌감이 읽혀졌지만, 이유를 모르겠다. 어째서 불쾌해하고

있지?

「아니요.」

일단 대답하자, 황제가 미소지었다. 아름다운 남자의 부드러운 미소. 하지만, 이 남자 확실히 무섭다.

지금 웃고 있을 때는 꽤 만만한데 얼굴을 굳히는 순간, 긴장으로 짜부러질 것 같다.

이게, 권력자의 능력인건가.

「다행이군.」

황제의 가벼운 말에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어째서 내게 정혼자가 없었다는 사실이 다행인거

냐?

잠깐, 그러고보니 나 왜……

「제가 왜 폐하와 혼인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 말에 국무대신은 얼굴을 찡그리고 황제는 환하게 웃었다.

「그건 말이지.」

비밀이라도 말해주는 것 같이 황제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얼굴을 들이밀었기 때문에, 나도

국가 기밀이라도 듣는 것처럼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눈동자 속의 거짓말도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이 가까워졌을 때 황제가 말했다.

「내가 너에게 한 눈에 반했기 때문이야.」


얼어죽을.

누가봐도 거짓말이 분명한 소리를 잘도 지껄이고 있다.

얼굴은 모델보다 예뻐서는 성격은 어찌 저 모양이냐. 황제라는 타이틀이 아깝다. 영화속에서의

왕들은 참 카리스마가 있든데. 율 브리너라던가. - 그러고보니 율 브리너말고 특별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하긴 그 아저씨는 카리스마가 최고였지.

빙글거리며 웃는 황제와 가뜩이나 여러 가지 일로 심신이 피곤한 나의 질린 표정을 보던 국무대신이

「저녁 때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그 때 다 말씀드릴테니 마마, 우선은 조찬을……」라며 달래기 시작했

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나서는 황제와 국무대신은 사라졌다. 자기들끼리 아는 말을 지껄이면서. 남겨진 나

어제와 똑같은 길을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면서 자꾸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그런데 뒤돌아보면 깜쪽같이 없는 것이다. 혹시 야오밍처럼 크던 금발 남자

-얼굴뿐만 아니라 구렁이 같은 면도 황제와 닮은-인가 싶어서, 나는 빠르게 걷다가 갑자기 돌아봤다.

당황한 얼굴의 여자가 거기 서 있었다.

귀엽다. 내게 동생은 없지만, 있다면 저런 여동생이 좋을 것이다. 귀엽고 깜찍하다. 초등학교 때 좋아

했던

여자애와 비슷한 것도 같다. 인사라고 건넬까 하여 입을 열려는데, 시녀장이 빨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은 부디 삼가주십시오.」

고상하고 다정한 아주머니. - 내가 시녀장에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이러했다. 그런 그녀가, 여자애에

서릿발같은 음성을 내고 있다. 그녀가 뭘 잘못했길래?

토끼같은 여자애는 시녀장을 한번 쳐다보고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이 썰렁한 공기가 부담스러웠다.

「돌아가죠.」

시녀장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것처럼 보여서 내가 새치기를 했다. 그리고 앞서 걷자, 시녀장이 곧 따라

붙었다.

말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해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그래도 내 옆에 서자 상냥하게 웃고 있

었다.

-아무도 믿지 마.

황제의 경고가 다시 생각났다. 확실히……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있을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아까

그 여자애가 뭘 잘못했다고 시녀장은 그토록 엄격한 말투를 쓴 걸까.

그저 쳐다 본게 다인데.

여자애들은 자존심도 강하고 상처도 잘 입는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건드리면 안된다. 여자와 남자는
틀리다는 것을 나는 평생 지워지지 않은 후회와 함께 깨달았었다.

하지만 시녀장은 같은 여자잖아. 그런데도 왜, 그녀에게 그토록 차가웠던 것일까? 시녀는 아닌 것 같았

다.

시녀들이 입는 유니폼 원피스가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시녀들과는 달리 허리를 강조하는 풍성한 원피스

입고 있었다. 특별히 장식은 없었지만 본인도 무척 귀여워서 전체적으로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하긴 여기는 누구나 다 화려하다.

그래서 더 정이 가지 않는다.

화려함은 싫다. 너무 빛나는 것도 싫다. 굉장히 아름다운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이상한가?

그러나 내 취향은 소박하고 평범한 것이다. 조금은 슬픈 사람이 좋다. 강한 빛은 어딘가를 어둡게 할

것이다.

그리고 보는 이의 눈을 아프게 한다. 그보다는 그저 은은한 빛이 좋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귀여운 여자애가 울고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방에 돌아오자마자 재단사가 들이 닥쳐서 혼을 빼놓았다. 혼례복을 맞춰야 한다며 그는 나를 홀딱 벗기

성기의 치수까지 재었다. 맙소사, 혼례복은 도대체 어떤 모양인걸까? 일단 이 세계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상은 까다롭게 굴고 싶지 않았다. 당장 하늘로 솟을 수도 없는 노릇. 우선은 살아가야 할 것

아닌가. 그 살아가는 방법이 ‘남자와 혼인한다’는 것이라는게 참으로 걸리지만.

그리고 나서는 비서관이 들어왔다.

「비서관 레니 데이비드입니다.」

‘데이비드’라니 상당히 친근감이 드는 이름이다. 그러나 여자의 외모는 절대로 친근하지 않았다. 그녀

외국인이라는 것을 둘째치고 -생각해보니 여기 사람들이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에 동양인 체구를

가졌다 하더라도 나에게 있어 그들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이 단어를 ‘

서양인’에 한정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회색눈에 은발은 그녀를 약간 무섭게 보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사각 안경.

이 동네에도 안경이 있구나. -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혼례식 절차를 설명드리겠습니다.」

결혼하고 양가 친지에게 인사.(그나마 한쪽은 없다.) 그리고 신혼여행. - 그런게 결혼식이 아니던가.

그렇게 얕잡아보고 있던 나였지만.

「혼례식은 보름간 치러집니다. 전날, 전야제 연회가 있습니다. 각 나라의 대사들이 참석하며, 귀족은

사성급 이상이 참여하는 연회입니다. 황궁 내에 있는‘기다림의 숲’에서 열릴 예정으로, 현재 연회를


위해서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날 황태자 전하와 만나실 예정입니다. 부모간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서는

그 전에 인사를 해두시는게 좋을 듯합니다.」

뭐라고요?

「다음 날 첫 번째 예식으로 정화의 의식이 행해집니다. 이는 오일간 행해지며, 첫날은 재림하신 호수

에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잠깐, 잠깐만요!」

내 말에 여자가 「예?」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갑고 완벽해보이던 외모가 순식간에 동글동글 귀엽

변했지만 지금 그것을 따질때가 아니다.

「재림? 제가 어디로 떨어졌다고요?」

그녀는 잠시 텀을 두고 대답했다.

「호수입니다. 권능의 상징 안에 있는 심판의 물」

뭔 상징안에 무슨 물이 있다고요? 아무래도 내 표정이 험악해졌나보다. 그녀가 서둘러서 설명했다.

「권능의 상징 - 이라는 건, 황제 폐하의 숲을 말합니다. 궁 내의 다른 숲과는 달리 폐하의 허가가

없으면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접근 불가 지역이지요. 그리고 그 안에 심판의 물 - 이라는 호수가 있

습니다.」

연못도 아니고, 호수?

「기억이 완전하지 못하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설명에 부족함이 있었던 점을 용서해주십시오.」

아니 뭐 용서씩이나. 살아오면서 아웃사이더로서 (혹은 구박덩이로서) 박해는 많이 받아봤지만

이렇게 정중한 사과는 처음 받아보았다. 나는 민망함을 감추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심판의 물에서 정화의 의식은, 오일간 행해지며, 황제 폐하와 마마,

그리고 신관이 참여합니다. 신관은 황궁 내 신전에 있는 신관이 참여할 것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첫날은 수면위에서, 둘째날은 반신을 담그고, 셋째날은 수중에서, 넷째날은 스갠강가에서

다섯째날은 황궁 내 신전에서 각각 의식을 치루실 예정입니다. 그리고 하루 휴식.

그 다음 부터는 사냥의 의식입니다. 첫째 날은 조류를, 둘째 날은 어류를, 셋째 날은 사자를 사냥합니

다.」

「저보러 사자를 잡으라고요?!」

놀라서 물었더니 그녀가 「아니요, 아닙니다.」라고 다시 대답했다. 당황한 얼굴로 그녀가 말을 이었

다.

「사냥은 황제 폐하께서 몸소 하십니다. 마마께서는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 깜짝 놀랐네.
그 황제 얼굴은 예뻐도 몸은 체조선수 같았다. 근육이 엄청난 걸 보니 알아서 잘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솔직히 걱정이 되었다. 사자를 잡아오라니, 지나친 거 아닌가.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지?

「그리고 하루 휴식. 그리고 나서 오일간은 혼례식입니다. 첫째 날은 신의 인정을 받는

제례가 이루어집니다. 삼인의 대신관이 직접 주관하는 제사입니다. 둘째 날은

골드 드래곤의 인정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 부분은 마마 홀로 가셔야 합니다.」

「어디로요?」

「드래곤의 둥지입니다.」

차라리 사자를 잡아오는게 낫겠다. 드래곤이면 용 아닌가? 용의 둥지에 가라고? 나보러?

「폐, 폐하도 같이 가시는거죠?」

혼자 죽으라고 할 셈은 아니지?

「아니요, 폐하께서는 드래곤의 인정을 이미 받으신 몸입니다. 만나 뵙지 못하셨나요?」

「만나보긴 했는데요.」

얼굴보고 인정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알아.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저보러 용의 둥지에 혼자 갔다 오라고요?!」

「혼례식의 중요한 절차입니다.」

비서관이 강경한 얼굴로 말해서, 나는 쓰러질 것 같았다. 맙소사, 이런 잔인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정말 돌아가시겠다.

용이 있는 세상이라니. 무섭다. 그 둥지에 사람을 홀로 보내는 인간들은 더 무섭고.

문득 ‘혼례식의 중요한 절차’라는 말이 걸렸다. 그 말은 즉, 내 이전의 황비들도 이 혼례식을 치루었다

는 말이 되는데……

「역대 황비들도 그 절차를 밟았나요?」

「물론입니다.」

「드래곤이 잡아먹지 않았나보죠?」

「무슨 말씀이십니까? 드래곤은 사람을 먹지 않습니다!」

무슨 경을 칠 소리냐는 듯이, 반쯤은 화내고 반쯤은 겁먹은 얼굴로 비서관이 큰 소리를 냈다.

「드래곤과 인간은 불가침조약을 맺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부터도 드래곤은 인간을

먹지 않았습니다. 드래곤의 식생활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지만, 골드 드래곤의 경우에는

초식동물입니다. 식물과 물외에는 섭취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간을 먹지 않는다니 좋기는 한데- 용이 초식이라니 그건 좀 깨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 말씀드렸었죠? 아, 둘째 날은 골드 드래곤의 인정식. 셋째 날은 혼례식. 넷째 날은

연회와 합방식. 그리고 다섯째 날은 황제폐하께 작위를 받습니다. 이렇게 혼례를 마무리 짓게 됩니

다.」

듣는 것만으로도 질린다. 이걸 다 해야해? 게다가 합방식? 남자끼리인데 왠 합방식? 아니야, 일단은 넘

어가자.

그 다음부터는 각 차례에 대한 소소한 차례들을 말해주기 시작했는데, 내 머리가 돌인건지

그녀가 천재인건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여기까지가 큰 흐름이고,

이제부터 절차들에 대해 설명드릴까합니다.」라고 말할 때, 내가 이 곳 사람이고

정당한 황비(?)였다면 제발 그만해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주변 상황을 전혀

모르겠는지라 우선은 입 다물고 인상만 쓸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데이비드 비서관. 또 고문중이였어?」

지단 짝퉁이 이토록 반가울줄이야. 아침에 보고 오후에 보는 것이니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눈물날 만큼 반가웠다. 그 뒤에 같이 오는 황제가 구세주 같았다.

황제가 들어서자마자 방 안에는 가벼운 긴장감이 달렸다. 시녀장을 비롯 시녀들이 모두

그를 향해서 절을 하고 있다. 그러나 비서관이나 국무대신은 고개를 빳빳히 쳐든 채였다.

이게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까지 궁금해하지는 말자.

「물러가라.」

황제의 명령에 시녀들이 소리 없이 물러갔다.

「오늘도 예쁘네.」

국무대신이 비서관을 찝쩍대고 있다.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 비서관이 홱 돌아서는 바람에

넘어질뻔 하는 것을 옆에서 황제가 잡아주었다. 그러고보니 황제도 상당히 큰 편인데,

비서관보다 약간 커보인다. 국무대신이 황제와 10cm 정도 키 차이가 날 듯하다. 그 말은

나와 국무대신은 머리 하나 이상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맙소사.

명색이 신하이면서도 황제가 잡아주자마자 눈짓으로 인사하더니만 다시 비서관에게 치근덕거리기 시작했

다.

「오늘은 언제 시간 되? 바빠?」

비서관이 빤히 황제를 쳐다보자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내 얼굴을 쳐다보지 마.」

그러자 비서관이 고개를 숙이고 황제의 발치를 노려보았다.

「내 발도 쳐다보지 말고. 아무리 황제여도 불가능한 일은 있다고.」

황제면서 그렇게 간단히 ‘불가능’을 운운하는거야? 누구는 ‘짐은 곧 태양이다.’라고 했다고.

아니 뭐, 그건 그거대로 재수없지만.

결국 비서관은 입을 열었다. 아주 불쾌한 목소리로.


「바쁩니다.」

딱 한마디였다. 그러나 국무대신은 기죽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나 바쁜데?」

대답도 해주기 싫은 모양이다. 냉정해보이긴 하지만 확실히 말해서, 비서관은 굉장한 미인이었다.

그리고 종종 저런 여자에게 불타오르는 인간이 있다. 눈 앞의 이 사내처럼.

「내일은?」

「바쁩니다.」

「모레는?」

「바쁩니다.」

「글피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끈질기다니. 황제는 아예 익숙해진건지 그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이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놀라서 얼굴을 돌렸다. 그러자 킥-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황제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지

는 않았다.

「바쁩니다.」

한참만에, 불쾌감이 몇십배 가중된 목소리로 비서관이 대답했다. 그녀의 온몸에서 ‘귀찮아’라는

오오라가 퍼져나올 것 같다. 나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그 포스를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혼례식이 끝나면 어때? 그 때는 한가할까?」

국무대신의 목소리는 조금 시무룩해져 있었다. 그의 상황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비서관의

목소리는 한없이 냉랭해지기만 했다.

「바쁠겁니다.」

아마, 국무대신이 있는 한 그녀는 영원히 바쁠 것이다. 그건 여기로 뚝 떨어져 아무 것도 모르는 나도

알겠다.

「아, 그럼……」

시무룩하다 못해 울먹일 것 같은 목소리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말을 붙여보려는 국무대신을 막은 것

은 황제였다.

「물러가도 좋다, 데이비드 비서관. 수고했어.」

그 말을 듣자마자 비서관은 허리를 우아하게 숙여보이고 안절 부절 못하는 국무대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가버렸다. 나는 국무대신의 최후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황제와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또 웃었다.

나를 보고 웃으며 뭔가를 말하려던 황제는 그의 옆에서 원망의 시선을 보내는 국무대신을 올려다보았다.

「왜?」
「아닙니다.」

「……할 말이 굉장히 많아보이는 얼굴인데?」

그러자 국무대신이 입이 나온 얼굴로 말했다.

「왜인지 아시잖아요.」

「알기는 하는데, 왜 자네가 그런 표정인지는 모르겠어.」

「한달만에 만나보는건데, 너무……」

이야, 여자 때문에 황제에게 개기냐. 그 놈의 충성 참으로 얄팍하기도 하지.

「데이비드에게 잘 보이고 싶었으면 다른 여자들에게는 관심을 꺼야지.」

「전 여성이라면 다 좋습니다. 폐하처럼 고르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비서관이 자네를 싫어하는거야.」

그 말에 국무대신의 표정은 더욱 서러워졌다. 애가 따로 없다.

「폐하께서도 실연하셨으면서, 너무 잔인하시네요.」

그 말에 황제가 냉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비서관과 국무대신의 대립에서 황제와 국무대신의 대립으로 불

옮겨 붙은 듯 했다.

여자란 정말 대단해.

아무것도 안 하고 매일 붙어다니는 것 같던 저 둘을 싸움 모드로 바꿔놓다니.

「전쟁터에 나가있어서 죽을까봐 걱정되어서 헤어진거와, 물건 간수못해서 차인거는 틀린 거 같은데.」

황제의 직격탄이 날라갔다. 제대로 맞은 국무대신의 표정을 보아하니 한동안은 회생 불능이다.

한참이나 시무룩해져있던 국무대신은 시녀장이 가져다 준 차를 마시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가 정신을 차리는 동안, 나는 황제와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했다’기보다는 황제가 묻고 내가 대

답했다.

황제는 비서관이 무슨 이야기를 해주었냐며 (분명히 자신도 알고 있을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고, 나는

주섬주섬 들은 이야기를 도로 꺼내놓았다.

「정말로 드래곤의 둥지에 혼자가야 하나요?」

사람을 먹지 않는다지만 여전히 무섭다. 내 말에 황제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폐하는 안 무서우셨어요?」

내 말에 황제가 「난 안 가봤는데.」라고 대답했다.

「폐하는 드래곤의 인정을 받았다면서요.」

「아, 그거.」

황제가 차를 한모금 마시자마자 옆에서 대기하던 시녀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잔을 채웠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인정을 받았거든. 보면 알잖아?」

본다고 어떻게 알아.


「봐도 모르겠는데요.」

「……네가 적응을 너무 잘해서, 잠깐 네가 달에서 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내 머리카락과 내 눈동자

색.」

그렇게 말하면서 황제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금색눈이 선명하다.

「이 세상에 금색눈과 금발은 나 하나뿐이야. 이것이 골드드래곤의 인정이다. 게다가 세살 때는 신성한

이름도 받았고.」

「신성한 이름이요?」

「그래.」

그러고보니 아무리 황제라지만 이름도 모르겠다. 나프라 시녀장. 니타우 국무대신. 레니 데이비드 비서

관.

황제라도 이름정도는 있지 않을까?

그런데 황제에게 이름을 물어도 되는걸까? 뭐 이름이야기를 꺼낸 건 저쪽이니까 괜찮겠지.

「신성한 이름이 뭔데요?」

「나라연. 내가 받은 이름은 그거야.」

「그러니까 폐하 이름이 나라연이라는 건가요?」

그 말에 황제는 기묘한 얼굴을 했다. 그는 놀란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했다.

「내 이름이 궁금해?」

뭐, 궁금하다기 보다는……별로 궁금하지는 않지만.

그는 내가 자신의 이름을 궁금해하는 것이 아주 기쁜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오엔이다. 나라연을 계승한 시오엔.」

「성은요?」

내 말에 주위의 시종들이 얼굴을 굳혔다. 험악해지는 걸 보니 내가 뭘 잘못 말했나보다.

다행히도 이 자리 최고 권력자인 황제는 전혀 화내지 않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내게는 성이 없어. 성이라는 건 가문의 이름이잖아.」

「황족도 가문이 있는 거 아닌가요? 혹시 유브라데는 선출제인가요?」

로마를 떠올리며 물었지만, 황제는 그게 말이 되냐는 얼굴로 쿠키를 집었다.

「아니, 세습제야.」

씹는 소리는 요란한데 얼굴은 그림이다. 잘생긴 것들은 좋겠다. 그건 그렇고 왜 성이 없지? 내가 묻기

전에 황제가 먼저 대답했다.

「신의 자손인 황족은 가문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아.」

지랄하시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왜 웃는지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황제는 나를 보고 따

라 웃었다.
황제치고 참 줏대도 없다.

뭐, 나로서는 다행이다. 이 황제가 “죽여라.”를 줄기차게 외치는 황제였으면 정말 살기 힘들었을테니

까.

「그럼요? 역사에는 뭐라고 기록되는데요?」

「황제 시오엔. 이름이면 충분하잖아.」

무거웠다. ‘이름만으로 충분한 사람’이라니, (그렇게 안보이지만) 진짜 권력자구나. 주변이 필요 없고,

가족도 필요 없고, 이름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그런데 생각해 볼 수록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영 아리송하다. 나도 부모덕 봤다는 말을 죽어도 못하지만.

그래도 이름만으로 충분하다는 건 좀 외롭지 않을까.

외롭지 않아요? - 라고 튀어나갈 뻔 한 말을 겨우 단속하고,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잘 생긴 권력자.

한국으로 치면 재벌 3 세? 아닌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대기업 회장? 대통

령?

그들도 베이스캠프가 없이 혼자 살 수는 없다.

그는 충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에 나라면 외로울 것이다. 지금도 외롭지만. 바람둥이 아버지,

결벽증인 어머니, 그 둘은 이혼했고, 아들인 나를 이리저리 서로와 서로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떠넘기

했지만, 좋아하는 여자는 새엄마고, 그녀는 곧 재혼할 것이지만. 그 모든 슬프고 아프고 힘든 일들도,

추억이다. 나를 지탱해주는 과거가 없이 내가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관계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이 아닌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 그것이 진정한 권력자인가? 머리가 아파왔다. 나는 늘 권력자에게 밟히는 인생을

살아왔었다. 중학교 때는 선생에게 고등학교 때는 깡패에게 집에서는 부모에게. 이런 내가 권력자에 대

고찰하는 때가 오다니.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무슨 생각해?」

묻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황제가 여전히 쳐다보고 있었다. 첫만남에서 칼을 들이댄 이후

-생각해보니 겨우 어제잖아.- 그는 급속도의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원래 다정다감한 성격일지도 모르

겠다.

……그런 것 치고는 성격 좀 꼬였던데.

「잠깐 집에 대해서.」

황제의 표정이 한 톤 내려갔다. 잘 못 본건가? 아니, 아까까지는 싱글 싱글 웃던 사람이 지금은 표정이

좋지 않다. 그는 분명히 기분이 상했다. - 이유는 모르겠지만.


황제가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 물었다.

「행복한 집이었나?」

그 질문은 생각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아니요, 전혀요.」

「불행했어?」

「아니요.」

행복하지 않았지만, 불행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남에게 기대거나 기대를 하는 성격이 아닌 것이다.

내 말에 황제가 턱을 괴고 눈을 가늘게 해서 나를 쳐다보았다.

생긴 건 예쁘다.

저 얼굴로 남자라니, 아깝다. 네가 여자라면 내가 결혼하고 여기 눌러붙어줄 수도 있는데.

「원래 그런 식이야?」

뭐가?

「물어보면 대답해주고, 적응도 잘 하고.」

숨길 것이 없고, 두려울 것도 없으니까. 그런 소리는 질리도록 들어봤다. 마이페이스라는 말.

「좀 자기 중심적이기는 하죠.」

「월인은 신비주의자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별 거 없네.」

황제가 그렇게 말해서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말해도 그는 알아듣지 못

했다.

하긴,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만도 하지.

「별 거 없어서 정말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다니 고맙네. 나도 너 조금 마음에 들려고 해.

고맙다고 말하려는데 회생 불능 상태로 멍하게 있던 국무대신이 갑자기 번개같은 움직임으로 황제를 돌

아보았다.

「폐,폐하?」

「왜?」

아무렇지도 않은 황제와 소스라치게 놀란 국무대신이 시선을 몇 번 주고 받더니 갑자기 국무대신이 헛기

침을 했다.

「일단, 상황을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유브라데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듯 하오니, 제 이야기

를 들어주십시오.」

뭔가 있는 것 같지만 저 둘 사이에 뭔가 있든 말든 나와는 관계없지. 나를 쳐다보며 국무대신이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프리젠테이션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뭘 해도 요란스러운 사람이구나. 달리 말하면 화려하다는 뜻도 되겠다. 실제로 어울리기도 하고.


하지만 전사타입의 외모로 저렇게 구니까 어딘가 적응이 안되는 것도 사실이다.

뭐, 내가 너무 지단을 의식한 건지도 모르지.

2. 계시 (1)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참 애매합니다만……」

국무대신은 그렇게 서두를 꺼내고 잠깐의 생각끝에 말을 이었다.

「삼십년 전부터 말씀드릴까합니다.」

30 년전?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잖아. 내가 왜 황비가 되었는지-가 왜 삼십년전까지 튀어나오는 걸까?

「이야기가 그렇게 길지는 않습니다.」

내 얼굴을 보고 국무대신이 안심시키듯 말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길었다.

「삼십년 전, 유브라데의 작은 산골마을인 파데에서 보고서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파데를 관리하는

지방 도시는 당연히 관리를 보냈지요. 그런데, 파데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670 명이 사는 마을이

비어있었던 겁니다. 관리는 텅텅 빈 마을에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고, 가정집에 허락을 구하지 않고

들어갔습니다. 가정집에는 시체뿐이었어요. 네, 모두가 시체였습니다. 모두 죽어있었던 겁니다. 」

나, 이토 준지류의 만화책은 절대 안 보는데. 소름이 끼쳤다. 이런 이야기는 질색이다. 허구인 만화책

안 보는 판국에 ‘사실’로서 괴담을 듣다니.

그냥 ‘파데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라고 하면 되지, 뭐 저렇게 이야기하듯 말하

그러는거냐. 가능한 아무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건너편에서 황제가 물었다.

「무서워?」

어, 어떻게 알았지? 그러나 대한민국 사나이 김민후, 무섭다고 할 수는 없다.

「아니요.」

「무서운 얼굴인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국무대신도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안색이 창백합니다. 이런, 아직 이야기 시작도 안했는데……다음에 할까요?」

요란스럽다느니 한거 미안해요. 국무대신, 좋은 사람이구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황제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아니, 말하기 전에 자신의 무릎을 툭툭 치고, 다음에 말했다.

「내가 안아줄까? 여기서 들을래?」

……너, 뭐 잘못 먹었니? 그건 일종의 성추행이라고.


「됐습니다.」

내 거절에 황제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옆에서 국무대신이 샘통이라는 듯이 진하게 미소짓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당황한 얼굴을 「흠!」하고, 기침을 하더니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계속하겠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 일은 유브라데 뿐만 아니라 드와나 전체를 시끄럽게 했죠. 그러나 학자들을 파견하고, 신관들을

파견해보아도,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제사를 지내게 됐습니다. 라브만이 주관하는 첫 제사인 셈이었

죠. 그만큼

큰 일이었습니다.」

「라브만이요? 그게 누군데요?」

그러고보니 이 사람, 전에도 황제와 국무대신이 이야기하는 도중에 나왔었던 것 같다. 누군지 궁금해져

서 물었더니

황제가 쿠키를 질겅질겅 씹으며 대신 대답했다.

「신성지의 주인. 신관들의 두목.」

‘신관들의 두목’. 그 라브만이라는 사람과 황제는 사이가 좋지 못한가 보다.

「‘라브만’이라는 것은 직책의 이름입니다. 하아……이야기를 좀 더 파고들자면.」

아니, 안 파고들어도 되는데. 그냥 물어본거에요. 전 라브만이 누군지 몰라도 되는데…… 만류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여기 계시는 영광의 이름 나라연을 계승하셨으며 존귀……」

「한 골드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위대한 전사 시오엔 황제.」

그 말을 자기 입으로 하고 싶냐. 그러나 황제도 꼭 자기 PR 을 할려고 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하지 말라니깐.」

나라도 싫겠다. 국무대신이 멋쩍은 얼굴을 했지만, 저 눈에 보이는 저 빛은……아무리 봐도 고의다.

「죄송합니다. 어릴때부터 받았던 교육이라 툭하면 튀어나옵니다.」

거짓말. 황제도 전혀 신용하지 않는 눈치다.

「여하간, 황제폐하께서는 유브라데 만물의 지배자이심에 틀림이 없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입법권, 사법

권, 행정권을

모두 가지고 계시고, 군의 원수이시기도 하시죠. 물론 신전도 유브라데의 국민인 만큼 황제 폐하를 섬

기고 있습니다.」
정치과목 생각난다.

「그러나 신전이 복종하는 자는 폐하가 아니라 신입니다. 수천의 신들, 그 가운데서도 태양신 ‘레’와

달과 밤을

주관하는 여신 ‘데’을 중심으로 하지요. 그들은 신들이 남겨놓은 유적과 말, 계시를 통해서 현재를 반

추하고

영원한 진리를 찾아 헤맵니다.」

호러물에서 판타지물로 대 전환. 호러물보다는 판타지가 낫긴 하지. 난 둘 다 별로이고, 사실 스포츠만

화를 좋아하지만.

「라브만은 수많은 신전들의 통솔자입니다. 그는 이 궁을 중심으로 한 수도 디안의 교외에 있는 숲에서

은거하고 있는데,

세명의 대신관말고는 그를 본 자가 없습니다. 그는 유브라데의 국민이지만, 폐하를 섬기지 않습니다.」

대놓고 그런 말 해도 되나? 나는 슬쩍 황제의 눈치를 보려 했지만, 황제가 내 쪽을 쳐다보고 있는 바람

에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예쁜 얼굴이 생긋 웃었다.

「안아줘?」

그리고 또 자신의 무릎을 탁탁 쳐보인다.

「……괜찮습니다.」

그래, 나라도 섬기기는 싫겠다. 대답을 하면서 국무대신을 쳐다보는데 황제가 갑자기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왠지 네 마음이 이해가 갈 것 같아, 니타우.」

국무대신은 민망한 얼굴로 황제에게 대답하지 않고 내게 말을 이었다.

「라브만이 어떤 전통을 가지고 이어지는지는 모릅니다. 신관은 결혼할 수 없으니 세습제는 아닐것이라

고 생각하지만,

그 실체는 아무도 모르지요. 라브만을 본 자는 세명의 신관뿐. 그러나 3 인의 대신관은 종신직이므로 실

제로 한 시대에

대여섯명정도만이 아는 존재일뿐입니다.그 라브만이 주관하는 첫 제사였습니다. 공개적인 자리에 라브만

이 나온 것은,

라브만이라는 존재가 생긴지 천년만이었죠.」

「그럼 이제 라브만이 누군지 아시겠네요?」

「아니요. 알지 못합니다. 그는 검은 천을 쓰고 나왔습니다. 그 숲에서 나올당시, 그는 전전대의 황제

위미르께

미리 허락을 받고 나왔습니다. 자신의 베일을 벗기지 말라는 조건이었죠. 황제는 수락했고, 그는 제사


를 지냈습니다.」

국무대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당히 냉혹해보이는 얼굴이다. 이제껏 푼수 떨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고

보여지지

않을 정도로.

「제사는 성공적으로 치루어졌고, 그리고나서 멸망한 마을은 없었습니다. 제사가 이뤄지는 동안 파데를

제외한

마을을 두개나 더 말살시킨 병이 갑자기 사라진 것입니다. 라브만은 ‘신의 노여움이 풀렸다’고 선언했

고,

사람들은 그것을 신병(神病)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신병은 사라졌습니다. 신자 수가 급등했고, 신전들은 갑작스런 초대객들의 줄지은 방문에 즐거운 비명

을 질렀죠.

신전들이 증축되고, 본래 신을 믿는 나라였던 유브라데는 마치 전 국민이 광신도가 되는 분위기를 풍

겼습니다.

인접국 기혼의 여행자이자 학자인 슈이처의 기록에 따르면 ‘유브라데는 태양신의 노예가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 때쯤, 위미르 황제께서는 세 번째 황비를 맞이하시게 됩니다. 드와나를 들끓게

한 미녀셨죠.」

「내 어머니야.」

자랑인가 싶었는데 황제의 낮빛은 썩 좋지 못했다. 그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아무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얼굴색은 좋지 못했다.

「당시에 유브라데에서는 그 위명이 좀 덜했습니다. 유브라데는 신병의 공포에 떨고 있었고, 사피엔스는

윗대륙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사피엔스의 체니 공주는 열 아홉 번째 공주- 즉, 하렘에 쳐박혀

있어야

할 신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사피엔스의 황제보다 유명했습니다. 그 미모는 다른 대륙의 미혼 왕자들까

청혼하고 있는 와중이었죠.」

「그리고 그녀는 위미르 황제, 즉 내 아버지를 만났다. 부성애를 전혀 느껴보지 못한 그녀에게 위미르

황제는

완벽한 아버지상이었지. 그래서 둘은 결혼해. 그리고 그녀는 체니 황비로서, 드와나 초강대국인 이 유

브라데로
시집을 온다. 첫해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 그녀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웠으므로. 세상에 다시 없을 미

모라는 둥,

시인들은 그녀를 추켜세우기 바빴고,축하 퍼레이드에서 그녀의 실물을 보고 자살을 한 청년들까지 있었

다. 그런데,

다음해부터 신병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네 개의 마을이 연달아 사라졌지.」

「사실, 체니 황비를 반대하는 여론은 강력했습니다. 그것은 신전을 필두로 한 것이었죠. 체니 황비가

출생한

사피엔스 국은 무신의 국입니다. 무신론자들의 나라지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인간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반대는 거셌습니다. 섬김을 모르는 자를 황비로 맞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습

니다.

그러나 체니 황비는 얼마든지 신을 섬길 수 있다고 했고, 맹세도 했으며, 그녀의 기적같은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었습니다. 첫해, 그녀는 완벽했습니다. 제사에도 참석했었죠.」

「그러나, 어머니는 몸이 약했고, 게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는 타이틀에 지나치게 몸도 마

음도 가

있었다. 그녀는 황제조차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미모를 가지고 있었지. 그녀는 무신론자였어.

신을 섬길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으니까. 모든 이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믿는 사람이기도 했고. 어릴 때에 불과한데도, 그녀의 모습은 생각이 나. 자식에게는 관심도 없이 자신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여자였다. 하지만, 아름다웠어. 그건 사실이었지.」

「몇 가지 사소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건 제사에 참석한 황비의 태도

였습니다.

황비는 무릎을 꿇지도 않았고, 신에게 불을 피우지도 않았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나와 앉는게 고작

이었죠.

신전들은 불길한 계시를 늘어놓고, 황제와 신전 사이에 냉전이 계속될 때쯤, 신병이 돌기 시작한 것입

니다.」

「연달아서, 네 개의 마을이 사라졌다. 겨우 한달이었지. 이천명이 죽은 것이야. 게다가 항구마을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올라오고 있었고.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그리고 신전은 신병을 불러들인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을
취했지.

무신론자가 황비가 되었으니 신에게 버림받은 것은 당연하다며. 그리고 삼년간 쿠테타의 직전까지 진행

된 사건이

두 번이나 일어나자 아바지는 더 이상 참지 못했고, 그는 신성지를 싹 쓸어버리겠다고 호언하며 전쟁준

비를 했지.

신관들도 신성지를 지키겠다며 신성지 앞에 집결하고 있었고. 그리고 아버지는 군대를 이끌고 신성지로

갔다.

보병이 주였기 때문에 여기서 신성지까지 가는데 무려 이틀이나 걸렸어. 그리고 신성지 앞에서 그는 죽

었어.」

「증상은 신병과 같았습니다. 고열증세를 보이고 몇 시간만에…… 민중들이 봉기하려고 하는 때, 파발마

는 달려가

황제의 붕어소식을 전합니다. 병사들은 갈팡질팡했고, 신관들은 신성지에 집결한 김에 궁까지 쳐들어 올

기세였죠.

그리고……」

「어머니는 자살했어.」

맙소사.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황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도 무표정하게 내 시선을 받았다.

「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내 말에 황제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정말? 명복을 빌 정도로 안타까운 죽음인가?」

황제가 물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시집 잘 못와서 죽은 건데, 당연히 안타까운 거 아닌가.

자신의 어머니잖아.

「고마워.」

진심으로 고마운 얼굴을 하고 있는 황제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해져서 다시 국무대신을 쳐다보았다.

그는 내 눈빛이 ‘이야기를 시작하라’라는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나 황제께서 즉위하시게 됩니다.」

「내 큰형이야. 본래 학자가 되고 싶어했지만 그가 황태자였거든. 그래서 그는 즉위하지. 육년전에 죽

었어.」

「겨우 마흔살이셨는데, 머리가 하얗게 새셨었죠. 유브라데에서는 툭하면 신병이 마을 하나를 전멸하고,

인접국인 기혼과 전쟁까지 발발했었으니까요. 게다가 수도를 옮기느냐 마느냐, 라는 토의가 나올 정도로

기혼은 강했습니다. 수도앞에 남은 도시는 겨우 두개에 불과했습니다.」

「그 때, 황명을 받아서 출전했어. 이겨서 돌아왔지. 그리고 유언으로 황태자였던 둘째형이 아니라 내

황제로 지목되었어. 둘째형은 반발했지만, 그는 군인이 아니었고, 당시는 전시였지. 그래서 내가 엉겁

결에

황제가 된 거지. 그리고 육년이 지난 올 해 조용하던 신전에서 갑자기, 계시가 내렸다는 공표를 했

다.」

「월인이 내려오는데 그를 황비로 삼으면 그가 유브라데를 구원 한다는 이야기였죠. 폐하께서는

기혼 정벌중에 돌아오셔야 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황비 문제는 국민들이 예민하거든요.

황비 때문에 사라져가던 신병이 되돌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심판의 물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네가 떨어지더라고. ‘깃털같은 움직임으로 황제의 품에 안길

것이다’

는 계시와는 달리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더군. 호수 중심에 서 있던 내 옆으로 떨어져 물에 곤두

박질쳤지.

몸은 얼어있고, 안색도 좋지 않았어. 너를 건지고 나왔더니 당황한 얼굴로 신관들이 중얼거리고 있더

군.」

「그 때!」

갑자기 국무대신이 연극조로 외쳤다.

「영광의 이름 나라연을 계승하셨으며 존귀한 골드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황제 폐하께서 외치신 겁니다.

‘황비 선언’을!」

뭔가 원망스럽다는 얼굴이라는 걸 알겠는데 왜 국무대신이 황제를 원망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서 나는

눈을 깜빡였다. 황제는 빈정거리는 것이 분명한 국무대신의 말에도 표정에 일말의 움직임도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알겠어?

뭘?

「네가 왜 황비가 되어야 하는지.」

아아, 그렇다. 이 기나긴 이야기의 시작은 그것이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달에서 황비가 떨어진다는 계시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떨어졌다. - 이렇게 간단하게 말하면

안돼요?」

내 말에 황제와 국무대신이 동시에 말했다.

「그 정도로는 납득하실 것 같지 않아서……」

「그렇게 순순한 성격이 아니잖아.」

밤이 깊었다. 어두운 창밖을 보니 정말 셋이서 쉴 새 없이 떠든 것이 실감 났다. 그래- 그래서 내가

황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

그러나, 그 뒤에는 어쩌지?


나는 집으로 어떻게 돌아가야 하지? 황비같은 거창한 존재가 되고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돌아갈 수는 있을까? 뭐든 간에. 만약 이 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어쩌지.

「폐하께서는 절 정말 비로 맞을 생각이세요?」

「내가 빈 말할 사람으로 보이나?」

황제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전 남자인데요.」

「안다니깐.」

「남자를 황비로 맞으셔도 괜찮으세요?」

「상관 없어.」

황제니까 형식적인 남자 마누라가 하나 있다 하더라도, 인생에 장애는 없겠지만…… 그래도 황제란 역사

에 이름이 남잖아.

뭐, 본인이 괜찮다니 괜찮은 거겠지.

「왜? 그대는 황비 자리가 싫은가?」

황제의 말에 나는 생각에 반쯤 잠긴 채 「당연히 싫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국무대신의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쳐들었더니 황제가 일어 서 있었다. 차가운 얼

굴이었다.

「왜지?」

단순한 질문인데도, 단숨에 공기가 팽팽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고 싶으니까요.」

당연한 이야기다.

게다가 나처럼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인간이라면 더더욱 인생의 파트너는 중요하겠지. 외롭지 않게

해 줄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살고 있다.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더욱 외롭게 할 따름이지만, 기다리

이 마음은 언젠가 사라질것이다. 그리고 나를 외롭지 않게 해 줄 사람이 나타나겠지. 내가 외롭지 않

해 줄 사람이 생겨서, 우리는 서로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도 행복하리라는 보장은 없어. 내 어머니 이야기가 충분한 교훈이 되잖아?」

「사람마다 틀리죠. 저는 폐하의 어머니보다 더 노력할거에요.」

황제의 냉랭한 시선이 걸렸지만 일단은 대답했다. 나에게 삶의 목표가 뭐냐고 묻는 다면 이것이다. 사

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것. 내가 소속될 누군가를 만나는 것.

「그래? 그럼 노력해.」
황제가 웃었다. 그러나 입가만 올라갔을 뿐 눈은 여전히 차가웠다.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것은 자존심? 아니면……?

「왜……이러시는 거죠? 제가 황비가 되지 않으면 폐하의 입장이 곤란해지신다는 건 십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제 감정까지 강요하실 수는 없으실텐데요.」

내 바른 말에 황제가 코웃음쳤다.

「세상에 어떤 놈이 자기 마누라가 다른 놈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리를 하는데 가만 있는단 말인

가. 내가

이상한 건가, 그대가 이상한 건가?」

뭔가 말이 되는 것도 같고……안 되는 것도 같고……애매하다.

뭔가, 나와 황제 사이에는 입장 차이 이전에 뭔가 있다. 굳이 말하자면 대화의 전제가 틀리다고 해야

하나?

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은 이 기분. 옛날에 ‘부모는 누구나 자기 아이를 사

랑하는가.’

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럼 폐하와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일단 살고 보자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틀리다. 명목상의 황비가 아니라면 문제가 크다. 세상에 어떤

놈들은

자기는 상대를 좋아하지 않아도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꼴을 못 보는 인간들이 있는데, 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황제도 그 계열인가 보다.

인생의 목표를 이룰 수 없다면 살거나 죽거나 매한가지지.

「나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목을 치겠다.」

황제의 무표정에 숨이 막혔다. 잘 되어가는 듯 하다가 왜 갑자기 이런 삼천포로 빠지는 거냐.

「……황비 자리는 받겠지만, 폐하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남자 대 남자라는 걸 좀 염두해두자. 어?

「왜?」

너, 진짜 호모냐! 아까 누군가에게 차였다는 거, 혹시 상대가 남자였어?

「전, 남자이니까요.」

「비마마는 남자시잖습니까!」

나와 같이 답답해진 국무대신의 목소리도 울려펴졌지만, 황제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국무대신을 노려봤

다.
「끼어들지 마라.」

그 얼굴에 방금 전까지 일그러졌던 국무대신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바뀌었다.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국무대신이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머리를 조아렸다. 시녀장이 나에게 한 것 처럼.

황제가 나에게 삐딱한 시선을 던졌다.

「남자라서, 그래서 뭐?」

「혹시 남자를 좋아하십니까?」

「전혀.」

황제는 바로 부정했다. 그 말이 안도감과 의아함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전혀’라고 단호하게 말할 정도

인데

지금 ‘왜’냐고 묻는거야?

「저도 남자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 말에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겠지.」

드디어 이해를 했구나. - 이런 내 기대를 배반하며, 황제가 또다시 물었다.

「그래서?」

「예?」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그대가 왜 나를 사랑할 수 없느냐고 묻고 있다.」

「혹시 여자십니까?!」

답답한 나머지 소리를 치자,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니, 남자다.」라고 대답했다.

너, 혹시 무뇌아 아냐?!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나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 그대도 남자를 좋아하지 않지. 그리고 우리 둘은 남자다. 충분히 이해하

지만,

운명이 점지한 거잖아?」

운명같은 소리하시네.

「운명이 점지하면 뭐든 따라야 합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황제는 굉장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나? 하긴 이 나라는 신은 수천명이나 믿

는다니,

운명이나 계시가 나오는 건 무조건 믿는 건가?

황제는 한참이나 나를 노려보다 이를 악물었다. 그 다음부터는 엉망진창이었다. 황제는 나를 노려보고

몇마디 더 살벌한 대화를 하다 나가버렸다. 꽤 좋은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호의가 사라진 기

분이었다.
뭐야?

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왜 황비가 되어야 하는지, 현재 상황이 어떤지 - 그런 것은 들었는데도

다른 일이 알 수가 없어져 버린다. 옛날부터 그랬지. 늘 그래왔다. 내가 알 수 없는 주변상황.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집단. 나는 늘 주위를 맴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황비 자리는 안 받는다 할 걸 그랬나?

또, 새 어머니 생각이 난다. 늘 슬프고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 젊고 사랑스러운 여자. 그녀는 다른 이

와 결혼하겠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바쁜 걸음들이었다. 시녀 누나들이 빠른 속도로 짐을 싸고 있었다. 그 정확하

고 신속한 손놀림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며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자니 시녀장이 들어와서 말을 걸었

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마.」

벌써 이 마마 소리가 적응이 될려고 한다. 역시 내가 무심한 성격이기는 한가 보다.

「좋은 아침이에요, 시녀장님.」

내 ‘님’소리에 놀란 것 같던 고상한 아주머니는 살포시 눈을 접으며 웃었다.

「마마께서도 준비하셔야지요?」

에?

「무슨 준비를요?」

그 때 갑자기 시녀가 와서 「니타우 라 크리스티 국무대신이 알현을 요청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뭔가

가,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다. 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들어오라고 전해주세요.」라고 말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국무대신은 어제보다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시녀장,

잠시 나가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나와 국무대신을 번갈아보던 시녀장이 한숨을 쉬었다.

「빨리 끝내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오전내에 처리하시라 이르셨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큰 소리를 냈던 국무대신이 조금 목소리를 낮췄다.

「부탁드립니다.」

시녀장이 가볍게 한숨을 토하고 움직이자 멀리 있던 시녀누나들도 다 같이 나갔다. 방문이 닫힐 때까지

국무대신은 아무 말도 없다가 바로 내게 물었다.

「어쩌시려고 그러셨습니까?」

「뭘요?」

「어제 폐하께 하신 말씀 말입니다. 자칫 잘못하셨으면 그 자리에서 명이 다 할뻔 했다는 건 알고 계십


니까?!」

모르겠는데요.

결혼 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는 게 유브라데의 헌법입니까?

내 표정을 보더니 국무대신이 한숨을 쉬었다.

「운명의 여신은 도대체 뭘 어쩌려고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데’는 왜 마마를 보내신 겁니까?」

나야 모르지…… 유브라데의 달 여신이 무슨 생각인지, 내가 알 수 있나.

「하나는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는, ‘자신을 위한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계십니

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내 얼굴에 ‘모르겠다’라고 쓰여 있기라도 한 걸까. 국무대신이 답답해 미치겠다는 얼굴로 눈살을 찌푸

렸다.

「폐하는 당연히, 마마께서 폐하의 편이 되리라 생각하셨다는 겁니다. 일생, 폐하의 곁에 계셔 줄 분이

라고 생각하신 겁니다

. 당연하지 않습니까? 계시는 ‘황비를 보낸다’고 했고, 마마가 달에서 떨어지셨으니까요!」

내가 달에서 떨어졌으면 지금 잘도 살아있겠다! - 같이 소리치고 싶었지만, 국무대신은 너무 살기등등

했다. 나는 당황했다.

국무대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마마……」

당황한 국무대신이 발을 동동 구를려는 순간, 시녀장이 나타났다.

「이동하셔야 할 시간입니다.」

「이동이라니요?」

내 말에 시녀장과 국무대신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오신김에, 말씀해주십시오.」

시녀장의 말에 국무대신이 곤란한 얼굴을 하더니 결국 한숨을 쉬었다.

「비 마마를 위해서, 황제폐하께서 어젯 밤 숙소를 만드셨습니다.」

「여기가 아니에요?」

내가 손가락으로 방 바닥을 가리키자 시녀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원래는 이곳이 맞습니다만…… 폐하께서, 폐하의 모후되시는 체니 황후마마의 온실을 쓰라 명하셨기 때

문에……」

「폐하가 어제 직접 명령하신겁니다. 그 분은 상당히 화가 나셨습니다. 어제도 하렘의 공녀 한명이 죽

었습니다.」

국무대신의 말에 시녀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죽어? 죽었다고?

「왜요?」
「폐하의 화풀이 대상이 되신거죠. 폐하는 자국민에게는 관대하시지만 타국의 노예나 공녀들에게는 자비

가 없으신 분입니다.」

단지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였다?

「움직이셔야 합니다! 불호령이 떨어질 겁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와 황제의 사이가 어떤 사이였지? 우리는 이틀전에 처음 만난 사이였다. 그게 다

였다. 내가 황제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죽었다고?

「황제 폐하는 남자를 좋아하는 분이 아니라면서요.」

황제 본인이 그렇게 말했었다. 내 말에 국무대신이 답답한 얼굴로 말했다.

「세상에는 무슨 일이든 예외가 존재하는 법이라는 걸 왜 모르십니까? 비 마마는 달에서 떨어지셨습니

다.

황제 폐하의 품으로요! 신이 계시를 내렸고, 황제 폐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사람을 운명의 힘으로

얻었습니다.

비마마, 생각을 해보세요. 비 마마가 여자시라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되는지! 황

제 폐하가 ‘남자라도

상관없다’고 말씀하신 건 비 마마는 이제 ‘남자’든 ‘여자’든이 중요하지 않는 상황이 된겁니다. 상식에

맞춰서는 안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내가 여자라는 전제를 두고 보자, 이 상황이 너무나 명확해졌다. 황제가 나를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황제는 사흘이나 모습을 비추지 않았고, 나는 나대로 번민에 시달렸다. 일단 도망쳐야 할 것 같다. 그

런데 그 남자 하렘의

공녀를 죽였다는 걸로 봐서, 만만한 타입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어느 나라 황제든, 이런 경우 도망가

면 가만 둘 것 같지는 않다.

도망치다 잡히면 안될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이렇게 얌전히 앉아서 황비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도망쳐서 어디로 간 단 말인가? 모르는 곳 뿐인데. 여기에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웬수같은 황

제와, 지단 닮은 국무대신, 그 국무대신이 치근덕거리는 비서관, 고상해보이는데 은근히 무서운 시녀

장. 이 네사람이 전부다. 그 외에는 이름도 소개받지 못했다.

씨발, 사지 멀쩡한데 막노동이라도 하면 되겠지. 여하간 말이 통하니까 뭐든 하면 된다.

도망갈까?

평소 같으면 ‘죽기야 하겠어!’라는 마음으로 저지를텐데, 지금만은 두렵다. 죽을 게 분명하기 때문에.


벌써 삼일째 이 곳을 나가지도 못했다. 산책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황제의 명령이란다. 환장할 노릇이

다. 빠져나갈 구석이 있나

, 산책하는 척하면서 찾아보기라도 할려고 했더니.

이사 온 곳은 거대한 온실이었다. 저번에 있었던 방이 내 고등학교 운동장만했다면, 이번은 운동장을

포함한 고등학교만하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온실이었다. 무식하게 큰 새장같기도 하다.

역시 삼층 높이. 중심은 4 층일지도 모르겠다. 들어가자마자 정원이 나오고 중간에 작은 집같은 방이 있

다. 방과 욕실. 그 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 한국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는 풀 냄새와 꽃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런

향은, 스승의 날 때

카네이션 사러 들어간 꽃집 다음이니 오랜만이었다.

밤에 정원 구석구석 비치되어 있는 벤치 아무데나 누워 있으면 별이 쏟아져 유리에 부숴질 것 같다. 아

름답고, 아름다운 광경.

이 곳도 시간이 흘러서 진보할까? 드래곤도 사라지고 전기가 생기고- 그리고 이 별과 화려한 궁전을

잃을까? 아니, 이 곳은

어찌 어찌 남아서 티켓 팔아 사는 관광상품이 될지도 모르지.

「저기, 시녀장님.」

내 말에 시녀장이 돌아보았다. 저 아주머니, 처음부터 나한테 호의적이기는 했지만 내가 ‘시녀장님’이

라고 부른 뒤로부터는

더더욱 호의적이었다.

「예, 마마. 하명하시옵소서.」

게다가 말투가 극존대어로 바뀌고 있다. 뭐야, 나 처음에는 쉽게 보인거야? 아니, 차라리 쉽게 보일 때

가 나았다.

「제가 유브라데어는 좀 하는데, 글을 몰라서요. 혹시 배울 수 있을까요?」

도망을 갈지 안 갈지는 몰라도, 일단 글은 배워두자. 시녀장은 환하게 미소지으면서 「물론입니다! 오

늘 가정교사를 물색하여,

내일부터 들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니, 양심이 조금 찔렸다.

그날 밤, 황제가 모습을 나타냈다. 사람을 화풀이로 죽일 수 있는 인간이라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교육을 받고 컸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배웠다면 당연히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잖아.

「잘 지냈어?」
도망칠 궁리와 두려움으로 정신적인 번민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잘 지냈다. 밥도 잘 먹고, 조깅은 좀

남사스러워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좀 했다. 푸쉬업이나, 윗몸 일으키기 같은 것. 내일부터는 가정교사도 온다. 나는 굉장히

잘 지내고 있었다. 원래

마이페이스인 작자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잘 버티는 법이다.

그러나 황제는 잘 지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의 허리까지 흔들리는 머리카락은 윤기가 없고, 얼굴

에는 수염이 듬성듬성

자라 있었다. 안색도 좋지 못했다.

겨우 삼일 안 만났는데, 폐인 모드로 나타나다니. 하늘에서 떨어진 인간이 마누라 자리 싫다고 했다는

걸로 이런 거냐.

「잘 지냈습니다. 폐하는요?」

내 말에 황제가 눈을 내리깔았다. 속눈썹이 길다. 여자들 마스카라한 것 같은 예쁜 속눈썹이었다.

어머니가 굉장한 미인이었다더니 진짜인가보다.

「전혀.」

황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개떡같았어.」

어느 새 시녀들은 사라져있었다. 그는 벤치 옆에 있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사방에서 하늘이 보였다. 맑고 아름다운 밤하늘이 사방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온실에서, 황제는 유난히

아름다웠다. 머릿결이

좋지 않아도, 얼굴이 초췌해도, 그는 아름다웠다. 뭘 해도 화보처럼, 그림이 되는 남자였다. 느릿한

걸음 으로 그는 내게

다가와서 내 어깨를 잡았다.

「일단, 내가 너무 빨랐던 것 같아. 생각해봤는데,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었거든. 자신이 그 변화를 느

끼지 못할 정도로. 네가

월인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완전히 들떠서- 너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었어.」

황제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시간을 두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예정대로 진행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알았어?」

모르겠어.

「너는 나를 위해 준비된 사람이다. 너는 내 품안에 떨어졌어.」

「옆이라면서요.」

품은 또 무슨 품이야.

그 말에 황제가 민망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 품으로 떨어졌어. ……내가 피하기는 했지만.」


내 표정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황제는 굉장히 당혹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내 얼굴은 화가 났거나, 어이가 없어나, 질린 표정 중 하나일 것이 분명했다.

「대신 건졌잖아. 물 속에서 너를 처음 봤을 때 무척 놀랐지. 끌어안았는데 물보다도 몸이 차가웠어.

시체인가-라고 생각했지. 아무리봐도 남자로 보이는데 내 황비로 점지해서 달의 여신이 보냈다는 것도

웃기고, 무엇보다 그 보내는 방식이 터프하잖아.」

말이 긴 걸 보니, 셋 다 일수도 있겠다.

……하긴 달에서 왔다고 치면, 달에서 발로 엉덩이를 차서 던져버렸다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기는 했을

것 같다.

황제는 숙이고 있던 얼굴에서 슬쩍 시선만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강아지같은 시선이었다. 기대는 시

선에 나는 웃어버렸다.

종 잡을 수 없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야. -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여기서 잘까.」

갑자기 황제가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잡고 방으로 이끌었다. 아니, 그렇다고 나는 남자랑 같이 자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이 ‘자자’가 어떤 ‘자자’냐.

방이라고 하기도 집이라고 하기도 애매모호한, 아름답고 매끄러운 흰 천으로 만들어진 천막으로 들어갈

때쯤 나는 슬쩍

황제의 손아귀에서 내 손을 빼내었다.

아마도, 황제가 놓아준 것에 가까웠다. 그는 나보다 앞서 들어가서 화려한 침대에 누웠다. 그저 움직임

인데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멋지다. 역시 인간은 타고나야 한다. 외모든 품위든.

그가 나른하게 누워서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뭡니까?」

「누워. 같이 자자.」

누구 마음대로요?

어이가 없어서, 반대쪽 침대가에 엉덩이를 걸쳤다. 나는 누울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에게 무언가를 말

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독수리가 먹이를 채듯이 내 손목을 낚아채는 바람에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폐하!」

「거짓말.」

황제가 나를 연인을 재우듯이 품으로 끌어당기고는 등을 토닥이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비난했다.

「뭐가 거짓말이라는 겁니까?」

그 품안에 안긴 것보다 ‘거짓말’이라고 단언하는 황제의 목소리가 더 신경쓰여서 우선 물었다.


「‘폐하’라는 말. 넌 나를 황제로 생각하고 있지 않아.」

「황제 폐하라는 건 아무리 하늘에서 떨어진 다른 세계 사람이라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황제라고 부르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지. 하지만 넌 내가 황제라고 생각하지 않

아. 달은 어떤 곳이었는지

궁금하군. 너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지 않거든.」

그럴리가. 도망을 칠까 말까 고민한게 다 무엇때문인데.

「전 폐하가 무서운데요.」

「설명하기 어렵네…… 넌 내가 황제라서 무서워하는 건 아니야. 그리고 날 무서워하지 마. 난 네가 날

무서워하지 않는 쪽이

좋으니까.」

갑자기 졸음이 왔다. 무언가가 귓가에 속삭여지고 있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 그리고 갑자기 쏟아

지는 졸음.

「평온하게 잠들도록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는 것처럼 나는 잠에 빠졌다.

-또 보네. 잘 지냈어?

키가 큰 황제다. 이 쪽은 황제가 아님을, 나는 아슬아슬하게 기억해냈다. 높은 곳에 있는 얼굴을 올려

다보자 그가 싱긋 웃었다.

-황제 폐하 아니시죠?

-글쎄?

남자는 싱글 싱글 웃을뿐이었다. 그 황제와 얼굴만 닮은 게 아니라 성격도 비슷한 것 같다.

-혹시, 형제인가요?

-이런, 황제는 너에게 자신의 소개도 하지 않았나. 그에게는 형제가 여러명 있지. 하지만 그의 어머니

는 그를 낳고 나서 죽었지

않은가.

처음 만났을 때는 분명히 현실이었다. 이 곳은 꿈같기도 하고 현실같기도 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

은 어둠.

-제가 어둠을 싫어하면 없애주신다면서요.

-당연하지.

-그런데 왜 어둡죠?

빨리 밝게 해달란 말이야. 그 이상한 재주로!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아지처럼 고개를 갸

웃, 그리고 눈을 한번 깜빡.
생긴 건 황제지만, 황제는 이럴 타입은 못 될 것 같다.

-여기는 그대의 의식속인걸. 다른 개체의 의식까지 움직일 수는 없어.

-남의 의식속에 마음대로 들어오는 건 되고요?

황제와 똑 닮은 침입자가 싱긋 웃었다.

-그런 걸 능력이라고 하지.

-하긴, 도둑질도 능력이죠.

이죽거려줬다. 아름다운 세계인데 복잡하고 기괴하다. 햇살도 별빛도 이토록 아름다운데…… 도무지 상황

도 사람도 알 수가 없다.

배경만 선명하면 뭘 하냐고. 눈 보신은 좀 되지만.

-그대는 정말 재미있어.

황제와 조금 다른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제의 웨이브진 금발이 아니라 이쪽은 스트레이트다. 황제

는 보기 좋은 은색에

가까워지려 하는 결이 가늘고 옅은 금발인데, 이쪽은 마치 황금실을 매단 것 같다. 황제의 눈동자도

옅은데 이 쪽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금색의 눈동…… 잠깐, 황제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만이 금발의 금안이라고 하지 않았던

가?

그럼 이 사람은 뭐지?

아니, 이 사람, 정말 ‘인간’이야? 귀신 종류 아닐까? 판타지에 나오지 않나……나이트 메어라고.

-사람맞아요?

내 말에 남자가 놀랍다는 얼굴을 했다. 그는 내 바로 앞까지 얼굴을 들이민채로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

게 쓰다듬었다.

-똑똑하네. 총명한 연인을 가진 자는 편하지.

-나이트 메어나 귀신류에요?

호러물은 질색인데.

내 말에 그가 ‘푸하하’하고 웃으면서 내 곁에서 떨어져나갔다.

-총명한데다 유머러스하군. 나이트메어? 몽마를 말하는건가? 나한테 나이트메어? 총명한 연인은

인생을 편하게 하지만, 유머러스한 연인은 인생을 즐겁게 만들지. 인간들은,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늘 무한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니깐.

그는 한참동안 웃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타인이 한 이야기를 곱씹으며 웃고 웃다니. 뭐 이런 인간(인

지 의심스럽지만, 일단.)

이 다 있냐.

‘사람이 아닌, 대화가 통하는 개체’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나는 나대로 당황스러웠다. 이 곳은 내

의식속이라는데,
왜 이렇게 어두운 걸까. 며칠간의 일을 떠올리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어두울만은 하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언제쯤 웃음을 멈출까, 하는 생각이요.

내 말에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한참전부터 나는 웃고 있지 않았어. 그대는 거짓말쟁이로군.

갑자기 날아오는 비난에 어이가 없어졌다.

-동그랗게 눈을 뜨니 귀엽군. 아니, 그대는……

황제와 비슷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가 말했다.

-그대는 귀여워. 난 인간이 싫지만, 그대는 귀여워. 이세계의 사람이라 그런가? 그대에게서는 반짝 반

짝 빛이 난다.

수억명의 사람들에게 묻혀있어도, 나는 그대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것을 뭐라고 하지? 인간

의 언어로,

이것은 무엇이지? 운명의 힘은 이토록 대단한건가? 내 시야를 바꾸어 놓을 정도로.

그대는 인간이다. 그렇게 보이는군. 간간히 다른 느낌을 주지만, 그래도 종족은 인간임이 분명해. 말해

봐라.

그가 자신의 심장위에 손바닥을 대고 말했다.

-이 감정은 뭐지?

……일단은 사랑이라고들 하는데.

-모릅니다.

밀어붙이자. 같은 얼굴의 두 사람에게 연애문제로 신경쓰고 싶지 않아. 황제는 인간이기나 하지. 이쪽

은 타인의 무의식에까지

자기 멋대로 들락 거릴 수 있는 인간 아닌가.

내 말에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대는 정말 거짓말쟁이로군. 이건, 사랑이잖아.

-알면서 묻는 쪽이 나쁜 거 아니에요?

사람을 떠본거잖아.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확신이 필요했을 뿐이야.

-그러세요. 그럼 확신해드리겠는데, 사랑은 아니에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그가 또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경우는……


있다. 드믈기는 하지만.

내 친구 중에도 아침 등굣길에 만난 여자애에게 반해서 일주일이나 골목에서 잠복한 녀석이 있었다.

-없어요.

어차피 거짓말쟁이 된 거, 하나 하나 두개 하나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쟁이인 것은 똑같지!

-‘없다’?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잖아.

국무대신도 그 놈의 ‘예외’를 말하기는 했다만.

-예외란 흔치 않으니까 예외죠.

여기서 지면 안된다. 황제 하나만으로 충분히 버거워. 그나저나 이 동네 남자들은 툭하면 모르는 남자

에게 연애질 거는게

습관인가?

황제는 눈을 도로록 굴렸다. 아니, 황제를 닮은 남자가 눈을 굴렸다. 그는 눈동자를 왼쪽으로 굴리고

오른쪽으로 굴리더니

웃으면서 단언했다.

-그럼 내가 예외의 경우군. 이런게 흔치 않은지는 잘 몰랐어.

-아니요, 흔치 않기 때문에, 이건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에 대해 뭘 아신다고 사

랑타령이세요?

-상대를 알아야만 사랑이 성립되는 건가? 사랑이라는 건 결국 감정이니, 느끼면 그만 아닌가? 아,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닌데

내가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대의 요지는 이런건가? 인간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주는 상대에

게 그 감정을 허락받아야

하는건가?

느릿한 척 하면서 빠른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남자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단이 없다. 한참을 서 있다가, 나는 갑자기 눈을 확 떴다.

어지러울 정도로 빨리 일어나서 부릅뜬 눈을 다시 질끈 감아야했지만.

꿈 내용이 생생하다. 그것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이 더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잘 자네.」

황제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셨다. 천막이 하나 있는데도, 역시 온실이라서 그런

지 햇빛이 강렬했다.

「좋지 않은 꿈이라도 꿨나보지?」

햇살속에서 황제가 반짝거렸다.

「예……」

애매한 내 대답에 황제가 「안됐네.」라고 말하며 나를- 들어올렸다. 어깨에 매단것도 아니고, 영화에
서 남자가 여자를

들어올리듯이, 그렇게.

「싫……!」

「욕실까지만 데려다 줄게.」

「걸어갈 수 있어요.」

「알아.」

알면 내려놓으란 말이다! - 라고 소리칠려는데 이미 욕실이었다. 그러고보니 아침만 되면 나타나서 인

사하는 시녀장이

오늘은 안 보인다.

황제는 나를 욕실에 세워두고 옷을 벗길려고 했다. 놀란 내가 뒤로 물러서자, 황제가 얼굴을 찡그렸다.

너가 황제면 황제지, 남의 옷을 왜 벗겨!

「위험……」

나온 말은 의외로 다른 말이라 내가 눈을 좀 크게 뜨고 다시 말해보라는 얼굴을 한 순간, 황제가 눈을

감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미끄러졌다.

다행인 점은, 뒤가 물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욕조에 빠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불행인 점은 내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옷까지

젖었다는 것과 눈앞에 나를 마누라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황제가 있다는 정도였다.

대리석 욕조가 큰 것은 둘째치고 깊었다. 내 어깨 바로 밑까지 물이 있었다. 위쪽에 의자가 있지만, 다

른 욕조들이

의자에 앉으면 바닥에 발이 닿는 것과는 달리, 이 욕조는 발이 닿지 않았다.

「월인이 다시 내려올 것이다.

깃털같은 움직임으로 황제의 품에 내려올 자를 환영하라.

태양을 숭배하는 자들이여, 달이 그대들을 구원할지니.

월인은 황비가 되어, 황제의 곁에서 신의 눈으로 굽어 살피리라.」

갑자기 황제가 이상한 말을 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더니 황제가 다정하게 웃으며 내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

락을 떼주었다.

욕조 위에서 쪼그리고 앉아도 생긴게 예술이니 왠지 멋져 보여서 나는 짜증이 났다. 잘나게 태어나어

좋겠다.

「이게 계시였어.」

닭살돋는 계시네.

내 감상을 듣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아 그저 입을 다물고 있자니 황제가 내 뺨에 입술을 대었다.

차가운 입술이 닿았다가 사라졌다.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사람을 나는 가지게 된거지.」

분명 이 세계에서 나같은 인간은 나 한명 뿐이겠지만 그래봐여 별 볼일 없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누군가를 구원할 힘이 없어요.」

그런 힘이 있다면 나 자신을 구원하겠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황제가 부드럽게 웃었다.

뭔가 이상하다.

나는 그 얼굴에 빠져들 것 같이, 쳐다보았다. 눈길을 돌리고 싶은데 돌릴 수가 없다. 왜인지 모르겠다.

그의 웃는 얼굴은 아름다웠다. 아니,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든 화를 내든 굳히든 아름답다. 그런 문

제가 아니었다. 그는

‘계시’를 말하면서 ‘내가 구원을 못 한다’고 하는데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평화로웠지만……

「아무도 구원하지 않아도 돼.」

간단하게 말하고 그는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내 곁에만 있어.」

어긋나있다. 처음부터 구원을 할 월인이기 때문에 내가 이런 대단한 대우를 받으며 황비가 되어야 한다

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황제는 왜 지금 ‘구원 하지 않아도 되니 곁에만 있으라’고 하는 걸까?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잘 못 이해한건가?

내 표정을 보고 황제가 가볍게 한숨을 토했다.

「너는 늘 뭔가를 생각하고, 결론을 내려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확인하고 있군. 확실히 말해서 나는 너

와 결혼하고 싶어.

한 눈에 반했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네 생각이 났고, 다음 날은 너와 이야기

하고 나서 더욱 좋았고,

그렇게 매일같이 조금씩 네가 좋아지고 있어. 너와 있으면 즐거워.」

맙소사, 나 여기 떨어진지 일주일만에 프러포즈 받은거야? 눈을 깜빡이는 내게 황제가 입술을 대려고

해서 나는 황제를

밀쳐냈다. 황제는 얌전히 밀려나주었지만 다음에 다시 나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고, 나는 물 속으로 들

어갔다.

깨끗한 물이다. 물 속이 훤히 보일만큼 투명하고 따듯한 물속인데, 나는 오한이 났다. 황제도 그렇고

그 귀신인지 뭔지

모를 황제를 닮은 남자도 그렇고, 마치…… 마치,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것 같잖아.

‘내가 여자라면’이라는 전제를 두면 이건 더 말할 필요도 없는 프러포즈가 된다. 그리고 그 뜻은……

내 인생은 종이 쳤다는 것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숨이 막힐 것 같은데 올라갈 수가 없다. 물밖에서 나를 쳐다 볼 황제의 옅은 금색 눈이 무서워서, 나는

올라갈까 말까를 계속
갈등하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가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황제가 나를 끌어안고 내 입술에 키스했다. 눈이 마주치자, 황제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 안에 혀를

넣으려는 순간,

나는 더 참지 못하고 황제를 다시 밀치고 위로 올라갔다.

숨이 막힌다 했더니…… 올라오다 물을 좀 먹었다 보다. 계속 콜록거리며 기침이 나왔다.

그리고 겨우 기침을 멈췄더니, 황제가 다시 입술을 대고 혀를 들이밀었다. 다시 밀쳐내려는데, 이번에

는 황제가 힘을 줬다.

그는 나를 잡아 안으려고 했고 나는 그를 밀쳐내려다 우리는 욕조 끝까지 움직였다. 그리고 벽에 닿았

다고 생각한 순간,

황제가 내 팔목을 잡아서 벽으로 밀어붙이고 키스했다.

나는 이제껏 키스도 섹스도 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추억으로 남기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충분히 할 수 있는

환경(-이라기보다 하지 않으면 병신되는 환경)에서도 하지 않았다.

남자와 첫키스라니. 게다가, 나는 첫키스였는데 비해 상대는 상당히 놀아본 듯 능수능란하게 남의 혀를

가지고 노는게 아닌가.

이제껏 키스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키스로 신음하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쾌

락도 주지 않는 키스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기분마저 있었다. 입 안이 성감대인 사람도 있나?

황제가 고개를 조금 더 틀어서, 더욱 깊이 혀를 넣어왔다.

이제 나는 사람들이 왜 키스를 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공유’였다. 가장 더러운 것

을, 서로 공유하는 듯한

기분. 그 비밀스러운 감각이 나를 궤뚫었고, 나는 엉겁결에 신음했다. 황제가 감았던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실눈을 뜬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황제가 나를 더욱 강하게 안았다.

이렇게까지 강하게 안기어본 적은 없었다. 두려움과 안도감이 교차했다.

등에 닿은 벽이 더 이상 차갑지가 않다. 입 안의 혀가 더 이상 낯설지도, 거부하고 싶지도 않다.

아무도, 아무 곳에서도 나를 이렇게 안아준 사람은 없었다. 이래서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타인끼리도

섹스하는 걸까.

그것은 쾌감의 문제가 아니라 다정함의 문제였던 걸까.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외롭기도 하고 여기는 현실세계도 아니니까, 남자와 키스해도 된다

는 거야?
나는 머리를 흔들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그는 내 손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다른 한 팔

로 내 턱을 쥐었다. 그리고

다시 키스했다. 온 입안을 핥고, 혀의 오돌토돌한 부분을 쓸어서 나를 다시 무너뜨리고도 모잘라 내

타액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고인 침이 사라진 내 입안을 다시 애무했다. 그의 손가락이 내 등을 타고 내려왔다. 확인하듯이

뼈를 하나 하나 문지르는

그 행동에 애가 타서 황제의 몸에 바짝 붙었다. 그러자 황제가 더욱 세게 나를 안았다. 몸이 너무 붙

어서 젖은 옷을 두고

서로의 성기가 맞닿았다.

처음 느끼는 타인의 쾌감.

처음 접하는 숨 막히는 시선. 황제가 말 없이 내 것에 자신의 것을 비비기 시작했다. 맙소사,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내 것이 커져가고 있다. 황제의 것은 이미 단단해졌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창피하면서도, 너무나 좋

다. 상대가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말이 없이도 알 수 있다.

나는 마지막으로 힘을 다해서 그를 밀었다. 하지만 그는 당연스럽게도 밀리지 않았다. 힘을 다해서 밀

었다지만, 후들거리는

내 팔은 그저 황제의 가슴에 닿았다가 떨어졌을 뿐이었다.

황제는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키스를 하며 움직였다. 우리는 둘 다 성기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

다. 황제가 내 성기에

문지르며 내게서 입술을 떼고 이를 악물었다.

고통스러운 듯이, 찌푸린 얼굴은 애절하기까지 했다. 그가 나를 벽에서 떼내어서 꽉 움켜안았다. 우리

의 페니스는 서로에게

짜부러질 듯 밀착되었고, 그 순간 고통과 쾌감에 못 이겨 나는 사정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황제도 사정했다는 걸 알았다. 황제가 나보다 더 오래 쿨쩍였다. 성기 크기와 몸집 크기

차이가 상관이 있던가?

잘 모르겠다. 황제의 성기는 컸다. 남자로서,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갔다.

「미치겠군.」

황제가 내 등이며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입술이 닿는대로 키스했다.

「미치겠어.」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너는 미치겠냐? 나는 돌아버리겠다.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거야?

현기증이 났다.
황제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듯 빤히 쳐다보더니 물었다.

「왜 후회하는 얼굴이지?」

몰라서 묻습니까.

「어차피 너에게 거부권은 없어. 나는 황제고, 너는 나의 비니까.」

그래, 너 잘났다. 대꾸할 가치도 못 느껴서 수면만 쳐다보는데, 황제가 다정하게 나를 안았다. 아직 흥

분의 잔재가 남아있어서

마음은 아무런 감각이 없는데 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몸이 움찔거리는 걸 황제는 그저 안고 토닥였다.

「너는 정말 특이해.」

황제가 속삭였다.

「그래서 정말 마음에 들어.」

원래 좋아하면 이렇게 달라붙고, 무조건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가. 내 주위사람들의 연애를 돌이켜보았

다. 정상적인 연애는

한명도 없었지만, ‘진심’이 들어가 있던 연애질을 한 커플 몇이 떠올랐다. 조심스럽고, 상대의 의중을

알아내려 애쓰고,

다가가도 될지 걱정하고. 그런 것이 아니던가.

황제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솔직하다. 만나지 일주일도 안되서 좋아한다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다.

하긴 그냥 마음에 드는 것일지도 모르지. 쟤는 황제고, 쟤를 좋다고 하는 인간이 한 둘이었겠어. 얼굴

도 잘 생겼고 돈도 많고

권력도 있으면 여자는 꼬이기 마련이다. 졸부 3 세들에게도 그렇게 여자가 몰려드는데, 하물며 이 쪽은

한 나라의 지배자

아니시던가. 그러다보니 마음에 들면 눈치 볼 거 없이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러모로 나와는 다르네. 같은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속이 좀 뒤집힐려다 멈췄다. 황제는 세습제. 어

차피 날 때부터 은수저

를 입에 백개는 물고 태어난 인간이다.

「글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며.」

그 말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뭐야, 내 일거수일투족이 보고되는건가?

「레니한테 배워. 그녀가 가장 잘 가르칠거야.」

그리고 레니 데이비드, 회색 머리카락을 한 미인 비서관이 이틀에 한 번 온실에 들렸다. 유브라데의 글


자는 영어와

비슷했고, 나는 곧 아주 쉬운 단어들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황제는 매일 밤 내게 왔다. 우리는 가면 갈수록 말이 없어졌다. 황제가 들어오면 시녀들은 나가버리기

고 황제의 직속

시종들이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동안 우리는 가벼운 대화만을 나눴다.

오늘은 뭘 했어. 밥은 먹었어. - 황제는 그렇게 물었고.

글자배우고, 놀았어요. 먹었어요. -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사라지지 않았다.

시종들을 물리고 나면 황제는 초조하게 나를 쳐다보고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황제가 다가와 나

를 끌어안는 순간,

모든 생각이 날라가고는 했다.

매일 보고, 매일 입술을 부딪치다보면, 감정은 생긴다. 이런게 정이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었다. 황제와

섹스를 하고 황제와 서로 부둥켜 안고 자다보면 그렇게 되기는 하는데.

문제는- 그 정이 마음이 아니라 몸으로 쌓였다는 것이다.

일단 무엇보다도, 나는 이대로 황비가 될 수는 없다. 황비가 뭐하는 자리인지 잘 짐작은 안가지만, 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더라도 이 곳에서 남자와 이렇게 서로의 자위를 도와주면서 살 수는 없다. 이 궁을

나가서

다른 여자와 살아야겠지. 나를 행복하게 해 줄, 내가 행복하게 해 줄수 있는 사람과.

그런데 한 번 개겼다가 이렇게 온실로 쫓겨난 상황이니 한번만 더 개기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게다

가 저 황제는

평소에는 만만해도, 수틀리면 목을 치는 타입이라고 하니…… 아니 수가 안틀려도 목은 친단다. 시녀 누

나들 말에

의하면 그렇다.

황제의 무시무시한 일화는 한도 끝도 없이 많던데, 그 중 최고인 이야기를 하나 꼽자면……황태자 관련이

다.

황제에게는 지금 네 살짜리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의 탄생비화가 정말 죽인다.

황제는 전 국무대신 따님-당시에는 날아가는 새도 호통 한번으로 떨어뜨릴 수 있을만한 집안이었다고 한

다.-과

황제의 분홍빛 로맨스가 있었단다. 그녀도 무척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황제는 말할 것도 없고한 상태여

서,

내심 여러 사람이 기대하고 있는 커플이었는데, 황제는 그녀를 비로 맞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그녀는 황제가 원치 않은 아이를 임신했다. 가면 갈수록 황제는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 황제는 체외사정을 했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찍어 그……안쪽에 발라넣는 짓을 계속

했다고 한다.

사정하자마자 나가버린 황제의 뒤에서. 결국 임신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이를 낳고 황제에게 아이

를 보여주며

자신의 애정을 호소했다고 했다. 그런데 황제는 그녀의 목을 자르는 것으로 모잘라 그녀의 집안 9 대를

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도 죽이려는 걸 모든 신하들이 눈물로 애걸복걸해서 살렸다는 것이다.

성격 파탄자이자 말로만 듣던 폭군의 실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날은 너무 놀라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자신의 아이면 예뻐야 하잖아. 아이를 죽이

려고 하다니,

버림 받은 아이로 살아왔던 나로서는 황제가 싫어질 것 같았다.

……그래, 싫다.

그런데 몸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나에게는 잘해주는 황제다. 섹스하고 잠드는 나를 씻겨놓는 것도 황

제고, 잠깐

열이 났을 때는 모든 일을 미루고 내 곁에 있었다는 황제였다. 그 정성 때문인지, 황제와 물건을 부비

는 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싫다.

아들을 죽일 수 있는 권력자라니, 싫다.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자신의 아들을 위하고, 남편을 사랑할

수 있는 여자와 결혼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만을 사랑하고 아이를 위해 살다가 죽을 것이다. 평화롭고 완전한 삶을 꿈구고 있

다. 거기에 황제는

어울리지 않는다.

도망쳐야 해.

혼례식 전에 도망쳐야 한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 고개 돌려봐.」

어느 새 들어온 황제가 목덜미를 핥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뒤에 서 있는 그에게 체중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한달 만에 익숙해진 감각들이 곤두서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저녁도 같이 못 먹었군. 황제란 바쁜건가.

「무슨 생각 하고 있냐니깐.」

「아무 생각도.」
「응……」

황제의 입술이 익숙하게 느껴져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이 모든 것들이 익숙해져도 안돼.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다.

젠장, 머리가 멍해진다. 또야.

거부할 수도 없다. 그냥 있을 수도 없다. 이런 것을 두고 사자성어로 ‘사면초가’라고 하는 것인가.

몇 번이나 생각했다. 돌이켜서, 돌이켜서, 돌이켜서. 지금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나

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최종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황비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망가야 한다. 최종 목적은 집으로 돌아갈 방법

을 찾아 돌아가는 것이다. 친구라고 말할 수도 없고, 부모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하지만 내 과거를 짊

어진 사람들이 있는 그 곳으로.

쾌락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라고.

「밖에 나갈 수 있게 해주세요.」

한달이나 이 온실에 쳐 박혀 있었다. 아름다운 곳이지만 이제 마음이 답답했다. 내 말에 황제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래, 너는 내가 네 마누라로 보이겠지. 자신의 아이를 낳은 여자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잔혹한 네가

이토록 쉽게 납득할 정도라면, 이 세계에서 계시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겠다.

하지만 나는 아니야.

「왜?」

「답답하니까요.」

「여기에 다 있잖아. 풀도, 연못도, 침대도.」

황제는 나갈 이유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 곳에는 모든게 다 있었다.

엄청나게 큰 이 온실에는 새도 호랑이처럼 보이는 동물도 있었다.

「바람이 없잖아요.」

「창문을 열라고 해.」

「다리도 없고요.」

「만들어주지.」

「……제 기분전환을 어떻게 해주실 건데요?」

황제는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도망갈려는 걸 눈치라도 챈 건가? 그 남의 머릿속으로 출장오

는 재주 가진 남자와 얼굴이 비슷하더니 혹시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든가……

「표정이 차가워.」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던 황제가 원망조로 다시 말했다.

「너는 차가운 사람이야.」

아들을 죽이려던 너만 하겠니.


「낮에만이라면 허락할게.」

어차피 밤은 네가 오니 움직일 수가 없잖아.

어떻게 나가야 하는 걸까? 이 궁의 배치도는 어떻게 될까?

「대신에 키스해줘.」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황제가 손을 뻗은 사이였다. 황제가 오지 않는 다면 아무런 수가 없기에 임신

을 시도했던 여성이 있었을 만큼 일방적인 관계들을 가지고 있던 황제로서는, 반대쪽으로 통하는 일방통

행을 참기 힘들지도 몰랐다.

어차피 한 키스, 내가 하나 네가 하나 그게 그거지.

나는 그의 목에 매달려 키스해주었다. 남자끼리라는 거부감은 애저녁부터 없었다. 일단 해보니, 생각보

다 나쁘지 않더라.

아니, 사실은 무척 좋았다. 남자끼리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겪어보니 별 거 아니더라. 절대

안되는 마약도, 술도,

담배도, 별 거 아니었던 것처럼.

황제의 숨이 헉, 하고 급게 들이쉬어졌다. 황제는 내가 어설프게 혀를 들이미는 순간, 나를 끌어안고

허겁지겁 내 입 안

곳곳을 빨아대었다.

절박한 키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의 교류. 소용돌이치는 물살은 너무 빨라서, 나는 얼굴이 찌푸려졌다. 미

안, 아무리 생각해봐도

네가 나에게 잘해주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 같아.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해.

한달 만에 나온 밖은 부드러운 미풍이 돌고 있었다. 내 마음까지는 닿지 않는 이 곳의 비단결같은 바

람.

마음은 정해졌다.

일단은 도망치는 거다!

3. 어린 양 (1)

나는 매일 조금씩 산책 시간을 늘려갔다. 처음에는 갑자기 황제가 나타난다던가 하는 일이 있었는데 -


그는 우연인 척 했지만, 아무리 봐도 고의였다. -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일단 황궁은 엄청나게 컸다. 예상보다도 엄청난 크기에 현기증이 났다. 그리고 나는 그 황궁의 중심부

보다 조금 오른쪽에 있었다. 궁의 중심부에는 예전에 내가 아침 식사를 하러 갔던 황제의 궁이 있었다.

연못으로 둘러쌓인 그 황제의 궁은 유사시에 연못에 악어를 풀어놓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되어있다고 한

다. 그리고 그 다리들도 무슨 단추를 누르면 전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 궁이 가장 중심부에 있고, 그

리고 내가 살고 있는 온실이 오른쪽 윗쪽에 있다.

일단은 황제의 궁보다 외부와 가까운 편이다. 그러나 정작 담을 본 적이 없어서 넘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내 모든 것은 황제에게 보고가 들어가는 것이

분명했으니까.

도망친다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글을 배운 것은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유브라데어는 영어와 비슷한

면이 있어서 지도는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황제의 서고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준 것은 황제의 배려였다. 그는 내가 돌아다니는 것보다 어느 한 구석

에 쳐박혀 있는 쪽을 환영했고, 그래서 내가 서재에서 책을 읽어보고 싶다고 했을 때 흔쾌히 허락했다.

하루 종일 나는 글자가 적은 책들부터 매달렸다. 하루 종일 매달리고도 모르는 글자들은 비서관에게 물

어보기를 반복했다. 라프라 시녀장도 글을 알고, 시녀 누나들도 글을 알아서 대답해 줄 사람은 많았다.

다행이었다.

이렇게 공부했으면 내 수능성적은 끝내줬을텐데. 지금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것을 살짝 후회하면서, 나는

사흘이나 쳐박힌 끝에 황궁 배치도를 찾아냈다.

일단은 무리였다. 황궁을 벗어나는 것은 무리였다. 아아주 무리였다. 황궁은 지나치게 컸던 것이다. 황

궁의 주변은 숲뿐이었다. 숲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도와 비교해 본 결과는 그랬다. 황궁이 중심에

있다고 했을 때 그 주변은 숲으로 둘러쌓여 있다. 그 숲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다. 도시라는 원

안에 숲이라는 원, 그리고 그 원 안에 황궁. 이런 구조였던 것이다. 맙소사, 이 황궁을 어떻게 빠져나

가.

절망스러웠다.

결국 배치도며 지도며 잘 집어넣고 하루 종일 황궁내를 서성거렸다. 그래봐야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내

온실이 있는 하렘구역부터 황제의 궁까지. 그나마도 왼쪽 건너에 있는 황제의 숲은 들어갈 수 없었다.

하렘내도 충분히 아름답기는 하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와, 수많은 화초들, 미로같은 정원, 그리고 아름

다운 소규모의 방들.

아름다운 누님들.

눈 보신은 되지만 마음은 여전히 심난했다. 빠져나갈 구석이 없잖 아. 아무리봐도 없다.

아니야, 그런 게 어딨어. 난공불락이니 뭐니 하는 감옥에서도 사람이 빠져나가는 판국이야. 웃기지 마.

이 동네는 인터넷도 없어. 일단 빠져나가면 될 거야.

걸으면서도 절로 얼굴이 찌푸려지는데 어떤 여자가 갑자기 정원 수풀을 헤치고 달려나오다 나랑 마주쳤


다. 놀란 그녀가 잘 못 서서 넘어지려는 걸 내가 겨우 잡아주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웬만한 시녀

누나들도 나보다 큰 데 이 아이는 작다.

울었는지 빨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가여워졌다.

「괜찮아요?」

알지도 못하는 사이-라고 하려다 생각났다. 전에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황제 궁에서 돌아오는 길

에.

시녀인가, 라고 생각했었다. 왜냐면 시녀장이……

「이게 무슨 행동이십니까? 기혼에서는 공주께 예법을 가르치지 않는 겁니까?!」

이렇게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공주였어? 그런데, 시녀장 왜 이래요?

「마마, 가시죠! 이런 곳에 더 계셔봐야……!」

시녀 누나들도 가차없이 적의를 드러내는 가운데 공주는 혼자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짜증이 났다. 나와 공주와 새 어머니가 겹쳐졌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굳어져서 나왔지만, 나는 하고 싶

은 말을 했다.

「다들 왜 이래요? 먼거 가 계세요.」

「마마……」

다들 만류하는 목소리가 늘어졌다. 그들이 나를 모시고 있는 건지, 나를 감시하는 건지 순간 짜증이 났

다.

「먼저 가 계시라니깐요! 아니면, 지금 절 감시하시는 건가요?!」

지나친 말이었다. 내 말에 시녀 누나들이 일제히 시녀장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얼굴이었다. 나도 당황

스러워. 한숨을 토했다. 실은 이 시녀군단도 꽤 짜증스러웠다. 없으면 좀 자유로울 것 같은데 완전히

지쳤다. 왜 이렇게까지 일거수 일투족을 쫓아다니는 건가.

「조금 후에 다시 뫼시러 오겠습니다.」

시녀장은 그 말을 남겨놓고 시녀들을 데리고 갔다. 마지막으로 보낸 시선은 염려로 가득찬 것이어서,

더더욱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래, 저 사람들은 감시를 하려는 게 아냐. 그냥 나를 돌봐주려했을 뿐이

지. 단지, 그 돌봐주려는 그 부분이 내게는 감시가 되지만.

「괜찮아요?」

그녀는 어렸다. 내가 그렇게 묻는 순간, 그녀는 무너졌다. 내 품에서 그녀는 미친 듯이 울기 시작했다.

통곡에 가까운 그 울음소리 때문에 더 우울해졌다. 나도 울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무릎이 꺽인채로, 체중을 전혀 모르는 남자에게 맡긴 채로 여자는 무척 많이 울었다.

「세번째 물어보는 건데, 괜찮아요?」

내 말에 그녀는 새빨개진 코를 하고도 웃었다.

「괜찮아요.」

끅끅거리면서 울더니 마음은 좀 풀어진 모양이다. 물을 좀 가져다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녀


는 분수로 가서 물을 마셨다. 분수물이라니 마셔도 되나. 눈살이 찌푸려졌다.

「우리 두 번째 만나는거죠?」

내 말에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저, 기억하세요?」

「예.」

그 때도 시녀장이랑 분위기 안 좋았었죠. - 그 말이 입술까지 올라왔다 내려갔다.

「우와, 대단해. 월인이 절 기억해주시다니 굉장해요!」

마치, 연예인이 기억해준 것처럼 여자는 좋아했다. 아니, 뭐 굉장할 것 까지야. 이 곳에 와서 인간관계

가 아주 협소해진 나로서는 잊을 수가 없다오. 이런 말은 안 해도 되겠지.

「아까는 왜 울었어요?」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유모랑 싸웠어요.」

그리고 한 시간동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이름은 라로로, 기혼의 공주였다. 기혼과 유브라

데가 전쟁을 했을 때 황제가 기혼의 수도 근처까지 밀고 들어갔었단다. 그리고 현재 휴전중인데, 기혼

에서는 계속 휴전을 제시하는 입장이고, 자신들의 평화 입장을 알려주기 위해서 보내온 공주가 그녀라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어느 세계나. 힘 없는 자는 불쌍하다. 그녀는 이 곳으로 와서 가진 수모를 다 당하고 있

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내가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면 영광이죠. 조국을 위해서 당연히 노력할거에요.」

긍정적이구나. 나는 당장 토끼고 싶어서 난리인데. 나보다 그녀가 더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나라면 절

대로 못 버티는데. 그녀는 잘도 버티고 있다.

내 이야기를 해봐야 도망가고 싶다-밖에 더 있겠는가. 멋지네요, 라고 말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 금발머

리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굳은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왜 저렇게 기분이 나쁘지?

내 시선을 따라 그 쪽을 쳐다 본 라로가 부들부들 떨면서 땅바닥에 엎드렸다. 황제가 무섭긴 무서운가

보다.

전쟁은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나라를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인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건 어떤걸까.

황제의 얼굴이 더 차가워져 간다.

저 남자가 나한테는 꽤 다정하지만 남들한테 가차 없다는 것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게다가 공녀들

은 노예 다루듯 한다는 말도 들었다. 괜히 애꿎은 여자에게 피해가 가기 전에 움직여야겠다.

「왜 표정이 그래요?」

죽인다고 할까봐 겁나게.

「무슨 이야기를 했지?」


내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도 같이 물었다.

「그냥, 이야기요.」

「내용이 뭔데?」

「날씨같은……」

내 말에 그가 내 어깨 너머 여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돌아가지.」

문득 눈에 들어 온 하늘은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속은 타들어가는데 무정한 시간은 잘도 간다.

도망쳐야 해.

머릿속에서 하루종일 생각하는 그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황제의 손이 더욱 교묘하게 내 등을 애무

해갔다.

「시오엔……」

어느 새 섹스때는 이름을 부르게 됐다. 그는 내가 이름을 부르자 잘했다는 듯이 입술에 키스를 건네고

내 엉덩이

사이에 자신의 것을 문질러댔다.

처음 그가 이랬을 때는 정말 놀랐다. 설마하니, 지금 내 뒤에 삽입하겠다는건가! - 싶어서. 완전히 굳

은 내 몸을

어루만지던 그는 이렇게 엉덩이 사이에 문지르기만 했다.

그 위험하도록 매력적인 감촉에 내 넋이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쾌락에 빠지지 말란 말

이야.

자신을 몇 번이나 비난해봐도, 도저히 제 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다. 그를 거부할 수는 없겠지만, 나 자

신이

제 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는 있는 거 아닌가.

아, 빌어먹을. 제발 제 정신을 차려봐!

눈 앞이 흐려진다.

익숙한 사정감. 황제의 손이 세게 내 것을 잡았다. 기분좋은 아픔이 도리어 쾌락의 절정을 주었다.

사정하는 가운데, 엉덩이 사이에서 따듯한 액체가 느껴진다. 눈을 감았다. 단단한 팔이 뒤에서 나를 끌

어안고 있었다.

「빨리 합방식을 치루고 싶군……」

황제가 목소리와 한숨과 섞여 나왔다.

「이미 치루고 있잖아요.」

내 말에 황제가 피식 웃었다.
「틀려.」

뭐가 틀린데? 그냥 섹스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를 끌어안으며 황제가 웃음진 목소리로 속삭

였다.

「다른 이와 닿지 않은 사람과 합방식을 하면, 상대를 가질 수 있어. 그 인연은 다음에도 이어진다고

하지.」

아이고, 웃겨라. 그런 걸 믿는다고?

「어차피 죽으면 끝이잖아요.」

「환생하니까.」

환생을 믿다니. 이 동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오늘도 세 번이나 사정해서 사정없이 졸렸다. 이미

익숙한 품안에서 졸고 있는데 황제의 목소리가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인간은 영원히 환생해. 쉬고, 다시 살아가는 거야.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그 영원한 여정속에서 혼자

가 되지. 길을 잃지 않도록, 누군가를 잡아두는 거야. 그 사람을 통해서 나를 세울 수 있도록.」

「잡히는 쪽은 불쌍하군요.」

「서로가 서로를 잡아두는 거야. 끝 없이 이어지는 관계속에서 같이 나아가는 거지. 언제까지나 혼자이

고, 또 언제까지나 같이야.」

뭔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그러나 저러나 무척 졸려서 나는 눈을 감았다.

「아들도 있으신 분이니, 저와는 합방식을 해봐야 소용 없잖아요.」

「그녀에게 단 한번도 삽입한 적이 없어. 나는 아직 합방식을 미뤄두고 있거든. 너는 누군가와 이미 했

나?」

「폐하와 한 게 처음이에요. 키스든 섹스든.」

그 말에 황제가 나를 힘주어 안았다. 팔꿈치가 접혀서 아팠지만 계속 졸렸다.너무 졸려서 견딜 수가 없

다.

정신 없이 잠에 빠져 들었다.

-오랜만이군.

그러네요. 남의 머릿속으로 놀러오는 형님.

-잘 지냈어?

-그런데, 왜 툭하면 남의 머릿속으로 놀러오세요?

-실체가 없거든.

유령 아니랬잖아!

-귀신류 아니라면서요!

내 말에 그가 또 갸웃갸웃 하더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큰 키를 접다시피해서 나에게 밀착되었

던 그가 싱긋 웃었다.

-무서운가 보지?
이럴 때 무섭다,고 솔직히 못하는 것이 대한 건아의 비애다. 무섭다고 하면 끝날 문제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말 못하겠다. 내 앞에서 그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 무서워요.

-그대는 참 거짓말이 심해. 뭐가 안 무섭다는 건가, 이렇게 눈에 두려움을 가득 안고서.

-안 무섭다니깐요.

-그래? 그럼 솔직히 말하겠는데, 난 귀신이야.

순간, 그를 쳐내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밀려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넘어질뻔 했다. 뒤로 꺾이는

내 몸을 잡아주면서 그가 혀를 찼다.

-흠.

아아, 쪽팔린다. 내 머릿속이니 좀 쫓아낼 수 없나. 그의 귀가 팔락거렸다. 귀가……팔락팔락 움직였다.

마치 개처럼.

뭐지? 사람의 귀가 나비 날개처럼 움직이는 것은 처음 보아서 나는 좀 굳었다. 정말 인간은 아닌데. 귀

신이라고 하기에도 좀……

-도대체 뭐하시는 분이세요? 남의 머릿속에는 왜 오시고요!

소리칠려던 게 아닌데 고함이 나가버렸다. 아, 한심해. 내 고함에 금발남자가 눈을 깜빡이다 기분좋게

미소지었다.

-미안, 내 장난이 심했어?

남자는 선선히 사과했다. 아, 자기 혐오가 더욱 높아져갔다. 괜히 다른 사람에게 시비걸고 있다. 물론

이 사람이 내 머릿속에 들어온 것은 나쁘지만, 그래도 지금 내가 화를 내는 건 굳이 ‘이 사람이 잘못했

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눈 앞에 이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황제랑 몸을 섞더니 황제 닮아가나.

-누구세요.

지쳐서 목소리가 낮아졌다. 머릿속에서도 목소리가 들리는 거구나. 신기하다.

-글쎄……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남자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다시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나를 제대

로 일으켜주고 손을 뗀 뒤 대답했다.

-골드 드래곤, 이라고 하는게 나을까?

아아, 순식간에 납득이 갔다. 그렇구나.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금발 남자는, 골드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표식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 다음의 금발은 골드 드래곤 본인일 수 밖에.

-아, 그래서 실체가 없으신거군요.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남자의 귀가 또 움직였다. 나비같은 움직임이었다. 귀엽고 예뻐서, 충동적으로

그 귀에 손을 대었다.

-드래곤이니까, 이건 환영일 수 밖에 없겠죠. 그렇구나.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귀가 또 움직였다.

-아니, 지금은 실체가 없어.

-그……몸도?

도대체 드래곤의 몸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그래, 본체도 지금은 잠들어 있지.

-왜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숙였다. 키스하려고 하는 것 같아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운명이, 내게 신부를 보낸다는 경고를 했거든.

어째, 어느 나라 계시와 참 비슷하네요……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나는 그저 경계태세를 갖춘 채 그의 말

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결국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황제폐하도 그 소리를 하던데.

내 말에 그가 씩 웃었다.

-그래.

뭐가 그러신데요. 내가 물어보려 하는데, 갑자기 의식의 어둠속으로 물이 차 올랐다. 점차 물이 찬다.

잠시 물에 정신이 빼앗겼다 고개를 드니 남자가 사라져있었다.

「키미누……」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불려지고 있는 이름은 내 이름이 아냐. 그런데도, 그 목소리

는 상당히 부드러워서,

그래서……

「키미누……」

그래서 나는 눈을 떴다. 눈 앞에 있는 남자는 황제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순간 내가 확실하게 눈을 뜬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금발머리는 자신이 드래곤이라고 말하는 남자의 것과

약간 틀렸다. 그 차이를 느낄때까지 나는 멍하니 결이 가는 금발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제가 휘장을 거둔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천막같은 느낌으로, 천들이 가렸던 욕실의 천들이 사라져서,

어디를 보아도 별이 보였다. 나는 이 곳에 와서 처음으로 별빛이 뭔지를 알았다. 은은한 달과 별의 빛,

그리고 흔들리는 램프의 음영, 나를 안고 있는 황제의 단단한 몸.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내가 도망치는데 성공해도, 오늘은 왠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평화로운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할 것 같다. - 그런 예감이 들었다.

어느 새 알몸으로 안겨있는 것이 거부감이 없다. 따듯하고 단단한 몸은 기분이 좋다.

「황제면서……」

내가 입을 열자 황제가 귀를 가까이 댔다. 별이 쏟아질 것 같아, 저 아름다운 하늘에 현기증이 나서 눈

을 감았다.
기분은 좋아. 확실히 말해서 이 모든 것은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다. 황제의 얼굴을

보면 두근거린다.

매력적이다. 상대의 목을 치는 살인광 폭군이라 할지라도, 일단 그는 나에게 따듯하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이런 따듯함을 처음 받아보기 때문에. 내가 원하던 소속감, 내가 원하던 따듯함.

그가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것은 아니야. 그는 적에게만 차갑고, 자신의 사람에게는 관대하다잖아.

「황제면서 이런 거 좋아하시네요. 씻기고 옮기고……」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좀 어색하지만, 그게 즐거워.」

넌 황제니까 이런 거 안해도 되잖아.

내 속마음을 들은 것처럼 황제는 손으로 물을 담아 내 어깨에 뿌리며 덧붙였다.

「소중한 건 늘 보살펴야 하거든.」

물건 취급인데도 기분은 좋았다. 아무도 나를 보살펴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호의가 눈물나게 좋다.

곤란한데, 나는 정말 도망가야 하는데. 마음 한편이 간사하게 속삭인다. ‘이래도 괜찮잖아.’라고.

「합방식이 기다려지네. 너에게 작위를 주는 순간도. 이렇게 내일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처음

이야.」

황제가 속삭였다. 아, 제기랄. 차라리 좋아한다, 사랑한다 - 이런 종류가 낫다고. 이 남자는 모든 진

심을 말로 표현한다. 잘나서 그런지, 여과없이 그대로 뱉어지는 말은……없는 양심을 찔러대고 있다.

도망가지 말까?

여기를 나간다 쳐도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잖아.

하루에도 수백번, 마음이 바뀐다. 도망가야 해. 그리고 도망가지 말까. 그냥 여기에 있을까. 어차피 성

공할 확률도 그다지 없어. 너도 알고 있잖아.

황제의 몸은 따듯하다. 그 손은 다정하다. 누군가의 목을 사정없이 내려쳤을 손에서 피냄새는 나지 않

았다.

그의 손이 뒤에서 부드럽게 내 고개를 돌렸다. 나는 고개만 뒤로 돌려서 다가오는 혀에 입술을 열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라는 생각은 곧 가슴을 만지는 황제의 손에 날라가버렸다.

일단, 해가 뜨면 ‘도망가지 말까.’라는 마음은 엷어졌다. 황제만 보이지 않으면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

이 들었다. 쾌락을 아는 몸은 황제에게 호의적이었지만, '이 보다 더한 쾌락은 없어.‘라고 생각하는 순

간 더 강렬한 쾌락을 선사하는 황제에게 빠져있지만, 내 마음은 아니었다.

도망칠 수 있는 기회는 반드시 온다. 반드시 오게 될거야. 그 때 주변 보지 않고 도망칠 수 있도록,

나는 황제가 준 패물 몇가지를 늘 들고 다녔다. 어디서나 보석은 돈이 되는 법이니까.

지도를 외다시피 쳐다보고, 가능한 여행기 종류를 읽었다. 최신판으로 다른 나라는 어떤가- 그런것들

을. 기회가 왔을 때 정말로 도망갈 수 있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때 어떤 조건이 안


되서 도망가지 않기는 싫었다.

「키미누. 무슨 생각 하세요?」

둘이 있을 때 라로는 나를 ‘마마’라고 부르지 않고 '키미누‘라고 불렀다. 나는 그녀와 세 번째 점심식

사를 같이 하고 있었다. 왠지 그녀를 볼 때마다 새 어머니가 생각나서, 조금이라도 잘해주고 싶었다.

이 곳에 와서는 음식도 형편 없는 것들을 받았을 정도로 푸대접 신세였던 그녀는, 나와 같이 먹으면 음

식이 호화스러워 좋다며 웃었다.

「다들 그런 걸 물어봐.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말.」

「아, 다들 그래요?」

「응.」

매일 같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라로도, 황제도, 시녀장도, 가끔 들르는 국무대신까지,

이틀에 한번 보는 비서관도 내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어서 당황스러웠다.

「하긴, 그럴 만 하지요.」

라로가 웃으면서 스튜를 덜어먹었다. 나한테는 물 한모금이라도 마시면 득달같이 따라주는 시녀 누나들

이, 라로에게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뭐라고 말하면 분위기가 더욱 이상해질 것 같아서, 지금은 참

고 있지만 나중에 라로가 가면 한 마디 할 생각이었다.

「뭐가 그럴만 해?」

「키미누는 무표정하거든요.」

「내가?」

「네.」

하지만 다들 내 표정은 귀신같이 알아보는데. 누구나 그랬다. 저 세계든 이 세계든, 다들 날 보고 ‘무

섭잖아.’라고 하거나 ‘거짓말.’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런데 내가 무표정하다고?

「키미누는 이야기를 할 때는 표정이 훤히 드러나는 것 같아 보여요.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면 바로 무

표정해지는 거에요. 마치……방금 전 표정이 거짓말인 것처럼.」

라로가 스튜를 저으면서 고개를 움직였다.

「뭐랄까, 배우같아요. 연극배우. 무대에 서면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지만, 실은 대본을 읊고 연기를 하

는 것에 불과한 그런 사람. 키미누는 무표정해서, 방금 전에 나와 이야기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에

요. ……혹시, 결례가 되는 말이었나요?」

지금 표정연기 하고 있다는 말인가. 내가?

「아니,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평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내 말에 그녀가 방긋 웃었다.

「다행이네요.」

아아, 너의 솔직함이 나를 갑자기 이상한 의문으로 빠트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솔직함이란 좋은거지.

그나 저나 여자들이란 어쩌면 저렇게 남들의 심리 상태에 예민한걸까.


내가 무표정했나?

알 수가 없다. 나름대로는 솔직하게 반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 지금도 그래요. 그 무표정.」

그냥 생각에 빠져서 무표정한 거 아냐? 방금전까지 여성의 예리함에 감탄했던 나는 바로 의심이 들었

다.

「이제 곧 혼례식이네요.」

라로가 꿈꾸는 여성의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 폐하는 무서운 분이지만, 그래도 아름답죠. 전 처음에 늑대같은 사람을 상상했었어요. 기혼에

있는 작은 오라버니말을 듣고 있으면, 정말 무서운 사람일 거 같았거든요.」

무서운 사람? 하긴 이 사람 저 사람 목을 뎅강 뎅강 쳐대니.

「드와나 최악의 전쟁미치광이라고들……아, 죄송해요.」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지금 어디서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사색이 되서 나에

게 사과를 하고 시녀들의 표정을 살피는 그녀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됐어. 이야기 계속 해줘.」

「아니에요. 나도 참…… 입 조심하라고 그렇게 들었는데도.」

「황제 폐하가 전쟁광이야?」

그 말에 난처한 얼굴로 라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새 빈 그녀의 접시에 다시 스튜를 따르면서 물어

보았다.

「폐하는 무서운 사람이니?」

라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쥐는 그녀를 보고 나는 알 수 있었다.

무서운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키미누밖에 없어요.」

라로가 스튜를 받아들고 웃음지으려 애쓰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를 그렇게 말하는 건, 키미누밖에 없어요.」

「무서운 사람이라는 거? 너도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아니요, 당연히 무서운 분이시죠. 저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계시는데요. 하지만 키미누는 마치…… 키

미누의 입에서

나오는 그 분은, 보통 사람 같아요.」

우리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건, 황제가 그렇게 대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몸을 섞

고, 씻겨주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고, 가끔은 발장난도 치고.

그녀도 그 것을 깨닫고 침묵하고 있었다.

「키미누.」
한참 후에, 그녀가 나를 불렀다.

「응?」

「하렘의 공녀들이 밤마다 얼마나 마음 졸이는지 아세요? 황제 폐하가 오시면, 그들은 죽는 거니까. 늘

밤에 어느 방에 황제 폐하가 오신다는 기별이 오는지, 마음을 졸여야 하죠. 그런데요.」

맙소사. 공녀들과는 한번 자면 전부 죽여버린거야? 이러다 아라비안 나이트 되는 거 아냐?

「이상하죠. 전부 다……화장을 하고 기다려요. 옷도 가장 예쁜 것을 매일같이 손질하고, 기별을 가슴 졸

이며 기다리죠. 오면, 무서워하면서도 굉장히 바빠요. 어차피 황제 폐하는 보지도 않고 찢어버리는 옷

들을 손질하고 온 몸을 정갈히 하죠.」

혹시 죽지 않을까 싶어서? - 그러나 내 예상은 틀렸다. 라로가 쓸쓸히 웃으며 이유를 알려주었다.

「어차피 황제폐하의 사람이잖아요, 우리는. 다가올 죽음이 두려운 것보다도, 하룻밤이 더 두근거리는거

에요. 이렇게 세월이 가서 하렘 어디에 있는 누군지도 모르게 되서 죽는 것보다, 황제 폐하께 안기고

싶은 거에요.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서…… 단 한사람만을 위해 준비되었는데, 그 사람이 봐

주지 않으면……」

죄책감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내 탓이 아닌데도, 숨이 막혔다.

「공주 마마!」

시녀장이 참지 못하고 질책하자, 라로의 어깨가 떨렸다.

「시녀장님!」

나도 같이 소리치자, 시녀장이 탐탁치 않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나한테는 참 잘해주시는 분인데 라

로한테는 가차 없으시다.

그 날은, 하루 종일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배치도와 지도를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기를 여러

번, 결국 오랜만에 차를 마시며 온실에서 뒹구는 하루를 보냈다.

저녁에 온 황제는 상당히 피곤한 안색이었다.

「뭘 하고 있었어?」

그렇게 물으면서도 그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오자마자 시녀들과 시종들을 물린 황제가 목덜미에 코를 묻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황제의 등을 안자, 황제가 목덜미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각국의 사절들이 도착하고 있어. 거의 다 도착했지. 전야제를 치룰 준비도 완료되었고. 이제, 곧 혼

례식이 시작될테니까. 조금 긴장한 것인지도 모르지.」

황제의 말에 나는 눈을 감았다. 나도 긴장하기는 했지. 그 전에 도망쳐야 할텐데 어쩌지-라는 것 때문

에.

「기혼의 휴전요청을 받아들일까 해.」


황제의 목소리는 낮아지면 속삭이는 것 같은 소리가 된다.

「기혼? 전쟁이 났던 거기요?」

「응.」

「왜 휴전하시려고요?」

내 말에 황제가 부드럽게 내 목덜미를 핥으며 속삭였다.

「너를 전쟁터로 데려갈 수는 없으니까.」

어떤 말로 이 부담감을 설명할 수 있을까.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휴전하겠다고? 몇 번이나 왔던 기혼

의 사자들을 돌려보낸 네가?

「게다가 기혼은 이제 산지가 시작돼. 절벽에 있는 성을 공격하기에 우리 군사로는 힘들어. 기혼은 산

악전투의 프로. 우리가 이기겠지만, 소득보다 출혈이 클거야.」

「그래서, 휴전을……」

문득 라로가 생각났다. 시녀들에게 무시받으며, 늘 울분을 삼키고 있을, 새 어머니와 닮은 그녀가 생각

나서 나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그럼, 라로는……?」

「그게 누군데?」

「하렘에 있는……」

내 말에 황제가 물었다.

「왜 그녀에게 관심이 있지?」

단조로운 어투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어투로 내 목을 치겠다고 한 적이 있다.

「……어머니와, 조금 닮았거든요.」

‘새 어머니’였지만. 그런 부분은 빼고 말하자 황제의 목소리에 다정함이 돌아왔다.

「아아……」

황제의 손이 어느 새 내 옷을 벗겨내고 있었다. 익숙하다. 황제의 손이 내 옷을 벗겨내며, 그 손가락이

슬쩍 스치는 부위들이.

「글쎄, 어떻게 하는게 좋겠어? 원하는대로 해주지.」

그가 옷을 벗기려 해서, 나는 팔을 들었다. 만세를 한 내 팔에 티셔츠가 스치더니, 곧 바닥에 떨어졌

다.

「……가능하면, 돌려보내주세요.」

너라도 가. 넌 충분히 했잖아.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지.

내 말에 황제가 「응.」이라고 짧게 말했다. 나는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벗어날 수 있기는 한

걸까. 이 남자에게

이렇게 길들여져서, 나는 어떻게 되고 있는 걸까.

희미해지고 있다. 도망치고 싶어 - 라는 그 간절함이.


「기혼과 휴전이래요!」

다음 날, 라로가 달려왔다. 그녀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녀도 황제를 좋아했지만, 그래도 역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보다는 조국이 좋다며 그녀는 한 없이 재잘거렸다.

「그리고 저도 귀국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어요. 오늘 준비해서 내일 궁을 떠날거에요. 아, 맙소사.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잘 됐다. 어서 가. 돌아가서 잘 지내도록 해. 내가 웃는 것을 본 라로가 「너무너무 잘됐죠!」라며 내

팔을 움켜쥐고 나를 끌어안았다. 시녀장이 헛기침을 하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는 그녀를 보니 굉장히 기

쁜가보다-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손이 주머니로 들어왔다. 그리고 무언가, 아주 작은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넣자마자 그녀가 내게서 떨어졌다.

「하아……실은 무지무지 바쁜데, 온 거에요. 키미누에게 작별인사를 하려고요.」

나는 웃었다. 주머니 속이 신경쓰여 견딜 수가 없지만, 그녀가 굳이 이런 방식을 취했는지가 알 수 없

어서 나는 웃고 있었다.

「갈게요. 그 동안,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너무 고마웠어요.」

라로가 가는 것을 보고 나서, 나는 황제의 서재로 서둘러 돌아왔다. 사람들을 물리고 책을 꺼내며, 주

머니 안에 있는 것을 꺼냈다.

아주 작은 주머니가 있었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주머니는 끈이 달려 조이는 형식이었다. 그 끈을 느슨

히 하고 안쪽을 보자 편지와 알약 두개가 들어있었다.

[라로.

정히 견딜 수 없다면 이것을 쓰거라. 한 알은 반 나절의 잠을, 두 알은 영원한 잠을 줄 것이다. 그러

나 명심해라. 너는 기혼을

짊어지고 있음을.

메테이스 ]

메테이스가 누군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라로는 가는 길에 이 것을 내게 준 것이다. 죽으라는 뜻인지 살

라는 뜻인지 영 아리송하다. 혹시 그동안 내가 미웠다는 뜻인가. 그 말을 돌려 말한 것인가?

왜 이런 것을 준 것인지 알 수가 없네. 분명한 건 두 알이면 죽는다는 뜻인 것 같다. 그러고보니 글자

를 읽을 수가 있네. 유브라데와 기혼은 같은 글을 쓰는 건가?

“어지간히 착한 오빠로군.”

동생을 보내면서 죽는 약을 주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될 법도 하다는 생각

이 들었다. 그래, 보내는 쪽 마음이야 오죽하겠어. 오빠인지 아버지인지 삼촌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빠

라 치고.

한 알을 먹으면 반 나절의 잠을, 두 알은 영원한 잠을.

줄리엣같구나.
줄리엣은 사랑을 위해서 했지만, 나는 벗어나기 위해서 쓰니 그다지 로맨틱하진 않네. 한 알을 먹고 반

나절의 잠을 자면, 뭔가가 있을까. 그 반 나절의 잠이라는 건 정말 ‘잠’인걸까, 아니면, 줄리엣처럼

그런 종류인걸까. 설마하니 이렇게 보내는 약에 수면제를 줬겠어. 그건 아닐거야.

그렇다면……어느쪽일까.

어느쪽이든, 쓰지 말아야 할텐데. 쓰지 않고, 잘 되야 할텐데.

다음 날 오후, 갑자기 황제가 들이닥쳤다. 놀라서 황제의 책꽂이에 지도를 꽂고 내심 불안해하고 있는

데 황제가 나를 안아들었다. 그는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관심도 없었다.

「폐하?」

「가능한 움직이지 마.」

황제는 나에게 엄포를 두고 빠른 걸음으로 온실까지 걸었다. 그가 해가 떠 있을 때 이런 적은 없었는

데, 나는 불안해졌다. 혹시나 내가 탈출계획을 짜고 있다는 걸 알게 된걸까?

황제를 올려다보니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온실로 들어서자마자 시녀들이 문을 열

고 소란스럽게 움직였다. 방에는 궁의가 당도해 있었다.

「진찰해라.」

황제의 초조한 음성에 궁의가 「명을 받드옵니다.」라고 말하며 내 손목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국무대

신에 비서관까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통 알 수가 없다. 두리번거리는 나를 바라보던 황

제와 나머지 사람들은 궁의의 「건강하시옵니다.」라는 보고에 전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뭔데 이러는 걸까?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무슨 일이시죠?」

황제와 궁의를 번갈아보며 묻자, 황제가 딱딱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라로 공주가 귀국 도중에 사망했다.」

……누가 어떻게 되었다고?

-기혼과 휴전이래요!

그렇게 기쁘게 뛰어왔던 그녀가, 어떻게 되었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입에서 먼저 말이 튀어나갔다.

「거짓말.」

내 말에 황제가 내게 걸어왔다. 하지만 나는 물러섰다.

「키미누.」

그가 어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지만,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웃던 아이

가, 돌아간다고 좋아하던 그 아이가, 죽어? 오늘 아침에 돌아가던 아이가?

내가 물러서자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다가와서 끌어안았다. 내가 밀쳐내려는데 그가 더욱 힘을 주었

다.

「도대체 무슨 사이길래 이래.」


도망쳐야 해.

‘도대체 무슨 사이길래 이래.’라고? 사람이 죽었는데 고작 한다는 소리가 ‘도대체 무슨 사이’?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굳어있었고, 내 마음도 식어갔다. 맙소사, 사람이 죽었는데 도대체 무슨 사이냐고?

도망쳐야 해, 제 정신이 아냐.

「신병(神病)입니다.」

신병…… 내가 고개를 들자, 국무대신이 찡그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수도를 나가는 길목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전원 고열증세가 확인되었고, 라로 공주는 몸이 많이 약했기

때문에……」

겨우, 겨우 몇시간만에?

온 몸이 차가워졌다. 소름이 끼쳤다. 신이 내리는 병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건지 손에 닿을 듯 느껴

졌다. 맙소사, 이것이 신병이란 말이야?

「지금 수도의 실력있는 의사들이 대거 입궁하여 모든 이들을 체크중입니다.」

「누, 누군가 죽였을 가능성은? 독을 푼다던가…… 그들은, 적대국의 사람들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쪽 병사들이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원 고열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내 말에 국무대신이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독약의 증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신병입니다.」

사람을 몇천명이나 죽이고, 마을을 몇 개나 없어지게 만든 그 병이 돌아왔나보다. 내가 와서 사라졌다

던 그 병이, 돌아왔나보다. 하느님 맙소사-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국무대신이 난감한 얼굴로 황제를 쳐다보았지만, 황제는 그저 나를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비탄에 젖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몇 번 같이 밥을 먹었고, 그녀가 울던 때 마

주친 적이 있고, 그리고…… 맙소사, 죽었다고?

자신이 참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이나 같이 밥을 먹은 사이인데, 그녀가 죽었다는데 나는 슬퍼

하기보다 그것이 무서웠다. 손이 덜덜 떨릴 만큼 무서웠다. 나는 이제껏 주변인이 죽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이제까지 죽는 것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삶이 힘든 것보다 차라리 죽는 편

이 낫다고 생각했다. 죽는 것보다 힘든 삶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몇 번이나 죽고 싶어진 적도 있었고,

‘죽고 싶다’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진심으로 죽음이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

다.

이렇게 갑자기 죽음이 다가오나? 그것이 공포스러웠다. 무서워졌다.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황제에게

매달렸다.

키스와 섹스. - 단순히 쾌락과 위로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생명줄이 된 기분이었다. 죽음이 내게 달려들
것만 같아서…… 그래서 나는 정신없이 황제에게 매달렸고, 그는 다정하게 나를 안아주었다.

「괜찮아.」

그는 몇 번이나 내게 속삭였다.

「너는 내가 지켜줄게. 걱정하지 마.」

실체가 없기에 더 무서운거야. 귀신처럼, 병은 보이지 않는다. 막을 수 없어.

몇 번이나 사정한 뒤에도 내 표정이 좋아지지 않자, 그는 상냥하게 나를 안아주었다.

「괜찮아. 황궁 내는 괜찮으니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 죽음 그 자체? 아니면, 나도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것? 죽음이 너무

가까웠다는 것? 나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해서 이토록 긴장하고 있는 것일까.

「괜찮아, 누구도 내 앞에서 너를 해칠 수는 없어.」

당신이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죽음에서 나를 구해 줄 수는 없어. 그런데도 황제는 힘주어 말했다.

내가 있는 한 너는 괜찮아. - 처음에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고, 그저 매달려있을 뿐이였다. 살아있는

사람의 체온이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계속 듣다보니 믿음이 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지켜줄게.」

내 목을 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따듯함이 전해져왔다.

도망을 칠까, 말까.

마음은 더욱 혼잡스럽다. 하긴 이런 생각해봐야 소용있는 것이 아니지. 어차피 도망갈 길은 없다. 그래

도 만약에 기회가 생기면 나는……도망을 쳐야 하는 것일까, 말아야 하는 것일까.

라로의 시체는 기혼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불쌍한 라로. 나라를 위해서 이 곳에 오더니, 이제 돌아가는

길에 죽음을 당했구나. 가엽고 가여운 라로.

신병이 밖에서 돈다는 것을, 처음으로 손끝까지 절감하도록 깨달았다. 도망가는 것이 더욱 두려워졌다.

밖에 나가면- 죽을 지도 몰라. 사람들은 날 월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뭔가 오차가 있어서 이

세계에 떨어진 것에 불과하니까, 나도 죽을지 몰라.

그러나 이 안도 안전하지 않지. 특히 황제는 무서웠다. 그는 나를 지켜주겠다 말했지만, 그의 힘은 양

날의 검이었다. 나를 찌를 수도 있고, 나를 지켜줄 수도 있는. 그러나, 그 지켜준다,라는 것이 과연

지켜준다는 것에 속하나?

무엇보다도- 내가 왜 지켜져야 하지? 나는 스스로를 지키고 싶다. 스스로를 가치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서로의 인생을 동반해줄 누군가를 찾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황제는 분명히 진심으로 지켜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정말로 다정하게 나를 끌어안고, 몇 번이

나 나를 위해서 노력해주었다.

솔직히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느낀다. 태풍을 만난 조각배처럼, 조금만 있으면 뒤집어질 것 같다.

하지만, 그 남자는 무서운 사람이야. 사람의 목숨이 사라졌는데도 무슨 사이냐고 추궁하고, 공녀나 적

은 사람으로도 안보는 사람이야.


매일같이 생각에 시달렸다. 나는 이 곳에 왔을 때부터 조금씩 몸무게가 줄고 있었다. 황제가 시녀장에

게 몸에 신경쓰라고 말한지도 어느덧 세 번째, 이번에 황제는 그녀에게 화를 냈다.

화를 내는 목소리가 들려서 민망해졌다. 그들이 안 준 것이 아니다. 내가 안 먹은 것도 아니다. 그냥

몸무게가 빠지고 있을 따름이었다. 원래 스트레스 받으면 이상하게 살이 빠지는 체질이었다. 잘 먹었

고, 토하거나 하는 예민한 성격이 아닌데도, 아무런 이유없이 살이 빠졌다.

황제의 서재 한 중간에 앉아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지도를 집어던졌다. 이런 것을 봐서 뭐하지? 나가서

무슨 소용이 있지? 어차피 황제는 아껴두었던 합방식까지 나한테 하겠다잖아. 밖도 위험해. 집으로 갈

방법은 없어. 도망쳤다 잡히면 죽을지도 몰라. 그럴바에는 차라리, 그래, 차라리……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나는 황제가 좋아지지 않았다. 새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처럼, 그를 애틋하게 여

기지 않았다. 그와 몸을 섞는게 좋았지만, 그와 다른 일을 할 때 특별한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는 상대와 지낼 수 없었다. 더욱이 그 상대에게 평생, 그리고 다음 생까지

약속할 수도 없었다.

책으로 가득찬 서재에서의 중간에서 나는 그 서재를 한번 훑어보았다. 황궁은 전부 2-3 층 높이의, 높

은 천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서재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위까지 빽빽하게 책장으로 가득차 있었고, 그

래서 여기저기 사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언젠가, 이 서재가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그 언제가 빨리 좀 왔으면 좋겠다.

늘, 결론은 이렇게 끝났다. - 도망쳐야 해. 늘, 결론은 그런 것이었다. 황제의 품에서, 황제의 애정에

서, 황제와의 결혼에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왜인지 알 수 없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보다, 어느새 도망쳐야 한다는 것이 더 강해졌다. 황제

와 있으면 위험해. 그는 위험한 사람이야. 그는 아무나 막 죽여. 그는……

인정할 건 인정해, 김민후. 사나이답게, 인정하라고!

내가 무서워하는 건……나도 황제를 좋아하게 될까봐, 그것이었다. 그렇게 무서운 사람을 좋아하게 될까

봐, 대등하지 못한 사람을- 절대로 ‘동반자’가 될 수 없고 나는 그의 ‘일부분’이 될 뿐인 사람을, 그

것도 남자를- 좋아할 수는 없었다. 나는 사랑만큼은 제대로 하고 싶었다. 따듯하고 평온하고 서로가 서

로를 바라보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 오랜시간동안의 꿈이었고, 언젠가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거라는 기대로 살아왔다.

그 남자를 좋아할 수는 없어. 내게 자식을 줄 수도 없고, 내게 가족을 만들어 줄 수도 없는 - 그 사람

을 좋아할 수는 없어.

역시, 도망가야겠다.

이제 더 이상 혼란스러워하지 말자. 도망가는 거다.

다짐했다. 오후 늦은 햇살이 가득찬 황제의 서재에서, 나는 그런 결심을 다잡았다.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전 가겠습니다.」

내 말에 황제가 말도 안된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일단 황궁을 빠져나가야 한다. 더욱

이 신성지라면, 수도 근교의 숲. 수도를 벗어날 수 있다.

발단은, 신성지에서의 초대였다. 국무대신의 말에 의하면 ‘황비가 내려올 것이다’라고 대대적으로 계시

를 공표했던 신전은, 그 월인 황비가 남자였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세간에서도 조롱거리가

되었다. 월인 황비가 남자라니, 계시라니 받아들이기는 하겠지만 남자 황비에는 거부감이 심했던 것이

다. 황비는 구세주이니 욕할 수 없고, 그래서 엉뚱하게도 신전으로 그 불똥이 튄 것이다.

그리고 그 신전이 아직 황비가 월인으로서 이 세계에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병이 다시 찾아온

것이라고 하며, 앞으로 당분간은 신병의 걱정이 없지만- 그래도 황비가 적응을 할 재례가 필요하다고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혼례식 전야제는 일주일 남겨두고 있는 아침이었다.

「말도 안돼. 놈들은 널 잡아먹을 속셈이야.」

「그렇습니다. 적응이라니요, 웃기지도 않지요.」

「어차피 황비건도 계시를 거짓으로 공표한게 틀림 없을 거라고.」

방금…… 뭐라고?

나는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는 낭패라는 표정이었고, 국무대신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져있었다.

「잠깐만요. 계시가 거짓이라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내 말에 황제가 가볍게 한숨을 토했다.

「그런 뜻이 아니고……」

아니, 이건 변명이다. 그는 처음부터 내가 월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내가 월인이 아니라는 걸, 내가 신이 정한 황비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

내 고함에 황제가 일단 나를 끌어안았다.

「둘만 있겠다.」

그 말에 비서관, 국무대신, 외교대신이 동시에 나갔다. 비서관과 국무대신은 우리를 자주 봤지만, 외교

대신의 경우에는 나를 처음 본 사람이었다. 내가 황제에게 거의 반말을 하는 것을 본 그의 표정은 ‘넌

이제 갈기갈기 찢겨죽을거야.’라는 듯한 것이었다.

그들이 나가자마자 황제가 나를 끌어안은 채 목에 입술을 댔지만, 나는 온 힘을 다해서 그를 뿌리쳤다.

「알고 있었냐고! 말해!」

황제는 내가 반말을 하고 있는데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표정에 비해 어조는 침착했다.

「알고 있었어, 그게 사고에 불과하단걸.」


「그런데 왜……?」

「네가 필요했으니까.」

어떤 면으로? - 라고는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 내가 필요했어? 월인 황비, 구세주 - 그 명목상으로 필

요했다고? 그 필요에 우선은 응하겠다는 나에게 자신을 사랑하라고 한 건 너 아니야?

「네가 필요했어. 유브라데에도, 나에게도.」

황제가 글자 하나하나가 달굼질이라도 되어 있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뱉어내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었어. 나를 위한 사람이 물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고. 나는……가지고 싶었어.

첫눈에 너를 가지고 싶어서, 어떻게도 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나는 그 기회를 이용했어.」

사람을 황비로 만들어놓고, 뭐?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만들어놓고 뭐가 어쩌고 저째?

「처음에는 혹시 여자라면 죽여버리겠다고 마음 먹었었지. 신관놈들 수작은 뻔하니까. 그따위 계시를 걸

어놓고 아무런 여자 하나를 부유마법으로 내려보낼 생각이었을테지. 그리고 외척이 되서 정치를 흔들겠

다는 속셈이야. 하지만, 너는 여자가 아니었어. 너는, 신전이 준비한 사람일 리가 없었어. 그래서 나는

……」

황제가 눈을 감았다.

「정말로 나를 위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라고 했다고? 말해봐요, 잘나신 황제폐하.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라고, 아니면

목을 치겠다고 했다고? 내가 월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신이 점지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도!」

「그래.」

눈 앞이 검게 물들었다. 현기증에 몸이 비틀거렸다. 난생처음 이토록 화가 났다. 뭐라고 소리치고 싶은

데, 할 말이 없었다. 너무 화가 나서 숨결이 거칠어진 것을, 자신의 귀로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비틀거리자 황제가 나를 잡아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너는 유브라데 국민이 아니야. 너는, 월인도 아니지. 너는 자유민이다. 이세계에서 온 사람이지. 과

거에도 두어명 있었다는 기록을 봤어. 월인’은…… 평범한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했던 선조의 계책에 불과

했어. 그는 아주 평범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는 너무 평범했지. 아니 평범하다 못해, 형편없

었어. 천애고아였으니까. 그래서 내 선조는 그것을 역이용한거야. 그녀를 월인으로 포장한거지. 부유마

법을 써서, 귀족들앞에서 그녀를 깃털처럼 내려보냈다. 대대로 황제에게밖에 전해지지 않는 일지에 나오

는 이야기야.」

하느님 맙소사.

「나는 너를 원해. 그래서 이런 짓을 했어. 네가 이세계사람이라는 걸 알아. 어딘가의 통로가 있고, 그

게 심판의 물 위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심판의 물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세계사람이 와서 생긴

것이니까. 그렇지만, 나는 너를 가지고 싶었어. 처음에는 그저 가지고 싶다, 정도였어. 그런데 가면갈

수록,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수록 가져야만 하는 것으로 바뀌어가. 나에게 전혀 지배되야 할 이유
가 없는 너를.」

배신 뒤의 열렬한 고백은 허탈했다. 나는 화를 내려다 참았다. 더 이상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갈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 이제는 어떤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를 차갑게 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묵직한게 잡혔다. 황제가

준 단검이었다. 자기만 믿으라고, 기가 막혀서. 나는 그것을 황제의 발치에 집어던졌다.

황제는 음울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감사히 잘 썼습니다, 폐하. 그리고, 저는 이 황궁에서 나가보겠습니다. 이제 보내주시겠죠?」

「안돼, 보낼 수 없다.」

황제의 거부에 코웃음이 나왔다. 보낼 수가 없어? 누구 마음대로 보낼 수가 없어?

내 표정을 본 황제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져갔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 싱긋 웃었다. 정말로 아름다운 얼

굴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이런 미소를 보았다……

「나는 정말로 너를 온전하게 가지고 싶었어. 겁먹지 않은 너를, 나에게 늘 도도한 너를. 하지만, 마음

처럼 되지 않는군.」

그 미소가, 황제 본인의 미소임을 알았다. 그는 본래 이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동안의 그 다정함은

전부, 전부……

「이세계의 사람이든 뭐든, 너는 내 품으로 떨어졌어. 놓지 않아.」

그는 나를 끌어안았다. 그동안 ‘힘주어 끌어안았다’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거짓임을 깨달았다. 그는 그

동안 나를 가볍게 안고 있었을 뿐이다. 그가 정말로 힘을 주자 고통스러워졌다. 숨도 쉴 수 없다.

눈 앞이 흐려진다.

「일단은, 자도록 해.」

숨이 쉬어지지 않아. 밀어낼 수도 없다. 아예 팔이 움직이지 않아. 내 몸인데, 아무것도 되지 않아……

되지 않아.

-화났나?

-알고 있었어요?!

오랜만에 출연한 골드드래곤에게 고함을 질르자 그는 어깨를 들어올리는 제스쳐를 취했다.

-뭐, 모르진 않았지.

그는 착하게 웃었지만, 나는 속을 생각이 없었다.

-알면서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말했지 않나.

그가 다가왔다.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내 앞에 서서 말했다.

-방해할거라고.

이 빌어먹을 금발 놈들! 나는 그의 다리를 발로 찼지만, 내 발도 그의 다리도 멀쩡했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대, 괜찮은 건가? 단단히 화났군.

안 괜찮아요, 라고 소리치려고 하기 전에 그는 내 발을 살폈다.

-아무리 이 곳이 그대의 꿈속이라 할지라도, 이런 짓을 해서는 안돼. 본체에 무리가 갈 수 있거든. 발

은 이상이 없어서, 다행이야.

그는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런 소리가 나와? 발이 이상이 없어서 다행이야?

-저 황제 원래 저렇게 미친 놈이에요?!

내 말에 골드 드래곤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는 어둠속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고 있었다. 야오

밍만한 키로 그렇게 굴러다니면서 웃지 마, 위협적이라고.

그러나 그는 자기 마음 풀릴 때까지 웃더니 겨우 몸을 일으켰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는 그는 아직

도 웃음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겨우 답해주었다.

-어, 원래 미친놈이야. ‘드와나 최악의 전쟁광’이라는 이름으로 악명이 아주 자자한 놈이거든.

나는 열받은 나머지 ‘놈’이라고 말한다치고, 왜 너는 ‘놈’이라고 하는데? 아…… 하긴, ‘골드드래곤의

수호를 받는’이라고 했으니 [황제<골드 드래곤]의 관계겠지.

-씨발, 진짜 미친 놈 아냐……

저런 놈한테 가슴이 두근거렸었다니 복장이 터진다. 나도 어둠속에서 주저앉았다. 드래곤이 데굴데굴 굴

러서 내 앞에 멈추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네가 좋다는데,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드래곤의 눈은 완전한 금색이었다. 황제와는 틀렸다. 그 금색은 나를 비추지조차 못했다. 아무것도 비

추지 않는, 금을 녹인 색.

-나를 왜 좋아하는데요? 하늘에서 떨어져서요?

아, 생각할수록 빈정상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인간을 좋아하는 거잖아요. 그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지 마음에 들면 끝

인거잖아요. 제가 그런 놈을 왜 좋아해요, 제가 뭐가 아쉬워서!

난 그 인간이 황제거나 말거나 잘 생기거나 말거나 그런 거 필요 없단 말이야! 오랜만에 화가 났더니

온 몸이 덜덜 떨렸다.

-그리고 나온 김에 이야기하는데 드래곤씨는 왜 툭하면 남의 꿈속으로 들어오세요?

-널 보고 싶거든.

-전 별로 안 보고 싶어요!

그 말에 드래곤이 시무룩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말이 심했나? 평소에 이러지 않는데 이번만은 제

대로 컨트롤되지 않는다. 똑같은 얼굴이 눈 앞에 있으니 열불 났다.

-얼굴이 같아서?

그가 진지하게 물어서 나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이 같아서……기도 하지만, 굳이 이야기하자면.


-성격도 어딘가 비슷해요.

-아, 역시?

그리고 다시 드래곤은 바닥을 뒹굴었다. 마치 방금 전의 시무룩함이 연기였던 것 처럼. ‘ 것 처럼’이

아니고 연기였다.

이 동네 금발 놈들은 다 비슷한 놈들이야!

일어날테다!

-어?

나와 드래곤은 동시에 멍한 목소리를 내었다. 드래곤의 몸이 엷어지고 있었다.

-거부라……

드래곤이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몸을 한번 내려다보고, 나를 쳐다보더니 장난이 가득찬 눈으로 말했

다.

-저런, 너무 서운해 하지마. 이건 그대가 나를 거부한 것에 불과하지, 내가 못 온다는 뜻은 아니거든.

또 보지.

오지 마!

눈이 떠지기 전에 소리가 먼저 들렸다.

「비 마마, 마마…… 일어나 보셔요, 마마……」

누구의 목소리지? 이 가녀린 목소리는…… 굳이 말하자면 새 어머니 목소리와 비슷한데, 그녀 목소리보다

도 가늘다. 누구지? 들어본 적은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

「비 마마, 마마……」

다급하고 초조한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아직 밤은 오지 않아서인지 실내는 밝았다. 휘장이 드리워

진 방안에서, 눈에 익은 시녀 한 명이 내게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시녀장을 제외하고 시녀 누나들이 내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은 없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물어서 들어

내기는 했지만, 그들은 늘 조심했고, 나한테 이야기하고 후회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토록 조

심스러운 어투로……

「신성지로부터의 전언입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놀라서 시녀를 쳐다보았다. 황궁 안에 있는 사람은, 전부 황제편 아니었어? 내 놀

란 얼굴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시녀가 조금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수수한 얼굴이다. 이런 스파이짓을

할 얼굴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신성지다. 수도 근교의 숲. 빠져나갈 수 있다.

「달로 돌아가실 방법을 원하신다면 초대에 응해주십시오.」


돌아가? 돌아간다고? 달이라면…… 한국으로……?

가슴이 쿵쾅거렸다. 달도 돌아간다고? 달로? 달이란 말이야? 맙소사,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어?

황제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이세계에서 온 사람이 있었다고. 그들이 어떻게 되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돌아갈 수 있어?

믿어도 되는 일인지 의심이 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머릿속에서, 황제에게 돌려주었던 검이 생각났

다. 정말로, 믿어도 되는 것인지 의심이 되었지만, 그렇지만.

돌아갈 수 있다고?

「그럼, 저는 전언을 전했나이다.」

시녀 누나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나는 홀로 방에 앉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돌아갈 수 있어? 아무도 나를 기다려주는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곳은 이렇게 나 자신

이 무력하지 않았다.

절대권력자가 없는 그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내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내 과

거가 존재하는, 내 자유가 존재하는, 나의 것이 존재하는, 나의 꿈이 살아있는…… 그 곳으로.

어쨌든 해보는 거다. 만약에 돌아갈 수 없는 거였다 하더라도,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 만약 안되면

신성지는 여기보다 빠져나가기가 쉬울테고, 다시 말해서……

수도를 빠져나갈 수 있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기혼이고 밑으로 내려가면 펠하임. 기혼은 적대국이니 입

국만 할 수 있다면, 아무리 황제라 할지라도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어. 나를 찾아볼 수도 없을 것이

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너무 흥분해서, 나는 황제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황제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을 때까지, 나는 도망

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키미누?」

심장이 발치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진정해야 해. 황제에게 화를 내서는 안된다. 어찌되었든 신성지로

갈려면, 황제의 허락이 필요하니까.

「예.」

「잘 있었나? 밥은 먹었어?」

대단하구나.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을 감금해두고도 황제는 이렇게 나올 수 있는거구나.

씁쓸해졌다. 새삼 자신이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

황제의 입술이 귓가를 맴돌았다. 아, 귀찮아. 스멀스멀 올라오는 쾌락도, 이 지분거리는 입술도 귀찮았

다. 도망가기 위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아야 할텐데, 이 모든 것들이 귀찮았다.

「너는 아무데도 못 가.」

누구 마음대로냐고. 그래, 넌 마음대로 지껄여. 난 갈거니까.


「예.」

일단 대답은 해주었다. 그러자 황제가 나를 홱 돌렸다. 깜짝이야…… 놀라서 황제를 쳐다보는데, 황제가

이를 갈 듯이 말했다.

「넌 못 가.」

그거야 네 생각.

「예…… 그런데 혼례식전에 신성지는 다녀오게 해주세요.」

「안돼.」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황제가 상당히 얄미웠지만, 나는 왠지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예감이었지만,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짧게 한숨을 쉬어 기분을 전환하고 입을 열었다.

「애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잖아요.」

내 말에 황제의 표정이 조금 움직였다. 나는 놓치지 않고, 밀어붙였다. 신성지로 가야한다. 그래야 뭐

든 할 수 있어.

「신병이든 뭐든간에, 할 수 있는만큼은 해보아야죠.」

황제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냈다.

「널 잡아먹을 거야.」

「그 사람들이 식인종도 아니고, 절 왜 잡아먹어요?!」

내 말에 황제가 나를 끌어안았다. 조금……끌어안고 있는 손이 떨렸다. 떨리고 있어? 왜?

「신이, 널 데려갈거야.」

……뭐?

황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더 물어볼 수 없었다. 신이 나를 데려간다고? 그러나,

왜? 달의 여신인지 뭔지 하는 그 ‘신’이 나를 데려간다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제대로 잡은 게 맞기는 하다. 나는 돌아갈 생각이니까. 수단이나 방법 따위 가릴 상황이 아니

니까.

하지만, 다시 한번 묻기에는 황제가 지나치게 떨고 있어서.

「폐하?」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물론 돌아갈 생각이지만, 특별히 이 남자의 ‘자신을 위한 사람’ 따위가

되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는 떨고 있었다.

「보내지 않아.」

난 갈건데.

「보낼 수 없어. 보내지 않아. 너는 어디에도 못 가. 이 곳에 있는 거다.」

그건 네 생각.

그러나 너무 떨고 있다. 무서운 사람이라더니, 왜 이렇게 떠는 걸까. 신이 나를 데려간다고? 그것은 너

무 정확한 이야기라 할 말이 없기는 하지만…… 아니, 그의 두려움은 내가 돌아간다고 생각하는데에 기인


한 것이 아니다.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신이 나를 데려갈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말. 그러니까……‘죽음’을 지칭하는 것 같았다.

부부간의 정이라고 했던가? 나는 ‘살다보면 정이 쌓이고, 그 정으로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을 믿지 않

는 사람이었다. 그 예를 훌륭하게 배반해준 내 부모가 있었기 때문에 단 한번도 믿은 적이 없었지만,

그런 것은 정말 있나보다. 이 황제가 미운데도, 이렇게 떨고 있는 것을 보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

다.

섹스의 효과인가. -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고, 씁쓸함에 웃음이 나왔다.

「폐하…… 신이 절 왜 데려가요. 전 아직 창창한 나이라고요.」

신이 나를 데려가는 게 아니고, 내가 직접 가는 거지. 신이 있는 곳이 아니라, 붉은 십자가만이 가득한

한국으로.

「열 아홉 살짜리도 있었어.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폐하?」

「나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야. 신과 내 사이에서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신이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고 할 생각은 아니지, 설마? 그나저나 언제 무슨 일에 ‘열 아홉 살짜

리’가 있었던 것일까.

뭐, 궁금해하지 말자. 신성지에 가면 어차피 등 뒤에 둘 곳인데. 황제가 떨면서 말했다.

「너는 안돼. 너를 잃을 수는 없어.」

잠시 갈등하다가, 나는 그를 안아주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여웠다. 그래서

나는 그를 안아주었다. 그래 붙어지낸 정이 있는데 이 정도 위로 못해줄까.

그 날, 우리는 손을 잡고 잠을 잤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잔 것은 오랜만이었다. 서로를 끌어안

고, 서로의 손을 잡고, 잠에 청했다. 나는 그가 평화로운 꿈을 꾸길 원했다.

내가 가면, 분명 그는 화를 낼테니까- 부디, 오늘은 좋은 꿈을 꾸길.

신성지에 가기로 결정이 난 것은 이틀 뒤였다. 신성지에서는 ‘특별한 의식’은 하룻밤이면 된다고 했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황제는 나를 보내지 않기 위해서 상당히 애썼지만, 남자 황비를 탐탁치

않아 하던 귀족들이 거의 목숨을 걸고 진언했고, 그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국무대신이나 비서관도

이번만은 보내야 한다고 그를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신성지에서는 밤에 오면 된다고 했기에, 나는 저녁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방 안에서 나는 슬쩍 황

제가 주었던 보석 몇 개를 들고 움직였다. 지도도 찢었고, 황제에게 홧김에 돌려주었던 단검이 좀 아쉬

웠지만 괜찮았다.

신성지에서 나가서 계속 움직이는 것이다. 기혼까지 가야한다. 신성지에서 네 개의 도시를 지나, 신의

길을 지나면 기혼이었다. 지도상으로 보건대 상당히 멀었다. 하지만, 말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한국에서 말을 타보기는 했다. 승마 클럽에 다닌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넣어서 어쩔 수 없이 삼개월

다녔었는데 무척 잘 탄다고 칭찬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렇게 실전으로 탈 줄은 몰랐는데. 낙마는 위험하다고 들었다. 낙마도 위험하지만 말이 난

리치다 밟거나 걷어차이기라도 하면 장애인으로 평생 살거나,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는

데.

그래도 여기서 평생 남자의 아내가 되어 사는 것보다는 낫지.

여기 처음 왔을 때 생각난다. 그 때는 이 랩스커트인지 에이프런인지 하는 겉에 입는 치마가 너무 싫었

다. 그래서 안 입겠다고 그랬었지. 그런데 지금은 이 스커트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스커트 안쪽

에 있는 바지에 보석을 넣었는데, 티가 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저런 장신구도 오늘 만큼은 말

없이 꼈다.

말에 타면, 미리 연습삼아 타보겠는데…… 황제가 준 것은 마차였다. 어쩔 수 없이 마차를 타고 있자니

배웅나온 황제의 표정이 더욱 좋지 않았다.

「가자.」

황제가 말에 올랐다. 왜 말에 타는 건가, 라고 생각하면서 시녀장한테 물어보려는데 마차가 출발하기

직전 평소보다 아름다운 비서관이 날렵하게 마차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생각보다 성격이 쾌활한 타입인 비서관은 알면 알수록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게 싹싹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고 마차의 건너편에 앉았다.

마차라고는 해도 내가 평소에 알던 마차와는 전혀 틀렸다. 큰 마차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침대까지 있

었고, 게다가 너무나 화려했다. 눈이 아플정도로 금색이 가득했다. 아름다운 커텐, 아름다운 가구까지.

확실히 황제라는게 대단하긴 하구나 - 새삼 깨달았다.

「폐하는 어디를 가시죠?」

내 말에 비서관이 모르다니 의외라는 얼굴로 대답했다.

「신성지에 같이 가십니다.」

황제면서 안 바빠? 같이 간다고? 맙소사- 도망칠 수가 없잖아. 순식간에 희망이 물거품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고 있는데……

「신성지 안까지는 들어가시지 않지만…… 밖에서 기다리실 예정이십니다.」

「그렇게 하실 것 까지는……」

내 말에 비서관이 고개를 저었다.

「비 마마, 조심하셔야 합니다.」

비서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신성지는 폐하와 적대적인 관계입니다. 마마, 부디 조심하시고……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시면,


무조건 빠져나오십시오. 폐하와 근위대가 신성지를 포위하고 기다릴 예정입니다.」

이렇게 할 정도로 적대적이었나보지? 하지만 이 쪽도 상관없다. 나는 신성지에서 멀어질 생각이니까.

「폐하는 어디서 기다리시죠?」

「입구입니다.」

반대쪽으로 도망쳐야겠구나.

마차가 길을 달렸다. 나는 처음으로 황궁 밖을 나온 것이었는데, 수도의 사람들은 전부 몰려든 모양이

었다. 사람들이 에워쌓고 ‘황비’를 외쳐대고 있었다. 그 환호에 미안해졌다.

길거리를 쳐다보며 동정을 살피다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황제가 미소를 보내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

리는 것을 쳐다보면서, 새삼스럽게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알몸이 되어 서로를 만졌던가. 그리고 그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공유

했던가.

안녕, 아름다운 황제 폐하. 나 아니어도 곧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람 있을 거에요, 없더라도 다른 사람

을 좋아하면 되고.

이제는 바이바이.

4. 탈주 (1)

나는 이 나라를 얕잡아 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수도의 성문을 지나쳐 나와 조금 후에 도착한

숲을 보고 나는 한숨을

삼켰다. 맙소사, 이게 숲이야?

그 곳만 빛이 없다…… 굉장히 어두웠다. 하늘까지 자랄 생각인 것 같은, 끝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거

목들이 즐비한 숲은

어두컴컴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서 있었다.

황제는 내 어깨에 손을 두르고 천천히 그에게로 걸어갔다. 문득 분위기가 이상하다 싶어 뒤를 돌아보았

더니 다들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왜 이런 거지? 황제를 올려다보니, 황제의 표정도 차가웠다.

「들어라, 신관.」

황제가 냉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신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이번에는 병이라는 명목을 달지 못하

리라.」

‘이번에는’이라는 건, 저번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황제가 대놓고 협박을 하자, 신관이 몸을 파르

르 떨고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이 동네 사람치고는 참 작구나. 신관은 나보


다 조금 작았다. 웬만한 시녀 누나들도 나보다 큰 이 나라에서, 이 남자는 신관을 안 했으면 여자와 사

귀기 힘들었겠다.

「물론입니다, 폐하. 여섯시간의 제례가 끝나면, 비 마마께서는 곧 폐하의 곁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신관은 침착한 음성으로 대답했지만, 황제는 그가 아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

자, 그는 내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대었다.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어서 나도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주머니속의 보석이 아프다. 다리를 찌르고 있나보다. 뾰족하게 가공되어 있었더랬지……아니, ‘가공’이라

는 말 보다는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대는 나와 운명으로 이어져있다.」

황제가 뜬금없이 말했다. 로맨틱한 언어기는 한데 너무 뜬금없어서, 나는 다소 당황한 얼굴이었을 것

같다. 내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황제가 부드럽게 내 이마에 키스했다.

「그러니 그대가 없는 나의 삶은 삶으로서의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대가 없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

마음이 아팠다.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고작 ‘하늘에서 떨어졌다’에 불과하겠지만, 어떤 이유

로 좋아했든간에, 그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달라지지 않는다.

「신관, 들었나? 나는 나의 비가 사라지면 죽어도 좋다. 무슨 뜻인지 알 것이라 믿겠다.」

「알고 있습니다, 폐하.」

신관이 더욱 허리를 숙였다. 내게 말하는 사랑인지, 신관을 얼르는 협박인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나

는 황제에게 웃어주었다.

황제도 내게 웃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

그래봐야 소용 없는 것일테니까. 도망치다 잡히면 당신은 나를 죽이겠지. 하지만, 그래도 이 길이 옳다

고 나는 믿어.

네가 무슨 이유로든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싫어.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그래서 혹시나 너와 정말 그런 사이가 된다 해도, 너는 내게 영원히 평온을 줄 수 없을테니까.

나는 싫어. 나는 나만을 바라보는 사람과, 가족을 이루고 싶어.

내게는 너를 위할 의리도 없어. 어차피 너도 나를 속였으니, 결국 하나씩 저지른 사이가 되는 거지. 너

는 속여서 나를 잡았고, 나는 속여서 너를 떠나고.

「마마, 곧 재례가 시작됩니다.」

신관이 나를 재촉했다.

나는 다시 한번 황제에게 미소를 짓고 몸을 돌렸다. 황제의 시선이 느껴졌다. 염려로만 가득한 그 시선

을 받으면서도, 나는 이제 더 이상 뒤돌아볼 생각이 없었다.

안녕.

나 혼자, 마음 속으로만 그 인사를 건넸다.

신이 있다면 그는 정말 내 마음을 알아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관이 내게 말을 건네주었을 때 나는 그


런 생각을 했다. 신성지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태양이 뜨지 않은 것처럼 어두웠다. 신관은 내게 램프를

하나 건넸고, 자신도 램프에 불을 붙였다.

아직 해가 떠 있는데 불이 없으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니, 정말 숲이 울창하구나. 지구에도 이런 시

절이 있었을까? 아니, 아직 아프리카라던가 아마존 밀림같은데는 이럴까?

「마마, 말을 타실 수 있으신지요?」

안장도 있고하니 탈 수 있겠지.

「탈 수 있어요.」

「그럼, 저 나무를 향해서 달려주십시오.」

유난히 큰 나무였다. 이 거목들 틈에서도 보일 정도로. 잠깐, 아까 입구쪽에도 분명히…… 뒤를 돌아보자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저건 반대쪽 출구인가보죠?」

내 말에 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마. 그렇기에 저쪽으로 가다보면 중심부인 제단에 도착하실 수 있는 겁니다.」

그렇구나.

‘달로 돌아갈 수 있다.’ 그 말은 무슨뜻일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말을 달리자 조금 불편했지만, 곧

요령이 생겼다. 승마를 배워둔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조기교육에 감사할 뿐이다.

이십여분 말을 달려서, 신관이 멈췄다. 나도 그에 맞춰 멈추면서 재빨리 이곳을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곳이구나. 이제 지구에서 이런 숲은 밀림이 아니면 볼 수 없을 거야.

「여기서부터는 걸으셔야 합니다.」

말에서 내리고 고삐를 쥐었다. 내가 하는 것을 보더니 신관이 먼저 길 안내를 했다. 아까부터 팔목에

달랑거렸던 램프 때문에 팔목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자박자박, 풀을 밟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어디선가 들리는 새소리, 그리고 물소리.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곳은 별도 보이지 않겠구나. 나무가 정말 많다.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담쟁이덩쿨로 뒤덮인 곳은, 아름답지만 을씨년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

푸려졌다.

「들어가십시오.」

신관이 옆으로 비켜서서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 ‘귀신의 집’같은 곳에 혼자 들어가라고? 어이가 없어

서 신관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진심인 듯 그대로 고개만 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달도 돌아갈 수 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돌아가면 다시는 이쪽으로 올 수 없겠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나는 뒤를 돌

아보았다. 어두컴컴한 숲속에서, 초라한 신관 하나가 말 두 마리를 데리고 허리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

다. 그림같은 풍경이었다.
인사는 충분히 했지.

나는 육중한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보인 것은, 희미한 향 냄새가 나는 어두운 실내였다. 그리고 그 어

둠에 눈이 익자 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계단위에 서서 어둠같은 검은 천으로 온 몸을 가린 사람

이 있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가 없지만, 저 사람이 전설의 ‘라브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었다.

내가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그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서오십시오, 여행자여.」

‘황비’가 아니다. 갑작스럽게 실감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안도가 되었

다. 그 동안 이 곳에서 여러모로 마음 고생을 많이 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툭하면 사람을 죽

인다는 전쟁광 황제와 사람 머릿속을 드나드는 드래곤, 그리고 죽어버린 작은 여자아이.

「안녕하세요.」

내 말에 그가 스르륵 걸어왔다. 귀신같은 몸놀림이었다. 계단아래까지 내려오는데 마치 그 움직임이 미

끄러지는 것 같았다. 호러류에 한없이 약한 나는 몸이 움찔거렸다.

「달로 돌아가고 싶으신겝니까?」

목소리는 남자임이 분명했다. 키도 황제만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황제랑 체구가 비슷해서, 혹

시 황제면 어쩌지 - 라고 걱정했지만 (왜 이런 걱정을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올려다 본 그의 눈동

자는 녹색이었다.

「돌아가고 싶어요.」

내 말에 그가 싱긋 웃었다. 그것과 동시에 몸이 허물어졌다. 맙소사, 정신은 멀쩡한데 몸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지는데도, 남자는 움직이지도 않았다.

뺨에서 아주 희미한 냉기가 느껴졌다. 그것이 바닥에 닿았기 때문이라는 걸, 바닥을 보고 나서야 알았

다.

「시작해볼까요?」

남자의 말에 숨어있었던 사람들이 나타났다. 뭐야, 왜 숨어있었던 거지? 하나같이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람들이 나를 사냥에서 잡은 짐승을 운반하듯 사지를 하나씩 잡고 움직였다.

아픈 것보다도,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좋은 일 같지는 않다. ‘달로

보내주겠다’는 건 헛소리였나. 빌어먹을, 나 또 속은 거야?

그들은 지하실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와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사이, 아까 나를 데리고 왔던 신관은 여

전히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이 데리고 간 실내에는 해부대같기도 하고 진찰대 같기도 한 제단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그 곳에

올려놓고 단검을 꺼내들었다.

설마.
오싹해졌다.

몇 시간이나 지난걸까. 눈 앞이 자꾸 흐려진다. 그들은 내 온몸을 단검으로 긁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

지 나는 고통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나 수치심만큼은 컸다.

내 옷을 멋대로 벗기고, 온 몸을 단검으로 긁고 있다. 이유가 뭔지 묻고 싶은데 물을 수가 없다. 심장

이 오그라들 것 같이 무섭다. 온 몸이 피투성이인데도 그들은 긁고 또 긁었다.

모욕감에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공포로 심장이 멈출 것 같다.

그들은 내 몸에 칼집을 내고, 베어나오는 피를 마셨다. 그것은 라브만이라는 남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를 데리고 온 남자들은 그저 쳐다만 보고 있고, 세명의 신관과 라브만이 내 온 몸에 칼자국을 내고

있었다. 온 몸을, 남자들의 혀가 기어가고 있다.

숨이 막혀, 토할 것 같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이 무서웠는데, 나는 울지 않았다. 그들을 노려보았다. 가능한, 무표정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하나는 분명히 안다. 이것은 모욕적인 일이다. 그들은 내게 수치

를 주고 있다. 그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다.

웃기지 마. 내가 조금이라도 겁먹은 티를 낼 것 같아.

그러나, 이거 진짜 호러기는 한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혹시 신관놈들이라는건 다 뱀파이어라던가……?

「아픔은 없을 거라 믿습니다.」

넌 내가 입만 뚫렸더라도 죽었어, 개새끼야!

「분합니까?」

라브만 개자식이 물었다. 분해? 분하냐고? 널 씹어먹어도 시원치않은 이 판국에 분하냐고?

그 때, 또다시 상처가 생겼다. 허벅지 근처다. 지금 왜 나는 통각도 없고, 말도 못하는 걸까.

「황제의 것이 되는 겁니까? 유감이군요.」

놈이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밀어낼 수가 없는 것이 분했다. 힘이 없는 것이 이토록 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나와 무슨 원수가 져서!

그의 이빨이 내 입술을 깨물어 상처를 냈다. 그 상처를 혀로 헤집으면서, 라브만이 말했다.

「월인의 피가 황제에게 가다니 정말 유감입니다.」

달로 돌려보내준다는 건 거짓말이었냐?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내 입술의 상처를 빨아먹고 나서 그는 목에 칼을 들이대었다. 그리고 목

에 칼집을 내고 상처를

빨아먹었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가는 것을 느낀다.

마음이 모욕으로 식어가는 것도 느꼈다.


내가 해방된 것이 몇 시간 뒤였는지 알 수 없다. 그 때쯤에는 온 몸의 감각이 돌아왔다. 온 몸이 쓰리

고 아프다. 그래도 나는 티를 내지 않았다.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자주 뵙고 싶군요.」

라브만은 지껄였다. 놈에게 달려들고 싶지만 온 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걷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

을 다 쏟아부은 것에 가까웠다.

「나도 꼭 다시 만나고 싶군.」

내 말에 라브만이 피식 웃었다. 아까 지하실에서 내게 상처를 내고 피를 빨아먹을 때는 잠시 벗은 것

같았는데, 다시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놈들은 내가 나가자 문을 닫았다. 담쟁이덩쿨로 뒤덮힌 그 집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시간에 정신이

미쳤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되었지?

아직도 허리를 숙이고 있는 신관에게 가서 묻자 그가 대답했다.

「다섯시간정도입니다. 이제, 돌아가셔야지요.」

그는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겠지. 목 아래부터 발목위까지, 천이 덮히는 모든 곳이 베인 상처로

가득했다. 핏물이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나보다 먼저 말에 타려고 했다.

「저기, 타시기 전에 잠깐만……」

내 말에 신관이 다가왔다. 동그란 눈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아마 이렇게 정중한 걸로 봐서는 3 인의 대

신관이니 라브만이니 하는 윗대가리쪽은 아닌 것 같다. 아까 내 피를 먹은 놈들이 그 윗대가리 네명이

겠지. 다시 만나고 싶다고? 이쪽도 마찬가지야. 다시 만나면 죽여주지.

앞으로 한시간.

신관이 다가왔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복부로 주먹을 내질렀다. 그가 「크윽……」하고 신음을 뱉

으면서 쓰러졌다.

「미안해요.」

말로 미안하다고 하면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미안해요. 나는 그의 후드를 벗기고, 옷도 벗겼다. 옷을

갈아입고 내 옷으로 재갈을 물린 뒤 나무 사이에 숨겨두었다. 그가 나와 체격이 비슷한 건 다행이었다.

그의 옷은 내게 맞았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뒤 나는 말을 타고 달렸다. 옷을 갈아입는 것은 지독하게

고통스러웠다. 천이 온 상처에 닿아서 스쳐서 쓰렸다. 그래도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벗었던 장

식물들을 스커트에 담아서 보자기를 묶듯이 묶었다.

반대쪽의 거목을 향해서 달리는 것은 꽤 힘들었다. 무엇보다 말을 다루는 것이 보통 힘든게 아니었다.

말은 온순하지만 겁이 많아서 히스테릭해지기 쉬운 동물이었다. 알면서도 자꾸 초조해졌다. 거목의 앞에

서서 나는 떨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말로 달려왔는데도 이십여분 달린 것 같다. 이 숲, 정말 크구나.

멀리 황제의 군사들이 보였다. 분명, 친위대겠지. 그래도 황제가 반대쪽에 있고, 그들이 보호하는 것은

황비가 아니라 황제이기 때문에 반대쪽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근위대에서 황비를 모르는 자
는 많았다.

제발 들키지 않기를. 제발.

후드를 눌러 쓰고 나는 달렸다. 황제의 근위대가 가까워져 왔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리는 듯 하다. 배까지 그 진동이 느껴지는 듯 했다.

「서라.」

그 말에 말을 천천히 멈췄다.

「어디를 가는 거지?」

근위대에게 고개를 들지 않고 숙인 채 대답했다.

「마을에……」

「아아.」

그들은 그렇게 의미없는 목소리를 뱉으며 길을 열어주었다. 나는 좀 더 굽신거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

고 말을 재촉했다. 멀어지고 있다, 멀어지고 있다. 하느님 맙소사, 나는 그 곳을 빠져나온 것이다. 가

능한 멀리 가야 해. 가능한, 한도의 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어서.

어서 가자, 어서!

말을 재촉하여 달렸다. 계속 따끔거리는 온 몸 때문에 미치겠다. 그래도 지금은 도망쳐야 해.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없다!

이틀이 지났다. 일단 나는 수도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에 머물렀다. 마을 이름은 시오에나이스.

‘시오엔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황제를 좋아하는 곳인가 보다. 여관도 하나밖에 없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 오기 전에 수도 옆에 바로 붙어있는 도시에서 보석을 바꾸었다. 일부러 장식을 떼고 보석만

가져다주었더니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얼마나 고가일지 몰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먼저 가격을 제

시하라고, 가격이 맞지 않으면 그냥 나가겠다고, 하지만 돈이 좀 급하다고 말하고 주는대로 받아왔다.

여관에 들어와서야 그 보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았다. 내가 그 보석을 주고 받은 것은 900 골

드. 그러나 여관에서 묵는 것은 고작 3 골드였다. 이대로라면 기혼을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았

다.

다음 날 시오에나이스에서 나와 작은 마을쪽으로 이동했다. 말린 음식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건빵이 있다

고 해서 그것을 미리 사두고, 큰 도시까지 갔다. 혹시 모를 추격을 대비해서 일부러 ‘펠하임으로 간

다’는 말도 흘려넣었다.

전야제가 이뤄지기로 되어있는 날 아침에는 ‘셴’이라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셴’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무척 많아서 줄을 서야 했다. 그것이 나한테는 다행이었다.

「왜 갑자기 이러는거야?」
남자가 아내로 보이는 여자에게 물어보자 여자도 줄의 앞을 쳐다보면서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는데……누구를 찾나봐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라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인상부터 칙칙하겠구만.」

그 말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나왔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그러다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며 기

다리는 사람에게로 눈이 꽂혔다. 맥주, 저거다! 성분은 분명히 비슷할거야!

「맥주, 저한테 파시면 3 골드 드릴게요.」

맥주는 한병에 25 은화정도이니 파격적이었다. 남자는 새로운 맥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 그는 선뜻

맥주를 내주었다.

「그러시오.」

그래서 나는 맥주를 들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서 머리를 감았다. 제발, 제발 탈색되라, 제발! 처음에

는 별 영향이 없어보였는데, 태양빛을 받고 서 있는 동안 점차 붉게 변했다.

누가 봐도 검은색은 아니라고 생각될때쯤에, 나는 사람들에게 함류했다.

「잠깐, 머리색이……」

「이건 갈색이지. 이게 어떻게 검은색이야? 여기 봐, 칠흑같이 검다잖아.」

나를 세워두려던 보초가, 그 옆에 있는 동료의 말을 듣고 「그렇지?」라며 나를 보내주었다.

벌써 여기까지 오다니.

이 동네에 인터넷같은게 있을 리 없고, 전서구라도 있는건가? 성문은 통과했지만 계속 심장은 두근거렸

다.

그러고보니 오늘 전야제일텐데, 어떻게 되가고 있으려나.

「황비마마 시해범이 있다면서?」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줄 알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가진 사람이래요. 황비마마를 시해하려 하다니, 간도 크지.」

「잡아서 때려죽여야해. 신병에서 구할 유일한 사람에게 그게 뭐하는 짓이래?」

「그러게요. 빨리 잡아야 할텐데…… 수도는 지금 분위기가 엉망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오늘이 전야제인

데, 전야제도 못하고 있다고. 그러고보니 푸줏간 주인네 아들이요. 지금 감옥에 있는데 이번에 사면될

예정이었거든요. 그것도 취소된 모양이에요.」

황비마마 시해범?

황비가 혹시 여러명인가? 그럴 리가 없지, 황제는 합방식이 처음이라고 했잖아! 맙소사, 나를 시해했다

고? 내가?

도시는 크고 화려했다. 마차안에서 잠시 보았던 수도만큼은 아니어도 전체적으로 화려했다. 벽돌식 건물

도 많았고, 마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숙박업소도 많았는데, 나는 가능한 저가의 숙박업소로 골랐다. 돈을 아낄 필요가 있었고, 저가의 숙박


업소가 숨기에는 더 안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침대에 누워있으니 그 호화찬란하던 온실이 생각났다. 자꾸 황제도 떠올랐다. 그 목소리, 그 얼굴, 그

손놀림. 섹스와 일상생활, 모든 곳에서의 황제가 떠올라서 마음이 심난했다.

어쩌면 좀 좋아했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뒤통수를 맞았지만, 그래도 좀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정한 사람도, 그렇게 나를 원한

사람도 처음이었다. 좋아할 만은 했지. 그 짓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돈도 많았고, 또 권력자고……

아니, 그래서는 아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아니야.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다. 감정과 시간의 공유. 그리고 다정함과 열정.

그래, 그런 것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도망쳐야겠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떠나와보니 새삼…… 아주 조금, 그

리워지기도 했다. 아직 국경근처에도 못 갔는데.

일주일만에 내 머리카락은 밝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 머리색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서 나는 절대로 한 숙박업소에 머무르지 않았다. 가능한 움직였다. 같은 도시내에서라도 숙박업소를 바

꾸었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린트인’에 도착했다. 그 곳을 지나 ‘파인’으로 가면, 그 곳에 국경이 있었다. 나는 국경

을 넘을 생각이었다.

도망치기 시작한지 한달만이었다.

「국경이 폐쇄되요?」

내 말에 보초가 그것도 몰랐냐는 얼굴로 「어느 나라 사람이야, 도대체!」라고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국경이 폐쇄되? 왜?

「왜요?」

「자네, 전시였으면 기혼의 스파이로 의심받아서 잡혀갔을 사람이구만!」

그는 농을 걸었지만, 나는 제대로 웃어줄 수도 없었다.

「왜? 기혼에 급한 일 있어? 기혼 사람이야?」

「아, 아뇨……」

「그러고보니 생긴 게 특이하네.」

그가 내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해서 나는 황급이 고개를 숙였다. 실수다, 티나면 안되는 거였는데.

「생긴 걸로 뭐라 하지 마세요. 콤플렉스에요.」

그가 의아하게 생각하기 전에 재빨리 둘러댔다.

「뭐, 코가 좀 낮기는 해도, 그런걸로 콤플렉스씩이나. 그나저나, 자네가 머리카락이 검은색이었다면,

자네도 수도 이송 대상이 되었겠구만.」

「왜요?」

「자네랑 비슷해.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 쌍꺼풀 없는 눈에 낮은 코. 색조가 연한 입술. 약간 마른

체격. 하긴…… 자네는 약간 마른게 아니라 아주 깡말랐구만. 밥 좀 먹고 다녀, 사내 놈이 이게 뭐야.」


맙소사, 살 찌우면 안되겠다.

「수도에 공부하러 간 내 아들놈도 자네꼴이 아닐까 염려스럽구만. 아들놈에게 편지라도 쓰면 좋을텐데…

…」

갑자기 보초가 넋두리를 했다. 글을 아는 사람이 드믄 것 같기는 하다. 그래서 더욱 유브라데에서는 정

보가 느린 것이다. 나같은 인간은 천만 다행이지.

그래도 ‘셴’의 보초는 글을 알던데. 그 쪽은 큰 도시라서 그런가? 어차피 국경도 폐쇄되었다고 하니,

더 이상 움직이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리고, 도시보다는 마을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은

수도에서 먼 북쪽 마을이고 하니까…… 나야 이곳에 멈췄다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곳을 지나쳐서 조금

무리하여 파인으로 곧장 가는 모양이었다. 파인은 국경과 맞닿아있으니 아무래도 위험하고, 이 동네정도

가 안전할 것 같다.

국경이 언제 열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황비 시해범이라고 갖다붙여도 곧 열어야 할 것이다. 그 때

까지만 여기서 기다리자.

「제가 써드릴까요?」

그러자면, 이 곳에서 안면을 좀 터두는게 좋겠지.

「자네, 글을 쓸 수 있어?! 어떻게?!」

배웠으니까……이기는 한데. 뭐라고 둘러댈까 하다가 신관이 생각났다. 그래, 신의 가르침을 전하는 놈들

이니 글정도는 알겠지.

씹어죽여도 시원찮을 새끼가 생각났지만, 일단 기억속으로 던져두고 나는 미소지었다.

아직도 내 온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그저 베인것인데도 의외로 잘 낫지 않는 것이다.

「신관인…… 형이 있거든요. 배웠어요.」

내 말에 보초가 환히 웃으며 나를 초소로 안내했다.

「사랑하는 아들 로즈에게.」

아들 이름이 ‘로즈’? 그 알 수 없는 작명센스에 놀라 다시 보초를 쳐다보았으나 보초는 아련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요, 아저씨. 어디를 보고 있는거야? 보초가 내 마음 속 소리를 들은 것

처럼 고개를 퍼뜩 돌렸다.

「이봐.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하는 건가?」

저에게 그걸 물어보시면 안돼죠……

「날씨인사……라도 하시는게?」

「아, 그렇군.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그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여기는 가을인데 거기도 가을이겠구나. ……그리고 나서는?」

정말 편지쓰고 싶은 사람 맞아? 나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다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으신 건데요?」


내 말에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몸이 건강한지 알고 싶고, 공부는 잘하는지도 물어봐달란다.(당연히

건강하고, 공부는 잘 하고 있다는 답장이 오겠지.) 여동생은 아픈 게 나았다고도 써달라고 해서 대충

썼다.

「읽어봐줘.」

내가 편지를 쓰는 동안 목마르면 안된다며 차까지 가져다 준 아저씨가 건너편에 앉아서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부담스럽기 그지 없다. 이 아저씨에게 부탁을 받아 홀로 성문을 지키다 교대시간이 되어 교대하고 온

아저씨의 파트너도 구석에 자리를 잡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사랑하는 아들 로즈에게. 가을이 완연한데, 환절기에 감기에 걸리지 않았는지 걱정스럽구나. 이 곳은

낙엽이 떨어졌지만, 수도에는 아직 낙엽이 남아 있을 것 같구나. 잘 있는지 걱정스러워 편지 보낸다.

집은 걱정없단다. 나도 네 어머니도 건강하고, 네 여동생은 병이 완전히 나았단다. 너는 어떠니? 공부

는 잘 하고 있니? 아프지는 않은지, 공부는 잘 되가는지, 염려스럽다. 부디, 몸 조리 잘하고, 공부도

쉬엄쉬엄 하거라. 답장을 기다리겠다. 늘 너를 기다리고 믿고 있는 아버지가.」

내가 불러주었더니 보초 아저씨가 존경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네, 대단하구만.」

또 다른 보초 아저씨는 손뼉까지 쳤다.

「멋지네. 완전 시인이나 소설가 같구만.」

그리고나서 나는 엉겹결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보초 아저씨가 하도 고맙다며 뭘 주려 하시길래

그러면 찻값으로 생각해달라고 하고 넘어갔더니 온 마을주민이 들이닥친 것이다. 여관 주인은 ‘여관

비’대신에 글을 써달라, 푸줏간 주인은 ‘고기’를 들고 와서 글을 읽어달라, 잡화점 아저씨는 이런 저런

군것질거리를, 식당 아주머니는 구운 파운드케이크를 들고 오셔서 글을 써달라고 하셨다.

국경은 열릴 날이 요원하고, 또 당장은 이 곳에 머무를 핑계가 필요하기도 했다. 그래서 원하는대로 해

주다 보니 완전 마을의 스타가 따로 없었다. 급기야.

「예?!」

당황한 내가 눈을 깜빡이자, 다들 미안한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작은 여관방-이라고 해도 나를 예뻐하

시는 여관주인 아주머니가 가장 좋은 방으로 내주신 것이었다.-에 온 마을 주민이 모여서는 내게 간청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네는 어차피 기혼으로 갈거잖아. 하지만 당장 국경은 열리지 않을걸세. 황비마마 시해범이 아직 잡

히지 않았다고 하지 않나.」

보초 아저씨의 말에 이어 여관 주인 아주머니가 간청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국경이 열리면 더는 부탁하지 않을게요. 제발, 안될까요?」

그 아주머니 뒤로 푸줏간 주인 아저씨가 바톤을 받았다.

「우리가 생각해봤는데, 일주일에 한 30 골드씩은 줄 수 있을 거 같거든. 그, 그정도로 안될까?」

다들 상당히 간절한 얼굴이었다. 그들의 요지는 자신들의 아이를 가르쳐달라는 것이다. 글을 가르치는

곳은 도시밖에 없는데, 일단은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가 대부분이고, 아닌 곳은 몇 군데 없으며,

거기까지는 유학을 보내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하긴, 나도 수도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한달이 걸렸다.

「30 골드는 됐구요……」

나는……정말로 이런 류에 약하다. 부모라는 사람들에게 한 없이 약하다. 사회적 약자에게 정말 약하다.

내 부모는 저런 사람들이 아니었고, 나 자신도 늘 약자였기 때문에- 돕고 싶어진다.

「그냥, 지금처럼 맛있는 거 주세요. 여관비 대신 내주시고요. 그냥, 그거면 됐어요.」

어차피 국경 열릴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데 핑계삼아 잘 됐네. 그런데 애새끼들이라…… 내가 과연 애

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과연…… 과연!

-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잘 지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생각하는 그 빌어먹을 초딩들과 이 아이들은

질적으로 틀렸다. 아이들은 글을 배우고 싶어했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회가 흔치 않은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가르치는 쪽도, 그 열의에 전염될 정도로.

「이게 뭐라고?」

「코끼리요!」

「이건?」

「사과요!」

옹기종기 앉아서 아이들은 아기 새처럼 빽빽 대답했다. 애들은 재수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동네 아이들은

한 없이 귀엽다. 콧물 질질 흘려가면서도 눈은 초롱초롱하다. 늘 말하는 꿈도 ‘돈 많이 벌어서 엄마 고

생 안시킬거에요!’같은 것이다. 한국에서 초등학생 주제에 설왕설래의 키스나 해대는 놈들과는 사뭇 틀

린 것이다.

글자는 다 가르쳤고, 이제 문법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보초 아저씨가 자신의 아들이 보던 책이라며 초

급 수준의 책을 가져다 준 것이 도움이 되었다. 아주 초급이라서, ‘안녕하세요’같은 것들이 쓰여 있었

다.

사실 말을 할 줄 알면, 글을 알기는 어렵지가 않다. 아이들은 곧 편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

곳에 온지 이주만이었고, 날씨도 쌀쌀해져있었다.

이렇게 빨리 글에 익숙해지리라고는 생각하지못했던 동네 주민들은 마치 내가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

를 좋아했다. 내가 동네에 나타나면 음식을 싸주기 일쑤였고, 여관방에서 내려올라치면 주인 아주머니가

숨이 턱에 닿을 것 같이 뛰어나와 제일 비싼 음식을 가져오라고 주방장에게 성화를 부렸다. 그 주방장


아저씨 딸도 가르쳤기 때문에, 주방장 아저씨도 만사 제치고 내게 음식을 해주었다.

「잘 먹을게요.」

내 말에 아주머니가 내 등을 솥두껑같은 손으로 팡팡 내려치셨다. 으윽, 아파요……

「우리 애가 이제 편지도 쓸 수 있더라니깐! 아휴, 다 선생님 덕분이야.」

「아니요, 그건 시오에나가 머리가 좋은 덕분이죠. 정말, 총명해요.」

그런데 그 이름은 바꾸시는게 좋지 않겠어요? 그런 미친놈의 이름을 여성형으로 쓰셔서 어쩌시려구……

하긴 예쁘긴 하드라, 예쁘긴.

「여자애라 뭐 배울 이유가 있나 싶어도, 부모 마음은 그런게 아니잖어.」

「응? 여자애라서 왜 배울 이유가 안되요?」

이해가 안가네. 오늘은 맛있는 양고기 스튜였다. 스튜를 한 입 집어넣으며 묻자 주인 아주머니가 쓴 웃

음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글 같은 거 배워봐야, 귀족 놈들 첩밖에 더 해.」

「관직에 오르면 되죠.」

「여자가 어떻게 관직을 해! 여자도 시험에 응시할 수는 있다고 들었지만……」

「지금 비서관이 여자잖아요.」

레니 데이비드가 생각나서 묻자 아주머니 눈이 댕그래졌다.

「비, 비서관이면 굉장히 높은 직책이잖아? 그, 그러니까- 」

「황제폐하의 최측근이죠.」

「비서관이 여자야?」

「그럴걸요.」

「그런 걸 다 우찌 알아?」

실수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서관이 여자라는 건 다 알고 있는 게 아니었던 건가. 그러나 아주머

니는 그저 함박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들었어요.」

「신관으로 있는 형에게 말이야?」

「그……렇죠, 뭐.」

그 말에 뭔가 말하려던 여관주인은 저쪽에서 술주정뱅이들이 소리쳐서 그녀를 부르자 「알겠어, 기다

려!」라고 그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소리치고는 내게 속삭였다.

「많이 드세요, 선생.」

「예……」

그래도 음식은 끝내주게 맛있다니깐. 먹는 것에 한 없이 약한 나로서는 맛있으면 행복했다.

도피 생활은 이제 ‘생활’이 되어가면서 두렵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일주일에 한번씩 맥주로 머리를 감

자, 머리가 푸석해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좋았다. 가면갈수록 나는 황제가 뿌리는 정보와 멀
어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제는 햇빛 아래에서 나를 본 적이 없지만, 이 곳은 늘 태양빛으로 가득차있었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빛을 받아 갈색으로 보였다. 갈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 나는 그가 말하는 인물상에서 멀어보였고,

사람들은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목적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어딘가에는 나를 돌려보내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혹은 내 세계로

돌아갈 곳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국경이 열리길 기다려야 한다.

「이야, 자네도 국경이 열리길 기다리는 거야?」

여행자들과 툭하면 자리를 같이하면서, 얻어 듣는 것도 많아졌다. 이 동네 여행자들은 대부분 국경이

열리길 기다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결국 비슷한 처지였다.

「그런데 그 이야기 들었어?」

남자가 목소리를 낮춰서 나도 탁자쪽으로 몸을 숙였다.

「아아, 그 이야기 말이지?」

맞장구를 쳐주던 남자도 낮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섯명이 한 팀인 자리에 합석해서, 나도 같이 목

소리를 낮춰 물었다.

「무슨 이야기인데요?」

「황비 시해범. - 그거, 실은 황비래.」

온 몸의 피가 순식간에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황비가 사라졌다더군. 신성지에서 재례를 받는데, 사라졌나봐. 그런데 남은 것은 황비의 피묻은 옷

뿐이었다고

하니 황궁이 뒤집어지지 않았겠어.」

「황제가 노여워하면서 당장 자신의 비를 내놓지 않으면 신성지를 치겠다고 한 모양이야. 그러나, 신관

은 황비의

옷으로 묶여있었고, 본인의 옷은 갈취당했으니…… 이게 무슨 뜻이겠나. 황비 본인이 그렇게 했다는 것

밖에 더 되.」

「신성지 놈들이 죽일 놈들이야. 신병을 구하기 위해 온 황비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황비가 달아난단

말인가.」

온 몸을 칼로 긁고 피를 마셔댔죠. 하지만 그 일 때문에 도망친 건 아닌데, 어쩌다 이야기가 그쪽으로…

댁들 표현으로 하자면 ‘달에 돌아가고 싶을 뿐’이지요.

「하지만 말야, 나라도 황비자리는 싫을 것 같아. 뭐니뭐니해도 사내놈 첩인거 아닌가? 누가 좋겠어.

게다가 황제라면……」

「그래, 그 황제는 좀……」

다들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하긴 나쁜놈이지, 게다가 전쟁광. 어느 놈이라고 좋겠냐.


댁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쁜 놈이라니깐!

티는 내지 않고 이야기만 듣고 있는데, 목소리가 좀 더 낮아졌다.

「그나저나 사실일까.」

그 말에 다들 이상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다. 그들은 눈짓을 교환했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 눈짓을 주었

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 가만히 있자,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월인의 피를 마시면 불로장생한다는게.」

불로장생? 늙지 않고 오래 산다? 순간 어이가 가출해버리는 바람에 꽤 오랫동안 멍해 있었다. 아니, 그

러니까- 남의 피를 긁은 게 고작 불로장생이라는 헛소리를 믿고 그랬다는거냐.

사실 엄청나게 분노해있었는데 좀 사그러드는 기분이었다. 불로장생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잘 알고 있

다. 나 자신이라도 솔깃한 이야기일테고. 그게 멀쩡한 사람을 거짓말로 유인해서 피를 긁어먹어도 된다

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름대로는 거창한 이유가 있긴 있었네.

「황제도 그래서 황비를 찾는 거라지.」

말도 안돼. 그는 내 피는 마신 적이 없다고.

뜬 소문이라는 건 무섭기 그지 없다. 황제는 졸지에 뱀파이어라도 된 듯한 분위기였다.

성질 나쁜 남자인 건 확실하지. 그래도 나에게는 다정했다. 황제 씩이나 되어서 내 말을 들어주었지.

씻겨주고, 안아주고, 라로가 죽어서 떨고 있는 나에게 몇 번이나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괜찮다고, 지켜

주겠다고. 그래, 그런 사람이었어. 최소한 내 피를 마시려고 한다 - 는 음해성 발언을 들어야 할 사람

은 아니었어.

날씨가 쌀쌀했다.

겨울의 길목에서, 북쪽은 좀 더 추웠다. 국경을 넘든 말든, 우선 파인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도 좀 사고, 보석도 하나 더 바꾸고, 국경 소식도 좀 들어야겠다.

「울지 마……」

파인으로 아주 가는게 아니라 잠깐 다녀오겠다는데도 아주 성화들이었다. 여관 주인 아주머니는 국경이

열린 것도 아닌데 어디를 가느냐며 남의 옷 보따리를 빼앗아들고, 아이들은 다리에 매달렸다.

아, 진짜 왜들 이러세요……

「진짜 오늘 저녁에 돌아올거라니깐요.」

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있다. 아니, 진짜로 돌아올거라니깐요. 여관 주인 아주머니의 눈이 부리

부리 무섭다. 아줌마, 눈 튀어나오겠어요……

「싫소. 분명 선생은 우리에게 질려서 가는게야.」

「아니라니깐요.」
「그럼 와 옷 보따리를 가지고 가는 건데?」

그냥 옷을 좀 버릴까 했을 뿐인데. 그 안에 신관복이 있었다. 도망쳤을 때 입었던 옷을 슬쩍 버리고 올

까 했을 뿐이었는데.

나는 아주머니에게 옷 보따리를 빼앗으려던 것을 포기했다.

「그럼 갖고 계세요. 다녀올테니깐요.」

「진짜 올거죠, 선생님.」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애들은 울고, 부모들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만류하고, 여행자들은 재밌다는 듯이 구경하고.

미치겠다. 얼굴 팔려서 좋을 게 없는 입장인데도.

「진짜로 돌아와요, 정말로 돌아올거라니깐요.」

몇 번이나 다짐을 들은 사람들이 그제야 놓아주기 시작했다. 새벽에 나갈려고 한 것이 벌써 아침이었

다. 주방장 아저씨가 도시락을 세 개나 주셨다.

「괜히 비싼 식사 사드시지 마시고, 이거 드세요. 그리고 얼른 오시고.」

맛있는 거에 약한 건 또 어찌 아시고……

「그러고보니, 여기 음식이 별로인 거 아니요?」

이건 또 왠 불똥? 잡화점 아저씨가 의심으로 가득 찬 눈을 하고 여관 주인 아주머니와 주방장 아저씨를

노려보았다.

「음식이 별로라니, 한스씨- 지금 말 다했어?!」

여관장 아주머니, 바로 방어태세에 돌입. 왜 갑자기 싸우고들 그러세요!

「음식 맛있는데 왜 그러세요……」

나도 여관 주인 아주머니 편을 들자 잡화점 아저씨가 날카로운 시선을 나를 쳐다보았다.

「선생님, 마르신 것 좀 봐. 엉? 이게 남자 팔목이야? 이 집에서 음식을 어떻게 주었길래 이래?!」

「우리집 야채도 공짜로 드렸잖아요, 선생님 드리라고 드렸더니. 어머, 진짜 저 팔목이 아주……」

남의 팔목 잡고 이러지 마세요. 손목을 빼고 싶은데, 잡화점 아저씨 힘이 보통이 아니다. 지구로 치면

북구인쯤 되어 보이는 유브라데 사람들은 남녀할 것 없이 나보다 크고, 나보다 힘도 센 편이었다. 물

론, 쌈질이라면지지 않겠지만……

나이 정정하신 아저씨나 아주머니를 상대로 쌈질은 가당치도 않다.

「아니, 제가 요즘 살이 빠지는 추세일뿐이에요. 아- 정말 왜 이러세요. 진짜 잘 먹고 있어요, 저!」

어쩌다 이런 말로 빌어야 하는 사태가 온건지. 다들 믿지 않는 얼굴인 가운데 나는 잘 먹고 있다고 사

정사정하고, 그 끝에야 겨우 여관을 나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말을 탔다. 신성지에서 빠져나오던 때가 생각난다. 온 몸이 따끔거려 죽을 것 같았다. 마음은

모욕과 수치로 너덜거렸고, 그래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움직였다.

……지금 같으면 절대 못하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거기 서라.」

파인으로 말을 모는데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나인가 - 싶어서 놀라 뒤를 돌아보았더

니, 내가 맞았다. 멀리서 병사들이 나를 부르고 있다. 어줍잖게 도망가는 것보다는 서는게 나을 것 같

아 우선 말을 멈췄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뭘까.

「그러세요.」

「자네 혹시 저 린트인 사람인가?」

거기 사람은 아니지만.

「예, 그런데요?」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심장이 덜컹.

「약간 마른체격에 밀빛 피부인 남자를 보지 못했나?」

잘 해야 해. 잘 해야 한다, 김민후.

「린트인은 작은 마을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았더라면, 제가 알고 있겠지요. 검은 머리카락도 검은 눈

동자도 없었습니다.」

내 말에 병사들 서너명이 눈짓을 교환하더니 「가 봐도 좋다.」라고 허락을 내렸다. 말을 다시 출발시

키려는데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폐하 직속 부대가 움직인다며?」

내가 들은 것은 그 한마디였다. 말은 출발했고, 곧 멀어졌으니까. ‘황제 직속 부대’가 뭘까? 황제가

추격대를 보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황제 직속 부대라고?

파인에 도착해서도 내내 그 생각 뿐이었다. 황제 직속 부대라니, 그게 뭘까- 하고.

황제의 서재에서 닥치는 대로 읽은 여행기들에 의하면 파인은 수도 다음으로 화려한 도시였다. 그럴만

한 것이, 파인을 지나면 하루 밤낮을 달려야 하는 ‘신의 길’이 이어지고 그 다음은 윗대륙인 것이다.

큰 땅덩어리 사이를 연결하는 ‘신의 길’은 유일한 육로였고, 그래서 그 ‘길’바로 앞에 있는 파인이 성

황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의 길 앞에는 기혼의 도시가 있었지만 -실제적인 국경은 신의 길 끝이었

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파인의 성문을 ‘국경’이라고 불렀다.- 그 도시는 전쟁으로 불에 탔다고 했

다.

「이 곳은 멀쩡하잖아요.」

내 말에 옷 사이즈를 빼주던 주인이 뭘 모른다는 얼굴을 했다.

「기혼이야 당장 수도를 차지할 생각이 컸고, 우리 황제 폐하는……그런 분이 아니잖아요.」

「그럼요?」
「도대체 어디 사람이야? 황제 폐하는 기혼의 모든 도시를 불태웠어요. 기혼같이 큰 나라도 그러니까

정말 수가 없더라구. 지금 기혼은 다섯 개 도시외에는 허허 벌판이라오. 그 도시들도 이민자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서……」

그래서 유난히 거지들이 많은 거구나. 성문 근처에는 수백명의 거지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으로 들어오

려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붙어서 돈을 달라고 했다. 누군가 한명이 돈을 주었더니 그 사람에게 수십명이

떼로 몰려드는 것을 보고 나는 주지 못했다.

내 코가 석자인 판국에 누구에게 돈을 준단 말인가.

옷을 갈아입으라면서 가리킨 탈의실은 공용이었다. 맙소사, 이런 곳에서는 갈아입을 수가 없다. 내 온

몸은 칼집 투성이고, 나는 옷을 벗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주세요.」

내 말에 주인이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말이에요. 옷을 입고 나오셔야 사이즈를 보정해드리지.」

「됐으니까 그냥 주세요.」

「아니, 그래도……」

내 말에 주인은 가만히 있다가 한숨을 쉬면서 내게 옷을 주었다. 옷을 한 두벌만 살 생각이었는데 혹시

몰라 여러 벌을 샀다. 파인에서 기혼의 도시까지는 상당히 걸리는 모양이다. 그 미친 황제가 다 불태웠

다고 하니 도시는 멀리 가야 있을테고, 그러자면 옷이 여러벌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국경이 곧 열릴 것이라는 공고가 붙어 있었다. 도시 사람들도 대부분 글을 읽지 못하는지 저게 무슨 말

인지를 몰라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글자를 좀 아는 사람들이 틀리게 읽기까지 해서 정보는

어처구니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젊은이, 저게 뭔 말이우?」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는 할머니가 내게 물었다.

「국경이 일주일 뒤에 열린다는군요.」

대답해주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말이우?」

「젊은이, 글을 읽을 수 있는게요? 일주일 뒤?」

「호오- 일주일뒤라니, 다행이군요. 그 말이 다인가요?」

공식문서에 쓰이는 글은, 문법이 평소에 쓴는 것과 차이가 난다. 나는 천천히 그 글을 읽었다.

「일주일 뒤에, 국경이 열린다. 들어오는 자는 자유로우나, 나가는 자는 엄중한 검문을 거칠 것이다. -

라네요.」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한숨과 함께 소란스럽게 뭐라고 말하는 가운데, 나는 한 줄을 읽고 숨이 막혔다.

마지막에 쓰여 있는 문장이었다.

「돌아올 자는 반드시 돌아오게 될 것이며, 그대가 원하는 길은 그 곳에 없다.」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중얼거렸던걸까? 내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아, 이건 다른 거에요. 신경……안 쓰셔도 될거에요.」

이건 나에게 하는 말이야. 나에게 전하는 말이야. 내가 원하는 길이 그 곳에 없다고? 없다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네가 도대체 어떻게 알아?

순식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국경이 열린다는데, 그래도 마음이 무겁다. 이제까지의 상황으로 보건대

국경이 아무리 철통같은 경비를 더해도, 일단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을 찾는 이상

에는 내가 걸릴 확률은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무거웠다.

벌써 저녁이구나.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갈 곳으록 가고 있었다. 국경이 예상보다 오래 닫혀있었는지라 여인숙마다 만원이었다. 린트인

사람들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내가 여기서 묵을 여인숙은 있지도 않았다.

옷을 사고, 도시를 빠져나가려다 귀금속점에 들렸다. 성문 바로 옆에 있는 곳이었는데 쇼윈도를 보니

꽤 화려해보였다.

「이, 보석을 바꾸고 싶은데요.」

내 말에 주인이 보석을 보더니 「무슨 가문에서 오신거요?」라고 물었다. 이 정도 보석은 귀족들이 파

는 모양이지.

「아니요, 귀족은 아니에요.」

「이만한 보석을 돈으로 바꿔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 우선 좀 앉으시겠소? 여보- 차 좀 내오지.」

아주머니가 차를 끓이러 가신 사이, 남자는 보석을 감정했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가져다 주신 차를 마

시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뭐지? 내가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데 그들이 오자마자 주인이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사람이오!」

그들이 나를 결박했다. 어이가 없다. 무슨 일이지? 내가 황비라는 걸 안 건가? 아니면 그 비싼 보석이

왜 나같은 놈에게 있는지 몰라서 지금 이러는 건가? 내가 도둑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머리가 어지럽게 회전했다. 도대체 뭐지?

팔이 뒤로 꺾이고, 강제로 무릎을 꿇게 되었다. 아프다-는 둘째치고 무슨 일인지 알아야 대처할 것이

아닌가.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지?

설마……설마……!

누군가가 거칠게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겨서 어쩔 수 없이 목이 들렸다. 금안이 먼저 보였다.

빌어먹을.

나는 절망감으로 눈을 감았다.
「오랜만이야.」

쉰 목소리로 황제가 인사를 건넸다.

황제는 나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목을 치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도망칠 경우 그가 날 죽일거라고 생각

했는데 그는 그럴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나를 안아올렸다.

쪽팔리다는 생각이 안 든 것은 아니지만, 이 상황에서 반항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강심장이 아니었다.

「많이 말랐군.」

그는 나를 말 위에 태웠다. 왜 여기에 태우는 건지 몰라서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자신의 망토를 벗어

나를 뒤집어 씌운 그가 뒤에 올랐다. 그의 팔이 양 허리를 스쳐 고삐를 잡는 것을 느끼며,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머리는 왜 이래?」

그는 왜 도망쳤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한 손으로 능숙하게 고삐를 잡고 말을 다루면서, 그는 다른

한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만졌다.

「머리색을 잘도 바꿨군. 그러니까 못 잡아냈지. 덕분에 좋은 거 배웠어.」

그는 특별히 나를 원망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 부분이 더 호러였다. 당연히 화를 낼 거라 생각

했는데.

죽을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머리카락을 만진 손을 내려서 내 허리를 부둥켜안은 그가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대고 냄새를 맡았다.

「너의 체향이로군. 실감이 난다.」

나도 네 목소리를 귀에서 들으니 실감이 난다. 빌어먹을, 잡혔구나. 생각보다 오래 버틴 것인지, 너무

나 빨리 잡힌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안 걸까.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밑으로 갈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

지?

그가 갑자기 내 몸을 세게 안아서, 그의 손가락이 옆구리 뼈 사이를 파고들었다.

「윽……」

신음소리가 나갔다. 그 목소리에 황제가 웃었다.

「드디어 목소리를 듣는군.」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음산하다기보다는 그저 유쾌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이 황제가 미친 놈 같았

다. 심장이 심하게 뛰었다. 무서워서라는 건 알겠는데 잡혀서 무서운 건지 이 황제가 광인이라는 확신

때문에 무서운건지 영 종잡을 수 없다.

「어떻게 날 찾아냈죠?」
결국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질문이 의외라는 듯이 황제가 웃음소리를 냈다.

「그대는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어. 왜, 못 찾아낼 것 같았나?」

-사실 못 찾아내라고 열심히 노력하기는 했지만, 잡힐 것 같기는 했었다. 그래도 스스로는 완벽한 노력

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남의 서재에서 지도를 뜯어가다니. 당분간 서재 출입금지야. 덕분에 이쪽도 엉망진창이야. 혼례식은

개판이 되고.」

수도까지 가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파인에 있는 성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황제와 둘만 남겨지자, 긴장은 배가 되었다. 이 황제만 어떻게 하면 다시 한번 도망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랬다간 정말 유브라데에 한없이 쫓기게 되겠지.

황궁에서의 엄청난 크기만 보다가 드디어 방 다운 방에서 황제랑 둘이 있자니 뭔가……새삼스러운 생각들

이 들었다. 황제와 이 방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그 화려한 궁이 어울렸다.

황제가 칼집을 풀어 의자에 올려두는 것을 보다가, 꽤 크기는 하지만 - 해볼만 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

이 들었다. 필살 한방으로 해치우면 되지 않을까?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수도로 한방- 될지도 몰라.

될지도 몰라.

주먹을 쥐었다. 그가 아까 나를 깨지는 물건처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침대위에서 주먹을 쥐고 움직이려

는 찰나였다. 황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아직도 내게 등을 보인채로 웃음 소리를 냈다.

「그런식으로 살기를 비춰서는 안돼. 말단 신관놈이라면 몰라도 나는 당하지 않아.」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넌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야. 정말로.」

황제가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고 티와 바지, 랩스커트를 입은 차림으로 다가와 내 앞에 서더니 갑자기

티를 확 들추었다. 황제의 말에 당황하고 있던 나는 제대로 된 반항도 한 번 못해보고 그렇게 맨 몸을

보여야 했다.

그는 내 칼자국이 무수한 몸에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잠시 내 몸을 내려다본 그의 표정이 차가워지는

것이 심상치 않아서 나는 옷은 내리려 했지만, 그의 손에 제지당했다.

「신관 놈들이로군.」

노여움으로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는 내 상처들을 쓸어보면서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떴

다.

「그대의 옷을 찾았을 때부터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다. 아니었지만……」

그가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가린 입에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들려서 나는 눈을 감았

다.

「수천명의 목숨을 거두었는데도, 왜 그대의 고통에는 이토록 민감해질 수 밖에 없는 건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나왔다. 하긴 너는 나를 좋아하니, 화가 났겠지. 났겠지만……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차마, 그 자국들을 더 이상은 볼 수 없는 것처럼.

아마도, 그는 나를 무척 좋아하나보다. 하지만, 그가 죽였다는……그의 옛 여자친구. 황태자의 생모일 여

자가 나는 가여워졌다.

그의 마음을 잡으려면, 아들을 낳는 것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쪽이 나았을텐데. 그럼 아마 그대는 이

남자의 사랑을 받고 있을거야. 당신의 가문도 멀쩡했겠지. 양쪽 다에게 좋은 관계였을텐데 말야.

이 남자가 나를 어느 정도 좋아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는 하늘에서 떨어진 인간이 신기해서 좋아하

지. 하지만 나는 호기심으로 점철된 애정보다는, 오래가는 평온한 사랑을 바라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곳에는 내 자리가 없다. 내 과거도, 나를 아는 사람도, 아무것도 없어.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는

‘월인’이라는 허울 좋은 단어 뿐이야.

그에게 안긴 채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그래 넌 날 좋아하는구나. 그게 어느 정도인지 어떤 감정인지

아리송하지만,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건 부정하지 못하겠다. 도망친 나를 잡고도 화를 내기보다는 내 상

처에 안타까워하는 네가, 불행히도 나는……

몸만 마음에 들어. 이건 안되는 관계야.

「이젠 안 아파?」

그가 물었다. 아프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다는 듯이.

「하나도 안 아파요.」

내 대답에도 그는 나를 놓지 않았다. 힘주어 끌어안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품 안에 넣은 것이 전부인

그의 포옹에 한숨이 나왔다.

「지켜준다고 약속했었는데……」

그가 애통한 목소리를 내서 나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도망친 건 내쪽이야. 어째서 당신이 그런 목

소리를 내지? 그런 말을 하지?

당신은 이상해. 도망친 건 내쪽이고- 당신은 나를 잡았지. 그게 우리의 현재상황이라고. 그런데도 당신

은 너무나 마음이 아픈 것 같이 보여서, 나는……

「미안해.」

당신이 사과할 일이 아닌데도, 당신은 사과한다. 당혹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는 내게 화를 내지도 않

고, 그는 나를 죽이지도 않았다. 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 같지도 않고, 그는 그저 내가 아픈지-

그리고 그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회의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당신 탓이 아닌데도.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고, 자신의 그런 마

음을 뻔히 알면서도 속으로 이죽대는 나같은 인간에게 그가 이러는 것이, 마음 아팠다. 나는 늘 사회적

으로 약자였고, 그는 강자였지만, 우리의 관계에서는 그것이 전복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약자였다. 나는 그를 핍박하고 있다.

아, 빌어먹을. 나는 내가 가해자가 되는 상황이 정말 싫단 말이야.


-난 절대로 너랑 안 놀아. 절대로 너랑 다시는 안 놀아.

오래된 과거의 한 구절이 떠오르려해서 그걸 누르느라 한동안 나는 말도 하지 못했다. 과거의 잘못은

용서받을 수 없다. 용서해줄 대상이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이상에는, 그 일을 과거로 흘려

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남겨진 그 장면은 늘……관둬야 한다. 이 생각을 더 하면 안돼. 그럼 또 결론도 나지 않을

생각을, 계속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키스해도 되?」

그가 갑자기 물어서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의 금색 눈, 그의 매끄러운 뺨, 그의 예쁜 코.

그의 아름다운 얼굴. 나는 그것들을 유심히 보았다.

그 동안 그는 초조한 것처럼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내게 그가 한번 더 물었다.

「키스해도 되?」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알몸으로 서로 부비기도 했잖아. 이제와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걸까. 그는 더할나위 없이 애절한 표정으로, 마치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어서, 그

게 좀 마음이 아파서……

「하세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조금 움직여서, 약간 대각선인 상태로 입을 맞췄다. 그래, 이런 키스만 하더라도,

각도를 맞추는 것도 당신 몫이지. 나는 그저 가만히-

아, 진짜 가해자잖아. 관계의 재조명 속에 싹트는 죄의식. 미치겠다.

우리 입장에서 그는 가해자가 아니었다. 아니, 한달전까지는 가해자였을지도 모르겠는데, 여하간 지금

은.

이 애매한 관계를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그가 잡은 거다. 그러니까 그에게 문제가 있다! -라고만은

할 수 없는 이 애매모호한 관계. 내가 잘못한건가?

입술을 입술로 문지르던 황제는 천천히 입술을 핥기 시작했다. 혀를 내밀어서, 그는 온 입술을 맛본뒤

입술을 갈랐다. 치아와, 잇몸, 혀와 혀뿌리, 입천장과……볼 안쪽까지, 그는 남김없이 핥았다. 그것은

키스라기보다는, 확인절차에 가까웠다.

「그대와 키스하게 되어서 영광이야.」

황제의 말에 가슴이 지끈거렸다. 황제씩이나 되서 이럴 이유가 없잖아. 당신은 황제고, 그리고 나는……

황제가 내 혀를 가지고 가, 자신의 입에 담았다. 그는 아직도 내 몸에 제대로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내가 아플까봐 이러는 것이 절절하기는 한데, 그러고보니.

「말랐네요.」

많이 말랐다. 뺨도 그렇고, 몸도 그렇고, 많이 말랐네. 표정은 더 아파보이고…… 신관 놈들에게 몸이


베이던 걸 떠올려보았다. 수치와 모욕감. 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불로장생’라는 단어를 듣

고나서는 그렇구나, 했다. 그래- 그 정도 타이틀이면, 일단 이해는 가지. 안 늙고 길게 산다는데, 나

라도 끌리겠다. 물론 사석에서 그 라브만 자식을 다시 만나면 그 자식이 죽든가, 내가 죽든가- 내가 죽

더라도 그 자식이 살아있는 꼴은 못 보지-지만, 그래도…… 이 남자가 이렇게 아파할 일은 아닌데. 타인

이고, 또 내 통각이 그에게 전염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그는 아파하고 있다. 정작 상처가 남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나보다 더.

「많이 말랐어요.」

「그대보다는 덜해. 어쩌다가 이렇게 마른거야? 보석도 들고 나갔으면서, 먹지도 못한 건가.」

아니, 먹기는 먹었는데…… 먹은 정도가 아니고 진짜로 잘 먹었는데.

「보석을 겨우 하나밖에 안 바꾸다니. 그걸로 잘 지낼 수 있었던 건가?」

소곤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가여워서,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이 감정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

겠다. 사랑은 아니고, 동정은 더더욱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동질감에 가까운. 아니, 동료애에 가까

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짧은 시간을 공유했다. 작은 감각을 공유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완전한 타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좋아할지도 모르겠다고……두려워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 나는 어떨까?

나는 지금 이 남자가 가엽고 안타깝다.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이 남자를 끌어안고 있

다. 이 남자는 무서운 사람이고, 이 남자는 전쟁광이고, 이 남자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인다. 이 남

자에게는 아들도 별 거 아니고, 이 남자에게는 연인도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하는 걸 알겠다. 그래서 이 남자는, ‘원하지 않은 아들을 낳았다’는 이유로 연인도

죽일 수 있었던 이 남자는, 지금 나를 이렇게……이렇게, 걱정하고 있다. 도망친 나를 잡고서, 이렇게-

아무런 질책도 없이 그저 걱정만을.

단 한번도 나는 이런 걱정을 받아본 일이 없었다. 늘 혼자 먹는 밥, 내가 아프거나 말거나 관심없는

집, 내 이름도 잘 모르는 멤버속에서 어울리면서, 그렇게 살았었다. 이런 걱정은 단 한번도 받아본 적

이 없어서 당황스럽고, 민망하고, 마음이 따듯하고, 왠지 재채기가 나올 것 같다.

「잘 먹고 잘 지냈었어요.」

그가 안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하나로 그렇게 말했다. 그는 나를 안은 채 대답했다.

「그건 그거대로 기분 나쁘군. 나는 전혀 잘 지내지 못했어.」

그래보이네요.

「내일부터 수도로 돌아갈 준비를 하지.」

결국 그 궁으로 돌아가게 되는 건가. 한숨이 나왔다. 그 곳을 나오기 위해서 내가 이제껏 얼마나 노력

했는데. 내 한숨소리를 들은 황제가 내 귓불에 키스하면서 속삭였다.


「왜 한숨이지? 돌아가기 싫은건가?」

돌아가고 싶으면 애초에 왜 도망을 쳤겠어요. 내 얼굴을 보고 황제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너는 나와 돌아가야 해. 혼례식은 몸이 나을때까지 미루도록 하지. 하지만, 경비는 더 강화할

거야.」

절대로 도망가지 못해. 이제 더 이상은. -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입밖으로는 꺼내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황제가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여행은 재미있었나?」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 이토록 소름끼칠 수가 있을까. 그는 ‘여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도망을

갔다는 것이 전혀 데미지가 없는 것처럼, 내가 자신을 거부했다는 것이 전혀 상관 없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모르는 걸까? 혹시 내가 자신을 떠난 것이 아니라 여행을 갔다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

「제가 여행을 갔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내게서 도망을 간 거지.」

다행이다, 아직 이성은 살아있군요.

「하지만, 그건 여행이기도 하잖아. 왜, 도주는 도주일뿐 여행이 될 수는 없는건가? 새로운 사람을 만

나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생겼잖아.」

그가 말했다.

「재미있었기를 바래. 이왕 나온 거 말이지.」

그의 금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는 왜 그 눈에서 달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조용한 달, 광기의 전

조같이 푸르게 빛나는 밤하늘의 달 두 개를.

「그대에게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테니까.」

다음 날, 이른 새벽에 황제는 내 눈만 남겨두고 망토로 씌운 뒤 움직였다. 그와 그의 친위대는 정말로

빨랐는데, 이 말도 우선 훈련된 말이었고, 성문도 무조건 통과했기 때문에, 그들은 나보다 훨씬 빠른

시간내에 움직일 수가 있었다.

나는 한달이나 걸렸던 거리를 그들은 일주일만에 주파했다. 황제는 나를 안고도 전혀 힘들어하지 않고

일주일 내내 하루종일,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했다. 그가 얼마나 힘들어하지 않던지 나는 내가 가벼울지

도 모른다는 망상까지 품게 되었다.

그는 자신도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뭔지 움직이면서 알 수 있었다. 금발을 감추기 위

해서였다. 드와나 유일의 금발머리가 누군지는, 드와나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암

살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그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움직였다.

「마마, 오랜만이옵니다.」
시녀장 아주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까지 지으며 다가왔다. 어찌나 반가워하시는지 얼떨떨할 지경이었

다. 비서관도 국무대신도 나를 보고 한숨 놓는 듯한 안도의 표정을 지어서, 나는 뭔가 내가 모르는 사

정이 있는가-싶었다.

황제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를 온실로 이끌었다. 오랜만이구나, 이 온실. 하나도 안 반갑다.

시녀 누나들이 대거 바뀌어있다. 나한테 신성지에서의 전언을 알려주 시녀도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바

꿨나보지. 아니면 시녀누나들도 교대 업무를 하는 건지도 모르고.

온실 문이 열리는 것이 끔찍했다. 아름다운 그 온실내부도, 꿈결같이 환상적인 천막도 하나같이 끔찍했

다. 빌어먹을, 돌아오게 될 줄이야.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5. 구속

머리가 어지럽다.

그동안 어떻게 되었던 것이었더라. 한참을 생각해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아서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아. 기억이 나는 것은…… 그래, 궁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황제는 내게 차를 권했다. 그리고 나는 아무 말 없이 마셨지. 마시고 나서……조금 있다가, 이 상태가

시작되었다. 그는 내게 무언가를- 달고,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가 아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그대는 내 곁에 있으면 되.」

황제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어디에 있는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몸이 멋대로, 움직이지 않아. 왜 이

러지? 팔을 뻗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누군가가 내 머리를 들었다. 상체가 일으켜지는 것 같다. 금색 눈이 보여서 나는 눈을 감았다. 그래도

목소리는 차단할 수 없었다.

「물을 마시겠나?」

「여기는……?」

내 목소리도 멀게 느껴졌다.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다. 아무리 노력해도, 시선이 맑아지지 않

아.

「그대의 방.」

내 방이라고? 아니, 여기는 내 방이 아니야. 내 방에는 이렇게 화려한 침대도,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도

없어. 아무도 없는 내 방에는 책상과 침대 그리고 옷장…… 플레이 스테이션, 그리고…… 그래, 나는 유브

라데에 있지. 한국이 아니라 유브라데에. 이 아름다운 사람은 황제다. 굉장히 무섭고, 가여운 그 남자.

입에 물잔이 대어졌다. 나는 목이 말랐었는지도 모르겠다. 물이 느껴지자마자 허겁지겁 마셔버렸으니까.


물을 흘렸는지 목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느껴졌는데도, 황제는 책망하지 않았다.

물은 차가웠다. 갈증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머리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계속 흔드는 것

같다.

「내게……무슨 짓을 한 거……에요?」

내 목소리 같지 않다. 내 말을 알아들은 황제가 대답했다.

「떠나지 못하게 방울을 좀 매어뒀어.」

「미……쳤군요……」

황제가 작게 쿡쿡거렸다.

「어릴때부터 늘 들어왔지.」

내가 여기에 얼마나 있었는지, 내가 돌아온지 얼마나 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자꾸 몸이 미끄러지는

것만 같아서 황제에게 매달리게 되는데, 잘 매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

에서 울리고 있다.

여기는 어디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하고 있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가라앉고 있다. 나 또한 어딘가로 가라

앉고 있어.

문득, 린트인 사람들이 생각났다. 가지마요, 가지마요…… 그 얼굴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나 없으니 어떻

게 살고 있을까. 글은……그래도 대충은 아니까, 읽고 쓰는데 지장은 없겠지.

내가 누구더라……

방금 떠오른 얼굴이 아직 뇌리속에 남아있는데…… 이제 누구인지 정말로 모르겠어.

여기가 꿈 속인지 현실인지 전혀 모르겠다. 꽃이 피어있는데 눈도 내리고 있어. 눈은 차갑지 않고 따듯

하고, 달이 두개, 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상한 점액질에 갇혀서 옴싹 달싹 못하고 있었

다. 움직일 수가 없다……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무얼 하고 싶은 의

욕도 없지만, 기분만은 나쁘지 않아.

-괜찮나?

황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웃어주고 싶었지만, 안면 근육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안 괜찮아 보이는군.

지금의 당신은 아까의 당신보다는 나아보이는데. 아니, 내쪽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아까보다는 정신이

덜 흐릿한 것 같거든.

-이런. 도대체 얼마나 먹인 거지? 향을 피우는 것 같기는 하던데……

뭐라는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자꾸, 세상이 핑핑 돌기만 해.

-완전히 헝클어졌군. 김민후?

-내 이름……발음, 되시네요……황제폐하?
자꾸 점액질이 나를 먹어가. 내 몸이 사라져 가. 이젠 끝……

-이런, 안되지.

황제는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마자 모든 것이 사라졌다. 꽃도, 눈도, 달도 전부 사라지고 어둠만이 남

았다. 정신은 여전히 희미하지만, 여전히 힘은 없지만, 그래도 안도감이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

오고 있었다.

-김민후, 정신 차려봐.

황제가 나를 흔들었다. 황제가 무척 크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보이는 황제의 머리카락은 샛노랗다.

날라리같아.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눈도……파충류의 눈처럼 빛이 없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다.

이 사람은 골드 드래곤이다.

-이런, 완전히 갔군. 김민후……내가 누군지 알겠나?

알고 있어. 내 상태가 엉망이라고 날 너무 물로 보는 거 아니야.

-용 형님.

-푸하, 형님? 맛이 가니 귀엽기는 하네.

내가 잠시 황제와 착각했던 드래곤은 나를 흔들다 말고 장난스러운 눈으로 나를 내려보다 다시 나를 흔

들기 시작했다.

-이런, 잠시 귀여움에 눈이 멀어서. 미안하네. 민후, 그대 괜찮아?

-아……아,아……

아, 목소리가 울린다. 이거 재밌네.

-아,아,아,아,아,아……

-안괜찮다는 뜻이군. 충분히 알아들었어. 자, 이게 그만 입을 다물고.

남자가 나를 흔들다 말고, 손가락을 ‘딱’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그러자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뭐야, 재밌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이것도 재미있다. 팔까지 같이 붕붕붕 흔들자 더 재미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터트린 것 같다.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굳어지는지 모르겠다. 내가 미친 짓을 하고 있어서? 하지만, 정말 미칠만

하잖아. 새 어머니를 좋아해, 그녀는 다른 놈과 결혼해, 나는 술 쳐 마시고 겨울 연못에 빠져, 안죽어

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더니 전혀 모르는 곳에 떨어져, 황제가 좋다고 덤벼, 사람은 족족 죽어나가, 그리

고 지금 나는……나는……나는 누구더라?

과거가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다시 떠오르고 아까보다도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계속 몸을 흔들고 있는데 커다란 남자가 나를 안았다. 안아서 무릎베개를 해주었다. 몸을 흔드는게 재

밌기는 했지만, 누군가의 무릎을 베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대는, 정말 사람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어.


하아? 이건 또 뭔 소리?

근데 네가 누구더라? 금발, 금안…… 이런 인간을 하나 알기는 했는데 그게 누구였지?

자꾸 기억이 움직인다. 오락실의 겜블게임기처럼 움직이는 그림들 중에서 임의대로 찍는 거 같다.

-그냥 즐기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길고, 삶은 지루해. 고통도 재미가 될만큼, 지루한 시간은 의미없

이 흘러간다.

목소리는 진지했다.

-그러니까, 운명의 여신이 배려한 게임이라면 얼마든지 장기판의 말이 되어주겠다고 생각했었더랬지. 일

족도 시끄러웠고, 이런 제약은 게임에 불과했으니까.

그 목소리는 누군가와 겹쳐졌다.

-이제 내게 결정을 요구하는 시간이 온 건가? 아니, 아직은 아니라고 믿고 싶어. 그대를 어떻게 하지

못해서, 이런 짓을 저지르는 내가 신기하고 낯설어. 아직은, 호기심이라고 믿고 싶지만.

목소리에서는 감정이 보였다. 나는 알 수 없는 색깔로 이루어진 감정들. 이걸 무엇이라고 하는 걸까.

-그저 손 놓고 즐길 수는 없겠어…… 정말로, 곤란하군.

아직 내가 모르는 감정.

아직 나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

-그대한테는 어려웠나? 하긴, 그대는 좀 어린편이지. 순수하다고 하면 좋겠나. 천진하다, 순수하다, 바

보같다. 아니, 그대는 마치 자라고 싶지 않은 것 같아.

순간 가슴이 따끔거렸다. 어른……그 단어가 늘 추잡하다고 생각해왔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대여. 그대도 자라야 해. 시간은 흐르거든.

남자의 목소리는 위에서 내려왔다. 이불을 덮는 것처럼 다정하고 따듯한 목소리였다.

-정신은 내가 잠가 두지.

그 말이 마지막으로 눈이 떠졌다. 여전히 시야는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누군가가……좀 어떻게 해줘. 몸

이 말을 듣지 않아.

여기가 꿈이 아니라는 확신이 든 것은 발치에 이불이 걸려 넘어질 뻔 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아

무도 없고, 날씨는 맑았다. 시야는 여전히 흐릿하고, 심장이 머리에서 울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눈

앞과 상황을 확인할 여력은 남아있었다.

며칠간-이라고 하지만 정확히 며칠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반나절, 하루 정도일 수도 있겠고……어쩌면,

한달 이상일지도 모르지.-을 나는 이상한 상태였다. 지금보다 훨씬 심했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었다.

화장실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밥은 먹었나? 알 수가 없다.

태양빛은, 그 색을 가둬둔 듯한 머리카락을 한 남자를 떠올리게 했다. 그 남자 짓이다. 내 몸은 그 남

자가 준 차를 마신 다음부터 이상했다. 그리고……그리고 나서의 기억은 희미하다.

눈앞이 빙글 빙글, 세상이 움직인다. 아, 지구는 원래 돌지.

문득, 황제를 떠올 리가 오한이 났다. 그는 다시 돌아올 것이고, 나는 또 이보다 심하게 어지러워야 하


겠지. 뭘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채. 그것은 싫다, 구역질이 나올만큼

역겹다고 생각한다. 움직이는데 뭔가가 찰랑거려서 발목을 내려다보았더니, 사슬이 달려있었다. 사람의

발목에 사슬을 매다니. 정말 미친놈이구나. 다시 한번 절감했다.

……갑자기 떠올랐다.

‘한 알을 먹으면 반 나절의 잠을, 두 알을 먹으면……’

영원한 잠을.

잠을 자면 좀 덜할까? 죽을 수야 없지, 누구 마음대로 죽어? 웃기지 마, 나는 가늘고 길게 끈덕지게

살테다. 그렇지만……이렇게 살아서야 ‘산다’고 할 수가 없으니, 잠을 자면 좀……덜하지 않을까.

옷을 뒤적였다. 매케한 냄새가 나는데 이게 무슨 냄새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시녀 누나들을 모조리

짜르기라도 한 건지 방 안은 전혀 청소된 기색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상당한 실수끝에 내 옷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나체였다.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다. 허벅지에는 하얀 점액이 말라붙어있지만, 무슨 액체인지는

알고 싶지도 않다. 이 냄새는 무엇일까? 시큼하고, 매케한 이 냄새들은-

주머니를 뒤졌더니 알약이 두 알 나왔다. 약 한 알은 숨겨둬야하는데, 어디가 좋을까. 한참 생각하다

결국은 다시 옷에 넣어두고 한 알을 입에 넣었다.

반 나절의 잠……

일어날 때는 머리가 맑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황제고 뭐고 반드시 때려눕혀주지. 그렇게 생각하다가 잠

이 들기 직전에 내가 그 알약을 처음 보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쥴리엣……

아, 빌어먹을. 사고 친 거 아닌지 모르겠다.

정신이 오락가락한 것과, 정신은 멀쩡한데 눈이 안 떠지는 것. 어느 것이 더 힘들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겠다. 둘 다 겪었기 때문이다. 둘 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정도로 힘들다.

정신은 말짱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데, 이번엔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차륵, 하고 커텐치는 소리.

(아마도 천막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황제의 노여움이 가득한 - 이를 가는 소리.

「신전쪽의 동향은?」

「조용합니다.」

「첩자의 보고는?」

「이상이 없다는 보고입니다.」

대답을 하는 것은 비서관이다. 레니 데이비드 비서관. 그녀의 목소리도 침통하게까지 느껴졌다.

「황비에게 위해를 가한 자를 찾아내야 한다. 무조건 찾아내.」

‘무조건’이래…… 그거, 나야. 애꿎은 부하들만 죽겠구나. - 그렇게 생각한것과는 달리 비서관의 각오어

린 목소리가 들렸다.
「명을 받듭니다.」

「궁의.」

남은 진지한 목소리로 ‘명을 받듭니다’라고 하는데 이 황제는 듣지도 않는다. 그는 궁의를 불렀다.

「하명하십시오.」

「현재 황비의 상태는?」

「처음에는 돌아가셨는 줄 알았습니다만, 미세한 심장 박동이 확인되옵니다. 살아는 계십니다.」

「……혼수상태인가?」

「그런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깨어날 가능성은?」

그 말에 궁의가 대답하지 못하고,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갑자기 내 몸이 일으켜졌다.

「황비를 내 방으로 옮긴다. 하렘을 수색해.」

「명을 받듭니다.」

이 목소리는 누구인지 모르겠다. 황제의 품이라는 건 알겠다. 따듯하고, 부드럽고, 황제의 체향이 느껴

진다. 분명히 무슨 향일텐데, 무슨 향기인지 모르겠는……정체모를 향을 황제는 가지고 있었다.

「황비에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색출해라.」

그의 말에 비서관이 애매한 목소리로 「복명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황제가 나를 안고 걷기

시작했다. 이런, 대형사고를 쳤나보다. 정신은 멀쩡한데 어떻게 해야 깨어날 수 있는거지?

「폐하-」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도 들렸다. 라프라 시녀장이다. 저 고상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흥분에 쩔

어있었다.

「폐하- 알약이 발견되었나이다.」

「궁의.」

황제가 부르자마자 궁의가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시녀장이 「이 쪽으로.」라고 말하

는 소리도 들리고, 발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져갔다.

「데이비드 비서관. 따라가서 상황을 확인하고 보고해라.」

「명을 받드옵니다.」

그리고 또 한명이 사라져갔다.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안고 걸었다. 온실에서 황제의 궁까지

는 그래도 거리가 되는 편인데, 그는 나를 고쳐 안지조차 않았다.

「폐하, 신전에서 비 마마에게 은밀히 현상금을 걸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습니다.」

「감히 누구에게 현상금을 걸었다고?」

황제의 목소리가 무시무시하다. 황제면 황제답게 좀 다정하면 안되나. 본인은 어차피 우위에 서 있잖

아.

국무대신도 불쾌한 목소리였다.


「불로장생의 꿈을 버리지 못한 모양입니다.」

황제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을 얼려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날파리같은 놈들뿐이겠지. 전부 잡아서 신성지 코앞에 목을 매달아라.」

「복명하겠습니다.」

나에게 현상금이 걸렸다는 부분도 걸리지만……이 황제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다. 사람을 날파리라고 표현

하는 것도, 전부 잡아서 어쩌라는 것도, 정말……사람의 목숨은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는구나.

신전도 그렇고, 황제도 그렇고- 사람은 그저 굴러다니는 돌에 불과할 정도로 미천하게 생각하는군. 믿

을 수 없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내가 황비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황제 위에 떨어지지 않았

더라면, 나를 황제가 보지 못했더라면, 나도 분명히- ‘날파리’에 속해야만 했겠지.

무서운 세계, 꿈이라면 빨리 깼으면 좋으련만. 꿈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아직은 참으셔야 합니다.」

국무대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황제를 달랬다.

「아직은 때가 아니옵니다.」

「알고 있어.」

황제가 더러운 걸 뱉어내듯이, 말을 토했다.

「걱정 마, 인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으니까.」

구라는…… 네 어디에 ‘인내’가 있다는 거야? 그는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몸이 둥실 둥실 움직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는 어떻게 잠시도 가만히 있는 법이 없군.」

내게 하는 말이라는 걸, 조금 뒤에야 알았다.

「키미누, 그대는 도대체 왜 이러는건가. 약을 써서 잡아놓아도 혼례식을 준비해도 연기처럼 빠져나간

다. 내가 이토록 무력할것이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어.」

황제의 목소리가 처참하도록 슬프게 느껴졌다. 그냥 내 착각인지도 모른다. 눈을 떠서 그의 얼굴을 보

면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일지도 몰라. 그는 어쩌면 분노한 나머지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르지.

「쫓고 도망가고……이 전쟁의 끝은 뭐가 있을까.」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나서, 그의 우울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대여, 얼마든지 도망가도 좋아. 나는 전쟁만큼은 져본 일이 없거든.」

오싹했다. 그는 나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있었다. 혼수상태(?)의 인간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은 벽에다

대고 각오를 다지는 것과 비슷하다. 즉,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이다.

무섭다. ‘인내’는 몰라도 ‘집요함’만큼은 확실해보이는 이 황제가 이렇게 말을 하고 있으니…… 게다가

전쟁? 그는 전쟁광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전쟁에 능하고 미쳐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뭐라고? 맙소사-

전쟁같은 사랑. - 그런 노래가 있었다. 유행가 중에서 그런 구절을 가진 노래가 대 히트를 했었지. 그
래서, 그 커플은 잘 되었던가? 유행가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다 그 노래는 상당히 오래전 것이었다. 기

억이 나지 않는다. 전쟁같은 사아랑- 난, 위험하니까, 사랑하니까- 뭐였드라? 뭐였지?

「황비마마께서 드신 것은, 약이옵니다.」

「예, 그리고 이 약은 아마도……」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황제가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죽고 싶었단 말인가? 그 정도로 힘들었던가? 말도 안돼, 웃기지 마라. 그대는 죽지 못해. 내게 와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다. 절대로 그러하지는 못해!」

왜 화를 내는 건지, 이해가 도통 안되네…… 그리고 내가 죽으면 죽는 거지, 그 쪽에서 된다 안된다 할

문제는 아니지.

그리고 나도 죽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다. 내가 왜 죽어야 해? 나는 오래 오래 살거야. 좋은 여

자도 만나고, 토끼 같은 자식들을 위해서 회사도 다니고. 솔직히 네가 좀 걸리기는 하지만.

「약의 성분은 틀림이 없사옵니다. 섭취량이 어느정도인지 모르겠사옵니다만……」

「장례식을 준비할까요?」

궁의와 함께 국무대신이 물었다. 그러나 황제가 고함을 쳤다.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을 상대로 무슨 장례란 말인가!」

그 말에 나까지 깜짝 놀랐다. 산채로 장례를 치루지 않은 건 다행인데, 그렇다고 고함을 지를건 없잖

아. 그런데 이게 무슨 성분일까.

한참 뒤에 황제는 나를 두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나랏일로 뭔가 있는 모양이었는데, 잘은 모르겠다.

누군가가 내 뺨을 만지고 있다.

「솔직히, 아름다운 분이라는 생각은 안드는데요.」

궁의인가보다. 비서관의 차가운 질책이 궁의에게 날라들었다.

「폐하가 보시면 그 손뿐이 아니라 집안대대손이 끝장날 것이오. 당장 손을 거두시오.」

그 말에 궁의가 냉큼 손을 거두었다. 나로서는 그다지 기분나쁘지는 않았는데, 비서관의 냉기서린 목소

리가 무섭기는 무서운가보다.

「폐하께서는 정말 남자 황비와 혼례식을 치루실 예정이십니까?」

궁의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감히 폐하의 명을 의심하다니. 지금 당장 그 목을……」

「데이비드 아가씨, 무서워 죽겠습니다. 좀 나긋나긋, 여자답게 말씀하실 수는 없으십니…… 알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비서관님. 이거 좀 놓고……」

뭔지는 몰라도 원래 살벌한 비서관이 열받았나보다. 새액-하는 이 소리가 검이 아니기만을 빌 뿐이다.

하지만 궁의, 좀 이상한 사람 맞네. 왜 여자 운운이냐. 맞아도 싸지. 그리고 비서관의 미모는 착하기

그지 없잖아. 몸매도 그렇고. 나긋나긋한 여자라니, 내 새어머니같은 사람 말야?


내가 좋아하는 여자지만, 그 성격은 아니야. 사람은 진취적이어야 한다고. ……나도 썩 그런 타입은 아니

지만.

「한번만 더 관직의 상하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직접 머리를 갈라 집어넣어주겠소.」

비서관의 그 말에 궁의가 소름이 끼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연모하는 여인에게 수작을 걸었으니, 그 목숨 받아도 되겠지?」

국무대신이었다. 댁이 연모하는 여인이기는 한데, 그 여인은 댁을 질색하잖아…… 아니나 다를까, 비서관

이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 누가 저에게 수작을 걸든 그 일을 처벌하실 권리가 대신님께는 없사옵니

다.」

「뭐, 정론상으로는 그런데……」

「정론이 아니어도 그렇지요.」

비서관이 차갑게 국무대신의 말을 자르고 궁의에게 명령했다.

「물러가라. 다시 한번 그 천한 손을 비 마마께 댄다면 황제폐하께서 몸소 처분을 내리시리라.」

「아니오, 아니오…… 이 몸은 그냥 궁금했을 따름이옵니다.」

궁의가 서둘러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런데 이 사람들은 죽어가는(것으로 알려져 있는) 내

앞에서 이게 뭐하는 짓들이래.

잠시 비서관과 국무대신은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국무대신이 물었다.

「시간 있어?」

「없습니다.」

비서관의 바람 생생 부는 목소리가 바로 튀어나왔다. 끈질기다.

「그럼, 내일은? 내일도 바빠?」

「바쁩니다.」

「모레는?」

「바쁩니다.」

이쯤에서 멈춰. 너무 비참하지 않냐고. 그러나 국무대신은 비참하지 않은가보다. 지단을 닮았지만, 지

단보다 미남인 국무대신이 주뼛거리는 음성을 냈다.

「글피는?」

당연히 ‘바쁩니다’라는 음성이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비서관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약간의 시간을 두었다. 오죽하면 의식만 멀쩡한 내가 다 긴장이 될 정도였다.

「대신님.」

「그렇게 부르지 마. 너무 먼 사이같잖아. 니타우,라고 불러줘.」

「……크리스티 백작 각하. 저는 각하와 한때 ‘어떤 사이’였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가

끝났다는 것을 이제 각하께서 인정해주셔야 할 차례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서관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가워서 나는 당황했다. 황제도 툭하면 무서운 소리를 냈지만, 비서관처럼

차갑지는 않았다. 황제의 목소리는 주로 노여움으로 차가웠다. 그러나 비서관의 목소리는 무관심으로 냉

랭했다. 어느 쪽이 더 무섭냐고 한다면 당연히 황제쪽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더 저온이냐고 묻는다

면……

「……나는 너 포기 못해.」

국무대신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했다. 끈질기다…… 비서관이 아예 상대도 하지 않

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은 틀렸다. 비서관이 차갑게 물었다.

「그래서 폐하의 이 말도 안되는 집착을 돕고 계시는 겁니까?」

「명에 복종할 뿐이야.」

「하니안을 계속 피워서 상대의 정신을 흐리게 하다니 창피하신 줄 아세요.」

「명에 복종할 뿐이라니깐.」

비서관의 냉혹한 질책에 국무대신의 목소리도 차가워졌다.

「부추기셨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비서관의 예리한 지적, 그리고 국무대신은 침묵했다. 뭐야, 댁이 부추긴거야? 일어나기만 해봐라, 댁하

고는 이제 상대 안할거야.

「폐하께는 이 분이 필요해.」

국무대신의 목소리가 진중하게 공간을 울렸다.

「그 분은, 정말로 혼례식을 올릴 예정이야. 이제까지는 드와나 최악의 전쟁광으로서, 그 분은 전제군

주였지. 잘해오셨어. 다 끝났다고 생각되었던 전쟁의 판도를 뒤집고, 유브라데의 영광을 마련하셨어.

그런데 이제는 전쟁이 끝날 때야. 말해봐, 나를 비난하는 데이비드 비서관. 폐하께서는 전쟁광이시다.

우리는 무슨 수로 그 분의 관심을 전쟁에서 국내로 돌려야 하지? 기혼이 문제가 아냐. 영토의 확장이

문제가 아냐. 우리에게는 복잡하고 미묘하고 길게 끌어야 할, 우리 전부가 죽어도 남을 국내 정세가 있

어. 어쩔거야? 이대로 계속 전쟁을 할까? 우리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냐고. 그대도 알 것 아니야? 더

이상은 전쟁을 할 수가 없어. 물자도 없고, 사람들도 지쳤다고. 이제 이 땅에서 살아나가야 할 준비를

해야 해, 다른 사람의 목을 칠 준비가 아니고.」

비서관은 그 말에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도 그 이야기에 압도되었다. 이제는 ‘이 땅에서 살아나가야

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국무대신의 말은 감동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의 한 마디로 감동을 깨버렸다.

「……글피 다음 날도 바빠?」

비서관도 감동이 깨진 모양이다.

「평생 바쁩니다!」

쾅-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하, 하지만 휴일에는 뭘 할……」

정말 끈질기다. 방에 남아서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이 목소리가 작아진 국무대신은 한숨을 쉬면서 중얼

거렸다.

「되게 튕기네.」

아니, 아무리 봐도 저건 ‘튕기는 것’은 아니잖아. 그녀는 정말 댁이 싫은거라고. 다시는 상대하지 않겠

다고 생각했는데 가엽다. 같은 남자로서 이렇게 가여울수가.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아멜리아나 만나야겠군.」

넌 평생 구박당해도 싸. 다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국무대신도 나간 모양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분명 내 방이었다면 시계 초침 소리라도 들렸을텐데. 시계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다. 완벽한 침묵. 이런 것이 죽음인걸까. 누군가가 오지 않는다면 나는 죽은 사람과 다를 바가 뭐가 있

을까……라고 생각할 무렵.

천장이 보였다. 갑자기 눈이 떠진 것이다. ‘반나절의 잠’이라더니 이런 것이 어떻게 잠이야? 여하간 눈

이 떠져서 정말 다행이다.

온 몸이 찌뿌드드했다. 하긴 그 동안 계속 누워있었던거니까. 하니안? 그게 뭔지는 몰라도 대충 마약류

라는 건 알겠다. 머리가 지금은 맑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가능하면 금단증상이 없는

것이길 바랄 뿐이다.

기지개를 켜고 나서 잠시 생각했다. 방 안에는 나 혼자고, 나는 뭘 하는 것이 좋을까? 이 곳은 황제의

궁, 황궁 중심부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테니 얌전히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나저나 ‘반나절의

잠’이라더니 어디가 잠이냐고, 잠은. 잘못하면 생매장당하는 줄 알았다.

사실 화가 난 것도 많고, 할 말도 많은데…… 졸렸다. 마약에 찌들어 있었지, 그리고 나서는 갑자기 멀

쩡한 정신으로 혼절해있었지, 정작 잠을 제대로 잔 기억이 없다.

우선 자자.

황제가 눕혀놓은 침대에서, 자기로 마음먹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황궁의 것이라 그런지…… 이불도 시트도 느낌은 최고다.

미친 듯이 잤던 것 같다. 눈을 감자마자 졸음이 쏟아졌고, 내 정신은 한 없이 잠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누군가가 나를 만진 것도 같았지만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참만에 자다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금색이었다. 눈을 두세번 깜빡이자 그게 황제의 눈

이라는 것을 알았다.

황제는 내 얼굴 바로 앞에다 얼굴을 갖다대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폐하?」

그가 전혀 움직이지 않아서, 박제같다는 생각이 들어 섬짓해졌다. 그를 작게 불러보자, 황제가 약하게

미소를 지었다.
「응.」

「뭐하시는 겁니까?」

「네가 자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어.」

이쁜 소리 골라 한다. 벌떡 일어나려 했는데 머리가 어지러워서 도로 눕고 말았다.

「궁의가 말하길, 몸이 완쾌되려면 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하더군.」

「하니안의 효과입니까?」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댁의 부하들이 내 앞에서 말싸움을 했거든.

「어쩌다보니……」

「하니안은 꽤 좋은 기분을 준다고 들었는데.」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본래 내 몸은 마약 효과가 약한 편이었고, 그래서 한국에서 놀

때도 마약은 가능하면 하지 않았다. 일단은 약물로 나를 움직인다는 것이 무척 싫었고, 다음은 전혀 좋

은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폐하는 좋으셨나보죠?」

그냥 물어본 것일 뿐인데 황제는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나는 마약이나 독약은 익숙해져 있어서.」

독에도? 나도 마약에는 꽤 적응이 되어있다고 자신하는데. 사실은 적응이 되어있는게 아니라, 몸에서

안 받는 거지만.

「어릴 때부터 조금씩 섭취해두었거든. 황태자는 다 그래.」

암살……될지도 모르니까? 지구에서도 옛날 왕족들이 그랬다는 것을 들은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눈 앞

에 그런 사람이 있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서, 나는 그를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게 되었다.

그는 나처럼 시트에 뺨을 댄 채 나를 보면서 미소지었다.

「다 그래. 특별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야. 그런 얼굴 하지 마.」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데요?」

「속상하다는 얼굴.」

착각이시네. 내가 너 때문에 속상할 의리가 어디 있어.

「별 거 아냐. 그렇게……찡그리지 마.」

거울이 있다면 보고 싶다. 나는 정말로 속상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왜 그랬어요?」

말을 돌리고 싶어서, 입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다정한 얼굴로 「뭘?」이라고 물었다.

「왜 나한테 그런 행동을 했냐고요. 왜 나한테 하니안을 사용했냐고요.」

혹시 진짜 미친거에요? 아니, 사실 늘 미쳤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제까지는 반만 미쳤다고 생각했

는데 이제는 온전하게 미친 사람 같잖아. 황제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도망쳤잖아.」

예쁜 얼굴에 결이 가는 금발이 몇가닥 흘러내려와있다. 무척, 아름답다. 밤의 조용한 공기속에서,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사람에게는 해서는 안되는 최저선이라는게 있잖아요.」

「내가 왜 너를 좋아하는 줄 알아?」

그는 뜬금 없이 물었다. 알고 있다. 하늘에서 떨어졌기 때문이지.

「하늘에서 떨어져서?」

그는 잠기 눈을 감았다. 내가 그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려는데 그가 내 손을 붙잡았다.

「기분 좋아……」

그는 결국 끝까지 책망하지 않았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모

든 것을 흘려보냈다. 도리어 나를 책망한 사람들은-

「이번만은 못 넘어가세요.」

온실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만난 나프라 시녀장이 일착이었다. 그녀는 이제껏 고상하고 상냥하다고 생각

했던 이미지에서 일변하여, 내가 라로라도 되는 마냥 도끼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세요, 네? 제가 구원을 못 받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어요! 마마께서는 늘 저희

를 그런 눈으로 보시죠.

저희가 마마를 구속하고, 마마를 감시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저희도 사람이에요!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고 있지만, 사람이라고요. 어쩌면 이렇게 무신경하세요!」

……네?

나는 중년 아주머니가 눈물고인 눈으로 책망하시는 경우를 처음봐서, 당황하고 말았다. 아주머니가 눈물

을 흘리면서도 할 말은

다 하셔야겠는지 빠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희가 구원을 바라는게 파렴치해보이실 수도 있겠죠. 마마께서는 구원하시고 싶지 않으실 수도 있겠

죠. 저희가 부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래도 몇 달이나 같이 있었는데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행동하세요? 저한테 뭐

하나라도 물어보셨어요?

하다 못해 이 황궁의 뒷문이라도 물어보셨냐고요!」

물어봤으면 알려는 주셨을 거구요?

「신성지에 가시기 전에 황제 폐하의 서재에서 지도를 가져가셨더군요. 보석도 가져가셨구요. 보석도 제

일 싼 거나 가져가시고,

물어라도 보시지. 뭘 현금화하기 좋냐고 물어라도 보시지. 저 머리 나빠요. 저 마마 의심 안해요. 저

그런 거 보고 안한다고요.
어쩌면, 어쩌면 나이도 어리신 분이 이렇게……이렇게……」

「시녀장님.」

옆에서 시녀 누나들이 시녀장을 부축하려하면서 그녀를 달래려 했지만, 그녀는 모두 다 뿌리치고 다시

나를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신관놈들이 도대체 마마 몸에 무슨 장난을 친거에요? 온 몸이 베인 상처로 가득한데 이 몸

으로 국경까지 가시다니,

그러다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셨냐고요!」

마지막의 고함소리는 너무 컸다. 나는 망연자실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고상한 눈에서 흘려내리

는 눈물이 따듯하게

느껴져서, 이런 것이 어머니인걸까-라는 생각이 들어서……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왠지 몸이 무너

져내렸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내 어머니와는 손톱만큼도 닮지 않은, 고상한 시

녀장의 놀란 얼굴이었다.

「아마도, 긴장상태가 완화되었기 때문일겁니다. 미열이 있고 무력감을 느끼실텐데, 그동안 너무 긴장하

신 탓입니다. 그리고

처음에 진찰했을 때도 말씀 올렸었습니다만, 심장이 이곳 분들보다 느리신 편입니다. 아마도, 달과 대

지 사이의 이동에서

몸이 적응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약간 몸이 뜨거운 것과 아무 것도 할 의욕이 없다는 것 빼면 아무 이상도 없었다. 실제로 무리하면 할

수도 있고. 시녀장이

스프를 들고와 떠 먹여주면서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후회안해요. 마마께서 또 쓰러지시더라도, 그런 일이 있다면 전 또 그렇게 말씀드릴거에요.」

그러면서도 그녀의 얼굴은 염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쓰려졌다는 것에 놀라 달려온 황제가 얼굴을

찌푸리며 무슨 뜻이냐는

듯 내게 눈짓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흔들었다.

시녀장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주름이 가 있어도, 참 아름다운 그녀는- 분명히, 젊을 때는 여러 남자

애 태웠을 것이다.

「시녀장님 말을 들어서 쓰러진 게 아니에요. 궁의님도 그러시잖아요, 이 곳에 적응이 안된거라고. 그

리고 기분 나쁘지 않아요

. 죄송해요, 멋대로 행동해서.」

황제의 표정이 살벌하다. 그는 라프라 시녀장이 나에게 뭔가 한게 아닐까 의심하는 눈치였다. 곤란해,

곤란해. 나는 시녀장에게서

스프를 빼앗아들고 말했다.


「폐하랑 둘이서만 좀 있고 싶은데요.」

다들 황제의 눈치를 슥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나가는 동안 황제는 기대 서 있는 그대로

있다가 다들 나가자

시녀장이 앉아있던 의자에 와 앉았다. 그는 스프를 다시 뺏어들고 내게 한 수저씩 떠먹여주며 물었다.

「시녀장이랑 무슨 말 한거야?」

「있어요, 그런게.」

「시녀장이 너의 적이야?」

이 황제는 확실히 이상한 이분법을 가지고 있다. 적, 아니면 아군. 그에게는 물리칠 것과 지킬 것밖에

없다. 그는 이름만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절대권력자. 내가 적이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시녀장을 죽이겠지. 그에게는……

「아니요.」

생각하느라 대답이 너무 늦었나보다. 황제의 표정이 여전히 사니워서 나는 그가 내미는 스프를 한 숟가

락 먹으며 다시 말했다.

「아니에요. 시녀장님은 절대 적이 아니에요.」

「그래.」

그는 더 말하지 않고 스프를 떠 먹여주었다. 그는 내게 책망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그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저지르기만 해. 아무도 일을 마무리지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는 황제라서 마무리짓지 않아도 되고,

나는 무책임해서겠지.

황제의 손가락은 얇아보였다. 하긴 이 남자는 말라보인다. 힘도 없어보였다. 금발이 더욱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근육 투성이고……아, 나도 운동해야지.

「내가 너에게 하니안을 쓴 게, 해서는 안되는 최저선이야?」

황제가 갑자기 물어서 당황했다. ……그럼, 사람에게 마약을 써서 그 사람의 정신을 이상하게 만든게 최

저선이 아니면 뭐가

최저선인데? 내가 그를 어이없어 쳐다보는데도 그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죠.」

내 대답에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힘들군.」

「네?」

「그래도 해볼게. 나는 너에게 최저선을 넘겨서 행동하고 싶지는 않아. 네가 그렇게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보지.」

아니, 그냥 나를 놔주는게……그게 제일 좋을 것 같기는 한데. 괜한 소리 해서 이 말랑한 분위기를 굳히


지는 말자.

황제는 냉막한 얼굴로 다 먹은 스프그릇을 들고 있었다. 굉장히 차가운 얼굴이네-라고 생각하다가 그의

목소리에 웃음이 튀어나올 뻔 했다.

「하지만 네가 도망을 가잖아.」

굉장히 뾰루퉁한 목소리였다. 아, 하마터면 그냥 웃어제낄뻔 했다.

「사람을 속여서 잡아놓고 무슨 말씀이세요.」

「하지만 나는……」

나는?

황제가 일어섰다. 그는 일어서서 「나프라.」라고 불렀고, 그러자마자 바로 천막 뒤에서 나프라시녀장이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하명을 기다립니다.」

「잘 돌봐.」

황제는 그렇게 말하고 스프그릇을 침대 옆 협탁에 놓은 뒤 등을 돌리려고 했다. 말 하다말고 가다니 성

격 진짜 이상해. 나는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고 시녀장을 쳐다보았다. 우리 어머니도 나한테 걱정해

준 적이 없는데, 저 아주머니는 나를 위해 울어주었다. 인간 관계는 늘 확장되고 있어. 완전한 타인이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내가 너무 경계태세를 굳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돌아가야 하

고, 어차피 마음같은 거 줘봐야……

「너와 있으면 감정 조절이 안돼.」

황제는 아직도 삐친 티가 나는 목소리로 그렇게 한마디를 뱉고 사라졌다. 마치 도망가는 것 같은 빠른

걸음이었다. 귀엽네, 생각보다. - 그렇게 생각하고, 순간 자신의 마음에 놀랐다.

귀여워?

저 커다랗고 난폭한 황제가 귀여워? 김민후, 너 눈이 삔 거 아냐? 잠시 잊고 있었는데 저 황제에게 가

끔 가슴이 두근거렸었지.

……지금처럼.

곤란한데.

「허기를 느끼시지는 않으십니까? 스프를 좀 더 가져올까요?」

시녀장의 말에 고개를 흔들다가,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오랫동안

보지 않아서 그녀의 얼굴도, 그녀의 성격도, 그녀의 모든 것이 희미해져버렸어.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오직 ‘당신 자식이야, 내가 얘를 왜 책임져?!’라는 말 뿐.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인사도 없었지.

그러고보니, 이 동네. 호모한테 너그러운 곳인가?

「시녀장님.」

내 말에 그녀가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하명하십시오.」

「……여기는 남자들끼리 결혼해도 되요?」

굉장히 기본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에 시녀장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무슨 그런 천인공노할 말씀을 하십니까?! 신이 듣습니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는 시녀장은……솔직히, 당황스러웠다. 혹시 내가 여자로 보이나?

「저……저도 남자인데요.」

내 말에 시녀장이 얼굴을 찌푸렸다.

「알고 있습니다.」

뭐야, 그게……

「황제 폐하의 선택에 왈가왈부할 권리가, 저에게는 없습니다.」

아이고, 그러세요. 이 아주머니는 진짜 알다가 모르겠다. 황제 측근이라서 그런가?

「저는 모실 따름입니다. 제게는 비 마마를 진단하거나 비 마마를 판단할 능력도 권리도 없사옵니다.

저는 주어진대로 행합니다. 그러니 부디 마마…… 다시는 홀로 가지 마세요. 황제 폐하께서는 저에게 비

마마를 모시라 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제 주인은 비 마마십니다.」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지 마세요.」

누가 어머니같다고 생각한거야, 김민후, 바보 멍청이!

「전 또 혼자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그러지 마세요. 절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도 마시고, 제 걱정을 하지

도 마세요.」

잠깐, 닿았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때때로 감정은 빛의 속도로 공간을 날라다니는 것

같아. 가끔 부딪치면 감동이 되지만, 결국은 다른 속도로 나아가는 것이다. 감동에 씁쓸해하면 안된다.

도리어 그렇게 느낀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하겠지. 하지만, 마음이 식어빠졌다.

‘어머니’라는 단어를 들먹인 것은 너무나- 확대해석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환상을 뒤집어 씌우

고 싶었던 거야? 나도 알고 있다. 부모도 사람이고, 부모의 인생을 자식이 간섭할 수는 없다는 것을.

부모를 욕해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기대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야. 나는 지금 지나치게 외

롭단 말이야.

빌어먹을, 여기는 어디야. 돌아가고 싶어.

「나가주세요.」

누군가, 내게 지금 손을 내밀어줘. 나를 끌어안아줘. 내 곁에 있겠다고 다정하게 말해줘. 빌어먹을, 이

런 약한 감정에 휘둘리는 자신이 화가 나 미치겠다.

두 번째로 화를 낸 사람은 비서관이었다. 그녀가 내 걱정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찾


아왔을 때 그녀의 온 전신에서 북극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이 느껴지는 듯 해서, 나는 얼어붙을 뻔 했다.

그러나 그 뒤의 뺀질거리는 지단이 나타나서, 바로 회복되었다.

하니안을 부추겼다고 했었지? 빌어먹을, 얼굴만 지단이야. 성격은 변태라고.

내가 황비인 이상, 대충 계급떼고 맞장뜰 수 있는거냐? 내가 뭐라고 질책하려는데 비서관이 말했다.

「몸은 좀 어떠하신지요?」

‘아직도 안 죽었냐.’라고 말하는 듯 해서 순간 오싹했다. 굉장한 미인이 차가우면, 남자는 압도된다.

아름다운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는 없다. 그러나 모든 ‘과한 것’은 과해서 좋지 않고, 사실 남자들은 아

름다운 여자를 갈구하면서도 조금 두려워한다. 나도 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남자라, 다시 쫄아들었다.

짝퉁 지단에게 따져물을 말이 있는데도, 도저히 못 하겠다.

「신성지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비서관이 의자에 앉았다. 내 침대 옆에 있는 의자는 이제 완전히 손님 전용이 된 기분이다. 그 옆으로

국무대신이 의자를 당겨 앉으려는 걸 내가 제지했다.

「하니안을 부추기신 분과 함께할 정도로 좋은 성격 못 됩니다. 하실 말 먼저 하시고 나가주세요.」

내 말에 그가 씨익 웃었다. 느끼한 웃음이었다.

「이런- 들으셨습니까?」

마치 엿들은 것 같은 분위기가 되고 있다. 나는 천천히 그의 말을 정정했다.

「들린거죠.」

「그렇다면 그 뒷 이야기도 들으셨을텐데요.」

그 ‘뒷 이야기’가 뭐였는지 생각하다 떠올랐다.

『이제 이 땅에서 살아나가야 할 준비를 해야 해, 다른 사람의 목을 칠 준비가 아니고.』

「듣긴 했는데.」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 조금 감동했던 거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나라 사람들을 위해서 내

가 마약에 헤롱대어 줄 의리가 있나?

「하긴, 월인께서는 그럴 이유는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국무대신이 신중한 어조로 말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저희도 꽤 심각합니다. 그리고 간절하지요. 신병은 지난 이십년간 오백만명이 죽었습니다. 유

브라데의 전 국민수는

약 1 억 5 천만명정도로, 드와나에서도 손꼽을만한 큰 나라지만, 신병에는 대항할 수가 없습니다. 병은

마치 자아를 가진 것처럼

마을에 나타나 모든 것을 죽음으로 휘감습니다. 그 곳에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만

이 죽을 뿐이죠. 본래

점염병이라는 것들은 불안을 초래합니다. 또한 누군가는 죽어도, 누군가는 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신

병은 틀립니다.
신병이 어느 마을에 상륙하면, 그 마을은 끝장입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새도, 나무도 그

대로입니다. 쥐도 개도

전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습니다. 오백만명이 죽었습니다. 지금 저희가 누구 한 사람의 인

권이나 그 사람의 삶을

존중할만한 여력이 남은 걸로 보이십니까?」

말투가 차가운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나 하나를 망가뜨려서 나라를 구할

수 있다면, 그는 할 것이다.

‘5,000,000 명?’

숫자에 압도되었다. 그건……도대체 몇 명인걸까? 어느 정도의 숫자인거지?

「그러나 저는 월인이 아니에요. 저를 잡아두신다고, 신병이 사라지지 않잖아요.」

「그러나 이세계에서 온 자유민이시죠. 이것은 기적이며, 운명이 배려한 것입니다. 유브라데에서는 ‘태

양은 필요한 곳에

비춰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운명이 배려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적기가 있고, 모든 일은 순서가 있

습니다. 그리고 복잡하고

완벽한 시스템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죠.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전혀.

「모르겠는데요.」

「올 수 없는 곳에서 온 사람이 있으니 이것은 징조입니다. 무언가는, 분명히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변화가 보여질 때까지는

이 곳에 계셔주셔야겠다는 말입니다.」

국무대신의 눈이 음산하게 빛났다. 미친 사람 같다. 황제 측근이라 그런가.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

「대신님!」

비서관이 국무대신을 질책했지만, 국무대신은 입을 열었다.

「아시겠습니까?」

나는 늘 이런식이었다. 사람들은 늘 뭔가를 결정하고, 그 결과물로 나를 떠밀었다. ‘걸리적거리는 아

이’였을 때도, ‘하늘에서 떨어진 황비’일 때도 이런식이었다.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나에게는 분명 이

런 상황들과, 어쩔 수 없이 갇혀지는 나 자신이겠지.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할 말은 미리 정해져있었지만, 그 말을 하기가 두려워졌다. 황제의 얼굴이 머릿속

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난폭하지만 정직하고, 그는 잔인할지언정 상냥하고, 그는 무섭지만 아름답

다. 나는 이제 그가 나에게 있어 ‘완전한 타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눈을 감았다. 그래도 집이 아니라 황제가 보였다. 나와 있으면 감정 조절이 안된다는, 그 무시무시한

사내가 자꾸 눈에 어른거렸다. 내가 도망쳐도 나를 잡을 생각밖에 하지 않는, 나에게는 책망도 원망도

보복도 없었던 기묘한 상냥함이 떠올랐다.


그는 나와의 관계에서 누구도 끼워넣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네게 최저선을 행했다고 느끼게 하고 싶

지 않으니,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 이래도 되는걸까. 이건 정말로 ‘배신’에 걸맞는

짓인 것 같아. 상대의 호의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알겠어요. ……그러나 변화가 안 보이면 어쩌실래요? 일년이 지나도, 이년이 지나도 변화가 안 보이면?

저보러 평생

여기서 입닥치고 알지도 못하는 나라를 위해 인생을 바치라고 할 셈이라면 포기하는게 좋을거에요.」

내 말에 국무대신이 내 손을 잡고,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가 내 손을 자신의 가슴에 댄

채 말했다.

「삼년만 부탁드립니다. 그 이후에는……」

「그 이후에는?」

황제의 금색 눈이 자꾸 떠올랐다. 그 시무룩하던 목소리도, 삐친 것같은 뒷모습도 떠올랐다.

좋아하는 것……은 아냐. 그렇지는 않아.

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아. 그 남자를 싫어할 수는 없어. 그는 정말 이상하고 잔인하지만, 내게 상냥했

어. 그가 잔인한 것은

성품일지라도, 그는 내게 상냥하려고 노력한 사람이야. 싫어할 수는 없어. 누구도 나를 그렇게 안아주

지 않았고, 누구도 내

걱정을 그렇게 해주지 않았어. 나를 잡아놓고도 겨우 보석 하나 바꿨냐며, 음식도 못 먹었냐고 물어본

사람이야. ……싫어할

수는 없어, 그럴 수는 없어.

하지만, 이 곳은 내 자리가 아니야.

나와 눈이 마주친 국무대신이 맹세했다.

「그 때 원하시는대로 이루어드리겠습니다. 제 목숨을 원하신다면 제 목숨을, 달로의 귀환을 원하신다면

귀환을. ‘레’와 ‘데’에게

제 운명을 걸고 맹세합니다.」

「대신님!!」

놀란 비서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불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돌아가는 방법을 알고 계세요?」

내 말에 국무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서둘러 말했다.

「밖에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심판의 물과 몇가지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약속해주십시오, 삼년간은-

황비로서 최선을

다해주시겠다고. 사람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이제 유브라데 국민들도 신이 아니라 병이 아니라 운명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하면서 평범하게 살 때가 되었습니다. 부디, 부디 선처해주세요. ‘고작’ 삼년이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삼년이

긴 시간이라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삼년이 일억 오천만명을 살릴지도 모릅니다.」

3 년.

고등학교 시절과 같구나. 그 때도 ‘3 년만 참으면 독립할테다’를 정말 수도 없이 외쳤더랬지.

「맹세해주십시오.」

국무대신이 말해서 입을 열었다. 그래, 삼년. 한번 더 버텨보지, 뭐. 돌아갈 방법이 있다면야, 얼마든

지. 내가 도망치거나 하는 것보다 낫잖아. 무엇보다도, 벌써 반년이 지났으니까.

「맹세합니다.」

그러나 자꾸 황제가 생각났다. 나는 이래도 되는 걸까. 내가 말하자 국무대신이 눈을 내리깔았다.

「신성한 계약이, ‘레’와 ‘데’의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태양이여, 우리를 지켜보소서. 달이여,

우리를 단죄하소서.

모든 계약은 신뢰속에서 행해지며, 신뢰를 배반하는 자에게 대가를.」

국무대신이 칼을 꺼냈다. 순간, 신성지에서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같아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

섭다, 빌어먹을,

온 몸이 덜덜 떨리도록 무섭다. 왜 갑자기? 왜 갑자기 이렇게 무서운거지?

국무대신이 내 팔과 자신의 팔을 동시에 그었다. 상처가 이어지고 피가 같은 곳에 떨어졌다.

「피는 섞였습니다. 상처는 이어집니다. 모든 것은, 계약대로 행해질 것입니다. 태양이여, 이 모든일에

순조로움을 부여하소서

. 달이여, 모든 적을 말살하소서. 우리의 계약은 신의 앞에서, 분명하게 행해질것입니다.」

상처가 더 커졌다. 그냥 한번 베었을 뿐인데, 상처가 커져간다. 상처가 내 손을 잡은 그의 손과 내 손

에서 퍼져나가 서로의

손목을 한번 둘렀다. 마치, 팔찌처럼.

「신성계약이니, 한번 더 도망치시면 신벌이 있을겁니다. 물론, 삼년 뒤에 비 마마께서 원하는대로 말

씀을 들어드리지

못해도 제게 신벌이 내리겠죠.」

국무대신이 내 손을 놓고 일어나면서 싱긋 웃었다.

「계약에 감사드립니다, 비 마마. 저……개인적인 시간을 딱 1 분만 가져도 되겠습니까?」

‘개인적인 시간’?

「그러세요.」

내가 말하자마자 국무대신이 아픈지 손목을 탁탁 털면서 비서관을 돌아보았다.

「혹시, 데이트 생각있어졌어? 나, 방금 괜찮지 않았어?」

……갇.

비서관이 질린 얼굴로 그를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바쁘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혹시 안 바빠질 수도 있는거잖아?」

「바쁩니다.」

그 말에 국무대신은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아아, 같은 남자로서 정말 처참하다. 눈 뜨고 봐주기가 힘들

다. 그는 천막을 나가서,

온실에서 대기하고 있을 시녀 누나들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그 사이, 비서관이 말했다.

「무모한 행동이셨습니다. 계약에 관해서 알고 계십니까?」

당연히 모르죠. 그러고보니, 이거 사기당한 거 아냐.

「계약을 지키지 않으면, 심장이 멈춥니다. 국무대신은 비 마마와 자신의 동맥을 연결하여 계약을 부여

했으니, 제한은

커졌습니다. 아십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홀로 나가시면 안됩니다. 3 년뒤에는 반드시 국무대신이 계약

을 이행할것입니다.

3 년안에, 비 마마가 원하는 걸 들어줘야 하는 것이고, 3 년간 변화가 없다면, 3 년이 지난 다음 날, 들

어줘야 합니다. 마마,

그 때 그가 마마의 요구조건을 지키지 못하면, 그의 심장이 멈춥니다.」

비서관의 표정이 염려로 가득차 있다. 그게 나를 향한 염려가 아니고, 국무대신을 향한 염려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염려가 되면 데이트 한번 해주지 그래요? 정말 마음이 아프다고.

「신성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비서관의 질문에 신성지를 떠올렸다. 엄청난 나무들, 초저녁인데도 이미 어둡던 숲. 빛도 들어올 수 없

는 것 같은 그 대지의 중심부에 우두커니 서 있던 건물. 을씨년스러운 담쟁이 넝쿨.

그 이상을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꼭 말해야 합니까?」

내 말에 비서관이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바로 전에 황비의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계

약씩이나 한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다.

그런데 황제가 안 보내준다고 하면, 국무대신이 무슨 힘으로 보내주겠다는 이야기지? 속이 영 안 좋았

다.

「신성지 중심부에 건물이 있었어요. 그 건물을 들어가자- 남자가 한면 있었고요. 그 남자가 라브만인

지는 모르겠지만, 검은 베일을 쓰고 있었고, 그와 세명의 남자가 제 몸을 칼로 베서……」

간단하게 말하자. 떠올리지 마.

-그 당시에도 모욕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 때를 떠올리면 모욕과 수치를 느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제는 공포가 느껴진다. 왜? 당시에는 화가 났었잖아.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왜 이제야


무서운 거지?

「피를 먹었어요.」

더 이상은 안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비서관은 내 얼굴을 쳐다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길고 우아하게 올라간 속눈썹을 보면서 나는 입

술을 깨물었다.

이상하다, 왜 지금 그 일을 떠올리는게 무섭지?

「라브만과 대신관들이 분명합니다.」

비선관이 한숨을 쉬며 말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 때 황제가 들어왔다. 그는 국무대신이 시녀장과 함께

구급상자로 보이는, 그러나 무척 화려하게 세공된 상자를 들고 오는 동안 나를 보고, 피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내 손목을 들기 직전, 내 손목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데이비드, 이빨 상해.」

……참, 알 수 없이 다정하단 말이지. 비서관이 「아.」라고 의미없는 신음을 뱉으며 입을 벌렸다. 그

사이, 황제는 내 손목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국무대신을 쳐다보았다. 황제의 시선에는 역시 피를 흘리

고 있는 국무대신의 손목이 보였다.

「계약인가.」

황제는 한숨을 뱉으며 시녀장에게 상자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빠르고 다정하게 내 손목에 붕대를 감아

주었다.

「무슨 계약이냐고 안 물어보십니까?」

국무대신이 싱긋 웃었다. 나는 당연히 이 계약건을 황제에게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국무대신이 당당

하게 물어서 당황했다. 그러나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손목에 붕대를 매고, 담담히 물었다.

「뭔지 알아야 하는건가?」

「아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건, 신하로서의 조언인가?」

그 말에 국무대신이 「그렇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하자, 황제가 피식 웃었다.

「말하고 싶다면 해 봐.」

「계약의 내용은 삼년간 비 마마께서 자의로 황비로서의 모든 의무에 충실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황제가 내 눈을 쳐다보았다. 금색 눈속에 있는 나는, 작았다. 그래서,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

지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반대급부는?」

「달로의 귀환입니다.」

그 말에 황제가 어깨를 떨며 쿡-하고 웃더니 「안됐군.」이라고 말했다. 나에게 하는 말인지, 국무대신

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황제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다정한 얼굴을 했다.


「나는 삼년 뒤에 충실한 신하를 잃겠지만, 그래도 그대랑은 삼년간 휴전이라니 기쁘군. 나는 그대와

다정하게 잘 지내고 싶거든.」

「폐, 폐……하?」

국무대신이 얼빠진 소리를 냈지만, 황제는 쿡 웃으면서 일어났다.

「밤에 보지.」

그는 나에게 인사를 하고 국무대신을 스쳐 지나가려했다.

「폐하, 이렇게 절 버리시는 겁니까?」

국무대신이 우는 소리를 하자, 황제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다시 한번 내 비에게 상처가 생기면, 그대가 내 신하라 할지라도 봐주지 않겠다.」

그 목소리는 엄중했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였다. 국무대신은 어느새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

리고 황제가 사라지자마자 (그는 왜 온 것인지 모르겠다.) 「이야, 팔 하나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는데

재수가 좋아요.」라며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비서관을 보면서.

「점심 같이 할래?」

라고 물었다.

나는 그 안타까운 광경에 눈을 감았다. 눈을 채 다 감기도 전에 비서관의 앙칼진 목소리가 날라들었다.

「바쁩니다.」

내가 3 년간은 황비로서 의무를 다하겠다고 하자, 황제는 내 숙소를 처음에 있었던 방으로 옮겨주었다.

온실에 감금되었던 것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매일 밤 와서 같이 자고는 하는 이 황제가 의외로 자

신의 방에 나를 들여놓지 않은 것이 신기했는데, 그 대답은 시녀장이 해주었다.

「황제 폐하의 방은, 시종들이 늘 상주하고 있습니다. 암살을 피하기 위함입니다만, 아마도 황제 폐하

께서는 비 마마와 같이 계시는 걸 누군가에게 보이시기 싫으신가 봅니다.」

왜?

이해가 안 가서 시녀장을 올려다보았더니 시녀장이 미소지었다.

「이해가 아니 가십니까?」

「실제로, 이 방에 와도 여러 사람에게 보이게 되잖아요.」

「허나, 폐하께서는 그 것도 탐탁치 않아 하시지요.」

그걸 어떻게 알지? 물어보려는데, 시녀장이 곱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오래 모신 분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다면, 이 관직은 그만두어야지요.」

나하고는 별로 오래 안 있었는데 내 마음은 어떻게 알지? 당황했다. 시녀장이 「주무십시오.」라고 말


하고 나가버렸다. 이 방은 온실처럼 절경은 아니다. 온실은 온실내에 있는 아무 벤치에나 누우면 별이

보였는데, 이 곳은 창밖으로만 별이 보였다.

어느 새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 익숙해지려한다. 이러다 한국가면 ‘공기가 매워.’라고 하는 거 아

닌지 모르겠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있으니 별 생각이 다 든다. 일단 드는 것은 정말 삼년을 버텨야 하는 건가, 라는

생각. 그 다음은 왜 안도감이 드는 거냐 하는 의문. 그리고 나서는 금발과 금안과 잔인한건지 상냥한

건지 도무지 종 잡을 수 없는 남자에 대한 회상.

온실이 좋았지. 별이 사방에서 보였으니까. 누구더라, 칸트였나. 그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쳐다보면

쳐다볼수록 더 보이는 것은 내 마음의 도덕인지 뭔지와 밤하늘이라고. 정말, 보면 볼수록, 하늘은 더욱

빛난다.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이기 시작한다. 보지 않는 것보다 들여다 볼 수록 감동은 커진다. 사람의

마음도 저럴까? 사람의 마음도 보려고 노력할수록, 보이게될까.

다른 누구의 마음보다도 내 마음이 궁금하다. 나는 왜 3 년이란 시간을 이 곳에 발붙이기로 한 걸까?

황비라니 가당치도 않아. 웃기지도 않아. 하지만, 뭐 어때-라는 기분이 있다. 내가 황비라고 해서, 내

가 남자가 아닌 것은 아닌걸. 뭐, 어때.

그냥 조금 더 두고보고 싶을 뿐이야. 무엇이든, 누구이든은 너무 생각하지 말자. 한국에 가야 하는 것

은 당연하지만, 한국에서도 특별히 나를 기다릴 사람은 없어.

인간이란,진짜 간사하다. 스스로도 며칠전과 지금 자신의 말이 영 틀리다는 걸 알고 쓴웃음이 나왔다.

어느 새 잠이 들었었나보다. 눈을 뜨기도전에 다른 사람의 체온이 느껴졌다. 익숙하고 따듯한 체온에

눈을 감다가 한숨이 나왔다. 나는 집안에서 독자였고, 누구와도 이렇게 살을 맞대보지 않았는데, 벌써

이 몸이 익숙해지다니.

「왜 한숨을 쉬지?」

목소리가 위에서부터 내려왔다.

「예?」

「왜 한숨을 쉬냐고.」

황제는 나를 안고서, 속삭여 물었다.

「한심해서요.」

「그대도 그대 자신을 한심하게 여길때가 있나?」

황제는 놀라운 걸 발견한 사람처럼 물었고, 나는 웃고 말았다.

「당연히 있죠. ……많아요.」

「어째서? 그대는 자존심도 강하고, 추진력도 뛰어나잖아.」

「별로- 그렇지는 않은데요. 뭐 황제폐하도 그런 생각 하실 때 있으실 거 아니에요.」

내 말에 황제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대답했다.

「다섯살 때 이후로는 없었어.」


뭔가……사람 같지 않은 답변이었다. 자신을 한심하게 여긴 적이 없다고? 고개를 들자 황제와 눈이 마주

쳤다.

「정말로요?」

그것은 굉장히 신기한 말인데.

「정말로. 왜 자신을 한심하게 여겨야 하지?」

황제라 그런가? 황제라서 자신이 늘 자랑스러운건가?

「자신이 늘 자랑스러우세요?」

「아니.」

「그러면요? 자랑스럽지도, 한심하지도 않으면요?」

내 말에 황제가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의무를 다할 뿐이야. 그건 당연한 것이고, 자랑스러워할 이유도 한심해할 이유도 없어.」

아이고, 그러세요. 그래, 너 잘났다. 고개를 내리고 눈을 감자 황제가 나를 좀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이런게 싫지 않다. - 이게 문제다. 파인에서 잡혀온 이래 황제는 나를 안지 않았다. 그는 나를 그저

끌어안는 것도 내가 부서지기라고 할 것처럼 조심스러웠고, 나는 그것이 좀 불만이었다.

계약을 괜히 한 것이 아닌가 후회스럽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어야 했던 거 아냐. 이러다, 진짜-

「아픈가?」

황제가 물었다.

「아니요.」

그의 손은 내 등과 배를 더듬고 있었다. 아프지는 않은데 조금……느끼니까 웬만하면 하지 말지.

「아팠나?」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황제폐하.」

「시오엔이라고 불러.」

그의 목소리는 계속 낮아지고 있었다.

「저는 지금 아무렇지도 않아요.」

실은, 문제가 좀 있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는데 있다는 걸 자각했다. 나는 칼이 무서웠다. 국무대신

이 단검을 빼는 순간을 회상해도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그가 물어보는 ‘아픔’은 육체 한정이니까.

「약속하겠어.」

황제가 내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건조한 입술의 느낌이 이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황제가 입술을 떼

고 나를 내려다보아도, 그 입술의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복수하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의 복수를 약속하겠어.」

순간, 끌리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이 남자는 나를 좋아해. 그 이유가 뭐든, 나에게 굉장히 충실
해. 내가 아프다고 난리치면 그는 신성지로 들이닥쳐서 그 빌어먹을 놈들을 다 죽여버릴지도 몰라. 그

가능성만으로도 잠시 심장이 뛰었다. 그러고 싶었다. 사람의 간절한 면을 후벼서 유인하고, 불로장생

따위의 말도 안되는 이유로 사람의 피를 먹은 놈들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나는, 사슴피

를 원하는 한국 남자에게 목이 따인 사슴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 아팠던 풍경을 다시 떠올리며 마음을 다 잡았다.

『너하고 안 놀아, 절대로 다시는 같이 안 놀거라고!』

댕기머리 여자애였다. 눈물이 글썽이던 여자애는 덜덜 떨고 있었다.안돼- 이건 내 힘이 아니니까. 상대

는 나빴다. 그는 인간같지 않다고 느낄 정도로 저질이었다. 그러나 그의 방식을 답습해서, 힘으로 누를

수는 없어. 그러면 나도 인간이 아닌, 저질이 된다. 그럴 수는 없어.

죽여버리고 싶다.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모르겠어. 왜 죽이면 안되지? 그들은 내

몸에 상처를 내고 내 피를 빨아먹었어. 그들은 날 살려둔건가? 내가 황비가 아니어도, 황제가 신성지를

포위하지 않았어도, 그들은 내게 그렇게 해주었을건가. 천만에, 나는 이 권위를 빌어서 살아남았어. 아

니면 그들은 나를 죽여서 내 몸에 있는 피를 전부 빨아먹었을거야.

안된다는 걸 알아, 하지만 유혹은 상당히 강렬했다.

「됐어요.」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의 힘을 이용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힘겨웠는지.

그 유혹이 얼마나 달콤했는지.

그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됐다고?」

「복수를 원하면 제가 해요.」

「그대가?」

황제는 그렇게 물으면서, 내 등을 쓰다듬었다. 내 온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가느다랗게 베인 자국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것은 마치 벌레들이 달라붙은 것 같은 흉한 모습이었고, 그는 그 상처들을 만지면

서 나에게 묻고 있었다.

「제가요. 왜요, 황제 폐하의 힘이 아니면 제가 못할 것 같으세요?」

당연히 그렇겠지. 나 자신도 사실 의심된다. 당장 황궁에서 나가지도 못하는 몸인데, 무슨. 그러나 황

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믿어 의심치 않아.」

「진짜로요?」

「응.」

이 사람이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순순히 넘어가지? 내가 의심하는 티를 많이 냈나보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너는 내 손에서 벗어났던 사람이야. 그 정도의 능력이면 무엇이든 못 해내겠어. ……신성지는 너의 적

인가?」

툭하면 적이냐고 묻냐.

그러나 대답은 단호하게 할 수 있었다.

「네.」

내 말에 황제가 내 손을 가져다 키스했다.

「그대 마음대로 해봐. 그대의 등은 내가 지켜줄테니까.」

당장 뭘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황제의 말은 힘이 되었다. 어차피 3 년이나 있어야 해. 천천히 생각

좀 해보자고.

6. 필요한 힘 (1)

혼례식은 무한 연기되었다. 혼례식의 앞에 있는 정화의 의식중에는 온 국민 앞에서 상체를 드러내야 하

는 부분이

있는데, 내 몸은 도저히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황비의 의무에 충실하겠다고 밝힌 이상에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했지만……그

렇지만……

「지금이 조실 때입니까아아아!!」

시녀장과 비서관이 동시에 양 귀옆에서 소리를 질러서 깜짝 놀랐다.눈을 번쩍 떴더니 한 눈에 한명씩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황비라는 자리를 우습게 보고 있었나보다. 영화라던가, 만화같은데서 보면 왕비든 황후든 그 대부분은

바느질하고 치렁치렁한 옷 입는게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뭐 암투도 좀 해주시고, 질투하고, 쏘아붙이고

그런 거. 그랬는데, 이건 정말 장난이 아니다.

유브라데의 이천년 역사를 나보고 하루만에 외우라니. 자랑은 아니지만 이번 수능에서 국사가 최악이었

던 나에게, 지금 너무한 거 아냐. 그러나 비서관이나 시녀장은 전혀 너무하지 않다고 말했다.

「황비는 본래 귀족들의 여식 중 한명이 뽑히는 것이 관례입니다. 황비의 정통성을 물고 늘어질 것이

고, 게다가 황후로서 인정할 수 없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일단은 자신이 월인이라는 점을 자각해주세

요.」

「그거라면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유브라데를 구원하시기 위해 내려오셨다는 것도요?」

갑자기 화제가 무거워졌다. 돌덩이 하나가 심장으로 내려 앉는 것 같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비서관과 시녀장은 허리에 손을 걸친 채 둘이서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하긴 갑자기 하시려니 힘드시죠.」

비서관이 먼저 안타깝다는 얼굴을 하고 위로차 말을 건넸다. 슬쩍 눈치를 보듯 위를 올려다보니 웃고

있었다.

「다행히 자력으로 글을 깨우쳐 주셨으니……그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고보니 황후랑 황비랑 틀려요?」

내 말에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얼굴로 시녀장과 비서관이 동시에 대답했다.

「황비마마는 여러분 계실 수 있지만, 황후전하는 한분 뿐이죠. 그 분은, 제국의 2 인자이십니다.」

왕비는 한명뿐이지 않나. 사실, 제국과 왕국의 차이라고는 대빵이 황제와 왕의 차이라는 것 밖에 모르

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갔지만.

「그러고보니 그리안가에서도 진언이 들어왔던 모양입니다.」

비서관이 시니컬한 음성으로 말하자 시녀장도 어이없다는 목소리를 냈다.

「살라메이님께서 부정을 저지르신건데, 어지간히 뻔뻔하네요!」

그리고 그 둘은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호오라……살라메이?

상황은 단숨에 역전되었다. 비서관과 시녀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자며 차를 대령해놓고, 역사서를

멀리 치운뒤, 나를 살살 꼬시기 시작했다.

「폐하께 내색 안 하실거죠?」

천국이 다른 곳이냐, 이게 천국이다. 따듯한 차, 쌀쌀한 바람, 달콤한 쿠키. 이 곳이 천국이로다. 내

얼굴을 보면서 더욱 몸이 달아오른 듯, 비서관이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고, 미인도 옆에 있군.

진짜 천국이네.

「못 들은 체 해주실거죠? 그죠, 그죠?」

생각 좀 해보고요.

「살라메이가 누군데요?」

‘살라메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시녀장과 비서관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아무래도 금기시 되는 이름인

가보다.

뭐야, 황제의 첫사랑? 그렇게 생각하고 갑자기 가슴이 지끈거려서 놀랐다. 아니, 그 남자 나이가 스물

여덟살이라는데 첫사랑정도는 당연히 있을 법한 나이 아닌가. 나 왜 이렇게 동요하고 있는거지.

자꾸 뜨거운 것이 몰아치는 것 같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쿠키를 하나 더 집어먹었다.

「폐하께 아무 말씀도 안하신다고 약속해주세요. 그럼 말씀드릴게요.」

사실 처음부터 말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나 비서관과 시녀장이 너무나 진지하게 나오길래 나도 같이

좀 튕겨준 것일 뿐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서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라메이님은, 황제폐하의 전 연인이세요.」

비서관의 말에 따르면, 살라메이 그리안은 붉은 머리와 붉은색이 연해져 거의 금색에 가까운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황제의 네 번째 연인이었으며, 앞의 세명과 똑같이 그녀도 황제를 ‘찼다’.


「황제폐하도 차여요?」

황제도 차이다니…… 황제잖아.

「다른 나라 황제폐하분들은 아니 그러시겠지만, 시오엔 폐하께서는 종종 그러셨지요.」

비서관의 말에, 차를 따르던 시녀 누나 한명이 개입했다.

「종종이 아니라 100%에요.」

예쁘지, 다정하지, 돈 많지, 키 크지. 여자분들이 좋아할 타입 아닌가? 여긴 여자들의 이상형이 다른

건가?

「아무래도 폐하께서는 좀……무서운 면이 있으시잖아요.」

그 시녀 누나를 살벌하게 노려보면서 시녀장이 말했다.

「아, 집착하는 그 성격이요?」

내 말에 시녀장과 비서관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비 마마한테만 그러시고요. 폐하는 연인들에게 별로 집착하시는 분들이 아니에요. 만약 그랬더라

면 벌써 사단이 났지요.」

「좀 집착하셨더라면 좋았을텐데……」

또 다른 시녀누나가 말참견을 하다, 이번에는 비서관의 무시무시한 눈길을 받고 재빨리 고개를 떨구었

다.

여자들이란 대단하다. 특히 남의 이야기를 할 때의 그 신랄함, ‘심리해석’에 대한 다채로움은 따라갈

남자가 없다. 그리고 이 자리의 청일점인 나로서는 계속 듣기밖에 할 수 없었다.

일단, 황제가 가장 처음 사귄 여성은 정체가 불분명했다. 아니, 정체는 분명했지만 누가 처음인지가 불

분명했다고 해야 하나? 그의 고모였던 타이닌 백작부인이라는 설도 있고, 그 따님인 타이닌 백작가 영

애라는 설도 있었다. 백작부인은 당시 35 살, 황제는 18 살이었다고 하니 두배에서 겨우 1 살이 모자른

대단한 연상연하 커플이었던 것이다.

「모녀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거 아니에요?」

내 말에 모든 여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폐하는 사귀는 여성분께 충실하십니다.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차라리 백작부인의 딸과 사귀었으면 좋았을텐데, 아무래도 백작부인이었을 것 같단다. 왜냐하면 황제가

황궁의 그녀의 게스트룸에서 나왔기 때문인데. 그리고 나서는 황제와 그녀의 딸과 스캔들이 터졌다.

그리고 일년 뒤, 타이닌 가는 역적모의에 가담한 것이 발각되었다. 황제의 둘째형을 황제로 만들려던

사람들의 모의에 주동자는 아니지만, 아주 적극적인 가문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들의 처형은 황제가 직

접 목을 잘랐고 황제의 추격대와 근위대가 그들의 9 대를 멸했는데, 황제는 타이닌 백작부인과 그 따님

만을 살려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연인에게는 상냥한 황제 신화’가 시작되었다. (내가 너무 비꼬고

있다는 건 아는데 다른 말로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번째는 시녀인 마르가리타였죠?」


「그 아이는 저도 잘 모르는 아이라서.」

「저, 저 동기에요!」

또다른 시녀 누나의 난입. 이번에는 환영받았다. 어떤 타입이었냐는 비서관의 말에 시녀 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굉장히 조용한 타입이었어요. 그리고 황제 폐하를 굉장히 좋아했죠.」

「하긴, 황제 폐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없잖아요? 황궁내에서라면.」

「그래도 지금은 좀 덜하지만, 그 때는 완전 아이돌이셨잖아요.」

「여자보다 예쁘셨죠. 우우우, 그 때.」

잠깐 시녀누나들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해졌다. 거기에 황제라도 있나 싶어 돌아보았더니 허공이었다. 아

스트랄한 영역으로 날아갔구나.

맙소사, 비서관까지 표정이 아득하다.

「마치 천사같으셨죠……」

정말? 믿을 수 없는 소리에 내 얼굴이 찌푸려지는데, 비서관, 시녀장, 시녀누나 여섯명 - 도합 여덟명

이 동시에 같은 말을 뱉었다.

「외모는.」

그럼 그렇지.

「외모는 지금도 천사에요.」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말하자, 여덟명이 나를 쳐다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왜, 왜……?

「천사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이름 모를 시녀누나의 말에 비서관이 동의를 표했다.

「그런 천사라면, 천국은 이름이 아까워요.」

「간판만 천국인거죠, 그건.」

나부끼는 금발, 옅은 황금색 눈동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같은 얼굴.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

나?

스물 여덟살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남자.

대충 ‘천사’라는 이미지와 걸맞는 것 같은데, 다들 부정하고 있어서 내심 마음이 상했다. 비슷한데? 혹

시 이 나라 천사는 흑발에 흑안이라도 되나. 그럴 리가 없지. 황제가 어릴 때라고 검은색이었을리 없잖

아. 그에게는 황금색이 가장 잘 어울린다.

그나저나 대화가 너무 산으로 가고 있지 않나요?

내가 혼자 그렇게 화두에 집착하는 와중에도, 시녀누나들과 시녀장, 비서관은 천국이 아깝다, 그 때가

좋았다 등등 황제의 옛 시절을 추억하고 있었다.

「마르가리타라는 분이 뭘 어쨌는데요?」

황제의 두 번째 애인이었던 마르가리타는 첫 번째 백작부인과는 좀 달랐다. (아니, 백작부인이 연인이


었을 것이다-라는게 대세여서 그렇지. 어쩌면 그 따님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대충 백작부인이라고 생

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녀는 황제를 정-말로 사랑했다. 미친듯한 사랑이었고, 황제가 전쟁터에 출

진할 때마다 세상이 끝난것처럼 굴었다고 한다. 따라가겠다고 난리친 적도 있었다. 황제의 그 성질머리

이면 당장 목을 쳐도 시원치 않을 판국이었는데, 황제는 늘 그녀에게 다정했다.

그녀는 어느 날 황제에게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것도 공중의 면전- 연회장 한복판에서.

「그 연회장이라는 곳이, 그러니까……」

말을 못 잇는 내게 시녀장이 말해주었다.

「당시가 신년 파티였으니까, 대 연회홀이었습니다. 수용인원이 2 천명이 넘는 홀이지요. 당시에 오신

귀족분들은 1500 명 정도셨고요.」

맙소사, 그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광기의 커플’이 따로 없구나.

그래서 두 번째 애인인 시녀 마르가리타는 하렘에 갇혔다. 황제는 확실히 애인에게 무르다. 그녀가 자

신의 목숨을 노렸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것도 처형을 한 것도 아니고 하렘에 그냥 가

둬둔 것이다. 맛있는 식사, 포근한 잠자리. 그 모든 것을 죄인인 그녀에게 제공하면서, 그녀를 그저 가

둬둘 뿐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세 번째 애인은 13 살의 여성, 공작가의 영애 샤말라였다. 맙소사, 변태냐. 당시 황제가

23 살이었다고 하니, 한국에서라면 당장 감옥에 갈 상황이었지만 이 곳은 유브라데였고, 그는 황제였다.

이 13 살 샤말라는 그의 총애를 믿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뇌물을 받고 그들을 돕다가 그 중 한사람이

국가 기밀을 기혼에 팔아먹다 걸렸고, 그녀도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지만 추방으로 끝났다.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이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네 번째, 살라메이 그리안. 그녀는 황제가 전쟁터에 나갈때마다 황제가 죽을까 두려워하다 못해

서, 음유시인과 결혼해버렸다. 그리고, 황제를 ‘찼다’.

결국 황제의 연애사는 전부, ‘차였다’로 통일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차인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황제가 그만두지도 않았고, 늘 어쩔 수 없이 그만두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애인……이라기보다는 아내에 가까운 나도 도망쳤으니, 인생 참 기구하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가진 남자가 연애사는 어째 그 모양이래.

그리고 한편으로는 불쾌감을 느꼈다.

왜 불쾌감을 느꼈는지는 생각하지 말자.

……뭐야, 결국 사귀면 무조건 잘해주는 남자인거잖아. 당연히 기분나쁠 만 한 것이다. 나는 조금……설명

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그런 기분이 있었단 말이지.

왜 자꾸, 바람둥이에게 농락당한 처녀의 기분이 되는 걸까. 기분이 더러워졌다.


밤에 황제가 돌아왔다. 그는 나를 찾느라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낭비했고, 그래서 요즘 바쁘다고 했다.

누가 듣고 싶댔냐.

늘 그는 자신의 스케쥴을 보고했다. 오늘은 이런 걸 했다, 내일은 저런 걸 할 것이다. 왜 이런 이야

기를 해주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내 몸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왜 일찍 올 수 없었는지 설명하고,

내게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다. 도망가지 않는다는 내 말을 믿는 것인지, 황궁 내를 산책해보라고 하기도 하고, 원한다면 자신

의 서재에 들어가도

좋다고 했다.

우리는 사귀는 사이인걸까?

결혼한 사이?

정혼한 사이?

기뻐하는 그의 얼굴. 즐거워서 마냥 좋아만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오늘 들은 그의 연인들 이야기를 생각하며 새삼 내가 어디쯤에 위치한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자신은 마음을 주지도 않으면서 타인의 마음만 드러내라니, 그건 비열하

다.

타이닌 백작부인. 시녀 마르가리타. 공작가의 영애 샤말라. 살라메이 그리안.

그는 열 여덟살에 처음 연애를 했다. 십년간 네명의 여인. 그렇게 많다고도, 그렇게 적다고도 할 수 없

다. 그가 황제라는 걸 고려한다면 적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끝까지 사랑해주지 않았고, 그

는 상대를 끝까지 지켰다.

……뭐, 조금 감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단 말이야. 사랑은 대화와 비슷한 것 아닌가? 인간의 감정이란 결국 자신 혼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어딘가, 흘러가는 것이잖아. 누군가와 부딪치고, 또 누군가와 교류하고. 대화처럼, 상황처럼,

감정도 그렇게 흘러가게 될터인데, 더욱이 ‘상대’가 반드시 필요한 ‘사랑’이라는 감정이라면 반드시 상

대와 교류하게 될텐데.

어째서 한쪽은 배신하고, 한쪽은 지키는 관계가 계속된걸까.

이상하잖아. 아무도 안 이상한가? 그저 ‘차인다’로 설명될 수 있는 건가?

「원래 애인들한테 무척 잘해준다면서요?」

내 말에 잠시 황제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옷을 벗다말고 돌아 보는 그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있어서,

살짝 당황했다.

아니 뭐 그렇게 굳을 이유야 있나……?

「누구냐, 그 쓸데없는 말을 너의 귀에 부은 것은.」


그런 표정으로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냐.

「누구면요.」

내 말에 그는 잠시 나를 노려보았다. 그가 노려보면, 무섭다. 그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그는 나에게

잘해주니까. 하지만

마음은 가라앉는다. 어딘가 무섭다는 기분이 든다. 이것이 박력일까? 혹은 살기?

그는 잠시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더니 그의 무서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는 다

정하게 미소지었다.

「누구든 상관없겠지. 그래, 잘해주는 편이야.」

반역을 해도, 자신을 팔아 뇌물을 먹어도, 자신을 죽이려해도, 부정을 해도 봐주는 게 겨우 ‘잘해주는

편’이야?

그런 건 거의 ‘등쳐 먹혔다’라는 수준이 아니고?

연애를 해보지 않아서 이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왜?」

왜라니…… ?

당연한거잖아. 왜라니. 당신은 지금 부조리한 관계를 이어간거라고. 왜라니, 당신이 잘해준 사람들이,

당신의 연인이란

사람들이 당신을 등쳐먹었는데 왜라니!

「왜 그런 것이 궁금하지?」

황제가 물었다. 황제는 내 얼굴을 보고 미묘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답

할 꺼리가 없어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왜 그런 것이 궁금하지?

……그러게, 나는 왜 이런 것이 궁금하지?

할 말이 없는데, 황제가 대답하라는 듯한 얼굴로 다가오니까 곤란했다. 그가 상체에 아무것도 입지 않

고 밑에 바지 하나만 입은 차림으로 다가와서, 나는 다시 한발짝 물러났다. 침대 위에서 앉은 채 물러

나는 것은 자신이 약하게 느껴지는 행동이라, 조금 민망해지려는 찰나에 황제는 침대 밑에서 무릎을 꿇

었다.

그는 침대에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대를 왜 좋아하는지 말했던가?」

「하늘에서 떨어져서.」

그 말에 황제는 소리내어 웃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나?」

아니……그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입밖으로 꺼냈을 때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가 나를 올

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너는, 나를 사람처럼 여겨. 너와 있는 나는 황제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야. 너는 나를 그대로 판단

해.」

‘가문’이 필요없는 절대권력자. 역시 그 자리는 본인에게도 부담이었을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 그대를 구하는 그 순간부터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어. 황제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그대를 구했다. 그 순간, 필요한 것은 황제의 힘도 권력도 아니라 내 두 팔이었다.」

당황스러웠다. 하늘에서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누구라도……누구라도, 당신은, 아니 폐하는 구했을거에요.」

잔인하기는 해도 굉장히 다정한 사람이니까. 그러나 황제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는 사람을 죽이기는 해도 사람을 구하지는 않아. 구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야. 너처럼 내

앞에서 떨어져 내가

아니면 죽을 지도 모르는 상대가 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너는 내가 처음으로 구한 사람이

야.」

황제의 옅은 금색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나를 사람으로 보고 있지. 그래서 나에게 인간으로서의 최저선을 지키라고 말하지. 내게서 도망

치려 하고, 나를 비난하는

눈을 하기도 해. 너는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

당연하잖아, 당신은 사람인걸.

「그래서, 너를 사랑해. 이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야. 수많은 이유가 있는데 일단 입으로 정확하게 전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정도일 뿐이야.」

황제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그 순간,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수 초가 지난 후 새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곧 사라졌다.

황제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는 어딘가를 보고 있어. 그 곳이 달이든 어디든, 나의 세계가 아닌 곳은 분명하지. 그 곳에 남겨

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남겨둔……사람.

「너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느냔 말이다, 키미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인가?」

아니, 대답하기 어렵지는 않다. 그저 하기 싫을 뿐이지.

‘없다’고 대답하기에는 너무 슬퍼서.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아서. 나

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내가 남겨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그 사람은 날 기다리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그 쪽이랑 무슨 상관?!’이라던다 ‘남이사!’라고 뱉어버리고 싶지만.


「키미누?」

이 남자가 ‘너를 좋아해. 너는 남겨둔 사람이 있나?’라고 물어온 이 상황에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

다. 게다가 거짓말은 질색이라서 - 뒤에 맞추기가 괴롭다.-, 나는 입을 열었다.

「기다리지 않지만 남겨둔 사람은 있어요.」

그게 무슨 뜻인줄 알아챈 것처럼 황제가 피식 웃었다.

「짝사랑이라는 뜻이군.」

그 순간, 미묘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짝사랑이다. 도무지 핑계를 붙여볼 구석이 없는 완전한 짝사랑

이지만 그래도 대놓고

‘짝사랑이라는 뜻이군’이라니, ‘아니’라고 하고 싶어진다. 조금은 상대도 마음이 있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라고 하고 싶지만.

짝사랑이라는 것은 또 사실이어서.

발끈한 마음을 드러내지 말자,고 생각하면서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비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계약한 것을 후회한다. 아침부터 일어나 이런저런 공부를 했고, 덕분에 지금

몸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졸려 죽겠는데도 이 잔인한 여자들은 반쯤 졸고 있는 나를 몰아붙이고 있었

다.

처음 왔을 때 랩스커트가 싫다고 난리를 친 것은 분명히 기억한다. 그리고 내 몸을 씻기려 했을 때 질

색한 것도 기억하지만, 그게 어째서 ‘이성에게 몸을 보여주지 않는 월인 황비’가 되면서 황제가 씻기고

닦이고 옷을 입히게 된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상대가 여자라면 당연히 안되

지만, 상대가 황제라면 뭐- 내 몸을 어떻게 하든지, 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말하면 꽤 낭만적인 것

같지만, 실은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난 잘래.’라는 무심함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스케쥴 자체

가 살인적인 것이다.

덕분에 요즘은 아무 생각없이 살고 있다. 외우라면 외우고, 걸으라면 걷는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는 지

나치게 졸리고, 바쁘고, 힘들다. 다행히 이런 저런 대기 시간들이 길어서 주로 그 시간들에 졸고 있었

다.

「비 마마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모든 스케쥴 중에서 가장 최악인 것은 이것이다. 하렘의 여성들과 일주일에 한번 갖는 오찬.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도 어딘가 사납다. 차라리 주먹으로 치고 박는 쪽이 낫지, 여자들은 눈으로 광

선을 내뿜는 것 같다.

「아, 뭐라고 하셨죠?」


「이런이런, 마마께오서는 이 자리가 재미가 없으신가 봅니다.」

「하긴……폐하를 뵙고 싶으시겠지요. 이제 신혼이신데, 그런데. 마마께서도 별 수 없으셨나 봅니다. 그

리 싫어하시더니,

이제 비의 책봉을 받으신다고요?」

뭐가 별 수가 없냐.

악의인지, 본래 성격인지, 알 수가 없다.

「본래, 폐하께서는 취향이 일관적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그리고 웃음소리가 작게 일었다. 그러니, 뭐? 그냥 대놓고 말해라. 대놓고 ‘너가 월인이라서 거기 있는

거지, 월인 아니었으면 그냥 끝이야.’라고 대놓고 해봐, 대놓고.

아니, 대놓고 해도 문제가 있다. 여자를 팰 수는 없지만, 여자와 말싸움으로 이길 수도 없다. 여자들과

몇 번 말싸움을 해보았는데 본전도 못 찾았다. 이기는 방법은 단 하나, ‘무시’뿐이다.

「그래서, 뭘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신건데요?」

노려보자, 여자들의 수군거림이 잦아들었다. 으윽, 이런 상황 정말 별로다. 이쁜 누님들(일까? 연하일

지도.)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고.

공녀기는 하지만, 예쁜 여자잖아. 나도 남자인데, 미인에게 이유 없이 욕먹는 건 싫다.(미인이 아니라

도 여자에게 욕먹는 것은 싫다.)

「하렘에, 괴물이 있다는 소문 말입니다.」

……때때로, 이럴 때 내가 지구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떨어졌다는 자각이 분명하게 든다. 괴물? 괴물이라

고?

「괴물이라는게……」

「트롤이라는 소문이에요. 못 들어보셨어요?」

트롤?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게 뭔지는 알 것 같다. 아니, 잠깐 뭐였지? 머릿속을 뒤져봐도

트롤이 어떤 생물체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생각나는 바가 없다. 키가 큰 거였나, 작은 거였

나? 털이 있었나, 없었나?

「어디에 있는데요?」

내 말에 여자들이 까르르 웃는다. 정말 ‘까르르’여서 이 사람들이 웃는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

다. 라로가 있다면 좋았을텐데, 라로는 죽었고- 라로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라로를 떠올리자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그녀를 떠올리면 늘 생각하는 것은 죄책감과 신병에 대한

공포. 그리고 무겁게 짓눌리는 책임감……같은 것. ‘구원’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 어둡고 슬

프고 차가운 감각들뿐이다.

「하렘에 중심부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수상한 냄새가 난다. 하렘중심부에 있는 트롤이 아직까지 살아있을 리가 있냐. 그럼 이 착한 몸매의 누

님들도 전부 죽었겠지.
당연히 흘려 들으려고 하는데, 그러기에는 꽤나 심각한 얼굴들이 많았다. 하루 종일, 수많은 스케쥴에

끌려 다니면서도 그 말이 걸렸다. 정체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정의할 수도 없는 생명체. ‘괴물’이라

고 부르는- ‘트롤’이라는 동물.

하렘의 중심부에 트롤이 있다.

「그거 정말이에요?」

내 말에 시녀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요?」

「하렘의 중심부에서 사는 트롤.」

당연히 부정하리라고 생각햇는데 시녀장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트롤이라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떤 괴물이 있다고는 하더군요.」

하렘의 중심부에?

「……맙소사, 위험하지 않나요?」

내 말에 시녀장이 미소지었다.

「위험하지요.」

「그런데 왜 황궁에 괴물을?」

황궁에는 하렘이 있다. 황궁의 중심부에는 황제의 사궁이 있고 그 오른쪽 위쪽에 하렘이 있다. 하렘은

거대한 정원이고, 그 안에는 ‘황제의 여자들’의 숙소가 포진되어 있다. 그런데, 이 하렘의 특징은 무작

정 걸으면 반드시 중심부로 통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자들의 숙소에는 다다를 수 없고, 중심부에

서 괴물이 기다린다.

여자들또한 도망칠 수 없다. 일단 경비병을 피해서 달아나야 할 텐데, 잘 못 들어간 길은 중심부로 이

어진다. 맙소사, 이건 감금이잖아.

……하지만, 그들은 황제의 여자고, 여기는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고. ‘감금’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

흥미 본위로 들은 이야기는 상당한 찝찝함을 남겼다. 여자들은 어쨌든 납치당한 상태가 아니다. 하지

만, 그것은 분명히 감금이야. 그렇지만, 책을 지지리도 안 읽는 나도 ‘하렘의 여자들이 출입자유’라는

말은 들어본 일이 없다.

정말로 괴물이 있을까?

그는 정말로 사람을 헤칠까?

단지 나가고 싶어서, 단지 만나고 싶어서, 단지 그 이유로 하렘에 들어온 사람들을 그쪽으로 내 몬다.

물론 그것은 전부 안되는 일이었어. 하지만 그런걸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을 설계한 자와,

그것을 지시한 황제는 양쪽 다 살인자가 아닐까.

나는 황비의 의무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 그렇게 말했지만 실은 최선 따위 다하고 있지 않다. 스케쥴

은 너무나 타이트하고, 배워야할 것도 알아야할 것도 많고, 그 모든 것들을 알고 제대로 수행하기는 불

가능해. 마치 고 3 초기와 비슷하지. 하루 종일 시험과 하루 종일 외울 것을 부여 받고, 실제로 ‘외울


시간’은 주지 않는 그런 때와.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하렘의 중심에 있는 게 진짜로 트롤이에요?」

다음 날 아침, 여느때처럼 날 씻겨서 수건으로 말려서 옷을 입혀주는 황제에게 물어보았다.

「아아, 그런게 있다고 하더군.」

「본 적이 없으세요?」

내 말에 황제가 「있어야하나?」라고 되물었다. 아니, 뭐 있을필요는 없죠. 그럴 필요는 없지만……

「위험하지 않나요?」

내 말에 황제가 피식 웃었다.

「자신에게 허가된 길이 아니라면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지.」

「길을 헤매면 죽는 건가요? 단지 실수도 해도 안되는 건가요?」

황제가 내 허리에 끈을 매어주고 귀에 귀걸이를 채워주며 물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니라?」

황제는 여전히 다정한 얼굴로 물어보고 있지만,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그렇다, 내게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뭐라고 해야 하지? 당신은 살인자라고?

「그냥 궁금했을 뿐이에요.」

나는 결국 얼버무리고 말았다. 황제는 그런 나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너무 호기심에 가까이 하지 마. 그대는 지나쳐.」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광할한 정원에 발을 잘못 들여놓은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그는 어떻게 되

는 거지?

며칠간 우울했다. 일단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이 죽을 지도 모른 다는 것. 그 장소가 어딘가에 있고,

더욱이 내게 ‘허락되지 않은 길’을 통하면 나도 갈 수 있을 곳이라는 것. 내가 있는 곳에서 사람이 죽

어가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 나는 ‘살인 방조죄’를 저지르고 있다.

더욱이, 나는 그 곳으로 갈 뻔 했다. 실제로 하렘의 담을 넘으려 했던 나였다. 당연히 그 쪽으로 갈

뻔 했던 것이다. 심장이 철렁했다. 자꾸 트롤에게 먹혀지는 꿈을 꾸었다.

트롤은 갈색의 몸을 가지고 있다. 곰보다도 크고, 늑대보다 사나운 이빨을 가지고 있다. 그는 앞발로

나를 움켜쥐고 나를 먹으려고 한다. 어둠 속에서, 아무도 나를 구해줄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몸부림쳐

도 트롤을 이길 수 없다.
-뭐하나, 그대?

며칠째 그런 꿈을 꾸던 도중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는 트롤보다 작았지만, 황제보다는 크고, 황제와 같

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색은 틀렸다.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마자 나는 ‘살려줘요!’라고 외쳤던 것 같다. 그러자 그가 싱긋 웃었다.

-분부대로.

그가 날아들었다. 아니, 그는 도움닫기로 허공을 뛴 것이지만, 내 눈에는 날아올라 달려든 것처럼 보였

다. 그는 트롤의 등을 손으로 꿰뚫고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갑자기 나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프지 않은 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내 눈 앞에서 피가 튀었다. 지독하게 몽환적이었지만, 숨 막히도록 공포감이 있는 광경이었다. 피다……

눈앞에 꿈틀거리는 심장이 움직이고 있다. 남자는 나를 흘끗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그 심장은 한 손

으로 우악스럽게 움켜쥐었고, 심장이 터졌다.

맙소사, 심장이 터졌어.

트롤이 사라져간다. 하지만 트롤이 실재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게 꿈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가.

-그대는 정말 손이 많이 가는……

그가 다가와 내 뺨에 손을 대려는데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심장을 터트렸어. 심장을!

그 손으로 나를 만지려 하고 있다.

-그대? 민후?

나는 뭐에 놀라고 있는 걸까? 무엇이 나를 이토록 전율시키는 것일까? 눌러 터진 심장? 나를 해치려는

트롤? 나를 구한 남자?

심장- 심장이야. 그렇지만 왜 이토록 놀라운 것인지는 모르겠어. 나는 지금 무엇에 이토록……

그래, ‘심장’이다. 그것이 살인자의 심장이라 할지라도, 괴물의 심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토끼의 심

장이라 할지라도! 그냥 죽인 게 아니라 심장을 터트렸어,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람의……

지금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되는 질문. 하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어.

-사람의 심장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하실 건가요?

-이봐, 그대가 구하라고 한 거잖아.

황제와 똑 닮은 얼굴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저은

것이 ‘사람의 것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라는 뜻이 아님을 알고 있다.

-대답하세요.

내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민후. 너의 가장 큰 단점이 뭔지 알아?

그가 팔짱을 꼈다. 그 손이 나에게 닿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상대가 어

떻게 보든 상관이 없다. 나는 저 손이 닿는 것이 싫다.


-그대는 지나치게 결벽증이 심해. 그 결벽증을 부숴야 어른이 된다고.

-전 이미 충분히 컸어요.

내 말에 드래곤이 고개를 성의 없이 끄덕거렸다.

-그러시겠지.

-사람의 심장을 터트리는 건 어른이라도 이해할 수 없는 거예요. 자꾸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내 말에 드래곤이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대는 전쟁을 겪어봤나?

-아니요.

-음, 그래서인가. 지나치게 연약하군.

-안 연약해요!

당신이 지나치게 무시무시한 거지!

-그래? 그럼 하나 묻겠는데, 전쟁이 났다고 치자고. 너의 가족들도, 네가 사랑하는 사람도, 다 죽인

놈이 있다고 쳐. 너의 팔도 하나 날아갔지. 그러면, 너는 그를 그냥 죽이고 싶겠나?

그의 차가운 말이 귀로 흘러들어왔다.

-너는 단 한번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나? 다시 묻지. 너에게 힘이 있다면 상대를 죽일

수 있다. 그렇다면 넌 누군가 한명쯤 죽였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대는 가학심을 가져 본 일이 없

나? 상대가 더 괴로워하길, 더 몸부림치길 느껴본 적이 없나? 그것을 법이든 뭐든, 인간들이 정한 규칙

을 생각하며 그대는 참는다. 하지만, 그 규칙이 무너져있다면? 네가 누구를 죽여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

는다. 아니 도리어 ‘죽인다’는 행위가 너의 가치를 높인다. 그렇다면.

빛도 반사시키지 않는 그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너는 죽이지 않았을까? 자신만만하게 대답할 수 있나?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 해도 이건 틀려요. 우리나

라에도 사형이 있지만, 가능한 고통을 느끼지 않는 방식으로 죽인다고요. 약물이라던가, 교사형이라던가

……

-약물? 교사형? 웃기는 군. 어차피 죽는 사람은 죽고 싶어 하지 않는 거잖아? 그리고 고통을 말하자

면, 약물이나 교사형보다 내 쪽이 깔끔했을걸. 그 생물은 즉사야. 고통도 느끼지 못해. 죽지 않는 자에

게 이런 방식은 최악이겠지만, 그래봐야 그들은 죽지 않았잖아? 죽는 자에게 자비는 ‘살려주는 것’뿐이

야.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고통 없이 가게 하는 것’이잖아.

드래곤이 흐려지고 있다.

-또 거부인가?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온 공간에서 울려댔다. 그가 수백 명 있는 것처럼.

-좋겠지. 내가 결론을 내리면, 너는 이렇게 툭하면 날 밀어내진 못할 거야. 다음에 보자고.

눈을 뜨고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사람을 죽인다. - 생각해보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증오스러운


상대라면 역시

라브만이라는 그 변태 신관이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를 죽이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죽이

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 그런 긴박한 상황을 겪어봤을 리가 없다.

‘이렇게 날 밀어내진 못 할 거야.’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이를 갈면서 그렇게 내뱉고, 사라져버렸다.

아침을 먹고, 일을 하면서도 내내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심장을 터트린다. - 그것은 즉사이고, 상대는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그 심장을 잡은 이에게,

그 심장의 느낌이 날 텐데.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존재하잖아. 그건- 그건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그는 드래곤이니까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까……

「예산 건입니다.」

내가 황비라는 건 알지만, 내가 왜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는지는 진짜 모르겠다. 내 얼굴이 구겨지는 것

을 본 내무대신이 민망한 얼굴을 한 채로 헛기침을 했다.

「비 마마!」

옆에서 시녀장이 작게 책망하는 소리가 들려도 어쩔 수 없다. 정말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무대신에게도 아름다운 딸이 있다는데, 그의 딸이 황비자리에 앉으면 딱 좋겠군. 그래서 그녀가 아버

지와 둘이서 이야기하면 좋잖아. 저 내무대신도 내심 그런 것을 바랄 테고.

황제와 그녀가 같이 있는 것은……아아, 이 부분이 불쾌하군. 역시 예산안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 할까.

자, 잠깐.

나 방금 무슨 생각을?!

「비, 마마……!!」

상념에서 바로 벗어나 눈앞을 보자, 뭔가 시야가 달라져있었다. 나는 예산보고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야한 생각을 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버린 것이다.

아아 쪽팔린다. 여기서 뭔가 말을 하는 게 좋을까, 그냥 앉는 것이 좋을까. 일단 표정관리에는 성공했

지만, 이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 그러니까요, 저기…… 일단 지금은 휴전한 상태이니, 군비보다는 다른 쪽으로 금액을 돌려야……」

「휴전이라니요? 정말로 폐하께서 더 이상 전쟁을 하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까?」

놀란 얼굴로 여기저기서 되물어오는 말들에 당황해버렸다.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옆에 황제라도

있다면 시선을 보내 볼 텐데, 불행히도 황제가 없다.

마음도 심난하고 머리도 아픈데, 이 상황에서 눈치만 보고 있자니 정말 죽고 싶은 기분이다.

대충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기는 한데.

「마마, 말씀을 해주시오소서.」


「확언해주소서.」

난리가 난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불구경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연유로 휴전을 결심하신 것인지 아시고 계시는지요?」

황제는 내게 말했었다. ‘너를 전쟁터로 데려갈 수는 없으니, 휴전해야 겠다’고. 엄청난 부담감으로 다

가온 그 말이 잊혀지지는 않는데, 여기다 대고 그 소리를 똑같이 읊어줘도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이 매달리는 시선을 보내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을 쏟아 붓고 있다. 그 시선에 대한 책

임감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확실한 말씀은 폐하께 들으셔야 할 테고요……」

말을 얼버무리는데 시선이 좀 더 질척해진다. 누군가는 울 것 같은 얼굴이다. 굉장히 대단한 이야기였

구나.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였던 거구나. 나는 어떻게 말했지? 되는대로 지껄일 뿐이었는데.

남의 집안일이라는 기분은 쉽게 떨쳐지지 않는다. 그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 듯 모를 듯

마음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 국무대신의 그 절절한 이야기도, 마음속을 녹이는 듯 했지만 결국 잔상을

남기는 정도로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해!’라는 그 목소리뿐, 나머지는 어떤 이야

기였는지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마마……」

애처로운 목소리들이 부담스럽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잖

아.

당장 하렘에 있을 트롤이 더 걱정돼. 사람이 죽는 것은 싫다. 그 외에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는 별 관

심이 가지 않아.

머리가 복잡하다. 아픈 것 같기도 해. 예산안. 트롤. 황제. 국무대신. 계약. 드래곤. 심장이 터져서……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복잡해. 실타래의 색이 여러 가지로 마구 엉켜있다.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의 비를 그만 괴롭히도록.」

눈앞이 가려져있다. 그것이 누군가의 손바닥임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따듯한 체온

이 누구의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체향은 익숙하다.

황제가 왔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죄책감이 들었다. 3 년간은 황비로서 모든 의무를 다 하겠노라고 약속했는데,

이것은 그렇게 가볍게 할 수 있는 약속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휴전이다. 그대들은 내가 말을 할 당시에 뭘 들었는지 모르겠군. 전쟁보상금, 포로의 교환. - 휴전이

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종전을 위해 노력할 것이고.」

황제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나의 비는 사람이야. 키미누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황제가 이렇게 짜증내는 것을 처음 본다. 그는 진심으로 불쾌한 얼굴을 하고, 나를 제외한 모두를 노려

보고 있었다. 그가 너무 화를 내고 있어서, 다들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내가 내내 ‘황비의 의무’가

힘들다고 투덜거려도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는데.

「그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키미누를 이렇게 몰아붙이는지 모르겠군. 그는 황후가 아냐. 황비일 뿐이

다. 더욱이 황후도 단

한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예산안에 관계한 사람이 없지 않은가.」

「한 분은 계시잖아요.」

역시 국무대신은 강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릿하고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그 말투는 더

욱더 ‘고의적’으로 보였다.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황제는 한마디로 일축하고 국무대신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여전히 싱글벙글한 얼굴로 황제

를 쳐다보았다.

「그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우리를 승리로 이끌 겁니다. 폐하도 아시고 계시지 않으시옵니까?」

웃는 척해도 국무대신 또한 진지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아마 그는 더욱 더 아무렇지 않은 척, 능

글맞은 척 하고 싶었나보다. 그러나 그의 눈은 웃어도 그의 입은 차가웠다. 그 자신도 조금 당황한 것

처럼 보였다.

황제가 불쾌한 목소리로 경고하듯 그를 불렀다.

「크리스티.」

「우리는 이겨야 합니다. 저는 단지 승리를 위해서 폐하를 보필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제게 약속을

주셨나이다. 저는 충성을 맹세했나이다. -필요합니다, 이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황제는 잠시 그를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래도 이건 지나쳐. 예산안은 장난이 아냐. 실력 있는 전문보좌관을 붙이고, 키미누의 스케줄을 조

정해. 너무 타이트해. 그가 나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는- 우리를 돕는 사람일 뿐이지, 해나

가는 건 우리가 해야 해.」

황제가 국무대신에게 시선을 던졌다.

「당연하게 몰아붙이지 말란 말이야.」

전원이 조용해졌다. 황제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방을 빠져나왔다. 이 뒤에도 몇 개나 스케줄이 있었

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이렇게 나와도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를 쳐다보다 시선을 내렸다.

뒤에서 나프라 시녀장이 따라붙은 것을 알 수 있다. 황제의 전속 시종들이 종종걸음을 치며 앞뒤에서

황제와 보폭을 맞추고 있다.


「화났어요?」

내 말에 황제는 굳은 얼굴로 앞을 쳐다 보면서 대답했다.

「아니.-조금 불쾌할 뿐이야.」

「화난 거 맞잖아요.」

미모 때문인가? 아니 권력 때문인가? 전쟁광이라고 하더니만 그 박력 때문인가? 황제가 얼굴을 굳히면

깜짝 깜짝 놀라게 된다. 저런 얼굴로 자기 아이를 낳은 여자를 죽였을까?

아, 이상하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인한테 무척 잘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왜 죽

였을까? 단순히 자신이 원하지 않는 아이를 낳아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러고 보면, 그 아이는 어디 있

을까? 이 위험한 후궁에서 길을 잃고 있는 건 아닌지 갑자기 걱정이 됐다.

「화난 거 아니야.」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황제가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속상해?」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황제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부

드럽고 상냥한 - 저 미소가 ‘사랑스러운 것’을 볼 때의 미소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갑자기 당황하고 말

았다.

황제는 자신이 어떻게 나를 쳐다보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알든 모르든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굉장히 직선적이고 원하는 건 원한다 말할 수 있는, 권력자이니까. 하지만 나로서는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설 만큼 그 미소는 애틋했다.

저 남자는 나를 좋아해. 도망친 나를 잡고도 화를 내지조차 못했고, 약 먹고 궁을 뒤집어 놓은 내가 뻔

뻔스럽게 자고 있어도 질책한번 하지 않은 사람이야. - 하지만 저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나.

심장이 간질거렸다. 자꾸 마음이 두근거린다. 감정이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것 같다는 착각을 느낄 정

도였다.

「키미누?」

내가 한 걸음 물러서자 황제는 두 걸음 다가와 거리를 좁히고 나를 자세하게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거절당해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가 자존심 때문에 나에게 집착하는 줄 알았

다. 그 다음에는 하늘에서 떨어져서,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저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나……?

「이런, 안 그런다고 노력했는데. 내가 살기라도 비춘 건가? 왜 그러지? 키미누, 그대 괜찮나?」

당혹스러웠다. 한 걸음 더 물러서다가 발을 살짝 삐끗해서 미간을 좁혔더니 황제가 다시 다가와 내 앞

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황제의 시종들이 체할 것처럼 숨을 들이쉬는 걸 보고, 나도 당황해서 그

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신발을 벗기고 발목을 확인하고 발바닥을 확인하더니 나

를 안아 올렸다.

「다친 것 같지는 않지만…… 의원을 불러보지.」


뒷말은 내가 아니라 나프라 시녀장에게 말한 듯 했다. 놀란 시녀장이 그러나 침착하게 자신의 옆에 있

는 시녀누나에게 눈짓을 했고, 시녀누나가 종종걸음으로 걸어간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 시선을 돌렸더

니 황제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왜 그래요?」

「취향이야?」

「뭐가요?」

황제에게 안겨 둥실둥실 떠가는 게 익숙해지려 한다. 이미 이 체온이나 체향, 손의 느낌, 그리고 안긴

감각에는 익숙하다. -언제부터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을까? 나도 새어머니를 그렇게 쳐다보았을

까? 그녀도 사실은 내 마음을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재혼이야기를 내게 먼저 했던 것일까? 실은 내가

잡아주길 바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갑자기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서 웃음이 나왔다. 그랬을 리가 없잖아. 강간하고 ‘저 쪽이

꼬셨어’라고 하는 것 같구나. 자기 편할대로 생각하다니. 하지만, 황제의 시선은……

잘 못 본 것일지도.

다시 한번 보기위해 고개를 들었다.

……역시 잘못본거였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왜, 그런 얼굴이세요?」

「내 얼굴이 어떤데.」

「사람 하나 죽일 얼굴이요.」

그 말에 황제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한이 날 정도로 무서운 미소여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나 가지고 되겠어?」

황제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사람 목숨 하나도 많은 거거든, 이라고 반론하기에 분위

기가 안 좋다.

「그래서 저 시녀가 네 취향인가?」

어느 시녀?

아아아, 이제야 누군지 알겠다. 정말 개가 샐러드 먹는 소리 하고 있구나.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

았다. 나 때문에 질투하고 있다. 알면 알수록 괜찮은 사람이고, 다른 이 에게는 어떻든 여하간 나에게

는 다정한 사람이고- 나보다 아홉 살이나 형인데, 꽤 귀엽기도 하고.

나는 황제를 힘주어서 끌어안았다. 황제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웃었다.

「이봐요, 시오엔 형님. 난 최소한 나보다 10cm 는 작은 여자가 취향이에요.」

사심 없이 황제를 끌어안으며 웃어버렸는데, 나보다 10cm 는 큰 남자가 나를 보며 조금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도 않고 웃고 있었다. 그가 왜 행복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니, 알 수 없

어서 죄책감에 휩싸였다.

「다시 말해.」
무엇을?

「시오엔이라고 다시 해봐.」

「……시오엔.」

그는 정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환하게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은 더욱더 빛이 났다. 금발에 손가락

을 파묻고 끌어안고 싶은 것을 견디며, 나는 자신이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이후 나는 황제를 시오엔이라고 불렀다. 섹스를 할 때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는 했지만, 몇 번 없었

다. 언젠가 한 번 그는 내게 이름으로 부르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나는 가능하면 그렇게 부르려

애썼다. 황제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그는 나를 좋아했고, 그는 내게 잘해주었으며,

그는 나를 걱정했다. 나는 받은 것이 많았고,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게 키스도 섹스도 하지 않는 황제는 가끔 참지 못하는 것처럼 이마에 입술을 갖다댈 뿐이었다. 그는

다른 이에게 가지도 않았고, 나를 안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자유 시간을 내게 할애하였고, 자

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그가 하는 짓이라고는 나와 한 공간에 있는 정도였다. 그는 여위어가고 있었지만

행복해보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잘못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져버렸다.

죄책감과 시오엔에 대한 죄책감속에서, 내가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보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

었을지도 모른다.

「전하, 황비마마십니다.」

이 아름답지만 무식하게 넓은 미로 정원에서 황태자와 마주쳤을 때 나는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

다.

아이는 황제를 닮지 않았다. 금발도 금안도 없었다. 더욱이 황제의 미모도, 황제의 카리스마도 없었

다.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눈동자. 그 황제의 아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닮지 않은 외모였다.

당황했다. 황제의 아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당연하게 ‘금발과 금안, 아름다운 아이’를

생각하던 나는 그가 시오엔의 아들이라는 것에 의문을 느낄 정도였다.

「비 마마, 예의를!」

비서관이 낮게 질책해 와서 나는 남들이 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으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앳된 목소리

차갑게 날라든 것은.

「무식한 남자. 너 따위가 월인이라고?」

노골적인 적의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사내지 않은가! 아바마마의 취향은 고작 이런 것인가?」


-아니, 너네 아빠 취향은 더 최악인데. ‘사람으로 봐줘서 좋다’라는 시오엔의 말을 멍하니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비틀린 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 ‘사람으로 봐줘서 좋다’라는 요지로 줄일 수 있었던 시오

엔의 말은 내가 싸가지가 없다는 뜻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싸가지 없는 남자가 취향이야. - 라고는 그의 아들에게 입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말해줄 수 없지만.

「평범해. 지루해. 월인이라고?」

황태자가 고개를 바싹 쳐들었다. 그 눈에 빛나는 적의와 달리 작은 몸은 떨고 있었다. 무서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웃기지마. 전혀 신비롭지도, 전혀 장엄하지도 않아. 나는 너 같은 남자 인정하지 않아.」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인 것으로 모자라 어머니의 집안 전부를 멸했다. 나라면 바로 삐뚤어졌을 텐데,

황태자는 고고하고 턱을 들고 나를 쏘아보았다. 기품과 자존심. 보기 나쁘지 않았다.

「너 같은 천한 놈을 우리나라에서는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남창이라고 한다! 월인이라고? 월인이라

고?!」

「전하-!」

황태자의 시종들이 난리가 났다.

「전하, 키미누 황비십니다.」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폐하께서 총애하시는 분입니다.」

반대로 나의 시녀 누나들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들은

전부 흉흉한 살기를 뿜고 있었는데, 황태자의 시종들은 시녀 누나들의 분위기에 짓눌린 듯 보였다. 황

태자의 시종이, 내 시녀누나들보다 등급상이든 뭐든 아래인 것 같다.

엉뚱한 곳에서 날아온 돌이 아프기는 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아이는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

었고, 그 노여움은 옳았다. 나도 어릴 때 그런 분노를 터트린 적이 있었다.

그렇기는 한데……

나는 아이보다는 나이가 많아서 이 살벌함과 어색함이 더욱 걱정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나한테는 참 잘

하는 황제가 아이에게 박정하다는 이야기를 들은지라 더욱 걱정스러웠다. 화를 내봐야 꼬맹이에 불과하

다. ‘남창’이 뭘 하는 사람인지 알기나 할지 의심스러웠다. 일단 입을 열었다.

「황태자 폐하.」

순간 모두가 나를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왜, 왜? 당황스러워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이가 냉

혹한 목소리로 비웃었다.
「-전하다. 달에서는 예의범절도 안 가르치는 건가? 평민도 그 정도는 알아!」

아 어린 게 무지하게 꼬장꼬장하다. 그나저나 월인인 거 안 믿는다더니 아무래도 믿는 것 같다. 내 시

선을 올려다보던 아이가 「너 같은 거, 죽어버려!」라고 저주성 발언을 씹어뱉었다.

솔직히 말해서 황제 - 시오엔에게 짜증이 났다. 아이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이 나를 비난

하고 있었다. 아무리 어려도 그 남창을 원하는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은 알 텐데, 아이는 전적으

로 신뢰하는 듯한 눈을 가지고 ‘아바마마’라는 단어를 꺼내고 있었다. 애한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런

꼴로 만드나. 분명히 애정결핍일거야. 가능하면 내가 놀아주고 싶은데, 상대가 원치 않으니까 그래 줄

수도 없다. 시오엔이 좀 잘해주면 좋을 텐데. 여러 가지 생각이 났을 때 그 옆에서 황태자보다 조금 나

이가 있어 보이는 소년이 황태자에게 소리쳤다.

「전하,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는 황태자의 입을 막았다. 필사적인 얼굴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사이 보게 된 것은, 황태자보다 더한 적의였지만.

「마마, 송구하옵니다. 전하께서 지금 이성을 잃으셔서 그렇사옵니다. 결코 마마께……」

진짜 싫다. 매주 한번씩 하렘의 꽃 같은 누님들에게 갈굼받는 것도, 어린 아이들에게 미움받는 것도.

「아, 괜찮아요.」

꼬맹이에게 존댓말을 쓰는 게 어딘지 간지러웠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니 일단 말을 높이고

보자.

「으윽……」

소년이 황급히 황태자의 입에서 손을 떼 내었다. 물린 것 같다. 피가 나는 손을 움켜쥐고 있는 소년의

뺨을 후려치고는, 황태자가 다시 나를 노려보았다.

「너 같은 건……」

자신이 화가 났기 때문에 상대를 후려치는 게 당연하다는 얼굴이다. 급속도로 짜증이 올라왔다. 이 꼬

맹이 부모가 누구이기에 애를 이따위로 가르쳐놨어?! - 라고 생각하다 떠오르는 얼굴 때문에 아랫입술

을 깨물어야 했다.

최소한 아버지 쪽은 내가 알고 있지. 그리고 그 어머니 자리에 내가 설지도 모를 판국이다.

「나 같은 건, 뭐?」

린트인의 아이들이 생각난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눈은 똘망똘망하던 아이

들. ‘엄마에게 예쁜 옷을 사줄 거예요!’라던 아이들. 밝고 솔직하고 선량하던 그 아이들이 누리지 못하

는 많은 것들을 이 황태자는 누리고 있겠지.

황태자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고작 한걸음뿐이었지만, 무의식적으로 취한 행동

인 듯 수치심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도망칠 수도, 앞으로 걸을 수도 없는 아이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 우습고 허탈해져서 등을 돌렸다. 이

짓을 삼년이나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욕이 튀어나갈 것 같다.


-이런 이유로, 시오엔이 안절부절 못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이유로’라는 것이 되었냐면, 내가

심술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아니요, 폐하.」

「그럼 어디 아파?」

「아니요.」

굉장히 아름다운 얼굴의 남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 미모에 압도될 뻔도(압도되기에는 지나치게 상

황이 안 좋았지만) 했었다. 그런데 확실히 알고 나니 아무리 아름다워도 결국 사람이란 비슷하다. 그는

서류를 보는 척 하면서 나를 흘끗 흘끗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누구나 눈치보고, 화장실가고, 소심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조금 좋아졌

다.

「배고파?」

「아니요.」

「안 자? 너 잘 시간 지났어.」

「안 졸린데요? 먼저 주무세요.」

아이가 계속 떠올랐다. 저주성 발언, 그리고 절박하게 화를 내던 모습들이……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다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날 미워하고 있군.’이

라고 생각하고 넘겨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많은 부분들에서 그렇게 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어린

아이 특유의 그 얼굴이, 황제와는 거의 닮지 않은 앳된 외모가 생……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무데나 노려보면서 멍하니 생각 중이었는데 갑자기 몸이 넘어가는 바람에

소리도 못 지르고 입만 벌렸다. 몸이 넘어가서 보인 것은, 시오엔의 얼굴이었다.

「시오엔?」

「-화난 건 아니군.」

아- 잠시 심술부리던 중이라는 걸 잊어버렸다. 시선이 달라붙어 있다. 정말 예쁜 얼굴이구나. 아름답

다, 섹시하다. 이 얼굴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 걸까? 강하고 견고하고 아름답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

을 어필하거나 드러내지 않는다. 그 부분이 그를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그는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이

다. 그의 외모에 그의 권력이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손을 뻗어 뺨을 만져보았다. 매끄러운 감촉이 새삼스러웠다. 금색 눈동자에 담긴 내가 커져간다. 공기

가 조금, 차단된 기분이 들었다. 답답하다기보다는 안락하다고 느낀 순간.

황제의, 아니 시오엔의 입술이 닿았다.

시오엔이 화를 낸 이후 나의 스케줄은 상당 부분 조정되었다. 정확히는 조정하는 척 하면서 뒤로 밀어


버린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시녀장과 비서관이 ‘이 이하로는 안돼요!’라며 나에게 간절한 눈을 해서,

엉겁결에 ‘시오엔에게는 스케줄을 다 보고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해버렸다. 황제인 시오엔에게 보고가 올

라가는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비서관의 말에 따르면 ‘요즘은 볼 서류가 너무 많아서 비

마마 관련 서류까지 보실 수는 없다’라고 한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아니면 정말 울었을 거라고 엄살떠

는 비서관은 꽤 귀여웠다.

이렇게 하릴 없이 후원을 돌아다니는 것도 오랜만이다. 아름다운 후원. 도대체 누가 관리하는 것일까.

겨울에도 아름답기만 하다. 얼어붙은 호수도 눈으로 뒤덮인 나무들도 아름다운 곳. - 하지만 이 미로의

중심부에는 괴물이 있다.

트롤.

괜찮아. 아무도 가지 않았을 거야. - 그렇게 생각해봐도 자신이 공범자인 것 같은 기분을 누를 수가 없

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차가운 공기를 느끼면서 크게 심호흡을 했을 때였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스

쳐지나가는 시녀와 눈이 맞았다.

순간이었다.

그녀가 누구더라. 기억이 애매했다. 하지만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생각하는데 그녀

의 뒤로 남자 시종이 같이 뛰어오고 있었다. 다급한 얼굴,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황태자의

시녀와 시종이다. 다들 뛰쳐나오고 있었다.

「괴물이에요!」

울며 소리치는 시녀와 시종들의 무리들이 나를 스쳐 지나가는 동안 나는 번갈아보았다. 그들이 나오던

곳에서 나와야 할 두 아이를 기다렸지만 그들은 나오지 않았다.

맙소사. 황태자가 하렘에서 길을 잃은 걸까.

나는, 나는, 나는!

누군가를 불러와야 해, 라고 생각하다가 멈췄다. 그건 시녀나 시종들이 할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나는, 나는.

심장이 두근거린다. 눈이 따끔거렸다. 온 몸의 피가 평소보다 몇 배로 빨리 도는 것 같이 느껴졌다. 목

이 타는 듯한 갈증과 머리털이 솟을 것 같은 긴장감.

‘나는……’

새어머니가 생각났다.

‘나는……’

아버지도 생각났다.

‘나는……’

라로가 생각났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달렸다. 아무리 무서워도 아이가 괴물과 마주쳤다는데 돕지 않아서는 안 된다.

황제의 아이는 이제
겨우 여섯 살에 불과해. 도와야 한다. 그리고 달려갔을 때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엄청난 크기의 괴물이 아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갈색머리의 황태자였다. 그 옆에는 시녀나 시종들과는

달리 아이를 구하려고

했는지, 소년이 엎어진 채로 기어가고 있었다. 괴물을 향해서, 황태자를 구하기 위해서. 나는 달렸다.

달려서, 소년의 검을 들고 무작정 휘둘렀다.

「내려놔!! 내려놓으란 말이야!」

아이는 살려야 해. 아이는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아이를 살려야 했다. 움켜쥐고 들어올리던 아이를 놓

치고 트롤이 한 발짝 물러났다.

엄청난 크기였다. 빌어먹을, 이층높이는 되는 괴물이 서 있었다. 허공에 들리려다가 떨어진 황태자가

굴렀다.

「가!」

눈을 떼면 안돼, 절대로 눈을 떼서는 안돼. 트롤을 노려보는 채로 소리 질렀다. 내가 저 괴물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일분? 이분? 고작 해봐야 오 분이겠지. 온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무섭다. 눈

물이 날 것 같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

그래도 지켜야 해.

「너, 너 같은 것한테 도움을 받느니 차라리……!」

황태자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가! 망할 새끼야, 누가 널 구해주겠다고 이러는 줄 알아?! 옆에 있는 형 데리고 빨리 가!!」

복장이 터져서 외치니까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소년은 황태자에게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며 가는 것 같

았다. 너무 느리다.

저렇게 절뚝거려서는 소용이 없어. 그 순간, 트롤의 팔이 허공을 갈랐다.

안돼.

너무 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거야.

도저히 이길 수 없어!

트롤이 다가온다. 도망쳐야 하는 걸까? 아니면 맞서 싸워야 하는 걸까? 저 높이의 트롤과 어떻게 싸울

수 있는 걸까. 칼을 바르게 잡았다. 검도를 배운 적이 있다. 하지만 초보일 뿐이다. 그저 초단을 딴

게 다인 검도 실력으로 과연 저 커다란 놈을 이길 수 있을까.

다시 한번 팔이 와서 몸을 납작 엎드려 피하고 바로 옆으로 굴렀다.

트롤이 고개를 갸우뚱 움직이더니 이상한 소리를 냈다. 고릴라 같기도 하고, 오랑우탄 같기도 한 모습

에 소름이 끼쳤다.

못 이겨. 절대로 못 이겨.

그렇다면, 도망치는 거다.

숲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놈은 강했다. 빠르고, 점프력도 엄청났다. 키가 3m 는 되어 보이는 놈과 싸


우려면 숲은 안 될 것 같았다. 놈은 나무를 탈 수 있는 것으로 보였고, 그렇다면 정원으로 움직여야 했

다.

놈의 패턴은 팔을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팔만 휘둘렀는데 옆에 있는 조각을 들고 휘두르기 시

작하자 그 위협이란 말로 다 못할 정도였다. 소름이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다. 빌어먹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어렵다. 칼은 아까 던져버렸다. 나는 트롤의 곁

에 접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트롤은 엄청나게 빨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넝쿨나무들을 이어 만든 미로를 이용해서 숨는 것뿐이었다. 넝쿨 사이로 들어가 도

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움직이는 경로대로 트롤이 넝쿨들을 부서트린다. 이대로라면 이 아름다운 하렘의 정원은 벌판이 될

지도 모르겠다. 다리가 아파. 숨이 가빠. 더 이상은 도망칠 수 없다, 라고 생각했다. 아마 네 번째 넘

어진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약간의 시간의 텀이 있었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눈을 뜨려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끌어안고

굴렀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물체가 옆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굉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나도 모르

게 나를 안은 사람에게 파고들었다.

「괜찮아?」

나를 안고 있는 사람도 떨리고 있다.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시오엔

이 어떻게 했나보다. 저 엄청난 괴물을 시오엔이 어떻게 했나봐.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은 거야? 얼굴 좀 보여 봐. 어디 아프거나 한 곳은 없고? 키미누- 그대 정말 괜찮은 건

가?」

시오엔이 놀라서 나를 뒤집고 이리 저리 살펴보고 있다. 황금색 눈동자를 보는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이 갑자기 올라와

내 심장을 아프게 했다.

「괜찮아요. 옆구리가 결린 거 말고는 괜찮아요.」

다리도 좀 삔 것 같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살아있고, 황태자를 구했다. 모든 것은 괜찮았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지독한 악몽을 꿈꿨다. 신관들이 내 몸을 가늘고 예리한 칼들로 가지고 놀고, 결

정타로 트롤이 나를

짓밟았다. 심장이 터져 나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새벽, 나는 시오엔이 깨워주지 않고도 일어났다. 나는 그의 옆에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욕실에는 면도

를 하는 작은 칼이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고 나는 칼을 잡았다.

머리카락이 욕실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강해질 거야.
내가 황비가 아니었다면? 황제가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살았을까. 살 수 있었을까!

아니야, 나는 죽었을 것이다.

이미 신성지에서 죽은 목숨일 것이다. 그들은 내 피를 남김없이 마셔버렸을 거야. 트롤은 내 머리통을

부숴버렸을 것이다.

강해져야 한다.

강해져야 해.

머리카락이 눈물처럼 비처럼, 욕실 바닥에서 뒹굴었다.

7. 지켜줘 (1)

「푸하하하하하하!」

일어나서 나를 보자마자 시오엔은 침대를 구르며 웃어대었다. 그가 얼마나 웃어대는지 처음에는 얄밉다

가 나중에는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저러다 혹시 죽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그는 정말 오랫동안 웃었다. 웃음이 멈출만하면 나를 쳐다보고 다시 웃어대었다. 그가 너무 웃는 바람

에 일정이 늦어져 들어왔던 비서관은 거의 쓰러질 뻔 했고, 나프라 시녀장은 무시무시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강해지겠다는 결심 겸해서 자른 머리였는데 이토록 반향이 클 줄이야. 내가 보기에도 스포츠식

으로 깎은 머리는 나와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았다.

「맙소사. 그대, 내 품에서 빠져나가서 뭘 하는가 했더니만.」

시오엔은 겨우 웃음을 멈추고, 내게 다가와서 나를 안아 올렸다. 아이처럼 들어올리고 그는 다정하게

뺨을 비볐다.

「이런 깜찍한 짓을 하고 있었군.」

「깜찍이요?」

어이가 없어서 한 소리인데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깜찍.」

「끔찍한 소리 하지 마시고, 좀 놔주세요.」

「정말 귀엽군. 귀여워. 그대는 정말- 타인을 즐거워지게 만드는 비상한 재주가 있어.」

그리고 내 머리를 보는 순간 황제는 다시 나를 내려놓고 성대하게 웃었다. 그는 한참 만에 비서관의 열


렬한 재촉의 눈길을 받고 걸음을 옮기다가 내 뒤통수를 쳐다보고 다시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간신히 걸어 나가자 귀신보다 무서운 얼굴의 시녀장이 회심의 눈빛을 번뜩였다.

얼마나 많은 잔소리를 들었는지,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속이 쓰렸다. 말로 내가 잘못을 하면 얼마나

했다고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그래봐야 내 머리카락인걸. - 라고 조심스럽게 대거리를 해보았다가

정말 목숨이 날아가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잔소리는 계속되었다. 비서관과 시녀장이 번갈아가며 잔소리를 해대더니, 급기야는……

「푸하하하하…… 소, 송구……윽, 하옵……쿡쿡……마……」

시오엔과 같이 온 국무대신도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내게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계속 실패하면

서, 그저 웃고 있었다. 당황한 비서관이 국무대신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겨우 다잡

은 얼굴을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흐트러트리고 말았다.

한숨이 나왔다. 그 옆에서 아직도 쿡쿡거리는 황제를 보고 있자니 더더욱 그랬다.

「됐으니까, 먼저 웃으세요.」

「우하하하하하하하하」

국무대신이 웃느라 정신이 없다. 그 옆에서 황제가 부러운 얼굴을 하고 있기에

「시오엔도 웃어요.」

라고 해주었더니 그도 성대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녁을 먹고 황제와 둘만 남게 되자, 황제는 계속 내 머리를 만졌다. 처음에는 쳐내려고 했는데, 그가

정말로 행복하게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신기하다는 듯이 계속 만져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부탁하고 싶은 것도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건드릴 수 없었다. 빨리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의 눈동자를 볼수록, 그의 시선을 느낄수록, 그의 손이 주는 온기를 느낄수록, 자꾸 침묵하

게 된다. 그의 몸에서는 희미하게 어떤 향이 난다. 하지만, 그게 무슨 향기인지는 정말 모르겠다.

「그대는 정말 신선해.」

황제가 중얼거렸다. 나를 끌어안고 내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황제가 쿡쿡거렸다.

「여기는 잘못 잘랐군. 동그랗게, 자국이 생겼어.」

윽. 그거 땜통이라는 이야기잖아.

무언가가 맨살에 닿는다. 그것이 황제의 입술이라는 것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살한

어머니가 대륙 최고의

미인이었다더니, 정말 아름다운 황제의 옅은 색의 입술-이 닿은 것만으로도……

스톱!

닿은 것만으로도, 그래서, 그래서 뭐?!

「이런, 괜찮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내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황제도 같이 일어났다. 그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눈으로 살피고 있었

다. 그 절박한 눈길이……마음을 흔들었다. 왜 흔들렸는지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흔들렸다.


삼년 뒤에는 가야 해.

황제를 좋아하지 않아.

황제가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토록 흔들리고

있다.

「키미누?」

「민후에요.」

나는 황제를 쳐다보지 못했다. 황제가 다시 한번 그렇게 애틋한 눈을 하고 있다면, 발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달라져서, 내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데.

귓가에서 심장이 시끄럽게 울렸다. 왜 나는 그가 안타까워졌지? 그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다

는 것을 깨달았지? 그가 나를 구하는 순간 - 그는 나만을 쳐다보고 놀랐다. 그런 것 들을 나는 왜 지

금 깨닫고 있는 거지?

「미누.」

그는 절대로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내 이름을 제대로 듣지도 못한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이야. 여기에는 내 자리가 없다. 이 자리에 내가 선 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고.

「미누……?」

황제의 손이 내 얼굴을 끌어당겨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삼년 뒤에는 돌아가야 한다. 아무도 기다려주

지 않아도, 그 곳으로 가야 해. 여기서 무얼 하겠다는 거야. 여기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냔 말이

지.

그러나 삼년 뒤라는 건 길다. 삼년이라는 시간은 아주 길고, 웬만한 사랑 따위는 식다 못해 증발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괜찮지 않을까.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린다.

「미누로군. ‘키미누’라는 건……」

황제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상냥하게 미소지어보였다.

「풀네임인가.」

‘네’라는 한마디를 할 수 없었다. 목이 간질거렸다. 아니, 목이 잠긴 것 같기도 했다. 왠지 안절부절

못하게 되어 시선을 뗄 수가 없다. 황제의 입술이 보였다. 아까 내 머리에 닿았던, 수없이 키스했던,

그 아름다운 입술.

황제의 얼굴이 더 다가오는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키스인가, 라고 떠올리자마자 심장 소리가 더욱

커졌다. 황제가 다가오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지도 않는다. 침묵이 참기 힘들어져서 눈을 감은 채 고

개를 돌리는데 황제의 손이 아프게 나를 끌어당겼다.

급한 키스였다. 황제의 혀가 입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이 손목을 붙잡혔다.

심장이 지나치게 두근거렸다. 이건 흥분이 아니다. 나는 육체적인 흥분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이것은


그런 쾌락이 아니었다. 눈을 뜨자 황제의 감은 눈이 보였다. 긴 속눈썹이 예쁘다고 생각한 순간 황제의

손이 눈이 뜨였다.

혀가 핥아지면서, 눈을 마주쳤다.

황제의 눈이 조금 웃는 것 같았다. 아니,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했다. 눈은 사람의 감정을 보여주는 거

울이라던데, 그 거울은 너무나 자세한 거울이라서- 현미경으로 확대된 물체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었

다. 황제의 손이 올라와 내 눈을 감겼다. 어둠 속에서 황제의 입술과, 혀와, 숨소리에 갑자기 흥분되기

시작했다.

「아……」

입을 단속할 수도 없이 신음소리가 나갔다. 황제의 입술이 목덜미에서 느껴졌다. 그가 빨아들이는 것을

느끼면서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소리가 나갈 것 같다.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다. 웃기지 마, 겨우 이

정도로 이렇게 될 리가 없잖아. 스스로를 책망해보아도 갑자기 오른 흥분은 줄어들지 않았다.

「미누.」

황제가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묻는 간에 나는 대답할 수 없을 것이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갑자기 심장이 시리고 아팠다.

황제가 눈 위에서 손을 치우고 내 턱을 고정한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황제의 금색 눈에 비친 나는 너무 작아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미누.」

그는 나를 부르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잠시 침묵했던 그가 말했다.

「너는 못 가. 너는 절대로 달로 돌아갈 수 없어.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아.」

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내가 지금 돌아가고 싶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

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집이고 새어머니고 생각이 나지 않았었다. 내가 생각하는 건 그의 입술과, 그

의 숨결과 그리고 - 예전에 그와 나누었던 섹스였다.

그런데 내 얼굴은 지금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을까?

「망설이지 마라.」

황제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했다.

「어차피 너는 못가니까, 너는 내게 잡혀서 갈 수 없으니까, 망설일 필요 없어. 너는 지금, 당하고 있

는 거니까.」

그 다정함이 너무나 부드러워서, 그가 내 망설임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폭군에게, 너는 희생당하고 있을 뿐이야. 미누.」

왜 이토록 다정한 목소리로, 당신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당신은 그런 말

을 하고 있을까. 상냥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다정하게 키스하면서, 당신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나를 달래려는 듯한 황제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더 망설이지 않았다. 황제의 목에 팔을 감고 적극적으


로 키스를 되돌렸다. 황제가 알려준 방식대로, 황제에게 키스를 하면서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

을 떼자, 우리의 사이에는 타액의 실이 연결되어 있었다.

「시오엔, 저는요」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황제가 다시 키스했다. 자꾸 몸이 뒤로 밀렸다. 벽에 머리를 부딪칠지도 모

른다고 생각한 순간, 황제의 손이 뒤통수에서 느껴졌다. 그가 머리를 받쳐주고 있다.

뭔가 말해야 해.

그런데 할 말이 없다. 나는 돌아갈 것이다. 서로 목숨을 건 일이니 국무대신이 돌아가게 해줄 것이다.

못 돌아가도 괜찮다, 라고 생각하는 건 지금 이 순간일 뿐이야.

쾌락에 흔들리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마음에 흔들렸다. 차라리 쾌락을 줘. 엉망진창으로 흔들어줘.

여기서 더 생각하거나 더 황제를 보면 나는 정말 ‘못 가도 괜찮아’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럴 수는 없

으니까, 차라리……

황제는 내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는 찡그리듯 한번 웃고는 정말 나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너는 범해지고 있는 거야.」

몇 번이나, 그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라고 해야 한다. 이렇게 한쪽

의 호의를 받으면서 마치 자신은 동정으로 상대해준 것처럼 굴면 안돼. - 그렇게 생각해도 정작 할 말

이 없어서……그리고 쾌감에 머리가 잠겨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을 뜨자 한 낮이었다. 왜 이제야 눈을 뜬 건지 몰라서 잠시 생각해보자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황제

의 손에 잡힌 페니스, 황제는 내 말을 듣기도 싫은 것처럼 나를 몰아붙였다. 나는 몇 번이나 사정했다.

마치 그는 나를 먹어치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황제가 사정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그저 나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따듯한 시선, 그리

고 다정한 목소리.

-너는 범해지고 있는 거야.

동이 터오는 순간에도 나는 황제의 입안에 방사했다. 황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그는 황제잖아. 그는

그런 것을 받는 입장이어야 하지 않은가.- 능숙하게 내 것을 빨아 마셨다.

안돼, 그만 떠올리자.

그는 마시고 나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기쁜 얼굴로 내 입술을 만졌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

을 그 손가락으로 만졌다. 키스도, 아니 그 보다 더한 것들도 한 사이였는데.

주술처럼, 못 박히는 듯 했다. 키스하는 듯 했고, 그에게 분신을 빨리는 것 같기도 했고, 그의 성기를

핥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안돼, 그만 떠올리자구.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흔드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끌어안았다. 뒤에 있는 그 사람의 몸이 나체라는 것

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시오엔의 긴 금발 머리카락이 내 어깨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결심했다.

「시오엔.」

내 부름에 그가 귀를 핥으며 대답했다.

「응?」

「나, 검술이 배우고 싶어요.」

「……뭐?」

이 남자에게 폐 끼치지 말자.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폐는 끼치지 말자. 다정한 이 남자에게 도

움이 되자. - 그런 마음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시오엔은 웃었다.

「어제, 싫었어?」

그의 말에 당황했다. 당연히 싫지 않았다. 그도 알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얼굴을 돌려 표정을 살핀 시

오엔이 뺨에 키스하며 물었다.

「몸을 겹친 다음날 아침, 깨자마자 검을 가르쳐달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그, 그렇게 이야기가 되는 건가.

「아니면 아직 모자란 건가.」

시오엔의 목소리에 위험한 것이 깔린다. 그것이 색기라는 것을 아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아니……」

내 대답에 그의 얼굴에 짙게 드리워졌던 욕망이 한 순간에 흩어졌다.

「왜 검술을 배우고 싶은데? 또 도망치게?」

기묘하게 삐딱하다. 내가 그를 노려보는데, 그가 싱긋 웃었다. 아픈 것 같아 보이는 미소가 안타까워서

나도 모르게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다정하네.」

시오엔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이 애처로울 지경이었

다. 내가 이 남자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그는 이렇게 말할 법도 했다.

「나는 강해지고 싶을 뿐이에요. 도망치려는 것이 아냐.」

내 말에 황제가 눈을 떴다.

「왜?」

황제의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하긴, 트롤 때문도 그렇고, 신관 놈들 때문도 그렇고. 검술이 필요하다고 느낄 만은 하군.」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황제의 입으로 듣자니 뭔가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아니라고 하면

이유를 따로 대어야 할 것이고, 나는 지금 그 이유를 생각해낼 수 없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내 얼굴을 쳐다보다 내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술을 대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황태자의 무술사범에게 부탁해두지.」


곤란한 상황이다. 황태자는 왠지 모르겠지만, 나와 같이 수업을 듣겠다며 바득바득 우겨댄 모양이었다.

내 모든 것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서도 왜 같이 하자고 한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여하간 같이 하든

말든 내 할 일만 하면 되는 거니까.

오랜만의 운동은 숨이 찼다. ‘황비의 기품을 생각하라’고 시녀장이 뭐라 그래도 꼭 스트레칭과 윗몸일

으키기, 팔굽혀펴기 등등을 했었는데, 역시 모자랐던 모양이다. 게다가 검도와는 또 틀린 것이라서 더

욱 힘들었다.

「수련을 받으신 적이 있으셨던 모양이군요.」

무술 선생이 그런 말을 했다. 검을 쥐는 법부터 모든 것이 틀린데도 어떻게 알았을까.

「네.」

일단 대답을 하자 옆에서 황태자가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 열 살도 안 된

애새끼하고 이런 관계라니 영 불편하다.

「재능이 있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 정진하시면 좋은 결과가 있으실 겁니다.」

「할아범! 나는? 나는?!」

옆에서 시끄럽게 묻는 황태자에게 무술 선생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정히 듣고 싶으신 겝니까.」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황태자는 발끈한 얼굴로 무술 선생을 올려다보았지만, 나이 지극한 노인장은 코

웃음도 치지 않고 그 시선을 떨궈버렸다.

「뭐, 뭐야! 내가 저 남자보다 못하다는 거야!」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운동을 상당히 잘하는 편이다. 검도, 유도, 태권도 할 것 없이 전부 초단을

땄고, 어릴 때부터 이런

저런 운동을 한 끝에-본래 운동신경도 좋았던 편이라고 생각한다- 약하지 않다. 그런 열아홉 살의 내

가 여섯 살짜리에게

질 리가 없잖아. 그냥 따져 봐도 당연히 내가 낫지.

나뿐만 아니라 ‘티엔’이라고 불리는 황태자의 비서관이 될 소년도, 무술 선생도, 하다못해 황태자의 시

종들도 어이가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여섯 살은 용감했다.

「말을 해보란 말이다!」

아, 귀찮아.

일단 오늘치의 수련은 끝났기에 나를 선생에게 목례를 해보이고 등을 돌렸다. 뒤에서 황태자가 난리를

칠거라고 생각했다. 황태자는 내가 가는 시간만 되면 ‘황태자에게 예의를 안 갖춘다’는 둥 뭐라는 둥

시끄럽다. 서열과 촌수를 따지자면 그의 어머니뻘-빌어먹을-되는 나한테 그가 먼저 예의를 갖추는 게


옳은데도, 녀석은 끝도 없이 시비를 건다.

빨리 강해지고 싶다. 강해져서 그래서, 뭘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다. 나는 계속 황궁에 있어야 할 것

이고, 유일한 괴물은 황제가 죽여 버렸다. 그러니까 이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도, 강해지고 싶다. 하

루라도 빨리, 강해지고 싶다.

「너 말이야!」

얼레? 오늘은 새로운 패턴이다. 내가 갈 때면 늘 뒤에서 꿍시렁대던 황태자가 눈앞에 서 있다.

황제와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 하지만 입술은 비슷한 것 같다. 저 입술보다 황제의 입술 쪽이 더 예쁘

지만. 시오엔의 입술은 황태자의 입술보다 옅은 색이다. 그래서 야한 짓을 할 때만 붉어지는 것이 색정

적이다.

「아바마마가 총애하신다고 해서 우쭐거리지 마. 너 같은……」

「안 그럴게.」

또 길게 시작하려는 황태자의 말을 끊고 스쳐 지나가려는데 황태자의 손이 내 바지를 붙잡았다. 귀찮게

또 왜-라는 기분으로 밑을 내려다보았는데 황태자의 얼굴이 새빨갛다.

어디가 아픈 걸까?

시녀 누나들에게 들은 바로는, 황제는 황태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한다. 황태자의 생일이 되어도, 황태

자가 감기가 폐렴으로 발전해 생사가 흔들려도, 그는 보고를 한 신하에게 짜증을 내었다고 할 정도이

다. 그러다보니 황궁 내에서 황태자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고, 그는 조금……버려진 아이 같은 상황

이 되었다. 어딘가 내 상황과 비슷해서, 나는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아이와 이야기를 할 때는 눈높이를 맞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무릎을 꿇고 황태자와 시선을 맞췄

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었다.

「어디 아파?」

하지만 열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와 시선을 맞춘 황태자의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더니 아이

다운 목소리로 그가 나직하게 속삭여 물었다.

「아바마마는……」

아이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건강하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하고 같이 수업을 받겠다고 한 건가? 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해서? 아버

지한테 달려갈 수도 없는 이 가여운 아이가 순간 내 모습으로 보여서, 당황했다.

내가 대답을 못 하자 아이가 나를 쳐다본다. 그 얼굴에 쓰여 있는 것은 순수한 걱정이다. 아버지의 건

강에 대해서. 작은 얼굴이 염려로 가득 차기 전에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어, 건강하셔.」

그러자 아이는 서둘러 내 앞에서 벗어났다. 수치스러워 하는 얼굴에는 그래도 조금 온화한 빛이 있었

다. 그것이 안도라는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죄책감으로 몸둘 바를 모르게 되어버렸다. 맙


소사, 내가 저 조그마한 아이한테 이토록 잔인하게 굴었다니.

아이의 뒷모습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하지만 내 마음은 암흑 투성이였다. 오늘 시오엔이 오면 한 번

이야기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하면서 시녀누나들을 꼬드겨서 정보를 더 받아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피

지기면 백전백승. 옛 어른들의 말씀은 무조건 옳은 법이니까.

「그건 좀……그건, 정말 그만두시는 게 좋지 않으실까요?」

내 말에 비서관이 미간을 좁혔다.

「비 마마. 이번 삭발 사건만 하더라도 그냥 넘어가주신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알고 계십니까. 황제

폐하가 아니라 다른 분이셨으면 비 마마께서는 벌써 큰 일이 나셨을 겁니다.」

「그 전에 이미 탈궁하셨을 때부터 큰 일이 나셨겠죠.」

「그 전에 폐하를 거절하셨을 때부터……」

어디까지 갈 셈이야. 계속 ‘ 그 전에’를 말하는 비서관과 시녀장을 쳐다보자 둘이 동시에 헛기침을 했

다.

「시오엔은 자기 애인데, 왜 예뻐하지 않는 거죠? 처음에는 싫었어도, 다음에는 좋을 수도 있는 거

고.」

내 말에 비서관이 고개를 흔들었다.

「더 싫으시면 싫으셨지. 좋지는 않으실 걸요.」

비서관의 말에 시녀 누나들도 동조하는 분위기다. 왜일까. 더 들어보려 했지만 다들 입을 다물었다. 한

번 시녀 누나 중 한명이 이야기를 하려다가 흠칫 하고 놀라며 입을 다문 뒤로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

았다. 뭔가…… 내게 숨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뭘 숨기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얻은 바도 없이 시오엔을 기다렸다. 황태자와 시오엔, 둘을 전부 떠올리면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나

름대로 생각해보고 있었다. 일단 아무렇지도 않게 황태자에 관해서 이야기를 꺼내고. 그리고……

황제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침실 바깥쪽의 방 세 개를 거쳐서 여기까지 오게 되어있기 때문에 이

미 그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말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침대 가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지친 얼굴의 황제가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먼저 뛰어든 것 같기도 하다. 황제가 먼저 입술을 대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황제의 목에 매달

린 게 먼저인지, 황제가 내 허리를 안은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머리가 멍해졌다. 황제의 손이 내 분신을 쥐어짜내듯이 흔들고 있었고, 나는 황제의 어깨에 이를 박았

다. 그 순간 황제가 내 것을 강하게 쥐면서 신음 소리를 냈고 그래서 나는 그 옆에 다시 이를 박았다.

황제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황제의 입술을 빨았다. 황제는 신음하면서도 웃었다. 그는 정말 기쁜 것 같

았는데, 그 찌푸리면서 웃는 얼굴이 너무 좋아서 나는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 같았다.

내 쪽에서 키스했다. 황제의 혀가 도망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의 혀를 잡아챘다. 그의 치열을

모두 핥고 그의 타액을 먹고 그의 혀를 빨았다.
황제가 내 몸을 힘주어 안았다. 더욱 힘을 주었으면 좋겠다. 허리가 부러져도 좋으니까, 이것으로는 만

족할 수 없다.

「더……」

말이 말로서 나오지 않는다. 황제가 내 겨드랑이 두 팔을 넣고 아이를 들어올리듯이 나를 올렸다. 그래

서 나는 황제의 목에 팔을 감고 안겨있었다. 애가 탔다. 한계에 도달해있는 내 것을 황제의 가슴근처에

비비자 황제가 잠긴 목소리로 이를 갈았다.

「침대까지는 가만히.」

마음대로 안 된다고……! 항의하려고 했는데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황제의 손이 애널에 닿았다. 이상했

다. 닿는 순간, 도리어 더 하고 싶어졌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도리질했다.

「핥아 버릴 거야.」

황제의 협박에 눈을 질끈 감았다. 상상이 되자 거기가 간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창피할 것 같기는 했

지만 좋을 것 같기도 했다. 더러울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곧 사라졌다. 황제의 유려한 목선을 혀

로 덧그리며 나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상관없어요.」

황제가 으르렁거렸다.

「핥는 걸로 안 끝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분명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황제가 며칠 전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너는 범해지고 있는 거야.

아니, 나는 범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약하지 않고, 나는 누구에게도 책임 회피를 하고 싶지는

않다.

「상관없다고요.」

내 속삭임을 들은 황제가 침대에 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 초조하던 몸이 안

겨서 움찔거리는 것을 황제도 느꼈을 텐데, 그는 나를 가만히 안고 있었다. 그의 딱딱해진 분신이 느껴

졌는데도 그는 말없이 포옹을 풀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황제가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목소리에서는 욕정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담백한 기운

만이 느껴졌다.

「예?」

「무슨 일이기에 네가 이러는 거야.」

정말 좋은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다정한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황제가 다정한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말
할 수 없겠지만, 내게는 상냥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부드러워지고 있다. 발기한 채로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위를 중단하고 나를 끌어안는다.

「무슨 일이야?」

그 때 황태자가 생각났다. 갑자기 생각난 대로 지껄였다.

「아이가 싫어요?」

내 대답이 늦어져서 중간에 침묵의 텀이 생긴 동안 황제는 입술로 나를 더듬고 있었다. 황제의 입술이

귀를 건드렸다. 귓불을 빨아 당기면서 황제가 「응?」하고 다시 물었다.

「아이가 싫냐고요.」

「싫다, 좋다. - 그렇게 말하기는 어려운데.」

「그럼요?」

시녀장도 비서관도 하도 엄포를 놔서 그가 난리를 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황제는 담담하게

대답을 했다.

「관심 없어.」

황제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심장이 지끈거렸다. 그가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대상은 ‘아이’일 뿐이다. 알고 있지만……알고 있는데도, 마음이 아팠다.

내 아버지도, 자신과 관계하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을까.

「자신의 아이인데도?」

내 말에 황제가 귓가에서 한숨을 쉬었다. 긴 숨결이 귀 안으로 들어와 등이 오싹했다.

「마이를 말하는 건가?」

황태자의 아명을 언급하는 황제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가 목으로 입술을 내렸다.

「그 애가 또 그대에게 무슨 해코지를 한 거지?」

달콤한 애무에 빠져서 자꾸 머릿속도 눈앞도 흐릿했다. 몸이 뒤로 넘어가는데 황제의 손이 바쳐주었다.

그러나 황제는 느릿하게 내 몸을 눕혀서, 등이 침대에 닿도록 만들었다.

「미누. 그 아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건데?」

황제가 이빨을 세워 목젖을 살짝 물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급하게 튕겨 올랐다.

「아……무짓도.」

「그런데 왜 그 아이에게 관심이 있지?」

흔들리는 시야에 황제를 담아 봐도 보이는 것은 그 금발뿐이다. 반 곱슬의, 긴 금색 머리카락. 황제의

입술이 내려가는 것이 기뻐서 자꾸 숨이 가빠졌다. 헐떡이는 꼴이 부끄럽지 않았다.

「나요……」

아마도 내가 그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황제에게 불쌍해 보이고 싶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에

게도 불쌍해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실제로 나는 불쌍하지도 않았고. 내가 그 이야기를 한 것은 황제가

혹시라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그가 자신의 아이에 대해서 심한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잔혹한 황제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

도 듣고 싶지 않았다.

「나 말이죠, 어릴 때 부모님이 헤어졌는데……」

황제의 입술이 계속 내려가고 있다. 기대감에 하반신을 쳐들었다. 부끄럽지 않다. 머릿속이 자꾸 녹아

내리는 것 같은 기분에 멍해질 뿐, 창피하지 않았다.

「응……」

황제의 입술이 내 물건을 삼키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리고 그가 볼을 오목하게 해서 빨아들이기 시작

한 다음에야 숨을 쉬었다. 초조하고 애가 타서 시트를 긁었더니 황제가 손을 잡았다.

나보다 키도 크고 근육질인 남자인데, 손가락은 앙상하다. 그가 손을 세게 잡아서 나는 정작 손가락을

굽힐 수조차 없었다.

「둘 다 나를 맡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무척 슬펐어.」

이렇게 한 마디로 끝낼 수 있는 아픔은 아니지만. 나는 그가 나를 위해 가여워하길 원하는 것이 아니

다. 그가 나를 이해해주길 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아버지는 지금 슬퍼하고 있을까. 어머니는 내가 사라졌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들은 지금 어쩌고 있을

까.

한동안 말하지 못했다. 사정할 때까지는 제대로 된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없었다. 황제가 그렇게 두지도

않았고, 나도 급해서 허리를 흔들 뿐이었다. 황제의 입에 물건을 넣은 채 허리를 흔드는 게 미안하다고

생각해서 멈춘 순간 황제가 내 손을 놓고, 양손으로 내 허리를 잡아 강제로 흔들었다.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더……!

세상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배설감이 아니라, 무언가- 내가 황제에게 무언가 각인을 새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나직한 목소리를 내는 색정적인 입술에.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는데 황제가 내 몸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내 위에서 앉아서 윗옷을 벗었다.

들어오자마자 나와 이런 짓을 해서, 그는 예복 차림이었기에 벗을 옷도 많았다. 나는 제대로 입지도 못

하는 옷을 그는 손쉽게 벗어 던졌다.

「내 이름을 불러봐.」

갑자기 그가 그렇게 요구했다.

「왜요?」

「누구 앞에서 스트립을 하는 건 처음이라서.」

황제가 눈을 내리깔 때면, 긴 속눈썹 때문에 그림자가 진다. 애처로운 것 같기도 하고 잔인한 것 같기

도 한 그 얼굴이 사랑스럽다고 느껴져서 당혹스러웠다. 갑자기 이렇게 감정이 변하다니.

「이게 무슨 스트립이에요.」

내 말에 황제가 웃었다.

「그래, 그래. 여하간 이름을 불러줘. 네 입으로 부르는 내 이름이 듣고 싶거든.」


「……시오엔.」

왠지 민망해져서 작게 부른 이름에 황제가 웃으면서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그는 나와 눈

을 마주친 채로 옷을 벗어

던지고 나에게 키스했다. 잠시 저 입술에 내 물건이 들어갔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찝찝하지는

않았다.

「누가 너를 키운 건데?」

그도 나도 몇 번이나 사정해서, 나른해졌을 때였다. 졸려서 눈을 감고 있는데 시오엔이 나를 만지며 물

었다. 그가 유두를 만질 때마다 섬짓해진다. 이것이 공포보다는 쾌감에 가깝다는 것을 아는 내가 신음

을 흘릴 때마다 그는 웃음소리를 냈다.

「아버지요……」

「흐음.」

시오엔의 입술이 내 유두를 물고, 빨아들인다. 그의 이빨이 한 번 더 물더니 입술이 움직였다. 유두의

옆에 가서 그가 피부를 빨아들였다. 마크를 남기는 것이다. 평소보다 아픈데, 그것이 좋았다.

「아파?」

끝나고 시오엔이 물어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아직 욱씬거리는 피부를 할짝였다.

「일부러 아프게 했어.」

그리고 그는 내 온 몸에 그런 마크를 남겼다. 그는 남기면서 들었고, 나는 말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가 헤어졌다는 이야기. 그래서 내가 남겨졌고, 결국 아버지에게 맡겨졌다는 이야기. 혼자여서 외로웠던

이야기들. 두서없이 나오는 대로 지껄여댔다. 황제가 제대로 듣고 있는 건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마크가 더 아프게 남아서 듣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폐하도 아드님한테 좀 잘해주세요.」

장난스러운 내 말에 황제가 이를 세워 깨물었다. 아프고 놀라서 엎드리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려는데

뒤에서 황제가 제압했다.

그가 엉덩이를 깨물며 기분 나쁘다는 목소리로 협박했다.

「시오엔이라니까. -다시 한번 폐하라고 하면 뒤를 핥아버릴 거야.」

엉덩이에 마크를 남기는 그에게 말했다.

「핥아도 된다니까요.」

그 순간 황제의 입술을 움직였다. 그 입술이 움직이는 게 너무 생생해서 괜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

었다. 황제의 입술이 엉덩이에서 점점 중심부로 옮겨가고 있다. 그리고 할짝, 하고 애널이 핥아졌다.

소름끼칠 정도로 생경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허리가 떨려.」

황제가 등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말하고 그 곳에 혀를 대고 할짝였다. 집요하다고 할만한 애무였다.

등이 너무 떨려서, 자꾸 울음소리 같은 것이 입 밖으로 나가서 곤란할 지경이었다. 황제가 어떤 얼굴로


비문을 핥고 있는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합방식을 원했어.」

황제가 그렇게 말하고, 너무 핥아져서 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은 뒤에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 묻었다. 몸

안으로 무언가가 들어온다. 아프지는 않았다. 낯선 이물감이 두렵지도 않았다. ‘다음 생에도 이어지기

위해서’ 합방식을 치른다고 들었을 때 비웃었는데 지금, 나는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이어진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것 같이 느껴졌다.

「나는 거절했다. 나는 누구와도 합방식을 치루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전후로 움직이는 그 손가락에 맞춰서 허리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조

금 후에야 깨달았다.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눈앞에 엉덩이를 들이댄 채 흔들고 있는 것일 테니

까.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녀가 감히 내가 주지 않은 아이를 만들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어. 합방식을 치루지 않은 상태의

아이. 물론 많은 커플들이 합방식을 치루지 않고 결혼하고, 살아간다. 다음 생까지 이어지길 원한다는

건 웬만한 각오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왔다. 닫혀있는 것을 뚫고 들어오는 감각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고, 정말 미쳤다

고 느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것이 사랑스러울 리 없는데.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은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지. 그 정도로 황후자리가 욕심이

나는 것인지, 그 때는 실감도 하지 못했거든. 그녀는 그 아이로 신전놈들과 결탁했다.」

순간, 모든 쾌감이 사라졌다. 엎드린 채로 나를 고개를 돌렸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황제는 「왜, 할

기분이 사라지나.」라고 말하며 쓰게 웃었다. 그러나 곧 그도 손가락을 빼버렸고, 나는 황제를 끌어안

았다. 이 애처로운 마음을, 이 안타까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저 안아주는 수밖

에 없었다.

신전놈들이라면 내 몸을 이렇게 만든 라브만과 수하들이겠지. 그들은 황제의 어머니를 자살로 몬 장본인

이기도 하다. 황제의 여자는 나보다 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아이를 빌미로 그들과……

「울지 마라.」

그가 그렇게 속삭여서야 나는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이 아프다. 눈물을 멈추기 위해서 아무리

눈을 질끈 감았다 떠보아도 눈물은 계속 나왔다. 내가 불쌍해서인지 황제가 불쌍해서인지 알 수가 없

다. 나는 부모에게 짐밖에 안 되는 존재였고, 황제는 자신의 아이를 가긴 여자조차 그를 버렸다. 동병

상련이라고 하기에는 경우가 틀린데도- 너무 가여워서. 나는 괜찮아, 하지만 저 아름다운 남자가 웃으

면서 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무 가여워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울지 마.」

아무도 그를 개인적으로 사랑해주지는 않는 건가. 황제의 주위에는 그를 이용하거나 광기로 가득 차 그

를 원하는 사람밖에는 없는 건가.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가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황제가 나를 힘주어 안았다.


「그대를 사랑하고 있어. 그대는 내가 가여워서 울고 있는 거겠지만,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이런

이야기는 전부 옛날이야기

에 불과해. 울지 마. 그대를 울리고 싶지 않으면서도, 그대를 울리고 싶어진다. 그대가 마음 아픈 게

싫으면서도, 그대가 나를

위해 울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쁘니까. 그러니까, 울지 마.」

「이런 게 기뻐요?」

겨우 이런 게 기뻐? 당신을 위해 누군가가 울어준다는 사실이 기뻐? 가여워, 가여워서 정말 견딜 수가

없다. 나는 황제에게

안긴 채로 이를 악물었다. 대한민국의 건아라면 일생에 세 번밖에 울면 안 된다고 배워왔던 나인데도,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유브라데에서 키스는 청혼의 의미다.」

황제가 내 입술을 핥으며 속삭여 물었다.

「키스해도 될까?」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물이 떨어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젯밤의 일이 생각나서 죽어버리고 싶어졌다. 왜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친 거지?

눈살을 찌푸리며

앉았는데 황제가 내 뒤에서 내 머리카락을 말려주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타월로 머리카락을 비비던 황제가 싱긋 웃는 것이 예쁘다고 생각했

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그 모습이 멋져서,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예뻤던가. -뭐, 남자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아름다운 것에는 약한 편이라

서 그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게 된다. 황제의 손가락이 내 입술과 턱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멍하니 바

라보다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으흠.」

하는 소리 때문이었다. 누군가 왔다는 생각만이 멍하니 들고, 그에게서 시선을 떼야겠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황제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황제가 천천히 눈을 감고, 내가 좋아하는 속눈썹이 보이

고, 그의 입술이 다가오려는 찰나.

「으,흠흠흠흠!」

쥐어짜내는 헛기침이 들렸다. 웃음이 나와서 쿡, 웃었는데 황제가 「웃지 마.」라고 엄포를 주더니 내

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명령했다.

「꺼지거라.」
「폐하.」

그러나 상대는 아마 유브라데에서 유일하게 황제의 명령에 (눈치를 보면서) 개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일 것이다. 국무대신이 식어빠진 음성으로 황제를 불렀다.

「나는 꺼지라고 했다.」

「대신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내 얼굴에 미련이 남은 듯 만지작거리다가 일어섰다. 그는 가벼운 몸짓으로 일어나서 「나프

라.」라고 불렀다. 그러자 시녀장이 빠르고도 조용한 걸음으로 종종걸음쳐 다가와서는 황제의 앞에 공손

히 엎드렸다.

「미누를 보살펴라.」

황제는 그렇게 말하고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가 웃는다. 온 얼굴로, 감정이 물감이 되어 퍼지는 것

처럼 아름답게, 그가 웃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나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시녀장이 나직하게 물었다.

「비 마마, ‘미누’가 누굽니까.」

「아, 그게……저에요.」

「마마의 존명은……」

「제 이름은 키미누인데요. ‘키’가 성이고, ‘미누’가 이름이거든요.」

내 말에 시녀장이 눈을 깜빡였다.

「맙소사, 이름이 그토록 짧다니……역시 월인이시군요.」

어? 왜 그렇게 되는 거지. 시녀장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만져주면서 말했다.

「폐하께서는 워낙 강하신 무장이시라……그렇게 세게 머리카락을 비비시면, 머리카락이 상할 겁니다. 마

마, 폐하께 말씀 좀 올리셔요.」

빡빡이보다 조금 길 뿐인 머리카락이 상하면 얼마나 상한다고. 하지만 시녀장은 부드러운 손길로 마사지

하듯 머리를 만져주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전에 시녀장에게 화를 낸 적이 있다. 내 멋대로 화를 낸 거였는데, 너무나 지치고 힘들고- 아니, 이것

들은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나는 그녀가 내 어머니 같다고 내 멋대로 생각했고, 그녀의 태도가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어서 화가 났다. 정말 자기 멋대로 화를 내었던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지나버렸지만.

「아들이 있으세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것이었는데 나프라 시녀장이 방긋 웃었다.

「못 보셨어요?」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 정말로 자랑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도 기분 좋게 웃었다. 내 어머니

는 나를 자랑스러워할까? 그럴 리가 없다. 나는 그녀에게 지워지고 싶은 인생의 오점일 테니까.

내가 옷을 갖춰 입고 침실에서 나가자 비서관이 목례를 해보이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건넸다. 대부분


은 내가 몰라도 괜찮을 일들이었는데도, 처음 이 보고를 들을 때보다는 관여할 것들이 조금 있어진다.

이렇게 일이 늘어가는 것이구나. 새삼스러운 자각이 들었다.

「수르트 장군 각하를 못 보셨군요.」

당분간 머리카락이 길어질 때까지는 황비 일은 휴무라고 한다. 눈치 보면서 자주자주 잘라줘야 하지 않

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비서관이 싸늘하게 ‘황제 폐하께서 비 마마의 일을 충당하시는 겁니다.

’라고 하자 그런 마음은 사라졌다.

며칠 전부터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아니, 이미 마음이 어떤지는 알았는데 생각하고 싶지가 않은 것일지

도 모르겠다.

「뭐…… 좀, 놀라실 지도.」

비서관이 말하며 서류를 끄적이는 것을 보고 있는데 시녀 누나들이 갑자기 서로 눈치를 보며 웃더니 한

명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보러 가시지 않으실래요?」

사람 얼굴을 구경하러 가라고요?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비서관이 차갑게 노려보자 시녀 누나가 어깨를 움츠렸다.

「오늘은 폐하도 계시잖아요.」

그 말에 비서관이 「아아」라고 의미 없는 감탄사를 뱉더니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왜 쳐다보는 건지

모르겠어서 나도 같이 쳐다보았더니 그녀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최근 검술 수업은 잘 되가십니까?」

갑자기 그게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비서관이 일어섰다.

「모시겠습니다.」

왜 비서관이 나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일단, 비서관이 ‘보면 놀랄 것이다’라고 한

수르트 장군은 정말 놀라웠다. 나프라 시녀장하고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우아한 나프라 시녀장과는 달

리 완전 산도둑이 따로 없었다. 지단을 닮은 국무대신보다 열배는 더 마초스러웠다. 하긴, 나프라 시녀

장도 어딘가 모르게 조금 보수적인 면이 있었지. 그런 어머니 밑에서 저런 아들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 정도일 줄이야. 그런데 국무대신보다 늙어 보이는 저 아들

의 어머니인 시녀장. - 시녀장 나이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여자란, 진짜 대단해. 어떻게 자신의 나이를 속일 수가 있는 거지? 혹시 저 장군이라는 사람이 겉늙

은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내가 비서관을 돌아보자 비서관이 말했다.

「각하의 나이는 48 세이십니다.」

「그, 그럼- 시녀장님의 나이는……?」

모르는 게 좋을 텐데, 라는 얼굴로 비서관이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시녀장님의 나이는요.」

「올해 아마 실버 파티를 하실 겁니다.」


실버 파티라는 게 나이에요? 내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자 비서관이 싱긋 웃었다.

「65 세에 하시는 파티입니다.」

맙소사, 그 얼굴이 65 세? 나에겐 할머니뻘인데? 당황스러웠다. 너무 당황해서 입을 딱 벌리고 멍하니

있을 때 비서관이 나직하게 말했다.

「날을 잘 고른 모양입니다. 폐하와 수르트 장군이 결투를 할 모양입니다. 유브라데 최고의 볼거리일거

에요.」

누나처럼 상냥하게 비서관이 미소 지었다.

「무(武)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어떤 보화보다도 소중한 기억이 될 것입니다. 마마께서는 당연히 그

길을 가셔서는 안 되지만.」

비서관이 앞을 똑바로 보았다.

「보시는 정도는 괜찮겠지요.」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정면을 주시했다. 황제가 서 있었다. 상의를 벗고 그 빌어먹을 랩스커트와 바

지만 입은 황제가 나에게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입가만 씩 올라가는, 눈은 차가워져 있는 미소.

그것이 ‘도발’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수르트 장군의 턱수염이 있는 얼굴이 차가

워지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황제와 턱수염이 마주쳤다가 떨어진다. 검은 겨누고, 맞대고, 동시에 떨어진다. 어느 한쪽이 조금만 힘

이 없었더라도 무너질

것 같은 균형상태. 멋지다.

아슬아슬하게 칼이 움직인다. 황제의 칼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턱수염은 간발의 차이로 피했지만 머리

카락이 베어진 듯

땅으로 떨어졌다. 맙소사, 저거 진검인가보다!

「정말……폐하께서는 대단하십니다.」

수르트 장군이 저음으로 말한다. 그 말에 황제가 「관둬.」라고 미간을 찌푸렸다. 둘은 더 이상 칼을

맞댈 생각이 없어보였다. 겨우 오 분정도의 시간을 맞대더니 끝내버린 것이다.

뭐야 이게?

어이가 없어서 눈을 깜빡이는데 비서관이 웃으면서 속삭였다.

「연습을 하시다가 진짜로 결투하신 적이 있거든요. 두 분 다 무장이신지라, 하시다보니 정말로 자극받

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수르트 장군은 폐하의 가슴에 베인 상처를 만들었고, 폐하는 수르트 장군의 다리를 부러트리셨

죠.」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황제의 목에서 땀이 흘러내려 쇄골에 고였다. 햇살이 반짝여 황제의 몸을 비추
고 있다. 황제의 목,

쇄골, 그리고 유두. ……빌어먹을, 난 원래도 그다지 건전한 청소년은 아니었지만 이정도로 타락하진 않

았었다고!

「그 이후로는 진심이 될 것 같으시면 바로 멈추십니다. 그 때 황제폐하의 가슴에 난 상처 때문에 수르

트 장군의 9 족을 멸해야

한다고 귀족들이 계속 상서를 올렸었거든요.」

황제가 다가온다. 금색 눈이 반짝인다. 하얀 피부가 정말 예쁘다. 예쁜 누님에게 사로잡힌 청소년이 된

기분이다. 황제는 남자고,

근육질의 몸을 가졌고, 게다가 폭군에 전쟁광으로 유명한데도- 예쁘다. 내가 황제를 좋아한다면, 그건

분명히 미모에 넘어가서

일거야.

내가 황제를 좋아한다면……

「햇살 아래에서 보니 더 재미있군.」

황제가 밉살스럽게도 내 머리카락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못됐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마음은 두근거

렸다.

빌어먹을, 빠진 거야.

이 잔인한 남자에게 빠져서 어쩌겠다고. 삼년 뒤면 가야 하는데 어쩌려고 난 지금 이러는 거냐.

「수르트.」

황제의 부름에 장군이 무릎을 꿇는다. 그 절도 있는 자세에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유들유들한 모

대신과는 사뭇 틀린

느낌이다.

「하명 하시옵소서, 주군.」

주군? 주군? 그거 무협지에 나오는 말 아냐?

「나의 반려자다. 이름은 키미누.」

장군은 단 한번 나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무서워서 뒷걸음질 칠 뻔 했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가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이를 악물고 노려보자, 천천히 장군이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인자해보였고, 어딘가 시녀장의 모습이

보이는 듯도 했다.

「비 마마를 뵙사옵니다.」

「네……안녕하세요.」

그렇게 인사가 끝나자마자 황제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하지만 나는 장군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

었다. 무섭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로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나를 노려보았었다. 그것이 한 순간에

불과할지라도, 아무런 감정 없이 그런 얼굴이 나왔을 것 같지는 않았다.


「늙은이 취향이야?」

내가 자꾸 그 쪽을 흘끔 흘끔 쳐다보자 황제가 짓궂게 물었다.

「아뇨!」

내가 놀라서 소리 지르자 황제가 싱긋 웃었다.

「그래야지. 수르트를 상대하고 싶지는 않다고.」

황제의 몸에서 늘 나는 향기가 아니라 땀냄새가 느껴졌다. 어지러울 정도로 체향이 강해져 있어서, 한

숨이 나왔다. 이런 것이

사랑일까? 새 어머니를 떠올려본다. 그녀의 체향도 그녀의 습관도 특별히 기억이 남는 것이 없다. 늘

슬퍼 보이는 얼굴만이

기억에 있을 뿐이다.

쾌락은 아니야.

나에게 쾌락을 알려준 것도 황제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쾌락과 감정을 구별할 수 있다. 이건 쾌락이

아니다. 하지만, 이게

감정이라면 어떤 감정인 것인지 모르겠다.

「한판 더 뛰어야 하니까, 여기서 보고 있어. 같이 점심 먹자.」

황제는 내게 자신의 것으로 추정되는 의자를 권하고, 다시 검을 들었다. 그리고 황제와 수르트 장군은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기백으로 검을 맞대었다.

황제가 움직인다. 황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수르트 장군의 검을 피하느라 흙바닥을 뒹굴수록

그의 얼굴에는 기묘한

흥분만이 자리잡는다. 야성적인 잔인한 얼굴. 황제의 모든 시선을 잡아채는 것은 오로지 수르트 장군

뿐이다.

장군이 우세한 걸까.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나보다. 땀이 고이고 있다. 아직 날씨는 추운데 왠지 덥다고 느껴졌다. 위험

해-라고 생각한 순간,

황제가 날아올라서 (실제로는 뛰어오른 거겠지만.) 수르트 장군의 목을 칼로 찍고 그의 머리 위를 뛰

어넘었다.

「내가 이겼어, 수르트.」

황제가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해서 수르트 장군이 콧등을 찡그렸다. 진심으로 분해하는 얼굴이라는 것

을 깨닫자 왠지 웃음이

나왔다. 연세도 있으신 분이 애 같으시다.

「다음에는 이기시지 못하실 겁니다.」

「이길걸. 이제 슬슬 은퇴할 나이잖아, 수르트.」

황제가 자신의 검을 허리에 차고 등을 돌리며 웃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


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
그는 강하다.

굉장히 강한 사람일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수르트 장군이 칼을 맞대었을 때 보여주던 살의는 아까

나를 놀라게 만들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물러서지 않았고, 이겼다. 아마 황제는 굉장히 강한

사람일 것이다. 실제로

전쟁광이라느니 하면서 다 끝난 전쟁을 이기게 만든 사람이라고도 하고.

하지만 나는 그가 무척 예뻐서,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켜주고 싶다’

이 말도 안 되는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유레카’처럼 떠올랐다. 맙소사, 나는 정말 황제를 지켜주고 싶

은가보다.

그는 나보다 강하다. 그는 나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내가 그를 지켜주다니. 말로 안 되는 소리

다. 내가 무슨 수로

그를 지켜? 그런데도 지켜주고 싶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지켜주고 싶어. 강해져서 지켜주고 싶어. 당

신이 나를 지켜주지

않아도 되게 강해져서, 내가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

이거 진짜 사랑인가.

남자를? 황제를? 우리 아버지처럼 애를 버린 남자를? 나보다 키도 크고, 강한 이 사람을? 지켜주고 싶

다고? 내가?

스스로에게 말도 안 된다고 비난해보아도 소용없었다. 내 마음은 저 사람을 지켜주겠다고 결정하고 있었

다. 지켜주고 싶다고

소망하는 이 마음이 기가 막혔다.

이성과 마음이 반대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폐하.」

황제를 불렀는데 황제가 대답하지 않았다. 못 들은 건가 싶어서 다시 한번 「폐하.」라고 부르자 황제

가 내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시오엔.」

내 말에 황제가 「말해.」라고 해서 웃음이 나왔다. 진짜 폐하라는 소리가 듣기 싫은가보다.

「황태자 전하하고는 같이 식사 안하세요?」

「마마!!」

놀란 나머지 뒤에서 시녀장이 펄쩍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려서 놀랐는데 황제가 고개를 웃으며 시녀장을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왜요?」

「뭐가.」

「왜 시녀장님이 저러시는 건데요?」

황제는 곤란한 얼굴을 하고 나를 내려다보다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뭐, 됐어. 태자하고 밥을 먹을 생각은 없지만, 너라면 기분이 나쁘지 않아. 하지만 아무리

너라고 할지라도.」

황제는 가볍게 말했지만, 내용은 무거웠다.

「황태자에 대한 언급은 자제해주기 바란다. -부탁이야.」

‘부탁이야’라고 하는 목소리는 차가웠다. 사랑을 자각하자마자 밀쳐졌다는 기분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

다.

「비 마마! 황제 폐하 앞에서는 경칭을 붙이는 게 아닙니다!」

점심을 먹고 방으로 돌아오는데 비서관이 거품을 물었다. 비서관은 냉정하게 생긴 미인상인데 꽤 다혈질

이다. 귀엽다, 라고

생각하고 국무대신을 떠올리며 따라다닐 만 하다고 생각했다.

「황제폐하 앞에서는 누구를 지칭할 때도 경칭을 붙여서는 안 됩니다. 본래 폐하의 앞에서 선황 전하만

큼은 경칭을 붙입니다만

, 현 황제폐하께서는 드래곤의 수호를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유브라데의 지배자이시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황태자 전하’라니요!」

「그럼 황태자, 라고 그냥 말하란 말이에요?」

「아니요! 황태자 전하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하지 마세요.」

상당히 진지한 얼굴이다. 비서관은 늘 내가 하는 일을 걱정하고 잔소리하지만, 이렇게 강경한 입장으로

말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잠시 그 이쁜 누나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비서관도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요?」

「폐하께서 싫어하시니까요.」

「그건 나쁘잖아요.」

내 말에 비서관이 고개를 저었다.

「좋든지 나쁘든지 - 그 부분은 폐하께서 판단하실 분제입니다.」

「아이에게는 잘못이 없잖아요. 그 어머니가 뭘 하든 아이에게는……」


「저는.」

비서관이 단호하게 내 말을 끊었다.

「이런 비 마마가 좋습니다. 마마께오서는 상냥하신 분이세요. 제 걱정을, 린트인 아이들에게 글자를,

황제 폐하께도 진심으로

다정하신 분이라는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마. 그 일은, 황제 폐하의 권리이시자, 의무이

십니다. 비 마마께서는 그

상황을 모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비 마마께서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마마께서 아시는 것

과는 조금 다른 진실이

있습니다.」

비서관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한숨을 쉬며 나를 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마마께오서도 아시겠지만, 황궁은 친황제파와 신전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저나 대신님, 수르트 장군

님 등은 전부 친황제파인

셈이지요. 친황제파의 모든 사람들은 반쯤은……」

비서관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는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용납이 안 된다는 얼굴이었지만,

나를 보고 똑바로 말했다.

「반쯤은,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처형하시길 원했습니다.」

아이인데?

너무 뜻밖의 이야기를 들어서 마음이 차가워졌다. 왜? 아이잖아. 그 어머니가 잘못했다고는 해도, 일단

자기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한 여자에게 너무 지나친 것 아니었던가. 아이잖아. 아이라고. 걔는 아무 잘

못이 없잖아.

「그 아이는 잘못이 없잖아요.」

나도 모르게 이를 갈 듯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하지만 참을 수가 없다. 아이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잖

아. 그 아이는 그저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잖아. 아이에게는 너무 혹독해. 아이에게는!

「하지만 황태자 전하에게는……」

「그만.」

그 목소리는 국무대신의 것이었다. 국무대신이 내게 오는 길이었나 보다. 그는 터벅터벅 걸어서 데이비

드 비서관의 눈을 감겼다. 국무대신의 손바닥으로 가린 그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지는 것을 나는 아연

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아이에게는 잘못이 없다.

나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어.

「송구하옵니다만, 마마. 비서관과 함께 물러가겠사옵니다.」

「안돼요. ……저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겠습니다.」

내 말에 국무대신이 냉소를 던졌다.


「삼년 뒤에 달로 돌아가실 비 마마께서 듣기에는 너무 지저분한 이야기라 사료되옵니다. 이만, 물러가

옵니다.」

각오도 없으면서 듣지 말라는 국무대신의 비난이었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내 방을

나서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왜 나를 비난하고 있는 거야? 아니,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잘못이

없다. 사람들이 지나친

거야. 너무한 거라고.

비서관이 업무를 바꿔달라고 황제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황제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지만 나

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나는……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졌다. 뭐야,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분명히 내 방 침대

에 앉아있었다. 이

무식하도록 크고 숨 막히도록 사치스러운 방의 아주 작은 물건들도 보이지 않는다. 왜지? 갑자기 무서

워졌다.

「오랜만이군.」

그 목소리는 뒤에서 들려왔다. 소름끼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서자 내가 앉았던 곳

바로 뒤에 황제가

앉아있었다. 아니, 황제가 아니다. 그는 시오엔이 아니다.

골드 드래곤.

트롤의 심장을 맨손으로 부순 골드 드래곤이다.

「나를 거부하고 잘 지내는 것 같군.」

냉혹한 음성으로 말한 드래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갸웃갸웃. 아마 저 안 어울리

는 습관은 드래곤으로

서의 습성인지도 모르겠다.

「안색이 안 좋군. -나를 만나서 안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남이사.」

「요즘 시오엔 녀석과는 분위기 좋던데? 그 아들네미 일 때문에 이러나?」

이 작자 스토커냐?

-아니 잠깐. 그는 어떻게 이런 일을 알고 있는 걸까. 무슨 수로 아는 거지? 황궁은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고, 황궁에 골드
드래곤이 산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으며, 무엇보다.

잠깐.

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디지? 여기는 나의 꿈속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여기가 어디지?

갑자기 어둠이 몰려가고, 침대가 보였다. 그 옆의 협탁도, 아름다운 인공 폭포도 보였다. 매일같이 바

뀌는 수많은 꽃들도

화려한 커텐도(커튼도), 모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 더 강해졌네. 깨달음을 얻으라고 온 게 아니란 말이다.」

드래곤은 짜증을 내면서 내게 다가와 내 턱을 치켜 올렸다. 야오밍 보다 클지도 몰라. 목이 아프도록

쳐들어야 겨우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대는 나의 신부다.」

오랜만에 와서 한다는 소리는……헛소리였다. 목이 아프도록 고개를 쳐들었던 게 아깝다. 나는 신경질적

으로 그의 손을

쳐내려고 했지만 드래곤의 다른 손이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대는 나의 것이다. 시오엔 따위에게 마음을 흔들리지 마라.」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시오엔을 지켜줄 수 없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일에 참견

하지 말라는 식의

뉘앙스로 나를 밀쳐내었고, 그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연인’정도일 것이다.

그가 필요한 것은 ‘연인’이다. 그는 가족이나 배우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연인’을 원하는 것이다.

물론 ‘반려자’라는 것은

다음 생까지 끌고 갈 정도로 대단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전쟁을 치루고 있는 황제이고- 그에게 다

음 생까지 같이 갈

‘반려자’가 과연 중요한 존재일지 잘 모르겠다. 그에게는 현재가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드래곤이 또 흐려지려고 했다. 또 거부니 뭐니 하면서 이를 갈며 떨어지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드래곤

이 미간을 좁혔다.

그것만으로 흐려지려던 드래곤은 다시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내가 결정을 내리면, 그대가 거부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했지.」

드래곤이 씨익 웃었다.

「이것이, 운명이 정한 나의 신부란 말이지. 운명의 여신의 장기말이 되어도 재미있을 거라고만 생각했

는데, 설마 이토록

번민하게 될 줄은 진정 몰랐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 거다.」

「손 떼세요.」

「너는 남이 구애를 하는데 그 소리가 나와?」


드래곤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순간, 이성이 끊어졌다.

「이 새끼야, 당장 손 안 떼?!」

그 순간 드래곤이 놀라서 내게서 손을 거뒀다. 요 며칠간 시녀장도 나를 피하고, 비서관은 아예 대놓고

황제에게 업무를

바꿔달라고 했으며, 황제는 황제대로 스킨십에만 몰두하고, 국무대신은 나에게 비아냥거렸다.

「네 눈에는 내가 여자로 보이냐? 어? 어디서 신부타령이야? 그리고 너 드래곤이라며? 내가 너랑 사귀

면 우린 수간이야,

누굴 변태로 만들려고 이 지랄이야?」

듣고 있던 드래곤의 표정이 점차 미묘해지더니 그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는 건지 모르겠다. 미

친 듯이 화를 내려다가

갑자기 긴장이 완화되어 주저앉고 말았다. 드래곤은 계속 웃었다.

「아, 너 진짜 귀엽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한참을 웃다가 흐려졌다. 「이런, 이런.」하면서 그는 뭔가를 하려다가 나를 보

고 다시 웃어제끼느라

계속 흐려져갔다.

「너무 웃느라 컨트롤이 안 되네. 다음에 보자구. 그 때는 자세하……푸하하하하, 사라지는 김에 이야기

하는 건데 그대 그

헤어스타일 정말 웃겨. 알고 있나?」

그리고 흐려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 새끼가 지금 사람을 놀리나!

나는 가장 근처에 있던 꽃병을 집어던졌다. 그러나 상대는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우아하게 꽃병을 잡

았다. 아까와……뭔가

분위기가 틀린 것 같……

맙소사, 차가운 얼굴로 성큼성큼 들어서는 그는 오리지널 황제였다. 이런, 어쩌면 좋으냐. 당황한 얼굴

로 드래곤 이야기를

해야 할 지 말아야할지 한참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나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 머리카락을 비비면서 그가 말했다.

「머리카락만 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지.」

짜증이 났다. 좋냐? 나는 기분이 더럽다. 뭐라고 말하기 굉장히 어렵지만, 기분은 좋지 않아서 나는 황

제의 손을 쳐냈다.

그러자 황제가 한숨을 쉬면서 침대에 누워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들어오라는 싸인을

무시해줄 생각이었지만.

「마이- 그러니까 그대의 ‘황태자 전하’에 관해서 이야기해줄 테니까 이리 와. 제대로, 말해줄게.」
그 비아냥거리는 말투와 손짓이 기분 나빴지만, 호기심이 그것을 이겼다. 다들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

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나는 망설이다 결국 황제의 손바닥 옆에 앉고 말았다. 황제가 쿡쿡거리고 웃으며 나를 끌어

안았다.

「음……」

황제가 내 머리에 턱을 올려놓고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마이를 낳은 여자는, 전 국무대신의 딸이야. 그 국무대신의 집안은 4 대째 대귀족으로 집안사람들 반

은 관직에 등용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지. 나머지 반은, 집안을 돌보거나 신관직에 있었지. 그녀도 신관자격이 있는 사람이었고.

- 그녀가 신관놈들과

결탁하리라는 건 당연했어. 하지만 아이를 가질 줄은 몰랐지. 그 당시는 내가 지금보다 힘이 없을 때

였고, 신관놈들은

지껄여댔지. 황태자가 위대한 황제가 될 거라고. 황태자가 빨리 황제가 될 수록, 신은 유브라데를 용서

하게 될 것이라고.

신은 황태자를 선택했다고.」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황제가 빨리 죽어야 한다고. 그래야 황태자가 제위에 오를 수 있으니까.」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뭐- 그게 정말 계시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않지만……사람 마음이라는 건 말이야. 자기 뜻대로 되는 것

은 아니어서.

게다가 나는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나는 그를 끌어안았다. 정신 차렸을 때 나는 몇 번이나 속삭이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

몇 번이나 그렇게 속삭였다. 별로 연관이 없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그가 알아주길 바랐다. 그가 원하는

것은 ‘연인’일

뿐이든 뭐든 지금 그런 것들은 상관없었다. 나는 그가 알아주길 바랐다.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 당신이 필요 없다하더라도, 내가 지켜줄게.」

황제가 비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비웃지 않았다. 그는 내 가슴에 머리를 댄 채로 「정

말?」이라고 물었다.

그 목소리는 낮아서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았다.

「응, 정말로 지켜줄게.」

「그래.」

황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켜줄게, 라고 몇 번이나 말하는 동안 그는 가만히 듣고만 있


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잠들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맹세하듯이 몇 번이나 지켜줄게, 라고 말하는 동안 그는 조용히 잠들었

다.

삼년 뒤는 너무 멀어.

이미 봄이 다가왔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삼년 뒤는 너무 머니까- 괜찮아. 이건 그

렇게 무책임한 약속은

아니야.

황제의 머리를 끌어안고 나는 몇 번이나 그 황금색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지켜줄게, 그 말을 속으로

수백 번 되뇌이면서.

8. 가면무도회 (1)

‘사랑의 파티’라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단어의 닭살스러움으로 인해 사망할 뻔 했다. 겨우겨

우 몸을 추스르고 어이없이 비서관을 쳐다보자, 비서관이 민망한 듯한 얼굴을 했다. 황제에게 무슨 말

을 들었는지 비서관은 어느 날부터인가 다시 내 방에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첫 날 와서 새빨간

눈으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풀이 죽어 있었지만, 가면 갈수록 옛날의 그 비서관이 되어있었다.

그 증거로는.

「좋은 아침입니다, 비 마마.」

인사는 나에게 날리면서도 비서관의 온 몸을 훑는 느끼한 남자에게 쌀쌀맞은 저 태도가 있겠다. 최근

국무대신이 나에게 호의가 아닌 적의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된 뒤로 나는 그에게 꽤 밉

살스럽게 굴고 있었다.

예를 들면.

「레니 데이비드 비서관. 허락한다. 미리 말해도 좋아.」

라고 내가 말하자 비서관 누나는 아주 쌀쌀맞은 얼굴로 국무대신에게 「바쁩니다.」라고 뱉어버렸다. 국

무대신이 나에게

「최소한 말이라도 걸게 해주세요!」라고 항의하는 걸 가볍게 씹어버렸다.

「정말 너무 하시네.」

국무대신이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에 앉더니 비서관을 보면서 머리카락을 지분거렸다. 비서관이 짜증난다
는 얼굴로 고개를

홱 돌리는 걸 보자 마음이 시원해졌다.

「치근덕댈 거면 다른데 가서 해주세요.」

내 말에 국무대신이 울적한 얼굴로 나를 불쌍하게 쳐다봤다.

「제발 좀 봐주세요. 사랑의 파티에 비 마마도 가실 거잖아요.」

윽. 마침 그 파티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다. 내 눈짓에 국무대신이 남자답게 웃으며 비서관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비서관은 냉정무비하게도 ‘미안 물러가는 것을 허락해주시옵소서, 비 마마.’라고 말하고 내가 뭐라 하

기도 전에 나가버렸다.

어지간히 싫었나보다.

「앗, 저도 물러가옵니다. 비 마마.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시옵소서.」

마지막 말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평소에 비서관의 ‘바쁩니다’ 한마디면 끝나던 국무대신이 왠지

적극적이다. 사랑의

파티에 참석해야 한다. - 라고만 듣고 나머지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한 나는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파티 이름이 졸라 닭살이다.

’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우리는 뭘로 할까?」

최근 황제와 몸을 겹치고 나면, 황제와 같이 욕조에 들어가게 된다. 욕조라고 해도 거의 수영장인 그

곳은, 몸을 아늑하게

눕힐 수 있도록 의자처럼 되어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내 어깨까지 물이 닿았다.

의자위에서 황제에게 기대었다. 황제는 내 뒤에서 나를 안고 목을 지분거리면서 속삭이고 있었다.

「뭘, 뭘로 해요?」

「사랑의 파티 때, 우리는 신호를 뭘로 할까.」

이게 뭔 소리래.

알고 보니 사랑의 파티라는 것은 가면무도회였다. 그……영화에서나 보던 그 가면무도회. 배트맨 가면 같

은 걸로 가리고

춤추는 그거 말인가. 그런데서 무슨 신호씩이나 정하는가 싶었지만, 이게 알고 보니 서바이벌 파티에

가까웠던 것이다.

사랑의 파티. 일명 서바이벌 파티. 황제고 국무대신이고 없는, 가면 쓰고 대거리하는 파티에 가까운 이

파티는 매년 푸른

새싹의 달(3 월인 듯) 첫 날밤에 시작한다. 커플은 자신의 정절과 상대를 지키기 위해서, 솔로는 인재

를 낚기 위해서, 심사

더러운 놈들은 커플을 찢어놓기 위해서, 각자의 야망(?)을 가지고 하룻밤 술래잡기가 펼쳐지는 것이
다. 사실 이 파티는

유브라데의 수호자인 골드 드래곤의 발정기를 축하(남의 발정기를 왜 축하하냔 말이다)하는 뜻으로 생긴

파티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변질되었는지는 당사자인 골드 드래곤도 모를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혼례식을 한다고 했다가 취소했으므로- 나를 보기 위해 드와나 대륙의 온 왕족들이

사랑의 파티에 예약을

했다고 한다. 이번 파티는 사상 최악의 파티(규모로는 사상 최고)가 될 거라고 황제가 짜증스러운 얼

굴로 말했다.

「가지 말죠?」

내 말에 그럴 수는 없다고 한다. 파티의 시작도 파티의 끝도 황제가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간에

빠져나갈 수는 있어도

앞과 뒤에는 반드시 참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황제 자리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

각이 든다.

「다들 너를 노릴 거야. 미리 정해두자고.」

황제는 무척 진지해서,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 같았다. 나는 그저 웃고 말았는데 그렇게 웃고만 있

을 일이 절대 아니었다.

「웃을 일이 아니세요.」

비서관이 따끔한 얼굴로 충고했다.

「그 파티는 정말, 저질이에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늘 저질스럽게 간다니까요. 미리미리 싸인을 생각해

두셔야 해요.」

「그래서 비서관님은 뭘로 정했는데요?」

내 말에 비서관이 「정하다뇨?」라고 다시 물었다.

「국무대신님하고 싸인 정하셨어요?」

「아니요. 제가 왜 국무대신하고 싸인을 정해요! 비 마마, 전 솔로예요.」

잘도 그런 파티에서 국무대신이 비서관을 혼자 두겠다. 최근 좀 생각해보았는데, 국무대신이 나를 싫어

하는 이유 중에는 이 아리따운 비서관 누나도 한몫하는 것 같다. 황제도 좀 그런 편이지만, 그 국무대

신은 이 비서관 누나의 곁에 누가 있든 싫어하는 것 같다.

여하간 비서관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죽어나는 건 국무대신일 것이다. 힘들겠는걸.

시녀장과 눈이 마주치자 시녀장이 쓰게 웃었다. 아마도 저 괴물 같은 동안의 아주머니도 나와 같은 생

각을 하고 계셨나보다.

은근히 국무대신은 거슬리는 바가 많다. 나를 왜 싫어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요즘 그의 내가

거슬린다는 듯한 태도는 선을 넘어서고 있는 기분이었다.

뭐, 약점도 잡고 있겠다. - 타협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는 여기 와서 처음으로 ‘황비’로서 국무대신을


호출했다.

「요즘,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웃으면서 말하자 국무대신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굳어진다. 둘만 있는 것이 싫은지 그는 나에게 용건을

빨리 말하라는 듯한 재촉의 시선을 보냈다.

「사랑의 파티라는 거, 비서관도 참여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마마.」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다시 한번, 아까와 똑같은 말투로 말하자 국무대신이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천천히 펴졌다. 그 얼굴은

능글맞지도 진지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주 흥미롭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떤 싸인을 원하세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국무대신의 흥미롭다는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저와 데이비드 비서관이 싸인을 정하도록 하지요. 그 싸인을 보고 대신님은 비서관을 데려가면 되는

거잖아요.」

「반대급부를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관대한 자비를 부탁드립니다.」

국무대신은 잘도 그렇게 지껄이면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팔목에 있는 상처가 보인다. 나에게도 이

어져있는 저 상처는 황제의 측근인 그와 나의 계약을 증명한다.

「빚으로 달아주세요.」

내 말에 국무대신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나는 씩 웃었다. 가능한 개구쟁이처럼 보이는 미소를 짓기 위

해 노력했다.

「어떤 싸인이 필요하세요?」

국무대신은 갑자기 호탕하게 웃어대었다. 그리고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굉장히 정

중한 자세라서, 나는 당황했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지켜만 보았다. 국무대신이 고개를 들고 나를 올

려다보았다.

「마마께 충성하겠습니다. - 저는, 마마를 황후로 추대할 예정입니다.」

이게 또 무슨 개뼈다귀 굴러가는 소리야? 내가 눈을 깜빡이면서 입을 딱 벌려도, 국무대신은 조금도 주

저함이 없이 말했다.

「저는 마마를 의심하진 않았사옵니다만, 여러 가지로 마마께오서 3 년 뒤에 - 이제는 2 년 반입니다만-

돌아가시는 게 낫다고 생각했사옵니다. 폐하의 문제도 있고 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마마, 제 생각보다

훨씬 잘해주시고 계시옵니다. 황비 마마로서 마마가 보여주신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사옵니다. 올해 오월

부터 열리는 총 회의에서, 저는 마마를 황후로서 추대 건의를 할 예정입니다.」

「말도 안……!」

황비로서 쪽팔리는 것만으로도 가끔 죽어버리고 싶은데 누굴 황후로 추대해?! 내가 소리 지르려는데 국

무대신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
「폐하께서 4 월생이라는 걸 알고 계십니까? 폐하는 곧 스물여덟 살이 되십니다. 서른이 다 되어 가시는

데 후사가 없으십니다.

그러니 이번 총 회의에서는 황후 추대로 인해 난리가 날겁니다. 마마, 마마는 폐하에게 아주 조금의 연

정도 없으십니까? 그것이

동정이든, 연민이든, 아주 약간의 마음도 없으십니까?」

국무대신이 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요. 마마께오서는 어리신 데에 비하여 포커페이스가 능숙하십니다만, 그래도 사랑에 빠

지면 사람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삼년 뒤에도 달로 돌아가시길 원하신다면, 잡지 않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 폐하를 제

가 한번은 막아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마. 지금 당장은 어떠십니까? 다른 이가 황후마마가 되시고, 그 분이 마마의 상전

이 되셔서 명령하시고,

황제 폐하를 그 분과 나눠가지신다는 것에 정말 아무런 불만이 없으신 겁니까?」

나눠 가져?

불쾌감이 머리털 끝까지 내달려, 온 몸의 털이 쭈뼛 솟는 것 같았다. 나눠 가져? 누굴 나눠 가져?

그 남자는 내 것이다.

삼년간은 온전히 내 것이다. 당연히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못해도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삼년 안에 그 남자가 나에게 질릴지도 모르지만! - 솔직히 진지하게 이 가능성을 생각

해보지는 않았다.

「황후 마마로 추대되시면, 비 마마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지실겁니다. 역사에도 폐하를 가지신 이가 누

군지 똑똑히 쓰여지겠지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테고, 특히 남자들은 더욱 그렇다. 자신의 연인이 다른 사람 것이 되는 꼴을

보는 것은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나도 결국 남자라서, 그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 간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순간 눈이 뒤집힐 뻔 했다.

「생각 좀……해볼게요.」

황후가 된다. 아마 삼년 뒤에 돌아가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는다’고 선택할

수는 없다. 그 남자가 나를 언제까지 좋아할 것이며, 나는 언제까지 그 남자에게 빠져있을 것이며, 이

위험한 황비 자리를 언제까지 이어갈 것이며- 저 멀리 있는 나의 친구들, 나의 자리, 그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여기에 있을 수는 없잖아.

혼란스러워져서 국무대신을 외면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국무대신이 갑자기 뭘 내밀었다. 뭔가, 이러고 봤

더니 붉은 보석으로 된 귀걸이였다.

의중을 알 수 없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데이비드에게 꼭 달라고 좀 해주십시오.」


아……

맞다. 황후 소리가 나오는 바람에 잊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국무대신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뭐, 손해 보는 것도 아니니 좀 놀아난다고 해도 괜찮기는 하지만. 내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국무대신이 강조했다.

「꼭입니다, 꼭.」

「네네.」

아침부터 다들 분주했다. 나는 내가 황비자리에 있어서 유난히 치장이 심한 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오산이었다. 내 옆에 앉아있는 황제도 귀로는 보고를 들으면서 치장을 해야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것저것 바르고 달고 난리여서 보면서 질려버렸다.

「아무래도 남자니까 더 치장하는 거지.」

‘황제고 남자인데 그렇게 치장해야 하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황제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어째

서 남자인데 더 치장하게 되는 게 당연한건지 몰라서 내가 가만히 있자, 황제가 말했다.

「구애는 수컷이 하는 거잖아.」

남자도 아니고 ‘수컷’?

「달은 안 그런가보지?」

「아, 주로 여자들이 더 꾸미는데……」

「뭐 여자들이 꾸미는 건 당연한거지. 그녀들은 아름답고, 또 아름다워질 권리가 있으니까. 하지만 파

티에서만큼은 남자들에게 치장은 의무가 된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대는 그런 거 몰라도 좋아. 그대가 어떤 모습이든 난 좋으니까.」

너도 그렇게 꾸미는 거보다는 웃통 벗고 검을 드는 게 더 멋있는데. 황제는 그런 거 몰라도 좋다고 했

지만 내 시녀 누나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가 보다. 귀에 뭘 달고 머리를 건드리고 난리가 났다. 황제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나가기 직전 내게 얼굴을 들이댔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키스할 건가?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내게 키스하지 않고, 내 목덜미로 다

가와 내 목덜미를 물었다.

「아파!」

진짜 아팠다. 몸부림쳐도 그는 나를 소파에 몰아붙이고 물고선 빨아들였다. 일단 무는 것을 멈추자 아


릿하기는 해도 참을 수 있을 정도여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홀에서 보자.」

내가 아연해져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황제는 내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대고는 나가버렸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창피한 것보다 어이가 없어서 욱신거리는 목을 손으로 눌렀는데 시녀누나들이 동시에 긴 숨을 뱉었다.

「대……대단하시네요.」

「우리 폐하가 저러실 줄은 정말 몰랐는데.」

뭐가요?

내가 시녀 누나들을 쳐다보자 시녀 누나들도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니 그녀들은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라고 말하며 나를 약 올렸다. 황제가 나를 물어버린 거랑 황제가 대단하거가 무슨 상관 관계인거야?

그나저나 이거 은근히 아프다. 인상을 쓰면서 나오는데 기다리고 있던 비서관이 내 얼굴에서 시선이 점

점 밑으로 가더니 내

목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 이건……」

「폐하께서 정말 마음 단단히 드셨네요.」

비서관이 혀를 내누르며 말해서 신기했다.

「어? 시오엔이 했는지 어떻게 아세요?」

그 말에 비서관도 싱긋 웃었다.

「설마하니, 비 마마께 위해를 가할 자가 폐하밖에 더 계시겠습니까?」

뭡니까, 이 분위기.

웃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어간다. 다들 싱글 싱글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뭐야, 이거.

그러는 사이 역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평소와는 사뭇 다른 광택의 국무대신이 들어왔다. 그도 나에게

인사를 하다 말고 내 목덜미를 쳐다보기에 왠지 수치스러워서 손바닥으로 가렸지만 이미 늦었다.

「이야, 우리 폐하께서는 열렬도 하시지.」

국무대신이 빈정거렸다. 나를 놀릴 꺼리가 생겨서 기쁜 것처럼. 그리고 그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시

녀 누나들 중에서도 유난히 차갑고 무서운 누나가 정곡을 찔러주었다.

「부러우신가보네요.」

얼굴은 여전히 상냥하다. 하지만 눈은 개미 눈물만큼도 웃고 있지 않다.

시녀 누나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봄바람 같은 미소와 시베리아 냉풍의 눈빛으로 이어지는 악랄한 공습

이었다.

「대신님께서도 빨리 연인이 생기셔야지요.」


「그러고 보니 오늘의 파티에서 생기시면 되겠네요.」

「일주일전에는 시녀 샤리나와 밤을 지새셨다면서요?」

불쌍하다. 국무대신은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서 비서관의 눈치를 보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뭐 남자로서 불쌍한 것은 불쌍한 거고.

「아멜리아는 어쩌고?」

걸어 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 대한민국 남자로서 나도 미소지어보였다. 그 순간, 비서관이 고개를 홱 돌

려서 국무대신을 쳐다보았다. 시녀 누나들도 웃는 얼굴이 사라지고 노골적으로 국무대신을 노려보고 있

었다. 시녀장조차 한심하다는 얼굴로 경멸의 시선을 보내자, 국무대신이 「아니, 그게 아니고……」라고

뭐라 변명하려 했다.

「아멜리아면, 그 아멜리아?」

비서관이 입가를 한쪽으로만 올렸다. 충격이다. 비서관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가 있구나.

「아니, 내 말 좀 들어봐.」

국무대신이 당황한 얼굴로 비서관을 잡았지만 비서관은 냉혹하게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 후, 비서관은 폭풍처럼 나에게 할 일들을 보고하고(그런 것을 보고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좀 제쳐두

고) 가버렸다. 그 뒤에서 국무대신은 입을 벙긋 벙긋 하며 뭔가를 시도해보려고 했지만 화가 난 미인의

박력이라는 건 남자로서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기 때문에, 그는 단 한마디도 붙여보지 못했다.

「그 이름은 도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예?!」

비서관이 나가자마자 국무대신이 나를 붙잡고 한탄하듯 절규했지만 내 방에는 다른 여성들이 있었는지라

……

국무대신이 나를 붙잡으려는 순간, 마치 영화의 느린 화면처럼 내가 뒤로 빠졌다. 실제로는 시녀 누나

들이 나를 잡고 뒤로 뺀 거였지만, 순간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이 빠진 국무대신이 나를 올려

다보는데 시녀장이 중간에 서서 그에게 말했다.

「니타우 라 크리스티 국무대신 각하.」

시녀장이 저렇게 풀네임을 부르니까 압도되는 부분이 있었다. 죄인이 아닌 나도 이럴진대 당사자인 국무

대신은 얼굴이 구겨지다시피 했다.

「황비 마마는 매우 소중하신 분입니다.」

시녀장의 말은 엄숙했다.

「저는, 비 마마를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벌레는 꺼지라는 뜻이었다. 국무대신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틀린 소리는 하지 않

았다. 그는 분명히 내가 약을 먹고 잠들었을 당시 ‘아멜리아’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국무대신이 울상

이 되어서 나가는 것을 보자 왠지 불쌍해졌다.

「아멜리아?」
황제가 그 이름을 듣자마자 「정신 못차렸군.」이라고 말하며 국무대신을 노려보았다. 다들 진저리치며

싫어하는 이 이름이 궁금해져서 황제에게 물었더니 황제는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황제가 나를 살피면서 협박했다.

「바람피우면 죽여 버리겠다.」

너야말로 조심해라. - 그렇게는 말할 수 없다. 일단 좋아한다는 말도 해야 할지 어쩔지 잘 모르겠는 상

황이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가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앞줄에 시뻘건 여자가 아멜리아다.」

그게 설명이냐. 나는 그를 한번 쏘아보고 앞줄을 쳐다보았는데 정말 시뻘건 여자가 있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 피로 범벅이 된 것 같은 드레스. 붉은 입술. 정말 새빨간 여자였다.

「유브라데의 창녀, 아멜리아 라 린트인이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창녀’라는 단어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그녀가 정말로

몸을 판다 할지라도 그런 말을 쓰는 것은 옳지 않아. 그런 말로 누군가를 소개하는 건 정말 비열한 일

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정말로 창녀야. 그대는 다정한 사람이라 이런 것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동정의 여지

가 없어.」

「아무리 그래도 ‘창녀’라는 말은……」

「창녀에게 미안할 정도로, 그녀는 쓰레기야. 저 더러운 유혹에 넘어간다면, 정말 가만두지 않겠다.」

안 넘어가!

도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건지 모르겠다. 황제가 이 곳에 있으라, 고 당부하고 어디론가 자리를 떴다. 요

즘 나에게 매진하느라 황제의 곁에 있지 않는 비서관이 그를 보좌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비서관, 복장

에 힘 준 기분이 든다.

역시 저 여자 탓인가? 다시 한번 ‘시뻘건 여자’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생긋 웃는다. 웃으니 꽤 귀엽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됩니다, 비 마마.」

옆에서 국무대신이 단호하게 속삭였다.

「비 마마께서 아멜리아에게 넘어가시는 날이 제 관을 짜는 날입니다. 부디 자중해주십시오.」

「삼년 뒤에 죽으나, 지금 죽으나.」

내 말에 국무대신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요. 저는 꼭 보고 싶은 광경이 있기 때문에, 그걸 보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습니다.」

보고 싶은 ‘광경’?

그게 무엇이냐고 물어보기에 국무대신의 얼굴은 너무 진지하고 신중해보여서 나는 그만두었다. 남 일에


간섭하는 건 싫다. 내 일만으로도 정신이 없어.

황제가 나에게 다시 다가왔다. 그는 나에게 가면을 건네고, 자신도 가면을 썼다. 그 순간, 회장이 술렁

이기 시작한다.

「비 마마를 소개하시지는 않는 겁니까?」

국무대신이 묻자 황제가 얼굴을 찡그렸다.

「모르는 게 약이야. 내가 소개하지 않아도 이미 대부분은 눈치를 챘을 거고. 오늘은 사랑의 파티를 빙

자한 탐욕의 연회. 조심해야 할 거다.나도, 너도.」

「무슨 말씀이십니까?」

국무대신은 자기는 알 바 아니라는 얼굴을 했지만.

「데이비드의 약혼자가 왔다더군.」

황제의 한마디에 얼굴을 사납게 굳혔다. 이러다가 결투 장면이라도 보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럼 재

밌겠군.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이 파티의 끝을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난교 파티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별 거 아니네. 영화에서 보는 것과 비슷했다. 아니 영화보다 훨씬 심

하게 화려했지만, 그것 말고는 비슷했다. 시종들이 은쟁반을 들고 돌아다니고 다들 그 쟁반에서 우아하

게 잔을 낚아채 술을 마신다. 커다란 홀은 내 방만했다.(나는 자주 내 방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실제로

그 방안에는 여러 방이 있다. 호텔의 스위트룸 같은 느낌이지만, 실제로 스위트룸에서 자본 적이 없으

므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펜션 같은 건가. 동서남북의 구석에는 인공 폭포가 흘러내리고 있

었는데 그것은 각자 다른 술이었다. 술로 인공 폭포라니. 아아, 사치스러워.

「혼자신가요?」

매력적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더니 아까 그 여자였다. 아멜리아 라 린트인. 잠깐, ‘린트인’이라고?

내가 잠시 선생질을 하던 곳이 분명 그런 이름이었는데. 그러나 그 곳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그리고

아주 평화로운 마을이기도 했다.

「혼자기는 하지만.」

곤란한데.

당신과 말만 몇마디 해도 황제는 내가 당신을 임신시키기라고 할 것처럼 - 아니지, 이런 경우는 이야기

가 다르구나. 당신이 내 동정이라도 따 먹을 것처럼 팔팔 뛸 거라고. 아, 그 이상인데 - 뭐라고 표현

해야 하는 거지.

「린트인에서, 선생님으로 계셨었다면서요?」

그녀가 자신처럼 빨간색으로 가득 찬 잔을 건네며 말했다.

「린트인과……무슨 관계가 있으신 건가요?」

내 말에 그녀는 짧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녀가 너무 빨리 고개를 저어서, 왠지 거짓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왜 이렇게 튀는 차


림을 하고 있는 걸까? 붉은 드레스, 빨간 머리카락, 그리고 술도 붉다. 가면을 쓰고 있어도 그녀가 아

멜리아 라 린트인이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러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기분이다.

가면 하나로 누굴 찾을 수 있겠어 - 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가면 일색이니까 의외로 정말 못 찾겠다. 자

신의 파트너와 자정이 지날 때까지는 같이 있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해서 떨어졌더니만, 그 눈에 띄

는 금발을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다.

「오늘 밤의 예약은 이미 잡혀있으신가요?」

아멜리아가 물었다. 그 목소리는 유혹보다는 장난에 가까워서 나도 기꺼이 웃어주었다.

「있습니다.」

「황금을 녹여 만든 분이겠지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간에,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나쁜 느낌이 아니었다. 그녀는 창녀라고

하기에는 너무 차분한 느낌이었다. 나도 ‘창녀’라고 불리는 여자들을 많이 보았다. 사실 ‘걸레’라고 불

리는 여자들이었지만.(그녀들은 우리를 변태라고 불렀다. 결국 피장파장, 같은 인간들끼리 어울린 셈이

다.)

그들 중 누구도 아멜리아 같은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아멜리아가 가볍게 내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도전하고 싶지만, 그만두지요. 더 미움 받으면, 정말 위험할 것 같으니까.」

누구에게? - 라고는 묻지 않았다. 너무 짚이는 데가 많아서 묻기가 두려웠다. 그녀는 생긋 웃고 등을

돌렸다. 그녀를 경멸하는 척 하면서도,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

다.

나는 가능한 구석에 처박혔다. 기둥과 폭포 사이,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 서 있다보면 황제가 데리러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황제는 헤어지기 직전 ‘가능한 한 곳에서 머물러라.’라고 주

문했기 때문이었다. 설마하니 저 사람 많은 한 중간에서 머무르라고 한 건 아닐 테니까.

어디선가, 향기가 느껴진다. 맡아 본 향기다…… 위험하고 매혹적인 이 향기.

뭔지 알고 있다. 이건 ‘하니안’이다. 내가 황궁으로 끌려와서 한동안 정신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

향기다. 깨달은 즉시 소매로 호흡기를 막고, 조용히 빠져나오려 했다. 이 향기는 질색이다. 나는 나를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증오한다.

갑자기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이 금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한참 뒤에 깨달았다. 눈이 마주

친 순간, 그저 그 사람과 마주보고 있는 순간, 세상이 정지한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난잡해지는 광경

속에서, 마치 우리 둘만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다. 그 남자가 금발을 가지고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덫에 걸린 토끼의 심정을 맛보았다.

빌어먹을.

제대로 걸린 것 같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그도 내 쪽으로 걸어왔다. 한 걸음씩 서로에게 다가갔다.
황제가 신호를 정하자고 했었는데 그 때 결국 신호를 정하지는 못했다. 그 생각이 떠올라서, 부질없다

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시선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알아볼 수 있는데- 신호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시오엔.」

내 말에 가면 밑의 입이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다가갈수록, 황제 특유의 체향이 풍겼다.

「나인지 알고 있었어요?」

이 기분을 그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나인지……알고 있었어요?」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내 목덜미를 가리켰다. 내 목덜미에는 그가 남긴 이빨 자국이 있다. 아아, 그렇

지. 내가 조금 실망하려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자국보다 먼저 눈이 마주쳤는데.」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귀로 흘러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그대일 것 같더라고.」

나도 그럴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려다 곧 그만두었다. 삼년 뒤에는, 삼년 뒤에는……

말하는 사이 머리가 멍해진다. 하니안의 효과다.

「이 곳에 있을 건가?」

황제가 물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러워서 뒤에 있는 기둥으로 뒷걸음질 쳐 기대는데 황제가 샹들리에

불빛을 등지고 내 앞에 서 있었다.

황제의 입술이 다가왔다. 거부감 없이 그 혀를 받아들였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는 자각이 조금 뒤에 들

어서 그를 밀어내려고 했더니 황제가 내 손목을 쥐고 나를 밀어붙였다. 멍하니 비워진 머리에는 달콤함

으로 가득 차서 곧 주위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곧 돌아올 테니, 이 곳에 있도록 해. 자정이 되면, 그때부터는 아수라장일 테니까.」

황제가 내 목덜미에 한 번 더 이를 박았다. 아까와는 달리 아프지 않았다. 피가 뽑혀 나가는 것 같은

쾌감에 턱을 치켜들고 신음소리를 냈다. 눈을 감고 있자, 황제가 천천히 내 몸에서 떨어져 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 체온이 사라지는 것이 너무 아쉬워서 잡는 대신 한숨을 한번 쉬었다.

「비 마마?」

멍한 머리를 가누지 못한 채로 기대어있을 때 그 말이 들려왔다. 습관적으로 대답을 하려다가, 엉망인

머릿속으로도 경고등이 울려 대답하지 않았다. 한 번 더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비 마마?」
가면무도회에서 상대의 정체를 캐묻는 것만큼 비신사적인 일이 또 뭐가 있을까. 나는 눈을 감았다. 대

답하지 않으려 했다.

-김민후.-

정확한 이름으로 발음되어진 내 이름이 들리는 듯해서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나보다 훨

씬 컸지만, 이 대륙에서 유일하게 내 이름을 발음할 수 있는 남자만큼 크지는 않았다. 잘못 들은 건가?

-김민후. 시오엔은 어디에 있지?-

내 눈앞에 키스라도 할 것처럼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남자는 금색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금발도 아

니었다. 아무리 하니안에 취해있다 하더라도 그 정도를 구분 못하지는 않는다.

「비 마마……」

입술이 다가온다. 닿기 바로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손바닥으로 막고 자세히 쳐다보았다. 분명히 그 드래

곤의 목소리였는데?

이상하네.

「비 마마……」

비 맞은 중처럼 계속 한 마디만을 중얼거리며 남자는 나에게 몸을 비비려고 했다. 요즘 황제와 그러는

게 좋아지기는 했어도 나는 기본적으로 평범한 남자애다. 한마디로 이런 성추행이 죽을 만큼, 그리고

상대를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싫고 참을 이유도 없는 남자애란 뜻이다.

나도 난교 파티의 룰 정도는 알고 있다. 수도 없이 많은 자리에서 아슬아슬하게 하지 않았던 나였다.

병신 되기 일쑤였고 때때로는 강제로 할 뻔한 경우에도 늘 정조(라고 하기에는 좀 우습지만, 다른 말을

모르겠다)를 지켜왔던 나였다.

내 몸을 빼내면서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고 남자의 어깨를 양 손으로 잡은 뒤 남자의 사타구니에 정

확하게 무릎을 박아주었다.

「윽……」

남자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동정심은 전혀 들지 않았다. 치근덕대는 것도 상대를 봐가며 해야지.

넌 자리가 자리니만큼, 재수가 좋았다. 이런 자리가 아니었다면, 하니안 때문에 머리가 멍해져 있지만

않았어도 나는 크게 싸웠을 것이다.

-김민후.-

「비 마마?」

이번에는 여자였다. 뭔가 이상하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붉은 입술이 다가오자 낭

패라는 심정이 되었다. 여자는 때릴 수 없으니까 밀치고 당황했다.

황제가 이 곳에 있으라고 했는데 있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왜 이러는 거지, 갑자기.

-왜 혼자 있는 거지?-

지금 이 환청이 하니안의 효과인가? 알 수가 없다. 분명 이 목소리는 그 드래곤이 맞는데. 내 이름을

발음할 수 있는 자는 그 드래곤뿐인데. 하지만 눈앞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나를 보고 눈을 감으며 다시 키스하려한다. 뭐야, 이거.

여자를 다시 밀치고 등을 돌리는데 또 다른 남자가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의 신부여.-

닭살 돋는 소리 하지 말고 나타나려면 빨리 나타나란 말이다! 남자를 밀쳐내려고 하는 순간 손목이 잡

혔다. 이젠 별게 다 사람을 건드리네? 힘을 쓰려고 하는 순간 팔이 등 뒤로 꺾였다. 남자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듯하더니 싱긋 웃었다.

「신선한데?」

아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이 남자는 멍하지도 않고, 뭔가에 홀린 느낌도 아니다. 이 남자는 제정

신이다.

「놔.」

내 말에 남자가 느끼하게 미소 짓는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느끼하다기보다는 위협적이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반말을 지껄이시나.」

웃기시네. 이런 거에 겁먹을 정도면 내 인생은 지금과 180 도 틀려졌을 것이다.

「네가 누구여 봤자지. 시비는 네가 먼저 걸었어. 이거 안 놔?」

「못 놓겠는데.」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어서 뭔가 행동하기 민망하다. 그래도 시선을 두려워하느라 이런 것을 참아

줄 수 있을 정도로 부처님 가운데 토막은 되지 못해서, 머리로 박아줄까 사타구니를 올려 차줄까를 고

민 중이었다.

「놔.」

그 목소리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창백한 칼이 남자의 목에 드리워져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황제의 얼

굴은 무표정해서 더욱 무서웠다.

나도 남자인지라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여자를 사이에 두고 싸우거나 하는 상상. 그게 내 친구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어쩌지? 싸워야 하나, 아니면 양보해야 하나.

’라고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새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싸우는 상상도 가끔 해보았었다.

하지만 하늘에 맹세코, 내가 여자역이 된 경우는 상상한 적이 없었다. ……진짜, 죽고 싶을 만큼 면이

팔리고 있다.

「다들 신이 났군요.」

국무대신이 혀를 찼다.

「결투는 이 파티의 묘미죠. 뭐 요즘 사람들이야 나약해서 눈치만 볼 뿐이지만, 옛날에는 종종 이런 일

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좀 말려보시는 거 어떠세요?」

내 말에 국무대신이 능글맞게 웃었다.

「싫습니다. 저 연약하거든요.」
지단을 닮아서 ‘연약’같은 소리 하시네. 그러고 보니 유난히 금발이 많이 보인다. 유브라데의 금발은

황제 한명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궁금해서 물어보자 국무대신이 대답해주었다.

「골드 드래곤을 위한 축제다 보니 금발로 오는 사람들이 많죠. 고대에서는 모두 금발 가발을 착용했다

고 하더군요. ……지금이야,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지만.」

국무대신이 팔짱을 끼고 관전하는 자세로 말했다.

「원래 이 축제의 목적은 골드 드래곤의 발정기 축하지요.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골드 드래곤은 발정

기에, 드래곤과는 하룻밤을 지낼 뿐입니다. 그리고 인간하고 교미한다고 하죠. 골드 드래곤이 인간과

교미할 수 있도록 만든 연회가 바로 이 연회입니다.」

남자와 황제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골드 드래곤이면 황제와 닮은 그 드래곤인데…… 사람과 같이 자게 만들기 위해 이런 연회를 여는 거라

니, 뭔가 믿기가 어려웠다.

「골드 드래곤의 아이로 태어난 자들 중에는 영웅이 많습니다. 유브라데에 전해 내려오는 영웅의 반은

골드 드래곤의 아이로 알려져 있죠. 유브라데의 수호자인 드래곤은, 상당히 변덕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드래곤의 아이를 받아 나라를 강하게 하고 싶었던 거지요. 자신의 아이가 있는 한, 드래곤은

어느 정도 힘을 써주니까요. 그게 아니다 하더라도 드래곤의 아이는 기본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

니다.」

이 연회는 골드 드래곤에게 사람을 바치는 제단과 다름없는 것이다. 놀라서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 그럼 여자들이 너무 가엽잖아요. 그녀들은……」

「아? 아……여자들만 가여운건 아닙니다. 골드 드래곤은 수컷도 임신시킬 수 있거든요.」

나, 남자를 임신시킨다고? 얼굴은 황제와 똑같은데- 소름이 돋았다. 더 이상은 듣고 싶지도 않다. 앞을

똑바로 보았더니 아까 나에게 수작을 걸던 남자가 가면을 집어던지고 있었다.

「나는 테란티오 가문의 둘째 아들이며, 육군 중장 사무엘 라 테란티오다. 연회의 규칙을 어긴 자여,

나의 도전을 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골드 드래곤의 이름을 걸고, 이 도전의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한다!」

의기양양 소리치는 남자는 평범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어쩐지 아프더라니 군인이었군. 그나저나 저렇

게 닭살 돋는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 구나. 내 머리 위에서 「호오……」하고 국무대신의 감탄사가 들렸

다. 올려다보자 국무대신이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테란티오 가의 멍청이가 제삿날을 재촉하는군요. 볼만해지겠습니다.」

상당히 빈정대는 말투였다. 사무엘이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는 평범한 얼굴에, 나보다 한두 살 많아 보

이는 정도였다.

「네 이름을 밝혀!」

하긴, 얼굴도 가리고 있고 금발 가발들이 많으니 상대가 누군지 모를만하다.

모를 만 하기는 한데…… 아무리 모른다고 해도 철이 없다. 황제가 가면을 벗는 순간 굳는 얼굴을 보면서


나는 옛날 유행가를 떠올렸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라고 반복되는 그 CF 송을.

하긴 이 경우에는 안 되는 줄 알았더라면 아마 그러지 못했겠지만.

「유브라데의 시오엔.」

황제가 선언하는 순간, 테란티오 가의 둘째아들은 유브라데에서 가장 불쌍한 남자가 되었다. 사색이 된

둘째아들을 보고 있자니 불쾌감이 스멀스멀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와 온 얼굴에 자리 잡는 것이 느껴졌

다.

수르트 장군하고 맞붙었을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상대가 평범한 사람이 되니 그 실력은 더욱 눈에

띄었다. 황제는 강했다. 그와 저 남자는 게임이 되지 않았다. 황제는 상대를 가지고 놀았고, 상대는 황

제가 무서운 나머지 - 그가 황제라는 사실이 무서운 건지, 황제가 휘두르는 칼이 두려운 건지는 알 수

가 없지만 - 도망쳐대기에 급급했다.

결국은 이야기를 듣고 파티장에서 뛰쳐나온 테란티오가의 장남이 애원해서, 황제가 넘어가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자 좌중의 구경꾼들(라고 해도, 대부분은 파티장에서 끈적한 분위기에 휩싸인 듯 사

람들을 그다지 많지 않았다.)은 아쉬운 듯한 목소리를 냈다.

저 남자는 내가 지켜줄 필요가 없어. 그가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면 나도 그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

그저 당신을 쳐다보는 것이 전부라면 그런 관계 사양하겠어.

등을 돌렸다. 황제와 국무대신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무작정 앞으로 걸어

나갔다. 짜증스러웠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강탈되기 위한, 그런 존재로서의 나를 원하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었다.

이게 사랑인지는 잘 몰라도, 좋아하고 있어. 정말 좋아하고 있어. 하지만 이렇게 한심해서야, 말할 수

가 없잖아. 나는 삼년 뒤에도 황제 곁에 있겠다는 약속도 할 수 없다. 그리고 그에게 뭔가 도움이 되지

도 못한다. 이렇게 자신이 무력한데 ‘좋아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남자가 세상에 존재할까.

최소한 내 주위에는 없을 거야.

기분이 암울했다.

황제가 따라온다는 걸 알면서도 뒤를 돌아보거나 걸음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어디까지 걸

어도 그저 묵묵히 쫓아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에 짜증이 나서 결국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왜요?」

「뭐가.」

「왜 쫓아 오냐고요.」

황제의 금발이 달빛은 받아 창백하게 빛나고 있다. 아름다운 남자. 돈도 많고 권력자고 힘도 세고- 게

다가 다정하기까지 한 남자. 내가 당신을 상대로 뭘 해줄 수 있겠어.

무력감에 화가 났다.

「그대는 이 숲의 지리를 모르잖아.」


「모르든 말든, 내버……」

황제가 내 턱을 움켜잡았다. 갈고리처럼 손톱이 파고들어서 아픈 나머지 얼굴을 찌푸렸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도망칠 생각인가?」

헛다리짚으시네.

아니라고 하면 되는데 그렇게 말하기가 정말 싫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내가 왜 이러는지 설명하기가 싫

어서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도망칠 생각은 아니군. 정말로 그대가 도망치려고 마음먹었으면 분명히 나 모르게 했겠지. 그 때처

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좋겠어요.」

그만둬. 이런 식으로 비아냥거리지 마.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어봤지만 일단 터져나가 말은 멈춰지지가

않는다.

「뭐가.」

「강해서 좋겠어요. 돈 많아서 좋겠어요. 황제라서 좋겠어요. 빌어먹을, 진짜 좋겠다. 남 눈치 볼 것도

없고-」

황제를 알면서 겪었던 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나는 처음부터 그랬지. 눈을 뜨자

마자 월인이니 뭐니 하면서 사람을 자기 멋대로 가두고, 결국 나는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잖아. 진짜 자

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일이 존재하기는 해? 황제를 가여워했던 내가 떠올라 수치스러웠다. 말도

안돼. 저렇게 강한 사람을 내가 지켜주겠다고 한거야?

「별로 안 좋아.」

짜증이 날 데로 난 나를 붙잡고 황제가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황제를 외면했지만 그는 잡

고 있던 내 턱을 돌려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정말, 좋지 않아.」

사기다. 황제는 부서질 것 같이 가련해보였다. 말도 안돼, 이건 사기다. 그는 나보다 키도 크고 근육은

내 두 배는 되어 보이고 방금 전까지 검을 들고 날아다니며 사람 하나를 가지고 놀았다. 그는 자신의

아이도 필요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왜 이렇게 연약해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지켜준다고 했잖아.」

사기다. 황제가 흐릿하게 미소 짓는 것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몇 번이나 사기라고 속으로 읊조렸다. 황

제는 내게 키스하기 위해 다가오면서 아주 작고 연약하게 속삭였다.

「지켜줘.」

아무래도 약점을 잡힌 모양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황제의 입술이 다가오는 순간, 그 입술이 족쇄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프거나 피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후회할지도 몰라.

막연한 예감을 느끼면서도, 기꺼이 그 입술에 닿았다. 키스는 길고 달콤했다. 저 멀리 연회장에서는 지

금쯤 난리가 낫겠지. 이 황제와 닮은 드래곤은 그들 중 누군가를 임신시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

만 그 모든 일은 나와는 관계가 없다.

어두운 숲 속에서 숨이 막히도록 키스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길도 나있지 않은 숲 속에서 황제에게

안겨 있었다. 그래, 여자역이든 뭐든 해주겠다. 당신이 필요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주겠

다. 삼년이라는 기간동안, 나는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다 해주겠다. 시험적인 기간을 두고 사귄

다는 게 비열하다는 거 알아. 그러니까 그만큼 최선을 다하겠다.

황제의 팔이 내 허리를 감싸고, 다른 팔은 내 어깨를 안았다. 나도 황제의 목과 머리를 안으며 우리는

계속 키스했다. 황제의

입술이 목으로 내려가고 나도 적극적으로 황제의 머리를 안으며 그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고 흐릿한

시선을 들어 앞을 보았…

웬 발이?

「으------흠흠흠흠흠흠!」

국무대신이었다.

황제는 다시 홀로 돌아갔고, 나는 빠져나왔다. 옆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국무대신을 노려보며, 황제

는 나에게 ‘자신의 방’

에 가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왠지, 연상 누나의 원룸에 초대받은 기분이 들어서 얼굴에서 불이 났다.

국무대신이 작작 좀 하라는 얼굴로 우리 둘을 쳐다보았지만, 둘 다 별 관심이 없이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누구와 사귀는 건 처음이구나.(이런 걸 사귄다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

지만, 대충 비슷한 거니까.) 황제의 방은 가본 적이 있다. 도망쳤다 들켜서 왔을 때도 이 방이었다.

황제의 방은 크지 않았다. 그는 나처럼 방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자신만의 건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었기 때문에 방이 클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라고 해도 그 방은 상당히 크긴 했다.

침대는 크고 낮았다. 그 위에는 여러 가지 색의 털이 깔려 있었는데 그 털을 부드럽고 좋은 냄새가 났

다. 거기에 앉았다가 쓰러졌다. 굉장히 기분이 좋고, 황제의 냄새가 난다. 황제는 이런 곳에서 자는 거

구나, 라고 생각하니 새삼스러운 감격이 들었다.

나른하다.

하니안의 효과가 아직 몸속에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자마자 잠이 오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잠에 빠져든다. 겨울 연못에 빠질 때처럼, 누군가가 발목을 잡아끄는 것 같다고 느

낄 정도였다.
‘황제가 오면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멋진 밤을 보내야……’

내가 마지막으로 한 생각은, 이런 상황에서의 남자라면 누구나 응당 할 법한 - 조금 야한 것이었다.

어둡다. 그리고 습기도 느껴진다. 뭐지? 어디선가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는 음악처럼 영

롱하다. 발밑이 축축하다.

「아.」

의미 없이 소리를 내보자 그 소리가 울린다. 약하게 에코가 들렸다. 이 곳은 마치…… 그래, 마치 동굴

같다. 동굴이구나, 라고 생각한 순간 당황했다. 동굴? 내가 언제 동굴에 가봤다고 동굴 속에 있는 꿈을

다 꾼단 말인가.

「민후.」

아아, 그렇지. 드래곤, 당신이 있었지. 매일 어둠 속에서 보는 것만으로 모자라 이젠 인테리어도 갖춘

거냐. 빨랑 깨서 황제랑 야한 짓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건성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압도되고 말았다.

황제와 똑같은 얼굴을 한 드래곤이 저벅 저벅 걸어왔다. 아까까지는 어두웠던 동굴 안에 작은 촛불들이

갑자기 생겨나고 드래곤은 무표정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온 몸은 피로 젖어있었다. 맙소사, 피라니. 어디 다친 거예요, 라고 물어보려 했지만 입이 제대로

열리지가 않았다. 천천히, 마치 계시라도 받은 사람처럼 나를 고개를 숙였다. 황제와 똑같은 얼굴, 옷,

신발, 그리고- 피투성이의 바닥을 발견했다. 온갖 곳이 피로 얼룩져있다. 끈적거리고 축축한 발밑은 전

부 피였다.

발에 뭔가가 닿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의 팔이었다. 잘려진 팔이 나뒹굴고 있다.

이를 악물었다.

「악취미도 이 정도면 변태의 수준이군요.」

이건 꿈이야. 이건 그의 인테리어야. 전의 트롤처럼, 이건 그저 환상에 불과해.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달라져 있을 거야.

그런데 어떻게 눈을 떠야 하지?

드래곤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리고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악취미는 아닌데? 원래 드래곤은 성교를 한 뒤 상대를 죽인다. 드래곤이 죽이지 않는 것은 동족인 드

래곤뿐이야.」

「이건 실제가 아니잖아요. 이런 광경은 치워주세요.」

내 말에 드래곤이 소리 높여 웃었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웃음이었다. 그 웃음이 대답해주고 있었지만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드래곤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내게 말했다.

「이건 실제야.」
그 때 나는 발견했다. 테란티오가의 둘째아들을 보게 되었다. 그는 배를 움켜쥐고 지렁이처럼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의 애널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뭐지……?

남자는 나를 발견했다. 그는 살려달라는 것처럼 내게 팔을 뻗었다. 남자의 사타구니에는 성기도 고환도

없이

피만 떨어지고 있었다. 드래곤이 내 귓가에서 속삭였다.

「곧 죽을 거다.」

「살려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옷을 벗었다. 옷을 찢어서 붕대처럼 만들고 달려가려는데 뒤에서 드래곤이 나를 끌

어안았다.

「못 가.」

「이거 놔! 살려야……」

「그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저 남자를 살릴 수는 없다. 그는 곧 죽을 거야.」

죽든 살든 해보는 데까지는 해봐야 한다. 내가 가려는 순간, 남자가 쓰러졌다.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맙소사, 죽었다고? 동굴 안을 두리번거렸다. 많은 수의 사람들. 굴러다니는 인체의 조각들. 그 남자가

마지막 생존자였는지, 이제 살아있는 것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너……!」

눈앞이 빨갛게 물들었다. 귀에서 심장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분노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뒤돌

아서

높이 있는 드래곤의 멱살을 잡았다. 그 순간 드래곤이 나를 밀쳤다. 드래곤에게 온 힘을 실었던 지라

나는 쉽게

넘어갔다. 뒤로 쓰러졌다.

물컹.

그것이 뭔지 알 수 있다. 절대로 비명 지르지 말자.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수천 번 다짐했을 것이다.

절대로 정신 잃지 말자.

드래곤이 내 앞에 서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 위로 자신의 몸을 덮어왔다.

「나도 놀라고 있어.」

드래곤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아주 낮았는데도 동굴 속에서는 계속 울리고 있었다.

「지루함이 끝나다 못해 이제 화가 나려고 하거든. 사실은 화를 낼 일이 아닌데 말이지.」

드래곤의 입술이 다가오는 것을 나는 온 힘을 다해 뿌리쳤다. 이 자식이 돌았나? 내 얼굴을 쳐다보며

드래곤이 미소 지었다.
「너는 운명이 정한 나의 신부.」

드래곤의 목소리는 아주 작은데도,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다. 그것은 이 곳이 동굴이기 때문일까?

눈을 감는다. 드래곤의 두 팔 사이에 가둬진 채로 나는 몸을 웅크리고 귀를 막았다. 아무것도 듣기 싫

어. 이 꿈 속에서 깨게 해줘.

「나의 아이를 가져라.」

이 꿈 속에서 깨게 해줘!

눈이 떠졌다. 눈앞의 남자가 드래곤이 아니라 황제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황

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여기로 바로 오라 했을 텐데?」

무슨 말인지 몰라서 나는 그를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황제가 혀를 차며 나를 안아 올려서

어디론가 데려갔다. 황제의 욕실이었다. 내 방에 있는 것과 비슷한 욕실은 그보다 훨씬 심플했다. 그는

욕실에서 내 옷을 단숨에 찢어버리고 욕조 안에 눕혔다. 멍하니 대리석 욕조의 물을 바라보는데 천천히

그 물이 붉은 빛을 띠는 것을 보고 숨이 막혔다.

「피가……」

황제의 옷도 피가 튀어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드래곤하고는 달리 많이 젖어있지는 않았다. 그저 군데

군데 튀어 있을 뿐이었다. 욕실에 나 있는 커다란 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내 피가 아니야. 안심해도 돼.」

「그럼 누구의……」

황제도 옷을 벗고 욕조로 들어왔다. 그는 나와 반대편에서 들어왔고, 수영을 하듯 몸을 움직여 내 쪽으

로 다가와 나를 안아 자신의 무릎위에 올려놓았다.

「사랑의 파티에서 사건이 생겼다. 누군가가 사람들을 죽였어. - 그 일의 조사 때문에 피가 튄 것일 뿐

이야.」

「그 남자……」

살려달라는 듯이 손을 내밀던 남자. 기고 있었다. 앞도 뒤도 피범벅이 되어서.

「테란티오 가의 둘째아들.」

내 말에 황제가 나를 돌렸다. 그가 놀란 얼굴로 내게 소리쳤다.

「그대가 피해자 신분을 어떻게 아는 거냐? 그 자리에 있었던 건가? 범인을 봤나?」

황제가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는 채로 황제와 닮은 그 드래곤을 생각했다. 정말

그는 드래곤이 맞을까? 알 수가 없다.

「하니안 때문에 다들 범인을 보지 못했다. 그대는 내 방에 바로 온 것이 아니라 그쪽으로 갔었던 건

가? 범인을 봤나?」
「봤어요.」

「누구냐? 인상착의를 말하라. 누군지 이름을 알고 있나? 아는대로 말해봐!」

머리가 멍하다.

그는 정말로 죽었던 거구나. 그건 실제였구나. 그 피비린내도, 그 동굴도 전부 다 실제였단 말이지.

「골드 드래곤이 죽였어요.」

아마 비웃거나, 혹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제는 내 말을 듣는 순간 싸늘해진 얼굴로

나를 씻겼고, 둘 다 욕실에서 나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서관과 국무대신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집합한 회의실에서 나는 다시 한번 증언해야 했다.

「영광의 이름 나라연을 계승하였으며, 존귀한 골드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황제 시오엔의 비 - 나 키미

누는 영혼과 심장을

걸고 이 증언에 추호의 거짓도 없음을 맹세한다.」

그런 맹세를 거친 뒤 나의 증언에 사람들이 각기 다른, 절망과 한탄으로 가득한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거의 대부분을 증언했지만 골드 드래곤과 원래 알던 것이라던가, 그가 나에게 자신의 신부라며 아

이를 가지라고 한 것 따위는 말하지 않았다. 해서는 안 될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도 나에게 ‘거짓이 아

니냐’던가 ‘더 말할 것은 없느냐’라고는 묻지 않았다. 그들은 골드 드래곤이 사람을 죽인 것이 놀라운

듯 비탄으로 가득 차서, 다른 일은 알려 들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록이 사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무대신이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비서관도 그에 덧붙였다.

「드래곤의 동향을 가장 잘 아는 종족이라면 드워프나 엘프들입니다. 접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능하면 엘프로 해. 엘프는 골드 드래곤에게 빚이 있고, 그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나를 모르는 척

하지는 않을 거다.」

난교 파티의 끝은 씁쓸했다.

‘지켜줘’

황제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황제를 지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심장이 지독하게 두근거린다. 이것이 공포인지, 앞으로의 각오인지 알 수가 없다. 그날 밤, 둘 다 밤을

새서 초췌한 얼굴로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나는 황제의 팔을 벤 채 속삭였다.

「좋아해요.」

황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환한 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이 같아도, 똑같은 가면으로 감추고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알아볼 수 있다.

그만큼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

황제가 끌어안는 순간 눈을 감았다. 황제의 손과 황제의 입술에 키스하고, 그의 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

었다.
「합방식이라는 거, 무슨 절차가 필요한건가요?」

내 말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 벗지 못한 나의 옷을 벗겨주었다. 황제의 입술이 쇄골에 닿

는 순간, 입을 열어 신음

소리를 뱉었다.

황제가 내게 키스하며 자신의 옷을 벗었다. 그는 능숙하게 옷을 벗으면서도 나를 애무했다. 나도 그에

게 애무를 돌려주고

싶었지만 그는 능숙했고, 나는 기껏해야 몸을 떨다가 그의 귀나 뺨, 머리카락에 키스를 해주는 것 밖에

는 할 수 없었다.

‘다음 생에도 그 인연을 이어지게 만드는 의식’

그것이 나를 흥분시켰다. 죽을 만큼 아플 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도, 자발적으로 내 몸을 맡겼다. 황

제의 성기가 ‘남자로서

부러운 크기’가 아니라 ‘두려운 크기’가 되는 것이 이상하면서도 즐겁고, 애틋했다.

이 정도도 못하면서, 이 남자를 지켜낼 수는 없잖아.

황제가 내 뒤에 손가락을 넣었다. 몇 번이나 손가락을 돌려 내 뒤를 넓혀가는 절차는 창피했지만 피하

고 싶지는 않았다

. 나는 황제의 앞에서 엎드리고, 다리를 벌리고 내 스스로 엉덩이도 갈랐다.

「미누?」

「해요.」

나는 망설이지 않을 거야.

사람의 피, 사람의 팔, 사람의 시체. 나는 절대로 당신을 그렇게 만들지 않겠어. 어떤 희생을 치르던

간에, 그러지 않겠어.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무언가를 하겠어.

이것은 증거가 될 것이다. 내가 마음속으로 한 맹세의 증거.

황제의 것이 천천히 들어왔다. 귀두가 들어오는 순간 찢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뒤를,

손바닥을 깨물며 참아내고, 일부러 힘을 뺐다.

이것은 각오.

이것은 반드시 이 남자를 지켜내겠다는 나의 각오.

일단 귀두가 들어오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찢어질 듯 찢어지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얼마나 긴장하

고 있었는지, 내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검을 잡기에는 고운 손이 내 이마를 훑고 지나갔다.

「아파?」

황제가 내 등에 입술을 대며 물었다.


「아니요.」

「……내 이름을 불러봐.」

황제의 말에 나는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시오엔, 이라고. 그 순간, 황제의 것이 조금 더 들어왔

다. 압박감에 숨을 쉴 수가 없다. 자꾸 몸이 말리려고 한다.

「다시 한번 불러줘.」

다시 한번 부르면 그는 또 조금 들어올 것이다. 조금 더 두꺼운 부분이 들어와 토하고 싶어질지도 모르

겠다. 그래도 좋다.

「시오엔.」

그러고 나서 나는 덧붙였다.

「좋아해요.」

그 순간 시오엔이 그대로 자신의 것을 박아 넣었다. 이거, 진짜로 아프다. 장난이 아닌데, 라고 생각하

면서도 웃는 나 자신이 기특했다. 대견했다. 아픈 건 괜찮아. 맞는 거라면 얼마든지 견뎌왔고, 이건 맞

는 것 보다 아프지만 버틸 수 있다.

「좋아한다는 말 하지 마. 이성이 날아간다.」

시오엔은 그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그리고 얕게 나를 찔렀다. 그 것은 점점 깊어졌다. 아프다……에서 도

취된다. 천천히 뭔가가

나를 덮치고 있다. 내 허리를 잡고 시오엔도 내가 움찔거리는 것을 느낀 것 같다. 그는 빠르게 움직이

기 시작했다.

안쪽의 어딘가가 닿을 때마다 심장이 아프다. 그런 흥분도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몸이 제멋대

로 움직인다.

그런 쾌락이 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에서야 알았다. 시오엔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게 된다. 그가 떨어

지는 게 싫어서,

그의 것에 달라붙어있기 위해서, 눈앞이 흔들린다. 무언가를 분명 보고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다.

「아……」

한번 나간 신음은 제멋대로 튀어 오르고 내질러진다.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너무 흔들리는

것이 싫어서, 이 광적인

쾌감이 무서워서 아랫입술을 물고 참아보려 하자 시오엔이 손가락이 입으로 들어왔다. 혀 대신에 손가

락이 키스하고 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 손가락에 입안을 맡겼다. 혀와, 입천장과, 치열. 그 모든 것을 맡기느라 계속 타

액이 떨어지는데도

나와 시오엔, 누구도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디론가 올라가고 있다. 뱃속 깊은 곳에서 갑자기 생겨난 덩어리가 점점 커져가 온 몸을 잡아먹고 있

다.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 애가 타고 초조하다.


안돼. 이제 더 이상은.

의미를 생각할 수도 없이 그렇게 떠올렸을 때 시오엔이 강하게 삽입했다. 내장이 눌린 기분이 든다. 몸

안에서 커져가던

덩어리가 풍선처럼 터지는 것 같은 쾌감에 제멋대로 눈물이 나오고, 등을 세운채로 소리 질렀다.

「안돼……!」

그리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굉장히 나른하고 졸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또 그

지옥 같은 동굴의 꿈을

꾸면 어쩌나, 라고 생각했는데 시오엔이 내 뒤에서 자신의 것을 빼고 나를 끌어안았다. 팔베개를 한

채로 그가 속삭였다.

「사랑해.」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헐떡여서 몸이 말라 침을 생으로

삼키는 게 고작이었다.

잠이 드는 내 귓가로 시오엔이 말했다.

「이제 너는 나의 것이다. 영원한 나의 것이다.」

정말로 기쁜 듯한 목소리에 손을 잡아주는 것만이, 내가 잠들기 전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9. 예언 (1)

꿈속에서 그녀는 울고 있었다. ‘평생’이라고 어린 입이 무절제하게 저주어린 말을 뱉었다. 아니, 그 입

이 어리다 할지라도

그 말은 무절제하게 뱉은 것이 아니었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잘못했어, 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내가 말을 채 하기도 전에 그녀가 등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서둘러 소리쳐보아도 그 등은 꼿꼿하게 세워진 채로 멀어졌다. 미안해,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아무리 말해도 멀어지기만하는 등. 오랜만에 꾸는 꿈은 차갑고 슬펐다.

-누구야?

이 뻔뻔스러운 작자가 안 나타났다면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이사.

-화난거야?

시오엔과 닮았는데 왜 이 남자는 이토록 그와 알맹이가 다른 걸까? 끈질기고, 못됐고, 이기적이다. 잔


인하지만 묘하게 상냥한 시오엔과는 여러모로 틀리다. 쌍둥이와 결혼하는 사람들은 좀 찝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를 보면 껍데기보다 그 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드래곤이 한발짝 앞으로 다가와서 나는 두걸음 물러났다.

황금색 눈이 가늘어지고, 코 끝에 주름이 잡힌다. 곤란한 미소를 입에 달고 그는 잠시 다른 곳을 쳐다

보다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내게 화난건가?

-그럼 내가 누구에게 화가 났을 것 같으신데요?

혹시 바보냐?

대놓고 말하기에는 그 피와, 성기가 잘려진채 기어가던 남자와, ‘아이를 낳아’라고 강요하던 드래곤의

목소리가 걸려서 나는 조금 소심한 태도로 쏘아붙였다.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물라서 물어보는 거잖아.

바보 맞구나.

말할 가치가 없다. 그런데 내 꿈이기는 한데 내 맘대로 깰 수 없는 꿈속에서 나는 이 자리를 피하지도

못하고 여기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드래곤은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

다. 그의 얼굴은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동정의 여지는 없다.

그는 살인자다.

-나한테 화난 거라는 건 알겠는데. 아니, 그 이유도 아는데.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 눈치라도 챈 것일까?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고 횡설수설했다. 그것

이 내 눈치를 보는 행동이라는 것을 나는 좀 뒤에야 깨달았다. 그는 조금 더 황망하게 말도 안되는 단

어들을 늘어놓다가 짜증스러운 손짓으로 이마위를 덮은 앞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난 드래곤이니까, 이게 당연한거야.

-뭐가 당연한데요? 그 죽은 사람들이 그쪽에게 죽여달라고 했어요? 그쪽의 일용한 양식이 되고 싶대요?

-그런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닌데?

그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먹이사슬이라는 게 있잖아.

힘 없는 변명조의 어투에 잠시 정신이 팔렸다.

-드래곤은 인간보다 위란 말이야. 그러니까 드래곤은……

-식인 드래곤,이라는 건가요?

-일단은.

거짓말.

골드 드래곤은 인간을 먹지 않는다고 비서관이 말했었는데! 초식동물이라매, 초식동물! 비서관에게 화를


내야 할지 눈앞의 드래곤에게 화를 내야할지 모르겠다. 내 안색이 어떻게 변했는지, 드래곤이 갑자기

두 손을 들었다.

-잠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드래곤은 사람을 먹이로 쓰지 않아.

-방금은 식인이라며!

-‘일단’이랬잖아, 일단.

내가 그를 노려보자 그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눈썹을 내려트렸다.

-사람을 안 먹는다고요?

-아니, 먹기는 하는데.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고함을 지르자 드래곤이 당황하더니 갑자기 뭐라고 주문을 왼다. 그러자마자 나는 돌처럼 뻣뻣하게 굳어

졌다. 입도 열 수가 없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드래곤이 천천히 다가와서 갑자기 무서워졌

다. 그는 사람을 죽였다. 성교를 한 뒤 죽이는게 그네들의 버릇이든 습관이든 습성이든 그건 내 알바

아니다. 그는 사람을 죽였다.

살인자.

눈을 떼지 않은 채 속으로 비난했다.

살인자.

가까이 다가온 드래곤이 내 표정을 보고 미간을 좁히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싫어.

-그렇게 싫다는 얼굴로 거부하지 말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드래곤이 나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시간이 꼬여버린거야. 민후, 넌 나의 연인이지 시오엔 녀석 것이 아니라고. 그와 합방식을 생각하다

니, 말도 안돼.

그거야 네 사정이고! 그리고 너보다야 시오엔이 낫지. 아니 무엇보다 누구 마음대로 그런걸 정하고 지

랄이야! 감은 눈을

뜨지 않고, 표정도 마치 못 들었다는 것처럼 무표정을 고수한채 나는 속으로만 욕했다.

-미치겠네. 정말이야. 너는 나의 연인이야. 시오엔이 너에게 이런저런 짓을 해서 지금 많이 혼잡해졌지

만, 최종적으로는

너는 나의 것이 될거다.

그 순간, 체온이 올라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주먹으로 드래곤의 뺨을 갈겼다. 뺨에 주먹이 닿는 그

순간 몸이 풀렸다는

것을 깨닫고 드래곤과 마주본채로 ‘아’라고 내뱉었다.

화를 낼까? 혹시 나를 죽일까? 좋아, 와봐. - 이런 기분이었던 나를 드래곤이 끌어안았다. 벼락치는


밤에 어린아이가 인형을

끌어안듯이 절박하게.

솔직히, 별로 애틋하지 않았다. 살인자잖아.

-운명은 나에게 너를 준거야.

드래곤이 내 주먹을 잡고 천천히 손가락을 폈다. 그가 무섭지 않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와 이 드래곤의

관계에서만큼은 내가 더 힘이 있는 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드래곤의 호의때문이든 뭐든간

에. 아니, 내가

역학관계에서 밀리는 쪽이라 할지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나에게 빼앗을 수 있는 것

은 없으므로.

드래곤이 내 손가락을 펴고 손바닥에 입술을 댔다.

-꿈에서라도 이런짓은 하지 말아. 전에도 말했잖아, 다칠 수도 있다고.

혀가 아닌 입술로 손바닥을 핥으며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운명이 점지한 너의 연인은 나야. 시오엔이 아냐. 그는 가짜이고, 그는 곧 죽을 것이며, 그는 아무것

도 아니야.

죽어……?

누가, 죽는다고?

나와 눈이 마주친 드래곤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죽어. 시오엔은 죽을 것이다.

그 말에는 위엄이 있었다. 압도되고 있었다. 그 말은 간결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없

었다. 마치, 계시와 같았다. 그것은 당연하고, 그것은 옳은 말이었다. 거짓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그

런 말이었다. 그가 드래곤이라서? 아니, 정신차리자. 그는 드래곤이지 아폴론이 아니다.

그는 신이 아니야.

-당연히 죽죠.

내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웃으려고 애를 썼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굴고 싶었

다. 가능한 나는 무심하게 말하기 위해서-아마도 당황한 티가 역력했겠지만- 노력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내 말에 드래곤이 피식 웃었다.

-시오엔은 좀 더 빨리 죽을거야.

-무슨 소리야?

나는 드래곤의 무릎에 앉아있는채로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무슨 소리야, 시오엔이 왜 죽어? 왜, 언제 죽는다는 건데?

그의 멱살을 쥐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내가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것을, 눈이 시큰거려서 알 수 있


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도 멱살을 놓을 수도 없었다.

누가 죽는다고?

누가?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던 드래곤이 입술을 가늘게 하고 내게 말했다.

-내 아이를 낳을래?

드래곤이 다시 물었다.

-시오엔이 왜 죽느냐니까! 뭔가 알고 있으니까 지금 이러는 거잖아, 시오엔이 왜?!

내가 그를 윽박지르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드래곤이라서 그런지 그 모습은 성인 남자에게 어

울리지 않는다기

보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선명히 느끼게 해주었다. 갸웃거리던 목을 바로 하고 그가 물었다.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

-시오엔이 죽는다며? 말을 정확히 해! 그가 왜……

-나와는 관계없어.

그 차가운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관계가 없어? 사람이 죽는데 관계가 없어?

마치 내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와는 관계없어.

-관계없는 이야기를 왜 꺼낸건데?

-마음이 뒤틀려서.

-마음?

-그래, 마음.

‘마음’?

지금 이 와중에 마음이 나와?

-무슨 마음?

-내 마음.

-그러니까, 그게 어떤 마음인데? 뒤틀린 마음이 뭔데?

-너를 사랑하고 있어.

제정신이 들었다. 나는 시오엔과 닮은 얼굴을 훑어보고 한숨을 뱉었다. 뱉으면서, 머리를 굴렸다. ‘시

오엔이 죽는다’고

그는 말했다. 죽는다, 시오엔이 죽는다. 안돼, 나는 그를 지킬 것이다. 그를 하찮은 고깃덩어리로 만들

지는 않겠어.

드래곤이 나에게 자신의 아이를 가지라고 했을 때를 기억해냈다. 그 피내음이 자욱한 동굴. 그리고 발

뒷꿈치에 밟히던
인체의 조각.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시오엔을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야.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드래곤의 입에서 시오엔이 죽는다고 말한 근거가 뭔지 캐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흥분하지 말아야

한다. 천천히

말을 유도해야 한다. 넌 할 수 있어, 김민후. 넌 할 수 있어.

-나를요?

-그래.

-내 어디를요?

머리가 핑핑 돈다. 시야가 어지럽게 느껴질 정도로 머릿속이 혼잡했다. 내 질문이 의외인지 그는 또 고

개를 갸웃거렸다.

-네 어디를?

그가 나에게 되물었다.

-네, 나의 어디를요.

실은 무슨 대답이 나오든 상관없었다. 일단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을 벌면서 나는 속으로 할 말을 정리

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노력뿐으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당장 들

어내야 하는데 왜 모르겠는거야!

드래곤은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 물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이유가 필요해?

-계기든 뭐든 있겠죠. 아, 좋아요. 제 장점이라도 말해보세요. 제 어디가 좋으신데요?

너무 빨리 말했다는 낭패감이 잠시 들었다. 그러나 드래곤은 생각에 빠지느라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는 생각을 하고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그럼 다른 사람과 제가 다를 바 없지 않나요?

-아니, 그건 아냐. 그건 아니야, 너는 틀려. 너는 특별해.

-그러니까, 어디가요?

뭐라고 말해야 하지? 어떻게 그 이야기를 꺼내야 하지? 반드시 대답을 들어내야 한다. 그런데,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말을 해줄까? 저 드래곤이 내게 말을 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드래곤이 곰곰이 ‘나의 어디가 좋은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곧 죽을 시오엔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쪽도 나를 좋아하는 건가요?

-아까부터 그쪽, 그쪽 하는데. 내게는 이름이 있어.

-이름?

-그래.

-그런게 무슨 상관이에요. 대답해보세요. 곧 죽을 시오엔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쪽도 나를 좋아하


는 거 아니냐고요?

그럼 시오엔이 죽으면 나를 좋아하지 않겠군요. 저는 언제까지 이 일방적인 장난에 놀아나야 하나요?

한달? 두달?

하느님, 제발. 제발, 드래곤이 아니라고 말하게 해주세요. 제발, 제 말을 무시하거나 돌리거나 하지 말

고 대답하게 해주세요.

제말, 제발.

드래곤이 잠시 나를 노려보다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빨리는 안 죽어. 시오엔의 생은 아직도 꽤 남아있다고.

그렇게 대답하고나서 드래곤이 비릿하게 웃었다.

-아하? 그대는 시오엔이 언제 죽는지가 궁금한 모양이군.

정곡을 찔려서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군. 내 이름따위는 안중에도 없는거군. 그대가 궁금한건 오로지 시오엔의 남아있는 생이 얼마인

지, 그것뿐이란 말이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알려줄까보냐.

그리고 바로 사라진 드래곤 때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아무리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드래곤의 흔적도 보이

지 않았다.

‘알려줄까보냐.’

그 말투하며, 타이밍하며……토라져서 간건가?

당황스럽다.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여하간 한 두달내로 시오엔이 죽는 건 아니라고 하니 안심이 되었

다. 한 두달내에 드래곤은 반드시 내 꿈에 나타날테니까.

아 말하고나니 왠지 도끼병 환자같다. 현실도 아니고 꿈속에서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런데도 나는 입가를 가리고 얼굴을 찡그렸다. 왠지 더웠다.

‘미누?’

시오엔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았다. 아, 여기는 꿈이지. 잠을 깨야 그를 볼 수 있다.

‘미누? 일어나 봐. 미누, 그대, 무슨 꿈을 꾸길래 얼굴을 붉혀?’

……꼭 깨야 하는 걸까? 지금 이 순간, 반드시?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무슨 꿈을 꾸었냐면, 너가 죽는


다고 드래곤이 씨부렁거렸어! 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아니, 좀 있다 깨는 것도 괜찮겠다.

좀 있다 깨는 것도……

갑자기 어둠이 흔들린다. 엄청난 속도,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아. 그러나 꿈속에서 왠 지진? -지진?

그리고 눈이 떠졌다.

「시오엔?」

내 말에 금발의 남자가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아침햇살을 직격으로 받고 있는 얼굴은 기적처럼 꿈처럼

아름답다.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내가 방금전까지 꿈속에 있었던 것을 자각하고 자신이 현재 어떤

모습인지를 보자,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설마 앉아서 잔 것은 아닐테고, 그렇다면 시오엔이 내 몸을 일으킨 것이다. 그 지진은 시오엔이

흔들어 깨웠기 때문인가보다.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 입술이 맞대왔다. 거부감 없이 그 입술을 느끼면서도 머리 한쪽이 어지럽게

돌아간다. 시오엔은 두달내에는 죽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 죽는다는거지?

누가 그것을 알려줄 수 있을까? 어떻게 죽는지 알아야 막을 수 있다. 그건 드래곤이 안다. 드래곤은 어

떻게 아는 걸까? 드래곤을 노리는게 빠를까, 아니면 다른 이를 알아봐야 할까.

죽는 건 안돼, 그것만은 막아야 해.

허나,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미누?」

어떻게 해야 살릴 수가 있지? 아니, 일단은 그 말의 진위여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그는 당연하게 이

야기했고, 그것이 너무나 당연히 들렸다 하더라도, 틀린 것일 수도 있다. 가능성을 염두해두어야해. 백

조중에 흑조도 있었듯이 모든 일에는 아닐 가능성이 있다. 그래, 우선은 맞는지 틀리는지를 먼저 확인

해야해.

「키미누?」

누구에게 확인을 해야 하는 걸까? 물론 안되면 드래곤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 알아내야 해. 그러나 드

래곤은 마지막 수단이라 치고 그 전에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그에게 내걸 수 있는 내쪽의

조건이 너무 빈약하다. 게다가 알려줄테니 애를 낳아라, 이런식으로 나오면 골치아파진다. 누가 있을

까? 그리고 드래곤은 말한 자이니 다른 자가 확인해주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 드래곤이 말한 것은 드래

곤이 말한대로의 의미만 가질 뿐 그것을 확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키미누!」

갑자기 몸이 들어올려져서 깜짝 놀랐다. 눈 앞에는 아름답고 아름다운 남자가-

무시무시한 눈을 하고 있다. 이런, 생각에 빠져서 잠깐 상황을 잊었다. 웃으면서 일단 나는 상황을 무

마하려 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그리고 내 실수를 깨달았다. 말을 채 번복하기도 전에 시오엔은 화가 난 얼굴로 내 턱을 잡았다.


「이야기가 아니고 키스였죠. 알아요, 안다니깐요.」

나는 재빨리 그에게 말했지만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가 이럴때마다 나는

그에 대해서 들었던 수많은 소문들이 생각나 두려워진다. 물론 그 소문들의 뒷배경에는 다른 사정이 있

었다는 것도 알지만, 들었을 당시의 공포까지 그 사정이 가져가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싹해졌다.

「‘키스였죠’라……」

시오엔이 음습하게 중얼거렸다. 아아, 금발놈들. 드래곤이든 시오엔이든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데, 어

째서 성격은 하나같이 이렇게 어두침침한걸까.

키스였다는 거 안다니까. 왜 뇌까리고 그래!

그는 뭔가를 기다렸다.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기다리는 걸 보니 나에게 뭔가 바라는게 있는가보

다. 말인지 행동인지조차 감이 안 잡히는데 뭔가를 해야 한다니 부담이 장난 아니다. 어쩔까하다가 기

다리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그가 기다리는 동안 나도 기다렸다. 그의 눈을 보고 그가 안아올린 그 상태로.

「그대는 무정하고 잔인해.」

시오엔은 한참만에야 그런 말을 하고 나를 침대위에 눕혀주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낮고 어두워

도, 나를 눕히는 손길은 부드러워서 새삼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합방식 다음 날 ‘키스였죠’라고 말하는 연인은 그대밖에 없을 것이다.」

잠깐 울컥했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정신이 팔렸는데! 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너 아니였으면 난

토끼같은 마누라와 여우같은 자식……나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시오엔이 좋고, 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니까. 삼년-아니, 이제는 삼

년도 아니다. 이년뒤에는 가야 하지만, 갈 때는 가더라도 아무도 그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겠어.

‘태양은 필요한 곳에 비춰진다’

국무대신은 그렇게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온 것도 뭔가 의미가 있다고.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

만, 그걸 이용해서 시오엔을 지킬 수 있다면 만사 오케이다.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도 살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내게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보다 시오엔이 백배 소중하다.

아아, 이거 생각하면 할수록 지고지순하지 않은가. 열부문이라도 세워줘야 하는거 아니냐고, 황제폐하.

그러나 금발을 휘날리며 폐하는 문지방을 넘어 사라지고 있다.

아, 인간이 쪼잔하네.

하긴 키스하다 말고 딴 생각에 빠지더니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라는 헛소리를 했으니 기분이 상할만

은 하다. 이해는 하는데, 억울하다. 더욱이 이 억울함을 대놓고 풀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나를 억울하게

만든다.

억울하기는 하지만 억울해하기만 할 때는 아니지.

일단,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공부하는 거다.

-라고 생각하고 시간을 이리 저리 비우고 몰아서 시오엔의 서재에 처박힌지 두시간만에 나는 양손을 들
고 말았다. 나름 유브라데 글자를 안다고 믿었는데 도무지 뭔말인지 모르겠다. 일단 골드드래곤이 어떤

존재인지 그에게 예지능력이 있는지 확인해보려고 했는데 골드드래곤에 대한 말들은 하나같이 추상적이

다. 게다가 주관적이다. ‘골드드래곤이 어떤 용인가’가 아니라 ‘골드 드래곤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

가’-즉 인간의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다. 이런 건 필요가 없단 말이다.

아니, 골드 드래곤의 능력이 뭐야? 불을 내뿜냐? 예지능력이 있냐? 아아아악- 도대체 뭐냐고! 이 빌어

먹게 긴 서술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거냐.

골드 드래곤은 영광의 이름 나라연의 또 다른 이름으로,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자를 말하면서 동시에

신의 힘을 뜻하는 ‘리안’의 대리인을 말하기도 한다.

하나씩 써라, 하나씩. 나라연. 그러고보니 나라연이라는 단어를 어디서 들은 것 같다. 나라연이라는 단

어를 어디서 들었더라. 분명히 들은 적이 있는데?

아, 생각났다.

‘영광의 이름 나라연을 계승하였으며 존귀한 골드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황제 시오엔’

분명, 시오엔의 앞에 붙는 그 화려찬란한 수식어중에 ‘나라연’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나라연. 시오엔

은 나라연을 계승한 자. 그리고 골드 드래곤은 나라연의 다른 이름. 그건, 골드 드래곤이 ’나라연‘이라

고 봐도 되는건가? 아니 그 전에 나라연이 도대체 무슨 뜻이지?

나라연이라는 단어를 찾으려고 봤더니 어디서 찾아야할지 모르겠다. 일단 건물 이름은 아닐 것 같은데…

…왜 이 나라에는, 이 세계에는 컴퓨터가 없는거냐. 네이버에서 치면 바로 나올텐데.

결국 알만한 자를 찾아 물어보는 수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유시간이 끝나고 데리러

온 비서관에서 ‘나라연’이 뭔지 아냐고 물어보았더니 비서관이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왜지? 켕기

는 것은 없지만 이왕이면 아무도 모르게 시오엔을 지켜주고 싶은 나로서는 뜨끔한 시선이었다.

「뭔지 아는거에요?」

내 말에 비서관이 차가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 대답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아 그럼 뭔지 좀……」

「그 전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비서관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서 덩달아 신중한 얼굴을 하고 이야기를 들었다. 비서관의 회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설마하니, 또 탈주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이번에 탈주하시게 되면 목숨이 위태로워

지십니다.」

「아니에요!」
「아니신데, 왜 서재에 매달리시는 겁니까?」

비서관이 어찌나 의심스러워하는지 우울해졌다. 내가 탈주계획을 세울 때 말고는 이 서재에 매달린 적이

없었나? 생각해보니 정말 없었다. 그 때 뿐이었다, 내가 이 곳에 틀어박혔던 것은.

아니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렇지, 매정하게도 말한다.

「그냥, 골드 드래곤에 대해서 궁금했을 뿐이에요.」

「골드 드래곤이요?」

비서관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어두운 얼굴로 납득했다.

「아, 전에……그 사랑의 파티사건때문이군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두는게 좋을 것 같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비서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어떤 것을 아시고 싶으신지요?」

‘골드 드래곤에게 예지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서. 그러나 왜 그런 것을 궁금해하냐고 하면 할 말이 없

다. 그것은 골드 드래곤이 발정기에 사람을 죽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 잠시 생각해보다가 ‘나

라연’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비서관이 나를 흘끗 쳐다보고 - 내가 황비니까 그녀보다 윗사람일텐데 왜

쫄아야하는거냐- 대답해주었다.

「나라연이라는 건 우주의 핵심을 말합니다.」

핵심 수학 정리! - 라는 문제집이 갑자기 생각났다. 내가 헛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비서관

이 고운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 미인인지라 찡그려도 예쁘기만 했지만.

「우주의 핵심이라는 건 ‘힘’입니다. 우주를 지탱하고 있는 힘이지요.」

힘은 머리가 두 개인가, 아니면 팔이 여섯 개인가? 그 전에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건 맞는건가? 아

니, 이 동네는 좀 말을 쉽게 할 필요가 있다. ‘우주의 핵심인 힘’이라니? 그게 사람이라는거야, 토끼

라는거야, 완두콩이라는거야! 상상의 여지가 있게 좀 말해주면 안되나?

「힘은 대기에 존재합니다. 힘은 모든 곳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한 중심으로 모이는데

그것이 나라연입니다.」

지금 그걸 설명이라고……

내 얼굴이 어지간히 불만스럽게 보였는지 비서관이 난처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밖에 설명드릴 수가 없어요.」

안 듣느니만 못하다. 여하간 ‘나라연’이라는 건 먼지라고 생각하자. 대기 속에 있다니까. 어디에나 있

다니 먼지가 확실할 것이다. 우주에도 먼지는 있으니까.

자, 그러면 그 먼지가 골드 드래곤이랑 무슨 상관이지?

「그 먼……이 아니고 나라연이 골드 드래곤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내 말에 ‘아’하고 감탄사를 뱉은 비서관이 대답했다.

「골드 드래곤은 그 나라연에서 태어났거든요.」


먼지에서 태어난 시오엔 얼굴의 드래곤…… 자 변경하자. 나라연은 먼지가 아니고 ‘알’이다. 대왕계란같

은거. 사람은 태어날 때 3kg 정도이지만 드래곤은 얼마만할까? 더 작을까, 더 클까.

계란의 크기를 정할 수가 없으니 상상도가 또다시 흐트러진다.

「골드 드래곤는 세나요?」

「예?」

「강하냐고요. 골드 드래곤은 강하나요?」

내 말에 비서관은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라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하나- 머리

를 필사적으로 굴리고 있는데 비서관이 입을 열었다.

「사람보다 강하냐고 물으신다면, 강합니다. 드래곤중에서는 가장 약하고요.」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것도 있잖아요. 그럼, 사람 대 골드 드래곤으로는 승산이 있는 거겠네요.」

「아니요.」

그 대답은 마치 드래곤이 ‘시오엔은 죽는다’라고 했을 때처럼 단호하고 선명했다. 비서관은 내게 왜 그

런 것을 물어보는지 묻지도 않았으면서, 어딘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차가워보이지만 실은

따듯한 회색 눈이 나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듯 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인간은 절대로 골드 드래곤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죽여서는 안된다’

나는 그 말의 미묘함을 놓치지 않았다. 죽여서는 안되는 거지, 죽일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나도 누구

를 죽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약간의 제압만 하면 된다. 제압을 해서 시오엔이 언제 죽는지, 왜 죽는

지, 어떻게 해야 피할 수 있는지만 들어내면 된다. 그 작자 말을 다 믿을 수는 없겠지만 많이 들을 수

록 좋을테니.

「그러니까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네요.」

「골드 드래곤 하나만 보자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골드 드래곤은 실제로의 힘은 드래곤 중 최하위이

니.」

더할 수 없이 신중하게 비서관이 대답하고 ‘하지만’이라며 덧붙였다.

「골드 드래곤은 드래곤들의 중심. 드래곤 전부와 싸워야 할 겁니다. 승산이 없어요.」

「드래곤끼리는 친한건가요?」

당장은 골드 드래곤에게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일은 최악의 사태를 생각해두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에 하나 확인할 수 없다 하더라도 드래곤 본인에게는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래서 시오엔이 언제 죽는다는 건지 들어내야 한다.

「아니요, 친하다의 문제가 아니고. 아니, 뭐 친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요. 골드 드래곤은 드래곤들의

힘이에요. 골드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있어서 드래곤들이 마법을 쓸 수 있는거죠. 나라연의 힘을 ‘빌려

와서 구현하는’ 행위가 드래곤의 힘 자체이니까. 그 나라연과의 매개체는 나라연에게서 태어난 골드 드


래곤이 전부에요. 골드 드래곤이 없으면 드래곤은 힘을 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드래곤들은 필사적으

로 골드 드래곤을 지킬거에요.」

괜찮아, 드래곤을 죽이려는게 아니니까. 그리고 당장 드래곤과 뭘 어쩌겠다는 것이 아니니까.

「골드 드래곤에게 있는 것이 힘인가요? 그러면 능력이 대단한건가? 예지……능력이라던가?」

아주 잘 물어보았다! 스스로가 기특할 지경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여기까지 오다니.

「아아. 마마, 대단하시네요, 어떻게 눈치채셨어요?」

예지능력……이 있다고?

그 단호한 목소리는 예지능력을 가진 자의 목소리였기 때문인가? ‘예지능력’이라는 건 어느 정도 맞추

는걸까? 50%? 40%?

「얼마나요? 얼마나 맞죠, 그 예지능력이라는건?」

내 말에 비서관이 싱긋 웃었다.

「얼마나라니요. 다 맞는거죠.」

다……?

다,라고? 다? 다?

갑자기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그 말이 정말로 맞단 말이야? 아니야, 김민후. 이

러지 마. 그 놈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는 문제잖아. 그래, 그것이 ‘예지능력을 발휘한 말’일지 그냥

해본 말일지는 아무도 몰라. 아직은, 절망하지 마. 아직은.

일단, 그래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은.

‘그 말이 맞는가.’에 대해서. 그렇다면 ‘예지능력’을 가진 다른 누군가를 찾아내야 한다.

「사람도, 예지능력을 가질 수 있겠죠?」

내 말에 비서관이 「예, 있습니다. 라브만이라던가.」라고 대답했다. 그 변태새……

「그, 그 사람말고는 없나요?」

「라브만 말고는 없는 걸로 아는데요. 아, 그러고보니- 크리스티의 형이 그쪽으로 유명한 분이였죠.」

「크리스티?」

「국무대신 말입니다. 니타우 라 크리스티.」

국무대신은 내가 그의 형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걸 왜 묻느냐’며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역시 비서관

과는 달라서 곱게 말해주지 않는데다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는 걸보니 당황하게 된다. 나는 거짓말

을 잘 하는 성격이 아니란 말이다. 당황해서 이리저리 말을 꺼낸 것이 도리어 자폭하는 길로 가고 있었

다. 도중에 몇 번이나 솔직히 말할까 했지만 ‘내 아이를 낳아라’라는 발언을 시오엔이 들으면 썩 좋아

하지 않을 것 같고, 지킨다고 맹세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죽어야 한


다’는 둥 하는 소리를 들었던 시오엔에게 또다시 그런 말을 듣게 하는 것이 싫어서, 나는 끝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마마.」

달래는 것 같이 한숨을 쉬면서 그가 나를 불렀을 때도 나는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난처하다는 얼굴이

곧 느긋한 미소로 바뀐다.

「좋습니다, 정히 언질을 주지 않으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제 형이라면, 연락이 되는데 시간이 필요

합니다.」

「어째서요?」

마음은 한없이 조급하다. 시오엔이 죽는다고 그 망할 해물탕 거리(드래곤)가 지껄였단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나에게는 아주 급한 일인데?

내 말과 내 표정을 보면서 국무대신이 찡그린 얼굴을 한 채 대답했다.

「형은 변방에 있거든요. 남쪽 끝입니다.」

「신전에 있는 것이 아니고요?」

「아니요.」

「예지능력이 있는데 신관이 아니에요?」

내 말에 국무대신은 표현하기 힘든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아, 그게……좀 사정이 있어서요.」

그 틈을 타고 비서관이 난입했다. 득의양양한 미소에 이쪽이 다 웃음이 나올정도였다. 비서관은 똑똑하

고 예쁜 여자인데 어딘가 어린애같은 면이 있다.

「스캔들을 일으켜서 신전에서 파문당하셨거든요.」

「레니!」

국무대신이 비서관을 낮게 질책했지만, 비서관은 모르는 체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정말로, 형제가 생긴 것도 일상생활도 똑같습니다.」

그 미소보다 독성이 열배는 짙은 냉소를 지으며 시녀장이 덧붙였다. 시녀장이 가져온 허브티를 마시면서

나는 국무대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상에, 저런 인간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단 말인가.

「아아, 그러고보니 아멜리아 라 린트인을 두고 형제가 대립하기도 했었지요.」

아, 그 빨간 미인누나. 다들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떠는 그 누나를 사이에 두고 싸웠다니, 정말 ‘바람둥

이 형제 전설’같구나. ‘아멜리아’라는 이름을 뱉는 비서관은 무표정했지만, 그 이름을 들은 국무대신이

펄쩍 뛰었다. 그는 눈 앞의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나를 스쳐서 비서관을 잡았다.

「레니 데이비드. 사람 말을 좀 들어! 나랑 아미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

아미?

「아미가 누군데?」

정말 순수한 질문이었다. 그 순간 국무대신의 얼굴은 흙빛이 되고 비서관은 ‘서류를 가져오겠다’는 핑


계를 대며 사라져버렸다. 그 뒷모습을 바보처럼 지켜보던 국무대신이 자리에 털썩 앉아 나에게 원망의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미’라는게 ‘아멜리아’의 애칭임을 깨달은 나는 난처해졌다.

아아,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물론 꼬투리를 잡아 국무대신을 곤경에 빠트리는 것이 재미있기는 하지

만, 지금만큼은 도움이 필요했다.

「아아, 정말 미치겠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국무대신이 차를 마시려는 순간, 시녀 누나가 그 찻잔을 우아하고 날렵하게 빼앗았

다. 허공에서 헛손질을 한 국무대신이 고개를 숙인 채 찡그린 눈을 들어 시녀 누나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한없이 상냥하고 예의바른 목소리로 시녀 누나가 말했다.

「잔에 이물질이 묻어서. 다른 잔으로 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그 옆에 있는 시녀 누나가 바통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잔이 지금 없어서요. 혹시 냉수라도 드릴까요?」

완전 ‘냉수마시고 속 차려라’로군. 국무대신이 고개를 다시 푹 숙이는데 시녀장이 근엄한 얼굴로 경고

했다.

「다시는 비 마마 앞에서 상스러운 소리 마십시오. 상전앞에서 그게 무슨 예의랍니까?」

아무리 봐도 ‘미치겠네’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아미’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분명한 시녀장의

말에 억울해 미치겠다는 얼굴을 한 국무대신이 나를 쳐다보았다. 구원을 바라는 왼쪽 눈과 원망으로 가

득찬 오른쪽 눈이 얼마나 강렬한지……

마주 볼 수가 없어서 외면해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국무대신이 끝을 올린 어조로 나를 불렀다.

「마마……」

시선이 마구잡이로 내 뺨과 목등을 찌르고 있지만 열심히 무시하기로 했다. 여성 여러분의 공격은 참혹

하고 집요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발을 빼는게 낫다. 게다가 국무대신이 잘못한게 맞잖아. 아니, 왜

멀쩡한 비서관 내버려두고 다른 여자를 두고 형제와 싸우고, 급기야 애칭을 불러제끼냐고.

그래, 국무대신이 잘못 한 것이다. 아무리 지단을 닮았더래도, 아니 지단 본인이어도 이런 중요한 경기

에서 자살골을 넣으면 죽은 목숨이야. 난 모른다.

「마마, 좀……」

‘난 누구? 넌 누구? 여긴 어디?’버젼으로 외면하고 또 외면하는 것만이 나의 살길!

국무대신이 내 허벅지를 쿡 찔렀다. 평소에도 별로 황비 대우를 해주지는 않지만 이렇게 나오는 걸 보

니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의자를 조금 옮겨 다른 쪽으로 움직이며 그를 쳐다보지 않았

다.

시녀 누나들과 시녀장님은 가면 갈수록 범위를 좁혀가며 ‘니타우 라 크리스티! 궁정 최악의 바람둥이는

여자의 적!’라는 모토로 공격하고 있었고, 국무대신은 완전히 벼랑 끝에 몰려 흐지부지한 나뭇가지(즉,

나)만을 잡고 있었다. 여기서 국무대신을 살린 것은 내가 아니었다.


「뭐하는 거지?」

시오엔이었다.

어느 새 방으로 들어온 시오엔은 내 허벅지를 쏘아보았다. 나는 깜짝 놀라서 국무대신의 손에서 허벅지

를 떼려 했는데 의외로 국무대신은 천천히 손을 떼었다. 그 손놀림은 마치 총을 겨눠져 두 손을 올리는

범인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시오엔의 표정이 조금 풀리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바로 당황했다. 아니, 내가 무슨 조선시대 아낙이라고 이런 것에 이렇게 지레 놀라야 하나?

시녀장과 시녀누나들이 동시에 프로페셔널한 미소를 지으며 다과상을 재빨리 치워서 물러갔다. 그 전에

국무대신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황제의 시종들도 곧 사라지자 방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시오엔.」

새삼스러운 이름을 입에 담으며,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 이름은 내가 지켜야 할 상대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지켜야 할 상대. 상냥하고 친절하고 좋은 사람인 저 남자를 지켜줘야

해.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갑자기 목뒤로 손이 들어와 나를 끌어당겨서 놀랐다. 눈을 크게 뜨고 시오엔을 쳐다보는데, 시오엔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채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너한테 말할 수 없는 생각.

「미누.」

갑자기 오싹해졌다. 뭔가- 뭔가가 나를 억누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압사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토할 것 같지만 여기서 그런 티를 내면 상처 입겠지. 그는 나를 좋아하니

까. 티를 내지 말자, 라고 생각하면서 시오엔을 보고 있다가 그의 낭패어린 표정을 보고 뭔가 잘못되었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를 내려주며 등을 돌렸다. 순간, 그 모든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엷어졌다.

「미안.」

그는 그렇게 말한채 등을 보이고 있었다. 앞으로 사라지지도 내게 얼굴을 보여주지도 않고. 나는 그가

뭘 미안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그의 등 뒤에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매일같이 느끼는 감탄을 또 절감했다.

아름답구나.

저 잘빠진 뒷모습. 부드럽게 구불거리는 금발. 단정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알맞은 근육. 정말로 아름다

운 남자다. 저 정도로 아름답다면, 남자든 여자든 중요하지 않겠지. 알맹이가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

을 정도의- 압도적인 미모. 저 정도쯤 되면, 사람같지 않다. ‘조각같은’이라는 형용사를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는 조각 같지도 않다. 외계인같다.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쳐다보고 쳐다봐도 질리지

않고 그저 바라보게 된다.
생각해봤는데……나 사실은 외모에 약한 걸까? 아니 사람은 누구나 외모에 약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외모를 밝혀서 그 외의 것은 아무래도 좋은 사람인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왜 저 남자를 지키겠다고 이 난리를 치고, 저 남자를 좋아하게 된 걸까?

그는 상냥하다.

-그 미모에 홀려 모든 것을 잊은 척 하면 안된다. 그는 상냥하다. 내게 잘해줬다. 그는 성심을 다해서

나를 대해주었고, 내게 진심을 보여주었다. 그러고보면, 마음이라는건 전염성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살기를 비출 생각은 아니였어.」

아아, 나를 두렵게 만든건 살기였구나. 저렇게 예쁜데, 살기도 뿜을 수 있다니 역시 대단해. 사실 살기

니 하는 건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도 할 수 있구나. 하긴 예전에도 ‘살기’를

운운한 적이 있었지.

「괜찮아요.」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하얀 얼굴이 싸늘하게 느껴진다. 아마 저 냉랭한 무표

정때문이리라.

「나는 안 괜찮아.」

뭐?

「나는 전혀 안 괜찮아. 나는 정말 그대를 모르겠어. 합방식을 하자더니만, 바로 이런식이로군.」

내가 어떤식인데?

「그대는 말했었다. 최저선이라는 것이 있다고. 그리고 나는 약속했지. 그 최저선을 지키겠다고. 그러

나 그대가 나에게 대하는 것의 최저선은 없는 건가?」

섹시한 목소리. 낮은데다 위협적이어서 멋지다. 등골이 오싹한 것이- 성감을 자극한다. 그런데, 내용은

왜 이렇게 애같은거야. 그나저나 최저선을 지키겠다고 그가 약속한 적이 있던가? 최저선이 뭔데? 뭐의

최저선인데?

갑자기 애정의 깊이차가 실감났다. 그는 내가 한 말들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내가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그가 어떤 생각으로 내게 말했는지. 굵직굵직한 것들. 내가 상처입

은 것들. 내 마음속에서 내 멋대로의 기준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들. 나는 그런것들만 알고 있지만, 그

는 다르다. 그는 내가 아무렇게나 넘겼던 것들을 기억하고, 실천한다.

아아,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미모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름답고 가련한 누님을 가지고 노는 기분이다.

으윽, 반성해야겠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거지?

「내가 뭘 어떻게 했길래요?」

「계속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합방식을 한 다음 순간부터.」

……정말 나쁜 놈이 된 기분이다……

이건 마치 하룻밤 잔 다음에 바로 흥미가 떨어진 남자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핀치에 몰려 나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아아, 죽을지도 모르는 시오엔. 네 걱정때문이었단 말이다.


-말로 뱉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시오엔은 나를 불만스러운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섹스한 다음 날 버림받은 여자

의 시선과 아주 흡사해서, 나의 죄책감을 증폭시켰다. 그럴려고 그런게 아니야. 입속으로 중얼거리다

고개를 숙인 나에게 다가온 시오엔이 부드럽게 요구했다.

「키스해줘.」

고개를 들자 애처로운 시선으로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하는 건 좋은데요. 하나 확실히 해두겠는데.」

내 말을 듣고 있는건지 듣지 않는 건지 시오엔은 입술을 가까이 하고 있다.

「난 당신을 무시한게 아니에요. ……좀 생각할 것이 있었을 뿐.」

「좀 생각할 거?」

입술이 닿은채로 물어서, 간질거렸다. 금색 눈이 너무 가까워서 어지럽다.

「그런게 있어요.」

그는 가만히 나를 쳐다보다 눈을 감았다. 입술을 마주한채로 그는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

뒤에야 그가 ‘키스해줘’라고 말했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쳐 당황했다. 나보러 이 이상 뭘 어쩌라는거야?

저 입안에 혀라도 넣으라는거야? 이렇게 새삼스러운 분위기에서? 나보러?

하지만 안하면 정말 화를 낼 것 같다. 으아, 미인 누님을 사귀는 놈들의 심정이 단번에 이해가 간다.

안절부절 못하는 심정도. 아, 진짜 네 생각이었어.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는 없지만.

하긴 해야지……

눈을 감고, 의지를 굳히고(키스하는데 의지를 써야 하다니!), 닫혀져있는 입술로 혀를 집어넣었다. 넣

는 순간 시오엔이 입을 벌리고 내 혀를 빨아들였다. 빨아들이다 멈출때마다 혀가 조금 뒤로 밀려나고,

다시 빨아들여진다. 그것은 성기를 삽입하고 흔드는 행위와 비슷해서 숨이 막혔다.

휘청이는 몸을 시오엔이 단단하게 잡고 다시 키스해왔다. 내가 핥는 것은 그의 혀뿌리정도였고, 그는

내 입안을 휘저었다.

내 머리를 고정하고 있는 손의 손가락들이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젖히고 두피에 닿았다.

「미누.」

내 이름을 끝까지 제대로 부를 수 없는 남자. 아아, 상관없어. 혀가 내 모든 타액을 앗아간다. 손가락

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움켜잡는다. 고통과 쾌락. 두려운과 환희. 어느쪽이라도 좋다.

옷이 벗겨지는 동안 나는 시오엔을 보고 웃었다. 시오엔의 입술을 할짝였다. 시오엔의 손이 더욱 거칠

어지는 것이 기분좋게 느껴진다.

내 상의를 벗긴 시오엔이 자신의 옷을 재빨리 벗고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엉덩이에 닿은 그의 성기

가 확실하게 느껴진다. 손바닥으로 내 허벅지를 문지르고 안쪽으로 파고드는 손가락에 동조해서 다리를

벌렸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다. 좀 의연하게 하고 싶은데 이게 마음대로 안된다. 귀로 흘러 들어오는 거친 숨


소리가 처음에는 시오엔의 것이었는데 이젠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

다른 손이 내 유두를 긁어서 그 예리한 감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항의를 위해서인지 무엇을 위해서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상태로 고개를 돌려 등뒤의 시오엔을 쳐다보았다. 뺨이 약간 붉어져있는 것이 귀

엽다고 생각했다. 내 뺨도 저럴지 알 수가 없다.

「다시 키스해줘.」

시오엔이 속삭여 애원했다. 팔을 뒤로 돌려 그의 뺨에 대고 키스했다. 허벅지를 문지르며 안쪽으로 들

어오던 손이 사타구니에 닿았다. 키스하려고 입술을 가져다대다 눈을 감고 몸을 떨었다. 그 순간을 못

참았는지 시오엔이 나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그의 손가락이 내 뒤에서 지분거리는 것이 창피하게 느껴졌

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입술에 매달려 오래도록 견뎠다. 온 몸이 간지러운 기분이 든다. 뒤를 자

꾸 움찔거리는 것이 싫은데도, 움찔거리게 된다.

시오엔이 내 몸에서 손을 떼고 내 몸을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를 침대의 기둥에 기대게 한

뒤 천천히 내 가슴에 입술을 대었다. 입술이 감질나게 움직여 밑으로 내려간다.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

이 입술이 내려감에 따라 같이 내려온다. 귀를 만지던 손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빨아줘.」

시오엔은 그렇게 요구하며, 내 물건을 입에 물었다.

「뭐하는 거지?」

어느새 깨어난 시오엔의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팔굽혀펴기를 하다 말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왕이면 나도

시오엔의 옆에서 애틋한 무드를 풍겨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 시녀장은 나에게 ‘팔굽혀 펴기를 하는

황비라니!’라며 세상이 망하기라도 하는 듯 한탄하기 때문에, 그녀가 오기 전 - 즉 시오엔이 가기 전-

에 해야 했다. 빌어먹을, 이 동네 여자들은 운동도 안 하나? 헬스장을 가봐도 80%는 여자던데.

「운동이요.」

보면 모르냐. 골드 드래곤의 말이 진실인지 어떤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힘은 있어야 한다. 힘이 있었더

라면 나는 라브만에게 그 꼴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힘이 있었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것이다.

강해져서, 지켜줄거야. 아침 햇살 속에서 저렇게 빛나는 저 남자를 내가 지켜줄 것이다. 분명히 내가

지킬 수 있을 거야. 뭔가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을거야.

이 동네에서, 이 세계에서 안전한 자는 아무도 없어. 잔인한 황제 위에는 사람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드

래곤이 있다. 누가 어떻게 되든 나는 몰라. 내가 지킬 사람은 하나 뿐이야.

「힘들지 않아?」

내가 땀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 나른한 목소리로 시오엔이 물었다. 땀이 이마에서 콧잔등을 지나 양탄

자에 떨어졌다. 약간씩 숨이 거칠어졌다. 나는 고개를 젓고 두어번 더 움직였지만, 시오엔은 내 목소리

를 기다리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안 힘든데요.」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덥다…… 땀을 대충 손으로 닦고 시오엔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본 시

오엔이 해맑게 웃으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운동해야지.」

-혹시, 이거. 내가 무겁다고 하는 건가? 생각해보면 나를 번쩍 번쩍 들기도 하고, 섹스를 할 때도 자

신의 무게에 내 몸무게까지 지탱하고 있는 시오엔이다. 내가 무거울지도 모른다. 살을 빼야 하는 걸까?

다가가면서 얼굴에는 티를 내지 않은 채 나는 속으로 ‘나는 무거운가’에 대한 고찰에 빠져들었다. 이

동네에 체중계가 있을까? 의심스럽다. 그런데 체중계가 없으면 내 몸무게가 얼마인지 어떻게 아나.

시오엔의 손이 다가와서 나는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오엔이 내 뒷머리를 잡고 나를 끌어당

겨 키스했다. 키스는 길고 부드럽고 난잡했다. 이 남자는 왜 키스도 이렇게 야한걸까.

키스의 끝은 멀리에 있었다. 타액의 실이 연결된 것이 꽤 부끄러웠다. 그러나 여기서 얼굴을 붉히면 더

창피한 일인 것 같아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시오엔을 내려다보았다.

시오엔이 활짝 웃었다.

「그래서, 나를 지켜줘야지.」

말을 안해도 통하는 걸까? 새삼 감동이 되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내가 너를

지키려고 허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야. 이런것이 이심전심인가. 추운 겨울에 따듯한 음료를 마신것

처럼, 뱃속이 따듯해졌다. 아아,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려 애쓰며 시오엔이 벌린 팔 안으로 들어갔다. 시오엔의

입술이 다시 닿는다. 너는 알고 있구나, 내가 너를 지킬것이라는걸. 내가 너를 지킨다는 말은 빈 말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는 알고 있구나. 응, 내가 지켜줄게. 너든, 너의 아이든, 신관이든, 똥색용

이든!

-라고 결심은 했고, 의도도 좋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 국무대신의 형은 멀리에 있다고 하고,

가까이에 있는 예지능력을 가진 자는 없는 거냐. 예지능력이 아니라면, 무슨 수가 있을까? 그 말을 확

인해볼 어떤 수. 그게 뭘까.

그게 뭘까, 어떻게 해야 좋은 걸까.

「마마?」

나에게 뭐라고 짜증을 내는 중이었는지 하렘의 누님 중 한명이 앙칼진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아, 진짜

이 자리 너무 싫다. 일주일에 한번 하렘의 여성들과의 점심식사. 밥이 넘어가다 체할 지경이다.

「네.」

「마마, 아무리 마마라 하실지라도 사람이 눈앞에서 말을 하는데 듣지 않으시는 건 지나친 오만이시군

요. 저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뜻입니까?」


요즘 딴생각 좀 했다고 툭하면 타박을 받는데, 정말 힘들다. 나라고 다른 생각을 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란 말이야. 아 빌어먹을 골드 드래곤.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서 이렇게 심난하게 만드냔 말이

다.

「누나같은 거라뇨. 그렇게 생각안해요.」

이름을 알려주긴 했는데 기억이 안나서 대충 ‘누나’라고 했더니 여자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다른 생각하신거 맞지 않으십니까? 하긴, 저 같은 건 파리정도로 밖에 아니보이시겠죠!」

나를 과보호하는 시녀 누나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틀려졌다. 내 뒤에서 뿜어져나오는 누나들의 기에 질

릴 지경이다. 본래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눈앞에서 웃으면서 나를 씹는 자리인 이 자리의 참석자들도,

이런 직설적인 화법은 당황스러운지 그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크리모사님, 왜 이러세요. 누군가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서 그녀가 크리모사임을 깨달았다.

「파리라뇨. 누나처럼 이쁜 파리가 어디있어요.」

가슴 큰 파리가 어디있어, 라고 하면 맞아 죽겠지. 하지만 가슴을 안 볼 수 있도록 좀 가려주면 안되

나. 유두가 보일듯 말듯한 저 옷차림 때문에 아까부터 당황하여 고개를 돌리고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딴

생각을 하게 된 것 아니냔 말이다.

「지금 제 이야기는 듣지도 않으셨잖아요! 제가 뭐라고 했는지 말씀 좀 해보세요!」

당연히 모르지.

소리를 치는 그녀에게 당황한 나와는 달리 내 뒤의 시녀누나군단의 분노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이

누나들이 이래서 지금 저 여자가 더 난리를 치는지도 모르겠다. 아, 진짜 모르겠네. 뭐라고 했을까.

「미안해요.」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는게 상책이다. 무엇보다 시녀장의 눈길도 타오르고 있다. 전에 라로에게 하던 것

을 생각하면 시녀장이 가장 위험하다.

여자들끼리 싸우는 건 질색이다. 음험하고 어처구니없이 싸움이 길어지는데다가 명확한 결론도 안 난다.

아니, 솔직해지자. 무섭다. 여자들은 무섭다. 특히 싸우는 여자들은 더 무섭다. 여자의 한이 서리면 오

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데 이건 결코 장난도 과장도 아니다.

여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여자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 자기들끼리 그러는 건 상관없지만 나는 끼고 싶

지 않단 말이다.

「마마!」

질린 목소리로 시녀장이 나를 불렀지만 나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크리모사인지 살모사인지하는 여

자를 쳐다보고 있자 그녀가 「됐습니다. - 먼저 일어서나이다.」라고 하고 가버렸다. 다 안 먹고 가다

니. 안절 부절하는 누나들이 새삼 귀엽다. 매주 만나서 매주 갈궈졌는데, 생각한것만큼 악랄한 여자들

은 아닌가보다. 그러고보면 여자가 귀엽다고 생각하는 건 남자의 본능일지도 몰라. 아무래도 남자와 여

자의 관계에서 손해보는 건 남자들뿐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최소한 나와 여자의 관계는 그

래.
「오늘 오찬에서 난리났었다면서요?」

국무대신이 오후에 오자마자 물었다. 그리고 그는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그윽한 눈길로 비서관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곧 나올때가 되었는데.

「오늘 바빠?」

진짜 지겹다. 구경하는 나도 이럴지언데, 비서관은 얼마나 지겨울까. 그러나 지겹다기보다는 냉랭한 태

도로, 비서관이 사무적인 어조를 강조하며 대답했다.

「바쁩니다.」

「그럼 내일은?」

차라리 레파토리를 좀 바꿔보지. 진짜 같은 남자로서 안타깝기 그지 없다. 어느새 뒤에 들어온 시오엔

도 짜증스러운 얼굴을 내비추며 손짓으로 자신의 시종들을 물러가게 하고 지켜보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씨익 웃으며 ‘지겨워’라고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슬쩍 고개를 끄덕였

다.

「모레는?」

「바쁩니다.」

「글……」

「황제 폐하!」

황제를 눈치챈 비서관이 국무대신을 살짝 무시하며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국무대신이 평소에는 이

렇게 예의를 챙기지 않던 비서관의 행동에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결국 무릎을 꿇었

다.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뾰족한 목소리의 국무대신에게 시오엔이 대답했다.

「아까 봤잖아, 크리스티.」

어이없다…… 황제한테 짜증내는 부하라니, 이 동네- 진짜 어떻게 된거야.

「저는 이만 물러가옵니다, 폐하.」

비서관이 정중한 목소리고 고했다.

황제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물러갈 수 없다. 절대 물러가게 해서는 안된다고 턱을 바닥에 댄 채로 눈을

부라리는 국무대신과 황제의 발만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물러간다는 비서관. 시오엔은 팔짱을 끼고 한숨

을 쉬었다.

그가 급기야 나를 쳐다보려 하자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물러가도 좋다, 데이비드 비서관. 그리고 원한다면 배웅하고 와도 좋다 크리스티 국무대신.」

안됐다, 비서관.

비서관이 일어나서 바로 움직이자, 국무대신도 들고 있던 서류를 탁자에 내팽겨치고 그 뒤를 쫓아갔다.

‘글피도 바빠?’라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어쩌면 국무대신이 그저 쫓아다니는 것만을 좋아하는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노

골적으로 귀찮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닐 수가 있나. 이런 내 생각에 대해서 시오엔에게 물어보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시오엔이 어느새 다가와 나를 끌어안고 격렬하게 키스했다.

순간 모든 생각이 날아갔다. 그저 흔들린다. 감각과 시오엔의 존재에, 그저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키

스하고, 키스했다. 내가 그를 더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가 나를 더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가 너무 다가와서 내가 허리를 계속 뒤로 제끼게 된다. 아픈고 불편한데도, 그것들을 무시할만큼 아

니 무시할 수 밖에 없을만큼 시오엔과의 키스는 좋았다. 우리는 서로를 만지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급

한 일인것처럼 부둥켜안은 채 키스했다. 그것은

「으흠흠흠!」

언제나처럼, 국무대신은 날카롭고 무겁고 억지스러운 헛기침소리로 자신의 컴백을 알리기전까지 계속되

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오엔은 어떤 보고들-신전이나 황태자나 하렘관련의 보고들-은 반드시

내 앞에서 들었는데, 오늘도 그런 보고들 때문에 국무대신이 온 모양이었다. ‘바쁩니다’의 연속 콤보

공격을 당하고 온 국무대신은 초췌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가 보고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기요, 국무대신님.」

내가 부르자 국무대신이 의외라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의외라는 얼굴이었지만 시오엔은 노골

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뭘 잘못한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말했다.

「좀 레퍼토리를 바꿔보는 거 어때요?」

국무대신이 「예?」라며 나에게 되물어서 나는 다시 대답했다.

「바쁘냐,가 아니라 다른 거 있잖아요. 좋은 책이 있다,던가. 아니면 집에 놀러오라던가, 아니면 데이

트를 하자던가, 아니면……」

내 말에 국무대신이 지적했다.

「그게 안 바빠야 가능한 거 아닙니까.」

「그렇게 물어봐도 바쁘면 바쁘다고 하겠죠.」

내 말에 힘을 실듯, 시오엔도 옆에서 말했다.

「듣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 충고는 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 니타우.」

상당히 민망한 얼굴로 국무대신이 조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렇게 지겨우세요?」

나와 시오엔은 동시에 대답했다.

「네.」

「응.」

둘 다 지나치게 단호한 음성을 냈는지라 국무대신이 기가 죽은 얼굴로 「노력하겠나이다.」라고 중얼거

렸다.

「그리고 어차피 데이트 신청을 할거면 꽃이라도 주면서 해보는 거 어때요?」


내 말에 국무대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입궁하면서 꽃다발을 들고 오라 하십니까? 그 날은 제가 시녀들의 눈초리에 사망하는 날이 될겁니

다.」

왜 눈초리에 사망을 하지?

내가 잠시 멍한 사이, 국무대신은 보고를 시작했다. 그의 말투가 사무적으로 변하고, 시오엔의 표정도

‘황제의 얼굴’이 되었다. 나만 그 사이에서 멍하니 보고를 듣고 있었다. 보고는 다양했는데 시오엔이

보는 서류를 토대로 옆에서 국무대신이 설명하는 식이였다. 이런 일은 비서관이 하는 것이 아닌가, 싶

었지만 비서관의 보고를 떠올려보니 희미한 차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비서관의 보고는 사적인 것이지만 국무대신의 보고는 한없이 공적이다. 국무대신은 하렘이나 신전이나

황태자의 신변잡기를 보고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일의 영향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다. 그의 모든 보고 사

항은 국정으로 향하고 있다. 원인이 문제가 아니라 결론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건 데이비드 비서관의 보고서에 있었는데, 제가 보고드리는 편이 나은 것 같아서.」

사족일지 전제일지, 알 수 없는 말을 붙이며 국무대신이 서류를 하나 더 올려놓았다. 시오엔이 그 서류

를 팔락이며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을 죽이고 있단 말인가?」

누가?

누군지보다 더 얼굴이 찌푸려졌다. 여기에 있으면서 가면 갈수록 사람이 죽는다는 것에 무감각해지는 기

분이다. 모르는 타인이라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벌써 몇 번이나 죽을 뻔 했고,

죽는 사람도 봐왔다. 가면 갈수록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은 무거워지고, 감각은 무뎌진다. 쉽게 삶을

생각해서도 죽음을 선택해서도 안된다고 느끼지만,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게 관심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어쩌면 우울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우울해지기 싫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사옵니다.」

「이유는?」

「단순변심이옵니다.」

단순변심? 그거, 홈쇼핑에서 물건 사고 반품할 때 쓰는 단어잖아. 그걸 사람을 죽일 때 쓴단 말이야?

방금전까지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당황했다. 시오엔은 그 말에는 별 감흥을 보이지 않고 탁자위에서

손가락을 톡톡 치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가 나에게 서류를 주었다.

살인범에 대한 서류다. 봐도 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봐.」

황제의 눈이 다정했다. 그는 나에게 이 서류를 보여주는 걸까? 그러나 나는 황제의 금안이 다정함과 같

이 흥미가 반짝이는 것을 보고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 나쁜 예감. 나는 잠자코

종이를 들었다. 머뭇거리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 나는 그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처음에는 내가 글자를 잘못 읽었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내가 그 이름을 잘 못 안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는 동명이인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 세가지는 전부 의미 없는 시도에 불과했고, 나는 ‘마이

유브라데’라는 이름을 보고 잠시 굳어버렸다.

마이 유브라데.

마이라는 건 그 황태자 아닌가. 오늘도 만났었다. 오늘도 평소와 똑같이 그는 티엔이라는 미래의 비서

관이 될 소년을 데리고 행차했고, 나를 쏘아보았다. 나에게 인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심한 말도

하지 않는다. 아마 그를 무시하는 나에게 지쳐서였을 것이다.

사람을 죽이고 있어?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서류들을 넘겼다. 믿을 수가 없다. 황태자는 이번 달에만 세명을 죽였다. 이유

는 간단하다. 차를 쏟아서, 눈초리가 기분 나빠서, 마지막은……검은 머리라서. 나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

다. 새삼스럽게 아이의 증오와, 아이의 권력이 실감났다.

그러나 겨우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여?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눈앞이 어두컴컴해지는 기분이었다.

「미누.」

누군가가 나를 끌어안아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시오엔이 가볍게 흔들며 나를 다

시 불렀다.

「미누. 키미누.」

「예.」

「이런,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어.」

언제 불렀는지 어느새 다가온 시녀장이 차가운 물을 건네주었다. 그 물을 마셔도 마른 목은 적셔져도

이성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정신이 든 것은 아주 순간에 불과하고, 나는 다시 멍해졌다. 서류를

내려놓고 반대편에 있는 국무대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은 나를 우스워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눈을 깜빡이고 다시 쳐다보았다. 유난을 떤다는 듯한 태도

로 그는 시선을 탁자로 내렸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내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있는 시오엔을 쳐다

보았다.

「미안해, 이런 서류를 보여주는게 아닌데. 내가 생각이 짧았어.」

시오엔도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이상한 거라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

분이다. 맙소사, 내가 이상한거라고?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왔다. ‘내가 왜 네 아이를 키워!’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라브

만이 내 몸을 긋던 그 날카로운 검의 감촉이 갑자기 느껴졌다. 순간, 나는 황제를 밀었다. 그것은 아주

약간에 불과했지만, 황제는 내 이상을 감지한 것 같았다.

「니타우 라 크리스티.」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황제가 명령했다.

「물러가라.」
국무대신이 잠시 나를 살피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고, 그는 곧 사라졌다. 그

가 움직이는 그 시간이 숨이 막혔다.

「미누.」

시오엔이 다가왔다. 물러설 뻔한 발을 필사적인 의지로 억눌렀다. 시선을 들어 시오엔을 쳐다봐야 하는

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시오엔은 곧 죽는다,고 말했다. 골드 드래곤은 그렇게 말했다. 골드 드래곤에게 시오엔의 존재나, 마이

에게 시종들의 존재나 다 비슷한 것일까? 벌레나 인간이나, 결국 같은 생명이라는 건가.

나는 여기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어. 절대 이 세계 사람이 될 수 없을 거야.

시오엔의 입술이 다가온다. 수 백번 키스했던 그 입술을 느끼면서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새삼

스러운 다짐을 했다.

아름다운 조각들로 가득찬, 호화찬란한 천장을 보며 시오엔의 입술을 느꼈다. 몸안으로 파고드는 시오엔

의 중심은 거침이 없었다. 자꾸 몸을 말으려는 나를 지탱하며, 내 몸을 펼치며, 그렇게 내 안에 자리잡

은 시오엔이 낮게 말했다.

「너는 마이가 아니야.」

뭐?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데, 시오엔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너는 아무하고도 같지 않아.」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시오엔이 움직였다. 크게 움직여 찔러 넣는 시오엔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졌다. 사람을 심심풀이로 죽이는 황태자. 그리고 황태자의 어머니이자 자신이 안은 여자에게 버림받은

황제. 갑자기 어릴 때 읽었던 아라비안 나이트가 생각난다. 희미한 이성으로 그 기나긴 이야기의 끝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아내에게 버림받은 술탄이 하룻밤 지낸 뒤 여자들을 죽여버리는 그 잔혹한 이야기의

끝은 어떻게 되더라?

전쟁같은 사랑- 그런 가요가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 뒤를 기억해보려 애쓰고 있었다. 모든 이야기

는 어째서 가장 중요한데만 기억이 나지 않을까. 잘 두려고 숨겨둔 물건의 위치가 생각나지 않는 것처

럼.

「아……!」

내 자제의 영역을 벗어난 신음이 내 귓가에 울리고, 시오엔의 행동이 더욱 거칠어졌다. 다시 발기하는

중심을 느끼며 나는 시오엔에게 매달렸다. 내가 방금전까지 뭘 떠올리려고 애썼다는 자각이 순식간에 엷

어지고,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시오엔의 향기가 난다. 숨막히도록 매혹적인 향기. 그러나 ‘숨이 막힐 정도’의 매혹이라면- 소용이 없

는 것 아닐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어둠속이었다.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라고 생각했는데 누가 옆에 자고 있었다.

시오엔의 얼굴이 옆에 있다. 아름다운 얼굴. 아니, 잠깐.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달라.
다르다!

나는 재빨리 침대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그 움직임을 감지한 시오엔이 팔로 머리를 바치고 비스듬히 누

운 채 눈을 떴다. 역시 틀리다.

「감도 좋단 말이지.」

드래곤이 유들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굳은 목소리를 내보아도 드래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뭐가?」

「왜, 내가 그쪽과 같이 침대위에 누워있는 건데요?」

「응, 침대? 아, 침대가 좋아?」

다시 보니 드래곤과 내가 누워있었던 것은 어둠속이었다. 그것은 침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드래곤이 장

난끼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딱 치자, 드래곤의 몸 아래에 있는 어둠이 침대모양으로 솟아났

다. 시트나 배게가 어둠이라는 것을 빼면, 그 모습은 시오엔과 누워있던 시오엔의 침대와 상당히 비슷

했다.

「자, 침대도 비슷하고, 상대도 비슷하니. 시오엔 녀석하고처럼 또 하지 않겠어?」

팔을 활짝 벌리고 느글느글한 말도 잘한다.

「됐습니다.」

「어째서? 얼굴도 비슷하고, 테크닉은 내가 위일텐데.」

「시끄럽습니다.」

「이야, 차갑다. 한번 비교해봐.」

눈 앞의 드래곤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숨결이 내 귓가에서 들려왔다. 그 목에 팔을 감자 드래곤이

그 커다란 키-야오밍과 비슷하다니까-에 걸맞지 않게 나긋하게 몸을 붙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

는 바닥으로 드래곤을 메다 꽂았다.

「윽……」

바닥에 널부러진 드래곤이 볼멘 소리를 했다.

「너무하잖아. 어떤 놈에게는 다리도 벌려주더니 나한테는 이러기야.」

「시끄럽다고 했잖아요.」

「와, 이젠 완전 구박이네.」

이 자식이 진짜.

「키스해줘.」

방금, 뭐라고요?

어이가 없어서 그 낯짝을 쳐다보고 있자 드래곤이 잠시 시선을 이리 저리 헛돌리다 나를 쳐다보았다.

꽤나 애절한 얼굴이다. 그러나 그 얼굴이 시오엔의 얼굴이라서 더욱 애절한 느낌이 난다. 아, 지 아들


이 사람을 죽인다는데도 눈하나 깜짝 않는 그 냉혈한을 내가 좋아하기는 하나보다.

팔짱을 끼고 그 행태를 바라보고 있자니, 드래곤이 한 발짝 다가섰다. 생각해보면, 이 놈도 살인자였

지. 사람을 몇이나 죽였는지. 그를 비난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건 종족의 차이라는데 어쩌겠어. 그

러나 좋아지지도 않는다. 그래, 인간적으로 나는 이 드래곤이 싫다. 정이 안간다. 호의도 안 생긴다.

내가 원래 이런 놈이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정을 잘

주는 타입도 아니다. 사회적인 약자에게 약하다고는 종종 들었지만, 약자에게 약한 것과 누구를 좋아하

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

「아니면.」

드래곤이 얼굴을 숙이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이름을 물어봐줘.」

얼레?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이름이 있다’는 둥 했던 기억이 살짝 났다. 시오엔이 죽는다고 했었던 그 때.

그때는 당장이라도 이 드래곤을 만나서 시오엔이 언제쯤 죽느냐며 멱살을 잡을 생각이었는데 역시 시간

이 좀 지났는지라 많이 진정되었다. 일단은 그 예지능력이 뛰어난 것 빼고는 아주 붕어빵이라는 지단

닮은 대신님 형과 이야기를 해본 뒤에 족쳐야 할 것이니까.

「그럼, 시오엔의 남은 생을 알려줄게.」

참으로 구차하다.

그렇게까지해서 나한테 이름을 알려줘야 할 이유는 뭐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허벅지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다음, 야단맞은 소년처럼 고개를 푹 숙

이고 있는 드래곤을 쳐다보았다. 그는 진심인 것 같다.

「……이름이 뭔데요.」

조금 당황스럽다. ‘내 아이를 가져라’라고 할 때는 이 새끼가 돌았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또 열

렬 순정파 소년같으시다. 그런데 솔직히는 어느쪽이든 반갑지가 않다. 왠지 동정심을 사려는 수작같아서

기분이 더럽다.

「리안.」

「자, 이제 시오엔의 생은 얼마나 남았는데요?」

이렇게 대놓고 가여운 척 하는 인간들을 안다. 남자 중에서는 별로 못 봤지만, 여자들은 많이 봤다. 히

로인 놀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여자들. 그리고 히어로 놀이에 빠져 익사중인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남자

들. 약한 척은 강한 척하며 받아줄 인간앞에서나 해. 약하다면 강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약하다면,

스스로 극복하려고 해야지. ‘난 약해요~’라며 이러지리 픽픽 쓰러지는 인간들 따위 질색이다.

-인정한다. 약간은,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정말, 매정하군. 정말로 매정해, 그대는.」


「전 원래 매정했어요. 그래서 시오엔의 남은 생은요?」

「얼마나 남았는지는 나도 몰라.」

이 자식이 진짜 죽어볼래?

정말 이번에는 드래곤이고 나발이고 죽여버리겠다는 심정으로 한 발작 앞으로 걷는데 투덜거리면서 드래

곤이 대답했다.

「서른살까지야, 시오엔의 생은.」

서른살?

처음 만났을 때는 여름이었다. 그 때 시오엔은 스물 여덟이라고 했어. 아, 아니다. 내가 한국나이로 스

물 여덟이라고 생각한 거고 그는 스물 일곱이라고 했어. 시오엔은 사월생이라고 들었다. 이제 곧 사월

이 되는데 그는 그 때 스물 여덟이 된다. 내후년…… 겨우, 이년이 남았을 뿐이라고?

「거짓말.」

전과는 달리 더욱더 동요했다. 드래곤의 말을 확인해보고 놀라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너

무나 ‘당연한 것’같이 느껴져서 당황했다. 그의 말이 신의 계시라도 되는 것처럼!

「정말이야. 인간들은 믿지 않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는 서른살까지밖에 못 살아.」

나도 모르게 그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거짓말!」

드래곤이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호러 영화의 살인귀같은 미소였다.

「정말.」

굉장히 유쾌하다는 얼굴로 웃은 드래곤이 싱그러운 얼굴로 물었다.

「놀랐어?」

놀랐냐고? 이해할 수가 없어. 왜 여기 사람들은 이토록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있지? 이것 봐-

사람이 죽는다는 이야기라고. 숨결이 닿을 것 같이 가까운 거리에서 드래곤이 미소지었다.

「이상해, 이상하단 말이야.」

죽는다고?

「이상해, 너는 정말로 이상해. 그대는 정말로 신선하고, 너무나 이상한 사람이야. 월인이라서 그런걸

까?」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려서 무의식적으로 드래곤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가까운 그가 한손을 들어 내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대는 왜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걸까. 나는 이토록 그대에게 관심이 많은데. 그대는 왜 시오엔을 좋아

하는 걸까. 시오엔은 별

볼일 없는 놈이야. 알고 있어? 이토록 감이 좋은 그대라면, 알 듯도 한데.」

죽는다고?

「시오엔은 결국……」
죽는다고? 말도 안돼. 서른, 서른 살이라면 내후년. 내가 집에 돌아간 뒤에 그가 죽는다고! 당연하게,

너무나 당연하게 나는 내가 돌아가고 그도 잘 먹고 잘 살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하지. 사랑 좀 한다고

안 죽어.

맙소사, 그냥 죽는다고? 거기까지가 그의 삶의 전부라고?

「왜, 죽는데요?」

내 질문에 드래곤이 인상을 썼다.

「그게 중요해?」

「그거 말고 그럼 뭐가 중요한데!」

고함을 지르자 잠시 미간을 좁힌 드래곤이 물었다.

「살리고 싶어?」

이 자식, 진짜 성격 이상한 거 아냐? 당연히 살리고 싶지, 그걸 말이라고 지껄여!

내 얼굴에서 대답을 읽었는지 드래곤이 또다시 투덜거렸다.

「운명의 여신은 정말 성격이 이상한가봐. 도대체 너를 내 연인으로 지정했으면서 왜 이렇게 상황을 꼬

이게 했지? 여하간, 민후.」

드래곤이 말했다.

「민후, 시오엔은 아니야. 너는 나의 것이라고.」

「왜 죽냐고! 사람 말이 말같지가 않아? 왜 죽냐고? 왜 죽냔 말이야!」

우리는 동시에 모든 행동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눈물이 뺨으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드래곤

이 내 눈물을 보고 있다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상관 없어. 눈물이 남에게 보이는 것이 쪽팔리지만,

그건 괜찮아. 창피함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왜 죽는건데. 왜 그가, 죽어야 하는 건데. 행복해지지 않

아? 그는 여자한테 버림받고, 어머니는 그를 안 좋아했고, 사람들은 그가 죽어야 한다고 했다고 하는

데. 그는 그냥 그렇게 죽어버려? 몇 년 뒤에?

왜 그가 죽어야 하는데?

「울지 마.」

드래곤이 손가락으로 내 뺨에 흐른 눈물을 훔치더니 혀로 할짝였다.

「왜 죽는건지 말해줘요……」

나도 모르게 애원조가 튀어나왔다. 드래곤이 자신의 멱살을 잡은 내 주먹을 풀고 나를 끌어안았다.

「정말로, 그 자식이 좋은 거구나.」

「왜 죽는 건데요……」

「그 자식이 그렇게 좋은데, 나는 좋지 않은 거구나.」

「왜 죽냐니깐요……」

이상한 소리 말고 제발 말을 해줘. 죽어? 죽는다고? 갑자기 타인의 죽음들이 한꺼번에 내 일처럼 밀어

닥쳐 눈앞이 흐려졌다. 죽는다고? 왜, 도대체 왜?


등을 토닥이는 손짓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런 포옹따위는 내게 아무런 감정도 주지 못해. 작은

위로조차 되지 못해. 말을 해, 그는 왜 죽는건데?

「그냥 죽어. 시오엔에게 허락된 삶이 거기까지이니까.」

「허락된 삶?」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뭔가를 물어보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눈앞의 시오엔이 골드 드래곤

과 너무 달라서, 그 똑같은 얼굴이 틀린 것을 나는 너무 순식간에 알아챌 수 있어서, 더욱 눈물이 나왔

다.

죽어? 죽는다고?

시오엔이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향기가 느껴진다. 숨이 막히도록 매혹적인 향기. 나는 분명 잠들기 전

과유불급이라고 생각했었더랬지. 말도 안돼, 그의 향기에 내가 질식해 죽기 전에- 그가 죽을 거라고?

말도 안돼, 죽는다고?

「왜 그래? 안 좋은 꿈을 꾸기라도 한 거야?」

시오엔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무슨 꿈이었길래 그래? 나를 지켜준다더니, 영 엉망인데?」

「당신이……」

목소리가 엉망진창이었다. 약해보이는 건 질색이야. 나는 누군가를 지키고 싶고, 또 강해지고 싶어. 하

지만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들은 드래곤의 목소리는 강했다. 그 목소리에는 거짓이라

고는 한 알도 없는 것 같이 들렸다. 마치 드래곤의 입을 빌어 신이 말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죽는다는 말을 들었어.」

시오엔이 부드럽게 나를 토닥이더니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앞뒤로 요람을 흔들듯 자신의 몸을

흔들며 물었다.

「꿈에서?」

「꿈에서.」

「이런 겨우 그 정도로 이렇단 말이야?」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엄청난 말을 했다.

「총 회의가 시작되면 매일 들을텐데. 어쩌려고 그래.」

10. 과거의 덫 (1)


나는 잠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시오엔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부드럽고 상냥한 얼굴

의 시오엔이 이토록 괴기스러워보인 것은 처음이다.

「뭐?」

내 질문에 시오엔이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그런 소리라면 늘 듣는걸.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어? 마이가 빨리 황제가 되어야 이 나라가 안정될

거라는 계시가 있었다는 것을.」

그런 말이라면 들었지만, 방금 전의 이야기와는 좀 틀리잖아.

「그 때 신관들이 그랬거든. 신의 계시에 따르면 내가 오래 살아봐야 서른살이고, 그 때 죽는것보다 빨

리 죽는게 이 나라에 도움이 된다더군.」

서른살.

그 단어만이 귀에 꽂혔다. 서른살. 서른살? 그렇게 확실한 숫자가 나온단 말이야?

「그, 그 계시. 누가 받은건데요?」

다급해졌다. 혹시 다른 말도 뭐 들은게 없을까?

「기억 안나는데?」

시오엔은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대답해서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인간아, 너가 죽는다는데 넌 지금 그런

말이 나오냐.당장 멱살을 잡고 앞뒤로 흔들어주고 싶은 걸 꾹 참고 그를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

다.

「왜?」

왜? 왜라는 말이 나와요, 지금?

「죽을지도 모른다잖아요.」

내 말에 시오엔이 나를 떨어트리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걸 믿어?」

나도 다른 자가 말했더라면 한 귀로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시오엔이라면, 그래서 시오엔처럼 굴곡

이 많았더라면 그쯤은 ‘악의’로 해석하고 넘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어. 나는 드래곤의

목소리를 알고 있다. 그 절대적인 목소리를. 무신론자인 나조차도 믿게 만드는 그 목소리를.

「만약……이라는게 있잖아요.」

내 말에 시오엔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만약?」

조금 힘이 빠진 것 같은 목소리였다. 시오엔이 입술 끝을 내리며 웃었다.

「만약이라니. 세상에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대는 만약을 걱정하지?」

넌 걱정해야 할 상황이야…… 그러나 내 마음속을 알 리 없는 시오엔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나를 쳐다보


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골드 드래곤이 그러는데 너 죽는대! -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냥

말을 해버리면 좋겠지만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억울할 따름이었다.

내가 속으로 억울해하면서 가만히 있는데, 시오엔이 속삭였다.

「그리고 죽더라도 괜찮아.」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정중하게 내 손등에 키스하며 말했다.

「너를 가졌으니까.」

바보냐?

넌 이 상황에서 폼을 잡고 싶냐?

……그래 넌 잡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난 지금 네 폼 잡은 모습을 즐겨줄 상황이 못 돼. 너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빌어먹을. ‘허락된 삶이 거기까지’라고만 하면 나보러 뭘 어쩌라는거야?

아마 내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돌린 것이 화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오엔이 내 턱을 잡아 자신쪽으로

돌렸다.

「그대는 어쩌면 이토록 잔인한 것일까.」

헛소리 집어치워.

난 지금 이렇게 멜로 영화를 찍을 때가 아니라고. 서른 살에 죽는다,라. 아아, 빌어먹을. 겨우 이 작

자를 여기에 두고 집에 갈 결심이 조금 굳어졌는데 또다시 약해진다. 서른 살에 죽는다니. 진짜면 어떡

해.

아니, 생각해보면 진짜인 경우에는 더욱 집에 가야 한다. 일년 뒤에 그가 죽으면, 나보러 이곳에서 뭘

하고 지내라는 이야기야? 너를 지켜줄거라고 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상대에게서지. 죽음은 공평하

고 잔인하고 절대적인 것이라 내가 구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잖아.

내 말을 들을래야 들을 수 없는 시오엔이 한탄했다.

「달콤해졌다가 금방 차가워지고, 그리고 다시 다정해지고. 나는 가면 갈수록 그대의 진심을 알 수가

없어져.」

애절하게 그가 말해서, 조금 미안해졌다. 합방식 하자마자 요즘 태도가 불성실한 것 같기는 하다. 아

니, 그런데 여러모로 놀랄 일들이 펼쳐져서.

「미안해요.」

사과를 하자 시오엔이 이마를 마주대었다.

「알면 신경 좀 써줘. 지켜준다더니, 말뿐이었나.」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진짜로.」

날 말만 하는 남자로 만들지 마! 널 지켜줄거라는 건 진짜였어. 내 얼굴을 본 시오엔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아, 아무래도 요즘 약점 잡힌 기분이 든다니깐.


드래곤과 시오엔 사이에서 이런 저런 번민을 하느라 잠시 잊었던 ‘황태자가 살인을 한다’는 사실을 다

시 깨닫게 된 것은 검술수업에서였다. 황태자의 갈색 머리카락이 보이고, 황태자가 티엔이라는 소년을

데리고 들어오는 그 순간 갑자기 서류에서 본 이름이 생각났다.

마이 유브라데.

그렇게 쓰여있었다. 시오엔은 그저 ‘황제 시오엔’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그의 아들인 마이 황태자의 경

우에는 나라의 이름이 성이 되는 모양이었다. 마이 유브라데. 올 한달 동안 세명이나 죽인 살인자. 그

러나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황태자가 알고 있었을까? 그것을 절감할 수 있도록 알려준 자가

누가 있을까? 그의 아버지는 그를 좋아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절대 권력자가 관심없어 하는 황태자에

게 제대로 된 사람들이 붙었을리 만무하다. 그 착한 비서관조차 황태자에 대해서는 썩 감정이 좋지 못

한 모양이니까. 나만 해도 저 나이엔……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황태자의 변론을 막은 것은 시오엔의 목소리였다.

‘너는 마이가 아니야.’

나는 어쩌면 저 황태자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뭐가 어쩌면이냐. 나와 저 황태

자는 닮았다. 부모의 짐밖에 되지 못하던 나와, 역시 그런 황태자. 나 역시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고 감

정적으로는 최악인 어린시절을 보내왔다. 저 황태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너는 마이가 아니야.’

그러나 나는 저 황태자가 아니다. 시오엔의 말은 옳다. 그러나……저 황태자는 그저, 교육이 부족한 것인

지도 몰라.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은 것인지도 몰라.

모르는 상태에서라면, 그가 나쁜 것이 아니야.

뭐라고 말을 붙여볼까 했지만 할 수 없었다. 내가 황태자를 상대로 이래라 저래라라고 말할 수 있을 리

가 없지. 한숨이 나온다. 새삼스럽게 몇가지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흔들리며 잔상을 남겼다. 대부분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것들 뿐이다. 특히, 댕기머리 여자애. 그 아이에 관련된 건 정말 떠올리고 싶지

조차 않다.

분명히 후회 할텐데.

「비서관님.」

내가 비서관을 부르자 그녀가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예, 황비마마.」

「황태자가 몇 살이었죠?」

「올해 다섯 살이 되셨지요.」

그래, 그래서 한국 나이로 여섯 살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의 목숨이 뭔지나 알고 있을까?

사람이 사는 동안 얼마 만한 무게의 추억을 쌓고 있을지 저 아이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역시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나.

황태자가 목검을 들고 ‘압’하고 기합을 넣는 뒤에 가서 지켜보다 말을 걸었다.


「있잖아.」

내가 말을 건게 어지간히 의외였던 듯 황태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진짜, 시오엔은 조금도 닮지 않았

다. 혹시 시오엔의 아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설마하니 황제를 상대

로 남의 아이를 황제 아이라고 개뻥을 쳐댈 수야 없었겠지.

그래, 시오엔의 아이가 맞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목구비조차 닮지 않은 거냐. 이대로라면, 시오

엔의 상대 여성도 썩 이쁘지는 않았다는 거 아닌가? 하긴 시오엔은 나를 좋아한다. 솔직히 평범하게 생

겼는데 말이지. 혹시 이 동네의 미적 기준에서는 내가 좀 잘생긴 것이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

던 시절도 있었지만 곧 깨졌다.

「나랑 이야기 좀 안 할래?」

「너같은 거랑 내가? 어이가 없는 소리를 하는군!」

여섯 살 치고는 대단한 언변이다.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홱 돌리려던 황태자가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아, 아바마마와 관련한 이야기야? 그런거야?」

절박한 눈동자로 매달리는 아이를 보자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아니……」

「그럼? 네가 나랑 할 이야기가 아바마마 말고 또 뭐가 있어?」

금새 기력을 회복한 황태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린애라 그런지 솔직한데……무지하게 이기적

이구나. 「시간 내줄거야?」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해. 아바마마하고 상관이 없다면, 너같은 거랑 이야기할 이유 없어.」

이이. 이 어찌나 솔직한 아이인지! 뒤통수를 한 대 갈겨주었으면 좋겠네. 손바닥이 근질 근질해지려는

걸 참고 나는 용건을 꺼냈다.

「너, 애꿎은 사람들을 죽인다며?」

너무 직접적으로 꺼낸 것인지 아이의 동그란 눈이 찌그러졌다.

「뭐?」

「사람을 죽인다며.」

「-마치 살인자처럼 말하지 마.」

황태자가 불쾌하다는 듯이 일갈하고 말했다.

「겨우 노예 두 마리와 시종 한명이었을 뿐이야. 시종은 귀족도 아니었고.」

두 마리?

너, 방금 뭐라고 했니? 두 마리?

내 얼굴이 완전히 굳어진 것을 본 황태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천진해야 할 어린 얼굴에 담긴 비웃음은

기가 막힐 정도로 썩어있었다.

「이제야 내가 무서운 존재라는 걸 깨달았나보지?」

두 마리?
이상하게도, 나는 황태자를 때리지조차 못했다. 저런 놈은 두들겨패서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고, 황

태자고 뭐고 사정 봐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움직이지조차 못했다. 사람이, 단지 노예라는

이유만으로 ‘마리’라고 말했다. 그렇게 세었다. 사람을, 마치 동물 취급 했다.

그런 황태자를 향해 눈살을 찌푸린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내가 이상한 사람인 것 같이 느껴졌다.

이 곳에는 강자의 권리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힘만이 모든 것인 것 마냥.

황태자의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등을 돌리는 것 뿐이었다. 내 안색이 어지간히 이상했는지 따라

오던 비서관이 물었다.

「마마, 심기가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불편한 일은 많은데, 불편해하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들 아무렇지도 않다. 사람을 죽이는

여섯 살짜리가 아무렇지도 않다니. 맙소사. 사람을 ‘두 마리’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정말 이게 아무 일

도 아니야? 내가 왜 이렇게 충격받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거야? 내가 이상한거야?

뭔가,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기분이 번뜩 들었다. 삼년뒤, 아니 이년 뒤. 이년 뒤에는 돌

아가면 돼. 그 전에는 연애를 하고. 그동안은 저 아름다운 남자를 지키고. - 자기 멋대로라는 거 알지

만, 이게 나의 최선이니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정말 나는 이곳에서 이년이나 버틸 수 있어? 정말로?

그동안 너무 내 편할대로 생각한 게 아니고?

「미누?」

눈치코치 없는 황제는 오늘도 돌아오자마자 진한 키스를 했다. 도망칠까?

누군가는 나에게 비겁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실은, 나 자신도 내가 비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는 당연히 황태자에게 ‘쓴 맛’을 보여주는 교육을 통해서 인성을 바로 잡고, 시오엔에게도 아들 교육

바로 시키라고 화를 내야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타입이 아니다.

귀찮은 일이 질색이기도 하고.

게다가 황태자가 아이이기는 해도 나와 다르다는 시오엔의 말은 옳은데다, 그 삐뚤어진 관념은 이 동네

의 가치관 - 내가 뭐라고 손댈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 무엇보다도.

황태자는 아이이지만 약자는 아니다. - 그 순간 내 관심은 엶어져버렸다. 그가 약한 것은 아버지와 아

들 관계에서만이야. 특별히 약자라고 할 수는 없다고.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새삼 ‘계약서는 확실하게 읽고 서명해야 한다’는 구절이 떠오른다. 그런 계약따

위 하는 게 아니였다. 나는 도망치면 죽는다. 이건 황제의 문제가 아니고 그냥 죽게 되는 것이다. 도망

칠 수 없어,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헛짓이라고 되뇌이면서도 나는 다시 황제의 서재에 틀어박혔다.

계약파기에 대한 문건들을 찾아보았다. 전체적으로 계약파기의 조건은 세가지다.

첫째. 둘 다에게 계약을 파기할 마음이 있을 것. - 이런 경우 어떤 절차를 거치면 자동 해제된다.


둘째. 한 쪽의 의식이 불명하여, 의사표시를 할 수 없을 것. - 이런 경우까지 상정한 계약이 아닌 경

우 역시 어떤 절차와 신관의 참석 아래에 해제할 수 있다.

셋째. 계약의 내용이 한쪽에게 불리하여, 조건이 맞지 않는 경우. - 불리한 쪽이 계약을 보호하는 신이

아닌 그 윗대의 신에게 호소하여 해제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고등신관이상의 자가 참석하여야 하며

몇 가지 새로운 조건들이 있다.

일단 첫 번째는 무리. 두 번째도 내가 국무대신을 때려 죽이기라도 하지 않는 한 무리. 그런 비벼볼 때

는 세 번째인데, 세 번째는 뭔 말인지 잘 모르겠다.

한쪽이 불리하다. - 이런 경우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지 않나. 불리하다,는 건 사람마다 다르니

까. 계약을 보호하는 신이 아닌 그 윗대의 신이라. 이게 뭘까?

신의 계보가 적힌 문건을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찾을 수가 없다.

서재를 지나치게 어지럽혀서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 볼 거 같으니 대충 아래쪽에 쑤

셔박았다. 어차피 이 서재에는 나밖에 드나드는 사람이 없으니까.

도망을 갈 수 있는 방법을 일단 확보해두자,는 것이지만. 그러자니 또 걸리는 것이 있다. 시오엔은 누

가 지키지? 그는 서른살에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그걸 한 귀로 흘려듣는 시오엔과는 달리 나는 그것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아 이러자니 저쪽이, 저러자니 이쪽이.

걸리는 것 투성이다.

이런 생각들로 며칠을 지냈다. 신의 계보가 적힌 책을 찾아냈지만 절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가장 윗대의

신은 레와 데. 그 신들이 나와 국무대신의 계약을 보호하고 있으니 소용없을 것이다. 레와 데의 보호를

받으려면 그 자신이 대신관이던가 아니면 대신관의 피를 진하게 타고나야 가능하다던데, 국무대신의 형

은 (스캔들로 파문당했을지언정) 상당히 유능한 신관이었나보다.

빌어먹을. 약속은 어기라고 있는 건데! - 라고 억지를 스스로에게 부려봐도 소용 없다.

시간은 빨리 흘러, 또다시 하렘 누님들과 오찬 시간이었다. 밥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아서 깨작대고 있

는데, 뭔가가 숟가락 위로 올라왔다.

「어?」

고개를 들었더니 그 여자다. 이름이……이름이이이……

「살모사 누님.」

「크리모사입니다!」
도끼눈을 뜨고 소리를 지르는 통에 긴장해버렸다.

「죄송합니다.」

「어서 드세요. 오늘은 아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겝니까?」

이렇게 말하며 그 누나는 재빨리 내 앞으로 음식을 옮겨주었다.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 뿐이라 당황

했다. 나 싫어하는 거 아니였어? 혹시, 날 갈구려고 그동안 주의깊게 날 본건가? 이 여자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무섭다, 이 여자. 지금 왠지 내가 좋아하는 음식만 주고 있지만, 사실은 싫어하는 음식만 주려

고 날 관찰한 걸지도 몰라. 이 멤버만으로도 체할 것 같은데 싫은 음식만 먹다니. 울고 싶을 것이다.

「아, 좀.」

「뭐가 불쾌하신 건데요?」

크리모사 누나는 그 와중에도 내 숟가락에 버섯요리 비슷한 것을 얹어주었다.

「그게……」

황태자 건이라 이야기하기는 곤란하지. 한숨이 나왔다. 한숨을 쉬니 크리모사가 또 도끼눈을 했다.

「상 위에서 한숨이라니요! 그러고도 제국의 황비님이십니까? 허리도 펴시고요!」

교관이 따로 없다. 어쩔 수 없이 허리를 펴고 밥을 먹었다. 아니 도대체 왜 이래? 이건 싫어한다기 보

다는 호의어린 제스처다. 그렇기는 한데……아주 솔직해져서 차라리 싫어하는 편이 낫겠다. 생각할 게 많

다구. 귀찮단 말이야.

이 누님, 상당히 무서운 분인듯. 이제까지 이 누님의 뒤에서 참새떼처럼 나를 씹던 여자들이 한없이 조

용하다. 침묵속에서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혹시 시오엔이 뒤에서 뭐라고 쪼기라도

한 걸까?

「내가 먹어도 괜찮아요.」

내 말에 크리모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마음대로 하사와요!」

그리고 보여지는 뒷모습이 굉장히 빠르게 사라져간다. 뭐야, 뛰고 있는거야? 엉거주춤 일어났다가 다시

앉자 여자들의 눈초리가 한없이 사납다. 나 뭘 잘못한건데? 으아, 싫다. 여자들의 한은 무섭고 질기다

고. 아니, 질긴면이 무서울지도 모르지만 여하간 몇 대 맞는 걸로는 절대로 안 끝나잖아. 다른 누나들

도 일어서더니 「다음 주에 뵙겠사옵니다.」라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화살을 날리듯 쏘아붙이고는, 사라

져버렸다. 빈 식탁에 홀로 앉아 있다가 될되로 돼라는 심정이 되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렘의 누나들과 하는 오찬은 질색이지만, 야외에서 식사를 하는 이 순간은 순수하게 좋다. 멋진 하늘

도, 아름다운 정원도 무척 좋다. 아름다운 정자위에서 잘 꾸며진 정원을 보는 것도 좋고, 노루같은 작

은 동물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도 예쁘다. 서울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사치겠지.

「비 마마, 노여워하셔도 됩니다.」

시녀장이 분개하며 말해서 놀라웠다. 아니 별로 화나지 않았는데요. 뭐 누나들이 이 정도로 심술내는

걸로 화를 낼 만큼 어리지는 않다. 무엇보다 다들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음험한 사람들도 아니고. 내


식사에 독을 넣거나, 사람을 사주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잖아. 황태자는 노예든 뭐든 간에 사람을 한 마

리, 두 마리 이렇게 세는데에 비하면 이건 귀엽지.

「맞아요, 마마. 공녀들에게 한마디 하세요!」

「따끔히 혼내셔야 합니다.」

저 누나를 상대로 나보러 말로 싸우라고요? 농담이시죠?

의자를 불안정하게 흔들며 고개를 넘겨 뒤를 보자 시녀장 이하 시녀누나들 일동이 분노 게이지 일백퍼센

트 충전된 상태의 오오라를 내뿜고 있다. 이상하구나. 그 옆에서 비서관조차 화를 내는 걸 보고 있자니

정말 기분이 묘해진다. 이상하고, 이상하다. 어째서 당신들은 화를 내야 할 일에 침묵하고 이런 사소한

일에 화를 내는 걸까.

내가 이방인임을 절실하게 느끼게 한다. 황태자일에 대한 보고를 한 뒤의 국무대신의 시선에서도 그런

것들이 느껴진다. 내가 약하다,라고 느끼는 국무대신의 눈빛. 그리고 그가 잔혹하다고 생각하는 나. 시

오엔은 이 세계의 중심. 최고 권력자. 아마도, 저 국무대신보다 몇배는 더 잔인하겠지.

나는 여기에 익숙해질 수 없을 거야.

「왜요?」

왜 당신들은 그 여자들을 비난하고 있는 거야. 그 여자들은 나름대로 힘들잖아. 차라리 그 정도는 이해

타당한 선 아닌가. 당신들이 비난해야 하는 건 황태자 아니야? 그 아이가 황태자이기 때문에 비난할 수

없는 건가?

알고 있다, 지금 내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아무도 황태자를 비난할 수는 없겠

지. 황태자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사람, 그의 부모뿐이겠지만 그의 부모중 한 명은 죽었고 한

명은 아이에게 관심이 없다.

「예?」

「왜 공녀 누나들에게 화를 내라고 하냐고요.」

‘당연히 화가 나야 정상 아니야.’라는 얼굴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황제의 궁으로 돌

아오는 내내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지구에는 이제 아프리카에나 존재할 것 같은 아름다운 하늘.

그리고 그 하늘보다 아름다운 남자를 떠올렸다. 이상하지? 나는 당신을 정말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도,

이 순간 당신이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가 없어. 당신이 이토록 먼 것은 당신이 황제라서는 아니겠지.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야. 당신이 나를 아무리 좋아해도, 나는 당신을 그렇게까지 좋아할 수는 없나봐.

당신의 나라, 당신의 아이, 당신의 신하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들.

「우울해?」

당황했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누군가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는 시오엔과 착각하지 않는, 드래곤

이었다. 드래곤이 들어오는데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를 스쳐지나간다. 시녀장은 아

무도 없는 듯, 염려가 가득한 눈길로 나를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드래곤이 내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우울하냐고?」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드래곤이 싱긋 웃었다. 그 웃음과 함께 누군가가 ‘마마!’라고 부르는 소리

가 났다. 그 절박한 목소리.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누군가가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 목소리가 시녀장의 것이라는 걸 깨닫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너를 부르고 있군. 볼래?

드래곤이 손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갑자기 의자채로 쓰러진 나와, 나를 부축한 채 의원을 부르라고 소

리치는 시녀장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하고 나는 두리번거렸다. 이 어둠은 익숙한 곳이다.

나의 꿈 속.

-현실에서 만나도 아는체 안하잖아. 역시 밀회가 좋은건가?

-현실의 저는 지금 뭘하고 있는건데요?

-쓰러졌어.

그게 그렇게 발랄하게 대답할 이야기야?

그러나 드래곤은 유쾌해보였다. 그래……시오엔. 나는 당신을 닮은, 당신 나라의 수호신도 이해가 안 가.

이해할 수 없어. 종족 차이니 뭐니 하면서 쿨한 척 이해해보려 해도 이게 한계야. 사람의 목숨을 개미

다루듯 하고, 시체 위에 사람을 눕히고 ‘아이를 가져라’라고 하는 용따위 이해할 수 없어.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누웠다.

-졸려? 외로워? 우울해?

어둠은 어디가 바닥이고 어디가 공간인지 모르겠다. 드래곤은 내가 누운 아래쪽에 앉아 자연스럽게 내

머리를 그의 허벅지 위로 올렸다.

-말을 해봐.

-왜 자꾸 오고 그래요?

내 말에 드래곤이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으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네가 보고 싶으니까.

지쳐서 아무렇게나 중얼거렸다.

-난 별로 안 보고 싶은데.

아무렇게나 한 소리인데 너무나 진심이어서, 조금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내 말에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

였다.

-응, 내가 너라도 그럴 것 같아.

-혹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아름다운 얼굴. 시오엔과 묘하게 다르지만, 그래서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그

는 시오엔보다 약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은 엄청나게 강하겠지. 드래곤이니까.

-혹시 금발에 금안을 가진 자들은, 검은 머리카락에 매력을 느끼는 건가요?

드래곤은 누군가를 떠올렸는지 인상까지 쓰며 대답했다.


-아니.

그리고 그가 물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게 고작 검은 머리여서라고 생각한거야?

찔려서 아무 말 못하고 있는데, 드래곤이 내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겼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 정해져 있는 일이기 때문이야. 네가 어떤 사람이든, 네가 무

엇을 했든, 네 머리카락이 검든 금색이든 그런거와는 상관없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라. 결국 누구든 상관없다, 아닌가.

아아 모르겠다. 지쳤어. 시오엔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린 너무나 다른 사람이라는 걸 느낀다. 그

가 서른살에 죽든 말든 나는 내 갈길을……

맞다, 서른살!

-용형님.

드래곤이 기분 좋은 얼굴로 대답했다.

-제정신으로도 그렇게 부르는군. 리안이야, 리안으로 좋아.

-좋아, 리안형님.

‘형님’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건 동서고금 범우주적인 남자의 성향인 모양이다. 리안이 마치 시오엔처

럼 눈을 접으며 웃었다.

-응.

-시오엔은 왜 죽어요?

-생이 다해서.

계속 같은 말. 같은 자리.

-나는 언제 죽어요?

드래곤은 대단하구나. 상대가 언제 죽는지도 다 알고. 나는 언제 죽게 될까. 죽음이 신비롭기 때문에

삶이 치열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별로 신비롭지 않구나.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휘장을 들추

듯 죽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말에 드래곤이 눈을 깜빡였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 아냐? ……위화감을 느꼈다. 너무나 당연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드래곤에게서.

-몰라요?

내 말에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다고? 그런데 시오엔이 죽는지는 어떻게 알아요? 아, 내가 월인이라서, 모르는건가?

눈을 감았다. 피곤해. 이런 저런 신경쓰는 것도 피곤하고, 여기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실감하게 되는

것도 피곤하고, 아이의 잘못에 어린시절의 과오를 대입하는 것도 피곤하고, 전부 다 피곤해.

전부 다.
그냥 이대로 잠들었으면 좋겠어, 이 꿈 속에서.

-죽음은 신의 영역. 드래곤이라고 해도 알 수 없는 것이잖아.

위화감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입을 벌리고 나타났다. 나는 벌떡 일어나 드래곤의 코앞에서 추궁했다.

-드래곤이라도 알 수 없다고? 그런데 시오엔의 생이 다하는 게 언제인지는 어떻게 알아요?

드래곤이 난처한 얼굴을 잠시 했다가 금새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세. 어떻게 알까?

-씨발, 장난 치지 말고!

멱살을 잡으려고 손을 뻗는데 두 손을 전부 잡혔다. 드래곤이 내 두손을 잡고 자신의 어깨 뒤로 빼 몸

이 끌려오게 하면서 물었다.

-너는 왜 시오엔을 좋아하지? 그가 황제라서?

-아니야.

-그럼 왜?

그의 말에 생각해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가 다정해서? 그가 친절해서? 그가 나에게 잘해주어서? 아

니,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그가 나를 좋아해서? - 그런것들은 그저 이유의 한 부분. 내가 그를 좋아

하게 된 계기가 뭔지는 전혀 모르겠다.

-모르겠어요.

내 대답에 드래곤이 잠시 내 눈을 들여다보다 나를 놓아주었다.

-그대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군.

그리고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차라리 거짓이 나을 때가 있는 법인데.

-시오엔 이야기 마저 해주세요. 시오엔이 언제 죽는지 어떻게 알아요? 죽음은 신의 영역이라면서.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볼게.

드래곤이 슬픈 얼굴을 했다. 애틋하고 안타깝기는 한데 그 이상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시오엔이 이

런 얼굴을 했다면 무척 애절할거야. 그래서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질거야. 끌어안고 괜찮다고 속삭이고

괜찮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감수하겠지.

그러나 드래곤의 얼굴은 -분명히 같은 얼굴인데도- 그저 가여울 따름이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

는 것처럼.

-그대가 나를 좋아하게 될 가능성은 없나? 지금 그대의 마음속에서 말이지.

정말로 드래곤은 나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어 민망해졌다. 하지만 민망한 건

민망한거고, 대답은 딱부러지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능하다면, 대답은 확실하게 하는 편이 낫다.

‘희망고문’이라는 단어도 있으니까.

-없어요.

내 말에 드래곤이 나른하게 되물었다.


-절대로?

-절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드래곤이 시선을 돌릴 때까지 쳐다보자, 그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는 잠시 엄지

손가락으로 다른 손가락들을 하나씩 만지며 무언가 숫자를 세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가 다시 물었

다.

-시오엔이 싫어진다면, 그 때는 내가 좋아지지 않을까?

-시오엔이 싫어지면 더 싫어지겠죠. 얼굴이 똑같잖아요.

-좋아, 기대해보지.

드래곤이 흐려진다. 내가 거부한 걸까?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대가 어떤 결정을 할지, 정말 기대해볼만하겠어.

나는 어둠 속에 혼자 있었다. 어떻게 하면 깰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깨고 싶지가 않다. 시오엔이 서른

살에 죽는다는 것도 싫고, 그 확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황태자는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모

르겠다. 가장 모르겠는건,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데에 비해 나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이다.

아까 드래곤이 손을 내밀어 보여줬던 곳에서는 여전히 내 주변 풍경이 보이고 있다. 시오엔이 달려온

듯 하다.

‘의원!’

시오엔이 고함을 치자마자 얍삽해보이는 의원이 무릎을 꿇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이번엔 무슨 일이지?’

‘혹시 또 그 약을……’

옆에서 시녀장도 묻고 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시녀장 아주머니 참 좋은 분이란 말이지. 사실 황제

옆에서 저렇게 말 끊으면 안될텐데, 너무 걱정된 나머지 물어본 것이다. 하긴 상대가 시오엔이니 가능

했겠지. 나도 잘은 모르지만, 저 황제가 좀 특이한 인물이라는 건 알겠으니까.

‘아닙니다. 그게……비 마마께서는 그저 잠 들어계신것 뿐이옵니다.’

말을 듣자 마자 시오엔이 나를 일으켰다. 윽, 어둠이 출렁거린다. 혹시 여기 꿈 속이 아니고 내 뱃속

아니야? 배라면 어디? 대장은 아니겠지, 설마. 아아아아 어디선가 향기롭지 못한 냄새가 날 것만 같아.

‘미누? 미누! 일어나보아라, 미누!’

엄청나게 흔들렸다. 지진이 따로 없다. 윽, 흔들지 좀 말아봐! 도리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알았

어, 일어날게. 일어나면 될 거 아니야.

얼이 빠진채로 눈을 뜨자 시오엔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솔직히 같은 남자에게 안기는 것이 조금 쪽

팔린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뻔히 아는 사람들 앞에서는 더욱. 이것 좀 놓으면 안될까 싶어 그 품에

서 벗어나려고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시오엔이 더욱 힘주어서 끌어안는 바람에 꼴사납게 기침까지 할 뻔

했다.
「괜찮은건가? 의원, 진찰을!」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그럭저럭 몇 달 만에 보는거 같네. 의원의 얼굴에 ‘사고뭉치’라고 쓰인 것 같아

상당 민망했다. 생각해보면 저 아저씨는 날 볼때마다 진찰하러 왔었구나. 하긴, 의원인데 진찰이 아니

면 뭐하러 보겠어. 볼 일이 없지.

「실례하겠습니다.」

의원도 내 몸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시오엔이 초조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나는 민망해졌다. 사실

은 만사 귀찮아서 어둠속에서 미적거렸다는 걸 알면 나한테만은 다정한 저 시오엔도 화를 내겠지?

‘아무 이상 없습니다’라는 말을 예상하면서 몸을 맡겼는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비 마마, 요즘 어떠십니까?」

누구라도 이 타이밍에서 의원이 저런 질문을 하면,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할 것이다. 여유작작하게 있

던 나는 눈을 좀 크게 뜬 정도였지만, 초조해하던 시오엔은 의원을 거의 잡아먹을 시선을 하고 있었다.

이와중에 팔을 걷어부치고 고개를 삐딱하게 숙인채 목선을 드러내보인 저 남자가 섹시하다고 생각하다

니. 나도 정말 제대로 된 놈은 아닌가보다.

「뭐,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심장이 아프시다던가……?」

「전혀요.」

의원이 내 얼굴을 보고,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미소가 더욱 불길해졌다.

「일단, 안색은 좋으시군요. 다행입니다.」

마치 암환자를 대하는 듯한 태…… 담배를 좀 피기는 했었는데 설마 그 정도로 폐암은 아닐테고. 아니,

그럴 리가 없지. 폐암과 심장이 무슨 상관이람.

나와 시선이 마주친 의원이 역시 웃는 채로 말했다.

「그럼 괜찮습니다.」

그리고 의원과 시오엔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그 잠깐이 내 몸상태에 뭔가 이상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의원과 시녀장, 시녀들이 물러가고 둘만 되자 시오엔은 부드럽게 웃었다. 꿈결 같은 미소

뒤에 꿍꿍이가 있어보이는 것은 결코 내 기분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추궁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다. 시오엔은 나를 다시 한번 끌어안았는데, 힘을 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아주 가벼운 포옹이었다. 그의 안스러운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마음 한쪽은 뭉클했고

다른 한쪽은 간지러웠다. 아 이 남자는 잔인한데다 잘났는데 왜 이렇게 사사건건 절절한거야.

좀 안겨있다가, 포옹이 길어지는 바람에 팔을 들어 같이 껴안았다. 그러자 힘이 조금 더 가해진다. 차

라리 아픈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도망치려 했다는 것을 알면 너는 또 길길이 날뛰겠지? 이번에야말로 날 죽이려고 할까?


시오엔을 좋아하지만, 시오엔과 함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기분은, 종종 괜찮다가도 다시 튀어나

오겠지.

「일단 쉬고 있어. 못 끝낸 일이 있어서.」

시오엔이 다정하게 나를 눕혀주었다. 그리고 손의 마디가 확연히 보이는 예쁜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자고 있어.」

날 재우고 의원에게 결과를 들으러 가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내가 잠들었

다고 시오엔이 생각할 때까지. 나는 내가 잠들었다는 확신이 들면 시오엔이 바로 등을 돌려 나가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내 옆에서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눈이 보이지 않는 자가 만져서

상대를 인식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끈질긴 손놀림이었다.

그러다 정말 잠이 들어버렸다.

어떤 꿈도 꾸지 않고, 푹 잠들었다. 때때로 어디서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한 것도 같은데 그게 현실인지

꿈속인지 알 수가 없다.

기억나는 것은 한 마디.

‘그렇게는 안돼.’

아주 낯익은 목소리가 낯선 차가움을 뱉듯 하는 말. 누구 목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잠에서 깨서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운동이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몸을 움직이면 뭔가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리고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내가 뭔가를 하

고 있다는 흐믓함과 나는 전진하고 있다는 안도감이 든다.

팔굽혀펴기를 하면서 생각해보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황태자에게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할 것이다.

사람이 기껏 마음을 먹었는데……시오엔은 당분간 운동하지 말라며 내게 약속을 요구했다. 절대로 운동을

해서도, 과로를 해서도 안된다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몇가지 주어진 일 외에는 탱자탱자 놀기 바쁜 내

가 무슨 과로냐, 과로는. 그러나 그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있어서 나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그동안 사람을 죽이지 않기를 빌어야지.

시오엔이 서른살에 죽는다고 한 드래곤도 요 며칠 전혀 보이지 않는다. 죽음은 신의 영역. 그런데 어떻

게 시오엔이 죽는지 아는 걸까? 혹시 그도 계시를 받은 걸까? 그렇다면 신관의 계시는 맞는 건가? 아니

면 그도 잘못 해석한걸까? 계시라는 건, 예언이라는 건 해석의 문제인걸까? 너무나 당연하게 그냥 보이

는 걸까?

아니야…… 그 목소리는 ‘절대’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신도 믿지 않고, ‘절대’도 없다고 생각했지


만 지금만큼은 절대가 있다고 믿어. 그 목소리만은 진실이라고 생각해.

시녀장도, 시녀누나들도, 비서관까지 사람을 환자 취급하고 있다. 덕분에 침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조

차 잔소리를 듣는 실정이다. 아아 누워있는건 따분하다고.

황태자를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말이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기 싫고, 나른하다. 혹시 또 이상한 거 먹인건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정신

상태는 멀쩡하다. 눈을 감자, 곧 잠이 들었다.

여자애였다. 댕기머리를 한 여자애. 팔에는 깁스를 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생각이 안나도 저 얼굴만

큼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잊을 수가 없다.

‘야, 미안해. 이제 좀 풀어라.’

나도 그대로다. 내 어린시절 그대로, 나는 여자애의 어깨를 가볍게 칠 생각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순

간 여자애가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 겨우 한걸음 차이의 거리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멀게 느껴졌다.

‘야, 미안하다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다시 한걸음 앞으로 가자, 여자애는 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나는 여자애를 쳐다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가슴에 안고서.

그리고 여자애가 말한다.

‘너같은 거 정말 싫어. 다시는 너랑 안 놀아. 평생 널 싫어할거야!’

나는 당황한 얼굴로 멍청하게 서 있다가, 조그맣게 발음해보았다.

‘평생?’

‘꺼져, 죽어버려! 엄마!’

마치 내가 귀신이라도 되는 것 같은 태도로, 엄마를 부르며 여자애는 달려갔다.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째서, 어째서 그러는거야.

미안해, 라고 말하고 싶어도 이미 그녀는 내 앞에 없다. 그녀는 평생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 절대로 돌

이킬 수 없는 과거의 잘못은, 그 곳에 그대로 남아있다. 낙인처럼.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드래곤이 물었다. 어깨동무를 하고 내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대고. 어느새 나왔는지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나는 이미 어둠속으로 사라진 여자애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지만, 찾지 못했다. 한숨이 나왔다.

-벌써 세 번째 보는 것 같은데. 저 여자애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소리를 들어?

나는 그에게서 떨어져, 내 심장에 손을 대보았다. 실제로 심장은 평소보다 심하게 뛰고 있지 않은데도,

내 몸속의 심장은 날뛰는 것 같이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내 가슴을 헤집어 심장에 직접 손을 댄 것 아

픔이 느껴져 나는 눈을 감았다.

황태자를 말려야 해. 말려야 해, 말려야 해.

드래곤이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깨리라고 생각했는데 드래곤이 나
를 끌어안았다. 사내놈끼리 스킨쉽이라니, 징그러워서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데도 드래곤의 힘은 강했다.

하긴 키가 나보다 몇센치가 큰 거냐.

-안돼. 나는 이제 너에게 휘둘려서 사라지지는 않을 거야.

그 말에 안긴채로 드래곤을 돌아보자 드래곤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강조했다.

-이제, 나는 결심했어.

-무슨 결심이신데요?

-너에게 내 아이를 가지게 하겠다고.

이 자식이 귀가 먹었나!

-내가 수간이라고 했잖아! 아, 진짜. 호모만으로도 용량초과야, 시끄러.

형님 대우를 좀 해주려고 하면 헛소리를 지껄여대니, 대우를 해줄 수가 없다, 도대체가! 드래곤을 팔꿈

치로 찍자 드래곤이 반사적으로 피하려고 하면서 내 몸을 놓았다. 그 사이에 빠져나온 나를 쳐다보며

드래곤이 말했다.

-네가 내 아이를 가졌을 때의 표정이 궁금해.

변태다.

이 놈은 정말 변태야. 황제처럼 잔인한 것도 아니고, 국무대신처럼 바람둥이인것도 아니다. 이 놈은 그

냥 변태다. 변태, 치한은 때려 죽이는 것이 제일!

내 표정을 나는 볼 수 없었지만, 아마 ‘때려죽이자!’라는 것이 드러났는지 드래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자, 잠깐.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지 않을테니 내 말좀 들어봐.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되는데.

오랜만에 손가락 관절을 꺾었더니 심상치않은 소리가 난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동안 너무 편하게 살아

주었구나. 서울에서야 당연히 한달에 한번은 쌈질이었고, 여기 와서도 도망치니 잡히니 하면서 긴장하고

살았는데 반년동안은 평화로웠다. 반년치의 힘을 몰아서 패주지.

드래곤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가 날 이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난 드래곤이야. 무지 잘난 놈이지!’라고 쓰여있는 저 얼굴을 두들겨 패고 싶다. 어둠속을 한발작 물러

설때마다 드래곤의 금발이 찰랑거렸다. 그러고보니 드래곤의 금발은 직모이다. 시오엔의 금발은 반곱슬

인데. 보면볼수록, 시오엔쪽이 좀 더 화려하다. 시오엔을 보다 드래곤을 보면, 같은 얼굴인데도 어딘가

추레하다는 기분이 들어.

……나, 진짜 얼굴을 밝히나……? 시오엔을 생각하면 그가 아름답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왠지 그래서

좋아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어. 처음 봤을때부터 예쁘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아 미모에 넘

어간 것인가. 나름대로 인기도 있었고, 사귀자는 여자 다 뿌리치고 남자를 사귀는데, 결국은 미모에 넘

어간 것이라니. 기구하다고 할지, 내 자신이 웃기다고 해야 할지.


-넌 절대로 나 못 이겨.

그러면서 뒤로 왜 물러나시나?

-어차피 누구에게나 목숨은 하나잖아. 죽기살기로 덤비면 이기게 되어있어요.

내 말에 드래곤이 피식 웃었다.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이 웃으며 그가 두 손을 들었다.

-마음대로 해봐. 그대, 그런데. 그거 하나만 알아줘.

뭘, 알아둬? 변태들은 꼭 말이 많아요.

-드래곤은 영생의 생물이라는 것을.

영생? 긴 삶?

-얼마나 오래사는데요?

-늙어서 죽은 동료는 단 한 마리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걸.

힘이 빠졌다. 뭐 늙어서 죽은 동료는 없다,는 것은 다른 이유로 죽은 동료는 있다는 뜻이 되고. 그러니

까 패죽일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냥 긴장이 풀렸다. 하긴, 변태도 살아야지. 바퀴벌레에도 생명이

있고, 변태에게도 생명이 있고. 생명은 귀한 것이지.

일단 저 용 새끼가 나한테 반드시 변태짓을 한 건 아니고. 변태여도 변태짓을 안한다면 괜찮아. ……일단

은.

-뭐, 관두죠.

-왜?

-일단은 날 겁탈한 것도 아니고.

-할지도 몰라.

이 자식이 진짜 사람을 가지고 노나!

-그렇게 쳐다봐도, 할지도 모르는건 할지도 모르는거야. 날 너무 신사적으로 보지 말라고.

착각도 유분수. 그저 기가 막혀서 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상당히 띠껍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표정을 바꿀 기분은 들지 않았다.

너는 내 마음속에서 변태로 결론 났어. 신사는 무슨 얼어죽을 신사.

-별로 신사적으로 안 봐요.

내 목소리에 질린티가 너무 났는지 드래곤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넌 나를 너무 믿고 있잖아.

-안 믿는데요? 저 그쪽 하나도 안 믿어요.

-아니, 그게 아니고.

드래곤은 말하기 어려운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가 말하는 건, 그대가 나를 이성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야.

-우린 동성이야!

이거, 바보잖아. 바보에 변태. 최악이다.


아 진심으로 반응한게 억울할 지경이다. 고함을 친 내가 의외인지 어리둥절하게 있는 드래곤을 두고 나

는 등을 돌리려 했다.

-자, 잠깐.

드래곤이 나를 부르는 사이, 갑자기 그가 흐려졌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문채 사라져간다.

그 불만스러운 입가를 쳐다보다 갑자기 금색눈이 보여서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시오엔이 나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다. 늘 걱정만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해졌다. 그를 끌어안자, 그

의 체온이 전해져온다.

댕기머리 여자애는 말했다. ‘너랑 다시는 안 놀아.’ 그 말은 진심이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

과거의 잘못은 시간이 흐를수록 고칠 수 없게 된다. 나중에 크면, 황태자도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서

놀라게 될거야. 무서워할거야. 그 죄의 대가를 감당할 수 없을거야.

「황태자.」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 말이 헛 나왔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했다.

「마이 황태자를 만나게 해주세요.」

황태자를 만나러 가서, 말해주자. 내 이야기를 해주자. 그래, 걔가 반성하든 말든은 걔 문제. 일단 나

는 말해주자. 그것이 나의 도리. ……형.으로서는 아니고 여하간 도리같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안돼.」

죄송한데 다시 한번?

나는 당연히 시오엔이 허락할 줄 알았다. 그러나 시오엔은 단 한마디로 거절했다.

「안돼.」

「왜요?」

「싫으니까.」

이것이 이유의 다였다. 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시오엔이 입술을 겹쳤다. 나도 모르게 평소처럼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시선에 놀랐다. 그리고 뜨거운 입술에 또 놀랐

다. 저런 눈으로 이런 키스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정열적인 키스와는 달리 눈은 무척이

나 차갑다. 왠지, 자신이 어리다고 실감했다.

시오엔은 여전히 다정했고, 정말로 좋은 사람이지만, 때때로 완고하다. 가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

꼈던 것 같은데, 이번이 그러했다. 그는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싫으니까 가지 마라’라고 나에게 말한

상태였다. 왜 싫은지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냥 싫다,가 이유의 전부였다.

「이제까지는 아무 말 안했었잖아요!」

사흘동안 왜 싫냐,를 캐묻던 내 인내심은 사흘만에 바닥이 났다.

「그랬었지.」

밤에는 쓰러질 때까지 섹스하고 아침에는 ‘왜 싫냐’와 ‘그냥 싫다’의 의미 없는 공방전을 하던 사흘.
시오엔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마이의 근처에 가지 마. 마이쪽에도 명령을 전달했으니 접근하지 않겠지만.」

그 말중에서 ‘명령’이라는 단어가 귀에 꽂혔다.

「그건 황제로서 명령하는 건가요?」

시오엔은 내 몸에 이불을 덮어주며 대답했다.

「아니.」

내 귀에는 ‘응’으로 들렸다. 침대를 떠나려는 시오엔의 팔을 잡고 그를 끌어당겨서 물어보았다.

「싫은 이유가 아예 없는 건 아니죠? 진짜로, 단지, 그냥, 이라는 이유로 내가 못가게 하는 건 아니겠

죠?」

시오엔이 나를 가만히 쳐다보는 사이 내가 「왜냐고 물어보지 않을테니까 그것만이라도 좀 대답해봐

요.」라고 닦달하자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싫은 이유가 아예 없다는 거에요, 아니면 이유가 있긴 한데 말을 해주기 싫다는 거에요?」

「말하기가 싫어.」

완전 애다.

드래곤은 요즘 변태같더니 시오엔은 정신연령이 퇴화를 했나? 이 두 금발 쌍둥이는 똑같이 상태가 안

좋아지는 건가.

「그리고 그대 이제 슬슬 바빠질거야.」

시오엔이 방을 떠나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달부터 혼례식 준비에 들어갈거니까.」

그리고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나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니, 그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할 소리냐.

그리고 내 결혼식이 왜 그렇게 사무적인 일이 되어야 하는거야!

「마이 황태자 전하한테 무슨 일 있어요?」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비서관이 움찔했다. 서류를 보다 말고 서류 밑에 드리워진 비서

관은 그림자가 덜컹거려서 쳐다보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미소 지으려 했다.

「진짜 무슨 일 있어요?」

내 말에 비서관이 「아무 일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나는 속지 않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

녀가 국무대신이 자주 그러는 것처럼 헛기침을 했다.

「으흠. 정말입니다.」
「아무리봐도 거짓말 같은데.」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보다도 서류는 좀 읽으셨어요?」

앗…… 비서관의 시선이 엄중해졌다.

「외울게요.」

기죽은 내가 대답하자 비서관이 내 옆으로 의자를 바싹 붙이고 서류를 넘겨가며 설명해주었다.

「처음부터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내달에 있을 총 회의에서 황비마마의 황후 추대안을 국무대신 니타

우 라 크리스티가 발표할겁니다. 그리고 일주일뒤부터 혼례식 준비에 들어갑니다.」

「총 회의라는 건 귀족 회의인거죠?」

「예. 그렇습니다.」

「그럼, 총 회의에서 황후로 부적격 판정을 내릴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잘은 모르겠지만 안건이 부결될 수도 있는 문제 아닌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란 내 말에 비서

관이 싱긋 웃었다.

「무조건 된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어째서요?」

「모두들 황제폐하의 성정을 아시니까요.」

한마디로 성격 더러운 황제를 아니 다들 입다물고 있을거다, 이거구나. 황제는 좀 이상하지만 정말 좋

은 사람인데. 시오엔은 황제로서는 꽤 차가운 사람인 것 같다. 비서관이나 국무대신에게는 잘해주지만

남들에게도 잘해주는 것 같지는 않아. 그 의원을 대할때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게다가 마마께오서는, 신병의 구원자 아니십니까. 이견은 없을 것이라 사려되옵니다.」

아아,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 맞다, 원래 이 혼례식을 하게된 계기는 신병때문이었지. 남자 황비를 받

아들이게 된 것도 다 신병때문이었다. 그 빌어먹을 계시가 하필이면 내가 떨어지던 타이밍에 딱 들어맞

는 바람에, 이 난리가 된거였지.

「그래도 만약 반대가 있으면요?」

「있어봐야 소수겠지요.」

「그대로 만약 반대가 크면요?」

비서관과 시선이 마주쳤다.

「비 마마께서 내키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여기서 왜 그냥 내키지 않는다,고 할 수 없는 걸까? 시오엔을 지키겠어,라고 맹세하던 나의 마음은 거

짓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사실 내가 지킬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하다. 왜 그동안 약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권력도 그 자신의 힘도 모든 것이 그를 위해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자꾸 도망치고 싶어진다.

이 결혼식은 정말로 ‘일’인 것이다. 비서관만 해도, 이미 그것을 일로서 잡고 있지 않은가. 시오엔을
정말 좋아해서 -비록 삼년뒤에 두고 날아갈 예정이긴 해도- 남자에게 시집(맙소사)을 가는 내 마음과는

일절 상관 없는 커다란 프로젝트.

「마마……」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여하간 총 회의에서 황후로 인정이든 적격 판정이든 뭐든 받고 나서 일주일

뒤부터 준비 시작. 그럼 혼례식은 언제 열려요?」

「빛의 달입니다.」

잠깐, 잠깐. 지금이 푸른 새싹의 달. 그러니까 삼월. 그 다음이 부드러운 바람의 달. 사월. 돌아오지

않는 달. 오월. 빛의 달. 유월. 아, 유월. 그냥 숫자로 세지, 인간들.

실제로 서민들은 숫자로 센다는데, 귀족은 숫자로 안 센다고 한다. 왜 인지는 귀족들만이 알 일이지.

사실 서민층인 나로서는 이해 불가능이다.

「유월 언제부터요?」

내가 ‘유월’이라고 발음하자, 비서관이 미간을 좁혔지만 아무 말 없이 대답해주었다.

「빛의 달 첫날부터 시작합니다.」

「보름정도죠?」

「혼례식 자체는 보름입니다만, 빛의 달은 내내 긴장하셔야 할 듯 합니다. 스케줄도 많을 거고요. 일

단, 드와나의 전 황족이 모이는 자리이니만큼, 그들도 혼례식이 끝난 보름정도는 계속 머물 것 같습니

다.」

잠깐, 전 황족?

전?

혼례식을 꽤 쉽게 생각하고 있었나보다. 비서관이 가고 나서 한동안 혼례식 관련 책들을 쳐다보다 기가

질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전 국민과 다른 황족들 앞에서 남자에게 장가가야 하는 거야? 아니, 시집.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소름이 끼쳤다. 남자랑 결혼하는 것만으로도 온 힘을 다해서 결심한건데, 그걸 수많은 인간들 앞에서

해야 한다고? 옛날에 왜 한다고 했었지? 도대체 나는 무슨 생각으로 저걸 한다고 한거지? - 아, 맞다.

그 때는 도망칠까 말까 갈등하고 있었을때구나.

면이 팔려 죽을지도 몰라. 나는 진심으로 위기감을 가졌다.

내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다. 아, 남자와 결혼하는 걸로 모잘라서 그걸 그렇게 많은 인간들 앞

에서 약속해야 한단 말이야?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이라는 말에 맹세를? 맙소사.

기분탓인지 아까까지 달빛으로 밝았던 밖이 어두워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 때 시오엔이 뛰어들어왔다.

「쳐라!」

시녀장과 시녀 누나들이 쫓아 들어오고, 시오엔은 나를 끌어안았다. 불안정한 손길이 당혹스러운데다,

시녀 누나들은 커다란 창에 어두운 천을 달고 있었다.


「시오엔?」

내가 그의 이름을 입에 담자, 그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남들 앞에서 남사스럽게 안겨 있는 것도 좀

그렇지만, 그보다는 역시 시오엔이 불안해하는 것이 이상해서, 나는 가만히 안긴채 상황을 내 나름대로

인식해보려 애썼지만, 도무지 상황이 이해가 안 가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였다.

갑자기 국무대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옵니다.」

그 한마디에 시오엔의 몸이 더욱 긴장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잡아채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

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 곳에는 시오엔과 늘 뒹굴던 호화찬란한 침대와 시오엔이 잡

았다던 무슨 짐승의 가죽이 보였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없잖아.

그 순간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빌어먹을, 넌 진짜 미쳤어!」

처음 보는 남자가 드래곤을 향해 비난을 퍼붓고 있다. 누구인지 전혀 모르겠다. 드래곤은 그 말을 흘려

들으면서 그 남자 너머의 나를 바라보았다.

「안녕, 달링.」

달링같은 소리 하시네.

그의 말에 처음 보는 남자의 뒷모습이 움찔거렸다. 그가 귀신이라도 보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눈을 감으며 개탄했다.

「신이여, 당장 이 미친 드래곤을 데려가소서!」

동감입니다. 신이여, 직무유기 하지 마시고 빨랑 좀 데려가세요. 그러나 역시 신은 탱자 탱자 노는 중

인지 드래곤을 데려가지 않았고, 나와 드래곤은 여전히 불꽃튀는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일단 소개부터 하지.」

드래곤이 웃으며 자신의 앞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바유야. 크림슨 드래곤의 부수장. 곧 수장이 될 드래곤이지.」

「남의 아버지의 사망을 멋대로 예언하지 마!」

정말 최악의 인간……아니, 드래곤이다.

「곧,이라고 해도 언제일지는 모르지. 그냥 곧.」

예언 아니야, 라고 골드 드래곤이 바유를 달래며 말했지만 바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아, 여기에도

애가 한명, 아니 한 마리…… ‘마리’하니까 또 황태자도 생각나네. 요즘은 왜 이렇게 심난한 일 투성이

일까.

내 앞에서는 여전히 ‘백년이나 이백년이나 천년쯤 곧이잖아, 곧.’라고 친구를 달래는건지 놀리는건지
의도 모를 짓을 하는 황금룡 한 마리와 생크림룡 한 마리가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여긴 어디에요?」

내 말에 용 두 마리가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전에 와봤잖아?」

이건 똥색용.

「리안이 여기서 그대에게 프러포즈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건 아이스크림색용.

그런데 크림슨 드래곤이라는 건 크림색이 맞는 걸까?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러고보니 골드 드래곤이라는

건 정말 금색이 맞는 걸까? 드래곤의 앞에 붙은 그 색은 털색인건가?

「프러포즈요?」

나한테 청혼했다고? 저 드래곤이? 언…… 기억났다. 시체 속에 누워서, 들었다. ‘내 아이를 가져라.’ 그

동굴임을 처음에 알아보지 못한 것은, 이 동굴이 밝기 때문이었다. 빛들이 떠다니고 있다.

아니, 깨끗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동굴에는 엄청나게 큰 짚더미와 책장, 걸상과 책상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여긴 어디에요?」

그 떼는 촛불들이 켜져 있었는데, 이 동굴안에는 촛대도 양초도 보이지 않았다. 내 질문에 바유가 인상

을 썼다.

「미안하군, 아무 설명도 못 들은 모양이지? ……여긴, 골드 드래곤의 둥지다.」

사람이 죽어있던 동굴은, 둥지였다. 그 사람들은, 그 시체들은 어떻게 되었지? 테란티오가의 둘째 아

들. 그 남자의 고환은 왜 떨어졌던 걸까? 그들은 어떻게 죽은 거지?

맙소사, 나는 왜 이 감각을, 이 공포를, 살인자의 지독한 행위를 잊고 있었던 거지?

아아, 그래. 그 행위를 잊지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현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너랑 안 놀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댕기머리 여자애. 그것은 내 최악의 과오. 다시는 그런 기억을 가지고 싶지 않은

데, 조금이라도 발을 잘못 내딛으면 그런 기억이 다발로 생길 것 같다. 눈앞의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무리고, 엄벌에 처하는 것도 무리고. 도무지 할 수 있는 것이 없네.

「전 여기 왜 왔는데요?」

바유가 민망한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납치되었기 때문이지.」

「납치라니? 초대야!」

「어지간히 신사적인 초대다. 초대라니, 웃기시네.」

다시 티격대는 용 두 마리는 일단 제쳐두고, 동굴밖으로 나가기 위해 입구에서 발을 내밀려다가 상승기


류 때문에 넘어졌다. 맙소사,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조심 조심 걸어서 입구에 가보았더니 밑은 까

마득한 절벽이었다.

시오엔, 이제 난 어쩌지?

「시오엔……」

당황한 나머지 주저앉아서 시오엔을 불렀을 때 갑자기 골드 드래곤이 달려와 나를 낚아챘다. 바유가 눈

을 감더니 고개를 저었다.

「무리야, 그의 주인이 부르고 있다.」

골드 드래곤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몸에서 비늘이 돋아나고 있다. 그 소름끼치는 광경 때문에

나는 아예 눈을 감았다.

「웃기지 마. 이 사람은 나의 것이다. 운명이 정한 나의 연인이라고!」

「운명이 정해주었을 때 냉큼 잡았어야지, 늦은 네 잘못이야. 더 이상은 못 잡아둬.」

바유가 단호하게 말하는 순간, 누군가가 내 심장을 잡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전에도 이런 기분

이 든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골드 드래곤의 꿈속으로 끌려 들어왔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김민후!」

갑자기 골드 드래곤이 나를 붙잡았다.

「놈과 합방식을 한건가?」

한지가 언제인데. 뒷북이야.

골드 드래곤이 예지능력이 있을까, 그렇다면 얼마나 맞는 것일까. - 그런걸로 고민하던 나의 지난 며칠

이 아까울지경이다. 바보냐, 라는 얼굴로 내가 올려다보고 있자 골드 드래곤은 당황했는지 뒷걸음질쳤

다.

그 순간 갑자기 골드 드래곤이 고함을 질렀다.

「놈에게 너를 준건가?!」

「빌어먹을 리안! 하지 마!」

바유라는 드래곤이 골드 드래곤을 잡는 것과 동시에 어떤 손이 내 심장을 잡아챘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울렸다.

‘잡았다.’

그리고 갑자기 나는 눈앞의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 공간이 어떤 공간과 혼합되고, 뭉뚱그

려진다. 그리고 천천히

시오엔의 방이 눈앞에서 구체화되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주 만족스럽군. 그대의 공로를 치하한다, 신관.」

나한테 프러포즈를 할 때의 드래곤처럼 피를 흘리며 시오엔이 날카롭게 웃고 있었다. 방금 전 다른 개

체에게서 보았던 것과 조금 다른 금안이 흥분으로 가득찬 채 웃고 있다. 아까의 드래곤보다 이쪽이 더

짐승같다.
이것은 누구의 피지?

그렇게 질문하고 답을 보았다. 시오엔의 가슴에 십자모양으로 상처가 나 있었다. 그 상처는 무척 깊어

보여서, 당장이라도 소리를 칠 것 같다. 놀라는 스스로를 제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나는 시오엔

을 올려다보았다.

「그대는 내게 해줄 말이 있을 것 같군.」

시오엔이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말을 해야하는 건 시오엔쪽이 아닌건가? 그는 왜 이런 상처를 냈지? 나는 어떻게 드래곤의 동굴로 끌려

갔고 -나는 그것이 늘 드래곤을 만났던 것과 같은, 일종의 유체이탈이라고 생각했는데. 꿈이든 현실이

든 간에 말이다. 그런 것이 아닌건가?-,. 나는 여기에 무슨 수단으로 돌아온 거지?

시오엔의 손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느꼈다. 내 맨 심장을 움켜쥐는

손길을.

「골드 드래곤이 왜 그대를 호출한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호출?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만, 시오엔의 얼굴은 좀 더 달랐다. 이 방의 분

위기는 뭔가 더 말하는 것 같다. 카펫을 밟는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다. 누구인지 몰라 고개를 돌리

려는데 시오엔이 내 턱을 잡고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각인이다.」

각인?

무슨 각인?

시오엔이 내 눈동자를 혀를 내밀어 핥을 수도 있을 것 같이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있었으므로 필연적으

로 나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게 되었다. 어떤 음습한 감정이 그의 눈을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의 표정이 굳어지고, 그가 차가운 얼굴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왠지 모르게 그 표정이 약간 상처

입은 것 같다고 느껴졌다.

「신관, 신관!」

그러자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내게 다가오려 했는데 그를 막아서고 국무대신이 나를 쳐다보았다. 시오

엔처럼 내 눈을 들여다 본 국무대신이 놀란 눈을 했다.

「니타우, 고하라.」

「아, 그게……」

국무대신이 정말 그답지 않게도 말을 더듬었다.

「크리스티!」

시오엔의 추궁에 국무대신이 시선을 돌렸다. 시오엔에게서가 아니라, 나에게서.

「각인이 맞습니다. 골드 드래곤의 문양이 확실합니다.」

국무대신의 말에 시오엔이 이를 가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그것은 시오엔이 나를 빼낼 때의 골드 드


래곤과 비슷한 소리였다.

11. 만약,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1)

시오엔은 정말 서른 살에 죽게 되는가? 그의 천수는 거기까지인가?

-나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크리스티 국무대신의 형을 만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

야 할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시오엔이 황명으로 국무대신의 형을 호

출했기 때문이었다.

시오엔은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는 방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나를 부르지도 않았고, 내가 어디에

나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햇살이 눈부신 아침에, 나는 감옥으로 숙소를 옮기게 되었다.

쪼잔하다.

내 머릿속에서는 그 네글자가 쉼새없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정말 좀생이다. 물론 나도 거울로

내 눈동자를 보았더니 이상한 문양이 있어서 놀라고 화나기는 했다. 그러나 시오엔이 이럴 줄은 정말로

몰랐다. 내 잘못도 아닌데 나를 냉큼 감옥으로 쫓아보내다니.

감옥 안은 또 화려해서 ‘애인에게 끝까지 잘하는 병’이 또 도졌나, 싶을 정도였다. 나한테 질렸나. 나

에게 화가 났나. 그렇더라도 얼굴은 보이고 말하는게 예의 아닌가. 합방식을 할 정도로 나를 좋아하는

거 아니였나? 그 감정은 그냥 월인에게 신기한 정도였나? 아니면 다른 이가 자신의 사람에게 각인을 새

겨둔 것을 배신으로 여기는 타입이였나? 이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건가?

왠지, 과거 때문에 애인과 싸운 여자의 심정이 되었다. 아니 여자들은 ‘너무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

만 남자인 나는 ‘걸리면 다 죽었어’라는 각오로 늘 손가락 관절을 꺾고 있었다. 차라리 드래곤이 꿈에

라도 나타나면 ‘지금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러느냐!’고 따져볼텐데, 그럴 수도 없다.

황제라서 그런걸까? 용서할 수 없는 걸까? 아니 애초에, 내가 왜 용서를 받아야 하냐고! 내가 이런 일

에 휘말리게 된 건 다- 시오엔 탓이잖아. 아아, 시오엔이든 용새끼든 걸리기만 해봐라, 아주 작살을 내

주지.
창살 너머로 보이는 달은 여전히 예쁘다. 창백한 빛이 시오엔을 떠올리게 한다. 아, 나쁜 자식. 순진한

청소년을 몸으로 꼬셔놓고 이렇게 버리다니. 정말 나쁜 놈이다. 열받는다.

비서관이 가져다 준 책을 읽으며 꽤 무료하게 보내고 있었다. 감옥에 있든 시오엔의 방에 있든 나를 죽

이지는 않을 것이다. 국무대신과의 계약에 따르면, 나를 이년뒤에는 보내줘야 국무대신이 사는 것이니

까. 잠깐 ‘시체로 보내주지’ 따위의 대사가 생각났지만 이 동네 신을 믿기로 했다. 레인지 데인지간에

그래도 명색이 신인데 그 정도 잔재주는 간파해주지 않겠어?

실은 우울하다. 시오엔이 나를 정부로 원한다고 생각했던 적도 잠시 있었지만, 지금은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l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아,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그는 나를 좋아했어. 지켜줘,라고 속사이던 그 목소리. 도망친 나를 잡은 날 그 쓸쓸한 시선. 모든 기

억들이 거짓이었다고 외면하는 바보짓은 하지 말자.

두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크게 해보았다.

실은, 믿고 있다. 여기에 날 가둔 이유는 뭔가 있을거라고. 그가 지금 내게 오지 않는 것도, 뭔가 있

는 거라고. 그리고 그것은 골드 드래곤과 관련이 있을거라고. 만나면 한 대 거하게 때려주긴하겠지만,

시오엔을 믿고 있다. 그는 아무 이유도 없이 나는 여기에 가둘 사람도 아니고, 그는 나에게서 관심이

떠난 것도 아니다. 그저, 단지……그에게는 이럴 필요가 있었을 뿐이야.

하지만, 말은 하란 말이다, 말은! 입은 열어야 할 거 아니냐고!

일주일만에 내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다. 열받아서인지 어째서인지 알 수가 없

다. 하나 확실한 건, 시오엔을 내 눈앞에 세워야겠다는 것이다.

단순히, 그 이유로 나는 단식을 시작했다. 세끼를 다 먹지 않자, 그 다음날 아침 비서관이 보초의 엄중

한 에스코트(를 빙자한 감시)를 받으며 면회를 왔다. 한국에서는 면회실이 따로 있지만, 이 빌어먹을

탑에는 면회실도 없다. 그녀는 쇠창살 밖에서 나를 만나야 했다.

의자라도 좀 가져다주지. 보초에게 뭐라고 말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 일단은

죄인이고. - 어쩌면, 정말 죄인일지도 모른다. 매순간 믿음이 흔들리고, 다시 공고해지고. 멀미가 날것

같이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비 마마. 식사를 전혀 하지 않으신다고 하셔서……」

「아.」

시오엔을 부르느라 단식을 한다는 소리를 하면, 비서관은 걱정하겠지. 찬바람이 부는 외모와는 달리 상

냥하고 착한 비서관이다. 그녀를 걱정시킬 필요는 없다. 어차피 시오엔은 나에 대해 보고받고 있을 것

이다. 그리고 만약 보고받지 않을 정도로, 시오엔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면…… 오싹해졌다. 관심이 없다

면 - 아니,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하자.

「그냥 입맛이 없어서요.」

「식사는 같은 주방장이 만들어 올리는데…… 속이 안좋으신겁니까? 의원을 데려올까요?」

「아니에요. 그냥 환경이 달라져서 그런가봐요.」


내 말에 비서관이 당장이라도 걱정으로 압사될 것 같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쇠창살에 달라붙었다.

「이런, 몸이 안좋으신건가요? 환경이라니, 어디가 문제신겁니까?」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모르겠는게 문제에요.」

내 말에 비서관이 아, 하고 의미없는 감탄사를(아니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뱉었다. 그녀는 잠시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은, 이 감옥은 정치범 수용소라서요.」

……나, 정치범인거야?!

평생 나와 관계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단어가 튀어나와서 내 눈알도 튀어나올 뻔 했다. 정치

범 수용소?

「여기라면, 다른 힘이 통하기 어려우니까요. 특히나, 골드 드래곤이라면.」

비서관의 손가락이 창살을 어루만지고 있다. 여자다운, 곱고 아름다운 손가락. 나는 그 손가락을 보면

서 다른 이의 손을 떠올렸다. 몇 번이나 생각했었다. 검을 쥐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손이 아닌가, 하

고. 남자의 것이라기보다는 여자의 손가락처럼 보이는, 저 비서관의 손가락과 닮은, 그 창백하고 섬세

한 손가락을.

「골드 드래곤은 이 탑에서만큼은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아마, 그래서 비 마마를 일단 옮기신 걸거에

요. 지금 폐하의 궁에도 결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잘은 모르겠지만, 여하간 나를 죄인으로 처박은 건 아니구나. 힘이 빠져서 침대에 걸터앉아야했다. 믿

음과 의심의 갈팡질팡 댄스를 일주일 내내 초단위로 추었기 때문인지, 안심의 강도는 컸다. 갑자기 긴

장이 풀려서 온 몸이 주저앉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시오엔은 저한테 말 한마디 해주지 않은 거죠?」

내 말에 이번에야말로 정곡을 찔린 듯한 얼굴로 비서관이 나를 외면했다. 그녀는 내가 추궁하려고 하자

갑자기 바쁘다며-그녀는 일년 내내 바쁘다,라는 말은 입에 달고 살지 않은가! 이제와 그 핑계라니! 내

가 국무대신처럼 보이나!- 가버렸다. ……가버린다, 이거지?

좋아, 끝까지 해보자.

골드 드래곤의 힘이 통하지 않는 곳에 나를 두었다. - 라는 건, 시오엔의 마음이 내게서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는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아니면 내가 죽을테니까.

단식 사흘째.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시오엔도, 시오엔의 측근인 국무대신도, 하다못해 시녀장이나 비서관도 아니었

다.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살모사누님이었다. 베일로 온 몸을 감싸고 내 앞에 온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렘의 일을 잘 모르는 나도, 그녀가 정치범 수용소에 제멋대로 드나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십중팔구 몰래 온 것이겠지.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 내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던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녀를 맞았다.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성적인 매력이 폴폴 풍기는 얼굴을 한

그녀가 나에게 빠른 어조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겁니까?」

이 여자는 정말 나를 걱정하고 있구나. 섣부른 호기심으로 이런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

로 걱정하고 있다. 그녀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움직인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조금만 못 먹어도 볼이 들어가는 타입이라, 그런 것 같다.

나는 여자의 걱정에 약하다. 어머니가 그런 걱정을 해준 적이 없고, 반대로 그런 걱정에 대한 동경만이

가득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조금 웃으며 대답했다.

「특별히는.」

그러자 살모사 누님이 웃음이 쏙 들어갈 소리를 뱉었다.

「골드 드래곤과 황제 폐하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거 진짜세요?」

「아니에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누가 누구사이에서 뭘 걸쳐?! 아무리 이쁜 누님이라도 할 수 있는 소리가

있고, 해서는 안되는 소리라는게 있는것이다.

「하지만, 골드 드래곤이 문양을 각인했다고……헛소문인건가요?」

「아니, 그건 맞는데요.」

「맙소사!」

살모사 누님이 낮게 소리쳤다.

「왜, 왜요?」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여기까지 와준건 고마울 일이다만……왠지, 내가 굉장히 잘못한 거 같다는 저 시선

을 받고 있자니 불길해졌다.

「그럼 양다리 맞잖아요!」

「내가 각인하라고 해서 한것도 아닌데, 그게 어떻게 양다리에요?!」

「비 마마. 그러시면 여쭤보겠는데요. 어떤 사람이 황제 폐하께 키스마크를 남겼다고 합시다. 그게 실

수로 남겨진거다 하더라도, 비 마마는 마음이 편하시겠어요?」

상상이 되자마자 속에서 열불이 났다. 남의 거에 뭐하는 짓이야!! 상상속의 내가 고함을 쳤다. ……절대

로, 가만두지 않지.

하지만 키스마크하고 각인은 좀 틀리지 않나요? 그 예시가 맞는건가요? 좀 극단적이라고 생각 안해요?

그러나 자신의 예시가 맞다고 생각하는지 살모사 누님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불쾌하긴 하겠죠.」

「왜 그러셨어요?」

「아니, 제가 뭘요!」
아, 진짜. 이건 실수도 뭣도 아니고,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한거라니깐요. 내가 당한거야. 억울해서 팔

짝 뛰겠다. 그런 나에게 살모사 누님이 물었다.

「왜, 골드 드래곤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요?」

예?

가만히 있는 내게 그녀가 다시 물었다.

「황제 폐하는 굉장히 노하셨어요. 골드 드래곤의 문양은 하루 아침에 새겨지는게 아니에요. 비 마마는

몇 번이나 드래곤과 만나셨다는 이야기인데,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아니, 나는……」

변명할 말이 없다. 정말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다. 시오엔을 속이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속인 것

이 되어버렸다.

「나는……」

처음에는, 시오엔의 나의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에는, 골드 드래곤을 만나는 것에 익숙해 있

었고, 그 다음에는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 것도 같고, 그 다음에는 골드 드래곤이 내게 청혼을 하는 바

람에 말하기가 어려웠다. 속이려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시오엔에게 단 한번도 드래곤에 대해서 말하려

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저나, 웬일이세요?」

내가 묻자, 살모사 누님이 눈동자를 뎅굴 뎅굴 굴렸다. 섹시한 느낌의 누님인데도, 이런 모습을 보니

꽤 귀엽다. 설마 내 걱정이 되어서 온 것만은 아닐테고, 용건이 있을 것이다.

「골드 드래곤……에게, 정말 마음이 있으신거에요?」

에이, 그럴리가요.

말도 안되는 말에 웃으면서 얼굴을 찡그리자 살모사 누님이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녀가 이윽고

뭐라고 말하려던 차였다. 나는 그녀보다도 그녀의 뒤에서 다가오는 시오엔을 보고 있었다. 맙소사, 진

짜 시오엔이다. 오랜만에 만난 시오엔. 며칠 못보다 봐서인지 더 예쁘다. 난 분명히 이 남자의 미모에

홀렸을거야. 그래서 이렇게 반가운걸거야.

내 얼굴을 본 살모사 누님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얼어붙었다.

「보초.」

시오엔의 목소리에는 감정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었다.

「데려가라.」

변명을 할 틈도 없이 살모사누님이 끌려나갔다. 데려가라, 라고 시오엔은 말했지만 도대체 어디로 데려

간다는 건가? 갑자기 옛날 시오엔이 하룻밤에 공녀의 목을 한명씩 치던 남자라는게 떠올랐다. 설마, 죽

일 생각은 아니겠지?

문이 열리고 시오엔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이 조금씩 커졌다. 아아, 내가 단식을 하던 이유가 뭐였더

라? 나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해서, 그가 왜 나를 이 감옥에 가두었는지 그의 입으로 듣기 위해서 단식을


했었다. - 그렇다고, 스스로 믿었다.

아니, 아니다. 내가 단식을 한 이유는……

이 남자가 그저 보고 싶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는 것을 스스로도 깨달았고, 창피

하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멈추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억울한 마음이 갑자기 북받쳐올라서, 그가 내 마음고생을 알아주길 바라는 심정이 되었다.

「울지 마.」

시오엔이 단숨에 거리를 좁혀 나를 안았다.

「울지 마, 울지 말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안도와 분노가 동시에 밀려들어왔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여기에 있는건가요?」

살모사 누님말대로, 내가 골드 드래곤과 아는 사이라는 걸 숨겼기 때문에?

시오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 앉지조차 않고, 그저 서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나를

다독였지만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라는 애매한 말을 뱉은 뒤, 나를 침대에 눕히고, 사라졌다. 살모사 누님, 설마 죽은

거 아니겠지? 이제 사람의 생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게 된다. 이것이 적응인가? 만약 그렇다

면, 나는 더 이상의 적응을 거부하고 싶을 정도다.

밤새도록 생각했다. 두 개의 달이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그 환상적인 하늘을 지켜보다 태양이 완전히

그곳에 자리잡았을 때 결심했다.

믿어보겠다고. 시오엔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가 나를 여기에

가둔 것도 죄가 아닌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만, 믿기로.

아무 생각도, 추측도 없이 그저 믿어보기로.

그리고 나서, 나는 밥을 먹었다. 아주, 잘 먹었다. 편식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매일같이 운동했고,

촛대를 검대신 휘두르며 검술 선생님이 알려주셨던 것들을 복습해보려 노력했다. 믿는다,고 결심했으니

믿는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나는 검대신 촛대를 휘둘렀다. 밥을

가져다주는 보초는 때때로 나를 보고 ‘미친놈아니야?’라는 얼굴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런데서 안

미치면 그게 더 이상하지.

나흘정도였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운동에만 매진하던 시간은.

나흘 뒤, 살모사누님이 다시 찾아왔다. 전보다 훨씬 더 황폐해진 얼굴을 하고서. 시오엔이 가만두었나

보다. 정말 다행이다.

그녀는 전과는 달리 딱 한마디만을 했다.

「물에 담그세요.」

이상한 펜던트 하나를 두고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어디서 봤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식으로 접촉해

온 여자가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구더라?


연꽃을 띄워둔 대야(라고 말하지만 아마 꽃병이겠지.)에서 연꽃을 집어 탁자에 두고 팬던트를 물에 떨

어뜨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이런식으로 접촉했던 여자가 떠올랐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시녀누나였다. 그 빌어먹을 라브만 놈의 쪽지였지.

지금이라도 도로 뺄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팬던트에서 보라색 염료같은 것이 나와 물은 보라색으로 만

들었다. 물을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라브만이 나타났다.

건너편이 투명하게 비치는 라브만의 모습을 보며, 이건이 홀로그램이나 혹은 환상류의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주먹을 움켜쥐고, 최대한 무덤덤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멱살을 잡

을 수 없다면, 가능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리라.

-오랜만입니다.

11. 만약,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2)

인사를 할 의무는 없다.

-이런, 아는 척도 해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용건만 간단히.」

내 말에 라브만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검은 베일로 가려져 보이는 것이라고는 녹색의 눈

동자뿐. 처음 만났을 때, 황제와 비슷한 체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

다. 그는 황제와는 전혀 다르다. 나는 황제의 몸을 마음속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접해보았으니

까.

-달로의 귀환에 관한 거래입니다.

지랄!

순간, 울컥할뻔했다. 가능한 빈정거리는 모드로, 온 힘을 다해서 평정을 지키며 나는 중얼거렸다.

「한번 속지, 두 번은 안 속아. 꺼져.」

-이번의 거래는 정말입니다. 원하신다면, 계약을.

라브만이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아니, 개처럼 짖고 있다. 하긴, 저 놈에게 ‘개’를 갖다대다니 미안

하다, 강아지들이여. 너네의 수준을 너무 낮췄어.

저 놈에 비하면 개가 훨씬 낫지. 암.

「좆까시네. 꺼져.」

-정말입니다.
「네가 무슨 수로, 황궁에 들어와서 날 보내줄건데?」

라브만이 고개를 저었다.

-가업비밀입니다.

이제 더 이상 대답할 가치도 없다. 저 대야의 물을 부어버릴 심산으로 나는 대야에 손을 대었다.

-어차피 황제도 저도, 비슷한 입장입니다. 저희가 없이, 황제가 비 마마를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마

찬가지로 심판의 물이 없다면, 아무리 저라도 보내드릴 수 없지요. 그러나 저는 심판의 물의 조건을,

손쉽게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제가 더 유리합니다.

더 유리해?

심판의 물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까?

호숫물을 가져갔다는 뜻인가? 그러나, 어떻게 해서? 예전의 그 시녀누나가 아직도 황궁에서 일하고 있

는 걸까. 잠깐, 그 때는 잊고 있었는데……황궁에 스파이가 있어?! 맙소사, 그러고보니 그 누나. 스파이

잖아.

얼굴이……기억나지 않는다. 평범하게 생겼었던 것 같다. 거기가 전부로, 이목구비 어느 한 구석도 기억

나지 않았다.

이 돌머리! 왜 생각이 안 나는거야! 그 때 뚫어지게 쳐다보았었는데! 도대체 왜!

「조건은?」

일단은 대화를 이어가자. 그리고 제발 생각해내보자. 그 여자, 어떻게 생긴 얼굴이었지? 그래도 내 시

녀였고, 이리 저리 얼굴을 마주치던 사이였는데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

-당신입니다.

라브만이 아주 진지하게 말해서,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아무래도 이 분위기는 거의 프러포즈 분

위기인데.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미친 놈일려고.

「날 어디다 쓰게?」

-아니요. 당신을 원합니다. 남자로서.

「지랄.」

욕나오네, 진짜.

나는 나를 진심으로 원하는 남자를 둘이나 알고 있다. 그 두사람 모두 저렇게 식은 눈으로 나를 구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상대를 진심으로 원하는 남자,라는 조건이라면 셋을 알고 있다. 나 자신을 포함한다

는 이야기다. 내가 시오엔을 원할 때, 나는 저런 눈으로 말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정말입니다, 당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섹스상대로?」

-즉물적으로 말하자면.

너, 신관 아니였냐.

나는 이제껏 신관이라는 게 목사나, 수녀나, 혹은 스님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게 아닌건가? 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건 좀……정갈해야 하지 않나.

팔짱을 끼고, 별 거지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원하는 나에게 아무짓도 안하고 피만 마신건 너 아니야?」

-그 때 반했습니다.

이 자식이 진짜 사람이 핫바지로 보이나.

그 시녀누나. 도대체 어떻게 생겼었지? 평범한 얼굴이었다고, 생각했다. 잠깐, 평범한 얼굴? 내가 생각

하기에 이 동네에 평범한 얼굴이라는 게 그렇게 흔했나?

-당신을 원합니다.

「나의 피겠지.」

-아니요, 당신의 몸을 원합니다. 당신이 황제의 물건을 품는 그 구멍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도 네가 신관이냐?」

이런 도발에 넘어갈만큼, 다혈질적인 성격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신관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말

세다 싶어 묻자 라브만의 녹색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신관이기전에 앞서 남자지요.

「그런거 앞세울거면 신관 하지 말았어야지.」

지랄을 다발로 떨어요.

-그래서, 대답은 어떻습니까?

「거절이다.」

이 대답이 당연한 나와는 달리, 라브만은 의외라는 눈이었다.

-달로의 귀환이라는 말만으로 신성지까지 오셨던 분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의, 소심한 대답이시군요.

「그때와는 사정이 달라져서.」

-어떤 사정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물어보지 마.」

-꼭 여쭤보고 싶군요.

이 새끼하고 왜 이런 대화를 계속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 시녀누나의 얼굴은 죽어도 생각이 안나지

만, 그녀의 얼굴을 내가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은 났다. 그리고 나는 이 동네에 와서 그녀만큼 평

범하다 싶은 얼굴을 본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린트인에서조차, 평범하다고 느낀 얼굴은 없었다. ‘특출

나지 않다’라는 말은 ‘평범하다’라고 말하고 있었을 뿐이지, 그 시녀 누나처럼 대놓고 평범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때는 네가 그냥 모르는 사람이었고, 지금은 나의 적이니까.」

-이런, 마음이 좁으시군요. 관용을 베풀어, 과거는 잊어주십시오.

누구 마음대로?

「아아, 난 쪼잔해서. 절대로 잊지 않겠어.」


나와 라브만은 서로 쳐다보았다. 나도 그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싸움이었다. 자신의 의지 관철이

자, 기싸움이기도 했다.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라브만 쪽이었다.

-후회하실겁니다.

진지하게 말하는 그 얼굴을 보고 더 이상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나는 대야를 들었다.

-잠시만요, 아직 할 말이 남아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목소리였지만 내가 대야를 들자, 그 얼굴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잠시만, 비 마마!

흥이다.

창밖으로 대야의 물을 버리자, 환영은 사라졌다. 시녀 중 누군가는 스파이다. 그녀의 얼굴을 기억해낼

수는 없지만, 그녀의 얼굴을 본다면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찾아봐야겠다.

여기서 나간다면 말이지. 아니야, 나갈것이다. 시오엔을 믿을 것이다.

「황비 마마! 괜찮으신겁니까?!」

갑자기 쇠창살밖에서 모르는 목소리가 들려와 대야를 놓고 다가가자, 보초가 새파래진 안색으로 나를 부

르고 있었다. 그 뒤로 또 다른 보초가 달려오고 있다.

「비 마마는? 무사하신건가?!」

그 뒤로 다른 보초가 「비 마마는?!」이라며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다. 사람들이 왜 이래……? 가뜩이나

찔리는 것이 있어서, 당황해서 눈치만 보고 있을 때였다.

「맙소사, 비 마마!!」

세사람이 합동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눈이 내가 아닌 내 뒤를 바라보고 있어, 본능적으로 뒤를 돌

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허공에 무언가 문양이 새겨진다. 원과 원이 겹치고,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다.

-수천의 신과 세티의 이름으로.-

라브만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 머릿속에서만 들린건가?

-힘이여, 나의 명에 따르라.-

뒤로 물러섰다. 쇠창살이 등에 닿자마자 손을 뒤로 돌려 움켜잡았다. 이거, 상당히 불안하다. 아, 진

짜. 남자로서 누굴 원한다고? 입에 침이나 발라라!

-대지여, 움직여라.-

딱 보기에도 허공의 그림은 완성된 듯이 보였다.

-오라, 내가 원하는 자여!-

허공의 그림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넝쿨로 변해간다. 글자들이 이어져 넝쿨이 되고 있다. 그리

고 빛나는 은색 넝쿨이 나를 향해 뻗어져나왔다. 내 몸을 휘감은 넝쿨이 문양이 있었던 쪽으로 나를 끌

고가려 한다. 나는 쇠창살에 달라붙었다.


보초들이 반대편에서 격자무늬 쇠창살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나를 잡아당기고 있다.

「비 마마 힘내세요!」

「당겨, 당겨!」

쇠창살에 달라붙은 나와, 그런 나를 필사적으로 잡고 있는 보초 세명, 그리고 반대쪽에서 나를 끌어당

기는 은색 넝쿨. 온 몸에서 땀이 흘러도 나는 창살을 놓지 않았다. 스스로도 원숭이 같을 거라는 생각

이 들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저 라브만 놈의 생각대로 되게 두지 않을거야!

내가 그동안 체력관리에 힘을 쓴 것은 이렇게 추한 짓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동안

의 관리가 도움이 된 것 같기는 하다. 나는 생각보다 오래 버텼다. 그러나 쇠창살이 흔들거리더니 넝쿨

의 힘으로 창살이 부서졌다. 그리고 내 옷자락을 잡고 있었던 보초들의 손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우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나는 문양이 있었던 자리로 끌려들어갔다. 이젠 끝이다! 눈을 질끈 감았을 때 갑자기 넝

쿨이 나를 바닥에 내팽겨치고 다시 문양을 만들고 있었다.

어, 얼레?

문양을 보고 쇠창살이 있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국무대신이 와 있었다.

-배신자.-

「마음대로 지껄이세요.」

국무대신이 손을 들고 약지를 물어뜯었다. 그의 약지에서 피가 떨어진다. 그리고 국무대신이 뭐라고 말

을 했다. 그게 무슨 단어인지, 무슨 발음인지조차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의 약지에서 떨어지는 핏방울들이 허공에서 떴다. 마치 무중력 상태에서의 물방울들처럼.

「수천의 신과, 레의 이름으로.」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어!-

「제약이여 풀리라. 대지여, 나라연의 문양을 새긴 자를 보호하라.」

-얍삽한 놈!-

「힘이여, 돌아가라. 나라연의 의지를 되살리라.」

-죽여버리겠다, 죽여버리겠다!-

허공의 문양이 부서지고 있다. 그 은빛이 조각난 채 바닥으로 흩어져내렸다.

「환영입니다. 그러나, 비 마마는 안돼요. 다음에는 직접 붙어보죠, 어디.」

-그때는 죽여주지, 산산조각내서!-

그 저주성 발언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머릿속에 말이 들리지 않았다.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좀

더 집중해보았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런, 마마께오서 월인이라는 말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정말일줄은 몰랐는데요.」

국무대신이 그렇게 말했다.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국무대신을 자세히 쳐다보자, 국무대신과 닮았지만 다른 사람이었다. 그제


야, 시오엔이 호출했던 국무대신의 형이 생각났다.

그는 예지능력이 뛰어나다던, 크리스티 국무대신의 형인가보다. ……형제라고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닮

았을 줄은 몰랐는데. 이 닮은 얼굴로, 똑같이 바람둥이 짓을 하다 신전에서 파문당한거란 말이지.

뭐랄까……잠시 절박했던 순간 때문에 아직도 심장이 날뛰고 있는데, 입가에서는 웃음이 흘렀다.

맙소사, 저렇게 닮은 얼굴로, 그렇게 닮은 짓을?

「뭐가 그렇게 즐겁나?」

익숙한 목소리다. 경련하는 입가를 제어하려 애쓰며 고개를 들자, 시오엔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차

가운 무표정이다. 안 본 사이, 그는 좀 여윈것같다. 무슨 일이 있었나? 눈밑도 좀 거뭇한 것 같은데.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시오엔은 나를 안아올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품에 다시 미소가 나왔다.

「웃지 마.」

시오엔이 속삭였다.

「방으로 돌아가면, 엉덩이를 때려줄거야.」

그 말에 다시 키득 키득 웃음이 새어나왔다. 방으로 돌아간다. 시오엔과 함께 돌아간다.-라고 꽤나 가

볍게 생각하며 안겨있었던 나였지만.

「자, 말 좀 해보지. 도대체 마음을 놓을 수가 없군. 방에 두면 골드 드래곤과 만나서 문양을 새기지,

골드 드래곤을 피해서 탑에 두었더니 이번에는 라브만이 접선하지.」

라며, 방에 도착한 시오엔이 나를 침대가 아닌 의자에 내려놓자, 당황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어디까지 말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살모사 누님이 팬던트를

들고 왔다는 건 빼야겠지. ‘내아를 낳아도’ 발언도 빼고. 처음 만나게 된 계기……가 뭐드라?

강제로 턱이 들어올려졌다. 시오엔이 턱을 쥐고 고개아 아프도록 치켜올리고, 경고했다.

「머리 굴리지 말고, 당장 불어.」

이야아……오랜만에 시오엔의 터프한 모습을 보니!

……마구 삐뚤어지고 싶구나.

하지만, 정말로 화가 난 것 같다. 그는 평소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는 앉지만, 나는 마음으로부터 그

가 정말로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면갈수록, 시오엔의 심리를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합

방식의 효과일까?

「골드 드래곤하고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첫인상이 능글맞았다는 것만 기억난다.

「그는 주로 꿈속에 나타났어요.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고는 했지만. 시오엔과 외모가 비슷했고……그

게 다에요. 아, 맞다. 며칠전에는, 바유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크림슨 드래곤이라던데.」

「데이비드!」

시오엔이 부르자마자 비서관이 보고 했다.

「아닙니다. 드래곤 장로회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바유라면 크림슨 드래곤의 이인자잖아?」

「개인적인 친분일겁니다.」

비서관이 자신있게 대답했고, 시오엔의 이마에는 주름이 하나 더 생겼다.

「그나저나, 폐하. 황비에게 소개라도 좀 시켜주십시오?」

능글거리는 것이 국무대신과 똑같은, 국무대신의 형이 말했다. 지단을 닮은 남자가 둘이나 있다니! -

의외로 지단, 흔한 생김새일지도?

조금, 동경했었는데. 그 외모를. 왠지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나의 비, 키미누다. 그리고 이건.」

‘이건’이라는 시오엔의 지칭대명사에 국무대신의 형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곧 나에게 미소지었다.

「린타우. 니타우의 형이고, 블랙신관이다.」

「블랙신관?」

「파문당한 사제를 그렇게 칭합니다. 처음뵙겠습니다, 비 마마.」

지단 투, 아니지. 지단 쓰리가 남자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옆의 국무대신은 상큼하지 못하게 얼

굴을 구기고 있었고, 국무대신 옆의 비서관의 눈은 지단 쓰리를 향해서 반짝이고 있었다.

뭐랄까.

이 세사람의 관계랄까, 연애사가 머릿속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어디까지 맞추고, 어디가 틀린 것일지

내심 궁금해졌다.

11. 만약,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3)

둘만 있으면 내내 물고 빨고 하던 사이라 그런지, 둘만 있는데도 사무적인 무드로 흐르는 것이 조금 서

운했다. 시오엔은 지금 나한테 화가 나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나도 사실 할 말 많다. 가령 예를 들면,

왜 감옥에 보냈느냐-던가. 아니, 그 이야기는 들었지. 왜 감옥에 보낼때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느

냐,다.

그러나 그런 걸 따져묻기에는 왠지, 내 입장이 더 궁지에 몰린 듯한 기분이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건

몰린거고, 사실이 어떻든 요새 계속 억울하고 분통터졌던 나는 서운함을 넘어서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몇가지를 연달아 묻던 시오엔이 나를 품에 안을 때까지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시오엔이 나를 무

릎위에 앉히고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다행이야.」

시오엔이 긴 한숨을 뱉었다.

「신성지 놈들이 그대를 또 건드리는 줄 알고, 많이 놀랐다.」

내가 좋은 애인인줄 시오엔은 알고 있을까? 아직도 서운한데, 그래도 나는 착실하게 시오엔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시오엔이 내 이마에서 살짝 떨어지고, 다시 입술을 댔다.

「그대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신은 나에게 저주밖에 주지 않았으나, 그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

하다.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된 것은 얼마 후였다.

「어떻게 된건지 아시고 싶으시다니요? 저는 제 입을 찢어버리고 싶을 지경입니다!」

비서관의 분노 모드는 무섭지만, 그러나 오늘의 비서관은 유난히 요염하고 아름답다. 아무래도 화장에

공을 들였다고 생각한 것은 내 착각인가?

아니, 착각이 아니다. 저 옷하며, 저 헤어스타일하며. 아무래도 누군가를 의식하고 정성을 다한 모습이

다. 지구식으로 말하자면 데이트용 복장이랄까.

「저는 이제껏 마마께 진실만을 고해왔습니다. 그것은, 마마께 제 진심을 전하면 마마께오서도 진심으로

저를 믿어주시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마께오서는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으셨군요. 골

드 드래곤도, 라브만도, 그 무엇도!」

비서관의 눈에 눈물이 어리는 것을 보고, 새삼 반성했다. 화가 난 여자의 앞에서 그녀의 미모를 즐기고

있었다니, 확실히 벌 받을 일이다.

「미안해요.」

진심을 다해서, 최대한 사근사근하게 나는 사과했다.

한참이나 새근거리며 숨을 몰아쉬던 비서관이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허공을 노려보며 진정

하려 애쓰고 있었고, 그 이후에는 다시 평소의 태도로 돌아왔다.

「이제 저한테 속이는 거 있으시면 안되셔요?」

비서관이 새침하게 노려보며 물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난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거짓말쟁이로 찍힌 것일까.

비서관이 건너편에 우아한 태도로 앉아서 잔을 들며 미간을 좁혔다.

「지금 웃으면서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비서관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

「실은 상황이 굉장히 나쁩니다.」

비서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이 동네에 와서 처음으로 아주 절실하게 반성해야했다. 반성정도가 아니


라 자기 혐오감에 빠질 정도였다.

본래 그런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 골드 드래곤과 황제 시오엔이 월인을 사이에 두고 예민해져 있다는

것. 월인의 피가 불노불사의 효과가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래서 국민들은 ‘어떤 효용’으

로 인해 드래곤과 황제가 나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들에게 있어 나는 황제의 황비이기

는 하지만, 황제와 어떤 감정이 있는 사이가 아니라, 상징적인 존재였다.)

아무리 황궁내의 일이라 할지라도, 소문은 막을 수 없는 법이다. 더욱이 황비의 눈동자에 골드 드래곤

의 문양이 새겨지고 있다는 ‘재미있는 스캔들거리’는 훨씬 더 은밀하고 빠르게 말이 퍼져나갔다. 시오

엔은 드래곤의 영향을 더 받기 전에 나를 정치범의 감옥인 탑으로 옮겼지만, 그 사이에도 말은 엄청나

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황궁에서는 죽을 힘을 다해서 ‘월인 황비는 황궁에 호의적이며, 드래곤또한 여전히 유브라데를 수호하고

있다. 월인황비와 드래곤은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퍼뜨리고 있었지만, 인간의

귀는 재미있는 것을 더 믿으려 하는 법이라,(게다가 무려 사실이기까지 하다) 효과는 현저하게 떨어지

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탑이 보라색 빛으로 감싸였다. 그 보라색 빛이 라브만의 힘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유브

라데에 아무도 없었다. 보라색 빛은 라브만 외에는 아무도 쓸 수 없는 것이였으니까.(신관들은 능력에

따라 빛의 색이 다르다고 한다.)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시오엔이었지만, 그는 총회의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린타우를 보냈고, 린타우는 라브만에 맞서 나를 구해주었다.

그리고 소문은 이제 ‘라브만, 드래곤, 황제가 월인을 노린다.’라는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일단 황비

이니 황제가 더 유리하다는 해석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황비’가 그냥 황비로 책봉된 것에 불과하

고, 이제 저울질을 할 것이라는- 정말 지독히 자기들 멋대로의 소문이었다.

총 회의 쪽은 난리가 났다. 귀족들은 두 파로 나뉘어 지금 황후로 책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드래

곤에게 제물로 바치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물로 바치라고 주장했던 쪽은, 시오엔이 서슬이 퍼

런 얼굴로 「나보러 내 마누라를 어쩌라고?」라고 되묻는 바람에, 조용히 (아마도 목숨이 아까워서) 사

그라들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혼례식을 올리게 될 것 같다.

내 기억이 맞다면, 골드 드래곤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내 말에 비서관이 「그런 절차가

있긴 합니다만……골드 드래곤이 허가를 해줄리도, 폐하께서 그 절차를 따를리도 만무하지요……」라고 어

딘가 아련한 시선으로 대답했다.

내가 말을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상황이 악화되지는 않았을텐데.

통렬한 후회였다. 괴로울 지경이었다. 골드 드래곤이 나보러 자기 애를 낳으래, 라는 말이 뭐 그리 어

렵다고! - 아니,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해야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해야 했었는지도 모르겠

다,가 아니고, 해야 했다!

일단 시오엔이 이를 바득 바득 가는 바람에 반 황제파-혹은 신전파- 귀족들은 조금 누그러진 상태였지


만, 그만큼 황제에 대한 반발심이 마음속에서 커진 것은 당연하다고, 비서관이 한숨을 쉬었다.

시오엔을 지켜준다고 하고, 벼랑에서 밀어버린 격이다. 전쟁 영웅으로서의 시오엔의 입지도, 이제 휴전

하면서 천천히 흔들리고 있을 때였다. 월인도 드래곤도 시오엔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다는 소문은 계속

퍼져나가고 있고, 나라연을 계승한 시오엔의 위치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하면서도 비서관은 더 이상 나

를 책망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린 황태자에게 성급한 접선을 시도하는 자들까지 생겼다고 한

다. 주로 신전파 귀족들인데, ‘신이 선택한 황제’는 황태자라고 생각하는 무리들이다. 신이 선택을 했

든 뭘했든 겨우 여섯 살-이 나라 나이로는 다섯 살-짜리에게 지나친 걸 바라는 족속들이다. 하긴 그 뒤

에서 황제가 된 아이를 좌지우지하겠다는 속셈이겠지만.

내가 시오엔에게 모든 것을 맡겼더라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조리 말해주었더라면, 시오엔이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을텐데. 알게 모르게 시오엔과 골드 드래곤을 저울질했던 기억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비 마마.」

시녀장의 목소리가 들려,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도 그냥 고개를 돌렸다. 시녀장과 함께 모르는 군인들이

같이 서 있었다.

「네.」

「총 회의에서, 증인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총 회의는 아니었지만, 나는 한번 증인석에 오른 경험이 있다. 테란티오가의 둘째 아들을 비롯하여, 드

래곤이 여러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증언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때는 총 회의가 아니였고, 시오엔의 말

에 따르면 ‘약식’이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총 회의에서 나를 호출하고 있다.

「시오엔이?」

내 말에 군인 둘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그제야 내가 너무 멋대로 시오엔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는 자각이 들어서 곤란해졌다. 하긴 나한테는 애인이어도 남들한테는 황제지.

비서관이 내 앞으로 나섰다.

「아니요, 총 회의쪽에서의 요청일겁니다.」

나에게 대답했지만, 내게는 뒤통수만 보여주고 있었다. 비서관이 군인들을 노려보았다. 군인들이 가볍게

그녀에게 목례를 하고 대답했다.

「의장의 요청입니다.」

비서관이 냉혹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비 마마는 황제 폐하의 비시니, 의장이 오라 가라 할 권한은 없다. 거절한다.」

「‘월인’께, 유브라데의 신민들이 내세운 대표로서, 요청하는 것이라고 전언을 주셨습니다.」

엎어치나 메치나 아냐?

그러나 비서관은 난감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커다란 눈이 깜빡거리는 것이 어지간히 당혹스러

운 상황인 듯 했다.
「가겠습니다.」

내 말에 비서관과 시녀장이 동시에 눈을 감았다.

준비된 마차를 타고, 회의장까지 움직여야 했다. 아름다운 정원이다. 하렘의 조각들과 식물들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영국같은 곳에선 정원도 하나의 예술이라더니, 그것을 이곳에서 깨닫는다. 무엇하나 더

해져도 빠져도 안될 것 같은 총체적인 아름다움, 저 시녀 누나조차도……

잠깐, 저 여자?!

「세워요!!」

내 고함소리에 놀라 말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덕분에 마차가 전복될 뻔 했다. 마부석에 앉아있던 군

인 두사람이 「무슨 일이십니까?!」라고 소리치며 마차와 마부석을 잇는 작은 창문을 열었고, 내 옆에

앉아있던 비서관은 마차벽에 마련된 손잡이에 매달린 채 「마마?!」라고 나를 불렀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마차가 열리자마자 튀어나가듯 마차를 벗어나 나는 달렸다. 뒤에서 군인과 비서관이 연유도 모

르고 나를 따라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기다려주십시요!」

「마마, 비 마마!」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달려가자, 저 멀리 앞에 있던 시녀가 뒤를 돌아본다. 당혹스러움

끝에 달린 희미한 불안. 저 여자, 맞다! 저 갈색머리, 수수한 얼굴. 나에게 ‘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쪽지를 건넸던 그 여자다!

그녀가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내 달렸다. 그리고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비 마마……」

비서관 빠르다. 그녀는 군인들보다 더 빨리 내 앞에 도착해있었다. ……그럴 수가 있나?

나는 오른손으로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 같은 시녀의 팔목을 움켜 쥔채 내 앞에서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숙이고 있는 비서관과 저 멀리서 달려오는 남자 둘을 번갈아보았다.

「비서관님.」

「하,하,하명……하시옵소서, 마마.」

「달리기, 잘하세요?」

내 말에 비서관이 ‘또 뛰자는거냐?!’라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다지……잘 한다고는……」

나는 빠른 편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늘 릴레이니 하는 달리기 시합에 나가기도 했고. 그러나, 군인보

다 내가 빠를까? 그리고 비서관이 군인보다 빠르다고?

군인 둘도 내 앞에서 헉헉대며 거의 쓰러질려고 하는 꼴을 보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비서관님.」

「예, 마마.」
「마차로 가세요. 지금 당장. 뛰세요.」

나는 군인들을 노려본 채 명령하자, 비서관은 연유도 모르고 뛰기 시작했다.

「자, 잠깐!」

군인들이 나와 비서관을 보며 잠시 우왕좌앙하는 순간, 나는 검을 뽑았다. 차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진검은 처음이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내 실력은 얼마나 향상되었을까?

-아니, 트롤을 상대로도 버텼던 나다. 시오엔이 와줄거야. 그 정도만, 버티자.

「비 마마?」

어쩌면 생사람 잡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시오엔의 군대는 당나라 군대다. 군대 교육을 제

대로 시키게 되는 계기가 되겠지.

「너네, 누구세요?」

내 말에 군인들이 애매모호하게 웃는다. 그리고 표정이 바뀌었다. 빌어먹을, 이 여자 겨우 찾아냈는

데-! 나는 여자를 밀어뜨리고 검을 제대로 잡으려 했다.

그 순간, 갑자기 깨달았다. 이 놈들이 군인이 아니면 어느 놈들일까? 만약 신전쪽이라면……

내 뒤에 있는 여자와 한패잖아?

-그 순간, 내 몸으로 무언가가 관통했다. 어떤 소리가 났다. 사람의 살을 찢고, 쇠붙이가 뼈에 닿는

지독한 소리가 내 몸 안에서 들렸다.

영화에서 보면, 몸에 칼이 박힌채로 싸우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내 힘으로 몸을 웅크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순식간에 눈앞이 검은색으로 변했다.

-많이 다쳤잖아.

오랜만에 보는 드래곤은 야위어있었다. 야위든 야위지 않든은 내 알바 아닌데, 시오엔의 얼굴로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요?

꿈 속은 늘 똑같은 어둠이었다. 자신의 몸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 생각없이 내린 시

선 끝에 피가 흐르는 내 몸이 보였다. 옆구리를 찔렸나보다.

아프지 않으니 일단 넘어가자.

-오랜만이군.

드래곤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아주 부담스러워진 내가 입을 열려고 하

는데 드래곤은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잘 지낸 것 같군.

드래곤이 서서히 다가와 피가 흐르는 내 몸에 손바닥을 대었다. 손바닥에서 황금색 빛이 반짝였다. 천

천히 피가 멎는 것이 보인다.

-피를 펄펄 흘리는 사람에게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피를 흘리는 거는 불의의 사고인거고. 그대는 잘 지낸것 같은데?


-뭐, 대충.

내 말에 드래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과 어둠속에서, 오로지 드래곤의 손바닥만이 반짝였다.

그것은 어두운 밤에 타오르는 모닥불같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드래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대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왜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데요?

-내가 그대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아, 생긴 것도 똑같이 생겨서는 하는 말도 비슷하구나. 전에 시오엔이 하던 소리와 비슷한 말을 하는

드래곤을 쳐다보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감정을 전부 보답 받을 수는 없잖아요. 리안 형은, 자신을 원하거나 자신을 바라는 사람을 무조건 좋

아하세요?

피가 멈추고, 이제 상처도 아물었다. 드래곤의 손바닥에서도 더 이상 빛이 나오지 않았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드래곤이 내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그렇다면 제가 리안 형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니.

드래곤이 고개를 다시 한번 저었다.

-비슷하지 않아. 비슷할 수 없어. 이 간절함이, 어떻게 그런 감정들과 비슷하다는 거냐?

나보다 나이가 많을텐데, 참 어리구나.

시오엔의 얼굴에서 나오는 말이라 그런지 조금 귀엽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 남자의 빛 때문에 또 문양

이 진해진다던가 하는 건 아니겠지? 어둠속에는 거울도 없어서, 눈동자 속의 각인을 확인할 길이 없다.

-남들도 다 그렇게 간절한겁니다.

-너는 영원히,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

드래곤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런 가능성은 단 한번도 염두해두지 않은 것

처럼.

-감정은 변하니까 영원히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요.

사랑도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 부모가 그렇듯이, 언젠가는 시오엔의 감정도 사라지고 내 마음도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사랑이란 그런거잖아? 드라마를 보아도, 책을 보아도, 게임을 해도- 인간은 결

국 변한다는 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말할 수는 없다? 그럼 언젠가는 나를 사랑하겠다는건가? 시오엔 녀석은 죽어, 너는 홀로 남는다.

-그가 죽더라도, 그래서 내 감정이 변한다 하더라도, 내가 그 쪽을 좋아할 가능성은 별로 없지요. 세상

에 절대란 없으니 그렇게 말해서는 안되겠지만 아주 희미한 가능성이에요, 그건. 그리고.

시오엔을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거지만, 만에 하나 그가 죽는다해도.


-난 시오엔이 죽기 전에 집으로 돌아갈거에요.

-방해할거야.

-마음대로 하세요.

드래곤이 이를 바득 갈았다. 드래곤에게 말하면서도, 나는 시오엔에게 고백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오엔이 죽더라도, 나는 가야 한다. 어차피 내가 여기 있다고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나는

이방인이다. 이렇게 사람을 찌르고 온갖 암투가 횡횡하고, 마법에 각인에 알지도 못하는 기술이 총 동

원되는 이 세계에서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모험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집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자고, 편의점 가서 삼각김밥 사다 먹고, 플레이 스테이션에 매진하고, 결혼

했을 새 어머니에게 축복도 해주고 싶다. 내일을 걱정 없이, 그리고 내가 의도한대로 내 인생을 조절할

수 있길 바란다. 이렇게 하루하루 상황이 달라지고, 살얼음판을 걸으며 살고 싶지는 않다.

시오엔을 정말 좋아하지만.

그를 정말 지켜주고 싶지만.

내게는 사랑보다 자신이 중요하다. 목숨이라면 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미래는 걸 수 없다.

-너를 사랑해.

드래곤은 몇 번째인지 모를 고백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처음 듣는 고백을 곁들였다.

-그래서 너를 증오해. 그리고 나를 경멸해.

그는 사라져갔다. 투명해진 몸으로도 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희미해져갔다.

11. 만약,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4)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작은 뒤통수였다. 어디서 보던 뒤통수다. 갈색 머리카락에 아주 작은 몸. 어

린애인 것 같다. 다섯 살? 여섯 살?

「깼군.」

예상했던 얼굴이 나를 돌아보았다. 황태자다. 신관파에게 황제가 되라고 부추겨지고 있다더니 고새 넘어

갔냐. 하긴 여섯 살짜리가 황제 시켜준다는데 넘어갈 법도 하지만.

「창녀같으니.」

무시무시한 얼굴로 황태자가 나를 모욕했다. 하지만 사실 너무 웃겨서 별로 데미지를 입지는 않았다.

「남창,이겠지. 창녀는 여자잖아. 난 남자고.」


그 순간 눈앞에 뭔가가 나타나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눈을 뜨자, 황태자가 채찍을 들

고 서 있었다. 자기 몸길이보다도 긴 채찍을.

저걸로, 내 얼굴을 때린 것이다.

한 때는, 황태자에게 말을 잘해서, 그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

전에는 그가 가엽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어릴 때의 내 모습이 겹쳐져 안타깝다고 여기던 때가 있

었다.

저 빌어먹을 아새끼가 사람을 ‘마리’라고 칭한걸로 모자라서 채찍으로 때려?

「너같은 건!」

내가 멀쩡하게 일어나자 황태자가 소리치다 말고 굳었다. 그래 옆구리가 찔린 내가 멀쩡하게 일어날거라

고는 생각도 못했겠지. 이게 보자보자하니까 진짜.

머릿속 한구석에서 시오엔의 목소리가 울렸다.

‘마이는 네가 아니야.’

그래, 저 아새끼는 정말 싸가지가 없는 아새끼일뿐이다.

황태자가 뭐라고 소리치기전에 나는 황태자에게 몸을 날려 그의 입을 막았다.

「읍읍!」

미친듯이 반항해봐야 고작 여섯 살. 한손으로 가볍게 누르면 끝이다. 머릿끝까지 열이 받아서, 입을 막

은채 바닥에 누르고 채찍을 빼앗았다.

이 새끼를 어떻게 해줄까?

코딱지만한 게 진짜 열받게 하는군. 난 어린애한테 관대한 인간이 아니다. 내가 이 애새끼에게 이제껏

너그러웠던 건 이 애새끼가 시오엔의 아이인 동시에 나에게 어린시절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였다. 그래

서 나는 이 아이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사람처럼 옴싹달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채찍으로 도대체 몇 사람을 후려친걸까?

나는 황태자의 입을 완전히 틀어막은 채 채찍으로 아이를 한 대 쳤다. 그렇게 아픈 정도는 아니었을 거

라고 생각했는데 황태자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놈들이 꼭 이런식이다. 린트인 아이들이 그립다. 그 아이들은 착하고 총명하고

성실하고 강단도 있었다. 이 놈은 뭐냐고, 도대체. 시오엔의 아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참……약하다. 주변

에서 받쳐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안 닥쳐?」

내 으름장에 황태자가 놀란 눈으로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가엽지만, 이 놈은 좀 세상 무서운

걸 알 필요가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 인내심이 더 이상 남아있지가 않다.

내가 황후가 되겠다고 결심한데는, 너의 입지 문제도 있었단 말이다- 이 나쁜 아새끼야아아! 시오엔은

전에 말한 적이 있었다. ‘황후가 남자라면, 현재 임시인 황태자도 그 자리를 공고히 하게 될것이다’라

고. 그래서, 나는 황후는 정말 싫지만, 하지 뭐-라고 생각한 것도 조금 있었단 말이다.


이런 썩을 새끼가, 사람 마음도 모르고!

나는 황태자를 끌고 창가로 데려갔다. 채찍 한 대로, 얼굴이 찢어져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한손으로

황태자를 끌고 다른 한손으로 피를 닦다가, 황태자의 얼굴에 문질러주었다. 황태자가 더욱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황태자의 방은 삼층이라 들었다. 화려한 내장으로 보건대 황태자의 숙소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창문을 여니 바닥이 멀리 보였다. 이 황궁은 유난히 천장이 높아, 삼층이라 할지라도 거의 육

층 수준이다. 떨어지면 여섯 살짜리는 죽을지도 모른다.

입을 놓고 목을 잡아 창가 밖으로 손을 뻗었다. 손아귀에 잡힌 목에서 캑캑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나갔다.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제발!」

그리고 밖에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황태자의 비서관으로 같이 교육받고 있는 소년 티엔과, 호위병사들

이었다. 그 병사 옆에는 아까 병사인 척 하던 놈들이 신관복을 입고 있었고, 나를 찌른 시녀도 서 있었

다.

「무엄하다! 전하를 당장 놓아드려라!」

티엔이 상황파악도 못하고 고함을 쳤다. 어린애들이란, 이래서 짜증이다.

「나한테 한번만 더 소리치면, 손 놔버린다?」

내 말에 티엔이 「이, 이런 비겁한……」이라며 이를 갈았다. 잘 살고 있던 사람을 납치한 게 누군데 비

겁 운운이야? 그러나 반론하기도 귀찮아서 나는 내버려두었다.

「조, 조건이 뭐냐?」

「시오엔 불러와.」

그러자 안색들이 변했다. 계산하는 거 빤히 보인다. 시오엔이 이 꼴을 보면 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하는 거겠지. 그러나 불러오지 않으면 황태자가 죽고, 그럼 신전파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 그 조건은 안돼.」

지랄한다.

「안되는게 어딨어, 되게 해.」

내 말에 다들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황비치고 너무 극악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들 잊는 것

같은데, 나는 황비이기 전에 사내 놈이란 말이다. 열받으면 뵈는게 없어진다고.

그러게 나를 묶어두셨어야지. 내가 칼에 찔려서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유로 풀어두면 쓰나. 자,

데려올래, 아님 정말 죽여버릴까.

신관 놈들이 이상한 짓을 하려는게 눈에 띄였다.

「신관 놈들. 이상한 짓만 해봐. 황태자도 죽이고, 나도 죽을거야. 그럼 시오엔이, 아니 황제가 가만

있을 거 같아? 늬들은 끝장이야. 게다가, 골드 드래곤도 가만 있을 거 같아?!」

그 말에 신관들이 움찔거렸다.
「타협은 없다, 황제를 데려와!」

팔이 후들거렸다. 당장이라도 놓을 것 같다. 하지만 놓아서는 안돼, 사람을 죽여서는 안돼. 나는 창가

턱에 팔을 올리고 가능한 무게를 창에 지탱하려 노력했다. 땀이 흐르고, 피도 흘렀지만, 손으로 닦는

거 외에는 계속 문가의 놈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티엔이 황제에게 갔고, 티엔을 제외하면 황태자를 진

심으로 위하는 인간이 이 멤버중에는 없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끝이다.

눈앞이 자꾸 흔들거린다. 이를 악물었다. 이제 안되는 것 같다. 천천히 황태자를 끌어올려 창가에 앉히

고 주저앉는데, 갑자기 칼이 나타났다. 나와 대치하고 있었던 사람들의 목에 하나같이 칼이 들이대져있

다.

그리고 그들이 강제로 무릎을 꿇은 채 옆으로 비켜지고, 시오엔이 들어왔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마이 유브라데.」

시오엔이 나에게 다가와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황태자에게 냉엄한 목소

리로 선언했다.

「너는 더 이상 황족이 아니다. 탑으로 후송해라.」

「아, 아바마마!」

황태자가 시오엔의 발치에 매달리는 순간 시오엔이 발로 아이를 차버렸다. 진심으로 찬 것이 눈에 보였

다. 아이의 작은 몸이 허공을 날아 벽에 쳐박혔다. 토사물을 뱉으며 아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전하!」

티엔이 비명을 지르자, 시오엔이 티엔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황제의 병사로 보이는 남자가 티

엔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티엔이 갈대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시오엔은 정말로 화가 난 것 같다. 그가 말하던 ‘살기’가 그의 온몸에서 흘러 나온다. 나를 안아 올린

시오엔이, 나에게 채찍을

휘두른 황태자나 나를 찌른 시녀보다 훨씬 무섭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압도된다.

「죽여라.」

시오엔의 명령에, 모든 사람의 목에 대어졌던 칼이 서슴없이 움직였다. 비명도 무엇도 없이, 사람들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거의 동시에 그들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방금전까지 움직였던 사람들이,

죽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어버렸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악-----------」

시오엔의 당황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

「미누, 잠깐, 진정 좀.」

사람이 죽었어, 사람을 죽여버렸어!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누가 나를 흔들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뭔가 말하고 있어. 그러나 들리지 않는다. 사람이 죽는다. 사람

을 죽인다. 그런것이 당연시 되는 이 곳, 이제는 싫어! 누군가 보내줘! 나를 여기서 내보내줘! 나를


집으로 보내줘!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우와아아아악- 살려줘, 살려줘!」

누군가 나를 좀 살려줘! 제발 누가 좀 도와줘! 이젠 정말 싫어!

알지 못하는 누군가, 보아도 인식할 수 없는, 나를 안고 있던 누군가가 나를 끌어안았다. 숨이 막히도

록 세게 안긴 상태에서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지지 않는다. 나는 그를 물어뜯었다. 살점이 입

에서 움직였다. 피비린내가 입안에서 진동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는 미동도 없이 나를 끌어안고 있었

다.

한참을 고함을 지르다, 나는 눈을 감았다. 쓰러지고 있다. 정신이 멀어진다. 이 감각이, 이토록 고마웠

던 적은 없었다.

「지켜준다더니……」

눈이 떠지지 않는다. 어떤 상냥한 손길이 내 이마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 손이 닿아서야 나는 내가 식

은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지겨워졌어? 무서워?」

대답을 하고 싶어서 입을 열려 했지만, 입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게다가 할 말도 없어서, 나

는 다시 한번 입을 열 시도를 해보지 못하고 그저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총 회의에서 대신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서관의 목소리다.

「기다리라고 해. 데이비드, 범인 색출 작업은?」

「아직입니다.」

「잡아내. 분명히, 대신들 중에 협력자가 있다. 그들은 회의장을 지키는 부대의 완장을 차고 있었어. -

그리고 군대에도 협력자가 있다. 그 쪽도 수색해.」

시오엔이 나른하게, 노래하듯이 말했다.

「명을 받듭니다.」

「반드시 잡아내라.」

그저 잡아내라는 그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에 질리게 했다. 그는, 죽여버릴 것이다. 어쩌면 마이

처럼 채찍을 휘두를지도 모른다. 사람에게 채찍을 휘두르다니. 나는 뉴스로밖에 그런일을 보도 듣도 못

했다. 더욱 끔찍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죽었다. 아무런 변호의 기회도 받지 못한채.

「완장의 원 주인들은?」

「완장은 본래 두 개씩 지급되기 때문에 다른 한 개를 차고 있었다고 합니다.」

「언제 분실했는지는 알고?」


「기억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대시켜.」

「명을 받듭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뭔가를 쓰고 있는것이겠지. 늦은 오후인데도, 밖에서는 새소리가 들리고 있

다. 그 새소리가, 방 안의 침묵을 더 부각시켰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궁의가 말하기를, 그대가 내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 ……내 말이 들리나?」

잠시 침묵했다가, 시오엔의 손이 닿았다. 그의 손이 내 입술에서 턱으로 그리고 가슴쪽으로 내려갔다.

섹스를 하려는 걸까?

「그대는 늘 내 손을 벗어나는군.」

내 가슴쪽에서 시오엔의 손이 이상한 글자를 그리고 있다. 무슨 글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대는 내 곁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상하지. 그대를 아무리 잡아놓아

도, 그대는 계속 멀어진단 말이야. 마치, 운명처럼.」

시오엔의 몸이 내 몸위로 덮였다. 그 체온과 무게가 느껴졌다. 그리고 숨결이 귀에서 흩어졌다.

「신은 단 한번도, 내 편이 아니었다. 허나, 신도 나에게서 그대를 빼앗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두었거든. 아무도 내게서 그대를 데려가지는 못한다.」

새삼 신경쓰이는 것 한가지. - 시오엔이 과연 이년뒤에 나를 보내줄까?

그가 보내주지 않는다면, 나는 계속 이 상태로 살아야 하는건가? 사람이 죽는 것을 방관하면서? 때로는

살인자가 되면서? 나도 곧 황태자처럼, 황제처럼, 신관들처럼 사람을 죽이는데에 거침이 없어질까?

적응이 되어도 문제지만, 적응이 만약 되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 이 고통과 함께 여기서 몸서리치며 살아야 한다는건가.

「그대가 황태자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황제가 속삭였다.

「그대가 오늘 내에 깨어나지 않는다면, 황태자도 그대의 시녀들도 전부 처형하겠다.」

그 협박을 하는 목소리는, 우울하게 느껴졌다.

사면초가의 심정으로, 나는 시오엔의 품에 안겨있었다. 내 힘으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고, 내

힘으로는 눈꺼풀을 들어올릴 수도 없고, 무엇보다 그럴 마음이 생기지도 않는 가운데, 가만히 그에게

안겨있는 수밖에 없었다.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과 자신의 시종들을 인

질로 삼은 협박범의 품 속은 따듯하고 온화했다. 새삼,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닫게 되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어디서부터 잘못 선택한 것일까.

알 수가 없다. 시오엔을 처음 보았을 때, 술 마시고 연못에 빠졌을 때, 시오엔에게 지켜주겠다고 했을

때, 삼년간은 황비로서 있겠다고 계약을 했을 때, 신성지에서 마을로 달려가던 때.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한것일까. 그 순간순간은 맞는 선택을 한 것 같은데, 왜 결과는 이렇게 되었을까.

「깨어나……!」

비통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이 뜨였다. 시오엔의 옷이 보인 순간, 기가 막히고 말았다. 이런게 사

랑일까? 이렇게 지치고 힘들고 화나는데도, 상대가 깨어나라고 하자마자 눈을 뜨는 것이? 너무 바보같

잖아. 너무 어이없잖아. 너무……이건, 정말 너무 손해잖아. 나만 너무 아프잖아.

드래곤에게 잘난 척 설교했던 것이 떠올랐다. 감정을 전부 보답받을 수는 없다고, 내 입으로 말해놓고

지금 나는 억울해하고 있다.

내가 깨어난 것을 모르는 시오엔이 나를 끌어안은 채 애원했다.

「제발, 다시 한번 나에게 지켜주겠다고 말해, 제발……」

나는 시오엔을 마주 안았다. 그가 놀란 얼굴로 나를 떨어뜨리고 내가 눈을 뜬 것을 확인했다. 그 시선

을 받으며 나는 입을 열었다.

「일어나긴 일어났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지친 목소리였다. 실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이 죽었다. 거짓말이라고, 누

군가에게 거짓말이라고 해달라고 지금이라도 당장 소리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 아닐 것이

다.

「조금, 시간을 좀 주세요.」

「뭐에 대해서?」

시오엔이 당장이라도 헐떡일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그도 지쳐보인다. 하긴, 그도 지칠 것이다. 그도

나 때문에 곤욕을 치루고 있으니까.

그런 걸 감수하면서까지 나와 있는 이유가 뭘까? 드래곤에게 던져주고, 그 대가로 무엇이든 받아내면

좋을텐데. 그가 골드 드래곤의 수호를 받고 있다는 것은, 그가 강력한 군주가 되는데 커다란 힘이 되었

을 것이다. 그런 것을 버리고 나와 있느라 그도 고생이 심한 것 같다.

「뭐에 대해서든.」

「도망칠건가?」

「못 친다는 거, 아시잖아요.」

불만스러운 얼굴로 시오엔이 나를 쳐다보아서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도망 안 쳐요.」

「그럼 뭐에 대해서 시간을 달라는 거지?」

「혼례식이요. ……좀 쉬고 싶어서요.」

완전히 지쳐서, 이제 뭐든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시오엔은 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안돼.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다. 예정대로 혼례식을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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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조금만 더 (1)

눈을 뜨면 시오엔이 앞에 있다. 그는 나를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데, 내가 조금만 일어나도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본다. 어둠속에서 금안이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감시 받는 죄수의 심정이 되고 있었다.

매일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방으로 찾아온다. 그러나 시오엔은 나를 자신의 방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했고, 시오엔의 방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엄중한 감시와 몸수색 끝에 들어올 수 있었다.

치수재기.

절차외우기.

연설문외우기.

황궁에 만들어지는 외국인 숙소의 방을 배정하기. 역시 그들의 자리를 배정하기. 그들에게 편지쓰기.

그들의 이름과 초상화를 외우기.

수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내게 떨어졌다. 나도 그것들을 하려고 애를 썼지만, 내 체력은 떨어져 있어서

내 마음대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시오엔도 비서관도 나에게 더 열심히 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도리어

비서관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 가능하도록 짜고, 휴식시간을 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매일이 피곤한데도, 왠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시오엔의 품속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잠은 오지 않았다.

가면갈수록 예민해지는 귀에서는 시오엔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는 자고 있을까?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데?

「잠이 오지 않나?」

시오엔이 눈을 뜨지 않은 채 물었다.

「조금.」

「그대가 흥미로울 이야기 해줄까?」

시오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 목소리로 나오는 말은 무엇이든 좋을 것 같지 않다. 내가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는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보지 못했다.

내가 입을 열어 됐다고 하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황태자를 처형한다.」

「언제요?」

「오늘, 오후에.」

여섯 살 짜리 아이에게 ‘처형’이라니. 시오엔이 눈을 뜨고 내 얼굴에 입술을 댔다. 이젠 희미하게 남은


상처를 입술로 더듬어서, 등골이 오싹했다.

「살리고 싶나, 아니면 죽이고 싶나?」

당연히 살리고 싶다.

내 허리를 안은 시오엔의 팔을 잡고, 손톱을 박으며 나는 그의 키스를 받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내 등으로 흘러 간지럽혔다.

「어느 쪽이든, 태자는 죽일 것이지만.」

그럼 왜 물어보는거지?

잠시 마주친 내 눈에서 내 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시오엔이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대답했다..

「글쎄.」

시오엔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통증이 아릿하게 느껴졌다.

「내가 왜 그대에게 이런 걸 물어보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아마도, 그대가 조금 더 내게 다가오길 바라

는 걸지도 모르지.」

나는 더 다가갈 수 없을만큼, 너에게 다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시오엔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내 몸을 더듬어 내려간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나는 새삼스

럽게 내 몸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다. 우리의 몸은 이토록 닿아있는데, 왜 시오엔은 내게 다가오라고

하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머릿속에서 모였다가, 쾌락의 입김에 밀려 흩어졌다.

물어보려고 밀어내어도, 시오엔의 손이 교묘하게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뒤에서 애무하는 것을 즐

기는 시오엔이 나를 돌리고 등 뒤로 몸을 붙인 채 움직이고 있다. 그의 성기의 끝이 몸 어딘가에 닿을

때마다 세포가 깨어나는 것같은 감각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이 따위로, 굴지 말아. 거부하고 싶어도 등 뒤에 있는 시오엔을 거부할 수가 없다. 도리어 시오엔은 내

엉덩이 사이에 물건을 끼우고, 노골적으로 귓가에 신음을 내지르며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뒤에 있는 시오엔을 쳐내야한다는 것은 그저 머릿속의 작은, 사방 1cm 도 안되는 작은 공간에서의 이성

뿐, 내 몸은 내 통제밖으로 터져나갔다.

「좋아……」

시오엔은 대놓고 내게 속삭인다. 시오엔하고밖에 안해본 나지만, 이게 고의라는 건 알겠다. 화를 내고

싶은데, 화는 고사하고 제대로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좋아…… 움직여줘……」

말투만 애원조다. 당장이라도 그만두라고 하고 싶은데 몸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시오엔의 손이 내 성기

를 잡고 흔들었다. 차라리 엎드리고 싶은데 엎드릴 수가 없다. 시오엔이 뒤에서 나를 붙잡고 있다. 허

리가 휜채, 불안정한 자세로 흔들려서 더욱 성감은 고조되었다. 그의 손이 내 앞을 잡고 미끄러질때마

다 허리를 움직이게 된다. 그럼, 뒤에 있는 시오엔의 성기를 좀 더 느끼게 된다. 어느 쪽도 완전히 쾌

락을 추구할 수가 없다.
「미누, 더, 더 움직여줘……」

느리게 요구하는 말투는 더없이 순종적이고, 내 뒤에서 움직이는 몸은 나를 강탈할 것 같다. 실제로 앞

으로도 뒤로도 움직이지 못하고 허공에 뜬 상태로, 나는 허리만 움직였다.

「좀 더……」

그리고 시오엔이 나를 내려주었다. 드디어 허공에서 침대로 무릎이 닿아서, 안도하기도 전에 시오엔이

내 허리를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눈앞이 계속 흔들린다. 눈을 감으려는 순간, 시오

엔의 성기가 내 뒤에 조금 들어왔다.

아프다. 찢어지지 않도록 시오엔이 뭘 바르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다. 아파서 포기하고 싶은데도, 포기가 되지 않는 이 순간. 이를 악물면서도, 내 성기도 숙여지지

않고, 더욱 단단해지는 이 순간을 뭐라고 해야 하는걸까.

입술을 물어뜯어 피맛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만두라고 할 마음은 나지 않는다.

시오엔의 오른손이 내 오른손 위에 겹쳐졌다. 왼손으로 시오엔이 내 허리를 안고 허리를 조금 띄웠다.

이를 악물고 긴장하는 순간 시오엔의 혀가 귀에 닿았다. 놀라서, 긴장이 풀리자마자 시오엔이 강하게

들어왔다.

숨을 몰아쉬는 내 뒤통수에 시오엔이 다정하게 이마를 비비며 속삭였다.

「숨을 쉬어봐.」

이 순간이 가장 고통스럽다. 억지로 벌어진 뒤는 입까지 관통된 것처럼 아프고, 온몸이 간헐적으로 떨

린다. 어떻게 내게 해보려 해도 되지 않는다. 가장 힘든 것은 이 모든 것을 시오엔이 보고 있다는 것이

다. 마치 배설행위를 보인 것처럼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는 기분이 들어서 약간의 수치심이 생긴다.

천천히 숨을 내쉬는 동안에도 시오엔은 내 성기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상냥한 애무를 계속하고 있었

다. 내 몸이 이완되는 것을 기다리면서 그는 내 목을 핥았다. 짐승이 핥는 것 같은 할짝거림이었다. 조

금 익숙해지자마자 나는 목을 움츠렸다.

「간지러워요.」

내 항의에도 시오엔이 할짝임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좀 더 익숙해져야 하는걸. 그대는 이런 걸 좋아하는군.」

「간지럽다니깐요.」

「그대는 다정하고, 상냥한 것을 좋아하지. 그건 좋은 일이야.」

내용상으로는 칭찬같기도 한 말이 별로 칭찬같지 들리지 않았다. 할짝이던 곳을 이로 지그시 물면서 시

오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숨이 막히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좋다. 이 고통속에서, 쾌락이 도착하길

기다리면서 시오엔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좋은데, 시오엔은 뒤에 달라붙어있다.

그래서 소리와 촉감으로밖에 그를 느낄 수 없었다. 그 감각들은 조금 더 짙어졌지만, 시오엔을 보지 못

해서 조금 아쉬웠다. 갑자기 빨라졌다. 시오엔이 허리를 마구잡이로 흔들어서 쫓아갈수가 없다. 허공으

로 손을 뻗으려 해도 한 손은 뒤에서 잡혀있는 상태였고 자유로운 한손을 흔들어도 상대에게 닿을 수가


없다.

어떤 안타까움이 전율이 되어 몸속을 흘렀다.

「잠깐, 잠깐만……」

흔들리면서 겨우 고개를 돌렸다. 제멋대로 신음이 튀어나와, 목이 자꾸 말라서 침을 삼켜야했다. 숨을

헐떡이느라 고개가 움직이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며 시오엔을 쳐다보자, 시오엔이 입술이 닿지 않은채 오

무려서 키스하는 모양을 만들었다.

입술이 떨어지면서, 가볍게 키스할 때의 소리가 났다. 그리고 시오엔이 입술을 핥은 뒤 말했다.

「더 허우적대봐.」

그리고 시오엔은 내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사람처럼 거칠게 움직였다. 마라톤을 백미터 달리기 속도로

달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숨이 막힌다. 쾌감이 너무 빠른 속도로 깊어져, 제대로 느낄 틈도 없다.

몸이 느끼고, 머리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느끼는지조차 알지 못하겠다.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타

액이 흐르는 것을 막지도 못한채 울부짖었다. 내가 울때마다 시오엔은 더욱 더 내 몸속에서 날뛰었다.

사정은 어이없이 찾아오고, 그런 순간이 없었던 것처럼 다시 부추겨졌다.

「읏, 그만, 그만! 아, 좋아, 아니 싫어, 아니!」

귓가에서 헐떡이는 숨소리에 웃음소리가 섞였다. 한 사람은 웃고, 한 사람은 헐떡이고 있을것이다. 아

니, 한 사람은 웃으면서 헐떡이고, 한 사람은 그저 헐떡이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나일까, 시

오엔일까. 고개를 급하게 저었다. 뭐든 좋으니까 아무것이나 생각을 하고 싶었다. 아무것이라도!

지금 몸 속에서 움직이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이든! 지금 내 몸에 달라붙어서 나를 흐드는 사람 말고 다

른 것을!

「안돼, 아직이야.」

시오엔은 계속 쿡쿡거렸다.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가 검게 물든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데도, 시오

엔은

지치지 않고 나를 밀어붙였다. 반응하지 않아야 이 미친 행위를 멈출 수가 있는데, 반응은 제멋대로 나

온다. 일단 한계점을 지나자 그 때부터는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몸을 흔드는 것도, 시오엔의 입술을 핥

는 것도, 아무것도.

처음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는, 시오엔의 몸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어두워서 아직도 밤인가,라고 생

각했는데-

두꺼운 커튼이 쳐져있었다. 시큼한 정액냄새가 시트 주위를 떠돌고 있다.

「일어났군.」

몸이 결합된 상태로, 시오엔이 가볍게 입술을 댔다. 잘 잤어,라는 식의 가볍고 건전한 키스였다. 지금

일어났는데도, 몸은

사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기절했던 것일까, 잠이 든 것일까. 어느쪽인지 생각을 해보기도 전에,

시오엔의 움직임에 동화되었다. 이상하게도 옆구리가 결린 것도, 힘이 든것도 사라졌다. 그저 이 감각


만이 중요해졌다. 순수한 쾌감에 중독되어서 허리를 움직였다. 시오엔은 느리게 움직이는데, 그것에 맞

춰 움직일수록 느낌은 커졌다.

「아……」

시오엔은 거침없이 신음을 뱉었다. 내 눈을 마주하고서 일부러 자신을 흩트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신음은 짐승과 창녀, 그 중간쯤에 있었다. 교태로운 입술로 신음을 뱉으면서, 짐승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분명히 무서워해야 할 것 같은데 흥분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핥아줘……」

시오엔이 애원을 담은 목소리로 요구했다.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나는 시오엔의 입술을 핥았다.

「말을 해봐.」

「무슨……」

무슨 말을, 이라고 채 묻기도 전에 시오엔이 밑에서 위로 찔렀다. 앉아서 하는 것은 훨씬 힘들다. 내장

이 내려와서 시오엔의 물건이 흉기로 느껴질 지경이다. 그의 성기가 내 내장을 찔러 터트릴 것 같다.

뒤가 따끔거렸다. 진무른 것 같은 느낌이 나는 곳을 시오엔이 질퍽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나도 움직였다. 그가 치고 올라올 때마다 그의 것을 조이며 허리를 당겼다. 몸이 자동화

된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 말이나.」

시오엔의 아름다운 얼굴에서도 땀방울이 흘러 떨어졌다. 핥아달라고 했던 시오엔의 말이 생각나 그 땀방

울을 핥고 나는 불만을 터트렸다.

「짜잖아……」

그 말에 시오엔이 키득거리면서 몸을 움직였다. 소년같이 웃으면서 그가 부드럽게 내 뺨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사랑한다고 해줘, 그 말이 듣고 싶어졌어.」

사랑이…….

나는 사랑을 잘 알지 못한다. 이 감정이 사랑인지 잘 모르겠다. 움직이면서 나는 「좋……아해요.」라고

힘들게 대답했지만, 시오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랑한다고 해줘.」

혼란스러웠던 의식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잠시 시오엔을 쳐다보았다. 시오엔도 피스톤질

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숨결이 공유되는,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금색 눈동자는 시오엔이 사람이라는 것을 잊게 한다.

시오엔이 달콤하게 애걸했다.

「사랑하다고, 말해줘. 나를 사랑하고 있잖아……지켜주고, 사랑해줄거잖아……」

몽롱해졌다.

시오엔의 움직임이 다시 뒤에서 느껴졌다. 집요하고 농후한 움직임에 넋이 나갈 것 같다. 눈을 뜨거나


감는 것은 이미 어느쪽이든 상관 없이 되어버렸다. 눈이 뜨거웠다. 왜 뜨거운지도 모르겠는데, 눈물이

흐르는 것만이 뺨에서 느껴졌다. 움직이면서 나를 본 시오엔이 입술만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순간, 왜 나는 울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눈물이 났다. 무언가가 무섭고, 또다른 무언가가 북받

쳐올랐다.

「사랑해요……」

그 순간 몸 안쪽이 뜨거운 액체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시오엔의 정액을 몸으로 받으면서 나는 웃다가

울었다. 희미한 이성으로,

그가 사정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다시 한번 눈물이 흘렀다. 왜 우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데도, 몸이 알아서

눈물을 내보내고 있었다. 이 지독한 쾌감에 밀려 슬픔이 뒤처진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가 마지막으

로- 그리고 제대로 한

유일한 생각이었다.

그 다음에도, 그리고 그 다음에도 깨어났을 때마다 계속 꿰뚫려있었다. 시오엔은 내가 잠들었다 깨었을

때 조금씩 더 위험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요구했고 나는 멍하니 그 말을 반복했다. 일

어나고 깨고를 반복할

수록 시오엔은 말이 없어졌고, 급해졌다. 그리고 나도 그가 요구하지 않은 말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사랑해요.」

시오엔은 결코 대답해주지 않았다.

12. 조금만 더 (2)

눈을 뜨자 마자 햇빛이 보이는 것에 안도했다. 시오엔은 더 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정말 다행이다. 더

했으면 난 죽었을 것이다

. 남자로 태어나 복상사로 죽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라지만, 난 그딴 영광 필요없다. 아아, 살아있구나.

이토록 삶이 반갑고 절실했던 것은 처음이다.

-라고 생각하고 널부러져있으려다 문득, 섹스 전초전에 시오엔이 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오늘, 오후에.’

황태자를 처형한다. 우와아아아악-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이겠다고? 말도 안되지, 그것도 지

아들이잖아.
나는 단순한가보다. 패닉상태를 일으켜 소리를 지르고 시오엔을 물어뜯었던 것도 기억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 그건 과거. 황태자 처형은 미래. ……잠깐, 미래? 정말 미래일까? 나는 얼마나

잔걸까? 시오엔하고는 도대체 얼마나 섹스한거지?

……황태자는 살아있는건가?

「누나, 시녀누나!」

내 고함에 시녀가 달려왔다. 그러나 곧 그녀는 「앨.리.스.입니다.」라고 내가 부른 호칭을 정정해주었

다. 정정해서 불러주지 않으면 도로 가버릴 기세였다.

「앨리스 누나. 누나. 지금 몇일……아니, 나 얼마나 누워있었어요?!」

「폐하와 같이까지 포함해서요?」

앨리스 누나가 귀엽게 고개를 움직이며 물었다. 그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는데, 지금 쪽팔린게 문제가

아니다.

「같이……랑, 시오엔이 나간 뒤랑.」

「같이는 오일정도셨고, 사흘정도 더 주무셨지요. 그 동안 폐하께서도 밤에는 돌아오셨어요.」

맙소사, 내가 몇일을 잤다고? 아니,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 그럼, 황태자는……?」

새파란 눈동자를 한 앨리스 누나가 싱그럽게 미소지었다.

「일단은, 탑에 수용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일단은?!」

「폐하께서 원래는 그 다음날 처형하신다고 하셨는데, 그 다음날부터 비 마마와 방에 머무르시는 바람에

아직 처형전이시거든요. 그 이후에, 폐하께서는 밀린 정사 때문에 거의 밤을 지새우셔야 했고요. 혼례

식 때문에 무척 바쁘시거든요.」

다행이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다. 그나저나 시녀 누나,라고 급한 나머지 외치기

는 했지만, 정말로 시녀 누나가 있는 경우는 처음이다. 대부분은 비서관이나 시녀장이 있었으니까.

「레니 데이비드 비서관님은요?」

「폐하의 보좌로 근무중입니다. 비 마마께 인사하시고 싶어했어요.」

「시, 시녀장님은요?」

「국빈을 모실 숙소 정리로 바쁩니다. 숙소배정은 시녀장이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일이었다.

고마운 시녀장님. 하긴, 처음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숙소배정이라는게 말이 숙소배정이

지, 디자인부터 해야 하는건데. 나는 직사각형밖에 생각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적센스라는 건 타

고나야 하는 법인데, 나는 모든 디자인을 정사각형, 직사각형, 마름모, 원, 삼각형. 도형밖에 생각해내

지 못했기 때문에 비서관과 시녀장은 암담한 얼굴을 했었다. ‘달은 왜 이렇게 척박한 환경으로 만든겁

니까?’라고 나한테 따져 물을 정도였으니까. 나에게 어떤 곳에서 사느냐고 물어보길래 아파트를 그려주


었더니 ‘닭장입니까?!’라고 둘이 동시에 경악을 하는 모습도 재미있었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존속살해는 좀 그렇지. 아니, 많이 그렇지. 그건, 패륜이잖아. 몸을 일으켰지만, 순간 눈앞이 노래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허리가 무지하게 당겼다. 옆구리에 팔을 걸치고 끙끙거리는 내 앞에서 앨리스

누나가 만류했다.

「누워계셔야 한다고 합니다. 너무 무리하셨다고……」

윽, 섹스로 무리해서 누워있어야 한다뇨. 아아, 면팔린다.

「시오엔은?」

「지금이라면 총 회의에 참석하셨을 겁니다.」

「혹시 그 근처에서 기다렸다가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내 질문에 앨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안되십니다. 폐하께서는 비 마마에게 자숙하시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자숙?」

내가 뭘 잘못해서, 자숙?

「한마디로 방에 머무르시라는 말입니다.」

「나가면 안되는거에요?」

그 말에 앨리스가 쓴 웃음을 지었다.

「실은,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감금상태인 모양이다. 오늘밤에도 돌아오겠지. 돌아오면 황태자 이야기를 해보라고 해야겠다.

설마 정말 죽일셈은 아니겠지? 그럼 지 아들이잖아.

-라는 나의 기대를 저버린 시오엔은 저녁에 돌아오자마자 물어본 내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얼굴로 대답했

다.

「처형할건데?」

「아, 아들인데?」

아들이 무슨 상관이야, 라는 얼굴을 한 시오엔은 갑자기 미소 지어서 나를 놀라게 했다. 다정하고 상냥

한 미소이기는 한데, 뭔가 어긋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너, 아들을 죽인다는 말을 그렇게 녹을 것 같은

얼굴로 해도 되냐.

「내가 안했으면 좋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오엔이 해맑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럼, 내 것이 될래?」

무슨 뜻인지 몰라, 시오엔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게 되었다. 나는 이미 네 것이잖아. 너와 합방식도 했

고, 수많은 인간들 앞에서 너와 결혼할거고, 너와 섹스도 했고, 너를 좋아한다고도 했잖아. 뭘 네것이

되라는거냐. 그냥 해본소리인가 싶자, 닭살이 돋았다.


나는 웃으면서 시오엔의 팔을 툭 쳤다.

「이미 시오엔의 것이잖아.」

그러나 시오엔은 어느새 웃음을 지우고 나를 진지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야.」

……진심이라면, 혹시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거냐? 여기로 와서 겪었던 수많은 일들을 떠올리자, 시오엔

이 방으로 오는 길에 바나나 껍질이라도 밟아 넘어져 머리를 다치는 일도 새삼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

었다. 은근히 설득력있는 상상에 염려스러워졌는데 시오엔의 손이 내 머리카락에 닿았다.

「그럴래? 내 것이 될래?」

「……진심이에요?」

저 정말 장난치는 거 아니고, 머리 부딪친거야?

「응, 진심이야.」

「나, 시오엔하고 합방식 했잖아요. 혹시 기억 안나요?」

너 정말 머리를……

내 의심스러워하는 말투에 시오엔이 인상을 썼다.

「기억하고 있어.」

뭐야, 깜짝 놀랐잖아.

「예를 들면……그래, 문신같은 건 어때?」

문신?

「내 아들을 살리는 대가로, 네 팔에 문신을 새기는 건 어때? 진심으로 제안하는거야.」

시오엔 포에버, 같은거라도 새기라- 이거야?

시오엔은 인상을 풀고 다시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얼굴이 찌푸려졌다. 시오엔이 하는 말

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과 내 문신이 무슨 상관이야.

「진심으로?」

팔짱을 끼고 그가 강조한 문구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자, 시오엔이 고개를 저었다.

「반정도만.」

「반정도만……?」

「그래, 반정도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반은 진심이라는 건데, 반은 아니라는 거다. 그런 말을, 자기 아들의 목숨을

걸고 했다는 뜻이 된다. 경멸해야 할지, 진지하게 대답해야 할지 내 자신의 태도도 흔들렸다.

「하지만 네가 문신을 새긴다면.」

도대체 무슨 문신을 새기라는거냐.

「황태자의 처형은 관두지. 이 상처에 대한 책임도.」

이미 자국도 희미해져있는 얼굴의 상처를 만지며 시오엔이 말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

「걔는 시오엔의 아들이잖아요.」

왜 나한테 이러는거냐?

내 지적에 시오엔은 깨달음의 얼굴을 했다. 그건 마치 ‘맞아, 마이는 내 아들이었지’라는 식이었다. 잊

고 있었단 말이야? 설마, 하는 내 앞에 시오엔이 말뚝을 박는 것처럼 확인 사살을 했다.

「그랬지.」

더 이상 뭔가를 말할 기운이 없다.

기력이 떨어진 나를 시오엔이 안으려는 듯, 당겼다. 그 힘에 순순히 끌려가면서, 나는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그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마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상대를

부둥켜 안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의 시간은 제멋대로 흐르는 법이라,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안고 있었

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시오엔이 돌아왔을 때는 창밖이 밝았으나, 지금은 달빛이 아스라이 아름다

운 정원을 비추고 있다는 것 뿐.

「지금 당장 대답을 강요하지는 않을게.」

나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요구했고, 그 본인은 그 말에 대답해주지 않은 잔인하고 상냥한 남자가, 칼

을 가는 것 같은 어조로 속삭였다.

「내일, 처형장에 와서- 행동으로 보여줘도 돼.」

잔혹한 말을, 다정하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나는 속으로 그 재능을 빈정거리며 칭찬했다. 그리고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꼬맹이가 죽는 살든 그

건 내 알바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그 꼬맹이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 꼬맹이가 불행하게 버려진

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 꼬맹이는 거의 미친 놈같이 보였다. 사람을 ‘마리’라고 세지 않나, 채찍을 휘두르지 않나. 거의 여

섯 살이라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영국에서 사람을 죽인 단발머리 여자애와 비슷해 보일정

도였다. 그래, 아무리 어려도 미치광이는 있는 법이다. 세상에는 별별 인간이 다 있으니까.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싹수가 노란 애새끼다. 죽으라지.

「좋아하는 색이 어떻게 되십니까?」

황제의 직속 재단사 아저씨의 질문에 「검은색이요.」라고 대답한 나를 시녀장과 비서관이 동시에 노려

보았다. 이미 처형당했을까, 아니면 처형중인걸까. 시오엔의 부하들이 신관과 시녀의 목에 칼을 휘둘러

피가 터진 수도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처럼 뿜어졌던 것을 기억나 자꾸 초조해졌다.

「비 마마, 마마께오서는 혼례식을 올리시는 거지, 장례식의 관에 눕는 것이 아니에요.」

이제는 황비 취급도 해주지 않는 비서관이 새침하고 따가운 어조로 내게 일침을 놓았다. 뭐, 황비 취급

은 안 받는것이 낫다. 받을 때마다 간질거리니까. 그러나 이 경우는 상황이 좀 달랐던 것이, 재단사가
놀란 얼굴로 비서관을 쳐다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비서관이나 내가 둘 다 그가 상대하기에는 높은 계급이어서 일

것이다.

갈색머리카락에, 희미한 인상의 아이가 생각났다. 아이는 아직 소년도 무엇도 아니다. 그는 아직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고, 시간의 심판을 받아본 적도 없다.

‘평생 너를 미워할거야.’

댕기머리 계집애가 내 머릿속에서 빽빽 소리쳤다. 내가 지금 그 아이를 구한다고 해서, 여자애가 나를

평생 미워하기로 한 것이 틀려지는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하물며, 황태자가 나에 대해

호의를 가지는 일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이건 그저 자기 희생이야. 아무것도 없는.

죽으라지. 이 동네의 법칙은 이제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할만큼 하고, 이년 뒤에는 재빨

리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내 것이 될래?’

유일하게 걸리는 것은 시오엔의 저 말이었다. 내것이 될래? 문신을 새기는 것이, 시오엔의 것이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최근의 시오엔은 불안정해보였다. 거기에는 거의 대부분 내가 원인제공을 했다. 말을 숨겼고, 도망쳤

고, 그리고 지금도 미래의 이별을 약속하고 있다. 시오엔은 내가 ‘보내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는 거기

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고 있다. 나는 암묵적으로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시오엔은 나를 보내줘야 한다

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섹스하고, 나를 괴롭히고, 이렇게 저울질 하고 있는 걸까? 그를 위해서 귀가를 포

기할 수는 없다. 이 곳에서 평생을 산다는 상상만으로 그건 내게 공포가 되고 있다. 매일같이 이리 저

리 휩쓸리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시오엔을 좋아해도, 사랑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나는 어리고, 연애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건 분명하게 알고 있다.

「시오엔은, 황태자를 싫어하나요?」

내 말에 비서관이 내 옷의 디테일을 체크하면서 무심하게 대답했다.

「무관심하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겁니다.」

어떻게 보면 증오보다도 지독하다.

재단사는 마치 우리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 같은 얼굴로, 내 옷을 매만져주었다. 시오엔이 입는 것보다

는 훨씬 심플하지만 내 기준에서는 지나치게 치렁치렁한 예복을 다섯벌째 갈아입다가, 나는 마음속의 초

조함에 졌다.

「황태자의 처형은 언제죠?」

「곧 시작할겁니다.」

비서관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나갈 준비를 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내가 처형장에 갈 것이라는 걸 예상했

다는 얼굴이었다.
황제의 방은 황제 직속 부대가 경호하고, 그들의 경호 대상에는 차기 황후인 나도 포함되어 있다. 황궁

내의 납치건 때문에 내린 시오엔의 극약처방이다. 아마 그들은 내가 미울지도 모르겠다. 전에 파인에서

잡힐 때도, 시오엔을 보좌한 것은 저 부대라고 알고 있으니까. 짜증날지도 모른다. 나만해도 내가 무슨

특수부대에 들어갔는데 ‘대빵의 애인을 잡아와라’ ‘대빵의 애인을 지켜라’ 따위의 임무만 있다면 짜증

날거다.

그래서인지 그들 앞에 서면 민망해진다. 정중한 태도로 마차의 문을 열어주는 병사에게 「고맙습니다.」

라고 말을 건넨 것도 아마 그런 작은 죄책감 탓이다.

처형장이 작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뭐니뭐니해도 상대는 황태자가 아닌가. 황제의 유일한

아들, 황제가 될 뻔한 아이. 게다가 그 아이는 (그게 진짜든 거짓말이든은 좀 제쳐두고) 신이 ‘위대한

황제’가 될거라고까지 했다. 그런 애를 그것도 친아버지가 죽이겠다는데 처형장이 작을 리가 있나. 천

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콜롯세움같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시오엔은 나를 보자마자 거리낌 없이 내 어깨를 안았다. 남자끼리, 그것도

수천명은 되보이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어깨를 안긴 것에 내가 놀라 움찔거리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태도

였다.

「시작하는군.」

시오엔의 말에 고개를 들자 원형 경기장같은 한중간으로 아이가 끌려나오고 있었다. 멀리서 보고 있었서

아이의 표정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질질 끌리는 걸음이긴 해도 스스로 걷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

는 이미 체념한 것으로 보였다. 시오엔이 아이를 가리켰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가 가리킨 것은 아이

가 아니었다.

「저기 보여?」

아이의 옆에서 놋쇠대야같은 것이 보였다. 그 밑에는 작은 장작이 타오르고 있었다.

「문신의 도구다.」

시오엔이 무덤덤하게 덧붙였다.

「문신이라기보다는, 낙인의 도구지. 본래는 노예에게 번호를 찍을 때 쓰는 용도지.」

그의 눈을 쳐다보아도, 그의 감정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하게 알겠다. 그는 나에게 안

정감을 얻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는 뭔가에 쫓기고 있고, 그래서 나에게 이렇게 잔인하게 굴고 있

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하게 알겠다.

그는 황제이고, 나는 그의 일을 거의 알지 못한다. 시오엔이 말해주는 시오엔의 스케줄은 말 그대로 스

케줄일 뿐이고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다. 내게 중요한 것은 시오엔

의 숨결, 시오엔의 체온, 시오엔의 존재로, 그 이상은 관심이 없다.

「내가 저걸 내 몸에 찍으면 되는 거에요?」

그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시오엔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시오엔이 처한 상황따위에는 관심이 없

었다. 지킨다고 늘 말하면서도, 지킬 방법을 위해 현실을 돌아보지 않았다. 어느 한구석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오엔을 살려두고 있기만 하면 된다는.

살려둔 다음에, 내가 이년뒤에 도망치면 되는 거다. 그리고 나는 한국에 가서 말하는 거다. ‘내가 지켰

어.’ 개뿔, 지랄하시네.

「하게?」

시오엔은 아마 건조하게 말하고 싶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말투에는 아주 희미하지만 깊고 인상적인

흥분이 섞여 있었다. 그가 기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기다렸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등을 돌렸

다. 이 오페라 극장의 귀빈석같은 곳에서 내려가, 저 처형장 중간까지 가야했기 때문에.

다리미를 맨살에 지지는 것과 비슷하겠지.

끔직할 것이다.

「비 마마, 정말 하시게요?」

시오엔은 나를 붙잡지 않았고, 내가 어두운 복도를 내려오는 것을 쫓아 오면서 비서관이 물었다.

「-시도는요. 정말 댈 수 있을지는 자신 없어요.」

내 대답은, 내 마음을 조그만 왜곡도 없이 반영해서 한 것이었다. 다리미를 맨살에 지진다. 그게 가능

할 리가 있나, 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텔레비전에서 떠들어대던, 아동학대사건도 떠올랐다. 아버지인지

삼촌인지 하는 개새끼가 애 다리에 다리미를 지지는 일이 하도 많다보니 애가 아픔에 무감각해졌다는,

뭐 대충 그런 내용의 뉴스.

애도 견뎠고, 안 죽었다는데.

나도 못할 것 같지는 않다. 공포로 봄날의 날씨에 추위를 느끼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해서, 황태자 전하를 살려야 하나요?」

비서관이 물었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는, 아이를 살릴 생각으로 왔던 것 같다. 아니 반반정

도였지만 일단 가서 보기는 하자,는 심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내 마음은 조금 변해있었고, 설명하기에는 내 말솜씨가 모자랐다.

계단에서 이어지는 어두운 복도를 따라,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처형장에 발을 내딛었다. 모래바닥에 신

발이 닿고, 황태자의 안도한 듯한 시선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은 정해졌다.

12. 조금만 더 (3)

「하늘이……」
누군가의 중얼거림 때문에 하늘을 올려다보자,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아까는 분명 화창한 날씨였

는데,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 같다. 비가 오면 곤란하다. 화로의 불이 사라질테니까.

자기를 구해러 왔다고 생각한건지, 황태자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의 팔이 허공으로 조금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죄책감이 생겼지만, 나는 마음을 모질게 먹기로 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공포와 직결되었다. 왠지 발바닥이 따가운 것 같다. 인어공주,라는 오래된 동화를

떠올리고 나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돌았냐, 자신을 인어공주로 비유하다니. 남자에게 뒤를 대주고는 했

더니, 성격도 좀 변한 모양이다.

화로는 눈 앞에서 보는 것이 더 무서웠다. 놋쇠대야안에 있는 화톳불과, 그 위의 낙인을 찍는 도구로

보이는 쇠막대는 이가 덜덜 떨릴 정도였다. 시뻘겋게 달궈진 저 막대를 내 팔에 대어야 한다는 건 지독

한 짓이었다.

마른 침을 삼키고 숨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몸이 덜덜 떨려서 숨까지 끊겼다. 몇 번이나 숨을

크게 들이키고 볼품없이 내뱉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화로앞의 병사가 달궈진 쇠막대의 손잡이를 내밀

었다. 손잡이 쪽으로 손을 뻗는대도, 그 뜨거운 온도를 느꼈다. 식은 땀이 이마와 등에서 동시에 흘렀

다.

눈을 감았다.

이를 악물었다. 팔뚝 가까이 그것을 대고, 거기서 느껴지는 온도에 치를 떠는 순간, 병사가 말했다.

「비 마마, 멈추십시요!」

눈을 뜨고 병사를 보자 병사가 시선으로 시오엔을 가리켰다. 시오엔을 쳐다보자 시오엔이 손을 들고 있

었다. 풀어주라는 뜻인가보다. 황태자를 잡고 있던 병사 둘이 황태자를 놓아주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툭, 떨어졌다.

빌어먹을.

나는 웃으려고 했지만, 그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눈을 부릅뜬채 입만 웃고 있었다. 아마, 끔찍한

몰골이었을 것이다. 병사가 내 모습을 보고 뒷걸음질쳤으니까. 나는 이층 높이에서 이쪽을 관망하고 있

는, 무표정한 시오엔에게 쇠막대를 휘둘러보였다. 그 순간, 시오엔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쩌면 나는 새디스트인지도 몰라. 반대일 수도 있고.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정상인은 아닐 것이라는- 단 한가지뿐이다.

시오엔이 이층 높이의 난간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는 순간, 나는 망설임

을 억누르고 단숨에 팔뚝에 그 쇠막대를 갖다 붙였다.

「으아아악-」

소리를 지른 것은 병사들 쪽이었다. 나는 신음 한조각 흘릴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맛보면서도 그 쇠막

대를 내 팔에 오랫동안 밀어붙였다. 아니, 오래라고는 해도 십초 안팎이었을 것이다. 후끈거리는 정도

가 아니라,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뒷걸음질 친 병사의 허리에 찬 칼을 빼앗았다.

아까부터 들려오던 어떤 비명들은, 이제 커져만 가고 있었다. 원형 처형장을 둘러싼 귀족들의 경악으로


가득찬 소리가 시끄러웠다. 의식이 끊길 것 같아 눈을 깜빡이고 나는 황태자에게 달려들었다.

아마, 순식간의 일이어서 병사들은 나를 막지 못한 것일 것이다. 나는 황태자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

지만, 황태자가 피하기도 했고 내 팔에 힘이 없어서 실패했다. 제대로 내가 검을 고쳐잡고 다시 휘두르

려고 했을 때 누군가가 내 뒤에서 나를 결박했다.

「미누, 키미누. 괜찮아. 됐어, 다 끝난거야.」

시오엔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건 웃기는 소리였다. 그는 나에게, 스스로의 살을 지지라고 말했다. 그

는 나에게,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삼았다. 그는 나를 저울질하더니, 내가 이를 악무는 순간 마치 자비

를 베푸는 것처럼 ‘봐주었다’! 누구 마음대로? 웃기지 마!

「웃기지 마!」

나는 악을 쓰면서 황태자를 향해 발버둥쳤다. 황태자가 엉덩이를 뒤로 밀며 내게서 멀어지는 것을 보면

서 고함을 쳤다. 시오엔이 뒤에서 계속 나를 달랬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미누, 내가 잘못했어. 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뭐라고 소리를 치긴 한게 확실한데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내가 알 수 없는

말을 소리치며, 시오엔의 품에서 벗어날려고 필사적이었다. 그 사이 팔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어느

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나를 고함을 치고, 사람들은 자리를 벗어

나고, 시오엔은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죽여주지, 네가 바라는대로! 네 아들, 내가 죽여주겠어! 네가 뭘 바라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기억나는 것은 이 한마디였다.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소리쳤는데도, 기억나는 것은 이 한마디 뿐

이었다. 저주를 뱉었던 것도 같고 욕을 했던 것도 같다. 사정없이 시오엔을 쳤기 때문에 시오엔의 복부

에는 시퍼런 멍이 남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오엔은 나를 힘으로 누르지도 않았고, 나를 기절시키지도

않았다. 그는 내가 때리는 것은 온 몸으로 맞으면서, 병사들을 접근하기 못하게 하고, 나를 안고 있었

다. 뒤에서 잡은 나를 맞으면서도 돌려서 제대로 품에 안은 시오엔 때문에 눈물이 났다.

차가운 비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머리가 차가워졌다. 옷이 젖어 달라붙었다. 나는 눈물과 빗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시오엔에게 묻지 않

을 수 없었다.

「도대체, 넌 뭘 바라는 거야?」

시오엔은 뭐라고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기다릴 수 없었다.

나는 할 말이 있었다. 그리고 타는 듯한 고통과, 얼어붙을 것 같은 이 빗속에서만, 그 말을 할 수 있

을 것 같았다. 이 말을 하는데 용기가 필요해서도 무엇이 필요해서도 아니다. 나는 그저……

울먹이고 싶지 않는데, 울먹일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정말 진절머리가 난다. 조금

이라도 늦어지면 나는 해야할 모든 말을 잊을 것 같아서 흉한 모습이라는 걸 알면서도, 울고 훌쩍이며

말해야 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줘.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내가 다 말해줄게. 나는 말하기 싫어서 그런게 아니


야. 그저, 뭘 말해야 했을지 몰랐을 뿐이야.」

그는 가만히 나를 보고만 있었다. 그가 무정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만히 듣고 있어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모순된 생각은 하나는 가슴에서 하나는 머리에서 오는걸까.

「나는 당신을 정말 좋아해. 사랑이 뭔지 잘 모르지만, 아마 사랑하고 있을거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지 모르지만, 정말 좋아해. 당신은 못됐고 나쁜놈이지만, 나는 당신을 이해할거야. 이해하려고 노력할

거야. 당신이 원하는게 내 팔을 지지는건지, 당신 아들을 죽이는 건지 모르겠어. 모르겠지만, 할게. 그

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시오엔이 손을 들어 내 눈가를 닦아주었다.

「불안해하지마……난 당신을 정말 좋아해. 실은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아. 나에게 얼마나 다정

한지 알고 있어. 잘 말할 수는 없지만, 난 중요한 것을 알고 있어.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고, 내 마

음을 믿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러니까……」

어지럽다.

몸이 휘청거리는 순간 시오엔이 나를 잡아주었다.

「미안해, 불안하게 해서……」

그가 들었을까.

너무 작게 말해서, 그가 듣지 못했을 거 같다.

비는 사흘이나 계속되었다. 전에 비가 왔을 때도 시오엔은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시오엔이

비를 싫어한다고 말했는데 그건 정말일지도 모른다.

익숙한 향기. 이거 하니안이다. 내가 이불을 들어 호흡기를 막으려는데, 내 옆에 알몸으로 누워있는 시

오엔이 내 손을 제지했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야. 가능한 흡입하는게 좋아.」

다정하고 상냥한 얼굴. 여자와는 다르지만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부드럽게 웃고 있는 시오엔이다.

안심이 되었다. 늘 내게 상냥하기는 하지만, 최근의 시오엔은 불안했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내 목을

칠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상냥한 척 하면서, 폭력을 행사했다. 내가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

도였다. 하지만, 이제 시오엔은 돌아왔다.

다행이다, 시오엔은 돌아왔다.

나도 시오엔처럼 나체였다. 그래서 다리에 닿은 시오엔의 다리와 그 체온이 더 기분좋게 와닿았다.

「어릴 때, 크게 실수한 적이 있어.」

시오엔이 아름다운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듣는 그 목소리는 노래를 듣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나라연을 계승하고 나서 얼마 후에, 나는 내가 어떤 힘을 다룰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 마법,이라고


봐도 좋겠지. 정령과 의사소통이 자유자재로 되고, 자연체라면 나를 보호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이 어린

나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이었어. 나는 당시에 힘을 원했거든. 특별히 부모를 사랑하는 아이는 아니었지

만, 부모를 빼앗기고 형제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고 툭하면 신전이나 세워달라고 하면서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려는 신관놈들에게는 이를 갈고 있었거든.」

기분좋은 손길이 내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늘 기도소에서 기도를 했지. 사실은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 난 어렸고, 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잠정적 죄인 신세였으니까. 뭘 하더라도 ‘반역’의 기질이 보인다는 둥 말했으니까, 제대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도소에 가는 것 뿐이었지. 그것만은 다들 ‘반성’의 행위라고 생각해주었거든. ……그

러나, 나는 그렇게 착한 아이는 아니라서, 기도소에 가서 늘 기도했지. 신관과 대신들을 쓸어버릴 힘을

달라고. 식사에 들은 독, 시녀들의 은근한 학대, 심심하면 나를 죽여야한다고 부르짖는 대신과 신관들.

자기 변호할 생각은 아니지만, 꽤 혹독했거든.」

시오엔의 입술이 눈가에 닿았다.

「구원을 기대했지. 누군가가 나에게 힘을 주거나, 혹은 누군가가 나를 괴롭히는 무리들을 싸잡아 죽여

버리길. 그리고 어느 날 정말로 신이 내게 물었어. 힘을 원하니, 라고.」

시오엔이 나를 끌어당겨 자신의 몸 위로 앉혔다. 그제야 나는 내가 누워 있었다는 것과, 시오엔은 상체

를 세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오엔은 나를 앉히고 내 목을 지분거리고, 손가락으로 왼쪽 견갑

골 밑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성적인 의도가 배제되어 있어서, 나는 편안히 그 애무를 즐기고 있었

다.

「나는 원한다고 대답했지. 어쩌면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

아. 하지만, 환상에 마음속으로 대답을 좀 한다고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러자 내 머릿속에서 다시 묻더

군.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라고. 그 때 나는 내가 희생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 내게 있는 거라고는

소수의 사람밖에 없었거든. 그나마도 내 편일지 아닐지 확실치 않았어.」

시오엔의 손이 내 유두를 애무했다. 세 개 잡고 손가락으로 굴리는 걸 느끼면서 나는 조금 신음했던 것

도 같다.

「그래서 대답했지. 원한다고. - 나는 힘을 받았어. 어떤 힘인지 다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어. 육체적인 힘을 부여받았겠지. 내 힘은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거든. 나라연

계승이야 그 전에 있었으니 상관 없을테고. 대가로 나는 나를 따라다니던 시종과 병사와 기도소를 전부

날려버렸지만.」

「……날……려요?」

「날렸다는 표현은 이상할지도 모르겠군. 빛이 보였어- 그 빛은 내게 힘을 주는 것 같이 느껴졌지. 그

리고 그 빛이 사라진

순간, 시체들을 발견했지. 그것은 아마도, 유일하게,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것이겠지. 그들에게는

죽을 이유가 없었어.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을거야.」

가엽고 불쌍한 시오엔.

그를 끌어안고 다독여주고 싶은데 하니안 때문에 어지럽다. 예전에, 파인에서 잡혀왔을 때도 이랬었지.

그 때와는 달리 지금은 좀 더 편안한 느낌이다.

「신은 내게서 빼앗을 뿐이야. 나는 그에게 결코 순종하지 않는, 패륜아고. 내가 죽는 순간까지 이 평

행선은 계속되겠지.」

「당신은 신을 믿는구나.」

내 말에 시오엔이 뭐,라고 물으며 내 입술로 귀를 갖다대었다.

「당신은 신을 믿는다고.」

「당연하잖아.」

「신은 없어.」

내 말에 시오엔은 「무슨……?」이라고 되물었다. 무신론자로서, 나는 다시 대답했다.

「신은 없어.」

「말도 안되는!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해. 신병만 봐도 알 수 있지. 신이 아니라면, 세상에는 악마밖에

없다는건가?」

시오엔의 부정을 듣고 있자니, 내가 다른세계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로 워프한 기분이 들었다.

「신은 없어. 구원은…… 다른…… 것에서 찾아야 해. 당신은 잘못…… 생각한거야. 당신의…… 힘은 처음부터

당신의 것이었을

거고, 신은…… 없어.」

시오엔이 나를 붙잡고 뭐라 말했는데, 나는 그 전에 의식을 잃었다.

내가 눈을 뜬 것은 결국 사월 마지막 주였다. 이제 겨우 한달이 남았다. 맙소사, 한달동안 어쩌란 말이

야. 수많은 일거리에 잠겨 압사할지도 모를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나날들 속에서, 시오엔은 제대로 보이

지도 않았다. 의원은 ‘심장이 약하시니 다시는 이러시면 안됩니다.’라고 강조했고, 시녀장과 비서관은

나에게 성격을 고치라고 타박했다. 그녀들 말에 따르면 가끔 나는 너무 무모해진다는 것이다. 그런가?

꽤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바꿀 때가 왔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만난 국무대신은 그저 웃었을 뿐이다. ‘폐하를 많이 좋아하시나봐요.’라고 뭔가 모를 애매모

호한 소리를 하다 그는 가버렸고, 국무대신의 형 블랙 신관인 린타우 라 크리스티는 내 팔뚝을 보더니

‘진짜 하실 줄은 몰랐는데요.’라고 쓴 웃음을 지었다.

아침에 시오엔이 오지 않자, 그가 어디서 자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는 의외로 내가 예전에 머물렀던 온

실에서 자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바쁜데 그는 더 바쁜 듯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내가 다가가자마자 그

는 눈을 감은 채 물었다.

「누구냐.」

「민후.」
아마, 그는 내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하리라.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내 이름을 정확히 말해주었

다.

「아아……」

그는 신음하듯이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잠들었다.

스트레칭을 하고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팔굽혚펴기가 거의 끝날 때쯤에야 그는 눈을 뜨고 물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아까 제대로 정신을 못차렸었던 듯하다. 나는 그를 상대로 미소지었다.

「내가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그는 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그

가 가능하다면 행복한 생각만을 하길 바란다. 피해망상 같은 건 당신과 어울리지 않아.

내 말에 그가 웃었다. 그 웃음에 정신 팔려 있다가 한 손을 뒷짐지고 하는 팔굽혀펴기의 첫 번부터 턱

을 박고 말았다. 아, 진짜 아프다. 턱을 문지르며, 그에게 정신 팔렸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나는 딴

소리를 했다.

「팔굽혀펴기를 오십개 한 다음에 뒷짐 지고 하는 건 무리인가봐요.」

나는 머쓱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일어섰다. 시오엔은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저 남자는

나른한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린다. 좀 바보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매력이다.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잘 잤어요?」

내 말에 시오엔이 싱긋 웃었다. 그의 머리를 끌어안자, 그의 체향이 났다. 그에게 피해입었다고 생각하

지 말라고 하려다,

그만두었다. 신병까지 나도는 상황이니, 그에게 신을 믿지 말라는 건 너무한 소리인 것 같다. 게다가

드래곤도 존재하는

곳이니 정말로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

신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또 어때.

당신한테는 내가 있는데.

그는 계속 웃고만 있다. 웃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내가 지켜준다는게 같잖은거죠?」

내 말에 그는 도리질을 쳤다. 어린애같다. 문득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떠올랐다. 당신이 뭐에 힘든지 나

는 모른다. 당신이 왜

불안정했는지 나는 모른다. 어느 모습이 당신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이 보여주는 것을 보

고,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 옳은 방식이라는 건 알 수 있다.

당신에게 나를 보여주고, 나를 말해줄게.


그러니까 불안해하지마.

신이 당신의 모든 것을 빼앗는다면, 내가 그 모든 것을 지켜줄게. 당신은 서른살에 죽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당신을 그 시간안에 살릴 수 없다면, 내가 그 때 같이 죽어줄게.

나는 그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그가 불안해하지 않기를, 그가 행복

하기를. 기원하고 기원하면서.

12. 조금만 더 (4)

오월의 첫째 날.

린타우 라 크리스티가 나에게 알현 신청을 했다. 나도 그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기 때문에 타이밍이 절

묘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시녀장과 비서관 시녀누나들을 모두 물리고 그에게 단도

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시오엔은 정말 서른살까지밖에 못사나요?」

린타우는 국무대신과 똑같은 얼굴로 웃었다. 남자다운 얼굴. 비서관이 가슴 떨려 하는 것이 이해가 간

다. 하지만 나는 남자라 그런지 시오엔의 아름다운 얼굴이 더 마음에 든다.

「누가 그런 말을……」

능글맞게 화제를 돌리려고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그의 말을 막았다.

「골드 드래곤 ‘리안’이 말한거에요. 말해줘요.」

내 말에 린타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는 내게 대답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골드 드래곤의 이름을, 골드 드래곤이 직접 준건가요?」

그는 마치 ‘리안’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린타우가 입에 검

지를 갖다대었다.

「그 이름은, 다시는 말해서는 안됩니다.」

「어째서요?」

「그 이름을 말할 때마다 마마께오서는 조금씩 ‘그’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됩니다. 지금은 제가 주술을

걸어놓았지만 아마 크게 소용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상대는 나라연, 그 자체이고- 저는 나라연의 힘을

빌어서 사용하는 자에 불과하니까요.」

무슨 캔디맨이냐.

뭐 하지 말라니 하지 말자. 실제로 내 눈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은가.


「하지 않을게요. ……자, 이제 말씀해주세요. 시오엔의 생은 정말로 30 년인가요?」

린타우는 거기에 대해서 조금 애매한 답변을 했다.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씀드릴 수 있겠고……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얼굴을 보고 린타우가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황제 폐하의 운명을 주관하는 것은 신도, 운명도 아닌 골드 드래곤입니다.」

……누가 뭘 어쩐다고요?

「나라연의 계승자이지 않습니까. 그 힘의 영향을 받는 만큼, 그 힘의 존속을 결정하는 것도 드래곤이

지요.」

이 무슨 눈앞이 어두워지는 소리냐.

골드 드래곤이 그 힘의 존속을 결정하기 때문이라니……그럼, 시오엔이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그 용에게

달려있다는 이야기야?

「그……골드 드래곤은, 이제 제 앞에 안 나타날까요?」

오는 것을 반길 수도, 반기지 않을 수도 없는 이 미묘한 입장 때문에 정말 환장하겠다. 아니 만나도 할

말이 없지.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서른살까지 밖에 못 산다. 서른살이상 산다. - 그게 전부일

줄 알았지. 골드 드래곤 마음에 달렸다는 소리를 들을거라고는……

「골드 드래곤이 원한다면 나타날겁니다. 제 힘으로 드래곤을 막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게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불행인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하다.

골드 드래곤이 애를 낳아라, 대신 시오엔의 생명을 연장해준다. - 이런식으로 나오면 어떡하지? 린타우

와 이야기를 할 당시에는 그저 가능성으로만 염두해두었던 것이 실제로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시오엔을 죽일 수는 없다.

그러나 아이를 낳을 수도 없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돌보지도 않을 아이를 낳는 다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 가능하다쳐도 그게 인간으

로서 할 짓인가? 그 아이는 사랑의 산물도 아니고, 나는 분명 책임을 가지지도 못할 것이다.

물론 시오엔을 살리고 아이를 돌보는 방법도 있겠다. 그러나 그럼 내 인생은? 완전 구렁텅이잖아. 자신

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오로지 타인을 위해서 산다는게 좋은 건가? 그게 삶이라고 부를 수가 있나?

난 내 주제파악은 확실히 하고 있는 편이다. - 나는 그렇게 이타적인 인간이 못된다, 절대로.

아, 역시 골드 드래곤 말살-외에는 방법이 없는걸까?

머리를 굴리는 게 귀찮다. 너무 오랫동안 머리를 굴리고 있어서, 이제 더 이상은 만사 귀찮고 힘들다.

역시 이 동네답게 ‘살인’ 아니 ‘살룡’만이……

아아아, 이러지 말자, 김민후. 성인이 되자마자 이렇게 삐뚤어지면 안된다구!

그러나 도저히 앞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잖아.

「예?」

오월부터는 나도 알현신청에 응답한다. 알현은 상대에 따라 시간이 정해져있는데 대부분은 ‘혼례 축하


인사’를 하는 귀족들일거라고 들었다. 그래서 그렇구나, 하고 알현실에서 사람이 들어오길 기다리며

‘시오엔을 살리기 위해 책임질 수 없는 출산을 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현 신청자들의 명단을 가지고 온 비서관이 이상하다며 명단을 보여주었다. ‘전원, 신관입니다.’라고

한다.

「왜, 신관들이, 저를……?」

빈말로도 신관들하고 사이가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아니, 나쁘지. 아주 나쁘지. 신관놈들이 나에게 이

상한 짓을 했다는 건 일반 국민 사이에서도 퍼져있는 이야기다. 그 이후 황제가 신성지를 불태우겠다느

니 하며 윽박지른 것도 이미 알려진 이야기다. 그 이전부터 황제와 신성지의 사이는 최악이었다. 부모

대부터의 악연이고, 서로 목숨이 걸린 상황이니 당연하다.

그런데 신관들이 왜 나를 찾아온걸까? 황제와 잘 먹고 잘 살라고?

「어떻게 할까요?」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내가 다치는 일도 많았는지라- 비서관은 가면 갈수록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애처

럼 보고 있다. 아마, 알현을 거절할 수는 없겠지. 거절할 수 있는 건이었으면 벌써 거절해주었을 것이

다.

「들어오라하세요.」

내 신변보호는 시오엔의 직속 부대 병사들이 하고 있다. 지금도 내 뒤에서 완전 무장하고 있는 그들을

가리키며 나는 비서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보였다.

「이 형님들이 지켜주시겠죠.」

그리고 나는 별 생각 없이 비서관을 쳐다보았는데 - 사실 그 떡발 좋은 형님들을 믿고 있었다기 보다는

비서관을 안심시킬려고 한 소리였다.- 갑자기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맡겨만 주십시요!」

음, 뭔가 믿음이 간다.

게다가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시오엔의 직속 부대는 상당한 엘리트라고 한다. 시오엔은 자신의

직속 부대를 뽑을 때 다른 건 다 안보고 얼마나 전투능력이 좋은가,만 보았기 때문에 좀 위험천만한 형

님들이 많아서 그렇지 능력하나는 캡이라고 들었다.

「뭐, 이러시다니까, 괜찮아요. 신관도 사람인데 설마 뭐 있겠어요?」

사실 뭐,라고 간단히 할 수 없을 정도로 잔뜩 있지만.

시녀를 포섭하질 않나. 황태자와 반역 모의를 하지 않나. 사람을 칼로 긁고 피를 마시지 않나. 아주 가

지가지 하는 놈들이지만, 설마 황궁내에서 그러기야 하겠어. - 라는 심정이다.

그리고 나도 힘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하여, 흉흉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첫 번째 신관이 들어왔다. 혼례를 경하드린다,고 입을 연 남

자는 이런 저런 말을 하다가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낮게 말했다.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뭔말이야.

「저희가 황제로부터 월인을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제야 내가 월인(月人)이었다는 사실이 희미하게, 기억 속 어딘가에서 스물스물 기어올라왔다. 아아,

그랬다. 나는 월인이었다. 더불어 말하자면, 구원자이기도 했다.

오, 그랬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놈이었다, 이 동네에서.

일이 너무 많아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잠시, 난 이동네에서 대단한 놈이었지 - 라는 생각 때문에 말을 슬쩍 놓쳐서 다시 말해달라고 요구해야

했다. 그러자 신관이 내 뒤의 ‘형님들’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저희가 황제로부터 구해드리겠습니다. 드래곤으로부터도 보호해드리겠습니다.」

퍽이나.

내 안에서의 순위를 나열하자면 황제가 최고다. 시오엔말고는 라브만이다 골드 드래곤이나 그놈이 그놈

이고, 둘 다 재수없다. 그래도 좀 나은 것이 있다면 골드 드래곤일테지. 골드 드래곤은 ‘나’에게 관심

이 있지만 저 놈의 라브만은 내 ‘피’에 관심이 있는 놈 아닌가.

내가 대답이 없자, 신관이 다시 말했다.

「유브라데를 구하기 위해서는, 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신은 시오엔 황제가 아닌 마이 황태자를 황제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월인께오서는 지금 속고 계……」

인내심 오링.

「닥쳐!」

속인 건 너네 대빵쪽이란다. 애꿎은 남의 애인 잡지 말고 꺼져버려. 어디서 이간질이야, 이간질이. 어

째 신관씩이나 되어서 하는 짓이 스파이 보내기, 협박하기, 약 먹이기, 칼로 몸 긋기 따위밖에 없는거

냐. 좀 신관다운 행동을 해보란 말이야.

내가 소리를 치는 바람에 내 뒤의 병사들이 내 양 옆으로 다가와 섰다. 신관의 눈에 두려움이 어렸다.

신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다문 나에게 나직하게 말한 것은 오른쪽 병사였다.

「하명하십시오.」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어렵다. 아니, 낯설다. 그리고 내키지가 않아서 나는 입을 다물고만 있

었다. 그러자 왼쪽의 병사가 물었다.

「내보낼까요?」

일단 물어봐 와준다면 대답하는 것은 낯설지도, 거북스럽지도 않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신

관을 내보냈다. 그 이후는 비슷한 일이었다. 그들은 전부 ‘혼례 경하드리옵니다.’로 시작했고 ‘속고 계

십니다.’로 본심을 드러냈다가 내가 화를 내면 병사들이 끌고 나가는 패턴이었다.

그 중 한명은 억울하다는 얼굴로 통곡했다.

「월인께서는 저희를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까? 이 신병에서, 이 공포에서 저희를 해방하러 오신 분


이 왜 황제의 곁에 계시는 겁니까? 왜 황제를 지지하시는 겁니까?」

「무엄하다, 어느 안전이라고 황제 폐하를 하언하여 칭하는가?!」

시종과 병사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그다지 무엄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 신관

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무례함이 아니었다. 그 신관의 목소리에는 그런 것들을 덮고도 남을 절박함이

있었다. 그는 허공으로 팔을 뻗었다. 그 팔은 내게 닿지 않았지만, 분명 나를 향해 내밀어져 있었다.

「신이 우리를 버렸으니, 이제 모두가 멸망할겁니다. 유브라데는 지도에서 사라져, 가장 불행한 나라로

남을 겁니다. 누구의 기억에서도 버려져, 이대로 파멸하게 될겁니다. 당신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는데,

대체 왜 당신은 악마의 꾐에 넘어가 우리를 버리는 겁니까, 대체 왜!」

그는 진심으로 분통해했다. 슬퍼하고 노여워했다. 그 얼굴은 정말이었다. 라브만이 하위 신관들을 속이

는가 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오엔을 좋아하니까 믿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보았지만, 스스로의 마음 속 어딘가는 그 말을 비웃고 있었다. 좋아해서 믿는다니, 그

건 말도 안돼. 연인에게 속는 수많은 사람들을 비웃던 너 아니야? 그들 자신도 상대가 그럴거라고는 상

상도 하지 못했을거야. 너도 그렇잖아.

수많은 신관들이 내게 울부짖었다.

왜 당신은 우리에게 오지 않느냐고. 이곳은 황궁이고, 그들은 황실모독죄를 받을 텐데 그건 개의치 않

는 얼굴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종교인처럼 엄숙하고 맹목적이었다. 그들은 정말 신관이었다. 그리고 그

들은 내게 묻고 있었다. 자신들은 아주 오랫동안 너를 기다려왔는데, 너는 왜 악마의 곁에 있느냐고.

악마……?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치부했는데, 가면 갈수록 동화된다. 그들의 통탄에 밀려, 뿌리도 없는

죄책감에 가슴이 짓눌렸다.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그냥 사람이라고. 평범한, 인간.

아니, 그러지 마.

두명의 알현 신청인-분명히 그들도 신관일 것이다-을 남겨두고 나는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다. 이제껏

나는 도망쳐왔다. 늘 나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라는 태도로 살아왔다. 그러나 그 때문에 시오엔은 불안

해하고, 저들은 저렇게 비탄에 젖었다.

태도를 확실히 해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오엔이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나를 저울질 했듯이

내 저울 양 극단에도 무언가가 담겨있다. 그 한쪽이 시오엔이라면.

다른 쪽은 무엇이라 할지라도 상관이 없다. 이미 결과는 나온 것이다.

「나는 황제 폐하를 돕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처음으로, 내 의지로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내가 월인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거짓말쟁이가 되어

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떤 죄책감에도 밀리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시오엔이 불안해하는 건 보고 싶

지 않다. 그 남자가 악마든 전쟁광이든간에, 그 남자를 살리고 싶다. 그 남자가 정말로 악마라면……

나는 같은 죄를 짓겠다.

「누구에게도, 어디에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날부터는 귀족들도 알현을 신청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신전파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앵무새

처럼 반복해야 했다.

「저는 황제 폐하의 것이고, 황제 폐하를 지지할겁니다.」

마음한쪽이 무거워졌다.

무언가가 내 마음을 갉아먹고 있다. 하지만, 상관없어. 나는 지켜야 할 것이 있으니까.

알현신청에 응한지 나흘. 시오엔은 진지하게 「알현을 미뤄줄까?」라고 물었다. 시오엔뿐만 아니라 대부

분의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신전파 인간들이 그렇게 알현 신청을 많이 했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는 분위기였다. 알현신청은 공개적으로 받기 때문에, 순서를 움직일 수조차 없다는 것이

다. 비서관은 혹시라도 무례하게 구는 자가 있다면 바로 내쫓으라고 내게 말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약

속했다.

「오랜만이야.」

처음보는 신관이 나를 보고 냉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모르는 인간이다……아니, 아는 사람인가? 딱히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그래 어딘가 분위기가 낯이 익다. 그러나 얼굴은 전혀 모르겠다.

「무엄하다!」

「당장 예를 갖춰라!」

시오엔 부대의 형님들은, 의외로 다혈질이었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나를 좋아했다. 내가 월인이기

때문에, 그들은 황재의 애첩이 아닌 월인을 경호한다는 측에서 임무가 막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

를 자랑스러워했고, 나는 때때로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죄책감을 느꼈다.

……지금처럼.

남자가 빈정거렸다.

「무엄한 건 너희쪽이야.」

그 말에 병사들이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놀란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고, 다음에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민후.」

평범하게 생긴 남자였다. 그 남자는 정확한 발음으로 내 이름을 말했다. 그제야 나는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정말로, 오랜만이네요.」

내 말에 그는 싱긋 웃으면서 단상 위로 올라와 내 뺨에 손을 대었다. 나도 움직일 수 없는 걸까, 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움직일 수 있었다.

「이렇게 순순하다니 뭔가 이상한걸. 혹시 날 기다린거야?」

다정한 말, 그러나 그 목소리는 전혀 모르는 자의 것이었다.


「반정도는.」

내 말에 드래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아파? 안색이 안 좋은데.」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짜증스러웠다. 나는 그 손길을 쳐내고 드래곤에게 「용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민후?」하고 다시 나를 불렀다.

「용건. 용건을 말하세요.」

「정말 어디 안 좋은 거야?」

「용건!」

내 고함에, 드래곤이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밉살스런 소리를 해주려 왔는데, 그대가 이러면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없잖아.」

「무슨 밉살스런 소리요?」

내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 드래곤이 무릎위에 놓인 내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무슨 일 있었어?」

「시오엔.」

그 이름에 드래곤이 「아아, 그대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지 않을 리 없지.」라고 가볍게 불평을 늘어

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용건을 꺼냈다.

「시오엔을 죽이는 게 그 쪽이라면서요?」

「내게는 리안,이라는 이름이 있어.」

「대답하세요.」

드래곤은 눈동자를 이리 저리 움직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죽인다……라고 할 수는 없지.」

「거짓말. 다 알아봤어요. 시오엔은 나라연을 계승한 자이기 때문에, 당신의 영역내에 있다며?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대로 그의 수명이……」

「아아, 일반론으로는 그런데, 이런 저런 문제가 있어서 말이야.」

드래곤이 그렇게 말하더니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눈을 찡긋했다.

「내 용건과 그대가 하고싶은 말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은데. 의외로군.」

그가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는 이야기가 곤란해.」

그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시오엔은 불안해하고 있다. 시오엔…… 그의 수명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또 다시 이 손을 잡는게 옳

은 걸까. 옳지 않은 걸까. 알 수가 없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시오엔을 떠올린다. 그의 금발, 그의 금안, 그의 미소, 그의 목소리, 그의 체온, 그의 체향, 그리고

그의……보여주지 않는 감정들.
「됐어요.」

「뭐가 돼? 내가 아니면……」

그리고 드래곤은 내 머릿속으로 속삭였다.

-시오엔이 죽는다는 걸 그대도 알잖아.

시오엔이 원하는 건, 그의 생명 연장이 아닐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알아요. 그런데, 됐어요. 그 쪽이 나에게 무슨 용건이든간에 됐다고요.」

시오엔이 설사 지금 이 순간 급사한다 하더라도.

「……됐어요.」

13. 모두를 지키는 건 불가능해 (1)

「미누.」

밤에 돌아와야 할 시오엔은, 낮부터 방에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내 알현이 끝나자마자 모든 스케줄을

미루라고 이르고 나를 불렀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를 끌어안은 그가 「이번에는, 전부 말해주기

야.」라고 속삭였다. 그의 얼굴을 흘끗 올려다보니, 그는 여전히 여유로워보였지만……초조했겠지. 그래

서 그는 나를 부른 것이다.

나는 그를 지키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를 구하겠다고도 결심했었다.

그러나 무엇이 그를 괴롭히는지, 무엇에서 그를 구해야하는지는 그다지 깊게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내

귀에 키스를 하는 시오엔의 목에 팔을 두르고, 나는 그에게 「할 말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

시오엔은 다정하게 이마를 맞비빈뒤 나를 안고 침대위로 올라갔다.

「이게 어디까지 맞는지는 나도 모르는데.」

시오엔이 뒤에서 나를 안고 어깨에 키스를 하고 있다. 내 옷을 벗기는 그의 손놀림은 능숙하다.

「당신이 죽는대요.」

시오엔이 애무하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감미롭게 키스하며, 시오엔은 마치 별 거 아니라는

말투로 물었다.

「누가?」

「골드 드래곤이.」

흐음……하고 신음인지 콧방귀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시오엔은 여전히 내 몸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는다는 말을 허투루 들은 것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왠지, 그가 놀라지 않을 것 같

다는 기분을 예감을 했었던 것 같다.

「언제?」

「잘은 모르지만, 서른살정도.」

「아아, 그렇군.」

시오엔이 내 목에 이를 세웠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오싹했다. 시오엔의 치아에 달라붙은 가죽이, 뼈에

닿은 채 살짝 미끄러졌다.

「신관놈들이 아예 아무 일도 안하고 노는 건 아니군.」

「믿어요?」

「뭘?」

「당신이 죽는다는 걸.」

그 말에 시오엔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목 안쪽으로 나오는 웃음소리는 음산하게까지 느껴졌다.

「아아, 골드 드래곤이 그렇게 말했다면 확실하지. - 나는 나라연의 영역내에 있으니까.」

「골드 드래곤이 또 내게 한 말이 있는데, 이건 좀 옛날에 한 소리기는 하지만……」

시오엔이 응……이라고 흐트러진 발음으로 말하며 내 뒤로 손가락을 넣었다. 무의식적으로 조이자, 시오

엔이 「이야기를 계속 해줘.」라고 속삭였다. 그러면서 그는 손가락을 조금 움직였다. 몸에 힘을 빼려

고 애쓰면서 나는 시오엔의 요구대로 말을 이었다.

「나보고……자기 아이를 가지라고, 윽!」

시오엔의 손가락이 갑자기 쿡 하고 깊게 삽입 돼서 신음을 흘렸지만, 그는 내 신음에는 관심도 없는 듯

했다.

「그래서?」

시오엔이 물었다. 더할 나위 없이 초조한 음성으로 그가 다시 재촉했다.

「그래서, 너는 뭐라고 대답했지?」

「대답 안했어요.」

그는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그의 손가락이 난폭하게 내 내부에서 움직였고, 내가 느끼는

곳을 긁어대었다.

「나는……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내 말에, 시오엔의 손가락이 멈췄다. 사정할 뻔 했던 것이 겨우 멈춰져서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쾌락

의 파도가 계속 내 안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잦아질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시오엔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길 바래요?」

「뭘 말이야?」

「드래곤은 뭔가 할 말이 있나봐요. 내 생각에는 자기 아이를 낳는 조건으로, 당신의 생명을 연장해주


는 게 아닐까 싶어.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길 바래요?」

시오엔은 바로 대답했다.

「거절해.」

그 말투는 아주 오만했다. 냉혹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단호했다. 어떻게 하길 바란다,라는 그런 어조가

아니었다. 그는 내게 명령하고 있었다. 거절하라고. 나는 명령조를 무척 싫어하지만……이 말은 조금 기

쁜 것도 같다. 그가 내심 이렇게 말하기를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시오엔이 손가락을 하나 더 넣으면서 속삭여 물었다.

「거절할거지?」

작고, 약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나 시오엔이 모자르다는 듯이 조금 움직이며 「대답해줘, 거절할거지? 그래줄거지?」라고 물어서 나

는 입밖으로 대답해야했다.

「이미 거절했어……」

「착하네.」

그 이후에는 계속 몸을 섞었다. 눈물날 정도로 다정한 몸놀림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나는 절정에 오르

는 순간에도 웃고 있었는데, 시오엔은 ‘왜 웃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와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지켜줄게,라고 한 말을 그가 믿고 있다고 - 사랑하니까 마음이 통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나는 그 때를 생각하며 웃었던 것 같다.

웬만하면, 이렇게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내고 싶지 않지만.

……세상은 거짓말 투성이다.

가장 흔한 거짓말은 ‘자기 아이를 예뻐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다. 그런 부모는 있다. 그것도 상당히 많

다. 간단하게 말하면 내 부모서부터 시작할 수 있고,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시오엔도 썩 자기 아들한

테 관심 있는 사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자기 배로 낳았다 하더라도 그 아이가 자신과 다른 타인이

다. 이 진실은 두 가지의 부작용을 낳는데 집착과 방관이다. 물론, 대부분의 부모는 그들을 잘 키우고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이지 전체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자기 아이를 예뻐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고. 또 그들은 말한

다. ‘그건 본능이다’라고. 지랄하시네. 툭하면 본능이래.

같은 맥락으로, ‘운명’이라는 말도 싫다.

「스스로 구하세요.」

나는 신관들을 공격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고장난 라디오처럼 ‘나는


황제를 지지한다.’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며칠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신물이 난 나는 나도 모르

게-그리고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그들을 공격했다. 그것은, 짜증과 공격 - 그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만한 방식이었다.

「예?」

‘황제와 드래곤으로부터 구해주겠다’라고 말하고 있던 신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도 귀엽지 않

다. 남자주제에 토끼처럼 눈을 뜨다니.

입에서 나가는 말이 생각보다 훨씬 심드렁해졌다.

「발이 없어요, 손이 없어요. 가서 구하라고요. 신병에 걸린 사람들을 찾아서 구해주라고요.」

내 말에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신관이 소리쳤다.

「신병은 전염병입니다!」

「그럼 기도라도 하든가!」

나도 맞고함을 질렀다. 분명 나보다 나이도 많을테지만, 이제 더 이상은 존댓말을 해줄 기력이 없다.

미워할테면 미워해라. 아니 좀 더 틀리다. ‘자, 덤벼.’ 따위의 도발에 가까울런지도 모른다.

사실 종교인이나 수도자는 좀 더 침묵이 어울리는, 신중하고 조용하고 침착한 분위기 아닌가?

-그러나 지구는 그럴지언정 이 동네는 틀린 모양이다. 최소한 내 눈앞의 신관은 확실히 틀리다.

「당신은 도대체 유브라데에 왜 온 겁니까? 자신의 의무를 방기하지 마십시오!」

병사들의 서슬 퍼런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신관이 악을 썼다.

「황제랑 결혼하러 왔다, 왜?!」

나도 같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신관이 너무 소리를 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목이 터져라 외쳤다.

「호모새끼! 변태! 황제의 물건이 그렇게 좋더냐?!」

「네 물건보단 낫지 뭘 그래?! 너 분명히 손가락 하나보다 작지?」

아마 이런 저질 대화가 나오기 전에 종료를 시키고 신관을 쫓아보내고 싶었겠지만, 이미 신관과 나는

서로에게 욕을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저 멀리서 「제발, 비 마마!」라고 낮게 나를 어르고 달래

는 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

내 말에 신관이 거의 폭발할 지경이 되어 나에게 뭐라 말하기 위해 크게 숨을 크게 들이셨다가 그대로

「컥!」하고 숨이 걸려 기침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욕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 입을 막았

다.

「미누, 제발 좀……」

그 목소리는 시오엔의 것이었다. 시오엔이 난처한 목소리로 「진정 해봐.」라고 나에게 속삭였다.

……이런, 당황스럽다. 나는 그가 이런 모습을 보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그가 이런 모

습을 보지 않기를 원했다. 신관이 ‘황제’라고 운운하고, 나에게 이를 갈고, 황제의 곁에 있는 것이 내

직무를 미루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시오엔의 성격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는 다정한 것 같으면서도 잔인하고, 나를 뭐든 믿어줄


것 같이 굴면서도 냉혹하다. 그리고-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광경이 있다. 사람들의 목에서 일시에 피가 뿜어져 나오던 소름끼치던 장면이,

또다시 내 앞에서 연출되지 않기를 바랬다. 그런 짓을 하는 것이 시오엔이라는 게 싫었기 때문에.

「내보내세요.」

시오엔이 막으면 어쩌지? 시오엔이 저 자를 죽이려고 하면 어쩌지? 최대한 냉정하게 말하면서도, 나는

속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시오엔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황제로서의 시오엔이 무섭다. 그

가 저 자를 내 앞에서 죽일까봐 무서워 견딜수가 없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신관도 내가 뭘 무서워하는지 안 것 같은 눈이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고 내 얼굴

을 쳐다보면서, 시오엔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눈앞에 곰이나 사자 같은 맹수

를 둔 등산객같은,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나도 시오엔의 옆에서, 떨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쓰고 마른 침을 몇 번이나 삼켜가며 그 뒷모습을 주시했

다. 시오엔이 죽이지는 않겠지? 설마, 밖에 나간 그를 잡아내 처형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거

라고 믿고 싶었다.

「추워?」

시오엔이 옆에서 염려를 섞어 물었다.

「아뇨.」

나는 웃어 보였다. 이상하다……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속이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는데, 왜 그게 되지

않지? 자꾸 속이게 되는 것 같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뭔가가 자꾸, 내 안에서 비밀로 되어버린다.

골드 드래곤 이야기를 고백해도, 비밀은 계속 생긴다. 이건 말할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졌다. 아니, 절

대로 말하지 말아야한다고, 들켜셔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시오엔을 사랑하는데도……

그 사랑만으로는 다 되지 않는 것 같다. 아, 이런 깨달음따위 별로 알고 얻고 싶지 않았다구.

「점심 같이 먹으려고 왔어. 날씨도 좋고 하니, 밖에서 먹자고.」

「아아……」

나는 그의 옆에서 미소 짓고, 그와 같이 걸었다. 오전 알현은 끝났으니 내 쪽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신관들에게 ‘네 의무는 유브라데를 구원하는 것이다!’라고 책망받는 것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내

가 그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뭐 크게 부정하지 않았지만, 아주 속이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힘든 것은 다른 쪽이었다.

라브만이나 그 대신관이라는 놈들은 나쁜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 밑의 하위신관들은 그만큼 나쁜 놈들은

아닌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맛이 별로야?」

시오엔이 물어서 고개를 젓고, 잊기 전에 미소 지어 보였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정말로 걱정하고 있다. 유브라데에 내린 그 신병의 존재를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어떻게든 미래를 찾기 위해 애쓴다. 월인이 왔을 때 그들은 순수하게 기뻐했을

것이다. 월인이 구해줄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 월인은 사람을 구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고, 황제와 혼례를 치룬다고 한다. 그들 입장에서

는 이 신병을 부른 것이 황제의 존재나 다름없는데-정확히는 황제의 어머니겠지만- 그와 결혼을 한다

니, 배신감을 느낄만도 하다.

그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거지만……

그건 그들의 생각 문제이다. 실제로 시오엔도 ‘신을 증오한다’고 말하면서도 신의 존재를 믿고 있으니

까. 문제는, 그들은 정말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전이 적이다,고 시오엔처럼 딱 잘라 말하기

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신전에 포괄적으로 속해있다는 것이다.

음식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혀 위에서 느껴지는 모래맛 뿐이다. 그 씁쓸함이 정말 미칠 것 같이 느껴진다.

[신전은 너의 적인가?]

시오엔이 그렇게 물은 적이 있다. 신전은 너의 적이야? 나는 망설임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러나- 신전은 너무나 큰 단어였다. 그 단어에 속한 자는 대신관 세명과 라브만 정도가 아니다. 그 이상

이었다.

나는 왜 생각도 하지 못했을까.

13. 모두를 지키는 건 불가능해 (2)

린타우 라 크리스티가 북쪽으로 출발한다고 한다. 시오엔의 특명을 받고 움직인다는데, 무슨 특명인지는

말해주지 않았고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다. 다들 그를 배웅한다길래 나도 같이 배웅하러 나갔다. 황궁

첫 번째 외문에서 그가 말에 타는 것을 지켜보는데 비서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엇……」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면서 내 옆에 서 있는 시오엔에게로 고개를 돌렸는데 시오엔도 난감한 얼굴

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시오엔의 옆에 서 있는 국무대신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말에 탄 린타우가

시오엔과 그 떨거지들-물론 나를 포함이다-에게 인사를 하려다 말고 비서관을 보더니 곤혹스러워했다.

「레니……」

어어어어어……
아니, 이거 못 올 데를 온 것 같은 기분이 살짝, 들려고 하는데.

시오엔과 나는 동시에 서로를 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비서관에게 늘 ‘시간 있느냐?’고 물어보는 황궁

최악의 바람둥이의 시선이 매서웠다.

그 시선에 응시당한 것은 주로 시오엔이었는데(나와 국무대신 사이에 시오엔이 서 있었다), 시오엔은

급기야 자신의 신하에게 「좀 봐줘……아무리 황제라도 사람 마음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단 말이야……」라고

애원했다. 국무대신은 일단 레니 데이비드 비서관이 걸리면 황제고 나발이고 집어치우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시오엔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장난스럽게 얼굴을 찡그리자 시오엔이 ‘구해줘’라고 입모양만으로 말했다.

‘불가능해’라고 내가 입모양만으로 대답하자 ‘거짓말쟁이. 지켜준다더니.’라고 입모양만으로 타박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국무대신이 고함을 쳐서 우리는 서로 멋쩍게 바라보아다가 서로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 둘 만의 세계를 만들때입니까, 예?!」

마치 우리가 전쟁 중에 연애질이라도 했다는 듯이 국무대신이 거품을 문 사람처럼 충혈된 눈으로 책망했

다. 그 신경질적인 고함에 어느새 눈물을 닦은 비서관이 국무대신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런 국무대신을 따듯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린타우가 비서관에게 말했다.

「레니, 이제 슬슬 한 가족이 되어줬으면 좋겠어.」

프러포즈가 아니었다. 이것은 자신의 동생을 대신해서 건넨 프러포즈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국무대신의

얼굴을 봐도 그렇고 내 생각에도 쓸데없는 참견이다. 아니나 다를까. 비서관은 생긋 웃으면서

「어차피 블랙신관도 되셨고하니, 저와 결혼하시게요? 그거라면 한 식구가 되도록 하지요.」

라며 이 대화에는 전혀 끼어들지 않았던 한 남자의 가슴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 처절함에 나와 시오엔은 동시에 눈을 감았을 정도였다. 멍하니 서 있는 국무대신은 평소의 밉살스러

운 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폐인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레니……」

「어서 가세요, 어차피 저같은 거한테 관심도 없으시잖아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침을 쏘아대는 비서관이 어색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내가 아는 그녀는 딱부러지

고, 상냥한 사람이었는데.

확실히 연애라는게 맘먹은대로 되는 종류는 아닌가보다.

린타우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 시오엔과 나에게 목례를 해보인 뒤 가려다가

문득 등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의 뺨에 키스했다.

「내가 하지 말랬지!」

국무대신이 주먹을 사정없이 내지르는 것을 슬쩍 피하며, 린타우는 경악으로 가득찬 나에게 느끼한 윙크

를 날린 뒤 사라졌다.

온갖 분란거리를 남겨두고서.
차가운 침묵속에서 시오엔과 나는 양쪽의 눈치를 보며 스프를 떠먹었다. 우리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난

감해하면서도 웃었는데, 가끔 그게 마음에 안 드는지 싸늘한 시선만으로 추궁당했다.

황제고 황비고, 연애전선에서는 아무래도 소용 없는 모양이다. 계급이 무슨 상관,이라는 듯한 분위기에

질렸다.

「하긴 옛날부터 린타우님이 각하를 좀 좋아하셨었죠「」.」

「사람을 호모로 만들지 마.」

「호모인 황제폐하앞에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이쯤되면 황제가 아니라 그냥 소시민이라 할지라도 화가 날법 한데 시오엔은 무념무상이었다. 아마 시오

엔이 화를 내지 않으리라는 걸 아니까 하는 소리겠지만- 우리가 식사하는 곳에서 황제의 시중을 드는

시녀장이 무시무시한 눈길로 노려보아도, 그들은 이미 그들만의 세상에 빠져있었다.

-좋은 의미로 그들만의 세상이라는 건 아니지만.

「난 너를 좋아하는 거, 너도 알잖아.」

「형에 대한 반발심은 아니고요?」

「헛소리!」

「그렇다면 사귈 때 누가 바람 피우랬나요. 진심을 진심답게 보여야 상대가 믿는법이지요, 각하.」

원래 황제 앞에서는 존칭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각하’까지 나오는 걸 보니 비서관은 분명히 이성이

날아간 것이 틀림없다. 사실 황제도 제정신은 아닌 걸로 보인다.

그는 나를 응시하면서 음식을 먹고 있는데, 시선에 온도가 있다면 나는 화상을 입었을지도 모르겠다.

「린타우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내 마음속에는 너 뿐이야.」

「그랬다면, 좀 더 진지하셨어야죠.」

「여기서 어떻게 더 진지하란 말이야?」

「좋아요, 그럼 린트인 백작부인하고는 무슨 사이세요?」

「친구사이.」

그 말에 시오엔과 비서관이 동시에 말했다.

「거짓말.」

「말도 안돼.」

시오엔의 목소리가 현저히 낮았는데도, 국무대신은 시오엔을 노려보았다. 시오엔은 딴청-나를 응시하기-

을 피우면서 국무대신의 눈길을 전혀 모르는 체 했다. 그리고 국무대신은 시오엔을, 시오엔은 나를 열

렬하게(이런 열렬함, 정말 거부하고 싶다) 쳐다보는 사이 비서관이 달칵 소리를 내며 숟가락을 내려놓

았다.

「폐하, 물러가도 될까요?」

이런 폭풍우 모드의 비서관은 천하무적이다. 아마 유브라데 최강일 것이다. 잘은 몰라도 드와나 대륙까

지 확장해도 그녀는 강할 것이다.


……시오엔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한번 국무대신의 열렬한 시선을 받아야했다.

결국 사랑스러운 시오엔이 가여워져 나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말았다.

「쫓아가세요.」

내 말에 국무대신이 흘끗 시오엔의 눈치를 봤다. 시오엔이 귀찮아 하는 티를 노골적으로 내면서 손을

휘젖자 「물러갑니다!」라고 말하며 사라져버렸다. 말이 사라진거지, 정말 비호처럼 날아갔다. 복도 저

편에서 「친구 사이가 왜 같은 방에서 나오시는데요? 예? 얼굴이 왜 백작 부인 다리 사이에 있어야 하

는건데요?!」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런게 아니라니깐! 그건 오해야, 오해라구!」라는, 국무

대신의 절규도 들렸다.

헉. 다리 사이에 얼굴이……

내 놀란 표정을 마주한 시오엔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봤어.」

뭘?

내게 시오엔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린트인과 크리스티가 가든 파티때 한 구석에서 섹스하는 거.」

「헉, 정말이요?」

진짜 놀랐다. 아니……굉장히 밉상인데다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는 것 같고 바람둥이이기는 하지

만, 그래도 비서관에게는

진심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 속 한 구석에서.

놀라서 스푼을 떨어뜨릴 뻔 했는데, 다행히도 손에 힘을 줄 수 있었다.

뭔가, 굉장히 의외다 - 라는 기분이 들었다.

「저도 봤어요. - 아니라고 우길거면 장소는 좀 가릴 것이지.」

시녀장도 말해서 더 놀랐다.

「나프라, 그 때 가든 파티에 있었어?」

「아니요, 제가 본 것은 국무대신 개인실이었습니다.」

「일하라고 방내줬더니 잘하는 짓이군.」

시오엔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나는 그에 앞서 이해가 안 갔다. 국무대신이 그렇게 아무데서 막 한단 말

이야? 물론 열렬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열렬하다면- 도대체 왜 그렇게 오매

불망 비서관을 쫓아다니는거지?

알 수가 없네.

「뭔가, 사정이 있는 거일수도 있잖아요?」

「사정같은 말씀 하십니다. 아무리 사정이 있어도 누가 집무실에서 지저분하게 놀아도 된답니까?」

일단 내 교육도 담당하고 있는 시녀장이 도끼눈을 했다. 그 옆에서 시오엔도 「어떤 사정이 있든 용납

될 수 없는 선이 있어.」라고 따끔하게 말했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 뭔가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떤 사정이든 아무데서나 몸을 섞는 것은 이상하다. 망가같은데서 보면 온갖 곳에서 섹스를 하

지만 확실히 이상하다. 섹스를 하기 전에는 그것이 그렇게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었지만……

시야가 흐려진다.

상대밖에 보이지 않고, 이성이 희미해지고, 알 수 없는 감각들이 덮친다. 상대를 더듬는 나의 손도, 정

해진 것처럼 움직이고 또한 다급하다.

열기가 느껴진다. 숨이 막히고, 심장소리가 귀에서 들린다. - 그걸 아무데서나,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거지?

내가 한참동안 생각하다 결국 자려고 침대에 누웠을 때 묻자 - 시오엔은 아주 애매하게 웃었다. 그는

대답하기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한참이나 말을 해주지 않다가 내 추궁에 못 이겨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입을 열고도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망설였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말을 고르다가 신중하게 대답해주었다.

「여러가지 형태의 욕망이 있어. 물론 연인과 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것이지만, 때로는 그저 사정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지. 너도 자위를 해보았겠지만, 자위와 섹스는 다르잖아.」

다르지.

「그런 것과 마찬가지야. 다른 이와 몸을 섞는 것도 굉장한 쾌감이 있는가하면, 그저 그런 수준도 있

지. 그 경우에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저 그런 정도라면 왜 타인과 하지? 혼자 하면 되잖아요.」

내 말에 시오엔이 「혼자 하는 것보다는 남하고 하는게 더 좋으니까.」라고 간결하게 답했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우 그정도라면……나는 하고 싶지 않다.

겨우 자위와 비슷하거나 자위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라면, 나는 평생 자위를 하는 것이 낫겠어. 난 아

마 보통 남자들과는 약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남자나 여자라는 개념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보건대 나는 좀 까다롭고 폐쇄적인 것 같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이런 말을 했더니 시오엔이 정말 기쁘게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마이를 좀 더 키워서……」

시오엔이 나를 자신의 몸 위로 올리고 말했다. 즐거움으로 가득찬 음성이었다.

「황제 자리를 재빨리 넘겨버리는 거야.」

시오엔의 유두가 눈앞에 있었다. 잠시 갈등하다가 그 혀를 내밀어 조금 핥으니 시오엔의 몸이 크게 출

렁였다. 그가 내 어깨를 움켜 잡고 나를 끌어올렸다.

「……이러지 마.」
난처하게 웃는 것이 진짜 딱 내 취향이다. 알고보면 나 취향 나쁜 거 아닐까?

「왜요? 아아- 하긴 늙어서-」

내 빈정거림에 시오엔이 울컥한 얼굴로도 웃었다. 이야, 저것도 재주다. 게다가 굉장히 가련해보인다.

「내일 너 알현 길잖아. 요즘 지쳐하는 거 다 알아. 도발하지 말고……」

「늙은이.」

「……후회 안하지?」

시오엔의 물건은 이미 내 손안에 있었다. 시오엔의 얼굴이 천천히 변했다. 나는 사실 아름답고 어딘가

연약해보이는-그럴 리가 없지만- 시오엔이 좋지만……이 얼굴도 꽤 마음에 든다.

아마도 시오엔의 얼굴이기 때문이겠지.

게다가 이렇게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시오엔은, 맹수같다. 고양이과의 맹수. 어떻게 보면 웃는 것 같

고, 어떻게 보면 기회를 엿보는 것 같은 느낌. 말랑말랑한 발바닥이 좋지만, 발톱을 감추고 있는 듯한

위험함.

평소에는 그다지 볼 수 없는 얼굴이라서 마음에 든다. 레어 아이템이랄까.

「시오엔이야말로.」

내 말에 시오엔이 아랫입술을 핥으며 웃는다. 그는 재미있어도 기뻐서도 아니라, 그냥 웃었다. 금안이

흥분으로 더욱 선명해져 있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키스를 했다.

시오엔이 발기하고 있는 도중이 싫을 지경이었다. 빨리, 더 흥분해. 빨리. 내가 그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은 굉장한 쾌감이었다. 그의 것을 잡은 손이, 내 의도보다 더 빨리 움직인다. 내가 키스하는 동안에

도 시오엔은 내 목에 이를 세운다. 소름끼치도록 좋았다. 이미 벗고 있기 때문에 꺼릴 것이 없다.

내가 시오엔의 것을 손으로 훑는 동안 시오엔은 내 뒤를 만졌다. 용서없이 만지는 손길 끝에서 질척이

는 소리가 났다. 휘젖는 그의 손가락이 선명하게 느껴져서 나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왜 이렇

게 초조한걸까. 어디든 닿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다.

시오엔이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가 내 다리를 벌렸다. 언제나 이 순간에 엄습

하는 수치심조차 사랑스럽다. 그래- 이 모든 행위는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시오엔이 크림을 손가락에 듬뿍 묻히고 다시 내 내부를 휘저었다.

「아……」

목소리가 가면갈수록 높아졌다.

「더 벌려줘.」

시오엔이 입으로만 애원하고, 내 엉덩이 밑으로 손을 넣어 허공으로 띄웠다.

「다리 잡아줘.」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두 손을 내 허벅지에 대었다. 나는 직접 양 허벅지를 잡고 허리를 허공에 띄웠

다. 그러자 시오엔이 내 중심에 뺨을 비볐다.


「다정해……」

손가락이 하나씩 늘어간다. 시오엔은 조금씩, 신중하게 내 뒤를 열었다. 이 여는 과정은 부끄럽고도 고

통스럽다.

「그냥 해줘요……」

내 부탁에도 시오엔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혀를 뾰족하게 세워 요도를 후비며 괴롭힌 뒤에 세 번째

손가락을 넣었다.

「아……제발, 그냥……」

손가락 세 개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펼쳐졌다가 오무라들기도 하며 나를 괴롭혔다. 헐떡이

는 숨을 제어할 수가 없다. 그냥 아픈 것이 나을 것 같은데 시오엔은 상냥하고 잔인하게도 그 여는 과

정을 계속한다. 차라리 뒤로 엉덩이를 세우고 하는 것이 나은 것 같은데, 그는 이것을 좋아한다. 내 눈

을 쳐다본 채 내 뒤를 연다. 내가 입술을 물면, 그는 자신의 손을 대준다.

「물……거 같아…… 손가락 빼……」

「물어줘.」

시오엔은 나처럼 헐떡이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숨결도 흐트러져 있다.

「위도 아래도 나를 물고 있는 거야.」

장난스럽게 말하며 시오엔의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왔다.

「무리……」

밖으로 나올때는 오무라들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부채살처럼 펼쳐졌다. 입구가 아닌 안쪽이 넓혀져 나는

크게 신음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신음할 때마다 시오엔은 더 교묘하게 손을 움직였다. 느끼는 곳이

애매하게 닿아 허리를 흔들고 싶은데 흔들 수가 없다.

안타까움에 눈물이 흘렀다.

「싫어……」

「뭐가 싫은데?」

허리를 움직이고 싶어. 닿게 하고 싶어. 허리에 힘이 들어가서 자꾸 허리가 당긴 듯한 느낌이다.

「자세가……」

「지금은 뺄 수 없는데.」

시오엔이 난처한 목소리를 냈다. 말을 제대로 할 수조차 없다. 시오엔의 손가락이 내 혀를 애무하고 있

다. 나도 그의 손가락을 핥아보려 하지만 신음 때문에 입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오엔의 손가락이 혀뿌리에 닿았다. 살살 긁어내고 있다.

「손톱 세우지 말……」

「이대로 돌아볼래?」

시오엔이 그렇게 제안했다. 이대로라니……이대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술을 마신 것처럼

뺨이 더울 지경이다.
「아, 아니 그건 싫……」

두말할 필요도 없이 거절하는 내게 시오엔이 네 개의 손가락을 거칠게 움직이며 물었다.

「닿지 않지?」

어, 어떻게 안걸까. 그는 알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창피하고……뭐라고 돌려서 말하

고 싶은데 생각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움직이고 싶잖아. 엉덩이를 흔들고 싶은 거지? 말해, 미누. 말해줘.」

「읏……응……」

천천히 몸을 뒤집었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했고, 시오엔이 도와줘야 했다. 뒤집자마자 시오엔의 손가락

이 빠져나갔다. 이제 겨우 닿을 수 있었는데!

「안돼!」

내 항의에도 불구하고 시오엔의 손가락은 이미 빠져나간 뒤였다. 시오엔이 내 엉덩이 양쪽을 잡고 벌렸

다. 방금까지 학대받았던 뒤가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운 공기와 시오엔의 시선이 동시에 느껴져

나는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물컹한 것이 안으로 들어온다.

「더러워, 하지 마!」

내가 낮게 소리쳐도, 그는 비웃을 뿐이었다.

「거짓말쟁이.」

시오엔은 알고 있는 걸까. 실은 침대에 눕기 전에 그 안을 씻는다는 걸. 씻을 때마다 부끄러움에 미칠

것 같다. 시오엔을 아직 좋아하지 않을 때는, 시오엔에게 시중을 맡겨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가 내

뒤에 사정하고 내 뒤에서 그의 정액이 어떻게 나오는 것인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

때 그가 목욕탕에서 만나는 다른 남자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시오엔의 혀가 몇 번 움직이고, 주름을 할짝거렸다. 그 곳이 긴장되었다. 가능하면 움직이고 싶지 않은

데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상한 맛이네.」

맛?

순간, 진짜 놀랄 뻔 했지만……

「이런 맛밖에 없는 건가.」

라고 하는 그의 작은 투덜거림으로 그가 말하는 것이 크림이라는 것을 알았다. 핥지 마, 그런거! 그렇

게 말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시오엔이 「넣을게.」라고 말하고 그대로 집어넣었다.

시오엔의 손이 허리를 잡고 있다. 그 손에 힘이 들어갈때마다 시오엔의 분신이 조금씩 들어왔다. 확실

히 익숙해져서 그런지 덜 고통스러웠다. 시오엔이 내 등뼈에 입술을 대었다. 목 뒤서부터 한번 입술을

대고 조금 들어오는 것을 반복했다. 그의 입술이 내려갈수록 내 안도 채워져갔다.

시오엔이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3. 모두를 지키는 건 불가능해 (3)

골드 드래곤에게는 예지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시오엔은 그 골드 드래곤의 수호를 받고 있다고 한다.(내가 아는한 그 용은 누구를 수호해줄 성

격은 못될 것 같은데. 더욱이 상대가 시오엔이라면.)

-그렇다면 시오엔에게도 예지능력이 있다고 봐도 좋을까.

시오엔의 충고는 한없이 옳았다. 알현실에서 나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앉아도 편치가 않아서

뒤척이게 된다. 아직도 거기가 벌려져있는 느낌이었다. 안쪽에서 이물감이 느껴져 난처하게 입술을 깨물

어야했다.

「그런 표정 좀 하지 마시고, 말씀을 해주십시오- 월인이시여! 정말로 황제의 곁에 있으실 겁니까? 그

것이 월인의 의지시란 말입니까?!」

얼굴은 달라져도 내용은 비슷하다. 그리고 하나같이 열렬하다. 나도 평소 같았으면 악을 써주었을텐데

오늘은 만사 귀찮다.

「그래요.」

「어떻게, 어떻게 저희에게 이러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아아아!」

몸이 힘들어서 그런지, 상황에 좀 더 냉정하게 굴 수 있었다. 대답할 의무가 없다. 그러니까 하기 싫은

말, 할 말이 없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왜 그렇게 악을 써대었던 것이었을까.

아마도,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나를 보호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요,라고.

네가 잘못한거야-라고 밀어붙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내가 옳다고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뭐가 문제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월인이시여, 월인께서는……」

「황비에요.」

‘아무도 구원하지 않아도 돼.’

시오엔은 언젠가 그렇게 말했다. 아무도 구원하지 않아도 된다고.

「……데는 왜 당신같은 분을 보낸겁니까?」

신관이 절망으로 가득찬 목소리를 냈다. 이런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어서, 당황스럽다. 왜 나같

은 걸 보냈냐니. 왜냐하면-
신은 없기 때문이야.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같은 게 여기 있는 거야. 아니라면, 당신들이 원하는 그 월인은 없어.

나는 그냥 길을 잘못 든 인간일 뿐이야.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안됐네.

아니, 사실 남의 일이기도 하다.

「데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겁니까?!」

「정말 조잘조잘 말 많네.」

나는 싸가지가 없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이 말은 알현실 뒷문으로 들어오던 국무대신이 한 소리

였다. 아마도 이 신관이 마지막 알현자인 것 같다.

「그렇게 신병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면 네 발로 뛰어. 바보같은 자식아.」

나도 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정말 인정사정 없구나.

신관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었다. 자세히 보니 이 신관, 나이가 그렇게 많아보이지는 않는다. 몇 살일

까? 스무살? 스물두살? 여하간 나보다 조금 형이던가, 나와 동갑이던가. - 어쩌면 나보다 어릴지도 모

르겠다.

「누, 누구시오, 무례한 말을 하는 당신은!」

「니타우 라 크리스티.」

「크리스티? 그 악마의 앞잡이인……」

그 말에 국무대신이 싸늘한 목소리로 「보초, 끌고 가.」라고 명령했다. 감정의 편린이 전혀 보이지 않

는 그 목소리에 오싹해졌다.

국무대신은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품평을 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나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섞어 물었다.

「일이 좀 급해져서,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알현 도중 난입한 무례한 행동은 후에 원하시는대

로 처벌받겠습니다.」

빠르면서도 침착한 어조는, 사무적이다. 본능적으로 나는 이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의미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국무대신은 시선으로 알현실에 있는 모든 사람을 내보

냈다. 마지막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국무대신이 물었다.

「여쭙겠습니다. 유브라데를 구원하실 겁니까?」

……어이가 없어서 나는 국무대신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국무대신은 진심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얼

굴은 신중하고 진지했다.

「제가 월인이라는 거……그거 거짓말인거 아시잖아요.」

「아니요, 비 마마께오서는 월인이십니다.」


「아니, 아 그렇기는 한데-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저는 단순한 차원이동자일뿐이라고 전에 그랬잖아

요.」

잠을 못 잔것이 분명한 얼굴로 국무대신은 턱을 긁었다.

「상처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폐하께서.」

「예?」

「전에 칼에 찔리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상처가 남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아아, 그거.

「골드 드래곤이 치료해준거에요.」

내 말에 국무대신이 그러셨군요,라면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이상하단 말입니다. 물론 비 마마를 잡은 것이 저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이건 우연의 연속인

걸까요? 신관을 족쳐서 알아낸 바로는 그 계시가, 정말이라고 하더군요. 깃털이니 뭐니 하는 건 거짓말

이었지만- 딱 그 보름에 그 순간에 어떻게 비 마마가 떨어지실 수 있는 걸까요? 왜 골드 드래곤은 비

마마의 목숨을 구하고, 비 마마에게 프러포즈하는 걸까요? 비 마마가 오시자마자 신병이 사그러들었습니

다. 곪은 상처들이 일시에 터지는 이 모든 현상들이 그저 우연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걸까요? - 늘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습니다.」

국무대신이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모든 것이 어떻게 이토록 비 마마의 사정에 맞춰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비 마마, 아

니 이계의 객이시여. 계약은 지킵니다. 이년이 조금 더 남았지요. 시간이 되고, 그 때에도 비 마마께서

귀환을 원하신다면 반역을 해서라도 돌려보내 드릴 겁니다. 제 목숨을 걸지요. 그러나 그 전에 여쭤보

고 싶습니다. 비 마마께서는 유브라데를 구원하실건가요?」

‘아무도 구원하지 않아도 돼.’

시오엔은 그렇게 말했다.

‘내 곁에만 있어.’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시오엔의 뜻이 그렇다면.」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내 말에 국무대신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예?」

「시오엔이 유브라데를 구하라고 한다면, 그리고 제 능력이 되는 한도내에서 방법을 알려준다면 최선을

다할거에요.」

「폐하가 원치 않으시면요?」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대답을 회피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안 구해요.」
사람이 죽는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간다. 신관들

의 모습도 선명하다. 그래, 그들 모두는 잘못하지 않았어.

누구도 완벽한 죄인은 없다.

사실 이 상황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렇다면 보다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게 중요도 순위는 늘 시오엔이 최정상

의 자리를 잡고 있다.

뒤는 돌아보지 마, 김민후.

어차피 과거로 갈 수 있는 길은 어느 곳에도 없다. 누구도, 신이라 할지라도 시간을 돌려서 뒤로 걸을

수는 없어.

깨끗하게, 경멸당하겠다. 자기 보호따위는 하지 않겠다.

그렇게 마음 먹은 나에게 국무대신은 피식 웃었다.

「이야, 열렬하신데요.」

굳게 먹은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아니, 그렇게 헤벌쭉 웃으면서 하실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아아 각오하고 있었던 내가 바보같다.

「뭐가요?」

「그냥……마음이, 라고 해야 할까요. 사랑이? 뭐 폐하쪽도 참 열렬하시지만.」

능글맞게 웃으며 국무대신이 덧붙였다.

「비 마마께서도 폐하를 좋아시긴 하시나보네요. 그것도 상당히. 다행입니다.」

그 얼굴에는 안도의 미소가 가득했다. 그가 뭔가를 정말로 걱정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유브라데는 지금 흑백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황궁은 특히 심하죠. 황제파와 신

전파. 중립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리는 말은 앞으로 달리거나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중립은 있을 수

없지요. 사람이 오백만명이나 죽었는데 탁상공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 못합니다. 하루 하루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목표를 위해서는 뒤도 옆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야 할 판국입니다. 모든

이를 만족시키면서 어떤 것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다쳐야 합니다. 저는 비 마마를 황후로 추

대했습니다. 이제 곧 유월이군요. 혼례식이 시작될겁니다. 그 전에, 비 마마의 각오를 듣고 싶었습니

다.」

국무대신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해갔다.

「마마께오서는 굉장히 좋은 분입니다. 다정하고, 정의로우시죠.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서 다정함과

정의로움은 독과 같습니다. 비 마마의 모든 행동이 폐하에게 돌아옵니다. 비 마마 본인은 자신의 양심

과 위배되지 않은 길을 가시고 싶으시겠지만, 그건 발밑에 시체를 깔아두고 홀로 고고하게 걸으시겠다는

것과 별 다를바가 없습니다. 모두가 비 마마를 주목하고, 모두가 비 마마 때문에 벌벌 떨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럴만한 여유가 전혀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국무대신이 물었다.

「비 마마는 악역을 자청하실 각오가 되어있으십니까?」

악역?

너무나 낯설어서 어지러울 정도였다. 악역이라고? 내가? - 그렇게 놀라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어이가

없기도 했다. 정말 단 한번도 나는 ‘악역’을 생각해본 일이 없구나. 내가 하는 어떤 일도 악이라고 느

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옳다고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에만 주력해왔고, 그래서 후회도 뭐도 없

었다.

그런 인생이었다 - 인생이라고 말하기에도 짧은 내 생은.

악역을 자청할 각오라니.

되어있지 않다. 할 수 있을리 없다. 악역이라고? 악역을 해야 한다고? 사람을 존경하는 것. 약자를 지

키는 것. 수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내가 생각하는 ‘지켜야 하는 것’들이.

내 혼란스러운 얼굴을 마주한 국무대신이 말했다.

「자신을 온전하게 지키면서, 타인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게, 당연한거잖아.

「비 마마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마다, 폐하는 고립되게 됩니다. 게다가 폐하 본인도 비 마마를 사랑하

시는지라 더욱 더 불안해하시죠. 어느 순간, 비 마마는 악역을 자청하셔야 할지도 몰라요. 그런 순간은

올겁니다. 비 마마께서는 그 때 악역이 될 각오가 되어있으신가요? 아니라면, 부디 상징적인 존재로 이

곳에 남아주십시오. ……좀 더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곳에 남아있으신 동안에는 부디,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주십시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셨습니까?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아주십시오.」

그 때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악역하죠, 뭐.」

내가 도대체 뭔 생각을 하고 이런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스스로가 한심할 지경이었는데 그건 국무대신도

마찬가지인지, 국무대신이 아주 진지하게, 대놓고 물었다.

「아무 생각없이 하신 말씀인거죠, 이거?」

나는 자존심이 좀 높은 편이다.

「아뇨.」

나와 눈싸움을 하던 국무대신이 「진짜로 각오가 되어있으시다는 말이세요?」라고 다시 물었다. 여기서

아니,라고 해야 한다. 이봐, 각오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 마. 나처럼 까탈스러운 놈이 악역을 자청하는

각오라니-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요.」

허세 부릴 일이 아니야, 김민후. 너 왜 이래? 허세없이 정직하게 못하는 건 못한다고 하는게 너의 장점

이었다고. 왜 이러는 거냐고!


정말 속으로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대놓고 국무대신에게 ‘그런 각오 없어요’라고는 죽어도 말하기

가 싫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울고 발광하는 지경이면서도 겉으로는 무심한 척 대답했다.

「비 마마. 마마, 지금 화나신거죠?」

그런걸까. 어느 정도는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아니요.」

우아아아 미치겠네, 라고 국무대신이 소리치더니 나에게 우는 목소리를 냈다.

「차라리 화를 내세요!」

「화 안났다니깐요.」

실은 났다. - 하지만 왠지 인정하기가 싫어졌다.

국무대신이 얼굴을 찌푸리고 나를 쳐다보다 다시 물었다.

「정말로, 각오가 되어있다-이 말씀이세요?」

「네.」

아뇨.

「정말이시죠?」

의심스러워하는 말투에 나는 옹골찬 대답을 내놓았다.

「물론이죠!」

내가 도대체 이 뒷감당을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진짜 모르겠다……

13. 모두를 지키는 건 불가능해 (4)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아마 내 머릿속의 퓨즈가 끊긴 것은 아마도 국무대신이 ‘끼어들지 말라’고 했

기 때문인 것 같다. (남 탓이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어쩌면 난 시오엔을 내 생각보다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아, 늘 ‘이 만큼 좋아한다’라고 생각하고 있

으면 그보다 더 좋아하고 있다는 걸 자각할 만한 일이 생기니 이것 참, 큰일이다. 사실은 굉장히 좋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 안 해보았는데- 뭐 그런 사랑있지 않은가. 목숨을 거는 사랑, 같은 거.

으아아아 말도 안돼. 사랑에 목숨을 왜 걸어? 살고 봐야 사랑이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해보려 하니 수많은 장면들이 걸린다. 일단은 내 팔에 새겨져 있는 저 문신인지 낙인인지

모를 저것도 걸리고…… 내가 어떤 마음으로 저걸 찍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머리가 하얗게 백지화되고,

그 중간에 시오엔이 자리잡았다. 그리고-


뭐라고 했었는지, 무슨 마음을 먹고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집에 가도 큰일이다. 뭐

아버지가 내 몸을 들여다 볼 일은 없겠지만, 만약 이 몸을 보면 뭐라고 해야 하지? 온 몸에는 희미하게

긁힌 자국이 있고, 옆구리에는 땜빵 자국이, 팔뚝에는 낙인이. - 아 진짜 고민되네.

남자들에게는 정복욕과 소유욕이 있다던데, 정말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시오엔을 구박하는 건 괜찮

아도 다른 놈이(여자도 포함해서) 그를 괴롭히는 꼴은 못 본다. 시오엔은 나보다 크고 나보다 세고 나

보다 잘났지만, 금발 웨이브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 미모는…… 나에게 그를 ‘여자친구’라던가, 그런 식

으로 생각하게 된다. 내가 그의 여자친구가 아니고, 그가 여자쪽인 것이다.

섹스는 내가 여자역이지만- 그것도 초기에는 시오엔을 지켜주겠다는 마음에서 한 것이였다. 지금은 익숙

해져있고, 또 난 그 포지션으로 처음을 배웠으니 그냥 죽 이어지는 것이지만……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기

사도의 의미였단 말이다.

시오엔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다정하게 웃는 그가 정말 좋다.

그러니까 그 미소를 지켜주고 싶다.

불안해하고, 나를 저울질하고, 사람을 죽이는 그는 보고 싶지 않다. 그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다. 지켜주겠다,라는 건 거짓말이 아니야.

시오엔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러니까 시오엔이 웃고 행복해하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악역, 하지 뭐.

가능한 좋은 방법을 찾아보겠지만 아무리해도 안된다면. 아무리해도 소용이 없다면.

그 때는 그냥, 악역하지. 세상에 못하는게 어디있어. 하면 다 되는 거지. 박정희 아저씨가 말했다.

‘하면 된다’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시오엔이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물었다. 나른한 목소리, 따듯한 몸. 그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에게만 특별하다는 걸 알고 있어. 그에게 기대면 그의 심장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그가 아무리

무섭더라도 결국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나는 이년 뒤에는 가야해요.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하지만, 시오엔.」

내 말에 흐려지는 금색 눈을 보고 마음이 안타까웠다. 당신을 지키는 것은 좋아, 그것을 위한 악역도

자청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나 시오엔.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살 수는 없어.

「이년 뒤에 가지 않는 것을 빼고, 나는 당신에게 무엇이든 다 해주겠어요. 왜냐하면 당신을 정말로 사

랑하거든요. 시오엔……

그러니까 약속해주세요.」

「뭘?」
「이년 뒤에는 나를 보내준다고.」

시오엔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싫어.」

「시오엔!」

「그대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 없어. 그건 안돼.」

그가 나를 놓았다. 그리고 움직이려는 그를 붙잡은 건 나였다. 나는 그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나를

쳐다보게 했다. 그의 시선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절망감이 나를 안타깝게 만들었

다.

악역 자청이고 나발이고 다 좋아. 당신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어. 그러나-

나는 가야 해. 나는 여기에서 계속 있을 수는 없어. 당신은 원래 잔인한 사람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야. 당신은 이미 잔인해졌는데. 눈가리고 야옹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고, 어차피 인간은 본

성을 바꿀 수 없어.

그러니까, 시오엔-

달콤한 꿈을 꾸게 해줘.

「나는 어릴 때 댕기 머리 여자애를 좋아했어요.」

그는 더더욱 얼굴를 구기고 있었다.

「너무너무 좋았어. 그 여자애가 귀엽고 예뻐서 어쩔 줄을 몰라할정도로. 하지만 여자애한테 잘해주는

건 다른 남자애들이

우습게 보니까 그 여자애랑 만날 싸웠어요.」

「그대가 과거에 누굴 좋아했는지 따위, 듣고 싶지 않아!」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시오엔이 거부했다. 정말 의외인 남자다. 잔인한데 다정하고, 상냥하면서

도 질투가 심하다. 나는 「들어요!」라고 강요하며 그를 붙잡은 채 계속 말했다.

「어느 날도 싸우다가……무슨 일이었는지는 기억도 안나는데, 팔을 부러뜨렸어요. 고의로. 화해할 수 있

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그냥 싸움이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는데 갑자기 시오엔이 끌어안았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시오엔이 속삭였다.

어, 뭐라고?

나는 그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그냥…… 맙소사……

왜 아무 이유도 없이 눈물이 흐르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우는 것이 이상하지도 않은지 시오엔은 좀 더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 있었다.

「내가 옛날에 기도소를 날려버렸다는 이야기 했었잖아. 네 상황은 잘 알아. 그리고 말해두지만, 그건
네 잘못이 아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아무도 너에게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그래,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여자애가 나보다 약하다는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마이도 나도 너와는 달라. 미누……마이는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아이가 아니야.

그애는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야.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라고 신은 물었고-

그래, 나는 무엇을 희생하더라고 그 힘을 얻고 싶었어. 그러니까, 우리하고 같다고 생각하면 안돼. 네

입장을, 네 마음을 타인과 동일시하지는 말아. 그건 네 잘못이 아냐.」

「사람들은 나에게 욕을 했죠. 그 여자애는 평생 나하고는 말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 처음이네

요,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준 사람은.」

혼자 내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는건 힘들었다. 더욱이 내가 스스로 나에게 말하면서도 믿지 못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아, 이런 말을 하려던게 아닌데.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내 옆에 있어. 내가 수십번이라도 말해주지. 그대 잘못이 아니야. 그 무엇도, 그대 잘못이 아니야.」

아, 빌어먹을.

나는 시오엔의 옷에 얼굴을 비벼 눈물을 닦고 웃는 낯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돼요. 난 여기와 안 맞아. 더욱이……」

「미누.」

「나는 잔인한 당신을 볼 자신이 없어. 정말이야. 나에게는 다정하지만 온 세상 사람에게 다 다정한 건

아니잖아요. 알고 있어요. 당신은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당신은 내게 잘해주지만, 그래도 당신은 굉장

히 무서운 사람이야. 여기에는 그 무엇도 없어. 나는 여기와 안 맞아요.」

시오엔이 얼굴을 찡그렸다.

「보내준다고 약속해줘요. - 당신이 그 약속만 해주면, 나는 그동안 당신 옆에 있을거야. 당신이 나에

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당신 옆에서 당신 곁을 지키고 있을거야. 당신 말대로 당신을 지켜줄거야. 하

지만 그것은 이년동안이야. 나는 그 이상은 할 수 없어. 한계를 정해두지 않고 당신을 사랑하기에, 나

는 너무 계산적인지도 몰라요. 사람이 마구잡이로 죽고, 음모로 가득찬 이런 곳에서 나는 오랫동안 견

딜 수 없어요. 시오엔이 나를 보내주지 않는다면 나는 미쳐버릴지도 몰라.」

「미누.」

「약속해줘요. 당신은 나를 좋아하잖아. 내게 집착하는 것도, 당신의 손짓 하나로 죽이는 사람들처럼

날 가볍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라면. 당신은 황제로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연인으로서 나를 좋아한

다면. 그 약속을 내게 주세요. 이년 뒤에, 나를 보내준다고.」

시오엔이 눈을 감았다.

그는 정말 내키지 않는 얼굴로 「반드시 그것만이 약속이 될 수 있는건가?」라고 물었다.


「네.」

약속을 그가 어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입에서 나를 보내주겠다는 그 약속이 중요했다. 내 의

사를 존중하겠다는 표현이 중요했다. 나는 약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제 악역을 자청하게 될지도 몰라.

내가 당신을 지켜야 한다고, 당신에게 그럴 가치가 있다는 걸 보여줘.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줘.

「단 한번이야.」

시오엔이 이를 갈았다.

「단 한번, 기회를 주겠다. 이년 뒤에 그대가 원하는대로- 그대가 가고 싶을 때마다 보내주겠다는 약속

은 못해. 그러나, 단

한번은 기회를 주지. 그대가 원한다면 계약도 하겠어.」

시오엔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있었다. 그는 말하고 싶지 않아서 목소리를 낮춘 것이 아니다. 그는 상처

입은 것처럼 이를 가느라 목소리가 낮아진 것일 뿐이었다.

「됐나, 만족하나? 그대가 도망칠 길이 있으니 이제 만족하나? 그대는 잔인하고, 잔인한-」

「결혼해주세요.」

내 말에 시오엔의 얼굴이 멍해졌다. 나는 이 아름다운 얼굴이 멍해지는 것이 좋다.

「뭐?」

시오엔이 되물었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결혼해주세요. 프러포즈에요, 이거.」

「뭐?!」

이년뒤에 떠나겠다면서 결혼을 운운하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시선이다. 아아, 그럴지도 몰라. 그런

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게 최선이지 뭐야.

「나는, 황비역 때문에 당신과 혼례식을 올리는게 아니야.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거야. 비록

헤어진다 하더라도,

그건 의미있는 일일거라고 생각해. 시오엔, 청혼하는거에요. 결혼해주세요.」

「기가 막히는군. 하나도 안 반가워.」

시오엔의 말에 나는 하지 않으려던 지적을 했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시오엔이 나를 흘겨보더니 시선을 돌렸다. 뺨에 홍조가 떠오른 것이 보여, 무척 귀여웠다. 아아, 시오

엔. 뭘 믿고 이렇게 귀여운거냐.

「안 반갑다니까. 기쁜 거야 당연하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을 받았는데. 그러나 그대는 미리 도망

갈 구석을 마련하고

온 거잖아. 전혀 반갑지 않아.」

얼굴은 웃고 있다니깐……
「당신이 원하는대로 해줄게. 그러니까 당신도 내가 원하는거 하나만 들어주면 돼.」

「그것 말고, 전부 들어줄 수 있어.」

시오엔의 다급한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해도, 당신은 죽일 수밖에 없잖아. - 이런 말 더하고 싶지 않아.」

나는 웃었다.

그는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줄 수 없어. 평온한 생활도, 맛있는 콜라도. 나와 당신은 정말 너무 틀려서, 우

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어. 우리는 결국, 스쳐지나가는 것일 뿐

일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당신을 기억할거야.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 나는 지금, 당신에게 제안하는 거야. 내 마음의

갈등과, 당신의 불안을 종식시킬 제안을.

「나를 지켜준다고 했잖아. 영원히, 나를 지켜줄 수는 없는거냐.」

시오엔이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영원은 없어요.」

우리는 한참동안 마주보았다. 내가 다시 한번 물었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어요?」

내 질문에 시오엔은 나를 끌어안았다.

「……네.」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제야 나도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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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본문 끝.

에필로그 하나 남았습니다.

에필로그는 천천히 보여드릴게요.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개인적인 구원관계에 대해서, 이건 물론 제 사견이고 제 주장입니다만.

상대가 죽고 싶다고 할 때 죽여주는 것이 저는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시오엔이 죽는다 하더라도 시오엔이 원하는대로 해주는 것이 구원이고

또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이 소설을 동인지로 낼 생각이었다면 좀더 일, 이부를 명확히 나누었을텐데

너무 앞에서 복선을 많이 보여드려서 죄송스럽습니다.

컨트롤 부족입니다.

조금 더 능력을 갈고 닦도록 하겠습니다.

시오엔 버전의 에필로그에서 뵙겠습니다.

Epilogue

사내가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그 뒤에서 사내의 직속 부대원들을 무표정한 얼굴을 하

고 있었지만 속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들은 죽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저주받을지도 모른다. 신과 드

래곤들이 그들을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들고, 영원의 시간동안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그들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눈앞의 사내였다. 눈앞의 사내는 고문과 협박의 대가였으므로. 현생의 안전과 후생의 행

운. 택하라면 당연히 현생쪽이었다.

「일주일 안에 우리는 입궁한다.」

그 말에 부대원들은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속으로만 욕을 하고 있었다. 이 곳은 신의 길. 절벽을 내려

가는데만 이틀은 걸릴 것이고, 신의 길에서 수도까지는 말로 꼬박 달려도 일주일이었다. 말이 일주일이

지, 그 일주일도 최고 기록이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사내의 눈이 거의 뒤집혔었고, 사내의 눈을 뒤집은

상대가 하늘에서 떨어진 이였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조차 없었다.

사내는 무서운 주군이었지만, 합리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불가능한걸 가능하게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불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요구하는 주군이었고, 실제로 그 자신이 선봉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의

부대원들은 자긍심이 하늘 높이 서 있었지만, 가끔 이럴 때 자신이 왜 이 부대로 자원했었는지 스스로

의 손목을 분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폐하…… 재는 어떻게 할까요?」

사람을 산채로 태운 적도 있다. 시체를 태운 기억을 셀 수도 없다. 시체가 타는 냄새가 역겹다고 조차

생각하지 않는 부대원들이었다. 인간이 아닌 것들도 많이 태웠다. 수많은 건물들. 셀 수 없는 나무들.

그러나 드래곤을 태운 적은 없었다.

정상적인 수르트가 눈치를 보며 사내에게 묻자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수르트는 그 하얀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애첩에게 잘 보이겠답시고 매일같이 우유로 씻고 팩을 하고 마사지를 받는 손이었다. 원래


도 고운 손이었는데 사내가 온 극성을 떨어서인지 옛날보다 열배는 고와보인다. 역시 겉모습만 보고는

모를 일이다. 저 손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드래곤의 육체를 찾아내어 불을 붙일 줄이야.

수르트는 잠자코 그 손에 재가 든 항아리를 올려주었다.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재를 절벽에 쏟아버렸다. 드래곤의 둥지에서 순식간에 재가 아름답게 흩어져

내렸다. 그것은 눈이 내리는 것 같기도 했고, 깃털이 흩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재가 드래곤

의 육체를 태워 나온 재라는 점에서, 사내를 제외한 남자들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사내의 검술선생이자, 사내의 총애를 받는 수르트 장군이 나직하게 물었다. 그것은 사내가 괜찮냐는 의

미가 아니고 ‘우리가 이런 짓을 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가까웠다. 사내는 멍하

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소년이 생각났다. 사내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수하고 총명하고 정

의롭고 상냥한 사람. 그리고 그의 눈이 생각났다. 검은 색이라고 생각했는데 짙은 갈색이었다. 어둠속

에서는 어둠을 담아 검고, 낮에는 짙은 갈색으로 순결한 마음을 숨기고, 빛을 받으면 밝은 갈색이 되는

그 아름다운 눈에는 사내의 것이 아닌 다른 자의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안 괜찮아.」

사내는 수르트가 어떤 의미로 물었는지 알면서도 그렇게 대답했다. 그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인간으로

골드 드래곤의 육체를 태워 그 재를 절벽에 뿌리고도 그는 타오르는 복수심 때문에 이가 갈릴 지경이었

다. 이것으로는 전혀 충분치 않다. 마음 같아서는 드래곤 전체와 전쟁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자멸로만 이어진 길이었다.

이걸로 끝났다고는, 꿈도 꾸지 마라.

지옥을 맛보게 해줄테니까.

사내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특별히 소심해서가 아니라, 들을 상대가 없는데 지껄이는 취미는 없기 때

문이었다. 사내의 등 뒤에서 고고하게 타오르는 사내의 분노를 온 세포로 느끼며 수르트 이하 군인들은

무표정하게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제가 정확히 일주일만에 환궁했을 때, 황제의 부대원들은 탈진했고,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황제

를 맞이하던 하렘의 여성들과 가신들 그리고 시종들은 모두 속으로만 ‘괴물’이라고 중얼거렸다. 덜덜

떨고 있었지만 눈앞에서는 절대 내색해서는 안되었다. 내색하는 날이, 관 짜는 날이었으므로.

황비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황비는 탑에 갇혔고, 황제는 황비일로 열 받아 있었

다. 황비의 눈동자에 각인을 새겼기로서니 반성중이라 육체와 혼이 분리되어 있었던 골드 드래곤의 육체

를 찾아 불태운 인간이다. 거의, 인간의 수준이 아니었다.

‘황비가 황제를 좋아하지 않는 건 당연해.’

황비가 황제를 거절하다 안되니까 도망치고, 잡혀와서도 거절해서 탑에 갇혔다-라고 믿고 있는 신하들이


암암리에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지 마누라를 겁탈한 것도 아니요, 문신을 새긴 것도 아니요, 눈동자

속에 각인을 집어넣은 것에 육체를 찾아내서 죽이다니- 황제는 사랑의 파티때부터 골드 드래곤을 의심하

고 있었다. 의심만 하는 줄 알았지, 그 때부터 골드 드래곤의 육체를 찾아 헤메었을줄이야. 찾아낸 황

제 직속 부대놈들도 독하고, 그 놈들과 똑같이 잠 못자고 제대로 못 먹으며 일주일을 달리고도 혼자 멀

쩡한 황제는 정말 괴물이다. 그리고 그 괴물이 다시 전쟁광으로 변할까봐 전전긍긍하는 국무대신 이하

모든 인원은 황제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만 조아린채 황제의 말 혹은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는 자신의 궁으로 가려다 말고 문득 탑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는 부드러운 감정이 깔려 있어서,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슬쩍 황제를 지켜보던 레니 데이비드 비서관의 죄책감을 동하게 했다. 이런 사내라

는 걸 황비에게 알려줬어야 했을까! 그래야 하지 않았을까!

답은 바로 레니의 마음속에서 나왔다. 답은 아니었다. 남보다도 자신의 목숨이 소중한 법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레니 데이비드.」

사내의 입에서 지명된 데이비드가 「하명하십이오.」라고 공손히 대답했다.

「아니, 물어볼 것이 있어서. 미누는 잘 지내고 있나?」

「단식중입니다.」

「단식? 누가 말이냐?」

사내가 차갑게 되물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확인일 뿐이었다.

「황비가 단식중입니다.」

「이유는?」

그렇게 묻고, 데이비드가 대답하기도 전에 황제가 초조히 질문을 추가했다.

「건강은?」

「건강에 아직은 이상이 없사옵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틀 더 단식을 하시면 좋지 않다는 궁의의 판단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대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내는 미간을 좁힌 채 탑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단식은 얼마나 되었지?」

「사흘이옵니다.」

사흘이나 먹지 않았다고? 가뜩이나 마른 몸이었다. 황궁에서 도망칠 때 먹지도 못했는지 영 부실한 몸

이 안스러웠는데 가면갈수록 마르고만 있었다. 그런데 사흘이나 음식을 입에 대지 않다니. 사내는 혀를

차며 자신의 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긴 꼬리가 붙었다. 나프라 시녀장, 국무대신, 비서관, 수르트

장군, 근위대, 황제의 시종들등등 수많은 인원이 황제의 앞뒤로 따라 붙어 걸었다.

그냥 방에 둘 것을 그랬나?

사내는 그로서는 드물게 후회했다. 하지만 정치범들을 가두는 저 탑은, 골드 드래곤의 마법을 소진하는

효과가 있었다. 옛 선조가 골드 드래곤을 가두려다가 실패한 탑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저 곳
에 넣어둔 것이었다. 자신 없는 동안 혹시라도 소년이 골드 드래곤과 만난다면-그게 꿈이든 현실이든-,

이라는 가정만으로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런 자신의 독점욕을 들키는 날에는 소년의 사랑

도 엷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사내는 현재 소년에게 왜 소년이 탑에 감금되었는지도 설명하지 않고 있었

다.

설명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일주일내내 씻지도 않고 밤을 새서 달려왔다. 덕분에 꼴은 엉망이었다. 오랜만에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

며 느긋하게 목욕을 하는 사내의 옆에서 시녀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사지부터 손톱손질, 머리카락에

서 속눈썹을 지나 풋케어까지 완벽한 귀부인 치장의 전초전이었다.

욕실까지 쫓아와 보고를 하는 비서관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데이비드, 그래서?」

눈을 감은 채 보고를 듣던 사내가 그녀를 재촉했다. 데이비드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계속 보고를 이었

다. 보고를 들으며 모든 치장을 끝낸 사내가 당연한 듯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사내를 보필하는 자들

도 당연한 걸음을 했다. 사내가 이 정도로 치장을 했다는 건 단 한 사람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가 분명

하기 때문에.

‘골드 드래곤을……’

여자의 목소리였다.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사내는 여자의 베일 쓴 뒷모습을 노려보뎌 한 발자

국씩 내딛다가 자신을 발견한 소년과 시선을 교환했다. 소년은 사내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채 그저

그를 바라만 보았다. 겨우 이주일 남짓 보지 않았을 뿐인데 소년은 말라 있었다. 겨우 사흘 안먹었다는

데도 소년은 당장이라도 휘청일 것 같았다.

사내가 없었기 때문에?

소년의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는 소년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사내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일

부러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조금씩 가까워질때마다 소년의 얼굴은 더욱 창백

해졌다. 사내에 대해서 누군가 말해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간이 큰 자가 이 황궁내에 있을 거라

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소년은 사내를 보고 놀란 것이다. 조금 반가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내는 웃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소년과 사내의 중간에 있는 여자가 걸렸다. 어렴풋이 생각날 것

같기도 한 얼굴이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보초.’

사내의 목소리에 보초가 흠칫 했다. 일단 황비에게 접근 금지령이 내려지지 않았었지만, 자기 애인이

다른 여자와 히히덕대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길 황제는 아니라는 것을 보초는 잘 알고 있었다. 보석에 눈

이 어두워 이 자리를 묵인한 자신의 선택을 저주하며 보초는 마른 침을 삼켰다.

‘데려가라.’
베일을 쓴 공녀가 흘끗 소년을 보고 움직였다. 사내가 없어졌던 사이 황궁 내 질서가 개판이었다. 피바

람을 일으킬 작정을 하면서 사내는 감옥 안으로 발을 옮겼다. 사내의 움직임 하나 하나를 소년이 뚫어

지게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섞인 염려와 슬픔과 애정을 느끼면서 사내는 속으로 웃었다. 이렇게 길들

이는 것이다. 이렇게 길들여가면, 소년은 사내의 것이 될 것이다.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눈물일 뿐인 그 한방울의 액체가, 사내의 눈에

는 보석보다 예뻤다. 소년은 울고 있었다. 저렇게 외로운 얼굴로, 사내앞에서. 사내는 소년을 잘 알았

다. 자존심 강하고, 울지도 않고, 지독할 정도로 ‘남자다운’ 소년이 우는 것은 사내 앞에서 뿐일 것이

다. 그는 그래서 그 눈물이 마음에 들었다. 더 울리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만큼 안타까워서 사내는 소년을 바로 품에 넣었다.

「울지 말아.」

사내는 가능한 다정하고, 가능한 부드럽게 속삭였다. 소년이 울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무는 것을 보면서

사내는 다시 한번 이 여린 소년의 머리카락에 뺨을 비볐다. 이토록 아름답고 순결하다니. 사내는 웃음

이 나올 것 같았다. 소년의 사랑이 기뻐서 지금이라도 소년을 눕히고, 탐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사내는

그저 소년을 끌어안고만 있었다. 한참 후에, 소년이 어깨를 떨면서 사내에게 물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여기에 있는 건가요?」

특별히 소년에게 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내는 소년의 결백을 믿었다. 쉬 마음을 주지 않아서, 사

내도 소년을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왔던가. 소년은 선택당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선

택을 하는 사람이었다.

소년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러나 사내는 소년이 자유롭게, 그가 조절할 수 없는 영역에서 다른 이와 접

촉했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것이 온 몸을 불태우는 질투를 낳았다. 그 질투 때문에 불사의 존재이자 자

신의 생명을 손안에 쥔 - 신과도 같은 자와 반목할 정도로.

사내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결국 사내는 소년에게 아무 대답도 주지 못한다.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도, 소년에게 진심으로 부딪칠 수도 없다. 세상은 대가가 따르는 법. 소년을

이토록 농락한 대가는 분명 크게 다가올 텐데, 사내에게는 다른 길이 준비되지 않았다.

소년은 분명, 자신을 떠날 것이다.

그 족쇄를 이중 삼중으로 만들어도, 신은 사내가 아닌 소년의 편. 소년이 진심으로 결별을 원한다면,

사내는 소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내는 소년을 속일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나를 지킬 수 없어.

분명 너의 적은 나일테니까.

네가 지켜야 하는 것은 너 자신이야.

사내는 소년을 안은 채 눈을 감았다. 하지만 외곬수인 소년은 사내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목

을 물어뜯겨 절명해가는 가운데에서 소년은 웃으며 ‘지켜줄게요’라고 말할 것이다.


사내는 기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소년을 안고, 소년이 볼 수 없는 틈을 타서 잔인한 미소를 마음껏 지

었다. 그는 정말로 행복했다. 거짓이든 속임수든 그 자신이 행복감을 느낄 수만 있다면 그에게는 상관

없었다.

소년을 조금씩 더 몰아넣어서, 완전히 저 마음과 몸을 갈취해야겠다고 사내는 이를 드러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한 채 부둥켜 안고 있는 연인들의 감옥 밖에서는 비서관이 시녀장을 보며 한숨을 쉬

고 있었다.

「사람들은 월인이 황후가 된다고 좋아하고, 폐하도 좋아하시니 다 좋은 일이겠죠.」

당사자인 한명을 빼놓고 비서관이 음울하게 속삭였다.

「뭐, 아마도. ……언제까지 가둬두실 생각이신거지?」

「골드 드래곤하고 뭔가 결판내시기 전까지는 계속 저 상태일거라고 하시던데요.」

「아아, 가여운 비 마마.」

「어쩔 수 없죠, 뭐.」

「그렇지, 뭐- 어쩔 수 없지.」

어두운 밤, 사내는 갑자기 눈을 떴다. 자신의 옆에는 소년이 잠들어 있었다.

-도대체, 넌 뭘 바라는 거야?-

소년의 목소리가 생각나서 사내는 피식 웃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자신에게 애절하게 매달리는 소년

을 보자니, 심장이 뻐근해졌다. 뭘 바라고 있느냐고?

-미안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 그렇게 속삭였다. 정직한 눈물을 감추지도 않은 채, 사내의 품에서 떨고 있었

다.

-불안하게 해서……-

사내는 웃었다. 소년이 정신을 잃는 것을 보면서 사내는 그저 웃었다. 소년의 사랑은 아름다웠다. 사내

가 본 적이 없는 색채로 빛나고 있었다. 사내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더 욕심이 커져간다. 소년이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알아주길 바란다. 소년이 자신을 지켜주길 바란다. 소년이 자신을 믿어주길 바라고,

소년이 이대로 사내의 품안에 영원히 머물기를 바란다.

소년은 정말로 사내를 지킬 생각이다. 그리고 사내는 지켜지는 척 할 예정이었다.

사내가 소년의 뒤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소년은, 사내의 앞에서 그 깨끗한 목을 드러내고
있다.

창백한 달빛에 의지해서 사내는 소년의 입술을 만졌다.

나는 전혀 미안하지 않아.

좀 더 몸부림쳐줘. 좀 더 나를 사랑해봐.

하니안의 향이 방 안 가득히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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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추가합니다!

골드 드래곤은 안 죽었습니다아아아-

.......T^T 시오엔이 찾아낸건, 골드 드래곤의 잠자고 있던 육체쪽입니다; 그는 안 죽었어요. 말짱하

진 않겠지만 죽은 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능력이 딸리는가 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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