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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화. 엄마 맞아. 우리 엄마잖아
때때로 꾸는 꿈이 있다.
‘정말 괜찮겠어?’
‘…….’
그 꿈은 그게 끝이었다.
* * *
발걸음이 무겁다. 다리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힘겹게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배
속에선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한 발자국 옮기면 꼬르륵. 두 발자국 옮기면 꼬르륵.
그 순간이었다.
먹을…… 건가?
“…….”
“얘야.”
“우웅.”
“엄마!”
그러다 오로지 아이만을 바라보던 남자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불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그를 진즉부터 바라보고 있었기에 우리의 눈은 단번에 마주쳤다.
남자는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눈동자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픈 빛이
내비치는 눈동자였다. 남자의 우울한 눈동자를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나 또한 갑자기 슬퍼졌다.
이전에도 남자의 눈동자를 올곧게 마주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 이상한 생각마저도 든다.
“……세나?”
‘세나.’
“하.”
남자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신형을 낮추었다. 이내 허공에 뻗어진
남자의 손이 아이에게 향했다. 저가 직접 내게서 아이를 떼어 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엄마, 배고파?”
“엄마! 엄마!”
라고 울부짖었다.
아,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지. 마음은 아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아빠에게 끌려가는
아이를 다시 끌고 올 수는 없었다.
갑작스럽고 황당했던 상황이 이렇게 종료되는 건가, 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아이가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고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곤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서럽게 울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넌 도대체가! 네 엄마는…….”
남자는 소리쳤다.
“네 엄마는 여기 없어!”
“저기 있잖아!”
“조쉬……. 하.”
“이봐, 거지.”
“아니요. 얼마 전에 잘렸어요.”
“뭐라고요?”
“무슨 일이요?”
그사이에도 아이의 대성통곡은 이어지고 있었다. ‘아빠가 엄마를 버렸어.’ ……라는 소리와
함께.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는 점점 파렴치한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선뜻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초조한 얼굴빛을 띠었다.
“나는……. 요한 랭카스터야.”
“네?”
“……요한 랭카스터라니까?”
“흠, 좋은 이름이네요.”
“컥!”
“좋아요, 갑시다.”
“어딜?”
“당신을 따라 밥을 먹으러.”
“나 원.”
“아!”
‘정말 괜찮겠어?’
제 2 화. 정말 많이 닮으셨어요
두서없는 내 물음에 요한은 표정을 굳혔다. 그는 잠깐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는 낯빛을 띠더니
이내 대답했다.
“……하, 기가 막히는군.”
“뭐가요?”
그는 정말로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 순간 나는, 억지로 인연을 만들어서 요한에게 작업을
거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저 밥맛.”
“알겠어요, 오구오구.”
내 밥줄 예쁜이. 오구오구.
* * *
“턱이 빠지겠군.”
“엄마. 뭐 해? 얼른 가자.”
“……저기.”
“저를 따라오시겠어요?”
사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정말 많이 닮으셨어요.”
“네?”
닮았다, 라.
“저기요?”
슬쩍 요한의 얼굴을 보자, 그는 내 대답이 고까웠던 것인지 미간을 고약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요한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무슨 생각이요?”
“네.”
“네, 네.”
“흐음, 그렇군요.”
마음은 이미 유모로 일해야지! 라고 결심했으면서도, 나는 일부러 고민하는 척을 했다.
선택권은 나에게 있었고, 나는 이 일을 조금 더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넉넉히가 어느 정도인데요?”
“몇 년은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는 정도로.”
“그럼 야근 수당은요?”
“…….”
“그리고…….”
“잠깐, 또 뭐가 더 남았나?”
나는 히죽 웃으며 물었다.
“연차는……!”
“…….”
“하하. 안 되면 어쩔 수 없죠.”
“그건 봐서.”
“알겠어요. 저기 그런데…….”
“또 뭐가 남았나?”
나는 배를 움켜잡으며 대답한다.
“밥은…….”
응, 그래서 내 밥은?
“…….”
“……거지.”
아주 행복해 보였다.
“……입에 잘 붙지 않는 이름이군.”
“…….”
우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 * *
깜빡 잠이 들었던가.
“조슈아?”
“이 밤에 네가 웬일이야?”
“……지금?”
“인사 잘~한다.”
“으, 술 냄새.”
“조쉬, 네 엄마는…….”
“……!”
“……세나.”
세나.
“…….”
“뭐, 뭐 하는 짓이에요.”
그 목소리는 잔잔하게 떨렸다. 나는 어찌하지 못한 채로 요한에게 한동안 가만히 안겨 있었다.
귓가엔 ‘세나’라고 애절하게 말하던 요한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왠지 모르게 마음
어귀가 시큰거리는 기분이었다.
“…….”
“요한…….”
“네?”
“요……, 요한.”
“…….”
“저기요, 밥맛 씨? 요한?”
“설마 잠들었어요?”
“어, 엇!”
“엄마! 괜찮아?”
“뭐?”
“조슈아, 난…….”
“…….”
오늘의 일은 하룻밤의 꿈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이 저택을 나가게 된다면, 조슈아만은
약간 그리워질 것도 같았다.
* * *
“세나?”
눈을 감은 채로 곤히 잠든 세나의 얼굴이었다.
꿈이 아닌 걸까.
잠이 든 세나의 옆에는 조슈아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꼭 껴안은 채였다. 요한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두 사람. 이렇게 꼭 껴안고 자고 있는
거, 엄청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의 앞에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이가 세나가 아님을 곧 깨닫는다.
“……배고파. 흠냐.”
“……거지?”
“휴.”
솔직히 처음엔 세나가 살아서 돌아온 줄 알았던 요한이었다. 그녀와 세나는 그 정도로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살아서 돌아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운 것임을 요한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는 없는 법이다.
세나는 분명 죽었다.
요한은 세나의 장례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끔찍한 기억을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단 말이다. 비가 하염없이 오던 날, 갈색빛의 관에 누인 세나의 모습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
거지의 얼굴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이 이상해졌다. 요한은 침대에서
완전히 벗어나 방을 나섰다. 거지에게 일순 마음이 동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 * *
나는 늘 꾸던 꿈과는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세나.’
“……!”
“조슈아.”
“언제 들어왔어요?”
“방금.”
“그럼 안 돼요?”
“……뭐?”
“거지!”
“…….”
제 5 화. 밥맛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야?
나는 괜히 요한에게 틱틱거렸다.
볼살이 싱그러운 꼬맹이 주제에 도끼눈을 뜬 채로 노려보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 아이는
조막만 한 제 허리에 손을 올려 어느 기숙제의 사관 같은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아주 엄한
목소리는 덤이었다.
“부부 싸움은 그만하라고 했찌!”
여기서 앞의 상황을 조금 설명해 보자면, 요한의 방에서 나온 우리는 지금 복도를 걷던
중이었다. 발걸음의 목적지는 아침 식사를 할 식당이었다. 마침 배가 고팠는데 잘된 참이다.
“실수라. 엄청 했죠.”
“……!”
“막 욕하고.”
“아무렴요.”
“거짓말.”
“뭐?”
“그리고 키…….”
그리고 키스까지 하려고 했다니까요,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괜스레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를 느끼며 말을 돌렸다.
“…….”
나는 요한에게 잡혔던 손목을 빼내며 잰걸음으로 아이에게 다가갔다. 맛있는 냄새가 맡아지는
게, 식당이 코앞임이 분명했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요한은 여전히 복도에 우두커니 선 채였다.
“뭐 해요? 안 따라오고.”
“이봐, 잠깐만.”
“왜요?”
“네.”
“……미ㅇ…….”
미? 설마 미안해는 아니겠지.
“뭐라고요?”
“미……, 미…….”
미?
“미트볼이 오늘 주메뉴예요?”
“당신.”
문제가 있었던가?
* * *
“먹지.”
“아직은 안 돼.”
“뭐, 그렇네요.”
“맙소사!”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 * *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선 서로를 지그시 응시하는 우리 사이엔 기묘한 긴장이 흘렀다.
꿀꺽, 침을 넘기는 소리마저도 큰 소리가 되어 울렸다.
“조슈아는 어쩜 이리 귀여울까.”
“큭큭.”
“다섯 살!”
“좋아하는 건 어찌 되는고?”
조슈아는 기가 조금 죽은 채로 대답했다.
“정말?”
“응!”
“그게 뭐려나.”
“…….”
나는 할 말을 잃고 만다. 미소만을 짓던 내 얼굴이 약간은 곤란한 빛을 띠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마가 후덥지근한 것이 조만간 식은땀이라도 흐를 기세였다.
그래서,
* * *
* * *
“세나.”
“정신 좀 차려 봐요.”
“…….”
어제도 술에 잔뜩 취해 나를 껴안더니.
나는 언성을 높여 그를 불렀다.
“기괴하구나. 기괴해.”
나는 혀를 끌끌 찼다.
“…….”
그의 말은 내 귀에 그렇게 들렸다.
솔직히 좀 의외였다. 요한은 까칠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쩌면 다정한 사람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넌!”
그리고 세 번째, 내 얼굴은 세나라는 여자와 미칠 정도로 닮았다. 조슈아의 착각, 요한의
동요, 이름 모를 시녀의 ‘닮았네요.’라는 말. 그것들이 가리키는 답은 그러했다.
“뭘 바라고 있는 거야.”
* * *
“으으……. 무거워!”
“…….”
“밥맛…….”
뭘까. 어젯밤에 분명 침대 밑에서 재웠는데, 이 인간이 언제 침대 위로 올라온 걸까? 그것도
나를 꼭 껴안은 채로 말이다.
“……!”
“여긴 제 방인데요?”
“……!”
“귀엽네.”
* * *
놀라울 정도로 마님과 닮았던 여자. 벨라는 그 여자의 얼굴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알겠어.”
“미치겠네.”
가깝게 보았던 거지의 얼굴이 이렇게나 계속 생각이 나는 건, 역시나 그녀가 세나와 닮았기에
그런 것일까? 어쩌자고 거지의 침대 위에서 잠들었던 건지.
요한의 시선은 책상 위에 올려진 무언가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무언가의 정체는 유화로
그린 세나의 그림이 있는 작은 액자였다.
“세나.”
넌 그런 나를 어떻게 생각해?
“아빠!”
어쭙잖게 꼬마용 양복을 입은 조슈아의 멜빵바지가 너무도 귀엽다. 요한은 총명한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 아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조쉬. 일찍 준비했구나.”
요한은 자못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조슈아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동시에 마차는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제 7 화. 우리 아빤 최고의 밥맛이야!
‘미취학 아동 사교 모임.’
세나가 없더라도 누구보다도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었다. 그것이 요한의 진심이었다.
“조쉬! 잘 지냈니?”
아이들의 귀여운 인사에 요한은 그제야 거지를 잊어내고선,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간다.
“뭔데?”
“우리 아빠가 이번에 한 단계 진급하셨대. 좋겠지?”
“……으응. 멋있다.”
“……아, 맞아!”
그러다 조슈아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이 다시금 밝아진 얼굴을 했다. 그러곤 어제 엄마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뭔데?”
“……컥!”
요한이 당황하는 사이에도 두 아이들의 대화는 빠르게 이어졌다.
환장할 상황이었다.
“……조, 조쉬.”
“웅?”
“…….”
요한은 다시금 거지를 떠올렸다. 세나와 똑같은 금발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던
그녀를.
역시는 역시다.
“……거지.”
“맙소사.”
* * *
미취학 아동 모임이 끝나자마자 요한은 한 손으로 조슈아를 거뜬히 들고선 얼른 마차에
올라탔다. 조슈아가 ‘아빠는 밥맛!’ 타령을 더 하기 전에 공작저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
“…….”
“……컥.”
요한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벨라에게 조슈아를 맡기고선, 거지의 방으로 부리나케 찾아갔다.
긴 다리로 휘적거리며 걸은 탓에 그는 금세 거지의 방에 도착했다.
똑똑.
“나는 할 만큼 했어.”
요한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는 매섭게 으르렁거렸다가 괜스레 멋쩍은 감정이 들었다.
절대로 거지의 눈치를 본 건 아니다. 절대로 거지에게 심어질 제 이미지를 염려한 건 아니다.
요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허허.”
“마음에 들지 않는군.”
“……밥맛, 쿨쿨.”
“무슨 꿈을 꾸는 거야.”
“……음흉하기도 해라.”
“……!”
“거지 너, 다시 눈 감아.”
“……!”
“그래요?”
“조슈아!”
“맙, 맙소사.”
* * *
“약았어.”
요한은 거지의 방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거지는 조슈아를 인질로 잡고선 요한이 다그치려는
것을 한사코 막았다. 결국 백기를 든 쪽은 요한이었다.
똑똑.
“누구야?”
“벨라예요!”
“들어와.”
“……네? 밥, 밥맛이라뇨?”
“네.”
“어, 맞아.”
“알겠어. 이만 나가 봐도 좋아.”
“네.”
“밥맛. 밥맛이라.”
“아.”
밥맛.
어떻게 그 기억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걸까. 아무리 오래된 기억이라 할지라도 세나와 관련된
기억인데.
* * *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제대로 된 통성명도 못 했네요.”
“하지만…….”
내게 한동안 볼따구니를 공격당한 조슈아는 내가 놓아주기가 무섭게 테이블 근처로 쪼르륵
뛰어갔다. 녀석은 벨라가 가져다준 과자를 입에 넣고선 우물우물했다. 볼이 빵빵한 게, 한
번만 깨물어 보면 소원이 없겠다.
“안타까워라.”
나는 괜찮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에 그다지 동정받고 싶지는 않았다.
“…….”
“네?”
“그럼요.”
* * *
요한의 공작저로 온 지도 일주일이 흘렀다. 일주일 사이에 딱히 큰일은 없었다.
‘……!’
“엄마!”
“조슈아, 잘 잤어?”
“흠흠.”
요한이었다.
“……내가?”
“웅!”
“웅웅! 그랬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요한이 거짓말을 했다는 게 나의 결론. 두뇌로 치열하게 분석한 결과였다.
“그러세요, 오구오구.”
요한은 이를 뿌드득 갈며 천천히 걸어와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는 기다란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선 나를 삐딱하게 바라봤다. 단언컨대 그는 지금 불만이 가득한 게 틀림없었다.
“이봐, 거지.”
나는 버릇처럼 대답했다.
“……!”
“앉아.”
“넵.”
망했다.
* * *
조슈아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 것인지, 보는 이마저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벨라는 그런 조슈아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조슈아 님, 즐거우세요?”
“응, 나 엄청 행복해!”
“…….”
“…….”
“응응.”
조슈아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러어엄.”
하긴. 조슈아는 지난 4 년 동안 자신의 엄마를 보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액자 속
그림으로는 자주 보았으나, 살아 있는 엄마를 보지 못했다는 소리다.
“……앗, 네!”
“밥맛이라.”
……나, 너무 솔직했나?
“뭐라고?”
“…….”
“…….”
“주의라.”
어렸을 때라.
“알아.”
뭐! 정말로 알고 있었어?
진실을 토로한 사람은 나인데, 되레 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고 계셨다고요?”
“내가?”
“그럼 누가요?”
요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언가를 포기한 기색이 완연한 고갯짓이었다. 그러다 그는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불시에 작게 읊조렸다.
“……없다고 생각했어.”
“행복해 보였으니까.”
“엄마! 내가 많이 늦었지?”
“그래, 엄청 늦었네.”
“나 기다렸어?”
“그럼. 기다렸고말고.”
“미안해, 엄마. 얼른 올걸. 대신에 내가 얼마나 맛있는 거 가져왔는지 한번 볼래?”
“아빤.”
“응.”
“아직도 안 갔어?”
“……!”
“주인님. 괜찮으세요?”
벨라는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물었다.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아빠, 잘 가!”
“큭큭.”
* * *
낮 동안에 한차례의 소동이 지나간 후, 나는 적적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저택의 현관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머리칼이 석양빛에 반짝거렸다. 석양빛과 대조되는 푸르고도
오묘한 푸른빛의 머리칼이었다.
“엄마!”
귓가에 파고든 엄마라는 소리가 낯설지 않다. 아니, 되레 익숙하기만 하다.
“욘두?”
“오늘은 뭘 배웠어?”
“어떻게?”
“내가 엄마의 냄새를 영원히 기억하는 거야. 그럼 나는 언제고 엄마를 기억할 수 있어. 잊지
않을 수 있대. 냄새뿐만이 아니라, 엄마의 드레스나 엄마의 구두를 기억해도 돼. 그런 것들을
수단이라고 한대.”
“응.”
“엄마? 무슨 생각해?”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하지.”
우리는 죽이 척척 잘 맞는 콤비처럼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얼굴을 보고선 킥킥거렸다. 이럴
때 보면 정말 내 아들 같기도 하다.
“웅. 아빠 동생!”
조슈아는 눈치가 빠른 영민한 아이였다. 아이는 내게서 고민하는 기색을 재빠르게 인식하며,
내 손을 더욱 꽉 부여잡았다. 애처로운 눈빛은 덤이었다. 조금 전까지 생글생글 웃었던 주제에
표정을 어찌 이리 잘 바꿀꼬.
나는 결국엔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암묵적인
내 동의에 조슈아는 별안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방 밖으로 이끌었다.
그는 내가 아는 남자였다.
“너……. 바비?”
이윽고 남자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까지 다가와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의 얼굴의 그림자가
내게로 기운 것은 그때였다.
“리나, 한참 찾았잖아.”
진짜로 바비다.
“밥맛.”
“두 사람……, 아는 사이?”
제 11 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그녀
“…….”
“바비…….”
내가 바비를 처음 만난 건 작년 여름, 아주 무더웠던 날이었다.
‘열사병?’
그 누군가가 바비였다.
‘감사합니다.’
‘음료, 시원했지?’
‘네?’
‘첫눈에 반했어.’
‘……네?’
‘…….’
‘……리나.’
“저기, 요한 씨.”
“아무 말도 하지 마.”
“…….”
“……리나.”
“……!”
리나. 리나. 리나.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내 귓가에 끊임없이 울렸다. 입안이 괜스레
말라 갔다.
바비의 말에 요한은 매섭게 대꾸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나를 두고선 몇 차례의 험악한 대화를
더 나누었다.
“조슈아! 두 사람 좀 말려 봐.”
“헤헤.”
조슈아는 방긋방긋 웃었다. 박애주의자 조슈아 꼬맹이가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얜, 악마가
다가와도 그게 악마인 줄 모르고 좋아할지도 몰라. 그럼 안 되는데.
“……어?”
“맙소사.”
나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액자 속에 존재하는 세나를 조금 더 자세히 관찰했다.
익숙함이라.
“세나…….”
“웅! 맞아!”
탁.
“밥맛.”
“보지 마.”
“리나, 나는…….”
“응응!”
“…….”
제 12 화. 더는…… 못 기다리겠어
“그래. 알고 있었어.”
영문 없이 입 안이 썼다. 제길.
“그런데 그게 중요해?”
“뭐?”
“너를 이제 믿지 못하겠어.”
“알아.”
“쉽게 온 거 아니야.”
“응.”
“그건 무슨 말이야?”
“너는 나를 따라왔었어야 했다는 말이야.”
“넌 무슨…….”
“…….”
“더는…… 못 기다리겠어.”
“조슈아도 더는 못 기다리겠써!”
“조, 조슈아?”
아이의 얼굴은 곧 울 듯이 일그러졌다.
“돌아가지.”
“응……. 히끅.”
“알아요.”
“요한 씨.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지 마세요.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본인의 신변이 보호받길
원하거든요.”
“뭐라고요?”
상황은 역전된 듯하다. 요한은 조금 전까지 당황했던 주제에 지금은 꽤나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순순히 고백한 것을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미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약은 줄로만 알았는데 꽤 순진한 구석도 있었군. 이런 술수에 홀라당 넘어가다니 말이야.
물론 벨라를 혼내진 않아. 어차피 이곳에 머물다 보면, 벨라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었으니까.”
“내 마음이지.”
“와, 완전 밥맛이다.”
“뭐라고?”
“이크,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내가 어쭙잖게 입가를 가리자, 요한은 입가에 띠었던 오만한 미소를 지우고선 발끈했다. 그는
역시나 제 감정에 솔직한 남자였다.
“허!”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재빨리 거짓 웃음을 지으며 그런 게 아니라고 조슈아에게 변명을 했다.
“그리고 엄만!”
* * *
‘나는 오늘 엄마를 보고 싶지 않아! ……부부 싸움은 조슈아의 마음을 아프게만 해.’ 그렇게
말하는 조슈아에게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잘 가늠할 수 없었다.
“흠흠, 안에 있나?”
“흠흠, 안에 있는데요?”
제 13 화. 한 번만 안아 줄 수 있는가
“그렇군.”
“그게 그 말인 거잖아!”
“하하, 그걸 이제 아셨다니.”
“넵.”
“그럼 그만 웃지 그래?”
“세나…… 씨에 대한 거요?”
“좋아요. 알려 주세요.”
“…….”
“지금 바비 편을 드는 건가?”
“저기, 요한 씨.”
“왜?”
“그 자식과 난 이복형제야.”
“……!”
“저한테 묻고 싶은 말이 있어요?”
“아니.”
“정말?”
“…….”
“이봐, 거지.”
“맹점이요?”
“……!”
“당신의 말에 저도 동의해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뱉어진 물음을 뒤늦게 주워 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은
듯했다.
“한 번만…… 안아 줄 수 있는가.”
제 14 화. 요한의 비합리적 의심
요한은 비합리적이고 아주 소모적인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일주일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겨우겨우 의식이 돌아온 그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배고파.’
였다고.
정신을 차린 리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처음엔 심지어 자신의 이름조차도 몰랐다.
그렇기에 자신이 그 산에 왜 널브러져 있었는지는 당연히 알 리가 없었다.
일을 하는 데 재주가 아주 없다.
왜냐면 거지 리나와 세나의 버릇이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일순 요한이 흠칫할 정도로.
거지가 정말로 세나와 연관이 있다는 전제하에 계획한 일이기도 했다. 연관이 있었다면,
당연히 무언가를 떠올리겠지.
‘한 번만…… 안아 줄 수 있는가.’
그 말은 정말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일어나요.”
“날 도대체 뭐로 보고.”
“…….”
“……!”
“왠지 모를 안정감이랄까요?”
“……!”
“…….”
“가 볼게.”
“네?”
벨라는 뜬금없는 요한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불어 요즘 들어 요한이 이상한 질문을
참 많이 한다는 생각마저도 든 그녀였다.
질문이 이상하긴 했지만, 벨라는 성의껏 대답을 해 주었다. 어찌 되었건 요한은 제
주인이었으니까.
“……바보 같은 것만 자꾸 묻는군.”
요한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버릇처럼 마른세수를 하자, 홧홧했던
얼굴은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세나…….”
“맙소사.”
그는 짙은 한숨을 뱉어냈다.
제 15 화. 바비 넌, 세나 씨를 사랑했어?
‘한 번만…… 안아 줄 수 있는가.’
……신경 쓰이게.
이건 꿈인가.
정원수로 가까이 다가가자 작은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었던 게 아니었나 보다.
목소리는 성인의 것이 아니라는 듯이 앳되기만 했다.
‘요한, 바비. 그만해! 요한의 말도 맞고, 바비의 말도 맞아. 바비가 나에게 흙을 던지는 건
잘못했지만, 요한이 잔소리가 좀 심하긴 해. 큭큭.’
요한, 바비?
세나.
‘세나?’
요한, 바비, 세나. 아이들의 얼굴이 내게로 완전히 향하자 나는 확신했다. 이들은 그들의
어릴 적 모습이 틀림없다고. 성인이 된 그들의 얼굴과 너무 닮았잖아.
무슨 이런 해괴한 꿈이 다 있담.
‘무거워……. 무겁다고!’
“……으윽……. 무겁다고!”
“얼레? 조슈아야?”
“엄마! 좋은 아침이야!”
“정말? 나, 와도 돼?”
하지만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그 꿈이 정말로 그들의 과거의 한 부분일 거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이한 확신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요한은…….
* * *
조슈아는 욘두인지 요 녀석인지 모를 가정교사 녀석에게 수업을 받으러 갔고, 어젯밤 줄행랑을
쳤던 요한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내 꿈은 진짜였던 걸까.”
“엄마야!”
“팔. 다쳤어?”
“…….”
“기쁘다.”
나는 잠깐 얼빠진 얼굴로 그의 웃는 낯짝과 깁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녀석은 세나를.
“…….”
“사랑했어?”
“엄마야!”
나, 오늘 엄마를 너무 많이 찾는데.
내 외침에 남자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시선이 닿기가 무섭게 그는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발걸음이 조급해 보이기만 했다.
“……요한.”
“하하. 그러게요.”
“그러게요. 하하.”
“…….”
“연차 취소.”
아주 잔인한 말이었다.
“안 돼요!”
내가 그걸 어떻게 얻은 건데! 망할!
영문을 알 수 없는 홍조였다.
나는 순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요한.”
‘요한.’
‘요한.’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던 내 목소리가 귓가에 따갑게 맴돌았다. 동시에 수많은 물음들이 내
머릿속을 일순 지배하기 시작했다.
“……요한.”
“거지……?”
요한의 웃는 얼굴, 우는 얼굴, 심통이 난 얼굴……. 적어도 공작저에서 보름간 머물며 보았던
그의 얼굴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지켜본 듯한 그의 여러 모습들이었다.
“……요한.”
나는 손을 뻗어 그의 흰 뺨을 쓸었다.
확신에 가까운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내 머리를 관통했던 두통이 가시기 시작했다. 마치
기억해 내야 할 것을 기억해 냈기 때문에 사라진다는 듯이.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네?”
“그럼 무슨 의미인데.”
“조슈아!”
아이가 내 드레스 자락에 바짝 붙어 달랑달랑 매달리기까지의 시간은 총알과도 같았다.
조슈아는 앙증맞은 통통한 두 손으로 내 드레스를 꼭 움켜잡았다.
“미안해. 조슈아.”
하여튼 귀도 좋아요.
“나 원.”
조슈아는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요한에게 사납게 대꾸했다. 근엄한 다섯 살짜리 꼬맹이의
으름장이었다.
“약속할게. 조슈아.”
‘요한.’
* * *
요한과 바비는 세나를 좋아했다. 하지만 세나와 결혼하게 된 것은 요한이었다. 바비는 사랑의
실패자로서 그녀를 그리워하게 된다.
“1 년이 맞물린단 말이지.”
가령 병이라든지, 사고라든지…….
“큭큭.”
웃음을 지음에 부드럽게 굽어진 두 눈매, 초승달처럼 올라간 입꼬리. 요한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거 처음 봤다.
“…….”
“……어, 뭐. 그랬어.”
세 사람. 요한은 그것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린 것처럼 내게 되묻지 않았다.
“세? 세, 뭐?”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벨라였다.
“다과를 가져왔습니다.”
“벨라.”
“네?”
“네? 다과를요?”
벨라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네, 그리고요?”
“…….”
“조슈아는 지금 자는데요?”
“…….”
바보, 솔직하지 못한 것 좀 봐.
“…….”
* * *
나는 요한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거지. 찾는 게 있나?”
“아뇨.”
“……켁, 켁!”
아니나 다를까.
“……너!”
……아마도.
“네네. 큭큭.”
“킥킥.”
킥킥. 그 요망한 웃음소리는 조슈아의 것이었다. 조슈아는 우리를 보며 키득거렸다. 아이가
보기에도 우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오! 샌드위치는 두 눈이 커질 만큼 정말 맛있었다.
아이는 날아다니는 흰 나비를 쫓기도 하고, 잔디를 뜯기도 했다. 귀족가의 소중한 꼬맹이인
조슈아는 정원에 있는 모든 것을 신기해하는 듯했다.
“두 사람…….”
“거지? 내 뒤에 뭐가 있는 건가?”
안, 안 돼!
제 18 화. 세나 씨는 왜 죽었죠?
……좀 과한 방법으로.
“어?”
“저, 저만 바라보세요.”
“……어?”
“…….”
요한은 어쩐지 수줍은 얼굴을 했다. 무언가를 대단히 착각한 얼굴 같았다. 이를테면 내가 저를
좋아해서 나만 보라고 소리친 것이라 생각한……. 그런 착각이라고나 할까.
요한의 착각과 기대가 달갑지 않아야 함이 옳았다. 나는 실제로 요한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유는?”
그렇지, 저거다.
“요한 씨. 머리에!”
“……!”
“당신 머리에 풀 쪼가리가 하나가 얹어져 있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확인 차 겸사겸사 저만
쳐다보라고 한 거였죠. 하하하.”
요한은 뒤늦게 말했다.
나는 지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또 그렇군.”
“바보.”
아차, 생각 없이 말이 나갔네.
“……뭐? 바보?”
“…….”
* * *
“벨라, 시간 좀 있어요?”
벨라였다.
“리나 님. 무슨 일이 있으세요?”
“리나 님?”
딸깍.
“앉으세요.”
“곤란한…… 질문이요?”
“세나 씨는 왜 죽었죠?”
“아…….”
아무리 조용히 치러진 장례라 할지라도 그녀의 죽음이 가져온 파장은 지대할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렇기에 그녀가 왜 죽었는지에 대한 것은 다른 이에게서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팠어요.”
“세나 씨가 아팠어요?”
아팠다, 라.
“아.”
“왜요?”
“…….”
쉽게 말하면 그런 거다.
“……! 그, 그걸 어떻게…….”
“리나라는 이름이라면…….”
제 19 화. 궁금해?
“누구에게서요?”
“마님에게서요.”
“…….”
벨라의 말대로,
* * *
“엄마!”
“당연히 엄마 아들이지!”
“으음.”
아이의 눈빛은 뭐랄까. 당연한 사실을 왜 따지려 드느냐는 눈빛에 가까운 것이었다.
“거지 리나!”
“…….”
조슈아는 신이 난 듯이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엄마.”
“응!”
그건 도대체 무슨 말인 걸까?
“……아빠 생각은?”
조슈아는 아이답지 않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아쉽다.”
요한의 부재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내 자신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뭐라고 아쉬워한 거야.
이내 나는 두 눈을 완전히 감았다.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땐, 웬 낯선 방이었다.
또 꿈인가.
‘세나?’
‘세나.’
희한한 꿈이네. 그렇게 생각하는 도중에 또다시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엔.
‘……!’
내가 아닌 내가 서 있었다.
그렇게 우린 눈이 마주쳤다.
설마 내가 보이는 걸까?
‘궁금해?’
세나는 나를 보며 예쁘게 웃었다.
“……헉!”
“무슨 이런 개꿈이.”
“그 방…….”
“그곳에 지금 가 봐야겠어.”
의미 없는 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억을 잃고 거리를 방황했던 근 5 년간, 단 한 번도 꾸지 않았던 꿈이었다. 하지만 나는
요한과 조슈아를 만난 이래로 그들과 관련된 꿈을 계속해서 꾸고 있었다.
“…….”
문고리 위에 손을 올리자 손가락 사이로 금속성의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손바닥은 어느새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그 대화가 문을 여는 해법이었다.
“……요한.”
딸깍.
“……!”
제 20 화. 넌 뭔데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해
‘궁금해?’
낯선 인기척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탁.
“거지, 너…….”
* * *
‘바보.’
“…….”
“휴.”
‘거지가 대답합니다.’
그는 작은 등을 하나 챙겨 든 채로 방을 나섰다.
“…….”
이상하다고 느낀 건 그때였다.
문이 잠겨 있지 않다.
“거지, 너…….”
“…….”
이성적인 물음이 머릿속을 그득하게 채웠다. 하지만 요한은 더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죽은 세나가 제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너 뭐야.”
“…….”
“넌 뭔데 자꾸 세나인 척을 해.”
리나에게 세나인 척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실상 그녀에게서 세나의 흔적을 찾았던 건,
요한 본인이었다고.
눈물이었다.
“이봐요. 당신 지금 울어요?”
* * *
“……다 울었어요?”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
“…….”
“세나 씨.”
“미안.”
“나와.”
“뭐 해? 따라 나오지 않고.”
“……네.”
“뭐지?”
“할 말……. 할 말이 있어요.”
* * *
“…….”
“어머나.”
“세상에나.”
“우와, 대단해!”
요한은 과한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처럼 푸스스 웃었다. 정말로 진심으로 좋아서
웃는 미소였다. 그 미소가 조슈아의 미소와도 닮아 보였다. 아이 같은. 상념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평온한 미소.
아이는 조막만 한 손으로 피아노의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번갈아 쳤다. 그 손동작이 어찌나
유연하던지,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다.
‘내 연주가 어때?’
피아노와 남자아이의 모습은 연기처럼 증발해 버리며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 헛것이 아니구나.
“……요한.”
“아.”
“…….”
“……!”
“…….”
“요한 씨.”
“리나.”
“…….”
“그건 명령인가?”
“애절하게 어떻게요?”
제 22 화. 한 번만 나를 제대로 봐 주면 안 돼?
“네? 제가 물은 건 그게 아니었는데요?”
“…….”
“망할.”
“뭐라고?”
“착각이죠, 착각.”
“……네, 네.”
나는 조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녹턴.”
“…….”
내가 궁금했던 건 그거였는데.
* * *
새 나라의 어린이인 조슈아는 꼬맹이 주제에 일어나는 시간이 정확했고, 아이는 아침에
깨자마자 대개 내 방으로 왔었다.
“…….”
나는 내 뺨을 찰싹 때렸다. 정신 차려.
“안녕!”
바비는 문에 등을 기댄 채로 대답했다.
“어쩐 일이긴. 너 보러 왔지. 네가 너랑 얘기하고 싶으면 그냥 오라며. 그래서 그냥 왔어. 음,
다리를 부러뜨려서 와야 했을까?”
“내가 봤을 땐 네가 제일 위험해.”
“날 속인 너를 아직 용서한 거 아니야.”
“네, 네.”
“그럼, 그럼.”
“맙소사. 맛있어.”
“응. 나도 좋아해.”
“컥컥! 야, 넌 무슨 그런 말을…….”
나는 들고 있던 마카롱을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답했다.
“……세나와 나는 다른 사람이야.”
“…….”
어쩌면 바비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의 마음을 거절하는 데에 그것만큼 확실한 이유는
없을 테니까.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일이었어.
나는 침묵했다.
“미간에 주름 생겼다.”
“그가 하는 말을 믿지 마.”
“……바비.”
“넌 나만 믿어.”
“…….”
“확신해.”
“난…….”
그는 작은 목소리로 푸념했다.
“쉿. 없는 척하자.”
“안 돼. 조슈아가 울 거야.”
“좀 울면 안 돼?”
“…….”
“야, 너 왜 울어.”
“가지 마.”
“…….”
“부탁할게.”
눈물에 섞인 바비의 진심이 너무도 마음을 저리게 만들었다. 일 년간 고백했던 바비의 진심을
의심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나는 그의 진심을 진하게 느끼고 있었다.
“……정말?”
“……어라. 어디 갔지.”
제 23 화. 가지 마. 나랑 있어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좋은 오후!”
“조슈아. 미안해.”
바비였다.
“……!”
“우리. 비밀 얘기 중이었거든.”
“바비 삼촌…….”
그리 말하는 바비의 입가는 유연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가는 여전히 울음기가
가득했다.
“……!”
나는 벙찐 채로 아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불……! 불장난하는 거야?”
“하…….”
“불장난.”
“조슈아도 아빠 말에 동의해!”
“정말 동의해!”
맙소사.
삐뚤어진 아이처럼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조슈아가 침묵했다. 아이는 고민하는 얼굴로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엄마. 사랑해.”
아이는 내 볼에 작별을 고하는 입맞춤을 쪽 소리가 나게 하고선 자신의 방까지 도도도 걸어갔다.
물론 나와 불장난을 한 바비를 도끼눈으로 재차 째려보는 일도 잊지 않았다.
불장난 따위는 끔찍하다고 말하려던 차였다. 머리통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말하던 것을 멈추며 이마를 짚었다.
‘내 딸.’
‘싸우면 안 된단다.’
엄마……인 걸까?
여자의 목소리를 떠올리기가 무섭게 머리통을 무겁게 짓누르던 고통도 사그라졌다.
“하.”
“괜찮아?”
“…….”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우린…….”
바비에게 닿았단 요한의 시선이 다시금 내게 닿았다. 그는 입술을 뭉그러뜨리며 우리의 관계를
털어놓길 꺼려하고 있었다. 당신, 도대체 뭘 고민하는 거야.
“…….”
요한은 침묵했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바비의 푸른 눈동자가 그제야 요한에게 향했다. 바비는 굳게 닫고만 있었던
입술을 벌렸다. 그는 제 눈빛보다도 차가운 목소리로 요한에게 한마디를 건네었다.
“…….”
“가자, 리나.”
“요한 씨.”
“가지 마.”
작은 소리로 내뱉은 그의 말이 언뜻 진심처럼 들렸다.
내가 물었던 거라면…….
“바비와 함께 있지 마.”
“나랑 있어.”
제 24 화. 세나의 관
세나의 꿈을 꾸고, 세나의 방에서 리나와 만나고, 리나에게 이상한 물음을 듣고……. 그
일들은 꿈보다도 더 꿈같은 일들이었다.
녹턴은 음악이라곤 그다지 즐기지 않았던 세나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곡이었고, 요한은 그런
세나를 위해 항상 녹턴을 연주했었다. 어떻게 얼마나 더 잘 치면 그녀를 기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고민을 했었다.
요한은 드레스 사이로 발을 가볍게 내딛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것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세나는 분명 죽었다.
* * *
“…….”
복도에서 마주한 리나는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그래, 그녀가 사라질 리가 없잖아.
요한은 저도 모르게 리나에게 까칠한 언사를 내뱉었다. 결코 그녀를 나쁘게 대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바비와 함께 있는 그녀를 보자니 말이 좋게 나오지 않더라.
“가지 마.”
“…….”
“바비와 함께 있지 마. 나랑 있어.”
요한은 그녀를 한 번 더 붙잡을 수 없었다. ‘계약 관계로 이어진 물주와 거지.’ 리나가 말한
대로 우리의 관계는 그 정도일 뿐이니까. 그녀를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 * *
모두가 밤의 부드러움에 안긴 새벽. 요한은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빗줄기 사이를 소리
없이 가로질렀다. 색이 어두운 우비를 깊게 눌러쓰고선, 한 손엔 삽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이
비장하기만 했다.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의 임종을 지켜봤던 요한이나 더불어 조슈아까지도 그녀에겐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것일까?
“……없어.”
관 안에 자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안에 잠들어 있어야 할 세나의 시신이 없다. 따뜻한
육신을 잃은 그녀의 뼛조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제 25 화. 네가 죽는 순간까지도 알고 싶어
“뭐가?”
“신경 쓰여?”
“요한이 다시 보고 싶어?”
바비는 일전에 정원수 뒤에 숨어서 우리를 지켜봤던 일을 토로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홀연히 사라졌던 그였는데.
“…….”
“그래, 솔직하게 얘기할게. 요한에게 설레서 그런 건지는 확언할 수 없어. 하지만 바비, 나는
요한을 두고 온 게 신경 쓰여.”
“그를 좋아해?”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어.”
“그거 농담이지?”
“농담 반 진담 반.”
“너 진짜 미쳤어?”
바비는 지지 않고 대답했다.
“어. 나 미쳤어.”
“…….”
“…….”
“…….”
“네가 죽는 순간까지도.”
바비와 만났던 일화를 들은 요한이 제기했던 그 맹점. 바비는 요한의 말대로 역시나 나를
만나기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말했잖아. 처음엔 세나와 닮아서 네게 접근했을지언정 지금은 네게서 세나를 떠올리지
않아. 네가 세나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 물론 외관상으론 닮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세나인 건 아니잖아. 너에게서 세나를 찾는 일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야. 난 그저 네가
좋았으니까, 네 뒤를 쫓아다닌 것뿐이야. 맹세해.”
“…….”
“응.”
바비는 빙그레 웃으며 나를 지나쳐 갔다. 부담스럽지 않은 스킨십도, 약간은 폭력적인 고백도
더는 없었다.
“비 온다.”
* * *
조슈아가 찾아왔다.
‘가지 마. 나랑 있어.’
* * *
“조슈아. 무슨 일이야?”
“뭐? 요한 씨가 죽어 간다니!”
“뜨거워.”
“으응…….”
시선을 밑으로 끌어내리자, 내 손목을 부여잡은 큰손이 보였다. 큰손의 주인은 요한이었다.
언제 깬 걸까.
“……가지 마.”
“소리치지 마. 머리 울려.”
“요한.”
“네?”
“난 괜찮아.”
“…….”
제 26 화. 너랑, 입 맞춰 보고 싶다고
“나를……. 걱정했어?”
“당연하죠.”
“왜.”
“대답 한번 참 잘하는군.”
“……!”
“연차.”
“…….”
“두 배로.”
“밥맛 씨, 지금 장난해요?”
“컥!”
“…….”
“너랑, 입 맞춰 보고 싶다고.”
“망설여지는 건가.”
하지만.
“…….”
그래도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입맞춤을 요구한 요한의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서로의 입술이 닿는 순간만큼은 기분이 좋아질 거라는 사실이었다.
“연차는 세 배가 어때요?”
쾅, 하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조슈아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
“그, 그게…….”
조슈아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눈으로 훑더니, 고물고물한 두 손을 얼굴까지 올렸다. 아이는
앙증맞은 손으로 제 두 눈을 가리더니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
“허허.”
“……아.”
“……음…….”
“……됐, 됐어.”
* * *
“콜록, 콜록.”
“괜찮아요?”
당신의 감기와 정신이 괜찮느냐는……. 의원이 다녀간 뒤부터 계속해서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던 그였다.
“왜 웃어.”
“흠흠.”
“어. 비를 맞았어.”
“왜요?”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서 확인하셨어요?”
“어……. 대충.”
“제 기억이요?”
“저희 둘이요?”
“그래, 같이.”
“왜요?”
“네가 뭘 잊고 있는지 궁금해졌으니까.”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저는 안 궁금한데요?”
“……뭐?”
“…….”
“설마……, 연차 네 배?”
“정답은 미인 거지입니다.”
“큭큭.”
바로 세나의 방.
“네.”
긴 고민 끝에 그는 숨을 나지막이 토해 내며 말했다.
“모쪼록.”
* * *
이전에 찾아갔을 때와는 다르게 오늘은 한낮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등골이 서늘한 기분이었다.
왠지 모를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들어, 나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왜 그래?”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네, 네.”
“……!”
이틀 전, 그 책을 보았던 장소에는 다른 책이 꽂혀 있었다. 선명한 붉은빛을 가진 그 책은
보이지 않았다.
“책이…… 없어졌어.”
어떻게 된 일일까.
“그 책이 무슨 책인데?”
나는 진실을 토로했다.
“그 책이 제 꿈에 나왔거든요.”
“네 꿈에?”
“표지가 붉은 책이라.”
“잘 모르겠어. 그런 게 있었는지도…….”
요한은 대답했다.
“아니.”
“……다시 한번 더 찾아보지.”
“바비도 알아.”
배가 다르기는 하나, 형제임에는 분명할 텐데. 그들은 어째서 서로를 그토록 싫어하는 걸까.
“혹시.”
요한의 한마디에 나는 미루어 짐작하던 것을 멈추며 그를 응시했다.
나는 요한에게 대답했다.
“어쩌면요.”
* * *
“윽, 물이 너무 많잖아.”
“…….”
나는 흘깃 요한을 보았다.
괜스레 뜨끔했다.
“네?”
“거지라고 안 했다고.”
“그런데요?”
“똑똑.”
“큭큭.”
“……웃지 마.”
“아.”
“왜 그래요, 도대체?”
“거지라고 안 했다고.”
“알아요.”
“네. 아무렴요.”
“큭큭.”
“엄마, 아빠!”
그 선생이 진짜!
“……아빠는 여자아이.”
……는 개뿔.
“당신은 그걸 왜 대답해요!”
제 28 화. 요한과 닮은 남자, 욘두
이상한 일이었다.
“…….”
“풉, 큭큭.”
“…….”
* * *
“네 꿈.”
“상상……, 아니야.”
“네?”
“요한 씨.”
“그래도 네가 두렵다면.”
“…….”
“역시나……. 세나 씨 때문이죠?”
그는 고민 없이 곧장 대답했다.
“…….”
머리 아프다. 요한은 속삭이듯이 말하며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벽 어귀를 넌지시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우수에 젖어 보였다.
“그럴지도 모르겠어.”
“더 아팠으면 좋겠네요.”
“……!”
“잘게.”
“하.”
“……요한.”
* * *
나는 요한의 방을 나서며 새삼 깨달았다.
“이곳에 머문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는구나.”
“요한……?”
이윽고 내가 서 있던 곳까지 걸어온 남자는 역시나 요한이 아니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요한과
닮았다는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이목구비가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엇!”
“엇!”
“욘두 선생님이라.”
“네? 저요?”
“컥!”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당신이 가르친 건 전혀 도덕적이고 사회적이지 않다고!
“…….”
이거 참,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겠네.
“욘두 쌤. 지금 시간 있어요?”
“제, 제게 말입니까?”
“…….”
“귀걸이. 예쁘죠?”
제 29 화. 리나, 먹여 줘
“……그, 그래요.”
“…….”
나, 칭찬하려는 거 아닌데.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뭐야. 내가 할 말이 없는데?
“조슈아 님, 참 사랑스럽죠?”
“그게 뭔데요?”
“…….”
내가 잘못 본 것일까?
“그런가요. 하하.”
“어린아이답지 않은 말은 어떤 말입니까?”
“유모님! 설마 벌써 요, 요한 님과……!”
“…….”
“글쎄요.”
* * *
“저녁 시간이다.”
밥맛은 이제 좀 괜찮아졌으려나?
똑똑.
“요한 씨, 안에 계세요?”
“……어.”
“들어가도 돼요?”
“어.”
“용건이 있나?”
“아뇨, 꼭 그런 건 아닌데.”
요한은 우리가 꼭 용건이 있어야 만나는 사이처럼 말했다. 그러자 묘하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말에 틀린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갈까요?”
“나가라는 듯이 말한 게 누군데.”
“콜록, 콜록.”
“약은요?”
“먹었어.”
“머리는, 아파요?”
“아직 아파.”
“저녁은요?”
“저녁은…….”
“네? 뭘요?”
“벨, 벨라!”
“그래서요?”
설마 죽을 먹여 달라는 건 아니겠지.
“조, 조슈아.”
“어서, 어서!”
“…….”
“리나.”
“먹여 줘.”
“…….”
“컥.”
“쯧쯧.”
“이제 됐죠?”
“어. 그래서?”
“……!”
“응!”
“아빠가 미안해.”
“나도 미안.”
“조슈아. 미안.”
* * *
“그 차. 남기지 말고 다 마셔.”
“왜요?”
“……!”
“이봐, 거지.”
“나 원.”
“풉!”
“아니, 나 이제 멀쩡해.”
“모쪼록.”
“계속해 봐.”
인자한 미소는 개뿔. 요한은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올려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입술은 겨우겨우 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눈은 하나도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눈치를 보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더 했다. 이번엔 요한이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
않을 말일 테다.
“……어?”
“…….”
“…….”
“…….”
아, 나 너무 진지하게 대답했나.
* * *
‘…….’
“……하.”
눈을 뜨자 기억나는 건, 남자의 목소리와 제법 선명하게 보였던 남자의 붉은 입술 두
가지뿐이었다.
* * *
하지만 그녀를 계속해서 원망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원망보다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인연이 기구해도 그렇게 기구할 수가 없었다. 리나가 요한만은 만나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는 눈을 감았다.
“마음 아프게.”
“사랑해.”
하지만 아무리 딸아이를 가지고 싶었기로, 아무나 양녀로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나는 아버지의 마음뿐만 아니라, 요한과 바비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였다.
요한과 바비는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만, 묘하게도 세나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주 조금도.
‘바비, 나는 살고 싶어.’
바비는 그녀가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의 병에는 차도가 없었고,
그녀는 종내엔 말을 하는 것조차도 힘들어했다.
바비는 그녀를 떠나보낼 준비를 서서히 했다. 혹 다음 생에도 만난다면, 그때는 요한이 아니라
나를 선택해 줘.
바비는 조슈아가 요한을 닮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조슈아를 제 아이처럼 대했다. 그러다
요한과 우연히 만나면 그와 싸우기는 했지만.
요한이 리나를 원하게 된 일은 어쩌면 당연히 벌어졌어야 할 일일지도 몰랐다. 세나를 여태껏
잊지 못한 요한이었기 때문이었다.
세나와 너무도 닮은 그녀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바비는 리나의 모습을 훔쳐보며 눈물을
훔쳤었다. 꿈속에서만 보았던 세나를 다시 만난 것 같았으니까.
‘너무 닮았어.’
똑똑.
“계십니까?”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아니. 그냥 잠깐 생각.”
* * *
“아침이다. 제길.”
“…….”
“바비?”
“…….”
“그런가?”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며 함께 키득거렸다.
“……뭐?”
그는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이어 말했다.
“요즘 애가 좀 타서.”
“오늘도 좋아해.”
“…….”
“…….”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어진 그의 고개가 내 얼굴 위로 바투 드리웠다. 이내 서로의 코끝이 닿고
바비가 눈을 감는 게 보였다.
아마도 바비는 내게 거절할 시간을 주려는 것 같았다. 그에게서 종종 느꼈던 다정한 배려였다.
‘너랑, 입 맞춰 보고 싶다고.’
조금 붉어진 얼굴로, 낮은 목소리로 고백하듯이 말했던 요한. 나는 그와 닿을 뻔했던 입술을
떠올리며 숨을 골라냈다.
“……리나.”
“미안해.”
요한의 입술이 닿을 뻔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네겐 떨리지 않았던 심장이 떨렸다고 한다면.
너는 어떤 말을 할까.
* * *
“바비.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너, 여기 2 층에 세나 씨의 방이 있는 거 알지?”
그는 몇 초쯤 지난 후에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응.”
“…….”
바비는 웬일인지 단번에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러다 또다시 뒤늦게 대답을 하고야 만다.
“아니.”
“응, 그래.”
“…….”
제 32 화. 리나가 신경 쓰여
왜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지 잘 모르겠다. 그것은 역시나 리나가 세나와 닮았기 때문일까.
“…….”
“……!”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저도 모르게 정원으로 박차고 나가려는
발걸음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마음이……. 너무 이상해.”
바비와 리나가 함께 있는 걸 봤을 때마다 느꼈던 질투라는 객쩍은 감정이 또다시 피어올랐다.
요한은 창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들의 모습에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어색한 기류를 풍기던 두 사람은 이내 공작저의 현관으로 들어가며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기에 이르렀다.
“하.”
“안도라…….”
사라진 세나의 시신. 세나와 같은 버릇을 가진 리나. 기억상실증인 리나. 세나와 관련되는
꿈을 꾸는 리나.
하루가 다르게 리나를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져만 간다. 그녀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제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리나가 세나의 대신을 하기를 바라는 걸까? 그녀가 세나를 대신해서 영원히 저와 조슈아의
곁에 남아 주기를 고대하는 걸까?
요한은 바비와 리나가 사라져 적막함만이 풍기는 정원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초점이
흐려진 시선으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시신을 찾고, 시신이 사라진 일과 연관된 사람을 찾아내자. 그러면 여태껏 자신이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아낼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똑똑.
“누구야?”
“……욘두입니다.”
“들어와.”
“……잠깐만.”
요한은 욘두에게 자신의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좋습니다. 요한 님이 원하신다면야.”
“그런 건가.”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요한의 머릿속에는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리나의
얼굴이 맴돌았다. 좋은 일이라.
“모쪼록.”
요한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무의식중에도 그녀를 떠올리는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
요한은 일순 침묵했다.
“리나가 세나와 닮아서 신경이 쓰이는 걸까? 그녀는 세나가 아니라고 수없이 생각해 보았지만,
그게 뜻대로 잘 안 돼. 욘두 선생. 너는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녀를 내 곁에, 조쉬의 곁에, 계속 두는 게 과연 옳은 일인 걸까?”
“…….”
“…….”
“……아니야. 네 말에 틀린 점은 없어.”
“그럼 요한 님. 저는 진짜로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조슈아 님께서 깨어나셨을지도 모르고,
요한 님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신 듯하여.”
‘이봐요, 밥맛 씨.’
라고 모른 척을 할 테지.
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만이 그득한 내 방에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그곳엔 익숙한 신형이 보였다.
“엄마!”
그런데 가까이서 바라본 조슈아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항상 바라보는 이마저도 행복해지는
해맑은 미소를 짓던 조슈아였건만, 아이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
“아빠가……. 아빠가…….”
“뭐? 바, 바람?”
“……예쁘다.”
나는 솔직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여자는 멀리서 보아도 충분히 아름다워 보였던 것이다.
조슈아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창밖을 노려보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 모습마저도
치명적이게 귀여웠다는 점이었다.
“저 아줌마, 가끔씩 아빠한테 찾아와서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어. 조슈아는 저 아줌마가 싫어!
엄청 싫어! 완전 싫어!”
“큭큭.”
조슈아는 제 아빠의 말을 똑같이 읊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이 참으로 우습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다.
“엄마가 최고야.”
조슈아의 사랑스러움에 히죽거리면서도, 내 머릿속 한편에선 이름 모를 여자에 대한 궁금증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
“중요한 건 너희 아빠 마음이니까.”
말이 지나쳤던 걸까.
“조, 조슈아.”
그것은 처음으로 겪은 조슈아의 거부였다.
토할 것 같아.
요한에게 ‘계약 관계로 이어진 물주와 거지’라는 우리의 관계를 똑바로 정의해 주었던
나였는데.
‘그를 좋아해?’
똑똑.
“누구세요?”
“네! 들어오세요.”
나와 눈이 마주친 벨라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손에는 다과가 올려진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티 나요?”
나는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아뇨, 딱히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닌데…….”
요한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 낯빛이 어두워진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내 말에
상처를 입고 나가 버린 조슈아가 신경 쓰여서 그런 것인가.
“벨라.”
“네?”
“아까 전에 우연히 저택으로 찾아온 여자를 보게 됐는데, 벨라는 그 여자가 누군지 아세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엄청 예쁜 여자던데. 하하.”
엘리스, 라.
“리나 님 설마…….”
“아, 아니에요! 저 지금 질투하는 거 절대로 아니에요. 요한 씨가 다른 여자랑 뭘 하든,
심지어 재혼을 하든 저랑 무슨 연관이 있다고.”
“……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 * *
요한이 나를 찾아온 것은 석양이 지고, 어슴푸레한 어둠이 깔리고 나서였다.
“말장난. 또 안 속아.”
“아이고, 재미없어라.”
“무슨 말이요?”
“네가…….”
제 34 화. 질투, 라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말을 막아 버렸다.
“뭘 그만둔다는 거지?”
“당신이요!”
“내가?”
“무슨 일이 있었나?”
“…….”
“…….”
왜 저런 밥맛 같은 말이 싫지 않은 거지?
“뭐?”
“요한 씨. 그럼 좋은 밤 되시기를.”
“질투, 라.”
* * *
내가 오늘 무슨 잘못이라도 했던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오늘, 더해 요 근래에 그녀에게 딱히 잘못한 사실은 없었다.
요한은 억울했다.
“벨라.”
“네?”
요한은 뒤늦게 자신의 물음을 철회했지만, 벨라는 이미 오늘 오후에 있었던 리나와의 만남을
떠올리고 있었다.
공작저에 방문했던 낯선 여자에 대해 묻던 리나. 절대로 질투가 아니라고 발뺌하던 리나.
그러면서도 요한과 만났던 여자를 무척이나 궁금해했던 리나.
귀엽기도 하셔라.
“엘리스 후작 영애?”
“그게…….”
그러한 사실을 깨닫기가 무섭게 입가에 맺혔던 웃음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지난 사 년간, 소리
내어 웃은 적이 없었던 요한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좀 묘했다. 어색하기는 했으나, 요한은 입가에 스민 미소를 좀처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혼자 웃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도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런 말을 했던 건가.
요한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사실을 질투한 리나. 리나의 얘기를 듣고 세상 행복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요한.
“…….”
그녀와 더 이야기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요한은 벨라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었다. 벨라는
고개를 작게 조아린 뒤 방을 나섰다.
혼자가 된 요한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
세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때, 요한은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감기로 인한 열에 취했다는 핑계로 그녀와 입을 맞추게 된다면. 그녀의 입술의 감촉을 느끼게
된다면. 그 감촉 또한 세나의 것과 닮았을까, 싶어서.
세나의 시신을 찾게 되고, 제 예상과는 다르게 세나와 리나가 관련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리나와 세나 사이에 있었던 무수한 우연들은 정말로 단순한 우연일 뿐이고, 리나는 리나라는
여자 그 자체였다면.
“하.”
“……아빠아아.”
요한은 사뭇 심각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아이를 한
팔로 가볍게 안아 들었다.
다시금 소파까지 걸어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조슈아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쉬 네가?”
조슈아의 말은 이어졌다.
그리 말하는 조슈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원체 하얗던 조슈아의 피부가 더더욱 하얗게
질려 가는 것을 본 요한은 마음이 쓰라렸다.
‘엄마 바보! 왕바보!’를 외쳤을 조슈아가 얼마나 귀여웠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왕바보라는
말이 왜 이렇게까지 귀엽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요한은 그녀가 화가 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그럼에도 아이에게 잘못을 일깨워 주었다.
아이가 놀라지 않게. 다정하게.
“그런 말은 하면 안 되는 거, 알고 있지?”
“……웅응. 그건 다 아빠 때문이었어.”
요한은 꾸짖듯이 말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조슈아를 구태여 겁을 주며 타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엄청 슬퍼 보였어.”
엄청 슬퍼 보였다, 라.
“물론.”
“나야.”
“또 왜…….”
“조슈아?”
고백하듯이 자신의 잘못을 토로한 조슈아의 얼굴은 다시금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는
끝까지 울음을 토해 내지는 않았다.
리나는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입술을 안쪽으로 동그랗게 말았다. 진지한 조슈아 앞에서 웃음을
터뜨릴 수는 없지, 아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들더라.
“……정말이야?”
“말 잘 듣네, 우리 조슈아.”
울상이었던 조슈아의 얼굴이 그제야 느슨하게 풀렸다. 조슈아는 조막만 한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내려올 정도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절대로 입 밖엔 낼 수 없는 상상이었다.
요한이 괴로워하고 있는 사이, 조슈아는 제 볼을 리나에게 가까이 가져다 대며 말을 건네었다.
“좋아.”
“자, 이제 아빠 차례야!”
“……?!”
“응응! 조슈아 볼에만 뽀뽀해 주면, 아빠가 서운해할 거야. 엄마는 아빠가 얼마나 잘
삐치는지 모르지?”
가까이 선 두 사람을 본 조슈아의 얼굴엔 늘 그랬던 것처럼 흐뭇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딱히……, 못 할 것도 없지 않나.”
“네, 네?!”
“아무튼 조쉬가 저렇게까지 바라잖아. 뭐……. 네가 조쉬를 실망시키고 싶다면 그러지 않아도
좋고.”
“…….”
“얼굴.”
“…….”
“붉어졌네.”
돌아오지 않은 물음을 되뇌던 요한의 얼굴엔 다소 씁쓸한 미소가 맴돌았다. 요한은 리나에게
머물던 시선을 옮기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 조슈아!”
“그리고.”
“네?”
“……!”
* * *
세나는 외동이다.
닮은 얼굴을 가진 세나와 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라는 익숙한 생각이 든다. 동시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요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고 싶네.”
변명하자면 그런 거다.
제 36 화. 내일 나갈까?
“…….”
내게 돌아온 것은 정적뿐이었다.
문은 잠기지 않았는지 매끄럽게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나는 요한을 단번에 발견할
수 있었다.
“피곤한가 보다.”
“…….”
“……어디 가.”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
그는 비실비실 웃었다.
“아니라?”
“흐음, 그런가?”
“내일 나갈까?”
내일 나가자는 건 설마…….
“……!”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내일 나갈까?’를 말하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데이트를 신청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
요한은 제 말을 덧대었다.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 줬어야지.
그러나 실망감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왜냐면, 요한과 둘이서 나가는 것보다 조슈아와 셋이서
나가는 게 훨씬 더 재미있을 테니까.
“시비 거는 거예요?”
“아니, 딱히.”
“…….”
“나도 늘 날을 세우고 있는 건 피곤해.”
* * *
“혹시 모르잖아.”
조슈아의 유모로 취직하기 전까지 얼굴을 가리지 않고 거리를 활보했었지만, 그때의 내 모습은
형편이 없었었다. 매일 씻지도 않았고, 입고 있던 옷도 엄청 낡았으니까.
“…….”
맙소사, 또다.
“조쉬, 가고 싶은 곳이 있니?”
“가고 싶은 곳이 있나?”
나는 대답했다.
“글쎄요.”
어디로 가면 좋으려나.
“가기 싫은데요?”
“…….”
나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
“그 좋은 옷. 누가 사 줬지?”
“…….”
나는 작게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
“얼굴.”
“…….”
“붉어졌네요.”
“나가자.”
이 손을 잡아, 말아.
이내 맞닿은 그의 손의 감촉이 그리 싫지 않다. 따뜻하고, 온기 가득한 그의 손. 까닭 모를
희미한 그리움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손.
“앞장서.”
“좋아요.”
* * *
“…….”
“훔쳐보는 거 다 티나.”
나는 다른 말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컥.”
“……네?”
“…….”
“자, 그럼 다시 가 보자.”
* * *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 언제 가도 나를 반겨 줄 곳.
“도착.”
<리키네 잡화점>
“리나?”
“리나!”
의아했던 목소리는 확신에 가까운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울림이 좋은 중후한 아저씨의 목소리
또한 그대로였다.
“…….”
나는 침묵했다.
“풉, 큭큭.”
“설마 신랑??!!”
“아니에요!”
“아저씨 안녕!”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조슈아가 그 주인공이었다.
아저씨는 별안간 놀란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번엔 입까지 쩍 벌리며 기함하는
게 아닌가.
“설마 아들???!!!”
“아니에…….”
나는 확고한 어투로, 물러섬이라곤 없이 말하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하.”
“아마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웅웅. 리키 할아버지.”
“어쩜 이리도 말을 잘할꼬.”
“…….”
“아닌가?”
저는 조슈아의 아빠입니다, 라.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게 말입니다.”
“……?!”
“미쳤어요?”
“장을 보러 잠깐 나갔단다. 곧 있으면 돌아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렴. 마틴도 네 남편과
아들을 보면 무척이나 기뻐할 거야.”
“…….”
“길거리에서요.”
“조슈아?”
자박자박 걸어간 조슈아는 나와 아저씨 사이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곤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장황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약간 발끈한 채로 물었다.
“그게 웃겨요?”
요한이 했던 말과 같은 말이었다.
그러다 내 눈에 띈 것이 하나 있었다.
의미 없는 물건은 없었다.
“이건 뭐예요?”
“쌍둥이요?”
쌍둥이라.
“……!”
그 가정은 그러했다.
세나와 내가 쌍둥이였다면.
느리기는 하지만 확실히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아니,
잊고 있었던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리나도 하나 주랴?”
“네?”
“……?”
“나 원 참.”
나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요한이었다.
“어?”
“요한 씨. 뺨이 붉어졌어요.”
* * *
“아니요. 딱히.”
“조슈아는 뭘 하는 걸까요?”
제 39 화. 네가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우리는 구태여 조슈아를 캐묻지 않았다. 아이가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한다면야,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 주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조슈아가 뭘 산 걸까요?”
“왜 설마…….”
“마틴 아주머니!”
“리나. 이게 얼마 만이니.”
‘왜 항상 너만 행복해져?’
“……리나?”
“요한?”
“또 어지럼증인가?”
“……네.”
“내가 준 차는 잘 마시고 있는 거지?”
“그런데도 넌…….”
나는 대답 대신 생각했다.
요한은 실제로 어렸을 적 녹턴을 쳤었고, 내가 환청처럼 들었던 요한과 세나의 대화처럼
그녀의 방 문고리는 고장이 나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구일까.
나는 휴, 하고 짧게 숨을 골라냈다.
“우웅.”
“아……. 하하하.”
“저쪽은 네 남편?”
“맙소사.”
“리, 리키 아저씨!”
“맙소사!”
* * *
라고 대답한 것이다.
“휴.”
“거 참. 일단 한번 들어 봐 봐.”
“……알겠어.”
올려다본 요한의 얼굴이 시무룩해 보이기만 했다. 언제나 오만하게 굴던 그라고는 믿기지 않는
반응이었다.
의기소침해진 그의 얼굴은 꼭 조슈아의 얼굴과 닮아 보이기도 했다. 내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
짓던 조슈아의 요망한 얼굴과 닮았다고 해야 할까.
그는 저가 하고 싶은 말을 한 일이 기쁜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내 착각일지도 몰랐다.
“…….”
바비다.
‘리나. 그만 가 볼게. 내일은 나도 약속이 있어서, 모레에 찾아올게. 그때도 괜찮지?’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럴 거면 같이 가.”
“응! 엄마!”
“잠, 잠깐만……!”
“휴.”
“……!”
제 40 화.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잘 베푼다
잡화점 내외는 상인들 사이에서 금슬로는 단연 최고로 뽑히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잡화점 내외는 기억을 잃어 자신의 부모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리나를 안쓰러워했고, 리나는
그들을 잘 따랐다. 꼭 진짜 부모님을 따르는 것처럼.
그런 리나가 오랜만에 찾아와 돌연 남자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번듯한 남편도 생겼다고
한다.
“리나가 그렇다고 했으니까, 그렇지 않을까? 더군다나 그 아이. 리나와 똑같이 생겼던걸.
모자 사이가 아니라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어.”
“그러게. 리나가 추후에 다시 제대로 설명해 준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네. 그래야겠지요.”
“그렇다고 해.”
리키의 대답에 마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애타고, 절박하게.
“누구요?”
“그래! 맞아. 이름이 바비였어. 그 청년. 참 싹싹하고 좋았는데 말이지. 리나의 짝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어. 물론 선택은 리나의 몫이겠지만.”
“귀걸이?”
“네. 며칠 전에 또 찾아왔었잖아요.”
“아, 맞아.”
‘자네가 여긴 어쩐 일로?’
‘그래, 잘 왔네.’
리나가 잡화점 내외를 친부모처럼 생각한다는 사실을 안 이래부터 시작된 안부 인사이기도 했다.
바비는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듯 다과 세트를 쓰윽 내밀었다. 한눈에 보아도 포장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다과 세트였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
리키의 말은 이어졌다.
‘아…….’
‘리나에게 꼭 좀 전해 줘.’
바비는 손을 뻗어 귀걸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귀걸이 끝에 달린 에메랄드빛 보석이 작게
흔들리며, 오묘한 빛을 내비쳤다.
‘귀걸이가…… 낯이 익네요.’
‘응? 아는 귀걸이야?’
뒤쪽에서 리키와 바비가 대화를 나누던 걸 잠자코 지켜보던 마틴은, 그 순간 달라지던 바비의
얼굴을 목도하게 된다.
“……맞아요.”
그리고…….
“조슈아도 다시 왔어!”
“어쩐 일로 다시…….”
“정말로 감사합니다.”
바비임이 분명했다.
그녀를 믿지만, 그럼에도 요한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가 모르는 시간에, 모르는 곳에서
리나와 바비가 마주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착하구나.”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아빠 잘 가~!”
“그래. 우릴 믿고 얼른 다녀오게!”
한편, 가게에 남겨진 조슈아와 잡화점 내외는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엔
친밀함이 가득했다. 오늘 처음 만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자신의 취향을 확실히 말하는 조슈아를 보며 리키는 또다시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주 요망한 어린아이구나.
아이가 없어 적적함을 느꼈던 잡화점 내외의 눈에, 조슈아가 얼마나 예뻐 보였는지 모른다.
리나에게 조슈아를 자주 데려오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휴. 밖이 엄청 잘 보이네.”
“휴우.”
“엄마인가?”
엄마, 아빠는 조슈아를 놔두고 어디로 가는 걸까. 엄마가 다시는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강, 강아지야!”
* * *
“엄마!”
맙소사. 조슈아는 얼빠진 얼굴로 여자의 얼굴을 꼼꼼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엄마가
아니었다.
“……얘야! 얘!”
뒤늦게 둘러본 주위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리키 할아버지가 있던 가게는 어디로
가야 나오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곳에 있자.
그곳에 가만히 있으면, 엄마랑 아빠가 나를 찾으러 올 거야. 그리고 경비처럼 보이는 사람을
발견하면, 당당하고 의젓하게 말하자.
아이는 무릎을 세우고 앉고선, 그 위에 제 얼굴을 얹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이따금 조슈아를
힐끔힐끔 바라보기도 했지만,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는 이는 없었다.
* * *
“쉿. 나야.”
“…….”
“조슈아는요?”
“잡화점에 맡겨 두고 왔어.”
“…….”
“요한 씨. 너무 가까워요.”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부정하지 마.”
“…….”
“네 심장 소리 여기까지 다 들리니까.”
나는 어깨를 흠칫 떨며 대답했다.
“왜요?”
“네?”
“……!”
“……어, 나도 봤어.”
제 42 화. 넌 도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걸까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만 같아.
“…….”
“…….”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안 울어.”
* * *
나는 그를 달래 주고 싶었다.
“……괜찮아요?”
“요한.”
마주친 시선이 깊고, 뜨거웠다. 우리 주변을 맴도는 기류를 달아오르게 만드는 눈 맞춤이었다.
“…….”
“넌 도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내 착각인 걸까.
“모르겠어.”
“…….”
“그래도 될까.”
눈을 감자 요한의 입술 감촉이 완전히 느껴졌다. 그의 입술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부드러웠다.
온기 가득한 그의 입술은 내 입술을 부드럽게 탐했다. 서로의 입술은 부드럽게 맞닿아 있었고,
우리의 몸은 부담스럽지 않게 밀착되고 있었다.
입술을 맞추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겐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오묘한 그리움이 든다고
해야 할까.
* * *
“……!”
“이, 이봐요!”
“발. 더러워졌잖아.”
“…….”
“요한 씨. 괜찮…….”
제 43 화. 오해하고 싶어
“……나. 리나?”
“네. 부르셨어요?”
“저……기.”
“오해하지 말고 들어.”
꿀꺽.
나는 몸을 배배 꼬며 대답했다.
“좋아. 휴.”
그는 낮게 숨을 골랐다.
“나……. 오늘 너랑 같이 자면 안 될까?”
“……!”
“혹시 술 드신 거 아니죠?”
“아니야! 완전 맨정신이야.”
“…….”
너무 티 났나?
“요한 씨. 어떡하죠?”
“왜?”
“…….”
“그것도 엄청.”
그는 이마를 짚으며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손…….”
“어?”
“많이 떨리네요.”
“그러네.”
“그렇다고 한다면.”
“네?”
“……떨려서 혼자 못 자겠다고 한다면. 그럼 오늘 밤, 네 옆자리를 허락해 주는 건가?”
“제, 제가 뭘요!”
“제가 그랬던가.”
“정말 괜찮겠어?”
“……!”
‘정말 괜찮겠어?’
허락을 구하는 조심스러운 두 목소리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꿈속의 남자가 요한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요한 씨.”
“어?”
“…….”
바랐군, 바랐어.
* * *
“저도 괜찮아요.”
“하하.”
“…….”
“믿지 못하겠지만, 널 만난 이래로 세나에 대한 기억이 멀어진 기분을 이따금 느끼고 있었어.
절대로 잊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그녀의 기억인데…….”
“그래서 슬퍼요?”
그는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
“리나.”
* * *
요한은 긴 꿈을 꿨다.
정원에는 만개한 아름다운 꽃들이 즐비했다. 하나 미소를 드리운 세나의 얼굴보다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
흐려졌던 세나의 신형은 완전히 옅어지며, 종래엔 그녀의 상이 연기처럼 허공에 피어올랐다.
꿈일 뿐인데, 요한은 까닭 없이 기분이 이상해졌다.
네가 완전히 사라질 것 같아. 다시는 내 꿈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아.
“…….”
“그냥 하품해서.”
“넌 괜찮아?”
“제기랄. 에취!”
“…….”
“……아. 조쉬.”
그는 이마를 짚었다.
제 44 화. 바지는 왜 입고 나오셨어요?
“……의원을 불러올게.”
“…….”
요한은 조슈아를 아이의 방으로 옮겼다. 리나의 말마따나 아이에게 감기가 옮으면 안 되니까.
그는 침대 위에 아이를 눕혀 주며, 아이의 이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곤 뒤따라
들어온 벨라에게 말했다.
“네. 주인님.”
“네, 알겠습니다.”
“휴.”
그는 안도의 숨을 뱉어 냈다.
리나의 코끝에 머물던 그의 손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마로 올라갔다. 그러자 그녀의 이마를
뒤덮은 미열이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씻고 싶은데.”
누군가의 시선을 느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에, 누군가의 진득한 시선이 머물러 있는 듯했다.
요한은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언제 잠에서 깼을지 모를 리나의
얼굴이 존재했다.
“거, 거지 너! 눈 감아!”
“옷…… 옷이!”
“바지는 왜 입고 나오셨어요?”
“……어?”
그는 반문했다.
“뭐??”
“……좀 아쉬워서.”
“내, 내 몸이 왜.”
“생각보다 꽤 좋네요. 관리는 어떻게 해요? 큭큭.”
“궁금해?”
“네?”
“……요, 요한 씨.”
“…….”
“……!”
“큭큭.”
“…….”
“…….”
정적이 드리운 방 안. 침묵을 깬 이는 리나였다.
“흠흠. 다시 잘 건가?”
“……네.”
“어디 가요?”
“…….”
* * *
요한이 나가 버린 후, 나는 그의 방에 혼자 남게 되었다.
“우린 무슨 관계지.”
“……바비?”
제 45 화. 사랑하면 원래 미치는 거래
바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나는 연신 마른기침을 하며 아픈 척을 했다.
“…….”
“구제불능이구나.”
나는 화제를 돌렸다.
“팔……. 깁스 풀었네.”
“큭큭.”
“뭐 하느라?”
너, 욘두 쌤 집에는 왜 갔어?
그 책은 네가 가져간 거지?
넌…….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기왕 만난 김에 물어봐 버릴까.
“……귀걸이?”
“이 귀걸이를 기억해?”
“글쎄. 나는 더 말해 주지 않을 참이야.”
“나 원. 그럼 애당초 보여 주지 말든가.”
“……뭐?”
나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아연실색했다.
“바비. 더 알려 줘.”
“그냥은 못 알려 주지.”
내리깐 그의 눈동자 속엔 희미한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열기가 일컫는 바는, 무언가의
바람이었다.
“……미친놈.”
바비는 내가 욕지거리를 할 줄 알았다는 듯 저가 하고 싶은 말을 건넬 뿐이었다.
“…….”
“같은 말인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싫어.”
“왜?”
나는 요한을 떠올렸다.
“나는 그와 키스했어.”
“요한…….”
“타이밍 정말 안 좋네.”
푸념은 덤이었다.
“쥐새끼가 또 몰래 들어왔네.”
그러곤 그는 내게 물었다.
“…….”
나는 이전에 바비를 선택했었다. 내 손목을 그러쥔 채로, ‘가지 마.’라며 애달프게 말하던
요한을 외면했었단 말이다.
“…….”
“…….”
“그럼 또 보자. 안녕.”
* * *
“욘두 쌤!”
그는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아, 이건 연인과 반쪽씩 주고받은 귀걸이입니다. 나머지 한쪽은 사랑하는 그 여자가 가지고
있죠.”
“결혼하셨어요!?”
“그 여자분…….”
“제가요?”
……맙소사.
나는 솔직한 감상을 읊조렸다.
신중하게 고른 그의 답은 패션 테러.
그 덕에 당황한 것은 나였다.
이렇게 진지해서야 농담을 못 하겠잖아.
“기념일이에요? 만난 지 몇 주년 기념?”
“좋아요! 제가 도와줄게요.”
“해 주지 않을 이유는 없죠.”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안 돼.”
……하는구나.
“왜인지 모르겠어?”
“네!”
“정말로?”
“욘두는…….”
제 46 화. 몰래도 안 돼
“욘두는?”
요한은 낮게 숨을 고른 뒤에 이어 말했다.
“……남자잖아.”
좀 의아한 말이랄까.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네?”
요한은 안절부절못하는 걸음으로 내 앞을 몇 번 거닐었다.
“선생이기 전에 남자잖아.”
설마…….
‘가지 마.’
“젠장.”
“어?”
“잠깐만.”
“갑자기 왜 그래요?”
“네가 방금 고백했잖아.”
“네?!?! 콜록 콜록.”
“……??”
“…….”
“…….”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오해를 한 요한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이상한 일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이었다.
“안 돼.”
“각박하네요.”
“그래도 안 돼.”
“네, 알겠습니다.”
그럼 몰래 만져 보는 걸로.
“몰래도 안 돼.”
“…….”
“네, 그랬죠.”
“어.”
“물론.”
“좋지.”
나는 연속해서 물었다.
“조슈아도 좋아하죠?”
“그럼 저도 좋아해요?”
“좋……. 어?”
“…….”
* * *
“어.”
내 말에도 요한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아닌가.
“네. 몰랐어요?”
몰랐던 걸까?
요한은 욘두에 대해서 더는 묻지 않았다.
“콜록 콜록.”
“하나도 안 괜찮잖아.”
“…….”
“콜록 콜록.”
“요한 씨?”
“……미안.”
요한은 뒤늦게 사과를 했지만 서늘해진 기류는 다시 온화해지지 않았다. 농담을 주고받았던,
어쩐지 마음이 몽글한, 그때론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알아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
“그래서요?”
“요한 씨. 그래서 저희의 관계를 확실히 정리해 주세요. 저와 또 이따금씩 키스할 거예요?”
“알 거 다 아는 사이에 무슨.”
나는 코웃음을 치며 그를 닦달했다.
“……하고 싶어.”
“좋아요. 대답 잘했어요.”
“……어.”
“알겠어.”
“저도?”
“…….”
우리 사이엔 잠깐의 정적이 맴돌았다.
수줍은 낯빛을 한 요한은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제 얼굴을 뒤덮은 열기를
가라앉히려는 것처럼.
“네, 그렇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 만약에 너와 세나가 진짜로
쌍둥이였다면.”
“넌…… 괜찮겠어?”
“응. 네 곁에 내가 있어 줄게.”
“어째서요?”
“그렇겠지.”
똑똑.
“누구야?”
“들, 들어와!”
“……리키 아저씨가 잠깐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는데……. 조슈아가 가게를 뛰쳐나갔어. 엄마,
아빠랑 비슷한 사람을 봤거든. 그런데 어떡해. 조슈아 엄마가 아닌 거야.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 그래서 뛰어갔는데……. 미안해.”
“엄마, 아빠……. 이제 조슈아를 미워할 거야? 동생이 생기면, 이제 동생만 좋아할 거야?”
아이는 곧장 대답했다.
“헤헤.”
울상이었던 조슈아의 얼굴엔 해맑은 미소가 새겨졌다. 보는 이의 마음을 절로 나른해지게
만드는 편안한 미소였다.
“흠흠.”
“내 볼도 여백이 많아.”
“……!”
정중하게 말했다.
“응응!”
요한의 조사에 누락된 욘두의 연인. 연인과 나눠 꼈다던 한쪽뿐인 에메랄드빛 귀걸이. 그리고
그 귀걸이가 잃어버린 내 기억과 관련이 있다던 바비.
제 48 화. 기대했던 것 이상이네
그는 선심을 쓰는 양 그리 말했다.
“이쯤이야.”
“내가 챙겨 준 약은?”
“두 분, 대화가 끝나셨습니까?”
“네. 왜요?”
다소 의외인 대답이었다.
“좋아요!”
“이건 어때요?"
“……욘두 쌤.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내가 사 줄게.”
“네? 요한 님께서요?”
“전 이거요!”
“…….”
요한은 구겨진 내 얼굴을 보며 더더욱 짙어진 미소를 지었다. 얄미워도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세 말도 안 해.”
“욘두 쌤?”
조금 전, 그 표정은 뭐였을까?
내가 잘못 본 걸까?
“벌써?”
“그래, 나가 봐.”
요한은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우리도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을 뿐이었다.
“……!”
“……기침은 방금 한 거잖아.”
“하하하. 그랬던가.”
* * *
“기대했던 것 이상이네.”
* * *
그 문서는 사라진 세나의 시신과 관련된 문서였다. 조사 결과를 건네받길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른다.
시일이 꽤 걸리더라도, 자세하고 확실한 정보를 알아오라 지시했던 요한이었다. 실제로 조사의
결과도 꽤 시일이 지난 후에 요한에게 당도한 터였다.
“후.”
그만큼 그곳에 올라가 세나의 관을 파내어, 그녀의 시신을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리란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며칠 전까진 그랬다.
“…….”
그중 제일 의심 가는 이를 고르자면, 바로 바비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바비가 구태여 이미 죽은 세나의 시신을 가져갈 이유가 없었다. 설령
바비가 세나를 사랑했다 하더라도.
“알 수 없군.”
“……욘두.”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런 징조나 실마리가 없었다? 그 사실은, 누군가가 수상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게,
완벽하게 세나의 시신을 가져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하.”
일이 꽤나 복잡해진 기분이었다.
제 49 화. 손, 손이 떨려!
“지난 4 년간 바비의 행적에 대해서 조사해 와. 그리고 욘두의 행적도. ……욘두에게 연인이
있다고 하는데, 그 연인에 대해서도 조사해 오도록.”
요한은 찝찝했다.
욘두의 집에 있던 그 책은 무엇이었을까.
짧은 고민에 대한 답은 곧 나왔다.
* * *
“그렇지만…….”
“새끼발가락이 정말 작네요.”
“……마님도 그랬는데.”
“너무 닮아서요?”
“손, 손이 떨려!”
나는 입가를 가린 채로 킥킥거렸다.
“풉, 큭큭큭.”
나는 쉼 없이 웃었다.
“하지만 아빠는…….”
그는 놀랍게도 잠옷 차림이었다.
이럴 때 저 볼을 왕창 늘여 줘야 하는데. 아쉽다.
“……나는?”
“…….”
나는 그 순간 확신했다.
“큭큭큭.”
“…….”
그녀는 놀란 듯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이었다.
“벨라가 도망갔네요.”
“그러게.”
“하하.”
“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요한은 한쪽 입꼬리만 올려, 비스듬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모르게 사악해 보이는
미소였다.
“…….”
“가족은 함께 자야 하는 거잖아!”
* * *
“요한 씨. 자요?”
“아니.”
나는 요한 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글쎄요.”
“네 기억 속에 나도 있다고 했지.”
‘정말 괜찮겠어?’
“하지만 말할 수 없다고요.”
“……!”
쪽.
“나랑 무슨 야한 짓을 했는데?”
제 50 화. 그 다음 건, 우리 둘만 있을 때 해
“설마 키스?”
그건 기본이고, 그것보다 더한 짓을 했다고 한다면……. 나는 입술을 작게 뭉그적거렸다.
“그렇겠죠?”
“그런 의미에서……”
“입 맞춰도 돼?”
물러섬이 없는 말이었다.
깨면 어떡해.
그러다 우리의 입술이 떼어지면, ‘우와! 조슈아 동생이 진짜로 생기겠어!’라고 말할지도.
“잠깐이면 돼.”
“…….”
“조금만.”
“…….”
“안 돼?”
“……진짜 잠깐만이에요.”
“그다음 건, 우리 둘만 있을 때 해.”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아쉬워하고 있다는 걸 모조리 들킨 기분이었다. 젠장.
“우리 둘이 있을 때 뭘 하려고요?”
“…….”
“가라고만 해 봐.”
그 혼쭐. 좀 많이 받아 보고 싶은데……. 쩝.
* * *
“우웅.”
이런 너를 두고 내가 공작저를 떠날 수 있을까.
* * *
‘입 맞춰도 돼?’
어두운 밤, 서로에게 집중한 시선, 조용한 사위, 그 속에서 나누는 사소한 대화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세나가 죽은 후에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었다.
이윽고 먼저 잠이 든 이는 리나였다.
‘……으흠…… 리나…….’
슬픈 꿈이라도 꾸는 걸까.
“…….”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일순 몰려왔던 졸음이 모두 가신 기분이었다.
되레 정신이 바짝 드는 느낌.
잠에서 깬 세나에게 리나라는 이름에 대해서 물어보면, 그녀는 언제나 고개를 내저었다.
‘악몽을 꿨나 봐.’
* * *
딸깍.
집 안엔 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았다.
“…….”
이 책이 내가 찾던 그 책일 것 같아.
“……세나.”
아닐 리가 없어.
리나의 말이 맞았다.
제 51 화. 세나의 일기
첫눈이었다.
“하…….”
눈물이었다.
“……공작님. 도착했습니다.”
요한은 입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그러곤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며, 눈물의 기운을 완전히
몰아냈다.
* * *
“……엇! 요한 님. 안녕하십니까.”
요한은 그 일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휴.”
* * *
“찾았다. 이걸 또 놓고 오다니.”
“……널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는 건성으로 책을 몇 장 넘겨 보았다.
이런 게 남아 있었구나.
‘욘두. 대답해.’
‘……하하. 명령이라.’
‘네가 똑바로 답해 주지 않는다면 요한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거야. 네가 세나와 관련된
무언가를 우리에게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
‘……!’
하지만 더 이상의 설명도, 설득도 없었다. 욘두는 그저 빙그레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욘두는 진실을 알려 주었고, 그것을 믿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바비의 몫이었다.
* * *
“요한 씨.”
“어.”
“식사는 하고 나간 거예요?”
“그럼 뭐 좀 드실래요?”
“지금은 먹는 것보단…….”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나 봐.
“……!!”
아니! 입술을 먹겠냐고 묻는데, 얼씨구나 좋다고 반응해도 모자랄 판국에 기겁한 모양새라니.
“큭큭.”
“보여 주고 싶은 거요?”
“……그, 그거 설마!”
탁.
“같이 읽어 보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 씨.”
“어.”
여섯 번째 일기는…….
제 52 화. 누군가의 기억
⌜조슈아는 정말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네 목을 조르고 싶어.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어.
그가 슬퍼할 테니까.
“아니야. 세나는 조슈아를 정말 사랑했어. 그녀가 아프기 전까지 아이를 얼마나 열심히
돌봤는지 몰라.”
“…….”
“…….”
요한은 침묵했다.
⌜조슈아를 보는 게 점점 더 괴로워졌다.
나는 매번 고개를 내저었다.
빌어먹을 병 같으니라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과 통증은 나뿐만 아니라, 요한과 조슈아, 심지어 바비까지 힘들게
만들었다.
몸은 이대로 영영 낫지 않는 걸까?
그런 짓을 해 버린 나는, 인제 와 벌을 받고 있는 걸까?
나는 그날, 리나라는 이름을 절규하듯이 부르던 세나의 목소리를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리……나?
“……!”
나는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놀란 것은 나 하나만은 아닌 듯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심한 악필이기는 했으나, 종이 위에 쓰인 것은 분명히 ‘리나’였다.
‘궁금해?’
사락.
“요한…….”
“……어?”
“어. 맞아.”
“…….”
“……아냐, 알려 줄게.”
“요한 씨.”
그는 고개를 작게 갸웃거렸다.
‘…….’
‘……세나.’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세나.’
“……!”
나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그 남자는 나와 제법 닮은 남자였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
그는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나의 아버지.
그곳 역시 처음 보는 곳이 아니었다.
‘귀여운 아이로구나.’
그 누군가는 바로…….
제 53 화. 네 머릿속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어
그 누군가는 바로…….
요한이었다.
아니, 요한뿐일까?
남자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
“……리나.”
요한은 손을 뻗어 내 뺨을 닦아 주었다.
기억을 찾는 걸 매번 두려워했었다.
“리, 리나.”
그는 약간 당황한 듯했다.
“…….”
이건 나를 향한 설렘이야.
요한의 말이 맞았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
“요한 씨.”
“응.”
그의 다정한 손길 덕이었을까.
“왜요?”
그는 주저하고 있었다.
“…….”
섬세하게 빚어진 턱선, 기다란 검은빛의 속눈썹, 내리깐 그의 동공엔 여러 감정이 얽혀 있었다.
“……밥맛 요한.”
“예전이라면…….”
“…….”
요한은 혼란스러워했다.
누가 진짜 세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틈엔가 바뀐 것이라면.
감쪽같이.
누구도 알 수 없게.
설령 부모님이라고 할지라도.
“중간에 바뀐 거라면요?”
만약에 정말로 중간에 뒤바뀐 거라면, 요한은 사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프기 전의 세나는 분명히 세나였어. 그녀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한 후엔, 내가 너무 바빠진
시기였어. 지금은 마음먹으면 시간을 낼 수 있지만, 그땐 여러모로 일이 엄청 많았거든.”
“네.”
“그게 뭔데요?”
그의 말에 이의가 없었다.
“쉴래?”
“요한 씨?”
그다음은 순식간이었다.
“가지 마요.”
“바빠요?”
요한은 고민 없이 즉시 대답했다.
“어. 완전 바빠.”
“……!”
그는 멀어지려던 내 손을 다시 부여잡았다.
그 또한 내게 진심을 토로했다.
“……키스하고 싶어요.”
“갑자기?”
“못 할 건 또 없기는 한데…….”
나는 마주한 그의 뺨을 쥐어 잡았다.
둘만 있을 때 하자며.
“……!”
“안 할 거예요?”
그 순간 든 생각은 하나였다.
“……너.”
“…….”
나는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제 54 화. 난 안되겠니
“조슈아 님.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웅웅! 얼른 시작하자!”
“제게요?”
어른에게 충분히 도움을 요청할 법도 했지만, 아이는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일을 끝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욘두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목걸이?”
“조슈아 님. 웬 목걸이입니까?”
“우와. 다행이다!”
* * *
그날 밤엔 조금 기묘한 꿈을 꾸었다.
잘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딸깍.
생일인 걸까.
‘생일을 축하한단다.’
박수 소리, 생일을 축하한다는 소리, 희미한 음악 소리……. 여러 소리들이 귓가에 뒤섞여서
들렸다.
“……하.”
꿈은 그게 끝이었다.
오늘 꾼 꿈 또한 내가 잊은 기억 중 하나인 걸까?
“……깼어?”
“네, 깼어요.”
“꿈을 꿨거든요.”
“무슨 꿈?”
“……아.”
“…….”
“맞나 보네.”
“……오늘.”
“네? 오늘이라고요?”
“아 참. 넌 그런 사람이었지.”
“……니까.”
그는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
* * *
“으윽. 너무 어렵다.”
“……바보.”
그날 보았던 바비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 조급해 보였고, 그렇기에 장소를 얘기하는 걸 깜빡한
듯했다.
나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바비?”
딸깍.
그는 나와는 다르게 방문을 단번에 잠가 버리기까지 했다.
바비는 한 걸음 두 걸음 내게 걸어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영문 없이 긴장되었다.
며칠 전과 똑같은 구도였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니까. 공작저엔 여러모로 방해꾼이 많아. 오늘은 아무도 방해하지
말았으면 해.”
나는 꽉 잠긴 문 쪽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무서워?”
“……바비.”
“……리나.”
“응.”
제 55 화. 나는 너만 있으면 돼
“…….”
그는 요한이었던 걸까?
“……역시나 안 되는 거구나.”
“그래도 포기 안 해.”
“그만큼 나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라는 애달픈 고백을 내뱉는 바비의 얼굴을 보며, 나는 요한만을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미안해.”
네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어.
토하듯 진심을 내뱉은 그는 자신의 얼굴에 마른세수를 했다. 바비의 얼굴이 괴로워 보이기만
했다.
“…….”
“그러니까 바비.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목매지 말고, 너도 너 좋다는 사람을 만나.
그럼 너는 행복해질 거야.”
“하, 하하.”
“…….”
바비는 후, 하고 짧게 숨을 골라냈다.
“…….”
“……바비.”
무슨 말을 꺼내려는 걸까.
“넌 쌍둥이야.”
“넌 세나와 쌍둥이라고.”
“……!”
세나와 내가 쌍둥이라니.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사실이야?”
나는 주먹을 꽉 쥐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럼에도 심장의 떨림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도리어 제 세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바비의 말은 이어졌다.
세나가 낳은 조슈아.
“…….”
공작부인이었던 세나.
나는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
“넌 그런 걸 모두 견뎌 낼 수 있어?”
“…….”
넌, 내가 알던 바비가 아닌 것 같아.
“리나.”
“리나.”
나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응.”
“…….”
내가 좋아하는 그의 미소.
“…….”
“내 마음 좀 제발 알아주라.”
* * *
나는 그 차가 조금은 그리웠다.
‘넌 세나와 쌍둥이라고.’
바비의 말대로 세나와 내가 쌍둥이가 맞고, 요한이 사랑했던 사람이 그녀였고, 조슈아를 낳은
사람 또한 그녀였다면…….
“말도 안 돼.”
나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똑똑.
“누구야?”
요한인 걸까?
제 56 화. 조슈아도 엄마 거야
“웅웅!”
“해야 할 일?”
나는 잡고 있던 아이의 볼을 놓아주었다.
“조슈아?”
……웬 케이스?
‘……오늘.’
요한은 세나의 생일이 오늘이라고 했다. 조슈아는 세나의 기억을 알고 있었던 걸까?
“응, 엄마 거야.”
“조슈아…….”
“얼른 받아 줘!”
“엄마! 생일 축하해!”
“……고마워.”
심각해졌던 게 무색했다.
본래의 뜻은 언제 알려 주는 게 좋을까.
아이가 훌륭한 밥맛이 되기를 심각할 정도로 바라기 전에. 그전에 알려 주어야 할 텐데.
나는 늦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휴. 다행이다.”
“이제 얼른 열어 보자!”
그러자 보인 것은 목걸이였다.
나는 그 순간 묘한 평온함을 느꼈다.
나는 의문을 표했다.
“아빠는 엄마의 생일 때마다 피아노를 쳐 줬대. 엄마는 아빠의 연주 소리에 따라서 춤을 추구~!
조슈아는 아빠의 얘기를 들으면서 항상 상상만 했어.”
“…….”
“하지만 오늘은 진짜로 보자! 아빠한테 피아노를 연주해 달라고 하고, 엄마는 춤을 추자!
조슈아가 엄마의 파트너가 되어 줄게.”
“얼른, 얼른.”
결국 백기를 든 쪽은 나였다.
* * *
“……싫어?”
“……알겠어.”
* * *
“뭐?”
그는 고개를 작게 갸웃거렸다.
“……바비가 알려 준 건가.”
오랫동안 조율을 하지 않은 거라고 믿기지 않게, 건반에서 울리는 소리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녹턴.
나는 그날 그런 것들을 떠올렸었다.
“……녹턴.”
요한은 세나가 죽은 후엔 피아노를 한 번도 치지 않았다고 했다.
“……어때?”
나는 성의 없이 대답했다.
“네에, 네에.”
“또…… 듣고 싶은 게 있어?”
또 듣고 싶은 음악이라.
제 57 화. 얼굴이 예쁜 여자
행복한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건, 누구나 바라는 것일 테다.
춤을 추던 조슈아가 내게 손을 뻗었다.
“나, 나도?”
“조슈아는 나를 좋아해?”
아이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나도 좋아해.”
“헤헤.”
“욘두 선생님!”
묘한 것은 그런 일련의 행동들에서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는 거다.
“킥킥.”
“와, 너 매너 엄청나다.”
“어, 그랬지.”
“……어.”
“누구한테요?”
“큭큭.”
“요, 요한 씨?”
……뽀뽀는 저가 한 주제에.
“아빠!”
* * *
“왜?”
“그럴까?”
“응!”
“어때?”
“나 같은 여자가 어떤 여잔데?”
“얼굴이 예쁜 여자.”
“……! 풉, 큭큭.”
나는 이마를 짚었다.
“엄마?”
“하아아암.”
“잠 와?”
“우웅. 눈이 감길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프다.”
“…….”
나는 그를 게슴츠레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싫어?”
오호라, 아주 능청맞은데.
“축하해.”
“…….”
“울어?”
“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거다.
“윽, 완전 밥맛.”
“…….”
“알려 주면 뭐 해 주실 건데요?”
“장난치지 마. 나 진지하니까.”
“조슈아요. 큭큭.”
“……조쉬? 나의 조쉬가?”
“그러게요.”
얼마 못 가 그는 내게 제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
“조쉬에게 질 수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욘두 쌤인 걸까요?”
요한 또한 내 말에 동의를 했다.
“그것도 일단은 보류. 갑작스럽게 해고했다가 도리어 마음을 삐딱하게 먹으면 어떡해. 그럼
우리뿐만이 아니라 조쉬에게도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어.”
“…….”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
“여기서 자고 갈래요?”
“넌, 넌 무슨 겁도 없이!”
“…….”
같이 자자고 한 건 당신이거든요?
요한은 꼭 내가 저를 잡아먹을 것처럼 군 듯이 말했다.
나는 능청맞게 대답했다.
“이미 알 건 다 아는데.”
“뭐?”
나는 혀를 쯧쯧 차며 요한을 놀렸다.
* * *
한가로운 오전이었다.
유일하게 열려 있는 방문 하나.
“…….”
옆얼굴은 또 어떠한가.
하대를 일삼을 것처럼 오만해 보이는 오뚝한 콧날. 날카로운 눈매. 기다란 속눈썹.
‘아, 이건 연인과 반쪽씩 주고받은 귀걸이입니다. 나머지 한쪽은 사랑하는 그 여자가 가지고
있죠.’
“……!”
“……세, 세나 언니……?”
세나 언니.
“세나 언니…….”
원래부터 눈물에 약하다.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있자면, 슬픔이 전가되는 기분을
자주 느끼곤 했다.
“…….”
하지만 나는 세나가 아니었고, 리나일 뿐이다. 그것이 현실이었고, 망자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었다.
“애석하게도, 저는 세나 씨가 아니에요.”
어깨 위로 여자의 손이 닿는 게 느껴졌다.
이명을 동반한 그 소리가 귓전을 사정없이 때렸다. 하지만 이번에 울린 목소리에는 흐느끼는
소리가 동반되지 않은 채였다.
‘……언니.’
“……!”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며 눈을 떴다.
“……에믈린?”
나는 그때 깨달을 수 있었다.
“……욘두 쌤.”
“…….”
“네, 맞아요. 소개가 늦었네요. 조슈아의 유모인 리나라고 해요. 그쪽이 정말로 에믈린……
이에요?”
“동생이요?”
그녀가 눈물을 흘리면 내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 그것은 요한이 울던 모습을 봤을 때 느꼈던
감상과 비슷한 것이었다.
* * *
“그럼 두 분은…….”
그녀는 내 나이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대뜸 언니라는 호칭을 부치며, 살갑게 굴었다. 물론
액면가로 보았을 때, 내가 나이가 더 많아 보이기는 했다.
“큭큭. 괜찮아요. 언니는 욘두의 매력을 몰라도 돼요. 왜냐면, 그의 매력은 저만 알 거거든요.
그는 제가 오래전에 찜해 둔 남자예요.”
“일단은 앉을래요?”
“네! 좋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엄청 들었죠. 실제로 세나 씨의 초상화를 보기도 했는데, 제가 봐도 진짜
닮았더라고요.”
그것은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자, 세나가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요한과 바비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양녀 후보로서 공작저에 자주, 오랫동안 기거했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세나를 떠올리게 하는 내 얼굴은, 그녀를 추억하는 뭇사람들의 마음을 나약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것만 같았다.
“특이한 행동이요?”
“그게 뭔데요?”
제 60 화. 욘두 쌤의 오래된 연인이에요?
“네, 그래서요?”
바라본 그녀의 눈가엔 눈물 자국은 없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말은 이어졌다.
“…….”
나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말해 주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오히려 제가 더
고마운 걸요.”
또 궁금한 것이라.
“…….”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기류만을 풍기던 그녀였다. 하나 지금 그녀 주변에 맴도는 기류가 제법
냉랭해져 있었다.
미소 덕분에 그녀를 둘러싼 차가운 기류는 사라졌으나 그 미소는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그 순간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잠깐 들었다.
“……!”
그 생각은 그러했다.
말도 안 돼.
나는 아연실색하며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그 생각은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내 추측 중
제일 신빙성 없는 것이었다.
“…….”
“…….”
“아참! 언니 저랑 같이 누굴 좀 만나 줄래요?”
“누구요? 요한 씨요?”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조슈아를 또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 * *
“오빠! 나 왔어!”
우리의 방문을 알리는 큰소리가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안쪽에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할머니!”
“풉.”
에믈린의 말은 이어졌다.
“……아.”
“네, 그렇군요.”
“……세나?”
노부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미소 지음에 눈가에 새겨진 주름이 조금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 저는 누구예요?
제 이름은 기억해요?
노부인의 집중이 에믈린 쪽으로 완전히 옮겨가자, 멀뚱히 서 있던 요한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내게만 들릴 법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나중에 둘만 있을 때 다시 만나.”
“너……!”
“…….”
“벨라도 함께 왔습니다.”
내가 에믈린과 세나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던 사이, 조슈아의 수업이 끝난 것 같았다.
조슈아는 영문 없이 등장한 나를 보고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다과를 준비해 온 벨라와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었다. 그러고선 그녀는 능숙하게 다과를
내려놓은 뒤에 방을 나섰다.
“그래. 조슈아야.”
노부인은 요번엔 사탕을 꺼내는 일조차 까먹은 것인지 인자한 미소만을 연신 지었다.
이윽고 조슈아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노부인과의 인사는 그쯤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이는 내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자세를 낮추어 아이의 귓전에
작게 속삭였다.
“벌레?”
“웅웅, 그 벌레는 소중한 기억을 갉아먹고 사는 벌레야. 할머니가 조슈아 이름을 계속 까먹는
건, 조슈아를 소중하게 여겨서 그런 거래.”
“…….”
맙소사. 나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욘두 선생님이. 그러니까 할머니가 똑같은 걸 계속해서 물어도, 놀라지 말라고 했어.”
욘두 쌤, 당신은 대체…….
치매를 앓아 누군가를 잊어가는 일을, 머릿속에 소중한 기억을 갉아먹는 벌레가 있다고 설명해
주다니.
“왜?”
“조슈아가 다시 알려 주면 되니까.”
나는 아이를 꼭 안아 주었다.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네?”
“아.”
“에믈린. 말이 지나치잖아.”
“…….”
바라본 에믈린의 얼굴은 처참히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저가 그러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만 같았다.
멋지게 한 번에 딱 안아 들고 싶었는데.
복도를 나오긴 했지만 막상 어디론가 가려고 하니, 행선지를 정할 수 없었다. 아이를 데리고
공작저를 대뜸 나설 수도 없었거니와 내 방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꼬르륵.
“…….”
“꼬르륵!”
“…….”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웅웅! 식당으로 가자! 조슈아는 과자를 먹고, 엄마는 고기를 먹어. 엄마는 고기를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잘 먹으니까.”
얜, 나를 왜 이렇게 잘 아는 거야.
* * *
“헤헤.”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접시에 잘 익힌 고기를 살며시 올리는 거지. 나이프로 작게 찔렀을 때
터져 나오는 육즙이란…….
그 고기를 한입 먹으면, 오늘 있었던 기분 나쁜 일을 완전히 잊을 것만 같아.
문제는 아마도 고기와 함께 나온 붉은 와인이었다. 입가심 정도로만 몇 차례 마셨는데, 어쩐지
오늘따라 취기가 조금 도는 기분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나는 지금 밥맛 요한이 제일 절실히 보고 싶나 봐.
나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작게 휘저었다.
“조슈아야. 난 괜찮아. 그런데 왜 이렇게 잠이 오는 걸까.”
* * *
그는 망설여졌다.
‘…….’
자신의 순간적인 망설임으로 인해, 리나의 얼굴은 삽시간 잿빛으로 변해 버렸다. 바보처럼
웃기만 하던 그녀의 얼굴이 흐려지는 것을 보는 건 자못 고통스러웠다.
그는 생각했다.
“…….”
요한은 냉랭한 그녀의 눈빛에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대답을 망설이기는 했으나,
에믈린을 감싸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
뒤늦게 대답한 에믈린의 목소리엔 쇳소리가 가득했다. 그녀는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에믈린의 날카로운 홍안이 요한에게 닿았다. 그러곤 그녀는 그가 대답을 망설였던 질문을
다시금 건네었다.
“도대체 뭘 묻고 싶은 거지?”
“저 여자를 좋아해?”
리나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든 어떻든, 리나를 향한 자신의 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확고한 대답은 확실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설령 그녀가 세나의 쌍둥이
자매라고 해도.
“가지 마, 오빠.”
“…….”
“리나!”
“……리나.”
……고기를 먹고 잠이 들었구나.
“아빠는 바보야.”
“…….”
요한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답이 명백히 정해진 에믈린의 물음에 대답을 머뭇거린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조쉬. 돌아가자.”
“응, 좋아.”
식사량을 더 늘려서, 아니, 더 좋은 고기를 준비해서 그녀의 몸무게를 늘려야 할까. 그러고
보니 요즘 같이 식사하지 않은 지 꽤 되었구나.
내려다본 리나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그녀는 잠에서 깨기는커녕 안긴 자세가 편한 것인지,
제 품에 더욱 파고들기만 했다.
리나가 이따금씩 고른 숨결을 내뱉을 때마다, 따스한 그 숨결은 요한의 가슴 어귀에 고스란히
닿았다. 그러자 숨결이 닿은 언저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요한은 온몸이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그녀를 안고 있고, 그녀가 내뱉는 숨결을
느꼈을 뿐인데.
얼마 못 가 요한은 리나의 방까지 걸어왔다. 그는 어느 시녀의 도움을 받아 방문을 열고,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히기까지에 이르렀다.
“……밥맛…….”
이전 날, 차마 잇지 못한 말은 그러했다.
리나만을 떠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달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세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리나에 대한 마음을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세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빠.”
조슈아였다.
“어, 조쉬.”
“에믈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물론 이모도 잘못한 게 있으니까, 엄청 사과하지는 않을 거야. 조금만 사과할 거야. 그리고
이모에게 꼭 해야 할 말도 있어.”
“리나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아 달라고 할 거야. 조슈아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걸, 조슈아는 두고 볼 수 없어.”
“……컥!”
“아빠, 얼른 가자!”
‘리나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아 달라고 할 거야. 조슈아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걸, 조슈아는 두고 볼 수 없어.’
아이는 세나의 이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리나를 만나기 전엔 종종 세나에 대해서 얘기를
해 달라고 칭얼거린 적도 있었다.
* * *
요한은 애꿎은 입술을 뭉그러뜨리며 여러 생각에 잠겼다. 잠들지 못하는 밤, 상념이 깊어지는
밤이었다.
“…….”
그는 눈도 뜨지 않은 채로 한마디를 읊조렸다.
“……영감.”
리나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듯하게 들렸다. 어째 익숙한 할머니 목소리
같기도 하고.
“……할, 할머님!”
우당탕.
“벨, 벨라!”
제 64 화. 모든 건 조슈아의 계획대로
“요한.”
“네, 할머님.”
“먼, 먼저 드십시오.”
* * *
때는 아마 점심시간이었을 것이다.
“나, 나는 가기 싫다니까!”
조슈아는 고개를 들어 올려, 잘생긴 자신의 아빠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이번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 웃으면 안 되지, 안 돼.
“조쉬! 나는 정말 싫다니까?”
많이 화가 난 게 아니어야 할 텐데.
조슈아는 외쳤다.
“……응, 들어와!”
요한의 얼굴이 무참하게 구겨졌다. 조슈아는 초조해진 얼굴로 닫힌 방문과 구겨진 얼굴을 한
요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엄마! 보고 싶었어.”
괜찮……은 걸까.
“안 돼.”
“조슈아야. 왜 안 돼?”
“……우린 가족이니까.”
“…….”
“…….”
이제 와 밝히는 건데, 조슈아를 앞세워 시작한 촌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녀의
마음을 단번에 함락시킬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뭐? 고기?”
“얼마나 준비했대?”
“엄~청 많이!”
“…….”
“언제까지 세워 둘 거지?”
“저기, 요한 씨.”
“어.”
“그래서…….”
“그래서?”
“……!”
“……하, 하하하.”
나는 이제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해도 되는 걸까?
그래도 너를 좋아한다고.
“뭐예요. 지금 저 비웃어요?”
“큭큭.”
“으응.”
똑똑.
“먹지.”
“잘 먹겠습니다!”
“고기가 조금 질기군.”
“좀 많이 익힌 것도 같군.”
얼마나 작게 속삭인 것인지, 그녀의 말은 요한에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답답한 얼굴로
리나와 조슈아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답지 않게 여러 번 말을 하고 있는 건데.
내용은 그러했다.
조슈아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고선, 다시금 요한의 귓가로 제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리나는 매우 의문스러웠다.
물론 잘 썰린 고기는 완전 감사지만.
“……어? 썰어 달라며?”
리나는 반문했다.
“예? 제가요?”
“그럼 누가 더 있단 말이지?”
“제가 언제 그랬어요?”
“뭐? 조잘……거려?”
그는 왠지 모를 자괴감마저도 느꼈다.
“킥킥킥.”
“…….”
두 사람은 직감했다.
“조슈아!”
“헤헷. 들켜 버렸네.”
완전 항복이었다.
* * *
에믈린의 날카로운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던 요한의 얼굴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던 요한의 일그러진 얼굴이, 왠지 괴로워 보이던 그의 얼굴이, 내 눈앞에
아른거렸다.
라는 말을 할 줄 알았던가. 바보 같아.
요한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답했다. 평소의 퉁명스러움은 일말도 없는 담백한 말이자,
미소였다.
“이봐요, 요한 씨. 할 말 있어요?”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터무니없는 연극을 하며 조슈아를 앞세운 이유는 나에게 사과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풉!”
“푸흐, 큭큭.”
아주 거침없는 평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혀를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조슈아의 마지막 말에, 우리의 얼굴엔 결국 짙은 미소가 새겨졌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을 따름이었다.
* * *
우리는 때마침 찻잔을 치우러 온 벨라에게 잠든 아이를 맡기었다. 벨라는 아이를 능숙하게
안아서 방을 나갔다. 아마도 조슈아는 자신의 침대에 눕혀질 것이다.
나는 대답했다.
“당연하죠. 저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어요.”
요한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부터, 공작저를 떠나지 못하게 했던 사람이 바로
조슈아였다. 아이가 주는 따스하고 긍정적인 느낌이 너무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쪽.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라.
나는 고개를 옆으로 비틀어 요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또다시 일순 흠칫할 정도로 우리의
얼굴은 아주 가깝게 닿아 있었다.
“잘했어요.”
서로의 입술은 찰나에 닿았다. 내 입술이 닿기가 무섭게 요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숨결을
집어삼켰다.
나는 그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요한 씨.”
“어.”
“…….”
하지만 요한의 얼굴엔 눈에 띄는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그저 나른한 욕망에 잠식되어 초점이
흐려졌던 그의 눈이, 다시금 선명해지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제 66 화. 네 필체를 확인해 보자
요한은 나를 비웃듯이 픽 웃었다.
그는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뒤에 이어 말했다.
“와우.”
“그러게요.”
“너 원래 그런 거 신경 안 썼잖아.”
“…….”
과거의 기억을 잃었지만, 잊힌 과거에 목메지 않으며 현실에 충실해 왔고, 뒷말을 하는
사람들의 의중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요한의 말은 이어졌다.
‘떠나지 마.’
그런 내가 사라진다면…….
“……당신은요?”
“큭큭.”
후련했다.
“아얏. 아파요!”
쪽.
“……이, 이건 약을 주는 차원에서…….”
“바보 밥맛.”
“리나.”
“네.”
“…….”
“나는 요즘 세나 꿈을 꾸지 않아.”
그는 휴,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슬퍼요?”
“…….”
“심한 열병처럼 앓던 그녀가, 막상 사라지려고 하자 후련한 기분까지 드는 거야. 미쳤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이젠 네게 좋아한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당신……. 많이 힘들었겠어요.”
“그녀도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지금 당신의 선택을 존중해 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행복을 빌어 줄 테죠.”
“……리나.”
나는 그의 호의에 대한 답을 내어놓았다.
“네, 감사합니다.”
그는 잠깐 놓고 있던 손을 다시금 꽉 잡았다. 그러고선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로 내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킨 후에 말했다.
“그게 뭘까요?”
“일단 가자.”
딸깍.
그것은 나도 익히 아는 물건이었다.
“……세나 씨의 일기장?”
“아…….”
나는 바보 같은 탄식을 내뱉었다.
바비는 나와 세나가 쌍둥이 자매라고 했고, 세나의 일기장엔 묘하게 달라 보이는 필체가 두
가지 존재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숨을 낮게 골랐다.
첫눈이었다.
“…….”
꽤 긴 침묵이 맴돌았다.
제 67 화. 현실에선 할 수 없는 일을 이뤄 내는 마법
“……달라.”
“기억을 잃으면, 필체도 바뀌는 걸까? 사람의 필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것은 아니니까.”
“어떡하지?”
“네?”
“어?”
“……큭큭.”
“뭔가가 떠올랐어?”
자극적인 것이라.
“……자극적인 게 뭘까요?”
나는 아주 노골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혀를 삐죽 내밀었다.
“하여튼.”
그는 도리어…….
이제 그다음 해야 할 일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같은 것의 절차를 차근차근 밟아갔다.
모든 것을 끝낸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누운 채로 마저 하지 못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은 궁금했으나 요한에게 묻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내 물음에 요한은 난처한 기색을 풍겼다.
하지만 그는 대답을 피하지는 않았다.
“나도 처음엔 웬 뜬금없는 방문인가 했는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나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찾아온 것 같아.”
“세나 씨의 기일…….”
세나를 떠올리며, 바라보는 이마저도 울컥할 구슬픈 눈물을 흘렸던 요한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차분함이었다.
그사이, 그의 말은 이어졌다.
“왜요?”
그는 대답하기를 잠깐 망설였지만, 이윽고 답을 내어놓았다.
“……!”
그것은 요한의 공작저에 머물며 있었던 일 중 제일 기괴한 일이었다. 내 얼굴과 세나의 얼굴이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도 훨씬 더 소름 끼쳤다.
“놀랐지? 미안.”
“…….”
“…….”
“……좋아하게 된 거니까.”
나는 작게 킥킥거렸다.
“…….”
“…….”
“왜, 왜?”
“평소에 욕 같은 거 많이 먹죠?”
“……흐음.”
“내 주름. 보기 싫어?”
맙소사.
어디 사랑스럽게만 바라볼까?
맙소사.
* * *
꿈속의 날은 밝았다.
나는 그때 알 수 있었다.
여긴 내가 아는 정원이야.
지금보다는 앳되어 보이는 요한과 세나, 아니, 리나, 아무튼 쌍둥이 자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들의 여유로운 휴식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꼭 그곳에, 더해 세계에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놀랍게도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요한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슨 약속?’
제 68 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듯한 기분
놀랍게도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요한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슨 약속?’
‘됐어. 하지 마. 부탁 안 하면 되잖아.’
아무래도 요한은 이 당시에도 세나에게 이성적인 호기심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나가 더 토라질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게 다 티가 났다.
‘사족이 참 길다.’
‘고마워.’
“……하.”
그리고 역할 바꿔치기.
“……!”
“역할……바꿔치기?”
쌍둥이와 관련된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고 할지라도, 세나는 자신의 역할을 리나가 빼앗는 것은
아닐지 은연중에 걱정했을 것이다. 심각한 질투를 했을지도 몰랐다.
‘왜 항상 너만 행복해져?’
“하.”
* * *
오랜만에 아주 개운한 잠을 잔 것 같았다. 아니, 정정하겠다. 아주 대단한 늦잠을 잔 거라고.
내 방으로 돌아가 벨라가 가져다준 가벼운 식사를 마쳤을 때,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리나 언니.”
에믈린이 애당초 내게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좋지 않지는 않았을 것이다.
“죄송해요.”
무언가를 말하길 주저하던 에믈린의 입술이 이윽고 열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
“에믈린…….”
“…….”
“그 장면을 본 건 정말 우연이었어요.”
“…….”
제 69 화.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어요?
“에믈린 씨.”
“……네.”
“…….”
사랑이란 게 그런 것 같다.
“…….”
“제가요?”
나 원. 나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왜요?”
“부리자면?”
나는 즉답했다.
“정, 정말이죠?”
하지만 아이가 욘두를 논하며 인상을 찌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해, 욘두가 가르쳐 준
희한한 말들을 아주 믿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네?”
에믈린은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생각이 뭔데요?”
“……컥!”
좋은 생각이란 게 미행이라니.
* * *
“네, 들어오십시오.”
“우선 앉으십시오.”
“차는…….”
“욘두 쌤.”
“네, 유모님.”
“그럼 혹시…….”
제 70 화. 버릇이…… 똑같아
“…….”
버릇이…… 똑같아.
욘두는 요한과는 어렴풋이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고, 바비와는 같은 버릇을 가지고 있다라.
세 남자. 꼭 형제 같아.
이건 마치 세 사람이 형제임을 암시하는 것만 같잖아.
“아. 그건 말이죠.”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린 것은 그때였다.
“그렇군요.”
나는 에믈린을 내려다보았다.
마법사 학회에 간다는 욘두를 미행할 필요성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은
에믈린이 하는 대로 따라 보자 싶었다.
“그래도 될까요?”
“그의 집 열쇠는요?”
“그래서요?”
“당연히 돌려주지 않은 채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죠.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그때부터
예상했다고나 할까요.”
“…….”
“오늘 하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니에요?”
욘두의 집은 세나의 일기장이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 안쪽엔 더 대단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에믈린은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마차는 곧 출발했다.
* * *
그는 대로를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을 요리조리 피하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우리는 욘두와 꽤
거리를 벌린 채로 그의 뒤를 조용히 따르기 시작했다.
그의 집을 털러……, 아니, 탐방하러 가는데 왜 그의 뒤를 따르느냐고 묻는다면, 그 이유는
단순했다.
가는 방향이 같았으니까.
욘두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집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꼭 자신의 집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처럼.
“아하. 그럴 수도 있겠어요.”
욘두의 걸음이 멈출 때까지 우리의 미행은 끝나지 않았고, 그에게 들키지도 않았다.
“…….”
“리나 언니.”
“네.”
“욘두 쌤…….”
그 순간 새삼 통감했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저흰 이제 어떡하죠?”
“좋아요.”
* * *
“휴.”
그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마법적 장치가 더해진 방으로, 욘두에게 허락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바로 그의 발 부근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꽃향기…….”
그러니까, 나와 에믈린이 원했던 ‘욘두의 오래된 연인’과 관련된 내용의 것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집에서 식사를 하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식기의 수는 거의 없었고, 여자의 흔적은 일말도
보이지 않았다.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미 꽃잎이다.”
그것은 한 장의 붉은 꽃잎이었다.
꽃잎에선 내가 맡았던 꽃향기와 같은 향이 맡아졌다. 하지만 이 작은 꽃잎 하나가 낸 냄새라고
하기엔, 내가 맡은 향은 제법 존재감이 확실했다.
꽃잎 한 장으로 인해서 맡은 냄새가 결단코 아니었다는 거다.
* * *
내가 찾은 것 중 제일 인상 깊은 것은 장미 꽃잎 한 장뿐이었다.
“아…….”
“…….”
“그렇군요.”
“…….”
그녀는 한 템포 쉰 후에 제 말을 이어했다.
“고마워요.”
아, 배고파.
공작저에 돌아가서 일단은 밥부터 먹어야지. 뭘 먹어야 맛있게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
장미를 좋아했던 너.
나의 불행을 바랐던 너.
나는 메마른 숨을 토해 냈다.
“…….”
“악몽이라도 꾼 거예요?”
잊힌 과거엔 소중한 추억이 당연히 많겠지만, 그와 반대되는 괴로운 추억도 있으리라 여겨졌다.
“그런 것 같아요.”
“네? 벌써 다 왔다고요?”
나는 문득 시선을 끌어내렸다.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리나!”
“……요한 씨?”
“리나.”
“네?”
“네가…… 봐야 할 것이 있어.”
제 72 화. 필체의 주인
“……작님. 공작님?”
요한은 후작의 말에 집중을 하려고 했다. 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제 머릿속, 리나의 존재감은
커져 갔다.
“…….”
그사이, 그의 발걸음은 그가 목표했던 곳에 도달해 있었다. 요한은 걷던 걸음을 멈추며,
입술을 떼어 냈다.
“……리나. 안에 있나?”
“안에……없나?”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리나가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이전에도 몇 차례 존재했었다.
리나는 제가 가라고 할 때까지는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요한은 그날 들었던
리나의 다짐을 되뇌었다.
리나를 찾아야겠어.
그렇지만…….
요한은 책상에 올려진 쪽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보아도 리나가 남긴 흔적이었다.
요한은 숨을 짧게 골라냈다.
“……!”
요한은 숨을 삼켰다.
익숙한 필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필체는…….”
요한은 쪽지를 꽉 쥐고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곤 세나의 일기장을 성급하게 찾았다.
사락.
“……리나.”
그녀를 꼭 찾아내야겠다.
* * *
“……리나!”
* * *
“그게 뭔데요?”
“큭큭. 저도 좋, 좋…….”
“리나.”
“네?”
“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야.”
“진짜로 뭘 알아냈는데요?”
“요한……?”
“……!”
“리나.”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73 화. 그 두 가지 사실 사이의 연결점
“그게 무슨……말이에요?”
“……요한 씨.”
“…….”
세나의 시신을 가져간 장본인을 찾고, 그녀의 시신을 되찾는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이
조금 더 명확히 해결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며 말했다.
“괴로워할 필요 없어요.”
그것은 이미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으로 사라진 뒤였다. 거기엔 요한이 잘못한 일은 없었다.
요한은 고민 없이 대꾸했다.
“아니. 그럴 일은 없어.”
나는 픽 웃었다.
“…….”
“욘두의 집……?”
“하.”
“알겠어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연인의 흔적은 개뿔. 그곳은 타인의 흔적이라곤 일말도 없던 곳이었다. 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대신 이걸 발견했어요.”
“겨우 장미 꽃잎 하나?”
“욘두가 네게……?”
“어. 그래서?”
“…….”
“어.”
“그리고 요한 씨가 거금을 써도 세나 씨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평범한 사람들로선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세나 씨의 시신을 훔쳐 갔기 때문이다.”
“…….”
“괜찮아요.”
그때 털어놓아도 늦지 않으리라.
“아무튼 저는 그 방이 의심돼요.”
“…….”
이봐요, 요한 씨. 털어놓지는 못했지만, 욘두가 진짜로 세나를 좋아했을지도 몰라요.
나는 대답 대신 마른 침을 삼켰다.
“왜요?”
“리나.”
“엄마!”
나는 잘 가늠할 수 없었다.
“할, 할머님.”
테레사 할머님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요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다가오는 것에만
그치지 않으며, 요한의 소맷자락을 끌어당겼다.
“……컥!”
“…….”
하나 내 자리를 빼앗긴 사실이 조금도 애석하지 않았다. 도리어 무릎을 바짝 세우고, 정좌를
한 요한의 모습이 자못 우스웠을 따름이었다.
“흐윽, 흑…….”
웬 울음소리일까?
함께한 미행. 내게 고백한 에믈린의 속사정. 에믈린은 심지어 요한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했던
일화를 내게 토로했다. 그것도 안 지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은 나에게.
대신, 에믈린이 한 생각과 같은 생각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이곳에 세나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
“무슨 같은 말?”
“……조쉬.”
* * *
나는 미소로 회답했다.
“바비를 만나야겠어요.”
“안 돼.”
“…….”
요한은 침묵한 채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아주 복잡 미묘한 눈빛. 내 말을 선뜻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아는 듯했다.
“아, 아니야.”
“아니라니까.”
“미행을 할게.”
요한은 단순히 서로의 입술만을 맞대고 있었다. 마치 내 입술의 윤곽을 제 입술로 기억하려는
것처럼.
얼마 못 가 입술은 떨어졌다.
그것 또한 아주 아주 애석한 일이었다.
나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의 말이 내 귀엔 그렇게 들렸다.
“그럼요?”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벨트 위에 손을 올렸다.
“내가 그걸 왜 마셔?”
“…….”
“제, 제가 아는 요한 씨가 맞는 거죠?”
그는 나를 조금 더 꽉 껴안고선 이어 말했다.
맞닿은 요한의 몸이 너무도 뜨거웠다. 아니, 뜨겁게 달아오른 쪽은 어쩌면 나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의 어깨 위에 얼굴을 기댄 채로 심호흡을 했다.
평온하기만 했던 심장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
“좋아해.”
“요한 씨……?”
“부디 부탁할게.”
나를 안아 든 요한의 발이 향한 곳은 침대 위였다.
제 75 화. 귀걸이의 주인
그날 밤엔 이상한 꿈을 꾸었다.
‘……!’
나는 꿈이라는 것도 잊은 채 당황했다.
……세나?
그녀를 세나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녀가 나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풍성한 금발 머리를
가진,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아름다운 그녀.
그녀는 느릿한 동작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 있었다. 실제로 느릿하게 민 것인지, 꿈이기에
그녀의 동작이 느리게 보이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절벽은 떨어진 돌멩이가 지면에 닿는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의 아득한 높이를 가지고 있었다.
설마…… 나는 지금 이 절벽 밑으로 떨어지려는 건가?
‘……!’
몸이 추락하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하아.”
조금 전에 꾼 꿈이 그 사연임이 틀림없다.
나는 나와 닮은 여자…… 즉, 세나로 추정되는 여자로 인해 절벽에서 떨어진 것이다. 나를
증오했던 나의 자매가 나를 절벽에서 밀어뜨린 것이다.
“…….”
“……세나.”
나는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동시에 눈가에선 후드득 눈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울어?”
* * *
“……후줄근하군.”
당연히 조슈아를 공작저에 놔두고 가려고 했지만, 조슈아의 고집을 도저히 꺾을 수 없었다.
‘흐으윽. 엄마, 아빠가 조슈아를 버리고 어디론가 가려고 해. 흐윽. 지금 조슈아를 데리고
나가지 않는다면, 나를 버린 거라고 생각할 거야.’
조슈아가 울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것은 요한 또한 다름이 없었다. 아이의 극단적인 표현에,
우리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되었다. 완전 항복이었다.
나는 그때 이마를 짚었다.
제 76 화. 엄만 날 뭘로 보는 거야. 조슈아만 믿어
미행과 숨바꼭질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왜냐면, 요한은 미숙한 형이라 바비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짐작하지 못했으니까.
“엄마 배에서 배고픈 소리가 나면, 조슈아의 마음이 아파. 그래서 조슈아는 엄마가 항상
배불렀으면 해.”
“……그럼 아빠 배는?”
“…….”
“……하.”
“네?”
“무슨 말이요?”
“아니, 제가 애도 아니고…….”
나는 이번에도 그의 말을 대충 따라 했다.
“잘했어.”
나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 * *
“리나.”
“왜요?”
바비는 어쩐지 한량 같고, 여자를 좋아할 것 같고, 술과 향락을 즐기며, 도서관의 ‘도’
자도 모를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의외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죽이곤 했다.
“날 뭘로 보고. 나만 믿어.”
* * *
“큭큭.”
이윽고 나는 도서관 안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뭐 읽어?”
“사랑 이야기.”
“…….”
“각박하네.”
나는 그 점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 인정.”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비는, 언니가 사랑했던 남자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조슈아가 손가락질을 받아도 되겠느냐는
혹독한 말을 남겼었다. 나는 그가 남긴 잔인한 말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 하하.”
먼저 말을 꺼낸 쪽은 바비였다.
“응, 맞아. 나는…… 내가 세나와 쌍둥이인 사실을, 네가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
“……응.”
“…….”
“나는…….”
“좋아, 그럼 이제 가자.”
“어디를?”
“…….”
나는 늦지 않게 대답을 해 주었다.
* * *
“리나. 찾는 게 있어?”
“어?”
나는 조금 전, 내가 했던 말을 상기해 보았다.
나 원. 요한의 말투였잖아.
나는 이마를 짚었다.
“요한에게 옮았어?”
“빌어먹을 형이 별걸 다 옮겼네.”
“그러게. 별걸 다 옮았어.”
“응. 좋아.”
우리는 가까운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로 들어가고, 창가에 있는 자리에 자리를 잡고, 시원한
음료가 나올 때까지도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나지 않았다.
“리나.”
“……응.”
“…….”
“우웩. 웬 근거 없는 자신감이야.”
“…….”
“오, 그 겁쟁이가?”
“요한 씨가 왜 겁쟁이야?”
“너…… 요한 씨를 꽤 걱정했구나.”
“리나.”
“응.”
바비는 늦지 않게 제 말을 이어 갔다.
“행복해야 해, 리나.”
바비 또한 허술했던 우리 데이트의 끝을 인지한 듯싶었다.
“……바비.”
“…….”
나는 바비가 나라는 사람을 완전히 등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와의 인연을 이대로 정리하기엔
그와 나눈 추억이 너무도 깊었다.
“울 것 같은 표정 짓지 마. 착각하고 싶잖아.”
“…….”
“…….”
“응. 듣고 있어.”
……욘두.
제 78 화. 형아. 나 싫어?
“별로 안 놀라네?”
“왜?”
진짜 리나가 아니었을까.
흔해 보이는 상앗빛 셔츠를 입고, 얼굴을 반쯤 가리는 모자를 썼지만, 그럼에도 뛰어난 체격과
잘생긴 얼굴을 숨길 수 없는 내 남자, 요한.
“아빠는…… 글쎄.”
“…….”
알고 있었던 걸까?
“……어?”
* * *
“조슈아는 단 게 좋아.”
“어휴.”
갑작스럽게 등장한 요한과 조슈아는 얼결에 우리와 합석하게 되었고, 좁은 의자임에도 요한과
조슈아는 기어코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고.
“흠흠.”
요한은 괜스레 멋쩍은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선 그는 저 멀리 두었던 유리잔을 다시금 집어
들었다.
바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요한은 그제야 바비와 진득하게 시선을 맞추었다. 먼저
입술을 뗀 쪽은 요한이었다.
하긴. 요한은 지난밤, 형으로서 미숙했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자조했었다. 그러한
그였기에, 바비에게 사과의 말을 먼저 꺼낼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허!”
“리나와 나는 이제 서로의 마음을 완벽하게 확인한 사이야. 네가 끼어들 틈이 없다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리나의 손을 잡지 말도록.”
“……리나. 봤지? 요한이 이런 놈이야. 형이 이런데 어떻게 우리의 관계가 개선될 수 있겠어.”
“…….”
“…….”
어쩐지 애달픈 기운이 가득한 듯한 얼굴. 그것은 누군가를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이를테면
세나라든지.
‘시작은 세나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우리 사이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어. 우리를 중재해
줄 세나는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우리의 사이는 악화된 상태로 굳어진 거야.’
“…….”
그 대화, 좀 우스워야지.
* * *
“고마워.”
나는 내 옆에 앉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싫어요?”
“너도 그래?”
요한은 대답 대신 내 손을 꽉 잡았다.
“…….”
“…….”
“바비의 말을 믿어?”
제 79 화. 내가 너의 삼촌이란다
“……하.”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제 마음을 얼마나 송두리째 빼앗아 갔는지. 그녀가 진짜로 가지고
있던 게 무엇인지.
그렇게까지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요한, 유모님, 그리고 바비. 그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바비와는 실제로 몇 차례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푸흡.”
바보 같은 요한의 모습을 떠올리기 무섭게 욘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비웃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선대 가주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황당해 했을까. 어쩌면 목덜미를 잡고선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 알면서도 그들 모두를 그대로 둔 이유는, 역시나 그녀가 곧 살아날 거라는 강인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욘두의 마음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이러다간 그녀가 살아나기 전에, 요한과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계획이 들통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으니까.
“…….”
대화를 나누지 못해도 이렇게나 좋은데, 실제로 대화를 나눈다면 얼마나 흥분이 될까.
제집을 방문한 이는 요한 하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아무래도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는 누군가가
또다시 방문한 듯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쯤에.
장장 4 년간 준비해 온 일이었다.
* * *
다음 날, 일찍 잠에서 깬 욘두는 서둘러 공작저에 갈 준비를 했다. 그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늘 조슈아에게 가르쳐 줄 자료를 꼼꼼히 챙겼다.
그리고 조슈아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 매력은 아이를 절대로 미워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욘두의 어머니가 그곳에 가기를 권유했기 때문이다.
‘욘두. 랭카스터 공작가에 가서, 그곳의 가주를 만나고 와 주렴. 내 이름을 댄다면 그가 너를
도와줄 거란다.’
“……공작저에 도착했습니다.”
* * *
욘두는 펼쳐진 책장 위에 머리를 누이고 잠든 조슈아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욘두가 내어 준
책을 읽던 아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 버렸다.
조슈아 너는 아니?
내가 너의 삼촌이란다.
우리는 피를 나눈 사이란다.
제 80 화. 나만 불행한 것 같아
욘두는 소파에 허리를 깊숙이 기대었다.
창가로 들어온 따사로운 햇볕이 내비치는 한가로운 오전. 어쩐지 사색에 잠기기 좋은 시간이자
분위기였다.
누군가의 죽음을 논하는 구슬픈 욘두의 말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냉랭했다.
‘돌아가.’
욘두는 생각했다.
저 아이처럼 좋은 옷을 입고 있었을까?
저 아이처럼 깨끗했을까?
저 아이가 배를 곯은 일은 없겠지.
나만……불행한 것 같아.
욘두는 다음날에도 랭카스터 공작가를 찾아갔다. 물론 쫓겨날 각오를 한 채였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자신을 곧바로 내치지 않았다.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만나 주었다.
욘두는 거기서 작은 희망을 가졌다.
‘……어머니를 도와주세요.’
하나 내뱉는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위압감이 가득한 아버지의 모습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는다면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감, 감사합니다!’
‘……네?’
‘하……할게요! 하게 해 주세요.’
욘두가 긍정을 하자, 아버지의 매질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욘두는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르게 된다면, 어머니를 돕지 못하게
되니까.
‘……하.’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버지는 차갑게 등을 돌렸고, 욘두는 그대로 그 방에서 끌려나갔을
뿐이다.
순간 묘한 실망감이 들었다.
‘…….’
‘……!’
요한.
욘두는 확신했다.
욘두의 깊은 사색을 깨운 것은 현실 속, 조슈아의 한마디였다.
“……생님. 욘두 선생님!”
욘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칫.”
‘돌아가.’
“욘두 선생님.”
“정말로 무슨 일이 없는 거지?”
그러곤 그는 생각했다.
제 81 화. 세나의 기일
“배가 고픈 것 같아요.”
“미쳤어요?”
대답이 너무 거칠었나.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일단은 입술부터.”
“어때? 내 입술 같아?”
나는 그의 입술 위에 짧게 입을 맞추고선 대답했다.
“어때? 내 얼굴 같아?”
나는 손끝으로 그의 뺨을 매만졌다.
“…….”
“그래서 싫어요?”
“갑자기?”
“싫음 말고.”
“……나 원.”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우리는, 밤이 되면 습관처럼 서로를 찾았다. 그러곤 무언가에
이끌리듯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어쩌면 우리의 동침은 이미 공작저 내에도 파다하게 소문났을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마주친
사용인들이 나를 보며 숙덕거리는 모습을 몇 차례 본 것도 같다.
“리나.”
“네.”
그는 숨을 낮게 골랐다.
* * *
* * *
우리는 사제 한 사람을 대동한 채로 공작저의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날은 다소 쌀쌀하기는
했으나 걷는 데에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였다.
“웬 장미예요?”
장미.
욘두가 준 시들지 않는 장미, 나의 자매가 좋아했던 장미, 그리고 욘두의 집에서 맡았던 짙은
장미의 향기마저도.
“그전에는요?”
“일기장. 기억 나?”
나는 네, 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라일락을 좋아했던 세나는 나와 필체가 같았고, 장미를 좋아했던 세나는 나와 필체가 달랐다.
야산의 중턱이기는 했으나, 이곳은 관리가 무척이나 잘 되어 있었다. 요한이 그동안 이곳을
얼마나 열심히 관리한 것인지, 나는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길지 않은 기도는 곧 끝이 났다.
“…….”
“리나. 괜찮아?”
있죠, 요한.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세나를 추모하기 위해 공작저에 방문한 할머님과 에믈린은 저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무섭게
공작저를 나섰다.
대화를 이어 준 것은 내 옆에 서 있던 조슈아였다.
“……에믈린, 너.”
나는 작게 키득거렸다.
“오빠나 잘해~!”
요한의 신경을 단단히 건드리는 에믈린의 말을 마지막으로 마차는 출발했다. 우리는 마차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 * *
“엄마? 아빠?”
조슈아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휴, 다행이다.”
* * *
“…….”
“정말요?”
그는 쿨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잖아. 제집에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만 남을 뿐.”
“…….”
나는 이마를 짚었다.
* * *
“요한.”
“응?”
“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응.”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알아.”
딸깍.
요한은 문고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전에 내가 돌렸을 땐 절대로 열리지 않았던 문이었지만…
….
딸깍.
“……!”
어째서 잠겨 있지 않은 걸까?
“방 안이 장미로 가득해요.”
“…….”
“……엇!”
쾅.
“리나! 괜찮아?”
커다란 침대…….
“……찮아? 리나!”
제 83 화. 그걸 이제 알았니?
제일 처음 느낀 것은 냄새였다.
하지만 꾸준히 관리한 것인지, 정취가 꽤나 훌륭했다. 일렬종대로 심어진 같은 종류의 꽃들,
잘 손질된 정원수들. 크기가 작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나는 아이의 뒤를 쫓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긴 금발, 하얀 피부, 오뚝한 콧대, 그리고 비슷해 보이는 연령대.
‘……!’
쌍둥이라.
나는 자연스럽게 ‘세나’와 ‘리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잠든 리나가 눈을 뜬 것은 그 순간이었다.
‘……!’
‘나를 찾아 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공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리나,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 봐.”
“……요한.”
“휴……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다.”
“……네 기억?”
“네.”
“일단은 나가자.”
“……좋아요.”
에믈린과 나의 은밀한 방문은 흔적을 남기지 않은, 완벽한 것이었다고 여겼다. 하나 욘두는
거기서 무언가의 낌새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
마차에선 설핏 잠이 들었다.
마차에 올라타 요한의 어깨에 잠깐 기대고 있었는데,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공작저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그가 잡은 손을 차마 빼내지 못했다.
“……많이 걱정했나.”
세나의 일기장이었다.
“…….”
그리고 역할 바꿔치기.
나는 그날, 리나라는 이름을 절규하듯이 부르던 세나의 목소리를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벌을 받아 마땅한 그런 짓.
그렇다면…….
탁.
‘그걸 이제 알았니?’
……리나.
“……리나, 깼어?”
“리나! 또 왜 그래?”
“괜찮……아요. 잠깐 두통.”
“의원을 불러올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깊게 심호흡했다.
까맸던 눈앞이 다시금 환해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밝아진 시야 앞으로 내비친 것은 욘두의
집에서 보았던 환영과 같은 풍경이었다.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은 두 아이를 키워 보자. 남몰래 키운다면, 모진 풍파가 다가오지 않을지도 몰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건강하게 컸고, 리나는 침대에 누워서 지내는 날이 늘어 갔다.
라고 강조하셨으니 말이다.
‘……아버지.’
양보하는 일은 이제 지긋지긋해.
……끔찍해.
그 후론 상황이 역전되었다.
온화한 눈으로 나를 보았던 리나의 눈빛이 어떻게 변하는지, 나는 조금도 헤아리지 않았던
것이다.
‘있지, 리나. 들어 봐. 오늘은 요한과 바비가 달리기 시합을 했어. 하지만 순탄했던 건
아니었어. 요한이 그랬거든. 자기는 체통을 지켜야 하는 공자라서, 달리는 일 따윈 하지
않겠다고. 큭큭.’
‘…….’
‘…….’
‘…….’
‘……리나?’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순간이었다. 가만히 누워 있었던 리나가 몸을 일으켜 내게
달려들었다.
‘……!’
리나의 얼굴은 고약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 얼굴은 꼭 터지려는 울음을 참아 내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리……리, 나…….’
‘왜 항상 너만 행복해져?’
제 85 화. 역할 바꿔치기의 초석
‘…….’
‘하지만 언니는 뭐야? 언니는 뭘 했길래 모두의 사랑을 받는 거야? 언니가 한 일이라곤 고작
건강한 몸으로 여기저기 나다닌 것밖에 없잖아.’
‘……리, 리나.’
‘양보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언니가 내게 뭘 양보했어? 언니가 내게 양보한 건 하나도 없어.
언니는 언니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을 뿐이야. 결국 좋은 곳의 양녀가 되려는 사실도, 언니
본인을 위한 거잖아.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시궁창 같은 우리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
병수발은 그만 들기 위해.’
‘제발…… 그, 그만.’
차마 묻지 못한 말이었다.
‘…….’
‘컥, 하…….’
‘……!’
‘……괜……괜찮아.’
‘……세나 언니.’
하지만 나는 어쩐지 리나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우리가 물보다 진한 피로 연결되어 있기에
느낄 수 있는 이해일 수도 있었다.
아픈 동생을 무조건 위해 주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은,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도 내 머릿속에
강하게 낙인이 되어 있었다.
‘…….’
‘……응.’
‘…….’
괜찮은 걸까?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요한.”
“어.”
“……어?”
눈물로 인해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보이는 요한의 얼굴엔 충격도, 놀람의 기운도 없었다.
“괜찮아. 울지 마. 내가 다 들어 줄게.”
“…….”
나는 말을 잇지 못한 채로 눈물만을 흘렸다.
과거를 선명하게 떠올린 순간에 요한과 함께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물을 닦아
줄 요한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 * *
하지만…….
고백하듯이 내뱉은 그녀의 말이, 거짓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엔 진심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제 과거를 힘겹게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리나를, 아니, 세나를 안아 주어야 했으니까.
세나는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리나는 세나와는 다르게, 제가 겪었던 이야기를 세나에게 세세히 토로하지 않았다.
첫 아이,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무사히 낳았다는 사실에 몹시도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사고가 있었던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오던 날이었다. 왠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류가 가득한 날.
‘알겠어. 나가자.’
리나는 그날 말을 참 많이 했다.
상가와 집들로 즐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주변은 웬 녹음들로 가득해져 있었던
것이다.
‘언니. 이제 다 왔어.’
‘여기는 어디야?’
‘……응.’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하늘엔 여전히 먹구름으로 가득했고, 도착한 풍경이 녹음을 감상하기엔
…….
‘여긴 절벽 아니니?’
‘그렇구나…….’
‘이리로 와 봐.’
이내 마주한 절벽은, 마차가 여기까지 올라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아득한 높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리나?’
‘리나!’
세나는 몸이 추락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마지막 몸부림으로, 리나의 귀에
걸린 에메랄드빛 귀걸이를 잡아챘다.
“하…….”
요한은 마른 숨을 토해 냈다.
요한은 괴로웠다.
“……응.”
“…….”
“하지만 내가 한 말은 그대로야.”
“어떤 말이요?”
“네가 진짜 세나든, 리나든 상관없다는 말.”
아주 긴 밤이었다.
* * *
그 순간 든 생각은 하나였다.
* * *
아이를 깨울 수는 없으니까.
“조슈아. 내가 진짜 네 엄마였다니…….”
“우웅…… 엄마?”
조슈아는 제 옆에 누운 내 모습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두 눈을 몇 차례 비비적거렸다.
“조슈아. 잘 잤어?”
“내가?”
“조슈아. 사랑해.”
똑똑.
“응! 들어와!”
“그렇군요.”
나는 그 순간 그것을 보게 되었다.
“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좋습니다.”
* * *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조슈아의 공부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욘두 쌤.”
“네, 유모님.”
욘두에게 묻고 싶은 말은 정말 많았다.
“아…… 그러시군요.”
“…….”
“그렇습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제 88 화. 리나 님이 계신 곳
“……!”
나는 깜짝 놀라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음…….”
“…….”
욘두는 쉬지 않고 이어 말했다.
“……!”
나는 무릎 위에 올려 둔 두 손을 꽉 그러쥐었다.
“그게 뭐죠?”
“……네?”
더 이상의 설득과 권유는 없었다. 욘두는 앉았던 몸을 깔끔하게 일으켰다. 그러곤 기다란
다리로 방문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 * *
“세나 님.”
“……네.”
“좋아요.”
“그녀는 처음에 자신을 세나라고 소개했습니다. 양녀가 되기 위해서 그곳에 머무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
‘가엾어라.’
공감.
욘두는 제게 있어 리나는 첫사랑과 비슷한 것이라고 했다.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콱 조이는
듯한 기분을 주는 그녀라고 해야 할까.
욘두의 말은 이어졌다.
“……알겠어요.”
“세나 님. 저를 뒤따라오십시오.”
“네…….”
“도리어 덜컥 겁이 났을 따름이었습니다. 설마 이대로 리나 님이 죽어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그래서요?”
“…….”
앞서 걷던 욘두의 걸음이 멈춰 섰다.
“자, 이곳입니다.”
보여 드리고 싶은 것.
나는 낮게 숨을 골랐다.
그래서일까.
어렸을 때 지냈던 곳.
나는 욘두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며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었던 건, 역시나 비슷한 환경이
가져온 공감 때문이었던 걸까?
질투, 분노, 그리고 원망……. 욘두가 요한에게 느꼈을 감정과, 리나가 내게 느꼈을 감정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
“……네, 그렇습니다.”
“……!”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두려우십니까?”
이번엔 내가 침묵했다.
“…….”
“그것이 아니라면, 다시 만난 리나 님이 당신께 다시 역할 바꿔치기를 하자고 제안할까 봐
두려우신 겁니까?”
……둘 다 두려워.
왜일까.
“……잠깐만요.”
“네.”
리나는 분명 4 년 전에 죽었다.
“하, 하하하.”
“…….”
“그러기 위해서 요한 님과 조슈아 님을 뒤로한 채로 여기까지 저를 따라온 것이 아닙니까?”
괜찮을……까.
“이곳에 계십니다.”
“휴.”
“…….”
리나가 입고 있는 드레스일까?
“……리나?”
나는 주먹 쥔 손을 펴 입가를 가렸다.
정말로 리나다.
“욘두 쌤.”
“네, 세나 님.”
“왜라고 생각하십니까?”
“…….”
“푹 쉬십시오.”
* * *
“그동안 리나 님이 누워 계신 것만 봤는데…….”
욘두는 그 사실에 작은 희열을 느끼곤 했다. 모자란 것 없이 완벽해 보이는 요한에게도 부족한
것이 존재하는구나 싶어서.
리나든 세나든, 제가 만나는 여자가 누가 되었든 잘해 주었던 요한. 그리고 그러한 요한에게
어린 리나는 매번 환하게 웃어 주었다.
죽음이 예견된 데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녀였지만, 욘두는 그녀를 쉬이 포기할 수 없었다.
리나는 욘두가 태어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유일한 여자였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을까.
욘두는 그 순간 직감했다.
욘두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찾아간 공작가, 그리고 마주하게 된 공작부인은
세나가 아닌 리나였다.
(욘두는 세나가 요한과 결혼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리나 님은 요한 님을 여전히 좋아하시는구나.
다른 건 다 양보했습니다.
가진 게 그다지 많지 않다.
욘두는 후회했다.
하염없이 쏟아지던 겨울비. 슬퍼하던 요한과 바비. 그리고 리나의 관에 세워진 비석.
욘두는 괴로웠다.
‘너는 정말 노력파구나.’
어머니의 약값을 벌기 위해서, 공작의 모진 매질에도 끝끝내 공작저로 찾아갔던 자신을 보고선
한 말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당황했던 것은 잠깐이었다.
세나가 조슈아의 유모가 되고 그녀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올 무렵, 욘두는 영원히 시들지 않은
장미를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까.
어린 시절, 욘두가 리나에게 주었던 에메랄드빛 귀걸이 하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 * *
“조쉬.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아.
“……세나가?”
믿을 수 없게도, 어젯밤 같이 잠들었던 세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어쩐지 눈앞이
아찔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서없이 말하던 조슈아는 이윽고 울음을 터트려 버렸다.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에선 서글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를 찾아야겠다.
“조슈아도 같이 찾아볼래…….”
“넌 여기서 잠깐 기다려.”
“조슈아도 같이…….”
그가 제일 먼저 간 곳은 세나의 방이었다.
“……세나!”
하나 그녀의 방은, 오래전부터 비워져 있었던 것처럼 고요했다. 요한의 외침에 돌아온 것은
정적뿐이었다.
요한은 조슈아의 공부방을 찾아가기도 하고, 응접실을 찾아가기도 하고, 간간이 마주친
사용인들에게 그녀의 행방을 묻기도 했다.
“……망할.”
* * *
“…….”
“…….”
“……조쉬, 그런 거 아니야.”
“…….”
“조쉬…….”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한 이는 조슈아였다.
“……!”
조슈아는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 세나가 썼던 ‘리나’라는 이름을 정확하게 내뱉고 있었다.
아이가 리나의 이름을 뱉어 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깜짝 놀라 버린 요한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제 91 화. 미안해요
요한은 혼란스러웠다.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
“…….”
요한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두 손을 꽉 그러쥐었을 뿐이다.
꼭 만나야 되는 인연 같은 게 아닐까.
“……조쉬. 네 말이 맞아.”
“그래, 조금 더 찾아보자.”
사람들을 시키기는 했지만, 조슈아와 함께 그녀를 조금 더 찾아보자는 결심을 한 순간이었다.
그들의 대화에 다른 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뭐?”
……조슈아였다.
“조쉬, 미안.”
“그럼 이제 다 같이 나가자!”
“바비. 나도 네 말에 동감해.”
요한은 대답했다.
“즉, 욘두가 리나에게 ‘지금 꼭 욘두를 따라나서야 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며, 리나를
꼬드긴 게 아닐까?”
그 정보는 바비에겐 유익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욘두라는 남자가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바비는 아주 오래전에 욘두의 뒤를 몇 차례고 미행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알게 된 것은 그의 집 두 채였다.
“그곳이 어디야?”
요한은 되물었다.
“두 집?”
“…….”
“당장 가 보자!”
* * *
그다지 좋지 않은 징조였다.
“…….”
“…….”
“미안해요.”
욘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 * *
그래서 우선은 조슈아를 데리고 공작저를 나왔지만,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한다면 아이는
뒤따라온 기사들에게 맡길 참이었다.
“바비, 그런데 너는 왜 공작저를 찾아 온 거야? 그날 이후로 네 마음은 모두 정리된 게
아니었던가?”
그 이유는 아마,
‘즉, 욘두가 리나에게 ‘지금 꼭 욘두를 따라나서야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며, 리나를 꼬드긴
게 아닐까?’
바비의 그 말 때문이리라.
얼마 못 가 마차는 멈춰 섰다.
“이곳이야.”
요한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
“…….”
“응! 기억해.”
“게임?”
제 92 화. 당신의 형입니다
바비의 말은 이어졌다.
“응!”
“그렇구나.”
유모로 들인 여자가 자신의 엄마가 아님을 앎에도, 그런 사실을 조금도 모른다는 듯이 모두를
속인 녀석답지 않은 순종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
제발 아무 일도 없어 줘.
“바비, 들어가자.”
“좋아.”
찰칵.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세나는 지금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닐까?
끼이익.
집 안은 그리 어둠침침하지 않았다.
생활감이 없는 빈집.
저 안에 무언가가 있을 거야.
“어.”
“긴장 돼?”
두려워하지 말자.
드디어 찾았다.
하지만 바라본 리나의 시신에는 부패한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너무도 산
사람처럼 보여서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였다.
그러나 리나에게선 아무런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을 쉼에 당연히 부풀어 올랐다 내려가야
할 그녀의 흉부 또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요한은 그제야 이 방에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요한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욘두.”
“세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욘두는 즉시 대답했다.
“무슨 짓을 했을 것 같습니까?”
“…….”
“…….”
제가 한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정답이라고?
“리나를 알아?”
“으윽…….”
그는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요한의 고개는 오른쪽으로 꺾어질 듯이 돌아가 버렸다.
욘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요한은 반문했다.
“내 아버지를 알아?”
“네, 아주 잘 압니다.
리나와 세나의 얼굴이 닮은 것처럼.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신의 형입니다.”
“……!”
“놀라셨습니까?”
“…….”
요한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
“그러다 소년은 아버지의 진짜 아들과 자주 만나는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소녀는
소년의 안타까운 사정을 기꺼이 들어 주었고, 공감해 주었으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
그리고 역할 바꿔치기.
사랑.
요한은 얼마 못 가 알 수 있었다.
‘사랑해, 세나.’
아픈 채로도 제 사랑을 바라던 세나의 정체는, 세나의 자리를 질투한 리나였던 것이다.
요한은 절박했다.
“…….”
“닥치세요.”
“……빌어먹을 놈.”
요한은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던 다리가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욘두가 마법을 풀어 준 듯싶었다.
“…….”
하지만 욘두는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제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감에 기뻐해야 할 텐데.
“……형제라며.”
“…….”
즉, 요한은 욘두를 괴롭히고 멸시한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욘두를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해 주었을 뿐이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욘두는 믿을 수 없게도 요한에게 아무런 짓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안해요.’
그 마법은 세나를 죽이려는 마법이 아니라, 세나가 가진 강인하고도 아름다운 생명을 리나에게
반쯤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세나의,
‘미안해요.’
그때 그에겐 요한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토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곧 현실이 되어,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
곧이어 유리창 너머로 그들을 바라보는 동그란 에메랄드빛 눈동자마저도 등장하고 말았다.
“……조슈아 님?”
욘두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
하지만 요한의 절규는 조슈아에게 닿지 않았다. 욘두는 아이의 말이 들리는 것만을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
그는 차마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래, 저 눈빛 때문이다.
제 94 화. 나는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지 않아
미안하다는 세나의 말이 환청처럼 귓속에 맴돌았고, 슬퍼할 조슈아의 얼굴이 환영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만.
누군가를 완벽하게 미워할 용기. 누군가를 완벽하게 증오할 용기. 누군가를 완벽하게 저주할
용기.
“……요한 님.”
“……욘두.”
요한이 애원하고, 절망하고, 무너져 내리고 있지만, 욘두는 역시나 통쾌하지 않았다.
회생한 그녀가,
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그래요, 리나 님.
욘두는 리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녀의 피부가 닿은 손끝엔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우연처럼 맞잡았던 세나의 뜨거운 손과는 완전히 달랐다.
“…….”
리나가 원하는 거?
그건 당신 하나뿐일 거야.
쾅! 쨍그랑!
* * *
나는 긴 꿈을 꾸었다.
‘응. 너를 찾았어.’
‘미안.’
‘하긴 언니는 언니의 이름을 제대로 알기까지도 엄청 오래 걸렸으니까.’
‘리나.’
‘어. 원망해.’
‘…….’
‘…….’
‘…….’
리나의 말은 쉼 없이 이어졌다.
‘……리나.’
그런 네가 밉지 않은 이유는 왜일까.
‘할 말 다 했어. 인제 그만 나가 봐.’
‘…….’
“……요한.”
조슈아 수업을 하기 위해 공작저로 찾아온 욘두. 그와의 대면. 그의 고백. 스산한 빈집.
그리고 발견한 리나의 시신.
요한이 나를 찾아 준 걸까?
“……세나?”
“네, 깨어났어요.”
“대머리는 싫은데.”
“……미안해요.”
“…….”
이윽고 요한은 내가 잠든 사이에 있었던 일을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에 내가 느낀 감상은 씁쓸함이었다.
요한의 이야기가 구두점을 찍었을 때, 나는 격심한 아픔을 느꼈다. 물리적인 상처는 조금도
없었음에도.
나는 요한의 손을 부여잡았다.
요한은 대답했다.
“…….”
그가 내게 아무 짓도 못 했던 이유.
“……요한.”
“…….”
“하, 그랬군.”
“네. 저도 맹세할게요.”
나는 그런 요한이 사랑스러웠다.
“세나.”
“네.”
“…….”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그게 뭔데요?”
“밥맛 요한.”
“…….”
맙소사, 그 말이라니.
상상하지도 못한 말이잖아.
그래,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이상한 일이지.”
“뭐가요?”
내겐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 나는?”
“당신은 뭐요?”
나는 작게 킥킥거렸다.
“그래서 대답은?”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한 번 더 말해줘요.”
“사랑해.”
“5 년 치 몫까지 다 듣고 싶어요.”
“사랑해.”
“사랑해.”
“이젠 제발 행복하자.”
“응.”
‘…….’
나는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요한은 내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미음을 먹을 때에도, 심지어 화장실을 다녀올 때까지도.
내가 사라질 일은 영영 없어.
잠에서 깬 조슈아였다.
“나도 좋아해.”
“그럼 매일 매일 셋이서 같이 자자!”
“세나.”
“네.”
“알겠어요.”
넌 지금 어디에 있니?
-完
제 96 화. 외전 1. 조슈아의 고민
조슈아는 그때 생각했다.
그렇게 토로해야지.
요한에게 물어보아도,
* * *
잠에서 깼을 땐,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얼레, 깨어 있었네.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그럼 저도 깨워 주지.”
“어땠는데요?”
“절경이었지.”
“조슈아는요?”
“……아침부터요?”
“그리고 세나.”
“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이미 볼 것 못 볼 것을 다 본 사이에…….
“벨라. 들어와.”
“네, 좋은 오전이에요.”
리나 님.
“……!”
“와! 두 분! 축하드려요!”
오간 설명은 딱히 없었지만, 벨라는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확인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아주 객쩍은 생각이었다.
“그러게요. 저도 신기하네요.”
“바비 님이 찾아오셨어요.”
바비라니…….
좀 의외인 인물이었다.
요한의 대답 또한 의외였다.
“네, 알겠습니다.”
벨라는 유려한 인사와 함께 뒤돌아섰다. 그러고선 방을 완전히 나가기 직전, 우리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건네었다.
“베, 벨라!”
“…….”
“……바비에게 가 볼까?”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알고 있어요.”
“…….”
“……세나.”
그러니까 뭐랄까.
* * *
응접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바비는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는 초조한 걸음걸이로
방 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리, 리나!”
괜찮아?
어디 아프지는 않아?
“포옹은 여기까지.”
이것도 많이 참은 거야.
“바비, 너……!”
나는 얼른 그들을 중재했다.
긴 서두는 필요 없다.
“고백할 거?”
“……!”
“바비. 내 말을 믿어?”
나는 그의 말에 긍정을 해 주었다.
“애석하게도 그래.”
“아니. 그렇게 된다면, 욘두가 더 나쁜 마음을 먹게 될지도 몰라. 세나, 네 생각도 그렇지?”
나는 대꾸했다.
요한에게 장난을 치며, 요한과 반말을 하며, 요한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그 세나로.
“……엄마. 울어?”
“엄, 엄마. 왜 울어? 조슈아 때문인 거야? 조슈아가 또 잘못을 해 버린 거야? 흐어엉.”
* * *
“응!”
조슈아라면 그 말을 하겠지.
“틀렸어.”
“그것도 틀렸어!”
‘사랑해요.’
“……!”
“……!”
나는 깜짝 놀랐다.
“조슈아…….”
“…….”
“그래도…… 리나가 행복해 보였어도, 조슈아가 사실을 말하면 리나가 우리를 떠날까 봐
두렵기도 했어. 내가 리나를 엄마라고 불러야지, 리나가 우리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욘두 쌤.
이유는 나도 잘 알 수 없었다.
나는 입가를 틀어막았다.
‘…….’
“……나도 가족이야.”
제 98 화. 외전 3.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딱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욘두에 대한 내 평은 그러했다.
“응. 듣고 있어.”
“다른 생각했지?”
그는 단언했다.
“응. 그런데?”
공감.
“안길래?”
“교육?”
“응.”
“요한. 미래의 일은 더 생각하지 말자. 욘두가 그녀를 살리든, 결국 살리지 못하든. 우리는
지금 현실에 집중하자. 네가 그랬잖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고.”
“……어.”
“물론. 나도 마찬가지야.”
네 목을 조르고 싶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때, 그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조슈아에게 충분히 해코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작 일기장에 분노를 표하는 게 아닌, 실제로 끔찍한 일을 저지를 시간과 여유가 있었을
거라는 거다. 리나는 무려 1 년간 내 행세를 했으니까.
망설임.
* * *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
‘하지만 너무해. 그런 이유로 조슈아의 선생님을 그만둔 거라면, 적어도 조슈아에게 마지막
인사는 해 주어야 하잖아…….’
그것으로 충분했다.
“피곤하니까 얼른 같이 자자.”
요한은 작게 킥킥거렸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
“내 말에 따라 줘서 고마워.”
“하고 싶은 말이 한 가지 더 있어.”
“비꼬아서 말 하지 마.”
“…….”
“……요한?”
쾅.
“…….”
제 99 화. 외전 4. 라일락, 첫사랑
나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 앞까지 걸어간 순간이었다. 내가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방문이
먼저 열리기 시작했다.
“요한……?”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나는 그 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라일락.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
“…….”
“그래서 내 꽃은 안 받아 줄 건가?”
“흠흠. 예쁘군.”
요한은 어울리지 않게 열없는 소리를 했다. 그의 귀 끝은 언제나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요한의 말.
세상에서 제일 다디단 말.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말.
첫사랑. 요한 또한 내게 있어 첫사랑이었다.
“사랑해.”
다른 말은 필요 없어.
“받아 줘서 고마워.”
“그럴지도 모르지.”
“좋네. 네게 미쳤다는 건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니까.”
“깨달았거든.”
“뭘?”
나도 기억을 잃은 내내 너를 그리워했어.
그리고 나는 너를 자주 꿈꿨어.
내 곁에도 네가 필요해.
그 또한 그날을 기억하듯이.
* * *
“내 손을 처음 잡았던 날? 그게 언제였더라.”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열 살 때. 그때 내가 네 손을 처음 잡았어.”
* * *
나는 화장대의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바라보았다.
“긴장한 건가…….”
똑똑.
요한일까? 아님 조슈아?
“누구세요?”
“……나야, 바비.”
나는 그의 방문을 응해 주었다.
“들어와.”
리나가 나를 증오했던 마음도, 요한을 질투했던 욘두의 마음도, 나를 사랑했던 바비의 마음도
……. 시간이 흐르면, 결국은 조금씩 흐려질 거라고.
나는 그 점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진심이었다.
“예쁘다.”
그건 당연한 일이지.
오늘은 다른 날이 아니라, 내 두 번째 결혼식이니까.
나는 바비를 따라 미소 지었다.
“바비…….”
“큭큭.”
“기꺼이.”
“응! 얼른 들어오렴.”
잘 다려진 검은색의 바지와 앙증맞은 흰 셔츠, 그리고 귀엽게 둘러진 멜빵이 조슈아와 퍽이나
잘 어울렸다.
“엄마…….”
제 100 화. 외전 5. 첫눈이 다시
“그러면 곤란한데.”
나는 짧게 숨을 골라냈다.
“그래서 서운해요?”
이내 완전히 가까이 다가온 요한은 자세를 낮추어, 조슈아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조쉬, 너……!”
맙소사.
“……피. 좋아. 그럼 조슈아가 오늘 하루만 아빠에게 양보할게. 대신, 엄마를 또다시 슬프게
하면 안 돼!”
* * *
그러나 내겐 주어진 시간이 많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잡화점 내외는 내 사정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우리의 결혼식을 축하하러 흔쾌히 와 주었다.
“축하해, 리나!”
나는 그 사실이 궁금해져.
“…….”
“……긴장 돼?”
“응……. 긴장 돼. 이상하지?”
“넌 왜 긴장한 거야?”
“큭큭.”
이제는 우리 차례였다.
우리는 좀 전보다도 아름다워진 그 길을 함께 걸어가야 했다.
“세나.”
“응.”
“나와 영원히 함께할 준비가 됐어? 이번엔 절대로 너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너와 헤어지지
않을 거야.”
“물론이지.”
“좋아.”
“……눈이다.”
“첫눈이네. 옛날 생각난다.”
“그래. 다행이다.”
그 말은 제법 익숙한 말이었다.
먼저 운을 뗀 이는 요한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내 손끝을 부여잡았고,
아마 내가 죽는 순간까지 잊지 못할 광경이리라.
* * *
욘두는 그녀의 기억을 조금 더 움켜쥐려고 애썼지만, 흩어지는 기억을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제 101 화. 굉장한 소식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질투가 났다.
망설임.
잠든 그는 며칠째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손을 잡으면 온기가 느껴졌다. 현실에선 결단코 느끼지 못했던 온기였다.
‘나, 돌아왔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나, 돌아왔어.’
그의 손이 리나의 얼굴을 감싸던 순간, 리나의 앙상한 손가락 하나가 까딱하고 움직였다.
* * *
나는 요한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조슈아의 유모로서?”
“네가 가진 걸 다 줘.”
“응.”
“요한, 너!”
“큭큭.”
“이리로 와.”
요한은 말했다.
“응, 요한.”
* * *
입덧이 아니려나.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자네는 그만 나가 봐도 좋아.”
“하나만 해.”
“사랑해.”
내가 제일 좋아할 법한 말이었다.
“우리에게 와 줘서 고마워.”
아이가 실제로 태어났을 때, 요한이 얼마나 아이를 사랑스러워할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웁!”
“갑자기?”
“우욱!”
“……!”
“풉, 큭큭.”
나는 연신 미소를 지었다.
화장실로 뛰어들어 간 요한은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는 이제 여섯 살이 되었다.
“응! 엄청 잘 듣고 왔어.”
조슈아는 이제 더 이상 욘두를 찾지 않았으며, 새로운 가정교사에게 잘 적응한 터였다.
“뭔데?”
“왜? 왜 안 돼?”
있지, 요한.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