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868

졸지에 엄마가 되었다

제 1 화. 엄마 맞아. 우리 엄마잖아

때때로 꾸는 꿈이 있다.

그 꿈속에서는 남자 하나가 나왔다. 그 남자와 나는 어느 넓은 방 안에 존재했다.

우리는 침대 위의 창가로 내비치는 따스한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사방은 조용했다. 고요한 적막 속의 유일한 소리는 우리의 숨소리뿐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온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늦지 않게 내게 손을 뻗어


나를 안았고,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았다.

‘정말 괜찮겠어?’

나를 안고 있던 남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곧장 대답한다.

‘응,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상관없어.’

안고 있던 몸이 불시에 떼어지며, 남자는 내 손을 꽉 그러잡았다. 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기설기하게 엮인 다섯 손가락의 감촉이 몹시 선명했다. 내 손등을 조용히 매만지는 남자의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붉게 상기된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침과 동시에 남자는 햇볕이


스민 내 몸 곳곳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남자의 입술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타인의 숨결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곳까지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 입맞춤에 응하듯이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

남자는 내 이름을 부르며 성마른 숨을 토해냈다. 나는 남자를 조금 더 꽉 껴안았다.

그 꿈은 그게 끝이었다.

지난 오 년간 자주 꾸던 같은 꿈이었지만, 꿈에서 깨고 나면 모든 것이 흐릿했다. 남자가 나를


부르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고, 더해, 남자의 얼굴 또한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남자의 목소리 하나뿐이었다. 그 목소리는 듣고 있자면 절로


황홀해지는 좋은 목소리였다.

* * *
발걸음이 무겁다. 다리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힘겹게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배
속에선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한 발자국 옮기면 꼬르륵. 두 발자국 옮기면 꼬르륵.

마지막으로 음식다운 음식을 먹었던 게 언제였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


일했던 식당에서 쫓겨난 이래로 제때에 식사를 챙겨 먹은 적이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꽤나 고약한 악취가 내 코끝을 자극했다. 씻은 지는 언제였더라.

아, 배고프다. 이대로 걷다간 따가운 햇살 밑에서 아사할 게 분명해.

나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밥을 구하지?


어디서…….

그 순간이었다.

손바닥을 대고 있던 바닥에 웅웅거리는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진동은 점점 커지며,


이윽고 타닥타닥하는 발소리마저도 들렸다. 발소리는 멈출 기세 없이 점점 더 빨라지더니 이내
내 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게 가까이 다가온 것을 확인했다.

먹을…… 건가?

“…….”

먹을 건 개뿔. 다가온 것의 정체는 꼬마 아이였다.

다섯 살쯤 되었을까. 볼살이 포동포동 오른 금발 머리의 남자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어쩐지


감동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온종일 찾고 있던 장난감을 드디어 찾은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아이의 얼굴을 관찰했다. 얼굴에서부터 윤기가 좔좔 흐르는 것이 보통 귀티가 아니었다.


입고 있는 옷은 또 얼마나 고급스럽게 보이던지, 손에 닿기만 해도 손가락이 흘러내릴 것처럼
매끄러워 보이는 옷이었다. 아마도 귀족 꼬맹이인가 보다.

감동스러운 표정을 짓던 꼬맹이는 나를 이리저리 관찰하더니, 이윽고 제 몸을 굽혀 쪼르르 내


품속에 안기었다. 내 품에 쏙 들어온 남자아이에게선 아주 좋은 냄새가 났다.

……내게선 이토록 좋은 냄새가 나지 않을 텐데. 나는 아이가 맡을 내 냄새가 염려되었다.

“얘야.”

나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우웅.”

아이는 귀엽게 옹알거리며 대답했다. 그 모습이 퍽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엄마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아들 하나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아이는 악취가 나는 내 품에서 나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되레 나를 더욱더 꽉 껴안았다.


“얘야, 넌 누구니?”

나는 다시금 아이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러자 내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아이가


소리쳤다. 아주 이상한 호칭으로 말이다.

“엄마!”

엄마라니?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아이를 낳은 적이 있던가? 소실된 내 기억 속에 이 남자아이가 존재하고 있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남자아이가 너무나도 낯설었다. 적어도 내 아이였다면,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잊힌 기억은 여전히 무언가에 꽉 막힌 채였다.

그래서 나는 일단 아이를 달랬다.

“꼬맹아, 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난 네 엄마가 아니란다.”

나는 아이를 떼어 내려 했다. 귀족 아이가 거지 같은 사람의 품에 안겨 있는 모양새는


바람직하지 못했다. 아이의 진짜 엄마나 아빠가 이 모습을 본다면, 되레 내가 욕을 먹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엄마 맞아. 우리 엄마잖아.”

하나 아이는 내가 저를 떼어 내려 하면 할수록 내게 더욱더 안겨 왔다. 어째서 이 아이는 나를


자신의 엄마라 착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이의 진짜 엄마가 나와 닮은 걸까?

또 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이번엔 보폭이 조금 더 큰 발걸음이었다. 아마도 성인 남자쯤으로 예상되는 발걸음 소리다. 그


발소리는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와 멈추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게 가까이 다가온 새로운
인물을 바라보았다.

“조쉬! 더러운 건 만지면 안 된다고 했지!”

내가 예상했던 대로 역시나 성인 남자가 맞았다. 그것도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잘생긴 남자.

남자의 굵고 낮은 목소리는 내게 안긴 아이를 질타했다.

‘조쉬’. 아마도 나를 끌어안고 있는 꼬맹이의 이름인 듯했다. 아니, 잠깐. 그렇다면 ‘


더러운 거’라는 건, 설마 나를 일컫는 건가?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원래


사실은 콕 집어 말할수록 기분이 나쁜 법이다. 그리고 나는 억울했다. 내가 먼저 이 아이를
끌어안은 것도 아니었거니와, 아이가 갑자기 달려와 내게 안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오로지 아이만을 바라보던 남자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불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그를 진즉부터 바라보고 있었기에 우리의 눈은 단번에 마주쳤다.
남자는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눈동자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픈 빛이
내비치는 눈동자였다. 남자의 우울한 눈동자를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나 또한 갑자기 슬퍼졌다.
이전에도 남자의 눈동자를 올곧게 마주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 이상한 생각마저도 든다.

이 남자는 누구일까. 조쉬의 아빠인 걸까?

남자의 슬픈 눈동자 때문이었을까. 나는 분명 ‘아이가 먼저 뛰어와 나를 껴안았다.’라는


변명의 말을 꺼내려 했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남자의 눈동자는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동요였다.

“……세나?”

남자의 매혹적인 입술이 어느 이름을 뱉어냈다.

‘세나.’

남자의 목소리에선 제 눈동자와 닮은 어떤 슬픔이 뚝뚝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미간을 옅게 찌푸리며 ‘그럴 리가 없지…….’라는 혼잣말과 함께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곤 여전히 내 품에 안긴 조쉬라 불리던 남자아이에게 말했다.

“조쉬, 얼른 이리로 오지 못해?”

남자의 목소리가 제법 격해졌다. 방금 전 세나를 찾던 아련한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남자의 목소리가 한순간 너무도 급변해, 나는 내가 잘못 들었던 것은 아닐는지
하는 착각이 일었다.

조쉬라던 아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돼. 엄마가 여기 있는데 내가 어떻게 혼자 가?”

아이가 내 품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내 허리를 감싼 아이의 손아귀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아이를 떼어 내 버리지도, 그렇다고 남자에게 뭐라 하지도 못한 채 멀뚱거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

남자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신형을 낮추었다. 이내 허공에 뻗어진
남자의 손이 아이에게 향했다. 저가 직접 내게서 아이를 떼어 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남자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무시무시했다. 아무래도 곧 사달이


날 게 분명하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남자가 폭발하는 것보다도, 내 배 속이 먼저 폭발해 버린다.


꼬르륵.

그것은 흡사 마른하늘에 천둥과도 같은 소리였다. 아이는 소리의 근원지인 내 배 쪽을 유심히


바라봤고,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맥 빠진 소리를 내었다.

나도 생리 현상은 어쩔 수 없다고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엄마, 배고파?”

“꼬마야. 나는 네 엄마가 아니지만, 배는 고프단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대답을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생글생글 웃는 아이의 모습을 보자 괜스레 아이의 말에 대답해 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겼다. 남자는 그런 내 모습에 기가 찼던지 허, 하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더니, 이윽고 아이를 우악스러운 손길로 완전히 채 갔다.

아이는 나와 떨어지기 싫은 것인지, 남자에게 끌려가면서도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더불어


손을 뻗은 채로…….

“엄마! 엄마!”

라고 울부짖었다.
아,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지. 마음은 아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아빠에게 끌려가는
아이를 다시 끌고 올 수는 없었다.

마주친 아이의 눈동자가 너무도 슬퍼 보인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네 엄마가


아니니까. 나는 아이의 간절한 눈동자를 외면했다. 미안해, 꼬맹아.

갑작스럽고 황당했던 상황이 이렇게 종료되는 건가, 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아이가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고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곤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서럽게 울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으어어엉. 아빤 나빠. 엄마를 길거리에 버려둔 것도 모자라서, 이젠 배고픈 엄마에게 밥도


주지 않으려고 해. 엄청 나빠……. 흐윽.”

아이는 작은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방대한 성량으로 울부짖었다. 그 덕에


대로변을 거닐던 사람들이 우리들을 힐끔거리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잘생긴 미남자는 아이의 아빠가 확실했고, 그렇다면 배고픈 엄마라는 건……. 지금 나를


말하는 건가? 어째서 내가 배고픈 엄마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배가 고픈 건 맞았다.

“조쉬! 얼른 일어나지 못해? 저택으로 돌아가면 아빠한테 혼날 줄 알아!”

남자의 목소리가 더욱더 커졌다. 그의 하얀 목덜미에는 가느다란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조쉬, 너 저택으로 돌아가면 진짜로 저 남자한테 혼쭐이 나겠다.

하나 남자의 화가 난 음성에도 아이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되레 더욱 큰 소리를 내며 제


아빠를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아빠가 엄마를 여기에 버리고 간다면, 나도 여기 있을 거야.”

“넌 도대체가! 네 엄마는…….”

“엄마는 여기에 있잖아!”

조쉬는 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배고픈 엄마는 아니지만 배가 고픈 나를.

남자는 소리쳤다.

“네 엄마는 여기 없어!”

“저기 있잖아!”

“조쉬. 저 더러운 것은 너의 엄마가 아니야.”

“아빠가 돌봐 주지 않았기 때문에 더러워진 거야!”

“조쉬……. 하.”

남자는 더는 말을 이어 하지 못한 채로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당돌한 녀석일세. 두 사람의 고집에는 한 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았다. 저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왠지 피곤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남자가 얼른 아이를 데리고 조용히 사라져 주길.
나는 잠시나마 그렇게 바랐다.

하지만 내 바람과 상반되게 미남자의 시선이 불현듯 내게 향했고, 그가 또다시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남자의 고운 얼굴이 고약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봐, 거지.”

거지? 누굴 부르는 거지?

나는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에, 딱히 나 말고는 거지라고 불릴 사람이 없다는 걸 인지했다.


거지처럼 보이긴 하지만 거지까지는 아닌데. 나는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며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네, 거지가 대답합니다.”

“혹시 일하는 곳이 있나?”

“아니요. 얼마 전에 잘렸어요.”

“그래. 그런 꼴인데 일하는 곳이 있었다는 게 더 이상하군.”

“뭐라고요?”

이 남자가 진짜 뭐라고 하는 거야?


남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뻔뻔하게 대답했다.

“혹시 일을 해 볼 생각이 없나?”

“무슨 일이요?”

“일단은 저택으로 가서 얘기하지. 아이가 진정하지 않잖아.”

그사이에도 아이의 대성통곡은 이어지고 있었다. ‘아빠가 엄마를 버렸어.’ ……라는 소리와
함께.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는 점점 파렴치한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선뜻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초조한 얼굴빛을 띠었다.

걷던 것을 멈추고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숫자도 점점 늘기 시작했다. 이것 또한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주목을 받아 버린 기분이었다.

“얼른 대답해 줬으면 좋겠군.”

남자는 나를 보챘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쉬이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낯선 사람에게 가지는 최소한의 의심 때문이었다.

이 남자를 따라가도 괜찮은 걸까?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남자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훑어봤다. 잘생기고 좋은 옷을 입은 남자는 사기꾼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번에 그에게 신뢰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남자는 내 눈빛에 서린 의심스러운 기운을 알아차린 듯이 말했다.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건가?”

얼레, 눈치도 꽤 빠르네.

나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지금 거지가 당신을 의심합니다.”

나를 거지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절대로 뒤끝 있게 구는 건 아니다.

남자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한마디를 뱉어냈다.

“나는……. 요한 랭카스터야.”

“네?”

“……요한 랭카스터라니까?”

요한.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려 보려 애썼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채로 거리를 방황하던 내게, 그와 관련된 무언가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짧은 감상평을 남겼다.

“흠, 좋은 이름이네요.”
“컥!”

남자는 심각한 얼굴로 제 이마를 짚더니 이어 말했다.

“기가 막히는군. 잘 들어. 나는 최연소로 공작위를 물려받았고, 수많은 공적이 있지. 황제


폐하께서 직접 사사한 공로패도 있어. 이젠 내가 누군지 알겠나?”

그러니까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지? 나는 그가 최연소로 공작이 되었다든지, 공적이


있다든지에 대한 것에는 관심이 그다지 없었다. 내가 지금 유일하게 관심이 있는 일은…….

꼬르륵. 배 속에선 또다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당신을 따라가면 밥은 주죠?”

“그걸 말이라고 하나.”

요한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좋아요, 갑시다.”

“어딜?”

“당신을 따라 밥을 먹으러.”

“나 원.”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밥을 먹으러 가자는 게 그토록 허탈한 일이었던가.

나는 허탈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내 귓가에는 그의 웃음소리와 목소리가


여전히 저며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곱씹어서 생각하자니, 갑작스럽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낮고 중후한 남자의 좋은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기분이 든다. 어디서 들었더라.

“아!”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 목소리의 출처를 곧장 기억해 냈다.

‘정말 괜찮겠어?’

자주 꾸던 꿈속에서 들었던 그 남자의 목소리와 요한의 목소리가 닮아 있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에게 대뜸 물음을 건네었다. 그건 정말로 생각 없이 건넨
물음이었다.

“요한 랭카스터 씨.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나요?”

제 2 화. 정말 많이 닮으셨어요
두서없는 내 물음에 요한은 표정을 굳혔다. 그는 잠깐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는 낯빛을 띠더니
이내 대답했다.

“……하, 기가 막히는군.”

“뭐가요?”

그는 미간을 옅게 구기며 이어 말했다.

“정말 고전적인 작업 수법이잖아. 그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이 한두 번이어야지. 벌써부터 내게


다른 마음이 생긴 거라면 곤란한데.”

그는 정말로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 순간 나는, 억지로 인연을 만들어서 요한에게 작업을
거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확신했다. 꿈속에서 나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던 그 남자가 요한일


리는 없다고.

내가 잠깐 착각한 것이 틀림없다. 더군다나 요한 같은 잘난 남자와 기억을 잃은 채로 길거리를


방황하던 나 사이에 접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더해, 요한에게는 엄청 귀여운 남자아이도 있는걸. 이미 결혼한 듯한 요한 랭카스터 씨와 내가


그런 야한 짓을 했을 리가…….

기억을 잃은 이래로 연거푸 꾼 같은 꿈. 나는 그 꿈이 잃어버린 내 과거의 기억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한 채로 나를 한껏 비웃던 요한은 내게서 등을 돌리며 말했다.

“거지 네 마음은 알았으니. 이만 따라오도록.”

“그런 거 아니에요!”

요한은 들은 체도 하지 않으며 앞서 한 발자국 먼저 걸어갔다. 그러곤 그는 나지막이 혼잣말을


읊조렸다. 듣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말이었지만, 내 귀엔 그의 말이 똑똑히 들렸다.

“소름 끼치도록 불결한 냄새가 나는 여자에게 받은 고백이라니.”

뭐? 불결한 냄새가 나는 여자의 고백? 지금 나 욕한 거 맞지? 나한테 냄새난다고 한 거지?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물론 그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말했다…….

“저 밥맛.”

……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나 보다.


앞서가던 요한의 걸음이 별안간 멈춰졌다.

나는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흠칫 놀라며 어깨를 작게 움츠렸다. 그는 주저 없이 홱


뒤돌아보며 내게 대꾸했다.

“뭐라고? 밥맛? 거지, 지금 내게 밥맛이라고 한 건가?”

아니, 저가 내게 거지라고 한 건 아무렇지도 않고, 내가 저에게 밥맛이라고 한 건 문제가 되는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변명 같은 말을 내뱉었다.

“저기 그러니까, 밥맛이…… 그립다고요! 아이고, 배고파라. 하하.”

어색한 내 웃음이 요한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은 것인지, 그는 찡그린 표정 하나 풀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한숨과 섞인 푸념에 가까운 말이었다.

“내가 이런 여자와 그녀를 착각하다니.”

나는 그의 말이 묘하게 기분 나쁘면서도, 요한과 그의 아들이 나를 보고선 어떤 착각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요한은 분명 나와 ‘그녀’를 착각했다고 했다. 아이가 나에게 엄마라고 했으니, 요한 또한


자신의 아내와 나를 착각하기라도 한 걸까?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나와 요한 사이로 조그맣고 귀여운 무언가가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의 정체는 길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서럽게 울고 있었던 아이였다.

아이는 언제 울음이 그친 것인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볼살이


만두처럼 부풀어 오른 게 다시 봐도 참 귀티나고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엄마, 조슈아 집에는 맛있는 게 엄청 많아. 우리 집에 가자, 응?”

자신을 조슈아라고 칭한 아이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내 손엔 남자아이의 고물고물한


손가락의 감촉이 느껴졌다.

“알겠어요, 오구오구.”

내 밥줄 예쁜이. 오구오구.

모르는 사람을 무턱대고 따라가도 되나, 싶은 생각이 재차 든다. 그러다 나는 지금의 내


처지를 상기했다.

요컨대 세 들어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 갈 곳 없고 돈도 없는 내 처지. 요한이 말한 대로 거지


같은 처지이긴 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렇긴 했다. 젠장.

거지 같은 내 처지를 생각한다면, 요한을 따라가는 게 맞았다. 나는 또다시 내게서 등을 돌린


채로 앞서 걷기 시작한 요한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가 딱히 내게 나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의 아이 때문에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니, 아이 때문에라도 이상한 짓을 할 것 같지 않다고나 할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김에 일단 그들을 따라가서 밥부터
먹어야겠다. 허기짐을 해결하고 난 뒤에 그다음 일은 그때 생각하지, 뭐.

아이는 내 손을 이끌었다. ‘밥 먹으러 집으로 돌아가자!’라는 유혹이 담긴 말과 함께. 나는


못 이기는 척을 하며, 앞으로 몇 걸음을 내디뎠다.

챙겨갈 짐도 없었던 나는, 아무런 미련 없이 어느 마차에 올라탔다.

* * *

함께 탔던 마차가 멈춰 선 곳은 크기가 매우 큰 저택이었다. 그 크기를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다.

제 입으로 저의 대단함을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요한의 말대로 그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인가


보다. 아니, 대단한 부자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려나.

이렇게 큰 저택에서 살려면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할까. 나는 턱을 조금 벌린 채로 대저택을


감상했다.

요한은 나를 힐긋 보고선 한마디의 감상을 남겼다.

“턱이 빠지겠군.”

막 엄청 기분 나쁜 말은 아닌데, 묘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건 왜일까.

“엄마. 뭐 해? 얼른 가자.”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내리자 행복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조슈아가 보였다.

아이가 너무 행복한 얼굴로 말해서, 나는 차마 ‘나는 네 엄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란다.’


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내가 그리 말한다면, 아이는 슬픈 눈을 하고선 울어 버릴 게
분명했으니까.

나약해진 내 마음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짓기에 이른다. 그건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는 미소였다.


그렇게 나는 얼결에 저택의 안까지 들어가고야 만다.

저택으로 들어가자마자, 앞서가던 요한은 시녀로 보이는 여자와 몇 번의 말을 주고받았다.


그는 인상을 여전히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나를 여러 번 가리켰다.

이윽고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요한은 내 옆에 있던 아이를 번쩍 안아 들더니, 별다른 말도


없이 어디론가 걸어가 버렸다.

밥맛인 제 아빠완 별개로 아이는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귀여운 것.

“엄마! 조금 이따가 봐!”


그래, 조금 이따가 네가 말한 맛있는 거 먹자!

나도 어색하게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쩐지 그렇게 해 주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기.”

아이와 요한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시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제야 시녀 쪽을


바라보았는데, 바라본 그녀의 얼굴이 약간은 이상했다.

뭐랄까. 그녀는 놀란 얼굴이면서도 동시에 엄청 슬픈 얼굴을 한 채로 내게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막연하게 슬픈 얼굴이라기보다는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을 본 듯한 얼굴이었다.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을 때 짓는 얼굴처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떨리는 눈동자와, 붉어지는 눈시울은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을 암시하기도


했다. 시녀는 가까스로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저를 따라오시겠어요?”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상하네. 나는 괜스레 목덜미를 주물럭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시녀가 향한 곳은 욕실이었다. 말이 욕실이지, 그 크기는 방 크기와 다름이 없었다. 부자들은


다 이렇게 사는 건가 싶을 정도로 무식하게 큰 욕실이었다.

시녀는 씻고 나오라는 말과 함께 욕실을 나섰다. 아무래도 아까 요한이 나를 씻기라는 명령을


한 게 분명했다. 불결한 냄새 어쩌고를 하더니, 밥도 주기 전에 나를 씻기려나 보다.

때마침 나도 씻고 싶었던 참이었기에, 나는 욕조에 얼른 몸을 담갔다. 욕조에는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잘 데워진 물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나와 동고동락했던 검은 때들과
이별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었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묵은 때들을 가차 없이 벗겨 낸 뒤에, 개운한 마음으로 욕실을 나섰다.


어쩐지 몸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깨끗해진 몸으로 시녀가 준비해 준 고급스러운 드레스까지 입자, 왠지 모르게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이렇게 좋은 옷을 입어 본 지가 언제더라.

시녀는 멀끔해진 나를 보더니, 처음 나를 봤을 때보다도 더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모습은 꼭 눈물을 참는 모습 같았다.

내 얼굴이 울음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이라도 되는 건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 시녀도 조슈아


꼬맹이와 요한처럼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걸까?

시녀는 울음기가 희미하게 섞인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주인님이 계신 곳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그녀의 뒤를 따랐다.

사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왜 나를 보자마자 울려고 했느냐, 아이의 진짜 엄마는 어디에 있느냐.

그런 질문들을 하고 싶었지만, 시녀의 표정이 좋아질 기색이 없었기에 쉽사리 질문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리 묻는다고 한들 시녀가 곧이곧대로 내게 대답해 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시녀에게 있어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솔직한 대답을 해 줄 리는


없었다.

잘 걷던 시녀는 어느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선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띄엄띄엄 한마디를 뱉어냈다.

“정말 많이 닮으셨어요.”

“네?”

나는 되물었지만, 시녀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인님이 기다리실 거예요. 얼른 들어가 보세요.”

시녀는 황급히 방문을 열어 주고선 자리를 떠나 버렸다. 내가 질문할 것을 미리 막겠다는 듯이.

닮았다, 라.

나는 그 말을 되뇌며, 방으로 들어섰다.

방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가 보였다. 방 중앙에 있던 소파에 기다란 다리를 꼰 채로


그림처럼 앉아 있는 그 대단한 요한 랭카스터 씨.

요한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내게 닿기가 무섭게 다시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요. 동요. 또 동요. 그의 표정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눈빛엔 진득한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시녀가 나를 보던 눈빛과 닮은 것이었다.

“저기요?”

내가 한마디를 꺼내자, 요한은 두어 번의 헛기침과 함께 대답했다.

“……검은 때가 소름 끼치게 많이 벗겨졌군. 못 알아볼 정도야.”


네 말투는 소름 끼치게 재수가 없군.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대답 대신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거지, 일단은 앉아서 얘기하지.”

“네, 거지가 일단은 앉겠습니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거지라고 나를 불러서, 뒤끝 있게 구는 게 절대로 아니다.

슬쩍 요한의 얼굴을 보자, 그는 내 대답이 고까웠던 것인지 미간을 고약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요한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네가 씻을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해 봤어.”

“무슨 생각이요?”

“네게 일을 준다고 했잖아. 어떤 일을 줄지 생각을 해 봤다는 거야.”

“네.”

일이라. 나도 사실 일을 구하던 터였다. 여기서 일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

“조쉬는……. 아, 그러니까 아까 네게 안긴 잘생긴 남자아이의 이름이 조슈아 랭카스터야.


짐작했겠지만, 내 아들이지. 조쉬는 고집이 엄청 세거든. 누굴 닮았는지.”

누굴 닮긴, 당신을 닮은 거겠지. 나는 대로변에서 요한과 아이가 주고받던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를 두고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주고받던 그 대화들을.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사이, 요한의 말은 이어졌다.

“너를 이대로 내쫓는다면, 조쉬가 나를 엄청 닦달할 게 분명해. 아니, 닦달뿐일까. 매일


저잣거리로 나가서 너를 찾을지도 몰라. 한번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게 있으면 꼭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이거든.”

“네, 네.”

“그래서 네가 당분간만이라도 이 저택에서 조슈아의 유모로 일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이게 바로 내가 말한 일이라는 거야.”

유모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지만,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되레


조슈아처럼 귀여운 아이를 돌보는 일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곳에서 유모로 일하게 된다면, 숙식이 모두 제공되는 게 아닌가. 그럼 완전


감사하지!

“흐음, 그렇군요.”
마음은 이미 유모로 일해야지! 라고 결심했으면서도, 나는 일부러 고민하는 척을 했다.
선택권은 나에게 있었고, 나는 이 일을 조금 더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일부러 엄청 고민하는 티를 내자, 내게서 고민하는 빛을 읽은 요한이 조건을 내걸었다.


아주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이다.

“수당은 넉넉히 쳐 줄게.”

“넉넉히가 어느 정도인데요?”

“몇 년은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는 정도로.”

“그럼 야근 수당은요?”

“…….”

요한의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갔다. 나는 그것을 못 본 척하며 말을 이어 갔다.

“유모라면 밤에도 일을 할 거 아니에요. 그렇다면 야근 수당도 챙겨 주셔야죠.”

“야근 수당. 그래, 좋아. 야근 수당에 휴가비도 넉넉히 챙겨 주지.”

“그리고…….”

“잠깐, 또 뭐가 더 남았나?”

나는 히죽 웃으며 물었다.

“연차는……!”

“…….”

“하하. 안 되면 어쩔 수 없죠.”

“그건 봐서.”

요한은 잔뜩 구겨진 얼굴로 툴툴거렸다. 나는 입가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로


키득거렸다. 좀 얄미웠을 거다.

좋아, 좋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되레 엄청 좋은 조건이 아닌가. 문제가 하나 있다면


요한의 밥맛 같은 성격이겠지만, 적당히 잘 피해 가면 나쁘지 않겠단 생각도 들었다.

“좋아요. 그럼 저는 언제까지 유모를 해야 하는 거죠?”

“조슈아에게 네가 필요하지 않을 그때까지.”

추상적인 대답이었다. 설마 평생 동안 아이를 돌보는 건 아니겠지, 라는 생각을 하던 순간,


요한이 내 생각을 읽은 듯이 덧붙여 말했다.
“걱정하지 말도록. 아이는 금방 자라니까. 가짜 엄마가 필요한 시기는 그리 길지 않을 거야.”

나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의 말에 이견이 없었다.

요한은 그 후에 내가 유모로서 이 저택에서 일하며 지켜야 할 것들을 일러 주었다.

가령 조슈아가 나를 엄마라고 부르겠지만 진짜 엄마인 척은 절대로 하지 말 것, 저택 안을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 것,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에게 바로 보고할 것, 저택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함부로 말을 섞지 말 것, 조슈아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줄 것, 등등의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방을 쓰라는 말과 함께 그의 방은 바로 옆방이며,


조슈아의 방 또한 그 옆방이니 이 구역을 벗어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내가 무슨 줄에 묶인 개도 아니고 이 구역만 다니라는 건 좀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를 봐서 활동 구역을 서서히 넓혀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알겠어요. 저기 그런데…….”

“또 뭐가 남았나?”

나는 배를 움켜잡으며 대답한다.

“밥은 도대체 언제 먹어요? ……씻고 났더니, 더 배고파진 것 같아서.”

내 말에 요한은 이마를 짚으며 긴 한숨을 쉬었다. ‘내 팔자야…….’라는 혼잣말은 덤이었다.

이윽고 요한은 여전히 시름이 깊어진 얼굴로 한마디를 뱉어냈다.

“밥은…….”

응, 그래서 내 밥은?

“아, 맞아. 제일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군.”

“밥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단 말이에요?”

“…….”

요한은 표정을 더욱 굳히며, 내 물음과는 상관없는 말을 했다.

“조슈아의 진짜 엄마에 대해선 궁금해하지 말 것.”

제 3 화. 부부 사이에는 함부로 끼어드는 게 아니라고 했어!


조슈아의 진짜 엄마. 그 말인즉슨 요한의 아내.

조슈아의 진짜 엄마라는 것은 요한이 구슬픈 목소리로 불렀던 ‘세나’라는 이름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허기짐과 조슈아의 간절함에 이곳으로 오긴 했지만, 나는 지금에서야 왠지 모를 찝찝함을


느꼈다. 왜냐면 조슈아가 나를 엄마라고 부르면 부를수록, 나는 그 녀석의 진짜 엄마가
궁금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궁금해하지 말라니. 이건 신종 고문인 걸까?

조슈아의 진짜 엄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대충 사정이라도 알아야 조슈아의 장단에 맞춰


줄 텐데. 그 순간, 내 배 속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꼬르륵.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요한마저도 내 복부 근처를 흘깃 바라볼 정도였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일단은 밥부터 먹자. 복잡한 물음들은 그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논제였다.

밥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조슈아 또한 떠올랐다. 맛있는 것을 준다고 나를 유혹하더니, 녀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밥줄 예쁜이는 어디에 있으려나.

닫힌 방문이 자연스레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엄마! 엄마, 배 엄청 고프다고 했지?”

먹을 것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고 하더니. 아, 아니,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고 하더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조슈아였다.

금세 옷도 갈아입은 것인지, 녀석은 편한 차림새였다. 그 편한 차림새 또한 매우 귀티나


보이기만 했다.

“그래, 아이야. 나는 무척이나 배가 고프단다.”

“……거지.”

요한이 작은 목소리로 나를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고선


조슈아만을 바라보았다.

“헤헤. 내가 그래서 맛있는 거 가지고 왔어.”

조슈아의 뒤로 나를 보며 기괴한 표정을 지었던 시녀가 따라 들어왔다. 시녀는 저가 언제 슬픈


표정을 지었냐는 듯이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나는 급변한 시녀의 얼굴에 놀라다가, 시녀가 끌고 온 이층 높이의 트레이를 보고선 더 놀랐다.


고기, 또 고기, 그리고 고기. 여러 고기들이 먹기 좋게 잘 조리된 음식들이 트레이에
한가득했다.

그것들의 맛있는 냄새가 내 후각을 미친 듯이 자극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뛰어들어 그


음식들을 내 두 손에 가득 쥐고선 게걸스럽게 먹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나를 본 시녀는 작게 키득거리며, 테이블 위에
음식들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시녀가 음식을 모두 내려놓기까지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겐 그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꼴깍. 자연스럽게 침이 넘어간다.

“조슈아. 나 이거 먹어도 돼?”

분명 조슈아에게 물은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요한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럼 그걸 도대체 누가 먹는단 말인지.”

요한은 작은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나는 그를 도끼눈으로 한번 째려봤다가, 조슈아를 다시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극명한 온도 차였다.

“물론이지! 다 엄마를 위한 건데!”

조슈아는 요한의 빈정거림이 무색할 정도로 단번에 내 식사를 허락했다. 나는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허기진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고기가 어쩜 그리 맛있던지……. 이런 음식이 매일같이 나온다면, 나는 평생이라도 조슈아의


곁에만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런 아들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 아들 하지, 뭐. 그게 어려운 일인가. 이건


절대로 맛있는 음식 때문에 든 생각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언할 수는 없다.

허겁지겁 먹던 것을 멈추며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아직까지 방을 나가지 않은 요한과


조슈아가 보였다. 요한의 얼굴은 처음과 다름없이 매우 구겨진 얼굴이었고, 조슈아의 얼굴은,

“엄마의 먹는 모습은 보고 있기만 해도 행복해.”

아주 행복해 보였다.

생긴 건 다섯 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말하는 건 능글맞기 그지없다. 말하는 모양새는 제


아버지인 요한과는 전혀 닮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외향적인 부분은 밥맛 요한과 꼭 닮았지만
말이다.

“하, 거지의 식사가 드디어 끝났습니다.”

나는 부른 배를 몇 번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거지다운 식사였다고 생각해.”

조슈아도 있는데, 요한은 말끝마다 나를 거지라고 불렀다. 나는 한쪽 눈썹을 들썩거리며 그를


작게 노려보았다.

“지금 나를 노려보는 건가?”

“네, 거지가 지금 당신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말할 거지?”

“당신이 저를 거지라고 부르지 않을 때까지요?”

“거지를 거지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데?”

“제겐 리나라는 이름이 있다고요. 리나라고 불러 주세요.”

물론 그것이 진짜 내 이름이 아닐지도 몰랐다. 나는 기억을 송두리째 잃은 터였으니까.

잊힌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기억이 났던 이름 하나가 ‘리나’였다. 나는 그 이름이 내 이름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입에 잘 붙지 않는 이름이군.”

요한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서 저를 계속 거지라고 부르겠다는 거예요?”

우리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자, 조슈아는 안절부절못한 채로 소리쳤다.

“둘 다 그만해! 부부 싸움은 나쁜 거라고 했어!”

“…….”

우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부부 싸움이라는 말에 우리는 할 말을 제대로 잃었음이었다.

* * *

가벼운 실랑이가 있은 후, 요한과 조슈아는 방을 나갔다.

나는 이젠 내 방이 된 이곳을 요리조리 관찰했다. 방은 제법 넓었고, 가구는 몇 없었지만


필요한 건 다 있었다. 옷장, 테이블, 의자, 소파, 침대…….

배도 부르고 몸도 편하니 어딘지 모르게 잠이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대로 침대로


걸어가 몸을 뉘었다. 그와 동시에 침대의 부드러운 감촉이 내 등에 닿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배고픔에 힘겨워하던 내가, 고작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배가 부른
채로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꽤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하얗디하얀 홑이불을 목까지 올려 덮으며 눈을 감았다. 행복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방 안에 푸르스름한 어둠이 깔렸을 무렵이었다.

깜빡 잠이 들었던가.

잠이 깬 이유는 나를 흔드는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서였다. 나는 억지로 눈꺼풀을 반쯤 들어


올렸다.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것은 나를 보며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조슈아였다. 조슈아는 침대까지


올라와, 내 얼굴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반나절 사이에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이 꿈인가 싶었지만, 내 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조슈아는


꿈이 아니었다.

“조슈아?”

“응, 엄마. 조슈아야.”

“이 밤에 네가 웬일이야?”

아이는 웅얼거리며 조금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가 돌아왔으니까……. 이제 아빠를 말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네 아빠라면, 요한을 말하는 거니?”

“응. 엄마! 나랑 같이 아빠한테 가자.”

“……지금?”

조슈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를 보는 녀석의 눈동자가 묘하게 굳건해 보였다. 아이


주제에 제법 결의가 가득 찬 눈빛이었다.

요한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딱히 밥맛을 걱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정을


아예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이건 그러니까……. 인류애적인 차원에서 하는 걱정이었다.

“응! 얼른, 빨리!”

조슈아는 누워 있던 내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듯, 내 어깨를 부여잡고선 낑낑거렸다. 그


고물고물한 손으로 나를 일으킬 수가 있으려나.

나는 애쓰는 아이의 얼굴이 안쓰러워, 또다시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켜 주었다. 이 밤에


요한에게 가자고 하는 일은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어째 불길한 예감이 설핏 든다.
나는 잠에 취해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침대에서 완전히 내려왔다. 조슈아는 내
손을 꼭 부여잡고선 어디론가 나를 끌었다. 역시나 아이 주제에 제법인 악력이었다.

조슈아는 내 방을 나와, 옆방의 문을 제 방인 양 활짝 열어젖혔다. 내 방의 옆방이라면……,


아마도 요한의 방이려나. 몇 시간 전에 요한이 그렇게 말했으니 말이다.

요한의 방으로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코를 찌르는 듯한 술 냄새가 났다. 조슈아는 그제야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아주고선, 앞으로 쪼르륵 달려갔다.

조슈아의 걸음이 멈춘 곳에는 테이블 앞에 앉아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요한이었다.

나는 조슈아의 걸음을 따라가, 테이블 위에 박을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고 있는


요한에게 한마디를 건네었다.

“인사 잘~한다.”

요한이 들었으면 곧바로 화를 냈을 법한 말이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그는


테이블 위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처박았을 뿐이었다. 낮에 보았던 모습과는 완전
다른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으, 술 냄새.”

나는 테이블 위에 나뒹구는 빈 술병들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이렇게 큰 집에서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을 그가, 제 몸을 건사하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신


이유는 무엇일까. 나 같으면 하루하루가 행복할 것 같은데.

나는 그가 취한 사연이 조슈아의 진짜 엄마와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직감이었다.

그사이 조슈아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요한의 몸을 흔들었다.

“아빠. 엄마가 왔으니까, 이제 그만 슬퍼해도 돼.”

그러자 놀랍게도 요한이 대답을 했다.

“조쉬, 네 엄마는…….”

그는 발음이 다 뭉그러진 목소리로 힘겹게 한마디씩을 뱉어냈지만, 말을 끝마치지는 못했다.

테이블에 처박혔던 요한의 고개가 들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

요한은 고개를 들자마자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고, 우리의 눈은 정확하게 맞물렸다. 술에


취해 초점이 흐려진 눈이었지만, 그 눈이 이상하게도 슬퍼 보였다. 구슬픈 그의 눈동자는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설, 설마 인사 잘한다는 내 말을 질타하려는 건 아니겠지. 왠지 모르게 입안이 말라 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요한의 붉은 입술이 작게 열리며, 쇳소리로 가득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세나.”

그것은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세나.

요한은 분명 낮에도 나를 그런 식으로 불렀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한쪽 손을 턱, 그리고 나머지 한쪽 손도 턱, 하고 올리며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내 앞까지 걸어오는 게 아닌가.

이내 마주하게 된 우리, 요한은 우두커니 선 채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슬픈 눈으로.


낮보다도 해쓱해진 얼굴로.

나는 그를 빤히 응시했다. 키가 얼마나 컸던지 한참이나 올려다봐야 했다.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얼굴은 새삼 잘생긴 얼굴이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며, 조금 헝클어졌지만 그 헝클어짐조차도 섹시해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이며, 반쯤 풀려서 더 관능적으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며. 솔직히 이렇게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늦은 밤, 술에 취한 그와


마주하고 있는 일이 옳지 않은 일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

침묵은 길어졌다. 요한은 물론이거니와 조슈아마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요한의 손이 허공에 들리며, 내 허리 부근을 부담스럽지 않게 감싸 안았다. 나는 작게


움찔거렸지만 그의 손을 내치진 못했다.

“뭐, 뭐 하는 짓이에요.”

대신 어쭙잖게 말을 더듬거렸을 뿐이었다.

요한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그의 고개는 내 얼굴 쪽으로


기울어졌고, 우리의 시선은 가까워졌다. 나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곧 키스라도 할 듯 가까워진 거리 속에서, 그는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영락없이


그에게 안기고야 만다. 그의 품은 뜨겁고 또 뜨거웠다.

그는 내 어깨 위에 제 얼굴을 완전히 묻은 채로 내 허리춤을 더욱 꽉 부여잡았다. 도망을 가지


못하게 붙잡아 두려는 듯이. 내게 닿은 그의 손끝에서 까닭 모를 간절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내 착각인 걸까.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한 채로 그의 벨트 어귀를 꼭 부여잡았다. 나도 모르게 매우
익숙하게 그의 벨트 위를 잡았는데,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요한은 술 내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토로했다.

“세나……, 왜 이제야 온 거야.”

 
그 목소리는 잔잔하게 떨렸다. 나는 어찌하지 못한 채로 요한에게 한동안 가만히 안겨 있었다.
귓가엔 ‘세나’라고 애절하게 말하던 요한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왠지 모르게 마음
어귀가 시큰거리는 기분이었다.

요한의 슬픔이 내게로 전가되었기에, 내 마음 또한 이토록 아릿한 걸까?

문득 시선을 옮겼을 땐, 진짜 부부처럼 꼭 껴안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조슈아가 눈에


띄었다. 녀석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매우 흐뭇한 얼굴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흐뭇한 얼굴이라. 괜스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조슈아. 밥맛, 아니 네 아빠 좀 어떻게 해 봐!”

조슈아는 고개를 귀엽게 좌우로 내저으며 말했다.

“안 돼, 안 돼! 부부 사이에는 함부로 끼어드는 게 아니라고 했어!”

“…….”

아주 단호한 목소리였다. 꼬맹이 주제에 저런 말은 도대체 어디서 배워 온 거야.

조슈아에게 뭐라 더 말하려고 했지만, 요한의 말이 한발 앞섰다.

“요한…….”

그는 제 이름을 진득한 목소리로 불렀다.

“네?”

“나를…… 요한이라고 불러 줘. 네가 내 이름을 다시 불러 주는 그날을 항상 꿈꿔 왔어.”

요한은 절절함을 넘어서서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니, 애원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오전 내내 비아냥거리며 나를 거지라고 조롱하던 그의 모습과는 판이한
모습이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정말 질색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이 그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울먹거리며 몸을 잘게 떠는 요한을 꽉 안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째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요한의 뜨거운 체온이 내 몸까지도 달아오르게
만들어 내 뇌까지도 뜨겁게 만든 건지, 그래서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든 건지.

결론적으로 나는 절절한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야 만다.

“요……, 요한.”

그의 이름을 부르기가 무섭게 요한은 내 어깨 위에 기대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꺼풀이


반쯤 감긴 관능적인 그의 얼굴이 내 얼굴과 퍽 가까웠다.

그는 이번엔 정말로 내게 키스할 듯이 내 얼굴 위로 바투 다가왔다. 얼마 못 가 서로의 입술이


스치듯이 닿았다.

그와 키스를 하면 안 되는데. 내 옆엔 조슈아도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내 허리를 꾹 부여잡은 요한의 악력이 거셌다.

곧 그의 입술이 내 윗입술 위에 닿았다. 나는 눈을 꼭 감았다.

제 4 화. 부부 싸움은 나쁜 거라고, 조슈아가 그랬잖아

“…….”

얼레, 왜 입술이 완전히 닿지 않는 거지. 몇 초가 흘렀음에도 내 입술 위에 닿는 촉감이


없었다. 더불어 내 허리춤을 잡고 있던 요한의 악력이 느슨해진 기분이었다.

그의 얼굴이 내 입술이 아닌, 내 어깨 위로 힘없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 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슬그머니 떠서 상황을 파악했다.

요한은 제 몸을 나에게 완전히 맡긴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마치 고요하게 잠이 든 것처럼…


….

아니, 잠깐. 진짜 잠든 건 아니겠지?

“저기요, 밥맛 씨? 요한?”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러 보았다. 하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그의 몸을 콕콕 찔러


보기도 했다. 하나 요한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잠들었어요?”

요한은 침묵으로 답했다. 술에 흥청망청 취했던 그가 곯아떨어진 게 틀림없었다.

그와 키스 하는 줄 알고 눈을 감았던 조금 전의 내 모습이 머쓱했다. 나, 도대체 뭘 기대 한


거야.
나는 얼굴의 화끈거림을 느끼며, 그를 질질 끌어서 침대 근처까지 걸어갔다. 다행히 침대는
그리 멀지 않았고, 나는 그를 침대 위에 눕힐 생각이었다. 그렇게 그의 몸을 침대 위로
던지려고 했는데…….

“어, 엇!”

졸지에 나까지도 그와 함께 침대로 엎어져 버린다. 큰 체격을 가진 그의 무게에 내 몸뚱이가


넘어간 것이었다. 나는 요한의 밑에 완전히 깔려 버렸다. 그의 넓은 가슴팍은 내 흉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엄마! 괜찮아?”

상황을 조용히 관망하던 조슈아는 그제야 침대 근처까지 쪼르르 다가와 내게 물었다.

“아니, 안 괜찮아! 조슈아, 내가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 좀 도와줄래?”

조슈아는 침대 위로 올라와 낯부끄러운 자세로 겹쳐진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엄마 무슨 소리야? 거기서 나오겠다니! 부부는 원래 같이 자는 거잖아. 그리고 조슈아도 그


사이에서 같이 잘 거야.”

“뭐?”

나는 의아함을 표함과 동시에 요한의 몸을 있는 힘껏 옆으로 밀었다. 그의 몸은 가까스로


넘어가며, 숨쉬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휴, 살 것 같아.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그때였다. 조슈아가 나와 요한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구렁이처럼 스멀스멀 우리 사이로 들어오는 녀석의 모습이 퍽 귀여워 보였다.

이윽고 제 자리를 완전히 확보한 녀석은 내 허리에 팔을 두르며, 내가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곤 당당하게 선포한다.

“오늘은 셋이서 같이 자자.”

“조슈아, 난…….”

네 진짜 엄마도 아닐뿐더러 밥맛이랑 계속 이렇게 있을 수 없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문이 막혀 버린다.

내 대답을 기다리며 웃고 있는 조슈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부정을 뜻하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슈아는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운 채로 옹알거렸다.

“엄마한테선 엄마 냄새가 나. 좋은 냄새. 이렇게 다시 같이 자는 날이 오다니……. 조슈아는


너무 너무 행복해.”

“…….”

넌 왜 행복하다면서 목소리엔 슬픈 기운이 가득한 거야?


엄마 냄새라는 말은, 듣는 사람마저도 슬프게 만드는 말이었다. 정작 나는 엄마라는 존재를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쪼그마한 녀석은 내가 대답하는 걸 막으려는


듯이 눈을 감은 채로 자는 척을 하는 중이었다.

감고 있던 녀석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발칙한 것. 자고 있지도 않으면서.

조금만 힘을 쓴다면, 내게 둘러진 족쇄 같은 조슈아의 팔을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길 포기한 채로 되레 조슈아를 꼭 안아 주었다.

내 체온이 조슈아에게 닿길 바라며. 엄마 냄새라는 걸 조슈아가 더 느끼길 바라며. 조슈아가


더는 슬퍼하지 않길 바라며.

고작 몇 시간밖에 보지 않은 아이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이 동하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지만,


조슈아는 그 이상한 일을 만들어 낼 정도의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조슈아가 내 품에 더욱 깊숙이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나는 조슈아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조용히 쓰다듬으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내일 밥맛 요한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 상황을 보고선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했지만…


…. 뭐 아무렴 어떻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요한이 나를 쫓아낸다면 나는 이 저택을
쿨하게 나가면 되니까.

오늘의 일은 하룻밤의 꿈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이 저택을 나가게 된다면, 조슈아만은
약간 그리워질 것도 같았다.

생각은 그렇게 점점 무뎌져 갔다.

* * *

요한은 제법 오랜만에 잠을 푹 잤다. 꿈속에서 세나를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세나를 잃은 후, 요한은 제대로 된 잠을 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없는 밤은 지독하게


길었고, 요한은 그럴 때마다 술을 찾았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당최 잠을 잘 수 없었으니까. 술을 마시지 않으면 세나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으니까.

시간은 모든 것을 무뎌지게 만들었지만, 세나에 대한 그리움만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무게를 더해 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정신이 있을 땐 세나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더니, 정작 꿈속에선 보기 힘들었던


세나였다. 그런 그녀가 어젯밤 그의 꿈에 나왔다. 역시나 이상한 일이었다.
요한은 꿈속에서 보았던 세나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늘 꿈꾸던 얼굴 그대로 제게 다가오던
그녀의 모습을, 그녀를 품에 안았을 때의 감촉을 잊지 못했다. 그것은 꼭 현실의 감촉처럼
선명했다.

그는 이마를 짚으며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어제 얼마나 마신 것인지 두통이 상당했다.


조슈아를 위해서라도 술은 줄이는 게 좋겠어, 까지 생각하던 순간, 요한은 깨닫게 된다.
침대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눈동자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보인 것은…….

“세나?”

눈을 감은 채로 곤히 잠든 세나의 얼굴이었다.

요한은 아직까지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몇 차례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고, 심지어 제 뺨을 세게 때려도 봤다. 하나 그럼에도 눈동자에 맺힌
세나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꿈이 아닌 걸까.

요한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세나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따뜻했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처럼.

잠이 든 세나의 옆에는 조슈아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꼭 껴안은 채였다. 요한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두 사람. 이렇게 꼭 껴안고 자고 있는
거, 엄청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침대 위, 조금 열어 둔 창문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이 조슈아의 금발을 더욱더 노랗게


물들였다. 요한의 입가엔 저도 모르게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어떻게 된 일일까. 세나가 살아서 돌아오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요한은 자신의 앞에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이가 세나가 아님을 곧 깨닫는다.

“……배고파. 흠냐.”

세나라고 생각했던 여자의 잠꼬대를 듣는 순간, 요한은 그녀가 누구인지 떠올렸다.

“……거지?”

요한은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다시 보니 그제야 알겠더라. 따뜻한 육신을 가진 채로 뜨거운 숨결을 내뱉는 여자가 거지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름이 리나였나, 뭐였나.

어제 거리에서 주워 왔던 그 거지. 거지 주제에 세나와 지독할 정도로 닮은 여자.


아서라, 또다시 거지와 세나를 착각하다니.

“휴.”

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세나일 리가 없지.”

그는 실망한 얼굴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 그녀가 세나가 아님을 깨달았음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거지에게 닿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는 거지를 너무도 섣불리 집으로
데리고 온 게 아닐까, 하는.

물론 조슈아가 거지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사달이 벌어진 것이기도 했지만


……. 사실 요한도 내심 거지를 조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솔직히 처음엔 세나가 살아서 돌아온 줄 알았던 요한이었다. 그녀와 세나는 그 정도로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살아서 돌아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운 것임을 요한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는 없는 법이다.

세나는 분명 죽었다.

요한은 세나의 장례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끔찍한 기억을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단 말이다. 비가 하염없이 오던 날, 갈색빛의 관에 누인 세나의 모습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관 속에 누인 세나의 얼굴마저도 불현듯이 떠오른다. 죽은 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해 보였던 그녀의 얼굴이었다.

요한은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예고 없이 불쑥 떠오른 파리했던 세나의 얼굴을 지워 내고 싶다.


사랑했던 사람의 죽은 모습을 떠올리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영문으로 제 방에, 그것도 자신의 침대에서 거지와 조슈아가 서로를 꼭 껴안은 채로


잠들어 있는 걸까. 밤새 이런 모양새였다면…….

“나도 여기에 끼어서 같이 잤다는 건가? 하.”

요한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려고 했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까닭인지, 지난밤의 기억은 희뿌연 연기처럼 희미했다.

자신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 함께 잠이 든 거지에게 화가 나야 함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그건 거지의 품에서 자고 있는 조슈아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기 때문인 걸까. 아님,
거지가 세나와 닮은 얼굴을 가진 채로 잠들어 있었기에 그런 것일까.

요한은 그녀가 거지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손을 뻗었다. 까닭 없이 떨리는 손끝은


거지의 뺨에 닿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 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

요한은 급하게 손을 거두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그녀의 얼굴에 머물던 손을 꽉 그러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외로웠던 걸까. 그렇기에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집에 들이고, 조슈아 옆에 붙여 놓고,


심지어 그 얼굴까지도 쓰다듬었던 걸까.

거지의 얼굴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이 이상해졌다. 요한은 침대에서
완전히 벗어나 방을 나섰다. 거지에게 일순 마음이 동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설령 거지가 세나와 똑 닮았다 할지라도.

* * *

나는 늘 꾸던 꿈과는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의 나는 어딘지 모를 어느 저택의 복도를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꽤 넓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복도였다.

복도엔 빛이라곤 없었다. 밤인 것 같은데, 벽엔 그 흔한 등불 하나 켜지지 않은 채였다.


복도에 난 창가로 간간이 들어오는 달빛만이 유일한 빛다운 빛이었다. 짙은 어둠이 깔린 복도
위, 걷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나 말고 다른 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낮고 무거운


구두 소리였다. 단언컨대, 뾰족한 구두에서 나는 날카로운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구두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내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처음으로 보인 것은 역시나 구두였다. 제법 값이 나가 보이는 남자의 구두다. 그다음엔 잘


다려진 검은 바지가 보인다. 이윽고 상체마저도 보이며, 그가 입고 있던 흰 셔츠가 눈에
띄었다.

나와 남자 사이의 거리는 퍽 가까워졌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춘 채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나와 닮은 금발을 가지고 있었고, 머리카락의 길이는 짧았다.
이목구비를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묘하게도 이목구비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순간 흐리게만
보이던 그의 붉은 입술이 작게 움직이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세나.’

“……!”

꿈에서 깬 나는 숨을 간헐적으로 헐떡였다. 꿈에서는 깼지만, 내 귓가엔 꿈속에서 들었던 ‘


세나’라는 이름이 맴돌았다.

세나. 그 이름은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요한이 울음에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던 이름이자, 조슈아의 엄마로 추정되는 여자의


이름이기도 했다.

도대체가. 꿈에서 본 금발의 남자는 누구고, 그 남자는 왜 세나라는 이름을 읊조렸을까?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말이다.

이 꿈 또한 내가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 있는 꿈인 걸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목 주변이 너무나도 답답하다는 것을 인지했다. 나는 시선을 내려 목


부근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 목과 쇄골 사이에 둘러진 팔 하나가 보였다.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하얗고 작은 팔뚝이었다.

“조슈아.”

나는 팔뚝의 주인의 이름을 부르며, 조심스럽게 팔을 치웠다.

하루가 꼴딱 지나간 것인지 주위는 밝았고, 술에 취해 조슈아 옆에서 자던 요한은 보이지


않았다. 먼저 깨서 어디론가 갔나 보다.

그것은 조금 묘한 일이었다. 왜냐면 요한은 우리 세 사람이 함께 잤다는 사실을 깨닫는 즉시


내게 불호령을 내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디로 간 걸까.

나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어제 있었던 일들을 상기했다. 기억은 조각난 필름처럼


떠올랐다.

나를 엄마라고 부르던 아이를 따라 얼떨결에 온 요한의 저택, 술에 찌든 채로 꾸벅꾸벅 인사를


잘하던 밥맛 요한, 그답지 않게 구슬픈 목소리로 내뱉던 ‘세나’라는 이름.

그리고 거의 맞닿았던 입술, 함께 누워 있던 침대, 누워 있던 그의 얼굴 위로 드리워진 푸른


달빛, 검은 머리칼과 대조되는 그의 흰 피부와 붉은 입술……. 아니, 잠깐! 내가 이렇게나
자세히 봤었나?

나는 왠지 모를 꺼림칙함을 느끼며 침대에서 조용히 내려왔다. 그러곤 아직까지 곤히 잠든


조슈아에게 이불을 덮어 주며, 아이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조슈아의 금발은 보기 좋게 흐트러져 있었고, 차양처럼 길게 쳐진 금빛 속눈썹이 구관절


인형의 것처럼 보였다.
정말 예쁜 아이라는 걸 새삼 통감한다. 성격은 정반대지만 이 부자, 헉 소리가 날 정도로
예쁘고 잘생겼다는 건 인정.

아이는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인지, 제 미간을 옅게 구기며 작게 옹알거렸다.

“엄마, 엄마. 가지 마. ……조슈아 옆에 있어.”

조슈아는 꿈에서도 엄마를 애타게 붙잡고 있었다. 나는 허공을 헤매던 아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작은 손엔 미적지근한 땀이 가득 배어 있었다.

얜, 왜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거야.

“괜찮아, 조슈아. 떠나지 않아.”

나는 나머지 손으로 조슈아의 등을 가볍게 쓸어 주었다. 조슈아는 구기고 있던 미간을 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잡고 있던 아이의 손을 한참
동안 놓아줄 수 없었다.

조슈아와의 애틋한 시간을 방해한 것은 등 뒤에서 들린 남자의 목소리였다.

“……떠나지 않긴, 뭘 떠나지 않아. 약속한 시간이 되면 떠나야지.”

나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언제 왔을지 모를 요한이 조금 열어 둔 문에


등을 기댄 채였다.

“언제 들어왔어요?”

“방금.”

그는 터덜터덜 걸어와 침대 위, 내 옆에 걸터앉았다. 그는 조슈아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내


손을 지그시 응시했다.

“누가 안 떠나겠대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오늘의 그에게선 지난밤 취했던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언제 씻고 옷마저도 갈아입은 것인지, 가깝게 앉은 그에게선 술 냄새는커녕
좋은 냄새만이 날 뿐이었다.

“난 또. 영원히 눌러살려고 하는 줄 알았네.”

“그럼 안 돼요?”

“……뭐?”

요한은 그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냐, 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영원히 눌러살겠다고


했다간 내게 욕이라도 할 기세다. 나는 얼른 내 말을 수습했다.

“농담, 농담. 표정 좀 푸세요. 무서워서 말도 못 꺼내겠네.”

“지금 엄청 잘하고 있잖아?”


“어머나, 여기서 더 잘하면 얼마나 놀라시려나.”

“거지!”

“쉿쉿. 조슈아가 깨겠어요. 거지가 지금 당신에게 경고를 줍니다.”

거듭 말하지만, 요한이 자꾸만 나를 거지라고 불러서 뒤끝 있게 구는 건 절대로 아니다.


진짜로!

“……너! 또 그런 식으로 말을!”

요한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요한도 아차 싶었던 것인지 재빠르게 입을 다물었지만, 결국엔


조슈아는 잠에서 깬 듯했다. 아이는 감고 있던 눈을 비비적거리며,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둘 다 그만해! 부부 싸움은 나쁜 거라고, 조슈아가 그랬잖아!”

아마도 따끔한 일침을 말이다.

“…….”

우리는 또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모르게 기시감이 드는 상황이었다.

제 5 화. 밥맛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야?

“당신 때문에 조슈아에게 혼났잖아요.”

나는 괜히 요한에게 틱틱거렸다.

솔직히 따지고 보면 조슈아에게 혼난 건 요한 탓이기도 했으니까. 그가 조금이라도 유연하게


말을 걸었다면, 우리의 음성이 높아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나 요한은 억울하다는 듯이 대답을 했다.

“허,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도대체 왜 내 방에서 잠들어 있었던 거지?”

“기억 안 나요? 그게 다 당신이 술에 취해서 벌어진 일이었잖아요!”

내가 거기까지 대답했을 때, 앞서가던 조슈아가 걸음을 멈추고선 뒤로 돌아봤다.

볼살이 싱그러운 꼬맹이 주제에 도끼눈을 뜬 채로 노려보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 아이는
조막만 한 제 허리에 손을 올려 어느 기숙제의 사관 같은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아주 엄한
목소리는 덤이었다.
“부부 싸움은 그만하라고 했찌!”

흥분한 나머지 발음이 조금 세게 나온 조슈아의 말이 퍽 귀엽다. 엄한 얼굴에 엄한 목소리.


손발이 파들파들 떨려야 함이 옳았지만, 나는 느른한 미소를 슬쩍 지었다.

“조슈아,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안 싸워.”

“조쉬. 내가 거……, 아니 이 여자랑 왜 싸우겠어.”

조슈아는 ‘지켜볼 꼬야!’라는 말과 함께 다시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귀엽게 지켜보면


얼마나 사랑스럽게요? 오구오구.

나는 조슈아의 앙큼한 볼따구니를 한껏 매만지고 싶은 작은 충동이 들었다. 나중에 요한 몰래


해 봐야지.

 
여기서 앞의 상황을 조금 설명해 보자면, 요한의 방에서 나온 우리는 지금 복도를 걷던
중이었다. 발걸음의 목적지는 아침 식사를 할 식당이었다. 마침 배가 고팠는데 잘된 참이다.

조슈아를 선두로 한 채로 우리는 다시금 식당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 요한은 또다시


조슈아에게 혼나고 싶지는 않았는지, 제법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하하하. 그래, 나 기억 안 나. 그러니까 설명해 봐. 내가 취한 사실과 거지 네가 내 방에


있었던 사실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하하.”

그는 억지로 웃음소리를 냈다. 세상 까칠한 척은 혼자 다 하는 주제에 아들인 조슈아에겐 다시


혼나고 싶지 않은가 보다.

그 간극이 꽤 귀엽게 느껴졌다……까지 생각하던 찰나에 나는 인상을 매섭게 찌푸렸다.

뭐? 귀여워? 얼굴만 번듯한 이 밥맛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 버린 걸까.

나는 불순한 상상이라도 해 버린 사람처럼 고개를 내저으며, 귀엽다와 관련된 생각을 죄다


지웠다. 그러곤 요한을 따라 거짓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답했다.

“후후, 조슈아가 당신이 술을 더는 못 마시게 해야 한다고 나를 찾아왔어요. 내가 당신을


말려야 한다나 뭐라나. 후후.”

“하하하. 조쉬……. 그 녀석이 벌인 일이었군. 하하.”

“그럼 제가 당신 방에 왜 찾아갔겠어요. 호호.”

순간 요한은 웃던 것을 멈추고선, 나란히 걷던 내 손목을 잡아챘다.

잠깐만. 그는 개미 같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고, 조슈아는 우리가 걸음을 멈춘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홀로 걸어갔다.
그렇게 우리와 조슈아 사이의 간격은 꽤 벌어졌다. 이내 조슈아에게 우리의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리까지 간격이 벌어지자, 요한이 입술을 느릿하게 떼었다.

“이봐, 혹시 내가 실수는 하지 않았겠지?”

그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실수라. 나는 어젯밤 요한이 내게 했던 만행들을 떠올렸다.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나를


안았던, 내게서 다른 여자의 자취를 찾았던 그의 모습을. 그러고 보니 심지어 키스까지 하려고
했었다.

물론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막지 않은 건 나이긴 한데.

어쨌든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다는 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 누군가가 요한이든 다른 사람이든 간에.

“실수라. 엄청 했죠.”

“……!”

요한의 동공이 일순 커졌다. 나는 그를 조금 놀리고 싶은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막 욕하고.”

“내, 내가? 점잖기로 소문난 이 요한 랭카스터가?”

“아무렴요.”

요한은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가 실제로 내게 욕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를 놀리고 싶은


마음에 한 거짓말이었다. 과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요한의 얼굴이 꽤 봐 줄 만했다.

“막 술병도 던지려고 하고. 주사가 아주 볼썽사납더라니까요.”

“거짓말.”

얼레, 어떻게 알았대.

“아무리 술에 취했거니와 내가 그랬을 리는 없어. 솔직하게 말해 봐.”

아무래도 장난은 여기까지만 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요한이 더 속을 것 같지 않아서.

나는 어깨를 작게 으쓱이며, 어젯밤에 실제로 있었던 일을 그제야 토로했다.

“당신, 저를 안고선 엄청 흐느꼈어요.”

“뭐?”

“그리고 키…….”
그리고 키스까지 하려고 했다니까요,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괜스레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를 느끼며 말을 돌렸다.

“하여튼! 술에 취해서 스킨십하려는 남자는 질색이에요.”

“…….”

요한은 발끈할 법도 했지만, 이상하리만큼 잠잠했다. 그는 그저 침묵했을 뿐이었다. 어젯밤의


일이 설핏 기억나기라도 한 걸까?

사납게 반짝이던 그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그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이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세나. 그는 지금 그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가 나를 다른 여자로 착각한 사실은 역시나 기분이 좋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나는 세나인 척 요한을 안아 주었을 것이었다.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몸을 잘게 떨던 그를, 나는 결코 외면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어젯밤 일로 그를 구태여 타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실엔 내 의지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거기서 뭐 해! 얼른 조슈아의 뒤를 따라와야지!”

이크, 저를 따라오지 않음을 드디어 눈치챈 조슈아가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나는 요한에게 잡혔던 손목을 빼내며 잰걸음으로 아이에게 다가갔다. 맛있는 냄새가 맡아지는
게, 식당이 코앞임이 분명했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요한은 여전히 복도에 우두커니 선 채였다.

“뭐 해요? 안 따라오고.”

그는 그제야 느릿하게 발걸음을 떼었다. 아침부터 으르렁거렸던 요한의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가라앉아 보였다.

역시나 식당은 코앞이었다.

엄청 큰 식당, 엄청 크고 긴 테이블, 그 위엔 벌써부터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올려져 있었다.


꿀꺽. 침이 절로 넘어간다. 그렇게 식탁 앞에 앉으려던 찰나, 내 뒤에 서 있던 요한이 나를
불렀다.

“이봐, 잠깐만.”

“왜요?”

“그……, 어젯밤의 일.”

“네.”

“……그러니까. 함부로 스킨십해서…….”


요한은 뜸을 들였다.

얼른 식사를 해야 하는데, 얜 왜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구는 거야?

“……미ㅇ…….”

요한은 입술을 안쪽으로 뭉그러뜨리며 말했다.

미? 설마 미안해는 아니겠지.

“뭐라고요?”

“미……, 미…….”

미?

“미트볼이 오늘 주메뉴예요?”

“아니야! 미트볼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럼 뭔데? 답답하기도 해라.

“그럼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거예요?”

“……미, 미인계를 썼지? ……하.”

나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저가 스킨십을 한 것을 모두


내 탓으로 돌리겠다는 건가?

“당신.”

나는 딱딱한 목소리로 요한을 불렀다. 요한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이어 말했다.

“저를 미인으로 생각하고 있었군요.”

나는 오른쪽 입꼬리를 올려 슬그머니 미소까지도 지었다.

미인계를 썼다는 말이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요한이 나를 미인으로


생각해 주었단 말도 되는 게 아닌가! 미인이라는 말을 싫어할 여자가 어디에 있어.

“하하, 미인은 배가 좀 고파서 얼른 식사를 시작해야겠어요.”

내가 너스레를 떨자, 요한은 괴로운 소리를 내며 마른세수를 했다.

“……하, 그래. 미인 거지. 얼른 식사를 하지.”

“미인 거지라……. 네, 네. 미인 거지가 이제 식사를 시작합니다. 큭큭.”


“휴…….”

요한은 땅이 꺼질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가 있었던가?

* * *

아침 메뉴는 요한의 말대로 미트볼이 아니었다.

오늘의 아침 메뉴 주인공은 바로바로 육즙이 죽여주는 비프 스테이크였다. 고기 표면의


갈색빛이 가히 심상치 않았다. 아마 엄청 맛있겠지.

“먹지.”

요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식탁 앞에 앉은 우리 세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얼른 집어 들었다. 몇 차례 칼질을 했을 때,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조슈아가 말했다.

“엄마, 엄마! 조슈아가 썬 것 볼래? 엄청 잘하지?”

조슈아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언제 다 썬 것인지, 제 앞에 놓여 있던 크기가 조금 작은


스테이크를 모두 썬 채였다.

“응, 너 엄청 잘한다. 장가가도 되겠어.”

“이, 이봐! 장, 장가라니! 애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요한은 당황한 듯이 나를 불렀고, 조슈아는 자신의 아빠가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이 작게 키득거렸다. 요놈 봐라.

“아빠. 조슈아 장가가도 돼?”

“아직은 안 돼.”

그는 단호하게 대답한 뒤에 내 접시를 흘긋 보며 말했다.

“누구 아들인데 당연히 잘해야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에 비해 네 칼질이 영 형편없군.”

요한은 내게 당한 것을 복수라도 하듯이 깐죽거렸다. 나는 발끈하며 요한의 접시를 바라봤지만


……. 그는 흠잡을 곳 없이 아주 정밀하게 스테이크를 썰어 둔 터였다. 제길.

“뭐, 그렇네요.”

딱히 시비를 걸 거리를 찾지 못한 나는 콧방귀를 뀌며 칼질을 재차 시작하려 했다.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요한은 기다란 손을 뻗어 내 접시와 자신의 접시를


바꿔 치기 하는 게 아닌가!
그러자 내 앞에 놓이게 된 것은 정갈하게 잘 잘린 스테이크가 놓인 접시였다.

“오, 오해는 하지 마. 네 칼질을 보고 있으니까, 내가 답답해서.”

소름 끼칠 정도로 매너 있는 남자인 척하는 요한의 모습이 소름 끼치도록 낯설었다.

“맙소사!”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요한을 바라만 보자, 그는 나를 보지도 않은 채로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쳐다볼 거지? ……나는 원래 칼질하는 거 좋아해. 너를 위해서 접시를 바꿔


줬다느니 뭐니 하는 착각 따위는 안 했으면 좋겠어.”

예예, 절대로 안 합니다. 그런 착각.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 * *

인물 간 탐색의 기본은 호구 조사다.

나는 호구 조사를 할 참고인을 내 방에 모신 상태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선 서로를 지그시 응시하는 우리 사이엔 기묘한 긴장이 흘렀다.
꿀꺽, 침을 넘기는 소리마저도 큰 소리가 되어 울렸다.

그러다 긴장은 일순 깨진다.

“엄마는 너무너무 예뻐.”

참고인의 아주 귀여운 애교와 함께.

“조슈아는 어쩜 이리 귀여울까.”

나는 흐물흐물해진 마음으로 흐물흐물해진 입가로 진한 미소를 지었다.

“헤헤, 엄마 아들이라서 그런가 봐.”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 제 얼굴을 괴고 있는 조슈아의 얼굴엔 싱그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가는 아이라는 데에 이의가 없는 바였다.

딱히 아이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조슈아는 그런 나조차도 단번에 함락시켜 버리는 아이였다.

“부정하진 않을게. 오죽했으면 네 아빠도 나를 미인이라고 했겠니.”


“엄마 말이 맞아! 우리 아빠는 말이야. 평소에 아무한테도 예쁘단 소리를 안 해. 그렇게 말해
준 사람은 엄마가 처음일 거야.”

그래, 미인 거지라고 불린 사람은 내가 처음이겠지.

나는 그 기괴한 호칭을 되뇌었다.

좋아해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그래, 조슈아. 난 엄청난 호칭을 획득했어.”

“큭큭.”

아이는 하얀 이가 보이도록 웃었다. 조슈아는 미인 거지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나는 손을 뻗어 조슈아의 결 좋은 금발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래서 조슈아는 나이가 어찌 되는고?”

“다섯 살!”

다섯 살. 아이의 나이는 일전에 내가 짐작한 대로였다. 나는 그때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좋아하는 건 어찌 되는고?”

“단 거면 다 좋아! 사탕을 제일 좋아하는데, 아빠는 내가 사탕 먹는 걸 싫어해.”

조슈아는 기가 조금 죽은 채로 대답했다.

“조슈아, 걱정 마. 내가 너희 아빠 몰래 사탕을 가져다줄게.”

“정말?”

“그럼. 대신 사탕 다 먹으면 꼭 양치해야 한다?”

“응!”

조슈아는 격하게 머리를 끄덕거렸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더욱 흐트러뜨렸다. 어쩜 이리


대답을 잘할꼬?

조슈아는 내게도 궁금한 것이 생긴 것인지, 이번엔 저가 먼저 말을 건네었다.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다.

“엄마, 조슈아도 궁금한 게 있어!”

“그게 뭐려나.”

“엄마는 가끔 아빠를 밥맛이라고 부르잖아. 밥맛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야?”

“…….”
나는 할 말을 잃고 만다. 미소만을 짓던 내 얼굴이 약간은 곤란한 빛을 띠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마가 후덥지근한 것이 조만간 식은땀이라도 흐를 기세였다.

밥맛이라……. 아주 지극히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그 말을 고작 다섯 살짜리 꼬맹이에게


설명해 주어도 되는지 고민이 됐다.

예쁜 거, 좋은 거만 보고 자라야 할 다섯 살이었다. 그런 아이에게 나는 결단코 그 말의 나쁜


뜻을 알려 줄 수 없다.

그래서,

“음, 조슈아. 너희 아빠처럼 멋있는 사람을 밥맛이라고 해.”

나는 조슈아에게 나쁜 의미를 알려 주지 않으면서도, 요한을 한 방 먹일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자 조슈아는 감동한 듯한 얼굴과 목소리로 말했다.

“우와! 그렇구나. 우리 아빠처럼 멋있는 사람을 밥맛이라고 하는구나!”

“그럼~, 너희 아빠가 얼마나 멋있는데. 너~무 멋있어서 너~무 밥맛이야.”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연신 큭큭거렸다. 조슈아는 내가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나를 따라 저도 웃었다. 우리는 한동안 바보처럼 큭큭거렸다.

그러다 불현듯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밥맛이 좋은 뜻인 줄 아는 조슈아가 요한에게 실제로 밥맛이라고 하면 얼마나 우스울지.


조슈아는 한껏 순수한 얼굴로 요한에게 ‘아빠는 밥맛이야!’라고 말하고, 요한은 그 말에
얼마나 놀랄지.

어쩌면 너무 놀라서 뒤로 발라당 자빠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잘생긴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흐를 걸 상상하니, 왜 이렇게 즐거운 걸까.

나는 요한에게 곧 닥칠 시련의 상황을 디테일하게 상상하며 배를 잡고 웃었다. 조슈아는 내가


왜 배를 잡고 웃는지의 이유를 역시나 모르면서, 나를 따라 제 배를 잡고 웃었다.

그 조그마한 배를 꼭 끌어안고 웃는 모양새가 무척이나 귀여웠다.

나는 거기서 왠지 모를 행복함을 느꼈다. 조슈아가 자꾸만 사랑스럽게 보여서 큰일이다.

* * *

한동안 가짜 엄마로서 돌볼 조슈아에 대한 호구 조사를 끝낸 나는, 무료함을 느끼며 침대에


누웠다. 낮 동안에 나와 놀아 주던 조슈아는 수업을 듣기 위해 나를 떠난 터였다.

아이는 방을 나가면서 절대로 다른 곳으로 가면 안 된다고, 안 된다고 내게 거듭 강조했다.


밥줄 예쁜아. 네 가짜 엄마는 늘 배가 고파서, 맛있는 것이 즐비한 이곳을 떠날 생각은 없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조슈아의 볼에 작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럴 일은
없단다, 꼬맹아.’라는 말과 함께.

누워 있다 보니 잠이 스멀스멀 오기 시작했다. 나는 미련 없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잠은


금세 들었다.

* * *

잠에서 깬 이유는 그러했다. 갑자기 무언가가 내 몸 위를 꾹꾹 짓누르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간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감고 있던 눈을 반강제적으로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낮게 깔린 어둠과 내 몸 위에 엎어진 채로 나를 짓누르는 무언가,


그리고 지독한 술 냄새였다. 나는 목만 겨우 들어 올려, 내 배 위에 엎어진 무언가를 바라봤다.

무언가의 정체는 장신의 남자였다. 이름을 읊자면 그 대단한 요한 랭카스터 씨.

그의 몸뚱이의 반, 즉 상체는 내 배 위에 엎어져 있었고, 그의 하체는 침대 밖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한마디로 그는 침대 앞에서 엎어진 모양새였다는 거다. 그것도 내 몸뚱이 위로!

순간 엎어져 있던 요한의 얼굴이 홱 들렸다.

제 6 화. 이 상습범을 어떻게 하면 좋지?

요한은 감고 있던 눈을 힘겹게 반쯤 들어 올렸다. 이윽고 그의 붉은 입술이 조금 열리며, 그는


누군가의 이름을 그리운 듯이 불렀다.

“세나.”

세나. 요한은 어제와 다름없이 나를 그 이름으로 불렀다.

나는 거기서 어젯밤 사고처럼 닿을 뻔했던 그의 입술과 내 등을 헤맸던 그의 손길을 떠올렸다.


어쩐지 더운 기분이 들었다. 추워진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열기였다.

더해, 내 심장은 차분하지 못한 소리를 냈다.

“이봐요, 밥맛 씨. 전 세나라는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그가 짜증을 낼 만한 호칭으로 불렀다. 하나 요한은 대답 대신 제 고개를 다시금 침대


위로 처박았을 뿐이었다.
일단은 엎어진 그를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곤 요한의 머리통을 툭툭 건드렸다.

“정신 좀 차려 봐요.”

“…….”

그새 잠이라도 든 건가. 그에게선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나는 꽤 대담하게 그의 머리통을 쥐어 잡아 흔들었다. 그의 몸이 작게 흔들릴 때마다 알싸한


술 냄새가 내 코끝을 자극했다.

어제도 술에 잔뜩 취해 나를 껴안더니.

“이거 완전 상습범 아냐?”

나는 언성을 높여 그를 불렀다.

“아, 좀! 일어나 보라니까!”

움찔. 요한의 몸이 드디어 움찔했다. 정신을 차린 건가? 라고 생각했던 그때였다.

일어날 기세라고는 도무지 보이지 않던 요한의 머리통이 스르륵 들렸다. 그는 힘겹게 내 위에


엎어져 있던 상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술을 얼마나 마신 것인지, 그는 제 상체를
일으키면서도 몇 번이고 비틀거렸다.

이내 반듯하게 선 요한은,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상기된 얼굴을 한


요한은 감기려는 눈꺼풀에 힘을 꾹 주고 있었다.

“너……! 히끅, 거지였구나.”

그러다 나는 그의 손이 빈손이 아님을 인지하게 된다. 요한의 손에는 옷이 들려 있었다. 성인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드레스라고 해야 할까.

아닌 밤중에, 술에 잔뜩 전 채로 찾아와 여자 드레스를 손에 쥐고 있는 모양새라.

“기괴하구나. 기괴해.”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요한은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님 못 들은 척을 하는 건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제 손에 쥐고 있던 드레스를 내 무릎 위로 조심스럽게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몸은 가눌 수 없이 휘청거리면서도, 드레스는 던지지 않았단 사실에 나는 제법 놀랐다.

“난……, 히끅. 맨정신에 미안하다는 말할 용기가 없어서 술을 마신 건 절대로 아니야.”

미안하다는 말? 요한이 내게 잘못한 게 있었던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발음이 다 뭉그러진 채로 이어 말했다.

“어제, 어제……. 멋대로 껴안아서 미안.”

“…….”

“그건 네가 거지라고 해도 불쾌한 일일 수 있잖아.”

어젯밤, 나를 세나라고 착각하여 안았던 일을 말하는 건가?

요한은 지난밤 일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를 안았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있었다. 마치


언젠간 내게 그런 실수를 할 것이란 사실을 미리 예상한 것처럼.

“이건 딱히 사과의 의미로 주는 드레스는 아니지만……. 넌 거지니까.”

그의 말은 내 귀에 그렇게 들렸다.

‘사과의 의미로 드레스를 줄게.’

나는 그제야 무릎 위에 놓인 드레스를 매만졌다. 손끝에 닿는 촉감이 매우 부드러운


드레스였다.

“네, 그 거지가 지금 감사한 마음을 가져 보려 합니다.”

솔직히 좀 의외였다. 요한은 까칠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쩌면 다정한 사람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넌!”

요한은 한마디를 남기고선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남과 동시에 그는


바닥에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채였다. 맙소사.

나는 침대에서 급하게 내려와 요한의 몸을 발로 툭툭 건드려 보았다. 설마 또다시 잠든 건


아니겠지.

“……하지 마……. 흠냐.”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그는 벌써 잠이 든 것인지 잠꼬대 같은 말만을 할 뿐, 감긴 그의


눈꺼풀은 들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 상습범을 어떻게 하면 좋지?”

시간은 아주 늦어 있었고, 나는 이 저택에 요한과 조슈아를 제외하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큰 체격의 그를 내가 손수 그의 방까지 모셔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사용인들에게 부탁을 했다간 이상한 소문이 돌지도 몰랐다.

아서라. 나는 술에 취해 잠든 요한을 깨우거나, 그의 방으로 옮기는 것을 포기한 채로 여분의


베개와 이불을 챙겼다.
바닥에 엎어진 그의 머리 밑에 베개를 놓아 주고, 이불도 목 끝까지 덮어 준다. 좋아. 나는
할 만큼 했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알아서 나가겠지.

나는 침대 위로 다시금 올라갔다. 시간이 늦었기는 하나 해가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고,


나는 재차 잠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언제부터 세차게 뛰기 시작했을지 모를 심장박동 소리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내


심장아, 넌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게 빨리 뛰는 거냐.

나는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으나, 잠은 곧바로 들지 않았다. 잠은 개뿔. 내 귓가엔 한


이름만이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세나. 그 여자는 누구일까.

조슈아나 요한의 행동들로 보았을 때, ‘세나’라는 이름은 조슈아의 진짜 엄마 이름임이


분명했다. 이건 내 손목을 걸 수 있을 정도로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손목
잘리는 걸 바라진 않지만…….

하여튼 내가 세나에 대해 짐작한 바로는 그랬다.

첫 번째, 세나라는 여자는 지금 이곳에 없다.

두 번째, 그녀는 지금 당장 이곳에 올 수 없다. 최악의 경우엔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세나라는 여자가 죽었다는 것에 생각이 치중되기는 하지만, 단언할 수는 없었다. 사정이야 알
수 없는 거니까.

그리고 세 번째, 내 얼굴은 세나라는 여자와 미칠 정도로 닮았다. 조슈아의 착각, 요한의
동요, 이름 모를 시녀의 ‘닮았네요.’라는 말. 그것들이 가리키는 답은 그러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지금 이곳에 없는 세나라는 여자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결론. 나는 세나라는 여자의 대신인 걸까?

까닭 모를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는 요한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더불어 요한의 아이인


조슈아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들을 알게 된 것도 고작 이틀. 그렇기에 내가 누군가의 대신이라는 사실은 전혀 괘념치


않아야 할 사실이었다. 심지어 나는 유급 노동을 하고 있는 터였다. 나는 그저 그들의 장단에
적당히 맞춰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좋지 않다. 서운하다……, 라는 뜬금없는 감정마저도 든다.

“뭘 바라고 있는 거야.”

나는 기다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했다.

생각은 여기까지만 하자. 세나가 죽었든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내가 할 일만을 하면 되니까.


그리고 조슈아가 나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면, 그때는 돈과 함께 쿨하게 이 저택을
나가면 되는 거다.
그러면 나는 다시금 기억을 잃은 채로 거리를 방황하는 돈 많은 미인 거지가 되겠지. 그래,
그러면 되는 건데.

까닭 없이 든 아쉬움은 물러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 * *

무거워……. 무거워서 토할 것 같아.

“으으……. 무거워!”

몸을 짓누르는 무게에, 나는 가까스로 들었던 잠에서 깼다. 익숙한 무거움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내 몸을 내려다보자, 누군가의 팔이 내 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게


보였다. 더불어 누군가의 몸이 내게 바투 붙어 있는 것마저도 깨닫고야 만다. 진한 숨결이
귓등을 간지럽힌 것은 그 순간이었다.

“…….”

나는 까닭 없이 오소소 피어오른 소름을 느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허락도 없이 내


배에 팔을 올린 채로, 내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연신 불어넣는 장본인이 보였다.

“밥맛…….”

나는 그의 이름을 아련하게 불렀다.

 
뭘까. 어젯밤에 분명 침대 밑에서 재웠는데, 이 인간이 언제 침대 위로 올라온 걸까? 그것도
나를 꼭 껴안은 채로 말이다.

조금 긴 그의 검은 머리칼이 내 얼굴에도 나부끼자, 심장 어귀가 조금 간질간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잠들기 전에도 떨렸던 심장은 잠에서 깬 지금까지도 세차게 떨렸다. 그 이유는 이
상습범 때문이겠지.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옆에 꼭 붙은 채로 잠들어 있는데, 심장이 떨리지 않는 건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설령 그 남자가 아무리 밥맛이라고 해도.

“이 인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지난밤에 빠졌던 고뇌와 같은 고민을 했다.

허락도 없이 침대 위로 기어 올라온 이 이간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발로 걷어차는 게 좋을까,


까지 생각하던 그때에, 곱게 감겨 있던 요한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떨리던 눈꺼풀은 서서히 들리며 곧 선명한 요한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우리의 눈동자는
꼼짝없이 마주치고야 만다.

“……!”

요한은 잠에서 깨자마자 처음 보인 것이 나라는 사실에 놀란 것인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 당황스럽게 한마디를 뱉어낸다.

“뭐, 뭐야, 거지? 설, 설마 지금 나를 덮친 건가?”

저기요, 댁이 지금 나를 덮치려고 했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하시는 거예요?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진실에 가까운 말이었다.

“여긴 제 방인데요?”

“……!”

요한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이곳이 정말로 제 방이 아님을


뒤늦게 인지한 듯했다. 그의 얼굴이 당혹스러운 빛을 띠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못 가 요한의 하얀 얼굴이 점점 붉어지기에 이르렀다. 그는 침대에서 허겁지겁 내려가며


두어 번 넘어지는 우스운 꼴을 보여주기도 했다.

무릎과 마룻바닥이 부딪히는 격한 소리가 났다.

윽. 가냘픈 신음 소리를 낸 요한은 아픈 무릎을 부여잡으며 내 방에서 줄행랑을 쳤다. 가


보겠다는 말은 없었다.

“귀엽네.”

……?! 나는 홀로 나지막이 읊조리다, 깜짝 놀란 듯이 입가를 틀어막았다. 그가 바보처럼


넘어지는 걸 왜 귀엽다고 생각한 거지.

들은 사람은 없었지만, 괜스레 머쓱해져서 나는 볼을 몇 차례 긁적였다.

그런데 아픈 무릎을 쥐고 가던 그의 뒷모습이 진짜로 귀엽기는 했어. 이건 다른 사람이


보았어도 충분히 느낄 만한 일반론적인 감상일 것이다.

나만이 느꼈을 감상은 아닐 것이다. 절대로!

* * *

요한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제 방으로 들어섰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당황해서 뛰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뛰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요한은 삽시간에 달아오른 체온을 느끼며 마른세수를 했다. 나,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야.

“주인님? 어제 어디서 주무신 거예요?”

요한은 그제야 제 방에 다른 누군가가 이미 와 있음을 인지했다. 제게 말을 건 이는, 일전에


거지의 목욕을 도와주었던 시녀인 벨라였다.

벨라는 방바닥에 나뒹구는 술병을 치우던 참이었는지, 술병 하나를 손에 쥐고선 요한을


의문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요한은 여전히 벌게진 얼굴로 어색하게 대답했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벨라에게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어……, 서재! 그래, 서재에 있다가 깜빡 잠들었지 뭐야.”

“술을 이렇게 많이 드시고 서재로 가셨던 거예요?”

“뭐, 어쩌다 보니.”

벨라는 요한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주인님, 얼굴이 벌겋게 익었어요. 혹시 어디 편찮으신 거예요?”

“아, 아무것도 아냐. 방은 나중에 치워도 되니까, 지금은 일단 나가 줘.”

요한은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며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벨라는 새삼 요한의 붉어진 얼굴을 재차 바라보았다. 마님을 잃으신 게 아직도 많이 힘드신


건가. 그래서 울기라도 하신 걸까.

공작부인이었던 세나가 죽은 후, 요한이 밤마다 술을 마시며 힘겹게 잠을 청한다는 사실은


저택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용인들은 그런 요한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벨라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다 벨라는 요한이 데려온 여자를 불쑥 떠올렸다.

놀라울 정도로 마님과 닮았던 여자. 벨라는 그 여자의 얼굴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는, 도플갱어라고 생각될 정도로 세나와 꼭 닮아 있었다. 처음엔


너무 놀라서 울 뻔한 벨라였다. 세나가 살아서 돌아올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여자는 누구일까. 요한은 그 여자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걸까.

벨라는 방을 나가기 직전, 요한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건네었다.

“주인님, 오늘 모임이 있으신 것은 알고 계시죠? 조금 이따가 다시 오겠습니다.”


벨라는 차마 그 여자에 대한 것을 묻지 못했다. 마침 그 여자에 대한 것을 조사하고 있으니,
조만간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알겠어.”

요한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임이고 뭐고,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윽고 벨라가 나가 홀로 있게 된 방 안. 요한은 방 중앙에 있던 갈색빛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파의 등받이에 고개를 깊숙이 누인 요한의 입술 사이에선 마른 숨이 새어
나왔다.

“미치겠네.”

사건의 경위를 조금 살펴보자면, 요한은 지난밤 세나로 착각을 한 채로 거지를 껴안은 일이


미안했다.

솔직히 그날 밤의 기억이 확실히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요한은 저가 거지에게 허락받지 않은


스킨십을 한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채로 거지를 세나라고 착각했음이 분명했다. 세나를 그리워하던


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드레스라도 주면서 사죄하려고 했는데…….

술을 마신 게 화근이었다.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미안하다는 말을 못 꺼낼 것 같아서, 조금만


마시고자 했건만, 요한은 저도 모르게 평소와 다름없이 거하게 마셔 버린 것이다.

느릿하게 눈을 감자, 머릿속엔 방금 전에 보았던 거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저를 보던 거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 ‘여긴 제 방인데요?’


라고 무심하게 말하던 그 붉은 입술.

가깝게 보았던 거지의 얼굴이 이렇게나 계속 생각이 나는 건, 역시나 그녀가 세나와 닮았기에
그런 것일까? 어쩌자고 거지의 침대 위에서 잠들었던 건지.

그녀가 다시 보고 싶다—. 는 생각까지 드는 건 왜일까. 세나가 아닌 거지인 그녀를. 내가


도대체 왜.

요한의 귓전에 세찬 소리가 들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요한은 그 소리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소리는 달음박질치는 자신의 심장 소리였다.

세나 외에 다른 여자에게 단 한 번도 세차게 뛴 적이 없던 심장이었다. 요한의 심장은 제


박동을 곧 멈출 듯이 느릿하게 뛰기만 했었다.

그랬던 자신의 심장이 고작 거지인 그녀를 보며 설렌 것이다.

요한은 참담한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제기랄.”

그는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대단히 언짢은 표정을 했다. 잔뜩 찌푸려진 그의 시선은 소파의


맞은편에 있던 책상 위에 닿았다.

요한의 시선은 책상 위에 올려진 무언가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무언가의 정체는 유화로
그린 세나의 그림이 있는 작은 액자였다.

“세나.”

요한은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너를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지에게 심장이 떨렸어.”

넌 그런 나를 어떻게 생각해?

요한은 그렇게 물었지만, 끝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제법 안정을 찾은 요한은 바빴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있던 시녀들 또한


매우 바빠 보였다.

한 시녀는 요한의 머리를 가다듬느라 바빠 보였고, 또 다른 시녀는 요한에게 어울릴 법한 옷을


이리저리 대 보느라 바빴다.

이윽고 수도에서 제일 유명한 재단사의 옷을 입은 요한은 마지막으로 동그란 안경을 눌러썼다.


눈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안경을 쓰는 게 여러모로 지적으로 보이니까.

요한은 평소 외적인 부분에 딱히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날이 날인지라 꽤 신경을


쓴 터였다.

방문이 열리며, 요한의 방으로 누군가가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아빠!”

들어온 이는 조슈아였다. 조슈아 또한 요한처럼 평소보다도 훨씬 꾸민 채였다.

어쭙잖게 꼬마용 양복을 입은 조슈아의 멜빵바지가 너무도 귀엽다. 요한은 총명한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 아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조쉬. 일찍 준비했구나.”

요한은 조슈아를 한 팔로 안아 들며, 아이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사랑스러운 내 아들.

세나가 없는 세상 속, 요한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인 조슈아. 세나를 똑 닮은 조슈아의 금발


하며, 아이의 총명하고 또렷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언제나 세나를 떠올리게 했다.
조슈아가 이렇게 예쁘게 크고 있다는 걸 세나도 봤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한은 자못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조슈아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동시에 마차는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마차는 곧 멈춰 섰다. 두 사람이 내린 곳은 어느 상앗빛의 커다란 건물 앞에서였다. 건물의


현관에는 무언가가 적혀 있었는데, 그 글귀는 이러했다.

<미취학 아동 사교 모임. PS, 관계자 외 출입금지.>

제 7 화. 우리 아빤 최고의 밥맛이야!

‘미취학 아동 사교 모임.’

그 모임은 제국 내에서 은밀히 전통을 이어 오는 모임 중 하나였는데, 아직 의무 기관에


입학하지 않은 아이들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교류하는 장이었다.

본질은 분명 그러했으나……. 지금은 그 본질이 약간은 퇴색되어 있었다. 정치적인 경향이


조금씩 가해짐으로써 모임의 성향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모임의 구성원들은 귀족 내에 내로라하는 사람들로 점점 줄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지식과 정보의 교류보다야, 비슷한 계급의 친구나 정혼자를 구하기 위한 장으로 바뀌고
있었다.

요한과 조슈아는 신분을 확인받은 뒤에, 상앗빛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은 연회장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천장엔 눈으로 한 번에 담을 수 없는 샹들리에가


즐비했고, 모퉁이엔 기다란 테이블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테이블 위엔 아이들을 위한 과자와 음료, 그리고 어른들을 위한 도수가 낮은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연회장에는 그 크기와는 별개로 사람은 몇 없었는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바로 성인


남자는 요한 하나뿐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런 사실을 괘념치 않아 하며, 되레 가식적인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사실


향수 냄새가 진득한 연회장 내의 공기가 매우 불쾌했지만 말이다.

요한은 이런 자리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는 공작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를 더 쌓고


싶다거나 대대손손 자랑할 만한 업적을 남기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굳이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 가며 정치적 이점을 얻기를 바라진 않는다는 거다.

하나 그에겐 조슈아가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세나가 남기고 간 보물.

요한은 조슈아를 위한 것이라면 뭐든지 해 주고 싶었다. 아이가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으면


했고, 아이가 조금 더 넓은 세상에서 놀았으면 했다. 조슈아가 다른 아이들에게 꿀리지
않았으면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끔찍한 자리에 빠짐없이 나와야만 했다.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껄끄럽고, 향수 냄새를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조슈아를 공작령에만 둘 수는 없었다.

세나가 없더라도 누구보다도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었다. 그것이 요한의 진심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요한에게로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는 요즘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는 여자였다.

요한은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구였더라.

“요한 공작님.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조슈아는 날이 갈수록 잘생겨지네요. 누구를 닮은 건지.


호호.”

요한은 가식적인 미소를 더욱 짙게 지으며, 이름 모를 여자에게 답했다.

“감사합니다. 부인이야말로 얼굴이 더 좋아 보이시는군요.”

오늘은 소름 끼칠 정도로 향수를 들이붓고 왔군. 요한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도대체, 지독할 정도로 향수를 뿌리는 이유는 뭘까.

요한은 불현듯이 오늘 아침에 제게 가까이 닿아 있었던 거지의 살 냄새를 상기했다. 햇볕에 갓


말린 듯한 뽀송한 냄새, 좋은 냄새……까지 생각했을 때, 요한은 다시금 얼굴이 홧홧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길! 제길! 그는 속으로 낮은 욕을 읊조리며, 갑작스럽게 떠오른 거지의 환영을 지우려


애썼다. 왜 그녀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히는 거야.

그사이 이름 모를 여자의 여식인 여자아이와 조슈아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두 아이는


일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조쉬! 잘 지냈니?”

“응, 요니. 너도 잘 지냈지?”

아이들의 귀여운 인사에 요한은 그제야 거지를 잊어내고선,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간다.

요니라고 불린 여자아이가 말했다.

“그럼! 나도 잘 지냈어! 조쉬, 너 그거 알아?”

“뭔데?”
“우리 아빠가 이번에 한 단계 진급하셨대. 좋겠지?”

“……으응. 멋있다.”

여자아이, 즉 요니의 말에 조슈아는 자신도 뭔가 아빠에 대한 자랑이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요한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며, 의미 모를 서류만을 볼 뿐이었다.

그것은 자랑할 거리가 전혀 아니었다. 조슈아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아, 맞아!”

그러다 조슈아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이 다시금 밝아진 얼굴을 했다. 그러곤 어제 엄마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요니, 요니! 우리 아빠도 자랑할 거 있어.”

“뭔데?”

요니는 조슈아를 보며 물었다.

요한은 내심 기대를 하며 조슈아의 말을 기다렸다. 뭐라고 자랑하려나. 대단한 얼굴이나


재력이나 능력에 대해서? 요한은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걸 가까스로 참아 냈다.

요한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조슈아는 해맑은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 아빤 최고의 밥맛이야!”

“……컥!”

요한은 사레에 걸린 듯 연신 캑캑거렸다. 밥, 밥맛이라니!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요한이 당황하는 사이에도 두 아이들의 대화는 빠르게 이어졌다.

“웅? 조쉬, 밥맛이 무슨 뜻이야?”

“세상에서 제일 멋있고 잘났다는 뜻이야. 세상 최고의 밥맛인 우리 아빠!”

“와! 정말 멋진 단어다! 너희 아빠가 좀 밥맛 같기는 해.”

요한은 어안이 벙벙했다.

조슈아가 저를 밥맛이라고 자랑을 하고 있다. 그것도 세상 최고의 밥맛이란다. 심지어 듣고


있던 여자아이조차도 요한이 밥맛이라는 사실에 동의를 하며 좋아하고 있었다.

환장할 상황이었다.
“……조, 조쉬.”

요한은 그제야 조슈아를 불렀다. 목소리가 어째 희미하게 떨렸다.

“웅?”

요한만이 당황한 게 아니었다. 아이들의 대화를 같이 듣고 있던 이름 모를 여자 또한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요니!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니야. 하하. 죄송해요, 요한 님. 저는 그럼 이만…….”

여자는 상황을 수습할 자신이 없다는 듯이 급히 자리를 떴다.

“아빠? 조슈아를 왜 불렀어?”

“…….”

요한은 침묵하며, 어째서 제 아이의 입에서 ‘밥맛’이라는 소름 끼치는 단어가 튀어나왔는지


추측했다.

밥맛……. 밥맛이라면 최근에 누군가가 제게 몇 차례 언급했던 단어였다.

요한은 다시금 거지를 떠올렸다. 세나와 똑같은 금발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던
그녀를.

“조쉬, 그 밥맛이라는 단어……, 누구한테 배운 거지?”

“밥맛? 그거 엄마가 가르쳐 줬어. 엄마가 그랬어. 아빤 최고의 밥맛이라고!”

역시는 역시다.

“……거지.”

요한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설마 했거니와, 진짜로 거지가 조슈아에게 밥맛이란 단어를


가르쳐 준 것이었다.

“밥맛이 무슨 뜻이라 하고 가르쳐 줬는데?”

“음. 밥맛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이라는 뜻이래! 아빤 정말로 밥맛이야!”

조슈아는 엄지까지 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티끌이라곤 없는 순수한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본


요한은 이마를 짚었다.

“맙소사.”

그 여자가 도대체 뭘 가르친 거야?

* * *
미취학 아동 모임이 끝나자마자 요한은 한 손으로 조슈아를 거뜬히 들고선 얼른 마차에
올라탔다. 조슈아가 ‘아빠는 밥맛!’ 타령을 더 하기 전에 공작저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요한은 마차의 시트에 몸을 깊숙이 누이며, 목 끝까지 잠겨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어 젖혔다.


목을 죄던 갑갑함은 사라졌지만, 속에 끓어오르는 답답함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조슈아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요한의 속도 모른 채, 마차에 타자마자 밥맛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아빤 어쩜 그렇게 밥맛 같아?”

“……!”

요한은 뭐라고 대답할지 가늠하지 못하며 마른기침을 연신 했다. 그사이에도 조슈아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얼른 커서 아빠처럼 대단한 밥맛이 될 거야!”

“…….”

그것은 실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대단한 밝음이었다. 요한은 짧은 심호흡과 함께 조슈아를


타일렀다.

“조, 조쉬. 너는 아빠만큼의 밥맛이 되면 안 된단다.”

“왜? 아빤 내가 아빠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는 게 싫어?”

싫어. 정말 싫어! 요한은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대신 억지 미소와 함께 다른 말을


건넸다.

“조쉬. 넌 아빠만큼의 밥맛이 아니라, 더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지.”

……왠지 내가 진짜로 밥맛이 된 것 같잖아. 요한은 까닭 없이 드는 기분 나쁨을 느끼며 미간을


옅게 구겼다.

입가에 띤 미소는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입매의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우와! 조슈아는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아암, 누구 아들인데.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지.”

“난 제국 최고의 밥맛 아빠의 아들인걸!”

“……컥.”

제발……. 제발, 조슈아. 거기까지만 해 주렴. 요한은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빌고 또 빌었다.


조슈아가 밥맛 아들이라는 말을 더는 하지 않기를.
* * *

요한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벨라에게 조슈아를 맡기고선, 거지의 방으로 부리나케 찾아갔다.
긴 다리로 휘적거리며 걸은 탓에 그는 금세 거지의 방에 도착했다.

요한은 문을 열어젖히려다 잠깐 망설였다.

“……노크 없이 열었다간, 진짜로 내가 밥맛 같잖아.”

그럼 안 되지. 난 밥맛 따위가 아닌데. 요한은 시름이 깊이 밴 한숨을 허공에 내뱉으며,


노크를 했다.

똑똑.

그러곤 아주 정중하게 묻는다.

“이봐, 거지. 안에 있나?”

하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시간은 저녁의 초입이었고, 잠이 들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설마 밖으로 나다니지 말라는 제 말을 어기고선, 저택을 나다니고 있는 걸까?

요한은 신경질적으로 노크를 다시 했다. 똑똑똑. 그 소리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끝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할 만큼 했어.”

요한은 그제야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거지! 넌 도대체가……! 조쉬에게 그런 말을 가르치면 어쩌겠다는 거야?”

요한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는 매섭게 으르렁거렸다가 괜스레 멋쩍은 감정이 들었다.

거지에게 저가 점잖다는 것을 매번 강조했던 요한이었다. 감정을 앞세운 채로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건, 정말 점잖지 않은 행동인데.

“흠흠. 그래서 거지, 대답은 안 할 건가?”

요한은 문지방에 선 채로, 약간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절대로 거지의 눈치를 본 건 아니다. 절대로 거지에게 심어질 제 이미지를 염려한 건 아니다.
요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대꾸는 없었다. 요한에게 돌아온 것은 고요한 침묵뿐이었다. 방 안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요한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머지않아 거지의 신형이 요한의 눈동자에 맺힌다.


거지는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초저녁이라서 잠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요한의
오산이었다.

역시는 역시다. 조슈아에게 밥맛이라는 단어의 뜻을 해괴하게 가르쳐 줄 거라 생각지도


못했거니와, 지금 곤히 자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자다.

요한은 늘어 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침대 근처까지 걸어갔다. 이윽고 걸음을 멈춘 그는


팔짱을 느른히 끼며,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는 거지의 모습을 살폈다.

거지는 정말 아무렇게나 자고 있었다. 한쪽 다리는 침대 가장자리에, 나머지 한쪽 다리는 이불


안에, 그리고 두 손은 만세를 하듯 위로 뻗은 채로 말이다. 아주 가관이다.

“허허.”

요한은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도대체가 제대로 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여자다.


하긴, 거지에게서 뭘 기대하겠냐마는.

당장에라도 깨울까 싶었지만, 요한은 너무도 곤히 자고 있는 거지의 모습에 차마 모질게


그녀를 깨우진 못한다. 대신 그는 침대 어귀에 걸터앉은 채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분명 화가 났었다. 다신 그런 해괴한 짓을 하지 못하게 으름장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막상


눈을 감고선 고른 숨소리를 내뱉는 거지의 얼굴을 보자니, 화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꼬박꼬박 말대답을 할 땐 잠깐씩 잊곤 했는데, 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은 세나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세나가 죽었다는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영락없이 세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요한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곧 닿은 그녀의 뺨. 그는 그녀의 뺨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번 뻗은 손은 쉬이 물릴 수 없었다. 지금 잠든 여자가 진짜 세나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거지에겐 퍽 미안한 생각이었다.

온기 가득한 거지의 뺨에 손끝을 대고 있자니, 고요했던 그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은 오랜 시간 동안 잠잠해 있었던 것을 보상이라도 하는 듯이 가쁜 소리를 냈다.

또 또. 요한은 거지를 향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자신의 심장을 통제할 수 없었다.

거지가 세나와 닮았다고 생각했기에 뛰는 심장인지. 아님 다른 이유 때문에 뛰는 심장인지. 그


이유도 잘 가늠할 수 없었다.

하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존재했다. 맹렬하게 뛰는 제 심장이 반갑지 않다는 점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그는 퉁명스럽게 혼잣말하면서도, 그녀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겨울이 오기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꽤 쌀쌀한 가을 공기였다. 혹여나 감기라도 걸린다면…….


“……이건 절대로 거지가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해서 덮어 준 건 아니야.”

요한은 변명하듯이 읊조렸다. 그러곤 자기 합리화를 했다. 아무렇게나 자고 있는 거지의


모양새가 소름 끼치게 보기 싫어서 그랬던 것뿐이라고.

요한은 이불을 덮어 주고도 침대에 걸터앉은 엉덩이를 쉬이 떼지 못했다.

아쉽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조금 더 바라보고 싶다는 묘한 충동도


든다. 무엇이 아쉬운 것이며, 무엇이 그의 마음을 소란스럽게 하는 걸까.

그런 저의 마음을 모를 거지의 입술은 잠꼬대에 가까운 말을 뱉어냈다. 그 말을 들은 요한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밥맛, 쿨쿨.”

밥맛을 찾는 거지의 입술이 몇 차례 뭉그적거렸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던 요한은 작게


혼잣말을 했다.

“무슨 꿈을 꾸는 거야.”

꿈에서도 밥맛을 읊조리는 거지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던 그때였다. 제 몸을 작게 뒤척거리던 거지는 침대 위에 올려진


요한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었다. 우연처럼 혹 사고처럼 벌어진 일이었다.

요한은 제 손등 위에 올려진 거지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가늘고 기다란 손이었다. 왠지 모르게 세나의 손을 연상케 하는 손이다. 세나의 손도


정말 이뻤는데. 그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하리라고 늘 다짐했었는데.

요한은 저도 모르게 손을 조금 움직여, 그녀의 손을 완전히 그러잡았다. 맞닿은 그녀의 손이


뜨거웠다.

심장은 여전히 빠른 소리를 내고 있었으나, 요한의 마음은 삽시간 이상해졌다. 애가 닳고


슬프더라.

거지는 왜 손마저도 세나와 닮아서는.

요한은 나머지 손으로 괜스레 제 눈가를 쓸었다. 영문 없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니,


눈물을 흘리고만 싶었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세나가 떠오를 때면 늘 울고 싶었다.

세나를 잃은 후에 조슈아 앞에선 제법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요한은 강하지


않았다. 그저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버티고 있는 이유는 조슈아 때문이었다. 아이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으니까.

요한은 그렇게 4 년을 버텼다. 세나가 죽은 지 벌써 4 년째였다.

“……음흉하기도 해라.”

순간 거지의 목소리가 요한의 귓등을 때렸다. 요한은 저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시선을 돌려 거지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는 언제 잠에서 깬 것인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로 저를 보고 있었다.

“……!”

요한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녀의 손을 몰래 잡은 걸 꼼짝없이 들켰다.

제 8 화. 세나라는 이름, 조슈아 엄마의 이름이죠?

“너, 너! 언제 깬 거지? 도대체 눈을 왜 뜨고 있는 거야?”

요한은 당황한 나머지 얼토당토않은 말을 내뱉었다. 그는 그녀에게 잡힌 손을 빼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에서 깼으니까, 당연히 눈을 뜨고 있어야죠.”

“거지 너, 다시 눈 감아.”

거지는 확고하게 대답했다.

“거지가 당신의 말을 거절합니다.”

“……!”

“자고 있는 거지 손을 몰래 잡은 기분이 어때요?”

천연덕스러운 거지의 말에 요한은 그제야 잡고 있던 손을 빼내었다. 손등이 화상에라도 입은


것처럼 뜨거웠다. 고작 거지의 손바닥이 잠깐 닿아 있었을 뿐인데.

“좋지 않아. 아주 좋지 않았다고.”

“그래요?”

거지는 누워 있던 상체를 일으키며, 제 방을 불시에 찾아온 요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여긴 왜 들어오신 거예요?”

요한은 그녀의 물음에 비로소 저가 왜 이곳까지 찾아왔는지 떠올렸다. 그 목적을 잠깐 잊고


있었던 그였다. 요한은 근엄하게 표정을 정비하고선 거지에게 경고를 주려 했다.

“그래, 맞아! 거지 너, 조쉬에게…….”


분명 그러려고 했는데, 그의 말은 누군가에 의해 멈춰지고 만다.

“엄마! 조슈아가 왔어!”

조슈아는 요한이 열어 둔 방문 사이로 폴짝 뛰어 들어와 침대까지 타닥타닥 걸어왔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조슈아!”

아이는 금세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와 그녀의 품에 꼭 안겼다.

“조슈아, 오늘 어디 나갔다 왔어? 복장이 아주 훌륭한데?”

그녀는 잘 빼입은 조슈아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우웅! 모임에 가서 친구를 만나고 왔어. 아 참, 나 친구한테 아빠 자랑도 했다!”

“그러셨어요? 오구오구. 무슨 자랑을 했을까나?”

“아빠가 제국 최고의 밥맛이라는 자랑!”

조슈아는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번에 사레에 걸린 것은 리나였다. 그녀는 연신


캑캑거리며 어색하게 조슈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그래? 설마 그 자리에 너희 아빠도 같이 있었어?”

“응! 당연하지! 아빠는 내가 밥맛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한걸~”

“맙, 맙소사.”

그녀는 당혹감이 가득 밴 한마디를 툭 뱉어내고선, 제 품에 안긴 조슈아를 꼭 껴안았다. 마치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조, 조슈아. 사랑스러운 아이야. 오늘은 계속 이렇게 붙어 있자. 그러지 않으면, 내가 네


아빠한테 죽을지도 몰라.”

* * *

“약았어.”

요한은 거지의 방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거지는 조슈아를 인질로 잡고선 요한이 다그치려는
것을 한사코 막았다. 결국 백기를 든 쪽은 요한이었다.

그는 거지의 방을 나서며, 나중에 그딴 말을 조슈아에게 가르친 것에 대해서 한마디를 꼭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절대로 뒤끝 따위가 아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요한은 힘없이 소파 위에 앉으며 머리칼을 몇 차례 쓸어 넘겼다. 오늘
하루 밥맛이라는 소름 끼치는 그 단어를 제법 들어서 그런 것인지, 머릿속에 밥맛이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까지 거지에게 밥맛없게 굴었던가? 드레스도 주면서 나름 사과도 했었는데…….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뭘 더 어떻게 상냥하게 대한단 말인가.

거지에게 미움을 받기 싫다. 스스로 한 생각이지만 참으로 희한한 생각이었다.

사랑했던 여자와 닮은 얼굴이라는 게, 그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일이었던가. 처음 본, 그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미움받기 싫다고 생각할 정도로.

요한은 인상을 콱 구겼다.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똑똑.

“누구야?”

문 밖에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벨라예요!”

“들어와.”

방으로 들어온 벨라는 요한이 앉아 있던 소파 앞 테이블 위에 티포트와 찻잔을 내려놓았다.


괴로움을 술로 달래는 요한을 위한 숙취 해소용 특제 차였다.

요한이 그토록 술을 많이 마시고도 다음 날 멀쩡한 건 특제 차 덕분이기도 했다.

요한은 찻잔의 고리에 손가락을 두르며, 벨라에게 무심코 물었다.

“벨라. 내가 그렇게 밥맛인가?”

“……네? 밥, 밥맛이라뇨?”

벨라가 의아한 눈으로 요한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아니야. 쓸데없는 것을 물었군.”

“네.”

“아, 그리고 저번에 부탁한 거 말인데.”

“저번에 부탁하신 거라면……. 거지 님, 아니 이름 모를 그 여자분에 대한 거요?”

“어, 맞아.”

벨라는 요한이 마님과 똑 닮은 여자를 데려오던 그 날, 그가 몰래 지시했던 사항을 떠올렸다.


‘저 거지가 어떻게 살았는지 조사해 봐.’

벨라는 요한이 믿고 있는 몇 없는 사용인 중 하나였고, 종종 벨라에게 사람들의 뒷조사를


시키곤 했다. 가령 조슈아에게 접근하는 인물이라든지. 조슈아가 관심을 가지는 인물이라든지.

결론인즉슨 조슈아만을 위한 뒷조사였다.

“아직 모두 다 조사한 건 아니지만……. 곧 서류로 정리해서 올려 드릴게요.”

“알겠어. 이만 나가 봐도 좋아.”

“네.”

벨라는 요한의 방을 나섰다. 또다시 홀로 방에 남은 요한의 머릿속엔 밥맛이라는 단어가


지겹도록 떠다녔다. 도대체 그 말은 왜 자꾸 생각이 나는 거야.

“밥맛. 밥맛이라.”

아련하고 기분 나쁜 단어다. 요한은 그리 결론을 내렸다.

밥맛. 그것은 기분 나쁜 단어임에 확실했지만, 그 단어를 되뇌다 보면 왠지 모르게 아련하고도


익숙한 느낌마저도 들었다.

그 단어가 왜 아련하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걸까.

요한은 팔짱 낀 손으로 팔의 윗부분을 몇 번 두드렸다. 그러다 문득 책상 위에 있는 액자를


보게 된다. 요한의 책상 위에 늘 존재하는 세나의 그림이 담긴 액자였다.

그 그림은 세나가 건강했을 때, 조슈아를 닮은 생명의 싱그러움이 그녀의 얼굴에 머물러 있을


때, 그때 그렸던 그림이었다.

“아.”

세나의 액자를 보던 순간, 요한은 그제야 무언가를 떠올렸다. 기억의 밑바닥에 있던 아주


오래된 기억. 밥맛이라는 단어와 관련된 기억.

밥맛.

그 단어는 어렸을 적 세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제게 말했던 단어였다.

어떻게 그 기억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걸까. 아무리 오래된 기억이라 할지라도 세나와 관련된
기억인데.

그 순간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밥맛이라 말하던 거지의 얼굴과, 액자 안에 잠들어 있는 세나의


얼굴이 완벽하게 겹쳐 보였다.

* * *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제대로 된 통성명도 못 했네요.”

시녀의 말에 나는 조슈아의 볼을 쭉 늘이고 있던 것을 멈추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시녀,


요한의 저택에 온 첫날에 나를 안내해 주었던 그 시녀였다.

“어, 그러네요. 안녕하세요. 거지가 아니라, 리나라고 해요.”

내가 그리 말하기가 무섭게 시녀는 큭큭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거지가 아니라, 리나라고


해요.’라는 말이 꽤 우스웠나 보다.

“리나 님, 반가워요. 저는 벨라라고 해요. 한동안 제가 리나 님을 많이 도와드릴 것 같아요.”

“존칭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편하게 리나라고 불러 주세요.”

“하지만…….”

“괜찮아요. 거지라고만 부르지 않으면 됐지, 뭐.”

“풉. 아, 죄송, 큭큭, 해요.”

벨라는 조금 전보다도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제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내게 한동안 볼따구니를 공격당한 조슈아는 내가 놓아주기가 무섭게 테이블 근처로 쪼르륵
뛰어갔다. 녀석은 벨라가 가져다준 과자를 입에 넣고선 우물우물했다. 볼이 빵빵한 게, 한
번만 깨물어 보면 소원이 없겠다.

나는 조슈아의 볼을 깨무는 것 대신에 벨라가 가져온 갓 구운 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먹었다.


여긴 다른 건 몰라도, 모든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

음식이 맛있으니 기분도 좋아진다. 나는 조슈아처럼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빵을 욱여넣었다.


다니던 일터에서 자주 잘리고 항상 돈이 없다 보니,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 두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뭔가 진짜 거지 같은 생각이긴 했지만, 나는 진짜 거지는 아니다. 진심으로.

그저 기억을 잃은 채로 거리를 헤매던 방랑자였을 뿐.

“하지만 리나 님. 저도 존칭이 편하답니다. 존칭하는 걸 허락해 주시겠어요?”

뭐, 본인이 정 그러고 싶으시다면.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그런데 리나 님은 이곳에 오기 전엔 뭘 했었어요? 주인님은 거지……였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셔서. 하하.”
나는 입안에 있던 빵 조각들을 급하게 씹어 넘긴 후에 답했다.

“딱히 진짜 거지는 아니었지만, 거지처럼 살기는 했죠.”

“어머, 딱해라. 그럼 가족은요?”

나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내가 누군지, 내가 왜 길거리에 버려져 있었는지, 그런 것들도


모르는데, 내 가족 따위를 알 리가 없었다. 기억을 잃기 전엔 내게도 가족이 있었던 걸까?

나는 내게서 조금 떨어진 채로 과자를 먹고 있는 조슈아를 흘긋 본 뒤에, 벨라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저, 사실 제가 옛날 기억을 잃어서. 제가 누구였는지 잘 몰라요.”

허심탄회한 고백이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거, 솔직히 숨기고 있었던 얘기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듣는 이는 그렇지 않나 보다.

벨라는 여느 삼류 연극 속 출생의 비밀을 들은 듯한 여자 주인공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완전 깜짝 놀란 얼굴이라는 거다.

……아니, 그런데 잠깐. 내가 연극 같은 걸 본 적이 있던가? 거지처럼 살 때는 돈이 없어서,


그런 걸 볼 여유가 없었는데.

“맙소사,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벨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서 기억을 잃게 됐는지도 기억하지 못해요.”

“안타까워라.”

나는 괜찮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에 그다지 동정받고 싶지는 않았다.

“아, 저도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내 말에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벨라에게 ‘그녀’에 관한 것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차마 요한과 조슈아에게는 물어보지 못했던 그녀.

벨라라면 그녀에 대한 힌트를 조금이라도 주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요한이 그녀에 대해선


알려고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말이다.

“세나……, 라는 이름. 조슈아 엄마의 이름이죠?”

세나. 내가 이곳에 온 궁극적인 이유.

벨라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입술을 뭉그러뜨렸다. 비록 ‘네.’라는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나는 변해 버린 그녀의 표정만으로도 그녀의 대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세나라는 이름은 조슈아 엄마의 이름임에 확실하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그래서 쿨하게 다음 질문을 했다.

최악의 경우,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

거지라는 말에 그렇게 잘 웃던 벨라는 내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질끈 감았다 뜬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던 것도 같다. 벨라는 몇 초의 침묵 뒤에 말을 꺼냈다.

“……4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네?”

“이건 주인님이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어차피 이 저택에 며칠 더 계시다 보면 금방 아시게 될


일이라고 생각해서……. 제가 말씀드렸다고는 절대로 말하시면 안 돼요.”

“그럼요.”

벨라는 불안하게 떨리는 눈으로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삽시간에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세나라는 여자는 요한과 조슈아뿐만이 아니라, 뭇 사용인들에게도 사랑을 받은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벨라가 세나의 죽음에 이토록 슬퍼할 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세나라는 여자가 진짜로 죽었다, 라.

“조슈아는 그 사실을 몰라요?”

“네. 그땐 조슈아 님이 너무 어려서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답니다. 조슈아 님은 마님께서 몸이


아프셔서 공기 좋은 곳에 요양차 내려가신 줄 알아요. 언젠간 말씀을 드려야지 하고 있지만.”

벨라는 거기까지 말하고선 입을 꾹 다물었다. 멀리 있었던 조슈아가 우리에게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엄마! 벨라! 두 사람, 나 빼고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조슈아 무지 서운해. 흥.”

조슈아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홱! 돌리며 저가 삐친 사실을 강조했지만, 벨라와 나는 그런


조슈아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조슈아, 너는 진짜로 나를 네 엄마라고 생각해?

미처 묻지 못하는 질문이 입안에 연신 맴돌았다. 나는 그 질문을 삼켰다. 삼킨 말이 쓰디썼다.


지독한 약보다도 훨씬 더 썼다.

* * *
요한의 공작저로 온 지도 일주일이 흘렀다. 일주일 사이에 딱히 큰일은 없었다.

다만, 요한이 저택을 돌아다니지 말라고 왜 내게 경고했는지, 나를 왜 묶어 둔 개 취급을


했는지 알게 되었을 따름이었다.

요한 몰래 저택을 조금 거닐었을 때, 이따금씩 벨라 말고 다른 사용인들과 마주친 순간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

느낌표를 하나씩 장착했다. 심한 사람은 느낌표 다섯 개까지 얼굴에 띄우더라.

나는 그들이 나를 보며 왜 놀란 것인지 이해가 되었다. 아마도 요한이나 벨라가 그랬듯이 내가


죽은 세나와 닮았기에 그런 것이겠지.

나는 온갖 느낌표들을 겪은 이래로, 요한의 말대로 감금 아닌 감금 신세를 자처하던 중이었다.


세나라는 여자와 닮은 얼굴로 저택을 더 나다녔다간 사달이 날 것만 같았기에.

밥맛이라는 단어를 조슈아에게 가르친 일로 호되게 잔소리를 들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요한은


이상하리만큼 그 일에 대해서 며칠째 묵인 중이었다.

마치 대단한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것처럼 말이다.

나는 솔직히 그의 침묵이 무서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건 신종 협박술일까. 다그칠 일을 다그치지 않음으로써 되레 내가 더 조심하게 되는.


치열한 두뇌 싸움이 필요한 일이었던 걸까.

밥맛. 그렇게 안 봤는데, 꽤 머리 굴리네.

나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자발적인 감금 생활로 인해 오늘도 무료하게 보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노크도 없이 방문이 달칵 하고 열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기별도 없이 방으로 들어설 이는


정해져 있었다. 나는 놀라지 않으며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엄마!”

일단 먼저 들어온 것은 조슈아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 짧은 다리로 자박자박 걸어오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내 눈은 금세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입가엔 흐물흐물한 미소가 절로 새겨지며 나는 조슈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얼른 이리 오세요.

“조슈아, 잘 잤어?”

“응응! 엄마랑 같이 자고 싶었는데, 같이 못 자서 엄~청 아쉬웠어.”


자박거리는 걸음으로 어느새 내 지척까지 다가온 조슈아가 내게 폭삭 안겼다. 나는 아이의
작은 등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이젠 조슈아와 안는 게 제법 익숙해진 나였다.

“리나 님, 안녕하세요. 저도 있답니다.”

열린 문틈 사이론 벨라도 함께 들어섰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벨라도 있었네요? 두 사람, 같이 온 거예요?”

하나 방문자는 두 사람으로 끝이 아니었다.

문틈 사이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하나 더 들렸다.

제 9 화. 그 속이 진짜가 아니더라도, 겉모습만 엄마이면 된다

“흠흠.”

남자는 슬쩍 제 모습을 드러내며, 뻘쭘하게 팔짱을 꼈다.

요한이었다.

“뭐예요? 당신은 왜 왔어요?”

이건 절대로 까칠하게 말한 게 아니다. 다만, 반갑지 않은 마음이 그대로 표출됐을 뿐. 난


꽤나 솔직한 사람이었으니까.

요한은 두어 번의 헛기침을 한 뒤에 머쓱하게 말했다.

“조쉬가 같이 오자고 해서. 난 정말로 같이 오기 싫었는데, 조쉬가 자꾸 부탁하지 뭐야. 내가


거지 너를 보러 여기까지 왔다곤 착각하지 말아 줘. 이건 다 조쉬 때문이니까.”

그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러자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조슈아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웅? 아빠? 내가 언제 그랬어?”

조슈아는 고개를 뒤로 조금 돌려,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한이 한


말을 전혀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그 덕에 당황한 사람은 요한이었다.

“조, 조쉬! 너 아까 분명히 같이 가자고 내게 졸랐잖아!”

“내가 언제! 아빠가 먼저 같이 오자고 했잖아.”

“……내가?”
“웅!”

“네 자랑스러운 아빠인 내가 여기로 먼저 오자고 했다고?”

요한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재차 되물었다.

조슈아의 대답은 단호했다.

“웅웅! 그랬어!”

“조쉬. 아빠가 거짓말은 하면 안 된다고 했지?”

그러자 조슈아는 한껏 울상인 얼굴을 하고선 나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엄마……. 나, 나 정말 억울해. 조슈아는 아빠에게 조른 적이 없어.”

그리 말하는 조슈아의 커다란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곧 눈물이라도 흘릴 모양새였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조슈아를 한 번 보았다가 요한을 한 번 바라봤다.

아무래도 조슈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이렇게나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가진


아이가 거짓말을 했을 리가.

그렇다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요한이라는 건데. 하지만 요한이 구태여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내 방에 올 이유가 있던가?

확실한 사실은, 두 사람 중 누군가는 명백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심각한 고민 끝에 이윽고 답을 내렸다.

“요한 씨. 어른답지 못하게 애 핑계나 대고. 그냥 제 방으로 오고 싶었으면 ‘오고 싶었다.’


라고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설마 제가 문전박대까지 할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요한이 거짓말을 했다는 게 나의 결론. 두뇌로 치열하게 분석한 결과였다.

“아, 아냐. 진짜 아니라니까? 마음대로 착각하지 말라고 했지.”

“착각이 아니라, 사실을 인정하라는 거죠. 오죽했으면 조슈아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건지.”

쯧쯧, 나는 혀를 찼다. 그러자 요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더 뭐라


변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애꿎은 머리만 연거푸 쓸어 넘겼다.

우리가 아옹다옹 다투는 꼴을 지켜보던 벨라가, 우리를 중재하기 위해 나섰다.

“주인님. 어찌 됐건 리나 님 방에 오셨잖아요. 이유가 중요한가요. 큭큭, 제가 다과를 준비해


올 테니, 일단은 방에 들어와 계세요.”

벨라는 우리의 짧은 촌극 같은 대화가 우스웠던지 연신 큭큭거렸다.

“벨라. 너마저도! 난 정말 억울하다니까.”


“네, 암요. 주인님이 억울한 건 제가 다 이해하죠. 전 그럼 준비를 하러 이만.”

벨라는 나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하고선 이내 등을 돌렸다. 그녀가 방을 나가려 했을 때, 폭


안겨 있던 조슈아가 내 품에서 사뿐히 빠져나오며 말했다.

“엄마! 나도 벨라를 따라갔다 올게. 먹고 싶은 과자가 있어.”

“그러세요, 오구오구.”

그렇게 조슈아와 벨라가 나가 버린 방 안. 아직까지 문 근처에 서 있는 요한과 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요한은 제 말을 믿어 주지 않은 나를 여전히 어이없다는 얼굴로 보고 있었고, 나는 시치미를


뗐다.

“뭐 해요? 얼른 앉아요. 벨라 말대로 어찌 됐건 이미 와 버린 거니까. 큭큭.”

요한은 이를 뿌드득 갈며 천천히 걸어와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는 기다란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선 나를 삐딱하게 바라봤다. 단언컨대 그는 지금 불만이 가득한 게 틀림없었다.

“이봐, 거지.”

“네, 거지가 대답합니다.”

나는 버릇처럼 대답했다.

요한은 제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우리 밥맛에 대해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

“그간 내가 아무 말도 안 해서 안심했나? 심심했지?”

“아, 아뇨. 그럴 리가요. 밥맛 얘기가 뭐려나. 하하. 저도 조슈아를 따라 주방에나…….”

나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요한은 단호하게 나를 막아 세웠다.

“앉아.”

“넵.”

어쩐지 그간 잠잠하다고 했더니.

이마엔 미적지근한 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망했다.
* * *

한편, 방을 나선 조슈아는 벨라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조슈아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 것인지, 보는 이마저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벨라는 그런 조슈아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조슈아 님, 즐거우세요?”

조슈아는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나 엄청 행복해!”

“우리 조슈아 님은 무슨 이유로 행복하신 걸까나.”

“엄마 아빠가 같이 있는 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거든!”

“…….”

벨라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도무지 무슨 대답을 해 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벨라, 벨라. 실은 말이야. 나 아까 거짓말을 했어.”

조슈아는 고백하듯이 말했다.

“……네? 조슈아 님이 거짓말을 하셨다고요?”

“응. 거짓말이 나쁜 건 알지만, 왜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도 있잖아. 그게 무슨 말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욘두 선생님은 거짓말이 모두 나쁜 건 아니라고 했어.”

다섯 살 꼬맹이치고는 꽤나 명석한 대답이었다. 벨라는 때때로 성숙하게 말하는 조슈아가


신기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분명 조슈아의 선생님인 욘두 선생에게 그런 것들을 배웠으리라. 벨라는 새삼 욘두 선생의


자질에 대해서도 감탄하게 된다.

“맙소사. 조슈아 님은 어쩜 그렇게 똑똑하세요?”

“내가 엄마 아빠 아들이라서 그래. 헤헤.”

“기특해라. 그건 그렇고, 조슈아 님은 어떤 하얀 거짓말을 하셨는데요?”

“사실은……. 아빠에게 내가 졸랐어. 엄마 방으로 가자고. 아빠 말이 맞아.”

조슈아의 말에 벨라는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풉, 그럼 주인님이 한 말이 사실이었네요.”


“응. 그런데 내가 졸라서 왔다고 하는 것보다 아빠가 졸라서 왔다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서 하얀 거짓말을 했어.”

“…….”

“아빠가 솔직하지 못한 거, 벨라도 잘 알잖아. 조슈아가 이렇게라도 둘 사이를 도울 거야.”

근엄하고도 굳건한 조슈아의 말에 벨라는 웃음을 한껏 터뜨렸다. 도대체 뭘 돕겠다는 거야.

거짓말을 했다고는 하나 너무 귀여운 거짓말이 아닌가. 아이 주제에 속이 깊은 것 같기도 하고.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을까. 죽은 마님 또한 잘 자란 조슈아의 모습을 본다면
분명 행복해하셨을 건데.

벨라는 기분 좋게 웃다가도 세나의 얼굴이 생각나 웃음을 걷었다.

“벨라. 이건 꼭 비밀로 해 줘야 해.”

벨라의 고충을 모를 조슈아가 말했다. 벨라는 세나에 대해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선 조슈아의


금발을 부드럽게 헝클어 주었다.

“그럼요. 조슈아 님이 원하신다면 당연히 그래야죠. 하지만 다음에 또 그런 거짓말은 하시면


안 돼요. 아시겠죠?”

“응응.”

조슈아는 정말 그러겠다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렇게 벨라와 조슈아는 주방에 도착했다.

벨라는 간단한 다과를 준비했고, 조슈아는 주방 언저리에 있던 어느 선반 위에 앉아 부산하게


움직이는 벨라를 지켜보았다.

조슈아의 손에는 벨라가 쥐여 준 과자가 들려 있었다. 초코 시럽이 잔뜩 올라간 그 과자는


조슈아가 평소에도 즐겨 먹던 것이었다.

“조슈아 님은 마님이 돌아와서 좋으세요?”

벨라는 여전히 부산하게 움직이면서도 은근슬쩍 물음을 건네었다.

그것은 불현듯이 든 의문이었다. 조슈아는 리나를 정말로 진짜 엄마라 생각하는가.

조슈아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러어엄.”
하긴. 조슈아는 지난 4 년 동안 자신의 엄마를 보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액자 속
그림으로는 자주 보았으나, 살아 있는 엄마를 보지 못했다는 소리다.

세나는 조슈아가 한 살이 되던 무렵에 죽어 버렸다. 한 살짜리가 엄마의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할 리는 없었다.

더불어 조슈아는 세나가 죽는 걸 직접적으로 보지 못했다. 세나가 죽은 사실 또한 정확히


모르리라. 요양하러 지방에 내려가 있는 줄 알 테니까.

그저 요한이 애지중지하던 액자 속에 있는 세나의 그림을 보며 그게 제 엄마의 얼굴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외관상으로 본다면 리나는 세나와 정말 닮았으니까. 그렇기에 조슈아가 소름 끼치도록 닮은 두


여자를 헷갈려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고, 벨라는 생각했다.

일단 요한은 조슈아가 보는 앞에서도 리나를 줄곧 ‘거지’라고 불렀는데, 조슈아도 분명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슈아는 매일 세나를 그리워하던 요한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렇게나 그리워하던


사람이 다시 나타났는데, 요한은 리나를 반가워하기는커녕 매일같이 시비만 걸었다.

조슈아는 하얀 거짓말을 운운할 줄 아는 명석한 아이였다. 그런 상황들을 직접 목도하고도,


아이는 리나를 엄마라 부르며 엄청 따랐다.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벨라는 예쁜 접시 위에 다과를 올려놓으면서, 눈썹을 작게 일그러뜨렸다.

조슈아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걸까?

고뇌하는 벨라의 손엔 조슈아가 먹고 있는 초코 시럽이 올라간 과자가 들려 있었는데, 그


과자는 꽤나 약은 과자였다.

겉보기에는 초코 시럽이 한껏 뿌려져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겉에만 시럽을 바른 것에


불과한 과자였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겉모습만 그럴싸한 과자.

과자를 보던 벨라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속이 진짜가 아니더라도, 겉모습만 엄마이면 된다.

“벨라! 얼른 가자! 엄마 아빠가 기다리겠어.”

“……앗, 네!”

조슈아가 앉아 있던 몸을 발딱 일으켜서 벨라에게 다가왔다. 해맑게 웃고 있는 조슈아의


얼굴엔 근심 하나 없어 보였다.

벨라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래, 고작 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뭘 알겠어. 그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도 컸었기에, 부수적인 것들을 신경 쓰지 않는 거겠지.
* * *

무거운 침묵 속, 긴장감이 엄습한다.

나는 입안이 절로 말라 가는 것을 느끼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조슈아와 벨라는 도대체 언제


돌아오는 걸까.

나는 그들이 얼른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조슈아가 돌아와야지, 요한이 나를 혼내지


않을 텐데.

요한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서 떠나지 않는다. 그는 앉으라는 말을 내뱉은 후로 몇 분째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침묵이었다.

“밥맛이라.”

그는 한마디를 툭 내뱉고선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내 간은 작게 오그라들어 이내 먼지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혼내려면 얼른 혼내지. 왜 자꾸 말을 끊는 거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했다. 나는 내가 먼저 화두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혼나 봤자


얼마나 더 혼나겠어.

“그, 그래요! 제가 조슈아에게 밥맛을 이상한 뜻으로 가르쳤어요. 당신을 골탕 먹이려고 한


짓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에요.”

……나, 너무 솔직했나?

그러나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나는 멋쩍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요한의


눈치를 슬쩍 봤다.

“뭐? 왜 내 귀엔 네가 나를 골탕 먹이려고 그랬다, 라고 들리는 거지?”

“그건 아마도 당신의 귀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증거겠죠?”

“뭐라고?”

요한은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일 정도로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제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수습하기에 이른다.

“농담, 농담. 하여튼 저 때문에 당신에게 곤란한 일이 생긴 거라면, 죄송해요. 조슈아가


갑자기 밥맛이라는 단어의 뜻을 물어보는데……. 뭐라고 답해 주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재수 없는 사람을 밥맛이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

“아,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재수 없다는 말은 아닌데. 하하.”


“그럼 재수가 있다고 생각했는가?”

“글쎄요? 그 반대이지 않을까요?”

요한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더는 솔직하게 대답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농담, 농담. 표정 푸시라니까요. 하하.”

“…….”

“다음부턴 주의할게요. 한 번만 봐주세요.”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조슈아에게 밥맛이라는 단어로 장난을 친 것은 명백한 내 잘못이었다.


내 잘못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주의라.”

그는 또다시 길게 침묵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나를 직시했다.

“밥맛이라는 말. 예전에도 썼던 말인가?”

그가 던진 질문은 아주 의외의 질문이었다. 내게서 밥맛이라는 말의 근원을 찾으려는 듯한


질문. 요한은 도대체 무엇이 궁금한 걸까?

“예전이라면 언제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가령 어렸을 때라든지.”

음, 그건 모르려나. 요한은 내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작은 소리로 덧대며,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그는 무언가 더 말할 듯하면서도 이내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어렸을 때라.

나는 요한에게 대답다운 대답을 해 주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내겐 어렸을 때의 기억이


없었다. 기억을 잃은 채로 거리를 헤매던 방랑자 리나. 나는 내 처지를 상기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뒤늦게 털어놓는 거지만, 저는 기억을 잃었어요. 잃은 기억 속엔 어렸을 때의 기억도


포함된답니다.”

짐짓 심각한 얼굴로 토로했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영 시원찮다. 요한은 벨라처럼 놀라지도


않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마치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진즉 알고 있었다는 사람처럼.

“알아.”

뭐! 정말로 알고 있었어?
진실을 토로한 사람은 나인데, 되레 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고 계셨다고요?”

“그래, 거지 네가 기억을 잃은 채로 방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도 이미 알고 있다고.”

“설, 설마 당신……. 미인 거지의 스토커였어요?”

“내가?”

“그럼 누가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요한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은


덤이었다.

“나 원, 그럴 리가 없잖아. 사실 네 뒷조사를 좀 했어. 기분……, 나쁠 수도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처음 보는 널 무턱대고 조쉬 옆에 붙여 둘 수는 없잖아. 나는 그저 네가 믿을 만한
거지인지, 아닌지를 알아본 거야. 다른 이유는 없었어.”

아, 그렇구나. 나는 그를 이해한다는 듯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생각해 보았을 때,


내가 요한이었어도 그랬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을 제 자식 옆에 무턱대고 둘 순 없지. 그리고 내 뒷조사를 해도 딱히 상관이


없었다. 켕기는 것도 없는데 뭐.

“그래서 거지가 묻습니다. 저는 믿을 만한 거지입니까?”

그리 묻긴 했지만, 참 이상한 질문이라는 데에 이의가 없는 바였다. 믿을 만한 거지인지


아닌지를 묻는 거지가 아닌 거지라.

이윽고 요한의 입술이 떼어졌다.

제 10 화. 두 사람, 진짜로 형제 사이?

“이봐, 거지.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알아? 넌 일주일째 내 저택에 머물고 있어. 매일


제때 식사를 챙겨 주고, 따뜻한 잠자리도 제공해. 그리고 드레스도 사 줬잖아. 그래도
모르겠나?”

요한은 줄줄 말을 내뱉으면서도, 내가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은 정확하게 내어 놓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정확한 답을 요구했다.

“네, 거지는 당신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허! 그 말투 소름 끼치게 짜증 나는군.”

“그럼 거지라고 더는 말하지 마세요.”

어쩌면 이젠 인정해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나는 사실 뒤끝이 있었던 거라고.

요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언가를 포기한 기색이 완연한 고갯짓이었다. 그러다 그는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불시에 작게 읊조렸다.

“……없다고 생각했어.”

“뭐라고요? 너무 작아서 안 들려요.”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네가 이곳으로 오고 난 뒤에 조쉬도…….”

요한은 나를 올곧게 바라보던 눈을 내리깔았다. 누군가와 시선을 맞추는 데에 거리낌이 없던


그가, 내게서 시선을 돌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행복해 보였으니까.”

작은 소리였지만 내 귓가엔 제법 확실히 닿았다. 조금 숙인 고개, 떨구어진 시선, 그리고


붉은 입술. 그의 입술은 희미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소였다.

요한의 미소. 나는 왠지 모르게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저 미소, 오랜만에 본다. 라는 생각이 불현듯이 들었다.

거리에서 요한을 만난 이래로 그의 미소를 봤던 적이 있던가?

물론 조슈아를 향한 요한의 미소는 꽤나 많이 보았다. 하지만 그가 나로 인해 미소를 지었던


적은 단언컨대 없었다.

나는 왜 나를 향한 요한의 미소를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꼭 예전에도 보았던 것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쓸어 주고만


싶었다. 그러곤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은 행복하지 않았나요?

“엄마! 내가 많이 늦었지?”

식당에 갔던 조슈아가 방으로 다시 돌아오며,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끝났다. 나는 어느새


내게로 가까이 다가온 조슈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엄청 늦었네.”

“나 기다렸어?”

“그럼. 기다렸고말고.”
“미안해, 엄마. 얼른 올걸. 대신에 내가 얼마나 맛있는 거 가져왔는지 한번 볼래?”

조슈아의 뒤를 따라온 벨라가 방으로 들어서며, 쟁반 위에 올려져 있던 다과를 내려놓았다.

“조쉬, 아빠한테 할 말은 없어?”

내 앞에서 귀엽게 꼬물거리던 조슈아를 본 요한이 물었다. 그는 언제 미소를 지었냐는 듯이


평소와 다름없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조슈아는 그런 제 아빠를 빤히 응시했다.

“아빤.”

“응.”

“아직도 안 갔어?”

“……!”

심드렁했던 그의 표정이 아주 삽시간에 무너졌다. 요한은 이마를 짚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


정성을 다해 키웠더니 헛수고였어…….’라는 푸념도 함께.

“주인님. 괜찮으세요?”

벨라는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물었다.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내가 괜찮지 않을 일이 뭐 있겠어. 그리고 나 진짜로 나갈 거야. 붙잡을 생각은 아무도 하지


마.”

그는 차갑게 등을 돌리며 방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나 그 걸음은 너무나도 느릿하다.


마치 저를 잡아 주길 바라는 사람처럼…….

그리고 놀랍게도 그를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빠, 잘 가!”

조슈아만이 그를 성의 없이 배웅했을 뿐이었다. 조슈아의 배웅에 요한의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게 보였다.

“큭큭.”

벨라와 나는 결국 웃음이 터져서, 한참이나 키득거렸다.

* * *
낮 동안에 한차례의 소동이 지나간 후, 나는 적적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가정교사에게 수업을 받으러 간 조슈아가 없어서 그런지, 나는 매우 심심했다. 심심함을


달래려 침대에 누워 있어도 보고 스트레칭도 한번 했다가, 이윽고 나는 창가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창밖을 내려다보자 아름다운 전경, 즉 공작저의 정원이 들어왔다.

잘 손질된 정원수들이 일자로 잘 심어진 정원은 누군가의 정성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순간


요한이 그 정원수들을 일일이 관리하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것은 일종의 환영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왜 그런 장면이 내 눈앞에 아른거렸는지 그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다.

환영은 곧 사라지며 대신 어느 마차 하나가 공작저로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마차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멈춰선 마차에선 누군가가 내리기 시작했다. 요한의 손님인 걸까.

마차에서 내린 이는 남자였다. 그것도 엄청 옷을 잘 입은 엄청 잘생긴 남자.

멀리서 보았기에 얼굴까지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잘생긴 아우라를 가득


풍기는 남자였다. 나는 그 남자가 잘생겼을 거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택의 현관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머리칼이 석양빛에 반짝거렸다. 석양빛과 대조되는 푸르고도
오묘한 푸른빛의 머리칼이었다.

저런 푸른 머리칼을 가진 남자를 하나 알긴 아는데.

나는 문득 거리에서 자주 만났었던 그 남자를 떠올렸다. 미인 거지라는 칭호에 걸맞게 그


남자는 거지꼴인 내게 고백을 했던 남자였다.

‘리나, 좋아해. 나랑 같이 살자.’

내가 오죽 좋았으면, 같이 살자고 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남자의 고백을 거절했다. 남자는 잘생겼고, 키도 컸고, 돈도 많아


보였지만, 그의 고백이 진실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듯한 고백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석연치 않았던 고백이었다.

남자는 자존심도 없는 것인지, 내게 고백을 거절당하고도 나를 매번 만나러 왔었다. 생각해


보니, 요한의 저택으로 오며 그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터였다.

잘 살고 있으려나. 나를 찾지는 않으려나.

이내 남자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 얼마 뒤,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조슈아의


외침이 들렸다.

“엄마!”
귓가에 파고든 엄마라는 소리가 낯설지 않다. 아니, 되레 익숙하기만 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는데, 나는 최근에 들어서야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엄마라는


소리에 언제 이토록 적응을 잘한 것인지, 이젠 조슈아가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면
서운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나는 창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며, 아이에게 가까이 걸어가 자세를 낮추었다.

조슈아는 늘 그랬듯이 내 품에 안겨 제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나는 아이의 말랑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좋은 냄새. 아기 냄새.

“조슈아, 수업은 끝났어? 열심히 들었어요?”

“응응, 오늘도 욘두 선생님이 재미있는 얘길 많이 해 주셨어.”

“욘두?”

“응! 선생님 이름이야.”

욘두라. 그러고 보니 이 저택에서 말을 트고 있는 사용인은 기껏해야 벨라 정도밖에 없었다.


조슈아의 선생님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조슈아는 때때로 나이에 비해 조숙한 말을 하곤 했다. 가령 부부는 함께 있어야 한다느니,


하는 그런 조숙한 말을. 그런 말들의 출처가 욘두 선생이 아닐는지 하는 추측을 해 본다.

도대체 아이에게 뭘 가르치는 거야.

“오늘은 뭘 배웠어?”

조슈아는 내 가슴팍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오늘 배운


것을 다시금 상기하려는 듯 눈동자를 귀엽게 굴렸다.

“음. 오늘은 영원히 기억하는 법을 배웠어.”

“영원히 기억하는 법? 아둔한 엄마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조슈아가 설명해 줘.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 말은……, 내가 잊고 싶지 않은 것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선, 의미 있는


수단을 만드는 거야.”

조슈아는 제법 어려운 말을 내뱉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으으음. 조슈아도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몰랐는데, 욘두 선생님이 쉽게 설명해


줬어.”

“어떻게?”

“엄마를 떠올리면 된대. 헤헤.”


여기서 엄마라는 것은 진짜 엄마인 세나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가짜 엄마 행세를 하고 있는
나를 말하는 걸까.

“내가 엄마의 냄새를 영원히 기억하는 거야. 그럼 나는 언제고 엄마를 기억할 수 있어. 잊지
않을 수 있대. 냄새뿐만이 아니라, 엄마의 드레스나 엄마의 구두를 기억해도 돼. 그런 것들을
수단이라고 한대.”

“응.”

“엄마의 냄새와 비슷한 냄새, 엄마 것과 비슷한 구두와 드레스……. 그런 것들을 보며 나는


엄마를 영원히 떠올릴 수 있는 거지! 어때? 엄마도 이제 이해가 되지?”

얘……, 너 다섯 살 꼬맹이가 맞니?

나는 그제야 아이가 말한 ‘영원히 기억하는 법’을 얼추 이해했다. 그러곤 아이가 한 말을


되뇌었다.

잊고 싶지 않은 것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선, 의미 있는 수단을 만든다.

기억을 잃고 방황하던 내게 있어, 꽤나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내게도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된


의미 있는 수단이 있지 않았을까?

기억을 잃은 계기가 되었던 어떤 사고를 당한 후에 나를 돌봐주었던 잡화점의 아저씨. 그


아저씨에게서 수단과 관련된 ‘무언가’를 들었던 것 같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엄마? 무슨 생각해?”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 조슈아가 똑똑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요. 누구 아들인데 이렇게나 똑똑할까.”

나는 조슈아의 엉덩이를 팡팡 내려쳤다.

“엄마 아들이라서 그런 거야.”

조슈아는 가지런한 흰 이가 보일 정도로 예쁘게 웃었다. 나는 아이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아빠 아들은 아니고?”

“피, 아빤 매일 잔소리만 하는걸. ‘조쉬! 그건 하면 안 돼!’ 이렇게 말이야.”

조슈아는 어쭙잖게 요한의 목소리와 엄한 표정을 따라 했다. 그 모습이 여간 우스운 게


아니어서 나는 작게 키득거렸다.

“큭큭, 맞아. 네 아빠가 잔소리가 심하긴 해.”

“맞아! 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

“당연하지.”
우리는 죽이 척척 잘 맞는 콤비처럼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얼굴을 보고선 킥킥거렸다. 이럴
때 보면 정말 내 아들 같기도 하다.

어쩜 이렇게 잘 맞아? 넌 숨겨 놓은 내 아들이 아니니?

“귀여워 죽겠네, 진짜.”

네가 이렇게까지 귀엽고 사랑스럽지 않았다면, 요한의 저택에 이토록 오래 남아 있지 않았을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한 채로 아이의 볼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그것도 엄마 아들이라서 그래.”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어쩌면 좋지?

한참을 키득거리던 조슈아는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화제를 돌렸다.

“앗! 맞아, 엄마! 오늘 삼촌이 온댔어!”

“네 삼촌? 이면 밥……, 아니 요한의 형제?”

“웅. 아빠 동생!”

나는 자연스럽게 조금 전에 보았던 푸른 머리칼의 남자를 떠올렸다. 설마하니 그가 조슈아의


삼촌인 걸까? 요한의 검은 머리칼과는 전혀 다른 머리 색을 가진 그 남자.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조슈아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엄마도 나랑 같이 삼촌을 보러 가자.”

“어? 네 삼촌을 내가?”

“웅웅! 삼촌도 엄마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었거든.”

“글쎄……. 그래도 될까?”

나는 고민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요한이 노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어찌 되었건 푸른 머리칼의 조슈아의 삼촌은 요한의 손님이었다. 그 사이에 내가 껴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를 잘 가늠할 수 없었다.

“응? 가자, 응?”

조슈아는 눈치가 빠른 영민한 아이였다. 아이는 내게서 고민하는 기색을 재빠르게 인식하며,
내 손을 더욱 꽉 부여잡았다. 애처로운 눈빛은 덤이었다. 조금 전까지 생글생글 웃었던 주제에
표정을 어찌 이리 잘 바꿀꼬.

나는 결국엔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암묵적인
내 동의에 조슈아는 별안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방 밖으로 이끌었다.

“어서 가자! 삼촌은 아빠 방에 있을 거야.”


다섯 살 꼬맹이에게 질질 끌려 나온 내가, 요한의 방까지 가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요한의 방은 내 옆방이었으니까.

조슈아는 내 방에 들어왔을 때처럼, 노크 하나 없이 요한의 방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어……. 요한 씨, 이건 그러니까 조슈아가…….”

나는 방 안으로 뭉그적뭉그적 들어서며 객쩍은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이건 절대로 내 의지로 들어온 게 아니다. 조슈아가 같이 오자고 해서 따라온 거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어째 낮에 요한이 말했던 대사와 비슷한 듯한 묘한 기분이 드는데…….

각설하고, 결론적으로 나는 내 말에 구두점을 찍지 못했다. 왜냐면 방 안에 서 있던 어느


남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요한이 아닌, 푸른 머리칼을 가진 그 남자와 말이다.

조슈아의 삼촌이라 추정되었던 그 남자. 왠지 모르게 익숙했던 그 남자.

나는 넋이 나간 얼굴로 남자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제 눈꼬리가 휘어지게 미소 지었다. 미소를 지음에 그의


볼에 있던 우물 같은 보조개가 움푹 파인다.

남녀노소 누가 보아도 참 예쁜 보조개라고 생각이 되는 보조개이자, 익숙한 보조개였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더라니.

그는 내가 아는 남자였다.

“너……. 바비?”

남자는 대답 대신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완벽한 초승달 눈을 만들고선 내게 가까이 걸어왔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이윽고 남자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까지 다가와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의 얼굴의 그림자가
내게로 기운 것은 그때였다.

그는 내게 고개를 바투 기운 채로,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따뜻한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말이었다.

“리나, 한참 찾았잖아.”

 
진짜로 바비다.

‘리나, 좋아해. 나랑 같이 살자.’

요한의 저택으로 오기 전, 내게 고백했던 그 남자.

나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마치 이곳에서 나를 만날 것을 이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그 순간 왼쪽 뺨에 구멍이 뚫릴 듯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그 시선의


장본인과 눈이 마주쳤다.

“밥맛.”

요한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내게 닿은 그의 눈빛이


진득하기만 했다. 뺨에 느껴졌던 따가운 시선은 내 착각이 아니었다.

“두 사람……, 아는 사이?”

요한은 누구에게 물었는지 모를 질문을 했다. 그 질문은 나야말로 요한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두 사람. 진짜로 형제 사이인 거야?

제 11 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그녀

요한이 한달음에 내게 가까이 다가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는 금세 내 앞까지 다가와 내


손목을 억세게 쥐어 잡았다. 힘주어 제 쪽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요한으로 인해, 나는
휘청거리며 그의 옆에 서게 되었다.

그가 잡은 손목이 아프고 뜨거웠다. 요한은 평소 상냥한 편은 아니었지만, 강압적으로 굴지는


않았었다. 그의 강압적인 모습은 적어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요한은 바비와 마주 선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굳어 있던 요한의 얼굴에 서린 기운의 정체는


경계였다. 이를테면 제 것을 남에게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그런.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심상치 않다.

“바비. 두 사람 아는 사이냐고, 내가 물었잖아.”

요한은 제법 살벌하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내게 위협답지 않은 위협을 하던 목소리와는


판이한 것이었다.
반면 바비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로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요한의 살벌한 눈빛이 아무렇지
않다는 태도였다.

“요한. 리나와 나는 아주 친밀한 사이야. 적어도 네가 리나를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서로를


자세히 알고 있어.”

“…….”

요한은 대답하지 않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곤 그는 내 손목을 더욱 세게 말아 쥐었다.


마치 내가 제 곁을 떠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나는 요한의 옆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왠지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밥맛 요한, 당신은 무엇을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거야?

“바비…….”

나는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리며,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내가 바비를 처음 만난 건 작년 여름, 아주 무더웠던 날이었다.

대지의 모든 생물을 말살해 버릴 듯한 강렬한 태양 빛. 그 밑에서 나는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매미의 지저귐이 희미한 소리로 들리며 몸이 휘청거리던 찰나, 누군가가 내
허리를 꽉 잡아 줬었다.

‘열사병?’

그 누군가가 바비였다.

소리 없이 다가와 쓰러지려던 나를 붙잡아 주었던 그는, 언제 준비했을지 모를 차가운 음료를


건네며 더위에 허덕이던 나를 구제해 주었다. 낯선 남자에게서 받은 친절한 호의였다.

‘이봐, 이거라도 좀 마셔 봐.’

푸른 머리칼을 가진 남자. 남자는 제 머리칼의 색과 닮은 청아한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쥐여 준 음료를 마시며 메마른 숨을 토해냈다.

‘감사합니다.’

바비는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었다. 아주 예쁜 웃음이었다.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음료, 시원했지?’

그는 여전히 예쁘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었다. 시선을 절로 붙잡는 붉은 입술이다. 여름 햇살에


반짝이던 그의 붉은 입술이 유달리 아름다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료는 정말 시원했으니까.

‘그럼……. 내가 음료 값을 받아야 되지 않을까?’

‘네?’

‘첫눈에 반했어.’

‘……네?’

그때의 나는 바보처럼 같은 대답을 연거푸 했었다.

‘나는 너 좋아하게 될 것 같은데.’

‘…….’

‘너도 나 좋아해 주면 안 될까? 그거면 음료 값으로 충분할 것 같아.’

바비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나와 눈을 맞췄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엔


거짓의 기운은 일말도 없었다.

첫눈에 반했다.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의 말이 메아리처럼 귓전에 울렸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는 일이 실제로 가능한 일인 걸까?

바비는 제 고백에 대한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한껏 흐트러뜨렸을


뿐이었다.

‘나는 바비라고 해. 네 이름은 뭐야?’

‘……리나.’

‘리나. 귀여운 이름이네.’

바비는 그날 이후로 근 일 년 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거의 후줄근한 차림으로 거리를 나다니거나, 일용직으로 일하거나 했고, 그 모습들은


이성적인 호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모양새는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모로 나와 정반대인 바비는(그는 잘생겼고, 늘 비싸 보이는 옷차림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괘념치 않아 하며 매번 고백했다.

좋아해, 같이 살자, 나랑 만나 주면 안 돼? 아직도 나 안 좋아해? 네가 좋아하는 건 뭐야? 넌


어떤 사람을 좋아해? 등등의 집요한 물음들과 함께.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바비가 나를 좋아하게 된 일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한 건 바비뿐만이 아니라,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냐면 바비의 온갖 정성에도 나는 끝내


그를 받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보다 나 좋다는 남자를 만나야 행복하다고 하던데, 내겐 그를 만나서는 안
된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바비에겐 이따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이 들 때가 있기도 했다.

그 감정의 이름을 일컫자면,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물론 바비에게서만 그리움이란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기억을 송두리째 잃은 나는, 종종


누군가가 그립다는 느낌을 뜬금없이 느낄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과거의 기억이 없었기에 그것이 가족인지, 친구인지, 더해 연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 묘하게도 바비를 볼 때마다 그립다는 느낌을 더 자주 그리고 확고히 느꼈었다.

잊힌 내 기억 속에 바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그리움의 정체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또한 떠올려 보았을 때, 나를 그토록 궁금해했던 바비는 지난 일 년간 정작 자신에 대한 것은


하나도 말해 주지 않았었다.

물론 내가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건 바비의 의도된 함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느냐. 그건 바로 바비가 요한의 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똑 닮은


얼굴을 가진 세나의 남편이었던 그 요한과.

어째 바비에게서 아주 진한 냄새가 났다. 진한 냄새의 정체를 일컫자면, 그건 수상한 냄새였다.

나는 과거를 거기까지만 떠올리며, 현실 속 바비와 요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뜨거운 언쟁 중이었다.

“요한. 더 안 물어봐? 우리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많이 궁금할 텐데.”

“됐어. 하나도 안 궁금해.”

“네가 궁금해하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얘기해야겠네.”

“그 입 다물어 줬으면 좋겠군.”

요한의 기세가 맹렬하다. 두 사람. 조만간 치고 박고 싸우는 건 아닐까.

“저기, 요한 씨.”

나는 요한을 슬쩍 불렀다. 중재라도 한번 해 볼 심산이었다. 그는 내 쪽으론 돌아보지도


않으며 대답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

“……리나.”

“……!”

거지가 아니라, 리나? 나는 화들짝 놀랐다. 요한이 나를 거지 혹은 미인 거지가 아니라 내


이름으로 불러 줄 줄이야.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가히 해롭다.

리나. 리나. 리나.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내 귓가에 끊임없이 울렸다. 입안이 괜스레
말라 갔다.

“요한. 리나가 말하려는 걸 왜 막아?”

바비는 분명 저에게 한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 대신 대답을 해 주었다.

“닥쳐, 바비. 넌 우리 일에 신경 쓸 필요 없어.”

이러다가 진짜로 싸움 나는 거 아냐?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일단 진정 좀 하실래요?”

요한은 내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바비도 마찬가지였다.

“요한 너나 닥쳐. 나는 리나와 얘기를 나누어야겠어.”

바비의 말에 요한은 매섭게 대꾸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나를 두고선 몇 차례의 험악한 대화를
더 나누었다.

“누구 마음대로? 거지, 아니 그녀는 지금 내 사용인으로 취직했어.”

“오호라, 요한 네가 얼마나 불순한 의도로 리나를 이곳에 취직시킨 건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불순한 의도라니? 말 가려서 해.”

그사이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요한의 악력이 느슨해져 있었다. 나는 그 틈을 타 그에게서 잡힌


손목을 빼내었다. 어찌나 힘주어서 잡고 있었던지 손목 어귀가 얼얼했다.

나는 불같이 싸우는 두 남자를 피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조슈아를 찾았다.

아이는 소파에 느른하게 앉은 채로 우리들을 아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른들의 싸움을


관망하는 다섯 살 꼬맹이라. 단언컨대 묘한 광경이었다.

나는 소파 쪽으로 걸어가 아이의 옆에 앉았다.

“조슈아! 두 사람 좀 말려 봐.”

“엄마. 남자들의 싸움에는 끼는 게 아니라고 했어.”


“그,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욘두 선생님이 그랬어!”

조슈아는 아주 밝게 대답했다. 제 말이 이상했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로 다시금 요한과 바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을 말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조슈아처럼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니, 조슈아가 저들을 말리지 않고
관망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요한은 항상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는 것과는 별개로 얼굴선이 가늘고 예쁘게 생긴 편이었는데,


이렇게 앉아 자세히 보니 미소년이 따로 없었다.

검은 머리칼과 대조되게 피부도 허연 것이, 아이가 있는 남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다.

반대로 바비는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얼굴선이 날카롭고 견고했다.

웃고 있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막상 표정을 굳히면 꽤 매서워 보이기도 했다. 여하튼


무슨 표정을 짓든 잘생겼다는 게 함정.

결론적으로, 두 사람 모두 아주 잘생긴 남자들이었다. 잘생긴 남자들이 다투는 모습은 결코


흔한 장면이 아니었다. 아주 희소할 테지. 팝콘이라도 하나 있으면 딱인데.

“조슈아. 그래서 바비가 진짜로 네 삼촌이라고?”

나는 두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조슈아에게 확인사살 했다.

“응응. 진짜로 조슈아의 삼촌! 바비 삼촌은 종종 놀러 오곤 하는데. 놀러 올 때마다 아빠랑


매번 싸워. 가끔은 정원에서 주먹다짐을 할 때도 있다니까. 그러니까 저렇게 말다툼을 하는 건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야.”

“두 사람. 사이가 엄청 안 좋구나.”

“조슈아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조슈아는 바비 삼촌도 좋아해.”

“조슈아, 너. 너무 다정한 거 아니니?”

“헤헤.”

조슈아는 방긋방긋 웃었다. 박애주의자 조슈아 꼬맹이가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얜, 악마가
다가와도 그게 악마인 줄 모르고 좋아할지도 몰라. 그럼 안 되는데.

그 순간 내 눈에 띄는 물건 하나가 있었다. 그건 요한과 바비의 뒤쪽에 있던 검은색의


피아노였다. 전에 요한의 방에 왔을 땐 보지 못했던 피아노였다. 그땐 그의 방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어서.

요한과 피아노라. 왠지 어울릴 것 같다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옮겨가며, 요한의 책상 위에 있던 어느 액자까지 바라보게 된다. 그 액자는
내 손바닥 크기만 한 작은 액자였는데, 그 속엔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어?”

나는 액자 속 여자를 보곤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여자의 얼굴이 내 얼굴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울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렸다.

세나. 나와 닮았을 것이라 예상했던 세나.

설마 저 그림은 세나의 얼굴을 그린 그림인 걸까?

내 팔뚝엔 언제 돋았을지 모를 소름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맙소사.”

갑작스럽게 주위를 맴도는 공기가 희박해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켜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심장이 가파른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설렘을 의미하는 소리는 아니었고, 짙은


불길함을 의미하는 소리에 가까웠다.

나는 이제야 조슈아가 나를 보며 엄마라 맹신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더불어 나를 볼 때마다 약한 모습을 보였던 요한 또한.

그 이유는 세나와 내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물보다 더 진한


무언가로 이어진 사이처럼.

나는 액자 속에 존재하는 그녀가 세나일 거라고 굳게 확신을 했다.

그녀다. 그녀임에 틀림없다.

 
나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액자 속에 존재하는 세나를 조금 더 자세히 관찰했다.

결 좋은 금발은 그녀의 가슴팍까지 내려와 있었고, 선명하게 칠해진 세나의 눈동자 색은


에메랄드빛이었다. 그것은 내 눈동자 색이기도 했고, 조슈아의 눈동자 색이기도 했다.

동그란 이마, 그 끝이 조금 올라간 코, 자연스럽게 색이 덧대진 붉은빛의 입술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나와 소름 끼치도록 닮은 얼굴이었다.
그렇기에 그런 것일까. 분명 처음 본 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가 않았다.
되레 익숙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익숙함이라.

“세나…….”

나는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액자 속 엄마도 예쁘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엄마도 예뻐! 다 예뻐! 엄청 예뻐.”

내가 액자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조슈아가 말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조슈아에게 물었다.

“조슈아. 저 사람이 진짜 네 엄마야?”

“웅! 맞아!”

조슈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4 년 전에 죽었다던 세나. 그 여자는 어떤 여자였을까?

나는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책상 근처까지 다가갔다. 액자 속 세나의 그림을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함이었다. 이내 나는 걸음을 멈추며, 책상 위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액자의 모서리에 내 손이 닿으려던 순간.

탁.

나보다 한발 앞선 누군가의 손이 액자를 책상 위로 엎어 버렸다. 그 덕에 내 눈동자에 맺혀


있던 세나의 얼굴은 곧 사라지고야 만다.

엎어진 액자 위에 올려진 손이 낯설지가 않다. 어쩜 여자의 손보다도 하얗고 예쁜 손. 나는


선이 예쁜 남자인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밥맛.”

나는 고개를 돌려, 언제 내 옆으로 왔을지 모를 그를 바라보았다.

“보지 마.”

그는 경고하듯이 말했다. 바비에게 따지던 목소리보다도 더 서늘한 목소리였다.

나를 향한 요한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빡였다. 책상 뒤, 널따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검은 눈동자를 연신 반사하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어째 불투명했다.

물기에 젖은 듯해 보이는 눈동자. 말은 그렇게나 서늘하게 했던 주제에,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기에 불쑥 슬퍼진 눈을 하게 되었을까.


“아무것도 묻지 마. 나는 아무것도 대답해 줄 수가 없으니까.”

그는 세나에 대해 내가 묻는 것을 원천 봉쇄했다. 나는 요한을 의문스럽게 바라보다, 그의


뒤에 있던 바비와 눈이 마주쳤다. 바비는 아차차, 하는 얼굴이었고 그 또한 무언가를 털어놓기
꺼리는 모습이 역력했다.

요한뿐만 아니라 바비 또한 ‘세나’와 관련된 일을 털어놓는 걸 꺼렸던 것이다.

“밥……, 아니 요한 씨.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요. 대신 바비랑 얘기 좀 나누고 와도


될까요? 저희가 나누어야 할 얘기가 생긴 것 같아서.”

“리나, 나는…….”

바비는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내 말끝을 늘어뜨렸다.

“아니, 방금 요한 씨에게 말한 건 부탁이 아니라 통보였어요.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조슈아도 여기서 네 아빠랑 잠깐만 기다리렴.”

“응응!”

조슈아는 상황이 심각해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밝게 대답했다. 다행이었다.

“…….”

요한은 침묵하며 나를 붙잡지는 않았다. 나는 바비에게 따라오라는 눈짓과 함께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기 전, 흘긋 바라본 요한은 여전히 액자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의 몸은


단단히 얼어붙은 듯처럼 보였다.

바비는 나를 따라 순순히 방을 나섰다.

우리는 기다란 복도를 조금 걸어가, 인적이 드문 곳까지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걷는 내내 생각했다. 바비는 일 년 전, 나와 처음 만났던 그때에 내가 세나와 닮았다는 사실을


몰랐던 걸까?

나는 걸음을 멈추자마자 바비에게 내 의문을 털어놓았다.

“바비. 너는 처음부터 내가 세나라는 여자와 똑같이 생겼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렇지?”

나는 마주 선 바비를 노려보며 물었다.

과연, 그는 어떤 대답을 할까.

제 12 화. 더는…… 못 기다리겠어
“그래. 알고 있었어.”

바비는 시원하게 인정했다.

그래, 그가 몰랐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요한의 동생이자, 조슈아의


삼촌이었으니까.

사실 그는 내가 세나와 닮았기 때문에 내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을지도 몰랐다. 그 예쁘디예쁜


웃음 뒤에 검은 꿍꿍이를 숨기고선 내게 접근했다, 이거지?

그와 친구도 아니었고 연인도 아닌 애매한 관계였지만, 나는 그에게 큰 배신감이 들었다.

그래도 일 년간 알던 사이다. 세나에 대해 아무런 언질을 해 주지 않은 것은 바비의


잘못이었다. 부정할 수 없이. 명백히.

바비 또한 내게서 세나를 찾았던 것은 아닐까. 죽은 세나를 그리워했기에 나를 제 곁에 두려


했던 거라고. 석연치 않다고 생각했던 바비의 고백엔 그런 배후가 있었던 것이다.

영문 없이 입 안이 썼다. 제길.

“그런데 그게 중요해?”

바비는 되레 따지듯이 내게 물었다.

“뭐?”

“물론 알고서 접근한 거 맞아. 요한의 아내……였던 세나를 동생인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 처음에 네게 접근한 건, 내 호기심에서 비롯된 일이었어. 인정할게. 넌 내가 알던
여자와 닮았으니까. 하지만 일 년 동안 널 쫓아다녔던 건 내 진심이었어. 내가 쫓아다닌 건
세나가 아니라 리나 너야.”

그는 답지 않게 진지하게 토로했다. 적어도 ‘리나, 좋아해. 같이 살자.’라고 고백했던 그


말보단 훨씬 더 진정성이 있었다.

“너를 이제 믿지 못하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비의 말을 온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유대는 이미 금이 갔고, 한 번


금이 간 유대를 다시 붙이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하……, 뭘 어떻게 해야 내 말을 믿을래? 나야말로 묻고 싶다. 넌 도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바비는 조금 화가 나 보였다. 늘 능글맞게 굴던 그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뭘 하긴. 나는 조슈아의 유모로 취직했는데? 일을 구하던 차였고, 마침 좋은 일거리가


생겨서 이곳으로 온 것뿐이야. 밥맛이 넉넉한 수당, 휴가, 그리고 연차도 준댔으니까.”

물론 연차는 보류이긴 한데. 나는 거기까지는 말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저들은 세나를 잃은 그리움에 너를 이 저택으로 데려온
거라고! 요한은 너를 세나를 대신할 여자로 생각할 뿐이야.”

바비는 사실을 아주 정확하게 읊어댔다. 세나라는 여자를 잃은 부자가, 세나와 닮은 나를 보며


위안을 삼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왠지 모르게 심장이 콕콕 쑤셨다. 그가 사실을 너무 콕 집어서 말해 준 탓이었다.

“알아.”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사실을 이 저택에 오고 나서부터, 아니 길바닥에서 그들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을 때부터 미루어 짐작했었다.

밥맛이 나를 바라보다가도 어느 순간 어떤 우수에 젖는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는 말이다.

바비는 단호한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옅게 구겼다. 나는 이어 말했다.

“그게 왜? 그들이 잠깐 착각하게 놔두면 안 돼? 아이가 제 엄마의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밥맛의 슬픔이 옅어질 때까지. 그때까지만 그들이 나를 세나라고 착각해도 되는
거잖아. 나는 돈을 받고 일하고 있는 거고, 내 스스로가 세나가 되길 바라는 건 아니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해.”

나는 세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세나가 되길 바라지도 않았다.

물론 조슈아는 충분히 사랑스러운 아이였고, 요한은 돈이 많고 잘생겼고 종종 성질을 부리긴


하나 그 본질까지 나쁜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부자를 책임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리나였고, 내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를 세나로 착각한다고 해도 나는 리나일 뿐이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하나 바비에겐 그렇지 않나 보다. 그는 조금 더 격앙된 목소리로 내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몸이 작게 흔들리자 왠지 뇌가 꿀렁거리는 기분이었다.

“너, 이렇게 쉽게 올 거였으면 내가 함께 살자고 했을 땐 왜 거절했어? 돈이 필요한 거라면


나를 따라왔어도 되는 거잖아.”

“쉽게 온 거 아니야.”

“그럼 어렵게 온 거야?”

“응.”

“내가 어렵게 오자고 했으면 나를 따라왔을 거야?”

바비는 진지하게 물었다.

“그건 무슨 말이야?”
“너는 나를 따라왔었어야 했다는 말이야.”

“넌 무슨…….”

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느냐고 따지려던 참이었다. 저 멀리 복도에서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성큼성큼, 타닥타닥, 두 개의 발소리.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발걸음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이윽고 두 개의 발소리는 나와 바비가 서 있던 복도 어귀까지 와 멈추어진다. 나는 고개를


비틀어 발걸음의 주인들을 바라보았다. 요한과 조슈아였다.

요한은 내 어깨 위에 올려진 바비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

“리나. 네가 궁금해하는 걸 알려 줄게.”

“…….”

“더는…… 못 기다리겠어.”

요한은 왜 나를 쫓아온 걸까. 그건 역시나 내가 세나와 닮았기 때문에? 사랑했던 여자와 닮은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게 질투가 나서?

나는 요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게 향한 요한의 눈동자엔 질투의 빛이 그득했다.

“조슈아도 더는 못 기다리겠써!”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내뱉어진 앙증맞은 호통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 앙증맞은


호통의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고물고물한 손으로 내 드레스를 꼭 움켜쥐고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 조슈아?”

 
아이의 얼굴은 곧 울 듯이 일그러졌다.

“엄마가 분명 잠깐이라고 했잖아……. 으엉엉. 조슈아는, 킁, 엄마를 무려 십 분간


기다렸는데……. 엄마는 오지 않고……. 흐윽.”

결국 조슈아는 울음을 터뜨리고야 만다. 무려 십 분간 오지 않은 엄마를 원망하며…….


왜 죄를 지은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조슈아의 울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음에 분명했다. 지금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면, 조슈아가 눈물을 더는
흘리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자세를 낮추어 울고 있던 조슈아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아이의 코끝과 눈초리 끝이


벌써부터 붉어져 있었다. 내 새끼, 많이 슬펐어요? 오구오구.

“어이구, 조슈아. 그래서 슬펐어요? 울지 마. 이제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으니까. 그렇지,


바비?”

바비는 내 드레스를 꼭 쥐고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조슈아를 보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의 눈물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바비의 마음마저도 흐물흐물해지게 만든 것임이


분명했다.

“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휴.”

요한은 슬그머니 끼어들어 한마디를 툭 던졌다.

“돌아가지.”

나는 요한을 바라보았다. 딱히 어떤 의미를 두고 바라본 것은 아니었는데, 요한은 질겁하며


대답했다.

“조, 조쉬가 저렇게까지 우는데! 넌 조쉬를 돌보기로 약속했지 않았나. 네가 돌아가야지


조쉬가 울음을 그칠 테니까.”

나는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요한을 더욱 빤히 바라봤다. 아주 의심스럽게.

“절대로 내가 조쉬 핑계를 대는 건 아니야.”

그러자 그는 귀여운 변명을 하더라. 어쩜, 솔직하지 못한 것 좀 봐.

나는 입술을 둥글게 말며 괜스레 입가로 새어 나오려는 미소를 참았다. 조슈아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데, 미소를 짓기가 좀 그랬다.

“자, 자, 조슈아. 그만 울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자. 뚝, 응?”

“응……. 히끅.”

조슈아는 내가 돌아가자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울고 있던 것을 뚝 그쳤다. 실로 신기한


일이었다.

이런 생각. 정말 해선 안 되는 것이지만……. 조슈아는 내게서 돌아가자는 말을 듣기 위해


일부러 눈물을 흘렸던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의 흔적을 지우고선 금세 방긋방긋 웃고 있는 조슈아를 보자니 설핏 의심이 들더라.

아냐, 귀여운 우리 조슈아가 그런 음흉한 계략을 펼쳤을 리가 없지.


나는 조슈아를 번쩍 안아 들며 요한의 방 쪽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솔직하지 못했던
요한도 내 뒤를 따랐기에, 바비는 복도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바비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우리를 뒤따르거나, 나를 다시


잡는 일은 없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요한의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요한은 방문을 열며 조슈아를 안으로 먼저


들여보냈다.

“조쉬, 안에 먼저 들어가 있어.”

“싫어! 조슈아는 엄마랑 같이…….”

“조쉬, 착하지. 금방 들어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요한은 단호하게 아이를 다그쳤다. 조슈아는 더 보챌 법도 했지만 쉬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요한의 표정이 제법 단호했나 보다.

요한은 열었던 문을 닫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복잡한 얼굴을 한 그는, 무언가를 말할 듯 입술을 벌렸다가도 이내 닫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나는 보채지 않으며 참을성 있게 그를 기다려 주었다.

얼마 못 가 그의 입술이 완전히 떼어지며, 그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네가 방금 전에 보았던 액자 속 여자가 세나야. 이미 짐작했겠지만, 그녀가 조슈아의 엄마지.


그리고 그녀는 4 년 전에, ……죽었어.”

죽었어. 그 짧은 한마디를 뱉는 요한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다. 그는 떨렸던


목소리를 숨기려 두어 번의 헛기침을 했지만, 창백해진 그의 얼굴빛은 숨길 수가 없었다.

‘네가 궁금해하는 걸 알려 줄게.’

요한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저를 따라온다면 내가 궁금해하는 걸 알려 주겠다고.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일찌감치 짐작한 태도였다. 내가 제일 궁금했던 건, 액자 속 그림의


주인, 조슈아의 엄마, 그리고 요한의 부인. 모든 명칭의 주인인 세나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요한이 힘겹게 털어놓은 사실들은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이었다.

그래서 나도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알아요.”

“……! 거, 거지. 네가 안다고?”

요한은 사레에 들린 듯이 캑캑거리며 놀란 티를 냈다. 나는 쿨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거지가 당신의 사정을 이미 통달했습니다.”


내가 빙그레 웃으며 한쪽 눈까지 찡긋거리자, 요한의 사레들린 소리가 커져 갔다.

영문 없이 얼굴에 열이 오른 듯한 그는 제 목을 조르듯 매어진 타이를 헐겁게 풀며, 목 끝까지


채워졌던 단추마저도 하나 풀었다. 그러자 그 속으로 깊게 파인 그의 쇄골이 설핏 보였다.

얼굴선만 예쁜 줄 알았는데……. 뭐야, 쇄골도 왜 저렇게 예뻐.

이건 절대로 내가 변태라서 한 생각은 아니었고, 그저 시선이 그쪽으로 갔기에 든 생각이었다.

나는 절대로 남자의 잘 빚어진 쇄골은 관능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내 시선이


아직까지 요한의 목 언저리에 머무는 건 절대로 아니다.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요한 씨.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지 마세요.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본인의 신변이 보호받길
원하거든요.”

나는 세나에 대한 것을 처음으로 알려 준 이를 떠올렸다. 그 장본인은 벨라였다.

“벨라에게 말하지 말라고 얘기했었는데.”

얼레, 눈치채 버렸네. 요한은 벨라가 범인임을 단번에 알아차린 듯이 말했다.

나는 이 저택에서 유일한 친구 격인 벨라에게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했다. 솔직히 그 일로


인해 벨라가 요한에게 꾸중을 들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벨, 벨라는 어쩔 수 없이 얘기해 준 거예요. 제가 엄청 졸랐으니까요.”

내 변명 같은 대답에 요한은 픽 웃었다.

“이봐, 거지. 걸려들었군. 한번 떠본 건데, 곧바로 인정해 버리다니.”

“뭐라고요?”

상황은 역전된 듯하다. 요한은 조금 전까지 당황했던 주제에 지금은 꽤나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순순히 고백한 것을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미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약은 줄로만 알았는데 꽤 순진한 구석도 있었군. 이런 술수에 홀라당 넘어가다니 말이야.
물론 벨라를 혼내진 않아. 어차피 이곳에 머물다 보면, 벨라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었으니까.”

“치사해! 어떻게 저한테 그런 술수를 쓸 수 있어요?”

“내 마음이지.”

요한은 콧방귀를 뀌며 거들먹거렸다. 얄미워도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와, 완전 밥맛이다.”

“뭐라고?”
“이크,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내가 어쭙잖게 입가를 가리자, 요한은 입가에 띠었던 오만한 미소를 지우고선 발끈했다. 그는
역시나 제 감정에 솔직한 남자였다.

“거지, 너. 그 밥맛이라는 말은 그만 쓸 수 없나?”

“거지가 당신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허!”

“왜냐면 당신이 저를 여전히 거지라고 부르기 때문에.”

아까 바비 앞에선 리나라고 잘만 얘기하더니. 나는 거기까지 말하지 못하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요한은 내게 반박을 하려고 했지만, 그의 반박은 급작스럽게 열린 문으로 인해 중단되고 만다.

“두 사람! 부부는 싸우는 게 아니라고 조슈아가 몇 번 얘기해! 벌써 세 번째야!”

우리의 언성이 높아진 것을 눈치채고선 문을 연 조슈아였다.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재빨리 거짓 웃음을 지으며 그런 게 아니라고 조슈아에게 변명을 했다.

“그만해! 거짓말은 더 나쁜 거라고 해써! 그 벌로 아빤 오늘 조슈아에게 뽀뽀하는 거


금지야!”

조슈아의 호통이 서린 엄벌에 요한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선처를 바랐다.

“……안, 안 돼, 조쉬. 아빤 네게 하루라도 뽀뽀를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어!”

“요한 랭카스터 씨, 꼴이 아주 좋군요. 후후.”

나는 진심이 가득 담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조슈아의 날 선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다섯 살


꼬맹이 주제에 무서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엄만!”

“잠, 잠깐만. 조슈아. 나도 벌을 받아야 해?”

“당연하지! 엄만 오늘 하루 내 볼을 만지는 거 금지야!”

그 고물고물하고 말랑말랑하고 한 입 베어 물고 싶은 네 볼을 만지지 말라고? 그건 온종일


굶으라는 말과 같은 말이었다.

나는 요한이 했던 것처럼 신형을 비틀거리며 조슈아에게 간절하게 말했다.

“……안, 안 돼. 조슈아. 나는 네 볼을 하루라도 만지지 않으면 살 수 없어!”

그러자 조슈아가 콧방귀를 뀌더라.


“흥!”

……아, 다섯 살한테 제대로 벌을 받았네.

* * *

조슈아는 다섯 살 주제에 야박한 구석이 있었다.

아이는 내게 엄포를 놓은 이래로, 내 방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언제고 시간이 있으면


‘엄마!’라고 소리치며 나를 찾아오던 아이였는데.

어디 찾아오기만 했을까. 아이는 그 말랑거리고 부드러운 제 뺨을 내게 헌납하며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조슈아의 흰 볼따구니를 만지는 걸 참으로 좋아했다. 그것이 요즘 내
인생의 낙이요, 유일한 재미였는데.

심지어 아이의 방에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도 당했다.

‘나는 오늘 엄마를 보고 싶지 않아! ……부부 싸움은 조슈아의 마음을 아프게만 해.’ 그렇게
말하는 조슈아에게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잘 가늠할 수 없었다.

요한과 투덕거리긴 했지만, 나는 요한과 진짜 부부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구태여 아이에게 사실을 읊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로 인해 조슈아가 상처받길


바라지 않았다.

결국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테이블 위에 머리를 몇 번 콩콩 쥐어박았다. 요한은


이러나저러나 도움이 되지 않는 작자임에 틀림없었다.

날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고, 나는 해가 다시 밝은 뒤에 조슈아를 슬쩍


먼저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내일도 조슈아의 볼따구니를 만지지 못하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흠흠, 안에 있나?”

요한이었다. 나는 그를 따라서 대답했다.

“흠흠, 안에 있는데요?”

문밖에선 낮게 가라앉은 요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따라 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군.”


“풉, 큭큭.”

나는 키득거리며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 주었다. 문밖에는 어색하게 서 있는 요한이


보였다.

“이 밤에 웬일이세요? 엇! 설마 저번처럼 술 진탕 마신 건 아니죠?”

나는 급하게 그의 주변에 코를 킁킁댔다. 다행스럽게도 그에게서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되레


아주 좋은 냄새가 났을 뿐이었다.

왠지 모르게 예전에도 어딘가에서 맡았던 냄새 같은……. 이를테면 어느 커다란 정원에서 같이


뒹굴었던 남자에게서 나던 냄새와 유사한 것이었다.

뭐? 남자와 정원에서 뒹굴어? 그랬던 적이 있었던가? 내가 그렇게 방탕한 삶을 살았던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불시에 떠오른 기억의 잔재를 조금 더 상기시키려 노력했지만, 그


이상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아쉬워라. 왜 항상 무언가가 떠오를 성싶다가도, 결국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걸까.

나는 아쉬운 마음을 요한에게 그대로 털어놓았다.

“요한 씨. 설마 저랑 정원에서 뒹군 적 있어요?”

제 13 화. 한 번만 안아 줄 수 있는가

“무,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도대체!”

요한은 한껏 당황하며 얼굴을 약간 붉혔다. 순진하기는.

“아니면 말고요. 술은 마시지 않은 것 같으니, 일단 들어오실래요?”

요한은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로 방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그는 내가 저택으로 왔던 첫날과 그다음 날을 빼고선, 술에 진탕 취한 채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이 의아했지만 그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왠지 물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이런


쪽에 눈치가 꽤 좋았다. 묻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눈치.

아무튼 결론은 늦은 밤, 요한이 나를 찾아온 것이 퍽 오랜만이라는 거다.


나는 그를 소파 근처까지 안내하며 말했다.

“아니, 이런 귀한 곳에 누추한 분이…….”

그는 자리에 앉으며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는 듯이


나를 홱 노려보았다.

“귀한 곳에 누추한 분이라 했나?”

“어머, 아뇨. 누추한 분이 귀한 곳에 오셨다고 했죠.”

“그렇군.”

그는 내 맞은편 자리에 완전히 착석하고선, 얼굴에 느낌표를 띄웠다.

“그게 그 말인 거잖아!”

“하하, 그걸 이제 아셨다니.”

요한은 제 이마를 짚으며 기다란 한숨을 쉬었다. ‘내 팔자야…….’라는 말은 덤이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듬뿍 드는 풍경이다. 나는 쉴 새 없이 키득거렸다.

요한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거지. 나는 지금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나누자고 널 찾아온 게 아니라고.”

“넵.”

“그럼 그만 웃지 그래?”

“거지가 웃음을 멈춥니다.”

나는 내가 한 말은 지키는 거지였다. 나는 웃음기를 완전히 거두어내고선 요한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제 와 그가 나를 찾은 용건이 궁금해지더라. 무슨 얘기를 하려고 나를 찾아온 걸까?

요한은 천천히 운을 뗐다.

“아까 못다 한 얘기를 더 해야 할 것 같아서.”

못다 한 얘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곧장 알 수 있었다.

“세나…… 씨에 대한 거요?”

요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더 숨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알아야 할 세나에 대한 정보는 이미 충분했다. 세나가 지금 이곳에
없는 이유라든지, 아이가 왜 나를 보며 그녀라고 착각했는지.

전자의 이유는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다. 물론 세나가 왜 죽었는지 그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그게 대수인가 싶다.

죽은 자는 죽은 자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무슨 이유로 죽었든 간에 누군가가 죽은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다시 살릴 수 없는데, 구태여 그녀가 죽은 이유까진 알고 싶지 않았다.


되레 그 이유를 알게 된다면 꺼림칙한 기분이 들지도 몰랐다.

후자의 이유는 내가 그녀와 너무 닮아서였다.

조슈아는 다섯 살이다. 4 년 전 죽은 세나였고, 아이는 태어난 이래 줄곧 엄마의 부재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액자 속에서만 존재하던 세나와 꼭 닮은 나란 여자가 나타났다. 그렇기에 아이가


착각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한은 무언가 더 깊고 진중한 정보를 내게 털어놓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내가 세나의 속사정을 더 알아도 되는 것인가.

그 진중한 정보가 가지는 무게를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좋아요. 알려 주세요.”

대답은 멋대로 흘러나왔다. 나는 은연중에 세나에 대한 조금 더 깊은 정보를 원했던 것이었다.


그것도 다른 누가 아닌, 요한이 들려줄 세나에 대한 정보.

까닭 없이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요한은 짧게 호흡을 골라냈다.

“사실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기려고 했어.”

“…….”

“하지만 네가 바비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생각이 조금 바뀌더군.”

‘왜요?’ 내 입술은 또다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물음을 뱉어냈다. 거의 반사적으로 뱉어낸


물음이었다.

“왜냐면 그 녀석은 소름 끼치도록 음흉한 놈이니까. 거지 너와 만났다는 사실을 내게 언질해


주지 않은 것부터가 매우 수상하잖아. 바비가 무슨 생각으로 그 사실을 함구한 건지 모르겠어.
하지만 적어도 세나와 닮은 여자가 있다……, 라는 말을 해 줬어야 한다고 생각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나는 그 말을 들을 자격이 충분하니까.”

자격이라. 당신은 세나의 남편이었기 때문에 그런 자격이 있다고 단언하는 걸까?


나는 그리 생각했지만 다른 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요한 씨에게 미리 알려 줬다가 당신이나 조슈아가 더 혼란스러워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바비가 함구한 게 아닐까요? 당신이랑 조슈아가 저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아이는 내게 엄마라고 하며 매달렸고, 요한은 나를 보며 곧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바비는 그 꼴을 볼 수가 없어서 사실을 은폐한 것일지도 몰랐다.

“지금 바비 편을 드는 건가?”

“지금 설마 질투하는 거예요?”

“질, 질투는 무슨!”

요한은 머쓱한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나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게……. 어쭙잖은


질투를 한 게 틀림없었다.

“저기, 요한 씨.”

“왜?”

“저도 방금 궁금한 게 생겼는데 물어봐도 돼요?”

“일단 들어는 보지.”

요한은 그냥 ‘응.’이라고 말하는 게 힘들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상한 건, 상냥하지 못한


그의 태도가 그다지 밉게 느껴지지 않은 나였다.

“그럼 당신이랑 바비는 진짜로 형제 사이이지만, 사이가 좋지 않은 거예요?”

나는 두 사람이 거친 말을 주고받고, 날 선 시선으로 서로를 보던 광경을 기억했다. 남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닮지 않은 얼굴과 상반된 분위기를 가진 그들.

“따지고 보면 형제겠지. 사이가 좋지 않은 형제.”

“따지고 보면 이라뇨? 그건 맞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그 자식과 난 이복형제야.”

“……!”

푸른 머리칼의 바비, 검은 머리칼의 요한이 닮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복형제니까.


요한은 별것이 아니라는 듯 서슴없이 말했지만, 나는 꽤 놀랐다.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 마. 넌 거지라서 잘 모르겠지만 배다른 형제라는 건, 귀족 사회에서


흔한 일이니까. 어디 숨겨 놓은 자식이 없는 게 더 이상한 일일 테지.”

요한은 한껏 비아냥거렸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왠지 바비와 요한 사이에 무거운 사연이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나는 역시나 묻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으니까.

단언하건대 이건 묻지 말아야 할 일임이 분명했다.

문득 요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는 우물쭈물하는 얼굴로 무언가 묻고 싶은 분위기를


연신 풍기고 있었다.

“저한테 묻고 싶은 말이 있어요?”

“아니.”

“정말?”

“……완전 아닌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 묻고 싶은 게 있는 건 아니야.”

요한은 역시나 ‘응.’이라고 말하는 게 힘들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또 이상한 건, 바보


같은 그의 모습이 손톱의 때만큼 귀여워 보인다는 점이었다.

“거지가 인심을 씁니다. 당신의 궁금증을 풀어 주겠습니다.”

“…….”

요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풀풀 내면서도 저가 묻고


싶었던 것을 토로했다.

“거지 넌 바비와 어떤 사이였던 거지? ……그 자식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까지


알고 싶은 건 아니지만.”

아주 자세히 알고 싶다는 말이구나. 나는 요한의 말 속에 서린 진짜 의미를 자연스럽게


알아차렸다. 요한은 열없이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기만 했다.

나는 바비를 만났던 일 년 전의 무더웠던 그 여름날을 다시금 떠올렸다.

열사병에 휘청거리던 나를 잡아 주었던 바비. 차가운 음료를 건네며 짓던 그의 미소가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바비와는 작년 여름에 우연히 만났어요.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서, 열사병에 시달리던 제게


시원한 음료를 주는 거예요. 여자보다도 예쁜 미소는 덤이었죠. 아, 그땐 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바비에게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분명 존재했으나, 나는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 생각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이곳에서 바비를 본 이후로, 그 또한 세나와 연관된 인물임을 안 이래로, 지난 시간


변함없었던 그의 친절이 정녕 나를 위한 친절이었는지 의심을 품게 되었으니까.

나는 바비에게 속 시원하게 묻고 싶었다.


넌, 지난 일 년간 나를 정말로 리나로만 대한 거냐고. 너도 내게서 세나의 자취를 찾지
않았냐고.

“이봐, 거지.”

요한의 말에 나는 바비를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버릇처럼 대답했다.

“네, 거지가 대답합니다.”

이젠 자다가도 누가 ‘거지’라고 부르면, 저렇게 대답할 성싶다. 입에 밴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네 이야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어.”

요한은 가느다랗게 찌푸린 눈썹을 손으로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맹점이요?”

“그래. 나는 바비의 태도가 마음에 걸려.”

“거지가 구체적인 설명을 원합니다!”

요한은 고개를 까딱이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 녀석이 너를 처음 봤을 때, 네 얼굴을 보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나?”

나는 바비와 처음 만났던 그때를 세세하게 상기했다.

맹렬한 한여름날의 태양, 아름답게 빛나던 그의 푸른 머리칼, 길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바라볼 정도로 잘생긴 바비의 얼굴, 그리고 제게 모이는 이목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나만을 바라보던 바비의 평온함.

내 얼굴을 처음 본 바비는 평온했다.

놀랍게도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내가 세나와 닮은 얼굴을 가졌다는 걸 이미


알았던 것처럼.

“……!”

나는 얼빠진 얼굴을 했다. 맙소사. 바비, 너 수상해. 매우 수상하다고.

잘난 체나 하는 밥맛인 줄로만 알았는데, 요한은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을 정확하게


짚어주었다.

그는 내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늦지 않게 자신의 말을 덧대었다.

“그 녀석과 나와 세나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어. 세나는 비록 나와 결혼하긴


했지만 바비와도 줄곧 잘 지냈으니까. 그리고 녀석은 세나를…….”
요한은 갑작스럽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해선 안 될 말을 꺼낸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세나를…….’

바비는 세나를 어떻게 했다는 걸까? 설마 ‘좋아했다.’라는 서술어가 아니기를 바랐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세 사람, 이복형제였던 두 남자는 한 여자를 좋아하게 되고, 결국


형제 중 한 남자와 결혼해 버린 여자, 그리고 그 여자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형제.

생각만 해도 끔찍한 신파적인 상황이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까 싶었지만, 그 순간 척추 끝을 타고 올라오는 기운이 하나 있었다.


그 기운의 정체는 불길함이었다.

“아무튼 바비가 세나를 닮은 널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는 건 무척이나 이상한 일이야. 네


얘기를 듣는 동안 소름 끼치는 생각 하나가 들더군. 너희 만남이 우연이 아닐 것 같다는 그런
생각.”

“당신의 말에 저도 동의해요.”

아무래도 바비를 만나 이야기를 다시 나눌 필요성이 있어 보였다.

나는 요한이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요한이 털어놓기 싫어하는 일을


구태여 내가 들먹거릴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내가 묻는다고 해도 그가 쉬이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솔직한 대답보다야, ‘거지.


더 알려고 하지 마. 다쳐.’라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 훨씬 더 컸다.

그래서 나는 내가 궁금했던 것을 재차 물어보았다.

“요한 씨. 그럼 당신은 왜 세나에 대한 걸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기려고 한 거예요? 저택에


올 때부터 ‘내 부인은 4 년 전에 죽었어. 너와 똑 닮은 여자였지. 엄마를 그리워하는 내
아들의 유모가 되어주지 않겠나? 물론 수당에 보너스에 심지어 연차까지 잘 챙겨 줄게.’라고
얘기했으면 깔끔하게 정리될 일이었을 텐데.”

나는 슬쩍 합의 보지 못했던 연차를 끼워 넣었다. 까칠한 요한이 호통을 칠까 염려했지만,


돌아온 것은 꽤나 서글픈 목소리였다.

“……네가 세나인 척할까 봐 두려워서 그랬어.”

뭐야, 나는 이렇게 진지한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의 달라진 태도가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뭉그러뜨렸다. 대답을 해선 안 될


기분이었다.

“나는 거지 네가 어떤 여자인지 전혀 모르잖아. 네가 악독한 여자인지, 아님 그 반대인지.


사전 정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데 무턱대고 믿을 수가 없었어. 넌 눈치가 꽤 빨라 보였고,
그래서 나나 조슈아가 죽은 세나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들어한다는 걸 금세 눈치챈다면? 그래서
작정하고 세나인 척을 한다면……. 그땐.”
요한은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나를 보던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나약한 빛을 띠었다.

“그땐 내가 정말로 네게 끌려갈 것 같았으니까.”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뱉어진 물음을 뒤늦게 주워 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은
듯했다.

나를 뚫어지라 응시하는 요한의 시선이 자못 신경 쓰였다. 얼굴 여기저기에 닿은 그의 시선이


지나간 곳이 따가웠다.

나는 괜스레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내 심장은 조금 전과는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주


빠른 소리였다.

우리를 감싸고 있던 공기의 흐름이 미묘하게 뜨거워진 느낌이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거지 네게 함락돼서 널 세나로 여겼을 거야. 네가 해 달라는 건 다 해 줬을


테고, 네가 원하는 건 모두 구해 줬겠지. 난 원래 소름 끼치도록 쉬운 남자는 아니지만,
세나에게만큼은 쉬운 남자였으니까. 그녀를 잃은 뒤 너덜너덜해진 내 마음은 완전히 나약해져
버려서 그럴 가능성이 충분했거든. 나는 나조차도 감당하지 못할 나를 보기 싫었어. 너를
세나라고 여길까 봐 두려웠어.”

그의 시선이 동그란 나의 이마, 내 두 눈, 콧대, 그리고 입술 언저리에 머무는 게 느껴졌다.

내 입가에 머문 요한의 시선은 오랫동안 다른 곳으로 옮겨 가지 않았다. 그러자 입가의 체온이


높아지는 기분이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으로 나를 그윽하게 보는지 나도 다 안단 말이야. 당신이 지금 누굴


생각하고 있는지 나도 다 안단 말이야.

나는 내내 피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눈은 단번에 맞닿았다. 애처롭고, 연약한, 밤하늘을


닮은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내게 무언가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한 번만…… 안아 줄 수 있는가.”

요한. 당신은 왜 당신이 두려워했던 일을 자처하려고 하는 걸까.

제 14 화. 요한의 비합리적 의심
요한은 비합리적이고 아주 소모적인 의심을 하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거지가 세나와 연관된 무언가가 아닐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 의심은 4 년 전, 죽은 세나가 관 속에 누이는 걸 직접 목도한 장본인으로서는 결단코 할 수


없는 의심이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매사 합리적인 사고만을 할 수는 없었다. 설령 모든 일에 합리적이라


자부하는 요한이라고 할지라도.

요한은 벨라에게 부탁했던 거지 리나에 대한 신상 정보를 떠올렸다. 벨라는 믿을 수 있는


유능한 수하답게 거지 리나에 대한 것을 꽤나 상세히 조사해 왔다.

거지, 아니 ‘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그 여자가 저잣거리에 나타난 것은 근 5 년 전이었다.

그녀를 처음 발견했던 이는 잡화점의 리 모 씨로서, 그날은 비가 아주 많이 왔다고 한다.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날려 버릴 듯한 매서운 바람을 동반한 거센 빗속에서 여자는 어느 산의


초입에 버림받은 것처럼 널브러져 있었다고 했다.

잡화점의 리 모 씨는 그렇게 증언했다.

‘어이쿠, 말도 마세요. 처음 발견했을 때 죽은 줄 알았다니까요. 산짐승한테 당한 건지 뭔지,


피 칠갑을 한 채로 널브러져 있는데……. 어휴, 그냥 그대로 둘 수 없어서 가게로 데리고 왔죠.
다행히 살아 있더라고요.’

리나에겐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상처는 없었지만, 뼈가 조금 부서졌다는 둥 찰과상이 있다는


둥 자잘한 부상이 많았다고 한다.

리 모 씨는 증언이 끝날 무렵에 의미 모를 말을 한마디 덧대기도 했다.

‘아, 그리고 희한한 부분이 하나 있었어요. 그 아가씨. 처음 발견했을 때 손에 무언가를 꼭


쥐고 있더라고요. 정신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을 펴는데도
한참이나 걸렸어요. 그렇게 꼭 쥐고 있던 것의 정체는 귀걸이였어요. 색이 특이하고 예뻤는데
……. 에메랄드 색이었나. 그 아가씨가 정신을 차린 후에 다시 주려고 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더라고요. 저도 경황이 없었던 터라…….’

그렇게 그녀는 일주일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겨우겨우 의식이 돌아온 그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배고파.’

였다고.

과연, 거지다운 발언이다.

정신을 차린 리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처음엔 심지어 자신의 이름조차도 몰랐다.
그렇기에 자신이 그 산에 왜 널브러져 있었는지는 당연히 알 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과거의 잔재 하나를 기억해 낸다.


그녀가 떠올린 유일한 과거의 잔재. 그것은 제 이름이 ‘리나’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리나는 그 이후에 그 가게에서 꽤 오래 일했다. 생면부지인 자신을 치료해 주고 돌봐 준


잡화점 주인 내외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도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일을 잘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꼭 손에 물 한 번 묻히지 않고 자란 사람처럼 모든 일에 서툴고 무지했다. 그녀가 잡화점을


나온 이유 또한 ‘더는 폐를 끼치기 싫어서’였을 정도였다.

리나가 잡화점에서 머문 기간은 2 년, 그 후에 그녀는 여전히 기억을 잃은 채로 저잣거리를


방황했다. 그다음은 그다지 별스러울 게 없는 정보들뿐이었다.

어느 식당에 취직했다가 식당의 접시를 모두 깨 버린 일. 어느 숙박 시설에 취직했다가 하얀


침대 시트에 모두 푸른빛을 물들인 일.

그런 별스러울 게 없는 정보들 속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긴 했다.

일을 하는 데 재주가 아주 없다.

요한의 의심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바로 그녀의 출신에 대한 의심이었는데, 그녀가 일을


그토록 못하는 건, 그녀가 일을 하지 않는 신분이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그러니까 리나는 일을 해 주는 사용인들을 거느린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단 거다. 가령


귀족이라든지, 아님 부유한 상인의 딸이라든지.

벨라가 조사한 건 거기까지였다.

요한의 두 번째 의심은 그녀와 함께 지낸 근 보름간 그가 직접 관찰한 바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 또한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거다. 거지 리나와 세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왜냐면 거지 리나와 세나의 버릇이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일순 요한이 흠칫할 정도로.

요한은 세나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다.

첫사랑, 첫 키스, 첫 여자……. 요한에게 있어 세나는 그런 단어들의 집합체였다. 세나의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할 순 없었다. 하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도 세나에 대한 것을 제일 많이
알고 있다고는 자부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함께했던 세나였기에 그는 그녀의 습관, 특징, 심지어 작은 버릇마저도 꿰차고


있었다.

가령 세나에게는 눈치를 슬슬 보면서 채소는 먹지 않는 식습관이 있었다. 세나는 육식 위주의


식사를 참 좋아했는데, 요한은 그런 세나에게 종종 잔소리를 하곤 했다.
고기만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수차례 얘기해도, 세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럼 내 몫까지
네가 먹으면 되겠네. 사랑하는 낭군님이 나보다 더 건강해져야지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요한은 그 애교답지 않은 애교에 매번 홀라당 넘어가며, 그녀의 편식마저도 사랑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거지 리나 또한 편식을 하는 게 아닌가.

리나는 채소에 포크 하나 갖다 대지 않았다. 그러곤 편식한다는 걸 티 내지 않기 위해


스테이크의 소스 속에 채소를 숨겨 놓는 모양새가……, 세나가 했던 약았지만 사랑스러운
행동과 비슷했다.

비단 식습관만이 비슷한 것이 아니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버릇, 걸을 때 종종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리는 모습,


밥맛이라고 부르던 그 험악한 언사.

리나의 수많은 것들이 세나와 닮아 있었다. 마치 세나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올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요한은 자못 혼란스러운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바비 또한 지난 일 년간 세나와 닮은 여자를 찾았다는 사실을 제게 숨겼다.

거기서 요한의 의심은 더해 갔다. 무언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실이 있는 게 분명해.


흑마법이든, 주술이든, 도플갱어든, 뭐든 리나와 세나가 진짜로 연관이 있는 거라면?

확인을 해야겠다. 그는 그렇게 결정지었다.

거지 리나의 진짜 정체가 뭔지 직접 알아내겠다고. 그렇지 않고선 못 배기겠다.

그 결정은 합리적인 사람이라 자부하던 그가 내린 비합리적인 결정이었다.

리나에게 찾아가 세나에 대한 것을 줄줄이 읊을 결심을 한 것은, 저가 그렇게 했을 때 혹


리나의 잃어버린 기억이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거지가 정말로 세나와 연관이 있다는 전제하에 계획한 일이기도 했다. 연관이 있었다면,
당연히 무언가를 떠올리겠지.

잃어버린 거지의 기억 속엔 대단히 의미심장한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요한의


직감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세나에 대해 털어놓기는커녕 저도 모르게 제 솔직한 마음을 토로하고 있었다.

요한은 왜 이렇게 솔직해졌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밤의 분위기에 취해서였을까. 아님


거지가 계속해서 세나로 보이기에 그런 것일까.

‘한 번만…… 안아 줄 수 있는가.’
그 말은 정말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술에 취하지 않은 맨정신으로 그녀를 안게 되면 어떤 감정이 솟구쳐 오를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녀가 저를 어떤 식으로 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세나는 누군가에게 안길 때 ‘작은 버릇’이 하나 있었다. 요한은 그것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걸 확인해서 뭐 하겠다고. 만약 그마저도 같은 버릇이 나온다면 그땐 어떻게 하려고. 요한은


스스로에게 그리 물었지만, 이내 답을 내리진 못했다. 마음이 이토록 복잡할 수가 없다.

뜬금없는 제 부탁에 리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요한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요한 또한 그녀의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초록빛인 듯 하늘빛인 듯, 바다를 닮은


에메랄드빛 리나의 눈동자는 세나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아아, 죽은 그녀가 제 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요한은 숨을 골랐다.

“……일어나요.”

긴 침묵 끝에 돌아온 리나의 대답이었다.

“대신 연차는 보장해 줘야 해요. 제 품은 비싸니까.”

이럴 때까지 제 몫을 챙기는 모습이 그다지 얄미워 보이지는 않다. 되레 벼룩의 간만큼


귀엽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요한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리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 또한


엉거주춤 일어선 채로 요한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요한은 가벼운 심호흡과 함께 그녀를 가볍게 안으려 했다.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 위에


둘러지던 순간, 리나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상한 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날 도대체 뭐로 보고.”

“뭐로 보긴요. 아닌 밤중에 찾아와서 안아 달라고 징징거리는 사람으로 보죠.”

“…….”

다 맞는 말이어서 대답할 건더기도 없었다. 왠지 모르게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다.

요한은 인정하기 싫었지만, 조금 인정했다. 어쩌면 자신은 아닌 밤중에 찾아와서 안아 달라고


징징거리는 파렴치한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녀에게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건 지금 이 순간 꼭 해야 할 일이었고,


내일로는 미룰 수 없었다.
요한은 기다란 한숨을 내쉬며 이윽고 그녀를 완전히 제 품에 끌어안았다. 리나는 더는 토를
달지 않으며, 요한의 가슴팍에 제 얼굴을 기댔다.

심장이 떨렸냐고 묻는다면, 그러했다.

근 4 년 만에 제정신인 상태로 여자를 안았기에 떨리는 건지, 세나와 닮은 여자를 안아서


떨리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심장이 가파른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까닭 없이 울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늘 이렇게 안았던 세나가 떠올라서였다.

리나의 등에 가볍게 손을 대자, 갈 곳을 잃은 그녀의 손이 슬그머니 제 벨트 어귀에 머무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리나는 소중한 무언가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요한의 벨트 위를 부여잡았다.

“……!”

요한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세나 또한 제게 안길 때면 늘 버릇처럼 벨트를 꼭


부여잡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요한이 확인하고 싶었던 ‘작은 버릇’이었다.

과거, 요한이 세나에게 ‘왜 허리를 잡지 않고 벨트를 잡는 거지?’라고 물으면…….

“……이봐, 거지. 벨트는 왜 잡은 거지?”

세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었다. ‘여길 잡으면 안정감이 있거든.’

그녀는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제 벨트를 풀기 일쑤였다. 그러곤 곧장 침대로 향했었지.


행복했던 과거의 여느 나날 중 한 부분이었다.

“왠지 모를 안정감이랄까요?”

“……!”

맙소사. 대답마저도 세나와 똑같다.

요한은 안고 있던 리나를 밀어내며 제 얼굴을 쓸었다. 얼굴을 쓰는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자연스럽게 내뱉은 진심이 담긴 목소리 또한 미미하게 떨렸다.

요한은 묻고 싶었다. 넌 도대체 뭐기에 세나와 자꾸 똑같은 행동을 하느냐고.

“정체를 묻는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이죠. 저는…….”


리나는 거리낌 없이 대답을 하려 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제법 강경하다.

요한은 그녀의 벌어진 입술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그의 목울대가 티가 나게


울렁거렸다.

“기억을 잃은 채로 거리를 방황했던 미인 거지죠.”

“…….”

요한은 침묵했다. 저런 대답을 하다니. 도대체 그녀에게서 무슨 대답을 바랐던 걸까.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밥맛 씨. 갑자기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면, 저는 어떡하면 좋죠?”

그는 대답 대신 미간을 옅게 찡그렸다. 말장난은 그쯤 하라는 일종의 호소였다.

리나는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가 볼게.”

리나는 저를 몇 차례 불렀으나, 요한은 도망치듯이 그녀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녀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혼란으로 물든 자신의 얼굴을 리나에게


계속해서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 더 있다간 리나를 세나로 여기게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요한은 복도의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심호흡을 했다. 다행히도 리나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세나와 리나 사이에 이렇게나 겹치는 일들이 많은 건, 단순한 우연에 불과한 걸까?

그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몇 차례 쓸어 넘겼다.

“주인님? 여기서 뭐 하세요?”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벨라가 요한을 발견하고선 그리 물었다. 그녀의 손엔 등불이 들린


채였다. 그녀의 얼굴을 본 요한은 문득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벨라. 혹시 너도 남자에게 안겼을 때, 상대 남자의 벨트를 잡나?”

“네?”

벨라는 뜬금없는 요한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불어 요즘 들어 요한이 이상한 질문을
참 많이 한다는 생각마저도 든 그녀였다.
질문이 이상하긴 했지만, 벨라는 성의껏 대답을 해 주었다. 어찌 되었건 요한은 제
주인이었으니까.

“음. 보통은 허리를 잡죠?”

보통은 허리를 잡죠. 요한은 벨라의 말을 되뇌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안을 때 벨트를 잡는 사람이, 세나와 리나를 제외하고 얼마나 더 있을까.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다.

요한은 기다란 한숨을 내쉬며 자조하듯이 말했다.

“……바보 같은 것만 자꾸 묻는군.”

조금 떨군 고개, 뺨 어귀가 홧홧하게만 느껴졌다.

“주인님. 혹시 힘드신 일이 있으시다면, 제가 도울 수 있을 만큼 도와드릴게요.”

“그래, 고마워. 그만 네 일을 보러 가 봐.”

“네. 주인님도 얼른 주무세요!”

요한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버릇처럼 마른세수를 하자, 홧홧했던
얼굴은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뜨거워진 요한의 얼굴은 잠잠해질 기미가 없었다. 요한은 영문 없이 힘이 빠져 축 늘어져 버린


몸뚱이를 이끌고선 책상 앞까지 걸어갔다.

그곳엔 그녀가 존재했다.

“세나…….”

닳고 닳을 정도로 불러 버린 익숙한 이름이 한숨과 함께 새어 나왔다. 불러도 대답이 없는 그


이름은 언제고 요한의 마음을 아프게만 했다.

요한은 손을 뻗어 세나의 그림이 들어 있는 액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그는 깨닫는다. 왠지


잠이 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몸이 지나치게 나른한 기분이었다.

“맙소사.”

깊은 밤, 술이 없으면 잠들지 못했던 지난 4 년이었다. 하지만 근 일주일 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잠을 이룬 그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약마저도 효과가 없었던 지독한 불면증이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처음엔 술에 취해 리나에게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술을 줄였다. 완전히 취하지 않고 잠이 들


수 있을까 싶었지만, 요한은 의외로 편안한 숙면을 취했다.

추후엔 술을 전혀 마시지 않고도 잠들 수 있을 정도였으니. 믿기지 않는 변화였다.


리나라는 여자 하나가 요한의 인생에 끼어들었을 뿐인데, 그녀는 고작 일주일 사이에 요한의
불면증을 해결해 준 것이었다.

요한은 세나의 액자를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로 침대에 몸을 누이었다. 역시나 술은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지만, 눈꺼풀은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무거웠다.

그는 짙은 한숨을 뱉어냈다.

이젠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녀를 제 곁에 계속 두는 건 옳은 일인가.

“세나. 거지가 너랑 또 똑같은 행동을 했어. 넌, 거지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거야? 알고 있다면


오늘 밤 내 꿈에 꼭 나타나서 얘기해 줘. 네 꿈을 꾸지 않은 지 오래됐어. 네가……,”

요한은 무거워진 눈을 감으며 이윽고 이어 말했다.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다.”

제 15 화. 바비 넌, 세나 씨를 사랑했어?

요한은 잔뜩 흐트러진 채로 도망을 갔다.

나는 그가 나간 방문을 몇 분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구태여 도망치던 그를 잡아, 왜


도망쳤느냐고 묻고 싶진 않았다.

‘한 번만…… 안아 줄 수 있는가.’

흐트러진 목소리로 내 품을, 아니 세나의 품을 갈구하던 요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를 안아 주었지만, 내 마음까지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심장은 어쩐지 애달픈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먹먹해진 가슴 위를 몇 차례


손으로 퍽퍽 내려쳤다.

“이봐요, 밥맛 씨. 세나라는 여자, 죽었다면서요. 4 년이나 지났다면서……. 왜 그렇게 못


잊어서 안달이야.”

……신경 쓰이게.

내 주관은 여전했다. 세나인 척 요한에게 들러붙을 생각은 없었고, 나는 이 저택에 머무는


동안엔 리나로서 내 소신껏 행동할 것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내게서 세나의 자취를 찾는 요한을 아예 모른 척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나는 자신이 없었다.
나는 침대에 발라당 누운 채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요한의 얼굴을 밀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요한과 껴안은 후부터 달아올랐던 몸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나, 그동안 남자들을 너무 등한시했던가.

더불어 심장이 누군가가 도끼질이라도 하는 듯이 쿵쿵거려서 곧바로 잠들 수 없었다. 너무도


소란스럽다.

나는 눈을 감으며 억지로 잠을 청해 보았다.

분명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깨달았을 때 나는 요한의 정원에 존재했다.

이건 꿈인가.

꿈속의 날은 매우 좋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고, 태양은 눈이 부시도록 빛이 났다.


주위를 둘러보자 잘 손질된 나무들과 잔디들이 즐비한 요한의 정원의 전경이 보였다.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수많은 정원수들 중 제일 큰 정원수 쪽으로 걸어갔다.

정원수로 가까이 다가가자 작은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었던 게 아니었나 보다.
목소리는 성인의 것이 아니라는 듯이 앳되기만 했다.

나는 정원수의 기둥 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 앞에 쪼르륵 앉아 있는 세 명의 꼬마가


보였다.

세 아이들은 대략 조슈아 정도의 나이로 보였는데, 가운데 앉은 금발의 여자아이를 두고


양옆에 앉아 있던 두 남자아이가 투덕거리고 있었다.

금발 여자아이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검은 머리의 남자아이가 한마디를 했다.

‘바비! 여자아이에겐 그런 거 던지면 안 돼.’

그러자 금발 여자아이의 왼쪽에 앉아 있던 푸른 머리칼의 남자아이가 대답했다.

‘하지만 세나는 하나도 기분 나빠 하지 않는걸.’

두 남자아이는 서로를 보며 으르렁거렸는데, 정작 일의 당사자인 금발 여자아이는 그 모습이


우습다는 듯이 방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흙을 던지면 어떡하겠단 거야? 넌 흙이 얼마나 더러운지 모르냐?’

‘요한은 할아버지 같아. 매일 이거 하면 안 돼, 저거 하면 안 돼. 넌 왜 잔소리밖에 할 줄


모르냐?’

푸른 머리칼 아이의 비아냥거림에 검은 머리칼의 아이는 더욱 발끈했다.


‘바비, 너! 아버지에게 다 이를 거야.’

그러자 그제야 금발 머리칼의 여자아이가 중재하기 시작했다.

‘요한, 바비. 그만해! 요한의 말도 맞고, 바비의 말도 맞아. 바비가 나에게 흙을 던지는 건
잘못했지만, 요한이 잔소리가 좀 심하긴 해. 큭큭.’

요한, 바비?

그러고 보니 두 남자아이는 요한과 바비를 꽤 닮아 있었다. 그들의 어릴 적 모습이라도 되는


걸까.

그렇다면 가운데에 있었던 금발의 여자아이는……. 나는 조금 전에 들었던 그녀의 이름을


상기했다.

세나.

‘세나. 내가 언제 잔소리가 심했다고.’

요한과 꼭 닮은 남자아이가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세나. 분명 세나라고 했다. 나는 약간은 놀란 나머지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세나?’

내가 세나라는 이름을 내뱉음과 동시에 세 아이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요한, 바비, 세나. 아이들의 얼굴이 내게로 완전히 향하자 나는 확신했다. 이들은 그들의
어릴 적 모습이 틀림없다고. 성인이 된 그들의 얼굴과 너무 닮았잖아.

무슨 이런 해괴한 꿈이 다 있담.

그 순간 나를 보던 아이들이 내게로 쪼르륵 다가와 내 몸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무거워, 얘들아!’

나는 내 몸에 들러붙는 아이들을 떼어 내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아이들은 내게 더욱 엉겨


붙었다. 한 놈은 한쪽 다리에 또 한 놈은 나머지 다리에 그리고 마지막 한 놈은 내 팔에.

무겁다. 이건 꿈이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실제로 내 몸에 누군가가


매달린 것처럼.

‘무거워……. 무겁다고!’

“……으윽……. 무겁다고!”

나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꿈에서 벗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이제 제법 적응이 된 내 방의 천장 벽지였다. 세 아이가 나왔던


장면은 역시나 꿈이었던 게다.
그런데 묘한 것은 꿈에서 분명 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몸이 무겁다는 사실이었다.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드는 상황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요한을 떠올리며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보인 것은.

“얼레? 조슈아야?”

요한이 아니라, 조슈아였다.

아이는 내 흉부를 누르듯이 내 몸 위에 올라타, 잠에서 깬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밥맛 아들 아니랄까 봐, 잠든 내 몸을 짓누르는 게 아주 빼다 박았다.

“엄마! 좋은 아침이야!”

아이는 내 얼굴 부근까지 기어 올라와 양 볼과 입술에 입술을 쪽쪽 맞추었다. 아아, 아침부터


이런 기분 좋은 뽀뽀 세례는 처음이야.

“으응, 조슈아. 언제 들어온 거야?”

나는 조슈아의 말랑거리는 뺨을 잡고선 말했다. 아이는 붉고 도톰한 입술을 벙긋거리며


대답했다.

“잠이 안 와서 계~속 눈만 뜨고 있다가, 밝아지자마자 엄마한테 왔어. 실은 엄마랑 같이 자구


시펐는데……. 아빠가 다 큰 어린이는 엄마랑 자는 게 아니라고 했어. 난 이제 어린이가
아니니까 엄마랑 같이 자지 않는 게 맞는데…….”

조슈아는 작게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똘망똘망한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드리운 건


순식간이었다. 어린이면 어린이지, 다 큰 어린이는 또 뭐야.

다섯 살 어린이 주제에 어린이가 아니라고 근엄하게 선언하는 조슈아가 귀여워, 나는 작게


키득거렸다. 나는 아이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어 주며 말했다.

“조슈아. 다음부터 잠이 안 오면 내 방으로 오렴. 다 큰 어린이에게도 가끔은 엄마 품이


필요하거든.”

“정말? 나, 와도 돼?”

“그럼, 오구오구. 대신 너희 아빠한텐 비밀이다.”

아이는 언제 울먹거렸냐는 듯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내 가슴 어귀에 제 얼굴을 묻었다.

“당연하지. 아빤 잔소리가 너무 심해서 어떨 때 보면 할아버지 같아.”

나는 조슈아의 말을 들으며, 지난밤 꾸었던 꿈을 상기했다. 어린 시절의 요한과 바비의 모습을.

‘그렇다고 해서 흙을 던지면 어떡하겠단 거야? 넌 흙이 얼마나 더러운지 모르냐?’

‘요한은 할아버지 같아. 매일 이거 하면 안 돼, 저거 하면 안 돼. 넌 왜 잔소리밖에 할 줄


모르냐?’
어째서 내가 그들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꿈을 꿨는지 모르겠다. 아니, 내 꿈이 그들의 어린
시절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 꿈은 내가 만들어 낸 환상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그 꿈이 정말로 그들의 과거의 한 부분일 거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이한 확신이었다.

나는 ‘세나’와 관련된 꿈을 처음 꾸는 게 아니었다. 며칠 전, 어느 복도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던 남자가 나를 세나라고 부르던 꿈도 꾼 터였다.

나와 꼭 닮은 여자, 잃어버린 내 기억, 그리고 묘하게 낯익은 요한, 이전에 자주 꿨던 야릇한


꿈속의 남자와 목소리가 닮은 요한, 세나와 관련된 거듭된 꿈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잃어버린 내 기억과 세나 사이에 진정 어떤 연관이라도 있는 걸까?

모든 것이 불확실한 가운데 제법 확실한 사실이 하나가 있었다.

요한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잔소리가 많다는 점이다.

“조슈아, 밥맛이 할아버지 같다는 네 말에 나도 동감하는 바야. 요한 씨는 뭐랄까. 세계 최고


밥맛 할아버지일지도 몰라.”

허심탄회한 내 말에 조슈아는 소리 내어 킥킥거렸다.

설마 조슈아가 요한에게 세계 최고 밥맛 할아버지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잠깐 그런 염려가


들기도 했다.

* * *

요한의 저택에서 맞는 오전은 역시나 한가하다.

조슈아는 욘두인지 요 녀석인지 모를 가정교사 녀석에게 수업을 받으러 갔고, 어젯밤 줄행랑을
쳤던 요한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나는 굳이 요한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에게 할 말도 없었다.

나는 늘 그랬듯이 창가에 몸을 기댄 채로 저택 정원의 모습을 감상했다. 날은 완전히 가을날이


되었는지 푸르렀던 잎사귀들의 색이 바래 있었다.

색이 바랜 잎사귀들은 곧 떨어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으나, 정원의 돌길 위엔 떨어진 잎사귀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정원은 그 주인인 요한을 닮아 정갈하기만 했다.
저택의 주인인 요한 랭카스터 님께서 아주 소름 끼치게 관리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정원을 훑던 내 시선이 멈춘 것은 꿈에서 보았던 정원수를 발견했을 때였다. 일자로 심어진


정원수들 사이에서 제일 커다란 정원수.

꿈에서 보았던 세 아이들이 앉아 있었던 그 정원수와 똑같았다.

“내 꿈은 진짜였던 걸까.”

나는 가까이서 그 나무를 보고 싶었다. 그렇게 한다면 무언가가 기억날지도 몰랐다.

아무런 연관이 없을 거라 자부했던 그들과 연관된 꿈을 왜 꾸었는지. 더해, 내가


누구인지까지도.

요한은 내게 저택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혹 정말로 나갈 일이 생긴다면


제게 미리 언질을 하고 나가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알리지 않은 채로 저택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정말 잠시 나갔다 올


참이었고, 고작 정원에 갔다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작저를 나와 정원으로 가는 내내 마주친 사용인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점을 다행이라


여기며, 창문으로 보았던 커다란 정원수까지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곧 다다른 정원수 앞,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가까이서 본 정원수는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컸다. 나무 둘레가 내 몸통보다도


컸으니까. 나무 뒤에 누가 숨어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할 법한 넓이다.

그를 발견한 것은 나무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엄마야!”

이곳에서 만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만나서 그런 것인지, 나는 놀란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나무의 기둥 뒤에 앉아 있던 남자의 고개가 들리며,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리나. 난 네 엄마가 아닌데.”

“바, 바비!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바비는 빙그레 웃으며 제 옆을 팡팡 두드렸다. 옆에 앉으라는 동작 같았지만, 나는 우두커니


선 채로 그를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다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무슨 영문인지, 바비는 자신의 왼팔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붕대를 감은 채로 깁스를 하고 있었다.

“팔. 다쳤어?”

바비는 기꺼워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가 다친 것을 내가 알아주어서 기뻐하는


듯했다.
“어떻게 하면 네게 어렵게 다가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팔을 좀 부러뜨렸어. 그럼 네가
나를 좀 어렵게 생각하지 않을까, 해서.”

“뭐, 뭐라고? 팔을 부러뜨렸다고? 네 스스로?”

바비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서린 미소가 짙어지며, 예쁜 보조개가 더욱 깊게


들어갔다.

“요한 몰래 어떻게 너를 만나러 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네가 때마침 여기까지 와 주었네.


의미가 깊은 곳에 있길 잘했어.”

“…….”

“기쁘다.”

 
나는 잠깐 얼빠진 얼굴로 그의 웃는 낯짝과 깁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바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 말은 꼭 나 때문에 네 팔을 부러뜨렸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리나. 네가 그랬잖아. 쉽게 요한에게 간 게 아니라 어렵게 간 거라고. 그럼 네가 날 어렵게


생각하면, 나를 거리낌 없이 만나 줄까 해서.”

“……넌 가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그건 처음으로 든 생각이 아니었다. 바비는 예쁘고 잘생긴 얼굴에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나는


그가 이따금씩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예를 들자면, 몇 개월 전 내가 어느 식당에서 일했을 때였다.

그곳은 주로 기름진 음식을 파는 곳이었는데, 바비는 기름진 것도 잘 못 먹는 주제에 나를


보기 위해 매일같이 그 식당으로 출근했다.

바비는 여러 음식을 시켜 놓곤 했는데, 그가 음식을 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가 한 일이라곤


온종일 내 모습을 눈으로 좇는 일뿐이었다. 서빙을 하는 내 모습, 그릇을 치우는 내 모습,
그리고,

‘어이, 아가씨. 남자친구는 있나?’

내게 껄떡거리는 남자의 모습까지도.

미인 거지가 아니랄까 봐, 내게 치근덕거리는 남자가 일주일에 꼭 두어 명씩은 있었다.


바비는 늘 생글생글 웃었지만 어느 남자가 내게 추파라도 던지면, 그는 웃음기를 지우고선 그
남자를 두들겨 팼다. 누구 하나 때리지 못할 것처럼 희고 예쁘게 생긴 주제에 그의 주먹질은
매서웠다.

바비는 어떤 덩치가 오더라도 백전 무패였다.

얼마나 싸움을 잘하던지 추후엔 가게에 들어오는 남자들이 나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더불어 나는 그 가게에서 곧 잘리기도 했다. 잦은 시비와 싸움에 따른 테이블 파손, 식기
파손이 그 이유였다.

거리로 내몰릴 때마다 바비는 내게 말했다.

‘우리 집으로 가자.’

가진 것 하나 없었던 나였지만, 나는 항상 바비의 말을 거절했었다. 그건 물질적인 이유가


아니라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를 따라가선 안 될 것 같다는.

나는 내키지 않는 일은 하지 않았다. 다행인 점은 바비가 내 선택을 강요하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젠 나를 좋아해 주면 안 돼?’

바비는 늘 그렇게 물었다. 그 말이 절박했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걸, 내 마음대로 정할 순 없었으니까.

나는 바비에게 마음이 설레지 않았다. 애석한 일이었다.

나는 과거를 떠올리던 것을 멈추고 바비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곧 울 듯한 눈을 한 그였다.


그가 나를 보고 있는 건지, 요한처럼 내게서 세나의 흔적을 찾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자세를 낮추며 바비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바비. 네가 날 속인 걸 전부 용서한 건 아니지만, 네 팔을 구태여 부러뜨리진 말았으면 해.


날 만나고 싶으면 그냥 찾아와. 나와 얘기가 하고 싶은 거라면 얘기하자. 그게 뭐 어려워.”

나를 속인 바비를 용서한 건 절대로 아니다. 지난 일 년간 세나에 대한 일을 숨긴 것은 바비의


명백한 잘못이었다.

하지만 내겐 제정신이 아닌 듯한 바비와도 쌓아 온 정이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거리를 나다니던 나를 지켜 주었으니까.

제게 시선조차 한 번도 주지 않은 나를, 그런 내 등 뒤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 집에 있는데, 내가 제정신이면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바비는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다음엔 다리를 부러뜨리면 네가 나를 더 어려워해 줄까? 어디를 더 어떻게 해야 날 봐 줄래?”

바비는 내가 요한의 저택에 있는 게 정말 끔찍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역시나 내가 세나라는


여자와 닮았기 때문일까?

나는 바비의 진심이 궁금했다. 그리고 어젯밤, 요한이 수수께끼처럼 남기고 간 뒷말도


궁금했다.

‘……그 녀석과 나와 세나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어. 세나는 비록 나와 결혼하긴


했지만 바비와도 줄곧 잘 지냈으니까. 그리고 녀석은 세나를…….’

그 녀석은 세나를.

“바비. 너 설마 세나라는 그 여자를,”

“…….”

“사랑했어?”

제 16 화. 나, 당신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바비는 침묵했다. 내게 향한 그의 푸른 눈동자만이 더욱 구슬픈 빛을 띠었을 뿐이었다.

나는 낮추었던 자세를 다시 세우며 뒤돌아섰다. 바비에게서 직접적인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나는 그 대답을 들은 듯한 기분이었다.

너는 세나라는 여자를 사랑했어.

나는 거의 뛰는 듯한 걸음으로 현관에 들어왔다. 왜 도망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바비와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바비는 나를 잡지도,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복도를 거닐었다. 정원에서부터 뛰어서인지 기력이 약간 달렸다.

무거워진 발을 끌고 3 층까지 올라갔을 때, 나는 내 방문 앞에 서 있던 남자를 보고선


까무러치게 놀라 버린다.

“엄마야!”

나, 오늘 엄마를 너무 많이 찾는데.
내 외침에 남자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시선이 닿기가 무섭게 그는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발걸음이 조급해 보이기만 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가까워지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남자의 시선이 내


몸과 시선을 옭아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내 남자는 내 앞에 정면으로 마주 섰다.

“엄마가 아닌 나라서 아쉽겠군.”

나는 남자의 이름을 나지막이 내뱉었다.

“……요한.”

밥맛이 왜 하필 지금 내 방문 앞에 있었던 걸까. 설마 하니 나를 기다린 것은 아니겠고.

그리고 제일 의아한 점은 따로 있었다. 그가 화가 나 보인다는 점이었다. 눈초리가 매섭게


올라간 요한의 등 뒤론 흉흉한 아우라가 넘실거렸다.

영문은 모르겠으나 그가 화난 것은 분명해 보이니, 일단 웃으면서 대답을 해 보자.

“하하. 그러게요.”

웃는 얼굴엔 침도 못 뱉는다고 하던데, 요한은 까칠하게 말을 걸어 왔다.

“지금 어딜 갔다 온 거지? 나갈 땐 내게 미리 얘기한 뒤에 나가라고 주의를 줬을 텐데.”

“그러게요. 하하.”

“거지 너는 ‘그러게요’라고 밖엔 대답할 줄 모르는 건가?”

“거지가 또 대답합니다. 그러게요. 하하.”

“…….”

요한의 얼굴은 내 얼굴에 곧 침이라도 뱉을 것처럼 더욱 험악해졌다.

나는 그 순간 직감했다. 요한은 웃는 얼굴에도 침을 뱉을 사람이다. 틀림없다.

나는 입가에 띠었던 미소를 지운 뒤,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정원에서 잠깐 바람 쐬고 온 건데……. 각박하네요, 각박해.”

요한은 무언가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을 하더니 이윽고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연차 취소.”

아주 잔인한 말이었다.

“안 돼요!”
내가 그걸 어떻게 얻은 건데! 망할!

그렇지만 요한의 면전에 대고 ‘망할!’이라곤 외칠 수 없었다. 대신 나는 그에게서 연차를


허락받았던 방법을 떠올리며, 두 팔을 수평으로 벌렸다.

“다시 안아 줄게요. 당신을 안아 주면 연차를 주는 거 아니었어요? 어라, 그러고 보니 오늘은


벨트를 안 찼네요?”

“내, 내 앞에서 벨트 얘기는 하지 마!”

화나 보였던 요한은 ‘벨트’라는 말에 지극히 당황한 면모를 보이며 말을 더듬었다.

밥맛, 벨트에 뭔가 사연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머쓱하게 벌렸던 팔을 다시 오므렸다.

내게 안길 기세라곤 일말도 없어 보이던 그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헛기침을 두어 번했다.


그의 검은 머리칼 사이로 내비친 앙증맞은 귀 끝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홍조였다.

“……조슈아가 널 애타게 찾았어. 내가 널 애타게 찾았었다고 착각하는 건 곤란해.”

요한은 제법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조슈아라는 이름이 들어갔기에 그의 말이


부드럽게 들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슈아의 수업이 벌써 끝난 거예요? 아이는 어디에 있어요?”

“네 방에 있어. 거지 너를 찾겠다고 고집부리는 걸, 애써 진정시켜 놨어.”

나는 싱그러운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조슈아의 포동포동한 얼굴을 떠올렸다.

수업을 끝마친 후 내 방으로 와 내가 없는 걸 알았을 때, 조슈아는 펑펑 울지 않았을까.

처음 만났던 그 날과 다름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엄마, 엄마’ 하고 나를 찾지


않았을까. 내가 진짜 엄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조슈아에게 미안해졌다. 꼭 내가 진짜 엄마가 된 것처럼.

요한은 붉어진 귓가를 숨기지 못하며 뒤돌아섰다. 뒤돌아선 채로 등만 보인 그는 따라오라는


듯이 손가락을 몇 차례 까딱거렸다.

그는 앞으로 두어 걸음 먼저 걷기 시작했는데 그 걸음걸이가 다소 느릿했다. 마치 내가


뒤따라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순순히 그의 뒤를 따랐다.

“거지가 당신의 뒤를 순순히 따릅니다!”

이크, 생각만 한다는 게. 요한은 까칠하게 대꾸할 법도 했지만 의외로 그는 침묵했다.


몇 걸음 걷자 금세 내 방문 앞까지 도착했다. 요한은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로 나지막이
한마디를 했다.

“정말로 도망간 줄 알고 걱정했잖아. 너도……, 너도 날 버리고 간 줄 알았어.”

그것은 작은 소리였지만, 가까이 있던 내게는 확실한 소리가 되어 내 귓가에 전달됐다.

요한이 말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이번엔 조슈아라는 이름이 서려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요한.”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왠지 익숙하게. 그리고 그립게.

‘요한.’

귓가에 이상한 이명이 맴돈 건 그때였다.

‘요한.’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던 내 목소리가 귓가에 따갑게 맴돌았다. 동시에 수많은 물음들이 내
머릿속을 일순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그를 이름만으로 불렀었던가? 나는 누구지? 요한은 누구였지?

답이 없는 물음들은 지독한 두통을 가지고 왔다. 나는 견딜 수 없는 두통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몸을 휘청거렸다.

“……요한.”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얼른 뒤로 돌아봤다.

“거지……?”

그러곤 그는 흔들리는 내 몸을 재빠르게 받쳐 들었다.

요한은 내 허리에 손을 두르며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허리를 감싼 그의 손길이


지나치게 깊었다.

바투 닿은 그의 몸은 너무나도 가깝다. 드레스 아래로 전해져 오는 그의 체온이 뜨거웠다.

“이, 이봐! 괜찮은가?”

나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며 눈을 감았다. 두통으로 인해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눈을 감음에 새카매진 시야 사이로 요한의 여러


얼굴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요한의 웃는 얼굴, 우는 얼굴, 심통이 난 얼굴……. 적어도 공작저에서 보름간 머물며 보았던
그의 얼굴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지켜본 듯한 그의 여러 모습들이었다.

내가 잊고 있던 과거의 잔재들일까? 그 속에 ‘요한’이라는 남자가 속해 있던 걸까?

나는 감았던 눈을 떠 그를 다시금 직시했다. 우리의 얼굴은 내가 눈을 감기 전보다도 더


가까워져 있었다.

“……요한.”

희미하게 떨리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그의 이름은 확실히 낯익은 것이었다.

내게 닿은 걱정스러운 그의 검은 눈동자도, 차양처럼 길게 쳐진 그의 검은 속눈썹도, 떨리는


그의 붉은 입술도.

나는 손을 뻗어 그의 흰 뺨을 쓸었다.

“나, 당신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확신에 가까운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내 머리를 관통했던 두통이 가시기 시작했다. 마치
기억해 내야 할 것을 기억해 냈기 때문에 사라진다는 듯이.

요한의 눈동자가 크게 동요했다. 그의 눈동자엔 숨길 수 없는 파문이 일고 있었다.

내 고백이 그에게도 뜻밖일 거라고 여겨졌다. 저를 알고 있었다는 내 말에, 요한은 어떤


감상을 가질까.

침묵은 이어졌다. 나는 뜨거운 숨을 작게 토해 냈다.

그도 나에 대한 무언가를 아는 게 아닐까? 세나가 아닌 리나에 대한 무언가를.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을. 그것이 그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일까?

섣부른 기대가 피어올랐다. 요한은 내 허리를 감싸지 않은 나머지 손을 들어 올렸다.

“그건…….”

요한은 느릿하게 말하며, 뺨을 감싼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포개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괜스레 긴장이 되어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네?”

요한은 내 손을 가차 없이 떼어 내며, 내 허리에 둘러졌던 제 손도 빼내었다.


나는 또다시 작게 휘청거렸지만 요한이 다시 내 허리를 감싸는 일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제가 할 말을 했을 뿐이었다.

“나는 요한 랭카스터야. 최연소로 공작위를 물려받았고, 수많은 공적이 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그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거들먹거렸다. 파문이 일었던 그의 눈동자는 금세 오만하게 변해


있었다.

“배가 고플 땐 나를 그렇게나 모른 척하더니. 이제 배가 부르니까 내가 누군지 생각이 난


건가?”

그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나는 지끈거림이 옅게 남아 있던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 저 작자에게 도대체 뭘 기대한 거야.

“요한 랭카스터 씨. 제가 말한 ‘당신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의 의미는 그게 아니었단


말이에요.”

“그럼 무슨 의미인데.”

그는 물음표 없는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한 ‘알고 있었던 것 같다.’의 의미는 그런 거다.

송두리째 잃어버린 내 기억들 속에 당신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당신이 내 과거를 알 것도


같다는.

우리가 무슨 관계였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요한을 지켜봤던 게


분명했다.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호언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주 대단한 요한 랭카스터 씨.”

요한이 내게 무언가를 더 묻기 전에, 나는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열었다. 슬쩍 바라본 요한의


얼굴엔 불만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우리가 어떤 관계였는지, 내가 누구였는지, 확실히 떠올리지


못했으니까.

내게도 확실하지 않은 사실을 구태여 언급하여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서


세나의 흔적을 좇고 있는 그에겐 더더욱.

문을 완전히 열어젖히자 처음으로 보이는 건 소파에 앉아 있던 조슈아였다. 아이는 나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내게 쪼르륵 뛰어왔다.

“조슈아!”
아이가 내 드레스 자락에 바짝 붙어 달랑달랑 매달리기까지의 시간은 총알과도 같았다.
조슈아는 앙증맞은 통통한 두 손으로 내 드레스를 꼭 움켜잡았다.

“엄마, 엄마! 어디 갔다 온 거야? 조슈아가 얼마나 찾았는데. 엄마가 또 없어진 줄 알고…….


날 또 버린 줄 알고…….”

“미안해. 조슈아.”

조슈아는 울먹거렸다. 나는 자세를 낮추어 조슈아의 동그란 이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바람 쐬러 정원에 잠깐 나갔다 왔어. 말도 없이 사라져서 미안해. 다음부터는 어디를 가든


조슈아에게만 꼭 미리 말해 줄게.”

세계 최고 밥맛 할아버지는 제외야. 나는 조슈아의 귓가에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아이는 곧 울 듯이 굴었던 주제에, 세계 최고 밥맛 할아버지라는 말은 또 우스웠던지 대번에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었다.

“거지. 방금 뭐라고 했지? 내 귀가 이상하지 않다면, 세계 최고 밥맛 할아버지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내 뒤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요한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하여튼 귀도 좋아요.

“거지가 대답합니다. 당신의 귀는 매우 정상이라고.”

“나 원.”

조슈아는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요한에게 사납게 대꾸했다. 근엄한 다섯 살짜리 꼬맹이의
으름장이었다.

“아빠!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 마. 그럼 조슈아가 화낼 거야. 엄만 아빠가 제일 멋있는


밥맛이라고 칭찬을 했을 뿐인데! 아빠는 왜 화만 내려고 해.”

요한은 조슈아에게만은 정말 약했다. 그는 굳게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선 조슈아를 달랬다.


그의 목소리가 억울하기만 했다.

“조쉬. 잘 들어보렴. 네가 5 년……, 아니 우리 조쉬는 똑똑하니까, 딱 4 년만 지나도 이


아빠가 왜 화를 내는 건지 알게 될 거란다.”

“하지만 조슈아는 지금 현실에 있는걸. 그럼 아빠가 화를 내는 이유에 대해선 5 년이나, 4 년


후에 이해하도록 할게.”

“하하. 너무 명석한 대답이라서, 내가 할 말이 없구나.”

요한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선 내게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거지 리나 양.”


나는 그를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거지 리나가 아주 동의하는 바입니다.”

조슈아 덕에 지극히 행복한 기류가 흐르던 가운데,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슈아와 요한의 걱정은 정녕 나를 향한 걱정이었을까, 하는. 아니면 세나라는 여자를 닮은


나를 향한 걱정이었을까, 하는.

나를 걱정했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과한 바람인 걸까. 가망 없는 희망인 걸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쓸데없이 든 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 조슈아를 꼭 안아 주었다. 조슈아는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을 작정인 건지 내게 깊숙이 파고들었다.

우리는 눈물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을 진한 재회를 했다. 내가 사라진 것은 고작 30 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터인데.

“다신 조슈아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해.”

내 품에 안겨 있던 조슈아가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다섯 살 꼬맹이의


협박이었다.

“약속할게. 조슈아.”

약속할게. 조슈아 네가 날 필요로 하는 동안엔 널 혼자 두지 않겠다고. 네게 가짜 엄마가


필요하지 않게 될 그 순간까지 네 곁에 있겠다고.

“엄마가 있어서 조슈아는 너무 행복해.”

조슈아는 내 품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나는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나도 조슈아 네가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이에게서 나는 좋은 냄새 덕이었는지 두통은


이제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하나 내 머릿속엔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

‘요한.’

* * *

우리는 소파에 도란도란 앉게 되었다.


조슈아는 여전히 내게 꼭 붙어 앉은 채였고, 요한은 제 방으로 돌아가지 않을 참인지 우리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나는 생각에 잠깐 잠겼다. 무슨 생각이냐면, 내게 일어난 일련의 상황들에 대한 정리라고나


할까.

지금까지 내가 알아낸 사실들을 조합해 보자.

일단 바비와 요한과 세나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다. 꿈속에서 보았던 것을 가늠해


본다면, 세 사람은 원래 사이가 매우 좋았다.

요한과 바비는 세나를 좋아했다. 하지만 세나와 결혼하게 된 것은 요한이었다. 바비는 사랑의
실패자로서 그녀를 그리워하게 된다.

바비는 나를 만났던 그때부터 내가 세나와 닮았음을 알고 있었다. 아니, 이 사실은 정정이


필요한 듯하다. 바비는 나와 안면을 트지 않았던 그전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몰래 지켜보다, 기회를 틈타 접근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비는 나를 처음 봤을 때 놀라지 않았을 거라고.

다시 돌아와서, 조슈아를 낳은 세나는 1 년 뒤에 죽어 버린다. 그게 아마 4 년 전 일일 테다.

그리고 나는 5 년 전에 기억을 잃었다.

요한에 대한 기억이 설핏 떠올랐을 때 솔직히 나는 ‘내가 세나가 아닐까.’하는 의심을 조금


했다. 신빙성이 아주 없는 의심은 아니었다.

내가 여러 번 꾸었던 야릇한 꿈속의 남자 목소리와 요한의 목소리가 닮아 있었고, 방금 전에도


요한과 관련된 것을 떠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세나라고 하기에는 연도가 맞지 않았다.

“1 년이 맞물린단 말이지.”

세나와 나 사이에는 함께 존재했던 1 년이 있었다. 분명히.

생각의 흐름은 자연스러운 의문 하나를 만들어 냈다.

가령 병이라든지, 사고라든지…….

과연, 세나는 어떤 이유로 죽은 걸까.

제 17 화. 새……, 샌드위치가 먹고 싶다고요!


“거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지?”

요한의 말에 나는 생각하던 것을 멈추었다. 그러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거지에게도 비밀은 있습니다.”

뜬금없이 요한에게 ‘세나 씨는 왜 죽었어요?’라고 물을 수는 없었다. 나도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바비처럼 기회를 틈타 그에게 물어볼까 싶었지만……. 솔직히 요한에게 세나와 관련된 일을


묻기는 여간 망설여졌다.

“거지가 지금 비밀을 만드는 거지?”

요한은 입가를 비스듬하게 일그러뜨리며 비아냥거렸다.

“이봐요, 당신의 말의 뉘앙스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거지로 시작해서 거지로 끝나는 것


같다는 기분이랄까.”

“거지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면 그런 거지.”

요한은 저가 그렇게 말하고도 우스운 것인지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큭큭.”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웃음은 기어코 큰 웃음이 되었다. 요한은 어깨를 들썩거리면서까지


웃었는데,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웃음을 지음에 부드럽게 굽어진 두 눈매, 초승달처럼 올라간 입꼬리. 요한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거 처음 봤다.

그가 가진 인성과는 별개로 잘생겼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지만, 웃고 있는 그는 정말 보기


좋았다. 평소에도 저렇게 웃으면 좀 좋아.

“요한 랭카스터 씨. 말장난을 즐기시는 줄 몰랐네요.”

그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을 매끄럽게 쓸어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난 원래 이런 걸 꽤 즐거워해. 예전에 세나와도 종종…….”

요한은 자연스럽게 대답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즐겁게 웃고 있던 입꼬리는 금세 굳어 버린다.

고작 ‘세나’라는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을 뿐인데, 우리 사이에 흐르던 공기가 급변해


있었다. 냉랭하고 또 냉랭하게.

“…….”

나는 침묵하며 내 옆에 앉아 있던 조슈아를 내려다보았다.


울었다가 웃었다가 으름장까지 놓았던 아이는 언제 잠든 것인지, 내 허벅지 위에 머리를 누인
채였다. 적절한 타이밍에 잠이 들었구나.

나는 아이의 금빛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에게 물었다.

“세나 씨와도 종종 그랬던 거예요?”

“……어, 뭐. 그랬어.”

“세 사람.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다고 했잖아요. 많이 친했던 거예요?”

세 사람. 요한은 그것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린 것처럼 내게 되묻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으며 뜸을 들였다. 고민이라도 하는 듯 그의 손가락은 제 허벅지 위를


몇 번 두드렸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리로 갔다. 희고 기다란 예쁜 손이었다. 어쩐지 그 감촉이 궁금해지는


손.

그의 손에서 단연 눈에 띄는 곳은 왼손 약지였는데, 거기엔 금빛의 얇은 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그전엔 인지하지 못했던 반지였다. 결혼반지라도 되는 걸까.

문득 깨달았을 땐, 굳게 닫혀 있던 요한의 입술이 조용히 열려 있었다.

“예전엔 셋이 항상 붙어 다녔어. 이 저택에서. 저 정원에서.”

나는 지난밤 내가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요한의 정원, 커다란 정원수 밑에 옹기종기 앉아 있던 세 명의 아이들이 나왔던 그 꿈. 그


꿈대로 세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아주 친했던 것이다.

그럼 여기서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어째서 내가 세나의 어린 시절과 연관된 꿈을


꾸었느냐였다. 아니, 그 꿈은 진짜이긴 한 걸까?

세나에 대한 내 궁금함이 만들어 낸 허상은 아니었던 걸까.

“요한 씨. 하나만 더 물어도 돼요?”

“이미 물으려고 마음먹은 주제에 이제 와서 동의 구하지 마.”

물어봐도 된다는 건가? 하여튼 물어봐도 된다는 말을 참 어렵게 한다니까.

나는 툴툴거리는 요한을 가자미눈으로 쏘아봤다. 그러자 요한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내게


다시금 말을 건네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건데?”

“저, 음……, 그러니까. 세……, 세…….”

세나 씨는 왜 죽었어요? 나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내 직감은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지금이 바로 세나의 죽음에 대해 물어볼 타이밍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입술이 잘 떼어지지 않았다. 내내 솔직하게 말하던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묻기가 망설여졌다. 그것은 다른 논제가 아니라 세나에 대한 것이었기에 그런지도 몰랐다.

“세? 세, 뭐?”

“세……. 그러니까, 새……, 샌드위치가 먹고 싶다고요! 아오, 진짜! 먹고 싶어 죽겠네.


배고파 죽겠다.”

젠장. 세나가 샌드위치로 변해 버리다니. 나는 까닭 모를 처참함을 느끼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바라본 요한은 입꼬리를 잘게 떨리고 있었다. 웃음을 참고 있는 모양새임이 분명했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은 뭐랄까. ‘샌드위치가 먹고 싶다는 말을 아주 어렵게 내뱉은 거지’


쯤으로 느껴졌다.

“하여튼 누가 거지 아니랄까 봐.”

나는 대꾸를 하지 못하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왜 솔직하게 묻지 못했을까. 요한이 또다시 슬퍼할까 봐? 구슬퍼진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하지만 그 일은 내가 꼭 알아야 하는 일이었다. 간과해선 안 될 일이란 예감이 들었다.

샌드위치가 먹고 싶은 거지와 그런 거지를 우스워하는 요한 사이의 대치는 가벼운 노크 소리로


인해 끝이 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벨라였다.

“다과를 가져왔습니다.”

아마도 요한이 벨라에게 미리 언질을 해 놓은 듯했다. 아까 내가 조슈아를 달랠 때 그는 잠깐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했었는데,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벨라와 나는 가벼운 고갯짓 인사를 나누었고, 그녀는 쟁반에 올려 있던 다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녀가 막 테이블 위의 세팅을 끝냈을 때, 잠자코 지켜보던 요한이 그녀를 불렀다.

“벨라.”

“네?”

“미안한데. 이것들은 정원에 준비해 주겠나?”

“네? 다과를요?”
벨라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어. 큰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날씨가 좋으니까. 조쉬와 함께 정원에 나간 지도


오래됐고. 그리고……, 음.”

“네, 그리고요?”

“……가능하다면 샌드위치도 준비해 줬으면 좋겠는데.”

샌드위치를 어색하게 운운한 요한은 민망하다는 낯빛을 내비쳤다.

설마하니 내가 샌드위치를 먹고 싶다고 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 매사 내게 고깝게 구는 요한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도록 할게요, 주인님.”

벨라는 테이블 위에 올려놨던 걸 쟁반 위에 다시 올리고선 방을 나갔다.

“…….”

나는 요한을 게슴츠레하게 바라봤다. 요거 참, 의심이 되는데.

요한은 눈치를 보듯이 나를 슬쩍 바라보다 나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왜, 왜! 거지 네가 샌드위치를 먹고 싶다고 해서 그런 거 절대로 아니니까, 착각하지 말도록.


나도 때마침 샌드위치가 먹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아니, 제가 뭐라고 했나요.”

왜 꼭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그런담.

“나는 네가 아니라, 조쉬와 정원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싶었을 뿐이야.”

요한은 연거푸 변명했다. 나는 아직까지 곤히 잠든 조슈아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조슈아는 지금 자는데요?”

“…….”

요한은 귀가 붉어진 채로 침묵했다.

바보, 솔직하지 못한 것 좀 봐.

“……우웅. 엄마, 아빠. 조슈아를 찾았어?”

조슈아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깬 듯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오동통한 손으로 눈가를 비비적거리는 모양새가 너무너무 귀여웠다. 언젠간 내가 조슈아의


귀여운 손을 깨물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일 테다.
“조슈아. 깼어? 더 자지 그랬어.”

“아니야. 조슈아도 엄마 아빠랑 같이 놀 거야.”

“그래, 조쉬! 이 아빠가 너를 위해 샌드위치를 챙겨서 정원으로 나갈 예정이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만을 위해서.”

“…….”

나는 요한을 계속해서 게슴츠레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제는 요한의 흰 뺨마저도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요한은 조슈아뿐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정원에 가려고 한 거구나.


자고로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을 뜻했다.

“우와! 우리 그럼 소풍 가는 거야? 엄청 좋아! 조슈아는 너무 좋아!”

조슈아는 물개 박수를 치며 엉덩이를 몇 번 들썩거렸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 흐뭇하게


바라보다 무언가의 사실을 깨닫고야 만다.

정원에 바비가 있었는데.

입가에 띠어진 기분 좋은 미소가 서서히 거두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정원을 응시했다.

바비는 여전히 정원에 있을까.

바비를 만난 지 한 시간 조금 넘게 흐른 것 같았다. 혹여나 바비가 아직 정원에 있고,


우연처럼 그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아서라. 벌써부터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저, 정원으로 소풍 가는 건 내일…….”

나는 내일 가는 건 어떠냐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물개 박수를 치며 ‘아빠, 오늘은 안 바쁜 거야?’, ‘오늘은 조슈아랑 놀아 주는


거야?’라는 말을 뱉어 내는 조슈아를 보자니 말문이 턱 막혔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내일 가자고 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바비와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만이 간절했다.

* * *

공작저의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상쾌한 가을 냄새가 맡아졌다. 올려다본 하늘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소풍을 가기엔 끝내주게 좋은 날이었다.
조슈아는 한쪽 손으론 내 손을 나머지 손으론 요한의 손을 잡고 있었다. 조슈아를 사이에
두고서 나란히 걷게 된 요한과 나. 우리의 모습은 영락없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나는 요한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출처를 알 수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요한의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그러자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곱게 넘겨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생각이었다. 밥맛의 머리칼을 넘겨 주기는 개뿔.

나는 요한에게 닿았던 시선을 물렸다. 그의 머리칼을 넘겨 주고 싶다는 충동이 더더욱 커지기


전에.

벨라는 정원에 미리 나가서 발 빠르게 준비를 해 둔 듯싶었다.

정원 한편, 어느 나무 그늘 밑에 핑크빛의 천이 깔려 있었고, 요한이 꼭! 먹고 싶다고 했던


샌드위치와 차가 천 위에 예쁘게 올려 있었다.

우리가 자리 잡은 곳은 다행스럽게도 바비와 만났던 커다란 정원수와는 거리가 꽤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 사실에 작게 안도를 하며 예쁜 천 위에 앉았다.

나는 엉덩이를 붙이면서도 슬쩍슬쩍 정원수 쪽을 바라보았다. 바비의 모습이 보일 성싶었지만,


그의 푸른 머리칼은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나를 만났으니 돌아가 버린 걸까?

“거지. 찾는 게 있나?”

나는 돌렸던 고개를 얼른 제자리로 돌렸다.

“아뇨.”

바비가 이곳에 있었다는 걸 요한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요한은 내 대답에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 들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마치 자신이 먹고 싶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한 번에 저렇게 많이 먹다간 목에 걸릴 텐데. 목에 걸리면 마실 것을 찾겠지?

나는 바비에 대한 것을 금세 까맣게 잊고선, 자못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내 손은 도둑의 것보다도 빠르게 찻잔과 주전자를 등 뒤로 조용히 숨겼다. 그러곤 심드렁한


표정을 유지하며, 기다렸다. 요한이 캑캑거리기를 말이다.

“……켁, 켁!”
아니나 다를까.

샌드위치가 목에 걸린 듯한 요한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연신 기침을 해 댔다.

“요한 씨. 차 마시고 싶죠?”

요한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본 요한의 고갯짓 중에 제일 기민했다. 그는 내게


구원을 바라는 눈빛을 보내며, 제 가슴팍까지 퍽퍽 두드리기에 이르렀다.

“그럼 리나라고 불러 보세요. ‘예쁜 리나 양. 저는 지금 목이 너무 마릅니다.’ 이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차를 드릴게요.”

“……너!”

요한은 부들거리며 그제야 찻잔과 주전자를 찾았다. 하나 나는 그것들을 모두 내 등 뒤로 숨겨


놓은 터였다. 그가 찾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찻잔과 주전자가 보이지 않자, 요한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약간 당황한


듯했다. 나는 시치미를 뚝 뗐다.

“당신이 찾고 있는 거 절대로 못 찾으실 텐데.”

이건 요한이 나를 거지라는 말로 놀려서 하는 복수는 아니다. 그가 말장난을 했던 것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게 절대로 아니다.

……아마도.

요한은 인상을 구길 수 있을 만큼 완전히 구기고선 띄엄띄엄 말했다.

“예……쁜…… 리나 양. 저는 지금 목이…… 마릅니다.”

꽤나 굴욕적인 말을 내뱉는 그의 얼굴이 아주 우스웠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자, 여기.”

미션을 달성했으니 보상을 주어야지.

나는 그제야 숨겨 두었던 찻잔과 주전자를 건넸고, 요한은 차를 한 번에 털어 마시고선 분한


표정을 지었다.

“나 원 참. 애도 아니고. 누가 뺏어 먹어요? 그렇게 급하게 먹지 않아도, 당신이 샌드위치를


먹고 싶어 하는 거 충분히 잘 알았으니까, 천천히 먹어요.”

“내가 언제 급, 급하게 먹었다고. 난 샌드위치를 먹을 때 항상 이렇게 먹어.”

“네네. 큭큭.”

그의 열없는 변명에 나는 기어이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토록 참았던 웃음이었는데!

“킥킥.”
킥킥. 그 요망한 웃음소리는 조슈아의 것이었다. 조슈아는 우리를 보며 키득거렸다. 아이가
보기에도 우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나와 조슈아는 연신 키득거렸고, 차로 인해 진정되었던 요한의 얼굴은 다시금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요한이 나와 조슈아에게 쓴소리를 한 것은 아니었다.

놀림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낮게 미소 지은 그의 얼굴이


평안해 보이기만 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꽤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다. 불현듯이 든 생각이었다.

그러다 요한은 머쓱한 손길로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 들어 내게 들이댔다.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였다.

“거지, 너도 먹어. 네가 언제 이런 최고급 샌드위치를 먹어 보겠나.”

나는 그가 건넨 샌드위치를 받아 들며 고개를 넙죽거렸다.

“예, 예. 자고로 예쁜 거지 리나는 사양을 모릅니다.”

요한은 다시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고, 나도 그가 건네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오! 샌드위치는 두 눈이 커질 만큼 정말 맛있었다.

내 옆에 앉은 조슈아 또한 그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그 모습이 역시나


정말 귀여웠다. 조슈아는 아마 귀여움을 빼면 시체일 거다. 어쩜 이렇게 모든 모습이 귀여워.

배를 채운 조슈아는 정원을 뛰어다녔다.

아이는 날아다니는 흰 나비를 쫓기도 하고, 잔디를 뜯기도 했다. 귀족가의 소중한 꼬맹이인
조슈아는 정원에 있는 모든 것을 신기해하는 듯했다.

요한은 안절부절못하며 조슈아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조슈아가 흰 나비를 잡기 위해 폴짝 뛰어오르기라도 하면 아이가 넘어질까 봐 초조해했고,


조슈아가 잔디를 뜯어 입가로 가져가면 누가 잔소리 대마왕이 아니랄까 봐, 아이를 다그치기도
했다.

조슈아는 제 아버지의 꾸중에 주눅이 들기는커녕 되레 킥킥거리며 요한을 비웃었다. 그러다


지친 것인지 아이는 잔디 위에 발라당 누워 버렸다.

요한은 도리질을 했다. 아이를 말리는 것을 포기한 듯싶었다.

밥맛 요한. 생각보다 꽤 가정적이잖아. 어울리지 않는 그 자상함에 나는 왠지 모를 괴리감을


느꼈다.

조슈아에게만 향해 있던 요한의 시선이 내게 닿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왜.”

그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끝까지 내뱉지 못한 요한의 말엔 까닭 모를 의문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봤던 거지?”

내 눈빛이 너무 뜨거웠던가. 나는 솔직하게, ‘두 사람. 보기 좋아서 빤히 쳐다봤어요.’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아닌 말로 서두를 조금 뱉기도 했다.

“두 사람…….”

하지만 나는 내 말을 끝맺지 못했다. 요한의 등 뒤, 우리가 있던 곳과 조금 가까운 곳에서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기둥이 튼튼한 나무 뒤에 있던 무언가. 푸른 머리칼을 흩날리는 무언가.

바비. 돌아가지 않았던 거야?

나는 내게 머문 그의 시선을 선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바비는 나무에 숨은 채로 나를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만났던 정원수가 아닌 다른 나무의 뒤에서.

심지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화들짝 놀란 건 나 혼자뿐인 것만 같았다.


나는 “아…….” 하는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바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요한과 조슈아가 바비의 존재를 아직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데.

“거지? 내 뒤에 뭐가 있는 건가?”

요한은 얼빠진 내 시선에 의문을 느낀 듯 고개를 뒤로 돌리기 시작했다.

안, 안 돼!

제 18 화. 세나 씨는 왜 죽었죠?

나는 요한을 급하게 막았다.

“요한 씨! 제게서 눈을 떼지 마세요!”

……좀 과한 방법으로.

“어?”

“저, 저만 바라보세요.”
“……어?”

나는 요한의 고개가 돌아가는 것을 아주 성공적으로 막았다. 그는 돌아가던 고개를 다시


똑바로 한 채로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으니까.

다만,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요한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문제였다.

“…….”

요한은 어쩐지 수줍은 얼굴을 했다. 무언가를 대단히 착각한 얼굴 같았다. 이를테면 내가 저를
좋아해서 나만 보라고 소리친 것이라 생각한……. 그런 착각이라고나 할까.

나는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그가 서 있던 쪽으로 다가갔다. 무릎이 닿을 거리만큼


가까워질 때까지 요한의 눈은 줄곧 나를 좇고 있었다. 왠지 기대감에 잔뜩 부푼 눈으로.
그렇게.

요한의 착각과 기대가 달갑지 않아야 함이 옳았다. 나는 실제로 요한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제가 저만 바라보라고 한 이유는…….”

내뱉어진 내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바투 마주한 그의 눈동자에 덜컥 가슴이


떨렸다. 나는 왜 그에게 설레어 하는가.

그 까닭은 모두 요한의 잘생긴 얼굴 탓이라고 단정 짓고 싶었다. 하나 그렇게 단정 짓기엔


설렘의 깊이가 깊다.

불현듯이 내 허리에 깊숙이 둘러졌던 요한의 손길이 떠올랐다. 그의 다섯 손가락이 닿았던 내


허리 부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이유는?”

요한은 내 말꼬리를 잡았다. 나는 달아오른 허리 부근을 열없이 손으로 몇 차례 털어 내며,


그의 얼굴을 꼼꼼히 쳐다보았다. 무슨 변명거리가 없으려나.

그러다 그의 머리카락 위에 얹힌 잔디 한 줄기를 보게 된다. 아까 조슈아가 공격적으로 뜯던


잔디 쪼가리 중 하나인가 보다.

그렇지, 저거다.

“요한 씨. 머리에!”

말보다도 행동이 먼저 나왔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 위로 손을 뻗어, 잔디 쪼가리를 떼어 내


주었다. 그러자 그의 어깨가 티가 나게 움찔거렸다.

“……!”
“당신 머리에 풀 쪼가리가 하나가 얹어져 있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확인 차 겸사겸사 저만
쳐다보라고 한 거였죠. 하하하.”

이거 보세요. 진짜로 잔디 쪼가리 하나가 있었네요? 나는 그의 눈앞에서 잔디를 살랑살랑


흔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웃음이 어색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지만, 내 걱정은
기우였다.

요한은 나를 의심하기는커녕 제 귓바퀴를 붉히고 있었다. 몸의 반응이 아주 솔직한 남자였다.


그는 입술을 뭉그적거리며 쑥스러워했다. 고작 거지의 손길이 잠깐 닿았을 뿐일 텐데.

그 모습이 좀……. 나는 깨닫고 싶지 않은 사실을 깨닫고야 만다.

믿기 싫지만, 밥맛에겐 귀여운 구석이 있는 거라고. 확실히. 이젠 인정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요한은 뒤늦게 말했다.

“무엄하군. 그렇다고 해서 내게 함부로 손을 대다니.”

어쭈? 지난날, 함부로 날 껴안았던 장본인이 누군데.

나는 지지 않고 대답했다.

“위엄이 넘치시는 공작님인데, 머리 위에 잔디를 얹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건 또 그렇군.”

“바보.”

아차, 생각 없이 말이 나갔네.

“……뭐? 바보?”

요한은 저를 바보라고 부른 나를 다그칠 수 없었다. 우리 사이로 조슈아가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자로 누워 있던 녀석이 언제 일어난 것인지.

“엄마, 아빠! 조슈아가 지켜봤는데, 두 사람 사이가 좋아 보여!”

네 눈엔 그렇게 보였니? 나는 잘 모르겠는데.

나는 조슈아의 금발을 부드럽게 흐트러뜨렸다. 아이는 기분 좋은 얼굴을 하며 내 손길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귀여운 것.

“조슈아. 기분이 좋아?”

“응응! 기분 좋아. 행복해. 매일 이렇게 행복했으면 좋겠어.”


조슈아의 말 덕분이었을까. 무표정에 가까웠던 요한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웠다.

“조쉬. 나도 네가 매일 행복했으면 한단다.”

“나도! 나도 조슈아가 매일 행복했으면 해.”

우리는 거의 동시에 조슈아에게 말했다. 조슈아는 입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로 웃으며, 제 두


손으로 요한과 내 손을 각각 잡아챘다.

“그럼 우리 셋이서 매일 행복하자!”

나는 조슈아를 보며 해맑게 웃으면서도 슬쩍 바비가 숨어 있던 나무를 살펴보았다.

“…….”

다시 바라본 그 나무에는 바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법처럼 홀연히 사라진


것이었다. 언제, 어떻게,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나는 바비가 사라졌음을 안도하면서도 그의 행방이 궁금했다. 물론 그가 어디로 간 것인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하나 나는 그가 또다시 나타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앞에 제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지 않고 사라졌다는 건, 바비도 요한과 일부러 마주치지는


않겠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요한과 내 손을 잡은 조슈아가 우리를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이의 걸음에 맞추어 정원을 함께 나돌았다.

단란한 우리의 모습을 보며 나는 또다시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러자 하릴없이


떠오른 이는 세나였다.

세나.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내 자리는 그녀의 자리였겠지.

세나라는 이름이 떠오르자마자 동시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세나가 어떻게 죽었는지 꼭


알아야겠다는.

차마 요한에게 묻지 못했던 그녀의 이른 죽음의 이유를, 나는 알고 싶었다.

그것은 꼭 요한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었다.

* * *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내가 찾은 이는 요한의 저택 내에서 유일하게 안면을 트고 지내던


사용인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떠올렸다. 갈색 머리, 갈색 눈동자, 나이는 나보다도 더 많아 보였고,
(삼십 대쯤이 되었을까.) 희고 깨끗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벨라, 시간 좀 있어요?”

벨라였다.

그녀는 내가 요한의 저택에 처음 왔을 때부터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었다. 세나가 4 년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미리 언질해 준 것 또한 그녀였다.

나는 복도에서 우연처럼 만난 벨라를 잡아 세웠다. 벨라의 다갈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가


이내 부드럽게 굽어졌다.

“리나 님. 무슨 일이 있으세요?”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은 유보 없이 흐른 시간을 무시하듯이 빛났다.

미소를 지음에 눈가에 자연스럽게 파인 주름마저도 퍽 매력적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녀는 한때


여러 남자 시종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었을 것이다.

요한의 저택에 있던 남자 사용인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든 벨라였건만, 그녀는 지금 혼자였다.

그녀가 혼자인 이유엔 딱한 사정이 하나 있었는데, 사랑했던 남자가 일찍 죽어서 그 남자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나는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어떻게 벨라의 사정을 이렇게나 자세히 알고 있는 거지?

마치 오래전부터 벨라라는 여자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동시에 왠지 모를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무엇이 그리운 건지, 무엇을 그리워하는 건지, 그 목적성을 알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쑥 떠오른 벨라의 사정에 대한 진위 여부를 의심했다.

“리나 님?”

그사이, 불러 놓고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벨라가 다시금 불렀다. 나는 그제야 그녀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아, 죄송해요. 지금 바쁘지 않으시다면, 제 방으로 잠깐 가시겠어요?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벨라는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궁금한 기색을 가득 풍기면서도, 섣불리 그


이유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입이 무거운 건 예전과 다름이 없는 듯하다.


“…….”

또. 또. 기시감에 가까운 생각이 든다.

‘입이 무거운 건 예전과 다름이 없는 듯하다.’ 이런 생각은 내가 전에도 벨라를 알았다는


전제하에 들어야 할 생각일 텐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가 더 생각나길 바랐지만, 안개 속에 갇힌 기억은 내 의지대로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생각나지 않는 기억이 답답하긴 했으나 구태여 짜증을 내진 않았다.

왜냐면 짜증을 낸다고 해서 5 년간 잊고 지냈던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소모적인 일은 질색이다.

나는 요한이나 조슈아와 혹여나 마주칠까 싶어, 벨라의 소맷자락을 잡고 재빠르게 방으로


들어왔다.

딸깍.

나는 방문까지 완벽하게 잠그고 나서, 소파 위에 앉았다.

“앉으세요.”

벨라는 왠지 긴장한 얼굴로 내 맞은편에 앉았다.

“리나 님, 도대체 무슨 일이세요?”

벨라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물었다. 우리 두 사람 말고는 엿들을 사람이라곤 전혀


없는데 말이다.

“제가 곤란한 질문을 할지도 모르겠어요.”

“곤란한…… 질문이요?”

“네. 벨라가 대답해 주기 곤란한 질문이라면, 대답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좋아요. 일단은 들어 볼게요.”

벨라는 굳건한 심지가 담긴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어깨가 내려갈 정도로 심호흡을 한


뒤에 말했다. 이럴 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최고였다.

“세나 씨는 왜 죽었죠?”

“아…….”

벨라는 탄식했다. 내 입에서 그런 질문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제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혈기가 좋았던 얼굴은
금세 핏기가 가시며, 그녀는 내 시선을 외면했다.

한마디로 지금의 벨라는 난감해 보였다. 내 질문이 그녀를 곤란하게 만든 것이리라.

나는 그녀를 보채거나 닦달하지 않으며, 그녀의 대답을 차분히 기다렸다. 설령 벨라가


부정적인 대답을 한다고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요한처럼 벨라에게 마구잡이로 명령을 할 수 있는 신분의 사람도 아니었고, 그저 일개


거지……였으니까. 요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다.

만일 벨라가 세나의 죽음에 대한 자초지종을 함구한다면, 나는 다른 이에게서 알아내 볼


참이었다.

세나의 죽음은 일개 거지의 죽음이 아니라, 공작가의 마님의 죽음이었다.

아무리 조용히 치러진 장례라 할지라도 그녀의 죽음이 가져온 파장은 지대할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렇기에 그녀가 왜 죽었는지에 대한 것은 다른 이에게서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최악의 경우, 바비에게 물어보는 방법도 있었다.

바비라면……, 그라면 내게 세나의 죽음에 대한 것을 알려 줄 것이 분명했다. 아니, 더해


내가 묻지 않은 사실까지 읊어 줄지도 몰랐다. 나는 확신했다.

다른 이들 속엔 요한은 당연히 포함되지 않았다.

그에게 물었다간 얼마나 험악한 말을 들을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거지 주제에 뭘 더 알려고 구는 거지?’라며 말장난을 빙자해 비아냥거릴지도 몰랐다. 하여튼


그 밥맛이 어디 가겠어.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벨라의 입술이 무겁게 떼어지기 시작했다.

“……아팠어요.”

그녀는 결국 세나의 사정을 내게 털어놓은 것이었다.

“세나 씨가 아팠어요?”

벨라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아팠다, 라.

“리나 님처럼 아주 건강하신 분이었는데…….”

벨라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곤 작게 훌쩍거렸다. 눈가를 쓰는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나는 잠자코 그녀가 다음 말을 이어 하길 기다렸다.

“조슈아 님을 낳은 후부터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셨어요. 그렇게 1 년을 침상에 누워만


계시다가…….”
킁, 벨라는 콧물을 들이켜며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1 년을 침상에 누워만 계시다가…….’ 나는 그녀가 차마 잇지 못한 서술어를 예상할


수 있었다.

세나는 조슈아를 낳은 뒤, 1 년을 앓다 죽어 버렸다.

그녀가 죽은 원인은 병이었다.

“벨라, 더 얘기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뒷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옅게 끄덕였다.

벨라는 또다시 소매로 제 눈가를 쓸며, 자신의 말을 덧대었다.

“……홀로 남게 된 조슈아 님은 요한 님의 책상 위에 있는 마님의 그림을 보며 성장했어요. 진짜


살아 있는 엄마를 대하는 양 그 그림에게 매일같이 안부 인사를 하고, 입을 맞추고,
그리워했죠.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 몰라요. 조슈아 님이 리나 님을
보자마자 단번에 엄마라고 따른 건, 역시나 닮은 외모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림 속 마님의
얼굴과 리나 님의 얼굴은 성인인 제가 봐도 엄청 닮았으니까.”

“네. 저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세나와 닮은 얼굴. 나는 어렴풋이 요한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그 액자를 떠올렸다.

“고마워요. 털어놓기 힘드셨을 텐데,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벨라가 솔직하게 얘기해 주지 않을 가능성이 근 80 퍼센트 정도라고 생각했다. 사용인인


그녀가 털어놓기엔 꽤 예민하고 무거운 논제였으니까.

하지만 벨라는 고민 끝에 내게 사실을 일러 주었다.

생판 모르는, 자칫 위험한 짓을 할 수도 있는 사람인 나에게(물론 나는 위험한 짓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공작가의 사정을 일러 준 그녀의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보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에 대한 어쭙잖은


신뢰가 생긴 걸까?

“이런 말씀, 실례될지도 모르겠어요. 실은 리나 님이 무언가를 물으면, 꼭 마님이 묻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벨라는 제 시녀 복을 구기듯이 꽉 말아 쥐며 말했다. 토하듯이 내뱉은 그녀의 말 속엔 감정이


그득했다.

감정의 정체를 일컫자면, 그건 역시나 마님에 대한 벨라의 그리움이었다.

나에게마저도 그 그리움이 전가된 것인지 내 심장이 욱신거렸다.

“실례되지 않아요. 되레 감사한 걸요. 시간을 내 주신 것도 너무 감사드려요.”


줄곧 내 시선을 피하며 마룻바닥 어귀만 바라보던 벨라의 시선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그녀의
다갈색 눈동자는 나를 직시했다.

“이것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도 리나 님께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당연하죠. 뭐든지 물어보세요.”

벨라는 내게 무엇이 궁금한 걸까.

“리나 님은, 잊은 기억을 되찾고 싶은 마음은 없으세요?”

“아.”

나는 얼빠진 얼굴로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이거 참, 의외의 질문은


나만 한 줄 알았는데, 벨라도 내게 의외의 질문을 하는구나.

내가 잊고 있는 기억은 타율적으로 태어나고, 성장했던 과거의 여러 기억들이었다. 지금 내게


남은 기억은 5 년 전, 사고 후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현재까지의 기억들뿐.

나는 소파에 몸을 완전히 기대며 대답했다.

“글쎄요. 사실 예전엔 엄청 찾고 싶었어요. 전 뭐 하는 사람이었을까, 누구였을까, 가족은


있었을까……. 궁금했죠. 하지만 지금은 거의 포기 상태예요.”

“왜요?”

“잊고 있는 기억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해야 할까요. 없어진 기억이 생각보다 매우 끔찍한


기억이라면요? 기억을 잃은 저를 제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어느 잡화점의 주인이었는데. 글쎄,
제 상태가 장난이 아니었나 봐요. 피 칠갑을 한 채로 산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지 뭐예요.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제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끔찍하고도 어쩌면 잔인할 수 있는.
떠올리면 괴로울지도 모르는.”

“…….”

나는 괜스레 목덜미를 주물거리며 이어 말했다.

“그래서 떠올리려고 애쓰지 않으려고요. 전 지금 생활에도 충분히 만족하니까. 과거를 굳이


알아서 괴로움을 자처할 필요는 없잖아요?”

벨라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은 내 말을 반만 이해했다는 얼굴에 가까웠다.

쉽게 말하면 그런 거다.

나는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답답함보다, 피 칠갑을 하고 있었던 내 모습에 대한 원인을 아는


게 더 두려웠던 거였다. 어떤 사실은 알지 못하는 게 더 나을 때가 있었다.

나는 화제를 전환할 요량으로 벨라에게 물음을 건네었다.

잊고 있는 기억이 두려웠지만, 그 물음은 벨라에게 꼭 묻고 싶었던 물음이었다.


“벨라. 혹시……. 잊지 못하는 남자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 물음은 방금 전 내 머릿속에 설핏 떠오른 벨라의 여러 신상에 대한 확인


사살이다.

“……! 그, 그걸 어떻게…….”

벨라는 무너져 내리는 표정을 어찌하지 못한 채로 되물었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선 확신했다. 사랑했던 남자가 일찍 죽어 버려서, 그녀는 지금까지


혼자인 거라고.

갑자기 떠오른 내 기억들은 허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벨라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음 질문을 꺼내어 놓았다.

“자, 그럼 다음 질문. 벨라는 혹시 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를 알고 있어요?”

까닭은 모르겠지만, 나는 벨라라는 여자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벨라도


리나라는 여자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

“리나라는 이름이라면…….”

꿀꺽.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 19 화. 궁금해?

“……몇 번 들었던 것 같아요.”

나는 곧 발딱 일어날 듯이 벨라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벨라가 리나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니!

“누구에게서요?”

내 목소리는 너무도 격앙되어 있었다. 나는 끌어 오르는 흥분을 참을 수 없었다.

벨라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마님에게서요.”

그녀의 대답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님에게서요. 나는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마님이라면……, 세나 씨.”

세나는 리나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세나가 알고 있던 리나는 내가 아닐 수도 있었다. 리나라는 이름이 특이한 이름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말이다. 내겐 오한이 들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게 그냥저냥 지나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제가 그 이름을 들은 건, 마님이 낮잠을 주무셨을 때……,


이따금 잠꼬대처럼 부르던 이름이었으니까요.”

나는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벨라와의 대화로 알아낸 사실들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정리했다.

나는 벨라의 속사정까지 뼛속 깊숙이 알고 있었고, 세나는 리나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벨라는 한마디를 덧대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마님이 조슈아 님을 낳은 이후론 그 이름을 더는


잠꼬대처럼 부르지 않았다는 거예요.”

“…….”

“물론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일 수도 있어요. 그건 단지 잠꼬대였을 뿐이니까요.”

벨라의 말대로,

그건 단지 잠꼬대에 불과했던 걸까?

* * *

벨라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방엔 익숙한 손님이 찾아왔다.

“엄마!”

꼬맹이 주제에 번듯한 쓰리피스까지 갖춰 입은 조슈아였다.

나는 자세를 낮춰 팔을 수평으로 벌리며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아이는 늘 그러했듯이 내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음, 오늘도 좋은 냄새.
포옹을 동반한 재회가 끝난 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슈아를 내 옆에 앉혀 두었다.
조슈아는 붉고 도톰한 입술로 오늘 수업에서 듣고 온 것들을 조잘거렸다.

나는 적당한 타이밍에 과장된 추임새를 넣어 주며 아이의 말을 들어 주었다. 유모랍시고 하는


일이 고작 이런 것들뿐이라서, 나는 조슈아의 이야기를 들어 줄 때 꽤나 성심성의를 보이고
있던 터였다.

“……조슈아는 엄마 아들이라서 이렇게 똑똑해!”

오늘 배운 것에 대한 얘기를 끝낸 조슈아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이의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여 주며 말했다.

“오구오구, 누구 아들인데 이렇게 예쁠까.”

“당연히 엄마 아들이지!”

조슈아는 거리낌이라고는 전혀 없이 대답했다. 내 눈을 바라보는 아이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초롱초롱하기만 했다.

나와 같은 색의 눈동자. 어쩐지 바라볼 때마다 기묘한 느낌을 주는 눈동자였다.

“조슈아. 너는 아직도 나를 네 엄마라고 생각해?”

나는 넌지시 조슈아에게 물었다. 별다른 의미가 있어서 물은 것은 아니었고, 그저 대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물은 것이었다.

“응. 엄마는 조슈아의 엄마야.”

“으음.”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되레 조슈아는 ‘아직도 나를 네 엄마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한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눈빛은 뭐랄까. 당연한 사실을 왜 따지려 드느냐는 눈빛에 가까운 것이었다.

당연한 것이라. 나는 입가에 띠운 미소를 지우지 않고선 물었다.

“조슈아. 네 엄마의 이름이 뭔지 알아?”

“세나. 아빠가 술에 취할 때마다 늘 불렀던 이름이야.”

“그래. 그리고 네 아빠가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도 알아?”

“거지 리나!”

“…….”
조슈아는 신이 난 듯이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거지 리나라는 말이 그토록 우스웠던 것일까.

“그, 그래. 잘 아는구나. 세나와 거지 리나. 이름이 다른데도 너는 나를 네 엄마라고


생각해?”

그건 때때로 들었던 의문이었다.

요한은 대놓고 나를 거지라든지 아~주 간혹 리나라고 불렀다. 대개 거지라고 불렀다고 해야


함이 옳을 것이다. 그렇기에 조슈아도 당연히 거지라는 말을 들었으리라고 여겨졌다.

요한은 아이 앞에서 가짜 엄마 연극 같은 것은 하지 않으며, 나를 세나와는 다른 여자로


대했단 말이다. 그럼에도 조슈아는 나를 엄마로 따르며, 좋아해 주었다.

조슈아는 어른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청산유수로 말을 내뱉는 명석한 아이였다.

그런 똑똑한 아이가 그 간극을 놓쳤을 리가 없었다.

“엄마.”

조슈아가 제법 진지하게 나를 불렀다. 나는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엄마가 어떻게 불리는지는 조슈아에게 중요하지 않아.”

아이는 흐트러짐이라곤 없는 강경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중요한 건 엄마가 엄마라는 사실뿐이니까.”

“내가 네 엄마라는 사실?”

조슈아는 다시금 빙그레 웃으며 내게 안겼다.

“응!”

아이의 대답이 우렁차기만 했다. 나는 내게 안긴 조슈아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지만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들었다.

‘엄마가 어떻게 불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엄마가 엄마라는 사실뿐이니까.’

그건 도대체 무슨 말인 걸까?

“얘, 조슈아야.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이번엔 내가 제법 진지하게 물었지만, 조슈아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조슈아는 엄마 생각만 해.”

“……아빠 생각은?”
조슈아는 아이답지 않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해. 아빠는 잔소리쟁이야. 난 엄마가 최고라구!”

무언가 석연치 않은 마음은 여전했지만, 내겐 왠지 모를 승리감이 들었다.

이 자리에 요한이 있었다면, 그의 표정이 꽤 봐 줄 만했을 텐데. 아쉽네.

* * *

눈을 몇 번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내 방의 두 번째 방문객이던 조슈아마저도 다시 나가 버린 방 안. 침대에 누워 있는 내가 내는


숨소리를 제외하곤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요한은 낮 동안에 바쁘기라도 한 것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바쁜가.

이건 절대로 내가 요한이 보고 싶어서 든 생각은 아니다. 더불어 그가 찾아오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단지 심심했고, 조금은,

“아쉽다.”

불현듯이 내뱉은 말은 진심이었다.

하나 무엇 때문에 아쉬운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다. 어차피 요한과 마주해 봤자, 그의 밥맛


같은 면모만 더 알아 갈 텐데.

침대 위,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붉은빛에 나는 눈가를 찌푸렸다. 그건 꼭 석양빛이 따가워서


눈가를 찌푸린 것만은 아니었다.

요한의 부재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내 자신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뭐라고 아쉬워한 거야.

나는 다시금 눈을 천천히 껌뻑거렸다.

지금 자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아까 벨라가 가져왔던 스테이크 엄청 맛있던데. 육즙이 아주 그냥 죽여주던데. 요한은 그런


스테이크를 몇 살 때부터 먹었을까.

다섯 살? 아니, 그전부터 그는 스테이크를 먹었겠지? 행복했겠다. 요한은 다섯 살 때도 엄청


잘생겼을 거야. 밥맛이긴 하지만 지금도 엄청 잘생겼으니까.

말만 조금 더 예쁘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밥맛이 말을 예쁘게 하건 하지 않건 그게


무슨 상관이람…….
의식의 흐름대로 떠오르던 생각들이 점점 무뎌지기 시작한다. 더불어 눈을 깜빡이는 속도도
느려져 갔다.

이내 나는 두 눈을 완전히 감았다.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땐, 웬 낯선 방이었다.

또 꿈인가.

저번엔 낯선 복도에 관한 꿈을 꿨는데, 이번엔 낯선 방이 나오는 꿈이라. 요한의 저택으로 온


이래로 이상한 꿈을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꾸는 기분이었다.

나는 주위를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방은 넓었지만 눈에 띄는 가구는 몇 없었고, 몇 있는 가구마저도 단출하고 클래식한


것들뿐이었다.

방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방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책장이었다. 책장엔 여러


책들이 공격적으로 꽂혀 있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열린 문틈 사이로는 여자아이 하나가 들어왔다. 긴 금발이 허리까지 내려온 아이는 일전에


꿈에서 보았던 아주 익숙한 아이였다.

‘세나?’

나는 얼떨결에 아이의 이름을 불렀지만, 다행히도 아이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나를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아니, 듣지 못한 것일까. 들리지 않는 것일까.

나는 소리를 내어 재차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세나.’

그것은 확실한 소리가 되었지만, 아이에게는 내 소리가 닿지 않은 것 같았다.

아이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책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는 읽을 책을 고를


요량이었던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장을 훑었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건 내 꿈임이 분명해.

나는 잠자코 아이를 관찰했다. 아이는 내가 일전에 꿈에서 봤던 때보다도 키가 커져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간 나는, 아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이의 모습이 연기처럼 증발해 버렸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이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희한한 꿈이네. 그렇게 생각하는 도중에 또다시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엔.

‘……!’

내가 아닌 내가 서 있었다.

세나. 장성한 세나가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요한의 책상 위에 있던 액자 속 그림과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비록


꿈이라 할지라도 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을 만큼 놀라 버린다.

나는 장성한 세나가 방으로 완전히 들어오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장성한 세나 역시


어린 세나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나를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세나는 어린 세나가 그랬듯이 책장 앞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그녀는 어떤 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붉은빛의 표지를 가진 책이었다.

세나는 책상 앞에 앉아 붉은 표지의 책을 펼쳤다. 나는 세나의 발자취를 따라 책상까지 걸어가


그녀의 뒤에 섰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보인 펼쳐진 책 속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깨끗한 백지였다.

세나는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어느 펜 하나를 집어 들어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꿈이라서


그런 것인지, 글자들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흐릿했다. 애석한 일이었다.

한참 무언가를 쓰던 세나의 손이 갑작스레 멈추더니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책마저도 덮어


버렸다. 왠지 짜증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세나의 고개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고개를 느릿하게 뒤로 돌렸다. 이내 그녀의 시선이 제 뒤에 서 있던 나를 정확하게


직시했다.

그렇게 우린 눈이 마주쳤다.

설마 내가 보이는 걸까?

역시나 꿈이었지만 입안이 바싹 말라 가고, 이마엔 식은땀이 맺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눈동자를 넘어서, 내 머릿속까지 관통하고 있는 듯한 세나의 눈빛이 자못 날카로웠다.


세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며 제 입술을 작게 움직였다.

‘궁금해?’
세나는 나를 보며 예쁘게 웃었다.

“……헉!”

나는 꿈에서 깨, 까닭 없이 가빠진 숨을 헐떡였다.

눈을 뜨자마자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꿈속에서 보았던 세나의 모습은 현실에선


보이지 않았다. 방 안엔 나만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깜빡 잠든 사이에 날은 벌써 저문 것인지, 방 안은 칠흑 같은 어둠이 즐비했다. 열어 둔


창가로 들어오는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오늘 밤엔 달도 뜨지 않은 것인지,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도 없다. 사위는 짙은


어둠뿐이었다. 왠지 모를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 같았다.

“무슨 이런 개꿈이.”

나는 이마를 소매로 훔쳐 냈다. 이마엔 정말로 미적지근한 땀이 배어 있었다. 나는 누워 있던


몸을 반쯤 일으키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휴.

꿈에선 깼지만 눈앞엔 세나의 환영이 계속해서 어른거렸다.

장성한 세나. 붉은 표지의 책. 그리고 ‘궁금해?’ 나를 도발하는 듯했던 그녀의 말.

“그 방…….”

나는 꿈속에 나왔던 그 방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말이다. 아주 이상한 점은 단출하고 특색이 없었던 그 방이 어디에 있는 방인지 알 것


같다는 점이었다. 마치 예전에 갔었던 것처럼.

“2 층 복도. 중앙에 있는 계단에서 오른쪽 두 번째 방.”

나는 머리칼을 연거푸 쓸어 넘기며 생각했다.

나, 그곳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나는 침대에서 완전히 내려오며 어깨 위에 숄을 걸쳤다.

“그곳에 지금 가 봐야겠어.”

그곳은 세나의 방임에 분명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묘한 확신이었다.

의미 없는 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억을 잃고 거리를 방황했던 근 5 년간, 단 한 번도 꾸지 않았던 꿈이었다. 하지만 나는
요한과 조슈아를 만난 이래로 그들과 관련된 꿈을 계속해서 꾸고 있었다.

우연이 연속해서 일어날 때는 더 이상 우연이 아니었다.

나는 이들과 연관이 있었던 사람임에 분명했다. 요한, 조슈아, 바비. 더해 세나마저도.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다만, 나는 아직까지 그 연결 고리를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2 층 복도. 중앙에 있는 계단에서 오른쪽 두 번째 방.

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억을 더듬으며 복도를 거닐었다. 벽면에 간간이 켜져 있는 등불이


비추는 자리를 제외하곤 복도는 매우 어두웠다.

사용인들조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깊은 잠에 빠져든 걸까.

몸이 바짝 굳어 갔다. 작은 등불을 쥐고 있던 손아귀엔 힘이 꾹 들어갔다. 침묵과 어두움이


가져오는 분위기는 사람을 절로 긴장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2 층까지 내려왔다. (내가 머물던 곳은 3 층이었다.)

중앙에 있는 계단에서 오른쪽. 그리고.

“…….”

나는 두 번째 방의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방문은 여느 다른 방문의 모양과 같았다.

특색이라곤 없는 이 방 안엔 무엇이 있는 걸까. 나는 그 안을 살펴도 되는 걸까.

방 안을 살펴보지 않는 게 더 나은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면 모를까. 나는


이미 희한한 꿈을 꾼 터였다.

결말이 어떻게 되든, 설령 부정적인 결말을 가져오더라도, 나는 지금 당장 이곳을 확인하고


싶었다.

문고리 위에 손을 올리자 손가락 사이로 금속성의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손바닥은 어느새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깊은 심호흡을 하고선 문고리를 돌렸을 때, 문고리는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잠긴


것이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이곳이 진짜 세나의 방이라면, 당연히 잠겨 있음이 옳았다. 요한이 주인


없는 방을 열어 둘 리는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이곳은 세나의 방이었다. 열려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그런 일차원적인 사실도 고려하지 않고선, 무슨 배짱으로 이곳에 온 걸까?

아니, 나는 잠긴 방문을 여는 방법마저도 알 것 같았다.


복도를 걷는 내내 묘한 환청이 메아리처럼 울렸었다. 지금까지도 내 귓전엔 어느 남녀의 대화
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그 대화가 문을 여는 해법이었다.

‘……그러게, 방문 좀 제대로 고치라니까. 잠가 두면 뭐 해. 앞으로 세게 밀면서 문고리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금방 열려 버리는걸.’

처음 들렸던 건, 불만기와 웃음기가 반반 섞인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비밀은 나만 알잖아. 그러니까……, 화나도 싸워도 문은 잠그지 마. 세나. 네가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로 속상할 것 같아. 울어 버릴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이어서 들린 것은 애원하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요한.”

남자의 목소리는 요한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귓가에 맴돌던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흐려지며, 이내 완전히 사라지기에 이른다. 나는


괜스레 귓가를 벅벅 문질렀다. 절절했던 요한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완전히 고치지 않은 문고리. 앞으로 세게 밀면서 오른쪽으로 돌리면 금방 열려 버리는 문고리.

나는 문고리를 앞쪽으로 세게 밀면서 오른쪽으로 돌렸다.

딸깍.

“……!”

놀랍게도 문이 열렸다. 정말로.

제 20 화. 넌 뭔데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해

문고리를 앞으로 더 밀자 끼이익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내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문을 열어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열었던 문을 다시금


완전히 닫았다.

방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창문에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기라도 한 건지,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작은 빛조차도 없었다.

나는 들고 있던 등불만을 의지한 채로 더듬더듬 걸어가, 어느 테이블 위에 등불을 올렸다.


얼추 창문이라고 예상되는 곳까지 걸어가 커튼도 걷었다.
그러자 주위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밝아졌다.

나는 그제야 방 안을 제대로 둘러볼 수 있었다. 방을 둘러보던 나는 깜짝 놀라고야 만다.

“……! 꿈속에서 봤던 거랑 똑같아.”

엊그제도 아니고, 어제도 아니고, 무려 조금 전에 꾼 꿈이었다. 나는 꿈속에서 보았던 방


안의 전경을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단출하고 클래식한 가구만이 몇 있던 그 방. 아마도 세나의 방.

그리고 나는 한쪽 벽면을 모두 차지한 책장마저도 발견했다. 발걸음이 그리로 향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한 걸음, 두 걸음을 떼어 냈다. 책장에 가까워질 때마다 괜스레 숨이


가빠 오는 듯했다. 이내 나는 책장 앞에서 걸음을 멈춰서며 그것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눈길이 멈춘 곳은 꿈속에서 장성한 세나가 뽑아 들었던 ‘붉은 표지의 책’이 있던 곳이었다.

그 책은 꿈속에서 보았던 곳과 정확히 같은 곳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궁금해?’

와서 보라는 듯이 나를 도발했던 꿈속의 세나를 떠올렸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책을 뽑아


들었다. 그래, 내가 못 볼 이유는 없지.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엔 먼지 하나 없었다. 오랫동안 꽂혀 있었던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면이 매끄럽기만 했다. 누군가가 꾸준히 관리하기라도 하는 걸까.

꿈속의 세나는 분명 이 책 안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이 속엔 도대체 무엇이 적혀 있는 걸까.


거기엔 내가 잃은 기억에 대한 실마리가 있는 걸까?

나는 책표지를 쓸던 것을 멈추고선 책장을 넘기려고 했다. 입안은 바싹 말라 있었다.

낯선 인기척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더 놀랄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별안간 깜짝 놀란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인기척의


정체는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반한 누군가였다.

처음에 보인 것은 검은빛의 구두, 검은 바지, 흰 셔츠, 손에 들고 있는 등불, 그리고 등불에


비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탁.

나는 도둑질을 하다 걸린 듯한 기분을 느끼며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다. 책은 내


발치에 아무렇게나 떨어졌지만, 내겐 그것을 주울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온 그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요한이었다.

“거지, 너…….”

밤의 정적을 가로지르는 요한의 목소리가 매서웠다.

* * *

요한은 오랜만에 세나 꿈을 꾸었다.

꿈에 나온 세나는 요한과 결혼하기 전,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에 소소한 애정 전선이 맴돌던


그때의 세나였다.

세나는 어려서부터 ‘어떤 이유’로 요한의 저택을 자주 오갔었다.

그래서 공작저엔 그녀의 방도 존재했었는데, 그의 꿈속에 나온 장소는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까지 세나가 썼던 그 방이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나온 장면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 중 하나였다.

과거, 세나의 방의 문고리가 고장 난 적이 있었었다. 요한은 사람을 시켜 고장 난 문고리를


얼른 고쳐 주었지만, 무슨 영문인지 그 문고리는 금세 또 고장이 났다.

‘……그러게, 방문 좀 제대로 고치라니까. 잠가 두면 뭐 해. 앞으로 세게 밀면서 문고리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금방 열려 버리는걸.’

꿈속의 세나는 불만기와 웃음기가 반반 섞인 채로 제게 투덜거렸다. 툴툴거림에 삐죽 나온


붉은 입술이 퍽 사랑스럽다.

‘하지만 그 비밀은 나만 알잖아. 그러니까……, 화나도 싸워도 문은 잠그지 마. 세나. 네가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로 속상할 것 같아. 울어 버릴지도 모르겠어.’

요한은 그렇게 대답하며 세나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바보.’

바보라 말하는 세나의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렸다.

“…….”

굳게 감겨 있던 요한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들렸다. 꿈속에서 세나에게 입을 맞추자마자 꿈에서


깬 것이었다. 그는 얼굴을 쓸며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꾼 네 꿈인데…….”

조금만 더 오래 머물러 주지. 세나와 고작 대화 한 번 나눈 채로 끝이 나 버린 꿈이 애달프다.

요한은 억지로 눈을 감고선 잠을 청했다. 다시 잠이 들면, 세나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은 채였다.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오른쪽으로도 뉘어 보고, 왼쪽으로도 뉘어 봤지만


도통 다시 잠들지 못했다. 되레 정신만 더욱 뚜렷해질 뿐이었다.

“휴.”

시간이 꽤나 흐른 뒤에, 요한은 감고 있던 눈꺼풀을 무겁게 들어 올렸다.

그의 머릿속엔 세나의 기억과 거지의 기억이 섞여 이리저리 난잡하게 굴러다녔다. 같은 얼굴,


비슷한 습관을 가진 두 여자.

‘거지가 대답합니다.’

그 해괴한 대답이 불쑥 떠올랐다. 분명 처음엔 세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득 깨닫고 보면


거지를 생각하고 있던 요한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제 머릿속에 있는 기억들을 모두 끄집어내어, 세나에 대한 것과 거지에 대한


것을 정확하게 나누고 싶었다.

요한은 결국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잠은 하나도 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잠들기 위해


술을 마시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작은 등을 하나 챙겨 든 채로 방을 나섰다.

오늘 꿈에 나왔던 세나의 방. 잠도 오지 않는데, 오랜만에 그곳으로 가 볼 참이었다.

그 방은 세나가 죽은 이래로, 지난 4 년간 요한을 제외하곤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방이었다.


방문은 항상 잠긴 채였고 유일한 열쇠는 요한이 늘 들고 다녔다.

물론 문고리가 고장 난 문짝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바꾸려면 진즉 바꿀 수도 있었지만, 요한은 차마 그렇게까지 하지 못했다. 이유를 대자면,


고장 난 문짝 또한 세나와의 추억이 서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손때가 묻은 물건을 처분할 수는 없었다. 설령 그것이 고장이 난 문짝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잠갔음에도 문고리를 힘주어 잡아 오른쪽으로 돌리면 문이 열린다는 사실은 요한과


세나만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구태여 문짝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요한은 생각하던 것을 멈추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앞에는 고장 난 그 문짝이 있었다.

그는 지금 곁에 없는 세나를 떠올리며 문짝을 손끝으로 쓸었다.


당장에라도 그녀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문고리는 안 고쳐도 좋은데 막 열지는 마. 나, 혼자
있을 땐 네가 좋아하는 차림새거든.’ 그렇게 말하며, 유혹의 기운이 가득 서린 윙크를 할 것만
같았다.

하나 지금 요한의 곁을 지키는 건 짙은 어둠뿐이었다.

켜켜이 쌓인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요한은 미간을 가느다랗게 구기며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

이상하다고 느낀 건 그때였다.

문이 잠겨 있지 않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혹 사용인 중 누군가가 제 허락도 없이 이 방에 손을 댄 걸까.

요한은 문고리를 살짝 비틀었다. 문은 끼이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요한은 열린 틈새로 한 발자국 더 걸어갔다.

방 안이 평소와는 다르게 밝았다. 두껍게 쳐져 있던 커튼이 걷혀 있었고, 작은 등불도 보였다.


누군가가 세나의 방에 방문했음이 틀림없다고, 요한은 확신했다.

혼란스러운 요한의 시선이 이윽고 어느 신형 하나에 닿았다.

그 신형의 정체는 세나가 아끼던 책장 앞에 우뚝 서 있는 거지, 아니 리나였다.

“거지, 너…….”

밤의 정적을 가로지르는 요한의 목소리가 매서웠다.

“…….”

솔직히 처음엔 세나인 줄 알았다. 책장 앞에 서 있던 리나는 꿈에서 나왔던 세나의 모습과


똑같았으니까.

허리까지 내려온 매끄러운 금발, 어두운 사위 가운데에서도 빛이 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정말로 세나처럼 보인다.

‘요한 왜 이제야 날 찾았어. 늦었잖아.’ 그녀가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저 여자는


거지 리나일 뿐이다. 죽은 세나일 리가 없다.

요한은 단단히 얼어붙은 채로 한 발자국도 떼지 못했다.

입술 사이로 리나의 이름이 매섭게 흘러나왔지만, 사실 요한의 마음은 그러하지 않았다.

매정함은 무슨. 되레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속삭이고 싶었다. ‘미안. 내가 너를


너무 늦게 찾았지.’ 설령 그녀가 세나와 닮은 리나라고 할지라도.

리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한은 그런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왜 리나가 이 새벽에 이곳에 있는 걸까.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세나의 방이었다. 수많은


방들 중에 이곳으로 온 거지의 저의는 무엇인가. 잠긴 문은 또 어떻게 연 것인가.

이성적인 물음이 머릿속을 그득하게 채웠다. 하지만 요한은 더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요, 요한 씨. 이건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랫입술을 부르르 떨며 변명을 꺼내려는 리나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내 요한은 제 발을 무겁게 떼어 냈다. 그에 따라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등불이 작게 흔들렸다.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까지 리나에게 다가간 요한은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짓이기고만 있었다.

눈이 너무 닮았어. 초록빛인 듯 하늘빛인 듯했던 에메랄드빛의 세나의 눈동자와 리나의


눈동자는 정말로 닮아 있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건 리나임을 아는데. 분명 잘 알고 있는데. 허락도 없이 세나의 방에 들어온


리나를 다그쳐야 함이 옳은데…….

다그치고 싶은 마음은커녕 요한은 희게 질린 리나의 뺨 위에 손을 올리고 싶었다.

부드럽게 뺨을 쓸어 주고 싶다. 흔들리는 두 눈동자 위에 입술을 맞추고 싶다. ‘너, 왜


이렇게 떨어. 떨지 마.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그러곤 그녀를 달래어 주고 싶었다.

요한은 리나에게서 세나의 환영을 봐선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저 얼굴만 닮은


껍데기에 흔들리지 말자고.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좀 이상하다.

세나 꿈을 꾸어서 그런 것인지. 밤이 주는 묘한 분위기에 취한 것인지. 어두운 곳에서 본


리나의 얼굴이 더더욱 세나와 닮아 보여서 그런 것인지.

죽은 세나가 제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너 뭐야.”

“…….”

“넌 뭔데 자꾸 세나인 척을 해.”

토하듯 뱉은 말에는 매서운 기운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투정에 가까운 그의 말 속엔 애달픈


기색만이 가득했다.

요한은 줄곧 두려워했었다. 리나가 세나인 척을 하는 건 아닐까, 하고.


요컨대 그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유모라는 빌미로 리나를 공작저로 데려왔을 때,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란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아니, 요한은 그렇게 되리란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이미 4 년 전에 죽었지만,


세나를 아주 조금도 잊지 못한 그였다.

그럼에도 리나를 저택으로 데려와 제 곁에 둔 건.

“……넌 뭔데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해.”

리나에게서 세나의 모습을 덧대어 보기 위한 저의 추악한 면임을, 요한은 알고 있었다.

리나에게 세나인 척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실상 그녀에게서 세나의 흔적을 찾았던 건,
요한 본인이었다고.

요한은 고개를 떨구었다.

돌연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눈동자엔 뜨겁고 또 뜨거운 기운이 서리며, 그것은 곧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이었다.

한번 흐른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려, 마룻바닥 위로 뚝뚝 떨어졌다. 정신 차려, 요한


랭카스터. 꼴사납게 거지 앞에서 울고 있지 마.

그는 흐르는 눈물을 멈추려 노력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흘러내리는 눈물의 양은 많아졌다.


시야가 부옇게 흐려질 정도였다.

무엇으로 인한 눈물인 걸까.

세나에 대한 그리움에 복받쳐 오른 눈물인 걸까. 리나에게서 세나를 찾은 것은 정작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흘리는 한탄의 눈물인 걸까.

“이봐요. 당신 지금 울어요?”

당혹스러운 기운이 가득한 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춤거리는 리나의 손이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쳐내야 하는데. 내게 닿게 만들지 말아야 하는데. 요한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허공에 뻗어


있던 리나의 손을 잡아챘다. 동시에 그가 들고 있던 등불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나뒹굴었다.

맞잡은 그녀의 손이 따뜻하기만 했다. 살아 있는 자의 따뜻한 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요한은 잡고 있던 리나의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릴없이 앞으로


끌려온 리나는 꼼짝없이 제게 안겼다.
 
그녀에게선 그립고도 익숙한 냄새가 났다.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는데, 어째서 리나에게
세나의 체취마저도 느껴 버린 걸까.

요한은 리나의 등을 꾹 누르며, 그녀를 제 품 안에 완전히 가두었다.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로 얼굴을 파묻자, 그녀가 눈에 띄게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다 할 저항은 일절 없었다. 되레 그녀는 어쭙잖게 그의 등을 쓸어 주었을 뿐이다.


위로의 의미가 담긴 손길이었다.

정말 미친 것 같지만, 요한은 지금 이 순간이 좋았다. 설렜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거짓이


아니리라.

마치 세나가 살아 돌아온 것만 같아서.

리나에겐 차마 털어놓지 못한 진심이었다.

* * *

요한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었다.

주인 없는 방에 왜 함부로 들어왔냐고. 함부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서 왜 멋대로 책장의 책을


뽑았냐고.

하지만 요한은 눈물을 흘렸다.

바늘로 찔러도 눈물 하나 나오지 않을 것처럼 굴었던 주제에 그는 조슈아보다도 더 서럽게


울더라. 우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요한의 모습이
애달팠다.

그가 무슨 이유로 우는지 알 것만 같아서, 마음이 더욱 아렸다. 허락도 없이 불쑥 안은 그를


밀어내지 않은 건,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내 목덜미에 제 얼굴을 파묻은 채로 요한은 한참이나 울었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그의


눈물이 뜨거웠다.

나는 조슈아의 등을 토닥이듯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며, 그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목덜미에 느껴지는 그의 숨결이 너무도 맹렬해서 내 기분이 이상해졌다. 발끝이 절로


오므려지는 이상야릇한 소름이 느껴짐과 동시에 내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심장아, 네가 지금 나댈 상황이 아닌데. 지금 이 남자는 나를 다른 여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내 등을 헤매는 그의 손은 세나를 그리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내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이나 나를 안고 있었다. 사실 울음은 진즉 그친 것 같았지만, 그는 제 감정을
추스르는 듯 내게서 쉬이 몸을 떼어 내지 못했다.

그사이에도 내 심장은 눈치 없이 제 세기를 더해 가며 뛰었다.

“……다 울었어요?”

나는 요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내게 깊이 파묻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이내 다시 마주한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요한은 제 얼굴을 옆으로 조금 돌려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는 저가 울었다는 사실을 머쓱해 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머쓱해 하지 않게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에계, 폼이란 폼은 혼자 다 잡으면서 엄청 울보였네. 울보 밥맛 요한 씨.”

“그, 그렇게 부르지 마.”

요한은 발끈하며 대답했지만, 그 대답 속엔 모가 난 구석이라곤 전혀 없었다.

나는 그의 옆얼굴 속 빨개진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당신, 도대체 세나라는 여자를 얼마나 사랑했고, 그리워한 거야.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

“…….”

“세나 씨.”

돌아가 있던 그의 고개가 나와 마주한 것은 그때였다.

그는 어색하지 않게 내게 눈을 맞추었다. 그러곤 눈물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그 눈동자로, 그


붉은 입술로 대답했다.

밥맛인 주제에 꽤나 의외인 대답이었다.

제 21 화. 리나라는 이름을 진짜로 몰라요?

“미안.”

그리 말하는 요한의 목소리엔 진심이 그득했다. 그는 정말로 내게 미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과는 다른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네 말대로 세나를 그리워해. 그녀가 보고 싶어.’

그렇지 않고서야 요한이 굳이 내게 사과를 할 필요가 없었다.

“미안하다면, 저를 용서해 주실래요? 여기 세나 씨의 방 맞죠? 멋대로 들어와서 죄송해요.”

“……맞아. 여긴 세나의 방이었어. 그나저나 넌 도대체 여길 어떻게 찾아서 온 거지? 문도 분명


잠겨 있었을 텐데.”

“으음. 그냥 밤에 잠이 안 와서 복도를 걷다가 아주 우연히 여기로 온 거예요. 잠긴 문을 연


것도 우연이었고요. 문고리가 고장 나 있더라고요. 하하.”

나는 거짓말을 슬쩍 하며 요한의 눈치를 봤다. 그에게 꿈 애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런 희한한


꿈을 어떻게 설명해. 난 안 해. 아니, 못해.

요한은 내 말의 진위 여부를 가늠하듯이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긴 한숨을


내뱉으며 뒤로 한 발자국 걸어갔다.

“나와.”

그가 내 말을 믿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대로 넘어가 주려는 듯싶었다.


요한은 앞서갔고, 나는 그를 뒤따르려 했다.

그것이 내 발치에 걸린 것은 그때였다.

나는 시선을 내려 내 발에 걸린 것을 바라보았다. 붉은 표지의 그 책. 아까 내가 떨어뜨렸던


그 책이었다. 요한의 눈물 때문에 잠깐 동안 잊고 있었는데.

“뭐 해? 따라 나오지 않고.”

그새 문 앞까지 걸어간 요한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나는 발치에 있던 책을 집어 들어 다시금


책장에 꽂아 넣었다.

요한의 끈덕진 시선이 내게 붙어 있는데, 그 책을 보란 듯이 들고 나갈 수는 없었다. 안에


쓰인 것을 봐야 하는데.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로 요한을 따라 방을 나왔다. 요한은 열쇠로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선 내게 경고했다.

“다신 함부로 들어가지 마. 오늘은 이렇게 넘어가지만, 다음엔 그냥 안 넘어가.”

“……네.”

요한은 등을 보이며 먼저 뒤돌아섰다. 돌아가는 그의 등이 쓸쓸해 보였다. 이대로 보내기


싫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그의 나약한 모습을 봤기에 그런 것일까?

“뭐지?”

깨달았을 땐, 나도 모르게 요한의 손목을 잡은 채였다. 요한은 고개만 뒤로 돌려 나를


의문스럽게 응시했다.
나, 왜 요한을 붙잡은 거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입술은 아무렇게나 움직이며 변명을 했다.

“할 말……. 할 말이 있어요.”

그 순간 알아차리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차리고야 만다. 붉게 충혈이 된 그의 눈에 잠깐


이채가 맴돈 걸 본 것이다. 저건 필시 내가 할 말을 매우 궁금해하는 듯한 이채인데.

망할, 내가 할 말이 어디 있어. 나 할 말 없는데……. 쩝.

* * *

나는 내 앞에 앉아 있는 요한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는 허리를 펴고 올곧게 앉은 채, 삐딱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 있다면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는 얼굴이었다.

네네, 미인 거지가 지금 당신에게 할 말을 빠르게 생각해 내고 있습니다만.

요한은 할 말이 있다던 내 말에 토씨 하나 달지 않으며 주인 쫓는 강아지처럼 내 방까지 졸졸


따라왔었다. 순종적인 그의 태도가 퍽 위화감이 들더라.

더불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보채지 않는 그의 모습도 위화감이 든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제가 지금 뜸을 들이는 건, 절대로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나는 뜨끔한 듯이 말했다. 요한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으니까 어서 얘기해 봐. 거지 너를 위해 내가 이렇게나 시간을 내줬잖아.”

얼레. 왜 이렇게 유해? 평소 같았으면, ‘소름 끼치는 침묵이군.’라든지, ‘얼른 얘기해. 내가


지금 얼마나 더 기다려야겠어?’라든지의 말을 꺼냈을 텐데.

그가 유해진 까닭은 그가 흘렸던 눈물 탓이었을까. 세나를 떠올리며 약해진 마음 탓이었을까.

“이러다간 조만간 동이 틀지도 몰라. 내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겠어? 느려 터져서는.”

쯧쯧. 요한은 가차 없이 혀를 찼다. 그 모습이 퍽 얄밉기만 했다.

그래, 이래야 밥맛이지. 그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본색을 드러냈다. 어쩐지 그답지 않게


너무 착하게 얘기한다고 했다.

나는 어렵사리 입술을 떼어 냈다.


“그……, 당신에 대해 궁금하다랄까.”

역시나 인물 간 탐색의 기본은 호구조사다.

요한에 대한 것은 얼추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알게 된다면, 무언가를


알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뱉은 말이었다. 이를테면 잃어버린 내 기억에 대한 단서를.

그 기억에 대해 파헤치는 건 여전히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잘 모르겠다.

드문드문 떠올랐던 기억들과 이상한 꿈들은, 나를 너무도 궁금하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잊고 있는지.

“이 새벽에 그것도 갑자기 나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고?”

요한은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저도 왜 갑자기 이 새벽에 당신에 대해 알고 싶어졌는지 궁금해요.”

“……? 거지, 그건 도대체 무슨 말이지?”

“미인 거지의 헛소리입니다.”

“…….”

“하여튼 얼른 말해 줘 봐요. 당신이 지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저도 알고 있어요. 뭐,


최연소로 공작이 되었다든지, 공이 많았다든지……. 제가 지금 알고 싶은 것은 당신의
과거예요.”

요한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석연치 않다는 기운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래서 요한이 좋아할 법한 그리고 그의 의심을 단번에 날려 버릴 법한 말을 건네었다.

“과, 과거에도 당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궁금해서요! 하하하.”

과연.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는지 요한은 픽 웃으며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하긴 내가 과거에도 대단하긴 했지. 거지 네가 궁금해할 만해.”

당신, 그래서 평소에 사기는 안 당해요? 사기당하기 딱 좋은 성격인데. 단순해도 이렇게


단순할 수가 없어.

나는 생각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며 그를 따라 피식 미소 지었다. 조소인 거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잘 됐는지는 미지수였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거리는 요한에게선, 방금 전까지 그를 뒤덮었던 눈물의


기운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이 약간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하면 좋을까. 놀랄 만한 일이 워낙 많아서 말이지.”


“네, 네.”

나는 성의 없이 대답했다. 요한은 과거를 상기하듯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술을 열었다. 의미심장한 표정은 덤이었다.

“다섯 살 때부터 나는 피아노를 쳤어, 영재였지.”

“어머나.”

“베토벤부터 모차르트, 바흐, 쇼팽. 내 선배였지.”

“세상에나.”

“하지만 난 그걸 접고선, 공작위를 물려받았어. 열넷이었지.”

“우와, 대단해!”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조슈아에게 하듯이 과한 추임새를 넣었다. 습관은 아주


무서운 것임이 분명했다.

요한은 과한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처럼 푸스스 웃었다. 정말로 진심으로 좋아서
웃는 미소였다. 그 미소가 조슈아의 미소와도 닮아 보였다. 아이 같은. 상념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평온한 미소.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 난다던데…….”

나는 나도 모르게 나온 진심을 무마하려 그를 따라 푸스스 웃었다. 요한은 내 말을 분명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꾸짖지 않았다. 되레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 그의 눈이 부드럽게만 보인다. 그러다 나는 무언가가 이상함을


느낀다. 밥맛이 나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다니? 맙소사.

나는 눈가를 벅벅 문지르며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따사로워 보였던 그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이상한 일이네.

요한의 얼굴을 보던 내 시선은,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던 그의 손가락에게도 닿았다.

희고 긴 그의 손. 항상 따뜻하기만 했던 그의 손. 남자치고는 손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피아노를 쳤었구나. 나는 요한의 방에서 보았던 검정색의 피아노를 떠올렸다.

시야가 흐려진 건 그때였다.

영문 없이 흐려진 시야 사이로 요한의 모습이 점점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기에 이른다. 암전. 내 눈앞이 완전히 까맣게 물들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당황한 채로 눈을 재빨리 감았다 떴다. 다행히도 시야는 다시 밝아졌지만, 요한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요한의 모습 대신에 보인 것은 검정색의 커다란 피아노였다. 낯선 피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요한의 방에서 보았던 피아노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

피아노 앞에는 검은 머리칼의 남자 꼬맹이가 앉아 있었다. 나이는 조슈아 정도쯤이 될까.

아이는 조막만 한 손으로 피아노의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번갈아 쳤다. 그 손동작이 어찌나
유연하던지,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다.

아이는 잔잔하고도 애상적인 기운이 가득한 곡 연주를 끝내고선 건반에서 손을 떼어 냈다.

연주가 끝나자, 피아노의 건반에만 닿아 있던 아이의 시선이 들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아이의 얼굴이 완전히 보였다.

하얀 피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 흰 피부에 도드라지는 붉은 입술.

‘내 연주가 어때?’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아이의 목소리는.

피아노와 남자아이의 모습은 연기처럼 증발해 버리며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돌아온 시야 사이로 처음 보인 것은 놀랍게도 요한이었다. 이번엔 성인인, 현재의 요한의 얼굴.

그런데 이상한 점은 요한의 얼굴이 너무도 가깝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내 몸은 요한의 품에


완전히 기댄 채였다.

올려다본 그의 얼굴엔 걱정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그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팔뚝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이 지나치게 다정했다.

분명 맞은편에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가까워져 있는 거지? 또 헛것이 보이는 건가.

나는 손을 뻗었다. 내 손은 금세 요한의 뺨에 닿았다. 뺨과 마주한 손바닥으로 전해진 요한의


체온은 뜨거웠다.

아, 헛것이 아니구나.

“……요한.”

피아노를 치던 그 아이는 요한이었어.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던 영재, 요한. 베토벤부터 모차르트, 바흐, 쇼팽이 선배였던,


요한.
 

“이봐, 괜찮아? 넌 어째서 정신을 자주 잃는 거지?”

요한은 내 팔뚝을 쓸던 손길과 비등한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와 가까운 사이가 된 듯한


착각이 드는 다정함이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잠깐 어지러워서 그런 것뿐이니까.”

“누, 누가 네 걱정을 했다고.”

그는 누가 봐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아닌 척을 했다. 나는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물고 늘어진다고 해서 쉬이 인정할 남자가 아니라는 거, 나는 이미 수어 번 체감한 터였다.


그렇기에 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저희는 왜 이렇게 붙어 있어요?”

아마도 요한이 부끄러워할 만한 그런 질문.

요한은 얼굴을 확 붉히며 내 팔에 머물던 제 손을 거둬들였다. 그럼에도 제 뺨에 닿은 내 손은


쳐내지 않았다. 더해, 제게 완전히 기댄 내 몸 또한 내팽개치지 않았다.

“그거야! 네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휘청거렸으니까.”

“아.”

“흑심이 있어서 그런 건 절대로 아니야. 내가 또 얼마나 신사적인 남자인데. 휘청거리는


사람을 앞에 두고, 팔짱만 끼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게 설령 ……거지 너라고 해도.”

하여튼 조잘조잘 변명하기는. 그렇게 변명하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위한다는 그런 착각은


하지 않을 텐데. 왜 그렇게 귀엽게 앙앙거리는 거야.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뺨을 작게 쓸었다. 내 엄지가 졸지에 그의 입술 어귀에 닿은 건 사고처럼


벌어진 일이었다.

“…….”

그저 바라만 보았을 때도 참으로 매끄러워 보이는 입술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닿은 그


입술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부드러운 촉감을 가지고 있었다.

입술을 맞대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할 정도로.

요한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지만, 역시나 내 손을 쳐내지 않았다.


나는 그의 붉은 입술을 보며 조금 전 환영처럼 보았던 어린 요한의 붉은 입술을 떠올렸다. 그
아이는 내게 물었다. ‘내 연주가 어때?’

그건 네가 늘 치던 녹턴이었고 네가 그 곡을 자주 친 이유는, 내가 그 곡을 좋아했기 때문이야.


음악이라곤 질색하던 내가 유일하게 즐겨 듣던 곡이었거든.

나는 그의 사정을 줄줄이 기억해 냈다. 나를 위해 쳤던 너의 그 녹턴.

“녹턴. 지금도 잘 쳐요?”

“……!”

요한은 얼이 빠진 얼굴을 했다. 마치 녹턴이라는 곡에 서린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당신, 정말로 녹턴을 잘 쳤었어요?”

“…….”

그는 침묵했다. 거듭된 내 질문이 그를 당황시킨 게 분명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요한 씨.”

요한은 리나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입에 잘 붙지 않는 이름이라고 투덜거렸었다. 그때의


요한은 그 이름을 처음 듣는 것처럼 굴었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세나가 잠결에 몇 차례 불렀다던 리나라는 이름을 정말로


모르는지.

유보 없이 흐른 시간 속에서 그도 무언가를 잊고 지냈던 게 아닌지.

“당신은 리나라는 이름을 진짜로 몰라요?”

요한은 ‘리나, 리나…….’라는 혼잣말을 했다. 그는 그 이름에 서린 무언가를 떠올리려


노력하는 것만 같았다.

‘아니.’라든지 ‘몰라.’라든지의 대답을 곧바로 꺼내 놓지 않은 건, 그도 리나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는 전제가 되는 게 아닐까.

나는 숨을 골랐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고 느껴진 건 그 순간이었다.

내 얼굴 위로 기울어진 요한의 얼굴엔 표정다운 표정은 없었다. 평소 제 감정을 잘 갈무리하지


못하는 그라고 여기기엔, 너무도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리나.”

요한은 내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본 채로 별안간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그것은 분명 내 이름이었지만, 묘하게도 낯설게 느껴졌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요한이 나를 리나라고 부른 게 낯설었다는 거다.

그건 내가 그에게 줄곧 거지라고 불렸기에 그런 것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과거엔 요한에게


다른 이름으로 불렸어서 그런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내 심장은 또다시 가쁘게 뛰기 시작하며 그에게 반응했다. 매일같이 거지라 불리다가


갑작스럽게 이름으로 불리니 설레기라도 하는 건지.

“내가 대답해 주면 넌 뭘 해 줄 건데?”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제 얼굴을 몰래 매만지던 내 손을 치워 냈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러곤 앉아 있던 몸까지 일으키며 앉음에 구겨졌던 셔츠 자락을 몇 차례 털어 냈다.

나는 기울어져 있었던 상체를 바짝 세우며 그를 바라보았다.

“미인 거지 양이 도대체 뭘 염두에 두고서 내게 그런 질문을 한지는 모르겠지만.”

“…….”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떠올랐어. 하지만 난 지금 무지 잠이 와.”

요한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길게 하품했다. 일단은 방으로 돌아가야겠어. 하품에 섞인 말을


내뱉은 요한은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로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 잠깐만요! 대답은 해 주고 주무시러 가세요. 그래도 되잖아요.”

“그건 명령인가?”

“아니요. 미인 거지가 부탁을 합니다.”

요한은 방문을 완전히 열어젖혀, 문지방에 선 채로 나를 삐딱하게 내려다보았다.

“부탁이라면 조금 더 애절하게 말했어야지.”

그는 팔짱을 낀 채로 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내가 애절한 부탁을 하길 기다리는


모습에 가까워 보였다.

“애절하게 어떻게요?”

“‘멋있는 요한 님. 저는 당신의 대답을 간절하게 원합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대답해


줄게.”

왠지 모르게 기시감이 드는 상황이다. 얼마 못 가 나는 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럼 리나라고 불러 보세요. 예쁜 리나 양. 저는 지금 목이 너무 마릅니다. 이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차를 드릴게요.’
샌드위치를 와구와구 먹던 요한을 놀렸던 그 일. 요한이 똑같이 복수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대답했다.

“멋……있는 요한 님……. 저는 당신의 대답을 간절하게 원합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의 대답을 들어야겠다. 그가 무엇을 마음에 걸려 했는지 알아야겠다. 나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요한은 피식 웃으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제 22 화. 한 번만 나를 제대로 봐 주면 안 돼?

“녹턴. 지금은 치지 않아.”

“네? 제가 물은 건 그게 아니었는데요?”

내가 물은 건, 당신도 리나라는 이름을 알고 있느냐는 거였다고!

요한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아니. 넌 내가 녹턴을 아직도 잘 치냐고도 물었었어.”

“…….”

“어떤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해 달라고는 네가 정해 주지 않았잖아.”

“망할.”

“뭐라고?”

나는 가식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망할이라는 말을 들으셨다면, 아주 잘못 들은 거예요.”

젠장, 빌어먹을, 제기랄! 요한이 저런 식으로 능구렁이처럼 내 물음에서 피해 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바다.

“그런가.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아주 똑 부러지게 망할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착각이죠, 착각.”

“뭐, 네가 정 그렇다면, 내가 잘못 들은 걸로 치지.”

“……네, 네.”
나는 조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며 헛웃음을 지었다.

내 물음이 진정 의미하는 바를 요한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 그럼에도 그는 다른


물음에 대한 답을 내어놓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의 회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궁금했다.

요한은 제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덧대어서 말했다.

“그리고 녹턴.”

“…….”

“들려줄 사람이 없어서. 그래서 안 쳐.”

그는 유언 같은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며 방에서 완전히 나갔다. 돌아가던 그의 옆얼굴이 조금


슬픈 빛을 띠었던 것도 같다. 그 연주곡에 서린 요한의 추억은 슬프고도 아련한 것이었던 걸까.

나는 요한이 닫고 나간 방문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머릿속엔 요한이 했던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미인 거지 양이 도대체 뭘 염두에 두고서 내게 그런 질문을 한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떠올랐어.’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 라.”

내가 궁금했던 건 그거였는데.

요한 또한 세나가 잠결에 종종 내뱉었다던 ‘리나’라는 이름을 들었던 걸까. 확실한 사실은


요한은 리나에 대한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머리를 테이블 위에 박고선 작게 신음했다.

“완전 치사해……. 알려 줄 거면 그냥 알려 주는 거지. 지가 밥맛이면 다야? 으, 완전


궁금해.”

나는 요한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그의 생각을 낱낱이 알아내고 싶었다.

그사이 날은 완전히 밝아 있었다.

* * *

아주 늦잠을 잤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땐, 오후 12 시가 넘어 있었다.


동이 트는 걸 보고 잠이 들었으니 이 시간에 일어나는 게 당연한 듯도 싶다. 나는 상체를
부스스 일으키며, 버릇처럼 고물고물한 생명체 하나를 찾았다.

아침마다 나를 항상 찾아오던 조슈아였다. 하지만 조슈아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참, 12 시라면 조슈아가 가정교사에게 수업을 받을 시간인데. 아무래도 수업을 들으러 갔나


보다. 아쉬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새 나라의 어린이인 조슈아는 꼬맹이 주제에 일어나는 시간이 정확했고, 아이는 아침에
깨자마자 대개 내 방으로 왔었다.

오늘 아침에도 그렇게 했음이 자명했지만, 잠든 나를 깨우지 않은 건 아이의 배려인 듯싶었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행동만 해. 만나면 그 사랑스러운 볼따구니에 한껏 입을 맞출 테다.

나는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대충 세수를 했다. 씻고 나왔을 때, 욕실 근처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홈드레스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젯밤에 입고 있었던 드레스였다.

“…….”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드레스 위에 코끝을 가져다 대자 거기선


요한의 냄새가 났다. 왠지 모르게 가슴을 설레게 하는 그의 냄새.

어젯밤 너무도 진하게 안고 있었던 탓에 그의 냄새가 드레스에 밴 듯했다.

그는 잘 잤을까? 지금은 깼겠지? 보고 싶…….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내 뺨을 찰싹 때렸다. 정신 차려.

요한은 밥맛이기는 하나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잘생겼고, 밥도 삼시 세끼 잘 챙겨 주고,


드레스도 사 주고, 그랬지만.

“그는 세나만을 사랑하잖아.”

지난 일 년간 갖은 애정 공세를 펼치던 바비에게는 단 한 번도 설레지 않더니, 나는 어째서


내게서 매일같이 세나를 찾는 요한에게 설레는 걸까. 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리며 누군가가 헐레벌떡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방문을 꾹 닫은 남자는 내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미소가 싱그럽기만 했다.

“안녕!”

“안녕!……이 아니라, 바비,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정원에서 보았던 바비. 나는 그날 일을 잠깐 떠올렸다. 그는 그때 돌아가지 않고선 내내


공작저에 머물렀던 걸까?

바비는 문에 등을 기댄 채로 대답했다.
“어쩐 일이긴. 너 보러 왔지. 네가 너랑 얘기하고 싶으면 그냥 오라며. 그래서 그냥 왔어. 음,
다리를 부러뜨려서 와야 했을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직 팔도 멀쩡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응. 맞아. 나 안 멀쩡해.”

바비는 깁스를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더욱 해맑게 웃었다. 그에게 있어 부러진 팔은


상처라기보다는 훈장처럼 보였다. 여하튼 이상한 녀석.

그는 딸깍, 소리가 나게 문을 잠그고선 내 눈치를 슬쩍 봤다.

“문 잠가도 돼? 혹시나 요한이 올까 봐.”

“이미 잠근 주제에 뒤늦게 동의를 구하는 건 무슨 태도지?”

“설렁설렁 넘어가 주라. 리나.”

바비는 보조개가 예쁘게 파이는 미소를 지으며, 욕실 근처에서 드레스 냄새를 맡던 내게


가까이 걸어왔다.

나는 요한의 냄새가 밴 드레스를 내려놓으며 바비를 의문스럽게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본 바비의 얼굴이 그 전날 보았던 것보다도 훨씬 더 해쓱해 보였다. 그래도 정말


잘생기긴 했다. 잘생긴 얼굴이 해쓱해지니 왠지 모르게 사연이 있는 얼굴처럼 보인다랄까.

난 왜 잘생긴 이 녀석을 끝내 좋아하지 않은 걸까. 의문은 이어지고 있었다.

“바비 너, 설마 문 잠그고 이상한 짓 하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몸을 움츠리며 한껏 경계했다. 바비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원래도 이상했던


놈이 요즘 따라 더 이상해져서 약간 걱정이 돼서.

“안 해. 이상한 짓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진작 했을 거야.”

바비는 내 말이 우습다는 듯이 푸스스 웃으며, 내 머리칼을 한껏 흐트러뜨렸다. 푸스스 웃는


모습이 요한과 좀 닮아 보이기도 했다. 이복형제라던 두 사람.

나는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비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눈에 비친 것은 분명


바비였지만, 나는 거기서 요한을 떠올리고 있었다.

“……너. 방금 위험한 말 한 거 알지?”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단언하건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남자일걸? 나 빼고 세상 남자들은 모두 늑대야.”

“너도 남자인데, 왜 너만 안전해?”


“비밀.”

“내가 봤을 땐 네가 제일 위험해.”

바비는 기분 나빠 하는 기색 하나 없이 무방비하게 놓인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는 소파 위에


나를 앉히고선, 저도 내 옆에 꼭 붙어 앉았다.

바비는 깁스를 하지 않은 나머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그것은 작은 박스에 정성껏


포장된 수제 마카롱이었다.

“자, 네가 좋아하는 마카롱. 이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남자가 주는 마카롱인가?”

바비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킥킥거렸다. 나는 그것을 슬쩍 받았다. 색이 아주 예쁜 마카롱을


보고 있자니 절로 입안에 침이 고인다.

아아, 바비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이런 걸 사 오면 계속 까칠하게


굴 수 없잖아.

“날 속인 너를 아직 용서한 거 아니야.”

“네, 네.”

“하지만 사람은 미워하되 음식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잖아.”

“그럼, 그럼.”

“나는 그런 의미에서 네가 준 마카롱을 받은 거야.”

나는 마카롱을 입속에 하나 집어넣었다. 쫄깃한 겉면과 부드러운 내용물이 입안 가득히


느껴졌다. 너무 너무 맛있잖아.

“맙소사. 맛있어.”

“응. 나도 좋아해.”

“컥컥! 야, 넌 무슨 그런 말을…….”

나는 갑작스러운 고백에 캑캑거리며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토록 맛있었던 마카롱이 모래알처럼


느껴졌다.

몇 번이고 들었던 바비의 고백이었지만, 나는 새삼 그 고백에 반응을 하고 있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고백이었다.

“네가 짜증 내고 날 싫어하고 미워해도, 나는 너를 좋아해.”

바비는 나와 조용히 눈을 맞추었다. 그의 목소리가 진중해져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너를 좋아하는 일밖에 없으니까.”

 
 
나는 들고 있던 마카롱을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답했다.

“……세나와 나는 다른 사람이야.”

“알아. 세나는 내 첫사랑, 리나는 내 마지막 사랑. 뭐가 문제야? 너야말로 내가 세나를


좋아했기 때문에 너를 좋아하는 거라고 믿고 싶은 거 아냐?”

“…….”

“그래야 내 마음 거절하는 네 마음이 편할 테니까.”

언제 슬그머니 움직인 것인지 언제부터인가 바비의 손끝이 내 손끝에 닿아 있었다. 손끝으로


스민 그의 온기가 저릿했다. 나는 손을 뗄 수 없었다.

‘너야말로 내가 세나를 좋아했기 때문에 너를 좋아하는 거라고 믿고 싶은 거 아냐? 그래야 내


마음 거절하는 네 마음이 편할 테니까.’

 
어쩌면 바비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의 마음을 거절하는 데에 그것만큼 확실한 이유는
없을 테니까.

허를 찌르는 바비의 물음이 이어졌다.

“리나. 요한에게 설렜어?”

……설렜어. 그가 내 품에 안겨 울 때, 난 설렜어.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줄


알면서도 나는 설렜어.

그건 정말 바보 같은 일이었어.

나는 침묵했다.

“미간에 주름 생겼다.”

바비는 깁스를 한 손을 뻗어, 손끝으로 구겨진 내 미간 부근을 눌렀다.

“고민을 한다는 건, 그렇다는 거구나.”

그는 맞닿아 있었던 내 손을 완전히 그러잡으며, 맞잡은 손을 제 입가까지 올렸다. 그는


경건한 종교 의식을 하듯이 내 손등 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내리깐 그의 눈꺼풀 위, 색이 옅은 푸른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요한의 마음을 믿지 마.”


그는 눈을 감고선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가 하는 말을 믿지 마.”

“……바비.”

“넌 나만 믿어.”

다시 눈을 뜬 바비는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엔 내


모습이 오롯이 비치고 있었다. 오로지 나만을 보던, 나만을 쫓던 바비의 그 눈빛.

“리나. 난 너를 너로만 보는 유일한 사람이야.”

“…….”

“확신해.”

그는 확고한 빛이 가득한 눈으로 간절하게 말했다. 그 눈빛은 뭐랄까. 어떠한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난…….”

나는 말을 이어 할 수 없었다. 다른 이의 방문을 알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똑똑. 찰칵. 찰칵. 잠긴 문고리가 매끄럽게 돌아가지 못하는 소리 또한 들려왔다. 동시에 방


밖에선 명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엄마! 조슈아야! 문은 왜 잠겨 있는 거야?”

……그건 네 삼촌이 벌인 일이란다. 나는 억울해. 나는 바비를 보았다. 바비는 난감해진 얼굴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참. 요한을 피하려고 했더니 다른 귀여운 방해꾼이 왔네.”

그는 작은 목소리로 푸념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자연스레 조슈아에게 잠긴 문을 열어 주려고 했다. 하지만 바비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나를 강제로 앉혔다.

바비에겐 잡고 있는 손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쉿. 없는 척하자.”

그는 유혹하듯이 말했다. 나는 매몰차게 대답했다.

“안 돼. 조슈아가 울 거야.”

나는 조슈아가 울길 바라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나를 찾아와, 침을 흘리고 자던 내 모습을


그저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을 사랑스러운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길 원치 않는다.
그건 조슈아의 삼촌인 바비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조슈아는 뭇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랑스러운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바비는 의외의 대답을 꺼내 놓았다.

“좀 울면 안 돼?”

“바비. 넌 아이의 삼촌이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하니?”

“나도 물론 조슈아를 사랑해. 하지만 너를 더 사랑하는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을


조슈아가 방해하려고 하는데,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해?”

“…….”

“너랑 얘기한 지 고작 십 분밖에 안 됐어. 십 분 얘기하고자 너를 찾아온 게 아니란 말이야.”

바비는 나약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가늠할 수 없었다.

그사이에도 방 밖에선 ‘엄마! 엄마!’라고 소리치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쿵쿵거리는 소리와 엄마라는 소리가 뒤섞여서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바비가 조금 안쓰럽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렇지만……. 조슈아에게 방문을 열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저울질할 수 없었던 마음이 조슈아에게로 기울었다.

내가 또다시 앉아 있던 엉덩이를 떼어 냈을 때, 바비는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강인한


악력이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나를 제대로 봐 주면 안 돼?”

뜨거운 숨결이 밴 말을 토해 낸 바비의 푸른 눈동자가 불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가에서


투명한 눈물이 쏟아질 때까지는 단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바비는 후드득 눈물을 쏟아 내며 애원했다.

“내가 더 울고 싶어. 넌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이 나를 외면하기만 해?”

“야, 너 왜 울어.”

나는 완전히 일어나지도, 그렇다고 해서 앉지도 못한 채로 그를 빤히 응시했다.

바비는 깁스를 한 팔로 제 얼굴을 힘들게 쓸며 몸을 웅크렸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와 꾹 다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끅끅거리는 소리가 내 발걸음을 잡았다.

“가지 마.”

“…….”

“부탁할게.”

나는 바비에게 잡히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나,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아.

눈물에 섞인 바비의 진심이 너무도 마음을 저리게 만들었다. 일 년간 고백했던 바비의 진심을
의심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나는 그의 진심을 진하게 느끼고 있었다.

나를 좋아하는 네 마음이 진심 같아. 나도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을까?

줄곧 바비의 마음을 받아 주지도 않을뿐더러, 심지어 나는 그의 진심을 의심하기도 했었는데…


….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마음이 조금 흔들렸냐고 묻는다면, 그러했다.

나는 어깨가 가라앉을 정도의 기다란 한숨을 내뱉은 후, 그를 달래듯이 어깨를 몇 차례


토닥거려 주었다.

“알겠어. 너랑 더 얘기해 줄게.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정말?”

그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물기에 가득 젖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곧 죽기라도 할 듯이 시들해졌던 그의 얼굴이 긍정적인 내 대답으로 인해 곧장 활짝 폈다.


단순해도 이렇게 단순할 수가.

이복형제인 바비와 요한. 두 사람, 단순하다는 점이 꼭 닮아 있었다.

“응. 하지만 조슈아를 계속해서 저렇게 둘 수는 없어. 조슈아는 내가 잘 타일러서 보낼 테니까,


기다려 줘. 그 정돈 할 수 있지?”

바비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을 바꿀까 봐, 전전긍긍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여러모로 곤란함을 느끼며 그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바비는 그제야 내 손을 놓아주며 내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이윽고 방문까지 걸어간 나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초 전부터 방 밖이 묘하게


조용해진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잠긴 문을 열어젖히고선 복도를 살폈을 땐,

“……어라. 어디 갔지.”

문이 부서지라 두드리던 조슈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거지. 고집이 센 조슈아가 쉽게 포기할 것 같진 않은데.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잠긴 문과 대답 없는 나를 걱정한


조슈아가 요한을 찾아간다.

‘아빠! 엄마가 또 사라졌어.’


아이는 그렇게 말하며 아빠를 데리고 온다……, 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내 옆방이었던 요한의 방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조슈아를 한 손으로 번쩍 든 채로 방을 나오고 있었다. 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은


덤이었다.

일그러진 그의 시선이 내게 닿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제 23 화. 가지 마. 나랑 있어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요한이 웃는 얼굴에도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정색하는 거지보다는


웃는 거지가 나을 것 같아서였다.

“좋은 오후!”

나는 오른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고,

“좋은 오후, ……는 무슨. 조쉬, 봐. 아무 일도 없잖니.”

요한은 들고 있던 조슈아를 내려 주며, 아이를 달래었다.

조슈아는 울먹이는 얼굴로 웅얼거리더니 이내 내게 쪼르륵 뛰어왔다. 내 다리에 꼭 매달린


조슈아는 나를 연신 책망했다.

“엄마. 안에 있었으면서 왜 조슈아를 모른 척했어? 내가 얼마나 문을 많이 두드렸는데.”

아이는 솜방망이 같은 손으로 내 드레스 어귀를 팡팡 두들겼다.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 줄 알면서도, 나는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작은


주먹을 그렇게 귀엽게 내리치면 얼마나 무섭게요. 오구오구.

“조슈아. 미안해.”

나는 조슈아에게 사과하면서도, 한편으론 방에 남아 있는 바비가 걱정되었다. 요한까지 복도로


나와 버린 이때, 요한과 바비까지 마주쳐 버릴까 봐.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지금 만난다면 이번에도 필시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낼 게 자명했다.

아무래도 두 남자는 만나지 않게 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조슈아가 엄마한테 잘못해서 그런 거지? 조슈아가 엄마한테 미움 받을 만한 짓을 해서 엄마가
그런 거지? 앞으론 내가 더 잘할게. 조슈아가 노력할게. 엄마, 나 미워하지 마. 응?”

내가 문을 열어 주지 않은 사실에 대해, 조슈아는 자신의 잘못이라 여기며 이번엔 스스로를


책망하기에 이른다.

“조슈아, 절대로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단지…….”

나는 쉬이 말을 끝내지 못하며 얼버무렸다. 요한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떤 변명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차마 잇지 못했던 대답은 내 등 뒤에서 이어졌다.

“조슈아. 리나는 나와 얘기 중이었어. 그래서 네게 방문을 열어 주지 못했던 거야.”

바비였다.

“……!”

어째서 나와 버린 거야.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바비를 응시했다.

바비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한쪽 눈을 작게 찡긋거렸다. ‘알아서 할게.’ 그는


소리 없이 입술만 조금 움직여 메시지를 전했다.

바비는 내 옆까지 다가와, 조슈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비밀 얘기 중이었거든.”

“바비 삼촌…….”

바비는 조슈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착한 조카인 조슈아가 자리를 비켜 주지 않을래? 리나와 나는 얘기를 끝내지 못했어.”

그리 말하는 바비의 입가는 유연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가는 여전히 울음기가
가득했다.

조슈아는 바비와 나를 몇 번 번갈아 쳐다보더니, 뜬금없이 도끼눈을 했다.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매서운 눈빛이었다. 웬 도끼눈일까.

“삼촌! 지금 우리 엄마랑 설마 불……, 불…….”

조슈아는 ‘불’로 시작하는 어떤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지 불이라는 말만 연거푸 반복했다.


놀란 건 나였다.

“……!”

설마 조슈아가 ‘불륜’이라는 단어를 내뱉을까 싶어서였다. 그건 정말 다섯 살 꼬맹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잖아!

나는 벙찐 채로 아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불……! 불장난하는 거야?”

불륜까진 아니었지만, 불장난이란 단어가 가지고 오는 파장은 꽤 컸다. 나는 놀라 벌어진 입을


미처 다물지 못한 채로 조슈아의 이름을 불렀다.

“조, 조슈아.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욘두 선생님이 위험한 짓 하는 걸 불장난이라고 했어!”

조슈아는 나와 바비가 함께 있었던 일을 ‘위험한 짓’이라고 추정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괜스레 이마 위가 홧홧해지는 기분이었다. 나와 바비가 함께 있었던 일은 불장난 따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나저나 불장난이라는 단어를 가르쳐준 이도 욘두라니.

“또, 또 욘두 선생이 그런 걸 가르쳤다니.”

도대체 그 선생은 아이에게 이상한 걸 얼마나 많이 가르친 거야.

나는 황당함 반 당황스러움 반을 느끼며, 복도에 선 채로 우리를 관망하던 요한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 순간만큼은 바비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서 내뱉은 말이었다.

“요한 씨, 그 선생 잘라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막상 뱉고 나자 아차 싶었다. 요한과 바비가 마주치면 안 되는데.

하지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던 바비는 얌전히 기다리지 못하고선 제 모습을 드러냈고, 요한


또한 바비를 보았다. 수습하기엔 이미 늦은 일일지도 몰랐다.

“하…….”

올려다본 요한의 얼굴엔 표정다운 표정이 없었다. 왠지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불장난.”

그는 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뱉기엔 어색했던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하나 조슈아와는 달리


요한이 뱉는 불장난이란 단어는 퍽 위압감이 있었다.

나는 절로 어깨를 움츠리며 괜스레 조슈아를 꼭 껴안았다.

영문 없이 열심히 일하는 남편을 두고선, 다른 남자를 만난 여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내가 실제로 불장난 따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단 말이다. 요한과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건만.

내가 누굴 만나든, 심지어 누구와 연애를 하든, 그것은 요한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조슈아의 유모로서 이곳에 온 것뿐이니까.
하지만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요한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화가 난 듯 일그러진 얼굴 속,
그의 검은 눈동자는 상처받은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요한이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역시나 내가 세나와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이게 불장난이 아니라면, 뭐가 불장난이라는 거지?”

요한은 메마른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내 품에 안겨 있던 조슈아가 외쳤다.

“조슈아도 아빠 말에 동의해!”

그리고 또다시 외쳤다.

“정말 동의해!”

맙소사.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조슈아의 명백한 동의 때문이기도 했고, 뜻밖인 요한의 동의


때문이기도 했다.

나와 바비의 밀회를 보며 불장난이라고 단언한 요한이라. 내가 당신과 무슨 사이길래? 우리는


계약 관계로 이어진 물주와 거지 사이일 뿐일 텐데.

내가 아는 요한이라면 ‘조쉬! 그런 말은 쓰면 안 돼!’라고 다그쳐야 함이 옳았다.

“요한 씨. 그 대답이 아니잖아요!”

요한은 셔츠의 양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며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그가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 주길 바랐는데, 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쉬, 너는 네 방에 들어가 있어.”

요한은 뒤늦게 말했다. 조슈아를 향한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시선은 내 얼굴에만


끈덕지게 닿아 있었다.

“싫어! 조슈아는 엄마랑 있을 거야!”

“네 엄……마랑은 내가 할 얘기가 있어. 그러니까, 일단은 방으로 들어가.”

삐뚤어진 아이처럼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조슈아가 침묵했다. 아이는 고민하는 얼굴로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조쉬, 착하지. 아빠가 있으니 안심하렴.”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요한은 조슈아를 타이르면서도 강경하게 말했다.

조슈아는 내게서 곧장 떨어지지 못하면서도 이내 제 아버지의 말에 수긍하고야 만다.

“……응. 알겠어. 조슈아는 착한 아들이니까. 아빠 말 들을게.”


“옳지. 착하구나.”

아이는 내 품에서 벗어나기 전, 내 귓가에 대고 고백했다.

“엄마.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진심이 가득한 고백이었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한 고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랑스러운 꼬맹이 조슈아.

아이는 내 볼에 작별을 고하는 입맞춤을 쪽 소리가 나게 하고선 자신의 방까지 도도도 걸어갔다.
물론 나와 불장난을 한 바비를 도끼눈으로 재차 째려보는 일도 잊지 않았다.

나는 멀어지는 조슈아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조슈아, 나도 네가 참 좋아. 네가 진짜 내 아들이었으면 어땠을까?

조슈아가 방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리자, 남겨진 우리 세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조슈아를 안기 위해 쪼그리고 있었던 몸을 일으키며 바비를 흘긋 보았다. 그는 입술을


일자로 다문 채로 제 목덜미를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바비는 요한과 마주하게 된 지금의
상황을 불편해하는 듯했다.

나는 두 사람이 또다시 서로를 헐뜯기 전에, 먼저 말을 꺼내었다.

“이봐요, 요한 씨. 나중에 조슈아에게 제대로 정정해 주세요. 불장난이라뇨! 그건 제가 꼭


일하는 남편을 두고선 다른 남자와 놀아난 것 같잖아요. 불장난 하니까……. 예전에 누가
말했던 게 생각나네요. 언제나 남자 조심하라고. 사랑은 마치 불장난 같아서 다치니까! 저는
그래서 불장난 따위는…….”

불장난 따위는 끔찍하다고 말하려던 차였다. 머리통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말하던 것을 멈추며 이마를 짚었다.

귓가엔 작은 환청이 맴돈 건 그 순간이었다. 그 환청은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던 그 말의


출처에 대한 기억이었다.

‘내 딸.’

‘오늘도 공작저에 다녀왔니?’

‘요한과 바비를 만났니?’

‘싸우면 안 된단다.’

자애로운 여자의 목소리는 아주 그리운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엄마……인 걸까?
여자의 목소리를 떠올리기가 무섭게 머리통을 무겁게 짓누르던 고통도 사그라졌다.

“하.”

옆에 있던 바비가 재빠르게 내 어깨를 감싸 쥐며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나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귓가에 맴돌았던 환청은 사라졌고, 머리통을 갈라놓을 듯


나를 옥죄었던 아픔도 사라졌지만, 나는 혼란스러웠다.

기억을 잃은 내가,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

불장난은 위험한 것이라며 나를 타일렀던 우리 엄마. 공작저에 다녀왔냐고 묻던 엄마. 그리고


요한과 바비를 알던 엄마. 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몸을 잘게 떨었다.

문득 바라본 요한의 손이 허공에 머물러 있는 게 보였다. 내 시선이 닿기가 무섭게 그는 제


손을 재빠르게 갈무리를 하며 팔짱을 꼈다.

마치 그도 내게 손을 뻗으려던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나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요한에게 하던 말을 마저 했다.

“……하여튼 조슈아에게 확실하게 얘기해 주세요. 거지가 부탁합니다.”

나는 조슈아에게 남편의 동생과 불장난을 한 여자로 남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피곤한 몸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너는


조슈아를 외면한 채로 바비와 놀아나고 있었잖아.”

“…….”

묘하게도 틀린 말이 아니라서, 나는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요한의 말은 이어졌다.

“정말 피곤하군. 누가 나를 새벽까지 잡아 뒀는지 몰라.”

요한은 심드렁하게 말하며 바비를 바라보았다.

“아주 긴 밤이었어. 그렇지, 거지?”

물음은 내게 향했으나, 요한은 바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새벽까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바비에게 강조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조슈아를 잠깐 외면한 건 제 잘못이 맞아요. 하지만 울보 밥맛 씨가 피곤하든 말든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저희가 무슨 사이길래.”

“우린…….”
바비에게 닿았단 요한의 시선이 다시금 내게 닿았다. 그는 입술을 뭉그러뜨리며 우리의 관계를
털어놓길 꺼려하고 있었다. 당신, 도대체 뭘 고민하는 거야.

나는 우리의 관계를 확실하게 짚어 주었다.

“저흰 계약 관계로 이어진 물주와 거지죠.”

“…….”

요한은 침묵했다.

그의 얼굴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을 그렇게까지 콕 짚어 줄 필요는 없잖아.’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럼 당신은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되길 바라는 거예요?’

교차한 시선 속, 무언의 메시지들이 오고 간 기분이었다. 나는 여전히 내 어깨를 말아 쥐고


있던 바비에게 말했다.

“바비. 못다 한 얘기를 하러, 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내게 어쭙잖은 질투를 하고 있는 요한과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요한은


우리를 막아 세웠다.

“안 돼. 유모로 취직했으면, 유모로서 일을 제대로 해야지.”

차갑게 얼어붙은 바비의 푸른 눈동자가 그제야 요한에게 향했다. 바비는 굳게 닫고만 있었던
입술을 벌렸다. 그는 제 눈빛보다도 차가운 목소리로 요한에게 한마디를 건네었다.

“요한 랭카스터.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때? 넌 나와 리나가 함께 있는 게 싫은 거잖아.


조슈아 핑계 대지 마. 지금 네 모습 추해.”

“…….”

요한은 화를 낼 성싶었지만, 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무래도 바비가 한 말에 대꾸할 여지가 없나 보다. 바비의 말은 너무도 명백히


사실이었으니까.

“가자, 리나.”

나는 잘 떼어지지 않는 발을 한 발자국 떼어 냈다. 요한이 추한 짓을 한 게 맞았고, 나는


다시금 바비와 얘기를 하러 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 그게 맞는 일임을 안다.

하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왜 이렇게 망설여지는지 모르겠다. 요한의 상처받은 눈빛이, 내게 뻗으려 했지만 차마 닿지
못했던 그 손길이, 자꾸만 내 눈앞에 아른거렸다. 리나, 너 참 미련스럽구나.

그렇지만 나는 뒤돌아섰다. 나를 세나로 여기며 내게 질투를 하는 요한의 손을 들어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내 손목이 누군가에게 부드럽게 잡히며, 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멈춰지게


된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서 나를 붙잡은 이를 확인했다.

“요한 씨.”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한다.

“가지 마.”

 
작은 소리로 내뱉은 그의 말이 언뜻 진심처럼 들렸다.

‘가지 마’ 바비에게도 들었던 말이었건만, 나는 거기서 극명히 다른 느낌을 느꼈다. 요한이


내뱉는 ‘가지 마’라는 말은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이미 추한 남자가 되었으니까. 조금 더 추해져도 상관없겠지.”

나를 보는 요한의 눈동자가 간절했다. 오만한 남자가 자신을 추한 남자라고 인정할 정도라면,


그는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

“어제 네가 물었던 걸 진짜로 대답해 줄게.”

내가 물었던 거라면…….

‘당신은 리나라는 이름을 진짜로 몰라요?’

그 물음을 말하는 걸까? 어제 새벽, 어쩐지 무언가를 아는 티를 내었던 요한이었다.

궁금해. 나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흔들리는 마음 사이로 요한은 다시금 나를 꾀어냈다.

“바비와 함께 있지 마.”

요한은 그 잘생긴 얼굴로 사람의 마음을 흐물흐물하게 만들었다.

“나랑 있어.”
 

제 24 화. 세나의 관

요한은 지난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다음 날을 위해서라면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는 게 나았건만, 그는 소파 위에 앉은 채로 두


눈만 끔뻑거렸을 뿐이었다.

요한의 등 뒤론 여명이 드리우고 있었다.

“소름 끼치도록 긴 밤이군.”

그는 소파 위로 머리를 완전히 기댄 채로 읊조렸다. 눈을 감자, 밤새 있었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세나의 꿈을 꾸고, 세나의 방에서 리나와 만나고, 리나에게 이상한 물음을 듣고……. 그
일들은 꿈보다도 더 꿈같은 일들이었다.

요한은 혼란스러웠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리나의 거듭된 물음들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녹턴. 지금도 잘 쳐요?’

‘당신은 리나라는 이름을 진짜로 몰라요?’

녹턴. 그 곡명을 듣는 것은 퍽 오랜만이었다.

녹턴은 음악이라곤 그다지 즐기지 않았던 세나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곡이었고, 요한은 그런
세나를 위해 항상 녹턴을 연주했었다. 어떻게 얼마나 더 잘 치면 그녀를 기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고민을 했었다.

그가 피아노로 녹턴을 칠 때마다 세나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미소를 지으며 춤을 췄다.

요한은 드레스 사이로 발을 가볍게 내딛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것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하지만 세나가 아프기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치지 않은 곡이었다. 그걸 리나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이야.

요한은 리나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수많은 피아노 연주곡 중에서 녹턴을 대뜸 꺼내 놓은 것도 이상했고, 그 새벽에 갑작스럽게


녹턴이라는 화제를 꺼낸 것도 이상했다.
이상한 걸로 치자면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작저의 수많은 방들 중에서 리나가 세나의 방을 콕 찍어서 들어간 것도 매우 이상했다. 잠겨


있던 세나의 방문을 우연처럼 열었다는 것도 너무도 이상했다.

그 방이 세나의 방이라는 걸 진즉 알고 있었던 리나의 말이 제일 이상했다.

‘미안하다면, 저를 용서해 주실래요? 여기 세나 씨의 방 맞죠? 멋대로 들어와서 죄송해요.’

그땐 경황이 없어서 간과했던 그녀의 말이었다.

두서없었던 리나의 변명에 그냥 넘어가 준 이유는, 요한 또한 그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몰라서였다.

하지만 그 이상한 점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세나’와 연관이 있다는 점이었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세나와 리나. 두 여자 사이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세나가 정말로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걸까?

“……정말 미쳤군, 미쳤어.”

요한은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아연실색했다.

세나는 분명 죽었다.

그녀가 고인의 모습을 하고선 관에 뉘어 흙 속에 파묻히는 걸, 똑똑히 봤었단 말이다. 하지만


석연치 않다. 우연이 거듭되면 더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나가 정말로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걸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리나가 자꾸만 세나로만 보이는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다. 이러다간 그녀에게 입을 맞춰


버릴지도 몰랐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리나가 정말로 세나와 연관된 무엇이라면. 그렇다면 그녀에게 입을


맞추어도 되는 걸까?

고요히 감겨 있던 요한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관을……, 확인해 봐야겠어.”

조금 더 확실히 확인을 해 봐야겠다.

4 년이 지난,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고인이 된 아름다운 세나가 아직까지 고이 잠들어 있는지.


요한은 결심했다. 자신의 비합리적 의심, 즉 리나가 세나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에 종지부를
찍어야겠다고.

만일 세나의 관 속에 따스한 육신을 잃은 풍화된 뼈만이 남아 있다면, 그의 비합리적 의심은


사그라질 것이었다. 적어도 리나와 세나가 동일 인물이 아니라고 확언할 수 있었다.

물론 세나의 뼈를 보는 건 아주 마음이 아프고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들을 모두


감수하고서라도 세나의 관 속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다. 그 반대의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만약에 세나의 관 속에 아무것도 없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가정이었다.

그땐 의심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깊어져서, 그 의심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요한은 지금 당장에라도 그녀가 묻힌 곳으로 뛰어가, 관 위를 뒤덮은 흙을 모두 파내고 싶었다.


부드러운 흙을 모두 파내고, 그 속에 고이 묻혀 있을 관을 열어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당장 어찌할 수는 없었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날은 이미 완전히 밝아 있었다.

대낮에 묘를 파헤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그가 공작저의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 * *

그날은 요한의 마음을 대변해 주기라도 하는 듯이 우중충한 날이었다. 오후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곧 비라도 쏟아질 듯이 하늘은 어두컴컴해졌다.

창가에서 바라본 하늘엔 잿빛 먹구름이 가득했다. 머지않아 비가 내릴 것임에 분명했다.


요한은 먹구름을 보며 생각했다.

비가 내린다면, 흙을 파내기에 더 적절할지도 몰라.

그러다 그는 자조했다. 정말 미쳤나 봐.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요한은 책상 위에 머리를 뉘었다.

지난밤 한숨도 자지 않았지만 잠이라곤 전혀 오지 않았다. 되레 어느 날보다도 정신이 또렷할


뿐이었다.

그런 그를 찾아온 이는 조슈아였다. 조슈아는 또다시 엄마가 사라졌다느니, 엄마의 방문이


잠겨 있다느니, 하며 횡설수설했다.
리나가 아무런 말도 없이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았을 거란 걸 알면서도, 요한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일전에 리나가 말도 없이 사라졌을 때 느꼈던 감상과 똑같았다. 왠지 버림받은 듯한


느낌. 아주 참혹한 기분이었다.

요한은 책상에 앉아 있던 몸을 얼른 일으켰다.

세나와 리나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완전히 알아내지도 못했는데, 리나가 다른 곳에 가는 걸


원치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억을 잃은 리나를 쫓아내고 싶지도 않았다.

적어도 세나의 관 속을 확인할 때까지는, 리나가 제 시야 속에 존재했으면 했다.

리나의 방으로 향하는 요한의 발걸음이 조급했다. 본인도 인지하지 못한 조급함이었다.

“…….”

복도에서 마주한 리나는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그래, 그녀가 사라질 리가 없잖아.

요한은 리나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안도하면서도, 그녀를 따라 나온 바비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공작저로 오는 걸 그토록 금했건만, 바비는 어떻게 매번 공작저에 몰래 들어오는 걸까.

요한은 저도 모르게 리나에게 까칠한 언사를 내뱉었다. 결코 그녀를 나쁘게 대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바비와 함께 있는 그녀를 보자니 말이 좋게 나오지 않더라.

마음속에 뜨거운 무언가가 활활 타올라서 미칠 것만 같았다. 몸의 심지를 태우는 그것의


정체를 요한은 알고 있었다.

질투. 우습게도 요한은 바비와 함께 있는 리나를 보며 질투를 하고 있었다. 리나가 세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드는 질투인 걸까.

바비는 그렇게 말했다.

“요한 랭카스터.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때? 넌 나와 리나가 함께 있는 게 싫은 거잖아.


조슈아 핑계 대지 마. 지금 네 모습 추해.”

바비의 말엔 틀린 점이라곤 하나 없었다. 요한은 제삼자의 눈에 추해 보일 정도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내 주려고 했다. 저 여자는 세나가 아니다. 저 여자는 길거리에서 주워 온 거지일


뿐이다. 요한은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요한의 머릿속에는 바비와 리나가 함께 있는 모습이 상상됐다.

문을 잠근 방 안. 바비의 상냥한 말과 미소에 까르륵 웃는 리나. 그러다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며 이윽고 마주한 두 입술은 서로의 온기를 나눈다.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상이었다. 하지만 자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상상은 디테일을 더해
가며 요한을 괴롭혔다.

두 사람 사이의 기류는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며, 바비의 입술이 리나의 입술이 아닌 다른 곳을


탐하게 된다면…….

바비와 함께 사라지는 리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찢기는 것만 같았다.


마음속에서 활활 타오르던 것은 기어코 흘러내리며 그의 온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요한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애원하고 있었다.

“가지 마.”

“…….”

“바비와 함께 있지 마. 나랑 있어.”

더 추해져도 좋아. 그렇지만 네가 바비와 함께 있는 건 두고 보지 못하겠어.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요한의 입안에 맴돌았다.

손목이 잡힌 리나는 몇 초간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나중에. 나중에 다시 만나요. 조슈아와 함께.”

리나는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며 바비와 걸어갔다.

요한은 그녀를 한 번 더 붙잡을 수 없었다. ‘계약 관계로 이어진 물주와 거지.’ 리나가 말한
대로 우리의 관계는 그 정도일 뿐이니까. 그녀를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요한은 조금 전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던 손을 꽉 쥐었다. 나, 도대체 거지에게 뭘 바라고 있는


거야.

쿵. 닫힌 방문 사이로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요한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그들이 사라진 방문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요한은 제 얼굴을


마른세수하듯이 쓸었다.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만 싶었다.

오늘 밤, 세나의 묘지에 가 보자. 이런 상태로는 더는 버틸 수 없다. 확실하게 확인하고서


거지를 저택에서 내보내는 방향으로 생각해 보자. 정말로 세나가 살아 돌아왔을 리가 없잖아.

복도에 나 있던 창문의 유리 위로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회색빛 구름이 쏟아 내는 비가 지면을 적시기 시작했다.

* * *
모두가 밤의 부드러움에 안긴 새벽. 요한은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빗줄기 사이를 소리
없이 가로질렀다. 색이 어두운 우비를 깊게 눌러쓰고선, 한 손엔 삽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이
비장하기만 했다.

요한은 공작저의 뒤에 있던 야트막한 산길을 거침없이 올랐다.

불현듯 공작저 쪽으로 돌아보았을 때, 불이 켜진 방은 그 어느 곳도 없었다. 요한은 휴, 하는


안도의 숨을 짧게 내뱉었다.

요한이 하려는 일은 누군가가 눈치채기라도 하면 곤란한 일이었다.

이윽고 그는 산의 중턱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에는 세 개의 묘비가 나란히 존재했다. 두 개는 요한의 부모님의


묘비였고, 하나는 세나의 묘비였다.

언제고 세나가 보고 싶을 때마다 자주 찾아왔던 곳이었지만, 요한은 새삼 그 풍경이 익숙하지


않게 느껴졌다.

비가 오는 새벽녘에 찾아왔기에 그런 것일까. 을씨년스럽기만 한 분위기에 요한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요한은 세나의 묘비에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릎 위로 비에 축축이 젖은 흙의 서늘함이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런 것들을


선명히 느낄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하다.

요한은 그녀의 묘 앞에 세워진 비석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비석에 쓰인 글귀를 보았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그것은 1 년간 원인 모를 병을 앓던 세나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어떤 의미가 담긴 말인 것 같았지만, 요한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으니까. 세나는 혼자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로 눈을 감았다.

세나는 무엇을 갖고자 했던 것이며, 그녀는 왜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고 단언했던 걸까.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의 임종을 지켜봤던 요한이나 더불어 조슈아까지도 그녀에겐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것일까?

“세나, 나는 아직도 네가 남긴 말의 뜻을 잘 모르겠어.”

요한은 그 비석을 잠깐 동안 껴안았다. 그러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살아 있는 진짜 세나를


안고 있는 듯한 기분이 설핏 들기도 했다.

이내 요한은 비석을 껴안았던 팔을 풀어냈다. 그는 비석 위에 짧게 입맞춤을 하고선


고해성사하듯이 말했다.
“미안해, 세나.”

네 허락도 없이, 네가 잠든 이곳을 파헤쳐서 미안해.

하지만 나는 확인해 봐야겠어. 이곳에 네가 여전히 잠들어 있는지. 네가 죽은 일은 어떤


착오가 아니었는지. 죽었던 네 시신이 어떤 행운으로 인해 다시 살아난 게 아닌지.

물론 세나와 리나 사이엔 1 년이라는 함께 존재했던 시간이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거다.

하지만 지금의 요한에게 그런 문제는 부수적인 일이었다. 이미 묘지까지 와 버렸다. 더는


물러설 요량이 없다.

요한은 흙 위로 삽을 찔러 넣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흙은 한껏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는 숨을 골랐다. 삽을 쥔 손이 가늘게 떨렸고, 심장은 메마른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것은 설렘의 징조라기보다는 불안한 기운이 가득 담긴 소리였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요한은 흙을 퍼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입안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싹 말라 있었다.

서걱서걱. 흙이 파이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나지막이 울렸다. 주춤거렸던 요한의 삽질은


속도를 더해 갔다.

얼마 파내지 않았을 때, 삽의 끝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았다. 그리 깊게 묻어 두지 않은 세나의


관이었다. 요한은 짧게 숨을 고르며 조금 더 흙을 파냈다.

흙이 파내지고 구덩이가 커지자 세나의 관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잘 짜인 나무 관은 흘러간 세월을 무시하기라도 한 듯이 4 년 전, 처음 봤던 그때와 다름이


없었다.

멀쩡하다. 작은 흠 하나, 바램 하나 보이지 않았다. 새벽녘이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요한은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관의 덮개 위에 있던 흙을 손으로 털어 냈다. 희고 가는 그의


손이 점차 더러워졌지만, 요한은 멈출 수 없었다.

흙을 거의 털어 낸 관의 덮개 위. 요한은 덮개를 살짝 옆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그것은 너무도


쉽게 밀려났다. 마치 진즉부터 누군가가 열어 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요한은 관의 덮개를 반쯤 열고선 그 안을 살폈다. 그사이에도 거센 빗줄기는 요한의 머리 위와


어깨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요한은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 내며 그 안을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 그러다 그는 놀라며


뒤로 나자빠졌다.

“……없어.”
관 안에 자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안에 잠들어 있어야 할 세나의 시신이 없다. 따뜻한
육신을 잃은 그녀의 뼛조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침묵. 고요. 그것들만이 그 속을 지키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요한은 손을 올려 제 입가를 가렸다. 입가에 올려진 그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다.

세나의 시신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제 25 화. 네가 죽는 순간까지도 알고 싶어

“바비. 괜찮은 걸까?”

방으로 들어온 나는 문을 완전히 닫고선 바비에게 물었다. 바비는 나와 마주 선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조슈아랑 밥맛……, 아니 요한 씨 말이야. 그렇게 두고 와도 상관없는 걸까?”

“신경 쓰여?”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나는 딱히 요한을 신경 쓰는 게 아니다. 내가 신경 쓰는 건 곧 울 듯한 얼굴을 했던 조슈아다.


……하지만 요한도 곧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잖아.

내 눈앞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조슈아와 요한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하지만 나는 확언하듯이 말했다. 내가 신경 쓰고 있는 건 조슈아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되뇌듯이.

“난 조슈아가 신경이 쓰일 뿐이야. 아무래도 너와 오랫동안 얘기는 못 할 것 같다. 좋아,


인심 썼다. 내일도 찾아와. 대신 조슈아의 수업 시간에 찾아와 주었으면 해. 그럼 너랑 더
놀아 줄게.”

나는 바비의 어깨를 퍽퍽 내려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바비는 웃거나, 그렇다고 해서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기만 했다. 주절거리는 내 말속에 담긴 진심을


가늠하려는 것처럼.

내가 요한까지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려는 것처럼.


진심은 일순 간파 당한다.

“요한이 다시 보고 싶어?”

바비는 내 대답을 듣지 않으며 이어서 말했다.

“요한에게 설레서, 그와 함께 있고 싶은 거야?”

요한과 함께 있고 싶다고 분명히 대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 앞에 있는 바비보다 상처 입은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떨구던 요한을 훨씬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심이었다.

“요한과 조슈아와 네가 정원에서 노는 걸 봤어. 왠지 가족 같더라고. 방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러했어.”

바비는 일전에 정원수 뒤에 숨어서 우리를 지켜봤던 일을 토로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홀연히 사라졌던 그였는데.

“하지만 결국 방해하지는 못하겠더라. 선뜻 다가갈 수 없었어. 요한을 바라보던 네 얼굴이 꽤


행복해 보였으니까.”

“…….”

“다시 한번 더 물을게. 넌 지금 함께 있는 나보다도 요한을 더 생각해?”

나는 드레스를 꽉 쥐고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진심이 제대로 간파당한 것 같은데 인제


와 다른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그래, 솔직하게 얘기할게. 요한에게 설레서 그런 건지는 확언할 수 없어. 하지만 바비, 나는
요한을 두고 온 게 신경 쓰여.”

솔직하지 못한 대답은 바비를 더욱 힘들게 만들지도 몰랐다. 뭐, 애당초 내가 거짓말을 잘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그러자 바비에게서 돌아온 질문은 꽤나 직접적이었다.

“그를 좋아해?”

글쎄. 그를 좋아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잘 모르겠다. 설렘과 좋아하는 것의 경계를 잘 모르겠다. 설레는


건, 다른 남자에게서도 이따금씩 느끼곤 했으니까.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어.”

아직까지는. 그 말이 입안에 오랫동안 맴돌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로 요한을 좋아하게 되기라도 하는 걸까?


역시나 잘 모르겠다. 왜 그에게 감정적으로 휩쓸리게 되는지.

나는 내 마음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휴, 다행이다. 그럼 아직 내게 기회가 있는 거네. 지난 1 년간 넘어오지 않았던 너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네 다리라도 부러뜨려서 내 옆에 둬야 하나.”

“그거 농담이지?”

“농담 반 진담 반.”

바비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이라고 했지만, 왜 내겐 그의 말이 백


퍼센트 진심으로만 느껴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엄포를 놓듯이 대답했다.

“내 다리를 부러뜨리면, 네 다리도 내가 부러뜨릴 거야.”

“좋아. 그럼 그게 우리 첫 번째 커플 아이템이 되겠다. 같은 쪽 다리를 부러뜨리고, 같은


붕대를 감고, 같은 깁스를 하자. 그리고 같은 날에 깁스를 푸는 거야. 와, 꽤 멋진데? 그날은
기념일로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바비에게선 장난치는 기색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었다. 진심으로 내뱉은 말임이 분명했다.

“너 진짜 미쳤어?”

바비는 지지 않고 대답했다.

“어. 나 미쳤어.”

“…….”

“나를 돌아 버리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네가 요한의 저택에 온 걸 안 순간부터 미치지 않고선


하루라도 버틸 수가 없었어.”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를 강압적으로 대할 수도 없잖아.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강압적으로 대해? 나는 그렇게까지 해서 네 마음을 얻고 싶진 않아. 그래서 나는 지금 최대한
자제를 하고 있단 말이야.”

바비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바비는 그런 내


팔을 부드럽게 그러쥐며 내가 도망가는 걸 막았다.

그는 내 어깨 위에 이마를 묻으며 말했다.

“네게 나쁜 짓을 하게 될까 봐, 내 자신이 너무 두려워.”

바비는 한 발자국 더 다가와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으로 내 허리춤을 조용히 감쌌다. 그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서, 그의 손길을 뿌리쳐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바비. 너와 친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너를 잘 모르겠어.”

“나에 대해서 얘기해 줄게. 그럼 너도 너에 대해서 더 얘기해 줘. 혹시나 잃어버렸던 기억을


조금 떠올렸다든지, 그런.”

“…….”

“우리가 만나기 전까지, 나는 너에 대해서 알지 못했어. 하지만 이젠 네 모든 순간을 알고


싶어.”

그는 나지막이 한마디를 덧대었다.

“네가 죽는 순간까지도.”

무섭도록 달콤한 고백을 하는 바비의 숨이 약간은 거칠어졌다. 내 팔뚝 위에는 원인 모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어깨를 뒤로 빼내며, 내 어깨 위에 올려진 바비의 얼굴을 떼어 냈다. 더는 그와 가까이


붙어 있어서는 안 되겠단 생각이 퍼뜩 들어서였다.

“바비. 넌 나와 만나기 전부터 나를 지켜봤었지? 그래서 처음 봤던 그때에도 날 보고 놀라지


않은 거고.”

“……맞아. 그전부터 너를 지켜보고 있었어. 처음엔 나도 세나가 살아서 돌아온 줄 알고


혼란스러웠지.”

바비와 만났던 일화를 들은 요한이 제기했던 그 맹점. 바비는 요한의 말대로 역시나 나를
만나기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말했잖아. 처음엔 세나와 닮아서 네게 접근했을지언정 지금은 네게서 세나를 떠올리지
않아. 네가 세나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 물론 외관상으론 닮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세나인 건 아니잖아. 너에게서 세나를 찾는 일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야. 난 그저 네가
좋았으니까, 네 뒤를 쫓아다닌 것뿐이야. 맹세해.”

“…….”

“반대로 요한은 네게서 세나만을 찾고 있어. 리나, 넌 내 말을 기억해야 해.”

바비는 내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내 이마 위에 조금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조용히 넘겨 주었다. 스치듯이 닿은 그의 손이 뜨거웠다.

“너를 너로 보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말.”

그는 제가 했던 말을 재차 강조했다. 그 말엔 거짓의 기운이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넌 어째서 네가 나를 세나로 보지 않는다고 단언해?

너도 세나를 좋아했다면서. 그럼에도 내가 세나로 보이지 않는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바비는 늘 그러했듯이 내 미간 위를 꾹꾹 누르며 ‘예쁜


주름살.’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리나. 그만 가 볼게. 내일은 나도 약속이 있어서, 모레에 찾아올게. 그때도 괜찮지?”

“응.”

“다음에 볼 땐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만나자.”

바비는 빙그레 웃으며 나를 지나쳐 갔다. 부담스럽지 않은 스킨십도, 약간은 폭력적인 고백도
더는 없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열려다, 문득 내 뒤쪽에 있던 창문을 몇 초간 빤히 바라보았다.

“비 온다.”

나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바비의 말대로 정말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 * *

조슈아가 찾아왔다.

아이는 바비가 내 방을 나서기가 무섭게 나를 찾아와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꾸벅꾸벅 졸면서도, 같은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엄마. 없어지면 안 돼. 그러면 조슈아는 너무 슬플 거야.”

나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몇 번이고 같은 대답을 했다.

“조슈아를 두고서 다른 곳으론 가지 않네요.”

밥맛의 아들인 내 밥줄 예쁜이. 배고픈 엄마는 아니지만 배고픈 거지인 내가 사랑스러운 너를


두고 어디론가 사라질 일은 없단다.

하지만 네가 가짜 엄마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성장해 버린다면…….

“조슈아. 너야말로 나를 외면하면 안 돼.”

그땐 네 엄마가 아니라도 좋으니까, 네 곁에서 네가 성장하는 걸 지켜볼 수 있게 해 주렴.

“엄만 무슨 그런 말을 해! 조슈아 서운해. 조슈아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네가 그럴 일은 없겠지. 지금은 말이야.


거기까지 대답한 조슈아는 몇 분이 지난 후에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나는 아이를
조심히 들어 침대 위에 뉘어 주었다.

아이의 자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요한이 떠올랐다. 두 사람,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은 달라도 이목구비가 정말 닮았기 때문이었다.

요한도 자고 있는 모습은 천사처럼 예뻤는데. 그놈의 입이 문제지.

‘가지 마. 나랑 있어.’

요한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당장에라도 찾아올 것 같이 굴었던 주제에 그는 석양이 지고, 밤이 되어서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내가 먼저 그를 찾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찾아가서 어쩌란 말인가. 무슨 말을 해.

리나라는 이름에 대한 것을 알려 달라고 할까?

리나라는 이름과 관련된 일이 궁금했으면서도 왜 요한의 손을 뿌리쳤느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그러했다.

나를 세나라 여기며 가지 말라고 호소한 요한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괜스레 사람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어 놓은 요한의 태도가 불만스러웠다.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잠든 조슈아 옆에 몸을 누이었다. 그렇게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잠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빗소리에 섞인 요한과 바비의 여러 말들이었다.

* * *

잠에서 깬 이유는 아마 다급한 아이의 목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 엄마! 큰일 났어.”

나는 잠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한 채로 눈을 비비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날은 밝은 것


같았지만, 비는 그치지 않아 주위가 그다지 밝진 않았다.

“조슈아. 무슨 일이야?”

방문을 활짝 열고 들어온 조슈아는 언제 잠에서 깬 것인지 멀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였다.


금빛 머리카락도 한쪽으로 곱게 쓸어 넘긴 것이 과연 부잣집 아기 도련님이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과는 별개로 조슈아는 다급하고 또 다급했다. 아이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아빠가……, 아빠가 죽어 가.”

“뭐? 요한 씨가 죽어 간다니!”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아침부터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고 조슈아를 몇 번이고 다그쳐 보았지만, 조슈아는 아빠가


죽어 간다는 말만을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울먹거리는 목소리는 덤이었다.

나는 더 지체할 요량 없이 앞장을 선 아이를 따라 요한의 방으로 갔다.

아이는 나를 요한의 침대까지 이끌었다. 거기엔 침대에 가지런히 누운 채로 마른 숨을 토해


내고 있는 요한이 보였다.

그는 조금 상기된 얼굴이었고, 이마엔 언제부터 맺혔을지 모를 식은땀이 가득했다. 나는 그의


이마 위에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올려 보았다.

“뜨거워.”

열이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열병.

“조슈아. 너희 아빠는 죽어 가는 게 아니라 감기에 걸린 것 같아. 나가서 벨라나 누군가를


데려와 줄래? 의원을 불러야 할 것 같아.”

“으응…….”

조슈아는 정신을 완전히 잃어 마른 숨만을 내뱉는 요한을 보며 불안해했다. 나는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고작 열병 가지고 네 밥맛 아빠가 죽을 리는 없잖아.

괜찮다는 내 말 덕분이었는지, 조슈아는 불안함이 약간은 가신 얼굴로 방 밖을 나갔다.


뛰어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절박해 보이기만 했다.

나는 그의 침대 위에 있던 조금 열린 창문을 완전히 닫았다. 감기에 걸린 주제에 창문은 왜


열어 둔 건지.

어제부터 내리던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나는 창문 밖 회색빛의 풍경을 잠시 보았다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요한을 다시금 응시했다.

“아프긴 왜 아파요. 적응 안 되게.”

종종 헐렁한 면모를 보였어도, 대개 냉철하게 굴었던 요한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아프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는다.

별안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봐, 거지.’라고 말할 성싶었지만, 하얗게 질린 그의 입술은


뜨거운 숨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거 참. 조슈아를 시킬 게 아니라, 내가 나가서 사람을 불러와야 하나.

걱정이……, 조금 되었다. 눈앞에 사람이 아픈데 걱정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어.

나는 결국 내가 직접 사람을 불러오자는 생각으로 뒤돌아서려고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누군가의 손으로 인해 저지당하고야 만다.

시선을 밑으로 끌어내리자, 내 손목을 부여잡은 큰손이 보였다. 큰손의 주인은 요한이었다.

언제 깬 걸까.

“……가지 마.”

요한은 어제 했던 말을 똑같이 읊조렸다. 하나 그 목소리의 울림은 완전히 달랐다.

어제보다도 낮고 쇳소리가 그득한 목소리였다. 더불어 손목에 맞닿은 그의 손도 평소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열병.

나는 요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잘게 떨리는 눈꺼풀을 반쯤 들어 올린 채였다.

붉어진 두 뺨. 식은땀으로 인해 젖은 머리칼. 반쯤 뜬 눈꺼풀. 그를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그가 너무도 나약하게 보였다.

영문을 알 수 없이 그의 젖은 앞머리를 쓸어 주고 싶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면.

“밥맛 씨. 괜찮아요? 이렇게 열이 나는데 왜 아무도 안 불렀어요!”

나는 과장해서 말했다. 그의 앞머리를 쓸어 주고 싶다느니, 하는 생각을 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소리치지 마. 머리 울려.”

“하여튼 그 성격……. 누가 밥맛 아니랄까 봐.”

“요한.”

“네?”

“밥맛이 아니라, 요한이라고.”

그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나를 지그시 보았다.

“지금 호칭이 중요해요? 하여튼 잠시만 기다려요. 사람을 불러올게요.”

그를 밥맛이라고 부른 것에 꾸지람을 듣지 않기 위해서 말을 돌린 것은 절대로 아니다.

요한은 그런 나를 급하게 붙잡았다. 조금은 절박하게.

“난 괜찮아.”
“…….”

“그러니까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리나.”

리나.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내 이름에 영문 없이 가슴이 설렜다. 고작 이름 하나를


불렸을 뿐인데, 입안은 바짝 말라 갔다.

제 26 화. 너랑, 입 맞춰 보고 싶다고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의 절박함이 적응되지 않았을뿐더러, 묘하게도 가지 말라는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나를……. 걱정했어?”

“당연하죠.”

솔직히 대답하고 나자 괜스레 머쓱했다. 역시나 아픈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걱정하지 않을


이는 없다고 여기면서도. 요한의 시선이 대단히 진득했기 때문일까.

“왜.”

요한은 물음표 없이 물었다.

왜, 라. 만약에 바비 또한 이렇게 아팠더라면 그때도 그를 걱정하지 않았을까?

“제 걱정은 아픈 사람을 눈앞에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일반적인 걱정이에요.”

“대답 한번 참 잘하는군.”

그는 허탈한 미소를 지은 뒤에 몇 초간 침묵했다. 그는 나를 빤히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해탈한 듯이 말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어.”

손목을 그러잡고 있던 그의 손이 천천히 내려와 내 손을 완전히 잡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

얼기설기하게 얽힌 손가락의 감촉이 낯설지 않았다. 과거에도 그와 손을 잡았던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느낌으로 그칠 뿐, 그와 관련된 과거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주 조금도.


“입 맞춰 달라고 한다면. 그건 내 욕심인 건가?”

“욕심인지는 잘 모르겠고, 열로 인해 당신의 뇌마저도 이상해진 게 확실하다는 건 알겠어요.”

툴툴거리며 대답했지만, 나는 새삼 당황했다.

입을 맞춰 달라니……. 키스를 하자는 걸까? 뜬금없이 웬 키스인 거야.

우리 사이에 맴도는 기류가 조금 전보다도 달아오른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맞아. 내 머리가 이상해진 게 분명하군.”

요한은 픽 웃었다.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매력적으로 보였다.

저 보기 좋은 입술에 내 입술이 닿는다, 라. 닿으면 엄청 부드럽겠지. 닿고 싶……. 나 원.


도대체 무슨 생각까지 하는 거야.

나는 그의 입술에 닿고 싶다는 생각까지 해 버린 나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입 맞춰 주면 뭘 해 줄 건데요?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일단 들어는 볼게요.”

“연차.”

“…….”

“그때 취소했던 거 다시 줄게.”

내가 침묵하자 요한은 내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손을 약간 들어 올렸다. 그는 검지와 중지를


펴, 숫자 2 를 그려 냈다.

“두 배로.”

정말 요한답지 않은 모습이다. 나는 그를 비웃듯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밥맛 씨, 지금 장난해요?”

그러자 요한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선 대답하더라.

“그래, 밥맛 씨가 지금 거지에게 장난을 칩니다.”

“컥!”

맙소사! 저건 내 말투인데? 나는 적응할 수 없는 요한의 태도에 연신 캑캑거렸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면 죽는다고 하던데. 설마 요한은 정말로 위독한 병에 걸리기라도 한


걸까?

요한은 놀란 나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가 나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는 횟수가 점점


느는 것만 같다. 여전히 내 착각이길 바랐지만,
“놀랐어?”

그리 묻는 요한은 부드럽기만 했다.

진짜로 죽을병에 걸렸나, 이 남자.

“…….”

붉어진 그의 얼굴 탓일까.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이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더욱


관능적으로 보였다.

동시에 아픈 사람을 관능적으로 생각해 버린 내가 파렴치한처럼 느껴졌다. 젠장.

“어, 어제 도대체 뭘 한 거예요? 애도 아니고. 이불 안 덮고 잤어요? 설마 전처럼 홀딱 벗고


잔 건 아니죠? 답답해도 옷은 꼭 입고 자라고…….”

나는 주절주절 내뱉다가 급하게 말하던 것을 멈추었다. 미처 잇지 못한 말은 그러했다.

‘답답해도 옷은 꼭 입고 자라고 했잖아요.’

……이건 꼭 전에도 그런 말을 한 것 같은 태도잖아. 그의 잠버릇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몇 번 뜻하지 않게 동침을 하긴 했지만, 나는 요한의 잠버릇을 보지 못한 터였다. 나는 도대체


왜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은 걸까?

다행스럽게도 요한은 내가 횡설수설한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낮은 목소리로


고백하듯이 작게 읊조렸을 뿐이었다.

“새벽에 흙을 팠어. 안엔 아무것도 없더라. 그러니까 바보 같은 생각이 자꾸 들더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물어볼게요. 그 바보 같았던


생각이 뭐예요?”

요한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더욱 꽉 주었다. 내가 도망가지 않길 바라는 악력이었다. 손바닥


사이로 전해져 온 그의 열기가 너무나 맹렬했다.

“너랑, 입 맞춰 보고 싶다고.”

열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진 것은 비단 요한뿐만이 아닌 듯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 또한


핏기가 가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사실 그 생각은 그전부터 계속해서 들던 생각이기도 했다. 닿는 촉감이 매우 훌륭할 것 같은


요한의 입술. 닿고 싶다.

요한은 나를 보채지 않으며 참을성 있게 내 대답을 기다려 주었다. 열로 인해 반쯤 풀린 그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평소였다면 무슨 그런 개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느냐고 윽박이라도 질렀을 것이다. 나와


당신이 입을 맞출 이유 따위는 조금도 없다고 엄포를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입술은 얼어붙은 듯이 굳어 버렸고, 시선은 요한 이외의 다른 곳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요한의 그윽하고 진득한 눈빛이 나를 옭아맸다.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눈빛이다.

관능적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이 요사스럽기만 했다. 이러다간 나도 모르게 ‘네, 그렇게


하세요. 거지가 허락합니다.’라고 말할지도 몰랐다.

그가 풍기는 자극적인 분위기에 취해서.

“망설여지는 건가.”

요한은 띄엄띄엄 가쁜 숨을 내쉬며 물었다.

망설여지는 게 당연하잖아. 새벽에 흙을 팠는데, 안에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하자 나와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는 당신을 어떻게 이해해. 두서라곤 일절 없는 말이었다.

더불어 내가 세나와 닮았기 때문에, 그가 나와 입을 맞추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는지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하지만.

“…….”

이성은 본능에 잠식된다. 나는 요한과 입을 맞추고 싶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입맞춤을 요구한 요한의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서로의 입술이 닿는 순간만큼은 기분이 좋아질 거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허리를 천천히 굽혔다. 달뜬 요한의 얼굴이 가까워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삽시간 가까워진 내 얼굴을 보고선, 요한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그는 저가 입을 맞춰 달라고 했던 주제에 막상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긴장을 해 버린 것이었다.

그의 목울대가 티가 나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는 서로의 코끝이 닿을 거리에서


숨을 골랐다.

“연차는 세 배가 어때요?”

괜찮아요? 내가 거기까지 말하자, 요한은 잠깐 당황했던 기색을 지우고선 엷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입맞춤 한 번에 연차 세 배는 꽤 나쁘지 않잖아.


요한은 성격은 별로이긴 했어도 잘난 공작님이었고, 잘생긴 남자와 입 맞추는 걸 싫어할
사람은 그다지 없을 것이었다. 물론 그중에 나도 포함이다.

그래, 나는 그런 의미로 요한과 입을 맞추는 거야. 다른 의미는 없어.

그러니까 제발 심장아, 너 그만 좀 나대면 안 되겠니.

나는 요한의 뺨 위에 손을 올린 뒤,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숨결이 가까워지고 있음이 피부


위로 선연히 느껴졌다. 이윽고 그의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쾅, 하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조슈아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벨라를 데리고 왔……!”

나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뒤로 돌아봤다. 내가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주 빠른


움직임이었다.

“…….”

우리의 모습, 즉 입술을 맞출 듯 서로의 얼굴을 가까이하고 있는 모습을 본 조슈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엄청 커진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을 뿐이었다.

조슈아의 뒤에 서 있던 벨라 또한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벨라는 괜스레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입술만 몇 차례 뭉그적거렸다.

이 타이밍을 어떻게 하면 좋지? 내가 누워 있던 요한을 덮치는 모양새 같잖아.

“그, 그게…….”

나는 요한이 누워 있던 침대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사이에도 요한은 붙잡고 있던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되레 더욱 꼭 부여잡았다.

마치 이 상황을 모면하려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조슈아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눈으로 훑더니, 고물고물한 두 손을 얼굴까지 올렸다. 아이는
앙증맞은 손으로 제 두 눈을 가리더니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조, 조슈아는 아무것도 못 봤어! 엄, 엄마 아빠는 하던 거 계속해!”

“…….”

……우리가 뭘 하고 있었니, 얘야.

양 뺨이 뜨거웠다. 나는 해선 안 될 일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나는 도움을 청하는 심정으로 요한을 바라봤다. 그가 조슈아에게 변명이라도 해 주길 바랐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심통이 난 듯, 무언가를 아쉬워하는 듯한 얼굴로 조슈아를 응시했을 뿐이었다.

아쉬워해? 당신은 지금 뭘 아쉬워하는 거야?

“허허.”

나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사이, 조슈아는 벨라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벨라. 우리 아빠가 다 나았나 봐. 조금 이따가 다시 오자.”

“네네, 조슈아 님. 큭큭.”

벨라는 나로선 까닭을 전혀 알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웃음을 참으려 제 입가를


가렸지만, 한번 터진 웃음은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은 들어왔을 때와 다름없이 재빠르게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방문은 소리 없이 닫히며,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음…….”

우린 객쩍은 소리를 내며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나는 그에게 한마디를 건네었다.

“그, 뭐, 하던 걸 계속해야 할까요?”

“……됐, 됐어.”

요한은 메마른 숨을 내뱉었다.

내려다본 요한의 얼굴이 처음 봤을 때보다도 훨씬 더 붉어져 있었다면. 그건 내가 잘못 본


것이었을까?

* * *

결국엔 의원이 다녀갔다.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그는 열을 동반한 감기에 걸렸다고 한다.

의원의 처방을 받은 후, 요한은 벨라가 가져다준 뜨거운 차를 꼭 쥐고선 소파 위에 앉았다.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언제 이 방을 나가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침부터 낯부끄러운 오해를 했던 조슈아는 수업을 들으러 간 터였다.


조슈아가 아까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지,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했다. 아이고.

“콜록, 콜록.”

요한은 가벼운 기침을 했다. 그는 기침을 막을 요량으로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입술로


가져갔다가, ‘으뜨뜨’라는 혀 덴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괜찮아요?”

그건 여러 의미가 담긴 괜찮아요, 였다.

당신의 감기와 정신이 괜찮느냐는……. 의원이 다녀간 뒤부터 계속해서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던 그였다.

“난 감기 따위에 함락될 만큼 나약한 남자가 아니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휘청거렸다. 상체가 곧 고꾸라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모양새였다.


나는 그 간극이 우스워 소리 죽여 키득거렸다.

“왜 웃어.”

“아프면 그냥 아프다고 해요. 아픈 걸 누가 비웃는다고.”

“흠흠.”

그는 두어 번의 헛기침을 했다. 꼭 제 마음을 들킨 것처럼.

“그런데 진짜 감기는 왜 걸린 거예요? 비라도 맞았어요?”

나는 창밖을 넌지시 보았다. 비는 여전히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가. 언제 그치려나.

요한의 저택으로 오지 않았다면, 나는 길바닥에서 저 비를 맞고 있었을지도 몰라. 새삼 그의


저택으로 온 사실이 흡족했다.

요한은 내 시선을 좇아 저도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 비를 맞았어.”

“왜요?”

“확인할 게 있어서.”

그는 창문으로 떨어지는 빗줄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시 바라본 그의 옆얼굴이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요한은 비까지 맞으면서 무엇을 확인하고자 했던 걸까.


나는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않았다. 왜냐면, 그가 묻지 말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물음을 건네었다.

“그래서 확인하셨어요?”

“어……. 대충.”

그는 깔끔하게 확인하지는 못했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다 창밖을 보던 그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요한은 이번엔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너, 기억을 잃었다고 했지.”

“네. 저는 기억을 잃고 거리를 방황했던 미인 거지였죠.”

요한은 미인 거지라는 말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미인 거지 양. 이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돌아온 기억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나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그러자 요한의 얼굴 위로 실망하는 빛이 눈에 띄게 번져 갔다.

물론 돌아온 기억들이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들에 대한 것을 요한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왜냐면 그 기억들은 모두 요한과 관련된 기억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요한이 믿을지도 미지수였고, 문득 떠오른 내 기억들이 진짜인지 아닌지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일단은 감추자. 기억이 더 확실히 떠오른 뒤에 털어놓아도 늦지 않으리라.

“요한 씨. 갑자기 제 기억에 대한 것은 왜 물으신 거예요?”

“네 기억이 돌아왔으면 해서.”

“제 기억이요?”

요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네 기억이 돌아올 방법을 찾아보자.”

“저희 둘이요?”

요한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왜요?”
“네가 뭘 잊고 있는지 궁금해졌으니까.”

내가 뭘 잊고 있는지, 요한이 궁금하다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의중을 잘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봐, 거지.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큰 뜻이 있는 건 아니야. 나는 단지……, 음.


그래, 네가 답답할 것 같아서. 그래서 말한 거야. 기억을 잃은 네가 걱정된다는 그런 착각.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요한은……, 거짓말을 정말 못하는 남자다. 나는 그의 말속에 서린 그의 진심을 대강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기억을 잃은 채로 거리를 헤매는 내가 걱정되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의 이마 위에 ‘네가


안타까워.’라고 쓰여 있는걸.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저는 안 궁금한데요?”

“……뭐?”

그러곤 일전에 벨라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내뱉었다.

“없어진 기억이 생각보다 매우 끔찍한 기억이라면요? 기억을 잃은 저를 제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어느 잡화점의 주인이었는데. 글쎄, 제 상태가 장난이 아니었나 봐요. 피 칠갑을 한
채로 산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지 뭐예요.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제게는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끔찍하고도 어쩌면 잔인할 수 있는. 떠올리면 괴로울지도 모르는.”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기억은 어찌할 수 없을지언정 구태여 억지로 그 기억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

요한은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문 채로 나를 보았다. 내가 그런 대답을 하리란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엔 약간은 충동적인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도 잃어버린 제 기억이 정말로 궁금하시다면, 거래를 해요.”

“설마……, 연차 네 배?”

그는 아연실색한 얼굴을 했다. 내게 질렸다는 얼굴쯤으로 보였다.

아니, 도대체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내가 꼭 갑질한 것처럼 구네.

“사람을 도대체 뭐로 보고! 그렇게까지 요구하지 않아요.”


“아까 연차 세 배를 운운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나는 씩 웃으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정답은 미인 거지입니다.”

“칭찬 아니야. 자랑스럽게 말하지 마.”

“큭큭.”

내가 킥킥거리자 요한은 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농담하던 것을 멈추며 그에게 진지하게 말을 건네었다. 내가 그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에


대한 말을.

“요한 씨. 그래서 제가 요구하고 싶은 건…….”

제 27 화. 뽀뽀하면 아이가 생긴다고 했어

나는 지난번에 갔었던 그 방을 떠올렸다.

고장 난 문고리가 있던 그 방. 단출하고 클래식한 가구밖에 없던 그 방.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 있던 그 방.

바로 세나의 방.

“세나 씨의 방. 그곳에 한 번만 더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럼 저도 당신의 말을


들어줄게요.”

세나의 방으로 가서 그 책을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충동적으로 든 생각이었지만 꽤 나쁘지 않은 거래 조건이었다. 기억이 돌아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상쇄시킬 정도로.

“이유를 물어도 되나?”

요한은 진지해진 눈빛을 했다.

‘세나의 방’이라는 말 하나에 그의 분위기가 완전히 급변해 있었다. 나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던 요한의 모습은 일순 자취를 감추었다.

“저도 당신처럼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세나의 방에서?”

“네.”

세나의 방이라. 요한은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는 마치 내가 그 방에 가도 될지


아닐지를 재고 있는 듯했다.

긴 고민 끝에 그는 숨을 나지막이 토해 내며 말했다.

“……좋아. 시간을 더 끌 것도 없이 지금 가도록 하지. 단, 나도 함께였으면 하는군.”

요한과 함께라.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모쪼록.”

붉은 표지의 책을 요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세나의 방으로


가서 그 책을 찾아보자. 그 속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확인을 해 보자.

‘궁금해?’ 꿈속에서 들었던 세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응. 나는 궁금해. 그래서 지금 확인해 보려는 참이야.

너야말로 왜 자꾸 내 꿈에 나타나는 거니?

그렇게 물었지만, 세나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침묵.

* * *

복도를 거니는 내내 우리 사이에 오고 간 대화다운 대화는 없었다. 요한은 침묵했고, 나도


침묵했다.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건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우린 계단을 내려와 2 층 복도에 다다랐다. 고작 한 번 찾아갔을 뿐인데, 내 발걸음은 아주


익숙하게 세나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전에 찾아갔을 때와는 다르게 오늘은 한낮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등골이 서늘한 기분이었다.
왠지 모를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들어, 나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등 뒤엔 죽은 세나의 영혼이 있을 것 같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래?”

요한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내 행동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는 이내 세나의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요한은 언제 챙겨 왔을지 모를 열쇠를 주머니 속에서 꺼내었다. 열쇠 구멍 속에 열쇠를 넣어


돌리기가 무섭게 잠긴 문이 열렸다.

끼이익. 기름칠이 잘 되지 않은 소리가 들리며, 요한은 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낮이었지만, 그 안의 풍경은 밤에 보았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둡다. 낮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캄캄했다. 빛이라고는 일절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창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빛의 경로를 막은 것의 정체는 두껍게 쳐져 있던


커튼이었다.

요한은 앞서 걸어가 쳐져 있던 커튼을 활짝 걷었다. 그러자 그제야 가을날의 햇살이 방 안으로


스몄다.

꽤 따스해 보이는 햇살이 스미었지만, 방 안에 맴도는 기류는 여전히 스산했다. 솜털이 비죽


서는 차가운 기류에 나는 어깨를 작게 움츠렸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저 커튼, 지난번에 열어 두고 나갔었는데. 요한이 다시 쳐 두었던 걸까?

“콜록콜록, 뭐 해? 확인하고 싶은 걸 얼른 확인해야지.”

요한은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나를 재촉했다.

“네, 네.”

나는 커튼에 대한 생각을 밀어 두고선 책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내내 요한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게 느껴졌다. 그는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빠짐없이 지켜볼 요량인 것 같았다.

걷는 동안 생각했다. 그 책을 보면 어쩌면 잃어버린 내 기억을 되찾을지도 모르겠다는. 내가


잊고 있었던 과거의 잔재와 부딪히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세나의 책은 내게 있어 이를테면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것이었다. 열어 보기 두렵지만, 결국엔


열고야 마는, 그런.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책장의 위쪽으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
이틀 전, 그 책을 보았던 장소에는 다른 책이 꽂혀 있었다. 선명한 붉은빛을 가진 그 책은
보이지 않았다.

“책이…… 없어졌어.”

나는 혼잣말을 하며 눈으로 책장을 빠르게 훑어 냈다. 여기저기 빠짐없이 두어 번이나 책장을


훑어보았지만, 붉은 표지의 책은 보이지 않았다.

이틀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머릿속은 하얗게 질려 버려서, 나는 그 어떤 추론도 할 수 없었다.

요한이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말아 쥐며, 내 몸을 틀었다.


책장 쪽을 향해 있던 내 몸은 하릴없이 돌아가며 요한과 마주하게 된다.

요한의 얼굴은 복잡 미묘했다.

“세나의 방에서 확인하고 싶다고 했던 게 책이었어?”

나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 책이 무슨 책인데?”

나는 주춤했다. 망설여졌지만, 책이 사라졌다는 사실로 인해 백지장이 되어 버린 내 머릿속은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진실을 토로했다.

“그 책이 제 꿈에 나왔거든요.”

“네 꿈에?”

“네. 사실 이곳이 세나 씨의 방이라는 걸 안 것도, 꿈에서 이곳을 봤기 때문이에요.”

“꿈이라. 어떤 꿈인지 자세히 물어도 될까?”

요한은 답지 않게 정중하게 물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유하게 말하는 일엔 영 서툰 요한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부드럽게


물어 버리자, 나는 절로 내 사정을 자세히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나. 얘기해 줘.”

물러진 내 마음 사이로 요한의 부드러움이 더욱 파고들었다.

리나.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매끄럽게 내뱉어진 내 이름에, 나도 모르게 귓바퀴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부드러움에 함락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실들마저도 털어놓고야
만다.

“제 꿈에 나온 세나 씨가 그 책에 무언가를 적는 걸 봤어요. 개꿈이겠지 했는데. 실제로


찾아온 세나 씨의 방에 정말로 그 책이 있었어요. 표지가 붉은색인 책. 혹시 요한 씨도 그
책을 아세요?”

망설였던 게 무색할 정도로 말은 술술 흘러나왔다.

“표지가 붉은 책이라.”

요한은 잠자코 생각을 했다.

“잘 모르겠어. 그런 게 있었는지도…….”

그러다 그는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덧대었다.

“이틀 전 밤에, 네가 떨어뜨렸던 책이 그거였던 건가?”

“맞아요. 그때 확인하려고 했는데, 당신에게 때마침 들켜서.”

“그렇다면 이틀 전까진 분명 있었다는 거군.”

요한은 내 어깨를 잡았던 손을 물리며, 매끈한 제 턱을 문질렀다.

“이상해. 세나의 방은 다른 사람의 손길이 닿는 게 싫어서, 사용인들에게도 청소를 맡기지


않거든. 내가 관리하고 나만 들어온단 말이야.”

“그럼 요한 씨는 이틀 사이에 이곳으로 온 적이 있었어요?”

나는 걷힌 커튼을 흘긋 바라보며 물었다.

요한은 대답했다.

“아니.”

사용인들도 들어오지 않는 세나의 방. 유일한 방문자인 요한은 지난 이틀 사이에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걷혀 있었던 커튼을 다시 친 이는 누구란 말인가.

또 다른 방문객이 있었던 것일까?

“……다시 한번 더 찾아보지.”

요한은 저도 합세해서 나와 함께 그 책을 찾기 시작했다. 이번엔 책장에만 그치지 않고, 방


안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끝내 그 책을 찾을 수 없었다.

정말로 이틀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없네요.”

고대했던 것만큼이나 실망이 컸다. 어쩐지 일이 너무 잘 풀린다 싶더라니 결국엔 이 사달이


나는구나 싶다.

나는 휘청거리는 몸으로 방 안을 배회하고 있던 요한에게 말을 건네었다.

“이곳이 세나 씨의 방인 걸 알고 있는 다른 사람도 있어요?”

“공작저에 오래 일했던 사용인들은 알고 있지. 그리고…….”

그는 배회하던 걸음을 멈추며 제 말을 덧대었다.

“바비도 알아.”

그는 바비라는 이름을 내뱉으며 인상을 작게 구겼다. 무의식중에 나온 적대감 같은 것이었다.

배가 다르기는 하나, 형제임에는 분명할 텐데. 그들은 어째서 서로를 그토록 싫어하는 걸까.

“바비도 어릴 때부터 곧잘 세나와 함께 놀았었으니까.”

“바비가 가져간 걸까요?”

“그 책을? 이유랄 게 없는데……. 뭐, 요즘 들어 쥐새끼처럼 공작저에 자주 오가는 것 같기는


했지만.”

바비가 가져갈 이유가 없다, 라.

“바비에게도 그 책을 가져가야 할 일이 생겼고, 그 시기가 저와 우연히 겹친 게 아닐까요?”

나는 무심코 그리 뱉고선 생각했다. 도대체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길래 바비가 들고 간 걸까.

물론 바비가 들고 갔으리라고 확정 짓는 것은 아니다. 이건 단순한 가정이었다. 요컨대 바비가


그 책을 들고 갔다는 가정하에.

사실 그 책엔 별다른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꿈에서 본 것을 바탕으로 추정해


보았을 때, 그 책은 세나의 일기일 가능성이 높았다.

일기. 일기……. 일기에 보통 엄청 중요한 일을 적던가?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사실 바비에게 있어 그 책 속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책을 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는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 책을 가져간 게 아닐까. 공작저에 머물게 된 내가 그 책을 보지 않기를 바랐다면.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요한의 한마디에 나는 미루어 짐작하던 것을 멈추며 그를 응시했다.

“그 책이 잃어버린 네 기억과 관련이 있는 건가?”

그 책이 잃어버린 내 기억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바비가 그것을 가져간 거라면.

나는 요한에게 대답했다.

“어쩌면요.”

바비는 내 기억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 책을 가져간 거라면.

물론 이것은 나의 가정일 뿐이었다.

* * *

병간호의 기본은 무엇인가.

“윽, 물이 너무 많잖아.”

“…….”

단언하건대, 그것은 인내다.

“네, 네. 거지가 지금 수건을 조금 더 짭니다.”

나는 요한의 이마 위에 올려진 수건을 잡아채 신경질적으로 수건을 짰다. 물방울이 후드득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물이 조금 많기는 했네.

나는 흘깃 요한을 보았다.

침대 위에 얌전히 누워 나만을 바라보는 그의 붉은 얼굴이 좀 보기 좋았다. 처연해 보이기도


하고 수줍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의 보기 좋은 얼굴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즉 그의 병간호를 때려치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침대의 매트 끝 쪽에 앉아 있던 엉덩이를 슬쩍 움직여,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건


절대로 붉어진 그의 얼굴을 더욱 가까이 보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너무 침대 끝에 앉아 있던 것 같아서. 침대 밑으로 떨어질 것 같아서.

괜스레 뜨끔했다.

“제 간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벨라에게 시키세요. 저는 누굴 간호해 본 적이 없어서 솜씨가


서툴답니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소득 없이 세나의 방을 나온 뒤, 내 방으로 가려던 찰나 나를 붙잡았던 요한이었다. ‘나 많이


아파.’ 어울리지 않는 투정을 부린 요한은 기어코 내게 제 간호를 시켰다.

사실 거기엔 강압적인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의 투정에 넘어간 것은 내 마음이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간호랍시고 하는 것은 뜨거운 그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 주는 것뿐이었다. 이런


허술한 간호라도 바란 요한의 의중을 잘 이해할 수 없다.

연차를 주는 대신에 나를 마음껏 부려먹을 작정인 건가.

그렇게 요한의 이마 위에 다시 물수건을 올려 두려던 찰나, 그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나, 거지라고 안 했는데.”

“네?”

“거지라고 안 했다고.”

“그런데요?”

요한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지만 곧바로 털어놓지 않았다.

“똑똑.”

나는 요한의 이마 위를 손으로 가볍게 노크하며 말했다.

“거지가 요청합니다.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무, 무슨 짓이야. 이게.”

요한은 이미 내 손이 떼어진 제 이마를 벅벅 문질렀다. 그의 양 뺨이 더욱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큭큭.”

“……웃지 마.”

“그래요, 거지가 웃음을 멈춥니다.”

“아.”

그는 짜증스러운 탄식을 내뱉었다.

“왜 그래요, 도대체?”

“거지라고 안 했다고.”
“알아요.”

“……그러니까. 거지가 대답한다니 뭐니 하는 말. 하지 마.”

요한은 내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조금 내리깔며 말했다.

“버릇처럼 한 번씩 내뱉는 말은 나도 어쩔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노력할게.”

갑자기 왜? 줄곧 거지라고 잘 불렀으면서. 나는 그의 태도의 변화가 의아했다.

요한은 내가 의아해할 것을 짐작했다는 듯이 변명했다.

“착각하지 마. 조슈아가 계속해서 좋지 않은 단어를 듣는다는 사실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이니까.”

“네. 아무렴요.”

“웃……지 말라고 했을 텐데.”

“큭큭.”

하지만 웃음이 나오는 걸 어떡해. 나는 키득거리며 요한의 이마 위에 물수건을 올려놓았다.

노크 없이 방문이 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노크 없이 불쑥 들어올 이라면, 딱 하나 있었다.

나는 미소가 드리워진 얼굴로 예의 없는 방문객을 바라보았다.

“엄마, 아빠!”

오전 수업을 듣고 돌아온 조슈아였다. 아이는 쪼르륵 뛰어와 단번에 침대 위까지 올라왔다.


조슈아는 가지런히 누워 있는 요한을 한 번 보았다가, 나를 한 번 보고선 킥킥거렸다.

……얘야, 뭘 생각하며 웃는 거니.

나는 조슈아가 낯부끄러운 소리를 하기 전에 선수 쳐서 먼저 말했다.

“조슈아. 수업은 잘 듣고 왔어?”

하나 조슈아는 내가 선수를 친 것이 무색해지게 아침에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응! 엄마. 나는 여동생이 좋아. 조슈아는 동생이 생기면 엄청 잘해 줄 거야.”

“그,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뽀뽀하면 아이가 생긴다고 했어.”

역시나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슈아는 얼굴을 붉혔다. 나는 아이라는 말에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누, 누, 누가 그런 걸 가르쳐 줬어?”


“욘두 선생님이!”

그 선생이 진짜!

나는 진심으로 욘두인지 요 녀석일지 모를 그 선생의 상판대기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에도 조슈아의 물음은 이어지고 있었다.

“아빤 여동생이 좋아? 남동생이 좋아?”

조슈아는 요한의 얼굴 옆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저런 질문에 요한이 대답할 리가 없지. 그래, 밥맛 당신이 나를 대신해서 아이를 잘 타일러 줘


…….

“……아빠는 여자아이.”

……는 개뿔.

요한은 귀를 붉히며 대답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매우 솔직한 진심을.

“당신은 그걸 왜 대답해요!”

“우리 조쉬가 묻는데 당연히 대답해 줘야지. 흠흠.”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곤 지난날 요한이 했던 대로 푸념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 부자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제 28 화. 요한과 닮은 남자, 욘두

조슈아는 작고 귀여운 손을 내 손등 위에 조심스레 올려다 놓으며 말했다. 내게 향한 아이의


눈동자엔 총명한 기운이 가득했다.

“좋아. 그럼 조슈아 동생은 여동생으로 확정!”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조, 조슈아. 그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더군다나 내가 요한과 함께 네 동생을 만들 수는 없어.

순간 내 머릿속이 야릇한 생각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두운 밤. 요한과 단둘인 침대 위. 웬일인지 요한의 흰 셔츠의 단추가 평소보다도 훨씬 많이
풀어져 있었다. 풀어진 단추 사이로 희고 매끈한 그의 살갗이 뜨문뜨문 보였다.

창밖으로 내비치는 달빛에 따라 그늘지는 그의 단단한 몸이 아주 보기 좋다.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그의 벨트 위에 손을 올린다…….

아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나는 상상하던 것을 멈추기 위해 내 뺨을 작게 내려쳤다. 하나 머릿속에 한번 드리운 야한


상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되레 더더욱 구체적인 상상이 되어 내 머릿속을 옥좼다.

그런데 상상이 왜 이렇게 자세하지.

요한의 섹시한 쇄골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의 귀 뒤에 숨겨진 작은 점의


위치마저도 나는 모조리 알고 있었다. 꼭 이전에 실제로 본 것처럼.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 상상만으로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후덥지근한 열기가 얼굴 위까지도


올라오기에 이른다.

지금 내 얼굴, 완전 붉어졌을 것 같은데.

“엄마는……. 여동생이 싫어?”

조슈아는 자못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조슈아에게 잡히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대답했다.

“아니. 조슈아의 여동생이 생기는 일은 아주 좋은 일이야. 하지만…….”

나는 네 진짜 엄마가 아니기 때문에, 네 동생을 만들어 줄 수 없어.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며 나는 말끝을 흐렸다.

애석하게도 조슈아는 내가 동의한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 신이 난 채로 소리쳤다.

“와! 그럼 엄마도 동의한 거다! 사실 사교 모임에 갈 때마다 친구들이 동생 자랑을 엄청 해서,


조슈아는 그게 정말 부러웠어. 조슈아도 동생 자랑하고 싶은데……. 꼭 여동생이 아니라도
좋아. 조슈아는 훌륭한 형이 될 자신도 있어!”

“…….”

조슈아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해.

요한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그는 이마에 올려진 물수건이 들썩거릴


정도로 웃고 있었다.

“풉, 큭큭.”

부드럽게 굽은 그의 눈매가 아름답게 보였다. 나는 웃고 있던 그에게서 한동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요한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눈매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왠지 모르게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의 눈을 보았다간 더 더워질 것 같아서. 그와 관련된 야릇한 상상을 한 여파였다.

“웃지 말고, 저 좀 도와줘요!”

나는 그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요한은 조슈아를 중재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말했다.

“조쉬. 동생 이름은 뭐가 좋으니?”

“조슈아는 동생만 생긴다면 뭐든 좋아!”

“…….”

아무래도 계약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이건 유모가 아니라 진짜 엄마 대행 같잖아. 요망한 부자사기단 같으니라고.

* * *

얼마 뒤, 요한은 한참이나 나를 곤란하게 했던 조슈아를 돌려보냈다.

‘조쉬. 우린 이제 네 동생에 대한 것을 상의해야 하니까, 방으로 돌아갈래?’ ……라는 아주


낯부끄러운 말과 함께.

조슈아는 홀로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다 작게 키득거리며 돌아갔다.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임에 분명하다.

나는 조슈아가 나가자마자 요한에게 따졌다.

“조슈아의 동생에 대해서 상의하긴 뭘 상의해요! 아주 그냥 사람을 얼마나 놀려 먹으려고.”

“미안. 그렇게 말해야지 조쉬가 군말 없이 돌아갈 것 같아서.”

“아니……. 사과할 일까지는 아닌데.”

요한의 입에서 쉬이 ‘미안’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게 잘 믿기지 않았다.

감기 때문이었을까. 오늘따라 그가 유독 유하게 구는 것만 같았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진다는데, 그게 헛소리는 아닌가 보다.

“사실은 조쉬를 보내 놓고, 너랑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어. 콜록, 콜록.”

요한은 손을 들어 올려 제 입가를 가렸다. 잔기침을 계속해대는 그가 약간은 염려가 되었다.

말을 계속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나는 얼른 대화를 끝내기 위해서 그에게 되물었다.


“무슨 얘기요?”

“네 꿈.”

“제 꿈이라면……. 세나 씨와 관련된 꿈을 말하는 거죠?”

요한은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어. 세나와 관련된 꿈을 꾼 적이 더 있었나?”

세나와 관련된 꿈을 꾼 적은 물론 더 있었다. 횟수로 따지자면 총 세 번 정도.

첫 번째 꿈은 어느 복도에서 마주친 금발의 남자가 나를 ‘세나’라고 부르는 꿈이었고, 두


번째 꿈은 어느 나무의 밑동에 어린 세나와 요한, 바비가 놀고 있던 꿈이었고,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꿈은 세나의 방과 관련된 꿈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을지 말지에 대해 고민을 하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요한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당사자인 나조차도 내가 왜 세나와 관련된 꿈을


꾸는지 알지 못했다. 내게도 확실하지 않은 일을 그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요한에게 세나와 관련된 꿈을 꾸었노라고 털어놓은 터였다.

그는 벌써 혼란스러워진 상태였고, 그렇기에 다른 꿈에 대해서 털어놓아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하지 마세요. 그냥 별스러울 게 없는 꿈을 꾼 것뿐이니까. 어린 당신과 세나와 바비가


공작저에 있던 기둥이 큰 나무……. 그 밑에서 옹기종기 떠들던 모습을 꿈에서 봤어요. 물론
그 꿈은 제가 만들어 낸 상상일 수도 있어요.”

요한은 내 말을 집중해서 듣더니, 심각해진 얼굴로 답했다.

“상상……, 아니야.”

“네?”

“그 나무. 우리에겐 꽤나 의미가 깊은 나무거든. 어렸을 때, 그 느티나무 밑에서 줄곧


놀았었어.”

그럼 내가 꾼 꿈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란 말이야?

나는 자못 놀랐지만 놀란 티를 내지 않았다. 하나 요한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진 얼굴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내 얼굴에 닿은 그의


시선이 뜨거웠다.

“넌 왜 세나와 관련된 꿈을 꾼 걸까? 세나와 연관이 있어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제가 누구였는지조차.”


요한은 이마에 올려져 있던 물수건을 내리며 말했다.

“네 기억이 돌아오는 게 두렵다고 했지? 하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잖아. 비록 넌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이 되었지만, 사실 잊고 있었던 기억에 행복한 기억이 더 많다면? 네가 잊고
있었던 게 아주 소중한 기억이었다면?”

요한이 말한 부분은 내가 간과했던 부분이었다.

나는 잊힌 내 기억이 끔찍할 것이라고 확정지어 생각했을 뿐. 그 속에 행복한 기억이 더 많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네가 왜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됐는지. 피하지 말고 맞서 보자.”

“요한 씨.”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요한은 내 부름에 답하듯 말했다.

“그래도 네가 두렵다면.”

요한의 손이 슬금슬금 다가와 내 손을 부드럽게 쥐어 잡았다.

언제고 내가 손을 빼낼 수 있을 만큼 가볍게 말아 쥔 그의 손이 뜨거웠다. 그 손을 뿌리칠


수도 있었지만, 뿌리치고 싶은 마음은 일절 들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오랫동안, 그의 손을 잡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내가 네 옆에 있어 줄게.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잖아. 네게


닥칠 두려움을 내게 나눠 줘. 반, 아니, 그 전부를 내게 줘도 상관없어.”

“그렇게까지 해서 당신이 얻는 게 뭐예요?”

“…….”

“역시나……. 세나 씨 때문이죠?”

그는 고민 없이 곧장 대답했다.

“부정하지 않을게. 하지만 오로지 세나만을 위한 거라고 말할 순 없어. 지금 내 눈앞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건, 너니까.”

“…….”

“머리에 열이 올라서, 굉장히 두서없이 말했군.”

머리 아프다. 요한은 속삭이듯이 말하며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벽 어귀를 넌지시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우수에 젖어 보였다.

‘그래도 네가 두렵다면, 내가 네 옆에 있어 줄게.’


다정하고도 또 다정한 그의 말이 내 귓전에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심장은 평상시의 박동을
벗어나 엄청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난 도대체 뭘 기대하길래, 고백이라도 받은 것처럼 설레고 있는 걸까.

“많이 아픈가 봐요. 자꾸 헛소리하고.”

나는 툴툴거리며 그가 내팽개친 수건을 집어 들었다. 팔을 뻗어 침대 옆, 협탁 위에 있던 물을


담은 그릇에 대충 물을 적셔 그의 이마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요한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어.”

“더 아팠으면 좋겠네요.”

“진심인가? 더 아프면 헛소리도 더욱 심해질 텐데.”

동시에 요한의 시선이 내 쪽으로 재차 돌아오며, 그는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는 픽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었다.

“그럼 네게 또다시 입 맞춰 달라고 할지도 모르겠군.”

“……!”

“잘게.”

그는 내가 놀랐다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눈을 감았다. 자는 척하는 줄 알았건만, 그는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진짜로 잠들었는지 확인하려고 콧잔등을 슬쩍 건드려 보기도 했다. 하나 정말로 잠들었더라.

“하.”

나는 허탈한 소리를 내며 그의 메마른 뺨을 톡톡 건드렸다. 잠든 그에게선 이렇다 할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요한.”

이봐요, 대답해 봐요. 당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내가 누군지.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 입을 맞춰 달라고 한 건지.

* * *
나는 요한의 방을 나서며 새삼 깨달았다.

“이곳에 머문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는구나.”

잘 몰랐는데, 막상 깨닫고 나니 시간이 꽤 많이 흘러 있었다. 이곳에 언제까지 머물러야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하던 순간 내 등 뒤에서 구두 소리 하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구두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몸을 틀었다. 그러자 단정한 구두 소리의


장본인이 보였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요한……?”

복도 끝에서 내 쪽으로 걸어오는 남자는 설핏 요한을 떠올리게 하는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비슷한 체격, 검은 머리카락. 스치듯이 본다면 요한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저 남자가 요한일 리는 없었다. 아픈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으니까.

이윽고 내가 서 있던 곳까지 걸어온 남자는 역시나 요한이 아니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요한과
닮았다는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이목구비가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생긴 걸로만 따지자면 요한이 훨씬 더 잘생겼다. 마주한 남자도 충분히 미남이기는 했지만,


요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나는 무심결에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는 놀랍게도 요한과 같은 눈동자 색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진한 검정색. 다만 요한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남자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안경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요한보다도 훨씬 더 차분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공작저에서 처음 보는 남자이기도 했다.

남자는 제게 닿은 내 시선을 느낀 듯이 나를 지나쳐 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걸음을 멈춘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엇!”

남자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내게 손가락질을 했고, 나는 그를 따라 했다.

“엇!”

삿대질에는 삿대질이지. 우리는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는 희한한 광경을 그려 냈다.

다른 사용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남자 또한 내 얼굴을 온전히 보고선 놀란 듯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의미하는 바는 그러했다. 그는 내게서 세나를 떠올린


것이리라. 나와 닮은 얼굴을 가진 그녀를.
남자는 놀랐던 얼굴을 애써 진정시키고선 말했다.

“혹시 조슈아 님의 유모님이십니까? 저택 내에 나돌던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닮으셨을 줄은……. 아아, 손가락질…….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저도
그만.”

남자는 손가락질했던 손을 황급히 갈무리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를 따라


손가락질했던 손을 물렸다.

“맞아요. 저는 조슈아의 유모인 리나라고 해요. 괜찮아요. 다들 저를 보고선 놀라곤 하니까.


저, 그런데 누구신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욘두라고 합니다. 조슈아 님의 선생님이죠.”

남자는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내려다보았다. 요한이나 바비의 희고 예쁜 손과는 다르게 약간은 투박한


손이었다.

나는 그의 손끝을 살짝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욘두 선생님이라.”

욘두? 설마 매일같이 조슈아에게 이상한 것을 가르치던 그 선생?

나는 다시금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엇, 당신! 딱 걸렸어!”

“네? 저요?”

“당신, 도대체 조슈아에게 뭘 가르치는 거예요?”

부부는 함께 잔다느니, 남자들의 싸움엔 끼면 안 된다느니, 심지어 뽀뽀하면 아이가


생긴다느니. 그가 조슈아에게 가르친 듯한 해괴한 말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욘두 선생은 쓰고 있던 안경을 올려 쓰며 급작스럽게 진지한 얼굴을 했다. 내게 향한 그의


검은 눈동자에 냉정한 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설마……. 그런 해괴한 말들을 가르친 데에는 나로선 알 수 없는 지대한 이유가 있던 걸까?

욘두는 그냥 선생도 아니고, 무려 공작가의 아기 공자님의 선생님이다. 사실 그에겐 엄청난 큰


뜻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긴장한 채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는 조슈아 님께 인류애적이고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것을 가르칩니다.”

“컥!”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당신이 가르친 건 전혀 도덕적이고 사회적이지 않다고!

큰 뜻이니 뭐니 하며 긴장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그사이 그는 한술 더 떠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어 말했다.

“왜요? 조슈아 님이 제 칭찬이라도 했습니까? 하하, 이거 참 부끄럽네요.”

“…….”

이거 참,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겠네.

“욘두 쌤. 지금 시간 있어요?”

“네, 조슈아 님의 수업이 끝나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시간 좀 내 줄래요? 당신에게 해야 할 얘기가 있어요.”

“제, 제게 말입니까?”

나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욘두는 제 뒷머리를 작게 긁적거리며 아주 수줍게 대답했다.

“하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이렇게 따로 시간을 내서 칭찬을 해 주시려고


하다니요. 이 욘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당신, 진짜로 몸을 가눌 수 없게 만들어 줘야 하는 걸까?

나는 욘두에게 따라오라는 듯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내 방 쪽으로 걸어갔다. 욘두는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야단칠 내 의중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는 듯이 그는 아주 기쁜 얼굴이었다.

어쩌다 욘두와 마주 걷게 된 #내게 ‘그것’이 보인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것의 정체는 욘두의 한쪽 귀에 걸려 있던 작은 귀걸이였다. 그 귀걸이는 그가 걸을 때마다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끝에 에메랄드빛의 보석이 달린 저 귀걸이.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모양의 귀걸이를 낀 적이 있었던가.

내가 그의 귀걸이를 빤히 바라보자, 욘두가 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귀걸이. 예쁘죠?”

 
제 29 화. 리나, 먹여 줘

나는 훔쳐보던 것을 딱 들킨 사람처럼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래요.”

“다음에 비슷한 걸로 하나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됐어요. 뇌물은 사양이에요.”

나는 황급하게 에메랄드빛 귀걸이에서 눈을 뗐지만, 내 눈앞엔 그 귀걸이의 잔상이 오랫동안


맴돌았다. 왜 이렇게 눈에 밟히는 걸까.

나는 귀걸이에 대한 쓸데없는 생각을 접어 두고선 방문을 열었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일단 욘두를 소파에 앉히고선 나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요한처럼 턱을 오만하게 들어 올리고, 다리를 요염하게 꼬고 더해 팔짱까지 끼자, 나는 대단히


뿔이 난 학부모가 된 것만 같았다.

욘두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듯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저를 칭찬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

나, 칭찬하려는 거 아닌데.

“칭찬하려는 거 아니에요. 기대하지 마세요.”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는 눈에 띄게 실망했다. 고개를 조금 떨군 그의 얼굴이 시무룩해 보이기만 했다. 좀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고. 안 돼, 마음 약해지지 말자.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에 말했다.

“욘두 선생님. 당신이 조슈아에게 부부는 같이 잔다는 걸 가르쳤어요?”

나는 내 물음에 욘두가 말을 더듬으면서 당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놀란 얼굴로 ‘죄송합니다,


제가 가르쳐선 안 될 것을 가르친 것 같습니다.’라고 넙죽 사과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욘두는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려 제법 진지하게 답했다. 그는


더듬거리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저 침착했을 뿐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인륜대사인 결혼을 한 부부는 당연히 같이 자야지요. 자고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싸우더라도, 설령 조금 밉더라도, 부부는 잠자리를
같이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배우자가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을 한 거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

뭐야, 왜 이렇게 말을 잘해.

다섯 살 꼬맹이에게 왜 그런 걸 가르쳤냐고 윽박을 지르려 했건만, 도리어 내가 설득당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욘두가 가르친 이상한 말이 좀 많았어야지.

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며 이어 말했다.

“그럼 뽀뽀하면 아이가 생긴다는 말도 당신이 가르친 거예요?”

내 말에 욘두의 얼굴이 와락 붉어졌다. 그는 머쓱한 듯이 제 뺨을 긁적이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 조슈아 님이 갑자기 찾아오셔서 부부가 뽀뽀하면 아이가 생기는 거냐고 자꾸


물어보시는 바람에…….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지만, 나중에 조금 더 자세히 제대로 알려
줄 생각입니다. 대처가 허술했다는 거,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조슈아 님은 지금 너무
어리기도 하고……. 뽀뽀하면 아이가 생기는 거라고 이미 확정을 짓고서 제게 물은 것이라.
흠흠.”

……뭐야. 내가 할 말이 없는데?

욘두가 뽀뽀하면 아이가 생긴다고 가르친 게 아니라, 되레 조슈아가 그 사실에 수긍하라고


욘두에게 강요한 거니까. 조슈아 이 녀석은 도대체가.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욘두를 노려보았다. 왠지 모르게 욘두에게 말려들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욘두는 내 눈빛에 서린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 좋은 미소를 연신 짓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돌연 질문을 건네었다.

“조슈아 님, 참 사랑스럽죠?”

“네. 제가 진짜 엄마는 아니지만, 가끔 진짜 엄마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사랑스러워요.”

딱히 곧이곧대로 대답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대화의 주도권을 뺏긴


기분이었다.

“그렇죠. 저도 종종 생각합니다. 조슈아 님이 제 아이였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저……,


유모님을 만난다면 꼭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는데. 초면에 물어봐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뭔데요?”

욘두는 내 눈치를 조금 봐가며 물었다.

“유모님은 진짜로 거지였습니까?”


“……네?”

아서라, 이런 질문일 줄이야. 진짜 거지였냐는 질문은 벨라에게 들었던 질문이기도 했다.

내가 이상한 표정을 짓자, 욘두는 저가 더 당황한 것인지 얼굴이 훨씬 더 붉어지기에 이르렀다.


얼굴을 붉히는 그의 모습은 묘하게도 요한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하하.”

“…….”

“실은 공작저의 다른 사용인들도 모두 궁금해하고 있답니다. 저택에 새로 온 유모님에 대해서.


이곳에 오기 전까지 어디서 뭘 했는지, 어떤 사람인지.”

나를 보던 욘두의 눈동자 속에서 날카로운 빛이 일순 생겼다 사라졌다. 붉어진 얼굴 속에


새겨진 날카로운 눈빛이라. 좀처럼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일까?

“저를 궁금해한다, 라.”

욘두는 희미한 미소를 드리운 채로 고개를 옅게 끄덕였다. 빤히 들여다본 그의 얼굴에선


냉소적인 기운은 전혀 없었다. 역시나 조금 전에는 내가 잘못 보았나 보다.

나는 그렇게 확정 짓고선 생각했다. 내가 공작저의 사용인이었어도 충분히 나를 궁금해할 것


같다고.

꾀죄죄한 몰골로 공작저에 들어와 보란 듯이 요한과 조슈아와 허물없이 지내는 여자. 그


여자는 심지어 공작부인인 세나와 아주 닮아 있다. 구설이 없을 수 없는 논제였다.

나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아 잘 몰랐지만, 어쩌면 저택 내엔 이미 나에 대한 구설들이


즐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제 와 구설을 알았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뒤에서 몰래 하는 뒷담화


따위에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해해요. 저 같아도 궁금하겠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래요, 저 거지 맞아요. 뭐,


거지라기보다는 돈이 없었다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이지만. 그래서 이렇게 좋은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게 가끔 믿기지 않을 때가 있기도 해요.”

“거지였을 때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지금 모습이 자연스러운데요?”

“그런가요. 하하.”

하긴 미인 거지의 명성이 어디 가겠어. 나는 기분 좋게 웃다 불현듯이 깨달았다. 나, 욘두를


혼쭐내 주려고 그를 방에 들인 거잖아.

나는 입가에 스민 미소를 거둬들이며, 눈썹을 구겼다.


“자꾸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새는데! 당신, 조슈아에게 다음부터는 이상한 걸 가르치지 마세요.
아이가 자꾸 어린아이답지 않은 말을 하잖아요.”

“어린아이답지 않은 말은 어떤 말입니까?”

“음. 부부가 함께 자야 한다는 말?”

나는 괜스레 낯을 조금 붉히며 대답했다. 나는 결단코 요한과 동침했던 지난밤들을 떠올린 게


아니다. 흠흠.

욘두는 내 말에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유모님! 설마 벌써 요, 요한 님과……!”

“아니에요! 요한과 같은 침대를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요!”

“…….”

서툰 내 거짓말에 욘두는 침묵했다. 나는 그의 눈치를 슬쩍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는 벌써 확정 지어 생각한 듯싶었다.

‘요한 님과 벌써 동침을 하셨군.’ 나를 보는 그의 눈이 내게 그리 말하는 것만 같았다.

……망했군. 나는 내가 거짓말에 매우 서툴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했다. 화제를 먼저 바꾸어


준 것은 다행히도 욘두였다.

그는 다시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을 건네었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말이란 자고로 저희 같은 어른들이 정해둔 틀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맹세할 수 있습니다. 조슈아 님께 사회적 정의에 어긋나는 일을 결단코 가르치지 않았다고.”

욘두는 내가 했던 말에 대해 꽤나 현명하게 대답했다. 아, 역시나 공작가의 도련님의 선생님이


맞구나, 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의 말이 맞았다. 조슈아는 가끔 희한한 말을 하기는 했으나, 그 말은 내가 아이답지 않은


말이라 생각해서 이상했던 것일 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말은 아니었다.

“욘두 쌤. 제가 당신의 자질을 좀, 아니, 꽤 많이 의심하고 있었어요.”

“괜찮습니다. 유모님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해야 유모님께 믿음을 살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의 자질을 의심했다는 내 말에도 욘두는 미소를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무언가를


곰곰이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중지와 엄지를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퉁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손에 붉은 장미 한 송이가 생겨났다.
욘두는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 띠어져 있던 미소는 더욱 짙어져 있었다.

“유모님. 저는 제국에 몇 남지 않은 마법사입니다. 마법사는 범인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지식과 능력을 가지고 있죠. 이 정도의 이력이라면, 제게 믿음을 조금 주시겠습니까?”

마법사라……. 그런 거 책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 존재하다니. 나는 그가 건네 준


장미를 받아 들며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욘두는 기분이 좋아진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믿음이 조금이라도 생겨서 다행입니다.”

* * *

꼬르륵. 내 배꼽시계는 그 어떤 시계보다도 정확했다. 나는 배 속에서 외치는 아우성을 들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저녁 시간이다.”

그간 식사는 대개 내 방이 아니면 식당에서 했었는데, 조슈아나 요한과 동석일 때가 많았다.


우리는 진짜 가족은 아니었지만, 진짜 가족처럼 단란하게 식사를 하곤 했다.

요한은 식사 때마다 ‘편식은 도대체 왜 하는 거지?’라든지, ‘채소를 남기지 말도록.’라든지


엄한 부모님이 할 법한 온갖 잔소리를 하며 나를 닦달했다. 그는 잔소리를 하는 게 질리지도
않나 보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내가 실제로 편식을 하기는 했다. 나는 육식주의자였고, 채소라면


질색이었으니까. 윽, 채소의 초록색을 떠올리자마자 내 인상은 절로 찌푸려졌다.

“그런데 오늘은 밥맛이 아프니까, 조슈아랑 둘이서만 먹어야 하나?”

밥맛은 이제 좀 괜찮아졌으려나?

딱히 요한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고 골골대던 그가 눈에 밟히는 건 절대로 아니었지만,


깨달았을 때, 나는 요한의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진짜로 걱정…… 하는 건가.”

나는 노크를 하려고 손을 올렸다가도 선뜻 두드리지 못하며 주저했다. 찾아갔다가 괜스레


요한에게 오해를 살 것 같아서.
제 걱정을 했냐느니 뭐니 하는 그의 놀림을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결국 노크를 해
버리고야 만다.

똑똑.

“요한 씨, 안에 계세요?”

안쪽에선 메마른 소리가 들려왔다.

“……어.”

“들어가도 돼요?”

“어.”

요한은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지만, 요한은 등불 하나 켜지 않은 채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그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갔다. 마주한 그의 얼굴을 보고선 나는


또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으, 눈부셔. 아픈 그가 왜 이렇게 잘생겨 보이는 거지. 어두운 사위 사이로 요한의 얼굴이


눈에 띄게 빛이 나고 있었다.

나 혹시, 채소를 먹지 않은 여파로 시각이 이상해진 게 아닐까.

“용건이 있나?”

“아뇨, 꼭 그런 건 아닌데.”

요한은 우리가 꼭 용건이 있어야 만나는 사이처럼 말했다. 그러자 묘하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말에 틀린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갈까요?”

“……됐어. 이미 들어왔으면서 나가긴 뭘 또 나가.”

“나가라는 듯이 말한 게 누군데.”

“콜록, 콜록.”

요한은 대답 대신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며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는


것처럼 보였다.

허공을 내젓던 그의 손은 까딱거리기에 이르렀다. 이번엔 아마 제게 가까이 오라는 신호인 것


같았다.
나는 침대 맡까지 다가가 그 언저리에 앉으며 요한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아침에
보았던 것보다도 훨씬 더 좋아져 있었다. 열이 좀 내렸나 보다.

“약은요?”

“먹었어.”

“머리는, 아파요?”

“아직 아파.”

“저녁은요?”

“저녁은…….”

요한은 말을 잇지 못했다. 방문이 또다시 벌컥 열리며 고물고물한 생명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아빠! 조슈아와 벨라가 죽을 가져왔어.”

조슈아의 뒤를 따라 벨라도 방으로 들어섰다.

“주인님, 아프셔도 식사는 하셔야 돼요.”

두 사람은 그리 말하면서, 요한의 방에 먼저 방문한 나를 발견하고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리나 님도 계셨군요. 리나 님 식사도 가져다드리려던 참이었는데.”

“벨라, 안녕하세요. 조슈아도 안녕.”

내 인사에 벨라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조슈아 또한 ‘엄마! 엄마!’라는 말을 노래 부르듯이 내뱉으며 잰걸음으로 다가와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내 옆에 앉은 아이는 나를 보며 연신 방긋거렸다.

“그럼 리나 님. 제가 이곳으로 리나 님 식사도 가지고 올 테니까, 대신 리나 님께 이것 좀


부탁해도 될까요?”

“네? 뭘요?”

“이건 주인님의 저녁 식사예요.”

벨라는 내 무릎 위에 트레이 하나를 올려놓았다. 트레이 위에는 갓 끓여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죽이 있었다.

주인님의 식사라면 요한의 식사인가? 이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지?

“이걸 어떻게 해야 해요?”

벨라는 방금 전보다도 훨씬 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모쪼록 주인님의 식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벨, 벨라!”

그녀는 내가 무어라 말을 더 하기 전에 꽁무니를 뺐다. 나는 무릎 위에 올려진 죽과 요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요한은 ‘흠흠’ 하는 헛기침 소리와 함께 나지막이 말을 건네었다.

“벨라가 식사를 부탁한다고 하는군.”

“그래서요?”

설마 죽을 먹여 달라는 건 아니겠지.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조슈아가 내 드레스 자락을 흔들며 말했다.

“엄마도 참! 아빠는 오늘 아프니까, 엄마가 아빠한테 죽을 먹여 주자!”

“조, 조슈아.”

“어서, 어서!”

조슈아는 머뭇거리는 내가 답답하다는 듯이 내 손가락에 직접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나는 지난날에도 그랬던 것처럼 요한이 조슈아를 말려 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말리기는커녕


입술을 뭉그적거렸을 뿐이었다. 마치 저도 내가 먹여 주길 바라는 것처럼.

뻔뻔해도 그렇게 뻔뻔할 수가 없었다.

“…….”

나는 조슈아가 쥐여 준 숟가락을 죽에 담근 채로 고민했다. 이걸 먹여 줘, 말아.

죽을 보던 시선을 들어 올려 요한을 다시금 응시했을 때, 우리의 눈은 단번에 마주쳤다.


요한은 나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붉은 혀를 끄집어내어 제 입술을 핥아 냈다.

상기된 그의 얼굴, 제 혀를 쓰는 느른한 붉은 혀, 이윽고 그가 아랫입술을 조금 깨물자 나는


마음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젠장, 왜 이렇게 섹시해 보이지.

“리나.”

그는 제법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자연스럽게 불렀다.

“먹여 줘.”

나도 모르게 ‘네, 거지가 당장 떠먹여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뻔한 걸 겨우 참아 낸다.


나는 까닭 없이 버석해진 입 안을 느끼며 끝내 죽을 떴다. 홀렸어, 홀린 게 틀림없어.

나는 요한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숟가락을 들이대었다. 숟가락을 쥔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요한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퉁명스러운 한마디를 툭 뱉어 냈다.

“혹시 진짜로 죽을병에 걸렸어요?”

태도가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잖아. 왜 갑자기 리나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예쁜 미소를 짓는


건데.

꼭 당신이 내게 다른 마음을 가지게 된 것 같잖아. 나만 당신에게 심장이 떨리는 게 아닌 것


같잖아. 당신도 나와 같은 설렘을 느꼈을 거라고 착각하고 싶잖아.

“…….”

요한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돌연 진지해진 얼굴을 했을 뿐이었다. 진지해진


그의 얼굴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든 것은 나였다.

장난스럽게 물은 건데……. 설마 진짜로 앓고 있는 병이 있었던 걸까?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을 한 요한의 입술이 열리기 시작했다.

제 30 화. 가주에게 며느리로 점쳐진 아이, 세나

“넌……. 평소에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컥.”

요한이 미간을 가느다랗게 찌푸렸다. 긴장했던 게 무색할 정도의 김이 빠지는 대답이었다.

“아니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길래.”

“쯧쯧.”

요한은 허무맹랑한 내 말에 혀를 찼다. 혀를 차는 요한이 얄미워 보이면서도 나는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진짜로 앓고 있는 병이 없어서.

왜 이렇게 마음이 놓이는지 모르겠다. 나는 얼마만큼이나 요한을 염려했던 걸까.

내 마음을 하나도 모를 요한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죽을 생각은 없고. 죽은 조금 뜨거울 것 같군.”

또 변했어, 당신. 온순하게 웃지 말란 말이야. 한 번씩 변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애예요? 가지가지 하네, 진짜.’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수저 위에 후후 바람을 불어 댔다. 왜 내가 이렇게까지 고분고분해졌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제 됐죠?”

요한은 주저 없이 숟가락을 넙죽 물었다. 오물오물 죽을 먹는 모양새가 꽤 귀여웠다……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고개를 작게 좌우로 내저었다. 이런 생각은 옳지 않아.

그렇게 두 번째로 죽을 떠 그의 입가까지 가져갔을 때, 의아함이 들더라.

“요한 씨. 그런데 당신, 손을 다친 건 아니잖아요.”

“어. 그래서?”

요한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두 번째 숟가락도 넙죽 물었다. 나는 비아냥거리듯이 그에게


말했다.

“손 다친 거 아니니까, 이제 본인이 직접…….”

본인이 직접 먹으라고 말하려던 차였다. 죽을 떠먹여 주는 다정한 우리의 모습에 조슈아가


물개 박수를 쳤다. 마치 역사적인 순간을 본 듯한 모습이었다.

“우와! 엄마, 아빠 너무 로맨틱해!”

너무도 순수하게 좋아하는 조슈아의 모습에 직접 먹으라는 내 말이 쏙 들어갔다.

요한 또한 조슈아가 사랑스러웠던지 입술을 비스듬히 기울여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조슈아의 동생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

우리는 얼굴에 느낌표 하나씩을 띠우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조쉬. 동생이 무척이나 가지고 싶은 거구나.”

요한이 머쓱하게 묻자 돌아온 건 조슈아의 해맑은 대답이었다.

“응!”

“아빠가 미안해.”

“나도 미안.”

네 동생을 만들어 줄 수 없어서 미안해. 어째 어감이 조금 이상한 말이다.

조슈아는 우리들의 사과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귀엽게 갸웃거렸다.

“엄마, 아빠가 왜 조슈아에게 미안해해? 꼭 조슈아 동생을 절대로 만들어 주지 않을 것처럼!


그런 거 아닌 거지? 웅?”
귀여운 조슈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역시나 딱 한 가지뿐이었다.

“조슈아. 미안.”

* * *

기어코 요한에게 죽을 다 먹여 준 나는, 뒤늦게 벨라가 가져다준 식사를 대충 했다.

식사 후 가벼운 티타임은 요한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왜냐, 벨라가 차를 요한의 방으로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자기 전에 무슨 티타임이냐고 토를 조금 달아 봤는데, 요한은 단호하게 대답하더라.

‘자기 전에 꼭 마셔야 할 차가 있어.’

시간이 늦은 관계로 조슈아는 벨라가 데리고 나간 터였다.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게 조슈아의 신조였다. 귀여운 것.

아이는 아마 지금쯤 곤히 잠들었을 것이다.

침대를 벗어나 소파에 마주 앉게 된 요한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차를


마시는 모습을 빤히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차 마시는 거 처음 봐요? 왜 그렇게 빤히 봐요?”

요한은 찻잔을 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차. 남기지 말고 다 마셔.”

“왜요?”

“이전에 벨라에게 부탁했던 건데, 그거……. 어지럼증에 좋은 차거든. 너, 정신을 자주


잃잖아.”

“……!”

요한의 말에 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칠 뻔했다.

맙소사. 지금 나를 걱정한 건가?

“왜, 왜 이래요. 적응 안 되게.”

“이봐, 거지.”

나는 놀랐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잽싸게 대답했다.


“네! 거지가 대답합니다.”

요한은 황당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설마 이래야 적응이 돼?”

“그래요. 이래야 밥맛 씨지.”

“나 원.”

그는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찻잔을 기품 있게 들어 올렸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틀린 말을 했던가.

나도 찻잔을 들어 찻물을 조금 들이켜던 순간, 요한은 뜻밖의 소리를 했다.

“……고마워. 간호해 줘서. 네 덕에 몸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아.”

“풉!”

요한의 입에서 ‘고마워’라는 말이 나오다니. 잘 믿기지 않는 그의 감사 인사에 나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찻물을 질질 흘렸다. 입술 밑으로 흐르는 차가 미적지근했다.

요한은 잘 뻗은 미간을 한껏 구기며 질색했다는 듯이 말했다.

“소름 끼치게 더럽군. 왜 마시던 걸 흘려.”

그는 끔찍한 것을 본 것처럼 눈가마저도 매섭게 찌푸렸다.

아암, 그래. 소름 끼치게 밥맛없는 말투를 써야지 그게 밥맛이지.

나는 소매로 입가를 대충 닦으며 그에게 물었다.

“요한 랭카스터 씨. 혹시 열이 다시 심해진 거 아니에요?”

“아니, 나 이제 멀쩡해.”

“그런데 갑자기 웬 감사 인사예요? 너무 당신답지 않아서 소름이 돋을 정도예요.”

요한은 또다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 나는 네게 도대체 어떤 이미지인 거야?”

“거지가 묻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해도 되는 질문입니까?”

“모쪼록.”

“항상 인상을 쓰고, 성질을 자주 내고, 말도 예쁘게 못 하고, 오만……, 여기까지만


할까요?”
나는 요한의 눈치를 슬쩍 봤다. 요한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대답했다.

“계속해 봐.”

“계속하면 절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시면서.”

“괜찮아. 봐, 나 웃고 있잖아. 인자한 미소.”

인자한 미소는 개뿔. 요한은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올려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입술은 겨우겨우 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눈은 하나도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눈치를 보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더 했다. 이번엔 요한이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
않을 말일 테다.

“오만하기도 하지만……. 그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신분과 직위에 적합한 오만함이라고


생각해요.”

“……어?”

“밥맛 씨가 늘 하는 말처럼, 당신은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 맞으니까. 그 부분은 저도


인정해요.”

“…….”

“그리고 항상 인상 쓰고, 성질을 부려도…… 뭐, 가끔은 친절하더라고요. 답지 않게 사려


깊게 굴고. 마음은 그다지 나쁜 사람이 아닌 거죠?”

“…….”

“그런 걸까요? 본인이 상처 받기 싫어서 더 화를 내고, 타인을 밀어내고, 센 척을 하고.


연약하게 굴었다간 타인에게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니까. 당신은 그런 식으로 강한 척을 한
거죠?”

“…….”

“강한 척, 해도 좋아요. 하지만 스스로를 갉아먹을 정도로 강한 척은 하지 마셨으면 해요.”

아, 나 너무 진지하게 대답했나.

요한은 연거푸 침묵으로 답했다. 그의 얼굴에 띠어져 있던 우스꽝스러운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왜 저렇게까지 말이 술술 나왔는지 잘 모르겠다. 내 입은 내 의지를 벗어난 채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줄줄이 뱉어내더라.

생각해 보니, 그는 태초부터 밥맛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그는 사근사근하고 참 귀여웠다. 조슈아처럼 볼따구니가 얼마나 포동포동하고
말랑했는지 모른다.

잠들어 있던 그의 볼을 몰래 콕콕 찔러 보는 게 내 소소한 행복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공작가의 장자라는 책임감, 가문을 이어 가야 한다는 압박감, 여러 형제 사이에서


제일 잘나야 한다는 강박감……. 그런 것들을 느끼며 자기 자신을 강하게 포장했다.

그는 연약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가시를 두르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밀어냈다.

그의 나약한 마음속으로 파고들 수 있는 허락된 이는 극히 드물었다. 그중에 세나가 있었던


거라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불현듯이 깨닫는다.

내가 어떻게 요한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 거지.

그의 어린 시절을 종종 환각처럼 떠올리기는 했지만, 방금 떠올린 것은 너무나도 디테일 했다.


그것은 아주 많은 경험 속에서 우러나온 생각 같았다.

팔뚝엔 까닭 모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요한이 그답지 않은 짓을 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강렬한 소름이었다.

소름은 한동안, 아니, 아주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 * *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그 꿈을 꾸었다. 기억을 잃은 이래로 지난 5 년간 자주 꾸었던 그 꿈.

밝은 햇살이 스며 있던 방 안, 그리고 이름 모를 남자와 함께 앉아 있던 침대 위, 남자는 지난


꿈들과 다름없이 괜찮겠냐는 물음을 건네었다.

꿈속의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응,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상관없어.’

남자는 나를 껴안으며 내 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꿈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의 촉감과


온기가 선명했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완전히 기대며 생각했다. 넌 도대체 누구야?

우리의 몸은 불시에 떼어지며, 나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어쩐지 시야는


뿌옇게 흐려지며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

남자의 붉은 입술 사이로 누군가의 이름이 흘러나왔을 때, 나는 꿈에서 반강제로 깨어났다.

“……하.”
눈을 뜨자 기억나는 건, 남자의 목소리와 제법 선명하게 보였던 남자의 붉은 입술 두
가지뿐이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다시 들어 보아도 요한의 목소리와 아주 똑같았다. 요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남자의 붉은 입술 또한 요한의 입술과 닮아 있었다. 제 혀를


끄집어내어 관능적으로 입술을 핥던 요한 랭카스터의 입술과.

“설마……. 내가 요한의 입술을 너무 자세히 봐서 꿈에서도 나온 건가?”

나는 스치듯이 닿았던 그의 붉은 입술을 떠올렸다. 조슈아만 아니었다면 곧바로 닿았을 그의


입술이었는데.

그와 키스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나는 요한의 입술을 그만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그의 입술의 붉은빛의 궤적은 오랫동안 내


눈앞에 잔상처럼 맴돌았다. 내가 다시 잠이 들던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 * *

바비는 숨을 죽인 채로 어느 적막한 방에 들어섰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듯한 방 안은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바비는 그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침대 시트 위를 성의 없이 몇 차례 털어 냈다.


그러곤 그 위에 그대로 누워 버린다.

그는 제 목을 죄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 젖히며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공작저에 또 몰래 들어온 걸 요한이 알게 된다면, 당장 쫓아내겠지.”

바비는 기다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했다.

공작저임에도 불구하고 몇 없는 사용인들, 여러 빈 방……. 그런 요소들은 바비가 공작저에


몰래 기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좋은 조건들이었다.

바비는 이런 식으로 곧잘 공작저에 머물다 가곤 했다. 물론 요한이 눈치채면 큰일이 나겠지만.

그는 깁스를 하지 않은 손을 허공에 뻗어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고의로 부러뜨린 팔을


생각보다 꽤 심하게 부러진 것인지 쉽게 낫지 않고 있었다.

뭐, 그래도 상관없었다. 제 팔이 오랜 시간 부러져 있으면 있을수록, 리나의 마음이 불편해질


테니까.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된 리나는 결단코 저를 외면하지 못하리라.

리나의 약한 마음을 이용하는 건 조금 약은 행동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하지만 어쩌겠어. 이렇게라도 해서 리나가 나를 신경 써 줬으면 좋겠는걸.”

리나. 바비는 그녀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요한 몰래 쥐새끼처럼 공작저에 들어온


이유는 역시나 리나 때문이었다.

지난 일 년 내내 저가 고백할 때는 눈길 한번 안 주더니. 취직이니 유모니 하는 핑계로 요한의


공작저로 쉬이 따라온 그녀가 처음에는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를 계속해서 원망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원망보다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마음은 이상한 것이라서, 그녀를 충분히 원망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마냥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되레 이유가 있었겠지, 내가 잠깐 챙겨 주지 않은 사이에 배가 너무 고팠던 거야. 리나는 배가


자주 고픈 여자였으니까. 그렇게 생각될 따름이었다.

리나가 식당에 취직해 꽤 오랜 시간 잘 일하길래 잠깐 찾아가는 횟수를 줄인 게 화근이었다.


그사이에 요한을 만날 게 뭐람.

인연이 기구해도 그렇게 기구할 수가 없었다. 리나가 요한만은 만나지 않기를 바랐는데.

바비는 시름이 깊어진 한숨을 또다시 내쉬었다.

“왜 너조차도 요한에게 마음을 주려고 하냐.”

그는 눈을 감았다.

“마음 아프게.”

리나의 눈길이 요한에게 향했을 때, 마음이 아팠냐고 묻는다면, 그러했다.

심장이 칼로 도려낸 것처럼 아팠냐고 묻는다면, 또 그러했다.

리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사랑해.”

매일같이 리나에게 털어놓았던 진심이 버릇처럼 흘러나온다.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온 닿지 못한 진심이 애달고 슬프다. 어떻게 진심을 전해야 리나가 제


마음을 알아줄까. 자신은 또다시 사랑의 실패자가 되는 걸까?

바비가 바라는 건 단 한 가지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것.

원하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는데, 과거에도 그렇거니와 지금도 그 바람을 이루는 게 너무


힘들다. 그는 다른 것을 바라지 않았다.

부도, 지위도, 명예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데.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이면 되는 건데.”

바비는 며칠 전, 표정을 굳힌 채로 제게 소리를 지르던 요한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복형제라도 일단은 형제인데, 요한은 저를 너무 싫어하더라. 세나의 빈자리를 채우고 싶어서


리나를 데려온 주제에 도리어 제게 소리치더라.

바비는 헛웃음을 흘렸다.

“요한이 나를 언제부터 싫어했더라.”

요한이 처음부터 저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어렸을 때 분명 친하게 지냈었다.

바비가 서자이긴 했지만, 적자인 요한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었다. 되레 아버지보다도


바비를 잘 챙겨 줬었다.

그런 두 사람의 사이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세나’가 랭카스터 가의 저택에 오고 난


후부터였다.

바비는 세나와의 행복했던 과거마저도 오랜만에 상기했다.

오래된 기억이긴 했으나, 그 기억들은 전혀 바스러지지 않은 채로 바비의 머릿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세나가 랭카스터 가의 저택에 처음 왔을 때는 바비가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그 당시 제 아버지(지금은 돌아가신 지 오래다.)는 이상할 정도로 딸아이에 집착을 했었다.


가히 딸을 얻기 위해서 여기저기 바람을 피웠다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였으니까.

하나 기묘하게도 정부인에게서나, 첩에게서나 얻은 자식 중엔 딸이 없었다. 꼭 누군가가


당신이 원하는 것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저주를 내린 것처럼.

아버지는 결국 양녀를 들이기로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아무리 딸아이를 가지고 싶었기로, 아무나 양녀로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부친은 손수 여자아이들을 선별하였는데, 양녀의 마지막 후보로 남은 두 여자아이 중에


세나가 있었다. 두 여자아이는 그렇게 랭카스터 가의 저택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세나는 상당히 총명한 아이였는데,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둘을 깨우칠 정도의 재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총명함에도 불구하고 세나는 랭카스터 가의 양녀가 되지 못했다.

그건 아마도 세나를 양녀보다 제 며느리로 삼고자 했던 부친의 마음이 작용한 것임이


틀림없다고, 바비는 생각했다.
왜냐면 세나는 양녀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랭카스터 가에 계속해서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세나를 얼마나 예뻐했는지 모른다.

랭카스터 가의 가주에게 일찌감치 며느리로 점쳐진 아이, 세나.

물론 세나가 일찍부터 요한의 짝으로 점쳐졌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세나의 짝으로


랭카스터 가의 어느 아들이든 상관없다고 여겼었다.

선택은 세나의 몫이었던 것이다.

제 31 화. 바비와 키스를 하는 게 옳은 일일까

랭카스터 가의 여러 아들 중 세나와 친하게 지냈던 것은 단연 요한과 바비였다. 세 사람은


매일같이 만나 줄곧 함께 시간을 보냈다.

세나는 아버지의 마음뿐만 아니라, 요한과 바비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였다.

세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두 남자는 세나에게 깊게 빠져들었다. 그녀에게 빠져드는


것은 마치 불가항력과도 같다고, 바비는 생각했다.

그래,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세나를 향한 제 마음을 요한이 눈치챘을 때부터. 그때부터


요한이 저를 싫어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쭙잖은 질투의 여파였는지도 모르겠다.

바비는 요한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세나에게 구애를 했지만, 끝에 세나가 선택한


남자는 요한이었다.

그녀의 선택에 바비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지켜보며 행복을 빌어 주는 일밖에 없었다.

형의 여자가 된 세나를 계속해서 좋아할 수 없었다.

세나와 요한이 결혼하고 이 년이 지난 뒤였나. 세나는 저를 꼭 닮은 조슈아를 낳은 뒤에,


갑작스럽게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던 건강한 세나였건만, 그녀의 병세는 삽시간에


악화되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병이었다.

늘 싱그럽기만 했던 세나의 얼굴은 생명의 기운을 잃어 가며 시들어 갔다.

요한과 바비는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만, 묘하게도 세나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주 조금도.

세나가 앓기 시작한 지 일 년이 지난 후, 그녀는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심각해졌다.
바비는 지금까지도 생명의 기운이 꺼져가던 세나의 창백한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병색이 깊은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두 눈엔 살고자 하는 열의가


그득했다.

‘바비, 나는 살고 싶어.’

간절하기만 했던 세나의 목소리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가느다란 숨을 토해 내던 세나를 보는 건 아주 애달픈 일이었다. 하지만 애달픈 마음과는


별개로 바비는 때때로 아픈 세나에게서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것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위화감이었다.

바비는 그녀가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의 병에는 차도가 없었고,
그녀는 종내엔 말을 하는 것조차도 힘들어했다.

바비는 그녀를 떠나보낼 준비를 서서히 했다. 혹 다음 생에도 만난다면, 그때는 요한이 아니라
나를 선택해 줘.

그러나 요한은 그녀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지 못했다. 심지어 세나가 죽던 그날까지도.

바비는 세나의 관이 흙 속에 파묻히던 그날 또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이 하염없이 쏟아지는 겨울비. 그 속에서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세나의 관을 지켜보던 요한의 메마른 얼굴.

힘내라는 말조차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틀어져 버린 우리의 관계.

바비는 그 이후 요한을 거의 찾아가지 않았다. 심지어 요한이 공작위를 물려받던 그날도


찾아가지 않았다.

근래에 들어서야, 조슈아를 보러 몇 차례 찾아온 공작저였다.

아이는 세나의 외형뿐만이 아니라 총명함마저도 똑 닮아 있었다. 보고 있자면 절로 세나를


떠올리게 하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바비는 조슈아가 요한을 닮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조슈아를 제 아이처럼 대했다. 그러다
요한과 우연히 만나면 그와 싸우기는 했지만.

세나마저도 죽어 버린 지금, 요한 너는 왜 나를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거야? 바비는 늘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차마 요한에게 묻지는 못했다.

돌아올 대답이 두려워서일까?

이젠 너와는 완전히 인연을 끊고 싶다고, 요한이 그렇게 말할까 봐 무서운 걸까?

요한은 저와는 다르게 맺고 끊는 일이 제법 확실한 남자였다.


요한. 나는 너와 많이 다투기는 했지만 너를 진심으로 미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바비는 전하지 못한 진심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바비는 과거를 회상하던 것을 멈추고,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곤 자조하듯이 픽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그런데 또다시 한 여자를 동시에 원하게 되다니.”

요한이 리나를 원하게 된 일은 어쩌면 당연히 벌어졌어야 할 일일지도 몰랐다. 세나를 여태껏
잊지 못한 요한이었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시간이 지날수록 리나를 더 원하게 되겠지.

바비는 점점 더 리나를 원할 요한의 모습을 보는 게 두려웠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흔들릴


리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또한 두려웠다.

세나와 닮은 여자가 있음을 요한에게 알리지 않은 건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바비는 리나를 처음 보았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세나와 너무도 닮은 그녀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바비는 리나의 모습을 훔쳐보며 눈물을
훔쳤었다. 꿈속에서만 보았던 세나를 다시 만난 것 같았으니까.

리나에게 털어놓았던 대로 바비가 처음부터 리나를 리나 그 자체로 보았던 건 아니었던 것이다.

바비는 리나를 발견한 이래로 하고 있던 모든 일을 내팽개쳐 놓고 매일 그녀를 훔쳐보았다.


하루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리나를 살피는 데 썼을 정도였다.

‘너무 닮았어.’

리나는 마치 세나의 ‘부활’ 같았다.

바비가 리나라는 존재를 안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첫사랑과 온기 한 번 제대로 나눠 보지 못한 채로 떠나보냈던 바비에게 ‘리나’라는 세나와


닮은 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 준 이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방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린 것은 그때였다.

똑똑.

“계십니까?”

방문자의 목소리는 남자의 것이었다.

바비는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선 대답했다.


“어, 들어와.”

그러자 문이 열리며, 어느 남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아니. 그냥 잠깐 생각.”

바비는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새로이 등장한 남자에게


향했다.

“욘두 쌤. 나와 만나서 하고 싶다는 얘기가 뭐야?”

바비는 누워 있었던 까닭에 구겨진 셔츠를 손으로 몇 번 매만지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것도 야밤에. 나, 설레게.”

욘두는 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한 발자국씩 옮길 때마다 그의 귀에 걸린 에메랄드빛


귀걸이가 작게 빛났다.

“이를 어쩌나. 제가 말씀드릴 이야기는 바비 님께서 설렐 만한 이야기가 아닐 텐데요.”

바비에게 리나라는 세나와 닮은 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 준 이는 바로 ‘욘두’였다.

* * *

창문으로 스며들어 오는 밝은 빛을 바라보며, 나는 혼잣말을 했다.

“아침이다. 제길.”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매번 꾸었던 그 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계속해서 떠오르는 요한의 붉은 입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미친 척하고 다시 입술을 맞대어 볼걸. 서로의 입술이 닿지 못했던 묘한 아쉬움에 이토록


생각이 나는 건지.

나는 괜스레 입맛을 다시며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창밖을 바라보자 밝은 햇살이 스미고 있는 게 보였다. 해는 이미 일찌감치 뜬 듯했다.


나는 이내 누워 있던 상체를 일으키며 무거운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아무래도 잠을
자기엔 그른 것이 분명했다.

나는 침대에서 완전히 내려와, 소파 위에 대충 걸쳐 두었던 숄을 어깨 위에 걸쳤다.

복잡한 머리도 식힐 겸, 답지 않게 아침 운동도 할 겸, 겸사겸사 정원을 거닐 생각이었다.

정원으로 나오자 조금 쌀쌀한 공기가 내 살갗을 헤집었다. 어느새 부쩍 가까워진 겨울의


바람이었다.

조슈아에게 이기지 못해 요한의 저택으로 따라온 것이 가을. 야속하게 흘러가 버린 시간이 꽤


길었다. 사실 야속한 것은 시간 하나만이 아니었다.

흘러간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커져 버린 요망한 부자와의 유대가 언짢다.

‘그 요망한 부자를 하루라도 보지 못한다면 죽을 것만 같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들과


더욱 가깝게 지내다 보면 그렇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머리가 꽤 아플 테지. 그런 순간이 도래하기 전에 공작저를 벗어나는 게 옳은


일일 성싶지만.

어깨 위에 커다란 카디건이 걸쳐진 것은 그때였다.

“…….”

고개를 돌려 카디건의 주인을 바라보자, 거기엔 꽤나 의외의 인물이 보였다.

“바비?”

“안녕, 리나. 추운데 왜 이렇게 얇게 입고 나왔어.”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바비는 내 어깨 위에 대충 걸쳐 두었던 카디건을 여미어 주며 대답했다.

“잠이 안 와서 창밖을 보고 있는데. 이게 웬걸. 완전 예쁜 여자가 엄청 얇게 입고 정원을 걷고


있네. 나 원, 마음이 너무 쓰여서.”

“…….”

“감기 걸려. 리나, 옷 좀 제대로 입고 다니자.”

바비는 유려한 미소와 함께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 머리 위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불현듯이 내게 카디건을 걸쳐 준 남자가 요한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바비에게는 미안한 생각이자 실없는 생각이기도 했다.

여기서 왜 갑자기 요한이 생각난 거야.

“바비. 공작저에 아직도 있었어?”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가 있는데 내가 공작저를 떠날 이유가 없잖아.”

“그런가?”

“그리고 요한이 가주가 되었다고 해도, 나도 공작가의 일원인걸. 아무도 나를 내쫓을 수는


없어. 설령 요한 랭카스터라고 해도.”

얘도 참, 매번 이상하게 당당하다. 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내가 공작저를 떠난다면?”

“그럼 나도 떠나야지. 큭큭. 요한과 만날 때마다 싸우는 거, 나도 지긋지긋해.”

“나도 요한과 말다툼하는 거 지긋지긋해.”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며 함께 키득거렸다.

그런데 말이다. 요한과 말다툼을 하는 거,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사실 요한을


놀리는 일을 꽤 좋아했다. 바비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한 진심이었다.

바비는 그런 나를 그윽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다툼을 하지 않는 나는 지긋지긋하지 않아?”

“네가 지긋지긋할 이유는 없지.”

되레 그는 항상 거의 매 순간 나를 맞춰 주기만 했었다. 요한의 태도와는 완전 반대였다.

바비는 나와 발맞추어 걷던 걸음을 갑작스럽게 멈추었다. 그러곤 그는 한탄하듯이 말했다.

“내가 지긋지긋해져야 리나 네게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걸까.”

“……뭐?”

나는 그를 따라 걸음을 멈추며 바비를 올려다보았다. 바비는 턱을 밑으로 당겨, 나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그는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이어 말했다.

“요즘 애가 좀 타서.”

바비는 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천천히 제 손을 끌어 올려, 내 두 뺨 위에 얹었다.


이내 그는 내 양 뺨을 두 손으로 완전히 감싸며 말했다.

“오늘도 좋아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그의 고백이었다.


그건 꼭 ‘밤에는 잠을 잤어. 아침이 와서 일어났지.’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내뱉는
어투였다.

“…….”

나는 침묵했다. 바비는 내 침묵에 괘념치 않으며 내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 사이의 간격은 좁혀지며, 우리의 얼굴은 퍽 가까워졌다. 그가 내뱉는 뜨거운 숨결이 내


피부 위에 선연히 느껴질 정도였다.

“네 머릿속이 내 생각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어. 나를 지긋지긋하게 여기든 그 반대로 여기든,


어찌 되었건 네가 온종일 내 생각만 하기를 바라.”

“…….”

“네가……. 날 사랑해 줬으면 좋겠어. 아니, 나를 사랑해 줘.”

늘 듣던 바비의 고백이 오늘따라 더욱 진득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두근거렸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단언하지는 못하겠다.

나는 바비의 고백에 익숙해졌기에 이토록 의연할 수 있는 걸까?

바비의 푸른빛의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빡이는 게 보였다. 그는 부담스럽지 않게 한 걸음 더


다가왔고, 내 뺨을 조금 더 깊숙이 감싸 안았다.

깨달았을 땐, 바비의 푸른 눈동자가 내게 한층 더 가까워져 있었다.

키스……, 하려는 걸까.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어진 그의 고개가 내 얼굴 위로 바투 드리웠다. 이내 서로의 코끝이 닿고
바비가 눈을 감는 게 보였다.

바비는 조급하지 않게 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곧 맞닿을 입술이었건만, 그는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아마도 바비는 내게 거절할 시간을 주려는 것 같았다. 그에게서 종종 느꼈던 다정한 배려였다.

여기서 내가 눈을 감는다면 그의 입술이 완전히 닿을 것임이 분명했다.

바비와 키스를 하는 게 옳은 일일까.

곧 서로의 입술이 스치듯이 가볍게 닿았을 때, 나는 고개를 옆으로 조금 돌렸다.

느닷없이 요한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너랑, 입 맞춰 보고 싶다고.’
조금 붉어진 얼굴로, 낮은 목소리로 고백하듯이 말했던 요한. 나는 그와 닿을 뻔했던 입술을
떠올리며 숨을 골라냈다.

믿을 수 없게도 심장이 약간 두근거렸다. 고작 요한의 입술을 잠깐 떠올렸을 뿐이었는데.

“……리나.”

“미안해.”

거절을 뜻하는 내 사과에 바비는 미련 없이 제 손을 거두었다. 따뜻했던 바비의 손이 사라진


뺨이 스산하게 느껴졌다.

“……춥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 아침 산책은 여기까지.”

바비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으나, 바라본 그의 얼굴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의


미련이 그득하게 남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그의 눈빛을 외면하며 발걸음을 먼저 옮겼다.

요한이 떠올라서 너와의 키스를 거부했다고 한다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요한의 입술이 닿을 뻔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네겐 떨리지 않았던 심장이 떨렸다고 한다면.
너는 어떤 말을 할까.

* * *

공작저의 현관으로 들어와 내 방이 있던 3 층까지 올라가는 내내 우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바비는 그저 내 걸음의 속도를 맞추어 주었을 뿐이었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 막 2 층을 지나쳤을 때였다.

나는 2 층 복도 어귀를 보며 자연스럽게 세나의 방을 떠올렸다. 이곳엔 문고리가 고장 난


세나의 방이 있었는데.

그리고 사라져 버린 붉은 표지의 세나의 책을 떠올린다.

“바비.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나는 대화의 흐름에 따라 어색하지 않게 물었다.

“너, 여기 2 층에 세나 씨의 방이 있는 거 알지?”

그는 몇 초쯤 지난 후에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응.”

“혹시 최근에 세나 씨의 방에 들어간 적이 있어?”

“…….”

바비는 웬일인지 단번에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러다 또다시 뒤늦게 대답을 하고야 만다.

“아니.”

“응, 그래.”

바비는 왜 내가 그런 질문을 건넸는지 묻지 않으며 담담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바비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친구로 지낸 지난 몇 년, 바비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주 잘 파악했다.

그리고 나 또한 바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은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바비 정도로


그의 속을 완전히 간파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바비가 거짓말을 할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 눈은 조금 빨리 깜빡였으며 입술은 작게 짓이겼다.

그리고 지금의 바비는 그런 행동들을 빠짐없이 하고 있었다.

“…….”

나는 죄 없는 입술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바비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넌, 최근에 세나의 방에 들어간 적이 분명 있었어.

나는 바비가 거짓말을 했다고 확신했다.

제 32 화. 리나가 신경 쓰여

요한은 지난밤 깊게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 동이 튼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겨울잠에서 깨어난 기분이 얼핏 들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잔 거지.

그는 어제보다도 가벼워진 몸을 느꼈다. 지난날 그의 몸을 뒤덮었던 열병이 가신 듯했다.

이마에서 느껴지는 열의 기운은 일말도 없었다.


자기 전에 먹었던 약의 효능이 좋았던 것인가. 아님 리나의 간호 덕이었던가.

요한은 누워 있던 상체를 부스스 일으키다, 옆에 잠들어 있는 조슈아를 발견했다.

언제 자신의 옆에서 잠이 든 것인지 조슈아는 고른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감기 옮을 수도 있었을 텐데.”

요한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옅게 구기며, 아이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지독한 열병이 옮았을까 봐 염려가 된다. 하지만 아이를 타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슈아가 평소와는 다르게 왜 자신의 침대에서 잠이 든 것인지 얼추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픈 자신이 걱정되어서 그런 거겠지.

요한은 소리 없이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와, 겉옷을 걸쳤다. 살갗에 닿는 공기가 어제보다도


차가워진 느낌이었다.

조슈아의 옷을 두껍게 입혀야 되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옷의 두께에 대해 생각하던 요한의


사고는 물 흐르듯이 리나의 드레스에게도 닿는다.

리나가 입고 있던 드레스도 꽤 얇던데. 리나의 옷도 두꺼운 것을 준비해 주어야 할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요한은 깜짝 놀라며 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미쳤군. 거지가 춥게 입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그렇지만 말이다. 그는 벨라에게 카디건이나 따뜻한 소재로 만든 드레스를 몇 벌 준비해


놓으라, 얘기해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왜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지 잘 모르겠다. 그것은 역시나 리나가 세나와 닮았기 때문일까.

의미 없이 방안을 배회하던 요한의 걸음은 창가 근처에서 멈추었다. 혼란스러웠던 그의 시야에


그들이 맺힌 것은 우연처럼 벌어진 일이었다.

“…….”

그들의 정체는 이른 아침부터 사이좋게 정원을 거닐고 있던 리나와 바비였다.

요한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창가 근처로 더더욱 다가가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제법 먼 거리였지만 웃고 있던 리나의 얼굴은 요한의 눈동자에 아주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보였다. 어째서 그녀의 얼굴이 이토록 자세히 보이는지 모르겠다.

킥킥거리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두 사람은 돌연 서로를 마주 보며 이상야릇한 기류를


풍겼다.

설마 키스……, 하려는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던 요한은 곧 아연실색하고야 만다.

“……!”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저도 모르게 정원으로 박차고 나가려는
발걸음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정원으로 나가서 뭘 어쩌려고. 두 사람이 키스하는 걸 막으려고?

요한 랭카스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무슨 이유로 그들의 스킨십을 막으려는 건데?

요한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는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제 손을 꽉 말아 쥐며 마른 숨을 토해 냈다.

“마음이……. 너무 이상해.”

 
바비와 리나가 함께 있는 걸 봤을 때마다 느꼈던 질투라는 객쩍은 감정이 또다시 피어올랐다.
요한은 창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들의 모습에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키스는 성사되지 않았다. 리나가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어색한 기류를 풍기던 두 사람은 이내 공작저의 현관으로 들어가며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기에 이르렀다.

“하.”

요한은 시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안도라…….”

바비와 리나가 키스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자신을 부정할 수 없다.

요한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사라진 세나의 시신. 세나와 같은 버릇을 가진 리나. 기억상실증인 리나. 세나와 관련되는
꿈을 꾸는 리나.

그리고 리나를 향해서 커져 가는 자신의 마음.

하루가 다르게 리나를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져만 간다. 그녀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이제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은 리나에게서 무엇을 바라는 걸까.

리나가 세나의 대신을 하기를 바라는 걸까? 그녀가 세나를 대신해서 영원히 저와 조슈아의
곁에 남아 주기를 고대하는 걸까?
요한은 바비와 리나가 사라져 적막함만이 풍기는 정원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초점이
흐려진 시선으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사라진 세나의 시신.’

그는 세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후 믿을 수 있는 수하에게 일을 지시한 터였다. 그


일은 사라진 세나의 시신을 찾는 일이었다.

아주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할 일이자, 절대로 지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은 사라진 세나의 시신부터 찾자.

시신을 찾고, 시신이 사라진 일과 연관된 사람을 찾아내자. 그러면 여태껏 자신이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아낼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더해, 의문으로 남아 있었던 세나의 묘비 문구의 진실을 알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요한이 그 문구를 떠올렸을 때, 두어 번의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누구야?”

“……욘두입니다.”

요한은 아침부터 저를 찾아온 욘두를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그의 방문을 수락해 주었다.

“들어와.”

욘두는 문을 열고 들어와 요한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요한은 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자 부드럽게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 들어 올린 고개, 저와 마주한 검은 동공.

이따금 생각하는 거지만 욘두는 종종 저와 닮아 보였다. 물론 이목구비가 꽤 다르고, 저가


훨씬 더 잘생기기는 했지만…….

요한은 저도 모르게 밥맛 같은 생각을 한 제 자신을 머쓱해하며, 욘두에게 물었다.

“욘두. 그대가 나를 왜 찾아온 거지?”

욘두는 사려 깊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공작저를 일찍 찾아온 김에 요한 님께 인사도 드릴 겸, 조슈아 님을 찾아갔었는데


보이지 않으셔서 조슈아 님도 찾을 겸해서 찾아왔습니다. 조슈아 님은 요한 님의 침대 위에
계셨네요.”
욘두는 요한 뒤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조쉬가 내 옆에서 잠이 들었나 봐. 나중에 깨면 돌려보내도록 하지.”

“네. 요한 님도 뵈었고 조슈아 님의 행방도 알았으니, 저는 이만 다시 나가 보겠습니다.”

“……잠깐만.”

요한은 나가려는 욘두를 저도 모르게 붙잡았다.

“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 요한은 뒤늦게 후회했다. 욘두를 왜 붙잡은 거지.

요한은 욘두에게 자신의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마음이 든 건,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마저도 편안하게 만드는 욘두의 사려 깊은 미소


때문은 아닌가 싶다.

“괜찮다면 오랜만에 나와 얘기를 좀 하지. 뭐, 조쉬에 대한 것도 얘기할 겸.”

“좋습니다. 요한 님이 원하신다면야.”

요한과 욘두는 함께 방을 나섰다. 요한의 방엔 조슈아가 잠들어 있었기에 얘기를 나누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내 두 남자는 그리 멀지 않은 응접실로 들어섰다. 마주 앉은 두 남자 사이엔 잠깐의 침묵이


맴돌았다.

요한은 어느 시녀가 내어 온 차를 먼저 마신 뒤, 욘두에게도 차를 마실 것을 권했다. 욘두는


“네.”라는 흔쾌한 대답과 함께 차를 들이켰다.

탁. 막 찻잔을 내려놓은 욘두가 요한에게 말을 건네었다.

“요한 님께서 요즘 평온히 잠드신다는 소문을 제가 설핏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용인들이 얼마나 기뻐하는 줄 모릅니다.”

“내가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사용인들이 기뻐한다고?”

“네. 요한 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대부분의 사용인들이 요한 님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나 원. 살가운 말도 잘하지 못하는 저를 왜 그렇게까지


좋아하며 따르는 건지.

“존경하고 좋아하기도 하는 사람이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꽤, 아니, 무척이나


기쁜 사실이죠.”

“그런 건가.”

“최근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좋은 일이라. 딱히.”

요한은 말끝을 흐리며 제 턱을 몇 차례 문질렀다.

좋은 일이 있느냐는 물음은 세나가 죽은 이래로 처음 듣는 소리였다. 좋은 일이라곤 딱히


없었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요한의 머릿속에는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리나의
얼굴이 맴돌았다. 좋은 일이라.

욘두는 제 말을 이어서 했다.

“그래도 얼굴이 좋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솔직히 저뿐만이 아니라 공작저에서 일하고 있던


사용인들 모두가 요한 님을 오랫동안 걱정했답니다. 속이 따뜻하신 가주님은 역시나 많은 이의
사랑을 받고 계시니까요. 하하.”

욘두는 너스레를 떨며 미소를 지었다.

요한은 사용인들이 했다던 그 걱정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세나가 죽은 후


흐트러졌었던 자신의 모습에 대한 걱정을 말하는 것이리라.

“유모님이 오신 뒤에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다고……, 다들 그런 말을. 앗, 제가


주제넘은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요한 님.”

요한은 대답 대신 찻물을 들이켰다. 아니라고는 대답할 수 없는 말이었다.

리나가 저택에 온 뒤로 자신의 불면증이 사라졌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세나가 죽은 뒤, 한 번도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지난 4 년과 불면증이 사라진 최근은


당연히 다를 것이다. 그는 요즘 피곤하지 않았고, 낮에 조는 일도 없어졌다.

욘두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본 것은 정확했다.

공작저에 리나가 온 후부터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마저도 편안해진 요한이었다.

“욘두. 너는 거지……, 아니 세나와 닮은 그 여자를 실제로 본 적이 있나?”

“네, 최근에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그녀를 보고선 어떤 생각이 들었지?”

“솔직하게 대답해도 되는 질문입니까?”

“모쪼록.”

요한은 고개를 옅게 끄덕이며, 욘두가 할 말을 미루어 짐작해 보았다.

그는 아마도 ‘세나’와 연관된 말을 꺼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동의를 먼저 구할


이유가 없었다.
“외형이 놀랍도록 세나 님과 닮았더군요. 이런 말씀까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세나 님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역시나. 요한은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으며, 인정했다.

“그래. 네 말대로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세나로 착각할 정도로


닮았지.”

그렇기에 지금도 리나가 자꾸만 생각나는 걸까.

붉고 예쁜 입술로 ‘밥맛’이라 말하며 히죽거리는 리나의 얼굴이 요한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가 떠오르는 것은 불시에 그 어떤 전조도 없이 벌어지는 일이었다.

요한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무의식중에도 그녀를 떠올리는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욘두는 제 콧대에 흘러내린 동그란 안경을 쓱 올리며, 의미심장한 물음을 내어 놓았다.

“요한 님은 유모님이 신경 쓰이시는 겁니까?”

“…….”

요한은 일순 침묵했다.

이번 또한 아니라는 말을 선뜻 내뱉지는 못하겠다. 자신은 확실히 리나를 신경 쓰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요한은 욘두에게 그런 질문은 월권이라는 말도 꺼내 놓지 못했다. 제게 닿아 있는


욘두의 진중한 눈빛 때문이었을까. 요한은 메마른 입술만 짓이겼다.

솔직히 욘두와는 속마음을 털어놓고 지내던 사이까지는 아니었다.

욘두를 안 지는 꽤 오래되었으나, 그와 단둘이 있어 본 적도 그리 많지 않다.

요한에게 있어 욘두는 조슈아의 선생으로서 적합하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요한은 욘두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리나가 신경 쓰인다. 하나 그것이 세나 때문인지, 온전히 리나를 좋아하게 된 건지 잘


모르겠다.

조슈아의 선생인 똑똑한 욘두라면,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 주지 않을까.

요한의 입술이 느릿하게 운을 떼었다.

“어, 맞아. 리나가 신경 쓰여.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솔직한 마음은 스스럼없이 흘러나왔다.


이 순간만큼은 욘두가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졌다. 떠올려 보니, 처음 봤을 때부터 욘두에게서
막연한 친근함을 느꼈던 것 같다.

막연한 친근감. 요한은 그 말을 되뇌었다.

“리나가 세나와 닮아서 신경이 쓰이는 걸까? 그녀는 세나가 아니라고 수없이 생각해 보았지만,
그게 뜻대로 잘 안 돼. 욘두 선생. 너는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녀를 내 곁에, 조쉬의 곁에, 계속 두는 게 과연 옳은 일인 걸까?”

요한은 마른 숨을 토해 냈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털어놓자 후련함도 조금 들었다.

욘두는 흐트러진 요한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제 입가에 띠어져 있던 미소를 거두어들였다.


요한을 바라보던 욘두의 눈동자엔 제법 냉정한 빛이 맴돌고 있었다.

“제가 지금 당장 유모님을 공작저에서 내보내라고 한다면. 요한 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욘두는 흔들림이라곤 전혀 없는 확고한 어투로 물었다.

“공작저를 나간 유모님을 다시 찾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

몰아치는 욘두의 날선 물음에 요한은 침묵으로 답했다.

요한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자신은 리나를 가차 없이 내보낼 자신이 있는가. 내보낸 그녀를 다시 찾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은 질문들의 대답을, 요한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없다. 그는 리나를 당장 내쫓을 수도 없었고, 공작저를 나간 그녀를 다시 찾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유모님이 신경 쓰이는 요한 님의 마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요한 님,


본인만이 알 수 있을 테죠.”

요한은 고개를 옅게 끄덕였다.

“지금은 그저 추후에 후회하지 않게, 요한 님의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우매한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

“실례가 되는 말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야. 네 말에 틀린 점은 없어.”
“그럼 요한 님. 저는 진짜로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조슈아 님께서 깨어나셨을지도 모르고,
요한 님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신 듯하여.”

욘두는 저가 언제 냉정한 빛을 내비쳤냐는 듯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요한은 돌아가는 욘두를 이번에는 붙잡지 않았다.

마음속에 있던 혼란스러움을 욘두에게 토로하기도 했고, 더 할 말도 없었다. 요한은 욘두가


나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내 욘두가 완전히 나가 버려 홀로 남겨진 요한은 앉은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하며,


세나를 떠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노력한 끝에 떠올린 거라곤 흐릿한 잔상으로 이루어진 기억뿐이다. 세나에 대한 건 기가


막히게 잘 기억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리나를 만난 이래로 세나에 대한 기억이 멀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세나의 기억은 멀어지며 그 기억이 사라진 곳에 스며든 것은 리나에 대한 기억이었다.

‘이봐요, 밥맛 씨.’

저를 그렇게 부르던 리나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세나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한 것인데, 역시나 문득 깨닫고 보면 리나의 생각을 하고 있던


요한이었다.

리나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바람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제 33 화. 엄마는 바보야! 왕바보!

오전에 바비를 만난 이래로 나는 줄곧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바비가 세나의 방에 몰래 들어갔다면, 그는 그 방에 왜 들어갔던 걸까.

그 이유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사라진 붉은 표지의 책 때문인 걸까?

일의 진상을 알기 위한 제일 좋은 방법은 바비에게 직접 묻는 일이었다.

‘네가 세나 씨의 방에 있던 붉은 표지의 책을 가져갔어?’

하지만 내 물음에 바비가 솔직하게 대답해 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보조개를 동반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라고 모른 척을 할 테지.

바비는 이미 세나의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내게 사실을 일러 줄 의향이


없는 것이리라.

물론 그것은 내 감이자 추측이기는 했지만, 나는 바비가 거짓말을 했다고 정말로 확신했다. 이


확신에 내 손목을 걸 수도 있다.

“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만이 그득한 내 방에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그곳엔 익숙한 신형이 보였다.

“엄마!”

오늘도 귀티가 줄줄 흐르는 조슈아였다.

아이는 짧은 다리로 자박자박 걸어와, 언제나처럼 내 무릎 위에 자리 잡았다. 푹신한 소파를


마다한 채로 내 무릎 위에 앉은 조슈아는 어제보다도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키도
좀 큰 것 같고.

그런데 가까이서 바라본 조슈아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항상 바라보는 이마저도 행복해지는
해맑은 미소를 짓던 조슈아였건만, 아이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조슈아, 우리 귀염둥이. 표정이 왜 이래. 무슨 일 있었어? 설마 밥맛이 조슈아를 혼낸


거야?”

조슈아는 작게 도리질을 하며 웅얼거렸다.

“아니야. 조슈아는 혼날 짓을 하지 않았어.”

“그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우리 예쁜이.”

“…….”

조슈아는 대답하는 데에 잠깐 망설이는 빛을 내비치더니, 이내 내 손을 꼭 잡고선 나를


어디론가 이끌기 시작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아이의 발걸음에 따라갔다.

조슈아의 걸음이 멈춘 곳은 창문 앞이었다. 아이는 창틀에 대롱대롱 매달려 어딘가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나는 조슈아의 귀여운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정원 어귀에 잘


정차되어 있는 마차 한 대가 있었다.
그 마차는 요한의 공작저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낯선 문양이 새겨진 그 마차는,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찾아오기라도 한 걸까.

“아빠가……. 아빠가…….”

조슈아는 좀처럼 제 말을 잇지 못하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낯선 방문객은 요한과


연관이 있는 인물인 건가.

“너희 아빠가 왜?”

“……바람을 피우려고 해!”

“뭐? 바, 바람?”

요한이 바람을 피워? 나를 두고? ……가, 아니라.

조슈아의 말에 나도 모르게 말려들어 든 생각이었다. 끙.

그 순간 정차되어 있던 마차에서 어느 여자가 내리는 게 보였다. 그 여자는 레이스가 풍성한


상앗빛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마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완전히 내린 여자의 붉은 머리칼이 겨울 햇살에 반짝거렸다.

“……예쁘다.”

나는 솔직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여자는 멀리서 보아도 충분히 아름다워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기품 있게 내디디며 공작저의 현관까지 걸어갔다. 걸어가며 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는 모습에서,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자는 얼마 못 가 현관문으로 들어가며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이름 모를 여자를 바라보던 시선을 끌어내려 조슈아를 내려다보았다.

“조슈아. 너는 저 여자에 대해서 알고 있어?”

조슈아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창밖을 노려보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 모습마저도
치명적이게 귀여웠다는 점이었다.

불만으로 가득 찬 포동포동한 볼따구니가 너무 귀여워서, 하마터면 나는 아이의 볼을 쭉 잡아


늘릴 뻔했다.

나는 조슈아의 볼로 향하던 손을 가까스로 저지했다. 한 번 늘어뜨리면 멈출 수 없을 것만


같아.

“저 아줌마, 가끔씩 아빠한테 찾아와서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어. 조슈아는 저 아줌마가 싫어!
엄청 싫어! 완전 싫어!”
“큭큭.”

조슈아의 말에 돌연 웃음이 터진 나는 소리를 죽이며 키득거렸다. 웃음이 터진 제일 큰 이유는


조슈아의 말 중에 ‘소름 끼치는 미소’라는 부분 때문이었다.

‘소름 끼치는’이라는 말은 요한이 주야장천 쓰던 말이었다.

아이 앞에선 물도 제대로 못 마신다고 하더니,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조슈아는 제 아빠의 말을 똑같이 읊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이 참으로 우습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다.

너는 커서 소름 끼치는 밥맛이 되면 안 될 텐데.

나는 자세를 낮추며 조슈아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조슈아. 저 여자가 예뻐? 내가 예뻐?”

별다른 의미가 있던 물음은 아니었고, 그냥 좀 궁금해서.

하지만 나는 돌아올 조슈아의 대답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내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닌 조슈아의 선택은 바로 나겠지.

나는 벌써부터 우쭐거리며 히죽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왜 그런 당연한 걸 묻는 거야! 당연히 엄마가 제일 예쁘지.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예뻐. 진짜야. 조슈아는 거짓말하는 아이가 아니야.”

오구오구, 내 새끼. 그렇게 대답하면 얼마나 사랑스럽게요?

“그래, 조슈아 말이 맞아. 나는 그냥 거지도 아니고, 미인 거지니까.”

조슈아는 약간은 누그러진 얼굴로 내 뺨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 아이는 두 눈을 귀엽게 껌뻑거리며 내게 속삭였다.

“엄마가 최고야.”

“나도 조슈아가 최고야.”

 
조슈아의 사랑스러움에 히죽거리면서도, 내 머릿속 한편에선 이름 모를 여자에 대한 궁금증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 여자, 설마 요한과의 재혼을 계획하고 있는 여자인 걸까.


조슈아의 말로 짐작해 보았을 때, 여자의 방문은 오늘이 처음이 아닌 듯했다. 그녀는 자주
공작저를 오갔고, 요한을 만났던 것이리라.

하긴, 세나가 죽은 지도 벌써 사 년이나 흘렀다.

요한은 아이가 하나 있는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잘생겼고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주 대단한 공작가의 가주가 아니던가.

얼굴 돼, 키 커, 재력도 완벽해. 조슈아는 얼마나 또 귀여워.

진짜 엄마가 아닌 나조차도 단번에 함락시켜 버린 아이였다. 조슈아와 마주한다면, 그 누구든


아이를 사랑하지 않고선 배기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은근슬쩍 조슈아에게 물어보았다.

“조슈아는……. 새엄마가 생기는 게 싫어?”

“…….”

조슈아는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선 미간을 매섭게 찌푸렸다.

몰랐는데, 인상을 찌푸린 조슈아의 얼굴은 요한의 찡그린 얼굴과 제법 닮아 보였다.

아이는 구겨진 미간을 펴지 않으며 강경하게 대꾸했다.

“엄마가 있는데 새엄마가 왜 필요해? 지금 당장 아빠에게 가서 저 아줌마가 더 이상 찾아오지


못하게 하자. 엄마가 있는데, 아빠가 저 여자를 만나면 안 되는 거잖아.”

아줌마라고 하기에는 꽤 젊고 예쁜 여자였는데. 어느 명문가의 아가씨라도 되는 걸까.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네 아빠가 저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나는 어쩔 수 없어. 물러나 주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야.”

“…….”

“중요한 건 너희 아빠 마음이니까.”

왜냐면 나는 네 진짜 엄마가 아니라, 네 유모로 잠깐 취직한 것뿐이니까. 나는 차마


거기까지는 말하지 못했다.

말이 지나쳤던 걸까.

조슈아는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나는 뒤늦게 조슈아를 달래 주기 위해 아이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조슈아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내 손길을 거부했다.

“조, 조슈아.”
그것은 처음으로 겪은 조슈아의 거부였다.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그때부터 지금까지 조슈아가 내 손길을 거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이는 그저 나를 마냥 좋아했을 뿐이었다.

나를 향한 아이의 사랑과 관심은 맹목적이었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거운 둔기에 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충격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

나는 다소 당황하며, 허공에 뻗어진 손을 쉬이 갈무리하지 못했다.

“엄마는 바보야! 왕바보!”

조슈아는 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심한 말을 내뱉으며 방을 뛰쳐나갔다. 마치 어느 소설 속


비련의 여자 주인공처럼.

나는 아이를 붙잡지 못하고 아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항상 밝게 웃거나 서럽게 울곤 해서, 화를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저


밝고 명랑한 아이인 줄만 알았는데.

처음 본 아이의 화가 난 모습에, 내 기분이 묘해졌다.

실수……한 건가,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끝이질 않았다.

“하지만 나는 분명한 사실을 말했는걸.”

요한이 그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나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

그런데 말이다. 이상한 점은 그 말을 되뇌면 되뇔수록 내 마음이 공허해진다는 점이었다. 내


머릿속엔 오묘한 상상들이 번져 갔다.

눈을 뗄 수 없는 적발을 가진 여자의 웃음소리. 여자와 마주 앉은 요한의 얼굴에 서린 작은


미소.

무언의 메시지가 담긴 눈빛의 교차. 미래를 함께할 것을 약속하는 두 사람……, 까지 상상했을


때,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토할 것 같아.

나는 기다란 심호흡을 뱉어 내며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요한과 내가 무슨 사이라고, 나는 그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걸까.

요한에게 ‘계약 관계로 이어진 물주와 거지’라는 우리의 관계를 똑바로 정의해 주었던
나였는데.

나는 나를 일순 옥죈 답답함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를 일컫자면, 그 이름은 ‘질투’였다.

이건 다 나를 매번 두근거리게 만든 요한의 탓이 컸다.

그가 요즘 그답지 않게 나를 챙겨 주어서. 이따금 나를 리나라고 불러 주어서. 종종 나를 향해


다정히 웃어 주어서. 나를 매번 안아 주어서. 그래서 그런 거라고.

설령 요한이 나를 세나라 생각하고 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가까이 닿은 누군가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란 말이다.

나는 내게 닿았던 요한의 온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은연중에 내게 닿았던 그의 온기가 다른 이에겐 닿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를 좋아해?’

끝내 대답하지 못했던 바비의 물음이 떠올랐다.

이봐, 리나. 넌 요한을 정말로 좋아하게 된 거야?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요한에게 끌리고 있어. 부정할 여지없이. 분명히.

“그렇지 않고서야, 밥맛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걸 신경 쓸 이유가 없지.”

내가 굽힌 자세를 일으키지 못하고 마른세수만 하던 그때, 누군가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세요?”

방 밖에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라예요.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네! 들어오세요.”

나는 그제야 자세를 일으키며, 벨라가 들어오는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벨라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손에는 다과가 올려진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다과를 드리려고 찾아왔답니다.”

“고마워요, 벨라. 잘 먹을게요.”


나는 벨라에게 가까이 다가가 벨라가 들고 있던 트레이 위, 쿠키 하나를 입속에 집어넣었다.
어쩜, 벨라가 가져오는 쿠키들은 하나같이 모두 맛있는 걸까.

“벨라! 이거 엄청 맛있네요. 꿈에서 생각 날 맛이에요.”

“어머. 그래요? 이번에 새로 구워 본 쿠키인데,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그런데 무슨 일


있으셨어요? 낯빛이 어두워 보여요.”

벨라는 내가 조슈아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내뱉고 있었다. 나는 괜스레 뺨을 긁적거렸다.

“티 나요?”

내 낯빛이 그렇게 좋지 않던가.

“진짜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나는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아뇨, 딱히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닌데…….”

요한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 낯빛이 어두워진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내 말에
상처를 입고 나가 버린 조슈아가 신경 쓰여서 그런 것인가.

나는 그녀를 조용히 불렀다.

“벨라.”

“네?”

“아까 전에 우연히 저택으로 찾아온 여자를 보게 됐는데, 벨라는 그 여자가 누군지 아세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엄청 예쁜 여자던데.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두루뭉술한 내 설명에도 벨라는 단번에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차렸다는 듯이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엘리스 님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엘리스, 라.

내 한마디에 벨라가 바로 알 정도라면, 그 여자는 역시나 꽤 자주 저택에 들락날락했던 것임이


분명했다.

“방금 오신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분이라면, 엘리스 님이 맞으실 거예요.”

“그 여자분. 요한 씨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요? 가령 재혼을 계획하고 있다든지…….”

내가 가감 없이 묻자 벨라는 희한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이라고나 할까.

“리나 님 설마…….”
“아, 아니에요! 저 지금 질투하는 거 절대로 아니에요. 요한 씨가 다른 여자랑 뭘 하든,
심지어 재혼을 하든 저랑 무슨 연관이 있다고.”

사실은 엄청 신경 쓰고 질투하고 있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어쭙잖은 질투를, 나도 어찌할 수


없단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벨라에게 내 마음을 곧이곧대로 토로할 수는 없었다. 이런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질투는 진짜로 아니라니까요.”

벨라는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얼굴로 입술을 우스꽝스럽게 일그러뜨렸다.

“그렇게 궁금하시다면 직접 물어보는 게 어떨까요? 큭큭.”

“……네?”

“리나 님이 주인님께 직접 물어보는 거예요.”

“됐어요! 제가 요한 씨에게 그걸 왜 물어요.”

“그럼 계속 궁금해하실 텐데요?”

벨라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 것인지 얼굴에 띠운 미소를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아, 그 여자에 대해서 묻지 말걸. 나는 뒤늦게 후회를 했다.

“지금 리나 님 낯빛이 더 어두워진 거 아세요? 엘리스 님 얘기를 하면 할수록 어째 표정이…


….”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암요, 알겠어요. 리나 님이 아니라면 아니라는 거죠. 아~ 그럼 저는 이제 주인님께도 다과를


내어 드리러 가야겠어요. 두 분, 무슨 대화를 나누시려나.”

놀리는 듯한 벨라의 말에 내 얼굴은 확 붉어졌다. 나는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벨라는 들고 있던 다과를 어느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선, 다시금 방을 나갔다. 방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벨라의 키득거림은 끊이질 않았다.

젠장, 젠장, 젠장!

아무래도 벨라에게 인정하기 싫은 내 마음을 들킨 게 분명했다. 벨라가 날 어떻게 생각하려나.

* * *
요한이 나를 찾아온 것은 석양이 지고, 어슴푸레한 어둠이 깔리고 나서였다.

안에 있느냐는 요한의 물음에 나는 고민 없이 방문을 열어 주었다. 낮에 꽤 오랫동안


엘리스라는 여자와 대화를 나누었을 요한.

내가 문을 반쯤 열었을 때, 방밖에 멀끔히 서 있는 요한의 모습이 보였다.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나갔던 조슈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꼬맹이, 아직도 많이 삐쳐 있으려나.

“귀한 곳에 누추한 분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나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요한을 슬쩍 노려보았다.

요한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말장난. 또 안 속아.”

“아이고, 재미없어라.”

“재미있자고 찾아온 게 아니야.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

“무슨 말이요?”

요한은 입술을 작게 뭉그적거리며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의 사실’을 꺼내


놓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항상 밥맛처럼 저가 하고픈 말을 다 하는 주제에, 그런 그가 털어놓기를 고민하고 있는 사실은


무엇일까.

설마하니 엘리스라는 여자와 재혼을 결심하였으니, 인제 그만 조슈아의 유모를 관두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닐까.

요한이 어울리지 않게 망설일 말이라는 게, 그런 것밖에 없지 않는가.

그렇게 확정 짓기가 무섭게 마음 한쪽이 쓰라렸다. 마음이 날카로운 칼로 갈기갈기 찢긴


기분이 들었단 말이다.

꼿꼿이 선 채로 한참을 고민하던 요한의 입술이 작게 열린 것은 그때였다.

“네가…….”

제 34 화. 질투, 라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말을 막아 버렸다.

“전……! 지금 당장 그만둘 수 없어요.”

“뭘 그만둔다는 거지?”

“유모요. 아직 못 그만둔다고요. 조슈아도 저를 엄청 좋아하고.”

물론 오늘 약간 문제가 있었기는 한데…….

아무튼 각설하고, 조슈아는 나를 아직까지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대로 아이를 보지 못하게


되는 건, 나에게도 슬픈 일이었다.

어쩌면 내가 사라짐에 아이가 느낄 슬픔보다도 더.

“누가 그만두라고 했는데?”

요한은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당신이요!”

“내가?”

“네, 지금 그 말을 하려고 온 거잖아요.”

“이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흔들림 없는 그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다정한 눈빛, 그리고 걱정이 느껴지는 다정한 그의 목소리.

요한의 검은 눈동자 속엔 나만이 오롯이 맺혀 있었다.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 도대체 나


보고 어쩌란 말이야.

심장은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님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내 얼굴이 닳을 정도로 쳐다보는 건 그만두고, 뭐든 좋으니까


대답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

그 여자와 무슨 사이인지 물어봐도 되는 걸까?

재혼을 결심하고 있느냐고 물어봐도 되는 걸까.

내가 빤히 바라보기만 하고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요한은 한마디를 더 내어놓았다.


“그래. 내가 잘생긴 건 나도 충분히 아니까. 그렇게 소름 끼치게 쳐다보지 않아도 돼.”

하여튼 그 밥맛이 어디 가겠느냐만은.

“…….”

왜 저런 밥맛 같은 말이 싫지 않은 거지?

귀여워. 조슈아처럼 그가 귀엽게 느껴진단 말이야.

요한은 엘리스인지 뭔지 하는 여자에게도 밥맛 같지만 귀여운 말을 했을까. 그 여자도 요한을


귀엽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세나를 제외한 모든 여자를 돌보듯이 할 것처럼 굴던 주제에, 요한은 다른 여자와


히히덕거렸던 걸까.

대답을 바라는 요한의 눈빛에 못 이겨, 나는 겨우 겨우 한마디를 뱉어 냈다.

“……하. 이번 생은 글렀어요. 이상한 게 자꾸 귀여워 보여.”

“이상한 게 귀여워 보인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무슨 말이긴, 당신이 귀여워 보여서 미치겠다는 거지.

“거지가 부탁합니다. 당신 말대로 오늘은 당신 얼굴을 그만 보고 싶어요. 하실 말씀은 내일


하도록 하세요.”

“뭐?”

“요한 씨. 그럼 좋은 밤 되시기를.”

나는 반쯤 열었던 방문을 가차 없이 닫았다. 방 밖에선 요한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가 다시 문을 노크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꽉 닫힌 방문에 등을 기대며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한 걸까.

요한에게 돌아올 대답을 두려워한 걸까?

아님,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질투한 내 자신을 인정하는 게 두려웠던 걸까.

나는 후자 쪽이 조금 더 확실한 까닭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내 마음을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질투, 라.”

 
 

* * *

꽉 닫힌 문 앞에 서 있던 요한은 고개를 작게 갸웃거렸다. 그는 방금 전의 리나의 행동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오늘 무슨 잘못이라도 했던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오늘, 더해 요 근래에 그녀에게 딱히 잘못한 사실은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너무나도 잘해 줬다는 게 문제지.

요한은 억울했다.

어지럼증에 좋은 차도 대접했고, 옷도 두꺼운 것들로 바꾸어 주고, 식사도 만족스러울 정도로


제공해 주는데.

그런데 왜 쫓겨난 거지.

“나는 그저 기억을 찾을 방법에 대해서 얘기해 보려던 참이었는데.”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읊조린 요한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제 방으로 돌아갔다. 빨리 해결 하고


싶은 일이었기는 하나, 구태여 리나를 닦달하고 싶지는 않았다.

요한이 방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벨라가 곧 찾아왔다. 그가 즐겨 마시던 숙취 해소에 좋은


차를 가져온 까닭이었다.

물론 요한은 요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진 않지만, 그래도 그 차는 꾸준히 마시던


중이었다.

습관은 무서운 거라고, 그 차를 마셔야 하루가 마무리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차를 내려놓고 돌아가려던 벨라를 붙잡았다.

“벨라.”

“네?”

“혹시 오늘 거지……, 아니, 리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글쎄요. 딱히 큰일이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주인님, 그런 건 왜 물으세요?”

“오늘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아……, 아니야. 거지가 이상하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요한은 뒤늦게 자신의 물음을 철회했지만, 벨라는 이미 오늘 오후에 있었던 리나와의 만남을
떠올리고 있었다.
공작저에 방문했던 낯선 여자에 대해 묻던 리나. 절대로 질투가 아니라고 발뺌하던 리나.
그러면서도 요한과 만났던 여자를 무척이나 궁금해했던 리나.

거기까지 생각한 벨라는 실소를 터뜨렸다.

리나가 오늘 이상했을 이유는 그 이유밖에 없겠다고, 그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귀엽기도 하셔라.

벨라는 이마에 ‘저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라고 쓰여 있던 리나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주인님. 실은 아까 전에 리나 님께서 엘리스 님에 대해서 물으셨어요.”

“엘리스 후작 영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이름이 튀어나오자, 요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벨라는 낮에 있었던 일을 요한에게 일러 주었다.

벨라의 말을 묵묵히 듣던 요한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잇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요량이 없었다.

“풉, 큭큭. 그런 일이 있었다 이거군.”

요한은 상념이라곤 하나 없이 기분 좋게 웃다, 새삼 생각했다. 리나를 만난 이래로 이따금


기분 좋게 웃는구나.

그러한 사실을 깨닫기가 무섭게 입가에 맺혔던 웃음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지난 사 년간, 소리
내어 웃은 적이 없었던 요한이었다.

물론 세나가 죽은 후, 요한이 웃음을 죄다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슈아 덕에 간혹


미소 짓기도 했었다.

하지만 미소를 띠던 도중에 꼭 세나가 생각나서 그는 마음 편히 웃지 못했다.

네가 사라진 세상 속에서 내가 웃는 건 사치처럼 느껴져.

혼자 살아남았기에 웃는 것조차도 죄를 짓는 마음이 들었었다.

하지만 요즘은 좀 묘했다. 어색하기는 했으나, 요한은 입가에 스민 미소를 좀처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혼자 웃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도 별로 들지 않았다.

리나가 희한한 소리를 하며 제 방문을 막아 세운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도리어 더 우습기만


했다.

그녀는 다른 여자를 만난 자신에게 어쭙잖은 질투를 한 게 아니던가. 그 작고 엉뚱한 머리로


저와 엘리스와의 관계를 어디까지 생각했을지.
엘리스 후작 영애와 재혼이라도 할 성싶어,

‘유모요. 아직 못 그만둔다고요. 조슈아도 저를 엄청 좋아하고.’

그런 말을 했던 건가.

엘리스 후작 영애는 지난 일 년간 공작저를 꾸준히 찾아오며, 제게 호감을 표했던 여자였다.

그녀는 젊고 아름답고 성격도 좋았지만, 요한은 그녀와의 재혼을 꿈꾼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애당초 세나를 제외한 다른 여자와 잘된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래도 그건 질투가 아닐까, 싶었답니다. 리나 님은 주인님을 신경 쓰고 있는 걸까요?”

벨라는 그리 물으며 요한을 빤히 바라보았다.

요한은 미소가 만연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옆에 있는데 신경 쓰지 않는 게 더 이상할 따름이지. 그렇지 않은가, 벨라.”

아마도 아주 뻔뻔한 대답을 말이다.

벨라는 매번 보아도 잘 적응되지 않는 요한의 자신감에 탄식이 절로 나왔다.

“맙소사. 주인님, 그런 발언은 앞으로 지양하시는 게 어떨까요?”

하지만 우스운 것은, 제 주인인 요한은 자신만만한 말과 제법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왜? 사실이지 않나. 무슨 문제라도?”

“네, 문제가 아주 많습니다.”

“……벨라, 너. 가끔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네 상관이야.”

요한은 기분 좋게 맞받아치며 키득거렸다. 놀리는 듯 질타하는 듯한 벨라의 말에도 그는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돌연 벨라가 날카로운 질문을 건네었다.

“그런데 주인님은 리나 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생각이랄 게 필요한 논제인가? 그녀는 그냥 조쉬의 유모일뿐이야.”

요한은 고민 없이 호쾌하게 정의를 내렸지만, 그를 바라보는 벨라의 눈은 게슴츠레해졌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리나를 거지라고 불렀던 요한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새 그녀를 ‘리나’


라고 똑바르게 부르고 있었다.
심지어 거지라는 호칭이 버릇처럼 튀어나오면, 리나라고 말을 정정하여 재차 읊조린
요한이었다.

그는 언제부터 리나를 리나로 부르게 된 걸까.

요한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사실을 질투한 리나. 리나의 얘기를 듣고 세상 행복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요한.

그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빠짐없이 지켜본 벨라는 생각했다.

혹 서로의 마음이 끌리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이전부터 들었던 의심이었지만, 설마……, 하고 생각했던 벨라였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른다면 서로에게 향한 마음이 진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주인님. 이런 말은 주제넘을지도 모르겠지만……. 리나 님에 대한 것은 주인님이 조금 더


경각심을 가지고 신중하게 생각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법 진지해진 벨라의 말에 요한은 제 얼굴에 드리우고 있던 미소를 서서히 지워 냈다.

“두 분이 친하게 지내시는 건, 너무 보기 좋아요. 조슈아 님이 리나 님으로 인해 행복해하시는


것 또한 아주 좋고요. 그렇지만 리나 님은 마님을 닮았잖아요.”

“…….”

“닮은 사람, 그것도 주인님께서 엄청 사랑했던 사람과 똑 닮은 사람에게 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리나 님은 마님이 아니잖아요. 그걸 제일 잘 아시는 분이
주인님이시잖아요.”

“벨라.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모쪼록 두 분 다 상처받지 않으셨으면 해요, 저는.”

요한은 잘 빠진 제 턱을 천천히 문질렀다.

벨라가 콕 집어서 말한 논제는, 그가 요 근래에 계속해서 고민했던 문제였다. 꽤 답답해서


욘두에게까지 물어봤었던 논제.

벨라가 물러서지 않고 요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조금 더 건네었다.

“주인님. 비록 시녀인 제가 한 말이기는 하지만, 진지하게 고민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 누구보다도 주인님이 행복해지시길 바라니까요.”

요한은 자신의 마음을 꼼짝없이 들킨 기분이었다. 벨라가 유능하고 눈치 빠른 수하인 사실은


이럴 땐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알겠어. 생각해 볼게. 넌 그만 나가 봐.”

그녀와 더 이야기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요한은 벨라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었다. 벨라는
고개를 작게 조아린 뒤 방을 나섰다.
혼자가 된 요한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벨라가 눈치챌 정도로, 자신은 리나에게 흔들리고 있었던 걸까.

여전히 세나를 제외한 다른 여자를 제 곁에 두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만 리나라면.

“…….”

세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때, 요한은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리나가 정말로 세나와 관련된 <무엇>인 건가 봐.

추측하기만 했던 사실에 왠지 확신이 서는 느낌.

그렇기에 이렇게 더더욱 신경이 쓰이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어쭙잖게 입을 맞춰 보고 싶다는


말을 하게 되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감기로 인한 열에 취했다는 핑계로 그녀와 입을 맞추게 된다면. 그녀의 입술의 감촉을 느끼게
된다면. 그 감촉 또한 세나의 것과 닮았을까, 싶어서.

이러다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리나를 좋아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나의 시신을 찾게 되고, 제 예상과는 다르게 세나와 리나가 관련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리나와 세나 사이에 있었던 무수한 우연들은 정말로 단순한 우연일 뿐이고, 리나는 리나라는
여자 그 자체였다면.

리나에게 점점 끌리는 마음을 세나와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나눌 수 있는 걸까.

“하.”

그 순간 복잡하기만 한 요한의 방을 두 번째로 방문한 이가 있었다.

“……아빠아아.”

조슈아였다. 아이는 어째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요한을 기다랗게


늘어뜨려 불렀다.

“조쉬? 늦은 시간에 자지 않고. 무슨 일이야.”

조슈아는 선뜻 제게 가까이 오지 못하고 방문 근처에서 우물쭈물했다. 조슈아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요한은 사뭇 심각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아이를 한
팔로 가볍게 안아 들었다.
다시금 소파까지 걸어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조슈아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조슈아가 고백할 게 있어.”

“우리 아들. 무슨 고백이길래, 이렇게나 표정이 어두운 걸까.”

“조슈아가……. 엄마한테 심한 말을 해 버렸어.”

“조쉬 네가?”

우리 아이는 이따금 엉뚱하기는 하나 심한 말을 하지는 않는데. 요한은 저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며 시선을 내리깐 조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조슈아의 말은 이어졌다.

“우웅. 조슈아가 엄마한테 바보라고 해 버렸어. 소중한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조슈아는 정말 나쁜 아이야. 아빠, 엄마가 많이 화났겠지? 화가 나서 조슈아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하면 어떡해.”

그리 말하는 조슈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원체 하얗던 조슈아의 피부가 더더욱 하얗게
질려 가는 것을 본 요한은 마음이 쓰라렸다.

바보라는 말을 한 조슈아를 두둔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있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다.

우물거리던 조슈아는 고백하듯이 한마디를 더 토로했다.

“심지어 왕바보라고 해 버린걸. 흐흐윽. 조슈아가 잘못했어. 후윽.”

아이는 끝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었다.

이런 반응, 정말 상황과는 맞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요한은 작게 실소를 터뜨릴 뻔한


것을 겨우 참아 냈다.

‘엄마 바보! 왕바보!’를 외쳤을 조슈아가 얼마나 귀여웠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왕바보라는
말이 왜 이렇게까지 귀엽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건 리나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었다.

요한은 그녀가 화가 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그럼에도 아이에게 잘못을 일깨워 주었다.
아이가 놀라지 않게. 다정하게.

“그런 말은 하면 안 되는 거, 알고 있지?”

조슈아의 조그마한 등을 작게 토닥여 주자, 아이의 울음은 곧 그치기에 이르렀다.


“킁, 당연하지! 이젠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게. 약속해.”

“그럼, 그래야지. 조쉬. 아빠는 네가 그런 말을 그냥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분명히 이유가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

“……웅응. 그건 다 아빠 때문이었어.”

“조쉬. 남 탓을 하는 건 소름 끼치도록 아주 나쁜 일이란다.”

요한은 꾸짖듯이 말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조슈아를 구태여 겁을 주며 타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요한은 궁금했다.

조슈아와 리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관해서.

“그렇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 얘기해 보렴.”

“아빠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걸, 엄마도 알았어. 그런데 엄마는 그런 아빠를 말리기는커녕


조슈아한테 새엄마가 생기는 건 어떻냐고 물었어. 엄마가 있는데 새엄마라니!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는 거잖아!”

조슈아는 조막만한 목에 핏줄이 올라올 정도로 소리쳤다.

뭐야, 조슈아도 연관이 있었던 건가.

요한은 조슈아의 앙증맞은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때 리나 표정이 어땠는데?”

“엄청 슬퍼 보였어.”

엄청 슬퍼 보였다, 라.

벨라의 말대로 리나는 저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일까?

“좋아. 아빠가 도와줄게. 네 엄……마한테 가서 솔직하게 사과를 하자. 아빠가 곁에 있어 줄


테니까.”

“정말로 아빠가 조슈아 곁에 있어 줄 거야?”

“물론.”

“좋아! 아빠가 옆에 있으면 조슈아도 엄마한테 사과할 수 있을 것 같아. 역시 아빠밖에 없어.


헤헤.”

조슈아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요한은 아이의 미소를 따라 저도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조슈아와 함께 간다면 이번에는 문전박대 당하지 않겠지.

제 35 화. 엄마, 아빠 볼에도 뽀뽀를 해 줘야지!

요한은 두어 번의 가벼운 노크와 함께 방문을 두드렸다.

“나야.”

안쪽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몇 초가 지나지 않아서 문이 자연스럽게 열리었다.

“또 왜…….”

또 왜 찾아왔냐는 물음을 건네려던 리나는 조슈아를 발견하고선 하던 말을 멈추었다. 아이는


요한의 뒤에서 그의 바지 자락을 꼭 붙잡고 있었다.

왠지 겁을 잔뜩 먹은 듯한 조슈아의 얼굴은 뭐랄까. 어미를 잃은 작고 나약한 어린 짐승을


떠올리게 했다.

“조슈아?”

리나가 조슈아의 이름을 부르기가 무섭게 요한은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조쉬를 따라온 것뿐이야.”

구실이 아주 좋은데. 요한은 흡족했다. 왜 리나를 만나는 데 좋은 구실이 생겨서 기쁜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슈아가 네게 할 말이 있다고 하는군.”

“아, 아빠! 그걸 바로 얘기하면 어떡해!”

“조쉬. 잘못을 했으면, 확실하게 사과를 해야 하는 거야.”

요한은 자신의 뒤에 숨어 있던 조슈아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 마지못해 앞으로 요한의


앞에 선 조슈아는 리나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며 쭈뼛거렸다.

리나는 다정한 목소리로 조슈아에게 말을 건네었다.

“조슈아. 나한테 할 말 있어?”

“……그, 그게 그러니까……. 엄마…… 미안해. 조슈아가 다 잘못했어.”

“우리 예쁜이가 무슨 잘못을 했더라? 나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리나는 조슈아가 ‘엄마는 바보야! 왕바보!’라고 소리치며 뛰쳐나갔었다는 사실을 정말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혼자 있는 동안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요한과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요한에게 향했던 자신의 질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를 좋아하게 된 사실을 확실히


인정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조슈아가 엄마한테 바보라고 한 거……. 정말 정말 미안해. 엄마. 많이 화났지? 화나서


조슈아를 버리고 갈 거야?”

고백하듯이 자신의 잘못을 토로한 조슈아의 얼굴은 다시금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는
끝까지 울음을 토해 내지는 않았다.

조슈아는 앙증맞은 아랫입술을 윗니로 꾹 깨물고 있었다. 제법 비장한 얼굴이다.

조슈아의 비장한 얼굴은 뭐랄까. 나는 잘못을 했으니까, 엄마의 어떤 처분이든 달게 받겠다…


…, 라는 느낌을 준다고 해야 할까.

조슈아에게 있어 바보라는 말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말이길래.

리나는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입술을 안쪽으로 동그랗게 말았다. 진지한 조슈아 앞에서 웃음을
터뜨릴 수는 없지, 아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들더라.

나중에 ‘밥맛’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뜻을 알게 된다면 조슈아가 얼마나 놀랄까, 하는.

조슈아가 그간 얼마나 요한을 밥맛이라고 불렀던가. 언젠간 아이가 놀라지 않게 잘 설명해


줘야 할 텐데.

리나는 빙그레 웃으며 조슈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흐트러뜨렸다.

“오구오구, 우리 예쁜이. 그런 걸 마음에 두고 있었어요? 괜찮아. 화 안 났고, 널 버리고 갈


생각도 없으니까.”

조슈아가 내 손길을 거부해서 조금 놀라기도 했는데, 그 부분은 나름대로 이해하는 부분이니까.


조슈아는 새엄마를 운운했던 내게 충격을 받았던 거겠지.

리나는 거기까지 말하지 않으며, 고개를 옅게 끄덕였다.

“……정말이야?”

조슈아는 확인하듯이 되물었다.

“정말이야. 하지만 다음에 또 바보라고 했다간 그땐 네 엉덩이를 팡팡 때려 줄 거야.


알겠어?”

“응응!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런 말 하지 않을게. 약속해.”

“말 잘 듣네, 우리 조슈아.”
울상이었던 조슈아의 얼굴이 그제야 느슨하게 풀렸다. 조슈아는 조막만 한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내려올 정도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리나는 그런 조슈아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조슈아는 그런 작은 부분을 마음에 담아 둘


정도로 나를 많이 신경 쓰고 있구나.

조슈아에게 닿아 있었던 리나의 시선이 요한에게 옮겨졌다. 조슈아가 이렇게까지 나를 신경


쓰는데, 그런데도 나를 유모에서 내쫓을 작정이야? 요한 랭카스터 씨.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요한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지금 누구 엉덩이를 뭘 어떻게 한다고?”

“왜요? 요한 씨가 조슈아 대신에 맞아 볼래요? 엉덩이 팡팡.”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이상한 소리를 하지 말라고 다그쳤지만……. 요한의 머릿속엔 이상야릇한 상상이 피어올랐다.


열 살배기 같은 짓궂은 얼굴로 자신의 엉덩이를 팡팡 내려치고 있는 리나에 대한 상상이랄까.

상상 속, 자신의 옷차림은 또 왜 그렇게 얇은지 모르겠다. 상상 속, 엉덩이를 맞고 있는


자신은 왜 그렇게 행복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절대로 입 밖엔 낼 수 없는 상상이었다.

요한은 마른세수를 하며 탄식했다. 요한 랭카스터. 도대체 무슨 생각까지 하는 거야. 얼굴은


왜 이렇게 뜨거운 거냐고.

 
요한이 괴로워하고 있는 사이, 조슈아는 제 볼을 리나에게 가까이 가져다 대며 말을 건네었다.

“엄마! 그럼 화해의 의미로 조슈아 볼에 뽀뽀해 줘.”

“좋아.”

리나는 쪽 소리가 나는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가볍게 닿은 아이의 볼이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웠다. 질릴 때까지 입을 맞추고 싶은 볼따구니다.

리나의 입맞춤에 기분이 금세 좋아진 조슈아는 요한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자, 이제 아빠 차례야!”

“……?!”

요한과 리나는 약속한 듯이 깜짝 놀라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엄마, 아빠 볼에도 뽀뽀를 해 줘야지!”


“내, 내가? 네 아빠한테?”

“응응! 조슈아 볼에만 뽀뽀해 주면, 아빠가 서운해할 거야. 엄마는 아빠가 얼마나 잘
삐치는지 모르지?”

“……아. 내가 그걸 모르는 건 아닌데.”

네 아빠가 얼마나 잘 삐치는지 모르는 건 아닌데. 리나 또한 요한을 슬그머니 올려다보았다.


요한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잠깐 고민하던 요한은 이내 리나에게 작은 손짓을 하며, 제게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리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선 두 사람을 본 조슈아의 얼굴엔 늘 그랬던 것처럼 흐뭇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설마 진짜로 하게요?”

리나는 작은 목소리로 요한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

“딱히……, 못 할 것도 없지 않나.”

“네, 네?!”

이 남자가 또 열이 나는 건가. 리나는 아연실색했지만, 요한은 태연자약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잠깐 잊었나 본데. 우린 그때 거의 입술이 닿았었어.”

“뻔뻔해! 그, 그건 연차가 걸렸던 거잖아요! 열로 당신의 머리도 이상해지기도 했었고.”

“아무튼 조쉬가 저렇게까지 바라잖아. 뭐……. 네가 조쉬를 실망시키고 싶다면 그러지 않아도
좋고.”

“…….”

“결정은 네 몫이야, 리나.”

요한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바라본 리나의 얼굴이 석양보다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부끄러워하는 건가.

‘아무래도 그건 질투가 아닐까, 싶었답니다. 리나 님은 주인님을 신경 쓰고 있는 걸까요?’

그 이유는 벨라의 말대로 리나가 자신을 신경 쓰고 있기 때문에 일까.

질투의 뿌리가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리나, 네가 나를 좋아하게 된 거라면.

요한은 손을 뻗어 붉어진 리나의 볼 위를 작게 두드렸다.

“얼굴.”
“…….”

“붉어졌네.”

네게 끌리는 내 마음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신의 손끝이 닿자마자 얼굴을 더욱 붉히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리나의 얼굴이 아주 귀엽게만


보였다.

요한은 리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생각했다.

세나, 나는 이대로 계속 웃어도 되는 걸까?

돌아오지 않은 물음을 되뇌던 요한의 얼굴엔 다소 씁쓸한 미소가 맴돌았다. 요한은 리나에게
머물던 시선을 옮기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쉬. 리나가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하는데 그냥 넘어가 주는 게 어떨까? 아빠는 받은 셈


칠게.”

“큭큭큭. 엄마는 부끄럼쟁이야.”

“조, 조슈아!”

요한은 그 순간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리나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리고.”

“더 하실 말씀, 아니, 저를 더 놀릴 구실이 있나요?”

대꾸하는 리나의 목소리는 모가 잔뜩 나 있었지만, 요한은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엘리스 후작 영애는 나와 아무 사이도 아니야.”

“네?”

“오늘 공작저로 찾아온 적발을 가진 여자 말이야. 물론 후작 영애의 생각은 내 생각과는 다른


것 같지만, 나는 아직까지 누군가를 내 옆에 둘 생각은 없어. 그럴 자신도 없고. 네가 알아
두었으면 해서.”

“제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요?”

“그 이유는 네가 더 잘 알겠지. 내가 벨라에게 좀 들은 게 있어서.”

“……!”

내가 왜 해명 따위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군. 요한은 고개를 작게 가로저으며 뒤돌아섰다.


조슈아의 사과도 성공적으로 끝나고, 하고 싶은 말도 모두 했으니 만남을 파할 생각이었다.
요한은 여전히 뭐가 어떻게 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이니, 여러 이상한 상황의
전말이니.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모든 사실이 제대로 드러나기 전까진, 그녀를 곁에 두어야겠다.

* * *

평화로운 나날들이 며칠 더 흘렀다.

나를 찾아온다고 했던 바비는 며칠 전 아침 산책에서 만난 이래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홀연히 제 모습을 감춘 바비.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매번 나를 따라다니며 내게 고백했던 바비가 한순간 급작스럽게 사라져 버리자,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공허하다는 기분보다는 영문 없이 뒷덜미가 싸한 기분.

썩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

나는 지난 며칠간 평소보다도 더 온순해진 조슈아와 놀아 주고, 배가 터질 정도로 밥을 먹고,


좋은 드레스를 입고, 정원을 산책하기도 했다.

아, 그리고 나는 요한 몰래 세나에 대한 것도 알아보고 있던 참이었다. 왜냐면, 그녀에 대한


게 매우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내 꿈에 거듭 나오던 그녀가 내게 진짜로 알려 주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그


메시지를 알고 싶었다.

세나에 대해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그녀의 신상을 엄청 깊게까지 조사하지 않았기에 쉬운 일이었을 수도 있었고, 내겐 아주


훌륭한 정보원이 있었기에 쉬운 일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 정보원의 이름을 일컫자면, 그녀의 이름은 ‘벨라’였다.

‘세나 씨에게 형제가 있었어요?’

‘세나 씨의 부모님은 어떻게 살아 계신가요?’

내게 세나의 죽음의 이유를 알려 줬던 벨라는 거듭된 내 물음에 곤란해하면서도, 내가 씁쓸한


표정을 짓기가 무섭게 답을 일러 주었다.

‘리나 님이 무언가를 물으면, 꼭 마님이 묻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벨라는 분명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벨라의 나약한 마음을 이용한 것이었다.


치졸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도 세나에 대해서 꼭 알고 싶어서 말이지.

물론 나는 벨라가 곤란해할 부분은 묻지 않았다. 애당초 그런 물음을 건네어 벨라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도 없었고.

그러하여 내가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는 그러했다.

세나는 외동이다.

세나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다.

닮은 얼굴을 가진 세나와 나.

나는 그녀와 내가 자매 사이는 아니었을까—, 라고 의심하기도 했었는데, 세나는 외동이었다고


한다. 퍽 김이 새는 정보였다.

“세나에 대해서 어떻게 더 알아보지.”

요한에게 알려 달라고 말해 볼까. 알려 달라고 한다고 쉬이 알려 줄 작자는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요한이 알고 있던 리나라는 이름에 대한 정보도 아직 듣지 못한 터였다.

조만간 눈치를 봐서 다시 물어봐야겠다. 아니, 대화를 나누어야 물어보든지 말든지 할 텐데.

내게 저와 만난 여자가 누군지 아주 친절하게, 내가 오해하지 않게, 설명해 주었던 요한과는


며칠간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 못한 터였다.

물론 간혹 식사를 같이하긴 했지만, 요한은 바쁜 것인지 식사가 끝나면 금방 사라졌고,


이전처럼 늦은 밤 나를 찾아와 시비를 거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지럼증에 좋은 차는 벨라를 통해 꾸준히 내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리고


웬걸. 드레스도 겨울용으로 다 바꾸어 줬는걸.

적응되지 않는 그의 다정한 배려였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라는 익숙한 생각이 든다. 동시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던 요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 죽을 생각은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유해진 이유를 잘 모르겠으나, 그의 유함은 내겐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왜냐면 그가 유해지면 유해질수록 나는 그에게 설레할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그가 자꾸 생각났고, 심지어 나는 바비와 함께 있을 때도 요한을


생각했다.
이건 다 스스럼없이 나를 껴안고, 나와 동침까지 했던 요한의 탓이 크다. 그냥 큰 게 아니라
엄청 크다.

요한은 과거, 세나를 닮은 내가 저를 휘두를까 봐 두렵다고 했었다.

있죠, 요한. 내가 그러고 싶다는 마음이 진짜로 들게 되면 어떡하죠.

당신을 돌이킬 수 없이 좋아하게 되어서, 세나 대신이라도 좋으니까 당신 곁에, 조슈아의 곁에


있고 싶다는 욕심을 생기면 어떡하죠.

“보고 싶네.”

그를 생각하기가 무섭게 보고 싶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요한은 지난날 한량처럼 굴더니, 밀린 일이 어마어마했나 보다. 그의 방의 불이 아주 늦게까지


꺼지지 않는 것을 몇 차례나 봤었다.

물론 내가 그의 방을 염탐한 건 절대로 아니다. 흠흠.

나는 그저 잠이 안 와서 복도를 거닐었는데, 요한의 방문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봤을


뿐이라고.

“오늘도 늦게까지 일하는 건가.”

나는 혼잣말을 하며, 오늘도 불이 켜진 요한의 방을 바라보았다. 요한의 방문 틈새로 새어


나오는 빛줄기는 어두운 복도를 가로지르는 유일한 빛이었다.

도대체가 무슨 일을 동이 틀 때까지 하는 걸까.

이것도 내가 동이 틀 때까지 그의 방 불이 꺼지는 걸 지켜본 게 아니다. 절대로!

변명하자면 그런 거다.

나는 단지 요즘 들어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려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잠들지 못한 밤, 창문을 통해 밤의 풍경을 감상하다 보면, 옆방인 요한의 방의 창문이 보였던


거다.

그의 방 불은 여명이 번질 때까지도 꺼지지 않았었다. 나는 창문에 얼굴을 뺀 채로 한참 동안


그 창문을 지켜보았다. 이상하게도 중독성이 있더라.

다시 돌아와서, 나는 오늘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벌써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어두운 복도 위에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복도를


나다니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설마 요한이 준비해 준 어지럼증에 좋은 차가, 사실은 불면증을 유발하는 차는 아니었을까?

그 차가 밥맛의 교묘한 장난이었다면……, 이라는 의심마저도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근래 들어 이렇게까지 잠에 못 들 수가 없다. 나는 머리를 누이는 순간 바로
잠이 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안되겠다. 직접 얼굴을 보고 물어야겠다. 그 차의 진짜 정체가 뭐냐고.

……밥맛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괜한 명분을 만든 것은 아니다.

나는 그의 방문에 가볍게 노크했다.

“저기요, 요한 씨. 아직도 일해요?”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저, 슬쩍 들어가 봐도 될까요?”

제 36 화. 내일 나갈까?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슬쩍 들어오는 건 뭐냐고 호통을 쳤을 요한이었지만.

“…….”

내게 돌아온 것은 정적뿐이었다.

나는 대범하게 문고리를 잡고 그것을 돌렸다. 요한이 불쑥 들어온 나를 쫓아낸다면 그땐


쿨하게 방을 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문은 잠기지 않았는지 매끄럽게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나는 요한을 단번에 발견할
수 있었다.

방 안에 있었으면서, 호기롭게 들어온 내게 호통을 치지 않았다 이건가.

호통 대신 나를 반긴 것은 요한의 고른 숨소리였다. 요한은 책상 위에 턱을 괸 채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무언가를 쓰다가 깜빡 잠든 것인지 손에는 만년필이 쥐인 채였다.

나는 발소리를 최대한 줄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피곤한가 보다.”

곤히 잠든 그는 내 인기척을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들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꺼풀은


고요히 감겨 있기만 했다.
꼭 감긴 눈꺼풀 위로 수놓아진 검은 속눈썹이 참으로 길었다. 일전에도 느꼈었던 감상이었지만,
새삼 통감한다. 잘 땐 천사처럼 예쁘고 잘생겼다고.

요한은 추워진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것인지 얇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달랑 셔츠 하나를 입은 그의 패기가 놀랍다.

저러다 또 감기에 걸릴 테지. 감기에 걸리면 내게 키스를 해 달라고 요구할지도 몰랐다.

“…….”

나는 괜스레 얼굴이 뜨거워진 것을 느끼며 손부채질을 잠깐 했다.

얼굴에 올라온 열이 몸에도 옮겨 갔는지, 왠지 더운 기분이었다. 더위를 느낄 계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숄을 벗어, 요한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얹어 주었다. 덥기도 했고,


그가 감기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기도 해서.

“이봐요, 밥맛 씨. 아이의 아빠라면, 당신 건강을 더 잘 챙겨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신이 아프면, 조슈아가 또다시 엉엉 울 텐데. 그 쥐똥만 한 녀석의 커다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서 뒤로 두어 걸음 떨어지며 방을 다시 나가려고 했다. 잠든 그를 구태여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슬금슬금 뒷걸음치던 그때였다.

“……어디 가.”

낮게 가라앉은 요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턱을 괴고 있던 자세에서 미동 없이 감고 있던


눈만 스르륵 떴다.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아니, 눈만 잠깐 감고 있었어. 좀 피곤해서.”

“…….”

“그런데 누가 조용히 들어와서 내 얼굴을 훔쳐보지 뭐야. 심지어 어깨에 숄도 덮어 주네? 나


원, 내가 아는 미인 거지는 내가 추울까 봐 뭘 덮어 줄 사람이 아닌데.”

그는 비실비실 웃었다.

영문 없이 약이 오르고, 내 얼굴은 더욱 달아오른 것인지 그 열기가 심상치 않았다. 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나는 요한을 걱정했다는 사실을 단번에 인정하기 싫었다. 요한의 얄미운 미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급하게 변명거리를 떠올렸다.

“당신이 추울까 봐 걱정한 게 아니라…….”

“아니라?”

“……밥맛 씨가 또 감기에 걸리면, 조슈아가 울 거니까. 다 조슈아를 생각해서.”

밥줄 예쁜이 조슈아야, 네 핑계를 대서 미안해. 나는 마음속으로 조슈아에게 작게 사죄했다.


하지만 조금은 조슈아 때문이기도 한걸.

요한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을 하며, 제 어깨 위에 걸쳐진 숄을 보란 듯이 더욱 여미었다.

“흐음, 그런가?”

“미인 거지가 착각은 하지 말아 줄 것을 요청합니다.”

내 말에 그는 작게 키득거렸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내 말이 아주 우스웠나 보다.

요망한 조슈아처럼 킥킥거리던 요한은 뜬금없는 제안을 하나 했다.

“내일 나갈까?”

내일 나가자는 건 설마…….

“……!”

나는 그의 말에 숨겨진 이면의 의미를 깨닫기가 무섭게 자못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봐요! 요한 랭카스터 씨. 데이트도 수당이 붙는 거 알고 계세요? 전 고급 인력이니까요.


어휴, 데이트의 ‘데’ 자도 모를 것 같이 구셨으면서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데이트 신청을
하시다니.”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내일 나갈까?’를 말하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데이트를 신청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요한이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몸을 배배 꼬았다. 왜냐면


요한을 놀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다소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앞, 앞서가지 마! 도대체 얼마나 앞서가지 거야.”

“당신에게 애프터 신청을 받는 것까지 생각했다 랄까요.”

“…….”

할 말을 완전히 잃은 요한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어이없다는 듯한 저 눈.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아마도 우리가 처음 그 거리에서 만났던
때, 그가 나를 보던 눈빛일 게다.

요한은 제 말을 덧대었다.

“내 말은 조슈아랑 셋이서 다 같이 나가자는 말이었어.”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 줬어야지.

그러나 실망감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왜냐면, 요한과 둘이서 나가는 것보다 조슈아와 셋이서
나가는 게 훨씬 더 재미있을 테니까.

“웬일이에요? 이 구역을 벗어나지 말라고 했었잖아요.”

“다른 부탁은 들은 체도 안 하면서, 그건 왜 그렇게 잘 지켰는지 모르겠군.”

“시비 거는 거예요?”

“아니, 딱히.”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갈 거냐고, 내가 물었잖아.”

좀 진중한 눈빛. 거절을 뜻하는 말을 쉬이 꺼낼 수 없는 눈빛이었다.

“거지가 묻습니다. 진심입니까?”

요한은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곧장 대답했다.

“밥맛이 대답할게. 진심이야.”

맙소사. 이번에 말을 더듬게 된 사람은 나였다.

“당, 당신! 아프고 나서부터 진심으로 이상해졌어요!”

나는 질색했다. 밥맛이 밥맛처럼 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한이 확실하게 유해진 건 아마도 그가 열병에 걸리고 난 뒤부터임이 틀림없었다.

그때 도대체 어떤 심적 변화가 생겼던 걸까.

입을 맞춰 달라고 했던 건, 어떤 심경의 변화에서 비롯된 말이었을까.

요한은 내 질색에도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는 진중한 얼굴과 눈빛으로 고백하듯이


말했을 뿐이었다.

“스스로를 갉아 먹는 강한 척은 하지 말라며. 나는 네 말을 따르고 있을 뿐이야.”

“…….”
“나도 늘 날을 세우고 있는 건 피곤해.”

* * *

“오늘 준 모자는 왜 이렇게 앞을 가려요? 시야가 답답해요.”

나는 머리 위에 눌러쓴 모자 끝을 어색하게 누르며 말했다.

질문은 요한에게 건넸지만, 나는 마차의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만에 타는 마차고, 얼마 만에 하는 외출인지.

날씨는 외출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고, 열어 둔 마차 창문으로 들어오는 겨울바람마저도


차갑기는커녕 상쾌하게만 느껴졌다.

지난 오 년간 떠돌아다녔던 거리의 풍경들은 익숙했으나, 나는 새삼 출처를 알 수 없는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조슈아보다도 더 들떠 있는지도.

“혹시 모르잖아.”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요한은 친절한 설명을 덧대어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세나와 닮은 내가, 세나를 아는 어느 귀족과 혹시나 마주칠까 봐. 그래서 이상한 소문이라도


돌까 봐 염려하는 듯했다.

조슈아의 유모로 취직하기 전까지 얼굴을 가리지 않고 거리를 활보했었지만, 그때의 내 모습은
형편이 없었었다. 매일 씻지도 않았고, 입고 있던 옷도 엄청 낡았으니까.

요한의 말처럼 거지같은 내 모습을 보고선 세나를 떠올릴 이는 좀처럼 없을 것이었다.

내가 세나와 닮았음을 제대로 알아차렸던 이는 세나의 최측근이었던 바비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나의 얼굴을 아는 귀족은 거의 없었다.

공작이기는 하나 대외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던 요한이었다. 그렇기에 공작 부인인 세나 또한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중요한 사교 모임에만 이따금 참석했을 뿐이었다.


설령 참석한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대개 일찍 귀가하거나 소수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세나의 얼굴을 제대로 아는 귀족은 극소수였다고.

나는 막힘없이 흘러가는 사고를 통제할 겨를이 없었다.

“…….”

생각이 끝이 난 시점에서 나는 작게 신음했다.

맙소사, 또다.

나는 또다시 세나와 요한에 관련된 사연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떠올린 사연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아빠, 아빠!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내 옆에 앉은 조슈아는 신이 난 목소리로 요한에게 묻고 있었다.

“조쉬, 가고 싶은 곳이 있니?”

“조슈아는 엄마, 아빠랑 같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좋아! 엄청 좋아!”

말을 끝마친 조슈아는 까르륵 웃었다. 조슈아에게 닿아 있던 요한의 시선이 내게 닿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나?”

어쭈, 이제 내 의사도 제법 부드럽게 물어보네.

나는 대답했다.

“글쎄요.”

어디로 가면 좋으려나.

“네가……, 공작저에 오기 전까지 생활했던 곳에 가 봐도 좋고.”

공작저에 오기 전까지 생활했던 곳이라.

단순한 의미로 건넨 말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잠깐 주저했던 요한의 모습 속에서 그의 진짜


의중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이전에 지냈던 곳에 가서, 잃어버린 내 기억에 대한 실마리를 찾길 바라는 게


아닐까.

‘네가 왜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됐는지. 피하지 말고 맞서 보자.’

기억을 찾는 것을 두려워했던 내게, 요한이 했던 말이었다.


피하지 말고 맞서 보자.

지난 오 년간 줄기차게 나다녔던 거리였지만, 나는 과거의 기억을 조금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건 명백히 기억을 떠올리기를 꺼리는 내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리라.

하지만 지금, 바로 이 순간, 내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채로 거리를


나다니게 된다면.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자 노력을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간 떠올리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걸까.

끔찍하고도 어쩌면 잔인할 수 있는. 떠올리면 괴로울지도 모르는.

‘비록 넌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이 되었지만, 사실 잊고 있었던 기억에 행복한 기억이 더


많다면? 네가 잊고 있었던 게 아주 소중한 기억이었다면?’

하지만 요한의 말대로 사실은 아주 소중했던 기억일지도 모르는.

요한은 내가 기억을 찾기를 바랐다. 그 이유가 온전히 세나만을 위한 것이라곤 하지 않았던


그였다.

‘오로지 세나만을 위한 거라고 말할 순 없어. 지금 내 눈앞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건,


너니까.’

나는 그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가기 싫은데요?”

왜 심술이 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요한이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내 기억이 돌아오길 바라길 원했던 걸까.

“…….”

모가 가득한 내 대답에 요한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워지며, 그는 침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땅이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무거운 한숨이었다.

아, 요한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내 마음이 나약해지는데.

나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

“농담, 농담. 좋아요! 그럼 오랜만에 잡화점 아저씨도 만나 봐야겠어요. 너무 좋은 옷을 입고


있어서, 저인 줄 알아보지 못하면 어떡해요?”

피 칠갑이 된 나를 처음으로 발견했던 잡화점 아저씨. 아저씨는 잘 지내려나.

잡화점 내외는 나를 친딸처럼 대해 주며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도리어 잡화점 내외에게 폐를


끼친 사람은 나였다.

왜냐면, 나는 일을 정말로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꼭 잡화점 일이든 집안일이든, 내가 손만


대면 결말은 파국이었다. 깨뜨린 접시만 해도 몇 개인지.
나는 결국 잡화점을 나온 터였다. 더 있다간 잡화점을 말아먹을지도 몰라.

잡화점 아저씨에 대한 생각을 잠깐 한 뒤, 다시 바라본 요한의 얼굴엔 웬 우쭐한 기운이


그득했다.

“요한 씨. 지금 그 표정이 의미하는 바는 뭐죠?”

조금 전까지 침울해했으면서, 이제 와 우쭐해진 이유가 뭐야?

요한은 어깨를 작게 으쓱이며 물었다.

“그 좋은 옷. 누가 사 줬지?”

“…….”

“내가 사 줬다는 걸 꼭 알아 달라는 건 아닌데.”

그렇지만 알아 달라는 거지?

나는 작게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네에, 네에. 대단하신 요한 랭카스터 씨가 사 준 거, 당연히 알죠.”

“음. 네 취향에 맞았을까 싶기도……. 착, 착각하지 마. 내가 네 취향에 더 알맞은 드레스를


사 주고 싶어 한다는 그런 착각.”

요한의 희한한 어법에 대해서는 이미 완전히 간파한 나였다.

‘네 드레스 취향이 궁금해.’

나는 요한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고, 그에 걸맞은 대답을 해 주었다.

“전 뭐든 좋아요. 프릴이 많은 화려한 드레스도 좋고, 심플한 드레스도 좋고. 그건 다 당신이


저를 생각해서 사 준 거니까.”

“……!”

능청스러운 내 대답에 요한은 자못 놀라며 얼굴을 약간 붉혔다.

나는 일전에 그가 나를 놀렸던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얼굴.”

“…….”

“붉어졌네요.”

내가 사실을 읊어 주기가 무섭게 요한은 제 얼굴을 더더욱 붉혔다. 어쩜, 솔직하지 못한 건


한결같구나.
“너……!”

요한의 말은 구두점을 찍지 못했다. 잘 달리던 마차가 멈추며, 마부가 ‘도착했습니다.’라고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벌렸던 입술을 어색하게 오므렸다. 어울리지 않게 줄곧 침묵한 채로 우리의 대화를


엿듣던 조슈아가 한마디를 내뱉은 것은 그때였다.

“엄마, 아빠. 사이가 너무너무 좋아 보여.”

얘야, 네 눈엔 우리가 사랑싸움을 하는 걸로 보이니.

나는 조슈아의 손을 꼭 잡고선 말했다.

“나가자.”

마차에서 제일 먼저 내린 이는 요한이었다. 그는 익숙하게 마차에서 내려, 열린 문 앞에


멀뚱거리고 서 있었다.

내가 막 마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요한은 돌연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마치 에스코트라고


하는 모양새처럼.

요한은 헛기침을 하며 내가 얼른 손을 잡아 주기를 기다렸고, 나는 잠깐 망설였다.

이 손을 잡아, 말아.

“엄마, 뭐해! 아빠 손을 잡아 줘야지. 킥킥.”

나를 부추긴 것은 요망한 조슈아였다. 나는 조슈아의 부추김에 못 이겨 조슈아의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요한의 손을 잡았다.

 
이내 맞닿은 그의 손의 감촉이 그리 싫지 않다. 따뜻하고, 온기 가득한 그의 손. 까닭 모를
희미한 그리움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손.

내가 제 손 끝에 손을 올리기가 무섭게 요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을 완전히 그러잡았다.


손잡는 건 또 왜 이렇게 익숙한 거야.

고작 손만 잡았을 뿐인데, 다른 진한 스킨십들을 했을 때보다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상하게도, 요한은 내가 마차에서 완전히 내린 다음에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다정하게 맞잡은 손을 지그시 내려 보다, 이내 요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요한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은 채로 내게 말했다.


제 37 화. 설마 신랑?! 설마 아들?!

“앞장서.”

요한의 말은 명령조에 가까운 짧은 말이었지만,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그가 짓고 있던 훌륭한 미소 탓일까. 어쩐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런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날씨가 몹시도 좋았기에 그런 것일까.

이유가 어찌 되었건 그다지 상관없었다. 나는 기분이 좋았고, 요한과 평소처럼 말다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요.”

나는 눈앞에 펼쳐진 기다란 대로를 바라보았다.

지난 5 년간 줄기차게 다녔던 그 대로. 완전 홈그라운드다.

내 얼굴엔 자신만만한 미소가 맴돌았다.

* * *

내가 잠깐 떠나 있었던 동안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중앙에 난 긴 대로를 따라 일렬종대로 늘어선 층이 낮은 여러 건물들. 상가들. 그리고 상인들.

거리를 가로지를 때마다 여러 소리들이 시끄럽게 울렸다.

물건을 팔기 위해 홍보하는 상인의 목소리, 길가를 나다니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어디선가


들리는 싸움 소리, 출처를 알 수 없는 희미한 음악 소리마저도.

조용하고 적막하기만 한 요한의 공작저와는 판이한 곳이었다.

내겐 제법 익숙한 거리의 소음이었지만, 나는 새삼 요한이 걱정되었다.

처음 봤던 날, 나를 ‘더러운 것’이라며 질겁했던 요한이 이런 곳을 좋아할까 싶어서.

요한은 더러운 것, 시끄러운 것이라곤 질색할 것 같은 예민한 남자 같았지만…….

“…….”

내 손을 잡은 채 나와 걸음의 속도를 맞추고 있는 요한은 아직까지도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맙소사. 내 옆에 선 이 남자는, 못생긴 주름이 생길 정도로 매번 인상을 구기던 그 요한이
맞는 거야? 시끄러운 거 엄청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건가.

굳게 닫혀 있던 요한의 붉은 입술이 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훔쳐보는 거 다 티나.”

“제가 언제요. 흠흠.”

젠장. 어떻게 안 거야. 눈이 옆에 달린 것도 아니고.

나는 시치미를 떼며 괜스레 내 반대쪽 손을 잡은 조슈아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군말 없이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그사이, 요한이 대꾸했다.

“소름 끼치도록 진득한 네 시선을 내가 왜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놈의 소름은 얼마나 더 돋아야 돋지 않게 되는 걸까.

나는 다른 말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하하,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더라.”

기억을 잃은 사고 후, 내가 근 2 년간 머물렀던 잡화점.

그곳에 찾아가는 것은 나도 제법 오랜만이었다.

잡화점에 더는 폐를 끼칠 수 없어 스스로 나온 다음에, 안부 인사를 할 겸 종종 찾아갔던


가게였다.

하지만 지난 1 년 동안 통 찾아가지 못했었다. 먹고 사는 게 좀 팍팍 했었어야지.

나는 내 기억들 중 유일하게 선명한 지난 5 년간의 기억을 더듬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길로 쭉 나 있던 대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로 들어섰을 때, 조용했던 조슈아가


소리쳤다.

“엄마, 엄마! 여기 기억나? 여긴 아빠가 돌봐 주지 않아서, 엄마가 배고파했던 곳이야!”

“컥.”

나는 예고 없이 훅 들어온 조슈아의 말에 헛기침을 두어 번했다.

‘아빠가 돌봐 주지 않아서, 엄마가 배고파했던 곳’이라는 말이 왜 이리 당황스럽고 우스운지


모르겠다.

“조, 조쉬. 여길 기억하고 있었어?”


요한도 당황한 것인지 말을 조금 더듬거렸다. 나도 요한과 같은 마음이었다.

꼬맹이, 너. 따가운 햇볕 아래서 아사하기 직전이었던 내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단


말이야?

조슈아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으며, 배가 고팠던 내가 앉아 있었던 곳까지 총총총 걸어갔다.

이내 걸음을 멈춘 아이는 조막만 한 배를 움켜잡고선 어쭙잖은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엄마가 꼬르륵, 거리고 있었어. 아빠는 그런 엄마에게 결국 밥을 주었고.”

배가 고픈 모습을 아주 현실감 있게 연기한 조슈아는, 이번엔 요한을 향해 엄지를 추켜세웠다.

“역시 우리 아빠는 최고의 밥맛이야!”

……내게 밥을 준 자신의 아빠를 최고의 밥맛이라 칭하는 조슈아라.

아이의 말에 돌아온 것은 요한의 작은 탄식이었다.

“하……. 밥맛의 악몽이 끝나지 않는군.”

그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나는 속삭이듯이 그에게 말했다.

“밥맛의 진실을 언제 알려 줘야 좋을까요?”

“아직은 안 될 것 같아. 저렇게 자랑스럽게 밥맛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사실을 얘기해.”

“그렇기는 하네요. 하하하.”

조슈아의 표정이 너무도 해맑았다. 밥맛이라는 단어를 저토록 좋아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는 조슈아를 보던 시선을 옮겨, 나란히 서 있던 요한의 얼굴을 다시금 쳐다보았다.

바라본 그의 얼굴은 자못 심각해 보이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요한은 방긋방긋 웃으며 거리를 나다니는 조슈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내게 말을


걸었다.

“여긴 예전에 세나와도 종종 다녔던 길이었어.”

그것은 아주 뜻밖의 고백이었다.

“……네?”

나의 되물음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신의 고백을 이어 갔다.

요한의 옆얼굴 속, 그의 검은 눈동자는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마치 과거의 어떤 일을


상기하고 있다는 듯이.
“꼭 참석해야 하는 연회가 있어서 조쉬와 함께 참석하고 오는 길이었어. 문득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

“…….”

“그래서 옛 추억을 떠올리며 조쉬와 걷기 시작했지. 마차가 아닌 내 발로 직접 걷는 건 꽤나


오랜만이었어. 세나가 죽은 이래로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요한은 나와 처음 만났던 그 날, 나를 발견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걸까?

나는 추임새를 넣지 않고선 경청했다. 장난을 치거나, 끼어들어선 안 될 분위기였다.

“아이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 나간 건 불시에 벌어진 일이었어.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어디론가 내달리는 아이를 붙잡을 수 없었고, 뒤늦게 아이를 쫓아갔어. 다행히도 곧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 말한 그는 그제야 내 쪽을 내려다보았다. 초점이 흐렸던 그의 검은 눈동자엔 어느새


밝은 이채가 서려 있었고,

“그곳에서 너를 발견했지. 세나와 똑같이 생긴 널.”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그의 눈동자는 내 눈동자를 오롯이 응시하고 있었다.

세나의 그림자 정도로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나라는 사람 그 자체로 바라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하는 눈빛이었다.

“요한 씨.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요한은 픽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정체가 여전히 궁금하다는 말.”

요한은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당신은 내 정체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와 조금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요한의 말이 한발 더 앞섰다.

“조쉬! 이리로 오렴. 가던 길을 계속 가야지.”

요한은 조슈아에게 손짓을 했다.

짧은 촌극을 끝낸 조슈아는 다시금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내 손을 부여잡았다.

아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엄마.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나는 조슈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네 아빠가 나를 돌봐 주기 전에, 내가 잠깐 살았던 곳?”

“우와! 조슈아는 기대돼.”

나도 기대된단다. 나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뺨 위로 요한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말했다.

“자, 그럼 다시 가 보자.”

* * *

과거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은 내게, 돌아갈 곳이 존재한다는 건 언제고 마음의 위안이 되는


사실이었다.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 언제 가도 나를 반겨 줄 곳.

“도착.”

나는 어느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리키네 잡화점>

이곳이 바로 내가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연고 없는 나를 기꺼이 거두어 주었던


리키 아저씨의 잡화점.

잡화점은 층수가 낮고 조금은 낡은 상앗빛의 건물이지만, 어찌나 관리를 잘했는지 건물의


외관이 깨끗해 보였다. 심지어 마당 앞에는 쓰레기 하나,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과연, 깔끔한 성격을 자랑하던 리키 아저씨다운 면모다.

나는 잡고 있던 요한의 손을 놓고선, 유리로 된 잡화점 문을 밀었다. 딸랑, 하는 차임벨


소리와 함께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리키 아저씨는 마침 가게의 물건을 정리하던 참이었는지, 유리문 근처에 있던 가판대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시야를 가리던 모자를 벗어 던지며, 아저씨의 이름을 불렀다.


“리키 아저씨!”

아저씨는 내 목소리를 금세 알아들은 듯 내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리나?”

똑바로 마주한 아저씨의 모습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듯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게 만드는 푸근한 인상을 가진 아저씨.

동그랗게 나온 배도 여전했고, 빗은 것인지 빗지 않은 것인지 의아한 갈색빛의 퍽퍽한


머리칼도 여전했고, 푸석한 머리칼과 상반되는 멋들어진 콧수염도 한결같았다.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아저씨의 모습을 보자 어쩐지 감격이 서렸다. 부모님에 대한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런 내게 있어 아저씨는 부모님과 비등한 사람이었다.

“리나!”

의아했던 목소리는 확신에 가까운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울림이 좋은 중후한 아저씨의 목소리
또한 그대로였다.

아저씨는 단번에 내 앞까지 다가와 나를 가볍게 껴안았다.

“이게 얼마 만이냐. 그간 왜 들리지 않은 거야?”

“그간 일이 많았어요. 죄송해요.”

아저씨는 안았던 나를 놓아주며, 뒤늦게 내 모습을 눈으로 꼼꼼히 관찰했다. 얼마 못 가


아저씨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곤 묻는다. 놀리는 투라고는 일절 없는 진지한 어투로.

“리나 너! 왜 이렇게 깨끗해졌어?”

“…….”

나는 침묵했다.

나 원. 도대체 내가 얼마나 더러웠던 거야.

아저씨까지 이렇게 말하면, 요한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던, ‘더러운 것’이라는 말에 대해


이의를 가질 수 없잖아.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때 조용히 끼어든 웃음소리 하나가 있었다.

“풉, 큭큭.”

우리의 감동적인 재회를 잠자코 지켜보던 요한의 웃음소리였다.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요한은 한쪽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린 채로 웃고 있었다. 심지어
어깨도 들썩였다.

나는 가자미눈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요한은 쉬이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러자 리키 아저씨의 시선 또한 자연스럽게 요한에게 향했다.

요한의 모습을 샅샅이 훑어본 아저씨는 이번엔 더욱 놀란 얼굴을 하며 나에게 물었다.

“설마 신랑??!!”

아저씨, 느낌표와 물음표가 많은데요.

나는 부정의 말을 재빠르게 꺼내었다.

“아니에요!”

그 순간 또다시 우리 사이를 끼어든 다른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아저씨 안녕!”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조슈아가 그 주인공이었다.

아저씨는 별안간 놀란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번엔 입까지 쩍 벌리며 기함하는
게 아닌가.

아저씨의 눈은 나를 한 번, 조슈아를 한 번,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나는 아저씨의 놀란 얼굴과 흔들리는 동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곧바로 눈치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조슈아와 나는 모자 사이라고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정말 닮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아들???!!!”

아저씨, 느낌표와 물음표가 더 늘었어요.

“아니에…….”

자연스럽게 아니라고 말하려던 찰나,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옆엔 나를 엄마라고 굳게 믿고 있는 조슈아가 있었다. 조슈아가 똑똑히 듣고 있는데, 차마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며, 어떤 말을 꺼내야 이 상황을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을지 고뇌에


잠겼다.

내 고뇌를 해결해 준 것은 조슈아였다.


“응! 우리 엄마야! 조슈아는 엄마 아들. 엄마랑 나는 눈동자 색이랑 머리카락 색이 똑같아.
예쁘지?”

아이는 우리의 관계를 너무도 확실하게 정립하고 있었다.

 
나는 확고한 어투로, 물러섬이라곤 없이 말하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눈동자가 까닭 없이 슬퍼 보였다. 똘망똘망한 아이의 눈동자는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슈아는 엄마 아들이 아니야?’

“……하.”

그래, 내가 졌다. 아이의 눈빛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네, 아마도 제 아들이에요.”

나는 조슈아가 내 아들임을 인정했다.

그렇게 된다면 요한도 자연스럽게 내 남편이 되는 건……가?

“아마도?”

아저씨는 약간의 의문을 표했다.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어쩐지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단다. 갑작스럽기는 하다만……. 아이가 아주 귀엽고


총명해 보이는구나.”

아저씨는 자세를 낮추어 조슈아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어이구, 우리 예쁜 강아지. 이름이 뭐라고?”

낯선 이의 물음을 겁낼 법도 했지만, 조슈아는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조슈아라고 해. 그리고 나는 예쁜 강아지가 아니야.”

“허허허. 요 녀석, 엄마를 닮아서 말 한 번 아주 살벌하게 하는구나.”

“조슈아는 엄마를 좋아해.”

“그래, 그래. 나는 리키라고 한단다. 편하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렴.”

“웅웅. 리키 할아버지.”
“어쩜 이리도 말을 잘할꼬.”

리키 아저씨는 자신의 손자라도 만난 양 조슈아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조슈아는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조금은 투박한 아저씨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특하기도 해라. 조슈아를 보는 아저씨의 눈빛이 자못 부드럽기만 했다.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나도 조슈아를 처음 보자마자 아이에게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도 나와 같은 호감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처음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도 단번에 함락시키는 조슈아. 사랑스러운 아이.

조슈아를 바라보던 아저씨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간 것은 불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시선은 내 뒤쪽에 어색하게 서 있던 요한에게 닿았다.

“리나. 그럼 저쪽은 네 신랑이 맞는 거 아니니.”

아저씨는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

내가 침묵하자, 아저씨의 물음은 요한에게 향했다.

“아닌가?”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요한의 얼굴을 응시했다. 중간중간 큭큭거렸던 요한은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런 얼굴이라면……. 좋지 않은 대답이 흘러나올 게 분명한데.

요즘 그답지 않게 유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요한의 본모습은 밥맛에 가까웠다.

그는 ‘그런 소름 끼치는 착각 따위는 삼가 줬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내뱉을 것 같은


심드렁한 얼굴을 한 주제에, 꽤나 놀라운 대답을 읊조렸다.

제 38 화. 쌍둥이는 풍파를 불러일으키는 존재

“처음 뵙겠습니다. 요한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 것도 모자라, 한 발자국 걸어 나왔다. 그러곤 아저씨에게 악수를


청하는 게 아닌가.
“저는 조슈아의 아빠입니다.”

저는 조슈아의 아빠입니다, 라.

내가 조슈아의 엄마라고 인정을 했으니.

그렇다면 우리는……?

“리나. 아무리 부끄러워도 그렇지. 남편을 부정하면 어떡하니. 허허허.”

아저씨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나를 더욱 황당하게 만든 것은 요한의 대답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는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책망하듯이 말한 것이다. 내가 마치 실제로 부끄러움 때문에


남편을 부정해 버린 사람인 것처럼!

“……?!”

나는 이마를 짚었다. 졸지에 남편까지 생겨 버리다니.

“미쳤어요?”

나는 진짜 남편인 양 내 옆에 보란 듯이 선 요한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요한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조쉬가 지켜보잖아.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분위기상.”

이거 참. 틀린 말도 아니고. 조슈아가 지켜보는 지금, 나는 역시나 우리 관계의 진실을


토로할 수 없었다.

내가 요한을 외면하면 조슈아가 울지도 몰라.

‘이번엔 왜 엄마가 아빠를 돌봐 주지 않으려고 해? 조슈아는 슬퍼.’

그리 말하며 눈물을 뚝뚝 흘릴지도.

조슈아 한정 마음이 약한 내 죄다. 나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리키 아저씨. 마틴 아줌마는요?”

잡화점의 금실 좋은 부부인 리키 아저씨와 마틴 아줌마. 둘러본 잡화점 내부엔 마틴 아줌마의


신형은 보이지 않았다.

“장을 보러 잠깐 나갔단다. 곧 있으면 돌아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렴. 마틴도 네 남편과
아들을 보면 무척이나 기뻐할 거야.”

오해는 그렇게 커져 가는 걸까.


“하하. 그렇게요.”

나도 이젠 모르겠다. 오늘 하루 잘생긴 남편과 귀여운 아들 하나 생긴 셈 치지, 뭐.

그리고 요한이 내 남편이라면…….

나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요한의 얼굴을 새삼 꼼꼼히 바라보았다.

동그란 이마 위로 부드럽게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 시원하게 잘 뻗은 눈썹, 기다란 눈매,


곧게 내려온 콧대, 소년을 떠올리게 하는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그리고 붉은 입술.

그래, 그가 내 남편이라면 썩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도무지 부정의 말을 꺼낼 수 없는 잘생긴


얼굴을 가졌잖아.

이런 남자와 산다면 적어도 눈 호강은 매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가끔 귀엽기도 해서,


놀려먹는 재미도 있을 테고.

요한이 나를 세나로만 생각해 주지 않는다면. 그의 친절과 스킨십들이 모두 내가 세나와


별개의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

그렇다면 나는 당신이 정말로 내 반쪽이 되기를 바라게 될지도 몰라.

“그나저나 이렇게나 훤칠한 신랑을 도대체 어디서 만났대?”

리키 아저씨는 아직까지 얼굴을 붉히며 내게 물었다. 나는 꾸밈없이 솔직하게 알려 주었다.

“길거리에서요.”

내 말에 아저씨는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조금 더 설명을 보태려던 그때, 조슈아가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선 앞으로 조금


걸어갔다.

“조슈아?”

자박자박 걸어간 조슈아는 나와 아저씨 사이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곤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장황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배를 잡고 있었어. 꼬르륵 소리가 났지. 그때 아빠가 딱~


나타나서 엄마를 구해 줬어. 완전 최고의 밥맛처럼! 엄마는 우리 집에 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깨끗해졌어! 조슈아는 얼굴이 새카맸던 엄마도 좋았고, 얼굴이 깨끗해진 엄마도 좋아.
어떤 모습이든 어쨌든 모두 다 엄마인 거니까~!”

우리가 만났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준 총명한 조슈아였다.

물론 중간에 ‘완전 최고의 밥맛처럼.’이라는 흠 같은 말이 들어가 있기는 했지만. 끙.

조슈아의 언변에 요한은 다시금 소리 죽여 웃기 시작했다.


“큭큭.”

나는 약간 발끈한 채로 물었다.

“요한 씨. 아까부터 깨끗해진다는 말만 나오면 도대체 왜 웃는 거예요?”

그는 훌륭한 미소가 스민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더러웠던 네 모습이 자꾸만 생각나서.”

“그게 웃겨요?”

“어. 그럼 웃기지, 안 웃겨?”

나는 그의 웃음 포인트를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대화를 말자, 말아. 나는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조슈아의 귀여운 연설에도 아저씨는 웃음 대신 심각해진 얼굴을 했다. 아저씨는 무언가를 짧게


생각하더니, 이내 내게 물었다.

“리나. 혹시……. 기억이 돌아온 거야?”

나는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지금도 소실된 기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이곳까지 온걸요.

“아……. 아이가 많이 크길래, 네가 기억을 잃기 전에 낳은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단다. 적어도 다섯 살은 훌쩍 넘어 보이는데……. 오 년 전이면, 사고를 당한 네가 우리
잡화점에 들어왔던 해가 아니니. 묘한 일이구나.”

리키 아저씨의 말이 맞았다. 내가 끔찍한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은 것은 오 년 전, 즉 다친


나를 처음 발견했던 아저씨가 나를 거두어 준 것도 오 년 전이라는 거다.

그런 내게 다섯 살이 된 아들이 있는 건, 너무 이상한 일이잖아. 아저씨가 묘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할 성싶었다.

“아저씨. 사정이 정말로 많은데, 지금은 듣는 귀가 너무 많네요. 조만간 다시 찾아와서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아무래도 이 요망한 부자를 떼어놓고 이곳에 다시 찾아오는 게 좋을 듯싶었다. 그때 내 사정을


제대로 설명해야지.

내 말에 아저씨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여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저씨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아마도 내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실망을 한 것 같았다. 나는 내 기억을


찾기를 두려워했지만, 아저씨는 내가 기억을 찾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아저씨는 내가 누군지. 내가 왜 그런 끔찍한 사고를 당했는지 알아야 한다고 했다.


‘피하지 않고 직면해야지.’ 아저씨는 마치 각인이라도 시켜 주듯 이따금씩 그렇게 말하곤 했다.

요한이 했던 말과 같은 말이었다.

나는 분위기를 환기시킬 요량으로 다른 말을 꺼내었다. 아저씨의 어두워진 얼굴을 보는 건,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나저나 가게는 하나도 변한 게 없네요. 여전히 손님도 별로 없고.”

나는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며, 오랜만에 찾은 가게를 거닐었다.

여러 가판대 위에는 제국에서 보기 드문 희귀한 물건들이 즐비했다. 나쁘게 말하자면 희한한


물건들이기도 하다.

그 물건들은 제국에 떠도는 여러 미신에 기반한 물건들이 절대 다수였는데……, 가령, 불운을


쫓아 주는 못생긴 인형이라든지, 소원을 이뤄 주는 망령이 깃든 램프라든지, 행복을 불러오는
까마귀 모형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러다 내 눈에 띈 것이 하나 있었다.

잡화점에 2 년간 살며,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물건이 그 정체였다. 좀 생소한 물건.

나는 그것을 집어 들어 조금 더 자세히 관찰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를 가진, 남아일지 여아일지 모를 애매한 모습의 인형 두 개.

붉은 옷을 입고 있던 두 인형은 각각의 한쪽 팔이 나란히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쌍둥이를


붙여 놓은 모양새 같았다.

무엇에 쓰는 인형인 걸까.

아니, 이 인형은 ‘어떠한 일’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것일까.

의미 없는 물건은 없었다.

하찮게 보이더라도, 각자가 만들어진 의미가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이건 뭐예요?”

나는 조슈아와 놀고 있던 아저씨에게 물음을 건네었다. 아저씨는 내 손에 쥐인 인형을 보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그 인형은 제국 내의 유명한 미신 때문에 만들어진 인형이란다. 쌍둥이를 낳지 않게 도와주는


인형이지.”

“쌍둥이요?”

“그래. 쌍둥이를 낳게 되면 그 집안에 모진 풍파가 들이닥친다는 미신이 있어. 아주 예전부터


전해져 오는 미신이란다.”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였다. 잡화점에서 살았다고는 하나, 미신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니까.

아저씨는 설명을 조금 더 덧대었다.

“제국에선 아주 오랫동안 쌍둥이는 불길하다고 여기고 있어. 만약에 쌍둥이를 낳게 된다면, 둘


다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한쪽만 죽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한쪽만 버리기도 한단다. 즉
애당초 쌍둥이를 낳지 않은 것처럼 꾸미는 거지.”

애당초 쌍둥이를 낳지 않은 것처럼 꾸민다.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바싹 마른 입술을 짓이기며, 쌍둥이라는 말을 몇 차례 되뇌었다.

쌍둥이라.

무거운 둔기에 맞은 듯, 뒤통수가 얼얼해진 것은 그때였다.

“……!”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머릿속엔 한 가지 가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가정은 그러했다.

세나와 내가 쌍둥이였다면.

벨라에게 들은 바로 세나는 외동이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제국에는 쌍둥이를 불길하게 여기는


미신이 있었다.

쌍둥이지만 쌍둥이임을 알려선 안 된다. 쌍둥이는 집안에 모진 풍파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였으니까.

둘 다 죽이거나, 한쪽만 죽이거나, 아니면 한쪽만 버리자. 애당초 쌍둥이를 낳지 않은 척을


하자.

나는 자연스럽게 어떤 귀결에 도달하고야 만다.

세나와 나 중, 누군가는 알려지지 않은 쌍둥이 중 하나였다면.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온몸엔 소리 없는 소름이 피어올랐다. 어쩐지 뒷덜미마저도 서늘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 결론은 그저 내 추측이었을 뿐, 무언가 가시적인 근거가 있는 결론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한 가지 확신했다. 내가 알아낸 여러 사연은 분명 모두 연관이 있다고.

하지만 이전에도 느꼈듯이 연관된 이야기들을 이어 줄 연결 고리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중간에 아주 중요한 무언가의 연결점이 누락되어 있다. 틀림없다.

그 연결 고리마저도 명료히 알게 된다면, 나는 세나와 나, 그리고 나의 기억상실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있게 되는 걸까.

느리기는 하지만 확실히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아니,
잊고 있었던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나는 복잡해진 눈으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즉부터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인지, 우리의 눈은 단번에 마주쳤다. 시시껄렁한 말을


주고받던 요한의 얼굴 또한 제법 복잡해져 있었다.

당신도 나와 세나가 쌍둥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교차한 눈빛 속에서, 내가 보낸 소리 없는 메시지였다.

요한의 입술은 떼어지지 않았다. 그는 무겁게 가라앉은 검은 동공으로 한참이나 나를 응시했을


뿐이었다.

“……리나도 하나 주랴?”

나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키 아저씨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네?”

다소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내게 쌍둥이를 낳지 않는 힘이 담긴 물건을 왜 준다는 거지?

아저씨는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요한을 번갈아 보았다.

“둘째는 리나를 닮은 딸이면 좋겠는데. 허허.”

“……?”

나는 몇 초가 지난 후에야 아저씨가 무슨 의도로 인형을 주겠다고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아저씨! 무,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다 알면서 묻기는. 필요 없으면 말고.”

“나 원 참.”

시답지 않은 농담을 오갔음에도 심각해진 얼굴이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나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기억을 찾고자 찾아온 잡화점이었건만, 도리어 더 가치 있는 정보를 알아낸 기분이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인형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모양은 쌍둥이에 비등했지만, 쌍둥이를 낳지


않게 도와주는 효험이 있는 인형.
내 머리 위로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조용히 다가온 누군가의 손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헝클어뜨렸다. 마치 리키 아저씨가


조슈아의 금발을 흐트러뜨렸듯이.

“심각해하지 마. 이따가 같이 얘기해 보자.”

요한이었다.

그는 역시나 내가 하고 있었던 생각을 일찌감치 모두 눈치챘다는 듯이 말했다.

요한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일-즉, 나와 세나에 관한 일-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가 하는 걱정과 생각을 이해하는 단 한 사람.

“함께 맞서 보자고 했잖아.”

요한은 일전에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했다. 그때 했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진심이라는 듯.

나를 내려다보는 요한의 눈동자엔 다정한 기운만이 그득했다.

이봐요, 요한 씨. 이번엔 내게서 세나를 떠올리지 않은 거야? 당신이 지금 걱정하는 건,


리나인 거냐고.

믿을 수 없게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간 요한에게 떨렸던 심장보다도 훨씬 더. 아주 많이.

진득한 스킨십을 한 것도, 고백을 뜻하는 말을 들은 것도 아니었건만, 내 심장은 제 세기를


더해 갔다.

나 어떡해. 당신이 진짜로 좋은 건가 봐. 날 이해해 주는 당신이 하나도 밥맛으로 보이지 않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밥맛이 밥맛으로 보이지 않는 건, 정말로 큰일이었다.

“……왜? 내가 실수라도 했나?”

요한은 내가 인상을 찌푸린 이유에 대해 묻는 듯했다.

아암, 큰 실수를 했지. 너무 다정하게 굴었잖아.

“차라리 실수를 한 게 더 나았으려나요.”

“어?”

그럼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자네. 요한이라고 했나? 자네 생각은 어떤가?”

질문의 타깃을 바꾼 아저씨의 물음이었다. 요한은 내 머리 위에 올려져 있던 손을 급히


갈무리하며,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아……. 인형. 둘째. 여자아이.”

생각나는 대로 읊조린 듯한 그는 뺨을 조금 붉혔다. 늘 그렇듯 감정의 변화가 얼굴에 너무도


잘 드러나는 요한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뺨을 붉히는 걸까.

“요한 씨. 뺨이 붉어졌어요.”

요한은 마른기침과 함께 대답했다.

“나는 절대로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어.”

그리 말하는 그의 뺨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홍당무가 따로 없다.

나는 그 순간 확신했다. 그가 이상한 생각을 한 게 분명하다고. 이를테면 조금 야릇한


생각이려나.

“조슈아도 여동생이 좋아!”

잠잠하던 조슈아마저도 끼어들어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맙소사. 기시감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

* * *

“무언가 떠오른 게 있어?”

요한은 작은 기대가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해 줄 만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니요. 딱히.”

쌍둥이와 관련된 묘한 깨달음을 얻기는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내가 세나와 쌍둥이가 맞다면 ‘쌍둥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적어도 무언가를 떠올렸어야


했지 않을까. 그것이 아무리 작은 단서라고 할지라도.
“그렇군.”

요한의 목소리에선 작은 실망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쉽게 떠오를 기억이었다면, 진즉 떠올렸을 거예요.”

“그래. 그럼 조금 더 천천히 둘러보지. 오랜만에 온 거 아냐. 마틴 아주머니? 하여튼 그분도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기왕 잡화점까지 온 김에 마틴 아줌마까지 만나고 싶었다.

요한은 나를 이끌고선 잡화점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 또한 이런 곳은 처음이었던지,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기에 바빴다.

아주 귀찮았는데, 놀랍게도 나는 매번 친절하게 답을 내어놓고 있었다.

……아주 좋지 않은 현상임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요한 못지않게 내 주변을 머물렀어야 할 조슈아가 조용했다.

나는 요한에게 ‘행운을 불러주는 까마귀 인형’에 대해서 설명하던 것을 멈추고선, 조슈아를


찾았다. 내 설명을 듣던 요한의 시선 또한 조슈아를 좇았다.

“조슈아는 뭘 하는 걸까요?”

우리와 약간 떨어져 있던 조슈아는 리키 아저씨와 속닥거리고 있었다. 조슈아는 우리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제 몸을 흠칫 떨며, 우리의 시선을 외면했다.

아주 수상해 보이는데 말이지.

조슈아 예쁜아, 넌 아저씨와 무슨 앙큼한 모의를 짜고 있는 거니.

제 39 화. 네가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우리는 구태여 조슈아를 캐묻지 않았다. 아이가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한다면야,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 주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조슈아가 나쁜 짓을 도모하고 있을 거라는 의심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내 조슈아는 어떤 작은 물건을 자신의 재킷 주머니 속에 쏙 집어넣었다. 동작이 어찌나


빠르던지, 우리는 물건의 정체를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조슈아가 뭘 산 걸까요?”

“글쎄. 아무리 잘난 아빠라고 해도, 나도 가끔은 조쉬의 행동을 헤아리지 못할 때가 있어.”


요한은 거들먹거리면서도 가까이 붙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가, 가까이 붙지 마요.”

“왜 설마…….”

“떨려서 그런 거 아니니까, 좀 떨어져요!”

아까부터 떨리던 심장이 아직까지도 빨리 뛰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가까이 붙지 좀


말라고.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누가 보면, 내가 전염병이라도 걸린 줄 알겠어.”

요한은 툴툴거리면서 내게 한 발자국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까이 붙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공기가


희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랄까.

그때 잡화점 유리문의 차임벨 소리가 명쾌하게 울렸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마틴 아주머니였다.

“마틴 아주머니!”

나는 단번에 달려가 아주머니의 품에 안겼고, 아주머니는 그런 내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따스한 손길이었다.

“리나. 이게 얼마 만이니.”

리키 아저씨 못지않게 푸근한 인상을 가진 아주머니의 목소리엔 희미한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가볍게 안겼던 몸을 떼어 내며, 아주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주머니 역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항상 아름다운 진저 빛의 머리칼을 한쪽으로 곱게 땋곤 했었는데, 오늘도 그러했다.


왠지 모르게 소녀를 떠올리게 하는 아주머니였다.

“제가 너무 오랜만에 찾아온 거죠? 죄송해요.”

“아니란다. 괜찮아. 우리를 잊지 않고 이렇게 이따금 찾아와 주는 것도 너무 고마운걸.”

아주머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뺨을 어루만졌다.

어쩜, 이렇게나 좋은 사람들이 또 있을까 싶다.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는 아니었지만, 잡화점 내외와 내가 나누었던 정은 끈끈했다.

기억을 잃은 후, 백지장에 가까웠던 내가 엇나가지 않았던 건……. 다 이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억을 찾지 않아도 행복할 것 같다는 기분을 들게 만들어 준 것도 이분들의 역할이 컸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데 굳이 무언가를 떠올릴 필요가 있을까—, 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내 귓가에 기이한 목소리가 관통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왜 항상 너만 행복해져?’

귓전엔 뜨거운 숨결이 진득하게 맴돌았다. 마치 방금 전, 누군가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인


것처럼.

그 목소리는 마틴 아주머니의 목소리도, 다른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소리가 얇고 가느다랗다. 곧 숨이 끊어질 듯 속삭이는 목소리는 여자의 것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정의하자면, 어린여자의 목소리라고나 할까.

목소리는 한없이 떨렸지만, 그 속엔 뿌리 깊은 증오의 감정이 배어 있는 듯했다.

누구의 목소리일까. 환청인 걸까.

“……리나?”

갑작스럽게 얼어붙은 나를 보며, 마틴 아주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 목소리야말로 현실


속 목소리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의 목소리가 또다시 내 귓가에 박힌 것은 그때였다.

‘네가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방금 전의 목소리보다도 더욱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 누군지 모를 그녀는 내게 명백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넌, 과거에 내가 알던 사람인 거야?

과거에 나를 싫어했던 사람인 거야?

이명처럼 맴도는 목소리 탓이었을까. 시야가 흐려질 정도의 거센 두통이 느껴졌다.

나는 몸을 작게 휘청거렸다. 중심을 잃은 내 몸을 잡아 준 것은 요한이었다.

“요한?”

내 어깨를 꽉 쥔 요한은 나를 자신의 품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릴없이 그의 품에 안긴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또 어지럼증인가?”

“……네.”
“내가 준 차는 잘 마시고 있는 거지?”

나는 영문 없이 흐트러진 호흡을 내뱉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암요. 누가 준 차인데, 꼬박꼬박 잘 마시고 있죠.”

“그런데도 넌…….”

요한은 거기까지만 말하며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럼증에 좋은 차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네 어지럼증에는 왜 차도가 없느냐.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나는 대답 대신 생각했다.

내 어지럼증은 신체적 결함에 의한 현상이 아닐 거라고. 그렇기 때문에 어지럼증에 좋은 차를


먹어도 내겐 차도가 없었던 거라고.

어지러울 때마다 나는 무언가를 떠올렸었다. 가령 요한의 어린 시절 모습이라든지, 요한과


세나가 대화를 나누던 목소리라든지.

그 말인즉슨, 내가 무언가를 떠올릴 때마다 어지럼증이 동반된다는 거였다.

그간 떠올렸던 것들은 놀랍게도 모두 다 환상이 아니었다.

요한은 실제로 어렸을 적 녹턴을 쳤었고, 내가 환청처럼 들었던 요한과 세나의 대화처럼
그녀의 방 문고리는 고장이 나 있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 내 귓가를 들쑤신 목소리 또한 환청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나를 증오했고, 내가 행복해지는 걸 싫어했으며, 나의 불행을 바랐다.

그것은 어쩌면 떠올리는 게 더 끔찍할지도 모르는 과거 기억의 일부분일까.

그녀는 누구일까.

나는 그녀의 정체를 기억해 보려고 애썼지만, 역시나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 이상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도 없었다. 애석한 일이었다.

나는 휴, 하고 짧게 숨을 골라냈다.

“이제 괜찮아요. 붙잡아 줘서 고마워요.”

나는 잠깐 기댔던 그의 품을 벗어났다. 요한은 내 어깨를 잡아 주었던 손을 쉽게 물려주었다.

“엄마, 엄마. 괜찮아? 엄마 어디가 아픈 거야?”

어느새 가까이 다가왔을지 모를 조슈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잠깐 어지러웠던 것뿐이야. 우리 예쁜이. 나를 걱정했어?”

“당연하잖아. 조슈아는 엄마가 아픈 게 싫어. 엄마가 아프면 조슈아는 눈물을 흘릴지도


몰라.”

조슈아는 제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작게 울먹거렸다. 나는 자세를 낮추어 아이를 품에


안아주었다.

“괜찮아. 울지 마. 나 엄청 튼튼한 거, 조슈아도 잘 알잖아.”

“우웅.”

상황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내 앞에 마틴 아주머니가 있다는 걸 뒤늦게


상기하게 된다.

일련의 상황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틴 아주머니는 리키 아저씨와 똑같은 반응을 내비쳤다.

“리나. 설마…… 네 아들이니?”

“아……. 하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마틴 아주머니의 의아한 시선은 이번엔 요한에게까지 닿았다.

“저쪽은 네 남편?”

……아 모르겠다, 나도.

나는 부정의 말을 꺼낼 생각을 깔끔하게 포기하며, 순순히 인정했다.

“네에. 그렇습니다. 저쪽은 소름 끼치는 제 남편인 요한이고, 이쪽은 사랑스러운 제 아들인


조슈아예요.”

“맙소사.”

요번에 몸을 휘청거린 것은 아주머니였다. 마틴 아주머니는 너무도 깜짝 놀란 것 같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리키 아저씨마저도 한 마디를 거들었다. 아마도 오해를 가중시킬 만한 그런


말이었다.

“둘째도 벌써 계획하고 있나 봐.”

“리, 리키 아저씨!”

아주머니는 이마를 짚었다.

“맙소사!”

 
 

* * *

리키 아저씨와 마틴 아주머니는 내가 가게를 다시 나설 때까지 내 건강을 염려했다.

무슨 일을 하든 건강이 제일 우선이라느니. 혹시나 요한이 힘들게 하면 서슴없이 가게로


찾아오라느니. 아무래도 내가 잠깐 어지럼증을 느낀 여파가 컸나 보다.

우스운 것은 요한의 태도였다.

잡화점 내외의 걱정에 요한은 기꺼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네. 제가 책임지고 리나를 잘 보살피겠습니다.’

라고 대답한 것이다.

내가 꼭 진짜 저의 아내라도 된 것인 양. 내가 꼭 그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라도 되는 양.

물론 그의 살가운 태도가 싫다는 건 아닌데…….

아무튼, 나는 괜찮다는 말을 수어 번 하고 나서야 가게를 나설 수 있었다.

“휴.”

나는 잠시 벗고 있었던 모자를 다시금 고쳐 썼다. 모자를 쓰고 있던 그때, 요한이 슬그머니


말을 걸어 왔다.

“이건 절대로 너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말은 아닌데.”

“거지가 당신의 말을 듣기를 거부합니다.”

왠지 곤란하게 만들 말일 것 같아서, 나는 일찌감치 그의 말을 듣기를 거부했다.

“거 참. 일단 한번 들어 봐 봐.”

“저를 곤란하게 할 말일 게 분명해요.”

그러자 요한은 단번에 꽁지를 내리더라.

“……알겠어.”

웬걸. 왜 이렇게 유하게 구는 거야.

올려다본 요한의 얼굴이 시무룩해 보이기만 했다. 언제나 오만하게 굴던 그라고는 믿기지 않는
반응이었다.
의기소침해진 그의 얼굴은 꼭 조슈아의 얼굴과 닮아 보이기도 했다. 내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
짓던 조슈아의 요망한 얼굴과 닮았다고 해야 할까.

시무룩한 얼굴을 한다고 해서 내가 그의 말을 들어줄까 보냐, 라고 생각했지만……. 묘하게도


마음이 자꾸만 나약해졌다.

휘둘리는 건 정말 질색인데, 나는 매번 이 요망한 부자에게 너무도 휘둘리고 있었다.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해진 내 마음은 이내 내 입술마저도 흐물흐물해지게 만들었다.

“아. 알겠어요, 알겠어.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요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다음에도 같이 나왔으면 해. 조슈아가 너무 행복해하니까. ……나도 즐거웠다는


착각 따위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는 저가 하고 싶은 말을 한 일이 기쁜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요한 씨. 당신 그거 알아요? 지금 당신의 얼굴도 행복해 보인다는 거.

물론 내 착각일지도 몰랐다.

“저 엄청 고급 인력인 거 아시죠? 외근 수당은요?”

“하. 나한테서 얼마나 살벌하게 챙길 셈이야?”

“농담이에요. 쫄기는. 저도 이렇게 나오는 거 꽤 즐거워요.”

나는 픽 웃으며 모자를 매만지던 손을 내렸다.

모자도 제대로 썼으니, 이제 공작저로 돌아갈지 다른 곳에 더 가 볼지, 요한과 얘기를 나누어


보는 게 좋을 법 싶다.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까…….”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던 요한의 뒤쪽으로 익숙한 누군가의 뒤통수를 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 대로에 있던 수많은 인파 속에서 단연 눈에 띄는 어느 남자의


뒤통수였다.

“…….”

푸른 하늘을 연상하게 하는 파란 머리카락, 멀리서도 눈에 띄는 훤칠한 키.

바비다.
‘리나. 그만 가 볼게. 내일은 나도 약속이 있어서, 모레에 찾아올게. 그때도 괜찮지?’

며칠 후 찾아오겠다는 말만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져 버렸던 바비.

세나의 방에 들어간 것임이 분명한 바비.

사라진 붉은빛 표지의 책을 가져갔으리라 추정되는 바비.

나는 바비의 뒷모습일 거라고 확신했다.

“요한 씨. 저 잠깐만 따로 어딜 갔다 올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


계세요.”

나는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까닭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바비를


따라가야겠다는 생각만이 맴돌았다.

바비를 따라가서 그와 마주하든, 바비의 행적을 몰래 지켜보든, 어찌 되었건 그를


쫓아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는 거다.

요한은 입가에 스며 있던 미소를 거두어들이며 대꾸했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황당한 빛이 완연한 요한의 얼굴 뒤로, 바비의 신형이 점점 더 멀어지는 게 보였다.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생각나서 그래요. 나온 김에 잠깐만 만나고 곧바로 공작저로


돌아갈게요. 삯마차 탈 돈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럴 거면 같이 가.”

“조슈아가 있잖아요. 아이랑 먼저 돌아가세요. 도망가지도 않을 거니까, 그것도 걱정하지


말고. 조슈아도 먼저 돌아가 있어. 금방 뒤따라갈게.”

대답은 동시에 흘러나왔다.

“응! 엄마!”

“잠, 잠깐만……!”

말 잘 듣는 꼬맹이인 조슈아는 아주 밝게 대답했고, 요한은 여전히 내 독단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한 대답을 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의 설명을 내뱉지 않았다. 그러다간 바비를 완전히 놓쳐 버릴지도


몰랐으니까.

나는 요한을 지나쳐 앞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요한의 목소리가 두어 번 정도 더 들렸지만, 그가 나를 쫓는 일은 없었다.


조슈아를 두고서 나를 쫓아올 리는 없으리라.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이었다.
저녁때여서 그런 것인지, 대로엔 아까 전보다도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나는 여러 사람들을
지나치며, 바비와의 거리를 좁혀 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나는 더더욱 확신했다.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정체가 바비임이


틀림없다고.

이내 그에게 내 손끝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진 순간이었다. 잘 걷던 바비의 걸음이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건만, 나는 어느 건물 뒤로 몸을 재빠르게 숨겼다.

“휴.”

숨을 몰아쉼과 동시에 식은땀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려와 턱 끝에 맺혔다. 나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바비의 다음 행동을 훔쳐보았다.

다행히도 바비는 저를 뒤따른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는 일 없이


몸을 반대쪽으로 틀고 있었다.

그러자 나는 그제야 그의 앞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잘생긴 이목구비를 가진 그. 그는 역시나 바비였다. 내 예상은 조금도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바비가 걸음을 멈춘 이유는 어느 저택에 들어가기 위함인 것 같았다.

그는 잠깐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의 종착지는 대로에 있던 어느


흔해 빠진 건물의 현관이었다.

저곳은 바비의 집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의 집이 아니었다는 거다.

나는 그와 1 년간 친구로 지냈다. 그의 집을 알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내가 알던 바비의 집이 그의 진짜 집이라고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바비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랭카스터 공작가의 자제 중 하나였다.

그가 번듯한 다른 집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한 일이었다.

이내 바비는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아 돌렸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한두 번 방문한 것이 아닌


것 같은 스스럼없는 모습이었다.

별안간 누군가가 내 입가를 가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주 커다란 손은 불시에 다가와 내 입가를 완전히 가리기에 이르렀다.

“……!”

 
제 40 화.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잘 베푼다

<리키네 잡화점> 그 가게는 개업을 한 이래로 상승세를 누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가게를 연 지는 십 년 하고도 더 되었지만, 손님으로 북적북적했던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당연히 가게 수완도 다소 형편없었다.

하지만 주인 내외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님이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되어 준다면야


여러모로 감사했기 때문이다.

잡화점 내외는 상인들 사이에서 금슬로는 단연 최고로 뽑히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한마디로 아이가 없었다는 거다.

아무리 노력해도 들어서지 않는 아이를 보며, 두 사람은 입양이라도 할까—, 라고 종종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내젓기 일쑤였다.

두 사람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한 살림이었다. 입을 하나 더 늘렸다간, 도리어 그 아이를


불행하게 만들지도 몰랐다.

조금 더 유복했더라면, 아이를 냉큼 입양했을 건데.

삶의 만족도는 높았으나, 두 사람은 이따금 공허함을 느끼곤 했다.

아이가 하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나날 중 만난 여자가 바로 ‘리나’였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피 칠갑을 한 채로 널브러져 있던 리나. 잡화점의 주인인 리키는


정신을 잃은 그녀를 얼른 잡화점으로 데리고 왔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요한이 조사한 대로다.

아이가 없어 허전함을 느꼈던 잡화점 내외는 기억을 잃은 리나를 친딸 대하듯이 했다. 좀


장성한 딸이긴 했지만, 뭐 아무렴 어떻겠냐 싶었다.

잡화점 내외는 기억을 잃어 자신의 부모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리나를 안쓰러워했고, 리나는
그들을 잘 따랐다. 꼭 진짜 부모님을 따르는 것처럼.

정이라는 건 무서웠다. 리나가 잡화점에 머문 2 년간, 세 사람 사이에는 혈연을 뛰어넘은


진득한 유대가 생겨 버렸다.
세월이 지나더라도, 혹 리나의 기억이 돌아와 그녀가 진짜 부모님을 찾더라도, 그래도
끊어지지 않을 끈끈한 유대.

그런 리나가 오랜만에 찾아와 돌연 남자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번듯한 남편도 생겼다고
한다.

세상만사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었다.

잡화점 내외는 리나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양 굴었지만, 그들은 내심 심각했다.

비상이다. 딸처럼 여겼던 아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잡화점 내외인 리키와 마틴은 잡화점 안에 우두커니 선 채로 고뇌에 잠겼다.

폭풍처럼 일어난 일들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다.

“리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아까는 그냥 넘어갔지만, 그 아이랑 남자……. 정말로


리나의 아들이자 신랑인 걸까요?”

진저빛 머리칼이 아름다운 잡화점의 안주인, 마틴의 한마디였다.

리키는 수염이 비쭉 자란 턱을 가만히 문지르며 대답했다.

“리나가 그렇다고 했으니까, 그렇지 않을까? 더군다나 그 아이. 리나와 똑같이 생겼던걸.
모자 사이가 아니라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어.”

“암요, 암요. 저도 그렇게 느꼈다니까요. 그런데 참……. 그렇게 큰 애가 있었다니.”

“그러게. 리나가 추후에 다시 제대로 설명해 준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네. 그래야겠지요.”

자초지종을 제대로 듣지 못한 두 사람의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나에게 부정적인 의심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가령 리나가 좋지 않은


이유로 부자의 아내이자 엄마가 되었다든지.

두 사람은 리나를 믿고 있었다. 리나에겐 분명히 사연이 있으리라.

허투루 일을 벌일 아이가 아니었다. 되레 리나는 귀족가의 자제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생각이 깊고 총명한 아이였다.

화제는 곧 다른 것으로 옮겨 갔다. 화두를 먼저 꺼낸 것은 마틴이었다.

“리나는 아직 기억을 찾지 못한 거죠?”

“그렇다고 해.”
리키의 대답에 마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리나가 얼른 기억을 찾았으면 좋을 텐데요. 리나를 보고 있으면 사랑받고 자란 듯한 느낌을


엄청 받잖아요. 사랑받았던 아이니까, 누군가가 지금까지도 애타게 찾고 있을 텐데.”

비록 5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기는 했지만, 누군가는 아직까지도 리나를 찾고 있지 않을까.

애타고, 절박하게.

“아 참. 그럼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으려나.”

불쑥 또다시 화제를 바꾼 것은 리키였다. 그는 누군가를 떠올린 듯이 고개를 작게 갸웃거렸다.

“누구요?”

“왜, 그 남자 있잖아. 매일같이 리나를 쫓아다녔던 그 남자. 요 근래에 리나가 잡화점에 통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리나의 안부를 물으러 종종 혼자 찾아왔었던 그 남자! 머리카락이
파랗고 희끄무레한 청년 말이야.”

결 좋은 파란 머리칼에, 생김새가 희끄무레한 청년.

요한 못지않게 늘 좋은 옷차림에 서글서글한 미소가 매력적인, 웃을 때 파인 보조개가 인상


깊은 그 청년.

마틴은 그 청년의 이름을 곧장 떠올렸다.

“아아. 이름이 바비……? 였던가 하는 그 청년을 말하는 거죠?”

“그래! 맞아. 이름이 바비였어. 그 청년. 참 싹싹하고 좋았는데 말이지. 리나의 짝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어. 물론 선택은 리나의 몫이겠지만.”

리키의 말에 마틴은 동의했다.

미인 거지라는 별명에 걸맞게 리나를 따라다녔던 남자는 숱하게 많았다.

그녀의 추종자 중 제일 눈에 띄었던 남자는 바로 바비였다. 얼굴로 보나, 성품으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바비가 제일 잘났었다는 뜻이다.

물론 잡화점 내외가 바비의 신분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딱 봐도 태가 나오지


않던가.

저 푸른 머리 청년은 귀족일 게 분명해. 두 사람은 은연중에 그렇게 확정 짓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곱게 자란 듯한 외모와 기품이 넘치는 동작들은 시정잡배들에게선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고귀함이었다.

그래서 잡화점 내외는 바비와 리나가 약혼이라도 할 줄 알았다. 부모 대신 참석해도 되는


건지를 리나에게 물어도 될지, 고뇌했던 내외였다. 너무 앞서갔나.
마틴은 바비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그는 여전히 리나를 좋아하고 있을까. 리나에게 뜬금없이 신랑과 아이가 생긴 것을 알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도 보았었는데.

“그러게요. 그 청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잡화점 내외는 바비가 약간 안쓰럽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한결같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나를 곧 포기하지 않을까? 리나에겐 이제 번듯한 신랑과 아이가 있는걸.”

“안쓰럽네요. ……그래도 그 청년. 귀걸이는 제대로 돌려준 게 맞겠죠?”

“귀걸이?”

리키가 되묻자, 마틴이 대답했다.

“네. 며칠 전에 또 찾아왔었잖아요.”

“아, 맞아.”

두 사람은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일주일도 되지 않은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며칠 전, 바비는 역시나 귀족을 연상하게 하는 차림새로 잡화점을 찾아왔었다.

바비의 방문은 매우 뜻밖이어서, 잡화점 내외는 눈을 동그랗게 떴었다. 그렇기에 인사 대신


먼저 나온 말은 의문이었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로?’

바비는 그들의 놀람에도 괘념치 않아 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셨어요? 지나가던 길에 생각이 나서 들렸습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아주 예의가 바른 청년이다. 잡화점 내외는 의문을 금세 거두어들이고선


바비에게 웃어 주었다.

‘그래, 잘 왔네.’

바비라는 청년은 매번 그런 식이었다.

그는 잡화점에 리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리나가 잡화점에서 지낸 건 2 년뿐이었다.-


번번이 찾아와 안부를 묻곤 했다.

리나가 잡화점 내외를 친부모처럼 생각한다는 사실을 안 이래부터 시작된 안부 인사이기도 했다.
바비는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듯 다과 세트를 쓰윽 내밀었다. 한눈에 보아도 포장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다과 세트였다.

그러자 감탄한 것은 잡화점 내외였다. 참으로 싹싹한 청년이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바비는 다과 세트를 준 뒤에 돌아가려고 했으나, 잡화점 내외는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 리나는 잘 지내는가? 요즘 너무 안 보여서, 걱정이 되네.’

‘네. 잘 지내고 있답니다. 배불리 잘 먹고 있고요.’

배불리 먹는 게 제일 중요하지. 리나는 배가 자주 고픈 아이니까.

잡화점 내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을 건네었다.

‘다행이네. 그럼 자네는 리나와 꾸준히 연락하고 있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만. 혹시 리나에게 전달할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리키는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이내 리키는 바비 앞까지 다가와, 손을 뻗었다. 쫙 펼쳐진 그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에메랄드빛의 귀걸이였다.

투박한 리키의 손과는 어울리지 않는 매우 아름다운 귀걸이.

‘최근에 이걸 찾아서 말이야.’

‘…….’

바비는 대꾸 없이 리키의 손바닥 위에 놓인 귀걸이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던 그의 눈이 일순 굳으며, 그 속엔 날카로운 빛이 맴돌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리키의 말은 이어졌다.

‘이건 5 년 전에 우리가 리나를 처음 발견했을 때, 리나가 꼭 쥐고 있었던 귀걸이야.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며칠 전에 찾았지 뭐야! 글쎄, 가구 하나를 버리려고 옆으로 밀었더니 그 밑에
들어가 있더라고. 어쩐지 그간 보이지 않더라니.’

‘아…….’

‘리나에게 꼭 좀 전해 줘.’
바비는 손을 뻗어 귀걸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귀걸이 끝에 달린 에메랄드빛 보석이 작게
흔들리며, 오묘한 빛을 내비쳤다.

외관엔 다소 흠집이 나 있기는 했지만, 그 빛만은 후퇴함이 없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귀걸이가…… 낯이 익네요.’

바비는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한쪽밖에 없는 귀걸이. 짝을 잃은 귀걸이. 그리고 늘 한쪽 귀에만 귀걸이를 끼고 있던 그 남자.

바비의 머릿속엔 요한과 닮은 듯 닮지 않은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응? 아는 귀걸이야?’

리키의 물음에 바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이 귀걸이는 제가 리나에게 꼭 전해 주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자네를 믿는다네.’

‘네. 그럼 조만간 또 찾아오겠습니다.’

바비는 에메랄드빛 귀걸이를 재킷의 속주머니에 소중히 넣고선, 등을 돌렸다.

뒤쪽에서 리키와 바비가 대화를 나누던 걸 잠자코 지켜보던 마틴은, 그 순간 달라지던 바비의
얼굴을 목도하게 된다.

뒤돌아서던 바비의 옆얼굴이 너무도 무섭게 굳어 있었다.

늘 사려 깊은 미소를 짓던 바비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표정이 매섭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마틴은 바비의 표정이 굳는 걸 똑똑히 보았다. 확실하다.

그 순간 마틴이 느낀 것은 이상한 위화감과 섬뜩함이었다.

저 청년에게 리나의 귀걸이를 건네준 게 과연 옳은 일인 걸까?

마틴은 고개를 내저으며, 제가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다.

리나의 귀걸이를 보고선 저 청년이 무서운 표정을 지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한 번 든 위화감은 꽤 오랫동안 사그라지지 않으며, 그녀의 주위를 불길하게 맴돌았다.

리나, 잘 지내고 있는 거지? 그렇지?


마틴은 거리를 나다녀도 보이지 않는 리나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리나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리나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것이 오늘이었다.

마틴은 그녀의 방문에 커다란 안도를 느꼈다. 약간 울먹인 이유 또한 안도에서 비롯된


울먹거림이었다.

하지만 마틴은 아직까지 의문스러웠다.

그때 바비에게 느꼈던 위화감은 도대체 뭐였을까?

잡화점 내외는 며칠 전을 회상하던 것을 멈추었다.

“리나에게 귀걸이를 잘 받았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까 너무 놀라서 못 물어봤네요.”

“걱정 마. 잘 전해 줬을 거야. 그 청년이 굳이 전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리키는 왠지 불안해하는 마틴의 어깨를 작게 토닥여 주었다.

마틴은 리키가 한 말을 되뇌었다.

‘그 청년이 굳이 전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있죠, 리키. 그 청년. 그때 전해 주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마틴은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며 어렵사리 입술을 떼어 냈다.

“……맞아요.”

그래, 지나친 내 걱정이었을지도 몰라. 고작 그 귀걸이가 뭐라고. 부디 리나가 그 귀걸이를


보고선, 기억을 조금이라도 떠올려 줬으면 좋겠는데.

잡화점 내외가 바라는 것은 여전했다. 리나가 기억을 찾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날 무렵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유리문에서 다시금 딸랑 하는 차임벨 소리가 났다. 드디어 마수걸이를 하는가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손님은 아니었다.

“……부탁할 것이 있어서 다시 들렀습니다.”

혼란스러운 낯빛을 띤 채 가게 안으로 들어선 이는 요한이었다. 리나의 신랑이라고 했던


멀끔한 그 남자.

그리고…….
“조슈아도 다시 왔어!”

리나의 아들로 추정되는 조슈아도 함께였다.

잡화점 내외는 동시에 읊조렸다.

“리나의 신랑? 그리고 아들?”

조슈아는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응! 조슈아가 다시 왔어!”

“어쩐 일로 다시…….”

어쩐 일로 다시 왔느냐는 리키의 물음은 구두점을 찍지 못했다. 요한이 급작스럽게 말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잠깐 맡기고 싶습니다. 갑작스러운 부탁,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리나를 쫓아가야


할 것 같아서…….”

요한은 고개를 푹 숙이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그 덕에 놀라게 된 쪽은 잡화점 내외였다.

누군가에게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듯한 오만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건만, 스스럼없이


고개를 조아린 요한의 태도가 가히 놀라웠다.

그에게서 왠지 모를 절박함도 느껴졌다.

요한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진지하게 말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너무도 진지하고, 정중했던 까닭일까. 잡화점 내외는 부정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리키는 그의 정중함에 당황하여 말을 조금 더듬었다.

“고, 고개 숙이지 않아도 돼. 아이는 우리가 맡아 줄 테니까.”

애당초 조슈아를 잠깐 맡아 주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요한은 다시금 고개를 작게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얼른 리나를 쫓아가 봐. 조슈아는 우리가 잘 보고 있을게.”

리키는 얼른 나가보라는 듯이 허공에 손짓했다.

리나가 어디로 사라졌고, 요한이 왜 뒤쫓아 가겠다고 했는지 의아하지만, 일단은 그를 보내


주자. 그리고 아이를 맡아 주자.
잡화점 내외는 작게 숨을 골랐다. 리나에게 들을 자초지종이 더 늘어난 듯했다.

요한은 가게를 나가기 직전, 조슈아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건네었다.

“조쉬는 의젓한 다섯 살이지?”

“응. 조쉬는 잘 큰 다섯 살이야.”

“좋아. 그럼 이곳에서 아저씨, 아주머니 말을 잘 들으면서 잠깐만 기다려 줄래? 의젓한 다섯


살이니까, 울지 않고 기다릴 수 있지? 내가 리나를 데려올게.”

달래려고 한 말인데, 요한의 목소리엔 초조함만이 그득했다.

요한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더 늦었다간 리나를 완전히 놓쳐 버릴지도 몰라.

요한은 조금 전에 보았던 것들을 상기했다.

무언가를 보며 앞으로 뛰어가던 리나. 요한은 뒤늦게 몸을 틀어, 리나의 시선 끝에 있던 어느


남자의 뒤통수를 발견했다.

푸른 하늘빛과 닮은 푸르스름한 머리카락을 가진 뒤통수.

바비임이 분명했다.

요한이 조바심을 느낀 건 그때였다.

제 41 화. 어떡해……. 조슈아 엄마가 아니야

바비를 우연히 발견한 리나가, 그의 뒤를 쫓아갔다라.

물론 추후에 그녀가 공작저로 돌아올 것임을, 요한은 믿고 있었다.

까닭을 알 수 없이 커진 믿음이었다. 리나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녀가 도망가는


것을 아닐까, 염려했던 마음이 무색할 정도로.

이렇다 할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었고, 그녀의 미소를 마주한 시간이 더해졌을 뿐일 텐데. 돌연히


늘어난 것은 그녀에 대한 신뢰였다.

그녀를 믿지만, 그럼에도 요한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가 모르는 시간에, 모르는 곳에서
리나와 바비가 마주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출처를 알 수 없는 질투가 새어 나와 요한의 마음을 잔뜩 물들여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요한은 잡화점으로 다시 들어가, 리나의 부모님격인 잡화점 내외에게 조슈아를 부탁한
것이었다.

이곳에 조슈아를 잠깐 맡겨 두고 리나의 뒤를 따르자. 이곳은 믿을 만한 곳이니까.

“우웅! 조쉬는 잘 기다릴 수 있써! 울지 않아.”

“그래. 착하구나.”

요한은 조슈아의 이마 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대답은 두 곳에서 흘러나왔다.

“아빠 잘 가~!”

“그래. 우릴 믿고 얼른 다녀오게!”

요한은 재빠르게 유리문을 열고선 밖으로 나갔다. 그의 발은 리나가 뛰어갔던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한편, 가게에 남겨진 조슈아와 잡화점 내외는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엔
친밀함이 가득했다. 오늘 처음 만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예쁜 강아……, 아니, 조슈아야. 아까 챙긴 엄마 선물은 잘 가지고 있지?”

리키의 물음에 조슈아는 예쁘게 웃었다.

“우웅! 조슈아의 재킷 주머니 속에 잘 넣어 둔걸. 리키 할아버지도 엄마한테 절대로 말하면 안


돼! 깜짝 선물이니까.”

“허허. 당연하지. 다만, 외상인 걸 까먹으면 안 된단다. 커서 꼭 갚아야 해.”

“당연하지~ 조슈아는 훌륭한 밥맛이 될 거니까. 돈도 엄청 많아질 거야. 그럼 그때 두 배……,


아니, 세 배로 갚을게.”

조슈아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생긴 건 꼭 리나와 판박이인데, 표정은 꼭 제 아빠와 판박이였다. 조슈아의 근엄한 표정이


요한이 지었던 표정과 제법 닮아 있었던 것이다.

리키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허허허. 훌륭한 밥맛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만, 너는 커서 아주 훌륭한 어른이 될 것


같구나.”

“응, 당연하지. 헤헤.”


“그럼 조슈아야. 잠깐 가게 구경을 하고 있으렴. 나와 마틴 할머니가 먹을 것을 조금 내어
오마.”

“좋아! 조슈아는 초코 과자를 좋아해.”

그 와중에 자신의 취향을 확실히 말하는 조슈아를 보며 리키는 또다시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주 요망한 어린아이구나.

리키와 마틴은 훈훈한 미소를 지은 채로 주방으로 걸어갔다. 주방은 잡화점의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방에 아이가 먹을 만한 과자가 좀 있던가. 아이에겐 어떤 차를 내줘야하는 거지.

아이가 없어 적적함을 느꼈던 잡화점 내외의 눈에, 조슈아가 얼마나 예뻐 보였는지 모른다.
리나에게 조슈아를 자주 데려오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리키와 마틴이 사라진 잡화점 내부, 혼자 남게 된 조슈아는 잡화점을 쓰윽 둘러보다, 커다란


창문이 있는 쪽으로 도도도 걸어갔다.

조슈아는 창문 밑에 있던 선반을 기어 올라가, 그 위에 자리를 잡았다.

“휴. 밖이 엄청 잘 보이네.”

조슈아는 창문 밖으로 펼쳐진 대로 위를 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거리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엄마 아빠는 언제 돌아오는 걸까아아.”

헤어진 지 고작 십 분 남짓. 조슈아는 벌써부터 엄마 아빠가 그리웠다.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봐도 봐도 또 보고 싶다. 엄마 아빠랑 평생 떨어지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휴우.”

흘러나온 한숨엔 시름이 깊었다. 자그마한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십 분 정도가 더 흘렀을 때였다.

조슈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풍성한 금발을 가진 여자의 뒷모습이 맺혔다.

“엄마인가?”

풍성한 금발을 가진 여자의 옆에는 검은 머리칼을 가진 남자도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인파 속에 가려서 그들이 입은 옷까지는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설핏 내비친 옷차림도 리나와


요한이 입었던 옷차림과 비슷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조슈아의 눈동자엔 이채가 서렸다.


“엄마다. 엄마랑 아빠다!”

조슈아는 확신했다. 비록 뒷모습일 뿐이지만, 저렇게 예쁜 금발을 가진 여자가 우리 엄마가


아닐 리 없어.

그런데 왜 엄마 아빠는 잡화점 쪽으로 오지 않고, 가게와 먼 곳으로 걸어가는 걸까.

조슈아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초조해진 것은 조슈아였다.

엄마, 아빠는 조슈아를 놔두고 어디로 가는 걸까. 엄마가 다시는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안절부절못하던 아이는 이내 선반 위를 쪼르륵 내려와,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물론 문을 여는


데 힘이 부쳐서 애를 먹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조슈아의 작은 몸이 미꾸라지처럼 밖으로 빠져나갔다. 얼마나


조금 열었던 것인지, 호쾌하게 울리던 차임벨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주방에 있던 잡화점 내외는 아이가 나갔음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몇 분이 더 흐른 후, 아이가 좋아할 만한 다과를 내온 잡화점 내외는 뒤늦게 조슈아를 찾았다.

“조슈아야. 어디에 있니. 와서 과자를 좀 먹으렴. 네가 좋아하는 초코 과자도 가지고


왔단다.”

초코 과자를 찾느라고 다소 늦게 돌아온 잡화점 내외였다. 분명 일전에 사 둔 과자가 있었는데,


어디에 뒀는지 도무지 보이지 않아서.

몇 초가 흘렀음에도 조슈아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아이는 이미 잡화점을 나간


뒤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시금 조슈아를 찾았다.

“아이야? 우리 예쁜 강아지가 어디로 갔을까.”

연거푸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그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강, 강아지야!”

두 사람은 들고 왔던 다과를 내팽개치고선 진지하게 아이를 찾았다. 그다지 넓지 않은


잡화점을 뒤지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론은 그러했다. 아무리 찾아도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가게 안에 없다면, 밖으로 나갔다는 걸까? 아이는 언제 소리소문 없이 가게를 나간 걸까.

잡화점 내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가게를 나섰다.

아이가 사라졌다. 큰일이다.


 

* * *

가게 밖으로 나온 조슈아는 잰걸음으로 검은 머리칼과 금빛 머리칼을 가진 남녀의 뒤를 쫓았다.

넘어지지도 않고 열심히 뛰어간 결과, 조슈아는 금빛 머리칼을 가진 여자의 드레스 자락을


쥐어 잡을 수 있었다.

드디어 엄마를 따라잡았다! 조슈아는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하지만 걸음을 멈추며 뒤돌아본 여자의 얼굴은 리나의 얼굴이 아니었다.

맙소사. 조슈아는 얼빠진 얼굴로 여자의 얼굴을 꼼꼼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엄마가
아니었다.

“어떡해……. 조슈아 엄마가 아니야.”

엄마보다도 화장이 진하고, 예쁘지 않은 여자다.

“얘, 꼬마야. 엄마를 잃어버렸니?”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이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일전에


요한이 했던 말뿐이었다.

‘조쉬. 모르는 사람이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해 주면 안 된단다.’

모르는 사람. 대답을 해 주면 안 돼. 조슈아는 아빠 말을 잘 듣는 의젓한 다섯 살이니까.

조슈아는 완전히 뒤돌아서며 왔던 길로 되돌아서 뛰어갔다. 일단은 화장이 짙은 저 아줌마를


피하자.

“……얘야! 얘!”

뒤쪽에선 저를 부르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슈아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뛰어갔다.

정해 둔 목적지는 없었다. 아이는 그저 앞으로 내달렸을 뿐이었다. 그러곤 생각했다. 저


아줌마를 따돌린 후에 엄마, 아빠를 다시 찾자.
그러다 진짜로 엄마, 아빠를 영원히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럼 조슈아는 영영
미아가 되는 걸까?

아이의 눈동자엔 불투명한 것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것의 정체는 눈물이었다.

눈물은 이내 아이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곳에서 아저씨, 아주머니 말을 잘 들으면서 잠깐만 기다려 줄래? 의젓한 다섯 살이니까,


울지 않고 기다릴 수 있지? 내가 리나를 데려올게.’

아빠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아저씨, 아주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밖으로 섣불리 나온 건, 조슈아의 잘못이야. 아빠가 울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어. 그러니까 조슈아는 울지 않아.

조슈아는 킁, 소리가 나게 콧물을 들이켜며, 눈물의 기운을 몰아냈다.

의젓한 다섯 살……. 밥맛에 버금가는 의젓한 다섯 살…….

조슈아는 그 말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얼마 못 가 조슈아는 열심히 뛰던 걸음을 멈추었다. 숨이 부쳤던 까닭이었다.

뒤늦게 둘러본 주위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리키 할아버지가 있던 가게는 어디로
가야 나오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다만, 다행히도 이곳은 조슈아도 조금 아는 길이었다. 기다란 대로 속, 아는 곳이라곤 딱 한


곳밖에 없었던 아이였다.

조슈아는 자박자박 침착한 걸음걸이로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욘두 선생님이 그랬어. 길을 잃었을 땐, 우왕좌왕하며 이곳저곳 쏘다니지 말라고.

모르는 사람들의 말은 함부로 믿으면 안 되지만, 경비복을 입은 사람과는 말을 섞어도 된다고


했어.

그곳에 있자.

그곳에 가만히 있으면, 엄마랑 아빠가 나를 찾으러 올 거야. 그리고 경비처럼 보이는 사람을
발견하면, 당당하고 의젓하게 말하자.

아저씨. 조슈아가 미아가 된 것 같아요, 라고.

그러면 나는 다시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왜 자꾸 눈물이 나오는 거지.

조슈아는 다시금 킁, 하고 콧물을 들이켰다.

의젓한 다섯 살이라서 정말로 울고 싶지 않은 조슈아였지만, 눈물은 통제할 수 있는 부류의


것이 아니었다.
눈물은 조슈아의 의지를 무시한 채로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끝내 도착한 그곳에서 조슈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는 무릎을 세우고 앉고선, 그 위에 제 얼굴을 얹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이따금 조슈아를
힐끔힐끔 바라보기도 했지만,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는 이는 없었다.

버릇처럼 코를 훌쩍이던 조슈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올려다본 하늘빛이 가히 심상치 않게


변해 있었다.

조슈아의 울적한 마음처럼 먹구름으로 가득하다. 공작저를 나올 때까지만 해도 분명 맑았던


하늘이었건만.

“엄마, 아빠…… 보구 싶어……. 조슈아가 잘못했어. 많이 잘못했어.”

* * *

내 입가를 가린 장본인의 목소리가 곧 들렸다.

“쉿. 나야.”

내 귓가에 작게 닿은 그 목소리는, 내가 익히 아는 이의 것이었다. 나는 고개만 옆으로 조금


돌려,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

그러자 뛰어온 듯 헝클어진 머리를 한 요한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손을 올려, 내 입가를 가리고 있던 그의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곤 속삭이듯이 그에게


물었다.

“여긴 어떻게 따라온 거예요?”

“네가 횡설수설하면서 가 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

“조슈아는요?”

“잡화점에 맡겨 두고 왔어.”

끔찍이 생각하는 조슈아를 오늘 처음 본 잡화점 아저씨, 아주머니에게 맡긴 요한이라.


나는 조슈아를 뒤로한 채 나를 쫓아 온 요한의 진짜 의중이 궁금해졌다.

당신, 내가 그렇게까지 신경 쓰이는 거야?

그의 의중과는 별개로 내 심장은 다시금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안겨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몸과 가까웠고, 얼결에 맞닿았던 우리의 손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깍지까지 끼고 있었다.

“…….”

나는 자연스럽게 깍지를 낀 요한의 능청스러움에 감탄했다.

요한이 원래부터 스킨십에 능수능란했던가.

맞잡은 요한의 손이 너무도 뜨거웠다. 뜨거운 것은 그의 손뿐 만이 아니었다. 내 귓가에


선연하게 닿는 그의 숨결은 더 뜨거웠다.

나는 까닭 모를 이상야릇한 소름을 느끼며, 그에게서 몸을 조금 떼어 냈다.

하나 요한은 도망가던 내게 제 몸을 더욱 바짝 붙이며, 도리어 나를 더욱 품속에 가두었다.

“요한 씨. 너무 가까워요.”

나는 할 말은 다 하는 거지라서, 그에게 솔직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가깝게 더 있다간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거야.

“왜? 내가 가깝게 있는 게, 네게 문제라도 돼?”

그는 나를 그윽하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네 심장 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릴까 봐?”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부정하지 마.”

“…….”

“네 심장 소리 여기까지 다 들리니까.”

나를 놀리려고 한 말임이 분명했다. 알지만, 나는 평소처럼 말대답을 할 수 없었다.

요한의 말처럼 내 심장은 정말 빠르게 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심장의 떨림이 가시길 바랐다.

그 순간 그는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대며, 내 이름을 진지하게 불렀다.


“……리나.”

나는 어깨를 흠칫 떨며 대답했다.

“왜요?”

“그런데 말이야. 저거……. 네가 찾던 그 책 아니야?”

“네?”

요한은 어디론가 턱짓을 했다. 그의 턱짓이 가리키는 곳은 바비가 들어간 저택이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저택의 커다란 창가 쪽.

능청맞게 나를 놀리던 요한은 언제부터 바비가 들어간 저택 쪽을 살피고 있었던 걸까?

나는 요한 때문에 잠깐 잊고 있었던 본래의 내 목적을 떠올렸다. 나는 바비의 뒤를 쫓고


있었고, 그가 처음 보는 저택으로 들어간 것까지 본 터였다.

우리가 숨어 있던 곳과 바비가 들어간 저택과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마침 열린 창문도


엄청 커서, 그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나는 안광에 집중을 하며 저택의 내부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창문 근처에는 동그란 목재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엔…….

“……!”

붉은 표지의 책이 올려져 있었다.

“붉은 표지의 책이야.”

요한은 그 책이 내가 찾던 책이 맞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붉은 표지의 책이 자세히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내게 보이는 건 그 형태 정도.

그리고 내가 찾던 세나의 책만이 붉은 표지를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붉은 표지를 가진 책은


흔하디 흔했으니까.

하지만 내겐 묘한 생각이 들었다.

저 책이 내가 찾던, 그리고 세나의 방에서 사라진 그 책 같다는 생각.

“요한 씨. 저곳으로 바비가 들어갔어요.”

“……어, 나도 봤어.”

“저긴 제가 아는 바비의 집이 아니에요. 당신은 저 집이 누구의 집인지 알고 있나요?”


내 물음에 요한은 주저하지 않으며 입술을 천천히 떼어 냈다.

그는 저곳이 누구의 집인지 일찌감치 알고 있는 듯했다.

“저긴……. 욘두 선생의 집이야.”

내가 알기론 그래. 그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 42 화. 넌 도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우리는 왔던 길을 급하게 되돌아갔다.

아주 중대한 사실을 알아내기는 했지만, 맑았던 하늘이 급변했음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하늘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우중충하게 변해 있었다. 바람에 밀려온 회색빛 먹구름은 곧 비를


토해 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그러자 혼자 남겨 둔 조슈아가 몹시도 걱정이 되었다.

물론 아저씨, 아주머니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게 아니던가.

조슈아를 혼자 놔둔 지 어언 삼십 분이 넘은 듯했다. 아이를 더는 혼자 놔둬선 안 될 것 같다.

요한과 나는 별다른 대화 없이 잡화점으로 내달렸다. 대화는 공작저로 돌아간 뒤에 나누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잡화점 도착했을 땐, 가벼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얼른 잡화점의 유리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잡화점 내부를 서성거리고 있던 리키 아저씨와 마틴 아주머니였다.

그들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으며, 서성거리는 발걸음엔 왠지 모를 긴박함이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만 같아.

나는 내가 느낀 직감이 틀리지 않길 바라며, 그들에게 물었다.

“아저씨, 아주머니! 조슈아는 어디에 있어요? 아이를 맡아 주셔서 감사해요.”

두 사람은 그제야 우리의 방문을 인지한 것인지, 뒤늦게 대답했다.

“……조, 조슈아가……. 사라졌단다.”


“조슈아가 사라……졌다고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입술은 언어를 잃은 듯 굳어 버렸고, 나는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는 기분을 느꼈다.

조슈아가 사라졌다. 그 충격적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손발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다리에도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닌 말로, 눈가엔 눈물이 조금씩 맺히기 시작했다.

초조한 낯빛을 띤 마틴 아주머니의 말은 이어졌다.

“잠깐 먹을 걸 내오려고 주방에 갔는데, 돌아와 보니 아이가 감쪽같이 사라진 게 아니더냐.


가게 주변을 샅샅이 찾아봤는데도 보이지 않아서……. 일단 경비병에게 신고를 하고 가게로 막
돌아온 참이란다.”

“…….”

“리나, 미안해. 모두 다 우리의 잘못이야. 미안……. 미안.”

아저씨, 아주머니는 고개를 푹 숙이며 우리에게 속죄를 구했다. 내 손을 붙잡고 있던 요한이


손을 놓은 건 그때였다.

깍지가 풀리고, 이내 짧게 맞닿은 그의 손끝이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조, 조쉬를……. 찾으러 가야겠어.”

그는 당황한 듯 충격에 빠진 듯한 목소리로 가게를 뛰쳐나가려고 했다. 나는 뒤돌아서던 그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잠깐만요. 섣불리 행동하지 마세요.”

침착해지자. 물론 조슈아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침착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침착해지자.

눈물이 기어코 내 뺨 위로 흘러내렸지만, 나는 그것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놔. 지금 조쉬가…… 조쉬가……!”

요한은 내게 경고하듯이 말했다.

“요한 씨. 잠깐만…….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요. 당신, 이곳 지리를 잘 아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가서 뭘 어떻게 하려고? 당신도 미아가 되고 싶은 거예요?”

“…….”

당장에라도 내 손을 뿌리칠 것 같았던 요한은 내 말에 제 아랫입술만을 짓이겼다.


요한은 이곳 지리를 잘 모른다. 그런 그가 섣불리 나갔다간 도리어 길이 엇갈리거나,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었다. 요한 또한 그 사실을 인지했으리라.

나는 다시금 침착하게 생각했다.

요한과는 달리 아저씨, 아주머니는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다. 그런 두 분이 주변을 샅샅이


찾았음에도 아이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즉 아이는 이 근처에 있지 않다.

조슈아는 어디로 간 걸까.

조슈아는 내로라하는 명석한 아이였다. 어떤 이유로 인해 길을 잃은 아이는 그 자리를


벗어나기는커녕 ‘상징적인 곳’에서 우리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경비로 보이는 자에게 말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다섯 살 주제에 얼마나 상황을 잘 대처하겠느냐만은. 그래도 나는 왠지 조슈아가 차분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그냥 감이었다.

그러다 돌연 어느 장소 하나를 떠올린다.

이곳과는 조금 멀면서도, 우리에겐 다소 상징적인 그곳.

“저……. 조슈아가 있을 만한 곳을 알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일단 그곳으로 같이 가 봐요! 얼른!”

조슈아가 짧은 촌극을 했던 그곳. 나와 이 부자가 처음 만났던 곳.

나는 가게를 나와, 그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드레스가 거추장스러워서 한껏 들어 올린


채였다.

뛰다가 구두 한쪽이 벗겨졌는데, 그걸 주워서 신을 겨를도 없었다.

나는 결국 불편했던 구두 한쪽도 마저 벗어 던지고선 그곳까지 뛰어갔다. 발바닥이 따끔거리는


줄도 모르고. 쓰고 있던 모자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그렇게.

요한은 별말 없이 나를 조용히 따랐다. 그는 두서없는 내 말을 신뢰한 것이었다.

이내 도착한 그곳에는 정말로 조슈아가 있었다.

맙소사. 감사합니다. 아이를 찾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평소 믿지도 않던 신에게


감사를 표하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무릎을 세워 앉아, 그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조슈아는 내 존재를 뒤늦게 눈치챈 듯했다.


아이의 자그마한 손이 내 등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눈물을 흘렸다.

눈동자에 차고 넘친 눈물이 빗물과 섞여서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우습게 일그러진 입술로


조슈아의 이름을 불렀다.

“조슈아. 미안해. 내가 미안해. 괜히 너를 놔두고 가서…….”

다행이다. 네가 이곳에 있어서 너무 다행이야. 나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선 펑펑 울었다.

“엄마. 왜 때문에 울어?”

조슈아는 울지도 않으며 내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꼬맹이, 넌 도대체 얼마나 어른스러운 거야?

“조슈아가 엄마를 슬프게 한 거지? 다신 아빠 말을 어기지 않을게……. 조슈아가 아빠 말을


어기고 가게를 뛰쳐나왔어.”

조슈아는 우리를 원망하기는커녕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아이를


더욱 꼭 껴안았다.

터덜터덜 다가온 요한이 안고 있던 우리의 몸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다행이다. 찾아서 정말 다행이야.”

그는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낮게 토로했다.

비를 맞아 푹 젖어 버린 드레스 위로, 내 등을 감싼 요한의 뜨거운 손길이 느껴졌다.

그의 손은 아직까지도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흐아앙. 아빠 울지 마아. 미안해. 흐윽, 조슈아가 잘못했어.”

이내 조슈아마저도 울음을 터뜨리고,

“나 안 울어.”

요한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빠가 거짓말은 나쁜 거라고 했잖아.”

“……그래. 아빠가 미안해. 아빠가 나빴어. 다 내 잘못이야. 너를 혼자 두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하.”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가늘었던 빗줄기는 굵어져 있었고, 눈물 소리는 빗소리에 잠식되고 있었다.


 

* * *

공작가로 돌아가는 마차 속엔 오고 가는 대화는 없었다.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유일한


소리는 빗소리뿐이었다.

굵어진 빗소리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차의 창문 위로 눈물처럼 떨어지는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다. 소나기일 줄 알았는데,


오랫동안 그치지 않을 비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무릎을 베고 잠든 조슈아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비를 맞은 아이가 감기라도 걸리는 게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에 급한 대로 마틴 아주머니의


옷으로 갈아입히고, 그것도 모자라 담요로 꽁꽁 싸맨 조슈아였다.

조슈아는 마차에 타자마자 까무룩 잠이 든 터였다. 많이 놀랐고, 힘들었나 봐.

내 무릎을 꼭 껴안은 아이의 손을 보며, 나는 마음이 애달파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아이가 깨고 나서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불룩한 볼따구니를 자랑하는 조슈아였건만, 아이의 볼이 눈에 띄게 메말라 보이기도 했다.

이 조그마한 녀석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한 걸까.

나와 요한을 얼마나 목이 터져라 부르며 찾았을까.

매번 어른스러운 말을 하고 의젓하게만 굴어서, 나는 잠깐 잊고 있었다.

녀석은 가짜 거지 엄마를 진짜 엄마라고 믿고 싶어 할 만큼의 어린애였잖아. 고작 다섯


살이라고.

나는 다시금 코끝이 찡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또다시 흐를 것만 같았다. 조슈아를


찾았을 때, 그토록 많은 눈물을 쏟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내 눈가가 조금 젖어, 나는 손끝으로 눈가를 훔쳐냈다. 손끝엔 차갑고 축축한 것이 묻어


나왔다.

나는 기다란 심호흡과 함께 다짐했다. 아이야, 앞으론 너를 절대로 혼자 두지 않을게.

모든 일이 나 때문에 벌어진 일처럼 느껴졌다. 이번 일로 유모 자리에서 잘리게 되는 건


아닐는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옆에 앉은 요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줄곧 침묵하고 있는 그였다.

그 순간 천둥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며, 창문으로 번개의 밝은 빛이 새어 들어왔다.


빛에 따라 음영 진 요한의 얼굴이 음울해 보이기만 했다. 여전히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조슈아 못지않게 메말라 버린 요한의 뺨을 쓸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달래 주고 싶었다.

그는 조슈아를 잃어버린 게 죄다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죄다 내


탓이라고 생각했듯이.

나는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을 한 요한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었다.

“……괜찮아요?”

내 물음에 그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가며, 그는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우리가 원래 이렇게까지 가깝게 앉아 있었던가. 그와 마주한 얼굴이 제법 가까웠다.

문득 깨달았을 땐, 나는 마차의 시트 위에 올려져 있던 요한의 손등을 붙잡은 채였다. 그의


손등은 차갑기만 했다. 미처 갈아입지 못한 젖은 옷 때문일까.

“괜찮아요. 아이를 찾았잖아요. 그리고 제 잘못이 제일 컸어요. 조슈아의 유모라면서, 제


마음대로 굴어서는 안 됐었는데.”

“아니야. 내 잘못이 더 커. 아이를 맡겨 두고 너를 뒤 따라가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왜


…….”

그는 말을 끝까지 잊지 못하며 기다란 숨을 토해냈다.

“요한.”

나는 그의 이름을 진득하게 부르며, 그의 손을 좀 더 꼭 잡았다.

“괜찮아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조슈아도 당신이 괴로워하는 걸 바라지 않을 거예요.”

요한은 내 손을 뿌리치지 않으며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마주친 시선이 깊고, 뜨거웠다. 우리 주변을 맴도는 기류를 달아오르게 만드는 눈 맞춤이었다.

그러다 굳게 닫혀 있던 요한의 입술이 천천히 떼어지기 시작했다.

“……조슈아가 사라진 걸 알았을 때 절망적이었고,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어. 온 마음 다 바쳐


사랑하는 내 아이를 잃어버리다니. 그건 있을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될 일이잖아.”

“…….”

“하지만 네가 내 손을 잡아 주자 믿을 수 없게도 그런 마음들이 가시기 시작하더라. 나 자신을


원망하고, 옥좼던 마음이 사그라지고 있단 말이야. 괜찮다는 네 한마디에 나는 정말로
괜찮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낮게 숨을 고른 그가 이어 말했다.

“넌 도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걸까.”

글쎄요. 제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요.

눈을 느릿하게 한 번 깜빡이자, 요한의 얼굴과 더욱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착각인 걸까.

“모르겠어.”

“…….”

“……하지만 조금 더 다가가고 싶어.”

그는 내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손을 들어 올려, 내 뺨 위에 얹었다. 역시나 차가워진


손이었다.

눈물의 기운이 가득한 그의 눈동자가 바투 가까워졌고, 그의 코끝과 내 코끝이 조금 닿았다.

우리의 얼굴이 가까워진 것은, 내 착각이 아니었다.

“그래도 될까.”

그는 속삭이듯이 내게 허락을 구하고.

나는 대답 하듯이 그의 아랫입술에 내 입술을 맞추었다.

 
눈을 감자 요한의 입술 감촉이 완전히 느껴졌다. 그의 입술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부드러웠다.

온기 가득한 그의 입술은 내 입술을 부드럽게 탐했다. 서로의 입술은 부드럽게 맞닿아 있었고,
우리의 몸은 부담스럽지 않게 밀착되고 있었다.

입술을 맞추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겐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오묘한 그리움이 든다고
해야 할까.

출처를 알 수 없는 그 그리움은 요한에게서 종종 느꼈던 것이었다.

나는 과거에도 당신과 입을 맞추었던 적이 있었던 걸까?

입술의 끝만 닿았던 가벼운 입맞춤은 머지않아 끝이 났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 내며


성마른 숨을 토해 냈다.

나는 감았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눈을 뜨자 마주친 것은, 이미 그전부터 나를 보고 있었을


요한의 검은 눈동자였다.
그의 눈동자는 슬퍼 보였다. 곧 눈물을 쏟아 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을 정도로.

요한은 지금 나를 누구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 * *

키스 후 요한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비도 그치지 않았다.

공작저에 도착한 마차는 조용히 멈춰 섰고, 요한은 아무런 말 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자리를 뜨지 않으며, 마부가 씌워 준 우산 밑에서 내가 내리길 기다렸다.

나는 아직까지도 곤히 잠든 아이를 소중히 안고선 마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조쉬는 놔둬. 시종을 불렀으니까. 그리고 넌 젖은 드레스를 입고 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무릎을 베고 잠든 조슈아의 머리를 마차 시트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마차의 계단에 한 발자국 디뎠을 때였다.

“……!”

나는 별안간 한 번에 들린 내 몸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허공에 뜬 다리가 우습게 발버둥 치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요한이 나를 안아 든 것이었다.

그의 한쪽 손은 내 허리를, 나머지 손은 내 허벅지를 단단히 받치고 있었다.

“이, 이봐요!”

“쉿. 조쉬가 깨.”

불시에 다가와 나를 거뜬히 안은 요한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그는 자기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허공에 뜬 내 발 쪽으로 향했다.

“발. 더러워졌잖아.”

“…….”

나는 그제야 내 발의 상태를 인지했다. 흙탕물로 범벅이 된 아주 흉한 모습의 발이었다.

기다란 드레스 밑에 감추어져 있어서 미처 인지하지 못한 터였다.

조슈아를 찾다 벗겨진 구두. 나는 무언가를 신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엔 아이와 얼른 공작저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요한 씨. 괜찮…….”

나는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내 말은 구두점을 찍지 못했다.

요한의 말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됐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착각하지 말라는 말, 지금은 안 할 테니까.”

제 43 화. 오해하고 싶어

나는 조슈아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고 있는 요한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요한은 잠든 조슈아를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있던 중이었다.

조물주의 실수 없이 빚어진 그의 반듯한 얼굴 속, 단연 눈에 띄는 곳은 그의 붉은 입술이었다.

저 입술이 조금 전에 내게 닿았다, 이거지.

우리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입술의 온기를 나누었다.

그와 나누었던 입맞춤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입술 어귀가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괜스레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잠깐이나마 조슈아를 잃어버렸던 상황. 갑작스럽게 내린 비. 습도를 머금은 마차 속 기류.


그런 복합적인 것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입을 맞추지 않았을 것이다.

나약해진 요한의 마음은 누군가의 온기를 원하고 있었고, 그때 그의 곁에 있었던 게 바로


나였다고.

“……나. 리나?”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요한의 부름을 뒤늦게 인지했다.

“네. 부르셨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몇 번이나 불렀는지 모르겠군.”

그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나는 내 앞까지 다가온 요한의 얼굴을 보며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씻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채 마르지 않은 검은 머리칼. 운 까닭에 붉게 충혈된 눈. 그리고
느릿하게 입술 위를 쓰는 붉은 그의 혀끝!

맙소사, 맙소사.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뛰잖아.

나는 관능적인 그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뒤늦게 대답했다.

“그, 그냥 이것저것 생각 좀 했어요. 전 이제 제 방으로 돌아가 봐야겠어요.”

황급하게 돌아서려던 나를 붙잡은 것은 요한의 한마디였다.

“저……기.”

그는 망설이는 기미가 역력한 투로 나를 불러 세웠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눈을 내리깐 요한의 얼굴이 청초하게 보이기만 했다.

그는 또다시 제 입술 위를 혀끝으로 느릿하게 쓸며 다음 말을 꺼내길 주저하고 있었다.

붉고 도톰한 요한의 혀…….

꿀꺽.

설마 또다시 입을 맞추고 싶다는 건 아니겠지.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요한이 ‘또 입을 맞춰도 될까?’라는


말을 꺼냈을 때 어떤 답변을 해 주어야 할지 고뇌했다.

못 이기는 척 눈을 감고, 입술을 쓱 내밀어 볼까.

하긴, 너무 가볍게 키스하기는 했어. 진정한 키스라면, 적어도 서로의 것이 좀 더 오고 가야


하지 않겠어?

물론 요한이 나와 세나 중 누구를 생각하며, 키스를 한 것인지 찝찝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그와 키스를 끝낸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일이라고 여겨졌다.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자.

본능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까, 마차 속에서 나눈 키스가 부족했다고. 한참이나.

나는 몸을 배배 꼬며 대답했다.

“요한 씨. 벌써부터 오해가 드는데 어떡하죠?”

요한은 작게 발끈했다. 자고 있는 조슈아 덕에 언성을 높이지 못하는 듯했다.


“그,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미리 경고한 거잖아!”

“알겠어요. 거지가 오해하지 않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좋아. 휴.”

그는 낮게 숨을 골랐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까지 주저하는 거야.

……정말로 키스해 달라는 말을 하려는 걸까.

“나……. 오늘 너랑 같이 자면 안 될까?”

“……!”

동, 동침을 하자는 건가?

이건 입맞춤을 하자는 것보다도 훨씬 더 수위가 센 말이잖아!

나는 화들짝 놀라며 두 팔로 내 몸을 감싸 안았다. 술에 취해서 내 침대에 자주 침범하더니,


이젠 대놓고 동침까지 제안하는구나.

아서라. 이 남자를 어떻게 하면 좋지?

“혹시 술 드신 거 아니죠?”

“아니야! 완전 맨정신이야.”

“…….”

“변태 보듯이 쳐다보지 마. 이래선 미리 경고한 보람이 없잖아.”

너무 티 났나?

나는 갑작스럽게 야릇한 제안을 한 요한의 의중이 궁금해졌다.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동침까지 한단 말인가. 물론 오늘 하루, 우리에겐 많은 일이 있기는


했지만.

“요한 씨. 어떡하죠?”

“왜?”

“저……. 오해를 해 버린 것 같은데.”

“…….”

“그것도 엄청.”
그는 이마를 짚으며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가. 이번엔 또 어디까지 오해한 거야? 설마 내가 너를 어, 어, 어떻게 해 보겠다는


엉큼한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오해를 한 건 아니겠지.”

나는 대답 대신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요한은 재빠르게 말을 덧대었다.

“절대로 아니야. 소름 끼치는 착각은 삼가 주었으면 좋겠군.”

그러곤 그는 시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곤란한 듯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요한의 두 뺨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나는 작게 키득거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야 만다.

내가 발견한 것은 머리칼을 쓰는 그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손…….”

“어?”

“많이 떨리네요.”

요한은 손을 내린 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쫙 펴진 그의 손은 조금 전보다도 더욱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 떨림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네.”

요한은 제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이어 말했다.

“……꼭 잡아 달라는 건 아니지만, 네가 잡아 주면 괜찮아질 것 같기도 해.”

어쩜. 이 남자. 손을 잡아 달라는 말을 왜 이렇게 어렵게 하는 걸까.

생각보다도 행동이 먼저 튀어 나왔다.

나는 내 몸을 감쌌던 한쪽 손을 뻗어 떨리는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맞닿은 손가락 사이로


진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그는 아직까지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걸까.

“손이 떨려서 혼자 못 자겠어요? 오구오구. 당신, 조슈아보다도 더 어리광쟁이였네요.”

놀리듯 건넨 말이었지만, 돌연 돌아온 것은 다소 진지한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네?”
“……떨려서 혼자 못 자겠다고 한다면. 그럼 오늘 밤, 네 옆자리를 허락해 주는 건가?”

이렇게 진지하게 나오면 더는 장난스럽게 대답할 수 없잖아.

사실 내 마음은 이미 훨씬 전부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에라이. 거지가 인심을 씁니다. 좋아요. 대신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아무 짓도 안 해. 도리어 네가 내게 이상한 짓을 할지도 모르지.”

“제, 제가 뭘요!”

“너, 저번에 자고 있던 내 얼굴도 훔쳐봤잖아. 그것도 꽤나 진득하게.”

턱을 괴고 잠든 요한의 얼굴을 훔쳐본 과거가 곧장 떠올랐지만…….

“제가 그랬던가.”

나는 시치미를 뗐다. 인정하면 또 얼마나 놀림을 당하게 될지.

요한은 내 말에 따지지 않으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시시껄렁한 대화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맞닿은 손으로 전해지는 그의 떨림이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었다. 나는 그 점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낮은 미소를 짓던 그는 속삭이듯이 내게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그는 마지막으로 내게 동의를 구했고, 나는 그 순간 무언가를 떠올렸다.

“……!”

지난 5 년간 내 꿈속에서 내 몸과 마음을 애태웠던 그 목소리.

얼굴이 보이지 않던 그 남자가 내게 속삭였던 그 목소리.

‘정말 괜찮겠어?’

요한은 꿈속의 남자와 똑같은 말을 읊조린 것이다.

허락을 구하는 조심스러운 두 목소리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꿈속의 남자가 요한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요한 씨.”

“어?”

당신. 도대체 제 꿈속에서 왜 나온 거예요? 나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도 이유를 모르는 내 꿈속 일이었다. 타인인 요한이 그 이유를 알 리가 만무했다.

얘기를 꺼내 봤자 이상한 소리가 돌아올지도 몰랐다.

가령 ‘도대체 나를 얼마나 상상했길래, 그런 야한 꿈까지 꾼 거지?’라든지, ‘처음에 나를


모른다고 했던 건 역시나 거짓말이었군. 넌…… 설마 내 스토커였나?’라는 오해를 살지도.

미인 거지로 모자라, 미인 스토커라니. 나는 미인 스토커가 되는 일은 결단코 막고 싶었다.

“전…… 괜찮아요. 자, 그럼 침대로 같이 갈까요? 당신의 침대는 망망대해처럼 넓으니,


조슈아를 사이에 두고 함께 누우면 될 것 같아요.”

“…….”

그러자 요한은 조금 실망한 듯한 얼굴을 했다.

“왜요? 설마 조슈아를 쏙 빼놓고 우리 둘이 같이 침대에 눕자는……. 그런 의미는 아니었던


거죠?”

“흠흠. 당연히 조쉬를 사이에 두고 자야지.”

……뭐야. 진짜로 우리 둘이서만 잘 생각을 한 건가?

헛기침을 하는 그의 태도가 상당히 미심쩍었다.

요한 랭카스터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엉큼한 구석도 있었네.

“진짜로 우리 둘이서만 눕기를 바란 게 아니야.”

요한은 단언했지만, 나는 그 순간 확신했다.

바랐군, 바랐어.

하지만 얼굴을 붉히는 요한이 귀여우니, 나는 눈을 딱 감고 모른 척해 주었다.

* * *

“몸은 괜찮아요? 열병에 또 걸리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멀쩡해. 너는?”

“저도 괜찮아요.”

잠든 조슈아를 사이에 두고 누운 우리. 우린 차마 서로를 바라보지 못한 채 천장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까…… 키스하면서 누구 생각을 했어요? 세나 씨? 이런 거 물어도 괜찮으려나요?”

“이미 다 물은 주제에 뒤늦게 동의 구하지 말라고 했지.”

“하하.”

“솔직하게 대답해 줘야 하는 걸까?”

“당연하죠. 거지가 밥맛 씨의 솔직한 대답을 요구합니다.”

요한은 나지막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의 목소리엔 희미한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그냥 널 생각했어. 네 스스로를 거지라고 부르던 너.”

“…….”

“믿지 못하겠지만, 널 만난 이래로 세나에 대한 기억이 멀어진 기분을 이따금 느끼고 있었어.
절대로 잊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그녀의 기억인데…….”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선 자조하듯이 픽 웃었다.

“지나간 기억은 바스러지기 마련이고, 세나는 벌써 죽은 지 4 년째야. 흐릿해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기억이기도 하군.”

“그래서 슬퍼요?”

“잘 모르겠어. 점점 더 흐릿해지는 그녀의 기억에 슬프다고 확실히 대답할 수 없는 건…….”

그는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너라는 존재 때문이 아닌가 해. 세나의 기억이 흐려진 자리에, 너에 대한 기억이 가득 차고


있으니까.”

“…….”

“그래, 솔직하게 털어놓을게. 나는 네가 신경 쓰여.”

천장만 보고 있던 요한의 몸이 내 쪽으로 틀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으며, 내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뺨 위에 닿은 그의 손은 이제 전혀


떨리지 않고 있었다.

“리나.”

그는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다정한 목소리, 다정한 손길. 나는 내 멋대로 오해하고 싶은 바람이 들었다.

“요한 씨.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저는 또 오해하게 될지도 몰라요.”

당신이 세나 대신이 아닌, 리나라는 여자를 좋아하게 된 거라고.


 

* * *

요한은 긴 꿈을 꿨다.

그는 평소 거의 꿈을 꾸진 않았지만, 혹 꿈을 꾸게 된다면 대개 세나가 나오는 꿈을 꿨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꿈속에선 세나가 나왔다. 제법 오랜만에 꾼 세나의 꿈이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로 공작저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세나가 아프기 전까지, 함께


자주 거닐었던 정원이었다.

세나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스며 있었다. 요한은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정원에는 만개한 아름다운 꽃들이 즐비했다. 하나 미소를 드리운 세나의 얼굴보다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날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꿈임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기분이 좋았다.

따뜻한 바람, 밝은 태양 빛, 미소 짓고 있는 세나. 그가 늘 꿈꿔왔던 이상이었다.

더해, 요한이 현실에서 겪고 있는 상황과는 완전히 반대이기도 했다. 현실 속엔 세나가


존재하지 않았고, 자주 비가 내렸으며, 날은 추웠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세나는 요한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내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리 멀리 간 것은 아니었다. 세나는 곧 걸음을 멈추고선 잔디 위에 떨어져 있던 심지가 노란


보랏빛 꽃송이를 집어 들었다.

꽃을 쥐고 있던 세나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녀의 모습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

요한은 급하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은 세나에게 닿지 못했다. 그녀의 손이


투명해졌기 때문이었다.

흐려졌던 세나의 신형은 완전히 옅어지며, 종래엔 그녀의 상이 연기처럼 허공에 피어올랐다.
꿈일 뿐인데, 요한은 까닭 없이 기분이 이상해졌다.
네가 완전히 사라질 것 같아. 다시는 내 꿈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아.

“…….”

요한은 자연스럽게 잠에서 깼다.

감고 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마자 눈가에선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까닭 없이


흐른 눈물이었다.

요한은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 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그의 뺨을 쓸어 준


누군가가 있었다. 요한은 그제야 저가 혼자가 아니었음을 인지했다.

그는 눈물로 시큰해진 눈동자를 굴려, 누군가의 정체를 확인한다.

“요한 씨……. 슬픈 꿈이라도 꿨어요?”

언제 먼저 깼을지 모를 리나가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흘러내린 그의 눈물을 닦아 주고 있었다.

그래, 맞아. 우리는 어젯밤 같은 침대를 썼었어.

요한은 제게 닿은 리나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냥 하품해서.”

그는 자신의 뺨에 닿은 그녀의 손을 떨쳐 낼 생각을 하지 못하며, 선명했던 세나의 꿈을


다시금 상기했다.

꿈속에서 잡았던 세나의 손이 감촉이 아직까지 제 손에 저며 있는 듯했다.

이토록 생생한 꿈을 꾸었는데도, 슬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꿈속에서 세나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졌으니, 당연히 애달파야 할 텐데…….

슬픈 마음보다야, 이상한 후련함이 들었다. 과거에만 붙잡혀 있던 자신을 떨쳐 내 버린 듯한


후련함.

‘세나. 내가 이런 마음을 가져도 되는 걸까?’

“어쩜. 식은땀 좀 봐. 혹시 또 감기에 걸린 거예요? 나약하네요, 아주 나약해.”

리나는 혀를 끌끌 찼다. 그 모습이 얄밉기는커녕 왜 이렇게 귀여워 보이는 걸까.

요한은 잠이 들었을 때보다도 더욱 가까이 닿은 리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넌 괜찮아?”

“저요? 저야 당연히 괜찮……. 푸에취!”


리나는 제 입을 황급히 가리며 기침을 했다. 상기된 그녀의 얼굴이 뜻하는 바가 감기였나보다.

요한은 걱정이 앞섰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다정한 말이 아니었다.

“뭐야. 감기? 아주 나약하군. 쯧.”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게 버릇이 된 요한이었다.

이제 와 ‘괜찮아? 네가 아프니까, 내 마음이 더 아픈 것 같아.’라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얼른 의원을 불러와야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제기랄. 에취!”

“…….”

그녀의 재채기 소리를 두 번째 듣던 순간, 요한은 누워 있던 몸을 황급히 일으켰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고 여기서 딱 기다려. 의원을 불러올 테니까.”

“일단 침대에서 나와야겠어요. 조슈아에게 옮길지도 모르니까.”

“……아. 조쉬.”

요한은 그제야 조슈아를 떠올렸다.

조슈아는 리나의 소란스러운 기침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깊게 잠들어 있었다.

그는 이마를 짚었다.

미쳤군. 조슈아를 까맣게 잊을 정도로 리나를 걱정하고 있었다니.

그 순간 잠든 줄 알았던 조슈아의 붉은 입술 사이로 작은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44 화. 바지는 왜 입고 나오셨어요?

“엄마, 아빠……. 지금 조슈아 옆에 있어?”

조슈아는 잡아 달라는 것처럼 두 손을 허공에 뻗었다. 요한과 리나는 아이의 손을 동시에


부여잡았다.

리나는 기침이 가신 목소리로 말했다.

“응. 네 옆에 있어. 걱정하지 말고, 더 자자.”


눈도 뜨지 못한 아이는 웅얼거림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마도 잠결에 내뱉은 말인가 보다.

리나는 아이의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조슈아의 어깨 부근을 토닥여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언젠가 들었던 자장가를 허밍 했다.

아직까지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불러 줬었던 그 허밍. 신기한 일은 허밍을 하는 내내


기침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요한은 넋을 잃은 채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기억의 밑바닥에 잔존하던 어느


기억을 불러왔다.

조슈아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이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제목 모를 콧노래를


흥얼거렸던…… 세나.

요한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의원을 불러올게.”

그는 조용히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

조슈아를 낳은 지 1 년 후, 출처 모를 병에 앓게 된 세나는 단 한 번도 콧노래를 흥얼거리지


않았다. 그토록 사랑했던 조슈아를 방치하기도 했다.

요한은 그런 세나를 이해했다. 본인의 몸이 아프니, 아이를 돌볼 기력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요한에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리나라면, 제 몸이 아무리 아프다고 할지라도 조슈아를 챙겼을 거라고.

그녀는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조슈아를 방치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되레 제 아이처럼 열과


성의를 다해 돌봐 주었겠지.

“…….”

그는 공작저의 주치의를 찾았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일단은 감기에 걸린 리나부터 진찰을 하자.

이내 주치의와 함께 돌아온 요한은 주치의에게 조슈아와 리나의 상태를 꼼꼼히 점검해 볼 것을


명령했다.

깊은 잠에 빠진 조슈아에게는 감기의 기운이 없었고, 리나는 미열을 동반한 감기 기운이 조금


있다고 했다.

요한은 조슈아를 아이의 방으로 옮겼다. 리나의 말마따나 아이에게 감기가 옮으면 안 되니까.
그는 침대 위에 아이를 눕혀 주며, 아이의 이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곤 뒤따라
들어온 벨라에게 말했다.

“벨라. 조슈아가 깰 때까지 옆에 있어 줘. 혹시나 아이가 깨면 내게 일러 주고.”

“네. 주인님.”

“……아 참. 욘두에게도 오늘 조슈아의 수업은 하루 쉴 거라고 얘기해 줘.”

“네, 알겠습니다.”

벨라는 묻고 싶은 것이 있다는 얼굴이었지만, 끝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는 눈치가 빠른


사용인이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아이의 방을 나서며 이마를 훔쳐 냈다. 훔쳐 낸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다. 날개 죽지를


따라 흘러내리는 땀방울도 느껴졌다.

겨울이라는 계절감과는 어울리지 않는 땀이었다. 아침부터 긴장을 하고, 신경을 써서 그런


것인지.

요한은 찝찝하다는 생각과 함께 제 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저를 반기는 리나의 목소리는


없었다.

발소리를 죽인 채로 다가간 침대, 리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요한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코끝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미약한 그녀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다시 잠든 거구나.

“휴.”

그는 안도의 숨을 뱉어 냈다.

도대체 무엇을 걱정했던 것이고, 무엇에 안도한 걸까.

죽은 듯이 잠든 리나를 보며, 어느 날 갑자기 죽어 버린 세나를 떠올렸기에 그런 걸까.

잠든 것처럼 영원한 안식을 맞이했던 세나. 요한은 침대 위에 누인 앙상했던 세나의 몸을 잠깐


떠올렸다.

리나의 코끝에 머물던 그의 손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마로 올라갔다. 그러자 그녀의 이마를
뒤덮은 미열이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열 때문인 걸까. 리나의 입술이 평소보다도 훨씬 더 빨갛게 상기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요한은 그녀의 붉은 입술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순간 불쑥 떠오르는 건, 어제 마차 속에서 나누었던 그녀와의 키스였다.


리나는 나약해진 요한의 마음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자신을 위로해
주었으며, 제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리나와의 키스는 세나를 떠올리게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냥 널 생각했어. 네 스스로를 거지라고 부르던 너.’

놀랍게도 그 순간 요한의 머릿속을 채운 이는 리나였다.

시시껄렁한 말장난을 주고받던 리나.

기억을 잃은 채로 거리를 방랑하던 미인 거지인 리나.

흐릿해진 세나의 기억과는 상반되는 선명한 기억 속의 세나.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네가 세나와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라는 여자 그 자체를 신경 쓰게 된 걸까?”

요한은 리나에게 물었지만, 잠든 리나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그에겐 자신의 침대를 차지한 리나를 내쫓아야겠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조슈아에게도 더러 그러했듯이 그녀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을 뿐이었다.

그녀와 입을 맞추었던 기억을 상기했던 까닭에, 요한은 조금 더 더워졌음을 느꼈다.

“……씻고 싶은데.”

리나가 자고 있는 이 방은 자신의 방. 그렇기에 그는 다른 욕실을 써야 하나 싶었다.

“자고 있으니까, 괜찮겠지.”

요한은 괜찮을 거라는 말을 되뇌며, 제 방에 딸린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잠깐 씻고 나올 사이에 설마 리나가 다시 깨어나기라도 할까.

얼마 못 가 개운하게 씻고 나온 요한이 욕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타월로 탈탈 털어 냈다.

그의 옷가지는 늘 벨라나 다른 시녀가 챙겨 주었기 때문에, 그는 미처 갈아입을 옷을 챙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요한은 바지만 입은 채였다. 땀으로 인해 찝찝해진 셔츠는 다시 입을 수 없었으니까.

 
누군가의 시선을 느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에, 누군가의 진득한 시선이 머물러 있는 듯했다.

요한은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언제 잠에서 깼을지 모를 리나의
얼굴이 존재했다.

그녀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셔츠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상체를.

“거, 거지 너! 눈 감아!”

너무 당황한 나머지 요한은 저도 모르게 거지라는 말을 내뱉었다. 제법 오랜만에 부른 그녀의


애칭이었다.

리나는 놀란 것처럼 말을 더듬거렸다.

“옷…… 옷이!”

그는 뒤늦게 타월로 상체를 가리며, 뒤돌아섰다.

깨긴 또 언제 깬 거야. 그리고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옷을 왜 다 입고 나오지 않았냐고, 리나가 타박을 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요한의 등 뒤로 들린 리나의 말은 자못 황당한 것이었다.

“바지는 왜 입고 나오셨어요?”

“……어?”

요한은 리나가 한 말을 되뇌었다.

바지는 왜 입고 나오셨어요? 그 말은 꼭 바지를 입은 걸 아쉬워하는 것 같잖아.

그는 반문했다.

“뭐??”

“……좀 아쉬워서.”

“도대체 뭘 아쉬워하는 거야!”

금방 씻었지만, 그는 또다시 더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열기가 드리운 것은 그의 귓가, 그리고 얼굴, 그러다 그의 온몸이 뜨거워졌다.

“저……. 그런데 당신 몸……. 콜록콜록.”

“내, 내 몸이 왜.”
“생각보다 꽤 좋네요. 관리는 어떻게 해요? 큭큭.”

리나는 마른기침을 하면서도 요한을 놀렸다. 그 덕에 약이 단단히 오른 쪽은 요한이었다.

뒤돌아선 등이 벌겋게 익어 있을 게 분명했다. 붉어진 제 등을 보며 리나가 얼마나


재미있어하고 있을까.

그는 이대로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한은 작은 한숨과 함께 다시금 정면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곤 그녀가 누워 있던 침대 근처로


몇 발자국 걸어가기 시작했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리나의 얼굴에 띠어져 있던 미소가 희미해졌다.

경망스러운 말에 얼굴만 붉히던 제가, 도리어 당당하게 다가가자 당황한 것이리라.

그녀는 태연자약한 척을 하려고 했지만, 방황하는 그녀의 동공을 숨길 수 없었다.

요한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그는 상체를 가리고 있던 타월을 침대 위로


던졌다.

“궁금해?”

“네?”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며.”

요한은 그렇게 말하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리나는 눈에 띄게 흠칫 떨었으나, 그럼에도 어디론가 도망가지는 않았다.

그녀는 얼어붙은 듯 누운 자세 그대로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타는 요한의 몸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직접 보고 판단해 봐. 조금 만지는 것도 허락해 줄게.”

“콜록 콜록. 가까이 붙지 마요! 감기 옮을 거예요!”

가까이 붙지 말라니까 더 붙고 싶은 심술궂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요한은 청개구리처럼 제 몸을 리나에게 더욱 바짝 가져다 대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몸은


도망갈 구석 없이 밀착되었다.

그녀를 당황시키려고 행한 행동인데……. 막상 서로의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가니 묘한


마음이 들었다.

짓궂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돌연 요한의 시야에 가득 맺힌 것은 리나의 붉은


입술이었다.

요한은 그 붉은 입술에 또다시 입을 맞추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술이 닿기가 무섭게 기분이 좋아졌던, 한편으론 두근거렸던 그 키스를.

세나를 제외하곤 그 누구와도 입을 맞춘 적이 없던 요한이었다. 다른 여자와는 절대로 입 맞출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이 좀 우습다.

지금 이렇게나 리나의 입술에 집중하고 있잖아.

요한의 손은 리나의 뺨을 조용히 감싸 안았다.

“……요, 요한 씨.”

요한은 대답 없이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리나가 질색을 한다면 바로 물러날 생각이었다.

“…….”

하지만 리나는 질색하기는커녕 눈을 곤히 감으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게 아닌가.

그녀는 심지어 입술을 앞으로 조금 내밀기도 했다. 꼭 키스하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요한은 그 모습이 너무도 우스웠다. 입술 사이로 작은 실소가 새어 나갈 뻔했지만, 꾹 참아


냈다. 지금은 웃는 것보다야 입술을 맞대는 게 더 중요하니까.

이내 서로의 입술 끝이 조금 맞닿고, 요한마저도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

그는 등 뒤에 닿은 따가운 시선을 또다시 느꼈다. 마치 누군가가 훔쳐보고 있는 듯한 느낌.

요한은 고개를 옆으로 비틀어,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절대로 이곳에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이와 눈이 마주치게 된다.

“……!”

요한은 허겁지겁 리나의 몸 위에서 물러났다. 결국 그는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침대 밑으로


떨어지기에 이르렀다.

요한은 엉덩방아를 찧은 엉덩이를 문지르며, 눈이 마주친 장본인을 응시했다.

조금 열린 문틈. 그 사이로 앙증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미, 미안해! 그럼 조슈아는 동생을 기다리고 있을게!”

요한이 씻은 그 잠깐의 사이, 깨어난 것은 리나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큭큭.”

조슈아를 뒤따라온 듯한 벨라의 키득거림도 들렸다. 열렸던 문은 다시 닫혔지만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

“…….”
정적이 드리운 방 안. 침묵을 깬 이는 리나였다.

그녀는 머쓱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한 씨. 이 상황…… 꽤 익숙한 것 같지 않나요?”

“……나도 그렇게 느꼈어.”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요한은 저가 열병에 걸렸던 지난날을 언뜻 떠올렸다.

그때도 조슈아의 등장으로 키스를 하지 못했었지, 아마.

“흠흠. 다시 잘 건가?”

“네. 콜록 콜록. 왠지 나른하네요. 제 방으로 돌아가서 잘까요?”

“아니, 됐어. 그냥 꼼짝 말고 누워 있어.”

“……네.”

요한은 뒤늦게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나는 잠깐 나갔다 올게.”

끝내 닿지 못한 입술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그녀의 위에 올라탈 수는 없었다.


왠지 엄청 부끄러운 기분이랄까.

“어디 가요?”

“낮엔 해야 할 일이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쉬고 있도록.”

“…….”

“해야 할 얘기가 많잖아.”

그는 작별 인사처럼 그녀의 이마 위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미수로 끝난 키스의


아쉬움을 달래 줄 입맞춤이었다.

그러다 문득 요한은 깨닫는다. 입을 맞추는 일이 꽤나 자연스러워진 것 같다고.

언제고 또다시 입술을 맞추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자연스러워졌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 * *
요한이 나가 버린 후, 나는 그의 방에 혼자 남게 되었다.

그에게 했던 말대로 몸이 나른했고, 손가락 까딱할 힘조차 없었지만, 사실 잠은 그다지 오지


않았다.

그건 다 그의 침대에서 나는 그의 냄새 때문인가 싶다.

나는 베고 있던 베개에 코를 묻으며 킁킁거렸다. 거기엔 낙인처럼 남겨진 요한의 짙은 냄새가


존재했다. 좋은 냄새.

그 냄새가 코끝에 연신 맴돌아서 나는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그의 냄새를 계속해서 맡고 있자니 내 곁에 요한이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그가 내 옆에 누워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 만나는 사이가 된 건가.”

좋아한다느니 만나고 싶다느니 하는 말은 오가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감정이 가득 깃든 눈으로 서로를 몇 차례 바라보았고, 서로의 입술을 원했을


뿐이었다.

비록 동생을 기다린다는 조슈아 덕에 조금 전의 키스는 미수로 끝났지만.

단순한 욕구로 인해 나눈 키스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분명 감정적인 교류가 있었고, 우린 서로의 감정에 이끌려 키스를 한 것이었다.

“우린 무슨 관계지.”

우리는 이제 돈 많은 고용주와 거지 사이가 아니게 된 걸까?

나는 어영부영 넘어가는 게 싫었다. 그와 관계의 정의를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의 진심이 궁금했다.

나만 당신에게 두근거렸던 게 아니었는지, 묻고 싶었다.

세나를 떠올리지 않았다던 당신의 키스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았을 때,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방문객이 당연히


요한일 거라고 생각했다.

“요한 씨. 벌써 왔어요? 바쁜 것처럼 나가더니, 또 제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걸 못


참아서.”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요한이 아니라, 난데?”

나는 그제야 방문객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그곳엔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서 있었다.

“……바비?”

바비는 조용히 문을 닫고선, 내게 가까이 걸어왔다. 훈장이라도 되는 양 자랑했던 팔의 깁스는


사라져 있었다.

부러진 팔이 나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일은 다소 폭력적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비는 내가 저를 어렵게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스스로 팔을 부러뜨렸다고 했었다.

그것은 진정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 짓이었을까? 사랑이라기보다는 집착에 가깝게


느껴졌다면.

어느새 가까워진 바비의 얼굴엔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비가 그치질 않네. 많이 젖었다.”

바비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 위에 내려앉은 빗방울을 털어 냈다. 지나친 자연스러움이었다.


마치 우리가 지금 만나기로 약속한 것처럼.

“바비. 우리가 오늘 만나기로 했었어?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제 45 화. 사랑하면 원래 미치는 거래

 
바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우린 아직 친구라며. 네가 언제든 내 얘길 들어 주겠다며.”

“…….”

“나는 비록 공작님까지는 아니지만, 공작가의 일원이야. 적어도 네가 공작저에 있는 한, 네가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알 수 있단 말이야.”

바비에겐 아주 유능한 첩자라도 있는 걸까. 공작저에 있는 일을 곧이곧대로 바비에게 알려 줄


누군가라고나 할까.
나는 그 누군가에 대해서 추측을 해 보았다.

그 누군가는 공작저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도 의심을 받지 않을 이일 것이다.

즉 이곳에 늘 상주하면서도, 공작가에서 벌어진 일을 자연스럽게 지켜볼 수 있는 누군가.

내 머릿속엔 누군가의 이름이 불쑥 떠올랐다.

‘저는 욘두라고 합니다. 조슈아 님의 선생님이죠.’

나를 향해 만개한 미소를 지었던 욘두.

어제, 수많은 인파 속에서 단연 돋보였던 바비가 들어갔던 어느 집.

‘저긴……. 욘두 선생의 집이야.’

바비는 욘두와 원래부터 알던 사이인 걸까?

욘두는 조슈아의 선생님이었으니, 두 사람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 집의 테이블 위에 있던 붉은 표지의 책이었다.

“……리나? 그런데 왜 요한의 방에……, 그것도 침대 위에 있는 거야?”

앉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비는 또다시 자연스럽게 침대 모퉁이에 엉덩이를 붙인


채였다.

나는 상체만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었다.

내게 닿은 바비의 푸른 눈동자가 평소보다 훨씬 더 가라앉아 보였다. 입꼬리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동자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연신 마른기침을 하며 아픈 척을 했다.

“콜록, 콜록. 바비. 나, 감기 걸렸으니까 다음에 봐.”

물론 바비와 나눌 이야기는 엄청 많았다.

그가 왜 욘두 쌤의 집에 간 것이고, 그는 욘두 쌤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이며, 세나의 책에


대해서도 물어봐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요한과 대화를 나누지 못한 터였다. 요한과 상의를 한 뒤에 바비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네가 전염병에 걸렸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어.”

바비는 단언했다. 그의 말 속엔 거짓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넌 네 목숨을 조금 더 소중히 해.”


“누굴 위해서?”

바비의 단호한 대꾸에 할 말을 잃은 것은 나였다.

“…….”

“어차피 아무도 사랑해 주지 않는 삶이야. 내가 죽는다고 해서, 누구 하나 슬퍼해 줄 사람은


없겠지.”

“……조슈아가 슬퍼할 거야.”

바비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꼬맹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도 슬퍼할 거야.”

이번에 그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바비는 내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어째서 그가 내 말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바비의 말처럼 우리는 아직 친구 사이였으니까.

나는 바비를 따라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한 씨가 곧 돌아올지도 몰라. 마주치면 어쩌려고.”

“들키면, 그땐 그때 가서 생각해 볼게.”

참으로 낙천적이네. 나는 타박하듯이 말했다.

“구제불능이구나.”

“그걸 이제 알았다면 곤란한데.”

대화가 통하지 않는 기분이란 건, 이런 기분인 걸까?

나는 화제를 돌렸다.

“팔……. 깁스 풀었네.”

바비는 깁스를 했었던 왼팔을 보란 듯이 몇 차례 돌렸다.

“응. 이제 다시 멀쩡해져서, 내가 보기 싫은 걸까?”

“이번엔 다리를 부러뜨릴 생각이라면 예고해 줘.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게.”

“큭큭.”

웃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건만, 돌아온 것은 바비의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그를 따라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바비의 행동들에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도
많았던 까닭이었다.

“왜 안 왔었어? 접때 나를 찾아오겠다고 했었잖아.”

기분 좋게 웃던 바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다 곧 그의 입가엔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우와. 리나가 나를 기다렸어?”

“꼭 그렇다는 건 아닌데……. 콜록 콜록.”

“미안. 나도 곧장 너를 찾아오려고 했었는데, 그간 좀 바빴거든.”

“뭐 하느라?”

너, 욘두 쌤 집에는 왜 갔어?

그 책은 네가 가져간 거지?

넌…….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기왕 만난 김에 물어봐 버릴까.

바비가 내 쪽으로 손을 뻗은 것은 그때였다.

바비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손바닥을 쫙 펼쳤고, 그의 손바닥 위엔 낯익은 물건이 올려져


있었다.

“……귀걸이?”

빛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영롱하게 빛나는 에메랄드빛 귀걸이.

“이 귀걸이를 기억해?”

나는 침묵하며, 귀걸이를 보았던 출처를 떠올렸다.

얼마 못 가 그 출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귀걸이를 봤던 기억은 잃어버린 기억이 아니라,


최근의 기억이기 때문이었다.

“욘두 쌤의 귀걸이……. 맞지?”

욘두의 것보다도 흠이 많이 나 있다는 걸 제외하고선, 똑같은 모양의 귀걸이였다.

욘두는 한쪽 귀에만 귀걸이를 차고 있었는데, 바비가 보여 준 것이 나머지 짝인 걸까?

나는 바비가 내게 이 귀걸이를 보여 준 의도를 잘 가늠할 수 없었다.


“이게 왜?”

“글쎄. 나는 더 말해 주지 않을 참이야.”

“나 원. 그럼 애당초 보여 주지 말든가.”

“그럼 여기까지만 말해 줘 볼까? 이 귀걸이. 어쩌면 네가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된 물건일지도


몰라.”

“……뭐?”

욘두의 귀걸이와 같은 귀걸이가 잃어버린 내 기억과 연관이 있다고?

나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아연실색했다.

“바비. 더 알려 줘.”

“그냥은 못 알려 주지.”

그는 무언가를 원한다는 듯이 말했고, 동시에 그의 얼굴이 내 얼굴 위로 기울어졌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얼굴 속, 바비의 얼굴에는 표정다운 표정이 띠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내 턱 끝을 부드럽게 낚아채며, 내 입술을 내려다보았다.

내리깐 그의 눈동자 속엔 희미한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열기가 일컫는 바는, 무언가의
바람이었다.

너와의 키스를 원해. 그에게서 짙은 열망과 절박함이 느껴졌다.

그는 정원에서 성사되지 못했던 이전 날의 키스를, 이번엔 확실히 끝내려는 걸까? 설령 내가


거부를 한다 할지라도.

지난 1 년간 내게 고백을 하며, 나를 따라다녔던 바비였다.

그는 질리도록 내 뒤를 따라다녔지만 결단코 내게 스킨십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였건만……. 무엇이 그를 조급하게 만든 걸까.

“키스해 주면 자세히 얘기해 줄게.”

“콜록 콜록. 나 감기 걸렸다니까. 옮을 거야.”

내 나름대로의 협박이었으나, 바비는 내 말을 비웃었다.

“커플 감기. 완전 좋아. 짜릿해.”

도리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으니, 그에게 돌아갈 내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친놈.”
바비는 내가 욕지거리를 할 줄 알았다는 듯 저가 하고 싶은 말을 건넬 뿐이었다.

“사랑하면 원래 미치는 거래.”

“…….”

“그래서 어쩔 건데? 나랑 뽀뽀할래, 아님 나랑 키스할래?”

“같은 말인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리나. 네겐 선택권이 그다지 없다는 말이지. 네가 궁금해하는 걸 알아내려면, 넌 내 말을


따라야 한다는 거야.”

“싫어.”

“왜?”

“기억이 돌아오는 건 항상 끔찍한 일일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 생각이


바뀌었지. 그래, 나는 기억을 찾고 싶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와 키스할 순 없어.”

나는 요한을 떠올렸다.

우스운 말이었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남자와 입을 맞추고 싶지는 않았다. 구제불능이라는 거,


바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닌 듯했다.

그리고 바비는 나를 너무도 잘 알았다.

“역시나 요한…… 때문에?”

그는 단번에 내가 하고 있던 생각을 알아챈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옅게 끄덕이며 진실을 고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바비에게 더 나은 일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와 키스했어.”

어쩌면 이젠 그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질지도 몰라.

바비는 아랫입술을 작게 짓이겼다. 하나 그럼에도 가까이 닿아 있던 얼굴은 뒤로 물리지


않았다.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또다시 열린 건 그때였다.

“리나, 차를 내가 직접 가지고 왔어. 감동 받았다면 곤란하고, 잠들어 있다면 어쩔 수 없…


….”

바보처럼 조잘거리던 말소리는 곧 멈춰 섰다.


탁, 무언가가 거칠게 내려지는 소리와 함께 성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바비의 신형
뒤로 보이는 방문객을 바라보았다.

“요한…….”

그는 한달음에 침대까지 다가와, 바비의 어깨를 잡아 뒤로 밀쳐 냈다. 바비는 하릴없이


비틀거리며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쿵,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바비의 허탈한 미소 소리가 들렸다.

“타이밍 정말 안 좋네.”

푸념은 덤이었다.

여유롭지 못하게 등장한 요한은, 제 머리칼을 쓸었다.

“쥐새끼가 또 몰래 들어왔네.”

“이렇게 잘생긴 쥐새끼가 존재한다니.”

바비의 비아냥거림에 요한은 인상을 더욱 굳혔다.

그러곤 그는 내게 물었다.

“리나. 이번엔 확실하게 선택해 줘. 이번에도 빌어먹을 저 자식의 손을 잡을 건지. 아님 내


손을 잡을 건지.”

“…….”

“네가 내 손을 잡는다면, 당장 저 자식을 끌어내 버리겠어.”

나는 이전에 바비를 선택했었다. 내 손목을 그러쥔 채로, ‘가지 마.’라며 애달프게 말하던
요한을 외면했었단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는 요한의 손을 잡고 싶었다. 무척이나.

요한은 내게 손을 뻗고 있었다. 언제고 마주 잡았던 그의 예쁜 손이었다. 내가 그의 손바닥


위에 손을 얹으려던 순간, 바비의 말이 한발 더 앞섰다.

“이봐, 요한. 그래도 우리가 형제 사이라는 걸, 가끔은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

“좋아. 갈게, 나가면 되잖아. 하지만 리나.”

그는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한 말이 궁금하다면, 나를 직접 찾아와. 나는 언제나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그럼 또 보자. 안녕.”

바비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방을 나갔다. 요한은 멀어지는


바비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내 방문은 다시 닫히고, 굳은 듯이 서 있던 요한은 잠깐 내려놓았던 찻잔을 다시금 가져왔다.


그는 침대 옆 협탁에 찻잔을 올려 둔 채로 말했다.

“차……. 마셔. 나는 바비와 얘기를 나눠야겠어.”

요한은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란 것처럼 서둘러 방을 나섰다.

* * *

욘두를 만난 것은 정말 우연처럼 벌어진 일이었다.

요한과 바비가 다녀간 이래로 나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콜록거리던 기침도 쏙 들어간


터였다. 원래부터 심한 감기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왠지 모를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요한의 방을 나섰고, 그의 방을 나서자마자 복도를


거닐던 욘두와 마주친 것이었다.

“욘두 쌤!”

나는 앞서가던 그를 급하게 불렀다. 욘두는 몸을 뒤로 틀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움직임에


따라 그의 귓가에 걸린 에메랄드빛 귀걸이가 작게 흔들렸다.

욘두의 귀엔 여전히 귀걸이가 한쪽만 달린 채였고, 나는 그 순간 확신했다.

바비가 가지고 있던 귀걸이는 욘두가 차고 있던 것이 아니다. 나머지 한쪽인 것이다.

“리나 님이 아니십니까? 반갑네요.”

“……네, 저도 반가워요. 그런데 만나자마자 엄청 뜬금없는 질문을 해도 될까요?”

욘두는 갸웃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귀걸이……. 왜 한쪽만 차고 계시는 거예요?”

그는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아, 이건 연인과 반쪽씩 주고받은 귀걸이입니다. 나머지 한쪽은 사랑하는 그 여자가 가지고
있죠.”

“결혼하셨어요!?”

“아하하, 아뇨. 결혼은 아직.”


욘두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은 꼭 요한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요한이 나를 보며 세나를 떠올릴 때, 그때에 요한이 했던 슬픈 얼굴과 닮아 있었던 것이다.

욘두의 연인이라는 여자는 세나처럼 죽은 것일까?

그렇기에 그가 슬픈 표정을 내비친 걸까.

욘두의 연인이 가지고 있다던 나머지 한쪽 귀걸이는 왜 바비가 들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왜


소실된 내 기억과 연관이 있다는 것일까.

“그 여자분…….”

나는 사정을 물으려고 했지만, 욘두가 다른 말을 꺼내었다.

“귀걸이 말입니다. 다른 걸로 하나 더 맞춰 볼까 생각 중인데, 리나 님께서 골라 주는 걸


도와주시겠습니까?”

“제가요?”

“네. 보시다시피 제가 옷을 잘 못 입습니다. 뭘 고르는 데 영 소질이 없어서…….”

나는 그제야 욘두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그는 각이 선 갈색빛 바지에 파란빛이 도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맙소사.

잘생긴 얼굴을 그렇게 쓸 거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건 어떨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옷차림이었다.

 
나는 솔직한 감상을 읊조렸다.

“지금까지 이런 테러는 없었던 것 같아요. 이것은 안구 테러일까요. 패션 테러일까요?”

욘두는 아주 심각한 얼굴을 하며 고민했다.

제 테러가 안구 테러인지, 패션 테러인지에 관해서.

“굳이 고르자면 패션 테러?”

신중하게 고른 그의 답은 패션 테러.

“아, 아니! 그걸 그렇게 쉽게 인정하지 마세요!”

그 덕에 당황한 것은 나였다.
이렇게 진지해서야 농담을 못 하겠잖아.

“하하하. 저는 인정이 빠른 편입니다.”

“살면서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겠어요.”

“유모님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요즘 새 귀걸이를 고르는 일이


아주 큰 골칫거리거든요.”

“기념일이에요? 만난 지 몇 주년 기념?”

“……기념일이라. 비슷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는 또다시 눈에 띄게 침울해진 얼굴을 했다.

기념일을 논하는데, 왜 우울한 빛을 띤 걸까. 그는 심지어 패션 테러를 운운했던 얼굴보다도


안색이 더 나빠 보였다.

나로선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이유 모를 그의 우울함에 마음이 나약해졌다.

‘그를 꼭 도와주어야겠다!’라는 사명감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그를 그대로 두진 못하겠다.

어쩌면 욘두가 요한과 묘하게 닮았기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좋아요! 제가 도와줄게요.”

그를 도와주며 귀걸이에 얽힌 사연을 조금 더 알아내 보자.

그렇게 한다면, 구태여 바비를 찾아가지 않더라도 내 궁금증이 해결될 것이리라.

“오! 감사합니다. 시간은 언제가 좋을까요?”

“음. 일단은 요한 씨에게 허락을 구해야 할 것 같은데. 아시다시피 저는 조슈아의 유모이기도


해서.”

“공작님이 허락해 주실까요?”

“해 주지 않을 이유는 없죠.”

“하하. 그렇죠. 잠깐이면 되고……. 나쁜 짓을 하려는 건 아니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시간 정도 나갔다 오겠다는데 요한이 반대하겠어?

* * *
“……안 돼.”

……하는구나.

나는 요한의 집무실로 와, 욘두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며칠 뒤에 그와 잠깐 나갔다 오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것은 완고한


거절이었다.

“왜요? 타당한 이유를 백 가지만 대세요. 그럼 순순히 물러날 테니까.”

“왜인지 모르겠어?”

“네!”

요한은 의자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내 앞까지 걸어 나왔다.

“정말로?”

“네. 거지가 설명을 요구합니다! 당신의 결정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요.”

요한은 아주 심각한 얼굴로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의 구겨진 얼굴은 조금 전에 보았던


얼굴이기도 했다. 불시에 바비와 만났던 그때에.

그러다 그는 시름이 깊은 한숨과 함께 운을 떼었다.

“욘두는…….”

제 46 화. 몰래도 안 돼

“욘두는?”

요한은 낮게 숨을 고른 뒤에 이어 말했다.

“……남자잖아.”

좀 의아한 말이랄까.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네?”
요한은 안절부절못하는 걸음으로 내 앞을 몇 번 거닐었다.

“지금 남자와 둘이서 나간다는 거잖아.”

“그는 조슈아의 선생인데요?”

“선생이기 전에 남자잖아.”

요한은 단언했다.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애꿎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그 모습은 뭐랄까. 아주 초조해 보였다.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나는 그의 부산스러움과 초조함의 이유를 미루어 짐작했다.

떠올려 보면, 이 남자가 질투했던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바비와 함께 있는


것을 아주 대놓고 싫어하며, 언제나 나를 붙잡았었으니까.

‘가지 마.’

애처로운 목소리로 나를 붙잡았던 요한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연하다.

이건 비밀인데, 나는 그때 요한을 선택하지 않은 것을 때때로 후회하곤 했다. 혼자 남겨졌을


그가 얼마나 슬퍼했을지 내심 짐작이 가서.

나를 세나로 착각해서 하는 질투일지, 오로지 나를 위한 질투인지 그 본질을 정확히 알 수


없기도 했다.

약간 씁쓸하기는 했지만, 그 경계가 모호한 것은 사실이었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내 앞을 배회하던 요한이 뒤늦게 한마디를 읊조렸다. 낭패 서린


목소리였다.

“젠장.”

나는 그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왜냐면, 나도 얼마 전에 당신을 찾아온 여자에게 질투를 했었거든.

“질투하실 거 없어요. 저는 욘두 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걸요.”

“하지만 그는 나보다는 아니지만 꽤 잘생겼고, 보통 사람이 아닌데다가, 배우자도 없는걸.”

“그렇지만 욘두 쌤은 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잖아요.”


“…….”

그 순간 배회하던 요한의 걸음이 뚝 멈춰 섰다. 그는 바닥만 보던 시선을 들어 올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무슨 말이냐는 의미가 서린 듯한 눈빛이었다.

“제 걱정과 제 생각을 이해해 주는 한 사람.”

“어?”

“그게 당신이라고요, 요한 랭카스터 씨.”

세나와 얽힌 기묘한 일들. 가령 나와 세나가 닮았다든지, 내가 세나와 관련된 꿈을 꾼다든지,


그런 일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요한이었다.

어디 털어놓기만 할까. 함께 고민할 수도 있는걸. 그리고 함께 헤쳐 나갈 수도 있다는 사실.

유일무이한 요한의 역할 때문에 나는 그에게 더욱 끌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내 말에 요한은 짐짓 심각해진 얼굴을 했다.

“잠깐만.”

그는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깊은 고뇌에 잠겼다.

“갑자기 왜 그래요?”

요한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난 아직 고백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어.”

나는 황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구가 몇 없어 적막할 정도로 큰 방 안엔 우리 둘밖에


없었다.

“누가 고백한대요? 여긴 저희 둘밖에 없는데요?”

“네가 방금 고백했잖아.”

심드렁한 그의 대꾸에 나는 잠깐 동안 잊고 있던 기침을 내뱉기에 이르렀다.

“네?!?! 콜록 콜록.”

요한은 이미 다 눈치챘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말엔 주저함이라곤 일말도 없었다.

“네 마음속엔 나밖에 없다며.”

“……??”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당신뿐이라는 말이, 어째서 ‘내 마음속엔 당신밖에 없어.’라는 말이


된 걸까?
아서라.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구나.

“하. 이래서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겠군.”

“…….”

“좋아. 어쩔 수 없군. 너와 함께 있어 주지.”

요한은 심각한 짝사랑을 앓고 있는 나를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처럼 말했다.

사람이 너무 황당하면 할 말을 잃는다는 게 지금 딱 내 상황인 듯하다.

“소름 끼치도록 자연스러운 고백이었어.”

덧대어진 그의 말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

졸지에 요한에게 고백을 한 여자가 되다니. 맙소사.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오해를 한 요한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이상한 일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이었다.

내겐 그가 한 오해를 바로잡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고백한 거라고 굴뚝같이 믿고 있는 요한이 귀엽기만 했다. 조슈아에게 하듯 그의


볼을 한 번 꼬집어 보고 싶을 정도.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 요한의 볼도 엄청 말랑말랑할지도 모르겠다.

만져 보고 싶으니 일단은 동의를 구해 보자.

“요한 씨. 나중에 볼 한번 꼬집어 봐도 돼요?”

요한은 무슨 그런 해괴한 말을 하느냐는 듯이 흘금 나를 쳐다봤다. 그러곤 즉답한다.

“안 돼.”

“각박하네요.”

“그래도 안 돼.”

“네, 알겠습니다.”

그럼 몰래 만져 보는 걸로.
“몰래도 안 돼.”

“…….”

나는 침묵했다. 거울은 보지 않았지만, 얼굴이 그리 좋지는 않을 게다. 아마도 조금 찌푸려져


있을 테지.

그나저나 그는 내 생각을 어떻게 안 걸까?

요한은 나를 비웃듯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도 내 생각을 모조리 간파당한 기분이었다.

“네 입으로 말했잖아. 네 생각을 이해해 주는 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네, 그랬죠.”

그는 나와 눈을 맞추었다. 마주한 시선이 깊다. 그의 시선 속에 맺힌 메시지는 그러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내 손바닥 안이야.’

먼저 시선을 회피한 쪽은 나였다. 고요한 그의 시선을 계속해서 마주하는 건, 늘 그렇듯 내


심장에 무리이기 때문이었다.

고백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진짜로 고백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고백과


관련되지 않은 말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미취학 아동 모임 후원에 관한 거.”

“그건 조슈아와 연관된 일?”

“어.”

요한은 고개를 옅게 끄덕였다.

“그리고……. 한 부모 가정에 대한 후원도.”

“그것도 조슈아 때문에?”

“물론.”

“돈 엄청 많나 보다. 다 후원이네요. 돈 많으면 좋아요?”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얼굴엔 오만과 자만이 한껏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얄밉지 않고


역시나 귀엽다는 게 함정이다.

“좋지.”

나는 연속해서 물었다.
“조슈아도 좋아하죠?”

“좋아. 너는 왜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을 하는 거지?”

자, 그럼 흐름에 따라 다음 질문도 이어서 해 보자.

“그럼 저도 좋아해요?”

“좋……. 어?”

그는 자연스럽게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으려다가 놀란 듯이 되물었다.

“요한 씨는 저를 어떻게 생각해요? 전…… 당신의 진심이 궁금해요.”

내게 키스를 한 당신의 진심이 궁금해.

요한은 신나서 대답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침묵했다. 그는 날렵한 제 턱을 문지르며 혼잣말을


했다.

“고백에 이어, 이젠 내 마음을 확인하는 물음이라…….”

내뱉어진 그의 말에 나는 또다시 이마를 짚었다.

나 정말로 완전히 요한에게 고백을 해 버린 여자가 된 걸까.

내 심장은 조금 전보다도 빠른 속도로 달음박질 치기 시작했다. 요한의 대답을 기대하는 건지,


뭔지.

나는 입술을 뭉그러뜨리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

요한은 대답 대신 내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내 손을 다 감쌀 정도로 큰 그의 손의 온기가


제법 익숙하다. 성공적으로 손을 잡은 그는 몇 차례의 가벼운 헛기침했다.

“일단 네 방으로 돌아가서 얘기하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말이었다.

* * *

요한은 신사처럼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문득 문고리에 손을 얹은 요한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왼손 약지의 반지는 사라져 있었다. 세나와의 결혼반지로 추정되었던 그


반지. 그는 언제 그 반지를 뺀 걸까.

그것은 그의 심경의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 걸까?


나는 자조하듯이 픽 웃었다. 결혼반지 하나가 사라진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내가
우스웠다.

이윽고 방으로 들어온 요한은 잡고 있던 손에 힘주어 나를 침대까지 끌고 갔다.

“괜찮아졌다고 해도, 군소리 말고 누워 있어.”

“거지가 묻습니다. 그건 명령입니까?”

요한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니. 당연히 부탁이지.”

그러곤 그는 잘 정돈된 홑이불을 들어 올려, 내가 들어갈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가벼운


턱짓으로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길 종용하는 요한이었다.

나는 그의 말대로 별말 없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부탁이라고 하는데 못 들어줄 것도 없지.

“하지만 잠은 오지 않는 걸요. 그리고 당신과 얘기도 하고 싶어요.”

“누워 있으라고 했지, 자라곤 하지 않았어.”

그는 내가 이불을 덮는 모습까지 확인한 후에, 방 한편에 있던 흰색의 작은 스툴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러고선 침대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있죠, 요한 랭카스터 씨.”

“어.”

“확실히 말해 두는데, 저는 욘두 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그리고 그에게는 미래를


약속한 여자가 있는 걸요. 그러니까 이상한 질투하지 마세요.”

질투하는 그는 귀엽고 또 귀여웠지만, 욘두에 대한 오해는 확실히 풀어 두는 게 좋을 성싶었다.

내 말에도 요한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아닌가.

“……욘두에게 미래를 약속한 여자가 있다고?”

“네. 몰랐어요?”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잠깐 침묵했다. 욘두 쌤에게 미래를


약속한 여자가 있다는 것이 요한에게 생각할 일인 걸까.

그러고 보니 아까 요한은 분명 욘두에게 ‘배우자도 없고’라는 말을 했었다.

몰랐던 걸까?
요한은 욘두에 대해서 더는 묻지 않았다.

“감기는 어쩌고, 쉬라니까 왜 또 나와서 일을 벌였어?”

“괜찮아졌길래, 잠도 안 오고 그래서……. 여차저차 복도로 나간 거죠, 뭐. 그러다 욘두 쌤과


마주쳤고.”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생리 현상이 툭 튀어 나왔다.

“콜록 콜록.”

그러자 요한의 표정이 무시무시해졌다. 그는 꼭 예전에 나를 거지라고 불렀던 그때의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좀 화가 나 보이는 얼굴.

“하나도 안 괜찮잖아.”

“이제 곧 괜찮아질 거예요. 제 몸이잖아요, 저는 알 수 있어요.”

“…….”

“콜록 콜록.”

망할 기침 같으니라고! 왜 괜찮다는 말을 꺼낼 때마다 새어 나오는 걸까.

나는 마른기침을 참아 내려 노력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해괴한 소리가 흘러나왔을 뿐이었다.

요한의 얼굴이 더욱 굳어진 것은 그때였다.

그는 굳어지는 제 얼굴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부드럽게 휘어지던 그의 눈은 단단히


경직되었고, 시시껄렁한 오해를 뱉어 내던 그의 입술은 일자로 얼어붙었다.

요한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깊게 가라앉았다. 마치 오래된 어떤 일을 상기하고 있는 듯한


눈동자였다.

“요한 씨?”

나는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이내 얼어붙은 그의 입술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세나도 그런 식으로 죽었어.”

세나도 그런 식으로 죽었다, 라.

가벼운 감기인 줄 알고 괜찮아하다가,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죽었다는 말인 걸까.

죽음이라는 불길한 단어 하나에 우리 사이를 맴도는 기류가 일순 서늘해진 것만 같았다.

“……미안.”
요한은 뒤늦게 사과를 했지만 서늘해진 기류는 다시 온화해지지 않았다. 농담을 주고받았던,
어쩐지 마음이 몽글한, 그때론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세나 씨도 가볍게 앓다가 많이 아파지게 된 거예요?

나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물어야 할 것과 묻지 말아야 할 것을 잘 구분하는 나. 나는 그 질문이 묻지 말아야 할


질문임을 알 수 있었다.

“난 그저……. 네가 조금이라도 아프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알아요.”

아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먹먹한 걸까.

“키스를 할 땐 저를 생각했다면서요. 하지만 오늘은 세나 씨가 생각난 거예요?”

요한은 조금 주저하며 대답했다.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어. 하지만 너를 볼 때 이따금 세나가 생각나는 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거야. 넌……, 세나와 지독하게 닮았으니까.”

나는 몸의 반응이 솔직한 요한의 모습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럴 때마저도 그가 솔직하게 대답해 버리자, 나는 괜스레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세나와 지독하게 닮은 거 안다. 그가 나를 보며 세나를 떠올리는 걸, 머리로는 이미 안단


말이다.

그러나 요한의 눈빛 속에서 그리움과 회한 같은 감정을 읽은 내 기분은 끔찍했다. 그건 세나를


향한 감정들일 테니까.

아무래도 내 가슴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나 보다.

나는 내심 그가 나를 리나 그 자체로 봐 주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별것 아닌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나는 요한에게 진정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그가 오로지 나만을 생각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걸까?

막상 그가 진심이 되었을 땐, 그땐 어떻게 하려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해 드리면 좋을까요?”

“……아까 네가 물었던 물음에 대한 답을 해 줄게.”


내가 물었던 물음이라면,

‘요한 씨. 저를 어떻게 생각해요? 전…… 당신의 진심이 궁금해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닐까 싶었다.

요한은 차마 내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말을 이어 갔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고민했어. 나는 너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네.”

나와 눈을 맞추길 주저했던 요한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내 마주한 그의 시선 속엔


조금 전에 보았던 세나와 얽힌 감정들이 사라져 있었다.

당신은 지금 나를 온전히 바라보고 있는 걸까?

“결론은 그래. 나는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아직 혼란스러워. 하지만 나는 그래도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내 옆에 있어 줘.”

요한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곧이곧대로 듣자면 고백에 가까운 말이었다. 분명히.

하지만 내가 세나를 닮았기에, 세나를 대신해야 하기에,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말로도


들렸다.

“이기적이에요. 누누이 얘기했지만, 저는 세나 씨가 아니에요.”

나는 단언했다. 그만큼 요한에게 확실히 말해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기적이라는 거 알아. 네가 세나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나는 네가 신경 쓰여서 미칠


것 같아. 내 진심은 그래.”

“그래서요?”

“리나. 네가 나를 도와줘. 내가 네 모습을 보고도 세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게. 내가 널


무조건적으로 리나 그 자체로 볼 수 있게. 그렇게 된 뒤에도 네가 소름 끼치게 신경 쓰인다면
…….”

거기까지 말한 요한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는 다음 말을 잇기를 잠깐 망설이더니 이내 말문을 열었다.


제 47 화. 내 볼도 여백이 많아

“그땐 진짜로 조슈아의 엄마가 되어……. 윽. 아니야. 이다음은 나, 나중에 얘기해.”

요한은 얼굴을 황급히 가리며 말을 돌렸다. 채 가려지지 못한 그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는 말을 멈추었지만, 나는 그의 말을 끝까지 다 들은 기분이었다.

바보. 진짜 조슈아의 엄마가 되어 달라니. 그런 해괴한 고백이 어디 있어.

로맨틱이라고는 전혀 없는 고백이었건만, 내 입가엔 왜 이리도 미소가 드리우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심장은 또 왜 이렇게 빨리 뛰어.

“요한 씨. 그래서 저희의 관계를 확실히 정리해 주세요. 저와 또 이따금씩 키스할 거예요?”

“너, 너는 무, 무슨 그런 부끄러움도 없, 없이!”

요한은 기겁했다. 그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이젠 홍당무가 될 지경이었다.

“알 거 다 아는 사이에 무슨.”

이미 여러 번 입술을 맞댄 주제에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야.

나는 코웃음을 치며 그를 닦달했다.

“그래서 키스할 거냐고 물었잖아요.”

요한은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고 싶어.”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하는 요한의 얼굴이 퍽 귀엽다.

어떨 땐 대범하게 굴더니, 어떨 땐 또 저렇게 한 번도 키스 해 보지 못한 순수한 사람처럼


군다.

나는 대범한 요한의 면모도 좋았지만, 귀엽게 얼굴을 붉히는 요한 쪽이 훨씬 더 좋았다.

“좋아요. 대답 잘했어요.”

“……어.”

“그럼 이제부터 제게 키스해도 좋아요. 대신 다른 여자와는 절대로 키스하면 안 돼요. 물론


세나 씨를 생각하면서 제게 키스를 해도 안 되고요. 알겠어요?”

“알겠어.”

요한은 아주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 너도…….”

“저도?”

“너도 바비와 친하게 지내지 마. 만날 일이 있으면 내게 먼저 얘기해 주고.”

“큭큭. 알겠어요. 하지만 바비는 종종 소리 소문 없이 저를 찾아오기도 하니까, 그런 건


이해해 주셔야 해요.”

요한은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순간 요한과 진짜 연인이 된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우린 아직 연인이라고 확정 짓기엔 약간 애매한 사이였다. 왜냐면 우리 사이엔


세나라는 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대로 요한이 나를 보고도 완전히 세나를 떠올리지 않게 될 때—. 그때가 된다면 우린


완벽한 연인이 되지 않을까?

뭐야, 그러고 보니 나는 요한에게 내 마음이 어떤지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잖아.

요한은 어쭙잖은 착각을 하며, 내가 제게 고백을 했다고 믿는 듯했고…….

나는 여전히 뺨을 붉히고 있는 요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저렇게 얼굴을 붉히며 좋아하는데, 아까는 착각이었다는 말을 어떻게 해.

나는 요한이 착각하게 내버려 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딱히 그가 틀린 착각을 한 것도 아니고. 흠흠.

 
우리 사이엔 잠깐의 정적이 맴돌았다.

수줍은 낯빛을 한 요한은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제 얼굴을 뒤덮은 열기를
가라앉히려는 것처럼.

어제부터 내리던 비는 아직까지 그치지 않은 채 창문 위로 눈물처럼 떨어졌다.

정적 속, 빗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어제 있었던 일을 절로 떠올렸다.

쌍둥이와 관련된 미신, 바비, 욘두의 집, 그리고 세나의 붉은 표지의 책.

생각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질문으로 이어졌다.


“요한 씨. 당신도 어제 저와 같은 생각을 한 거죠? 저와 세나 씨가 쌍둥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

쌍둥이와 관련된 리키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를


뒤늦게 깨달은 얼굴이랄까.

요한은 창가에 머문 시선을 그대로 두고선 대답했다.

“어, 맞아. 너희 두 사람이 쌍둥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두 사람. 몹시도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잖아.”

“네, 그렇죠.”

“하지만 내가 알기론 세나에겐 자매가 없어. 그리고 세나에겐 쌍둥이와 관련된 말을 들은 적도


없고.”

“하지만…….”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동시에 말했다.

“쌍둥이는 집안에 풍파를 일으키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

창밖을 바라보던 요한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그는 결 좋은 제 머리칼을 한 차례 쓸어 넘긴


후에 이어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 만약에 너와 세나가 진짜로
쌍둥이였다면.”

“네, 저도 동의해요.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나는 환청처럼 들었던 목소리 하나를 떠올렸다.

‘네가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어쩌면 분노로 가득 찼던 그 목소리.

내가 진짜로 세나와 쌍둥이라면, 그 목소리의 주인은 ‘세나’일지도 몰랐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조금 더 알아볼게. 하지만 쉽게 알아내지는 못할 거야. 세나의


부모님은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셨으니까.”

벨라에게 들은 대로였다. 외동이었던 세나. 오래전에 돌아가신 부모님.

요한은 이불 위에 올라와 있던 내 손끝을 가볍게 부여잡았다.

“넌…… 괜찮겠어?”

잊힌 기억과 세나와 관련된 진실. 그런 것들을 더욱 깊이 파헤쳐도 괜찮겠냐고 묻는 듯했다.


대답을 구하는 요한의 눈은 어쩐지 애처로운 빛을 띠었다. 나는 쿨하게 미소 지었다.

“함께 헤쳐 나가기로 했잖아요. 혼자면 주저했을지도 몰라요.”

“응. 네 곁에 내가 있어 줄게.”

요한은 자신이 지금 얼마나 로맨틱한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하는 걸까?

나는 표정의 변화가 없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그때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어요.”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진실을 더 알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내가 누구인지. 숨겨진 사실은 무엇인지.

“욘두와 바비는 원래부터 친했던 사이인가요?”

나는 욘두의 집으로 들어가던 바비를 떠올렸다. 스스럼없이 욘두의 집을 들어가던 바비였다.


적어도 바비는 어제 처음으로 욘두의 집에 방문한 것이 아닐 것이다.

“딱히. 인사는 했지만, 따로 만나서 대화하는 걸 본 적은 없어. 들은 적도 없고. 하지만


서로의 집에 자연스럽게 방문할 정도의 사이였다니……. 더군다나 그곳엔 붉은 표지의 책도
있어. 물론 그 책이 우리가 찾던 책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요한은 눈을 반짝이며 이어 말했다.

“수상한 냄새가 나는군. 아주 많이.”

그러다 그는 갑작스럽게 진한 한숨을 내쉬며 자조하는 게 아닌가.

“하, 어쩌면 이건 다 내 잘못이 아닌가 싶어.”

“어째서요?”

“나는 오랫동안 바비를 홀대했고,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미숙한 형이었지.”

두 사람. 왜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게 된 것인지는, 나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지게 된 데에는 전적으로 요한의 책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비


또한 요한에게 까칠하게 대했으니까.

“바비도 미숙한 동생인걸요.”

“그렇겠지.”

나는 괴로워하는 듯한 요한의 얼굴이 안쓰러워, 가벼운 농을 던졌다.

“그럼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완숙이 되는 걸까요?”


“…….”

“미숙과 미숙이 만나 완숙! 하하.”

웃으라고 한 말이었는데, 요한은 얼굴을 더욱 굳혔다. 그의 얼굴은 내게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런 농담을 할 수 있는 거지?’

아, 왜. 뭐가 어때서. 나는 재미있기만 한걸.

“하하하하, 요한 씨 웃어요. 웃어.”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에도 요한은 질색했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는 요한에게 성을 내려고 했지만, 그보다도 노크 소리가 더


빨랐다.

똑똑.

“누구야?”

요한이 묻자, 방 밖에선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엄마, 아빠! 이젠 조슈아가 엄마, 아빠를 만나도 되는 걸까? 아직 동생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면 조슈아는 돌아갈게!”

아이는 순수한 의도로 말한 것이겠지만, 내 얼굴은 확 붉어졌다.

동생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는 말은……. 내가 듣기론 제법 야릇한 말이라서.

“들, 들어와!”

요한은 말을 더듬거렸다. 돌연 마주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이 붉어져 있음을 확인한 후에


침묵했다.

이봐요, 요한 씨.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당신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예요?

이내 조슈아가 문을 열고 내 방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제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조슈아. 나는 당장이라도 아이를 내 품 안에 으스러지게 안고


싶었다. 혼자 사라진 아이를 타박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동생을 만든다……는 말을 한 기개가 무색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주춤거렸다. 아이의 걸음걸이엔 주저함이 가득했다.

“조쉬. 이리로 오렴.”

요한의 부름에 조슈아는 쭈뼛쭈뼛 우리 앞까지 다가와 걸음을 멈추었다.


평소였다면 단번에 침대 위로 기어올라 왔겠지만, 아이는 역시나 주저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바라본 아이의 얼굴이 울상이었다. 조슈아는 저가 혼날 것임을 예감한 것일까?

“……리키 아저씨가 잠깐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는데……. 조슈아가 가게를 뛰쳐나갔어. 엄마,
아빠랑 비슷한 사람을 봤거든. 그런데 어떡해. 조슈아 엄마가 아닌 거야.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 그래서 뛰어갔는데……. 미안해.”

조슈아는 두서없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의 말을 모조리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인 줄 알고 모르는 사람을 쫓아갔다가 길을 잃었다는 말이 아니던가.

“엄마, 아빠……. 이제 조슈아를 미워할 거야? 동생이 생기면, 이제 동생만 좋아할 거야?”

얘, 꼬맹아. 네 동생은 아직 생길 일이 전혀 없단다.

나는 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예쁜이 조슈아야.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아. 애당초 너를 혼자 두고 간 내 잘못인걸. 그래도


약속해 주지 않을래? 다음부터는 절대로 혼자 나다니지 않겠다고.”

조슈아는 내로라하는 명석한 아이니까, 이 정도로 말해도 충분히 이해하겠지.

아이는 곧장 대답했다.

“당연하지! 다음에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게.”

한참을 침묵했던 요한은 그제야 한마디를 거들었다.

“조쉬.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에도 말없이 혼자 다닌다면 정말로 혼을 낼 거란다.


이번엔 아빠의 잘못도 컸어. 나는 너를 놔두고 갔으니까. 조쉬도 나를 용서해 주지 않을래?”

“응응! 아빠를 용서해! 그럼 엄마! 화해의 의미로 조슈아를 안아 줘.”

용서는 아빠가 구했지만, 안아 달라는 상대는 나였다. 아이는 나를 향해 포동포동한 짧은 팔을


뻗었다.

나는 아이를 얼른 안아 들어, 말랑한 볼따구니에 입술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다.

“미안해. 나는 감기에 걸려서, 지금 너를 안아 줄 수는 없어. 지금은 나 대신 네 아빠 품에


안겨 있을래?”

“……조쉬. 너는 아빠의 품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끔씩 잊는 것 같아.”

요한은 십 년쯤 늙을 것 같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헤헤.”
울상이었던 조슈아의 얼굴엔 해맑은 미소가 새겨졌다. 보는 이의 마음을 절로 나른해지게
만드는 편안한 미소였다.

요한은 팔을 뻗어 조슈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는 제 무릎 위에 조슈아를 앉혀 두고선,


아이의 머리칼을 몇 차례 쓰다듬었다.

“엄마 감기가 나으면 조슈아가 질릴 때까지 안아 줘야 해. 알겠지?”

“물론이지. 네가 놓아 달라고 해도 놓아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네 얼굴에 마구잡이로 뽀뽀를


할 거야.”

그 말랑말랑한 볼따구니에 내 입술의 낙인을 모조리 남길 것이다.

부드러운 조슈아의 볼에 닿는 입술의 감촉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건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요한의 헛기침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흠흠.”

요한은 무언가를 바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볼도 여백이 많아.”

고백하듯이 털어놓은 그의 말이 너무도 우스웠다. 나는 절로 소리를 내어 웃었다.

“풉, 큭큭. 요한 씨도 마구잡이로 범해지는 걸 원하는 거예요?”

요한은 막상 내가 서슴없이 물어 버리자 조금 당황했다.

“아, 아니. 내 말은 그냥 조슈아 볼만 있다는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해 주었으면 한다는 거지.”

하여튼. 키스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끊임없이 킥킥거리던 사이, 요한의 무릎 위에 앉아 있던 조슈아가 몸을 일으켰다.

아이는 제법 중심을 잘 잡아 반듯하게 서며, 요한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조막만 한 아이의 손은 요한의 뺨을 반도 못 감싸고 있었다.

“……!”

아이의 뽀뽀 세례는 불시에 시작되었다.

쪽, 쪽. 사랑스러운 입맞춤 소리가 몇 차례 울렸다. 요한은 조슈아의 돌발적인 뽀뽀 세례에


맥을 추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내 그의 얼굴이 흐물흐물해지며 녹기 시작했다. 행복함을 제대로 느낀 듯한 얼굴이었다.

아, 나는 그 순간 요한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내게도 조슈아의 뽀뽀 세례가 필요해.


마지막으로 요한의 입술에도 입을 맞춘 조슈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빠에겐 조슈아도 있어! 조슈아 뽀뽀는 어때?”

“너무 너무 좋아. 사랑스러운 내 아들, 조쉬.”

조슈아는 다시금 요한의 입술 위에 입을 맞추고선,

“히힛. 아빠, 다시는 걱정시키지 않겠습니다.”

정중하게 말했다.

“조쉬. 나도 너를 혼자 두지 않을게. 제발 내 시야에만 있어 줘.”

“응응!”

“네가 없어진 걸 알고, 내가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던지…….”

요한은 아찔했던 그때를 또다시 떠올린 듯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조슈아도 엄청 무서웠어. 무서웠으니까,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쪽. 조슈아는 약속을 뜻하는 입맞춤을 또다시 선사했다.

……나도 조슈아에게 뽀뽀를 받고 싶어.

“아빠와 엄마를 다신 슬프게 하지 않을 거야.”

귀여운 목소리로 말하는 조슈아가 몹시도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뽀뽀 세례를 끝낸 조슈아는 자세를 낮추어 요한의 품에 안겼다. 요한은 그런 조슈아를 꼭 안아


주었다.

나는 입가를 가린 채로 그 장면을 빠짐없이 바라보았다.

마음이 절로 따사로워지는 모습이잖아. 어쩐지 코끝이 찡한 것 같기도 하고.

과연, 조슈아로 시작해 조슈아로 끝나는 요한이었다.

그때, 감동으로 물든 내게 불현듯 오묘한 의문 하나가 들었다.

조슈아를 자신보다도 더 끔찍이 생각하는 요한.

요한은 잘 알지 못하는 나를 조슈아 옆에 두어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를 조사했던 사람이었다.


어쩐지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내게 든 의문은 그러했다.

그런 그가 과연 욘두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지 않았을까, 하는.

욘두는 다른 누가 아니라, 공작가의 귀한 도련님인 조슈아 꼬맹이의 선생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출신부터 그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가 살아온 환경을 쫓다 보면 욘두의


연인에 대한 것도 자연스럽게 알아내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요한은 욘두의 연인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얼굴을 했었다.

나는 그제야 욘두의 연인 이야기에 요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던 이유를 알 법도 싶었다.

욘두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했지만, 그의 연인에 대한 것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가


아닐까?

요한의 조사에 착오가 있었던 건지, 그가 대충 조사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예감이 끊임없이 들었다.

요한의 조사에 누락된 욘두의 연인. 연인과 나눠 꼈다던 한쪽뿐인 에메랄드빛 귀걸이. 그리고
그 귀걸이가 잃어버린 내 기억과 관련이 있다던 바비.

나는 욘두의 연인에 대해서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잃어버린 내 기억과 연관이 있는 인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섣부른 추측이 들기 시작했다.

제 48 화. 기대했던 것 이상이네

욘두와 함께 나가는 일은 결국 요한에게 기각되었다.

대신 요한이 내놓은 합의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그러했다.

‘대신 공작저로 보석상을 부를게.’

그는 선심을 쓰는 양 그리 말했다.

선심은 개뿔. 질투 나서 그랬던 주제에.

하지만 나는 그의 질투가 싫지 않았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요한의 일처리는 매우 빨랐다. 다음날 곧바로 보석상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매우 큰 응접실 안, 나는 보석상이 가져온 여러 장신구에 정신이 홀딱 팔려 있었다.


소파 앞에 있던 테이블 위, 붉은 벨벳 위에 놓인 액세서리들은 하나같이 모두 예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색이 오묘한 보석이 달린 목걸이, 섬세한 세공이 아름다운 귀걸이, 금빛 팔찌……. 길거리


생활을 할 땐 결단코 마주하지 못했던 액세서리들이었다.

그간 벨라가 주는 대로 액세서리를 했고, 평소 장신구에는 그다지 욕심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너무도 예쁜 것들이 눈앞에 어른거리자, 내겐 물욕이 샘솟았다.

유모 월급으로 딱 하나만 살까. 그간 돈을 쓴 적이 한 번도 없잖아.

“아주 예쁜 것들이 많군요. 공작님,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던 욘두는 영문도 모르고 감사해했다.

요한은 내가 저와 둘이서만 나가는 게 싫어서 그런 건데……. 욘두는 자신을 위해 보석상을


공작저로 불러들인 거라 찰떡같이 믿은 듯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요한은 턱을 들어 올리고선 오만하게 대답했다.

“이쯤이야.”

나는 그를 보며 한껏 비웃어 주었다. 요한은 그런 내 비웃음을 곧장 눈치챈 것 같았다.

“왜? 그 비아냥거리는 웃음의 이유는 뭐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콜록 콜록.”

몸은 아프거나 하지 않았지만, 빌어먹을 기침이 가시질 않았다. 기침이 완전히 가셔야


조슈아를 안아 줄 수 있을 텐데.

요한은 그런 나를 자못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내가 챙겨 준 약은?”

“먹고 나왔어요. 오호, 지금 걱정하시는 거예요?”

“기침 소리가 듣기 싫었을 뿐이야.”

어쩜, 걱정했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던가.

우리의 아옹거림을 끝내 준 이는 욘두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분, 대화가 끝나셨습니까?”

“네. 왜요?”

“아……. 리나 님이 보시기엔 어떤 귀걸이가 아름다운지 여쭙고 싶어서.”


욘두는 장신구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물었다. 이것저것을 살펴보는 그의 눈빛이 매우
신중했다. 제게 있어, 제 연인이 몹시도 소중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듯이.

“그전에 욘두 쌤의 연인분의 취향에 대해 알고 싶어요. 그분은 보통 어떤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어요?”

“흐음……. 그녀는 화려한 스타일의 드레스를 자주 입었습니다.”

다소 의외인 대답이었다.

패션 테러범인 욘두. 조곤조곤 말을 건네는 그는 어쩐지 차분한 스타일의 여자와 만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욘두의 연인은 화려한 드레스를 즐겨 입는 여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럼 귀걸이는 심플한 게 좋겠어요. 화려한 드레스에 화려한 장신구는 너무 과할 테니까요.


욘두 쌤의 생각은 어때요?”

“저는 리나 님의 의견이라면, 뭐든 따르겠습니다.”

“좋아요!”

나는 심플한 세공이 아름다운 귀걸이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화려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무난한 디자인도 아닌 귀걸이였다. 예쁜 건


당연한 일이었고.

“이건 어때요?"

“오오! 예쁩니다. 아주 좋습니다.”

욘두는 화색하며, 그 귀걸이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좋아해 주시니 다행이에요.”

“그녀가 매우 좋아할 것 같습니다. 이걸 줄 생각에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는군요.”

“……욘두 쌤.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왜, 왜요? 제 심장은 두근거리면 안 되는 겁니까?”

“아니. 꼭 그렇다는 건 아닌데…….”

이것도 꽤나 의외라고나 할까.

심장이 두근거린다느니 하는 말은 욘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표현을 쓰지


않을 줄 알았다는 거다.

나는 거기서 욘두의 진심을 느끼기도 했다. 욘두는 제 연인을 정말 사랑하고 있나 보다.


욘두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그의 연인. 나는 그녀의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

욘두는 그 귀걸이의 값을 지불하려는 듯 재킷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요한의 그런 그의


행동을 막아섰다.

“내가 사 줄게.”

주머니를 뒤지던 욘두는 깜짝 놀란 채로 말했다.

“네? 요한 님께서요?”

“그래. 욘두, 네가 조슈아를 위해 준다는 사실은 공작저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니까.


그런 의미로 선물 겸, 겸사겸사 하나 사 주겠다는 말이야.”

요한의 말에 욘두는 주머니에 넣은 손을 곧바로 빼내며 말했다.

“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빨라도 너무 빠른 수락이었다. 사양 따위는 개나 줘 버리지, 라는 느낌이랄까.

요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는 당황함에 컥컥거렸다.

“컥! 수락이 너무 빠르잖아!”

“하하하. 요한 님께서 사 주신다고 하는 건데, 당연히 빨리 수락해 드려야죠. 윗사람의


호의에 대한 지나친 사양은 예의가 아닌 줄 압니다. 하하.”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기분이 왜 이상한 거지. 요한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한 씨. 그럼 저는요? 제가 조슈아를 끔찍하게 사랑한다는 사실 또한 공작저의 모든 사람이


다 알 걸요?”

“너도 마음에 드는 게 있나?”

나는 아까부터 내 눈에 제일 잘 띄었던 목걸이 하나를 가리켰다. 내 눈동자 색을 닮은


에메랄드빛의 작은 보석이 달린 목걸이였다.

“전 이거요!”

“좋아. 넌 그걸로 해.”

맙소사. 이렇게 바로 사 주는 거야?

“우와! 진짜로 사 주시는 거예요? 사 준다는 착각 따윈 하지 말라는 말은 왜 안 해요?


그러면서 슬쩍 사 주는 게 당신 스타일이잖아요.”

요한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왜냐면 이건 네 월급에서 제할 예정이거든.”

“…….”

망할, 어쩐지 요한이 호락호락하게 사 줄 리가 없지.

나는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다. 요한이 웃는 얼굴에 침을 뱉는 사람이듯, 나


또한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요한은 구겨진 내 얼굴을 보며 더더욱 짙어진 미소를 지었다. 얄미워도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큭큭. 지금 속으로 내 욕 엄청 했지?”

“어떻게 알았어요?”

“다 알아. 이마에 그렇게 써졌던걸.”

“치사해. 안 사요, 안 사.”

나는 단단히 심통난 체를 했다. 그러자 돌아온 것은 요한의 웃음소리였다.

그는 심지어 내 머리칼 위를 부드럽게 흐트러뜨리기도 했다. 마치 삐친 내가 몹시도 귀엽다는


듯이…….

“큭큭. 농담이야. 마음껏 골라. 월급에서 깎지도 않을게.”

“어! 한 입으로 두 말 하기 없기예요.”

“세 말도 안 해.”

나는 요한이 말을 바꾸기 전에 얼른 아까 눈으로 찜해 두었던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심통이


난 척 새침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욘두 쌤. 쌤이 보기에도 이 목걸이가 저한테 잘 어울릴 것 같죠?”

다시 바라본 욘두의 얼굴은 조금 이상해져 있었다.

너스레를 떨던 모습은 없어지고, 욘두는 웃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은 이상한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욘두 쌤?”

“……아! 네. 무척이나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 유모님이야, 가지고 있는 외모가 출중하시니


뭐든 잘 어울리겠죠.”

그는 다시금 희미한 미소를 드리웠지만, 나는 의문스러웠다.

조금 전, 그 표정은 뭐였을까?
내가 잘못 본 걸까?

“요한 님. 그럼 저는 요한 님이 사 주신 귀걸이와 함께 나가 보겠습니다.”

“벌써?”

“두 분의 시간을 더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욘두는 자못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가 봐.”

요한은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우리도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을 뿐이었다.

물론 우리에게 둘만의 시간이 필요한 건 맞긴 한데……. 욘두가 짓는 웃음이 너무 음흉하잖아!

욘두는 꼭 남들 앞에선 하지 못할 일을, 제가 나가면 하라는 듯이 짓궂게 웃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조금 조아린 후 소리 없이 방을 나섰다.

나는 욘두가 방을 나가자마자, 요한을 흘긋 바라보았다.

순간 눈에 띈 곳은 두어 개쯤 풀린 셔츠 사이로 내비친 그의 쇄골이었다. 그냥 쇄골이 아니라


엄청 깊고, 관능적인 쇄골.

전에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참으로 탐이 나는 쇄골이었다. 한번 만져 보고 싶네.

남들 앞에서 하지 못할 일이라는 건, 요한의 쇄골을 만지는 일쯤이 아닐까?

내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요한은 풀어져 있던 셔츠의 단추를 황급하게 잠그며 말했다.

“넌…… 도대체 뭘 생각하길래, 얼굴이 붉어진 거야?”

“……!”

“그것도 내 쇄골을 보면서.”

내가 얼굴까지 붉혔던가. 나는 변명했다.

“콜록 콜록 콜록. 저,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얼굴은 기침해서 붉어진 거고.”

“……기침은 방금 한 거잖아.”

“하하하. 그랬던가.”

요한의 의심스러운 눈빛이 오랫동안 내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의 의심이 가실 때까지 만들어 낸 가짜 기침을 했다.


아이고, 목 아파라.

* * *

열었던 방문을 다시 닫은 욘두의 표정이 삽시간 빳빳해졌다.

그는 입가에 스몄던 미소 또한 금세 지워 냈다. 동그란 안경 알 속, 그의 검은 눈동자가


무신경하기만 했다.

고작 표정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욘두의 분위기는 급변해 있었다.

감정이 띠어져 있지 않은 듯한 고요한 눈동자,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 그는 쉬이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리나 앞에서 조금 바보 같은 면모만 보였던 욘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욘두는 조금 전에 보았던 리나와 요한의 모습을 잠자코 떠올렸다.

그 두 사람. 짧은 시간 동안 감정이 꽤나 깊어진 것처럼 보였다.

욘두는 고개를 좌우로 두어 번 비틀며, 작게 킥킥거렸다.

기분 좋은 웃음이라기보다는 서슬 퍼런 기운이 완연한 미소였다.

“기대했던 것 이상이네.”

욘두는 손바닥을 폈다. 그러곤 그 위에 놓인 새로운 귀걸이를 바라보았다. 유모님이 골라 준


귀걸이.

“얼른 가져다 줘야겠다. 얼마나 잘 어울릴까.”

이걸 리나가 골라 줬다는 사실을 너도 알게 된다면, 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욘두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는 ‘그녀’를 빨리 만나고 싶었다.

* * *

한편, 귀걸이 소동을 끝낸 요한은 다시금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는 경건한 의식을 치르길 준비하는 것처럼 동그란 안경을 바짝 올려 썼다. 그러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두툼한 문서를 집어 들었다.

그 문서는 사라진 세나의 시신과 관련된 문서였다. 조사 결과를 건네받길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른다.

시일이 꽤 걸리더라도, 자세하고 확실한 정보를 알아오라 지시했던 요한이었다. 실제로 조사의
결과도 꽤 시일이 지난 후에 요한에게 당도한 터였다.

“후.”

요한은 짧게 숨을 고르며, 문서의 한 글자 한 글자를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일단 요한이 지시한 조사의 제일 첫 번째는, 지난 4 년간 공작저의 뒤편에 존재하는 산에


출입한 사람들의 목록이었다. 바로 부모님과 세나의 묘가 존재하는 그곳.

야트막한 그 야산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경비도 얼마나 삼엄하게


세워뒀는지 몰랐다.

요한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조슈아였고,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그들의 묘가 있는


그곳이었으니까.

리나가 아니었다면, 요한은 세나의 관을 파 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평생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곳에 올라가 세나의 관을 파내어, 그녀의 시신을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리란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며칠 전까진 그랬다.

세나가 죽은 후, 지난 4 년간 산에 출입한 사람은 역시나 그다지 없었다.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는데, 모두 다 요한이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요한 자신을 포함한 총 일곱 명. 이름을 나열하자면 그러했다.

바비, 요한의 여동생, 할머니, 마지막으로 정기적으로 묘를 관리해 주는 묘지기 세 명.


그들이 다였다.

묘지기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행적들을 일일이 보고 받던 중이었다. 또한 경비들은 산


초입만 관리할 뿐이지, 묘가 있는 곳까지는 올라가지 않았다.

“…….”

그들 중엔 과연 세나의 시신을 가져간 사람이 존재하는 걸까?

그중 제일 의심 가는 이를 고르자면, 바로 바비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바비가 구태여 이미 죽은 세나의 시신을 가져갈 이유가 없었다. 설령
바비가 세나를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치가 시체에게 이상할 짓을 할 미친놈까진 아닐 테니까.”


비록 지금은 사이가 틀어졌다고 할지라도, 세나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제법 친하게 지냈던
바비였다. 형제라고 불릴 수 있었던 유일한 시기가 그때이기도 했다.

요한이 아는 바비는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단언할 수는 없었다.

“알 수 없군.”

그 순간 요한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간 사람이 하나 있었다.

야산을 지키는 경비의 눈을 속일 수 있을 법한 사람. 그리고 공작저에 자주 기거하는 사람.

요한은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욘두.”

욘두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마법사였다. 제국에 몇 존재하지 않는 마법사. 요한은 그의 능력을


크게 사, 그를 조슈아의 선생으로 일임했던 터였다.

그의 마법 능력이 어떤 것인지, 요한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말이다.

그에겐 경비의 눈을 속이고, 시체를 감쪽같이 가져갈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있지 않을까.

스스로 생각하고도 소름이 돋는 생각이었다.

요한은 심각해진 얼굴로 문서의 뒷장을 모두 읽어 보았다.

뒤에는 공작저를 오간 사람들 중 수상했던 방문자가 있었는지, 눈에 띄는 짐을 가져간 사람이


있었는지, 세나와 얽힌 사람이 방문했었는지, 등등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결론은 모두 똑같았다.

눈에 띄는 수상한 사실이 없다.

요한은 들고 있던 문서를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수상한 사실이 없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면 일은 이미 벌어졌고, 존재했던 세나의


시신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징조나 실마리가 없었다? 그 사실은, 누군가가 수상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게,
완벽하게 세나의 시신을 가져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세나의 시신을 가져간 건, 충동적인 행동이 절대로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생각했고, 그 생각에 따라 주도적으로 실천에 옮긴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세나의 시신을 가져갈 만한 능력과 배짱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

일이 꽤나 복잡해진 기분이었다.

실마리 하나 드러나지 않은 조사임에도, 요한은 다시금 수하를 불러들였다.

그가 이번에 조사를 해 볼 것은 명백했다.

제 49 화. 손, 손이 떨려!

“지난 4 년간 바비의 행적에 대해서 조사해 와. 그리고 욘두의 행적도. ……욘두에게 연인이
있다고 하는데, 그 연인에 대해서도 조사해 오도록.”

요한은 찝찝했다.

그는 조슈아에 대한 것이라면 뭐든지 끔찍할 정도로 미리 조사하고 조심하는 편이었다.

리나를 공작저에 들일 때에도 그러했고, 욘두를 공작저에 들일 때도 그러했다.

욘두가 조슈아의 가정교사로 일한 지 어언 2 년째였다.

요한은 단순히 욘두가 선생으로서 자질이 충분한지에 대해서만 조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욘두가 자라 온 환경이 어땠는지, 어떤 습관이 있는지, 심지어 그에게 연인이


있는지조차도 조사했었다.

과거, 욘두에 대해서 조사했을 땐 그에겐 연인이 분명히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욘두에게 연인이 있다고 한다.

리나의 말을 들어 보았을 때, 그는 ‘기념일’ 비슷한 것을 챙긴다고 했다. 비단 기념일이라는


건 한두 달 만난 연인끼리 챙기는 이벤트는 아니지 않던가.

물론 욘두에게 지난 2 년 사이에 연인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요한은 역시나 찝찝했다.

미리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

요한은 수하를 내보내고, 들고 있던 문서도 내려놓으며, 책상 위를 손끝으로 몇 차례 두드렸다.


“그건 그렇고.”

욘두의 집에 있던 그 책은 무엇이었을까.

붉은 표지를 가진 그것은 정말로 세나의 것이었을까?

욘두의 허락을 받지 않고 가져와도 되는 걸지. 아님 직접적으로 묻는 게 좋을지…….

짧은 고민에 대한 답은 곧 나왔다.

“직접 가지고 와야겠어.”

내 눈으로 직접,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봐야겠어.

요한은 머지않아 그의 집에 방문하리라 다짐했다.

기회가 된다면 내일이라도 나쁘지 않으리라.

복잡한 생각을 끝마친 요한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리나의 모습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아옹다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가 궁금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간식은 챙겨 먹었는지, 기침은 가셨는지, 내 생각은 하는지.

“……왜 이렇게 보고 싶지.”

요한은 자조하듯이 말했다. 그는 저가 꼭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이 너무도 오랜만이라 생소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돌연히 커진 마음을 토로했을 때, 리나는 제 마음을 한껏 경계했다.

하지만 요한은 확신했다.

리나에게 고백했듯 시작은 분명 세나였으나, 오로지 세나 때문에 리나에게 마음이 열린 것은


아니라고.

세나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가슴 설레는 일이, 그다지 끔찍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걸 내팽개치고 지금 당장 그녀를 만나고 싶을 정도로.

* * *

“벨, 벨라! 간지러워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된다니까요.”


“하지만 주인님이 시키신 일인 걸요. 이래 뵈도 제가 마사지에 일가견이 있어요.”

“그렇지만…….”

벨라는 내 발을 주물거리고 있었다. 왠지 수치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사건의 경위를 살펴보자면, 그러했다.

나는 잃어버린 조슈아를 찾기 위해 구두가 벗겨진지도 모르고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 덕에


얻은 것은 발바닥에 생긴 영광의 상처들이었다.

군데군데 까지고 피딱지가 생긴 발바닥의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요한은 대뜸 벨라까지 보내어 내 발을 돌보게 한 것이었다.

나는 소파 밑에 꿇어앉은 채 내 발을 매만지는 벨라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벨라는 괜찮다고는 하지만 이런 건 정말 어색해서.

“새끼발가락이 정말 작네요.”

벨라는 내 새끼발가락을 앞뒤로 움직이며 말했다.

“……마님도 그랬는데.”

그러다 돌연 세나의 이야기까지 꺼낸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말이 혹 실례가 된 것은 아닐는지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벨라, 괜찮아요. 세나 씨와 왠지 비슷하다는 말에는, 이제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겨서.”

벨라는 이윽고 뜨거운 타월로 내 발을 감쌌다.

아, 민망하다고 했지만, 기분은 너무 좋아.

“리나 님을 보면 볼수록 기분이 이상해져요.”

“너무 닮아서요?”

벨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만 닮으신 줄 알았는데, 드레스를 입혀 드릴 때 보면 체격도 비슷하시고, 심지어 발가락


모양도 비슷해요. 이 정도면 쌍둥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랄까…….”

얼굴뿐만 아니라, 몸도 닮은 세나와 나.

그녀와 나는 정말로 쌍둥이였던 걸까?

쌍둥이인데 그녀에 대한 것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리나 님. 이상한 소리를 해서 죄송해요. 이로써 저의 특별한 발 마사지가 끝났답니다.”


“고마워요.”

벨라는 해맑게 웃으며 꿇어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저녁도 거하게 먹었고, 발마사지도 받아서인지 어쩐지 졸음이 몰려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잠이 들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기는 하나, 오늘은 일찍 자는 게 어떨까. 복잡한 일들은 내일


다시 생각하지, 뭐.

벨라를 배웅해 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방문까지 걸어갔을 때였다.

닫혔던 문이 서슴없이 열리기 시작했다.

노크를 빼놓은 방문자는 문이 열리자마자 한마디를 외쳤다. 고백하듯이 혹 투정 부리듯이.

“손, 손이 떨려!”

덩치는 커서는, 꼭 어린아이처럼 말하는 그의 간극이 우습다.

나는 입가를 가린 채로 킥킥거렸다.

어린아이처럼 투정하는 이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엄마! 조슈아도 손이 떨려.”

아이는 말만으로 그치지 않으며, 내 앞에서 헐렁한 연기까지 선보였다. 오동통한 손을


위아래로 흔드는 아이의 모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웠다.

“풉, 큭큭큭.”

나는 기어코 웃음을 터뜨렸다.

“조, 조쉬! 언제 내 뒤를 따라왔어?”

요한은 뒤늦게 제 뒤에 있는 조슈아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았다.

“엄마한테 가려고 나왔는데! 아빠가 엄마 방문 앞에 있는 걸 봤어.”

“그리고 넌 왜 갑자기 손을 떠는 거야?”

아이는 순수하게 물었다.

“손이 떨리면 조슈아도 엄마 방에 계속 있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제 딴에는 아빠에게만 들릴 거라 생각하며 작은 목소리로 물은 조슈아였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는 꽤나 가까웠다. 비밀 얘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쉼 없이 웃었다.

“……! 내, 내가 언제 리나 방에 계속 있으려고 했, 했다고 그래?”

“하지만 아빠는…….”

조슈아의 동그란 눈이 요한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나는 아이를 따라 요한의 복색을


살펴보았다.

그는 놀랍게도 잠옷 차림이었다.

역시나 자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고, 요한은 편한 복장으로 공작저를 나다니지 않았다.

그는 위엄 있는 랭카스터 가의 가주였고, 보이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했으니까.

그런 그가 잠옷을 입고 와서, 손이 떨린다고 호소하다니.

나는 지난날 나누었던 우리의 대화를 통해 요한의 생각을 곧바로 파악했다.

‘떨려서 혼자 못 자겠다고 한다면. 그럼 오늘 밤, 네 옆자리를 허락해 주는 건가?’

손이 떨려서 혼자 못 자겠다는 핑계와 함께 내 옆자리를 꿰찼던 요한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손이 떨린다는 이유로 내 옆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거짓말까지 하며 내 옆자리를 노리면, 얼마나 귀엽게요.

나는 끝내 요한에게 허락받지 못한 그의 볼따구니를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이럴 때 저 볼을 왕창 늘여 줘야 하는데. 아쉽다.

“……하여튼 조슈아는 지금 손이 엄~청 떨려.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다구!”

조슈아는 제 아빠를 훑던 것을 멈추며 내 드레스를 꼭 움켜잡았다. 덜덜 떨렸던 아이의 손은


아주 멀쩡해 보였다.

요 앙큼한 어린이 또한 요망한 연기를 한 게 틀림없었다.

부자 사기단의 명성이 어디 가나 싶었다.

“그러니까, 나 엄마 옆에서 자면 안 돼?”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이 내 마음을 마구잡이로 뒤흔들었다.

아니, 사실 그렇게 귀엽게 쳐다보지 않아도, 나는 조슈아를 내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되레 내 옆에 있어 준다면 내가 더 고마운 일일 테지.


“조슈아. 네 손이 떨리지 않아도, 나는 언제고 네 손을 잡아 줄 거란다. 그리고 나도 너랑
자는 거 너무 좋아.”

나는 말로만 그치지 않으며, 아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보들보들 말랑말랑한 조슈아의 손.

낫지 않는 기침 덕에 조슈아에게 한동안 가까이 가지 않은 터였다.

낮 동안에도 나를 괴롭혔던 마른기침은 다행히도 지금은 거의 멎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조슈아에게 뽀뽀까지는 하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까.

“……나는?”

다시 바라본 요한은 왠지 조슈아를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까지도 손을 옅게 떨고 있었다. 연기인지 진짜인지 갸우뚱할 정도였다.

저것이 연기라면 그는 탁월한 연기자이겠고, 진짜라면 그의 손을 당연히 잡아 주어야겠지.

내가 대답을 주저하는 사이, 말소리는 다른 곳에서 흘러나왔다.

“주인님. 손이 떨리신다면, 잠옷을 입고 리나 님의 방을 찾아올 게 아니라, 저의 특별한


마사지를 받는 게 어떨까요?”

“…….”

허를 찌르는 벨라의 말에 요한은 침묵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 순간 확신했다.

요한은 탁월한 연기자였구나.

“큭큭큭.”

왜 이렇게 행복한 미소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꼭 돌아와야 할 곳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들 사이에 껴, 행복한 미소를 짓는 일을 언제나 그리워했던 것만 같다.

나는 허공에 우습게 뻗어져 있던 요한의 손을 그러잡았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요한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벨라. 손이 떨려서 잠도 못 자는 요한 랭카스터 씨를 오늘은 제가 책임질게요. 그래도


될까요?”

내가 윙크까지 하자 벨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나! 어쩜, 어쩜. 리나 님이 그래 주신다면야 저야 완전 좋죠.”

그녀는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얼굴마저도 붉히고 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 저도 떨리는 손을 잡아 줄 수 있는데. 제게는 그런 사람이 언제 생기는 걸까요.”

벨라가 푸념 가득 섞은 채로 말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러게요.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잊지 못하는 사람을 잊으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벨라는 꼭 좋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

그러자 짓궂은 말만 일삼던 벨라가 침묵했다. 그녀는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을 했다.

말을 내뱉을 듯 조금 벌어진 입술에선 그 어떤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벨라는 뒤늦게 한마디를 겨우 꺼내었다.

“……죄송해요. 저는 돌아가 볼게요. 두 분, 아니, 세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벨라는 허겁지겁 방을 나섰다. 나는 급하게 자리를 피하는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놀란 듯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이었다.

마치 예상하지 못한 것을,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듯한 얼굴.

그것은 벨라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내비쳤던 얼굴과 같은 것이었다.

“벨라가 도망갔네요.”

“그러게.”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요한은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벨라에겐 잊지 못하는 남자가 있어. 리나 넌,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그는 묘하게 진지해져 있었다. 하여튼 그냥 넘어가는 게 없구나.

“그건 제가 묻고 싶은 거예요. 저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요.”

“음.”

그러곤 그는 진지하게 이어 말했다.

“일단은 같이 누워서 생각해 볼까?”


“컥.”

진지하게 한다는 말이 그토록 음흉한 말이라니!

“나를 언제까지 세워 둘 참이야? 다리가 저릴 지경이군.”

“……저는 당신과의 합방을 허락한 적이 없는데요?”

“내 손이 떨리지 않아도, 언제고 내 손을 잡아 주겠다며. 그리고 나랑 자는 것도 너무


좋다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그건 조슈아한테 한 말이잖아요!”

그러자 요한은 한쪽 입꼬리만 올려, 비스듬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모르게 사악해 보이는
미소였다.

“몰랐어? 조쉬와 나는 한 세트야. 조쉬에게 한 말이 나한테 한 말이고, 나한테 한 말이


조쉬에게 한 말이란 거지. 그치? 조쉬.”

조슈아는 세상 행복하게 대답했다.

“웅웅! 맞아! 조슈아는 아빠랑도 같이 잘래!”

“…….”

“가족은 함께 자야 하는 거잖아!”

나 원. 이 부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 * *

조슈아는 금세 잠이 들었다. 색색거리는 아이의 숨소리가 우리 사이의 유일한 소리였다.

나는 이불을 꼭 쥔 채로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다 이 인간 때문이었다.

내 옆에 누운 요한과의 거리가 아주 가까웠다.

이전 날, 셋이서 함께 잠을 잤을 땐, 조슈아를 중간에 두고 잤었는데……. 오늘은 요한이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내가 이유를 묻자, 그렇게 대답하더라.

‘넌 감기에 걸렸잖아. 조쉬가 네 옆에서 잤다간, 감기가 옮을 수도 있어. 나는 건강한 성인


남자니까, 네 감기가 옮지 않을 거야.’
아주 대단한 이유였다.

지난날, 감기에 걸려서 골골거렸던 사람이 누군데.

나는 요한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요한 씨. 자요?”

“아니.”

그는 곧바로 대답하고선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의 시선이 내 뺨 위에 고스란히 닿는 게


느껴졌다.

나는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이젠 그의 눈빛에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나는 새삼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바라보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뻗어 온 그의 손이 이불을 꼭 쥐고 있던 내


손등 위에 포개졌다.

그러곤 그는 몹시도 다정하게 물었다.

“……벨라 일도 떠올린 건가?”

그렇게 다정하게 물으면,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잖아.

나는 요한 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네. 예전에 떠올린 사실이에요. 그녀를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떠오르더라고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인 양.”

“그것 말고 또 생각난 게 없어?”

“글쎄요.”

리키 아저씨의 잡화점에서 들었던 환청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할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 요한이 먼저 물음을 건네었다.

“네 기억 속에 나도 있다고 했지.”

“맞아요. 이따금 떠오른 기억과 꿈속에선 당신이 자주 등장했었죠. 어렸을 때 당신을 본 적도


있고, 성인이 된 당신을 마주한 적도 있어요.”

“맞아. 어렸을 때를 보았던 얘기는 저번에 들었어. 그럼 성인이 된 나와 관련된 기억이나 꿈은


어떤 거였는데?”

성인이 된 요한과 관련된 것이라.

나는 지난 5 년간 잊을 만하면 꼭 다시 꾸었던 같은 꿈을 떠올렸다.


밝은 방 안. 침대 위의 우리 둘. 내게 입술을 맞추던 요한. 그리고 내 드레스 위로 손을
올리던 요한.

‘정말 괜찮겠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뺨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꿈속에서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남자를 요한이라


확정 짓고 있었다.

오로지 선명하게 기억하는 꿈속의 목소리와 요한의 목소리가 똑같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같은 꿈을 또다시 꾸게 된다면, 그땐 늘 보이지 않았던 남자의 얼굴이 완전히 보일


것이란 이상한 확신이 들기도 했다.

“거지가 대답을 거부합니다.”

“넌 꼭 불리할 때, 그렇게 말하더라.”

“하지만 말할 수 없다고요.”

“오호라, 야릇한 거였나 보지?”

“……!”

놀라는 내 얼굴을 본 요한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잡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제 쪽으로 가져가, 내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쪽.

손등에 남은 그의 입술의 감촉이 너무도 자극적이었다.

그는 혀를 끄집어내어 입술을 관능적으로 핥아 내더니, 이내 묻는다.

“나랑 무슨 야한 짓을 했는데?”

제 50 화. 그 다음 건, 우리 둘만 있을 때 해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설마 키스?”
그건 기본이고, 그것보다 더한 짓을 했다고 한다면……. 나는 입술을 작게 뭉그적거렸다.

“하여튼. 나를 얼마나 좋아하게 된 거야? 그런 꿈도 꾸고.”

그는 내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아무리 야릇한 꿈이라고 해도, 그래도 현실의 것보다는 별로겠지.”

“그렇겠죠?”

“그런 의미에서……”

요한은 다시금 혀끝으로 입술을 핥아 냈다. 왠지 모를 열기에 휩싸인 그의 검은 동공이 위험한


빛을 내비쳤다.

“입 맞춰도 돼?”

물러섬이 없는 말이었다.

요한은 내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조, 조슈아가 옆에서 자고 있잖아요.”

깨면 어떡해.

저 발칙한 꼬맹이는 저가 깨도, 깬 티를 내지 않으며 우리의 입맞춤을 훔쳐볼지도 몰랐다.

그러다 우리의 입술이 떼어지면, ‘우와! 조슈아 동생이 진짜로 생기겠어!’라고 말할지도.

이런 내 걱정을 모를 요한은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잠깐이면 돼.”

“…….”

“조금만.”

입맞춤에 조금만이 어디 있어.

입술을 맞대게 된다면, 그다음의 스킨십을 원할 테지.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요한은 꽤나 애처롭게 말했다.

“굿나잇 키스는 조쉬와도 매일 해.”

“…….”

“안 돼?”

조슈아를 닮은 애처로운 눈빛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 마음은 절로 나약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키스를 하기로 한 사이인데, 상관이 없으려나.

“……진짜 잠깐만이에요.”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요한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 위로 제 얼굴을 기울였다.


내 말이 수락을 뜻하는 것이었음을 단번에 알아차린 듯했다.

미소가 스민 그의 입술이 닿은 건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짧게 닿았다 곧 떨어졌다. 쪽 소리도 나지 않은 아주


담백한 입맞춤이었다.

잠깐이라느니, 굿나잇 키스라느니 하더니 정말로 제 말을 철석같이 지킨 그였다.

그러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입술을 맞대게 된다면, 그다음의 스킨십을 원할 테지.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요한이 원한 게 아니라, 내가 더욱 원하고 있다는 게 다소


머쓱했다.

요한은 내 코끝에 다시 한번 더 짧게 입을 맞춘 후에 내게 속삭였다. 그가 내뱉는 숨결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뜨거워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다음 건, 우리 둘만 있을 때 해.”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아쉬워하고 있다는 걸 모조리 들킨 기분이었다. 젠장.

“우리 둘이 있을 때 뭘 하려고요?”

“다 알면서 묻지 마. 소름 끼치도록 부끄러우니까.”

그는 얼굴을 붉혔고, 나는 작게 킥킥거렸다.

“요한 씨. 그런데 떨리던 손은 이제 완전히 괜찮아졌네요?”

“…….”

“손도 안 떨리는데 다시 당신의 방으로 돌아가실…….”

다시 당신의 방으로 돌아가라는 내 말은 구두점을 찍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불시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치 내 말을 막으려는 듯이.


쪽.

요한은 짧게 맞추었던 입술을 떼어 냈다.

“가라고만 해 봐.”

그는 입술로 혼쭐이라도 내 줄 것처럼 말했다.

그 혼쭐. 좀 많이 받아 보고 싶은데……. 쩝.

* * *

자고 일어났을 때, 요한은 보이지 않았다.

내 옆에 잠든 것은 하루 만에 빵빵한 볼따구니로 원상 복귀된 조슈아 뿐이었다.

나는 조슈아의 볼따구니를 손끝으로 가볍게 쿡쿡 찔렀다.

이 볼따구니를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넌 모르겠지.

“우웅.”

아이는 작은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몰래 찔러 보는 건 그만둬야겠다.

그나저나 요한은 아침부터 바쁜 일이 있는 건가. 언제 방을 나간 걸까.

나는 조슈아의 금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주며, 요한이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땐 진짜로 조슈아의 엄마가 되어……. 윽. 아니야. 이다음은 나, 나중에 얘기해.’

“있지, 조슈아야. 네 아빠는 내게 끝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진짜로 네 엄마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아니,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좋을 것 같아.

요한이 나를 세나로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고, 무엇보다도 네가 너무 사랑스러우니까.

이런 너를 두고 내가 공작저를 떠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조슈아가 더욱 좋아져서 큰일이었다.

“사실은 요한 씨보다 조슈아 네가 더 좋아.”

이렇게 좋은 너를, 내가 어떻게 저버릴 수 있을까.


조슈아가 너무 소중하다고 새삼 깨달은 것은 아이를 잠깐 잃어버렸을 때였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그때.

그 사건은 아이에 대한 사랑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음을 느끼게 해 주기도 했지만,


나와 요한 사이의 감정이 더욱 무르익은 계기가 되어 주기도 했다.

나는 조슈아의 이마 위에 짧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조슈아. 네가 내 쌍둥이 자매의 아이라면…….”

내가 그 쌍둥이를 대신해서, 너희 부자의 옆에 있어도 되는 걸까?

* * *

요한은 아침 일찍부터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시트에 머리를 완전히 기대었다. 어째 졸음이 조금 밀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어젯밤 손이 떨린다는 가당치도 않은 이유로 리나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였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단지 함께 있고 싶어서 한 행동이었는데, 막상 함께 있게 되자 손이


잡고 싶어졌다.

손을 잡으니, 키스까지 하고 싶은걸.

키스를 하게 된다면 더한 것을 원하게 될지도 몰라.

요한은 키스는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깨달았을 땐 이미 그녀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입 맞춰도 돼?’

리나의 대답은 당연히 오케이.

찰나였지만, 서로의 입술이 닿는 느낌은 황홀했다. 입맞춤이 이토록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걸,


제법 오랜만에 느낀 듯했다.

요한은 제 옆에 조슈아가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상기했다.

아이 앞에서 진한 키스는 절대로 안 돼.

하지만 짧은 입맞춤에도 그의 머릿속엔 경종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손이 뻗어지는 걸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아.


요한은 조슈아가 자주 부르던 동요를 마음속으로 쉼 없이 되뇌었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착한 생각…….

그 후, 그들은 오랜 시간 잠들지 못했다. 가볍게 입술을 다시 맞추기도 했으며,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어두운 밤, 서로에게 집중한 시선, 조용한 사위, 그 속에서 나누는 사소한 대화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세나가 죽은 후에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었다.

이 밤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윽고 먼저 잠이 든 이는 리나였다.

요한은 리나가 잠든 다음에도 한참이나 잠들지 못했다. 그는 뜬눈으로 잠든 리나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그 잠꼬대’를 들은 것은 우연처럼 벌어진 일이었다.

‘……으흠…… 리나…….’

무슨 꿈을 꾸는지 모를 리나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애절하기만 했다.

그러다 굳게 감겨진 그녀의 눈꺼풀 사이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딱 한 방울의


눈물이었다.

요한은 손끝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슬픈 꿈이라도 꾸는 걸까.

그녀는 왜 다른 누구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아련하게 부른 걸까.

‘당신은 리나라는 이름을 진짜로 몰라요?’

요한은 오래전에 리나가 제게 했던 물음을 떠올렸다.

그는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리나에게 끝내 대답해 주지 않았었다. 물론 그녀가 다시 묻는다면,


그땐 그 해답을 알려 줄 참이다.

요한이 석연치 않게 생각했던 것은 바로 잠꼬대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름과 관련된 잠꼬대라고 해야 할까.

세나는 잠결에 ‘리나’라는 이름을 몇 차례 뱉어 내곤 했었다.

어제의 리나는 꼭 예전의 세나처럼 ‘리나’라는 이름을 잠꼬대로 내뱉었던 것이다.

“…….”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일순 몰려왔던 졸음이 모두 가신 기분이었다.

되레 정신이 바짝 드는 느낌.

생각해 보니, 세나가 리나라는 이름을 부를 때도, 항상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넌 무슨 꿈을 꾸는 걸까. 어떤 슬픈 꿈이길래, 눈물을 흘리는 걸까.

세나와 알고 지낸 세월만 근 십 년이 넘었다. 그녀는 무슨 일을 겪든 눈물을 잘 흘리지 않았다.


우는 그녀를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를 눈물짓게 한 그 이름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리나라는 이름에는 어떤 사연이 얽혀 있는 걸까.

잠에서 깬 세나에게 리나라는 이름에 대해서 물어보면, 그녀는 언제나 고개를 내저었다.

‘악몽을 꿨나 봐.’

요한은 그녀에게 속 시원하게 묻고 싶었다.

너는 도대체 어떤 비밀을 가진 채로 눈을 감은 거냐고.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역시나.

같은 얼굴, 같은 습관. 이젠 같은 잠꼬대까지.

요한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쌍둥이인 것은 아닐까, 의심을 했지만…….

“왠지 네가 진짜 세나 같아……. 리나.”

* * *

마차는 곧 멈춰 섰다. 요한은 마차에서 내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은 쾌청하기만 했다. 그칠 것 같지 않게 내리던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요한은 잠깐 들어 올렸던 고개를 다시금 내렸다. 그러곤 로브에 달린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좋아. 직접 가서 확인해 보자고.”

그는 작은 기합을 한 뒤,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의 뒤로는 호위병 두어 명이 조용히


뒤따랐다.
요한은 평소 멀끔한 차림새를 지향했는데, 오늘은 제 몸을 모두 로브로 가린 후였다. 지금
하려는 일은 다소 비밀스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신분을 드러낼 수 없는 그런 일이라고나 할까.

그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목적지를 정해 둔 걸음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잘 걷던 요한의 걸음이 멈춰 섰다.

그는 호흡을 짧게 골라내고선, 제 앞에 있는 어느 건물을 빤히 바라보았다.

크기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관리가 잘 된 듯한 상앗빛의 저택 하나.

그곳은 바로 욘두의 집이었다.

요한은 로브 주머니 속에 깊숙이 넣어 두었던 열쇠를 꺼내 들었다. 욘두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그의 집 현관을 열 수 있는 키였다.

욘두의 집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만드는 것은, 그에 대해 뒷조사를 하는 일보다도 더 쉬운


일이었다.

요한은 현관까지 다가가 주위를 잠깐 둘러보았다.

아침, 그리고 그의 집이 꽤 외곽에 위치해서인지 오가는 사람들은 그다지 없었다.

좋아, 지금이 딱 좋군.

그가 현관의 열쇠 구멍 속에 열쇠를 넣어 돌리자마자 명쾌한 소리가 작게 울렸다.

딸깍.

이윽고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요한의 몸이 쏙 들어갔다.

그를 뒤따라온 호위병 하나도 함께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나머지 호위 하나는 보초로 세워


두었으니, 만약을 위한 준비마저도 확실했다.

집 안엔 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았다.

하나 그다지 어둡지는 않다. 커다란 창가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 때문이었다.

욘두의 집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욘두는 혼자 살고 있었고, 이 시간엔 공작저에 있을 게 확실했으니까. 욘두는 지금 오전에


행해지는 조슈아의 수업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고요한 집 안. 요한의 숨소리, 발소리만이 유일한 소리였다.

요한은 숨을 죽인 채로 거실에 있던 책장 가까이로 걸어갔다.


다른 곳은 살펴볼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요한은 오로지 저 책장,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장에 꽂혀 있을 붉은 표지의 책을 찾고자


했다.

물론 책장에 붉은 표지의 책이 없을 시엔 다른 곳도 살펴보겠지만.

“…….”

책장을 살펴보는 그의 눈이 분주했다.

책장엔 붉은 표지를 가진 책이 몇 권 꽂혀 있었다.

요한은 그것을 하나하나 빼내어, 그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마법서로 보이는 책, 어느 인물의 전기, 교양서적…….

세나의 것이라 추정되는 책의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요한은 조바심이 들었다.

지난날, 리나와 함께 보았던 그 책은 세나의 것과 비슷한 책이었던 걸까. 저와 리나가 과하게


넘겨짚은 것이었다면.

이윽고 요한은 책장 제일 밑에 꽂혀 있던 붉은 표지의 책을 뽑기 위해, 자세를 굽혔다. 그것은


붉은 표지를 가진 마지막 책이었다.

책의 책등에 손이 닿는 순간, 요한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찾아야 하는 것을 드디어


찾은 듯한 느낌이랄까.

심장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요한은 영문 없이 바짝 긴장했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작은 확신마저도 했다.

이 책이 내가 찾던 그 책일 것 같아.

요한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책을 완전히 빼내었다.

빼낸 책의 표지를 손끝으로 잠깐 쓰다듬은 그는, 이내 책의 표지를 넘겼다.

그렇게 한 장이 넘어가고, 그의 눈동자엔 그 안에 적힌 글귀가 맺혔다.

한 줄을 읽자마자, 책을 쥐고 있던 요한의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곳엔 너무나도 익숙한 필체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나.”

바짝 마른 그의 입술 사이로 그리운 이름 하나가 툭 삐져나왔다.


세월이 흐르고, 그녀의 필체를 보지 않은 지 오래 되었지만 요한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세나의 필체야.

아닐 리가 없어.

함께 자라며, 가정을 꾸려 나가며, 숱하게 많이 보았던 세나의 필체였다.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리나의 말이 맞았다.

세나의 방에선 진짜로 세나의 책 하나가 사라졌던 것이다.

요한은 그녀가 남긴 메시지들을 다급하게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번째 장이 넘어가고, 세 번째 장마저도 넘어갔다.

마음 같아서야 선 자리에서 끝까지 살펴보고 싶지만, 여건이 그리 좋지 못했다.

원하는 것을 찾았으니,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요한은 세나의 책을 품 안에 소중히 넣고선, 욘두의 집을 나섰다. 집을 나오는 내내 마주친


사람은 없었다. 다행이었다.

그는 잰걸음으로 정차해 둔 마차까지 걸어갔다.

이내 마차에 올라탄 요한은 얼른 마차를 출발시켰다. 기운찬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출발한


마차. 요한은 품에 넣어 두었던 세나의 책을 펼쳤다.

공작저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겠다. 그는 책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고 싶었다.

그 책의 정체는 세나가 남긴 ‘일기’였다.

제 51 화. 세나의 일기

⌜십이월 마지막 주, 먹구름 사이로 하얀 꽃이 내렸다.

첫눈이었다.

새벽부터 쏟아지던 첫눈은 눈앞이 뿌옇게 흐려질 정도로 흩날렸다.

그치지 않는 눈발을 보며, 요한은 근심을 늘어놓았다. 나는 귀엽게 툴툴거리는 그를 달래어


주었다.
눈이 오든, 심지어 비가 내리든 뭐 어때. 우리가 함께이면 되는 거지.

예정 없이 내린 눈 때문에, 예정되어 있었던 야외 결혼식이 취소되는 일은 없었다.

나는 흰 드레스와 흰 눈이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오늘은 우리의 결혼식이었다.

우리는 첫눈을 맞으며 결혼을 했다.

나는 그에게 사랑의 맹세를 하며 생각했다.

좋지 않았던 과거의 기억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요한과 영원히 행복하기를.

그를 닮은 예쁜 아이 하나를 낳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결혼식 내내 요한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흰 눈 속에서 웃고 있던 요한의 얼굴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오늘로서 완벽한 내 남자가 된 요한. 네가 웃는 모습을 영원히 기억할 거야.⌟

첫 페이지를 다시 읽은 요한은 눈가가 시큰해졌다.

“하…….”

나지막이 숨을 내뱉었을 땐, 눈동자 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기어코 흘러내렸다.

눈물이었다.

요한은 아주 오랜만에 세나와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흰색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던 세나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녀는 흰 눈을 처음 본


강아지처럼 눈밭을 뛰어다녔다. 드레스를 입은 것을 잊은 건지, 결혼식이라는 것을 잊은 건지.

하나 그럼에도 요한은 그녀를 다그치거나, 말리지 않았다.

네가 내 웃는 얼굴을 아름다워했듯, 나도 눈 위를 뛰어다니는 네가 아름다워 보였으니까.

그것은 선명하지 않은, 다소 흐려진 기억이었다.

요한은 눈발이 날리는 정경 속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던 세나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나에게 제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 뒤, 세나가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와 요한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요한은 손끝으로 눈가를 훔치며 다음 장을 넘겼다.

일기는 거의 대부분 요한과 행복했던 일들이 쓰여 있었다.

⌜요한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받았다.

아주 아주 예전에 내가 보고 싶다고 했던 라일락이었다.

라일락이 필 계절도 아니건만……. 그는 어디선가 비싼 값을 치러 구한 것만 같았다.

그럴 필요 없다고 핀잔을 조금 주긴 했지만, 사실 나는 매우 기뻤다.

오늘 밤엔 요한의 벨트를 가만 두지 않아야지.⌟

그녀의 귀여운 말투에 요한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고, 입가엔 미소가 스민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요한은 쉬지 않고 일기를 읽어 내려갔다.

일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열 개 정도랄까.

날짜도 띄엄띄엄, 내용도 띄엄띄엄, 완전 제멋대로인 일기였다.

그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세나는 원래 하고 싶은 것은 곧 죽어도 하고, 하기 싫은 것은 절대로 하지 않던 여자였다. 그


일기는 완전히 그녀의 성향대로였다.

다섯 번째 일기까지 읽고, 여섯 번째 장을 펼쳤을 때, 요한은 돌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체가 조금 달라진 것만 같다.

“……공작님. 도착했습니다.”

그 순간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기에 집중하고 있을 동안 어느새 공작저에 도착한


것이다.

요한은 입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그러곤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며, 눈물의 기운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내 마차에서 내리는 그의 얼굴은 오만방자한 요한 랭카스터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정원을 거닐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했다.


세나의 일기를 리나와 함께 보아야겠다고.

손에 쥔 조그마한 세나의 일기장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 * *

공작저의 복도를 걷다 마주친 이가 있었다.

요한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남자는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

“……엇! 요한 님. 안녕하십니까.”

오늘만큼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요한은 쥐고 있던 세나의 일기장을 등 뒤로 조금


숨겼다.

“욘두. 어디 가는 길이지? 지금은 조슈아의 수업시간이 아닌가?”

그러곤 괜스레 위엄 있는 어조로 말했다. 욘두의 시선이 제 손이 쥔 세나의 책에 닿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욘두에게 ‘세나의 일기장이 왜 네 집에서 발견된 거지?’라고 물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물으려면 욘두의 집에 몰래 들어갔다는 사실까지 토로해야 했다.

일단은 리나와 상의를 해 보자. 그런 뒤에 욘두를 몰아세워도 늦지 않으리라.

“아. 죄송합니다. 조슈아 님의 수업 자료를 마차에 두고 와서……. 원래 이런 실수는 잘 하지


않는데…….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욘두는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지우고선, 정중히 사죄했다.

그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굳은 의지를 내비쳤지만, 사실 욘두가 깜빡깜빡하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었다.

머리가 비상하기는 하나 이따금 헐렁한 면모를 내비치는 욘두.

요한은 그 일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가벼운 실수를 모두 상쇄할 만큼 욘두는 수업적인 면에서 훌륭했으니까. 요한은 그의 수업을


몇 차례 참관한 적이 있었다.
“알겠어. 그럼 얼른 다녀오도록 해.”

요한은 그가 지나갈 수 있게 옆으로 비켜 주었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세나의 일기장을


자연스럽게 등 뒤로 완전히 숨기기도 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요한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욘두는 요한을 지나쳐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는 욘두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욘두의 시선은 줄곧 제 눈동자에 닿아 있기만


했다.

다른 곳은 쳐다보지 않은 것 같으니, 욘두가 책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겠지.

세나의 일기장을 봤다면 욘두의 표정이 약간은 흐트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이 본 그의 얼굴엔 동요의 빛은 없었다.

“휴.”

요한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리나의 방이었다.

* * *

타고 온 마차를 뒤지던 욘두는 이윽고 화색 했다.

“찾았다. 이걸 또 놓고 오다니.”

욘두는 머리를 머쓱하게 긁적이며, 동그란 안경을 올려 썼다.

오래전에도 ‘그녀’가 매번 주의를 주었던 건망증이었다.

‘그렇게 자꾸 깜빡 깜빡 잊으면 어떡해! 꼭 필요한 무언가도 잊으면 어쩌려고. 네 건망증을


보고 있으면, 먼 훗날에 나마저도 잊을 것 같아.’

그녀의 말은 제법 예전에 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억양,


표정마저도.

욘두는 제 머릿속에 맴돈 말에 대답하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널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리고 지금도 넌 내 곁에 존재하는 걸.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마차의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그의 귀에 매달린 새로운 귀걸이가 눈에 띄게 흔들거렸다.

리나가 직접 골라 준 그 귀걸이 또한 ‘그녀’와 하나씩 나눠 낀 터였다.

그는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조슈아가 더 기다리기 전에 얼른 돌아가야만


했다.

욘두는 복도를 거닐면서 생각했다. 조금 전 우연히 마주친 요한에 대해서.

“조금은 눈치챈 건가.”

요한은 손에 쥔 무언가를 숨기려 했고, 욘두는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바비가 가져다준 세나의 일기를 찾아온 거구나.

하지만 상관없겠지. 제 계획에 차질이 생길 건 없었다.

그들이 진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별로 상관이 없다는 거다.

제 계획은 그녀가 죽은 뒤, 무려 4 년간 연구해 왔던 일이었다. 4 년이 지난 지금 무언가를


알아차렸다고 해도, 아주 늦은 일일 테지.

돌아와서, 세나의 일기는 며칠 전에 바비가 들고 온 것이었다.

대뜸 제 집으로 찾아온 바비는 그렇게 물었다.

‘세나의 일기장에 리나라는 이름이 언급되어 있었어. 리나가……. 세나와 연관이 있는


여자였어?’

바비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아니, 리나와 세나가 그렇게나 닮았는데, 두 사람이 연관되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욘두는 티 나지 않게 작은 조소를 지었다. 그러곤 바비가 건네준 세나의 일기를 받아 들었다.

그는 건성으로 책을 몇 장 넘겨 보았다.

이런 게 남아 있었구나.

‘욘두. 대답해.’

바비의 물음에 욘두는 일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답했다.

‘제가 답해 드린다면, 바비 님께서는 제게 무엇을 내어놓겠습니까?’

‘나는 부탁을 하는 게 아니라, 명령을 하는 거야.’

‘……하하. 명령이라.’
‘네가 똑바로 답해 주지 않는다면 요한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거야. 네가 세나와 관련된
무언가를 우리에게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언제 드러나도 이상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하지만 바비와 거래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딱 한 번.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그 부탁은, 언젠간 기막히게 쓰일 날이 있으리라.

욘두는 동그란 테이블 위에 세나의 일기장을 올려놓았다. 바비는 경계가 가득 서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상한 부탁이라면 들어주지 않을 거야.’

‘바비 님께서 충분히 하실 수 있는 부탁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 그래서 내 물음에 대한 답은?’

‘그럼 거래가 성립되었다는 전제 하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비는 긴장한 채로 욘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욘두는 바비에게 리나의 비밀 하나를 알려 주었다.

‘……!’

그러자 바비는 눈에 띄게 놀라워했다. 얼마나 놀랐던지 꼿꼿이 서 있던 몸을 휘청거릴


정도였다.

‘말, 말도 안 돼……. 그런 사실을 나는 세나에게도 들은 적이 없어.’

바비는 한동안 욘두가 알려 준 사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의 설명도, 설득도 없었다. 욘두는 그저 빙그레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동그란 안경 속의 욘두의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욘두는 진실을 알려 주었고, 그것을 믿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바비의 몫이었다.

* * *

무료한 오전을 보내던 그때, 방 밖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나야, 들어가도 돼?”


이름도 밝히지 않은 방문객의 정체는 요한이었다.

나는 소파에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단번에 문을 열어 주었다.

“요한 씨.”

“어.”

“아침에 안 보이던데,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그게……. 잠깐 나갔다 왔어.”

“식사는 하고 나간 거예요?”

요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바라본 그의 얼굴빛이 탁해 보였다. 영문 모를 먹구름이 잔뜩 낀 듯한 얼굴이었다.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나는 요한의 기분을 풀어 주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럼 뭐 좀 드실래요?”

“지금은 먹는 것보단…….”

그는 말을 잇지 못하며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조만간 땅이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한숨이었다.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나 봐.

나는 얼른 부끄러운 얼굴을 한 채로 물었다.

“음식 좀 드실래요? 아님……. 미인 거지의 입술부터?”

몸까지 배배 꼰 뒤 입술을 조금 내밀자, 요한은 기겁했다.

“……!!”

그는 기겁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난 것이다.

아니! 입술을 먹겠냐고 묻는데, 얼씨구나 좋다고 반응해도 모자랄 판국에 기겁한 모양새라니.

어젯밤 질리도록 내게 입을 맞추었던 요한은 어디로 갔나 싶었다.

요한은 시선을 옆으로 회피하며 대꾸했다.

“입, 입술은 나중에.”

내 입술이 싫어서 피한 것은 아닌 듯했다. 그리 말하는 요한의 얼굴이 퍽 붉어졌기 때문이다.


우스운 것은, 그래도 내 입술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입술은 나중에래. 누가 나중에 허락을 해 준다고 그러는 거야.

“피, 거 참 반응 한 번 마음에 안 드네요.”

그는 두어 번의 헛기침을 하며 내 앞까지 다가왔다. 그러곤 내 머리 위를 가볍게 콩


쥐어박았다.

“놀라서 그런 거잖아. 그런 건 도대체 어디서 배워 와서는.”

“그래서 싫었어요? 이젠 하지 말까요?”

요한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낌새를 주면 괜찮을지도 몰라.”

역시나 싫다고는 안 하네.

“큭큭.”

그는 뒤늦게 방 안으로 완전히 들어와, 열었던 문을 닫았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에요? 이 시간엔 원래 잘 찾아오지 않잖아요.”

“네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

“보여 주고 싶은 거요?”

“일단은 앉아서 얘기하지.”

요한과 나는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요한의 손에 들린 그 책을 발견하고야 만다.

“……그, 그거 설마!”

요한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책을 우리 사이에 있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탁.

나는 테이블 위에 얹어진 책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붉은빛의 표지를 가진 세나의 책.

과연, 그 책은 내가 꿈에서 보았던 무늬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이건 세나의 일기장이었어.”

그 책의 정체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세나의 일기장이라고 한다.


나는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장난스러웠던 기세는 모조리 사라진 뒤였다.

책까지 뻗어진 내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책 표지 위에 손을 올렸을 때까지도 손의 떨림이


가시지 않았다.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는 한 걸음, 두 걸음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내 내 옆에 꼭 붙어 앉은 그는, 떨리는 내


손을 대신해서 책을 집어 들었다.

“불안해하지 마. 괜찮을 거니까.”

요한은 나머지 손으로 떨리는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내 떨림이 가실 때까지.

역할이 바뀐 듯한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같이 읽어 보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책을 어떻게 찾아온 것인지 궁금했으나, 일단은 책의 내용부터 살펴보고 싶었다.

그건 책의 내용을 다 훑어본 뒤에 물어도 됐으니까.

책의 첫 장이 넘어가고, 내가 처음으로 읽은 것은 세나와 요한의 결혼식에 관련된 것이었다.

어쩐지 매우 행복했을 것 같은 두 사람의 결혼식. 그 장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마치


내가 실제로 겪은 것인 양.

그 순간 내가 ‘세나’가 된 듯한 기분이 잠깐 들었다.

그렇게 두 장, 세 장……. 책장은 조급하지 않게 넘어갔다. 우리는 대화 하나 나누지 않으며,


진지하게 글귀를 읽어갔다.

머지않아 우리는 여섯 번째 일기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세나의 일기를 보고선 처음으로 가진 의문이었다.

“요한 씨.”

“어.”

“필체가…… 바뀐 것 같아요. 당신도 그게 느껴져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필체의 변화는 아주 미묘한 변화였지만,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내가 그 필체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달라진 것은 필체 하나뿐 만이 아니었다.

일기의 내용도 묘하게 달라진 기분이었다.

그 앞의 내용들은 요한과의 행복한 이야기가 주된 주제였다면,

여섯 번째 일기는…….

제 52 화. 누군가의 기억

 
⌜조슈아는 정말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아이. 그리고 끔찍할 정도로 세나를 닮은 아이.

태어난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보채는 법이 없었다.

조슈아는 잘 울지 않았다. 벌써부터 의젓하다는 생각마저도 들게 만드는 아이였다.

아이용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잠든 조슈아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끼곤


했다.

네 목을 조르고 싶어.

나는 그럴 때마다 주먹을 꽉 쥐고, 심호흡을 했다.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어.

요한은 아이를 끔찍하게 아꼈다.

그가 제 목숨처럼 아끼는 아이에겐 나쁜 짓을 하지 말자.

그가 슬퍼할 테니까.

하지만 내게도 아이가 생긴다면 그땐…….⌟

그것은 조슈아를 낳은 이후의 이야기를 적은 듯해 보였다.

읽는 내내 이상한 위화감이 드는 내용이었다.


세나라면 분명 본인일 텐데, 왜 일기 속 세나는 자기를 닮아 가는 아이에게 끔찍함을 느꼈던
걸까.

꼭 조슈아를 싫어하는 것처럼.

“……요한 씨. 세나 씨는 조슈아를 싫어했어요? 가령 낳을 때 너무 힘들었다거나 죽을 뻔해서…


… 아이를 끔찍하게 생각했던 걸까요?”

요한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아니야. 세나는 조슈아를 정말 사랑했어. 그녀가 아프기 전까지 아이를 얼마나 열심히
돌봤는지 몰라.”

“…….”

“사용인들을 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모든 걸 손수 했어. 도리어 아이에 관한 것에 제


손이 닿지 않으면 불안해했지.”

“그렇다면, 이 일기 속 내용은 조금 이상하네요.”

왜냐면, 일기 속 세나는 조슈아를 사랑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

요한은 침묵했다.

그 또한 위화감이 가득한 일기 내용에 대해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침묵은 대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윽고 일기장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조슈아는 나를 볼 때면 언제나 방긋방긋 미소를 지었다.

안아 달라는 듯 허공에 뻗은 아이의 손을 얼마나 많이 무시했는지 모른다.

그러다 요한이 그런 내 모습을 볼 뻔한 적도 있었다.

나는 급하게 아이를 안아 주는 척을 했다.

더럽게 무거워. 체중 관리라도 시켜야 하는 거 아냐?

공작가의 아이라고 해서 이렇게까지 막 먹여도 되는 거야?

내게 아이가 생긴다면, 나는 절대로 많이 먹이지 않을 거야.

더럽게 무거운 조슈아보다 훨씬 더 예쁘고 사랑스럽게 가꾸어 놓아야지.

나와 닮은 듯 닮지 않은 아이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볼 때마다, 깊은 상념 같은 것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아이의 눈동자를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었다.⌟

깊은 상념. 그녀에게 떠오른 상념은 무엇일까?

우리는 또다시 다음 장을 넘기었다.

⌜조슈아를 보는 게 점점 더 괴로워졌다.

요한은 그런 나를 볼 때마다 좋지 않은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매번 고개를 내저었다.

조슈아를 봐서 기분이 나빠졌다고 할 수 없었으니까.⌟

세나는 행복하지 않았던 걸까?

조슈아를 낳은 것이 달갑지 않았던 걸까?

모든 부모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좋아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묘한 것은, 일기 속 세나가 조슈아를 끔찍해하면 할수록 내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사실이었다.

미움 받는 것은 조슈아였지만, 정작 내가 미움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나는 한쪽 손으로 아득한 아픔이 전해지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우리는 일기를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번 펴 보았으니, 끝을 보아야겠다. 요한도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리라.

그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세나의 글씨는 악필로 변해 있었다.

마치 글자를 쓰는 것이 무척이나 괴로운 듯.

꾹꾹 눌러쓴 까닭에 글씨는 군데군데 번지거나 획이 커져 있었다.

⌜잠깐 괜찮아졌던 고통이 또다시 나를 찾아왔다.

빌어먹을 병 같으니라고.⌟

고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일기의 내용 또한 매우 짧아져 있었다.

우리는 다음 장을 또다시 넘겼다.


그다음 일기 속 글자는 그전 것보다 훨씬 더 일그러져 있었다.

⌜……펜을 잡기 힘들 정도로 몸이 좋지 않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과 통증은 나뿐만 아니라, 요한과 조슈아, 심지어 바비까지 힘들게
만들었다.

공작저의 모두가 나를 걱정하는 것만 같다.

나는 손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었지만, 걱정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상한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모두 다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아. 나는 그 순간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을 느끼길 얼마나 고대했던가.

하지만 빌어먹을 병 때문에 요한이 내 몸에 손 하나 대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주 곤욕스러웠다.

조슈아 따위가 아닌 사랑스러운 내 아이를 얼른 낳아야 할 텐데.

몸은 이대로 영영 낫지 않는 걸까?

그의 곁에 영원히 머물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짓을 해 버린 나는, 인제 와 벌을 받고 있는 걸까?

나는 그날, 리나라는 이름을 절규하듯이 부르던 세나의 목소리를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 목소리가 잊히지 않아.⌟

리……나?

“……!”

나는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놀란 것은 나 하나만은 아닌 듯했다.

일기장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올렸을 땐, 요한과 단번에 눈이 마주쳤으니까.

“세, 세나 씨의 일기장에 리나라는 이름이 있어요.”

내뱉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나는 몇 번이고 일기 속 글자를 다시 살펴보았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심한 악필이기는 했으나, 종이 위에 쓰인 것은 분명히 ‘리나’였다.

리나. 그것은 흔한 이름이기는 했지만, 나는 확신했다.

세나의 일기장에 나온 리나라는 이름은 나를 뜻하는 게 틀림없다고.

나와 세나는 정말로 어떤 관계가 있는 사이일까?

자매라든지, 쌍둥이라든지, 아님 먼 친척이라든지.

‘궁금해?’

꿈속에서 보란 듯이 나를 도발했던 세나.

네가 내게 보여 주려고 했던 게, 이거였던 거야?

요한은 대답 대신 일기의 다음 장을 넘겼다.

사락.

빳빳한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다음엔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대신에 다른 것을 발견했다.

종이가 찢긴 것처럼 얼기설기한 자국들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것은 세나가 찢은 것인지, 아님 이 일기장을 나중에 발견한 다른 이가 찢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발견한 이라면, 제일 의심 가는 두 인물이 있었다.

바로 바비와 욘두. 그들 중 한 사람이 뒷장을 찢은 걸까? 두 사람이 함께 찢은 거라면?

그렇다면 그 뒤엔 과연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던 걸까.

“요한…….”

나는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요한은 일기장의 종이 위를 손끝으로 반복해서 쓰다듬고 있었다.

깊은 상념에 빠진 듯한 그의 얼굴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요한 랭카스터 씨. 당신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어?

그 순간, 나는 과거의 일화 하나를 불현듯이 떠올렸다. 리나라는 이름과 관련된 일이라서


떠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한 씨.”

“……어?”

요한은 그제야 내게 대답다운 대답을 해 주었다.

“예전에 리나라는 이름에 관해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고 했었잖아요.”

“어. 맞아.”

“지금 알려 주실 수 있어요? 그때 치사하게 끝까지 알려 주지 않았잖아요.”

“…….”

“설마 지금도 알려 주지 않을 건 아니죠?”

“……아냐, 알려 줄게.”

이제 더는 숨길 게 없으니까. 요한은 숨을 낮게 고르고, 나와 진하게 눈을 마주쳤다.

의미심장한 무언가의 말을 내뱉으려는 듯이.

“그 이름은 세나가 잠꼬대처럼 부르던 이름이었어.”

리나라는 이름을 잠꼬대로 부르던 세나.

나는 지난날 벨라가 내게 해 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제가 그 이름을 들은 건, 마님이 낮잠을 주무셨을 때……. 이따금 잠꼬대처럼 부르던


이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벨라는 그렇게 덧댔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마님이 조슈아 님을 낳은 이후론 그 이름을 더는


잠꼬대처럼 부르지 않았다는 거예요.’

요한이 마음에 걸려했던 부분은 벨라가 내게 얘기해 주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요한 씨.”

그는 듣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옅게 끄덕였다. 나는 이어 말했다.

“혹시……. 세나 씨가 조슈아를 낳은 이후에는 잠꼬대로 그 이름을 부르지 않지 않았나요?”

내 물음에 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아닌지를 상기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의 고뇌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붉은 입술은 작게 열리며, 그는 내게 답을 내어 주었다.


“네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네 말대로인 것 같아. 세나는 리나라는 이름을
부르는 잠꼬대를 자주 했었어. 하지만 조슈아를 낳은 이래론 그 잠꼬대를 한 번도 듣지
못했어.”

그는 고개를 작게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니 꽤 이상한 일인 것 같군.”

지끈거렸던 관자놀이의 통증이 더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나는 눈가를 잔뜩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자연스럽게 몸을 웅크리자, 요한이 내 어깨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입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아파 왔기 때문이다.

‘…….’

아픔으로 물든 머릿속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공명하고 있었다. 작았던 목소리는 이내 제


소리를 키워 가기에 이르렀다.

머릿속엔 지난날 꿈속에서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세나.’

“리나!” 나를 부르는 현실 속 요한의 다급한 목소리와, 머릿속에서 공명하는 ‘세나.’라는


환청에 가까운 소리가 뒤엉켰다.

혼란스러워진 나는 눈을 꼭 감았다. 시야는 곧 컴컴해졌다.

그러다 팟, 스파크가 일 듯 눈앞에 밝은 빛이 튀기 시작했다.

컴컴했던 시야는 일순 밝아졌다. 밝은 빛은 제 영역을 확장시키며 이내 내 시야를 모조리


밝혔다.

밝아진 시야 사이로 내비친 것은 어느 복도였다.

그곳은 요한의 공작저에 있는 복도가 아니었다. 복도의 폭과 벽면의 색깔, 모든 것이 달랐다.

하지만 나는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예전에 몇 번이고 내달렸던 익숙한 복도인 것 같단 말이다.

그때, 복도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저벅저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뾰족한 구두에서 나는 날카로운 소리가 아닌, 낮고 무거운 구두 소리가 울렸다.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구두 소리를 내던 누군가는 이윽고 내 앞까지 완전히 다가왔다.

낮고 무거운 구두의 주인은 남자였다. 구두 다음으로는 그 남자가 입은 검은 바지가 보였다.

내 시선은 위로 점점 더 올라갔다. 그러자 그가 입고 있던 흰 셔츠마저도 보게 된다.

그리고 바라본 남자의 얼굴.

남자는 나와 닮은 금발을 가지고 있었고, 머리카락의 길이는 짧았다.

남자의 붉은 입술이 작게 움직이며, 그 속에선 누군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세나.’

“……!”

나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깜짝 놀란 듯한 요한은 내 어깨를 쥐어 잡고선 끊임없이 물었다.

“괜찮아? 사람을 불러올까? 숨을 쉬기가 불편한 거야?”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답할 기력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을 불러올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저 잠깐 숨이 가빠진 것뿐이니까. 더해, 머리의


지끈거림도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나는 길게 심호흡을 하며, 조금 전에 보았던 환영을 다시금 되뇌었다.

그것은 내가 공작저에 온 이래 처음 꾼 꿈과 똑같은 것이었다.

금발 머리의 남자가 나에게 ‘세나’라고 말하던 그때의 꿈 말이다.

그땐 남자의 이목구비를 전혀 보지 못했다.

내가 봤던 건, 남자의 붉은 입술과 그 입술이 내뱉던 세나라는 이름 하나뿐.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조금 전에 본 환영 속에선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부드럽게 굽은 눈매, 인자한 미소를 띤 입술, 중년의 남자.

그 남자는 나와 제법 닮은 남자였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

그는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리나! 제발 한마디만 해 줘. 괜찮은 거라고. 응?”

요한은 대답 없는 나를 채근했다. 바라본 그는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

지독한 병으로 세나를 잃은 요한은, 누군가가 아파하는 것을 못 견뎌하는 듯했다.

그것은 그에게 남겨진 지독한 트라우마인 걸까.

나는 입술이 찢길 듯 제 아랫입술을 짓이기는 요한의 입술 위로 손을 올렸다.

“괜찮아요. 당신이야 말로 불안해하지 마세요.”

내 한마디에 요한은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안도가 밴 한숨이었다.

“네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닐까…… 불안했어.”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독한 통증은 가셨지만, 왠지 모르게 아직까지 정신이 멍한 기분이었다.

얼빠진 정신 사이로 무언가의 희미한 영상이 다시금 떠오른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기가 무섭게 눈앞의 전경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초조해했던 요한의 얼굴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 눈앞엔 어느 남자의 얼굴이 그려졌다.

‘창밖을 보렴. 커다란 저택이 보이지? 그곳이 이제부터 네가 머물 저택이란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반갑게 인사해 주어야 해.’

그는 내가 조금 전에 복도에서 보았던 그 남자였다.

나의 아버지.

아버지와 나는 잘 달리는 어느 마차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마차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아버지의 말대로 아주 커다란 저택이 존재했다.

한눈에 담기조차도 버거운 대저택.

그곳 역시 처음 보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바로 랭카스터 공작가였던 것이다.

마차는 곧 공작가의 정원 한편에 멈춰 섰다. 금발이 아름다운 아버지는 나를 훌쩍 들어 올렸다.

문득 내려다본 내 손이 아주 작다는 걸 깨달았다. 조슈아 손의 크기 정도랄까.

아무래도 이 환영은 내가 어렸을 때의 기억인 것 같았다.

나를 안아 마차에서 내린 아버지는, 정원의 잔디 위로 나를 내려 주었다.

우리는 손을 꼭 잡은 채로 녹음이 드리운 공작가의 정원을 함께 걸었다.

보폭이 다소 큰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인상 깊었다. 나는 그의 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작은 발을


쉼 없이 놀렸다.

환영이라고 하기에는, 현실의 것처럼 제법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내 대저택의 현관 앞까지 다다르자, 어떤 남자 하나가 보였다. 새로이 등장한 남자는 나와


아버지를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목이 꺾일 정도로 고개를 꺾었다. 이윽고 남자의 얼굴이 내


시야에 담겼다.

남자는 중년인 것 같았지만, 매우 젊어 보였다.

흰 피부와 부드러워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

‘귀여운 아이로구나.’

나를 내려다보는 칠흑같이 검은 동공.

그리고 웃을 때 예쁜 곡선을 그리는 눈매는 내가 아는 누군가와 많이 닮아 있었다.

그 누군가는 바로…….

제 53 화. 네 머릿속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어
 
그 누군가는 바로…….

요한이었다.

그 남자는 요한과 닮아 있었던 것이다.

아니, 요한뿐일까?

웃는 눈매는 묘하게 바비를 떠올리게도 만들었다.

부드럽게 굽어진 눈매는 뭇 여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비와 요한은 같은 아버지를 가진 형제였다.

즉, 내 환영 속에 새로이 등장한 이 남자의 정체는…….

‘나는 제럴드라고 한단다. 이 저택의 주인이지.’

남자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누군가의 손을 완전히 그러쥐고도 충분히 남을 큰 손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 우리의 손이 맞닿기 직전, 모든 것이 삽시간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게 손을 내밀던 남자의 큰 손도,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아버지의 손도, 녹음이 짙던


공작가의 건물도 모두 연기처럼 증발해 버렸다.

이내 내 눈앞에 드리운 것은 시커먼 어둠.

환영은 그게 끝이었던 것이다.

“…….”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눈동자 사이론 뜨거운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눈물이 흐른 이유는 무엇일까.

“……리나.”

요한은 손을 뻗어 내 뺨을 닦아 주었다.

“무언가를 떠올린 거지?”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

요한. 나를 이해해 주는 단 한 사람.

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잊힌 내 기억은, 이제야 비로소 수면 위로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네, 작고 소중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어요.”

기억을 찾는 걸 매번 두려워했었다.

과거의 기억이 없어도 행복한데, 구태여 찾아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요한과 조슈아를 만난 이래로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잊힌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요한이 가지는 의미가 궁금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보자.

어쩌면 혼자였기에, 찾는 것을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

하지만 요한은 내 손을 잡아 주었고, 함께 부딪혀 주겠다고 했다.

나는 요한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었다.

“리, 리나.”

그는 약간 당황한 듯했다.

“잠깐만요. 잠깐이면 돼요.”

“…….”

뺨에 맞닿은 요한의 가슴팍은 뜨거웠다.

셔츠 위로 평온하지 못한 그의 심장 박동 소리도 들려왔다.

나를 향한 설렘일지, 아님 내게서 세나를 추억한 설렘일지 항상 의심했지만……. 나는 오늘은


확신했다.

이건 나를 향한 설렘이야.

이윽고 요한의 손이 내 등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요한의 말이 맞았다.

그는 도리어 잃은 내 기억 속에 행복한, 절대로 잊어선 안 될 기억이 존재하는 게 아니냐고


했었다.

그래, 당신이 이겼어.

조금 전, 잠깐 떠오른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마음이 너무도 시큰거렸다.

나를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짓는 아버지의 얼굴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다른 건 잘 모르겠다. 모든 것을 기억해 낸 게 아니니까.


하지만 문득 떠오른 단편적인 기억 속에서, 나는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많이 사랑했던 것 같아. 그리고 나는, 나를 사랑하는 그를 좋아했어.

딱 한 줄기만 흘렀던 눈물은 기어코 큰 줄기가 되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

나는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을 줄줄 흘렸다.

요한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흐느끼는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실까? 부모님은 어디에 계신 걸까.

지난 5 년간 한 번도 가지지 않았던 의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요한 씨.”

“응.”

“세나 씨의 본가는 어디예요? 그녀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다고 하셨죠?”

묻는 목소리 속엔 울음기가 가득했다.

요한은 늦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내 등을 쓸어 주는 것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어. 내가 세나와 결혼했을 무렵에 돌아가셨어. 그리고 네 본가에는 지금 사촌들이 살고 있어.


안타깝지만, 나는 그들과 교류하지는 않아.”

그의 다정한 손길 덕이었을까.

끝을 모르듯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은 곧 멈추었다. 나는 소매로 눈물의 흔적을 쓸어 냈다.

“왜요?”

“세나가 그러지 않기를 바랐거든. 그녀의 사촌들은 세나를 핑계로 공작저에 많은 돈을


요구했었어. 나는 스스럼없이 돈을 내어 주었지만, 세나는 언제나 그걸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

“제가 그 사촌들을 만나 봐도 되는 걸까요?”

“글쎄. 세나의 본가는 여기서 꽤 먼데.”

그는 주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촌들은 세나와 나, 아니, 리나에 대한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요한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일기장 속 세나가 숨기고 있던 무언가를.


“안 돼요?”

나는 다시금 그에게 동의를 구하였다.

대답을 주저하며 잠깐 고민한 그는 끝내 한마디를 읊조렸다.

“하지만 초대하는 건 가능할 것 같아. 네가 직접 가는 것보다 그들을 부르는 게 더 나은


일일지도 몰라. 너에게나, 나에게나.”

“…….”

“리나. 넌 그들에게서 뭘 확인하고 싶은 거지?”

“쌍둥이에 관한 걸 묻고 싶어요. 그들이라면 무언가를 알지 않을까요?”

나는 그의 가슴에 기댔던 얼굴을 들어 올려, 요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섬세하게 빚어진 턱선, 기다란 검은빛의 속눈썹, 내리깐 그의 동공엔 여러 감정이 얽혀 있었다.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조금 찌푸린 미간마저도 어쩐지 밉지 않다.

이유 없이 찡그려진 그의 얼굴을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이상한 그리움이 일었다.

요한과 조슈아, 심지어 바비에게도 느꼈던 익숙한 그리움.

묘한 그리움에 물든 내 마음은, 한마디를 뱉어 냈다.

“……밥맛 요한.”

그것은 내가 느낀 그리움과 연관이 있는 말이었다.

나는 밥맛 요한이라는 말을 지금, 그러니까 성인이 되어 만난 그에게 처음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이전에도 내뱉은 적이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찡그리는 데에만 사용했던 까칠한 꼬맹이에게.

그 꼬맹이는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데려다준 저택에서 만난 남자아이였다.

조금 전처럼 확실한 환영이 눈앞에 어른거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희미하지만 확실한 남자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보이지 않길 반복했다.

몰아치는 과거의 기억들이 내 머릿속에서 끊어진 필름처럼 떠올랐다.

녹음이 짙은 그 정원에서, 커다란 그 느티나무 근처에서, 남자아이는 지금의 요한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유 없는 심술에 입술을 삐죽거리며, 나를 내려다보았던 것이다.


‘요한, 넌 정말 밥맛이야.’

나는 그런 요한을 놀리는 걸 좋아했고, 어린 요한은 밥맛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성질을 냈다.

화가 난 요한을 달래 주는 건, 어린 내가 제일 재미있어 하던 일 중 하나였다.

화를 잘 내긴 했지만, 곧바로 풀어 주던 요한.

넌 애교 섞인 내 한마디에 바로 미소를 지었었어.

성인이 된 요한의 얼굴과 어린 요한의 얼굴이 끊임없이 교차했다.

그것은 결단코 내가 만들어 낸 허구성 가득한 기억이 아니었다.

나는 과거, 어린 요한을 실제로 만났던 적이 있다고 확신했다.

“요한 씨. 우린 아무래도 예전에 만났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예전이라면…….”

“과거에도 변함없이 밥맛이었던 당신의 어린 시절.”

“…….”

그는 다소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거짓말이 아닌걸.

나는 생각나는 대로 그에게 읊조렸다.

“제가……. 설마 세나인 걸까요?”

그것은 이전에도 생각했던 물음이었다. 내가 세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요한은 혼란스러워했다.

“모르겠어. 확신할 수 없어.”

“하지만 세나 씨가 죽은 걸, 모두가 봤다고 했죠?”

“……어. 4 년 전, 그녀는 확실히 죽었어. 죽은 그녀의 시신은 관 속에 누였고, 나는 그녀를


묻어 주었어.”

누가 진짜 세나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둘 중 누군가는 분명히 죽었다.

중간에 바뀐 필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설마 사람이 달라진 걸까?

어느 틈엔가 바뀐 것이라면.

감쪽같이.

누구도 알 수 없게.

나는 액자로 보았던 세나의 외형을 기억하고 있었다.

알려 주지 않으면 구분하지 못할 만큼, 그녀와 나와 똑 닮아 있었다.

마음먹고 서로인 척 연기를 한다면, 외형으로는 쉬이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설령 부모님이라고 할지라도.

“중간에 바뀐 거라면요?”

어린 시절부터 세나를 알았던 요한이었다.

그녀와 함께 자랐고, 함께한 시간이 길었다.

만약에 정말로 중간에 뒤바뀐 거라면, 요한은 사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사람이 달라졌다는 걸 느끼지 못했어요?”

필체가 바뀌었듯이 사람 또한 바뀐 징조가 있지 않았을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간에 사람이 바뀌었다면, 무언가 달라진 점이 존재할 것이다.


아주 작은 점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요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프기 전의 세나는 분명히 세나였어. 그녀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한 후엔, 내가 너무 바빠진
시기였어. 지금은 마음먹으면 시간을 낼 수 있지만, 그땐 여러모로 일이 엄청 많았거든.”

“네.”

“그리고 아픈 그녀는 하루의 반 이상을 잠들어 있었어. 처방받았던 독한 약이 그 원인이었지.


나는……. 그런 그녀를 안아 준 게 전부였어. 그것마저도 아주 늦은 밤이 되어서야 가능한
일이었지.”

요한은 잠깐 말을 멈추고선,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가 기억하는 아픈 세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녀는 아픈 몸으로 나와 더한 스킨십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어.
그녀의 몸은 그 정도로 아팠으니까.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았다고. 그런데 내가 뭘 더 어떻게
해.”

거기까지 들었을 때 떠오른 것은, 세나의 일기장 속 내용 중 하나였다.

‘하지만 빌어먹을 병 때문에 요한이 내 몸에 손 하나 대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주 곤욕스러웠다.


조슈아 따위가 아닌 사랑스러운 내 아이를 얼른 낳아야 할 텐데.’

그녀는 요한이 아픈 제게 스킨십을 하지 않는 것을 ‘곤욕’이라 표현하고 있었다.

거기엔 왠지 모를 부정적인 감정만이 느껴졌다.

그를 사랑했기에 스킨십을 원했다기보다는……. 그녀는 어떻게든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소유욕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잘 생각해 봐요. 아주 작은 거라도, 무언가 달라진 조짐이 없었나요?”

요한은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달라진 점은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아.”

그는 내 등을 감쌌던 손을 뻗어, 내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독한 약에 취해 잠든 세나는, 리나라는 이름을 잠결에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는 점.”

요한은 꽤나 단호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모든 의문을 속 시원하게 풀 해답은 하나야.”

“그게 뭔데요?”

“네가 기억을 완전히 되찾는 것.”

내 뺨을 감쌌던 그의 손은 이윽고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헝클어뜨렸다.

“네 머릿속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어.”

내 머릿속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다, 라.

그의 말에 이의가 없었다.

내가 모든 것을 떠올린다면, 모든 게 해결될 문제였다.

그 순간 전에 없던 간절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로 잊힌 내 기억을 찾고 싶었다.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요한, 당신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싶어.

당신도 내가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 중 하나였던 걸까?

“쉴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까닭 없이 온몸의 정기가 송두리째 빠진 기분이었다.

눈물을 흘린 여파인가. 그것도 아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여파인가.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뻗었다.

“요한 씨?”

그다음은 순식간이었다.

그는 내 몸을 훌쩍 들어 올렸던 것이다. 마치 공주님이라도 된 양 그에게 폭삭 안긴 것이 꽤나


부끄럽기도 했다.

그는 성큼성큼 침대까지 걸어갔다. 그러곤 침대 위에 나를 조심스럽게 눕혀 주었다.

요한은 나를 침대에 눕혀 주는 것에만 그치지 않으며, 내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도 다정해서, 그의 손길이 설핏 닿을 때마다 왠지 모를 소름이 돋았다.

어쩐지 얼굴도 붉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쉬고 있어. 혹시 소름 끼치게 내가 보고 싶다거나, 무언가가 떠오르면 벨라를 부르…….”

요한은 제 말을 끝내지 못했다.

내 눈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어디론가 옮겨 갔다. 그의 시선의 종착지는 자신의 손목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가 그의 손목을 부여잡은 것이었다.

“가지 마요.”

나는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말했다.

오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신이 가지 말았으면 해.

“바빠요?”

요한은 고민 없이 즉시 대답했다.

“어. 완전 바빠.”

이건 명백한 거절인 거지?

나와 있어 줄 만큼 있어 줬으니, 이제 그만 붙잡으라는 거겠지?


나는 잡고 있던 그의 손목을 놓았다. 아쉬움이 들어서 얼마나 천천히 놓았는지 몰랐다.

그렇게 잠깐 맞닿았던 그의 손목에서 완전히 손을 떼던 순간.

“……!”

그는 멀어지려던 내 손을 다시 부여잡았다.

요한은 나와 또다시 눈을 맞추었고.

“그렇지만 지금은 네가 더 중요해.”

그 또한 내게 진심을 토로했다.

“……키스하고 싶어요.”

“갑자기?”

“중요하다는 말에 두근거렸단 말이에요. 책임지세요.”

“못 할 건 또 없기는 한데…….”

나는 맞잡은 그의 손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예기치 못한 내 행동에, 요한의 몸은 하릴없이 내게 끌려왔다.

엇!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은 우스꽝스럽게 내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나는 마주한 그의 뺨을 쥐어 잡았다.

“어제 못했던 걸 해요. 마침 우리 둘뿐이잖아.”

둘만 있을 때 하자며.

유혹의 기미가 가득한 내 말에 요한은 놀란 얼굴을 했다.

“……!”

“안 할 거예요?”

그의 목울대가 티가 나게 꿀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답지 않게 긴장한 듯 마른 침을 삼킨 요한의 눈동자가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요한은 내 유혹에 완전히 넘어온 게 틀림없었다.

얼마 못 가 우리의 입술은 물러설 여지없이 가까워졌다.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지분거렸다. 그는 조급하지 않게 내


입술을 탐하고 있었다.
내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은, 내가 인지하지 못한 새에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는 내게 몸을 바짝 밀착시키며, 내가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든 생각은 하나였다.

요한과 체온을 나누고 싶다. 그의 뜨거운 살갗을 만지고 싶다.

이성은 마비되고, 본능이 내 머릿속을 스멀스멀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가 입고 있던 셔츠 속으로 내 손을 쓰윽 집어넣자, 부드럽게 때론 거칠게 내 입술을


탐하던 요한이 제 입술을 떼어 냈다.

그는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그윽하게 내려다보았다.

“……너.”

“…….”

“이런 식이라면, 나도 더 참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데.”

나는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장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제 54 화. 난 안되겠니

“조슈아 님.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온 욘두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냐! 많이 기다리지 않았어. 하지만 혼자 있는 건, 조금 심심한 일이었던 것 같아.”

입술을 귀엽게 옹알거리며 말하는 조슈아의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설령 아이를 싫어하는 이가 보아도, 공감할 감상이었다.

조슈아가 이렇게까지 사랑스럽지 않았다면, 아이조차 미워했을지도 모르겠어.


욘두는 만연한 미소를 지으며 동그란 테이블 근처로 다가갔다.

테이블 밑으로 보이는 조슈아의 다리마저도 매우 사랑스러웠다.

아이는 바닥에 닿지 않는 제 다리를 허공에 휘젓고 있었다.

“큭큭. 잊고 온 것을 가지고 왔으니, 조금 전에 끝내지 못한 수업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욘두는 기어코 소리가 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웃는 얼굴로 조슈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웅웅! 얼른 시작하자!”

조슈아는 금세 욘두에게 집중했다.

욘두는 아이에게 오늘 가르칠 것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일러주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다섯 살짜리 꼬맹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수업에 집중을 했다.

배우는 것에 큰 흥미를 느낀 듯 눈을 반짝이는 조슈아.

참으로 총명한 아이임이 틀림없었다.

아이의 총명함과 순수함은 왠지 그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욘두는 잠깐 동안 머릿속을 헤집은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쳐 냈다. 그러곤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수업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조슈아 님.”

“욘두 선생님! 오늘도 수고했어!”

그리 말한 조슈아는 앉아 있던 몸을 발딱 일으켰다. 마치 수업이 끝나기를 진즉 기다렸다는


듯이.

수업을 들을 동안 어떻게 앉아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아이의 동작은 기민했다.

“욘두 쌤! 욘두 쌤. 가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 봐. 조슈아가 보여 줄 게 있어.”

“제게요?”

“우웅! 딱 기다려 봐!”

조슈아는 작은 다리로 어디론가 총총 걸어갔다.

이내 아이가 걸음을 멈춘 곳은 어느 선반이었다.


아이는 주위에 있던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의자 위로 올라갔다. 그러곤 다소 높이가 있던 선반
위의 서랍을 열었다.

어른에게 충분히 도움을 요청할 법도 했지만, 아이는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일을 끝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욘두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조슈아는 서랍 안에서 저가 찾던 무언가를 찾은 뒤 의자에서 내려왔다.

아이는 다시금 욘두에게로 총총 걸어와 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거 봐봐. 엄청 예쁘지?”

욘두는 고개를 숙여 조슈아의 손바닥 위에 놓인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목걸이?”

그것의 정체는 목걸이였다. 붉은빛의 작은 보석이 달린 아주 예쁜 목걸이.

“조슈아 님. 웬 목걸이입니까?”

“욘두 선생님이 그랬잖아. 조슈아는 똑똑히 기억해.”

“제가 조슈아 님께 어떤 것을 말씀드렸는지, 구체적으로 물어봐도 될까요?”

조슈아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선생님이 그랬어. 영원히 기억되기 위해선 의미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고.”

욘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분명히 그런 것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과거의 기억은 바스러지기 마련이었다.

흐려지는 기억 속에서 무언가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선, 의미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절대로 잊지 않을 매개체가 필요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그런.

욘두는 불현듯이 자신의 에메랄드빛 귀걸이를 떠올렸다.

그것 또한 자신을 잊지 말아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주었던 귀걸이였다.

“네, 그렇습니다. 역시나 조슈아 님은 똑똑하시군요. 아직까지 그걸 기억하시다니.”

“헤헤. 당연하지~ 조슈아는 엄마 아들이니까.”

곧 죽어도 아빠 아들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조슈아를 보며, 욘두는 또다시 작게 키득거렸다.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엄마를 이렇게나 좋아하다니.

“이건 엄마가 나를 영원히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한 목걸이야.”


“오.”

“엄마가 이걸 볼 때마다, 이 목걸이를 채울 때마다, 나를 생각해 주는 거지! 히히.”

조슈아가 준비한 목걸이는 리키에게서 받아온 것이었다.

훗날 훌륭한 밥맛이 되면, 그 값을 세 배로 주기로 했던 목걸이라고나 해야 할까.

“욘두 선생님이 보기에는 어때? 엄마두 좋아할 것 같아? 웅?”

욘두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암요.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조슈아 님을 엄청 기특해하지 않을까요?”

“우와. 다행이다!”

조슈아는 선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정말로 미워할 수 없는 아이다. 아이가 가진 배경이 무엇이든 간에.

“그래도 다행이야. 내일 엄마의 생일인 걸, 욘두 선생님이 알려 줬으니까!”

엄마의 생일. 즉, 세나의 생일.

욘두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선 느른하게 입술을 떼어 냈다.

온화하기만 했던 그의 목소리가 일순 날카로워져 있었다.

“하지만 조슈아 님. 기억하고 계시죠? 그날을 제가 알려 드렸다는 건, 주인님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두에게도 비밀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당연하지. 조슈아는 약속을 잘 지키는 어린이야. 약속을 어기는 게 얼마나 나쁜 일인지…….


최근에 깨닫기도 했거든.”

아이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젠 약속을 어기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욘두 선생님은 나만 믿어.”

제 가슴을 팡팡 내려치며 말하는 조슈아의 기백이 가히 범상치 않았다.

욘두는 일순 풍겼던 냉기를 없앴다. 그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회답했을 뿐이었다.

“네, 그럼요. 저는 조슈아 님을 믿습니다.”

 
* * *

그날 밤엔 조금 기묘한 꿈을 꾸었다.

내 꿈속에선 깊은 잠에 빠진 여자아이 하나가 나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금발, 레이스가 앙증맞은 잠옷을 입은 여자아이.

나는 그 아이가 어린 나일 거라고 확신했다.

아이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모습 속 내 모습보다도 어려 보였다.

나는 잠든 나를 지켜보다, 이내 방 안까지 살펴보았다.

그리 넓지 않은 방 안에는 가구들이 별로 없었다. 몇 없는 가구들은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았고


낡았지만, 깨끗해 보였다.

비록 오래됐지만, 관리가 잘 된 가구들. 기시감이 가득한 풍경이었다.

잘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딸깍.

문이 열림과 동시에 얼굴이 흐릿한 성인 남녀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잠든 나를 깨웠다. 꿈속의 나는 작은 손으로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났다.

두 남녀는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어린 나는 잠에서 덜 깬 채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성인의 보폭을 따라 잡으려는 나의 걸음걸이가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나는 넘어지지 않으며


그들의 걸음을 곧잘 따라갔다. 아버지를 뒤따르던 내 걸음이 잠깐 생각났다.

이내 그들의 걸음이 멈춘 곳은 주방이었다.

걸음을 멈추기가 무섭게 어두웠던 주방의 불이 켜지고, 밝아진 사위로 케이크를 든 어느 시녀


하나가 튀어 나왔다.

생일인 걸까.

나를 깨웠던 남녀 중, 남자가 내 몸을 안아 들었다. 그는 나를 익숙하게 안고선, 내 귓가에


속삭였다.

‘생일을 축하한단다.’
박수 소리, 생일을 축하한다는 소리, 희미한 음악 소리……. 여러 소리들이 귓가에 뒤섞여서
들렸다.

어린 나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케이크 위를 밝힌 초들을 하나씩 껐다.

“……하.”

꿈은 그게 끝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요한의 저택 속 내 방의 익숙한 벽지가 보였다.

나는 기다랗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곤 손을 뻗어 그 크기를 확인해 보았다.

꿈에서 본 조막만 한 손은 사라진 후였다. 손가락이 시원스럽게 뻗은 지금의 내 손이 시야에


맺힐 뿐이었다.

오늘 꾼 꿈 또한 내가 잊은 기억 중 하나인 걸까?

그것이 내 기억 속 한 장면이 맞는다면, 나는 어렸을 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게 분명했다.

내 생일을 축하해 주던 사람들이 엄청 많았으니까.

나를 축하해 주던 꽤 많은 사람은 모두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속에선 미움이니, 질투니, 증오니 하는 부정적인 감정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를 깨웠던 얼굴이 흐릿한 두 사람은 나의 부모님이었던 걸까?

“……깼어?”

나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언제 깼을지 모를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네, 깼어요.”

더 참을 수 있을지 감당할 수 없다던 요한은 결국 내 침대에서 밤을 보낸 터였다.

분명 눈을 맞추고 있었는데, 내 시선은 자꾸만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의 상체 쪽으로 자꾸만 눈이 간단 말이다.

나는 티 나지 않을 정도로만 시선을 내려 그의 몸을 감상했다.

어젯밤에 보았어도 훌륭했던 그의 몸은, 오늘 아침에도 여봐란듯이 훌륭했다.

내가 늘 탐냈던 그의 쇄골은 오늘도 탐이 나고.

“악몽을 꿨어? 얼굴이 좋지 않네.”

다행히 요한은 내 시선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가슴팍을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금 들어 올렸다.

“꿈을 꿨거든요.”

“무슨 꿈?”

“생일과 관련된 꿈이랄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는데, 돌연 돌아온 것은 요한의 탄식이었다.

“……아.”

내가 악몽을 꾼 것은 아닌지 걱정하던 그에게 수심이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그 수심은 악몽을 꾼 내 사정 때문에 깊어진 것은 아닌 듯했다.

그의 시름이 깊어지게 한 원인은 아마 내가 말한 ‘생일’이라는 단어 때문이리라.

“왜요? 설마 이맘때쯤에 세나 씨도 생일인 거예요?”

“…….”

요한의 대답은 침묵이었다.

침묵이 긍정을 뜻한다는 것은 이미 과거에도 숱하게 많이 겪은 바였다.

“맞나 보네.”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뱉었다.

“요한 씨.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말해 봐요. 세나 씨의 생일이 언제예요?”

“……오늘.”

“네? 오늘이라고요?”

“어. 잠깐 잊고 있었는데, 네 덕에 방금 떠올랐어.”

세나의 생일날, 생일과 관련된 꿈을 꾼 나.

이것 또한 지나친 우연인 걸까?

“넌 네 생일이 언젠지 기억나?”

“기억을 잃고 헤맨 방랑자 미인 거지에게 뭘 바라는 거예요.”

“아 참. 넌 그런 사람이었지.”

요한은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이마를 짚었다.


“요한 씨. 당신도 저에 대해서 잊은 거예요? 기억은 제가 잃었는데, 도리어 당신이 제 사정을
기억하지 못하다니.”

“……니까.”

그는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요한의 얼굴은 뭐랄까.

아주 민망하고도 부끄러운 말을 내뱉은 듯한 얼굴이랄까. 어쭙잖은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너무 작은 소리여서, 나는 제대로 듣지 못한걸.

“뭐라고 했어요? 다시 말해 줘요.”

당신의 고백을 똑똑히 듣고 싶어.

그는 몇 차례의 헛기침으로 제 목소리를 골라냈다.

기합을 넣은 그는, 이내 내리깐 시선마저도 들어 올렸다.

“내가 기억하는 건, 기억을 잃은 미인 거지가 아니라…….”

“…….”

“내 앞에서 예쁜 미소를 짓는 리나 너니까……. 흠흠.”

어쩜. 그렇게 예쁜 말을 하면,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게요.

나는 얼굴을 조금 들어 올려, 요한의 입술 위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멋진 말이었어요.”

* * *

요한은 어제 오후에 하지 못한 일을 처리하러 갔다.

한가한 오전, 바쁜 요한과 욘두에게 수업을 듣고 있을 조슈아. 결론적으로 나는 매우 심심했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어제 요한과 함께 읽었던 세나의 일기장을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그것을 하나하나 차근히 읽어 가며, 나는 다시금 내 기억의 파편 하나가 떠오르기를 바랐다.

하지만 두 번을 읽고, 세 번을 읽어도 떠오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 좀 더 떠올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때에 문득 떠오른 것은 바비가 남긴 말이었다.

‘이 귀걸이. 어쩌면 네가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된 물건일지도 몰라.’

귀걸이, 세나의 일기장, 그리고 익숙하게 욘두의 집에 들락거리던 바비.

욘두와 바비는 세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으윽. 너무 어렵다.”

욘두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지 바비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지, 나는 잘 가늠할 수 없었다.

내가 세나에 대해 묻는다고 해서, 그들이 솔직한 대답을 해 주리라 장담할 수도 없었다.

‘내가 한 말이 궁금하다면, 나를 직접 찾아와. 나는 언제나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바비는 수수께끼 같은 자신의 말이 궁금하다면, 직접 찾아오라고 했다.

바비, 그런데 그거 알아?

넌 내가 어디로 찾아가야 할지 말해 주지도 않았어.

“……바보.”

그날 보았던 바비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 조급해 보였고, 그렇기에 장소를 얘기하는 걸 깜빡한
듯했다.

“아 참. 밥맛한테 귀걸이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네.”

요한이 일을 끝내고 돌아온다면, 바비가 말한 귀걸이에 대한 것도 상의 해야겠다— 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문 안 잠그고 있는 건 여전하네.”

잠겨 있지 않은 문을 스스럼없이 열고 들어온 이가 있었다.

나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바비?”

너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네가 딱 내 눈앞에 등장해 주다니.

“잘생긴 쥐새끼의 재등장. 큭큭.”

그는 저가 말하고도 웃겼던 것인지 작게 키득거렸다.

그러고선 방 안으로 완전히 들어와 열었던 문을 닫았다.

딸깍.
그는 나와는 다르게 방문을 단번에 잠가 버리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어디서 만날지……. 내가 장소를 얘기 안 했더라고.”

바비는 한 걸음 두 걸음 내게 걸어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영문 없이 긴장되었다.

그를 알게 된 이래로 이렇게까지 긴장됐던 적이 있던가.

“나도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하던 중이었어. ……그런데 문은 왜 잠근 거야?”

나는 자연스럽게 물으며, 조금 전까지 보던 세나의 일기장을 잽싸게 이불 밑으로 숨겼다.

바비에게 들켜선 안 될 것 같아.

이내 침대 맡까지 다가온 바비는 침대 모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며칠 전과 똑같은 구도였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니까. 공작저엔 여러모로 방해꾼이 많아. 오늘은 아무도 방해하지
말았으면 해.”

며칠 전에는 요한이 와서 바비를 말려 주었지만, 오늘은 과연 어떨까.

나는 꽉 잠긴 문 쪽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바비. 나는 네가 나쁜 마음을 먹지 않을 사람이란 걸 알아.”

시선을 돌려, 마주 본 바비의 얼굴이 그전보다 훨씬 더 해쓱해져 있었다.

바다를 연상하게 했던 바비의 푸른 눈동자마저도 어쩐지 탁한 빛을 띠고 있었다.

볼 때마다 앙상해지는 그의 얼굴이 약간은 안쓰러웠다.

이제 그가 나를 그만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무서워?”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내 대답에 바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무서워하지 마. 나 마음 아파. 세상 무서울 거 없는 너잖아.”

“……바비.”

“그런 네게, 내가 처음으로 무서운 존재가 되는 건 싫어. 정말 싫다.”

그렇게 만든 건 너라는 걸, 왜 넌 모르는 거야?


“귀걸이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네가 나를 보고 웃어 주고, 나와 눈을 맞춰 주고, 나와
즐겁게 대화를 나눠 주고, 그리고 공작저를 떠나 준다면……. 내가 알고 있는 걸 모두 알려
줄게. 거기엔 분명 네가 지금까지 고뇌했던 사실에 대한 해답이 있을 거야.”

바비는 애원하는 듯 부탁하는 듯 말했다.

“……리나.”

“응.”

“난…… 정말로 안 되겠어?”

제 55 화. 나는 너만 있으면 돼

바비의 고백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게 흘러나왔다.

처음이 아니기에 그런 것일까.

“나는 너와 친구로 남고 싶어.”

바비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좋다 싫다, 이분법적으로 나누자면, 나는 그가 좋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긴장감이 없는 좋아함이었다. 나는 그를 지극히 친구로서 좋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요한을 좋아했다.

요한에게 느끼는 건 지극히 이성적인 긴장감을 내포한 감정이었다.

그의 예쁜 손을 볼 때마다 그 손등과 손끝에 모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셔츠


사이로 설핏 드러난 그의 몸을 볼 때마다 나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러다가 정말로 조슈아의 동생이라도 생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다.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고작 며칠 전에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깨달은 날이 오래되고, 그렇지 않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결국 나는 요한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고,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거고,


요한 또한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좋아하는 상대방을 만지고 싶은 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전 날, 사랑했던 그의 벨트를 가만두지 않았던 것처럼…….

내가 제 벨트에 손을 얹을 때마다, 소스라치게 기겁하며 얼굴을 붉히던 그 남자.

“…….”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른 사고는 내게 새로운 과거의 일부분을 들추어냈다.

‘내겐 과거에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다.’

볼 때마다 만지고 싶었던 사랑스러운 남자가 존재했던 것 같다.

그는 요한이었던 걸까?

아님, 또 다른 남자인 걸까.

“……역시나 안 되는 거구나.”

바비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로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바라본 그는, 제 손톱 끝으로 다른 손가락의 손톱 위를 짓이기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짓이긴 것인지, 짓이겨진 손톱 위가 불그스름해졌다.

조만간 살이 터지고, 붉은 피가 맺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손톱을 짓이기는 버릇. 오랜만에 보네.

생각해 보니, 바비는 무언가 제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손톱을 세게 짓이기곤 했었다.


그것은 아주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나는 바비에게 그러지 말라고 두어 번 정도 닦달을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후부터


지금까지 그는 줄곧 손톱을 짓이기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내 말이 가지는 파급력이 지대했던 것이다.

바비는 내가 싫어하는 행동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싫어할 만한 행동 또한 하지


않았다.

그는 노력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 마음을 얻기 위해. 우리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지금은 얼마나 초조하기에, 하지 않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제 버릇을 드러낸 걸까.

나는 어쩐지 그에게 애달픈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포기 안 해.”

“끈질겨. 이렇게까지 나를 놓지 못하는 이유가 뭐야?”


“해 볼 만큼 해 보지 않고 포기한다면……. 영영 후회할 것 같아서.”

“그만큼 나를 사랑해?”

바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사랑해.”

누군가의 고백에 두근거리는 것보다도 왠지 슬픈 감상이 드는 건, 바비가 처음일 게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바비의 마음을 더 받아 줄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나는 요한과


조슈아를 더욱 좋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일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렇게 되리란 것을 직감했다.

사랑해라는 애달픈 고백을 내뱉는 바비의 얼굴을 보며, 나는 요한만을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요한이 내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면……. 내 심장은 얼마나 두근거릴까.

바비를 보면서, 요한을 떠올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것은 바비에게 늘 미안한 일이었다.

“……미안해.”

네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어.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사과했다.

“사랑한다는 내 고백이…… 너를 불편하게 만든 거라면, 나야말로 미안해. 하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네가 영원히 모를 것 같아서.”

토하듯 진심을 내뱉은 그는 자신의 얼굴에 마른세수를 했다. 바비의 얼굴이 괴로워 보이기만
했다.

전해지지 않는 진심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 나는 그 기분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축 처진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어 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는 것이 옳은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이제 확실히 요한을 좋아해.”

대신 나는 확실한 내 마음을 전하였다. 바비가 그러했듯이.

“네 말대로, 말하지 않으면 너도 내 마음을 제대로 모를 테니까.”

“…….”
“그러니까 바비.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목매지 말고, 너도 너 좋다는 사람을 만나.
그럼 너는 행복해질 거야.”

지금처럼 네 얼굴이 해쓱해지지는 않을 거야.

나는 바비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 주고 싶었다.

내 말에 돌아온 것은 바비의 허탈한 웃음이었다.

“하, 하하.”

“…….”

그는 웃던 것을 멈추고선 나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죽은 자의 눈처럼 광채를 잃은 것처럼 보였던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날 선 빛을 띠고 있었다.


어느 틈에 생겼을지 모를 강한 열기였다.

“이런 말까지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온 김에 나도 끝까지 털어놔 볼게.”

“무슨 말을 털어놓겠다는 거야?”

바비는 후, 하고 짧게 숨을 골라냈다.

“털어놓을지 말지를 수백 번 고민했어.”

“…….”

“이런 말을 하면서까지 네 마음을 얻고 싶었던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느껴.”

“……바비.”

“그렇다면 나도 최후의 수단을 내어놓아야지.”

바비는 작게 조소를 지었다. 그가 꺼낼 말이 아주 의미심장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무슨 말을 꺼내려는 걸까.

바비는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설마……. 잃어버린 내 기억과 관련이 있는 일인 걸까?

이윽고 조소를 띠고 있던 그의 입술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넌 쌍둥이야.”

쌍둥이. 그간 숱하게 많은 고민 속에 늘 존재했던 그 단어.

나는 세나와 내가 쌍둥이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수어 번 했었다.


그리고 바비는 확고하게 말했다.

“넌 세나와 쌍둥이라고.”

“……!”

 
세나와 내가 쌍둥이라니.

바비의 푸른 눈동자 속 열기가 더해져 있었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입술을 조금 벌린 채 미간을 찌푸렸을 뿐이었다.

그것은 줄곧 의심해 왔던 일에 대한 해답이었지만, 나는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진실이 가지는 무게를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걸까.

너무도 갑작스럽게 불어 닥친 진실에 나는 얼이 빠졌다.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바비가 폭력적인 빛을 내비쳤을 때보다도, 그가 내게 고백을 했을 때보다도, 내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사실이야?”

겨우 내뱉은 말은, 그 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럼에도 심장의 떨림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도리어 제 세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요한과 사랑했고, 결혼했던 세나는 네 쌍둥이 언니였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믿고 싶지 않다면 믿지 마. 하지만 나는 네게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는 걸 맹세해.”

나는 바비를 꼼꼼히 바라보았다.

나는 지난날처럼 바비의 얼굴에 거짓의 기운이 스며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다.

바비는 거짓말을 할 때 얼굴에 드러나는 편이고,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도 진중해 보여서, 그가 한 말이 모조리 ‘진실’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정도였다.

바비의 말은 이어졌다.

“넌 네 쌍둥이 언니가 사랑했던 남자와 만날 수 있어?”

세나가 사랑했던 요한.

“넌 네 쌍둥이 언니가 낳은 아이의 엄마로 평생 살 수 있어?”

세나가 낳은 조슈아.

“네가 기어코 요한과 잘 돼서 공작저에 살게 된다면, 밖으로 함부로 돌아다니지도 못할 거야.”

“…….”

“왜냐면 너는 세나를 지독하게 닮았으니까. 세나는 대외활동을 즐겨하지는 않았지만, 웬만한


귀족들은 세나의 얼굴을 다 알아. 그들에게 너는 어떻게 비칠까? 사람들은 요한을 어떻게
생각할까?”

공작부인이었던 세나.

그리고 그녀의 얼굴과 사정을 아는 귀족들.

“죽은 여자를 못 잊어서, 얼굴이 닮은 여자를 곁에 뒀다고 손가락질하겠지. 누군가는 어쩌면


요한을 소름 끼치게 생각할지도 몰라. 꼭두각시를 세워 둔 남자—, 로 취급할지도.”

나는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따지고 싶었지만, 그의 말에 틀린 점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나는 먼 미래까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당장의 감정만을 헤아렸을 뿐이었다.

요한이 나를 좋아하고, 조슈아가 나를 좋아하고, 내가 그 부자를 좋아하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벌어진 입술 사이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나는 정말로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설령 너희들이 진심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너희의 사랑을 좀처럼 믿어 주지 않을 거야.”

“…….”

“넌 그런 걸 모두 견뎌 낼 수 있어?”

“…….”

“너뿐만이 아니라, 요한, 조슈아에게도 향할 손가락질을 견딜 수 있어?”


바비는 잔인할 정도로 나를 몰아붙였다.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나를 잊어 달라는 말을 잔인하게 내뱉었던 내가 무색할 정도였다.

잔인함의 정도를 따지자면 바비 쪽이 훨씬 더 잔인했다.

모진 말을 내뱉은 바비는 내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섭고, 냉정한 얼굴.

나를 향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던 그의 눈초리의 끝이 매섭게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넌, 내가 알던 바비가 아닌 것 같아.

“리나.”

무서운 얼굴로 나를 몰아세웠던 바비는 뒤늦게 제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그러곤 그는 대답


없는 내 이름을 재차 불렀다.

“리나.”

나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응.”

“나는 적어도 네가 그런 일을 겪게 만들지 않을 거야.”

바비는 유혹의 기미가 가득 찬 목소리로 나를 꾀어냈다.

“네가 원한다면 모든 걸 버리고 이곳과 먼 곳으로 가도 상관없어. 네 얼굴을 아무도 모르는


그런 곳으로. 요한이 절대로 찾아올 수 없는 곳으로.”

“…….”

“나는 너만 있으면 돼.”

그는 조금 더 나와 진득하게 눈을 맞추었다. 나는 내게 닿은 바비의 눈동자를 피할 수 없었다.

바비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이며 입가 또한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것은 명백한 미소였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미소.

보조개가 예쁘게 들어가는 그의 미소가 늘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본 그의 미소는


왠지 모를 섬뜩함을 안겨 주었다.

그 순간 바비의 손이 슬금슬금 다가와, 이불 위에 얹힌 내 손을 쥐어 잡았다. 강압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스킨십이었다.

하지만 팔뚝에 소름이 돋는 이유는 무엇일까.


“네가 내 손만 잡아 주면 돼.”

“…….”

“내 마음 좀 제발 알아주라.”

최후의 보루를 꺼내 놓은 바비.

달콤한 말에 밴 충격적인 진실.

나는 바비의 말을 온전히 믿어야 하는 걸까?

아니,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걸까.

* * *

놀랍게도 바비는 그대로 돌아갔다. 군더더기 없는 말끔한 퇴장이었다.

‘대답, 기다리고 있을게.’

그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나는 소파에 앉은 채로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든 여러 사실에 머리가 지독하게 아파 왔다.

이럴 때 요한이 매번 준비해 주었던 어지럼증에 좋은 차를 마시면 딱일 텐데.

나는 그 차가 조금은 그리웠다.

하지만 누군가를 시켜서, 혹은 내가 나서서 차를 마시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온몸의 기력이 송두리째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차를 마시는 대신에, 나는 바비의 말을 끊임없이 곱씹었다.

‘넌 세나와 쌍둥이라고.’

바비의 말대로 세나와 내가 쌍둥이가 맞고, 요한이 사랑했던 사람이 그녀였고, 조슈아를 낳은
사람 또한 그녀였다면…….

세나의 일기에 쓰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설마 바뀐 필체 주인, 즉 은연중에 조슈아를 싫어하는 듯한 빛을 내비쳤던 글을 쓴 사람의


정체가 ‘나’였던 걸까?

“말도 안 돼.”
나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조슈아를 처음 봤을 때를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조슈아를 얼마나 예뻐했는데. 우리 밥줄 예쁜이의 볼따구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아이의 탐스러운 볼을 만지는 것에 얼마나 큰 희열을 느꼈는데.

그런 내가 조슈아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런 내가 아기 조슈아가 더럽게 무겁다는 불평을 했다고?

아무리 기억이 없거니와, 내가 과거에 그런 생각을 했을 리는 없다고 여겼다. 도리어 나는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조슈아를 아주 끔찍하게 예뻐했을 것이다.

살이 오른 아이의 손이며, 팔뚝이며, 여기저기에 입술을 쪽쪽 맞추었을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요한과 나의 추측이 잘못된 것일까?

중간에 사람이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그 추측.

나는 바비의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믿어야 할지 잘 가늠할 수 없었다.

그 말의 출처가 누구인지 매우 궁금하기도 했다.

바비는 요한도 모르는 정보를 어떤 경로로 알게 된 걸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남긴 말 중에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존재했다.

‘설령 너희들이 진심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너희의 사랑을 좀처럼 믿어 주지 않을 거야.’

그의 말이 맞았다.

세나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 중 우리를 고깝게 보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물론 나는 타인의 시선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남들이 뭐라 하든, 설령 그것이 엄청 나쁜 말이라도, 내가 아니면 된다고 생각했다. 뒤에서


떠드는 추잡한 소문 따위엔 휘둘리지 않았다.

나만 떳떳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요한과 조슈아는 달랐다.

나 때문에 그들까지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면…….

나는 그러한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

누군가의 손가락질과 경멸어린 시선을 받은 조슈아가 울게 된다면.


“…….”

나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신들이 뭘 안다고 조슈아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거야.

“하……. 어떻게 해야 좋은 걸까.”

내뱉은 한숨엔 시름이 깊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누구야?”

요한인 걸까?

하지만 방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요한의 것보다 훨씬 더 귀여운 것이었다.

“엄마! 조슈아가 왔어!”

사랑스러운 조슈아. 나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제 56 화. 조슈아도 엄마 거야

문을 활짝 열어 주자 어제보다 조금 자란 듯한 조슈아가 보였다. 아이는 손을 수평으로 활짝


벌리며 내게 답을 구했다.

“엄마! 조슈아가 보고 싶었어?”

내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그럼요. 얼마나 보고 싶었게요. 오구오구. 어서 들어와.”

“웅웅!”

조슈아는 제법 늠름하게 걸어왔다. 아이 주제에 너무도 씩씩하게 걷는 그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오늘따라 조슈아가 늠름하게 느껴진 이유에는, 아이가 입은 옷차림의 여파도 있는 듯했다.

평소에도 손에 물 한 번 묻히지 않을 법한 도련님처럼 입는 조슈아였지만, 오늘의 조슈아는


뭐랄까. 왠지 꼬마 신랑처럼 보였다.
조슈아는 검은빛의 꼬마용 쓰리피스를 갖춰 입은 채였다.

우리 꼬맹이가 오늘 중요한 모임이 있었던가.

나는 요한과 조슈아의 스케줄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요한에게서 오늘 대외 행사에 참여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나는 조슈아를 소파 위에 앉히고선, 아이의 탐스러운 볼을 잡아 쭉 늘어뜨렸다. 아주 살살


잡았으니, 아프지는 않을 테다.

“조슈아. 벨라에게 다과를 부탁하러 갔다 올게. 여기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 줄래?”

조슈아가 좋아하는 초코시럽이 가득 올려진 과자를 가져와야지.

“아, 아니!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가지 마, 엄마.”

“해야 할 일?”

나는 잡고 있던 아이의 볼을 놓아주었다.

조슈아의 얼굴이 비장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이에 걸맞은 해맑은 미소를 짓던 조슈아의 얼굴은, 삽시간 꽤나 어른 같은 얼굴로 변모했다.

아니, 어른 같은 얼굴을 따라했다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눈가를 조금 굳히며, 미소의 기운을 완전히 몰아냈다.

섬세하게 빚어진 아이의 붉은 입술은 굳게 닫히며, 아이는 소파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휴, 하는 짧은 심호흡을 한 조슈아는 약간은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슈아?”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왜 이렇게 진지해?

이윽고 조슈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내게 올곧이 향했다. 아이는 제 재킷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멋스러운 케이스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반지 케이스와 비슷한 크기의 케이스였다.

……웬 케이스?

조슈아는 그것을 소중한 것인 양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작고 오동통한 조슈아의 손의 크기와


케이스의 크기가 비등했다.

“엄마. 조슈아의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아이는 내 쪽으로 케이스를 쓰윽 들이밀었다.


“……이거 설마 나 주는 거야?”

오늘 무슨 날인가. 웬 선물인 거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세나 씨의 생일이 언제예요?’

‘……오늘.’

요한은 세나의 생일이 오늘이라고 했다. 조슈아는 세나의 기억을 알고 있었던 걸까?

“응, 엄마 거야.”

“조슈아…….”

“얼른 받아 줘!”

나는 얼결에 아이가 건넨 케이스를 건네받았다.

내가 이걸 받아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차마 케이스를 열어보지 못했을 때, 조슈아는 부끄러운 듯이 제 몸을 배배 꼬며 고백했다.

“그리고 조슈아도 엄마 거야.”

맙소사. 이토록 귀엽고 완벽한 고백이라니.

나는 자세를 낮추어 아이의 양 뺨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고마워, 조슈아. 넌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워?”

“헤헤. 그거야 사랑받고 싶으니까.”

조슈아는 가까이 닿은 내 얼굴의 입술 위에 쪽 소리 나게 입술을 맞대었다.

“엄마! 생일 축하해!”

“……고마워.”

가까스로 대답하기는 했지만, 내겐 조금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세나인 척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고, 세나를 대신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세나의 생일을


챙겨 받는 나.

바비의 말이 진실이라면, 내 생일 또한 오늘인 걸까?

조슈아의 기특한 행동에 만연한 미소를 짓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입가가 딱딱하게 굳은 듯한


느낌이었다. 조금 전에 다녀간 바비가 남긴 말 때문이었다.
그사이, 조슈아의 말은 이어졌다.

“아빠가 그랬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꼭 멋있게 입어야 한다고. 엄마 생일은 엄청~ 중요한


날이니까, 조슈아도 훌륭한 밥맛처럼 입고 왔어.”

아이는 그러한 행동을 한 저가 자랑스러운 양어깨를 으쓱거렸다.

“엄마, 나 어때? 나 멋있어? 나 훌륭한 밥맛 같아?”

심각해졌던 게 무색했다.

훌륭한 밥맛 같으냐는 아이의 말에 나는 푸흣, 하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내가 정반대로 알려 준 뜻 덕에 생긴 조슈아의 이상한 장래희망. 훌륭한 밥맛.

나는 킥킥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본래의 뜻은 언제 알려 주는 게 좋을까.

아이가 훌륭한 밥맛이 되기를 심각할 정도로 바라기 전에. 그전에 알려 주어야 할 텐데.

나는 늦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응. 조슈아 너, 지금 완전 훌륭한 밥맛 같아. 너희 아빠를 넘어설 정도란다.”

“휴. 다행이다.”

아이는 작은 가슴팍이 눈에 띄게 오르내릴 만큼의 큰 심호흡을 했다.

“이제 얼른 열어 보자!”

조슈아의 말에 따라, 나는 아이가 건네준 케이스를 열었다.

그러자 보인 것은 목걸이였다.

가운데에 붉은빛의 작은 보석이 달린 예쁜 목걸이.

“우와. 이런 걸 어디서 구했어?”

“그건 비밀이야. 어때? 마음에 들어?”

“……응. 너무 마음에 들어. 매기 아까울 정도로 너무 예뻐.”

조슈아는 물개 박수를 몇 차례 치며 아주 좋아했다.

“엄마가 좋아해 주니까, 조슈아도 기뻐. 엄청 기뻐!”

나는 아이를 내 품에 꼭 안아 주었다. 그러곤 연하디연한 아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까이 닿은 아이에게선 뽀송뽀송한 냄새가 났다.
“조슈아. 정말로 고마워. 네가 준 목걸이를 소중히 할게.”

과거의 나는, 이런 조슈아를 정말로 미워했을까?

고물고물한 아이의 손이 내 등을 꼭 감싸는 게 느껴졌다. 조슈아는 그렇게 내게 한참 동안


안겨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묘한 평온함을 느꼈다.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이 연거푸 벌어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일들이 모조리 해결된


듯한 기분이었다.

아이의 품이 너무도 따스해서, 왠지 코끝이 찡해질 정도였다.

내 몸의 반 정도밖에 오지 않는 아주 작은 어린아이의 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아빠한테 가자.”

나는 몇 분간 소중히 안고 있었던 조슈아를 놓아주었다. 바라본 아이의 얼굴은 여전히 결연한


빛을 띠고 있었다.

왠지 어른스러운 얼굴. 요한의 얼굴과 꽤나 닮아 보이기도 했다.

“응? 갑자기 웬 요한?”

나는 의문을 표했다.

“예전에 아빠한테 들은 적이 있어.”

나는 잘 듣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마주 본 조슈아의 말은 이어졌다.

“아빠는 엄마의 생일 때마다 피아노를 쳐 줬대. 엄마는 아빠의 연주 소리에 따라서 춤을 추구~!
조슈아는 아빠의 얘기를 들으면서 항상 상상만 했어.”

“…….”

“하지만 오늘은 진짜로 보자! 아빠한테 피아노를 연주해 달라고 하고, 엄마는 춤을 추자!
조슈아가 엄마의 파트너가 되어 줄게.”

주저가 되었다는 게, 솔직한 마음일 것이다.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닌 세나의 생일이었으니까.

내게서 망설이는 빛을 읽은 조슈아는 얼른 내 손을 낚아챘다.

“얼른, 얼른.”

매번 느끼는 것이었지만, 아이는 가끔 지나치게 눈치가 좋을 때가 있었다.


조슈아는 재촉하는 말을 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다. 아이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내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었다.

‘조슈아가 이렇게나 바라는데, 엄마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거야?’

내게 닿은 조슈아의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그리 말하는 듯했다.

결국 백기를 든 쪽은 나였다.

“……그래. 일단은 가 보자.”

요한이 피아노를 쳐 줄지는 의문이지만.

* * *

요한은 집무실에 있었다.

그는 한창 일하는 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우리를 보고 한껏 놀란 얼굴을 했다.

“두 사람이 여기엔 어쩐 일이야?”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대범하게 앞장선 이는 조슈아였다.

“아빠, 뭐 해! 오늘 엄마의 생일이잖아. 얼른 피아노 치러 가자!”

엄마의 생일, 이라는 말에 요한의 얼굴이 삽시간 굳어졌다. 그는 할 말을 잃은 듯한 얼굴로


나와 조슈아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나는 요한이 왜 그런 얼굴을 했는지가 궁금했다.

조슈아가 과거의 일을 들추었기 때문에 그런 걸까?

요한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아이는 그가 앉아 있던 의자로 쪼르륵 뛰어갔다. 그러고선


그의 바지자락을 쥐어 잡았다.

“……싫어?”

으윽. 저건 조슈아의 눈빛 공격임이 분명했다.

저를 싫어하는 이의 마음마저도 단번에 함락시킬 수 있는 굉장한 눈빛.

바다를 닮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한껏 반짝이고 있을 게다.


나는 장담했다. 요한은 저 눈빛에 못 당해낼 거라고.

그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항복을 할 것임이 자명했다. 그리고 그가 항복하는 데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과연, 내 예상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듯했다.

“……알겠어.”

요한은 한숨이 밴 목소리로 나지막이 대답했다.

“우와! 그럼 피아노를 쳐 주는 거지?”

“어. 조쉬가 이렇게나 원한다는데…… 아빠가 어떻게 들어주지 않을 수가 있겠어.”

“히히. 아빠! 엄마 다음으로 좋아해.”

조슈아의 반 토막자리 고백에 요한은 헛웃음을 흘렸다.

“리나. 네가 홀린 건 나뿐만이 아닌가 봐.”

* * *

“아깐 왜 표정을 굳힌 거예요?”

나는 검은빛의 피아노를 조율 중인 요한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요한은 뒤를 힐끔 바라보며


소파에 앉은 조슈아의 동태를 확인했다.

그러곤 아이에게 들리지 않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나의 생일이 언제인지 조쉬에게 말해 준 적이 없거든.”

“네? 그럼 조슈아가 오늘이 그날인지 어떻게 안 거예요?”

“나도 모르지. 몰랐으니까 놀란 거 아냐.”

“조슈아가 오늘 제게 선물도 줬어요.”

흰색의 건반 하나를 눌러 보던 요한은 놀란 듯이 되물었다.

“뭐?”

“선물을 미리 준비해 왔다는 말이에요.”

“조쉬가 그런 걸 어떻게 준비해 온 거지?”


“저도 그 사정은 잘 모르겠는데…… 선물을 준비해 왔다는 건, 이전부터 이미 세나 씨의
생일이 언젠지 알고 있다는 소리가 아닐까요?”

그는 고개를 작게 갸웃거렸다.

“……바비가 알려 준 건가.”

그 순간, 조슈아의 목소리가 울리면서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났다.

“엄마, 아빠, 뭐해? 조슈아만 빼놓고 비밀 얘기를 하는 거야?”

“아,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있겠어.”

“나중에 조쉬가 없을 때 다시 얘기해. 일단은 연주부터.”

조율이 끝난 듯한 요한은 본격적으로 연주를 하려는 듯 셔츠를 걷어붙였다.

올라간 셔츠 밑으로 그의 희고 단단한 팔뚝이 눈에 띄었다. 지난밤 나를 꽉 안아 주었던


듬직한 팔이었다.

그는 듬직한 팔과는 어울리지 않는 길고 매끄러운 손가락으로 건반을 순서대로 눌러 보았다.

오랫동안 조율을 하지 않은 거라고 믿기지 않게, 건반에서 울리는 소리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그는 얼마나 오랜만에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 걸까.

나는 오래전, 내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올랐던 어린 요한과 그가 치던 피아노 선율을 떠올렸다.

녹턴.

그가 늘 치던 그 곡. 음악을 질색했던 내가 유일하게 즐겨 듣던 그 곡.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것이었던 그 곡.

나는 그날 그런 것들을 떠올렸었다.

환상이 아닌, 실제로 듣는 그의 녹턴은 어떠할까?

요한이 녹턴을 칠거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가 그 곡을 연주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아니, 그것은 예감을 뛰어넘은 확신이었다.

나는 조슈아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 한 곡 들어 보고, 그 다음에 같이 춤을 출까?”

“웅! 조슈아는 엄마와 함께라면 뭐든 좋아.”


“귀여운 것.”

이내 요한의 연주가 시작됐다.

나는 첫 음이 울리자마자 연주곡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어쩐지 애달픈 감상을 주는 그 곡.

“……녹턴.”

나는 피아노의 건반을 차례대로 누르는 요한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연주하는 그의


얼굴은 매우 진지해 보였다.

그는 신중하게 건반 하나하나를 눌러 가며, 아름다운 선율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은 비단 선율 하나만이 아니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내비치고 있었다.

새삼 그에게 반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나는 요한에게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내 옆에 조슈아가 앉아 있다는 사실마저도 깜빡


잊을 만큼의 대단한 집중이었다.

 
요한은 세나가 죽은 후엔 피아노를 한 번도 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지금 어떠한 마음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 걸까.

녹턴을 연주하며 그가 떠올리고 있을 사람은 누구일까.

그것은 나일까. 이미 죽어 풍화된 육체를 가진 세나일까.

연주는 이내 클라이맥스에 다다랐고, 요한은 페달을 무겁게 밟았다.

나는 그에게서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론 바비의 말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너뿐만이 아니라, 요한, 조슈아에게도 향할 손가락질을 견딜 수 있어?’

나는 이 사랑스러운 부자 곁에 계속 있어도 괜찮은 걸까?

나라는 존재가 이들에게 상처를 준다면. 나 때문에 이들이 슬퍼진다면.

사랑해서 이별을 한다는 말을 예전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하는데, 왜 구태여 이별을 해야 하는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 말을 조금 이해할 성도 싶었다.


내가 이들을 사랑하는 만큼, 이들 또한 나로 인해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내가 이들의 곁을 떠나는 게, 도리어 이들이 행복해지는 일이라면.

“……어때?”

깨달았을 땐, 요한의 황홀한 연주가 끝이 나 있었다.

그는 나와 조슈아를 바라보고선, 한껏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내 연주 죽여주지? 나 멋있지? 반할 것 같지?

그의 눈빛엔 그런 의미가 새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조슈아는 이미 엄청난 박수 세례를 퍼붓고 있었다.

“아빠! 너무 너무 멋있어! 조슈아도 쳐 볼래! 가르쳐 줘.”

아이는 정말로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이윽고 요한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는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는 듯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뒤늦게 대답해 주었다.

“멋졌어요. 재주를 썩히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하하. 이제 와 털어놓는 거지만, 나는 못 하는 게 없어.”

저 밥맛스러운 면모가 아주 훌륭하게 유지되는 게 자못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는 성의 없이 대답했다.

“네에, 네에.”

“또…… 듣고 싶은 게 있어?”

또 듣고 싶은 음악이라.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겐 녹턴 말고는 그다지 듣고 싶은 음악이 없었다.

마치 내가 떠올린 그때의 그 말처럼.

음악을 질색했던 내가 유일하게 듣는 건 ‘녹턴’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처럼.

제 57 화. 얼굴이 예쁜 여자
행복한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건, 누구나 바라는 것일 테다.

나는 보랏빛 카펫 위에 사뿐사뿐 발을 내딛는 조슈아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는 다섯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훌륭한 춤 솜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팔을 뻗는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었으며, 발을 내딛는 동작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요한은 피아노를 치면서도 춤추는 조슈아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는 화사한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아주 행복해 보였다. 불행이라는 것이 전혀 다가오지 못할 정도로.

또 듣고 싶은 곡이 없느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잘 모르겠어요. 애당초 아는 곡이 별로


없는걸요.’라고 대답한 터였다.

그리하여 요한이 직접 선곡하여 친 곡은 제법 빠르고 경쾌한 곡이었다. 춤을 위한


선곡이라고나 할까.

빠른 곡조가 울리기 무섭게 조슈아는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제 춤사위를 뽐내기 시작했다.

녹턴을 쳤던 것 못지않은 매우 유려한 요한의 피아노 솜씨. 그리고 신이 난 듯 카펫 위를


날아다니는 조슈아.

행복하다—, 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의 행복함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근래에 들어서 느낀 행복 중에 제일 큰 행복이었다.

“엄마! 엄마도 같이 추자!”

춤을 추던 조슈아가 내게 손을 뻗었다.

“나, 나도?”

……나는 춤이라고는 태어나 한 번도 쳐 본 적이 없는데.

물론 기억을 잃기 전에 몇 번 췄을지도 모르겠지만.

보잘것없는 내 춤 솜씨로 조슈아의 흥을 깨 버릴까 봐 염려가 되었다.

“웅웅! 조슈아가 오늘은 엄마의 파트너가 되어 주겠다고 했잖아.”

조슈아는 얼른 제 손을 잡으란 듯이 발을 동동 굴렸다. 초롱초롱한 눈빛 공격은 덤이었다.

네가 그렇게 쳐다보면 내 마음이 얼마나 약해지게요.

나는 앉은 몸을 엉거주춤 일으키며, 뻗어진 아이의 손끝에 내 손을 올렸다.

“그럴까? 하지만 내가 너무 못 춰서 실망하면 안 돼.”

“조슈아는 엄마가 뭘 하든 실망하지 않아.”


“…….”

“좋아하는 사람은 뭘 하든 사랑스럽게 보이는 거래.”

조슈아는 노상 그랬듯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더해지는 건, 내 입가의 미소였다.

“조슈아는 나를 좋아해?”

좀 자주 묻는 질문이었다. 나는 어떤 대답이 돌아올 줄 알면서도, 똑같은 질문을 또다시


건네었다.

아이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응, 좋아해. 완전 좋아해. 엄청 좋아해.”

나는 아이의 이마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러곤 조슈아의 고백에 대한 답을


내어놓았다.

“나도 좋아해.”

좋아한다는 말이 가지고 오는 따뜻한 기분이 좋았다. 같은 말, 같은 억양이지만 매번 들어도


지루하지 않은 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매시간 하루 종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을 정도로.

“헤헤.”

조슈아는 바라보는 이마저도 기분이 흐물흐물해지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조슈아. 좋아하는 사람은 뭘 하든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말은 누가 가르쳐 줬을까요?”

그 말의 출처를 물었지만, 어째 누가 가르쳐 줬을지 알 수 있을 법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만연한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동그란 안경 속, 호선을 그린


눈이 인상적인 그.

“욘두 선생님!”

역시나 그 말의 출처는 욘두였어.

그가 의심스럽다는 점과는 별개로 나는 조슈아의 수업을 꼭 참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수업을 하면, 아이가 이렇게나 어른스러울 수 있는 걸까?

“엄마. 조슈아를 따라해 봐!”


조슈아는 연회장을 주름잡을 법한 춤사위를 내게 알려 주었다. 나는 아이가 하는 대로
백조처럼 손을 뻗고, 발을 내디뎠다.

 
묘한 것은 그런 일련의 행동들에서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는 거다.

떠오를 듯 확실히 떠오르지 않는 안개 같은 기억들이 내 머릿속에 자욱이 서리기 시작했다.

과거의 기억인 듯한 그 기억.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 속 나는, 화려한 연회장 속에 존재했다.

나는 지금 입은 것보다도 훨씬 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춤을 추고 있었다.

파트너는 꼬마 신랑을 연상하게 하는 조슈아가 아니었다. 조슈아처럼 쓰리 피스를 꼭꼭 갖춰


입은 어느 성인 남자…….

남자의 얼굴이 보이려던 찰나 머릿속에 서렸던 환영들이 모두 걷혔다.

비록 잊힌 기억을 제대로 들여다 본 것은 아니었지만, 내 몸은 춤을 추었던 과거를 떠올린


듯했다.

나는 곧 조슈아보다도 더욱 자연스럽게 춤을 췄다.

형편없는 내 춤 솜씨로 조슈아의 흥을 깰까, 괜히 염려했나 보다.

내 춤 실력은 내가 생각해도 꽤 훌륭했으니까.

체력이 먼저 달린 쪽은 조슈아였다. 아이는 작게 비틀거리며 색색거리는 가쁜 숨을 내뱉었다.


나는 조슈아의 고물고물한 손을 잡고 카펫 위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이마에선 미적지근한 땀이 흘러내렸다.

“킥킥.”

조슈아는 땀이 흐르는 내 얼굴이 뭐가 그리 우스운 것인지, 소리 내어 키득거렸다. 아이는


웃는 것에만 그치지 않으며 내 이마를 소매로 쓸어 주었다.

“와, 너 매너 엄청나다.”

일순간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의 완벽한 매너였다고 해야 할까.

조슈아는 킥킥거리기만 했다. 아이의 얼굴이 몹시도 행복해 보였다.

이내 요한의 피아노 연주가 끝이 났다. 나는 의자 위에 앉은 요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눈에 띄게 부풀어 올렸다 가라앉을 정도의 큰 심호흡을 내뱉은 그의 얼굴이 약간 피로해


보였다.
“요한 씨. 힘들어요?”

“날 도대체 뭘로 보는 거야?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고. 완전 거뜬해. 오늘 밤새도록 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는 피아노의 덮개를 덮었다. 밤새 칠 수 있다고 자부했던 말과는 정반대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너희 둘만 춤추는 걸 보니까…….”

요한은 말끝을 흐리며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요한이 채 잇지 못했던 말은 조슈아가 대신


매듭을 지어 주었다.

“아빠도 같이 추고 싶었던 거구나. 헤헤.”

“흠흠.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야.”

……같이 추고 싶었던 거 맞네, 맞아.

솔직하지 못한 요한은 자연스럽게 내 옆에 몸을 누이었다. 그렇게 우리 셋은 보랏빛 카펫 위에


쪼르륵 누워 있게 되었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모습이기도 했다.

요한은 더러운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런 그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러운 것에


괘념치 않아 하고 있었다.

원래의 그였다면, 카펫 위에 누운 조슈아를 당장 일으켜 세웠을 텐데.

“녹턴……. 예전엔 들려줄 사람이 없어서 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과거, 요한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녹턴. 들려줄 사람이 없어서. 그래서 안 쳐.’

“어, 그랬지.”

“오늘은 들려주고 싶었던 거예요?”

“……어.”

“누구한테요?”

요한은 잠깐 침묵했다. 그래서 나는 요한이 즐겨 하는 말을 따라했다. 놀리려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닌, 그런 말.

“꼭 저라는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에요.”


아닌 척하며 진심을 토로하는 그 이상한 어법. 하지만 왠지 싫진 않고, 사랑스럽게만 느껴지는
어법이기도 했다.

요한은 마른기침을 두어 번 정도 했다.

“……하. 도대체 당해 낼 수가 없군.”

“큭큭.”

진득한 한숨을 내쉰 그는, 잠깐 누웠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진 것은 불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요, 요한 씨?”

쪽. 듣기 좋은 마찰음이 울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내게 고개를 기울였고, 그의 입술이 내


이마 위에 닿은 것이다.

요한은 몹시도 다정한 미소를 지은 채로 대답했다.

“대답은 이걸로 충분할 것 같은데.”

그리 말하는 그의 양 뺨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뽀뽀는 저가 한 주제에.

나는 대답 대신 만연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말처럼 대답은 그걸로 충분한 것 같아.

세나를 잃은 후 그 누구에게도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지만, 내게는 들려주고


싶었던 거라고.

나는 그 어떤 말보다도 근사한 고백을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빠!”

요한은 그제야 조슈아의 존재를 눈치챈 듯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나는 조슈아가 또다시 자신의 동생이 생길 것 같다느니 하는 낯부끄러운 소리를 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나 조슈아가 내놓은 말은 제법 의외인 말이었다.

“조슈아한테도 뽀뽀 해 줘야지! 엄마한테만 해 주는 게 어디 있어. 너무해.”

아이는 토라진 듯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고, 나는 거기서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삐죽 내민 네 입술에 내가 입을 맞추어 주고 싶어!

하지만 요한의 반응이 빨랐다. 그는 뒤늦게 아이의 이마에도 이마 뽀뽀를 해 주었다.


“조쉬. 내가 잠깐 너를 잊은 건 절대로 아니야.”

도둑이 제 발을 전 것 같은 말을 뒤따른 건, 그의 희미한 미소였다.

부드럽게 굽은 그의 눈이 우리 둘을 연신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속에 맺힌 것은


사랑스러운 기운밖에 없었다.

그는 나와 조슈아를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처럼. 맙소사.

“조쉬. 연주도 끝났으니까, 리나와 잠깐 놀고 있을래? 나는 아까 하다만 일이 남아서


말이야.”

곧 돌아올게. 요한은 나지막한 말을 덧대며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창밖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 * *

“조슈아. 오늘이 세나……, 아니, 내 생일이라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내 무릎 위에 앉은 조슈아는 입술을 작게 옹알거렸다.

우리는 내 방으로 돌아와 시간을 함께 축내고 있는 중이었다.

“조슈아는 엄마를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대답해 줄 수 없어.”

웬걸. 무엇을 묻든 모든 걸 털어놓을 것처럼 굴던 조슈아가 대답을 회피하다니.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가 내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가 무섭게 느낀 기분이었다.

“왜?”

“알려 주지 않기로 약속했거든. 약속을 어기는 건 엄청 나쁜 일이야.”

“그럼 나한테만 알려 주라. 밥맛한테는 비밀로 할게.”

나는 달콤한 말로 아이를 유혹했지만…….

“안 돼! 조슈아는 이제부터 약속을 잘 지키는 어린이가 되기로 했단 말이야.”

돌아온 것은 조슈아의 강경한 대답이었다.


조슈아는 원래부터 고집이 센 아이였다. 고집을 한 번 부리면, 제 아버지를 이길 것처럼
굴기도 했으니.

아이가 이미 말해 주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상, 끝내 알려 주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나는 아이를 닦달하는 것을 멈추었다. 조슈아가 말하기 싫다는데, 구태여 아이를 채근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에 세나의 생일이 언젠지 알고, 조슈아에게도 알려 줄 수 있을 법한 사람을 추측해 보았다.

음……. 벨라나 욘두가 알려 준 걸까? 어쩌면 바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들 중 하나가 조슈아에게 세나의 생일을 알려 주었고, 생일을 알려 준 데에 어떤 의도가


있는 거라면.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조슈아가 내게 말을 건넸기 때문이었다.

“엄마, 조슈아가 준 목걸이를 걸어 보자. 엄청 예쁠 거야.”

“그럴까?”

“응!”

나는 조슈아를 소파 위에 앉혀 두고선, 화장대로 걸어갔다. 그러곤 화장대 위에 올려 두었던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 든 붉은 보석이 예쁜 목걸이를 내 목에 채우자, 그것은 영롱한 빛을 띠며 아름답게


빛났다.

“어때?”

조슈아는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땅에 닿지 않은 발을 동동 굴리는 건 덤이었다.

나를 요리조리 세세히 살펴보는 조슈아의 눈동자가 연신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내 관찰을 끝낸


듯한 아이가 입술을 조금 떼어 냈다.

“조슈아도 엄마 같은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나 같은 여자가 어떤 여잔데?”

나는 조슈아가 ‘엄마처럼 다정한 사람.’이라든지, ‘엄마처럼 목걸이가 잘 어울리는 여자.’


라는 말을 할 줄 알았다.

더럽고 불순한 것들은 감히 접근도 하지 못할 순수한 얼굴을 한 조슈아였다. 아이에게서


얼마나 순수한 말이 새어 나올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다소 뜻밖의 말이었다.

“얼굴이 예쁜 여자.”
“……! 풉, 큭큭.”

아이는 내가 왜 웃음을 터뜨린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순수한 얼굴로 요한이 할 법한 대답을 하다니!

나는 이마를 짚었다.

“엄마?”

“조슈아야. 얼굴이 예쁜 여자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예쁜 것도 아주 중요하단다. 물론


조슈아는 똑똑한 아이니까, 나보다도 더 잘 알겠지만.”

“엄마는 마음도 예뻐.”

아암, 자고로 아이는 거짓말을 못하는 법이지.

잡화점 일을 하며 잡화점 물건을 두어 번 망가뜨리기도 했고, 식당 일을 하면서 접시 몇 개를


깨뜨린 걸 숨기기도 했고, 공작저에 있으며 요한 몰래 과자를 좀 많이 먹기는 했지만…….
그렇지만 내 마음이 예쁜 걸로 쳐 두자.

지금부터 마음이 예쁜 것처럼 살면 되지, 뭐.

“하아아암.”

예쁜 말만을 내뱉던 조슈아의 작고 붉은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기다란 하품 끝에 눈물이라도 흘린 것인지, 아이는 제 눈가를 손끝으로 쓸었다.

“잠 와?”

“우웅. 눈이 감길 것 같아.”

“그럼 침대로 가 볼까?”

“……나 엄마 방에서 자도 되는 거야?”

“조슈아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래도 되지요. 네 아빠한테는 내가 잘 말해 둘게.”

“우와! 너무 좋아. 나는 엄마 옆에서 자고 싶어.”

나는 조슈아를 가뿐히 들어올려 침대까지 걸어갔다. 이내 침대 위에 아이를 눕혀 주고,


이불까지 가지런히 덮어 주고야 만다.

조슈아는 또다시 나른한 하품을 한 뒤, 눈을 반쯤 감았다.

“조슈아가 먼저 꿈속에 가 있을 테니까. 엄마도 얼른 와.”

“응, 잘 자. 꿈속에서 보자.”


아이는 고개를 옅게 끄덕였다. 그것이 조슈아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무거워진 조슈아의 눈꺼풀은 완전히 감겼다. 나는 조슈아의 말랑한 볼따구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조슈아는 금세 잠든 듯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침대 모퉁이에 앉은 엉덩이를 일으키지 못하며, 잠든 아이의 얼굴을 한없이 감상했다.

새로 생긴 엄마밖에 모르는 귀엽고 착한 아이인 조슈아.

그 순간 불현듯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슈아는 언제쯤이면 가짜 엄마를 필요하지 않게 될까, 하는.

여섯 살? 일곱 살? 아이는 영민한 녀석이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번 겨울이 지나면 곧 여섯 살이 되는 조슈아였다.

고로 조슈아에게 가짜 엄마가 필요하지 않을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올지도 몰랐다.

‘가짜 엄마는 이제 필요 없어!’

좋아한다는 말만을 내뱉던 아이의 예쁜 입술에서 부정적인 말이 흘러나오고…….

내가 없으면 살지 못할 것처럼 굴던 조슈아가 나를 외면하게 된다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심장이 두 쪽으로 쩍 갈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기억을 잃은 이래 느낀 기분 중에


제일 암담한 기분이었다.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아.

내게 있어 조슈아가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걸, 나는 이런 식으로 새삼 통감했다.

“조슈아. 그런 날이 도래하기 전에, 네 곁을 떠는 게 옳은 일인 걸까?”

나는 아이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침묵.

제 58 화. 체온을 맞대는 게 제일 따뜻하다고 하더군

요한은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야 돌아왔다. 제법 늦은 밤이었다.


노크 없이 들어온 그는 놀랍게도 잠옷 차림이었다.

하다만 일이라는 게 생각보다 꽤 많았던 걸까.

아님,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잠잘 준비를 완벽하게 하고 오느라 늦은 걸까.

“…….”

아주 불순한 의도로 가득한 옷차림임이 분명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침대 모퉁이에 앉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내가 옆에 앉으라고


권한 것처럼.

가깝게 앉은 그에게선 아주 좋은 냄새가 났다. 코를 가까이 가져다 대어 그 냄새를 샅샅이


맡고 싶다는 음흉한 바람이 잠깐 들었다.

그는 무릎 위에 올려진 내 손까지 당연하다는 듯이 그러잡았다.

나는 그를 게슴츠레하게 바라보았다.

“뭐가 이렇게 자연스러워요?”

“그래서 싫어?”

“아니, 싫다는 건 아닌데.”

우리는 혹여나 잠든 조슈아가 깰 성싶어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싫다는 건 아니라는 내 말에 요한은 픽 웃었다.

그가 이번에 한 행동은 깍지였다. 그는 마치 내가 깍지를 껴 달라고 말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오호라, 아주 능청맞은데.

요한은 내 손끝을 끊임없이 매만지며 괜스레 입술을 뭉그적거렸다. 무언가를 조금 망설이던


그는 이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축하해.”

짧은 말이었지만, 왠지 무게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축하해? 그는 말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으며,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요한의 검은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는 내게 오롯이 닿은 채로 느릿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언제였을지 모를 네 생일을 언제나 축하해.”

그는 내가 되묻기 전에, 제 말의 의미를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언제였을지 모를 내 생일을 축하해 주는 요한이라.

“아까…… 세나의 생일을 네가 대신한 것 같아서, 기분이 상하지 않았어?”

“…….”

“너를 세나로 보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너를 미인 거지 리나로만 보겠다고 했잖아.”

그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요한이 이토록 세세한 남자인지, 나는


처음 알았다는 거다.

이봐요, 요한 씨.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세나와 제가 쌍둥이래요.

그럼 어쩌면 오늘이 제 생일일 수도 있어요.

나는 대답 대신 킁, 하고 콧물을 들이켰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진 기분이었다.

눈물이라도 흘리는가 싶어 눈가를 쓸어 보았지만, 다행히도 눈물은 새어 나오지 않았다.

괜스레 울적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울어?”

“거지가 대답합니다. 제가 왜 울어요. 하하.”

나는 오랜만에 미인 거지에 걸맞은 대답을 하며, 객쩍게 웃었다.

“난 또 내가 너무 소름 끼치게 감동적인 말을 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린 줄 알았네.”

“……눈물을 흘릴 정도의 감동적인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뭐? 그렇단 말이지. 딱 기다려 봐.”

요한은 왠지 비장해진 얼굴을 했다. 그는 꼭 전장의 선두에 나서는 장군 같은 얼굴을 한 채로


잠옷의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얼굴은 세상 비장한데, 옷은 잠옷 차림새라니.

나는 그 간극이 우스워 돌연 웃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조금 울컥했던 기운이 모조리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요한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아닌지 잘 가늠할 수 없었다.

이윽고 그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가 꺼내든 것의 정체는 목걸이였다. 중간에 상앗빛의 커다란 보석이 달린 아주 고급스러운


목걸이.

그는 어깨를 당당하게 편 채로 늠름하게 말했다.


“저번에 보석상이 왔을 때, 너 몰래 하나 사 뒀어. 네가 좋아할까 봐 준비한 건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야.”

이젠 그렇게 어렵게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냥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했다고 하면 되는데.

“언제 줘야 하나 고민 했는데 오늘이 딱인 것 같더군.”

“오.”

“이걸 네 목에 걸어 주면 네가 감동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

그의 손이 내 목 언저리까지 올라왔다. 그러다 그의 손이 갈피를 잃은 것이 보였다.

요한은 내 목에 목걸이를 채워 주려다가, 이미 걸린 다른 목걸이를 발견한 것 같았다.

아참, 내겐 이미 멋있는 남자가 선물해 준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지.

“……? 이미 목걸이가 있……어?”

“다른 남자가 먼저 줬거든요.”

“다른 남자? ……설마 바비? 그 개자식이 왔었어?”

온화하기만 했던 요한의 목소리가 급변했다. 더해, 그의 주위를 맴도는 기류 또한 험악해진


것만 같았다.

바비라는 이름이 가지고 오는 파급력이 지대했다.

요한의 얼굴은 잔뜩 성이 나 있었지만, 내겐 하나도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마음을 확인한 상대에게 상처를 줄 법한 일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거다.

설령 바비가 목걸이를 줬다고 해도, 그것을 내 목에 홀라당 걸고 다닐 만큼 생각이 없지는


않다는 거다.

“아뇨. 바비보다도 훨씬 더 멋진 남자가 줬어요.”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나 말고 그런 남자가 더 존재한다는 거야?”

“윽, 완전 밥맛.”

“…….”

“요한 씨. 당신은 사실 밥맛이라는 별명을 꽤 즐기고 있는 거죠?”


그는 기다란 신음을 흘렸다. 아주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요한이 불만을 가진 이유는, 내가 다른 남자에게 목걸이를 이미 받았기에 그런 것일까.

아님, 저 말고도 훨씬 더 멋진 남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런 것일까.

왠지 후자 쪽이 더 큰 이유일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아니, 그래서 누가 줬냐니까. 말해 봐. 누군데.”

“알려 주면 뭐 해 주실 건데요?”

“장난치지 마. 나 진지하니까.”

요한은 자못 초조해했다. 느긋한 내 태도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얼른. 나 애가 타.”라며 나를 채근했고, 그 목소리는 메말라 있기만


했다.

요한은 알까. 애가 탄 당신의 모습이 엄청 섹시해 보인다는 걸.

나는 그를 조금 더 애태우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요한이 더욱 화를 낼 것 같았다.

“조슈아요. 큭큭.”

“……조쉬? 나의 조쉬가?”

“조슈아 말고 당신보다 멋진 남자가 또 어디에 있겠어요.”

요한은 땅이 꺼질 만큼의 한숨을 또다시 내쉬었다.

“하……. 그럼 그렇다고 진즉 얘기해 줬어야지!”

“그러게요.”

머쓱하게 웃는 내 얼굴 위로 요한이 손이 다가왔다. 그는 조금 전 주저했던 일을 완전히


수행하려고 마음먹은 것 같았다.

얼마 못 가 그는 내게 제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

“조쉬에게 질 수 없지.”

그는 내 목에 걸린 두 개의 목걸이를 보고선 보람찬 미소를 지었다.

나 원. 부자에게 제대로 사랑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잖아.

“그나저나 조쉬가 어떻게 세나의 생일을 알았고, 선물까지 준비한 거지?”

“저도 그게 의문이에요. 조슈아에게 물어봤는데, 웬일인지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않더라고요.”


“조쉬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세나 씨의 생일을 알려 준 사람이 자신의 정체를 비밀로 부쳐 달라고 했대요. 조금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죠?”

“조금이 아니라 엄청 느껴지는데?”

세나 씨의 생일을 알려 줬지만, 자신의 존재가 비밀로 부쳐지기를 바라는 자.

그리고 평소 조슈아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자.

“……설마 욘두 쌤인 걸까요?”

벨라와 욘두, 그리고 바비 중 구태여 제일 유력한 사람을 고르라면, 그 사람은 바로 ‘욘두’


였다.

“나도 욘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요한 또한 내 말에 동의를 했다.

욘두. 나는 그 이름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행한 일은 없었지만, 그는 제 존재감을 서서히 키워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희미하지만 확실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욘두.

나는 그 사실에 영문 모를 소름 끼침을 느꼈다.

“세나 씨의 일기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욘두를 직접 추궁할 거예요?”

그 일기장을 누가 가져갔든 간에, 결국 일기장이 나온 곳은 욘두의 집이었다.

우리에겐 욘두를 추궁할 확실한 명분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일단은 지켜볼 예정이야.”

“그럼 해고하는 건 어때요?”

“그것도 일단은 보류. 갑작스럽게 해고했다가 도리어 마음을 삐딱하게 먹으면 어떡해. 그럼
우리뿐만이 아니라 조쉬에게도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어.”

“…….”

“나는 최대한 상황을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어. 그렇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욘두는 마법사가 아니던가.

그가 마음을 먹는다면, 우리에게, 심지어 조슈아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아주 손쉽게.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미인 거지 양은 걱정하지 마. 내가 지금 욘두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조사하고 있으니까.


그를 어떻게 할지는 조사를 끝낸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거야.”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말을 끝마친 그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 작은 손길에 안도감이 들었다.

확실히 정리된 일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왠지 모든 일이 잘 해결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고나


할까.

“흠흠. 그런덴 여긴 왜 이렇게 추워.”

“추워요? 외투를 드릴까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요한은 왠지 무언가를 잔뜩 바라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체온을 맞대는 게 제일 따뜻하다고 하더군.”

“…….”

믿을 수 없게도, 내 머릿속에서 요한의 말이 단번에 해석 되었다.

‘나는 오늘 네 옆에서 자고 싶어. 너랑 꼭 붙어서. 네 체온을 느끼면서.’

아서라, 잠옷까지 입고 온 마당에 뭘 더 돌려서 말을 하는 건지.

그는 오늘도 내 방에서, 내 침대에서 자고 싶어 함이 틀림없었다.

한결같은 이 상습범을 어떻게 하면 좋지?

“여기서 자고 갈래요?”

당신이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면, 내가 솔직하게 말해 주면 되는걸.

돌려 말하지 않은 내 말에 요한은 기겁했다.

“넌, 넌 무슨 겁도 없이!”

“…….”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해?”

같이 자자고 한 건 당신이거든요?
요한은 꼭 내가 저를 잡아먹을 것처럼 군 듯이 말했다.

나는 능청맞게 대답했다.

“이미 알 건 다 아는데.”

“뭐?”

“당신의 몸 어디어디에 점이 있는지 이미 다 안다고요.”

“……아, 아이가 듣겠어!”

초저녁부터 곤히 잠든 조슈아가 뭘 듣겠냐만은.

나는 혀를 쯧쯧 차며 요한을 놀렸다.

“어우. 아깐 아이 앞에서 남부끄럽게 뽀뽀도 하더니, 새삼 내외를 하네.”

그러자 돌아온 것은 그의 항복 선언이었다.

“하……. 됐다. 내가 너를 어떻게 이겨.”

그는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의 얼굴엔 참을 수 없는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 * *

한가로운 오전이었다.

조슈아는 욘두에게 수업을 듣고 있을 것이고, 요한은 제 일을 하고 있을 테다.

할 일이 없는 것은 나 혼자뿐인 듯했다. 나는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며, 누워 있던 몸을


겨우겨우 일으켰다.

화장대까지 비척비척 걸어가 거울을 통해 바라본 내 모습이 아주 우스꽝스러웠다.

내 목에 걸린 디자인이 전혀 다른 두 개의 목걸이 때문이었다.

나는 요망한 부자가 챙겨 준 목걸이 두 개를 모두 빼 두고선, 방을 나섰다. 산책이라도 조금


해 볼 심산이었다.

내 방과 이어진 복도를 거닐며, 나는 생각했다.


이곳에 꽤 오래 머문 것 같지만 주인을 모르는 방이 수두룩하구나.

나는 비슷비슷하게 생긴 크림색의 방문들을 눈으로 하나하나 훑었다. 문들은 모두 열리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꽉꽉 닫혀 있었다.

꽉 닫힌 문들 사이로 이질적인 것이 보인 것은 그때였다.

유일하게 열려 있는 방문 하나.

그것이 이질적인 것의 정체였다.

내겐 왠지 모를 호기심이 솟구쳐 올랐다.

그 방 가까이로 가 보자. 가서 그 안에 누가 있는지 확인해 보자.

내 머릿속엔 유혹의 기미가 가득한 말들이 둥둥 떠다녔다.

생각보다 행동이 훨씬 더 앞섰다. 깨달았을 땐, 내 발걸음은 이미 그 방으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발소리를 죽인 채 그곳까지 걸어갔다.

이내 가까이 다가간 방 문 앞. 나는 조금 열린 틈새 사이로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이밀었다.

“…….”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보였다. 나는 내 시야에 맺힌 인물들을 조금 더 세세히 관찰했다.

밝은 방 안, 제일 먼저 보인 이는 요한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남자인 욘두였다.

분명 조슈아의 수업 시간인 것 같은데, 그는 한가롭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다. 욘두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맞은편에는 멀리서 보아도 눈에 띄게 예쁜 여자 하나가 서 있었는데, 내겐 초면인


여자였다.

나는 그 여자에게 안광을 집중했다.

여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아주 기다란 은빛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더해, 머리카락의 끝에


풍성한 웨이브를 준 그녀의 머리 스타일은 매우 훌륭해 보였다.

옆얼굴은 또 어떠한가.

하대를 일삼을 것처럼 오만해 보이는 오뚝한 콧날. 날카로운 눈매. 기다란 속눈썹.

정면을 보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저 여자. 엄청난 미색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해.


입고 있는 드레스는 또 어떠한가.

그녀는 풍만한 제 가슴이 돋보이는 모양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예쁜 얼굴을 가진


것에 그치지 않으며, 육감적인 몸매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 욘두가 이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 이건 연인과 반쪽씩 주고받은 귀걸이입니다. 나머지 한쪽은 사랑하는 그 여자가 가지고
있죠.’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던 욘두.

설마 저 육감적인 여자가 욘두의 연인인 걸까?

욘두는 제 연인을 만나기 위해서 조슈아의 수업을 땡땡이친 거고?

그렇게 안 봤는데……. 불량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그런데 말이다. 저 조합이 꽤나 뜻밖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욘두는 어렸을 때, 선생님 말을 엄청 잘 들었을 것 같은 모범생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한 그가


만나는 이가 엄청 놀았을 것 같아 보이는 여자라니.

서로의 다름에 이끌리기라도 한 건지.

나는 그들이 나눌 대화가 몹시도 궁금했다.

조슈아의 수업을 땡땡이치고선 제 연인과 나눌 대화라는 게, 어쩐지 궁금증을 자아내지 않던가.

수상쩍었던 욘두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귀를 기울이던 순간—.

“……!”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 열린 문을 어깨로 밀어 버렸다.

기름칠이 워낙 잘 된 덕에 문이 열리는 소리는 울리지 않았지만, 그들은 내 인기척을 느낀


듯했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그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문 틈 사이를 어쭙잖게


훔쳐보고 있는 내게.

도망갈 틈은 없었다. 나는 굳은 듯이 그 자리에 선 채로 식은땀을 흘렸다.

젠장, 그 순간에 왜 하필 어깨를 움찔거려서는.

얼마 못 가 욘두의 연인으로 예상되는 육감적인 여자와 눈이 단번에 마주쳤다.

내 얼굴을 바라본 여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제 입을 떡 하니 벌리며, 한마디를 읊조렸다.

“……세, 세나 언니……?”

제 59 화. 욘두, 너무 멋있지 않나요?

세나 언니.

공작저에서 내 얼굴을 처음 본 사람들이 줄곧 내뱉었던 익숙한 말이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 여자도 세나를 아는 여자였던가.

여자는 망설임 없이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이 제법 조급해 보였다.

성큼 성큼 다가온 그녀는 이내 조금 열린 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나는 어쭙잖게 구부리고 있던 몸을 반듯이 세웠다. 그러자 우리의 얼굴은 제대로 마주하고야


말았다.

정면으로 본 여자는 문틈 사이로 보았던 것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웠다.

투명한 빛을 띤 은발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양 빛났고, 석양보다도 짙은 홍안에 서린 이채는


자못 신비로웠다.

숲속의 요정이 있다면, 이런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미인 거지라는 별명이


흔들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교차한 시선 속, 여자의 홍안이 잘게 떨렸다. 여자는 곧 울음이라도 토해 낼 것 같은 구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나 언니…….”

그녀는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또다시 ‘세나’라고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조만간 눈물을 쏟아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목소리였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 여자도 세나를 사랑했고, 세나가 사라진 세상 속에서 그녀를


그리워했던 거라고.

켜켜이 쌓인 그리움의 농도가 꽤나 짙어 보였다.


이 여자는 세나와 어떤 관계가 있었던 걸까?

그녀는 이내 내 어깨를 잡아채 나를 제 품 안에 가두었다. 나도 키가 그리 작은 편이


아니었건만, 그녀의 키가 어찌나 크던지 나는 그녀의 품속에 쏙 가둬졌다.

“……죽은 게 아니었던 거야? 살아 있었던 거야?”

내 등을 헤매는 그녀의 손이 애달팠다. 그녀에게서 충분히 벗어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한 채로 침묵했다.

내가 세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을 때, 그녀가 얼마나 슬퍼할지 감히 가늠할 수 없어서.


이 여자가 눈물을 흘린다면 나도 왠지 슬퍼질 것 같아서.

원래부터 눈물에 약하다.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있자면, 슬픔이 전가되는 기분을
자주 느끼곤 했다.

그건 요한의 눈물을 봤을 때도 매번 느꼈던 감상이었다. 나를 세나라 생각하고 행해진 요한의


스킨십들을 단번에 뿌리칠 수 없었던 그 이유.

세나를 떠올리며 슬퍼하는 그의 마음이, 내게도 진하게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언니. 뭐라고 대답이라도 해 줘. 응?”

이름 모를 그녀는 내게 간절하게 답을 구했다.

나는 그제야 그녀를 조금 밀어냈다. 그러자 꽉 껴안고 있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그녀는 나를


쉬이 놓아주었다.

내 등을 헤매던 그녀의 손은 이윽고 내 손끝을 부여잡았다. 그녀는 내가 살아 있음을, 뜨거운


체온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이라도 하는 듯해 보였다.

울음을 참으려고 아랫입술을 꽉 깨문 그녀가 안타까워 보였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슬픈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을 따름이었다. 설령 우리가 완전히


초면인 사이라고 해도.

“…….”

하지만 이제는 현실을 인지할 시간이야.

그녀에게 잔인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세나가 아니었고, 리나일 뿐이다. 그것이 현실이었고, 망자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었다.

“애석하게도, 저는 세나 씨가 아니에요.”

오랜만에 내뱉은 익숙한 말이었다.

세나 임을 부인하는 내 말에, 그녀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처럼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얼마 못 가 그녀의 깊고 큰 눈동자에선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한 번 잡은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세나 언니라고 말해 줘요. 당신, 세나 언니가 맞잖아요. 응? 맞잖아.”

흐느끼는 그녀의 소리가 내 귓가를 적셨다.

‘세나 언니, 세나 언니.’

나를 부르는 것이지만, 내 이름이 아닌 그 이름 또한 귓가에 새겨졌다.

눈썹과 눈썹 사이가 따끔하게 아파 온 것은 그때였다.

날카로운 것에 의해 사정없이 찔리는 듯한 기분.

자욱이 퍼져 가는 통증은 내 머리를 통째로 옥좼다. 나는 미간을 사정없이 구기며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어깨 위로 여자의 손이 닿는 게 느껴졌다.

‘……세나 언니. 세나 언니.’

이명을 동반한 그 소리가 귓전을 사정없이 때렸다. 하지만 이번에 울린 목소리에는 흐느끼는
소리가 동반되지 않은 채였다.

아픔을 참지 못해 눈을 감자, 눈앞에 다른 전경이 펼쳐졌다.

처음 느낀 것은 분 냄새였다. 조슈아에게서 나는 향 못지않은 아주 좋은 아기 냄새.

그 냄새는 어느 빈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좋은 냄새가 나는 정갈한 방, 열린 창문에선 따뜻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고, 그 바람에 따라


누군가의 머리칼이 흩날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신비로운 빛을 띤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 여자아이였다. 조슈아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그 아이는 제법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것은 드레스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제 목과 팔, 그리고 손에 가지각색의 액세서리들을 걸치고 있었다. 하나같이 눈이 아릴


정도로 빛났다.

여자아이의 시선은 내게 곧 닿았다. 아이는 놀랍게도 화마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언니.’
“……!”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며 눈을 떴다.

그러자 아기 분 냄새도, 정갈한 방도, 열려 있던 창문도, 액세서리를 한 예쁜 여자아이도


모두 다 사라져 있었다.

내 눈앞에 비친 것은 뺨이 눈물로 얼룩진 그 여자뿐이었다.

“……에믈린?”

어째서 그 이름이 툭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그 이름을 반갑게, 아주 그립게 부르고 있었다. 마치 수 년 동안


보지 못한 사람의 이름을 부른 것처럼.

“이, 이거 봐! 세나 언니가 맞잖아!”

깜짝 놀란 여자는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내가 부른 ‘에믈린’이라는 이름이 실제 제 이름인


듯한 반응이었다.

나는 그때 깨달을 수 있었다.

화마와 닮은 붉은 눈동자. 과한 액세서리. 화려한 드레스.

그래, 맞아. 이 여자는 조금 전에 내가 본 어린 여자아이와 똑 닮았어. 그 여자아이가


성장했다면, 당연히 이 여자가 되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에믈린. 나는 그녀의 이름을 몇 차례 되뇌었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그 이름은 묘하게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그게 다였다. 그 이상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어째서 그 이름을 알고 있었던 걸까.

너도 내 과거의 기억 중 일부분인 거니?

“에믈린 님. 그분은 마님이 아니십니다.”

뒤에서 잠자코 우리를 지켜보기만 했던 욘두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욘두 쌤.”

그는 천천히 우리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고선 늘 그랬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미소 지으면서도 울고 있는 여자를 달래 주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욘두는 익숙한


것처럼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쉬. 그만 우세요. 운다고 해서 달라질 일이 아니잖습니까.”


“하, 하지만! 욘두도 들었잖아. 이 사람이 내 이름을 정확하게 불렀어. 세나 언니가 아니라면,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건데?”

“요한 님이나 바비 님께 들었겠죠. 에믈린 님. 이분은 조슈아 님의 유모님이신 리나


님이십니다. 얼굴이 마님과 닮았기는 하나 명백히 다른 사람이죠.”

“…….”

“그렇지 않습니까? 리나 님.”

욘두는 내게 동의를 구했다.

“네, 맞아요. 소개가 늦었네요. 조슈아의 유모인 리나라고 해요. 그쪽이 정말로 에믈린……
이에요?”

내가 떠올린 이름이 진짜 당신의 이름인 걸까?

그것은 일종의 확인사살이었다.

대답은 욘두에게서 흘러나왔다.

“네, 그렇습니다. 에믈린 님은 요한 님의 막냇동생이시죠.”

“동생이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하나도 안 닮았는데.

도리어 욘두가 요한과 바비와 형제라고 한다면, 그게 더 믿을 만한 말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 정도로 에믈린은 두 사람과 하나도 닮아 있지 않았다.

“……양녀예요. 닮지 않은 거, 저도 알아요. 그렇게 놀라실 필요 없어요.”

그녀는 여전히 흐느끼는 소리로 말했다. 내가 왜 의문을 표한 것인지 단번에 짐작한 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너무 놀란 티를 냈던가.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에믈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나저나 랭카스터 가의 양녀라. 나는 요한에게도, 심지어 바비에게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형제가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은 이상한 사실이 아니었다.

‘숨겨 놓은 자식이 없는 게 더 이상한 일일 테지.”

요한은 랭카스터 가의 난잡한 형제 관계를 경멸했었다.

“저야말로 죄송해요. 세나 언니일 리가 없는데…… 너무 닮으셔서 저도 모르게…….”


“괜찮아요. 공작저에 온 뒤에 그런 소리를 꽤 많이 들어서 이젠 아무렇지도 않네요, 하하.”

나는 그녀가 더는 울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면 내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 그것은 요한이 울던 모습을 봤을 때 느꼈던
감상과 비슷한 것이었다.

하나 내 미소를 직면한 그녀는 제 얼굴을 기괴하게 일그러뜨렸다.

“그런데 진짜로 세나 언니가 아니에요?”

아무래도 내 미소가 그 세나를 떠올리게 했음이 틀림없었다.

* * *

“저는 이만 가 봐야할 것 같습니다. 조슈아 님께 돌아가 봐야 해서요. 에믈린 님이 부르신


덕에 급하게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문도 완전히 닫지 않은 것 같군요.”

아하, 조금 열린 문틈은 욘두의 부주의가 만들어 낸 것이었구나.

욘두는 그사이를 엿본 나를 책망하지 않으며, 제 말을 이어 했다.

“그럼 두 분은…….”

거기까지 말한 그는 우리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에믈린 씨. 저와 조금 더 얘기를 나누어도 될까요?”

“당연히 되죠, 완전 돼요. ……리나 언니.”

그녀는 내 나이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대뜸 언니라는 호칭을 부치며, 살갑게 굴었다. 물론
액면가로 보았을 때, 내가 나이가 더 많아 보이기는 했다.

그러한 모습이 싫기는커녕 꽤나 귀여웠다. 없던 동생이 생긴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럼 저는 나중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욘두는 신사처럼 마지막 인사를 건넨 뒤에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기 직전 제법 다정한


목소리로 에믈린에게 한마디를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제가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울지 마십시오, 에믈린 님.”

동그란 안경 속, 욘두의 검은 눈동자가 일순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와우, 완전 남자다운 모습. 패션 테러범에 덜렁거리는 게 일상인 욘두라고는 믿기지 않는
카리스마였다.

뭐야, 뭐야. 둘이 정말로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야?

내가 올 때까지 넌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마. 내 앞에서만 울어. 네 눈물을 볼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이런 뉘앙스인 거야?

“……언니. 욘두, 너무 멋있지 않나요?”

에믈린은 한껏 감동을 받은 것처럼 말했다.

“글쎄요. 제게 있어 욘두 쌤의 이미지는 좀 허당에 왠지 휘파람을 잘 불 것 같은 이미지라서…


….”

“큭큭. 괜찮아요. 언니는 욘두의 매력을 몰라도 돼요. 왜냐면, 그의 매력은 저만 알 거거든요.
그는 제가 오래전에 찜해 둔 남자예요.”

찜해 둔 남자라는 건, 그들이 연인 사이가 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나는 기회가 된다면 그 사실에 대해서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걱정 마세요. 그 매력을 구태여 알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하.”

아까 전에 울었던 그녀라고는 믿기지 않게, 에믈린의 얼굴은 평온해져 있었다. 운 까닭에


붉어진 눈이 아니라면, 그녀가 울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일단은 앉을래요?”

“네! 좋아요!”

우리는 그렇게 방에 있던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 보는 그녀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녀를 붙잡은 이유 중 제일 큰 이유는 세나에 대한 것을 묻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어떤 말로


운을 떼어야 할지, 나는 잘 헤아릴 수 없었다.

다행히도 에믈린이 내게 먼저 말을 걸어 주었다.

“세나 언니와 닮았다는 소리를 정말로 많이 들으셨죠?”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엄청 들었죠. 실제로 세나 씨의 초상화를 보기도 했는데, 제가 봐도 진짜
닮았더라고요.”

“사실 저는 아직도 언니가 세나 언니인 것 같아요. 이렇게 마주 보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몰라요.”

그녀는 눈에 띄게 음울해진 얼굴을 했다. 다가가 손을 꼭 잡아 주고 싶은 얼굴이었다.

“세나 씨와 에믈린 씨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데요?”

좋아, 자연스럽게 물음을 건넸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론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다.

“세나 언니와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였어요. 언니가 일곱 살이었고, 제가 여섯 살


때였나. 저흰 랭카스터 가의 최종 양녀 후보였죠.”

“양녀……후보요? 세나 씨가 양녀 후보였던 거예요?”

“네, 맞아요. 랭카스터 가에는 남자 자식들은 많았지만, 여식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결국


양녀를 들이게 되었는데, 저희 둘 중에 제가 양녀가 된 거예요.”

그것은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자, 세나가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요한과 바비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양녀 후보로서 공작저에 자주, 오랫동안 기거했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에믈린과 함께 양녀 후보였지만, 결국 양녀가 되지 못한 세나.

“그래서요? 그때 일에 대해서 조금 더 알려 주실 수 있어요?”

“물론이죠!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아닌 걸요. 더군다나 리나 언니는…… 세나 언니와 너무


닮아서, 왠지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그 말은 일전에 벨라가 했던 말이기도 했다.

세나를 떠올리게 하는 내 얼굴은, 그녀를 추억하는 뭇사람들의 마음을 나약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튼 저는 그 시절의 세나 언니와 아주 가깝게 지냈어요. 세나 언니는 비록 라이벌이었지만,


제게 있어 정말 가족 같은 사람이었고, 저는 언니를 좋아했어요. 언니가 공작가의 양녀로
발탁이 되어도, 언니의 행복을 빌어 줄 수 있을 만큼 좋아했답니다.”

에믈린이 세나를 좋아한 마음엔 한 치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나에 대해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한없이 진실 되어 보였고, 거기엔 불순한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세나가 돌연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에믈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가엾은 에믈린 랭카스터.

세나를 잃은 후, 그녀가 겪었을 슬픔이 요한의 슬픔과 비등했으리라고 여겨졌다.

“……그런 언니가 세상을 일찍 등지게 되어서 많이 슬프셨겠어요.”

에믈린은 대답 대신 미소로 화답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나 보다.

나는 그녀가 또다시 눈물을 왈칵 쏟아내기 전에 다른 말을 했다.

“아, 혹시 어렸을 때 기억에 남는 세나 씨의 행동이 있었나요? 가령 특이했다든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든지……. 뭐든 좋아요.”

“특이한 행동이요?”

에믈린은 내 말에 의문을 가질 법도 했지만, 의문을 표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했을 뿐이다.

마치 어린 시절 저가 보았던 세나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다는 듯이.

침묵은 길어졌다. 세나와 관련된 상황들을 되짚어 보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듯했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 정체에 연관된 일을 알아낼지도 모르겠다는 기대와


함께.

이윽고 그녀의 침묵이 깨졌다. 에믈린은 무언가 떠올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그런 행동이 한 가지 있긴 했어요.”

“그게 뭔데요?”

그녀의 붉은 입술이 작게 떼어 냈다.

제 60 화. 욘두 쌤의 오래된 연인이에요?

“세나 언니는 어렸을 때 항상 집에 빨리 가야 된다고 했어요.”

그것은 다소 의외인 말이었다.

집에 빨리 간다는 게 어째서 특이한 행동이 되는 걸까.

내 눈빛에 서린 의아한 기운을 에믈린 또한 읽은 것 같았다. 그녀는 늦지 않게 사정을 조금 더


설명해 주었다.
“언니의 집은 공작저에서 꽤 멀어서 가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아니, 공작님께서도 공작저에 언니의 방을 따로 내주기도 했거든요.”

그 말은 이전에 요한에게서도 들었던 이야기였다.

세나의 생가는 여기서 엄청 멀고, 그곳엔 지금 그녀의 사촌들이 살고 있다고.

나는 잘 듣고 있다는 것처럼 고개를 옅게 끄덕여 주었다. 에믈린은 막힘없이 제 이야기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니는 시간을 많이 들여서라도 집에 자주 돌아가곤 했어요. 일주일 중 반은


공작저에서 자고, 반은 집으로 돌아갔죠.”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에믈린 씨는 그 이유를 알고 있나요?”

원인 없는 결과는 없고, 이유 없는 행동은 없다.

세나가 에믈린이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했다는 건 무언가의 이유가 있으리라.

“물론 저도 언니에게 이유를 묻기는 했죠. ‘언니는 왜 공작저에 쭉 머물지 않는 거야? 나랑


같이 자자. 나랑 밤새 얘기를 나누자.’”

“네, 그래서요?”

나는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 주었으나 에믈린은 쉽사리 제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그녀는 제 눈가를 손끝으로 쓸었을 뿐이었다. 마치 제가 눈물을 흘렸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라본 그녀의 눈가엔 눈물 자국은 없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후. 죄송해요. 세나 언니가 자꾸만 생각나서, 감정이 잘 갈무리되지 않네요.”

나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옅게 끄덕였다. 그러고선 희미한 슬픔에 잠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미 5 년 전에 죽은 세나가 남긴 흔적이 꽤나 짙은 듯했다.

그리고 남겨진 이들에게 새겨진 그녀의 흔적들은 모두 다 소중하고 따스한 것인 듯했다.

적어도 세나를 아는 이들 중 그녀를 나쁘게 기억하는 사람을, 나는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의 사랑을 얻지 못했던 바비 또한 그녀를 부정적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도리어 이따금 그녀를 그리워하는 빛을 내비쳤을 뿐.

죽었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머무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그것도 아주 긍정적으로.


다소 선명히.

평판이 좋은 아주 좋은 여자인 세나.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해야 했다. 아무리 사랑받는
존재였어도 결국 다가오는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이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물러섬이 없고, 막을 수도 없는 그러한 것.

하지만 그녀의 내면엔 남들이 잘 알지 못했던 분노가 잠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나는 세나의 일기장 속, 어쩐지 분노로 가득 차 보이는 글귀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적은 것인지, 아님 그녀는 제 마음속에 내장된 분노를 숨기고 산 것인지, 나는 잘


가늠할 수 없었다.

문득 인지했을 땐, 에믈린이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언니는 제 물음에 대한 대답을 잘 해 주지 않았어요. 그냥 집에 가고


싶다고 했었나? 그런 식으로 얼버무렸던 것 같아요. 오래전의 일이라서 저도
가물가물하네요.”

“집에 돌보아야 할 무언가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이를테면 애지중지하는 강아지라든지.”

타인에게는 알려선 안 될 동생이라든지.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아 냈다.

하지만 ‘동생’이라는 말은 곧 에믈린의 입술 사이에서 비집고 나왔다.

“아! 언니에게 동생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종종 했었어요. 왜냐면 언니는 저를 엄청


챙겨 줬었거든요. 그건 결단코 그냥 나오는 행동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나오는 행동이 아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습관 같은 게 아닐까.

“은연중에 나오는 버릇처럼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요?”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그녀의 말은 이어졌다.

“그래서 언니에게 동생이 있는 건 아닐까, 라고 생각했어요, 보통 제가 겪은 외동들 중에 세나


언니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거든요.”

“…….”

“하지만 언니는 외동이었어요.”

에믈린은 무릎 위에 올려둔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었다.

“리나 언니……. 제가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은 거죠?”

나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말해 주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오히려 제가 더
고마운 걸요.”

그녀는 그제야 밝은 미소를 지었다. 시선을 일순 빼앗기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비록 랭카스터


가의 형제들과는 닮지 않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리나 언니. 저한테 더 궁금한 게 있어요? 제가 아는 선에선 다 말해 줄게요!”

또 궁금한 것이라.

세나에 대한 것은 일단은 알고자 했던 것을 안 느낌이었다. 당장 더 궁금한 것이 없다고나


할까…….

그러다 불현듯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논제 하나가 있었다. 나는 무릎을 탁 내려치며


물었다.

“아! 에믈린 씨는 혹시 욘두 쌤의 오래된 연인이에요?”

늘 그 정체를 궁금했던 욘두의 연인이었다.

패션 테러일지 안구 테러일지 모를 수상한 마법사가 사랑하는 여자는 과연 누구일까.

나는 잠자코 에믈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의 주위에 풍기는 분위기가 변한 것 같다고 느낀


것은 그 순간이었다.

“…….”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기류만을 풍기던 그녀였다. 하나 지금 그녀 주변에 맴도는 기류가 제법
냉랭해져 있었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던 그녀의 시선이 마룻바닥으로 내리꽂혔다. 내리깐 그녀의 홍안 속엔


좀 전까지 보지 못했던 기류가 스며 있었다.

경계의 빛이 가득 서린 눈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자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사뭇 다르게 보였다.

석양 같은 빛을 띠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바라본 그녀의 눈동자에서 느껴진 것은


이상한 소름 끼침이었다.

석양 같은 건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았고, 검붉은 피만을 연상하게 했다.

내가 섣부른 물음을 해 버린 걸까?

그래서 나는 내가 한 물음을 철회하려고 했다. 하지만 에믈린이 말이 한발 더 앞섰다.


“……아뇨. 제가 몇 년째 열심히 꾀어내고 있는 중인데, 잘 안 넘어오네요.”

부정의 대답을 한 에믈린은 잠깐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입가를 고의로


비틀어 간신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 덕분에 그녀를 둘러싼 차가운 기류는 사라졌으나 그 미소는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에믈린이 별안간 서늘한 낌새를 내비친 것은, 몇 년째 꾀어냈음에도 제게 넘어 오지 않는 욘두


때문인 걸까?

서로의 마음이 통하지 못한 짝사랑이 서글펐기에 그런 것일까?

나는 그녀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를 더욱 우울해지게 만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욘두 쌤한테 연인이 있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아까 너무 다정해 보이셔서,


저도 모르게 실례를 범했네요.”

에믈린이 욘두의 연인이 아니었다, 라.

그렇다면 욘두와 귀걸이를 나눠 낀 오래된 연인은 과연 누구인 걸까.

욘두는 그 귀걸이를 자신과 연인이 각각 하나씩 나누어 꼈다고 했었다.

하지만 나머지 한 짝은 바비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비는 말했었다.

‘이 귀걸이. 어쩌면 네가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된 물건일지도 몰라.’

그 순간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잠깐 들었다.

예쁜 눈웃음을 지은 바비의 팔짱을 낀 패션 테러범 욘두의 모습이 상상되었던 것이다.

언제고 나를 보며 미소 지었던 바비의 붉은 입술이 욘두의 이름을 사랑스럽게 부르는 거다.

그러니까 바비와 욘두가 오래된 연인……. 아냐. 영양가 없는 상상은 더 이어 가지 말자.

나는 삽시간 내 머릿속에 불어 닥친 이상한 상상을 몰아냈다.

두 남자와 관련된 상상을 몰아내기가 무섭게 내 머릿속을 뒤덮은 가정이 하나 있었다.

“……!”

그것은 조금 전에 들었던 생각처럼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은 그러했다.

설마하니 내가 과거에 욘두의 연인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돼.
나는 아연실색하며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그 생각은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내 추측 중
제일 신빙성 없는 것이었다.

요 근래 내게 떠오른 기억 중에서 욘두와 관련된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비록 아주 일부분이었지만 나는 바비의 어린 시절도 꿈속에서 보았고, 에믈린의 과거 모습이라


추정되는 여자아이의 모습까지 본 터였다.

내 과거에 욘두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적어도 한 번쯤은 그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

나는 침묵하고 있는 에믈린은 빤히 바라보았다.

“리나 언니. 저는 괜찮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남자를 제 걸로 만들려고 하는 거. 저도


별로 도덕적이지 않은 행동인 거 아니까.”

“…….”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좋아하게 된 걸요. 그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든, 그가 결혼을 했든


……. 어찌 됐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러한 사정은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되잖아요.”

그녀는 제 오른쪽 눈을 내게 작게 찡긋거리며 물었다.

“언니도 저와 비슷한 마음을 느껴 본 적이 있나요?”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나요?

그녀는 내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러자 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이는 요한이었다.

요한. 내 쌍둥이 언니라 추정되는 세나와 사랑을 나누었던 남자.

언니가 사랑했고, 사랑을 나눈 남자를 사랑해도 되는 걸까?

나는 희미한 미소로 대답을 갈음했다.

비슷한 마음을 느낀 것 같지만, 그녀에게 내 사정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으니까.

에믈린은 내 침묵을 괘념치 않아하는 듯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내 침묵이 긍정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대신 내가 더 이상 난감한 미소를 짓지 않게 화제를 바꾸어 주었을 뿐이었다.

“아참! 언니 저랑 같이 누굴 좀 만나 줄래요?”

착하고, 선하고, 눈치도 빨라 보인다.


나는 그녀에 대한 그런 감상을 내렸다.

“누구요? 요한 씨요?”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했다.

“물론 오빠와도 함께 있기는 할 텐데……. 제가 리나 언니를 보여 주고 싶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에요! 저와 함께 공작저로 온 사람이기도 하고요! 큭큭.”

에믈린은 재미있는 일이라도 떠오른 듯이 킥킥거렸다. 두 손을 입가까지 올려 웃는 모양새가


왠지 조슈아를 잠깐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내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단숨에 내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무방비하게


놓인 내 손을 잡아당겼다.

에믈린은 처음 보는 내게 스스럼없는 스킨십을 했다. 그러자 도리어 당황하게 된 쪽은 나였다.

“얼른, 얼른! 같이 가요!”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조슈아를 또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불가항력. 조슈아가 무언가를 부탁할 때 절대로 거절하지 못했던 것과 비슷한 기분을 느낀


것만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그 방을 나서게 되었다.

* * *

에믈린은 공작저의 복도를 아주 훤히 알고 있다는 듯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목적지가 정해진


그녀의 걸음엔 망설임이라곤 없었으며, 마주친 시녀들은 에믈린에게 예를 표했다.

랭카스터 공작가, 요한의 막냇동생이 타이틀에 걸맞은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걸음이 멈춘 곳은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도 익히 아는 방이었다.

“같이 가자는 곳이 요한 씨의 방이에요?”

그러자 에믈린은 대답 대신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네! 방 안에 리나 언니를 꼭 보여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누굴까. 그 사람은 요한의 다른 형제나 친척쯤이 되는 걸까?

이내 에믈린이 내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곤 커다란 소리로


쩌렁쩌렁하게 말했다.
방문 근처에는 시녀가 있었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손수 하리라 마음을 먹은 것만 같았다.

“오빠! 나 왔어!”

우리의 방문을 알리는 큰소리가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안쪽에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에믈린은 기다리기는커녕 문고리를 쥐어 잡았다.

“아까 전에 제가 나오면서 문을 잠그지 않고 나왔으니까, 문이 열려 있을 거예요.”

과연, 그녀의 말이 맞았다.

에믈린이 문고리를 돌리기가 무섭게 그것은 저항 없이 부드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문은 스르륵 열렸고, 열린 문 사이로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리었다.

나는 방 안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대화 소리의 장본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본 채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사람은 내가 너무도 잘 아는 요한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상복처럼 보이는 검은빛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노부인이었다. 에믈린은 노부인을


아주 반갑다는 듯이 불렀다.

“할머니!”

에믈린은 노부인을 아주 살갑게 불렀지만, 노부인은 그녀 쪽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노부인의 시선이 끈덕지게 머문 곳은 요한의 얼굴이었다.

나는 에믈린을 따라 방 안으로 느릿하게 들어와 문을 닫은 후, 노부인을 조금 더 관찰해


보았다.

노부인은 드레스 색과 비등되는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 밑으로 설핏 보이는 머리칼은


본래의 색을 잃은 듯이 옅은 빛을 띠고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단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노부인의 회색빛 머리칼은 누군가가


세세하게 관리를 해 준 듯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라본 노부인의 옆얼굴은 비록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지만, 그 나이 대에 비하면


아주 고와 보였다. 역시나 누군가의 관리를 꾸준히 받은 듯한 모습.

나이는 아마 칠십 대……정도 되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드레스하며, 잘 관리 받은 모습하며, 아무래도 저 노부인은 에믈린과


요한의 할머니가 틀림없다는 확신이 섰다. 물론 에믈린이 이미 그녀를 할머니라고 불렀지만.

나는 시선을 비틀어 노부인의 앞에 서 있는 요한의 얼굴 또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만이 그득했다.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제 61 화. 소중한 기억을 갉아먹는 벌레

“미인 거지도 들어왔습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내 방문을 알리며, 요한과 노부인이 서 있는 곳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그들은 방 중앙에 있는 소파에도 앉지 않은 채였다.

앞서 들어갔던 에믈린이 서 있는 곳까지 걸어가자, 그들의 대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었다.

“당신은 죽은 내 영감과 똑같이 생겼구려.”

노부인이 그리 말하자 요한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마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할머님.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 사람은 제 할아버님이니까요.”

요한의 침착함이 외려 내겐 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풉.”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가까스로 막아 냈다. 나는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할머님? 예끼. 이넘아. 레이디에게 할머님이라니, 매너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놈이구나.”

조금 전까지 죽은 영감을 찾았으면서, 노부인은 저가 할머님이라고 불린 사실에 끔찍해 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광경이었다.

하나 요한은 이번에도 화를 내지 않고선 조곤조곤 대답했다. 아마도 노부인이 원할 법한


대답을 말이다.

“레이디. 일단은 소파에 앉아 주시겠습니까? 레이디의 건강이 염려가 되어……. 하하하.”

“……내 건강을 염려하는 건 내 죽은 영감이랑 비슷하구먼.”

노부인은 저가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제야 요한의 말을 꼼짝없이 따라 주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떼며 이윽고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멀뚱히 선 채로 요한과 노부인의 대화를 지켜보던 에믈린이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내 귓가에 제 입술을 가지고 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저분은 저와 함께 온 제 할머님이세요. 리나 언니는 테레사 부인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할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심각한 치매를 앓게 됐답니다.”
요한에게 자신의 영감과 닮았다고 한 것은 치매 때문에 한 말이었구나.

그나저나 요한은 제 할아버지와 얼마나 닮은 거야.

나는 할아버님과 닮았다는 말을 태연하게 읊조리던 요한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연신


키득거렸다.

에믈린의 말은 이어졌다.

“할머님도 세나 언니를 무척이나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언니가 만나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

“아까는 분명히 저랑 요한 오빠를 알아보셨는데……. 잠깐 욘두를 만나고 온 사이에 다시


저희를 잊으셨나 봐요.”

안타까운 일이에요. 거기까지 말한 에믈린은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렇군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노부인이 세나를 좋아했다면, 나와 노부인의 만남을 성사시키지 말아야 했지 않았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노부인이었다.

세나와 닮은 나는,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지는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노부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나는 노부인을 진즉부터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그녀와 단번에 눈이 마주쳤다.

노부인은 요한과 닮은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 속에 서린 이채가 약간은 흐려져


있었지만, 요한의 것처럼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세나?”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는 세나의 이름을 내뱉었다.

노부인은 흐려지는, 그리고 붙잡을 수 없는 기억 속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아가씨는 내가 잘 알던 사람과 닮았구려.”

노부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미소 지음에 눈가에 새겨진 주름이 조금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인. 저는 리나라고 해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 진짜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 아가씨가 내가 알던 사람일 리는 없지. 그 아이는 아주 예전에 죽었다우.”

노부인은 꽤나 씁쓸한 얼굴을 하고선 말끝을 흐렸다.

정신이 불안정함에도 세나에 대한 기억은 그녀에게도 강인하게 각인되어 있는 듯했다.

세나를 기억하는 또 다른 사람인 테레사 부인. 그녀 또한 세나를 긍정적으로 기억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처음 만난 아가씨도 제법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구려.”

노부인은 나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오묘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저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끝낸 듯한 에믈린은 노부인에게로 쪼르륵 걸어갔다. 그러고선


노부인 옆에 앉아 세상 누구보다도 살갑게 팔짱을 꼈다.

할머니. 저는 누구예요?

제 이름은 기억해요?

기억하신다면 제 이름을 불러 주세요!

아이 같은 에믈린의 재롱에 노부인은 미소를 짓기만 했다.

노부인의 집중이 에믈린 쪽으로 완전히 옮겨가자, 멀뚱히 서 있던 요한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내게만 들릴 법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당황했지? ……아니, 나야 말로 소름 끼치게 당황했어. 왜 네가 에믈린과 함께 등장한 거지?”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그는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을 의아해 하는 듯했다.

“거지가 대답합니다. 아까 우연히 만났어요.”

요한의 말끝이 거지라고 끝이 나니, 버릇 같은 대답이 튀어나오더라. 이제는 나 자신을 거지라


칭하지 않아도 됨에도 불구하고.

“에믈린이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았어?”

“이상한 소리라면 어떤 소리요?”

“……내 욕을 했느냐고 묻고 싶은 건 아니야.”

……당신의 욕을 했느냐고 묻고 싶은 거구나?


나는 변함이 없는 그의 말투가 귀여워 작게 킥킥거렸다. 요한은 내 머리 근처로 손을 뻗었다,
이내 어색하게 갈무리했다.

아무래도 저도 모르게 내 머리를 쓸어 주려다 다른 사람이 존재함을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나중에 둘만 있을 때 다시 만나.”

“좋아요. 나중에 만나서 얘기만 하지 말고, 다른 것도 해요.”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요한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달아오르는 제 얼굴의 붉은 기를 눈치챈 듯 머쓱하게 목덜미를 몇 차례 주물럭거렸다.

이봐요, 요한 씨.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다른 거……. 머리를 마음껏 쓰다듬을 수 있게 해 준다는 말이었는데요?”

“너……!”

“그 말이 그렇게 야릇한 말이었던가.”

어휴, 쯧쯧. 내가 혀까지 차자 요한의 얼굴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붉어지기에 이르렀다.

아무도 없었으면 저 붉어진 볼따구니에 입술이라도 맞추어 보는 건데. 아쉽다.

그 순간 느껴진 강렬한 안광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내 뺨에 상처라도 생길 법한 아주 강렬한


시선이었다.

나는 강인한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그 시선의 장본인과 눈이


마주쳤다.

“…….”

에믈린? 별안간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안광에 서린 강인한 열기는 채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그녀는 왜 나를 이토록 빤히 들여다보는 걸까.

아니, 그것은 들여다본다는 표현과는 맞지 않은 눈빛이었다. 쏘아 본다, 째려봤다는 표현과


훨씬 더 잘 어울리리라.

얼마 못 가 두 명의 방문자가 찾아왔다. 두어 번의 노크 소리와 함께 조슈아와 벨라가 들어온


것이다.

“할머니! 할머니가 왔다는 소식에 조슈아가 할머니를 보러 왔어.”

“벨라도 함께 왔습니다.”
내가 에믈린과 세나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던 사이, 조슈아의 수업이 끝난 것 같았다.
조슈아는 영문 없이 등장한 나를 보고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두 눈만 동그랗게 떴을까. 조막만한 붉은 입술도 떡 하니 벌어진 채였다. 나는 이상했던


에믈린의 낌새는 금방 잊고선 조슈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무 귀여워. 널 어떻게 하면 좋지?

아이는 나와 노부인을 번갈아 보면서 고뇌에 빠진 듯했다. 어느 사람에게 먼저 아는 척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모습 같았다.

나는 다과를 준비해 온 벨라와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었다. 그러고선 그녀는 능숙하게 다과를
내려놓은 뒤에 방을 나섰다.

그사이, 조슈아의 고뇌는 끝이 난 것 같았다.

녀석의 선택은 노부인이었다. 연장자를 우선시한 선택인 것 같았다.

어느새 노부인 앞까지 간 조슈아는 그녀에게 능숙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테레사 할머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노부인은 그런 아이를 부드럽게 굽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너는 처음 보는 아이로구나. 어여쁘니, 이 할미가 사탕을 하나 주마.”

“응! 할머니, 고마워. 내 이름은 조슈아라고 해.”

“그래. 조슈아야.”

그녀는 제 주머니를 한참이나 뒤적거렸다. 그렇게 몇 초가 흘러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올린


노부인은 조금 전과 똑같은 말을 했다.

“어이쿠, 이렇게 예쁘게 생긴 아이는 처음 보구나. 이 할미가 사탕 하나를 주마.”

치매에 걸린 사람은 뒤돌아서면 곧바로 잊어버리곤 한다던데.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성도 싶었다.

도돌이표 같은 질문에 조슈아는 놀라는 법 없이 대답했다.

“응, 할머니. 고마워.”

“우리 예쁜이는 이름이 무엇일고?”

“조슈아라고 해. 이번엔 꼭 기억해 줘.”

아이는 여름 햇살과 닮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설령 제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제


미소는 기억해 달라는 것처럼.

노부인은 요번엔 사탕을 꺼내는 일조차 까먹은 것인지 인자한 미소만을 연신 지었다.
 
이윽고 조슈아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노부인과의 인사는 그쯤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이는 내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자세를 낮추어 아이의 귓전에
작게 속삭였다.

“조슈아. 테레사 부인께서 계속 네 이름을 까먹는데, 놀라지 않는 거야?”

이번엔 조슈아가 내게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주 대단한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있자나, 엄마. 테레사 할머니의 머릿속엔 아주 무서운 벌레가 살고 있대.”

“벌레?”

“웅웅, 그 벌레는 소중한 기억을 갉아먹고 사는 벌레야. 할머니가 조슈아 이름을 계속 까먹는
건, 조슈아를 소중하게 여겨서 그런 거래.”

“…….”

맙소사. 나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건 누가 가르쳐 줬어?”

“욘두 선생님이. 그러니까 할머니가 똑같은 걸 계속해서 물어도, 놀라지 말라고 했어.”

욘두 쌤, 당신은 대체…….

아이에게 이따금 이상한 말을 가르치고, 옷도 엄청 못 입고, 왠지 모르게 수상한 면이 가득한


당신이 한 말이 정말로 맞는 거야?

치매를 앓아 누군가를 잊어가는 일을, 머릿속에 소중한 기억을 갉아먹는 벌레가 있다고 설명해
주다니.

그것은 다섯 살 아이에게 꼭 맞는 설명이었다. 왠지 동화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정말로 나쁜 벌레야. 할머니의 머릿속엔 왜 그런 벌레가 사는 걸까? 그래서 조슈아는 엄청


슬퍼. 할머니가 내 이름을 기억해 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

녀석은 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이 음울해진 얼굴을 했다. 커다란 눈망울엔 슬픈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조슈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헝클어 주었다.

오구오구. 기특해라, 내 새끼.


“하지만 할머니가 조슈아 이름을 계속 까먹어도 나는 괜찮아.”

“왜?”

“조슈아가 다시 알려 주면 되니까.”

나는 아이를 꼭 안아 주었다.

어쩜, 너는 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더욱 사랑스러워지는 거니.

할 수만 있다면, 아이의 얼굴 여기저기에 물리도록 입을 맞추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참지 못하고 아이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추어 주기도 했다.

아쉽게도 입맞춤은 딱 한 번밖에 할 수 없었다. 여긴 요한과 나, 그리고 조슈아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 사실을 깨닫기가 무섭게 한동안 조용했던 에믈린이 한마디를 읊조렸다.

“……리나 언니는 그만 나가 주세요.”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네?”

처음 보는 내게 언니라며 살갑게 굴었던 그녀가 무색했다.

노부인 옆에 앉아 다리를 유려하게 꼰 에믈린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엔


아무런 감정도 띠어져 있지 않았다.

“가족끼리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아.”

요한은 그녀를 급하게 저지했다.

“에믈린. 말이 지나치잖아.”

“왜? 저 여자가 귀족이라도 되는 거야? 조슈아의 유모라며. 그럼 벨라와 다를 게 없는 사용인


아니야? 사용인을 쫓아내는 게 뭐 어때서?”

사람이 이렇게나 변할 수 있는 걸까?

어떠한 내 모습이 그녀를 급변하게 만든 걸까. 아니, 사실은 이게 진짜 그녀의 본심은 아닌


걸까?

나는 뜨문뜨문 느꼈던 그녀의 이상한 모습들을 절로 떠올렸다.

“오빠. 설마 리나 언니를 세나 언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는


거 아니지?”
휘몰아치는 에믈린의 말에 요한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자 나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그가 나를 세나로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거,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침묵은 나를 내심 섭섭하게 만들었다.

‘그런 거 아니야. 착각하지 마.’

어쩌면 나는 그가 따끔하게 대답해 주기를 바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한이 대답을 망설이는 심정 또한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는 제 가족들에게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 한 것이리라.

요한이 대답을 망설인다면, 내가 대신 해 주면 그만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요한이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는 거잖아. 왜냐면 에믈린의 말은 정확히 나를


가리킨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슈아에게 귓속말을 하기 위해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선 사용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해 주었다.

“에믈린 씨. 죄송한데, 요한 씨가 저를 세나 씨로 보는 건 제가 용납 못해요.”

“…….”

“그럼 사용인은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제 말이 지나쳤다면 거듭 사죄를 드려요. 죄송해요.”

나는 그대로 방을 나가려고 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상심이 컸고, 섭섭했고, 아무튼 기분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그때 내 드레스 자락을 꾹 잡고 놔주지 않는 이가 있었다. 나는 시선을 끌어내려 내 드레스를


부여잡은 이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도 엄마를 따라갈 거야.”

우리 귀여운 꼬맹이가 날 따라나서기를 결정한 것만 같았다.

“조쉬! 그 여자는 네 엄마가 아니야.”

에믈린의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가 한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조슈아가 나를 뒤따를 거라고 확신했다.

왜냐면, 에믈린의 외침에도 녀석은 잡고 있던 내 드레스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에 띄게


일그러진 아이의 얼굴이 에믈린 쪽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강경한 한마디를 외쳤다.


제 62 화. 망설이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흥! 에믈린 이모가 나빠! 엄마에게 나쁘게 대하는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이야!”

너는 어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하게 해 주는 거니? 나는 당장이라도 조슈아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토닥여 주고 싶었다.

네가 얼마나 장한지 몰라.

하지만 그것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에믈린을 바라보며, 그녀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당신의 말에도 조슈아는 나를 따른다고 한다는데……. 지금 당신의


기분은 어때?

하나 구태여 묻지 않아도, 그녀의 대답을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바라본 에믈린의 얼굴은 처참히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저가 그러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만 같았다.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진 얼굴은 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가감 없는 그녀의 속마음이 드러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내게 살갑게


군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아니었던 거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자 그녀에게서 이따금 느꼈던 이상한 위화감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럼 조슈아……님을 돌보는 것이 저의 일이니, 조슈아 님은 제가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어색한 존칭을 붙여 가며 말한 어투엔 희미한 미소가 스며 있었다.

나는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두 팔로 조슈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요 며칠 사이에 부쩍 큰


조슈아는 제법 무거워져서, 약간 휘청거리기도 했다.

멋지게 한 번에 딱 안아 들고 싶었는데.

그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었다.

복도를 나오긴 했지만 막상 어디론가 가려고 하니, 행선지를 정할 수 없었다. 아이를 데리고
공작저를 대뜸 나설 수도 없었거니와 내 방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 어디로 가야지 찜찜한 내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내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착한 줄만 알았던 에믈린의 태도가 급변했기 때문인가. 아님,
나를 한 번에 두둔해 주지 않은 요한 때문인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골몰하던 내게, 반갑고도 익숙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꼬르륵.

“…….”

기 싸움을 한 탓인지, 깨달았을 땐 몹시도 배가 고파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기력을 너무도


많이 소모한 게 분명했다.

“엄마 배 속에서 익숙한 소리가 나.”

“우리 조슈아가 무슨 소리를 들었을까나.”

나는 모른 척을 했으나 조슈아는 숨김없이 해맑게 대답했다.

“꼬르륵!”

“…….”

“킥킥.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엄마 배에서 나던 소리랑 똑같은 거다.”

“넌 그걸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니?”

아이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엄마 배꼽 소리는 엄청 많이 들었어! 엄마는 우리 집에 와서도 자주 꼬르륵거렸으니까. 엄마


배꼽에서 나는 소리가 제일 커. 공작저에 있는 사람들 소리 중에 최고야.”

얘야. 그건 자랑이 아닌 것 같구나.

하지만 나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선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럼! 뭐든 내가 최고지. 배꼽 소리든 뭐든. 큭큭.”

조슈아가 최고라고 하는데, 내가 여기서 어떻게 다른 말을 해.

하잘것없는 일임에도 아이가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나를 추켜올려 주자, 나는 실제로 내가


대단한 능력을 가진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배꼽 소리가 제일 큰 게 얼마나 뛰어난 능력이라고 이런 마음까지 드는 걸까.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속상했고, 우울했던 기분을 어떻게 누그러뜨리나 걱정했는데……. 그 해답은 그리 먼 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조슈아 덕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음울한 기운은 어디론가 홀연히 날아가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뭐 좀 먹을까?”

“웅웅! 식당으로 가자! 조슈아는 과자를 먹고, 엄마는 고기를 먹어. 엄마는 고기를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잘 먹으니까.”

얜, 나를 왜 이렇게 잘 아는 거야.

어디로 갈지 고민이 되었는데 마침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주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식당에서 만난 벨라는 터무니없이 큰 목소리로 우리를 반겼다.

“어머, 리나 님! 조슈아 님!”

나는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려놓으며 급하게 벨라를 진정시켰다.

“쉿, 쉿! 왜, 왜 이렇게 반가워하시는 거예요.”

“반가운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지, 그럼 어떻게 해요.”

“그건 맞는 말이기는 한데…….”

“헤헤.”

조슈아는 우리가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보며 귀엽게 킥킥거렸다.

나는 안고 있던 조슈아를 바닥에 내려 주며, 식당에서 풍기는 냄새를 슬쩍 맡아 보았다. 숨을


딱 한 번 길게 들이켜자 이마를 탁 짚을 만한 냄새가 맡아졌다.

끝내주게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나는구나.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읊조려 보자면 그러했다.

확 올라오는 붉은 불길이 있단 말이야. 그 불 위에 그을림이라곤 하나 없는 은빛 팬을 올려.


그리고 은빛 팬 위에 올리브 오일을 적당량 둘러서 팬에 기름칠을 좔좔 해 주는 거야.

적당히 달궈진 팬 위에 윤기가 나는 두툼한 고기 한 조각을 턱 올리는 거지. 여기서 절대로


조급해 하면 안 돼. 고기를 살살 달래 가며 고르게 익혀야 한단 말이야.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접시에 잘 익힌 고기를 살며시 올리는 거지. 나이프로 작게 찔렀을 때
터져 나오는 육즙이란…….
그 고기를 한입 먹으면, 오늘 있었던 기분 나쁜 일을 완전히 잊을 것만 같아.

“크……. 지금 고기 요리하고 있는 거 맞죠? 하하하.”

나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면서도 때가 아닌 시간에 식당까지 온 게 머쓱해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기도 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는 요한과는 다르게 벨라는 아주 사려 깊은 사람이었으니까.

벨라는 알 만하다는 듯이 빙그레 미소 짓고선 말했다.

“식탁에 앉아 계시겠어요? 제가 먹을 걸 좀 내어 올게요. 조슈아 님도 앉아 있으세…… 어?”

조슈아도 앉아 있으라는 말을 하려던 찰나 그녀는 별안간 놀란 듯한 소리를 내었다.

나는 벨라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시선을 틀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분명 내 발치 근처에


있던 조슈아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아이의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조슈아는 이미 식탁에 앉아 있어!”

언제 식탁까지 걸어간 것인지, 아이는 아이용 의자에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앉아 있었다.

어디 허리만 펴고 앉아 있었을까. 아이의 목에는 넥스카프까지 둘러진 채였다.

아이의 기민한 행동력에 나와 벨라는 서로를 바라본 채 큭큭거리기만 했다.

 
문제는 아마도 고기와 함께 나온 붉은 와인이었다. 입가심 정도로만 몇 차례 마셨는데, 어쩐지
오늘따라 취기가 조금 도는 기분이었다.

평소 식사 때도 자주 마시던 거라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 오늘은 원래 가지고


있던 주량이 모두 수포가 되어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내 옆에서 초코 과자를 먹고 있는 조슈아에게 피해를 끼치기 전에 와인 마시는 걸


그만두어야겠다.

나는 쥐고 있던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와인 잔의 바닥엔 조금 남은 붉은 와인이 희미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와인…….”

밥맛이 즐겨 마시던 거네.


나는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로 요한을 떠올리게 하는 와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와인에 서린 요한과의 추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 기억은 이제 아주 오래전의 일이 되어 버린 과거였다.

공작저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때.

어두운 방을 비추는 빛은 달빛뿐이었던 방 안. 술에 잔뜩 취해서 비틀거리던 요한.

그리고 으스러질 정도로 나를 꽉 껴안았던 요한. 술 내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그리워했던 요한.

‘세나……. 왜 이제야 온 거야.’

나는 코웃음을 쳤다.

바보처럼 내 등을 감쌌던 그의 뜨거운 열 손가락이 지금 무척이나 간절하게 그리웠다.

요한이 술에 취해서 세나를 찾던 마음이 약간 이해가 되기도 했다.

술을 마시고, 취하고, 정신이 나약해지니 자연스럽게 지금 제일 간절한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밥맛 요한이 제일 절실히 보고 싶나 봐.

이봐요, 밥맛 요한 씨. 당신은 지금 뭘 하고 있어?

……난 지금 당신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때 당신이 간절하게 떠올린 사람이 세나였다면, 지금 당신이 간절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누굴까.

지금 요한이 술에 취한다면, 그가 내뱉을 이름은 누구의 것일까? 그것은 세나일까, 리나일까?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술에 취한 요한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만 같았다. 예전엔 술에 취해


그렇게도 내게 스킨십을 하더니.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배가 불러서인지 와인을 마셔서인지,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나른함이 온몸을 덮쳐 왔다.

우리 근처엔 벨라가 여전히 있기는 했지만, 조슈아를 두고서 잠들면 안 될 텐데.

“엄마, 엄마! 아빠처럼 죽어 가면 안 돼!”

조슈아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반쯤 뜬 나를 보며 말했다. 다급한 어투는 아니었고,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밴 어투였다.

장난스러운 기미가 가득하다고 해야 할까.

나는 괜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작게 휘저었다.
“조슈아야. 난 괜찮아. 그런데 왜 이렇게 잠이 오는 걸까.”

조슈아와 대화를 나누었지만, 내 머릿속에 한 번 떠오른 요한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눈꺼풀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무서워진 것만 같았다. 이윽고 나는 눈을 완전히 감았다.

감긴 눈꺼풀이 다시 들리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나는 좀처럼 예상할 수


없었다.

* * *

요한은 자신이 확고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줄곧 해 왔다. 그것은 그가 가진


자긍심이었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해 왔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순간에는 정작 확고하게 굴지 못했다.

‘오빠. 설마 리나 언니를 세나 언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는


거 아니지?’

그는 망설여졌다.

무슨 대답이 옳은 것인지, 어떤 합리적인 대답을 해 주어야 모두가 납득할지, 고민이 되었다.

특히나 에믈린은 세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는 설명하기가 더욱 까다로웠던


것이다.

요한은 골몰했고, 그사이 대답할 타이밍은 지나가 버렸다.

‘에믈린 씨. 죄송한데, 요한 씨가 저를 세나 씨로 보는 건 제가 용납 못 해요.’

‘…….’

‘그럼 사용인은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제 말이 지나쳤다면 거듭 사죄를 드려요. 죄송해요.’

자신의 순간적인 망설임으로 인해, 리나의 얼굴은 삽시간 잿빛으로 변해 버렸다. 바보처럼
웃기만 하던 그녀의 얼굴이 흐려지는 것을 보는 건 자못 고통스러웠다.

그때 요한은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가족들에게 합리적인 대답을 내어놓는 일보다, 리나에게 미움 받는 일이 훨씬 더 끔찍한


일이었다고.

왜 자신은 항상 뒤늦게 알아 버리는 걸까.

조금 더 일찍 그녀가 원할 법한 대답을 해 주었다면, 상황이 바뀌었을까?


리나의 얼굴이 흐려지지 않고, 조슈아가 화를 내지 않았을까?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조슈아보다도 저가 리나에게 못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고.

“…….”

리나와 조슈아가 나가 버린 방 안. 침묵은 뾰족한 가시가 되어 제 몸을 사정없이 찌르는 것만


같았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는 이는 없었다.

치매에 걸려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할머님은, 소란스러운 상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리나를 향해 소리치던 에믈린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에믈린. 조금 전에는 네가 심했어. 나중에 그녀에게 사과하도록 해.”

그것이 요한이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부탁이라기보다는 어쩐지 명령조에 가까운 말.

에믈린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한껏 모가 난 시선으로 요한을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네가 그렇게 쳐다봐도, 네가 말이 심했다는 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야.

요한은 냉랭한 그녀의 눈빛에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대답을 망설이기는 했으나,
에믈린을 감싸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

그는 진한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에믈린과 할머님이 공작저로 찾아온 것은 예고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공작저와 가까운 곳에


기거하는 그들은 종종 말없이 공작저를 찾아오곤 했다.

그래서 요한에게는 리나의 존재를 미리 설명할 기회가 없었다.

할머님을 상대하고 있을 순간에, 리나와 에믈린이 우연처럼 마주치게 되다니.

물론 그 사실을 아예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빠, 나는 욘두를 만나고 올게! 할머님을 잘 부탁해!’

에믈린은 오래전부터 욘두에게 호감을 내비치고 있었고, 요한이 말리기도 전에 욘두를 찾아


나섰다.

제 방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리나와 맞닥뜨리는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을


적어도 한 번은 했던 것 같다.

한편으론 괜찮을 수도 있겠다고, 쉽게 여겼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에믈린은 세나를 잘 따랐고, 그녀를 좋아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세나를 닮은 리나에게도
살갑게 굴지 않을까? 벨라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요한의 오판이었다.

에믈린은 리나를 한껏 경계하고 있었다.

그녀가 왜 리나를 경계하는지 요한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엔 처음 보는 사람에게조차도


지나치게 다정한 그녀였는데.

“그럼 오빠는 잘했다는 소리야? 저 여자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뒤늦게 대답한 에믈린의 목소리엔 쇳소리가 가득했다. 그녀는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요한으로선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였다.

그 분노는 어디서 기인된 분노인 걸까.

요한은 그녀를 달래듯이 말했다.

“경계할 필요 없어. 세나와 닮기는 했지만, 세나와 닮았다는 이유 하나로 공작저에 들인 건


아니니까.”

에믈린의 날카로운 홍안이 요한에게 닿았다. 그러곤 그녀는 그가 대답을 망설였던 질문을
다시금 건네었다.

“다른 말을 할 필요는 없어. 내가 묻는 한 가지에만 대답해.”

“도대체 뭘 묻고 싶은 거지?”

“저 여자를 좋아해?”

망설이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리나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든 어떻든, 리나를 향한 자신의 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이미 결정된 마음이었고,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이었다.

요한의 붉은 입술 사이에선 확고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좋아해. 그리고 그녀가 세나와 닮지 않았어도, 나는 그녀를 좋아했을 거야.”

제 63 화. 조슈아는 리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요한은 내심 놀랐다.

내가 이렇게까지 확고하게 대답할 수 있었구나.

확고한 대답은 확실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설령 그녀가 세나의 쌍둥이
자매라고 해도.

“할머님을 부탁해. 나는 리나를 따라가 봐야겠어.”

“가지 마, 오빠.”

한 번 확고하게 대답을 하자 그 다음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요한은 자신의 마음을 가감


없이 내뱉었다.

“좋아하는 여자와 사랑하는 아들이 화가 나서 나갔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

“…….”

에믈린은 침묵했다. 그녀는 표독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꽉 쥐었을 뿐이다.

요한은 그대로 뒤돌아섰다. 완전히 늦어 버리기 전에, 그 전에 리나를 찾아내야겠다. 그러곤


그녀를 꼭 안아 주어야겠다.

‘에믈린에게 그런 소리를 듣게 만들어서 미안해. 내가 먼저 나서주지 못해서 미안해.’

다정하게 그녀의 등을 쓸어 주는 건 어떨까.

아무렇지 않은 척 당당한 척 말하고선 방을 나섰지만, 뒤돌아서던 그녀가 짧은 한숨을 내쉬는


것을, 요한은 분명히 보았다.

그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진심 어린 위로이리라.

방을 나온 요한은 황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일단 그가 먼저 찾아간 곳은 그녀의 방이었다.

왠지 방에는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리나!”

그는 잠기지 않은 방문을 활짝 열며 그녀를 찾았지만, 리나의 대답은 없었다. 역시나 그가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방엔 그녀가 없는 것이었다.

요한은 열었던 문을 닫았다.

“……이곳 말고 리나가 갈 만한 곳이라면…….”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요한은 잰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장소는 리나가 공작저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그곳에 없을 리가 없지.

그는 확신했고, 확신이 현실로까지 이어지기를 애타게 바랐다.

토라졌을 리나가 신경 쓰여서 미칠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신경 쓰여서 미칠 것 같다는 거,


세나가 죽은 이래로 잠자코 죽어 있던 감정이었다.

리나를 만난 이래로 죽어 있던 여러 감정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걸, 그는 새삼 통감했다.

이윽고 그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것은 멀리서도 눈에 띄는 아름다운 금발이었다. 풍성하게 내려온


금발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빛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요한은 식탁 위에 엎드려 있는 리나를 보곤 맥이 빠진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리나.”

내 예상대로 이곳에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왠지 네가 무언가를 먹으러 갔을 줄 알았어. 넌…… 배가 자주 고픈 여자니까.

요한은 그녀의 잦은 허기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내 얼굴이 완전히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세세히 들여다보았다.

테이블 위에 엎드린 그녀는 두 눈을 곱게 감고 있었다. 입가엔 차마 닦지 않은 고동색의


소스가 묻어 있기도 했다.

……고기를 먹고 잠이 들었구나.

평소와 다름없는 그녀의 모습에 요한은 큰 안도를 했다.

요한은 자신의 재킷을 벗어 리나에게 덮어 주었다. 얼마나 깊게 잠든 것인지, 그녀는 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빠. 조슈아는 안 보여?”

요한은 뒤늦게 리나 옆에 앉아 있던 조슈아를 발견했다. 아이는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이상할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너도 여기 있었어? ……미안. 리나를 살핀다고.”

“아빠는 바보야.”

아이는 작은 눈썹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그러자 요한은 꾸짖듯이 대답했다.


“조쉬. 그래도 아빠에게 바보라는 말은 쓰면 안 되는 거야.”

“하지만 아빠는……. 아빠는 엄마 편을 들어주지 않았잖아. 엄마 손을 잡아 준 건,


조슈아밖에 없어.”

“…….”

요한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답이 명백히 정해진 에믈린의 물음에 대답을 머뭇거린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조슈아 또한 그러한 제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겠지.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조슈아는 요한이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성장한 것일지도


몰랐다.

“다음엔 그러지 않을게.”

다섯 살짜리 꼬맹이에게 고해하듯이 토로한 사실이 다소 우습기도 했다.

“조쉬. 돌아가자.”

“응, 좋아.”

요한은 잠든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평소에 그렇게나 잘 먹는데, 안은 그녀는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조금 소름 끼치게 표현해 보자면, 깃털처럼 가벼워서 제법 걱정이 됐을 따름이었다.

식사량을 더 늘려서, 아니, 더 좋은 고기를 준비해서 그녀의 몸무게를 늘려야 할까. 그러고
보니 요즘 같이 식사하지 않은 지 꽤 되었구나.

그녀를 안고 복도를 거닐며, 요한은 안아 든 리나의 몸과 제 몸이 아주 가깝게 밀착되어 있는


것을 느꼈다.

내려다본 리나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그녀는 잠에서 깨기는커녕 안긴 자세가 편한 것인지,
제 품에 더욱 파고들기만 했다.

리나가 이따금씩 고른 숨결을 내뱉을 때마다, 따스한 그 숨결은 요한의 가슴 어귀에 고스란히
닿았다. 그러자 숨결이 닿은 언저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달아오른 것은 비단 가슴 부분만이 아니었다.

요한은 온몸이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그녀를 안고 있고, 그녀가 내뱉는 숨결을
느꼈을 뿐인데.

그녀의 숨결 속에 밴 희미한 와인 향을 맡았기에 그런 것인지. 지난밤 함께한 그녀와의 밤이


떠올라서 그런 것인지.
요한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곳곳을 탐하고
싶다는 바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리나를 안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얼마 못 가 요한은 리나의 방까지 걸어왔다. 그는 어느 시녀의 도움을 받아 방문을 열고,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히기까지에 이르렀다.

“……밥맛…….”

그것은 꽤 익숙한 리나의 잠꼬대였다. 예전에도 그녀는 분명 이런 식으로 잠꼬대를 내뱉은


적이 있었다.

대관절, 그는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꿈의 내용이 어떻든 간에, 요한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맴돌았다. 어찌 되었든


결론적으론 제 꿈을 꾸고 있다는 게 아닌가.

밥맛과 거지라는 희한한 말이 저와 그녀의 애칭이 되어가는 듯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예쁜 말을 놔두고서 그런 말로 서로를 부르는 우리라니.

그 순간 요한이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밥맛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녀의 숨결을 느꼈을 때도, 그는 그녀에게서 세나를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리나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리나. 네가 나를 도와줘. 내가 네 모습을 보고도 세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게. 내가 널


무조건적으로 리나 그 자체로 볼 수 있게. 그렇게 된 뒤에도 네가 소름 끼치게 신경 쓰인다면
그땐 진짜로 조슈아의 엄마가 되어…….’

이전 날, 차마 잇지 못한 말은 그러했다.

그땐 진짜로 조슈아의 엄마가 되어 줄 수 있겠느냐고. 내 곁에 영원히 있어 줄 수 있겠느냐고.

리나만을 떠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달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세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리나에 대한 마음을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세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리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세나에게 죄를 짓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특히나


그들이 쌍둥이 자매라면, 더더욱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나 소중히 여기던
조슈아보다도 리나가 더 신경이 쓰이게 되어 버린걸.

그때 요한은 자신의 바지자락을 흔드는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다.

오로지 리나에게만 닿아 있던 시선을 끌어내리자, 누군가의 정체가 보였다.

“아빠.”

조슈아였다.

“어, 조쉬.”

“이제 에밀린 이모한테 가자.”

그것은 꽤나 뜻밖의 말이었다.

조슈아는 사람을 좋아했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조차도 친밀하게 대했지만, 한 번 제 눈에


벗어난 사람들에게는 아주 혹독하게 대했다. 괜히 고집불통 조슈아가 아니었다.

아이는 에믈린과 제법 돈독하게 지냈지만, 조금 전 일로 인해 에믈린을 싫어하게 되지는


않을까 싶었다.

지금 조슈아에게 있어 일 순위는 에믈린도, 심지어 자신도 아닌 리나였으니까. 그것은


요한에게 있어선 조금 서운한 일이기도 했다.

요한은 자세를 낮추어 조슈아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에믈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응. 조슈아가 아까 말을 심하게 했으니까, 사과할 거야.”

“…….”

“물론 이모도 잘못한 게 있으니까, 엄청 사과하지는 않을 거야. 조금만 사과할 거야. 그리고
이모에게 꼭 해야 할 말도 있어.”

“그게 무슨 말인지, 아빠가 먼저 알아도 될까?”

“리나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아 달라고 할 거야. 조슈아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걸, 조슈아는 두고 볼 수 없어.”

요한은 아이의 금빛 머리카락을 한껏 흐트러뜨려 주었다.

아이가 정말 크기는 컸나 보다. 생각하는 게 어쩜 이리도 장할까.

“누구 아들인지 몰라도, 정말 장하다.”

요한의 말에 조슈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조슈아는 엄마 아들.”

“……컥!”

이럴 때조차도 엄마 아들이라고 단언하다니…….

한 번쯤은 아빠 아들이라고 대답해 줄 수도 있잖아.

“아빠, 얼른 가자!”

아이는 요한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는 앞서가는 아이의 작은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나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아 달라고 할 거야. 조슈아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걸, 조슈아는 두고 볼 수 없어.’

……조슈아가 리나를 리나라고 부르는 건 처음 듣네.

조슈아는 자신을 낳아 준 엄마의 이름을 모르지 않았다.

아이는 세나의 이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리나를 만나기 전엔 종종 세나에 대해서 얘기를
해 달라고 칭얼거린 적도 있었다.

조슈아는 리나를 정확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요한은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아이는 엄마가 그리워서, 제 엄마와 닮은 리나를 잘 따르는 것이라고. 더해, 리나를 아예


자신의 진짜 엄마로 생각하는 줄 알았단 말이다.

하지만 리나를 세나로 여기기로 작정했다면, 그 이름 또한 ‘세나’로 불러야 했지 않을까.

만일 조슈아가 모든 것, 가령 리나가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점을 알면서도 리나를 엄마처럼


따르는 거라면.

조슈아는 하루하루 놀라울 정도로 성숙해지고 있었다. 얼굴과 몸은 아직 어린아이의


것이었지만, 무르익은 사고는 아이를 아이로만 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요한은 지금 처음으로 조슈아의 생각을 잘 알 수 없었다.

저 자그마한 머릿속에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조금도 헤아릴 수 없었던 것이다.

* * *

침대가 원래부터 이토록 넓었던가.

요한은 어쩐지 황량하게만 느껴지는 침대 위를 더듬었다.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두운 밤, 모두가 잠들 시간, 제 방에 혼자 누운 요한은 잠이 하나도 오지 않았다.

지난 4 년간 혼자 잠들었고 고작 며칠 동안 리나와 같은 침대를 썼을 뿐인데, 그녀의 빈자리가


자못 크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쓸쓸한 걸까. 지금 곁에 없는 리나의 온기가 꽤나 간절했다.

그간 어떻게 혼자 잤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요한은 애꿎은 입술을 뭉그러뜨리며 여러 생각에 잠겼다. 잠들지 못하는 밤, 상념이 깊어지는
밤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슈아는 에믈린과 무사히 화해를 했다. 에믈린은 저도 조슈아에게 날 선


말을 했던 것이 미안한 것인지, 다시금 살가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모, 엄마한테 다시는 나쁜 말을 하지 마.’

하지만 그 말에 대한 대답은 미소로 대신했을 뿐이었다. 에믈린은 웃고 있었으나 그 웃음은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날이 저물고, 할머님이 계신 까닭에 에믈린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터이다. 요한은


내일 일찍이라도 에믈린과 얘기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에믈린과 리나 사이에 일이 더 생기기 전에, 에믈린과 할머님을 다시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배가 부른 채로 잠든 리나는 깨지 않은 것인지, 아님 깨고도 자신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인지,


요한을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침대에 눕기 전에 리나에게 한 번 찾아가기도 했다. 하나 그때 그녀는 곤히 잠든 채였다.

내일 아침에 에믈린과 얘기하기 전에 리나부터 찾아갈까.

찾아가,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면 어떨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요한은 좀체 잠들지 못했다. 잠들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여명으로 물든 창밖 전경이었다.

“…….”

설핏 든 잠은 오랫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옅은 잠에서 깬 요한이 처음으로 느낀 것은 제 손에 닿은 누군가의 온기였다. 어젯밤 간절히


그리워했던 타인의 체온.

설마 리나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 걸까.

혼자 잠든 밤이 외롭고 황량해, 제 옆에 잠든 게 아닐까. 실수인 척, 능청맞게 굴며. 침대를


침범한 일 따윈 단번에 용서해 줄 자신을 아주 잘 알고선.
요한은 픽 웃었다. 그녀가 귀엽기도 했고, 우습기도 했다.

그는 눈도 뜨지 않은 채로 한마디를 읊조렸다.

“이봐, 리나. 아무리 내가 생각났어도 그렇지. 허락 없이 내 침대에 누워 있다니.”

나도 너와 함께 잠들길 얼마나 고대했는지 몰라.

그는 타박하듯이 말했지만, 어투에 밴 웃음기는 저도 어찌할 수 없었다.

“이번 딱 한 번만 봐주지. 다음은 어림도 없어.”

다음에 우리가 또다시 싸우게 되더라도, 네가 나를 완전히 져버리지 말아 주었으면 해.

요한은 이윽고 완연한 미소를 지었다.

용기 있게 먼저 손을 건네어 주었으니, 그 보상으로 가벼운 입맞춤이나 한번 해 볼까…….


싶던 찰나였다.

제 옆에 누워있던 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감.”

리나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듯하게 들렸다. 어째 익숙한 할머니 목소리
같기도 하고.

……아니, 잠깐. 할머니?

요한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선 제 옆에 누운 이를 뒤늦게 확인했다.

비단 목소리만이 세월을 전통으로 맞은 것은 아니었다. 리나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한 여인이 제 눈에 들어왔다.

“……할, 할머님!”

요한은 식겁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 할머니는 아주 태연자약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영감.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수? 더 잡시다, 자요.”

그 태연한 대답에 요한은 기겁하며 몸을 허우적거렸다.

우당탕.

허우적거리던 몸은 이내 침대 밑으로 추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고통스러운 엉덩방아에


미간을 잔뜩 구기며, 도움을 요청했다.

“벨, 벨라!”

 
제 64 화. 모든 건 조슈아의 계획대로

요한은 얼굴을 느릿하게 쓸었다.

할머님의 치매가 날로 심해져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영감……. 즉, 할아버님과


닮았다는 이유로 같은 침대까지 쓰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할머님은 도대체 언제 어떻게 자신의 침대 위에 올라오신 걸까.

요한은 당황스러우면서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나와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할머님의 정신은 온전했었다.

약간은 고지식해 보이면서도 냉철했던 그녀가, 이젠 손자의 침대 위에까지 올라오게 된 사실이


자못 괴리감 있게 느껴졌다.

죽은 세나를 좋아했으며, 세나의 묘까지 갈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한 테레사 할머님.

“큰마님.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었답니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는 게 어떨까요?”

벨라는 믿음직한 수하다웠다. 그녀는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는 상황임에도 놀란 티를 전혀


내지 않으며 할머님을 잘 달래어 주었다.

“아가씨는 참으로 친절하구려.”

할머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침대에서 내려오며 또다시 영감을 찾는 일은 없었다. 할머님은 조금도 굽지 않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구겨진 치맛자락을 손으로 몇 차례 털어 냈을 뿐이었다.

그렇게 벨라의 뒤를 따라 방을 나가기 직전, 갈피를 잡지 못해 흐트러지고 있는 할머님의


정신이 잠깐 돌아왔다.

“요한.”

온도가 낮고 기품이 가득한 할머님의 목소리. 그것은 요한이 아는 할머님의 목소리였다.

요한은 절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러곤 생각했다. 할머님의 정신이 다시 돌아온 게 틀림없다고.

“네, 할머님.”

그녀는 고개를 조금 비틀어 요한의 눈동자를 정확하게 들여다보았다. 초점이 흐릿하기만 했던


그녀의 눈동자엔 자그마한 이채가 돌아와 있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거라.”

어쩐지 요한이 겪고 있는 모든 일을 꿰뚫어 본 듯한 한마디였다. 할머님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모든 일이 잘 해결되리라는 의미가 담긴 미소 같다고, 요한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온전한 정신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다.

“……그래서 영감의 아침 식사는?”

“먼, 먼저 드십시오.”

요한은 좀체 적응할 수 없는 ‘영감’이라는 소리에 식은땀을 흘렸다.

* * *

때는 아마 점심시간이었을 것이다.

리나의 방문 앞에 서 있던 부자는 요한의 신호가 떨어짐과 동시에 저들이 계획했던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거의 요한이 주도한 일이라고 일컫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이겠지만.

“아빠! 빨리 들어가자니까! 얼른! 얼른!”

조슈아는 힘껏 소리쳤다. 작은 아이의 몸에서 나왔다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꽤 우렁찬


목소리였다.

소리를 지르는 조슈아의 얼굴엔 미소만이 가득했다. 꼭 즐거운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 나는 가기 싫다니까!”

요한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 또한 평소보다 컸다.

조슈아는 고개를 들어 올려, 잘생긴 자신의 아빠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이번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빠, 이렇게 하면 돼?”

그러자 요한 또한 조슈아에게 작게 대답했다.


“그래, 조쉬. 잘하고 있어. 그렇지만 이번엔 더 크게 말해 볼래? 방 안에 있을 리나에게 더
잘 들리게 말이야.”

조슈아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다섯 살 꼬맹이의 비장한 표정은 실로 귀여워서 요한은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지금 웃으면 안 되지, 안 돼.

“조슈아는! 아빠를! 꼭 데리고! 엄마 방에 들어갈 거야!”

“조쉬! 나는 정말 싫다니까?”

싫다고 대답하는 요한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이 정도면 방 안에 있는 리나에게도 충분히 들렸겠지.

요한은 그렇게 확신했다.

꽤나 어처구니없는 연극을 하게 된 이유는 그러했다.

요한은 어제 리나에게 상처를 준 일, 즉 대답을 망설인 일에 대한 사과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기왕이면 자연스럽고도 극적이게 사죄를 하고 싶었다.

하나 그것은 성격이 그다지 살갑지 못한 요한에게는 다소 버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조슈아를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이용이라기보다는, 뭐 그냥 부탁쯤이라 치자.

오래전에 조슈아도 지금과 똑같은 수법으로 자신을 이용하지 않았던가.

요한은 조슈아에게 완전히 당했었던 지난날을 잠깐 떠올렸다.

‘아빠가 먼저 같이 오자고 했잖아!’

조슈아는 아이라곤 믿기지 않는 얼굴로,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거짓말을 했었다.


저가 리나의 방에 같이 오자고 한 주제에, 요한이 오자고 조른 것처럼 굴었던 것이다.

요한은 조슈아가 그런 식으로 요망하게 행동할 때면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내 아들이지만 정말로 못 말리는 구석이 있다니까.

그리고 저와 리나의 사이가 다시 좋아진다면, 그것은 조슈아에게도 좋은 일일 테다. 요한은


그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했다.

조슈아가 저를 억지로 리나의 방으로 데리고 온 척을 한다면, 리나에게 정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곤 넌지시 사과의 말을 건네는 거다.


‘너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대답을 망설인 게 아니었어. 하지만 내가 망설인 일에 네가
상처를 받았다면, 사과하고 싶어. 주저해서 미안해.’

그렇게 말한다면 리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많이 화가 난 게 아니어야 할 텐데.

이내 요한은 조슈아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얼른 문을 열고 리나의 방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가라는 신호였다.

조슈아는 외쳤다.

“엄마! 나 들어가도 돼?”

그러자 리나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울렸다.

“……응, 들어와!”

요한과 조슈아는 서로를 마주 본 채로 키득거렸다.

그러나 그 키득거림은 오래가지 못했다. 덧대어진 리나의 말 때문이었다.

“대신에, 조슈아 너만 들어와야 해!”

그것은 요한의 방문을 명백히 거절하는 말이었다.

요한의 얼굴이 무참하게 구겨졌다. 조슈아는 초조해진 얼굴로 닫힌 방문과 구겨진 얼굴을 한
요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발을 동동 굴리던 아이는 이윽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까치발을 들어 문고리를 잡았다. 아이는


문을 있는 힘껏 밀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건, 언제 문 앞까지 와 있었을지 모를 리나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요한과 조슈아를 차례대로 응시했다. 요한은 그녀의 눈빛에서 왠지


모를 한기를 느꼈다.

“엄마! 보고 싶었어.”

조슈아는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리나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렇게 귀엽게 웃으면 얼마나 사랑스럽게요. 오구오구.”

리나는 조슈아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슈아. 그런데 너는 왜 네 아빠랑 같이 왔어?”

리나의 시선이 조슈아의 뒤, 쭈뼛거리며 서 있는 요한에게 슬쩍 닿았다 곧 떨어졌다.


요한은 리나의 얼굴을 꼼꼼히 바라보았다. 저를 반기지 않은 건 묘하게 속상한 일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이 나빠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괜찮……은 걸까.

“아빠는 오기 싫다고~ 싫다고~ 했는데, 조슈아가 같이 오자고 졸랐어.”

“그렇게 오기 싫었으면 안 오면 되지.”

리나의 말에 조슈아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안 돼.”

“조슈아야. 왜 안 돼?”

조슈아는 조금 전의 단호함을 잃은 채로 주저하며 대답했다.

“……우린 가족이니까.”

“…….”

“가족은 함께 있어야 되는 거잖아.”

아이의 말에 할 말을 잃은 것은 비단 리나뿐 만이 아니었다.

“…….”

가족. 요한은 그 말을 되뇌었다. 되뇌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이 가라앉는 단어였다.

가족이라는 말을 꺼낸 조슈아 덕분일까. 시시콜콜 말대답을 하던 리나가 조용해졌다.

요한은 그녀가 조용해진 틈을 타, 그녀를 더욱 꼬드길 수 있는 말을 덧대었다.

“……네가 좋아할 만한 것도 준비했어.”

리나의 시선이 들리며, 요한에게 향했다.

“제가 좋아하는 거요?”

요한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와 밝히는 건데, 조슈아를 앞세워 시작한 촌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녀의
마음을 단번에 함락시킬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요한은 조슈아와 눈을 맞추며 신호를 주고받았다.

‘조쉬, 리나 방에 들어간 다음에, 내가 하라고 한 말을 지금 하렴.’

조슈아는 요한에게 받았던 지령을 떠올리며, 표정을 금세 바꾸었다.

아이는 언제 시무룩했었냐는 듯이 킬킬거리며 조그마한 입술을 떼어 냈다.


“엄마! 아빠가 벨라에게 엄마가 좋아하는 고기를 준비해 달라고 했어!”

“뭐? 고기?”

“응응! 쓱싹쓱싹! 어제 엄마가 맛있게 먹었던 그 고기 말이야.”

“얼마나 준비했대?”

“엄~청 많이!”

“…….”

요한은 보았다. 리나의 목울대가 티가 나게 꿀렁거리는 것을 말이다.

걸려들었군. 요한은 슬그머니 리나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까지 세워 둘 거지?”

리나는 그제야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리나의 얼굴이 자못 누그러져 있었다.

“저기, 요한 씨.”

“어.”

“그래서…….”

“그래서?”

그녀는 한껏 진지해진 얼굴로 물었다.

설마 고기에도 함락되지 않은 건가 싶던 찰나였다.

“준비하신 고기 부위는 어떻게 되는 될까요?”

“……!”

생각지도 못한 리나의 물음에 요한은 할 말을 잃은 채로 입을 조금 벌렸다.

이 여잔, 도대체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질문을 건네잖아.

“등심일까요? 안심일까요? 아니면, 살이 야들야들하고 쫄깃한 갈빗살일까요? 아, 물론 저는


부위에 상관없이 다 잘 먹기는 합니다만.”

“……하, 하하하.”

요한은 저도 모르게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리나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 저 작은 머릿속에 도대체


무슨 생각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겠다.
요한은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웃었다.

즐거워. 그녀와 함께 얘기하는 게 행복해. 그녀가 상처 받은 얼굴을 하면 마음이 아파.


그녀가 없는 밤은 너무도 길고 황량하고 외로워.

나는 이제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해도 되는 걸까?

네가 세나와 닮았든, 네가 세나와 쌍둥이 자매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손가락질하든.

그래도 너를 좋아한다고.

“뭐예요. 지금 저 비웃어요?”

“큭큭.”

요한은 웃음을 멈추지 못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고기 부위에 대해 조잘거리던 리나를 비웃은 게 아니었다. 대답이 너무 그녀다워서 웃음이


나온 것뿐이었다.

“엄마! 곧 벨라가 여기로 올 거야! 얼른 테이블 앞에 사이좋게 앉아 있자!”

“으응.”

조슈아는 요한이 지었던 것과 꼭 닮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리나의 손을 이끌었다. 리나는


조슈아가 이끄는 대로 테이블 앞에 앉아 버렸다.

요한은 그들의 뒤를 느릿하게 따라가, 리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방 한편에 있던 동그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세 사람 사이에는 잠깐의 침묵이 맴돌았다.

리나에게서 ‘요한 씨는 나가요.’라는 말이 내뱉어지지는 않았다. 요한은 그 점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똑똑.

침묵을 깨는 노크 소리의 주인은 벨라였다. 그녀는 요한이 미리 언질을 해 두었던 각종


고기들을 가져왔다.

벨라가 들어오자 군침 돋는 고기 냄새가 리나의 방을 가득 메웠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제


콧구멍을 몇 차례 벌렁거렸다.

요한은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고기까지 준비한 것은 정말로 잘한 선택인 것 같다. 이대로라면 그녀와 수월하게 화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화해를 할 수 있겠다는 그 작은 사실에, 요한의 마음이 묘하게 들떴다. 어제 오후,


심지어 오늘 아침 내내 리나의 굳은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았었는데.
벨라는 테이블 위에 식기와 고기를 내려놓고서는 잽싸게 방을 나갔다. 물론 요한과 리나를
흘긋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와. 고기다, 고기.”

맛있는 음식을 마주한 리나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요한이 준비한 고기의 정체는, 그의 저택에서 먹은 음식 중에서 리나가 제일 좋아하는 비프


스테이크였다. 부위로 따지자면, 안심.

먹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듯한 리나의 눈빛을 본 요한은 선수 쳐서 말을 건넸다.

“먹지.”

“잘 먹겠습니다!”

우렁찬 대답은 조슈아와 리나의 것이었다.

요한은 능숙하게 비프 스테이크를 썰어 가기 시작했다.

스테이크를 써는 데에 약간의 강박증이 있는 요한은 아주 반듯하고 노련하게 고기를 잘랐다.


일렬종대로 잘린 고기 조각들은 그 크기마저도 매우 비슷했다.

유려하게 칼질을 하는 요한의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은 하나였다.

어떤 식으로, 언제쯤, 리나에게 화해의 말을 꺼내면 좋을까.

일단은 대화부터 시작을 해 보자 싶은 요한이었다.

“고기가 조금 질기군.”

요한은 넌지시 한마디를 꺼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더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했다.

“좀 많이 익힌 것도 같군.”

서툴게 칼질을 하던 리나가 그제야 요한을 힐끔 바라봤다.

리나는 그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그녀와 그의 사이에 앉은 조슈아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작게 속삭인 것인지, 그녀의 말은 요한에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답답한 얼굴로
리나와 조슈아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그녀의 귓속말이 끝난 후, 조슈아는 요한의 귓가에 리나의 말을 그대로 옮겨 주었다.

“아빠. 엄마가 밥 좀 조용히 먹재.”


“……뭐?”

요한은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답지 않게 여러 번 말을 하고 있는 건데.

누구 때문에 돌아오는 대답도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건데. 젠장.

이내 그는 리나가 한 것과 똑같이 조슈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용은 그러했다.

“조쉬. 리나에게 이렇게 전해 주렴. 네 칼질 소리가 더 크다고.”

조슈아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곧바로 그녀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엄마, 아빠가 대답을 해 주지 않으면 말을 더 많이 하겠대.”

조슈아에게 말을 전달받은 리나는 요한을 따라 어이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또다시


조슈아에게 귓속말을 했다.

“대답이고 뭐고, 그만 조잘거려 달라고 전해 줄래?”

조슈아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고선, 다시금 요한의 귓가로 제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조슈아의 얼굴엔 대화의 내용과는 별개로 해맑은 미소만이 걸려 있었다.

“아빠, 엄마가 칼질이 너무 힘들어서 소리를 많이 냈대. 아빠가 엄청 잘 써니까, 아빠가 대신


썰어 줬으면 좋겠대.”

……뭐야. 그런 걸 원하면 그렇다고 진즉 말하지.

요한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정통으로 마주한 리나는


괜스레 흠칫 했다.

그는 오만한 미소를 유지한 채로 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스테이크는 저가 보아도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칼질로 가지런히 썰려 있었다.

그에 반해 리나의 접시 사정은 어떠한가.

그녀는 반도 채 썰지 못한 채였다. 고기를 보며 그렇게나 침을 줄줄 흘렸던 주제에.

요한은 무심한 손길로 제 접시와 리나의 접시를 바꿔치기했다.

“딱히 대신 썰어 주려고 했던 건 아니었지만, 보기 좋은 고기가 먹기도 좋다고 하더군.”

요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로써 얼추 화해의 초석을 쌓게 된 것 같았다.


제 65 화. 당신은 거기까지 생각했어요?

리나는 매우 의문스러웠다.

그만 조잘거리라고 했더니, 요한은 왜 뜬금없이 접시를 바꿔치기해 준 걸까.

물론 잘 썰린 고기는 완전 감사지만.

“……? 뭐예요? 왜 바꿔치기한 거죠?”

그녀는 의문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요한 또한 의문스럽게 되물었다.

“……어? 썰어 달라며?”

요한은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썰어 달라고 할 땐 언제고, 인제 와 왜 모른 척을


하느냐는 눈빛에 가까웠다.

리나는 반문했다.

“예? 제가요?”

“그럼 누가 더 있단 말이지?”

“제가 언제 그랬어요?”

“네가 아까 칼질이 너무 힘들어서 소리를 많이 냈다고……. 그리고 내 칼질이 엄청 훌륭하다고


나를 칭송하면서, 나보고 썰어 달라고 했잖아?”

“저는 그만 조잘거리라고 했을 뿐인데요?”

“뭐? 조잘……거려?”

요한은 미간을 옅게 구겼다. 화해하려고 머쓱하게 건넨 말을 조잘거린다고 표현했다니…….

그는 왠지 모를 자괴감마저도 느꼈다.

“그래요! 당신이 대답해 주지 않는다면 말을 더 많이 하겠다고 했잖아요.”

리나는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대화를 한 거야?”

요망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킥킥킥.”

요한과 리나는 웃음소리의 주인을 거의 동시에 쳐다보았다. 그 주인공은 그들 사이에 앉은


조슈아였다.
아이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 것인지, 미소가 한가득했다.

“…….”

두 사람은 직감했다.

이상해진 대화의 원인은 요망한 꼬맹이의 짓임이 분명하다고. 조슈아가 서로에게 다른 말을


전했음이 틀림없다고.

깨닫기가 무섭게 두 사람은 동시에,

“조슈아!”

아이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헤헷. 들켜 버렸네.”

조슈아는 탐스러운 제 뺨을 긁적거리며 방긋방긋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도 귀여워서, 리나와 요한은 도무지 아이를 혼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완전 항복이었다.

* * *

조슈아의 예쁜 미소에, 서로를 노려보던 요한과 나는 결국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아이의


미소에 전염된 것만 같다.

서로에게 전염된 미소 덕이었을까. 칼바람이 불던 분위기가 확연히 누그러져 있었다.

요한을 어떻게 다시 봐야 하나, 걱정했던 게 해결될 정도로.

어제, 상처를 받은 것은 나 혼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에믈린의 날카로운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던 요한의 얼굴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던 요한의 일그러진 얼굴이, 왠지 괴로워 보이던 그의 얼굴이, 내 눈앞에
아른거렸다.

잘못한 것은 요한인 것 같은데, 그가 왜 상심한 얼굴을 한 것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엔 딱히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하나 지금 찾아온 요한을 보자 마음이 약해지더라.

한동안은 말도 섞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목소리를 듣자 설핏 미소가 지어졌다.


조슈아를 앞세워 어쭙잖은 촌극을 한 그의 모습이 퍽 우스웠다.
요한은 나를 얼마나 둔하게 여기고 있는 걸까.

그런 허술한 연극에 단번에 속아 넘어가,

‘밥맛 씨를 용서해 줄게요.’

라는 말을 할 줄 알았던가. 바보 같아.

더 우스운 점은 바보 같은 그가 전혀 미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왜냐면, 그가 왜 이런 짓을 벌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아마도 나와 화해하고 싶었던 거겠지.

나는 요한이 바꿔치기해 준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요한의 것이었던 접시였다.

“어찌 되었든 잘 먹을게요.”

내 말에 요한은 나지막이 답했다.

“드디어 제대로 된 대답을 들었군.”

요한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답했다. 평소의 퉁명스러움은 일말도 없는 담백한 말이자,
미소였다.

“엄마, 아빠. 우리 더 자주 자주 같이 밥 먹자!”

조슈아는 드디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 된 우리의 모습을 보며 아주 좋아했다. 아이는


자신의 전매특허쯤인 물개박수마저도 치기 시작했다.

나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야, 우리가 같이 밥을 먹을 날은 얼마나 남았을까?

식사를 끝낸 우리는, 소파에 앉아 벨라가 가져다준 차를 홀짝거렸다.

아침 수업을 끝낸 조슈아는 달리 갈 곳이 없었던지, 내 무릎을 벤 채로 연거푸 하품을 하고


있었다. 배도 부르고, 햇살도 좋으니 잠이 오나 보다.

아이의 눈이 오랫동안 감겼다, 아주 잠깐 떠지기를 반복했다. 조만간 완전히 잠들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요한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내가 차를 마시는 모양새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

“이봐요, 요한 씨. 할 말 있어요?”

요한은 대답 대신 찻물을 한 차례 들이켰다. 입술만 적실 만큼의 아주 적은 양이었다.


“나는…… 너에 대한 내 마음이 확실하지 않아서 대답을 망설인 게 아니었어. 가족들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너나, 조쉬가 상처 받지 않을지를 고민하다 보니…….”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터무니없는 연극을 하며 조슈아를 앞세운 이유는 나에게 사과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나는 더 얘기해 보라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조금 긴 듯한 조슈아의 금빛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네가 조쉬를 데리고 그렇게 나가 버리니까, 소름 끼치게 후회가 되더군. 결론은……


그러니까……. 미안.”

사과를 논하는 그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사과의 ‘사’ 자도 모를 남자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사과엔 진심만이 그득했다.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마음 아팠어? 아무런 말도 못 한 내 마음은 더 아팠어.”

“……풉!”

제기랄. 웃으면 안 되는데.

아프냐, 내 마음은 더 아프다—, 라는 말에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느끼하고, 또 느끼한 말이었지만, 그 말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분 좋은 소름이었으니까.

“푸흐, 큭큭.”

내가 요상한 웃음소리를 연신 내자, 요한의 얼굴이 급속도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귀까지 모두 벌겋게 되고 나서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조금 전 소름 끼치도록 다디단 말을 하는 요한이 아닌, 제 진심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귀여운 요한으로 말이다.

“너, 넌 도대체가! 소름 끼치게 무드가 없어!”

그 순간, 잠든 줄만 알았던 조슈아가 나를 대신해서 대꾸했다.

“아빠. 그런데 조금 전 말은 솔직히 좀 웃겼어. 킥킥.”

아주 거침없는 평이었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너무도 명쾌한 말이라서 내가 구태여 더할 말이 없었다.

“조, 조쉬. 너마저도……!”

요한의 얼굴이 곧 터질 듯이 더욱 붉어졌고, 요한은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민망함이 나에게까지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아무튼 어제 일은 당신이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신다는 거죠?”

나는 웃음을 겨우 겨우 참으며 요한에게 말했다.

민망한 듯 연거푸 헛기침을 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요한에게 들었던 서운한 감정이


사그라지는 것만 같았다.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그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정해. 하지만 너도 내 입장을 조금은 생각해 줘. 할머님과 에믈린이 그렇게나 갑작스럽게


올 줄은 나도 몰랐다고. 더군다나 에믈린과 네가 만날 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고.”

“이해해요.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그래도 마음은 서운했어요. 내심 어느 소설 속 왕자님처럼


멋있게 제 편을 들어주기를 바랐다고나 할까. 이건 현실일 뿐인데.”

“어느 소설 속 왕자님? 그딴 종이 쪼가리 속 남자와 나를 비교하는 건가?”

요한은 툴툴거리듯이 말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웠던 붉은 기가 확연히 사그라져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요한은 설마 그딴 종이 쪼가리 속 남자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는 걸까?

“저는 그저 단적인 예를 든 것뿐이에요.”

나는 혀를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분위기가 다소 험악해졌음을 느낀 듯한 조슈아가 내 무릎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아이는 소파 위에 우뚝 선 채로 위엄 있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둘 다 그만해! 또 싸우려는 거야? 엄마, 아빠는 도대체 내가 없으면 어떡할 뻔했어? 그만


싸우고, 얼른 악수해. 둘이 손잡고 다신 싸우지 않겠다고 내 앞에서 맹세하란 말이야!”

너무도 근엄한 아이의 말에 나는 미소가 스밀 뻔했으나,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요한 또한 그런


조슈아가 우스운 것인지 제 입술을 뭉그러뜨렸다.

우린 웃음을 꾹 참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먼저 손을 내민 쪽은 이번에도 요한이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우리의 손은 곧 맞닿았다. 그의 손은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어제, 내 등을 감쌌던


열기로 가득한 그의 열 손가락을 그리워했었는데.

나는 오늘따라 왠지 그의 손이 반갑게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꽉 잡은 그의 손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떠나야 하는


걸까, 라고 생각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자, 이제 조슈아 앞에서 말해 줘. 다시는 싸우지 않겠습니다, 라고!”

요한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같은 말을 내뱉었다.

“다시는 싸우지 않겠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만족스러워.”

조슈아의 마지막 말에, 우리의 얼굴엔 결국 짙은 미소가 새겨졌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을 따름이었다.

어제 있었던 일로 인해 내 마음에 생긴 무거운 응어리가 산산이 분해된 것만 같았다.

* * *

꾸벅꾸벅 졸다가도 위엄 있게 굴던 아이는 이윽고 긴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때마침 찻잔을 치우러 온 벨라에게 잠든 아이를 맡기었다. 벨라는 아이를 능숙하게
안아서 방을 나갔다. 아마도 조슈아는 자신의 침대에 눕혀질 것이다.

나는 벨라와 조슈아를 방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이윽고 방문이 완전히 닫혔을 때, 내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고 있는 조쉬의 얼굴을 볼 때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져. 깊은 상념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걱정도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지.”

소리 없이 내 뒤에 가까이 다가온 요한이었다. 그는 다가오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내 허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허리에 둘러진 그의 팔이 단단했다. 그는 내 어깨 위에 제 얼굴을 기대고선 서로의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드레스 사이로 전해지는 요한의 체온이 뜨거웠다.

그것은 조슈아와 함께 있을 땐 결단코 하지 못하는 스킨십이었다.

“너도 조쉬를 보고 그런 기분을 느껴?”

나는 대답했다.
“당연하죠. 저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어요.”

요한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부터, 공작저를 떠나지 못하게 했던 사람이 바로
조슈아였다. 아이가 주는 따스하고 긍정적인 느낌이 너무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말랑한 무언가가 내 뺨에 닿은 것은 그때였다.

쪽.

내 어깨에 올려진 요한의 얼굴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그는 내 뺨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나는 예고 없는 스킨십에 흠칫 놀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입맞춤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조슈아가 주는 긍정적인 느낌 못지않게, 나는 요한과 나누는 스킨십이 좋았다. 처음 나눈 것도


아니었지만 아직까지 심장이 세차게 설레기도 하고.

“……어젠 정말로 미안해. 궁색한 변명 같지만, 네가 나간 뒤에 에믈린에게 내 마음을 당당하게


고백했어. 너를 좋아한다고. 네가 세나와 닮지 않았어도 너를 좋아했을 거라고.”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라.

심지어 내가 세나와 닮지 않았어도 나를 좋아했을 거라니.

그것은 나에게도 꽤나 의외인 요한의 고백이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비틀어 요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또다시 일순 흠칫할 정도로 우리의
얼굴은 아주 가깝게 닿아 있었다.

내 눈과 오롯이 맞춘 요한의 검은 동공은 내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멋있는 고백을 했는데, 나한테 떨어지는 보상은 없어?’

열기로 가득 찬 그의 눈빛은 농후하고 깊은 무언가를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입술 위를 혀끝으로 한 차례 쓸어내린 뒤에 고개를 바투 수그렸다. 서로의 코끝은 이미


물러날 곳 없이 바짝 닿아 있었다.

“잘했어요.”

서로의 입술은 찰나에 닿았다. 내 입술이 닿기가 무섭게 요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숨결을
집어삼켰다.

나는 몸을 조금 돌려, 그의 몸과 마주 보게 만들었다. 그러자 내 허리를 감쌌던 그의 단단한


손이 내 뺨을 모조리 감쌌다.

그의 입술이 닿는 촉감이 좋았다. 내 뺨을 감싼 그의 뜨거운 손이 좋았다.

요한은 잠든 조슈아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알까?

나는 당신과 입을 맞추고 있을 때도 그런 느낌을 느낀다는 걸.

맞닿은 입술 사이로 전해지는 온기가 깊어져 갈 때면, 깊은 상념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걱정도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원래 돌아와야 할 곳에서, 온기를 나누어야 할 사람과 키스를 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한 기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다른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요한이 나를 밀어붙였기


때문이었다.

깨달았을 땐, 나는 침대 위에 누운 채였다. 내 위에 올라탄 요한은 입술을 잠깐 떼어내며,


부족해진 숨을 골라냈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잠깐 떨어진 그의 입술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나른한 욕망에 잠식된 요한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바비가 했던 말이 귓가에 이명처럼


맴돌았다.

‘넌 네 쌍둥이 언니가 사랑했던 남자와 만날 수 있어?’

나는 그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요한 씨.”

“어.”

“얼마 전에 바비가 그랬어요. 제가 세나 씨의 쌍둥이가 맞다고.”

“…….”

분명히 충격적일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요한의 얼굴엔 눈에 띄는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그저 나른한 욕망에 잠식되어 초점이
흐려졌던 그의 눈이, 다시금 선명해지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제게 물었어요. 쌍둥이 언니가 사랑했던 남자와 만날 수 있겠느냐고.”

나는 바비가 했던 물음을 요한에게 고스란히 털어놓았다.

나 혼자 생각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거니와 사랑이라는 건, 우리 둘이서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바비의 물음은 나뿐만 아니라, 요한도 생각해야 할 대답이었던 것이다.

요한, 당신은 세나의 쌍둥이 동생을 만날 수 있어요?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교차한 시선 속, 무겁게 가라앉은 그의 검은 동공에 서린 메시지가 무엇인지, 이번만큼은 잘


알 수 없었다.

“당신은 거기까지 생각했어요?”

제 66 화. 네 필체를 확인해 보자

 
요한은 나를 비웃듯이 픽 웃었다.

“나를 너무 허술하게 본 거 아니야?”

그는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뒤에 이어 말했다.

“내가 거기까지 생각 못 해 봤을 거라고 생각해? 네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어.”

나는 조슈아처럼 작게 물개박수를 쳤다.

“와우.”

나도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는데, 밥맛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고?

새삼 밥맛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도 나처럼 닥친 일에만 충실할 줄 알았는데.

“왜 내가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고 예상했지?”

“그러게요.”

“나 원. 아무튼 애당초 그런 걸 신경 썼다면, 네게 고백하지도 않았을 거야.”

요한은 황당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는 바비가 내게 남긴 해답 없는 두 번째 물음에 관해서도 그에게 토로했다.

“그럼 저희가 계속 같이 잘 지내게 된다면, 다른 귀족들은요? 세나 씨의 얼굴을 아는 귀족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들이 저희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심지어 조슈아까지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면……. 나는 뒷말을 흐렸다. 나로 인해 조슈아가


부정적인 소문에 휩싸이는 일은, 생각할 때마다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요한은 내 위에서 완전히 내려갔다. 그는 더 이상 스킨십을 나눌 기분이 아닌 듯해 보였다.
나는 누워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너 원래 그런 거 신경 안 썼잖아.”

“…….”

그것은 허를 찌르는 말이었다.

솔직히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세상 두려울 것 없이 살아왔다.

과거의 기억을 잃었지만, 잊힌 과거에 목메지 않으며 현실에 충실해 왔고, 뒷말을 하는
사람들의 의중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헛소문이 돌든 누군가가 나를 음해하든, 당사자인 내가 결백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닌데, 남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요한의 말은 이어졌다.

“무슨 짓을 하든, 나는 워낙 잘난 사람이라서 뒷말이 따라. 너에 대한 뒷말이 하나 더


달라붙는 건 내게 신경 쓰이는 문제가 아니야.”

“대단한 자존감이네요. 그럼 조슈아는요?”

요한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마치 이번에도 거기까지 생각해 두었다는 것처럼.

“아이에겐 설명을 잘 해 주어야겠지.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아이가 상처받지 않게.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저는 그걸로 저택을 떠날 생각도 했단 말이에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어딜 떠난다는 거야? 누구 마음대로?”

그의 언성이 높아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다디단 말을 하며 내 마음을 설레게 한 남자와, 이


남자가 같은 남자인가 싶을 정도였다.

저택을 떠난다는 내 말이, 그를 그토록 흥분하게 만든 걸까?

요한은 무릎 위에 무방비하게 놓인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는 내가 지금 당장 떠날 거라고 말한


것처럼 대하고 있었다.

단단한 그의 악력이 내게 호소하고 있었다.

‘떠나지 마.’

“넌 아직도 조슈아에 대해서 잘 모르나 본데. 아이는 그런 소문보다 네가 사라진 사실을 더


힘들어 할 거야.”
요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조슈아는 안 지 고작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나를 너무도 잘 따랐다. 얼마나 잘 따랐냐면,


내가 진짜 아이의 엄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수어 번 느낄 정도였다.

그런 내가 사라진다면…….

조슈아는 두 눈이 벌겋게 될 때까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목소리가 쉴 때까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을까.

어쩌면 나를 찾으러 가자고 요한에게 애원할지도 몰랐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로 인해 조슈아가 힘들어 하는 건


정말로 견디지 못하겠다.

타인보다 나를 늘 우선시하던 내가, 누군가를 이토록 생각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물보다도 더 짙은 것으로 이어진 듯한 인연. 나는 그러한 느낌을 종종 느끼곤 했다.

“적어도 조슈아를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마.”

“……당신은요?”

요한은 잡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려, 내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홧홧했다. 나는 괜스레 조금 전 나누었던 뜨거운 키스가


떠올랐다.

키스는 이미 끝이 났지만, 달아오른 몸 안의 심지는 쉬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조슈아와 같은 마음이야. 우리는 아주 잘 통하는 부자지.”

“큭큭.”

왠지 화가 나 보였던 그의 얼굴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래서 대답은? 떠나지……않을 거지?”

“아무런 말 없이는 떠나지 않을게요. 정말 만약에 떠나게 될 사정이 생긴다면, 그땐 당신에게


얘기를 할게요.”

“그런 사정은 생기지 않아. 영원히.”

그는 확신했다. 어디서 나오는 확신일지 모르겠다. 하나 엉터리 같은 그의 확신에도 나는


미소가 새어 나왔다.

요한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네 옆에 있어 줄게.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잖아. 네게
닥칠 두려움을 내게 나눠 줘. 반, 아니, 그 전부를 내게 줘도 상관없어.’

나는 이전에 요한이 내게 건넸던 가슴 설레는 말을 되뇌었다.

이번에도 그의 말이 맞았던 것 같다.

어떤 감정이든 그것을 나눌, 그리고 함께할 사람이 있다는 건 꽤나 멋진 일이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둔 채로 공작저를 떠나는 게 옳은 일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 무거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그럼 당신이 가라고 할 때까지는 떠나지 않을게요.”

고민했던 지난날들이 이상할 정도로 대답은 수월하게 흘러나왔다.

후련했다.

그래, 털어놓지 못한 채 혼자 끙끙 앓는 건 내 적성이 아니었어.

나는 원래부터 충동적으로 사는 여자였다. 요한의 공작저에 오게 된 이유 또한 단지 배가


고프고, 처음 본 나를 잘 따르는 아이가 귀여워서였다.

요즘 들어 어울리지 않게 골몰했던 것만 같았다.

“……아니 그건 그렇고, 그 빌어먹을 자식은 언제 또 만난 거야? 만나게 된다면, 내게 바로


얘기해 달라고 했지.”

“얼마 안 됐어요. 하하하.”

요한은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내 이마에 작게 꿀밤을 놓았다.

“아얏. 아파요!”

“아프라고 때렸으니까, 당연하지. 다음에는 바로바로 얘기해.”

그는 이번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내 이마에 입술을 맞대었다.

쪽.

그러곤 어쭙잖게 말했다.

“……이, 이건 약을 주는 차원에서…….”

우물쭈물 거리는 요한의 모습이 퍽도 귀여웠다.

“바보 밥맛.”

그의 성질을 돋울 만한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여느 때처럼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마치 내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그런 그의 얼굴이 싫은 건 아닌데, 뒷덜미에 소름이 돋는 건 나로선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귀여움을 받는 일은 도통 적응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그는 내 이름을 담백하게 불렀다.

“리나.”

“네.”

“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니까, 나도 솔직하게 털어놓을게.”

“…….”

“나는 요즘 세나 꿈을 꾸지 않아.”

그는 휴,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죽은 후에, 그녀의 꿈을 종종 꿨었어. 하지만 네게 향한 내 마음을 인정한 이래로,


그녀는 내 꿈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거기까지 말한 그는,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난날 꾼 그녀의 꿈과 내게 닿은 자신의


마음…….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씩 상기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감상하듯이 쳐다보았다.

당신은 세나의 꿈을 꾸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이곳에 온 이후부터 당신과 관련된 꿈을 종종


꾸고 있어. 또다시 당신과 관련된 꿈을 꾸게 된다면, 그것은 어떤 꿈일까.

깨달았을 땐, 닫혀 있던 요한의 입술이 열려 있었다.

“꿈속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그녀는 연기처럼 사라졌었지.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던 꿈속 정경이


잊히지 않아. 그걸 떠올릴 때마다, 내 기분은 뭐랄까.”

요한은 나와 오롯이 눈을 맞추었다. 초점이 돌아온 검은 눈동자 속엔 상념도, 걱정도,


아무것도 서려 있지 않았다.

“그녀가 내게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어.”

“그래서 슬퍼요?”

“털어놓자면 네가 비웃을지도 모르겠어.”

“비웃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가 그랬듯이 솔직하게 털어놔 봐요.”

“나는……그다지 슬프지 않았어. 그동안 그녀를 너무 심하게 앓았던 것일지도 모르지.”

“…….”
“심한 열병처럼 앓던 그녀가, 막상 사라지려고 하자 후련한 기분까지 드는 거야. 미쳤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이젠 네게 좋아한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어때? 내 말을 들은 네 감상은?”

그는 무언가의 기대가 담긴 듯한 목소리로 내게 물어보았다. 그가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지는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도 칭찬 같은 걸 바라는 게 아닐까?

나는 그를 놀릴까 싶다가도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 맞잡은 손을 들어 올려, 이번엔 내가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당신……. 많이 힘들었겠어요.”

칭찬보다는 위로를 해 주고 싶었다.

세나가 죽은 뒤 지난 4 년간, 당신은 얼마나 힘들었던 걸까?

나는 그가 겪었을 상실감, 고통, 그리고 슬픔을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그녀도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지금 당신의 선택을 존중해 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행복을 빌어 줄 테죠.”

“……리나.”

“제가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을 둔 채로 먼저 죽는다면, 저는 그러기를 바랄 테니까요.”

요한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는 세나라면, 그렇게 바랄 것 같기도 해.”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고마워. 그냥 뭐든……. 얘기해 줘서 고맙고,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 줘서도 고맙고.”

그는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의 걸음의 종착지는 소파였다. 그는 그


위에 대충 걸쳐 놓았던 자신의 재킷을 집어 와 내 어깨에 얹어 주었다.

“딱히 네가 추워할까 봐 덮어 준 건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추울까 봐 덮어 줬다는 거지?

나는 그의 호의에 대한 답을 내어놓았다.

“네, 감사합니다.”
그는 잠깐 놓고 있던 손을 다시금 꽉 잡았다. 그러고선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로 내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 방으로 가자. 너와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설마. 내 머릿속엔 뜨거운 숨결을 내뱉던 조금 전 요한의 얼굴이 맴돌았다.

그는 내 숨을 좀 더 집어삼키고, 서로의 은밀한 곳을 더욱 탐내고 싶은 걸까?

차마 고백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솔직하게 토로하며 어쩐지 감정적으로 통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든 지금. 그는 이 분위기를 그냥 넘기지 않으려는 걸까?

어젯밤 각자 잠이 든 것을 보상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그런 거라면, 내 침대에서 끝을 보아도


상관이 없는데.

하지만 장소가 중요하나 싶었다.

나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킨 후에 말했다.

“요한 씨. 제가 아까 고기를 많이 먹어서 배가 평소보다 더 나왔을 거예요.”

제길.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조금 자제하는 건데.

나는 뒤늦게 배에 힘을 줘 보았지만, 내 배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나와 있었다. 가망 없는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그, 그런 거 하자는 게 아니야.”

그는 얼굴을 조금 붉히며 완강히 부인했다.

뭐야. 방금 분위기는 딱 그런 분위기였는데. 당장 침대에 함께 누워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단 말이다.

“아니에요? 괜히 기대를 했잖아요.”

“……완전 아니라는 건 아닌데……. 아, 아무튼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어.”

“그게 뭘까요?”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간단한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더라고.”

확인되어야 할 간단한 사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일단 가자.”

그는 잡은 손을 이끌었다. 나는 몸을 완전히 일으켜, 그가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 * *

요한의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나를 자신의 책상 앞에 앉혔다.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다. 그는 어디선가 작은 열쇠 하나를 가져와 책상 제일 밑의 서랍을 열기


시작했다.

딸깍.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린 서랍. 그는 그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나도 익히 아는 물건이었다.

“……세나 씨의 일기장?”

붉은 표지가 영롱한 그녀의 일기장. 해결되지 않은 여러 가지 물음을 남긴 일기장이기도 했다.

요한은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곤 종이와 펜을 꺼내 내 앞에 가지런히 놓아


주었다.

“네 필체를 확인해 보자.”

“아…….”

나는 바보 같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이제야 뒤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바비는 나와 세나가 쌍둥이 자매라고 했고, 세나의 일기장엔 묘하게 달라 보이는 필체가 두
가지 존재했다.

그래서 우리는 쌍둥이였던 두 사람이 중간에 바뀐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필체를 확인하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내 필체를 확인한다면, 내가 일기장의 앞쪽을 채운 필체의 주인공일지, 뒤쪽을 채운 필체의


주인공인지 알게 될 테니까.

그 말인즉슨, 내 정체가 어느 정도 판가름이 난다는 소리였다.

“싫어? 네가 내키지 않는다면 강요하지 않을게.”

요한은 사려 깊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저도 확인해 보고 싶어요. 제가 누구인지, 저도 알아야겠으니까.”


나는 왜 요한, 그리고 랭카스터 공작가와 관련된 환영과 보고, 꿈을 꾸는 것인지.

내가 세나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바비의 말이 과연 옳은 것인지.

내가 세나인지 그녀의 동생인지, 나는 그 사실을 알아야겠다.

숨을 낮게 골랐다.

글을 적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이렇게까지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요한은 잘게 떨리는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려 주었다. 그의 손의 온기가 전해지자, 나는 더욱


용기를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일기장의 맨 앞 페이지를 펼쳤다. 그러곤 그 안에 적힌 내용을 똑같이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십이월 마지막 주, 먹구름 사이로 하얀 꽃이 내렸다.

첫눈이었다.

새벽부터 쏟아지던 첫눈은 눈앞이 뿌옇게 흐려질 정도로 흩날렸다.⌟

나는 거기까지 적고선 펜을 내려놓았다.

요한은 심도 깊게 내가 쓴 글귀를 관찰하고 있었다. 우리는 일기장 속 필체와 내 필체를


한참이나 비교해 보았다.

“…….”

꽤 긴 침묵이 맴돌았다.

이윽고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리고선, 요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당신도 나와 똑같은 결론을 내린 걸까?

책상 위에 올려진 내 손끝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제 67 화. 현실에선 할 수 없는 일을 이뤄 내는 마법
“……달라.”

결론 짓는 요한의 말에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첫 번째 필체의 주인과 내 필체는 달랐다. 아니, 완벽하게 다르다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었지만 완벽하게 똑같은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까.

요한은 세나의 일기장을 몇 장 넘겼다. 그가 이번에 펼쳐 든 페이지는 여섯 번째 세나의


일기가 적힌 곳이었다.

우리는 심혈을 기울여 글씨체를 비교해 보았다.

“……이 필체와도 다른 것 같아요.”

이전과 똑같았다. 엇비슷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완벽하게 같지는 않았다.

요한은 실망이 밴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무언가를 기대했음이 틀림없었다. 가령 내가 두 가지 필체 중 어느 하나의 주인일 거라는


그런 기대.

하지만 그는 실망했다는 말을 꺼내진 않았다. 대신 희미하게 떨리는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시름이 깊어 보였던 그의 얼굴엔 나지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기억을 잃으면, 필체도 바뀌는 걸까? 사람의 필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것은 아니니까.”

“그런 걸까요?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라서 왠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필체 확인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네요. 나는 거기까지 말하며 쓰게 미소 지었다.

기대한 건 요한뿐만이 아닌 듯했다. 나도 내심 내가 두 필체 중 하나의 주인일 거라고


기대했나 보다.

기대한 만큼 실망은 컸다. 요한은 씁쓸한 미소가 서린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떡하지?”

“네?”

그는 비스듬히 미소 지은 얼굴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그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은 것은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모든 해답은 네 머릿속에 들어 있다는 내 말에 힘이 점점 더 실리는데.”

그는 상심이 가득한 우리 사이의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말에 흔쾌히


부응해 주었다.
“음. 그럼 제 이마에 다시 한번 더 입을 맞추어 봐요.”

이번에 되물은 쪽은 요한이었다.

“어?”

“방금 당신의 입술이 닿았을 때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를 듯 말 듯 했으니까요. 또 닿으면


진짜로 무언가가 생각날 것 같아.”

물론 떠오른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가 더러 그러했듯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데


조금 더 적극적으로 굴었을 뿐이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을 청하는 양 그에게 내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돌아온 것은


요한의 웃음소리였다.

“……큭큭.”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챈 것처럼 보였지만, 내 이마 위에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쪽. 듣기 좋은 마찰음이 울렸고,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뭔가가 떠올랐어?”

그는 제가 완벽하게 속아 주겠다는 것처럼 말했다.

“흐음. 뭔가 부족한 것 같아요. 어떤 잔상이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확실히 보이지 않네요.”

“그럼 더 자극적인 걸 해 볼까?”

자극적인 것이라.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희고 긴 목 밑 셔츠 언저리를 바라보았다.

셔츠 단추를 얼마나 꼼꼼히 잘 잠근 것인지, 그 사이로 드러난 그의 쇄골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괜스레 아쉬움이 들어서 나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요한의 쇄골만큼이나 내 시야에 자극적인 건 없지.

물론 더 자극적인 것을 얘기하자면, 다른 부위를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도 있었다.

“……자극적인 게 뭘까요?”

나는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떼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한 가지 말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착한 생각…….

하지만 그의 목 언저리에 닿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네가 지금 제일 보고 싶어 하는 거.”

요한은 혀를 끄집어내어 자신의 입술 위를 느릿하게 핥았다.

제길. 아무래도 그에게 내 생각이 읽혔음이 분명했다.

그럼 아닌 척하지 않아도 되겠는데?

나는 아주 노골적으로 대답했다.

“제가 당신의 관능적인 쇄골을 제일 보고 싶어 하는 건, 절대로 비밀이 아니에요.”

“그건 도대체 무슨 말이야?”

나는 혀를 삐죽 내밀었다.

“어서 빨리 당신의 쇄골을 보여 달라는 말.”

“하여튼.”

그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내게 아주 못 당해 내겠다는 기색이 완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말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는 도리어…….

“어쩔 수 없군. 쇄골을 보여 주려면 침대로 가야겠어.”

“……?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예요?”

“네가 싫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거고.”

“뭐 해요? 지금 당장 침대 위로 올라가 주세요.”

나는 지지 않고 대꾸했다. 요한은 킥킥거리면서 맞잡은 손을 놓았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 모습이 꼭 주인 말을 아주 잘 듣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올라가라고 하면 내가 못 올라갈 줄 알고.”

그다음 해야 할 일은 구태여 내가 시키지 않아도 그가 알아서 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관능적인 제 쇄골을 더욱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내 요한의 몸을 빈틈없이 가리고 있던 그의 흰 셔츠는 가지런히 개어져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졌다.

각이 잘 잡힌 채로 반듯하게 개어진 흰 셔츠. 뭇 사용인들 못지않은 훌륭한 솜씨였다.


요한은 언제고 내가 탐냈던 아름다운 몸을 내비친 채로 나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침대 위로 올라갔다.

이제 그다음 해야 할 일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같은 것의 절차를 차근차근 밟아갔다.

요한은 단단한 팔로 나를 꼭 껴안았다. 나는 그의 등을 천천히 매만졌다. 그의 품이 너무도


따스해,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길고 긴 포옹이 끝난 후에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그러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술을 맞대었다. 원할 만큼 나누는 키스 속에선 아무런 상념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가 만족할 만큼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 아주 깊고. 아주 길게.

 
모든 것을 끝낸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누운 채로 마저 하지 못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에믈린 씨는 갑자기 왜 온 거예요?”

그것은 궁금했으나 요한에게 묻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내 물음에 요한은 난처한 기색을 풍겼다.
하지만 그는 대답을 피하지는 않았다.

“나도 처음엔 웬 뜬금없는 방문인가 했는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나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 찾아온 것 같아.”

“세나 씨의 기일…….”

세나는 날이 추워졌을 무렵에 생을 다했구나.

나는 요한이 슬픈 표정을 지을까 싶어 그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슬픈 기류는 띠어져 있지 않았다.

믿을 수 없게도 그는 담담해 보였다.

세나를 떠올리며, 바라보는 이마저도 울컥할 구슬픈 눈물을 흘렸던 요한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차분함이었다.

우습게도 나는 그의 차분함이 마음에 들었다. 왜냐면, 그것은 나를 세나가 아닌 리나로서


좋아하게 되었다는 방증 같았기 때문이다.

그사이, 그의 말은 이어졌다.

“그런데 헛걸음이 아닌가 싶어.”

“왜요?”
그는 대답하기를 잠깐 망설였지만, 이윽고 답을 내어놓았다.

“세나의 시신이…… 사라졌거든. 나는 요즘 세나의 시신을 찾고 있어.”

“……!”

나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놀라 벌어지는 입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은 요한의 공작저에 머물며 있었던 일 중 제일 기괴한 일이었다. 내 얼굴과 세나의 얼굴이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도 훨씬 더 소름 끼쳤다.

이미 오래전에 죽어 풍화되었을 시신을 가져간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까닭 없이 입 안이 바싹 말라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심각한 갈증을 느꼈다.

“놀랐지? 미안.”

요한은 내 뺨을 매만졌다. 놀라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긴 손길이었다.

“조금 놀라긴 했는데……. 아니, 그런데 요한 씨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아신 거예요?”

“네가 나를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솔직하게 털어놔 볼게. 네가 공작저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네가 너무 세나 같아서……. 그래서 세나의 묘를 파 봤어.”

“…….”

“묘지를 파면서도 내가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수어 번 들더군. 그러면서도 끝내 그녀가


잠든 관 안을 확인해 봤어. 관을 덮고 있던 흙을 파는 순간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었거든.
그런데 이게 웬걸. 세나의 시신이 사라지다니.”

그는 그때의 기억을 잠깐 떠올린 듯 눈썹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그래서요? 설마 저를 죽은 세나의 소생쯤으로 생각한 건 아니겠죠?”

“처음엔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어.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생각이 바뀌더군. 네가


리나든 세나든 상관없다고.”

“…….”

“네가 가진 이름이 뭐든, 나는 이미 너라는 사람을…….”

그는 나와 맞물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마치 곧 부끄러운 말을 하려는 것처럼.

“……좋아하게 된 거니까.”

뭐라고 불리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 그는 나지막이 한마디를 덧대었다. 머쓱한 헛기침은


덤이었다.

생각이 복잡한 것과는 별개로 마음속엔 따사로운 기운이 차올랐다.


그것의 정체는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

“이봐요, 요한 씨. 더 자세히 말해 줘요. 나라는 사람 어디가 좋은 건지.”

“엉뚱하게 말하는 것도 좋고, 솔직한 것도 좋고, 가식이 없는 것도 좋아. 하고 싶은 건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건 하지 않는 배짱이 마음에 들어. 그리고 조슈아를 예뻐해 줘서……. 네가 내
아이를 예뻐해 주는 걸 볼 때마다 내 가슴도 왠지 설레.”

“조슈아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예쁜 아이인 걸요.”

“아암. 누구 아들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작게 킥킥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 조금 전 매듭 짓지 못한 말을 논제를 꺼내었다.

“그래서 지금은 세나 씨의 시신을 찾지 못한 거죠?”

“애석하게도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휴.”

“…….”

“시신이 사라진다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벌어지고야


말았지. 삼엄한 경비에게 걸리지 않고 시신을 가져간 사람은 누굴까.”

시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풍화된 뼈로 무엇을 하려는 걸까.

변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요한의 말대로 ‘소생’이라는 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 주변엔 현실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구현해 주는 능력자가 존재했다.

나는 내 방 창틀 위 꽃병에 여전히 꽂혀 있는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떠올렸다. 그것은 이전에


욘두가 마법으로 만들어 준 꽃이었다.

시간이 꽤나 흘렀지만, 그 장미는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시들지 않는 장미를 계속해서 보고 있자면, 마치 시간의 감각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마법사 욘두. 현실에선 할 수 없는 일을 이뤄 내는 마법.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마법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들어보지


못한 일일 뿐,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기분이 묘해졌다.


요한과 내가 의문스러워하는 일들 모두 욘두가 비스듬히 걸쳐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모든 해답은 욘두가 쥐고 있는 걸까?

내가 찾지 못했던 연결고리는 욘두인 걸까.

“무슨 생각 하길래 인상을 찌푸려. 주름 생겨.”

요한은 나를 장고에서 꺼내 주었다. 그는 주름진 내 미간 위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고 있었다.


나는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피, 본인은 더 자주 인상을 구기면서.”

“나는 주름조차도 아름다운 사람이잖아.”

“…….”

요한은 자기 자랑을 어쩜 이렇게 태연자약하게 내뱉는 거지?

조슈아가 제 아빠를 닮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이는 최고의 밥맛이 되면 안 될 텐데…….

그는 얼빠진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왜, 왜?”

“평소에 욕 같은 거 많이 먹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잖아.”

“……흐음.”

“내 주름. 보기 싫어?”

그는 보란 듯이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나는 수상한 욘두에 대한 생각을 접어 두고선 요한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요한의 주름은 몹시도 매력적이게 보였다.

맙소사.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좋아 보인다던데, 주름까지도 매력적이게


보이다니.

이러다간 조만간 그가 구토를 하는 모습마저도 사랑스럽게 바라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사랑스럽게만 바라볼까?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그의 입속에서 질질 흘러나오는 토사물들을 두 손으로 받아 줄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또다시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 * *

요한의 거듭된 진한 입맞춤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꿈속엔 어쩌면 내 과거일지도 모를 광경이 그려졌다.

그것은 이전 날 의심했듯 내가 만들어 낸 환상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잃어버린 실제 내


기억일 수도 있었다.

진실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나는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무섭게 꿈속 광경에 자못


집중을 했다.

무언가의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만이 들었을 뿐이다.

꿈속의 날은 밝았다.

여름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의 따사로운 햇볕이 지상을 내리쬐고 있었다. 햇볕을 받은


정원의 푸른 잎사귀는 연신 반짝거렸다.

나는 그때 알 수 있었다.

여긴 내가 아는 정원이야.

그곳은 바로 랭카스터 공작가의 정원이었다.

곧이어 잔디 위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어른은 아니었고, 조슈아보다는 훨씬 큰, 구체적인 나이를 논하자면 대략 십대쯤으로 보이는


남녀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늘 내 꿈에 나왔던 얼굴이기도 했다.

지금보다는 앳되어 보이는 요한과 세나, 아니, 리나, 아무튼 쌍둥이 자매 중 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세나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몸이 거의 닿을 정도로 꼭 붙어 누운 두 사람은 아주 여유로워 보였다.

그들의 여유로운 휴식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꼭 그곳에, 더해 세계에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무언가의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애석한 일이 하나 있다면, 대화 소리가 뜨문뜨문 끊겨서 들렸다는 점이었다. 선명하지 않은
대화 소리는 괜스레 조바심이 들게 만들었다.

이건 분명 내 꿈속일 뿐일 텐데, 솟아오르는 감정이 너무도 선연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귓가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꿈속이라서, 귓가에 집중을 한들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릴까 싶었지만…….

‘……요한. 나랑 약속 하나만 해.’

놀랍게도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요한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슨 약속?’

제 68 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듯한 기분

‘……요한. 나랑 약속 하나만 해.’

놀랍게도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요한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슨 약속?’

세나인 것 같은 여자아이가 말했다.

‘내가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나를 꼭 알아봐 주겠다는 약속.’

‘그런 약속은 도대체 왜 하는 거야?’

하여튼 요한은 십대 때에도 한번에 ‘응’이라고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마음속으론 이미 약속을 해 줄 것이라 마음먹었음에도 그는 제법 도도하게 튕겼을 것이다.

나는 그의 속마음을 단번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퉁명스럽게 대답한 그는 제 얼굴 위로 내리쬔 햇볕이 따가웠던 것인지 눈가를 작게 찌푸렸다.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해. 이유는 묻지 말고.’

그리고 요한의 입에선 여자아이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세나. 너는 왜 이유 없는 이상한 부탁을 하는 거야?’


세나. 그녀는 예상했던 대로 세나가 맞았다.

요한은 따가운 햇살을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정면을 보고 있던 몸을 세나 쪽으로


비틀었다.

하나 정면을 바라보는 세나의 몸이 틀리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옆얼굴을 몰래


훔쳐보았다.

요한의 시선은 그녀의 눈동자, 코끝을 자연스럽게 훑더니 이내 붉은 입술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오랫동안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았다.

‘됐어. 하지 마. 부탁 안 하면 되잖아.’

세나가 까칠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입술 부근을 훔쳐본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것만 같았다.

그 사실은 요한과 그들의 근처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나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해. 해 줄게. 네가 마음이 상한 것 같아서, 내가 한발 물러서 준 건 절대로 아니야. 내가


너를 왜 신경 써? 신경 썼다고 착각하면 곤란해.’

아무래도 요한은 이 당시에도 세나에게 이성적인 호기심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나가 더 토라질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게 다 티가 났다.

나는 앳된 요한의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사족이 참 길다.’

세나는 타박하듯이 대꾸했다.

‘흠흠. 아무튼 네가 어떤 모습을 하든, 이 요한 랭카스터 님이 너를 꼭 알아봐 줄게.’

그러자 세나는 그제야 요한 쪽으로 몸을 틀었다. 불시에 돌아간 그녀의 몸에 요한은 눈에 띌


정도로 흠칫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보던 시선을 황급히 물렸다.

요한의 뺨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고마워.’

세나는 사족을 달지 않았다. 그저 고맙다는 말만을 꺼냈을 뿐이다.

고맙다는 말에 드리운 세나의 아름다운 미소에 요한의 얼굴을 더더욱 붉어졌다.

밝은 햇살, 푸른 잔디 위, 그리고 풋내기 같은 두 사람.


이유 없이 울컥해지는 광경이었다.

“……하.”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땐, 주변의 광경은 완벽하게 변해 있었다. 녹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아무런 전조 없이 꿈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나는 상체를 조용히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었다. 날은 아직 밝지 않은 것인지 사위는


어두웠다.

옆을 내려다보자, 그곳엔 고른 숨소리를 규칙적으로 내뱉는 요한이 존재했다.

나는 그의 매끄러운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꿈속에선 느낄 수 없었던 타인의 체온이 내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요한, 당신의 입맞춤이 진짜로 효과가 있었나 봐요.

깨어났음에도 선명한 꿈을 오랜만에 꾼 기분이에요. 그것도 당신과 세나가 관련된 꿈이었어요.

‘내가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나를 꼭 알아봐 주겠다는 약속.’

세나가 한 그 말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던 걸까요?

당신은 어느 틈엔가 갑자기 조금 달라진 세나를 눈치채지 못한 걸까요?

세나의 일기장 속 달라진 필체. 어떤 모습이라도 알아봐 달라던 세나의 약속.

그리고 역할 바꿔치기.

“……!”

잇따른 흔적들은 나도 모르게 자연스러운 결과를 만들어 냈다.

“역할……바꿔치기?”

그것은 내가 의도한 말이 결단코 아니었다. 부자연스러움이라곤 일마도 없이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었고, 경험한 일을 뜻하는 말인 것만 같았다.

익숙한 말임이 틀림없다는 거다.

나는 누군가와 역할 바꿔치기를 했던 걸까?

날이 쌀쌀했음에도 불구하고 날갯죽지 사이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소매로 이마를 훔쳐 냈다. 그곳에도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나는 호흡을 길게 내뱉으며 정리를 해 보았다.


세나와 나는 쌍둥이 자매이기는 하나, 외부에 드러난 존재는 ‘세나’ 하나일 것이다.

쌍둥이는 집안에 풍파를 몰고 오는 존재였고, 랭카스터 형제들이 아는 이름은 세나


하나였으니까.

즉, 대외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쌍둥이 자매 중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한 사람만 밖을 나다니며 나머지 사람은 숨어 지내야 한다는 건, 너무 불합리한 일이잖아.

그래서 두 사람이 이따금 서로의 역할을 바꿔치기했던 게 아닐까?

랭카스터 가의 양녀 후보는 처음엔 세나 본인이었지만, 이따금씩 역할을 바꾸어 리나가 세나인


양 군 거라면.

그렇게 생각하자, 꿈속의 세나가 요한에게 왜 그런 약속을 받아 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나는 역할 바꿔치기로 인해 요한을 만나게 될 리나에게 내심 질투했던 것이다.

요한이 제게 대하는 것처럼 리나에게 상냥하게 굴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리라.

꿈속에서 본 세나는 고작 십대였다. 마음이 단단하게 성장하지 못한 어린 나이였다는 거다.

쌍둥이와 관련된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고 할지라도, 세나는 자신의 역할을 리나가 빼앗는 것은
아닐지 은연중에 걱정했을 것이다. 심각한 질투를 했을지도 몰랐다.

물론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세나가 리나를 질투했듯이, 혼자 남겨졌던 리나 또한 세나를 질투했을 수도 있다고.

아니, 리나는 질투를 넘어서서 세나를 증오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 순간 지난날 잡화점에서 들었던 환청을 떠올렸다.

‘왜 항상 너만 행복해져?’

‘네가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뿌리 깊은 증오가 밴 것처럼 느껴졌던 그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은 쥐 죽은 듯이 숨어 지내야 했던 쌍둥이 한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조용히 숨어 지냈던 쪽은 내가 아니었다는 건가.

왜냐면 그 목소리에 밴 증오의 방향이 명백하게 나였기 때문이다.


여자아이의 악에 받친 목소리는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분명했다.

바비는 내가 리나라고 했다.

하지만 말이다. 내겐 또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나인 것 같아…….”

그래야 모든 것들이 제대로 설명이 되는 것 같았으니까.

내가 지난 5 년간 꾼 요한이 나오는 야릇한 꿈, 공작저에서 꾼 여러 꿈들, 이상할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는 벨라의 속사정, 그리고 종종 들리는 누군가의 환청.

그렇다면 두 사람 중 밖을 나다닐 수 있는 사람은 어째서 ‘세나’로 결정된 걸까?

하지만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요한이 실제로 두 사람을 구별했는지 못했는지, ‘역할 바꿔치기’라는 말을 떠올린 것은


단순한 우연인 것인지,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바비를 다시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비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고백에 대한 내 대답을 언제고 기다린다고 했었다.

그에겐 정말로 미안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날 이래로 그를 거의 떠올리지 않았다.

그의 고백에 대한 답은 확고하고, 그를 제외하고도 생각해야 할 것들이 엄청 많았다. 내


머릿속은 이미 과부하란 말이다.

그럼에도 그를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그러했다.

내가 리나라는 말의 출처가 누군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

나는 한숨과 함께 다시금 요한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하고 있을 고뇌를 눈곱만치도 모를 그는 평온한 얼굴로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요한 씨. 당신과 입을 더 맞추면, 내일은 더 확실한 게 떠오를까요?”

* * *
오랜만에 아주 개운한 잠을 잔 것 같았다. 아니, 정정하겠다. 아주 대단한 늦잠을 잔 거라고.

나는 커다란 기지개를 켜며 요한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여느 날 그러했듯이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바쁜 그였으니 당연한 일일 성싶기도 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 둔 채로 저택을 떠나야 할지 고민하던 것도 해결되었고, 내가 해야 할


일은 이제 기억을 떠올리는 일 하나밖에 없었다.

떠올리고자 하는 확실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왜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걸까.

내 방으로 돌아가 벨라가 가져다준 가벼운 식사를 마쳤을 때,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내 방에 찾아올 방문자는 딱 정해져 있었는데, 가령 요한이라든지 조슈아라든지 벨라라든지,


이번엔 찾아온 이는 제법 뜻밖의 인물이었다.

“……리나 언니.”

방문자의 정체는 내게 모진 말을 내뱉었던 에믈린이었다.

작은 노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나의 눈치를 보았다. 제가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것을 아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예의상 그녀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에믈린의 말대로 나는 일개 사용인이었고, 그녀는 랭카스터 가의 막냇동생이었으니까.

심술을 부리고 싶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는데, 그냥 마음이 좋지 못했다.

에믈린이 애당초 내게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좋지 않지는 않았을 것이다.

“죄송해요.”

그것이 바로 그녀가 꺼낸 첫마디였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죠? 아, 어제 일을 말하는 거라면……. 전 괜찮아요. 당신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으니까요.”

현실적으로 틀린 점은 없었으나 감정적으로 내 마음이 상했을 뿐이지.

에믈린은 내 눈도 보지 못하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룻밤 사이에 달라진 그녀의


변화가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내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사이에 요한과 얘기라도 나눈 걸까?

무언가를 말하길 주저하던 에믈린의 입술이 이윽고 열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욘두 쌤을 좋아해서 그랬어요.”


“네?”

고백하듯이 말한 그녀의 목소리가 이번엔 벌벌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제법 침착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욘두 쌤이 세나 언니를 좋아했단 말이에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저는 알고


있었어요.”

“……!”

나의 놀람에도 에믈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털어놓기로 결정한 일련의 말들을 차례대로 내뱉는 것처럼 보였다.

“욘두 쌤이 아파서 잠든 세나 언니를 보던 눈빛을 잊지 못해요. 그건 제가 욘두 쌤을 쳐다보던


눈빛과 닮아 있었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무언가 더 털어놓을 사정이 있는 듯해 보였지만 결국 말끝을 흐렸다.

“에믈린…….”

나는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오래된 연인이 있다던 욘두가 세나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자못 믿기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최근에도 연인의 귀걸이를 사가지 않았던가.

욘두의 오래된 연인이 세나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리나 언니는 세나 언니와 닮았으니까, 그래서 요한 오빠처럼 욘두 쌤도 언니를


좋아하게 될까 봐. 겁이 나서 그랬어요.”

“…….”

“못되게 굴어서 죄송해요. 리나 언니에게 그러고 나서 많이 반성했어요.”

“……진짜 괜찮아요. 물론 마음이 아예 상하지 않았다고는 못해요. 하지만 에믈린 씨의 사정을


듣고 나니, 제게 모진 말을 했던 당신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도 같아요.”

물론 그녀를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그녀의 말을 백 퍼센트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를 향한 그녀의 홍안은 꽤 진실되어 보였다. 오늘 그녀에게선 이상한 위화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에믈린 씨. 욘두 쌤에게 오래된 연인이 있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 그렇다면 욘두


쌤이 오래된 연인을 놔두고서 세나 씨를 좋아했다는 말인가요?”
“모르죠. 저도 그의 사정은 알 수 없어요. 욘두 쌤은 제가 고백할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지만, 요한 오빠든 저든 욘두 쌤의 오래된 연인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아마 오빠는 욘두 쌤에게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걸요?”

“그렇지만 아파서 잠든 세나 씨를 보던 욘두 쌤의 눈빛엔 사랑이 깃들어 있었단 거죠?”

에믈린은 고통스럽다는 듯 인상을 와락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주저하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실은 제가 무언가를 봤었거든요. 욘두 쌤이 세나 언니를 바라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어요.”

나는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믈린은 초조해 했으나 좀 전처럼 말끝을 흐리지는 않았다.

“그 장면을 본 건 정말 우연이었어요.”

에믈린이 과거, 그녀가 보았던 장면을 내게 토로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시점은 세나가 아팠던 4 년 전 그때였다.

에믈린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세나의 문병을 자주 왔다고 했다. 그


장면을 본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세나와 몇 차례의 이야기를 나눈 후에 공작저를 나섰다. 막 마차를 타려던 그때,


세나의 방에 두고 온 작은 손가방이 뒤늦게 생각났다고 했다.

에믈린은 가방을 가지러 가기 위해 다시 세나의 방에 갔다.

세나의 방 앞에 도착한 에믈린은 노크를 하려다 문득 방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는 단순히 생각했다.

아까 나가면서 문을 완전히 닫지 않았나 봐.

문을 열려던 그때 안쪽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에믈린은 문을 여는 대신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에믈린의 시야에 맺힌 것은 고개를 숙임에 부드럽게 흘러내린 어느 남자의 검은 머리칼이었다.

남자는 침대 맡에 선 채로 자신의 얼굴을 세나의 얼굴 위에 가까이 기울이고 있었다. 이내


남자의 입술이 세나의 이마에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에믈린은 처음엔 그 남자가 요한인 줄 알았다. 하지만 묘하게도 남자가 입고 있는 복색이


요한의 것과는 달라 보였다.

그 순간 말도 안 되게 저 남자는 욘두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얼마 못 가 수그려진 남자의 얼굴이 서서히 들렸다. 에믈린은 숨을 죽인 채로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왜냐면 확인한 남자의 옆얼굴이 욘두였기 때문이었다.

에믈린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도망을 갔다.

두고 온 손가방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그때 본 것을 요한 오빠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고, 욘두 쌤에게 따질 수도 없었어요.


왜냐면 저는 두 사람 다 잃기 싫었거든요.”

“…….”

“하지만 우스운 사실은 그 후에도 제가 욘두 쌤을 계속 좋아했다는 거예요.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나 언니가 죽어
버렸어요…….”

그녀는 죄책감에 물든 얼굴을 했다. 에믈린은 비록 내 마음에 상처를 주었지만, 내겐 그녀의


손을 잡아 주고 싶다는 바람이 들었다.

제 69 화.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어요?

하지만 끝내 에믈린의 손을 잡아 주지는 못했다.

내가 그녀를 위로해 주어도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녀가 믿고 따랐던 세나가


아니니까.

에믈린이 위로받기를 바라는 사람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세나일 것임이 틀림없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주는 대신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믈린 씨.”
“……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제게 말해 줘도 괜찮은 건가요? 저흰 어제 만난 사이고……. 당신이


좋아하는 욘두 쌤의 치부가 저로 인해 드러날 수도 있을 건데.”

에믈린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그 미소는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말씀 드렸다시피 리나 언니를 보면, 언니에겐 뭐든 털어놔야 된다는 이상한 강박감이


들어요.”

내가 세나와 닮았기 때문에.

에믈린이 느꼈을 강박은 어쩌면 벨라가 느꼈던 감상과 같은 것일 테다.

나는 이전에도 벨라에게 여러 사연을 들은 터였다.

그녀는 외부인에겐 털어놓기 힘든 공작가의 사정을 내게 줄줄이 털어놓았었다. 제 마님과 닮은


나의 질문이라서, 그녀는 대답을 회피할 수 없다고 했었다.

“물론 요한 오빠에게는 비밀로 해 주세요. 욘두 쌤과 요한 오빠 사이가 어그러지지 않기를


바라는 건 여전하니까요.”

“좋아요. 저도 괜한 말이 나오는 걸 바라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비밀로 묻어 둔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에믈린의 고백이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행위였든, 결론적으로 욘두는 세나에게 입맞춤을 했다는 것이다.

욘두는 세나를 사랑……했던 걸까.

에믈린의 고백은 끝나지 않은 듯했다.

“그런 짓을 한 욘두 쌤을 공작저에 그대로 둔 건, 그 이후엔 그가 눈에 띄는 수상한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가 혹여나 조쉬나 요한 오빠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어서 저는 조용히, 그리고 오랫동안 욘두 쌤을 지켜봤거든요.”

속사정을 시원스럽게 털어놓아서인지, 그녀는 좀 전보다 확실히 안정되어 보였다. 자잘하게


떨리던 목소리가 제법 진정된 것처럼 들렸다.

나는 그녀의 말을 곱씹어 생각했다.

에믈린은 욘두가 눈에 띄는 수상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나 눈에 띄는 수상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게 수상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닐까?

가령 이미 풍화되었을 세나의 시신을 훔쳤다든지. 아주 은밀하게. 쥐도 새도 모르게.


“되레 욘두 쌤은 조쉬를 아주 좋아하고, 예뻐하는 걸요. 그때 그런 짓을 한 건 욘두 쌤의
충동적인 행동이었을 거예요. 비록 아프기는 했지만 세나 언니는 무척이나 예뻤으니까요.”

“…….”

“욘두 쌤은 예쁜 여자에게 일순간 마음이 빼앗겼던 거예요. 그뿐이에요.”

가능성이 아예 없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그녀가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고해하듯이 털어놓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욘두가 비난받기를 바라지 않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해야 할까.

사랑이란 게 그런 것 같다.

사랑하는 상대방이 어떤 짓을 하든, 설령 여러 사람에게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싶은.

그러한 일을 저지른 것에는 타당하고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어 버리는.

나는 자연스럽게 요한을 떠올렸다.

나는 요한에게 나와 스킨십을 나눌 땐 세나를 절대로 떠올리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하지만 그를 향한 내 마음의 깊이가 깊어진다면, 그땐 그러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게 될지도


몰랐다.

어쩌면 아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나를 보고선 세나를 떠올린다 할지라도, 나는 그래도 내 곁에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어.

나는 그렇게 바라게 될지도 몰랐다.

“네. 그런 것일 수도 있다고, 저도 생각해요.”

나는 에믈린의 말에 동의를 해 주었다.

그녀가 까닭 없이 안쓰럽고 측은하게 느껴져서,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고마워요. 리나 언니라면 이해해 줄 줄 알았어요.”

“…….”

“이해심이 많은 언니가 요한 오빠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요?”

“어제 오빠한테 들었거든요. 요한 오빠가 리나 언니를 사랑한다고. 그리고 언니도 오빠를


사랑한다고. 맞죠?”
“네. 저희를 축복해 주기까지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요한 씨를 사, 사, 사…….
아무튼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진심이에요.”

사랑해, 라는 말을 내뱉는 일이 왜 이토록 부끄러운 것인지.

그러고 보니 요한에게 좋아한다고 제대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았다.

추상적인 마음을 언어로 확인하는 쪽은 언제나 나였다.

물론 좋아함을 뜻하는 표현은 많이 하기는 했다. 하지만 언어로 내뱉어진 것과 그러하지 않은


것엔 확실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기회가 생긴다면 요한에게 고백을 해 보자.

어떤 식으로 고백을 해야 요한의 얼굴이 더욱 붉어질까.

밥맛 요한의 얼굴이 불구덩이처럼 붉어지며 부끄러움에 못 이겨 그가 말을 더듬거릴 모습을


상상하자, 나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요한의 여러 모습을 좋아하지만, 나는 그가 부끄러워할 때가 제일 좋았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에믈린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축복해 주고 싶어요. 제 태도가 또다시 돌변한 건, 어쩌면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안도했기 때문이거든요. 저 참 나쁘죠?”

제가 사랑하는 욘두에게 내가 마음을 줄 것 같지 않아서, 에믈린은 마음을 놓기라도 한 걸까?

그녀의 말에 이번엔 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쁘지 않아요. 자책하지 마세요.”

나 원. 나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있죠, 리나 언니. 4 년 전에 세나 언니가 죽었을 때 요한 오빠는 거의 죽은 사람 같았어요.


조쉬 때문에 어떻게든 살고 있지만 위태로워 보였죠. 저희 오빠 좀 바보 같은 거, 언니도 잘
알죠?”

밥맛이 바보 같다는 사실은 내가 너무 잘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그녀의 말에 집중해


주었다.

“너무 바보 같아서……. 설마 세나 언니를 따라갈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을지


매일 걱정했어요. 그래서 한동안 공작저에 머물기도 했고요.”

밥맛 요한. 그 정도로 힘들어했던 거야?

나는 괜스레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다시 만난 요한 오빠의 얼굴이 좋아진 걸 보고 나서, 처음엔 엄청


의아했어요. 오빠에게 좋은 일이라도 있나? 싶었죠.”
“네.”

“그리고 리나 언니를 보는 순간 저는 직감했어요. 오빠의 얼굴이 밝아진 건 리나 언니


덕분이라는 걸.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요한 오빠가 리나 언니를 좋아하는 이유가 세나
언니와 닮았기 때문이라고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왜요?”

“왜냐면 어찌 되었든 요한 오빠가 행복해지기를 바랐거든요. 오빠가 누군가를 다신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리나 언니를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하하하. 제가 뭐 큰일을 한 건 아닌데.”

에믈린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그리고 욕심을 하나 부리자면…….”

“부리자면?”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 순간 예감했다.

그녀가 내게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이 이제 흘러나올 거라고 말이다.

“욘두 쌤과 친하게 지내지 말아 주세요.”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이 그 말이었어?

나는 즉답했다.

“하나도 안 친해요. 앞으로도 친하게 지낼 일이 없고요.”

욘두는 왠지 모르게 정이 가지 않는 남자였다. 그에게 수상함을 많이 느꼈기에 그런 것이려나.

에믈린은 확인 사살을 하듯이 되물었다.

“정, 정말이죠?”

“그럼요. 그리고 요한 씨, 질투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욘두 쌤과 둘이 있는 것도 극구


말리더라니까요. 저를 꼭 끼워서 만나라나 뭐라나.”

“큭큭. 오빠가 좀 그래요.”

그녀는 작게 킥킥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좋아져 있었다.

“에믈린 씨. 그렇게 걱정되는 거라면, 요한 씨에게 욘두 쌤을 자르라고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아니요. 조쉬도 욘두 쌤을 좋아하잖아요. 그를 자르는 일을 제가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자고로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관찰하기론 조슈아는 좋고, 싫음이 분명한 아이였다.

그런 조슈아는 욘두를 제법 잘 따르는 듯했다.

욘두가 나쁜 마음을 가지고선 조슈아를 몰래 괴롭혔다면, 아이는 진즉 요한이나 내게 그


사실을 알렸을 것이다.

‘엄마, 아빠! 욘두 선생님이 조슈아를 괴롭혔어! 그래서 조슈아는 엄청 화가 났어.’

……조슈아는 그러고도 남을 아이였다.

하지만 아이가 욘두를 논하며 인상을 찌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해, 욘두가 가르쳐 준
희한한 말들을 아주 믿고 있는 눈치였다.

욘두는 최소한 조슈아를 괴롭히지는 않았으리라.

나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리나 언니. 한 가지만 더 욕심을 부려 봐도 될까요?”

에믈린은 제 바람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네, 물론이죠. 제가 들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기꺼이 들어 드릴게요.”

“욘두 쌤의 오래된 연인이 누구인지, 저와 함께 알아내요.”

“네?”

“공작저에 온 김에 이번에는 꼭 알아내겠어요. 왠지 언니랑 함께라면 알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에요.”

에믈린은 내게 손을 뻗었다.

“어때요? 언니도 궁금하지 않나요?”

마침 나도 욘두의 오래된 연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려던 참이기는 한데.

에믈린은 제 손을 왜 잡지 않느냐는 듯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고개를 까딱거리는 모습이 요한과 제법 닮아 보이기도 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남매라는 건가.

내 마음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한없이 주저했다. 하나 내 본능은 그렇지 않았다.

내 손은 내 의지를 벗어난 듯 이미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앞으로 뻗어진 내 손은 이윽고 에믈린의 부드러운 손바닥과 맞닿았다.


그녀는 내 손이 닿기가 무섭게 꽉 깍지를 꼈다. 이젠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처럼. 이젠
절대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처럼.

“잘 선택하셨어요. 제게 다 생각이 있답니다.”

그녀는 이번에도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엔 부자연스러움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아주


음흉한 기운만이 느껴졌을 따름이었다.

“그 생각이 뭔데요?”

“오늘 욘두 쌤을 미행해 봐요.”

“……컥!”

좋은 생각이란 게 미행이라니.

어쩐지 허술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물론 이것도 요한 오빠에게는 비밀이에요.”

쉿. 에믈린은 내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손의 검지를 제 입술 위에 올렸다.

* * *

에믈린은 제법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계획을 세운 듯했다.

그녀는 일단 조슈아의 수업이 끝났을 욘두에게 함께 찾아가자고 했다. 욘두에게 그의 동선을


슬쩍 떠볼 목적이었다.

그러고선 자연스럽게 그를 뒤따르자고 했다.

‘그런데 욘두 쌤이 오늘 제 연인을 만나지 않는다면 어떡하죠? 그럼 저희가 미행을 할


필요성이 없어지는 거잖아요.’

내가 그렇게 묻자, 에믈린이 예쁘게 미소를 지으며 답하더라.

‘그럼 어쩔 수 없는 거죠. 하지만 일단은 욘두 쌤에게 뭐할 건지 물어봐요! 실은…… 그를


미행하고 싶다고 매번 생각했는데, 혼자 할 용기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때마침 제 눈앞에 리나
언니가 나타난 거죠.’

나는 그녀를 따라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뒤를 생각하지 않은 에믈린이 귀여웠기 때문이다.


어제 좋지 않게 싸운 우리가, 오늘은 같은 일을 정열적으로 도모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다소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고 하던데, 그 말이 제격인 듯싶다.

에믈린과 이렇게나 결속력이 좋아질 줄 어제의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욘두 쌤. 저랑 리나 언니가 들어가도 되죠?”

에믈린은 시녀의 도움 없이 직접 방문을 청했다.

이 방은 내가 한 번도 가지 못한 방으로서, 에믈린의 말에 따르자면 요한이 욘두에게 내어 준


방이라고 했다.

“네, 들어오십시오.”

안쪽에선 사려 깊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에믈린은 단번에 문을 열었다.

우리는 그렇게 욘두의 방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안쪽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처음 보인 이는 욘두였다. 그는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킨 채로 우리를


맞이했다.

“두 분.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제가 공작저를 떠났으면 어쩌시려고…….”

그는 우리의 방문을 의아해하는 듯했다. 에믈린은 살갑게 대답을 했다.

“하지만 아직 안 떠나고 있었잖아요!”

나는 거기서 극명한 온도 차를 느꼈다.

우리 사이가 아무리 좋아졌다 할지라도, 나를 대하는 에믈린의 목소리와 욘두를 대하는


에믈린의 목소리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 간극이 얄밉기는커녕 사랑스럽게 느껴졌을 따름이었다.

에믈린은 그 나이 대에 알맞은 재기발랄한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랑에 한없이


충실하고, 질투가 많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우선 앉으십시오.”

욘두는 소파 쪽으로 손짓했다.

나는 욘두와 눈인사를 나눈 후에 소파 위에 앉았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조금 전까지 욘두가


본 듯한 책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차는…….”

욘두는 대접할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휑한 테이블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아, 제가 다녀올게요.”

시답지 않은 일이라서 딱히 내가 해도 상관없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에믈린이 앞장서서 나섰다.

“제가 시녀에게 말하고 올게요! 그래도 제가 이 중에서 제일 어리니까요.”

그녀는 아무래도 욘두를 보고선 기분이 좋아진 게 분명했다.

이뤄질 수 없는, 오래된 사랑을 앓고 있는 에믈린. 그녀의 밝음이 내겐 어쩐지 애달프게


느껴졌다.

욘두는 에믈린을 왜 좋아하지 않은 걸까.

에믈린은 잰걸음으로 다시금 방을 나갔다. 열렸던 문은 곧 닫히고, 방 안엔 나와 욘두만이


어색하게 남아 버렸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욘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욘두는 진즉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인지, 우리의 눈은 단번에 마주쳤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두


눈을 굽히며 미소를 지었다.

미소 짓는 욘두의 모습은 어렴풋이 요한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닮은 듯 묘하게 닮지 않은 듯한


두 남자.

“욘두 쌤.”

“네, 유모님.”

“제가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는데 물어봐도 괜찮아요?”

“물론이죠. 유모님이 그간 저를 얼마나 많이 도와주셨는데요. 제가 답해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답해 드리겠습니다.”

“요한 씨가 그랬어요. 당신은 유능한 마법사라고.”

“하하하. 제 스스로 인정하기는 뭣하지만, 실력이 꽤 나쁘지 않은 편이죠.”

“그럼 혹시…….”

지금 그에게 ‘이런 것’을 물어보는 게 옳은 일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겐 지금 당장 그것에 대해서 물음을 건네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나는 어젯밤 든


의아함을 풀어내고 싶었다.

내가 충동적인 여자라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임이 분명했다.

나는 드레스를 꽉 쥔 채로 그에게 물음을 건네었다.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어요?”


 

제 70 화. 버릇이…… 똑같아

욘두는 내가 한 말을 앵무새처럼 몇 차례 따라 내뱉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냐, 라…….”

사색에 잠긴 그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 보였다. 그는 내 물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만 같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짓고 있던 미소가 싹 가신 욘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결이 좋아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 동그란 안경 사이로 내비친 검은 눈동자. 테이블 어딘가로


시선을 둔 덕에 반쯤 그의 눈꺼풀은 반쯤 내리깔려 있었다.

역시나 요한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내 시선은 천천히 내려가며 이윽고 어느 부분에서 멈춰 섰다.

욘두는 버릇처럼 검지의 손톱 끝으로 자신의 엄지손톱 위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눌렀던지, 살갗이 벌겋게 변해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내게 있어 익숙한 ‘누군가의 버릇’이었다.

나는 이번엔 자연스럽게 바비를 떠올렸다.

바비는 자신의 손톱 위가 피가 날 정도로 짓누르는 버릇이 있었는데, 무언가가 제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버릇이…… 똑같아.

물론 손톱을 누르는 버릇을 가진 사람이 더 존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욘두와 바비가 같은 버릇이 있다는 사실은 왠지 묘하게 다가왔다.

욘두는 요한과는 어렴풋이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고, 바비와는 같은 버릇을 가지고 있다라.

세 남자. 꼭 형제 같아.
이건 마치 세 사람이 형제임을 암시하는 것만 같잖아.

요한은 랭카스터 가 가주의 방탕함을 내게 숨기지 않았다. 어디 숨겨 놓은 자식이 없는 게 더


이상할 따름이라고 한탄을 했었단 말이다.

설마 요한이 말한 ‘숨겨진 자식’에 욘두도 속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깊어지던 순간, 욘두의 입술이 천천히 떼어지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할 수 없습니다. 마법사가 인간의 생사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런 것에 마법사들이 개입하게 된다면, 세상은 혼란스러워질 테니까요.”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욘두는 제 손톱을 짓누르는 짓을 그만두었다. 하나 나는 그의 손에


닿았던 시선을 쉬이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내 대꾸는 뒤늦게 흘러나왔다.

“네, 그럴 것 같아요. 죽는다는 것의 의미가 사라질지도 모르죠.”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다면, 너도 나도 죽었다 다시 살아나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물음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 그건 말이죠.”

……사실 거기까진 생각 못 했는데 말이지. 흠.

나는 시선을 들어 올려 욘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제가 언제 심각한 표정을 지었느냐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물음에 대한 이유보다도, 나는 그에게 다른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욘두 쌤. 당신……. 랭카스터 가의 숨겨진 자식인 거야?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입안에 연신 맴돌았다.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린 것은 그때였다.

“리나 언니! 욘두 쌤! 많이 기다렸죠?”

아주 좋은 타이밍에 등장한 에믈린이었다.

그녀는 찻잔을 든 어느 시녀 하나를 대동한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수다스러운 말은 덤이었다.

“시녀에게 차를 내와 달라고 말하는 김에 저도 직접 주방에 다녀왔어요. 공작저에 무슨 차가


있나 구경을 한번 해 볼까 하고.”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두 분. 저 빼고 무슨 얘기를 나누고 계셨어요?”


“별 얘기 안 나눴어요.”

나는 머쓱하게 웃고선 욘두 쪽을 응시했다.

욘두는 내가 다소 의아한 질문을 했던 것을 티 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내 말에 동조를 해


주었을 뿐이다.

“네. 에믈린 님이 왜 이렇게 오지 않는 걸까—, 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내가 곤란해하는 것을 눈치채고 유려하게 말을 돌려 준 느낌이랄까.

“어머나. 제가 빨리 다녀올 걸 그랬나 봐요. 욘두 쌤이 그렇게나 저를 그리워하다니.”

“하하. 제가 그리워한 것까지는 아닌데…….”

욘두는 이번엔 아주 눈치 없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면 그는 조금 전엔 나를 위해서 아주 눈치 빠른 행동을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에믈린은 욘두의 솔직한 답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욘두 쌤은 오늘 오후에 뭘 하세요?”

“아, 오늘은 마법사들의 학회에 초대되어 그곳에 다녀올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에믈린은 잠깐 틈을 두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내 팔에 팔짱을 끼고선 말했다.

“저희도 오늘 상가에 가기로 했는데, 욘두 쌤이랑 같이 나가면 되겠어요!”

없던 일정이 새로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이런 식으로 욘두와 함께 나갈 구실을 만들겠다 이거지?

나는 에믈린을 내려다보았다.

내 팔에 제 몸을 잔뜩 기댄 그녀의 얼굴엔 한 점의 부자연스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대단히 타고난 연기자 같았다.

“오! 벌써 그 정도로 친해지신 겁니까?”

욘두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네, 제가 리나 언니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했거든요. 그쵸, 언니?”

나는 멋쩍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맞아요. 하하하.”

마법사 학회에 간다는 욘두를 미행할 필요성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은
에믈린이 하는 대로 따라 보자 싶었다.

그녀에게 무언가의 비책이 있는 거겠지.

……라는 생각을, 나는 단 십오 분 만에 철회했다.

대로까지 함께 타고 나가기로 한 마차 안. 잠깐 잊고 온 무언가를 가지러 간 욘두가 사라진


마차 속엔 에믈린과 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에믈린은 아주 당당하게 자신의 포부를 표명했다.

“욘두 쌤이 오늘 마법 학회에 간다고 했으니까, 저흰 욘두 쌤의 집에 가 봐요.”

비책이란 게 하나도 없는 듯한 말이잖아!

그녀는 그때그때 봐서 계획을 우회한 것처럼 보였다.

“컥! 그럼 미행이 아니라, 욘두 쌤 집을 털자는 거예요?”

“집을 털자뇨! 그런 못생긴 말 말고, 저희 예쁜 말로 고쳐서 말해요. 욘두 쌤의 집을


탐방한다……쯤은 어떨까요? 비록 몰래이기는 하지만요. 후후.”

아서라. 이 막무가내 아가씨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나는 이마를 짚었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오는 이유는 왜일까.

“그래도 될까요?”

“잘못된다면 제가 다 책임질게요. 그러니까 리나 언니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의 집 안엔


그의 연인에 대한 무언가가 있을 것임이 분명해요. 우리는 그의 연인에 대한 단서가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하고 빠르게 나가는 거예요.”

그녀가 책임지겠다니까, 나도 마음이 조금 끌리는데 말이지.

“그의 집 열쇠는요?”

에믈린은 씩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얼굴에 새겨진 사악한 미소였다. 나는 그렇게 단언할 수 있었다.

“욘두 쌤은 무언가를 잘 잊어버리는 사람이거든요. 글쎄, 저번엔 제 집의 열쇠를 공작저에


두고 간 거예요. 그걸 욘두 쌤한테 돌려줬냐고요? 아뇨. 제가 날름 주워서 숨겼답니다.”

“그래서요?”
“당연히 돌려주지 않은 채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죠.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그때부터
예상했다고나 할까요.”

“…….”

“걱정 마세요. 이 열쇠로 나쁜 짓을 하려는 건 아니니까요.”

“오늘 하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니에요?”

“오늘만 예외로. 하하하.”

그녀는 꼭 어느 연회장에 가는 것처럼 굴었다. 타인의 집을 몰래 수색하는 일과는 다소


괴리감이 있는 들뜸이었다.

희한하게도 그녀를 말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 또한 그녀의 제안에 구미가 상당히


당겼던 것이다.

욘두의 집은 세나의 일기장이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 안쪽엔 더 대단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이를테면 사라진 세나의 시신이라든지…….

설마하니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했지만, 내겐 치명적인 직감이 들었다.

욘두의 집에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아. 아마도 나와 요한에게 중요한 무언가가.

그사이, 놓고 온 무언가를 가지러 공작저로 갔던 욘두가 돌아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제가 요즘 들어 더욱 깜빡하는 것 같군요.”

에믈린은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어머, 괜찮아요. 욘두 쌤은 저만 잊지 않으면 되니까.”

“하하하. 에믈린 님. 제가 어떻게 에믈린 님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설, 설마 이제 제 마음을 받아 주시는 건가요?”

“하하하. 저는 공작저의 계신 모두를 잊지 않을 겁니다.”

“……피, 너무해. 또 그런 식으로 대답을 회피하시네.”

욘두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그는 바보처럼 굴었던 주제에 제법 능숙하게 에믈린의 말을 되받아치고 있었다. 마치 에믈린의


들이댐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마차는 곧 출발했다.

나는 마차의 창문을 통해 멀어지는 공작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공작저를 보자 떠오른 것은


요한과 조슈아였다.

물론 갑작스러운 외출을 요한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요한은 내가 어디를 가는지 제게 꼭꼭 보고하라는 말을 수어 번 했었다. 금방 다녀올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나왔다.

나는 그의 집무실 책상 위에 급하게 남겨둔 메시지를 떠올렸다.

⌜에믈린 씨와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금방 다녀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사실 요한의 얼굴을 보고 얘기하려고 했었다. 하나 그는 때마침 공작저에 방문한 손님과


응접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그에게 급한 메시지를 남기고 온 터였다. 메시지뿐만이


아니라 벨라에게도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쯤이면 요한이 내게 화를 내지는 않겠지.

그리고 조슈아는 낮잠을 곤히 자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 *

욘두의 뒤를 따르는 일은 생각보다 매우 쉬운 일이었다.

왜냐면 그는 패션 테러범이었기 때문이다.

구김이라곤 조금도 없는 각이 선 흰 바지, 그가 자주 애용하는 파란빛의 셔츠, 그리고


날파리가 미끄러질 법한 반짝이는 흰 구두…….

꽤 그럴싸한 체격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질타를 받았을 법한 옷차림이었다.

물론 내가 옷차림으로 사람을 판단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가 입은


옷은 정말 난해해서 눈에 아주 잘 띄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대로를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을 요리조리 피하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우리는 욘두와 꽤
거리를 벌린 채로 그의 뒤를 조용히 따르기 시작했다.
그의 집을 털러……, 아니, 탐방하러 가는데 왜 그의 뒤를 따르느냐고 묻는다면, 그 이유는
단순했다.

가는 방향이 같았으니까.

욘두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집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꼭 자신의 집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처럼.

에믈린과 나는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욘두 쌤. 왜 자신의 집 방향으로 가는 거죠?”

에믈린의 물음에 나는 대꾸를 해 주었다.

“글쎄요. 집에도 무언가를 놓고 온 게 아닐까요?”

“아하. 그럴 수도 있겠어요.”

건망증이 심한 욘두. 그는 이번에도 제집에 두고 온 무언가를 가지러 가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집에 두고 온 무언가를 잠깐 보러 가는 건 아닐까?

이를테면 역시나 사라진 세나의 시신이라든지…….

한 번 시작된 의심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욘두가 사라진 세나의 시신과 상관있을 거라는 추측을 하기 무섭게 나는 그의 모든 행동을


그쪽과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된 것이다.

욘두의 걸음이 멈출 때까지 우리의 미행은 끝나지 않았고, 그에게 들키지도 않았다.

우리는 어느 저택 뒤에 몸을 숨긴 채로 잠깐 걸음을 멈춘 욘두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마법 학회가 열리는 곳이 아니라, 내가 아는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그곳은 놀랍게도 우리가 목표 지점으로 잡았던 욘두의 집이었다.

“…….”

우리는 대화 없이 욘두의 다음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는 익숙하게 현관까지 통하는 계단을


올라가서 현관문을 열었다.

“리나 언니.”

“네.”

“욘두 쌤…….”

진지한 목소를 한 에믈린이 이어 말했다.

“옷을 갈아입으러 간 걸까요?”


“풉.”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에믈린 씨가 보기에도 욘두 쌤의 패션이 심각했던 거죠?”

“……적어도 흰 구두는 바꿔 신고 가는 게 아닐까, 하고……하하.”

에믈린은 어색하게 웃었다. 저가 내뱉고도 제 말이 우스웠나 보다.

그 순간 새삼 통감했다.

욘두를 사랑함에도 그의 흰 구두가 최악으로 보일 수도 있구나.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저흰 이제 어떡하죠?”

“어떡하긴요! 일단은 욘두 쌤이 다시 나오기를 기다려 봐요. 여기까지 왔는데 공작저로 그냥


돌아가기는 아쉽잖아요?”

에믈린은 또다시 유혹의 기미가 가득한 말을 내게 던졌다.

그리고 나는 참을 수 없는 구미를 느끼고야 말았다.

“좋아요.”

이 미행. 정말로 괜찮은 걸까?

* * *

집으로 들어온 욘두는 나갈 때 걷어 두었던 커튼을 치기 시작했다.

그는 집 안 창문의 커튼이란 커튼은 모두 완벽하게 친 뒤에 작게 숨을 돌렸다.

사실 커튼을 치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지만, 그는 그럼에도 자신의 모습을 아무도 보지


말았으면 했다.

욘두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소파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고선 제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휴.”

내뱉는 숨에선 시름이 가득했다.

조금만 더 연구를 한다면, 지난 4 년간 연구하던 것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건만…….


원하는 바가 얻어질 듯 얻어지지 않을 듯, 욘두의 연구는 처음으로 큰 난관에 부딪혀 있었다.

욘두는 꽤 굳은 얼굴로 어느 방 안에 들어갔다.

그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마법적 장치가 더해진 방으로, 욘두에게 허락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느껴진 것은 냄새였다. 냄새의 정체는 코끝이 아릿할 정도의


강렬한 장미향이었다.

욘두는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오를 정도로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어제보다 짙어진 장미향은 어쩐지 그의 기분을 고양시켜 주는 것만 같았다.

“오늘 유모님이 묻더군요.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느냐고.”

그는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대답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방 안엔 다른 가구는 없었다. 혼자 쓰기엔 적잖이 큰 침대 하나가 우두커니 존재했을 뿐이다.

욘두는 침대 맡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침대에 가까워질수록 장미향은 더욱 짙어졌다.

어느새 걸음을 멈춘 그는, 침대 위에 흩뿌려진 수어 개의 장미들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시들지 않는 붉은 장미였다.

제일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영원히 시들지 않는 마법을 걸어 둔 장미.

지난날, 욘두가 리나에게 준 장미와 같은 것이었다.

하얀 시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이 드리운 장미들 사이엔 어느 여자 하나가 누워 있었다.


그 여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였다.

욘두는 자세를 낮추어 창백한 여자의 뺨을 쓸어 주었다.

“나의 연인. 오늘도 좋은 꿈을 꾸고 계신가요.”

잠든 듯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여자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무겁게 드리운 침묵 속에서 욘두는 미소를 지었다.

제 71 화. 희미하지만 확실한 꽃향기

욘두는 의외로 곧바로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나서는 욘두의 모습이 보였을 때, 에믈린과 나는 동시에 어느 한곳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곳은 바로 그의 발 부근이었다.

애석하게도 그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흰 빛 구두는 갈아 신지 않은 채였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이유로 집에 들른 거야?

나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다가가 구두를 갈아 신는 건 어떨지 제안하고 싶었다. 그것은 아주


소모적인 생각이었다.

욘두는 현관과 이어진 대로를 내려와 대로 위를 쭉 걸어갔다. 우리가 숨어 있었던 건물과는


반대쪽에 위치한 대로였다. 그것은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이었다.

우리는 욘두의 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그저 숨을 죽인 채로 욘두가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그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리나 언니. 이제 안으로 들어가 봐요. 저희에게 기회가 왔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에믈린의 에너지에 전염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이상한 미행과 욘두의 집을 몰래 탐방하는 일이 그다지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고나 할까.


도리어 기회가 왔음에 기쁜 마음이 들었다면.

우리는 욘두의 집 현관 앞까지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에믈린은 작은 손가방 속에 넣어둔 열쇠를 꺼냈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자, 현관문은 큰


어려움 없이 스르륵 열렸다.

문이 열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입 안이 바짝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덮쳐 와, 나는 심호흡까지 내뱉었다.

집 안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제일 처음 느낀 것은 무언가의 냄새였다.

희미하지만 그 존재감이 확실한 냄새. 그 냄새의 정체는 내가 익히 아는 것이었다.

“꽃향기…….”

웬 꽃향기인가 싶었다. 집 안 어딘가에 화분이라도 있는 걸까.

에믈린과 나는 집 안을 꼼꼼히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은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


욘두가 실제로 마법 학회에 간 것인지 정확하지 않았거니와 그가 다른 이유로 다시 돌아올
가능성도 다분했으니까.

꽤 넓은 거실에서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벽 한 쪽을 거의 다 차지한 커다란 책장이었다.

책장엔 다양한 책이 꽂혀 있었는데, 튀어나오거나 흐트러진 책은 하나도 없었다.

정갈하게 잘 정돈된 책장이었다. 허술하게 무언가를 놓고 다니던 그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깔끔함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책장에 꽂힌 책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의심이 가는 책은 몇 개 뽑아서 그 안을 살펴보기도 했지만, 영양가 있는 정보가 적힌 책은


없었다.

그러니까, 나와 에믈린이 원했던 ‘욘두의 오래된 연인’과 관련된 내용의 것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주방, 욕실, 그리고 잠기지 않은 다른 방을 살펴보기도 했다.

무릇 오래된 연인이 있다면, 그 흔적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령 모양이 같은 식기가 세트로 있다든지, 여성용 세면도구가 있다든지…….

나는 본래의 정갈함을 흐트러뜨리지 않을 정도로만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흔적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집에서 식사를 하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식기의 수는 거의 없었고, 여자의 흔적은 일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깨끗하고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을 뿐이었다.

욘두는 제집에 연인을 데리고 오는 것을 싫어하는 건가.

이상한 점은 하나 더 존재했다. 희미하지만 확실한 꽃 냄새의 출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화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꽃 냄새를 낼 수 있는 향초도 보이지 않았다.

냄새는 맡아지지만, 꽃에 비등할 무언가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라.

나는 마지막으로 어느 방문을 열려고 했다.

“…….”

하나 그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것은 욘두의 집 속, 유일하게 잠긴 곳이었다.


유일하게 잠긴 방문은 괜스레 이상한 의심이 서리게 만들었다.

이 안에 아주 비밀스럽고 은밀한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리나 언니. 거긴 제가 아까도 열어 보려고 했는데, 열리지 않더라고요.”

에믈린은 어느새 내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래요? 이곳에 뭔가가 있는 걸까요?”

“다른 방과는 다르게 문이 잠겨 있으니, 무언가의 비밀이 존재할 수도 있겠죠.”

그곳에 욘두 쌤 연인의 흔적들이 모두 모아져 있을지도 몰라요. 에믈린은 한마디를 덧대었다.

“언니. 일단은 나가요. 잠긴 이곳을 제외하고 살펴볼 곳은 전부 살펴보았으니까요.”

에믈린은 어느 연회장에라도 오는 양 미행을 즐겼었다. 하나 지금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초조해 보였다.

즐거운 척을 했지만, 그녀 또한 내심 이러한 일을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듯했다.

그녀는 메마른 제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잠입을 욘두에게 들켜 구태여 일을 크게 만들 심산은 없었다.

열리지 않는 문 안을 살피지 못한 것이 아주 아쉽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문을 부술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막 뒤돌아서려던 때였다. 나는 내 발치에 무언가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발치에 걸린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장미 꽃잎이다.”

그것은 한 장의 붉은 꽃잎이었다.

발치를 조금 더 살펴보았지만, 떨어져 있는 것은 꽃잎 한 장이 다였다.

꽃송이도, 분재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손바닥에 올려둔 꽃잎을 몇 초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손바닥을 들어 올려 그


냄새를 맡아 보았다.

 
꽃잎에선 내가 맡았던 꽃향기와 같은 향이 맡아졌다. 하지만 이 작은 꽃잎 하나가 낸 냄새라고
하기엔, 내가 맡은 향은 제법 존재감이 확실했다.
꽃잎 한 장으로 인해서 맡은 냄새가 결단코 아니었다는 거다.

그렇다면 꽃잎이라든지 꽃송이라든지, 더한 무언가가 어딘가에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건데.

나는 고개를 뒤로 조금 돌렸다. 그러자 꽉 닫힌 방문이 보였다.

이 속엔 흐드러진 장미꽃들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서 방문을 꼭 잠가 두었지만, 냄새는 차마 그 흔적을 지우지 못한 게


아닐까.

문틈 사이로 새어나온 꽃향기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리나 언니! 뭐해요? 얼른 나가자니까요.”

앞서 간 에믈린이 나를 재촉했다. 나는 꽃잎 한 장을 손바닥에 꼭 쥔 채로 욘두의 집을 나섰다.

그의 집을 나섰을 땐, 해는 거의 다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어제보다도 짧아진 해를 보며


생각했다.

잠에서 깬 조슈아가 나를 찾고 있으려나.

요한이 내 걱정을 하고 있으려나.

두고 온 것들이 제법 그리워졌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을 그리워하자, 공작저로 얼른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그러자 내게도


돌아갈 곳이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기억을 잃은 채 방랑한 생활을 한 5 년간, 처음으로 느낀 오묘한 기분이었다.

잡화점에 머물 적에는 이런 기분은 느끼지 못했었는데.

정차해 두었던 마차로 향하는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나는 두고 온 것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그리워지기 전에 공작저로 돌아가고 싶었다.

* * *

나는 에믈린과 함께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우리가 자리에 앉아 마차가 출발했을 때, 에믈린은 내게 물음을 건네었다.

“언니는 욘두 쌤의 오래된 연인에 대한 단서를 찾았어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찾은 것 중 제일 인상 깊은 것은 장미 꽃잎 한 장뿐이었다.

욘두의 집에서 그의 오래된 연인에 대한 흔적은 하나도 찾지 못한 터였다.

오래된 연인이란 게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정말로 아무 자취도 없더라.

그것은 에믈린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죠? 정확한 연애 기간은


모르겠지만, 그에게 연인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무려 4 년 전이었어요. 그럼 최소 4
년 이상은 만났다는 건데. 그럼에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니…….”

에믈린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바라본 그녀의 얼굴엔 실망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실망감에 동감을 하다, 불현듯이 그녀가 남긴 말 중 어느 한 부분이 걸렸다.

‘그에게 연인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무려 4 년 전이었어요.’

4 년. 지금으로부터 4 년 전이면, 세나가 죽었던 그해였다.

“에믈린 씨. 혹시 욘두 쌤이 공작저에 들어온 게 언제인지 물어도 될까요?”

“아마 5 년 전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땐 조슈아가 막 태어난 해가 아닌가요? 아주 어린 아이에게도 가정교사가 필요했던


거예요?”

이번엔 에믈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욘두 쌤이 공작저에 처음 들어오게 된 계기는, 세나 언니의 병을 치료해 주기


위함이었어요.”

“아…….”

그것은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에믈린의 설명은 이어졌다.

“원인 모를 병에 걸려 끙끙 앓게 된 세나 언니를 위해서 오빠는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했었거든요. 제국 내의 유능한 의사, 서역의 의사, 몸에 좋다는 약재, 심지어 마법사인
욘두 쌤까지도.”

“…….”

“하지만 그 누구도 세나 언니의 병을 고칠 수는 없었어요.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앓아 온


불치병 같았답니다.”

에믈린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선 나를 바라보았다.


“불치병이라……. 세나 언니와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해요. 저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커 온 언니는 무척이나 건강했거든요.”

“그렇군요.”

“아무튼 세나 언니의 병을 고쳐 주기 위해 이따금 공작저로 오던 욘두 쌤은 자연스럽게 조쉬의


가정교사가 되었어요.”

“…….”

“그는 누가 봐도 유능했고, 요한 오빠도 그 점을 인정해 주었고……. 그리고.”

그녀는 한 템포 쉰 후에 제 말을 이어했다.

“세나 언니도 욘두 쌤을 조쉬의 가정교사로 적극 추천했어요.”

아팠던 세나는 욘두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걸까?

그것은 욘두의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존재했기 때문일까.

과거를 일러 주던 에믈린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아~ 수확은 없었지만 엄청 피곤하네요. 리나 언니. 저 잠깐 눈을 감고 있어도 될까요?”

“그럼요. 주무셔도 돼요. 도착하면 깨워 드릴게요.”

“고마워요.”

에믈린은 마차 시트에 몸을 완전히 기대고선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은 그녀는 꽤 피곤해


보였다.

피곤한 것은 에믈린만이 아니었다.

나는 늘어지는 하품을 하고선 마차 시트에 머리를 기대었다. 잠에 들고자 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잠시 눈을 감고 있을 요량이었다.

눈을 감자마자 뱃속에선 작은 울림이 느껴졌다. 찌르르 떨리는 뱃속 진동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였다.

아, 배고파.

공작저에 돌아가서 일단은 밥부터 먹어야지. 뭘 먹어야 맛있게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행복한 생각을 하던 그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물론 배가 고파서 느낀 두통은 아니었다.


이 고통은 내게 있어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잊힌 과거가 떠오를 때마다 불쑥 솟아오르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무언가가 떠오르려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고통은 제 세기를 더해 갔다. 이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지자, 나는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 순간 내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요한의 정원엔 예쁜 꽃들이 엄청 많아. 너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

‘요한에게 부탁을 해 볼까? 한 송이를 달라고? 너는 어떤 꽃이 갖고 싶어?’

‘……장미. 나는 붉은 장미가 좋아.’

뜨문뜨문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앳된 목소리를 가진 두 여자아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고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머리통이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이었다. 나는 몸을


웅크리면서도 그녀들의 대화에 최대한 집중했다.

내가 잊은 과거가 무엇인지, 나는 알고 싶었으니까.

‘장미. 좋아. 요한에게 꼭 얻어 올게.’

‘구질구질해. 빌빌 거리며 얻어 올 바엔 차라리 가져오지 마.’

‘또, 또. 나쁜 소리 한다. 그런 소리 하지 마. 난…… 네가 그런 소리를 할 때면 마음이 너무


아파.’

‘네 마음이 아프라고 한 소리거든?’

요한의 정원에서 장미를 구해 오겠다고 한 여자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모가 난 말을


내뱉던 여자아이는 침묵했다.

머릿속에 공명하는 것인지, 귓전에 맴도는 것일지 모를 대화 소리는 그것이 끝이었다.

장미를 좋아했던 너.

나의 불행을 바랐던 너.

그리고 마법으로 시들지 않는 장미를 만들었던 욘두.

나는 잇따른 여러 말들을 자연스레 줄줄이 떠올렸다.

“……언니, 리나 언니! 괜찮아요?”


나는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던 인상을 펴며 감았던 눈도 떴다. 그러자 언제 눈을 떴을지 모를
에믈린이 나를 걱정스럽게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메마른 숨을 토해 냈다.

“네, 괜……휴. 괜찮아요.”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얼마나 놀란 줄 몰라요.”

“…….”

“악몽이라도 꾼 거예요?”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좋겠어요.

잊힌 과거엔 소중한 추억이 당연히 많겠지만, 그와 반대되는 괴로운 추억도 있으리라 여겨졌다.

조금 전 떠오른 기억은 제일 괴로웠던 일의 초석이 되는 대화가 아니었을까.

“그런 것 같아요.”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고생해서 그런가 봐요.”

그녀는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는 말을 거듭 해 주었다.

왜냐면 환청이 사라진 직후부터 정말로 괜찮아졌기 때문이다.

“마침 공작저에 도착했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어요.”

“네? 벌써 다 왔다고요?”

“그럼요. 저보고 자고 있으라고 해 놓고, 정작 언니가 자고 있어서 얼마나 놀란 줄 몰라요.”

아주 잠깐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시간이 꽤나 흐른 듯했다.

깨달았을 땐, 마차의 움직임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 정말로 공작저에 도착한 거구나.

나는 문득 시선을 끌어내렸다.

내 시선이 닿은 곳은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펴지지 않은 꽉 쥐어진 손이었다.

나는 꽉 쥔 손을 천천히 펴 보았다. 손바닥 위에는 욘두의 집에서 가져온 꽃잎 한 장이 여전히


존재했다.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리나!”

허겁지겁 마차의 문을 연 이는 요한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요한 오빠?”

“……요한 씨?”

요한의 검은 눈동자는 오로지 내게만 향해 있었다. 그는 에믈린 쪽은 전혀 바라보지 않은


채였다.

마주한 그의 얼굴이 아주 급박해 보였다. 내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목소리도 아주 초조했던 것


같다.

요한은 뛰어온 것인지 고르지 못한 숨을 연신 내뱉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리나.”

“네?”

그는 의미심장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네가…… 봐야 할 것이 있어.”

제 72 화. 필체의 주인

“……작님. 공작님?”

요한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늦게 대답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잠깐 딴생각에 빠졌군요.”

그동안 스스로를 갉아먹을 정도로 일을 해 왔다는 사실이 무색했다. 그는 요 며칠간


공작이라는 직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공적인 일을 하던 도중, 쓸데없이 머릿속이 복잡해져 일순 멍해지는 순간이 잦아진 것이다.

요한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한 장본인은 바로 리나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리나의


정체라고 해야 할까.

그녀에 대한 풀리지 않은 많은 의문들이 요한의 머릿속을 옥죄고 있었다.

그것들은 오늘따라 요한의 정신을 더욱 어지럽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것은 어떤 징조인 것인가.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인가.

요한은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흩어졌던 정신이 재정비하려고 했다. 손바닥에는 기분 나쁜


땀이 조금 배어 있었다.

“괜찮습니다. 요즘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안색이 좋지 않군요.”

같은 사업을 함께 추진 중인 후작이 제게 말을 건네었다. 요한은 호흡을 가볍게 내뱉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럼 하던 얘기를 마저 하시죠.”

그렇게 잠깐 끊겼던 대화는 다시금 이어졌다.

요한은 후작의 말에 집중을 하려고 했다. 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제 머릿속, 리나의 존재감은
커져 갔다.

머릿속 한편을 차지하던 그녀에 대한 생각은 이윽고 그의 머릿속을 온통 지배해 버렸다. 결국


요한은 후작과의 대화에 완전히 몰두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대화를 끝낸 후작이 응접실을 나섰고, 요한은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조슈아가 있는 곳도, 제 방도 아니었다.

요한은 주방으로 향했다. 그는 시녀를 부를 시간조차 아까워 직접 주방으로 가, 어느 시녀가


타 준 차 두 잔을 쥐어 잡았다.

그것은 요즘 통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는 리나를 위한 특제 차였다. 정신을 자주 잃는 그녀를


위해서 예전부터 준비해 주던 차.

간혹 부딪히는 사용인들은 차를 쥔 채로 복도를 거니는 제 모습을 보며 흠칫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팔불출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는 도리어 제 어깨를 활짝 폈을 따름이었다. 그러자 왠지 모르게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적이 예전에도 존재했던 것 같다.

요한은 곧 과거의 기억을 상기해 냈다. 떠올려 보니, 세나를 위한 것들을 손수 내어 갔던 적이


제법 많았다.

세나를 위해서 하던 일들이 리나를 위한 것으로 이어졌다, 라.

세나가 아닌 리나를 위한 일을 할 때마다 요한은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곤 했었다.


사랑하는 세나를 두고 또 다른 여자를 위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굴었다.

하나 지금 이 순간엔 죄책감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마치 정말로 세나를 놓아주었다는 것처럼.

지금 요한의 바람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얼른 리나의 얼굴을 보고 싶다. 그녀와 마주 보고선


대화를 나누고 싶다.

조금 더 바라자면, 요한은 리나의 손을 잡고 싶기도 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

바람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요한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휴. 심호흡. 심호흡.”

요한은 바보처럼 혼잣말을 했다.

 
그사이, 그의 발걸음은 그가 목표했던 곳에 도달해 있었다. 요한은 걷던 걸음을 멈추며,
입술을 떼어 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바로 리나의 방이었다.

“……리나. 안에 있나?”

요한은 그답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두어 번 정도 더 리나의 이름을 부른 뒤에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두어 번 정도 이름을 더 부른 이유는 그녀에게 ‘밥맛’이라는 말을 더는 듣지 않기


위함이었다고.

“안에……없나?”

요한은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에 방 안을 둘러보았다. 몹시도 보고 싶었던


그녀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고작 몇 시간 헤어져 있었을 뿐인데, 왜 이리도 보고 싶은 걸까.

요한은 또다시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조금 전, 기분 나쁘게 스며 있던 땀은 제 손바닥 위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자 리나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불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리나가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이전에도 몇 차례 존재했었다.

그럴 때마다 요한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기분을 수어 번 느끼곤 했었다. 끝이 없는, 아주


깊은 나락에 떨어지는 듯한 기분.

그래서 그는 며칠 전에 리나에게 확답까지 들은 터였다.

‘그럼 당신이 가라고 할 때까지는 떠나지 않을게요.’

리나는 제가 가라고 할 때까지는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요한은 그날 들었던
리나의 다짐을 되뇌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추락하는 듯한 아찔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메말라 버린 입술을 혀끝으로 핥아 냈다.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리나를 찾아야겠어.

요한은 주인 없는 리나의 방을 나섰다. 그녀의 방엔 남겨진 것은 마셔 줄 이 없는 뜨거운 차가


담긴 찻잔 두 잔뿐이었다.

요한은 제 방과 조슈아의 방,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무실까지 살폈다. 제 방엔 누군가의 기척은


없었으며, 조슈아의 방엔 곤히 잠든 조슈아밖에 없었다.

그는 훨씬 더 조급해진 마음으로 집무실까지 살폈다. 물론 그곳에도 리나의 신형이 없었다.

그렇지만…….

⌜에믈린 씨와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금방 다녀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요한은 책상에 올려진 쪽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보아도 리나가 남긴 흔적이었다.

요한은 숨을 짧게 골라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던 불안함이 다소 가셔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그녀의 한마디에


위안을 받은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에믈린과 어디에 나간 거지.”

두 사람. 어제 꽤 크게 다투었지 않던가.

제가 후작을 만나고 있던 사이에 화해하기라도 한 걸까?

오늘 아침, 요한은 에믈린에게 찾아가 리나에게 사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부탁을 넌지시


건네기도 했었다.
모쪼록 두 사람이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부탁이었다.

“……그래도 이렇게나 빨리 화해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요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리나가 남긴 글귀를 여러 번 읽어 보았다.

그녀가 남긴 글귀는 짧았다. 하나 계속해서 보고 있자면 왠지 점점 더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가 묘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녀가 남긴 글귀를 다섯 번째 읽었을 무렵이었다.

“……!”

요한은 숨을 삼켰다.

익숙한 필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필체는…….”

세나의 일기장에서 보았던 필체와 왠지 모르게 닮은 것 같다.

그것은 일주일 전에 보았던 필체가 아니라, 무려 어제 보았던 필체였다. 비슷한 듯 묘하게


다른 두 가지 필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요한은 쪽지를 꽉 쥐고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곤 세나의 일기장을 성급하게 찾았다.

그것은 어젯밤 리나와 함께 필체를 확인한 후, 제 방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요한은 소파에 앉아 세나의 일기장을 펼쳐 들었다.

그는 일기장의 맨 앞 페이지를 펼쳐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뒤, 제가 가져온 쪽지를 일기장 옆에


놓아두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두 필체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몇 초가 흐른 후에 요한은 책장을 몇 장 넘겼다.

사락.

요번에 그가 펼쳐 든 일기는 여섯 번째 일기였다. 아주 미묘하게 필체가 달라진 시점.

그러곤 그는 또다시 신중하게 리나가 남긴 쪽지와 필체를 대조해 보았다.

몇 차례의 거듭된 검증 끝에 내린 결과는 요한의 마음을 완전히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렸다.

리나의 쪽지 속 필체는, 두 개의 필체 중 하나와 완전히 똑같다.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히.


요한은 소파에 몸을 완전히 기대고선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고선 지난밤, 리나의 필체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필체로 보였던 이유를 유추해 냈다.

그땐 아마도 ‘의식해서 썼기 때문’에 필체가 달라 보였던 게 아닐까 싶었다.

실제로 그녀는 기억상실이라는 치명적 결함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그 결함 덕에 5 년 동안


필체가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급하게 날려 쓴 쪽지는 그녀가 의식하지 않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적은 글귀였던


것이다.

그래서 본연의 필체가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닐까?

요한은 메마른 목소리로 리나의 이름을 불렀다.

“……리나.”

리나가 그 필체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녀의 진짜 정체는, 제가 이따금 의심했던 대로인 것인가.

어쨌든 요한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엔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함께 나눌


리나가 보고 싶다는 생각만이 계속 들었다.

요한은 앉은 몸을 일으켜 곧바로 방을 나섰다.

그녀를 꼭 찾아내야겠다.

그녀와 당장 만나 필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그러곤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넌, 결국 이 두 가지 필체 중 하나의 주인이었던 거라고.

* * *

요한이 공작저의 현관문을 나와, 정원을 막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그는 공작저의 철제 대문 사이로 들어오는 마차 하나를 발견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저 마차에 에믈린과 리나가 타고 있을 거라고, 요한은 확신했다. 이 시간에 공작저로


들어오기로 예정된 손님은 없었다.

요한은 마차가 멈추기 무섭게 마차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밥맛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제 모습을 완전히 잊을 정도로, 그는 급박했다.

문이 열리자 보인 것은 어쩐지 평소보다도 예뻐 보이는 리나였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조차도 그녀가 예뻐 보이다니. 요한은 속절없이 그녀에게 빠져든
스스로에게 잠깐 어이없어 했다.

그러다 정신을 곧 차리고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리나!”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리나의 얼굴이 제게 묻고 있었다.

요한 씨. 당신이 왜 갑자기 나타난 거예요?

* * *

“보고 싶어도 좀 참지 그랬어요. 에믈린 씨도 있는데, 얼마나 몰아붙이던지……. 얼굴이


화끈거려서 에믈린 씨도 제대로 못 보겠어요.”

나는 내 손을 꽉 잡은 요한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디선가 난데없이 나타난 요한은,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내 손을 맞잡았다.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오빠! 요, 요한 오빠!”라고 저를 부르는 에믈린을 말끔히 무시했다.


그러고 나서 나를 공작저 안으로 이끈 터였다.

평소 종종 제멋대로이기는 하나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는 아니었는데…….

나는 한 걸음정도 앞서 걸어가는 요한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야. 그것 때문에 너를 급하게 찾은 건 아니라고.”

요한은 그리 대답하며, 한마디를 덧대었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보고 싶지 않았다는 건 아닌데.”

내가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내 기분이 상했을지도 몰라.

나는 뒤늦게라도 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그가 귀여워 킥킥거렸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어.”

“그게 뭔데요?”

요한은 자못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알아냈어.”

“뭘요? 저를 향한 당신의 마음을?”

“그, 그건 이미 다 알아차렸다고. ……너를 향한 내 마음은 돌이킬 수 없어.”

그는 오늘따라 아주 진솔한 대답을 해 주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사랑스러운 입술에 입을 맞추어


주고 싶은 정도였다.

“큭큭. 저도 좋, 좋…….”

저도 당신을 좋아해요. 분명히 그런 말을 내뱉으려고 했지만, 어쩐지 입이 잘 떼어지지 않았다.

“……좋네요. 당신이 당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차려서.”

결국 흘러나온 말은 좋아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은 한 번도 해 주지 못해서, 꼭 표현해 주고 싶었는데.

낯부끄러운 말을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리나.”

“네?”

“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야.”

요한은 충분히 진지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키득거리던 것을 멈추었다.

“진짜로 뭘 알아냈는데요?”

그 순간, 잘 걷던 요한의 걸음이 멈춰 섰다. 그가 멈춘 곳은 자신의 방 앞이었다.

요한은 방문을 열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소파 앞에 놓인


동그란 테이블 앞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엔 내게 제법 익숙한 물건 두 개가 올려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나의 일기장과 내가 요한에게 남기고 간 쪽지였다.

“요한……?”

요한은 대단 대신 맞잡은 내 손을 이끌었다.

그는 소파에 나와 함께 나란히 앉은 후에야 잡고 있던 손을 놓아 주었다. 내 손바닥엔 그의


손바닥에서 묻어 나온 땀이 묻어 있었다.
평소 손에 땀 하나 없던 사람에게 웬 식은땀일까.

바라본 요한의 옆얼굴은 긴장에 잠식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요한은 테이블 위에 놓인 일기장과 쪽지를 동시에 집어 들었다. 그는 세나의 일기장을


첫 페이지를 펴고선, 책장 옆에 내가 남긴 작은 쪽지마저도 올려놓았다.

그러곤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네 필체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냈어.”

“……!”

그건 이미 확인했다가 수포가 되지 않았나요? 내 물음에 요한은 가벼운 턱짓을 했다.

“네가 직접 확인해 봐.”

나는 그의 얼굴을 보던 시선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러자 내 시야에는 세나의 첫 번째


일기와 내가 급하게 남기고 간 쪽지 속 메시지가 맺혔다.

나는 두 필체를 심도 깊게 관찰해 보았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은, 얼마 못 가 벌어진 일이었다.

“……제 필체와 세나의 첫 번째 일기장 필체가 똑같아요.”

그것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요한과의 결혼식에 마냥 행복해하던 그 일기장의 필체와 내 필체가 같다니.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내심 안도했다. 왜냐면, 내 필체가 여섯 번째 일기 속 필체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두 필체 중 하나가 내 것이라면 나는 그래도 첫 번째, 그러니까 왠지 긍정적으로 보였던 그


필체의 주인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리나.”

요한은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네가 진짜 세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제 73 화. 그 두 가지 사실 사이의 연결점

“그게 무슨……말이에요?”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요한이 남긴 말은 내가 줄곧 의심해 오던 사실이었다.

비록 기억을 잃은 내가 ‘리나’라는 이름만을 떠올렸다 할지라도. 바비는 내가 ‘리나’라며


확정지어서 말했다 할지라도.

나는 그래도 내가 ‘세나’가 아닐는지 매번 의심해 왔었다.

왜냐면 내가 세나여야만 설명되는 것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가 리나라면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절대로 오해하지 말라고 했어.”

요한은 제 말을 덧대기 전, 호흡을 기다랗게 내뱉었다.

“내가 너를 세나로 착각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거. 나는 단지 지금 벌어진 상황들을


조합한 결론을 내렸다는 거.”

“알아요. 오해 안 했고, 서운하지도 않아요.”

그것은 요한만이 생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나 또한 요한과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서운한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왜냐면 제가 누구든 당신은 이미 저를 좋아하고 있고, 조슈아도 저를 제 엄마로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내가 세나였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은 해.

내가 정말로 세나라면, 언니의 남자를 가로 챘다는…… 부정적이기만 한 죄책감은 들지 않을


테니까.

5 년 전, 내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미 죽어 대답할 수 없는 나의 또 다른 쌍둥이 자매는, 그 진실을 알고 있는 걸까?

진실을 모두 끌어안은 채로 부드러운 흙 속에 파묻혔을 나의 자매여.

나는 그녀의 사정이 몹시도 궁금해졌다.

내가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은 몇 가지 없었다. 그녀가 나를 아주 증오했다는 사실. 그리고


붉은 장미를 좋아했다는 사실.
그것은 이전 날 들은 환청에서 느낄 수 있었던 점이었다.

당시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의심했지만, 지금은 왠지 모르게 확신하고 싶었다. 그 목소리가 내


쌍둥이 자매의 목소리임이 분명하다고.

나를 향한 그녀의 증오는 어쩌면 내가 5 년 전에 겪은 끔찍한 사고로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잃은 일엔 그녀가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마냥 증오할 수 없었다.

그녀를 증오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것은 기분이라기보다는 사명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명감은 기시감이 있는 것이기도 했다.

바비의 거듭된 고백을 거절할 때마다 느꼈던 느낌과 닮아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과는 만나서는 안 될 것만 같아.’

그것이 저잣거리를 나다니던 시절에 바비의 고백을 거절한 제일 큰 이유였다.

“네가 그렇게 생각해 줘서 다행이다.”

요한은 내 허리를 조심스럽게 부여잡았다. 그러곤 여느 날 그랬듯 내 어깨 위에 제 머리를


기대었다.

나는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선, 그가 내 어깨에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주었다.

그러자 우리 사이의 거리는 좁혀졌다. 우리는 서로를 거의 안은 듯한 자세가 되었다.

“이제 뭘 더 어떡해야 하지?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겠어.”

“……요한 씨.”

“사라진 세나의 시신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실마리도 잡지 못했어.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어떠한 사실도 알아낼 수 없었어.”

“…….”

“누군가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세나의 시신을 감촉같이 가져간 것만 같아.”

세나의 시신을 가져간 장본인을 찾고, 그녀의 시신을 되찾는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이
조금 더 명확히 해결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괴로워하는 듯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현실에서 답답함을


느꼈기에.

나는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며 말했다.
“괴로워할 필요 없어요.”

괴로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사실은 없으니까.

그것은 이미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으로 사라진 뒤였다. 거기엔 요한이 잘못한 일은 없었다.

“제가 세나 씨의 쌍둥이 동생인 리나라는 게 확실시 된다면, 그땐 저를 싫어할 거예요?”

요한은 고민 없이 대꾸했다.

“아니. 그럴 일은 없어.”

나는 질문을 조금 바꾸어서, 그에게 다시 물어 보았다.

“좋아요. 그러면 제가 진짜 세나라는 게 확실시 된다면, 그땐 저를 싫어할 거예요?”

요한의 대답은 이번에도 엄청나게 빨랐다.

“당연히 아니야. 네가 진짜 세나가 맞다면, 그때 어떤 기분이 들진 잘 가늠할 수 없어.


하지만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거야.”

나는 픽 웃었다.

“그럼 됐잖아요. 제가 리나든 세나든, 요한 씨가 저를 좋아하겠다는 마음은 한결같다는


거잖아요.”

“…….”

“우리는 어떤 사실을 맞닥뜨리든 서로에 대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세워 둔


거예요.”

이제 저희에게 남은 일은 결론으로 가기 위한 완벽한 과정을 찾아가는 일 뿐. 나는 거기까지


말한 뒤에 요한의 입술 위에 짧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것은 위로의 메시지가 담긴 입맞춤이었다.

“그리고 세나 씨의 시신도 곧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문득 떠오른 것은 욘두였다. 아니,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욘두의 집이었다.

욘두의 집에서 가져 온 장미 꽃잎 하나는 여전히 내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요한이 내 손을 잡을 때에도, 그와 함께 세나의 일기장을 확인할 때에도, 그와 안겨 있는


지금까지도. 나는 반대쪽 손에 그것을 꽉 쥔 채였다.
“……에믈린 씨와 욘두 쌤의 집에 다녀왔어요.”

나는 무의식중에도 힘이 꽉 들어간 손을 펼쳤다. 그 사이로 싱그러움이 가득한 장미 꽃잎


하나가 드러났다.

“욘두의 집……?”

요한은 깊게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우리의 시선은 곧 마주쳤다.

“네. 에믈린 씨가 그의 집으로 가서 욘두 쌤의 오래된 연인에 대한 흔적을 찾아보자고


했거든요.”

“……설마 몰래 간 건가? 욘두에게 허락을 받은 게 아니라?”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하.”

요한은 이마를 짚었다. 몰래 욘두의 집에 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에믈린은 그렇다 치더라도, 너까지 거기 휘말리면 어떡해. 그러다 일이 커졌으면 어쩌려고.”

다그치는 말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왜냐면 그의 어투 속에 걱정스러운 기운만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잡고 있던 내 허리춤을 더욱 꽉 잡으며 이어 말했다.

“네게 딸린 남자가 두 명이라는 사실을 제발 잊지 말아 줘.”

나를 맹목적으로 필요로 하는 조슈아와 요한을 어찌 하면 좋을까.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대답했다.

“이거 원. 마음 편히 죽지도 못하겠네.”

“그런 말 하지 마. 농담이라도 죽는다니, 뭐니 하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마. 내 앞에선


금지야.”

“알겠어요.”

“그래서 찾았어? 욘두의 오래된 연인에 대한 흔적.”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연인의 흔적은 개뿔. 그곳은 타인의 흔적이라곤 일말도 없던 곳이었다. 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수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장미 꽃잎이 올려진 손바닥을 요한 앞으로 내밀었다. 가만히 내게 집중하던 요한은
단번에 내 손바닥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대신 이걸 발견했어요.”

“겨우 장미 꽃잎 하나?”

“겨우 장미 꽃잎 하나지만, 저는 예전에 욘두 쌤에게 장미를 받은 적이 있어요.”

“욘두가 네게……?”

잘 뻗은 요한의 미간이 처참히 구겨졌다. 그는 내가 욘두에게 장미를 받았다는 사실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나는 매력적으로 접힌 그의 주름을 새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제 주름의 아름다움을


논하던 요한이 떠올라, 작은 실소를 터뜨렸다.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내 웃음은 요한의 심기를 대단히 거스른 것만 같았다.

“흠흠.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제법 오래전에 장미꽃을 받았었는데……. 그 꽃이


아직까지도 시들지 않았거든요.”

“시들지 않는 장미……. 마법이 서린 장미인 건가? 그리고 욘두의 집에서 발견한 장미 꽃잎


하나라.”

“욘두의 집에선 코끝이 아릴 정도의 강한 장미 향기가 났어요. 그건 결단코 장미 한 송이가 낼


수 있는 향기가 아니었죠.”

“어. 그래서?”

이어지는 내 이야기에 요한은 구겨졌던 미간을 누그러뜨렸다. 그는 내 이야기에 꽤나 집중을


한 듯했다.

“모든 방을 둘러보았는데, 딱 한 방만 굳게 잠겨서 열리지 않더라고요.”

“…….”

“그래서 제가 추측한 사실은 그러해요.”

나는 요한의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잠긴 방 안엔 시들지 않는 장미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어.”
“그리고 요한 씨가 거금을 써도 세나 씨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평범한 사람들로선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세나 씨의 시신을 훔쳐 갔기 때문이다.”

요한은 내가 하려는 말을 단번에 이해한 것처럼 대답했다.

“평범한 사람들로선 할 수 없는 방법이라는 건, 마법을 뜻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러곤 시선을 끌어내려 내 손바닥 위를 바라보았다.

시들지 않는 장미. 사라진 세나의 시신. 그 두 가지 사실 사이의 연결점.

“세나 씨의 시신은 이미 오래전에 욘두 쌤이 훔쳐 간 게 아닐까요? 시신이 조금이라도


풍화되기 전에, 그것을 훔친 거죠. 그러곤 시들지 않는……. 즉, 썩지 않는 마법을 걸어 둔
거예요.”

“…….”

“욘두 쌤을 제외하고 아무도 열지 못하는 그 방 속엔 시들지 않는 장미와 썩지 않은 세나 씨의


시신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허무맹랑한 추측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겐 영문 없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은 출처를 알 수 없는 확언이었다.

“물론 욘두 쌤이 무슨 목적으로 세나 씨의 시신을 가져간 것인지는 저도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짚이는 점은 하나 있었다.

욘두의 목적을 추측할 수 있는 힌트는 에믈린의 고백 속에 있었다.

‘욘두 쌤이 아파서 잠든 세나 언니를 보던 눈빛을 잊지 못해요. 그건 제가 욘두 쌤을 쳐다보던


눈빛과 닮아 있었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었어요.’

세나에게 몰래 입맞춤을 할 정도로 그녀를 좋아했던 욘두.

욘두는 세나를 사랑했기에, 그녀의 시신을 훔쳐 간 게 아니었을까?

죽은 시신을 썩지 않게만 해서, 제 옆에 두고자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욘두는 그 이상의 것을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가령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일이라든지. 아마도 내가 생각하지도 못할 또 다른


바람이라든지.

마법은 현실에선 상상할 수 있는 일을 이뤄 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욘두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단언할


수 있었다.

왜냐면 반대로 생각해 보았을 때, 나도 충분히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요한이 죽었고, 내겐 그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한다.

그 능력이 큰 것인가, 작은 것인가는 상관이 없었다. 존재에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작은 희망이라도, 바랄 수 있는 여건이 존재한다면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노력이 많이 들 뿐.

그리고 세나가 죽은 것은 올해로 벌써 4 년째였다.

나는 어쩐지 입안이 바짝 말라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손바닥에도 요한의 것처럼 기분


나쁜 땀이 스며 있었다.

“리나? 괜찮아? 갑자기 안색이 나빠졌어.”

요한은 내 안색이 급변한 것을 금세 눈치채고선 물어보았다.

“괜찮아요.”

얼추 신빙성이 있는 추측이었지만, 나는 요한에게는 털어놓지 못했다.

신빙성이 크다고 해도 그것은 나의 추측일 뿐이니까.

조금 더 확실해졌을 때 털어놓자. 욘두 집의 잠긴 방을 확인한 후에 털어놓자.

그때 털어놓아도 늦지 않으리라.

“아무튼 저는 그 방이 의심돼요.”

“네 말은 그 안을 확인해 보자는 거지?”

“네. 확인해 봐야겠어요.”

“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공작이라고 해도, 평민들의 집을 함부로 수색하지는 못해.”

요한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싸한 구실을 만들어 들어가는 건 가능하지. 욘두에겐 꽤 미안한 일지만, 나는


그의 집을 어떻게든 수색해 봐야겠어.”

“요한 씨는 제 추측을 믿어요?”

요한은 한쪽 입꼬리만을 올려, 조소에 가까운 미소를 지었다.

“완전 터무니없어. 내가 아는 욘두가 그런 일까지 저질렀다고는 생각지 않아. 그가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했단 거야? 세나를 사랑한 것도 아니고, 그랬을 리도 없고. 너무
이상하잖아.”

“…….”
이봐요, 요한 씨. 털어놓지는 못했지만, 욘두가 진짜로 세나를 좋아했을지도 몰라요.

나는 대답 대신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도 그건 네가 한 말이니까. 내가 터무니없다고 한 건, 네 추측에 믿을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야. 하지만 어떡해. 네가 한 말이면, 나는 믿을 수밖에 없는데.”

맙소사. 밥맛 요한 주제에 너무도 유려한 말이잖아.

나는 아연실색했다. 그가 제국의 내로라하는 공작님이라는 게 인제 와 조금 실감이 되었다.

“……고작 이런 말 때문에 감동 받았다는 표정 짓지 마. 왠지 기분 나빠.”

“왜요?”

“네가 나를 진짜로 덜 떨어진 밥맛쯤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딱 들켰네. 나는 머쓱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요한은 기다란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튼 혼자서 위험한 일 좀 하지 마. 제발.”

“혼자서가 아니라 에믈린 씨랑 같이 했는데요?”

“리나.”

그는 내 이름을 불렀다. 그쯤에서 그만두라는 호소였다.

“네에, 네에. 알겠어요.”

나는 대화를 더 이어 가려고 했다. 하나 그때 우리를 찾은 사람들이 있었다.

꽉 닫혔던 문이 노크 없이 덜컥 열리며 초대 받지 않은 방문객들이 들어섰다.

“요한 오빠! 아무리 리나 언니가 좋아도 그렇지. 어떻게 나를 버리고 가? 아까 나를 투명


인간으로 취급한 건 너무했어.”

볼멘소리의 주인공은 에믈린이었고,

“엄마!”

앙증맞은 목소리는 조슈아의 것이었다.

조슈아는 얼마나 깊은 잠을 잤던 것인지, 뒤통수의 머리카락 반이 쭈뼛 서 있었다. 까치집처럼


헝클어진 머리가 어쩜 저리도 귀여운 걸까.

나는 조슈아를 보며 만연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진짜로 세나가 맞다면……. 5 년 동안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한 지나간
시간들이 너무도 원망스러울 것 같았다.

내가 진정 원망해야 할 대상은, 잊힌 기억을 아직까지 떠올리지 못한 나 자신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나를 그 시간 속에 녹아들지 못하게 만든 누군가인가.

나는 잘 가늠할 수 없었다.

제 74 화. 술보다 훨씬 더 다디단 네 입술이 있는데

에믈린과 조슈아 말고도, 방문자는 한 사람 더 있었다.

“영감. 나를 놔두고 어디를 그렇게 혼자 다니는 거우?”

조슈아 뒤로 등장한 이는 요한의 할머님이었다. 할머님의 능청스러운 말에 요한은 침음을


흘렸다.

“할, 할머님.”

그는 앉아 있던 몸을 습관처럼 벌떡 일으켰다. 나 또한 그를 따라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바라본 요한은 제 목덜미를 느릿하게 쓸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당황스러운 기색만이 역력했다.

테레사 할머님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요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다가오는 것에만
그치지 않으며, 요한의 소맷자락을 끌어당겼다.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동안 꼭 붙어 있으시구려.”

“……컥!”

“영감. 다리 아프게 서 있지 마시고.”

“…….”

요한의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할머님 옆에 다소곳이 자리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조금 전까지 내 자리였던 곳은 할머님이 차지하게 되었다.

하나 내 자리를 빼앗긴 사실이 조금도 애석하지 않았다. 도리어 무릎을 바짝 세우고, 정좌를
한 요한의 모습이 자못 우스웠을 따름이었다.

나는 결국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풉. 이를 어쩌나……. 두 분 사이에 제가 끼어들 곳이 없네요.”

“리, 리나. 놀리지 마.”

있죠, 요한 씨. 그거 알아요? 당신이 놀리지 말라고 할수록 내겐 더욱 짓궂은 마음이 든다는


거.

역시 나는 당신이 당황해하고,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제일 좋아.

그때, 누군가가 내 드레스자락을 잡고 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요한을 보던 시선을 끌어 내렸다. 그러자 언제 가까이 다가왔는지 모를 조슈아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테레사 할머니랑 아빠랑은 붙어 있게 놔두고, 엄마는 조슈아랑 꼭 붙어 있자.”

“조슈아가 그렇게 말해 주면, 내가 얼마나 기쁘게요. 오구오구. 이리로 오렴.”

나는 조슈아의 말랑말랑한 손을 꼭 잡았다. 아이의 손은 지난날보다 훨씬 더 매끄러웠다.

잡으면, 절대로 놓고 싶지 않은 감촉이라고나 할까.

이젠 한 번에 들기엔 약간은 버거워진 조슈아를 두 손으로 힘겹게 들어 올려, 나는 요한과


마주 보고 앉았다.

어찌 된 까닭인지 에믈린이 조용하다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흐윽, 흑…….”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방 안을 가로질렀다.

웬 울음소리일까?

나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방문 근처에 우두커니 선 채로 훌쩍이고


있는 에믈린이 보였다.

에믈린은 흘러넘치는 울음을 참지 않겠다는 듯 목 놓아 울고 있었다. 이내 그녀의 흰 뺨은


눈물로 모두 얼룩졌다.

그녀의 선명한 붉은 눈동자엔 뿌연 눈물이 맺혀, 그 색채가 흐려지기에 이르렀다.

이번엔 에믈린을 위로해 주어도 되는 걸까?

나는 그녀를 위로해 주는 일을 몇 번이나 망설였었다. 왜냐면, 그녀가 위로해 주기를 바라는


이는 내가 아닌 세나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깨달았을 땐,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조슈아를 소파 위에 앉혀 두고선,


그녀에게 다가갔다.

뻗어도 될지, 닿아도 될지, 매번 주저했던 내 손은 이윽고 에믈린의 흰 뺨에 닿았다.


나는 손끝으로 그녀의 뺨을 쓸어 주었다. 손끝에 묻은 에믈린의 눈물이 뜨거웠다.

“갑자기 왜 울어요? 괜찮아요?”

그리 묻는 내 목소리가 제법 다정했다. 얼마나 다정했냐면, 나 스스로가 놀랄 만큼이었다.

나, 에믈린에게 이토록 다정하게 대할 수 있구나.

함께한 미행. 내게 고백한 에믈린의 속사정. 에믈린은 심지어 요한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했던
일화를 내게 토로했다. 그것도 안 지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은 나에게.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어떤 친밀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비밀을 공유하는 데에서


생기는 유대감이었다.

에믈린은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광경……. 너무 가족 같잖아요. 제가 매번 상상했던 모습이에요. 세나 언니가 살아


있었다면 이랬을 거라고…….”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콧물을 킁 하고 들이켰다.

세나 언니가 살아 있었다면 이랬을 거라는……, 차마 잊지 못한 에믈린의 말이 기분 나쁘진


않았다.

대신, 에믈린이 한 생각과 같은 생각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이곳에 세나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행복하고 따사로운 광경일 게 틀림없었다. 그러자 그 순간 요한이 한 말이 불쑥 떠올랐다.

‘나는…… 네가 진짜 세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행복한 광경 속에 스며 있어야 할 사람은 과연 누구인 걸까.

“리나 언니, 미안해요. 제가 언니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한 거죠?”

“아니에요. 에믈린 씨. 이리로 와요.”

나는 에믈린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챘다. 그러고선 그녀를 조슈아 옆에 앉혔다.

“할머님과 요한 씨는 오붓한 시간을 보내게 놔두고, 저흰 셋이서 놀아요.”

에믈린은 울다가 웃으면 큰일이 난다는 말을 모른다는 듯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제 색을


잃었던 그녀의 홍안은 그제야 비로소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뺨을 모두 적셨던 눈물은 말끔히 그쳐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울음이 멈추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부터 누군가가 우는 얼굴을 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한과 조슈아, 그리고 에믈린의 우는 모습은 특히나 내 마음을 애달프게 만들었다.
슬픔이 전가되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내 뺨에 닿은 애절한 시선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조금 비틀었다. 그러자


애절하고도 간절한 시선의 주인이 보였다.

“…….”

시선의 주인은 여전히 정좌한 채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요한이었다. 그의 검은 동공


속에 맺힌 메시지는 제법 명확했다.

그는 우리 사이에 끼고 싶어서 미치겠다는, 소리 없는 메시지를 내게 보내고 있었다.

셋이서 놀자고 했던 것은 솔직히 장난이었다. 나도 기왕이면 귀여운 요한과 그보다도 더


귀여운 할머님과 함께 놀고 싶었다.

할머님에게 놀림을 당해 당황하는 요한의 모습이 보고 싶다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내 말보다도 조슈아의 말이 한발 더 앞섰다.

“엄마, 우리 다 같이 놀자! 편을 가르는 건 나쁜 일이라고, 욘두 쌤이 그랬어.”

나는 조슈아의 금빛 머리카락을 한껏 흐트러뜨렸다.

“조슈아야. 너는 어쩜 날이 갈수록 더더욱 사랑스러워지는 거니?”

“엄마, 조슈아가 같은 말을 얼마나 더 많이 해야 해?”

“무슨 같은 말?”

조슈아는 제 볼을 빵빵하게 한 채로 소리쳤다. 볼멘 목소리였다.

“조슈아는 엄마 아들이니까, 당연히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잖아!”

나는 약속된 물음을 건네었다.

“아빠 아들은 아니야?”

그러자 조슈아는 약속된 대답을 내뱉었다.

“응, 조슈아는 엄마 아들이야.”

변함없는, 확고하고도 강경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늘 그렇듯 요한을 울적하게


만들어 버린 것만 같았다.

“……조쉬.”

바라본 요한의 얼굴은 한껏 울먹이고 있었다.


 

* * *

우리들은 진짜 가족처럼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중한 기억을 갉아먹는 벌레를 안고 살아가는 할머님은 나를 보며 간간이 세나를 떠올리곤


했다.

‘……아가씨는 내가 잘 알던 사람과 닮았구려.’

할머님은 이전과 같은 말을 내게 다시 한번 더 건네었다. 그녀는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미소로 회답했다.

내가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테레사 할머님은 세나를 기억해 줄까?

그녀의 머릿속에 사는 벌레가 세나와 관련된 기억을 모두 갉아먹는 것은 아닐까?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가벼운 티타임도 가지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을 때가


되어서야 우리의 만남은 파투가 났다.

결국 요한의 방에 남겨진 이는 나와 요한이었다. 놀다 지쳐 잠든 조슈아는 일찌감치 제 방


침대에 누이고 온 터였다.

둘만이 남겨지자, 둘이서만 할 수 있는 대화를 나눌 수가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전 날부터


생각해 왔던 일을 요한에게 토로했다.

“바비를 만나야겠어요.”

소파 위, 다시금 나란히 앉게 된 요한의 대답은 단호했다.

“안 돼.”

“왜요? 적어도 몇 분 정도는 생각해 주고 대답해 줘요.”

“둘이서는 절대로 안 돼. 생각할 가치도 없는 말이잖아.”

“하지만 요한 씨가 동행한다면, 바비가 솔직하게 말해 주지 않을 거예요.”

“…….”
요한은 침묵한 채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아주 복잡 미묘한 눈빛. 내 말을 선뜻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아는 듯했다.

“지금 미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아, 아니야.”

나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요한은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려, 내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아니라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 줄게요.”

“미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어째서 용서까지 바라야 하는 생각이야? 나 원.”

그는 꼭 미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처럼 열을 냈다. 그러다 저도 아차 싶었던 것인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미행하자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사랑하는 여자가 속이 컴컴한 놈을


혼자 만나겠다는데, 당연히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거잖아.”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은 지금 쓰는 말인 걸까요?”

나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요한은 의외로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매끈한 제 턱을


들어 올리며 태연자약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네가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오호라, 오만하지만 멋있는 대답을 했다 이거지?

그는 내게 당한 전적이 너무도 많아, 나의 짓궂음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듯싶었다.

……그것은 꽤나 애석한 일이었다.

“아무튼 리나. 나는 네가 바비와 둘이서만 만나는 게 정말 싫어.”

“하지만 바비는 무언가를 분명히 알고 있어요. 쌍둥이에 대해서 알려 준 것도 그였으니까요.”

바비에게 내가 세나와 쌍둥이라는 사실을 알려 준 장본인은 누구일까?

예상한 대로 욘두인 걸까?

요한은 잠깐 침묵하며 무언가를 골몰했다. 나는 그가 먼저 침묵을 깨뜨릴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요한은 내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내 뺨이 모두 가려질 만큼의 큰 손. 내가


좋아하는 요한의 예쁜 손이었다.
“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미행을 할게.”

“컥, 이렇게나 당당한 미행 선포라니.”

픽 웃은 요한은, 이윽고 내 코끝에도 입을 맞추었다.

“뭐 어때. 그래서 싫어?”

“……아뇨. 한눈팔지 말고, 부디 저만 바라보고, 저를 철저히 미행해 주세요.”

만류라기보다는 미행을 조장하는 듯한 말이었다. 나는 내가 내뱉고도 내 말이 우스워서


킥킥거렸다.

요한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비틀어 내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 가볍기만 했던 그의 입맞춤이


이번엔 꽤나 길어졌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깊은 키스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요한은 단순히 서로의 입술만을 맞대고 있었다. 마치 내 입술의 윤곽을 제 입술로 기억하려는
것처럼.

 
얼마 못 가 입술은 떨어졌다.

서로의 숨결을 진득하게 나누지 못한 채 가벼운 키스로 끝나 버리다니…….

그것 또한 아주 아주 애석한 일이었다.

“모쪼록. 맡겨만 줘.”

그리 말한 요한의 검은 눈동자엔 아주 잘 해내리라는 확신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에게선


철저히 미행을 하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느껴졌다.

내 눈에 지독한 콩깍지가 씐 것이 틀림없었다. 미행을 열심히 하겠다는 요한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보인 까닭이다.

나는 요한의 목덜미를 끌어안아 그의 입술 위를 짧게 지분거렸다. 그의 사랑스러움을 견디지


못해 행한 입맞춤이었다.

마주한 요한의 눈이 조금 커져 있었다. 그는 입술마저도 조금 벌린 채로 당황한 면모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목울대가 꿀렁거릴 정도로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저…… 그럼 잘까?”

……웬걸. 평소와 다름없는 그 말이 오늘따라 왜 이리도 이상야릇하게 들리는 걸까.

나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네, 저는 제 방으로 돌아가 볼게요.”

“네 방으로 간다고? 방금 먼저 입을 맞췄으면서?”

요한은 믿기지 않는다는 어투로 말했다.

‘네가 꾀어냈으면서 인제 와 발을 빼는 건가?’

그의 말이 내 귀엔 그렇게 들렸다.

나는 그의 속마음을 다 알아차렸음에도 모른 척, 대답을 하였다.

“그럼요?”

“혼자 잠들기 싫어.”

요한은 손을 뻗어 나를 껴안으며, 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투정하는 듯. 내 체온을 더


느끼려는 듯.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벨트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자기 전에 술도 마시지 않네요?”

“내가 그걸 왜 마셔?”

“…….”

“술보다 훨씬 더 다디단 네 입술이 있는데.”

맙소사. 당신, 왜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거야.

“제, 제가 아는 요한 씨가 맞는 거죠?”

요한은 희미한 웃음기가 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의심되면 확인해 볼래?”

그는 나를 조금 더 꽉 껴안고선 이어 말했다.

“너, 내 몸에 위치한 점들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있잖아.”

맞닿은 요한의 몸이 너무도 뜨거웠다. 아니, 뜨겁게 달아오른 쪽은 어쩌면 나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의 어깨 위에 얼굴을 기댄 채로 심호흡을 했다.
평온하기만 했던 심장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요한이 나를 명백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기에 그런 것일까?

“와인에 완전히 중독되지 않은 건, 다 네 덕이야.”

“…….”

“좋아해.”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좋아한다는 그의 진심 어린 고백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황홀했다.

“네 생각으로 가끔 조슈아를 잊을 때도 있어. 나는 그 정도로 너를 좋아하나 봐.”

조슈아밖에 모르는 바보 밥맛 요한이 아이보다도 나를 더 생각했다니…….

어쩌지? 아까보다도 그가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데.

나는 용기를 내어 작은 소리를 내뱉었다. 아마 그의 고백에 대한 제일 알맞은 대답을 말이다.

“……저도 좋…… 좋아해요.”

했어, 내가 해냈어.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드디어 내뱉었다고!

나는 어떤 고양감에 도취된 채로 큰 심호흡을 했다.

나를 안고 있던 요한이 돌연히 몸을 일으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요한 씨……?”

그는 몸을 일으킨 것에만 그치지 않으며, 앉아 있던 나를 한 번에 들어 올렸다. 그의 한쪽


손은 내 허벅지를 깊숙하게 감싸고, 나머지 손은 내 허리를 감싼 채였다.

“나를 먼저 유혹한 건 리나 너야. 오늘 밤엔 나를 끝까지 책임져 줘야 해.”

요한은 매혹적인 미소가 서린 입술로 한마디를 덧대었다.

“부디 부탁할게.”

나를 안아 든 요한의 발이 향한 곳은 침대 위였다.

제 75 화. 귀걸이의 주인
그날 밤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내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비 냄새였다. 습하고, 눅눅한 냄새. 그리고 대지를


적시는 빗소리까지 귓가에 스며들었다.

눈앞은 암전이었다. 적어도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후각과 청각뿐.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꿈은 평소 꾸던 꿈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이 꿈 또한 내가 잊은 과거와 연관이 있는 꿈인 걸까?

나는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무언가가 보이기를 바랐다.

바라기가 무섭게 시야가 확 트였다.

확장된 시야 사이로 처음 보인 것은 회색빛 하늘이었다. 비를 가득 머금은 잿빛 먹구름은


하늘을 모두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깨달은 것은 내 몸이 뒤쪽으로 기우뚱하게 기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나는 꿈이라는 것도 잊은 채 당황했다.

하늘을 보던 시선을 조금 끌어 내리자 녹음이 보였다. 아마도 내가 지금 위치한 곳은 초록빛


잎사귀들이 즐비한 깊은 숲인가 보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더 끌어 내렸을 때,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이름이라


추정되는 것을 상기해 냈다.

……세나?

그녀를 세나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녀가 나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풍성한 금발 머리를
가진,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아름다운 그녀.

그녀는 느릿한 동작으로 내 어깨를 밀치고 있었다. 실제로 느릿하게 민 것인지, 꿈이기에
그녀의 동작이 느리게 보이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의 손짓에 의해 내 몸이 뒤로 밀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몸의 중심이


뒤로 가자, 내 발은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뒷걸음질 친 내 발에 치인 작은 돌멩이들이 또르륵 굴러가며 어디론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나는 시선을 완전히 내렸다. 그러자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내 뒤엔 아찔한 절벽이 존재했다. 굴러간 작은 돌멩이들은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절벽은 떨어진 돌멩이가 지면에 닿는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의 아득한 높이를 가지고 있었다.
설마…… 나는 지금 이 절벽 밑으로 떨어지려는 건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 몸의 중심이 뒤쪽으로 완전히 쏠렸다. 지면을 내디뎠던 발은


이윽고 허공에 닿게 되었다.

‘……!’

나는 악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로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나와 닮은 여자가


내 손을 잡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것은 절벽 밑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나와 닮은 여자는 뻗어진 내 손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녀는 도리어 내가 조금 더 빨리


떨어질 수 있게 내 팔을 한 번 더 밀었을 뿐이다.

바라본 그녀의 얼굴엔 표독스러운 미소가 스며 있었다. 그 미소는……. 이전 날, 꿈에서 본


세나가 지었던 사나운 미소와 닮아 있었다.

얼굴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돌연히 뜨거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동시에 깨닫게 된다. 지금 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건 빗줄기가 아니라, 뜨거운


내 눈물인 거라고.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뻗어진 내 손은, 우연처럼 그녀의 귀 쪽을 향해 방향이 비틀리게 되었다.


내 손끝엔 차가운 금속성의 무언가가 닿았다.

그것의 정체는 그녀의 귀에 매달린 귀걸이였다. 나는 그 귀걸이를 잡아챘다. 역시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흐릿한 빗속에서도 밝게 빛나던 그녀의 귀걸이는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꽉 쥠과


동시에 완벽하게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몸이 추락하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절벽의 밑바닥에 닿는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죽어 버리는 걸까?

두려워. 제일 처음 든 감정은 그러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도 점점 더 짙어지는 감정이 하나


있었다.

그 감정의 정체는 슬픔이었다.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든 걸까? 나의 최선이 너에게는 최악이었던 걸까?


어떻게 네가 나를 절벽에서 밀어뜨릴 수가 있어?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꿈속, 추락하는 내가 한 생각을 나는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끝없이 추락하던 몸은 이내 흙바닥에 닿았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태어나 처음 겪는


고통이 느껴졌다.

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제법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순간 현실과 꿈이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지 잘 가늠할 수 없었다.

꿈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실제로, 지금, 절벽 밑으로 떨어진 게 아닐까?

‘과거에 직접 겪었던 일’이기 때문에 이토록 고통이 선명한 걸까?

흙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나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나는 메마른 숨을 토해 냈다.

어디가 부서진 것인지, 어디를 다친 것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고통은


온몸을 옥죄었고, 나는 서서히 정신을 잃어 갔다.

정신을 잃어 가던 나는 힘겹게 한마디를 뱉어 냈다.

‘……내겐 돌아가야 할 곳이 있어.’

돌아가야 할 곳. 그때 떠오른 것은 요한과 조슈아가 존재하는 랭카스터 공작가였다.

그것은 꿈을 꾸고 있는 내가 생각한 곳인지, 아님 흙바닥에 쓰러진 과거의 내가 생각한


곳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돌아가야 할 곳을 떠올리자마자, 나는 죽을힘을 다해 앞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질질 끌리는


몸은 점점 더 흙투성이가 되어 갔다.

이런 식으론 절대로 돌아가야 할 곳에 돌아가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무언가라도 하는 편이 훨씬 더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꿈속의 내가 한 생각이었다.

희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은 채로 얼마나 기어갔는지 모르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돌아가야 할 곳까지 기어가지 못했다.

한계에 다다른 나는 차가운 흙바닥에 몸을 누이었다. 심지어 산속도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그사이에도 비는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맞을 따름이었다.

몸은 차가워져 갔고 숨은 곧 끊어질 듯이 미약해져만 갔다.

이대로 죽어 버리면 어떡하지?


누가 나를 좀 구해 주었으면 좋겠어.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그것이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꿈에서 깼을 땐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식은땀은 이마에만 서린 것은 아니었다. 입고 잔


얇은 슬립이 모두 젖어 버릴 만큼, 나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아.”

나는 기다란 숨을 토해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곤 주변을 확인했다.

귓가를 가득 메우던 빗소리도, 절경이었던 녹음도, 가파른 절벽도, 꿈속에서 본 것들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 주변에 존재하는 것은 창가로 들어오는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기운과 내 옆에서 곤히 잠든


요한뿐이었다.

나는 이번엔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꿈이 아닌 현실이다. 나는 돌아와야 할 곳에 존재하고 있다.

내 곁에는 나를 온 마음 다해 좋아하는 듬직한 요한이 있고, 내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에 이미 벌어진 일인 것이다.

“과거에 벌어진 일…….”

나는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생각했다.

기억을 잃은 나를 제일 먼저 발견한 이는 리키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나를 비 오는 날, 어느


산 초입에서 발견했다고 했다.

비 내리는 날, 아저씨가 산속에 들어간 이유는 산속에 작게 꾸려 둔 밭을 확인하러 가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거센 비에 작물이 훼손되지는 않았을까, 염려가 되었던 거라고.

아무튼 그 덕에 나는 리키 아저씨에게 발견돼, 잡화점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나는 내가 왜 상처투성이에 흙투성이가 되어 산 초입에서 발견된 것인지 조금도 떠올리지


못했다.

두꺼운 벽 속에 갇혀 있는 듯한 과거의 내 기억은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리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아주 명백하게.

하지만 나는 이제야 그 사연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조금 전에 꾼 꿈이 그 사연임이 틀림없다.
나는 나와 닮은 여자…… 즉, 세나로 추정되는 여자로 인해 절벽에서 떨어진 것이다. 나를
증오했던 나의 자매가 나를 절벽에서 밀어뜨린 것이다.

내 과거를 묶어 둔 두꺼운 벽은, 과거를 떠올리고자 결심한 내 의지로 인해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나는 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그러곤 손바닥 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위에는


꿈속에서 피가 날 정도로 손에 꽉 쥐고 있었던 귀걸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귀걸이의 모양과 감촉, 빛나던 느낌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귀걸이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귀걸이였다.

에메랄드빛 보석이 달린 예쁜 귀걸이.

‘이 귀걸이. 어쩌면 네가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된 물건일지도 몰라.’

바비의 말이 정말로 맞았다. 그것은 내가 잊은 기억과 관련이 있는 물건인 것이다.

그 귀걸이는 내가 끼고 있던 게 아니라, 나를 절벽으로 밀친 장본인이 끼고 있던 귀걸이였어.

그리고 그 귀걸이의 주인은 바로…….

“……세나.”

나는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동시에 눈가에선 후드득 눈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눈물이라고 생각했다. 울음의 전조는 조금도 없었으니까.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 귀걸이……. 세나뿐 만이 아니라, 욘두가 끼고 있던 귀걸이이기도 했다.

같은 귀걸이를 한쪽씩 나누어서 낀 욘두와 세나.

욘두는 그 에메랄드빛 귀걸이를 연인과 나누어 꼈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욘두와 세나가 연인이었다는 걸까? 세나는 요한과 조슈아를 놔둔 채 욘두와


비밀스러운 사랑을 싹틔웠던 걸까?

머리가 지독하게 아파 왔다.

나는 미간을 잔뜩 구기며, 요한이 깨지 않게 숨죽여 눈물을 훔쳐 냈다. 하지만 눈물은


한참이나 멈추지 않았다.

짓이긴 잇새 사이로 흘러나온 흐느낌은 기어코 요한의 잠을 깨워 버렸다.


그는 몸을 조금 뒤척이더니, 이윽고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요한은 울고 있던 나를 곧바로
발견하고선 꽤나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울어?”

요한은 누워 있던 몸을 얼른 일으켜, 나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왜 울어? 악몽이라도 꾼 건가?”

부드러운 그의 손이 내 눈가에 닿았다. 그는 몹시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꿨어요.”

내 눈가를 닦아 주던 그의 부드러운 손은 이윽고 내 어깨를 잡아채 나를 제 품에 껴안기에


이르렀다. 그는 다정하게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애도 아니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은 키 크는 꿈이니까, 울지 마.”

“……밥맛 당신보다 훨씬 더 컸으면 좋겠어.”

“그래, 더 커져서 나를 내려다봐.”

그는 농담에 가까운 내 말을 유려하게 받아쳐 주었다. 내가 울음을 그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배려임이 분명했다.

요한의 다정한 위로 때문일까. 그치지 않을 것 같았던 눈물은 서서히 거두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눈물이 그쳤음에도 그의 품에 오랫동안 안겨 있었다.

이것이 현실임을 더욱 느끼기 위해서.

* * *

바비는 내게 마지막으로 고백한 날을 이래로 내 눈앞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요한


또한 그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요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쥐새끼처럼 공작저를 나다니던 바비가 쥐새끼 같은 짓을 그만둔


것이었다.

바비는 마지막 고백을 하면서도 어디서 만날 것인지, 어디서 나를 기다릴 것인지, 결국 내게


말해 주지 않은 터였다.

그는 대답을 기다린다는 말을 남긴 채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나는 돌연히 사라진 바비를 어디서 찾을 것인지 잠깐 고민했다.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좋든 싫든 어쨌든 바비와 함께한 세월이 거의 일 년이었다.


나는 그가 어디서 머무는지, 그가 머리를 식힐 때 어디에 가 있는지, 그런 것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대로라면, 바비는 지금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곳에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여하튼 지금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곳은 그곳뿐이었다.

바비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나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바비의 얼굴을 오랜만에 떠올려 보았다. 그때 본 그의 얼굴은


메마르다 못해 수척해 보일 정도였다.

나는 다시 마주하게 될 그의 얼굴이 좋아졌기를 바랐다. 매우 수상한 면모를 보여 준


바비이기는 하나, 나는 그에게 악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후줄근하군.”

마차 안, 내 맞은편에 앉은 요한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바비에 대해 생각하던 멈추며,


그를 바라보았다.

흰 셔츠 하나를 입어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만 입던 요한은, 오늘따라 다소 허름해 보이는


상앗빛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나 아주 허름한 옷은 아니었고, 평소의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리고 원체 훌륭한 얼굴 덕에 허름한 옷을 입혀 놓아도 괜스레 눈에 띄었다. 미행을 위해서


눈에 띄지 않는 옷을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만 참으세요. 당신이 평소에 입는 값비싼 옷을 입었다간, 미행하는 걸 단번에 들킬


테니까. 바비의 눈치가 얼마나 좋은데요.”

바비와 만나겠다는 내 계획은 그다음 날 바로 실행되었다. 요한은 제가 해야 할 일을 일찍이


끝내고선 나와 함께 마차에 올라탄 후였다.

그리고 마차에 함께 탄 이는 요한 하나만이 아니었다.

“……맞아! 삼촌은 눈치가 엄청 빨라! 조슈아가 뭘 원하는지 바로 알아차려 주는걸!”

몰래 나가는 걸 들켜, 졸지에 동행하게 된 조슈아도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당연히 조슈아를 공작저에 놔두고 가려고 했지만, 조슈아의 고집을 도저히 꺾을 수 없었다.

저를 두고 간다는 우리의 말에 조슈아는 공작저가 떠나가라 울어 젖혔으니까.

‘흐으윽. 엄마, 아빠가 조슈아를 버리고 어디론가 가려고 해. 흐윽. 지금 조슈아를 데리고
나가지 않는다면, 나를 버린 거라고 생각할 거야.’
조슈아가 울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것은 요한 또한 다름이 없었다. 아이의 극단적인 표현에,
우리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되었다. 완전 항복이었다.

이내 함께 나가자는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조슈아는 울음을 뚝 그쳤다.

어디 울음을 뚝 그치기만 했을까. 아이는 제가 언제 울었냐는 양 방긋방긋 미소를 짓더라.

나는 그때 이마를 짚었다.

소악마 조슈아에게 당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사연으로 인해 결국 조슈아에게도 조금 허름한 옷을 입힌 채 동승하게 된 터였다.

물론 아이에겐 우리의 외출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알려 주었다.

내가 한 그럴듯한 포장은 바로…….

제 76 화. 엄만 날 뭘로 보는 거야. 조슈아만 믿어

‘조슈아. 우리는 지금부터 게임을 할 거야. 내가 바비와 만나고 있을 때, 너와 요한 씨는


바비에게 들키지 않고 우리의 뒤를 미행하는 거지. 우리 조슈아는 엄청 똑똑하니까, 바비에게
당연히 들키지 않을 자신 있지?’

내가 한 그럴듯한 포장은 바로 게임을 빙자한 말이었다. 그러자 조슈아는 아주 해맑게


대답했다.

‘응! 나 숨바꼭질도 엄청 잘해!’

다행히도 아이는 내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듯했다. 오히려 게임을 하자는 내 말에 한껏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무튼 조슈아는 때때론 소악마 같으면서도, 때때론 엄청 귀엽다니까.

미행과 숨바꼭질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조슈아는 내로라하는 명석한 아이이니, 적어도 조슈아 때문에 곤란해질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슈아가 노력할게. 눈치가 빠른 삼촌에게 절대로 들키지 않을 거야.”

그것은 아주 대단한 각오였다. 나는 아이의 외침을 들으며,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런데 리나. 사라진 녀석이 그곳에 있다는 걸, 네가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넌 가끔 보면,
그 자식에 대해서 너무 자세히 아는 것 같아.”

오늘의 행선지는 마차를 타기 직전, 일찌감치 요한에게 알려 준 터였다.

왜냐면, 요한은 미숙한 형이라 바비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짐작하지 못했으니까.

그는 자취를 감춘 바비가 어디에 있을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제 자신에 대해서 약간의


실망감을 느낀 것도 같았다.

‘……나는 바비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

그리 말하던 요한의 얼굴은 씁쓸한 빛만이 가득했었다.

“어쩔 수 없죠. 어찌 되었든 저는 바비와 일 년 동안 함께 지낸 사이인 걸요.”

“내가 배고픈 너를 조금 더 빨리 발견했어야 했는데. 젠장.”

“그러게요. 그럼 제가 배를 곯았던 날이 줄었을 텐데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슈아가 내 말을 따라 했다.

“그러게. 그러면 엄마의 배가 덜 꼬르륵거렸을 텐데.”

조슈아는 말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으며, 조막만 한 자신의 배를 두 손으로 감쌌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흐드러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푸흡. 조슈아야. 넌 어쩜 배고픈 내 배를 그렇게나 생각해 주는 거니?”

“엄마 배에서 배고픈 소리가 나면, 조슈아의 마음이 아파. 그래서 조슈아는 엄마가 항상
배불렀으면 해.”

“……그럼 아빠 배는?”

요한은 넌지시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고, 조슈아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아빠 배에선 배고픈 소리가 나는 걸 한 번도 듣지 못한걸.”

“…….”

너무도 솔직한 조슈아의 말에 요한의 얼굴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아빠 배도 항상 불러 있었으면 해. 왜냐면 아빠는 최고의 밥맛이니까!”

“……하.”

요한은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의 얼굴은 시무룩을 넘어서서 시들시들해져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숨죽여 웃기만 했다.


이 부자. 너무 사랑스럽고도 웃긴 게 아닐까?

“그래, 조슈아는 그렇다고 치고…… 리나.”

“네?”

요한은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이어 말했다.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을 복창해 주었으면 좋겠어.”

“무슨 말이요?”

“절대로 위험한 일은 하지 않는다.”

“아니, 제가 애도 아니고…….”

나는 툴툴거렸다. 하나 마주친 요한의 눈빛이 가히 심상치 않았다.

그는 내가 복창하지 않으면, 내 입술을 억지로 벌려서 복창을 시킬 법한 험악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래, 그까짓 거. 한번 해 주지, 뭐.

“절대로 위험한 일은 하지 않는다.”

요한은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면, 내 이름을 크게 부른다.”

나는 이번에도 그의 말을 대충 따라 했다.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면, 당신의 이름을 크게 부른다.”

“그리고 바비에게 한눈팔지 않는다. ……흠흠.”

그리 말한 요한은 머쓱한 헛기침을 두어 번했다.

“바비에게 한눈팔지 않는다.”

마지막 사항까지 내가 복창하자, 요한은 그제야 험악했던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했어.”

나 원. 당신, 이럴 때면 조슈아보다 더 애 같아.

그래서 나는 아이를 달래 줄 때 했던 말을 요한에게 똑같이 읊조려 주었다.

“걱정 마세요. 제겐 요한 씨밖에 없으니까요. 오구오구.”


그러자 요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가 되더라.

나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나도, 나도! 조슈아도 위험한 일은 하지 않을게! 킥킥.”

아이는 우리가 어떤 의미로 그러한 다짐을 내뱉었는지도 모르면서, 요한이 했던 말을 똑같이


복창했다.

한없이 즐거워 보이는 조슈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왜 한숨이 나오는 걸까.

이 미행 조합. 정말로 괜찮은 걸까?

나는 이전에 에믈린과 함께 미행을 했을 때보다도, 더더욱 큰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 * *

요한과 나는 익숙한 대로에 마차를 정차시켰다.

요한은 검은 모자를 써 자신의 훌륭한 얼굴마저도 가린 뒤에 마차에서 내렸다.

더해, 그는 조슈아에게도 귀여운 모자를 씌워 주었다. 조슈아가 쓴 모자는 조슈아의 금빛


머리카락을 모두 가리는 갈색의 모자였다.

마차에서 내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쾌청하기만 했다. 꿈속에서 본 비가 오던 광경과는


정반대인 날씨였다.

좋아, 미행하기에 딱 좋은 날씨고.

“리나.”

나는 나를 부른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모자를 쓴 것이 어색한지 모자의 테두리를 연신


만지고 있었다.

“왜요?”

“그치가 도서관에 있을 거라는 게 정말인가?”

요한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거듭 물어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 씨는 믿을 수 없겠지만, 바비가 그곳에 있을 가능성은 높아요.”

바비는 어쩐지 한량 같고, 여자를 좋아할 것 같고, 술과 향락을 즐기며, 도서관의 ‘도’
자도 모를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의외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죽이곤 했다.

또한 그는 술을 즐기지도, 여자를 즐기지도 않았다.


잘 놀 것 같은 얼굴을 가졌고, 화려한 액세서리로 자신을 꾸몄지만, 결국 그것은 겉모습에
불과할 뿐이었다.

호화로워 보이는 겉모습과는 별개로 바비의 내면은 제법 진국이었던 것이다.

……물론 내게 관심을 끌기 위해 제 팔을 부러뜨리는 둥 가끔 이상한 짓을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바비는 할 것이 없거나 나를 만나지 않은 날엔, 언제나 도서관으로 가곤 했다.

나는 바비가 무슨 책을 읽는 것인지 궁금해서, 그를 따라 도서관에 간 적도 있었다.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으며 여러 책을 읽었는데, 어느 날은 엄청 어려워 보이는 정치적인


내용의 책을 읽다가도, 또 어느 날에는 삼류 연애 소설을 읽기도 했다.

대관절 종잡을 수 없는 선택 기준이었다.

“요한 씨. 제가 먼저 도서관에 들어갈 테니까, 요한 씨랑 조슈아는 좀 이따가 천천히 들어와


주세요. 그리고 알아서 잘 숨고요. 알겠어요?”

나란히 선 두 남자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같은 대답을 내뱉었다.

“날 뭘로 보고. 나만 믿어.”

“엄만 날 뭘로 보는 거야. 조슈아만 믿어.”

맙소사. 이 부자, 좀 전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워 보여.

나는 내가 꼭 책임져야 할 두 남자의 볼에 차례대로 입을 맞추어 주었다.

잠깐 떨어져 있음을 아쉬워하는 작별의 입맞춤이자, 오늘 열심히 미행을 해 달라는 응원의


입맞춤이었다.

* * *

요망한 부자와 헤어진 대로를 조금 더 거닐면, 눈에 띄게 큰 고풍스러운 건물 하나가 존재했다.

그곳은 평민들도 자유로이 이용이 가능한 국립 도서관이기는 하나, 신분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서고가 제한되어 있는 곳이었다.

나는 짧은 기합과 함께 도서관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이내 꽃들이 예쁘게 가꾸어진 작은


정원을 지나쳐, 도서관의 현관까지 걸어가기에 이르렀다.

현관으로 들어가기 직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를 조용히 따르고 있을 요한과 조슈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두 사람은 도서관 정문의 외벽에 몸을 숨긴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큭큭.”

나는 분명 바비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이곳에 찾아온 것이건만, 왜 이렇게 즐거운


마음이 드는 걸까?

그건 다 요망한 부자가 너무 귀여워서 그런 것이다. 나는 확신했다.

 
이윽고 나는 도서관 안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오랜만에 온 이곳은 여전했다. 코끝에 기분 좋게 스미는 종이 냄새. 큰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볕. 커다란 책장. 그 속에 자리한 여러 책들.

도서관은 어쩐지 내 마음이 평화로워지게 만드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서고를 다니며 바비의 신형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번째 서고로 들어섰을 때, 나는 바비를 찾을 수 있었다. 바비는 널찍한 책장에 등을


기대고 선 채로 책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선, 바비의 모습을 관찰했다.

책장을 부드럽게 넘기는 그의 긴 손. 내리깔린 바비의 푸른 눈동자. 웃음기가 쏙 빠진 진지한


얼굴.

조금 긴 듯한 그의 푸르른 머리카락은, 조금 열어 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옅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 번 보게 된다면, 다른 곳으로 시선을 쉬이 돌릴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저를 스쳐


지나가는 여자 중 열에 아홉은 제게 넘어오게 만들 법한 그런 모습.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객관적인 감상이었다.

나는 바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의 목소리가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갔음에도, 바비는 책장을 향해 있던 시선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닌 듯했다.

“리나 너라면, 나를 찾아 이곳으로 올 줄 알았어.”

그는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나 또한 속삭이듯이 그에게 물음을 건네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마치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뭐 읽어?”

“사랑 이야기.”

“…….”

“어느 남자를 엄청 사랑한 여자가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표현한 이야기.”

“그 여자의 끝은 어떻게 되는데?”

내 물음에 바비의 시선은 그제야 들렸다. 그는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글쎄. 궁금하다면, 네가 직접 읽어 봐.”

“각박하네.”

“그 여자. 어쩌면 나와 닮은 여자인 게 아닐까?”

바비는 제법 진지하게 물음을 건네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넌 추악하지 않아. 내게 해코지를 한 건 아니잖아. 물론 협박은 좀 했지만.”

내 말에 바비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살펴본 그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싱그러움을 잃었던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온 것 같았단 소리다.

나는 그 점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받아 주지 못한 그의 진심 때문에, 바비의 몸과 마음이 더는 상하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내 말이 맞지? 바비 너도 인정하는 바지?”

나는 지난날, 어디든 함께 쏘다닌 친구 사이였던 그때처럼 말했다. 바비는 대답했다.

“어, 인정.”

“휴. 이제야 너랑 진짜로 이야기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친구 사이로서 나눌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를 말하는 거야?”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비는 보고 있던 책을 소리 나게 덮으며 나와 조금 더 진하게 눈을 맞추었다.

“가차 없네. 친구라고 선 긋는 네 말이 잔인해.”


“하지만 말했잖아. 나는 요한 씨를 사랑하게 된 걸. 내 마음이 확실한데, 바비 네게 여지를
주는 건, 너에게나 나에게나 그리고 요한 씨에게나 좋지 않은 일이야.”

“내가 한…… 혹독한 말들은 괘념치 않겠다는 거구나?”

바비는, 언니가 사랑했던 남자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조슈아가 손가락질을 받아도 되겠느냐는
혹독한 말을 남겼었다. 나는 그가 남긴 잔인한 말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 점에 대해선 이미 요한과 결론을 내린 후였다. 우리의 만남이 그러한 이유로는 파해질 수


없다는 게, 우리가 내린 결론이었다.

“상관없어. 함께 이겨 내고, 함께 극복할 거니까. 우린 그렇게 결론을 내렸어.”

“하, 하하.”

바비는 낮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 속에 밴 것은 지독한 허탈감이었다.

소리가 된 그의 웃음소리는 서고 내에 있던 몇 없는 사람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나가자. 나가서, 나랑 대화 좀 해.”

나는 익숙하게 바비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아차 싶었다. 왠지 그래선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색하지 않게 그의 소맷자락을 놓았지만, 바비는 내 행동을 진즉 눈치챈 듯싶었다.

그의 푸른 시선은 물러진 내 손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꽤나 오랫동안. 그렇게.

그의 시선이 닿은 손등 위가 괜스레 따갑게 느껴졌다. 나는 주먹을 꽉 쥐며, 주먹 쥔 손을


드레스 뒤로 천천히 숨겼다.

“……좋아. 나가자. 나도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으니까.”

바비는 쥐고 있던 책을 책장에 반듯하게 꽂은 후, 앞장서서 걸어갔다. 나는 책장에 꽂힌 책의


책등을 흘긋 쳐다보았다.

‘어느 남자를 엄청 사랑한 여자가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표현한 이야기.’

바비가 알려 주지 않은 그 여자의 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순간 원인 모를 병을 앓다 죽어 버린 세나가 잠깐 떠올랐다. 하나 정말로 잠깐 떠오른 것일


뿐, 그녀에 대한 생각은 곧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나는 바비의 뒤를 조용히 따랐을 뿐이다.


* * *

우리가 자리하게 된 곳은 도서관 앞 정원에 위치한 갈색 벤치였다. 약간의 거리를 둔 채로


앉은 우리 사이로 어색한 기류만이 맴돌았다.

절친한 사이였건만……. 왜 이렇게 멋쩍은 걸까.

먼저 말을 꺼낸 쪽은 바비였다.

“세나와 관련된 걸 묻고 싶어서 나를 찾아온 거지?”

그는 내가 저를 찾아온 이유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 같았다.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돌려 말하는 것은 시간만 축낼 뿐이었다.

“응, 맞아. 나는…… 내가 세나와 쌍둥이인 사실을, 네가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

“……응.”

“그리고 네가 가져온 에메랄드빛 귀걸이에 대해서도 궁금하고.”

“…….”

바비는 침묵했다. 그는 무릎 위에 올려 둔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선, 상체를 앞으로 조금


기울이고 있었다.

문득 깨달았을 땐, 바비의 뒤늦은 대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제 77 화. 데이트, 데이트. 첫 데이트

“나는…… 누구를 통해서 네가 쌍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크큭.”

바비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작게 키득거렸다. 내가 얼마나 고뇌한 질문인지, 그는 전혀 모르는


것만 같았다.

“장난치는 거 아니거든? 나 엄청 진지하단 말이야.”

“푸하. 응, 알아. 너 진지한 거. 네가 어울리지 않게 진지하게 구니까, 내가 웃음이 나오는


거잖아.”
그는 제 구두 위를 보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바비는 나와 조용히 눈을 맞춘 채로 이어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네가 날 무서워하는 건 아니라서.”

“바보. 네가 예전처럼만 굴어 준다면, 네가 무서울 이유는 없어.”

“좋아, 그럼 이제 가자.”

바비는 중요한 말을 쏙 뺀 채로 말했다.

적어도 어디에 가는지는 말해 줘야 할 것 아냐.

나는 그에게 물음을 건네었다.

“어디를?”

그러자 그는 노래를 부르듯이 한마디를 읊조렸다.

“데이트, 데이트. 첫 데이트.”

그것은 이상한 음정에 서린 이상한 말이었다. 그의 괴팍한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금세 웃음을 거두어들였다.

여기서 웃어 주면, 바비의 말에 완전히 넘어간 것 같았으니까.

얜, 진지한 말을 하려고 만났는데 왜 이렇게 우습게 구는 거야.

그러고 보니, 과거에도 바비는 내가 심각해할 때마다 우스갯소리를 즐겨 했었다. 그는


심각해진 내 얼굴을 보는 것을 힘들어했고, 내가 늘 웃기를 바랐다.

물론 매 순간 눈치 없이 웃긴 소리를 한 것은 아니었다. 내게 정말로 중대한 일이 벌어졌을 땐,


그는 나보다도 더 진지하게 굴며 해답을 함께 고뇌해 주었다.

때와 상황에 따른 정확한 기교. 나는 바비의 그런 점을 높게 사고 있었다.

되짚어 볼 때마다, 너는 좋은 구석이 정말 많은 녀석인데…… 왜 하필 나를 좋아해서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

나는 침묵했고, 바비는 보조개가 들어간 예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해가 질 때까지만 나랑 데이트해주라. 그럼 네가 궁금해하는 걸 모두 알려 줄게.”

나는 늦지 않게 대답을 해 주었다.

“진심이야? 이건 노파심에 물어보는 건데,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보는 앞에서 팔을 부러뜨린다든지, 달리는 마차에 뛰어든다든지……. 내가 거기까지
말하자 바비는 얼굴을 와락 구기고선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무슨 그런 해괴망측한 말을 하느냐는 모양새였다.

……넌 이미 그런 해괴망측한 짓을 한 사람이라고.

그는 내 관심을 끌기 위해 스스로 팔을 부러뜨린 과거의 자신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무서우면 거절해, 리나. 하지만 돌아가신 부모님께 맹세할게. 네가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논하는 바비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는 진심을 다해 토로했고, 나는


그의 진심이 의심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바비를 믿고 싶었다. 아니, 믿어 주고 싶었다.

우리가 지난 일 년간 쌓아온 유대를, 그가 허물지 않길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좋아. 그래서 어디로 데이트를 하러 가고 싶은 건데?”

나는 그리 말하면서, 어딘가에 숨어 있을 요한과 조슈아를 떠올렸다.

바비와의 데이트. 나를 미행하는 부자에게 괜찮으려나.

* * *

우리는 내가 공작저에 들어가기 전까지 함께 자주 거닐던 대로를 함께 걸었다. 가끔 길거리


음식을 사 먹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물건을 보며 키득거리기도 하면서.

데이트라는 로맨틱한 말이 붙기는 했지만, 그것은 데이트라기보다는 그와 친구로 지냈을 때


했던 일과 다름이 없었다.

자고로 데이트란, 서로의 손도 잡고, 야릇한 눈빛도 몇 차례 나누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입술도 맞대는 게 제격인데…….

나는 그 순간 요한을 절실히 떠올렸다.

손도 잡고, 야릇하게 쳐다보고, 입술을 맞대고 싶은 남자는 그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티가 나지 않게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대로를 거니는 수많은 사람 중 해괴한 모자를 쓴


요한과 조슈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나를 잘 따라오고 있는 걸까?

“리나. 찾는 게 있어?”

“……!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고개가 좀 뻐근해서……. 하하하. 내가 누구를 찾고 있다는


소름 끼치는 착각을 하는 건 곤란해.”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나를 보던 바비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그 말투……. 왠지 모르게 굉장히 익숙하다. 소름 끼치게 싫은 말투라고 해야 할까.”

“어?”

나는 조금 전, 내가 했던 말을 상기해 보았다.

‘소름 끼치게’를 운운했던 내 말. 그것은 필시 누군가를 단번에 떠올리게 만드는 어투였다.

‘내가 너를 걱정하는 건 절대로 아니야. 소름 끼치는 착각은 하지 마.’

속으론 걱정을 하고 있지만 아닌 척하는 말. 제 진심을 솔직히 표현할 용기가 없어 빙빙


둘러서 하는 말.

하지만 얼굴은 또 얼마나 솔직한지, 그리 말하는 얼굴엔 걱정스러운 빛이 잔뜩 스며 있는 그


남자.

나 원. 요한의 말투였잖아.

나는 이마를 짚었다.

“요한에게 옮았어?”

“……아마도 그런가 봐.”

대답하는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빌어먹을 형이 별걸 다 옮겼네.”

“그러게. 별걸 다 옮았어.”

나는 끔찍하다는 듯이 말하며,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음. 우리 이제 안으로 들어갈까? 계속 걸어 다녔더니, 목이 탄다.”

“응. 좋아.”

우리는 가까운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로 들어가고, 창가에 있는 자리에 자리를 잡고, 시원한
음료가 나올 때까지도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나지 않았다.

물론 중요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공통적으로 아는 주제에 대해서 대화하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다.
그러고 있으니, 요 며칠간 바비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나를 향한
바비의 고백도, 해쓱해졌던 그의 얼굴도.

모든 것이 지독하고도 긴 꿈에서 본 광경들처럼 느껴졌다는 거다.

이성적인 감정이라곤 전혀 없는 동성 친구와도 가까운 사이. 나는 오랜만에 그와 예전처럼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바비의 기분은 어떨까.

그는 애당초 나와 이성적인 감정이 없는 관계를 바라지 않았다.

나의 편함은 오히려 바비에게는 불편함으로 느껴질지도 몰랐다.

“리나.”

“……응.”

“내 얼굴을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나 착각할 수도 있어.”

바비는 픽 웃으며, 제 앞에 놓인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그는 목을 축일 정도로 가볍게 음료를


마신 후 다시금 내게 말을 건네었다.

“어렸을 때, 나와 요한은 제법 의좋은 형제다웠어.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도 했고,


서로를 위한 생일선물도 준비하기도 했고.”

그것은 꽤나 뜻밖인 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사이가 왜 나빠진 거야?”

바비는 대답 대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도 생기가 더해진 얼굴이었지만, 대답을 망설이는 그의 얼굴은 조금


지쳐 보였다.

“바비. 대답해 주기 힘든 질문이라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사정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바비는 고개를 느릿하게 내저었다.

“아니야. 오늘은 다 말해 주기로 한 날이니까. 말해 볼게.”

“…….”

“세나……때문이었어. 내가 세나를 좋아했기 때문에. 우린 그때 어렸고, 요한은 어린 마음에


세나를 좋아하게 된 내가 싫었나 봐. 물론 나도 요한을 좋아했던 건 아니야. 우린 아주 치열한
연적이었지.”

나는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선 그의 사연을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시작은 세나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우리 사이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어. 우리를 중재해
줄 세나는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우리의 사이는 악화된 상태로 굳어진 거야.”

“그런 너희 사이에 이번엔 내가 끼어들게 된 거고?”

“물론. 그리고 좀 더 악화된 거지.”

“하. 내가 인기가 많은 탓이었네.”

허세가 가득한 내 말에 바비는 엷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세나도 너도 결국은 요한을 택했잖아. 나 원. 내가 남자로서 그렇게 매력이 없는 건가.


얼굴 하나는 정말로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웩. 웬 근거 없는 자신감이야.”

바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제 말을 도로 회수할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나는 속아 주는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바비의 얼굴은 내가 보아도 빠지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네게 할 만큼은 다 해 봤다고 생각해. 네 관심을 얻기 위해 내 몸을 학대하기도 했고,


네게 진심으로 고백해 보기도 했고, 네가 궁금해하는 사실로 협박을 하기도 했고.”

“…….”

“협박해서 미안. 그렇게 한다면……. 네 마음이 조금은 돌아설 줄 알았어.”

바비는 쓰게 미소 지으며 이어 말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간과했던 거야. 너는 그런 시련을 이겨 낼 수 있는 강인한 마음을 가진 여자라는


걸. 넌 네가 사랑하는 것엔 정성을 쏟아붓잖아.”

예전에 잡화점에서 키우던 금붕어를 네가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는 내가 다 아는 사실이지.


바비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과거의 일을 들먹이기도 했다.

“……아니야. 네 말을 듣고, 나는 요망한 부자의 곁을 떠나야 하는 걸까, 라는 심각한 고민을


했어. 하지만 요한 씨가 나를 잡아 주더라.”

그때, 요한이 좀 멋있기도 했지. 아암.

요한은 나의 고뇌와 걱정을 한 번에 날려 줄 정도의 강력한 박력을 내게 보여 주었었다.

하지만 바비는 내 말을 반신반의하는 듯했다.

“오, 그 겁쟁이가?”

“응. 그런 걸 왜 신경 쓰느냐고 도리어 화도 낸 거 있지.”


“겁쟁이가 제대로 한 건 했네.”

“요한 씨가 왜 겁쟁이야?”

“세나의 죽음을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를 망가뜨렸으니까. 조쉬도 돌봐야 하는


처지인 주제에…… 매일 제 몸을 혹사시킬 정도로 와인을 마셨잖아.”

바비는 부정적으로 말했지만, 그의 말 속에 밴 감정은 ‘걱정’이었다.

녀석은 아닌 척했지만, 요한을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 요한 씨를 꽤 걱정했구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 녀석이기는 해도 일단은 함께 자란 형제니까. 형제는 왠지 완전히 미워할


수 없게 돼.”

형제는 왠지 완전히 미워할 수 없게 돼.

묘하게도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나를 증오했던, 심지어 나를 절벽에서 민 듯한 나의 자매를, 내가 완전히 미워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그녀가 좀처럼 밉지 않았다. 그것은 제법 묘한 일이었다.

“리나.”

“응.”

“아까, 그 소설 속 여자의 결말에 대해서 물었잖아.”

바비는 유리잔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내리깔린 그의 시선은 유리잔에 담긴 음료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도서관에서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했다.

‘어느 남자를 엄청 사랑한 여자가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표현한 이야기.’

내가 바비에게 물은 것은 어느 남자를 엄청 사랑한 여자의 끝.

바비는 늦지 않게 제 말을 이어 갔다.

“파국이야. 아무도 행복해지지 못해. 그 여자도, 그 여자가 집착했던 남자도, 그 남자가


사랑했던 여자도. 아무도.”

이윽고 내리깔렸던 그의 시선이 들렸고,

“집착은 사랑이 아닌 거야. 강요된 사랑은 서로에게 불행을 안겨 줄 따름이지.”

말을 끝마친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 순간, 창백할 정도로 하얀 그의 얼굴 위로 붉은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얼굴이
실제로 붉어진 것은 아니었다.

붉은 색채의 주인은 창밖으로 들어온 석양빛이었다.

모든 것들을 붉게 물들이는 압도적인 석양빛은 바비의 얼굴을 붉고, 또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연상하게 하는 그의 푸른 머리칼도, 파란 눈동자도, 그가 입고 있던 흰 셔츠도,


유리잔을 매만지던 바비의 흰 손마저도.

아름다운 오늘의 석양은 이 데이트의 끝을 의미하기도 했다.

“행복해야 해, 리나.”

 
바비 또한 허술했던 우리 데이트의 끝을 인지한 듯싶었다.

“……바비.”

“네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많이 생각하고 반성했어. 내가 너를 더욱 집착하게 된다면,


우리도 결국 파국을 맞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

“이렇게라도 너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마지막을 뜻하는 듯한 그의 말이 내 마음에 사무쳤다. 심장이 저릿한 기분마저도 들었다.

나는 바비라는 사람을 완전히 잃고 싶지 않은가 보다.

나를 사랑하는 바비가, 나와 친구로 남아 주기를 바라는 것은 나의 욕심인 걸까?

나는 바비가 나라는 사람을 완전히 등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와의 인연을 이대로 정리하기엔
그와 나눈 추억이 너무도 깊었다.

“울 것 같은 표정 짓지 마. 착각하고 싶잖아.”

“…….”

“네가 바란다면 내일부턴 완벽한 친구로 돌아갈게. 나도 너를 완전히 외면하지 못하겠으니까.”

바비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다 눈치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지 말라고 했던 것은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붉어진 그의 눈동자가 더욱
붉어져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석양빛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바비는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짓이겨진 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울음이라도


참는 듯이.

그때, 유리잔을 매만지던 그의 손이 앞으로 천천히 뻗어졌다. 그의 손은 테이블 위에


무방비하게 놓인 내 손을 맞잡았다. 맞닿은 바비의 손이 꽤나 뜨거웠다.

“하지만 요한이 잘 못 해 준다면, 곧바로 내게 와. 나는 언제고 너를 기다릴게.”

나는 덧대어진 그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적어도 오늘, 지금만큼은 잠깐 손을 잡고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바비의 손을 맞잡을 일은 영영 없을지도 몰랐다. 아주 영원히.

바비는 물기에 젖은 눈으로 창밖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는 푸른 하늘을 가득 물들인


석양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해가 완전히 지면, 우리의 데이트도 끝이 나는 거겠지.”

“…….”

“그럼…… 이제 네가 물은 것들에 대한 답을 해 줄게.”

돌아갔던 바비의 시선이 천천히 비틀리며, 이윽고 내게 닿았다. 그는 늘 그렇듯 부담스럽지


않게 나와 눈을 맞추었다.

“응. 듣고 있어.”

“일 년 전에 세나와 닮은 여자가 저잣거리에 있다는 사실도, 네가 세나와 쌍둥이라는 사실도,


모두 한 사람이 알려 준 거야.”

그 순간 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욘두.

과연 내 예상대로 그가,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의 원흉과 관련이 있는 걸까?

잠깐 말을 멈추었던 바비의 입술을 다시금 천천히 떼어졌다. 그는 주저함이라곤 전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모두 다 욘두가 알려 준 거야.”

 
제 78 화. 형아. 나 싫어?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바비에게 모든 것을 알려 준 이는 욘두였던 것이다.

“별로 안 놀라네?”

바비는 내 얼굴을 세세히 뜯어보고 있었다.

“아, 대충 예상하고 있었어. 정황상 욘두 쌤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거든.”

그러자 바비는 도리어 제가 당황을 했다.

“뭐? 혹시 욘두가 네게 나쁜 짓이라도 한 거야? 그 망할 자식이!”

바비는 당장이라도 욘두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애절하게, 곧 눈물이라도


흘릴 양 굴던 그의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인 모습이었다.

“진정해, 바비. 그가 내게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어.”

하지만 과거엔 그러한 짓을 했을지도 모르지. 나는 차마 거기까지 말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바비는 진짜냐는 말로 내게 거듭 확인을 하였다.

비록 나에 대한 정보를 욘두에게 얻었지만, 바비 또한 욘두를 신뢰하지 않는 듯해 보였다.

“……정보를 쥔 쪽이 욘두이기 때문에 그를 몇 차례 만났지만……. 나도 그 자식을 보면 왠지


모르게 찜찜해.”

“왜?”

“내게 너에 대한 정보를 일러 주기는 했지만, 욘두는 제일 중요한 무언가는 정작 털어놓지


않는 듯한 분위기였거든.”

“제일 중요한 무언가라.”

욘두가 바비에게 털어놓지 않은 제일 중요한 정보는 무엇일까.

바비는 제 고백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이어 말했다.

“아, 그리고 에메랄드빛 귀걸이는 며칠 전에 잡화점 내외분께 받은 거야.”

“리키 아저씨와 마틴 아주머니에게?”


“어. 그 귀걸이, 네가 사고를 당한 날, 네가 꼭 쥐고 있었던 거래. 그래서 나는 그것이
잃어버린 네 기억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그 귀걸이의 나머지
한쪽은…….”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한 채로 동시에 읊조렸다.

“욘두가 가지고 있지.”

“욘두 쌤이 가지고 있어.”

그리고 나는 내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싸늘한 비가 내리던 날. 절벽에서 나를 밀쳤던 나와 닮은 여자와, 그 여자의 귀에 걸려 있던


에메랄드빛 귀걸이를.

5 년 전 사고를 당했던 그때, 내가 꼭 쥐고 있었던 것은 분명히 그 여자의 귀걸이일 것이다.

그렇다면 욘두가 귀걸이를 나눠 낀 그의 연인이 세나라는 사실이 확실해진 걸까?

아니, 내가 세나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게 된다.

욘두와 연인이었고, 욘두와 귀걸이를 나누어 낀 그 여자는 바로…….

진짜 리나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큰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 그 의문은 바로 어째서 욘두가 우리


자매 일에 연관이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제 내가 알아내야 할 것은 욘두의 ‘동기’였다.

그때,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 당장 그 손 떼지 못해? 두 사람, 떨어져!”

얼마나 큰 소리였던지, 카페에 있던 몇 없는 손님들의 시선을 모두 주목시킬 정도였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이번엔 아주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흔해 보이는 상앗빛 셔츠를 입고, 얼굴을 반쯤 가리는 모자를 썼지만, 그럼에도 뛰어난 체격과
잘생긴 얼굴을 숨길 수 없는 내 남자, 요한.

새로이 등장한 이는 요한 하나가 아니었다.

“조슈아도 아빠의 말에 동의해! 엄마 손은 조슈아만 잡을 수 있어!”

귀여운 모자를 쓴 조슈아 꼬맹이가 제 아빠의 말에 동조했다. 요한은 조슈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조쉬, 나는 잡아도 되지?”

“아빠는…… 글쎄.”

“…….”

왠지 부정을 뜻하는 듯한 조슈아의 애매한 대답에, 요한은 침묵했다.

귀여운 촌극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푸훕, 하는 우스운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까 안 보이던데, 도대체 언제 카페까지 따라 들어온 걸까.

나는 바비에게 속삭이듯이 물어보았다.

“바보 같은 네 형이 등장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다시금 바라본 바비의 얼굴엔 놀란 빛은 조금도 드리워져 있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아주


침착해 보였을 뿐이다.

알고 있었던 걸까?

“너무 늦게 등장했다고 생각해.”

“……어?”

“도서관에서부터 우리를 미행하고 있었다는 거, 이미 다 알고 있었으니까.”

허술해도 그렇게 허술할 수가 없잖아. 바비는 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이미 모든 것을 일찌감치 눈치챈 듯한 여유로운 미소였다.

* * *

“조슈아는 단 게 좋아.”

내 옆에 앉은 조슈아는 제 앞에 놓인 다디단 음료가 든 유리잔에 손을 뻗었다. 나는 유리잔을


아이 쪽으로 가까이 가져다주며 말했다.

“그래도 단 거는 자주 먹으면 안 돼. 이가 아파질 수도 있으니까.”

“응. 하지만 오늘은 먹어도 되는 거지?”


“응. 오늘만 허락해 줄게.”

이내 조슈아는 유리잔을 집어 들었으나, 그 유리잔은 곧 누군가에게 빼앗기고야 말았다.

“안 돼. 조쉬 너, 공작저에서도 단 음료를 마시고 나왔잖아. 네게 정해진 단 것의 오늘


할당량은 모두 끝났어.”

단호하게 말한 이는 조슈아의 옆에 앉은 요한이었다. 즉, 우리는 조슈아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요한은 기품이 넘치는 손짓으로 유리잔을 저 멀리 가져다 놓았다.

“아빠는 나빠. 아빠는 조슈아를 미워하는 거지?”

나는 불만으로 인해 볼이 빵빵해진 조슈아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애한테 왜 그래요. 뭐처럼 나왔는데, 그냥 마시게 해 줘요.”

“그래서 조쉬의 건강이 악화되면, 네가 책임질 건가?”

“고작 단 음료를 하루에 두 잔 마셨다고 해서, 어떻게 되지는 않아요.”

나 원. 아이에게 왜 이렇게 각박하게 구는 거야.

요한과 나는 의견의 차이를 쉬이 좁히지 못하며,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나를 응시하는 요한의 눈빛 속엔 불만이 그득했다. 그것은 꼭 내가 조슈아에게 단 음료를


허락했기에 든 불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내가 바비와 잠깐 손을 맞잡은 사실에 대한 불만기도 서려 있다고 해야 하나.

경쾌한 박수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엄마, 이겨라. 엄마, 이겨라.”

조슈아는 정성을 다해 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이봐요들, 내가 같이 있다는 걸 기억해 줬으면 좋겠는데. 난장판이 따로 없네.”

그것은 맞은편에 앉은 바비의 목소리였다.

“어휴.”

구겨지듯 쪼르륵 앉은 우리를 보고선, 바비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요한과 조슈아는 얼결에 우리와 합석하게 되었고, 좁은 의자임에도 요한과
조슈아는 기어코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고.

“흠흠.”
요한은 괜스레 멋쩍은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선 그는 저 멀리 두었던 유리잔을 다시금 집어
들었다.

“그럼 오늘 하루만 허락해 주도록 하지.”

많이 봐 줬다는 어투에 가까웠다. 요한은 제법 다정하게 조슈아의 작은 손에 유리잔을 직접


쥐여 주었다.

“와, 와! 조슈아는 이제 알 것 같아. 아빠는 나를 미워하지 않아!”

고작 단 음료 하나에 요한에 대한 호불호가 결정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요한은 아이의 머리카락을 투박하게 헝클어뜨렸다.

“너를 미워한 적은 한 번도 없어.”

그것은 투박한 말에 서린 자상한 말이었다.

“그래서 내 존재는 언제 인식해 줄 건데. 이거 참 미행도 당하고, 리나와 함께하는 시간도


방해받고.”

바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요한은 그제야 바비와 진득하게 시선을 맞추었다. 먼저
입술을 뗀 쪽은 요한이었다.

“바비. 쥐새끼 같은 놈…….”

요한은 ‘쥐새끼 같은 놈’이라는 말을 자못 애절하게 불렀다.

얼마나 애절했냐면, 그가 상스러운 말을 내뱉었다고 인지되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애칭을


부른 것처럼 들릴 정도였다면.

요한답지 않은 목소리를 들은 바비는 식겁했다.

“됐어,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지금까지 부족한 형이었다니, 네게 못 해 준 게 많아서


미안하다느니 하는 말. 진짜로 하지 마. 엄청 소름 끼치니까.”

바비는 거기서 요한에게서 어떤 낌새를 느꼈나 보다. 가령 과거, 부족했던 제 모습에 대한


사과라든지.

하긴. 요한은 지난밤, 형으로서 미숙했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자조했었다. 그러한
그였기에, 바비에게 사과의 말을 먼저 꺼낼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이어진 요한의 말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무슨 소리야? 나는 네가 왜 함부로 내 여자의 손을 잡았는지 따지고 싶었던 것뿐인데?”

바비는 허탈한 소리를 내었다.

“허!”
“리나와 나는 이제 서로의 마음을 완벽하게 확인한 사이야. 네가 끼어들 틈이 없다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리나의 손을 잡지 말도록.”

“……리나. 봤지? 요한이 이런 놈이야. 형이 이런데 어떻게 우리의 관계가 개선될 수 있겠어.”

바비는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그러자 요한은 발끈하였고,

“너! 그런 식으로 은근슬쩍 말 돌리지 마.”

이번엔 내가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둘 다 그만해요. 애도 아니고 만나기만 하면 매번 싸우네. 그리고 진짜 애 앞에서 애처럼


싸우는 거 부끄럽지 않아요?”

나는 유리잔에 완전히 집중한 조슈아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조슈아는 별거 아닌 일인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엄마, 나는 괜찮아. 저번에 말했잖아. 아빠랑 삼촌은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고.”

그리 말하는 아이의 시선은 유리잔에만 꽂혀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그들의 싸움에 매우


익숙해했고, 두 남자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 조슈아 앞에서 당장 화해해요. 손 뻗고, 악수하는 거예요.”

두 남자 중 선뜻 먼저 손을 뻗는 이는 없었다. 두 사람 다 오묘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그것은 악수를 하기 싫어서 지은 표정이 아니었다.

“…….”

“…….”

어쩐지 애달픈 기운이 가득한 듯한 얼굴. 그것은 누군가를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이를테면
세나라든지.

‘시작은 세나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우리 사이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어. 우리를 중재해
줄 세나는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우리의 사이는 악화된 상태로 굳어진 거야.’

바비의 말처럼 세나도 이런 식으로 두 남자를 중재했던 걸까?

까닭 없이 코끝이 찡해졌다. 깨달았을 땐, 눈동자에선 뜨거운 것이 툭 흘러내렸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려, 눈가를 쓸었다. 손끝에 묻어 나온 것은 눈물이었다.

“…….”

웬 눈물이지. 눈을 한 번 느릿하게 깜빡이자 귓가엔 환청에 가까운 여러 소리들이


메아리치듯이 울렸다.

‘요한, 바비. 얼른 화해해.’


‘두 사람. 내가 없으면 어쩔 거야? 매일 싸울 거야?’

‘쯧쯧. 영원히 같이 있어 줘야겠네.’

지나간 과거에도 오늘과 비슷한 일이 있었고, 그때의 나도 싸우던 두 남자를 중재한 것 같은


이상한 느낌.

맞은편에 앉은 바비는 내 눈물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 리, 리나. 갑자기 왜 울어? 우리가 화해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나도 모르겠어.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나.”

모르겠다고는 했지만, 실은 나는 내 눈물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런 광경이 너무 오랜만인 것 같아서. 너무 그리웠던 것 같아서.

잊고 있던 소중한 것들에 울컥해서.

얼마 못 가 요한 또한 나의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눈치채기에 이르렀다. 요한은 얼른 손을


앞으로 뻗으며, 바비에게 소리쳤다.

“바비, 뭐 해! 얼른 내 손을 잡아. 너 때문에 리나가 울잖아.”

바비는 뻗어진 요한의 손을 꽉 잡았다.

“나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겠지. 요한.”

도대체가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싸우는 너희는…….

“두 사람, 싸우지 말라니까.”

나는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토로했다.

“알, 알겠어. 바비. 웃어. 미소.”

“하하하. 형, 오랜만에 사이좋은 형제 느낌이 나서 너무 기쁘다.”

“아까부터 자꾸 소름 끼치게 형이라고 부르네? 그냥 평소처럼 요한이라고 불러.”

“왜, 형아. 나 싫어? 우리 지금 의좋은 형제여야 하잖아.”

“하하하. 녀석. 그사이에 넉살이 늘었구나.”

화해하는 듯 아닌 듯한 이상한 대화가 몇 차례 지나갔다. 닮은 듯 닮지 않은 의좋은 형제인


바비와 요한은 서로 대화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내 얼굴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눈물은 오랫동안 흐르지 않았다. 두 남자의 어쭙잖은 대화를 듣고 있자니,
울음은 자연스럽게 그쳤다.

그 대화, 좀 우스워야지.

“우와……. 조슈아는 아빠랑 삼촌이 저렇게 사이좋은 걸 태어나서 처음 봐.”

조슈아는 태어난 지 고작 오 년밖에 되지 않은 주제에, 엄청 오래 산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말이 우습고 귀여워 끝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울다가 웃으면 큰일이 난다는 말을 모른다는 듯 해맑게 웃는 건, 에믈린 하나만이 아니었나


보다.

* * *

요한과 나, 그리고 조슈아는 공작저로 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바비와는 깔끔하게 헤어진


뒤였다. 바비는 심지어 우리를 마차까지 배웅해 주기까지 했다.

마차에 올라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내 무릎을 베고 누운 조슈아는 금세 잠이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의 미행 일정이 힘들었나 보다.

조슈아가 잠든 것을 확인한 요한은 돌연히 고백했다.

“고마워.”

나는 내 옆에 앉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네, 미인 거지가 당신의 고마움을 받아 줍니다.”

“……한 번쯤은 겸손해지면 안 되는 건가?”

“그래서 싫어요?”

“아니, 겸손하지 않는 너조차도 귀여워 보이는 내가 밉다…….”

요한은 시름이 가득 밴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그의 어깨 위를 두어 번 토닥여 주었다.


격려라도 하는 것처럼.

“사랑에 빠지면 원래 다 그렇대요. 그런 말도 있잖아요. ‘네 모든 모습이 긍정적으로 보여.’”

“너도 그래?”

“물론. 저도 밥맛 같은 당신이 밥맛이 아니라 귀여워 보여서 얼마나 흠칫흠칫 놀랐다고요.”

“왠지 별로 기쁘지 않아.”


요한은 께름칙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작게 킥킥거렸다.

“큭큭. 아무리 제가 신경 쓰여도 그렇지. 카페에서 그렇게 불쑥 나타나면 어떡해요.”

“그럼 어떡해. 바비가 네 손을 잡고선, 애절한 표정을 짓는데…….”

“바비가 우리의 행복을 빌어 준다고 했어요. 그간 나쁘게 군 것도 사과 했고요.”

요한은 대답 대신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래서 뭐가 고맙냐면…… 바비와 화해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는 말이었어. 네가 없었다면


우린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했을 거야.”

“…….”

“형…… 이라는 말.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거든.”

“앞으로도 계속 들었으면 좋겠어요.”

“글쎄. 그렇게 되려나.”

요한은 애매하게 대답했지만, 그 어투 속엔 긍정적인 기류만이 가득했다. 요한 또한


악화되었던 바비와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완화되기를 바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바비가 알고 있던 정보의 출처가 누군지, 알아냈어요.”

“…….”

느른한 미소를 짓고 있던 요한이 조금 굳었다. 그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고,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요한에게 사실을 토로하였다.

“그 정보들은 모두 욘두가 일러 준 거예요.”

“바비의 말을 믿어?”

“적어도 오늘 고백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전 믿어요.”

“리나 네가 믿는다면 나도 믿을게.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나는 요한의 말을 친절하게 이어 주었다.

“욘두에게 사실을 확인하는 일밖에 남지 않았어요.”

 
제 79 화. 내가 너의 삼촌이란다

욘두는 책상 위에 있던 장미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러고선 그것을 구둣발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세게 짓이겼는지 탐스러운 붉은빛을 자랑하던 장미들은 얼마 못 가 처참한 형태로 변해


갔다.

“……하.”

진한 한숨을 쉰 욘두는, 장미를 힘껏 짓이기던 것을 멈추었다.

힘없고 나약한 것에 화풀이하는 것이 얼마나 소모적인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욘두는 흘러내린 동그란 안경을 끌어 올리며, 의자 위에 쓰러지듯이 앉았다.

거듭된 마법 실험으로 인해 희뿌연 연기로 가득 메워진 방 안. 욘두의 한숨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왜…… 왜 마지막은 항상 실패인 걸까.”

욘두는 지난 4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한 가지 연구만을 해 오고 있었다.

일 년 열두 달, 쉰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진척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꼭 마지막, 즉 ‘사체에 적용시킬 때’에만 그의 마법은 항상 실패를 해 왔다.

그는 그동안 영원히 시들지 않는 장미를 만들어, 그것의 생명력을 시든 장미에게 전달하는


실험을 해 오고 있었다.

시든 장미에게 생명력을 부여해, 태초에 가졌던 싱그러움을 되찾아 주는 실험.

결론을 말하자면, 그는 죽은 식물을 완벽하게 재생시키는 데에 성공을 했다.

하지만 그 생명력은 4 년 전에 죽어 버린 그녀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욘두가 궁극적으로 이뤄 내고 싶은 연구는 바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마법’이었다.

그는 제법 긴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심신이 몹시도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난 4 년간 꾸준히 해 온 마법 연구를 인제 와 그만둘 수는 없었다.

괜찮을 것이다. 오늘은 실패했으나, 내일은 성공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 순간 욘두의 머릿속에 맴도는 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 속 어느 여자아이가
해 주었던 말이었다.

‘욘두. 너는 뭐든 정말 열심히 하는 것 같아.’

그래, 그녀가 제게 했던 말처럼 자신은 노력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꾸준한 노력은 언젠간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되리라.

욘두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의자에 제 몸을 기대고 있던 욘두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비척거리는 걸음걸이로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방의 한쪽을 가득 채운 커다란 침대였다. 욘두는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이미 먼저 누워 있던 어느 여자 옆에 제 몸을 누이었다.

욘두는 마주 본 여자의 얼굴을 세세히 들여다보았다.

죽은 자의 것처럼 창백한 피부, 핏기를 잃은 입술, 시원스럽게 잘 뻗은 콧대, 절대로 들리지


않을 듯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 그 위에 자리한 기다란 금빛 속눈썹.

그녀의 모습은 4 년 전, 그녀를 관 속에서 꺼내오던 날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몸은


조금도 썩지 않은 채였다.

풍화되지 않은, 껍데기는 산 자와 똑같은 육신. 차갑게 식어 버린 것은 그녀의 붉은 심장


하나뿐이었다.

랭카스터 공작가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그녀의 시신을 훔쳐올 수 이유는, 그가 마법사였던


까닭이었다.

일반인은 감히 예상도 하지 못하게, 쥐도 새도 모르게, 그는 마법으로써 시신을 훔쳐 올 수


있다는 거다. 복잡한 이동 마법이 그 해답이었다.

욘두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새겨 둔 비석 속 메시지를 떠올렸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틀렸다고, 욘두는 생각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제 마음을 얼마나 송두리째 빼앗아 갔는지. 그녀가 진짜로 가지고
있던 게 무엇인지.

그녀는 그녀가 가지지 못한 것에만 욕심을 부렸다. 그 욕심이 그녀의 목숨을 일찍 앗아 간


원인이었을지도 몰랐다.

욘두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닿은 곳은 여자의 핏기 없는 입술 위였다.


그는 그 위를 두어 번 두드렸다.

“나의 연인.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나의 연인에게는 어째서 장미의 숭고한 생명력이 닿지 않는 걸까.

시들대로 시들어 생명력을 다한 붉은 장미가, 살아 있는 장미의 생명력을 부여받아 다시


살아나듯, 왜 당신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것은 생명력을 가진 주체가 다르기 때문일까?

장미 대 사람이 아닌, 사람 대 사람이여야만 가능한 일인 걸까.

당신과 닮은 사람의 생명력을 부여받아야, 죽은 당신이 살아나는 걸까?

그렇게까지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 방법만이 당신을 살릴 방법이라면.”

욘두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모든 일을 다 해 보겠어. 설령 누군가가 고통 받는 일이라도.


누군가에게 용서 받지 못한 일이 될지라도.

“흐음. 당신과 닮은 사람이라.”

욘두는 누군가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그의 머릿속에 잔상처럼 맴돈 이는 밝고 건강해 보였던


조슈아의 유모님이었다.

두 여자. 쌍둥이이니 당연히 닮았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입술에 닿아 있던 욘두의 손은 옆으로 조금 비켜 갔다. 그는 그녀의 얼굴 위로


흘러내린 금빛 머리칼을 그녀의 귀 뒤로 조심스럽게 넘겨 주었다.

“당신이 곧 살아날 줄 알고, 그들을 그냥 두었는데…… 그러지 말 걸 그랬나 봐요.”

요한, 유모님, 그리고 바비. 그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바비와는 실제로 몇 차례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욘두는 요한이 자신의 저택으로 들어와 ‘세나의 일기’를 가져간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이전 날, 공작저의 복도에서 요한과 마주쳤을 때, 요한이 절절매던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했다.

“푸흡.”

바보 같은 요한의 모습을 떠올리기 무섭게 욘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비웃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랭카스터 가의 가주가 그토록 아꼈던 요한 랭카스터.


그 작자가 고작 사용인의 집에 몰래 들어와 책을 훔친 꼬락서니라니.

선대 가주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황당해 했을까. 어쩌면 목덜미를 잡고선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선대 가주는 체통과 위신을 그만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었으니까.

다 알면서도 그들 모두를 그대로 둔 이유는, 역시나 그녀가 곧 살아날 거라는 강인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밝혀진다고 할지라도, 그땐 이미 뒤늦은 일이 될


거라고.

그때엔 되살아난 그녀와 함께 이곳을 떠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욘두의 마음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이러다간 그녀가 살아나기 전에, 요한과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계획이 들통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욘두는 그녀에게 물었지만, 그녀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으니까.

“…….”

욘두는 오랫동안 잠든 것처럼 죽은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매일 보아도 질리지 않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비록 대화를 나누지 못하지만 이렇게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욘두는


생각했다.

대화를 나누지 못해도 이렇게나 좋은데, 실제로 대화를 나눈다면 얼마나 흥분이 될까.

“당신과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눌 날이 얼른 다가왔으면 좋겠어요.”

욘두는 턱을 조금 들어 올려, 그녀의 이마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닿은 그녀의 이마


위는 차가웠다.

살아 있는 자의 온기라고는 전혀 스미지 않은 그녀. 욘두는 제법 오랫동안 입술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온기를 가져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입맞춤은 과거, 그녀가 원인 모를 병에 앓았던 그때에 했던 입맞춤과 닮은 것이었다.

이윽고 입술을 뗀 욘두는 픽 웃었다.

“쉬고 계세요. 저는 잠깐 차를 마시러 나가 보겠습니다.”


욘두는 소란스럽지 않게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깊은 밤, 등불 하나 켜지 않은 거실이었지만 욘두는 익숙하게 주방까지 걸어갔다. 그는 자주


애용하는 찻잔을 꺼냈고, 능숙하게 찻물을 우려냈다.

그는 찻잔을 들고선 거실 중앙에 있던 소파까지 걸어갔다. 걸어가는 내내 그의 두 눈은 제집


안을 살피고 있었다.

몇 없는 가구. 정갈하고 심플한 집 안. 사람 냄새라곤 나지 않는 자신의 텅 빈 집.

그는 소파에 앉은 채로 기다란 다리를 꼬았다. 그러곤 찻잔을 들어 올려, 입술을 적실만큼만


찻물을 가볍게 들이켰다.

욘두의 시선은 거실의 책장에 꽂힌 여러 책들에 닿아 있었다.

그는 책장에 꽂힌 수많은 책을 보며 생각했다. 책의 위치가 달라져 있다, 고.

물론 그것은 아주 미미한 변화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욘두는 그런 것에 꽤나 예민한


편이었다.

어느 곳에 무엇이 있는지.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기억하게 되는.

물건을 자주 놔두고 다니기는 하나 그럼에도 곧바로 잊힌 물건을 찾을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까닭이었다.

제집을 방문한 이는 요한 하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아무래도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는 누군가가
또다시 방문한 듯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쯤에.

물론 집 안에 들어왔다고 해도, ‘그녀’가 존재하는 방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할 테지만,


그렇지만…….

욘두는 동그란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찻잔을 올려 두고선, 혼잣말을 했다.

“그래도 일을 빨리 매듭짓는 게 좋겠군.”

장장 4 년간 준비해 온 일이었다.

깨어나지 못하는 깊은 잠이 빠져든 그녀의 쌍둥이 언니 때문에 모든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 * *
다음 날, 일찍 잠에서 깬 욘두는 서둘러 공작저에 갈 준비를 했다. 그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늘 조슈아에게 가르쳐 줄 자료를 꼼꼼히 챙겼다.

그는 가벼운 콧노래와 함께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요한에겐 해묵은 감정이 있었지만, 욘두는 조슈아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총명한 아이를 보고 있자면, 제집에 두고 온 그녀가 떠올랐으니까.

그녀와 닮은 아이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또한 어린아이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슈아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 매력은 아이를 절대로 미워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것은 혈연으로 연결되었음에 느끼는 이끌림인 걸까?

욘두는 헛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마차 시트에 머리를 완전히 기대자, 불현듯이 아주 예전 일이 떠올랐다. 제법 오랜만에 떠올린


옛 기억이었다.

욘두가 떠올린 옛 기억의 시점은, 그가 여덟 살이었던 때였다.

그날은 아주 무더웠던 여름날이었다. 몹시도 덥지만 하늘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쾌청했던 날,


그날 욘두는 처음으로 랭카스터 공작가에 방문하게 되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욘두의 어머니가 그곳에 가기를 권유했기 때문이다.

‘욘두. 랭카스터 공작가에 가서, 그곳의 가주를 만나고 와 주렴. 내 이름을 댄다면 그가 너를
도와줄 거란다.’

그의 어머니는 욘두가 태어났을 때부터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녀는 병명이 정확한 병을


앓고 있었지만, 그녀에겐 꾸준히 약을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욘두에게 랭카스터 공작가로 가 구걸해 올 것을 부탁하였다.

욘두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어머니가 병으로 죽기를 바라지 않았고, 그에겐 돈이


없었다.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이 누구의 도움이든.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이. 가난한 집안. 끼니를 제때 때우지 못해 굶는 날은 부지기수.

그러한 배경에서 태어난 욘두였기에, 그는 어머니가 일러 준 랭카스터 가의 가주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고풍스러운 공작가의 저택에, 꾀죄죄한 자신이 발을 들일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어머니의 이름인 ‘칸나’라는 이름을 꺼내기 무섭게 욘두는 공작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만난 이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잘생긴 남자였다. 그 남자는 처음 본 남자였지만,


이상하게도 낯익은 기분을 주었다.

그것은 닮은 외모를 가졌기 때문인 걸까?

부드럽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칠흑 같은 검은 눈동자.

남자의 외향은 욘두의 외향과 제법 닮아 있었다. 마치 진짜 아버지인 것처럼.

욘두는 생각했다. 이 남자, 혹시나 나의 아버지가 아닐까?

‘네가 칸나의 자식이구나.’

하지만 아버지라고 하기에는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서슬 퍼랬다. 그것은 제 자식을


쳐다보는 눈빛은 명백히 아니었다.

그렇지만 남자가 꺼낸 말은 욘두의 생각과 딱 맞아떨어지는 말이었다.

‘칸나가 그랬나? 더럽고 천박한 네가, 내 아들이라고.’

그리 말한 남자의 눈엔 경멸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 만난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신을


멸시하고 있었다. 명백했다.

“……공작저에 도착했습니다.”

욘두의 회상은 마부의 목소리로 끝이 났다. 그는 감고 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는 가방을 챙겨선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곤 제 눈앞에 드리운 고풍스러운 공작저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 보았던 그때와 다름없는 커다란 저택. 변한 것은 자신의 위치 하나뿐인 것만 같았다.

더럽고 천박했던 제가, 어엿한 마법사로서 공작가 도련님의 선생님이 되었으니까.

아버지는 제가 공작저에 이렇게나 오랫동안 머물지, 심지어 당신이 자랑스러워하던 아들의


아이의 선생님이 될지……. 예상이나 했을까.

욘두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고작 어렸을 때의 기억을 잠깐 떠올렸을 뿐인데, 입안이 너무도 썼다.

* * *
욘두는 펼쳐진 책장 위에 머리를 누이고 잠든 조슈아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욘두가 내어 준
책을 읽던 아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 버렸다.

아직 수업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욘두는 구태여 아이를 깨우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가르쳐야 할 것은 다 일러 주었으니, 아이를 깨울 필요성은 조금도 없었다.

대신, 그는 잠든 조슈아를 들어 올려 소파 위에 누이어 주었을 뿐이다.

조슈아 옆에 조용히 앉은 욘두는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선 아이의 금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조슈아는 잠에서 깰 생각이 없다는 듯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천사같이 잠든 아이의 얼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욘두는 고해하듯 혹 고백하듯 한마디를 읊조렸다. 그것은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조슈아. 네게 삼촌이라는 말을 들을 날이 올까.”

조슈아 너는 아니?

내가 너의 삼촌이란다.

우리는 피를 나눈 사이란다.

제 80 화. 나만 불행한 것 같아

 
욘두는 소파에 허리를 깊숙이 기대었다.

창가로 들어온 따사로운 햇볕이 내비치는 한가로운 오전. 어쩐지 사색에 잠기기 좋은 시간이자
분위기였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자, 어째서인지 공작저로 오는 길에 떠올렸던 과거의 일이 잇따라


떠올랐다.

태어나 처음 만난 아버지이지만, 자신을 아들로선 인정해 주지 않는 그 남자. 랭카스터


공작가의 선대 가주였던 그 남자.

욘두는 제게 닿은 아버지의 냉랭한 눈빛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제가


찾아온 이유를 읊조렸다.

‘어, 어머니가 많이 아프세요. 하지만 저희에겐 약을 살 돈이 없어요. 어머니가 공작님을 찾,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라고 했어요.’
욘두의 말에 가주는 크게 웃었다.

‘하, 하하. 웃기는 여자로구나. 너는 잘 모르겠지만, 하룻밤이라도 좋으니 함께하고 싶다고


한 사람은 네 어미란다.’

그 당시, 어린 욘두는 아버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아버지는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얘기하듯 심드렁하게 이어 말했다.

‘그런데 덜컥 아이가 생겼다고 하지 않나, 도와 달라고 하지 않나……. 솔직히 네가 내


아이인지 내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천박한 네 어미와 다른 남자의 아이일 수도 있지
않느냐.’

하지만 저희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걸요.

아버지 눈에는 저희가 닮아 보이지 않는 건가요?

그리고 제 어머니는 천박하지 않아요.

어머니는 저를 낳으신 후에 거의 매일 밤 눈물을 흘리셨어요.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


누군가를 그리워하셨죠.

저는 오늘에서야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아요.

어머니의 눈물을 하나도 모르는 아버지는,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도 알지 못해요.

욘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어렸으나 눈치는 제법 좋았다. 그에게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이


존재했다.

‘……그래도 도와주세요. 저희에게 도와주실 분은 공작님밖에 없어요. 공작님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제 어머니는 돌아가실 거예요.’

누군가의 죽음을 논하는 구슬픈 욘두의 말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냉랭했다.

‘돌아가.’

아버지는 위압적으로 말했다. 그것은 어린 욘두가 도무지 거스를 수 없는 위압감이었다.

욘두의 입술은 떨렸고, 곧 그의 온몸이 떨려 왔다. 그는 아버지에게 말을 붙일 용기가 더는


없었다.

욘두는 어느 시종에게 두 팔이 붙잡혀, 끌려 나가듯이 방에서 쫓겨났다.

어머니에겐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까. 어머니의 약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욘두에게는 참혹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매일 배를 곯을 때와, 아픈 어머니를 바라볼 수밖에


없을 때에 느꼈던 것보다 더욱 참담한 기분이었다.
욘두는 힘없는 걸음걸이로 공작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기다란 복도를 지나치고, 수어 개의 계단을 내려가고, 이내 그는 현관을 나와 정원에 발을


내디뎠다. 공작가의 정원에는 종을 알 수 없는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 속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욘두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웃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욘두의 시야엔 두 아이의 모습이 맺혔다.

욘두는 커다란 정원수의 몸통 뒤에 자신의 몸을 숨겼다. 그러고선 두 아이를 조심스럽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자신의 연령대와 비슷해 보이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였다.

풍성한 금발을 가진 여자아이는 욘두가 태어나서 본 여자아이 중에 제일 예뻤다.

설탕 인형 같아. 저런 아이와 대화를 나누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리고 남자아이는 어째서인지 자신의 얼굴과 닮아 보였다.

까만 머리카락, 까만 눈동자……. 저 아이는 공작님의 진짜 아들인 걸까?

두 아이는 잔디 위에 다정하게 앉은 채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욘두가 들은 유일한 소리는 아이들의 호쾌한


웃음소리뿐.

하지만 욘두의 눈에 비친, 어쩌면 형제일지도 모를 남자아이는 행복해 보였다.

욘두는 생각했다.

나도 공작님의 아들로 인정받아 이곳에서 자랐다면, 저 아이처럼 행복했을까?

저 아이처럼 좋은 옷을 입고 있었을까?

저 아이처럼 깨끗했을까?

저 아이가 배를 곯은 일은 없겠지.

남자아이의 얼굴엔 걱정의 기류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자란


듯 밝고 긍정적인 얼굴이었다.

그때, 욘두의 마음속에 불쑥 솟아오른 감정은 짙은 질투였다.

나만……불행한 것 같아.
욘두는 다음날에도 랭카스터 공작가를 찾아갔다. 물론 쫓겨날 각오를 한 채였다.

비록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피를 나눈 혈육이니 계속, 그리고


간절하게 부탁을 한다면 조금이라도 도와주지 않을까?

위엄 가득한 공작가. 제국 내의 최상류층인 그들에게 있어, 제 어머니의 약값은 보잘것없는


수준일 텐데.

욘두는 어제보다도 마음을 다잡고선 아버지를 뵙길 청했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자신을 곧바로 내치지 않았다.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만나 주었다.
욘두는 거기서 작은 희망을 가졌다.

오늘이라면, 아버지가 나를 도와줄지도 몰라.

하지만 막상 만난 아버지의 얼굴은 어제보다도 더욱 차가운 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겁이 없는 건지, 겁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어린 건지, 잘 모르겠구나.’

몰아붙이는 아버지의 말에 대한 욘두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어머니를 도와주세요.’

하나 내뱉는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위압감이 가득한 아버지의 모습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는다면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좋아. 다시 한 번 더 찾아온 용기가 가상하니,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마.’

‘감, 감사합니다!’

‘감사를 논하기엔 아직 이르지.’

‘……네?’

아버지는 방 한편에 있던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저벅저벅 걷는 아버지의 구두 소리와 바닥에 질질 끌리는 무언가의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욘두는 아버지의 손에 쥐인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삐쩍 마른 자신의 몸보다도 더 굵어 보이는 몽둥이였다.

‘내 매를 딱 열 대만 맞거라. 맞는 내내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면, 네 어미의 약값을 조금


보태주도록 하지.’

그것은 애당초 욘두에겐 선택권이 없는 제안이었다. 그는 어떤 짓을 해서라도 어머니의 약값을


받아 내야 했으니까.

‘하……할게요! 하게 해 주세요.’
욘두가 긍정을 하자, 아버지의 매질은 시작되었다.

설마 진짜로 때리겠어. 제 아들인데 설마 모질게 매질을 하겠어—, 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했다. 아버지는 온 힘을 다해 욘두의 엉덩이를 내리쳤기 때문이다.

맞을 때마다 다리가 휘청거려 풀썩풀썩 주저앉기 일쑤였다. 욘두는 주저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아버지의 매질은 비명을 지를 만큼 아팠다. 태어나 겪은 고통 중에서 제일 큰 아픔이었다.

그것은 고작 열 살이었던 욘두가 감내할 수 있는 매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욘두는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르게 된다면, 어머니를 돕지 못하게
되니까.

욘두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잇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아 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던지, 아랫입술에선 피 맛이 났다.

욘두의 눈가에선 마르지 않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 눈물은 욘두의 뺨을 타고 흘러,


마룻바닥 위에 뚝뚝 떨어졌다.

‘……하.’

이내 매질을 끝낸 아버지가 숨을 기다랗게 내뱉었다. 욘두는 엉덩이 근처의 감각이 모두


사라진 듯한 느낌을 느꼈다.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를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당신이 제 아버지가 아닌가요?

‘…….’

어렸던 욘두는 아버지가 왜 자신의 어머니를 하룻밤 취한 뒤, 내버려 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고가 성장해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생겼을 때, 그는 알 수 있었다.

랭카스터 가의 선대 가주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들을 취하는 호색한이었다. 제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러한 기질에 따라 취해진 여자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방에 있던 어느 시종에게 말했다.

‘끌고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눈물로 얼룩진 욘두는 그제야 한마디를 읊조렸다.

‘……어, 어머니를 도와주시는 거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버지는 차갑게 등을 돌렸고, 욘두는 그대로 그 방에서 끌려나갔을
뿐이다.

욘두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었다.


복도를 걷는 내내 몇 번을 주저앉았는지 모르겠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만 싶었다.

왜 자신이 매질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욘두는 생각했다.

일확천금을 바란 것이 아니다. 그저 어머니의 약값을 조금 받고자 했을 뿐인데…….

하지만 욘두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울음을 삼켜 냈다. 공작저 내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간, 아버지가 약속을


번복할지도 몰랐으니까.

아버지의 대답은 끝끝내 듣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이번만큼은 자신을 도와주리라.

욘두는 그렇게 생각하며 공작저를 겨우겨우 빠져나왔다.

이윽고 맞닥뜨린 정원, 그는 자연스럽게 금발이 아름답던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오늘도 그 아이가 정원에 있는 것은 아닐까?

욘두는 여자아이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더해, 그녀의 웃음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오늘은 공작저를 찾아오지 않은 걸까?

순간 묘한 실망감이 들었다.

자신은 무엇을 기대한 걸까? 그 여자아이와 대화라도 나눠 보기를 고대했던 걸까?

욘두는 이름 모를 아름다운 여자아이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제 형제의 모습 또한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그때, 두 사람 모두 깨끗한 모습에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지.

욘두는 자신의 몰골을 새삼 내려다보았다.

‘…….’

꾀죄죄한 모습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그 여자아이를 만나서 어쩌겠다고.

대화는 무슨. 그 여자아이가 제 모습을 본다면,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갈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엔 씁쓸한 미소가 드리웠다.

자신의 처지가 늘 처량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오늘따라 자신이 더욱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욘두는 느릿하게 발걸음을 떼어 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선 깊은 잠을


청하고 싶었다.
그렇게 정원을 지나쳐, 공작저의 철제 대문에 가까워지던 찰나였다.

‘그 여자아이’를 만난 것은 행운처럼 벌어진 일이었다.

‘어머, 넌 누구니? 공작저에서 처음 보는 아이인데.’

욘두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제게 말을 건넨 여자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잔디 위에 힘없이 앉아 버렸다.

‘……!’

어디선가 불어온 잔바람에 의해 흩날리는 기다란 금발. 왠지 푸른 바다를 연상하게 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예쁘다. 정원수 뒤에 숨어서 보았을 때보다, 가까이서 보니까 훨씬 더 예뻐.

욘두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로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표정은 덤이었다.

그사이, 여자아이는 주저앉은 욘두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욘두는 제가 도리어 도망을 가고 싶었다. 이런 꾀죄죄한 모습을 그녀에게 보였다는


사실이 너무도 부끄러웠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놀라 굳은 몸은 욘두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시종의 아들이니? 너…….’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제게 오롯이 닿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세세하게 관찰하는 것만


같았다.

‘왠지 요한과 많이 닮았다.’

요한.

욘두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어제 보았던 저와 닮은 남자아이를 떠올렸다.

나와는 다르게 제대로 된 환경에서 버젓이 자란 나의 형제.

그 아이의 이름이 요한인가 보다.

욘두는 확신했다.

 
욘두의 깊은 사색을 깨운 것은 현실 속, 조슈아의 한마디였다.

“……생님. 욘두 선생님!”

시선을 끌어내리자, 곤히 잠들었던 조슈아가 깨어 있었다.


언제 깬 걸까.

“아, 조슈아 님.”

욘두는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조슈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회상 속에 존재했던 설탕 인형 같은 여자아이의 얼굴과 조슈아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조슈아가 얼마나 불렀는지 몰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욘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 과거의 일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범주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

조슈아는 대답을 보채지 않았다. 대신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작고 귀여운 손을 뻗었을


뿐이다. 이윽고 조슈아의 손이 욘두의 뺨에 닿았다.

아이는 걱정하듯이 욘두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욘두 선생님이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웅?


조슈아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도와줄게!”

조슈아는 욘두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랭카스터 가에 원한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아이의 진심을


의심하고, 내칠 만큼의 냉혈한은 아니었다.

자신의 아버지와는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욘두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조슈아 님. ‘두 손 두 발을 다 든다.’라는 말은 ‘포기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칫.”

“하지만 제게 해 주신 말씀은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슈아는 욘두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내 말이 틀렸다는 게 중요해? 조슈아가 선생님을 도와주려는 마음이 중요한 거야.”

“듣고 보니 조슈아 님의 말이 옳군요.”

제 아버지이자, 당신의 할아버지가 당신을 닮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가 저를 선뜻 도와주려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제게 잔인한 매질을 하지 않았다면.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제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 주었다면.

그랬다면 저와 닮은 공작가의 후계자인 요한을 질투하지 않았을 텐데.

‘돌아가.’

서슬 퍼런 아버지의 목소리가 욘두의 귓가에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욘두 선생님.”

“네, 조슈아 님.”

“정말로 무슨 일이 없는 거지?”

“네, 없습니다. 설령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조슈아 님이 이렇게나


저를 걱정해 주시니까요. 하하.”

조슈아는 작은 두 손으로 욘두의 목덜미를 감쌌다. 그러곤 어쭙잖게 욘두를 안아 주었다.

“헤헤. 다행이다. 내가 엄마, 아빠 다음으로 욘두 선생님을 제일 좋아하는 거 알지?”

욘두는 대답 대신 아이의 작은 등을 쓸어 주었다.

그러곤 그는 생각했다.

오랜 시간 요한을 미워하고, 질투했음에도 조슈아만은 절대로 미워할 수 없을 거라고.

제 81 화. 세나의 기일

“배가 고픈 것 같아요.”

나는 기억을 잃은 지난 5 년간 제일 많이 내뱉었던 말을 읊조렸다.

침대 위에 함께 누워 있던 요한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네 배 속에 사는 거지는 아직 잘 지내나 보군.”

마치 내 배 속에 사는 거지를 오래도록 알았다는 듯이.

“왜? 또 미인 거지라고 불러 보세요. 누가 기분 하나 상할 줄 아나.”

“싫어. 내가 왜 미인 거지라고 불러? 너를 부를 아름다운 단어가 얼마나 많은데. 피앙세.


자기. 여보…….”
나는 천장을 보던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지난 밤, 잠들지 못할 정도로 내가 괴롭힌
요한의 얼굴이 보였다.

남 부끄러운 말을 내뱉은 요한의 얼굴은 심드렁했다.

“미쳤어요?”

대답이 너무 거칠었나.

하지만 거친 내 말에 돌아온 요한의 대답은 미소였다. 그는 픽 웃으며, 저 또한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 나의 피앙세. 말이 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어제 먹은 음식이 상한 게 분명해요. 사람이 뒤바뀐 것 같아.”

“그럼 사람이 바뀌었는지, 안 바뀌었는지 오늘도 확인해 볼래?”

확인하자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도 예상이 가서 탈이다. 요한은 그 말을 더러


하며, 나와 스킨십을 했었으니까.

요한은 붉은 혀를 끄집어내어 제 입술 위를 느릿하게 핥았다. 야릇한 기류만이 가득한 혀


놀림이었다.

그는 지난밤 내 입술을 그토록 많이 탐해 놓고도, 또다시 내 입술을 탐닉하기를 바라는 걸까?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스킨십을 허락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깨달았을 땐,


우리의 스킨십은 몹시도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꼭 이전 날, 이를테면 아주 오래전부터 스킨십을 나누었던 것처럼.

그것은 기시감에 가까운 오묘한 느낌을 들게 만들곤 했다.

그러한 느낌이 들 때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을 하게 된다. 내가 세나인 게 아닐까—,


하는.

그사이, 요한은 제 말에 대한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입술부터.”

그리 말한 요한의 붉은 입술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어젯밤 제 낙인이 잘 남아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이 내 입술 위를 부드럽게 지분거렸다.

나는 완전히 눈을 감은 요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꽉 닫힌 눈꺼풀 위, 그의 검은 속눈썹은 그


끝이 내게 닿을 듯이 길었다.

조슈아의 속눈썹이 긴 건, 이 남자를 닮아서 그런 건가 봐.


얼마 못 가 요한은 입술을 조금 떼어 내고선, 내게 물음을 건네었다.

“어때? 내 입술 같아?”

나는 그의 입술 위에 짧게 입을 맞추고선 대답했다.

“응, 당신의 입술 같아.”

요한은 이번엔 아무렇게나 놓인 내 손을 쥐어 잡았다. 그는 내 손을 들어 올려, 제 뺨 위에


가져다 대었다.

“어때? 내 얼굴 같아?”

나는 손끝으로 그의 뺨을 매만졌다.

요한의 뺨은 부드럽기만 했다. 아이가 하나 있는 남자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응. 이번에도 당신의 얼굴이 맞아.”

“…….”

“사람이 뒤바뀐 건 아닌가 봐.”

그러자 요한이 대답했다.

“묘하게 말이 짧아진 느낌이군.”

“그래서 싫어요?”

“아니. 뭐랄까. 기분이 이상해. 세나와는 말을 놓고 지냈으니까.”

요한은 세나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지만, 구태여 변명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를 세나로 착각하고 싶어서 세나의 이름을 꺼낸 것이 아니라는 해명을 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는 제가 그런 의도로 세나의 이름을 꺼낸 것이 아님을, 내가 미뤄 짐작했으리라고 여긴 것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한의 추측은 맞았다. 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금 요한이 꺼낸 세나라는 이름은, 그저 과거를 추억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으니까.

요한은 세나의 이름을 내뱉으며 전처럼 짙은 슬픔에 잠식되지 않았다. 그는 담담했고, 나도


담담했다.

“그럼 저하고도 말을 놓고 지낼래요?”

“갑자기?”
“싫음 말고.”

“나쁠 건 없지. 하지만 우리의 모습을 보고, 다른 사용인들이 너에 대한 험한 말을 할까 봐


염려가 돼.”

요한은 내 뺨 위를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나는 그 손장난에 대답하듯이 그의 뺨을 연거푸


쓸어 주었다.

“험한 말이라……. 유모 주제에 주제도 모르고 당신과 맞먹으려 한다? 이런 말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해.”

“그럼 섞어 쓰지, 뭐.”

그리고 왠지 모르게 반말이 더 편한 느낌이거든. 나는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요한은 해탈한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너와 대화를 나눌 수만 있다면, 나는 뭐든 상관없으니까.”

“……나 원.”

“내가 들어도 속이 울렁거리는 말들만 연거푸 튀어나오는 걸 보니, 잠이 덜 깼나 봐.”

요한은 뒤늦게 자조하고 있었다. 나는 킥킥거렸다.

“조금 더 잘래요? 오늘 스케줄은 어때요? 한가해요?”

나는 그리 묻고선 눈을 감았다. 어제 늦게 잔 여파로 졸음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다란 하품마저도 하며, 생각에 잠깐 잠겼다.

요한과 함께 밤을 보내고, 다음 날의 태양 또한 함께 맞이한 일이 제법 많아진 것 같았다.

처음이 어려웠지, 아마.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우리는, 밤이 되면 습관처럼 서로를 찾았다. 그러곤 무언가에
이끌리듯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이제는 서로의 온기를 나누지 못하는 밤이 애석한 지경이 되었다.

어쩌면 우리의 동침은 이미 공작저 내에도 파다하게 소문났을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마주친
사용인들이 나를 보며 숙덕거리는 모습을 몇 차례 본 것도 같다.

그 숙덕거림은 최근 들어 더욱 심해졌는데, 나는 거기서 무언가를 직감했다.

수군거림이 심해진 데에 그럴싸한 이유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

“리나.”
“네.”

나는 그의 부름에 따라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요한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던 것인지, 우리의 눈은 단번에 마주쳤다.

“오늘 스케줄은 모두 취소되거나 미뤄 두었어.”

그는 숨을 낮게 골랐다.

그러곤 ‘수군거림이 심해진 그럴싸한 이유’와 ‘오늘 스케줄은 모두 취소되거나 미뤄


두었어.’에 대한 이유를 알려 주었다.

“오늘은…… 세나의 기일이야.”

* * *

누군가의 기일을 기려 본 적은 없었다. 아니,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기억을 잃은


사람이었다.

요한은 나와는 반대로, 지난 4 년간 세나의 기일을 꾸준히 추모해 왔다. 하지만 그는


이번만큼은 세나의 기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자못 난감해했다.

요한을 혼란스럽게 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세나의 시신이…… 사라졌거든. 나는 요즘 세나의 시신을 찾고 있어.’

기려야 할 시신은 사라졌고, 그녀의 묘에 남은 것은 텅 빈 관뿐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내 정체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던 중이었다.

내가 세나라면, 세나의 기일을 기릴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리나든, 세나든, 누구든 간에 죽은 이는 확실하게 존재했다.

비록 시신은 사라졌지만, 나는 죽은 나의 자매를 기려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을 건네었다.

요한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여 주었다.

그는 누구일지 모를, 사라진 시신을 추모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세나의 기일을 기릴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도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세나를 추모하기 위해 공작저를 찾은 에믈린과 할머님 때문이었다.

오늘 만난 에믈린과 할머님은 어두운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물론 요한과 나도 어두운 계통의


옷으로 갈아입은 터였다.

죽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엔 아직 이른 조슈아는 공작저에 남겨 둘 참이었다.

우리에겐 믿음직스러운 벨라가 있었다. 벨라는 아이가 울지 않게 잘 돌보아 줄 것이다.

“엄마, 아빠! 옷 색깔이 똑같아. 데이트 잘 다녀와!”

공작저를 나서기 전에 만난 조슈아는, 우리가 데이트를 위해서 옷 색을 맞춰 입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조슈아다운 귀여운 발상이었다.

“어제 바비 삼촌이랑 한 게임은…… 삼촌한테 들키기는 했지만, 무척 재미있었어. 하지만


오늘은 조슈아가 끼어들지 않을게.”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응, 고마워. 얼른 다녀올게.”

훗날 조슈아에게 그녀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좋을까?

에믈린과 조슈아는 싸운 후에 처음으로 만난 터였다. 그들은 지난날,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던


말들에 대해서 몇 마디를 짧게 주고받았다.

“조쉬. 미안해. 내가 리나 언니에게 심한 말을 했어.”

“이모도 왕바보야. 어떻게 엄마한테 그럴 수 있어? 사과는 했어?”

“그럼 벌써 사과했지. 하지만 조쉬 너…….”

에믈린은 아마도 ‘왕바보’에 대해서 한마디를 하려고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요한의 말이


한발 더 앞섰다.

“조쉬. 너, 나랑 약속했잖아. 나쁜 말은 쓰지 않기로 한 걸 잊었나?”

“……아빠, 미안. 이모도 미안.”

에믈린은 괜찮다는 것처럼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는 훈훈한 분위기를 남긴 채로, 공작저를 나서게 되었다.

* * *
우리는 사제 한 사람을 대동한 채로 공작저의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날은 다소 쌀쌀하기는
했으나 걷는 데에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였다.

요한의 손에는 웬 장미 다발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웬 장미예요?”

“아…… 매년 추모를 갈 때마다, 장미를 챙겨 갔었거든.”

장미.

그것은 내게 있어 여러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욘두가 준 시들지 않는 장미, 나의 자매가 좋아했던 장미, 그리고 욘두의 집에서 맡았던 짙은
장미의 향기마저도.

“세나가 장미를 좋아했어요?”

요한은 장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아프고 나서부터 장미를 찾았어.”

“그전에는요?”

“일기장. 기억 나?”

나는 네, 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녀는 그전엔 라일락을 좋아했어.”

나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일기장 속 내용을 떠올렸다.

그것은 내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토시 하나까지도. 생생히.

이토록 생생히 기억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그 일기를 적었기 때문일까?

⌜요한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받았다.

아주 아주 예전에 내가 보고 싶다고 했던 라일락이었다.

라일락이 필 계절도 아니건만……. 그는 어디선가 비싼 값을 치러 구한 것만 같았다.

그럴 필요 없다고 핀잔을 조금 주긴 했지만, 사실 나는 매우 기뻤다.

오늘 밤엔 요한의 벨트를 가만두지 않아야지.⌟


라일락을 좋아했던 세나는, 아프기 시작한 이래로 장미를 좋아하게 되었다.

요한의 말을 정리하자면 그러했다.

라일락을 좋아했던 세나는 나와 필체가 같았고, 장미를 좋아했던 세나는 나와 필체가 달랐다.

그리고 나의 자매는 장미를 좋아하였다.

‘……장미. 나는 붉은 장미가 좋아.’

나는 환청 속, 앳된 목소리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말했던 나의 자매를 떠올렸다.

왠지 부정적인 기류만이 가득했던 뒤쪽 일기를 쓴 주인공은…… 아무래도 장미를 좋아했던 나의


쌍둥이 자매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숨이 조금 차올랐을 때,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처음 와 본 세나의


묘지를 눈에 담았다.

야산의 중턱이기는 했으나, 이곳은 관리가 무척이나 잘 되어 있었다. 요한이 그동안 이곳을
얼마나 열심히 관리한 것인지, 나는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고인을 기리는 비석은 총 세 개였다. 두 개는 요한의 부모님의 것이었고, 마지막 하나가


세나의 것이었다.

사제는 익숙한 듯이 작은 기도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묵념한 채로 사제의 경건한


기도를 들었다.

길지 않은 기도는 곧 끝이 났다.

요한은 묵념했던 고개를 들어 올려, 그녀의 비석 앞에 장미꽃 다발을 올려 주었다. 나는 그


순간 그녀의 비석에 적힌 문구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몇 차례 곱씹어 읽어 보았다. 다소 묘한 문구였다.

그녀가 진짜로 갖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일기장 속 내용을 또다시 떠올렸다.

이번에 떠올린 것은 여섯 번째 이후, 즉 필체가 뒤바뀐 일기 내용이었는데, 희한하게도 그


내용이 희미했다. 꼭 내가 적지 않은 것을 떠올리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기어코 그 내용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빌어먹을 병 때문에 요한이 내 몸에 손 하나 대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주 곤욕스러웠다.
조슈아 따위가 아닌 사랑스러운 내 아이를 얼른 낳아야 할 텐데.⌟

요한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소유욕에 사로잡힌


듯한 일기 내용.

“…….”

나는 비석 속 문구를 지그시 쳐다본 채, 이미 죽은 그녀에게 소리 없는 메시지를 보냈다.

너는…… 설마 요한을 가지고 싶었던 거야?

네가 갖고자 했지만 결국 갖지 못한 것은 요한인 거야?

역할 바꾸기 놀이를 했던 우리. 너는 그러다 우연히 요한을 만나게 되었고, 그를 좋아하게 된


거야?

너는 요한을 가지고 싶었지만, 그와 추억을 나누고 감정을 공유한 것은 ‘나’였기 때문에……


그래서 나를 절벽에서 떨어뜨린 거야?

나를 죽이고, 내 자리를 네가 차지하기 위해서?

나는 꿈속에서 나를 절벽 밑으로 냉정하게 밀어 버렸던 나와 닮은 얼굴마저도 상기했다.

그러자 숨이 턱 하니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비정한 내용이잖아.

피를 나눈 자매를 절벽에서 밀어뜨릴 정도로, 그녀는 나에 대한 깊은 질투와 증오를 품고


있었던 걸까?

우리의 관계는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 있던 요한과 바비보다도 더욱 참혹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적어도 서로의 미숙함을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바비는 적어도 제 형인 요한을 절벽에서 밀어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제가 사랑하게 된


여자가 또다시 요한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리나. 괜찮아?”

언제 가까이 다가왔을지 모를 요한이 걱정스럽게 물어보았다.

나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얼굴이 좋지 않아. 너를 공작저에 두고 오는 건데…….”

“아니에요. 당신을 따라온 덕에 그녀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도 알게 되었는걸요.”

나는 그녀의 비석 문구에 여전히 시선을 두고 있었다. 요한의 시선 또한 그리로 닿는 게


느껴졌다.

그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비석 속 문구를 읽더니, 이윽고 말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에 서린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잘 가늠할 수 없어.”

있죠, 요한.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왜냐면, 저 문구는 모든 일을 아는 저만이 해석할 수 있는 문구 같거든요.

제 82 화. 어떤 진실이든, 너와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아

“리나 언니. 며칠 동안 엄청 즐거웠어요.”

“예쁜 아가씨. 그럼 다음에 또 보자우. 할아범도 예쁜 아가씨랑 잘 살고.”

세나를 추모하기 위해 공작저에 방문한 할머님과 에믈린은 저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무섭게
공작저를 나섰다.

우리는 정원 한 편에 정차해 둔 마차 앞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하하하. 요한 씨. 왠지 바람을 피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네요.”

할머님은 요한을 할아범이라 칭하면서도, 나와 잘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꽤나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요한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머쓱한 미소로


대답을 갈음했다.

대화를 이어 준 것은 내 옆에 서 있던 조슈아였다.

“할머니! 조슈아는? 조슈아에게는 인사 안 해 줘?”

“우리 귀여운 아가도 이 할멈을 기억해 주렴.”

“그럼! 언제나 영원히 기억해 줄게.”


테레사 할머님은 조슈아의 볼을 두어 번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할머님의 얼굴엔 인자한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에믈린은 마차에 올라타기 전에 내게 마지막으로 귓속말을 건네었다.

“리나 언니. 욘두 쌤의 연인에 대한 걸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제게 꼭 공유해 주셔야 해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에믈린은 조슈아가 지을 법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우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었다.

“요한 오빠도 리나 언니한테 잘 해 줘! 리나 언니는 성격이 더러운 오빠에게는 과분한


사람이니까.”

“……에믈린, 너.”

요한은 에믈린을 노려보기는 했지만, 구태여 에믈린을 닦달하지는 않았다. 그의 얼굴엔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을 뿐이었다.

얼레, 요한은 내가 제게 과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나 봐.

나는 작게 키득거렸다.

이윽고 테레사 할머님은 마차에 올라타기 위해 뒤돌아섰는데, 완전히 뒤돌아서기 직전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우리의 시선은 곧바로 교차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할머님은 내 어색한 미소에 응해 주듯 나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꼭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미소처럼 보였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익숙한 미소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전에도 할머님의 미소를 본 적이 있는 듯한 낯익은 기분.

하지만 그뿐이었다. 할머님이 무언가의 말을 건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던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고, 할머님은 에믈린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완전히


올라탔다.

요한은 마차의 창문을 향해 마지막 한마디를 건네었다.

“할머님, 조심히 가세요! 에믈린 넌, 할머님을 잘 보살펴 드리고!”

“오빠나 잘해~!”

요한의 신경을 단단히 건드리는 에믈린의 말을 마지막으로 마차는 출발했다. 우리는 마차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아쉽다는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와의 이별이 원래 이토록 아쉬운 것이었던가.


나는 우리가 또다시 만날 날을 고대했다.

* * *

조슈아가 그 말을 꺼낸 것은 공작저로 다시 들어가는 도중이었다.

“엄마, 엄마. 오늘 욘두 선생님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았어. 조슈아가 욘두 선생님을 힘들게


한 걸까?”

조슈아의 입에서 ‘욘두 선생님’이라는 말이 나오자, 요한과 나는 약속한 것처럼 걷던 것을


멈추었다.

나와 요한의 손을 사이좋게 잡은 조슈아는 갑자기 멈춘 걸음에 어리둥절해했다.

“엄마? 아빠?”

나는 뒤늦게 대답을 해 주었다.

“조슈아. 이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욘두 선생님이 너를 아프게 하거나, 힘들게 한 적이


있니?”

조슈아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아니! 욘두 선생님이 조슈아를 왜 아프게 해? 선생님은 언제나 다정하게 대해 주시는걸.”

“휴, 다행이다.”

모든 일의 배후가 욘두와 관련된 것임을 알아차린 이상, 욘두를 조슈아의 곁에 더는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욘두를 해고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지금이 처음은 아니었다.

나는 과거에 요한과 함께 욘두의 처사에 대해서 의논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요한은 욘두를 해고하는 일을 숙고하자고 했었다.

왜냐면, 갑작스러운 해고가 그의 성질을 돋우어 행여나 그가 나쁜 마음을 먹을까, 염려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심증뿐이었던 여러 사실에 대한 확증이 생겼으니까.


어제 우리는 욘두가 모든 일을 조장한 것임을 바비에게 들은 후였다.

욘두는 바비에게 내 존재를 최초로 알려 준 사람이자, 내가 세나와 쌍둥이 자매라는 사실을


알려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저잣거리에서 나와 만난 바비가, 세나와 닮은 내 얼굴을 보고도 놀라지 않은 이유는 바로


욘두가 내 존재를 일찌감치 알려 주었기 때문이라고.

아니, 여기서 잠깐. 욘두가 바비에게 내 존재를 귀띔해 준 거라면…….

욘두는 내가 공작저로 들어오기 전부터, 그러니까 내가 기억을 잃고 거리를 나다닐 때부터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걸까?

욘두는 나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끔찍한 사고를 당하기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 * *

나는 공작저에 들어오자마자 조슈아를 또다시 벨라에게 맡겼다.

조슈아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나는 요한과 둘이서만 꼭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조슈아는 보채는 일 없이 벨라를 뒤따랐다. 어쩌면 그것은…….

“조슈아 님. 맛있는 초코 과자를 내어 드릴게요.”

벨라의 꼬임이 훌륭했던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조슈아는 초코 과자에 잔뜩 현혹된 채로 벨라의 뒤를 홀린 듯이 쫓아갔던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한과 나는 약속한 것처럼 큭큭거렸다.

“누구 아들인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귀엽군.”

“그러게요. 진짜 제 아들이었으면 좋겠다.”

“…….”

요한은 침묵하며, 내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평소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드러나는 그였지만, 나는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헤아릴 수 없었다.
조슈아를 성공적으로 따돌린 우리는 요한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소파에 요한과 마주 앉은 채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었다.

“요한 씨. 오늘 당장 욘두의 집을 수색해 볼 수는 없나요? 어차피 오늘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다면서요.”

끝끝내 열지 못했던 꽉 잠긴 그 문 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 속에 내가 찾던 것이 존재할 것만 같은 느낌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요한은 짧은 한숨과 함께 대답하였다.

“하지만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욘두의 집을 무턱대고 수색할 수는 없어.”

그래서 그는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그의 집을 수색하자고 했었다. 하지만 요한은 아직까지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지 못한 것만 같았다.

“그럴싸한 이유를 당장 만들 수는 없으니까…….”

이윽고 이어진 요한의 말은 아주 그답지 않은, 다소 황당한 말이었다.

“불법으로 수색해 볼까?”

“정말요?”

“어차피 너도 에믈린과 함께 그의 집에 불법으로 침입한 적이 있잖아. 나라곤 못할 이유는


없지. 이미 이전에도 한 번 그랬던 적이 있었고.”

“하지만 열리지 않는 그 방은 어떻게 해야 하죠?”

그는 쿨하게 대답했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문고리를 부숴 보자. 뭣하면 문마저도 부숴 보자고.”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도리어 문을 부수는 일에 대단한 열의를 내비치고 있었다.

“그럼 누군가가 제집에 침입했다는 사실을, 욘두에게 들키게 되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잖아. 제집에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만 남을 뿐.”

“…….”

“만에 하나 욘두가 묻는다면, 아니라고 발뺌하면 되지, 뭐. 어쩔 거야. 문을 부쉈다고 해서


증거가 남는 것도 아니고.”

요한은 꿍꿍이가 많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욘두의 집에 몰래 들어가자고 말하던


에믈린이 지었던 미소와 꼭 닮아 보였다.
“열쇠는 어떡해요? 현관문도 부술 거예요?”

요한은 미소 지은 얼굴 그대로 재킷의 속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내 그가 주머니 속에서 꺼내


든 것은 금빛의 열쇠였다.

“이미 준비되어 있지.”

심지어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실마저도 에믈린과 꼭 닮아 있다니.

나는 이마를 짚었다.

에믈린이 양녀라고는 하나 알고 보면 요한과 피가 섞였을지도 모르겠다는 미묘한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세나의 일기장을 찾으러 갈 때, 만들어 둔 거야.”

요한은 제가 꼭 대단한 준비성을 가진 남자인 양 굴었다.

……남의 집 열쇠를 허락 없이 가지고 있는 주제에 말이다.

“그걸 왜 재킷 속에 넣고 다니는 거예요!”

“왠지 조만간 쓰일 날이 있을 것 같아서?”

요한은 낙천적으로 대답했다.

우스운 점은 그러한 그가 귀여워 보였다는 것이다.

나는 내 눈에 낀 콩깍지가 여전함을 새삼 통감했다. 이 콩깍지가 벗겨질 날이 오기는 오려나.

“말이 나온 김에 얼른 실행에 옮겨 보도록 하지.”

나는 요한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 * *

우리는 어두운 계통의 옷을 그대로 입은 채로 마차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욘두의 저택이었다.

욘두는 이른 아침에 공작저를 다녀간 이후 제집으로 돌아간 터였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출발하기 전에, 욘두를 집밖으로 불러낼 하수인을 먼저 보내기도 했다.

그 하수인은 욘두가 공작저에서 제법 친하게 지내는 작자로서, 어떤 이유를 대어도 좋으니


해가 질 때까지 욘두와 함께 있을 것임을 요한에게 명받았다.

요한은 하수인에게 명을 하는 데에 그치지 않으며, 몇몇의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혹 제 하수인이 욘두를 잡아 두는 일에 실패했을 시에, 기사들이 욘두의 행보를 적당히 막아설
계획이었다.

갑작스럽게 세운 계획치고는 꽤 치밀한 준비였다.

“요한.”

나는 맞은편에 앉은 요한의 이름을 불렀다.

“응?”

“……오늘. 슬프지는 않아요? 그래도 세나의 기일이잖아요.”

“나도 그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요한은 제 머리카락을 몇 차례 쓸어 넘기며 솔직하게 말했다.

“별로 슬프지 않아.”

세나의 기일이라는 말을 내뱉던 순간도, 그녀의 묘 앞에서 추모를 하던 순간에도, 요한은


그다지 슬퍼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 보였던 것 또한 아니었다. 그는 그저 담담해 보였고,


한편으론 씁쓸해 보였을 따름이었다.

“네가 무슨 이름으로 불리든 상관이 없다는 생각은 여전해.”

“네.”

“하지만 네가 세나가 아닐까, 라는 생각은 점점 더 커지고 있어.”

그래서 슬픔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걸지도 몰라. 거기까지 말한 요한은 숨을 낮게 토해 냈다.


그의 얼굴엔 수많은 고뇌가 얼룩져 있었다.

“나는…… 같은 여자를 두 번이나 사랑하게 된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나도 내가 세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으니까.

“네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네 곁에 제일 가까이에 있었던 나는, 왜 아무것도


몰랐던 걸까?”

그는 자조했다. 그러곤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던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괜찮아요. 이제 조금만 더 파헤치면 되니까. 제가 누군지, 제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응.”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알아.”

“당신은 진실을 수용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나요?”

내리깔린 요한의 시선이 내 물음에 응하듯이 들리었다. 그는 나와 시선을 고요하게 맞추었다.

“어떤 진실이든, 너와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아.”

내게 닿은 요한의 동공엔 흔들림이라곤 없었다. 그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확신하는 듯했고,


나는 그의 확신에 깊이 공감했다.

왜냐면, 어떤 진실이든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은 건 비단 요한 하나뿐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짧게 기합을 넣었다. 욘두의 집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

우리는 욘두의 집 앞에 몇 명의 보초를 세워 두었다. 그러곤 요한이 가져온 열쇠로 현관문을


열었다.

딸깍.

경쾌한 소리와 그의 집 현관문이 열리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선, 마지막으로 눈을


맞추었다.

무엇을 목도하든, 심지어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라도 함께 맞서 보자는 의미가 담긴 눈


맞춤이었다.

욘두의 집 안은 고요했다. 일찌감치 보낸 하수인은 제 일을 잘 처리한 듯 욘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집 안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이곳은 이전 날에 왔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몇 없는 가구의 위치, 깔끔한 내부, 그리고 짙은 장미향마저도.

“장미 향기…… 맡아져요?”

“어. 네 말대로 장미향이 나는군. 이전에 왔을 때는 맡아지지 않았는데…….”

요한은 세나의 일기장을 가지러 왔을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다른 곳을 둘러보지 않았다. 우리가 확인하고자 한 곳은 딱 한 군데였으니까.

요한과 나는 걸음의 소리를 죽인 채로, 열리지 않았던 그 방문 앞까지 걸어갔다.

이내 마주한 방문. 요한은 나와 잡지 않은 나머지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손은 금색의


문고리 위에 금세 닿았다.
“일단은 열어 볼게.”

요한은 문고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전에 내가 돌렸을 땐 절대로 열리지 않았던 문이었지만…
….

딸깍.

“……!”

놀랍게도 이번에는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어째서 잠겨 있지 않은 걸까?

요한은 나보다도 한 발자국 앞서 걸으며,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방 안은 환했다. 창문의 커튼이 모두 다 쳐져 있었지만, 곳곳에 등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내 코끝에 강렬하게 맴돈 냄새가 있었다. 그것은 방 밖에서 맡았던


것보다도 훨씬 더 짙어진 장미향이었다.

나는 방 안을 살피고 나서야, 왜 그토록 강한 장미향이 맡아졌던 것인지 알게 되었다.

“방 안이 장미로 가득해요.”

가구라곤 침대 하나뿐인 방 안, 그 속을 차지한 것은 흐드러진 장미들밖에 없었다. 장미는


정리되지 않은 채로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던 그의 집 광경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

요한은 침묵했다. 그는 그저 방 안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 덕에 우리는 꼭


잡고 있던 손을 잠깐 놓게 되었다.

나는 침대 쪽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침대 위의 시트는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마치 조금


전까지 누군가가 누워있었던 것처럼.

신고 있던 구두 밑으로 무언가가 밟힌 것은 그 순간이었다.

“……엇!”

침대를 관찰한다고, 발밑을 살피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아무렇게나 흩뿌려져 있던


장미 하나를 제대로 밟아 버린 것이다.

중심을 잃은 내 몸은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비틀거렸다. 악 소리를 들은 듯한 요한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가 나를 잡아 주기 전에, 내 몸이 먼저 바닥으로 추락했다.

쾅.

꽤 커다란 소리가 나며 마룻바닥에 머리를 그대로 찍어 버렸다. 나는 머리통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에 기다란 신음을 흘렸다.

“리나! 괜찮아?”

뒤늦게 다가온 요한이 바닥에 엎어진 내 몸을 들어 올려 주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바닥에 찧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잔뜩 찌푸린 시야


사이로 요한의 얼굴과 그의 뒤에 있는 침대가 동시에 보였다.

커다란 침대…….

그 순간, 침대의 모양이 이상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나를 보는 요한의 얼굴 또한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찮아? 리나!”

나를 부르는 요한의 목소리마저도 갈수록 아득해졌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 주위의 광경이 모두 다 달라져 있었다.

제 83 화. 그걸 이제 알았니?

제일 처음 느낀 것은 냄새였다.

조금 전까지 강하게 맡아지던 장미 향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 코끝에 진한 풀 냄새가


스미고 있었다.

안개에 휩싸인 듯 뿌옇던 시야는 곧 완전히 밝아졌다. 확 트인 시야 사이로 보인 것은 작은


정원이었다.

그 정원은 랭카스터 공작가의 정원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한 크기였다.

하지만 꾸준히 관리한 것인지, 정취가 꽤나 훌륭했다. 일렬종대로 심어진 같은 종류의 꽃들,
잘 손질된 정원수들. 크기가 작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그리고 그 정원의 중앙에는 어느 여자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대략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아이는 기다란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 화려하지 않은, 다소 평범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는 어디론가 뛰듯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의 뒤를 쫓았다.

여자아이는 곧 정원과 인접해 있는 어느 저택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2 층으로 보이는 그


저택은 정원과 마찬가지로 크기가 소담했다.

아이는 익숙하게 현관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거실을 가로지르다, 2 층과 연결된 계단을 두 계단씩 껑충껑충 올라갔다. 2 층으로


향하는 아이의 발걸음이 흥겨워 보였다.

2 층에 여자아이를 신나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걸까?

나는 아이의 뒤를 계속해서 쫓아갔다.

여자아이의 걸음은 어느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아이는 노크 없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문이 활짝 열리자, 냄새가 달라졌다.

그전까지 내가 맡았던 냄새는 정원의 풀 냄새, 저택의 오래된 목재 냄새였다.

하나 방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약재 냄새, 덜 마른 듯한 꿉꿉한 냄새, 어쩐지 비위가 상하는


냄새…… 어떠한 냄새라고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여러 냄새였다.

그 냄새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었다. 왜인지는 나도 잘 알 수 없었다.

달라진 냄새에도, 여자아이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자아이의


걸음이 멈춘 곳은 커다란 침대 앞이었다.

커다란 침대. 그것은 내가 조금 전에 욘두의 저택에서 보았던 그 침대와 유사한 크기였다.

성인 두어 명이 누워도 여유 공간이 남을 법한 큰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웬 여자아이였다.

여자아이는 침대의 크기와는 상반되게 아주 작았는데, 잠든 것처럼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나는 정원에서부터 따라온 여자아이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여자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긴 금발, 하얀 피부, 오뚝한 콧대, 그리고 비슷해 보이는 연령대.

‘……!’

놀랍게도 두 여자아이는 꼭 닮아 있었다. 얼굴, 체형, 연령대마저도.

그것은 마치 두 여자아이가 ‘쌍둥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쌍둥이라.
나는 자연스럽게 ‘세나’와 ‘리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러다 정원에서 만난 여자아이가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는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가, 잠든 듯 눈을 감은 또 다른 여자아이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 덕에 나 또한 누워 있는 여자아이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색색 고른 숨을 내뱉는 여자아이의 얼굴은 아주 창백했다. 정원에서 만난 여자아이와는 다르게


입술 또한 제 색을 잃어 있었다.

파리하게 질린 듯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짙게 드리운 것은 죽음의 기운이었다. 내가 맡은


죽음의 냄새는 이 아이에게서 나던 것이었나 보다.

똑 닮은 두 여자아이가 있으나, 한쪽은 건강하고, 한쪽은 그러하지 못하다.

자유로이 나다닐 수 있는 여자아이는 처음 본 그 여자아이 하나뿐이었다.

침대에 누운 채 깊이 잠든 여자아이는 저택 밖의 세상을 제대로 겪은 적이 없을 테다.

누가 리나이고, 누가 세나인 걸까?

요한의 말과 여러 정황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건강한 아이가 아마도 세나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건강하지 못한 아이는 리나일 것이다.

세나라 추정되는 여자아이는, 여전히 깨지 못하고 있는 리나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잠든 리나가 눈을 뜬 것은 그 순간이었다.

천천히 들린 눈꺼풀은 이윽고 완전히 들리며, 리나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푸른빛인 듯 초록빛인 듯, 오묘한 에메랄드빛 눈동자.

초점이 돌아온 어린 리나의 눈은 정확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의 시선은 교차했다.

‘……!’

내가…… 보이는 걸까?

리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로선 짐작할 수 없는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처절한 목소리로 나의 불행을 바라던 앳된 목소리의 주인은 너인 걸까?

내 죽음을 바라며, 나를 절벽에서 밀어뜨린 존재 또한 너인 걸까?


한순간, 어린 리나의 음성이 내 머릿속에 울렸다.

‘나를 찾아 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공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침대도, 똑 닮은 두 여자아이의 모습도 모두 다 어그러지며, 형체가 사라져 갔다.

잠깐 떠올린 과거는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이내 드리운 것은 완벽한 무지의 공간이었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없는 그러한 공간.

나를 현실로 이끌어 내 준 것은 바로 애절한 목소리였다.

“……리나, 제발.”

울음기가 가득 밴 그 목소리는 처절하기만 했다. 나는 울먹이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달래어


주고 싶었다.

“제발…… 정신 좀 차려 봐.”

울려고 하지 마. 슬퍼하지 마. 나, 죽은 거 아니거든.

나는 그저 잊고 있었던 과거를 떠올렸을 뿐이야.

곧이어 무지의 공간 속에 색채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뜨고도 한동안 넋이 나가 있었다. 내가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까맣게 잊은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나를 꼭 껴안은 이 남자. 나와 지금 눈을 맞추고 있는 이 남자.

이 남자가 나를 무지 속에서 꺼내어 주었어.

나는 그 남자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요한.”

“괜, 괜찮아? 정신이 들어?”

요한은 내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몽롱했던 정신은 곧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내 요한과 함께 욘두의 집을 수색하다가


장미 잎을 밟고 바보처럼 넘어져 버렸다, 라는 사실까지 떠올리고야 만다.
“네, 괜찮아요.”

“휴…… 다행이다.”

“……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어요?”

“일이 분 정도? 정신을 잃고 있었어. 네가 정신을 갑자기 잃어서, 지금 막 너를 데리고


나가려던 차였어.”

환영을 오랫동안 본 것 같은데, 내가 정신을 잃고 있었던 시간은 고작 일이 분 정도였다.

나는 좀 전에 본 여러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 장면들은 내가 임의로 만들어 낸 상상이라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선명했다.

장소가 바뀔 때마다 맡아졌던 다른 냄새들과 여자아이의 뚜렷한 금빛 머리카락마저도.

나는 확신했다. 그것은 내가 만들어 낸 상상이 아니라, 내가 잊고 있었던 과거의 일부임이


분명하다고.

요한은 힘없이 축 처진 내 몸을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어깨 위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로 다행이다.”

토하듯 내뱉은 말엔 진심만이 가득했다. 그는 나를 영영 잃을까 봐, 염려를 한 것 같았다.

고작 바닥에 머리를 잠깐 찧었을 뿐인데…….

그의 걱정은 내가 정신을 잃을 때마다 느꼈던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조슈아를 달래듯이 요한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손끝에 닿은 그의 등은 뜨거웠고, 조금 축축하기도 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린 것 같았다.

“걱정 많이 했어요? 방금, 잊고 있었던 과거를 떠올렸어요.”

“……네 기억?”

“네.”

침묵이 잠깐 드리웠다. 요한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몇 초가 흐른 후에야 느지막이 말을 건네었다.

“일단은 나가자.”

“……좋아요.”

어차피 욘두의 집에서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모두 확인한 터였다.


우리의 목적은 열리지 않았던 방문 안에 존재하는 것을 알아보는 일이었다.

방문은 웬일인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방 안을 살펴볼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의심이 될 만한 표면적인 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엔 의미 모를


장미들이 흩뿌려져 있을 뿐이었다.

에믈린과 나의 은밀한 방문은 흔적을 남기지 않은, 완벽한 것이었다고 여겼다. 하나 욘두는
거기서 무언가의 낌새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제집에 몰래 잠입한 것을 알아차린 욘두가, 방 안에 있었던 ‘중요한 무언가’를


다른 곳으로 옮긴 게 아닐까?

“…….”

요한은 나를 거의 안다시피 하여 방 밖을 나섰다. 이내 우리는 욘두의 집에서 나오기에


이르렀다.

밖으로 나왔을 땐, 주변은 어슴푸레해져 있었다.

우리는 욘두 집 주변을 지켰던 요한의 수족들과 함께 욘두의 집 근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이번만큼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로 욘두의 집을 빠져나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욘두는 무언가의 낌새를 또다시 느꼈을까?

* * *

마차에선 설핏 잠이 들었다.

마차에 올라타 요한의 어깨에 잠깐 기대고 있었는데,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공작저로 돌아와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작저의 요한의 방, 그리고 그의 침대 위에 있었다고 해야 할까.

작은 등불도 켜지 않아서인지 주변은 완전히 어두웠다.

나는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그러자 요한이 내 손을 꼭 잡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요한은 침대 옆에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의자 헤드에 제 머리를 기댄 채로 불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거지.”

나는 그가 잡은 손을 차마 빼내지 못했다.
“……많이 걱정했나.”

자세를 편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잠든 그를 깨우지 않고, 편하게 해 줄


수 있을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잠든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고요히 잠든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불시에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수면 위로


올라온 내 기억 속, 잠든 얼굴을 하고 있던 ‘리나’였다.

나는 오늘까지 떠오른 기억을 바탕으로 내 과거를 정리해 보았다.

세나와 리나. 쌍둥이 자매 중 몸이 아팠던 쪽은 확실히 리나였던 것 같았다. 왜냐면, 세나를


기억하는 모두는 그녀가 ‘건강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건강했던 세나는 양녀 후보로서 공작저를 오갔다.

그리고 아픈 리나는 ‘쌍둥이는 풍파를 불러일으킨다.’라는 미신에 따라 없는 사람처럼 숨어


지냈을 것이다.

세나와 리나 중 없는 사람이 될 이를 결정지은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건강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리나가 내내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나를 꼭 알아봐 주겠다는 약속.’

그것은 지난날 나와 요한이 했던 약속이었다. 그 약속을 떠올려 보았을 때, 그녀들은 역할


바꿔치기로 서로의 행세를 했던 것 같다.

리나는 아프지 않을 때, 세나인 척을 하며 종종 공작저를 오갔을 것이다. 그러곤 어린 요한과


바비를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정리해 보았을 때, 문득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세나의 일기장 속 내용이었다.

거기에도 분명 몸이 아팠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일기장을 꺼내어 다시금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내가 생생히 기억하는 부분은 나와 필체가 같은 앞의 내용이었다. 필체가 묘하게 뒤바뀐 여섯


번째 이후의 일기 내용은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확인해 보자.

나는 요한의 방에 있는 책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책장에 꽂힌 붉은 표지를 가진 책이 내


눈에 단번에 들어왔다.

세나의 일기장이었다.
“…….”

나는 요한에게 잡힌 손을 아주 천천히 빼내었다. 요한은 깊게 잠든 것인지 내 손이


빠져나갔음에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휴, 나는 짧게 숨을 고른 뒤에, 침대에서 조용히 내려왔다. 그러곤 살금살금 책장까지 걸어가


세나의 일기장을 뽑아 들었다.

제법 순탄한 진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침대로 갈 생각은 접어 두고선, 그 자리에 선 채로 일기장을 펼쳐 들었다.

책장을 몇 장 넘기자, 여섯 번째 이후의 일기 내용은 금세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그


내용을 다시금 읽어 보았다.

⌜……펜을 잡기 힘들 정도로 몸이 좋지 않다.⌟

소소한 행동을 하는 것조차도 버거울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던 세나.

조슈아를 낳고 1 년 후 갑자기 아파지기 시작했다는 세나.

어려서부터 아팠던 리나.

그리고 역할 바꿔치기.

……나는 일기를 마저 읽었다.

⌜그런 짓을 해 버린 나는, 인제 와 벌을 받고 있는 걸까?

나는 그날, 리나라는 이름을 절규하듯이 부르던 세나의 목소리를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 목소리가 잊히지 않아.⌟

벌을 받아 마땅한 그런 짓.

그 짓은 내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그 일을 뜻하는 게 아닐까?

절벽에서 떨어졌던 사람이 나인 것은 확실했다.

왜냐면 닮은 두 여자 중 절벽에서 떨어진 여자가 에메랄드빛 귀걸이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기억을 잃을 정도의 끔찍한 사고를 당했던 건 나.

그런 내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일기장 속 세나.


그리고 역할 바꿔치기.

그렇다면…….

“내가…… 진짜…… 세나인 거야?”

모든 상황들이 나를 세나라고 지목하고 있었다. 거기엔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설령 요한이라고 할지라도, 그 또한 나를 세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는 충격과 놀람에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다.

탁.

책은 마룻바닥과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하나 나는 그것을 주워 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듯한 느낌이었다. 무거운 둔기에 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한


느낌마저도 들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내 귓등에 공명하는 소리가 하나 있었다.

‘그걸 이제 알았니?’

그 목소리는 나를 명백히 비웃고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지난날 수어 번 들었던, 나를 원망했던 내 자매의


목소리였다.

……리나.

그것은 오래전에 죽은 리나의 망령이 속삭인 환청인 걸까?

환청은 작게 메아리치며 내 귓속을 두어 번 두드리더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망령의 목소리가 사라진 가운데, 내 귓가로 다른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리나, 깼어?”

잠에서 깬 듯한 요한의 목소리였다.

제 84 화. 불행을 조장한 시발점

머리가 또다시 아파 왔다.


누군가가 눈썹과 눈썹 사이를 날카로운 무언가로 계속해서 찌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앉아 있던 요한이 헐레벌떡 다가오는


게 보였다.

“리나! 또 왜 그래?”

“괜찮……아요. 잠깐 두통.”

길게 말할 여력이 없어서, 나는 짧게 대답하였다.

“의원을 불러올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잠깐만 안아 주세요. 그러면 돼요.”

나는 요한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요한은 이렇다 할 저항 없이 내 쪽으로 그대로 끌려왔다.

그는 다른 말은 덧대지 않으며, 내 등을 감싸 안았다. 그 또한 내 두통이 의원으로 해결될


일이 아님을 미뤄 짐작한 것 같았다.

관자놀이부터 시작해 이마 전체를 뒤덮은 고통은, 수면 밑에 오랫동안 잠겨 있었던 기억이


수면 위로 올라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깊게 심호흡했다.

이번엔 무엇이 떠오를까?

이번엔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될까?

 
까맸던 눈앞이 다시금 환해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밝아진 시야 앞으로 내비친 것은 욘두의
집에서 보았던 환영과 같은 풍경이었다.

작은 저택, 큰 침대 하나가 다인 낡은 방 안, 침대 위에 몸을 누인 나와 닮은 여자아이. ……


리나.

그리고 아픈 리나의 뺨을 쓰다듬어 주는 세나.

환영은 내가 조금 전에 보았던 장면 그대로였다.

나는 왠지 익숙한 그 장면을 빤히 들여다보며, 우리에게 얽힌 사연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기


시작했다.

세나와 리나. 쌍둥이인 나와 그녀 사이에 얽힌 지독한 사연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의 탄생은 불행을 의미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울려 퍼진 두 아이의 울음소리는, 탄생의 기쁨보다도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부모님이 걱정을 하게 된 이유는 제국 내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미신 때문이었다.

‘쌍둥이는 풍파를 불러일으키는 존재.’

그렇기에 쌍둥이가 태어나면 보통 덜 건강한 아이를 죽이거나, 두 아이 중 하나를 입양 보내는


것이 관행 아닌 관행이었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은 하나를 죽이지도, 입양을 보내지도 못했다. 두 아이 모두가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티 나지 않게 몰래 두 아이 다 키우는 건 어떨까?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은 두 아이를 키워 보자. 남몰래 키운다면, 모진 풍파가 다가오지 않을지도 몰라.

두 아이 중 어느 아이를 집 안에만 둘지 결정하는 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한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까닭이었다.

결정은 그렇게 고뇌 없이 저절로 내려졌다.

부모님은 건강한 첫째 아이의 이름을 ‘세나’로, 몸이 약했던 둘째 아이의 이름을 ‘리나’로


짓게 되었다.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 이름이 바로 세나였다.

우리는 외적인 부분이 놀라울 정도로 꼭 닮은 쌍둥이였다. 금빛의 머리카락 색하며,


에메랄드빛 눈동자하며, 심지어 체형마저도.

하지만 내적인 부분은 애석할 정도로 하나도 닮지 않은 채였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건강하게 컸고, 리나는 침대에 누워서 지내는 날이 늘어 갔다.

물론 부모님이 리나의 병을 고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몸에 좋은 영약을 구해 오기도 했고, 의원을 주기적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나의 병은 나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지고 있던,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치병.


그것이 리나의 병명이었다.

아버지는 그러한 사실을 굉장히 안타까워했던 것 같다. 내가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나이가


되고부터 아버지는 내게 매번,

‘세나. 아픈 네 동생은 불쌍한 아이란다. 부디 그 아이를 잘 돌봐다오.’

라고 강조하셨으니 말이다.

거듭된 말은 세뇌가 되었다.

나는 리나를 돌보는 일을 거스를 수 없는 숙명처럼 여기고 있었다.

주어진 숙명에 따라, 나는 리나를 정성스럽게 돌보아 주었다. 어느 땐 부모님보다도 더


성심성의껏 리나를 돌보아 주었던 것 같다.

때때로 리나가 마른기침이라도 연거푸 하는 날에는, 아이의 곁을 밤새 지키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러곤 잠든 리나의 손을 잡고선 간절하게 기도했다.

‘리나가 건강해지게 해 주세요. 건강해져서 저랑 같이 정원에서 뛰어놀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때가 아마도 다섯 살 때였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리나가 건강해진다고 할지라도, 나와 정원에서 뛰어놀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쌍둥이 중


한 사람은 숨어서 지내야 했으니까.

아무튼 나는 리나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는 완벽한 언니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로


리나는 내가 제게 양보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게 되었다.

시간은 조금 더 흘러, 우리는 일곱 살이 되었다.

일곱 살이 되었어도 변한 것은 없었다. 리나의 병세는 여전했고, 나는 여전히 건강했다.

달라질 것 없는 환경이 달라진 계기는 아버지의 한 가지 제안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세나. 랭카스터 가의 양녀가 되는 것은 어떻겠느냐?’

우리는 평민이었으나 내가 태어날 당시엔 벌이가 꽤 괜찮았던 집안이었다.

하지만 오랜 병수발은 기어코 가세를 기울게 만들었다.

제국 내에 도는 무서운 미신을 알면서도, 우리를 성심성의껏 키우셨던 아버지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아버지는 힘들고 지쳐 보였다. 어린 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세나. 너를 그곳에 팔려는 게 아니라는 걸, 네가 알아주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그곳의


양녀가 된다면 우리뿐만이 아니라, 네게도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거란다.’
‘…….’

‘너는 희생을 더 이상 강요당하지 않아도 되고, 네 마음껏 살 수 있어. 나는 네가 그곳의


양녀가 되어,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구나.’

‘……아버지.’

‘하지만…… 그래도 미안하다. 이런 제안을 할 수밖에 없어서…… 이 아비가 정말로 미안해.’

나는 그때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항상 강인하고, 굳건했던 아버지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얼마나 괴로웠던 걸까.

나는 아버지의 청을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물론 어렸던 까닭에 그 당시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죄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더는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했다.

아니, 어쩌면 ‘희생을 더 이상 강요당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에 큰 구미가 당겼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리나에게 희생을 하고, 베푸는 일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머릿속 한편으로 그 일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양보하는 일은 이제 지긋지긋해.

그런 생각을 한 번쯤은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버지의 손을 잡고서 찾아간 곳이 바로 랭카스터 공작가였다.

랭카스터 공작가는 태어나서 본 저택 중에 제일 큰 저택이었다. 나는 위압적이기만 한 저택의


외양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 나를 과연 양녀로 삼아 줄까 싶어서.

양녀가 되지 못한다면…… 아버지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이요, 나는 또다시 내


삶보다도 동생의 삶을 우선시하는 생활로 돌아가야만 했다.

……끔찍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끔찍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왜일까.

다행히도, 랭카스터 공작가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다.

딸아이를 가지고 싶어서 신분을 막론하고 여자아이들을 모집한 랭카스터 가의 가주도,


공작가의 여러 사용인도, 그리고 랭카스터 가 가주의 아들들마저도.
아니, 정정하겠다. 랭카스터 가에서 만난 두 명의 공자 중 한 사람만 친절했다고.

한 사람은 어린아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려 깊었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내가 만난


아이들 중에 성격이 제일 좋지 않았다.

전자의 이름은 ‘바비’, 그리고 후자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우연히 만나게 된, 어쩌면 형제가 될지도 모를 그 남자아이들과 나는 제법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바비와 요한 중 시간을 더 많이 보낸 쪽을 고르라면, 애석하게도 요한이었다. 후처의


자식이었던 바비는 공작저가 아닌 다른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거듭된 만남은 요한을 둘러싸고 있던 경계 막을 흐물흐물해지게 만들었다.

낯선 이를 경계하며 제 이를 드러냈던 요한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제법 친절하게 대해 주기


시작했다.

‘넌 소름 끼치게 못생겼으니까, 이거라도 하고 다녀.’

그리 말하며 요한이 건네준 것은 나비 모양의 예쁜 핀이었다. 못된 말과는 상반되는 귀여운


선물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요한은 그런 모습을 숱하게 지켜보며, 요한이 표현하는 데에 서툰 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론 상황이 역전되었다.

나는 툴툴거리지만 마음이 약한 요한을 매번 놀렸고, 요한은 나의 놀림을 받으면서도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제 또래의 여자아이를 만난 것은 내가 처음이라, 그는 나를 처음부터 조금 각별하게 생각한


듯했다. 나는 그 모습을 아주 귀엽다고 생각했다.

양녀 결정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랭카스터 가의 가주는 양녀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 아주 신중을 기했고, (아마 공작가라는


위신에 알맞은 아이를 선별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에 따라 내가 랭카스터 가에 가는
횟수는 점점 더 늘어 갔다.

그에 따라, 나는 우리 집과 공작저를 오가는 생활을 오랫동안 하게 되었다. 이따금씩


공작저에서 자고 가는 날도 존재했다.

공작저를 다녀온 날이면, 나는 꼭 리나를 만나러 갔다.

그러고선 공작저에서 있었던 일, 거의 대부분 요한과 있었던 일을 리나에게 세세히 얘기해


주곤 했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고백은 아니었다. 나는 공작저에 가기 전부터, 바깥일을 리나에게 줄곧


얘기해 주곤 했었다.
리나는 내가 해 주는 얘기를 무척이나 좋아해 주었다.

어떨 땐, ‘더 해 줄 얘기가 없어?’라는 말을 하며, 내가 조금 더 이야기해 주기를 바랄 때도


있었다.

그렇기에 공작저에 다녀왔던 일 또한 리나에게 알려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리나는 아팠고, 침상 밖으론 거의 나올 수 없었고, 바깥세상이 궁금할 거고, 답답했을 테니까.

랭카스터 공작가에서 있었던 일 또한 리나가 즐겁게 들어 주리라.

나는 그 나이에 맞게, 안일하게 생각하였다.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을 듣고 있던 리나의 얼굴을 조금도 괘념치 않았다.

온화한 눈으로 나를 보았던 리나의 눈빛이 어떻게 변하는지, 나는 조금도 헤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리나 사이의 불행을 조장한 시발점이었다.

‘있지, 리나. 들어 봐. 오늘은 요한과 바비가 달리기 시합을 했어. 하지만 순탄했던 건
아니었어. 요한이 그랬거든. 자기는 체통을 지켜야 하는 공자라서, 달리는 일 따윈 하지
않겠다고. 큭큭.’

이야기는 어두운 밤, 리나의 침대 위에서 늘 이루어졌다. 나는 리나 옆에 꼭 붙어 누운 채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달리기 시합을 하게 만들었는데?’

‘이기는 사람에게 화관을 만들어 준다고 했어. 공작가의 정원에는 예쁜 꽃들이 많이 피어


있거든. 떨어진 꽃들만 주어서 만들어도 아주 예쁜 화관을 만들 수 있어.’

‘…….’

‘그러니까 웬걸. 요한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뛰면 되느냐고 묻는 거 있지? 큭큭. 역시


요한은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

리나는 대답은 침묵이었다.

나는 줄곧 침묵하는 리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천장을 보던 고개를 조금 돌려, 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리나는 뒤늦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그때 나를 보던 리나의 눈동자 속에


내비친 부러움과 시기를 보지 못했었다.
나는 신이 나 있었고, 그런 것을 유념할 만큼 주의력이 깊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결국은 누가 이겼는데?’

긴 침묵 끝에 뒤늦게 내어놓은 리나의 말이었다. 나는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이를 간 요한이 이겼어. 그리고 요한은 그날 하루 종일 내가 준 화관을 쓰고 있었지. 체통을


지켜야 하는 공자 주제에.’

요한이 죽을 둥 말 둥 달리기 시합을 한 것은, 비단 바비에게 이기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닐 것이다.

요한은 아마 내가 준 화관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 밥맛이 꽃을 좋아했던가. 아니면, 나를…….

‘세나 언니. 얼굴이 붉어졌어.’

‘……! 어머, 정말? 가을인데…… 이상하게 덥네.’

나는 내 얼굴을 붉히게 만들었던 생각을 마저 했다.

요한이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나도 요한이 싫은 건 아닌데.

어렸던 나는 요한을 어떤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인지 잘 가늠할 수 없었다.

그와 형제가 되기를 바랐기에 느낀 감정일지, 이성적인 감정일지.

켜켜이 쌓였던 리나의 감정이 폭발한 것은 내가 여덟 살이 된 무렵이었다.

조금 다르게 설명하자면, 내가 공작저를 오간 지 일 년이 지난 후였다.

사건이 일어난 그날 또한 나는 리나에게 공작저에서 있었던 일을 토로하고 있었다. 우리가


얘기를 나누는 장소는 늘 같았다.

리나의 커다란 침대 위. 그녀의 병은 일 년이 지났음에도 차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리나, 있잖아. 오늘 요한이 꽃으로 만든 반지를 줬다? 얼굴도 엄청 붉어져 있었어.’

‘…….’

‘큭큭. 요한은 무슨 생각으로 내게 반지를 준 걸까? 형제끼리는 그런 걸 주고받지는 않잖아.


그 아이는 내가 제 형제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 걸까?’

리나는 그날 또한 대답을 하지 않고선 침묵을 지켰다.

‘……리나?’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순간이었다. 가만히 누워 있었던 리나가 몸을 일으켜 내게
달려들었다.

‘……!’

리나는 재빠르게 내 몸뚱이 위로 올라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변모한 리나의 눈동자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아팠지만,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던 리나였다. 하나 그날 리나의 눈에 서린 기류는 증오와


분노밖에 없었다.

리나의 얼굴은 고약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 얼굴은 꼭 터지려는 울음을 참아 내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음에 그녀가 한 행동은 다소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앙상히 마른 손으로 내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리……리, 나…….’

나는 기도가 막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내 목을 조른 리나의 손을 물리려고 노력했지만, 리나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픈 그녀라고는 믿기지 않는 악력이었다.

리나는 나보다도 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네었다.

‘왜 항상 너만 행복해져?’

리나……. 나는 차마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동생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네가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리나는 내가 불행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것은 처음 들은, 분노가 서린 리나의 말이었다.

제 85 화. 역할 바꿔치기의 초석

한 번 말문이 트인 리나는 제가 지금껏 생각해 왔던 것들을 내게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왜……! 언니는 왜 노력 없이 모든 것을 다 얻는 거야? 왜 항상 언니만 행복한 거냐고!’

리나는 나를 명백히 원망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향한 그녀의 원망을 피부 깊숙이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불행했어. 나는 늘 아팠고, 누군가에게 내 정체를 들켜선 안 됐고,
아버지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어.’

처절한 말을 내뱉은 리나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얼마 못 가 내 뺨 위로 리나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리나는 울음으로 인해 일그러진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의 말을 이어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착하게 웃는 일밖에 없었어. 착하게 웃지 않으면, 부모님이 나를


완전히 외면할 테니까.’

‘…….’

‘하지만 언니는 뭐야? 언니는 뭘 했길래 모두의 사랑을 받는 거야? 언니가 한 일이라곤 고작
건강한 몸으로 여기저기 나다닌 것밖에 없잖아.’

‘……리, 리나.’

‘양보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언니가 내게 뭘 양보했어? 언니가 내게 양보한 건 하나도 없어.
언니는 언니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을 뿐이야. 결국 좋은 곳의 양녀가 되려는 사실도, 언니
본인을 위한 거잖아.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시궁창 같은 우리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
병수발은 그만 들기 위해.’

쉼 없이 말한 리나는 가쁜 숨을 내뱉었다. 리나가 이렇게까지 길게 말하는 것은 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뒤늦게 리나의 진심을 모조리 알 수 있었다.

내가 항상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여러 일들…… 가령 리나가 궁금해하는 바깥세상 이야기를 해


준다든지, 혼자 지내야 하는 그녀의 이야기 동무가 되어 준다든지, 그런 일들을 리나는
최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게 아닐까?

건강한 내게 시샘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내가 만들어 버린 거라면…….

숨이 가빠진 것은 비단 리나 한 사람뿐 만이 아니었다.

리나에게 목이 졸린 나 또한 숨이 점점 더 가빠왔다. 나는 리나의 손목을 힘주어 잡았다.

‘제발…… 그, 그만.’

나는 힘겹게 한마디를 뱉어 내며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리나는 내게 토로하고 싶은 말이 남은


듯했다.

‘가만히 누워 있다고 해서 내 마음이 편할 줄 알았어? 나도 힘들어……. 힘들었다고! 나는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됐어. 양보를 받는 아이답게 모든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했으니까.’

리나는 그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서러움을 모조리 말하였다.

양보 받는 아이의 심정은 어떨까?


그것은 여태껏 내가 한 번도 고려해 보지 않은, 어떤 기분일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러자 마음 한편이 아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닌 말로, 나는 보란 듯이 희생하는 내 모습에 도취되었던 적이 있었다. 양보하는 아이가


되어 받은 부모님의 칭찬에 어깨가 올라갔던 적 또한 존재했다.

대견한 아이. 어른스러운 아이……. 나는 그런 칭찬을 들어가며, 리나의 기분이 어떨지는


조금도 가늠해 보지 않았다.

매일 같이 침상에 누워 있는 그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어떤 꿈을 꿀지. 나는


리나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사이에도 리나의 눈물은 점점 더 굵은 방울이 되어, 내 얼굴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고통으로 인해 반쯤 감긴 눈으로 바라본 동생의 얼굴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내 목을 조르는 건 너인데, 왜 네가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차마 묻지 못한 말이었다.

‘……나도 언니가 매일같이 말하는 그 저택에 가고 싶어. 나도 그곳의 양녀가 되고 싶어.


그리고 나도 그 남자아이를 만나고 싶어…….’

‘…….’

‘나도…… 나도 언니처럼 행복해지고 싶어.’

거기까지 말한 리나는 그제야 내 목을 조르던 손을 놓았다.

리나는 내 몸 위에 그대로 올라탄 채로 눈물을 소매로 훔쳐 냈다. 그녀의 흐느낌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컥, 하…….’

나는 갑작스럽게 확 트인 기도로 숨을 연신 몰아쉬었다.

숨이 안정적으로 내쉬어졌을 때, 나는 상체를 조금 일으켜 리나에게 손을 뻗었다.

이내 내 손끝이 닿은 곳은 리나의 하얀 뺨이었다. 나는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

리나는 갑작스러운 내 손길에 당황한 듯 어깨를 흠칫 떨었다. 눈물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그녀의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그녀의 눈은 내게 소리 없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난, 좀 전에 너를 죽이려고 했어. 너는 어떻게 내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거야?

황당함, 허탈함……. 리나는 내게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리나의 뺨에 닿아 있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목덜미를 느릿하게 쓸며, 헛기침을 두어


번했다. 내뱉어진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 있었다.

‘……괜……괜찮아.’

‘……세나 언니.’

그녀는 괜찮다고 말한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내 이름을 불렀다.

물론 리나가 내 목을 조른 일이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 동생이 순하고 착한 줄만 알았다. 하나 그녀는 내게 부정적인 감정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고, 심지어 나를 죽일 듯이 몰아붙였다.

그것은 정말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오래 산 것도 아니었지만, 살아온 내 인생을 통틀어 제일


충격적인 일이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나는 어쩐지 리나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우리가 물보다 진한 피로 연결되어 있기에
느낄 수 있는 이해일 수도 있었다.

나는 리나가 안쓰럽기까지 했다.

굳이 폭력적인 일을 하지 않았어도, 나에게 솔직하게 말을 해 줬었어도, 나는 분명히 동생의


마음을 이해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고선 어떻게 해야 응어리진 리나의 마음이 풀릴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주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내 하나뿐인 쌍둥이 동생이었으니까. 나는 그녀가 불행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 마음은 완전히 털어 내지 못한 아버지의 세뇌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다.

아픈 동생을 무조건 위해 주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은,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도 내 머릿속에
강하게 낙인이 되어 있었다.

설령 내가 동생에게 양보하는 일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그래도 나는


은연중에 동생을 위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양보를 잘 하는 어른스러운 아이니까.

‘……휴. 좋아, 그럼 이제 네가 원하는 걸 내게 말해 봐.’


나는 리나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일지 궁금했다.

밖으로 나가는 일을 바란다면, 나는 아버지에게 부탁을 해 볼 참이었다. 몰론 그 일은 리나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말에 리나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리나는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입술을 뭉그러뜨리며


대답을 골몰했다.

나는 그녀가 대답을 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이내 리나는 한마디씩 천천히 뱉어 냈다.

‘내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줄 거야? 이번엔 제대로 양보를 해 줄 거야?’

나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리나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바를 내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도…… 랭카스터 공작가에 가고 싶어.’

‘…….’

‘그곳에 가서, 언니인 척 요한과 놀고 싶어.’

그것은 다소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리나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리라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답은 곧바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나는 리나가 나인 척을 하며 요한을 만나게 될 사실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왜 대답을 안 해 줘? 다 들어준다고 했잖아. 이번엔 제대로 된 양보를 해 준다고 했잖아!’

리나는 나를 재촉했다. 나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두 사람의 만남이 달갑지 않은 것보다, 리나가 더 이상 슬퍼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조금


더 컸다. 그것은 아주 근소한 차이였다.

우리의 역할 바꿔치기의 초석은 그렇게 마련되었다.

그날 이후, 리나는 자신의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전에 없던


간절함이 생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노력은 곧 결실을 보게 되었다. 리나가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만큼 회복된 것이다.

리나는 기뻐했다. 랭카스터 공작가에 갈 정도로 호전된 자신의 모습을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러한 그녀를 곁에서 지켜보는 내 마음은 그러하지 못했다.

역할 바꿔치기를 허락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건강이 호전된 사실이 내심 탐탁지


않았다.
‘세나 언니. 그럼 오늘 하루는 내가 언니인 척, 랭카스터 공작가에 가도 돼?’

리나는 생기 가득한 얼굴로 그리 물었다. 전에 없던 간절함이 만들어 낸 그녀의 생기.

나는 나와 닮은 리나의 얼굴 속에 깃든 절실함에 이기지 못했다.

‘……응.’

‘고마워! 세나 언니는 정말 최고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언니인 척을 잘할 테니까,


걱정은 하지 마. 의심받을 짓도 하지 않을게.’

‘…….’

‘부모님께는 비밀인 거 알지?’

괜찮은 걸까?

부모님을 속인 채로 리나를 공작저에 보내는 게 옳은 일일까?

하지만 나는 신나 하는 리나의 얼굴이 못내 신경 쓰여, 리나를 공작저에 보내 버리고야 말았다.

한 번은 괜찮겠지. 그땐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리나가 모두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나인 척을 잘해 주겠다고 했으니까……. 들킬 일은


없겠지.

나는 나 자신을 타일렀다. 하나 왠지 모르게 공허해진 마음은 조금도 채워지지 않았다.

리나는 내가 자주 입던 드레스를 입고, 요한이 내게 준 나비 머리핀을 한 채로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같은 시간, 나는 리나가 자주 입던 수수한 홈드레스를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따금 부모님이 나를 보러 오긴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자는 척을 했다.

외적인 것은 놀라울 정도로 닮은 우리라서, 우리의 역할 바꿔치기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누워만 있는 것은 꽤나 괴로운 일이었다.

잠도 오지 않는 오후,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요한과 리나가 어떤 대화를 나눌지 상상했다.

그것은 내가 한 상상 중에 제일 괴로운 상상이었다.

“……리나. 아직도 머리 아파?”


깊은 과거에서부터 나를 꺼내어 준 것은 이번에도 요한이었다. 나를 꽉 껴안은 요한은 내내
침묵만 하는 나를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떠, 입술을 조금 벌렸다. 그 사이론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뇨, 이제 아프지 않아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두통이 완전히 가셔 있었다. 떠올려야 할 기억을 모두 떠올렸기에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처럼.

요한은 안고 있던 나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이내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요한은 내 안위를 살피려는 듯 나의 얼굴을


세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에게 안긴 채로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떠올린 과거 속에서 앳된 얼굴로 툴툴거리던 요한의 얼굴과, 훌륭한 남자가 된 현재 요한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요한.”

“어.”

“저…… 이제 제가 누군지 확실히 알 것 같아요.”

“……어?”

요한에겐 몹시도 충격적인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미 사실을 깨달았고, 내가 깨달은 사실을 요한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차마 털어놓지 못한 사실 때문에 뒤늦은 후회를 하기 전에.

어렸을 때, 쌍둥이 동생과 역할 바꿔치기를 했다는 사실을 요한에게 알려 주지 않은 것을 나는


지금에서야 후회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우리에게 있었던 일을 요한이 알고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제가 세나였던 것 같아요.”

내가 떠올린 진실은, 요한의 귀에 곧바로 와 닿았을 것이다.


“아니, 제가 세나예요. 당신과 어렸을 때부터 추억을 나누었던 그 세나가…… 나란
말이에요.”

구두점을 찍었을 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요한의 뺨에 머물던 손을 물려, 내 뺨을


훔치려고 했다. 하나 요한의 동작이 조금 더 빨랐다.

그의 손은 어렵지 않게 다가와, 눈물로 젖어드는 내 뺨을 매만져 주었다.

눈물로 인해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보이는 요한의 얼굴엔 충격도, 놀람의 기운도 없었다.

“괜찮아. 울지 마. 내가 다 들어 줄게.”

“…….”

“네가 무엇을 얘기하든, 어떤 충격적인 말을 내어놓든. 내가 네 말을 다 믿어 줄게.”

바보, 당신은 왜 내가 하는 말에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는 거야.

나는 말을 잇지 못한 채로 눈물만을 흘렸다.

“일단은 네 울음이 그치면, 그때 다시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줄래?”

몹시도 다정한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이 요한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는 그의 다정함이 원인인 게 틀림없었다.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차라리 울지 말라고 다그쳤다면, 내 눈물이 그쳤을지도 몰라.

잊은 과거를 떠올리기를 그토록 바랐음에도 왜 눈물이 나는 걸까.

그것은 떠올린 과거가 너무도 슬펐기 때문일까?

아니면, 애달픈 과거를 이제는 영영 돌이킬 수 없음이 한탄스러웠던 까닭일까.

과거를 선명하게 떠올린 순간에 요한과 함께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물을 닦아
줄 요한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 * *

울음을 그친 나는, 리나와 내게 드리운 태초의 불행부터 차례대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쌍둥이였지만, 가족을 제외한 세나의 주변인들이 왜 그 사실을 몰랐는지. 리나와 내가 왜 역할


바꿔치기를 시작한 것인지.

이야기는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요한은 추임새를 넣지 않으며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주었다. 그는 내 얘기를 들으면서도
나와 눈을 반듯이 맞추고, 내 손을 꼭 잡은 채였다.

“……당신은 저를 대신해서 리나를 종종 만났어요. 그런 낌새를 눈치챈 적 있나요?”

요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 너무 예전 일이라서 그런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하지만 이렇다 할 기억이 없다는 건,


큰 의심을 가진 적이 없다는 걸 뜻하는 게 아닐까?”

우리를 구별하지 못한 지난날의 요한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리나와 나는 마음먹는다면, 서로인


양 굴 수 있었으니까.

부모님조차도 분별하지 못했던 우리였다. 고작 어린 요한이 우리를 단번에 구별할 수 있으리라


여겨지지 않았다.

요한의 떨림을 느낀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나는 시선을 누그러뜨렸다. 그러자 눈에 띌 정도로


덜덜 떨리는 요한의 손이 보였다.

나는 그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아 주며, 그 손의 떨림이 가시기를 바랐다.

“……네가 더 상심할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는데, 더는 못 하겠다.”

요한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세나라니……. 세나……. 하…….”

그는 진짜 내 이름을 띄엄띄엄 불렀다. 하고 싶은 말은 넘칠 듯이 많았으나, 무슨 말부터 먼저


해야 좋을지를 가늠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제 86 화. 언니의 삶을 내가 완전히 빼앗아 버릴 거야

요한은, 세나와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녀에게 제일 먼저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고민했던 나날들이 있었다.

소모적인 고민인 걸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그 주제에 대해서 이따금 생각했다.

그리하여 긴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바로 그러했다.

‘나를 혼자 두고, 왜 너 먼저 간 거야.’

어리광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여겨도 좋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바로 요한의 솔직한 마음을 제일 잘 표현한 말이었다.


세나는 사랑스러운 조슈아와 저를 놔두고 너무도 일찍 생을 마감해 버렸다.

그녀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러나 저를 두고 먼저 간 그녀를 원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테다.

요한은 확신했다. 세나에게 제 진심을 전할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제가 세나였던 것 같아요.’

‘아니, 제가 세나예요. 당신과 어렸을 때부터 추억을 나누었던 그 세나가…… 나란


말이에요.’

연거푸 이어지는 리나의 충격적인 고백에 요한은 눈앞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세나를 다시 만난다면 해 주고 싶었던 말들 모두 무용지물이 된 듯한 기분마저도 들었다.

고백하듯이 내뱉은 그녀의 말이, 거짓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엔 진심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자신이 ‘세나’임을 확정 지어서 말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그녀의 돌아온 기억


때문이리란 것을, 요한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떠올릴 듯 떠올리지 못했던 그녀의 기억이 제법 완전하게 떠올랐나 보다.

그녀가 잊고 있던 기억 속엔 제가 존재했었나 보다.

요한은 눈물을 왈칵 흘리고 싶었다. 눈물샘이 마를 때까지 눈물을 흘려 내고만 싶었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왜 이제야 기억을 떠올린 거냐고. 너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누구냐고.

우습게도 리나의 고백에 의심이 가지는 않았다.

요한은 그녀의 말에 전적인 신뢰를 느끼고 있었다. 설령 4 년 전, 죽은 세나가 흙 속에


파묻히는 걸 보았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초월한 무언가의 일이, 제가 쉬이 짐작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요한은 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리나가 세나가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리나가 세나인 게 아닐까?’ 하는 제 의심 또한 걷잡을 수 없이 커졌기에 가능한
믿음이 아닐까.

결론적으로, 요한은 눈물을 참아 냈다.

제 과거를 힘겹게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리나를, 아니, 세나를 안아 주어야 했으니까.

제가 눈물을 흘리는 건 조금 뒤로 미루자. 세나가 진정할 때까진, 그녀를 먼저 위로해 주자.

제가 받은 충격보다 본인에게 들이닥친 충격이 훨씬 더 클 테니까.

세나는 제 기억을 어디까지 떠올린 걸까.

세나의 이야기는 길어졌고, 요한은 그녀의 이야기를 진중하게 들어주었다.

이야기의 핵심은 ‘주변에 알려지지 않아야 했던 쌍둥이’였다.

쌍둥이이지만, 완전히 상반된 삶을 살아가게 된 두 여자.

첫째인 세나는 밖에 나다닐 수 있는 아이였고, 둘째인 리나는 숨겨진 채로 길러진 몸이 아픈


아이였다.

‘……당신은 저를 대신해서 리나를 종종 만났어요. 그런 낌새를 눈치챈 적 있나요?’

요한은 그러한 낌새를 느낀 적이 없었다. 그는 과거의 제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네가 더 상심할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는데, 더는 못 하겠다.”

요한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세나라니……. 세나……. 하…….”

거기까지 말한 그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겨우겨우 말을 내뱉었지만, 목소리는 아주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나를……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세나는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너희가 뒤바뀌게 된 그 시점의 이야기를 해 줘. 역시나 일기장의 뒷부분은 다른 사람이


썼다는 거지?”

세나는 확고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말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일기장의 뒷부분을 쓴 사람은 리나예요. 성인이 된 저희가 또다시 바뀌게 된 것은 아마도 5


년 전, 어느 날이었던 것 같아요.”
세나의 이야기는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어린 리나가 세나의 목을 조른 이후, 종종 역할 바꿔치기를 하여 두 아이가 공작저를 오갔다는


내용의 뒷이야기였다.

역할 바꿔치기는 랭카스터 가의 양녀 채택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리나는 세나와는 다르게, 제가 겪었던 이야기를 세나에게 세세히 토로하지 않았다.

‘공작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라고 세나가 물어도, 리나에게선 ‘그냥 언니인 척을 잘 했어.


그러니까 신경 꺼.’라는 신경질적인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세나는 역할 바꿔치기를 한 일이 들킬까 봐 염려를 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왜냐면 얼마 못 가 리나의 병세가 다시금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악화된 그녀의 병세로 인해서, 역할 바꿔치기는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리나는 말을 거의


하지 않으며 잠만 자는 날이 늘어갔다.

그리고 에믈린이 양녀로 채택되었을 무렵, 리나의 병세는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었다.

그때, 가족 모두가 리나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세나는 말했다.

오랜 병수발은 아버지를 너무도 지치게 만들었고, 아버지 또한 여러 지병을 앓게 되었다.

세나는 리나에게 역할을 바꿔치기 해 주는 일이 싫어서 그녀가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나쁜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리나는 죽지 않았다.

세나가 요한과 결혼할 때까지도. 세나가 조슈아를 낳을 때까지도 그녀는 죽지 않았다.

리나는 가늘게 이어지는 명줄을 꼭 붙들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의 사명을 완수해야만 마음


편히 죽을 수 있다는 사람처럼.

먼저 생을 마감한 이는 그녀들의 부모님이었다.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는 내내 리나는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 또한 ‘


저를 숨겨서 길렀던’ 부모님을 일평생 원망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사건은 5 년 전, 세나가 조슈아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벌어졌다.

그 시절의 세나는 엄청나게 들떠 있었다.

첫 아이,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무사히 낳았다는 사실에 몹시도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세나는 어렸을 때 리나에게 목 졸림을 당한 이래로, 자신의 이야기를 리나에게 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리나를 돌보는 걸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세나는 아버지가 했던 리나의
병수발을 제가 이어서 하고 있었다.

장녀로서의 이상한 책임감. 세나는 여전히 그 책임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따금씩 들른 집에서 마주한 리나에겐, 요한과 관련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리나는 언제고 제 얼굴을 꼼꼼히 바라보았다.

리나는 평소엔 죽은 사람처럼 생기 없는 눈을 하고 있지만, 제 얼굴을 꼼꼼히 살필 때만은


살아 있는 사람의 눈을 했다.

그러니까, 리나의 눈이 총명하게 빛났다는 소리다.

그때 마주한 리나의 두 눈은 꼭 제 얼굴이 행복한지, 행복하지 않은지를 살피는 눈빛 같다고,


세나는 생각했다.

자신은 행복하지 않으니, 너 또한 불행해져야 해. 리나의 눈은 제게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듯했다.

세나는 리나의 눈동자를 볼 때면 까닭 없이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네가 또다시 내 목을 조를 것만 같아.’

세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설마 그런 일이 또다시 일어날까 싶었다.

그동안 얼마나 리나를 위해 주었던가. 리나가 해 달라는 것 중에 해 주지 않은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안일한 생각이었다.

세나는 한평생 그림자처럼 숨죽여 살아온 리나의 심정 전부를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사고가 있었던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오던 날이었다. 왠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류가 가득한 날.

보고 또 봐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조슈아 덕에, 세나는 리나에게 제법 오랜만에 찾아간


날이기도 했다.

그날은 어쩐지 리나가 침대에 누워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이전에 세나가 사다 준 좋은 드레스를


입은 채로 소파에 느른히 앉아 있었다.

‘오늘은 몸이 좀 괜찮은 거야?’

‘……응. 그런 의미에서, 나와 함께 외출을 해주지 않을래?’


다소 뜬금없는 리나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가…….’

하지만 놀랍게도 비는 일순간 말끔히 그쳐 있었다. 하늘엔 우중충한 먹구름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때마침 그쳤잖아. 언니가 온다고 해서, 삯 마차도 미리 불러 놓았어.’

리나는 어울리지 않게 세나의 팔짱을 끼며 살갑게 굴었다.

‘같이 나가자. 응? 나, 오늘은 몸이 꽤 가볍단 말이야. 오랜만에 언니랑 나가고 싶기도


하고.’

세나는 고민이 되었지만, 결국 그녀의 제안에 응해 주었다.

리나가 한 말대로 그들이 함께 밖을 나간 지 제법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나갔다 온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어.

‘알겠어. 나가자.’

리나는 제 제안에 수긍해 준 세나를 와락 껴안았다.

그때, 세나는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리나의 귀에 걸린, 짝이 하나밖에 없는 에메랄드빛 귀걸이였다.

저런 걸……. 언제 산 걸까. 왜 한쪽만 끼고 있는 걸까?

세나는 의문스러웠지만, 곧 의심을 지워 냈다.

지독한 병 때문에 밖을 잘 나다니지 못했지만, 리나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꾸미는 일을


좋아했다.

그런 그녀였기에, 제가 공작저에 머물 때, 어딘가에서 사 온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해


버렸다.

못 보던 귀걸이 하나가 생긴 게 뭐 대수로운 일일까 싶어서.

이내 함께 올라탄 마차는 곧바로 어디론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행선지를 이르는 말은 없었다. 리나는 이미 마부에게 행선지를 알려 준 것 같았다.

리나는 그날 말을 참 많이 했다.

제가 혼자서 뭘 하고 지냈는지,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평소 저에 대한 말을 잘 하지


않던 그녀라곤 믿기지 않는 수다였다.
세나는 밝아진 제 동생의 모습이 기뻤다.

리나를 잠깐 미워하기는 했으나, 그녀는 결국 하나밖에 남지 않은 제 혈육이었다. 세나는


리나를 온전히 미워할 수 없었다.

리나의 이야기에 너무도 휩쓸린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깨달았을 땐, 주위의 광경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상가와 집들로 즐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주변은 웬 녹음들로 가득해져 있었던
것이다.

‘언니. 이제 다 왔어.’

리나는 마차에서 먼저 내려, 세나의 팔을 끌어당겼다.

세나는 이내 어정쩡하게 마차에서 내리고선, 물음을 건네었다.

‘여기는 어디야?’

‘언니랑 같이 산에 올라온 적은 한 번도 없잖아.’

‘……응.’

‘그래서 이곳에 함께 와 보고 싶었어.’

그렇다고 하기엔 날씨하며, 도착한 곳의 풍경이 다소 묘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하늘엔 여전히 먹구름으로 가득했고, 도착한 풍경이 녹음을 감상하기엔
…….

‘여긴 절벽 아니니?’

그렇다. 그곳은 절벽이었던 것이다.

‘응. 절벽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얼마나 절경인지 몰라.’

리나는 서슴없이 말하며 마차에서 내린 세나의 팔을 또다시 이끌기 시작했다.

‘너…… 예전에 여길 와 봤어?’

‘그럼. 내가 언니의 삶을 모두 알 수 없듯이, 언니도 내 삶을 모두 다 알지 못하잖아. 예전에


한 번 올라와 봤어.’

‘그렇구나…….’

리나는 누구와 이곳까지 올라온 걸까.

세나에겐 그런 의문이 들었다.


숨어서 자란 탓에, 리나에겐 이렇다 할 친구는 하나도 없었다.

‘이리로 와 봐.’

이내 마주한 절벽은, 마차가 여기까지 올라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아득한 높이를 가지고 있었다.

세나는 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어지럼증이 일 정도로 아찔한 높이를 가진 절벽의 밑에는 키가 큰 나무들이 즐비해 있었다.

흐리지 않은, 맑은 날에 온다면, 정말 좋은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순간 잠깐 그쳤던 비가 다시금 쏟아지기 시작했다. 먹구름 사이로 차가운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리나. 그런데 여긴 너무 위험해 보여. 차라리 상가를 가자. 액세서리도 보고…… 새


드레스도 보고……’

‘하지만 그러려면 한 사람은 위장을 해야 하잖아.’

쌍둥이임을 들켜서는 안 되니까.

그들의 외출은 늘 한 사람이 위장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었다.

‘이런 곳에선 우리의 얼굴을 떳떳이 드러낼 수 있어. 아무도 없으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그 순간, 리나의 목소리가 급변했다.

리나는 어쩐지 냉랭해진 목소리로 제 말을 이어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내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아무도 모르겠지. 이곳엔 언니와 나밖에


없으니까.’

‘……리나?’

가까이 서 있던 리나가 세나의 어깨를 민 것은 그때였다.

어찌나 세게 민 것인지 세나의 몸은 곧바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세나는 본능적으로 리나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리나는 그런 세나의 팔을 한 번 더 밀쳤을


뿐이었다.

‘리나!’

리나는 미소 하나 띠지 않은 얼굴을 하고선,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가 점점 더 행복해지는 모습을 더 이상 못 봐 주겠어. 이젠 역할 바꿔치기가 아니라,
언니의 삶을 내가 완전히 빼앗아 버릴 거야.’

 
세나는 몸이 추락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마지막 몸부림으로, 리나의 귀에
걸린 에메랄드빛 귀걸이를 잡아챘다.

세나는 리나의 에메랄드빛 귀걸이를 꽉 쥔 채로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그다음은 요한이 아는 내용이었다.

절벽에서 떨어져 거의 죽을 뻔했지만, 리키 아저씨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한 세나.

사고의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게 된 세나.

그리고 5 년 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요한과 조슈아.

“……그럼 기억을 잃은 네가 왜 ‘리나’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그건 아마도 절벽에 떨어지는 내내 리나의 이름만 불렀기에, 그랬던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

요한은 시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조슈아를 낳은 후, 약 1 년간 세나로서 침상에 누워 있던 이는 리나였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그간 의문스러웠던 일이 제법 해결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건강하기만 했던 세나가, 갑작스럽게 원인 모를 병에 앓게 된 이유.

그것은 바로 리나가 가지고 있던 병이었던 것이다.

언니를 질투했던 리나가 세나인 척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왜 그때도 너희가 바뀐 걸 몰랐던 거지?”

요한은 마른 숨을 토해 냈다.

인지했을 땐, 눈가에선 눈물이 후드득 흘러내렸다.

그때, 리나와 세나가 바뀌었을 때.

리나가 세나를 절벽에서 밀어뜨리고, 세나인 척 공작저에 머물게 되었을 때.


제가 사람이 뒤바뀐 사실을 알아차렸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진 않았을 텐데…….

요한은 괴로웠다.

꼬여 버린 사실을 되돌릴 수 없음이, 그는 후회스러웠다.

제 87 화. 이제는 네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을게

“요한.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서로인 척을 하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지만…… 눈물이 나.”

요한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눈 주변이 눈물로 인해 반짝거렸다.

나는 그와 잡고 있던 손을 놓아, 그의 뺨을 닦아 주었다. 손끝에 묻어 나온 그의 눈물은


뜨거웠다.

“오늘은 울어도 돼요.”

“……응.”

나는 이번엔 그의 어깨를 감싸,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요한의 몸은 하릴없이 끌려와 내게


안기었다.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너는 왜 내게 처음부터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을까?”

기억이 돌아왔지만, 그 당시의 감정까지 선명하게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 내가 가졌던 감정을 얼추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는 무서웠던 거예요. 쌍둥이가 가지고 온다던 모진 풍파가, 혹 당신이나 조슈아에게


들이닥칠까 봐.”

“…….”

“요한.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은 과거의 저를 원망해요?”

“……아니. 내가 너를 왜 원망해.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감사한데.”

그는 울음기가 가득 밴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손은 내 등을 꽉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한 말은 그대로야.”

“어떤 말이요?”
“네가 진짜 세나든, 리나든 상관없다는 말.”

이내 그는 안겨 있던 몸을 조금 떼어 냈다. 그러곤 나와 지그시 눈을 맞추었다.

“왜냐면, 나는 다시 만난 너를 또다시 좋아하게 된 거니까.”

같은 여자를 두 번이나 사랑하게 된 기분. 너는 알아?

요한은 물었고,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알죠, 저도 같은 남자를 두 번이나 사랑하게 되었는데.

눈물에 젖은 그의 입술은 평소와는 다른 맛이 났다. 나는 그의 입술에서 눈물 맛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입을 맞추어 주었다.

아주 긴 밤이었다.

* * *

기억을 거의 다 떠올렸지만, 한 가지 의문점만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욘두는 도대체 나와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잊고 있던 내 기억을 샅샅이 훑어보아도, 내 기억 속에 욘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 일면식이 있던 사이가 아니었다.

그 순간 든 생각은 하나였다.

욘두는 내가 아닌, 리나와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해.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 제일 큰 근거로는, 그들이 나눠 낀 에메랄드빛 귀걸이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리나에게서 욘두와 관련된 말을 듣지 못한 터였다.

리나는…… 언제 어디서 욘두와 만나, 인연을 쌓은 걸까?

내가 모르는 리나의 사정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시체마저도 사라져 버린 리나가 보고 싶어졌다.

리나를 원망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확실히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녀가 내게 저지른 일을 생각해 본다면, 나는 리나를 원망해야 함이 맞았다.

리키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나는 5 년 전 그날 꼼짝없이 죽었을 테니까.

사랑했던 동생의 손에 죽어 조슈아와 요한을 다시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전적으로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리나가 어떤 생각으로 나를 밀친 것인지 알 것 같아서. 그 뿌리 깊은 증오엔 분명히 내 잘못도


있으리라 여겨져서.

나의 최선이 그 아이에겐 최선이 아니었음을 알 것 같아서.

그리고 나는 그 아이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서.

리나가 한 짓을 옹호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그녀를 하염없이 원망할 수는


없었다.

혈육으로 단단히 이어진 나의 또 다른 반쪽, 리나.

그 아이의 원망과 슬픔을, 나는 조금은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막힘없이 흘러가 버린 시간은 그녀가 한 짓에 대한 원망을 희석시킨 것만 같았다.

아무튼 기억하기 두려웠던 끔찍한 과거는 모두 떠올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욘두의 사정을 알아내는 일뿐이었다. 나는 그 일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 * *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나는 지난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터였다. 반대로, 요한은


여전히 내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요한이 깨지 않게 조심히 침대를 빠져 나왔다. 그러곤 그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기도 했다.

그사이에도 깊은 잠에 빠져든 듯한 요한은 깨지 않았다. 나는 조금 부어 있는 요한의 눈덩이


위에 조심스레 입을 맞춘 후,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이른 아침, 내 발걸음이 향한 곳은 조슈아의 방이었다. 바로 옆방이었으니, 그리 많이 걸을


필요는 없었다.

모든 기억을 떠올린 어젯밤, 요한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토로하고, 그의 눈물을 닦아 주느라


조슈아를 미처 찾아가지 못했다.
나는 그간 엄마를 간절하게 그리워했을 조슈아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소중한 너를 잠깐 동안 잊어버린 나를, 조슈아가 용서해 주었으면 했다.

조슈아의 방에 들어가니, 아이는 또한 깊이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아이가 잠든


침대까지 가까이 다가갔다.

나는 침대 모퉁이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이며,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뱉는 아이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내려다보는 것에만 만족이 되지 않아,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아이의 옆에 누워 버렸다.

그러자 잠든 아이의 숨결이 내 피부에 가까이 닿았다. 오밀조밀한 입술 사이로 작게 새어


나오는 숨소리가 귀엽기만 하다.

나는 조슈아의 말랑한 뺨을 손끝으로 잠깐 쓸었다가, 이내 손을 물리었다.

아이를 깨울 수는 없으니까.

“조슈아. 내가 진짜 네 엄마였다니…….”

너를 내 배 속에 품었던 행복한 나날들과, 네가 태어나던 축복의 순간을, 나는 왜 잊고 있었던


걸까.

그것은 너무도 소중한 기억이었는데.

청승맞게도 눈가가 시큰거렸다. 어제, 우는 요한을 달래 주느라 미처 다 흘리지 못한 눈물이


오늘에서야 비로소 왈칵 쏟아져 나왔다.

나는 소매로 눈물을 얼른 닦아 냈다. 혹여나 조슈아가 깼을 때, 눈물로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보일 수는 없었다.

“조슈아. 이젠 다시는 너를 잊지 않을게.”

나는 약속을 뜻하는 말을 내뱉었다.

이젠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나는 조슈아와 요한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나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눈물은 곧 그치었다. 나는 눈물이 마른 눈으로 조슈아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조슈아가 이불 속에서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잠에서 깨어나려는 듯싶었다.

얼마 못 가 아이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가늘게 뜨고선 나를 바라보았다.

“우웅…… 엄마?”
조슈아는 제 옆에 누운 내 모습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두 눈을 몇 차례 비비적거렸다.

눈을 몇 번 비벼도 제 앞에 여전히 존재하는 내 모습을 확인하자, 조슈아는 그제야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항상 생각하지만, 언제 보아도 참 예쁜 미소였다.

“조슈아. 잘 잤어?”

“웅! 엄마가 어쩐 일로 조슈아 옆에 있어? 나, 엄청 놀랐어!”

나는 조슈아의 볼록한 볼따구니에 짧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보고 싶어서 왔어.”

조슈아는 내 쪽으로 슬금슬금 기어와, 내 목에 제 팔을 둘렀다. 그러곤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내 목을 힘껏 껴안았다. 그래 봤자 내 목을 다 두를 수 없는 짧은 손이었지만…….

나는 오동통한 조슈아의 손을 여실히 느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 그런데 엄마 얼굴, 슬퍼 보여.”

“내가?”

“웅. 슬퍼하는 사람은 꼭 안아 주어야 한대. 그럼 슬픔이 사라진대.”

누구 자식인지 몰라도 참 대견한 생각과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이제 조슈아가 누구 자식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넌 내 자식이라서 이토록 똑 부러졌던 거구나?

나는 피식, 하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이고, 우리 조슈아. 네 덕에 엄마는 더 이상 슬프지 않아.”

엄마…… 라는 말이 제법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 말을 내뱉기 무섭게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가 뭉클하고, 아릿하게 아파 오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또다시 울컥하는 듯한 기분마저도 들었다.

미쳤나 봐. 왜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거지?

“……그런데 왜 울어? 엄마, 엄마. 왜 울어.”

“내가 언제 울었다고 그래.”

나는 콧물을 킁 들이켜며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사이로 굵은 눈물 한 방울이 새어 나왔다.


“엄마 울지 마.”

아이는 내가 우는 사실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조슈아가 더 꼭 안아 줄게. 엄마 울음이 그칠 때까지 안아 줄게.”

넌 어쩌면 나보다도 더 어른스러운 걸지도 몰라.

내가 없었던 지난 5 년, 네가 대견하게 커 준 일에 새삼 감사해.

“조슈아. 이제는 네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을게.”

너를 낳았다는 기억조차도 잊은 나를, 너는 어떻게 한눈에 알아본 걸까.

나는 조슈아를 처음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저잣거리를 나다니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조슈아는 나를 한 번에 찾아내 주었다.

아이는 배고픔에 아사할 뻔한 내게 손을 내밀어 주며, 나를 엄마라고 불러 주었다.

조슈아가 먼저 다가와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영원히 다시 만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내가 기억을 다시 찾을 용기를 얻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저 길거리를 방황하는 ‘리나’로 살아갔을 테지.

“……고마워. 나를 먼저 알아봐 주어서.”

“엄마. 조슈아는 엄마를 잊지 않아.”

조슈아는 처음부터 내가 자신의 진짜 엄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걸까?

나는 그리 묻는 대신 아이에게 안겼던 몸을 조금 떼어 내,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슈아. 사랑해.”

내가 앞으로 더 많이 사랑해 줄게.

내가 없는 동안, 네게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해 준만큼.

조슈아는 내 입술 위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조슈아도 엄마를 사랑해.”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킥킥거렸다. 조금 전에 눈물을 흘렸던 것이 무색한 정도였다.

이제 우리가 행복할 일들만 남은 걸까?

나는 조슈아와 오랜 시간 침대 위에서 노닥거렸다. 마치 그간 함께 나누지 못했던 시간을


보상하려는 것처럼.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우리의 행복한 시간은, 누군가의 노크 소리로 인해 깨졌다.

똑똑.

“조슈아 님. 욘두입니다.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입술에 스며 있던 미소가 슬그머니 거두어졌다.

“응! 들어와!”

조슈아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이 해맑게 대답했다.

아마도 욘두가 조슈아의 잠을 깨워 준 일이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던 듯했다.

이내 닫혔던 문이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열린 문 사이론 말끔히 옷을 차려 입은 욘두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그를 바라보았다.

“……어? 유모님이 아니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오늘은 제가 조슈아의 잠을 깨워 주었답니다.”

욘두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나는 그 순간 그것을 보게 되었다.

그의 한쪽 귀에만 매달린 에메랄드빛 귀걸이.

“저…… 잠깐만 저랑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유모님과 저. 이렇게 단둘이요?”

“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아, 어차피 조슈아 님은 씻고, 아침 식사도 하셔야 하니…….”

욘두는 고개를 옅게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좋습니다.”

* * *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조슈아의 공부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요한과 함께 욘두를 만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설핏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우연처럼 욘두를 만나 버렸고, 그의 얼굴을 보고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을 물어 보아야 했고, 더는 침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내 우리는 방 한편에 놓인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바라본 욘두의 얼굴이 평온하기만 했다. 그는 지나치게 차분해 보였다.

“욘두 쌤.”

“네, 유모님.”

욘두에게 묻고 싶은 말은 정말 많았다.

리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그 귀걸이는 정말로 리나와 나누어 낀 것인지.

리나의 시체를 어디에 두었는지. 그 시체를 가져간 이유는 무엇인지.

당신의 진짜 의중이 무엇인지까지.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일에는 순서가 있었다.

나는 욘두에게 제일 먼저 물어야 할 말을 알고 있었다.

리나 사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그녀의 에메랄드빛 귀걸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제일 처음 꺼내야 할 말.

나는 작게 숨을 골라냈다. 그러곤 서두를 천천히 떼어 냈다.

“바비에게 들었어요. 기억을 잃은 제 존재를…… 그러니까, 세나와 닮은 제 존재를 바비에게


알려 준 사람이 당신이라는 걸.”

“아…… 그러시군요.”

욘두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의 침착이 내겐 조금 묘하게 다가왔다.

지금 내가 토로한 이야기는, 내가 알게 된다면 욘두의 입장이 곤란해지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모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심지어 그는 내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을 묻기도 했다. 아주 여유롭게. 조금의 당황도 없이.


그는 마치 제가 한 일이 내게 알려지리란 것을 일찌감치 예상한 사람처럼 보였다.

“저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죠? 아니, 물음을 바꾸어서 다시 드릴게요.”

나는 요한과 닮은 욘두의 검은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욘두 쌤, 당신. 진짜 리나와 어떤 관계인 거죠?”

“…….”

내 물음에 곧잘 대답하던 욘두는 침묵했다.

욘두는 제 입술을 작게 뭉그러뜨리며 고개를 몇 차례 까딱거렸다.

침묵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그는 당황하지 않은 것만 같았다.

그러다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떼어지기 시작했다.

“유모님은…… 제국에 떠도는 유명한 미신을 아십니까?”

그가 먼저 꺼낸 말은 나와 연관이 아주 많은 미신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설마…… 쌍둥이는 집안에 모진 풍파를 일으킨다는 미신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욘두 쌤. 제 물음에 먼저 대답해 주세요.”

“저는 지금 유모님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욘두는 소파에 기대고 있던 허리를 앞으로 조금 숙였다. 그는 제 무릎 위에 깍지를 낀 두 손을


올려 둔 채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눈빛이 어쩐지 조금 전과는 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허술해 보였던 욘두가, 왠지 모르게 냉철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진짜 리나 님은 그 미신 때문에 일평생을 숨겨진 채로 자라 왔죠.”

제 88 화. 리나 님이 계신 곳

“……!”
나는 깜짝 놀라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욘두가 리나의 존재에 대해서 알 것이라 일찍부터 예상했음에도, 막상 실제로 그의 입에서


리나의 사연이 흘러나오자 나는 기함을 해 버렸다.

마음이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태연한 척을 하며, 욘두에게 대답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계신 거예요?”

“음…….”

욘두는 대답 대신 제 손목에 채워진 손목시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야기가 제법 길어질 것 같은데……. 조슈아 님의 수업이 끝나고, 다른 곳에서 얘기를


나누어도 괜찮겠습니까?”

진짜 리나를 알고 있는 욘두에게 조슈아를 맡겨도 되는 걸까?

욘두는 무언가의 비밀을 많이 품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조슈아가 짐짓 걱정이 되었다.

“오늘 조슈아의 수업은 없는 걸로 해요. 요한에게는 제가 말해 둘 게요.”

“왜요? 이런 제게 조슈아 님을 맡기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

“물론 수업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무려 마님의 명령이니까요.”

투명한 안경 알 사이로 내비친 욘두의 검은 눈동자가 가느다래졌다.

그리고 그는 나를 유모님이 아닌 ‘마님’이라고 불렀다.

욘두는 진짜 리나를 알 뿐만이 아니라, 내가 세나였다는 사실 또한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는 도대체 리나와 관련된 일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귀걸이를 나누어 낀 오래된 연인이 정말로 리나였던 걸까?

욘두는 쉬지 않고 이어 말했다.

“유모님. 기억이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

“기억이 돌아오셨으니, 얘기가 더 쉬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몰아붙여진 욘두의 말에, 나는 완전히 당황해 버리고야 말았다.

내가 욘두를 몰아세우려고 했었는데, 외려 그에게 닦달을 당하다니.

나는 무릎 위에 올려 둔 두 손을 꽉 그러쥐었다.

“그 쉬워진 얘기. 지금 당장 해 주세요. 저는 리나의 반쪽으로서, 당신과 리나가 사이의 일을


알아야겠으니까.”

“물론 얘기해 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한 말대로, 당신은 리나 님의 쌍둥이니까.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욘두는 조금 흘러내린 안경을 올려 썼다.

“요한 님과 조슈아 님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를 따라오셔야 합니다.”

“……네?”

“저를 따라오셔서, 제가 얘기를 나누고 싶은 장소까지 가셔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욘두 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어요. 그렇게 당신을 따라갔다가 제게 큰일이


생기면요?”

욘두는 어깨를 조금 으쓱였다.

“그것은 제가 확답을 내려드릴 수 없는 일입니다.”

이거 봐, 당신. 지금 너무도 수상한 낌새를 내비치고 있잖아.

“제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세요.”

머릿속엔 무수한 고뇌가 맴돌았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로 욘두를 따라나서도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일단은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게 나은 일일지.

그 순간 욘두는, 내가 고민에 대한 결심을 내릴 수 있는, 쐐기를 박는 결정적인 말을 건네었다.

“지금 저를 따라나서지 않는다면, 저는 이곳에서 영영 사라질 겁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저는


제국의 내로라하는 마법사입니다. 모습을 감추겠다는 마음만 먹는다면, 홀연히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설령 요한 님께서 공작님이라고 해도, 이미 사라진 저를 찾을 수는
없겠죠.”

그것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지금 저를 따라나서지 않는다면, 제가 가진 비밀을 껴안고선 영원히 사라져 버리겠다는.


“하…….”

나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일은 벌어지지 말아야겠지만, 만일 내게 또다시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요한이나 조슈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제야 겨우 예전 기억을 되찾게 되었는데…….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더 이상의 설득과 권유는 없었다. 욘두는 앉았던 몸을 깔끔하게 일으켰다. 그러곤 기다란
다리로 방문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

공작저의 사병을 시켜 그를 붙잡으려 한다고 해도, 그는 마법사이기 때문에 쉬이 잡히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잠깐만요.”

저를 붙잡는 내 말에, 문고리를 잡고 있던 욘두의 고개가 내 쪽으로 조금 돌아왔다.

“당신은 저를 어디로 데려가고 싶은 거죠?”

그러자 욘두는 느른히 입술을 떼어냈다.

“리나 님이 계신 곳. 그곳에 함께 갑시다.”

사라진 리나의 시체는…… 역시나 당신이 가지고 있는 걸까.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깨달았을 땐, 출처를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온몸을 덮친 뒤였다.

* * *

우리는 공작저를 나서, 욘두가 타고 온 마차에 함께 올라탔다.

마차는 곧 어디론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나는 멀어지는 공작저의 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하였다.

긴 잠에서 깨어났을 요한은, 내가 사라진 사실을 알고선 어떤 생각을 할까.


그는 내가 리나를 만나러 갔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요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욘두를 따라 나선 게 옳은 일인지, 나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리나의 숨겨진 사연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일은 지금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할 텐데.

“그리 멀리 가지는 않을 겁니다.”

맞은편에 앉은 욘두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얼굴 새삼 뜯어보았다.

이마를 덮은 부드러워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역시나 요한과 닮은 외모였다. 그리고 욘두는 바비와 같은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실은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사실을 의미하는 바가 아닐까?

“세나 님.”

욘두는 나를 스스럼없이 세나라고 불렀다.

나는 그 이름에 익숙하지 않아, 뒤늦게 대답했다.

“……네.”

“리나 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저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좋아요.”

욘두는 두어 번의 헛기침을 하면서 제 목소리를 다듬었다. 곧이어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비틀리며, 그는 나와 눈을 맞추었다.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러곤 놀라운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욘두가 랭카스터 공작가의 사생아가 아닐까, 생각했던 내 예감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욘두는 자신이 공작가의 사생아라고 했다. 요한도 모르는 요한의 형제.

어린 그는 아픈 어머니의 약값을 구하기 위해서 공작가에 처음 찾아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만난 아버지는 약값을 주는 대가로 제게 모진 매질을 했다고 한다.
모진 매질에 성치 않은 몸이 되어 비틀비틀 거리며 공작저를 나가려던 찰나에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고.

“그분은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공자인 요한 님만이 만날 수 있는 고귀함을 가지신 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설마 그녀가 리나인 걸까?

역할 바꿔치기로 인해 나인 척 공작저를 방문했던 그 리나가 아닐까.

“그녀는 처음에 자신을 세나라고 소개했습니다. 양녀가 되기 위해서 그곳에 머무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역시나 그때 그 시절 자신을 ‘세나’라고 소개한 여자아이는 ‘리나’임이 틀림없었다.

왜냐면, 내 기억 속엔 욘두와 만났던 일화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어머니의 약값을 위해 공작저를 몇 차례 더 방문했습니다. 방문할 때마다 아버지의


매질은 더더욱 심각해졌고, 세나 님이 그런 저를 먼저 찾아내어서 저와 만나 주었죠.”

그때 세나인 척을 하던 리나는, 욘두에게 말했다고 했다.

‘넌 공작가의 사생아인 거야? 왠지 나랑 처지가 비슷하다.’

‘…….’

‘가엾어라.’

가엾다, 라는 한마디에 욘두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누군가에게 쉬이 털어놓을 수 없는 자신의


사연을 그녀에게 모두 이해받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욘두는 그렇게 리나에게 제 사정을 모두 털어놓게 되었다.

‘……네가 비밀을 알려 주었으니, 나도 내 비밀을 너에게만 알려 줄게.’

리나는 욘두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병과,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공감.

그렇게 비슷한 처지를 가진 두 어린아이는 서로의 사정에 깊게 동감하게 되었다.

서로를 각별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그때부터일지도 모르겠다고, 욘두는 덧대어


말했다.

욘두는 제게 있어 리나는 첫사랑과 비슷한 것이라고 했다.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콱 조이는
듯한 기분을 주는 그녀라고 해야 할까.

거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첫 번째 생각은, 어쩌면 리나는 나보다도 욘두에게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고.

두 번째 생각은, 욘두는 리나를 첫사랑으로 여겼지만, 리나 또한 그를 첫사랑으로 여겼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욘두의 말은 이어졌다.

그들의 만남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고 한다.

욘두의 어머니는 악화된 병세에 이기지 못하고 결국 죽어 버렸고, 그와 동시에 욘두에게


마법적 재능이 움트기 시작했다.

욘두는 조금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마법사가 되겠다고 결심을 했다.

제 아버지가 다시는 제게 매진 모질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기를. 공자인 요한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리나에게 제 마음을 떳떳이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어머니의 약값이 필요 없어졌으니, 욘두가 공작저에 갈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욘두는 공작저에서 마지막으로 리나를 만났던 날, 그녀에게 에메랄드빛 귀걸이를 선물해


주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약값으로 아버지에게 받은 돈 중, 남은 돈을 그러모아 산 선물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에메랄드빛 귀걸이를 한 짝씩 나누어 가졌다.

“……그것이 어린 시절 리나 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저는 마법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었고, 리나 님께 편지를 부치기는 했지만 답장은 하나도 오지 않았으니까.”

나는 리나가 답장을 쓰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회복된 몸으로 몇 차례 공작저를 오가던 리나가 또다시 아파졌기 때문이었다.

잠깐 동안 잠잠했던 그녀의 병이 다시금 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리나 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성인이 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욘두가 제 사정을 거기까지 털어놓았을 때였다. 잘 달리던 마차가 멈추어 섰다.

“아, 일단은 내리시겠습니까?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군요.”

“……알겠어요.”

나는 마차에서 내리며, 욘두가 하다가 만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리나 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성인이 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 다시 만났다, 라…….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된 걸까?

그것은 리나가 내게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들이 나누었을 대화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궁금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공작저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희미해졌다.

“세나 님. 저를 뒤따라오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마차가 멈춰 선 곳은 숲길은 아니었으나 다소 외진 어느 주택가였다. 적어도 이곳은 욘두의


저택이 존재하는 곳은 아니었다.

이곳은 허름해 보이는 집들이 즐비했는데, 나의 홈그라운드인 리키 아저씨네 잡화점 근처도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뒤를 따르며, 이어서 생각했다.

욘두가 토로한 말을 모두 믿어도 되는 건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이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 이야기를 내뱉던 그에게선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 그가 거짓말을 한 채로 나를 유인한 것이라면, 그는 대단한 연기자일 테다.

“마법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완벽한 마법사가 된 후, 제가 먼저 리나 님을 찾아갔습니다.”

한동안 침묵했던 욘두가 제 사정을 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차에서 들었던 이야기의 뒷부분이었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집에 혼자 계시더군요. 침대 위에 누운 리나 님은 곧 죽을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은, 요한과의 결혼 준비로 내가 바빴을 시기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리나에게 전처럼


신경을 써 주지 못했던 시절이라고 해야 할까.

“리나 님은 오랜만에 만난 저를 보고선 깜짝 놀랐지만, 이내 빙그레 웃어 주었습니다. 그러곤


사과를 하더군요. ‘편지에 답장을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 동안 많이 아팠어.’ 저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물론 답장이 오지 않는 내내 상심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막상 리나
님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 화를 낼 수 없더군요.”

“네…….”
“도리어 덜컥 겁이 났을 따름이었습니다. 설마 이대로 리나 님이 죽어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그래서요?”

“그때 깨닫게 되었죠. 저는 저와 비슷한 처지를 가진 리나 님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

“저는 리나 님께 고백하듯이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평생 보살펴 주겠다. 내 마법으로


당신의 병을 완치시켜 주겠다.”

하지만 리나는 결국 죽어 버렸다. 욘두의 치료가 석연치 않았던 걸까?

“제 말에 리나 님은 단언했습니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라고…….”

 
앞서 걷던 욘두의 걸음이 멈춰 섰다.

“자, 이곳입니다.”

그리 말한 욘두는 제 앞에 있는 집의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끼이익,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천천히 열리었다.

그곳은 허름한 집들 중에서도 제일 허름해 보이는 집이었다.

왜 이런 곳에서 얘기를 하려는 걸까.

“들어가시죠. 안쪽에 보여 드리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보여 드리고 싶은 것.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떠오른 것은 ‘사라진 리나의 시신’이었다.

설마 이곳에 리나의 시신을 가져다 놓은 걸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시신을 생각하기 무섭게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을 각오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얼어붙은 듯이 그대로 몇 분간 서 있었다. 채근하는 욘두의 말은 없었다.

머릿속에선 경종이 쉼 없이 울리고 있었다.


내 직감은 내게 속삭였다.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 당장이라도 공작저로 돌아가.

하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욘두와 리나가 내게 숨기고 있는 사실을 알고 싶었다. 그것은 내게 닥친 두려움을


뛰어넘을 정도의 큰 호기심이었다.

나는 낮게 숨을 골랐다.

이윽고 나는, 열린 현관문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제 89 화. 역할 바꿔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집 안은 어두컴컴했다. 주위를 밝혀 줄 불은 하나도 켜져 있지 않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그 안으로 한 발자국 더 발을 내딛는 일이 주저가 되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나를 덮칠 것만 같은 오싹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 너무 어둡습니까? 평소에 불을 켜고 지내지 않다 보니.”

욘두는 어디론가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거실 한편에 있던 어느 창가 앞이었다.

욘두는 빛을 모두 가린 두툼한 커튼을 말끔히 거두어 냈다. 그러자 집 안이 조금 전보다도


훨씬 더 밝아졌다.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곤 그는 고백하듯이 말했다.

“이곳은 제가 어렸을 때에 지냈던 곳입니다.”

어렸을 때 지냈던 곳.

욘두는 분명히 랭카스터 가의 숨겨진 사생아라고 했다.

아무리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라고 할지라도, 이토록 좋지 않은 곳에서 지냈었다니…….

나는 욘두를 바라보았다.

요한과 닮았지만, 요한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욘두.


그리고 나와 닮았지만, 나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리나.

욘두가 살아온 삶과 리나가 살아온 삶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며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었던 건, 역시나 비슷한 환경이
가져온 공감 때문이었던 걸까?

질투, 분노, 그리고 원망……. 욘두가 요한에게 느꼈을 감정과, 리나가 내게 느꼈을 감정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현관문의 문고리를 여전히 꽉 잡은 채로 그에게 물음을 건네었다.

주위는 눈에 띌 정도로 밝아졌지만, 그곳으로 완전히 들어서는 건 아직까지도 두려웠다.

그것은 이곳에 존재할 ‘무언가’때문이었다.

“……이곳에…… 사라진 리나의 시신이 있는 건가요?”

“…….”

욘두는 침묵했다. 그는 창가에 그대로 선 채로 나를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그가 대답다운 대답을 해 주기를 기다리며, 뒤늦게 집 안을 둘러보았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것인지, 생활감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가구라곤 낡아 보이는 소파 하나가 다였고, 한쪽 벽면엔 오랫동안 떼지 않은 듯한 작은 난로가


존재했다.

깨달았을 땐, 욘두가 충격적인 대답을 내뱉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이곳에 사라진 리나의 시신이 있다는 확언이었다.

“……!”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의심만 했던 일이 확실한 일이 되자 깜짝 놀라 버린 것이다.

“두려우십니까?”

이번엔 내가 침묵했다.

“제가 리나 님의 시신을 훔쳐 갔기 때문에 두려우신 겁니까?”

“…….”
“그것이 아니라면, 다시 만난 리나 님이 당신께 다시 역할 바꿔치기를 하자고 제안할까 봐
두려우신 겁니까?”

……둘 다 두려워.

나는 리나가 나인 척하는 것이 싫었지만, 그보다도 리나를 가엾게 생각하는 마음이 더 컸다.

리나가 눈물을 흘리며 또다시 역할 바꿔치기를 해 달라고 조른다면, 나는 마음이 약해질 게


틀림없었다.

설령 그녀가 나를 절벽에서 밀어뜨렸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녀를 완전히 미워할 수 없었다.

왜일까.

우리가 같은 피로 진하게 이어졌기 때문일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욘두의 말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잠깐만요.”

“네.”

“리나가 제게 다시 역할 바꿔치기를 해 달라고 제안할 수 있다는 건…… 그녀가 살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내가 내뱉고도 쉬이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뒷덜미가 싸늘해지는 기분을 주는 말.

리나는 분명 4 년 전에 죽었다.

물론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공작가의 여러 사람들이 그녀의 장례를 치른 터였다.

그러한 그녀가 살아 있다니…….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 하하하.”

욘두는 나지막이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상하게도, 웃고 있는 욘두의 얼굴은 슬퍼 보이기만 했다.

마치 제 슬픔을 감추기 위해 웃음을 내비치는 것처럼.

“웃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
“그러기 위해서 요한 님과 조슈아 님을 뒤로한 채로 여기까지 저를 따라온 것이 아닙니까?”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이곳에 존재할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괜찮을……까.

그 순간 욘두가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방 한편에 있던 어느 문 앞까지 걸어가 스스럼없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이곳에 계십니다.”

주어가 빠진 말이었으나,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리나가 그곳에 있다.’

나는 결국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고 있던 것을 놓았다. 그리고 지면에 굳은 듯 버티고 있던 두


다리 또한 떼어 냈다.

한 걸음, 그리고 두 걸음.

열린 방문과 나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욘두는 내가 그 안을 조금 더 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 주었다.

“휴.”

이윽고 가벼운 심호흡과 함께 그 방 안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방 안은 다행히도 어둡지 않았다. 거실과는 다르게 곳곳에 촛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좁은 방 안에 있는 가구라곤, 커다란 침대와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나는 그 침대 위에 리나가 누워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내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은 듯했다.

“…….”

침대 위를 자세히 보니,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리나가 입고 있는 드레스일까?

조용한 정적 속, 내 귓가엔 나의 심장 소리가 크게 울리고 있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나는 두 손을 꽉 그러쥔 채로 시선을 조금 더 끌어 올렸다.

이내 드레스 위로 내비친 얼굴은…….

“……리나?”
나는 주먹 쥔 손을 펴 입가를 가렸다.

정말로 리나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얼굴. 나와 길이가 비슷한 금빛 머리카락.

침대에 누워 있는 리나의 모습은 죽은 것인지, 잠든 것인지 전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미 각오하고 예상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언어를 잃은 입술은 “아…….”와 같은 작은 탄식만을 내뱉었을 뿐이다.

느릿하게 깜빡인 두 눈이 시큰거렸다. 나는 시큰거리는 느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눈물의


전조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내겐 아직 확인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모든 사실을 낱낱이 알아내고 난 후에 눈물을 흘려도 늦지 않으리라.

나는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눈물의 기운을 몰아냈다.

그러곤 요한과 함께 알아낸 여러 사실 중에, 우리가 끝내 알아내지 못했던 한 가지 의문을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이 일을 꾸민 ‘욘두의 동기’였다.

“욘두 쌤.”

등 뒤에선 대답하는 욘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세나 님.”

“흙 속에 파묻혀 있던 리나를…… 왜 데리고 오신 거죠?”

“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이미 죽은 터였다.

죽은 자는 산 사람에게 사랑을 속삭일 수 없었다. 온기를 다정하게 나누어 줄 수도 없었다.

마법사인 욘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녀의 시신이 부패되지 않게 만드는 방법 하나뿐일


테다.

그는 그 사실에 만족하며 그녀를 이곳에 누인 걸까?

빈껍데기뿐인 육신이라도 좋으니, 제 곁에 두기 위해서?


제가 죽을 때까지 눈을 마주치지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도 못할 테지만, 그래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어서?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기이한 욕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죽은 자는 죽은 자고, 산 자는 산 자였다.

죽은 자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고 할지라도, 죽은 자와 산 자는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똑똑한 욘두가 그 사실을 모를 리는 없다고 여겨졌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문득 그것이 떠올랐다.

내가 떠올린 것은 욘두가 마법으로 만든 ‘시들지 않는 장미’였다.

시들지 않는 장미, 지속되는 생명력, 그리고 삶과 죽음.

죽은 자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 마법……?

“혹시 리나를…… 다시 살릴 생각이신가요?”

그럴 생각이라면 지금껏 욘두가 해 온 모든 일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마법이 실제로 가능한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욘두에게도 그 마법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는 지난 4 년간 리나의 시신을 그저 가지고만


있었던 게 아닐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마법을 할 수 있었다면, 그는 애당초부터 즉, 죽은 리나를 관 속에서


꺼내자마자 그녀를 살려 냈을 것이다.

하지만 리나가 죽은 지 무려 4 년이나 흘러 있었다.

욘두는 그 동안 그녀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는, 제가 숨기고 있던 사실을 내게 거리낌 없이 알려 주었다. 제가 그간 그토록


비밀스럽게 행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설마 리나를 살리는 마법에 ‘내’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까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

내 뒤에 서 있던 욘두의 손끝이 내 머리 위를 툭 건드는 게 느껴졌다. 세게 내려친 것은


아니고, 가벼운 접촉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이 내게 닿기가 무섭게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머리에는 알싸한 고통이 느껴지며, 나는 서서히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방심하던 사이, 욘두의 마법에 당한 것이었다.


이내 몸의 힘마저도 서서히 빠져 갔다.

내 몸은 바닥에 엎어질 듯이 휘청거렸고, 그런 나를 잡아 준 이는 욘두였다.

욘두는 부담스럽지 않게 내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의 얼굴엔 사려 깊은 미소가 띠어져 있었다.

나에게 이런 짓을 한 주제에 미소가 나오는 거야?

나는 그에게 저항을 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이미 축 늘어진 몸뚱이는 내


마음대로 조금도 움직여 주지 않았다.

“푹 쉬십시오.”

그것이 정신을 완전히 잃기 전, 내가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이곳까지 혈혈단신으로 따라온 과거를 후회하기도 전에, 완벽한 정적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 * *

욘두는 축 늘어진 세나의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러고선 그녀를 리나 옆에 눕혀 주었다.

그가 세나에게 건 마법은 잠깐 정신을 잃게 만드는 마법으로,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는


것이었다.

욘두는 침대 모퉁이에 앉은 채로 두 사람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똑같이 생긴 두 여자가 한 침대에 누워 있는 모양새는 다소 신선한 것이었다.

“그동안 리나 님이 누워 계신 것만 봤는데…….”

두 사람. 이렇게 함께 누워 있으니 이제야 진짜 쌍둥이 같군요.

욘두는 세나에게 미처 털어놓지 못했던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욘두는 공작저를 많이 오고 갔지만 세나와 실질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가 얘기를 나눈 것은 세나인 척 공작저로 왔던 리나 한 사람뿐이었다.

그것은 리나의 부탁 때문이었다.


‘만약에 언니가 이곳에 오게 되면, 모른 척해 줘. 언니는 격이 떨어져 보이는 사람과는 얘기를
나누지 않거든. 얘기를 나누게 된다면 네가 상처 받을 거야.’

리나는 그러한 부탁과 함께 저와 세나를 구별할 수 있는 이목구비 상 다른 특징을 알려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미묘한 것이라서, 실용성이 별로 없었다.

욘두는 리나가 알려 준 방법보다 두 여자가 풍기는 다른 분위기를 통해서, 그들을 구별하였다.

욘두에겐 남다른 눈썰미가 있었고, 그는 그것을 토대로 두 여자를 제법 잘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저와는 반대로 요한은 세나와 리나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욘두는 그 사실에 작은 희열을 느끼곤 했다. 모자란 것 없이 완벽해 보이는 요한에게도 부족한
것이 존재하는구나 싶어서.

하지만 욘두의 희열은 곧 절망으로 이어졌다.

리나든 세나든, 제가 만나는 여자가 누가 되었든 잘해 주었던 요한. 그리고 그러한 요한에게
어린 리나는 매번 환하게 웃어 주었다.

두 사람이 정원에서 만날 때면, 욘두는 안절부절못한 채로 그들의 모습을 훔쳐보곤 했다.

리나와 저는 서로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사이인데…… 어째서 제게 짓던 미소보다도


요한 앞에선 더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걸까?

……아아, 그것은 제가 부족해서일 거야. 요한은 신분이 높고,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고, 좋은


냄새가 날 테니까.

요한을 미워하는 마음보다도 자괴감이 더욱 컸다.

그 뒤의 이야기는 욘두가 세나에게 토로했던 것과 같았다.

욘두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내로라는 마법사가 되었고, 성인이 된 후 리나를 다시금


찾아간 것이다.

제 마법이라면 원인 모를 병에 시달리던 리나의 병을 완치해 줄 수도 있겠다는 기대와 함께.

하지만 다시 마주한 욘두는 더욱 깊은 절망에 빠지고야 말았다.

‘내겐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리나에게는 좋아하는 사람이 존재했고, 리나의 병은 욘두의 마법으로도 완치될 수 없었다.

리나가 앓고 있던 병은 완벽한 불치병. 그 끝은 오로지 죽음밖에 없는 잔인한 병이었다.

죽음이 예견된 데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녀였지만, 욘두는 그녀를 쉬이 포기할 수 없었다.
리나는 욘두가 태어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유일한 여자였다.

그녀를 포기해 버린다면, 그는 삶의 의지마저도 잃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리나는 자신을 만나는 것을 거부하였다.

어두운 집, 같은 침대, 늘 누워만 지내던 그녀는 제가 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욘두는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가늠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폭력적인 방법을 써, 그녀의 마음이 제게 돌아서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리나를 찾아가던 일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을까.

어느 날, 돌연히 제게 서신 하나가 도착했다. 서신 속엔 ‘공작가 마님이 앓고 있는 병의


치료에 협력을 해 달라.’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욘두는 그 순간 직감했다.

역할 바꿔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욘두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찾아간 공작가, 그리고 마주하게 된 공작부인은
세나가 아닌 리나였다.
(욘두는 세나가 요한과 결혼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병색이 짙은 얼굴을 하면서도 기어코 세나 자리를 꿰찬 리나를 본 후, 욘두는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닫게 되었다.

리나 님은 요한 님을 여전히 좋아하시는구나.

그것은 제게는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리나의 환한 미소가 의비하는 바이자, 욘두가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리나의 진심이기도 했다.

제 90 화. 알아. 조슈아도 다 안다고

공작저에서 세나인 척을 하던 리나는, 둘 만 남겨지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고백하듯이


말했다.

‘욘두…… 내가 너를 불렀어. 내 병을 치료해 줘. 내가 진짜 세나가 될 수 있게……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 줘. 너는 훌륭한 마법사니까, 그럴 수 있잖아. 그치?’
아니요. 저는 그렇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당신이 완전히 건강해지게 된다면, 요한 님과
영원히 행복해질 테니까요.

다른 건 다 양보했습니다.

당신이 지켜 달라던 비밀을 지켜 주었고, 당신이 세나 님과 말을 섞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그녀와 말을 섞지도 않았으며, 당신을 찾아오지 말라 해서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당신의 말을 들어줄 자신이 없습니다.

리나 님. 당신이 저를 사랑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욘두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물론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리나의 병이 다 나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신이 나선다면 모를까. 욘두는 그녀의 불치병을 낫게 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연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비록 세나인 척 요한의 곁에 있다고 해도,


그녀를 여전히 사랑했으니까.

가진 게 그다지 많지 않다.

욘두가 가진 거라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마법뿐이었다.

곁을 머물면 언젠간 제게 눈길을 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진심을 꾸준히 전한다면 언젠간 저를 한 번이라도 돌아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로지 요한만을 바라보았다. 제 아내가 진짜 세나인지, 가짜 세나인지도


모르는 그 바보 같은 요한에게.
(요한은 그녀가 아팠던 해에 굉장히 바빴고, 아픈 그녀를 세세히 살펴보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애당초 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정체를 의심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들이 ‘쌍둥이’이라는 사실을 아는 욘두만이 할 수 있는 의심이었다.)

욘두의 순정은 그녀가 숨을 거둘 때까지도 이어졌다.

리나는 어느 날 갑자기 제게 작별 인사 하나 남기지 않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치료차 공작저에 방문했을 땐, 그녀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제 마법으로는 손쓸 도리 없이


완전히 죽어 버린 것이다.

욘두는 후회했다.

다른 남자를 사랑한 그녀에게 불만을 가진 채 성심성의껏 그녀를 돌보지 않은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제가 조금만 더 그녀에게 정성을 다 했다면…… 그녀는 조금 더 연명을 할 수 있었을까?

욘두는 리나의 관이 흙 속에 파묻히던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염없이 쏟아지던 겨울비. 슬퍼하던 요한과 바비. 그리고 리나의 관에 세워진 비석.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리나. 네가 갖고 싶어 했던 건 요한 하나뿐이었던 거야?

너는 왜 네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나라는 존재를 알아주지 않은 거야?

욘두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침묵.

죽은 그녀를 잊고자했다. 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리나의 존재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젠 볼 수 없는 그녀가 제 눈앞에 환영처럼 맴돌았다. 이젠 들을 수 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제


귓가에 환청처럼 들리었다.

욘두는 괴로웠다.

그녀를 잃은 현실이 이토록 괴로울 줄 알았다면, 함께했던 시간들을 조금 더 소중히 생각했을


텐데…….

욘두는 슬픔을 견디지 못했다. 온기 한 번 제대로 나눠 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없으니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을 땐, 그는 흙 속에 파묻힌 리나의 관을 파고 있었다.

마법을 써서 아무도 모르게 그녀의 관을 파내고, 차가워진 그녀의 육체를 꺼내었다.

그 일이 벌어진 것은, 리나가 묻힌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욘두는 제집으로 리나를 데려가, 그녀에게 썩지 않는 마법을 걸어 두었다.

하지만 그녀를 소생시킬 수는 없었다.

마법사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여할 수 없었다. 제도 법상으로도 그러했다.

그렇지만 욘두는 그녀를 살려 내고 싶었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노력을 한다면 언젠간 그녀를 살릴 수 있는 마법을 행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과거, 리나는 제게 그렇게 말했었다.

‘너는 정말 노력파구나.’

어머니의 약값을 벌기 위해서, 공작의 모진 매질에도 끝끝내 공작저로 찾아갔던 자신을 보고선
한 말이었다.

리나의 말대로 자신은 노력파였다.

사랑받으려는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리나는 결국 제 사랑을 받아 주지 않았지만, 이번엔


다를지도 모른다.

제가 리나를 살린다면…… 그땐 리나가 제 노력에 감동을 할지도 모른다.

욘두는 그날부터 새로운 일에 노력하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법. 살아 있는 것의 생명력을 죽은 자에게 전하는 법.

그것이 바로 그가 노력하기 시작한 것들이었다.

리나를 살릴 방법을 연구하던 나날 중, 욘두는 리나와 바꿔치기 된 진짜 세나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욘두가 세나를 찾은 것은 리나가 죽은 지 일 년 후, 어느 대로변에서였다.

오랜만에 다시 본 세나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공작가의 마님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그 모습이 꾀죄죄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그때 욘두는 직감했다. 그녀들의 마지막 역할 바꿔치기에는 다소 끔찍한 일이 있었던 거라고.

욘두는 세나의 뒤를 조용히 캤다.

그리하여 그녀가 사고로 인해 기억을 잃었다는 점, 제 이름이 ‘리나’인 줄 안다는 점을


알아내게 되었다.

일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 같다.

세나를 사랑했던 바비에게 그녀의 존재를 먼저 알려 준 것은, 질투했던 요한에 대한 작은


복수였다.

욘두는 바비와 세나가 잘되기를 내심 바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요한뿐만이 아니라 랭카스터 가 형제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친 듯한 기분이


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욘두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는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기억을 잃은 세나가 조슈아의 유모가 된 것이다.

당황했던 것은 잠깐이었다.

세나가 조슈아의 유모가 되고 그녀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올 무렵, 욘두는 영원히 시들지 않은
장미를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까.

과거를 짧게 회상하던 욘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제 귓가에 매단 에메랄드빛


귀걸이를 버릇처럼 매만졌다.

“리나 님이 시들지 않는 장미에서 생명력을 얻을 수 없다면…… 살아 있는 세나 님의 생명력을


전해 받는 건 어떨까요.”

욘두는 혼잣말을 하며, 침대에 앉아 있던 엉덩이를 떼어 냈다.

그는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 책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매만지던 귀걸이를 빼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욘두는 짝이 없는 에메랄드빛 귀걸이 하나를 보며, 조슈아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을 생각했다.

‘조슈아 님. 오늘은 영원히 기억하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응!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

‘잊고 싶지 않은 것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선, 의미 있는 수단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아이에게 가르쳐 주었던 영원히 기억하는 법.

어린 시절, 욘두가 리나에게 주었던 에메랄드빛 귀걸이 하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리나. 넌 이 귀걸이를 볼 때마다 나를 기억해 줘.

* * *

요한은 오랜만에 오래도록 잠이 들었다. 지난밤 한껏 쏟아 낸 눈물 덕에 기력이 다한


까닭이었다.

깊게 잠든 그를 깨운 것은, 저를 흔드는 작은 손길과 조급한 목소리였다.


“……아빠, 아빠. 얼른 일어나.”

요한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스르륵 떴다.

눈을 뜨자 보인 것은 곧 울 듯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조슈아였다.

요한은 상체를 얼른 일으켜, 아이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조쉬. 무슨 일 있어?”

어른스러운 조슈아가 아침부터 울상을 지을 이유라.

그 순간, 요한은 까닭 모를 불안함에 시달렸다.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아.

조슈아는 천천히 대답했다.

“엄마가…… 엄마가 없어졌어.”

불안함은 느낌으로 그치지 않았다. 불길한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세나가?”

요한은 자연스럽게 제 옆을 살펴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어젯밤 같이 잠들었던 세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어쩐지 눈앞이
아찔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에 조슈아 침대에 조슈아랑 엄마가 같이 누워 있었는데…… 욘두 선생님이 와서 엄마랑


같이 나갔는데…… 조슈아가 나중에 다시 찾았을 때, 아무도 보이지 않았어.”

두서없이 말하던 조슈아는 이윽고 울음을 터트려 버렸다.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에선 서글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요한은 아이의 뺨을 감싼 손으로,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슈아가 한 말을 곱씹어 생각해 보았다.

“……조슈아가 공작저를 다 뒤져 봤는데도 엄마가 안 보여. 후으윽. 아빠가 엄마를 찾아 줘.


응?”

“조쉬. 울지 마. 세나는 어딘가에 있을 거야. 아빠가 금방 찾아 줄게.”

요한은 침착한 척을 하며 대답했지만, 그의 심장은 엄청나게 빨리 뛰고 있었다.

‘욘두 선생님이 와서 엄마랑 같이 나갔는데……’

조슈아가 한 말 중, 그 말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어째서 욘두와 세나가 동시에 사라진 걸까.

다른 누가 아닌, 제일 위험한 인물인 욘두와 연관이 있다, 라.

요한은 조슈아의 눈물을 마저 닦아 주며, 재빨리 침대 위를 벗어났다. 다행히도 아이는 울음을


금세 그치었다.

요한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만이 그득했다.

그녀를 찾아야겠다.

그녀를 찾아내서 그녀가 무사함을, 그녀에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음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하필이면…… 하필 이제야 비로소 그녀가 세나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제야…….

요한은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조쉬. 아빠가 찾아볼 테니까,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조슈아도 같이 찾아볼래…….”

“넌 여기서 잠깐 기다려.”

“조슈아도 같이…….”

“조쉬. 아빠가 찾아보고 다시 꼭 여기로 올게. 약속해.”

조슈아는 그제야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하여튼 그 고집은 누굴 닮아서는.

요한은 짧은 한숨과 함께 방을 빠르게 나섰다.

그가 제일 먼저 간 곳은 세나의 방이었다.

“……세나!”

하나 그녀의 방은, 오래전부터 비워져 있었던 것처럼 고요했다. 요한의 외침에 돌아온 것은
정적뿐이었다.

요한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곤 그녀가 있을 만한 곳을 이 잡듯이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요한은 조슈아의 공부방을 찾아가기도 하고, 응접실을 찾아가기도 하고, 간간이 마주친
사용인들에게 그녀의 행방을 묻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녀를 본 이 또한 아무도 없었다.

실로 기묘한 일이었다. 그녀가 이토록 홀연히 사라져 버리다니.


요한은 마지막으로 공작저의 정원까지 모조리 뒤져 보았지만, 세나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정원의 뒤쪽을 살펴보던 요한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잠깐 골랐다.


이곳저곳을 뛰어다닌 탓에 숨이 가쁠 대로 가빠져 있었다.

그는 이마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닦아 낼 기력조차 없었다. 세나가 사라져 버린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째서 제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로 사라져 버린 걸까.

그녀는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제가 긴 잠에 빠져 있을 무렵, 그녀는 무엇을 위해 아침부터 사라진 걸까.

“……망할.”

요한은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불길한 예감이 계속해서 들었다.

욘두가 그녀에게 해선 안 될 짓을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저 혼자 찾는 일을 그만두며, 제 사용인들과 기사에게 세나와 욘두를 찾을 것을 지시했다.

세나에게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그전에 그녀를 찾아야만 했다.

* * *

요한은 약속대로 조슈아를 놔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아빠! 엄마는 찾았어?”

방문을 열기 무섭게 조슈아가 소리쳤다.

“…….”

요한은 무슨 대답을 해 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려고 하니 아이가 울 것 같고, 거짓말을 하려고 하니 아이가 당장이라도


세나를 데려 오라고 호통을 칠 것만 같았다.

결국 요한의 대답은 긴 한숨이었다.

조슈아는 아이치고는 눈치가 제법 좋은 편이었다. 아이는 요한이 대답을 망설인다는 사실을


곧바로 눈치채고선, 말했다.
“못 찾았구나. 아빠가 찾아봐도 엄마가 보이지 않는 거지?”

“…….”

조슈아는 침대에서 훌쩍 내려왔다. 그러곤 문 근처에 서 있던 요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는 요한의 바지자락을 꽉 부여잡은 채로 말했다.

“조슈아 때문에 엄마가 사라진 거야?”

“……조쉬, 그런 거 아니야.”

“조슈아 때문에 엄마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거야?”

요한은 자세를 낮추며 아이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조쉬. 그런 거, 정말로 아니야.”

요한의 위로에도,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엄마가…… 아침에 본 엄마의 얼굴이 슬퍼 보였어. 조슈아를 놔두고 갈 것처럼 슬퍼 보였단


말이야.”

“…….”

“엄마는 조슈아 곁을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던 거지? 그런


거지? 떠나기 전에 조슈아를 안심시켜 주려고 그런 거지?”

“조쉬…….”

요한은 메마른 숨을 내뱉었다. 그는 제 얼굴을 마른세수하듯이 쓸었다.

조슈아를 어떻게 위로해 주어야 좋을까.

요한은 평소 누구보다도 조슈아를 잘 위로해 준다고 자부했지만, 지금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세나가 돌연히 사라져 버린 현실이 절망스러웠다.

그녀를 또다시 잃을 수도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지금 입을 연다면, 아이에게 절망적인 말만을 할 것만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엔 무거운 침묵이 잠깐 맴돌았다. 두 사람의 작은 숨소리만이 유일한 소리가


되었을 뿐이다.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한 이는 조슈아였다.

조슈아의 목소리는 아이답지 않게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알아. 조슈아도 다 안다고.”


요한은 흔들리는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네가 뭘 안다는 건데?”

이윽고 조슈아의 입술에선 충격적인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리나가…… 조슈아의 진짜 엄마가 아닌 걸 알아.”

“……!”

조슈아는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 세나가 썼던 ‘리나’라는 이름을 정확하게 내뱉고 있었다.
아이가 리나의 이름을 뱉어 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조슈아는 제가 매번 세나를 ‘리나’라고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도 그녀를 제 엄마라고


굳건히 믿었었다. 요한은 이따금 그 사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까지 정면으로 부딪혀 올 줄이야.

깜짝 놀라 버린 요한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제 91 화. 미안해요

요한은 뒤늦게 띄엄띄엄 대답했다.

“조……쉬. 너…… 세나, 아니, 리나를 네 엄마라고 착각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런 것도 모를 만큼 조슈아는 어리지 않아! 조슈아는…… 처음부터 리나가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요한은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조슈아는 왜 그렇게까지 세나를 제 엄마 대하듯이 맹신했단 말인가.

“넌…… 다 알면서도 왜 그녀를 엄마라고 맹신한 거지?”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

“착각이라고 해도, 진짜가 아니라고 해도 좋았어. 엄마, 아니, 리나는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조슈아는 리나가 좋았고, 리나도 조슈아를 좋아했으니까.”

“…….”
요한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두 손을 꽉 그러쥐었을 뿐이다.

조슈아에 대한 것을 모두 다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조슈아는 제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더 성숙한 아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조슈아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아빠도 행복해했으니까. 조슈아는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어. 모두가 행복해졌는데,


그럼 된 거 아니야?”

조슈아의 말에는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다.

비록 세나인 줄 몰랐지만, 리나가 공작저에 온 이래로 요한은 눈에 띄게 행복해졌다.

술 없이는 잠들지 못했던 제가, 이젠 술 없이도 평온히 잠들 수 있게 되었으며, 웃음 또한


많아졌다.

유모라는 이름하에 그녀를 제 곁에 뒀지만, 그것은 어쩌면 운명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꼭 만나야 되는 인연 같은 게 아닐까.

아니, 저와 그녀는 반드시 만나야 되는 인연이었다. 리나의 정체가 세나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조슈아에게는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좋은 걸까.

요한은 아이가 받아들여야 될 진실이 걱정되었다. 아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복잡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일단은 세나부터 찾는 게 먼저다.

그녀를 찾고서 조슈아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자.

요한은 아이의 어깨를 꽉 잡은 채로 대답했다.

“……조쉬. 네 말이 맞아.”

“그럼 조슈아랑 엄마를 더 찾아보자! 포기하지 말자!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조슈아는 요한을 꾸짖듯이 말했다.

요한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조슈아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세나와 닮은 조슈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조슈아. 넌 언제 그렇게 커 버린 거니.

“그래, 조금 더 찾아보자.”
사람들을 시키기는 했지만, 조슈아와 함께 그녀를 조금 더 찾아보자는 결심을 한 순간이었다.
그들의 대화에 다른 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엄마를 찾아보다니? 리나가 사라졌어?”

요한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미처 잠그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온 바비가 보였다.

“그녀가…… 욘두와 함께 사라졌어.”

바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뭐?”

바비는 한달음에 요한과 조슈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소리야? 자세히 말해 봐.”

요한에게 있어 바비는 신뢰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녀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아침에 있었던 일을 바비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며칠 전에 한 어쭙잖은 화해 때문인 걸까?

세나 때문에 바비와도 사이가 제법 좋아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로의 속사정을 고백한 게 언제였는지, 요한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니, 바비의 푸른 눈을 오롯이 쳐다본 적이 언제였던가.

이내 요한은 제 말에 구두점을 찍었다.

“……요한, 넌 뭐 했어? 잠에 빠져서 그녀를 위험하게 만들다니! 내가…… 내가 이러라고


그녀를 포기한 줄 알아?”

바비는 따지듯이 물었다. 물론 요한 또한 지지 않았다.

“나라고 그러고 싶었는지 알아?”

“적어도 나였다면, 그녀를 혼자 두진 않았어.”

“닥쳐. 너였어도 달라질 건 없어.”

두 사람은 서로의 사연을 공유하고, 서로의 눈을 반듯이 쳐다보았지만, 결국 그 끝은


언쟁이었다.

그들을 중재하는 역할은 언제나 세나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라진 지금. 그녀의 역할을 대신한 이는 바로…….


“두 사람! 그만 좀 해! 지금은 엄마를 찾아야 하는 게 더 급한 일이라고! 지금 두 사람
조슈아보다도 더 어린 것 같아!”

……조슈아였다.

조슈아는 세나와 똑 닮은 얼굴로 요한과 바비를 나무랐다.

한순간에 다섯 살 꼬맹이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어 버린 두 남자는 서로를 몰아붙이던 일을


그만두었다.

“조쉬, 미안.”

“……조쉬. 삼촌이 잘못했어.”

“그럼 이제 다 같이 나가자!”

바비는 의욕으로 가득 찬 조슈아를 잠깐 말렸다.

“조쉬, 잠깐만.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고 움직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바비. 나도 네 말에 동감해.”

“요한, 공작저는 네가 샅샅이 찾아 봤다고 했지?”

요한은 대답했다.

“일단 갈 만한 곳은 내가 다 살폈고, 지금은 기사들이 수색 중이야. 하지만 지금까지 이렇다


할 보고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아마도 공작저 안에는 없다고 봐야겠지.”

바비는 “그렇군.” 짧은 대답과 함께, 잘 빠진 제 턱을 문질렀다.

“두 사람이 공작저에 없다면…… 어디론가 나갔음이 분명하네. 하지만 리나가 너나 조쉬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나갔다는 건, 급한 일이었음이 분명하고.”

요한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즉, 욘두가 리나에게 ‘지금 꼭 욘두를 따라나서야 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며, 리나를
꼬드긴 게 아닐까?”

“헉! 삼촌! 그런 일이 있었던 걸까?”

바비는 조슈아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리며, 이어 말했다.

“욘두가 리나를 비밀스럽게 데리고 갈 곳이라면, 내가 좀 알 것 같은데.”

욘두는 바비에게 기억을 잃은 리나의 존재를 처음 알려 줬었다.

그 정보는 바비에겐 유익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욘두라는 남자가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바비는 아주 오래전에 욘두의 뒤를 몇 차례고 미행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알게 된 것은 그의 집 두 채였다.

평소 머무는 집 하나와 오랫동안 비워 둔 허름한 집 하나.

“그곳이 어디야?”

“욘두의 두 집 중 한 곳이 아닐까, 싶어.”

요한은 되물었다.

“두 집?”

“어. 욘두에겐 집이 두 채 있거든. 지금 살고 있는 집과 그전에 살았던 집.”

“…….”

“하지만 내 예상은 그래. 그가 현재 살고 있는 집은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아무도


모르는 그 허름한 집에 있는 게 아닐까?”

조슈아는 어느새 요한과 바비의 손을 한 쪽씩 잡은 채로 외쳤다.

“당장 가 보자!”

* * *

한편 욘두는 마법을 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 많은 준비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수식만이 필요할 뿐.

제일 필요한 세나의 살아 있는 몸뚱이는 이미 확보한 후였다.

하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마법을 이행하는 일은 그조차도 처음 시도해 보는 난해한 일이었다.

백 퍼센트 성공을 하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그는 리나를 살려 내기 위한 시도를 해 보고


싶었다.

욘두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터였다.

수식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한 욘두가 침대 근처로 다가간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세나의 눈이 반쯤 떠져 있었다.

욘두와 세나의 시선이 뒤엉켰다.


“……!”

오랜 시간 잠들게 만드는 제 마법은 완벽했다. 하나 세나는 잠에서 설핏 깨어난 듯싶었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걸까?

그다지 좋지 않은 징조였다.

다행인 점은, 세나가 정신만 잠깐 깨어난 듯 보였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제 몸을 일으키려는


듯 작게 몸부림쳤지만, 끝내 제 몸을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다.

욘두는 그녀에게 다시금 잠드는 마법을 걸려고 했다.

이내 세나의 이마에 손끝을 올리려던 그때.

비몽사몽 한 세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욘두 쌤……. 다 제 잘못이에요. 그때…… 처음부터 역할 바꿔치기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

“…….”

욘두는 허공에 손을 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세나의 고백은 이어졌다.

“리나가 다른 방법으로 행복해지기를 도와줬어야 했어요. 그 작은 일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


것 같아서…….”

“…….”

“미안해요.”

 
욘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리나와 같은 얼굴로 제게 속죄를 하는 세나의 얼굴은 묘한 감상을 안겨 주기만 했다.

“……당신이 무슨 계략을 꾸민 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내 선택으로 인해 당신이 불행해진


거라면…… 그것도 미안해요.”

욘두의 눈에 비친 세나의 얼굴이 리나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세나가 아닌 리나가 제게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요한을 사랑해서……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네가 불행해진 거라면, 미안해.’


 

“제가 리나 대신에 속죄할게요. 리나는 제 쌍둥이 동생이니까.”

세나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서 기어코 제 손을 조금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은 허공 위에 놓이게 되었다.

욘두는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그 손은 꼭 누군가가 잡아 주기를 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깨달았을 때, 그는 세나의 손끝을 부여잡고 있었다.

처음으로 잡아 본 세나의 손. 그녀의 손은 리나의 차가운 손과는 다르게 따뜻하기만 했다.

그것은 눈물이 날 만큼 간절하게 바랐던 살아 있는 자의 온기였다.

“…….”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세나의 눈동자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제가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욘두는 그 순간, 그녀에게 아무 짓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게 잘못한 거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세나를, 이런 식으로 희생시켜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최초의 의문이자 망설임이었다.

* * *

요한은 마차 안을 둘러보았다. 제 옆에는 조슈아가 앉아 있었고, 제 앞에는 바비가 앉아


있었다.

지금 함께 있지만, 그럼에도 그 사실이 잘 믿기지 않는 조합이라고, 그는 새삼 생각했다.

조슈아를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요한은 그 누구보다도 조슈아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다.

저를 놔두고 간다는 말을 꺼낸다면, 아이는 공작저가 떠나가라 울어 버릴 것이다.

요한은 조슈아의 눈물에 약했다. 그러곤 결국엔 아이를 데리고 나섰겠지.

그래서 우선은 조슈아를 데리고 공작저를 나왔지만,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한다면 아이는
뒤따라온 기사들에게 맡길 참이었다.
“바비, 그런데 너는 왜 공작저를 찾아 온 거야? 그날 이후로 네 마음은 모두 정리된 게
아니었던가?”

“정리됐어도 찾아올 이유는 충분해. 리나는 여전히 내 친구고, 나는 조슈아의 삼촌이기도


하니까. 그냥 안부 차 찾아온 거야. 경계하지 마, 요한.”

“응! 바비 삼촌은 조슈아의 삼촌이야.”

……애야. 넌 지금 누구의 편인 거니.

요한은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조슈아를 내려다보았다.

세나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은 여전했지만, 조슈아의 얼굴은 좀 전보다 훨씬 더 밝아져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

‘즉, 욘두가 리나에게 ‘지금 꼭 욘두를 따라나서야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며, 리나를 꼬드긴
게 아닐까?’

바비의 그 말 때문이리라.

세나가 혼자 사라진 게 아니라 욘두와 함께 나간 것이라고 여기자, 조슈아가 안심을 한


듯싶었다.

욘두와 나갔다면, 큰일이 없을 것이라 여기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조슈아는 욘두라는 남자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제일 위험한 인물인지도 모르고…….

요한은 관자놀이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에게 어디까지 알려 주어야 좋은 걸까.

또한 바비에게도 어떻게 설명을 해 주어야 할까.

리나가 진짜 세나라는 사실을 언제 알려 주어야 할지, 요한은 고민이 되었다.

요한은 바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바비가 곧바로 볼멘소리를 내었다.

“자꾸 쳐다보지 마. 내 얼굴 닳으니까.”

저런 녀석에게 리나의 진짜 정체가 세나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도 되는 건지…….

요한은 고개를 좌우로 내었다.

부수적인 일들은 뒤로 미루고, 일단은 세나부터 찾는 일에 집중을 하자.

바비가 말한 욘두의 허름한 집. 그 집에 세나가 있기를, 요한은 간절하게 바랐다.


제가 늦게 찾아간 것이 아니기를, 그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내내 기도했다.

얼마 못 가 마차는 멈춰 섰다.

세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저들 앞에 존재하는 낡아 빠진 저택을 바라보았다.

“이곳이야.”

요한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바라본 집은 허름하다 못해 곧 무너질 정도였다. 그곳에 누군가가 산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욘두는…… 이런 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걸까.

요한은 자세를 낮추었다. 그러곤 제 손을 꼭 잡은 조슈아에게 말하였다.

“조쉬. 집 안에는 바비와 기사들과 함께 들어가 볼게. 너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조슈아는 고집을 더 피우지 않았다. 요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뿐이다.

아이는 이번에도 눈치가 빨랐다. 꼬맹이인 제가 그 이상 관여하는 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퍼뜩 한 것이다.

“응. 조슈아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아빠는 걱정하지 말고, 엄마와 욘두 쌤을 잘


찾아와.”

“그래. 아빠 말을 잘 들어줘서 고마워.”

“……그런데 아빠. 욘두 쌤이 엄마를 데리고 간 건데, 왜 기사들이랑 함께 살펴보는 거야?”

“…….”

“조슈아는 엄마가 나랑 아빠를 버리고 어디론가 가 버린 줄 알고 슬퍼했어. 하지만 욘두 쌤과


함께 나간 거라면, 욘두 쌤이랑 비밀스러운 조슈아 얘기를 하러 간 거 아닐까?”

“…….”

“그냥 여기서 욘두 쌤한테 나오라고 소리치자! 쌤이 저 집에 있다면, ‘조슈아 님! 저를


어떻게 찾아내셨습니까!’라고 말하면서, 조슈아를 안아 줄 거야. 물론 엄마도 뒤따라
나오겠지.”

요한은 제 머리카락을 두어 번 쓸어 넘겼다.

조슈아의 추측은 현실에선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요한은 조슈아에게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 할지 조금도 헤아릴 수 없었다.

세나가 사라진 사실로 인해 백지장이 된 제 머리는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요한을 대신해 대답을 해 준 것은 근처에 있던 바비였다.


“조쉬. 이전에 삼촌이랑 했던 게임을 기억하지?”

바비는 지난날, 요한과 조슈아가 게임이라는 명분하에 자신의 뒤를 미행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응! 기억해.”

“욘두는 사실 우리에게 게임을 제안한 것일지도 몰라.”

“게임?”

“응. 숨바꼭질이랄까……. 아무런 메시지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린 사람을 누가누가 먼저


찾아내는가, 라는 게임이랄까.”

“우와! 그렇구나. 그래서 엄마랑 욘두 쌤이 그렇게 사라진 거구나!”

바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요한을 쳐다보았다.

‘둘러대는 건 이정도로 충분하지?’라는 메시지가 담긴 눈빛이었다.

요한은 코웃음을 쳤다. 오늘따라 바비가 왠지 믿음직스러워 보인다는 소름끼치는 생각은


덤이었다.

제 92 화. 당신의 형입니다

 
바비의 말은 이어졌다.

“이번에 우리가 하고 있는 게임은 조용히 행해져야 해. 조슈아 네가 내 뒤를 조용히


미행했듯이. 한순간에 확 하고 나타나서 왕 놀라게 하는 거지.”

바비는 작은 모션까지 더해가며 설명했다. 누군가를 갑작스럽게 놀라게 만드는 양 손바닥을 쫙


펼친 채였다.

적절한 모션 때문이었는지, 조슈아는 단번에 이해한 듯싶었다.

“응!”

“음……. 그리고 게임을 좀 크게 하게 되어서, 기사들과도 함께하게 된 거야.”

“그렇구나.”

“그럼 이제 조쉬는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거지?”


“물론이지!”

바비의 둘러댐은 완벽하게 끝이 났다.

조슈아는 바비의 어쭙잖은 변명을 완전히 믿은 듯했다.

유모로 들인 여자가 자신의 엄마가 아님을 앎에도, 그런 사실을 조금도 모른다는 듯이 모두를
속인 녀석답지 않은 순종이었다.

요한은 한시름을 놓은 것처럼 숨을 길게 내뱉었다.

어찌 되었든 조슈아가 의심을 하지 않게 된 것 같으니 다행이다.

이제 남은 일은…….

“…….”

요한은 제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허름한 저택을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세나…… 말도 없이 사라진 너를 원망하지 않을게.

제발 아무 일도 없어 줘.

요한은 조슈아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웅크렸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바비, 들어가자.”

“좋아.”

닮지 않은 듯, 묘하게 닮기도 한 두 남자는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그들의 뒤로는


공작저에서부터 따라온 대여섯 명의 기사들이 따랐다.

선두에 선 요한은 곧 현관문 앞까지 다가갔다. 그는 문고리에 손을 올려, 그것을 가볍게


돌렸다.

찰칵.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세나를 몰래 빼간 후 비밀스러운 일을 행하려고 했다면, 이곳의 문을 단단히 잠가 두어야 하지


않았을까?

바비의 말을 따라서, 이곳까지 온 것은 잘못된 선택인 걸까?

세나는 지금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녀는 공작저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나는 그저 잠시 외출을 나갔던 거고, 그녀의 외출이 작은 헤프닝을 만들어 버린 것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욘두와 함께 사라졌다’라는 사실이 찜찜하게만 느껴졌다.

요한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뱉고선, 문고리를 앞으로 당겼다.

끼이익.

문은 기괴한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요한은 몇 차례의 마른기침을 했다. 집 안쪽에서 훅 풍겨진 매캐한 먼지


냄새 때문이었다.

그는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로 집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집 안은 그리 어둠침침하지 않았다.

등불은 하나도 켜져 있지 않았지만, 커다란 창가로 들어온 햇빛 때문에 제법 밝게 느껴질


정도였다.

요한은 천천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가구는 거의 없었고, 사람이 살고 있다는 흔적 또한 보이지


않았다.

생활감이 없는 빈집.

아무래도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은 곳임이 분명했다.

그때, 요한은 작은 빛줄기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빛줄기는 꽉 닫힌 어느 방문 틈 사이로 미약하게 뻗어져 나온 것이었다.

요한은 본능적으로 확신했다.

저 안에 무언가가 있을 거야.

빛줄기를 본 것은 요한뿐만이 아니었다.

“……저곳에 들어가 보자.”

그리 말한 바비는 요한의 어깨 위를 두어 번 두드렸다.

“어.”

“긴장 돼?”

“……아니. 그보다도 얼른 확인해 보고 싶어.”

요한은 기사들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제가 앞장서서 그리 멀지 않은 그 방문까지


걸어갔을 뿐이다.
하지만 방문과 가까워질수록 입안은 바싹 말라 갔다. 종래엔 침조차도 삼켜지지 않을 정도였다.
용기 있는 걸음과는 상반된 몸의 반응이었다.

요한은 자기 자신에게 되뇌었다.

두려워하지 말자.

지금 제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일은 이곳에서 세나를 찾지 못하는 일 하나뿐이다.

그녀를 잃게 되는 일을 두 번이나 반복하지 말자.

이내 목적지에 도착한 요한은 걸음을 멈춰 섰다. 그는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고, 또다시


그것을 돌렸다.

낡은 문은 또다시 끼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밝은 빛이 쏟아져 내렸다.

요한은 눈썹을 조금 찌그러뜨린 채로 그 안쪽을 바라보았다.

곳곳에 켜진 등불들, 집 안을 뒤덮고 있던 먼지 냄새와는 상반된 희미한 장미 향, 커다란 침대,


그리고 그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두 여자.

요한은 멀리서도 눈에 띄는 금발을 보고선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찾았다.

아침부터 내내 찾았던 그녀가 드디어 제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요한은 침대 근처로 허겁지겁 뛰어가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그가 방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낡은 문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혔다. 마치


요한의 방문만을 허락한다는 듯이.

하지만 요한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제 시야에 맺힌 세나에게 온 신경을 빼앗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내 침대 위까지 기어 올라간 그는, “아…….” 하는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두 여자. 얼굴이 똑같아.

탐스러운 금빛 머리카락하며, 눈을 감고 있는 얼굴 생김새하며, 키하며…….

다른 곳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두 여자는 닮아 있었다.

요한은 닮은 두 여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쌍둥이. 세나와 리나. 그리고 사라진 리나의 시신.


요한은 잠든 듯이 눈을 감고 있는 두 여자 중 누가 세나이고, 누가 리나인지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제가 사 준 드레스를 입은 채로 고른 숨소리를 뱉어 내는 쪽이 세나였고, 정적에 휩싸인 채로


제가 모르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쪽이 리나이리라.

세나를 바라보던 요한의 시선이 이윽고 리나에게도 닿았다.

리나가 죽은 지는 무려 4 년이나 지나 있었다.

하지만 바라본 리나의 시신에는 부패한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너무도 산
사람처럼 보여서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였다.

그러나 리나에게선 아무런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을 쉼에 당연히 부풀어 올랐다 내려가야
할 그녀의 흉부 또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산 사람처럼 보였으나, 그녀는 역시나 죽은 것이다.

요한은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세나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살아 있는 자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온기에 요한은 조금은 안심했다.

늦지 않게 그녀를 찾아서 다행이다.

메마른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결국, 이곳까지 찾아내셨군요.”

요한은 그제야 이 방에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요한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하나 구태여 쳐다보지 않아도,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요한의 입술에서 그의 이름이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욘두.”

두 남자의 시선이 뒤엉켰다. 요한은 세나의 손을 꽉 잡은 채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욘두는 방 한편의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서 있었다.

“세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욘두는 즉시 대답했다.

“글쎄요. 단언하기 힘든 물음이군요.”

그러곤 피식 미소를 지었다. 욘두의 검은 눈동자엔 이지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요한은 침대에서 내려와 욘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내 그의 멱살을 꽉 움켜쥘 때까지도
욘두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똑바로 말해. 세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했을 것 같습니까?”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잖아.”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같은 침대에 눕혀 둔 욘두의 저의를, 요한은 조금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다 요한은 불현듯이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비며, 저를 따라온 기사들 하며……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요한은 꽉 닫힌 방문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제가 방 안으로 혼자 들어왔음에도 밖은 전혀 소란스럽지 않았다. 도리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을 따름이었다.

요한은 직감했다. 욘두가 마법을 쓴 것임이 틀림없다고.

그사이, 욘두는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힌트를 조금 드리겠습니다. 오래전에 죽은 리나 님과 죽을 뻔했지만 결국 죽지 않은


세나 님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4 년간, 생명력에 대한 것을 연구해 왔습니다.”

“…….”

죽은 사람과 산 사람. 그리고 생명력.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의 생명력을 옮긴다……?

제가 하고도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욘두의 멱살을 꽉 잡은 요한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지금 요한 님이 하고 계신 생각이 아마도 정답일 겁니다.”

“…….”

제가 한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정답이라고?

요한은 그에게 물음을 건네었다. 내뱉은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리나를 알아?”

욘두의 대답은 물음의 본질을 빗겨간 것이었다.

“제 부인이 바뀐 것도 모르고, 아픈 리나 님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제가 물은 것과는 상관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알 수 있었다.

욘두는 리나를 원래부터 알고 있었어.

그 순간, 요한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일화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리나가 죽기 전,


시름시름 앓았던 그때에 리나가 했던 말이었다.

‘……제국에 유능한 마법사가 있다고 들었어. 그라면 내 병을 치료하는 데에 도움을 줄지도


몰라.’

그 당시 리나가 추천했던 이가 바로 욘두였다.

리나 또한 애당초부터 욘두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바보 같았다는 거, 나도 인정해. 나는 그녀가 쌍둥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 사실을 진즉 알았다면, 지금과 같은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까?

욘두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올려 요한의 어깨를 살짝 밀쳤다.

조금 밀어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요한의 몸은 허공에 붕 뜬 채로 침대 근처에 내리꽂혔다.

“으윽…….”

요한은 엎어진 자세를 얼른 일으키며 작은 신음을 흘렸다.

마법사의 마법이 이렇게나 대단한 것인가. 고작 작은 손길 하나에 꼼짝없이 나가떨어져


버리다니.

그는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빌어먹을 마법사 같으니라고. 너 같은 건 진작 공작저에 다신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만들었어야


해.”

요한의 그 말이 화근이었는지도 몰랐다.

욘두의 얼굴에 새겨져 있던 희미한 미소가 거두어졌다. 가만히 서 있던 욘두는 요한 앞까지


뚜벅뚜벅 걸어와, 요한의 얼굴 위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요한의 고개는 오른쪽으로 꺾어질 듯이 돌아가 버렸다.

요한은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어느 틈에 또다시 마법을 건 것인지, 얼굴 밑부분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튼튼한 무언가에 사지가 단단히 결박된 기분이었다.


요한은 입속에 느껴지는 비릿한 것을 뱉어 냈다. 그러곤 돌아간 고개를 원래대로 위치시켰다.

다시금 마주한 욘두의 얼굴은 가히 심상치 않았다.

바늘 하나조차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굳은 얼굴.

그것은 요한이 처음 보는 욘두의 얼굴이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화나게 만든 걸까.

 
욘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요한 님은 지금 선대 공작님과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시군요.”

선대 공작이라면…… 자신의 아버지를 말하는 것일 테다.

요한은 반문했다.

“내 아버지를 알아?”

“네, 아주 잘 압니다.

“너…… 정체가 뭐야?”

그 순간 요한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굳어 버린 욘두의 얼굴이 평소보다도 자신의 얼굴과 더욱 닮은 것 같다.

리나와 세나의 얼굴이 닮은 것처럼.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욘두는 픽 웃었다. 명백한 조소였다.

그러곤 그는 말했다. 아마도 요한에게 있어 아주 충격적일 그런 말을.

“당신의 형입니다.”

“……!”

요한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눈이 커지고, 입술이 벌어지는 걸 막을 도리가 없다.

자신의 아버지가 방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사생아도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욘두마저도 아버지의 사생아였다니…….

욘두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모든 걸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저와 세나가 딱 한 가지 짐작하지 못했던 그것.

이런 일을 벌인 ‘욘두의 동기’는 과연 무엇인 걸까?

“놀라셨습니까?”

“…….”

“그럼 옛날이야기를 조금 해 보겠습니다.”

욘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이야기를 토로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구타는


없었다.

“허름한 이 집에는 어느 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몹시도 아팠고, 가난한 소년은


아픈 어머니의 약값을 치를 수 없었습니다. 소년은 약값을 구하기 위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게 됩니다. 아버지는 대단한 귀족인 동시에 부자였죠.”

지금 제가 들어온 허름한 이 집이 바로 그 모자가 살았던 집일 것이다.

소년이 찾아간 아버지가 바로 선대 공작일 것이다.

요한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이라 주장하며 약값을 구걸하는 소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내


매질을 견뎌 낸다면, 네 어머니의 약값을 주마.’ 소년은 그 제안에 기꺼이 응해 줍니다.
소년에겐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거든요.”

“…….”

“아버지는 잔혹한 분이었어요. 손속이 매서웠죠. 하지만 소년은 모진 매질을 견뎌 냈고


어머니의 약값을 받아 냈습니다. 다행인 점은,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기는 하나 당신이 한
약속은 꼭 지키는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과거의 기억을 헤집어 보았다.

공작저에서 매를 맞았던 아이를 본 적이 있는가.

애석하게도 욘두는 요한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소년은 아버지의 진짜 아들과 자주 만나는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소녀는
소년의 안타까운 사정을 기꺼이 들어 주었고, 공감해 주었으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

“소년은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욘두가 사랑한 소녀.

그 소녀가 바로 리나였던 걸까?


요한은 세나에게 들었던 과거 일을 떠올렸다.

제국의 미신 때문에, 한 사람밖에 나다닐 수 없었던 쌍둥이.

그리고 역할 바꿔치기.

세나는 욘두를 만난 기억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욘두가 자신의 속사정을 고백한 여자아이는 역할 바꿔치기로 공작저에 온 리나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요한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대강 추측할 수 있었다.

사랑.

멀쩡한 사람을 한순간 무너뜨릴 수 있는 그 감정.

철두철미하고 냉철했던 제가,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얼마나 무너졌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욘두의 사정에 공감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나 요한의 마음은 어쩐지 애달파졌다.

욘두는 제 고백이 끝나지 않은 듯이, 제 말을 이어 했다.

제 93 화. 선생님은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아니잖아

“하지만 그 소녀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자라나서도,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 소녀, 즉 리나가 사랑했던 남자는 누구였을까?

요한은 얼마 못 가 알 수 있었다.

세나의 자리를 꿰찬 리나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아팠음에도 자신만은 꼭


알아봐 주었다.

‘요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줘.’

요한은 그런 그녀에게 몇 번이고 사랑을 속삭여 주었다.

‘사랑해, 세나.’

‘네가 건강해지기를 매일 밤 바라.’


“…….”

리나는 자신을 사랑했던 것임이 틀림없다.

아픈 채로도 제 사랑을 바라던 세나의 정체는, 세나의 자리를 질투한 리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소녀는 곧 죽어 버렸죠. 마찬가지로 성인이 된 소년에게는 소녀를 살리고


싶다는 바람이 듭니다.”

“……살려? 죽은 리나를 어떻게 살린다는 거지?”

욘두는 요한의 말을 무시하고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꺼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오늘에서야 실현이 됩니다.”

“……! 그, 그만둬! 세나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마!”

죽은 리나의 시신을 훔치고, 세나를 납치한 욘두의 동기.

그것은 ‘리나의 소생’이었다.

요한은 그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물론 어떤 방법을 쓸지는 자세히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세나에게 해가 될 일임은


확실하다고, 요한은 생각했다.

“설마 세나를 희생시켜서 리나를 살리겠다는 건가? 어째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는


거지?”

“왜냐면 당신도 제가 느꼈던 상실감을 느끼기를 바라니까. 더불어 제가 사랑하는 리나 님이


되살아나기를 바라니까.”

“제발 그만둬……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공작이 되고 싶어? 공작위를 네게 줄게.”

요한은 절박했다.

공작가의 가주가 되기 위해, 자신을 갉아먹으면서까지 노력했던 과거의 자신이 무색할


정도였다.

마법으로 인해 목 밑부분이 굳어 버린 요한이 할 수 있는 일은 애원밖에 없었다.

무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세나와 무사히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요한은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욘두의 반응은 냉담했다.

“공작자리? 그딴 건 개나 주라고 하세요. 그런 걸 얻는다고 해서 만족이 되는 게 아니니까.”


요한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뱉어 낼 때마다 욘두에게 맞은 뺨이 욱신거리기도 했다.

애원이 통하지 않는다면, 현실을 일깨워 주는 게 어떨까?

도박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해 보고 싶었다.

요한은 저와 꼭 닮은 욘두의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했다.

“리나를 사랑하는 네 마음을 이해해. 나도 한 여자를 오랫동안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리나가 살아난다고 한들, 너를 사랑해 줄까?”

“…….”

“그녀가 사랑했던 건 내가 아니었나? 리나가 또다시 나를 사랑한다면? 그땐, 이젠 나라도


죽일 셈인가?”

“닥치세요.”

“리나를 그렇게까지 사랑했으면서, 나를 왜 진즉 죽이지 않았지? 마법을 쓴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잖아.”

욘두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요한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제 말을 이어 갔다.

“나는 네가 가지지 못한 자리에 버젓이 앉아 있고, 네가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도 가졌어.


따지고 보니까, 네가 나를 여태껏 죽이지 않는 게 이상할 따름이군.”

“요한, 당신은…… 내 원망과 질투의 대상. 당신의 역할은 제 삶의 의지를 불태워 주는


역할이었습니다. 한번에 죽이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요한 님이 한 말대로 저는 언제고
당신을 죽일 수가 있는데.”

“……빌어먹을 놈.”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무엇을 더 해야, 욘두를 회유시킬 수 있을까.

요한은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주위를 인지하며, 고뇌했다. 함께 온 기사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이 이토록 아쉬울 수가 없었다.

욕지거리를 들었음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던 욘두가 제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이내 올곧게 선 그는, 주저앉은 요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럼 무릎을 꿇고, 제게 빌어 보세요.”

요한은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던 다리가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욘두가 마법을 풀어 준 듯싶었다.

하지만 저항을 할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요한은 별다른 대꾸 없이 욘두가 하라는 대로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에게조차 한 번도 꿇지
않았던 무릎이었다.

그리고 그가 원한 대로 그에게 빌었다. 간절하게. 곧 울 것처럼.

“세나를 무사히 놓아줘.”

욘두는 터벅터벅 걸어가 벽 한쪽에 처져 있던 커튼을 확 열어젖혔다. 거두어진 커튼 뒤로


창문이 드러났다.

창문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바깥 풍경을 내비치기엔 충분한 크기였다.

요한은 유리로 된 창문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엔 낯익은 이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집 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몇몇의 기사들이었다. 조슈아는 기사들 뒤에 숨어 있는지,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당신의 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제 구두를 핥아 보세요.”

수치심을 느끼게 할 목적인 건가.

“…….”

요한은 대답 대신 욘두의 앞까지 기어가, 그의 검은 구두 위를 핥기 시작했다.

태어나 처음 맛본 구두약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입속에 가시지 않은 피 맛과 구두약 맛이


뒤엉켰다.

그 기묘한 맛에 요한의 미간은 절로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구두를 핥는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바깥에서 제 모습을 지켜볼 기사들이 일절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요한의 기사들은 제가 욘두의 구두를 핥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볼 테다.

두 눈을 의심한 기사들이, 어쩌면 창문 가까이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창문의 유리를 깨지는 못할 것이다.

완벽하게 방음이 된 이 방. 창문이든 꽉 닫힌 문이든, 욘두는 마법을 철저히 걸어 두었을 게


분명하니까.

그는 저와의 만남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무릎을 꿇은 채로 욘두의 구두를 핥는 행위를 내비치는 건, 자신의 명예와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사랑하는 여자가 위기에 놓여 있는데.


요한은 세나가 없었던 지난 4 년을 상기했다.

죽는 것보다도 괴로웠던 그 시간들을. 조슈아 때문에 차마 죽지 못했던 그 시간들을.

그는 죽지 못해 살아갔던 끔찍한 시간 속에 또다시 살고 싶지 않았다.

요한은 수치스럽지 않았다. 그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으니까.

욘두는 제 구두를 핥는 요한을 보고 웃는 소리를 내었다.

“하하하. 우습지 않습니까. 사랑이 사람을 이리도 망가뜨린다는 사실이…….”

하지만 욘두는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제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감에 기뻐해야 할 텐데.

“통쾌하기를 바라고 시킨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통쾌하지 않군요. 인상이 찌푸려집니다. 요한


님의 순정이 제 순정과 닮은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요한은 그의 구두를 핥던 것을 멈추고선,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욘두는 제가 한 말대로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사람이 바뀌었는지도 모르는 덜 떨어진 당신과 제가 닮았다니.”

“……형제라며.”

“…….”

“형제니까, 지독히도 닮은 거겠지. 네가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말이야.”

요한은 궁지에 몰린 주제에 제법 여유로운 소리를 했다.

욘두는 그다운 반응이라고 여겼다. 제가 지켜봐 온 요한은 그런 남자였으니까.

요한은 하등 오만하게 보이지만,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하는 남자였다.


세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한다면, 제 목숨을 버릴 정도로.

욘두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요한에게 이런 짓을 해 봤자, 죽은 리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을 학대했던 아버지가 제게


속죄하지 않는다.

욘두가 한을 품은 자는 리나와 자신의 아버지. 하나 그 두 사람은 이미 죽은 자들이었다.

산 사람인 요한은 제게 이렇다 할 짓을 한 적이 없었다.

즉, 요한은 욘두를 괴롭히고 멸시한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욘두를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해 주었을 뿐이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욘두는 믿을 수 없게도 요한에게 아무런 짓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게 잘못한 것이 눈곱만치도 없는 요한을, 더욱 잔인하게 괴롭히고 죽여도 되는지 고민이


되었다.

그것은 몇 시간 전, 세나에게 느꼈던 감정과 똑같은 감정이었다.

잠에서 설핏 깬 그녀가 손을 뻗으며 제게 고해했던 그 순간.

‘미안해요.’

욘두는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제 목덜미를 손으로 쓸며, 몇 십 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명력을 옮기는 자신의 마법은 이미 실패했다.

미안하다는 세나의 사과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은 사실이었다. 망설여졌지만, 욘두는 끝내


그녀들에게 마법을 행하였다.

지난 4 년간 연구해 온, 자신이 살아온 이유를 이제 와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만두기엔 이미


너무 많은 길을 걸어와 버렸다.

그 마법은 세나를 죽이려는 마법이 아니라, 세나가 가진 강인하고도 아름다운 생명을 리나에게
반쯤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짐작하건대, 세나 또한 그 사실을 반길지도 모르겠다고 여기기도 했다. 제 쌍둥이 동생이


살아나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 일은 욘두의 마음대로 착실히 진행되지 않았다.

한 인간의 생명력을 다른 인간에게 옮기는 마법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나 버렸다.

죽은 리나는 살아나지 못했다.

리나를 오래된 연인이라 칭하며 거짓말을 하는 일이 아닌, 그녀와 진짜 연인이 될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젠장, 젠장, 젠장.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세나의,

‘미안해요.’

그 말이 연거푸 떠올라서. 제 마음속에 작은 망설임이 일어서.

그렇기 때문에 마법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


세나를 이용해 리나를 살리는 일은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주저가 생겨 버렸기에.

요한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낸 것은 그맘때쯤이었다.

욘두는 자신의 위치를 기어코 찾아낸 요한 일행을 피하지 않았다.

그때 그에겐 요한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토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곧 현실이 되어,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요한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수치심을 준다면 제 마음이 후련할 줄 알았다.

하지만 욘두의 마음은 하나도 후련하지 않았다.

모든 게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제가 바라는 대로 풀린 일은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았다.

욘두는 이제껏 제가 해 온 일이 모두 부정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

욘두는 기다란 한숨과 함께 창문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곳엔 제가 예상했던 대로 요한의


기사들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들은 들고 있던 검으로 창문을 내려치기도 했고, 무언가 소리치는 듯 입술을 벙긋거리기도


했다.

아마 본능적으로 제 주군이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고는 모두 헛수고였다.

욘두는 이미 이 방 전체에 강력한 마법을 걸어 두었다.

방 밖에 있는 기사들, 창문 밖에 있는 기사들, 모두가 저와 요한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대치했을까.

바라보던 창문 유리창에 작은 손바닥 하나가 돌연히 등장했다.

곧이어 유리창 너머로 그들을 바라보는 동그란 에메랄드빛 눈동자마저도 등장하고 말았다.

욘두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주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조슈아 님?”

기사들 뒤에 숨어 있던 조슈아가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키가 작은 조슈아는 무언가를 밟고 올라선 채였다.


아이는 제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 그치지 않으며, 작은 손으로 창문 유리를 팡팡 두드렸다.

오밀조밀한 입술을 연신 움직이는 게, 무언가의 말을 주절거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조슈아까지 이곳에 데리고 오다니.

 
욘두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제게 맞아 한쪽 뺨이 부어오른 요한은 무릎을 꿇고 있고, 저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고 있고…….

조슈아는 지금 제 시야에 맺힌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욘두는 중지와 엄지를 가볍게 튕겼다. 저도 모르게 행한 일이었다.

그러자 조용한 주위 사이로 앙증맞은 목소리 하나가 울리기 시작했다.

“……두 선생님! 욘두 선생님! 아빠랑 지금 뭐 해? 아빠가 게임에서 져서, 욘두 선생님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거야?”

“…….”

“아빠가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은 건 처음 봐!”

조슈아는 해맑았다. 아이는 역시나 욘두를 굳건히 믿고 있었다.

요한과 욘두가 함께 있으니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요한은 욘두에게 사정했다.

“욘, 욘두! 조쉬에게 나쁜 짓을 할 생각은 하지 마! 조쉬! 얼른 창가에서 떨어져!”

하지만 요한의 절규는 조슈아에게 닿지 않았다. 욘두는 아이의 말이 들리는 것만을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요한의 말이 들리지 않는 조슈아는 이어 말했다.

“아빤 왜 그렇게 화나 보여?”

“…….”

“두 사람 모두 집 밖으로 나와! 조슈아랑 엄마를 찾아보자!”

창문 쪽에서는 리나와 세나가 누워 있는 침대가 보이지 않았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욘두 선생님! 조슈아 말이 안 들려? 여기 기사 아저씨들이 선생님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그러는데…….”
욘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조슈아야, 그 기사들의 말에 틀린 점은 없단다. 나는 네 아빠와 엄마에게 나쁜 짓을 해 버렸어.


그리고 이제 더 큰 나쁜 짓을 하게 될지도 몰라.

그는 차마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선생님이랑 아빠가 나와서 직접 얘기해 줘. 선생님은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아니잖아.”

욘두는 조슈아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악의 없는 순수한 눈동자였다.

그것은 자신을 맹신하는 듯한 눈빛.

어렸을 때 보았던 리나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완전히 닮은 것이었다.

그래, 저 눈빛 때문이다.

조슈아에게 나쁜 짓을 할 기회는 숱했지만, 아이를 한 번도 괴롭히지 못한 이유.

조슈아가 잘못을 해서 괴롭히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단지 요한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요한의 말마따나 요한은 제가 원했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의 가정교사가 막 되었을 땐, 조슈아를 조금 괴롭힐 계획이었다.

하지만 욘두는 아이를 괴롭히기는커녕 성심껏 가르치고, 보살펴 주었다.

요한보다도 리나와 닮은 조슈아가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아이에게 제가 삼촌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을 정도였다.

욘두는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세나와 요한에게 심한 짓을 하게 된다면…… 아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슬퍼하겠지.

욘두의 시선은 침대에 누운 리나에게 닿았다.

이젠 리나를 살리는 데에 실패한 제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시간이었다.

제 94 화. 나는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지 않아

욘두에게는 리나가 살아날 거라는 강인한 확신이 있었다. 계속 노력하다 보면 언젠간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몇 년이 걸리더라도, 설령 제 머리카락이 백발이 되더라도, 욘두는 리나를 살리고 싶었다.


그녀와 눈을 한 번 맞추고, 대화를 한 번 나누고, 욕심을 조금 내어 손이라도 잡는다면, 마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 그의 굳건한 확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리나를 영원히 살릴 수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세나가 유언처럼 남긴 ‘미안해요’ 그 말이…… 계속해서 떠오를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는


그녀의 말이 제 마법을 주저하게 만들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마법은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도 행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한 마법에


망설임은 독이었다.

리나를 살리는 데에 세나를 이용하는 일은, 이로써 완벽하게 실패한 걸까?

미안하다는 세나의 말이 환청처럼 귓속에 맴돌았고, 슬퍼할 조슈아의 얼굴이 환영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만.

‘욘두. 너는 왜 그렇게 물러 터졌어? 요한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지, 그를


괴롭힌 적은 없잖아.’

아주 오래전, 건강한 어린 리나는 제게 그렇게 말했었다.

욘두는 그날 리나에게 했던 대답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리나 님. 저는 용기가 없거든요.’

누군가를 완벽하게 미워할 용기. 누군가를 완벽하게 증오할 용기. 누군가를 완벽하게 저주할
용기.

욘두는 변하지 않은 채로 성장했다.

그가 요한을 질투하고 원망한 것은 여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한을 완벽하게 증오하지는


않았다.

‘요한, 당신은…… 내 원망과 질투의 대상. 당신의 역할은 제 삶의 의지를 불태워 주는


역할이었습니다. 한번에 죽이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요한 님이 한 말대로 저는 언제고
당신을 죽일 수가 있는데.’

센 척한다고,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진실은 그러했다.

욘두는 요한을 죽이지 않은 게 아니라, 죽이지 못한 것이다. 설령 리나가 그를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그건 리나의 마음이었으니까.

요한이 악독하거나, 리나에게 해코지를 할 낌새를 내비쳤다면, 그를 진즉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욘두는 알고 있었다. ……요한이 꽤 좋은 남자라는 사실을.


물러터진 마음은 세나의 한마디에 휘둘려, 몇 년을 바친 마법을 제대로 망쳐 놓았다.

또한 물러 터진 제 마음은, 조슈아의 깨끗한 눈동자에 동요하고 있었다.

욘두는 걷어 두었던 커튼을 다시금 쳤다.

그러자 잠깐 보였던 바깥 풍경은 가려지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조슈아의 목소리 또한 더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요한 님.”

욘두의 바지 자락을 쥐어 잡은 요한은, 절박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슈아 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사실을 제대로 알려 주십시오.”

“……욘두.”

“저는 나쁜 짓을 할 사람이라는 걸.”

“조, 조쉬에겐 제발 아무 짓도 하지 마……! 네,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이번엔 뭘 더


원해?”

요한은 정말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까지 벌벌 떨었다. 바라본 요한의 낯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가 위험에 처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실에, 깊은 절망을 느낀


듯했다.

요한이 애원하고, 절망하고, 무너져 내리고 있지만, 욘두는 역시나 통쾌하지 않았다.

혹 리나가 살아나도 후련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게 아닐까?

회생한 그녀가,

‘욘두, 미안하지만 나는 여전히 요한을 사랑해.’

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욘두.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 줘.”

욘두는 그제야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이 애원하지 않아도, 조슈아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아.

“당신들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욘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창가 근처에 서 있던 욘두가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욘두는 침대 쪽으로 느릿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요한은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의 몸은 또다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내 욘두는 침대


앞까지 걸어가, 두 여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욘두는 리나의 말을 또다시 떠올리며, 생각했다.

‘욘두. 너는 뭐든 정말 열심히 하는 것 같아.’

그래요, 리나 님.

당신이 한 말처럼 저는 조금 더 노력을 해 보고자 합니다.

당신이 증오했던 당신의 언니를 이용한 마법은 완전히 실패해 버린 것 같아요.

하지만 조금 더 노력을 하면, 다른 묘책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욘두는 리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녀의 피부가 닿은 손끝엔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우연처럼 맞잡았던 세나의 뜨거운 손과는 완전히 달랐다.

욘두는 리나를 든 채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요한의 얼굴은 고작 몇 분 사이에 눈에 띄게 메말라 있었다.

“요한 님. 지금 제가 물러나는 건, 당신 때문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사실만을 명심해


주십시오.”

“욘두…… 리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려는 거지?”

사지가 결박당한 요한이 그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말 하나뿐이었다.

“글쎄요. 어디로 가야 좋을까요.”

“리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제 목숨을 바칠 정도로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그녀를 그냥 놓아줘. 죽은 그녀를 살리려는 건, 네 욕심일 뿐이니까.”

“하…… 요한 님은 자신의 상황을 금세 잊어버리신 겁니까? 당신은 지금 간절히 애원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끝까지 애원만 하세요. 저를 가르치려 들지 말고.”

“내 말에 네 마음이 상했다면, 사과할게. 미안해.”

요한은 시선을 떨군 채로 이어 말했다.


“하지만 내가 너였다면…… 나는 그녀를 놓아주었을 거야. 그녀는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이미 죽어 버린 그녀가 뭘 원하는지, 넌 모르잖아.”

“…….”

욘두는 대답 대신 요한을 바라보기만 했다.

리나가 원하는 거?

리나가 갖고자 했지만, 갖지 못했던 거?

그건 당신 하나뿐일 거야.

하지만 욘두는 역시나 요한을 죽일 수는 없었다.

물러 터진 마음은 제 손에 누군가의 피가 묻기를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요한이 죽어 버린다면, 저를 믿고 있는 조슈아 또한 매일 매일 울 테니까.

우선 리나를 데리고 사라져 버리자.

요한, 조슈아, 세나, 그들이 완전히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리자.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리나를 살릴 방법을 연구해 보자.

결심이 서기 무섭게 욘두는 두 눈을 가볍게 감았다. 그러곤 이동 마법을 구현해 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의 몸 주위엔 희뿌연 빛이 피어올랐다. 욘두와 리나의 신형이 점점 흐릿해졌다.

욘두는 완전히 사라지기 전, 요한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었다.

“다시는 마주칠 날이 없기를.”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욘두는 의식적으로 요한의 시선을 피한 채로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굳어 있던 요한의 몸이 스르륵 풀리었다. 요한은 마룻바닥 위에 무릎을 꿇은 채로


얼굴을 쓸었다.

다시는 마주칠 날이 없기를 바란다는 건…….

이제 영원히 저와 세나, 그리고 조슈아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걸 의미하는 걸까?

요한은 온몸에 정기가 빠져나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나와 조슈아가 어떻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던 심장이 지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쾅! 쨍그랑!

날카로운 소음이 여러 차례 울렸다. 방문이 열린 소리와 창문이 깨진 소리였다.


“……요한! 괜찮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마법 때문에 방 안에 발을 디디지 못했던 바비가 소리쳤고, 여러 명의 기사가 방 안을


재빠르게 포위했다.

욘두가 사라지지자 그의 마법이 모두 풀린 듯싶었다.

요한은 한동안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세나가 무사한지 확인해야 하는데, 주저앉은 다리엔 힘이 모두 빠져 있었다. 마치 욘두의


마법에 다시 걸린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런 그의 옷자락을 쥐어 잡아 흔드는 이가 있었다.

“아빠? 욘두 선생님은 어디에 갔어? 그리고 엄마는 왜 침대에 누워 있는 거야? 조슈아랑


아빠를 기다리다가 잠든 거야?”

깨진 창문을 통해 기사와 함께 들어온 조슈아였다.

요한은 조슈아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깨달았을 땐,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 *

나는 긴 꿈을 꾸었다.

꿈속엔 내가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리나가 나왔다.

함께 살았던 집 안, 침대에 누운 꿈속 리나의 얼굴엔 생기가 더해져 있었다. 리나는 무척이나


건강해 보였다.

그녀는 나를 발견함과 동시에 누워 있던 몸을 반쯤 일으켰다.

‘세나 언니. 이제야 나를 찾은 거야?’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나는 대답했다.

‘응. 너를 찾았어.’

리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늦었잖아. 진즉 나를 찾아냈어야지.’

‘미안.’
‘하긴 언니는 언니의 이름을 제대로 알기까지도 엄청 오래 걸렸으니까.’

그녀는 기억을 잃은 지난 5 년간 내가 겪었던 일을 모두 아는 것처럼 말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리나.’

절벽에서 떨어뜨릴 정도로 나를 원망하고 질투했던 리나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나를 아직도 원망해?’

리나는 한쪽 입꼬리를 더욱 끌어올려, 조소를 지었다.

‘어. 원망해.’

그녀의 대답은 명백했다.

‘그래. 너는 죽어서도 나를 계속 원망하고 있구나.’

‘응. 영원히 원망할 거야.’

‘…….’

‘언니는 건강했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리나의 뿌리 깊은 증오는 조금도 가셔 있지 않았다.

비록 꿈이었지만, 나는 그 사실이 애석하게만 느껴졌다.

넌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지 나를 원망하지 않을 거니?

생각은 곧 의문으로 흘러나왔다.

‘……리나. 내가 어떻게 해야, 네가 나를 원망하지 않겠니?’

리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런 방법은 없어. 그러니까, 세나 언니도 나를 원망해. 언니의 남자를 뺏기 위해 언니를


절벽에 밀어뜨린 나를.’

‘…….’

‘언니를 절벽에 밀어뜨렸을 땐, 언니가 죽었는지를 차마 확인할 수 없었어. 그런 짓을 한


주제에 언니의 죽음은 무서웠거든.’

너도 무서웠니? 절벽에 떨어져, 기억을 잃은 나도 무서웠어.

과거에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 가늠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언니는 며칠이 지나도 찾아오지 않았고, 나는 언니가 죽었다고 확신했지. 무서워했고,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기쁘기도 하더라. 이젠 내가 완벽하게 언니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어. 내 병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요한은 아픈 내게


손도 대지 않았으니까. 언니에게 그런 짓을 해서 벌을 받고 있는 느낌이 들었어.’

리나의 말은 쉼 없이 이어졌다.

‘나를 영원히 용서하지 마. 나는 용서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

‘……리나.’

‘나는 죽어서도 내가 한 일을 뉘우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게 사죄받을 생각도 하지 말고,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마.’

넌 어쩜 꿈에서조차도 변함이 없는 걸까.

그런 네가 밉지 않은 이유는 왜일까.

리나는 제가 할 말을 끝마치자마자, 침대에 다시금 몸을 누이었다.

‘할 말 다 했어. 인제 그만 나가 봐.’

그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를 보는 게 마지막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리나. 설마, 오늘이 우리가 만나는 마지막 날인 거니? 이제 내 꿈에 나타나 주지 않을


거야?’

‘날 원망할 자신이 없다면, 그냥 나를 잊고 살아.’

‘…….’

‘영원히 기억하지 마.’

그녀는 매정하게 말하며, 등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나는 연약해 보이는 그녀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지 않아.’

그것은 내가 들은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허공에 삽시간 흩어지는 연기처럼 아득한 말.


오랫동안 감겨 있었던 눈꺼풀이 천천히 들리었다. 눈을 몇 차례 깜빡이자, 흐릿했던 시야가
또렷해졌다.

정신을 차렸고, 리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 이명처럼


맴돌았다.

‘……나는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지 않아.’

리나는 왜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지 않았던 걸까.

리나를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과거의 내가 우습다. 나는 요 근래에 리나가 했던


생각들을 조금도 헤아릴 수 없었다.

나는 시선을 옆으로 비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옆엔 내가 누운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댄 채로 잠이 든 요한이 보였다. 나는 그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러 보았다.

“……요한.”

그의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잠들기 전에 겪었던 여러 일이 떠올랐다.

조슈아 수업을 하기 위해 공작저로 찾아온 욘두. 그와의 대면. 그의 고백. 스산한 빈집.
그리고 발견한 리나의 시신.

리나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지? 욘두는?

나는 어떻게 공작저로 돌아오게 된 걸까.

요한이 나를 찾아 준 걸까?

어쩐지 길고도 지독한 악몽을 꾼 듯한 기분이었다.

이것이 잇따른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것이 꿈이 아님을 증명하는 목소리 하나가 들려 왔다.

“……세나?”

선잠이 들었던 요한은, 나의 작은 인기척에 깨어난 듯싶었다.

나는 그에게 대답해 주었다. 내뱉은 목소리가 조금 쉬어 있었다.

“네, 깨어났어요.”

요한은 손을 뻗어 내 몸을 단번에 껴안았다.

아주 그리워했던 그의 냄새가 코끝으로 훅 들어왔다.


요한의 좋은 냄새 속엔 희미한 땀 냄새가 배어 있었다. 돌연히 사라진 나를 찾기 위해, 그는
동분서주했던 걸까.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세나……. 미안해,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다…… 내 잘못이야.”

오전에 내가 겪은 것은 긴 악몽이 아니었나 보다.

따스한 그의 체온, 숨결, 나처럼 쉬어 버린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직감했다.

이것은 현실인 거야.

“제가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서, 걱정 많이 했죠?”

“어……. 너무 걱정해서 머리털이 다 빠져 버리는 줄 알았어.”

“대머리는 싫은데.”

요한은 안고 있던 나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마주한 요한의 얼굴이 가히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는 무지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야.”

“……미안해요.”

“…….”

나는 그제야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요한의 입술은 보기 좋게 터져 있었고, 그의 오른쪽 뺨은 약간 부어 있었다. 그것은 꼭


누군가에게 한 대 얻어맞은 모양새였다.

욘두의 마법으로 인해 내가 잠든 사이, 요한은 폭력적인 일을 겪었던 걸까?

“요한. 제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려 주세요.”

요한은 대답 대신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제 95 화. 뜨거운 피와 살처럼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

 
이윽고 요한은 내가 잠든 사이에 있었던 일을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에 내가 느낀 감상은 씁쓸함이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으리라곤 믿기지 않는 그런 이야기.

“……욘두는 리나를 안은 채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어.”

요한의 이야기가 구두점을 찍었을 때, 나는 격심한 아픔을 느꼈다. 물리적인 상처는 조금도
없었음에도.

내 심장은 예기로 빛나는 검에 찔린 듯이 아파 왔다. 나는 몸을 조금 움츠린 채로 요한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극렬한 아픔. 그것은 지금이 현실임을 알려 주는 또 다른 지표이기도 했다.

나는 요한의 손을 부여잡았다.

“욘두 쌤은 리나를 데리고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요?”

요한은 대답했다.

“알 수 없어. 하지만 그는 우리와 다시는 마주하지 않기를 바랐어.”

“…….”

“세나. 어디가 아프다거나,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아? 물론 네가 잠든 사이에 다녀간 의원은,


네게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그랬어.”

“괜찮아요. 저는 아무렇지 않아요.”

나는 그와 맞잡지 않은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 보았다.

몸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어딘가가 아프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탓에 희미한 두통이 느껴졌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도록 지속되지 않을 두통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요한의 손이 가진 온기가 내게 점점 더 전해질수록, 두통은 서서히 가실


것이다. 그리고 종래엔 죄다 사라질 테다.

“욘두 쌤은 왜 제게 아무런 짓도 하지 못했을까요?”

“과연 그가 아무 짓도 하지 못한 게 맞을까? 욘두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해 주지 않았어.


그저 얼버무리더군.”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네요.”

요한은 말해 보라는 듯이 내 말을 기다려 주었다.

“첫 번째, 무언가의 시도는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두 번째, 아무 짓도 하지 못했다.”


“……두 번째 가정이 맞았으면 하는 바람이야.”

“만약에 두 번째 가정이 맞는다면, 욘두 쌤은 왜 제게 아무 짓도 하지 못한 걸까요?”

나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욘두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의 얼굴은 그가 나를 기절시킬 때 보았던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마법으로 인해 강제로 잠든 후, 나는 기적처럼 잠에서 설핏 깨어났었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미묘했던 그 시점. 몸은 부유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던 그때.

뿌연 시야 사이로 욘두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 고백하듯이 말했다.

‘욘두 쌤……. 다 제 잘못이에요. 그때…… 처음부터 역할 바꿔치기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리나가 다른 방법으로 행복해지기를 도와줬어야 했어요.’

그것은 욘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지만, 리나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과거의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우리의 미래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나의 후회.

지금보다는 긍정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나의 헛된 기대.

우리의 마음이 참담하게 마멸되지 않았을 거라는 나의 예감.

그리고 그 순간에 본 욘두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그 또한 예기로 빛나는 칼에 제 심장이 찔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욘두의 슬픈 얼굴이 ‘그의 이유’였던 걸까?

그가 내게 아무 짓도 못 했던 이유.

“그것도 잘 모르겠어. 세나. 나는 모르는 일투성이야.”

“……요한.”

“하지만 맹세할게. 나는 다신 너를 잃지 않을 거야. 또다시 욘두가 나쁜 짓을 계획한다고 해도.


내 목숨을 다해서 너를 지킬 거야.”

“…….”

“그리고 너는 왜 욘두를 따라간다고 내게 말하지 않았지?”

타박하는 투는 아니었다. 요한은 단지 내 저의가 궁금해서, 그렇게 물은 것만 같았다.


“음…… 욘두 쌤에게 협박당했어요. 당신과 조슈아에게 말한다면, 리나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지 않은 채로 사라져 버린다고 했거든요. 하지만 그랬어도 당신에게 작은 메시지라도 남기고
나왔어야 했어요. 제 불찰이에요. 리나와 관련된 일이라서…… 마음이 급했어요.”

“하, 그랬군.”

작은 메시지도 없이 사라진 나를, 요한은 끝내 꾸짖지 않았다.

그는 그저 땅이 꺼질 만큼의 긴 한숨을 내뱉었을 뿐이다.

“이제 다시는 말없이 사라지지 않을게요.”

“제발 그렇게 해 줘. 나도 좀 살자.”

“네. 저도 맹세할게요.”

내 남자를 또다시 힘들게 만들 수 없지.

요한은 욘두와의 대치가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요한이 커다란 무서움을


느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는 나를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두려워했을 것이며, 욘두의 무시무시한 마법을 겁냈을


것이다.

요한은 그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러워 보였지만, 그 또한 인간이었다.

몰아치는 상황 속에서 맞닥뜨린 범접할 수 없는 상대에게, 그 또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란


소리다.

하지만 그는 무서움을 이겨 내며 나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나는 그런 요한이 사랑스러웠다.

이런 남자를 5 년 동안 잊고 있었던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세나.”

내 이름을 부른 요한은 고개를 조금 비틀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댔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마주한 그의 얼굴은 안쓰러울 정도로 좋지 않아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부은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네.”

“나는 지금도 두려움을 느껴.”

그가 내뱉은 숨결엔 시름이 가득했다.

요한은 나로선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커다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미안했다. 작은 메시지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사람은 나였으므로.

“걱정 마세요. 당신에게 맹세했잖아요. 이젠 당신을 놔두고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아요.”

나는 힘주어 말했다. 내 말 속엔 약속을 뜻하는 울림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요한은 말했다.

“그렇지만……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여전히 남아 있잖아.”

마치 아직까지 우리의 주변에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듯이.

“요한. 그런 일은 언제고 또다시 등장해요. 이걸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고…… 물론 그


크기는 모두 다르겠지만, 고뇌는 끝나지 않는 거죠.”

“…….”

“그렇지만 요한 당신이 그랬죠?”

“내가 뭐라고 했지?”

“함께라면 괜찮을 거라고.”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그는 말끝을 흐렸다. 제가 한 말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억을 하지 못하는 그에게 실망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내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제가 기억을 찾는 일을 두려워했을 때, 당신이 그렇게 말해 주었어요. 함께라면 괜찮을


거라고.”

“내가 그랬어? 기억해 줘서 고마워.”

“마음에 와닿은 말은, 머릿속에 오랫동안 맴돌아요. 어쩌면 제 심장에 새겨졌을지도 모를


말이에요. 당신의 그 한마디에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야겠다는 결심까지 섰으니까.”

“흠. 나도 네게 각인된 강인한 한마디가 있는데…….”

“그게 뭔데요?”

요한은 내 눈을 오롯이 바라본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밥맛 요한.”

“…….”

맙소사, 그 말이라니.
상상하지도 못한 말이잖아.

요한은 곧 사라질 것 같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너, 어렸을 때도 나를 그렇게 불렀었잖아. 내가 잊어버린 줄 알았지?”

그래, 맞아.

나는 어렸을 때도 당신을 밥맛이라고 불렀었어.

“용케도 기억하고 계셨네요.”

“아마 조쉬도 그 말을 강인하게 기억하고 있을 거야. 얼마나 자극적인 말인지.”

“아참. 조슈아는요? 아이는 괜찮아요?”

나는 뒤늦게 조슈아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요한이 토로한 이야기에는 조슈아의 활약도 포함되어 있었다.

누가 영특한 녀석이 아니랄까 봐, 아이는 우리 모두가 무사한 데에 큰 역할을 해 주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아이를 끌어안고,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어 주고 싶었다.

조슈아가 질겁하면서 ‘엄마! 이제 그만해!’라는 말을 내뱉을 때까지.

“응. 괜찮아. 네가 깨기를 기다리다가 잠들어 버렸어. 낮 동안에 꽤 많은 일이 있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으나, 나는 요한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조슈아


앞에선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말이다.

요한은 이어서 말했다.

“내겐 그런 생각이 들어. 결국 우리를 구해 준 것도 조쉬가 아닌가 싶은…….”

“저도 동의하는 바예요.”

“참 이상한 일이지.”

“뭐가요?”

요한은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것처럼 눈을 몇 차례 느릿하게 깜빡였다.

“너를 다시 찾아 준 것도 조쉬고, 우리가 붙어 있을 계기를 만들어 준 것도 조쉬고, 위험한


상황에서 너를 구해 준 것도 조쉬야.”

“우리는 축복 받은 걸지도 몰라요.”


그런 사랑스러운 아이가 우리의 아이라서.

조슈아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내겐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야.”

“앞으로 조슈아를 더 사랑해 줄 거예요. 그간 사랑해주지 못한 만큼.”

그러자 요한은 내게 물었다.

“……그러면 나는?”

“당신은 뭐요?”

“나는 사랑해 주지…… 않을…… 거야? 네 사랑을 소름 끼칠 정도로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야.”

나는 작게 킥킥거렸다.

“큭큭. 말을 참 어렵게 한다니까.”

“그래서 대답은?”

나는 가까이에 있던 요한의 입술 위에 입술을 가볍게 맞추었다.

“사랑해요.”

대답은 이쯤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기억을 찾은 후, 나는 처음으로 좋아한다는 말이 아닌 사랑한다는 말을 그에게 건네었다.

비슷한 의미를 가진 말이지만, 두 말이 가진 깊이는 완전히 다른 것만 같았다.

사랑한다는 말은 좋아한다는 말보다 따스함이 조금 더 밴 듯한 느낌이랄까.

바라본 요한의 얼굴이 삽시간 붉어져 있었다.

“사랑해요, 영원히. 죽을 때까지.”

나는 약속을 뜻하는 말을 또다시 건네었다.

요한은 붉어진 얼굴로 답하였다.

“나도 사랑해.”

“한 번 더 말해줘요.”

“사랑해.”
“5 년 치 몫까지 다 듣고 싶어요.”

요한은 대답 대신 내 이마에 입술을 맞대었다. 가볍게 닿은 입술은 곧 떨어지고, 그는 내게


속삭였다.

“사랑해.”

그의 입술은 미끄러지듯이 내려와 내 코끝에 닿았다. 그는 내 코끝에도 제 입술의 낙인을


남기고선, 고백했다.

“사랑해.”

그 입술의 종착지는 내 입술 위였다.

입술끼리의 입맞춤은 이마와 코끝에 나누었던 것보다도 조금 더 길고, 진해져 있었다.

내 입술에 닿은 그의 아랫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이 가실 때까지 그의 입술에서


입술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서로의 입술은 조금 떨어졌고, 요한은 속삭였다.

“이젠 제발 행복하자.”

“응.”

우리에게 모진 풍파가 더는 들이닥치지 말았으면 해.

요한은 나를 다시금 끌어안았다.

오간 대화는 더 이상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질릴 때까지 느꼈을 따름이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 문득 스치고 지나간 것이 있었다.

‘날 원망할 자신이 없다면, 그냥 나를 잊고 살아.’

‘…….’

‘영원히 기억하지 마.’

그 말이 왜 계속 생각나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리나는 내가 저를 잊고 살아가기를 바랐지만, 나는 그녀의 말대로 해 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뜨거운 피와 살처럼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나는 그녀에게서 영영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 * *

밤은 머지않아 다가왔다. 고작 한 것이라곤 요한과의 뜨거운 재회를 한 것밖에 없는데.

나는 미음에 가까운 것을 몇 스푼 먹은 뒤였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허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요한은 내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미음을 먹을 때에도, 심지어 화장실을 다녀올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내가 또다시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


염려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불안해 보이는 그를 쉼 없이 안아 주었다.

내가 사라질 일은 영영 없어.

나는 그에게 소리 없는 메시지를 보냈다.

잠든 조슈아의 얼굴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에, 우리를 찾아온 이가 있었다.

“엄마, 엄마……. 리나…… 또 사라진 건 아니지?”

잠에서 깬 조슈아였다.

아이는 ‘리나’라는 이름을 내뱉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아이가 보낸 몸짓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안아 달라는 신호였다.

나는 보고 싶었던 조슈아를 껴안으며 대답해 주었다.

“이젠 사라지지 않아. 약속할게.”

그럼에도 조슈아는 사라지지 않을 거냐는 질문을 다섯 번이나 더 하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정성들여 대답을 해 주었다.

조슈아 곁을 떠나지 않는다고.

아이 또한 요한 못지않게 놀랐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조슈아를 안심시킬 수 있을 법한


말을 꺼내었다.

“조슈아. 오늘은 셋이서 같이 자자.”

“응! 좋아. 조슈아는 셋이서 자는 거 좋아해.”

“나도 좋아해.”
“그럼 매일 매일 셋이서 같이 자자!”

대답은 요한이 대신 해 주었다.

“아빠도 찬성하는 바야.”

조슈아는 제일 먼저 침대 위로 올라갔다. 요한과 나는 아이를 가운데에 두고선 침대 위에 몸을


누이었다.

잠에서 설핏 깨, 우리를 찾아온 듯한 조슈아는 금세 다시 잠들었다.

하고 싶은 말, 설명해 주어야 할 말들이 많았지만, 오늘은 잠든 아이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았으니까.

많은 일이 있었던 오늘만큼은 푹 잠들 수 있도록 놔두는 게 어떨까.

조슈아에게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조슈아의 고른 숨소리만이 유일한 소리가 된 조용한 방 안.

요한은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세나.”

“네.”

“혹시 먼저 일어나면, 나를 꼭 깨워 줘야 해. 절대로 너보다도 늦게 일어나지 않을 거야.”

요한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돌연히 사라져 버린 내 탓을 하는 게 아니라, 나보다도 늦게 일어나 버린 자신의 탓을 하고


있는 듯한. 그런.

나는 조슈아의 가슴 위에 놓인 요한의 손을 부여잡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설령 당신이 늦게 깨는 일이 또다시 벌어진다고 해도, 우린 괜찮을 거예요.

다시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 욘두의 말은 진심인 것 같으니까.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났다.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떴고, 꿈은 꾸지 않았다.

나는 곤히 잠든 조슈아와 요한을 쳐다보았다가, 침대 옆에 있는 커다란 창을 바라보았다.

별조차도 흐려진 깊은 밤, 하늘빛은 짙은 검은색이었다.


나는 망망대해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어딘가에 있을 리나를 생각했다.

영원히 깨지 못하는 잠에 빠져들었지만, 생전 모습 그대로였던 리나.

그녀가 좋아했던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던 리나.

내가 욘두에게 골라 준 귀걸이를 끼고 있던 리나.

넌 지금 어디에 있니?

 
-完

제 96 화. 외전 1. 조슈아의 고민

공작저의 주방, 식탁에 앉은 조슈아는 다섯 살 인생 통틀어 제일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조슈아의 고민은 그러했다.

“……엄마…… 아니, 리나에게 조슈아의 진짜 엄마가 아닌 걸 알고 있었다고 어떻게 말하지?”

혼잣말을 한 조슈아는 제가 좋아하는 초코 과자를 와그작 깨물었다. 속이 빈 초코 과자는 잘게


부서지며 조슈아의 입 안을 배회했다.

겉면엔 초코 시럽이 뿌려져 있지만, 그 속엔 초코 시럽이 없는 그 과자.

그 과자는 이전 날, 벨라에게 묘한 감상을 주었던 과자였다.

‘진짜 엄마가 아니더라도, 겉모습만 그럴싸하면 된다.’

벨라의 추측은 제법 정확하게 들어맞아 있었다.

조슈아는 저잣거리에서 만난 리나가 자신의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액자 속 그림으로만 본 엄마의 얼굴과 그녀의 얼굴은 똑 닮아 있었지만, 자신의 엄마는 4


년 전에 죽어 버렸다.

조슈아는 제 엄마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에 떠났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요한과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쉬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요한의 생각만큼 어리지 않았다.

아이는 죽음과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정도로 커 버렸다.

진짜가 아님을 앎에도 불구하고, 엄마라 부르며 그녀를 따른 이유는 그러했다.

저잣거리에서 그녀에게 처음 안겼을 때 느낀 강렬한 동요 때문에.

조슈아의 심장은 어떤 큰일에 맞닥뜨린 것처럼 두근거렸고, 아이는 제 손끝과 발끝이


저릿저릿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조슈아는 그때 생각했다.

이 여자가 조슈아의 엄마였으면 좋겠어.

이 여자와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어.

심지어 이 여자와 아빠와 셋이서 살고 싶어……라는 생각마저도 들 정도였다.

처음 만난 낯선 여자에게 느꼈다고는 믿기지 않는 묘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조슈아는 억지로 그녀를 공작저에 들이는 데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 후, 모든 일은 조슈아의 뜻대로 진행되었다.

매일 밤, 죽은 그녀를 그리워하며 슬퍼하던 요한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웃음을 되찾아 갔다.

조슈아는 엄마의 부재로 느꼈던 쓸쓸함을 더는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러다간 리나가 자신의 진짜 엄마가 되어 줄지도 모르겠다고, 조슈아는 생각했다.

조슈아는 바보가 아니었다.

요한이 그녀를 ‘미인 거지.’ 혹은 간간이 ‘리나.’라고 부르는 것을 똑똑히 들은 터였다.

아이는 제 엄마의 이름과 비슷한 리나의 이름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조슈아는 시치미를 뚝 떼며, 리나의 이름을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리나가 엄마의 부재로 인해 공허한 삶을 살아가던 자신과 요한 곁에 영원히 있어


주겠노라고 다짐해 준다면…… 그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리나. 조슈아는 사실, 리나가 조슈아의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렇게 토로해야지.

하지만 조슈아는 어제, 저도 모르게 요한에게 자신의 속사정을 모두 고백하고야 말았다.

리나가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진짜가 아니라도 좋으니, 리나가 우리 곁에 남아 주었으면 한다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국 리나는 공작저로 돌아와 주었다.

요한이 제 사정을 알게 되었으니, 조만간 리나 또한 제 사정을 알게 될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니까, 리나가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자신의 사정을.

“거짓말을 하는 건 정말 나쁜 일이라고…… 욘두 선생님이 그랬는데.”

그렇다면 리나가 요한을 통해서 제 사정을 알기 전에, 제가 먼저 고백해 보자.

조슈아는 먹고 있던 초코 과자를 다 먹은 후에 리나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욘두 선생님은 왜 오지 않는 걸까?”

제게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 욘두 선생님.

어제 왠지 슬퍼 보이던 얼굴을 하고 있던 욘두 선생님은 부재중이었다.

공작저에서 그의 행방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요한에게 물어보아도,

‘조쉬. 그는 당분간 오지 않을 거란다.’

애매한 대답을 해 줄 뿐이었다.

“아빠랑 싸운 건가…… 애도 아니고, 아빠는 바보야.”

조슈아는 손에 쥐고 있던 초코 과자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자 살이 오른 아이의 볼이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손에 묻은 초코 과자 가루를 탁탁 털어 냈다.

딱 하나만 먹으려고 주방에 온 건데……하나만 더 먹어야겠다.

어차피 푹 잠든 리나와 요한은 한동안 깨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조슈아는 함께 잠든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던 요한과 리나를 떠올렸다.

두 사람이 함께 잠든 게 너무 예뻐 보여서, 조슈아는 그들을 깨우지 않은 채로 주방에 혼자 온


터였다.

* * *
잠에서 깼을 땐,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깨어나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요한의 단단한 팔, 그리고 내 얼굴과


마주한 요한의 단단한 가슴팍이었다.

갑갑한 걸 싫어하는 요한이었기에, 그는 잠옷의 단추를 두어 개쯤 풀고 있었다. 벌어진 셔츠


사이론 하얗고 단단한 그의 가슴팍이 보였다.

나는 혀를 조금 끄집어내어 그의 살갗을 맛보았다.

“……세, 세나. 낮부터는 좀 자제해 줘. 조쉬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얼레, 깨어 있었네.

요한은 기겁했으나, 나를 밀쳐내지는 않았다. 도리어 나를 조금 더 꽉 껴안았을 뿐이다.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아니. 일찍 깼어. 네가 깰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야.”

“그럼 저도 깨워 주지.”

“자고 있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구경거리였어.”

“어땠는데요?”

“절경이었지.”

나는 대답 대신 그의 가슴팍에 입을 맞추었다. 요한의 몸이 잠깐 움찔한 것 같기도 하다.

“조슈아는요?”

요한은 웃음기가 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찍 깨서, 우리 몰래 초코 과자를 먹으러 갔어.”

“……아침부터요?”

“조쉬가 초코 과자를 먹는 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거든.”

그것은 조슈아 곁에 있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알 수 없었던 사실이었다.

나는 오늘부터라도 아이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아이의 여러 모습을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커 가고, 성장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빠짐없이 지켜보고 싶었다.

“그리고 세나.”
“네?”

요한은 꽉 안고 있었던 나를 조금 놓아주고선,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속삭이듯이


말했다.

“네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바람이 드는 것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것 같아.”

그는 부자연스러움이라곤 일말도 없이 내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맞춤이었다.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햇볕. 맞닿은 그의 따스한 온기. 나른한 오전에 느낀 행복함.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비정했던 일들 모두가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느낌.

내가 기억을 잃었던 지난 5 년이 모두 꿈이었던 것 같은 느낌.

나는 지금 느낀 우리의 행복이 오래가기를 바랐다.

조금도 후퇴하지 않으며, 영원히 지속되기를.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벨라예요. 두 분, 아직도 잠들어 있으신 걸까요?”

요한은 아쉬운 얼굴을 한 채로 안고 있던 나를 완전히 놓아주었다. 나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며 흐트러진 옷을 재정비했다.

나보다도 먼저 침대를 벗어난 요한은 내 어깨 위에 자신의 카디건을 재빨리 덮어 주었다.

그의 카디건은 엄청 커서 내 상체가 모두 가려질 정도였다.

“추, 추우니까. 입으라고.”

그는 머쓱한 듯이 헛기침을 했다.

요한은 내게 친절을 베푼 일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이미 볼 것 못 볼 것을 다 본 사이에…….

어쩜. 저토록 귀여운 걸까.

“벨라. 들어와.”

요한의 허락이 떨어지자, 벨라는 그제야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보지 못한 것은 어제 하루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가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벨라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만연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아침…… 아니, 오전이에요. 주인님. 리나 님.”

“네, 좋은 오전이에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벨라가 내뱉은 한 마디를 곱씹어서 생각했다.

리나 님.

내 호칭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내게 있었던 기괴한 일들을 어떻게 설명해 줘야 좋을까. 아니, 말해 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

고민이 길어졌고, 벨라와 눈을 맞추고 있는 시간 또한 길어졌다.

벨라는 나와 맞추고 있던 시선을 옆으로 조금 비틀어, 요한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그런데 조만간 방을 합쳐야 하는 걸까요?”

“……!”

벨라의 짓궂은 질문에, 요한은 제대로 당황했다.

하지만 ‘아니.’라는 말은 곧 죽어도 꺼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두어 번의 헛기침과 함께


대답했을 뿐이다.

“흠흠. 조만간이 아니라, 오늘부터 당장 합쳤으면 하는데. 난…… 지금…… 소름 끼치도록


조급해.”

“와! 두 분! 축하드려요!”

오간 설명은 딱히 없었지만, 벨라는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확인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벨라는 말로 축하해 주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으며, 심지어 박수까지 쳤다. 조슈아가 하던 것과


닮은 물개박수였다.

“그, 그렇게까지 축하해 줄 필요는 없어. 아무튼 오늘 밤부턴 계속 함께 있을 거야.”

나는 소심하게 내 의견을 피력해 보았다.

“저기, 요한. 제 의견은요?”

“……뭐? 너도 같은 생각이 아니었어?”

“글쎄요. 당신이 하는 걸 보고 판단하고 싶다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일 분 일 초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너를 작게 만들 수만 있다면,
작게 만들어서 내 주머니 속에 넣어 다니고 싶은 심정이라고.”

와우. 나는 벨라를 따라 물개박수를 쳤다.

그런데 요한의 주머니 속에서 사는 일…… 꽤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뭐람.

아주 객쩍은 생각이었다.

“리나 님. 큭큭. 두 분 사이가 언제 이렇게까지 진척된 거예요?”

“그러게요. 저도 신기하네요.”

요한은 우리 두 사람의 대화에 차마 끼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다느니 뭐니 하는 말을 내뱉은 일을 뒤늦게 창피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러다 그는 늦지 않게 물음을 건네었다.

“……그래서 나랑 같은 방을 쓰지 않겠다는 건가?”

나는 이번엔 확실한 대답을 해 주었다.

“이 미인 거지는 당신의 주머니에 들어갈 만큼 작아지지 못하기 때문에, 기꺼이 당신과 한


방을 쓰겠습니다.”

벨라는 뭐가 그리도 우스운 것인지, 벨라의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촌극을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아 참. 그런데 벨라. 무슨 용건이 있어서 찾아온 거예요?”

벨라는 뒤늦게 자신이 찾아온 진짜 이유를 떠올리고선, 말했다.

“아침부터 찾아와, 두 분을 기다리고 계신 분이 있어요.”

“누가 찾아온 거지?”

요한의 물음에 벨라는 답하였다.

“바비 님이 찾아오셨어요.”

바비라니…….

좀 의외인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욘두에게 납치되었을 때 바비가 큰 역할을 해 주었다는 사실을 요한에게 들은


터였다.
바비는 욘두에 대해 우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에, 욘두가 숨어 있을 법한 장소 또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비가 짐작한 곳에 내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한다.

바비가 타이밍 좋게 공작저를 들르지 않았다면, 나는 요한과 영영 만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지는 생각이었다.

어제 나를 구출한 직후, 바비는 공작저에 머물지 않고선 제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렇기에 그는, 내가 무사한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아침 일찍부터 공작저를 찾아온 게 아닐까?

나는 늦게나마 바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 주고 싶었다.

예전이라면 그를 무작정 피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비와 나는, 석양이 지던 그 날에 다시 친구가 되기로 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바비를 훨씬 더 편하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나와, 기억을 잃고 방황하던 리나였던 내게 큰 도움을 준 사람이 바비였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나는 바비와 만나고 싶었다.

“알겠어. 나가 봐. 바비에겐 곧 찾아가겠다고 알려 주고.”

요한의 대답 또한 의외였다.

나는 요한이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던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벨라는 유려한 인사와 함께 뒤돌아섰다. 그러고선 방을 완전히 나가기 직전, 우리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건네었다.

“앗, 그리고 두 분이 함께 지내실 신혼 방…… 아니, 주인님 방을 정리해 둘게요!”

벨라는 대답을 바란 말이 아니었다는 듯 방문을 닫고 쏙 나가 버렸다.

“베, 벨라!”

“…….”

벨라에게 차마 닿지 못한 요한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나와 요한은 괜스레 멋쩍은 얼굴을 했다.

함께 밤을 보내는 게 처음도 아닌데, 함께 지낼 방을 꾸린다는 그 말이 왜 이리도 낯 뜨거운


걸까.
나는 소매로 이마를 훔쳐 냈다. 식은땀이 맺혀 있을 것도 같았지만, 이마에 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비에게 가 볼까?”

요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요한. 바비에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 주는 게 좋을까요?”

요한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아무것도 알려 주고 싶지 않아.”

바비가 나를 구출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는 바비를 여전히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삐뚤어진 거예요?”

“나는 소름 끼치게 질투가 많은 남자야. 몰랐어?”

“알고 있어요.”

“…….”

“하지만 바비와는 물보다도 진한 피로 이어진 형제잖아요. 언제까지 서로 남보다도 못한


사이처럼 굴 거예요?”

“……세나.”

그는 꼭 조슈아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야단을 들은 다섯 살배기 어린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나는 조슈아에게 말하듯 강경하게 이어 말했다.

“다른 이에겐 몰라도, 바비에게만큼은 우리의 일을 제대로 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 정체와 욘두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나는 바비에게 모두 다 얘기해 줄 참이었다.

* * *
응접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바비는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는 초조한 걸음걸이로
방 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내 우리의 인기척을 들은 바비의 고개가 나와 요한 쪽으로 돌아갔다. 아니, 내 쪽으로


돌아갔다는 말이 더 정확하리라.

“리, 리나!”

바비는 이제 내 것이 아니게 된 이름을 부르며 내게 뛰어왔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등을 감싸고, 나를 제 품에 욱여넣은 것은 일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바비에게 꼼짝없이 안긴 채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요한은 심한 욕지거리를 내뱉을 법한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바비를 말리지는 않았다.

바비가 끔찍하다는 듯이 말했음에도, 요한은 바비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무사함을 제대로 확인하려는 바비의 진심을.

제 97 화. 외전 2. 조슈아에겐 리나가 평생 필요해

바비는 요한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 안위를 확인했다.

괜찮아?

어디 아프지는 않아?

나는 요한에게 한 것과 같은 대답을 해 주었다.

“나는 정말로 괜찮아. 멀쩡해.”

“다행이다……. 얼마나 걱정한지 몰라.”

나는 바비의 등을 매끄럽게 쓸어주었다.

나, 여러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었구나.

바비의 포옹은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했다.

몇 초가 더 흐른 후, 요한이 바비와 나를 강제로 떼어 냈기 때문이다.

“포옹은 여기까지.”
이것도 많이 참은 거야.

요한은 불만스러운 말을 덧대며, 내 손을 잡아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요한. 그래서 내가 고맙다고 말할 줄 알았어?”

“바비, 너……!”

나 원 참. 또 싸우려고 하네. 오늘만큼은 싸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나는 얼른 그들을 중재했다.

“싸우지 마. 사이좋게 좀 지내. 도대체 언제 철들래?”

두 사람은 의도적으로 서로의 시선을 외면했다. 곧 죽어도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아진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이가 다시 나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오묘한 관계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튼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희한한 것은, 두 남자는 서로에겐 으르렁거리지만 내 말은 매우 잘 듣는다는 점이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남자는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물론 나는 요한과 손을 잡고 있었기에, 그의 걸음을 따라 그의 옆에 앉게 되었다.

나는 바비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고선, 입술을 떼어 냈다.

긴 서두는 필요 없다.

나는 잊고 있던 모든 것을 다시 기억해 냈고, 그 사실을 바비에게 솔직하게 알려 주면 되는


거니까.

“바비. 갑작스럽겠지만 고백할 게 있어.”

“고백할 거?”

“응. 내가 사실…… 진짜 세나였어.”

“……!”

짧지만 강한 임팩트가 있는 고백이었다. 바비는 돌연히 드리운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의연했다. 익히 예상했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드리운 채로 그간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간략하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제법 길어졌다.

그렇지만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없었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기억 또한 없었고, 영원히 잊을 수 있는 기억 또한 없었다.

나는 그렇게 내 이야기에 구두점을 찍었다.

돌아온 기억과 쓰라린 사연에 관한 모든 것을 고백한 것이다.

바비는 모든 진실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비. 내 말을 믿어?”

바비는 제 얼굴을 마른세수하듯이 쓸었다. 그는 조금 얼이 빠진 듯해 보였다.

나는 그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자고로 믿기지 않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엔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깨달았을 땐, 바비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못 믿을 이유는 없지. 리나 네 말인데. ……아니, 이제 세나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네 마음대로 불러도 좋아.”

어떻게 불리든 어차피 본질은 ‘나’니까.

“응, 알겠어. 그런데 뭐야……. 나는 그럼 같은 여자에게 두 번이나 반하고, 두 번이나


차이게 된 건가?”

바비는 내 사연에 완전히 스며든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말에 긍정을 해 주었다.

“애석하게도 그래.”

“하하. 참 우습다.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는 건지……. 욘두의 뒤를 꽤 오랫동안 캐


왔지만, 그가 그런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건 조금도 알아내지 못했어.”

바비는 어깨가 축 내려갈 만큼의 큰 한숨을 내쉬며, 제 말을 덧대었다.

“내가 욘두에 대해 제대로 알아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텐데.”

“바비. 넌 너대로 최선을 다해 주었어. 어제, 네가 없었다면 큰일이 났을지도 몰라.”

“그래서 욘두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이번에 대답한 이는, 우리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요한이었다.


“어. 지금으로선 알 수 없어. 하지만 욘두의 행방에 대해선 꾸준히 알아볼 참이야.”

“공론화는 시키지 않고?”

“조용히 찾아보게. 딱히 나쁜 짓을 더 꾸밀 것 같진 않고…….”

바비는 요한의 말에 아주 불신을 하는 듯했다.

“어째서 나쁜 짓을 더 꾸밀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미 나쁜 짓을 한 자잖아. 궁성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

“아니. 그렇게 된다면, 욘두가 더 나쁜 마음을 먹게 될지도 몰라. 세나, 네 생각도 그렇지?”

나는 대꾸했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시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욘두의 말이…… 그냥 한 말은


아닌 것 같아서.”

내뱉고 나서야 새삼 깨달았다.

나, ‘세나’였던 때처럼 요한에게 반말을 했구나.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지난 5 년간 불리었던 리나라는 이름을 어색해할 때쯤엔 나는 완벽한


세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한에게 장난을 치며, 요한과 반말을 하며, 요한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그 세나로.

그러자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5 년 간 리나로 지내왔던 기억이 벌써부터 멀어진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걱정돼. 세나 네게 또다시 위험한 일이 닥칠까 봐. 왜냐면 나는 요한을 믿을 수


없거든.”

“바비. 싸우지 말라던 세나의 말을 잊었어? 시비는 그만 걸어.”

“나는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나는 아련한 감상에 더 빠져 있을 수 없었다.

두 남자의 언성이 높아지기 전에, 그들을 또다시 중재해야 했으니까.

“요한, 바비. 제발. 그만 좀 해.”

그 순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었다.

노크도 없이 스르륵 열린 방문 사이로,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울렸다.

“엄마, 아빠! 조슈아가 왔어.”


우리 예쁜이, 초코 과자를 많이 먹고 왔어요? 오구오구.

나는 소파에서 얼른 일어나 조슈아를 껴안았다. 아이에게선 좋은 향기와 초코 향이 뒤섞인


냄새가 났다.

“엄마! 조슈아가 보고 싶었어?”

“응. 잠에서 깼을 때, 네가 보이지 않아서 얼마나 서운했는지 몰라.”

내겐 불현듯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조슈아가 나를 처음 발견했을 때, 아이를 기억해 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엄마. 울어?”

조슈아는 내 등을 조용히 토닥여 주기 시작했다.

까닭 없이 흐른 눈물은 내 뺨을 모두 적시고, 파묻고 있던 조슈아의 흰 목덜미까지 적시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안고 있던 아이를 놓아주고선, 내 것과 닮은 조슈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미안…… 엄마가 또 청승맞게 눈물을 흘렸네.”

자연스럽게 뱉어 낸 엄마라는 말이 화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토해 내고야 만다. 종래엔 엉엉 소리를 내어 울어 버렸다.

“엄, 엄마. 왜 울어? 조슈아 때문인 거야? 조슈아가 또 잘못을 해 버린 거야? 흐어엉.”

눈물은 또 다른 눈물을 낳았다.

조슈아의 커다란 눈동자에선 닭똥 같은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조슈아에게 울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도, 정작 나 또한 울음을 쉬이 그치지 못했다.

지금 흐른 눈물은 무엇을 뜻하는 눈물인 걸까.

세상에서 제일 소중했던 조슈아를 잊었다는 사실의 속죄를 바라는 눈물인 걸까.

조슈아를 다시 기억해 냈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눈물인 걸까.

소파에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재빠르게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달래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물은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나는 눈물샘에 고여 있던 눈물이 모두 다 마를 때까지 눈물을 토해 냈을 뿐이었다.


 

* * *

“엄마. 조슈아가 고백할 게 있어.”

눈이며, 코며, 뺨이며…… 울음 덕에 모두 다 빨개진 조슈아가 말했다.

겨우겨우 울음을 진정시킨 나와 조슈아는 소파에 함께 앉은 터였다. 아이는 내 무릎 위에


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조슈아가 뭘 고백하려나. 엄마가 맞춰 볼까?”

“응!”

“엄마를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말?”

조슈아라면 그 말을 하겠지.

엄마를 너무 사랑하니, 제 곁을 떠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을까?

어제, 잠깐 사라졌던 나 때문에 조슈아가 많이 놀랐을 테니까.

그러나 조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틀렸어.”

“음…… 그럼 엄마가 너무너무 예쁘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면, 이 말이겠지.

하나 조슈아에게 돌아온 대답은 절망적인 것이었다.

“그것도 틀렸어!”

“맙소사. 그럼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니?”

조슈아는 답지 않게 입술을 뭉그러뜨렸다.

아이는 무언가를 말하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아주 명백히.

나는 조슈아가 무엇을 말하기를 고민하는 것인지, 조금도 헤아릴 수 없었다.

조슈아는 작고 귀여운 아이이지만, 어떨 때 보면 요한보다도 훨씬 더 복잡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으니까.
요한은 자신의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는 아주 단순한 타입이었다.

나는 내친 김에 내 옆에 앉은 요한을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제게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입 모양으로, 그에게


소리 없는 말을 전하였다.

‘사랑해요.’

“……!”

내 말을 읽은 요한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심지어 그의 얼굴마저도 삽시간 붉어지기에


이르렀다.

……이거 봐. 요한은 몸의 반응이 솔직하고 단순하잖아.

요한을 잠깐 놀리는 사이, 고민이 끝난 듯한 조슈아가 조그마한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리나가 조슈아의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

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 진심으로. 어쩌면 내 이야기를 들은 바비가 놀랐던 것보다도 더.

조금 벌어진 입술은 다물어질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조, 조, 조슈아. 그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요한. 당신도 알고 있었어?”

요한은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것은 긍정을 뜻하는 고갯짓이었다.

발칙한 부자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의 대화가 오갔음이 분명했다.

그것은 요한이 내게 설명해 주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요한이 언제부터 조슈아의 사정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요한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사실을 앎에도 내게 말해 주지 않은 연유는…… 조슈아가 직접 고백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만난 처음부터. 조슈아는 리나가 조슈아의 진짜 엄마가 되기를 원해서……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어.”

조슈아는 늦지 않게 자신의 사연을 토로했다.


아이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덤덤했다. 마치 내게 사실을 고백할 것을 일찌감치 생각한 사람처럼.

“조슈아가 나빴지? 거짓말을 하는 어린이는 나쁘다고, 욘두 선생님이 그랬는데…….”

“조슈아…….”

나는 뭐라고 해 주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다.

조슈아가 나쁜 게 아니라고 말해 주어야 하는데,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애꿎은


아랫입술만을 깨물 뿐이었다.

조슈아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이어 말했다.

“조슈아가 행복했고, 아빠도 행복했고, 리나도 행복해 보여서 괜찮다고 생각했어.”

“…….”

“그래도…… 리나가 행복해 보였어도, 조슈아가 사실을 말하면 리나가 우리를 떠날까 봐
두렵기도 했어. 내가 리나를 엄마라고 불러야지, 리나가 우리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눈을 잠깐 감고선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울음을 참아 내기 위함이었다.

눈물샘이 마를 정도로 다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오산이었나 보다.

내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서, 나를 속인 조슈아가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안타까움은 내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며 나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었다.

나는 눈물의 기운을 있는 힘껏 참아 냈다. 그 덕에 결국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스로 울음을 참아 낸 내 귓가로, 조슈아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을 계속 속이는 일도 나쁜 일이라고, 욘두 선생님 알려 주었어.”

욘두 쌤.

당신은 그토록 잔혹한 일을 계획했으면서도, 조슈아에겐 왜 그렇게 훌륭한 선생님이었나요.

그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내 심장이 저릿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나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조슈아가 솔직하게 털어놓은 거야.”

“응…….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

나는 용기 내어 고백해 준 아이의 이마에 입술을 짧게 맞추었다.


“그럼 이제 리나에게 묻고 싶어.”

아이는 엄마가 아닌, 제가 아는 내 이름을 똑바로 불렀다. 내게 닿은 아이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엔 결연한 빛이 스며 있었다.

그것은 아이와 처음 만났던 순간에, 아이가 나를 보던 눈빛과 닮은 것이었다.

한 치의 물러섬도 보이지 않는 눈빛.

“조슈아의 진짜 엄마가 아니라도…… 조슈아의 곁에 남아 줄래?”

강인한 눈빛에 동반된 멋진 고백.

“조슈아가 엄청 잘해 줄게. 아빠보다도 훨씬 더 잘해 줄게.”

나는 입가를 틀어막았다.

“조슈아. 너는 어쩜 고백도 그렇게 잘하는 거니?”

“……리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조슈아는 수줍게 대답했다.

나는 아이의 볼과 입술에 마구잡이로 입술을 맞춘 후에 대답해 주었다.

“조슈아. 내가 말했잖아. 나는 이제 네 곁을 떠나지 않아. 나는 조슈아의 키가 나보다도 더


커지고, 조슈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조슈아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네 곁에 남아 있을게.”

조슈아는 내 입맞춤에 보답하듯, 내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술을 맞대었다. 그러곤 말했다.

“조슈아에겐 리나가 평생 필요해.”

과거, 조슈아의 유모가 되었던 첫날.

‘그럼 저는 언제까지 유모를 해야 하는 거죠?’

그날, 내가 한 물음에 요한은 그렇게 대답했었다.

‘조슈아에게 네가 필요하지 않을 그때까지.’

‘…….’

‘걱정하지 말도록. 아이는 금방 자라니까. 가짜 엄마가 필요한 시기는 그리 길지 않을 거야.’

그런데 요한. 이제 어쩌죠?

조슈아에겐 제가 영원히 필요한 것 같은데.

나는 아이의 몸을 부드럽게 껴안아 주었다. 머지않아 요한이 우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이게 웬걸.

맞은편에 앉은, 존재감이 희미했던 바비 또한 은근슬쩍 우리의 포옹에 동참하는 게 아닌가.

“……나도 가족이야.”

바비는 왠지 서운해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한과 나, 그리고 조슈아, 그 누구도 바비를 말리지 않았다.

우리 네 사람은 서로의 온기를 긴 시간 동안 느꼈다.

시간 감각이 정지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오늘, 우리의 만남과 포옹을 내 머릿속과 마음속에 새겨 두었다.

길이길이 기억해서, 꺼내어 보고 싶을 땐 언제고 다시 꺼내어 볼 수 있게.

제 98 화. 외전 3.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딱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욘두에 대한 내 평은 그러했다.

설령 그가 내게 용서하지 못할 일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그가 살아온 인생이 딱하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나는 먹구름 하나 없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욘두와 리나도 나와 같은 하늘을 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저기, 세나. 내 말 듣고 있어?”

“응. 듣고 있어.”

나는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하고선, 뒤로 젖혔던 고개를 똑바로 했다. 눈앞엔 왠지 불만스러워


보이는 요한의 얼굴이 보였다.

“다른 생각했지?”

요한은 내 대답을 의심스러워하는 듯했다.

“아니. 네 말을 다 듣고 있었는데? 음……. 네가 그랬잖아. 욘두의 저택 두 곳에 그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그리고 이곳과 조금 먼 마을에 수상해 보이는 타지인이 등장했다고.
그래서 너는 그 남자가 욘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고 있다고. 내 말이 맞지?”
“……어. 제대로 들은 거 맞네.”

요한은 나를 보던 시선을 조금 비틀어, 정원을 뛰어 노는 조슈아를 흘긋 바라보았다.

아이는 계절이 변했음에도 지난날 더러 그러했듯 정원을 흥겹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젠 그


뒤를 쫓을 나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겨울치고는 햇볕이 좋은 오늘. 우리는 정원에 소풍을 나온 터였다. 그 전엔 할 수 없었던


여유로운 일과였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 남자가 욘두라면, 그를 이곳까지 다시 데려올 참이야?”

요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냥 지켜볼 생각이야. 이상한 말이지만, 그에게 난폭한 짓을 할 자신이 없어.”

“욘두 쌤이 한 짓을 벌써 용서한 거야?”

그는 단언했다.

“아니. 용서 못 하지. 아니, 용서 안 해.”

“응. 그런데?”

“하지만 욘두가 했던 말이 아직까지 내 머릿속에 맴돌거든. ‘당신의 형입니다.’ ……그 말이


마음에 사무쳐.”

그 순간 출처를 알 수 없는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마주 앉아 있던 요한의 검은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나부꼈다.

나는 거기서 욘두의 검은 머리카락 또한 잠깐 떠올렸다. 동그란 안경 속 이따금 날카로운 빛을


띠던 그의 눈동자마저도.

나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공감.

욘두의 ‘당신의 형입니다.’라는 말이 사무친다던 요한의 마음을 이해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리나는 내게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지만, 그녀를 완전히 미워할


수는 없거든. 그녀와 나는 쌍둥이이기 때문일까?”

“그러게. 왠지 모르게 씁쓸해졌는데…… 그런 의미로.”

요한은 팔을 조금 벌리고선 이어 말했다.

“안길래?”

몹시도 다정한 말이었다.


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바보인 주제에.

나는 픽 비웃으면서도, 그에게 내 몸을 가까이 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요한은 벌렸던 손을 오므려 내 등을 감싸 안았다.

“정말 만약에…… 리나가 진짜로 살아난다면, 어떻게 할 거야?”

“글쎄. 일단은 너를 단단히 교육시켜야겠지.”

요한은 의문을 표했다.

“교육?”

“그래. 나랑 리나를 구별할 수 있는 교육 말이야. 아무리 아팠다고 한들, 무려 1 년 동안 너는


사람이 바뀐 걸 눈치채지 못했어.”

“세나. 그건 넘어가기로 한 일이잖아. 다시 변명해 줘야해? 나는 그때 일도 많았고, 리나를


치료할 방법을 찾느라고 엄청 바빴어.”

“응.”

“아픈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던 건 손에 꼽을 정도야. 나는 리나가 그렇게 갑자기 죽어 버릴 줄


몰랐으니까. 그녀의 곁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걸, 간과했던 거지.”

“잘했어. 너를 타박하려고 한 말이 아니야. 장난인걸.”

나는 그가 내 등을 쓰다듬어 주었듯, 그의 등을 두어 번 토닥여 주었다.

“요한. 미래의 일은 더 생각하지 말자. 욘두가 그녀를 살리든, 결국 살리지 못하든. 우리는
지금 현실에 집중하자. 네가 그랬잖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고.”

“……어.”

“나는 오늘을 후회 없이 살고 싶어.”

“물론. 나도 마찬가지야.”

아무튼 나의 결론은 그러했다.

리나와 욘두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이미 죽어 버린 리나에겐 행복해질 기회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욘두가 리나를 살려 낸다면, 그들이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조금 더 바라자면, 그들이 우리와는 연관되지 않은 채로 행복했으면 한다고 해야 할까.


⌜아이용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잠든 조슈아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끼곤
했다.

네 목을 조르고 싶어.⌟

리나는 일기장에 그렇게 적어 두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때, 그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조슈아에게 충분히 해코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작 일기장에 분노를 표하는 게 아닌, 실제로 끔찍한 일을 저지를 시간과 여유가 있었을
거라는 거다. 리나는 무려 1 년간 내 행세를 했으니까.

더해, 그녀는 제게 손을 대지 않는 요한을 마음먹고 유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리나의 병세가 악화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녀가 나를 절벽에 밀어뜨리고 내 역할을 대신했던


그 시점엔 리나는 제법 건강해 보였었으니까.

결론적으로, 리나는 결국 조슈아에게 해코지하지 않았고, 요한을 억지로 꾀어내지도 않았다.

망설임.

그녀는 나를 절벽에서 밀어뜨린 죄책감에 시달리며, 내 것인 모든 것들을 제가 취하는 일을


주저했던 게 아니었을까?

어렸을 적, 리나는 나를 질투해 내 목을 졸랐지만, 그녀가 나를 죽이지는 못한 것처럼.

욘두가 부정한 목적으로 나를 납치했지만, 결국 내게 나쁜 짓을 하지 못한 것처럼.

리나와 욘두는 닮아 있었다.

일순간 악한 마음을 품었지만,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임을 갖게 된 것이다.

그 망설임이 결국 요한과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구실이 되지는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마음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요한의 등 뒤로 보이는 조슈아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지치는 기색도 없이 여전히 정원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심해 속에 빠진 듯, 깊게 가라앉았던 내 마음이 돌연히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그것은 조슈아만이 가진 마력.

나는 아이에게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 * *

끔찍하고도 아찔했던 일이 있고,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한 달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그다지 없었다.

나와 요한은 처음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 소년처럼 서로를 고파했고, 조슈아는 나를


엄마라고 부르며 전과 같이 잘 따랐다.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구태여 달라진 것들을 꼽으라면, 몇 가지 추릴 수도 있었다.

일단 며칠 동안 욘두를 찾던 조슈아에게는 새로운 가정교사가 붙여졌다.

조슈아는 욘두의 부재의 이유를 궁금해했고, 슬퍼했다. 나는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조슈아를 납득시킬 수밖에 없었다.

‘조슈아. 욘두 쌤에겐 오랫동안 사랑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과 긴 여행을 떠났어.’

조슈아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욘두 선생님이 사랑하는 사람? 조슈아도 누군지 알아! 욘두 선생님이 가끔 말해 줬거든.’

‘어떤 사람이라고 말해줬는데?’

‘우선 엄청 예쁘대. 그리고 욘두 선생님이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자신을 보는 것 같다고


했어.’

‘…….’

‘그게 무슨 말인지 조슈아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욘두 선생님이 그 사람을 엄청나게


좋아했다는 사실은 조슈아도 알고 있어!’

조슈아는 욘두가 갑작스럽게 사라진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너무해. 그런 이유로 조슈아의 선생님을 그만둔 거라면, 적어도 조슈아에게 마지막
인사는 해 주어야 하잖아…….’

나는 조금 토라진 조슈아를 안아 주었다. 그러곤 달래듯이 아이에게 말했다.

‘욘두 쌤도 네게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한 걸 아쉬워할 거야.’

비록 위험한 일을 계획하고 저질렀지만, 욘두는 조슈아에게 있어선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두 번째로 달라진 것은, 요한과 내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벨라의 표현에
빌리자면, 신혼 방 정도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서로를 갈구하고, 탐했다. 이러다간 조슈아의


바람대로 아이의 동생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달라진 것은, 나를 둘러싼 공작저 사용인들의 수군거림이 조금 더 심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심해진 수군거림에는, 내가 곧 공작부인이 될 거라는 얘기가 태반이었다.

요한과 별 소란 없이 조용히 같은 방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그 사실을 사용인들에게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 자리가 원래부터 내 자리였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나는 타인의 수군거림 따위는 원래부터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이므로, 그들의 뒷말에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내겐 사랑스러운 조슈아와 요한만 있으면 되는걸.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른 부수적인 것들이 내 기분을 좌우할 수는 없었다.

평온한 하루, 어제와 별다를 것 없는 오늘, 깊어진 밤. 나는 조슈아를 재운 뒤에 아이의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리 멀리 걸어갈 필요는 없었다.

나는 옆방의 문을 자연스럽게 열었다. 그러자 침대 모퉁이에 앉은 채로 그대로 잠든 요한이


보였다.

요한은 꼿꼿이 앉은 자세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보고 또 보아도 그런 자세로 잠들었다는 게


아주 신기했다.

하루 종일 많은 일에 시달렸을 요한. 피곤하면 먼저 잠들어 있지.

그러나 요한은 같은 방을 쓴 이래로 먼저 잠들어 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꼭 내가 제 옆에 눕고 나서야 편안하게 잠들었다.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겠다는 내 다짐을


아직까지도 못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잠든 요한의 콧잔등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꼭 감겨 있던 요한의 눈꺼풀이 스르륵


들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영원히 깰 수 없는 잠에 빠진 공주님을 키스로 깨운 왕자님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쉬를 재우고 왔어?”

“응. 피곤하면 먼저 자고 있으라니까. 또 앉아서 졸고 있었지?”

요한은 내가 한 말을 깔끔히 무시하며, 조슈아처럼 칭얼거렸다.

“피곤하니까 얼른 같이 자자.”

아무래도 그는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불편한 자세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예정인가 보다.

요한은 말을 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무방비하게 놓인 내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잡아,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그의 끌어당김을 기꺼이 응해 주었다. 요한의 몸과 내 몸은 뒤엉키듯이 침대 위로 누이게


되었다.

요한은 제 팔과 다리로 내 몸을 단단히 옭아맸다. 옷 사이로 전해진 그의 체온이 따스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좋다.”

요한은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의 손은 미끄러지듯이 내가 입은 슬립 안으로 들어와, 어젯밤에도 물리도록 만졌던 내


살갗을 매만졌다.

“고민해 봤는데, 조쉬에게는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에 사실을 설명해 줘야 할 것 같아. 내가


너를 세나라고 불러도, 조슈아는 내가 그렇게 부르고 싶어서 그렇게 부른 줄 알겠지.”

“그렇게 결정을 내린 이유가 뭐야?”

“우리의 아이인 조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하기 때문에. 조쉬는 모든 걸


알면서도 감쪽같이 우리를 속였잖아.”

“요한 네가 우리 아이를 너무 낮잡아 생각한 걸지도 몰라.”

요한은 작게 킥킥거렸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

“너를 애당초부터 엄마라고 믿고 있었다면, 얘기하는 게 더 쉬웠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아이는 네가 리나인 줄 아니까……. 조쉬가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똑똑해 지면 그때 가서
다시 설명해 주자. 세나. 네 생각은 어때?”

“나는 네 결정에 따르고 싶어.”

내 생각은 변하지 않은 채였다.


내가 세나든 리나든 나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고, 조슈아가 나를 좋아하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기에, 조슈아가 우리의 복잡한 일을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사실을 알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내 말에 따라 줘서 고마워.”

요한은 올가미처럼 옥죄고 있던 내 몸을 조금 풀어 주었다.

그러고선 이번엔 내 얼굴 여기저기에 무차별적인 입맞춤을 선사했다. 그중 그의 입술이 제일


길게 머물다 간 자리는 역시나 내 입술 위였다.

밤의 부드러움을 닮은 요한의 키스는 이윽고 끝이 났고, 그는 더운 숨을 내뱉었다.

“하고 싶은 말이 한 가지 더 있어.”

나는 그와 닮은 따스한 숨결을 내뱉었다.

“밥맛 요한 씨. 무슨 말을 꺼내고 싶으신 거예요?”

“……조쉬에게처럼 세간에도 당분간은 네가 진짜 세나라는 사실을 알리지 말자.”

누구보다도 요한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가 꺼낸 말은 나로선 잘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묘하게 기분이 나쁘기도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내뱉는 목소리가 퉁명스럽기만 했다.

“이봐, 요한 랭카스터 씨. 지금 나보고 숨어 지내라는 거 아니지? 네 정부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듣고 살라는 거야?”

물론 남들이 하는 뒷말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나는 요한의 진짜 생각이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요한은 망설이는 기색 없이 곧바로 입술을 떼어 냈다. 내가 오해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태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름 끼치는 착각 따윈 하지 마. 내가 너와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내게 있어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너는 모르는 거지?”

“미인 거지가 대단하신 요한 공작님의 의중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나는 명백히 비아냥거렸다. 장난 반 진심 반이 섞인 말이었다.

“비꼬아서 말 하지 마.”
“…….”

“너, 심통이 제대로 났네.”

나는 대답 대신 내 허리 위에 올려져 있던 요한의 손을 떼어 냈다. 요한은 허망한 눈길로 제


손을 떼어 내는 내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심통 났어. 그러니까 네가 한 말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봐.”

내리깔린 요한의 시선이 천천히 들렸다.

그는 웃음기 하나 없는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살펴본 그의 얼굴이 자못 굳어 있었다.

장난이 약간 심했나…… 싶은 생각이 설핏 들던 순간이었다.

요한은 별안간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몸은 완전히 일으켜졌고, 그는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요한?”

그는 내 부름에 대답하지 않으며,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선 방문을 열어 방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닌가.

쾅.

요한은 심지어 방문을 세게 닫기까지 했다.

그것은 그와 결혼한 이래로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도 기억을 찾은 후에도, 그가 내 말을 무시한 채로 방문을 세게 닫은


일이 없었다는 거다.

“…….”

나는 지금 벌어진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닫힌 방문을 쳐다보았다.

요한이 정말로 화가 난 건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제 99 화. 외전 4. 라일락, 첫사랑

단언하건대, 요한이 내게 진심으로 화를 낸 적은 없었다.

내가 밥맛이라고 줄곧 놀려도, 그는 귀엽게 앙살만 부릴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놀리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장난을 쳐도, 심지어 조금 심한 말을 하더라도, 그가 받아 줄 거라고.

그것은 기억이 돌아온 이래로 더욱 확고해진 생각이었다. 왜냐면 어려서부터 함께해 온 그가


더욱 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막상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는다는 말……. 나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성싶었다.

나, 어쩌면 요한에게 너무 심하게 대했던 걸지도 몰라.

나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끝이 닿았던 내 등과 허리…… 닿지 않았던 곳을 일컫는 게 더 빠를 정도로,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수많은 부위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나는 조금 흐트러진 슬립을 추렸다. 일단은 요한을 쫓아가는 게 옳을 듯했다.

쫓아가서,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가 화난 것이라면, 그를 어르고 달래어 주어야지. 다음부터는 그를 적당히


놀려야겠다는 생각은 덤이었다.

그렇게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 앞까지 걸어간 순간이었다. 내가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방문이
먼저 열리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열린 방문 사이로 조금 전에 화난 듯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나갔던 요한의 모습이


드러났다.

“요한……?”

다시 돌아온 그에게선 그 전엔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그것의 정체는 그의 손에 들린 보랏빛 꽃다발이었다.

요한은 제 상체만 한 커다란 꽃다발을 든 채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화가 난 것이 아닐까, 염려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의 환한 웃음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요한이 내게 실망하고, 화났을까 봐 염려했던 마음이 녹자,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요한. 내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너는 모르겠지.

아무것도 모를 요한은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세나.”

나는 대답 대신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었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을 때, 보랏빛 꽃의 좋은


향기가 코끝에 자욱이 스며들었다.

나는 그 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라일락.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

필 계절이 아니건만, 요한은 비싼 값을 치러 그것을 구해 온 듯싶었다.

나는 얼굴을 쓸었던 손을 내렸다. 그러자 요한의 부드러운 미소와 닮은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다시 결혼해 줄래?”

그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을 일찌감치 준비해, 나에게 두 번째 프러포즈를 하고 있었다.

나는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한 마디라도 내뱉었다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으니까.

요한은 그러한 내 반응을 미리 예상한 것처럼, 제가 준비한 말을 유려하게 내뱉었다.

“보란 듯이 결혼해서, 내 옆자리가 네 자리라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자. 네가 진짜 세나라는 걸


알리지 말자는 건, 이런 의미였어.”

“…….”

“그래서 내 꽃은 안 받아 줄 건가?”

요한은 라일락 꽃다발을 들고 있던 손을 조금 뻗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얼른 받아 달라는


뉘앙스가 담긴 고갯짓이었다.

그는 내가 그 꽃과, 제 프러포즈를 받아 주지 않으리라는 가정은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처럼


굴고 있었다.

웃겨.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나는 그의 당당함을 비웃으면서도 손을 뻗고 있었다.

한겨울엔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라일락. 그는 언제 이런 걸 나 몰래 준비한 걸까.

이윽고 나는 그에게서 꽃다발을 건네받기에 이르렀다.

요한은 꽃다발을 안아 든 내 모습을 보고선, 조금 더 짙어진 미소를 지었다. 몹시도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흠흠. 예쁘군.”
요한은 어울리지 않게 열없는 소리를 했다. 그의 귀 끝은 언제나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럼 이제 내 말에 대한 대답도 해 줘.”

요한의 말.

‘나와 다시 결혼해 줄래?’

세상에서 제일 다디단 말.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말.

“라일락은 네가 좋아하는 꽃이기도 하지만, 내게 있어 네 의미와도 같아.”

요한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서로의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요한은 손을 뻗어 얼굴에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뺨에 스치듯이 닿은 그의 손끝에선 라일락 향기가 났다. 좋은 냄새.

“라일락의 꽃말은 첫사랑이거든.”

첫사랑. 요한 또한 내게 있어 첫사랑이었다.

“더 기다리기 힘든데, 이제 그만 대답해 주지 않을래?”

결국 요한의 가정이 맞았다.

요한의 프러포즈를 거절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내가 그의 꽃을 거부하거나, 그의 프러포즈를 받아 주지 않을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도리어 이런 소소한 이벤트를 준비해 준 요한이 기특하고, 사랑스러울 따름이었다.

나는 그의 근사한 프러포즈에 알맞은 대답을 내어 놓았다.

“사랑해.”

다른 말은 필요 없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면 내 마음이 모두 표현되는 걸.

“받아 줘서 고마워.”

그는 나를 제 품에 가볍게 껴안았다. 라일락이 뭉그러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처럼.

“사람들은 내가 세나와 닮은 여자와 결혼한 줄 알겠지. 어쩌면 나를 사랑에 미친놈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지.”
“좋네. 네게 미쳤다는 건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니까.”

“당신…… 솔직하게 말하는 실력이 늘었어.”

요한은 내 말에 부정하지 하지 않았다.

“깨달았거든.”

“뭘?”

“곁에 있을 때, 더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는 걸. 네가 내 곁에 없던 지난 4 년 동안, 나는


후회했어. 너에게 하지 못했던 말이 많았으니까.”

“너는 내게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너무 많아. 사랑한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 네가 소중하다는 말…….”

나도 기억을 잃은 내내 너를 그리워했어.

비록 널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누군가가 그립다는 느낌을 꾸준히 느끼곤 했거든.

그리고 나는 너를 자주 꿈꿨어.

비록 잠에서 깼을 때 아스라이 사라질 너였어도, 나는 언제고 너를 꿈꿔 왔어.

“결론은 그래. 내 곁엔 네가 필요하다는 말이었지.”

내 곁에도 네가 필요해.

“세나. 결혼식은 언제가 좋을까?”

나는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마음이 시킨 대답이었다.

“십이월 마지막 주. 그때 첫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요한. 넌 그날을 기억해?

십이월 마지막 주. 먹구름 사이로 하얀 꽃이 내리던 그날.

우리가 처음 결혼식을 했던 때잖아.

그치지 않는 눈발 속에서 흰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되고 싶어.

요한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좋은 날이네. 의미가 깊은 날이구나. 그럼 그날로 하자.”

그 또한 그날을 기억하듯이.
 

* * *

“라일락은 언제 준비한 거야?”

나는 침대 옆 협탁 위에 라일락 다발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요한은, 내가 움직이는 모양새를 눈으로 쫓으며 대답했다.

“이틀 전에? 줄 타이밍을 재고 있었는데, 막막해서. 이거 참. 프러포즈를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떨리더라.”

이내 라일락을 보기 좋게 올려 둔 나는 요한의 옆에 앉았다.

“얼마나 떨렸는지 궁금하다.”

“네 손을 처음 잡았던 날만큼 떨렸어. 그때를 기억해?”

“내 손을 처음 잡았던 날? 그게 언제였더라.”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진 우리 사이. 나는 그때가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요한은 그때의 기억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듯했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면서, 내게 해답을


알려 주었다.

“열 살 때. 그때 내가 네 손을 처음 잡았어.”

“요한. 너, 기억력 좋다.”

“별로. 하지만 너랑 처음 한 건 모두 다 똑똑히 기억해.”

“그럼 오늘도 기억할 만한 밤인 거야?”

“당연하지. 그럼 조금 더 기억할 만한 추억을 쌓아 보자.”

요한은 야릇한 의미가 담긴 미소를 지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내려앉은 건, 얼마 못 가 벌어진 일이었다.

요한은 더운 숨을 내뱉으며 나를 몰아붙였다. 평소보다도 훨씬 더 격정적인 입맞춤이었다.

나는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아, 그가 내 위에 조금 더 편하게 올라탈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타인의 온기가 다시 닿기를 바랐던 내 살갗에 그의 뜨거운 손끝이 닿았다. 나는 거기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소름 끼침을 느꼈다.

서늘하게만 느껴졌던 기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뜨거운 밤,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지금.

나는 요한과 마찬가지로 이 밤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시간은 조금 더 흘러, 요한과 내가 약속했던 십이월 마지막 주가 되었다.

특별한 일을 약속한 오늘.

나는 화장대의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바라보았다.

잘 정돈된 금빛 머리카락과 그리 화려하지 않은 흰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화장대 위에는 라일락으로 만든 작은 부케가 올려져 있었다. 나는 라일락 꽃잎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정말로 요한과 두 번이나 결혼하게 됐네.”

기분이 어쩐지 이상했다.

같은 남자와 두 번이나 결혼할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거울 속의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웃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긴장한 건가…….”

나는 픽 웃었다. 왜 이렇게 바보처럼 떨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따름이었다.

그때, 두 번의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똑.

요한일까? 아님 조슈아?

“누구세요?”

“……나야, 바비.”

나는 그의 방문을 응해 주었다.
“들어와.”

바비는 잠기지 않은 문을 열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결혼식에 참석하는 하객다운 깔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그의 푸른 머리카락과 어울리는 흰 빛의 슈트였다. 그는 원체 체격이 좋았으니, 슈트를 입은


그의 모습이 근사하기만 했다.

“바비.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바비는 내가 세나인 걸 안 이래로 한동안 공작저에 방문하지 않았다.

바비에게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제가 사랑했던 두 여자가 같은 여자였고, 결국 같은 여자에게 두 번이나 차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시간.

나는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설령 아물지 않는 상처라고 할지라도, 타인을 죽을 만큼 증오하는 마음이라도. 흘러가는 시간


앞에선 결국 힘없이 무너질 뿐이라고.

리나가 나를 증오했던 마음도, 요한을 질투했던 욘두의 마음도, 나를 사랑했던 바비의 마음도
……. 시간이 흐르면, 결국은 조금씩 흐려질 거라고.

“응. 잘 지냈어. 밥도 잘 먹었고, 여러 여자도 만나고.”

그리 말하는 바비의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희미하게 지은 미소 속엔 내가 한때 좋아했던 그의


보조개가 예쁘게 들어가 있었다.

메말라 보였던 그의 얼굴 또한 본래의 싱그러움을 찾아간 채였다.

나는 그 점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진심이었다.

나는 바비가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더해, 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기를 바랐다.

바비는 내게 조금 더 가까이 걸어와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어쭙잖게 팔짱까지 낀 채로 나를 꼼꼼히 바라보던 그는, 이내 오늘 내 모습에 대한 짧은 평을


내렸다.

“예쁘다.”

그건 당연한 일이지.
오늘은 다른 날이 아니라, 내 두 번째 결혼식이니까.

나는 바비를 따라 미소 지었다.

“큰일이네. 네가 또다시 내게 반하면 안 될 텐데.”

바비는 질색한 채로 대꾸했다.

“됐거든. 나는 오늘 결혼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고 싶지는 않아. 난 최선을 다했고, 네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존중해. 오랫동안 간직해 온 소중한 마음이잖아.”

한량 같은 바비치고는 제법 훌륭한 말이라서, 나는 조금 감동을 받아 버렸다. 마음 속 깊은


곳이 한순간 찡해지는 기분.

나는 그의 이름을 아련하게 불렀다.

“바비…….”

“아아, 감동 받지 마. 그러라고 한 말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미 약간 감동받아 버린걸.”

“숨겨지지 않는 내 매력을 어떻게 하면 좋지?”

“큭큭.”

바비는 왠지 요한처럼 대꾸했다.

나는 그 모습이 우스워 웃는 소리를 내었다.

“널 봤으니까, 이만 나갈게. 네 신랑에게 멱살이 잡혀서 끌려 나가기 전에.”

“요한이 온다면, 네 말대로 네 멱살이 잡힐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요한은 질투에 눈이 멀어서, 내 순수한 축하마저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형이니까.”

바비의 꽤나 자연스럽게 ‘형’이라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것은 요한과 바비 사이가 그전보다도 훨씬 더 좋아졌음을 보여 주는 방증이기도 했다. 비록


요한은 아직까지는 바비에게 까칠하게 굴었지만.

“아무튼 축하해. 행복하기를 바라.”

그는 마지막 인사 같은 한마디를 건네었다.

오늘 헤어지면 다신 못 볼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비. 우린 여전히 친구인 거지?”


“물론이지. 나는 친구가 별로 없어. 세나. 너라도 내 친구로 영원히 남아 주라.”

“기꺼이.”

바비는 진짜로 가 보겠다는 짧은 인사를 남긴 채로 뒤돌아섰다. 나는 뒤돌아선 그가 방을


나서는 모습을 빠짐없이 쳐다보았다.

바비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방문자가 나를 찾아왔다.

이번엔 진짜로 요한인가 싶었지만…….

“엄마! 조슈아야. 들어가도 돼?”

요한보다도 나를 먼저 찾아온 이는 조슈아였다.

“응! 얼른 들어오렴.”

조슈아는 용케 혼자 문을 열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화동 역할을 맡은 아이는, 그 역할에


맞게 꼬마용 정장을 입은 터였다.

잘 다려진 검은색의 바지와 앙증맞은 흰 셔츠, 그리고 귀엽게 둘러진 멜빵이 조슈아와 퍽이나
잘 어울렸다.

나는 앉아 있던 몸을 당장 일으켜, 아이에게 다가갔다.

내가 조슈아 옷차림에 대한 찬사를 내뱉기 전에, 조슈아의 입술이 조금 더 빨리 떼어졌다.

아이는 감동 받은 듯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엄마! 너무너무 예뻐. 천사 같아. 리나는 천사인 걸까?”

조슈아는 제 사정을 우리에게 모두 토로한 후부터 ‘엄마’와 ‘리나’라는 호칭을 번갈아서


쓰고 있었다.

나는 조슈아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어 주고선 대답했다.

“조슈아. 이제는 나를 예전처럼 엄마라고 편하게 불러도 돼. 오늘 밥맛인 네 아빠와 정식으로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으니까.”

조슈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을 더듬거렸다.

“저, 정말 그래도 돼?”

“그럼. 나는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조슈아를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걸.”

그리고 넌 진짜로 내 아들인걸.

네가 조금 더 커, 우리의 사정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 모든 사실을 알려


줄게.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인 조슈아.

“엄마…….”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제 100 화. 외전 5. 첫눈이 다시

조슈아의 커다란 눈동자에선 이윽고 굵은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그 덕에 당황한 것은


나였다.

“조, 조슈아. 울지 마.”

“조슈아도……. 킁. 조슈아가 왜 눈물을 흘리는지 모르겠어.”

나는 조슈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다행히도 아이의 눈물은 오래도록 이어지지 않았다.

다정한 손길 몇 번에, 아이의 눈물은 금방 그치게 되었다.

조슈아는 물기가 가득 밴 목소리로 약속하듯이 말했다.

“조슈아가 앞으로 더 잘할게. 아빠가 엄마를 힘들게 하면, 조슈아에게 꼭 말해 줘. 조슈아가


아빠를 혼내 줄 거니까.”

아이는 꼭 제가 내 신랑인 것처럼 굴었다.

귀엽고도, 사랑스러운 조슈아.

나는 조슈아를 꽉 안아 주었다. 조슈아는 자연스럽게 짧은 팔을 둘러, 내 등을 꽉 껴안아


주었다.

“엄마. 조슈아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엄마의 배에서 다시는 꼬르륵 소리가 나지 않게 만들어


줄 거야.”

자주 배가 고픈 미인 거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지 않게 만들어 준다니.

그것은 요한의 프러포즈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것이었다.

“조슈아. 요한보다 네가 더 내 신랑 같다.”

대답은 조슈아가 아닌 다른 이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러면 곤란한데.”

나는 조슈아의 목덜미 근처에 파묻었던 고개를 조금 들어올려, 목소리가 울린 쪽을 응시했다.


그곳엔 언제 방문을 열었을지 모를 요한이 보였다.

요한은 제 머리카락 색과 어울리는 검은 연미복을 입은 채로 열어둔 문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나는 그의 모습에서 일순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순간 떠오른 건, 과거에 우리가 첫 번째로 결혼했던 그날이었다.

넌 그때도 검은 연미복을 입고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었지. 너는 그날과 변한 게 없구나.

요한의 웃는 얼굴은 여전히 훌륭했다.

까닭 없이 울컥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 들어온 거예요?”

나는 짧게 숨을 골라냈다.

행복하고도 또 행복한 날에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아침부터 공들여서 한 화장이 번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네가 조슈아를 안았던 시점에. 두 사람이 너무 보기 좋아서, 내가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더군.”

“그래서 서운해요?”

“아니. 가족이잖아. 내가 왜 서운해 해.”

요한은 한 걸음씩 우리에게 다가와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그제야 안고 있던 조슈아를 놓아


주었다.

이내 완전히 가까이 다가온 요한은 자세를 낮추어, 조슈아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쉬에게 내 자리를 빼앗길 수는 없어.”

“하지만 엄마는 내가 더 좋다고 했어.”

“조쉬. 그래서 지금 결혼식장에서 네가 내 자리에 서겠다는 거니?”

“솔직히 조슈아가 그 자리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

“조쉬, 너……!”

맙소사.

두 사람 서로 고집 피우는 건 아직도 그대로잖아?

나는 사랑스러운 두 남자를 말리기는커녕 그들이 아옹다옹하는 모양새를 지켜만 보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입가에 드리운 미소가 짙어지는 기분이었다.

까닭 없이 울컥했던 것은 모두 다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사라진 그 자리에 새로이


생긴 감상은 바로 ‘행복’이었다.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조쉬. 오늘만큼은 나도 양보 못 해. 네 엄마의 옆자리는 내 자리야.”

요한은 다섯 살 배기 아이를 상대로 진지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최근에 본 장면 중에 제일


웃겼다. 나는 쉴 새 없이 키득거리기에 이르렀다.

“……피. 좋아. 그럼 조슈아가 오늘 하루만 아빠에게 양보할게. 대신, 엄마를 또다시 슬프게
하면 안 돼!”

길고 긴 언쟁의 승리자는 요한이었다.

요한은 제가 이긴 것이 기쁘다는 듯, 제게 양보를 해 준 조슈아가 기특하다는 듯, 아이의


머리카락을 두어 번 쓰다듬어 주었다.

멋지게 정돈된 아이의 머리카락을 고려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래. 네 엄마를 슬프게 하지 않을게.”

“응. 조슈아는 아빠를 믿어.”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도 조슈아와 요한을 믿어.”

우리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선 만연한 미소를 지었다.

불쑥 느꼈던 행복은 제 존재감을 점점 더 키워 가며,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식장으로 같이 가 볼까.”

요한은 흰 장갑을 낀 손을 나와 조슈아에게 내밀었다.

조슈아와 나는 거의 동시에 요한의 손을 꼭 잡았다.

* * *

결혼식은 예전처럼 야외에서 진행되었다. 랭카스터 공작가의 널찍한 정원에서 말이다.


하객은 많지 않았다.

공작저에서 친하게 지냈던 벨라와 바비, 리키 아저씨와 마틴 아주머니, 그리고 요한의


최측근이 다였다.

물론 리키 아저씨와 마틴 아주머니에겐 아직까지 자초지종을 모두 다 설명해 주지 못한 터였다.

그러나 내겐 주어진 시간이 많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잡화점 내외는 내 사정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우리의 결혼식을 축하하러 흔쾌히 와 주었다.

나를 보며 밝은 미소를 짓는 그들의 얼굴은 진심처럼 보였을 따름이었다.

내게 무슨 사정이 있든,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나를 믿어 주는 고마운 사람들.

나는 그들을 향해 라일락 부케를 든 손을 몇 차례 흔들었다.

“축하해, 리나!”

사정을 모르는 마틴 아주머니는 나를 익숙하게 ‘리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리나.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궁금한 건 여전해.

오늘 치르게 된 우리의 두 번째 결혼식을 넌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그 사실이 궁금해져.

그것은 리나에겐 차마 닿지 않을 소리 없는 메시지였다.

“…….”

이윽고 요한과 나, 그리고 조슈아는 정원의 한 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한겨울, 푸름을 잃은 잔디 위엔 하얀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하얀 양탄자의 양 옆에는 내가 좋아하는 라일락이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고, 양탄자의 끝에는


작은 단상이 존재했다.

라일락 뒤로는 작은 악단이 존재하기도 했다. 하객은 몇 없었지만, 음악은 필수라고……


요한이 그랬다.

소소해 보이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춘 결혼식. 나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은 그리 좋지 않았다. 비가 내릴지, 눈이 내릴지 모를 먹구름이 그득했을 뿐이었다.

나는 잿빛 구름을 보면서 생각했다.

첫눈만 온다면 완벽한 그림일 텐데.


그 순간, 우리에게 바투 다가온 이는 벨라였다.

“주인님, 리나 님. 축하드려요. 그리고 이건 조슈아 님을 위한 꽃잎.”

벨라는 우리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선, 조슈아에게 꽃잎이 든 바구니를 건네어 주었다.

“응! 나 알아! 조슈아가 먼저 걸어가면서 이 꽃잎들을 뿌리면 되는 거지?”

“그래. 그렇게 하면 돼. 그리고 조쉬. 넘어지면 안 된단다.”

요한은 꼭 잡고 있던 조슈아의 손을 놓아 주었다. 조슈아는 비장한 표정을 드리운 채로 우리의


앞에 섰다.

“물론이지! 아빠는 날 뭐로 보고!”

아이가 한 발자국을 내딛기가 무섭게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은은하고도 듣기 좋은


연주였건만, 나는 그때부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요한은 그런 내 낌새를 단번에 눈치챈 듯싶었다.

“……긴장 돼?”

그는 내 귓가에 대고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긴장 돼. 이상하지?”

“아니. 사실은 나도 긴장 돼.”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요한의 옆얼굴을 살펴보았다.

제가 한 말대로, 요한의 얼굴이 조금 굳어 보였다. 긴장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마저도 긴장을


해 버린 것이다.

“넌 왜 긴장한 거야?”

요한은 내게 슬그머니 눈을 맞추며 말하였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어떤 남자가 긴장을 안 해?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큭큭.”

그사이, 화동인 조슈아의 입장은 끝이 나 있었다.

하얀 양탄자 위엔 조슈아가 걸어가면서 뿌린 보랏빛 꽃잎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아이는 넘어지는 일 없이, 훌륭하게 제 임무를 완수했다.

이제는 우리 차례였다.
우리는 좀 전보다도 아름다워진 그 길을 함께 걸어가야 했다.

“세나.”

요한은 함께 발을 내딛기 전,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응.”

그러곤 약속을 뜻하는 근사한 말을 건네었다.

“나와 영원히 함께할 준비가 됐어? 이번엔 절대로 너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너와 헤어지지
않을 거야.”

“물론이지.”

우린 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셋이서 영원히 함께하는 거야.

“좋아.”

요한은 느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나를 이끌었다.

하얀 양탄자 위에 우리의 발이 나란히 올라갔고, 우리는 그 위를 발맞추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막 두 걸음을 걸어갔을 때였다. 내 얼굴 위로 차갑고 시린 것이 뚝 떨어졌다.

맞잡은 요한의 손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를 가진 그것.

나는 고개를 뒤로 젖혀서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 사이에서 하얀 꽃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요한의 손을 잡지 않은, 부케를 쥔 손을 허공에 뻗었다. 내 손등 위로, 얼굴에 떨어졌던


하얀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나는 손등 위에서 금세 녹아 버리는 하얀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이다.”

완벽해 보이는 결혼식에 딱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부족한 것마저도 채워졌구나.

요한은 나를 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곤 나처럼 한쪽 손을 앞으로 뻗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눈송이를 느꼈다.

“첫눈이네. 옛날 생각난다.”

“응. 우리가 처음 결혼하던 날에도 첫눈이 내렸었잖아.”

“그런 건 용케도 잘 기억하고 있었네.”


나는 곧바로 대꾸했다.

“아무리 기억력이 안 좋다고 해도, 우리의 결혼식을 잊어버리지는 않아.”

“그래. 다행이다.”

“오늘은 안 툴툴거려? 요한 너, 예전에 눈이 내려서 짜증을 냈잖아.”

“내가 언제 짜증을 냈다고 그래.”

요한은 시치미를 뗐다.

나는 귀엽게 툴툴거리던 과거의 그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구태여 그를 몰아붙일 이유는 없었으니까.

“눈이 오든, 심지어 비가 내리든 뭐 어때. 우리가 함께이면 되는 거지.”

그 말은 제법 익숙한 말이었다.

“얼레. 그거 내 일기장에 적혀 있던 거 아니야?”

“맞아. 세나 네가 적어 둔 내용이야. 네 의견에 나도 공감해.”

흰 눈과 어울리는 흰 드레스. 그리고 우리의 두 번째 결혼식.

“다시 걸어가자. 조슈아가 기다리잖아.”

요한은 대답 대신 나를 다시 이끌기 시작했다. 한 걸음씩 걸음을 더 내딛을 때마다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나는 내리는 눈을 즐거운 마음으로 맞으며, 이내 조슈아가 서 있던 단상까지 다가갔다.

걸음을 멈춘 우리는 조슈아를 사이에 둔 채로 서로에게 사랑의 맹세를 하였다.

먼저 운을 뗀 이는 요한이었다.

“나, 요한 랭카스터는 당신을 신부로 맞이함에 있어 다음과 같이 맹세합니다.”

요한은 조용히 나와 눈을 맞추었다.

떨어지는 하얀 눈 사이로 빛이 나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오늘따라 한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언제고 내가 좋아했던 그의 맑고 깨끗한 검은 눈동자.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인 당신을 다시는 잊지 않을 것임을 맹세합니다.”

그는 손을 뻗어 내 손끝을 부여잡았고,

“아름다운 미소가 어울리는 당신의 얼굴에, 슬픔이 서리지 않게 할 것임을 맹세합니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조금 숙여, 내 손등 위에 가벼운 입맞춤을 선사했다. 그의 입술이 머물다
간 자리가 뜨겁기만 했다.

그러곤 그는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목소리로 내게 마지막 물음을 건네었다.

“나를 또다시 믿어 주겠어?”

나는 긍정을 뜻하는 미소를 지은 후에 입술을 떼어 냈다.

요한의 멋진 서약에 내가 응답해 줄 순서였다.

“나는 요한 랭카스터를 신랑으로 맞이함에 있어 다음과 같이 맹세합니다.”

그사이, 눈발은 조금 더 거세졌다. 하얀 눈송이 사이로 보이는 요한의 얼굴은 좀 전보다도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많은 어려움과 겪고 고난을 이겨 내고 겨우 다시 만난 만큼, 당신과 영원히 행복할 것임을


맹세합니다.”

나는 맞잡은 요한의 손을 꽉 잡았고,

“사랑하는 당신을 또다시 혼자 놔두지 않을 것임을 맹세합니다.”

그러곤 요한이 그러했듯 고개를 약간 기울여 그의 손등 위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였다.

“그리고 당신과 조슈아를 영원히 사랑할 것임을 맹세합니다.”

내 말이 끝난 후, 몇 없는 하객들의 박수 소리와 조슈아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조슈아는 오늘이 제일 행복해!”

조슈아는 기쁜 듯이 하얀 양탄자 위를 뛰어다녔다. 아이를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요한과 나는 닮은 미소를 걸친 채로 조슈아를 지켜볼 뿐이었다.

조슈아. 오늘이 제일 행복한 것은 너 혼자뿐만이 아니란다.

나는 눈을 잠깐 감고 오늘의 아름다운 광경들을 머릿속과 마음속에 새겨 두었다.

흰 눈, 요한의 검은 머리카락, 조슈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 그리고 보랏빛 라일락.

다시 눈을 떴을 땐, 대비되는 여러 색체감이 더욱 선명해진 듯한 기분이었다.

아마 내가 죽는 순간까지 잊지 못할 광경이리라.

 
* * *

욘두는 창문을 통해 첫눈이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올해의 첫눈이 내리네요. 리나 님.”

욘두는 늘 그렇듯 돌아올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잠깐 동안 사색에 잠길 뿐이었다.

그는 리나의 밝았던 과거의 모습들을 가만히 떠올렸다.

그가 떠올린 모습들은 세나 대신 공작저를 오가던 리나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다.

‘욘두! 오늘도 공작님에게 맞은 거야? 그럴 줄 알고 내가 상처에 좋은 약을 챙겨 왔어.’

다정했던 리나 님. 차분해 보였던 세나 님보다도 훨씬 더 명랑해 보였던 리나 님.

언사가 거칠기는 했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다정했던 리나 님.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땐, 머릿속에 그려졌던 리나의 모습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욘두는 그녀의 기억을 조금 더 움켜쥐려고 애썼지만, 흩어지는 기억을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과거의 기억은 그런 식으로 점점 더 머릿속에서 흐려질 것이다. 그것은 마법사인 욘두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욘두는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을 통감하며, 깊은 침음을 흘렸다.

마음이 칼날로 찢긴 듯 너덜너덜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창문을 보던 시선을 끌어내려, 제가 앉은 침대 위에 누운 리나를 바라보았다.

온기 잃은 그녀는 여전히 곤히 잠든 채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리나와 함께 바라볼 날이 오기는 올까?

요한과 대치를 한 날로부터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제 101 화. 굉장한 소식

욘두는 지난 한달 간, 리나를 살릴 다른 방법을 찾고 있었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그녀를 기필코 살릴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노력하는 자에겐 끝이 없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수도에 있는 공작저와 멀리 떨어진 외곽 마을에 리나와 함께 안착한 후, 욘두는 딱 한 번


수도로 올라간 적이 있었다.

그는 그때 요한과 조슈아, 그리고 세나를 몰래 훔쳐보았다.

욘두는 마법을 이용해 공작가 정원의 정원수 중 가장 높은 나무 위에서 그들을 잠깐 동안


내려다보았다.

정원에 소풍을 나온 듯해 보이는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그들에게 있었던 모진 일들을 모두


잊은 것처럼.

질투가 났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솔직하게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질투가 났다.

리나와 제가 겪어 보지 못한 행복을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 같아서 심사가 뒤틀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해코지를 할 수 없었다.

망설임.

리나를 닮은 조슈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 제게 아무런 해를 끼친 적이 없는 세나.


그리고 저와 형제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저를 비웃지 않았던 요한.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 얽히고설켜 욘두가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들을 보면 볼수록 오히려 까닭 모를 죄책감마저도 느껴졌을 따름이었다.

욘두는 조용히 수도를 벗어나, 다시금 리나의 곁으로 돌아갔다.

공작저로 다시 찾아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젠…… 한때 즐겁게 행했던


조슈아의 가정교사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 사실이 욘두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리나 님. 첫눈을 함께 보지 못했으니, 마지막 눈이 내리는 것을 함께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내뱉은 말 속에선 희부연 김이 새어 나왔다.

추위를 느낀 욘두는, 침대에 몸을 누이며 어미의 품에 찾는 짐승처럼 리나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엔 제 몸을 녹일 온기는 없었다. 도리어 욘두가 리나에게 자신의 식은 온기를
나누어 줄 뿐이었다.

욘두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그는 언제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든 그는 며칠째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의 꿈속에선 건강한 리나가 나왔다. 리나는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결이 좋아 보이는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은 잔바람에 흩날렸고, 그녀는 쿨한 미소를 지은 채로


제게 손을 뻗었다.

그렇게 그녀의 손을 잡으면 온기가 느껴졌다. 현실에선 결단코 느끼지 못했던 온기였다.

리나는 입꼬리를 조금 더 끌어올리며, 욘두에게 딱 한마디를 건네었다.

그 말은 그녀에게서 듣기를 늘 바랐던 말이었다.

‘나, 돌아왔어.’

비록 꿈이었지만, 욘두는 그녀의 목소리에 눈물을 흘렸다.

꿈에서 깬 욘두의 눈가는 며칠째 눈물로 물들어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어렴풋이 든 잠. 꿈속에선 어김없이 리나가 나왔고, 그에게 손을 뻗었고, 그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나, 돌아왔어.’

욘두는 리나를 꽉 끌어안았다. 끌어안은 리나의 몸뚱이에선 짙은 장미향이 났다.

그의 손이 리나의 얼굴을 감싸던 순간, 리나의 앙상한 손가락 하나가 까딱하고 움직였다.

그것은 찰나에, 딱 한 번 벌어진 일이었다.

애석하게도 욘두는 그 미묘한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그저 어슴푸레하던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그녀를 껴안고 있었을 뿐이다.

* * *
나는 요한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내가 그를 잊고 지낸 지난 5 년간 그는 나와 함께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내가 없는 추억을


쌓았으며, 나를 그리워하고 지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와 다름이 없었다. 나를 원하는, 오로지 내게만 닿아


있는 눈빛.

올해의 첫눈이 내리는 결혼식을 끝낸 후, 둘만 남은 방 안.

우리는 신경 써 차려입은 드레스와 턱시도를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물론


서로를 마주 본 채였다.

스킨십은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존재해 같은 침대에 누워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지금이 행복했다.

이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요한의 뺨을 쓰다듬었다. 지난날 그의 얼굴에 새겨졌던 상처는 말끔히 아물어 있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 내가 너를 영원히 기억해 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요한은 내가 그런 질문을 한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대답을 미룬 것은 아니었다.

“기억하지 못한다면, 기억하지 못한 대로 나와 조슈아와 함께 행복하게 살겠지.”

“조슈아의 유모로서?”

“어. 널 영원히 붙잡고 있을 거야.”

요한은 꽤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나를 제 옆에 붙잡아 두겠다는


것 같았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네게 유모 월급을 제대로 못 받은 것 같아.”

“말만 해. 얼마나 필요해?”

나는 요한을 따라 사악한 미소를 지은 후에 대답했다.

“네가 가진 걸 다 줘.”

요한은 내 말을 비웃듯이 픽 웃었다.

“네가 나 대신 공작이라도 할래?”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그럼 내일부터 네가 랭카스터 가의 가주를 해. 이젠 내가 조슈아 유모를 할게.”

“응.”

“가진 게 공작 작위밖에 없어서……. 더 줄 게 없다. 세나, 어떡하지?”

요한은 내 얼굴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의 손끝이 조금 차가웠다.

“왜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해?”

나는 그의 손을 잡아채, 차가운 그의 손끝마다 입을 맞추어 주었다. 내 온기가 그의 손끝에


스밀 수 있게.

“너를 영원히 내가 가질래.”

그 말은 날 영원히 붙잡고 있을 거라는 요한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나는 요한 위에


올라타 그의 바지에 굳건히 채워진 벨트를 매만졌다.

“기억나? 너랑 껴안을 때마다, 내가 네 벨트를 잡았다는 거.”

“물론. 그 덕에 한껏 혼란스럽기도 했어. 기억을 잃은 너도 똑같은 행동을 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린 그때 정말 바보 같았어.”

서로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하고, 각자 혼란스러워했으니까.

“바보 같았지만, 내겐 그 시간들도 소중했어.”

요한은 내가 제 위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평온하기만 했다.

그러자 왜 그를 조금 더 당황시키고 싶은 바람이 드는 걸까.

그런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요한은 다른 화제로 대화를 돌렸다.

“잡화점 내외분들께는 잘 설명해 드렸어?”

“응. 조금 놀라기는 하셨지만, 그럴 것 같았다고 하더라.”

결혼식 후, 짧은 피로연에서 나는 잡화점 내외에게 내 사정을 대강 설명해 주었다.

“……뭐? 네 정체를 얼추 짐작하고 계셨다고?”

“함께 지낼 때, 나를 보고선 그런 생각을 했었대. 내 정체가 어딘가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귀족 같았다고.”

“그렇구나. 내 앞에선 그냥 배가 고픈 미인 거지였을 뿐인데…….”

“요한, 너!”
“큭큭.”

내가 발끈하자, 요한은 작게 킥킥거렸다.

그러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요한의 입술을 한껏 괴롭히고 싶어졌다. 나는 그의


입술을 곧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웃는 데 정신이 팔린 요한은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싶었다. 그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 갔을 뿐이었다.

“그분들껜 내가 평생 보답할게. 기억을 잃은 너를 보살펴 주었으니까.”

“나도 성심성의껏 보살펴 줘. 언제까지 웃고만 있을 생각이야?”

요한은 손을 뻗어 내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차가웠던 그의 손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다시금


따뜻해져 있었다.

“이리로 와.”

그는 내 몸을 끌어당기며, 내가 제 품에 안기게 만들었다. 나는 요한의 가슴팍에 귀를 갖다 댄


채, 그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평온했던 목소리와는 상반되게 그의 심장 소리는 차분하지 못했다.

바삐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좋았다. 그의 심장을 빨리 뛰게 한 원인이 나라는 사실이 좋았다.

요한은 말했다.

“세나, 나와 두 번이나 결혼해 줘서 고마워.”

“응, 요한.”

“첫눈이 그치면, 어디 먼 곳으로 여행 갈까?”

“기왕이면 따뜻한 남쪽이 좋겠어.”

“어. 조쉬와 셋이서 다녀오자.”

셋이서 다녀오는 첫 여행. 얼마나 근사할까.

나는 첫눈이 오기를 바랐던 조금 전이 무색하게, 눈이 얼른 그치기를 바랐다.

* * *

배고픈 미인 거지라는 별명을 조만간 잃을 것만 같았다. 지난 며칠 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인은 그러했다. 음식 냄새만 맡으면, 속이 울렁거려서.

지난 며칠간 먹은 음식이라곤 한숨이 나올 만큼의 양뿐이었다. ‘쥐똥만큼 먹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큰 병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 증상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입덧이 아니려나.

나는 나를 진단한 의사의 입술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저 입술 사이로 곧 ‘임신’이라는 말이


나올 것임이 자명했다.

“축하드립니다. 임신을 하셨습니다.”

결과를 기다리며, 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요한은 탄성을 내질렀다.

“정, 정말인가? 정말로 임신인 건가?”

의원은 “네, 맞습니다.”라는 거듭된 확신을 내비쳤다.

나는 내 추측이 정확했음을 새삼 통감했다.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린 뒤, 요한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 횟수가 어째 지나치더라니.

물론 임신이 달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도 요한과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하지만 기쁨보다도 실감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게,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의 정확한 표현이리라.

조슈아를 처음 임신했을 때도 좀처럼 실감 나지 않았는데…….

나는 아직 홀쭉하기만 한 내 배를 매만졌다. 그러곤 그 속에 잠들어 있을 작은 태아를 상상해


보았다.

얘, 넌 언제부터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거니?

“자네는 그만 나가 봐도 좋아.”

요한은 의원을 얼른 내보내고선, 그가 나감과 동시에 나를 제 품에 꽉 껴안았다.

“세나…….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하나만 해.”

그리하여 그가 선택한 말은 바로,

“사랑해.”
내가 제일 좋아할 법한 말이었다.

“뭘 준비해야 하지? 요즘 식사를 통 못 했지? 뭔가 특별한 것이라도 구해 와야 할까?”

“주책 부리지 마. 그만큼 기쁜 거야?”

요한은 안고 있던 나를 놓아주며 대답했다. 바라본 그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요 근래 본 요한의 얼굴 중에 가장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당연히 기쁘지. 구름 위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넌 안 기뻐?”

“나도 기뻐. 하지만 이상하게 실감이 잘 안 나.”

“당장 실감하지 않아도 돼.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우리에게 귀여운 아이가 하나 더


생겼다는 사실인데.”

요한은 내 배 부근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는 만지는 것에만 그치지 않으며, 자세를 조금 낮추어 내 배 위에 입술을 짧게 맞추었다.

“우리에게 와 줘서 고마워.”

그는 새로이 생긴 아이가 듣지도 못할 말을 내뱉었다. 내 입가엔 자연스럽게 미소가 스몄다.

아이가 실제로 태어났을 때, 요한이 얼마나 아이를 사랑스러워할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조슈아가 조금은 질투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물론 의젓하고 똑똑한 우리 조슈아가 팔불출 같은 제 아빠를 이해해 줄 거라는 묘한 확신이


들기도 했다.

요한은 조금 구부렸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아……. 나 너무 기쁘다. 어떡하지? 미소를 참을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하며 실실 웃던 요한이 입가를 가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웁!”

“요, 요한? 갑자기 왜 그래?”

“우웁. 잠, 잠깐만. 나 속이 울렁거려.”

“갑자기?”

“우욱!”

요한은 방에 딸린 화장실로 뛰어갔다. 아무래도 구토를 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따라가 등이라도 쓸어주려고 했지만,

“절대로 따라오지 마! 아이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어!”

요한은 그리 말하며 나를 극구 말렸다.

아니, 저기요, 요한 랭카스터 씨. 그럼 당신이 사랑하는 제겐 그런 모습을 보여 줘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조금 삐딱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말을 잠자코 따라 주기로 했다.

나는 앉은 자세 그대로 요한을 기다리면서, 그런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요한은 왜 갑자기 구토를 하는 걸까? 낮에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건가.

“……!”

그러다 오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맞아, 요한은 내가 조슈아를 임신했을 때도 내 입덧을 대신해 주었어.

그럼 이번에도 요한이 내 입덧을 가져가 주는 거야?

“풉, 큭큭.”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로 큭큭거렸다.

기시감을 느끼기가 무섭게, 지난 며칠간 메슥거렸던 속이 시원하게 풀리는 듯한 기분마저도


들었다.

오늘부터는 식사를 마음껏 할 수 있겠는걸.

나는 연신 미소를 지었다.

화장실로 뛰어들어 간 요한은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기다리다 지쳐 요한을 찾으러 앉았던 몸을 일으킨 그때였다.

“엄마! 조슈아가 왔어! 들어가도 될까?”

때마침 오전 수업을 끝마친 조슈아가 찾아왔다.

나는 화장실 쪽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우회해 방문 쪽으로 향하였다. 방문을 열자 어제보다도


키가 더 큰 듯한 조슈아가 보였다.

아이는 이제 여섯 살이 되었다.

“조슈아. 수업은 잘 듣고 왔어?”

“응! 엄청 잘 듣고 왔어.”
조슈아는 이제 더 이상 욘두를 찾지 않았으며, 새로운 가정교사에게 잘 적응한 터였다.

하지만 마음속으론 욘두를 이따금 떠올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를 안아 들고선, 열었던 방문을 다시금 닫았다. 그러고선 조금 전까지 앉아 있었던


의자에 앉아, 조슈아를 내 무릎 위에 앉혀 주었다.

“조슈아. 굉장한 소식이 하나 있어.”

“뭔데?”

아이는 나와 닮은 에메랄드빛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조슈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대답했다.

“조만간 조슈아의 동생이 생길 거야.”

“우와! 조슈아 동생이 진짜로 생기다니! 엄마, 아빠 엄청 뽀뽀 많이 했잖아! 그런데도 조슈아


동생이 생기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얘야. 넌 도대체 언제 그런 걸 지켜본 거니.

“조슈아는 너무 너무 기뻐. 엄청 잘해 줄 거야. 당당한 오빠나 형이 되어야지.”

조슈아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가슴을 펴고 말하는 모양새가 퍽 믿음직스러웠다. 나는 아이가 좋은 오빠나 형이 되리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답은 내가 아닌, 내 뒤쪽에서 흘러나왔다.

“휴……. 조쉬. 앞으로 네 엄마의 무릎 위엔 함부로 앉으면 안 된단다.”

오랫동안 구토를 한 요한이 우리 앞까지 비틀비틀 걸어왔다. 요한의 얼굴은 몇 분 사이에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왜? 왜 안 돼?”

“네 엄마를 힘들게 해서는……. 우웁!”

믿을 수 없게도, 그의 구토는 끝나지 않은 듯했다. 요한은 입가를 가린 채로 화장실로 재차


뛰어갔다.

나는 그가 매우 걱정됐지만, 이상하게도 미소가 자꾸만 피어올랐다.

“엄마. 아빠는 왜 저래?”

“아빠는 지금 네 동생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아빠가 아파 보여.”


나는 조슈아의 이마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잊었어? 네 아빠는 제국 최고의 밥맛이라고.”

저런 고통쯤은 단번에 참아 낼 수 있는 대단한 남자이지.

조슈아는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이의 얼굴에 일순 드리웠던 걱정의


기운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응. 조슈아도 알아. 우리 아빤 최고의 밥맛이야!”

있지, 요한.

조슈아에게 밥맛의 진짜 뜻을 언제 알려 주어야 좋을까?

영원히 알려 주고 싶지 않다는 짓궂은 생각이 잠깐 들었다.

 
-외전 完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