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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나 칭찬이 아니라 예언

1.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사회자가 TV 화면 속에 우뚝 서 있었다.

―2010 년 제 46 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수상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사회자가 무대 위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한 뒤, 봉투를 열었다. 사회자가 종이를 꺼낸 후 이름을 확인했다. 장내는


조용해졌다. 긴장감이 화면 너머 여기까지 느껴졌다.

사회자는 일부러 몇 초 정도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소리쳤다.

―영화 <국가대표>의 ‘하정우’ 님. 축하드립니다!

빵,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들렸다. 하정우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찼다. 그는 기쁜
얼굴로 일어나서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자 반가움이 먼저 느껴졌다. 그는 나보다 여덟 살 어린 친구이자 후배로, 한때 같이 작품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나는 망설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폴더를 열었다. 그리고 자판을 꾹꾹 눌러 메시지를 썼다.

[백상 봤어. 축하┃]

축하, 까지 쓰던 내 손이 우뚝 멈췄다. 글자 옆에서 깜빡거리는 커서 바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결국 폴더를 탁


접었다.

“후.”
짧은 한숨을 쉬고 리모컨을 들어 TV 를 꺼버렸다. 입이 썼다. 친분이 있던 동료 배우의 성공에 기쁘기도 했지만,
동시에 질투심과 초라함 역시 선명하게 느껴졌으니까.

술이라도 마실까 싶어서 냉장고를 열었지만 반쯤 마신 생수밖에 없었다. 나는 외투와 마스크를 챙기고 집밖으로
나섰다.

딸랑.

“안녕히 가세요.”

맥주가 담긴 비닐봉지를 달랑거리며 편의점에서 나오고 있을 때였다.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부르르 울렸다.

핸드폰을 열자 화면에 ‘김건’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그는 영화감독으로, 지금도 나와 막역하게 지내는


친구였다. 반가움이 앞섰다.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렸다.

―여. 김철수.

“어. 김건이.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술 한 잔 할까 싶어서 네 집에 왔는데 문이 닫혀서 전화했지.

“왜 미리 연락 안 하고?”

―연락하면 김새잖아. 놀라게 해주려고 했는데 다 실패했네. 쯧.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 친구는 예나 지금이나 참 젊게 사는 친구였다. 나도 괜히


장난스럽게 퉁겨봤다.

“내가 바빠서 집에 없으면 어쩌려고 무작정 찾아와?”

―너랑 내가 하루 이틀 봐? 너 매년 백상 챙겨 보는 거 뻔히 알거든. 오늘도 집에 틀어박혀서 하루 종일 궁상


떨까봐 찾아왔다.
아. 그렇구나. 씁쓸하기도 하고, 멋쩍기도 해서 실없이 웃었다.

―그나저나 진짜 어디야? 정말 바쁜 거야?

“아냐. 그런 거. 잠깐 집 앞 편의점에 왔어. 너도 이쪽으로 와라. 골목 돌아서 시내 쪽으로 오면 돼. 신호등


건너기 전. 감자탕 집 쪽. 어딘지 알지?”

―아, 어딘지 알겠다. 응. 그리로 갈게.

전화가 끊겼다. 나는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은 후, 방금 산 맥주를 꺼내 탁, 깠다. 그리고 마스크를 턱으로


내리고 한 모금 먼저 마셨다. 시원한 탄산이 목구멍을 기분 좋게 훑고 내려갔다.

나는 잠시 고개를 젖히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이라 별은 안 보이지만, 바람은 선선히 불어왔다. 3


월치고 날씨가 좋았다.

“여, 거기 궁상떨고 있는 김철수 씨.”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아까 전화했던 김건이 저쪽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 역시 손을


흔들어주자 그가 춥다는 듯 외투를 여미고 종종 뛰어왔다.

“아직 밤은 좀 쌀쌀하네.”

“그래? 난 딱 괜찮은데.”

그런 잡다한 얘기를 나누는 동안 건이가 자연스럽게 내 비닐봉지를 자기 쪽으로 끌어가서는 맥주 하나를 꺼냈다.
그가 캔을 딴 후 자기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곤 ‘크’하면서 입가에 묻은 거품을 손으로 훔쳤다. 내가 퉁을
놓았다.

“돈도 잘 버는 녀석이 남의 술 훔쳐 먹냐.”

“야. 나 요즘 쉬고 있는 거 모르냐. 나 돈 못 벌어.”

건이 엄살을 부렸다. 그는 2 년 전 상업영화를 내놓고 아직까지 작품 활동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영화계를


떠났지만, 귀까지 막은 건 아니었다.
“뭐래. 너 최근에 50 억 짜리 영화 들어가는 거 내가 다 알고 있거든.”

“···어디서 들었대.”

그가 살짝 당황한 낯을 했다. 그 꼴이 웃겨서 킥킥 웃었다. 놈이 투덜거렸다.

“하여튼 이 바닥 소식 빠른 건 알아줘야 돼. 뭔 비밀이 없어. 비밀이. 야, 내가 일부러 말 안 한 게


아니라······.”

“알아. 대신 이 다음 술은 네가 사.”

놈이 내 눈치를 슬쩍 보기에, 담담히 웃고선 고개를 까닥였다.

나도 알았다. 건이 나를 배려해서 일부러 말 안 했다는 것을. 그는 아직 현역으로 잘 나가는 영화감독이었고,


반면 나는 은퇴한 지 7 년이 넘어가는 퇴물 영화 배우였으니까.

티를 내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건은 내가 이 시즌만 되면 못내 우울해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남들은 파티며 회식이며 불려가느라 바쁜 백상예술대상 날 굳이 나한테 찾아왔겠지.

하지만 나도 괜히 친구에게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별 볼 일 없는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맥주를 마시자, 김건은 호탕하게 외쳤다.

“야, 당연하지. 2 차는 다 내가 쏜다.”

“3 차도 네가 쏘는 거야, 임마.”

“3 차? 오호. 김철수 선수 용감한데요. 본인의 체력을 너무 자신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흐흐, 우리는 시답잖은 농담과 웃음을 나누곤 본격적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그래, 요즘은 뭐하고 지내냐?”

“은퇴한 배우가 하면 뭘 하냐. 그냥 모아둔 돈 까먹으며 빈둥빈둥 살고 있지.”

“너 아직 젊거든. 이쪽으로 진출해보는 건 어때? 시나리오나, 감독 쪽. 연기하다가 이쪽으로 넘어오는 애들


많잖아.”

“글쎄··· 아직은 좀 더 쉬려고. 어머니 상 치른 지 아직 1 년도 안 됐고.”

김건이 ‘아차’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장례식장에 못가서 미안하다. 비행기 타서라도 돌아왔어야 했는데.”

“뭐래. 영화제에 감독이 빠지는 경우가 어디 있어. 대신 부조금 네가 제일 많이 냈으니 됐어.”

“어머니는······.”

김건이 말문을 흐렸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키고 느리게 말했다.

“···직접 원인은 급성 폐렴이긴 한데, 뭐, 3 년 전부터 몸이 확 안 좋아지셨으니까. 사실 7 년 전 그때 그 일로


남편 잃고, 다리도 그렇게 되신 후에 전반적으로 많이 약해지셨어. 알잖아.”

“그래. 알지. 남들 다 말리는데 네가 부득불 들어가 불길 속에서 어머니 모시고 나온 것도 알고, 하반신을 못
쓰게 된 네 어머니 병수발 네가 다 든 것도 알지. 그것도 자그마치 6 년이나. 네 효심이 그렇게 깊은 줄 내가
그때 처음 알았지. 아후, 나라면 못한다. 간병인을 붙이면 붙였지.”

“너는 바쁘니까 그렇지. 나는 뭐······.”

나는 습관적으로 손을 들어 오른쪽 뺨을 만졌다. 화상 자국의 우둘투둘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때 마침 편의점 문이 열리고, 알바생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화상 자국을 숨기듯 턱까지 내린 마스크를 살짝 끌어당겼다.

그러다가 건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의 얼굴이 안타까운 듯 조금 일그러졌다.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들킨


듯한 기분이 들어 살짝 귀가 화끈거렸다.
그래, 그랬다. 7 년 전 집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던 나는 불타고 있는 집을 목격했고, 모두 말리는 걸 뿌리치고 집으로 뛰어 들어가 어머니를 모시고
나왔다. 아버지는 구할 수 없었지만 어머니 목숨만은 구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대가는 컸다.

나는 그 화재로 인해 얼굴과 몸 일부에 커다란 화상을 입었다.

큰돈을 들여 치료도 받았지만, 완벽하게 옛날의 얼굴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다른 직종이라면 모를까,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는 직업인 배우에게 화상 자국은 치명적이었다.

결국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은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나마 나은 축이었다. 어머니는 화재로


무너진 콘크리트에 다리가 깔리는 바람에 하반신 마비가 오셨다. 그동안은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바빴지만, 그것도
1 년 전의 일이다. 결국 어머니도 1 년 전 돌아가셨으니까.

이젠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잘나갔을 때 벌어놓았던 돈도 거의 다 써버렸고, 시간차가 있었을 뿐


부모님 두 분도 화마로 모두 잃었다.

그리고 그 사고로 배우로서의 내 커리어, 미래도 잃어버렸다. 한때 충무로의 기린아, 블루칩, 유명한 모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불린 적도 있었지만, 다 옛날 일이었다.

“술 더 마실까? 내가 사올게.”

김건이 분위기를 바꾸듯 말했다. 친구가 노력하는 걸 알았기에 나도 짐짓 가볍게 대꾸했다.

“두 말 하면 잔소리지. 얼른 사와라.”

건이 술을 더 사왔고, 우리는 자리도 옮기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주거니 받거니 캔을 부딪히면서 연달아 술을


비웠다. 주량도 줄었는지 옛날엔 궤짝으로 들이부어도 멀쩡했는데 이젠 일곱 캔 쯤 마시니 술이 올라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뜨끈해진 볼에 차가운 맥주 캔을 갖다대 식히고 있는데, 열린 편의점 문 사이로 흐릿하게 박수 소리가 들렸다.
아마 알바생이 DMB 로 백상예술대상을 시청하고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나는 딱히 별 생각이 없었는데 김건이 벌떡 일어나더니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저··· 정말 미안한데에···. 다른 거 시청해줄 수 있을꽈요? 제송함니다. 에, 부탁드려요.”

건이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진 발음으로도 예의 있게 말하려 애썼다. 알바생이 진상 손님을 보는 것처럼 떨떠름한


눈치로 DMB 를 껐다.

김건이 알바생에게 연신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곤 편의점을 나와 내게 브이자를 그려보였다. 히죽 웃는 꼴이


못생겨서 뭐라 타박을 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나는 짧게 말했다.

“오지랖 넓기는.”

“너마안 하겠냐?”

나참, 웃겨. 불난 데 들어가 어머니 구한 새끼가··· 나한테 오지랖이 넓다고···. 야, 요즘 대세는···


이기적인 거야. 응? 자본주의, 적자생존··· 모르냐아? 착한 건 이제에 대세가 아니에요오.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애? 너처럼 착해빠진 놈은 말이야. 이런 못돼빠진 세상에서, 일찍 죽는다고. 정신을 똑! 바로 차려야···
어? 알아?

김건이 저주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웅얼거리며 플라스틱 의자에 철푸덕 앉았다. 그러더니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뻗어버렸다.

저거 아주 취했구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쥐고 있던 맥주 캔을 기울여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김이 빠져서 밍밍했다.

나는 입을 쩝 다신 후 캔을 우그러뜨리며 늦은 핀잔을 주었다.

“오지랖이 아니라, 그런 건 효심이라고 하는 거거든? 그리고 너보다 오래 살 거니까 걱정 마라. 너는 네 간이나


신경 써, 임마. 술도 못하는 새끼가.”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고, 김건이 쿨쿨 잠드는 숨소리만 들렸다. 나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요의가 느껴져서 잠깐 화장실을 다녀왔다. 건물에서 나오며 파라솔 쪽을 쳐다보자, 알바생이 궁시렁거리며 건이
발치에 쌓인 맥주 캔을 치우는 게 보였다. 김건은 아직도 불콰한 얼굴로 색색 잠들어 있었다.

김건은 아까 말했다.

―이쪽으로 진출해보는 건 어때? 시나리오나, 감독 쪽. 연기하다가 이쪽으로 넘어오는 애들 많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얼굴에 화상 좀 입었다고 인생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어쩌면 감독으로서의 내 재능을


발견할지도 몰랐다. 운이 좋다면 제 2 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도 있고.

‘그러나 문제는······ 내가 아직도 연기를 하고 싶다는 거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연기를 사랑했고, 배우로 살아왔다. 이제 연기자가 아닌 다른 삶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얼굴만 이러지 않다면, 당장이라도 현장에 나가서 연기할 수 있을 정도로 내 안에는 열정의 불씨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이미 내 손을 떠나간 꿈. 언젠가는 순응하고 포기해야 할 꿈.

담배가 당겼다. 나는 편의점 쪽으로 가는 대신 잠깐 몸을 돌려 골목길 쪽으로 갔다. 주머니를 뒤지자 담뱃갑이
만져졌다. 다행히 마지막 남은 돛대가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입가에 가까이 가져다대었다. 그리고 막 불을 키우려 했다.

그때, 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응?”
멀지 않은 대로변 쪽에 한 청년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소년에 더 가까워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 청년은 차들이 오고가는 도로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우뚝 서 있었다.

‘뭐지?’

나는 일단 담배를 입에서 빼냈다. 그리고 그 청년 쪽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요!”

청년은 도로와 매우 가까이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였다. 저러다가 사고가 날 텐데.

나는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 젊은 친구!”

그는 내 말이 안 들리는 건지 아니면 안 들리는 척 하는 건지 계속 멀뚱히 거기 서 있었다. 이어폰이라도 끼고


있나?

나는 조금 망설였다. 김건이 했던 말이 또 떠올랐다.

―요즘 대세는 이기적인 거야. 착한 건 이제 대세가 아니에요.

사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 역시 사람인지라 어느 정도는 이기적이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7 년 전 그때의 내 선택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묘한 생물인 건, 남들이 그렇다고 여겨주면 정말 제 자신이 그런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건은 나더러 더 이상 착하지 말라고 꾸짖듯 말했지만, 그 말은 도리어 나를 움직이게 했다. 뭐, 누가
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내가 이렇게 미련하고 멍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나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청년 쪽으로 걸어갔다. 골목을 나와 인도 쪽으로 걸어가자 나와 그 청년은 다섯


걸음 정도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그러다가 다쳐요. 뒤로 조금 물러나는 게 좋겠―”

그때였다. 청년이 갑자기 도로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차선 한 가운데에 정확히 섰다.

“······!!”

동시에 옆에서 커다란 경적음이 들렸다. 나는 눈을 홉뜨고 고개를 훽 돌렸다. 트럭 하나가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고민이고 자시고, 뭘 생각할 틈도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땅을 박차고 달려갔다.

청년의 호리호리한 등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나는 팔을 뻗어 그 등을 힘껏 밀었다. 청년이 콘크리트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나 역시 몸을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한 발 늦어버렸다.

빠아앙―.

긴 경적음과.

“철수야!!”

그 사이 잠에서 깬 건지 멀리서 김건의 경악에 찬 외침이 들렸고.


강렬한 헤드라이트 빛이 눈앞을 덮쳤다.

골이 울리는 커다란 충격과 함께 몸이 으스러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시야가 붕 뜬다고 여겨졌을 때, 나는 가벼운
짐 덩이처럼 바닥에 처박혔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늘어졌다. 뒤통수에 뜨겁고 축축한 것이 흘렀다. 가물가물한 시야로 밤하늘과
초승달이 보였다.

그때 불쑥, 김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너처럼 착해빠진 놈은 말이야. 이런 못돼빠진 세상에서 일찍 죽는다고.

아무래도 그건 저주나 칭찬이 아니라, 예언이었던 모양이었다.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사람들이 소리치는 듯 웅웅거리는 소리와 이명 같은 것이 귓가에


울렸다.

삐―.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운명의 표현 오디션
3.

복지사가 병원을 빠져나가며 물었다.

“참. 혹시 어디 갈 데 있니?”

백고운이 갈 곳 없어서 자살을 시도한 건 나도 알고 그도 알았다. 그러니 복지사가 그 말을 꺼낸 건 뒷말을


꺼내기 위함이었다.

“어디 갈 데 없으면······.”

“저 복지사 님.”

내가 그의 말을 끊고 물었다.

“혹시 저한테 지원금 같은 게 나오나요? 일단 방을 잡아야 할 것 같아서요.”

“어?”

“그리고 근처에서 알바 자리를 알아보려고요.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요.”

복지사는 내 적극적인 말에 깜짝 놀랐다. 자살까지 시도했던 백고운이 갑자기 생의 의지를 보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응, 그럼.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려고 했어. 일단 우리 단체에서 일시적인 자립지원금은 지급될 거야. 그
이후론 많지는 않지만 달마다 조금씩 지원이 들어올 거고.”

복지사가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음, 고운아.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물어봐도 되니?”

대답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너무 당연한 거였으니까. 백고운으로 눈을 뜬 순간부터, 얼굴에 화상 자국이 없단
걸 알았을 때부터 이미 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네, 연기를 하고 싶어요.”

“···연기? 배우가 되고 싶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복지사의 말에 담담히, 그러나 당당히 대답했다.


“네, 전 배우가 될 거예요.”

그러나 복지사는 갑작스러운 내 선언이 허황되게 들렸는지 약간 당혹스러운 듯 말을 더듬었다.

“그, 그래? 그렇구나. 음···. 그럼······. 아, 아까 방을 잡겠다고 했지? 정해둔 데 있니? 데려다 줄게.”

“노량진으로 가려고요.”

“노량진? 아 그래, 거기가 고시원이 몰려 있어서 방값이 싸긴 하지.”

혼자 납득했는지 복지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그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방송국 3 사와 가깝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KBC 와 MBS 가 노량진 바로 옆인


여의도에 있었고, SBC 는 조금 더 옆인 목동에 있었다. 세 곳 다 노량진에서 30 분 이내로 충분히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당장 방송국에 출근할 일은 없더라도, 그 근처에서 머물다보면 관련 정보도 훨씬 빠르게 접하기 쉬웠고 추후에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었다.

복지사가 핸들을 돌렸고, 차는 부드럽게 도로를 달렸다.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서울의 풍경이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후론 집밖을 거의 나가지 않으며
생활한데다, 부득이하게 나가는 일이 있어도 선글라스와 마스크, 모자 없이는 활보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내 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 나는 7 년 전에 어쩔 수 없이 그만둬야 했던 그 꿈을 다시 한 번 이뤄낼 것이다.

반드시.

*
복지사는 이것저것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나는 방을 구하자마자 관공서에서 전입신고 등 필요한 행정업무를 처리했고, 서류를 떼어왔다. 집 근처에 있는


일자리도 구한 뒤, 근로계약서도 썼다.

내가 복지사의 도움을 구한 건 딱 핸드폰을 구할 때뿐이었다. 민법상 만 18 세는 홀로 핸드폰을 개통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립에 필요한 일을 척척 해결하자 복지사는 입을 떡 벌렸다. 아마 내가 헤맬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백고운은 홀로 서는 방법을 몰랐기에 막막해하다가 결국 죽음을


택했으니까.

내가 진짜 열여덟 살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으나, 나는 전생에서 벌써 마흔 하나였다. 어지간한 사회생활은


할 줄 알았다.

그리고 이주 정도 지난 오늘.

나는 중양대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등에는 야무지게 백팩을 메고, 손에는 프린트한 대본을 들고서.

거의 20 년 만에 다시 온 모교는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길을 가던 한 사람이


친절하게 다가왔다.

“신입생이에요? 어디 가요? 알려줄게요.”

“신입생은 아니고··· 연영과 학회실에 오디션 보러 가요.”

나는 조금 멋쩍게 물었다.
“예술대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원래는 이쪽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사람이 ‘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대가 작년에 건물을 옮겼거든요. 저 건물 보이죠? 저기까지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로 나와요.”

“아, 감사합니다.”

“그래요. 오디션 잘 봐요.”

그 사람이 손을 흔들었고, 나도 빙긋 웃으며 고개를 꾸벅이곤 걸음을 옮겼다.

그래, 나는 지금 내 후배들이 만드는 독립영화에 오디션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지난 이주 동안 나는 꾸준히 배우 모집 공고 사이트를 확인하면서 연영과 학생들의 아마추어 작업이 없는지


찾아다녔다.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경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백고운은 연기학원을 다닌 적도, 예고를 다닌 적도 없었다. 남들이 보기엔 막 연기를 시작한 햇병아리처럼 보일
게 뻔했다.

당장 내놓을 프로필도 없이 에이전시를 돌아다닐 수는 없었고, 방송국이나 상업영화의 조단역 오디션을 보려 해도


분명 서류에서부터 떨어질 게 뻔했다. 그건 이 바닥 생리에 익숙한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그래서 나는 일단 포트폴리오부터 만들고자 연영과 학생들의 아마추어 작업을 찾고 다닌 것이다.

그들의 작업물은 독립영화제나 단편영화제 같은 곳에 자주 출품되기 때문에 관계자들에게 얼굴을 알리기에 좋았다.

그런데 바로 일주일 전 딱 좋은 자리를 하나 발견했다.

<운명의 표현>이라는 독립영화였는데 중양대 연영과 4 학년생이 만드는 졸업작품으로, 60 분짜리 장편영화였다.
구하는 배역도 주연 롤이었고, 대상도 10 대 후반에서 20 대 초반인 남성이라 딱 지금의 내 조건과 맞았다.

게다가 특별히 서류를 받지 않고 곧바로 오디션을 보는 방식으로 캐스팅을 한다고 했다. 오직 마스크랑 연기만
보겠다는 뜻이었다.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었기에 나는 바로 연락을 넣었고, 지정 대본을 받은 후 오늘 이곳에 온 것이었다.

정문에서 친절한 후배가 길을 가르쳐 준 덕에 나는 오래 헤매지 않고 예술대 건물에 도착했다. 그리고 물어물어
연영과 학회실을 찾아 갔다.

한 학생이 알려준 대로 복도 제일 안쪽으로 가자 어느 문 앞에 하얀 종이가 붙어 있었다.

[독립장편영화 <운명의 표현> 오디션 장소]

여기였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잠시 그 종이를 바라보았다.

감회가 조금 새로웠다. 다시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하지만 기회는 내게 다시 한 번 찾아왔고, 이건 꿈이 아니라 진짜였다. 그리고 오늘은 바로 배우로서 첫걸음을


내딛는 날이었다.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정면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내게 인사를 건넨 사람 앞에는 [표류 감독]이라는 팻말이 책상에 붙어 있었다. 그 남자―그러니까 이름이 ‘표


류’일 사람―이 내게 물었다.

“이름이?”

“백고운입니다.”

“네, 들어와서 거기 앉아 계세요.”

그가 서류 사이를 뒤적거려 내 것을 찾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지원자들이 조르륵 앉아있는 측면의 벽


쪽으로 가서 제일 끝에 착석했다.

내 이후로도 여러 사람들이 꾸준히 들어왔다. 모두 다 도착했을 때, 지원자는 도합 열다섯 정도 되어 보였다. 반


정도는 중양대 학생인 듯 했고, 반 정도는 나처럼 외부에서 지원한 사람인 듯 했다.

표류가 큼 헛기침 하며 일어났다.

“좋아요, 시간이 다 되었네요.”

그가 지원자를 둘러보며 말했다.

“저는 표류 감독입니다. 이름 특이하죠? 이번 <운명의 표현> 영화의 제작, 감독을 맡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조연출을 가리켰다.

“그리고 여기는 조대준. 조연출을 맡아주셨습니다. 성이 조 씨라 평생 조연출일 비운의 팔자죠. 조 조연출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조연출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조연출이 가볍게 표류를 흘겼다.

“재미없거든?”

“그래? 난 재밌는데.”

표류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둘이 잠깐 투닥거리니 지원자들도 슬쩍 웃었다.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카메라 테스트를 위해서 우리 조연출이 동영상을 좀 찍을 건데, 오디션 이후에는 다 지울 거니까 초상권은 걱정
마시고요.”

지원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류가 이어서 마저 말했다.

“지정대본은 메일로 다 보내드렸죠? 미리 말씀드렸던 대로 두 장면을 볼 겁니다. 이름 불리면 나와서 첫 번째


씬만 연기해주시면 됩니다. 한 바퀴 돌고 다시 돌아가서 두 번째 씬을 볼게요.”

표류가 우리를 휘 둘러보았다.

“자, 그러면 각설하고 바로 오디션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디션 볼 첫 번째 장면은 주인공이 피아노를 치면서 좌절하는 씬이었다.

주인공은 청소년 피아니스트인데 사고로 인해 시력을 잃는다. 그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피아노 앞에 서서 다시


피아노를 쳐보지만, 건반을 볼 수가 없다보니 계속 음을 틀리게 된다.

주인공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치지만 결국 끝까지 치지 못하고 오열하고 만다.


조연출이 학회실 한 가운데에 전자 키보드를 설치했다. 표류는 설명했다.

“음악은 제가 틀어드릴 겁니다. 원래 피아노가 있어야 하지만, 피아노를 가져올 수는 없어서 대신 전자 키보드를
빌려왔어요. 소품이 좀 소박하죠, 하하. 그래도 연기자분들이니까 전자 키보드를 그랜드 피아노처럼 보이게
연기해주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표류는 지원자를 호명했고, 지원자는 나와서 키보드 앞에 앉았다.

음악을 틀자 리스트가 편곡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왔다. 익숙한 음인 ‘빠바바밤―’이
학회실을 울렸고, 지원자가 연기를 시작했다.

표류는 장난스러운 기색을 거두고 진지하게 연기를 지켜보았다.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어느덧 열네 번째까지 지원자들의 연기가 이어졌다.

마지막 열다섯 번째 지원자를 남겨두었을 때, 표류는 볼펜 꼭지를 똑딱거리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연기는 세 번째, 이 사람이 제일 괜찮네.’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눈을 감고 피아노를 치는 시늉을 했지만, 세 번째 지원자 이 사람만큼은 눈을 뜨고 피아노를


쳤다.

하지만 그는 눈만 떴을 뿐 눈이 보이는 듯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는 먼 곳을 응시한 채 연기 내내 동공을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초점이 안 맞는 연기가 제법 리얼했다.

표류는 그런 식으로 마음속에서 순위를 매기며 마지막 순번을 호명했다.

“백고운 씨. 나와 주세요.”
백고운이란 앳된 청년이 나왔다. 이름만큼이나 고운 외모였다.

그가 키보드 앞에 앉더니 눈을 감았다. 손을 키보드에 얹은 채 음악이 나오면 연기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거기까진 다른 지원자들과 비슷했다.

‘흠.’

표류는 기대가 조금 반감되었다.

사실 시각 장애인이 늘 눈을 감고 다닐 거란 생각도 편견이었다. 고정관념에 기댄 뻔하고 게으른 연기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루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서류를 보니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청년 같았다. 나이도 어렸고. 표류는 그가 다른 지원자들과


비슷비슷한 연기를 보여줄 거라 무심코 추측했다.

“시작하겠습니다.”

표류는 테이프를 틀었다. 빠바바밤―. 벌써 열다섯 번째나 들은 <운명>의 곡조가 다시 한 번 흘러나왔다.

백고운이 손을 움직였다.

몇 초가 흘렀을까.

처음엔 심드렁했던 표류가 어느 순간 무엇을 알아채고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발견한 것이었다.

백고운의 손이 흘러나오는 음악과 똑같은 음을 따라 누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단단한 악수
4.

“잠깐만요.”

표류는 일시정지를 눌러 음악을 멈추었다.

백고운이 연기를 시작한 지 몇 초 지나지도 않았는데 표류가 흐름을 끊자, 백고운이 눈을 뜨고 의아한 듯 표류를
바라보았다. 다른 지원자들도 어리둥절한 듯 이쪽을 쳐다보았다.

표류는 일어나서 잠깐 전자 키보드를 살폈다. 역시나 전원이 꺼져 있었다. 이 전자 키보드는 그저 소품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아무 소리가 안 나도록 설치했다. 물론 자동 반주 기능처럼 뭔가 꼼수를 쓸 수도 없었다.

다른 지원자들도 그저 음악에 맞춰 아무렇게나 건반을 눌러서 연주하는 시늉만 했을 뿐이었다. 여기는 연기


오디션장이었지, 피아노 솜씨를 보는 콩쿠르 장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백고운의 손과 음악의 싱크로가 맞는 이유는 하나였다. 백고운은 이 곡을 칠 줄 안다.

표류는 백고운에게 물었다.

“혹시 피아노 배운 적 있어요?”

그리고 백고운의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아뇨, 없습니다. 이 곡만 칠 줄 압니다. 오디션 보려고 연습했어요.”

“연습했다고요?”

“네.”

백고운은 뭐가 문제냐는 듯 표류를 빤히 바라보았다. 표류는 뭐랄까···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피아니스트를 연기하기 위해서 피아노 치는 연습을 해왔다니. 맹랑하기까지 하지 않은가.

표류는 충동적으로 불쑥, 약간은 도발하듯 물었다.

“그럼 한번 직접 연주하면서 연기해 볼래요?”

다른 지원자들이 표류의 요구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데 백고운은 오히려 기다렸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표류는 전자 키보드의 전원을 연결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연기를 시작하란 신호를 보냈다.

학회실은 고요했고, 지원자들은 긴장한 채 백고운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주목 속에 백고운이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그가 숨을 가볍게 내쉬더니 곧 키보드를 누르며 연주를


시작했다. 음색은 좀 달랐지만, 음은 똑같은 곡이 곧 흘러나왔다.

그의 연주는 아주 매끄러웠다. 전공자의 입장에서는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지만, 비전공자의 입장에서 들었을 땐
충분히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연습을 해왔다는 백고운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기막힌 건.

‘······!! 눈을 감고 친다고? 이걸?’


바로 백고운이 눈을 감고 연주를 하고 있단 것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피아니스트라도 갑자기 눈을 감고 쳐보라고 하면 어색해하기 마련이다. 눈이 보이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건반을 보면서 연주하는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물론 훈련을 한다면 가능하기도 하지만(실제로 시각 장애인 피아니스트들은 세상에 존재한다), 손의 감각에만


의존해 연주를 하는 건 어지간한 훈련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백고운은 지금 바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 단순히 연주하는 법을 외워온 것이 아니라, 엄청난 연습을 해
왔다는 뜻이었다.

표류는 이미 입을 떡 벌릴 정도로 충분히 놀랐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연주가 30 초를 막 넘어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백고운은 연주하다가 눈썹을 꿈틀 올렸다.

표류는 그 이유를 알았다. 백고운이 눈썹을 치켜 올린 그 순간, 음 하나가 미세하게 엇나갔기 때문이었다.

표류는 그것이 백고운의 연주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그것이 백고운의 의도된 연기라는 걸
알아차렸다.

백고운이 다시 처음부터 연주를 시작했는데 훨씬 손짓이 성마르고 조급해졌다. 그리고 그는 똑같은 파트에서 또
한 번 실수를 했다. 이번에는 다른 지원자들도 명백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음이탈이었다.

백고운이 입술을 악 물었다. 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세 번째로 다시 치기 시작했다. 이번엔 거의 두 배속을


한 듯 템포가 빨랐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거칠고 숨 가빠지는 연주였다.

긴장감이 훅 고조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그 부분에서― 백고운은 또 한 번 실수를 했다.


그 순간이었다. 그가 열 손가락을 쫙 피고 피아노를 ‘쾅!’ 내리쳤다. 노이즈가 학회실의 공기를 쩌렁쩌렁하게
찢었다.

큰 소리에 놀란 듯 지원자들이 몸을 움찔 했다.

하지만 백고운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몇 번이고 키보드를 쾅쾅 내리쳤다. 분에 못 이기겠다는 듯.

음이 아무렇게나 파열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 순간, 키보드를 양 손으로 꾹 누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건반이 눌려 있는 탓에 음이


잔열처럼 남아 공기 중에 끈질기게 울리며 천천히 사라졌다.

그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는 모두가 저도 모르게 얼어붙어선 숨을 참았다.

백고운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에코가 완전히 사라져 고요한 침묵이 학회실을 무겁게 내리눌렀을 때였다.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감은 눈으로 그는 소리 없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잇새를 앙 다물었지만 간간히 흐득거리는 흐느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흐, 으······.”

그는 서럽게도 울어댔다. 좌절하고 절망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사람이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그 순간 백고운은 완벽하게 영화 속 주인공으로 보였다.


한 순간 꿈을 잃게 된 어린 피아니스트. 그가 지금 거기에 있었다.

‘······!!!’

표류는 몸을 곧추세웠다. 소름이 팔뚝을 타고 우두두 올라왔다.

착각이었지만, 백고운이 치고 있는 전자 키보드가 일순간 진짜로 그랜드 피아노로 보였다.

그래, 오디션을 시작하기 전 표류 자신이 말했었다.

―연기자분들이니까 전자 키보드를 그랜드 피아노처럼 보이게 연기해주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농담처럼 던졌던 말이 실제가 될 거라고는, 그는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었다.

“······좋습니다.”

그만해도 좋다는 표류의 말이 들린 건 한참 뒤였다.

나는 울음을 멈추고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축축한 뺨을 닦고 일어났다.

표류는 얼떨떨함이 가시지 않은 듯 했다.

“고운 씨. 어, 그러니까··· 음, 네. 잘 봤습니다. 정말 잘 치네요. 피아노 배운 적 없단 말이죠···.


믿기지가 않네요. 분명··· 제일 접수를 늦게 주셨는데. 일주일 만에 연습한 건가요, 그럼?”

“네, 맞습니다.”
“일부러 눈 감고 칠 수 있도록?”

“네.”

일주일 동안 그 곡을 눈 감고 칠 수 있도록 많이 노력했다. 까다롭긴 했지만, 자는 시간 쪼개가며 틈틈이


연습하니까 가능은 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치는 거였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의 1 분도 안 되는 부분만 치는 거였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다.

표류는 재차 물었다.

“그 곡은 어떻게 알고 연습했어요? 대본에는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말만 쓰여 있고, 곡명은 안 써놓았는데.”

“제목이 <운명의 표현>이고 주인공이 시력을 잃은 피아니스트였으니까요. 그래서 당연히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베토벤 역시 귀를 먹은 음악가로 유명했으니까. 그 추측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좀 노골적인


메타포이긴 했다.

“그런데 찾아보니까 원래 교향곡이란 게 피아노 버전이 없는 거더라고요. 대신 리스트가 편곡한 피아노 버전이
있다고 해서 그 악보를 구해 연습했습니다.”

“······대단하네요. 캐스팅 된 것도 아니고 오디션 보러 그렇게까지 연습하다니. 전 원래 피아노 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아. 나는 그제야 표류가 왜 이런 반응인지 알아차렸다.

보통 음악 소재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연주 장면을 찍을 땐, 배우 대신 대역으로 진짜 연주자의 손만 인서트 컷을


따는 편이다.

간혹 감독이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배우에게 직접 연주하도록 요청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럴 땐 배우들은 직접


악기를 배우지만, 그렇다고 해도 보통은 캐스팅이 결정된 후의 일이다.
출연할지 말지도 결정된 것도 없는데 오디션을 보기 위해서 악기를 배워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도
상업영화가 아닌 독립영화의 오디션 자리에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당연한 말을 뱉었다.

“연기할 때는 어떤 자리든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요.”

그것이 시장 바닥이든, 오디션 자리든, 무대 위든 말이다.

뭐, 그냥 악기를 연습한 거면 몰라도 눈을 감고 칠 수 있도록 연습한 건 내 욕심이긴 했다. 그 정도면 감독의


눈에 확실히 띌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이 작품을 꼭 하고 싶었다. 연기를 하고 싶단 갈망이 크기도 했고, 뭣보다 연기학원이나 예고를 다니지
않는 나는 남들보다 주어진 기회가 훨씬 적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꼭 그 기회를 잡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감독인 표류가 실력 있는 신예 감독이란 점도 한몫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그는 아직 학부생인데도 여러


단편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전적이 있었다. 실력은 보증된 감독이란 뜻이었다.

표류는 내 말에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약간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던 그는 어느 순간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군요. 멋진 연기 잘 봤습니다.”

그제야 나도 빙그레 웃었다.

“감사합니다.”
피아노를 잘 친다는 칭찬도 좋긴 했지만, 나는 연기자였기 때문에 연기에 대한 칭찬이 더욱 기꺼웠다.

내가 마지막 순번이었기 때문에 잠깐 텀이 생겼다. 그런데 표류가 바로 두 번째 장면을 보겠다고 말하는 대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벌써 1 시간 가까이 되었네요. 잠깐 쉬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모두 여기서 대기해주세요.”

표류는 옆의 조연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리고 따로 이야기 좀 하자는 싸인을 보냈다.

둘이 나갔고 학회실에 남겨진 지원자들은 조금 멀뚱하고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표류가 쉬는 시간이라고 했지만
여기서 대기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말 같긴 했다.

그런데 그때 문 밖에서 표류와 조연출의 목소리가 살짝 들려왔다.

······야, 아무리 그래도 ······어차피 내 마음은 이미 굳혀졌다고······ 그래도 그건 상도덕 없지······


기본이 되어 있잖아. 그 뿐이야? 연기도 좋고······ 그건 아는데 규칙이란 게 있잖아······ 시간은 금이잖아,
이건 오히려 배려라고······

둘이 무언가를 치열하게 얘기했다. 약간 의견이 부딪히는 것 같기도 했다.

곧 문이 벌컥 열리고 둘이 다시 들어왔다. 조연출은 한숨을 옅게 쉬는 반면, 표류는 승리한 표정이었다.

둘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표류가 우리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여러분. 이례적인 일이긴 하지만, 캐스팅이 결정 났기 때문에 오디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두 번째 지정


연기도 열심히 준비해오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다음에 또 좋은 인연으로 만날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모두 조심히
돌아가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오디션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캐스팅이 결정되었다고 모두 돌아가라고 하는 건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긴 했다.
그래서 표류와 조연출이 입씨름을 한 모양이었다.
모두가 ‘수고하셨습니다’하면서 가방을 챙기며 주섬주섬 일어났다. 그때 표류가 지나가듯 나를 콕 집어 불렀다.

“아, 백고운 씨는 잠깐 남아주세요.”

모두 상황을 대충 파악했다. 표류는 대놓고 나를 뽑았다는 말은 안 했지만, 누가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음, 기뻤지만 옆의 지원자들의 눈치는 조금 보였다. 보통은 지원자들의 체면도 있고 성의도 있고 해서, 이렇게
남들이 다 있는 앞에서 대놓고 캐스팅하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원자들이 짐을 챙기고 나가면서 내게 선뜻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축하해요. 영화 챙겨볼게요.”

“아. 감사합니다.”

“연기 정말 잘하시던데요. 잘 봤어요. 나중에 기회 되면 또 봐요.”

“네, 감사합니다. 또 봬요.”

지원자들은 당연한 결과를 납득한 듯 선선한 반응이었다. 몇몇은 내게 장난스레 엄지를 치키며 응원하고 가기도
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참 착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조금은 멋쩍게 고마움을 표했다.

모두 돌아가자 학회실엔 표류와 조연출, 그리고 나만이 남았다. 표류가 조금 달뜬 듯 연신 싱글거리며 나를


자리에 앉혔다. 그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우리는 백고운 씨를 캐스팅하기로 했어요.”

표류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러나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연기도 물론 제일 훌륭했지만, 고운 씨의 그 열정이랑 노력이 특히 놀라웠거든요. 우리 멋진 영화 하나 만들어
봐요.”

표류의 눈에 신인 감독의 패기, 열정, 뜨거움 같은 것이 보였다. 그리고 원하던 배우를 만난 감독들이 가지는
특유의 맹수 같은 눈빛 역시 어려 있었다.

그의 뜨거움이 내게로 옮아왔다. 7 년 만에 다시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새삼스러울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그래,
이제 비로소 다시 시작이었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 역시 그 손을 맞잡았다.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뜨거운 온도를 가진 두 손이 만나 단단한 악수를 나눴다.

음악감독 이초희
5.

<운명의 표현>은 주인공 원탑 영화였다. 타이틀 롤을 연기할 배우가 구해지자 그 뒤의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조단역의 캐스팅도 얼추 끝마쳤고, 스태프들도 구했다. 장소도 대여해놨고, 이제는 촬영에만 들어가면 되었다.

마지막으로 딱 한 가지 해결할 문제가 남았는데 그건······.

“바로 네가 음악 감독을 해주는 일이야. 초희야. 내 영화의 음악 감독이 되어주지 않을래?”

표류는 무릎 꿇고 앞의 여자― 이초희를 올려다보며 계약서를 공손히 들이밀었다. 물론 눈은 ‘응?’하는 투로


초롱초롱 떴다.
꽃다발만 안 들었지 완전히 프러포즈하는 시늉이라 카페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앉아 있던 이초희가 질색을 하며 표류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렸다.

“안 일어나? 내가 이런 짓 좀 공공장소에서 하지 말라고 했지, 쫌!”

표류가 아하하 웃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이초희의 맞은편에 제대로 앉았다.

“반가워서 그랬지. 너 학교에서 보는 거 오랜만이니까. 아무튼. 오바하긴 했는데 제의는 진심이야. 나 이번에
졸작 찍는 거 알지? 거기 음악감독 좀 해주라.”

“그래서 연락한 거구나? 하기야 웬일로 네가 날 다 보자 했다.”

“에이. 겸사겸사 얼굴도 보고 그러는 거지. 애태우지 말고 빨리 대답 좀 해줘. 크랭크 인이 바로 이번 주야. 응,


응? 해줄 거지?”

그런데 이초희가 뜻밖에도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어쩌냐. 나 요즘 너무 바쁜데.”

“뭐?”

“나 지금 들어가는 프로젝트 하나 있거든. 두 탕 뛰기엔 좀 무리일 것 같다. 미안. 나 말고 더 좋은 음감


찾아.”

“야, 안 돼! 너보다 더 좋은 음감이 어디 있다고!”

“류야, 그냥 솔직하게 말해라. 너 나 부려먹으려고 하는 거잖아. 졸작이면 뭐, 제작비도 부족한 저예산일 텐데.
네가 나 무상으로 써 먹은 거 한두 번도 아니고. 이번에도 그런 수작인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표류가 뾰로통하게 이초희를 노려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그러나 미안하기보단 얄미움이 먼저 드는


이유는.

“좀 무상으로 도와주면 어디 덧나냐? 너 어차피 돈도 취미로 벌잖아. 부잣집 외동딸이면서!”

“돈이 필요 없는 건 맞지만, 내 노동이 헐값에 매겨지는 건 싫어서. 게다가 이런 거래 관계는 확실해야지. 안


그러면 동종업계 사람한테 욕먹어.”
이초희가 귀를 후비며 히죽 웃었다. 표류는 코웃음 쳤다.

“야, 너야말로 솔직하게 말해라. 너 그냥 귀찮은 거잖아. 하고 싶은 영화는 공짜로 해주겠다고 네가 먼저


달려드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맞아. 사실 할 수는 있는데, 귀찮아.”

이초희가 깔끔하게 인정했다.

그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부유한 환경이 받쳐주었기 때문에 늘 여유로웠고, 하고 싶은 것만 했다. 성격도


호쾌했고, 변죽도 자주 올렸다.

하기야 이전만 해도 그랬다. 그녀는 한국 최고의 예고라 불리는 대한예고 음악과에 차석으로 입학한 인재였다.
여러 콩쿠르에서 상을 휩쓸어 가장 주목받는 청소년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랬던 그녀가 갑자기 대학 들어갈 때 돌연 영화를 찍고 싶다며 하던 거 다 때려 치고 연영과에 입학했다. 그


기상천외한 행적은 아직까지도 지인들에게 회자 되고 있었다.

결국 영화를 배우다 ‘역시 음악이 좋긴 하다!’면서 음악 감독으로 또 한 번 진로를 선회하긴 했지만, 지금은
직업 만족도가 좋은지 나름 꾸준히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와중에도 능력은 좋아서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였지만.

표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초희야. 페이를 챙겨줄 수는 있어. 그래도 이번엔 제작비가 아예 부족하진 않거든. 뭐, 네 마음에 들 정도는
아니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네가 공짜라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 아니야. 이번엔 진짜로 네가
필요해. 나 이번에 찍는 거 클래식 영화거든. 클래식 전공했던 음악 감독으로는 너만 한 사람이 없잖아.”

“······이거 진심이네.”

“응. 나 이거 시나리오 작년부터 쓴 거야. 내가 찍을 수 있는 마지막 독립영화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만큼 내


모든 걸 쏟아 부으면서 준비하고 있고. 꼭 좀 도와주라.”
이초희는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녀가 코를 구기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주연 배우는 누구야?”

“백고운 씨라고 신인이야. 오디션 보고 뽑았어. 아직 필모는 없는데 연기가 장난 아니야. 글쎄, 일주일 만에 눈
감고 피아노 칠 수 있도록 연습을 해왔더라고. 대단하지 않아? 이번 영화의 주인공이 시각 장애인
피아니스트거든.”

표류는 이초희가 관심을 보일까 싶어서 열심히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녀가 몸을 곧추세웠다. 아까와 달리 그녀는 냉정한 얼굴이었다.

“툭 까놓고 말할게. 난 딱 두 가지 경우에만 일해.”

그녀가 검지를 치켜들며 1 을 그려보였다.

“내가 하고 싶을 때. 마이너한 프로젝트라도 내가 생각했을 때 재미있는 작업일 것 같을 때지.”

그녀가 중지를 덧붙여 2 를 표시했다.

“또는 이건 정말 잘 될 작품이다 싶을 때. 뭐, 꼭 투자 많이 받은 상업 영화를 얘기하는 건 아니야. 기준은


다양하니까. 독립 영화라면··· 영화제에서 상 받는 정도? 그 정도는 되어야 내가 할 맛이 나거든.”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네 작품은 아직 두 가지 다 해당 안 돼. 딱히 재미있을 것 같진 않고, 영화제에서 상 받는 걸 네가 지금


당장 확신할 수도 없잖아. 게다가 주연 배우가 쌩 신인인 것 같은데. 그다지 매력적인 얘기는 아니다.”

얼핏 들으면 부정적인 얘기였다.


그러나 표류는 알았다. 그녀의 이 냉정한 표정은 그녀가 프로로 일할 때만 나오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지금
표류의 친구가 아니라 음악 감독으로서 그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즉, 오히려 이건 설득할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좋아, 그럼 이건 어때? 내가 여기서 백날 말해봤자 어차피 너 내 말 안 믿을 거잖아. 그러지 말고, 나 이번 주


금요일에 첫 촬영 들어가거든? 네가 직접 와서 고운 씨 연기하는 거 봐봐. 내가 내 작품이라서 확신하는 게
아니라, 고운 씨 연기력을 보고 확신하는 거야. 이번 작품, 무조건 돼.”

직접 보고 판단하란 말이었다. 그렇게까지 나오니까 이초희도 못 넘어가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콜. 대신, 본 후에도 내가 별로라고 생각해서 거절하면 더 이상 질척대지 않기. 물론 내가 거절했다고 삐지지도
않기.”

표류는 씩 웃었다.

“오케이, 콜.”

그 주 금요일.

이초희는 여유롭게 촬영장으로 도착했다. 가정집 안으로 들어가자 스태프들이 부산스레 촬영 장비를 설치하고
있었다.

표류가 왔냐며 이초희를 반겼고,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래서. 그 배우는 어디 있어?”

“아직 안 왔어. 고운 씨 알바가 저녁 때 쯤 끝나거든.”


“뭐?”

이초희는 어이가 없었다.

전해 듣기론 그 배우가 여기서 나이도 가장 어리고, 이걸로 데뷔하는 신인이라 했다. 그러면 누구보다 일찍 와서
촬영장 분위기도 좀 보고, 스태프한테 인사도 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벌써부터 연예인 병 걸려서 감독보다
늦고 그러는 건가?

이초희가 오해하는 걸 알아챈 표류가 얼른 말했다.

“계약서 쓸 때 정한 사항이었어. 알고 보니까 고운 씨가 소년 가장이더라고. 우리가 출연료를 많이 챙겨줄 수가


없으니까 대신 촬영 시간을 정해진 시간에만 찍는 걸로 합의 봤어. 알바는 고정된 시간이 필요하니까. 지금 딱
올 시간인데······ 아, 마침 저기 오네.”

표류가 고개를 돌렸고, 이초희도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백고운이란 친구가 보였다. 그는 촬영장 안으로 들어오며 스태프들한테 인사하고 있었다.

“제가 좀 늦었죠. 죄송합니다. 아, 이것 좀 드세요.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백고운은 들고 온 검은 비닐봉지에서 요구르트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주섬주섬 스태프들에게 나누어주며 살갑고


예의바르게 허리를 꾸벅거렸다.

사람 사이란 게, 작은 주전부리라도 선물이 오고가면 기분이 말랑하게 풀어지는 법이다. 촬영장 분위기가
훈훈하게 좋아졌다.

표류가 이초희의 옆구리를 찔렀다.

“너도 좀 커피라도 사 들고 오지 그랬냐. 돈도 많으면서.”

“아, 물론 커피야 얼마든지 쏠 수 있지. 내가 여기 합류하면 말이야. 근데 나 아직 여기 관계자 아니거든? 그냥


한 번 보러온 손님이거든?”
이초희가 도도하게 ‘흥’하고 턱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한 번 지갑을 열면 저래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돈을 턱턱 내놓았지만, 막상 그 지갑을 열게 하는 일이


까다로웠다. 안 친한 사람들이나 관계없는 사람들에겐 단 한 톨도 베풀지 않는 성격이라고나 할까. 네 편, 내
편이 확실한 타입이었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왔어요, 고운 씨. 인사해요. 여긴 이초희라고, 내 친구. 우리 영화 음악감독 좀 맡아달라고 내가 지금 꼬시는


중이에요.”

이초희가 싱긋 웃었다.

“반가워요, 이초희에요. 그 꼬심에 안 넘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아하하, 안녕하세요.”

“주연 배우라면서요? 오늘 촬영 파이팅해요.”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표류가 끼어들었다.

“고운 씨. 농담이 아니라 오늘 연기 진짜 파이팅해서 제대로 보여줘야 돼요, 알았죠? 우리 영화에 초희가 없으면
안 되는데, 아 글쎄 얘가 고운 씨 연기하는 거 보고 결정한다 했거든요. 리딩 때처럼만 하면 걱정 없으니까 나
고운 씨 믿고 있을게요.”

부담이 될 수 있는 말에도 백고운은 알겠다며 빙긋 웃었다. 그는 표류와 이초희에게도 요구르트를 주곤 갔다.

이초희는 한쪽 구석에 비켜 앉았다. 그리고 촬영이 스탠바이 되는 것을 구경하면서 65ml 요구르트 그 조그마한
것을 빨대로 쪽쪽 마셨다.

‘쟤가 그렇게 연기를 잘하나? 딱히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편견이긴 했지만, 훌륭한 연기자들에겐 대부분 범상치 않은 아우라가 있었다. 남들 앞에서 자신을 보여주는
사람들 특유의 그 당당한 기백이라고 해야 할까, 에너지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이 딱 보면 물씬 느껴졌다.

그러나 이초희가 보기엔 백고운은 평범했다. 인상적이지 않다고나 할까. 그나마 특별한 게 있다면 그 나잇대
남자들보다 조금 더 곱상하게 생긴 것 정도?

표류는 이초희에게 백고운이 일주일 만에 연주를 외웠다느니 천재 같다느니 했지만, 사실 그것도 이초희에겐
감흥이 없는 말이었다.

그녀는 음악가 집안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온갖 음악 천재들을 많이 봐 왔다. 그 바닥엔 한 번 듣고 곧바로 따라


치는 놈들도 많았다.

아마 그녀 자신도 일주일의 시간을 준다면 눈 감고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수 있을 터이다. 그래서 더더욱 표류의
칭찬이 와 닿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초희에게 감명을 남기려면 백고운은 피아노 연주가 아니라 오직 연기 그 자체를 보여줘야 했다.

그때 스탠바이를 끝내고 촬영에 들어가겠다는 표류의 말이 울렸다.

“자, 그럼 씬 7 테이크 1 찍겠습니다.”

스태프들이 움직임을 멈췄고, 촬영장이 조용해졌다.

이초희도 빈 요구르트 병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촬영장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호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럼 류가 말한 대로 얼마나 강렬한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나 해볼까?’

방구석에 백고운이 몸을 웅크리고 연기할 준비를 했다.


조연출은 클래퍼보드를 가지고 와 카메라 앞에 대었다. 표류가 외쳤다.

“액션!”

클랩스틱이 부딪히고 빠르게 빠졌다.

모두의 시선 속에서 백고운이 연기를 시작했다.

비발디 사계 여름 3 악장
6.

카메라 화면 속.

백고운이 방 한 구석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곧 중년의 여자가 들어와 쟁반을
조심스럽게 상 위에 내려놓았다.

“저녁 가져왔어요, 도련님. 안 들어가실 거 알지만 그래도 조금 드세요.”

“······.”

“······먹고 힘내셔야죠.”

백고운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여자는 안타깝다는 듯 그를 바라보다가 머뭇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다시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가 중얼거린 건 한참 뒤였다.

“······힘?”
그는 힘없이 조소했다. 그리고 넋 나간 사람처럼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래, 힘내야지. 힘을···, 내야지.”

그가 더듬더듬 주변을 짚으면서 체념한 듯 흥얼거렸다. 그런데 그가 앞으로 나아가다가 근처에 있던 협탁에 그만
발이 걸리고 말았다.

쿵. 그가 넘어지면서 턱을 바닥에 제대로 찧었다. 윽, 욱. 그가 신음조차 제대로 내지르지 못하고 고통에


빌빌거렸다.

‘오.’

이초희는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넘어지는 연기가 제법 리얼했다. 스태프들 중 몇몇이 ‘아이고 아프겠다’라는 표정으로 눈썹을 살짝 찡그렸을
정도였으니.

보통 연기의 기술은 두 가지 경향으로 갈리는데, 하나는 신체 연기였고 하나는 표정 연기다.

연극이나 무성영화가 인기 있던 옛날에는 주로 몸을 과장되게 썼다. 대표적으로 슬랩스틱의 거장 찰리 채플린이


있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가 점점 더 대중적이 되면서, 연기 경향도 섬세한 표정 연기나 감정선을 중요시 하는 쪽으로
옮겨갔다.

뭐, 얼굴 근육이든 몸 근육이든 어쨌거나 신체를 쓴다는 점에선 똑같지만 말이다. 배우란 자신의 신체를 통제해
연기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초희는 백고운의 넘어지는 연기를 보며 그런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그러나 딱 그뿐이었다. 연기 초짜 같진


않긴 했지만, 그렇다고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백고운이 몸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팩 치켜들었다. 그늘에 가려져있던 그의 얼굴이 달빛(조명)에 드러났다.

그리고 이초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백고운의 양쪽 눈알이 따로 놀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오른쪽 눈은 제대로 정 가운데에 있었지만, 왼쪽 눈은


안쪽으로 쏠려 있었다.

배우가 양쪽 눈썹을 다르게 움직이는 건 봤어도, 눈동자를 저렇게 제각기 따로 쓰는 건 처음 봤다.

이초희가 표류를 훽 쳐다보았다. 표류는 촬영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시선이 느껴졌는지 이쪽을 흘금 봤다.

그가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고 씩 웃었다. 보아하니 이미 저는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초희는 헛웃음 지었다. 어쩐지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인정했다. 저건 확실히 어려운 연기가 맞았다.

백고운이란 저 친구, 그렇게 안 보였는데 꽤나 실력이 좋았다. 몸과 얼굴 둘 다 자유자재로 쓰는 걸 보니 연습도


많이 한 것처럼 보였고.

‘하지만 기술이 뛰어나다고 해서 꼭 연기를 잘하는 건 아니지.’

연기의 기본은 감정 전달이었다. 기술적으론 훌륭해도 왜인지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연기가 있고, 반면 투박해도
어쩐지 가슴을 울리는 연기가 있다. 둘 중 하나를 골라야한다면 역시 후자다.

이초희는 다시 시선을 돌려 백고운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몇 분 전과 달리 그녀의 눈빛은 흥미와 기대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래. 사실, 삐뚜름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그녀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저 백고운이란 친구는 허울 좋은
알맹이가 아니라 진짜로 원석일 것이다. 그런 예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자, 얼른 보여주라고.’

그녀는 눈을 빛냈다. 어느새 자신이 팔짱과 꼰 다리를 풀고 몸을 기울이고 있단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백고운은 연기를 이어했다.

넘어졌다가 고개를 치켜든 그는 사시 뜬 눈으로 주변을 휘 둘러봤다. 아픔 때문에 반사적으로 맺힌 눈물이 그의


눈꼬리에서 아롱거렸다.

그때였다. 그가 이를 짓씹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익―!”

그리고 벽 한쪽으로 곧장 달려갔다. 촬영감독이 핸드핼드로 카메라를 이고 백고운의 등 뒤를 다급히 쫓아갔다.

카메라는 미디엄 쇼트로 백고운의 등을 잡은 채 주인공의 심리를 대변하듯 불안히 흔들렸다. 장면이 한순간에
급박하게 변했다.

백고운이 벽을 짚은 채 더듬거렸다. 곧 그는 서랍장을 찾아냈다.

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팔로 서랍장 위를 거칠게 쓸었다. 액자나 상패, 트로피 따위들이 와르르 바닥으로
넘어졌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초희는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입 안으로만 허밍했다. 음악감독으로서 직업병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본능적으로 지금 이 장면에 어울릴 곡을 찾고 있었다.

여기에는, 그래―.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 악장이 딱이었다. 그녀의 귓가엔 벌써 째지는 바이올린 선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아, 하···.”

밭은 숨을 몰아쉬던 백고운이 몸을 팩 돌렸다. 그가 흉포한 얼굴로 성큼성큼 돌진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물건을 걷어차고, 때론 그것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그는 집요하게 책상을 찾아냈다.

그가 책장에 꽂힌 파일들을 닥치는 대로 뽑아 던졌다. 파일에서 낱장의 악보가 튀어나와 바닥에 흩날렸다.

백고운은 이어 악보집을 꺼내 사납게 구기고, 던져대고, 찢었다. 그는 마치 피아노와 관계된 모든 것을 완전히


망가트리고 싶어 하는 듯 했다.

“아악!!”

그는 악을 쓰며 바닥에 떨어진 것들까지 좍좍 뜯었다. 파괴적인 힘이 한 번 터져 나오자 끝장을 보기 전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듯 폭주했다.

그때, 악보를 찾아서 바닥을 더듬던 그의 손에 가위가 닿았다. 아까 책장에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낼 때 떨어진
거였다.

가위란 걸 알아챈 그의 눈이 희번득 빛났다.

그가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한쪽 손을 바닥에 대고 가위를 치켜들었다.

백고운이 그 상태로 우뚝 멈췄다. 가위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를 악문 그의 입가도 파르르 떨렸다.


그는 금방이라도 자신의 손을 가윗날로 내려찍을 것 같았다. 긴장감이 훅 고조되었다.

촬영 감독이 그의 그 모습을 클로즈업했다. 화면에 백고운의 얼굴이 가득 찼다.

이제 곧 클라이맥스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그런데 그때였다.

‘어?!’

표류와 이초희, 그리고 촬영장의 모든 스태프들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백고운이 앉아있는 바로 뒤엔 책상이 있었다. 그 책상 위 끄트머리에 쟁반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맨 처음에 중년 여성이 들고 왔던 식사 쟁반이었다.

표류는 입을 떡 벌렸다. 이 장면은 원테이크라 저게 떨어져서 NG 가 나면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했다.

그러면 이 난장판을 다시 수습해 원상태로 되돌려야 한단 뜻인데, 그냥 먼지만 털고 다시 올려놓으면 되는


소품들도 있지만 몇몇 개는 망가져서 다시 찍으려면 새로 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일부러 찍기 전에 이거 딱 한
번에 오케이 나야 한다고 모두에게 신신당부 했었다.

원테이크가 아니었다면 조금 덜 리스크가 컸겠지만, 백고운의 연기를 믿기도 했고 리허설도 많이 맞춰봤기 때문에
욕심을 좀 부렸다. 이쪽이 훨씬 그림이 멋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잘 찍히고 있었고. 그런데 막판에 이런
돌발 상황이 생길 줄은 몰랐다.

‘제발!’
표류는 그 쟁반이 조금만 더 버텨주길 절박하게 기도했다.

그러나 머피의 법칙이란 말이 있듯, 세상일은 언제나 나쁜 쪽으로 흐르는 법이었다.

달칵.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쟁반이 결국 넘어갔고, 반찬 그릇들이 낙하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시뻘건 김치가 백고운의 머리 위에 턱 얹혔다.

‘안 돼!’

그 순간 모든 스태프들이 속으로 비명을 부르짖었다. 그건 표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허탈해졌다. 하지만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었다. 맥 빠져도 다시 하는 수밖에.

그는 헤드폰을 벗었다. 그리고 피눈물을 삼키는 심정으로 컷 소리를 내려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낼 뻔 했다.

표류가 컷 소리를 내기 전, 화면 속 클로즈업 된 백고운의 얼굴을 우연히 발견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백고운은 김치가 제 머리 위에 떨어지건 말건 여전히 제 손을 매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동공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고, 아까부터 지금까지 초점이 안 맞는 그 상태 그대로였다.

갑자기 제 머리에 축축한 게 떨어졌으니 흠칫 놀라 연기가 깨졌을 줄 알았다. 모두가 그렇게 예상했다. 그게
당연한 반응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니었다.
백고운은 감독이 컷 소리를 내기 전까지는 그 가상의 무대에서 먼저 내려올 수 없단 듯, 주인공에 몰입한 채
고집스럽게 거기 앉아있었다.

“······!”

즉, 그 말은 아직 촬영이 끝나지 않았단 뜻이었다. 이 장면을 살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표류는 반쯤 일어서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헤드폰을 꾹 눌러쓰고 눈을 부릅떴다. 스태프들도 아직


끝나지 않았단 걸 알아챘다.

허탈해질 뻔한 분위기가 단번에 뒤바뀌었다.

그건 마치 월드컵 축구 경기가 2:1 로 이어져 관중들이 다 졌다고 체념한 순간, 막판 1 분 남겨두고 갑자기
동점골이 터져 승부차기로 이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랑 비슷한 분위기였다.

김치가 백고운의 머리 위에 떨어진 건 돌발 상황이었지만 그림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반찬을 뒤집어쓴
모습이 주인공의 비참함을 더 부각시켰다.

이제 남은 건 시간뿐이었다.

‘조금만 더······!’

표류가 땀으로 축축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였다.

위기를 잘 넘겼나 했더니, 배춧잎 끝에 아롱거리듯 매달려 있던 김치 국물이 중력을 못 이기고 백고운의 이마를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눈꺼풀에 닿았다.

뻘건 물이 속눈썹에 엉겨 붙더니 천천히 눈으로 내려왔다.


눈에 이물질이 들어오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눈을 깜빡이게 되는 법이었다.

그런데, 백고운은 꿈쩍도 안했다.

벌건 물이 그의 오른쪽 눈에 스며들어갔고, 눈알이 천천히 시뻘겋게 충혈 됐다.

“······!!!”

빈말 않고, 촬영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

그 누구도 그의 연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는 표현이 맞았다.

백고운의 그 압도적인 기백이 촬영장의 모든 사람을 휘어잡은 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때, 백고운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가 치켜든 오른손을 아래로 쐑― 내리찍은 건


한순간이었다. 가위가 손등을 아슬아슬하게 비켜서 바닥에 콱 박혔다.

카메라가 그 장면을 빠짐없이 담아냈다.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촬영장은 고요함에 휩싸였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 것만 같았다.

“······컷!!!”

몇 초 뒤, 표류가 비로소 컷을 외쳤다.

스태프들이 숨을 토해냈다. ‘대박···’ 또는 ‘미친···’하는 욕설 섞인 감탄이 군데군데에서 들렸다.

컷 싸인이 나자 백고운도 눈에 힘을 풀었다. 그가 이쪽을 바라보며 다급히 물었다.


“잘 찍혔나요?”

표류는 방금 찍은 장면을 다시 돌려보면서 모니터링 했다. 일단 어찌어찌 끝까지 찍긴 했지만 혹시라도 중간에
눈치 채지 못한 실수가 있어 다시 찍어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꼼꼼히 확인한 결과,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완벽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원래 찍으려던 것보다 더 좋은 그림을 건진 듯 했다. 손으로 가위를 내리찍는 연기도
셌지만, 한쪽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된 채 내리찍으니까 훨씬 더 이미지가 강렬했다.

표류는 백고운에게 ‘오케이’ 싸인을 보냈고, 그제서야 스태프들도 마음 놓고 기뻐했다.

백고운 역시 안심한 듯 유순하게 웃었다.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연기한 탓에 그의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분장 담당이 백고운의 얼굴을 닦아주고 눈을 살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는 듯 했다. 안약을 넣어 눈물을
흘리게 해 주자 그의 눈은 다시 멀쩡히 돌아왔다.

“어, 이 안약이 김치 국물보다 매운데요?”

백고운은 분장 담당에게 말하며 실없이 웃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다시없을 강렬한 연기를 보여줬던
그는 어느새 순한 얼굴로 되돌아가 있었다.

저 모습만 보면 방금 전까지 온 집안을 다 부쉈던 그 인물이라곤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연기를 잘하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김치가 떨어지질 않나, 설상가상 김치 국물이 눈에 들어가지 않나. 명백히 NG 일 줄 알았다. 그런데 백고운은 눈
하나 깜빡 하지 않고 연기를 계속했다. 그리고는 그 위기를 아예 더 좋은 그림으로 바꿔버렸다.
이건 정말··· 천재 아닌가?

그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표류를 불렀다.

“야, 표류!”

뒤를 돌아보자 이초희가 보였다. 어찌나 촬영에 집중했는지, 표류는 그녀가 여기에 있단 것도 깜빡했다.

표류는 어땠냐고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이초희가 한 발 더 빨랐다.

“나 이거 한다. 이건 백 프로 대박이야!”

표류도 그제야 웃었다. 그가 상쾌하게 화답했다.

“당연하지!”

저런 미친 연기력을 가진 배우가 주연인데, 이 작품이 대박이 안 나면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렛잇비와 댄싱퀸
7.

홍대의 어느 식당. 열 댓 명 남짓의 사람들이 밥을 먹으며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아니, 거기서 반찬이 고운이 머리 위로 툭 떨어지는데 심장이 덜컹! 이걸 계속 찍어야 해 말아야 해 하는데 컷
소리는 안 들려오지, 고운이는 계속 연기하고 있지. 나도 에라 모르겠다 하고 계속 찍은 거지. 올 때 혹시나
몰라서 청심환 하나 먹고 왔는데, 이야, 그게 진짜 신의 한 수였다니까. 거기서 카메라 흔들렸어봐. 그 명장면을
내 손으로 날릴 뻔 했잖아!”
촬영감독의 흥분 섞인 말에 스태프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형 청심환 먹고 왔어요? 어쩐지 우리 소심한 형이 너무 태연하다 했네!”

“나 안 소심하거든?!”

“몇 번이나 원테이크 안 가면 안 되냐고, 부담돼서 미치겠다고 저한테 하소연한 건 어디 사는 누군데요 그럼?”

표류의 놀림에 스태프들이 또 한 번 와르르 웃었다.

“그랬어요, 선배? 아니, 막상 연기하는 우리 고운 씨도 태연한데 왜 선배가 떨어요.”

“야, 내가 소심한 게 아니라 얘가 이상한 거야. 너라면 어? 소품 다 부수는 장면 찍을 건데 두 번은 못 찍으니


실수 절대 하지 말라고 감독이 겁주면, 너는 막 움직일 수 있냐? 난 지극히 정상인 일반인이야. 고운이 얘가
지나치게 특별한 거고.”

촬영감독이 손과 혀를 모두 내둘렀다.

“아무튼 고운이는 내가 보기엔 열여덟 아니야. 그럴 수가 없어. 분명히 속에 연기 고수인 아저씨가 들어가 있을
거야. 어떻게 거기서 연기를 이어갈 생각을 하냐고.”

스태프들이 큭큭 웃었고, 나도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속으론 약간 뜨끔했다. 의외로 가장 진실에 접근한
추측이었으니까.

표류가 잔을 숟가락으로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오늘 모두 수고 많았습니다. 첫 촬영 날이라 우여곡절도 많았는데 정말 다행이도 무사히 찍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MVP 는, 모두 인정하시겠지만, 우리 고운 씨! 고운 씨 아니었으면 원테이크로 안 끝나서
새벽까지 촬영 갈 뻔했습니다. 모두 뜨거운 박수!”

스태프들이 인정한단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열렬히 박수 쳤다. 몇몇은 ‘호우!’하면서 테이블을 요란히 두드렸다.

술은 한 톨도 마시지 않았지만 다들 분위기와 웃음에 취해서 기분이 한껏 업된 상태였다.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긴 했다.

표류는 이어서 ‘우리 소심이 촬감님께도 안 떨어주셔서 감사하다고 박수!’하고 장난스레 외쳤다. 촬영감독이
발끈했다가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지자 머쓱하고 부끄러운 듯 고개를 꾸벅거렸다.

“자, 그럼 시키고 싶은 거 맘껏 시키고 다들 많이 드세요. 그리고 앞으로 남은 촬영도 파이팅 합시다.”

“옙―!”

표류가 다시 자리에 앉더니 옆에 있던 내게 불쑥 물었다.

“근데 고운 씨, 정말 괜찮겠어요?”

“네?”

“초희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건 촬영이 끝난 직후의 일이었다.

이초희는 음악감독을 맡겠다고 했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며 내게 말했다.

―영화 라스트 씬에 들어가는 곡 그거, 고운 씨가 직접 연주했으면 좋겠는데. 많이는 아니고 딱 앞의 부분 정도만.


뒤랑 자연스럽게 이어지면 좋을 것 같아서. 물론 내가 연습 장소도 제공하고, 치는 법도 도와주고. 어때?

나는 선뜻 알겠다 대답했다. 어차피 초반부는 직접 치는 컷이 들어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연습해놓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표류는 이초희의 제안을 불만스러워했다.

“라스트 씬에 삽입되는 곡이 뭔지는 알아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 번 3 악장이에요. 들어본 적 있어요?”

“어······ 아뇨.”
사실 나는 음악의 음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악보만 겨우 볼 줄 안다고나 할까. 그것도 따로 배운 건 아니고
초등학교 음악 시간 때 배운 거였다.

“거 봐요. 그건 오디션에서 쳤던 리스트 편곡 <운명>보다 훨씬 어렵고 빠른 곡이에요. 전공자들도


어려워하고요.”

“음······.”

“초희 걔가 원래 그런 감각에 좀 둔해요. 누구나 일이 주 연습하면 그 곡을 뚝딱 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니까.


자기가 천재라서 쉽게 하니까, 남들도 쉽게 하는 줄 아는 거지 하여간.”

이초희는 일이 있어서 촬영 끝나고 바로 가는 바람에 회식엔 참석 못 했다. 뒤에서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걸


보니 둘은 꽤나 친한 사이인 듯 했다.

“아무튼 내 말은, 거절해도 된단 뜻이에요. 어차피 라스트 씬엔 대역 쓰거든요. 배우는 연기를 해야지. 안
그래도 고운 씨, 촬영에 알바에 지금도 바쁜데 거기에 피아노 연습한다고 더 힘들면 쓰나.”

표류가 쯧하고 투덜거렸다. 나는 아하하 웃었다.

“네, 알겠습니다. 일단 해보고 너무 힘들면 말씀드릴게요.”

“그래요. 언제든 그만둬도 되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그럴게요.”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의 걱정이 느껴졌기 때문에 일단은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우리는 다시 회식을 이어갔다.

그런데 밥도 잘 먹고, 얘기도 많이 하고. 이제 기분 좋게 돌아갈 일만 남은 그때 갑자기 일이 터졌다.

조연출이 슬쩍 오더니 표류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이야기를 들은 표류가 소리 죽여 소리쳤다.

“뭐, 제작비 카드를 잃어버려?”


“어, 지갑 찾다가 지금 발견했다. 야, 어쩌냐.”

“일단 카드사에 연락해서 막아야지. 누가 쓰기 전에.”

“그건 이미 했지. 연락해 보니까 아직 누가 주워서 쓰진 않은 모양이더라.”

“다행이네. 그럼 뭐가 문제야? 카드야 다시 발급받으면 되잖아.”

“이 회식비 말이야, 회식비! 이거 계산해야 하는데, 지금 당장 돈이 없단 말이야. 나는 현금 조금밖에 안 들고


왔고. 넌 좀 있어?”

표류가 그제야 상황 파악을 했다. 그가 제 품을 다급히 뒤지더니 ‘헐’ 했다.

“야 어쩌냐. 나도 안 지갑 안 들고 왔는데.”

“뭐, 진짜? 넌 뭔 감독이란 애가 돈 한 푼도 안 들고 다니냐?!”

“이게. 너야말로 조연출이 제작비 카드를 잃어버리고 다니냐?!”

둘이 투닥거렸다.

“야, 지금 이럴 때 아니야. 스태프들한테 얘기해서 돈 모을까 그냥? 일단 걷어서 내고 나중에 다시 돌려주면


되잖아.”

“아무래도 그래야겠는데.”

그런데 오늘 무슨 날인 모양이었다. 스태프들에게 양해를 구했는데도 짠 것처럼 모두가 돈을 조금밖에 안 들고 온


것이었다.

있는 대로 다 긁어모아도 회식비에서 약간 모자랐다. 회식비가 많이 나온 탓도 있긴 했지만.

“이런. 진짜 어쩌냐.”

표류가 볼을 긁적였다. 그러나 그는 감독답게 상황을 금방 수습했다.


“이모님께 사정 말씀 드리고 양해를 구하지, 뭐. 일단 스태프들은 다 돌려보내고, 넌 여기에 남아 있어. 그
사이에 내가 택시타고 집 갔다가 돈 챙기고 다시 올게. 나 집이 여기 근처니까 택시타면 몇 분 안 걸려.”

“아, 그러니까 내가 인질로 좀 붙잡혀 있으라고? 무전취식 오해 받지 않게? 너 돌아온다 하고 그냥 가버리면 안


된다?”

“그땐 몸으로 일당 때우고 탈출하든지. 주방에서 설거지 한 백 번쯤 하면 될 듯. 큭.”

“오. 너 죽고 나 죽고 해보자고? 연예면이 아니라 사회면에서 얼굴 보고 싶으면 어디 한 번 해보시든지요.”

표류와 조연출이 그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둘은 가게 사장님께 말씀드리기 위해 1 층으로 내려가려


했다.

그때 창밖에서 무슨 노랫소리가 들렸다. 나는 뜻 없이 창밖을 쳐다보았고, 곧 무언가를 발견했다.

“감독님, 잠시만요.”

나는 표류를 붙잡았다. 그와 조연출이 나를 돌아봤고, 나는 물었다.

“회식비가 조금 모자란다 하셨죠? 괜찮으시다면, 그거 제가 채워드릴까요?”

“······네?”

표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몇 분만 수다 떨고 있으라 말한 뒤 가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조금 걷자 버스킹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가게 안에서 본 게 바로 이들이었다.

마침 그들이 곡을 끝내고 다른 곡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그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을 드렸다. 의외로 그들은 선뜻 자신들의 악기를 내어줬다.

악기를 잡으려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운명>이라도 치려고요?”

뒤를 돌아보자 언제 따라 나왔는지 표류가 서 있었다. 그는 ‘읏, 추워’하고 옷깃을 여몄다.

“뭐할지 궁금해서 따라 와 봤어요. 버스킹이라니. 기발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특이하다고 해야 할지······.


근데 여기서 클래식은 좀 안 먹히지 않을까요?”

그러면서도 그는 재미있다는 것처럼 웃는 낯이었다. 나도 대꾸했다.

“괜찮아요. 클래식 안 칠 거거든요.”

“그럼요? 피아노 배운 적 없다 하지 않았어요?”

“네. 맞아요.”

“응? 그러면······.”

표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나는 씩 웃곤 어쿠스틱 통기타를 집어 들었다. 참고로, 나는 건반 친단 말은 안


했다.

표류는 더 흥미진진해진 얼굴이 되었다.

“뭐야, 기타는 칠 줄 알아요?”

“칠 줄 안다기보다는, 그냥 코드 외우고 있는 곡이 한두 개 있어요.”

김철수였던 시절에 기타를 쳐야만 하는 배역에 캐스팅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잠깐 배웠다. 물론 본격적으로 배운


게 아니라 자유자재로 칠 수 있는 건 아니고. 정말 딱 몇 곡만 칠 수 있는 정도랄까.
나는 자리에 앉고 자세를 잡았다. 아까부터 버스킹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연주자가 바뀌자 호기심 어린 표정이
되었다.

나는 마이크테스트를 한 뒤, 사람들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백고운이라고 합니다.”

배우든 가수든 기본적으로는 남 앞에 서는 직업이다. 나는 무대에 올라선 것처럼 평소의 내 성격과는 다른 자아를
뒤집어썼다.

“사실 제가 지금 무척 곤란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계산을 하려고 보니까 지갑을
잃어버렸더라고요.”

그리고 무대에는 언제나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친구 녀석은 저더러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자기가 얼른 집에 가서 돈을 가져오겠다 말하는데. 글쎄 이 놈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죠. 자기가 안 돌아오면 주방에서 설거지해서 일당 채우고 풀려나라 농담을 던지는데, 이거
진짜로 주방에서 설거지 하게 되겠다 싶더라고요.”

아까 표류와 조연출이 주고받았던 농담을 살짝 각색해 말하자 사람들이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저기 뭐 하는데?’하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집에서 절 기다리는 여우같은 아내, 토끼 같은 딸······은 없지만, 제가 언제 들어올까 목 빠져라 기다리는


아빠 곰 엄마 곰은 있단 말이죠. 아, 물론 제가 아기 곰이란 소리가 맞습니다.”

뻔뻔하고 능청맞은 내 말에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빙긋 웃어 보였다. 적절한 타이밍의 농담은
사람들의 흥미를 확 끌어당기는 데에 좋은 법이었다.

어느새 사람들이 연극 무대를 보듯 내게 시선을 고정시켰고, 나는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친구 하나 잘못 뒀다는 이유만으로 날도 이렇게 추운데 집도 못 들어가고 밤새 설거지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래서 부끄러움과 실례를 무릅쓰고 여기 연주자님들한테 부탁을 드려 여기 앉았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몇 곡 들려드릴 테니 듣기에 아주 나쁘진 않았다 싶으시면 백 원이라도 부탁드립니다. 여기 모인 분들 전부가 백
원씩만 내주셔도 제가 먹은 국밥 한 그릇 값은 나올 것 같으니까요. 친구 녀석 몫은, 뭐. 알아서 하라죠. 그
친구야말로 이 기회에 설거지하는 법 좀 배워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어깨를 으쓱이며 가상의 친구를 팔아먹자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아무튼, 그러면 각설하고 노래 시작하겠습니다!”

악기를 빌려주신 분들이 바람잡이처럼 박수를 짝짝 쳤다. 관중들도 기대와 응원을 담은 박수를 짝짝 쳤다.
분위기가 단번에 업 되었다.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나는 코드를 잡은 후 기타 줄을 튕겼다. 그리고 노래를 시작했다.

첫 곡은 비틀즈의 <Let it be>였고, 두 번째 곡은 아바(ABBA)의 <Dancing queen>였다. 나는 스트로크도


넣어가며 시원시원하게 고음을 뽑아냈다.

김철수일 때도 노래 실력이 나쁘지는 않았다 썩 자부했지만, 백고운은 목소리 자체가 맑고 고운 편이라 내가


듣기에도 훨씬 잘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간 중간 박수를 치면서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거나 후렴구를 같이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호흡을 조절했다. 무대란 관객과 소통하는 끈을 놓지 않는 게 제일 중요했다.

앞쪽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손을 반쯤 들고 물결처럼 오른쪽 왼쪽 흔들었다. 또 몇몇은 흥겨운 듯 허밍으로 따라


부르기도 했다.

노래가 끝날 때 즈음엔 발 디딜 틈도 없이 행인들이 빽빽하게 서서 내 노래를 듣고 있었다.

두 곡을 다 부르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졌다. 몇은 휘파람을 ‘휘유!’하고 불었고, 여고생들은 ‘오빠


잘생겼어요!’하고 소리치기도 했다. 나는 감사하다고 허리를 꾸벅거렸다.
둘 다 워낙 유명한 곡이다보니 한 번 외워두면 야유회 같은 데에서 흥 돋우기 좋았다. 그래서 작품이 끝난 후에도
일부러 잊지 않도록 가끔씩 치고 그랬다.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기타를 주인에게 돌려드리자 표류가 기타 케이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내가 노래 부르는 동안 관중들을


돌아다니며 거기에 돈을 받아왔는데, 수확이 꽤 있었다. 그 케이스 안이 지폐와 동전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심지어는, 초록색 지폐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양이 많아 우리는 그 길거리에 쪼그려 앉아 한참이나 돈을 세야만 했다. 그리고 총 액수를 확인한 순간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입을 벌렸다. 정확히 238,520 원. 회식비를 채우기는커녕 아예 회식을 한 번 더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전리품을 들고 가게로 돌아가자 스태프들이 우리의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는 환호하면서 외쳤다.

“2 차 가자!!”

내가 미성년자라서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고, 아쉬워하는 그들을 다시 달래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유쾌하게 저물어가는 하루였다.

욕심을 더 내게 만드는 배우
8.

노량진의 어느 편의점.

“고운 학생, 이거 좀 먹으면서 해.”

편의점 점장이 부르자 백고운이 돌아보았다. 점장은 음료수 하나를 내밀며 푸근히 웃었다.

“원 플러스 원이라 내 거 사는 김에 고운 씨 것도 가져온 거야. 편하게 마셔.”


“아, 감사합니다.”

“뭘. 고운 학생이 일을 잘해주니까 내가 더 고맙지.”

아르바이트 인력으로 돌아가는 편의점 같은 경우 언제나 사람 쓰는 게 제일 문제였다.

일을 제대로 못 할까 걱정, 무슨 사고를 치지는 않을까 걱정. 사람을 구해도 늘 그런 불안이 한구석에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백고운이란 학생이 나타난 이후로 점장은 그런 걱정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백고운은 아침 7 시에 출근하는 오전 타임이었다. 오전 타임은 물건이 들어오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그것들을


정리해야 했고, 그 와중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자주 들락날락해서 제일 할 일이 많아 고된 시간대였다.

그러나 백고운은 완벽하게 일했다. 지각 한 번 한 적이 없었고, 출근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물건을 정리했으며,
심지어는 새벽 타임이 떠넘기고 간 청소도 점장이 출근하기 전에 다 해놓곤 했다. 정산 실수도 한 번 일으키지
않았고, 손님 응대도 몇 년 일한 베테랑처럼 능숙했다.

그래, 백고운은 여태 점장이 고용했던 모든 알바생을 통틀어 가장 성실하고 빠릿빠릿했다. 게다가 성격도 착하고
사람이 건실하기까지 해서 보고 있으면 괜히 흐뭇했다.

“영화에서 피아니스트로 나온다고 했었지?”

사람이 없는 시간대에 그가 피아노 치는 것처럼 데스크를 두드리면서 작게 허밍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음악을 전공하느냐 물었더니 연기를 전공한다는 말을 들었었다. 고아원 만기 퇴소해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지금은 무슨 영화에 출연중이라고 했다.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틈틈이 꿈을 향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뭉클할 정도였다.

“영화 나오면 보러 갈게.”

“하하, 네. 감사합니다.”

“오늘도 일 끝나면 촬영하러 가나?”

“아뇨, 오늘은 촬영이 없어서 피아노 연습하러 가요.”


“그래. 아, 그러면 이거 가져가서 가면서 먹어.”

점장은 미리 빼놓은 폐기용 도시락에 간식거리를 얹어주었다. 사람이 이렇게 열심히 사니까 뭐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당연했다.

생색내기에 뭣할 정도로 별 것 아닌 것이었지만, 백고운은 감사를 표하며 예쁘게 웃었다.

“늘 이렇게 챙겨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점장님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아이고, 진짜 사람이 어찌 저리 착하고 귀여울꼬. 자신은 딸만 둘이었는데 막내아들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누군가 그때 점장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면, 막내아들보단 손자에 가깝지 않겠냐고 정정해주었겠지만 말이다.

“이것 좀 드실래요?”

이초희는 레슨실에 도착하자마자 백고운이 내미는 젤리를 보고 ‘허’ 웃었다. 이번엔 젤리인가?

“고운 씨는 가만 보면 햄스터 같아.”

“네?”

“무슨 먹을 걸 그렇게 맨날 들고 다녀? 저번엔 사탕, 저저번엔 초콜릿, 저저저번엔 쿠키, 저저저저번엔 웬
맥반석 계란. 주전부리를 되게 좋아하나 봐. 한창 먹고 클 때라 그런가?”

백고운이 레슨실에 드나든 지는 이주 정도 흘렀다. 그동안 그는 올 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그녀에게 간식거리를


내밀었다.

처음에는 저번 첫 촬영 날 때 그가 들고 온 요구르트 같은 거라 생각했다. 낯선 사람 친해지기 위한 도구 같은,


뭐 그런 거.
근데 이주 내내 간식거리를 들고 다니는 걸 보니, 그냥 백고운은 먹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백고운이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뇨. 그게 아니라··· 실은 제가 편의점에서 일하는데 거기 점장님이 인심이 좋으셔서 매번 뭘 주시거든요. 아,


감독님 싫으시면 안 드셔도 돼요.”

이초희는 ‘얼씨구’하고 대답했다.

“싫다고는 안 했는데? 그냥 햄스터 같다고만 했지.”

햄스터는 볼 주머니가 커서 입 안 가득 먹을 걸 쑤셔 넣고 다니질 않은가. 백고운이 매번 주머니를 볼록하게


채워오니까 연상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백고운이 내미는 봉지에서 젤리를 하나 꺼냈다. 기다란 지렁이 모양의 젤리가 쭉 뽑혀 나왔다.

그녀는 조금 떨떠름해졌다. 왜 젤리를 지렁이 모양으로 만드는 걸까? 딱히 지렁이가 맛있어 보이는 생김새도
아닌데. 알 수가 없었다.

독일에 갔을 때 하리보 본점에 가서 곰 모양 젤리를 먹어본 적은 있어도 지렁이 젤리는 처음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젤리를 조금 씹었다.

하지만 막상 먹어보니 꽤 괜찮았다. 이초희는 젤리를 전부 입에 쏙 넣었다.

평소 주전부리를 잘 즐기지도 않고, 먹을 일이 생겨도 주로 공항의 면세점에서나 파는 고급 과자를 먹게 되는


그녀였지만, 백고운 덕분에 이런 저런 체험들을 많이 해보는 요즘이었다.

그녀는 손에 묻은 설탕을 털며 말했다.


“자, 그러면 다시 연습해보자고. 이제 거의 막바지니까. 고운 씨 마지막 촬영이 이번 주 주말이라고 했나?”

“네.”

“흐음···.”

마침 피아니스트 정대영이 레슨실에 도착했다.

정대영은 이초희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라스트 씬에 들어갈 곡을 연주해줄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의 부탁으로
겸사겸사 백고운의 레슨까지 맡아주기로 했었다.

“대영아, 오늘은 고운 씨 빡세게 연습시켜야겠다. 이번 주 주말 촬영이래.”

“아 그래? 그럼 오늘 평소보다 두 배로 열심히 해야겠네.”

정대영은 그녀의 쿵짝에 맞춰주듯 짐짓 겁을 주었다. 백고운은 그저 아하하 웃으며 ‘열심히 할게요’라고 대답할
뿐이긴 했지만.

둘은 녹음실로 들어갔고, 이초희는 바깥에서 둘의 레슨을 지켜봤다. 백고운이 피아노에 손을 얹고 이주 동안


매일같이 연습한 곡을 치기 시작했다.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프로인 이초희가 연주를 날카롭게 들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디렉션을 했다.

“잠깐 고운 씨, 거기 너무 빨라. 초반엔 allegro ma non troppo 야.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

“고운 씨, 거기선 조금 더 감정을 담아야 돼. 좀 더 애처롭고, 슬프고, 그런 떨림이 느껴지면 좋겠는데. 그리고
잇단음표 신경 써주고.”

영화의 라스트 씬은 말 그대로 절정인 장면이었다.

주인공은 처음엔 조심스럽게 연주를 시작하다가 점점 무아지경에 빠지게 되고, 나중엔 모든 것을 폭발시킨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 번 3 악장의 총 길이는 9 분 남짓 되고, 백고운은 거기서 앞부분인 2 분-3 분 정도만
친다. 그 뒤는 정대영이 이어받아 급박하고도 몰아닥치는 연주를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백고운의 연주와 정대영의 연주가 따로 놀면 안 된다는 점이었다.

같은 곡이라도 치는 연주자마다 느낌이 천차만별인 법이다. 이초희의 목적은 그 간극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이 치지만 어쨌거나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 한 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백고운이 정대영의 연주를 카피하듯 따라해야 했다. 연기란 본질적으로 흉내 내기니까, 말하자면
이건 아주 고난이도의 연기인 셈이었다. 단순히 피아노 치는 폼만 따라하라는 게 아니라 곡에 묻어나는 연주자의
특징까지 따라하라고 주문한 셈이었으니까.

비전공자더러 이주 만에 전공자가 되라는 소리였고, 뱁새더러 다리 찢어가며 황새를 따라잡으란 요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시각 장애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 눈알 연기까지 하는 배우인데, 이거라고 못하겠어.’

능력이 안 되는 배우라면 애초에 부탁을 하지도 않았다. 가능성이 많으니까 무리한 주문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래, 백고운은 감독으로 하여금 욕심을 더 내게 만드는 배우였다. 그건 감독이 배우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나 다름없었다.

“초희야, 좀 쉬자. 고운 씨도 좀 쉬어요.”

정대영이 백고운에게 말한 뒤 녹음실에서 잠깐 나왔다. 이초희가 눈썹을 치켰다.

“왜. 고운 씨 손 풀려서 한창 잘 하고 있는데.”

“야, 나도 좀 쉬자.”
정대영이 작게 타박하며 물을 마셨다.

그런데 녹음실 안에서 다시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쉬는 시간이었는데도 백고운은 쉬지 않고 그 짬짬이 다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초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초희와 정대영이 녹음실 밖에서 잠깐 그렇게 백고운의 연주를 지켜보는데, 정대영이 문득 말했다.

“······아마 연기가 아니라 피아노를 했어도 잘했을 거야. 확실히 재능이 있어. 피아노를 배운 적 없다던데
저렇게까지 따라오는 거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거거든. 가르치는 재미가 있는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이초희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정대영이 그런 말을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이초희와 정대영은 스타일이 정반대였다. 그녀가 뭐든 쉽게 해내는 천재에 가까웠다면, 그는 노력파 수재에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성격도 많이 달랐다. 그녀는 눈이 하도 높아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작업물이 만족할 때까진 동료들을 붙잡는 편이었다.

반면 정대영은 늘 웃는 인상에 말도 조근조근 해서 훨씬 관대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초희보다 훨씬


냉정한 편이었다. 피나는 노력이 기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아예 대화할
생각조차 안 하는 게 바로 그였다.

조별과제가 있다면 이초희는 닦달하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조원들을 끌고 가려 노력할 사람이었고, 정대영은
애초에 포기하고 혼자 모든 걸 할 사람이라고나 해야 할까.

결국 이초희가 사람과의 협업이 중요한 음악감독이 된 것도, 정대영이 개인이 잘하기만 하면 되는 솔로


피아니스트가 된 것도 그런 성격 탓이 컸다.

그렇기에 남에게 관심이 적은 정대영 입에서 타인의 칭찬이 나왔다는 건 정말로 잘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초희는 피식 웃었다.

“이게 뭘 모르네. 뭐, 고운 씨가 피아노에 재능이 있을 수도 있지. 근데 그게 연기 재능보다 더 크진 않을 걸.


고운 씨는 천생 배우야.”

정대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근데 왜 이렇게 열심히 가르쳐? 보니까 내 연주를 똑같이 따라 치게 만들려 하는 것 같던데. 그러면 굳이
고운 씨가 쳐야 할 필요 없잖아. 어차피 동시 녹음이 아니라 후시 녹음으로 들어갈 거라며.”

이초희가 허, 하고 정대영을 바라봤다.

“야, 내가 진짜 고운 씨 피아니스트로 키우려고 연습 시키는 줄 아냐? 아무리 고운 씨가 널 똑같이 따라 쳐도


어쩔 수 없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어. 난 그걸 써먹으려고 하는 거야.”

이초희가 굳이 백고운을 데려와 연습을 시키는 건 그 때문이었다.

주인공은 처음엔 자신이 잘 칠 수 있을까 두려움과 걱정을 담고 연주를 시작한다. 그러나 정대영이 처음부터 다
치면 아무리 서툰 척을 하려 해도 연주가 능숙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반면 백고운이 아무리 정대영의 연주를 잘 따라 친다한들, 이주 동안 연습한 실력으론 십 몇 년을 친 정대영의


연주에 비할 수는 없다. 초희는 그 서툶까지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곡 안에서도 서사가 느껴지도록 만드는 작업이었다. ‘두려움-극복-환희’라는 주인공의


감정 변화가 연주에서도 잘 느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정대영의 연주와 비슷하게 따라 치도록 만들려는 건 기본적으로 곡의 앞뒤 부분이 너무 따로 놀지 않게 하려는


것일 뿐, 그게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단 소리다.
정대영이 그제야 이해했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근데 그래도 너무 빡세게 굴리진 마라. 보니까 고운 씨 엄청 열심히 하는 거 같던데. 문방구에서


파는 그 건반 알지? 멜로디언인가? 숨 넣어가면서 치는 그거. 그거 사서 집에서도 연습한대. 알바하고 촬영하는
것만으로도 일정 빡셀 텐데.”

그런 말까지 들었는데 너무 몰아붙이기도 뭣했다. 이초희는 소리를 켜고 녹음실의 백고운에게 말했다.

“고운 씨, 손에 경련 안 와? 너무 치다가 손 삐끗하지 말고 적당히 쉬어가면서 해.”

“네, 아직은 괜찮아요.”

백고운이 ‘그보다’하면서 물었다.

“이젠 좀 듣기 괜찮나요?”

“아, 그럼. 점점 더 마음에 들어. 대영이도 고운 씨가 피아노 전공했으면 잘했을 거라는데?”

그건 사실이었다. 무리한 요구라도 시키면 척척 해내니 이보다 더 만족스럽고 예쁠 수가 없었다.

백고운이 겸손히 웃었다.

“두 분이 잘 도와주셔서 그렇죠.”

“어이구, 말도 예쁘게 하네. 웃지 마. 정들어. 나 미성년자한테 반하는 취미 없어.”

그런 농담을 던져가며 연습은 재개되었다.

보통 레슨은 두 시간 정도면 끝났다. 그러나 오늘은 라스트 씬 촬영이 바로 내일모레다보니 셋 다 투지가 불타는
바람에 평소보다 조금 더 늦게 끝났다.
“초희야 나, 갈게.”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둘 다 잘 가―.”

그래서였다. 이초희가 백고운의 이마에 살짝 보이는 그 땀이 평소보다 훨씬 열심히 연습을 한 탓이라 여긴 것은.

백고운에게 미열이 있단 것을 그때 알아챘더라면 그녀는 그를 레슨실 대신 병원에 데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고 시간은 흘러 어느새 마지막 촬영 날이 다가왔다.

그리고 일이 터진 건 그날 아침이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 번 열정


9.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아, 실수했다.’

몸이 으슬으슬한데다 목이 칼칼했다. 머리도 약간 멍한 것이 열이 있는 듯 했다. 백 프로 몸살 감기였다.

하긴 요 며칠 꽤 무리하긴 했지. 촬영에, 알바에, 피아노 연습까지. 그래도 몸 상태는 봐가면서 했다고
생각했는데.

7 년 만에 다시 연기를 하게 돼서 의욕이 조금 과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백고운의 몸으로 들어오면서 20 년


가까이 젊어진 셈이라 체력을 과신한 탓도 있었다.

‘그래도 실수는 실수지. 변명할 수가 없네.’


자기 관리와 체력 관리도 배우의 일이었다. 제 아무리 철인이라도 힘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고, 특히 촬영은 몸이
힘든 고된 작업이었다. 그러므로 프로 배우라면 체력을 쓸 데 안 쓸 데 구분해가면서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했다.
마냥 열심히 하는 게 다 능사는 아니란 소리였다.

그때 진동으로 전화벨이 울렸다.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표류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고운 씨? 씻고 있었어요?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데 안 받아서 뭔 일 있나 했어요.

오늘은 주말로, 마지막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그것도 영화의 마지막 씬을 찍는 날.

나는 눈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촬영장에 도착하기로 한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다.

“죄송해요. 혹시 무슨 일 있나요?”

―아뇨, 별 건 아니고. 지금 차로 촬영장 가는 길인데 픽업해 줄까 해서 전화했어요. 길 모르잖아요. 같이 가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살짝 기침이 나왔다. 표류가 물었다.

―어? 고운 씨 감기 걸렸어요? 목소리가 약간 안 좋은 것 같은데. 쉰 것 같기도 하고.

“네, 약간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숨겨봤자 안 좋기만 하다. 나는 솔직히 내 지금 몸 상태에 대해서 보고했다. 그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이런, 어쩌지. 오늘 촬영 미룰 수는 없는데···. 홀을 빌린 거라 날짜를 미룰 수가 없거든요.

물론 나는 대답했다.

“당연히 촬영 해야죠. 심한 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오늘은 대사가 없어서 목소리를 낼 씬도 없고. 촬영에는
지장 없습니다.”

그건 너무 당연한 말이었다. 나는 이미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심한 게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올 때 컨디션 안 좋으면 병원 들렀다 와요. 조금 늦는 것


정도는 괜찮으니까.

“네, 그럴게요.”

나는 전화를 끊고 나갈 채비를 하기 위해 일어섰다.

그런데 몸을 일으키고 바닥을 딱 밟는 순간 기립성 저혈압처럼 머리가 핑 돌았다. 열이 훅 올랐다.

이거, 내 생각보다 상태가 좀 더 심한 모양이었다.

나는 휘청이다가 벽을 탁 짚었다. 그리고 그 자세로 가만히 멈춰 서서 잠시 지끈거리는 골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입에서 밭은 숨이 하아, 하아, 흘러나왔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나는 다시 눈을 번뜩 떴다.

입술을 꽉 깨물곤 온 힘을 끌어 모아 다시 움직였다. 씻고, 옷을 입고, 나와서 택시를 불렀다.

택시에 올라탄 나는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택시 기사가 날 돌아보며 ‘어디로 갈까요?’하고 물어보려다가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학생. 얼굴이 아주 시뻘건데. 괜찮아요? 병원 갈까요?”

나는 살짝 갈라지는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했다.

“아뇨, 대한예고로 가주세요.”


오늘의 촬영장소가 바로 그곳이었으니까.

달리는 택시에서 나는 잠깐 잠들었다. 꿈을 꾸었던 것 같다.

김건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였는지 옛날에 내게 물었었다.

―있잖아. 너는 어쩌다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어?

꿈이 영화였다면 그 목소리가 바로 오프닝을 알리는 나래이션이었을 것이다. 전경이 페이드 인하면서 천천히
눈앞에 차올랐다.

그곳은 한 파출소였다. 어린 김철수가 보였다. 보아하니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이다.

곧 젊은 한 여자가 숨 가쁘게 뛰어오며 파출소 안으로 들어온다. 순경은 그 여자에게 물었다.

―김철수 학생 담임선생님 되십니까?

―네. 근데 철수가 왜 여길··· 무슨 일로······.

―별 건 아닙니다. 이 아이가 역에서 서성이는 걸 보고 누가 가출 소년으로 오해해 신고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아이들은 학교에 가 있을 시간이니까요.

어린 김철수는 선생님에게 인계되고, 둘은 고개를 꾸벅이고 파출소를 나온다.

―요즘 학교에 안 오더니. 역에 있었구나. 거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

―선생님은 철수가 나쁜 짓 했을 거라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그래. 어쩌면 선생님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일 수도 있고.
―······.

하지만 소년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문 채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다.

막 국민학교에 부임한 선생님은 이 상황이 조금 당혹스럽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아이들이 종종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막상 자신이 맡은 반 아이가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소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역에서 서성이고 있었는지도 몰랐고.

하지만 나는 그 소년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다. 소년은 선생에 반항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에 화가 나 있는 것도


아니다.

소년은 그저 향수를 타고 있는 것뿐이다.

소년의 가족은 한 달 전쯤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 왔다. 그러나 소년은 도통 서울에 적응하지 못했다. 커다란
건물들도, 차가운 표정의 사람들도, 소년에게는 너무 낯설었다. 그리고 그의 부모는 소년의 외로움을 챙겨주기엔
너무 바빴다.

선생님은 슬퍼 보이는 소년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뭔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날, 그녀는 뜻밖에 소년에게 책 한
권을 건넨다.

―말하기 싫은 거면 선생님은 더 묻지 않을게. 하지만 심심할 때면 이 책을 한번 읽어 봐. 선생님은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기차를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게 취미인데, 기차 안에서 책 읽는 걸 특히 좋아하거든.

소년은 책 읽는 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냥 받아둔다. 그리고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는 잊어버린다.

그런데 다음날 또 역에 간 소년은 문득 선생님의 말에 생각이 닿는다. 가방을 열자 그 책이 보인다.

그 책을 꺼낸 건 별 뜻이 없었다. 대합실에 앉아 자신의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몇


시간씩 그러고 있자니 선생님의 말대로 조금 심심함이 찾아왔을 뿐이었다.

소년은 책을 펼치고, 곧 그 책이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희곡임을 알아챈다. 보나마나 지루할 테니 몇 줄 읽고


바로 덮어버릴 거라 생각하면서 소년은 글자를 눈에 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소년은 앉은 자리에서 그 책을 다 읽어버린다. 마지막 장을 덮고 고개를 들었을 때, 바깥엔 깜깜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소년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친 건지 한동안 깨닫지 못하고 얼떨떨해 있다. 소년의 여운을 깨트린 건 역무원의
말이다.

―얘야. 혹시 부모님을 잃어버렸니?

―아니요. 그냥······.

소년은 머뭇거리다 대답한다.

―책을 읽고 있었어요.

다음날 소년은 역으로 가는 대신 학교로 간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가서 빌렸던 책을 내민다. 잘 읽었다고,
조금은 멋쩍게 말하며.

선생님은 별 말 없이 빙그레 웃으며 다른 책을 건네준다. 그것 역시 희곡이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선생님과 소년의 묘한 유대가 이어진다. 선생님은 매번 새로운 희곡을 건넸고, 소년은 단숨에
그것들을 읽어치웠다. 대화체로 이루어진 희곡은 어린 소년이 읽기에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선생님이 영문학과를 전공했다는 걸, 그리고 그 희곡들이 선생님이 직접 번역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건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의외의 제안을 한다.

―철수야, 직접 연극을 해보지 않을래?


소년은 머뭇거리고, 선생님은 싫으면 언제든 그만둬도 되니까 한번 해보라며 소년을 연극부에 데려간다.

그리고 소년은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된다.

희곡이 2 차원의 세계라면, 연극은 3 차원의 세계였다. 희곡이 상상으로 구현되는 세계라면, 연극은 그 상상이
실제가 되는 세계였다.

소년은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연극의 재미에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는 표현은
그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연극은 소년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친구들의 우정, 부모의 칭찬과 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꿈과 열정을.

한 소년의 가슴에 평생 꺼지지 않을 불꽃이 타오른 건 그때부터였다.

“괜찮아요, 고운 씨?”

나는 표류의 말에 꿈에서 빠져나오듯 상념에서 깼다. 표류가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나는 촬영장인 대한예고에 있었다. 정확히는 대한예고의 소원홀이라는 건물에 있었다.

대한예고는 표류의 모교였다. 그래서 외부인에게는 개방하지 않는 곳이지만 졸업생 권한으로 특별히 하루만 빌릴
수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오늘 촬영을 끝내지 못하면 또 이곳을 빌릴 수는 없단 뜻이었다.


내가 대기하는 동안 어느새 촬영준비가 끝났는지 스태프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관객 역을 맡아줄
엑스트라들이 좌석에 빼곡히 앉아 있었다.

표류와 이초희가 나를 두고 뭐라뭐라 얘기하고 있었다. 표류는 심각한 얼굴이었는데 조금 화가 난 것 같았고,


이초희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둘이 말을 멈추고 다급히 나를 돌아보았다.

“고운 씨, 괜찮아? 할 수 있겠어?”

“안 되겠다. 일단 약을 좀 먹고 삼십 분만 더 있다가 촬영을 하는 게―.”

나는 표류의 말을 끊었다.

“약은, 괜찮아요. 감기약은 먹으면 졸려서··· 손이 둔해지거든요.”

피아노를 치는 연기를 하는데 그럴 순 없었다.

내 말에 표류는 놀라 말문이 막힌 듯 했고, 이초희는 기가 막힌 듯 ‘지금 그게 문제야?!’하고 뾰족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걱정이 담겨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옅게 웃었다.

“괜찮아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대 가운데로 걸어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피아노에 손을 올린 채 촬영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표류는 결국 살짝 한숨을 쉰 뒤 어쩔 수 없단 듯 내게 ‘미안해요. 조금만 버팁시다’라고 말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보자고 덧붙이면서.
그는 감독이었고, 때문에 내 컨디션을 마냥 배려해줄 수 없었다. 그게 당연한 거였다.

“라스트 씬, 테이크 1 시작하겠습니다.”

홀이 조용해졌다.

클래퍼보드의 슬랩스틱이 부딪혔고, 카메라가 돌아갔다. 공연장에서처럼 부스럭거리는 소리,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가 뱉었다. 열 때문에 숨이 뜨거웠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은 후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쿵, 내리치듯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며 연주를― 아니,
연기를 시작했다. 미리 녹음을 딴 곡이 한쪽에서 함께 흘러나왔다.

몇 번이나 연습했기 때문에 음과 내 손의 싱크로는 무리 없이 맞아 들어갔다.

나는 초점을 비스듬히 맞춘 채 피아노 건반을 응시하며 손을 놀렸다. 빠르고 음산한 선율이 귓가를 가득 채웠다.

―있잖아. 너는 어쩌다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어?

상념이 하나, 둘씩 떨어져나갔다.

―책을 읽고 있었어요.

―철수야, 직접 연극을 해보지 않을래?

물에 깊이 가라앉듯 주변이 점점 고요해졌다.

열 때문에 의식이 흐릿했고,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 음악과 오직 나만이 남았다. 그 외의 감각은 필요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눈을 감고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다.

비로소 내가 나인지, 극 속의 인물인지 모를 시점까지 깊이 빠져들었을 때. 나는 불현듯 떠올렸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 번.

그 곡에 붙여진 이름은 ‘Appassionata’

즉―, ‘열정’

꿈은 하나의 열병과 같다. 평생을 괴롭히는 열병.

김철수였던 전생에서 화상 때문에 연기를 그만둬야 했던 건, 어쩌면 그 뜨거운 불꽃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려다
데여버린 걸지도 몰랐다.

태양을 쫓던 이카루스가 결국 추락했듯이. 불꽃에 달려드는 부나방이 결국 재가 되어 타버리듯이.

하지만 다시 한 번 주어진 생生에서도 나는 기꺼이 이 불꽃에 몸을 던질 것이다. 내 몸 안에서 타오르는 열꽃이


이끄는 대로. 장렬히 몸을 던지고, 기꺼이 타오를 것이다.

바로 지금의 이 순간처럼.

표류와 이초희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연주의 싱크로가 안 맞거나, 백고운의 연기가 흐트러지면 테이크를 다시 가야 했기 때문에 둘은 그의 연기에


신경이 팔려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시작할 때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둘은 그런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광경이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 백고운은 완벽하게 영화 속 주인공이었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거추장스러운 감각은 필요 없단 듯 눈까지 감아버리고 행위에 순수하게 몰입해있는
저 사람은, 바로 그들이 영화 내에서 구현하려고 했던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눈을 잃어 절망하지만 결국 포기하는 대신 꿈을 향해 다시 한 번 도전하는 것을 택한, 어린 피아니스트.

그가 바로 저기에 현현(顯現)해 있었다.

백고운이 달뜬 숨을 하아, 하아, 내뱉었다. 그의 흉통이 크게 오르락내리락 했다. 그의 손은 가팔라지는 곡에


맞게 점차 거세졌다. 그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백고운이 피아노를 ‘쾅!’ 내리치며 손을 우뚝 멈추었다.

홀이 완전히 고요해졌다.

표류와 이초희는 곡이 끝났다는 걸 몇 초 후에야 알아차렸다.

그리고 둘은 발견했다.

어찌나 세게 피아노를 친 것인지, 백고운의 손끝의 살이 붉게 부풀어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백고운이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살짝 지친 듯 몸을 수그렸다. 땀이 그의 턱을 타고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리고 그때였다.
관객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에게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와 홀을 뒤덮었다.

그야말로, 전율(戰慄)이었다.

애드리브가 되는 배우
10.

피아니스트 정대영은 촬영이 시작되기 전부터 관객석 한쪽에 앉아있었다.

제작비상 관객석을 가득 채울 엑스트라를 섭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손이 남는 스태프들도 머릿수 채우기에


동원되었고, 후반부 대역 촬영을 위해 잠깐 들른 정대영 역시 마찬가지의 이유로 관객석에 앉아 있었다.

카메라가 돌아가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 번 <열정>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앞의 3 분 정도는 백고운이
치고, 나머지 뒷부분은 정대영이 친 바로 그 곡이었다.

미리 해머 뒤에 천을 덧대 소리를 죽인 피아노를 백고운이 누르며 곡에 맞춰 손을 움직였다.

정대영은 곧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건 백고운이 감기몸살에도 연습한 대로 완벽하게 피아노를 쳐서가 아니었다.

정대영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곡이 진행된 지 3 분이 지난 후에도, 백고운의 손이 여전히 음악을 따라가고 있단 것을 말이다.

물론 그가 진짜로 연주하듯 음표 하나하나를 알맞게 치지는 않았다. 뒷부분은 연습한 적이 없으니까.


그러나 최소한 오른손 왼손이 알맞은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의 손은 피아노 음이 높을 때는 오른쪽 건반을
눌렀고, 음이 낮을 때는 왼쪽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그 손의 위치가 심지어 정확한 걸 보니, 아마 정대영이 연주하는 걸 눈여겨보고 폼을 외워두었다가 따라한 것으로
보였다.

어쩐지 자신이 연주할 때 옆에서 빤히 보고 있더라니. 그냥 구경하는 줄 알았는데 연기에 써먹기 위해서인 줄은
몰랐다.

‘대단하네.’

정대영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자신은 연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저 피아노 치는 것에만 어느 정도 조예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고운이 대단하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후반부에는 화면에 백고운의 얼굴만 클로즈업된다. 카메라가 백고운의 맞은편에서 찍기 때문에 그가
연주하는 손은 피아노에 가려 나오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건반 위의 손을 옮길 때 몸이 오른쪽 왼쪽으로 흔들거리며 어깨가 쏠리는 것 정도만 나온다 해야 할까.


그러나 그것조차도 크게 티 나는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백고운은 카메라에 잘 나오지 않는 디테일마저도 저렇게 신경을 써가며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감기몸살로 온 몸에 열이 팔팔 끓는 상태로 말이다. 의식조차 몽롱할 텐데.

아니, 아니다. 정대영은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저건 의식적으로 하는 연기가 아니었다. 저건 무의식적인 동작에 가까웠다. 수없이 많은 시간을 연습하고 또


연습해 몸에 배어버린 동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정대영 그 자신이 연습벌레였기 때문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백고운이 저 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얼마나 꼼꼼히
신경 썼는지, 그리고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지를.

그래, 정대영은 백고운의 저 짧은 연기에서 그것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니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러므로 곡이 끝나는 정확한 타이밍에 백고운이 손을 쾅 내리치고 홀이 일순 정적에 가득 찼을 때, 관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온 건 불가항력이었다.

그 박수가 원래 대본에 있는 액션이긴 했다. 그러나 이렇게 크게 칠 필요는 없다. 어차피 후시 녹음으로
들어가니까.

그러니 이 커다란 박수 소리는 오로지 백고운의 연기에 대한 찬사라고 보는 게 옳았다.

엑스트라들은 일반인이었으니 피아니스트인 정대영만큼 백고운의 디테일을 알아보지는 못했을 테지만, 그들도
본능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백고운의 연기가 훌륭했다는 걸.

멋진 연기란 원래 머리로 이해되기 전에 가슴부터 울리는 법이니까.

정대영도 힘 있게 박수를 짝짝짝 쳤다.

그러나 백고운이 피아노를 전공했다면 인재가 하나 탄생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역시 아깝다―. 내심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날 촬영은 큰 무리 없이 잘 끝냈다.

극한의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이 난다는 속설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 열로 의식이 흐릿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온
에너지를 다 쏟아 부어 연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유증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표류가 ‘고운 씨 컷은 다 땄으니까 이제 병원 가 봐요’라고 말하자마자
배터리가 방전된 듯 의식이 픽 나갔으니까.

눈 떴을 땐 병원이었다. 나중에 들은 거지만, 이초희가 차로 날 데려와주었다고 했다.

무리한 탓에 그날 몸살감기를 제대로 앓았고, 열이 도통 안 떨어져 결국 점장님께 양해를 구해 다음 날까지도


쉬어야만 했다. 하지만 수액을 맞으며 한숨 푹 자고 나니 다음날엔 몸 상태가 많이 개운해졌다.

일주일 뒤쯤이었다. 내가 일하는 편의점으로 표류와 이초희가 찾아왔다.

이초희는 와서 초콜릿이며 젤리며, 온갖 주전부리를 대뜸 쓸어 담더니 이십만 원어치를 넘도록 구매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점장님은 내게 10 분 일찍 가보라고, 친구들이 기다리지 않느냐며 인자하게 웃으며 내
사정을 양해해주셨다.

우리는 편의점 앞 파라솔 의자에 앉아서 이초희가 산 것들을 나눠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몸은 어때요? 괜찮아요?”

표류는 아직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네, 괜찮아요. 병원비도 이 감독님이 내주시고, 덕분에 잘 쉬었어요.”

“어이구, 그건 얘가 당연히 내야지. 고운 씨 아픈 게 누구 때문이었는데. 그러니까 내가 적당히 하라고 했는데


꼭 말을 안 들어요, 얘가.”

표류는 짐짓 식식거리며 이초희를 흘겼다. 그녀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나 때문 맞아. 내가 과했어. 적당히 했어야 했는데, 고운 씨 컨디션을 생각 못 했어. 미안.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더 얘기해.”

“아니에요. 저야말로 컨디션 관리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하죠. 촬영도 괜히 저 때문에 일찍 끝난
것 같고······.”
표류가 얼른 손을 저었다.

“아냐, 그건 진짜 아니에요. 그날은 고운 씨 몸 상태 생각해서 일찍 끝난 게 아니라 진짜로 너무 잘 찍혀서 일찍


끝난 거예요. 빈말 아니고, 진짜로. 별로인데 내가 쉽게 오케이 했을 리가 없잖아요. 나 의외로 일에 있어서는
인정사정없는 놈이에요.”

표류는 그런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듯 웃었다.

“지금 편집 들어가고 있는데 라스트 씬 정말 대박이에요. 편집 끝나면 제일 먼저 고운 씨한테도 영화 보여줄게요.


아무튼, 오늘은 그 얘기 하려고 온 건 아니고.”

표류가 말을 돌렸다.

“고운 씨 촬영도 끝났으니까 좀 한가하죠? 고운 씨도 우리 촬영팀 스태프들도 모두 수고했다는 의미로 MT 나 한


번 갈까 싶은데, 시간 되는 날 있어요?”

이초희가 옆에서 지렁이 젤리를 우물우물 먹으면서 덧붙였다.

“물론 돈은 신경 쓰지 말고, 고운 씨는 몸만 오면 돼.”

그러나 나는 난처히 볼을 긁적였다.

“아··· 죄송해요. MT 갈 시간은 따로 없을 것 같아요. 바로 다음 촬영 들어갈 작품을 좀 찾아보려고요.”

배우 공고 모집 사이트를 확인하지 못한 지 좀 되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새로운 것이 많이 업데이트 되었으리라.

그런데 내 말에 표류와 이초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벌써? 좀 쉬고 들어가지?”

“맞아요. 뭘 그렇게 서둘러요? 그러다 진짜 몸 상해요.”

나는 괜찮다고 웃어보였다. 진짜였으니까.

“얼른 다음 작품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해요. 걱정 마세요. 그렇게 무리하지는 않을게요.”

내 말에 표류와 이초희가 서로를 쳐다보며 무언의 눈짓을 주고받았다.

서울의 어느 한 사무실.

두 중년의 남자가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영화감독 유명한이었다.

유명한은 소설가 출신의 영화감독으로,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영화를 찍는 것으로 이름이 높은 감독이었다.

그리고 그와 술잔을 마주하는 사람은 극단 ‘왕국’의 단장 최호랑이었다.

최호랑은 한때 연극판을 주름잡던 대배우였으나, 이제는 현장에서 물러나 자신의 후배를 양성하는 것에만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유명한과 최호랑이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유명한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전에 내가 부탁했던 거 말이야. 좀 괜찮은 배우는 발견했어?”


최호랑은 오랫동안 극단을 이끌어오며 수많은 배우들을 보고 관리해왔다. 그 때문에 연기를 보는 눈도 높고, 아는
배우들도 많았다.

그래서 유명한은 가끔 원하는 배우가 따로 있을 때(그러니까 특정 이미지의 배우를 구한다거나, 특정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필요하다거나 할 때), 최호랑을 통해 추천받곤 했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에도 역시나 최호랑에게 배우 하나만 찾아봐 줄 순 없냐고 부탁했었다.

그러나 최호랑은 유명한의 말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발견은 무슨. 그런 사람을 어떻게 찾아. 배우에게 의존하는 실험적인 영화를 찍고 싶으니까 애드리브가 되는
배우를 찾아달라고? 말이야 쉽지. 영화 하나를 애드리브 통으로 채워달라는 부탁이나 다름없는데, 그런 배우가
세상에 어디 있어.”

유명한이 변명했다.

“내가 언제 배우의 애드리브로 영화를 채운다고 했어. 커다란 틀 안에서 배우들이 자유도 있게 움직이는 걸 찍고
싶은데, 되도록 애드리브가 되는 배우였으면 좋겠다고 했지.”

“그게 그 말이지.”

“전혀 다르거든. 어쨌거나 진짜로 좀 괜찮은 사람 없어? 너희 극단에는 그래도 그런 사람 꽤 있을 거 아니야.


네가 즉흥 연기도 많이 가르치고 그러잖아.”

유명한이 굳이 매체 배우가 아니라 연극판에서 구해보려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영화나 드라마는 배우의 자율도가 극히 제한되기 때문에 매체 배우들은 애드리브를 할 일이 거의 없다. 안 쓰다


버릇하니 당연히 능력도 떨어진다.

반면 연극판에서부터 연기를 배운 배우들은 그 점에서 훨씬 자유로운 편이다.

무대란 공간은 카메라 속 프레임과 달리 실제로 존재하는 시공간이다. 연극배우들은 일단 막이 올라가면 막이


내려올 때까지 커트를 할 수도, 일시정지를 할 수도 없다. 돌발 상황이 일어나도 배우들의 자체적인 순발력으로
극을 이끌어가야 한다.

연극배우에게 연기력이나 대사전달력뿐 아니라, 상대방과의 대사 호흡, 순간 대처 능력, 무대 장악력 등등이


다양하게 요구되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연극판부터 올라간 배우가 매체 배우로 시작한 배우보다 기초가 탄탄하다고들 한다. 사실 어느
정도는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얘기였다.

하지만 최호랑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우리 극단 애들이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네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은 없어.”

유명한은 팔짱을 끼고 소파에 등을 묻었다. 역시나 무리한 부탁이었을까.

그가 찍으려는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늑대아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사회에서 격리된 채 십 몇 년을 지낸


아이로, 인간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유명한은 그런 인물이 사회에 적응하는 감동 스토리를 그려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유명한은 만들어진 감동 신파는 딱 질색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감독이 노력한다 해도 대본을 이미 만드는
순간부터 그런 작위성의 덫을 피할 수가 없었다.

유명한이 추구하는 건 조금 더 날 것에 가까웠다. 배우들이 자의적으로 참여해서 꾸려나가는 그 무대를 오직


관찰자의 시점에서 담아내고 싶었다. 확실히 전에 없는 실험적 방식이기는 하지만, 잘만 찍으면 분명 재미있는
영화가 나올 거라 유명한은 확신했다.

최호랑이 코웃음쳤다.

“그럴 거면 다큐를 찍어, 영화를 찍지 말고.”

“실제로 그런 인물이 있으면 당연히 다큐를 찍지. 근데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게 영화감이겠어, 뉴스


토픽감이지.”
틀린 말은 또 아니라 최호랑이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유명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차라리 연령대를 훅 낮춰 아역 쪽에서 찾아볼까 싶기도 했는데···.”

속세를 알기 이전의 인물이니까 차라리 아이를 구할까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유명한이 구하고자 하는 배우는 고도로 연기를 잘해서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고 움직여줄 사람이지, 연기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돌아 돌아도 결국은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단 결론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만한 연기력이 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만.

역시나 포기할 수밖에 없나. 간략한 시나리오까지는 일단 대충 있었는데, 캐스팅할 만한 사람을 못 구해 아직


기획 단계도 못 들어가 봤다. 어쩌면 정말로 접어야 할지도 몰랐다. 벌써 3 년이나 준비한 프로젝트로 나름
의욕은 많았는데 말이다.

유명한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최호랑이 결국 어휴 한숨 쉬며 말했다.

“알았어, 일단 내가 더 찾아볼게.”

“그래. 부탁 좀 하자. 내가 또 네 안목 하나는 믿잖아.”

“말은 잘하지. 캐스팅 디렉터 비용이나 지불하고 말하든가.”

그들은 다시 다른 얘기로 돌아가 술잔을 기울였다. 몇 분 뒤, 이번엔 최호랑 쪽에서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참, 너는 이번에 부산국제영화제 가나?”

“아니, 시간이 안 돼서. 너는 가?”

“어, 초대권을 받아서. 작년에 심사위원 했다고 보내 준 모양이더라고.”

“가 봤자 다 영화하는 사람들밖에 없을 텐데, 뭣하러 가?”


“그냥. 거기에 신인 감독이나 배우들이 많잖아. 신인들 특유의 그 반짝반짝한 에너지를 보고 있으면 기분 전환이
좀 되거든. 원석 좀 건져보겠다고 거길 매년 찾아가는 관계자들 보고 있으면 옛날 내 생각도 좀 나고.”

유명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실없이 말을 던졌다.

“그래, 가는 김에 너도 원석 하나 좀 건져와. 이왕이면 내 영화 주인공 맡을 배우 좀 발굴해오면 더 좋고.”

“어이구, 꿈도 꾸지 마셔.”

말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농담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정말로 그런 배우를 발견하게 될 것임을―.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7080 바이브
11.

그러니까 그건 어느 날 갑자기 걸려온 표류의 전화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고운 씨, 큰일 났어요. 후반 막바지 편집하다가 발견한 건데, 꼭 찍어야 하는 씬이 누락됐어요. 편집점을 내가


착각해서 시나리오에서 빠진 것 같은데 급히 다시 찍어야 하거든요. 이번 주 주말에 시간 있어요?

그는 이렇게 급하게 연락을 줘서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했다. 나는 괜찮다고, 시간이 있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주말에는 아르바이트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돌아오는 주말인 오늘, 바로 그 장면을 찍기 위해 가평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래, 나는 분명 그렇게 알고 있었다.


*

“······근데 그건 뭐죠?”

내 말에 표류가 짐을 나르다 말고 ‘응?’ 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표류가 들고 있는 박스― ‘처음처럼’이라는 로고가 떡하니 박혀 있는 박스를 가리켰다.

표류가 멋쩍게 아하하 웃었다. 의심이 확신이 된 순간이었다. 어쩐지 추가 촬영이라면서 대본도 안 주더라니.

“누락된 씬 있다는 거 거짓말이죠?”

“이런, 들켰네. 그렇지만 이렇게 안 하면 고운 씨는 같이 MT 안 갔을 거잖아요. 아녜요?”

나 참. 저번에 내가 MT 를 안 간다고 했을 때 표류와 이초희가 눈짓을 주고받더라니, 그때 이런 꿍꿍이를 꾸민


모양이었다.

내 무언의 긍정에 표류가 고개를 저으며 쯧쯧 혀를 찼다.

“내 생각에 고운 씨는 너무 열심히 해요. 사람은 기계가 아니에요. 좀 쉬엄쉬엄, 기름칠도 하고 그래야 다시


굴러가지.”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리고 정당하게 반박했다.

“이건 기름칠이 아니라 알코올칠이잖아요.”

“뭐, 둘 다 에너지를 낸다는 점에선 비슷하잖아요.”

표류는 어깨를 으쓱이며 능구렁이처럼 넘겼다. 그는 가만 보면 사람이 좀 유들유들한 데가 있었다.


“그냥 뒷풀이 거하게 하는 거라 생각해요. 우리 마지막 촬영 날 때 고운 씨 아파가지고 회식도 못했잖아요. 그
뒤론 어영부영 시간이 지났고. 다들 얼마나 아쉬워했다고요. 그래도 우리한테는 졸작이라서 의미도 깊은데.”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뭐라 하기도 그랬다.

“···네, 알겠어요. 근데 괜찮은 거예요? 이렇게 다 같이 1 박 2 일 갈 수 있을 만큼 제작비가 남았나요?”

“아, 그건 걱정 마요. 이건 우리 물주님인 초희가 쏘는 거니까.”

그때 불쑥 뒤에서 이초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맞아, 고운 씨. 이건 내가 쏘는 거야.”

나와 표류는 고개를 훽 돌려 뒤를 쳐다봤다. 표류가 짐짓 허리를 깊이 숙이며 ‘어이구, 초희 님 오셨습니까’


하는 시늉을 했다. 이초희가 ‘엣헴’ 한 뒤 씩 웃었다.

“그때 내가 고운 씨 너무 혹사시켰잖아. 내 책임이 어느 정도 있다고 통감하고 있었거든. 만약 그날 나 때문에


촬영 펑크 났으면 내가 사비로라도 홀 하나 빌려줄라 했는데, 고운 씨가 워낙 훌륭하게 연기를 해줘서 그럴 일
없게 되었으니까 나한텐 돈 굳은 셈이지.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즐겨.”

표류가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초희, 부잣집 아가씨에요.”

네, 그런 것 같아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자.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거야? 긴말 말고 들어가, 들어가!”

이초희가 내 등을 떠밀면서 버스 위로 올라타게 했다. 결국 못 이기는 척 올라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건, 그들이 챙겨온 술이 내 생각보다는 적었다는 것이었다. 가서 술판을 벌이려는 건 아닌
모양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나만이 유일하게 미성년자이니 아마도 나는 술을 못 얻어먹거나, 거의 시음 수준 정도로만


축일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말은 나 홀로 멀쩡할 거란 뜻이었다. 술이란 원래 다 같이 먹고 헤롱헤롱 해야 재밌는 법이다. 다른


사람들 다 술 마시는 와중에 홀로 멀쩡한 것만큼 재미없는 게 없다.

하지만 표류가 챙겨온 술 박스가 하나인 걸 보니 그렇게 마셔댈 생각은 아닌 듯 했다. 저건 기껏해야 스태프 한
명에게 하나씩 돌아가는 수준일 테니까.

나는 안심했다.

그러나 곧 버스가 출발하고, 오래지 않아 나는 알게 되었다.

그 박스는 가서 마시는 용이 아니라, 가는 길에 마시는 용이었다는 것을.

“아, 티아라가 부릅니다. 처음처럼!”

조연출이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숟가락을 들고 외치더니, 노래방 반주가 흘러나왔다.

“처 처음처럼! 처럼! 처 처 처음처럼!”

앉아있는 스태프들이 흥에 겨워선 떼창 했다.

그건 몇 분 전의 일이었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표류와 조연출이 박스를 뜯더니, 버스에 앉아있는 스태프들에게
일사분란하게 술을 돌렸다. 그리고 스태프들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안줏거리로 먹을 과자를 품에서 부스럭거리며
꺼냈다.

그리고 다시 몇 분이 흘렀고. 지금의 이 상태가 된 거다.

“나를 묶고 가둔 다면 사랑도 묶인 채! 미래도 묶인 채! 커질 수 없는데!”

어떻게 해야 5 분도 안 되는 시간에 이렇게 분위기가 180 도 달라질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는요, 오빠가! 좋은 거어어얼!

“아이쿠, 하나 둘!”

“암 인 마 드리이이이이이 이이이이이이이 히이이이이이―!!!”

몇몇은 삼단고음을 내지르고 있었고, 몇몇은 병나발을 불었다. 한두 명은 그 좁은 버스 통로로 나와 춤을 추기도


했다.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기사도 스태프라, 말리기는커녕 ‘하하’ 웃으며 그저


노랫소리를 더 키워주었다.

흥으로 버스가 들썩들썩 했다. 나도 대학 다닐 때 MT 를 자주 갔었는데, 옛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동시에 요즘 젊은 친구들은 참 활기차고 시끄럽게 노는구나, 하고 조금 서먹해지기도 했다.

그때 이초희가 뒤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고 나를 불렀다.

“고운 씨! 우리 막내 배우님! 한 곡 뽑아보지?!”

술을 벌써 얼마나 먹은 건지 이초희의 얼굴은 불그스레했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놀자니 좀 그렇기도 해서 나는


그냥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뇨, 전 괜찮······.”

“좋아하는 가수 누구야? 말만 해! 다 있어! 투애니원?! 원더걸스? 소녀시대? 아니면 남자 아이돌 쪽?”

“아뇨, 저는······.”

“아, 노래 못 부르는구나! 괜찮아요, 괜찮아!”

옆에서 표류가 끼어들었다.

“아냐, 고운 씨가 얼마나 노래 잘하는데. 저번에 버스킹도 했었다고. 그죠?”

“뭐? 그랬어? 뭐야, 언제 나 빼고 그런 이벤트를 했었대? 나도 들려줘!”

이초희가 표류를 향해 물었다.

“그때 고운 씨 뭐 불렀어?”

“렛잇비랑 댄싱퀸.”

“그럼 그거 틀어줄까, 고운 씨?”

이초희가 당장이라도 신청할 듯 노래방 기계를 들었다. 여기서 더 빼기도 뭣해 결국 나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슬쩍 말을 꺼냈다.

“아뇨, 저는 그거 말고······.”

그건 기타 치려고 외워둔 노래들이었고, 좋아하는 노래들은 따로 있었다. 이초희와 표류, 그리고 조연출과 다른
스태프들까지 나를 기대감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그 앞에 대고 나는 말했다.

“들국화의 ‘매일 그대와’나 산울림의 ‘청춘’ 신청할게요.”

이초희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건 표류와 조연출도 마찬가지였다. 묘한 정적에 나는 아차 싶었다. 너무 옛날


노래인가? 나는 재빨리 말을 변경했다.
“그러면 전람회의 ‘취중진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노영심의 ‘그리움만 쌓이네’···.”

말하면 말할수록 어쩐지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내 목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표류가 어색히 아하하
웃었다.

“고운 씨 옛날 노래 좋아하구나. 그런데 음··· 아이돌 곡은 몰라요? 뭣하면 HOT 나··· 핑클이나···
서태지라거나···.”

“제가 발라드를 좋아해서 아이돌 곡은 잘 몰라요.”

“아, 발라드.”

표류가 깨달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조연출이 ‘발라드 좋죠······’하고 옆에서 중얼거렸다. 표류가
애썼다.

“그럼 신나는 곡은 아예 없어요? 아무거나 괜찮은데.”

“아, 하나 알긴 알아요. 그럼 그걸로 부를까요?”

문득 떠오르는 곡이 하나 있어서 그렇게 말했다. 표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좋죠!”

그리고 그날 내 별명은.

“어, 연어 씨!”

연어가 되었다. 강산에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을 불렀더니 이렇게 되었다.
“연어 씨 어디가요?!”

“···화장실이요.”

“알았어요. 화장실만 가야 돼요! 강을 거슬러 올라가진 말고!”

나를 부른 스태프가 나를 놀렸고, 펜션 1 층에서 옹기종기 모여 술을 마시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머쓱히 고개를 꾸벅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노래 정도면 충분히 신나는 노래인 것 같은데. 그런데 그 노래를 선곡하자 사람들이 갑자기
다 빵 터지더니, 급기야 나중에는 연어 씨, 하면서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요즘 세대 친구들의 입장에서 보면 좀 올드한 취향의 노래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7080 노래 중에


얼마나 좋은 게 많은데. 나는 꿋꿋이 생각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쏴아아―.

손을 씻고 화장실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거나하게 취해선 몸을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송골매 쿵쿵따!”

“매니저 쿵쿵따!”

“저팔계 쿵쿵따!”

“계, 계, 계······.”

“아,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쭉!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멀쩡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멀쩡한 사람으로 있는 것도 심심한 법이라, 나는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외투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다.

늦은 밤이라 밖은 깜깜했다. 곳곳의 가로등이 산책로에 불을 밝히고 있었고, 날벌레가 전구를 휘돌며 윙윙 날고
있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나는 평상에 앉아 외투 안주머니에 있던 프린트를 꺼냈다. 그냥 심심풀이로 읽고 있는 대본이었다.

막 그 프린트를 들여다보는데, 그때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운 씨? 여기서 뭐해요?”

뒤를 돌아보자 표류가 있었다.

“감독님은요?”

“나는 술 좀 깨려고요. 게임을 못 해서 계속 마셨더니 으.”

표류가 앓는 소리를 내며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곤 내가 들고 있는 프린트를 발견했다. 그가 ‘이야’ 소리를


냈다.

“여기까지 와서도 대본 보는 거예요? 진짜 장난 아니다. 역시 고운 씨는 천생 배우네.”

그러더니 그가 갑자기 뭔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고운 씨는 이름에서부터 딱 배우니까.”

“네?”

“왜, 이름에 ‘배우’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잖아요. ‘백’과 끝의 ‘운’에서 받침만 빼서 붙이면 ‘배우’
이니까.”

아, 그러네? 처음 알아차린 사실이었다.

“정말이네요. 신기하네.”

“사람이 이름 따라 간단 말도 있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 진짜 이름은 ‘김철수’로, 배우를 하기엔 너무 평범한 이름이었으니 완전히 맞는 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 김철수는 죽고 이젠 백고운이 되었으니 또 완전히 틀린 것 같지도 않긴 했다.

“감독님은 그럼 여행 좋아해요? 이름이 ‘표류’시잖아요.”

“아하하. 그런 질문 진짜 많이 받았어요. 결과적으로 말하면, 땡. 안 좋아해요. 애초에 내가 지은 이름도


아닌데요. 부모님이 지었지. 우리 부모님이 자식 이름 특이하게 짓는 거 좋아하거든요.”

그가 그렇게 말하니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혹시 감독님 형제 있어요?”

“네. 여동생 하나 있어요.”

“그러면 동생 분 이름도 특이한가요?”

“그런 질문 할 줄 알았어. 네, 동생 이름도 평범하지는 않죠. 한 번 맞춰 볼래요?”

나는 ‘끙’하고 눈을 굴렸다. 평범하지 않은 이름. 성이 ‘표’ 씨······.

“표주박?”

“······.”

“표고버섯?”

표류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

“······혹시 진심이에요?”
“······죄송해요.”

나는 멋쩍게 사과했다.

좀 썰렁했나. 농담이었는데.

쩝.

부산국제영화제 GV
12.

표류가 중얼거렸다.

“고운 씨는··· 생긴 건 안 그런데 우리 교수님이랑 참 닮은 것 같아요. 음악 취향이나··· 개그 스타일 같은


것이······.”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답을 말해주었다.

“동생 이름은 ‘정’이에요. 외자. 보통은 그냥 정아라고 불리고.”

표정. 성이랑 붙으니 확실히 특이하긴 했지만, 이름만 떼어놓고 보면 예쁜 이름이었다.

“동생 분 이름이 참 예쁘시네요.”

동생 이름 갖고 놀리는 걸로 들렸을 수도 있겠다 싶어 뒤늦게 다시 한 번 사과했다. 표류가 피식 웃었다.

“보니까 고운 씨 의외로 엉뚱한 면이 있네요.”

“제가요?”
“예. 사실 고운 씨가 좀 모범생 이미지잖아요. 매사에 열심이고 성실하고, 예의바르고 건실하고 착하기까지 해.
근데 또 연기할 때는 완전히 딴 사람처럼 미친 것 같고······ 아, 물론 좋은 뜻이에요. 그러니까 인성도 되고
재능도 되는, 너무 완벽하단 거죠.”

“아, 감사합······.”

“근데 사람이 너무 완벽하면 좀 재수 없는 법이잖아요? 근데 고운 씨는 은근히 허당미도 좀 있다 해야 하나.


그런 부장님 개그는 따로 배우려고 해도 못 할 것 같은데.”

나는 눈을 굴렸다. 칭찬인 건가······?

표류가 키득거렸다.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 이거죠.”

“아무래도 감독님 저 지금 놀리시는 것 같은데요.”

“그걸 이제 알아차렸어요? 고운 씨 이런 거엔 좀 둔한 편이네.”

“감독님은 술을 마시면 좀 풀어지는 편인가 봐요.”

“아하하. 미안미안. 봐 줘요. 그 동안 내가 일을 좀 열심히 했거든요.”

“일이요?”

“우리 영화 후반 편집 말이에요. 잠도 못 자고 편집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작업했거든요.”

표류가 별이 총총 뜬 밤하늘을 바라봤다. 그가 술로 살짝 뜨거워진 입김을 하― 내뱉었다.

“이번 작품, 진짜 제대로 만들고 싶어서 욕심 좀 부렸죠.”

그 말에서 표류의 애착이 뚝뚝 묻어났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었는데, 혹시 옛날에 피아노 전공하셨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번 작품, 감독님의 자화상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요. 주인공 이름도 ‘표현’이잖아요. 그래서 영화 제목도 <
운명의 표현>인 거고. 처음엔 그 표현하다의 그 표현에서 따온 줄로만 알았는데, 감독님 이름과 비슷한 걸
보니까 뭔가 의미가 더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표류가 웃었다.

“역시 고운 씨 똑똑하네요. 맞아요. 옛날에 피아노 전공했어요. 그래서 초희랑은 고등학교에서 만나기 전에도
이미 알던 사이였어요. 아, 내가 말한 적 있나? 초희도 대한예고 졸업생이에요. 걔는 음악과, 나는 연영과. 나
영화 공부하는 거 보고 애가 흥미보이더니 자기도 영화 찍겠다고 바이올린 때려 치고 대학도 연영과 온 거거든요.
뭐, 암튼 그 얘긴 여담이고.”

표류가 제 손을 밤하늘에 대고 들어 보였다.

“어렸을 때 나름 피아노 유망주였는데 손을 좀 다쳤거든요. 그 이후에 손을 빠르게 움직이는 게 잘 안 돼서 그만


뒀어요. 근데 그만큼 더 좋아하는 영화를 만나게 됐으니 뭐, 슬픈 이야기는 아니에요. 어쨌거나 지금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하고 나름 재미있고 행복하니까.”

표류가 손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가 문득 진솔하게 가라앉았다.

“영화에서는 시련과 고난에도 꿈을 포기하지 마라! 이런 식으로 그려내긴 했지만··· 사실 그건 영화잖아요.


모든 사람이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는 것도 좋지만 결국 그게 안 됐다고 해서
실패한 삶은 아니잖아요. 거창한 꿈까진 없어도 그냥 소소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건
작품과 별개로, 그냥 개인적인 내 생각.”

그의 말에서 그의 인간적인 모습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참 따뜻하고 다정한 영화를 만들겠구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술에 취해서 별 소리를 다 하네.”

표류가 뒤늦게 부끄러운지 쑥스럽게 웃었다. 나는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뭘요. 그리고 제 생각엔, 그건 꿈을 포기한 게 아니라 약간 모습이 달라진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결국 감독님은
이번 영화를 통해서 언젠가 꿈꿨었던 모습을 그려 보인 거잖아요. 피아노를 계속 치는 주인공.”
사람들은 자신에게 남은 미련을 어떻게든 해소하고자 한다. 표류는 자신이 관둬야 했지만 내심 원했던 모습을
영화로 대신 표현해 승화시키고자 한 것뿐이다. 그것이 가치가 낮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감독님이 얼마나 피아노를 좋아했는지 영화 찍는 내내 충분히 알겠더라고요. 실은 저도 옛날에 얼굴에 화상을


입어서 연기를 관둘 뻔한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감독님이 어떤 마음인지 잘 알아요. 저는 우연히 좋은 기회로
다시 얼굴이 나아지긴 했지만요.”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그럼에도 꿈을 계속 이뤄나가는 사람이 있고, 방향을 트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 그건 다름이지 틀림이 아니었다.

표류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살짝 붉어진 눈을 재빨리 위로 치켰다. 그가 눈을 깜빡거리면서 짐짓 장난스럽게


코를 킁 삼켰다.

“진짜 고운 씨 사람 감동 먹게 하는 데 뭐 있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그런 대화들이 막 마무리 될 때, 마침 누군가 우릴 우렁차게 불렀다.

“야, 거기 둘! 뭐해?!”

우리 둘은 뒤를 돌아보았고, 이초희가 펜션 입구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얼른 들어와. 술 게임할 사람 부족해.”

“이크, 땡땡이 끝이네요.”

표류가 웃으며 들어가자고 내 등을 살짝 두드렸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고, 밤늦도록 놀았다. 이초희의 공격적인 술 게임에 표류는 몇 잔 더 마시더니 오래지 않아
뻗어버렸다.

늦은 시간이 되자 흥도 가라앉고 남아 있는 사람도 적어졌다. 이초희와 나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눴다.


“표 감독님은 술이 약한가 봐요.”

“류? 아, 피곤해서 그래. 그 동안 빡세게 후반 편집 했거든. 들었나, 고운 씨? 류가 이번 영화 부국제 출품한


거.”

처음 듣는 얘기라 고개를 저었다.

부국제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말하는 것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영화계인들이 주목하는 영화제로, 한국에서 제일 큰 영화제라 할 수


있었다. 특히 매년 기라성 같은 신인들이 이 영화제를 통해 데뷔하거나 발굴되곤 한다.

그런데 설마 거기에 우리 영화를 출품했을 줄은 몰랐다.

“그거 출품 기간 맞춘다고 아주 죽는 줄 알았지. 결과가 아마 내일인가 나올 거야. 그니까 겸사겸사 오늘 오자고


한 거거든. 내일 결과 떴을 때 부국제 선정작 되면 축하 파티로, 안 되면 위로 파티라고 하자고. 고운 씨한테는
말 안 한 걸 보니까 쟤 나름 맘 졸이고 있나 보네.”

청룡영화상이나 백상예술대상과 같은 상들은 감독보다는 배우들이 주목 받는 경향이 강했다.

반면 부국제와 같은 경우는 조금 더 감독이 주목 받는 영화제였다. 달리 말하자면, 감독이 영화를 잘 만들어야


영화가 상을 받는다고 해야 할까.

표류가 굳이 내게 부국제 출품 소식을 얘기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설레발 쳐놓고 안 되면


좀 민망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비식 웃으며 맞장구쳤다.

“잘 됐으면 좋겠네요.”

“그러게. 나도 이번에 완전 열심히 했는데.”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표류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부르르 울렸다. 그가 잠에서 깼다.

“누구야, 이런 시간에······.”

그가 설풋 짜증을 내며 눈을 게슴츠레 뜨고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한숨을 쉬며 주섬주섬


일어났다.

“나 잠깐 전화 좀.”

“누구?”

“여동생.”

표류가 잠과 술이 덜 깨서 피곤한 낯으로 슬리퍼를 찍찍 신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면서 전화를 받았다.

“응, 왜? 나 오늘 자고 들어간다고 말 했잖······.”

그의 목소리가 문이 탁 닫히면서 끊겼다.

이초희가 졸린 건지 하품을 쩍 했다. 벌써 한밤중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이초희가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주섬주섬
일어났다.

“아이고, 나도 이제 자러 가야겠다. 고운 씨는 어떻게, 더 있을 거야?”

“저도 자야죠. 화장실만 갔다가요.”

우리가 막 같이 일어났을 때였다.

벌컥―.
“모두 기상!!”

표류가 안으로 불쑥 들어오더니 크게 외쳤다. 나와 이초희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뻗어 있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놀라서 ‘뭐야, 뭐야’하면서 고개를 퍼뜩 들었다. 어리벙벙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그들은 곧 고성의 진원지가 표류인 걸 알아차렸다. 그들이 막 표류에게 짜증을 내려고 했다.

표류가 먼저 외치지 않았다면 말이다.

“우리 부국제 초대 받았다!!”

“뭐?!?!”

그러자 펜션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다.

표류의 입가가 헤벌쭉 찢어져 있었다. 그가 전하길, 원래 내일 발표가 되는 건데 하루 앞당겨져서 오늘 발표가


되었다고 했다. 자신의 여동생이 집에서 확인하고 그에게 알려주려 급히 전화했단다.

“뭐야. 깜짝카메라 아니지, 이거?!”

“선배님, 이거 거짓말이면 진짜 미워할 겁니다!”

믿기지 않아 급기야 표류를 의심하던 스태프들도 오래지 않아 진짜 그들이 부국제에 초대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악! 어떡해!! 진짜야!!!”

그들이 손에 손 잡고 방방 뛰며 환호했다.

방에 가서 잔다던 이초희가 갑자기 의자에 발을 올리고 독립투사처럼 장렬하게 소리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모두 집합!! 술 더 가지고 와!!! 오늘은 모두 잠 안 잔다!!!!”

버스에서 1 차, 도착해서 2 차. 그리고 이제 막 3 차 술 파티가 시작될 참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꽃은 단연 GV 이다.

나는 <운명의 표현>의 주연 배우였기 때문에 감독인 표류와 함께 GV 에 참가해야 했다.

아르바이트가 있는 나는 나중에 부산으로 향하기로 했고, 표류와 이초희를 비롯한 촬영팀 식구들은 먼저 내려가
있었다.

그리고 GV 당일 날, 나는 부산에 도착했다. 표류와 이초희가 마중을 나왔다.

나름 오랜만에 보는 거라 표류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이초희는 대뜸 입을 떡 벌렸다.

“고운 씨! 설마 그 차림으로 GV 를 가려는 건 아니지?”

“···제일 좋은 옷으로 입고 온 건데요.”

셔츠에 검은색 슬랙스. 이 정도면 아주 무난한 차림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정장은 돈이 없어서 구매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대충은 격식 있는 차림새로 보이게 입고 온 건데.

“안 되지, 안 돼. 고운 씨는 이걸로 처음 얼굴 알리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폼 나게 입어야지. 누가 봐도 나


배우에요! 느껴지게. 게다가 우리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이 몇 명이나 되는데!”

이초희가 흐흐 웃었다. 얼굴 만면에 신난 기색이 완연했다. 그리고 그건 표류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벌써부터
흥분으로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둘이 왜 그러는지 뻔히 알았기 때문에 나는 모른 척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맞다. 그러고 보니 저희 작품이 관객수가 제일 많죠?”

그동안 제법 많은 일이 있었다.

어디서 이야기가 퍼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운명의 표현>이 부국제 관계자들에게 꽤나 깊은 인상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우리 영화가 이번에 상을 받을 유력한 경쟁작이라는 소문이 알음알음 돌았고, 그 입소문 덕분에 우리 영화는 표가
열리자마자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이 기세로 보면 배급사에서 컨택이 올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 영화가 일반 극장에 걸릴 수도 있단


뜻이었다. 덕분에 우리 촬영팀은 아주 매일이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옷을 갈아입지는 않았으나, 이초희의 성화에 결국 머리단장까지는 받았다. 그러고 우리는 함께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관에는 빼곡히 관람객이 차 있었고, 앞 열에는 간간히 카메라를 든 기자들도 보였다.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광경이었다.

GV 는 영화를 다 같이 관람한 후에 이어지는 게 순서였다. 극장이 어두워지고 조용한 가운데 영화가 시작됐다.

편집본을 표류에게서 받아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니까 기분이 색달랐다.

그리고 영화를 보니 표류와 이초희가 힘썼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영화 편집이 저예산답지 않게 아주 매끄러웠고, 삽입된 음악도 극장에서 커다란 사운드로 들으니 훨씬 풍부했다.

특히 마지막 씬의 베토벤 <열정>이 터져 나올 때는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확실히 표류가 삼고초려해서 이초희를


데려오려고 애썼던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내가 그녀를 흘긋 바라보자, 그녀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브이 하며
내게 씩 웃어보였다.

그리고 드디어 GV 가 시작됐다. 나와 표류가 앞으로 나섰고, 사회자가 우리를 소개했다. 박수소리와 셔터소리가
연신 터졌다.

7 년 만에 처음 대중 앞에 나서는 거라 떨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러지는 않았다. 뭉클한 감회는 느껴졌지만


말이다.

나는 차분함을 유지한 채 표류가 사회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걸 들었다.

“주인공인 ‘표현’이란 인물은 어떻게 보면 제 페르소나에 가장 가까운 인물입니다······ 시나리오는


재작년부터 준비했는데 처음엔 중단편이었다가 장편이 되어버렸고 이건 장편으로밖에 찍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받은 독립영화제작지원금, 그리고 예전에 단편 영화제에서 받은 상금, 그리고
제 사비를 합쳐서 총 제작비 삼천만 원으로 시작해······.”

몇몇 이야기는 저번 MT 때 들어 알고 있던 얘기기도 했고, 몇몇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어서 마이크가 내 순번으로 넘어왔다. 사회자가 먼저 감탄을 하고 시작했다.

“백고운 배우님. 영화에서 아주 강렬한 연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저뿐 아니라 모든 관객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고


계실 텐데, 혹시 그 초점 다른 눈 연기는 연습을 따로 하신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촬영에 안정적으로 임하기 위해서 따로 연습을 했었습니다. 그 외에 피아노 치는 연기를
위해서 피아노 연습도 하고 그랬습니다.”

“감독님이 요구한 게 많았네요.”

“그보다는 제 욕심이 컸죠. 신인인 저를 덜컥 주연으로 캐스팅해주셨는데 제가 작품에 누를 끼치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노력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정석적이고 훈훈한 얘기를 이어가고 있는 그때였다.

관객 열 앞쪽에서 기자 한명이 손을 불쑥 들었다. 분위기가 좋다보니 사회자는 그 기자를 커트하는 대신 발언권을


주었다.
그러나 기자는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혹시 그 눈 연기 지금 한번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그가 떠벌였다.

“기사에 쓸 사진을 좀 찍고 싶습니다. 시각 장애인처럼 포즈 한 번만 취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표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그 기자에게 화를 내기 위해 내가 가진 마이크를 가져가려고 할 때였다.

내가 한 발 더 빨랐다.

나는 마이크의 소리를 켜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13.

극단 ‘왕국’의 단장 최호랑은 부산에서 머무르는 일주일 동안 여러 부국제 영화를 봤다.

그 중엔 <운명의 표현>이란 영화도 있었다. 아주 잘 만든 영화였다. 유력한 수상후보라더니, 과연 그럴 법했다.

하지만 최호랑은 영화감독이 아니라 연기자였다. 그것도 한 극단을 이끌고 연기자를 양성하는 단장.

자연히 그의 관심은 그 영화의 만듦새 그 자체보단 그 영화에 출연하는 젊은 배우에게 더 쏠렸다.

‘이름이······ 백고운? 완전히 처음 듣는 이름인데. 어디서 저런 배우가 툭 튀어나왔지?’


이 영화가 첫 작품이라고 했는데 연기가 아주 수준급이었다.

영화 러닝 타임 내내 거의 주인공 한 사람만 나오다보면 보통은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백고운의 완급


조절이 뛰어나서 관람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는 영화 내에서 세상 서럽게 울기도 했고, 강렬하게 분노를 터트리기도 했으며, 또 그러다가도 완전히 텅
비어버려 껍질만 남은 멍한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김치 국물이 눈에 들어가는데도 도리어 눈을 부릅뜨고 가윗날을 내려찍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기까지 했다.

타이틀 롤의 주연 배우가 러닝 타임 60 분을 이끌고 갔다. 그것도 아주 여유롭게. 관객들의 흥미를 놓치지


않으면서.

그것만으로도 연기 실력은 이미 보증되었단 뜻이다.

‘저 배우, GV 끝나면 여러 에이전시한테서 명함 좀 받겠네.’

아주 잠깐 동안 최호랑 자신도 컨택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로 데뷔했으니 연극엔 그다지 관심이 없을
것 같아 보이니 그쪽은 아니었고.

‘분명 유명한이가 부탁한 배우의 나이대가 딱 저 정도였지, 아마?’

유명한 감독 이름이야 영화 하는 사람 중에 모를 사람은 없었으니 저 배우에게 말을 꺼내면 할렐루야 하면서


하겠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연기 실력이 그 정도까지 될까.’

유명한이 원하는 배우는 훨씬 고난이도의 연기력을 갖춰야 했다.

이 세상 어떤 배우가 오직 자신의 해석과 애드리브만으로 극을 통째로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아무리 즉흥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 해도 곤혹스러워할 것이다.

어지간한 20 년차 30 년차 중견 배우들도 어려워할 텐데 유명한은 그런 연기를 청소년 나이대의 배우에게서 원하고


있으니 문제였다.

사실 그에게는 찾아보겠노라고 말했지만, 최호랑 그 자신조차도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별로 없었다.

‘아역 배우 몸에 중견 배우 영혼이 들어갔다면 모를까, 그런 사람을 어떻게 찾겠어.’

그래서 최호랑은 백고운에게 말 꺼내볼 결심을 금방 그만두었다.

잠재력은 보였지만, 딱 그뿐. 아직 잘 모르는 배우였다. 영화 한 편을 본 게 고작이다. 최호랑은 그런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저 젊은 배우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최호랑은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GV 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한 기자가 무례한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기사에 쓸 사진을 좀 찍고 싶습니다. 시각 장애인처럼 포즈 한 번만 취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영화관 내부의 분위기가 살짝 싸늘해졌다. 몇몇이 불편한 헛기침을 내뱉었고, 사회자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기자는 여전히 저열하게 빙글거리고 있었다.

감독인 표류는 화가 났는지 백고운이 갖고 있는 마이크를 가져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백고운이 한 발 빨랐다. 백고운이 마이크의 소리를 키고 담담히 말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시각 장애인‘처럼’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예?”

“아실지 모르겠지만 시각 장애인이라고 모두 다 똑같진 않습니다. 시각 장애인은 전맹 그러니까 아예 안 보이는


사람, 그리고 저시력이 남아있는 사람 둘 다를 의미하거든요. 후자의 경우에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보이는
사람이 있고, 빛과 어둠을 구분해 사물의 윤곽 정도만 파악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요.”

갑자기 시작된 지식 강의에 기자가 멈칫했다.

“뿐만 아니라, 눈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영화에서 제가 연기했던 것처럼 눈에 변형이 온 시각 장애인도 있지만,
눈의 변형이 없어서 겉보기엔 다른 사람과 별 다른 차이 없는 시각 장애인들도 있습니다. 때문에 ‘
시각장애인처럼’ 이라는 말로는 기자님이 정확히 뭘 뜻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장애의 경우가 워낙
다양해서요.”

“아니, 나는 영화에서 한 것처럼······.”

기자는 백고운의 예상외의 반응에 당황한 것 같았다.

한편 백고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고 있는 관객들 몇몇은 웃음을 꾹 눌러 참는 듯 ‘큭’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속된 말로 하자면 지금 백고운은 아주 정중하고 세련되게 기자를 꼽주고 있는 것이었다.

너는 지금 장애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예의도 없으며, 나는 바로 그러한 네 무지를 지적하고 있는 중이다―


뭐 그런 뜻이었다. 딱히 기자는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백고운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설사 어떤 연기를 보여 달라고 콕 집어주신다고 해도, 죄송하지만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영화를 찍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시각 장애인 연기를 해야 했지만, 그건 작품을 위한 것일 뿐 그 밖의 다른 어떤 목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연기를 보인다면, 그 과정에서 제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시각 장애를 희화화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우려됩니다. 기자님에게는 그러한 의도가
없으셨겠지만, 제가 워낙 조심스러워서 기자님께서도 넓은 아량으로 양해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까와 달리 이번엔 영화관의 공기가 숙연과 놀라움으로 묵직해졌다.


백고운이 했던 첫 번째 말은 비꼼에 가까웠다. 때문에 그 말뜻을 알아들은 사람들은 통쾌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말은 달랐다.

백고운은 지금 타인의 장애를 단순히 구경거리, 흥밋거리를 위해 재현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는 상대방의 무례에 대한 분노보다는, 오로지 진중한 진심만이 들어 있었다.

충분히 기자의 요구에 정당한 화를 낼 수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감독인 표류는 거의 그럴 뻔했다.


하지만 백고운은 그러는 대신 예의바르게 자신의 생각을 담담히 전달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는 얼굴을 붉혔지만 화를 낼 순 없었다. 백고운이 저렇게 부드럽게 나오는데 이 상황에서
자신이 화를 낸다면 나쁜 쪽은 그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무안스럽게 사과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도 살짝 불편한 듯
얼굴을 씰룩거렸지만, 더 이상 분위기를 깨지는 않았다.

자칫하면 GV 분위기가 싸해질 수 있었는데도 백고운의 의연한 대처 덕에 잘 수습되었다.

그러니 관객들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고운 옆에 앉아있는 표류 역시 흐뭇하고 뿌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최호랑 역시 비슷했다.

‘저거······ 물건이네.’

최호랑은 살짝 놀라움이 담긴 눈으로 백고운이란 배우를 천천히 살폈다.


생각도 깊었고, 태도도 어른스럽다. 고작 19 살이 벌써 나이 사오십 먹은 사람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최호랑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결심을 내렸다.

‘마음에 드네. 한 번 얘기를 나눠 볼 가치는 있겠어.’

중간에 한 번 위기가 있었지만 다행히 GV 후반부엔 분위기가 다시 좋아졌다. 촬영 끝난 후 MT 를 가기 위해


표류가 나를 속였단 이야기를 할 땐 관객이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GV 는 무난히 끝났고, 우리는 관객과 사회자에게 감사하단 인사를 표하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안녕하세요, 백고운 배우님. 저는 케이엔터테인먼트의 박 실장이라고 합니다.”

세련된 여자가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나는 일단 명함을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영화 너무 잘 봤습니다. 백 배우님의 연기에 정말 감탄했고요. 혹시 소속된 에이전시가 없으시다면 저희 회사와


함께 해보는 건 어떠실까요?”

제법 단도직입적이었다. 내 옆에 있던 표류가 놀란 눈치로 날 봤다.

그도 그럴 것이, 케이엔터는 거대 엔터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인지도 있는 회사였다.

특히 케이엔터는 가능성 있는 신인들을 영입해 꾸준하고 성실히 작품에 출연시켜 결국은 배우를 띄우는 방식으로
유명했다. 사기꾼들이 워낙 많은 이쪽 바닥 특성상 드물게 신뢰도 높은 회사라고 할 수 있었다.
부국제에서 얼굴도 알렸겠다, 이르면 빠른 시일 내에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올 거라 생각하긴 했다. 그래서 일부러
아마추어 작업의 오디션을 찾아다니는 대신 부국제 날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초장부터 꽤 괜찮은 곳에서 손을 내밀어 올 줄은 몰랐다. 좋은 신호였다.

물론 그렇다고 당장 결정을 내릴 순 없었다. 일주일 정도면 연락할 곳은 다 연락해올 테니, 그 이후에 선택해도
된다.

당연히 그때는 내게 제일 좋은 조건을 따져서 에이전시를 고를 생각이었다. 에이전시는 배우 생활의 첫 단추나


다름없었다. 그 첫 단추를 잘 꿰는 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재는 듯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속내를 익숙히 숨기고 빙그레 웃은 채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다는 답변을 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잠시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곧이어 깜짝 놀랐다.

연기자 최호랑이 거기에 있었다.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나를 불렀다.

“백고운 배우?”

“최호랑 선배님?!”

“오. 혹시 나를 알고 있나?”

모를 리가!
최호랑이 누군가. 연극판을 한 번이라도 거친 사람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중견 연극 배우였다.

나 역시 대학생 때 연극부 활동을 한 적 있었다. 그때 공부하겠다고 최호랑이 나오는 연극을 얼마나 많이 봤던가.

그는 80-90 년대에 연극계를 주름잡았었고, 2000 년대 초에는 영화나 드라마에 조연으로 얼굴을 비추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은퇴해서 극단 단장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가 운영하는 극단 ‘왕국’은 한국에서 제일 커다란
극단이었다.

“그럼요. 정말 존경하고 있습니다.”

“젊은 친구들은 날 잘 못 알아보던데, 신기하군. 아, 말 도중에 끼어들어서 미안합니다. 잠시 백 배우와 얘기


좀 나눠도 되겠습니까?”

최호랑은 박 실장에게 양해를 구했고, 그녀는 괜찮다고 말했다. 최호랑은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말 놓아도 되나?”

“그럼요. 물론입니다.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그래. 유명한 감독이라고 알지? 그 감독이 나더러 청소년 배우 하나 좀 구해달라고 했는데, 연기력이 많이
필요한 배역이라 지금 좀 까다로운 상태거든. 그 친구는 연극판 쪽에서 배우를 구하고 싶어 하고 있고. 그래서
일단은 내 단원들을 대상으로 한 달 동안 1 차 오디션을 보고 괜찮은 사람을 추려서 유 감독에게 프로필을 넘길
생각인데. 혹시 관심 있다면 백고운 배우도 한번 참여해보지 않겠나?”

가벼운 제안, 그러나 거기에 담긴 말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유명한 감독이라니! 표류와 박 실장의 눈도 동그랗게 커졌다.

그런데 그때 최호랑이 덧붙이듯 못을 박았다.

“물론 참여했다가 안 될 수도 있다네. 그리고 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배우가 두 일을 동시에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 오디션이라도 열과 성을 다해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다른 길이 이미 보장되어 있는 사람은 절박함이
떨어지거든.”

최호랑이 박 실장을 살짝 눈짓했다.

우리 모두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에이전시에 들어간 후에 오디션을 볼 거라면 그냥 여기서 거절하란 뜻이었다.

다짜고짜 에이전시와 오디션 둘 중에 양자일택 하라는 최호랑의 말은, 확실히 그다웠다. 그는 이름만큼 무서운
사람으로 연극배우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깐깐하고 고집 센 성격 탓이었다.

이리하여 내 앞엔 두 개의 선택지가 놓였다.

에이전시는 안전한 선택이었다. 에이전시에 들어가면 조연이긴 하지만 작품에 당장 들어갈 수 있다. 물론 그
이후로도 꾸준히 작품에 출연할 수 있을 테고.

반면 최호랑의 오디션은 도박이었다. 유명한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에이전시를


골라갈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오디션에서 떨어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로우리스크 로우리턴,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만약 내가 다른 문제로 고민했다면 전자를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네, 하겠습니다.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나는 즉답하며 최호랑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이어서 박 실장에게도 명함을 돌려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당장은 에이전시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박 실장은 몰아닥치듯 정해진 이 상황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로써 내가 케이엔터와 인연을 맺게 될
일은 이제 사라진 셈이었다. 대놓고 면전에서 거절했는데 심기가 편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떨떠름한 얼굴의 박 실장이 떠나고, 만족한 얼굴의 최호랑도 연락처를 준 뒤 떠났다.

복도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을 때. 표류가 내게 슬쩍 말을 꺼냈다.

“······그래도 역시 좀 아깝지는 않아요? 케이엔터면 그래도 드라마 조연 정도는 바로 꽂아줄 수 있을 텐데.


유명한 감독의 눈에 최종적으로 들리란 법도 없고. 아, 물론 고운 씨 연기력에 대해서 의심하는 건 아니고요.
그냥 확실한 길과 불확실한 길 중에서 불확실한 길을 택한 거니까 개인적으로 궁금해서요.”

그가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나는 빙긋 웃었다.

“불확실한 길이 도전의식이 생기잖아요. 게다가 무려 유명한 감독님 작품인데 그 기회가 언제 또 오겠어요. 안


되더라도 일단 해봐야죠. 그리고······.”

나는 뒷말을 삼켰다.

‘연기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으니까요.’

왕자와 거지
14.

김철수가 죽은 지 6 개월 남짓 지났다.

김건은 자신의 죽마고우가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김철수에겐 친척이 따로 없었기에 김건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그의 장례를 치르고 잡일들을 처리했다.
부조금 정리, 납골당 안치, 유품 처리, 유언장에 따라 고인의 재산을 화상 치료 아동을 후원하는 민간단체에
기부하는 일 등등―.

그리고 오늘 김건은 자신의 아내와 함께 김철수의 집을 청소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향했다. 자잘한 가재도구나
생활품들은 아직 집에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동산은 처리하는 데에 시간이 걸려서 그 동안은 일부러 건드리지 않았으나, 이제는 그의 집도 팔렸기 때문에
이것들도 정리해야만 했다. 즉, 이건 고인의 주변을 정리하는 일 중 가장 마지막의 일이었다.

“그럼 힘내볼까?”

김건이 짐짓 밝게 외치며 말했고, 그의 아내가 옅게 미소 지으며 안쓰러움과 위로를 담아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둘은 하루 종일 김철수의 집을 청소하며 바지런히 움직였다. 가구들은 모두 내어놨고, 대부분의 물건은 버렸으나,


중요한 물건들은 자의적으로 판단해 따로 빼놓았다.

기계적이고 단순한 노동을 반복하다보니 생각이 많아질 틈이 없었다. 그런데 한참 바쁘게 몸을 움직이던
도중이었다.

아내가 김건을 불렀다.

“여보. 이거 당신 아니에요?”

“응?”

김건은 땀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안쪽 방에서 아내가 이쪽으로 와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쪽으로 가자 아내가 청소하다말고 커다란 앨범을 무릎에 펴놓고 구경하고 있었다. 김건도 호기심이 생겨서
고개를 쑥 빼 그녀가 보고 있는 걸 들여다보았다.

“앨범?”
“철수 씨 앨범 같은데. 이건 당신, 그리고 이건 철수 씨 맞죠?”

아내가 어느 사진을 콕 집었다.

사진 속엔 여러 명의 사람이 강당 앞에서 브이자를 그리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뒤쪽에 서 있는 사람은


멀쩡했는데, 앞쪽에 있는 사람들은 분장으로 얼룩덜룩했다. 그리고 김건은 뒤쪽 왼쪽 끝에 서 있었고, 김철수는
앞쪽 중앙에 서 있었다.

김건에게도 익숙한 사진이었다. 오랜만에 발견한 옛 사진이 반가워 그가 활짝 웃었다.

“맞아. 보니까 정기공연 때네. 아마 우리가 대학교 2 학년 때인가 그랬을 거야. 우리 과에선 축제 때마다 1, 2
학년들이 연극 공연을 올려야 했거든. 나는 극본을 맡았고, 철수는 주인공 역을 맡았지.”

“무슨 역할이었는데요?”

“거지 역할이었어. 연극이 <왕자와 거지>였거든. 알지? 마크 트웨인 작품.”

아내가 가볍게 김건을 흘겼다.

“여보, 나 영문학과 나왔거든? 따지자면 내가 자기보다 더 잘 알아요.”

“알지, 우리 여보 똑똑한 거. 그래서 반했잖아, 내가.”

김건이 키득거리며 아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사진을 가볍게 쓸었다.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마 이때였을 거야. 철수가 천생 연기자구나, 그걸 처음 느꼈을 때가. 원래 연기를 좋아하고 잘하는 놈인 걸
알고는 있었는데, 그렇게까지 연기에 미친 독종인 줄은 이때 처음 알았지.”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음, 이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주말 오후, 부부는 대청소 도중 휴식을 취하며 때 아닌 추억 여행을 떠났다. 이야기꾼은 김건이었고, 관객은
그의 아내였으며, 이야기의 주인공은 김철수였다.
“정기공연에서 배우들은 다 1, 2 학년이지만 총책임자는 고학번 선배가 맡는 게 전통이었거든. 당연히 그때 <
왕자와 거지>의 연출이랑 지휘를 맡은 선배도 우리보다 몇 학 번 위 선배였지. 그런데 그 선배가 하필 똥군기로
엄청 유명한 선배였던 거야.”

“아이고.”

“그 선배가 우리 애들 기를 죽이려고 연습실 들어오자마자 딱 우리를 훑어봤어. 그리고 주인공 역을 맡은


김철수를 보고, 옳다구나, 얘를 찍은 거지. 그리고 철수가 연기를 시작하니까 뭐 보지도 않고 곧바로
커트해버렸어. 그리고 막 별 트집을 잡아가며 갈궈대는 거야.”

김건은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그 선배가 김철수에게 뭐라고 했는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너는 그 몸짓이랑 말투가 진짜 거지라고 생각해? 아니, 아니. 네 연기엔 거지의 영혼이 없어. 거지의 애환,
절박함, 굶주림, 끔찍한 고통! 그런 게 없단 말이야.

그러면서 선배는 거들먹거렸다.

―하기야, 너네 같은 애들이 뭘 알겠니. 너희가 민주화 운동하다가 곤봉으로 맞아보길 했니, 잡혀가서 고문을
당해보기라도 했니. 안전하게 자라서 겉멋만 들었지.

그 선배는 고작 몇 살 더 많은 걸 가지고 ‘나 때는 말이야’라면서 으스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당시에도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더 어이가 없었다. 아내도 김건의 생각에 동의했다.

“진짜 웃긴 사람이네. 아무튼, 그래서 철수 씨는 어떻게 했는데요?”

“아, 맞다. 그래서 철수가 어쨌냐면―.”

김건은 일부러 뜸을 들이며 씩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굶었어.”

아내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굶었다고요?”

“응. 선배가 철수더러 거지의 영혼이 없다고 한 날, 걔가 그날부터 집에도 안 들어가고 말 그대로 거지처럼 사는
거야. 잠은 과방에서 자고, 운동부 애들 씻는 샤워실에서 간간이 몰래 씻고. 돈은 한 푼도 없으니까 과방에
굴러다니는 남은 음식 집어먹고.”

아내가 입을 떡 벌렸다. 김건은 그녀의 반응에 킥킥 웃었다. 그 역시 그 반응이 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애들도 감탄 했는데 철수 얘가 점점 냄새 나고 더러워지니까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했어. 나도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너무 유난 아닌가, 이런 생각이었고. 솔직히 연기를 못한다느니 뭐니 하는 말들은 다
선배의 쌩 트집이었지, 진짜 철수가 연기를 못한 게 아니었거든.”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아내가 호기심이 생겼는지 재촉했다.

“다음 연습이 이주 뒤였는데, 연습 날 철수가 연습실에 딱 나타났고, 선배는 말 그대로 기절초풍했지. 애가


완전··· 정말 말 그대로 거지꼴이었거든. 냄새 나니까 씻고 오라고 선배가 뭐라 했는데, 철수는 그대로 연기를
하겠다고 했어. 선배가 어쩔 수 없이 그러라고 했지.”

솔직히 선배로서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연기를 잘하고 싶어서 직접 그 배역처럼 살아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막말로, 그런 논리라면 살인자 배역을 맡은 사람은 연기를 하기 위해 살인을 저질러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마 그 선배도 그런 심보였을 것이다. 해볼 테면 해봐라. 그런다고 연기가 얼마나 늘 줄 아느냐. 연기란 건


체험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그런 말을 이미 입 속에 준비한 채로 말이다.

“철수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우리들에게 동냥을 하기 시작했어. 근데 내가 바로


옆에 서 있었거든? 철수가 내 다리를 확 부여잡고 한 푼만 달라고 소리치는데······ 그 순간 소름이 쫙 돋는
거야. 수염은 덥수룩하게 나 있지, 목소리는 무슨 골초를 피워댄 것처럼 잔뜩 쉬어서 갈라져있지, 동공은 텅
풀려서 시꺼멓게 죽어있지. 친구고 뭐고 못 알아보는 눈치로 내 다리에 멍이 들 정도로 억세게 꽉 쥐어 잡는데,
완전 내가 알던 김철수가 아닌 거야.”

“세상에······.”

“그 순간 진짜 거지에게 발목이 붙들린 것처럼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발을 확 뺐어.


그러다가 실수로 철수를 좀 걷어차고 말았거든? 근데 철수가 한 번 쿨럭 기침하더니 나를 보지도 않고
흐느적거리며 다른 사람한테로 가는 거야. 그리고 무릎 꿇고 한 푼만 달라고 양 손을 싹싹 비는데 그 기세가
얼마나 소름끼치도록 리얼한지······ 사람들도 경악한 채로 연기고 뭐고 다 잊고 몸을 뺐다니까.”

그때 느꼈던 소름이 다시 생생하게 떠올라, 김건은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부르르 떨었다. 이야기를 듣던 아내도
그 상황이 상상이 가는지 닭살이 돋은 팔뚝을 문질렀다.

아내는 감탄했다.

“그 선배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겠는데요?”

“암. 당연하지. 거기 있는 애들 전부가 철수 연기에 압도당한 걸 뻔히 알았으니까. 그날 이후 입도 뻥긋 못


했다니까. 철수 얘기가 과 전체에 소문나서 다른 선배들도 연습 구경하러 왔거든. 다른 선배들은 다 칭찬하는데
혼자 거기서 꼽 주면 그게 미친놈이지. 그때 그 선배 표정을 자기가 봤었어야 했는데. 하하!”

다시 생각해도 유쾌한 일화였다. 김건이 웃자, 아내도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대단한 놈이지. 캐릭터 이해도도 엄청나고, 순간 몰입력도 엄청 난 놈이었어. 그러고 한 달 뒤에 다시 그때 그


연기를 해보라고 하면 완전히 똑같이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기억력도 좋은 놈이었고.”

“그래서 당신이 철수 씨더러 천생 연기자라고 한 거군요?”

“그것도 그런데, 사실 압권은 그 뒤야. 내가 결국 그 연극 끝나고, 너무 궁금해가지고 물어봤거든. 그렇게까지


연기를 잘하고 싶냐. 너 정도면 그래도 원래 잘하는 편인데, 얼마나 잘하고 싶은 거냐. 뭐, 칸이라도 가게?
이런 식으로 물었을 거야. 근데 김철수 얘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김건이 그렇게 물었을 때, 김철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그는 무슨 그런 실없는 질문을 하냐는 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래. 그냥 좋아서 하는 거지.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새나오는 대답이었다.


“우와.”

아내가 입을 조금 벌렸다. 그래, 김건 역시 그 대답을 들었을 때 아내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웃긴 놈이지? 이걸 천재라고 해야 하나, 노력형이라고 해야 하나. 고민 많이 했다니까. 타고난 재능이 있으니
천재 같은데, 그럼에도 매 순간순간 노력해. 심지어 그걸 또 즐기면서 해. 그런 놈은 처음 봤어. 아마 내가 본
인간 중에 제일 특이한 놈일 거야, 걔는.”

김건은 거기까지 말했다가 우뚝 말을 멈췄다. 그가 잠시 뒤 중얼거리듯 말을 정정했다.

“그래, 특이한 놈이‘었’지······.”

아내는 슬픈 미소를 지은 뒤, 손을 뻗어 김건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내의 위로에 김건이 애써 웃었다.

“그런 놈이라면 아마 천국에서도 연기를 하고 있을 거야.”

“그렇겠네요. 아니면 신이 예뻐해서 얼른 환생시켜줬을지도 모르죠. 지상에서 너 하고 싶은 연기 맘껏 하라고.”

김건이 아내의 말에 웃었다. 그녀의 말이 그럴 듯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게 더 가능성 있네. 김철수 걔는 신이 예뻐할 만 하니까. 재능이 그렇게 많으면서도 늘 겸손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착했거든. 애가 뭐, 흠 잡을 데가 없는 놈이었지. 아, 아니네. 딱 한 가지 흠이 있네.”

김건은 무언가 떠오른 듯 농담을 던졌다.

“이성에게 관심이 없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지. 철수네 부모님이 걔더러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성화였는데,
끝까지 좋은 짝을 못 만났거든. 하도 돌부처라서 우리끼린 너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막 놀리고
그랬다니까.”
아내가 까르르 웃었다.

“설마. 짝사랑 정돈 있었겠죠. 말을 안 했다 뿐이지.”

“그렇겠지. 걔는 은근히 신비주의 같은 게 있었으니까. 뭐, 아무튼 그 덕에 내가 김철수 걔보다 딱 하나 더


성공했지. 나는 사랑을 얻었으니까, 움하하! 우리 예쁜 달링 같은― 아, 그만, 그만! 아, 미안해!”

김건은 짐짓 입술을 쭈욱 내밀고 아내의 볼에 뽀뽀하려다가, 아내가 앨범으로 때리는 통에 재빨리 사과했다.

“주책은, 정말!”

“주책이라니! 나 아직 젊거든?!”

김건이 발끈했고, 아내가 쯧쯧 혀를 찼다.

“당신은 젊게 사는 거지, 젊은 건 아니거든요?”

“어허, 이 사람 보게. 오늘 밤 직접 확인해 볼래? 내가 얼마나 혈기왕성한지?”

“미쳤나봐, 이 사람!”

김건이 능글맞은 눈빛을 던지자 아내가 질색을 했지만, 은근히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주말 오후, 부부의 웃음소리가 창밖으로 정답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시각.

자신의 친구가 자신의 집에서 그런 음담패설을 나누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김철수― 아니 이제 백고운이 된 한
남자는 극단 ‘왕국’의 연습실에 서 있었다.
그가 단원들을 휘 둘러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백고운입니다. 오디션 보는 한 달간 객원으로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배우에겐 몸 자체가 연기할 도구


15.

오늘은 최호랑이 말한 오디션의 첫 번째 날이었다.

극단 ‘왕국’의 단원들에게 인사를 한 후, 나는 들어가 앉았다. 객원 멤버가 온 건 처음인지 단원들은 내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자, 모두 집중.”

앞에 나선 최호랑이 주의를 집중시키곤 말했다.

“일전에 미리 말했듯, 유명한 감독이 이번에 들어가는 영화가 있다. 그리고 그 영화 주인공을 우리 극단의 배우
중에서 고르고 싶어 하고.”

모두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유명한은 거장이라 할 수 있는 영화감독이었다. 그런 감독의 영화에 캐스팅 될 수 있는 기회라는데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으랴.

“유 감독이 구하는 배역은 청소년이다. 성별은 상관없고. 그래서 10 대 중후반인 단원들 대상으로 일종의
오디션을 보기로 했다. 물론 그게 너희들이고. 다른 단원들에게는 너무 안타까운 소식이겠지만, 너희에게는 행운
같은 기회겠지.”

어쩐지. 단원들이 다 젊어서 뭔가 싶었더니, 여기 모인 사람들이 극단 전체 인원이 아니었구나.


하기야 ‘왕국’ 극단이 얼마나 큰데 고작 20 명이 전부일까. 오디션 대상자들만 최호랑이 부른 모양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말해줄 순 없지만, 이번 오디션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즉흥 연기다. 때문에 한 달간 즉흥


연기와 관련한 여러 시험을 볼 거다. 물론 평가하는 사람은 나다. 최종적으로 판단해 몇 명을 간추릴 거니까
시험 하나를 못 봤다고 해서 너무 좌절하고 포기하지 말도록.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말은 오디션이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번 시간을 통해 너희들 모두가 한발 성장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평소에 하는
트레이닝이라고 생각해주면 될 거다. 이해했나?”

단원들이 모두 ‘네!’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즉흥 연기라는 말에 긴장한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설렘이 더 큰 표정들이었다.

“좋아. 그러면 지금 바로 첫 번째 시험을 시작하겠다. 반장!”

“네!”

“준비한 거 가져와.”

반장이라고 불린 남자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절도 있는 걸음으로 재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오래지 않아 그는 곧 간이 행거를 돌돌돌 끌고 왔다. 거기에는 색색의 의상이 걸려 있었다. 피터팬 의상이나
백설공주 같은 드레스도 있었고, 하와이안 셔츠나 정장 자켓처럼 비교적 평범한 옷도 있었다.

최호랑이 말을 이었다.

“자, 즉흥 연기를 잘 하기 위해선 뭐가 필요할까?”

한 단원이 손을 들고 말했다.

“순발력입니다!”

“정답. 그런데 순발력이 있되 센스도 있어야 한다. 일단 담대하게 행동하는 건 좋지만, 기본적으로 센스가
없으면 애드리브가 재미가 없는 법이다. 모두들 작년 월말평가 때 파트너랑 짝 지어서 대본 없는 즉석 콩트를
해본 적 있지? 그때 얼마나 재미없는 극이 많이 나왔는지도 알 거고.”
여기 극단에서 그런 것도 했던 모양이었다. 단원들은 추억을 떠올리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 센스는 쉽게 말하자면 연출력과 비슷하다. 관객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야 재미있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능력이지. 연기자라고 그저 연기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란 소리다.”

최호랑은 간이 행거를 짚었다.

“즉, 오늘은 각자 의상을 하나씩 골라 1 인극을 해볼 것이다. 각자의 의상을 토대로 캐릭터와 스토리를 즉석에서
구상해 발표하면 된다. 이것이 이번 오디션의 첫 번째 시험이다. 질문 있는 사람?”

“발표 시간은 몇 분인가요?”

“1 분에서 3 분 정도다.”

단원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생각보다 높은 난이도에 당황한 것이리라.

1-3 분이면 정말 짧고 굵게 핵심만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 안에 나름의 기승전결이 있어야 했고. 멋진
걸 보여주겠다고 너무 욕심을 냈다간 시간이 오버되어 흐지부지 극을 마무리할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단원들과 달리 나는 오히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가벼운 긴장이 불러일으키는 흥분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더 질문 없지? 그러면 앞쪽의 오른쪽부터 앉은 순대로 1 번, 2 번··· 이렇게 간다. 임의 순번이니까 자신의
번호를 외우도록. 자, 1 번부터 나와서 의상을 골라라.”

제일 첫 번째의 사람이 우물쭈물 일어나 의상을 골랐다. 앞의 순번이 된 단원들은 의상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어서 비교적 얼굴빛이 밝았다.

의상은 연극에나 쓸 법한 의상부터 일상에서도 입을 법한 옷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의상보단 소품에 가까운
목도리, 가면, 안경까지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특징이 강한 의상이 메리트가 있을 것 같았다. 이를테면 피터팬 의상 같은 경우 피터팬이란
캐릭터나 스토리가 정해져 있으니까 대사만 구성하면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생각과 비슷했는지, 앞의 순번들은 주로 연극 의상들을 골랐다.

“이거 순번은 가위바위보 같은 걸로 정해야 공정한 거 아닌가······?”

뒤쪽에 앉아있던 단원들이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최호랑은 귀신 같이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덧붙였다.

“대신 발표도 앞의 순번부터 할 거다. 구상하는 시간은 뒷번호 애들이 더 많게 되겠지.”

그러니 불만 부리지 말란 소리였다.

소곤거리던 사람들이 뜨끔한 표정으로 입을 합 다물었다. 하지만 최호랑의 말대로 그들이 아주 불리한 것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에 뒷번호 사람들의 표정이 그나마 풀렸다. 대신 앞의 순번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표정으로 머리를 재빨리 굴리기 시작했다.

“······18 번, 19 번, 20 번.”

의상은 인원수대로 딱 맞춰 준비했는지 순번이 다가올수록 행거가 텅 비어갔다.

그리고 20 번이 나와 마지막 남은 의상을 집어가자 행거가 완전히 텅 비었다. 최호랑은 우리를 돌아보았다.

“다 챙겼지? 그럼 바로······.”

그때 내가 손을 들었다. 최호랑이 ‘응?’하고 날 봤다. 나는 말했다.

“21 번인데, 저는 아직 못 챙겼습니다.”


모두가 그제야 나란 객원 멤버를 떠올린 듯 눈을 크게 떴다.

최호랑이 반장을 돌아보며 불같이 일갈 했다.

“반장, 내가 분명 객원의 의상까지 해서 인원수 맞춰 준비하라 했을 텐데?”

반장은 하얗게 질려선 ‘아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디서 내 몫이 누락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원래의 인원이 20 명으로 딱 떨어졌다면 깜빡할 법도 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이건 큰 실수였다.

반장이 쩔쩔매며 말했다.

“지, 지금 바로 의상실에 가서 하나 더 챙겨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최호랑은 호랑이 같은 성미답게 허락하지 않았다.

“네가 의상실에 갔다 오는 시간만큼 다른 단원들은 구상하는 시간을 버는 건데, 그러면 그걸 즉석 연기라고 볼 수


있나?! 어!!”

연습실 공기가 바짝 얼어붙었다. 반장은 입술이 파랗게 질리도록 꾹 물었다. 그러나 그는 괜히 반장이 된 건
아닌지, 제법 빠릿빠릿하게 대책을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 제 잘못이니까 제 의상을 객원에게 양보하겠습니다.”

최호랑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의상실에 다녀온다고 시간을 지체하면 확실히 즉석연기라 볼 수 없기 때문에 형평성에 어긋날 테고, 그렇다고
다시 싹 걷어서 새로 의상을 선택하게 한다면 지금의 선택에 만족한 단원들은 불만을 가질 것이다.
최호랑이 결심한 듯 물었다.

“대신 이번 첫 시험에서 반장 너는 0 점이 되는 건데, 그 책임까지 감수하겠다 이 말이지?”

최호랑의 말에 단원들이 눈짓만 주고받았다. 분명 반장의 잘못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튀어나온 객원
때문에 원래 기존 멤버였던 그가 피해를 보는 것이 약간 본능적으로 마뜩찮은 듯 했다.

반장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네, 괜찮습······.”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손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최호랑에게 말했다.

“저는 이대로도 연기할 수 있습니다.”

최호랑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감은 좋았지만, 안 돼. 원래 입던 옷은 의상으로 치지 않는다. 본인과 다른 모습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아뇨.”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잠시 모두를 쳐다보았다. 모두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입고 있던 옷 아랫부분을 잡고 끌어올려 단번에 훌렁 벗었다. 순식간에 내 맨 상체가 드러났다.

최호랑과 단원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나는 덤덤히 말했다.

“의상이 없는 것도 의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저는 이걸로 연기하겠습니다.”

의상이 없다면 맨몸뚱이로 연기하면 된다. 배우에겐 몸 자체가 연기할 도구였으니까.

“······!!”

모두가 입을 떡 벌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최호랑은 백고운의 말에 적잖이 놀란 참이었다.

의상이 없는 것도 의상이라 할 수 있다― 라. 그 자신마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러나 틀린 말이 아니었다. 배역에 따라선 아무것도 입지 않는 것 자체가 의상이 되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다만 그런 생각 자체가 저 19 살 새파랗게 어린 친구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것이 놀라웠다. 기발하다 못해


참신하기까지 하지 않은가.

최호랑은 표정을 재빨리 갈무리하고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좋다. 그러면 객원인 고운이는 상의를 벗는 것을 의상으로 치지. 단, 이번 시험은 그 의상을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의를 벗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도록 즉흥 연기를 해야 한다. 맨몸뚱이라고 해서 마임 연기를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백고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했다.

최호랑은 다른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물론 의상을 활용해야 한다는 건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네, 알겠습니다.”

“좋아. 더 지체하면 안 되겠지. 그러면 1 번부터 바로 시작한다. 1 번, 앞으로 나오도록.”

최호랑은 한쪽에 비켜서서 자신의 젊은 단원들이 연기를 펼쳐 보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법 괜찮은 연기를 보여주는 사람도 있었고, 짧은 시간 안에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했는지 어설프게 몇 마디


던지고 허둥지둥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말은 쉽게 했지만, 이런 즉흥 연기는 아주 어려운 연기에 속했다.

1 인극이니 당연히 캐릭터나 스토리를 모두 독백으로 보여줘야 했다. 게다가 소품도 의상 하나로 한정되어 있었고,
심지어 그것을 활용하기까지 해야 했다.

미리 말한 대로 단순히 연기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순발력, 발상력, 연출력 모두를 갖춰야 했다.

발표는 점점 이어지고 이제 끝번호가 가까워졌다.

19 번은 안경을 택했는데 거기서 모범생이란 이미지를 착안했는지 쭈뼛거리는 연기를 보여줬다.

뒤이어 나온 20 번은 목도리를 택했는데 그 목도리가 죽은 부모님이 선물해준 유품이라는 전사(前史)를 설명하기


위해 독백을 시작했다. 그러나 전사가 너무 길어졌기 때문에 최호랑은 중간에 그의 연기를 끊어야만 했다.
“좋아, 그만.”

19 번과 20 번 모두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하지 못한 연기였다.

19 번은 모범생이란 캐릭터는 있었지만 스토리는 없어서 심심했고, 20 번은 스토리는 있었지만 캐릭터가 보이지
않아 밋밋했다.

캐릭터성과 스토리는 함께 가야 했다. 캐릭터만 있고 스토리가 없으면 안 되었고, 반대로 스토리만 있고 캐릭터가
안 보이는 것도 안 됐다.

제일 좋은 건 스토리에 캐릭터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래야 조화가 어우러지면서 인상적인 연기가 된다. 물론
그게 제일 어려운 연기였지만.

“자, 그러면 마지막 21 번.”

최호랑이 백고운을 불렀다.

드디어 마지막 차례인 그가 앞으로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백고운에게로 쏠렸다.

모두들 자신의 발표가 끝났기 때문에 여유롭게 백고운의 연기에 관심을 가질 수 있던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아까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의상이 없다고 하자 백고운이 바로 옷을 벗으며 의상이 없는 것도 의상이 아니냐고 했던 그 순간을 말이다.

이 시험이 순발력을 보는 시험이라면, 사실 백고운은 이미 아까의 그 순간만으로도 자신의 순발력을 어느 정도


증명한 것이 다름없었다.
원석이 아니라 이미 보석
16.

백고운의 드러난 상반신에는 제법 잔 근육이 붙어 있었다.

연기를 위해서란 걸 알면서도 몇몇 여자 단원들은 ‘큼’하고 작게 헛기침하며 조금 민망히 눈을 피했다. 또 몇몇


여자 단원들은 눈빛으로만 ‘오’ 감탄하며 백고운의 몸매를 훑어봤다.

최호랑 역시 그런 류의 시선은 아니었지만, 흥미로 눈을 빛내며 백고운을 쳐다봤다.

부국제에서 그가 나온 영화를 봤을 때까지만 해도 사실은 반신반의였다. 연기를 잘하는 건 눈치 챘지만 과연 그게


즉흥 연기에도 해당이 될까 싶었다.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연극은 연기 환경이 많이 달랐다. 당연히 발성이나 호흡, 연기 톤과 같은 것들뿐 아니라
각자 잘하는 연기도 달랐다.

그래서 보통 배우들은 자신이 한번 데뷔한 분야에서만 주로 활동하는 편이고, 그 구분에 상관없이 왔다 갔다


다양하게 활동하는 배우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런 케이스는 아주 드문 편이었다.

그러니 최호랑이 백고운에게 굳이 오디션에 참가하도록 기회를 준 것은 그의 연기력을 높게 쳤다기보다는, GV


당일에 봤던 그의 인성이나 생각 씀씀이가 기특해 한 번 기회를 줘 본 것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막상 데려와 이리 보니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원석인 친구였군.’

아까 의상이 없다고 하니 상의를 벗는 것으로 응수한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순발력과 재치라니.

어쩌면 정말로 유명한이 말한 그런 배우를 찾을 수 있을지 몰랐다. 처음으로 기대감이 들었다.


저 젊은 친구는 모두의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뭘 보여줄 것인가?

최호랑이 떠올릴 수 있는 상상력은 ‘상반신을 드러내고 남성적 야성미를 뽐내며 마당일을 하는 돌쇠 캐릭터’
정도였다.

예상한 그대로를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또 한 번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며 놀라움을 선사할 것인가?

최호랑은 관심을 담아 백고운을 쳐다보았고, 그것은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백고운은 모두의 앞에 나선 채 담담히 움직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양 팔을 옆으로 벌려 들었다. 꼭 벌서는 포즈


같았다. 일단 최호랑의 예상과는 다른 그림이었다.

백고운이 연기를 시작하기 전 최호랑에게 부탁했다.

“저 단장님, 중간에 박수를 다섯 번 정도만 쳐주실 수 있나요?”

“그래. 알겠다.”

최호랑이 부탁을 들어주겠다 하자 백고운이 고개를 푹 숙였다.

“······.”

“······.”

한참이나 그 상태로 말이 없기에 하마터면 최호랑은 백고운이 연기를 시작했다는 것도 못 알아차릴 뻔했다.

뒤늦게 그것이 연기 중이란 걸 깨달은 최호랑이 박수를 짝 쳤다.

“윽!”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백고운이 커다란 신음을 내며 상체를 크게 들썩였다. 꼭 무형의 채찍에 등을 맞은 것처럼
말이다.

“······!”

최호랑은 그제야 그가 무슨 연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벌서는 포즈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이제 보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상 같은 포즈에 더 가까웠다.

‘이것 봐라.’

최호랑은 눈을 반짝 빛냈다.

그가 다시 한 번 박수를 짝, 쳤다. 백고운의 상체가 다시 한 번 흔들렸다.

“읏······.”

아까보다 신음 소리는 작았다. 백고운이 입술을 꽉 깨물고 소리를 참은 탓이었다. 상체도 아까보단 덜 흔들렸다.

그건 그가 이미 첫 번째 채찍으로 자신이 맞게 될 것임을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최호랑은 백고운의 어깨와 팔의 근육이 긴장으로 바짝 딱딱해진 것을 면밀히 관찰했다. 사람은 다가올 아픔을
예감하면 본능적으로 몸을 굳히는 편이다.

근육 쓰는 연기가 제법 베테랑이었다. 일부러 첫 번째엔 크게 움찔하고, 두 번째에는 꾹 눌러 참으며 연기의


차이를 둔 것도 섬세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최호랑은 텀을 두고 박수를 세 번 ‘짝, 짝, 짝’ 쳤다. 여기까지가 백고운이 부탁한 박수 다섯 번이었다.


그러나 최호랑은 거기서 그만두는 대신, 예고하지 않는 행동을 했다.

최호랑이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박수를 재빠르게 여러 번 ‘짝짝짝짝!’ 친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건 돌발 상황이었다.

하지만 백고운은 최호랑의 애드리브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채찍질이 끝났다고 생각해 고개를 들려다가 다시 들려온 살 부딪히는 소리에 혀를 깨물었다.

“윽, 악!”

그가 아픔에 몸을 바르르 떨며 덜컹덜컹 흔들었다. 정말로 여러 번 채찍질을 등에 맞은 것처럼.

사람은 다 끝났다고 생각한 시점에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고통을 불시에 받게 되면, 훨씬 당황해 크게 반응하는
법이다. 백고운은 그 연기마저 제대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허공에 묶인 양 손목은 한 치의 움직임도 없었다. 정확한 마임이었다.

최호랑의 입가가 호랑이처럼 죽 찢어져선 비죽 올라갔다.

그 동안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연기를 봐왔고, 게 중엔 또 재능 있는 스타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들의 연기도 이번만큼 흥미진진하진 않았다.

백고운이 팔을 축 늘어뜨린 상태에서 쿨럭쿨럭 기침을 내뱉었다. 그가 밭은 숨을 하아, 하아, 내뱉더니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땀에 젖은 그의 얼굴이 보였다.

뜻밖에 그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내 말했다.


“왜 그래···, 화났어? 그렇게 열 내지 말고··· 아예 죽이지 그래. 팔도 아플 텐데, 응?”

힘껏 조롱하던 그가 갑자기 얼굴색을 싹 굳히고 눈을 형형하게 떴다. 그가 싸늘하게 짓씹듯 내뱉었다.

“어차피 내 입에서는 한 마디 말도 못 들을 테니까. 난 너네처럼, 출세해보겠다고 일본인에게 나라 팔고 동료


팔고··· 그런 종자가 아니거든.”

아픔이 몰려오는지 큭, 하고 신음을 내뱉던 그가 고개를 푹 숙이면서 웅얼거렸다.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 바엔 깔끔하게 뒈지는 게 낫지, 씨발··· 어차피 가진 것도 몸뚱이밖에 없는


천출인데··· 짧고 굵게··· 민족영웅으로 남아보는 것도··· 좋지, 뭐···.”

그가 한참을 가느다랗게 숨만 뱉더니 힘없이 비식 웃었다.

“읏···. 하, 진짜··· 뒈지려나 보네······ 머리가 존나 울리는 게······.”

그의 말이 흐려졌다. 잠시간 그는 미동도 없어서 정말로 죽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다 꺼져가는 목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린 것은.

“대한··· 독립······.”

만세, 까지 끝내 내뱉지 못하고 그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팔에 힘이 풀린 것처럼 그의 몸이 앞으로 45 도 더


기울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우뚝 멈추었다.

정적이, 말 그대로 압도적인 정적이 연습실에 내려앉았다. 모두가 백고운의 연기에 얼어붙었다.

“좋아, 그만.”
최호랑은 끝을 알렸고, 백고운은 그제야 후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이마와 상반신엔 땀이 흥건했다.

그것이 당연했다. 팔이 정말로 어딘가에 묶여있어서 몸에 전부 힘을 빼는 것이 가능했다면 모를까, 실제로는


아니었으므로 그는 몸을 기울인 채 배의 힘으로만 허공에서 버텼어야 했다.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연기는 힘이
많이 드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백고운은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의 연기는 최호랑이 의도했던 것과도 부합했다. 의상을 활용한 1 인극을 구상하는 것. 고문 받는 장면을
연출했으니 상의를 헐벗은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스토리와 캐릭터마저 완벽하게 이해되도록 보여주었다. 몇 마디 안 되는 짧은 대사만으로도


일제강점기라는 상황과, 쉽게 굴복하지 않는 민족투사의 캐릭터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심지어는 채찍을
가하는 가상의 상대방까지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저 짧은 시간 안에 이런 즉흥 연기를 구상했다니 놀라웠다. 게다가 강렬한 연기로, 사람들의 시선과 집중을


놓치지도 않았다.

최호랑은 다시 주섬주섬 상의를 입는 백고운을 보며 아까의 생각을 정정했다.

‘원석이 아니라 이미 보석이었군.’

이거, 유명한에게 넘기는 게 조금 아까울 지경이었다.

최호랑은 턱을 쓰다듬듯 입가를 가린 채 남몰래 씩 웃었다. 이런 기분이 드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면서.

[영화 <운명의 표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수상]


[<운명의 표현>의 주인공 백고운 배우, 시각 장애인 연기 호평]

[기라성처럼 떠오른 신예 백고운 배우, 인성 논란?]

노트북으로 인터넷 기사를 훑고 있던 표류가 짜증을 냈다.

“이럴 줄 알았어. 그때 그 기자네.”

“무슨 일인데요?”

“왜, 왜. 뭔데?”

나와 이초희도 옆에서 고개를 들이밀어 화면을 봤다. 기사들 중 마지막 기사의 헤드라인이 썩 좋지 못했다.

나는 정작 담담했으나 이초희는 열을 잔뜩 받았다.

“아니, 이게 뭐야?!”

표류와 이초희 둘은 ‘기레기는 정의의 철퇴를 받아야 한다’며 척척 죽이 맞더니, 갑자기 의기투합해서 기사의
댓글을 내 칭찬으로 도배해 버릴 거라며 팔을 걷어붙였다.

그런데 기세 좋던 둘이 멈칫했다.

“어라? 그래도 댓글 반응은 이미 좋은 편이네?”

“그래요?”

표류가 노트북을 내 쪽으로 보여줬다.

[개념 배우다. 소신 발언 좋네.]

[아름다운 얼굴에 아름다운 인성이 깃든다더니. 응원합니다.]


[기레기 수준하고는... 쯧쯧]

[요즘은 이런 것도 다 장애인 혐오에요. 시대에 뒤떨어진 기자님.]

[GV 갔던 사람인데 그 상황 다 직접 봤거든요. 기사가 좀 왜곡된 부분이 있네요 ㅎ; 실제로는 백고운 배우님
되게 부드럽고 정중하게 거절했어요. 연기도 정말 잘하셔서 놀랐는데 어쩜 생각도 그리 깊은지. 정말 멋졌고,
덕분에 팬 됐습니다. 앞으로도 응원할게요^^]

정말로 반응이 좋았다. 나는 부스스 웃었다.

“좋게 봐주셔서 다행이네요.”

“그러니까요. 아직 세상은 따뜻하네요.”

“나 쫌 감동.”

표류와 이초희 둘이 아주 쿵짝이 잘 맞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사실은 GV 에서 기자의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화가 났었다.

나 역시 옛날에 얼굴에 화상을 입어서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타인의 장애를 가지고 포즈 운운
하는 기자의 말에 욱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분하게 얘기하긴 했지만 나도 모르게 비꼬는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뭐, 물론 금방 정신을 차리고
예의바르게 거절하는 멘트를 하긴 했지만 말이다.

기자가 이렇게 비열하게 기사 쓸 거 예상했고, 어느 정도 욕먹을 것도 감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좋게


봐주었다. 다행이었다.

이초희가 그나저나, 하면서 내게 물었다.

“인기는 좀 실감해? 고운 씨, 상 받으면서 인터뷰도 제법 많이 했잖아. 버스나 지하철에서 누가 알아보지는


않아?”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확실히 에이전시에서 연락은 많이 와요.”


다 거절하고 있긴 하지만.

“배급사도 붙었고, 이제 극장에 걸리면 대중들도 많이 알아볼 거야.”

이초희의 말에 나는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기분 좋은 일이긴 하지만, 인기를 얻는 것 자체가 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다. 유명해지면 작품 제의가 많이


들어온단 점은 좋았지만.

이초희가 쯧쯧 혀를 찼다.

“하여간에 이 연친놈 같으니라고.”

“연친놈? 그게 뭐에요?”

“연기에 미친 놈이라고. 어떻게 나보다 신세대 용어를 몰라?”

음, 연친놈. 그거 듣기 나쁘지는 않았다.

이번엔 표류가 물었다.

“오디션은 어때요, 괜찮아요? 극단에 가서 보는 거죠?”

“네. 한 달 동안 즉흥 연기 위주로 이것저것 시험을 봐요. 좀 색다르긴 한데, 재밌어요.”

이초희가 끼어들었다.

“유명한 감독이라고 했지? 나도 연영과 수업 때 진짜 많이 봤는데. 근데 잘 만든 것과 별개로 내 취향은


아니더라. 고운 씨는 좋아해?”

“네, 좋아하죠. 감각적이고, 영상미가 있잖아요. 그리고 뭣보다 유명한 감독은······ 유명하잖아요.”
나는 중얼거렸다.

“유명한 유명한 감독······.”

그리고 내가 뱉은 말에 내가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하하 웃고 있는데 이초희가 표류를 돌아보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뭐야, 나 지금 여기에 웃어야 하는 타이밍이야?”

표류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응. 고운 씨 개그 스타일이야. 네가 이해해.”

고무공 연기
17.

오늘은 두 번째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나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극단 ‘왕국’의 연습실에 와 있었다.

앞에 나선 최호랑이 말했다.

“저번에 각자 다른 의상과 소품으로 1 인극을 했었지. 이번에는 공통 소품으로 즉흥 연기를 해볼 거다.”

즉, 오늘은 동일 조건의 다른 연기를 보여주면 된다는 뜻이었다.

단원들의 눈이 반짝였다. 아무래도 모두가 같은 소품으로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평성이 더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발표순서는 상관없다. 먼저 아이디어가 생각난 사람은 먼저 나와서 연기를 보여주면 된다.”

누군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아이디어가 겹치면 어떡하죠? 먼저 나온 사람이 선점해버리면 뒷사람들은 어떡하나요?”

“소재는 최대한 안 겹치는 게 좋겠지만, 도저히 안 떠오르면 어쩔 수 없지. 다만 같은 아이디어를 사용한다면


앞의 발표자보다 더 나은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 알겠나?”

단원들은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했다.

최호랑은 갖고 온 상자에서 분홍색 고무공을 꺼냈다.

“지정 소품은 이 공이다. 공을 이용해 아무 연기나 보여주면 된다.”

그러자 단원들의 얼굴에 살짝 낭패감이 스쳤다. 생각보다 추상적인 소품이라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럼 먼저 나와서 해볼 사람?”

최호랑이 우리를 휘 둘러보며 물었지만, 단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최호랑이 못마땅한 듯 ‘흠’하는 소리를 냈다.

“아무도 없어? 이렇게 자신감들이 없단 말이야? 좀 실패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있게 나서는 게 중요한


거야.”

그러나 최호랑의 격려에도 단원들은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묘한 일이 일어났다. 어째서인지, 단원들이 하나같이 나를 흘금거리더니 종래엔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린 것이었다.
으응?

그러자 최호랑의 시선 역시 모두를 따라 내게 닿았다.

“고운이가 해 본다고?”

어째서 흐름이 이렇게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은 없었다.

아니, 실은 객원인 내가 다른 단원들 제치고 제일 먼저 나서는 것도 모양새가 좀 그럴까봐 아까부터 손들고 싶은


마음을 일부러 꾹꾹 참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나가라고 등 떠밀면 나야 완전 환영이었다.

나는 냉큼 일어나며 힘차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가자, 앉아있던 단원들이 눈짓을 주고받으며 수군거렸다. ‘쟤 대박이


다’, ‘역시 대단하네’ 따위의 감탄과 놀람, 가벼운 질투가 섞인 수군거림이 내게도 들려왔다.

최호랑이 단원들을 조용히 시킨 후, 내게 공을 건넸다.

나는 공을 가볍게 바닥에 튕겼다. 공이 탄성 좋게 올라왔다. 아마도 피구할 때 쓰는 그 공인 것 같았다.


연기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공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바닥에 고무공을 놓고 그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화분 받침 하듯 양 손으로 턱을 괴고, 두 다리는 까닥까닥


흔들었다.
“흠, 음, 흠.”

나는 콧노래를 흥겹게 허밍하며 내 앞에 있는 고무공을 신기하고 재밌다는 듯 쳐다봤다. 그리고 즉석으로 떠오른
대사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정말 바보 같아. 다들 너를 고무공이라고 생각하잖아. 너는 사실 고양이인데 말이야. 그렇지


나비야?”

내 연기를 보고 있는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마 내 시도가 신선하게 보이긴 할 것이었다. 하지만 최호랑은 공으로 연기를 하라고 했지, 그 공을 ‘진짜
공’으로만 국한해서 연기하란 말은 없었다.

나는 고양이의 코를 가볍게 건드리듯 고무공을 툭툭 쳤다. 그러곤 공을 끌어안곤 벌떡 일어났다.

“나비야, 우리 밖에 나가 산책할까?”

당장이라도 나갈 듯 굴던 그때였다. 나는 공을 놓쳤다. 물론 일부러 놓친 것이었다.

“엇!”

나는 진짜로 고양이가 내 품에서 뛰쳐나간 것처럼 당황해 소리쳤다. 공은 내 품에서 벗어나 바닥에서 떨어졌고,
바닥에 부딪히자마자 탄성 있게 위로 튀어 올랐다.

나는 그것을 잡으려는 시늉을 하면서 공이 어깨 너머로 넘어가도록 했다. 마치 고양이가 내 품에서 계속 벗어나
폴짝 폴짝 뛰는 모양새로 말이다.

나는 ‘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뒤로 넘어가는 공을 시선으로 계속 쫓았다.

“나비야! 아이고, 야! 익!”


공은 한참이나 지름 1m 반경 안에서 폴짝폴짝 튀어 올랐다. 나는 그것을 놓치거나, 간신히 잡거나, 그러다가
다시 놓치거나 했다. 그러면서 낭패에 젖거나, 약올라하거나, 식식거렸다.

“잡았다!”

그러다가 양 손으로 고무공을 단번에 꽉 잡았다. 나는 손을 들썩들썩거렸다. 내 손아귀에서 고양이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말이다.

“어허! 안 돼. 더 멋대로 굴면 나 화낼 거······ 엇?”

가상의 고양이와 힘겨루기를 하던 나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동시에 공을 손등과 팔을 타고 반대편 쪽으로 넘겼다. 리듬체조 선수가 볼을 가지고 놀면서 유연하게 몸을
움직이듯, 나 역시 공을 팔등이나 가슴팍 그리고 등으로 몇 번 흘려보냈다. 고양이가 몸을 타고 요리조리
움직이는 것처럼.

고양이가 목덜미나 옆구리 같은 곳을 스치면 많은 사람들은 간지러워할 것이었다. 나도 간지럽다는 듯 아학학


소리를 냈다.

“아하하, 간지러워! 야, 하지, 흐으, 마아!”

그러다가 살짝 몸을 비틀어 관중들의 시선이 안 보이는 쪽으로 고무공을 힘껏 바닥에 튕겼다.

그러자 공이 반동으로 있는 힘껏 튀어 올랐다. 나는 거의 천장까지 튀어 오른 공을 올려다보며 불안한 소리를


냈다.

“어, 어······!”

나는 그 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주춤주춤 발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아래로 빠르게 낙하하는 공을 품에 받으면서 뒤로 풀썩 넘어졌다. 위에서 떨어진 고양이의 무게를 못 이기고
나동그라진 것처럼.

양 팔로 X 자를 그리듯 공을 꽉 끌어안았다.

“······.”

바닥에 누운 자세 그대로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내뱉지 않았다. 눈을 감고 그저 공을 끌어안은


채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고요함이 찾아왔다. 구경꾼들도 내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어 숨을 죽였다.

떨어지는 고양이를 받아내다가 다쳤나? 머리를 잘못 부딪친 걸까?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온갖 추측으로 저마다의 상상이 부풀어갈 때.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러나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용히 한 손으로 공을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너도 놀랐지?”

나는 다정히 키득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쉬―. 나는 안 다쳤어. 많이 놀랐구나. 하여튼 이 개구쟁이. 내가 너 때문에 못 산다,


진짜.”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공을 끌어안은 채 힘차게 일어났다.


“자, 신나게 놀았으니까 진도 다 빠졌지? 이제 밥 먹으러 가자. 나도 배고프거든. 오늘은 엄마가 저녁으로 뭘
해주셨을까? 어제 감자를 사온 걸 보면 카레일 것 같긴 한데 말이야. 하지만 오늘 학교에서도 카레를 먹었거든.
다른 거였으면 좋겠다. 엄마가 뭘 해놨을지 너도 궁금하지, 나비야? 자, 그럼 얼른 가자!”

나는 공을 끌어안고 가상의 무대 밖으로 걸어 나가는 시늉을 했다.

몇 초 뒤, 나는 우뚝 멈추고 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단원들과 최호랑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끝났습니다.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홀가분히 빙긋 웃었다.

단원 중 하나인 민하나는 경악으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 객원으로 참여하는 배우. 백고운이라고 했던가?

그가 고무공 연기를 시작했을 때 민하나는 머리 위에 번개가 내리꽂힌 듯한 충격을 받았다. 공으로 고양이를
표현하다니. 자신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발상이었다.

공이 소품으로 나온 이상 두 가지 연기가 가능했다.

공 자체에 전사(前史)를 부여하는 방식. 공을 일종의 상징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공을 튕기거나 던지거나 하면서 연기하는 방식. 공이란 소품 자체가 활동성을 특징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슬랩스틱 코미디 연기를 보여주기가 편했다.
그리고 민하나는 그 두 가지 모두를 배합한 연기를 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떠올린 즉흥 스토리는 이랬다. 축구를 좋아하는 여자아이는 공을 부모님께 선물 받고 기뻐하지만,


남자아이들은 그녀가 여자라고 축구에 끼워주지 않는다. 그래서 홀로 공을 갖고 놀면서 쓸쓸해한다.

이 구상에서 공은 일종의 성차별을 나타내는 상징이 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 공을 차면서 연기할 셈이니 활동적인
느낌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녀는 자신의 구상이 제법 마음에 들었고 즉흥적으로 떠올린 것 치곤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하지만 백고운의 연기를 보고 나서 민하나는 자신의 생각을 집어치울 수밖에 없었다.

백고운의 발상은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그 무엇이었다. 게다가 또 그 리얼한 표현력은 또 어떠한가.

백고운은 고양이와 기 싸움하는 어린아이를 연기했는데,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표정을 놓치지 않고 연기하는
동시에 고양이의 움직임 또한 놓치지 않고 훌륭하게 재현해냈다.

처음엔 어린아이가 고무공을 고양이로 착각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턴 단원들마저도 그 고무공을 ‘


진짜’ 고양이처럼 눈으로 바쁘게 좇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에 백고운의 품으로 뛰어드는 고무공은 순간적으로 정말 고양이처럼 보였다. 민하나는 제가 환각을
봤나 싶어 눈을 비볐을 정도였다.

그건 백고운이 공을 쓰는 것이 매우 능숙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공을 한 번도 놓치거나 잘못 튕기지


않았다. 그는 진짜 리듬 체조 선수처럼 공을 자유자재로 갖고 놀았다.

그 말인즉슨, 그만큼 그는 몸 쓰는 게 훈련이 되었단 뜻이었다. 저번에 고문 받는 연기를 보여줬을 때도 이미


짐작했지만, 그는 정말로 몸을 정확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그리고 심지어 그는 본능적인 스토리텔링 센스도 갖추고 있었다. 공, 그러니까 고양이를 받아낸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곧바로 깔깔 웃거나, 투덜거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부러 죽은 척 휴지(休止)를 주어 극의 긴장감을 끌어 높이고, 인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게
만들도록 했다. 그는 관중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법을 태생적으로 아는 듯 했다.

‘저게··· 저게 바로 천재라고 하는 건가?’

그런 표현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압도적인 재능을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민하나는 문득 최호랑을 바라봤다. 그리고 놀랐다. 최호랑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단장인 최호랑은 엄격한 만큼 어지간하면 모두가 있는 앞에서 좋은 소리를 내뱉지도, 만족한 표정을 짓지도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최호랑이 백고운의 연기에 짧게 칭찬을 남겼다.

“멋진 연기였어. 수고 많았다.”

그것은 최호랑에겐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가 다시 단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다음으로 나와서 연기할 사람?”

그러나 연습실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아무도 손을 들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봤다.

제일 첫 번째로 그렇게 활기차고 통통 튀며 개성이 강한 연기를 봤는데, 바로 뒷부분에 연기를 하게 된다면 뭘


보여주든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잘해야 중박이고, 못하면 더욱 초라해 보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손을 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법이었다.

덕통사고
18.

“정열아, 혹시 너 <운명의 표현> 봤어?”

편의점의 간이 테이블에 턱을 괴고 껌을 질겅질겅 씹던 송정열은 친구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그게 뭐야?”

“영화야. 못 들어봤어?”

“어. 유명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재밌더라고.”

“웬일? 너 영화 좋아했냐?”

“실은 저번에 남친이랑 영화관 갔는데 시간대가 맞는 게 없더라고. 저번 주에 개봉한 <김종욱 찾기> 그건
관객석이 꽉 차서 볼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냥 아무거나 자리 널널한 거 보려고 들어갔지. 근데 그게 <운명의
표현> 그 영화였어. 독립영화인데, 뭐라더라, 어디 영화제에서 상 받았다고 하더라고. 근데 진짜 재밌더라.”

“으응···.”

솔직히 말하면 송정열은 심드렁했다. 친구의 조잘거리는 말에 형식적인 대꾸를 하긴 했지만, 관심도 없었고
흥미도 없었다.

송정열 그녀는 이름만큼 정열적인 삶을 사는 여자였다. 그 정열을 바치는 대상이 다름 아닌 연예인이긴 했지만.

고등학생도 아니고 스물 중반까지 나이 처먹고 연예인 쫓아다니느냐고 주변에서 욕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떳떳했다. 원래 덕질은 성인이 되어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다. 돈도 있겠다, 통금도 없겠다.
그것만큼 연예인 좋아하기 좋은 환경은 없다.

그런데 그런 송정열이 오랜만에 짙은 허무함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그녀가 최근에 제일 좋아했던 배우 하나가 그만 음주운전을 해 연예계 생활을 은퇴한 것이었다.


그 배우가 나왔던 드라마를 매우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에게 눈길이 갔고, 그 이후로
필모그래피를 쭉 훑다가 결국 팬카페에 가입했다.

그리고 소싯적 아이돌 좀 쫓아다녀본 경험으로 대포 카메라를 들고 제작발표회나 영화시사회 등 배우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정열을 바치고 있었다.

‘얼굴도 진짜 취향이었고, 팬들한테도 다정해서 이번엔 진짜 끝까지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런 배우가 술 먹고 음주운전을 해서 사회면에 대문짝만하게 나온 것이었다. 그녀가 바쳐왔던 애정과


시간, 추억들이 한순간에 공중분해 된 셈이었다.

송정열은 화가 잔뜩 났다. 단순한 음주운전도 빡이 치는데, 그날 그 배우가 클럽에서 여자 끼고 문란하게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난 사고라고 소문이 파다하게 났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정이 털리는데 그 일로 있는 정 없는 정
완전히 털려버렸다.

‘나는 씨발 빠순질 할 때도 오빠 얼굴에 먹칠할까봐 열심히 살고 있는데, 정작 그 오빠란 새끼는 아주 막 살고


다녔네요, 썅.’

한편 송정열이 딴 생각에 빠져 분노의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줄도 모르고, 친구는 천진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주인공 맡은 배우가 딱 정열이 네가 좋아하게 생겼더라고. 게다가 인터넷 찾아보니까 미담도
많더라고. 어떤 기자가 막 무례한 질문 했는데, 그 배우가 아닌 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더라. 멋지지 않아?
난 연예인 별로 관심은 없지만 이런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더라.”

송정열은 거기까지 듣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연예인 인성 좋아봤자 소용없어. 난 이제 그런 거 안 믿기로 했어. 앞에서 팬들한텐 다정해도 뒤에서 거지같이
구는 사람이 세상에 많더라고.”

“뭐?”

“그리고 친구야 미안한데 난 이제 연예인 안 좋아할 거야. 내가 또 팬질하면 송정열이 아니라 개다, 개.”
갑자기 평소와 다르게 돌변한 송정열의 태도에 친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송정열은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너 그 라면 다 익지 않았을까?”

친구는 컵라면에 물을 부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송정열이 3 분이 넘었을 거라 알려주자 친구가 ‘아, 그러네’
하면서 그제야 주의를 돌렸다.

“어디 한 번 먹어볼······ 악!”

그런데 그때, 친구 놈이 손이 미끄러졌는지 컵라면을 들다가 떨어트렸다. 바닥으로 컵라면이 떨어졌고, 식겁한
친구는 몸을 재빨리 뺐다.

컵라면의 국물이 바닥에 팍 흩어졌다.

“읏!”

송정열은 일순 손등에 느껴진 따끔함에 눈을 찡그렸다. 친구는 몸을 재빨리 빼서 그런지 옷에 많이 튀진 않았는데,


오히려 옆에 있던 송정열이 조금 데여버렸다.

알바생이 다급히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세요?”

“저는 괜찮은데, 아 어떡해, 정말 죄송해요.”

사고를 쳐도 제대로 친 친구가 울먹거리며 알바생에게 연신 사과했다. 친구는 차마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잠시만요.”


알바생이 안쪽에서 대걸레를 가져와 닦기 시작했다. 송정열과 친구 역시 어정쩡하게 몸을 굽혀 휴지로 라면
건더기 따위를 집어서 버렸다.

얼추 수습되었을 때, 셋은 찌뿌둥한 허리를 폈다.

알바생은 가볍게 그녀들에게 말했다.

“나머지는 제가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정말 죄송해요.”

“뭘요. 이게 제 일인 걸요.”

친절한 알바생의 말에 친구가 고개를 들고 다시 한 번 사과와 감사를 표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친구가 알바생의 얼굴을 발견하고 우뚝 굳었다.

“어······?”

몇 초 간 어벙벙하게 눈을 끔뻑이던 그녀가 조금 확신 없이 물었다.

“혹시··· 백고운 배우 아니에요?”

배우? 친구의 말에 송정열의 귀가 쫑긋 반응했다. 그녀는 짐을 챙기고 있다가 고개를 훽 돌려 알바생을 쳐다봤다.

아까는 워낙 정신없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저 알바생, 확실히 준수한 외모긴 했다.

‘배우라고? 얼굴은 낯선데. 뭐지, 무명인가? 아니, 백 프로 무명이지. 그러니까 편의점 알바를 하는 거겠지.’

백고운 배우라고 불린 알바생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맞아요. 하하, 알아봐주시네요. 감사합니다.”

그가 뒷머리를 긁으며 머쓱하게 웃자, 단번에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곱상하게 생겼는데 웃으니까 인상이 훨씬
귀여워졌다.

‘좀······ 괜찮네.’

송정열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원래 팬이 된다는 건 훨씬 더 강렬한 계기가 있어야 한다. 겨우 실물로 한 번 봤다고 바로 팬 되는 건 아니었다.

빠순이로 오랫동안 살아온 송정열에게 팬이 되느냐 아니냐 하는 건 그만큼 아주 까다로운 기준을 요구했다.
아무렴, 자신의 온 열정을 바치는 일인데 함부로 결정하고 그럴 수야 없었다.

팬이 된다는 건 단순히 김치찌개를 좋아한다는 것처럼 취향의 문제도 아니었고, 점심식사로 김치찌개를 먹겠다는
결정처럼 쉬운 사안도 아니란 소리였다.

반면 오히려 일반인에 가까운 친구는 쉽게 팬이라는 소리를 뱉었다.

“어머, 진짜였구나! 저 영화 <운명의 표현>도 정말 재밌게 봤어요. 팬이에요!”

“어이구,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할게요.”

“여기서 일하세요?”

“아, 맞긴 한데··· 실은 오늘이 마지막 날이에요.”

“앗, 저 그럼······.”

친구는 그와 사진을 찍고 싶은 듯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주섬주섬 꺼내려 했다.

그때, 뒤에 멀뚱멀뚱 서서 기다리고 있던 송정열이 그런 친구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리고 하지 말라고 친구에게
눈치를 줬다.

송정열에게도 나름의 철칙은 있었다. 배우나 아이돌의 사생활 공간에서는 사진이나 싸인을 요구하지 말 것. 그게
개념 있는 팬이라면 지켜야 할 일종의 도리였다.

하지만 친구는 눈치 없게 송정열에게 되물었다.

“왜?”

“···많이 늦었어. 이러다 강의 지각해. 얼른 가자.”

송정열이 어물쩍 말을 돌리며 고개를 까닥였다. 친구가 시계를 확인하고 ‘헉’했다.

“그러네, 늦었다. 아, 그럼 저희는 가볼게요. 앞으로도 응원할게요, 파이팅!”

“네, 감사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백고운이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친구가 먼저 편의점을 나갔고, 송정열도 뒤따라 나가려 할 때였다.

백고운이 갑자기 송정열을 불렀다.

“아, 저 잠시만요.”

“네?”

송정열이 뒤를 돌아보았다. 백고운이 아까 챙겨놓은 건지 주머니에서 차가운 음료수 캔을 꺼내 그녀에게 불쑥


내밀었다.

‘어? 나?’

송정열이 어정쩡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거 설마··· 작업인가?


솔직히 말해서, 떨떠름했다. 무명 배우가 연기를 열심히 할 생각 않고 벌써부터 여자 후리기부터 하는 건가 싶어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백고운이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아까부터 손등을 감싸고 계시는데, 아까 라면 국물에 화상 입은 거 아닌가요? 이거라도 좀 대면서 가세요. 시간


되실 때 병원 한 번 가보시고요. 화상 자국, 그거 잘못하면 오래 가거든요.”

백고운의 말은 산뜻했다. 걱정은 하지만, 너무 참견하는 건 아닌 말투였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선을 딱 지키며 예의 바르게 먼저 인사했다. 덧붙여 마지막으로 빙긋 웃기까지.

송정열은 얼결에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하다 말하곤 밖으로 나왔다.

송정열과 그녀의 친구는 한참 걸었다.

“······.”

“그래서······ 정열아, 정열아? 너 내 말 듣고 있어?”

어딘지 얼빠진 송정열의 모습에 친구가 그녀의 이름을 재차 불렀다. 그때 그녀가 친구의 말을 끊고 멍하니 물었다.

“······저 사람 이름이 뭐라고?”

“어?”

“아까 저 알바생, 아니 배우. 이름이 뭐라고?”

“백고운 배우야. 왜, 아까 내가 말했었잖아. 며칠 전에 내가 <운명의 표현>이란 영화 봤었다고. 거기 주인공 역


맡은 배우야. 인성 좋다고 했던.”
“······어. 정말 그러네.”

“역시 너 관심 있는 거 맞지? 어쩐지, 딱 네 타입일 것 같더라고. 아깝다. 아까 사진 좀 찍자고 할 걸. 오늘이


알바 마지막이라니까 다음에 가도 없을 텐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송정열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다음에도 또 볼 수 있으니까 그건 괜찮아.”

“어?”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던 송정열이 갑자기 친구를 훽 돌아보더니 씩 웃었다.

“미안, 학교는 너 혼자 가라. 난 지금 영화 보러 가려고.”

“뭐?!”

뚱딴지같은 소리에 친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편 송정열의 머리는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자신의 친구는 며칠 전에 그 영화를 봤다고 했다. 그러니 벌써 내려가진 않았을 것이다. 독립영화라니 상영관이
적긴 하겠지만, 그거야 수도권 내에 있으면 지하철 타고 찾아가면 되니까 별 문제는 아니었고.

“N 차 뛰려면 지금부터 빨리 봐야 돼.”

“뭐? 대체 무슨 소리야?”

“나 저 배우한테 빠진 것 같아. 심장이 움직였어. 확실해. 인성도 좋고, 페이스도 좋고. 연기도 잘하겠지?
궁금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지금 바로 확인하러 가야겠어.”

“그렇다고 해도 지금 바로 보러 갈 필요는 없잖아.”

송정열이 친구를 향해 잔잔히 웃어보였다. 그리고 뭘 모른다는 듯 손가락을 까닥였다.


“친구야. 내 이름이 뭐야. 내가 또 한 정열 하잖아. 마음먹은 바는 바로 실행에 옮겨야 직성이 풀린다고. 그럼
나중에 강의실에서 봐!”

“무슨, 야! 송정열! 야!”

그러나 송정열은 벌써 지하철 쪽으로 성큼성큼 가고 있었다. 친구가 그녀의 뒤에다가 대고 소리쳤다.

“야! 너 아까 또 팬질하면 송정열이 아니라 개라며!!”

그러자 송정열이 친구를 돌아보더니― 기가 막히게도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맞아, 난 개야! 월월!”

그러곤 음료수 쥔 손을 크게 휘휘 흔들더니 훌쩍 가버렸다.

휑한 거리에 친구만이 홀로 남았다. 친구는 갑자기 휘몰아치듯 벌어진 이 사태에 어리벙벙한 듯 눈을 끔뻑거렸다.

그녀가 이제는 송정열에게 들리지 않을 말을 뒤늦게 중얼거렸다.

“너 나랑 같은 조라고··· 오늘 강의 시간에 회의해야 한다고······.”

이 개새야······.

몸을 쓰는 연습
19.

<운명의 표현>은 현재 배급사를 만나 극장에 걸린 상태였다. 부국제에서 상도 받았겠다, 흥행을 조금 예상했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는데 그건 같은 시기에 개봉한 영화 <김종욱 찾기>가 박스오피스를 석권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우리 영화가 밀렸다는 것이었다.

사실 부국제에서 상을 받아도 큰 화제가 안 되는 일은 의외로 많이 있었다. 영화에 크게 관심 없는 일반 대중들은


부국제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도 태반이었으니까.

하다못해 흥행작이 없었다면 우리 영화가 좀 주목 받았을지도 모르겠는데, 하필 경쟁작이 너무 떠버렸다. 운이


나쁜 경우라고밖에 할 수 없었지만, 영화의 흥행이란 건 사실 운이 크게 좌우하는 법이라 너무 그러기도 뭣했다.

아쉽긴 했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표류는 영화 관계자들에게 눈도장을 톡톡히 찍었고, 나 역시 덕분에 최호랑의 눈에 띄어 오디션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성과랄까, 변화랄까. 그런 것이 있다면 팬의 존재였다.

확실히 이초희의 말대로 <운명의 표현>이 극장에 걸리니까 알아보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주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아주 가끔 있는 정도였는데, 아르바이트 하는 편의점에서 누가 날 알아본 건 처음이었다.

‘팬이라.’

아까 편의점에서 날 알아본 사람이 그렇게 말했었다. 7 년 만에 다시 들어보는 단어는 여전히 듣기 좋았다.

유명세와 상관없이 이렇게 간혹 직접적으로 팬들을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건 역시 어쩔 수 없다.

팬들이란 참 이상한 존재였다.

김철수였던 시절, 나는 화상을 입고 은퇴한 후 7 년 동안 활동이 없었다. 그런데도 간혹 팬카페에는 글이


올라오곤 했다.
요즘 김철수 배우님은 어떻게 지내느냐, 자신은 내일 결혼을 한다, 자신이 대학 입학 했을 때 내 팬이 됐는데
벌써 세월이 이렇게 빠르게 흘렀다, 배우님이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찬찬히 읽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어느새 다시 연기를 하고 싶어졌다. 그래, 7 년 동안
연기란 꿈을 놓지 못했던 이유에는 어느 정도 팬의 존재 때문도 있었다.

내가 즐거워서 하는 연기이긴 했지만, 봐주는 사람들이 없다면 결국 그건 유명무실한 행위일 뿐이었다.

나는 정말로 그들이 감사했다. 아마 연기 다음으로 내게 소중한 게 팬의 존재일 것이었다.

문득, 나는 생각했다.

‘진짜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

의욕이 다시 한 번 힘차게 솟았다.

아까보다 훨씬 에너지 있게 편의점 청소를 하고 있는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그만두는 게 즐거운 건 아니지? 나 섭섭할라 그래.”

“점장님!”

어느새 오셨는지 점장님이 날 보며 예의 그 푸근한 웃음을 짓고 계셨다.

“그럴 리가요. 저도 많이 아쉬워요.”

아주 빈말은 아니었다. 점장님은 내 사정을 많이 봐주셨고, 어린 학생이 건실하다며 이것저것 살뜰히 챙겨주셨고,
뭣보다 돈을 넉넉하게 주셨다.
돈 떼먹는 점주도 심심찮게 있는 게 이 바닥인데, 점장님은 최저시급을 살짝 웃도는 월급을 늘 정확한 날짜에
입금해주셨다. 덕분에 고시원 방세를 안 밀릴 수 있었고.

하지만 이제는 당장의 생활비가 급하지 않았다. <운명의 표현>이 상을 받으면서 표류가 인센티브 개념으로 조금
떼어준 몫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최호랑의 오디션이 막바지로 치달아가면서 하루를 통으로 빼야 하는 일이 많아졌다. 연기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기로 했다.

“근처에 사니까 자주 뵈러 올게요.”

“어유, 그러지 마. 고운 학생은 연기로 성공해서 여기보다 더 좋은 곳으로 이사 가야지. 참, 나도 고운 학생


나오는 영화 봤어. 연기 진짜 잘하더만. 우리 딸 내외도 팬 됐잖아.”

“아하하, 감사합니다.”

“그래, 오늘은 일찍 퇴근해. 오늘도 무슨 오디션 보러 간다며? 이제 대배우가 될 텐데 한시라도 바쁘게


움직여야지. 얼른 가.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까.”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점장님은 한사코 더 괜찮다 했다. 그래서 결국 유니폼을 벗고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점장님은 가기 전에 나를 가볍게 포옹했다. 그러면서 열심히 하라며 등을 토닥여주셨다.

꼭 옛날에 돌아가셨던 내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 괜히 가슴이 찡했다.

아쉬운 낯으로 배웅하는 점장님을 뒤로 하고 연습실로 향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번 생에는 정말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것 같아.’

내게 지지를 보내주시는 고마운 분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절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씩씩히 걸음을 옮겼다.


*

극단 ‘왕국’의 연습실.

점장님의 배려로 평소보다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시간이 남았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옆얼굴에 닿는
은근한 시선들이 따끔따끔했다.

“······?”

고개를 휘 둘러 보자 연습실 곳곳에서 마찬가지로 스트레칭하고 있는 단원들이 날 흘금거리고 있었다. 시기와


질투, 낯섦, 거북함, 경계심······ 그런 것들이 복잡하게 그들의 눈에 어려 있었다.

사실 어느 정도 어쩔 수 없긴 했다. 내가 원래부터 그들과 함께 훈련 받던 극단 일원도 아니고, 나는 딱


오디션에만 끼어든 객원이었으니까.

연기를 계속 하다보면 주위에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도 생기지만, 반대로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생기는 법이다.

그건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톱스타도 악플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덤덤히 시선을 돌리고 다시 스트레칭을 계속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꽁지머리를 한 여자가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민하나라고 해요.”

“아, 안녕하세요.”

“저··· 실례가 안 된다면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네, 그럼요.”

그런데 민하나가 갑자기 다짜고짜 물었다.

“어떻게 해야 연기를 그렇게 잘해요?”

“네?”

나는 살짝 당황했고, 그녀 역시 당황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좀 긴장해서···. 그러니까, 혹시 평소에 하시는 특별한 훈련이 따로 있으신가요?


궁금해서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연기를 진짜 잘하세요. 저번에 보고 많이 놀랐어요. 혹시 비결 같은 게 있나··· 저랑 비슷한 나이로


보이시는데 너무 능숙해서··· 그······ 죄송해요, 제가 좀··· 갑작스럽죠.”

“아, 아니에요.”

그제야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그녀는 지금 내게 조언을 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이렇게 솔직한 타입은 좋아한다. 게다가 열심히 하려는 사람은 언제나 보기 좋은
법이다.

“극단에서도 트레이닝은 받으시죠?”

“네, 그럼요. 호흡, 발성 등등······ 그런 기본적인 것들은요. 하지만 고운 씨처럼 그렇게 즉흥 연기를 막 잘
하지는 못해요. 뭐가 문제일까요?”

“그건 제가 따로 조언드릴 수 있는 부분이 없긴 하네요···. 아, 혹시 영화나 드라마 좋아하세요?”

“아뇨, 연극이랑 뮤지컬만 봐요. 매체 쪽으로 갈 생각 없어서요.”

“그러면 지금부터 장르 상관없이 많이 보시는 게 좋아요. 아, 책도 많이 읽는 걸 추천 드리고요. 인풋이 많으면


아웃풋이 많이 나오게 되거든요.”

뻔한 얘기임에도 민하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깨달은 듯 ‘그렇군요···’하고 중얼거렸다.

아웃풋의 퀄리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아웃풋이 탁월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재능의 영역이고.

그래서 나는 그런 것 말고 실질적으로 당장 노력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연기는 대사를 잘 뱉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을 사용하는 것도 중요해요. 매일 몸을 쓰는 연습을 하세요. 자신의


몸을 정확하게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요.”

연기가 기교라면, 몸은 기초였다. 기초 없이 기교를 부리려 하면 그건 부실공사나 마찬가지였다. 무엇이든 기초


재료가 좋아야 그것을 잘 활용 할 수 있는 법이었다.

물론 나 역시 이것을 전생의 액터 스쿨에서 배웠었다.

배우에게 몸을 사용한다는 건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배우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인격이 되는 일이었다.
당연히 사람마다 몸을 쓰는 게 다른 법이다.

누군가는 느리게 걷고, 누군가는 빠르게 걸으며, 누군가는 어깨를 움츠리고 걷고, 누군가는 펴고 걷는다. 사람의
성격은 몸에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배우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꾸며낼 수 있어야 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배우가 몸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으면 연기할 수 있는 배역의 폭이 넓어졌다.

액터 스쿨에 다니면서 화상 입은 사람처럼 얼굴을 반쪽만 움직이는 연습이라거나, 팔다리를 꺾어 좀비처럼 보이는
연습 같은 것도 했었다. 눈알을 따로 움직이는 시각 장애인 연기도 그때 배운 것이었다.

“몸을 쓰는 연습이요······.”
한편 추상적이라 느껴졌는지 민하나가 말을 흐렸다. 나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줬다.

“제 귀 한 번 보시겠어요?”

“귀요? 갑자기 왜······ 엇!”

나는 귀를 찡긋 움직였고, 민하나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예요. 몸의 근육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 연습하란 뜻이었어요. 하다보면 물론 이런 것도
가능하게 될 거구요. 그러면 어떤 배역을 하든 훨씬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져요.”

예전에 동물을 의인화한 배역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이런 것도 연습했었다. 늑대나 개와 같은 동물들은 귀만


쫑긋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민하나는 얼떨떨한 듯 보였다.

“그런 것도 연습으로 되는 건가요? 원래 되는 사람만 되는 게 아니라?”

“대부분은 연습을 많이 하면 돼요. 보통 사람들은 이런 근육만 따로 쓰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못할 뿐이에요.


처음부터 이렇게 사소한 근육을 쓰려고 연습하시기보다는, 전반적으로 몸을 유연하고 정확하게 움직이겠다는
다짐으로 운동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액션부터 무용까지 두루 소화하겠다, 그런 생각으로요. 그리고 나중에는
점차 세밀한 동작을 연습하시면 될 거예요.”

민하나가 진심으로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뭘요. 제가 말한 건 이론일 뿐이에요. 결국 연습하는 건 자기 자신이니까 하나 씨 하기에 달린 거죠.”

“네, 열심히 할게요.”

“하하, 네. 응원할게요.”

우리는 훈훈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

그리고 그런 백고운의 말을 멀찍이서 듣고 있던 최호랑은 속으로 감탄했다.

‘벌써 저런 걸 알다니.’

백고운과 민하나는 대화에 빠져있느라 눈치 채지 못했지만, 최호랑은 이미 아까부터 연습실에 와서 둘의 대화를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특히 그는 백고운이 몸을 연습하라고 민하나에게 조언했을 때 적잖이 놀랐다.

백고운의 말대로 배우에게 몸은 기초 중의 기초였다.

당장 발상력은 떨어지더라도 몸을 사용하는 연습을 지금부터 해놓은 배우들은 기초가 되기 때문에 나중에 언제든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

‘이건 뭐 말이 오디션이지, 저 배우는 이미 다른 단원들과 같은 수준이 아니군.’

실력을 겨뤄야 하는데 오히려 백고운이 다른 단원들을 가르치고 있는 저 모습을 보라.

‘하지만··· 나쁘지 않군.’

이런 상황이 예상과는 다르긴 했지만, 결과적으론 모두에게 어떤 계기가 될 것이었다.

최호랑 역시 다른 단원들이 백고운에 대해 약간 못마땅해 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민하나처럼


시기나 질투 대신 솔직하게 상대의 재능을 인정하고 오히려 본받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연기를 금방 그만둘 사람과, 계속 할 사람이 걸러지는 계기가 되겠지.’


같은 시련이 있어도 누군가는 그걸 자존감을 깎아먹는 연료로 사용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다.

실력이 월등한 사람을 만나면 당연히 열등감이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열등감에 매몰되면 절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법이다.

하물며 이 바닥에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다. 계속 연기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실력 좋은
사람들을 계속 마주치게 된다. 그때마다 매번 시기와 질투로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부을 순 없는 법이다.

최호랑은 그런 면에서 민하나를 높이 쳤다. 원래도 제법 연기를 잘하는 야무진 친구였는데, 더 높이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최호랑은 백고운과 그 옆에 있는 민하나를 흐뭇이 보다가 손을 짝짝 쳐서 모두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집합!”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모였다. 최호랑은 가볍게 모두를 휘 훑어보았다.

벌써 오디션이 3 주나 지나갔다. 몇몇은 지친 듯 했지만 여전히 의욕을 보였고, 몇몇은 다 포기한 듯 얼굴이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이 오디션의 끝에 누가 선택되고, 누가 떨어질지 어느 정도는 윤곽이 나오고 있단 뜻이었다.

최호랑은 그런 그들을 향해 막판 스퍼트를 올리듯 말했다.

“자, 그럼 세 번째 시험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흰 천 연기
20.
“오늘은 저번에 이어 지정 소품으로 즉흥 연기를 할 것이다. 오늘의 지정 소품은 바로 이 천이다.”

최호랑은 품에서 천을 꺼냈다.

그건 하얀 면 재질의 천이었다. 너비는 손바닥 하나 정도였고, 길이는 팔을 넓게 벌렸을 때 손끝에서 반대쪽


손끝까지 정도였다. 쉽게 말하자면, 목도리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최호랑은 말을 이었다.

“규칙은 저번과 똑같다. 하고 싶은 사람이 먼저 나와서 보여주면 된다. 소재는 겹쳐도 되지만, 되도록 겹치지
않는 쪽으로 노력해주고.”

그리고 말미에 덧붙였다.

“그리고 고운이는 다른 단원들의 발표가 다 끝난 후 가장 마지막에 발표해라.”

“네? 아, 네. 알겠습니다.”

갑자기 지목받은 백고운은 어리둥절해보였지만,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최호랑에게도 다 생각이 있었다.

저번에 백고운이 제일 먼저 발표했더니 다른 단원들의 자신감이 전반적으로 하락해서 영 퀄리티 있는 연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비록 백고운이 에이스란 건 이제 거의 기정사실되긴 했지만, 그래도 나머지 단원들의 연기도 제대로 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일부러 백고운의 차례를 가장 뒤로 미뤘다.

그리고 최호랑의 개인적인 호기심도 들었다.


소재가 겹치지 않도록 한다면 가장 마지막 순번이 제일 불리한 법이었다. 약간의 핸디캡이 있는 상황에서도
백고운은 다른 단원들보다 더 멋진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저 친구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최호랑은 기대를 했지만, 티내지는 않았다. 그가 냉철히 단원들을 바라보고 물었다.

“자, 먼저 할 사람?”

단원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번쩍번쩍 들었다.

다들 저번에 백고운이 공으로 고양이를 표현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품이 꼭 그 소품 그 자체만으로 한정될
필요가 없다는 걸 이미 자신들의 눈으로 봤다.

그래서일까. 오늘은 다들 지정 소품을 저번보다 다양하게 활용했다.

그들은 주로 천을 몸의 어딘가에 묶거나 걸치면서 소품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단원들이 상상력을 발휘할
때마다 천이란 단일한 소품은 무궁무진하게 모습을 바뀌었다.

때론 스카프, 목도리, 안대, 허리띠, 두건 기타 등등······. 심지어 아예 몸 전체에 둘러 멍석말이나 미라를


표현한 사람도 있었다.

또, 천을 몸에 두르는 대신 휘두르는 사람도 있었다. 리듬 체조 선수들이 리본을 흔드는 것처럼 흰 천을


재빠르게 흔드는 사람도 있었고, 반면 살풀이춤의 수건처럼 손에 쥐고 훠이훠이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전반적으로 저번보다 개성적인 발상을 보여주었다. 소재가 겹쳐도 된다고 했는데 하나도 겹치지 않았다.
단원들도 스스로의 연기에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최호랑은 슬쩍 백고운을 바라봤다. 그도 다른 단원들의 연기에 긴장하거나 위기라고 여기나 싶어서.


그런데 최호랑은 의외의 모습을 목격했다.

백고운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선 즐겁게 연기를 감상하고 있었다. 가끔은 소리 죽여 박수를 소심히 치는 것이,
가식이 아니라 정말로 단원들의 연기를 즐기는 듯했다.

최호랑은 속으로만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물건이군.’

보통 사람이라면 여유를 잃고 초조해할 법한 상황이다. 그러나 백고운의 얼굴엔 그런 기미가 없었다. 다른


단원들에게 지지 않을 거란 자신감이 있는 건가?

그러나 최호랑은 곧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아니, 이걸 경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그냥 연기를 순수하게 즐기는 거지.’

최호랑은 자못 유쾌해졌다. 백고운은 연기를 잘하기도 했지만, 참 인간적으로도 정이 가게 만드는 놈이었다.

“자, 그럼 마지막.”

최호랑은 드디어 백고운을 불렀다. 그가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였다. 백고운이 앞으로 나오는 대신 갑자기 먼저 물었다.

“저, 단장님.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뭐지?”

“연기는 꼭 하나만 보여야 하나요? 여러 개를 해도 상관없나요?”


말이 질문이었지, 여러 개 하고 싶단 뜻이나 다름없었다. 이것 봐라. 맹랑하지 않은가. 최호랑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패널티가 있었으니, 어드벤티지도 달라?”

“아뇨,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최호랑은 흠, 하고 생각하는 척했다.

“그래. 확실히 마지막에 하라고 고운이만 예외적으로 순번을 고정시킨 건 불리하긴 했지. 어떡할까. 형평성에
맞게 하려면 고운이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나?”

최호랑이 단원들을 둘러봤다.

“어떻게 생각하나, 모두?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원한다면 두세 개씩 발표해도 되는 걸로 할까? 혹시 추가적으로


더 연기해볼 사람 있나?”

그러나 벌써 모두의 순번이 돌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아이디어가 나올 만큼 나온 상태였다. 모두 눈치만 볼 뿐


선뜻 나서지 않았다.

최호랑이 다시 백고운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허락을 내렸다.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지. 여러 개 하고 싶다면 여러 개 해도 좋다. 대신 앞에 나왔던 소재와 하나라도 겹치지
않아야 한다. 가능하겠지?”

그러자 백고운은 활짝 웃으며 곧바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거야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듯 말이다.


그 태도에 오히려 놀란 건 단원들이었다. 최호랑은 점점 더 기대가 커졌다.

백고운이 앞으로 걸어 나와 최호랑에게서 흰 천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두어 번 접더니 이마에 질끈 묶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백고운은 얼굴 표정을 확 바꾸며 연기를 시작했다.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헛차헛차’ 스트레칭 했다. 그가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더니 손을 바닥에 문질렀다.
그리곤 손바닥을 치면서 모래 터는 시늉을 했다.

곧 그가 바닥에 있는 줄을 잡는 시늉을 했다. 그리곤 ‘준비―’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가 반대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마의 흰 띠도 그렇고, 폼도 그렇고, 아마 운동회의 줄다리기를 표현하는 것 같았다.

백고운은 잠시간 그 상태에서 멈춰 있었다. 긴장감이 높아졌을 때.

그가 일순간 몸을 젖히듯 일으키며 허공의 줄을 꽉 잡아당겼다. ‘땅’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환청으로 들리는
듯 했다.

“영차, 영차!”

그가 악 쓰듯 소리를 지르며 몸과 팔을 뒤로 잡아당겼다. 끙끙거리던 그가 바닥으로 곧 엉덩방아 찧었다.

잠깐 멍해진 그가 곧 이겼다는 걸 깨닫고 벌떡 일어나 ‘와!’하고 소리를 질렀다.

환희에 차서 폴짝폴짝 뛰던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부른 듯 ‘어, 아빠!’하면서 뒤를 돌아봤다. 아마 화면 밖의


부름에 화답해 관중들에게서 등을 돌리는 방식으로 페이드아웃을 택한 모양이었다.
과연 그가 등을 돌린 채 우뚝 멈추곤 이마에 묶은 끈을 주섬주섬 풀었다. 이어서 바로 다음 연기를 보여주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단원들은 ‘역시 잘하네, 쟤’하는 투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최호랑은 표정 없이 담담히 팔짱만 꼈다.

솔직히 말하면, 아주 신선하거나 충격적이진 않았다.

표현력 자체는 좋았다. 그러나 딱 그것뿐이었다. 백고운의 방금 연기엔 캐릭터도 없고, 스토리도 없었다. 딱
단편의 이미지만을 가져와 재현해냈다. 다른 단원들과 비슷비슷한 방식이었다.

너무 기대감이 컸던 걸까. 뭔가 더 강렬한 무언가를 보여줄 줄 알았다. 최호랑은 살짝 실망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너무 짧아. 1 분이나 됐나? 아무래도 여러 개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시간을 타이트하게 잡은
모양이군. 차라리 한 가지만 택해서 더 길게 보여줬다면 더 나았을 텐데. 욕심이 너무 컸어.’

최호랑이 냉정하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백고운의 대사가 들렸다.

“이거, 이렇게 하는 게 맞나?”

그는 다시 관중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바로 다음 연기를 이어하고 있었다.

백고운은 셔츠 깃을 올리고 그 아래에 흰 천을 감고 있었는데, 꼭 넥타이 같았다. 그가 천을 이리저리 묶으려


시도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넥타이는 이렇게 매는 거라고 아빠가 가르쳐줬는데··· 왜 잘 안 되지······?”


그렇게 어찌어찌 움직이던 도중 넥타이 묶는 것을 얼떨결에 성공했다.

“아, 됐다! 휴···. 회사에 안 늦을 수 있겠어.”

그가 허공의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정돈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벌써 첫출근이라···. 고등학교 졸업한 게 어제 같은데. 시간 진짜 빠르네. 후··· 엄청 떨린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잠시 기죽어 있던 그가 양 뺨을 가볍게 때렸다. 그가 다시 활기차게 말했다.

“이제 시작이니까.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자켓 카라를 양 손으로 탁탁 잡아당기며 씩 웃었다. 그리고 자켓의 아랫부분을 손으로 펄럭이면서 몸을 훽
돌렸다.

역시나 이번에도 짧은 연기였다.

그러나 최호랑은 뭔가 감이 잡혔다.

‘설마······.’

그리고 백고운이 세 번째 연기를 이어 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백고운의 의도를 완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백고운은 흰 천을 팔에 완장처럼 묶고선 어둑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건 뚜렷한 하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상주(喪主)의 모습이었다.

그는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넋이 나간 듯 한참을 말없던 그가 눈물을 주륵 흘렸다.


“아버지··· 어떻게 이렇게 빨리 가세요, 예? 손주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집사람이 임신했어요. 아버지
그렇게 보고 싶다던 손주 얼굴도 보고··· 애 돌 되는 것도 보고··· 초등학교 입학하고··· 다 보고 나서 천천히
가시지, 뭐가 그리 급하시다고······.”

백고운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아부지, 고마웠어요. 혼자 애 키운다고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나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해요. 운동회


날 다른 애들 다 엄마들이 오는데, 우리 집만 아부지가 왔었잖아요. 엄마들 사이에서 어색했을 텐데 나 기죽는
게 싫다고 운동회며, 학부모 참관일이며, 그런 거 빠짐없이 챙겼잖아요. 회사 입사했을 때 넥타이
선물해주시면서 묶는 법 가르쳐 주신 것도 기억나요. 그때 아버지가 그랬잖아요. 내가 아들이라서 다행이라고.
평생 많이 못 챙겨줬는데, 그래도 넥타이 하나 묶는 법만큼은 잘 가르쳐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이제 와서
말하지만, 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맨날 생각했어요,
나. 정말로··· 정말로 많이 감사했어요, 아부지······.”

그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흐득거렸다. 단원들 중 감정이 풍부한 몇몇은 눈시울이 붉어지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곤


급히 깜빡거렸다.

백고운이 다시 느릿느릿 일어나더니 몸을 돌렸다. 막이 넘어간다는 표시였다.

그가 다시 몸을 돌렸을 때는 흰 천을 이불처럼 몸 위에 덮고 있었다. 그는 천을 쥔 손을 가슴팍 앞에 X 자로 모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힘겹게 눈을 뜨더니 먼 곳을 바라봤다. 곧 그가 아주 느릿하게 호흡을 뱉어내며 띄엄띄엄 말하기 시작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구나···. 내가 학교에 입학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내 아들이 입학하더니,
이제는 내 손주가 입학할 나이가 되다니······. 인생이 참으로 한 순간이야. 너무 빨리 지나가. 무상할 정도로.
하지만······.”

백고운이 잠깐 숨을 고르곤 옅게 웃었다.

“······그래, 재미있었어. 그거면 충분하지. 잘 즐기다 가는 것이면······ 충분하지.”


곧 그가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살짝 오르락내리락하던 흉통이 완전히 멈췄다. 그리고 백고운은 이불처럼
덮고 있던 흰 천을 조용히 위로 끌어당겼다.

곧 그의 얼굴이 흰 천에 완전히 덮였다. 꼭, 죽은 사람처럼.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백고운이 흰 천을 아래로 단번에 내리며 모두를 향해 경쾌하게 말했다.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

단원들은 꿈에서 깬 표정들을 했다. 연극을 보던 관객들이 막이 내려왔을 때 비로소 무대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놀란 건 최호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흰 천으로 여러 개의 연기를 보여준다고 했을 때, 각각 개별적인 단편의 연기들을 보여주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설마 그것들을 엮어서 하나의 스토리로 구성했을 줄이야.’

백고운이 보여준 건 한 남자의 일생이었다.


처음엔 운동회에 참여하는 십 대, 그 다음엔 막 회사에 입사한 이십 대, 그 다음엔 아버지를 잃은 삼십 대,
그리고 마지막엔 죽음을 맞이하는 노년.

백고운은 한 남자의 일생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장면에 알맞게 흰 천은 백팀을 상징하는 끈이 되었다가, 넥타이가 되었다가, 상주 완장이
되었다가, 죽음을 상징하는 수의가 되기도 했다.

발상력도 뛰어나고 연출력도 훌륭했다.

일생이란 거대한 시간을 단 5 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압축적으로 잘 담아냈고, 그 안에서도 인물의 희노애락을


나름의 백스토리와 함께 잘 보여주었다.

‘놀라워, 정말 놀라워.’

최호랑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처음에 별 볼 일 없는 연기라 오해했던 만큼, 뒤늦게 백고운이 뭘 보여주려는 건지 알아차렸을 때 그 충격은


대단했다.

가장 마지막에 발표를 시키면 핸디캡 때문에 수준 낮은 연기를 보여주지 않을까 했던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아니, 오히려 가장 마지막에 발표를 했기 때문에 백고운은 다른 단원들을 신경 쓰지 않고 제 실력을 다 드러낸 것


같았다.

그래, 백고운이 보여준 건 아마추어의 발표라기보다는 프로가 보여주는 하나의 짧은 시범 연극에 가까웠다.

그만큼 강렬하고도 대단한 연기였다. 즉석에서 구상한 것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스승이 기량 있는 젊은이를 발견했을 때처럼, 최호랑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무언가를 결심했다.

몰입력 테스트
21.

최호랑은 오디션이 끝난 후, 백고운을 따로 불렀다.

“백고운, 잠깐 나 좀 보고 가지.”

“네? 아, 네. 알겠습니다.”

백고운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일단 최호랑을 따라왔다.

사무실에 들어와 소파에 앉자 백고운이 맞은편에 따라 앉았다. 최호랑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실은 우리 극단에서 내년 말에 올릴 공연이 하나 있거든. 나는 백 배우도 그 공연에 함께 해줬으면 좋겠는데.


혹시 생각 없나?”

그러니까 이건 이른 캐스팅 제의였다.

최호랑은 본능적으로 예감할 수 있었다. 이번 시기가 지나면 백고운에게는 온갖 러브콜이 쏟아질 것이다. 그때
잡으려 하면 놓친다. 그 전에 먼저 이 탐나는 인재를 선점해야 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아예 자신의 극단에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하고 싶었는데, 그건 백고운의 발목을 너무 잡는 것


같아서 양심상 그럴 수는 없었고.
그 대신 딱 한 번만 같이 공연을 올려보고 싶었다. 내년 말이면 시기적으로 유명한의 영화를 찍은 직후쯤이 될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후의 차기작을 함께 하자고 미리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호랑은 이 정도는 말을 꺼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연이 물론 영화나 드라마만큼 대중적 파급력이 세진
않지만, 내년 말에 올릴 공연은 극단 왕국의 50 주년 공연으로 매우 특별하게 기획하고 있는 공연이었다.

게다가 백고운이 최종적으로 유명한 감독의 눈에 든다면(사실 반쯤은 이미 거의 확신하고 있긴 하지만), 최호랑이
그 중간에 다리를 놔준 공도 있지 않은가. 그 캐스팅 디렉터 값으로 이 정도의 이익은 취하려 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었다. 백고운이 거절한다면 최호랑도 깔끔하게 물러날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최호랑은
덧붙였다.

“편하게 말해줘도 괜찮네. 거절한다고 해도 이번 오디션에 불이익은 전혀 없을 테니까.”

그리고 백고운은 다행히도 전혀 망설이는 기색 없이 단번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아뇨, 그럴 리가요. 너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백고운은 예쁘게도 말했다.

“저야말로 단장님과 공연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최호랑은 만족스레 웃었다. 내년 말이면 아직 멀었지만, 벌써부터 백고운과 함께 할 공연이 기대가 되었다.

*
“그래서, 오디션 보다가 공연 캐스팅 제의까지 받았다고?”

내 이야기를 듣던 이초희가 입을 떡 벌렸다. 나는 딸기를 우물우물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년 말쯤에 올릴 공연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작품 제목이 뭔데?”

“아직은 몰라요. 그냥 출연해달라고 해서 알겠다고 하고 거기서 끝이었거든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일부러 자세한 건 말씀 안 해주신 것 같아요. 일단은 저도 뒷일은 생각않고 지금 하는 오디션에


집중하려고요.”

“맞아요, 사실 그게 좋죠. 잡생각이 많으면 일에 집중이 안 되니까. 아, 이것도 먹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표류가 까고 있던 귤을 내밀었다. 나는 감사히 받았다.

우리 셋은 지금 표류의 자취방에 모여서 도란도란 과일을 나눠먹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 어느새 내일이 마지막 시험이었는데, 표류와 이초희가 응원해줄 겸 찾아온다고 그랬다.
그런데 내가 있는 고시원은 방음도 안 되고 손님을 초대할 여력도 안 되어서 대신 표류네 집에 모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초희가 집들이 선물은 역시 과일 아니냐면서 고급 과일 바구니를 한 아름 사들고 왔다.

사온 건 그녀였는데 막상 그녀는 거의 손을 안 대고 나와 표류만이 열심히 과일을 먹고 있었다. 나는 돈이 없어서


과일 사먹기가 부담스러웠고, 표류는 홀로 자취하다보니 신선한 과일을 챙겨먹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이초희는 편의점에서 사온 과자를 아삭아삭 먹으면서 내게 물었다.

“내일이 마지막이면 결과는 바로 나오는 건가?”


“글쎄요, 그건 모르겠어요.”

“흠. 내일 볼 시험 주제가 뭔지 들은 건 없고?”

“네, 없어요. 즉흥 연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보는 시험이라서 그런 건 철저히 비밀로 하는 것 같아요.”

“되게 궁금하게 만드네. 그거 시험을 참관할 순 없나? 나도 고운 씨 연기하는 거 보고 싶은데.”

“참관은 안 되지만··· 아, 원하신다면 다시 보여드릴 순 있어요. 공이랑 흰 천만 있으면 가능해요.”

“에이, 왜 이래. 나 사석에서 배우들 장기자랑 시키는 그런 경우 없는 감독 아니야.”

나는 멋쩍게 웃었다. 아무래도 GV 에서 했던 말을 염두하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이초희가 살갑게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 이제 고운 씨는 스크린으로 봐야지. 유명한 감독으로 차기작 바로 되어서 빠른 시일 내에 볼 수 있으면


좋겠네. 그러고 보니 고운 씨 기다리는 팬들도 있던데.”

“팬들이요?”

“아, 몰랐어? 고운 씨 팬클럽 생겼어. 아직 회원이 몇 명 없긴 하지만. 나랑 표류는 이미 가입했고.”

표류가 노트북을 가져와서 인터넷 창을 보여주었다.

정말로 싸이월드에 내 이름을 건 작은 팬 페이지가 있었다. 회원 수도 열 명 남짓이었고, 글 수도 몇 개


없었지만 그래도 신기했다.

“이거 혹시 두 분 중 한 명이 만든 건 아니죠?”

“우리가 아무리 고운 씨 팬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기엔 우리가 좀 낯부끄럽지 않겠어······? 우리 아니야.
우리 영화 보고 고운 씨 팬 된 사람이 만든 거야. 봐봐, 매니저란 이 분. 벌써 우리 영화만 7 번 봤대.”

“어, 그러네요.”

그때 내 시선이 매니저 아이디에 닿았다.


[jungyeol_bgu]

뒤의 bgu 는 ‘백고운’의 이니셜일 테고, 앞은 ‘정열’이니까······.

나는 멈칫했다.

‘정열?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정열을 바치다 할 때 그 정열인 것 같은데, 어쩐지 이름처럼 느껴지는 게 어디서 비슷한 이름을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일주일 전 편의점에서 스쳐지나가듯 만났던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 줄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까맣게 몰랐다.


그때 얼핏 그녀의 친구가 그녀를 ‘정열아’라는 이름으로 불렀었던 것을 내가 어렴풋이 듣고 무의식 속에
기억해두고 있던 것 역시도 말이다.

때문에 나는 금방 착각이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고운 씨, 오늘은 그냥 내 방에서 자고 가요. 그래도 고시원보다는 여기서 자고 가는 게 컨디션에 더 좋지


않겠어요? 중요한 날이니까 내일 아침엔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요. 여기서 가는 게 더 가깝기도 하잖아요.”

“아, 그럼 그럴까요? 저야 그래주신다면 고맙죠.”

“뭘요, 우리 사이에.”

표류와 내가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초희가 불쑥 끼어들었다.

“뭐? 야, 그럼 나도 여기서 자고 갈래!”

“뭐래, 넌 우리 집보다 더 좋은 집 있잖아. 넌 너네 집 가서 자.”

“에이, 우리 사이에 깐깐하게 왜 이러실까.”

“얼씨구. 우리 사이가 뭔데?”

“이야, 이것 보소? 한때 무릎 꿇고 나한테 프로포즈도 했으면서, 아주 서운하게 구네? 작품 끝났다고 더 볼일


없다 이거지. 이럴 줄 알았어. 이 새끼 맨날 저 필요할 때만 나 찾고. 너 이리와. 오늘 베개 싸움 한 판
가자.”

“야! 고운 씨 오해하잖아!”

“아하하.”

“고운 씨, 초희 좀 말려 줘요!”

“어디가, 이리 안 와?!”

나는 둘의 난장을 구경하면서 마저 과일을 집어먹었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생각했다.

아, 이 딸기 진짜 맛있네.

그날 이초희는 결국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표류가 차를 태워준 덕에 훨씬 편하게


나는 극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시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최호랑은 앞에 서서 말을 꺼냈다.

“모두 알다시피, 우리는 총 세 번의 시험을 봤다. 한 번은 각자 다른 소품으로, 두 번은 모두 같은 소품으로


봤었지. 그리고 그 세 번의 시험은 모두 너희들의 순발력, 센스, 발상력, 연출력을 보는 시험이었고.”

그가 잠시 텀을 둔 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즉흥 연기에 중요한 것은 그것 외에 한 가지 더 있다. 그게 뭘까?”

단원들은 감이 잡히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했고, 최호랑은 곧바로 답을 알려주었다.


“그건 바로 몰입력이다. 배우라면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해야 해. 그래야 비로소 자연스럽게 그 캐릭터다운
애드리브가 나올 수 있다. 무슨 그런 기본적인 얘기를 새삼스럽게 하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모두 생각해봐라. 연기하다가 갑자기 돌발 상황이 생겨서 그것을 즉흥적으로 수습해야 할 때. 보통
사람들이라면 당황해서 집중이 깨지지. 그 짧은 순간 배역이 아니라 배우 본인이 튀어나와버리는 거야.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태연히 배역에 몰입해 있을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즉흥 연기를 잘 할 수 있다. 이해되나?”

“네!”

“좋아.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배역에 얼마나 몰입할 수 있는지, 몰입력이 얼마나 좋은지 테스트하는 시험을 할
거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당연히 높아야 하지. 두루두루 파악하기 위한 거라 생각하면
된다. 자, 모두 이쪽으로 오도록.”

최호랑은 우리를 데리고 연습실 반대편으로 향했다. 거기엔 매트리스와 테이블, 그리고 소품 따위가 있었다.

연습실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것들이 이미 거기에 세팅되어 있기에 뭔가 싶었더니, 시험을 위한 간이 세트장이었나
보다.

“너희들에게 생소할지는 모르겠지만, 1960 년대에 장 뤽 고다르나, 프랑수아 트뤼포와 같은 프랑스 감독들이
있다. 그 감독들은 실험적인 영화를 많이 찍었는데, 특히 배우들에게 즉흥적으로 연기를 시켜서 그것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400 번의 구타>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교도소 심리분석가에게 질문을 받는데, 실제로 감독은
그 주인공을 맡은 배우에게 질문 내용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배우는 오직 그 배역의 입장에서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한 거지.”

최호랑의 말에 단원들이 ‘와’하고 작게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대학 때 공부한 적 있는 내용이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들으니까 새삼 새로웠다. 그


감독들이 이끈 게 바로 누벨바그 사조인가 그랬지, 아마?

“거기에서 착안해서 오늘의 시험을 짜 봤다. 오늘은 모두 한 명씩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될 거다. 내용은
간단해. 그저 자신이 맡은 배역에 몰입해서 무대에 있으면 된다. 시간은 10 분 정도. 그때까지 그 인물로
버티기만 하면 통과다.”

나는 흥미로 눈이 반짝였다. 그러니까 이건 메소드 연기법과도 관련 있는 시험이었다. 메소드라는 게 완전히 그


배역이 되라는 거니까.

단원들이 ‘어라? 쉬운데?’라는 눈빛을 주고받을 때였다. 최호랑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물론 그 무대에 혼자 있지는 않을 거다. 중간에 내가 들어가서 너희들의 상대역을 할 거야. 너희들은 각자의
배역에 알맞게 대사를 치거나 반응을 하면 되고.”

“······!!”

단원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최호랑이 누구인가. 지금 이렇게 앞에 스승으로 서 있기만 해도 괜히 기가 죽을 정도의 대배우다.

그런데 무대 위에서 호흡을 맞추는 배우로 마주한다? 그것도 애드리브로만 상대해야 한다고? 기 안 눌리고 대사를
내뱉을 수나 있으면 다행일 것이다.

“참, 오늘은 마지막 시험이니까 카메라로 기록도 할 거다. 저쪽에 있는 카메라 보이지? 그런데 카메라를
의식하지는 말고. 오늘은 너희가 얼마나 배역에 몰입할 수 있는지를 보는 거지, 얼마나 극을 짜임새 있게
이끌어갈 수 있는지 연출력을 보는 건 아니니까.”

단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꿀꺽 침을 삼키며 ‘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최호랑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아. 일부러 몰입에 방해되게 하려고 그렇구나.’

의식해야 할 시선이 있으면 당연히 부담감이 높아지고, 배우가 연기에 집중하기도 어려워진다.

최호랑이 의도한 건 그것이었다. 일부러 방해물을 많이 갖다 놓은 상황에서 얼마나 잘 배역에 몰입할 수 있는지
보려고.

‘일부러 의식할 만한 부담감은 팍팍 주고, 그러면서 의식하지 말라고 강조하시다니. 오늘은 난이도가 높네.’
하지만 나는 연기에 한해선, 난이도가 높을수록 승부욕이 불타는 편이었다. 흥분으로 벌써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자, 한 명씩 뽑아라. 쪽지에 자신이 맡을 배역의 병명이 적혀 있다.”

최호랑이 앉아있는 단원들 사이로 걸어가며 주머니를 내밀었다. 단원들은 거기에 손을 집어넣고 뒤적거리며
쪽지를 하나씩 뽑았다.

“너 뭐 뽑았어?”

“나 조울증. 너는?”

“와 좋겠다. 나는 망상장애. 이거 어떻게 표현해야 하냐. 미치겠다.”

“저기 미안한데··· 혹시 틱 장애가 뭔지 알아? 나 이거 완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인데 어떡해?”

탄성이나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내 차례가 다가왔다. 나 역시 하나를 뽑았다. 그리고 펼쳐보였다.

[강박증]

나는 그 단어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럭키. 좋은 걸 뽑았다.

스승과 제자
22.
“모두 뽑았지? 생소한 병명도 있을 테니 각자 검색하고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최호랑은 그렇게 말하면서 10 분의 시간을 주었다.

단원들은 중 몇몇은 최근 등장한 스마트폰을 일찍이 갖고 있었는데, 다른 단원들은 그 친구들에게서 빌려 인터넷


검색을 하기도 했다.

10 분이 지난 후, 최호랑은 본격적으로 시험을 시작하겠다고 알렸다.

“시간은 충분했지? 오늘은 이름 순서대로 진행할 거다. 강일운!”

연습실이 단번에 조용해졌고, 이름 불린 강일운 단원이 긴장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뭘 뽑았지?”

“실어증입니다.”

“좋아. 준비 됐나?”

“네.”

최호랑은 한쪽에 스톱워치를 놓고 시작하란 듯 턱을 까닥였다.

강일운은 매트리스에 걸터앉았는데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듯 불안히 눈을 굴렸다. 일단 실어증이란 걸


의식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긴 했지만.

그가 잠시 부산스럽게 침대에 누웠다가 앉았다가 하면서 극에 집중하려 애썼다. 한 1-2 분 정도 흘렀을까.

최호랑이 시계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강일운, 지금 몇 시지?”
“네?”

그는 순간 당혹스럽게 대답했다가 곧 얼굴이 새파래졌다.

“······!”

그리고 그건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너무도 간단하게 벌어진 사태에 모두가 숨을 헉 죽였다. 최호랑이 눈썹을
꿈틀했다.

그러나 그는 혼을 내는 대신 짧고 간결하게 선고를 내렸을 뿐이었다.

“좋아, 그만. 다음, 김이연. 나와라.”

이건 탈락이나 다름없단 소리였다. 단원들이 충격 받은 듯 입을 작게 벌리고 서로의 눈치를 봤다. 분위기가 싸―


해졌다.

모두들 그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이 시험이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살벌하단 걸 말이다.

최호랑이 아까 말한 10 분 정도 무대에서 버틴다는 것은 말처럼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방심하다간 강일운의


경우처럼 3 분도 못 되고 커트 당할 수도 있었다.

얼굴이 까맣게 죽은 강일운이 자리로 돌아갔고, 김이연이 침을 꿀꺽 삼키며 일어났다.

그렇게 단원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시험은 한창 진행됐다.

최호랑은 단원들의 연기에 개입할 때마다 매번 단원들의 허를 찌르는 대사를 뱉거나 행동을 했다.

몇몇 단원들은 자신의 설정을 잊지 않고 반응했으나, 몇몇 단원들은 당황해 자신의 설정과 모순되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물론 최호랑은 일부러 그걸 노리고 의도적으로 대사를 치는 것이었다. 모두 그 방식을 알았기에 후반부로 갈수록
남아 있는 단원들은 더욱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순서는 어느새 백고운 근처까지 다가왔다. 민하나가 백고운보다 앞이었기에 먼저 앞으로 나갔다.

그녀는 거식증을 뽑았는데, 최호랑이 어떤 짓을 해도 시종 무시한 채 무기력하게 누워있었다. 밥을 안 먹고,


대신 그만큼 움직이지도 않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다.

민하나는 10 분이 다 지날 동안, 설정과 모순되지 않은 연기를 안정적으로 보여주었다. 제법 괜찮은 연기였다고


최호랑은 속으로만 평가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백고운 차례였다.

“자, 다음은 백고운.”

“네.”

그가 대답하며 일어섰다.

“뭘 뽑았지?”

“강박증입니다.”

최호랑은 시작하란 듯 고개를 끄덕였고, 백고운은 안으로 들어갔다.

기대감 어린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따라붙었다. 부담이 될 법한데도 그는 태연해보였다.

백고운은 들어가자마자 표정을 확 바꾸며 연기를 시작했다.

“쯧.”
그는 깐깐한 표정으로 눈을 찌푸리더니 협탁 위에 놓인 휴지를 뭉텅으로 뽑았다. 대부분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그는 휴지 몇 장으로 협탁 위를 닦기 시작했다.

“진짜 더러워 죽겠어.”

그는 홀로 중얼거리며 한참이나 청소에 열중했다. 일단 무대에 들어가자 배역에 완전히 몰입한 듯 주변은 신경
쓰지 않는 태도가 아까의 민하나랑 비슷했다.

물론 딱히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다. 강박증이니 청소를 하는 건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뻔한 액션이었으니까.

하지만 최호랑은 이제는 알았다.

백고운이란 배우는 언제나 자신의 예상을 보기 좋게 배반하고 훨씬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만다는 걸.

그렇기에 최호랑은 방심 하지 않은 채 무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뜸 소리쳤다.

“고운아!”

그러자 백고운이 최호랑을 돌아보았다. 그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먼저 아는 척 하지도 않고 신중히
최호랑의 다음 대사를 기다렸다.

즉흥 연기로 두 명 이상의 배우가 호흡을 맞춰야 하는 경우. 몇 가지 예의랄까 룰이랄까. 그런 것이 있다.

자세한 설정이 서로 간에 협의되어있지 않다면, 먼저 말을 꺼낸 쪽이 관계와 상황을 정해주는 것이었다.

최호랑은 팔을 걷어붙이고 짐짓 화난 듯 식식거렸다.

“아빠가 너 데리러 왔다. 근데 너 아직도 이러고 있니? 이 병원 다닌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차도가 없어? 안 되겠다, 아빠랑 같이 집에 가자. 차라리 집에 있는 게 더 낫겠어.”

그러자 백고운도 간략한 배경 설정을 알아차린 듯 스무스하게 받아쳤다.

“안 가요. 아빠나 가요. 그 더러운 집구석에 들어갈 바엔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지.”

백고운이 그때 무언가를 발견한 듯 눈을 찌푸렸다. 그가 불쑥 최호랑의 차림새를 지적했다.

“그리고 소매 내리고 단추 좀 제대로 채워요. 셔츠도 바지 안에 제대로 넣고요. 삐져나왔어요.”

최호랑은 속으로만 감탄했다.

‘역시 놓치지 않는군.’

백고운이 당황하지 않고 대사를 받을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호랑의 차림새가 흐트러져 있는 걸


알아챌지 아닐지 반신반의하긴 했다.

당연히, 소매를 걷어 올린 건 일부러 한 액션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봤다면 별 이상함도 눈치 못 챘을 것이었다.


그만큼 최호랑의 그 액션은 아주 자연스럽고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강박증이 있는 인물이라면 그런 사소한 삐뚜름함이 거슬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최호랑이 다른 단원들에게 했던 것처럼 허점을 찌르려 한 공격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백고운은
진짜 배역에 완전히 몰입한 것처럼 모순되지 않은 행동을 보여준 것이었고.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최호랑은 다음 액션을 취했다. 그는 바지 안에 쑤셔 넣은 셔츠를 꺼내면서 더 흐트러트렸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고운아.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 이렇게 조금 지저분해도 살아가는 데에 아무 문제없다고! 그러니까 너도
참고 천천히 봐봐. 보다보면 괜찮아질 거야.”

물론 실제 환자에게 이런 충격요법을 가한다면 자칫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심리적 문제란 게


밀어붙인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이건 가상의 설정이었고, 최호랑은 그저 갈등 상황을 만들어보려는 것이었다. 갈등이 있어야 배우들 간에
대사와 행동이 오고갈 수 있으니까.

최호랑은 기껏해야 백고운이 화를 내는 것을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백고운이 최호랑을 빤히 보더니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최호랑을 붙잡더니 그의 셔츠를 직접 쑤셔
넣기 시작했다.

“······!”

최호랑은 깜짝 놀랐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순간적으로 연기 중이란 걸 잊을 정도로 당황했다.

여태 앞선 모든 단원들은 최호랑이 만들어놓은 갈등 상황에도 기껏해야 말로 받아칠 뿐이었지, 이렇게 신체


접촉을 하면서 액션을 취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백고운은 진짜로 최호랑의 아들이라도 되는 양 스스럼없이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최호랑은 처음으로 극의 주도권을 놓치는 기분이었다.

두 배우가 대사를 주고받는다는 건 기본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턴을 주고받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신의 턴이 돌아왔음에도 수비에만 급급할 경우, 필연적으로 두 배우 사이에는 공격과 수비의 포지션이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흔히 상대 배우의 기(氣)에 눌린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단원들은 여태 계속 최호랑의 공격을 막아내기 급급했다. 그런데 백고운은 처음으로 먼저 훅 들어오면서 최호랑을
공격했다. 이제 반응해야 하는 건 최호랑 자신이 되었다.

그래.

최호랑은 이 젊은 배우에게― 자신보다 까마득히 어린 이 젊은 배우에게 지금 기로 밀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허, 이거 진짜 놀라운걸.’

그러나 최호랑이 밀린다고 밀리는 호락호락한 사람이었다면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좋아, 해보자고.’

최호랑은 눈을 빛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들은 더 이상 스승과 제자가 아니었다. 같은 무대에 올라선 동등한 배우일 뿐이었다.

이제 무대는 단순한 시험을 벗어나 정말로 하나의 극과 같은 상황으로 치달아 갔다.

때마침 백고운이 최호랑의 소매를 내리고 셔츠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가 만족스러운 듯 ‘후’ 숨을 내쉬며 몸을
떼었다.

그때였다. 최호랑은 그가 말릴 틈도 없이 매트리스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간이 세트장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는 백고운이 기껏 정돈해놓은 이불을 들춰서 던졌고, 협탁의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엉망으로 만들었다.

백고운이 경악했다.

“······! 뭐하는 거예요!”


“똑바로 봐! 보고 제대로 버텨! 버티면 다 괜찮아져! 그게 다 정신이 나약해서 그래! 자, 봐봐. 이게 정상이야,
이게 정상이라고!”

최호랑은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를 연기했다.

백고운은 분노와 충격으로 파르라니 떨었다. 곧 그는 입술을 꽉 깨물며 최호랑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그가


헤집어놓은 것을 다시 되돌렸다.

물론 최호랑이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그는 백고운이 집어 들어 탁탁 펼치려 하는 이불을 잡아챘다.

둘은 줄다리기하듯 이불을 양 쪽에서 잡아당기며 힘겨루기를 했다.

백고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곧 그가 악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 마요, 하지 말라고요! 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날 좀 내버려두라고요, 제발!”

“이게 아빠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아빠가 널 괴롭히려고 이래? 어? 다 널 위해서 이러고 있는 거지!”

그 말에 백고운은 이성이 툭 끊어진 것 같았다.

“아악!!”

그가 사자후를 토해내더니 길길이 날뛰며 최호랑의 몸을 강하게 밀쳐댔다. 그 힘이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기에,
최호랑 역시 이를 악물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나가요, 나가! 꺼져버려!”

“이 자식이 감히 아빠한테 욕을 해?! 매 어디 있어?!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연습실을 울렸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단원들은 얼어붙어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 이게 지금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이거 진짜야? 연기 맞아?’

‘지금 당장이라도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그만큼 백고운과 최호랑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도저히 즉석 연기라고 볼 수 없을 만큼 폭발적이었다.

모두의 눈이 바쁘게 백고운과 최호랑을 왔다 갔다 했다. 그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이 극이 어떻게 이어질지


긴장한 채 지켜봤다.

힘겨루기의 승자는 결국 백고운이 되었다. 최호랑이 이불을 실수로 놓쳤고, 백고운이 그 사이에 그것을 확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호랑은 승복하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인 건지 스톱워치를 끄고 갑자기 무대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는 금방 돌아왔다.

그리고 모두가 놀랐다. 돌아온 최호랑의 손에 밧줄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호랑은 누가 ‘엇’할 새도 없이 그 밧줄로 백고운을 팔을 묶어버렸다. 최호랑의 그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백고운은 아주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린 백고운 거세게 버둥거렸다.

“이거 풀어! 풀란 말이야!”

“가만히 있지, 못해?!”


최호랑은 마저 그의 다리를 묶기 위해 낑낑 애썼다. 그 둘은 서로 엉킨 채 잠시 사투를 벌였다.

이번의 힘겨루기의 승자는 최호랑이었다. 백고운은 포로처럼 팔과 다리가 묶였고, 최호랑은 땀으로 푹 젖은 몸을
일으켰다.

잠시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둘 다 격렬하게 몸싸움하느라 벅찬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아, 하―.

헉, 헉―.

백고운은 붉어진 눈을 부릅뜨곤 최호랑을 노려보았다. 증오에 찬 그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연기라지만 확실히
오싹한 모습이었다.

물론 최호랑이 그렇게까지 백고운을 몰아붙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예 움직일 수 없을 정도까지 몰린다면 백고운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여줄 것인가? 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때였다. 백고운은 몸을 팩 돌렸다. 의외의 선택이었다.

백고운은 최호랑을 등진 채 고집스럽게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의 뺨을 타고 분하고 억울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눈물만 흘릴 뿐 한참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최호랑에게 말로 맞서지도, 몸을 일으키려


애쓰지도 않았다.

‘음, 여기까지인가.’

최호랑은 백고운이 더 이상 공격해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이제 연기를 종료할 타임이 된 거라 생각했다. 그가


어깨에 힘을 풀려 했다.
그런데 그때, 백고운이 갑자기 꼬물꼬물 움직였다.

그는 묶인 상태에서 불편하게 손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고, 곧 휴지를 꺼냈다. 아까 미리 넣어 놨던 휴지였다.

최호랑은 가만히 눈썹을 치켰다.

‘뭘 하려고? 근처에 청소할 만한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눈물을 닦을 생각인가?’

그러나 백고운의 모두의 예상을 빗나가는 행동을 했다.

해수 오디션
23.

백고운은 휴지를 꺼내더니, 놀랍게도―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는 연습실 바닥 장판 사이사이의 그 틈을 닦고 있었다.

그 장판의 틈엔 보통 사람이라면 눈치 채지도 못할 먼지 덩어리들이 끼어 있었는데, 그는 그것들을 꼼꼼히 닦고


있는 것이었다.

“······!”

최호랑은 놀랐다. 그리고 그건 지켜보고 있던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선의 중심에 있는 백고운은 다른 사람이 지켜보건 말건 아랑곳 않고 자신의 행위에만 집중했다. 울고 있다가
문득 장판의 먼지를 발견하고, 금방 거기에 신경이 팔려서 다시 청소에 집중하게 된 것 같았다.
최호랑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내가 졌군.’

백고운은 정말로 자신의 예상보다 하나 더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최호랑은 바닥의 장판까지는 생각이 가 닿지도 못했다. 그는 이 무대에 놓여 있는 소품(매트리스와 협탁 등)만을


세트라고 생각했다. 보통 바닥은 그저 배경일 뿐, 소품 그 자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배우가 아니라 진짜 청소 강박증 환자의 눈으로 보기엔 바닥의 장판의 먼지라도 거슬릴 수 있는 법이었다.

그래, 백고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본인 자신이 아니라 인물로서 행동했다. 그것도 완벽하게.

“좋아, 그만.”

최호랑은 비로소 연기의 종료를 알렸고, 백고운도 행위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끝났나요?”

“그래.”

최호랑은 백고운의 밧줄을 풀어주면서 사과했다.

“혹시 아팠나? 미안하다.”

“아녜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했다.”

“단장님도 고생하셨습니다.”

그런 대화를 하는데 둘의 눈이 순간 마주쳤다. 그리고··· 어째서일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둘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최호랑은 깨달았다.

방금의 그 짧은 시간 동안 백고운과 합을 맞추면서 그들 사이에 묘한 유대감이 생겼다는 것을 말이다.

그건 무대에 올라간 배우들이 막이 끝나고 내려왔을 때, 동료 배우들에게 느끼는 전우애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 감각을 느껴보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무대에서 은퇴한 후 이제는 느낄 일이 없었으니까. 사실 그래서


반쯤은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이 기분을 이렇게 오랜만에, 그것도 이렇게 어린 친구와 연기의 호흡을 맞춘 것으로 다시 느껴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정말 못 당해내겠군.’

최호랑은 스승이었지만, 그 이전에 연기자였다. 오랜만에 연기자로 연기를 해서 그런가. 오늘은 백고운에게
가벼운 질투가 들었다.

그건 이제 후배들에게 전성기를 넘겨줘야 하는, 전(前)세대가 가질 수밖에 없는 어떤 회한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자못 유쾌한 것이, 제법 후련하게 즐거운 기분이었다. 최호랑은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충무로의 어느 영화 제작사.

유명한은 인상을 찌푸리곤 배우의 프로필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는 며칠 전 이번 영화의 주인공을 뽑기 위해 에이전시와 유명 학원에 공문을 돌렸었다.

나이 풀을 미성년자로만 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명한의 이름값 때문인지 접수된 서류만 백 단위였다. 그는


대한민국에 그렇게 아역 배우들이 많은지 처음 알았다.

유명한은 접수된 프로필과 연기 영상을 보고 후보를 1 차로 추렸고, 다시 그들을 불러 2 차 오디션을 봤다.

그러나 어떻게 된 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그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학원이나 예고 애들 문제점이 그거지. 오리지널리티가 없는 거. 어디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비슷비슷, 판에


박힌 연기들.’

자신이 찍는 게 평범한 영화라면 상관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유명한이 찍고 싶어 하는 이번 영화는 특히 배우의


개성이 중요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톡톡 튀고 반짝거리는, 극을 휘어잡고 이끌어갈 수 있을 만큼 존재감이 강한 배우.

신선한 마스크 중에 그런 사람을 구하고 싶어 일부러 공개 오디션을 열고, 또 최호랑에게 부탁해 연극판 쪽에서도
수소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가다가는 결국 기성 배우 쪽에서 타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쪼록 최호랑이가 구해오는 애들 중에는 괜찮은 친구가 있길 바라야겠군.’

며칠 전 최호랑은 거의 다 추려가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연락해왔다. 이제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그때,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고 조감독이 들어왔다.

“감독님, 최 단장님께서 다 정했다고 후보 프로필을 보내주셨습니다.”

조감독이 프린트 두어 장을 유명한에게 건넸다.


어디 보자. 이름이··· 백고운과 민하나? 보니까 남자 하나, 여자 하나였다. 성별 상관없이 보내달라고 했더니
각 성별에서 한 명씩 뽑은 모양이었다.

고작 두 명이라고 실망하지는 않았다. 최호랑은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최호랑의 안목은 워낙
엄격해, 그가 선별한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유명한이 프로필을 훑으려는데, 조감독이 ‘아, 참’하고 덧붙였다.

“그리고 최 단장님이 연기 영상도 짤막히 첨부해주셨어요. 도움이 될 거라고 하시던데요.”

그러면서 조감독은 책상에 노트북을 내려놓았다. 스페이스 바를 누르자 화면에 영상이 보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유명한은 깜짝 놀랐다.

최호랑의 시험 형식이 독특해서 첫째로 놀랐고, 즉흥극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두 후보의 연기가 괜찮았기에
둘째로 놀랐다.

특히 남자 쪽인 백고운이란 친구는 에너지가 엄청났다. 여자 쪽인 민하나가 거식증이란 설정을 뽑았기 때문에,


그녀의 무기력한 연기와 대비되어 상대적으로 더 강렬해 보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느낌이 확 왔다.

그리고 유명한의 머릿속에 전구가 반짝 켜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두 후보 중 어떻게 마지막 한 명을 고를지, 그 방법을 찾은 것 같다.

똑똑.

50 대로 보이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한 남자가 문을 밀었다. 그리고 안쪽을 향해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기태성. 충무로가 사랑하는 탑급 배우로, 30-40 대에 전성기를 누렸고 이제는 굵직한 영화에
가끔씩만 얼굴을 비추는 배우였다.

그런 기태성이 제작사 안을 둘러보다가 유명한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가 활짝 문을 열고 호쾌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유 감독님!! 이게 얼마만이야.”

“아, 기 배우 왔어?”

뒤를 돌아본 유명한도 그제야 기태성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둘은 예전에 작품을 하나 같이 찍은 적이


있었다. 그 이후 ‘감독님’, ‘배우님’하고 호칭은 하지만 말을 편하게 하는 형동생 사이였다.

둘은 찐한 포옹을 하며 반가움을 나눈 후, 소파에 앉았다. 워낙 성격이 무람없고 장난스러운 기태성이 가볍게


타박했다.

“왜 이제 불렀어. 이제 나 한물갔다고 안 불러주나, 서운할 뻔했다니까.”

“그럴 리가 있나. 오히려 나야말로 기 배우가 걷어 찰까봐 조마조마 했다고.”

“에이, 당연히 유 감독님이 부르는 건데 와야지. 게다가 보내준 시나리오랑 기획의도도 좋고. 근데 이거 진짜로
찍을 수 있겠어? 상당히···.”

기태성은 말을 골랐다.

“도전이던데. 뭐, 나야 재밌어 보여서 오케이 하긴 했지만. 어째, 투자자는 좀 붙고?”

“하하. 그럼. 기 배우가 주연이라니까 다들 돈 가져가달라고 난리던데.”

“감독님도 참. 투자자가 다 감독님 이름 보고 붙지, 은퇴 직전인 나 같은 배우 보고 붙을까.”

기태성은 손사레를 치면서도 빙그레 웃었다. 저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인 줄은 알지만 확실히 기분은 좋았다.
배우로서 유명한은 같이 작업하기 까다로운 감독은 아니다. 사람도 좋은 편이었고, 현장에서 배우를 혹독하게
굴리는 타입도 아니었으니.

예술 한다는 자아가 좀 세서 상업적인 영화를 일절 안 찍는다는 점이 단점이라면 단점이었지만··· 사실 흥행이란


건 미묘한 면이 많았다. 아예 예술영화라고 찍어도 국제 영화제에서 상도 받고 그러다보면 또 대중은 관심을
기울이는 법이었다. 유명한 감독 역시 그런 식으로 이름값을 높인 감독이었고.

기태성은 삼 년 전 찍은 작품을 마지막으로 커리어를 잠시 쉬고 있었다. 이제 쉴 만큼 쉬고 오랜만에 다시


복귀할까 슬슬 고민하던 차에 마침 소속사에서 연락이 왔다. 유명한의 시나리오가 왔는데, 읽어보지 않겠느냐고.

내용도 좋았고, 실험적이긴 했지만 재밌을 것 같았다. 게다가 뭣보다 주연 롤이다. 기태성이 바로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내 상대역은 구했수?”

“아직. 후보는 둘 있어.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 오디션 보고 정하려고.”

“오. 그 후보들 혹시 나도 아는 사람들인가?”

“아니, 기 배우는 모를 거야. 연극판 쪽에서 구했거든. 둘 다 신인이고.”

“호오―.”

이건 좀 의외였다. 하기야 유명한 감독의 이름값에, 기태성 자신의 이름값도 있으니 상대역 한 명쯤은 신인이어도
괜찮을 것이다.

기태성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유 감독님이 허튼 사람 데려올 리는 없고. 누굴 데려오든 잘 데려올 거라 믿지. 나랑 좀 잘 맞는 사람이면


좋겠네.”

“당연하지. 어떻게 보면 우리 기 배우랑 케미가 맞아야 하는 게 이 영화의 핵심인데. 실은 그래서


말인데······ 내가 기 배우한테 부탁할 게 좀 있는데.”

유명한이 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늘이며 운을 뗐다. 기태성은 ‘응?’했다.


*

일주일 뒤, 나와 민하나는 연락을 받고 영화 제작사에 도착했다. 미팅 룸에 안내받고 우리는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곧이어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바로 유명한 감독이었다.

“둘 다 반가워요.”

나와 민하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녕하세요!’하고 꾸벅 인사했다. 유명한은 앉으라고 손짓했다.

“미리 연락 받았겠지만 이렇게 두 분이 최종 후보에 들었어요. 최 단장이 두 배우를 추천하기도 했고, 저 역시


둘의 연기를 아주 인상 깊게 봤거든요. 둘 다 뛰어났지만 연극이랑 달리 영화는 더블 캐스팅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 명을 골라야 하는데··· 아, 일단 이거 먼저 받아요.”

그는 우리에게 프린트를 한 부씩 나누어주었다. 프린트 위에는 <가제: 해수>라고 영화 제목이 적혀 있었다.

프린트 아래쪽에는 간단한 배역 설명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눈으로 훑었다.

[해수: 10 년 전 유괴범에게 납치된 후 산 속에 방치되어 개들과 함께 자란 늑대아이. 사회적 교류가 단절된 채


자랐기에 언어도 사용하지 못하고, 이성적 소통도 불가능하다.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은 미성숙한 상태.]

유명한은 말했다.

“아주 간단하게 줄거리 설명을 하자면, ‘래원’이라는 형사가 10 년 만에 유괴범의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쫓아 도착한 산 속 컨테이너에서 10 년 전 납치된 ‘해수’라는 아이를 발견하게 돼요. 래원은
유괴범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해수와 함께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해수는 래원과 함께 지내면서 점점 인간
생활을 배우고, 그러면서 한발 성장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에요.”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설명만 들었을 땐 흥미가 훅 갔다.


“본론으로 넘어가자면 마지막 오디션은 이런 방식으로 볼 겁니다. 해수가 래원과 처음 만나는 씬 있죠? 그
장면을 오디션 장에서 연기하면 됩니다. 하지만 정해진 대본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지막 시험 때처럼, 상대
배우랑 즉흥적으로 합을 맞추며 연기를 해주면 됩니다. 래원 역은 상대 배우가 직접 와서 둘의 상대역을 해줄
거예요. 내가 부탁 좀 했죠. 정리하자면 캐릭터를 잡는 것도, 래원과 첫 만남 때 어떤 모습을 할지도 두 분이
상상해서 준비해오면 된다는 뜻입니다. 이해했나요?”

나와 민하나는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과제의 실마리
24.

민하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백고운과 나란히 뽑힌 것은, 자신이 그와 비슷하게 연기력이 높아서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운이 좋았지. 거식증 말고 다른 걸 뽑았다면 그만큼 못했을 거야.’

민하나에겐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가수가 꿈이라 연습생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다이어트 압박을 심하게 받았는지 어느 순간 거식증 때문에 힘들어 했었다. 물론 지금은 연습생을 그만두고 치료
받아 다시 건강하게 나아졌다.

민하나는 그 친구가 거식증을 앓았을 때의 모습을 지켜봤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 시험에서 비슷한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요령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뭣보다 ‘해수’라는 캐릭터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늑대아이라··· 개랑 비슷하게 하면 되나? 행동은 그렇다 치고, 어떤 느낌으로 잡아야 하지?’


곰곰이 상상해봤지만, 뚜렷이 잡히는 이미지가 없었다. 민하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벌떡 일어났다.

앉아서 생각만 한다고 뭐가 나오나. 이럴 땐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리하여 오늘. 민하나는 경기도의 한 유기견 보호센터에 봉사하러 왔다.

그녀는 다른 봉사자들과 함께 간단히 교육을 받은 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주로 배변 치우기, 축사


청소하기, 개에게 밥 주기 등등이었다.

막상 봉사하러 와보니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는 노동이 대부분이라 한가롭게 연기에 대해서 생각할 틈이 없었다.

개를 관찰할 틈도 없이 민하나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원장님이 또 그녀를


불렀다.

“하나 씨, 이거 애들 밥인데 밖에 있는 애들한테 주고 올래요?”

“네!”

그녀는 원장님이 건네준 개밥을 들고 뒷마당으로 나갔다. 몇몇 봉사자들이 개들과 함께 있는 게 보였다. 민하나도
막 그들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라치자 갑자기 개 한 마리가 민하나를 향해 거세게 짖었다.

컹, 컹!

민하나는 깜짝 놀라 움찔 멈춰 섰다.

설상가상으로, 한 마리의 개가 짖자 다른 개들도 따라서 민하나를 향해 컹컹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너무도 사나워 민하나는 우뚝 굳은 채 우물쭈물 했다.
다른 봉사자들도 당황했다.

“어머, 얘들이 왜 이러지. 쉬쉬.”

“밥 주러 온 거예요?”

“네. 원장님이 갖다 주라고 하셨어요.”

“그럼 저희가 할게요.”

“아, 감사합니다···.”

봉사자들이 민하나가 들고 온 개밥을 건네받았다. 그녀가 고개를 꾸벅이곤 다시 컨테이너 안으로 돌아왔다.

원장님이 벌써 끝냈냐고 놀라기에 민하나는 방금의 일을 설명했다. 그러자 원장님이 아하, 하고 웃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네. 아마 밖에 있는 애들은 대형견이라 그럴 거예요.”

“네?”

“왜, 하나 씨는 어리잖아요. 여기에 어린 학생들은 많이 안 오거든요. 애들은 의외로 서열 관계를 파악하는 게


빨라서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들한텐 잘 짖어요. 사랑을 많이 받고 컸으면 또 모르는데, 여기엔 험한
환경에서 구조된 애들이 많이 있거든요. 경계심이 좀 안 좋게 분출되는 거죠.”

“그렇군요···.”

“소형견 중에 마침 산책해야 할 애가 있는데, 대신 이 친구 산책 좀 시켜줄래요 그럼? 한 삼 십 분 정도


돌아다니다가 오면 돼요.”

“네, 그럴게요.”

원장님은 안쪽에서 포메라니안 한 마리를 데려와 목줄을 민하나에게 건넸다. 그 개는 약간 낯을 가리는 듯 했지만,
짖지는 않았다.

“귀여워라. 이름이 따로 있나요?”

“쫑이에요. 성대수술 받아서 짖지는 못 해요. 가정집에서 자란 것 같은데 국도변에 버려져서 떠돌고
있더라고요.”
안 짖는 게 아니라, 못 짖는 거였구나. 괜히 더 안쓰러웠다.

민하나는 쫑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한 이십 십 분쯤 걸었을까, 쫑이의 걸음이 슬슬 느려졌다. 자신의 다리도 좀 아프기도 해서 잠시 쉴 겸 근처에


보이는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그때 차 하나가 멀리서 오더니 한적한 시골길 도로를 붕 지나갔다.

민하나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쫑이가 낑낑거리며 몸을 바짝 움츠렸다. 그녀는 그제야 쫑이가 도로에 유기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쉬, 괜찮아. 괜찮아.”

민하나는 덜덜 떠는 쫑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나 쫑이는 오히려 그녀의 손길을 위협이라
생각했는지 그녀의 손을 콱 물었다.

“윽.”

아직 몸집이 작아서 크게 아프진 않았지만, 따끔하긴 했다. 그녀는 신음을 삼키며 잠시 참았다.

가만히 기다리자, 오히려 쫑이가 민하나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슬쩍 벌렸다. 그리곤 얌전해져서 제가 깨문 상처
자국을 혀로 삭삭 핥았다.

민하나는 빙그레 웃으며 쫑이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이제는 괜찮아.”

민하나는 그렇게 잠시 쉬는 시간을 갖다가 ‘이제 돌아갈까?’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는 왔던 길 대신, 좀 더
멀리 돌아가지만 차가 안 다니는 인도 길을 택했다.

다행히도 다시 센터에 도착할 때까지 특별히 쫑이가 두려워하는 기색은 더 이상 없었다.

쫑이는 다시 우리 안으로 들어갔고, 민하나는 원장님이 주는 새로운 일감을 받아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어느덧 길었던 해가 저물고, 봉사가 끝나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민하나가 원장님에게 막 헤어지는 인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근처에 쫑이가 들어가 있는 우리가 있었는데, 철조망 근처로 쫑이가 다가왔다. 그리곤 민하나를 올려다봤다.

원장님이 그걸 발견하고 웃었다.

“쫑이가 그새 하나 씨에게 정이 많이 들었나 봐요.”

“정말이야, 쫑아? 아이고. 언니도 가기 아쉽다. 꼭 다음에 또 올게.”

민하나는 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과 달리 이제는 그녀가 손을 뻗어도 놀라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쫑이가 유순히 민하나의 쓰다듬을 받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게 꼭 인간으로 따지자면 잘 가란 듯한 손짓 같았다.

처음엔 그렇게 겁먹고 두려워했던 애가 한나절 같이 있었다고 이렇게 마음을 연 게 뭐랄까··· 뭉클하고 그랬다.

“다음에도 꼭 올게요.”

“그래요. 또 봐요.”

원장님이 사람 좋게 민하나와 다른 봉사자를 배웅했고, 민하나는 시내로 돌아와 돌아갈 차편을 구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그제서야 문득 소기의 목적이 다시 떠올랐다.


“아, 맞다.”

원래는 ‘해수’라는 인물을 어떻게 연기할지 힌트를 얻기 위해 유기견 보호센터에 봉사하러 온 것이었다.

워낙 바빴다 보니 완전히 깜빡하고 있었다. 그녀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민하나는 뒤늦게 오늘 있었던 일을 반추했다. 대형견이 짖어서 그녀가 놀랐던 것. 그리고 소형견인 쫑이와 함께
산책 갔던 것. 그리고 쫑이가 경계하다가 나중에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

그리고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섬광처럼 퍼뜩 스쳐지나갔다.

‘······잠깐만.’

이거 어째, 이번 과제의 실마리를 얻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시각.

“잘 가, 고운 씨.”

이초희가 자신의 개를 안은 채 나를 배웅 나왔다. 그녀가 개의 앞다리를 잡고 흔들흔들 흔들며 장난스레 잘 가란


인사를 했다.

민하나가 유기견 보호센터에 갔다는 걸 몰랐지만, 나 역시도 과제를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며칠 전에 주변에 개를 키우는 사람이 있느냐 물었고, 다행히 이초희는 자신이 리트리버를 키운다고 했었다.
오늘은 바로 그 개를 구경하러 왔다. 그리고 지금은 이제 돌아갈 참이었다.

“오늘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뭘. 내가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지. 오디션 잘 봐.”

나는 인사하고 그녀의 집을 나왔다.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거리를 걷다가··· 슬쩍 웃었다.

나 역시, 어떻게 ‘해수’를 연기해야 할지 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영화 <해수>의 ‘해수’ 역 비공개 오디션 당일 날.

유명한은 서울의 한 스튜디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스튜디오에는 카메라 테스트를 위한 카메라 몇 대만 설치되어있을 뿐, 전반적으로 소품도 뭣도 없이 썰렁했다.


그건 오디션 볼 장면의 배경이 컨테이너 안이라는 설정 때문이었다.

유명한이 간단히 카메라 화면을 체크하고 있는데,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감독이 문득 물었다.

“근데 감독님. 왜 배우들한테 대본을 안 주셨어요? 완성본 있으시잖아요.”

유명한이 이주 전에 백고운과 민하나에게 준 것은 시놉시스뿐이었다. 거기엔 배역 소개와, 간단한 줄거리,


그리고 두 인물이 첫 만나는 장면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 적혀 있었다.

하지만 사실, 유명한은 완성된 대본이 있었다.

그러나 유명한은 일부러 그것을 공개하지 않았다. 백고운과 민하나에게는 물론, 기태성에게도 미완성 버전인
러프한 시나리오만 보여줬을 뿐이었다. 왜냐면―.
“어떤 걸 보여줄지 궁금하잖아.”

밑그림을 다 완성한 채 주는 것보다, 아예 흰 백지에 가까운 종이를 주고 거기에다가 뭘 그려줄지 지켜보는 게 더


흥미롭고 호기심이 가는 일 아니던가.

실은 ‘해수’ 역 배우을 구하던 공개 오디션 때 지정 대본을 줬더니, 다들 너무 비슷비슷한 연기만 해서 좀 질린


면이 있었다.

창의력도 없고, 신선함도 없고, 개인의 생각도 들어가 있지 않은 그런 몰개성한 연기들은 이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유명한은 영화의 기획 의도와 맞게 최대한 배우의 자유도를 끌어낼 수 있도록 이번 비공개 오디션을 기획했다.
물론 그건 최호랑이 보내준 시험 영상을 보고 힌트를 얻은 것이긴 했다.

“그보다 해수 역 준비는 됐어?”

“네. 민하나 씨부터 들어오라고 할게요.”

조감독이 무전으로 지시를 내렸고, 곧 스튜디오 한쪽에서 민하나가 들어왔다.

“규칙은 알고 있죠? 씬 마지막 부분만 지켜주면, 그러니까 래원과 함께 컨테이너를 나가는 것으로 끝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 전까지는 뭘 해도 상관없고요.”

“네, 알고 있습니다.”

“좋아요. 바로 시작하시면 됩니다.”

민하나는 고개를 꾸벅이곤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갑자기 신고 있던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그 신발을 아무렇게나 치워두었다.
그녀의 맨발 투혼에 유명한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모두 잠깐 놀랐다. 곧 유명한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해수가 신발을 안 신을 테니까 자기도 벗은 건가? 좋네.’

사소하지만 그런 행동 하나하나에서 이 연기를 하기 위해 신경 쓴 티가 났다.

한편 민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저에게 쏠리건 말건, 오로지 해수에 몰입할 준비를 했다.

그녀는 잠시 심호흡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오디션도 일종의 전략이지. 머리를 잘 굴려야 해. 중요한 건 이번 오디션의 경쟁자는 오직 고운 씨 혼자라는


거야. 즉, 나는 고운 씨랑 비교가 되겠지. 나는 고운 씨만큼 강렬한 연기를 할 자신이 없어. 소형견이 대형견
흉내 내려 해봐야 안 된단 거지.’

해수는 유괴범에게 납치되었다가 버려져서 홀로 10 년을 자랐다. 그러니 10 년 만에 다시 인간을 만난다면 잔뜩


경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반응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해수의 성격이 갈릴 것이다.

짖어야 할까? 아니면 겁먹어야 할까?

앞의 것이 더 강렬하겠지만 민하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이미 정했다. 아직 민하나에게는 백고운만큼 무대 장악력이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민하나는 강렬함 대신 다른 포인트로 연기의 방향을 정했다.

그건 감동이었다.

이제는 그것을 보여줄 차례였다.


두 버전의 해수
25.

민하나는 해수로 분하더니, 한참 동안 이로 손톱을 뜯는 것에 열중했다.

곧 래원 역의 기태성이 ‘쾅’ 문을 젖히곤 총을 겨눈 채 들어왔다.

“손들어!”

민하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책상 아래에 재빠르게 숨었다.

기태성은 컨테이너 안을 재빠르게 둘러보았고, 유괴범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그는 총을 내리며 쯧 혀를 찼다.

“젠장, 역시 없나.”

그때, 기태성의 눈에 책상 아래에 웅크려 있는 민하나가 들어왔다. 기태성의 눈에 놀라운 빛이 스쳤다.

“······!”

“······.”

“너 설마······ 혹시 해수니?”

사정은 이랬다.

10 년 전, 유괴범은 도합 여섯 명의 아이를 유괴했다. 그것도 두 살 전후의 남자(여자)아이만 유괴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유괴범에겐 두 살짜리 아들(딸)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식을 사고로 잃고 미쳐버린
것이었다.
유괴범은 자신의 아들(딸)이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현실을 부정한 나머지 다른 집의
아이를 유괴해 자신의 아이로 삼으려 했다.

문제는 아이들이 연약했다는 점이었다. 유괴범은 첫 번째 범행 때 아이를 납치해 가방에 넣고 운반했는데, 그러던
도중 아이는 산소 부족으로 질식사 했다.

그러자 유괴범은 아이를 아무렇게나 버린 후, 눈을 돌려 다른 집 아이를 납치했다. 마치 장난감이 망가지면


새로운 장난감을 사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아이를 대체할 수 있다는 듯이.

그렇게 유괴하고, 다시 죽고, 다시 유괴하고··· 그런 식으로 범행이 여섯 번 이어졌다.

그리고 유괴범은 여섯 번째 아이를 마지막으로 유괴한 후 종적을 감추었다. 그 마지막 아이가 바로 ‘해수’였다.

형사들은 온 힘을 다해 유괴범의 흔적을 쫓았으나 결국 놓쳤고,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유괴범은 자신이 납치한 아이가 죽은 이후에야 다른 아이를 유괴했기 때문에, 해수가 사라진 이후 그의 범행이
멈췄을 때 해수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런데 진짜로 살아있을 줄이야.

기태성은 민하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는 아예 컨테이너의 구석으로 도망쳐버렸다. 딱 겁먹은 동물 같았다.

기태성은 자신을 경계하는 민하나에게 무리해서 다가가지 않았다. 그는 몸을 낮추고 달랬다.

“쉬······ 괜찮아. 나는 널 해치러 온 사람 아니야. 널 도와주러 온 사람이야. 경찰이야. 경찰.”

민하나는 아무런 반응 없었다. 그러자 기태성은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하고 중얼거리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건 조그마한 초코파이였다.

그는 그것을 뜯어 바닥에 내려놓은 뒤 조금 물러났다. 그리고 가만히 있었다.

둘은 그 상태로 한참 대치했다.

그리고 한참 뒤, 민하나가 슬쩍 움직였다. 그녀는 주춤주춤 초코파이 쪽으로 다가가 그것을 이빨로 물더니 다시
뒤로 도망쳤다.

그녀가 다시 구석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자신이 들고 온 것을 이리저리 살폈다.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것을 슬쩍


핥았다.

“······!”

그녀는 처음으로 단 걸 먹어보는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태성은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맛있지?”

이제 좀 경계가 풀렸으려나? 기태성은 민하나에게 한 발 다가가려 했다. 그러자 민하나가 캭 소리를 내며 이를


드러냈다.

아직은 좀 성급한가? 기태성은 항복하듯 양 손을 옆으로 들었다. 그리고 ‘알았어, 알았어’하고 뒤로 물러났다.

“어쩐다······.”

기태성은 잠시 이 다음엔 어째야 할지 생각하며 뜻 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그때였다.

기척이 느껴져서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온 건지, 민하나가 기태성 바로 뒤로 슬그머니 와 있었다.


“어?”

그때 그녀가 우물쭈물하면서 입을 내밀었다. 뭔가를 물고 있었다. 기태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손바닥을 피자,
그녀가 손바닥에 그것을 떨어트렸다.

그건 아까 그가 준 초코파이였다. 그것이 반 정도 남아 있었다.

“나 먹으라고?”

나눠주기 위해 일부러 남긴 건가?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민하나는 가타부타 말없이 다시 재빨리 뒤로 도망쳤다. 기태성은 제 몫으로 남겨진
초코파이를 바라보다 옅게 웃었다.

“고맙다.”

기태성은 그것을 먹은 후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 발짝 나간 뒤 문 앞에서 기다렸다.

“자. 같이 나가자.”

기태성이 민하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의 대치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태성이 끈질기게 기다리자 곧 민하나가 머뭇머뭇 다가왔으니까. 부축을 받으며 나가는 민하나의 얼굴에 설렘과
긴장, 두려움 등이 스쳐지나갔다.

그건 해수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첫 발걸음과 같았다.

*
유명한은 둘의 연기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비교적 정적이고 잔잔한 그림이었지만, 특별히 어색하다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기태성이 일부러 초코파이를 챙겨온 것도 재미있었는데, 민하나가 그것을 받아 다시 반만 남겨서 돌려준 것도


기발했다.

그래, 둘의 연기는 마치 합이 좋은 랠리 같았다. 핑퐁이 잘 맞는다고 해야 하나.

‘사전에 서로 맞춰본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네.’

유명한은 기태성과 호흡이 좋다는 점, 그리고 캐릭터 이해도가 높다는 점에서 민하나에게 점수를 주었다.

민하나가 허리를 꾸벅여 연기가 끝났음을 알렸다.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아요, 수고했습니다. 대기실로 돌아가서 기다려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제 다음 순서인 백고운이었다. 기태성과 민하나가 나간 후, 몇 분 뒤 백고운이 들어왔다.

“바로 시작하세요.”

“네.”

유명한은 호기심이 들었다.

‘과연 어떤 걸 보여줄까?’
그런데 그때였다. 백고운도 대뜸 신발을 벗더니 맨발로 섰다.

유명한이 깜짝 놀라 백고운을 제지했다.

“잠깐만요. 혹시 앞의 민하나 씨 연기 영상을 대기실에서 봤어요?”

“네? 아뇨?”

백고운은 어리둥절한 듯 눈을 끔뻑거렸다.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당연했다. 유명한은 두 후보 간의 사전회의나 참관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그러니 백고운이 민하나의 연기를
카피하거나 컨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그 말은 백고운 역시 해수를 연기하기 위해 신발을 벗어야 할 거라고 스스로 생각했다는 뜻이었다.

이거, 두 후보 다 디테일까지 신경 쓰는 게 제법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끊어서 미안해요.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백고운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스튜디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는 심심한 듯 기지개를 피다가 벌러덩 누웠다.
일단 첫 시작은 아까의 민하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기태성이 들어왔다. 아까처럼 총을 겨눈 채 ‘손들어!’하면서 말이다.

그러자 누워 있던 백고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모두가―유명한을 비롯한 스태프들, 그리고 심지어 기태성마저도― 백고운이 놀라 컨테이너 구석으로 도망칠 거라
생각했다. 아까의 민하나처럼.
그런데 아니었다.

뒤이어 백고운이 보여준 행동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마!”

백고운은 활짝 미소 지으며 기태성 쪽으로 우다다 달려가더니 냉큼 그를 덮쳤다. 마치 집주인이 오랜만에 돌아온
걸 반기듯이, 꼬리라도 흔드는 것처럼 말이다.

갑자기 달려든 백고운 때문에 기태성은 ‘어, 어’하고 당황한 채 뒤로 기우뚱 넘어갔다. 그는 결국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자 백고운은 기태성의 배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을 싹싹 핥기 시작했다.

“······!”

모두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백고운 혼자만이 태연했다.

그런데 그러던 그가 갑자기 돌연 행동을 멈췄다.

그가 기태성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자신이 다른 누군가와 착각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챈 듯 흠칫하면서 뒤로
재빨리 물러났다.

“······?”

그가 기태성을 빤히 바라보면서 헷갈린다는 듯 기묘하단 표정을 지었다.

기태성은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아내며 주춤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처음엔 백고운의 돌발행동에 당황했지만,


지금이 연기 중이란 걸 금방 상기해냈다.
백고운은 활발한 늑대아이 쪽으로 컨셉을 잡은 모양이었다. 기태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평정을 되찾았다.

기태성은 백고운에게 ‘넌 누구니?’, ‘여기 살던 남자 못 봤니?’ 따위의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이 아이가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것, 10 년 전 사라진 해수로 추정된다는 것, 그리고 유괴범은 옛날에 여기를 뜬 것 같다는
사실을 하나하나씩 알아차려갔다.

그리고 그 동안 백고운은 멀뚱히 눈만 끔뻑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

기태성은 한숨을 쉰 뒤 총을 갈무리한 후 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 민하나의 경우처럼 백고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같이 나가자.”

그러자 백고운이 움찔 몸을 뒤로 빼더니, 컨테이너 안쪽으로 쌩하니 사라졌다. 아마 경계하는 듯 했다.

기태성은 아까의 민하나 때처럼 초코파이 하나를 꺼내 내밀려 했다.

그때였다.

테니스공이 도르르 굴러와 기태성의 발치에 툭 닿았다. 그리고 백고운이 뒤이어 달려오더니 기태성 바로 앞에
쪼그려 앉아선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 싸인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뭐, 놀아달라고?”
기태성은 황당히 되물었고, 백고운은 아예 테니스공을 입으로 물어서 내밀었다.

기태성은 엉겁결에 그것을 받았다. 공을 든 채로 그는 잠시 눈을 끔뻑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백고운의 이런 행동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기태성은 곧 한숨을 쉬곤 ‘어쩔 수 없지’라는 투로 어깨를 으쓱이며 공을 던졌다. 그러자 백고운이 기쁜
듯 헥헥 뛰어가더니 그것을 다시 입으로 물어 갖고 왔다.

기태성은 장단을 맞춰준다는 듯 몇 번 대충대충 던지며 놀아주었다. 백고운은 즐거워보였다.

그러나 기태성은 잠시 뒤 백고운이 갖고 온 테니스공을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그리고 주의를 돌리듯 ‘자’
하고 말했다.

“놀만큼 놀았지? 자, 이제 진짜 나가자.”

그러자 백고운이 눈을 팍 찡그렸다. 그가 짜증을 내는 듯 그를 뱅글뱅글 돌면서 재촉하기 시작했다.

“야, 그만해!”

기태성이 백고운의 잡아 말리려 했다. 그런데 백고운이 기태성의 자켓 자락을 입으로 물더니 확 잡아당겼다.
기태성이 다시 한 번 ‘악!’하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백고운이 왜 그랬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가 주둥이를 들이밀어 엎어진 기태성의 주머니에서 테니스공을


꺼내갔으니 말이다. 그는 토라진 듯 공을 물곤 안쪽으로 유유히 도망갔다.

‘허?’

기태성은 그 순간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졌다.


기태성에겐 역할이 있었다. 바로 해수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해수 역을 맡은 두 배우―
민하나와 백고운―도 그것에 응해주어야 했다.

아까의 민하나 때는 훨씬 쉬웠다. 그녀는 기태성이 준 소품(초코파이)를 활용하며 적절한 때에 마음을 열고 그를


따라 나왔다.

그러나 백고운은 훨씬 어려웠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예상이 안 갔고, 하는 행동도 뜬금없기 그지없었다.

백고운은 이제 기태성에게서 관심이 떨어진 듯 공을 홀로 갖고 놀았다.

호흡을 맞추는 상대 배우가 아니라, 진짜로 멋대로 구는 낯선 아이를 돌봐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태성은 눈썹을 살짝 좁혔다.

그러나 백고운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기태성은 조금 유치한 성격이란 것이었다. 어린 아이가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부리면, 자신도 같이 누워서 떼를 부리는 성격이라고 해야 할까.

기태성은 일부러 다 들리도록 크게 중얼거렸다.

“아, 어쩔 수 없네. 두고 가는 수밖에.”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전화 거는 척을 했다.

“어, 대철이냐? 왜 안 오냐고? 아냐, 지금 갈 거야. 응, 웬 길 잃은 꼬마 애를 만났는데 그냥 두고


가려고······.”

그가 말하면서 문 쪽으로 혼자 성큼성큼 걸어갔다.


물론 진짜로 나가버릴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이건 가벼운 위협 같은 거였다. 부모가 아이에게 울음을 멈추지
않으면 두고 가버린다, 그러는 것처럼.

그런데 그때였다.

기태성이 나가기 전, 공이 먼저 문 쪽으로 돌돌돌 굴러갔다. 공은 바깥으로 나가버렸고, 백고운은 그것을


쫓아가더니 기태성을 아무렇지 않게 제치고는 문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응?

그때, 백고운이 다시 공을 물고 오더니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가 공을 내려놓곤 코로 툭 굴렸다. 그러자


공이 또르르 굴러선 다시 기태성의 발에 툭 닿았다.

헥, 헥.

백고운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채 그저 거기 가만히 앉아선 기다렸다. 마치 기태성이 공을 줍고 이쪽으로 나와


달라는 것처럼.

상대를 밖으로 끌어내도록 해야 할 사람과, 상대에게 이끌려 끌려 나갈 사람이 어느새 뒤바뀌어버려 있었다.

기태성이 백고운을 데려갈 의지를 안 보이니까, 백고운은 일부러 먼저 나오는 방식으로 선수친 듯 했다.

기태성은 잠시 얼이 나가 있다가, 결국 헛웃음을 지었다.

애가 좀 제멋대로면 얄밉다. 그런데 애가 재치 있게 뻔뻔하면, 그때부턴 얄밉다기보다는 당돌하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이거, 꽤나 재밌는 후배님이시네.’

기태성은 속으로만 픽 웃은 후 이번엔 백고운의 의도대로 따라주었다. 그가 공을 줍고 나오자 장면이 끝났다.


백고운이 ‘해수’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키곤 기태성에게 감사하다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곤, 유명한에게 말했다.

“끝났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백고운의 연기를 지켜본 유명한은 놀라서 말문이 막힌 상태였다.

백고운의 연기는 파격적이었다.

그는 이전의 민하나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해수를 연기했다. 우선 그는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기태성과의 호흡도 미묘하다.

아까 민하나와 기태성의 호흡이 사전에 협의된 것처럼 스무스했다면, 백고운과 기태성의 호흡은 사전에 협의된
것이 아니란 걸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불퉁불퉁했다.

그런데 뭐랄까.

‘묘하게······ 그 날것의 느낌이 오히려 사실적이야.’

어느 정도였느냐면, 이전의 민하나의 연기가 달리 보일 정도였다. 민하나의 연기만 봤을 땐 잘 짜인 극이란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백고운의 연기를 보고 돌이켜 비교해보니 뒤늦게 인공적이란 느낌이 들게 했다. 너무
매끄럽게 잘 만들어진 것이 도리어 작위적이게 느껴지듯 말이다.

그만큼 백고운이 보여준 연기는 톡톡 튀고, 특이했으며, 여러모로 묘했다.

유명한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좋아요, 잘 봤습니다. 고운 씨가 해석한 해수란 캐릭터는 아주 활발하네요.”

“네. 저는 해수가 래원에게 겁먹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죠?”

“사람에게 데여본 경험이 있어야 겁먹을 텐데, 해수에게 그런 경험이 없지 않을까 싶어서요.”

유명한은 눈을 살짝 좁힌 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 날카롭게 되물었다.

“왜 데여본 경험이 없죠? 해수는 애초에 유괴범에게 납치당한 피해자인데요.”

그러자 백고운이 태연히 대답했다.

“유괴범은 해수를 학대하기 위해서 납치한 게 아니라, 자신의 아이로 키우기 위해 데려온 거니까요. 서툴긴 해도
해수에게 잘 해줬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유명한은 놀랐다. 이건 완전히 색다른 해석이었다.

“왜 유괴범이 해수를 떠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랜만에 사람이 왔다면 주인이 돌아왔다 여기고 반길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이나 동물들은 맹목적인 면이 있으니까요.”

유명한의 입가가 움찔 했다.

이거······ 흥미가 슬그머니 치켜든다. 색다른 해석이 단번에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는 일단은 표정을 숨겼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는 척 했다.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물었다.

“근데 래원은 처음 들어올 때 총을 겨누고 들어오잖아요. 겁이 나지 않았을까요?”


너의 해석에는 허술한 구멍이 있지 않느냐는 지적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백고운의 대답은 압권이었다.

“10 년 동안 인간세계에 단절된 채로 컸으니까 총이 위험하단 걸 모르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은 총을 맞지 않아도


그것이 위험하단 걸 알지만, 동물들은 맞아보기 전까지는 그게 뭔지 모를 거라 생각했습니다.”

“······!”

유명한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건 정말로, 유명한 자신도 생각해보지 못한 지점이었다.

역주행
26.

그러니까 그건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나는 표류와 이초희에게 혹시 개를 키우는지 물었고, 이초희는 자신이 리트리버를 키운다고 했다.

―혹시 좀 보러 가도 될까요? 연기에 참고 좀 하려고요.

―그건 상관없는데, 우리 애는 사람을 진짜 잘 따르거든. 아마 해수 캐릭터랑은 좀 거리가 있을걸.

―아, 그건 괜찮아요.

내가 연기하려고 하는 ‘해수’는 상처가 많고 경계심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다. 나는 그보다는 악동이나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을 강조하는 식으로 해수 캐릭터를 잡았다.

그건 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 바닥에 오래 있다면 참 많은 감독과 작업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알게 된 건, 감독마다 스타일이 다 다르단


것이었다.

어떤 감독은 배우가 자신의 대본에 있는 그대로 따라 하길 원한다. 그러나 반면 어떤 감독은 배우의 의견을
수용하는 것에 훨씬 유연했다.

그리고 유명한은 명백히 후자였다. 그는 실험적인 걸 좋아하는 감독이었다. 애초에 이 영화의 기획 의도가
그러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도 그에 맞춰서 훨씬 독특하고 톡톡 튀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더 전략적으로 좋았다.

게다가 이건 나와 겨루는 후보가 민하나라서 일부러 이렇게 잡은 것도 있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묵직하고 감동을 주는 스토리이기 때문에 밝은 느낌을 주는 인물이 있긴 해야 했다. 그래야
영화의 균형이 맞는다.

민하나는 여러 면에서 상대역인 ‘래원’과 대조된다. 어린 소녀와, 나이가 좀 있는 남자 보호자의 케미스트리는


스크린이 선호하는 짝꿍이다. <레옹>의 레옹과 마틸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두운 컨셉으로 캐릭터를 잡으면, 더욱 칙칙한 그림이 될 수도 있었다. 같은
성별의 페어라면 성격이 확실히 대조적인 게 좋았다.

‘다행이도 초희 씨네 리트리버가 아주 활발해서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됐지.’

어찌나 낯을 안 가리는지 처음 보는 내게 하도 꼬리를 흔들어대어서, 이초희가 질투할 정도였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연기해보였고, 이제 결과는 유명한의 결심에 달렸다.

그리고 삼십 분 쯤 지났을 때였을까.

옷을 갈아입고 잠시 대기실에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스태프인가?


나는 문을 열었고, 거기엔 유명한 감독이 있었다. 그가 빙긋 웃으며 대뜸 악수를 건넸다.

“크랭크 인은 한 달 뒤에요. 앞으로 반 년 동안 잘 해봅시다.”

내가 선택되었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내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민하나는 결과를 통보받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연기했고, 그렇기에 미련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가 궁금해 민하나는 결국 조연출에게 부탁했다.

“혹시 백고운 씨 연기 영상을 저도 볼 수 있을까요? 아, 그리고 제 것도요.”

서로가 연기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민하나는 백고운이 어떤 해수를 연기했는지 궁금했다.

조연출은 유명한에게 허락받곤 민하나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 민하나는 자신의 연기 영상과, 백고운의 연기
영상을 꼼꼼히 지켜본 후, 고개를 꾸벅이며 조연출에게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민하나는 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녀는 백고운이 경계심이 많고 까칠한, 그래서 훨씬 날카로운 연기를 보여줄 거라 막연히 예상했었다. 저번에
강박증 연기를 했을 때 최호랑과 격렬히 부딪히고 고함을 질러댔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백고운은 이번에도 민하나의 기대를 보란 듯 배반했다. 그는 그녀가 생각한 것과 완전히 다른 방향성으로
연기했다. 그리고 그건 훨씬 더 좋아보였다.

늘 한 발짝 더 앞서 나가는 백고운의 재능에 옅은 패배감이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묘한 후련함 비슷한 감정도 들었다.

그건 뭐랄까···. 자신이 애초에 따라잡지 못할 재능임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생기는 후련함
같은 것이었다.

‘설사 고운 씨가 나랑 비슷한 컨셉으로 연기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떨어졌을 거야.’

왜냐면 민하나 그녀 자신의 연기는 동선이나 시선처리 같은 것이 약간 어색하게 느껴졌는데, 백고운은 훨씬


자연스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건 연극 연기와 매체 연기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민하나는 연극만 했었고, 반면


백고운은 영화로 데뷔한 사람이었으니까. 애초에 카메라에 익숙한 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백고운 안에 김철수가 있고, 그는 연극판에서부터 시작해 매체에 조단역으로 데뷔해 차근차근 하나씩 올라간,
그야말로 산전수전공중전 다 겪으면서 모든 장르의 연기에 능숙해진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그건 민하나가 모르는
진실이었기 때문에 생긴 나름의 오해라고 할 수 있었다.

민하나는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복도에서 우연히 백고운을 만났다. 그녀는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려요, 고운 씨.”

“아, 하나 씨.”

“이제 더 이상 극단에 오시는 일은 없겠네요. 아쉬워요.”

그건 진심이었다. 훌륭한 실력자가 옆에 있으면 질투가 나지만, 또 그만큼 자극받고 배우는 게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러자 백고운이 의외의 말을 내뱉었다.

“아뇨, 아마 반 년 뒤에는 또 뵐지도 몰라요. 단장님이 다음에 올릴 공연에 한 번 참여해달라고 하셨거든요.”

민하나는 깜짝 놀랐다.

다음에 올릴 공연이라면 시기적으로 정기 공연일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이번에 돌아오는 정기 공연은 극단


왕국의 50 주년 기념 공연으로, 스케일이 큰 공연이었다.

그러나 민하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말이었다. 극단 ‘왕국’의 소속 배우는 공연에 투입되는 1 군과 연습생


신분인 2 군으로 나뉘는데, 민하나는 아직 2 군에 소속되어있기 때문이었다.

민하나는 ‘그렇군요···’라고 중얼거리다가 뭔가 결심한 듯 단단한 목소리로 백고운에게 말했다.

“그럼 그때 꼭 무대에 같이 서요.”

설 수 있으면 좋겠다, 가 아니었다. 그녀는 가정법 대신 일부러 청유형으로 말했다.

그건 그녀 나름의 각오였다. 반 년 안에 열심히 연습하고 또 노력해서 2 군에서 1 군으로 올라가겠다는 각오.

사람은 원래 라이벌을 통해 성장하는 법이었다. 민하나의 경우, 라이벌이라기보단 혼자만의 일방적인 동경에 더
가깝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것을 알 리 없는 백고운은 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럼요. 꼭 그때 봬요.”

*
송정열은 턱을 괴고 마우스 스크롤을 내렸다. 모니터 화면을 눈으로 훑던 그녀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오늘도 뭐 없네.”

그녀는 약 한 달 전쯤 <운명의 표현> 영화를 보고 백고운 배우에게 빠졌다. 연기도 잘하고, 외모도 잘생겼고,
근데 성격도 좋다. 안 빠지고 버틸 재간이 없었다.

다만 신인이라 아직 팬클럽이 없기에 아예 그녀가 먼저 선점해서 홈페이지를 만들어버렸다.

팬들에게는 때론 그 스타를 먼저 발견했다는 사실 자체가 은근히 자부심이 될 때가 있다. 이렇게 멋진 배우를


나는 일찍부터 알아봤다, 라는 뭐 그런?

송정열도 그런 뿌듯함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문제는 신인이다 보니 팬질 할 만한 콘텐츠가 너무 없었다. 소속사도 아직 없었고, 배우


개인이 운영하는 미니 홈피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주구장창 <운명의 표현>만 N 번 째 관람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원래 팬질의 생명은 끊임없이 수혈되는 떡밥인데, 아무래도 불을 지필 땔감 자체가 없으니 열정이 좀


사그라들었다.

송정열은 턱을 괴고 ‘끙’하고 눈썹을 좁혔다.

“게다가 슬슬 상영관도 거의 없단 말이지···. 더 볼래야 볼 수도 없다고.”

당장 팬질을 관두진 않겠지만, 심심한 건 어쩔 수 없다. 팬이란 팬질로 인생의 기쁨을 느끼는 존재인데, 앓고
열광할 게 없으니 인생의 낙이 없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송정열은 이것저것 생각하다 쯧 혀를 차며 노트북을 닫아버렸다.

“에휴, 내 코가 석자지. 시험공부나 하자···.”

그녀는 설레설레 고개를 젓곤 옆에 있는 전공 책을 끌어다가 펼쳤다.

그런데 책에 집중한 지 한 시간이나 겨우 지났을까.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더니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정열아 너 기사 봤어?]

송정열은 고개를 갸웃했다. 기사? 갑자기 무슨?

일단 그녀는 ‘못 봤는데, 무슨 기사?’라고 답장을 보낸 뒤, 다시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웹 사이트에 들어갔을


때였다.

송정열이 실시간 검색어에서 ‘백고운’이라는 이름을 발견한 것과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한 건 동시였다.

[실시간 검색어]

[1 위: 유명한 감독]

[2 위: 기태성 복귀작]

[3 위: 백고운]

[4 위: 영화 해수]

[5 위: 백고운 누구]

[너 좋아한다는 그 배우 이번에 유명한 신작 주연이래!]

유명한 감독? 자신이 아는 ‘그’ 유명한 감독?!


송정열은 경악에 차서 얼른 클릭해 기사를 훑었다.

간단히 말하면 유명한 감독의 신작 영화가 결정이 되었다는 내용인데, 거기에 캐스팅 된 배우들 리스트가
공개되어 화제가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언론사의 관심은 단연 낯선 이름인 ‘백고운’이란 배우에 집중되어 있었다.

유명한 같은 감독이 완전히 처음 보는 신인을 주연으로 발탁하면 누구라도 당연히 궁금해할 것이다.

‘파격 캐스팅’, ‘괴물 신인’, ‘유명한의 뮤즈?’, ‘충무로에 혜성처럼 등장한 배우’와 같은 수식어들이
뜨문뜨문 보였다.

송정열은 얼떨떨함도 잠시,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미친!!”

사람이 흥분하면 약간 험한 소리가 나오는 법이었다.

이거, 자신이 스타를 일찍이 알아봤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하루아침에 일약 스타덤에 오를 배우인 줄은
몰랐다.

괜히 송정열의 가슴이 자부심으로 뿌듯이 벅차올랐다. 그녀는 아무도 듣지 않을 말이지만 하하 뱉었다.

“그래요, 그 배우가 바로 내 배우에요!”

그녀는 전공 책을 덮고 한쪽으로 아예 밀어두었다. 그리고 두 손을 걷어붙였다. 팬클럽에 들어가 보니 벌써 눈에


띄게 가입 회원수가 늘어나있었다.
스타만 물 들어올 때 노 젓나? 아니, 팬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시험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얼른 백고운의 유일한 필모인 <운명의 표현>을 재조명하는 글을 올렸다.

댓글이 재빨리 달렸다. 네티즌들은 ‘도대체 그 영화를 어디 가면 볼 수 있는 거냐’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하필


상영이 거의 끝나갈 때, 그런 영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셈이었으니까.

“그래, 그래. 더 궁금해 해주세요.”

송정열은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관심이 많아지면 좋은 법이다. 특히 영화처럼 입소문에 많이 의지하는


작품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운명의 표현> 배급을 맡은 배급사에서 추가 상영관을 확보했다는 공지가 떴다.

그리고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일화가 그때 생기게 된다.

바로, 박스오피스에서 완전히 내려가고 있던 <운명의 표현>이란 영화의 순위가 갑자기 역주행하기 시작하더니,
개봉된 지 몇 개월 만에 1 위를 차지하게 되는 전무후무한 기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약간 나중의 일로, 지금의 백고운과 송정열은 아직 모르는 미래의 일이었다.

첫 대본 리딩
27.

기사가 나간 후, 첫 대본 리딩 날.

리딩 현장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은 사람은 단연 백고운이었다.


유명한이 워낙 극비리에 비공개 오디션을 보고 백고운을 뽑은 탓에, 많은 스태프들 역시 주연 배우가 누구인지
기사를 통해 알았기 때문이었다.

몇몇은 백고운을 보며 ‘아, 이분이구나’하면서 연기를 얼마나 잘하기에 바로 유명한 감독의 눈에 들었을까
궁금해 했고, 그 사이 <운명의 표현> 영화를 본 사람들은 ‘연기 진짜 잘하긴 하더라’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기태성 역시 바로 며칠 전에 그 영화를 보고 온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영화를 보고 확실히 알았다. 백고운은 기본적으로 연기를 잘하는 친구였다.

사실 오디션 장에서는 반쯤 반신반의긴 했다. 일단 센스도 있고, 개성도 있고, 기태성을 상대하면서 주눅 들지도
않을 담대함도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신인이었으니까.

유명한은 백고운의 신선한 감각과 뻔하지 않은 연기를 높이 쳤지만, 호흡을 직접 맞추는 기태성에게는 그보다는
기본적인 연기력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걱정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영화를 보고 내심 놀랐을 정도로 백고운은 재능이 많은


친구였으니까.

‘게다가 오늘 이리 보니 사람도 참 괜찮고.’

기태성이 도착했을 땐 이미 백고운이 와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까 제일 일찍 와서는 세팅 같은


자잘한 일손을 도왔다더라.

그리고 백고운은 미팅실에 도착한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인사를 건넸는데, 분량이 적은 조연이나 말단 스태프까지
차별 없이 대했다.

백고운에겐 하루아침에 라이징 스타 된 사람들 특유의 거만함이나 우쭐함 같은 것이 없었다. 적당히 예의바르고
적당히 살가운 게, 어딜 가든 예쁨 받을 타입으로 보였다.

유명한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올 사람은 다 왔나?”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소소하게 웅성거리던 미팅실이 조용해졌다. 상석에 앉은 유명한이 서두를 가볍게 꺼냈다.

“네, 모두 기사를 보고 오셨죠? 아주 우리 영화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요. 나랑 많이 손발을 맞춰본 사람도 있고,
처음 뵙는 사람도 있는데. 아무튼 모두 반가워요. 우리 멋진 영화 하나 만들어봅시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짧게 자기소개를 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주인공은 타이틀 롤을 맡은 백고운이었지만, 연차가 있기 때문에 안쪽에 앉은 기태성이 먼저


일어나서 고개를 꾸벅였다.

“형사 래원 역을 맡은 기태성입니다. 삼 년 만에 현장에 복귀하려니 많이 떨리네요.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예쁘게 봐주십쇼.”

기태성은 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유명한을 제외하면 여기서 기태성이 제일 나이도 많고, 연차도 높았다. 다른 사람들이 괜히 기태성을 어렵게
생각할 수도 있었기에 그는 이런 식으로 먼저 농담을 던지는 것이었다.

짧게 웃음이 지나가면서 분위기가 살짝 풀어졌다. 그리고 이어 백고운이 일어났다.

“해수 역을 맡은 백고운입니다. 멋진 분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단정한 말과 호감 가는 미소. 그는 허리를 꾸벅이고 자리에 앉았다.

의외로 그에게 긴장한 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참 신기했다.


백고운은 시종 예의 발랐지만 그렇다고 저자세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여유로운 편에 가까웠지만
그게 또 건방지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그에겐 그런 부드러운 여유로움 같은 것이 배어있었다.

‘신인인데도 꼭 20 년 넘게 영화판에 있었던 사람 같은 태도라고 해야 할까.’

기태성은 자신의 생각이 진짜로 맞는 줄은 모르고, 그저 자신의 실없는 생각에 픽 웃었다.

자기소개 겸 인사가 끝난 후, 유명한이 말했다.

“자. 그러면 이제 리딩 시작해볼까요?”

“네!”

드디어 영화 <해수>의 첫 리딩이 시작되었다.

이번 영화 대본은 다른 영화보다 비교적 두께가 얇은 편이었다.

그건 대본이 러프한 탓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백고운의 대사가 거의(아니 사실은 아예)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늑대아이란 설정이다 보니 그는 대사보단 눈빛, 동작, 행동, 따위의 비언어적인 연기를 더 많이 하게 될 터였다.

그래서 사실 이번 리딩에도 백고운이 참여할 여지가 많이 없었다. 유명한이 백고운더러 농담처럼 리딩에 참여 안
해도 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기태성은 내심 호기심이 들었다.


‘대사가 없는데 어떻게 리딩을 하려나. 자칫하면 꿔다놓은 보릿자루 되기 딱 좋은 배역인데.’

그러나 리딩 전에 백고운이 보인 여유로움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리딩이 시작된 지 몇 분 안 된, 영화의 초반부에서였다. 래원의 대사가 길게 이어지는 중간에 [해수:


······.]라는 부분이 있었다.

당연히 기태성은 잠깐의 휴지를 둔 후 바로 뒤의 자신의 대사로 넘어가려 했다.

“크르르.”

그런데 그때 백고운이 성대를 긁으며 목 아래 깊은 곳에서 그르렁 소리를 냈다. 마치 짐승이 털을 바짝


곤두세우고 위협할 때 낼 법한 소리였다.

그 장면은 해수가 래원을 경계하는 장면이었는데, 백고운은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그 부분에 그런 소리를 낸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백고운은 대사는 없었지만, ‘해수가 즐거워한다’ 혹은 ‘해수가 슬퍼한다’ 따위의 추상적인
행동지문에서도 저 나름 해석을 더해 ‘컹컹’이나 ‘으르렁’ 같은 짐승 울음소리를 냈다. 그게 어찌나
리얼했는지 유명한이 드물게 칭찬했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백고운은 대사가 별로 없음에도 존재감이 없지 않았다.

물론 그가 주인공이니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 그건 말처럼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타이틀 롤이라고 해도 그는 워낙 신인인데다 막내고, 맡은 배역조차도 대사가 거의 없었으니까.

촬영현장이라면 모를까 리딩에서는 충분히 기를 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백고운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명백히 ‘해수’로 분해 그 리딩 현장에서 자신의 몫을 당당히 드러냈다.

‘역시 잘하네.’

기태성뿐 아니라 그 순간 리딩 현장에 있는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했다.

리딩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리딩이란 건 단순히 대사의 호흡만 맞추는 것이 아니었다.

“근데요, 감독님. 여기 중간에 보면 ‘해수가 래원을 부른다’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계속 했던 것처럼 짖는


걸로 해야 할까요? 해수가 두 살 때 납치당했으면 엄마, 아니면 마, 라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서요. 아기 옹알거림으로 표현하는 게 좋을까요?”

“아, 그러네. 음···. 처음에는 아예 말을 못하는 걸로 갔다가 영화 중반부터는 조금씩 입이 트이는 걸로


가자.”

“네, 알겠습니다.”

의견을 주고받으며 캐릭터 빌딩을 같이 잡아가기도 하고.

“여기서는 좀 더 가벼운 느낌이 살았으면 좋겠어. ‘해수와 래원이 투닥인다’, ‘해수와 래원이 논다’ 같은
행동지문이 적혀 있는 부분들은 배우들이 자유롭게 애드리브로 채워주되 약간 티키타카가 느껴지게. 무슨 말인지
알지?”

“네!”

특정 씬의 연기 톤을 조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참 뒤 드디어 유명한이 대본을 덮으며 끝을 알렸다.

“모두 수고했어요. 그러면 다음에는 첫 촬영 날 때 봅시다.”

“수고하셨습니다!”
주변이 활기차게 부산스러워졌다. 기태성도 오랜 시간 앉아있던 탓에 찌뿌둥한 등을 쫙 피며 기지개를 켰다.

이거, 분위기도 좋고 배우도 좋고 시나리오도 좋다. 어쩌면 꽤나 대박일 영화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아직 리딩일 뿐이었지만 벌써부터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리딩이 끝난 후, 기태성은 유명한과 비슷한 연배의 조연 배우 몇몇과 함께 주차장 한쪽에서 잠깐 담배를 폈다.

그들은 모두 연차가 높아 오고가며 얼굴 한 번씩은 본, 서로서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따로 밥을 먹으러 갈 참이었다.

유명한이 담배 연기를 후 내뱉으면서 대뜸 기태성에게 말했다.

“잘하지?”

누구를 말하는지 한 번에 알아들은 기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네. 어디서 저런 놈을 데려왔대. 원래 연극하던 애라고 했나?”

“아니, 그건 아니고.”

유명한은 최호랑 단장이 부국제에서 백고운을 발견해 데려와 시험을 쳤다는 이야기를 짤막히 들려주었다. 그는
백고운이 예고나 학원에서 연기를 배운 것도 아니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그리고 의외의 얘기도 있었다.


“저번에 계약할 때 혼자 왔더라고. 좀 놀랐잖아.”

“왜? 소속사 아직 없을 수도 있잖아.”

“소속사는 아직 없을 수 있지만, 보통은 미성년자 아역인 경우엔 부모님이랑 같이 오거나 하잖아. 근데


들어보니까 부모님 두 분 다 안 계신다고 하더라고.”

“뭐, 진짜로?”

“응. 보육원에서 자라서 심지어 지금은 혼자 고시원에서 살고 있대. 알바하면서 영화 찍었다고 하더라고.”

“와, 대견하네.”

기태성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성격도 좋고, 연기도 잘하고. 근데 대견하기까지 해? 이거, 안 예뻐할 수가 없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감탄하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유명한이 ‘어이쿠’하면서 웃었다.

“예뻐하는 건 좋은데, 너무 짓궂게 굴진 말고.”

“에이, 내가 언제 그랬다고.”

“기 배우랑 같이 작품 한 후배들이 다 한 마디씩 하던데, 뭘. 하도 장난을 많이 쳐서 감정선 잡기 힘들었다고.”

“아 그거야 긴장 풀어주려고 그런 거지. 나만큼 후배 사랑 실천하는 사람 어디 있다고.”

물론 말을 꺼낸 유명한이나 말을 받는 기태성이나 반쯤은 농담처럼 하는 말이었다. 기태성이 후배 배우들을


얼마나 아끼고 생각하는지 이 바닥 사람들은 모두 알 정도로 유명했으니까.

그때, 뒤늦게 백고운이 건물에서 나왔다. 일찍 와서 일손을 도왔던 것처럼, 늦게까지 남아 청소와 정리를 도운
모양이었다.

“어, 고운아.”

유명한이 담배를 끄면서 그를 불렀고, 백고운이 그들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왔다.


“지금 집 가는 거야? 노량진 쪽 가는 거면 사람 많을 텐데.”

유명한은 괜찮으면 같이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말할 참이었다. 그런데 백고운이 뜻밖의 이야기를 내뱉었다.

“아, 아뇨. 오늘은 아는 형네 집으로 갑니다. 며칠 신세 지려고요.”

“응? 왜?”

“그게······.”

백고운이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오늘 아침에 고시원을 나오는데, 거기 머무는 사람들이 그를 알아봤단다. 그 전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영화


<해수>에 백고운이 출연한다는 기사가 뜬 후 얼굴이 팔려서 그런 듯 했다.

“소문이 퍼져서 못 가는 거구나.”

“네. 그래서 조금 잠잠해질 때까지만 버티려고요.”

그때, 둘의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기태성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이야 결혼해 집에 가족이
있다지만, 기태성은 아직 혼자 살고 있었다.

기태성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씩 지으며 불쑥 제안을 건넸다.

“그러면 우리 집은 어떤가, 후배님? 남는 방 하나 쯤은 있는데. 같이 연기 연습도 하고. 좋을 것 같은데.”

존경하던 선배
28.

실은 오디션 장에서 기태성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내색은 안 했지만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이


영화에 참여하는 줄은 몰랐으니까.

기태성은 전생의 나와 인연이 조금 있던 사람이었다.

김철수였던 시절, 그러니까 내가 막 조단역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알음알음 얼굴을 비추고 있었을 햇병아리 신인
시절 때였다.

내가 아주 작은 조연으로 출연했던 드라마 작품이 있었는데, 그때 주연 남자 배우가 기태성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나는 촬영장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촬영장의 텃세가 심했던 게 문제였다.

단순히 조단역을 홀대하는 것이라면 꿋꿋이 버텨냈을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못 견뎠던 것은 촬영장 분위기가
조단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그저 소품으로 대했다는 것이었다.

주연 배우였다면 시키지 않았을 위험한 연기도 서슴없이 시켰고(왜냐하면 안전장치를 설치하는 것에도 다 돈이
드니까), 열악한 환경에서 대기만 몇 시간을 시키기도 했다.

이를테면 한겨울에 야외에서 입수 씬을 찍는데, 쫄딱 젖은 채로 다시 다음 컷을 위해 한 시간씩 기다리게 시키는


식이었다. 그것도 열난로나 핫팩, 심지어는 수건 하나 제공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주연 배우는 몸이 얼면
연기하기 어렵다면서 이것저것 편의를 봐주었는데도.

그런데 그때 바로 기태성이 나섰다.

그는 농담처럼 감독에게 ‘조단역 배우들 힘들겠다’라고 운을 떼어 신경 쓰게 만들었고, 가끔은 자신의 사비를


털어 전 스태프와 조단역의 간이 의자나 외투를 사주기도 했다.

촬영장에도 권력이 있기 때문에 말단인 사람들은 문제제기를 쉽게 못 한다.

그러나 기태성 같이 몸값 높은 주연 배우가 한두 마디씩만 던져주어도 훨씬 개선이 되길 마련이다. 주요


제작진들이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하니까.
내가 촬영장 분위기에 학을 떼고 연극판에 돌아가지 않았던 것은 그때 기태성의 도움이 컸다.

그는 대외적으론 장난기가 넘친다는 평판을 받았지만, 실은 의외로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내 연기를 알아봐주고 감독에게 ‘철수 연기 잘하지 않아요?’라고 말을 건네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 덕에 나는 촬영 후반부에는 감독의 눈에 들었고, 그 감독의 다음 차기작에 제법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차곡차곡 대중의 눈에 들어 결과적으로는 연기를 계속 할 수 있게 되었고 말이다.

기태성과의 인연은 그 작품이 마지막이었고, 아쉽게도 친분이 더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많이


존경하고 또 고마움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기태성이 자기 집에서 머물지 않겠느냐 제안했을 때 잠깐 놀랐지만,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야 감사하죠. 영광입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나는 그 결정을 살짝(?) 후회하게 된다.

영화 <해수>의 첫 촬영 날.

촬영 장소는 양평의 한 세트장이었다. 이번에 찍을 장면은 해수와 래원이 처음 만나는 씬으로, 오디션 봤던 바로
그 장면이었다.

리얼하게 꾸며진 컨테이너 안에서 유명한 감독은 내게 동선을 설명했다.

“해수 시선이랑 카메라가 동일하게 갈 거거든. 테이블을 빙 돌아서 곧바로 현관으로 가서 문구멍에 눈을 갖다
대면 돼.”

“네, 알겠습니다.”

카메라 블로킹을 끝낸 후,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갔다.

“씬 3 테이크 1 갑니다.”

클랩스틱이 부딪혔고, 카메라가 돌아갔다.

나는 차가운 컨테이너 바닥에 네 발로 엎드려 오른쪽 발로 바닥을 벅벅 긁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래원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소리에 예민한 짐승처럼 나는 귀를 쫑긋 움직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을 굴리던 나는 테이블을 빙


돌아 현관문 쪽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현관문을 짚고 문구멍을 들여다보던 나는 곧 문이 열리자 재빨리 뒤로 폴짝 물러났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나는 현관문에 널려 있는 신발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컷, 오케이.”

간단한 테이크라 오케이는 금방 나왔다.

카메라 위치를 바꾸는 동안 유명한이 짧게 감탄했다.

“그동안 연습했어? 저번에 봤을 때보다 네 발로 움직이는 게 훨씬 자연스럽네. 몸도 엄청 가볍고 유연해졌고.


신발 안 건드린 건 일부러?”

“네. 원래 개나 고양이들은 바닥의 장애물들 안 건드리고 막 뛰어넘기도 하잖아요. 거기에서 착안해 유연하게
움직이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때 기태성이 으스대며 끼어들었다.

“감독님이 보기에도 훨씬 자연스럽지? 그 동안 특훈 했거든.”

그는 마치 훈련한 게 자신이라도 되는 듯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고 뿌듯이 웃었다.

‘나 참.’

나는 작게 헛웃음 지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며칠 전, 내가 기태성의 집에 머물기로 한 그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네 발로 움직이는 모션을 더 자연스럽게 소화하기 위해서 그가 빌려준 손님방에서 연기 연습을 했다.

사실 기태성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건 그런 속셈도 있었다. 고시원이나 표류의 자취방은 연기 연습하기에는


무리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기태성의 집은 넓은데다가 방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한창 연습을 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기태성이 들어왔다.

―뭐야, 벌써 하고 있었어? 같이 연습하자니까.

그러더니 그가 등 뒤에서 꺼낸 것은 개 장난감으로 보이는 볼이었다.

―저번에 보니까 후배님 약간 움직임이 어색한 면이 있더라고. 같이 연습하면 좋을 것 같아서 산책 갔다가 요 앞


동물 병원에서 샀지. 참, 그냥 연습하면 무릎이랑 팔꿈치 다치니까 밴드 두르고.

―······아니, 그냥 저 혼자 해도 되는데요.

―어허, 해수는 말하면 안 되지.


그가 짐짓 막무가내였기 때문에 나는 그와 한참을 놀이인지 연습인지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던진 공을 물고 터덜터덜 돌아오면 그가 배꼽을 잡고 웃길래, 그냥 날 골리는 게 아닌가 싶은 합리적인


의심이 들긴 했다. 오디션 장에서 내가 그를 두 번 엉덩방아 찧게 했는데, 그거에 대한 복수가 아닌가 하고.

하지만 그는 그러다가도 날카롭게 내 연기에 어색한 부분을 짚어주기도 했다.

이초희네 개를 참조하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갔을 때, 일차적으로 이초희가 내 모션을 봐주긴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녀는 연기자가 아니었기에 기태성의 지적이 더 섬세한 건 당연했다.

“해수야, 손!”

······물론 이렇게 보면 그냥 내 하는 꼴이 재밌어서 이러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가 내게 한 손을 내밀고 재차 ‘해수야, 얼른. 손!’하면서 빙글거렸다.

십 년 전에 돌아가신 내 막내 할아버지가 딱 이런 캐릭터였는데 말이다. 어렸을 적 나와 함께 많이 놀아주었던


할아버지였는데, 나중에 내가 배우가 되자 자신 덕에 내가 배우가 되었다면서 한 턱 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매번
개구진 농담을 던지곤 하셨다. 자기가 예전에 연극부를 했었는데 그 피를 내가 물려받았다나 뭐라나.

나는 한숨을 짧게 쉰 후 이를 드러내고 기태성의 손을 무는 시늉을 했다.

“왕!”

“어이쿠!”

그가 깜짝 놀라 손을 휙 빼더니 곧 낄낄거렸다.

역시 우상은 멀리서 봐야 한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나름 존경하던 선배였는데 어쩜 이렇게 유치한지 모르겠다.


나는 속으로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둘을 지켜보고 있던 유명한이 그 순간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둘이 잘 노네. 코드가 좀 맞나?’

알았다면 내가 기태성의 장난을 일방적으로 받아주고 있는 거라 해명했을 법한, 나로선 꽤나 억울한 오해였다.

컨테이너 씬(해수와 래원이 처음 만나는 장면), 그리고 숲 씬(해수가 산에서 뛰노는 과거 회상 씬)을 로케에서
다 찍은 후 이제 촬영지는 서울로 넘어왔다.

이번에 찍을 장면은 해수가 래원의 집에 처음 당도하는 씬이었다.

“낯섦과 호기심을 보여주면 될 것 같아. 고운이 네가 잡은 해수 캐릭터가 그러니까.”

“네, 알겠습니다.”

유명한의 말에 백고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크에 들어가자 카메라 화면 안에 기태성과 백고운이 잡혔다. 백고운(해수)은 기태성(래원)의 집이 신기한지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그때 백고운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리모컨을 눌렀고, TV 화면이 팍 켜졌다.

“왁!”

백고운은 화들짝 놀라 소파 위로 폴짝 뛰어 올라 넘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소파 등받이 너머, 백고운의 머리가


빼꼼 드러났다.
그가 눈을 끔뻑이며 TV 를 쳐다봤다. 경계심 어린 눈이었지만, 동시에 신문물에 어리둥절한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담고 있던 유명한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기본적으로 연기도 잘하지만, 확실히 노력이 대단하다니까.’

방금의 몸놀림은 거의 인간이 아니라 개나 고양이의 그것이었다. 몸이 유연하고 가벼운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네 발로 엎드렸을 때 몇 걸음 걷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익숙하지 않기도 하지만, 손이나


팔꿈치, 무릎이 특히 아파오기 때문이다. 걷는 것조차 그러할진대, 그러한 상태로 자유자재로 뛰는 게 가능할 리
없다.

그런데 백고운은 그걸 아무렇지 않게 해낸다. 몸을 쓰는 모습만 보면 거의 스턴트 맨 출신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백고운이 기태성의 집에 잠깐 얹혀살면서 둘이 매일 연기 특훈을 한다는 이야기는 이전에 들었었다. 물론


기태성이 백고운의 연기에 많은 도움을 준 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백고운의 피나는 노력이 기본적으로 받쳐주었기 때문에 저런 연기가 가능할
것이었다.

‘좀 독종인 면이 있다니까.’

사실 그건 이전부터 느꼈었다.

백고운은 캐스팅이 결정된 직후에 유명한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감독님, 촬영 들어가기 전에 살을 빼올까요? 아니면 상관없나요?


왜 그런 걸 묻는지 알았다. 해수는 설정 상 10 년 동안 방치되어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란 소년이었다.

그런 야윈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살을 빼는 게 좋을지, 아니면 그래도 카메라에 잡히는 미적인 이미지를 위해


그냥 내버려둘지 묻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리얼한 게 좋으니까 빼는 게 좋긴 하지. 근데 영화 중간부터는 해수가 잘 먹고 잘 자서 건강해지는


설정이라서. 처음엔 말랐다가 촬영하면서 다시 살이 오르는 게 제일 베스트이긴 한데··· 뭐, 분장으로 커버할
수도 있고. 그렇게 단기간에 체중을 왔다 갔다 하기도 힘들 거야. 굳이 무리할 필요 없어.

그래, 유명한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백고운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더니 백고운은 그 한 달 남짓의 짧은 기간 내에 정말로 체중을 무려 10kg 가량 가까이 감량해왔다.

그렇게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했으면 힘이 없이 비실거릴 법도 한데, 막상 카메라 돌아가고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또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몸무게가 줄어서 그만큼 훨씬 날렵하고 가벼워 보일 정도였다.

유명한은 놀랐고, 감탄했고, 내심은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지? 신인이라서 가능한 건가?’

아무튼 확실한 것은, 유명한 그가 정말 제대로 물건인 배우를 캐스팅했다는 사실이었다.

“컷, 오케이.”

유명한은 다각도에서 같은 장면을 몇 번 더 찍은 뒤 오케이 싸인을 내렸다.


유명한과 기태성, 백고운이 함께 모니터링을 했다.

유명한과 기태성은 모니터링을 한 후 만족했다. 더 없이 그림이 잘 뽑혔다.

당연히 당사자인 백고운도 그렇게 여기리라 생각하며 그 둘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랐다.

백고운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잠시 고민하더니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감독님, 혹시 이 장면을 3 일 뒤에 한 번 더 촬영해도 될까요?”

그리고 기태성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선배님 집을 나가야 될 것 같아요.”

······응?

연기 장인
29.

“그러니까 왜 나가려는 건데―?”

기태성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우는 소리를 냈다.

처음엔 그냥 농담처럼 하는 말인 줄 알고 ‘하하’ 웃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힘이


진심이었다. 바지가 벗겨지기라도 할까봐 나는 화들짝 벨트를 부여잡았다.

현관 앞에서 때 아닌 실랑이가 벌어졌고, 결국 나는 목소리를 높이는 수밖에 없었다.

“제가 저번에 다 설명 드렸잖아요! 해수 연기가 좀 어색한 것 같아서 잠깐 시골에 내려갔다 오겠다고요.


감독님도 허락해주셨어요!”
어제 찍은 장면을 보고 모두가 만족했지만, 나는 어딘가 좀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

그 느낌이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해수의 모습이 컨테이너에 있을 때와 래원의 집에 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컨테이너와 숲은 해수가 10 년 가까이 머물고 자란 곳이었다. 반면 래원의 집은 해수에겐 완전히 낯선, 처음


와보는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해수의 태도에도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물론 약간 낯설어하기도 하고, 경계심을 보이기도 한다. TV 가 켜진 것으로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것으론 어딘지 불충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유명한 감독에게 괜찮다면 3 일만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느냐 물어본 것이었다. 굳이 3 일이라 꼽은 건
딱 그 정도가 촬영에 지장 가지 않는 선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다행히 유명한은 내 의도를 이해하고 넉넉히 5 일을 빼주었다.

영화는 드라마와 달리 빨리 촬영을 뽑아야 할 필요가 없어서 비교적 여유로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정이
정해진 로케 촬영은 초반부에 마쳤기에 스케줄이 좀 유동적인 덕도 있었다.

물론 촬영 스케줄이 있으니까 그 이상은 뺄 수 없겠지만, 나도 그 정도까지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내겐 3


일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다 얘기가 되고 잘 풀렸는데, 기태성이 갑자기 이렇게 가지 말라고 길목을 막는 것이었다.


기태성의 논리는 이러했다.

“어디 외딴 곳에 처박혀 있으려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면 그냥 집에서 방 문 닫아걸고 있으면 되잖아.”

“아뇨, 아예 완전히 환경을 해수가 있던 곳과 똑같이 맞춰보려고요.”

“그런 곳이 어디 있는데? 어차피 숙박 잡아서 머물 거 아니야?”

“아, 그건 걱정 마세요. 다행히 아는 분이 안 쓰는 별장 빌려주신다고 하셨어요.”

“안 쓰는 별장······?”

생소한 어휘의 조합에 기태성이 눈을 끔뻑였다. 그 반응이 어느 정도 이해가는 바라 멋쩍게 웃었다.

사실 이초희에게 연락을 했을 때까지만 해도 별 기대는 없었는데,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그런 거라면 내 별장


빌려줄게’라고 정말로 말하자 나도 어찌나 놀랐던지.

물론 공짜는 아니었고, 조건이 있기는 했다.

“그 분이 선배님 팬이라서 대신 싸인 하나만 받아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뭐? 설마 어제 나한테 받아간 게······!”

어제 내 아는 사람이 선배님 팬인데 싸인 하나만 해줄 수 있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내 것까지 흔쾌히 해줬는데(사실


내 몫은 필요 없었지만), 이제와 그 싸인이 별장 제공자의 손으로 들어간다 하니 흡사 배반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난 거짓은 안 말했다. 자세히 물어보지 않은 기태성 탓도 있는 거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내가 보내 준다. 대신 일찍 와.”

결국 기태성도 흑흑 우는 시늉을 하며 손을 뗐다.


장난처럼 날 보내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긴 했지만, 그도 한 명의 배우로서 당연히 내 행동을 지지했다.

기태성의 집을 나오면서 나는 잠깐 딴 생각을 했다.

‘외로워서 그러신 건가? 얼른 장가를 가셔야 할 텐데.’

내가 전생의 김철수였다면 누구라도 소개시켜 드렸을 텐데, 이젠 그럴 수도 없으니.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곤 이초희가 알려준 주소로 향했다.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내려가자, 드넓은 논과 밭이 펼쳐진 외곽 지역이 나왔다. 이초희는 벌써 별장에
도착해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 왔어? 간단하게 청소는 했는데, 워낙 넓어서 다는 못 했어. 근데 진짜로 안 쓴 지 오래된 별장이라 많이
불편할 텐데. 괜찮겠어? 관리비가 많이 드는데 팔리지도 않아서 그냥 방치하고 있는 곳이었거든. 말이 별장이지,
거의 폐가야. 수도는 다행히 안 끊긴 것 같은데, 전기는 끊긴 것 같더라고. 그리고 밥은 또 어쩌게.”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감사해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초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뭐 문제 있으면 전화하고. 연기 연습이라고 해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네. 아, 그리고 이거.”

나는 가방에서 기태성의 싸인 종이를 꺼내 건넸다. 이초희가 팔짝 뛰며 좋아했다.

“대박! 진짜 고운 씨가 기태성이랑 영화 찍는구나. 와, 이제야 실감 나네. 아, 촬영장 놀러 가면 안 되나?


나도 실물 보고 싶다.”

“하하. 근데 기태성 선배님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물론 연기자로서는 존경하지만 사람으로서는 조금··· 독특하신 분이던데.

의외로 이초희의 대답은 단순했다.

“잘생겼잖아. 나 중년 취향이거든. 사실 원래 제일 좋아했던 건 고(故) 김철수 배우였는데······.”

이초희가 어두운 얼굴을 했다가, 짐짓 털어버리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그녀가 자기 옛날 전적을
농담처럼 들려줬다.

“내 고등학생 때 장래희망이 뭐였는지 알아? 김철수 마누라였잖아.”

어릴 때부터 꾸준히 소나무 취향이었다고 그녀가 깔깔 웃었다. 그리고 나는 어색하게 하하 따라 웃었다.

한편 등 뒤에서 살짝 식은땀이 흘렀다. 이거, 절대 내 정체를 들키면 안 되겠군.

외딴 시골에 백고운이 칩거한 지 5 일이 흘렀고, 드디어 다음 촬영 날이 돌아왔다.

백고운은 새벽 첫 차를 타고 왔다면서 일찍 촬영장에 도착했다.

그는 스태프들에게 살갑게 인사를 하면서 자잘한 일손을 도왔는데, 그 모습이 평소와 똑같았다.

5 일 전과 그나마 차이가 있다면 조금 더 살이 빠졌는지 볼이 핼쑥해졌다는 것 정도? 그 외에 특별히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보이지 않았다.

감독인 유명한과 상대 배우인 기태성은 백고운의 자율성을 존중했기 때문에, 백고운이 시간을 좀 달라고 했을 때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음향 감독인 예민음은, 솔직히 말해서, ‘굳이?’라는 느낌이었다.

그가 백고운에게 호의적이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었고, 그저 백고운의 지금 연기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주 전공은 음향이고 연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어깨 너머 본


배우들의 연기만 한 트럭이었다.

백고운의 연기는 저 자신이 봐도 객관적으로 훌륭했다. 근데 뭘 또 더 좋게 한다고 직접 고생을 사서 하나, 약간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면 씬 10 테이크 5 가겠습니다!”

어쨌거나 저번에 찍었던 장면은 재촬영에 들어갔고, 예민음 음향 감독은 집중했다. 야외 촬영이 아니라 잡음이
들어갈 확률은 낮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액션!”

촬영장이 조용해졌고, 기태성(래원)은 백고운(해수)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만 기다려.”

기태성이 그렇게 말한 뒤 카메라 화면에서 벗어나고, 백고운이 홀로 거실에 남았다.

저번과 달리 백고운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한참이나 못 박힌 듯 가만히 앉아서 눈을 꿈뻑거렸다.

‘왜 안 움직이지?’
모두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을 때였다.

백고운이 눈동자만 휙 굴려서 어딘가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TV 였다.

예민음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TV 는 안 켜졌는데? 리모컨 누르는 걸 까먹었나?’

백고운은 끈질기게 빤히 그쪽을 바라봤고, 자연히 다른 스태프들도 긴장한 채 조용히 그를 지켜봤다. 촬영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러자 아까까지는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예민음의 귀에 미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틱, 탁, 틱, 탁.

그건 바로 시계 초침소리였다.

그리고 그때 예민음은 비로소 깨달았다. 백고운의 시선이 닿은 곳은 TV 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정확히 표현하자면, TV 바로 위에 있는 벽걸이 형 시계였다.

백고운이 눈을 휙 굴렸다. 그는 거실 한쪽에 있는 베란다 너머를 쳐다봤다. 백고운의 귀가 예민하게 쫑긋


움직였다.

비록 예민음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백고운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자연히 상상되는 소리가 있었다.

부웅―. 차가 도로를 지나는 소리였다.


백고운의 시선이 다시 한 번 휙 돌아갔다. 그가 쳐다본 쪽은 이번엔 화장실 쪽이었다.

예민음도 이제 백고운이 듣고 있는 소리를 알 것 같았다. 물을 트는 소리.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 분명 그런


소리일 것이다.

백고운이 시선이 천천히 부엌, 그리고 방을 거쳐서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수많은 소리들이 자동적으로 상상되어 들려왔다.

냉장고를 여닫는 소리. 래원이 생수통 뚜껑을 까는 소리.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 난방이 조용히 윙 돌아가는
소리.

바로, 10 년 동안 숲에서 자란 해수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도시의 소리.

그건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백색 소음이었다. 그러나 배경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모두가 인식하지
못하는 소리들이기도 했다.

백고운은 바로 그것을 듣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로 그런 것을 처음 들어봤기 때문에 낯선 것처럼 말이다.

모두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바로 그것을 백고운만이 인식하고 연기로 표현해내고 있었다.

“······!”

예민음의 등에 소름이 쫙 돋아 올라갔다.

이곳은 인공적으로 꾸며진 세트장이기에 당연히 생활 소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백고운은 그저 시선을
옮기고 귀를 쫑긋하는 아주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그 소리들을 환청처럼 들리게 만들었다.
그러자 아주 찰나였지만, 일순간 이 촬영장이 인공적인 세트장이 아니라 정말로 래원의 집처럼 느껴졌다. 삼차원
(3D)의 공간이 사차원(4D)의 공간으로 전환되는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컷, 오케이!”

잠시 뒤 유명한 감독의 말이 떨어지고, 모두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유명한 감독과 예민음 음향 감독이 거의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유 감독님!”

“예민음 음감님, 잠깐 얘기 좀···.”

둘 다 모두 백고운의 연기에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딱 스친 참이었다.

“유 감독님, 방금 장면에서 후시로 소리를 좀 삽입하는 건 어떨까요?”

“안 그래도 제가 먼저 그 말 하려던 참이었어요. 제 생각엔 시계 초침 소리, 차 배기가스 소리, 수돗물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잠깐 회의를 나눴다. 의견은 무리 없이 일치했다.

백고운은 이번 장면에서 저번처럼 리모컨을 누르고 화들짝 놀라는 연기를 똑같이 보여주었다.

그저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그 전에 천천히 집을 훑어보는 동작이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연기로 인해 이 장면은 5 일 전과 느낌이 확 달라졌다.

이 장면은 해수의 호기심과 경계심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었는데, 저번에는 호기심이 더 강하게 표현되었다면
이번에는 경계심이 좀 더 강하게 표현되는 느낌이었다.
그 작은 차이가 미세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훌륭한 작품은 그런 사소한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아주 작은 미세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신경 쓰는 것, 우리는 그것을 장인이라고 부른다.

예민음은 조금 넋이 나간 듯한 기분으로 백고운을 새삼 다시 쳐다봤다.

5 일 뒤에 다시 찍어도 되냐고 백고운이 요청했을 땐 처음엔 조금 유난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지금 완전히 집어치워져 있었다.

오히려 5 일 만에 어떻게 저렇게 연기가 확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지 감탄만 나올 따름이었다.

‘진짜··· 연기 장인이네.’

그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기량을 십분 발휘하다
30.

이초희네 별장에 콕 박혀 있었던 건, 결과적으론 좋은 선택이었다.

5 일 간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채 지내다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 제일 먼저 차이를 느낀 건 바로 소리였다.

시골은 비교적 조용한 자연의 소리만 들린다. 시냇물 소리, 새 소리, 바람 소리 등등.

반면 도시는 북작대는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도시인들은(그리고 나 역시) 그런 소리에 어느 순간 익숙해져서 잘 느끼지도 못하지만, 해수라면 다를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표현했고, 다행히도 유명한은 다시 찍은 이 버전이 훨씬 좋다고 해주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느꼈다.

그런데 기태성을 돌아봤는데 뜻밖에도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긴가민가한 듯 눈썹을 좁히더니 갑자기 불쑥 내게 물었다.

“혹시 그 동안 밥 제대로 안 먹었어? 아까는 몰랐는데, 의상 갈아입고 나니까 살이 확실히 좀 빠진 것처럼


보이는데.”

아···.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게··· 실은 별장에 전기가 안 들어와서 갖고 간 과일만 먹었거든요.”

그러자 훈훈한 표정들로 내 연기를 칭찬하고 있었던 유명한과 다른 스태프들이 눈빛이 확 달라져선 날 훽 돌아봤다.

“뭐?!”

······응?

“5 일 동안 과일만 먹었다고? 그럼 오늘도 하루 종일 굶은 거야?”

“아뇨, 열차에서 빵도 사 먹었는데······.”

“그건 밥이 아니지! 누구 혹시 도시락 같은 거 없어?”

유명한이 외친 것을 시작으로 스태프들이 먹을 것을 찾는다고 웅성웅성 부산스러워졌다.


무슨, 내가 5 일 내내 생으로 굶은 줄 알겠다. 아니 그리고, 배역 때문에 한 달 동안 다이어트하면서 10kg
가까이 뺐을 땐 이렇게 큰일 난 것처럼 굴진 않았으면서.

그때 기태성이 박수를 짝 치며 모두를 주목시켰다. 그리곤 호탕히 외쳤다.

“후배님이 이리 고생하는데 선배 된 도리로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오늘 내가 시원하게 고기 쏩니다! 촬영


끝나고 전체 회식 갑시다아!”

기태성의 반가운 폭탄선언에 모두가 와― 박수를 치며 떠나갈 듯 환호성을 질렀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결국 나도 피식 웃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이런 촬영장 분위기가 유쾌했다. 이렇게 대놓고 막내 취급 받아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라 나름 신선하기도 했고.

나는 기태성에게 장난스레 한 마디 덧붙였다.

“선배님, 돼지 말고 소죠?”

“···물론이지!”

기태성이 고개를 끄덕이기 전, 1 초간 아주 잠시 머뭇거렸던 것을 나는 모른 척 해주기로 했다.

영화 촬영은 한 달 동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유명한 감독은 되도록 영화 내의 시간 순대로 촬영을 하길 바랐다. 때문에 촬영 중반쯤 갔을 때는 ‘래원’과


‘해수’가 부대끼며 투닥거리는 에피소드 같은 장면들이 많았다.
오늘 역시 그런 장면 중 하나였다.

유명한이 백고운에게 일렀다.

“고운아, 저번에 말했지? 여기는 그냥 둘이서 애드리브로 채워주면 돼. 그럼 부탁한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 찍는 장면은 래원이 해수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장면이었다.

“자, 스탠바이 해주시고. 씬 25 테이크 1 갑니다.”

클랩스틱이 부딪히고 카메라가 돌아갔다. 영화 속 시공간이 펼쳐졌다.

백고운은 조그마한 접이식 책상 앞에, 그리고 기태성은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접이식 책상 위에는 한글 교육


학습지가 펼쳐져 있었다.

기태성은 ‘래원’으로 분해 피곤한 듯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는 영화 내에서 다정하기보다는 까칠하고 심드렁한


성격의 캐릭터였다. 강력계 형사 일을 오래 하면서 절로 성격이 투박해진, 전형적인 형사 반장 캐릭터라고 해야
할까.

그는 일단 해수를 집에 데려와 키우고는 있었지만, 그건 그가 동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해수에게서 유괴범의


정보를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물론 오래지 않아 래원은 해수가 말을 알아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식은 그를


사람 꼴로 만드는 것이었다.

언어를 가르치는 것 역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기태성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 담뱃불을 탁탁 붙이려 했다. 그러다가 백고운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접이식
책상 앞에 앉아서 눈만 꿈뻑꿈뻑 뜨고 있었다.
기태성이 턱짓했다.

“그거 연필 잡고 따라 쓰면 돼. 서점 가서 물어보니까 3-4 살용이라더라. 그보다 더 어린 건 없대.”

백고운이 알아듣지 못하자, 기태성은 한숨을 푹 쉬곤 담배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가 소파를
내려와 무릎만 굽혀 쪼그려 앉았다.

“이렇게, 쥐고. 이걸 따라 쓰라고. 이게 ‘기역’, 이게 ‘니은’···.”

기태성이 먼저 천천히 시범을 보였다. 백고운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조금은 어색하고 서투르게 따라했다. 기태성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뭐야, 잘하네? 너 똑똑하구나?”

백고운은 ㄱ, ㄴ, ㄷ··· 옆에 있는 빈 칸에 그것을 삐뚤빼뚤 다 따라 썼다. 그러자 기태성이 페이지를 넘겨서


말했다.

“자, 이제 ‘니은’ 써 봐.”

“······.”

“써보라고. 니은. 니― 은!”

그는 눈을 끔뻑이다가 쭈뼛쭈뼛 ‘ㄱ’을 그렸다.

“······에휴.”

기태성이 힘 빠진 듯 한숨을 푹 내쉬는 것을 끝으로 유명한이 ‘컷’을 외쳤다.

“네, 좋아요. 테이크 한 번 더 갑시다.”


다시 한 번 클랩스틱이 부딪혔고, 기태성은 아까처럼 똑같이 대사를 치며 백고운의 손에 연필을 쥐어주었다.

그런데 백고운은 연필을 쥐긴 했으나, 이번에는 순순히 따라 쓰는 대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그는 망치라도 되는 것처럼 연필을 학습지에 쿵쿵 내리찍었다. 흑연이 종이 위에 닿으면서 흔적이


남았고, 그것을 발견한 백고운의 눈이 순간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반짝였다.

“안 ㄷ······!”

그리고 그 눈빛을 발견한 기태성이 불안한 예감을 느끼고 ‘안 돼’를 외치려 했지만, 그러기도 전 백고운은
까르르 웃으며 이미 연필을 온갖 곳에 죽죽 그어버렸다.

펼쳐진 학습지는 물론, 접이식 책상이며 거실 바닥까지 연필로 아무렇게나 그은 낙서로 더러워졌다.

“야, 야! 그만!”

어이쿠야. 기태성은 백고운의 손에서 연필을 빼앗으려 했고, 백고운은 연필을 안 뺏기려고 힘을 주었다.

둘이서 뒤엉켜 낑낑 힘겨루기를 했고, 그 난장을 찍던 유명한이 ‘컷’ 소리를 낸 뒤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유명한이 백고운에게 물었다.

“일부러 여러 가지 해보는 거야?”

“네, 괜찮나요?”

“좋네. 더 가능해?”

“네, 물론요.”
소품을 정리한 뒤, 다시 한 번 테이크를 갔다.

기태성은 이전처럼 백고운의 손에 연필을 쥐어주려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엔 백고운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가 학습지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갑자기 종이를 북 뜯어
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야, 그거 먹으면 안 돼!”

기태성이 기겁해선 이번에도 백고운을 말리려 했다. 백고운이 우물우물 입을 움직였고, 기태성은 황급히 백고운의
입을 억지로 벌렸다.

꿀꺽―.

그러나 백고운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였고, 백고운의 입이 아― 벌어졌을 땐 그의 입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뜨악한 기태성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거기서 한 번 또 컷으로 끊겼다. 제법 웃긴 장면이었는지 스태프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유명한도 푸스스 웃었지만, 동시에 조금 걱정은 되었는지 확인 차 백고운에게 물었다.

“고운이,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어릴 적에 종이 많이 먹어봤어요.”

“뭐? 아하하!”

둘이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며 웃었다.

그리고 기태성은 헛웃음을 뱉으며 새삼 백고운을 쳐다보았다.


‘이전부터 느낀 거지만 진짜 대단하네.’

방금 세 번의 테이크에서 백고운은 해수의 모습을 그라데이션으로 보여주었다.

첫 번째는 서너 살의 아이 같았고, 두 번째는 한두 살의 아이 같았고, 마지막에 종이를 씹어 먹을 땐 아이보다는


아직 짐승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주 미묘한 차이일 수 있으나, 백고운은 그 차이를 의식하고 아주 의도적이고 계산적으로 연기를 한 것이다.

‘연기도 연기지만, 몸도 안 사리고.’

뭣보다 종이를 진짜 먹을 줄은 정말 몰랐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그러기 쉽지 않았을 텐데. 맛이 없는 건 둘째


치고, 딱딱하고 뾰족해서 목으로 넘기는 것조차 어려운 게 보통이었다.

하기야, 백고운이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유독 몸을 사리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인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기태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나 확실한 건, 열정이 저리 넘치는 후배랑 같이 합을 맞추다보니 자연스럽게 저 자신도 자극이 된다는 것이었다.

연기만 40 년 넘게 했다. 질린 건 아니지만, 이제 새로울 것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요즘은 백고운 덕에 매일 촬영장에 올 때마다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오늘은 또 뭘 찍게 될까 기대가


됐다. 꼭 그 옛날 신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기태성은 이 감각이 기꺼웠다.

기태성은 픽 웃은 뒤 장난스럽게 백고운의 목에 헤드락을 걸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헤집듯 거칠게 흩트렸다.

“아이구, 귀여운 것!”


백고운은 갑작스러운 기태성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곧 분장팀 막내가 ‘머리 만지면 안 되세요!’하며 곤란한 눈치로 뛰어오자 백고운이 조금 미안해하듯 웃으며
사과했다.

영화 <해수>는 훈훈한 분위기에서 계속 촬영이 진행되었다.

애드리브가 되는 배우를 유명한이 원했다더니, 과연 그런 장면을 찍을 때마다 백고운은 제 기량을 십분 발휘했다.


많게는 한 장면에 테이크가 열 번을 넘겼는데, 그때마다 매번 다른 애드리브를 쳐서 모두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애드리브가 많이 필요한 장면, 즉 ‘래원’과 ‘해수’가 투닥거리면서 친해지는 장면을 다 찍고 나자 이제 영화


후반부를 찍을 차례가 되었다.

그리고 크랭크 인 들어간 지 한 달 반 째 되던 날.

드디어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씬을 찍는 날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다.

기태성이 가슴을 쫙 펴고 항구의 냄새를 기분 좋게 들이켰다. 12 월의 바닷가치고 추위가 그다지 매섭지 않았다.

“날씨 좋고, 컨디션 좋고. 오늘 그림 한 번 잘 나오겠는데?”

기태성이 옆에 있던 유명한에게 동의를 구했다.

“안 그래, 감독님?”

“그러니까. 너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좋으니까 오히려 더 걱정되네.”

“아니, 왜?”
“왜긴. 오늘 찍을 장면이 장면이니까 그렇지.”

영화 <해수>의 전반부는 따듯하고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해수’를 납치한 유괴범의 정체가 밝혀지는 후반부에
들어서면 분위기가 확 바뀐다.

결론만 말하자면, 유괴범은 지난 10 년 동안 감방에 있었다.

물론 6 명의 아이를 유괴한 것이 밝혀져서 들어간 건 아니고, 폭행 및 절도 등의 다른 죄를 저질렀다가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처음엔 비교적 가벼운 형이었지만, 죄가 쌓이고 쌓여 나중에는 가중처벌로 형이 더 불어났다. 그것이 유괴범의
발목을 잡았다.

그 사이 해수는 방치된 채로 쑥쑥 컸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나중에 래원에게 발견된다.

하지만 형기는 언젠간 끝이 난다. 형을 다 살고 나온 유괴범은 석방되고, 곧바로 자신의 아이― 해수를 찾으러
집에 간다. 그러나 이미 그곳엔 아무도 없다.

유괴범은 주변 이웃들의 증언을 통해 형사가 아이를 데려갔음을 알아챈다. 분노한 유괴범은 곧바로 래원을 찾아가
해수를 데려오려 한다.

그 과정에서 래원과 유괴범이 난투를 벌이게 되고, 래원은 유괴범을 기절시켜 수갑을 채우는 데에 성공하지만
자신도 치명상을 입게 된다.

그리고 죽어가는 래원을 붙잡고 해수는 오열하고, 둘은 마지막 이별을 한다.

영화의 제목처럼 주인공이 해수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해수의 성장과 홀로서기를 다룬 이야기였고, 그렇기 때문에
유사 아버지인 래원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기태성은 너무 잔인한 결말이라며, 영화감독들은 꼭 관객들 눈에서 눈물을 뽑아야 성에 차는


새디스트들이라고 투덜거렸지만.
유명한이 농담을 던졌다.

“날씨도 컨디션도 다 너무 좋아서 비극적인 분위기가 안 나오지 않을까 몰라. 비도 좀 내려주고 날씨도 좀
얼어붙게 추워야 배우들이 슬픈 연기하기에 좋을 텐데. 안 그래?”

“아이구, 농담도 지나치슈. 난 그런 거 딱 질색이야.”

기태성이 손을 훼훼 내저었다. 그리곤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고운이는 어디 있어? 아까부터 안 보이던데.”

“내가 따로 대기하라 시켰어. 혼자 있어야 감정 잡는 데에 도움 될 것 같아서.”

아, 그렇군. 기태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난 김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마지막 씬을 고운이한테 다 맡겨도 되겠어? 아무리 고운이가 애드리브를 잘한다지만 이전 장면들과
마지막 씬은 중요도 자체가 다르잖아.”

유명한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일단 한 번 찍어보는 거지. 별로면 원래 내가 생각했던 대로 다시 가면 되는 거고. 어차피 대사도 별로


없으니까 디렉션이 바뀌어도 고운이한테 무리가 크게 가지는 않잖아.”

말은 그렇게 해도 유명한의 눈엔 벌써부터 기대감이 잔뜩 어려 있었다. 백고운이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아주


궁금해 죽겠다는 눈빛이었다.

기태성은 어깨만 으쓱였다. 감독이 그렇게 한다는데 배우인 자신이 뭐라 하겠는가.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물론 속으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생각했다. 하여간 감독들은 이상한 데서 예술병이 꼭 있다니까.
“그럼 스탠바이 해주시고.”

촬영 준비가 다 끝난 후 유명한 감독은 조감독에게 일러 백고운을 부르라 했다.

감독, 스태프들, 출연 배우들, 그 모두의 시선이 백고운이 오는 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곧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백고운이 천천히 나타났다.

완벽한 해수의 얼굴을 한 채로.

이름이 가지는 의미
31.

유명한 감독은 아까 전, 백고운에게 자율적으로 마지막 씬을 연기해주면 된다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냥 고운이 네가 해수라고 생각해.

그리고 지금.

“액션!”

래원이 죽는 마지막 장면이 펼쳐졌고,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시작하고 있는 백고운은 완벽히 ‘해수’로 분해
있었다.

유명한과 스태프들 모두 조용히 숨을 죽였고, 피 분장을 한 기태성(래원)은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서 쿨럭 기침을
터트렸다.

“하아, 하···.”

밭은 숨을 몰아쉬던 기태성은 옆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눈을 떴다. 그리고 백고운(해수)을 발견하곤 겨우 미소를
지어보였다.

“해수······ 구나.”

백고운은 Ω 자세로 풀썩 쪼그려 앉더니 그런 기태성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아직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백고운이 어떤 반응을 보여주든, 기태성은 디렉션 받은 대로 연기를 이어갔다.

“해수, 야. 이제는 너 혼자, 쿨럭, 살아가야 해. 더 같이 있어주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될 것, 같다.”

기태성은 힘겹게 말한 후, 상처 부위를 붙잡고 잠시 한 번 더 기침을 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남자는 마지막까지 남은 힘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이제 홀로 남게 될 어린 소년에게 꼭


전하고 싶었던 말을 천천히― 힘을 주어 내뱉기 시작했다.

“해수야. 기억··· 해. 네 이름은 해수, 라고. ‘해수’, 너는 해수야. 절대 그걸··· 잊어버리지··· 마.”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이름은 그 존재가 이 세상에 자리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표다.

아이는 제 부모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나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불리며
사랑받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해수는 아주 어릴 때 유괴 당했고, 유괴범은 해수란 이름 대신 자신의 아들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해수는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고 컸고, 10 년이 지나는 동안 해수의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지금 이 순간, 해수의 원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줄 이는 래원이 유일했지만, 그 래원마저도 머지않아 죽게 된다.
이제는 해수 스스로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야만 한다.

기태성은 몇 번이나 ‘네 이름은 해수야’하고 중얼거린 뒤, 백고운의 뺨을 가볍게 쓸어준 뒤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한 순간. 기태성은 눈을 감고 손을 툭 떨어트렸다. 숨이 다한 것이었다.

“······.”

정적이 내려앉았다.

기태성은 래원이 죽어가는 모습을 열연해주었고, 그가 죽은 지금.

이제 연기의 턴은 해수인 백고운에게 넘어왔다.

촬영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백고운이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백고운은 곧바로 울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즐거운 듯 기태성이 쓰러지자 그 근처를 돌며 까르르 웃었다. 아직 죽음에 대한 개념을
모르는 사람이 할 법한 반응이었다. 그는 그저 기태성이 재밌는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기태성의 눈은 여전히 떠지지 않았다.

“······.”

백고운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이 가셨다. 그가 우뚝 제자리에 멈추었다. 그리고 눈을 끔뻑거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백고운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기태성의 몸을 툭 쳤다. 기태성은 미동하지 않았다. 백고운이 다시 한 번 더
기태성의 몸을 두드렸다. 기태성은 그래도 일어나지 않았다.

백고운이 조금 불안한 듯 서성거리다가 다시 기태성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다시 유명한 감독이 뷰파인더를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는 해수가 래원의 죽음을
알아차리고 오열할 차례였다.

다만 그것을 백고운이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했다. 울음을 크게 터트릴까? 숨을 죽이고 흐느낄까?

그때였다. 백고운이 눈매를 일그러트리듯 좁히더니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죽지 마? 가지 마?

유명한이 속으로만 추측했다.

그러나 백고운이 내뱉은 말은, 뜻밖에도 자신의 이름이었다.

“해······ 수.”

백고운은 모두의 예상을 배반하고 제 이름을 말하더니, 다시 빤히 기태성을 바라봤다. 기태성이 움직이지 않자
백고운은 안절부절 못하더니 다시 제 이름을 불렀다.

“해수우······.”

그렇게 백고운은 한참이나 자신의 이름을 내뱉었다. 띄엄띄엄, 말을 배우는 아기가 처음으로 입을 떼듯이.
힘겹게. 기를 쓰고.
“해애··· 수. 해수으···.”

그리고 어리둥절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유명한 감독은 한순간 백고운이 뭘 하고 있는지 벼락같이 깨달았다.

“······!!”

그는 지금 자신의 이름을 내뱉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는 지금 그것이 자신의 이름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백고운은 그저 아까 기태성이 했던 말― 정확히는 그 말 중에 반복적으로 발음되어진 ‘해수’라는 단어를


맹목적으로 따라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래원은 해수에게 단어를 가르치기 위해 여러 번 같은 발음을 반복해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해수가
그것을 따라할 듯 입을 옴싹거리면 ‘그래, 그래! 그거야!’하면서 반응했었다.

백고운은, 아니, 해수는 지금 그 때를 기억하고 있기에 이리 행동하는 것이었다.

기태성이 반복해서 내뱉은 단어를 계속 따라하다 보면 그가 다시 일어나 반응해줄 줄 알고.

이전처럼.

하지만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눈을 뜨지 않았고, 백고운의 중얼거림은 텅 빈 메아리가 되어 싸늘한 공중에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해, 흐으······ 수··· 우······.”

그리고 기태성의 몸을 돌며 ‘해수’가 기태성의 이름이라도 되는 양 연신 불러대던 백고운의 목소리에도 조금씩


울음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그도 천천히 깨닫고 있는 것이리라.

기태성이 진짜로 떠나갔다는 것을. 다시는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이 비로소 혼자 남겨졌다는 것을.

“해···, 흐으······ 수우, 끅, 우우······!”

종래엔 백고운이 몸을 멈추고 기태성의 몸에 엎어졌다. 원망과 서러움이 담긴 울음이 커졌다. 무력한 자신에 대한
미움과, 왜 이렇게 했는데도 깨어나지 않느냐는 듯의 서글픔이 뒤섞였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없는 적막한 거리. 한 소년이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흐느끼는 소리가 그렇게 한참동안 항구에 울려
퍼졌다.

“······컷, 오케이.”

한참 뒤, 유명한은 먹먹한 목소리로 됐다는 신호를 주었다.

그러나 보통 오케이 싸인이 나면 스태프 사이에서 울릴 법한 기쁨의 소리가 그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촬영장
분위기는 전례 없이 무겁게 내려앉아있었다.

백고운이 보여준 눈물 연기에 촬영장 분위기가 동화된 탓이었다. 스태프 중 몇몇은 눈물을 몰래 조용히 훔쳐냈다.

백고운은 다시 자신으로 돌아와 눈물을 닦은 후 유명한에게 물었다.

“다시 갈 필요 없나요?”

“응, 괜찮아.”

백고운이 보여준 연기가 마음에 안 들 경우 다시 디렉션 할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이제와선 쓸모없었다.

왜냐하면 유명한의 아이디어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장면을 백고운이 방금 막 보여주었으므로.


*

영화 <해수>의 촬영은 새해를 넘겨 1 월 중순 즈음에 끝났다.

그리고 오늘은 촬영 뒤풀이 현장이었다. 통째로 빌린 가게는 우리 영화 팀원들로 꽉 차 북적였다.

맞은편의 유명한 감독님이 일어나 ‘아, 아’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게 곳곳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조용히 하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유명한은 우리들을 휘 둘러보며 짧게 말했다.

“그동안 모두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절 믿고 이런 영화에 참여해주신 모든 배우 분들, 그리고 우리 스태프


식구들. 정말로 너무 감사했습니다. 원래 이런 건배사는 길면 안 되겠죠? 짧고 굵게 갑시다. 영화 <해수>
대박나자!”

“대박나자!”

모두 합창한 후, 술잔을 경쾌하게 부딪혔다. 나 역시 미리 채워둔 소주잔을 옆에 있는 기태성과 ‘짠’


맞부딪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술을 쭉 들이켜고 입가를 훔치며 다시 몸을 돌렸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기태성이 농담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뱉었다.

“이야, 촬영이 끝나고 나니 고운이가 성인이 되어 있네.”

그렇다. 나는 새해가 넘어가면서 법적으로 스무 살이 되었다.

내가 백고운이 된 지도 벌써 1 년이 다 되어갔다. 처음엔 실제의 나보다 스무 살 가까이 어린 친구의 몸으로 사는


것이 조금 어색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많이 적응했다.

몸이야 미성년자였다지만 정신은 이미 성인인지라 성인이 된다는 것이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감회가 조금 남다르긴 했다.

하필 또 요 며칠 동안 찍었던 영화 <해수>가 ‘해수’의 성장과 독립을 다룬 내용이라 더 그런 것도 있었다. ‘


해수’가 딱 사회에 발을 디디며 영화 촬영이 끝났고, 그와 동시에 2010 년이 저물고 2011 년 새해가 밝았으니까.
그리고 ‘해수’라는 캐릭터에서 벗어나 다시 ‘백고운’으로 돌아온 내가 또 마침 성인이 되었으니.
시기적으로 좀 공교롭다고나 해야 할까.

기태성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이고, 진짜 해수 같아서 큰일이네. 대견하다, 대견해.”

한 작품의 한 캐릭터를 맡아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일 년 가까이 몰입해 연기를 하다보면 당연히 작품이 끝났을
때 그 여운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로서 느끼는 감정인지, 아니면 자신의 감정인지
헷갈릴 때도 많고.

그래서 로맨스 작품 같은 경우, 주연인 두 남녀 배우가 작품이 끝난 후 열애설을 인정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 기태성은 내가 진짜 해수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나는 영화 찍는 동안 기태성의 집에서 거의


머물다시피 했었으니 안 그러는 게 더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픽 웃으면서 장난스레 대꾸했다.

“선배님, 센티멘탈은 선배님이랑 안 어울려요.”

“역시 그렇지?”

기태성은 냉큼 대답하며 손을 치웠다. 우리 둘은 죽이 잘 맞는 콤비처럼 낄낄 웃었다.

“자자, 오늘은 원 없이 마셔보자고. 고운이 너 성인 되고 아직 술 취할 때까지 안 마셔봤지? 주량 알아?”

“음··· 아뇨, 몰라요.”


당연히 내 주량 정도는 알았으나, 어쨌거나 지금 몸은 김철수가 아니라 백고운이니 혹시 또 몰라서 그렇게 답했다.

기태성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화색이 밝아졌다.

“그래? 그럼 또 이 형님이 술을 가르쳐줘야겠네.”

그 말을 시작으로 기태성과 나는 대작하며 술을 끊임없이 마셔댔다. 기태성이 날 부추기기도 했지만, 나 역시


오랜만에 맛보는 알코올이라 술이 아주 술술 들어간 탓도 있었다.

그 결과 우리는 뒤풀이 현장에서 가장 먼저 취한 사람이 됐다.

기태성이 맞은편 유명한 감독을 손짓으로 부르곤 실실 웃으며 말했다.

“유 감독님이 유감스러우면? 유 감 유감―!”

유명한이 어정쩡하게 ‘하하···’하고 웃었을 때였다.

“풉!”

웃음은 생뚱맞게도 내 입에서 터졌다. 하지만 도저히 못 참겠는걸. 나는 결국 못 참고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기태성이 그런 날 보면서 눈을 반짝였다.

“고운이 이런 개그 좋아해?”

“네, 완전 웃긴데요.”

“그지? 완전 웃기지?!”
그리고 우리 둘은 흡사 어깨동무를 하고 주거니 받거니 농담을 던지고 우리끼리 폭소했다.

“둘이 아주 잘 맞네···.”

유명한 감독이 그런 우리 둘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품 poom 매니지먼트
32.

다음날 아침.

“으······.”

나는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어젯밤 영화 <해수>팀 사람들과 술을 거나하게 먹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론 필름이 끊겨 있었다.

그래도 기태성의 집에서 깨어난 걸 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최소한 길바닥이나 경찰서에서 깨지는
않았으니.

나는 주섬주섬 일어나 손님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거실 바닥에 시체처럼 쓰러져 자고 있는 기태성을
발견했다.

나는 비척비척 다가가 기태성을 흔들어 깨웠다.

“선배님···, 일어나세요.”

“우욱, 흔들지 마··· 나 죽어···.”

기태성이 비몽사몽 손을 젓더니, 입을 턱 막고 헛구역질 했다.

이분도 어제 어지간히 마셨군. 나는 한숨을 푹 쉬곤 꿀물을 타서 갖다 주었다. 기태성이 ‘땡큐’하면서 힘겹게


그것을 마셨다.

그리고 대략 한 시간 뒤.

우리는 대충 씻고 나와선 근처의 콩나물 해장국 집에 들어왔다. 아직 10 시도 안 된 아침이라 가게에는 사람이


적었다.

해장국은 금방 나왔다. 아주머니가 국을 내오면서 기태성을 향해 ‘또 술 퍼마셨어?!’하고 친근하게 타박했다.


기태성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씩 웃었다. 보아하니 그는 이 가게의 단골인 것 같았다.

“고운아, 먹어. 여기 이모님 손맛이 좋아. 내가 이 해장국 먹으려고 술 먹는다니까.”

“넵, 잘 먹겠습니다.”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과연 해장국은 맛있었다. 그리고 뜨거운 국물이 위장 속으로 들어가자 속도 한결


편안해졌다.

그런데 그때, 몇 술 뜨던 기태성이 쩝 입맛을 다시더니 내게 물었다.

“아무래도 여기에 반주를 걸치면 안 되겠지?”

“···아무래도 안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마셔놓고도 또 마시고 싶다니. 주당이란 얘기는 건너 건너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술을 좋아할 줄이야.

기태성도 한 번 던져본 말인 듯 선선히 물러났다.

“역시 그렇지? 하기야 나도 내 나이를 신경 써야지.”

기태성이 별 뜻 없이 중얼거렸고, 나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선배님은 아직 젊은데요, 뭘.”

“뭐? 하하. 고운이 너 사회생활 꽤 잘하는데?”

기태성은 내 말을 빈 말이라고 생각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어··· 진짠데요. 선배님은 젊으시잖아요. 아직 50 대 아니세요?”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의 나(그러니까 김철수)도 40 대라 그런가, 20 살 어린 백고운보다는 10 살 많은 기태성 쪽이 더 가까운


나이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내 기준으로 하면 50 대는 그다지 많은 나이도 아니었다.

그리고 처음엔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려던 기태성도 곧 내 표정이 진심이란 걸 알아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엥,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럼요. 100 세 시대에 50 대면 아직 반 밖에 안 온 거죠, 뭘.”

기태성은 헛웃음을 뱉었다.

“그 얘기를 유 감독님 입에서 들었다면 모를까, 고운이 네 입에서 들으니 좀 묘하게 들리긴 하다, 야.”

기태성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내 나이가 젊은 건 아니지. 요즘은 나도 연기 접고 가게나 차려야 하나, 그런 고민도 많이 든다니까.”

기태성은 짐짓 한숨을 푹 쉬는 시늉을 했다.

“고운이 너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내 나이쯤 와 보면 늙어 죽을 때까지 연기로 벌어먹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짜 극소수거든. 대부분은 작은 엔터 회사를 차리거나, 아니면 아예 요식업에 투자해서 가게를 열거나 해요.
연기를 하더라도 전업으로 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고.”

나는 기태성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나 역시 전생(前生)에서 주변 동료들이 그렇게 사업을 벌이는 걸 많이 봐 왔다. 아무래도 예술계 쪽 직업이


불안정하기도 하거니와, 인기나 대중의 관심이란 게 생각보다 금방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리라.

“지금이야 아직도 시나리오가 들어오기는 한다지만, 언제까지나 감독이나 대중이 날 찾아줄리란 보장도 없고.
주변에서 하도 권하기도 하니까. ······아니, 됐다. 내가 이 얘길 왜 너한테 하고 있는 건지.”

기태성은 뒤늦게 내 나이를 의식했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

“잊어, 잊어. 내가 술에 아직 덜 깼나 보다. 이상하게 고운이 너랑 있다 보면 꼭 내 동년배처럼 느껴져서 별


소리가 다 술술 나온다니까.”

나는 빙긋 웃었다. 기태성은 연장자가 손아랫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것에 대해 멋쩍음을 느끼고 있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모른 척 태연히, 그러나 최대한 진심을 담백하게 담아 대꾸했다.

“에이, 선배님도 엄살은 참. 여든에도 정정하게 연기하시는 대(大)원로 배우 분들도 많으신데, 그거에 비하면
선배님은 엄청 젊으신 거죠.”

8 년 전 배우 생활을 은퇴했을 때, 나는 화상 자국 때문에 좌절하기는 했어도 나이를 장애로 여겨본 적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나는 백고운의 몸으로 들어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중에 의료 기술이 좋아져서
피부를 새로 이식받을 수 있다면 늦은 나이라도 다시 연기를 시작할 거라고.

그러니 연기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열정이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연기는 언제까지고 할 수 있었다.
“하긴, 그건 또 그러네.”

기태성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로 가만히 있더니, 곧 기분 전환이 됐는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리곤 호쾌하게
외쳤다.

“그래, 난 젊다! 이모님,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음, 그런 의미로 젊다고 한 건 아니었는데요.”

“알아, 알아. 기분만 내려고 하는 거야.”

기태성은 정말로 소주를 딱 두 잔에만 따른 후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나더러 ‘짠’만 해달라며 하나를
쥐어주었다.

우리는 허공에서 소주잔을 부딪쳤고, 맑은 소리가 짠― 울렸다. 기태성은 그것을 쭉 들이켠 후 ‘크으’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픽 웃었다. 어쨌거나 기태성의 기분이 나아진 듯 보여서
다행이었다.

나도 소주잔을 입에 갖다 댔다. 다 마시지는 않았고, 마시는 시늉만 하며 딱 입술만 축일 정도로 기울였을


때였다.

그런데 그때, 기태성이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혼잣말인지 모를 소리를 은근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원래도 탐났는데 보면 볼수록 진짜 탐나네.”

그러더니 그가 날 불렀다.

“고운아. 안 그래도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언제 말을 꺼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가 씩 웃으며 의외의 말을 꺼냈다.

“너 우리 소속사 안 올래?”

그리고 다시 두 시간 뒤.

어째서인지 나는 기태성과 함께 그의 소속사 앞에 서 있었다. 기태성이 즐거운 듯 연신 나를 재촉했다.

“자, 자. 얼른 들어와.”

나는 어깨를 으쓱한 후 결국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러니까 기태성이 나더러 자기 소속사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물어본 뒤, 나는 고민해보겠다 대답했었다.

그런데 기태성이 갑자기 더 신나서는, 자기 소속사를 소개시켜주겠다면서 내친 김에 날 끌고 왔다.

이런 걸 보면 기태성은 상당히 기분파에 행동파였다. 이런 타입이 사업을 벌인다고 사람을 잘못 만나면 딱 그날로
사기를 당하기 쉬운데.

“음, 선배님은 평생 연기만 하는 게 좋겠네요.”

“응? 뭐라고?”

나는 중얼거렸고, 기태성은 듣지 못한 눈치로 되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어쨌거나 여기까지 왔으니 나는 느긋이 기태성의 소속사를 구경하기로 했다.


기태성의 소속사는 ‘품 Poom 매니지먼트’로, 배우만을 전문으로 케어하는 회사였다. 그리고 품 매니지먼트에는
내로라하는 국내 정상급의 배우들이 다수 소속되어 있었다. 물론 기태성도 그 중 한 명이었고.

기태성은 로비부터 구경을 시켜주며 자기 소속사 자랑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내가 이미 아는 내용이었다.

품 매니지먼트는 긴 말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워낙 이쪽 바닥에선 유명한 회사였고, 소속 배우들한테도 잘 해주는


곳으로도 이름 높았으니까.

그래. 갑작스럽게 제안을 받고 어쩌다 충동적으로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사실 이건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부국제에 다녀온 이후로 의도적으로 소속사에 들어가는 것을 미뤄왔다. 처음에는 최호랑의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절했고, 유명한의 영화에 참여하게 된 직후에는 괜찮은 회사가 없는지 간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속사가 없는 배우가 인기를 얻게 되면 당연히 여러 매니지먼트에서 함께 하자고 손을 뻗쳐 오게 된다.

그러나 일찍 뻗쳐오는 손들 중에는 사기꾼들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많았다.

특히 상대가 어리고 신인인 배우일수록 더 그랬다. 배우가 계약에 어두울수록 회사는 자신들이 유리한 쪽으로
계약하기 쉬우니까.

그래서 이쪽 바닥에 유독 소속사와 연예인들 간의 소송 싸움이 많이 있는 것이었다. 김철수였던 시절 나 역시 몇


번 겪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번 생에도 다르지 않았다. 그 동안 나는 꽤 많은 곳에서 에이전시 연락을 받았는데, 대부분은


영향력이 너무 없는 작은 회사였거나, 좀 이름 있는 회사일라 치면 부당 계약이었다.

내가 진짜 신인이었다면 몰랐을까, 이제는 그 수작질이 다 빤히 보였기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뭐, 그런 이유들도 있었고 영화 촬영을 할 때는 다른 것보다는 연기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일부러 미룬 것도


있었다.
그리고 촬영이 끝난 지금. 이제 슬슬 소속사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한 시점에 기태성이 좋은 제안을 해온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거기에 감동해 재계약을 했고······.”

기태성은 마치 자기가 여기 사장이라도 되는 듯 회사 PR 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소속 연예인이 자기 소속사에 대해 칭찬을 한다? 그러면 진짜로 좋은 회사일 확률이 높았다. 직장인으로 따지면
자기 회사에 만족한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기태성은 이전까지 여러 소속사를 전전했는데 여기에 이적하고는 십 년 가까이 회사를 옮기지
않았다. 그걸 보면 이 회사가 배우를 잘 케어하고 있단 건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조금 일이 휘몰아치듯 결정되고 있기는 했는데, 그래도 기회란 원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이었다. 게다가
기회는 잡아야만 하는 타이밍이 있는 법이었다.

나는 반절은 마음을 정하면서 기태성에게 운을 띄웠다.

“그런데 선배님. 저더러 여기 오라고 한 게 선배님 개인적인 의견인 건 아니에요? 여기서 저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물론 기태성은 부정했다.

“그럴 리가! 오히려 그 반대지. 우리 실장님이 너 소개시켜달라고 하도 떼를 부렸는데, 내가 너 연기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부러 여태 말 안 한 거거든.”

기태성이 ‘어’하면서 고개를 돌려 알은체 했다.

“마침 저기 오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봤다.

순박하게 생긴 한 남자가 우리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재게 걸어오고 있었다.

······어라? 저 사람은?

기태성이 먼저 그를 소개했다.

“인사해. 우리 윤성광 실장. 우리 소속사 진짜 실세야.”

“안녕하세요, 백고운 배우님 맞으시죠? 정말 반갑습니다.”

그가 살갑게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왜냐하면 나는 이 사람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생前生의 인연
33.

품 매니지먼트의 윤성광이 기태성에게서 한 통의 문자를 받은 건 아까 전이었다.

―지금 백고운이 데리고 소속사 간다. 준비해 놔!

요지는 간단했다. 소속사 얘기를 꺼냈다고, 구경시켜준다는 명목으로 데려갈 테니 자연스럽게 꼬드길 준비를 하란
말이었다.

윤성광은 회사 근처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있다가 그 연락을 받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먹는 둥 마는 둥 급히


식사를 마치고 재빨리 회사로 복귀했다.
‘이건 기회야. 무조건 잡아야 해!’

사실 윤성광은 약 한 달 전부터 백고운을 호시탐탐 눈여겨보고 있었다.

백고운 본인은 모르고 있겠지만, 그는 지금 이쪽 바닥에서 이런 수식어로 꽤나 유명했다.

유명한 감독의 영화 주인공으로 발탁되어 하루아침에 뜬 슈퍼 루키.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내밀어진
에이전시를 모두 거부한 만만찮은 놈.

윤성광은 매니지먼트 관계자들 사이에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걔? 진짜 쉽지 않긴 하더라. 새파랗게 어린놈이 무슨 수십 번 계약해본 사람처럼 굴던데. 솔직히, 신인인 거


빼면 그 친구가 갑이고 우리가 을이지. 무려 유명한 감독이 주인공으로 뽑은 놈인데, 당연히 앞으로는 더
유명해지겠지. 그나마 몸값이 싼 지금일 때 데려와야 몇 년 뒤에 뽕을 뽑을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런데 그
백고운이란 친구, 그걸 모를 줄 알았는데 완전 잘 알고 있던데? 계약서에 장난질 쳐놓는 거 다 알아보고 아주 칼
같이 연락 끊는데. 와, 지금 말하는 거지만 그때 난 좀 쫄았다니까?

그리고 윤성광은 기태성에게서도 이런 얘기를 들었다.

―애가 진짜, 연기를 잘해. 처음엔 유 감독이 웬 듣도 보도 못한 친구를 주인공으로 세우나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니까. 애가 무슨, 평생 연기만 하고 산 사람처럼 연기를 하더라고.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놈이. 내가
장담해. 걔는 다른 거 상관없이 오직 연기력 하나로 최정상에 설 놈이야.

이곳저곳에서 들은 바를 종합하면, 연기는 끝내주게 잘하는데 성격 자체도 똑 부러진단 말이었다. 그러니


호기심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었다.

윤성광은 제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해수> 촬영장에 몰래 가봤고, 거기서 백고운이란 그 친구를 직접 봤다.

소문에는 거짓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소문은 축소된 편이었다.


백고운은 연기를 정말 기가 막히게 잘했고, 그 촬영장에서 본인이 제일 막내인 것 같았는데 그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을 정도로 강단 있었다.

후자가 중요한 건, 이쪽 바닥 특성상 재능도 재능이지만 결국은 멘탈이 강한 놈이 오래 가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윤성광은 인재를 가만히 두고 볼 만큼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기태성에게 백고운을 데려오면 어떻겠느냐고 얘기를 꺼내면서, 슬쩍 말이라도 흘려보라고 부탁했다. 둘은


같은 영화를 찍으면서 많이 친해진 듯 보였고, 원래 소속사를 결정하는 데에는 지인의 소개가 큰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었으니까.

기태성은 알겠다고 하면서도 백고운이 연기에 집중할 수 있게 영화 촬영 끝난 뒤에 말해보겠다 했다.

그렇게 윤성광은 한참 기다렸고, 드디어 오늘이 온 것이었다. 그러니 밥 먹다 말고 백고운을 맞기 위해 부랴부랴


왔을 수밖에.

“안녕하세요, 백고운 배우님 맞으시죠? 정말 반갑습니다.”

윤성광은 최대한 인상 좋아보이게 인사를 꾸벅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

윤성광은 당황했다.

왜냐면 백고운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쩐지 묘했기 때문이었다. 낯익은 사람을 아주 오랜만에 재회했을 때와
같은 눈빛이라고 해야 할까.

좀 더 보태자면, 꼭 친척 어른이 잘 큰 조카를 나중에 바라보는 듯한··· 그런 애틋함이 있는 눈빛이었다.


윤성광의 뒷목에 땀이 삐질 흘렀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여기에서 일하고 있었구나.’

나는 감회에 젖어 있었다.

윤성광, 그는 바로 내 옛날 매니저였다.

그는 비록 내 첫 매니저는 아니었지만, 나와 함께 했던 여러 많은 매니저들 중 제일 오래 기억에 남은 매니저였다.

그가 나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한 매니저란 것도 물론 이유라면 이유였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7 년 전 내가 화상 자국을 입고 연예계를 은퇴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연락이 끊어졌었다.

씁쓸했지만 나는 받아들였다. 어쩌겠는가. 그게 현실인 것을.

그런데 윤성광만이 내가 퇴물 배우가 된 후에도 꾸준히 계속 연락을 해왔다. 원래부터 친한 친구였던 김건은
논외로 친다면 말이다.

7 년이란 긴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연락도 뜸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1 년에 두어 번은 명절 선물과 함께 잘


지내시느냐, 건강하게 지내시라, 그런 연락을 받았다.

그와 함께 일했던 예전에도 그가 참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되고 나서는


그것을 더욱 실감했다.
그런 말도 있잖은가. 힘든 시기를 겪을 때 유일하게 좋은 점은, 자신을 진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누군지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라고.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그가 새로운 회사로 이직했다는 얘기는 들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회사가 바로
여기였다니. 그리고 이렇게 또 만나게 되다니.

참 신기하고 괜히 운명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생(前生)의 인연이 이런 방식으로 금생(今生)에 또 이어지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나보다 다섯 살 정도 어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러면 지금은 서른다섯 정도 됐을까?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고 싶어 입이 괜히 근질근질했다.

하지만 나는 꾹 눌러 참고 뒤늦게 대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잠깐 딴 생각을 했네요. 네, 안녕하세요. 윤성광··· 실장님이라고 하셨나요?”

“네, 맞습니다. 여기 서서 이러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아, 부담 드리려는 건 아니에요. 커피만
드시고 가셔도 괜찮아요.”

“하하, 네. 알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서로 깍듯이 얘기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쨌거나 지금의 나는 고작 20 살일 뿐인데도 30 은 훌쩍 넘은 그는 내게도 존대를 고수했다.

상대가 어리다고 무시하지 않고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미팅 실에 마주 앉았다.
윤성광이 오기 전부터 반쯤 마음을 정한 나는 그가 오면서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그렇기 때문에 더 볼 것도 없이
곧바로 직구로 말했다.

“기태성 선배님에게 얘기 들었습니다. 저와 전속 계약을 맺고 싶어 하신다고요. 저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윤성광은 깜짝 놀랐다. 아마 내가 좀 더 미온적인 반응을 보일 줄 안 모양이었다. 그는 잠깐은 얼떨떨해 했다가,


곧 기쁜 눈치로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그러나 나 역시 무조건적으로 여길 오겠다는 건 아니었다. 나는 덧붙였다.

“근데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작품에 들어갈지 선택하는 결정권은 제가 최우선적으로 갖고


싶습니다.”

이런 계약의 장은 기본적으로 협상 테이블이었다. 배우는 자율권을 많이 가져가려고 애쓰고, 소속사는 그 반대를


애쓰고.

그리고 나는 다른 건 그다지 상관없었지만, 작품을 결정하는 것에만은 내 의견이 가장 우선적으로 존중받기를


원했다.

“실은 제가 올해 하반기에 들어갈 작품이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극단 왕국에서 올라갈 연극인데, 거기 최호랑
단장님과 구두로 약속을 맺었습니다. 제게 은인인 분이나 다름없어서 함부로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습니다.”

윤성광은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었다. 그리곤 다행히 순순히 답해주었다.

“물론입니다. 조건을 그렇게 따로 걸지 않으셔도 저희 소속사에서는 언제나 배우의 의견을 존중해서 결정하고
있습니다. 상호협력적인 파트너 관계로 오래 가는 것이 저희 소속사가 추구하는 방향이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신
바가 무엇인지 알겠으니 따로 계약서에 명시하겠습니다. 혹시 더 원하시는 건 따로 없으신가요?”

나는 일단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그의 차례였다. 윤성광은 소속사 측의 입장을 설명했다. 대부분 납득 가능할 상식선의 얘기들이었다.

우리는 몇 가지를 더 조율한 뒤, 며칠 뒤 다시 만나 계약서을 주고받았다. 과연 장난질을 쳐놓은 부분은 없었다.


나는 만족한 채 도장을 찍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윤성광이 한 손을 내밀며 친근히 웃었다. 나 역시 웃으면서 그의 손을 맞잡았다.

“네. 저도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며칠 동안 나는 꽤 분주했다.

소속사 계약을 마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집을 구하는 일이었다. 영화 <해수> 출연료랑 소속사 계약금을


합치자 집 하나를 구할 수 있는 돈이 얼추 되었다.

표류와 이초희가 집을 구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우리 셋은 빨빨거리면서 부동산을 돌아다녔다.

그 결과 나는 여의도 쪽에 괜찮은 집을 하나 구했다. 고시원과 기태성의 집을 전전하며 유랑민처럼 살았던 과거는


이제 안녕이었다.

물론 며칠 전, 기태성과 윤성광은 자신들이 같이 가주는 게 좋지 않겠느냐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김철수였던 시절 이사를 몇 번 한 적이 있었기에 부동산을 돌아다니는 건 이미 익숙했다.

굳이 표류랑 이초희랑 만난 것도 실제로 도움 받기보다는 겸사겸사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를 풀기 위함이 더 컸다.
집을 구한 뒤 우리는 가볍게 술을 걸치며 근황을 나누었는데, 표류는 드디어 첫 상업영화를 찍는다 했다.
이초희는 최근 영화를 넘어 드라마 쪽으로 발을 넓혀보고 있었는데 좋은 일거리가 들어왔다고 했다.

서로 한동안 바빠서 얼굴도 잘 못 보게 되겠지만, 그래도 바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 아니겠는가.


우리는 표류의 입봉과 이초희의 드라마 쪽 데뷔를 축하하며 술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나 역시 꽤나 바쁜 시간을 보냈다.

실은 몇 주 전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데, 내 데뷔작인 영화 <운명의 표현>이 몇 달 전부터 천천히 오피스박스를


역주행하더니 몇 주 전 1 위를 탈환한 것이었다. 영화가 입소문이 중요한 매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내
눈으로 이걸 보게 되니 참 신기했다.

덕분에 영화가 부국제에서 상을 타던 때보다 더 많은 곳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나는 영화 <운명의 표현> 관련 인터뷰, GV 등에 참여하며 스케줄을 소화했다. 그리고 동시에 영화 <해수>의


제작발표회에 참석하기도 하는 등 여러 행사를 바쁘게 치렀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겨우 한숨 돌릴 시간이 났다.

이제는 실장님이 된 윤성광이 웃으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고운 씨. 그러면 이제 좀 쉬다가 ‘왕국’에서 올릴 무대에 참여하는 일만 남았나요?”

“아, 아뇨. 그건 올해 하반기쯤에나 될 것 같아서 그 사이에 작품 하나를 더 들어가려고요.”

보통은 작품 하나 끝나면 조금 쉬고 다음 작품에 들어가지만, 나는 굳이 쉬는 대신 곧바로 차기작에 들어가고


싶었다.

쉬는 건 지난 7 년 동안 충분히 쉬었다. 내게 필요한 건 휴식이 아니라 연기 열정을 불사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윤성광은 신인이 흔히 보이는 태도라 생각했는지, 휴식을 취하라고 말리는 대신 내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그래요. 안 그래도 그럴 것 같아서 그 동안 고운 씨 앞으로 시나리오 몇 개 받아봤어요. 한 번 구경할래요?”

“네!”

내 안색은 확 밝아졌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는 나와 합이 잘 맞는 편이었다.

나는 그가 건네 준 시나리오를 짧게 훑어봤다. 영화도 있었고 드라마도 있었다.

다만 가용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영화는 주연급이 많았지만 드라마는 조연급이 많았다.

윤성광은 옆에서 의견을 내놓았다.

“배역의 크기를 생각하면 영화가 좋긴 하지만, 드라마도 괜찮을 거예요. 조연이라고 꼭 나쁜 건 아니니까요.
드라마는 영화랑은 또 다르니, 새로운 경험도 될 테고.”

나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면 저는···.”

내가 막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꺼내들려 할 때였다.

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시나리오 더미의 가장 맨 아래쪽. 다른 것에 가려져 있어서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적힌 감독 이름을 보는 순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나는 그것을 꺼냈다.
윤성광은 내가 꺼낸 시나리오를 보더니 ‘아차’한 표정을 지었다.

“그 영화가 거기 섞여 들어갔네요. 미안해요, 고운 씨. 이건 고운 씨 앞으로 온 건 아니고, 우리 소속사에


들어온 거예요. 단역에 가까운 조연이기도 하고, 배역도 오디션으로 뽑는 거거든요.”

말하자면, 내가 굳이 선택할 필요는 없단 것이었다.

오디션을 보지 않고도 캐스팅 확정 될 수 있는 것이 여러 개 널려 있는데, 굳이 또 오디션을 봐야만 하는 배역에


도전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마음을 정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저 이걸로 해도 괜찮을까요?”

그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걸로요? 음, 영화 자체는 괜찮지만··· 그래도 비슷한 시나리오로 주연급인 게 따로 있는데요.”

“아뇨, 이걸로 하고 싶어요.”

“왜요?”

나는 씩 웃었다.

“이 영화 찍는 감독님이 마음에 들어서요.”

그래, 그 시나리오 앞에는 그 영화를 맡은 감독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건 연출]
바로 내 죽마고우의 이름이.

아메리카노와 카페모카
34.

김건이 이번에 찍는 영화는 학교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장르로, 두 소년의 우정을 다룬 이야기였다.

간단히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전학 온 주인공이 왕따를 당하는 학생을 도와주려다가 같이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둘은 힘을 합쳐 함께 그 일진 무리를 처치한다.

그리고 김건이 오디션으로 뽑고자 하는 배역은 바로 그 일진 무리의 우두머리 롤이었다.

배역 이름은 ‘태웅’이었는데, 주인공들에 의해 몰락하고 나서 훼까닥 돈다. 그는 약을 한 채 주인공을 찾아와


행패를 부리다 마지막으로 정의의 철퇴를 받고 사라진다.

캐릭터가 강렬해서 인상적이란 느낌을 받았지만, 롤 자체는 조연이었고 호감형 캐릭터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럴까. 기태성도 그렇고 윤성광도 그렇고, 내가 굳이 그 시나리오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약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해수’랑 이미지가 정반대니까. 해수는 순수한 이미지가 강하잖아. 대중들이 그런 이미지로 고운이
널 기억하고 있을 텐데 바로 다음 차기작에서 일진 역을 하면 좀··· 그렇지 않을까?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약을 빠는 캐릭터라니······.”

기태성이 자기는 별로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윤성광도 비슷한 이유로 우려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걸 하고 싶었다.

친구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마음도 물론 큰 이유였지만,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해요. 제가 차기작에서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저를 여러
스펙트럼의 연기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라고 생각할 거예요.”

특정 이미지는 배우를 대중에게 인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 그러나 그 이미지가 너무 고착될 경우
비슷비슷한 시나리오만 들어오게 되면서 배우는 계속 한정적인 연기를 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강렬한 연기는 연기력을 증명하기에도 좋고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영화 <해수>로 나를 처음 접하게 될 것이다. <운명의 표현>도 많은 사랑을 받긴 했지만


아주 대중적인 영화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해수>는 달랐다. 유명한 감독의 작품이니까 개봉만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볼 것이다. 잘하면 천만까지도 노려볼 수 있겠지.

그러면 대중들의 눈에 나는 감독을 잘 만나 한 순간에 뜬 신인으로 보일 것이다. 크게 틀린 말도 아니고.

내 연기를 좋게 봐주는 분들도 있겠지만, 아닌 사람들도 있을 분명 있을 것이다. 내가 유명한 감독님께 발탁돼


주인공을 덜컥 맡을 정도로 연기력이 좋은가? 그런 의심을 할 사람도 분명 생길 것이란 소리였다.

그러니 다음 차기작으론 연기력이 많이 요구되는 강렬한 캐릭터를 하고 싶었다.

물론 꼭 악역만이 연기력을 증명할 수 있는 캐릭터인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대중들은 그렇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니까.

기태성과 윤성광은 내 말에 일단 납득은 했다. 거기에 나는 쐐기를 박았다.

“뭐, 이렇게 말했지만 김건 감독님이 저를 안 뽑으실 수도 있잖아요. 우선 오디션만 볼게요. 그리고 캐스팅이 안
되면 다른 작품 찾죠, 뭐.”

해보고 안 되면 말겠다, 라는 투로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기태성과 윤성광은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도 곧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연기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마스크가 얼마나 배역에 어울리는지도 중요하니까. 일진 역에 고운이
네가 잘 어울리는 아닌지는, 그 감독이 알아서 판단하겠지.”

뉘앙스가 어째 묘했다. 그래, 어차피 안 될 거 한 번 해보기나 해 봐라. 이런 말투인데.

그리고 나는 주변에서 이런 반응이 돌아오면 기가 죽기는커녕 더 승부욕이 불타오르는 편이었다. 연기에 한해서는
말이다.

‘이거, 꼭 내가 따고 싶어지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며칠 뒤 충무로의 어느 제작사.

김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고운? 이번에 유명한 감독님 작품 주연으로 뽑힌 그 신인?”

“네. 그렇다고 하네요.”

조연출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건이 다시 한 번 되물었다.

“그 친구가 우리 영화에 참여하고 싶다고? 그것도 ‘태웅’ 역으로?”

“오디션을 보겠다고 지원을 해왔으니, 아마 그렇겠죠.”

김건은 약간 얼빠진 듯 눈을 끔뻑끔뻑하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의외네. 태웅이 그렇게 비중 있는 캐릭터는 아닌데. 그 친구, 이번에 뜬 라이징 스타 아닌가?”

“배역이 마음에 들었나 보죠. 아니면 잘 될 작품이라고 생각했거나.”

조연출의 무덤덤한 대꾸에 김건이 칭찬이라도 받은 것처럼 쑥스럽게 손을 저었다.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큼큼, 물론 내가 시나리오를 잘 쓰긴 했지만···.”

“주인공이 ‘이성한’이잖아요. 한류 스타 이성한. 솔직히 안 잘 되기가 더 어렵죠.”

“······.”

김건이 조연출을 지그시 노려봤다. 조연출은 그러거나 말거나 심드렁히 할 일을 처리하고 있었지만.

“넌 가만 보면 꼭 누가 나 엿 먹이려고 보낸 스파이 같단 말이지.”

“무슨 소리세요. 감독님이 절 직접 뽑았으면서.”

“그래, 일 잘해서 뽑았지. 설마 정말 일만 잘할 줄은 몰랐지만.”

“칭찬 감사합니다.”

“너는 진짜 한 마디도 안 진다.”

“져 드려요?”

“됐거든!”

김건은 입 속으로만 잔뜩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팩 돌렸다.

그는 의자에 기댔다. 그리고 아까 전 받은 백고운의 프로필을 팔랑이며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프로필에 적힌 필모그래피는 두 개 뿐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표현>은 안 봤고, <해수>는 개봉 전이었다.

말하자면 김건은 백고운의 연기를 아직 직접적으로 본 적은 없었다. 영화 관계자들에게서 연기 잘한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백고운의 오디션 지원은 좀 의외이긴 했지만, 자기가 먼저 하고 싶어서 찾아왔다는데 딱히 말릴 이유도 없었다.

김건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연기를 그렇게 잘한다는데, 구경이나 한 번 해보겠네.’

오디션 당일.

김건은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백고운을 발견했다. 배우 여럿이 대기하고 있는 곳에 그가 담담히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김건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때,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불쑥 들렸다.

“생각보다 잘생겼네요.”

“으악!”

김건은 깜짝 놀라 뒤를 훽 돌아봤다. 김건 뒤에 있던 여자는 조연출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김건이 소리 죽여 소리쳤다.

“깜짝 놀랐잖아. 소리 좀 내고 다녀!”

“감독님이 뭘 그렇게 은밀히 보시나 궁금해서 그랬죠.”


김건은 그제야 제가 몸을 숨긴 채 고개만 쭉 빼고 대기실 안을 훔쳐보고 있는 모양새란 걸 깨달았다. 그가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런 거 아냐. 그냥 궁금해서 그랬지.”

그리고 김건은 아까 조연출이 했던 말이 떠올라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잘생겼다기보다는 좀···.”

김건은 다시 백고운을 쳐다봤고, 이번엔 조연출도 옆에서 고개를 빼고 같이 쳐다봤다. 둘은 그렇게 몸을 숨긴


자세로 두런두런 대화했다.

“잘생겼다기보다는 좀 곱상한 얼굴 아니야?”

“그게 잘생긴 거죠.”

“잘생긴 건 좀 더 선도 굵고 눈썹도 뚜렷한, 그런 얼굴이잖아.”

“그건 남자들 기준이고요. 여자들은 저런 꽃미남 상을 더 좋아해요.”

“······그래?”

김건은 입술을 비죽였다.

“뭐, 그렇다 치고. 근데 배역에는 딱히 안 어울릴 것 같은데. ‘태웅’은 양아치인데, 얼굴이 저래 순해서
어울릴지 모르겠네.”

조연출이 이번엔 드물게도 김건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게요.”

둘은 잠시 그 상태로 뜻 없이 백고운을 바라봤다. 그 동안 둘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연출은 ‘연기를 하면 또 분위기가 바뀌려나’라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김건은······.

김건이 불쑥 물었다.

“근데 누굴 좀 닮은 것 같지 않아?”

“누구요?”

“음··· 그걸 모르겠어. 근데 분위기가 상당히 낯익단 말이지. 어디서 한 번 본 것도 같고···.”

“실제로 예전에 만난 적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건 아닐 텐데······.”

백고운의 정체가 자신의 친구 김철수란 걸 꿈에도 알 리 없는 김건은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그때 조연출이 손목의 시계를 보곤 김건을 일깨웠다.

“감독님, 이제는 들어가야 하는데요.”

“어? 아, 그래, 그래야지.”

김건은 그제야 정신 차리고 몸을 바로 했다. 백고운이 누굴 닮은 것 같든, 역할에 안 어울리는 것 같든, 어차피
지금 당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둘은 오디션 장 안으로 들어갔고, 오디션을 시작했다.

김건은 지원자들의 연기를 심사했다. 지원자들은 한 명씩 들어와 지정연기와 자유연기를 차례로 펼쳤다.

한 지원자 당 대충 십 분씩 걸리다보니, 몇 명 안 본 것 같은데 벌써 2 시간이나 흘렀다.

김건은 찌뿌둥한 목을 돌리면서 조연출에게 물었다.


“얼마나 남았지?”

“딱 반 남았습니다.”

“그러면 한 타임 쉬고 가자.”

“네. 그러면 이십 분 쉬고 다시 2 차로 오디션 본다고 공지할게요.”

“어, 땡큐.”

그렇게 막간 타임이 주어졌다.

김건은 바깥 공기를 쐬기 위해서 건물을 내려왔다. 그런데 기지개를 쭉 피며 하품을 쩍― 하는데, 건물 바로


앞에 커피숍이 눈에 띄었다.

김건은 내친 김에 발걸음을 옮겨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라도 좀 마시면 좀 머리가 깰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거기서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백고운이었다.

그리고 백고운 역시 김건을 알아보았다. 그가 반갑게 물었다.

“커피 사러 왔··· 아니, 오셨어요?”

“아, 네. 맞아요.”

“말 편하게 놓아주세요, 감독님. 제가 한참 어리잖아요.”

백고운이 친근하게 말했다.

“어? 아, 그래.”

김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금은 얼떨떨했다. 모범생 같이 생겨선 낯을 꽤 가릴 것 같았는데, 의외로 사교성이
좋다.
백고운이 계산대에서 주문을 하고 있었기에 김건은 그의 뒤에 서서 잠깐 기다렸다. 백고운이 주문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에 아이스 카페 모카 하나요. 카페 모카에는 샷 추가에 휘핑 많이 올려주세요.”

김건은 그의 주문을 들으면서 혼자 생각했다.

‘매니저 것도 같이 사는 건가? 그나저나 나랑 입맛 취향이 똑같네.’

그런데 백고운이 나온 음료를 옆에서 받고, 김건이 뒤이어 주문하려 할 때였다.

“감독님, 여기요.”

“······응?”

백고운이 카페 모카를 김건에게 내밀고 있었다. 김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나 먹으라고?”

“네. 감독님 이렇게 드시지 않으세요? 당이랑 카페인 동시에 충전해야 한다고 늘 카페 모카에 샷 추가해서
드시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닌가요?”

“어, 맞긴 한데···.”

김건은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백고운이 자신의 취향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둘째 치고, 왜 이걸 자신에게 주는
거지?

“저기··· 이거 나 왜 주는 건데? 혹시 배역 따내려고?”

“네? 아뇨, 설마요.”

백고운이 무슨 그런 농담을 던지냐는 듯 가볍게 웃었다. 김건도 ‘역시 그렇지?’하는 투로 따라 웃었다.


김건은 백고운의 대답으로 이런 걸 예상했다. 쉬는 시간이 짧으니까 제 거 사는 김에 같이 샀어요, 뭐 이런 말
같은 거?

근데 백고운의 다음 말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냥 감독님이랑 친해지고 싶어서요. 제가 감독님을 좋아하거든요.”

“······어?”

그리고 그 말은 김건을 혼돈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이게··· 이게 무슨 말이지? 아니, 그냥 순수한 뜻인가?

배우로서 감독과 친해지고 싶다는 건 이상하게 들릴 일은 아니었다. 감독에게 잘 보여 두면 작품에 출연할 기회가
더 많아지니까.

좋아한다는 말도 그냥 감독으로 존경하고 좋아한다, 이런 뜻이리라.

근데 그들은 완전히 초면이지 않은가. 좀 은근하게 돌려 말하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건 보통 아니지 않나?

낯간지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게 요즘 애들 특징인가? 자신이 너무 예민한 건가? 보통은 이런


생각까지는 잘 안하나?

김건은 어버버하다가 결국 떠듬떠듬 내뱉었다.

“저기, 혹시 모를까봐 말해두는데, 나 유부남이거든. 그런 쪽엔 전혀 관심도 없고.”

백고운이 ‘응?’했다가, 곧 무슨 말인지 알아챈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감독님이랑 그런 쪽에는 관심 없는데요.”

그렇게 말하는 백고운의 얼굴이 약간 똥 씹은 것 같았다.

앗.

순식간에 도리어 머쓱해진 건 김건이었다. 김건은 속으로만 제 입을 팍팍 때리며 ‘아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응, 알아, 알아. 농담 던진 거야.”

어색한 공기를 수습하기 위해 김건이 재빨리 말을 돌렸다.

“요즘 친구들은 벌써 커피를 잘 마시나 봐. 나는 아직도 그냥 아메리카노는 써서 잘 못 먹겠던데.”

“아, 네. 잠 좀 깨려고요.”

“피곤해 보이긴 하네. 어제 잠 못 잤어?”

“네, 한숨도 못 잤어요.”

“오디션 때문에 긴장해서?”

그런데 이번에 백고운이 또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뇨, 연기하려고요.”

“응?”

“태웅 캐릭터가 마약 하고 훼까닥 하는 성격이잖아요. 좀 미친 것 같아 보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부러 잠을 안


잤어요. 사실 커피의 카페인도 각성 효과를 주잖아요. 근데 이 커피가 잠 안 잔 상태에서 받으면 효과가 바로
오거든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리고 김건이 저를 좀 뜨악한 눈으로 보고 있든 말든, 백고운은 그 곱상하고 단정한 얼굴로 차분하게 미친
소리를 내뱉었다.

“이주 전에 실험해보니까 5 일 정도는 밤을 새워야 정신이 오락가락 하더라고요. 젊어서 그런가. 예전엔 3 일이면
됐는데. 아무튼 그래서 5 일 동안 밤새우고 오늘 여기 왔어요.”

그러면서 빙긋 웃는 것이었다.

김건은 생각했다.

······이거 약간 또라이인가?

약 빤 연기
35.

“다음 ‘백고운’ 배우님. 들어오세요.”

스태프의 지시에 백고운이 오디션 장 안으로 들어왔다.

백고운은 대중적인 인지도가 아주 높은 배우는 아니었지만,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슈퍼 루키라고 암암리에


소문이 뜨거운 배우 중 하나였다.

그래서일까. 오디션 장 한쪽에는 관계자들― 즉, 김건과 조연출, 그리고 제작사 쪽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대부분은 백고운의 등장에 흥미를 보였다.

단, 김건만 빼고 말이다.

바로 30 분 전에 김건은 백고운을 커피숍에서 우연히 마주쳤었다. 그리고 김건은 백고운에 대한 인상을 정정했다.
그는 연기를 잘 할지는 몰라도··· 조금 이상한 놈 같았다.
조연출이 지시했다.

“바로 지정 연기 보여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백고운은 5 일 동안 밤새우고 카페인을 들이켠 것 치곤 제법 멀쩡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연기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지정 연기는 바로 ‘태웅’이 자신의 심정을 길게 고백하는 부분이었다.

주인공들을 괴롭힌 이유를 독백으로 주절주절 설명하는 파트였는데, 대부분은 태웅의 자기변명과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말들이었다.

사실 이 대사는 직접적인 씬으로 들어가지 않고 나래이션으로 처리할 예정이었다. 장면화 할 부분이 없는, 순수한
대사들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인 행동 묘사가 없는 순수 독백일수록 연기하기가 어렵다는 건 누구나 아는 당연한 상식이다.

그런데도 굳이 이 부분을 오디션에서 보겠다고 지정한 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어려운 연기일수록 진짜 연기력을 보기 좋아서였고, 둘째는 이 독백 대사가 꽤나 긴데 그에 반해 내용은


두서가 없는 편이라 암기력을 테스트하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백고운이 차분히 숨을 고른 뒤, 갑자기 한 순간에 눈빛을 확 바꾸며 연기를 시작했다.

“쿡, 이봐.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그리고 백고운이 첫마디를 뱉자마자 김건을 제외한 모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여태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음산한 말투로 대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백고운은 킥킥 웃으면서 대사를 뱉고 있었다.

백고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웃음을 푸하하 터트리더니,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아마도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이 생각했을 것이다.

‘미쳤나?’

하지만 그건 아니란 건 곧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백고운이 이어서 내뱉는 대사는 대본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으니까.

“내가 걔네를 왜 괴롭혔느냐고? 그야 당연하지. 걔네들이 맞을 만 했으니까! 잘못? 그런 건 없어. 그냥 걔네가


약했으니까. 약한 건 죄야. 이런 세상에서 약한 건, 씨발, 존나 큰 잘못이지!”

백고운은 그 말을 화를 내며 뱉는 대신, 잔뜩 격양 돼선 찢어지는 하이 톤으로 말했다. 그리곤 도저히 제 의지로


참을 수 없다는 듯 히죽거리면서 실실 웃음을 흘렸다.

간간이 손을 비비적거리면서 발까지 굴리는 게, 에너지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과잉되어 있었다.

꼭 미친 것처럼, 혹은 약을 한 것처럼 말이다.

그제야 모두 백고운이 어떤 방향으로 연기 포인트를 잡았는지 슬슬 눈치 채기 시작했다. 백고운은 ‘태웅’이


약을 한다는 설정이니까 그런 모습으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미 백고운이 제정신이 아니란 걸 알고 있는 김건은 아까 전부터 백고운이 보여주는 연기의 의도가 무엇인지
진작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런데 그때. 백고운이 또 한 번 모두의 예상을 배반했다.


백고운은 미친 것처럼 까르르거리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말과 행동을 모두 우뚝 멈추었다. 그 잠깐의 텀이 있은
후,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눈에는 초점이 사라져 있었고, 얼굴 근육은 축 가라앉아 있었다. 분장을 따로 한 것도 아닌데, 단순히
표정연기만으로 인상이 음울하게 확 바뀌었다.

그가 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면서 손가락을 달달달 떨었다. 그리곤 불안하고 초조하게 서성거리며 대사를 계속
내뱉었다.

“걔네가 먼저 날, 씨발, 킁, 건드렸다고. 날 좆같이 꼬라 보잖아. 내가 쓰레기, 킁, 오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보잖아, 씹. 지가 뭔데?”

대사치는 와중에 백고운은 연신 코를 훌쩍였는데, 그것 역시 약을 한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백고운이 약에 중독된 사람의 모습을 훌륭하게 연기해내던 그때였다.

그가 또 한 번 연기의 방향을 틀었다. 그가 갑자기 벽을 쾅 치며 고성을 터트렸다.

“악!!”

그리곤 눈빛이 형형해져선 제작진이 있는 쪽을 훽 돌아보았다.

‘······!’

김건을 비롯해 모두가 그게 연기인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안 그래? 안 그러냐고요? 어?!”

백고운은 공격성을 표출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금단증상이 확 왔는지, 그는 숨을 턱 멈추곤 허겁지겁 제 몸을 뒤졌다. 마임으로 주머니에서 약 봉지를
꺼내는 시늉을 하더니 그것을 제 코로 갖다 대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이미 수전증 온 것처럼 발발 떨렸고, 손은 한순간에 가상의 봉지를 놓쳤다.

그리고 백고운, 아니 ‘태웅’은, 어리석게도 고개를 숙여 떨어지는 가루들을 코로 확 들이켰다.

그가 쇼크가 온 것처럼 눈을 뒤집어 까더니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는 경련을 히끅히끅 하더니 일순간 숨을
멈추고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

오디션 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제작진 일동 모두는 백고운의 연기에 놀란 상태였다.

‘뭐 저런 게 다 있지?’

그야말로 정신 나간 에너지였다. 인간이 보통 뿜어낼 수 에너지가 대충 100 프로라고 가정한다면, 방금 백고운이


뿜어낸 에너지는 거의 120 프로, 아니 200 프로였다.

백고운의 연기는 강렬한 것도 강렬한 것이었지만, 다채롭기까지 했다.

보통 지원자들은 한 가지 성격을 잡고 ‘태웅’을 연기해보였는데, 백고운은 마약한 인간의 네 가지 모습을 아예


한 큐에 단계적으로 보여주었다.

첫째로는 약을 처음 빨아본 사람의 하이 high 해진 상태, 둘째로는 중독자의 피폐하고도 불안해하는 상태,
셋째로는 주변인에게 공격성을 표출하는 상태, 넷째로는 쇼크사까지.

독백 연기는 보통 지루하기 쉬운데, 거기다가 길기까지 하면 어지간하게 잘 살리지 않으면 관객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긴 독백이란 것 자체가 커다란 핸디캡인 셈이다.
그러나 백고운은 오히려 길다는 바로 그 점을 이용해 한 중독자의 변화를 시간 흐름대로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니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편.

김건은 조금 다른 결로 경악에 차 있었다.

‘말도 안 돼.’

백고운의 연기를 보면서 김건은 팔에 오도도 소름이 돋아 있었는데, 그 감각이 어쩐지 낯익었다.

그래, 김건은 이런 감정을 아주 오래 전에 딱 한 번 똑같이 느껴본 적이 있었다.

자신의 친구이자, 10 년 전 방송계와 영화계를 휩쓸었던 연기 천재. 김철수.

김건은 김철수를 대학에서 알게 되었는데, <왕자와 거지>라는 연극을 함께 하면서 처음으로 그의 천재성을 실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백고운의 연기를 본 지금, 김건은 그때와 똑같은 경악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대기실에서부터 누굴 좀 닮았다 했더니, 그게 자신의 친구 김철수였을 줄이야.

특히 저렇게 몸을 안 사리고 연기를 하는 연기 스타일이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제 친구도 거지 연기를 한답시고 진짜로 이 주 가량 굶었었는데, 저 백고운이란 친구도 아까 그러지 않았는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연기하기 위해 5 일을 꼬박 한숨도 안 잤다고.

모두가 제각기 다른 이유로 섣불리 말을 꺼내고 있지 못할 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조연출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혹시 진짜 약을 해본 적이 있는 건 아니죠? 그건 좀 곤란한데요.”

“하하, 아닙니다.”

“오기 전에 술 마신 것도 아니고요.”

“네, 그것도 아닙니다. 지극히 제정신에 멀쩡합니다.”

“그렇군요.”

조연출은 한 텀 쉬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었어요. 연기가 진짜로 리얼해서.”

그러나 김건은 조연출의 성격을 알았다. 그녀는 쉽게 농담을 하는 성격이 아니다.

조연출은 아마 진짜로 백고운이 약을 하고 오지 않았는지 진지하게 물었을 테고,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백고운의
연기가 실감났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김건은 어쩐지 불퉁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건 뭐랄까. 이런 느낌이었다.

자신의 친구가 제일 연기를 잘한다고 은근히 자부심과 자랑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을 정면으로 도전받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태클 걸 듯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제정신은 아니지 않나요?”

모두가 김건을 돌아봤다.

“아까 쉬는 시간에 잠깐 요 앞 커피숍에서 만났죠, 우리? 그때 본인 입으로 그러지 않나요? 5 일 동안 잠을 아예


안 잤다고. 그리고 그 상태에서 커피 마셨죠, 분명. 카페인도 일종의 각성제에요. 특히 몸 상태가 그 따위일
때는 특히 더 잘 돌게 되죠.”

어째 말하다보니 점점 시비조가 되는 것 같았는데, 삐뚜름하게 말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도 일종의 도핑 아닌가? 촬영 들어가서도 매번 그럴 건가요? 밤새우고 커피 마시고. 그렇게 제정신


아니어야만 하는 상태에서 연기 할 수 있는 거면 제대로 된 연기 실력이라 볼 수 없지 않나?”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김건과 백고운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조금 혼란스러워했다.

김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마약과 커피는 아무리 같은 각성


효과를 준다고 해도 좀 다르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건 저마다의 판단에 따라 조금씩 의견이 갈릴
미묘한 문제였다.

오디션 장이 긴장과 침묵으로 신경이 팽팽해졌을 때였다.

정면으로 공격받은 백고운은 의외로 별 동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뒷머리를 순박하게 긁적였다.

그리고 꺼내는 말이···.

“그, 죄송합니다. 사실 그건 거짓말이었습니다.”


······응? 뭐라고?

“잠 깨려고 커피를 마신 건 사실입니다. 근데 그건 점심 먹고 오래 기다리느라 좀 나른해져서 그런 거였고,


어제는 잠을 충분히 잤습니다. 오디션 보러 오는데 최상의 컨디션으로 와야 하니까요.”

그리고는 깜빡했단 듯 덧붙였다.

“아. 3 일 정도 밤새운 적이 있긴 한데, 그건 진짜로 이 주 전에 연기 연습을 한다고 실험해봤을 때가


전부였습니다. 근데 그러다가 연기하기 전에 심근경색으로 죽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맛 가는 감각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어서 연기하는 데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른 제작진들은 백고운의 엉뚱한 행적과 그걸 천연덕스럽게 풀어놓는 뻔뻔함에 실소를 터트렸다.

홀로 당황한 건 김건이었다. 그가 더듬거렸다.

“그, 그러면 커피숍에서는 왜 거짓말 한 거죠?”

그리고 백고운의 이번 대답은 정말 상상 밖이었다.

“그렇게 말해두면 감독님이 저를 심사할 때 훨씬 몰입해서 봐주실 것 같았거든요. 아무래도 제 상태가 이상하다는
인식을 하고 보시면 더 리얼하게 느끼실 것 같아서요.”

김건은 입을 떡 벌렸다.

“······!!!”

말하자면 백고운의 연기는 이미 커피숍에서 김건을 만난 순간부터 시작되었단 뜻이었다.


그럼 그때 밤을 새웠다느니 커피가 돈다느니 뭐니 했던 것도 다 일부러 계산하고 던진 것이란 소리다. 백고운이
또라이라서가 아니라.

미친!

김건은 입을 벙긋거렸지만 나오는 말은 ‘허’, ‘하’와 같은 헛숨뿐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기가 막혔고, 배신감도 들었다.

그러나 연기자에게 ‘속았다’라는 감정이 드는 순간부터, 그건 연기자의 승리였다. 왜냐면 연기자는 곧


그것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직업이었으니까.

사기꾼에게 사기 잘 치는 놈아! 라고 해봤자 칭찬인 것과 다름없다. 연기자가 사기꾼이란 소리는 아니었지만.

김건은 결국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잘 봤습니다. 수고했어요.”

그리고 모든 지원자들의 오디션이 끝난 후.

제작사 관계자들까지 떠나 오디션 장에 김건과 조연출 둘만이 남았을 때였다. 김건이 책상에 왈칵 엎어졌다.

“아악, 분해!”

조연출이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다가 한 마디 했다.

“뭐하세요, 감독님? 누구를 캐스팅할지는 다들 만장일치로 결정했잖아요. 얼른 연락 하세요.”


김건이 짐짓 찡찡거렸다.

“그거 무를 순 없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아니, 내 맘대로 캐스팅도 못하면 대체 왜 내가 감독인 거야? 응? 감독이 이렇게까지 권한이 없어도 되는
거야?”

“무슨 소리세요. 막상 다른 사람들이 다른 사람 뽑자고 하면 감독님이 먼저 백고운 씨 뽑자고 밀어붙일 거면서.


그냥 감독님이 인정하기 싫어서 그러시는 거 다 알아요.”

그래, 그건 또 맞다. 으악, 심술 나! 근데 또 연기는 너무 잘해! 그래서 더 싫어!

그러고 있으니 자신이 옹졸해진 느낌이라 김건은 괜히 누구한테랄 것 없이 변명처럼 웅얼거렸다.

“아니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짓말은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왜 사람을 속이냐고, 어? 사람을 속이길 왜
속여.”

“왜요. 저는 재치 있다고 느꼈는데요. 실제로 제정신 아닌 상태로 와서 연기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김건은 씨근덕거렸다. 그것 역시 또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여기에 내 편은 하나도 없어······.”

김건은 우울하게 중얼거리다가 결국 ‘쳇’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전투적으로 핸드폰을 두드려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 쯤.

감독 김건이 찍는 영화 <친구들>의 대본 리딩 현장.


백고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태웅 역의 백고운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건은 조금 뚱하니 박수를 짝짝짝 쳤다.

한류스타 이성한
36.

영화 <친구들>의 제작 일정은 꽤나 촉박한 편이었다.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바로 한류스타 ‘이성한’이었는데, 그는 군대를 갔다가 바로 며칠 전쯤 전역했다.

즉, 이 작품은 그가 군대 다녀온 후의 첫 복귀작인 셈이었다.

2 년 동안 기다린 팬들은 그의 작품을 목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테고, 제작사나 투자자 쪽에서도 이것을 마케팅에
이용하길 원했다.

보통, 배우가 전역한 직후는 그가 어떤 작품으로 복귀할지 대중의 관심이 가장 높을 때였다.

그러니 그 관심이 식기 전에 발 빠르게 작품을 내놓으려면 당연히 얼른 작품을 찍어야 했다.

그게 바로 내가 김건이 차기작을 들어간다는 얘기를 1 년 전(그러니까 내가 백고운이 되기 직전)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제작 일정이 이제야 잡힌 이유였다.

내가 마지막 캐스팅 주자였는지, 오디션 결과를 통보받자마자 리딩이 바로 다음 주에 잡혔다.


그리하여 영화 <친구들>의 첫 리딩날.

“안녕하세요, 배우 이성한입니다. 이번에 주인공 ‘성한’ 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고, 나 역시 내 차례에 가볍게 고개를 꾸벅여 인사했다.

“태웅 역의 백고운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리딩은 시작되었고, 순조롭게 이어졌다.

저번의 <해수> 때와 달리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이성한이었다.

“용서할 수 없어, 어떻게 사람이 사람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성한이 얼굴을 우그러뜨리고 분노에 차서 대사를 뱉었다.

‘연기 잘하네. 그나저나 스물셋이라고 했나? 꽤나 일찍 군대를 다녀왔네.’

그는 2 년 전쯤 <꽃보다 소년>라는 하이틴 드라마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 드라마가 외국에도 수출 되면서


한류의 붐을 일으켰는데, 그 직후 이성한은 차기작을 선택하는 대신 의외로 군대 행을 택했다.

그 당시 이성한은 21 살로 배우치고는 매우 젊은 나이였고, 막 인기를 얻은 상태라 모든 대중들이 그의 군대 행을


의아해했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차라리 일찍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어차피 가야 할 거, 나중에 한창 배우


활동할 때 공백기를 보이는 것보다 그냥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다녀오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그래도 나라면 좀 나중에 갈 것 같은데. 다시 스크린에 복귀한 걸 보면, 연예계에 학을 떼고 군대를 간 건 아닌


것 같고······.’

나는 이성한이 리딩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런 시답잖은 생각들을 했다.

내가 맡은 ‘태웅’ 역은 캐릭터는 강하지만 분량은 별로 없는 조연이었기에, 초반부에는 내 대사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후반부의 클라이맥스에선 주인공인 이성한과 강하게 부딪히는 장면이 있었다. 태웅이 몰락한 후 홧김에
약을 하고 주인공을 찾아가 화를 내는 장면이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고성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좋냐, 흐··· 웃음이 나와? 남의 인생을, 흐흐, 이렇게 조져 놓고 웃음이, 어? 나오냐고?!”

“네 인생은 네가 망친 거지, 내가 망친 게 아니야.”

나는 미친 듯 웃었다가 화를 냈다가 하면서 대사를 내뱉었고, 이성한도 기죽지 않고 사납게 내 대사를 받아쳤다.

공기가 단번에 팽팽해졌다. 사람들이 ‘와···’하는 눈빛으로 숨죽이고 나와 이성한의 리딩 합을 지켜봤다.

그 클라이맥스 장면이 지난 뒤, 공기가 더워졌다. 이성한이 땀이 난 목덜미를 살짝 닦았고, 나 역시 칼칼한 목을


다듬었다.

김건이 우리의 연기에 조금 멍해진 듯 벙쪄 있다가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렸다. 김건이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큼큼, 두 배우님의 에너지가 대단하네요. 자, 모두 물 좀 마시고 이어 합시다.”

“네―.”

사람들이 생수통 뚜껑을 까고, 숨을 내돌리느라 잠시 부산스러워졌다.


그때 영화 내에서 ‘선생님’ 역을 맡은, 명품 조연 연기로 유명한 한 연로 배우가 감탄을 던졌다.

“이거, 다들 연기파 배우들이네. 성한이가 잘하는 건 원래 알고 있었는데, 고운 씨도 진짜 잘하네. 깜짝


놀랐어.”

“아, 감사합니다.”

나는 재빨리 감사를 표했다. 연로 배우가 허허 웃었다.

“하긴 유명한 감독님 작품도 찍었는데, 왜 아니겠어. 참, 그 영화는 언제 나온다고 했지? 올해 하반기였나?”

“아뇨, 조금 앞당겨져서 6 월 달 초에 개봉합니다.”

“그렇구나. 기대되네. 나중에 보러갈게.”

“네, 감사합니다.”

대화는 적절한 때에 끊겼다.

그건 쉬는 시간에 짧게 가진 스몰 토크였고, 연로 배우가 특별히 다른 사람이 무안해질 정도로 나를 칭찬한 것도


아니었기에 별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그 직후, 내가 시선을 돌려 이성한을 쳐다보았던 것에는 별 의미가 없는 동작이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이성한과 눈이 딱 마주쳤다. 이성한이 날 빤히 쳐다보고 있던 것이었다.

“······?”

이성한은 금방 고개를 돌려 자신의 대본을 쳐다보았다. 그가 말없이 대본을 팔랑팔랑 넘겼다.

뭐 말하려고 했던 거 아니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영화 <친구들>의 첫 촬영 날.

“안녕하세요.”

나는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성한에게 인사했다. 이성한이 대본에 고개를 파묻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날
봤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가 내게 짧게 인사 한 뒤 다시 대본을 쳐다봤다.

······어째 좀 리딩 때보다 좀 도도해진 것 같은 건 내 착각이려나?

이성한이 대본을 보고 있기에 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서먹한 채 있는 것도 별로라 그가


대본을 내려놓았을 때 나는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성한 씨는 이름이 참 좋네요.”

“네?”

“그게, 이름부터 성하잖아요. 성하다, 할 때 그 성하다.”

“······.”

“······재미없었나요?”

나는 죄송하다고 얼른 사과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이성한이 차갑게 대꾸했다.


“고운 씨는 촬영장이 장난인가 보죠?”

“···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내 농담이 재미없는 건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싸늘한 반응은


처음인데.

그때, 대기실에 스태프가 들어오면서 이성한에게 일렀다.

“성한 씨 이제 스탠바이 해야 해요.”

“네, 지금 가겠습니다.”

이성한이 일어나서 내게 가타부타 말없이 훌쩍 가버렸다.

홀로 남은 나는 눈을 끔뻑끔뻑하다가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딱히 진심으로 화가 나거나 기분 상한 건 아니었다.

내 진짜 나이가 벌써 마흔인데, 나보다 스무 살 가량 어린 친구가 까칠하게 굴어봐야 ‘음, 오늘 기분 안 좋나?’


정도의 기분만 드는 법이다.

그때 대기실 문이 한 번 더 열리고 내 매니저가 들어왔다. 이 분은 윤성광이 붙여준 내 로드매니저였다.

“여기 도시락.”

“아, 감사합니다.”

우리는 나란히 도시락을 까서 먹었다. 매니저가 물었다.


“아까 올 때 이성한 지나가던데. 둘은 잘 맞아?”

“음··· 아마도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매니저가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왜? 별로야?”

“아뇨, 그건 아니고.”

나는 떡갈비를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켰다. 그리고 말했다.

“그냥 개그 취향이 좀 다른 것 같아요.”

“······고운이 너 또 그거 했니?”

매니저가 날 떨떠름하게 바라봤다.

“그렇게 재미가 없나요?”

“음··· 아냐. 고운이 너만 즐거우면 됐지. 뭘.”

매니저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아무튼’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성한이 원래 아역 출신인 건 알지? 본격적으로 뜬 건 2 년 전이긴 하지만, 데뷔한 연차로만 따지면 벌써 10


년 가까이 되거든. 그래서 그런지 연기에 있어서 엄청 까다롭다고 하더라. 완벽주의자라고 해야 할까.
프라이드도 좀 있고. 성격이 안 좋은 것까지는 아닌데, 촬영 할 때는 조금 예민해지는 편이라고 이해해달라고
하네. 직장에 와서 사람 안 사귀고 진짜 일만 하는 스타일? 그렇게 보면 편할 거야. 고운이 너도 성한이랑 안
맞는다고 전전긍긍하지 말고 그냥 너 연기만 하고 가면 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

물론 나는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 나는 다른 쪽에 놀라는 중이었다.


“아니, 그런 얘기는 다 어디서 들었어요?”

“이성한 매니저한테 들었지. 오는 길에 잠깐 얘기 나눴거든.”

매니저가 별 것 아니란 듯 말했다.

몰랐는데 이 사람, 이리 보니 상당히 마당발이다.

하기야 저번에 처음 봤을 때도 대충 느끼긴 했다. 분명 내 전속 매니저라고 했는데, 소속사를 나오는데


연예인이고 직원이고 상관없이 다 그와 인사를 나누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걸 보고 어지간히 사교성이 좋은가보다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이 전부인 촬영장에 와서도 그 사교성이 가감 없이 발휘될 줄은 몰랐네.

그제야 나는 윤성광이 왜 이 분을 내 매니저로 붙여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연예인이 신인일수록 오히려 매니저는 경력직이 붙는 게 좋았다. 왜냐면 신인들은 방송국이나 촬영장에서
쭈뼛거리기 쉬웠고, 그만큼 매니저가 뒤에서 서포트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이 바닥은 일거리가 거의 인맥으로 오고간다. 그렇기 때문에 연예인의 생명은 매니저가 구해오는
일감에 달렸다는 말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니저가 사교성이 좋고 서글서글하면 그 가수나 배우들은 카메라에 얼굴
한 번 더 비출 기회를 많이 얻게 된다.

물론 이미 관계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나의 경우 크게 중요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매니저가 이렇게 뒤에서 날


서포트 해주면 좋은 건 사실이었다.

우리 매니저가 이성한 매니저에게 이성한에 관련된 얘기만 듣고 왔겠는가. 당연히 내 얘기도 했겠지. 애가 착하고
연기도 잘하고, 그러니까 대충 잘 부탁한다 뭐 이런 류의.

윤성광이 이 분을 내 매니저로 붙여놓은 건 어디 가서 기죽지 말라는 뜻이었고, 그만큼 윤성광이 세심히 소속


배우들을 잘 챙긴다는 뜻이었다.
‘역시 내가 소속사 하나는 잘 택했다니까.’

나는 만족했다.

마침 대기실 문이 한 번 더 열렸고, 스태프가 이번엔 내가 스탠바이 할 차례라고 일러주었다. 매니저가 나를


향해 파이팅을 외쳤다.

“고운이 잘 하고 와!”

“네, 형. 아, 저 간식들 형 드세요.”

나는 일어나면서 매니저가 입가심으로 사온 과자들을 가리켰다. 매니저가 ‘응?’했다.

“이건 네 몫으로 사온 건데? 내 건 따로 있어.”

“형 저 과자 좋아하잖아요. 저는 식단 조절하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기다리는 일이 쉬운가요, 뭐. 당 떨어지지


않게 잘 챙겨 드시고, 자리 비우셔도 저는 괜찮으니까 편할 때 산책도 하고 그러세요.”

별 말 안 한 것 같은데 매니저가 감동한 눈치로 코를 쓱 훔쳤다.

“짜식. 착하기는. 매니저 챙겨주는 배우는 너밖에 없을 거다. 그래, 고맙다. 너도 파이팅!”

“넵!”

우리는 코를 찡긋했다.

오늘은 영화 초반부를 찍는 날이라 내가 두드러지게 연기할 부분이 없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내 단독 컷을 다 딴 후, 이제 이성한과 합을 맞추는 부분이 왔다.


김건이 두리번거리며 누구랄 것 없이 물었다.

“성한이 어디 갔지?”

“아, 약간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제가 잠깐 차에서 눈 좀 붙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불러올게요.”

이성한 매니저가 김건에게 말했다. 그때, 내가 끼어들었다.

“아,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고 싶은데, 그러면 제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부를까요?”

주차장 쪽과 외부 화장실이 근처에 있어서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어차피 방향도 같은데 두 명 갈 것 없이 한


명만 갔다 와도 되니까.

김건과 이성한 매니저도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오면 되겠네.”

“그래줄래요? 고마워요. 성한이가 깊게 잠드는 편은 아니라 그냥 창문만 두드리면 알아서 깰 거예요.”

“네.”

그래서 나는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볼일을 보고 나오는 길에 이성한네 봉고차를 발견했다.

나는 다가가 짙게 썬팅 된 봉고차 창문을 툭툭 두드렸다.

잠시 기다렸다.

“······.”

그러나 오래 기다려도 안쪽은 조용할 뿐이었다.


뭐지? 이러면 깰 거라고 했는데. 안에 없나? 아니면 깊게 잠들었나?

다시 한 번 두드렸다. 그러나 여전히 조용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바짝 붙여 차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어렴풋한 인영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뭐야, 안에 있잖아.’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혹시나 해서 차 손잡이를 가볍게 당겨보았다.

그런데 진짜로 차 문이 ‘덜컹’하고 열렸다. 안 닫혀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차 문을 옆으로 조금 밀었다. 그리고 차 안쪽을 빼꼼 들여다보며 그를 불렀다.

“이성한 씨?”

차 좌석에 앉은 채 잠들어 있는 이성한이 제일 처음 보였다. 새어 들어온 빛 때문에 이성한이 눈을 와락 찡그리며


부스스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열린 차 문 밖으로 무언가 뚝 떨어져 바닥에 떼구르르 굴렀다.

“······?”

그건 언뜻 보기엔 감기약이나 두통약 같아 보였다. 나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 겉면에 붙어 있는 글자를 확인한 것과, 이성한이 화들짝 놀라 내 손에 쥔 것을 확 채간 것은


동시였다.
“이리 내!”

이성한이 그것을 재빨리 숨기고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그것을 알아봤는지 눈치 보는 표정이었다.

물론 나는 거기에 적힌 글자를 이미 읽은 후였다.

그건 수면 유도제였다.

문제는 그것이 꽤나 가벼웠단 것이고.

나는 이성한을 쳐다봤고, 이성한 역시 날 쳐다봤다.

“······.”

“······.”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거, 이름과 달리 성하지 않은 친구였군.

같이 밥이나 먹자
37.

이성한의 불면증이 시작된 건 2 년 전부터였다.

정확히는, 무명에 가까웠던 그가 <꽃보다 소년>으로 한 순간에 한류스타가 되면서부터였다.

자신은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아역 때부터 촬영장을 드나들었다고, 이 바닥 생리라면 이제


익숙하다고. 그렇게 스스로 여겼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역 배우와 성인 배우는 취급 자체가 달랐다.

아역 때는 감독님이며 다른 배우들이며 다들 예뻐해 주었고, 연기는 조금만 잘해도 과한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성인 배우는, 특히 인기를 얻은 후의 성인 배우가 되고 나서는 모든 것이 엄격해졌다.

―10 년 차라고? 그럼 연기는 잘하겠네. 그 정도 연차면 중견이나 다름없는데 당연히 잘해야지.

―한류스타 이성한이 주인공이면, 못해도 시청률 20 프로는 나와야 하지 않겠어?

비단 촬영장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인터넷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성한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좋은 말도 있었지만, 악플도 많았다.

―야, 근데 그 <꽃보다 소년>인지 뭔지, 그 드라마 존나 오글거리던데. 그런 연기라면 나도 하겠다. 이성한 걔,


솔직히 인기에 비해서 연기력은 거품이지. 걍 얼굴 좀 잘 생기고 작품 잘 만나서 뜬 거 아님?

이성한은 부담이 커졌다. 다음 작품은 더 잘 해야 할 것 같았고, 작품 역시 중박 이상은 쳐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럴수록 오히려 더더욱 다음 작품을 선택할 수가 없어졌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이성한은 깨달았다. 이 상태로는 연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이 쉴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하면서 제각기 나아가고 있는데,


자신만 아무 일 없이 놀면서 시간을 버린다니. 그건 거의 죄악감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성한이 선택한 건 차기작 대신 군대였다.

군대는 어차피 가야 하는 거니까. 자신은 노는 게 아니라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므로 어쨌거나 2 년 동안은
일하지 않고 정당하게 쉴 수 있다 여겼다.

처음에 그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모두들 울면서 군대를 간다지만, 이성한은 차라리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최악이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군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또래의 동료 배우들이 하나둘 씩 잘 되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러자
조급증이 들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나도 나가서 얼른 연기를 해야 하는데.

처음엔 도피할 수 있는 핑계가 돼주었던 군대는, 어느 순간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답답한 굴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조급증은 다시 또 강박이라는 형태로 이성한을 덮쳤다.

심지어 군대를 가느라 생긴 2 년의 공백만큼 더 잘해서 얼른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덧붙여지면서, 강박은
이전보다 훨씬 크고 거대해졌다.

그 생각 때문에 이성한은 군대에 있을 때 자신에게 들어온 영화 제의를 덜컥 수락했다. 전역만 하면 복귀작으로


바로 들어갈 작품이었다.

너무 성급하게 결정했다고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언론은 영화 <친구들>이 이성한의 복귀작이라고 기사를


뿌렸고, 사람들의 관심은 집중되었다.

2 년 전부터 계속 잠을 설치는 편이었는데, 전역일이 다가오면서부터는 불면증이 정말로 심각해졌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심각해졌을 즈음, 이성한은 수면제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수면 유도제에.
처음에는 한두 알만 먹어도 잠이 쏟아졌다. 좋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약발이 잘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내성이 생긴 건지, 기분 탓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효과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복용량을 늘렸다.

하루는 약을 비타민처럼 먹어대는 이성한을 보다 못해, 매니저가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어떠냐고 넌지시 물었었다.

그러나 이성한은 극구 거부했다. 정신과에 드나드는 모습을 파파라치에게 찍히기라도 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이성한은 이미 악플에 시달릴 만큼 시달렸고, 지금도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자신의 약점을 하나 더
대중에게 던져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래서 이성한은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는데······.

설마 이렇게 어이없고 허무하게 들킬 줄은 몰랐다.

그것도 백고운이란 이 배우에게 말이다!

막상 나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성한이 하도 내 눈치를 보기에 결국 나는 예의상 말을 건넸다.

“요즘 잠이 잘 안 오시나 봐요.”

“신경 꺼.”

곧바로 까칠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것 봐라.

아까 대기실에서 있을 때는 그래도 좀 귀엽게 까칠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까칠하기가 사포의 그것과 같네.
이게 원래 성격인가 보지?

어쨌거나 먼저 말을 놓은 건 이성한 쪽이기에 나도 은근슬쩍 말을 놓았다.

“수면 유도제는 일시적으로 먹는 약이거든. 불면증이 심한 거면 병원에 가 보지 그래?”

참고로 수면제는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지만 구매할 수 있지만, 수면 유도제는 의사의 처방 없이도 약국에서 구매
가능하다.

그러니 왜 이성한이 수면제 대신 수면 유도제를 택했는지는 이미 대충 짐작이 됐다. 정신과라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이성한이 곧바로 펄쩍 뛰었다.

“미쳤어? 기자한테 찍히면? 네가 책임지게?”

“안 찍히면 되잖아.”

“그게 가능할 것 같냐? 요즘 파파라치 얼마나 지독한데. 하다하다 집 앞에 밥 먹으러 가는 것까지 감시한다고.”

그런가?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러면 혼자 가지 말고 누구랑 같이 가든지. 주변 어른이나, 아니면 친구나. 들키면 그 사람이 가는 거고 너는


그냥 같이 가주는 거라고 하면 되잖아.”

“무슨, 그런 걸 해줄 사람이 어디 있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없지?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별 뜻 없이 물었다.

“왜, 너 친구 없어?”

그때, 정곡이라도 찔린 듯 이성한의 얼굴이 확 벌게졌다.

이성한은 아니라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과 다름없다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이성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으로만 딴 생각에 빠졌다.

흐음―.

며칠 뒤.

“아악, 왜 하필 걔야?!”

이성한은 집에서 대본을 들여다보며 대사 연습을 하고 있다가, 문득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하필 약을 먹고 있단 사실을 들킨 게 백고운이었을까.

이성한은 그가 껄끄러웠다. 왜냐면 백고운은 이성한과 많은 점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이성한도 작품을 잘 만나 한순간 한류스타가 된 사람이었고, 백고운 역시 감독을 잘 만나 한순간 일약스타가 된


놈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어쭙잖은 동질감이나 유대감, 친밀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성한은 백고운에게 열등감이 들었다.

이성한은 연기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이 심했고, 그런 그에겐 백고운의 존재 자체가 자극제였다. 아무도 둘을
비교하지 않았는데도 이성한은 백고운이 연기력으로 칭찬을 받을 때마다 괜히 열등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성한 자신이 보기에도 백고운은 객관적으로 연기를 꽤 잘했다. 그래서 더 분했다.

그런데 제일 결정적으로 분한 건 따로 있었다.

그건 이성한 자신과 달리, 백고운은 멘탈이 강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촬영장에서 이성한은 긴장감 때문에 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고, 그것을 티내지 않기 위해 언제나 많은
에너지를 들여야 했다.

그러나 백고운은 전혀 그런 티가 없었다. 그는 리딩 때도 촬영 때도 늘 여유로워보였고, 긴장하지도 않아 보였다.

이성한은 그것이 질투났고, 부러웠다.

그래서 사실 그렇게 화를 낼 것도 아닌 백고운의 개그에 정색한 채 틱틱대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는 바로 그 백고운이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게 된 꼴이었다.

“설마 어디 가서 말하진 않겠지?”

이성한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때였다.


따르릉―.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크게 울렸고, 이성한은 깜짝 놀랐다. 그가 핸드폰을 얼른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뭐야. 이성한은 안 받으려했는데, 혹시 감독님이나 PD 님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바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뜻밖의 인물이었다.

―안녕, 나 백고운인데. 지금 뭐해?

“뭐, 뭐, 뭐야? 너 내 번호 어떻게 알아?”

이성한은 기겁했다. 그러나 백고운은 태연했다.

―네 매니저님이 전화로 알려줬어.

“뭐? 우리 매니저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데?”

―내 매니저님이 알려줬지. 두 분이 벌써 엄청 친해지신 것 같더라. 싸이 일촌 맺었대.

이게 대체 무슨 대화란 말인가.

이성한은 순간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다. 일단은 상황 파악이 먼저다.

이성한이 사납게 물었다.


“그래서, 왜 전화 했는데?”

혹시나 자신이 약 먹는 얘기를 꺼내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날카롭게 반응하고 있을 때였다.

백고운이 여상하게 대답했다.

―나오라고. 밥 먹게.

“뭐?”

맥이 탁 풀리듯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백고운은 아랑곳 않고 제 말만 이어서 했다.

―네 매니저님이 그러던데. 너 타코 좋아한다고. 내가 잘 아는 타코 집 있거든. 같이 밥이나 먹자.

그는 당황했다.

뭐야, 얘 왜 이래? 뭐 잘못 먹었나? 왜 갑자기 이렇게 친한 척 구는 거지?

그때 이성한의 머릿속에 번뜩 뭔가가 스쳤다.

아, 설마.

“······야, 너 내가 약 먹는 게 안쓰럽냐? 그래서 동정해?”

이성한의 표정이 딱딱해질 차였다.

수화기 너머 백고운이 너무도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래. 사람이 약 좀 먹을 수 있지. 그게 왜 안쓰러운 건데? 몸 아프면 감기약 먹는 것처럼 정신이 아플 때도
약 먹는 게 당연한 거야. 그거 가지고 뭐라 하는 사람 아무도 없거든.

그리고 이성한은 이런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어쩐지 좀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

유난을 떨었던 게 어쩐지 좀 머쓱해질 차에 백고운이 다시 한 번 말해왔다.

―어쨌든, 올 거지? 진짜 맛있는 타코 집이니까 꼭 나와.

“······어이없어, 내가 너랑 왜 밥을 먹어야 하는데?”

―왜긴. 좀 친해져 볼까 해서 그렇지.

이번에도 백고운은 대수롭지 않은 말로 말했지만, 이성한은 두 번째로 말문이 막혔다.

뭐, 뭐라는 거야. 얘?

그러나 이성한이 더 뭐라 하기 전, 백고운이 먼저 말했다.

―아무튼 온다는 걸로 알게.

그리고는 전화를 먼저 뚝 끊어버리는 것이다.

곧 백고운의 번호로 문자가 한 통 왔다. 주소가 적혀 있었다. 여기로 오란 소리인 것 같았다.

이성한은 자판을 꾹꾹꾹 눌러서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안 갈 거야!]
백고운 역시 금방 답장 왔다.

[6 시까지야.]

[안 간다고!!]

[더 늦으면 먼저 먹으러 갈 거니까 시간 맞춰 와.]

이성한은 헛숨을 ‘허!’ 뱉었다.

아니, 얘는 뭐 이리 마이웨이야?

그리고 6 시. 한남동의 한 거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 사람이 길가에 서 있었고, 곧 그 앞에 차 한 대가 끽 섰다.

문이 열리고 백고운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안 온다더니. 왔네.”

그리고 그 앞에 모자와 선글라스와 마스크까지 쓰고 서 있던― 이성한은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가 입술을 비죽이다가 툭 대답했다.

“···그냥 타코가 땡겨서 온 거야. 너랑 밥 먹으러 온 게 아니라.”

타코와 곱창
38.

백고운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일단 타.”

그가 이성한을 잡고 끌어당겼고, 이성한은 얼결에 끌려 들어갔다.

그리고 차에 탄 이성한은 깜짝 놀랐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게 당연히 백고운의 매니저라고 생각했는데, 기태성 배우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 선배님?!”

아, 아니, 그가 왜 여기에?

이성한에게 기태성은 대선배였고, 또 많이 존경하는 분이었다. 팬이라고 자처할 수 있을 정도로.

이성한은 너무 놀라서 얼어붙었는데, 반면 기태성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 평온하게 인사했다.

“안녕? 네가 성한이구나. 오늘은 내가 일일 운전기사거든. 그냥 편하게 생각해. 참, 안전벨트는 꼭 매고.”

“네? 네!”

이성한은 화들짝 안전벨트를 맸다. 기태성이 차를 출발시켰다.

이성한은 바짝 군기가 든 채로 옆의 백고운에게 속삭여 물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선배님은 왜 여기 있는 거야?”


“매니저 형한테 내 사생활까지 따라다니라 시킬 수는 없잖아. 근데 난 아직 운전면허 없고. 그래서 선배님이
운전해주시겠다고 한 건데. 왜?”

대선배를 운전 셔틀로 쓰면서도 백고운은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성한은 말을 잃었다. 자신의 생각보다 백고운의 배짱은 더 큰 모양이었다.

그때, 기태성이 말해왔다.

“얘들아 벨트 꽉 붙잡아라.”

이성한이 ‘네?’하고 되묻기도 전이었다.

기태성이 핸들을 확 꺾었다. 몸이 오른쪽으로 확 쏠린 이성한은 그만 혀를 씹고 말았다.

“윽!”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때부터 기태성은 차로 기예를 부리듯 요리조리 차를 비틀며 운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기태성은 그런 거친
운전을 좋아하는 건지 차가 튕기듯 ‘부앙’ 속도를 내기도 했다.

이성한은 짐짝처럼 앞뒤, 좌우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우욱, 멀미가 났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이성한은 차마 대선배에게 운전 좀 살살해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벨트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꽉 부여잡았다.

‘살아야 한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 곡예를 부리는 차 안에서 필사적으로 버티던 때였다.

이성한은 오래지 않아 이상한 점을 눈치 챘다. 분명 타코 집으로 간다더니 차가 점점 으슥한 골목 안으로만


들어가고 있었다.

불안함을 이기지 못한 이성한은 백고운에게 다시 속삭이듯 물었다.

“야, 여기 맞아? 타코 집이라며?”

“응, 이쪽 맞아. 지름길로 가는 거야.”

백고운은 또 한 번 평온하게 대답했다.

이성한은 또 한 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는데 자신이 뭐라 하겠는가. 게다가 백고운의 저 여상한


반응은 참 듣는 상대로 하여금 ‘아, 응, 그래’하고 뻘쭘하게 만드는 느낌이 있었다.

이성한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그저 차가 움직이는 대로 몸을 맡겼다.

가슴 속 아주 깊은 한 구석에서 ‘나 납치당하는 건 아니겠지?’라고 슬그머니 치켜드는 불안감을 애써 모른 척


외면하면서.

그리고 겨우 그 곡예가 끝나고 차가 어느 건물 앞에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백고운이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다 따돌렸어요?”

“응, 이 정돈 껌이지. 나중에 배우 은퇴해서 택시 기사나 할 생각도 있다니까.”


기태성이 으스대며 대답했다.

그리고 둘의 대화에 이성한은 뒤늦게 깨달았다.

아, 기자들을 따돌린 거구나.

백고운이 이성한에게 내리라고 하면서 덧붙였다.

“그냥 밥 먹으러 가는 거니까 기자가 따라와도 상관은 없는데, 네가 싫어하는 것 같아서. 선배님 운전이 좀
거칠었지? 불편했다면 미안.”

“어? 아냐. 뭘······.”

심지어 백고운은 저번에 이성한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경 써준 모양이었다.

이성한은 그런 백고운의 선의를 의심했던 자신이 좀 부끄러워졌고, 머쓱함과 미안함이 몰려왔다.

다짜고짜 사람을 불러내기에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얘, 의외로 꽤 괜찮은 놈일지도······.

이성한은 어색히 헛기침을 큼큼 했다. 그리곤 재빨리 말을 돌렸다.

“여기가 그 타코 집이야?”

이성한은 빌딩을 올려다봤다. 과연 4 층에 멕시코 음식점으로 추측되는 영어 이름 간판이 보였다.

“응. 들어가자.”

백고운과 기태성, 그리고 이성한은 나란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탄 후, 자연스럽게 4 층 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백고운이 그런 이성한을 막더니 5 층을 눌렀다. 이성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4 층이었던 것 같은데.”

“알아. 5 층에 먼저 들를 일이 있어서.”

이성한은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그렇구나, 했다.

심지어 5 층에 내린 후 [정신건강의학과의원]이라는 병원 팻말이 보였을 때까지도, 이성한은 설마 백고운이


애초에 여길 목적으로 왔다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백고운이 멈추곤 이성한을 돌아보더니 뜬금없이 말했다.

“여기 다른 연예인들도 많이 오는 곳이래. 비밀 보장은 확실하고, 원장님이 이쪽 바닥에 대한 이해도 높다고


하시더라. 선배님이 추천해주신 곳이야. 그래서 같이 와주신 거고.”

“······뭐?”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던 이성한은, 곧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이성한은 눈을 부릅떴다. 배신감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 너······! 너 이러려고 나한테 타코 먹자고 거짓말 쳤어?!”

솔직히 말하자면, 아닌 척 했지만 이성한은 조금 설레고 있었다.

이성한은 완벽주의 기질 때문에 성격이 예민하고 까칠한 편이었다. 그래서 친구가 많이 없었다.

당연히 누가 먼저 친구하자고 이성한에게 손 내미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백고운이 먼저 친하게 지내고 싶으니까 밥 먹으러 나오라고 이성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때문에 이성한은
있는 대로 튕기긴 했지만 내심 친구가 생겼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근데 이게 다 자신을 병원에 끌고 오기 위한 속임수였다니!

그런데 그때, 백고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짜 밥 먹자고 불러 낸 건 맞아. 너도 봤잖아. 여기 바로 아래층에 타코 집 있는 거.”

백고운은 이성한과 눈을 맞춰왔다. 그리곤 뜻밖에도 진지하게 말했다.

“난 그냥 네가 한 번쯤은 방해받지 않고 선택할 기회가 있었으면 했어. 사진 찍힐까 봐 정신과 안 간다고 했잖아.
근데 지금은 기자들 없어. 나랑 선배님이 따돌렸으니까. 그러면 지금이라면 아무 문제없지 않아?”

“······!”

예상 밖의 말에 이성한의 눈이 커졌다.

“너한테 막무가내로 나오라 그러고, 여기까지 데려온 건 미안해. 하지만 나는 딱 여기까지만 할게. 이 다음은
온전히 네 선택이야. 한 번 가볍게 상담 받아 봐도 되고, 영 싫으면 그냥 아래층 내려가서 타코나 맛있게 먹고
헤어져도 돼. 물론 난 네가 뭘 선택하든 존중할 거고.”

“······.”

“하지만 네가 필요하다면, 난 언제든 도와줄게. 한 번 상담 받아보고 맘에 들어서 주기적으로 오고 싶다면, 내가


같이 와줄 수도 있고. 기자들이 따라와도 누가 알겠어? 그냥 친구랑 타코나 먹으러 온다고 생각하겠지. 네가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야.“

이성한은 말문을 잃었다.

이런 것은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가득 했던 화가 맥 풀리듯 어느새 스르르 사라져있었고,


남은 건 당황스러움뿐이었다.
타인이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한 적이 있던가? 아니,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질문들이 차올랐다. 왜 자기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우리가 뭐 얼마나 본 사이라고.

하지만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제 입으로 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부끄러움인지, 화인지 모를 감정으로 귀가 붉어졌다. 뭣보다 선택의 주도권이 막상 제게 넘어오자, 어째야 할지


잘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다.

이성한은 시선을 피하듯 옆의 기태성을 쳐다봤다. 그는 이성한이나 백고운과 달리 어른이었으니까.

그러나 기태성은 어떤 말도 얹지 않고 그저 빙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성한의 선택을 존중한단 태도로 한 발짝


물러서서 말이다.

이성한은 아래층으로 향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와, [정신건강의학과의원]이라는 팻말을 번갈아 쳐다봤다.

방금 백고운이 했던 말이 귀에 어른거렸다.

―여기 다른 연예인들도 많이 오는 곳이래. 비밀 보장은 확실하고, 원장님이 이쪽 바닥에 대한 이해도 높다고


하시더라.

강렬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심리적인 거부감도 있었다.

이성한은 결국 머뭇거리듯 물었다.

“······이런 데는, 좀, 그런 사람들이 오는 거 아닌가? 난 그렇게까지 힘든 건 아닌데.”

“많이 힘들고 적게 힘들고, 그런 게 중요한가. 그냥 힘들 때 가라고 있는 게 병원인데. 나는 감기 기운만 있어도


병원 가. 감기 걸려서 연기하는 데에 차질 생기면 안 되니까. 내 몸은 내가 제일 소중히 해야지.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신과 드나든다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한 거라니까. 나도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선배님도죠?”
백고운이 기태성을 향해 물었고, 기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옛날에 몇 번 여기 다닌 적 있는 걸.”

여태 이성한은 백고운의 저 ‘남의 시선이 어떠하든, 자기는 신경 안 쓴다’라는 마이웨이적이고 여상한 태도를
참 이상하게 여겼었다.

그러나 지금은 처음으로 백고운의 저 태도가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느낌이었다.

이성한은 한참을 망설였고, 백고운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 만에 이성한은 툭 물었다.

“······예약 안 했는데, 괜찮나?”

물론 백고운은 준비가 철저한 놈이었다.

“혹시 몰라서 내 이름으로 미리 예약해놨지. 다녀와. 우린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뒤.

“수고했어요. 다음 주에 봐요.”

상담실 문이 열리고 이성한이 쭈뼛거리며 나왔다.


보리보리 쌀을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던 나와 기태성은 그를 돌아보았다.

“끝났어?”

“······응.”

이성한이 한 발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약간 얼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뭐랄까. 꼭, 세탁기로 탈탈 돌려진 후 따듯한 햇볕에 건조되어 바짝
마르면서도 보송보송해진 느낌 같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약간 지친 것 같긴 했는데 묘하게 홀가분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성한의 눈가에 붉은 기가 조금 남아있는 걸 보니 안쪽에서 상담하다가 울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이성한의 고민이 뭐인지는 나야 모르지만, 그래도 하나는 알았다. 사람은 때론 고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훨씬 나아진다는 것을 말이다.

이성한은 상담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날이 조금 서 있었는데, 상담을 받고 나오니 말랑해져 있었다.

다음 주에도 오겠다고 약속까지 잡은 걸 보니, 아마 꽤 상담이 괜찮았던 모양이었다.

‘괜찮았느냐?’라든가. ‘내 말이 맞지? 오길 잘했지?’라든가. 그런 말을 해서 이성한을 멋쩍게 하는 대신, 나는


그저 일어났다.

그리고 오래 대기하느라 찌뿌둥해진 등을 기지개 편 후, 개운하게 물었다.

“그럼 이제 밥 먹으러 갈까?”

우리 셋은 진짜 타코 집이 있는 바로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타코를 배터지게 먹었다.


그날 먹은 타코는 참 맛있었다.

그리고 그날을 계기로 이성한의 태도가 조금 변했다.

“야, 나 대사 연습해야 하는데 상대역 좀 해줘.”

하루는 이성한이 그렇게 말하며 대사 좀 쳐달라고 부탁해왔다. 그래서 나는 대본을 가지고 와서 그의 연습을
도와줬다.

“―해서 나는 부릅, 아.”

잘 하던 도중, 이성한이 대사를 씹었다. 그가 답답한 듯 ‘아에이오우’하면서 입을 쫙쫙 편 후, ‘부르르―’


입을 털기까지 했다.

나름 중요한 장면의 대사인데,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가 많은 탓에 제 생각만큼 딕션이 명확하게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나도 모르게 끼어들고 말았다.

“호흡 없이 한 번에 다 대사를 말해버리려고 하니까 계속 씹는 것 같거든. 여기, 여기, 여기 부분을 끊어서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해볼래?”

“······.”

이성한이 대본을 노려보았고, 나는 아차 했다. 혹시 기분 상했나?

저번에 매니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성한이 연기에 대해서 프라이드가 높다고.


나는 그저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것 같아서 조언을 건넨 것뿐이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 막 데뷔한 신인이고
이성한은 10 년 연차이다. 듣기에 따라서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다.

특히 상대가 먼저 조언을 구한 게 아닐 때엔, 아무리 좋은 마음이어도 경솔한 참견이 되기 쉬웠다.

나는 이성한에게 사과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이성한이 내가 말해준 대로 따라하며 순순히 대사를 쳤다. 그러자 이번엔 대사도 안 밀렸을 뿐더러,
발음도 훨씬 안정되게 나왔다.

이성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네.”

그리고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덧붙이듯 물었다.

“혹시 더 해줄 말 또 있어? 여긴 이렇게 하는 게 좋다든가, 하는 거.”

물론 나는 기꺼이 내가 할 수 있는 한으로 도움을 주었다.

“······고맙다, 흥.”

이성한은 내가 한 말을 대본에 꼼꼼히 메모한 후, 감사 인사를 툭 던졌다.

새침하고 까칠한 건 여전했다. 그러나 예전보다 유해진 건 확실했다.

나는 그런 이성한의 태도에 남몰래 픽 웃었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게 귀엽다니까.’

사실 내가 기태성과 007 작전까지 하면서 굳이 이성한을 병원에 데리고 간 건 그가 눈에 밟혀서였다.

‘하는 짓이 꼭 막냇동생 같다고나 해야 할까.’

자존심 강한 놈이 혼자 끙끙거리질 않나. 좀 도와줄라 치면 가시 돋친 듯 굴지 않나. 그러면서도 성격이 여린 게


다 빤히 보이질 않나.

그러니 이 오지랖이 또 가만히 내버려 두질 못했다. 어쩌겠는가. 이게 내 성격인 것을.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잘 풀렸고, 이성한도 내게 좀 마음을 연 것 같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모른 척 물었다.

“다음엔 한남동 말고 신림동 어때? 거기에 내가 아는 맛있는 곱창 집 있는데. 혹시 타코 말고 곱창은 싫어해?”

이성한이 예의 그 새치름한 태도로 대답했다.

“······뭐, 싫진 않아.”

1 년 만의 재회
39.

김건은 요 며칠 새 조금 달라진 촬영장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성한 씨가 웃음이 좀 많아진 것 같죠.”

“응, 확실히.”
마침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조연출이 말해왔고, 김건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다. 예전의 이성한은 웃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번 영화 <친구들>은 이성한의 첫 주연 영화였다. 첫 주연이 부담스러운 건지, 이성한은 촬영장에서 언제나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모습이었다.

예전엔 ‘컷, 오케이’ 소리가 나와도 이성한은 내내 찝찝한 표정이었다가 결국 김건에게 “한 번만 다시 가면 안


될까요?”하고 묻곤 했다. 심지어 감독인 김건이 괜찮게 장면을 뽑았다고 만족한 경우에도 말이다.

그러나 이성한은 자신의 연기에 엄격했고, 객관적으로 잘 한 경우에도 계속 불만족스러워했다.

프로의식은 좋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경우 조금 피곤하기도 했다.

영화란 게 아무래도 공동 작업이다 보니 다 같이 ‘으쌰으쌰, 우린 잘 하고 있다!’라는 감각을 공유해야


분위기도 훈훈하고 일도 스무스하게 흘러간다.

그런데 모두 괜찮다고 하는데 주인공인 이성한이 만족하지 못해 몇 번이고 계속 찍다보면, 당연히 주변의 분위기
역시 지치고 어색해지기 쉬웠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컷’을 외치자 촬영을 구경하고 있던 백고운이 이성한에게 엄지를 치켰다.

“좋네. 잘하는데?”

“원래도 잘 했거든.”

이성한은 그렇게 대꾸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김건은 조연출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눈 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이제 찍을 장면엔 이성한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김건이 말했다.

“성한이 수고했어. 이제 잠깐 쉬고 있어.”

“넵! 감사합니다!”

이성한이 경쾌히 말한 뒤, 스태프한테 수고했다고 꾸벅거렸다.

그러니까 이런 점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전보다 사람이 좀 밝아진 게 확연히 느껴졌다. 좋은 변화였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만든 것은 아마···.

‘저 백고운이 같지.’

김건은 촬영장 한쪽에 비켜 서 있는 백고운을 조금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처음에 오디션장에서 그를 봤을 땐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함께 촬영을 같이 하다 보니, 처음의 인상과 달리 백고운은 꽤 괜찮은 놈이었다.

이번 영화가 하이틴인 만큼 출연 배우들 대부분이 10 대 후반 아니면 20 대 초중반이었다. 어린 친구들이 많은


촬영장은 성인 배우들이 주로인 촬영장과 분위기가 또 다른 법이었다.

좋은 경우는 배우들 대부분이 또래 친구처럼 친해지는 경우였고, 나쁜 경우는 아이들이 질투와 시기 등등으로
멘탈이 흔들려 촬영 전체에 영향이 가는 경우였다.

김건 역시 후자의 경우가 될까 내심 걱정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 달 쯤 촬영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보이는 것이다. 출연 배우들이 하나같이 백고운을 졸졸졸 따르고
있단 것을 말이다.

화기애애한 곳을 보면 꼭 중심에 백고운이 있었다. 주연 배우도 아닌 조연 배우 중심으로 배우들이 몰리는 건


확실히 드문 일이었다.

심지어 제일 친해지기 어려워 보이는 이성한마저도 백고운에게는 곁을 내주었다.

백고운이 배우들의 분위기를 친근하게 만든 덕에 촬영장 분위기는 이전보다 훨씬 전체적으로 업 up 되었다.

당연히 그건 또 결과물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고.

‘유명한 감독님이 예뻐한 이유가 있었네.’

김건도 이제는 인정했다.

자신이 백고운을 캐스팅하게 된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걸.

연기력도 연기력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성격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백고운은 작업하기 편한 배우임엔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오늘 찍을 장면을 얼추 다 찍은 후, 카메라 장비들을 철수하고 있던 때였다.

문득 생각난 듯 조연출이 김건에게 물었다.

“감독님, 주말에는 촬영 없죠?”

“응, 없어. 왜?”


“아뇨, 그날 약속이 있단 게 지금 떠올라서요. 혹시나 해서 물어봤습니다.”

“나도 그날은 시간 안 돼. 친구 1 주기라 납골당 가서 인사해야 하거든.”

“아··· 혹시···.”

“응. 철수. 그 친구 맞아.”

“그러네요. 고(故) 김철수 배우님이 딱 작년 이맘때 돌아가셨죠. 시간 빠르네요.”

“빠르지.”

그런 대화들을 하느라 김건은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백고운이 둘의 대화에 쫑긋 귀 기울이고 있단 것을 말이다.

그 주 일요일.

김건은 경기도 수원의 한 납골당에 와 있었다.

이곳은 원래 김철수의 부모님을 안치한 곳이었는데, 그의 아들인 김철수도 1 년 전 세상을 뜨면서 여기에 같이
안치해 놓았다.

김건은 ‘김철수’라는 이름이 음각된 유골함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툭 뱉었다.

“잘 지냈냐?”

이제는 제법 덤덤하게 자신의 친구를 마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여기 와서 직접 친구의 유골함을


보니 또 옅은 슬픔이 울컥 차올랐다.

죽마고우를 잃을 슬픔을 완전히 잊기에는 1 년은 그리 충분하지 않은 시간인 듯했다.


오면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입을 열었다간 저도 모르게 볼썽사납게 울어버릴 것 같아, 김건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대신 가져온 꽃이나 내려놓았다.

“···또 올게.”

고작 그런 말이나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김건은 먹먹함을 삼켰다. 그리고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김건의 눈에 백고운이 들어왔다.

······응?

“고, 고운이?”

“감독님, 안녕하세요.”

“어, 그래, 안녕.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얘도 여기에 아는 사람이 있나?

그런데 백고운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아뇨, 감독님 보러 왔어요. 오늘 여기 오신다는 얘기를 들어서요.”

“나 보러 왔다고? 왜?”

김건이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촬영장에서도 매일 보는데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그런데 그때, 백고운이 또 한 번 예상 밖의 말을 내뱉었다.


“제가 감독님께 고백할 말이 있어서요.”

김건은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불현듯 미간을 좁히고 허공을 쳐다봤다. 그가 의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번에도 그렇고. 너 진짜 나 좋아하는 거 아니지?”

“······그런 류의 고백은 아닌데요.”

“그래, 그럴 것 같긴 했어.”

어째 익숙한 데자뷰다.

김건은 백고운의 화법에 이제 어느 정도 적응했다. 얘는 좋은 놈인 건 맞아도 역시 조금 특이한 놈 같긴 했다.

어쨌거나, 뭘 말하려고 여기까지 와서 은밀히 보자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 말해도 돼. 뭔데?”

그때, 자신을 빤히 보던 백고운이 갑자기 말을 놓기 시작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진짜야.”

“······?”

예의 없게 무슨 행동이냐고 타이를 타이밍을 놓쳤다. 왜냐면 백고운이 이어서 한 말 때문이었다.

“사실 나 김철수야. 나 살아 있었어.”

문장을 이해하는 데에 잠깐 시간이 걸렸다.


백고운이 뱉는 예상 밖의 말들에는 이제 어느 정도 적응했다 생각했는데, 이번에 정말로 상상 밖이었다.

“어, 그러니까 고운이 네가··· 철수라 이거지? 음······ 고운아. 이게 지금 무슨 연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그것도 여기서 나한테 하기엔 별로 상황이 적절하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김건은 백고운이 말을 이해한 후에는, 그가 지금 연기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왜냐면 그것 외에는


상식선의 설명이 안 되었다.

스무 살 어린놈이 갑자기 찾아와 뜬금없이 자기가 1 년 전에 죽은 네 친구다, 라고 말한다면 누구라도 장난이라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백고운은 저번에도 이미 한 번 김건을 속인 전적이 있다. 그러니 지금 이것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장난은 진짜, 재미없었다. 이건 오디션 장에서 밤을 샜다고 거짓말 좀 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어지간하면 화내지 않는 김건의 얼굴이 싸늘해질 차였다.

그때였다.

백고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꼭 오늘 여기여야 했어. 그래야 네가 믿을 것 같았거든.”

그게 무슨, 이라고 묻기도 전이었다.

“이상하지 않아? 김철수가 안치된 납골당이 어딘지는 너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 말고는 모를 텐데, 내가 여길
어떻게 찾아왔는지 말이야. 하지만 내가 바로 김철수니까 안 거야. 우리 부모님을 내가 여기다가 모셨으니까.
그리고 내 친구 김건이라면 나를 우리 부모님 옆에 놓았을 거라 생각했지. 그래서 네가 납골당을 간다고만 했을
때 여기로 오겠구나 안 거야.”
“······!”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김철수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기껏해야 상조회사 직원들 몇몇, 김건, 그리고
자신의 아내 정도다.

왜 바로 의문을 갖지 못했을까. 백고운이 여길 어떻게 찾아왔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백고운의 말을 믿을 순 없었다.

무리한 가정이긴 하지만, 김철수가 여기에 안치되었다는 걸 알아낼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여기
납골당 직원이나 상조회사 직원이 정보를 유출했을 수도 있고.

그때, 백고운이 이어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믿기 어렵겠지. 갑자기 찾아와서 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니까 이게 뭔가 싶을 테고.


근데 진짜야. 너는 기억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백고운은 내가 구한 애야. 왜, 백상 날에 우리 둘이 편의점
앞에서 맥주 먹었잖아. 네가 내 맥주 뺏어 먹었고, 2 차 3 차는 네가 쏘겠다고 했는데 우리 둘 다 거기서 취해서
뻗었잖아. 그리고 나는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웬 청년을 구하려다가 트럭에 치여서 죽었고.”

이번엔 정말로, 김건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사고가 있던 그날 밤의 일은 김건과 김철수 둘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남에게 들었다고 하기엔 백고운이 밝히는
내용이 너무 상세했다. 그날 둘이 했던 대화까지 타인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백고운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내가 구한 애, 그 친구가 바로 이 백고운이란 친구였어. 눈 떴을 때 내가 이 청년이 되어 있더라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 친구 몸으로 들어오게 된 것 같아.”

*
우리는 납골당 한쪽에 비치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김건은 거의 삼십 분 째 자신에 대한 질문을 던져대고 있었다.

“내 흑역사 뭐야.”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술 먹고 전화로 선희 씨한테 고백한 거. 그리고 뻗어서 경찰서 유치장 갔는데, 경찰이 제일 최신 통화 목록에
있는 선희 씨가 친구인 줄 알고 부른 거.”

토 냄새를 잔뜩 풍기며 거지꼴로 일어났는데, 몇 시간 전 고백한 여자와 마주하게 된 상황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참 공감성 수치가 드는 일화였다.

“그럼 내 별명은 뭐야.”

“너 선희 씨랑 결혼한 다음엔 애처가. 그 전에 대학 다닐 때는······ 이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해?”

“얼른!”

“······거니거니.”

나는 체념했다.

“내 몸에 점은 몇 개야.”

“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지간한 건 대답해주고 있었는데 그 질문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친구 몸에 점이 몇 개 있는지까지 내가 알아야 하는가? 내 몸의 점도 몇 개인지 모르는 마당에.


그리고 그 질문은 일종의 함정 질문인 모양이었다. 대답을 못하자 오히려 김건은 내가 김철수란 걸 믿게 되었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진짜야? 너 진짜······ 김철수야?”

몇 번째 같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대답해주었다.

“그래, 맞아. 나 김철수 맞아. 네 친구.”

그때, 김건이 벌떡 일어났다.

몇 번을 혼란스럽다는 듯 제자리를 빙빙 맴돌던 김건이 날 훽 돌아봤다.

김건이 날 노려보면서 울먹거렸다. 어느새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너, 흐으, 너 이 자식······.”

그러더니 그가 내게 달려들어 와락 껴안았다.

나는 비식 웃었다.

“이젠 믿나 보네.”

“야 이 나쁜 자식아! 흐어엉, 내가 너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나는 너 죽은 줄, 끅, 알고, 진짜, 허엉.”

김건은 엉엉 서럽게도 울었다. 지난 1 년 동안 이별의 설움이 꾹꾹 쌓였다가 그제야 다 터진 것처럼.

그리고 나는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들었지만, 김건을 밀어내는 대신 ‘그래, 그래’하면서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우리 둘이 부둥켜 있는 꼴을 납골당 직원이 요상한 눈으로 바라볼 때까지, 한참을 그리 오랫동안 말이다.

1 년 만의 재회였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장면
40.

“여기서 혼자 사는 거야?”

김건은 김철수, 아니 이제는 백고운이 된 친구의 집에 들어서며 물었다.

“응. 내가 말 안 했나? 이 청년이 고아더라고. 그날 자살하려고 트럭에 뛰어든 모양이야.”

“아이고. 좋은 곳에 갔을 거야.”

“그러길 바랄 뿐이지.”

그는 진짜 백고운이 떠오른 듯 잠시 합장한 채 묵념하듯 기도했다. 타인의 삶을 대신해서 살고 있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김건은 그런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솔직히 말하면, 김건은 진짜 백고운의 안위 따위는 관심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친구가 살아 돌아온 것이


기쁠 뿐이었다.

그래. 자신의 친구가 살기 위해 타인이 죽어야 한다면, 김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친구를 선택할 것이다.

이기적이라 욕한다면 하라 그러던지. 죽은 친구를 되살릴 수만 있다면 그깟 욕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친구가 정말로 살아서 제 앞에 돌아와 있다. 감격에 가까운 감정이 또 주체를 모르고 차올랐다.
결국 김건은 옛 친구에게 와다다 달려들어 헤드락을 걸었다.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빼놓지 않고 이 형에게 말해야 할 거야. 응?!”

“뭐? 네가 왜 형인데?”

“어허! 너 지금은 백고운이니까 당연히 내가 훨씬 형이지! 밖에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라. 너랑 내가 지금


동갑으로 보이는지. 앞으로 형님이라고 깍듯이 모셔라.”

“나 참.”

친구는 어이가 없단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피식 웃었다.

둘은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긴 회포를 풀었다.

“그럼 그 동안 영화를 두 개 찍은 거네? 중간에 극단에 가서 한 달 동안 오디션도 보고.”

“그런 셈이지.”

“와, 배신이다 진짜···. 어떻게 그 사이에 나한테 연락을 안 할 수 있어? 난 진짜 너 죽은 줄로만 알았단
말이야. 장례식장에도 왔다며. 그때 말할 수도 있었잖아!”

“미안해. 좀 더 떳떳해진 다음에 만나러 가고 싶었어. 실은··· 너한테 티는 안 냈지만 7 년 전에 그렇게


은퇴하고 나서 그 동안 나 너 엄청 부러워했었어. 포기해야 하는 꿈인 걸 아는데도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거든.”

“······알지. 너 연기 좋아하는 거. 그래, 지금은 연기 맘껏 해서 좋냐?”

“어, 진짜 좋아. 하하!”

“하여간, 이 연기에 미친 놈. 널 누가 말리냐.”

친구가 멀쩡히 살아있는 줄도 모르고 지난 1 년 동안 혼자 삽질했다고 생각하면 아직도 간간히 원망스러운 마음이
울컥 차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재회의 기쁨이 더 컸다.

김건은 잔에 든 술을 입에 털어 넣은 후, 행복감에 푸슬푸슬 웃었다.


“이야, 진짜 꿈만 같네. 내가 너랑 다시 대작하는 날이 올 줄이야. 심지어 지금 너는 내 영화에 출연 중이고.”

“그러니까. 내가 너랑 같이 작품을 하게 되는 날이 다시 올 줄은 나도 몰랐다니까. 안 그래도 촬영하면서 우리


대학 때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

김건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다가, 문득 마른세수를 하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 어떡하냐.”

갑작스러운 김건의 탄식에 백고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냥···.”

김건이 양 손으로 볼을 꾹 눌렀다. 그리곤 붕어처럼 뚱하니 튀어나온 얼굴로 말했다.

“······부담이 커졌어. 이번 영화 잘 돼야 할 텐데. 너한테 쪽팔리지 않으려면.”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백고운이 아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김건은 눈을 흘겼다.

“야, 나 나름 심각하거든? 난 네 필모에 누가 되기 싫다고. 7 년 만에 복귀한 친구에 내가 도움이 돼주진


못할망정 똥물을 뿌리면 안 될 거 아니야.”

백고운이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네요, 이 사람아. 그리고 네 영화 괜찮아. 객관적으로. 좋은 영화니까 대중들도 알아봐 줄 거야.”

“······빈 말 아니지?”

“응. 아니야.”
그런데 그때, 그렇게 말하면서 백고운은 한 번 눈을 굴렸다. 김건은 그 표정을 기가 막히게 눈치 챘다.

“뭐야, 너 뭐 숨기고 있지? 얼른 말 안 해?!”

“아냐, 그런 거.”

백고운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김건은 진지했다. 그가 분위기를 잡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철수야. 나 지금 진지하게 묻고 있는 거야. 친구로서가 아니라. 감독 대 배우로서. 내가 다른 사람 말은


몰라도 네 조언만큼은 믿잖아. 그냥 기탄없이 말해줬으면 좋겠어.”

백고운이 김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가 멋쩍은 듯 볼을 긁적였다.

그리곤 그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냥, 별 건 아니고······.”

영화 <친구들>의 촬영이 막바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드디어 마지막 클라이맥스 장면을 찍을 날이었다.

촬영지인 학교 바로 앞에 촬영 장비들이 설치되었고, 구경꾼 역인 엑스트라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대기 했다.

그리고 이번 장면의 주인공인 백고운은 한쪽에 비켜서서 가만히 감정선을 잡고 있었다.


이 장면은 원래 태웅이 몰락한 후 주인공에게 찾아가서 화를 내는 장면인데, 김건은 여기서 태웅의 태도를
싸이코패스처럼 미친 모습으로 연기해줄 것을 주문했었다. 눈깔이 훽 돌아가서 분노를 터트리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히죽거리는 그런 모습으로 말이다.

김건은 태웅의 기괴한 모습이 강조되는 게 좋으리라 생각했다. 더구나 이 장면에서 태웅은 약까지 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요 전날.

영화에 대해서 조언해줄 것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해줄 것을 부탁했을 때였다.

그때 백고운이 건넨 말은 뜻밖에 ‘태웅’에 관련된 얘기였다.

그는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주인공과 태웅이 대립할 때 ‘이런 식으로 태웅의 캐릭터를 보여주면 어떨까?’라고
조금 색다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김건은 백고운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고, 시나리오를 곧바로 수정했다.

오늘 찍을 장면이 바로 그 장면이었다.

촬영 준비가 끝나자 김건이 외쳤다.

“자, 모두 스탠바이 해주시고. 씬 넘버 80, 테이크 1 가겠습니다.”

김건은 대기하고 있던 백고운과 시선이 마주쳤다. 둘은 짧게 눈짓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장이 고요해졌다. 김건이 카메라 감독에게 신호를 줬다.


“레디··· 액션!”

클래퍼보드가 딱 소리를 내며 빠졌다.

한순간 눈빛을 바꾼 백고운이 연기를 시작했다.

백고운(태웅)은 앵글 안으로 성큼성큼 돌진하듯 들어왔다. 그리고 걸어가고 있던 이성한(성한)의 어깨를 잡고 확


돌렸다.

하교하고 있던 학생들(엑스트라들)이 깜짝 놀라 이쪽을 바라봤다. 단번에 주변이 조용해졌고 이목이 집중됐다.

이성한은 눈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너 때문에···,”

백고운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짓씹더니, 고성을 내질렀다.

“너 때문에 우리 집이 다 좆 됐어, 이 씨발 새끼야!”

극 중에서 태웅은 국회의원의 아들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폭로로 인해 그의 아버지는 비리가 밝혀져 감옥에 잡혀
들어가고, 그의 집은 쫄딱 망하게 된다.

“웃음이 나와? 남의 인생을 씨발 이 따위로 조져 놓고 너는 하하호호 웃음이 나오냐고!”

“네 인생은 네가 망친 거지, 내가 망친 게 아니야.”

백고운의 고함에 이성한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대본 리딩 때 한 번 맞춰본 그 장면이었다.

다만 그때는 백고운이 미친 것처럼 실실 웃다가 화내다가 했지만, 지금은 그저 분노만 터트리고 있단 게 유일하게
다른 점이었다.

백고운과 이성한은 잠시 팽팽하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둘 사이에 긴장된 침묵이 내려앉았다.

“······.”

“······.”

백고운이 주먹을 꽉 쥐고 파르르 떨었다. 당장이라도 이성한에게 주먹을 날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구경꾼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그때였다.

부릅뜬 눈으로 이성한을 죽일 듯 노려보던 백고운이 이어서 한 행동은 선빵도, 도망도 아니었다.

털썩―.

백고운이 이성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구경꾼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백고운은 순순히 용서를 구하거나 참회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이성한을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부들부들 끌어올렸다. 그리고 도전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면 네가 나 용서할래? 응? 내가 어떻게 할까? 이렇게 할까? 어?”


그러면서 백고운이 바닥에 머리를 사납게 쿵쿵 찧기 시작했다.

이성한이 경악했다.

“무슨······!”

“부족해? 그래, 이런 걸로 네 분이 풀릴 리 없지. 내가 널 얼마나 심하게 괴롭혔는데, 그렇지?”

그러더니 백고운이 이번엔 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퍽퍽 주먹질했다. 이성한이 입을 떡 벌렸다.

그의 미친 짓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또 내가 뭘 했지? 아, 맞다. 너한테 담배도 지졌지. 근데 내가 지금 담배가 없는데···. 아, 저거면 되겠네.”

백고운이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가더니 도로 옆의 흙탕물 쪽으로 향했다. 그 흙탕물은 매연으로 인해 새까맸고,
담배꽁초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백고운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기에 머리를 박았다.

“······!”

백고운이 얼굴을 들자 땟국물이 그의 뺨에 주륵 흘렀다. 그가 히죽 웃으며 형형한 눈으로 이성한을 돌아봤다.

“응? 이 정도면? 어때? 분이 풀려? 용서할 마음이 들어? 아직 아니야?”

이성한과 구경꾼들 모두가 백고운의 서슬 퍼런 안광에 얼어붙었다. 모두가 경악한 가운데 백고운만이 실실 웃었다.

“더 해? 뭐, 내가 뭐할까. 네 신발이라도 핥을까? 어? 말만 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줄 테니까. 아니,


아예 개처럼 배도 까줄까? 재롱도 부려줘? 해줄게, 그딴 게 뭐 어렵다고. 말만 해. 씨발, 다 해줄 테니까!
말만 하라고!!”
백고운의 마지막 말은 거의 비명이었다.

“······!!”

그 순간, 백고운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던 촬영장의 모든 사람들의 팔에 소름이 우두두 올라왔다.

‘연기 맞아? 진짜 약 하고 온 건 아니야?’

연기란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미친


연기력였다.

그리고 한편.

백고운의 기백에 압도당해 얼어붙어 있던 이성한은 가까스로 자신이 지금 연기 중이란 걸 상기했다.

이성한이 이를 악물었다.

“이딴 짓을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아니, 애초에 나한테 이럴 필요도 없어. 난 너한테 사적인 복수심으로
이러는 거 아니니까. 너는 그저 죄를 지었고, 그래서 정당하게 처벌받는 거야.”

그리고 애초에 이건 용서를 구하는 것도 뭣도 아니었다.

이건 그저 폭력이었다. 가해자가 와서 ‘이제 만족해? 만족하냐고, 어?!’하고 외쳐대는 것과 다름없는 태도였다.

“난 더 이상 너랑 할 말 없어. 네 쓰레기 같은 얼굴, 보고 싶지도 않고.”

이성한은 싸늘하게 말한 다음 몸을 돌려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자 백고운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

이제 그의 눈빛엔 비굴함 대신 오로지 활활 타오르는 증오만이 있었다.

백고운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멀어지는 이성한을 향해 뛰어가려 했다.

그러나 태웅의 똘마니들이 그런 백고운을 붙잡았다. 그들이 안타깝다는 듯 한 마디씩 말렸다.

“그만 해, 이태웅!”

“야, 정신 차려!”

그러나 백고운은 오직 이성한의 뒷모습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야!! 씨발 새끼야, 거기 서!! 야!! 너 내가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라고!!”

충혈 된 그의 눈에 핏발이 올라왔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그렇게 울부짖는 백고운의 모습엔 왠지 모를 처절함이 느껴졌다. 백고운의 목이 쉬기 시작했고, 천천히 힘이


빠졌다.

촬영장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뒤.

“······컷! 오케이!”

김건이 외쳤다.
출연 배우들, 스태프들이 참았던 숨을 그제야 내쉬었다. 아무도 먼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방금 자신들이
뭘 본 거지?

그리고 김건은 찌릿찌릿 흥분이 도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폈다.

원래 ‘태웅’은 전형적인 지배자 캐릭터였다. 힘과 권력을 모두 가졌고, 언제나 남들 머리 위에 군림해야만


성이 차고, 그래서 자존심도 매우 강한 놈이었다.

그런데 먼젓번에 백고운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의 태웅의 모습에서 비애를 조금 더 넣어주면 더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어.

―비애?

―응. 예를 들면 태웅이 무릎을 꿇는다거나.

처음에 김건은 그게 원래의 ‘태웅’ 캐릭터와 반대되는 모습이라 생각했다. 태웅은 고작 몰락한 것으로 타인에게
용서를 구할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백고운의 말은 달랐다.

―태웅이 참회한 모습을 보여주자는 얘기가 아니야. 내 말은, 인물이 자신의 성격과 반대되는 짓을 할 때 그
인물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인다는 얘기였어. 한 번도 누구 앞에 무릎 꿇어본 적 없는 태웅이 완전히 몰락해서
무릎까지 꿇는다면, 완전히 밑바닥에 떨어진 모습을 훨씬 잘 보여줄 것 같거든.

그게 백고운이 말한 ‘비애’였다.

그리고 그의 말이 맞았다.

백고운이 방금 보여준 태웅 모습은, 원래의 캐릭터보다 10 배, 아니 100 배는 더 강렬했다.


김건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장면 하나를 찍었단 것을 말이다.

김건은 차오르는 뿌듯함에 남몰래 씩 웃었다.

‘그래, 저게 바로 내 친구 김철수지!’

포문을 열어젖히다
41.

시간은 빠르게도 흘렀다.

영화 <친구들>의 촬영이 끝났을 즈음, 드디어 영화 <해수>가 개봉했다.

<해수>는 개봉과 동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거장 유명한 감독의 차기작이라는 이름값도 한몫 했지만, 영화 자체도 대중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었다. 따듯한
감동 스토리인데, 마지막에는 과하지 않게 눈물을 짜낼 신파도 있었다. 인기가 없기가 어려웠다.

영화를 보고 온 대중들은 인터넷에 높은 평점을 남겼고, 영화의 누적 관객수는 매일매일 기록을 경신했다.

당연히, 주인공 ‘해수’ 역을 맡은 백고운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그만큼 높아졌다.

특히 많은 여성 팬들이 백고운의 외모에 열광했다. 꽃미남이라느니, 소년미라느니, 그런 수식어들이 백고운을


따라다녔다.

몇몇 남성들이 질투의 시선을 보냈다.


“걔는 얼굴 아니면 볼 것 없지 않냐? 연기를 그렇게 잘하는 것도 아니던데”라는 폄하의 말이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왔을 때였다.

<해수>가 개봉한 지 바로 두 달 만에 <친구들>이 이어서 개봉되었다.

사람들이 또 한 번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영화 <친구들>의 주인공은 이성한이었는데, 뜻밖에도 그 영화의 최대 수혜자는 백고운이었다.

백고운이 맡은 ‘태웅’은 악역 캐릭터로, 비중이 낮은 조연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영화를 보고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와, 백고운 연기 진짜 잘하더라”라는 말을 했다.

그만큼 백고운이 보여준 약 빤 연기는 모두의 뇌리에 남을 정도로 강렬했다. 그야말로 씬 스틸러였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들>이 개봉하기 바로 몇 달 전에 영화 <써니>가 개봉돼 극장가를 휩쓴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영화에는 본드를 한 악역 캐릭터가 나오는데, 그 배역을 맡은 배우분이 연기를 아주 실감나게 잘 해서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라고 회자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영화에 이어 <친구들>에서도 백고운이 약 빤 악역 연기를 아주 잘 소화해낸 것이었다.

사람들은 두 영화를 비교하며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배우들 이제 한 번씩 마약 연기해야 할 듯ㅋㅋㅋ 완전 연기력 증명하는 인증 시스템임ㅋㅋㅋ

백고운의 연기력에 대해 의심하는 목소리들이 사라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그 해 백고운은 다수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었다.

“제 31 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남우상 수상자는 영화 <해수>의 백고운 배우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제 48 회 대종상 남우조연상 수상자는 영화 <친구들>에서 태웅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쳐주신 백고운 배우입니다.


수상을 축하합니다!”

언론은 앞다퉈 백고운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다.

―[인터뷰] 충무로에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배우 백고운, 인기의 비결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 좋은 기회 주신
분들 덕분.”

―백고운의 다음 차기작은? 모두의 관심 집중 돼···. 소속사 측. “내정된 작품 있어. 추후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이제 백고운의 시대가 열리나··· 지금 영화계와 방송계는 백고운의 행보에 주목 중.

대중들의 반응 역시 뜨거웠다.

[영화 보면서 잘 안 우는 편인데 눈 퉁퉁 부어서 극장 나왔습니다. 영화 <해수> 보러 가는 사람들 휴지


필참하세요]

[님들 영화 <해수> 대부분이 배우들 애드리브래. 감독님 인터뷰 보다가 깜짝 놀랐음. 기태성이야 짬이 있으니
그렇다 치는데, 백고운 얘는 데뷔한 지 1 년도 안 되지 않았음? 진짜 미친 듯;;]

[아 솔직히 태웅 캐릭터 진짜 싫은데 본체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나도 모르게 극장에서 소름 돋았어... 젠장


분하다...――]

[백고운 배우 <운명의 표현> 때부터 봤던 찐팬입니다.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 백고운 배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팬카페 가입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베라 31 만큼 다양한 매력을 갖고 있는 백고운 배우에 입덕해보세요.
츄라이 츄라이!]

2011 년.

그 해는 훗날 명실상부 국내 원탑 배우라고 불리는 백고운의 연기 인생이 본격적으로 포문을 열어젖히는 해였다.


*

영화 <친구들> 팀은 오랜만에 모여서 회식 자리를 갖는 중이었다.

“고운이는 아직인가?”

김건의 물음에 조연출이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까 연락 받았을 때 9 시까지 온다고 했어요. 지금 8 시 반이니까 30 분 정도 뒤에 오겠네요.”

김건이 양 손으로 턱을 괴곤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그가 징징거리듯 투덜거렸다.

“얼른 오지. 나 심심한데.”

“스케줄이 많으니까 어쩔 수 없죠. 지금 제일 핫한 배우니까요.”

조연출은 여상하게 대답하면서도 조금 의아하긴 했다.

둘 사이가 많이 좋아졌네.

다른 스태프들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다.

오디션 장에서의 일로 김건은 처음에 백고운을 꺼려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촬영장에 가보니 갑자기 둘이서 무슨 10 년 된 친구처럼 사이가 좋아져 있었다.

둘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뭐, 자세한 이유야 모르겠지만 지켜보는 조연출 입장에서야 심심하지는 않았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고 해야
할까.

특히 벌써 사십 줄에 들어선 김건이 이제 막 스무 살 된 백고운에게 착 달라붙어서 칭얼거리는 꼴은 제법 웃겼다.

그때, 입구가 시끄러웠다. 곧 백고운이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철······ 아니, 고운아!”

김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가 벌떡 일어나 손을 번쩍 들고 백고운을 향해 휘저었다.

“여기야, 여기!”

고개를 꾸벅거리면서 인사를 하던 백고운이 김건을 발견했다.

“아, 감독님.”

“여기 와서 앉아. 오늘 우리 또 한 번 끝까지 달려야지.”

“상관은 없긴 한데, 선희 씨···가 아니라, 사모님이 허락하셨어요? 저번에 같이 건강검진 결과 보고 술


줄이라고 그랬다면서요.”

“어, 싹싹 빌어서 오늘은 허락 받았어. 대신 내일부터 금주니까 오늘 코가 삐뚤어지게 마실 거야.”

백고운은 그런 얘기를 김건과 하면서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어놓았다.

그리고 조연출은 그런 둘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재미있는 건, 김건이 젊게 사는 건 둘째 치고, 백고운 역시도 김건에게 꽤나 격의 없단 점이었다.

아무리 배우와 감독이 친해도 보통은 약간의 위계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나이 차이가 큰 경우라면 더더욱.
그런데 김건을 대하는 백고운의 태도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지금도 보라. 백고운은 스스럼없이 김건의 아내의
이야기를 꺼내고, 김건 역시도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고 있지 않은가. 무슨 진짜 동갑내기 친구처럼 말이다.

‘참 신기하다니까.’

그때였다. 백고운이 막 의자에 앉으려던 차에 누가 그를 불렀다.

“어, 백고운?”

조연출과 김건, 그리고 백고운이 고개를 돌렸다. 이성한이 보였다.

이성한이 손을 닦으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딱 백고운이 도착한 타이밍에 잠깐 화장실을 가느라 자리를 비웠던
모양이었다.

“왔냐?”

“어, 왔다.”

“일로 와. 너 자리 잡아놨어.”

이성한이 고개를 까닥였다. 당연히 백고운이 자신 옆에 앉을 거라 여기는 듯한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백고운과 이성한은 촬영장에서 늘 밥을 같이 먹는 식사 메이트였다.

둘이 그다지 살가워보이지는 않았는데, 또 은근히 꼬박꼬박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 나름의 방식으로 친한 것 같긴


했다.

‘이쪽도 보기에 꽤 심심하지 않지.’


그나저나 어쩐다.

결과적으로 김건과 이성한이 둘 다 백고운에게 자신의 테이블에 앉으라고 러브콜을 보낸 그림이 됐다.

조연출은 한가롭게 생각했다. 밖에서도 인기 있더니, 안에서도 인기가 많네. 백고운의 선택은 어느 쪽이려나.

그리고 당사자인 백고운은 살짝 당황한 듯 자신의 외투를 걸친 의자를 가리켰다.

“어, 나 여기에 앉으려고. 먼저 와서.”

보통은 그게 상식적인 선택이었다. 둘 중에 특별히 더 친한 사람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면, 보통은 먼저 부른


사람 쪽에 앉을 것이다.

그런데 이성한은 눈을 끔뻑였다. 그러더니 곧, 조금 뚱해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닭발 시켜놨는데. 너 그거 술안주로 좋아한다고 해서.”

“······어?”

그때였다. 이번엔 김건이 지지 않고 백고운을 쳐다봤다.

“고운아, 우리 술 대작해야지. 내가 술 끝내주게 말아줄게.”

“······응?”

그 둘 사이에 낀 백고운은 이 상황이 그저 어리둥절한 듯했다.

김건과 이성한이 서로를 쳐다봤다. 시선이 파직 마주쳤지만, 둘 다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얼씨구.’
그 둘의 모습은 꼭 뭐랄까··· 인기 많은 한 친구를 두고 유치한 꼬마 둘이서 자기랑 놀자고 신경전 벌이는 모습
같았다.

한편 조연출은 생각했다.

‘근데 둘 중 한 명이 술잔 들고 자리를 옮겨서 그냥 셋이 다 같이 앉으면 안 되는 건가?’

하여간, 보고 있다 보면 심심하지는 않은 사람들이었다.

왜 다들 나보고 자기 테이블에 앉으라고 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내가 택한 건 이성한이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고, 그저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빈속에 술부터 들이붓기보다는 뭘 좀


먼저 먹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다시 잔을 들고 김건 쪽으로 갔을 때, 그는 단단히 삐쳐있었다. 어떻게 20 년 우정보다 10 개월 우정을


더 중요시 여길 수 있냐면서 말이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 선택이었던 거였나.

나는 여전히 잘 이해가 안 되었지만, 어쨌거나 김건이 하도 툴툴거리기에 기분을 풀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노력에 김건은 조금 마음이 풀린 듯, 마지못한 척 ‘흥’하면서 말했다.

“내가 봐 준다. 너 죽다 살아난 줄 알아. 내가 오늘 무슨 정보를 갖고 왔는지 알면 너 나한테 더 잘 보였어야


해.”

“정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얘기는 처음 듣는 건데.

“무슨 정본데? 뭐, 작품 관련 된 거야? 근데 나 차기작 이미 정해져 있어서 당장 뭐 들어갈 수는 없는데.”

보통 배우에게 ‘정보’라고 한다면 감독이나 PD 가 어떤 작품을 기획 중이란 소문 정도에 가까웠다.

배우가 그 소문을 듣고 그들에게 프로필을 한 번이라도 더 내밀면 작품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도 하니까.

그런데 김건이 뜻밖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건 아니야. 뭐··· 관점에 따라서 별 것 아닌 정보일 수도 있고. 근데 너한텐 중요할걸?”

“뭐야, 사람 궁금하게. 뭔데?”

그리고 김건의 이어진 말은 좀 뜬금없었다.

“걔가 온대.”

“아니, 걔라고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듣느냐고 말하려했다. 그런데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오용호. 걔가 온대. 이번에 귀국한다더라.”

나는 놀라 눈을 끔벅였다.

······뭐?

*
평일 낮, 인천공항.

입국수속대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낀 한 남자가 캐리어를 끌고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그가 바로 오용호였다.

지나가던 사람들 몇몇이 그를 알아보는 눈치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사람 오용호 아니야?”

“배우 오용호? 어, 진짠가? 닮은 것 같긴 한데···. 근데 주변에 기자 같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럼 아닌가 보네. 좀 많이 닮은 사람인가보다.”

그들은 긴가민가했지만, 배우 오용호가 혼자 비밀리에 입국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가자, 늦었다’하면서 바삐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오용호는 공항에 우뚝 서서 잠시 주변을 휘 둘러봤다.

몇 년 만에 밟아보는 고향의 땅인지. 긴 타향살이 동안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그때였다. 오용호의 시선이 그때 공항 한쪽에 있는 LED 광고판에 닿았다.

<해수>라는 영화의 광고인지, 포스터 이미지가 대문짝만하게 보였다.

유명한 감독이라는 글자가 먼저 들어왔다. 유명한 감독은 오용호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 영화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남자― 포스터 한가운데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완전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때 지나가던 여자 관광객이 그 포스터를 보며 ‘꺅’, ‘백고운 배우네’하면서 잠깐 호들갑을 떨었다.

꽤 인지도 있는 배우인가?

물론 오용호야 알 수 없었다. 그는 지금에야 막 한국에 귀국한 사람이었으니까.

오용호에게 있어서 한국, 하면 바로 떠오르는 대표적인 배우는 딱 한 사람뿐이었지만··· 지금의 한국에는 그


사람이 없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 세상에도 없는 거였지만.

오용호는 중얼거렸다.

정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많이도 바뀌었네.”

오용호
42.

가을이 지나고 어느덧 겨울로 접어드는 무렵이었다.

오랜만에 극단 ‘왕국’에 도착했을 때,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민하나였다.

그녀도 나를 발견했다. 그녀가 이쪽으로 총총 다가오며 반갑게 인사했다.

“고운 씨, 안녕하세요!”

“하나 씨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그때 민하나가 빙그레 웃었다.

“에이, 저는 그 동안 고운 씨 많이 봤어요.”

“네?”

“영화 개봉했잖아요. 저 <해수>랑 <친구들> 둘 다 극장에서 봤어요. 참, 연기 엄청 잘 봤어요. 너무 좋아서 몇


번이나 관람할 정도였다니까요.”

아, 그 얘기였구나. 나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하하, 감사해요. 그보다 하나 씨도 대단하던데요. 들어오는 길에 들었는데, 1 군 소속 배우 중


최연소라면서요?”

이번엔 민하나가 멋쩍게 볼을 긁을 차례였다.

“벌써 들으셨어요? 네, 뭐··· 하하. 그렇게 됐어요. 운이 좋았죠.”

“무슨요. 하나 씨가 열심히 노력하셨으니 그렇게 된 거죠. 저번에 같이 무대 서실 거라고 하시더니, 진짜로 약속


지키셨네요. 멋져요.”

“어머, 알고 계셨어요? 그때 저 2 군이었던 거?”

“음··· 잘은 몰랐고, 대충은요.”

극단 왕국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었다. 1 군만이 무대 위에 오를 수 있는 배우고, 2 군은


연습생 같은 거라고.

저번에 헤어질 때 민하나는 같이 무대 서자는 말을 꽤나 비장하게 했다. 그래서 어딘지 그러지 않았을까 어림잡아
추측했을 뿐이었다.

저번에 봤을 때 2 군이었는데 1 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땐 1 군이 되어 있었으니, 그 사이 민하나가 열심히 살았단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최연소라고 하니, 잘은 몰라도 대단한 일이지 않겠는가.
민하나는 볼을 붉히며 웃었다.

“부끄럽네요. 제가 1 군 중 최연소긴 한데, 이번 공연에는 저보다 어린 배우들도 있긴 해요. 이번 공연에는 극단


소속 배우만 올라가는 건 아니라서요. 외부에서 섭외된 배우들도 꽤 있어요.”

“아, 들었어요. 극단 50 주년이라서 이번 정기 공연은 스케일이 엄청 큰 공연이라고요. 그래도 설마 <레미제라블


>일 줄은 몰랐지만요.”

“그러니까요. 저도 놀랐잖아요.”

우리 둘은 말을 멈추고 잠시 감흥을 느꼈다.

그래, 이번에 극단 왕국에서 올리는 작품은 무려 <레미제라블>이었다!

처음엔 놀랐지만, 생각해보니 왜 최호랑이 그 작품을 선택했는지 납득 가능했다.

<레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가 1862 년에 출간한 소설로, 내년인 2012 년에 정확히 150 주년이 된다.

그러니 2011 년인 겨울인 지금부터 작품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2012 년에 누구보다 빨리 <레미제라블>의 150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레미제라블>의 150 주년을 준비하는 건 우리 공연계 뿐만은 아닐 것이다. 출판계나 영화계
쪽에서도 바쁠 것이다. 올해 완역서를 낸다거나 리메이크를 찍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어쨌거나, 민하나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라인업이 대단해요. 1 군 배우 쪽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외부에서 섭외된 배우가 기대주거든요.
고운 씨가 하나고, 나머지 한 명이···. 아. 고운 씨도 알고 계시겠구나.”

그녀가 ‘아차’했고,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단장님께 들었어요. 오용호 배우가 참여한다면서요?”


그가 귀국한다는 얘기를 김건에게 들었을 때도 놀랐지만, 그가 몇 년 만에 귀국해서 처음 들어가는 작품이 바로
우리 <레미제라블>이라는 걸 알았을 땐 정말 놀랐다. 우연치곤 공교로웠다.

오용호는 전생의 나, 그러니까 김철수인 나와 인연이 조금 있는 배우였다.

‘아니, 그걸 인연이라고 할 수 있나? 음, 모르겠네.’

오용호는 좀······ 특이한 놈이었다. 유별난 놈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민하나가 물어왔다.

“고운 씨, 혹시 긴장하셨어요?”

어라. 티가 났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네, 뭐···. 조금요.”

“에이,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이런 말 주제넘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고운 씨가 연기 더 잘하는 걸요.”

“아··· 하하. 네, 감사합니다.”

민하나는 내가 오용호와 경쟁하는 것에 긴장을 느끼는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내가 긴장한 건 오용호 그 놈 그 자체였다.

‘그 녀석 의외로 감이 좋단 말이지. 내가 김철수인 거 알아볼지도 모르겠는걸.’

뭐······ 사실, 들켜도 딱히 상관은 없긴 했다. 그냥 좀 귀찮아지긴 하겠지만.


그때, 때마침 문이 열렸다.

모여서 저마다끼리 담소를 나누고 있던 극단 소속 배우들이 대화를 멈추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당 안으로 최호랑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리고 한 남자가 그런 최호랑의 뒤를 따라 여유롭게 같이 들어왔다.

바로 방금 전까지 우리가 얘기하고 있던 바로 그 사람, 오용호였다.

최호랑이 우리를 둘러보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모두 오랜만이네. 잘 지냈습니까?”

“네, 단장님. 안녕하세요!”

“그래,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여기는 배우 오용호 씨입니다.”

“안녕하세요.”

오용호는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고, 우리 역시 인사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우리를 가볍게 훑어보던 오용호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

“······.”

오용호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결국 내가 먼저 슬쩍 시선을 피했다.

뭐야, 설마 벌써 들킨 건 아니겠지?
*

공적인 자리라서 표정관리는 하고 있었지만, 사실 오용호의 지금 기분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오용호는 귀국한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옅은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면 여기에는 더 이상 김철수 배우가 없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한없이 길게 말할 수 있지만, 그냥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김철수는 오용호가 유일하게 존경했던


배우였다.

오용호는 아주 옛날에 김철수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했다.

어린 아이들이 꿈을 가지는 경위가 대부분 비슷비슷하듯이, 오용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김철수를 따라


연기를 시작했다.

말하자면 김철수는 오용호의 롤 모델인 셈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롤 모델이 있는 사람들은 한 번씩 그런 욕망을 품기 마련이다.

언젠가 내가 저 사람을 넘어보고 싶다.

그건 오용호라고 다르지 않았다. 꺼릴 것도 없었다. 프로의 바닥에선 연차의 차이만 있을 뿐, 다 같은


배우였으니까.

그래서 10 년 전 쯤, 오용호는 김철수에게 같이 연기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사실 말이 부탁이었지, 그 당시 오용호의 태도는 거의 도전장을 내미는 꼴이었다.


그때 오용호는 한창 잘나가던 때였고, 연기를 잘한다는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세상에서 제일 제가 잘난 줄
알았다.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성격 좋기로 유명한 김철수는 기꺼이 건방진 후배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오용호는 처음으로 패배감을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도 연기력이 많이 늘어서 이제는 조금 김철수와 동급으로 쳐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비교할 수도 없는 압도적인 차이였다.

오용호는 그 후에도 몇 번이고 김철수에게 같이 연기해 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오용호는 그때마다 매번 졌다. 물론 연기에 이기고 지는 건 없다지만, 매 순간 패배감을 느꼈으므로 그는


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중에는 오기가 들어서 이를 악물고 도전했다. 딱히 결과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데 자신이 하도 귀찮게 굴었는지 김철수가 어느 순간 “나 말고 더 잘하는 배우들 많으니까 그런 사람한테


해달라고 하는 건 어때?”라고 넌지시 말해왔다.

물론 국내에서 김철수보다 더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는 없었다. 오용호가 생각하기에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끈질기게 졸랐다.

―전 선배님과만 하고 싶은데요.

―너도 네 작품 해야지···. 언제까지 나랑만 할 순 없잖아.

―제가 귀찮아서 그러신가요?


김철수는 뜨끔한 표정이었고, 오용호는 굳게 다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선배님과 조금이나마 대등해지기 전까지는 찾아오지 않을게요.

김철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뭐······ 그래라. 근데 그 대등의 기준이 뭔데?

―선배님은 뭐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응? 나? 내가 대답해야 하는 거야?

―네. 선배님이 말씀해주세요.

오용호는 말해주기 전까지는 물러나지 않겠단 태도였고, 김철수는 결국 대충 떠오른 대로 말한다는 듯 대답했다.

―음··· 글쎄, 칸? 나는 그래도 칸에는 한 번 가봤으니까. 뭐, 상은 못 탔지만.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오용호는 비행기 타고 외국으로 날아갔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활동해 칸에 가는 것보다는 아예 외국에서 시작해 칸에 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용호의 목표는 칸에 단순히 참석만 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칸에서 상을 탈 생각이었다. 그 정도는 해야


그나마 김철수의 호적수라 명함을 내밀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선 아무리 유명한 배우라고 해도, 동양인이 외국에서 곧바로 비중 있는 역을 맡기는 어려웠다.
오용호의 선택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 미친 짓을 오용호는 해냈다.


몇 년 전쯤, 그는 영국의 시즌제 드라마에 운 좋게 캐스팅 됐다. 그리고 더 운 좋게도, 그 드라마가 대박이 났다.

오용호는 그 다음 시즌에도 참여했고, 외국의 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몇 년을 버티며 외국의 영화
관계자들에게 얼굴을 알렸다.

그맘때, 김철수가 얼굴에 화상을 입으며 연예계를 은퇴했다는 소식을 듣긴 했다.

그러나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얼굴에 화상을 입어도 그 연기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김철수가 죽었다는 사실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건 아예 오용호가 그와 겨뤄볼 기회 자체가 사라졌단 뜻이었다!

김철수의 사망소식을 들었을 때는 너무 늦은 뒤였다. 오용호가 잠깐 한국에 들렀을 땐 장례식이고 뭐고 다 끝나


있었다.

그는 충격에 빠졌지만, 아직 드라마의 시즌이 끝나지 않았기에 마무리하러 다시 영국에 가야 했다.

그리고 드라마가 끝난 후에는 한국에 오고 싶지 않았다. 한 가지 목표만 보고 달렸는데 그 목표가 갑자기 사라진
느낌이었다.

오용호는 쉬어가는 타임으로 잠시 방황했다. 소속사 측에서도 휴식을 권유했기에, 오용호는 내친 김에 1 년 동안


세계여행을 다니며 몸과 마음에 휴식을 취했다.

세상은 넓었고, 외국으로 시선을 넓히자 김철수의 말대로 연기 잘하는 사람은 꽤 많았다. 그 생각은 다시 새로운
동기가 되어주긴 했다. 그러나 마음 속 한 구석에는 아직도 헛헛함이 남아 있었다.

그때, 소속사 측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에 극단 왕국에서 <레미제라블>을 올린다고. 너 여기 주연 해보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고.
그래, 그건 맞았다.

왜냐면 오용호가 김철수의 연기를 봤던 게 바로 <레미제라블> 공연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 그 무대는


이렇게 큰 데가 아니라 학교의 작은 공연장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김철수를 이기겠다는 것만큼 큰 목표는 아니었지만, 이것 역시 오랜 목표였기에 오용호는 외국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다시 한국으로 날아왔다.

그런데 막상 이리 와 보니 다 고만고만했다. 눈에 띄게 특별한 아우라를 뿜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오용호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심드렁해졌다.

근데 그때, 오용호의 눈에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저번에 공항에서 영화 포스터로 봤던 그 남자였다.

이름이 아마······ 백고운이라고 했던가?

자신은 그 영화를 안 봤는데 소속사 사장님이며 주변에서 계속 저 배우가 그렇게 연기를 잘한다고 떠들어댔다.
오랜만에 오용호 그의 호적수가 나타났다면서.

오용호는 백고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데 그가 기가 눌렸는지 먼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오용호는 속으로만 ‘흐음―’ 소리를 냈다.

‘딱히 기대는 안 되는데.’

그리고 백고운이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오용호의 호적수가 되는 날은 없을 것이다.

오용호가 롤 모델이자 라이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오직 단 한 사람, 김철수 하나뿐이었으니까.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용호는 저 백고운이란 배우가 제 기대를 배반하고 연기를 잘해줬으면 싶었다.

목표를 잃어 모든 것이 지루해진 오용호에게 일말의 흥미라도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모작과 원작
43.

최호랑은 본격적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인사하죠. 나는 극단 왕국의 단장이자, 이번 <레미제라블> 공연의 총연출을 맡은 최호랑입니다.”

배우들이 박수를 짝짝짝 쳤다.

“여기 모인 분들은 아주 다양합니다. 우리 극단 소속 배우들도 있고, 아닌 분들도 계시죠. 연기를 막 시작한


사람도 있고, 반대로 10 년 넘은 분도 계시고요. 또, 연극만 하는 분들도 있지만, 아닌 분도 있습니다.”

최호랑은 말을 한 번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나 내 스타일을 아는 사람들은 이미 알겠지만, 나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 모두는 같은 무대에 지원하는 지원자일 뿐입니다. 즉, 배역 캐스팅은 오디션으로 정한다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내가 섭외한 분들 역시 이 조건은 동일합니다.”

배우들은 짧은 침음을 흘렸지만, 사실 이미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극단 왕국의 정기 공연 캐스팅은 늘 그런


방식으로 해왔다.

다만 이번엔 스케일이 큰 공연이니 만큼 외부 쪽에서도 최호랑이 섭외한 배우들이 있기에 그들은 이미 캐스팅이
내정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도 똑같이 배역을 두고 자리를 다퉈야 한다는 소리였다.


사실··· 명목상의 이야기이긴 했다. 최호랑이 섭외한 배우들은 아주 소수의 인원인데다가, 대부분은 이미
연기력이 보증된 유명 배우였기 때문이었다.

이를 테면 백고운이라든가, 오용호라든가.

그러니 그 나머지 자리를 두고 다른 사람들이 다퉈야 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서도 또 1 군의 대표 간판 배우들은 빼야겠지만. 그들 역시 극단 왕국에 적만 두고 있을 뿐, 영화나


드라마에도 얼굴을 비추는 배우들이라 사실상 외부의 배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오늘은 지원할 배역을 각자 고를 겁니다. 여기 있는 분 중에 <레미제라블>의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죠?


그럼 바로 하죠. 원하는 배역이 있는 곳에 가서 서 있으면 됩니다.”

최호랑은 미리 종이를 붙여놓은 벽을 가리켰다. 각각의 종이에는 ‘장발장’, ‘팡틴’, ‘코제트’, ‘자베르’
따위의 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위에 언급된 1 티어 배우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긴장된 침을 꿀꺽 삼켰다.

기실, 이 방식은 눈치 싸움과 다름없었다.

연극의 경우 한 배역 당 보통 적게는 한 명, 많게는 두세 명을 캐스팅한다. 그러므로 전략적으로 생각할 때,


사람이 몰리지 않는 배역을 지원하면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

뿐만 아니라, 1 티어 배우들이 어느 배역을 선택하느냐도 중요했다. 굳이 그들과 경쟁을 자처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들이 고르는 배역을 피하는 게 좋았다.

물론 그들이 정할 배역은 대충 정해져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배역을 고르라는 최호랑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용호는 곧바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장발장’ 앞에 섰다.

모두가 예상한 바이긴 했으나, 너무도 당당해 약간은 오만하게 보일 정도였다.

자기 아니면 누가 주인공을 하겠어, 그런 뉘앙스가 있다고 해야 하나. 당연한 걸 뭘 물어, 이런 느낌?

‘그래도 용기가 대단하네. 아직 서른밖에 안 되지 않았나? 장발장을 하기엔 나이가 어릴 것 같은데.’

다른 배우들이 최호랑을 흘금 바라봤다. 최호랑은 그들의 눈치를 기민하게 알아채고 말했다.

“배역을 결정하는 데에 나이, 성별, 신체 사이즈는 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분장팀이 해결해 줄 겁니다.


하지만 배우의 연기력은 분장팀이 해결해 줄 수 없죠. 그래서 저는 오직 ‘연기력’만 볼 겁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이 능력만 본다니, 원론적인 이야기였지만 동시에 파격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최호랑다운 말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걸음을 옮겨 배역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배우들은 자신과 어울릴 법한 배역을 고르는 경향을 보였다. 방금 전 최호랑은 연기력만 본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사람 심리란 게 있으니까.

그때, 나이가 좀 있는 50 대 중견 단원 한 명이 망설이다가 오용호 옆에 가서 섰다. 다른 사람들은 감탄하는


눈으로 그 단원을 쳐다봤다.

아마 그 단원은 장발장이란 캐릭터의 나이가 있으니 자신이 유리할 거라 여긴 모양이었다. 그래도 오용호와
경쟁하는 걸 택했단 점에서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모든 배우들이 다 배역을 골랐을 때.


딱 한 명만이 남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 한명에게 쏠렸다. 바로 백고운이었다.

그 순간 모두들 같은 생각을 했다.

‘백고운은 뭘 고를까?’

백고운만큼의 인지도라면 비중 있는 역을 골라야 마땅했다.

그러나 백고운의 나이대에 맞는 배역은 ‘마리우스’ 정도였다. 비중이 적다고는 하기에 뭣하나, 주연 캐릭터는
아니다.

물론 최호랑은 방금 전 나이는 전혀 상관없다고 했다. 그러니 장발장을 고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른인 오용호까지는 어떻게 장발장을 연기해본다 쳐도, 이제 막 스무 살인 백고운이 장발장을 하기엔
너무 무리가 있지 않은가?

모두들 그런 생각을 하며 백고운의 선택을 궁금해 할 때였다.

백고운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도착한 곳은―.

“······!”

장발장 역이었다.

그 역시 너무나 당연하단 듯 주인공을 택했다. 아까의 오용호와 마찬가지로.


최호랑이 만족스럽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하여 주인공인 장발장 자리를 두고 백고운, 오용호, 그리고 50 대 중견배우의 3 자 대결이 시작된 셈이었다.

오디션 볼 배역을 정한 바로 다음 날.

나는 모교인 중양대에 가는 중이었다.

‘레미제라블이라······.’

버스 창문 너머 풍경을 뜻 없이 구경하며 나는 잠깐 추억에 잠겼다.

때는 바야흐로 20 년 전, 내가 중양대 연영과 새내기 시절이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오리지널팀이 한국에 내한 공연을 온 적이 있었다.

나와 김건은 그 공연을 공연장에서 직접 관람했고,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았다.

감동에 한동안 빠져있던 우리는 <레미제라블> 공연을 우리가 직접 연극으로 재연해보자고 충동적으로 뜻을 모았다.
그 나이대에 할 법한 행동이었다.

김건이 각색을 맡았고, 나는 주인공인 장발장을 맡았다. 우리의 행동에 관심을 보인 동기 몇몇이 합류했다.

그렇게 소규모의 동아리가 즉흥적으로 결성되었고, 우리는 학교의 작은 공연장을 빌려 자비 공연을 올렸다.

‘어설프게라도 따라 해보고 싶을 정도로 <레미제라블>의 감동은 대단했지. 영어라서 대사 반은 못


알아들었는데도.’
그런데 이번에 극단 왕국에서, 비록 연극이긴 하지만, <레미제라블>을 올리는 것이었다.

20 년 전에 그 공연을 어쭙잖게 따라했던 내가 지금은 <레미제라블>의 정식 무대에 오르게 된다니. 어딘지 운명


같다고 하면 너무 호들갑일까?

어쨌거나, 그래서 내가 지금 모교로 향하고 있는 것도 20 년 전 내가 했던 내 공연을 다시 보기 위해서였다.

그날의 그 공연은 찍어서 비디오 테이프로 동아리원 모두가 나눠가졌는데, 나는 화재로 그것을 잃어버렸고,
김건은 신혼집으로 들어갈 때 버렸단다.

이제와 다시 찾으려고 김건을 시켜 연락을 돌려보니, 유일하게 그것을 갖고 있는 동아리원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 친구가 바로 중양대 연영과에서 교수로 있다고 해서 나는 지금 모교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연락받은 교수 연구실로 찾아갔을 때였다.

“어?”

“응?”

나는 소파에 앉아있는 오용호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도 날 발견하고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때 친구인 교수가 안쪽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갖고 나오다가 나를 발견했다.

“어, 네가 혹시 건이가 말한 고운이니?”

“아, 네. 안녕하세요.”

“그래, 여기 이 친구도 이걸 보고 싶다고 찾아왔거든. 이게 내 추억이 담긴 거라 빌려주지는 못하고, 비디오실


열어줄 테니까 거기서 둘이 같이 보고 가렴.”
교수는 나와 오용호가 아는 사이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싶었다.

우리 둘은 비디오실에 같이 들어오게 됐다. 뭔가 서먹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내가 그를 꺼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 같이 공연에 오를 사이인데 계속 낯가리는 것도 좀 그랬다. 그래서 내가


먼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 안녕하세요. 오용호 씨를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오용호는 예의 바르게, 그러나 조금은 무성의하게 화답했다.

“저는 여기 졸업생이거든요. 이 무대도 직접 봤고요. 백고운 씨는 어떻게 알고 오셨죠?”

거기다가 대고 ‘내가 출연했으니까···’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한 번 김건을


팔아먹었다.

“친하게 알고 지내는 감독님이 이 무대 극본 쓰셨거든요. 레미제라블 공연 준비한다고 하니까 도움 될 거라면서


한 번 보고 오라고 했어요.”

물론 그런 이유는 전혀 아니었고, 그냥 한 번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

20 년 전의 내가 <레미제라블>을 어떻게 해석했고, 어떻게 따라했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근데 나야 내 연기를 복기하려 와봤다 쳐도, 오용호는 왜 굳이 이걸 보러 왔지?

이건 동아리 규모의 자비 공연이었을 뿐이고, 오리지널 공연은 시중에서 영상을 구할 수 있을 텐데. 연습하려면
그런 걸 보는 게 더 낫지 않나?
궁금해서 묻자, 오용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제가 이 공연을 보고 배우가 되려고 처음 결심했거든요.”

······응? 진짜?

내가 김철수인 시절, 오용호는 내가 롤 모델이라면서 졸졸 따라다니긴 했다. 그런데 개인사를 알 정도로 친하지는
않아서 이 무대가 계기였을 줄은 몰랐다.

‘신기하네.’

내가 오리지널 <레미제라블>을 보고 감명 받았고, 그걸 따라한 자비 공연을 보고 다시 꼬마 오용호가 감명 받아


배우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니.

재밌는 우연이다.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조용히 비디오를 시청했다. 장발장을 연기하는 풋풋한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오용호 역시 생각에 잠겨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같은 영상을 보고 우리가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단 것은 말이다.

일주일 뒤.
오늘은 저번에 각자 골랐던 배역의 오디션을 보는 날이었다.

비중이 비교적 적은 조연을 지원한 배우들부터 한 명씩 앞에 나와 연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걸 지켜보는 가운데, 오용호만이 홀로 자신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착각이 아니었어.’

몇 년 전, 오용호는 <레미제라블>의 원작 공연을 미국 본토에서 관람한 적 있었다.

분명 감동적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오용호는 그때 묘한 기시감을 느꼈었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며칠 전 모교에 연락해서 “고(故) 김철수 배우가 학창시절 <레미제라블> 공연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혹시
영상 기록이 있을까요?”하고 물어서 찾아갔었다.

거기서 오용호는 추억 속의 공연을 20 년 만에 다시 보게 됐고, 충격 받았다.

김철수는 원작 공연의 장발장 캐릭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똑같이 연기하고 있었다.

정말로 말 그대로 ‘똑같이’ 말이다.

개성이 없단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무리 같은 캐릭터를 연기한다고 해도 사람마다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한 사람이


같은 캐릭터를 연기한다고 해도 매 무대마다 조금씩 다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김철수는 정말로 그대로 완벽하게 똑같았다. 목소리 톤, 손짓, 표정의 강약이 원작의 장발장 캐릭터를
복사 붙여넣기 한 것 같았다. 기계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할 텐데, 김철수는 그걸 해냈다.

‘그러니 원작 공연을 봤을 때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모작은 필연적으로 원작의 감동을 따라잡지 못한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도, 모작이 원작과 완전히 똑같을 때가 있다. 그런 경우 오히려 원작을 봤을 때 더


심심하거나 아쉬움이 들 수도 있다. 원작에는 뭔가 더 특별한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오용호는 이미 김철수의 모작 연기를 보고 그 다음에야 원작 연기를 봤다. 당연히 기시감과 더불어 묘하게
심심하단 인상을 받았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20 년 전 오리지널팀이 내한 공연 왔을 때 며칠 안 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 공연을 다 봤다고 쳐도 몇 번이 한계다. 그러면 김철수는 고작 몇 번 본 것으로 그 연기를 똑같이 재연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실제의 김철수는 그 공연을 딱 한 번 봤을 뿐이지만, 지금의 오용호는 그것을 몰랐다.

허나 한 번이든, 몇 번이든, 대단하다는 건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서 도전의식이 발생했다. 바로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무려 스무 살의 김철수도 했던 일이다. 그러니 서른 살의 자신이 못할 리 없었다. 오용호가 진정 김철수의


라이벌이라고 자칭한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오늘 오용호는 그 누구보다 승부욕이 불타고 있었다.

김철수는 이제 죽어서 없지만, 오용호가 그를 넘었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오용호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가운데 순서는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마지막으로 ‘장발장’ 역의 차례만 남았다.

“자, 그럼 첫 번째 볼 사람은······ 오용호 씨?”

최호랑이 그를 불렀다.

오용호는 일어났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섰다.

관중들을 마주하고 섰을 때, 경쟁자인 백고운과 50 대 단원이 저를 지켜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오용호의 경쟁자는 그들이 아니었다.

오용호의 라이벌은 예전부터 오직 김철수 하나였으며, 그가 없어진 지금은 오용호 바로 그 자신이 유일한
경쟁자였다.

그러므로 오용호는 거침없이 연기를 시작했다.

장발장 연기
44.

( *작중에서 등장하는 ‘원작’은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이 아닌, <돌아온 천재배우>에서 언급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 오리지널팀의 공연’임을 밝힙니다. 또한 이 뮤지컬 <레미제라블> 역시 실제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는 매킨토시의 뮤지컬 <레미제라블>과는 상관없는 가상의 뮤지컬임을 밝혀둡니다.)
이번 연극을 위해 각색한 장발장의 서사는 간략히 이러하다.

그는 빵 하나를 훔친 죄로 19 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 그는 가난의 고통으로 지쳐있었다.

가진 게 없었기에 출소 후 그는 또 한 번 미리엘 신부의 은촛대를 훔치려 한다. 그런데 신부는 그 모습을


보았음에도 은촛대를 그냥 가져가라고 말한다.

장발장은 그의 따듯함에 감명 받고 회개한다. 그 이후 그는 열심히 노력하며 살고, 새 사람이 되어 선행을


베푼다.

오늘 보는 지정 연기도 바로 이 장면이었다. 미리엘 신부의 대사는 최호랑이 쳐주기로 했다.

최호랑이 먼저 신부의 대사를 치면서 연기의 시작을 알렸다.

“차린 게 비록 별로 없지만, 마음껏 드세요.”

가상의 무대의 시공간은 미리엘 신부네 저녁 식사 자리다. 신부 역시 풍족하지는 않지만 손님인 장발장을
대접하기 위해 정성껏 준비했다는 설정이다.

오용호의 장발장은 지친 탓에 전반적으로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그때, 식탁 위의 가상의 음식을 본 그의 눈에 언뜻 살쾡이 같은 번뜩임이 조용히 스쳤다.

그는 잠시 그 식사를 내려다보다가 식기를 이용하지 않고 손으로 빵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우걱우걱 집어먹었다.

굶주림이 느껴지긴 하지만, 동시에 너무 게걸스럽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오용호의 장발장에게는 아직 세상에 대한 불신과 경계심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보던 미리엘 신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목이 막힐까 염려되니 물을 좀 가져오겠습니다.”

그리고 신부가 잠시 자리를 비운 그때. 오용호의 눈이 식탁 가운데에 있는 은촛대에 닿았다. 그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였다.

그가 은촛대를 잡아챈 건 한순간이었다.

오용호는 벌떡 일어나 재빨리 무대를 벗어나기 위해 몸을 날래게 움직였다.

“이봐요!”

그때, 뒤에서 다급히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들킨 것이다.

오용호가 퍼뜩 몸을 멈추고 낭패감 어린 눈으로 돌아봤다. 그의 얼굴엔 두려움이 스치지만, 동시에 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여차하면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이곳을 벗어나겠다는 결심 같은 것이 보였다.

그러나 신부는 그 은촛대를 가져가라면서 다른 것도 더 얹어주겠다 말해온다.

“······!”

오용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발장은 이후 신부의 집을 나온다.

그러나 오용호는 몇 걸음 못 걷고 우뚝 멈춰섰다. 그의 얼굴은 조금 멍했다.


곧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것처럼 오용호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그는 수치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은촛대를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참혹히 중얼거렸다.

“아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가 그것들을 바닥에 툭 떨어트리고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가 고개만 들어 치켰다.

마치 신의 광휘가 그의 얼굴에 내리쬐듯 그는 허공의 한 곳을 바라봤다. 푹 꺼진 눈으로 그가 결연히 다짐하듯


말했다.

“······새 사람이 되리라. 더 이상 이렇게 살지는 않으리라.”

그건 도둑 장발장이 성인(聖人) 마들렌 시장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완벽하다.’

민하나는 감탄했다.

오용호가 보여준 장발장은 그야말로 완벽하다고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장발장’이었다. 어떤 캐릭터의


이데아라는 게 있다면 그것을 그대로 베껴내서 꺼내놓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이야기 전개는 원작과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실제로는 은식기를 훔친 장발장이 순경에게 잡히고, 미리엘
신부가 자신이 은식기를 준 것이라고 말하면서 은촛대를 얹어준다. 그러나 이번 연극은 러닝타임 때문에 각색이
많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릭터 자체는 원작 그대로의 장발장 느낌이었다.
대사도 별로 없었는데 표정만으로 장발장의 고뇌와 괴로움이 다 느껴졌다. 원숙한 감정 표현 연기가 훌륭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것은 민하나뿐만은 아니었다. 다른 단원들도 ‘와···’하는 감탄 어린 눈으로 오용호를


바라봤으니까.

오용호가 들어가고, 이후 두 번째 차례로 50 대 단원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오용호와 비슷한 연기를 펼쳤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또 도둑질을 하다니!”

그러나 오용호가 오직 대본에 적힌 대사만을 절제 있게 뱉었다면, 그는 대본에 적혀있지 않은 말까지 덧붙이면서


간간이 애드리브 쳤다.

아마 앞선 오용호의 연기와 차별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효과는 좋지 않았다.

삶에 찌든 장발장은 무뚝뚝하고 경계심이 많은 편이었는데, 말수가 많아지자 그 매력이 반감되었다.

오히려 오용호의 연기를 의식한 것 같은 그의 초조함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두 명의 연기가 끝났다.

오용호는 완벽하게 장발장의 모습을 연기해냈고, 50 대 단원은 그와 비슷한 장발장을 흡사하게 구현해내긴 했지만
조금 밋밋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백고운의 차례만이 남았다.


이제 그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민하나를 비롯한 다른 단원들 모두가 백고운을 기대감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한편 나는 좀 놀랐다.

‘······설마 내가 했던 연기를 그대로 따라했을 줄이야.’

오용호가 보여준 장발장은 20 년 전에 내가 했던 장발장 연기와 똑같았다.

그게 나빴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오용호의 지금 연기가 더 세련되게 매끄럽다는 인상까지 있었다.

아무래도 20 년 전 그 당시의 나는 스무 살에 불과했고, 지금의 오용호는 서른 살이었으니까. 그러니 더 원숙한


연기인 게 당연했다.

사실 20 년 전의 내 연기는 원작을 무작정 따라한 모방 연기라, 어설픈 부분도 많았다. 비유하자면 내게 안 맞는


옷을 억지로 구겨 입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지금의 오용호는 따라 입되 자신의 몸에 가장 잘 맞게 수선해서 입은 느낌이었다. 그러니 훨씬 자연스러워


보였다.

아마 원작의 프로듀서가 봤다면 오용호를 한국어판 공연에 그를 캐스팅 했을 것이다. 그만큼 오용호는 장발장
같았다.

그때 최호랑이 날 불렀다.
“다음은 백고운이.”

이제 내 차례였다. 나는 일어나서 앞으로 나섰다.

앞의 두 사람처럼 나는 의자에 앉아 최호랑의 신호가 있을 때까지 대기했다.

그런데 그때, 최호랑이 바로 미리엘 신부의 대사를 치는 대신 내게 가볍게 물었다.

“고운이 긴장했나?”

나는 눈을 끔뻑이며 최호랑을 바라봤다.

“긴장 풀고 편하게 해.”

그제야 최호랑이 내 긴장을 풀어주려 이런 사담을 건네는 것임을 알아챘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의 선의가 고마웠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게 있다면, 나는 긴장하지 않았다.

왜냐면 내가 할 연기는 20 년 전과는 다른 장발장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내가 원작의 연기를 모방했을 땐, 나만의 해석도 뭣도 없었다.

‘내가 장발장이라면 어땠을까?’ 라든가, ‘왜 장발장은 이런 행동을 하는 거지?’ 라든가. 나는 이런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그냥 무작정 타인의 연기를 따라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제일 나다운 장발장을 연기할 셈이었다.

최호랑이 ‘준비 됐나?’라고 물었고, 나는 ‘네’하고 대답했다. 최호랑이 입을 떼며 천천히 미리엘 신부의
대사를 쳤다.

“차린 건 없지만···.”

그리고 내 연기가 시작됐다.

오용호는 사실 백고운이 앞으로 나설 때까지만 해도 큰 기대가 없었다.

그런데 백고운이 연기를 시작하며 표정을 확 바꾸었을 때였다.

그의 얼굴 근육이 축 쳐졌고, 동공에 빛이 사라졌다. 그러자 한순간에 피곤하고 음울한 얼굴이 되었다.

오용호는 아닌 척 했지만 내심 놀랐다.

그러나 백고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고맙소.”

그가 입을 열어서 처음 대사를 쳤을 때, 백고운의 원래 목소리인 고운 미성이 아니라 걸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

골초의 목소리가 저럴까. 잔뜩 쉰 목소리는 탁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내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성우들은 맡은 캐릭터마다 완전히 다른 음역대의


목소리를 왔다갔다하며 연기를 하기도 하지 않은가.

그러나 배우와 성우는 연기를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지만, 그래도 둘은 다르다. 특히 배우는 성우처럼
목소리의 음역대를 완전히 바꾸면서 연기하지는 못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말이다.

그런데 백고운은 지금 그걸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기가 어려웠다.

백고운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웅크리고 빵을 묵묵히 씹어 먹었다.

그러나 아까의 오용호가 굶주린 듯 빵을 우걱우걱 먹은 것에 비해, 백고운은 먹는 속도가 현저히 느렸다. 마치
체력이 떨어져 씹는 행위 자체가 매우 힘겨운 듯 보였다.

전반적으로 백고운의 장발장은 늙고 지친 모습이었다.

그때 미리엘 신부가 “목이 막힐까 염려되니 물을 좀 가져오겠습니다”라며 일어나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백고운의 시선도 식탁 위 은촛대에 닿았다.

백고운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은촛대와 부엌 안쪽을 번갈아보며 눈치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 망설임이 스쳤다.


그가 한참을 고민하고 머뭇거리더니 마치 강렬한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는 듯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그가 은촛대를 움켜잡고 재빨리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도둑이 흔히 그러하듯, 그는 긴장과 공포가 어린 얼굴로 빠르게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 했다.

“이봐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는 미리엘 신부에게 들킨다. 허나 신부는 장발장에게 은촛대 말고 더 가져가라고 말한다.

백고운은 은촛대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몇 걸음 걷던 그는 우뚝 멈춰 서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백고운은 살짝 대사를 바꿔서 쳤다.

그가 고개를 들더니 그 상태로 서서 잠시간 빈 허공을 쳐다봤다. 그의 표정은 멍했다.

곧 그도 아까의 오용호처럼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그는 양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얼굴을 푹 숙였다. 콩
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잠시 바르르 떨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

백고운의 연기를 지켜보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고개를 든 백고운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표정만은 깨끗했다. 마치 신의 은총을 받고 감화된 자만이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그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더니, 곧 속삭였다.

“······새 사람이 되겠소.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으리다.”

오용호는 놀랐다.

아까 오용호는 같은 대사를 비장하게 뱉었다면, 백고운은 훨씬 푸근한 음성으로 뱉었다. 그 목소리엔 어떤


괴로움도 없었고, 오로지 확신과 감사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느낀 건 비단 오용호만이 아니었다.

다른 단원들 역시 백고운이 보여준 색다른 장발장의 모습에― 그러나 어쩐지 매력적인 장발장의 모습에 충격에
빠져 있었다.

오직 단 한 사람, 최호랑만이 예상했다는 것처럼 씩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박수를 짝 쳐서 연기의 종료를 알렸다.

“좋아, 그만.”

그리고 최호랑은 갑가기 고개를 돌려 50 대 단원에게 물었다.

“아까 장발장을 연기할 때, 왜 그렇게 연기했습니까?”

그는 당황해서 그만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어, 원작 공연을 보니 그렇게 연기한 것 같아서요.”

솔직한 대답이긴 했으나, 적절한 답은 아니었다.

최호랑은 같은 질문을 곧바로 오용호에게도 던졌다. 그리고 오용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저는 장발장이 고작 빵 하나 훔친 걸로 19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것에 대해서 억울함과 분노가 많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부자들은 훨씬 더한 걸 해 처먹어도 너무 잘 살고 있으니까요. 그런 놈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은
상대적으로 깨끗하다고 믿었을 겁니다.”

오용호는 한 템포 쉬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미리엘 신부를 만나서 장발장은 처음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걸 직시했을 것 같았습니다. 그가 훔친 건
부자들의 물건이 아니라, 가난하고 착한 신부의 물건이었으니까요. 정당화할 무엇도 없었죠. 장발장은 처음으로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꼈을 겁니다. 심지어 그는 감옥살이를 한 후에도 또 도둑질을 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새
사람이 되려고 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속죄의 의미로요.”

“빵을 훔치고 19 년의 형을 산 것처럼?”

“네. 이번에는 은촛대였으니까 그보다 더 긴 시간인 평생을 바친 거죠. 물론 그 속죄는 타인을 위한


봉사였고요.”

오용호의 말에 단원들 모두가 놀란 눈빛이 되었다.

그래서 오용호의 장발장은 수도자(修道者) 같은 이미지였던 것이다. 자신의 죄를 십자가처럼 지고 묵묵히 속죄의
길을 가는 사람. 그게 그의 장발장이었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백고운에게 쏠렸다.

최호랑이 똑같은 질문을 마지막으로 백고운에게도 던졌다.


“아까 장발장을 연기할 때, 왜 그렇게 연기했나?”

그리고 백고운 역시 평온하게 대답했다.

“저는 19 년의 노역을 거치면서 장발장이 많이 지쳤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억울함이나 화를 낼 힘도 없어서


그저 안식만을 바랐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한 번도 장발장에게 따듯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기대가
없다면 애초에 배신감을 느끼지도 않죠.”

백고운이 이어 말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신부님이 따듯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저는 장발장이 진심으로, 마음 깊숙한 곳에서 감화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울었나?”

“네. 처음으로 느껴본 선의가 너무 따듯해서요. 감사함이 곧 존경이 되고, 동경이 되어 그 자신도 신부님처럼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오용호와 백고운 둘 다 ‘도둑이자 선인’으로 장발장을 연기한 건 맞았다.

그러나 둘의 해석은 완전히 달랐다.

오용호의 장발장엔 독기와 냉소가 서려 있는 모습이었다면, 백고운의 장발장은 훨씬 따듯하고 순수했다.

둘이 같은 인물을 연기한 거 맞아?

어떻게 해석의 차이로 이렇게 완전히 다른 사람을 연기해낼 수 있지?

모든 단원들이 경악에 차 오용호와 백고운을 번갈아 쳐다봤다.

둘 다······ 천재 아냐?
리허설 공연
45.

‘후회는 없어.’

남이야 어떻게 보든 말든 나는 속 시원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에 나만의 장발장을 연기한 건 튀어 보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오용호를 의식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와 차이점을 두려고 일부러 노력한 것도 아니었다.

저번에 영화 <해수> 오디션을 봤을 때 나는 전략적으로 캐릭터를 구상해 연기한 적이 있었다. 민하나와 달라


보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번엔 그것과는 달랐다. 이번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연기를 했다.

왜냐면 20 년 전의 나와 좀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땐 원작 공연의 감동이 너무 커서 소화고 뭐고 그저 그걸 따라 하기에 급급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철없고 미숙했지만, 또 젊은 혈기가 보여 괜히 풋풋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지난 후 자신이 했던 것을 돌이켜 볼 때 ‘아, 내가 왜 저랬지’하고 가끔 민망해지곤 하지


않은가. 나 역시 그랬다.

나는 만약 지금의 내가 20 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연기를 하고 싶을까 고민했다.

그래서 나온 답이 이것이었다.
시간여행을 할 수는 없지만, 이건 옛날의 내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결과와 상관없이 나는 만족했다.

“······‘코제트’ 역에는 민하나.”

최호랑은 캐스팅 된 사람들을 하나둘 씩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이 불린 사람들은 저마다 기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서 배역 이름이 적힌 곳에 가서 섰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장발장’ 역만 남았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와, 오용호, 그리고 50 대 단원에게 쏠렸다.

“장발장은 주인공 역이니만큼 배우의 캐릭터 이해도가 높아야 한다는 점을 봤습니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 모두 대충 결과의 당락을 짐작한 듯했다. 50 대 단원은 계속 불안한 표정이었다가 비로소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최호랑이 말했다.

“오용호 씨.”

오용호가 특별히 기쁜 표정도 없이, 당연하단 듯한 얼굴로 뚜벅뚜벅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장발장이 적힌 이름
쪽으로 향해 가서 섰다.

이전이나 그전이나 그는 참 당당했다.

그리고 최호랑이 이어서 입을 떼었다.


“······그리고 백고운.”

다른 배역들 중에서도 더블 캐스팅이 많았기에, 이상한 그림은 아니었다. 모두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 역시 감사한 마음으로 발을 떼려고 했다.

그러나 최호랑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둘의 캐릭터 해석이 많이 달라 관객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고 판단해 더블 캐스팅은 무리라고 결정 내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둘 중 한 사람만을 선택할 예정이에요.”

나를 비롯한 모두가 멈칫 했다.

네?

최호랑만이 혼자 여유롭게 말했다.

“또한 둘의 연기력을 비교했을 때 우위를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나는 원래 보기로 했던
연기력 외에 다른 것― 다른 배우들과의 합, 전체적인 조화, 무대 위의 장악력 등등을 함께 볼 생각입니다.”

우리 모두가 슬슬 눈치 채고 있었다. 설마?

“두 배우가 각자 장발장 역을 맡아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하면, 그걸 보고 나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투표로


장발장을 맡을 배우를 최종적으로 정하도록 하죠. 이례적인 일이지만 모두 양해해주시길 부탁합니다.”

그러니까 연극 러닝타임 전체를 오디션 볼 지정 장면으로 넓히겠단 뜻이었다. 그리고 우리 둘이 장발장을


연기하면 다른 배우들이 합을 맞춰줄 거고.

······그런데 그건 거의 리허설 공연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나와 오용호의 눈이 마주쳤다.

“······.”

“······.”

음,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최호랑은 임의로 두 팀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백고운과 오용호가 대본을 숙지할 수 있도록 2 주의 시간을 넉넉히
주었다.

2 주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오늘.

장발장 캐스팅을 두고 경쟁하는 마지막 오디션이 있는 날이었다.

민하나는 일찍 극단에 도착했다.

오늘은 평소 연습하는 강당이 아닌, 실제 공연이 올라가곤 하는 작은 공연장으로 향했다. 최호랑이 통 크게


빌려준 곳이었다.

민하나가 묵직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놀랐다.

“어? 고운 씨?”

“하나 씨. 일찍 왔네요.”
안에는 백고운이 있었다. 그는 무대 위에 서 있었는데, 허리를 굽히고 뭔가를 하고 있다가 민하나를 발견하고
허리를 폈다.

뭐하나 싶어서 가보니, 그는 동선을 표시해주는 테이프를 바닥에 붙이고 있던 중이었다.

“이거 하시려고 일찍 도착한 거예요?”

“네, 겸사겸사요. 저희 팀 순서가 먼저니까 미리 해놓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요.”

백고운은 별 것 아니란 듯 웃었다.

민하나 역시 연습하기 위해 제법 일찍 온 것인데, 백고운은 이미 한참 전에 도착해서 이런 것을 준비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민하나는 조금 혀를 내둘렀다.

‘성실하다고 해야 할지, 착하다고 해야 할지.’

물론 실제 공연이라면 동선이며 의상이며 조명이며 체크할 것이 많아 모두가 일찍 와서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그러나 이번에는 드레스 리허설도 아니고, 연습용 공연에 불과했다. 아니, 사실 공연이라고 하기도 뭣하고, 그냥
연습하는 모습을 남이 와서 구경하는 것에 가까웠다.

연기할 땐 독백이 아닌 이상에야 상대 배우가 대사를 받아쳐줘야 한다. 때문에 이번 오디션에서 보는 건 백고운과
오용호가 장발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하는 모습일 뿐이고, 다른 배우들은 그저 대사를 받아주는 역할에
불과하다. 그래도 너무 어설프게 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대략적인 동선 정도는 짰지만.

그런데도 백고운은 꼭 본 공연이라도 되는 것처럼 열심이었다. 나이가 적고 연차도 적다지만, 인지도로만 따지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상전일 텐데.

“고운 씨는 참 부지런하시네요.”
“저 때문에 다들 수고해주시는 건데 이 정도는 해야죠.”

민하나는 살풋 웃었다. 겸손한 척 한다기보다, 정말로 진심으로 하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러니까 당연히 고운 씨 팀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그랬다.

실은, 지난 2 주 동안 민하나는 백고운 팀과 오용호 팀을 모두 살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코제트 역에는 민하나 혼자 캐스팅 되느라 두 팀 모두에 참여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민하나는
2 주 동안 두 팀을 왔다갔다하면서 연습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민하나는 동시에 두 팀의 연습에 참여할 수 있었기에 분위기를 대충 비교할 수 있었다.

백고운 팀은 확실히 분위기가 좋았다. 팀원들 모두가 사이가 좋았고, 연습 역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진행됐다.

그리고 그건, 민하나가 볼 때, 백고운의 성격 덕이 컸다.

백고운은 연극판에서 몇 십 년은 굴러본 것처럼 능수능란하게 연습을 진두지휘 했고, 그러면서도 전혀 권위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시종 살가운 태도로 팀원들을 독려했다.

솔직히 말하면, 다른 팀원들의 입장에서 이건 그다지 득 될 것 없는 연습이었다. 물론 여기서 잘하면 최호랑의


눈에 띌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효과일 뿐이었고, 이 공연의 목적 자체가 장발장을 연기하는 배우를 뽑기 위해
경쟁하는 것 아니던가.

그래서 팀원들 입장에선 자기들은 이미 캐스팅이 확정된 마당에 추가적으로 이런 연습을 하는 것이 불만스러울
수도 있었다.

백고운은 그걸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의식하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팀원들에게 꼬박꼬박 감사를 표했고,
너무 잘하고 있다고 끊임없이 칭찬과 감탄을 남겼다.

그러니 처음엔 미적지근했던 팀원들도 나중에는 이 연습이 그저 순수하게 즐거워졌는지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좋다보니 연습 준비도 상당히 스무스하게 진행되었으며, 그 퀄리티도 당연히 좋았다.

그리고 반면 오용호의 팀은 그런 점에서 좀 묘했다.

분명 오용호 그 자신은 연기도 잘 했고, 연극 연출에 대한 기본은 있는 건지 무대 구성도 잘 만들었다.

그런데 뭐랄까··· 정말 딱 할 일만 한다고 해야 할까.

연극은 기본적으로 조별과제에 가깝다. 달리 말하자면 조장이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뜻이다.

오용호는 그런 면에서 조장 감은 아니었다. 그는 와서 오직 연습만 했고, 사담도 전혀 나누지 않았다.

그는 다른 팀원들이 모두 어울리는 동안에도 홀로 표표히 떨어진 채 제 할 일을 했다.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는 방법을 모른다기보다, 애초에 친해질 노력 자체를 안 한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자신이 제일 잘났다는, 그런 고고함과 오만함이 있는 듯 없는 듯 배어있다고나 해야 할까. 다른 사람과 어울려야


할 가치를 못 느껴서 상대를 굳이 안 한다, 그런 느낌?
그래, 그의 태도에는 그런 묘한 느낌이 좀 있었다.

‘그게 또 공연에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연극은 혼자 잘한다고 다 잘되는 그런 작업은 아니니까 말이다.

“고운 씨, 저도 도와드릴게요.”

“아, 감사해요. 그럼 이거 테이프 가위로 좀 잘라줄래요?”

민하나는 무대 위로 폴짝 올라갔다. 그리고 백고운을 도와주면서 생각했다.

‘고운 씨가 뽑히면 좋을 텐데.’

누구의 연기가 더 낫다 아니다를 떠나서, 자신은 그냥 백고운이 더 좋았다.

편파적이라고 해도 어쩌겠는가. 원래 팔은 안쪽으로 굽는 법이다.

몇 시간 뒤.

두 팀의 배우들이 모두 모였다.

그리고 최호랑을 비롯한 임시 심사단도 도착했다. 이번 공연을 기획한 프로듀서, 제작사 관계자들, 그리고
연극계 인사 몇몇이 참석했다.

“그럼 시작하죠.”
최호랑이 말했고, 백고운 팀이 먼저 시작했다.

연극 처음부터 끝까지를 한 번에 쭉 보다보니, 확실히 백고운의 장발장이 원작보다 훨씬 부드러운 캐릭터라는 게


더 잘 드러났다.

백고운은 테나르디에 부부에게서 코제트를 빼내오면서 눈물을 흘렸다.

“내가 너를 꼭 책임지마.”

그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어린 코제트가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에 대한 충격, 또 그것을


몰랐다는 사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백고운은 그런 연기를 대본을 따로 보지 않고 했다. 2 주 만에 대사를 통째로 외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팀원들 역시 대략적인 대사는 외웠는지, 대본을 아예 안 들고 합을 맞춰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자 전반적으로 진짜 공연 같은 느낌이 살았다. 여기서 의상과 분장, 조명만 있다면 거의 본 공연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백고운의 차례가 끝나고 이어서 오용호의 차례가 되었다. 그의 팀이 무대에 올랐고, 오용호가 연기를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오용호 팀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이 무언가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라, 이거······.’

왜냐면 두드러지게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앞선 백고운 팀 배우들은 대부분 대본을 보지 않았는데, 오용호 팀은 오용호를 제외한 전원이 대본을 들고 연기를
했다. 심지어 오용호 팀의 팀원 몇몇은 대본을 보고 읽는 것에 불과했는데도 대사를 더듬기까지 했다.

앞의 백고운 팀에 비하면 확실히 이쪽 팀이 덜 연습되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오용호 그 자신은 그런 팀 분위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용호의 연기에는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았고, 팀원이 버벅거리건 말건 저 자신만 잘하면 된다는 태도로
시원시원하게 연기를 계속 했다.

그리고 오용호의 장발장은 백고운과 비교했을 때 많이 달랐다.

그는 코제트를 구출할 때 훨씬 무거운 목소리로 “내가 너를 꼭 책임지마”라고 대사를 쳤다. 아이를 떠맡게 된
것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묵직한 책임감을 받아들이는 목소리였다.

백고운의 장발장이 기본적으로 정 많은 성정이었다면, 오용호의 장발장은 훨씬 신념이 강한 성격이었다.

물론 오용호 쪽이 훨씬 클래식한 장발장이긴 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묘한 구도가 됐다.

오직 백고운과 오용호 둘만 놓고 보자면, 대중에게 익숙한 캐릭터를 연기한 오용호 쪽이 더 유리했다.

그러나 공연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백고운 팀이 훨씬 더 높은 완성도를 보였다. 백고운은 함께 ‘극’을


만들면서 연기를 잘 해보였고, 오용호는 그저 자신 혼자만 연기를 잘 했다.

당연히 어느 한 쪽을 선뜻 택하기가 어려웠다.

“잠시만 상의를 하겠습니다.”


다른 심사위원들은 저들끼리 치열하게 얘기를 했다.

그런데 좀처럼 의견 차이가 안 좁혀지는지 상의가 점점 길어졌다.

어째야 하나 싶을 때였다.

그때, 가만히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만 있던 최호랑이 말했다.

“그러면 아예 투표를 해봅시다.”

합숙 연습
46.

최호랑이 투표를 하자고 했기에 심사위원단은 모두 종이를 적어서 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모든 단원들이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민하나는 궁금해져서 백고운과 오용호를 흘금 쳐다봤다.

백고운은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받아들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담담히 기다리고 있었고, 오용호는······.

그는 뜻밖에도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의외네. 바로 자기가 안 뽑힌다고 기분 상해할 줄 알았는데.’

그런 타입은 아닌가?

민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최호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개표하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최호랑이 들고 있는 종이들에 쏠렸다.

최호랑이 종이를 하나하나씩 펴서 거기에 적힌 이름을 읽기 시작했다.

“백고운, 오용호, 오용호, 백고운······.”

두 사람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민하나는 양 손의 손가락을 가만히 꼽으면서 표수를 셌다.

심사위원은 모두 10 명이었으므로, 한 명이 과반수를 얻게 되면 다섯 손가락이 부족해질 것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백고운.”

최호랑이 마지막 종이를 펼치고 이름을 부르자, 모두가 놀랐다.

“······!”

왜냐면 정확히 다섯 표 대 다섯 표였기 때문이었다. 민하나는 양 손을 모두 접은 채 조금 멍해졌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모두가 당황할 때였다. 최호랑이 ‘흠’하더니 말했다.

“그럼 이제 내 선택에 따라서 결과가 결정 나게 되는 거군요.”


아. 그렇다.

최호랑이 남아 있었다. 그 역시 심사단 중 한 명이었으니까.

모두가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깨달으며 최호랑을 주목했다.

“나는······.”

최호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연장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최호랑이 막 어떤 이름을 부르려고 하는, 그때였다.

“단장님.”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확 쏠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은―.

오용호였다.

그가 손을 들고 있었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용호는 담담히 물었다.

“혹시 지원할 역을 지금 바꿔도 됩니까?”


모두가 깜짝 놀랐다. 아니, 충격 받았다.

역을 바꾸고 싶다면, 장발장을 포기한다는 뜻인가?

최호랑은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금방 표정을 갈무리하고 물었다.

“무슨 역으로?”

“자베르 역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더니 오용호가 백고운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도 백고운 씨와 같은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 같은 역이면 함께 무대에 설 일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모두가 오용호의 생뚱맞은 말에 어리둥절해졌을 때.

오직 백고운 혼자만이 오용호의 눈빛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건 재미있는 상대를 만난 사냥꾼의 눈빛이었다. 거기엔 흥미로움과 투지, 호승심 같은 것이 뒤섞여 있었다.

백고운, 아니 김철수는 살짝 눈을 굴렸다.

‘······이런.’

그는 오용호의 저 눈빛을 알고 있었다.

김철수였던 전생에서 오용호가 그를 귀찮게 따라다니며 연기 같이 해달라고 졸라댈 때, 오용호의 눈빛이 딱 바로


저랬다.
오용호가 싫은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면 좀 부담스럽다.

백고운은 오용호의 뚫어질 듯한 시선을 모른 척 슬쩍 피했다.

주인공인 장발장까지 모든 배역의 캐스팅이 끝났다.

그리고 며칠 뒤. 기사가 나갔다.

[연극 <레미제라블> 공연 내년 상반기 개막. 초호화 배우 라인업, 백고운‧오용호 등 다수 스타 참여]

[극단 왕국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연극 <레미제라블>, 장발장 役 백고운? 파격적 캐스팅]

[<레미제라블> 총연출 최호랑 曰 “기대해도 좋을 것, 신선한 연극을 보여드리겠다.”]

공연계 쪽 팬들은 난리가 났다.

굳이 백고운이나 오용호의 이름값이 아니어도, 공연계 쪽에서 극단 왕국의 인지도는 매우 높았다. 극단 왕국이
올리는 정기공연은 유명 뮤지컬 못지않게 매번 전석 매진을 달성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런데 이번에 올리는 공연이 <레미제라블>이라고 하니 당연히 반응이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공연보다 드라마나 영화에 더 익숙한 일반 대중들도 백고운과 오용호가 참여한다는 얘기를 듣고 관심을
보였다.

[충무로의 괴물 신인 백고운, 이번엔 연극에 도전? “최호랑 단장님께 은혜 입은 게 있어 제안 받았을 때 기꺼이


출연 결정······ 색다른 모습 보여드리겠다.”]

[배우 오용호 한국에서의 첫 복귀작으로 연극 <레미제라블> 선택, 왜? “옛날에 <레미제라블> 공연을 보고


배우가 되기로 결심······ 꼭 해보고 싶었던 오랜 숙원 같은 작품이었다.”]
일반적인 대중들 중 몇몇은 연초인 신정 연휴에 가족들과 함께 봐야겠다고 미리 스케줄을 봐뒀고.

백고운이나 오용호의 팬들은 인터공원에 미리 회원가입을 해놓는 등 티켓팅을 할 준비를 미리 마쳐놓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그들의 공연은 오랜만에 들린 반가운 소식임은 틀림없었다.

연극 <레미제라블> 팀이 막 본격적으로 연습에 들어가기 시작하던 때였다.

어느 날 갑자기 최호랑이 말했다.

“2 박 3 일 동안 합숙 연습을 갈 예정이다.”

조금은 뜬금없는 말 같았지만, 나는 왜 그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았다.

장발장 배역 오디션을 위해 단원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져 경쟁 아닌 경쟁을 펼쳤다.

그러나 이제는 갈라졌던 두 팀이 다시 모여서 한 팀이 되어야 한다.

그 두 팀을 합치기 위해서 이번에 합숙 연습(이라고 쓰지만 아마도 그냥 친목도모를 위한 여행에 가까울)을 가는


것이었다. 짧은 며칠이라도 함께 자고 먹고 붙어있다 보면 꽤 많이 친해지곤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관광버스를 빌려 다 같이 서해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안쪽 자리에 앉아 창문 너머의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나른한 한적함에 절로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저번에도 <운명의 표현> 영화 촬영을 끝낸 후 표류네와 함께 MT 를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워낙 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라 가는 내내 시끌벅적했었다.

반면 오늘은 대부분의 단원들이 잠에 곯아떨어져있어서, 서해로 향하는 버스는 내내 조용했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이쪽이 더 내 취향이었다.

그런데 얼마간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을까.

갑자기 누가 내 옆자리에 털썩 앉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좀 놀랐다.

내 옆자리에 와서 앉은 사람은 오용호였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까닥였다.

“제 옆자리에 앉은 분이 코골이가 심해서요. 여기 좀 앉아도 되죠?”

“아, 네. 그러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오용호는 눈을 감고 팔짱을 꼈다. 곧 그는 잠에 든 것처럼 조용해졌다.

‘의외네. 도발하려 온 줄 알았는데.’

저번에 자베르 역으로 바꾸겠다고 했을 때, 그는 분명하게 말했었다.

나와 같은 무대에 서서 합을 맞춰보고 싶다고.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동경이나 호감의 표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발화자가 오용호일 때 그
말뜻은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뀌었다.

즉, 그는 나와 연기를 대결해보고 싶다고 밝힌 것이었다.

내가 아는 오용호는 아주 호전적이고 저돌적인 사람이었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성격이랄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이 저를 어떻게 보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그는 틈만 나면 내게 연기 좀 같이 해달라고 쉴 새 없이 따라다녔었다. 어찌나 그게 심했는지,


어지간하면 그런 부탁을 기꺼워하는 나였는데도 나중에는 그를 조금 피해 다녔을 정도였다.

이번에도 옛날처럼 같이 연기해 달라 그런 말을 꺼내기 위해 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정말 코골이 소리를 피하기 위해서 온 것뿐인가?

하여간에, 그는 내가 알던 옛날의 모습과 좀 달라진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다시 만난 것도 거의 십 년만이었으니까. 그 사이에 그도 좀 철이 들었을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다시 바깥 풍경을 바라보려 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오용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사 봤는데,”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오용호를 봤다. 그는 팔짱 낀 아까의 자세 그대로 눈만 뜬 채 날 보고 있었다. 안 자고


있었나?

그가 하던 말을 계속 이었다.

“최호랑 단장님에게 은혜를 입은 게 있어서 이번 공연에 참여하게 됐다는 게 진짜에요?”

“아··· 네.”

“의외로 손해 보는 타입인가 봐요.”

손해라.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았다. 나 역시 주변에서 이번 연극이 내 급에 안 맞다는 이야기를 꽤 많이


들었으니까.

물론 더 높은 개런티를 준다는 영화나 드라마의 출연 제의도 꽤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최호랑에게 공연에 오르겠다 약속을 했고, 그것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올리는 공연이
<레미제라블>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나 역시 이것을 꼭 하고 싶었고.

게다가 나는 지금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다.

내가 완전히 무명일 시절에는 카메라에 한 번이라도 더 나오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인기를 얻고 싶어서라기보다
인지도가 높아지면 작품 제의가 많이 들어오니까. 결과적으로 더 많고 다양한 연기를 할 수 있게 되고.

그러나 나는 지금 충분히 고를 수 있는 작품이 있었다. 당장 크랭크 인 들어가는 작품은 거절하고 있지만, 내년


혹은 내후년에 들어갈 작품들도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얘기들을 구구절절하기엔 조금 귀찮았고, 솔직히 말하면 오용호가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어깨를 으쓱이며 이렇게만 대답했다.


“뭐, 그런 타입인가 보죠. 돈 보고 연기하는 건 아니라서요.”

“그럼 뭘 보고 연기하는데요?”

뭘 그런 걸 묻지?

나는 당연하게 대답했다.

“재미요. 즐겁잖아요. 연기하는 것 자체도 재밌고, 다른 사람이랑 함께 하면 더 재미있고.”

오용호는 눈썹 하나만 쓱 올렸다. 이해를 못 하겠단 표정이었다.

그러자 도리어 내가 더 의아해졌다.

“그러면 오용호 씨는 뭘 보고 연기하는데요?”

그러자 오용호 역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성취감이죠. 연기 잘 한다 인정받으면 좋고, 라이벌이랑 승부해서 이기면 더 좋고.”

그렇구나. 그제야 나는 나와 오용호가 완전히 다른 타입이란 걸 알게 되었다.

오용호는 성취감, 인정욕구 등을 원동력 삼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게 그런 건 부차적인 목표일


뿐,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아니었다.

우리는 가치관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건 아마도 서로를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절대로 좁혀지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건 오용호 역시도 깨달은 듯 했다.


오용호는 다시 입을 다물곤, 이제 정말 자겠단 것처럼 다시 눈을 감았다.

약간 서먹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버스가 서해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조용히 각자 시간을 알아서 보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정확히 말하자면 서해의 한 섬이었다.

굳이 섬까지 들어간 이유는 단순했다. 겨울이라 바다에 들어가서 놀 수도 없는데, 그러면 배라도 한 번 타보면
좋지 않겠냐 하는 이유였단다.

아무튼 모두 배를 타고 즐겁게 섬에 도착했다. 여행 분위기가 좀 나는지 모두 다들 적잖이 들떠 있었다.

여자들의 숙소와 남자들의 숙소는 나뉘어 있었고, 우리는 각자의 숙소에 짐을 부렸다.

그런데 대충 짐을 놓은 후 마을 근처를 산책이나 할 겸 하나 둘씩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어? 눈?”

누군가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정말로 눈이었다.

처음엔 싸락눈에 불과했는데, 시장에서 먹거리를 사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어느새 눈발이 굵어져 있다.

대부분의 단원들은 그저 즐거워했다. 그들은 눈 쌓이면 눈싸움 하자, 눈사람을 만들자, 이런 얘기를 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느냐면······.


‘이번 연극에서도 눈 내리는 장면 있지 않나? 아마 장발장이랑 자베르가 마지막에 대치하는 장면이었던 것
같은데.’

눈이 내리는 걸 보니까 그 장면이 저절로 연상되었다.

그런데 나는 또 자베르 하니까 별 뜻 없이 오용호가 연상되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오용호 쪽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단 듯 나는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오용호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단 걸 알아차렸다. 뿐만 아니라 그 역시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단 걸


알아차린 눈치였다.

‘아차.’

그러나 이미 늦었다. 오용호가 다가와 물었으니까.

“백고운 씨, 대사 연습 저랑 한 번 맞춰보실래요?”

그래, 왜 말 안 하나 했다. 드디어 올 게 온 것이었다.

장발장과 자베르
47.

몇 주 전, 오용호는 백고운의 장발장 연기를 처음 봤을 때 조금 흥미가 생겼다.

‘제법 하는데?’

그리고 리허설 공연을 할 때는 조금 더 흥미가 생겼다.

‘꽤 하는데?’
물론 김철수만큼은 절대 아니었지만, 오용호는 그와 연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오용호는 선뜻 자베르로 역을 배역을 바꿨다.

충동적인 선택이긴 했지만, 장발장 역에 크게 미련 있던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오용호가 이 연극에 출연하려 결심한 것도 옛 추억의 <레미제라블>을 해보면 다시금 의욕이 솟아날까
싶어서였을 뿐이었다.

이 연극 자체에 대해선 오용호는 어떤 감흥도 없었다. 오용호가 먼저 매달릴 만큼 대단한 감독의 작품도 아닌데다,
같이 연기하는 단원들 대부분도 다 거기서 거기라 오용호의 흥밋거리에 미치지 못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오용호의 흥미를 끄는 사람이 게 중 툭 튀어나와 있으니 자연스럽게 눈이 갈 수밖에.

어차피 미련이 없던 자리였기에 오용호는 주인공 배역을 고집하기보다 백고운과 연기를 대결해볼 수 있는 자베르
역으로 바꿨다.

오용호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잠깐 백고운과 대화를 나눠봤다. 운이라도 띄워볼 겸 해서.

그러나 대화를 통해 오히려 오용호는 백고운이란 사람 자체에 대해서 빠르게 흥미가 식었다.

그는 야망이 없고 그저 착하기만 한 사람들과는 잘 맞지 않는 편이었다.

어쨌거나, 오용호는 백고운과 연기를 해보고 싶은 거지 그와 친해지고 싶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건 큰 상관이


없긴 했다.

그것보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때마침 눈이 왔고, 백고운 역시 연극 속 ‘그 장면’을 떠올린 게 분명한
표정을 지었다.
오용호는 백고운에게 가서 직구로 같이 한 번 합 좀 맞춰 달라 말했다.

그리고 백고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죠.”

백고운은 의외로 선선히 기다렸단 것처럼 말했다. 내심 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저 야망 없고 착하기만 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또 연기에 있어서는 오용호와 같은 과(科)일지도 몰랐다.

오용호는 만족감에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장발장과 자베르의 이야기는 원래 이러하다.

자베르 경감은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마들렌 시장의 정체를 의심하며, 그가 장발장이란 죄수임을 밝혀내기
위해 집요하게 그의 뒤를 쫓는다.

그러나 자베르는 프랑스 혁명 당시 시민군 속에 스파이로 숨어들었다가 들켜 죽을 위기에 처하고, 시민군 중 한


명이었던 장발장은 그를 구해주곤 자유롭게 풀어준다.

자베르는 한 번 악인은 악인이라고 믿는 사람으로, 극단적으로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쫓던 죄수에게서 도리어 목숨을 빚지게 된 자베르는 평생 굳게 믿고 있던 신념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한편 장발장은 그 직후 딸 코제트의 연인인 마리우스를 구출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베르를 다시 만나게 된다.


장발장은 자신을 붙잡아도 좋지만, 마리우스를 병원에 보내게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자베르는 뜻밖에도 장발장을 도와주곤 홀연히 사라진다.

그 다음날 자베르는 강에서 시체로 발견되는데, 자신이 평생 믿어온 가치관이 잘못됐다는 것에 대한 충격과
회한으로 투신자살한 것이다.

이번 연극은 장발장과 자베르의 마지막 장면을 약간 각색했는데, 둘의 대립이 훨씬 더 강렬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백고운과 오용호가 연기로 맞춰볼 장면이 바로 그 장면이었다.

백고운과 오용호, 둘은 지금 평상에 올라 서 있었다. 일종의 무대 대신이었다.

다른 단원들은 처마 밑에서 옹기종기 앉아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야, 둘이 싸운대!’와 같은 말을 듣고


싸움구경을 하러 간 아이들처럼, 단원들은 약간의 긴장과 흥미진진함을 함께 느끼며 둘의 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땅에 수북이 쌓이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눈싸움을 하자거나 눈사람을 만들자고 말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재밌는 것이 이제 막 시작되려고 하는데 눈싸움이나 눈사람이 웬 말인가.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당사자들, 백고운과 오용호는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그들의 머리 위에 소복소복 내리고 있어서 추울 법도 하건만,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백고운(장발장)이 거친 목소리로 먼저 대사를 쳤다.

“부탁이오, 이 청년만 병원에 보내주게 도와주시오. 그 뒤엔 당신이 날 어떻게 하든 신경 쓰지 않겠소. 뭐든


당신의 뜻대로 하리다. 나는 예전에 죄를 지었고, 그러니 죄를 받는 것이 당연하오. 하지만 이 청년이 무슨
죄겠소. 내가 지금 의사에게 이 청년을 데려가지 않으면 이 청년은 죽고 마오.”

“······.”

“이 청년은 내 딸의 연인이오. 이 청년과 내 딸이 헤어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내 실수였소. 아비로서 딸의


행복을 축복해주진 못할망정 망쳐서야 되겠소? 내 이렇게 부탁하리다.”

백고운의 목소리가 절절했다.

원래는 이 다음에 자베르가 말없이 장발장을 도와준다.

그러나 이번 연극에서는 여기서부터 내용이 달랐다. 각색된 내용에서 자베르는 한 번 더 강하게 장발장을
몰아붙인다.

오용호(자베르)는 무섭게 화가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너 같은 놈을 잘 알지. 한 번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은 또 나쁜 짓을 저지르게 돼있어.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거라 절대 바뀌지 않거든.”

그가 비아냥거렸다.

“저번에 날 놓아주고 나서 속으로 얼마나 즐거웠나, 응? 평생 너를 압박해오던 경찰의 생사권을 네가 쥐게


되었으니, 착한 척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얼마나 안달이 났느냔 말이야. 그래, 날 살려주고 나서는 네가
뭐라도 된 사람인 양 기분이 좋아졌나?”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원수도 살려주는 것에 내가 감동하길 바랐나? 아니면 내가 혼란스러워하길 바랐나? 천만에. 애초에 그런


속임수에 넘어갈 것이었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널 뒤쫓지도 않았겠지.”

자베르는 장발장의 선행이 모두 위선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장발장의 악한 본모습을 꺼내기 위해 일부러 도발한다.

오용호는 품에서 소품용 총을 꺼내 백고운의 발치에 툭 던졌다. 백고운의 눈이 커졌다.

오용호는 싸늘하게 말했다.

“다시 한 번 날 죽일 기회를 주마. 날 죽이고 지금 간다면 너는 네 딸의 연인도 구할 수 있고, 네 딸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

“대신 너는 죄 없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되겠지. 하지만 너 같은 놈에겐 가장 어울리는 짓 아닌가. 성자라도


되는 척 하지만 결정적일 때 네 이득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해칠 수 있는 놈들, 바로 그게 너 같은
쥐새끼들이다.”

오용호의 말은 신랄했다.

“네가 정녕 양심이 있는 놈이라면 내게 붙잡힐 수도 있겠지. 좋아, 그땐 나도 인정해주마. 그러나 네가 고상한


척 하는 대신에 저 청년은 죽을 것이고, 네 딸도 불행해질 것이다.”

진정한 성인이라면 사람을 해칠 리 없다. 설사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라도 말이다.

자베르는 일부러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건네주면서 장발장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코제트의 행복을 위해 자베르를 죽이고 갈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대신 딸의 행복을


저버릴 것인가.

물론 여기서 자베르를 죽이지 않고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없다. 마리우스를 업고 도망친다면 아무리 힘 센


장발장이라고 해도 달리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고, 그러면 자베르에게 붙잡힐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자베르는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어보였고, 그러므로 이제 장발장은 선택해야만 했다.


“자, 이제 선택해라!”

백고운이 허리를 굽혀 총을 집어 들었다.

“······.”

“······.”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백고운은 뜻밖에도 두려워하거나 고민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자베르가 총을 던질 때 조금 놀란 듯 했지만,


자베르가 쏟아내는 날카로운 말에도 시종 차분한 표정이었다.

백고운은 총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가 한 선택은······.

백고운은 총을 제 관자놀이에 대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게 내 선택이오.”

“······뭐?”

“여기서 내가 죽으면 당신을 죽일 필요가 없지 않겠소? 그리고 당신이 잡으려고 하는 범죄자는 나 하나뿐 아니오?
내가 죽고 나면, 당신은 선량한 시민인 저 청년을 길바닥에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니 결과적으론 내
죽음으로 저 청년을 구하는 셈이 되잖소.”

눈을 크게 떴던 오용호가 헛웃음을 뱉었다.

“하! 웃기는군. 내가 진짜 저 청년을 구할 거라고 믿나?”

그리고 백고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소. 당신은 나를 범죄자이기 때문에 잡으려는 것뿐이지, 내가 미워서 사적으로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니
말이오. 그렇기에 믿소. 당신은 나에 대한 감정과 상관없이 저 무고한 청년을 구할 것이오.”

“······!”

“게다가 당신은 나와 달리 진짜 착한 사람이지 않소.”

그 말에 오용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그는 말을 흐렸다. 그 스스로는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믿고 있긴 했지만, 지금의 이 상황만 따로 봤을 땐


아무리 봐도 자베르가 악당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객관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백고운의 말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내가 위선적이라면, 당신은 지금 위악을 부리는 것이니까 말이오. 당신의 본성은 선하다고, 나는 믿소.”

그 말에 오용호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을 때.

백고운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쥐고 있는 총의 방아쇠를 망설임 없이 당겼다.

탁―.

그러나 폭발음인 ‘탕’과 달리 맥없는 ‘탁’ 소리만 났다.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백고운은 숨을 흡 참았다가 놀란 듯 눈을 번쩍 떴다. 그가 쥐고 있던 총을 내려


보았다가, 다시 오용호를 보았다.

그리고 장발장은 한 발 뒤에야 깨닫는다. 자베르가 건넨 총에는 애초에 총알이 없었다는 것을.
애초에 이건 장발장을 시험하기 위한 함정이었을 뿐이었다. 자베르는 진짜로 죽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백고운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오용호에게 다가가 총을 다시 돌려주었다.

“시험은 통과한 것이라 믿겠소.”

그렇게 말하는 백고운의 얼굴엔 화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속았다는 걸 알았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이 장면의 전부였다. 이 다음에 장발장은 마리우스를 업고 뚜벅뚜벅 걸어가고, 자베르는 그런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우뚝 서 있다.

이제 다 끝났다는 걸 오용호도 알았다. 그는 얼어붙은 듯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연기를 계속 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다른 생각 중이었다.

‘생각보다 압도적이진 않군.’

원래의 무뚝뚝한 장발장 캐릭터보다 훨씬 부드러운 장발장 캐릭터라서 그런가. 백고운은 연기는 잘했지만, 상대를
압도할 정도로 강렬하지는 않았다.

이 장면은 원래 장발장과 자베르가 팽팽하게 부딪히는 장면이다.

자베르는 장발장을 몰아붙이고, 장발장은 자베르의 시험에 말리지 않고 자신만의 제 3 의 선택을 하면서 꼿꼿하게
반박한다.

그러나 백고운은 계속 차분한 톤으로 대사를 쳤고, 그래서인지 장면 자체의 긴장감이 덜한 것 같았다.

연기를 하면서 치열한 기싸움을 기대했던 오용호는 좀 맥이 풀리듯 김이 샜다.


그런데 그때였다.

백고운이 이제 몸을 돌려 걸어가려던 차였다.

그들이 연기하는 동안에도 계속 눈이 내리는 통에 평상엔 꽤 눈이 쌓여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꽤 미끄러웠단


뜻이었다.

백고운이 발을 잘못 디뎠는지,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엇―, 하기도 전이었다.

“······!”

바로 앞에 있던 오용호는 놀라 반사적으로 백고운의 팔을 잡아채 그를 지탱했다. 덕분에 백고운은 미끄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둘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오용호는 속으로 ‘아차’했다.

일단 상대가 넘어질 것 같으니까 붙잡긴 했는데, 아직 장면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즉, 백고운이 평상에 내려가기 전까지는 오용호도 자베르로 무대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러나 오용호는 저도 모르게 백고운을 도와주고 말았다. 방금까지 사납게 장발장을 몰아붙였던 자베르의
태도로는 옳지 못했다.

말하자면 배역에 몰입해있던 것을 오용호는 스스로 깨트린 셈이었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그렇다고 상대 배우가 부상당하도록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겠지만, 솔직히 스스로에게 좀 짜증이
났다.

오용호의 연기도 깨졌겠다, 장면이 싱겁게 흐지부지 마무리 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백고운이 갑자기 빙긋 웃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이것 보시게, 내가 아까 말했잖소.”

뜻밖의 말에 오용호가 한쪽 눈썹을 치키며 백고운을 돌아봤다.

그리고 백고운은 마치 자신이 진짜 장발장인 것처럼 스무스하게 애드리브를 쳤다.

“당신은 천성이 착한 사람이라고. 지금도 그렇지 않소. 아무튼, 고맙소. 덕분에 넘어지는 걸 면했구려.”

그가 그렇게 말하곤 몸을 돌려 다시 뚜벅뚜벅 걸어갔다.

백고운이 평상에서 내려왔을 때, 비로소 그들의 연기가 끝났다.

둘의 연기를 보고 있던 단원들은 감탄을 뱉으며 빨개진 손으로 박수를 짝짝짝 쳤다. 추위를 잊고 몰입했을 정도로
둘의 연기는 훌륭했다.

야외에서, 그것도 바람소리가 시끄러운 와중에도 둘의 성량은 풍부했고 딕션은 정확했다. 감정 연기는 또
어떠하고.

게다가 눈 내리는 환경이 그들의 연기를 방해하기보다, 오히려 척박하고 삭막한 극 중의 상황과 어울려 그들의
연기를 더욱 실감나게 만들었다. 그러니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편.

오용호는 살짝 눈을 찡그린 채, 언 코와 귀를 녹이는 백고운의 뒷모습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약간 묘한 것을 쳐다보는 눈빛이었다.

손발이 맞는 페어
48.

나는 뒤통수에 닿는 오용호의 시선을 느끼면서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들킨 건 아니겠지?’

내가 일부러 힘을 빼고 연기했다는 것을 그가 알아챘을까?

캐릭터성과 상관없이 나는 더 강렬한 연기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굳이 그러지 않았다.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오용호와 얽히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제일 컸다.

그에겐 미안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의 관심이 성가셨다. 그가 내게 흥미를 보이며 날 졸졸 따라다닌다면 귀찮을


것 같았다.

나 역시 연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연기를 순수하게 즐기는 사람과 같이 하는 게 좋지, 연기를 경쟁의 도구로
여기는 사람의 상대의 장단에 맞춰주는 건 조금 피곤한 일이었다.

게다가 내가 여자도 아니고. 저런 시커멓고 커다란 사내놈이 날 따라다닌다고 내가 좋아할 이유가 없잖은가.
오용호가 이성한처럼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다행히 오용호의 관심을 피하고자하는 내 시도는 대충 먹힌 것 같았다.

“한 번만 더 같이 해줄 수 있나요?”

오용호는 그때 이후로 내게 한두 번 정도 저렇게 더 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마다 몸을 뺐다.

“아······ 제가 지금은 바빠서요.”

그러자 오용호는 더 이상 요구해오지 않았다.

그의 단념이 빨랐다는 건, 나에 대한 그의 흥미가 대단치 않다는 걸 증명했다. 김철수였던 시절, 그는 내가


아무리 미적지근하게 굴어도 아랑곳 않고 집요하게 굴었으니까.

첫날밤은 오용호와 그렇게 보내고, 다음날부터 나는 단원들과 본격적으로 여행을 즐겼다.

이튿날 우리는 섬을 한 바퀴 돌며 구경을 하기도 했고, 밤새 내린 눈으로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들면서
놀기도 했다.

합숙 연습이라지만 연습은 거의 없었고, 거의 노는 데에 시간을 쏟았다. 최호랑도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효과는 좋았다. 대부분의 단원들이 많이 친해졌다.

오용호만 빼고 말이다.

그는 다른 단원들에게 특별히 냉랭하게 굴지는 않았지만, 친해지는 행위 자체에 관심이 없단 듯 시종 심드렁한


태도였다.

그러니 다른 단원들도 굳이 오용호를 부르지 않았다. 그 역시 그냥 저를 혼자 내버려두는 게 더 편하단 듯 굴었고.


나는 원래 혼자 겉도는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성격은 못 되었는데(아저씨의 오지랖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긴장하느라 촬영장에서 겉도는 신인 친구들에게 나는 더 특히 관심을 쏟곤 했었다. 거기엔 어느 정도 기태성의
영향도 있었다), 오용호는 혼자 있다고 외로움과 쓸쓸함을 느끼는 타입도 아니라 나 역시 굳이 터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합숙 연습의 이튿날이 지나갔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였다.

“어라, 또 눈이 오네?”

“······근데 눈이 좀 많이 오는데?”

“이거 괜찮나······? 눈 내리는 게 영 심상치 않은데.”

어제도 눈이 꽤나 많이 온 축이었는데, 오늘은 그보다 곱절은 더 많은 눈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 치 앞의 시야가 구분되지도 않을 정도로 눈이 쏟아지고 있는데, 본격적으로 바람도 거칠게
불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는 일단 숙소 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밖의 상황을 보며 대기했다. 간간히 불안한 눈짓을 주고받긴


했지만, 다들 어느 정도는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에이,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집에는 갈 수 있겠지.

그리고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뭐야, 미친. 눈이 아직도 내리는데······?”

“눈 쌓인 거 실화야?”

모두 경악했다.

어둑한 하늘에서는 눈이 아직도 펑펑 내리고 있었으며, 땅에 쌓인 눈은 과장을 좀 더 보태 무릎까지 올라와


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건 딱 봐도 알았다.

집으로 가려면 일단 섬을 나가야 했다. 배의 상황을 보기 위해 최호랑과 그의 조수가 함께 눈발을 뚫고 밖으로


나갔다.

나머지 단원들은 숙소 안에서 기다렸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지만, 모두가 설마하면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말이
씨가 될까봐 그랬다.

그리고 삼십 분 정도 흘렀을까.

둘이 다시 돌아왔고, 최호랑이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풍랑주의보가 내려서 배가 뜰 수가 없다고 하더군. 며칠은 여기에서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진짜로 우리는 섬에 고립된 것이었다.

“일단 숙소 문제는 해결했다.”

최호랑은 잠시 자리를 피한 후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더니, 몇 분 뒤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대절버스도 나중에 연락하면 나와 있기로 얘기 됐다. 어차피 육지 쪽도 눈이 와서 당장 움직일 수는


없다더군.”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단장님, 그러면 언제쯤 돌아갈 수 있나요?”

그건 우리가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최호랑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일단 기상청에서는 내일이면 눈이 그칠 거라 하는데, 상황에 따라서 좀 다르겠지. 일단 배가 뜨기 위해선


바람이 좀 잠잠해져야 하고, 육지 쪽 도로 상황이 좋아야 거기서 또 버스 타고 움직일 수 있으니까.
대략······.”

최호랑은 그 자신도 딱히 내키지 않는 말투로 말했다.

“3 일은 더 여기에 묵는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3 일이라. 못 버틸 기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짧은 기간은 또 아니다.

말하자면, 2 박 3 일 여행이 졸지에 5 박 6 일이 된 셈이었다. 심각해지기보다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상황이 일단은 그렇게 정리된 이후에 몇 가지 문제들이 남았다.

숙소는 최호랑이 해결했으니, 식량과 생필품을 더 구해야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근처 슈퍼마켓에서 조달할 수
있을 것 같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보다, 이 고립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하며 기다리고 있기엔 조금 뭣했다.
게다가 이리 온 것 역시 명목상으론 ‘합숙 연습’이지 않은가.

누가 먼저 슬그머니 말을 꺼냈을까.

“그러면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에 다른 단원들 역시 동조했다. 금방 뜻은 모였다. 최호랑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거기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근데 어디서 연습하죠?”

숙소에도 큰 방이 있긴 했으나, 거기에서 연습하기엔 터무니없이 작은 방이었다. 그렇다고 어제 나와 오용호가


했던 것처럼 야외에서 연습하기엔 너무 추워서 무리가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또 슬쩍 말을 꺼냈다.

“어제 산책하다 봤는데, 마을 회관이 좀 크게 있던데. 거기에 부탁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래서 우리는 다 같이 마을 회관으로 갔다.

다행히도 거기엔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이장님이 계셨다.

“여길 빌려달라고?”

그리고 우리의 얘기를 들은 이장님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다.


“음··· 우리도 여길 써서 말이지.”

최호랑이 다시 한 번 부탁했다.

“오래 쓰지는 않겠습니다. 뭣하시면 새벽에 연습해도 괜찮고요. 문만 열어주시면 조용히 연습하고 뒷청소
깔끔하게 하고 나가겠습니다. 불편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최호랑의 말투는 부드러웠고 또 정중했다. 신사적인 태도였다.

그리고 이장님은 최호랑의 그런 태도에 조금 신뢰가 가는지 약간 흔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선뜻
빌려주기엔 아직도 마뜩찮은 의심이 좀 있는 듯도 했다.

“글쎄··· 조용히 연습한다지만 밤에 또 시끄러울 수도 있고··· 우리 마을 사람들 잠귀가 워낙 밝아야지


말이지···.”

이장님은 시간을 끌면서 망설였고, 최호랑은 그런 그를 설득시키려고 했다.

또 한 번 실랑이가 이어질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회관 안쪽에서 한 어르신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의도치 않게 들려왔다.

“TV 가 또 안 되네. 눈 때문에 이렇지, 하여튼. 이놈의 TV 는 매번 이런다니까. 안 그래도 할 게 없어서


심심한데, 대체 뭘 보라는 거야?”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최호랑은 뭔가가 생각난 듯 표정이 밝아졌다. 그가 재빨리 이장님께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어르신, TV 수리 기사가 올 때까지 심심하지 않으세요? 저희가 이번에 연극을 하나 올립니다. 그 공연을
어르신들께 보여드리고, 그 대신 회관을 며칠만 조금 빌려 쓸 순 없을까요?”

“······연극 공연?”
의외로 이장님은 솔깃한 듯했다.

이장님은 고민하더니 ‘이게 나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니 잠시만 기다려 보소’하고 말한 뒤 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장님이 다른 어르신들에게 의견을 묻는 이야기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우리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일이 잘 풀릴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의 예상은 적중했다.

잠시 뒤, 이장님이 문을 빼꼼 열고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눈을 털고 종종거리며 마을 회관 안으로 들어섰다. 회관 안은 확실히 넓었다. 여기가 이 작은 마을에서


그나마 가장 넓은 건물 같았는데, 이 정도면 모여서 연습하기엔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좋은 델 찾은 것 같다.

안에는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계셨는데, 이장님 말씀을 들어서 그런지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들이었다.

어르신들이 숙덕거렸다.

“이 사람들이 연극쟁이들이라고?”

“무슨 연극일지 궁금하구먼.”

그리고 이장님이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여기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한테 공연을 구경시켜주고 회관 좀 빌려달라는데, 괜찮습니꺼?”

“아, 연극이 재미있으면 까짓 거 그라지, 뭐.”

다른 사람들이 동의한단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이었다. 외진 시골이라 이런 딜이 먹히는 것 같았다. 이곳 분들은 연극을 접할 기회가 아무래도 적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즉석에서 공연을 펼치게 되었다.

아직 본공연 연습은 시작도 안 했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한 번 리허설 공연을 해본 적이 있었다. 장발장 캐스팅
때문에 나와 오용호가 겨뤘을 때 팀을 나눠서 하지 않았는가.

최호랑은 그때 당시 내 팀이었던 단원들을 불렀다.

“너희가 합이 더 잘 맞았으니 너희가 올라갔으면 좋겠는데. 대사는 아직 기억하고 있나?”

물론이었다. 우리는 흔쾌히 우리가 공연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 팀의 단원들은 그때 했던 리허설 공연을 다시 한 번 어르신들 앞에서 펼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뒷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단원들, 심지어 최호랑까지 일이 잘 풀릴 거라 믿었다.

그러나 의외의 일은 거기서 생겼다.

“무슨 소리야, 저게?”

“모르겠는데······, 자네는 알아먹겠수?”

“음······.”

공연의 초중반을 넘어갔을 때, 어르신들이 하나 둘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었다. 이장님 표정도 약간 떨떠름한
것이, 기대하던 것과는 좀 다른 눈치였다.
그리고 당황스러운 건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미가 없나?’

급기야 어르신들 중 몇몇은 자리를 먼저 뜨기도 했고, 그러느라 부산스러워지면서 더 공연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인터미션을 핑계로 잠시 모여 긴급회의를 했다.

공연이 취향에 안 맞을 순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르신들을 만족해야 우리가 연습할 장소를 얻을 수 있단
점이었다. 이러다간 다시 쫓겨날 게 뻔했다.

갑자기 발생한 위기 상황에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만 도륵도륵 굴리고 있는 그때였다.

아까부터 홀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입을 열었다.

“내용을 좀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모두가 내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설명했다.

“아무래도 <레미제라블> 내용이 어르신들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레미제라블> 자체가 프랑스 혁명을 다루고 있으며, 주인공인 장발장은 ‘죄의식’으로
고뇌하는 캐릭터이다. 그러니 이런 정극에 익숙하지 않다면 우리 공연이 재미 없을 수도 있었다.

민하나가 물었다.

“그러면 어떤 방향으로 바꾸게요?”


모두가 ‘그걸 묻고 싶었다’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물론 나는 생각해둔 바가 있었기에 그것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내 말을 들은 단원들은 입을 떡 벌렸다.

“그건 완전 싹 바꾸자는 말이잖아요! 아니, 그건 둘째 치고. 그게 가능은 해요? 대본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애드리브로 해야 한다는 건데··· 그걸 어떻게 해요?!”

나는 최호랑을 바라봤다. 그리고 최호랑은 내 눈빛을 알아들었다. 그가 침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운이 너는 할 수 있겠지. 그리고 하나도 도와줄 수는 있겠고.”

지목당한 민하나가 당황한 듯 했지만, 조금 뒤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 수는 있어요.”

나와 민하나는 이전에 영화 <해수> 오디션을 보기 위해 즉흥 연기를 자주 했었다. 그리고 최호랑은 그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내 말에 둘은 그렇게 놀라지는 않은 눈치였지만, 문제는 우리 둘 만으로는 연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 둘이 다는 아니었다.

나는 오용호를 돌아보았다.

“오용호 씨.”
오용호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 나는 여태 그를 피해왔으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일단 급한
불은 꺼야하지 않겠는가.

그가 조용히 날 쳐다봤다.

그는 오늘 아침부터 여기 들어오던 내내 있는 듯 없는 듯 굴었다. 그리고 우리가 심각히 대화하던 그때까지만


해도 말을 얹지 않고 그저 지켜만 봤다.

그러나 내가 그를 콕 집어서 부르자 다른 모든 단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나는 물었다.

“할 수 있죠?”

나는 일부러 할 수 있겠느냐고 의문형으로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내 도발에 오용호는 그제야 한쪽 입꼬리를 씩 끌어당기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당당한 대답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둘이 먼저 시작합시다.”

“내가 장발장을 제외한 나머지 남자 캐릭터를 맡죠.”

“좋아요, 그러면 하나 씨는 나머지 여자 캐릭터를 맡아주세요.”


다른 단원들이 나와 오용호의 척척 맞는 대화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더 오래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어르신들의 관심이 더 식기 전에 공연은 다시 재개해야 했다.

나와 오용호.

우리 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대 위로 폴짝 올라갔다.

마치 오래 합을 맞춰 손발이 맞는 페어처럼 말이다.

멜로드라마
49.

몇 분 전, 내가 단원들에게 말한 내용은 이러했다.

―내용을 멜로드라마로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쉽게 말하자면··· 자극적인 아침드라마 같은 느낌으로요.

‘멜로드라마’란 흔히 말하는 감상적인 통속극을 뜻한다.

즉, 내가 ‘아침드라마’라고 표현한 건 막장 드라마를 순화하는 말이었다.

물론 나는 막장을 비하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막장’이라는 것만큼 인간의 감정을 원초적으로 건드리는
훌륭한 플롯이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에 저급과 고급을 따지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지금에야 셰익스피어 작품이 고전으로 취급받지만, 옛날엔 셰익스피어 작품도 아주 대중적인 작품이었다. 아니,
사실 셰익스피어야말로 멜로드라마의 원형이 아닌가.

그리고 <레미제라블> 역시 약간의 각색을 가한다면 충분히 어르신들도 재미있을 만한 멜로드라마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까의 공연을 재미없어하시는 것 같아 지금부터 새로운 공연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럼 다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어르신들에게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꾸벅였다.

어르신들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약간 어리둥절한 듯, 그러나 일단은 장단에 맞춘다는 듯 어정쩡하게 박수를 다시
짝짝짝 쳤다.

나와 오용호는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내가 먼저 대사를 쳤다.

“네가 영희를 가로챈 그 새끼더냐?”

여기서 영희란, 팡틴을 뜻했다.

나는 아까 단원들에게 이런 제안도 했었다.

―주인공 이름도 친숙하게 한국인 이름으로 바꾸면 좋을 것 같아요. 심순애와 이수일처럼, 이름을 번안하면 훨씬
더 친근하게 다가오니까요.

―그리고 내용 자체를 장발장의 사랑과 배신, 그런 치정극으로 바꾸면 좋을 것 같아요. 장발장과 팡틴이
애정관계였다는 식으로요.

그리하여 내가 완전히 새롭게 각색한 <레미제라블>의 기본 내용은 이랬다.

장발장(철수)과 팡틴(영희)은 옛 연인이다. 그러나 둘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장발장은 굶어가는 팡틴을 위해 빵을 훔치려 한다. 그러나 운 나쁘게 들키는 바람에 감옥으로 붙잡혀 들어간다.
장발장은 사랑하는 팡틴을 위해 몇 번이고 탈옥하려 하지만 번번이 걸리고 만다. 그래서 장발장의 형은 그만 19
년으로 늘어난다.

결국 그 형을 다 살고 장발장은 감옥에서 출소한다. 장발장은 자신이 없는 동안 팡틴이 무력하게 굶어 죽었을까봐


제정신이 아니다. 그는 정신없이 옛 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차라리 팡틴이 저를 기다리다가 죽었다면, 슬프지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더 잔인하고, 또 배신이 넘치는 곳이었다.

팡틴은 다른 남자와 결혼해 있었다. 그것도 19 년 전에.

장발장은 밀려오는 배신감에 치를 떤다. 그는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죄수가 아니라, 부자로 환골탈태하여


팡틴의 앞에 나서기로 한다. 그녀가 후회하도록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복수를 위해 불법적인 일도 서슴지 않으며 돈을 개처럼 번다.

그리고 마침내 장발장은 부자가 된다. 그는 드디어 팡틴을 찾아간다.

그런데 아뿔싸. 그녀는 병에 걸려 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돈을 보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나, 그 남자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불량배에 난봉꾼이었던


것이었다.

처음엔 많았던 돈도 빠르게 사라지고, 그녀는 나중엔 뼈 빠지게 일해서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런 그녀에게 감사할 줄도 모르고 술독에 빠진 채 첩을 끼고 살았다.

결국 몸을 돌보지 않고 일을 한 탓에 팡틴은 암에 걸렸고, 이제는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장발장은 그녀의 사정을 모르고 제 고통만 생각했던 지난 시간을 참회한다.


그리고 팡틴의 딸, 코제트를 자신이 데려가 키우기로 한다.

나는 이 모든 배경 스토리를 독백으로 처리하며 오용호에게 쏟아 부었다. 간간히 고통스러운 듯 목소리를


높이거나,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오용호는, 똑똑한 친구답게, 내 독백에서 본인의 캐릭터 설정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는 미리 상의된 것이 없었음에도 자연스럽게 즉흥적으로 내 연기를 받아쳐주었다.

“내가 영희를 가로챘다니, 말이 심하네. 엄밀히 말하면 영희가 그렇게 된 건 다 네 탓 아닌가? 네가 애초에 잘
했더라면 영희가 나한테 오진 않았겠지.”

그가 이죽거렸고, 나는 분노했다.

“개자식!”

“어허, 그렇게 나오면 안 될 텐데? 내 딸을 데려간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아?


아무렴, 내 사랑스러운 딸을?”

그러나 그의 표정엔 딸을 이용해먹고자 하는 비열함과 간사함만 있을 뿐, 딸에 대한 사랑의 감정 따위는 한 톨도


없었다.

나는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은 뒤, 품에서 동전을 꺼내 그에게 흩뿌리듯 던졌다.

오용호의 눈빛에 탐욕이 번뜩였다. 그가 히죽거리며 그것들을 주웠다.

“그 정도면 네 놈에게 있는 도박 빚 정도는 다 갚고도 충분히 남겠지?”

“뭐, 그럴 것 같군.”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난 코제트를 데려오는 대신 값을 치렀고, 이로써 우리의 거래는 끝난 것이었다.

장면이 끝났고, 이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야 했다.

오용호가 먼저 무대에서 벗어났고, 홀로 남은 나는 독백으로 씁쓸히 중얼거렸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찾아왔다면 영희는 죽지 않았을까? 모든 것이 다 내 탓이다. 이 죄를 어찌 갚아야 하나?


······영희의 딸, 그리고 저 비열한 자의 딸! 그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는 것만이 이 죄를 그나마 갚을
길이겠지.”

그리고 굳게 다짐하듯 입을 앙 다물곤, 차갑게 몸을 훽 돌려 나 역시 무대를 재빠르게 빠져나왔다.

민하나는 백고운과 오용호의 연기를 바라보면서 끝없는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대단하다. 완전히 다르게 바뀌었는데도 원래의 내용이랑 묘하게 이어져.’

이를 테면, 원래 <레미제라블>에서 팡틴의 딸 코제트는 악독한 테나르디에 부부 아래에서 학대당하면서 자란다는


설정이다. 그리고 장발장이 그런 코제트를 돈을 주고 테나르디에 부부에게서 빼내오고 말이다.

그런데 테나르디에 부부는 아예 삭제되고 완전히 새로운 인물― 팡틴의 남편이란 놈을 등장시켰는데도, 결국
장발장이 코제트를 데려온다는 큰 줄거리는 똑같게 이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개연성 역시 즉석에서 생각했다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러니 민하나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민하나는 관객석― 그러니까 어르신들이 모여 있는 쪽을 흘끔 바라봤다.

이전 공연에서 어르신들은 영 연극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부산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아까와 달리 관객석 쪽은 아주 조용했다. 모두가 백고운과 오용호가 있는 쪽의 무대를 바라보며
연극에 집중하고 있었다.

간간히 “아이고, 우짜쓰까”하고 추임새를 넣거나, “저저, 썩을 놈”하면서 눈가를 찡그리시기도 하는 것이 딱


아침드라마 볼 때의 반응과 비슷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백고운이 아까 내용을 멜로드라마로 바꾸자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민하나는 반신반의 했다.

꼭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관객이 고전극을 백 프로 이해 못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내용을 바꾸면서까지
공연이 친절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지금 보니 민하나의 생각이 짧았다.

지금 단원들이 서 있는 곳은 일반 공연장이 아닌 마을 회관이지 않은가.

그들 앞에 있는 어르신들은 공연을 보러 일부러 찾아온 관객들이 아니라, 반대로 단원들이 공연을 봐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손님들이었다.

그러니 공연에 관객의 눈높이를 맞추려 하는 게 아니라, 공연이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 접근해야 하는 것이 더
옳은 방향이었다.

민하나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백고운과 오용호의 연기는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용호가 먼저 무대에서 내려오고, 이어 독백을 처리한 백고운도 마저 내려왔다.


이제 장면이 바뀌어야 했다.

즉, 이젠 민하나 그녀 자신도 올라가야 했다.

예전에 영화 <해수>를 위해 오디션 봤을 땐 즉흥 연기를 단원들 앞에서만 펼쳤다. 그러나 지금은 타인인 관객들
앞에서 즉흥 연기를 펼쳐야 했다.

민하나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두려운가? 아니, 이건 오히려 흥분과 설렘에 가까운 긴장이었다.

그래,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민하나는 지금 이 상황이 살짝 즐거워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다 우발적이고 즉흥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 아닌가.

눈이 갑자기 많이 내려 이 섬에 고립된 것도, 그래서 연습할 장소를 얻기 위해 공연을 갑자기 펼치게 된 것도,
또 그 공연을 전면 개작해서 완전히 새로운 공연을 펼쳐야 하는 것도 말이다.

예상대로 흘러가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서 묘하게 더 즐거웠다.

뜻밖의 비일상이 주는 즐거움이라고 해야 할까. 익스트림한 놀이기구를 즐기면서 타는 사람의 심리와 비슷할 것
같았다. 약간은 다를지 모르겠지만.

백고운이 민하나에게 다가왔고, 그들은 올라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 백고운은 민하나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긴장하지 말고 절 믿고 편하게 해요.”


백고운은 그녀가 무슨 대사를 치든, 설사 실수를 하더라도, 그가 다 받아주고 수습해줄 테니 편하게 원래 하던
대로만 하란 뜻이었다.

그리고 민하나는 백고운의 그 말이 허풍이 아니라 진짜라는 걸 충분히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네, 그럴게요.”

백고운이 먼저 무대에 올라갔다. 그가 그리고 민하나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따라 나오란 듯.

그리고 든든한 동료가 먼저 올라가 있는 무대는 더 이상 두려운 공간이 아니었다.

민하나 역시 힘차게 무대 위로 발을 내딛었다.

민하나가 무대에 등장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내용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코제트(민하나)는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장발장(백고운)이 “값을 치렀으니 넌 오늘부터 내 딸이다”라는 말에


순순히 그를 따라 나선다.

사실 그녀는 조금 오해하고 있었다. 친아버지의 도박 빚 때문에 장발장에게 자신이 팔린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장발장이 어머니의 옛 남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가 자신을 구해주기 위해 데려온 것 역시 몰랐다.

물론 장발장은 코제트에게 잘해줬다. 코제트는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내심 돈으로 산 양녀임에도 잘해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코제트는 마리우스(오용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장발장은 그들의 사랑을 반대한다.
코제트는 장발장의 뜻을 거역하지 않으려 한다.

그때 코제트는 장발장의 뒤를 쫓는 자베르(오용호)에게서 장발장이 옛날에 죄수였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거기다 더해 마리우스는 코제트의 의심에 불을 붙인다. 장발장이 진짜 코제트를 딸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결혼을
반대하느냐고, 돈으로 그녀를 산 것에는 모종의 변태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충격에 빠진 코제트는 마리우스와 야반도주를 한다.

장발장은 사라진 코제트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처음엔 그녀가 그녀의 친아버지에게 돌아간 줄 알았기에
그쪽을 먼저 찾아간다.

그러나 장발장이 거기서 알게 된 진실은 충격적이다.

팡틴은 그 개자식과 결혼했을 때 이미 배가 부른 임산부였던 것이다. 즉, 코제트는 장발장의 진짜 딸이었다!

그러나 장발장은 이 사실을 일부러 코제트에게 숨긴다. 왜냐면 자신은 죄를 저지른 과거가 있었고, 지금은 자베르
때문에 수배자가 됐기 때문이었다. 장발장은 그가 받는 비난을 딸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발장은 병에 걸려 시한부가 된다. 친아버지란 사실을 밝히면 코제트가 자신을
돌본다고 고생할 게 뻔했기 때문에 장발장은 홀로 칩거한다.

그리고 한편 코제트는 마리우스와 함께 행복하게 살다가 다시 우연한 계기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또 한 번 충격 받은 그녀는 장발장을 찾아가지만, 그는 이미 숨을 거두고 있었다.

그녀는 장발장의 머리맡에서 오열하고, 마리우스는 이웃의 소문만 믿고 장발장을 오해한 것에 대해 참회한다.

그리고 자베르는 장발장을 조사하다가 그가 나중에 선행을 베풀고 살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자신이 한
가정을 망가뜨렸다는 괴로움에 그는 강에 투신자살한다.

그리고 출생의 비밀과 치정, 극적인 죽음 등등이 모두 얽힌 이 막장 멜로드라마가 드디어 막을 내렸을 때.

어르신 관객들 중 자리를 이탈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백고운과 오용호, 그리고 민하나가 커튼콜 대신 고개를 꾸벅였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을 회관을 가득 울리는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라이벌이 아니라 파트너


50.

오용호는 백고운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네.’

그저께 저녁 백고운이 오용호의 부탁으로 연기를 맞춰줬을 땐 어쩐지 심심하다 싶더니, 지금 보니 그때는 일부러
힘을 빼고 한 모양이었다.

‘막판에 넘어질 뻔한 걸 가지고 애드리브를 그렇게 쳤을 때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다고 짐작은 했는데······.’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백고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대사와 스토리를 꾸며내서 연기했다. 그것도 1 시간가량
말이다.

오용호와 민하나가 합을 맞춰주고 도와줬다고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주인공 장발장의 원맨쇼와 다름없는
극이었다.

즉, 백고운 혼자서 이 극을 이끌어간 것과 다름없었다. 분장도, 의상도, 조명도, 음악도 없이. 오직 연기력
하나만으로. 관객의 시선을 휘어잡으면서.

어지간한 연기자라도 이 정도로는 못 한다.

그런데 이런 실력을 숨기고서 그렇게 내숭을 떨어?

오용호는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한편 백고운은 어르신들에게 칭찬을 듣고 있었다.

“아유, 젊은 청년이 연기를 엄청 잘하네.”

“그러니까, 내 말이. 아니 요렇게 젊은 친구가 그런 아저씨 연기는 어째 그리 잘해? 참 신통해.”

그리고 이장님도 흐뭇하게 최호랑에게 말했다.

“잘 봤수. 약속대로 빌려줄 테니 맘껏 쓰쇼. 청소만 잘 해주고.”

“네,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뭘. 우리야말로 오랜만에 재미있었지.”

이장님은 껄껄 웃다가 뭔가 생각난 듯 ‘참’하면서 말을 꺼냈다.

“혹시 섬 나가기 전에 오늘 본 공연 한 번 더 보여줄 수 있나? 오늘 여기 못 온 동네 사람들이 더 있는데, 그


사람들한테도 보여주고 싶은데 말이야. 뭐··· 그쪽들이 힘들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장님은 입맛을 쩝 다셨다.


최호랑은 백고운을 돌아보며 눈짓으로 물었다. 백고운은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선선히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날에 섬을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공연을 해주기로 약속이 됐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얘기들을 하고 있는 동안, 오용호는 한쪽에 가만히 비켜서서 얘기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백고운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최호랑과 백고운이 몸을 돌려 단원들이 있는 이쪽으로 왔을 때였다.

“이봐···,”

오용호가 막 백고운에게 말을 걸려고 입을 떼었을 때, 백고운이 한 발 더 빨리 최호랑에게 말을 꺼냈다.

“단장님.”

“응?”

“저는 다시 할 수 있긴 한데··· 다른 단원들도 같이 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 말에 최호랑이 동의한 듯 대수롭지 않게 다른 단원들에게 물었다.

“혹시 해보고 싶은 사람 있나?”

그리고 의외로 단원들은 내심 재밌어 보였는지(원래 해야 하는 과제보다 딴짓이 더 즐거운 이치처럼),


쭈뼛거리면서도 꽤 많이 손을 들었다.

백고운이 오용호를 돌아보더니 물었다.

“괜찮죠?”
다른 사람들이 배역을 맡으면 1 인 다역을 했던 오용호가 배역을 양보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용호는 처음엔 좀 마뜩찮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저 백고운 하나와 연기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끼면


방해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괜히 1 인 다역을 하면서 주의를 분산시키기보다 한 배역만 맡아 연기에 집중하는 게 더 백고운과 겨루기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그 후, 3 일이 흘렀다.

그동안 극단 왕국 사람들은 마을 회관에서 연습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상 상황도 차츰 좋아져 이제 다시


서울로 올라갈 수 있게 됐다.

섬을 떠나는 마지막 날 아침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마을 회관에 동네 어르신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무료 공연이 있단 소문을 듣고 구경 온


분들이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극단 사람들은 공연을 시작했다.


연극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이윽고, 오용호(자베르)와 백고운(장발장)이 모두 무대 위에 서 있는 장면이 돌아왔다. 여기는 오용호와


백고운이 강하게 맞부딪히는 장면이었다.

오용호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저번에 연습으로 맞춰봤을 때와 달리 이번 공연에서 백고운은 전혀 힘을 빼고 연기하지 않았다. 즉흥극인데


그렇게 했다간 공연의 텐션이 단번에 무너지니까 말이다.

때문에 이번에는 그와 연기다운 연기를 겨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용호는 기대하고 있었다. 다른 단원들 몇몇도 무대에 함께 올라와 있긴 했지만 그 사람들은 자신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조금만 있으면 오용호의 대사가 돌아오는 그때였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마을 회관 문이 벌컥 열리고 한 할머님이 들어왔다.

“여기에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연극을 한다고 해서 왔는데, 내가 늦은겨?”

할머님의 목소리는 조용한 공기를 단번에 깨트렸다. 대사를 뱉고 있던 단원이 깜짝 놀라 졸지에 멈췄다.

그리고 공연을 관람하고 있던 다른 어르신들은 태연히 그 할머님을 부르면서 한 마디씩 던졌다.

“아이고, 감나무집 어머님 아녀. 와 이제 왔어. 이미 시작한 지 오랜디.”

“어여 이리 와서 앉어.”
분위기가 부산스러워져서 공연이 잠시 멈췄다.

새로 들어온 할머님이 자리를 잡아 앉았다. 소란이 조금 잦아든 것 같아 백고운과 오용호가 공연을 이어하려 할
때였다.

그 새로 오신 할머님이 백고운을 가리키며 불쑥 물었다.

“그런데 무슨 내용이여? 저 청년은 아주 곱상해 보이는디, 지팡이를 짚고 있네?”

“아 청년이긴 한디, 여 안에서는 아저씨 역이여.”

“그게 뭔 소리당가?”

“아 그러니께······.”

어르신들이 주고받는 목소리는 괄괄했다. 연극을 도저히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분위기가 흐트러졌다.

무대에 올라와 있는 단원들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해야 하나.

그러나 관객들이 집중해주지 않는 소란스러운 곳에서 연기를 계속하다보면 배우들의 몰입마저도 깨지기 마련이었다.

대사를 외우고 준비를 철저하게 한 공식 공연이라면 모를까, 즉흥 연기에는 몰입이 생명이었다.

실제로 중간에 할머님이 들어오면서 대사가 끊긴 단원은 지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분명 당황해서 대사를
까먹고 고장 난 것일 터였다.

일단은 수습해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해야 저 어르신들의 관심을 다시 공연으로 되돌려놓지?


그때였다.

오용호는 어떤 생각이 번뜩 떠올랐고, 저도 모르게 백고운을 쳐다봤다.

그런데 백고운도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둘의 눈이 딱 마주쳤다.

“······.”

“······.”

단순히 시선이 마주친 것뿐이었지만 오용호는 알아차렸다. 지금 백고운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단 걸


말이다.

그래서 오용호가 먼저 앞으로 나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김철수! 네가 감옥에 19 년 동안 갇혀 있는 동안 네 놈의 애인이 다른 자식과 결혼을 했다지? 그래, 너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신당한 복수심 때문에 불법적인 짓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돈을 모았어.”

오용호는 공연 초반에 설명했던 백스토리를 갑자기 다시 들먹였다.

맥락과 상관없는 뜬금없는 그의 대사에 다른 단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오용호를 바라봤다. 그들은 오용호가
뭘 하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한 듯 했다.

그러나 백고운만은 태연하게 오용호의 말을 받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적 없습니다.”

“발뺌하겠다 이건가? 왜,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서? 하지만 과거는 세탁한다고 어디 가는 게


아니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네 놈 정체를 밝혀낼 것이다.”

“형사님, 나는 정말로 선량한 시민일 뿐입니다. 내 딸, 비록 내 배로 낳은 친자식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아주


사랑스러운 내 딸과 함께 둘이서 오순도순 소박히 늙어가는 게 내 꿈이지요.”
오용호에 이어 백고운도 줄줄 설명하는 대사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단원들은 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슬슬 알아차렸다.

둘은 중간에 새로 들어와 앞부분을 못 본 할머님을 위해 짧게 배경과 인물 설명을 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본 관객이라면 이미 공연 앞부분에 제시된 정보라 둘의 독백이 장황하고 불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관객에게는 꼭 필요한 정보였다.

저 캐릭터가 어쩌구, 저 캐릭터는 어쩌구, 둘 사이는 원래 어쩌구, 이렇게 관객이 설명해주면 할머님은 무대에
집중하지 못한다.

그러나 무대 위 연기자들이 직접 설명해주면, 할머님의 신경은 무대 쪽으로 쏠리게 되고 금방 공연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오용호와 백고운은 이를 노린 것이었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새로 온 할머님이 ‘아―’하는 투로 고개를 끄덕거렸고, 다른 관객들의 관심도 다시 무대 쪽으로 돌아왔다.

다시 차분해진 관객석의 분위기에 단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연이 재개됐다.

한 시간 뒤, 드디어 연극이 끝났다.

중간에 돌발 상황이 발생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공연은 순조롭게 끝이 났다.


어르신들이 짝짝짝 박수를 쳤고, 단원들은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아우, 또 봐도 재밌네!”

어르신들이 재밌었다고 이야기를 나누며 회관을 하나둘 나섰다.

단원들은 무대에서 내려와서 주섬주섬 갈 채비를 하려 했다. 오용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아까 할머님이 중간에 갑자기 들어오느라 무대 위에서 대사를 까먹었던 단원이 오용호에게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 아까 고마웠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인사라 오용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함께 무대에 섰던 다른 단원들도 지나가면서 오용호에게 한 마디씩 던지며 인사했다.

“수고했어요.”

“아까 진짜 대단하던데요?”

오용호는 조금은 어리둥절했고, 조금은 떨떠름했다. 다른 단원들이 그렇게 살갑게 오용호에게 말을 건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단원들이 모두 나가고 백고운과 오용호만 남았을 때였다.

백고운이 짐을 챙기고 오용호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고생했어요. 특히 아까요.”

아까라 함은 돌발 상황을 수습하고자 애드리브를 던졌을 때를 뜻했다.

“네, 백고운 씨도요.”

오용호의 입장에서 좀 아깝긴 했다.

왜냐면 그때 오용호는 백고운과 연기를 정면으로 겨루기 위해 준비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할머님이 갑자기 등장해 주의를 분산시키느라 그 기회가 날아간 셈이었다.

마침 생각난 김에 오용호가 백고운에게 다시 물어보려 할 때였다.

백고운이 한발 먼저 말을 꺼냈다.

“근데 꽤 재밌었어요. 그쵸?”

재밌었느냐고?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용호는 불시에 허를 찔린 질문을 들은 것처럼,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재밌었느냐고?

그리고 오용호는 뜻밖의 것을 깨달았다.

원래 오용호는 상대방과 연기를 하고 나면 승리감, 혹은 패배감 둘 중의 하나의 감정이 드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없었다. 깨닫고 보니 조금 스스로 의아할 정도로 말이다.

지금 이 감정은 뭐랄까······.

스포츠 경기로 비유하자면, 복식 경기에서 같은 팀 파트너 선수와 합이 잘 맞아 기분이 좋은 느낌에 가까웠다.

백고운과 오용호가 1:1 경기로 만난 것이 아니라, 그 둘이 한 팀이 돼서 2:1 경기를 치룬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오용호에게 연기란 언제나 이기고 지는 문제였다. 그는 한 번도 연기를 ‘협동 플레


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까 돌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오용호는 즉석에서 대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백고운은 오용호와 생각이
통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대사를 받아주었다. 그 순간 둘은 마치 오래 손발을 맞춰서 서로에게 익숙했던
파트너 같았다.

오용호는 그 기분이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썩 유쾌했다.

이전에 버스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백고운은 그때 뭘 보고 연기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재미요. 즐겁잖아요. 연기하는 것 자체도 재밌고, 다른 사람이랑 함께 하면 더 재미있고.

오용호는 그때 백고운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뭐, 그렇다고 자신의 가치관을 바꿀 정도는 아니었고. 그저 말 그대로 ‘이해’는 했단 뜻이었다.

그는 투쟁심은 강했으나, 인정은 빠른 남자였다.


오용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선선히 대답했다.

“네, 재밌었어요.”

웃긴 놈일세
51.

예상치 못한 폭설과 풍랑으로 인해 2 박 3 일 합숙여행이 5 박 6 일이 되었으나, 그래도 극단 왕국 사람들은


무사히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이후 두 달 간 정기 공연 연습이 이어졌다.

단원들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여행도 같이 간데다가, 또 여행지에서 예상치 못한 일도 함께 겪고 보니 사이가


더욱 끈끈해졌다고나 할까. 좋은 결과였다.

그리고 <레미제라블> 공연의 티켓팅이 오픈되었다.

평소에도 인기가 많았던 극단 왕국의 공연이었는데, 백고운과 오용호까지 출연하자 티켓팅은 그야말로 피
(blood)켓팅을 방불했다.

슬슬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고 봄이 다가오는 신호로 길거리에 꽃이 하나둘 피기 시작하던 3 월의 어느 날.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레미제라블> 공연이 드디어 개막했다.

“<레미제라블> 팀을 위하여, 건배!”

우리는 건배사를 외치며 다 같이 잔을 부딪쳤다. 포차 내부의 분위기가 왁자지껄 했다.


오늘은 <레미제라블>의 뒤풀이 회식 날이었다. 우리는 바로 며칠 전 마지막 공연을 끝낸 참이었다.

<레미제라블> 공연은 봄이 시작되는 3 월 즈음에 올라갔는데, 재미있게도 봄이 끝나고 막 여름에 접어드는 5 월


말 무렵에 내려가게 됐다.

공연 준비 기간까지 합치면 우리는 거의 두 계절을 함께 동고동락하며 보낸 셈이다. 그러니 정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심지어 단원들은 오용호에게도 “마셔요, 마셔!”하면서 친근하게 굴었고, 오용호는 조금 마지못한 듯 굴면서도
의외로 순순히 그들과 함께 어울려주었다.

합숙 연습을 가기 전의 오용호의 모습과 비교하면 그건 놀라운 변화였다. 원래의 그라면 애초에 이런 뒤풀이에
끼지도 않고 혼자 집에 갔을 것이다.

처음엔 우리들과 영 안 친해질 듯 도도하게 굴더니. 반 년 가까이 함께 공연 연습을 하더니 그래도 제법 우리에게
마음을 열었나 보다.

나는 픽 웃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술을 홀짝였다.

그때 내 앞에 앉아 있던 단원들이 내게 물었다.

“고운 씨, 왜 이렇게 많이 안 마셔요?”

“아하하, 전 오늘 술이 좀 안 받아서··· 천천히 마실게요.”

나는 웃으면서 말을 둘러댔다. 실은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단원들은 의심하지 않고 술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래요, 그럼. 자 그러면 고운 씨는 꺾어 마시도록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원샷인 겁니다?”

“물론이죠! 건배!”

그들은 물 컵을 짠 부딪친 후, 그 컵에 든 소주를 원샷에 털어 넣었다.

원래 연기하는 놈들 중에 술 못 먹는 놈이 없다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은 연극쟁이라더니. 과연 술을 들이켜는


기세가 대단했다.

그들은 내일이 없는 듯 한참을 부어라 마셔라 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시끌벅적한 시간이 지나고 저녁이 깊어져 갈 무렵.

술에 뻗은 몇몇은 테이블에 엎어져 쿨쿨 잠들었고, 몇몇은 담배를 피우러 포차 밖으로 나갔다. 아직 멀쩡한
몇몇은 담소를 도란도란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잠깐 요의를 해결하고 다시 포차로 돌아온 참이었다.

의자에 걸터앉으려는데 갑자기 옆에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오용호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더니 태연한 낯으로 자신의 술잔을 가져왔다. 그리고 술을 내 잔과 자신의 잔에 각자


따랐다.

뭐, 짠이라도 하자는 건가?

그러나 오용호는 그저 말문을 트기 위한 행동이었는지 술병을 탁 내려놓은 후 날 쳐다봤다.

그리고 그가 툭 말을 던졌다.
“김철수 씨.”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내 진짜 이름.

“······.”

“······.”

나는 말이 없었고, 그는 내 반응을 관찰하는 듯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생각했다.

‘······감 좋은 놈.’

역시 내가 김철수라고 의심하고 있었던 거 맞구나.

사실 나는 몇 주 전부터 오용호가 날 보는 눈빛이 평소와 다르단 걸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어디서 내가 김철수란 낌새를 알아차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오용호는 감이 좋았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내가 한 수 더 위다.

나는 그가 이렇게 물어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일부러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경계를 풀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용호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눈썹 하나 깜짝 안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이런 것도 연기였기 때문에 표정 관리하는 건 내겐 식은


죽 먹기였다.

나는 조금 기다려서 오용호가 더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고 짐짓 어리둥절한 척 했다.

“뭐예요, 그게 끝? 대사 더 안 쳐요?”

“대사요?”

“상황극 하자는 거 아니었어요? 저번에 합숙 연습 갔을 때 마을 회관에서 했던 그거 하자는 건 줄 알았는데요.”

그때 내가 맡았던 배역은 장발장이었으나, 그 공연에서는 번안한 이름인 ‘김철수’를 썼으니까 말이다. 이런


핑계가 되어줄 줄은 그땐 몰랐지만.

오용호는 고개를 젓고는 대답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김철수 씨 몰라요?”

“김철수 씨?”

“왜, 있잖아요. 배우 김철수.”

······그게 난데.

나는 일단은 이렇게 대답했다.

“알기야 알죠. 유명한 분이셨으니까. 몇 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잖아요. 근데 그 분은 왜요?”

진짜 모른다는 듯 되묻자 오용호의 날카롭던 눈빛이 사라졌다. 의심을 거둔 듯 했다.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아뇨, 그냥 백고운 씨가 개인적으로 아는 분인가 해서요.”


“제가요?”

“네. 뭐, 진지한 건 아니고. 혹시나.”

오용호가 술을 홀짝이더니 입이 떡 벌어지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그쪽이 김철수 선배 아들인가 했죠.”

“······네?”

그건 내가 예상하던 말과 전혀 다른 말이었다.

오용호는 손을 저었다.

“진짜 아주 혹시나 싶어서 그냥 던져본 거예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고요.”

나는 말을 더듬거렸다.

“아니, 왜 그런 오해를······?”

“둘이 약간 분위기도 약간 비슷하고, 뭣보다······.”

오용호가 ‘흠’하는 눈치로 눈을 굴렸다.

“뭣보다 내가 알기론 철수 선배만큼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대한민국엔 없거든요. 근데 백고운 씨도 철수 선배만큼
잘해서. 혹시나 아들이라 유전자를 물려받았나 했죠. 그리고 딱히 조사하려던 건 아닌데 어쩌다 백고운 씨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음, 그건 미안합니다.”

소문? 아.

그러니까 내가 고아라는 얘기를 들었단 말이었다.


뭐, 딱히 숨기는 사실은 아니었다. 이 바닥에선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내 관심은 다른 것에 쏠려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김철수 배우의 사생아··· 라고 생각했던 겁니까?”

이런 쪽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처음엔 얼이 빠졌고 뒤이어 헛웃음이 나왔다.

오용호 얘는 상상력이 풍부한 걸까, 아니면 엉뚱한 걸까.

‘아니, 뭣보다 나 사생활 깨끗했는데?’

전생에서 배우로 활동하면서 스캔들 같은 거야 몇 번 나보기도 했었지만, 대부분은 금방 잠잠해졌다. 나는 여자에


그리 관심이 없어서 그런 쪽의 사생활은 아주 깨끗했다.

그런데 사생아라니. 허, 참.

‘가만 보면 진짜 이상한 놈이네, 얘는. 매번 나더러 롤 모델이라느니 뭐니 하면서 따라다녀 놓고는. 대체 그동안
날 어떻게 본 거야?’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기가 차다고 해야 할지.

내가 연신 헛바람을 내뱉자, 오용호도 제 상상이 너무 풍부했음을 인정했다.

“미안해요. 그냥 혹시나 백고운 씨의 성장배경이 그런 막장 드라마를 쉽게 생각해내는 데에 일조 했나 했죠.”

“그건 그냥 드라마죠!”
내가 내뱉자 오용호는 뻔뻔하게 말했다.

“칭찬으로 받아들여요. 그만큼 연기 잘한다는 뜻이었어요.”

이 자식 봐라. 진짜 웃긴 놈일세?

내가 어처구니 없어하건 말건 오용호는 천연덕스럽게 자기 술잔을 들었다.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요. 술 마시고 서로 잊읍시다. 예?”

그가 자기 잔을 내 잔에 갖다 대 ‘짠’ 소리를 냈다. 그리곤 기분 풀란 듯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는 뭐랄까··· 생각보다 뻔뻔한 구석이 있는 놈이었다. 아니, 사실 예전부터 연기를 같이 해달라느니 뭐니


하면서 쫓아다닐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나는 속으로만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술잔을 들었다.

우리는 함께 술을 쭉 들이켰다.

어쨌거나 해프닝이 좀 있었지만, 진정하고 보니 뒤늦게 조금 우습기도 했다.

뭣보다 오용호가 내가 김철수란 걸 알아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하기야, 생각해보면 백고운 몸에 내가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백고운이 내 아들이라고 의심하는 게 더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이긴 했다. 나와 백고운의 나이 차이도 딱 스무 살 가량 나니까. 내가 일찍 사고(?)
를 쳐서 애를 낳았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오용호만큼 내 상상력도 풍부한 편이었음을 인정해야겠다. 나는 피식 웃었다.


빈 술잔을 내려놓은 뒤, 축축한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 나는 물었다.

“그나저나. 할 얘기는 그게 다인가요?”

“아뇨, 그건 아니고. 본론은 따로 있는데···.”

“싫습니다.”

오용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오용호가 헛숨을 뱉었다.

“아니, 내가 뭔 말을 할 줄 알고 그럽니까?”

보나마나 뻔하지 뭐.

“저번처럼 또 연기 같이 해달라는 거 아니에요?”

합숙 연습 전까지 나는 그의 관심을 받지 않기 위해 너무 튀지 않을 정도로만 연기를 했는데, 마을 회관에서


즉흥극을 하느라 다 헛수고로 돌아갔다.

때문에 오용호가 이렇게 물어올 거라고 예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내가 체념했다고 해서 그의 부탁에
순순히 따라준다는 뜻은 아니었다.

“네, 맞아요. 생각 있어요?”

오용호가 민망해하지도 않고 냉큼 물었다. 나는 흥 콧방귀를 뀌고 대답했다.

“아뇨, 없어요.”

“그러면···.”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저랑 연기하고 싶으면 저랑 같은 작품에 출연하세요. 그 외에는 오용호
씨와 따로 안 해요.”
나는 제법 쌀쌀맞게 대답했다. 이렇게 말하는 건 취향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다. 오용호는 이런 식으로
말해도 끈질기게 졸라오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굴하지 않고 나를 꼬드기려 감언이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기랑 꾸준히 연습하다보면 실력 향상도


되고 어쩌구 저쩌구.

“아, 싫어요!”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생각을······.”

다른 단원들이 우리를 요상하게 쳐다보건 말건 우리는 한참이나 그런 실랑이를 해야만 했다.

아, 예나 지금이나 오용호는 진짜 귀찮은 녀석이다.

며칠 뒤.

나는 오랜만에 소속사에 들렀다. 그리고 실장인 윤성광을 만나자마자 물었다.

“실장님, 저한테 들어온 시나리오가 뭔지 외부에 유출된 적 없죠?”

“응? 아, 네. 없어요.”

윤성광은 어리둥절해했다. 나는 다시 한번 거듭 확인했다.

“진짜죠?”

“네, 그럼요. 그런데 그건 왜요?”

“아녜요. 없으면 괜찮습니다. 혹시나 나중에 누가 물어보거든 모른다고 딱 잡아떼어주세요.”

“······?”
윤성광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나는 그제야 빙긋 웃었다. 그는 입이 무거운 남자니 그런
점은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보다, 이제 슬슬 차기작을 정해야죠.”

“네. 아, 안 그래도 어제 연락 주시지 않으셨어요? 새로 들어온 게 있다고···.”

“맞아요. MBS 에서 드라마 하나가 들어왔어요.”

윤성광이 그 드라마의 시놉시스를 건넸다.

제목이 제일 먼저 보였다.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

오, 사극?

내 눈이 반짝 빛났다.

원작 소설
52.

윤성광은 말을 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퓨전 사극이에요. 이게 로맨스 소설이 원작이거든요. 원작이 엄청 히트 쳤는데. 혹시


읽어봤어요?”

“어, 아뇨. 근데 재밌어 보여요.”

“저는 원작을 읽어봤는데 실제로도 꽤 재미있어요. 방송국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기대작이라고 하더라고요. 한 번


시놉시스라도 읽어봐요.”

나는 시놉시스를 펼쳐서 간단히 읽었다.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 사실 제목만 보고 남자 주인공이 자객인데 여장해서 왕세자비가 되는 내용인가
했는데, 그런 파격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드라마의 간략한 내용은 이랬다.

여자 주인공은 이름 있는 양반 가문의 딸이다. 그런데 여주인공이 고작 7 살 되던 때, 그녀의 가문이 역모 혐의를


받아 한 순간에 몰락한다.

여주인공은 다행히 도망칠 수 있었으나, 자신의 부모가 정치적인 이유로 무고하게 숙청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는 복수심에 불탄다. 그때부터 여주인공은 남장을 하고 무예를 익힌다.

그렇게 십 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왕세자비를 간택하기 위해 전국에 금혼령이 내려진다.

여주인공은 그것이 기회라고 여긴다. 그녀는 남장을 풀고 어엿한 여자의 모습으로 왕세자비 후보에 도전한다.
그리고 궁에 들어가 여러 시험을 거친 후 어찌어찌하여 왕세자비가 된다.

하지만 그녀의 진짜 목적은 오직 왕을 살해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로맨스 소설답게, 여주인공의 복수는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면 여주인공은 그저 이용하려고만 했던
왕세자와 진짜로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재밌을 것 같네요.”

“그렇죠? 원작을 어떻게 구현할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원작이 히트친 작품이니만큼 기본적인 시청률도 나올
거예요. 게다가 요즘은 또 남장여자 드라마가 유행이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랬다. <커피프린스 1 호점>을 필두로 <바람의 화원>, <미남이시네요>, <성균관
스캔들> 등등이 모두 히트를 쳤으니 말이다.

윤성광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본격적인 남장여자 드라마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그런 씬들이 나오니까요.”

“저한테 제안 온 배역은 어떤 배역이에요?”

“남자 주인공인 왕세자 캐릭터에요. 방송국 쪽에서 고운 씨를 꼭 캐스팅하길 원하더라고요. 어때요, 생각 있어요?
제 생각에는 이번에 로맨스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여태 로맨스는 한 번도 안 찍어봤잖아요.”

“그건 그렇죠.”

전생에는 많이 찍어봤지만, 굳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윤성광은 내가 이 드라마를 하기를 원하는 눈치였고, 나 역시 긍정적이었다. 계속 영화만 찍은 터라 이번엔


드라마 쪽도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다.

게다가 사극이라서 더 마음이 가는 것도 있었다. 전생에서 나는 꽤나 사극을 많이 찍은 편이었다. 뭐, 주로


정통사극이었지 이런 로맨스 위주의 퓨전 사극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면 대본 읽어볼 수 있을까요?”

윤성광이 씩 웃었다.

“고운 씨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제가 미리 대본을 받아왔죠.”

그가 기다렸단 것처럼 가방에서 1 화 대본을 꺼냈다. 그가 덧붙였다.

“대본은 아직 1 화까지밖에 안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더 수정될 수도 있고요. 그래도 극본 맡은 작가가 드라마


바닥에선 실력 좋은 작가로 유명하니까 쪽대본 그런 거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극본을 쓴 사람이 누구길래?

가벼운 호기심에 나는 스태프 롤을 확인했다. 그리고 익숙한 작가의 이름을 확인했다.

아, 이 분이었어? 나는 전생에서 몇 번 이 작가의 작품을 찍어본 적이 있었다.

윤성광의 말대로 이 작가는 실력이 좋은 분이었다. 워낙 손이 빠른 작가라서 쪽대본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이 작가님이라면 믿을 만하죠.”

“아, 고운 씨도 아는 분인가요? 드라마 쪽은 아직 한 번도 해본 적 없잖아요.”

아차. 나는 하하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 소문으로 들었어요. 왜, 저번에 <친구들> 영화 찍으면서 제가 이성한이랑 많이 친해졌잖아요. 성한이가


드라마 많이 찍어서 이런 저런 거 많이 알려주거든요.”

이럴 때 이성한이 도움이 되다니. 역시 사람은 많이 사귀고 볼 일이었다. 이렇게 팔아먹어서 미안하긴 하지만.

그리고 며칠 뒤.

내 이야기를 듣던 김건이 뾰로통하게 말했다.

“차라리 날 팔아먹지.”
나는 오랜만에 김건과 만나 식사하고 있던 중이었다.

몇 달 전 오용호와 있었던 일부터 바로 며칠 전 퓨전 사극 드라마를 들어가기로 결정했다는 얘기까지, 우리는


근황을 두런두런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에 김건이 저런 얘기를 한 것이었다.

나는 후식을 먹다가 김건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넌 영화만 찍지, 드라마는 한 번도 찍어본 적 없잖아.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너 저번부터 유독 성한이 얘기만
나오면 뾰족하게 굴더라. 둘이 뭐 있었어? 영화는 같이 잘 찍었잖아.”

김건이 뜨끔한 표정으로 부정했다.

“아냐, 그런 거. 나도 성한이 좋아해.”

그가 눈을 굴렸다. 잠시 뒤,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인정했다.

“그래 나도 알아, 내가 유치하게 구는 거. 그냥··· 오랫동안 너랑 제일 친한 친구는 나 하나였는데. 요즘은


아닌 것 같아서 좀 질투한 것뿐이야.”

김건의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곧 웃음을 터트렸다.

“뭐라는 거야. 당연히 내 친구는 너 하나지. 내가 김철수란 거 아는 사람도 너 하나뿐이잖아.”

“아우, 알아. 부끄러우니까 더 말하지 마. 나도 내가 이렇게 치졸한 놈인 줄 몰랐단 말이야.”

김건이 붉어진 얼굴로 턱을 괴고 끙 신음을 냈다.

나는 하하 웃었다. 김건이 무슨 마음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화상 입고 나는 오랫동안 칩거했다. 그런 내게 친구라곤 김건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새 몸을 얻으며
사회적으로 재기하게 됐다.

친구관계란 미묘해서 친구의 성공과 인기를 언제나 축하하는 마음으로 보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 역시 질투심
때문에 김건 앞에 떳떳이 나서지 못할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김건이 스스로를 치졸하다고 표현하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감정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문제였지. 그리고 이렇게 솔직한 김건의
태도는 건강한 것이었다.

친구의 민망함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농담을 던졌다.

“네가 그럴 만도 하지. 나는 회춘까지 한 셈이잖아. 부러워서 어째?”

“허, 안 부럽거든? 너는 미혼남이니까 그게 좋은 거지, 내 케이스 돼봐라. 일단 와이프한테 뭐라 설명할 건데.


벌써부터 골치 아파. 난 됐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는 그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한차례 웃었다. 그리고 그제야 김건이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밥 먹고 이제 어디 갈 거야? 광화문 근처는 잘 안 와봐서 벌써 연 술집이 있나 모르겠네. 좀


프라이빗한 룸이 있어야 할 텐데.”

“예전에 내가 가던 데 있어. 근데 거기 가기 전에 잠깐 서점 좀 들르려고.”

“서점? 뭐, 책 사게?”

“응. 이번에 들어가려는 드라마, 그거 원작 소설이 있다고 해서 사서 읽어보려고. 대본은 아직 1 화밖에 안


나와서 뒷내용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거든. 대략적이라도 좀 볼까 해서.”

“오. 나도 그거 안 읽어봤는데, 나도 한번 사서 읽어봐야겠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근처 서점에 갔다.


히트쳤다는 게 거짓은 아닌지, 우리가 찾던 소설은 베스트셀러 코너 매대에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김건은 보고 싶은 책이 원래 더 있었다면서 서점을 구경하러 떠갔고, 나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갔다.

자리를 잡은 후 구매한 책을 펼치고 첫 장부터 가볍게 읽어보기 시작했다.

실은 김건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때울 겸 읽어보려던 것에 가까웠다. 초반만 읽고 나머지는 집에 가서 마저


읽을 생각으로 말이다.

그래, 처음엔 분명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정신없이 책을 읽고 있었다.

내용 자체의 흡입력도 대단했지만, 내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라, 이거······?’

그리고 한참 뒤.

“어, 너 거기 있었어? 한참 찾았네. 나 책 다 골랐는데 이제 가자.”

김건이 날 찾았을 때, 나는 어느새 책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있었다.

나는 생각에 잠긴 채 김건을 바라봤고, 그는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래?”

“아니, 별건 아니고······.”
각색한 드라마의 1 화 대본만 봤을 땐 몰랐다. 그런데 원작 소설을 읽으며 줄거리 전체를 다 보고 나니 다르게
보이는 게 있었다.

말을 흐리는 동안 나는 머릿속으로 정리를 마쳤다. 그래서 김건에게 내뱉던 말을 마저 끝맺었다.

“이번에 들어가려고 했던 드라마. 그거, 생각이 조금 바뀌어서. 실장님한테 얼른 연락해야겠는데.”

MBS 드라마국. 드라마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의 기획 현장.

극본을 맡은 서 작가와 연출을 맡은 김 PD 가 주요 배역의 캐스팅을 두고 열띤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일단 백고운 씨 측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네. 말이 검토지, 거의 수락한 것 같더라고요.”

“그러면 남주는 백고운 씨로 확정하는 건가요?”

“저는 괜찮은 것 같아요. 나이가 좀 어리긴 한데··· 페이스가 성숙하니까 여주인 루다 씨랑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여주는 그러면 이루다 씨로 확정인 거죠?”

“루다 씨가 최근에 예능으로 확 떴잖아요. 화제성을 이용하려면 지금이 딱이죠.”

“이번에 배우로 처음 데뷔하는 거던데. 연기는 잘 할까요?”

“원래 배우가 꿈이었대요. 소속사 측에서 일단 아이돌로 데뷔하라고 해서 가수를 한 케이스더라고요. 왜, 그런


애들 이 바닥에 꽤 있잖아요. 처음엔 아이돌로 데뷔했다가 인지도 쌓고 배우로 넘어오는 애들. 뭐, 연기 연습도
꾸준히 했다하고 본인도 열정이 있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럼 이제 남은 주요 배역은 서브남주랑 서브여주 정도네요.”

“저는 서브남주 역엔 이 배우랑 이 배우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원작이랑 싱크로율을 생각하면······.”

둘이서 그런 토론을 하고 있을 때였다.


뚜르르―.

김 PD 의 핸드폰이 울렸다. 연락 온 이는 이번 드라마의 조연출이었다. 김 PD 는 서 작가에게 양해를 구한 뒤


전화를 받았다.

“응, 왜?”

그리고 전화가 이어질수록 김 PD 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응. 백고운 씨가. 응. 응. 뭐? 갑자기?”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서 작가는 조금 불안해졌다. 설마, 안 한다는 얘기일까?

물론 백고운이 거절하면 다른 배우를 구하면 되지만, 백고운만큼 인지도가 높으며 연기도 잘하는 20 대 남자
배우가 드물었다.

대체할 후보는 몇몇 있었는데 하필 지금 대부분 작품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것도 경쟁사인 KBC 와 SBC 에 말이다.

윗선에서는 이 드라마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고, 그런 만큼 캐스팅 라인업이 빵빵하길 원했다. 백고운은 윗선에서
언급한 캐스팅 5 순위 안에 드는 배우였다. 그래서 제일 먼저 연락한 것이었고. 만약 백고운이 캐스팅을 거절하면
문제는 안 생겨도, 조금 골치는 아플 것이었다.

그래서 김 PD 가 전화를 끊었을 때, 서 작가는 조급히 물었다.

“왜요. 백고운 씨가 안 하겠대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서 작가는 휴 한숨을 쉬었다. 일단 다행이었다.


그러나 김 PD 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미간을 살짝 좁히고 있었는데, 약간 아리송한 얼굴이기도
했다.

김 PD 가 수화기 너머에서 전해 온 본론을 그제야 말했다.

“글쎄, 백고운 씨가 원작 소설을 읽었대요. 그리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대요. 원래 하기로 했던 남주가 아니라
서브남주로 배역을 바꾸고 싶다고 하네요. 이거, 어떡하죠?”

“······네?”

서 작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서브남주
53.

배우의 캐스팅 롤이 바뀌는 경우는 의외로 허다하다.

한 배우가 어떤 배역의 오디션을 봤는데, 제작진 측에서 그 배우는 다른 배역에 더 어울릴 것 같다고 판단해 다른
배역으로 캐스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보통 조연 롤을 구할 때나 그렇게 하지, 주연 롤을 그렇게 하지는 잘 않는다.

오디션이 아닌, 제작진 측에서 먼저 배우에게 캐스팅 콜을 요청하는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배우의 외적인 이미지와 캐릭터의 싱크로율이 얼마나 높으냐를 따져서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남주와
서브남주의 급 차이가 꽤나 크다는 점에 있다.

서브남주는 주연 롤이기는 하나, 엄밀하게 말해선 서브주연일 뿐이다. 당연히 남주와 인지도 차이가 있어야 한다.

남주를 맡게 된 배우가 1 티어 배우라면, 서브남주는 그와 비슷하거나 한 단계 낮은 인지도의 배우를 골라야 한다.


달리 말하면, 서브남주를 맡게 된 배우가 1 티어라면, 남주는 무조건 그와 비슷하거나 한 단계 높은 인지도의
배우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서 작가는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일단 이렇게 물었다.

“우리 드라마 제작비로 감당 가능해요?”

백고운과 남주를 맡을 미정의 1 티어 배우를 같이 캐스팅한다면 당연히 개런티로 나가는 제작비가 많아진다.

제작비는 다른 어떤 것보다 제일 중요한 문제였다.

“글쎄요, 제작비야 부장님이나 국장님을 찌르면 될 것 같기는 한데······. 일단 다들 우리 드라마에 거는


기대가 많으시긴 하거든요.”

김 PD 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면 캐스팅 라인업이 더 화려해졌다고 좋아할 수도 있죠.”

상황을 좀 덜 심각하게 하기 위한 농담인지, 아니면 진담인지는 모르겠지만 김 PD 의 그런 태도에 서 작가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 피디님은 어떻게, 괜찮으세요? 백고운 씨 얘기요.”

배역을 바꾸고 싶다는 백고운의 얘기를 들어줄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김 PD 가 ‘흠···’ 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글쎄요. 솔직히 말하자면······ 백고운 씨가 서브남주 역에 어울릴까요?”


“좀 그런 면이 있죠. 싱크로율이 일단 맞아야 하는데······.”

우선 캐릭터 외모부터 남주와 서브남주는 크게 대비된다.

남주가 단정하게 잘생긴 정석 미남이라면, 서브남주는 좀 더 거칠고 야생적인 외모라고 해야 할까.

성격적으로도 남주는 차분하고 이성적인 캐릭터인 반면, 서브남주는 호쾌하고 능글맞은 캐릭터였다.

물론 백고운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어떤 특정 이미지의 배역에 갇혀 있단 느낌은 없었지만, 좀 어린 배우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해수>의 ‘해수’는 아예 순진무구한 아이 같은 캐릭터였고, <친구들>에서 ‘태웅’은 강렬한 악역 캐릭터이긴


했으나 그래도 청소년 캐릭터였다.

어린 배우란 이미지도 있었고, 백고운의 외모 자체도 곱상하고 준수한 편이지 않은가. 그래서 서브남주보다는
남주 쪽에 먼저 캐스팅 제의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서브남주로? 어울릴까?

그런 의문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아깝긴 한데요.”

“잘 스타일링 해보면 될 것 같기도 한데··· 일단 아직은 상상은 안 가네요.”

둘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상상이 안 가는 상상을 하려 애쓸 때였다.

김 PD 가 먼저 아이디어를 번뜩 떠올렸다.
“그러면 이건 어떨까요?”

그가 방금 떠올린 생각을 서 작가에게 설명했다.

“아, 그거 괜찮네요. 한번 체크해보는 걸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서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그런 얘기들을 하며 일단의 상황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서 작가는 궁금했다.

“근데 백고운 씨는 왜 배역을 바꾸고 싶다고 했을까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김 PD 도 그건 자기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저도 그건 못 들어서요.”

배역을 바꾸고 싶다는 뜻을 내비친 후, 김건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 모두가 의아해했다.

개런티에서도 그렇고 비중에서도 그렇고, 남주가 서브남주보다 더 나은 편인데 왜 바꾸고 싶으냐고.

거기에 대한 내 답은 간단했다.

“서브남주 캐릭터를 더 연기해보고 싶어서.”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유일하게 원작소설을 읽은 윤성광은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소설 보면 그 캐릭터가 더 매력적이긴 하죠.”

“네, 그렇더라고요.”

1 화 대본만 읽을 땐 몰랐다. 왜냐면 거기에는 서브남주가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원작소설을 다 읽고 보니, 전체적인 이야기에서 서브남주가 얼마나 매력적인 캐릭터인지가 확 다가왔다.

매력적인 조연은 때론 주연의 인기를 압도하기도 하다.

간혹 삼각관계 로맨스 드라마를 보다보면 유독 서브남주를 좋아하는 팬이 더 많은 경우가 있다. 흔히


서브병이라고 하는데, 이 드라마도 왠지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나는 서브남주 캐릭터를 더 연기해보고 싶었고,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니고, 가볍게 한번 생각해달라는 의미로 연락드렸다. ‘다른 배역을 더 해보고 싶은데,
피디님과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느낌으로.

그때, 윤성광에게 전화가 왔다. 그가 내게 입모양으로 ‘PD 님’이라고 말해주었다.

제작진 측에 연락한 지 몇 분도 안 됐는데 금방 연락 온 걸 보니, 금방 결정이 났나 보다. 나쁜 쪽이려나?

“네, PD 님. 품 엔터 윤성광 실장입니다.”

그가 전화를 받고 잠시 저쪽의 말을 들었다.

“네, 네, 아뇨, 아, 네. 네, 이해했습니다, 그럼요, 네. 괜찮습니다. 네, 네. 감사합니다. 네―


들어가세요.”
윤성광이 전화를 끊은 후 전화내용을 곧바로 말해주었다.

“서브남주가 액션이 많이 필요한데 할 수 있겠냐고 하네요. 액션은 물론 활쏘기랑 말 타기도 잘해야 한다고요.
일단은 할 수 있다 대답했더니, 그러면 한 번 테스트를 해보자고 하네요. 고운 씨 괜찮겠어요? 활쏘기야 배우면
되고, 액션도 조금만 익히면 대역이나 편집으로 어떻게든 될 텐데, 말 타기는 아마 직접 해야 할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씩 웃었다.

사실 사극을 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조단역까지 합하면, 내가 전생에서 출연한 사극만 열 개가 넘었다.

그 열 번의 출연 동안 내가 활과 말을 아예 안 다뤄봤을까?

설마.

경기도 외곽 지역에 위치한 어느 승마장.

김 PD 와 서 작가, 그리고 백고운과 윤성광이 모두 모였다.

오늘 만난 여기서 만난 이유는 백고운의 승마 실력을 간단히 테스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김 PD 와 서 작가는 약간 다른 생각이 있었다.

‘영 몸치인 티가 나면, 그걸 핑계로 안 된다고 해야겠다.’


백고운이 서브남주 역에 아예 안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원래 남주 쪽 이미지를 생각하고 캐스팅 제안을
넣은 터라 이왕이면 원래의 롤대로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게다가 실제로 서브남주 역은 무예에 능통하다는 설정이라, 기본적으로 몸을 잘 쓰는 배우를 섭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 딴 생각을 숨긴 채, 둘은 백고운과 가볍게 스몰 토크를 나누었다.

“여름이라 그런가, 벌써 덥네요.”

“그러게요. 오늘도 타는 거 아닌가 몰라요.”

“두 분 다 선크림 잘 바르고 다니세요. 저는 한 번 깜빡했다가 완전히 탔거든요.”

그 말에 둘은 백고운을 봤다가 새삼 깨달았다.

“어, 그러게요. 고운 씨 피부가 좀 탄 것 같네요?”

오늘 백고운의 피부는 평소보다 훨씬 구릿빛이었다. 그 사이에 여름휴가라도 다녀왔나? 그래서 저렇게 단기간에
탔나?

물론 그들은 백고운이 태닝샵에서 인공적으로 피부를 태우고 왔다는 걸 몰랐다.

그래, 백고운은 그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일부러 이미지 메이킹을 하고 왔다. 선크림을 안 발라 피부가 탔다고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면서 말이다.

때마침 중년 남자가 다가와 그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백고운 배우님의 승마 교습을 도울 일일 코치 남양주라고 합니다.”


코치의 이름을 들었을 때, 백고운의 입가가 살짝 움찔했다. 입이 절로 근질거렸다. 그러나 백고운은 입매를
내리누른 뒤 허리를 꾸벅이며 정상적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코치님.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이성한 때 이후로 그는 이름 가지고 농담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었다.

인사를 마친 후, 코치는 말을 말 한 마리를 안쪽에서 끌고 왔다.

“이 친구 이름은 라이트썬더에요. 품종은 서러브레드로, 경주마 출신인데 은퇴하고 여기로 왔죠. 사극 촬영에
자주 출장 나가는 녀석입니다. 사람을 좀 가리지만 훈련이 잘 된 녀석이라 타기엔 이만 한 놈이 없죠. 일단 한번
만져보시겠어요?”

말은 커다랬지만, 백고운은 겁먹은 기색 없이 성큼성큼 다가가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사람을 가린다기에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말은 백고운의 손길을 유순히 받아들였다. 코치가 껄껄 웃었다.

“아이구, 썬더가 배우님을 엄청 좋아하네요. 잘생긴 사람을 알아보나 봅니다. 썬더는 암컷이거든요.”

“하하, 감사합니다. 다행이네요.”

말과 친해졌으니 이젠 본격적으로 말을 타야 할 때였다.

백고운은 보호구를 다 착용한 후, 안장의 발걸이에 발을 얹었다.

처음 말을 타보는 사람은 안장에 올라서는 것부터 어려워한다. 그래서 코치는 당연히 백고운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를 잡아주려 했다.

“읏차.”
그러나 코치가 도와주기도 전, 백고운은 몸에 힘을 싣고 훌쩍 말 위로 올라탔다.

코치뿐 아니라 지켜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서 작가와 김 PD, 윤성광―도 깜짝 놀랐다.

“몸이 상당히 가볍고 유연하시네요. 긴장도 안 하시고. 혹시 예전에 말 타본 적 있나요?”

“아뇨, 처음이에요.”

백고운은 겸손히 웃었다. 코치는 연신 감탄했다.

“그러면 타고난 감각이 있으신 거예요.”

서 작가와 김 PD 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거 어째,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그러면 한 바퀴 돌아볼게요.”

그들은 울타리가 넓게 쳐진 야외 초원으로 나갔다.

코치가 앞에서 고삐를 잡으며 걸었고, 거기에 맞춰 말이 움직였다. 백고운은 그저 말 위에 앉아서 흔들거렸다.

원래 말을 모는 법보다, 말 위에서 안정적으로 앉아있는 방법을 배우는 게 더 먼저였다. 말은 예민한 동물이라


기수가 불안해하면 같이 덩달아 불안해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고운은 뻣뻣하지도, 긴장하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지상에 앉아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한 바퀴 돌았을까. 백고운이 먼저 물었다.

“코치님, 저 혼자 돌아봐도 될까요?”


코치는 괜찮을 거라 판단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러면 한 바퀴만 혼자서 돌아봅시다. 힘을 빼고 있으면 썬더가 알아서 돌 겁니다. 그 다음엔 뛰는
것에 적응해봅시다.”

그가 고삐를 놓았고, 썬더는 코스를 따라 따각따각 걸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 주차장이 있었는데, 나가려는 차가 들어오려는 차와 부딪힐 뻔 했는지 클락션 소리가 크게 울렸다.

빵!

그리고 그 소리에 깜짝 놀란 건지 말이 갑자기 흥분했다.

푸르릉―.

“안 돼!”

코치가 대경실색해서 말 쪽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그가 말에 닿기도 전이었다.

말이 투레질하면서 콧김을 슉슉 뿜어내더니 앞발을 쳐들고 굴렀다. 백고운이 고삐를 붙잡고 버텼지만 몸이 뒤로
아슬아슬하게 젖혀졌다.

“꺅!”

“백고운 씨!!”

울타리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던 서 작가가 비명을 지르며 입을 틀어막았고, 김 PD 와 윤성광이 백고운을 부르며
벌떡 일어났다.
승마에 대해서 잘은 몰라도, 말에서 낙마하면 크게 다친다는 상식 정도는 모두 알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말릴 틈도 없이 쌩하니 튀어나간 말이 초원을 거칠게 뛰는데,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말의 그 움직임이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건 꼭 마법 같았다.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난 건지는 한 발 늦게 알 수 있었다.

말의 속도가 느려지니 보였기 때문이었다.

백고운이 말고삐를 잡고 능숙히 말을 몰고 있는 게 말이다.

그는 당황해서 말에 매달려있기는커녕 오랫동안 말을 타본 사람처럼 편안해보였다. 아니, 짐짓 재밌는지 입가엔


빙그레 미소까지 달고 있었다.

백고운과 라이트썬더는 오랫동안 함께 지낸 동료처럼 신나고 즐겁게 초원을 달렸다.

모두가 입을 떡 벌린 채 백고운이 말 모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그리고 한참 뒤.

“워워―.”

백고운이 고삐를 당기며 말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고삐를 돌린 뒤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셋의 앞에 멈춰 섰을 때.

백고운이 말 등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봤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백고운의 이마에 살짝 달라붙어 있었고, 등지고 있던 햇빛은 그의 머리 위에서 부서졌다.

백고운이 안심시키는 목소리로, 그러나 흥분의 기색이 아직 남아있는 듯 약간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놀라셨죠. 걱정시켜드려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그리고 그가 씩 웃었다. 햇빛을 반사한 그의 하얀 이빨이 반짝 빛났다.

그 순간, 서 작가는 눈을 부릅떴다. 머릿속 종이 뎅뎅 울리는 기분이었다.

지금 백고운은 원작소설에서 막 튀어나온 모습이었다.

그래, 백고운의 모습은 그들이 구현하고자 했던 서브남주의 모습과 완벽히 똑같았다는 소리였다!

아이디어 뱅크
54.

서 작가는 그동안 잠시 깜빡하고 있었다.

배우란 진정 카멜레온과 같은 존재라는 걸 말이다.

한 이미지에 고정되어 매 작품마다 비슷비슷한 캐릭터를 맡는 배우가 있고, 반대로 매 작품마다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해 ‘완전히 다른 사람 아니야?!’라는 느낌을 주는 배우가 있다.
그리고 백고운은 명백히 후자였다.

서 작가는 백고운이 남성적인 매력이 강한 배역과는 안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게으른 착각이었다.

헤어스타일과 패션 그리고 피부 톤을 조금 조정하자 이미지는 금방 바뀌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백고운은 바로 이전 작품인 <레미제라블> 공연에서 중년 남자인 장발장을 연기했단다.

포털 사이트에 좀 검색해보면 어색한 점이 없어서 도리어 놀라웠다는 관객들의 후기를 여러 개 찾아볼 수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백고운은 넓은 스펙트럼의 배역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배우란 뜻이었다. 물론 거기엔 뛰어난


연기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거겠지만.

서 작가는 승마장에서 백고운이 말을 몰았을 때 일순간이지만 서브남주 캐릭터가 진짜 튀어나온 것 같은 착각을


느꼈고, 그 감을 믿기로 했다.

그리하여 서 작가의 강력한 추천으로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의 서브남주 배역은 백고운이 맡기로 결정됐다.

자연스럽게 남주 자리가 공백이 되었는데, 다행히도 백고운을 대체할 1 티어 남자 배우를 금방 구할 수 있었다.

남주와 여주, 그리고 서브남주까지 다 결정되고 보니, 처음부터 이게 가장 베스트였겠다 싶을 정도로 밸런스가
좋았다.

생각해보면 백고운은 인기는 높지만, 드라마 쪽에는 이번에 처음 데뷔하는 것 아닌가.

최근에 개국 된 종편 쪽 드라마라면 모를까, 지상파에서는 서브남주로 데뷔해 차근히 올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그림이었다.

우려했던 제작비 쪽도 쉽게 해결됐다.


이런 말이 좀 실례일 수도 있었으나, 윗선의 결정권자들은 출연 배우의 인지도가 높으면 드라마의 시청률도 같이
높아진다고 믿는 경향이 강했다.

백고운이 서브남주 쪽으로 내려가면서 결과적으로 아주 화려한 캐스팅 라인업이 완성되었고, 윗선은 흡족해하며
제작비를 턱턱 내놓았다.

책임자들은 이번 드라마에 거는 기대가 많았고, 지상파의 힘이 아직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길 원했다.

최근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tvM 을 의식한 것으로 보였는데, 그럴 수밖에 또 없는 것이 그쪽에서 요즘 내놓는


드라마들이 하나같이 성공을 하면서 지상파를 바짝 긴장시켰기 때문이었다.

기대가 높아질수록 부담도 높아졌지만, 어쨌거나 지원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좋았다. 좀 어부지리
같긴 했지만.

조연들까지 캐스팅이 다 결정된 후, 본격적인 기사가 떴다.

원작소설이 워낙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자연히 드라마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높았다.

드라마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는 내년 상반기 방영 예정이었고, 크랭크인은 올해 말이었다.

그 사이 출연자들과 제작진들은 제작발표회와 리딩과 같은 자잘한 일정들을 소화했다.

연출을 맡은 김 PD 는 제작발표회에서 그들의 드라마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저희 드라마 장르는 액션 로코입니다. 원작의 로맨스 라인을 잘 살리면서도, 드라마만이 보여줄 수 있는 화려한
액션도 넣기 위해 노력했으니 재미있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장르가 로코이지만 액션도 있는 만큼, 무술 감독의 실력이 중요했다.


김 PD 는 수소문해서 스턴트맨과 영화배우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강철중 무술 감독을 섭외했다.

김 PD 가 강철중에게 요구하는 포인트는 이랬다.

“남주와 여주, 서브남주의 액션에서 캐릭터 차이가 확실히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왕세자인 남주는 정석적이고
반듯한 검술을 썼으면 좋겠고, 여주는 왕을 암살하려고 하는 자객이니까 민첩한 닌자 같은 느낌을 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서브남주는······.”

서브남주는 좀 더 복잡했다.

그의 이름은 ‘서주’으로, 설정 상 양반 가문의 서자 출신이었다.

그는 서자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고, 차별을 하도 많이 당한 탓에 어린 나이에 삐뚤어지기로 결심했다.

말하자면 ‘너희들이 날 못된 자식으로 취급한다면, 기꺼이 못된 자식이 되어주겠다!’하는 성격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는 머리가 조금 굵어질 때부터 공부를 게을리 하면서 하위계층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신경 쓰지 않았고, 그 태도는 무술을 익힐 때도 비슷하게 적용됐다.

그는 가문에서 가르쳐주는 검술도 익혔지만, 시정잡배들이나 하고 다니는 무식한 몸싸움에도 능통했다.

김 PD 는 그것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이렇게 말했다.

“서주는 남주와 여주의 중간 정도의 느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정파와 사파의 느낌이 동시에 있는 그런
느낌으로요.”

강철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재미있는 작업이 될 것 같네요.”

늦가을의 어느 날.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가 크랭크인에 들어갔다.

오늘은 백고운의 단독 촬영 날이었다.

오늘 찍을 장면은 1 화 초반에 등장하는 씬으로, ‘서주’인 백고운이 시장 바닥에서 엑스트라들과 싸우는 액션


씬이었다.

액션 씬은 본 촬영에 들어가기 전 리허설도 많이 맞춰야 하고, 와이어나 크레인 같은 대형 장비도 많이


동원되느라 거의 하루 종일 찍어야 하는 편이다.

백고운 역시 일찍 와서 옷을 갈아입은 뒤 강철중 무술 감독에게 설명을 듣고 있었다.

“저번에 감독님이 액션에 캐릭터성을 넣으라고 해서 생각한 게 이거거든. ‘서주’는 여유롭고 뺀질거리는
성격이잖아. 그래서 최대한 동작을 간결하게 짰거든. 움직이기 귀찮아서 경제적으로 싸운다는 느낌이랄까?”

강철중은 손날을 허공에 치는 시늉을 했다.

“한 방, 딱! 먹이면 쓰러지고. 한 방, 딱! 먹이면 또 쓰러지고. 무슨 말인지 알겠니?”

“네, 알 것 같아요.”

백고운은 진지한 자세로 그 얘기를 경청했다. 강철중은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지만, 정석적인 검술과 다른 점은 검 말고도 손과 발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는 점이야.


말하자면, 검술에 격투를 섞은 느낌이지. 서자 출신이라고 하니까 양반과 양민의 느낌을 동시에 줄 수 있도록 좀
섞었지. 일단 그런 뉘앙스를 이해하고 따라하면 될 것 같아. 알겠지?”

“네, 이해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동작을 알려줄게. 잘 보고 따라하면 돼.”

이번 장면의 배경은 시장 바닥의 골목길인데, 왈패들이 어린 애 돈을 빼앗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우연히 바로 지척에서 자고 있던 서주(백고운)이 그 소란에 눈을 뜬다.

상황을 파악한 서주는 아이에게 돈을 돌려주라고 한 소리 한다.

물론 왈패들은 돈을 돌려주기는커녕 서주를 비웃는다. 서주는 그 돈을 다시 뺏기 위해 몸을 일으킨다.

왈패들은 서주를 우습게 보곤 와르르 달려든다. 물론 이런 씬이 으레 그러듯이, 그들은 당연히 금방 제압당한다.

강철중은 줄거리에 맞춰 스턴트와 함께 액션을 보여주었고, 백고운은 그 자세를 유의 깊게 본 후 뒤이어 따라했다.

처음에 달려드는 놈은 이렇게 손을 꺾어서 제압하고, 다음에 달려드는 놈은 이렇게 발을 걸어서 쓰러트리고, 그
다음부터 달려드는 놈들은 검집으로 이렇게 찔러서 쓰러트리고······.

한편 그 모습을 근처에서 보고 있던 김 PD 가 입가를 가린 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뭔가 심심하다고 해야 하나.

김 PD 가 강철중에게 말을 걸었다.

“강 감독님, 검을 없애고 낫이나 가래처럼 주변의 소품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바꿔도 동작에 무리가 없을까요?”

“어······ 왜요?”
“액션은 지금 매우 좋은데, 캐릭터가 좀 더 드러났으면 좋겠어서요. 즉석에서 주변 소품을 이용하면 좀 더
여유로운 느낌이 들지 않을까요?”

김 PD 는 지금 연출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강철중은 곤란한 기색으로 볼을 긁적였다.

“글쎄요,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러면 약간 동작이 어색한 부분이 있을지도 몰라요. 기본적으로 장검을
전제하고 짠 액션이라서요.”

그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고운이 불쑥 말을 걸었다.

“그러면 뭘 먹는 건 어떨까요? 이를 테면 사과라든가요.”

“응? 사과?”

“네. 싸우는 와중에도 한손으론 계속 뭘 먹고 있으면 실력자라는 느낌이 살잖아요. 물론 한 손이 빌 때만요. 두


손 다 뭘 붙잡고 있어야 할 때면 잠깐 사과를 입에 물고 버티면 될 것 같아요.”

그 말에 김 PD 와 강철중이 모두 ‘좋은 아이디어인데?’라는 투로 말했다.

“그러면 한 번 해볼래? 사과는 있어?”

“네, 제가 식단 조절용으로 싸온 게 있어요. 매니저 형한테 갖다 달라고 할게요.”

그리고 곧 연락 받은 백고운의 매니저가 사과를 갖다 주었다.

백고운이 그것을 한 손에 쥐고 아삭 베어 무는 시늉을 하면서 아까 배운 액션을 느리게 복기했다.

의외로 그림이 아주 괜찮다.

사과는 그저 덤일 뿐 무기는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액션이 변경될 일이 없었다. 또 싸우는 도중에도 자기 할 일
(그러니까 사과 먹는 행위)를 계속 하니까 여유롭다는 느낌이 확 살았다.
모두가 만족할 그림을 얻고 있을 때였다.

백고운이 사과를 입에 문 채 두 손으로 칼을 잡고 몸을 휘 돌렸다.

그러자 사과가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백고운이 멈췄다. 그가 깨달은 듯 말했다.

“아, 이게 동작이 크면 입으로 물고 버티는 게 안 되네요. 이를 박아 넣고 버티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과육이


단단한 편이 아니라서 생각보다 쉽게 잘려요.”

김 PD 와 강철중이 혀를 찼다.

“이런, 그런 문제가 있네.”

“그러면 사과 대신 단단한 걸 물어야 하나? 근데 그렇다고 감 같은 걸 씹어 먹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고.”

둘이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고 여겼을 때였다.

뜻밖에도 백고운은 가볍게 말했다.

“음··· 그러면 잠시 맡기면 될 것 같아요.”

그가 근처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돌아보더니 불쑥 물었다.

“얘, 너 이름이 뭐니?”

백고운이 부른 사람은 7 살 남짓의 어린 꼬마 애였다.


그 꼬마는 엑스트라 아역으로, 이 장면의 처음에서 왈패들에 의해 돈을 빼앗기는 배역을 맡은 바로 그 아이였다.

그 아이는 갑자기 불린 탓에 놀란 듯 했다.

“저는··· 연희, 우연희에요.”

“연희구나. 이름 예쁘다. 연희야, 삼촌이 중간에 이 사과를 연희에게 패스하고 싶은데, 혹시 연희가 받을 수
있을까?”

“제가요?”

“응. 한 번 해볼래?”

“어······ 네.”

연희는 쭈뼛쭈뼛 고개를 끄덕였다.

백고운은 아이를 안심시키듯 빙긋 웃은 후 먼지가 묻은 사과를 닦았다. 그리고 그것을 살짝 던졌다. 캐치볼 하듯
말이다.

사과는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고, 연희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두 손으로 탁 받아냈다.

그리고 김 PD 와 강철중은 새삼 깨달았다.

‘아, 그러네. 엄밀하게 말하면 저 꼬마도 이 장면에서 서주 편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대단한 걸 도울 수는 없지만, 사과를 잠깐 받아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게 더 그림이 좋았다.

비록 자그마한 역할이지만, 그런 사소한 역할이라도 부여받으니 꼬마애가 덜 도구적으로 쓰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 전까지는 돈을 빼앗긴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앵글 내에서 조금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느낌이 있었다.
김 PD 는 속으로만 감탄했다.

‘아이디어가 좋네.’

간혹 배우들 중에 유독 아이디어 뱅크인 친구들이 있다. 백고운도 그런 과(科)인가?

‘아니면 그만큼 장면이나 본인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거겠지.’

단순히 인물을 흉내 내는 게 아니라 배역에 완전히 몰입해 연기하는 놈들이 있다.

많은 배우들이 그렇게 연기하지 않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지만, 의외로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여하간 백고운은 확실히 열정이 넘치는 친구였다. 그가 촬영장 와서 이렇게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니까 김 PD 도
괜히 으쌰으쌰 하게 됐다. 열정이란 흔히 전염되는 것이니까.

그들은 몇 번 더 액션의 합을 맞추며 카메라 리허설을 했다. 그리고 촬영 준비가 끝났을 때 김 PD 가 힘차게
말했다.

“좋아, 그러면 가보자고.”

본 촬영을 시작하겠단 뜻이었다.

싱크로율의 완성은 연기력


55.

장면은 스턴트맨(왈패)이 먼저 시비를 거는 것으로 시작했다.

“넌 뭐야?”
백고운(서주)는 하품을 쩍 하더니 귀찮은 듯 귀를 팠다. 그리고 나른히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글쎄, 여기서 낮잠 자고 있던 행인 1 정도랄까? 어이구, 이 사과 맛있어 보이네.”

백고운은 근처에 있던 바구니에서 사과를 집어 들어 천연덕스럽게 아삭 베어 물었다.

왈패들은 그런 그를 비웃으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다치기 싫으면 조용히 가라.”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지금이라 애한테 돈을 돌려주지? 어른이 추잡하게 애들 돈이나 뺏고. 꼴사납지
않아?”

“저 자식이 뭐라는 거야. 야, 안 꺼져?”

가장 앞쪽에 있던 왈패 하나가 백고운을 우습게보고 그의 이마를 툭툭 치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백고운은 한 손으론 여전히 사과를 베어 물면서, 오직 나머지 다른 손으로만 왈패의 손을 간단하게
꺾어버렸다.

왈패는 악 비명을 지르고, 그제야 다른 놈들이 으르렁거리며 차례로 백고운에게 덤벼든다.

그러나 백고운은 놀라기는커녕 간결한 동작으로 놈들을 척척 제압해갔다. 이깟 건 몸 풀기도 안 된다는 듯,


싸우는 도중에도 말을 하면서 말이다.

“뭐야, 너무 시시한데? 이게 다야? 아, 이러니 애들 돈이나 뺏고 다니는 건가? 수준이 딱 어린애라서?”

백고운이 사과를 가볍게 던졌다가 받으면서 빙글거리며 놀렸다. 열 받은 왈패들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김 PD 는 조용히 그런 그들의 모습들을 찍고 있었다. 직접 때리고 직접 맞는 게 아닌데도 액션 씬이 아주


리얼하게 느껴졌다.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백고운이 잘 싸우고 있던 도중이었다.

그는 뽑지 않은 검집 째로 왈패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일순간 손이 미끄러졌는지 사과를 놓쳤다.

“······!”

물론 사과야 떨어지면 다시 주우면 된다. 그건 사소한 실수에 불과했고, NG 가 나면 다시 테이크를 가면 된다.

그런데 김 PD 가 NG 를 말하기도 전, 백고운이 검집을 든 손을 재빨리 바꾸더니 허공에 뜬 사과를 반대편 손으로
잽싸게 턱 잡았다. 날렵한 반사 신경이었다.

‘오?’

김 PD 는 일단 더 지켜봤다.

“어이쿠, 조심.”

백고운은 실수한 적 없단 듯 뻔뻔하게 애드리브를 치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 동작(그러니까 사과를 맡기는


것)으로 넘어갔다.

“좀 걸리적거리네. 얘, 이거 잠깐 좀 맡기자.”

한쪽에 멀뚱히 서 있던 연희에게 백고운이 사과를 부드럽게 던졌고, 연희가 그것을 턱 받았다.

그리고 백고운은 스트레칭하듯 팔목을 가볍게 돌린 뒤, 다시 왈패들한테 고개를 까닥였다.

“자, 계속 하지?”
백고운이 NG 를 낸 줄 알고 잠깐 멈추고 있던 스턴트맨들은 그 말에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어쨌거나 감독의 컷
소리가 나오지 않았기에 테이크는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기합을 넣으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대충 모든 액션이 끝난 후.

백고운은 싸움이 아니라 간단한 조깅이라도 한 듯, 옷깃을 탁탁 잡아당기며 후 숨을 내쉬었다. 그가 쓰러진


왈패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 바닥에 떨어진 엽전 꾸러미를 주워들었다.

백고운이 한쪽에 멀뚱하게 서 있던 연희에게 다가가 그 엽전을 내밀었다.

“자.”

연희는 조금 멍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연기를 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아!’한 얼굴로 허둥지둥 엽전을
받았다.

“감, 감사합니다!”

백고운이 픽 웃었다.

그가 연희의 손에 들려 있던 사과를 다시 받아가면서 연희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흐트러트렸다.

“나야말로 고맙다.”

“네, 네?”

백고운은 말 대신 사과를 아삭 베어 물곤 가볍게 들어보였다. 대충 ‘이거’라고 뜻하는 몸짓으로.

그가 몸을 돌려 여유로운 걸음으로 터벅터벅 떠나갔고, 연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연희가 멀어지는 백고운의 등에 대고 다시 한번 소리 높여 감사를 표했다.

“진짜 감사합니다!”

백고운은 뒤 돌아보는 대신 손만 들어 살랑살랑 흔들어보였다.

김 PD 는 그 리액션까지 마음에 쏙 들었다.

서브남주인 ‘서주’는 기본적으로 장난끼 많고 능글맞은 가벼운 성격이었는데, 지금 백고운은 그런 서주의


모습을 완벽하게 연기해주고 있었다.

소설이든 만화든, 원작이 이미 있는 것을 드라마화한 작품은 필연적으로 싱크로율의 강박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원작을 이미 알고 있는 팬들이 원작 캐릭터를 그대로 드라마에서 구현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싱크로율이 높으려면, 기본적으론 배우의 외모가 캐릭터와 닮아야 한다. 그 다음엔 헤어스타일이나 분장, 의상
등으로 싱크로율을 높일 수 있다. 사람의 이미지란 의외로 그런 것에 많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싱크로율의 완성은 연기력이다.

연기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외모든 분장이든 아무리 싱크로율이 높다한들 다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백고운의 저 연기는 정말 서주와 똑같았다. 오죽하면 ‘원작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 같다’라는 표현을
쓰게 만들까.

처음엔 백고운이 서브남주 캐릭터를 맡고 싶다고 했을 때 의아했다. 자신이 어떤 배역에 더 어울리는지 잘 모르는
배우인가? 그런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알았다.


백고운은 본인의 한계와 가능성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서브남주 역할을 맡을 때의 모습을 감독과 작가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는데, 그 자신은 명확히 알고 있었단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참 똑똑한 배우야.’

김 PD 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기분 좋게 외쳤다.

“컷, 오케이!”

오늘은 촬영이 없는 날이었다.

그러나 촬영이 없다고 쉬는 날이란 의미는 아니었다.

배우의 루틴은 일반적인 회사원과 다르다. 회사원은 주중에 일하고 주말에 쉰다. 반면 배우는 활동기에 일하고
휴식기에 쉰다.

그리고 활동기란 한 작품에 들어간 뒤 그 작품이 끝나는 기간까지를 말한다.

달리 말하자면, 배우는 한 작품에 들어가면 그 작품이 끝나는 때까지 계속 일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소리였다.
비록 촬영이 없는 날이라도 말이다.

오늘 나는 헬스장에 와 있었다.

“후······.”

나는 덤벨을 내려놓으며 숨을 깊게 내쉬었다. 팔뚝의 근육이 뻐근하게 당겨왔다.


잠시 땀을 닦은 후 다시 반대쪽 손으로 덤벨을 들었다.

옆에서 벤치프레스를 하고 있던 기태성이 바벨을 내려놓으며 끙 소리를 냈다.

“아이고, 죽겠다.”

나는 아랑곳 않고 팔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숫자를 셌다. 내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기태성이 말을 걸었다.

“야야, 고운아. 안 힘드냐?”

“스물다섯···. 후······.”

나는 한 세트를 마친 후 덤벨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숨을 고르면서 그제야 대답했다.

“힘들죠. 안 힘든 운동이 어디 있나요.”

기태성이 어처구니없단 듯 대꾸했다.

“내 말은 진짜로 안 힘드냐고. 너 지금 벌써 여기서 다섯 시간 째 운동하고 있거든?”

그러나 나는 대수롭지 않았다.

“괜찮아요. 원래 오늘 목표가 여섯 시간 채우고 가는 거였거든요. 아직 한 시간 더 남았어요.”

“뭐? 그렇게 운동을 갑자기 많이 하면 탈나요, 탈나. 운동량은 천천히 늘려야지.”

그때 헬스장 안으로 내 매니저가 들어오면서 대신 대답해주었다.

“괜찮아요. 고운이 매일 새벽마다 두 시간씩 러닝하면서 운동해요.”


“뭐, 정말?”

“네. 지금은 몸 만드는 거라 바짝 운동하는 거고요. 이 주 뒤에 상의탈의 씬이 있거든요.”

“아, 그거 힘들지.”

기태성이 공감한다는 듯 눈을 좁혔다.

나는 그 사이에 한 세트를 더 마쳤다. 그리고 어깨를 피며 뒤늦게 뭔가를 깨닫고 물었다.

“그러는 선배님은 왜 여기 계세요?”

“참 일찍도 묻는다. 나도 작품 때문에 체중 감량해야 해서 요즘 운동하고 있어. 아구구, 감독들이 하여간 노인


공경을 안 해줘.”

기태성은 짐짓 무릎을 통통 두드리면서 투덜거렸다.

나는 픽 웃었다. 기태성은 그렇게 엄살을 부리면서도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 자체가 연기에 대한
그의 열정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새로운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기태성이 계속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나 티저 영상 뜬 거 봤다. 너 이번에 들어간 그 드라마 말이야. 아주 파격 변신 했던데? 너도 봤지?”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기태성을 바라봤다.

“······선배님, 이런 식으로 쉬려고 하시는 거 맞죠? 혼자 쉬시면 찔리니까 괜히 저 방해하시면서.”

“들켰니? 하하! 좀 봐 줘.”

기태성은 밉지 않게 웃었다. 결국 나도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장단을 맞춰드리기로 했다. 나는 벤치에 앉아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봤어요. 잘 나왔던데요?”

배우에게 모니터링은 필수였다. 공개된 날 바로 챙겨봤다. 잘 뽑힌 것 같아 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때, 매니저가 닭가슴살 샐러드를 부려놓으면서 끼어들었다.

“아우, 저는 좀 속상하잖아요.”

기태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매니저를 봤다.

“왜? 괜찮던데?”

“안 보셨어요? 사람들이 고운이더러 미스 캐스팅이니 뭐니 하잖아요. 왜, 고운이가 계속 학생 역할만 하다가


이번에 성인 연기에 처음 도전하는 거잖아요. 안 어울리고 어색하다는 반응이 꽤 있어요.”

기태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성인 연기가 처음이라고? 직전에 장발장 맡지 않았어?”

“아무래도 그건 공연이니까요. 대중들한테는 아직 <해수> 때의 고운이 이미지가 큰 것 같아요.”

기태성이 안타깝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

“그게 문제지. 배우한테 잘 된 필모가 있으면 좋긴 한데, 그 작품의 배역 이미지로 굳혀지기도 하니까. 그게 참
양날의 검이야.”

“그러니까요. 그래도 드라마 방영되면 그런 소리가 쏙 들어갈 거예요. 저번에 액션 씬 찍었는데 촬영장에서
감독님이랑 다들 얼마나 칭찬 했는데요. 원작의 서주랑 완전 똑같다고. 드라마가 빨리 방영되면 좋을 텐데,
그렇다고 감독님을 조를 수도 없으니까 괜히 속상한 거죠.”
그러나 당사자인 나는 막상 별 생각 없었다.

“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시간이 지나고 드라마가 방영되면 없어질 반응이라지 않은가. 그렇다면 괜히 지금 초조해 할 필요는
없었다.

모니터링은 하되, 대중의 반응에 너무 휘둘리지 말 것. 그래야 오래 배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한편 매니저가 ‘봤죠?’라는 투로 기태성에게 말했다.

“막상 고운이는 저러고 있으니까 괜히 저만 오바하는 것 같고 그렇다니까요.”

그때 기태성이 뭔가를 떠올린 눈치로 매니저에게 물었다.

“액션 씬이 그러면 저번 촬영으로 끝난 거야? 더 없어?”

“아뇨, 다음 로케 촬영에 또 한 번 있어요.”

기태성이 씩 웃더니 손짓으로 매니저를 불렀다. 그리고 다가온 매니저의 귀에 뭔가를 속닥거렸다.

“······!”

매니저는 뭔가를 깨달은 듯 마찬가지로 씩 웃었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라는 것처럼.

나는 그런 둘을 보다가 물었다.

“두 분이서 뭘 속닥거리시는 거예요?”


그러자 기태성과 매니저가 재빨리 숨기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응, 신경 쓰지 말고 고운이는 운동 계속 해.”

둘이 별 것 아니란 듯 빙긋 웃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수상쩍었다.

또 둘이서 뭔 작당을 꾸미고 있는 걸까.

나는 눈을 다시 한번 가느스름하게 뜨며 둘을 바라봤지만, 곧 어깨를 으쓱였다.

뭐, 둘이 뭘 한다고 해도 아주 이상한 짓을 꾸미진 않겠지.

나는 생각을 접은 후 다시 운동에 집중했다.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의 주요 촬영지는 용인의 대장금 파크였다.

이곳은 사극 촬영을 위해 2005 년에 만들어진 곳으로, 많은 사극 드라마의 전용 촬영지로 이용되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드라마의 대부분 촬영이 이곳에서 이루어지다보니, 드라마가 크랭크인 한 후부터 나는 여기에 거의


출근했다시피 했다.

그러나 오늘은 로케이션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충청남도의 서천군에 와 있었다.


여기에는 드넓은 갈대밭이 펼쳐진 곳이 있었는데, 오늘은 이곳을 배경으로 짧은 액션 씬을 찍을 예정이었다.

그나저나, 그건 그렇고.

“형, 그건 뭐예요?”

나는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것을 물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매니저는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부터 조수석에 있던 거였는데, 여간
신경 쓰여야지 말이지.

매니저가 뜨끔한 표정으로 아하하 웃었다.

“아, 이거? 여기가 관광지라서 사진 좀 찍으려고 갖고 왔어. 나 사진 찍는 게 취미잖아. 고운이 너는 신경 쓰지


마.”

취미로 찍는 거라고 보기엔 카메라가 너무 고급 같은데······.

사실 그가 뭘 할지 대충 예상은 갔다.

그러나 애 쓰는 게 보여서 나는 그냥 모른 척 해주기로 했다.

“네, 알겠어요. 그럼 많이 찍고 가요.”

메이킹 영상
56.

안으로 들어가자 노란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때 뒤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운 오빠, 안녕하세요!”

고개를 돌리자 이루다가 보였다.

그녀는 우리 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 된 배우였다. 원래는 가수로 활동하던 친구였는데, 이번 드라마를
통해 배우로 처음 데뷔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 요즘 뜬 엄청 인기 많은 연예인이라고 하는데, 나는 드라마나 영화를 제외한 TV 를 잘 안 봐서 이번에 처음


알았다.

다른 사람들(이를 테면 같은 소속사 배우들)은 나를 부러워하며 ‘실물이 더 예쁜가요?’ 따위를 물어봤다.

물론 이루다는 엄청 미인이긴 했지만, 그래봤자 아직 스물 몇이었다. 마흔 넘은 내겐 그저 귀여운 조카 같을


뿐이라 그런 류의 감흥은 없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의 감상은 ‘이루다가 본명인가?’ 정도가 다였다(놀랍게도 본명이란다!).

어쨌거나 나는 웃으며 인사했다.

“루다 씨,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그러니까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루다 씨도 촬영 들어갔죠?”

“네, 며칠 전에요. 개인 촬영도 좋지만, 역시 다른 분들과 함께 찍고 싶더라고요.”

이게 무슨 대화인고 하니, 설명하자면 이랬다.


우리는 리딩이나 제작발표회 혹은 포스터 촬영 등의 공식 일정에서 자주 만났지만, 크랭크인 들어간 직후엔
오히려 만나는 날이 뜸했다.

왜냐면 드라마 초반부는 여주의 배경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아역들이 더 많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나도 뜨문뜨문 촬영을 하긴 했지만 개인 촬영이라 서로를 볼 일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가 같이 나오는 장면을 찍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그녀와 내가 처음으로 같이 찍는 촬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루다는 활발한 성격인지 쫑알쫑알 말을 걸어왔다.

“아시다시피 제가 이번이 첫 드라마잖아요. 게다가 또 액션이라 부담도 크고요. 꼭 잘해내고 싶어요.”

“잘해내실 수 있을 거예요. 가수니까 춤 잘 추시잖아요. 기본적으로 몸을 잘 쓰시니까 액션도 잘 해내실


거예요.”

우리는 그런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면서 사이좋게 촬영장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는 잠깐 헤어졌다가 의상을 갈아입은 후 다시 만났다.

서로에게 검을 겨눈 채로.

나와 이루다는 갈대밭 안쪽에 있는 넓은 공터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우리는 진지한 얼굴로 검을 겨눈 채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고, 우리 사이엔 긴장된 바람이 흘렀다.

갑자기 우리가 싸우는 모양새가 된 건 이번 장면 때문이었다.


여주와 서브남주의 관계는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됐다.

앞서 서술했듯이, 여주는 어렸을 때 가문이 역모에 몰려 온 가족이 죽임을 당한다.

홀로 도망쳐 살아남은 그녀는 산을 타다가 지쳐서 쓰러진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발견한 건 아버지의 옛 벗이다.

그는 옛날에 장수로 이름을 날렸으나 정치적 이유로 유배를 당한 후, 지금은 시골에 은둔해서 살고 있다. 여주는
바로 그에게서 무예를 익히며 부모의 복수를 다짐한다.

서브남주인 서주가 여주를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스승을 통해서다. 서주 역시 이 스승에게서 무예를 배우기


때문이다.

서주는 주기적으로 스승이 은거한 초가집으로 찾아가 무예를 배우는데, 어느 날은 가 보니 자기와 엇비슷한
또래의 남자애가 스승 집에 얹혀살고 있는 걸 발견한다.

그 또래의 남자애는 남자애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앳된 얼굴의 미소년인데, 물론 이 아이는 남장한 여주이다.

그리하여 서주는 여주와 같은 스승 아래에서 검술을 익히게 된다. 말하자면 둘은 같은 동기(同期)인 셈이다.

당연히 둘은 함께 검술을 겨루기도 한다.

어릴 때는 주로 여주가 서주에게 졌다. 그런데 십 여 년이 지난 지금은 엇비슷하게 싸우게 된다.

지금 찍고 있는 장면이 바로 그 장면의 현재 버전이었다.

몇 분 전 김 감독님은 말했다.

―알고 있겠지만, 여기는 어렸을 때 싸우던 장면이랑 성인이 되었을 때 싸우는 장면이랑 오버랩 되면서 장면이
전환 돼. 시간이 흐르면서 루다가 성장했다는 걸 한눈에 보여줬으면 좋겠거든. 그래서 처음엔 루다가 밀리다가,
마지막엔 루다가 딱 한 방을 날리면서 서주를 확 제압하는 느낌으로. 알겠지?

그래서 이루다와 내가 지금 대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핫!”

이루다가 기합을 넣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우리의 검이 챙 부딪혔다. 진검은 아니었지만 가벼운 충격이 칼자루를
쥔 손으로 느껴졌다. 좋은 타격감이었다.

우리는 몇 번 더 합을 나눴다.

이루다는 나를 이기기 위해 기를 쓰고 달려들었지만, 나는 한 수 위인 선배처럼 그런 그녀의 칼을 가볍게 막거나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봐, 동생. 넌 나 못 이긴다니까?”

이루다는 대꾸도 않고 그저 거친 숨을 몰아쉰 뒤 다시 한 번 달려들 뿐이었다. 그 기세가 형형했다.

이번 드라마가 데뷔작이라더니 그녀는 연기를 꽤 잘했다.

지금 여기엔 투쟁심으로 불타는 한 맹수만 있을 뿐, 내게 애교 있게 종알거리던 이루다는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여자주인공에 동화된 채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몰입이 너무 과했던 걸까.

우리가 검을 부딪치는 장면에서 이루다가 그만 힘을 너무 실어버렸다.


나는 흉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손에 힘을 많이 안 주고 있었고, 그래서 검끼리 부딪히는 순간 내가 쥐고 있던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깡―.

손목이 짜르르하게 울린다는 걸 자각할 틈도 없었다.

그녀가 내지른 검이 내 목을 찌를 듯 훅 다가온 것이었다.

물론 그건 그녀의 의도가 아니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원래 한 번 속도를 내면 멈추기 어려운 법이지 않은가. 그녀의 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

이루다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짧은, 찰나에 가까운 순간이었지만 바로 앞에 있던 나는 그 표정을


알아봤다.

비단 그녀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큰 사고로 이어지는 줄 알고 숨을 헉 들이켰다.

그러나.

이루다가 급히 손을 멈추려고 하기도 전이었다.

나는 거의 척수반사 급의 빠른 속도로 목을 젖혀 칼을 피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그녀의 손목을 제압했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행동이었다.

“······!!”
뒤늦게 몸을 제어한 이루다가 우뚝 멈췄다.

그녀가 놀란 듯 입을 떡 벌린 채 날 쳐다봤다. 그녀의 눈은 동그랗게 떠져 있었다. 그녀의 눈이 깜빡였다.


끔뻑끔뻑.

“······.”

“······.”

한 발 뒤에야 나는 그녀가 놀란 것이 그녀 자신 때문이 아니라, 내 빠른 반응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다.

내가 너무 빠르게 몸을 피했나 보다.

실은 나는 전생에서 몇 년 동안 액션 스쿨을 다닌 적이 있다. 물론 작품 때문에 말이다.

한때 스턴트맨 해볼 생각 없냐는 제안을 농담처럼 받은 적도 있었지만··· 다 옛날 일이었다.

지금은 그저 다른 배우들보다 아주 조금 더 날렵할 뿐, 딱히 대단한 건 아닌데.

‘나도 너무 과했나?’

괜히 머쓱했다. 나는 어색히 이루다의 손목을 놓았다.

곧 감독님이 컷을 외친 후 다급히 물었다.

“고운이 괜찮아?!”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정신을 되찾은 듯 하나둘씩 내게 물었다.


“괜찮아요?”

“깜짝 놀랐어요. 안 다쳤어요?”

이루다 역시 쩔쩔매며 사과했다.

“오빠 죄송해요. 칼이 날아갈 줄 몰랐어요. 제가 너무 세게 쳤나 봐요. 다친 데 없으세요?”

“괜찮아요. 잘 피했어요. 그보다 저도 놀라서 루다 씨 손목을 세게 잡은 것 같은데, 아프진 않으세요?”

“네, 그럼요. 저는 괜찮죠.”

한바탕 그런 소란이 있었다. 감독님은 내가 괜찮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휴 내쉬었다.

그리곤 뒤늦게 호기심이 치켜들었는지 감독님이 눈을 빛내며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깜짝 놀랐어. 혹시 작품 들어온다고 따로 훈련 같은 거 받았어?”

액션 스쿨이라거나 그런 걸 다녔는지 묻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궁금했는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아뇨, 따로 그러진 않았어요.”

여기엔 내 매니저도 있었다. 내 매니저는 소속사에 들어온 후 내가 액션 스쿨을 다니지 않았다는 걸 누구보다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 전에 다녔다고 하면 되지 않냐 해도, 어차피 조금만 조사해보면 금방 들통 날 사실이라 거짓말 할 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대충 둘러댔다.


“저번에 액션 씬 찍고 나서 몸이 좀 액션에 익숙해졌나 봐요. 그래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변명에 감독님이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진짜로? 그러면 고운이가 원래 운동신경이 뛰어난가 보다. 너무 잘하는데? 타고 났네, 타고 났어.”

나는 어색히 눈을 굴렸다.

실제로 내가 타고났다기보다는 옛날에 오랫동안 훈련한 탓이었는데, 내 정체를 숨기다보니 타고난 운동신경처럼
보이게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아하하··· 그런 건 아닌데···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러느라 나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아까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매니저가 내 모습을 찍고 있단 사실을 말이다.

일주일 뒤.

“오늘 뭐 떴던데. 봤어?”

촬영장소로 가는 도중, 차 안에서 대본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매니저가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들고 의아한 듯 되물었다.

“오늘요?”

내가 알기로 오늘 뭐 뜨는 거 없었는데···.

“특별 메이킹 공개됐더라고. 한 번 봐봐.”

매니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면서 조수석에 있던 태블릿 PC 를 건넸다. 그래서 나도 별 생각 없이 그것을


받았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런 디지털 기계에 익숙하지 않았다. 요즘은 다들 스마트폰으로 갈아타 쓴다는데, 나는 아직


폴더폰을 고수하고 있었다. 매니저가 ‘너는 어린놈이 나보다 더 아날로그 감성이냐’하고 한 소리 할 정도였다.
이 태블릿 PC 도 원래 안 사려던 것을 소속사에서 하나 장만해 쥐어준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어색하게 느껴지는 잠금 화면을 열어 인터넷을 들어갔다.

정말로 우리 드라마의 특별 메이킹이 공개되어 있었다. 포스터 촬영 현장과 캐릭터 영상이었다. 게 중엔 내 것도


있었다.

나는 일단 내가 맡은 역인 서주의 캐릭터 영상을 틀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깜짝 놀랐다.

“어, 이거?”

저번에 충청남도 갈대밭에서 찍었던 이루다와의 액션 씬의 메이킹 영상이 흘러나왔다.

이루다가 내 목을 찌를 뻔 했던 아슬아슬한 순간과, 그 뒤에 내가 재빠르게 반응해 위기에 대처한 순간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이걸 언제 찍은 거지? 분명 메이킹 카메라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 내 머릿속에 번뜩 스치고 지나간 것이 있었다.

분명 그때 내 매니저가 수상쩍은 카메라를 들고 왔었다.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게 소속사용이 아니었어?’

소속사에서는 배우들의 촬영 현장을 따로 찍어 배포하기도 한다. 주로 서비스 용도이다.

나는 당연히 그런 용도로 매니저가 카메라를 갖고 온 줄 알았다.

내가 서주 캐릭터에 안 어울린다는 대중의 반응을 무마시키기 위해, 기껏해야 촬영 현장 스틸컷을 찍어 올리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예 영상으로 찍었을 줄이야.

매니저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왜 내가 그때 카메라를 들고 갔잖아. 나는 풍경 찍으려고 했는데, 우연히 네 촬영 현장도 찍었더라고. 우리


소속사 외장하드에 처박아두긴 아까워서 내가 제작진 쪽에 제공했지. 메이킹으로 쓰면 어떻겠냐고. 그쪽에서도
아주 좋아해서 다행이었지. 그런 명장면을 놓치면 아깝잖아.”

매니저의 말이 맞았다.

공교롭게도 이루다가 실수를 해줘서 내 액션 장면이 더 극적으로 보이긴 했다. 훨씬 내 능력이 부풀려져서 포장된
느낌?

심지어 언제 인터뷰를 딴 건지, 서주 캐릭터 영상의 말미엔 강철중 무술 감독의 짧은 코멘트도 실려 있었다.

“백고운 배우는 진짜로 액션을 잘해요. 아마 대한민국에서 제일 검을 잘 쓰는 배우일 거예요.”

당연히 이전의 내 캐스팅에 대한 부정적 반응도 쏙 들어가 있었다.

메이킹 영상 아래에 달린 댓글은 하나같이 내가 이렇게 서주 캐릭터에 잘 어울릴 줄은 몰랐다는 평이 가득했으니까.

나는 픽 웃으며 태블릿 PC 를 껐다. 그리고 매니저에게 감사를 표했다.

“형, 고마워요. 정말로요.”

매니저 형도 씩 웃었다.

“뭘. 네가 잘해서 된 거지. 난 그걸 우연히 찍은 것뿐이고. 아무튼, 수고 많았다. 남은 촬영도 잘 찍자.”

나는 힘차게 대답했다.

“네, 물론이죠!”

사랑스러운 강아지
57.

드라마의 초반부 촬영은 계속 이어졌다.

촬영이 있는 날에는 열심히 연기를 했고, 촬영이 없는 날은 틈틈이 헬스장을 가서 몸을 만들었다.


그리고 문제의 상의 탈의 씬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다.

나는 일찍 씻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 또 하루 종일 촬영이라 일찍 잠들려는데, 갑자기 집 초인종이 띵동 울렸다.

“응?”

이 시간에 누가 올 리가 없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인터폰을 확인했다.

밖에 찾아온 손님은 김건이었다.

일단 나는 문을 열었다. 김건이 ‘읏 추워’하면서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선수 쳤다.

“와이프가 친구들 초대했는데 아예 자고 간단다. 다 여자들인데 거기 있기도 뭐해서 나왔어. 미안한데, 오늘


하룻밤만 신세 좀 지자.”

그러면서 김건은 손에 쥔 치킨을 들어 올리며 뻔뻔하게 말했다.

“이건 빈손으로 오기 뭣해서. 술도 사왔는데, 너도 한 잔 하자.”

그가 하룻밤 자고 가는 거야 문제는 없었지만······.

“나 치킨 못 먹는데. 지금 식이 중이라서.”

“뭐? 왜?”

“나 내일 상의 탈의 씬 있거든. 드라마에서.”

“뭐?”
김건은 처음에 입을 떡 벌리고 놀라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아, 미안. 그냥, 네가 어려졌단 게 갑자기 실감 나서.”

나는 멋쩍게 웃었다.

“좀 그렇지? 나도 내가 이 나이에 청춘 로맨스를 찍을 줄 몰랐다니까.”

아무래도 청춘 로맨스는 젊고 탱탱한(?) 배우들의 전유물인 법이다.

동안인 배우들은 서른 초반까지도 그런 배역을 맡기도 한다지만······ 설마 마흔을 넘긴 내가 아직도 그런


로맨스 드라마의 남주로 팔릴 수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물론, 그건 전적으로 백고운의 몸으로 들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전의 김철수 몸이라면 불가능했겠지.

김건이 테이블에 치킨과 술을 깔았다. 오랜만에 수다 꽃을 피우고 있을 때, 김건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잠깐, 그러면 너 로맨스 연기는 어떻게 해? 이루다가 여주인공이라며. 그 친구 이제 막 스무 살 되지 않았어?”

김건이 경악한 채 날 쳐다봤다.

“그러면 너보다 스무 살이나 어리잖아! 로맨스 연기가 되냐? 아니, 연기자는 그런 거 안 따지······나? 뭐,
하기야 연기는 실제랑 다르긴······ 하니까.”

그럼에도 김건은 흡사 ‘이거 완전 도둑놈 아니여’라는 눈빛으로 날 찜찜하게 쳐다봤다.

나는 치킨의 튀김옷을 벗기고 닭가슴살 부위를 잘게 북북 찢고 있었는데, 김건의 말에 헛웃음을 뱉었다.


“이게. 사람을 아주 범죄자로 보려고 하네.”

나는 찢어놓은 닭가슴살을 한 입 먹은 후, 곧 어깨를 으쓱였다.

“뭐··· 사실 네 말이 맞긴 해. 처음엔 약간 이입이 안 되긴 했거든.”

사랑엔 나이가 상관없다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스무 살 차이는 좀··· 그렇지 않은가.

내가 아무리 연기자라고 해도 스무 살이나 어린 새파랗게 젊은 친구를 연애 대상이라 여기며 연기하기엔 나도


양심이란 게 있었다.

그러나······.

“내가 또 방법을 찾았지.”

나는 살짝 웃으며 말했고, 김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건이 궁금한 듯 ‘뭔데?’하면서 날 재촉했다. 나는 말을 끌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다음 날.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일찍부터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의 촬영이 이어지고 있는 현장이었다.

김 PD 는 헤드셋을 쓰고 집중하고 있었고, 카메라 감독은 한창 연기 중인 두 배우를 찍고 있었다.


물론 그 두 배우란 백고운과 이루다를 말하는 것이었다.

서주로 분한 백고운이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이제 가면 언제 또 운이를 보나.”

‘운’라고 하는 건 여자주인공인 이루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사실, 정확히 말해서 이루다가 맡은 배역의 극중 이름은 ‘연’이었다.

그러나 연이는 어릴 때부터 남장을 하고 자신의 정체를 숨겨왔다. 당연히 그녀는 같은 스승 아래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서주에게도 제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운이는 연이의 남자 버전 이름이었다.

그러나 연이는 지금 왕세자비 간택에서 뽑히기 위해 남장을 풀고 궁에 들어가려 하고 있다. 오랜 숙원이었던


복수를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허나 오래 집을 비우면 서주가 수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연이는 지금 막 “조선 팔도를 유람하기
위해서 떠나려고 합니다”라고 말한 참이었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서주가 방금 서운하다고 한 것이었다.

백고운(서주)은 계속 대사를 이어갔다.

“하지만 네 뜻을 꺾을 순 없겠지. 너는 옛날부터 그런 류의 고집은 꽤 센 편이었으니까. 그렇지?”

“네. 보고 싶을 겁니다. 잘 있으십쇼, 사형.”

이루다(연)가 건조하게 말했다.


백고운은 씩 웃더니 이루다의 목에 팔을 걸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아주 못 보는 것도 아니고. 인사가 거창하다, 동생. 와서 또 보면 되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얼른 와라.”

그 말에 연은 찡하니 도는 눈물을 삼키며 감정을 추스른다.

왜냐면 그녀는 왕을 암살한 후 자결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복수를 꿈꾸던 옛날부터 그녀는 오래 살 생각이
없었다.

한편 백고운은 그런 그녀를 애틋함과 복잡함이 반쯤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사실 연은 정체를 숨긴다고 숨겼지만, 서주는 이미 그녀의 성별과 정체를 오래 전에 눈치 챘다.

다만 서주는 그녀가 직접 자신의 정체를 말해줄 때까지 모른 척 하기로 했을 뿐이었다.

김 PD 는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백고운에게 말했었다.

―서주는 순정파 짝사랑 캐릭터잖아? 늘 연을 바라볼 때 눈에서 달달한 꿀이 뚝뚝 떨어졌으면 좋겠거든. 아직


본격적인 로맨스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시청자 입장에서는 서주가 연이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걸 이미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상상력이 자극되게 연기해주면 좋을 것 같아. 둘 사이에 뭔가 로맨틱한 기류가 느껴지게. 알겠지?

그리고 백고운은 감독이 말한 그대로를 정확하게 구현해주었다.

이루다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한껏 배어 있었다. 그 아래엔 언뜻 사랑스러움까지 약간


비쳐 보이기도 했다.

김 PD 는 그런 백고운의 표정을 꼼꼼히 잡아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감탄했다.

‘눈에 감정을 잘 담네. 진짜 진하게 짝사랑이라도 해 본 적 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백고운은 눈빛 연기를 잘 했다.

눈은 흔히 마음의 창이라고들 하지 않은가. 눈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고 강렬한 도구였다.

그리고 유독 눈빛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 있다.

특히 남자 배우들 중 ‘멜로눈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경우가 있다. 그런 배우들은 어떤 로맨스 드라마를


들어가도 상대를 사랑스럽게 쳐다봐서, 매 작품마다 상대 여자 배우와 진짜 사귀는 거 아니냐는 스캔들을
소소하게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김 PD 는 컷을 말했다. 그리고 카메라 위치를 바꾸느라 생긴 쉬는 시간에 농담을 던졌다.

“나 진짜 고운이가 루다 좋아하는 줄 알았잖아. 둘이 나 몰래 뭐 썸 타고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짓궂은 말이긴 했지만, 사실 연기가 너무 좋았다는 표현이었다.

이루다는 ‘감독님도 참!’하면서 귀를 붉혔고, 백고운은 민망한 듯 아니라고 웃었다.

김 PD 도 하하 웃었다.

“칭찬이지. 그러면 고운이는 어떻게 그렇게 멜로 연기를 잘해?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아, 그건······ 사실, 마인드 컨트롤을 해요.”

“마인드 컨트롤? 뭐, 예전에 짝사랑했던 사람이라도 떠올리면서 연기하는 거야?”

그 말에 이루다뿐 아니라 주변의 스텝들의 귀까지 쫑긋 세워졌다. 딱히 무슨 연애적 감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원래 남의 연애사는 궁금한 법 아니던가.

특히 연예인의 연애 쪽 사생활? 그런 가쉽만큼 재밌는 게 없다.


그러나 백고운은 재빨리 아니라고 손을 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럼?”

김 PD 는 장난기가 솟는 듯 되물으며 재촉했다. 그는 도리어 백고운이 이렇게 나오자 괜히 놀리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때, 백고운은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냥······ 저는 루다 씨를 강아지라고 생각하고 연기해요.”

······응?

기대한 답변과 다른 엉뚱한 말에 김 PD 를 비롯한 모두가 살짝 당황했다.

그리고 졸지에 강아지가 된 이루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가리켰다. 저······ 저요?

그랬다.

사실 내가 찾은 방법은 바로 이루다를 귀여운 강아지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보통 개나 고양이는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물론 약간의 개인차가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오죽하면


할리우드에서도 영화 속 사람들은 다 죽어도 개나 고양이는 살아남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촬영에 들어가면 이루다가 귀여운 강아지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그러면 확실히 연기했을 때 눈빛이 훨씬 더 멜로적으로 나왔다.

사랑스러운 강아지를 대할 때처럼, 나도 모르게 진짜로 얼굴 전체가 부드러워진다고나 해야 할까.

몰입이 어려운 배역과 설정에도 그럴 듯하게 연기하는 것이 배우의 훌륭한 미덕이긴 했지만, 배우가 실제라고
몰입할 때 가장 그럴듯한 연기가 나오는 것 역시도 사실이었다.

어제 내가 이 말을 하자, 김건은 처음엔 와하하 웃더니, 나중엔 감탄했다.

―그거 진짜 괜찮은 방법이다. 똑똑한데?

그 방법이 감쪽같아서 다행이었다. 감독님이나 다른 사람들도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그저 멜로 연기라


받아들였으니 말이다.

내 강아지 발언이 약간의 파문을 일으킨 후에도 촬영은 계속 이어졌다.

오늘도 하루 종일 촬영이라 중간에 대기도 해가면서 해가 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주변이 어둑어둑해지자 드디어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가 왔다.

이번에 찍을 장면은 바로 상의 탈의 씬이었다.

그 동안 운동과 식이를 병행하며 몸 관리를 했던 것은 바로 이 날을 위해서였다.

“좋아요, 스탠바이 하고―.”

김 PD 의 말에 촬영 현장이 조용해졌다.

나는 피 분장을 한 채 골목길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카메라 바깥 쪽에선 화려한 한복을 입은 이루다가 대기 중이었다.

이번 장면은 드라마 중반부의 장면으로, 시간이 좀 흐른 뒤이다.

연은 궁에 들어가서 간택 시험을 보고, 서주 역시 무과 시험에서 합격한 후 무관이 된다. 이후 연은 최종적으로


뽑혀서 왕세자비가 된다.

그 이후 연은 남주인 왕세자와 티격태격한다. 왕세자는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이랑 억지로 혼인한 것이 못마땅하고,


연이 역시 입궁하기 위해서 왕세자를 이용했을 뿐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느 로맨스 드라마가 그렇듯이 둘은 그렇게 아웅다웅하면서 정이 들게 마련이다.

이번 장면은 여주와 남주가 변복하고 밤 마실을 나오는 장면이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때, 누군가 그 둘을 공격한다. 연이가 아닌 제 3 자가 왕세자를 노리고
있던 것이다.

연이는 그 자객을 무찌를 수는 있지만 하필 왕세자비의 옷을 입고 있느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왜냐면 자신의
정체를 들키면 여태의 노력이 다 헛수고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변복하고 따라 나왔던 호위무사들이 자객을 상대하고, 하필 그 호위무사 중 하나였던 서주가 자객의
칼에 당한다(이 시점에서 연은 이미 예전에 서주를 알아봤지만, 서주는 여자인 그녀의 모습을 몰라본 눈치라
그녀가 안심하고 있었단 설정이다).

남주는 위험하기 때문에 연이더러 얼른 궁으로 돌아가자 재촉하지만, 연은 쓰러진 서주가 신경 쓰여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먼저 돌아가라 남주에게 말한 후 서주가 사라진 쪽으로 뛰어간다.


그리하여 서주와 연이 다시 재회하는 장면이 이번 씬이었다.

“레디, 액션!”

감독님이 외쳤고, 카메라 안쪽으로 이루다가 다급히 뛰어왔다.

그리고 나 역시 연기를 시작했다.

서주 앓이
58.

이번 장면은 서주가 다쳐서 쓰러진 장면이었다.

나는 피 분장을 한 채로 골목길 담벼락에 비스듬하게 앉아 있었다.

감독님의 ‘액션’하는 말에 카메라가 돌아갔고, 나는 옆구리 쪽 상처를 짚으며 신음을 참았다.

그때 이루다(연)가 골목길 안으로 뛰어오더니 다급히 내 앞에 주저앉았다.

“괜찮습니까?”

연은 정신이 없던 나머지 왕세자비인 척 해야 한다는 사실도 그만 까먹는다. 그녀는 원래 서주를 대하던 것처럼
저도 모르게 존대를 한다.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띄엄띄엄 말했다.

“하아··· 도망, 도망가셔야 합니다···. 근처에 아직 자객이, 남아 있을지 모릅··· 모릅니다.”

물론 이루다는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녀는 상처를 제대로 보기 위해 내 옷깃을 잡곤 망설임 없이 확 벌려 젖혔다. 피 분장을 한 내 상반신이
드러났다.

“······!”

처참한 몰골에 이루다가 충격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곧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노와 미안함, 안타까움, 절망 같은 것이 그녀의 얼굴에 스쳤다.

이루다가 지혈을 위해 내 상처를 꾹 눌렀다.

“윽―.”

나는 일부러 숨을 한계까지 흡 참았다. 긴장하듯 배가 딴딴해졌고,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 상태에서


숨만 밭게 내쉬었다. 그러자 고통을 참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루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죽으면 안 됩니다. 정신 잃지 마십시오.”

그 목소리엔 약간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말에 나는 힘겹게 픽 웃었다.

“그게, 큼, 제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요, 세자빈 마마.”

대본상 서주는 죽을 위기의 순간에서도 장난스러움을 잃지 않는 성격이었다.


연은 이런 순간에도 웃음이 나오느냐는 듯 눈매가 뾰족해지지만, 덕분에 냉철함이 조금 돌아온다.

한가롭게 눈물을 쏟을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한복을 거침없이 북 찢는다. 그리고 그것을 붕대 삼아
서주의 상처에 감으려 한다.

“아파도 조금만 참으십쇼.”

이루다가 몸을 기울여 나를 끌어안았다. 우리의 자세가 훅 가까워졌다.

이건 일종의 로맨스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클리셰였다.

붕대를 상대의 몸에 감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끌어안는 자세를 취해야만 한다. 그리고 신체가 가까이
맞닿으면 당연히 섹슈얼한 텐션이 생기게 된다. 설령 그 상황이 불가피한 위급 상황일지라도 말이다.

그녀가 사부작거리며 내 몸에 천 조각을 열심히 둘렀고, 나는 웃음기를 거두고 그런 그녀를 말없이 쳐다봤다.

어떤 상황에서도 장난스러움을 잃지 않는 서주조차도 연이 훅 몸을 가까이 붙인 이 상황에 잠시 당황해 긴장을


느끼고 있는 탓이었다.

이윽고 천 조각을 다 둘러 피를 지혈한 이루다가 몸을 뒤로 물렸다. 나는 참고 있던 숨을 그제야 작게 내쉬었다.

“자, 이제 업히십시오. 당장 의원에게 가야겠습니다.”

서주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연은 아무렇지 않게 고운 손을 내밀었다.

그때, 멀리서 서주를 찾는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땀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오고 있으니··· 마마는 얼른 궁으로 돌아가십시오.”

이루다가 눈을 찡그렸다. 그녀 입장에서는 한시가 급한데 서주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였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상기시켰다.

“운아, 네가 지금 세자빈이란 걸 잊은 건 아니겠지?”

“······!!”

이루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자신이 지금 왕세자비로 위장하고 있단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그걸 서주가 이미 알고 있단 것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언제부터······.”

그녀가 말을 더듬거렸다.

대본상으로는 이때 서주가 연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는 것으로 나와 있다.

동료들의 발소리는 가까워져 오고, 서주와 연이 이렇게 무람없이 대화할 수 있는 시간도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짝사랑만 하던 서주가 처음으로 연에게 진심을 토해내는 이 부분은 드라마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애틋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카메라와 조명에 둘러싸인 채 나와 이루다는 극에 몰입해 연기 중이었고, 스태프들과 감독님도 조용히 집중하고
있었다.
사위가 조용했다.

나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대사를 내뱉었다.

“운아. 실은 네가 세자빈이 됐을 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그리고 머뭇거리듯 손을 들어 올려 이루다를 향해 살짝 뻗었다.

공기마저 잠시 숨을 죽였을 때였다.

‘어?’

내 손이 막 이루다의 뺨에 살짝 닿으려 할 때, 나는 무언가를 눈치 챘다.

피 분장을 했던 탓에 내 손 끝엔 끈적끈적한 가짜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

내가 이루다의 얼굴을 만지면 분명 그녀의 뺨에 피가 묻을 것이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감독님은 이 부분에서 내가 이루다의 뺨을 문지르라고 정확한 디렉션을 주었었다.

그러나 내가 만약 진짜 서주였다면―.

거의 찰나에 가까운 아주 짧은 그 순간, 나는 갈등했고 금방 결정을 내렸다.

나는 내 판단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내 손끝이 이루다의 뺨을 만지기 직전, 나는 손을 멈칫 세웠다.


그리고 망설이듯 잠시 허공에 손을 가만히 두었다가, 곧 방향을 바꿨다.

나는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손길로 이루다의 잔머리를 살짝 뒤로 쓸어 넘겼다.

그녀가 너무 소중해 차마 내 더러움이 옮겨 묻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루다가 눈을 깜빡깜빡 했다.

나는 잠시 텀을 둔 뒤, 옅게 웃으며 속삭였다.

“너······ 참 곱고 예쁘다.”

이루다의 눈이 놀란 듯 천천히 커졌다.

한편 그 모습을 찍고 있던 김 PD 역시 놀란 상태였다.

백고운은 이루다의 뺨을 만지기로 한 원래의 행동 대신 그녀의 머리카락만 살짝 건드렸다. 그것도 엄청


조심스럽게 말이다.

원래 김 PD 가 의도한 표현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손짓이 훨씬 애틋하게 느껴졌다.

너무 소중해서 오히려 손을 함부로 못 대겠는 서주의 절절한 감정이 잘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좋은데?’

백고운이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니면 순간 디렉션을 잊어버려서 자의적으로 행동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았다.

“컷.”

김 PD 가 말하자 그제야 극에 몰입해 있던 배우들이 표정에 힘을 풀었다.

“고운아, 루다야. 잠깐 이리로 와 볼래?”

김 PD 는 배우들을 불렀고, 참고를 위해 조연출도 불렀다. 그들은 다 같이 방금 찍은 장면을 다시 한번 찬찬히


돌려봤다.

“······.”

“······.”

그리고 모니터링이 끝났을 때.

백고운은 만족한 듯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주가 이렇게까지 매력적인 캐릭터였나?’

원래 원작소설에서도 서주는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그러나 어떤 배우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캐릭터 본연의 매력이 반도 못 표출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그 매력이
그 두 배가 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백고운의 경우 명백히 후자였다.


모두가 백고운을 쳐다봤다. 어떤 강렬한 예감 같은 것이 그들의 머릿속에 스쳤다.

‘이거······ 어쩌면 남주보다 서브남주가 더 인기가 많겠는데?’

드라마 촬영이 한창 중반부에 접어들던 무렵.

멀게만 느껴졌던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의 방영 날짜가 어느덧 성큼 다가왔다.

그래, 오늘은 바로 고대하던 우리 드라마의 첫 방송 날이었다.

모두 헤어져 각자의 집에서 본방사수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첫 방송 날인데 다 같이 모여 봐야 또 그


재미가 크지 않겠는가.

우리 드라마 팀은 늦게까지 여는 고기 집에 모여 앉아 오랜만의 회식을 즐겼다.

내일 촬영도 없겠다, 그동안 수고한 것도 있겠다, 모두 너나할 것 없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던


때였다.

“이제 곧 방송 시작합니다!”

조연출이 목소리를 높이며 드라마가 곧 시작한다는 것을 알렸다. 시간을 확인하니 정말 10 시 직전이었다. 즐겁게
노느라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난 줄도 몰랐다.

“그럼 틀겠습니다!”

조연출이 식당 한쪽에 있는 대형 TV 를 틀었다. 때마침 우리 드라마가 곧 시작한다는 예고가 나왔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루다가 내 쪽으로 몸을 틀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떡해요, 저 너무 떨려요!”

그녀는 볼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는데, 비단 술을 마셔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정말로 긴장이 많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아, 루다 씨는 이번에 첫 드라마니까 정말 떨리시겠네요.”

그러자 내 말에 이루다는 고개를 열렬히 끄덕거리더니, 잠깐 멈칫했다.

“응? 고운 오빠도 드라마는 이번이 처음 아니에요?”

“제······ 제 말은 루다 씨가 연기로 데뷔한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떨리시겠다, 뭐 그런 말이었어요. 하하.”

나는 재빨리 수습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큰일 날 뻔했네.

그녀를 진정시킬 겸,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괜찮아요. 우리 잘 했잖아요. 반응도 좋았고. 잘 될 거예요. 걱정 마세요.”

“그렇겠죠? 아, 그래도 떨린다!”

그녀는 애교스럽게 몸을 부르르 떨더니, 후하후하 숨을 몰아쉬며 다시 TV 를 쳐다봤다.

사실 강도만 다를 뿐,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 모두가 긴장은 하고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공을 들인 프로젝트의


결과를 세상에 내놓고 이제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어찌 긴장이 안 될 수가 있겠는가.
나 역시 전생에 찍었던 작품까지 따지자면 그 수가 종이 한 페이지를 넘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이
순간은 떨렸다.

몇 분 동안 광고가 이어졌고, 이후 드라마가 시작한다는 말과 함께 MBS 로고가 떴다.

“이제 진짜 시작합니다! 5, 4, 3, 2, 1!”

조연출은 짓궂게 카운트다운까지 센 후 재빨리 의자에 착석했다.

오프닝이 끝난 후, 드라마의 첫 장면이 TV 화면에 가득 찼다.

고깃집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집중해서 우리 드라마의 1 화를 관람했다.

그리고 1 분 30 초 같은 1 시간 30 분이 흘렀다.

드라마가 끝나고 다음 편 예고로 넘어갔을 때, 한쪽에서 계속 포털 사이트를 체크하던 조연출이 외쳤다.

“우리 드라마 실검 떴어요!”

옆에 있던 이루다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들어가더니 ‘진짜다!’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오빠도 봐 봐요!”

그녀가 내게도 화면을 보여주었다.

진짜였다.

유명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가 무려 1 위부터 10 위까지 우리 드라마 관련 검색어로 싹 도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엔 내 이름도 실검에 들어가 있었다.

[6 위. 백고운]

1 화는 대부분 여주와 남주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이었다.

서브남주인 내 배역의 분량은 별로 없었고, 특히나 성장한 모습의 서주, 즉 그러니까 내가 1 화에서 실제적으로
등장한 건 딱 한 씬 뿐이다. 성장한 연이 서주와 검술을 겨루는 모습, 그러니까 저번에 메이킹 영상이 공개된
바로 그 장면이었다.

그런데도 이 정도면 꽤나 반응이 좋은 편이었다.

나와 이루다는 드라마 홈페이지로 들어가 시청자 반응을 확인했다. 서주에 대한 평이 간간히 보였다.

[서주 왤케 섹시해? 미치겠다 벌써 서브병 확정이다;;]

[우리 서주를 영상으로 보게 되다니 감격ㅜㅜ 백고운 배우님 처음엔 안 어울릴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찰떡이다ㅜㅜ 으른미 넘쳐ㅜㅜ 흐엉]

[몰랐는데 나 서주 좋아하네...]

[서주를 연이랑 이어지게 해달라고 방송국 앞에서 시위할 사람 구함 1/nnnnnnnn]

[윗댓 2/nnnnnnnn]

나는 웃었다.

사람들이 좋아해줘서 기뻤고, 원작소설을 읽고 서브남주를 택했던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단 걸 인정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허나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시청자들의 이런 반응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는 걸 말이다.

몇 주 뒤, 드라마가 중반부로 접어들 때부터 대중들 사이에서 ‘서주 앓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해당 캐릭터가 좋아서 ‘―앓이’라는 표현을 붙인다는 것 역시도 나는 조금 뒤늦은 훗날에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던 당시의 나는 그저 스태프들, 배우들과 함께 술잔을 부딪치며 감상을 즐겁게 나눌


뿐이었다.

우리 드라마의 성공적인 첫 방영 날이었다.

유행은 변하는 법
59.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의 남주 역할을 맡은 배우는 차영원이었다.

그는 도회적인 미남상이었는데, 그 때문에 옛날부터 꾸준히 주연 역할을 맡아왔다. 로맨스 드라마의 전형적
캐릭터인 재벌 남주에 딱 어울리는 외모라고 해야 할까.

차영원은 자신의 외모에 만족했고, 늘 비슷비슷한 역만 맡기는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늘 비슷한 역할이 들어온다는 건 나쁘게 말하면 뻔한 이미지라는 것이지만, 좋게 말하면 그게 자신의 셀링


포인트라는 뜻이었으니까 말이다.

아예 팔리지 않는 것보다는 팔리는 게 낫다. 그것도 남주 같이 굵직한 주연으로만 팔리는데, 어찌 기분이 나쁠까.
이제는 그것도 자신의 개성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은 좀 달랐다.

“대체 왜 다들 서주만 좋아하는 거야?!”


차영원은 스마트폰으로 시청자 반응을 확인하다가 성질을 팍 냈다.

그가 고개를 들고 앞에 앉아 있던 매니저에게 물었다.

“응? 왜 그럴까? 내가 연기를 잘 못했나?”

앞에서 운전하던 매니저가 쩔쩔매며 얼른 대답했다.

“에이, 무슨 소리세요. 형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데. 그냥 요즘 대중들 취향이 좀 바뀌어서 그럴 거예요.”

“취향?”

“왜, 예전에는 싸가지 없고, 돈 많고, 약간 초딩 같은 남자주인공이 인기가 많았잖아요. 다른 사람에겐


차가워도 내 여자에게만 따듯한 남자들 있잖아요.”

매니저는 백미러로 차영원을 흘금거리며 이어 말했다.

“근데 요즘엔 대중들이 다정한 순정파 남주도 좋아하더라고요. 이번 드라마도 그런 거랑 비슷한 걸 거예요.”

“뭐야, 그럼 내가 한물갔다, 뭐 이런 말이야?”

매니저가 화들짝 놀라 얼른 대답했다.

“아뇨, 그런 말은 아니고! 형, 클래식 이즈 베스트 몰라요? 원래 클래식은 영원한 법이에요. 유행은 약간


변해도 형 같은 ‘차도남’ 이미지는 꾸준히 팔릴 거다, 그러니까 이번 드라마 하나만 보고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라, 이런 말이에요.”

차영원은 흥 콧김을 내뿜으며 시트에 등을 깊이 묻었다.

사실 매니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유행은 변하는 법이었다.


비단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까칠한 재벌 남주가 인기 있었다. ‘저 남자가 내 남자다 왜 말을 못 해!’라며 남주가
여자주인공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팔렸던가.

차영원은 운 좋게 시대를 잘 만나 그때 전성기를 누린 케이스였다. 그는 그런 남주상과 가장 부합하는 외모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행이 변했다고 하더라도 차영원이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유행이 조금 식었다 뿐이지, 그런 싸가지 없는 재벌 남주 캐릭터는 아직까지도 조금씩 팔리고 있었다.

유행이 완전히 바뀐 건 아니란 소리였다. 그저 로맨스 드라마에서 고정적이던 캐릭터 조형이 다양해지면서 그
지평이 넓어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차영원이 너무 불안해할 이유는 없었다. 매니저의 말처럼, 클래식은 영원한 법이었으니까.

‘그래, 좋아. 다 알겠다 이거야. 머리로는 다 이해하겠는데······.’

그럼에도 마음에 안 든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차영원은 괜히 더 투덜거렸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어떻게 나에 대한 코멘트보다 백고운 그 친구에 대한 코멘트가 훨씬 많아? 내가


연차가 몇인데, 상식적으로 내 골수팬들이 더 많은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그 친구는 바로 몇 년 전에 데뷔한
친구라며? 근데 방송국 가보면 내 원래 팬들보다 걔 신생 팬들이 더 많다고. 이게 말이 돼?”

그리고 그 말에 매니저는 그저 어정쩡한 웃음만 어색하게 입가에 매달고 있을 뿐이었다.

차영원의 저 ‘뭘 하더라도 꼭 내가 제일 잘 나가야 한다’라는 마인드가 어쩜 저렇게 재벌 남주 캐릭터랑


똑같은지 모르겠다.
‘배우가 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오래 맡아서 하다보면 그 성격도 캐릭터랑 닮아가나?’

그런 시답잖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차영원은 내심 쌓인 게 많았는지 계속 투덜거렸다.

“심지어 이루다도 나보다 백고운 그 친구랑 더 친하게 지낸다니까? 촬영장에서 어찌나 고운 오빠, 고운 오빠,
하면서 졸졸졸 따라다니는지. 어째 나한테 하는 것보다 더 살가워. 나한텐 아직도 꼬박꼬박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말이야.”

매니저의 입가의 웃음이 더 어색해졌다.

어찌 보면 그건 당연했다. 이루다와 백고운의 나이 차이가 차영원과의 나이 차이보다 훨씬 적으니까 말이다.


누구라도 또래가 좀 더 편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차영원은 이루다와 연기할 때마다 은근히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참견을
하는데, 아무리 후배의 연기 지도를 도우려는 선배의 선의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이루다의 입장에선 차영원이 좀
으스대는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반면 백고운은 자신보다 어린 이루다에게 꼬박꼬박 ‘―씨’ 호칭을 붙이면서 이루다를 존중했다.

그러니 이루다가 자신을 그저 미숙한 후배로 대하는 차영원보다, 동등한 연기자로 대우하는 백고운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다. 그래서 매니저는 그냥 이렇게만 대답했을 뿐이었다.

“글쎄요···. 아무래도 고운 씨가 좀 더 편한가 보죠.”

*
차 안에서 매니저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땐 사실 별 생각이 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촬영장에 도착하고 백고운을 발견했을 때, 아까 흘려들었던 매니저의 말이 다시 상기됐다.

편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백고운이 연기를 잘하니 같이 연기하기에 편하다는 뜻인가? 아니면 말 그대로 성격이 좋아서 편하단 뜻인가?

문득 차영원은 궁금해졌고, 약간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준이라면 자신 역시 백고운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자신도 연기는 잘 하는 편이었고, 성격도 이 정도면 젠틀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루다도 그렇고, 대중들도 그렇고, 왜 다 저보다 백고운을 더 좋아하는 느낌이 드는 걸까?

매니저의 말처럼 그냥 다 우연일 수도 있었다.

매력이 덜 한 캐릭터를 자신이 맡게 된 것도 순전히 운이고, 이루다가 우연히 백고운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것도
순전히 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차영원은 어쩐지 납득하고 바로 수긍하기엔 뭔가 찜찜했다.

백고운에게 ‘아, 역시’하고 감탄할 만한 특별한 것이 있었다면 모를 터였다. 차라리 그랬다면 차영원도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백고운이 자신과 별 다를 것 없는 그냥 평범한 배우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욱 괜히 그랬다.


그때, 생각의 고리를 끊듯 매니저가 다급히 차영원을 불렀다.

“형, 거기서 뭐하세요. 얼른 의상 갈아입으러 가셔야죠. 오늘 바빠요.”

“알겠어, 갈게.”

차영원은 매니저를 따라 갔다.

그가 의상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였다. 근처에서 대본을 읽으며 연습하고 있는 백고운과 이루다가 보였다. 봐라,
또 둘이서 아주 사이가 좋다.

차영원은 그 둘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안 어두워?”

집중하고 있던 둘이 고개를 들고 ‘아’하면서 인사했다.

“선배님,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저녁 드셨어요?”

셋은 잠시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약간 긴장 돼요.”

“오늘 찍을 것 때문에?”

“네. 설마 촬영하다가 불붙고 이러진 않겠죠?”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 찍을 장면은 드라마 내에서도 꽤나 스케일이 큰 장면으로, 궁이 자객들에 의해 습격 받는 장면이었다.


이때 궁은 자객들이 쏜 불화살 때문에 불이 붙는다. 물론 궁에 붙은 불은 CG 처리를 하겠지만(문화재를 진짜
훼손할 일 있나!), 횃불 같은 소품의 경우는 진짜 불붙은 횃불을 이용하게 된다.

촬영장에 도착할 때부터 어슴푸레해지던 하늘엔 이제 완전히 어둠이 깔렸다.

촬영장 바닥 곳곳에 세트팀이 설치해놓은 불이 활활 타올랐고, 안전장치 등의 준비도 거의 끝나갔다.

차영원과 이루다, 그리고 백고운이 이제 촬영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는 그때였다.

“어머.”

이루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차영원과 백고운의 시선도 돌아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 대여섯 살이나 됐을까 싶은 꼬마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아역 배우로, 이번 장면에만 잠깐 등장하는 단역이었다.

이루다가 아이와 눈이 마주쳤는지 ‘안녕?’하면서 웃었고, 아이 옆에 서 있던 어머니는 아이 대신 말했다.

“안녕하세요, 해야지.”

그런데 아이는 쭈뼛거리더니 어머니 다리 뒤에 쏙 숨었다.

“죄송해요. 애가 낯을 좀 가려서요.”
어머니가 미안한 듯 말했다.

“아뇨, 괜찮아요.”

이루다는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그럼에도 못내 아쉬운 듯 입을 쩝 다시는 걸 보아하니, 아이를 평소에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두 그 아이가 정말로 낯을 가리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몇 분 뒤였다.

조연출이 다가와 아이의 어머니에게 스탠바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네, 갈게요. 다인아, 가자―.”

그런데 그때 다인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땅에 딱 붙어 섰다. 그리곤 웅얼거렸다.

“안 갈래.”

“응? 다인이가 갑자기 왜 이럴까. 얼른 가야지?”

다인이의 어머니는 당혹스러운 듯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다인이의 고집은 셌다.

다인이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으며 버텼다. 꾹 다문 입매가 짐짓 울먹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러다가 연기는커녕 카메라 앞에 서는 것조차 힘들 것 같았다.


문제는, 당장 촬영을 해야 하는데 대역을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다인이가 촬영을 거부하면 펑크가 난다는
점이었다.

다인이의 어머님은 물론 조연출과 주변 스태프들까지 갑자기 벌어진 이 비상사태에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조연출은 일단 말했다.

“그러면 조금 이따 올게요. 그때쯤엔 괜찮겠죠?”

“네, 제가 잘 달래볼게요. 죄송해요.”

조연출이 간 뒤, 다인이의 어머님은 무릎을 꿇고 다인이와 눈을 맞추면서 연신 다정하게 말했다.

“다인이가 왜 이럴까, 응? 겁나서 그래? 괜찮아. 그냥 학원에서 하는 것처럼만 하면 돼. 엄마가 옆에 있을 거고.


연기하는 거 재밌다고 했잖아.”

“······.”

그러나 다인이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으니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계속 다인이의 마음을 되돌리는 데에 실패하자, 이번엔 아이를 좋아하는 다른 스태프들 몇몇이 다가와
다인이를 어르는 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몇이 달라붙어도 다인이는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한편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차영원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저런 케이스 흔히 있지. 연습 땐 잘하다가 실전에서 얼어붙는 타입. 특히 아역들 중에서는.’

사실 이런 일은 촬영장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는 해프닝 중 하나였다.


평소 친한 사람들 사이에만 있을 땐 몰라도, 촬영장처럼 낯선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곳에 왔을 땐 당연히 누구나
긴장할 수밖에 없다.

성인이라도 긴장할진대, 하물며 어린아이는 어떠할까.

아역이라고 해도, 결국은 그냥 아이에 불과할 뿐이다. 성인도 아닌 아이에게 프로페셔널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거니 생각하며 차영원은 남일 같은 태도로 한 발 떨어져 있었고, 이루다는 다른


스태프들과 같이 다인이를 어르고 있었다. 물론 영 효과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까부터 다인이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백고운이 앞으로 나섰다.

“저··· 제가 다인이랑 얘기 좀 해봐도 될까요?”

“네? 아, 네.”

다인이의 어머님이 어리둥절한 듯 몸을 비켜주었고, 다른 스태프들과 이루다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백고운을


돌아봤다.

그리고 백고운은 쪼그려 앉아 다인이와 시선을 맞춘 뒤 물었다.

“다인이, 혹시 불이 무섭니?”

그 말은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말이었다.

그리고 다인이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이루다가 백고운에게 속삭이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부터 계속 횃불 쪽을 보고 있더라고요.”

“아, 그렇구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이루다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문제의 원인은 알아냈다.

그런데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촬영 장면이 불바다 씬이었기 때문에 불을 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백고운이 주변을 죽 훑어봤다. 그리곤 잠시만 사람들에게 몸을 비켜달라고 하더니 손을 겹쳐 모으곤 들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물었다.

“다인아, 이거 보여?”

응? 뭐가 보인다는 거지?

모두가 어리둥절했을 때, 다인이는 뭔가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우다!”

다인이가 손으로 가리킨 곳으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러나 거긴 땅바닥이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니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땅바닥에 그림자가 있었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곳곳에 횃불이 켜져 있던 탓에 생긴 그림자였다.

백고운의 손모양은 땅바닥에 여우 모양의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인이는 그걸 본 것이었고.

“맞아, 여우야. 다인이 잘 아네.”

백고운은 푸근히 웃었다.

모두가 그제야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이제 백고운이 뭘 하려는지 말이다.

손 그림자 놀이와 구연 동화
60.

다인이는 뒤늦게 자신이 촬영장에 있단 사실을 상기한 듯, 다시 수줍은 태도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인이는 여전히 동물 그림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백고운은 싱긋 웃더니 이번엔 손 모양을 약간 바꿔서 다른 그림자를 만들었다.

“이건 무슨 모양인지 알겠니?”

다인이가 머뭇거리다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토끼에요.”

“이 친구는?”

“음··· 늑대?”
“맞았어!”

백고운은 다인이를 독려하며 이번엔 손을 곰실곰실 움직였다.

“그럼 볼까요? 옛날 옛적에 아주 귀여운 토끼가 한 마리 살았어요. 이 토끼 이름은 다인이에요. 어머, 우리


다인이랑 이름이 똑같네? 그래서 토끼가 이렇게 귀여운가 보다.”

백고운의 과장된 연극 톤에 모여 있던 다른 사람들이 쿡쿡 웃었다. 다인이의 볼이 발긋 붉어졌다.

백고운은 ‘자―’하고 말을 끌면서 모두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 날, 이 다인이 토끼 앞에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늑대가 나타났어요. 힘없고 약한 토끼는 그대로 늑대한테
잡아먹힐 운명이었죠. 그때, 꾀 많은 여우가 뿅 하고 나타나 늑대를 가로막았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죠.”

―이봐요, 내기 하나 하지 않을래요? 내가 수수께끼를 하나 낼게요. 늑대 당신이 수수께끼를 맞히면 이 토끼뿐


아니라 나도 잡아먹을 수 있게 해드리죠. 하지만 수수께끼를 맞히지 못하면 나도 이 토끼도 살려줘야 해요.
어때요?

“말하자면 내기를 하잔 말이었죠. 그리고 늑대는 그 말을 듣고 옳다구나 덥석 수락했어요. 수수께끼만 맞히면


여우도 같이 잡아먹을 수 있으니까, 자신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죠. 문제를
내는 건 여우이고, 여우는 꾀가 많다는 것을요. 여우가 순순히 쉬운 문제를 내진 않았겠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토끼, 여우, 늑대였다. 그리고 이들의 성격은 뚜렷했다.

힘없는 토끼, 꾀 많은 여우, 그리고 힘은 세지만 약간 멍청한 늑대.

당연히 영리한 여우가 꾀로 늑대를 이기는 내용이 될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옛날 탈무드 이야기나 전래동화에 많이 나오는 우화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이런 우화의 장점은,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은 동물의 성격을 의인화하기 때문에 청자가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무의식적으로 대충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백고운은 계속 손 모양을 바꾸며 구연동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늑대는 문제를 맞히지 못했고, 토끼와 여우 둘 다 놓아줄 수밖에 없었어요. 늑대는 그제야
자신이 여우의 꾀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이 식식 났어요. ‘용서 못해! 여우 이 놈을 내가 언젠가는
혼쭐을 내겠어!’ 늑대는 그 뒤로 호시탐탐 여우를 잡아먹을 기회를 노렸어요.”

백고운은 연기를 곁들여 캐릭터의 대사를 쳤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손으로 그림자를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막간 인형극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즉석에서 모두 창작해내는 게 분명했는데도 백고운은 훌륭한 이야기꾼처럼 막힘없이 이야기를 줄줄 풀어냈다.

그 매끄러운 스토리텔링에 다른 스태프들은 감탄을 했고, 다인이는 어느새 무서움도 잊고 홀린 듯이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다.

백고운의 이야기는 이제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기회가 왔어요. 늑대는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여우가 살고 있는 집을 기습해 덮치기로
했어요. 그런데 이런, 여우는 그 사실을 모르고 쿨쿨 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연히 그 사실을 토끼가 알게
됐어요. 토끼는 은혜를 갚고자 여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로 했어요.”

그때, 백고운의 구연동화를 듣고 있던 이루다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

어째 이야기가 묘하게 익숙하다 했더니, 이 이야기는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의 드라마 내용을 비유하고
있었다.
다인이는 극 중에서 엑스트라인 심부름꾼 역할이었는데, 나름의 백스토리가 있었다.

다인이는 예전에 여주인공인 연이 탐관오리로부터 구해주었던 아이였다.

이후 다인이는 궁에 물건을 납품하는 사람들의 짐을 들어주고 사소한 돈을 받는 심부름꾼으로 일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연이 왕세자비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궁에 자객이 습격하고 화재가 난 날, 다인이는 화재가 난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된다.

다인이는 이번에는 자신이 연을 돕고 싶어 한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다인이는 난리가 난 와중에도 궁 밖으로 도망치는 대신 연이 있을 법한 공간으로 달려간다.

그건 백고운이 들려주는 우화 속 스토리와 똑같은 진행이었다.

그러니까 즉, 토끼는 다인이었고, 여우는 연이었고, 늑대는 드라마 속 악역 무리들인 셈이었다.

‘아, 그렇구나. 고운 씨는 지금 다인이가 자기 배역에 몰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는 거였어.’

단순히 불에 대한 두려움을 잊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배역과 동화돼 자연스럽게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수 있도록,
백고운은 다인이의 힘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루다는 감탄했다.

하기야 다인이에게 아무리 극 중 내용을 설명하면서 ‘너는 이러이러한 연기를 해야 돼’라고 설명한다 해도 딱히
몰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토끼와 여우, 늑대로 비유하니 내용이 간단해지면서 몰입이 확 됐다.

이렇게 다인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접근하는 방식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도 하지 못했던 생각이었다.


그야말로 백고운은 똑똑했다. 뿐만 아니라 다정하기까지 했다.

어린 아이의 고집을 그저 투정이라 치부하지 않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백고운의 다정한 성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깨달은 사람은 이루다뿐만 아니라 한 명 더 있었다.

그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백고운을 지켜보고 있던 차영원이었다.

그는 백고운이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차렸다.

그러자 몇 시간 전 매니저가 했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고운 씨가 좀 더 편한가 보죠.

그 말의 의미가 이제야 이해되었다.

처음에 백고운은 다인이와 몇몇 사람들 앞에서 손 그림자놀이를 곁들이며 구연동화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백고운 옆에는 어느새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백고운이 뭘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른 스태프들이 호기심에 기웃거리다가, 본인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서
그대로 눌러앉았기 때문이었다.

분하지만, 차영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백고운과 자신의 차이였다. 백고운에게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저 자리에 백고운 대신 자신이 있었다면? 그가 저만큼 할 수 있을까?

답은 ‘아니’였다.

주어진 대본으로 연기를 하는 거라면 몰라도, 차영원은 저렇게 즉석에서 이야기를 창작해 사람들을 몰입시킬 만큼
실감나게 연기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차영원 그 자신은 저기에 설 일도 없다. 기회는 아까부터 있었는데도, 차영원은 그저 남일
구경하듯 한 발 떨어져 수수방관하고만 있지 않았던가.

연기자로서도, 사람으로서도 백고운은 저보다 훨씬 더 성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루다뿐 아니라 스태프들, 그리고 나아가 대중들까지도 백고운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차영원은 입술을 꾹 말았다. 열등감 이전에 부끄러움이 먼저 들었다.

요즘 잘 나간다고 저도 모르게 좀 거만해져 있었나? 자신에게도 신인 시절, 무명 시절이 있었다. 그땐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이 없어도 연기가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작품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때는 아역이든 대선배든, 같이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 모두를 동료라고 생각했다. 누가 잘 나가고 못
나가고를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멋진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다 같이 으쌰으쌰 했었는데.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인기와 결과에만 연연하게 되었을까? 후배를 끌어주지는 못할망정 질투로 흉이나 보고
말이다.

새삼 그것을 인식하자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차영원은 멋쩍어서 ‘어린 친구가 뭐 저리 성숙하대’하고 괜히 한 번 속으로만 더 투덜거린 후, 반성하는 의미로


새로 마음가짐을 먹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 백고운의 구연동화도 끝이 났다.

“자, 이제 다인이가 토끼라고 생각하면 돼. 늑대로부터 여우를 구하러 가야하는 거지. 할 수 있겠니?”

“응, 할 수 있어요!”

다인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짓 비장한 표정인 것이, 어느새 사명감마저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갈까?”

“네!”

백고운이 다인이의 손을 잡았고, 다인이는 용감하게 카메라가 설치되어있는 곳으로 척척 걸어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다른 스태프들은 입을 와 벌리면서 박수를 조그맣게 짝짝짝 쳤다.

위기 상황이 될 뻔했던 것이 유쾌한 해프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종방연.

그것의 사전적 의미는 ‘한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등의 방송이 완전히 끝난 뒤, 그것을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
여는 잔치’이다.

우리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의 드라마의 마지막 16 화는 어제 방영되었다.

즉, 오늘은 우리 드라마 팀의 종방연이 있단 소리였다.

MBS 가 통 크게 잡아준 컨벤션 홀 입구로 들어서자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그 앞에 서자 기자들의


플래시가 연신 터졌다.
나는 자세를 잡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사진을 다 찍은 후, 홀 안으로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이루다가 보였는데, 그녀는 내가 여기에 도착했을 때부터 날 발견한 듯 날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녀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내게 인사하며 말했다.

“오빠, 기자들 진짜 많이 왔죠.”

“네. 우리 드라마가 잘 됐잖아요.”

우리 드라마는 첫방 때 시청률 15%로 순탄히 시작했다가, 막방 때 31%를 달성하며 종영됐다.

옛날에야 시청률 40, 50% 나오는 게 우스웠지만, 요즘엔 시대가 변했지 않은가.

종합편성 채널이 생기면서 경쟁자는 늘었고,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다시보기를 할 수 있으니 본방 사수하는
시청자는 줄었다.

자연히 시청률이 높게 나오기 어려웠고, 요즘엔 10% 중반만 되어도 선방한 드라마라는 말이 많았다.

그런데 막방 때 무려 첫방 때의 시청률의 두 배가 나오면서 30%를 넘기며 끝났으니, 우리 드라마가 대중적으로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지는 쉽게 설명될 수 있으리라.

그러니 종방연에 기자들이 많이 몰려든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루다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와, 오빠는 하나도 안 떠네요? 전 진짜 긴장 돼 죽을 뻔 했는데!”


아차.

나는 또 한번 어색히 하하 웃으며 둘러댔다.

“저도 지금 엄청 놀랐어요. 표정에 티가 잘 안 났나 보네요.”

그냥 전생에서도 이런 일은 몇 번 겪은 적 있어서 익숙했을 뿐인데, 이루다의 눈으로 보기엔 내가 너무 능숙하게


태연했나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왔어요?”

“아뇨, 감독님이랑 영원 선배님 아직 안 왔어요.”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고, 우리는 홀 안쪽으로 들어갔다.

비치된 핑거 푸드를 먹으며 도착한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자 속속히 다른 사람들도 도착했다.

그리고 감독님과 남주 역을 맡은 차영원까지 거의 대부분 도착했을 때였다.

“어?”

드라마의 극본을 맡았던 서 작가가 우리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누군가를 발견한 듯 문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팀장님 아니세요?”

자연히 서 작가의 시선이 닿은 쪽으로 우리 모두의 시선도 돌아갔다.

거기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 여자는 화환을 들고 오는 일꾼에게 ‘이쪽에다가 놓아 달라’라는 말을 하고 있다가, 서 작가의 말에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이 팀장이라는 사람이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아, 서 작가님. 안녕하세요.”

“어머, 언제 왔어요?”

서 작가가 호들갑을 떨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편 남겨진 나머지 우리들은 눈짓을 주고받았다.

서 작가만이 알은체 한 그 이 팀장이란 사람은 완전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방송국 쪽 사람도 아닌 것 같고, 외부 기자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스태프로 보이지도 않는데.

누굴까?

운전면허
61.

“아참, 내가 소개를 안 했네.”

서 작가는 뒤늦게 우리들을 떠올리고 그녀를 소개했다.

“인사해요, 이쪽은 로담 출판사의 이 팀장이에요. 우리 드라마 원작 소설 있죠? 그 소설 담당 편집자


분이에요.”

“안녕하세요.”
이 팀장이 인사했고, 그제야 우리들도 ‘아―’하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우리 테이블엔 대부분 배우들만 있었기에 우리가 그녀를 몰랐던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드라마 기획 단계인 미팅
자리에는 보통 제작진들이 들어가지, 배우들이 들어가지는 않으니까.

서 작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윤 작가님은 같이 안 왔어요?”

맥락상 원작 소설을 쓴 작가를 말하는 듯 싶었다.

이 팀장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 아시잖아요. 신비주의 고수하시는 거.”

“그건 그렇죠. 그래도 오늘은 오실 수 있을 줄 알았죠.”

서 작가는 대화 중에도 간간히 우리들에게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우리 원작 소설 작가님이 전혀 앞에 나서지 않으셔서 다 이 팀장님 거쳐서 소통해야 했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대충 알고 있었다.

드라마에 들어가기 전, 나는 원작 소설가의 인터뷰나 코멘터리 등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배역을 해석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그런데 책이 그렇게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도 작가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대충


신비주의구나 정도로 짐작하고 있었다.

이 팀장이 말했다.

“초대장까지 주셨는데 오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작가님이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그 대신 작가님이 손수 편지를


써서 전해주셨거든요. 제작진 분들과 배우님들에게 드리는 감사 인사 편지라고 하셨어요.”

이 팀장이 가방에서 편지 봉투를 꺼냈고, 서 작가가 그것을 펼쳐 확인했다.

어쩐지 호기심이 들어서 나와 이루다도 고개를 쭉 빼고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소설가 윤서리입니다.

드라마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의 종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 동안 원작자이자 또 한 명의


시청자로서 매우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제작진에게 보내는 감사 인사말이 쭉 이어졌다.

몇 줄 아래로 내려가니, 그 뒤에는 배우들에게 보내는 감사 인사도 쓰여 있었다. 연기를 잘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차영원과 이루다에게는 평범히 감사하다는 언급만 하고 넘어갔는데, 내 부분에는 몇 자 더 적혀 있었다.

[특히 서주는 백고운 배우님 덕에 더욱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인연이 된다면 다음 작품에도 또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단순한 인사치레의 말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또 묘하게 들리기도 하는 말이었다.

이루다가 흥분한 듯 내 옆구릴 쿡쿡 찔렀다.


“오빠, 이거 봐요! 이거 혹시 다음에 드라마화하는 작품도 같이 하자는 뜻 아니에요?”

그때, 이루다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이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건 작가님 사심이 맞을 겁니다. 사실 작가님이 드라마 챙겨보시면서 백 배우님 팬 됐다고 저한테 계속
말하셨거든요. 상당히 인상 깊게 보셨나 봐요.”

그러면서 덧붙였다.

“작가님 차기작도 최근에 판권계약을 마쳐서, 아마 드라마로 또 나올 것 같아요. 아직 확정된 바는 아무것도


없지만, 만약 그때가 되면 작가님이 백 배우님을 강력 추천할 거라고 농담처럼 말 하시더군요. 아무튼, 그만큼
팬이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이 놀란 듯 나를 돌아봤다.

농담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언급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랄 만한 일이긴 했다. 다른 주연 배우들도 있는데
굳이 나를 콕 집어서 그렇게 말했으니까.

감사하기도 했지만, 어째 너무 과한 관심을 받는 것 같아 나는 조금 멋쩍어졌다.

“좋아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고 저도 전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작가님이 좋아하실 거예요. 아참, 싸인 하나만 해주실 수 있을까요? 작가님이
부탁하셨거든요.”

“아, 네. 그럼요.”

나는 이 팀장이 꺼낸 원작 소설책 면지 부분에 싸인을 했다.

이루다는 이제 날 놀리고 싶은 건지 ‘오―’하고 추임새를 넣었고, 뒤늦게 이쪽으로 다가온 차영원은 편지를
확인하고 그저 말없이 샴페인만 홀짝였다.
감독님과 서 작가님은 ‘고운이 마성의 남자네’하는 소리나 하면서 껄껄 웃을 뿐이었다.

내 싸인만 남기는 것도 뭔가 그래서 나는 괜히 이루다에게 펜을 넘기며 말을 돌렸다.

“루다 씨도 싸인해요.”

“어, 저도 해도 되나요?”

“그럼요.”

이 팀장은 선선히 대답했다.

이루다는 자신의 싸인도 남긴 뒤 차영원에게 펜을 넘겼고, 그렇게 주연 배우 셋의 싸인이 모두 책에 온전히


담겼다. 그 책은 다시 이 팀장의 가방 속으로 돌아갔다.

일은 대충 좋게 마무리 됐는데, 하마터면 좀 민망할 뻔했다.

뭐랄까, 선생님께 편애 받는 학생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은 좋은데, 좀 민망한 그런 느낌?

뭐, 어쨌거나 기분은 좋았다는 소리다.

사전제작을 제외한 많은 드라마들이 대부분 그렇듯, 후반부 촬영은 거의 24 시간 내내 찍는 법이었다.

미리 찍어두었던 방송분이 다 나가고 나면, 그때부턴 바로 찍고 바로 편집해 바로 방송해야 그 일정에 맞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작품이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어쩔 수 없이 지치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연기를 좋아하더라도 물리적인 과로
앞에서는 장사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종방연까지 마치고 난 후 나는 오랜만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나는 이번 기회에 운전면허를 딸 생각이었다.

사실 운전면허는 백고운의 몸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일찍 따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계속 작품에
들어가느라 통 짬이 안 나서 여태 미뤄왔다.

어차피 운전은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 운전면허증은 그저 형식일 뿐이었다. 학원 같은 건 굳이 다닐 필요가


없었고, 바로 시험장에 가서 접수하고 기능과 주행을 처리하면 되었다.

그런데 어쩌다 운전면허를 따겠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이성한에게 하게 됐는데, 그때 이성한이 반색하며 말했다.

“어, 안 그래도 나도 따려고 했는데. 너 어디 학원 다니려고?”

“아니, 나는 그냥 바로 시험 보려고.”

“응? 아, 누가 가르쳐줬어?”

“아니, 그건 아닌데······.”

내 말에 이성한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혼자 그냥 바로 시험 치겠다고? 너 혹시 실제 운전이 카트라이더 같은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거기다가대고 ‘전생에서 이미 배워서 괜찮다’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나는 결국 둘러댔다.

“내 말은, 아직 가르쳐줄 사람을 구하고 있단 뜻이었어. 기태성 선배님한테 부탁해볼까 생각 중이긴 한데. 너도
같이 배울래?”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적어도 배우는 시늉 정도는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말이 나온 김에 나는 기태성에게 곧바로 전화해서 물어봤다.

―운전? 그래! 내가 또 한 드라이브 하지 않냐.

그는 의외로 선뜻 오케이 했다.

마침 기태성 역시 영화 막바지 촬영 중이라, 그 이후에 시간이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한 달 뒤, 나는 이성한과 함께 기태성의 집에 와 있었다.

기태성이 편한 차림으로 우릴 반기면서 물었다.

“그럼 둘 다 필기는 친 거지?”

“네!”

이성한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저는 그동안 부모님께 기능을 조금 배웠어요. 아직 잘은 못하기는 하는데, 저번엔 주차도 성공했어요.”

“아, 정말? 그러면 성한이는 잘 하겠네.”

이리 보니 이성한은 기태성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모양이었다. 예의 그 새침한 태도도 잊고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


싶은 학생처럼 종알거리는 게 말이다.

하기야 이성한에게 기태성은 까마득한 선배이지 않은가.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비록 기태성이 나한테는 죽이 잘
맞는 형이나 삼촌 같은 느낌이 컸지만 말이다.

우리는 근처에 한산한 공공주차장으로 이동해 본격적으로 운전을 해보기로 했다.


기태성은 주의할 사항 몇 가지를 짚어준 후, 한 번 해보라며 이성한에게 먼저 운전대를 넘겼다.

연습했다는 말이 진짜인지, 이성한은 뻣뻣해도 꽤나 자연스럽게 차를 몰았다. 비록 주차할 때는 좀 애를 먹긴


했지만, 그래도 초보자치고 그 정도면 엄청 잘 하는 것이었다.

기태성도 칭찬했다.

“운전 능력도 타고 나야 하는 거거든. 성한이 잘 하네!”

이성한은 아닌 척 했지만, 광대가 실룩거리는 것이 기분 좋은 듯 했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나는 학원을 다니지도 않았고, 운전을 가르쳐줄 부모가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기태성은 날 완전 초보라고 가정한
채 맨 처음부터 하나하나 꼼꼼히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이성한은 기태성의 칭찬을 들은 후 조금 우쭐해졌는지, 아니면 나름 운전에 있어서 자기가 선배라고
생각을 한 건지, 그런 기태성 옆에서 몇 마디 거들었다. 여기는 이렇게 하는 게 좋다, 저기는 저렇게 하는 게
좋다, 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런 둘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네, 네, 이해했어요’라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이론 강의가 끝났을 때, 나는 드디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그럼 이제 혼자 해봐도 괜찮을까요?”

“혼자? 벌써?”

“야, 너 너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거 아니야? 선배님 차 부숴먹으면 어쩌려고.”

자기가 기태성이라도 되는 양 쫑알거리는 이성한을 무시한 채 나는 기태성에게 ‘할 수 있어요’라는 눈빛을 팍팍


보냈다.

기태성은 잠시 고민하긴 했지만, 결국 호탕하게 허락해주었다.

“그래, 차야 부숴도 다시 사면 되니까! 안 그래도 요즘 차 바꿀까 생각하긴 했어, 하하!”

······어째 날 놀리는 것 같은데.

어쨌거나 나는 드디어 혼자 운전대를 잡을 수 있게 됐다. 기태성과 이성한은 밖에서 봐주겠다면서 나갔다.

남의 차라서 약간 어색하긴 했지만, 나는 금방 적응했다. 처음부터 너무 잘하면 좀 의심을 살까 싶어서 나는


일부러 천천히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이제 주차하는 일만 남았을 때였다.

기태성과 이성한이 이리로 들어오면 된다고 손짓을 하는 게 보였다.

그때, 불쑥 장난기가 들었다. 한 번 해봐, 그냥?

나는 살짝 씩 웃은 뒤, 엑셀을 훅 밟았다. 그리고 핸들을 휙 돌렸다.

“천천히 이리로······ 응?”

“······?!”

기태성과 이성한은 손짓을 하며 날 부르다가 곧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냐면 내가 운전한 차가 그린 듯이 미끄러지더니, 주차 공간에 한 큐에 딱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시원한 움직임으로 말이다.
‘이게 되네.’

반쯤은 신기했고, 반쯤은 유쾌했다.

왜, 그런 것 있잖은가. 주변에서 하도 못할 거라고 그러면 괜히 더 보란 듯 잘해내고 싶은 청개구리 심리라고


해야 할까.

사실 양 옆에 다른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면 그렇게까지는 못 했을 것이다. 빈 공간이니까 한 번 해본 거지.


그래도 진짜 되니까 기분은 좋았다.

밖으로 나오자 기태성과 이성한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게 보였다. 이성한이 물었다.

“너, 너, 뭐야, 방금? 설마 너 어디서 미리 배웠어?”

“아니, 처음인데.”

“그럼 그게 어떻게 가능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짐짓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글쎄, 나도 좀 타고 났나봐.”

겸손이 내 인생의 모토긴 하지만, 가끔씩 이런 허세를 부려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일이었다.

한 달 뒤, 나는 드디어 내 이름으로 발급된 운전면허증을 받을 수 있었다.

소속사에 들렀을 때, 내 얘기를 들은 윤성광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능이랑 주행을 한 번에 통과했다고요? 그것도 만점으로?”

옆에서 기태성이 혀를 내두르면서 거들었다.

“그렇다니까. 완전 천재야, 천재. 연기 말고 운전 쪽으로 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니까.”

“뭘요. 운이 좋았죠.”

“와, 고운 씨가 그렇게 운전을 잘하는 줄 몰랐네요. 어쨌든 축하해요. 그러면 이제 운전면허증은 있으니까 차만
있으면 되겠네요?”

“그렇죠. 그래서 부지런히 벌려고요. 하하.”

그건 진심이라기보다는 으레 하는 말이긴 했다. 열심히 벌어서 나중에 사야겠다, 라는 의미로 말이다. 차를


산다는 게 말이 쉽지, 아직 내 경제사정으로는 부족했으니까.

그런데 그때, 윤성광이 기다렸단 것처럼 말했다.

“그러면 고운 씨, 이번에 CF 한 번 안 찍어 볼래요? 이번에 작품이 잘 돼서 들어온 광고 제의가 좀 있는데.”

광고?

머리에 전구가 반짝 켜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 방법이 있었다. 어떻게 내가 이 생각을 먼저 못 했지?

안 그래도 이번 기회에 나는 좀 쉬기로 했었다. 다음 작품으로 들어가기 전, 광고를 하나 찍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뭣보다 차가 있으면 확실히 편한 점이 많았으니까.

나는 바로 물었다.
“어떤 게 들어왔는지 알 수 있을까요?”

뉴 월드 게임 광고
62.

윤성광이 설명하길, 내게 들어온 광고는 총 여섯 개란다.

옆에서 기태성이 놀란 듯 말했다.

“오, 진짜 많이 들어왔는데?”

“어, 그러게요.”

나도 놀랐다. 기껏해야 한두 개 쯤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윤성광이 싱긋 웃었다.

“우리 드라마가 이번에 워낙 잘 됐잖아요. 아마 고운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인기가 많았을 걸요?”

그러면서도 그가 살짝 으스대며 덧붙였다.

“게다가 캐릭터 덕도 많이 봤고요. 들어보니까 차영원 씨는 이번에 CF 가 세 개 들어왔대요. 근데 우리는 그 두


배가 들어왔다니까요.”

흔히 연예계에선 그런 말이 있다. 찍는 광고의 개수가 인기의 척도라는 것.

그러니 윤성광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기태성도 놀란 눈치였다.
“정말? 근데 그 친구 최근에 뭐 찍은 거 없던 것 같은데. 바로 작품 들어가지 않았어?”

“네, 그건 맞아요. 일부러 광고 들어온 거 다 거절했대요. 뭐라더라, 초심으로 돌아가 연기에 집중하고 싶다나?
뭐, 그렇대요. 거기도 뭔 일이 있었나 보죠.”

윤성광이 ‘아무튼’하면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음식 브랜드 쪽에 세 개, 의류 브랜드 쪽에 두 개, 그리고 게임 회사 쪽에서 한 개가 들어왔어요.”

내 귀에 마지막 ‘게임’이란 단어가 확 꽂혔다.

“게임이요?”

게임 쪽 광고는 전생의 나조차도 찍어 본 적이 없었다. 일단 기분이 색달랐다.

“네. 문월이라는 게임 회사인데, <그랜드 데스티네이션>을 만든 곳이에요. 혹시 해본 적 있어요? 꽤


유명한데.”

나는 어색히 웃었다.

“아뇨. 제가 요즘 게임은 잘 몰라서······.”

어렸을 때 오락실에서 테트리스 같은 게임은 많이 해 본 적 있었는데, 그 이후론 게임을 접할 일이 잘 없었다.

뭐, 게임 광고를 찍기 위해서 꼭 게임을 많이 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윤성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설명했다.

“어쨌든 거기 회사에서 이번에 <뉴 월드>라는 새로운 RPG 게임을 출시하거든요. 들어온 제의는 그 게임의
광고에요. 근데 컨셉이 좀 특이해요.”
“컨셉이요?”

“네. 그 게임 스토리 자체가 플레이어가 게임 속 세상에 떨어져서 용사가 되는 이야기거든요. 근데 그 스토리를


마치 짧은 드라마 티저처럼 만들고 싶어 하더라고요. 실제 배우가 게임 속 세상에 떨어져서 그 맵을 누비는
컨셉으로요. 그래서 약간 연기를 해줬으면 좋겠다고도 하더라고요. 뭐, 자세한 건 미팅 때 더
얘기해봐야겠지만요.”

윤성광은 나머지 다섯 개의 광고 제안도 마저 이야기해주었다. 대부분은 이전에 찍어봤던 것들과 비슷비슷했다.

그래서일까. 내 관심은 처음에 들었던 게임 쪽에 계속 가 있었다.

색다른 분야의 광고이기도 했지만, 뭣보다 컨셉을 들으니 재미있을 것 같아서 더욱 흥미가 생겼다. 특히 연기를
해야 하는 광고라는 점에서 더 매력적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는 첫 번째 들었던 게 제일 끌리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자 윤성광과 기태성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씩 웃었다. 둘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걸 선택할 것 같았어. 안 봐도 뻔하지 뭐.”

“실은, 안 그래도 저도 고운 씨가 그걸 좋아할 것 같아서 그쪽에 긍정적으로 답변했거든요. 예상이 맞았네요.”

나는 싱긋 웃었다.

함께 한 지 2 년 가까이 되어서 그런가, 이젠 척하면 척인 소속사 사람들이었다.

국내 최고 게임 회사 중 하나로 뽑히는 ‘문월’.


마케팅 팀의 황미나 팀장은 오늘도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옥상에서 빈 담배만 질근질근 씹고 있으려니까, 팀원이 걱정되었는지 다가와 물었다. 황미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손만 대충 휘저었다.

“무슨 일이세요? 표정이 안 좋으신데. 혹시 이번 <뉴 월드> 광고 때문에 그러세요?”

“응.”

“아직도 부장님이 못마땅해 하시는 거예요?”

황미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뭐.”

황미나는 원래 광고 대행사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일 년 전 여기 마케팅 팀으로 이직했고, 이직 후 이번에 처음으로 대형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그게 바로


이번 신작 게임인 <뉴 월드>의 광고 기획이었다. 그런 만큼 그녀는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해내고 싶었다.

황미나는 <뉴 월드>의 기본 스토리 설정이 ‘유저가 가상현실 게임 속에 들어가 용사가 된다’라는 것에 주목했다.

그녀는 그 스토리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마침 요즘 뜨기 시작한 웹드라마라는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녀는 ‘3 분 남짓의 패러디 웹드라마 형식으로 광고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팀원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고, 그 기획은 그대로 통과되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런데 광고 모델을 구하는 과정에서 차질이 생겼다.

바로, 황미나가 밀었던 모델과 부장이 밀었던 모델이 달랐다는 점이었다.

황미나는 백고운 배우를 추천했다.

백고운은 최근 성황리에 종방한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에 서브남주 역으로 출연한 배우였다.

대중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지금 대단했다. 지금 가장 핫이슈인 배우라고 해야 할까.

유행과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는 게 바로 광고였기에, 황미나는 당연히 그 배우를 제 1 순위로 섭외하고자 했다.

마침 원하는 이미지도 딱 맞아 떨어졌다.

드라마에서 백고운은 야성적인 매력이 있는 캐릭터를 연기했었는데, 그 이미지가 딱 <뉴 월드> 게임과 어울렸다.

몸값이 높아지긴 했지만, 앞으로 더 잘 될 배우였다. 차라리 지금 계약하는 게 싸게 먹히는 것이었다.

그러니 황미나가 백고운을 섭외 1 순위 모델로 추천한 것은 당연했다. 이보다 더 좋은 모델 후보가 없었다.

그런데 부장은 자신의 친척 중에 모델로 데뷔한 애가 있다면서 웬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을 추천했다.

많은 일거리가 학연지연혈연으로 오고간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인지도가 아예


없는 사람을 어떻게 광고 모델로 쓰겠는가.

게다가 이번 광고는 다른 때와 달리 연기력도 필요했다. 그러니 모델이 아니라 전문 배우를 섭외해야만 했다.
결국 광고 모델로 백고운 배우가 최종 결정되었다.

그런데 그 일 이후로 심기가 상했는지 부장은 사사건건 황미나의 일을 트집 잡았다.

황미나는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다. 흠이 잡히고 싶지 않았기에 이번 프로젝트를 무조건 성공시켜야만


한다는 압박감도 더 커졌다.

하지만 그녀가 누군가. 그 독하고 치열하다는 광고 쪽 업계에서도 살아남았던 그녀였다. 능력 하나라면 어디 가서


꿀리지 않았다.

“아무렴. 당연하지!”

그녀는 스스로에게 아자아자 힘을 불어넣은 뒤, 가슴을 쫙 피고 숨을 들이켰다. 한 번 환기하고 나니까 자신감이


다시 솟았다.

마침 팀원이 핸드폰에 온 연락을 확인하고 황미나에게 말했다.

“백고운 배우가 지금 도착했대요.”

“오케이. 지금 갈게.”

황미나는 힘차게 내려와 미팅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백고운 배우와 그의 매니저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백고운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황미나 팀장입니다. 이렇게 뵈니 정말 잘생기셨네요. 참, 드라마 너무 잘 봤습니다.”

“아하하, 감사합니다.”

짧은 인사치레의 말이 오간 뒤, 황미나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여기, 이게 스토리보드입니다. 처음에는 배우님이 PC 방 같은 곳에서 게임을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다음
장면에는 게임 속 세계에 배우님이 입장한 모습으로 전환됩니다.”

황미나는 베타테스트 할 때의 플레이 영상을 짧게 보여주었다.

플레이어는 1 인칭 시점으로 이동하면서 NPC 와 대화할 수 있고, 전투를 할 수도 있으며, 아이템을 줍거나 의상을
바꿀 수도 있었다.

“이 게임 플레이 영상을 실제로 찍는다는 느낌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게임 배경도 실제 한국이거든요.”

“아, 이해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게임 캐릭터를 그대로 연기하면 된다는 말인 거죠?”

“네, 맞습니다. 혹시 가능할까요?”

게임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3D 모델링으로 만들어진 게임 캐릭터는 실제 사람과 달리 신체의 움직임이 묘하게 부자연스럽다. 황미나는


그것을 똑같이 따라해 연기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었다.

황미나는 한 번 더 강조했다.

“어찌 보면 백 배우님의 연기력이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어서요. 패러디 영상 같은 느낌이긴 할 텐데, 그래도


최대한 비슷하게 연기해주셨음 해요.”

기본적으로 패러디는 원작보다 조잡한 법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패러디가 너무 어설프면 그 재미가 떨어진다.

패러디의 미학이란, 조잡하되 완성도가 높아야 하는 것이다.

황미나의 이러한 부탁에 부담이 될 법도 하건만, 백고운은 의외로 시원하게 대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열심히 해볼게요.”


*

오늘 나는 레퍼런스를 좀 더 많이 찾기 위해 직접 PC 방에 가서 게임을 해보기로 했다.

다만 내가 게임을 잘 모르는지라 어린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고자 이성한과 이루다를 불렀다. 둘은 선뜻 함께


해주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 셋은 최고급 사양이라는 신축 PC 방에 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성한의 컴퓨터를 흘긋 봤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성한은 2 등신 캐릭터들이 차 같은 걸 타고 빠르게


운전하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이성한은 내 눈길을 눈치 채고 대답했다.

“난 카트라이더 말고 다른 게임 해 본 적 없어.”

그러면서 그는 열심히 키보드를 눌렀다. 간간히 ‘이건 쉬운데’하고 혼잣말로 투덜거리는 걸 보니, 약간 심술이
난 것 같기도 했다.

사실 그는 나와 같이 운전면허 시험을 봤는데, 주행에서 두 번이나 미끄러졌다. 반면 나는 한 번에 턱 붙었고.

아마 그것 때문에 자존심에 스크래치라도 입은 모양이었다. 이성한은 원래 좀 완벽주의인 편이었으니까.

“뭐, 그래. 열심히 해라.”

나는 이쪽은 내버려두기로 하고, 반대쪽을 들여다보았다. 이루다가 막 컴퓨터 부팅을 끝내고 무슨 게임을
선택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루다 씨는 게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럼요. 제가 가수 안 했으면 프로게이머 할 생각이었다니까요. 오빠는 무슨 게임할 거예요?”

“저는 게임 잘 몰라서요. 루다 씨가 골라줄 수 있어요?”

“그럼요. 어떤 종류 원하시는데요? 말만 해요. 저는 어지간한 건 한 번쯤 다 해봤거든요.”

그러면서 이루다가 씩 웃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든든해 보이는지. 다행이었다.

“제가 찍을 게임이랑 가장 비슷한 게임이었으면 좋겠는데, 어떤 게임이냐면······.”

나는 설명했고, 이루다는 알아듣곤 제일 유사한 게임을 알아서 척척 골라주었다.

“오픈월드 어드벤처형 RPG 라 이거죠? 그러면 이게 제일 비슷할 것 같은데요. 이게 콘솔이랑 PC 두 버전으로


나온 게임이거든요. 아무래도 PC 니까 플스만큼 그래픽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꽤 괜찮아요. 참, 이건
스팀에서 사야 하는 유료 게임이거든요. 근데 어차피 맛보기로 하는 거니까 오빠가 제 계정으로 쓰세요. 다행히
여기 PC 방에 깔려 있네요.”

방금 이해한 듯 이해하지 못한 말이 지나간 것 같은데······.

내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이루다가 깔깔 웃었다.

“오빠도 못하는 게 있네요. 의외인데요?”

그녀는 나 대신 이것저것 마우스를 클릭해서 게임을 시작해주었다.

“자, 이제 하면 돼요.”

“고마워요.”

“뭘요. 그보다 오빠 저한테 이제 말 놓으시면 안 돼요?”


“응? 아··· 그럴까?”

사실 드라마 찍는 동안에는 이루다를 대할 때 일부러 선을 확실하게 그었었다.

안 그래도 그녀와 로맨스 연기를 하는데, 사석에서도 너무 격의 없이 굴면 우리 사이가 좀 묘해질까봐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루다가 생긋 웃었다.

“네. 솔직히 저는 오빠가 편해서 좋거든요.”

약간 아리송한 말이긴 했다. 일부러 선을 그었는데, 그게 도리어 편했다니. 하지만 아주 이해 못할 말도


아니었다.

나도 편하게 웃어보였다.

“그래, 그럴게. 그럼.”

나도 말을 놓고 나니 나 역시 그녀가 훨씬 편해졌다.

나는 게임을 시작했고, 간간히 모르는 건 이루다에게 물어보았다.

이루다는 비슷비슷한 다른 게임들도 소개시켜주었다.

RPG 게임들의 캐릭터들은 묘하게 움직임이 비슷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거칠게 말하면, 그들의 움직임은 로봇의
움직임과 비슷했다.

나는 그 움직임의 패턴들을 주의 깊게 관찰했고, 머릿속에 깊게 새겨 넣으며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이루다가 내게 물었다.

“어때요, 감 좀 잡았어요?”

나는 씩 웃었다.

“네, 확실히 잡았어요.”

게임 캐릭터 연기
63.

게임 <뉴 월드>의 광고 촬영 현장 당일.

황미나는 촬영지인 인천의 차이나타운에 일찍 도착해 촬영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네, 네, 그런 식으로 계속 카메라가 따라가면 될 것 같아요.”

둘은 체크할 부분을 마저 체크하면서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추 준비가 끝났을 때쯤, 백고운이 촬영장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팀장님.”

“안녕하세요, 고운 씨. 의상은 안에 준비되어 있거든요. 그거 갈아입고 오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 뒤, 백고운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원테이크로 찍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카메라 동선 등을 체크하며 리허설을 간단하게 마쳤다.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기 전, 잠시 시간이 떴기 때문에 백고운은 한쪽에서 대기했다.

그런데 그때, 그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더니 귀에 꼽았다.

음악을 듣고 있는 걸까?

다른 스태프들은 약간 호기심 어린 눈빛을 던졌지만, 황미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마인드컨트롤이라도 하나 보다 싶었을 뿐이었다. 왜, 수영선수들이 시합 들어가기 전 음악을 듣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논리로, 배우들도 연기 들어가기 전에 음악을 들을 수도 있지 않은가. 감정에 몰입하는 데에
노래만큼 좋은 도구가 없었으니까.

십 분 뒤, 황미나가 손짓했다.

“고운 씨, 준비해주세요.”

“네.”

백고운이 이어폰을 빼고 다가와 준비했다.

이번 장면은 백고운이 게임 속 세계에 처음 입장해 맵을 처음으로 누비는 씬이었다.

백고운은 게임 속 플레이어의 아바타를 연기한다.

그가 게임 캐릭터처럼 길을 쭉 걸으면, 촬영 감독이 그 뒤를 따르며 실제 게임 영상처럼 찍을 것이다.

다른 엑스트라 배우들이 NPC 처럼 골목 곳곳에 대기 중이었지만,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다. 미리


시청에 협조를 구해 길을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없어 싸늘한 거리는 더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여서, 정말 게임 속 세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 씬 2, 테이크 1 가겠습니다.”

클랩스틱이 부딪힌 후 클래퍼보드가 빠졌고, 촬영 감독이 ‘액션’ 싸인을 보냈다.

백고운은 연기를 시작했다.

그는 무릎을 살짝 굽히고 팔은 엉거주춤하게 옆으로 벌렸다. 그 자세 그대로 그는 가볍게 몸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S 자라도 그리는 듯한 리듬이었다.

그 기계적인 흔들거림은 3D 모델링 캐릭터의 움직임과 똑 닮았다.

팔짱을 끼고 한쪽에서 촬영을 지켜보고 있던 황미나가 눈썹을 살짝 치켰다.

‘흠, 꽤 괜찮은데?’

사실, 게임 캐릭터는 로봇보다는 실제 인간과 가깝다.

로봇은 기계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일 때도 관절만 뚝뚝 각지게 움직일 뿐이다.

반면 게임 캐릭터는 실제 인간처럼 가만히 있을 때도 몸이 흔들리게 디자인 된다. 왜냐면 유저가 그 아바타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동일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임 할 때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세히 관찰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게임 캐릭터의 흉통이 숨


쉬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것을 말이다.

백고운이 연기를 잘한다는 사실은 업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보니까 확실히 잘하긴
잘한다.
백고운은 처음 시작한 동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제 자리에서 가만히 몸을 흔들었다. 표현하자면, 이건 게임
캐릭터의 ‘대기’ 자세였다.

곧 그는 유저가 ‘앞으로 가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허리를 곧게 편 후 앞으로 척척척 걸어갔다.

그는 직선으로 쭉 걸었는데, 그러다 앞의 전봇대에 부딪힐 듯 다다랐다.

놀랍게도 백고운은 몸을 돌려서 다른 방향으로 걷는 대신, 계속 앞으로 걷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가상의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그의 발은 계속 제자리걸음이었다.

황미나는 잠시 뒤 또 놀랐다.

백고운은 가상의 벽에 계속 돌진하는 게임 캐릭터처럼 발을 움직였는데, 그의 몸은 허공에 가로막히면서도 동시에


약간씩 옆으로 밀렸기 때문이었다.

그 마임 동작이 꼭 진짜 게임 캐릭터를 보는 것 같았다.

‘디테일이 대단한데?’

이건 진짜 좀 놀랐다. 이 광고를 찍기 위해 진짜 연구를 많이 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백고운은 우뚝 멈추곤, 좌향좌 하듯 몸을 비틀어 45°로 몸의 방향을 비틀었다. 그리고 이번엔 앞으로 쭉 뛰었다.

실제 게임 캐릭터가 뛰는 것처럼, 백고운의 몸짓은 가벼웠다. 그는 전혀 힘들지 않은 듯 숨 하나 가쁘게 쉬지


않았다. 표정은 평온해서 진짜로 게임 캐릭터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몇 가지 동작을 연속해서 했다.

살짝 무릎을 구부린 채로 흔들거리며 대기하기. 앞으로 천천히 걷기. 앞으로 빠르게 뛰기. 좌우로 방향을 바꾸기.

백고운은 입력된 동작이 그 4 개 밖에 없는 게임 캐릭터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오직 그 4 개의


동작만 계속 바꿔가면서 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동작들은 시간차를 두고 다시 반복되어도 똑같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한 번 한 동작을 몇 분 뒤 다시 재연해보라고 할 때 똑같이 따라하지 못한다.

그러나 백고운은 가능했다.

그는 각각의 동작이 정말로 몸에 입력이라도 된 듯, 다른 동작을 하다가 다시 처음의 동작으로 돌아와도 복사


붙여넣기 한듯 똑같이 재연해냈다.

황미나 뿐만 아니라 촬영장의 모든 이가 속으로 감탄했다.

‘와, 정말 잘하네.’

괜히 연기파 배우라는 말이 붙는 게 아니었다.

백고운의 연기에 감탄하면서 그의 뒤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골목길 끝에 다다랐다. 같은 장면을 몇 번 더


찍어야겠지만, 일단 첫 테이크의 촬영은 끝난 셈이었다.

“컷! 좋아요.”

촬영 감독의 말에 백고운은 그제야 몸에 힘을 풀고 한숨 돌렸다.


3 분 내내 같은 동작만 하려니까 좀이 어지간히 쑤셨는지, 백고운은 뻐근한 목과 허리를 가볍게 돌리며 스트레칭
했다.

그 뒤, 그가 이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 괜찮았나요?”

“너무 괜찮았죠. 연기를 진짜 잘하시네요.”

촬영 감독이 대답했고, 황미나도 거들었다.

“딱 저희가 원하던 그림이에요. 따로 연습 같은 걸 하신 건가요?”

그냥 와서 즉석에서 연기했다기에는, 너무 퀄리티 높은 연기였다.

예상이 맞은 듯 백고운이 웃으며 긍정했다.

“네, 연습 좀 했어요.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황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정도 연기를 하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연습이 필요했겠지.

그런데 백고운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팔이나 다리를 정확한 각도로 계속 움직이는 건 괜찮았는데, 문제는 계속 일정한 속도로 몸을 흔드는 게
어렵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지거나 느려지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메트로놈을 키고 연습했어요. 그
박자를 완전히 외울 때까지 몸에 익히는 게 좀 시간이 걸렸죠.”

백고운이 워낙 태연하게 말해서였을까.


모두가 처음엔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 그러다 한 발 뒤늦게 모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잠시 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촬영 감독이 얼떨떨하게 물었다.

“BPM 몇으로요?”

“저는 80 에 맞췄어요. 확인해보니까 게임 캐릭터가 딱 그 속도에 움직이더라고요.”

“어······ 저, 그냥 궁금해서 그런데, 혹시 확인해 봐도 되나요?”

“네, 물론이죠.”

백고운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더니, 약간 민망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근데 약간 오차는 있을 순 있어요.”

오차라니. 그런 표현은 기계한테나 쓰는 말이지, 사람의 몸동작에 쓰는 표현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확신에 찬
것처럼 들렸다.

‘에이, 설마.’

촬영 감독은 자신의 스마트 폰에 메트로놈 앱을 깐 후, 방금 찍은 영상을 모니터링 했다.

그리고 그는 미심쩍은 얼굴로 메트로놈 박자와 백고운의 연기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궁금해져서 황미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와서 그것을 구경했다.

사실 여기 있는 모두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3 분 내내 같은 속도로 움직여?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도 괜히 긴장감이 들어서 모두가 숨을 죽였다.

조용한 가운데에 메트로놈 소리만 가만히 울렸다.

똑, 딱, 똑, 딱―.

그리고 영상의 반 정도가 흘러갈 때쯤.

사람들의 눈동자가 하나둘씩 커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백고운은 BPM 80 에 정확히 맞춰서 몸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속으로 박자를 세고 있다고 해도, 중간중간 걷거나 뛰거나 하다보면 집중이 흐트러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백고운은 영상 처음과 끝 모두 완벽하게 같은 박자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놀랍다 못해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모두가 입을 떡 벌리고 백고운을 돌아봤다. 그리고 거기엔 황미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황미나는 뭔가를 번뜩 깨달았다. 그녀가 물었다.

“혹시 아까 이어폰으로 듣고 있던 게 메트로놈 이거였어요?”

“아, 네. 맞아요. 녹음해서 매일 듣고 다녔거든요.”

백고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도리어 다른 사람들이 더 놀랐다.

새삼 백고운이 달리 보였다.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보통 사람이라면 3 분짜리 광고 하나를 찍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지 않는다.

백고운이 단순히 매사에 열심히 임하는 성격이라서가 아니었다.

이건 정말로 연기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고작 3 분짜리 연기를 위해 극기에 가까운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저 열정도 놀라웠지만―,

그 어려운 것을 별 것 아니란 듯,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 마는 저 천재성도 놀라웠다.

‘진짜 저 배우는 천재다.’

황미나는 연기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러나 이게 천재가 아니고서야 다른 누구를 천재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한편 모두가 놀라움에 입만 벙긋거리고 있을 때, 백고운은 혼자만 왜 그런 반응인지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뉴 월드>의 두 번째 촬영은 스튜디오에서 이뤄졌다.


오늘 여기서 찍을 장면은 두 장면이었다. 첫 번째는 광고의 첫 시작에 들어갈 장면으로, 실제 세계의 내가
게임을 하는 씬이었다.

별로 어려운 장면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촬영은 일찍 끝났다.

나머지 하나는 광고 본편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따로 홍보 영상에 쓸 장면이었다.

촬영 감독이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카메라 보고 홍보 문구를 말해주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아, 고운 씨. 여기요. 이거 그대로 읽어주면 돼요.”

황미나가 대본을 건넸다. 거기에 쓰인 문구는 두 줄로, 아주 간단했다.

[여러분도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뉴 월드>에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보세요.]

게임 스토리에 충실한 홍보 문구였다.

나는 카메라를 보고 싱긋 웃으며 문구를 그대로 읽었다.

“됐나요?”

촬영 감독은 손으로 오케이 싸인을 그려보였는데, 의외로 황미나가 살짝 고민했다.

“음, 약간 딱딱하게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 저요?”
감독님은 살짝 당황하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듣고 보니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게임이니까 연령층이 어리죠? 그러면 좀 더 편안한 말투로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B 컷을 하나 더 딸까요?”

황미나가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말했다.

“고운 씨, 방금 그 문구를 반말로 바꿔서 해볼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했다.

“거기 당신, 용사가 되고 싶지 않은가? <뉴 월드>에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봐라.”

황미나가 이번에도 NG 를 표시했다. 너무 근엄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좀 더 편안하게 하는 말투로요. 어린 애들이 친한 친구들에게 건네는 말투로요.”

친한 친구에게 건네는 말투?

“음······.”

나는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야, 너도 용사 될 수 있어.”

딱―!
내 말이 끝나자마자 황미나가 손가락을 부딪치고 시원하게 외쳤다.

“그거 좋은데요?! 이걸로 갑시다!”

노미네이트
64.

2013 년 겨울, 어느 날.

올해 하반기 최대 기대작 중 하나였던 게임 <뉴 월드>가 드디어 출시되었다.

그와 동시에 <뉴 월드>의 광고도 공개되었다.

황미나는 TV 뿐 아니라 버스나 지하철에 설치된 LED 모니터에도 광고를 걸어놓는 등 공격적인 홍보를 펼쳤다.

사람들은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릴 때, 보통 시간을 때울 겸 근처의 아무것에나 시선을 두곤 한다. <뉴 월드>의
광고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타겟팅 했다.

광고의 내용은 어찌 보면 간단했다.

백고운은 컴퓨터를 켰다가 게임 속에 떨어지고, 이리저리 골목을 돌아다니며 NPC 와 대화하며 자신이 용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NPC 에게 퀘스트를 받은 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다른 NPC 들에게 대화를 거는데,
그러면서 의외의 사실을 마주하기도 하고 소소한 반전이 밝혀지기도 한다.

<뉴 월드>는 쇼트 무비 같기도 했고, 요즘 유행하는 게임 실황 영상과 비슷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모니터에 흘러나오는 <뉴 월드> 광고에 뜻 없이 시선을 두다가, 그 광고의 묘한 매력에 금방
빠져들었다.
3 분은 짧지만, 동시에 꽤 긴 시간이다.

사람들은 그 광고를 보다가 버스나 지하철이 와서 중간에 끊기면, 거기서 잊어버리는 대신 각자의 핸드폰으로
광고를 검색해봤다.

사람들은 보통 광고를 싫어한다. 엄밀히 말하면, 광고는 결국 자신이 관심 없는 걸 자꾸 보라고 들이미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보는 광고 영상이라면?

그만한 화제 동영상이 없게 된다.

당연히, <뉴 월드> 광고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백고운이 출연한 <뉴 월드> CF 는 공개된 지 한 달 만에 온라인 누적 조회수가 1500 만을 돌파했다.

온갖 뉴스가 쏟아졌다.

[백고운, 광고계도 접수? 2013 년 브랜드 인지도 1 위 남자 배우 등극!]

[게임 <뉴 월드>, 서울영상광고제 대상 수상 “광고의 장르를 넓힌 광고였다”]

[“야, 너도 XX 될 수 있어” 유행어를 낳은 <뉴 월드>. 가나일보가 뽑은 2013 년 화제의 광고 TOP 5 에


선정]

그리고 광고가 유명해진 만큼, 자연히 게임도 유명해졌다.

<뉴 월드> 게임은 출시된 지 한 달 만에 매출 500 억 원을 달성했고, 이어 나온 모바일 버전은 출시 첫 날에


누적 다운로드 1000 만을 돌파했다.
그 때문인지, 재미있는 해프닝도 생겼다.

어느 날 포럼에 이러한 게시글이 하나둘 올라왔다.

[광고 보고 게임 시작했는데, 백고운이 입은 의상은 안 나오네;; 이거 허위매물 아님? 고소하기 전에 당장


내놓아주셈]

[문월 듣고 있나? 제발 백고운 버전 커마 할 수 있게 해주세요ㅜㅠ]

그런 요청이 많았는지, 정말로 문월 측에서 <뉴 월드> 게임에 백고운 커스텀 패키지를 한정 상품으로 내놓았다.

그건 의외의 결과를 낳기도 했는데, 게임 마니아뿐 아니라 백고운 팬들도 <뉴 월드>에 유입 된 것이었다.

[솔직히 게임 1 도 모르는 겜알못인데 우리 오빠 커스텀 있다고 해서 가입 했어요! 게임을 잘 못해도 양해


부탁해요 ㅠㅠ]

[나 분명 빠순이라서 게임 시작한 건데.. 어느새 10 시간 씩 게임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함... 게임 재밌네...


ㅎ 벌써 몇 십만 원 과금 했다.... 오늘도 통장에 월급이 스치운다....★ 또르르...]

그러다보니 기존의 게임 마니아들은 백고운 덕에 게임이 흥행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백고운이 계속 광고
모델 해주길 바랐다.

[문월 백고운이랑 오래 갔으면 좋겠네 그냥 아예 전속계약 맺어줘...]

[내 말이 222]

[둘의 자본주의 우정 응원합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정말로 백고운과 문월이 후속 CF 계약을 맺었다는 뉴스가 떴다.

백고운은 든든한 파트너가 생겨서 좋고, 문월 측은 긍정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번 광고 일은, 그야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윈윈 win-win 인 협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

2013 년 연말.

나와 김건은 미래 자동차 대리점에 와 있었다.

오늘은 드디어 내 차를 사는 날이었다.

마음에 드는 차의 시승을 마치고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하고 있는데, 김건이 계속 옆에서 촐랑거렸다.

“이야, 이게 바로 영 앤 리치네. 스물셋에 벌써 자차라니, 진짜 부럽다 부러워―.”

농담이긴 했지만, 그는 짐짓 깐족거리는 말투로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헛웃음을 뱉으면서 김건의 얼굴을 밀어냈다.

“아우, 그만 안 해? 몇 번 말해. 나 이거 개런티 받아서 사는 거라니까. 영 앤 리치는 무슨.”

CF 하나 찍었다고 중형차 하나를 턱턱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오는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운이 좋았다. <뉴 월드> CF 가 대박이 나면서 후속 CF 도 찍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었다.

추가 계약을 맺을 때, 나는 개런티를 좀 더 얹어 받았다. 그 덕에 목돈이 꽤 생겼다.

사실 나는 <뉴 월드> 게임 외에도 한두 개를 더 찍을 생각이었는데, 개런티 덕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물론 원래 계획했던 때보다 훨씬 일찍 차를 살 수도 있게 되고 말이다. 원래는 시간이 좀 더 걸릴 줄 알았다.


여하튼, 좋은 일이긴 했다.

마침 또 내가 최근에 운전면허를 따지 않았는가. 이제는 차도 생겼으니, 앞으로는 좀 더 편하게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만 놀리고. 이제 가자. 내가 밥 살게.”

나는 김건의 등을 떠밀며 대리점 밖으로 향했다.

김건은 히죽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졸졸졸 따라왔다.

“아, 백고운 선수. 오늘따라 통이 작은데요. 난 술도 얻어먹고 싶은데 말이죠.”

“나 방금 큰 돈 썼거든? 양심적으로다가 술은 네가 사라.”

김건이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싫은데? 나 원래 양심 없는데?”

“아들 뻘한테 술까지 얻어먹으면 안 민망하냐.”

“아니,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요? 백고운 선수, 술 사기 싫다고 너무 무리수를 던졌는데요.”

나도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똑같이 캐스터 말투로 대꾸했다.

“아, 겉보기엔 제가 어리니까 틀린 말은 또 아니죠.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세요. 잘해봐야 삼촌이랑


조카죠.”

남자는 영원히 철이 안 든다는 말이 있던가. 특히, 옛 친구랑 함께 있을 땐 더더욱 어려지는 것 같았다.


나이 마흔이 다 넘은 우리는 ‘술을 내가 사네, 네가 사네’하는 걸로 유치하게 투닥거리면서 대리점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때였다. 내 주머니 속 핸드폰이 웅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매니저였다.

나는 김건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전화를 받았다.

“네, 매니저 형. 무슨 일이에요?”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친한 친구가 번듯하게 사회 생활하는 광경을 우연히 목격한 사람처럼, 김건이 옆에서 ‘와,
저거 형이라 하는 거 봐’하면서 날 가증스럽게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통화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말은 생각하지도 못한 말이었다.

―고운아, 너 MBS 연기대상에 노미네이트 됐다! 우수 연기상 남자 배우 부문으로!

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요? 아, 네, 진짜 기쁘네요. 네, 네, 30 일이요? 되죠. 네, 그럼요. 네, 지금 밖이라서요. 네, 그럼


내일 뵐게요. 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통화를 끊은 후, 나는 김건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좋아, 네 말대로 오늘은 내가 술까지 쏜다.”


김건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대.”

“나 MBS 연기대상에 우수상 후보로 노미네이트 됐대.”

“뭐?! 야! 축하한다!”

아직 수상한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김건이 ‘짜식, 내가 너 될 줄 알았다니까’하면서 날 툭 쳤고, 나 역시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차를 산 날에 노미네이트 소식까지 듣다니. 이러면 내가 술을 또 안 살 수 없지 않은가.

좋은 일이 한 번에 들이닥치다니, 오늘 무슨 날인가 보다.

2013 년 12 월 30 일.

MBS 연기대상 시상식이 여의도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시상식은 보통 1 부, 2 부 나뉘어서 한다.

1 부 동안에는 초대된 가수들의 공연을 감상하거나, 조연들의 수상소감을 보면서 흘러간다.

두 시간 정도 앉아 있었을까. 오랜 기다림 끝에 모두가 고대하고 있던 2 부가 시작됐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사회자가 말했다.


“네, 그럼 다음 순서는 우수 연기상인데요. 먼저 미니 시리즈의 남자 부문 후보부터 보시겠습니다.”

곧 화면에 다섯 명 정도의 후보가 떴다. 그 중 하나에는 나도 있었다.

“2013 MBS 연기대상. 우수 연기상 미니시리즈 남자 부문 수상자를 바로 발표하겠습니다. 수상자는······.”

사회자가 봉투를 열고 이름을 확인했다.

두구두구―.

북 소리가 울리면서 긴장감이 조금씩 커질 때쯤, 사회자가 싱긋 웃었다.

곧 장내에 시원한 목소리가 울렸다.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의 백고운 배우입니다. 축하합니다!”

우렁찬 박수소리가 터졌다.

나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앉아 있던 이루다가 제일 먼저 벌떡 일어났다.

“오빠, 축하해요!”

우리 <왕‧자>팀의 다른 사람들도 내게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축하해요, 고운 씨.”
“축하해!”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나는 가볍게 그들 몇몇과 포옹하거나 악수한 뒤, 무대 위로 올라갔다.

상과 꽃다발을 들고 나는 마이크 앞에서 말했다.

“이렇게 상을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잠시 텀을 둔 후 조용한 장내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올 한 해는 좋은 작품을 만나 정말 과분한 사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자만하지 않고 앞으로도 더 열심히


노력하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그리곤 감사한 사람들을 쭉 언급하고 수상 소감을 끝냈다.

무대에서 내려와 자리로 돌아오자 이루다가 아쉬운 듯 말했다.

“왜 이렇게 짧게 했어요.”

“다른 사람들도 해야 하니까요. 괜찮아요.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왔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왔다.

‘다만······.’

나는 시상식이 이어지고 있는 무대를 바라봤다.

나라고 왜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전생에서 아무리 상을 많이 받았다고 해도, 상 받는 순간만큼은 매번 새롭고


벅차다.

하지만 나는 좀 더 날 것에 가까운 진심은 나중으로 아껴두었다.

왜냐하면 그건 정상에 섰을 때 하고 싶었다.

<해수>로 신인상. <친구들>로 조연상. 그리고 이번의 <왕‧자>로 우수상.

영화냐 드라마냐 차이는 있었지만, 다 같이 보자면 나는 하나하나씩 계단을 밟고 올라가듯 차근차근 상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아직 중간까지밖에 안 왔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올라갈 곳이 더 있지 않겠는가.

우수 위에 최우수, 나아가 대상······. 혹은 그 위.

더 높이 올라갈 자리가 있다는 건, 그만큼 더 도전할 기회가 많다는 소리였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감각.

내 미래가 아직 앞으로도 무궁히 펼쳐져 있다는 그 감각은, 나로 인해 더 도전의식을 불타게 만들었다.

그러니 그때를 위해서 나는 오늘의 감상을 아껴두기로 했다.

이제 비로소 시작일 뿐이었으니까.

왕중왕 PD
65.

그날은 우리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 팀의 경사라고 할 수 있었다.


이루다가 신인상, 내가 우수상, 그리고 차영원이 최우수를 받았고, 다른 조연들 몇몇도 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제작진 중에서는 서 작가님도 올해의 작가상을 받았다.

우리 팀에서 노미네이트 된 사람들 거의 모두가 상을 받은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상식이 마무리 될 때쯤엔 우리 팀이 2013 MBS 연기대상을 싹쓸이 했다는 기사가 떴다. 정말
요즘 기자들은 발 빠른 것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이루다가 옆에서 고개를 기웃 빼면서 물었다.

“오빠, 기사 떴어요?”

“응, 떴어.”

“KBC 에서는 누가 받았대요?”

방송 3 사의 연기대상은 연말에 열리다보니 주로 12 월 30 일 아니면 31 일에 하곤 했는데, 그러다보니 날짜가


겹치는 날도 가끔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랬다. 같은 시간대에 KBC 에서도 연기대상이 열리는 중이었다.

그쪽도 비슷하게 끝났을 테니 이제 슬슬 기사가 뜨거나, 아니면 우리 쪽 관계자들 중 소식통인 누군가가 알려줄
텐데······.

나는 최근에 바꾼 스마트 폰 화면을 터치하며 기사를 새로 고침 했다.

그러자 몇 초 전 등록된 기사가 딱 새로 떴다.

<2013 KBC 연기대상 대상 오용호, 3 관왕 석권!>


“오용호 씨가 받았대.”

“아, 정말요? 하긴, 그럴 것 같긴 했어요. 이번에 거기 사극도 엄청 흥행했잖아요.”

나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픽 웃었다.

‘얘는 진짜 행동이 빤히 보인다니까.’

오용호는 올해 50 부작 사극 드라마에 출연했다. 그가 맡은 주인공 역은 칼을 쓰는 검객이었다.

왜 그가 굳이 사극에, 그런 역을 택했는지는 뻔했다.

아마 오용호는 나를 따라서 그 드라마에 출연을 결정했을 것이었다.

딱히 도끼병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고, 이건 그냥 타당한 추측이었다.

오용호는 레미제라블 공연이 끝난 후 내가 무슨 작품에 들어갈지 귀찮게 물어댔다. 물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왕‧자>에 출연 확정했다는 기사가 떴다.

그러자 오용호의 연락은 뚝 끊겼는데, 며칠 뒤 갑자기 오용호가 KBC 쪽 사극에 들어갔다는 기사가 떴었다.

그러니 내가 당연히 그가 날 따라 사극에 도전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2013 년 상반기에 우리 드라마가 흥행했다면, 하반기에는 그가 나온 드라마가 흥행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 드라마는 로맨스 위주의 퓨전 사극이었고, 그가 출연한 드라마는 정통 사극에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웃긴 놈이었다.
‘자기는 대상 받아놓고선.’

그런 그가 우수상 받은 나를 향해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고 있다는 게 조금 웃기다고 해야 할까.

물론 나도 처음에 제안 받은 자리는 남주 역이긴 했고, 내가 내 발로 그 자리를 걷어찬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궁금하긴 했다.

왜 많고 많은 배우들 중 그는 굳이 내게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걸까?

김철수였을 때야, 내가 그의 선배였고 롤 모델이었다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일단 겉으로 보기엔 내가
그보다 10 살 가까이 어리지 않은가.

보통 후배가 치고 올라온다고 하면 질투를 느끼지 라이벌 의식을 느끼지는 않을 것 같은데.

편견이 없는 건지, 아니면 촉이 좋은 건지.

그래도 이상하게 밉지 않은 놈이었다. 귀찮긴 해도, 가끔은 내 뒤를 졸졸 좇아오는 어린애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때, 내가 자기 생각하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귀신 같이 오용호에게서 문자가 왔다.

[기사 봤는데. 상 받은 거 축하해요. 근데 이제 슬슬 작품 들어갈 때가 된 것 같은데. 뭐 없어요?]

하여간 귀여워할 틈을 안 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틀린 말은 아니지. 이제 슬슬 새 작품을 구할 때가 됐고.’


드라마 <왕‧자>가 종방한 후 나는 반년 가까이 쉬었다.

그 사이에 <뉴 월드> CF 도 찍었으니까 완전히 쉬었다고 하기는 뭣하지만, 그래도 작품에 오래 들어가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다고나 할까.

안 그래도 막 좀이 쑤시던 참이다.

돌아가는 길에 뭐 들어온 거 없는지 매니저한테 운이라도 띄워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막 시상식을 나오던 때였다.

“고운 씨? 고운 씨!”

뒤에서 누군가 날 불렀다.

“······?”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깜짝 놀랐다.

거기엔 왕중왕 PD 가 있었다.

이름이 특이한 탓에 한 번 들으면 잊기 힘든 것으로도 유명한 왕 PD 는 MBS 드라마국의 터줏대감 피디였다. 나


역시 옛날에 그와 작품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재빨리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왕 PD 님.”

“어머, 자기 나 아는구나.”

왕 PD 는 깜짝 놀란 듯 비음에 가까운 콧소리를 냈다.


나는 살짝 웃었다.

‘여전하시구나.’

왕 PD 는 이름뿐 아니라, 소녀 감성으로도 유명하다.

처음에 그를 만난 사람들은 보통 왕 PD 의 간드러진 콧소리를 어색해하는데,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오히려 안


들으면 섭섭할 정도가 된다.

“네, 그럼요. 히트작 제조기이시잖아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왕 PD 는 본인 자체의 개성도 강했지만, 사실 가장 유명한 건 그의 실력이었다.

그는 경력이 30 년 다 되어 가는데 필모그래피 중 단 한 번도 실패한 드라마가 없었다.

아무리 잘 나가는 작가나 감독이라 해도 한두 개 정도는 망한 작품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왕 PD 의 작품 중 비교적 흥행하지 못한 드라마라도 시청률이 기본적으로 15% 이상이었다.

30 년이란 그 긴 시간 동안 작품을 찍으면서 15% 그 아래로 떨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니, 그건 그야말로


전설이라고 할 수밖에 할 수 없었다.

내 말에 왕 PD 는 까르르 웃더니 손을 저었다.

“아유, 히트작 제조기는 무슨. 부끄럽다. 운이 좋은 거지. 드라마를 나 혼자 만드나. 배우님이랑 작가님이랑 다
같이 만드는 거지. 자기도 참, 사회생활 잘하는구나?”

왕 PD 가 ‘그보다’하면서 눈을 반짝 빛냈다.
“고운 씨 잠깐 시간 돼?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그럼요. 물론입니다.”

시상식 끝난 후 우리 <왕‧자>팀은 회식을 갖기로 했는데, 나는 감독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깐 빠져나왔다.

왕 PD 와 나는 로비 테이블에 앉았다.

그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혹시 자기, 지금 정해진 차기작 있나?”

“아뇨, 없습니다.”

“아, 다행이다. 아니, 내가 사실 며칠 뒤에 자기한테 내가 연락하려 했거든. 작품 하나 같이 하고 싶은데, 생각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지. 근데 오늘 여기 잠깐 들렀다가 고운 씨 있는 거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냅다 잡아버렸네,
호호. 원래 이런 건 소속사 통해서 해야 하는 건데, 그지? 내가 좀 성격이 급해서 이렇게 됐네. 당황했다면
미안.”

“아닙니다. 저야말로 불러주셔서 영광이죠. 저도 감독님과 꼭 한 번 작품 같이 하고 싶었거든요.”

사실 나는 작가나 감독의 이름값이 유명하다고 해도, 시나리오를 직접 보고 차기작을 결정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왕 PD 와 한 번 찍었던 이전의 내 경험을 믿었고, 더 나아가 그의 눈을 믿었다.

아무리 연출력이 좋다고 한들, 어떻게 매번 히트작을 찍겠는가. 기본적으로 극본의 힘이 좋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의 필모 중에 실패작이 없단 건, 그만큼 왕 PD 가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좋다는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서 왕 PD 가 말해준 시놉시스는 흥미로웠다.


“간단하게 말하면, 스무 살 차이가 나는 연하남과 연상녀의 사랑 이야기야. 남주는 여주를 짝사랑 하는데,
문제는 부끄러워서 고백을 못해요. 근데 그렇게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던 남주 몸에 어느 날 서른 살 아저씨
영혼이 빙의되는 거야. 남주가 확 바뀌어선 아주 저돌적으로 여주한테 들이대는데, 문제는 이 아저씨도 연애를
책으로만 배운 거지. 그래서 웃긴 해프닝들도 많이 일어나고. 일종의 19 금 로맨틱 코메디랄까? 어때, 흥미롭지
않아?”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미있네요.”

내용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뭣보다 그 드라마 내용이 내 상황과 비슷하다는 것이 가장 흥미로웠다.

나 역시 엄밀히 말하면 김철수인데 백고운 몸에 빙의된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왕 PD 가 박수를 짝짝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괜찮다니 다행이다. 내가 이 기획 딱 보자마자 자기가 생각났지 뭐야. 고운 씨도 베이비 페이스인데 몸은 또


좋잖아. 퓨어와 와일드가 동시에 공존한다고 해야 할까. 그게 딱 나한테 필이 왔거든.”

왕 PD 는 가늠하는 눈치로 나를 휘휘 손짓하더니,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눈빛이 몽롱하게 변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당황했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는 가끔 이렇게 자신만의 생각에 빠지면 대화 도중에도 잠시 다른 세계에 다녀오곤 했다.

왕 PD 는 오래지 않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이쿠, 또 이러네. 나는 참 이게 문제라니까. 미안미안. 아무튼, 나는 고운 씨가 남자 주인공을 맡아줬으면


좋겠거든. 시놉시스는 다음 주 중으로 보내줄게. 그러면 나, 긍정적으로 생각해주겠다는 걸로 받아들일게?”
꽤 갑작스럽게 일이 진행되긴 했지만, 사실 이만큼 좋은 기회가 또 없었다.

유명한 만큼, 왕 PD 는 같이 일하고 싶다고 같이 일할 수 있는 그런 감독이 아니었다.

다른 배우들이 제발 출연시켜달라고 사정해도, 그는 자신의 필에 맞지 않으면 단호하게 거절하곤 했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 남자 주인공 역으로 출연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뭣보다, 남자 주인공 역이 확 끌렸다. 1 인 2 역은 배우라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역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와 비슷한 ‘빙의자’ 주인공이라는 게, 어쩐지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역 같기도 했고.

나는 싱긋 웃었다.

“저도 딱 그게 제 배역 같다는 필이 오네요.”

내 사정을 모르는 왕 PD 는 그저 ‘어머, 자기 당차서 마음에 든다’하며 또 한 번 까르르 웃을 뿐이었지만.

2014 년 새해가 밝았다.

왕 PD 는 약속한 대로 시놉시스와 1 화 대본을 보내줬다. 나는 그것을 모두 다 읽고 확신했다.


이 작품은 될 것 같다.

역시나 왕 PD 는 작품에 대한 감각이 정말 좋았다. 그는 배우를 실망시키지 않는 감독이었다.

더 미룰 이유도 없었기에, 나 역시 출연을 결정했다는 확답을 주었다.

아직 기획 단계라 나 외엔 출연 확정한 다른 배우들은 없었지만, 차차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왕 PD 가 나를 요리 아카데미로 불렀다.

그는 일전에 내게 지나가듯 말한 적 있었다.

―고운 씨 근데, 우리 드라마가 요리 업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거라 요리하는 씬이 많이 들어가거든. 요리를 좀


배워야 할지도 모르는데.

물론 나는 당연히 괜찮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오늘 내 실력을 간단히 볼 겸 요리 아카데미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도착한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자, 30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우리를 반겼다.

훤칠한 키, 잘생긴 외모의 미남자였다.

주방장 모자를 쓰지 않았더라면 가수나 배우 쪽의 연예인인가 착각했을 법했다.

그가 우리를 보며 나긋하게 반겼다.

“어서 오세요.”
1 만 시간의 법칙
66.

남자가 왕 PD 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PD 님.”

“시우 씨도 오랜만. 어쩜 자기는 매번 날이 갈수록 더 섹시해져?”

둘은 이미 아는 사이인 듯,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왕 PD 는 이어서 그를 내게 소개시켜주었다.

“고운 씨. 인사해, 이쪽은 곽시우 씨. 요즘 제일 핫한 스타 요리사야.”

곽시우가 내게 가볍게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하세요, 곽시우입니다. 백고운 배우님이시죠?”

“아,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요리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와서 유명해진 스타 쉐프라고 한다.

어쨌거나 그 당시에 나는 그 요리 프로그램을 안 봤기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일단 첫인상은 좋았다.

그는 말투도 나긋나긋했고 표정도 온화했다.


그래서일까, 단순히 인사만 나눴을 뿐이지만 나는 막연히 그가 착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앞치마를 매고, 손을 씻은 후 조리대 앞에 섰다.

“그러면 한 번 간단하게 칼질하는 것부터 좀 볼까요?”

조리대 위엔 도마와 칼, 당근 하나가 있었다. 곽시우가 미리 준비해놓은 듯 했다.

“네, 알겠습니다. 이걸 썰면 되는 거죠?”

“맞아요. 얇게 썬 다음에 채썰기 해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칼을 잡았다.

낯선 듯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바로 직전에 했던 드라마 <왕‧자>에서도 검을 쓰는 역할을 맡았더랬다. 싸우기 위한 검과 요리하기


위한 칼은 비슷하긴 해도 전혀 다르긴 했지만.

나는 잠깐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한 뒤, 본격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통, 통, 통―.

속도가 그렇게 빠르진 않아도, 제법 정석적이고 반듯하게 채를 썰었다.

왕 PD 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조금 경박하게 호들갑을 떨었다.

“와, 고운 씨 소매 그렇게 걷어 올리고 칼질하니까 팔에 핏줄 올라온다. 엄청 섹시한데?”


그러면서 그는 다시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는데, 아마 상상 속에서 내 모습을 카메라로 이리저리 찍어보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멋지게 그림을 뽑아낼 수 있을까 시도 때도 없이 고심하는 게 그의 습관이었다.

한편 왕 PD 가 연출가의 시선으로 날 보고 있는 반면, 요리사인 곽시우는 오직 내 요리 실력에만 집중했다.

곽시우는 내가 당근을 채 써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리고 내가 다 했다는 의미로 곽시우를 바라봤을 때, 그가 빙긋 웃었다.

오, 괜찮았나?

그러나 이어진 곽시우의 말은 냉정했다.

“연습이 좀 더 필요하시겠는데요?”

시종 미소 띤 얼굴이기에 다정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단호한 타입인 모양이었다.

그는 조목조목 뭐가 문제인지 알려주었다.

“채 썬 거 보시면 간격이 일정하지 않아요. 그리고 속도도 더 빨라야 하고요. 팔을 이용하니까 속도가 느린 건데,
기본적으로 팔이 아니라 손목을 이용한다는 생각으로 해야 해요.”

이어서 그는 직접 채썰기 시범을 보여주었다. 나는 유의 깊게 지켜봤다.

그는 확실히 나와 근본적으로 모양새가 달랐다.

내가 채썰기를 할 땐 소리가 ‘통, 통, 통’에 가까웠는데, 그는 ‘토도도도도도도토동’에 가까웠다.


“이렇게 해야 돼요.”

“저, 다시 한번 해봐도 될까요?”

나는 그의 폼을 똑같이 따라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번 채썰기를 시도해봤다. 손목 스냅과 빠르기를 염두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빠르기에만 집중하니 어떻게든 비슷한 속도는 낼 수는 있었는데, 문제는 결과물이 이전보다 훨씬 처참했다.

손이 베일 듯 아슬아슬한 게, 위험하기도 했고.

“쉽게 안 되죠? 그게 손에 익어야만 나오는 거라서 그래요. <달인> 프로그램 보신 적 있나요? 거기 보면 기계


같은 달인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그게 다 몇 십 년씩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손에 익어서 그런 거예요.”

곽시우는 결론적으로 말했다.

“제 생각에, 드라마에 나올 요리는 배우시되 손 같은 장면은 따로 인서트 컷을 따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러자 왕 PD 가 아쉬운 듯 쩝 소리를 냈다.

“그럴 수밖에 없나? 좀 아깝긴 한데······.”

잠시 고민하던 왕 PD 가 불쑥 물었다.

“아니면 우리 시우 씨가 좀 가르쳐주면 안 되나?”

“제가요?”

“응. 자기 아카데미 운영하잖아. 거기 수강생으로 받아준다고 생각하면 되지.”


그가 처음으로 곤란한 듯 웃었다.

“글쎄요······. 저는 괜찮은데, 고운 씨가 안 괜찮을 걸요. 제가 좀 빡세게 가르치는 편이라.”

그때, 내가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요리는 배우려고 했다.

나는 작품에서 1 인 2 역을 하게 되는데, 원래 주인공인 남주, 그리고 그 남주에게 빙의되는 귀신, 이렇게 둘이다.

남주는 요리사 지망생인 학생이고, 그 남주에게 빙의되는 귀신은 잘 나가는 쉐프(였)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랄까.

그러니 남주 역할을 연기할 때는 조금 서툴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 쉐프 귀신에게 빙의된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요리사처럼 연기해야 했다.

“저도 빡센 거 좋아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프로 요리사를 연기 하는데 아마추어처럼 연습해서 되겠는가.

실제 요리사가 될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모방해서 연기하는 것이 내 직업이고, 연기에 한해서는 나 역시 대충할


생각이 없다.

내 말에 곽시우가 잠시 생각하는 눈치로 눈을 굴렸다.

곧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그렇게 하죠. 준비가 되면 연락 주세요. 편하실 때 이곳으로 오면 됩니다. 평일에는 아카데미 수업이
열리니까요.”

왕 PD 와 내 얼굴이 밝아졌다. 나는 감사를 표했다.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어우, 고마워 자기. 내가 나중에 한 턱 쏠게.”

“뭘요. 저도 PD 님한테 신세진 게 있으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하는 수업, 한 명 더 와서 듣는다고 힘든 것도


아니고요.”

그는 너르게 웃었다.

나는 생각했다.

‘역시 착한 분이신 것 같다.’

그런데 그때, 곽시우가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참, 물론 고운 씨가 힘드시다면 언제든 그만두셔도 괜찮습니다. 절대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요.”

“네, 그럼요.”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게 의례적인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일종의 복선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바로 일주일 뒤의 일이었다.


*

“······이게 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뒷말을 흐렸다.

오늘은 곽시우에게서 요리를 배우기 위해 아카데미에 온 첫날이었다.

며칠 전 연락했을 때 그는 시간을 말해주면서 이렇게 언질 했다.

―수업 시간 보다 두 시간 정도 일찍 오세요. 수업 전에 미리 준비할 게 있어서요. 워밍업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나는 그래서 그의 말대로 충실히 두 시간 일찍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했는데 곽시우는 없었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사람 자체가 없었다.

썰렁한 그곳에서 나를 반기는 건 수강생으로 보이는 수더분한 한 학생뿐이었다.

그는 곽시우에게 연락을 받았다며, 준비할 내용은 자신이 안내해줄 거라고 했다. 나는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본 것들은―

수많은 요리재료들이었다.

당근과 감자, 양파, 파 등등······.

아예 포대 째로 놓여 있는 그것들은 어림잡아도 다 합쳐서 1000 개는 훌쩍 넘을 것 같아 보였다.


마트에서 장 볼 때를 제외한다면, 군대에서 취사병으로 차출되었을 때 딱 한 번 이렇게 많은 식재료를 봤던 것
같다.

무슨 말이냐면, 한 소대를 먹일 수 있을 만큼의 양처럼 많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본 순간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딱 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저 많은 양을 수업에 다 쓸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곽시우는 연락줄 때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워밍업’하기 위해 일찍 오라고.

그래서 나는 ‘이게 다······?’라고 말을 흐리며 학생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학생은 내가 생각한 그대로를 말했다.

“수업 시작 전까지 이것들을 다 써시면 돼요.”

“다요?”

“네, 다요.”

내 당황을 충분히 이해한단 듯 학생 역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칼질은 기본이라서 요리 전에 떼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수업 전까지 다 못하면 수업 때도 계속 썰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만약 그때까지도 다 못하면, 남아서 오늘 안에라도 다 하고 가야 한다 그러셨어요. 그리고 만약
배우님이 뭐라 하시면, 기본에는 왕도가 없다고도 말씀드리랬어요.”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나 곧 수긍했다.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왜, 옛날 무협 소설에도 그런 얘기들이 왕왕 나오지 않은가.

하루에 천 번씩 만 번씩 베기, 찌르기를 무식하게 하다보면, 다른 수련을 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고수가 된다는


이야기 말이다.

실제로 1 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이 있기도 하고.

처음엔 이 많은 걸 두 시간 안에 다 썰라는 얘기에 당혹스러웠지만, 이것을 일종의 기본 수련이라고 생각하니


완전히 말이 안 되는 얘기는 아니었다.

곽시우가 내게 억하심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날 엿 먹이기 위해서 이런 일을 시킬 리 없잖은가. 이 많은


재료들을 구하는 것도 다 돈인데 말이다.

다만 일전에 곽시우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오르긴 했다.

―힘드시다면 언제든 그만두셔도 괜찮습니다. 절대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요.

아마 내가 못하고 금방 포기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간과한 게 하나 있다.

바로 독한 걸로 따지면 나도 어디 가서 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3 분짜리 게임 CF 를 찍기 위해 한 달 내내 귀에서 환청이 들릴 정도로 메트로놈을 듣고 다닌 게 바로 나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할게요.”

나는 곧바로 팔을 걷어붙였다.
그 상태에서 비장히, 그리고 의욕적으로 물었다.

“뭐부터 썰면 될까요?”

백고운이 묵묵히 식재료를 썬 지 1 시간 남짓 지났을 때.

수강생 정성해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사실 곽시우는 요리사 지망생 사이에서 엄청 무서운 쉐프로 유명했다.

최근 들어 방송에 나와서 훈남 쉐프로 대중에게 알려진 거지, 본 성격은 훈훈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많은 지망생이 그의 아카데미에 수업 들으러 오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이 못 버티고 나가떨어진다.

곽시우는 처음 들어온 사람들에게 지금 백고운이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노가다를 ‘기본이 되어야 한다’라는


이유로 일이 년 내내 계속 시키는데, 보통 여기서 많이들 포기한다.

그러면 고집을 좀 꺾을 만도 하건만, 그는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듯 내 주방에 왔으면 내 말을 따라야
하지 않겠냐’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좋게 말하면 직업의식이 강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융통성 없이 깐깐하다고나 할까.

그래서 정성해는 지금 여러 모로 많이 놀란 참이었다.

배우라고 차별을 두지 않는 곽시우도 대단했지만, 이 수많은 업무량에 질리지 않고 묵묵히 따르는 백고운도
대단했다.
사실 정성해는 백고운이 금방 도망 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그는 한 시간 동안 노가다를 하면서도 정성해에게 도움을 구하기는커녕 싫은 소리 한 번을 안 했다.


1 시간 째 계속 서서 재료만 썰고 있으니 분명 팔도 아프고 다리도 저리고 할 텐데 말이다.

조금 안쓰러워진 정성해가 물었다.

“저, 좀 도와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제 숙제니까요.”

“그래도······. 오늘 안에 다 못 하실 수도 있어요. 저도 처음에 할 땐 그랬거든요. 정말 혼자서 하시다간


새벽에나 다 끝날지도 몰라요.”

“괜찮아요. 그럼 그때까지 하고 가죠, 뭐.”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백고운은 빙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

보아하니 그는 정말로 여기 있는 걸 다 썰 모양인가 보다.

대충 하다가 중간에 가도 사실 상관은 없을 텐데. 나머지는 내일 미뤄서 또 해도 되고.

곽시우가 오늘 안에 하라고 가라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융통성은 있을 것이다. 백고운이 진짜 요리사
지망생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기세를 보아하니 백고운은 정말 곧이곧대로 오늘 안에 다 하고 갈 것 같았다.

정성해는 그런 백고운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어째, 쉐프님이랑 비슷한 과(科)이신가 보네.’


이런 사람이 세상에 곽시우 말고 또 있었다니.

백고운은 이미 유명한 배우지 않은가. 좀 대충대충 살아도 사는 데 문제 없을 것 같은데.

그런 그조차도 이렇게 열심히 한다는 게 뭐랄까.

대단하기도 하고, 좀 의외이기도 하고.

아무튼,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연기계가 재자 하나를 얻은 거죠
67.

놀란 것은 비단 정성해뿐이 아니었다.

아카데미에 도착한 곽시우 역시 백고운을 보고 살짝 놀랐다.

‘진짜로 하고 있네?’

아니, 물론 하라고 시킨 일이긴 했다.

그러나 솔직히, 투정 정도는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백고운은 곽시우가 도착했을 때도 ‘오셨느냐’라는 가벼운 인사를 건넸을 뿐, ‘정말로 이걸 다 해야


하느냐’ 따위의 불평불만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할당량을 다 채우기 위해 다시 묵묵히 채썰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양을 보니 정말로 두 시간 내내 꼬박 썬 것 같은데.’

결과물의 양만 딱 봐도 그 사람이 농땡이를 부리면서 했는지, 아니면 쉴 틈 없이 일만 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백고운의 경우 후자인 것 같았다.

사실 곽시우는 ‘오늘 안에 다 해야 한다’고 정성해를 통해 전달하긴 했지만, 그건 그만큼 부지런히 하란 말의


과장된 표현이었지 문자 그대로의 뜻은 아니었다.

백고운이 투덜거리면 짐짓 엄한 표정을 짓긴 해도 결국엔 편의를 봐줄 생각이었다. 그가 진짜 곽시우의 제자인


것도 아니니 말이다.

물론 그러면 처음부터 살살하지 왜 그렇게 일을 많이 시키느냐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곽시우는 시작하기 전에 분명 말했었다.

자신은 빡세게 가르칠 것이고, 힘들면 언제든 그만둬도 괜찮다고.

세상에 요리사는 많고, 아카데미가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 아래에서 배운다고 해도 그렇게 크게


차이가 있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자신 아래에서 배우겠다고 온다면, 그 정도 각오와 성의 정도는 보여야 곽시우로서도 가르칠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들 사이에 돈이 오간 것도 아니고, 그저 곽시우가 성의로 백고운을 도와주기로 한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칼질 같은 경우는 가르칠 방법이 따로 없기도 했다. 그건 그저 많이 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런 건 가르친다고 되는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몇 번이고 훈련을 통해 몸에 익혀야 하는 기술의 영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백고운이 먼저 투정을 부리지 않았기에 곽시우도 그가 계속 칼질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곽시우는 다른 수강생들을 향해 말했다.

“자, 그러면 시작합시다.”

그가 다른 수강생들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동안, 백고운은 구석에서 계속 채를 썰었다.

백고운은 앞에서 곽시우가 강의를 하든 말든 상관없단 태도로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그리고 곽시우 역시 백고운이 한 구석에서 채를 썰고 있든 말든 그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계속 강의를 진행 했다.

그러자 괜히 다른 수강생들이 흘금 둘의 눈치를 봤다.

아마 둘이 신경전이라도 벌이고 있는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백고운은 자기 일에 집중한 나머지 아예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였을 뿐이었고, 곽시우는 그런 그를 배려해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는 것뿐이었다.

두 시간 정도의 수업이 다 끝났을 때, 백고운이 썰어야 하는 식재료는 이제 막 반 정도 줄어 있는 상태였다.

다른 수강생들이 모두 떠난 후, 곽시우는 자리를 정리하면서 그제야 말을 걸었다.

“고운 씨. 하는 데까지 하고 가도 돼요. 나머지는 내일 해도 되니까요.”


이만하면 백고운의 성의는 충분히 확인했다. 그러니 첫날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단 말이었다. 애초에 비전공자가
하루 만에 할 수 있는 양도 아니었고.

백고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선히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그는 조금 더 하다 갈 모양인지 주변을 정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곽시우는 ‘그러면 갈 때 편하게 문 닫고 나가요’하고 말한 뒤, 먼저 퇴근했다.

그리고 다음날.

곽시우는 평소와 같이 새벽에 일어나 잠깐 아카데미로 향했다.

새벽시장을 가기 전 백고운이 얼마큼 일을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일의 진척량에 따라서 장을 봐야 할


식재료의 양이 또 달라지니까.

일단 밖에서 봤을 때 건물의 불은 꺼져 있었다.

‘일찍 갔나 보네.’

곽시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다른 수강생들도 같은 일을 받았을 때 거의 새벽에나 다 되어서 퇴근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꾸역꾸역 그 식재료를 다 썰고 갔을 경우를 말하는 거였다.

그러니 불이 꺼져 있는 건물을 봤을 때, 백고운이 하다 중간에 갔을 거라고 추측한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갔을 때.

곽시우가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가지런히 놓여있는 수많은 통이었다. 잘게 썰린 채들이 통에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그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켰다.

그걸 정말로 다 하고 갈 줄은 몰랐는데. 이거, 좀 의외였다.

게다가 더 놀라운 점은, 그 와중에 주변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단 것이었다.

원래의 빈 박스와 포대자루는 차곡차곡 접혀 근처에 놓여 있었고, 칼과 도마는 깨끗이 설거지 되어 있었다.

심지어 껍질과 같은 음식물 쓰레기도 싹 갖다 버렸는지, 주변에 떨어진 껍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덜 마른


행주가 싱크대 위에 널려 있는 걸 보니, 조리대도 한 번 싹 닦고 간 모양이었다.

꽉꽉 채워져 있는 통을 제외한다면 백고운이 왔다 간 티도 나지 않았다.

저 많은 걸 다 썬다고 어지간히 힘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이런 걸 신경 썼다는 게 예의 바르다고 해야 할지


섬세하다고 해야 할지.

한 번 하기로 한 것은 기어이 해내고야 마는 백고운의 의지도 마음에 들었지만, 백고운이란 사람 자체도 마음에
쏙 들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는 흔한 문구도 있잖은가.

원래 작은 행동, 사소한 말 같은 것에서 그 사람의 진짜 성격이 보이는 것이다.


―저도 빡센 거 좋아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그게 흔한 허세나 자신감인 줄로만 알았는데.

‘완전히 잘못 알았네.’

곽시우는 백고운이란 사람에 대해서 다시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썩 기분 좋은 재평가였다.

나는 어제와 같은 시간에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어제 그렇게 열심히 썰어놓은 것이 무색하게도 식재료들은 어제와 똑같이 쌓여 있었다. 그 사이에 곽시우가 새로
갖다 놓은 모양이었다.

“응?”

그런데 어제와 달라진 것이 딱 한 개 있었는데, 그건 조리대 위에 놓인 파스였다.

파스 위에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팔이랑 어깨 아플 것 같아서요. 붙이고 하세요.]

보아 하니 곽시우가 갖다 놓은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팔이랑 어깨에 살짝 근육통이 느껴지고 있던 차였다.


이런 걸 신경 쓰고 챙겨 주다니, 고마웠다.

그래, 고맙긴 한데······ 어째 고양이가 쥐 신경 쓰는 꼴 같긴 했다. 근육통이 생긴 게 누구 탓인데.

뭐, 엄밀하게 말하면 곽시우는 쉬엄쉬엄 해도 된다고 한 걸 내가 오기로 끝까지 하고 간 것이니까 내 탓이긴


했지만.

나는 픽 웃은 후 파스를 뜯어서 어깨와 팔에 착착 붙였다. 그리고 어제처럼 똑같이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한 달 간 꾸준히 곽시우의 아카데미에 나가면서 꾸준히 썰고, 베고, 자르고를 반복했다.

처음엔 속도가 영 안 늘어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더 하고 가야 했다.

그러나 점차 그 시간은 점차로 짧아지더니, 나중엔 수업이 끝날 때쯤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출 수는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하지만 그나마 속도가 빨라졌다 뿐이지, 내 칼솜씨는 여전히 ‘통, 통, 통’에 멈춰 있었다. 곽시우나 다른
수강생들처럼 ‘토도도도동’하고 빠르게 써는 건 여전히 불가능했다.

그런데 평소와 같은 어느 날이었다.

그때 나는 여느 때처럼 단순한 채썰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스위치가 딱 켜진 것처럼 어떤 전조도 없이 손의 움직임이 확 달라졌다.

이전에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자르는 느낌이라면, 손놀림에 달라진 후에는 눈으로 인식하기 전에 손이 먼저
나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일전에 곽시우는 임계점을 넘으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게 될 거라고 말한 적 있었는데, 그게 정말이었구나
실감했다.

‘진짜 신기하네.’

그리고 내 칼질이 변한 것을 발견한 곽시우는 더 이상 노가다를 시키지 않았다. 대신 수업을 듣게 했다.

그때부터 나는 다른 수강생들과 함께 정상적으로 요리를 배울 수 있게 됐다.

물론 요리는 칼질보다 훨씬 어려웠다. 칼질은 단순한 노동이라면, 요리는 신경 써야 할 것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나는 진짜 요리사가 될 것도 아니고, 방송에서도 요리하는 컷만 부분부분 딸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레시피를 외워 요리를 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역설적으로 기본을 떼자 훨씬 편해졌다.

수업을 들을 때도 내가 신경 쓰는 건 음식의 맛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폼과 자세였다.

가끔은 그런 것들을 눈여겨보다가 수업의 내용을 놓치는 일도 허다했다.

그럴 땐 대충 수습했는데, 의외로 결과물은 꽤 나쁘지 않았다.

나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수강생인 정성해는 내가 재능이 있어서라고 했다.

그 말이 인사치레라고 생각해 웃어 넘겼는데, 하루는 곽시우가 진짜로 이렇게 물어왔다.

“혹시 직업 전향할 생각 없어요?”

“네?”
“보니까 가끔 감으로 때려잡는 일이 몇 번 있던데. 아녜요?”

이런, 들켰다. 눈썰미 정말 좋네.

나는 어색하게 웃었는데, 곽시우는 드물게 칭찬을 했다.

“근데 그런데도 나쁘지 않게 맛이 나오더라고요. 감이 좋은 거, 그것도 타고난 거거든요. 진짜 진지하게 배우면


잘 할 것 같은데.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고.”

“아···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지금 일을 좋아해서요.”

완곡하게 거절하자 곽시우는 그럴 줄 알았단 듯 웃으면서도 약간 미련이 남는지 덧붙였다.

“요리계가 재자(才子) 하나를 잃었네요.”

잠시 생각하던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연기계가 재자 하나를 얻은 거죠.”

내 당찬 대답에 곽시우가 픽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게 더 맞는 말이긴 하네요.”

그렇게 내가 연기 연습을 위해 요리를 배우고 있는 동안, 왕 PD 는 본격적으로 다른 배우들의 캐스팅을 물색하고


있었다.

구정이 지날 때쯤, 유명한 주조연 배우들이 우리 드라마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가 속속히 뜨기 시작했다.
다만 아직 여주인공 자리만 공석이었는데, 왕 PD 는 생각해둔 사람이 있다면서 이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우리 작품 해달라고 꼬시고 있는 중인데, 사정이 좀 있어서 말이야. 설득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리네. 그래도
거의 넘어오고 있으니까 자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 기대나 하고 있으라구. 내가 누굴 섭외했는지 알게
되면 진짜 깜짝 놀랄 테니까, 호홍.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내게 기어코 말해주지 않았다. 깜짝 놀래주고 싶다나 뭐라나.

그러니 나로선 왕 PD 가 어련히 잘 캐스팅 하겠거니 믿고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한편 차기작이 그렇게 구체화되고 있는 동안, 내가 찍기로 한 <뉴 월드>의 두 번째 CF 촬영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고운 씨!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촬영장에 도착하자 황미나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는데, 저번 첫 번째 촬영보다 훨씬 텐션도 높고 표정도 밝았다.

아마 그녀가 책임지고 기획한 프로젝트가 성공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그동안 우리 CF 반응이 꽤 좋았으니까
말이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뒤,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이번에도 준비는 잘 하고 오셨어요?”

이번 CF 내용은 첫 번째 때와 비슷한 포맷이긴 했으나, 약간 업그레이드 된 내용이 있었다.

이 주 전쯤, 황미나는 스토리보드를 전해오며 이런 내용이니 추가적으로 이러이러한 연기를 준비해달라고 특별히
부탁해왔었다.
그리고 나는 지난 시간 동안 요리 연습을 하면서도 틈틈이 그 연기를 준비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열심히 연습하고 왔습니다.”

황미나는 믿는다는 투로 웃었다.

“그래요. 그럼 오늘도 잘 부탁해요.”

잠시 스탠바이 시간 뒤, 나는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리고 촬영이 시작됐다.

캐리커쳐
68.

첫 번째 CF 의 컨셉은 내가 게임 속에 떨어져서 그 세계를 탐험한다는 스토리였다.

말하자면, 그때의 난 튜토리얼을 막 밟고 있는 뉴비(*게임 커뮤니티에서 초보자를 일컫는 단어)였다.

반면 이번에 찍는 두 번째 CF 에서 나는 전직을 마친 용사였다.

<뉴 월드> 게임은 일정 레벨 이상이 되면 ‘전직’이라고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데, 그 직업은 매우 다양했다.

전사, 궁수, 마법사, 치료사 등등······.


그 직업 중 하나를 선택하고 나면 어엿한 한 용사가 되어 본격적으로 세상을 구하러 갈 수 있다는 게 게임의 기본
설정이었다.

이번에 찍을 CF 의 컨셉은 바로 그 용사가 된 후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황미나는 일전에 내게 이렇게 부탁했었다.

―직업마다 게임 캐릭터의 모션이 다르거든요. 그걸 연기해주셨으면 해요.

그녀의 부탁대로, 그동안 나는 직접 게임을 해보면서 그 모션을 연습했었다.

사실 각 직업마다 모션에 특징이 있어서 연기하기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면 먼저 전사부터 갈게요.”

촬영 감독님의 말에 나는 다리를 어깨 너비 정도 벌리고 선 뒤 무릎을 살짝 굽혔다.

내가 근육질의 오크라도 된 것처럼 목을 앞으로 살짝 뺀 뒤 등을 뒤로 동그랗게 말았다.

그리고 소품인 가짜 검을 한 손에 쥐고 양 쪽으로 몸을 크게 흔들거렸다. 숨을 크게 몰아쉬면서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 말이다.

“좋아요, 다음은 궁수 갈게요.”

소품이 활로 교체되었다.

나는 허리를 쫙 폈다. 자세는 꼿꼿이 한 뒤 활을 아래로 내려잡았다.

반대쪽 손으로 화살을 걸었지만 아직 쏘지는 않고, 다만 금방이라도 활을 치켜들고 쏠 듯한 자세로, 나는 차분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양 옆으로 흔들거리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작은 동작으로만 움직였다.

그런 식으로 나는 여러 직업의 모션을 계속 바꿔가면서 연기했다.

마법사의 경우 커다란 지팡이 같은 스태프를 들고 허공에 마법진 같은 걸 그리는 시늉을 했고, 암살자의 경우
짧은 단도류를 들고 날렵한 포즈를 취했다.

<뉴 월드>에서 직업은 대략 스무 개가 넘었다. 물론 3 분짜리 CF 에 그걸 다 보여줄 순 없으니 그걸 다 하는 건


아니었고, 특징적인 직업을 약 다섯 개에서 일곱 개 정도를 뽑아서 연기했다.

각 직업의 대기 자세를 찍은 후에는 저번 첫 번째 촬영 때처럼 골목을 이동하는 모습을 찍었다.

모든 건 저번과 거의 똑같았지만, 이번에는 가상의 몬스터와 싸우는 장면이 추가됐다.

각 직업군마다 ‘공격 모션’을 연기해야 했는데, 그것 역시 다 달랐다. 까다롭긴 했지만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촬영을 마치자 황미나가 다가왔다.

“오늘도 너무 좋았어요. 진짜 고운 씨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 했다니까요. 고운 씨가 우리 MVP 에요, MVP.”

“뭘요, 다 기획이 좋은 덕이죠. 저는 연기만 한 것뿐인데요.”

“말도 고운 것 봐. 제가 이래서 고운 씨 좋아한다니까.”

그녀가 씩 웃더니 은근슬쩍 말했다.

“실은 위에서도 반응이 좋아서요. 이렇게 잘 될 줄 몰랐나 봐요. 일단 찔러보고는 있는데, 혹시 전속 생각


있어요?”
전속 계약이라면 개런티가 훅 뛴다.

나는 속으로는 깜짝 놀랐지만, 금방 정신 차리고 자본주의 미소를 지었다.

“어유, 불러만 주신다면 저야 언제나 영광이죠.”

나는 천연덕스럽게 격의 차리는 시늉을 했고, 황미나는 깔깔 웃었다.

자본주의 앞에서 너무 굽실거리는 게 아니냐고?

내가 특별히 돈을 좇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굴러오는 돈까지 일부러 찰 필요는 없지 않은가? 돈이란 있으면
좋은 게 사실이니까.

나는 속으로만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연기 이외에는 특별히 관심이 없어서 꼭 필요한 행사(이를테면 제작발표회나 시상식 같은 것) 외에는 다른


스케줄을 별로 소화하지 않는 편이었다.

소속사 측에서도 그런 나를 배려해주고 있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화보 촬영 겸 인터뷰가 있었다.

인터뷰 요청을 한 곳은 <디 액터 the Actor>라는 잡지였는데, 국내에서 가장 이름 높은 매거진 중 하나였다.

여기는 특히 배우에게 호의적인 곳으로, 왜곡 없이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옮겨주는 것으로 배우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신뢰도가 높은 곳이라 나는 기꺼이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화보 촬영을 끝내고 자리에 앉자 인터뷰어인 박 기자가 인사했다.

그녀는 가벼운 스몰 토크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MBS 연기대상에서 상 받으신 거 봤습니다. 축하드려요.”

“아, 감사합니다. 좋은 작품을 잘 만난 덕분이죠.”

“드라마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가 정말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었죠. 저 역시 본방사수하면서 즐겁게


봤답니다. 그때 이후로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작년에 드라마 종방한 이후 CF 외에는 따로 근황을 알 길이
없었어요. SNS 도 따로 안 하시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나는 볼을 긁으며 말했다.

“별 건 아니고··· 제가 디지털에 약해서요. 아날로그 인간이거든요. 스마트 폰도 최근에야 바꿨어요.”

“어머, 정말요? 한창 디지털 기기에 관심이 많을 나이 같은데.”

“하하, 취향이 좀 올드한 편이라···. 안 그래도 애늙은이 같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냥 실제로 나이가 많은 것뿐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내 말에 박 기자가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이성한 씨와 인터뷰했을 때 얘기를 들은 적이 있네요. 처음 봤을 때 대뜸 아재개그를


하셨다고요.”

“아, 성한 씨가 그렇게 말했나요?”

“네. 그래서 첫인상이 별로였다고 농담처럼 말하시던데요. 물론 지금은 둘도 없는 친한 친구라고 하셨어요.”

나는 눈을 끔뻑이다가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이성한의 인터뷰를 따로 안 챙겨 봐서 그가 그렇게 말했는지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성한과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가 내게 까칠하게 굴긴 해도, 날 자기 바운더리에 넣어준 게


보였으니까.

근데 뒤에서는 둘도 없는 친한 친구라고 밝히고 다녔단 말이야?

나 참, 하여간 귀여운 놈이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멋쩍게 웃었다.

“맞아요. 사실 제가 썰렁 개그를 좋아해서요. 매니저 형이 맨날 저보고 부장님이라고 놀린다니까요. 성한 씨는


별로 안 좋아했지만요. 안 그래도 그때 이후로 자중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박 기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 고운 씨, 여기에 김 묻었는데요?”

그녀가 자기 볼을 툭툭 두드렸다.

내 볼? 여기? 나는 황급히 볼을 닦으려 했다.

그때 박 기자가 쿡쿡 웃었다.

“잘생김이 묻었네요.”
1 초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이해하고 빵 터졌다.

박 기자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썰렁 개그 좋아하거든요.”

“취향이 통했네요. 하하.”

우리는 그렇게 잠깐 웃었는데, 그러고 나니 분위기가 훨씬 편해졌다.

박 기자는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나는 내가 출연한 <운명의 표현>, <해수>, <레미제라블>, 그리고 최근의 드라마 <왕‧자>를 중심으로 주요
에피소드들을 이야기 했고, 박 기자는 간간히 리액션을 하면서 내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시간 순으로 훑고 올라오다보니 대화는 가장 최근에 찍었던 <뉴 월드> 광고까지 다다랐다.

박 기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또 광고 얘기를 안 할 수 없죠. <뉴 월드>의 광고로 또 많은 사랑 받으셨잖아요. 두 번째 CF 가 며칠 전에


공개 됐어요. 역시나 반응이 뜨겁던데. 혹시 보셨나요?”

“어, 아직 못 봤어요.”

“첫 번째 영상에서는 광고 형식이 신선하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근데 이번 두 번째 영상에서는 고운 씨 연기에


감탄했다는 반응이 더 많더라고요.”

박 기자는 커뮤니티에 올라온 댓글을 몇 개 읽어주었다.

[백고운 겜잘알인 듯... 진짜 게임 하는 사람 아니고서야 이렇게 똑같이 따라할 수 있을 리 없다...]

[ㅇㄱㄹㅇ 모션의 포인트들이 정확히 살아있음; 고인물인 듯]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연기 진짜 개잘하네]


박 기자가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이런 반응들이 많더라고요. 실제로 게임을 좋아하시나요?”

나는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실제로는 전혀 아니에요. 아까 말했듯이 제가 디지털에 약해서요. 광고 촬영 때문에 연구한다고 최근에 PC 방에


가보긴 했는데, 그걸 제외하면 옛날에 오락실에서 테트리스 같은 거 해본 게 아마 마지막일 거예요.”

박 기자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요? 의외네요. 저도 고운 씨가 게임을 좋아해서 그렇게 연기를 잘 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그러면 그냥


순수하게 보고 따라한 것뿐인가요?”

“음, 네. 그런 것 같아요.”

“다른 요령은 없었나요?”

“글쎄요······. 있다고 한다면, 주의 깊게 본 거, 그거 같아요.”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저는 배우에게 관찰력이 필수라고 생각해요. 배우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흉내 내는 직업이잖아요. 사람들을
오래 관찰하다보면, 모든 사람들에게 다 개성적인 특징이 있다는 게 보여요. 연기는 그 특징을 살리는 거라
생각해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좋은 비유가 있어 말했다.

“말하자면, 캐리커쳐 같은 거죠.”


박 기자가 ‘그렇군요’하고 감탄했다.

“······라고 말하며 백고운은 자신만의 연기 철학을 밝혔다. 그는 평소 애늙은이라 놀림을 받는다며 웃었지만,
사실 그건 성숙한 사람들이 흔히 듣는 수식어가 아니던가.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나는 그의 원숙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녹취록을 풀어쓰는 지금, 그와 인터뷰 했던 그 당시를 떠올리고 있는데 어쩐지 나무의 이미지가
생각난다. 아마 그건 나무의 이미지에서 기인하는 느낌이 아닐까 싶다. 동네에 하나 쯤 있는 커다란 나무
있잖은가. 보기엔 다른 나무들과 비슷해 보여도 알고 보면 나이가 천 년이 훌쩍 넘는 그런 나무. 올해 스물넷이
된 백고운은 요즘 가장 인기 있는 핫한 배우이지만, 나는 감히 예상해본다. 그는 앞으로 더 큰 배우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김건은 <디 액터> 3 월 호에 실린 내 인터뷰를 또박또박 읽은 뒤 잡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이야, 박 기자님 촉 진짜 좋으시다. 네가 마흔 살인 거 알아 본 거 아니야?”

김건은 현재 내 집 부엌에 앉아 있었고, 나는 주방에서 요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식재료를 썰다가 고개를 들고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그냥 느낌이 비슷하다는 말이겠지. 그보다 너 진짜 그렇게 계속 나 놀릴래?”

안 그래도 저걸 보면 날 놀릴 것 같아서 일부러 책장에 숨겨 뒀는데, 언제 또 그걸 기가 막히게 찾았는지


모르겠다.

몇 분 전 저걸 찾아낸 김건은 희희낙락하더니 기어코 그걸 내 면전에다 대고 또박또박 낭독까지 했다. 하여간


저건 언제 철들라나.

나는 쥐고 있는 칼을 살짝 들어 올린 채 눈을 좁히고 음산히 말했다.


“계속 그러면 밥 안 해준다.”

“아, 미안미안.”

내 협박이 먹힌 건지, 아니면 내가 쥔 칼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건은 금방 깨갱 꼬리를 말았다.

나는 다시 재료를 썰기 시작했다.

토도도도도도동―.

내가 아주 빠르게 채를 썰자 김건이 ‘오’하고 감탄했다.

“와, 너 그러니까 진짜 전문가 같다. 그런 건 진짜 그냥 많이 하면 저절로 돼?”

일전에 얘기해준 적 있었는데도 신기한 모양이었다.

“응. 그냥 자전거 타기 같은 거랑 비슷하더라고. 처음엔 잘 안 되는데 계속 하다보면 어느 순간되는 거 있잖아.”

“신기하네.”

우리가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따르릉―.

식탁에 놓아둔 내 핸드폰에 전화가 왔다.

김건이 핸드폰을 흘긋 보고선 화면에 뜬 이름을 읽어줬다.

“왕 PD 님이라는데? 어떻게, 네가 받을래? 아니면 내가 스피커폰으로 켜줄까?”

“어, 네가 좀 해주라. 땡큐.”


김건이 전화를 받은 후 스피커폰으로 재빨리 켜주었다.

왕 PD 님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고운 씨, 우리 드라마 여주인공 결정 됐거든. 저번에 내가 자기한테 가장 먼저 알려주기로 했잖아. 그래서


연락했지.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요즘 기술력은 참 좋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손으로는 계속 채를 썰고 있는 채였다.

“아, 네. PD 님. 말씀하세요.”

왕 PD 가 호호 웃더니 ‘서프라이즈!’하는 것처럼 높은 톤으로 말했다.

―누구냐면······ 심미애 씨야!

“······!”

나와 김건은 깜짝 놀랐다.

심미애. 그녀는 매우 유명했다.

한국에 3 명의 여배우가 있다면 김희애, 이영애, 그리고 심미애라고들 종종 하니까.

그러나 내가 놀란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나는 채를 썰다 말고 우뚝 멈춘 채였는데, 칼끝이 아슬아슬하게 손 바로 앞에 있었다. 하마터면 손이 베일 뻔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나와 김건의 눈이 마주쳤다.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김건이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폈다.

왜냐면 김건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옛날에, 나는 그녀와 아주 잠깐 사귄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 그녀는 유부녀였지만.

―응? 자기야? 여보세요? 왜 말이 없어? 너무 놀라서 그런 거야? 통화가 끊겼나? 응? 아닌데?

사정을 모르는 왕 PD 만이 허공에 되물을 뿐이었다.

여자 김철수
69.

[심미애, 드라마 <천의 맛>에 출연 결정. 20 살 연하 백고운과 호흡 맞춘다]

[배우 심미애(43)가 오랜 공백기를 깨고 드라마 <천의 맛>으로 안방극장에 복귀한다.


드라마 <천의 맛>은 왕중왕 연출, 황 자매 극본으로 둘이 합을 맞추는 세 번째 드라마이다. 일찍이 배우 백고운
(24)이 출연을 결정해 관심을 모은 바 있다.

드라마 <천의 맛>은 음식 평론가인 연상녀와 요리사 지망생인 연하남의 매콤달콤한 사랑 이야기이다.

심미애는 “실은 복귀하는 데에 고민과 두려움이 많아 처음에는 거절했다. 하지만 PD 님이 꼭 내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고 부탁했다. PD 님의 삼고초려에 결국 마음을 돌렸다”며 오랜 공백기를 깨고 이번 드라마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밝혔다.

또한 “백고운 씨의 작품을 인상 깊게 봤다. 연기를 정말 잘하더라. 20 살 나이 차이라 주변에서 걱정도 많이


헸다. 그렇지만 의외로 케미가 좋을지도 모른다. 호흡을 기대해달라”며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천의 맛>은 내년 상반기에 MBS 에서 방영 예정이다.]

오늘은 드라마 <천의 맛>의 첫 번째 리딩 날이었다.

나는 현장에 일찍 도착했다. 왕 PD 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아니, 고운 씨.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아··· 일찍 눈이 떠져서요.”

“어머, 자기 긴장했구나?”

“음··· 네, 조금요.”

나는 어색히 웃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왕 PD 는 심미애가 대(大)배우긴 하지만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라며, 긴장할 것 없다고 날 다독였다.
그는 헛다리를 짚고 있었지만, 사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기도 했다. 내가 살짝 긴장한 건 사실이니 말이다.
그런 종류의 긴장은 아니긴 했지만.

하나둘 씩 사람이 모이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왔을 때쯤.

문이 열리고 드디어 심미애가 나타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주변의 공기가 확 달라졌다.

심미애는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그저 존재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아우라가 있었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미애 씨 왔어요?”

“제가 늦었죠. 죄송해요.”

“뭘, 원래 주인공은 가장 마지막에 도착하는 법이잖아.”

왕 PD 는 신경 쓰지 않는 듯 호호 웃더니 그보다 얼른 오라며 손짓했다.

심미애가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들다가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녀는 여전히 곱고 우아했다. 나이가 무색하게 느껴지는 외모였다.

‘거의 10 년 만인가?’
예전엔 그래도 둘 다 작품을 하니까 오가며 소식은 들었는데, 나도 화상을 입고 은퇴하고 그녀 역시 결혼하고
육아에 전념한 뒤엔 서로 소식을 들을 길이 별로 없었다.

재회가 이런 식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인생 참 묘했다.

왕 PD 는 내게 그녀를 소개했다.

“고운 씨는 미애 씨 처음 보지?”

“네.”

거기다가 대고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니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단 예의바른 척 말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선배님이랑 같은 작품을 하게 돼서 너무 영광입니다.”

‘백고운’으로서는 가장 모범 답안일 인사였다.

심미애가 작게 웃었다.

“나도 영광이에요. 영화 <해수> 잘 봤거든요. 내 딸이 고운 씨 엄청 좋아해요.”

자연스럽게 대화가 그녀의 딸로 넘어갔다. 왕 PD 가 물었다.

“참, 그러고 보니 은혜가 지금 몇 살이죠?”

“올해 막 초등학교 들어갔어요.”

“어우, 귀엽겠다.”

“뭘요. 얼마나 말썽을 많이 부리는데요. 그래도 잘 때는 귀여워요.”

“그럼요, 애는 원래 잘 때 천사라잖아. 심지어 미애 씨 닮으면 얼마나 예쁘겠어.”

“하하, 맞아요. 그 점은 다행이죠. 은혜가 애 아빠를 하나도 안 닮아서 다들 나 혼자 낳았다고 그런다니까요.”


둘이 그런 얘기를 하하호호 하고 있을 때, 나는 듣고만 있었다.

전 애인의 아이 얘기까지 듣고 있으려니 약간 민망했다.

이 바닥에서 작품을 같이 하면서 눈 맞는 커플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래도 보통은 한 번 사귀었다가 깨진 커플은 같은 작품에 섭외하지 않는다.

암묵적으로 해주는 배려고 해야 할까. 괜히 어색한 상황이 생기면 제작진들도 골치 아플 테니까.

하지만 내가 김철수란 걸 사람들이 알 리가 없으니 여기서 머쓱한 건 나뿐이었다. 다른 사람들 모두는


화기애애했다.

나는 볼을 살짝 긁었다.

‘그래도··· 반갑긴 하네.’

단순히 옛 연인사이였다면 모를까, 사실 심미애는 내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김건과 나, 그리고 심미애는 같은 대학교 출신으로, 서로 죽이 잘 맞아 대학 때 함께 어울려 다니며 작품을


만들곤 했다.

사람들이 그런 우리 셋을 두고 연영과 트리오라 부르기도 했었다.

연기로는 남자 배우 중엔 내가 1 등, 여자 배우 중엔 심미애가 1 등, 극작으론 김건이 1 등이라면서 말이다.

뭐, 다 반쯤은 우스갯소리로 하는 옛날 추억이긴 하지만.


“자, 그러면 잡담은 이만 하고 리딩 시작해볼까요?”

왕 PD 가 대화를 일단락하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렇게 <천의 맛> 리딩이 시작됐다.

내가 맡은 배역은 남자주인공인 19 살 학생 ‘김리오’와 그 학생 몸으로 들어가는 38 살 ‘오대수’ 영혼,


둘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진짜 김리오’와 ‘오대수가 빙의된 가짜 김리오’ 두 버전을 연기하게 된다.

그리고 ‘오대수’ 역을 맡은 다른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그는 ‘진짜 오대수’를 연기할 분이었다.

그 분의 이름은 조상경으로, 코믹한 감초 역할을 자주 맡는 중견배우였다.

조상경이 먼저 대사를 시작하셨다.

“뭐야, 나 진짜 죽은 거야? 진짜로? 으아악!”

오대수는 식당 개업을 바로 앞두고 돌연사해서 귀천을 떠도는 영혼이 된다.

이어서 오대수가 얼결에 김리오의 몸에 빙의된 장면으로 넘어왔다.

바톤을 이어받아 내가 대사를 쳤다.

“뭐뭐뭐야 또?! 응? 어라? 나 살았나?! ······잠깐, 이거 내 손이······ 악! 아니잖아!!”


나는 괄괄한 목소리로 쩌렁쩌렁하게 대사를 쳤다.

반면 다시 오대수가 쑥 빠져나가 김리오가 되었을 땐 다시 목소리를 확 바꾸었다.

“응? ······나 방금 서서 깜빡 존 건가?”

나는 소년처럼 미성으로 어리둥절하게 대사를 뱉었다.

그렇게 지킬 앤 하이드라도 된 양 인격을 확확 바꿔가며 연기를 하자니 시간이 금방 갔다.

사실 순수하게 리딩만 하면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게다가 오늘은 가볍게 만나 얼굴이나 익히고, 그 김에 겸사겸사 리딩도 하자는 자리여서 더욱 금방 끝났다.

드라마 1 화 분량의 대본 리딩이 끝나고, 자리를 정리할 때쯤이었다.

심미애가 불쑥 내게 말을 걸어왔다.

“고운 씨.”

“네?”

“아까부터 느낀 건데, 일부러 상경 씨 사투리 따라한 것 같거든요. 혹시 맞아요?”

그러자 조상경이 ‘응?’하고 이쪽을 쳐다봤다.

그때 왕 PD 도 호들갑을 떨며 ‘맞아맞아’하고 맞장구쳤다.

“그거였구나. 상경 씨, 자기 고향 어디야?”
조상경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 부산입니다. 제가 사투리를 썼나요? 완전히 고친 줄 알았는데.”

“아니, 거의 티가 안 나는데, 목소리 높일 때 가끔 억양이 특이하게 튀어나올 때가 있어. 기분 탓인가 했는데,


사투리였구나. 그리고 고운 씨가 리딩 할 때도 어쩐지 느낌이 비슷하더라고. 따라한 것 같은데.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맞아요. 티가 많이 났나요?”

“아니, 나는 미애 씨가 말해주기 전까지 전혀 몰랐어. 그냥 상경 씨랑 진짜 똑같이 연기한다고만 생각했지. 미애


씨는 어째 알았어? 미애 씨 고향도 경상도 쪽인가?”

심미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 서울 토박이에요.”

“그냥 듣고 안 거야? 와, 역시 심미애네.”

심미애는 짐짓 장난스럽게 후후 웃으며 왕 PD 의 말을 받았다.

“그 정도는 기본이죠, 감독님.”

놀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작품 활동을 쉰 지는 거의 7 년 정도 되어 가는데, 그럼에도 그녀의 연기 실력은 여전히 녹슬지 않고


날카로웠다.

한편 왕 PD 와 조상경은 나를 새삼스럽게 봤다.


“그러면 고운 씨는 상경 씨가 부산 출신인 거 알았어?”

“아뇨, 저도 오늘 알았습니다. 그냥 대사 하실 때 약간 사투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그럼 그걸 듣고 즉석에서 따라한 거야?”

“네. 아무래도 제가 상경 선배님의 오대수를 연기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최대한 같은 사람처럼 보이게
연기해봤습니다.”

목소리 그 자체는 지문과 같아서 완전히 똑같이 따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말투는 어느 정도 따라할 수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자주 쓰는 어휘와 문장구조가 있고, 거기에 억양이나 말버릇이 있으면 더욱 특징적이
되니까 말이다.

내 말에 조상경이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이거, 왠지 제가 부족한 것 같아 미안하네요.”

“어,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내가 황급히 손을 젓자 왕 PD 도 웃음을 터트렸다.

“자기가 연기를 잘한다는 소리야. 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진짜 잘하네. 그런 걸 또 어째 기막히게 알았대? 고운


씨, 진짜 섬세하다.”

왕 PD 가 동의를 구하듯 심미애에게 그렇지 않냐고 물었다. 심미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살짝 놀란 듯, 그러나 흥미로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알았다. 대학 때, 나는 그녀의 저런 눈빛을 많이 본 적 있었다.

심미애는 연기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를 때 자주 저렇게 반짝거리는 눈빛이 되곤 했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눈빛이기도 했다.

사실 내가 그녀에게 반했던 것도 바로 저런 모습이었다.

김건이 심미애를 두고 ‘여자 김철수라니까’라고 할 정도로 우리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는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는 편이었고.

곧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표정을 풀었다.

“오랜만에 좋은 호적수를 만났네요. 촬영이 기대가 되는데요? 우리, 같이 잘해 봐요.”

왕 PD 와 조상경은 살짝 놀란 듯 했다.

심미애가 20 살 어린 나를 아무렇지 않게 경쟁자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보통 그 나이 차이 쯤 되면 귀여운 후배쯤으로 여기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 살짝 웃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잘 부탁드려요.”

그녀의 말처럼, 나 역시 촬영이 기대가 됐다.

며칠 전, 심미애와 다시 작품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껄끄럽지 않을까 솔직히 걱정했었다.

그러나 오늘 보니 그건 기우였다.

이렇게 만나고보니 오히려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내 전 애인이기도 했고, 친구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내게 자극이 되는 한 명의 배우였기 때문이었다.

20 년 전, 우리가 함께 학교를 다닐 때처럼 말이다.

드라마 <천의 맛>의 준비는 착착 이어졌다.

너무 순조로워서 우리끼리 ‘약간 불안한데’하면서 농담을 던졌을 정도였다.

그런데 크랭크 인이 바로 2 주 뒤로 다가 온 어느 날이었다.

말이 씨가 되기라도 한 건지, 정말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이 터졌다.

인맥 왕
70.

포스터 촬영 날이었다.

스튜디오에 주연 배우들이 모였을 때, 큰 목소리가 한쪽에서 터져 나왔다.

“뭐?! 장소 섭외가 취소됐다고?”

몇 분 전.

왕 PD 가 촬영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조연출이 다급한 얼굴로 다가와 왕 PD 에게 뭐라 속삭였다.


그리고는 방금 전, 왕 PD 가 외친 것이었다.

주연 배우들이 깜짝 놀라 잡담을 멈추고 왕 PD 쪽을 쳐다봤다.

단번에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스태프를 비롯해 주연 배우들 모두가 눈짓을 주고받으며 소리 없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야? 장소 섭외가 취소됐다고? 어디를 말하는 거지?

우리의 의문은 곧 풀렸다. 왕 PD 가 드물게 분노를 터트렸기 때문이었다.

“그 사장, 미친 거 아니야? 폐업까지는 그렇다 쳐. 근데 건물을 팔고 날라버려? 지금 연락이 아예 안 돼?”

“네, 완전히 연락두절이에요.”

“돌아버리겠네. 그러면 새 주인은 양보 못 해 준대? 당장 2 주 뒤에 촬영 들어가야 하는데, 그 레스토랑을


헐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거기서 찍을 장면이 산더미인데. 딱 4 개월만 있다가 공사하면 안 되냐고 물어봤어?”

“그쪽도 자기 일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하고 있어요. 장소 섭외에 응한 것도 전 주인이고, 자기는


상관없다고······.”

아, 그러니까 우리 드라마 주요 촬영지인 레스토랑이 돌연 다른 사람에게 팔리더니, 그 새로운 주인은 그 건물을


헐어버릴 작정이란 소리였다.

왕 PD 는 짜증을 냈다. 그러나 결국 체념하듯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거나 일은 생긴 건 생긴 거고, 지금은 얼른 그걸 수습해야 했다.

“어쩔 수 없지. 다른 곳을 구하는 수밖에. 우리 원래 리스트 있었잖아. 다시 연락 해보고 있어?”


“네. 다 돌려보고는 있습니다만, 일정이 워낙 촉박해서 다들 곤란하다고······.”

그때 조연출이 생각난 듯 말했다.

“근데 그 리스트에 곽시우 쉐프님 레스토랑도 있었거든요. 아직 거기엔 연락 안 해보긴 했는데 혹시······.”

조연출이 왕 PD 의 눈치를 봤다. 그러니까 친분이 있는 왕 PD 가 연락을 하면 장소를 빌려주지 않을까 하는


말이었다.

왕 PD 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 돼. 그 양반 자기 레스토랑 끔찍하게 아껴서 절대로 촬영 못 하게 한단 말이야. 예능국 김 PD 알지? 그


요리 오디션 프로그램 담당 PD. 걔가 나한테 얼마나 하소연을 했는데.”

“그래도······.”

조연출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고, 왕 PD 는 ‘끙’하고 눈썹을 좁히더니 한 풀 꺾인 기세로 말했다.

“알았어. 일단 연락은 해볼게. 기다려 봐.”

그리곤 그가 그 자리에서 바로 곽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자기, 잘 지냈어? 응, 아 나야 잘 지내지. 아니 다름이 아니고······.”

왕 PD 는 한참 뭐라뭐라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데 그때, 그가 갑자기 ‘응?’하며 멈칫하더니 나를 흘긋 봤다.

“고운 씨? 응, 여기 있지. 어, 잠깐만.”


그러더니 갑자기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리더니 말했다.

“시우 씨가 자기 찾는데?”

나는 어리둥절했다. 저요?

왕 PD 가 말하란 듯 재촉해서, 나는 일단 스피커폰에 대고 말했다.

“네, 쉐프님. 백고운입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곽시우의 예의 그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운 씨, 오랜만이에요. 물어볼 게 있는데, 혹시 그 드라마에서 하차할 예정 같은 건 없죠?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래.

엉뚱한 곽시우의 물음에 내가 어이없어서 대답했다.

“그럼요. 당연하죠.”

그러자 곽시우가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한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러면 제 레스토랑 빌려드릴게요.

이렇게 간단하게? 모두가 깜짝 놀랐다.

뭣보다 왕 PD 가 제일 놀랐다.
“진짜야? 자기?”

―네. 원래는 안 되는데, 고운 씨 봐서 빌려드릴게요.

갑자기 튀어나온 내 이름에 나는 또 한 번 어리둥절해졌다. 날 보고? 왜?

곽시우가 덧붙였다.

―대신 부탁 하나 있어요.

“어, 네. 말씀하세요.”

나는 살짝 긴장했다.

자기 식당을 빌려주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촬영 때문에 영업을 못 할 때도 분명 있을 테고.

그러니 쉽게 빌려준다고 한 만큼 내게 부탁할 일이 어려운 일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곽시우가 이어서 뱉은 말은 또 한 번 엉뚱했다.

―언제 한 번 가볍게 밥 먹으러 온다 생각하고 아카데미에 들러주세요.

“······네?”

곽시우가 예의 그 나긋나긋한 말투로 말했다.

―얼굴 못 본 지 꽤 됐잖아요. 배울 거 다 배웠다고 그렇게 딱 나가버리고. 연락도 없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서운했는데요.

“아··· 죄송해요. 바쁘실 것 같아서 따로 연락 못 드렸어요.”


내가 알기로 그가 출연하고 있는 요리 오디션 프로그램이 한창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지금
결승전을 치르고 있었고. 그래서 한창 바쁠 때라 생각했다.

곽시우가 ‘에이’하면서 살짝 타박했다.

―그래도 밥 먹을 시간은 있죠. 실은 안 그래도 고운 씨 나가기 전에 밥 한 번 해주려고 했거든요. 지금은 좀


어렵고··· 한두 달 뒤 시간 될 때 한 번 놀러 와요. 그래도 내 아카데미에서 한 달 동안 있었는데, 내 요리 한
번은 먹고 가야죠.

나는 그제야 그가 진심이란 걸 깨달았다. 생각보다 정 많고 따듯한 사람이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감사해요.”

―뭘요. 내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곽시우는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는 잘 해주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하긴 그는 엄하긴 해도 본질적으로 다정한 사람


같았으니.

곽시우가 다시 왕 PD 에게 말했다.

―그러면 PD 님, 레스토랑으로 전화주세요. 언제언제 촬영하시는지 알려주시면 최대한 맞춰서 빼드릴게요. 자세한
일정은 매니저랑 얘기하면 될 것 같아요. 제가 따로 말 해놓을게요. 참, 촬영 당일에 그래도 제가 레스토랑에
나가보는 게 좋긴 할 텐데, 아마 못 갈 수도 있어요. 제가 요즘 너무 바빠서요. 미리 죄송해요.

“아냐,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우리가 부탁하는 입장인데. 아무튼 너무 고마워 자기. 은혜는 꼭 갚을게.”

―뭘요, 그럼 다음에 뵐게요.

곽시우는 산뜻하게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왕 PD 가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운 씨 덕에 살았다. 진짜 고마워.”

나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뭘요.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쉐프님이 인정이 많은 덕이죠.”

딱히 내가 한 것은 없지만, 아무래도 곽시우가 나 때문에 레스토랑을 빌려줬다고 하니 다들 내 덕이라 여기는 듯


했다.

왕 PD 가 무슨 소리냐는 듯 ‘어우’하면서 말했다.

“자기가 뭘 모르네. 인맥도 능력인 거야. 그거 완전 어려운 능력이거든? 아무튼, 고운 씨 진짜 짱이다. 그새


어떻게 나보다 더 곽 쉐프랑 그렇게 친해졌어? 아주, 보니까 의외로 인맥 왕이다. 응?”

왕 PD 가 날 치켜세우기에 나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그 ‘인맥 왕’이란 말이 머지않아 촬영장에서 내 두 번째 별명이 되리라곤 말이다.

<천의 맛>이 크랭크 인에 들어갔다.

첫 촬영 날 때는 심미애가 밥차를 보내서 스태프 전원에게 식사를 돌렸다.


나 옛날에는 밥차란 게 없어서 막내가 함바집을 돌아다니고 그래야 했는데, 요즘은 케이터링 서비스 전문 업체에
연락만 하면 그런 걸 다 준비해준다.

게다가 퀄리티도 거의 이동식 뷔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시대가 많이 좋아졌다.

나 역시 주연인데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둘째 날에는 내가 밥차를 보냈다.

다들 맛있게 먹었고, 나도 흡족했다.

다른 주조연 배우들이 소소하게 커피차를 보냈고, 그렇게 한 사이클이 돌아서 이제 대충 마무리 되겠거니 하던
시점이었다.

어느 날, 기태성에게 불쑥 연락이 왔다. 그는 뜬금없이 말했다.

―어, 고운아. 내가 밥차 보냈거든. 오늘 점심 때 촬영장으로 갈 거야.

“네? 밥차요?”

나는 당황해 되물었고, 기태성은 쾌활하게 대답했다.

―응, 원래 이런 건 주변에서 보내주는 거야. 먹고 우리 배우 잘 봐달라고. 내가 그래도 너랑 같은 소속사인데,


선배로서 또 이런 걸 안 할 수가 없잖냐. 하하!

“안 그러셔도 되는데······. 감사해요.”

지금이야 내가 기태성을 편한 형처럼 여기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옛날부터 내가 존경하던 선배였다.

그런 선배가 이렇게 날 챙겨주다니, 감사하기도 하고 멋쩍기도 해서 쑥스럽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래서 그날 점심은 기태성이 보내준 밥차로 다들 맛있게 밥을 먹었다.


나는 거기서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더 엄밀히 말하면, 기태성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날 이후로 내 이름으로 밥차와 커피차가 줄줄이 보내졌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이루다였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서주 사형, 언제나 응원합니다! - 연이’라는 현수막을 달아 커피차를 보냈다.

이루다는 최근 새 미니 앨범으로 컴백해 본업에 충실하고 있었다. 가요 프로그램에서 그녀가 1 등을 했다는


기사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콘서트 투어를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던데. 그런 시기에 이렇게 날 챙겨주기까지 하다니, 고마웠다.

세 번째는 내 팬클럽에서 보내온 밥차였다.

내 팬클럽은 사실 데뷔작인 <운명의 표현> 이후 내가 하는 작품마다 꾸준히 밥차와 커피차를 보내왔었다.

그런 팬들이 고마워 나 역시 팬들에게 몇 번 역조공을 한 적이 있었다.

팬들에게 받는 사랑은 늘 과분했지만, 또 한편으론 그만큼 다시 돌려주는 기쁨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서도 팬클럽에서 어김없이 밥차를 보내왔지만,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기쁘게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정말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다음엔 갑자기 이성한에게서 전화가 오더니, 그가 툭 뱉었다.

―야, 나도 보냈다. 맛있게 먹든지 말든지.

뭘 보냈느냐고 되물을 틈도 없이 전화는 끊겼고, 그날 이성한이 보내온 밥차가 우리 촬영장에 도착했다.

그때부터는 나는 슬슬 당혹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내 이름으로 보내온 것들만 벌써 네 번째였다.

챙겨주는 건 고마웠지만, 남들 눈에 너무 유난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이제 진짜 끝이겠지.’

왕 PD 가 오해하는 것만큼 내 인맥은 그렇게 넓지는 않았다.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 중에선 보낼 사람은 다 보낸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한 명을 잊고 있었다.

다음 날 촬영장에 의문의 한 밥차가 도착했고, 나는 트럭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말을 잃었다.

[백고운 배우의 공중파 첫 주연을 축하합니다. 다음엔 꼭 나랑 같이 작품 합시다^^ - 오용호]

그래, 저 놈을 빼면 섭섭하지. 어떻게 까맣게 잊고 있었지?

오용호는 이번에도 내 차기작을 기사로 접했는데, 그 이후 왕 PD 에게 자기도 출연하고 싶다고 은근히 접촉해왔다.
그러나 왕 PD 는 자신이 생각한 이미지에 맞지 않으면 배우가 아무리 유명해도 절대로 쉽게 캐스팅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용호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얘기를 나는 나중에 왕 PD 에게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조금은 토라지지 않았을까 했는데, 이렇게 밥차까지 보내온 걸 보니 또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혹시 이게 심통인가? 일부러 연락도 안 하고 대뜸 보내온 걸 보니, 약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 와중에 끈질기네.’

현수막에 적힌 [다음엔 꼭 나랑 같이 작품 합시다^^]라는 문구가 참 오용호다웠다.

나는 헛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도합 다섯 번이나 밥차와 커피차를 받은 셈이었다.

그래서일까. 촬영장에서 나는 아주 슈퍼스타가 되어 있었다.

“고운 씨, 오늘도 너무 잘 먹었어요.”

“그러니까. 고운 씨 덕에 아주 풍족하게 촬영하네.”

제작진들과 배우들이 아주 싱글벙글한 얼굴로 내게 인사하면서 지나갔다.

엄밀히 말하면 계산을 한 건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어쨌거나 내 친분으로 온 것들이었기 때문에 내게 잘 먹었다


인사하는 것이었다.

왕 PD 가 다시 한 번 내게 감탄하며 말했다.
“와, 자기 진짜로 인맥 왕이다.”

그리고 그 말은 다른 스태프들에게로 퍼져서 촬영 내내 나는 인맥 왕이란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거, 오해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곤란하면서도 쑥스러운, 어째 좀 멋쩍은 별명이었다.

글씨체와 왼손잡이
71.

그러니까 그건 <천의 맛>이 크랭크 인 들어가기 직전의 일이었다.

소품 팀 막내 김만래는 드라마에 사용될 소품을 체크하고 있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백고운이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김만래가 벌떡 일어났다.

“어, 배우님.”

“안녕하세요. 혹시 들어가도 될까요?”

“네, 그럼요. 어쩐 일이세요?”

“혹시 제가 필요한 일이 있을까 해서요.”

그 말에 김만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필요한 일이라니?

이미 미술 팀과 세트 팀이 세트장을 다 만든 상태고, 소품 팀도 그에 맞춰 자잘한 소도구를 거의 다 준비한


상태였다.

게다가 필요한 게 있다 해도 배우가 그걸 도울 일은 아니었고.

김만래의 의문을 눈치 챈 듯 백고운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혹시 손 글씨가 필요한 소품이 있나요? 있다면 제가 쓸까 싶어서요.”

“아, 그런 거요. 안 그래도 일기장이 있긴 있는데······.”

그 일기장은 주인공인 ‘김리오’와 ‘오대수’의 소통 도구로, 일종의 교환일기였다.

오대수가 김리오의 몸을 차지했을 때 거기에다가 일기를 쓰면, 다음날 김리오가 그 일기를 보면서 자신이
오대수였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는 방식이랄까.

그래서 드라마에서 꽤 중요하게 다뤄지는 소도구였다.

백고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걸 제가 쓸게요. 혹시 극 중에서 제가 직접 글씨를 써야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고. 제 글씨체로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김만래는 잠시 고민하다가, 백고운의 말도 일리는 있는 것 같아서 알겠다 했다.

다만 덧붙이긴 했다.
“근데 분량이 좀 많아서요.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럼요.”

김만래는 일기장을 건네주었다.

거기엔 이미 글씨가 다 쓰여 있었다. 일기 내용 자체는 보조 작가가 써서 보내주는 거지만, 그걸 옮겨 적는 건


소품 팀이 담당했다.

물론 글씨는 소품 팀 두 명이 ‘김리오’와 ‘오대수’역을 맡아서 따로따로 적었다. 그래도 글씨체에 차이가


있는 게 좋을 듯 싶어서.

그래서 솔직히, 김만래는 백고운의 제안에 ‘굳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긴 했었다.

그런데 뭐, 본인이 일부러 수고스럽게 하겠다는데 딱히 말릴 이유는 또 없었다.

김만래는 여분으로 산 똑같은 공책을 건넸다.

“베껴 쓰실 거면 여기에다가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아, 고마워요. 내용은 여기 쓰인 게 다인 건가요?”

“네, 맞아요.”

“알겠어요. 고마워요. 그럼 일 봐요.”

김만래는 그렇게 했다.

백고운은 한쪽에 앉아 조용히 글을 베껴 쓰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드디어 다 했는지, 백고운이 몸을 일으키며 빙그레 웃었다.

“다 했는데, 여기다가 둘 게요.”

“아, 네. 그러면 배우님이 쓴 걸로 소품 쓰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아뇨, 뭘요.”

“그럼 촬영장에서 봐요, 만래 씨.”

“네, 들어가세요.”

백고운은 인사하고 떠났다. 김만래는 다시 일을 보기 위해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때, 문득 김만래는 뒤늦게 깨달았다.

‘어라? 방금 배우님이 내 이름 부르지 않았나?’

김만래는 습관적으로 제 몸을 쳐다봤다. 자신이 명찰을 차고 있던가 해서 말이다.

그런데 명찰은 없었다. 책상도 살펴봤지만 이름을 확인했을 만한 명찰 같은 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어, 그럼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지? 아, 설마 그때 외운 건가?’

자신이 백고운을 직접적으로 본 건 포스터 촬영 때였다.

그 당시 김만래는 분주하게 소품을 설치하다가 우연히 백고운과 말을 섞을 일이 생겼다.

그때 잠깐 이름을 물어보기에 답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지나가듯 물은 거라 당연히 외웠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몇 번 부르고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스태프들의 이름을 외우는 배우들은 가끔 있다.

특히 주연 배우들은 촬영장에 거의 내내 있으니까 주요 제작진 뿐 아니라 말단 스태프들의 이름까지 외울 때도


종종 있다.

사람이란 게 자주 얼굴을 보다보면 이름 정도는 외우게 되니까. 촬영 끝나고 나면 어차피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
해도.

그러니 드물긴 해도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래도 괜히 놀랍긴 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백고운이 뭘 한 번 들으면 단번에 외워버리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건지, 아니면 섬세한 타입이라 말단
스태프들의 이름까지 외워두려고 일부러 노력하는 건지, 김만래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사소한 이런 해프닝이 기분 좋은 건 사실이었다.

방송국에 있다보면 자신이 소모품이란 느낌을 종종 받을 때가 있다.

방송국에 카스트제도가 있다면 말단 스태프는 아마 불가촉천민 정도일 것이다. 물론 꼭대기에는 감독이 있겠지.

연예인들도 감독에게 잘 보여야 하는 건 똑같지만, 그래도 그들은 방송에 나와 인기라도 얻지 않은가.

스태프들은 그런 것도 없다.

심지어 몇몇 연예인은 가끔 스태프에게 갑질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런 연예인들을 만날 때면 자신이 그저 누군가를


빛내주기 위해 갈려나가는 부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방금의 백고운처럼, 스태프를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하는 연예인들을 만날 때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게


당연했다.

백고운이 미담 제조기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는데, 오늘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김만래가 그런 실없는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이번에 들어온 건 왕 PD 였다.

“어, 감독님.”

김만래는 재빨리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잘 준비 되어가고 있나 한 번 들렀지.”

그때, 왕 PD 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두 공책에 닿았다. 아까 전까지 백고운이 옮겨 쓰던 것이었다.

“이거 일기장이야? 근데 왜 두 개야?”

“아, 그건······.”

김만래는 아까 전 백고운이 찾아왔던 일을 설명했다.

왕 PD 는 백고운이 쓴 공책을 팔랑거리며 안을 훑어봤다.

“흐음······.”

가늠하듯 안의 내용을 보던 왕 PD 가 갑자기 싱긋 웃었다.

“자기, 이거 한 번 볼래?”
그가 공책을 펼치더니 김만래에게 보여주었다.

확연히 대조되는 두 글씨체가 보였다. 백고운 한 명이 옮겨 썼다는 걸 알지 못했다면 두 명이 쓴 걸로 착각할


법도 했다.

하지만······ 필체를 다르게 하는 건 의외로 쉬운 일이었다.

주의를 좀 기울여 일부러 다르게 쓰려고 한다면, 사실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왕 PD 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것이 아니었다.

“자기도 알겠어? 일부러 필체를 캐릭터 특성에 맞게 바꾼 거야.”

왕 PD 는 두 글씨체를 짚으며 말했다.

“이건 ‘김리오’ 글씨체야. 확실히 학생 같지 않아? 남고생 필체가 있다면 딱 이런 느낌일 것 같잖아.”

왕 PD 가 짚은 글씨체는 삐뚤빼뚤하고 삐쭉빼쭉했는데, 그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그렇게 보이긴 했다.

“반면 이건 훨씬 원숙하잖아. 30-40 대 아저씨가 쓴 것 같고.”

왕 PD 의 말대로, 다른 한 글씨체는 궁서체인데다 자간도 정갈한 게 나이가 좀 있어 보였다.

김만래는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글씨체에도 성격이 보이네요.”


소품 팀은 딱히 그런 것을 신경 쓰면서 준비하지는 않았다.

왕 PD 는 동의했다.

“그러니까. 이것도 일종의 고운 씨의 연기인 거지. 정말 꼼꼼하다니까.”

왕 PD 는 감탄하듯 중얼거리더니, 의미심장하게 빙긋 웃었다. 김만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세요?”

“별 건 아니고······.”

왕 PD 가 후후 웃었다.

“이걸 보니까 좋은 생각이 하나 나서.”

크랭크 인 직전.

나는 왕 PD 에게서 제의를 하나 받았다.

―자기, 혹시 상경 씨 나오는 분량 먼저 다 찍고 그 다음에 자기 촬영 들어가지 않을래?

―저는 상관없습니다. 근데 특별한 이유라도······?

―왜, 저번에 자기가 그랬잖아. 상경 씨 말투에 약간 사투리가 있는 것 같아 일부러 비슷하게 대사 쳤다고. 상경


씨가 연기한 오대수 캐릭터를 완전히 따라 하려고 했다며.

그리고 왕 PD 는 예상외의 말을 했다.


―그러면 이건 어떤가 싶어서. 아예 상경 씨가 연기하는 오대수를 먼저 다 찍어버려. 그리고 그걸 고운 씨가 보고
따라 하는 거지. 나도 궁금하거든. 자기가 어디까지 복사 붙여넣기해서 연기할 수 있을지. 사람은 말투뿐 아니라,
습관, 행동, 그런 것까지 다 개성이니까.

왕 PD 가 먼저 그런 제의를 해온 것은 의외였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배려일 수 있었다. 내가 더 완벽한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왕 PD 의 제안은 재미있을 것 같았다. 도전의식도 불탔고.

그래서 나는 오케이 했고, 조상경이 나오는 장면은 모두 앞으로 당겨졌다.

그리하여 첫 촬영 날인 오늘.

나는 내 씬이 없음에도 일부러 촬영장에 발걸음 했다.

세트 가운데에 조상경이 섰고, 왕 PD 가 메가폰을 잡았다.

“씬 3, 테이크 1 갑니다. 레디. 액션!”

조상경은 ‘오대수’가 되어서 옷을 갈아입고, 전화를 하고, 요리를 했다.

지금 찍는 건 드라마 초반부에 나오는 장면으로, 그의 소소한 일상을 보여주는 씬이었다.

별다른 연기력을 요하지 않는 장면들이었기에 오케이는 금방금방 나왔다.

“컷, 좋아요. 바로 다음 장면 갑시다.”

“네.”
그리고 촬영장 한쪽에 물러서서 조상경의 연기를 보던 나는 뭔가를 발견했다.

‘······어라? 설마?’

하지만 확신할 수가 없어서 긴가민가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할 바엔 그냥 본인한테 확인받는 게 나을 것 같다 싶었다.

그래서 촬영이 잠깐 쉬어가는 사이에 나는 조상경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 선배님.”

“응?”

“혹시 원래 왼손잡이셨나요?”

그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

“아까 핸드폰 쓰시는 거 보고요. 저번에 밥 드실 때나 필기 하실 때는 오른손 쓰시는 것 같았는데, 방금 핸드폰


자판 치실 때는 왼손으로 치셔서요. 혹시나 그게 더 편하신 손인가 했어요.”

조상경은 감탄했다.

“고운이 너 진짜 관찰력 좋다. 맞아. 옛날에 교정했어. 고운이 너는 모르겠지만, 우리 세대 때는 왼손잡이가 안


좋다고 부모님들이 다 교정시키거든.”

“그러면 지금은 아예 오른손만 쓰시는 건가요?”

조상경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익숙해져서 오른손을 주로 쓰긴 하는데, 사실 왼손도 쓸 수는 있어. 일상생활에서 불편한 점이 많으니까 그냥
오른손 쓰는 거지. 왼손 쓰면 필기할 땐 글씨가 번지고, 밥 먹을 땐 다른 사람들이랑 자주 팔이 부딪히거든.
근데 그건 왜?”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이건 그냥 든 생각인데, 혹시 오대수가 왼손잡이 캐릭터이면 어떨까요?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쓰는 손이 다르면 확실히 다른 인격이 빙의되었다는 걸 강조할 수 있잖아요.”

조상경이 놀랐다.

“어, 나는 괜찮은데··· 고운이 너 왼손 쓸 수 있어? 너도 오대수를 연기해야 하잖아.”

조상경이 염려하는 바가 뭔지 알았다. 그러나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네, 저도 왼손 쓸 수 있어요.”

“아, 고운이 너도 원래 왼손잡이였니? 저번에 보니까 오른손 쓰는 것 같던데. 혹시 나처럼 나중에 교정한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원래 오른손잡이에요.”

“응? 그럼 어떻게······.”

나는 살풋 웃었다.

“선배님이 교정한 거랑 비슷해요. 예전에 왼손잡이 역할을 맡느라 왼손 쓰는 걸 나중에 연습해서 익혔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양손잡이에요.”

내게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말이었으나, 조상경의 반응은 달랐다.


“······뭐?”

그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삼박자를 다 갖춘 친구
72.

조상경은 원래 왼손잡이였고, 백고운은 양손을 쓸 수 있다고 하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래서 조상경은 백고운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왕 PD 가 허락만 한다면 그렇게 하자고 말이다.

그리고 왕 PD 는 둘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놀라워하더니 흔쾌히 수락했다.

―둘이 가능만하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지!

왕 PD 는 꽤 흥미로워했다. 그도 도전을 즐기는 타입인 듯 했다.

그러나 반면 조상경은 조금 미심쩍었다.

‘정말 그게 가능할까?’

백고운은 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자신했으나, 솔직히 조상경은 믿기가 어려웠다.

왜냐면 살면서 그런 경우를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왼손잡이가 오른손으로 교정되는 일은 많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아마 아예 없을 것이다.

그렇게 단언하는 건 오른손잡이가 왼손을 쓰도록 교정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대부분은 오른손잡이에게 규격이 맞춰져 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보통은 불편한 소수자 쪽이 다수자 쪽의 규칙에 맞추려 한다.

달리 말하자면, 이미 세상이 편한 다수자가 굳이 소수자의 방식을 도전할 이유가 없단 말이었다.

불공평하지만, 세상의 이치가 그랬다.

그래서 조상경은 백고운의 말을 전적으로 믿기가 어려웠다.

물론, 연기를 위해 왼손 쓰는 걸 익혔다는 백고운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연기를 위해 배운 것이 언제나 평생 가지는 않는 법이다.

아무리 몸에 익힌 것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안 쓰면 까먹을 수 있다. 하물며 평생 나고 자란 고향의 사투리도 오래


안 쓰다보면 까먹는데 말이다.

작품에 들어갈 때 반짝 배워서 몸에 익혔을 수도 있지만, 그 이후 계속 오른손잡이로 살다보면 왼손을 쓰는 것은


언제든 금방 까먹을 수 있다.

그건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로 교정당해서 평생 두 손을 자유롭게 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케이스였다.

그런 걱정이 반쯤 있었지만, 어쨌거나 오대수를 왼손잡이 캐릭터로 바꾸자는 건 이미 합의된 내용이었다.

때문에 조상경은 일단 별 군말 없이 따랐다.


초반부의 장면을 다시 재촬영하고, ‘오대수’가 나오는 나머지 분량을 마저 찍었다.

그렇게 대략 일주일 하고도 며칠이 더 흘렀을 때.

이제 조상경의 분량이 끝났고, 백고운의 차례가 되었다.

오늘은 바로 백고운이 촬영하는 첫 날이었다.

“상경 씨도 왔네?”

왕 PD 가 촬영장에 도착한 조상경을 보고 살짝 의아한 듯 인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상경이 나오는 초반부 분량은 이미 다 찍은 터라 후반부로 넘어가기 전까지 더 이상 조상경의


스케줄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상경은 백고운이 어떻게 연기할지 궁금했다. 방송으로 확인해도 되겠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참기
어려웠다고나 할까.

조상경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대답했다.

“저도 고운이가 어떻게 연기하는 게 궁금해서요.”

“그 마음 뭔지 알지. 심지어 나도 오늘 기대 돼서 막 두근두근 하다니까.”

왕 PD 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그는 조상경더러 편하게 구경하라고 말한 뒤 스탠바이 하러 갔다.


조상경은 촬영장 한쪽에 비켜섰다. 그리고 백고운이 연기를 준비하는 걸 지켜보았다.

백고운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하다못해 왼손 쓰는 연습을 촬영 직전까지 하고 있지 않을까 했는데, 또 그런 것도 아니었다. 지금 백고운은


평소와 같이 오른손만 쓰고 있다.

오만한 허세일까? 아니면 근거 있는 여유일까? 아직은 잘 알 수 없었다.

조상경은 기대 반 걱정 반인 마음으로 촬영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그리고 왕 PD 가 메가폰을 잡고 시작 신호를 보냈다.

“씬 12 테이크 1, 액션.”

교복을 입은 백고운은 처음엔 남자주인공인 ‘김리오’로 시작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집 부엌에서 이것저것 음식을 만들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음, 다 익었나?”

그는 지금 감자를 볶고 있었는데, 다 익은 건지 확인할 겸 한 조각을 집어 먹어봤다. 그가 맹하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빠진 것 같은데······ 이게 맞나?”

그가 다시 몸을 돌려 레시피를 뒤적거리며 확인했다.

“감자가 익을 때쯤에 양파와 당근을 넣고······. 아! 소금!”


그가 깜짝 놀라 프라이팬을 놓고 소금을 찾기 위해 허둥지둥 대며 주방을 뒤적거렸다.

그러느라 한쪽에 방치된 프라이팬에선 감자가 타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그걸 발견한 김리오는 완벽하게 요리를 망치고 울상을 짓는다.

그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몇 번 더 찍은 뒤, 뫙 PD 가 말했다.

“오케이, 컷. 그러면 바로 다음 씬으로 갈게요.”

백고운은 옷을 갈아입은 뒤 다시 부엌에 섰다.

이번 장면은 아까와 달리 ‘오대수’가 빙의된 김리오의 모습이었다.

감독님과 작가님이 요리사 지망생이라면서 김리오를 요리 못하는 캐릭터로 설정한 것도 사실 의도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래야 빙의된 모습과 아닌 모습이 확실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고운 씨 준비 됐지?”

“네, 감독님. 준비 됐습니다.”

아까와 옷만 달라졌을 뿐 크게 달라진 건 없었지만, 백고운은 자신 있어 보였다.

“좋아요. 그러면 이제 씬 24 테이크 1 갑니다. 레디, 액션!”

카메라가 돌아가고 촬영장이 조용해졌다.


오대수로 분한 백고운이 가슴과 어깨를 쫙 핀 뒤 가볍게 목과 손목을 스트레칭 했다.

그리고 정면을 바라본 백고운이 씩 웃었다.

“어디, 그럼 해볼까?”

그는 대본에 나와 있는 대사를 치고 있는 것뿐이지만, 공교롭게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의 태도는 연기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여태 부렸던 여유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는 걸 단번에 증명했다.

백고운은 왼손으로 주방 곳곳에서 필요한 것들을 꺼내곤 조리대 위에 착착― 올려놓았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손의 방향을 헷갈리지 않았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왼손잡이였던 것처럼 그 모든
동작들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백고운은 김리오일 땐 오른손잡이로, 오대수일 땐 왼손잡이로, 완벽하게 연기했다.

‘······진짜 양손잡이 맞았구나.’

조상경은 감탄했다.

그러나 거기서 놀라기엔 아직 일렀던 것이다.

백고운이 껍질 깐 양파를 도마 위에 탁 올려놓고 중식도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그가 갑자기 식칼을 손에서 한 번 휘― 돌렸다.


마치 손에 쥔 볼펜을 가볍게 돌리는 것처럼 말이다.

“······!!”

촬영장에 있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백고운은 태연히 계속 연기를 이어갔다.

그는 한 번 휘 돌린 식칼을 ‘탁’ 잡더니 스위치가 켜진 사람처럼 양파를 투다다다다다 썰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백고운의 그 모든 동작이 다 왼손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5 초도 안 되어 주먹만 한 양파가 깔끔하게 분해됐다.

백고운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식칼을 손목으로 휘 돌린 후 도마에 탁 꽂았다. 그리고 채 썰어진 양파를 쭉


밀어 프라이팬에 확 넣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쾌감이 느껴질 만큼 시원한 동작이었다.

여기까지가 일단 한 컷이었기에 왕 PD 가 재빨리 외쳤다.

“컷!”

그리고 왕 PD 가 벌떡 일어나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자기야, 방금 그거 뭐야?!”

“네?”
“아니, 방금 칼을 이렇게 이렇게 했잖아!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아, 이거요?”

백고운이 되물으며 다시 한 번 시범을 보였다. 칼이 백고운의 손 안에서 몇 번이고 휘휘 돌아갔다.

일견 위험해보이기까지 하는 동작에 모두가 기겁했다.

가짜 칼이라면 모를까, 저건 진짜 날이 제대로 서 있는 칼이지 않은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나 백고운은 태연하게 웃었다.

“예전에 난타 공연 팀한테서 배운 거예요. 농구 할 때 공 한 손으로 돌리는 거랑 비슷해요. 연습하다보니 할 수


있더라고요. 아, 오른손으로 하는 것도 보여드릴까요?”

그는 반대 쪽 손에 옮겨 쥐더니 오른손으로 돌리는 것도 보여주었다.

백고운은 덧붙였다.

“아직 두 손을 같이 돌리는 건 못하지만요.”

백고운은 그 말을 마치 부족해서 부끄럽다는 것처럼 뱉었다.

왕 PD 와 스태프들은 얼이 빠졌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대단해서 입이 떡 벌어지는 수준이다.

그런데 백고운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구니까 그의 대단한 능력에 놀라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어이가 없어야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왕 PD 였다. 그가 호들갑을 떨었다.

“자기 진짜 대단하다! 근데 그런 걸 할 줄 알았으면 미리 말해주지. 깜짝 놀랐잖아!”

“아, 죄송해요. 저도 슛 들어가고 나서 떠올라서···. 하하···.”

백고운이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어쨌거나 완벽하게 멋진 그림을 하나 건졌으니 결과적으로는 좋은 것이었다.

“자기는 서커스 단원해도 되겠어.”

왕 PD 가 그렇게 칭찬 아닌 칭찬을 남겼고, 다른 스태프들도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모두가 그러고 있던 와중, 한쪽에 서 있던 조상경은 여전히 충격에 젖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왼손을 쓰는 건 어쩌면 할 수 있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저렇게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칼을 손 안에서 돌리는 퍼포먼스를 할 줄 안다니, 저건 단순히 왼손을 잘 쓴다의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진짜 대단한 친구구나.’

조상경이 느끼기에 연기를 잘하기 위해선 배우에게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센스.
꼼꼼한 시청자가 아니라면 배역마다 백고운의 손쓰는 방향이 다른지 아닌지 보통 관심도 없고 눈치도 못 챌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가 자세히 보지 않는 부분까지 치밀하게 신경 쓰는 게 바로 배우의 일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센스가 없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게 불가능하다.

둘째, 열정과 노력.

왼손잡이 연기를 하고 싶다고 왼손 쓰는 연습을 한다는 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건 어지간한
열정으로 되지 않는 일이었고.

마지막으로 타고난 신체 능력.

어떤 생각이 떠올랐고,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

그러나 결국 그걸 해내는 건 다른 문제다.

저런 기술은 타고난 운동실력이 없으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타고난 몸치가 춤을 못 추는 것이나 타고난 음치가 노래를 못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삼박자를 다 갖춘 친구였구나.’

센스가 있을 만큼 머리도 좋고, 열정도 많아 남들보다 배로 노력할 줄 알고, 그러면서 타고난 신체 능력까지
좋다.

그러니 조상경이 놀랄 수밖에.

자신이 했던 걱정은 다 기우에 불과했다. 백고운은 자신이 한가하게 걱정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이미 백고운은 조상경보다 훨씬 뛰어난 배우였다.

‘완전 너나 잘하세요, 였군.’

연차로 따지자면 백고운이 후배라서 내심 안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이리 보니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특히 조상경은 백고운과 같은 배역을 연기하기 때문에 비교당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조상경은 픽 웃으며 촬영장에서 조용히 빠져 나왔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빠지는 대신 곧장 집으로 향했다.

백고운이 저렇게 멋지게 오대수를 연기했는데, 조상경 역시 그 오대수를 마찬가지로 연기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 그걸 따라잡으려면 시간이 없었다. 일단 집에 가서 칼질부터 죽어라 해야 할 것 같았다.

숙제를 하나 얻은 셈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사랑의 오작교
73.

<천의 맛>의 장르는 힐링 로맨틱 코메디이다.

남자주인공인 ‘김리오(백고운)’는 옆집에 사는 여자주인공 ‘독고희(심미애)’를 짝사랑 한다.


그러나 김리오는 수줍음도 많은데다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고등학생일 뿐이다.

반면 독고희는 유명 매거진에서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음식 평론가로, 충분히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이다.

그래서 김리오는 먼발치에서 독고희를 그저 바라만 보며 짝사랑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유령인 ‘오대수(조상경)’이 지상을 떠돌다 김리오의 몸에 빙의된다.

오대수는 오직 그에게만 빙의될 수 있단 걸 깨닫고 “몸 좀 같이 쓰자”며 그에게 달라붙는다.

김리오는 처음엔 치를 떨며 싫어한다. 그는 부적을 갖고 다니는 등 자신의 몸을 지키려 노력하는데, 그때


오대수가 유혹적인 제안을 하나 한다.

―내가 살아 있을 때 잘 나가는 요리사였거든? 비록 내 레스토랑 개업 직전에 죽긴 했지만······ 어쨌든. 너


성공하고 싶지 않아? 내가 있으면 너 성공하게 해줄 수 있어. 내 소원은 별 거 아니야. 쉐프 소리 한 번은 죽고
싶거든. 너한테 나쁜 얘기는 아니지 않아? 네 꿈이랑 내 꿈이랑 같단 말이야. 네가 네 몸을 사알짝만 쓰게
해주면, 나도 네 꿈을 살알짝 앞당겨주겠다, 이 말이지.

그러면서 한 가지 더 덧붙인다.

―또 보니까 너 옆집 누나 짝사랑하고 있는 것 같던데. 그것도 내가 해결해줄 수 있다면 어때? 사실 내가 왕년에


한 가닥 하는 남자였거든.

그 말에 김리오는 솔깃 한다.

그래서 결국 둘은 거래를 맺게 된다. 김리오가 몸을 빌려주는 대신 일과 사랑 둘 다 쟁취할 수 있게 오대수가


도와주는 조건으로 말이다.

김리오의 몸에 들어온 오대수는 흐흐 웃는다.


“짜식아, 가망이 있든 없든 원하는 여자가 있으면 딱― 남자답게 고백하고 들이대는 거지. 혼자서 끙끙 앓고
있으면 그게 해결이 되냐? 하여간 요즘 애들은, 패기가 없단 말이야. 나만 믿어라, 후후.”

그러곤 그 길로 곧장 독고희에게 가서 대뜸 말한다.

“거기 예쁜 누나. 내가 누나 좋아하는데, 누나는 나 어떻게 생각해요?”

당연히 독고희는 그런 그를 ‘뭐야, 저 미친놈은’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오대수는 굴하지 않는다. 그는 끈질기고도 뻔뻔하게 무작정 들이댄다. 그 방식이 좀 옛날 방식이라
촌스럽기는 했지만.

독고희는 김리오(이지만 사실 오대수)를 또라이라 여기는데, 또 중간중간 진짜 김리오가 튀어나올 때면 답지 않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곤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네’라고 생각한다.

<천의 맛>은 두 남녀가 그렇게 고운 정, 미운 정 다 들면서 천천히 서로에게 빠지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촬영하는 동안 백고운은 ‘약간 올드하지만 호탕한 쾌남’과 ‘수줍어하는 연애 쑥맥 소년’을 오가며
탁월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 두 캐릭터가 어찌나 다른지, 연기하는 게 배우의 직업인 걸 아는 스태프들도 “진짜 같은 사람 안 같다”면서


감탄하고 다녔다.

오늘의 촬영이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스태프들에게 수고했다고 고개를 꾸벅이며 촬영장을 나왔다. 그때, 촬영장 한쪽에 서 있는 김건을 발견했다.

“어?”

“여, 고운이 하이?”

김건이 한 손을 들고 씩 웃으며 내게 아는 척 했다.

일단 보는 눈이 많았기에 나는 고개를 꾸벅이며 존대를 썼다.

“김 감독님? 여긴 어쩐 일로······.”

아무래도 내가 김철수란 게 비밀이다 보니 우리가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마 영화 <친구들> 촬영 이후 처음인 것 같은데. 연락 없이 찾아올 놈은 아닌데, 무슨 일이지?

한편 김건은 내 존대를 듣고 날 놀리고 싶었는지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씰룩였다.

그러나 그도 때와 장소를 가릴 줄은 알았다. 그가 큼큼 헛기침 하며 장난기를 누른 후, 내게 말했다.

“아니, 오늘은 너 보러 온 건 아니야.”

그때, 타이밍 좋게 심미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건이 오빠? 진짜 오랜만이다.”

김건을 발견한 그녀는 이쪽으로 오고 있었는데, 얼굴엔 반가움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쳤다. 그러니까 둘이 만나기로 했다 이건가?


김건도 반가운 듯 인사했다.

“그러니까. 십 년 만인가? 내가 알던 미애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지금은 심 배우라 불러야 하나?”

“뭐야, 그 낯간지러운 호칭은. 그냥 편하게 불러.”

“그래, 그럴게. 그보다 넌 진짜 하나도 안 변했다. 혹시 실제로 젊어지거나 한 건 아니지? 너는 막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다거나.”

“오빠도 참.”

심미애가 농담도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나는 김건이 날 두고 하는 말인 걸 알았다. 하여간 저게. 나는 가볍게 그를 흘겼다.

김건이 킥킥 웃더니 심미애에게 물었다.

“그보다, 고운이랑은 어때? 합이 잘 맞아?”

“응? 아.”

심미애는 나와 김건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약간 의아해했다가 뒤늦게 영화 <친구들>을 떠올렸다.

“고운 씨가 오빠 영화 찍었었지, 참. 응, 그럼. 잘 맞지. 그보다 둘이 많이 친한가봐.”

우리 둘은 살짝 뜨끔했다. 몇 마디 안 했는데, 티 났나?

“그래 보여?”

“응. 둘이 되게 오래된 친구 같아.”


심미애는 별 뜻 없이 말한 거겠지만, 그녀의 통찰력은 날카로웠다.

오용호와 다른 면으로 감이 좋은 친구였다.

김건이 어색히 웃으며 재빨리 말했다.

“아··· 영화 찍고 많이 친해졌어. 고운이가 나이만 어리지, 정신적으로 엄청 성숙해서 죽이 잘 맞더라고.


친구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너랑 고운이는 사랑 연기도 하는데.”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오빠, 나 그렇게 꽉 안 막혔어. 왜 혼자 변명 하고 그래.”

심미애가 웃었고, 김건이 ‘아, 그런가?’하고 멋쩍어했다.

나는 그런 둘을 보고 있었는데,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나서 슬그머니 웃음 지어졌다.

심미애는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동시에 강단 있는 성격이었고, 김건은 위로 누나들이 많아서 그런가 늘 막내 같은


면이 있어 여자들한테 잘 휘둘리는 성격이었다.

학창 시절, 같이 어울려 다녔을 때도 둘은 딱 저런 느낌이었다. 20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사람 성격이 어디


가지 않는구나 싶어서 새삼 웃음이 나왔다.

김건과 심미애는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튼 너 다시 복귀한 거 보니까 좋다.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내가 그동안 육아에 집중하느라 좀 바빴지. 나도 먼저 연락 줘서 고마워. 우선 어디 자리 옮겨서 얘기할까?”

“그럴까?”

둘이 근처에 프라이빗한 곳이 있는지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내가 불쑥 끼어들었다.
“저, 선배님, 감독님.”

둘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러면 제 집으로 안 가실래요?”

우리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김건이 속닥거렸다.

“웬일이야? 안 불편해? 괜찮겠어? 혹시 너, 미애한테 네 정체 얘기하려는 건 아니지?”

내가 심미애를 집에 들인 게 어지간히 놀랄 만한 일이었나 보다.

나는 ‘뭐래’하는 투로 피식 웃곤 일축했다.

“아니야. 그냥 오랜만에 동창회 하고 싶어서 부른 거야.”

그래도 우리 셋이 왕년에 친했는데, 나만 빼고 둘만 쏙 빠져서 회포를 푼다면 좀 서운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불렀다.

어차피 그녀와 있었던 과거는 다 옛일이니 이제와 서먹해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김철수란 것도 조심하면
들키지 않을 것이고.

그때 심미애가 집안 구경을 마치고 부엌으로 왔다. 그녀가 감탄했다.


“고운 씨, 집이 진짜 깔끔하네요. 남자인데 이렇게 정리정돈 잘하고 사람 처음 봐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요리도 직접 해먹어요?”

“원래는 잘 안했는데, 작품 들어가면서는 오히려 자주 해먹어요. 칼질 연습하느라 재료가 많이 나오거든요. 그걸


그냥 버리기도 뭣해서요.”

문제는 재료가 진짜 너무 많이 남아서 내가 먹을 것을 해도 남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나는 지인들을 부지런히 초대해 이것저것 요리해 먹였었다.

마침 지인들이 밥차를 보내주고 그럴 때라서 겸사겸사 그동안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답례하는 느낌으로 말이다.

당연히 편한 김건을 제일 많이 불렀지만 다른 사람들도 꽤 많이 불렀다.

오랜만에 표류와 이초희도 왔고, 기태성과 윤성광 등 소속사 식구들도 왔고, 오용호와 민하나 등 <레미제라블>
식구들도 왔었다.

이루다는 아무래도 여자라 혼자 내 집에 오면 곤란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파파라치한테 찍힐 수도 있고.

그래서 이루다를 부를 땐 이성한도 함께 불렀다.

둘은 나와 함께 PC 방 갔던 때 이후 두 번째로 함께 보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구면이라고 내 집에서 다시 만났을


땐 제법 친해진 듯 보였다.

아니, 친해졌다는 말로는 살짝 부족할 수도 있겠다.

의외로 둘 사이에 핑크빛 로맨스 기류가 좀 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성한은 까칠한 고양이 같은 것이, 처음엔 좀 다가가기 어려운 성격이지만, 반대로 마이페이스한테는 좀 약한
타입이었다.

왜, 내가 그를 무작정 끌고 타코집으로 데려갔던 그때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루다는 살갑고 활발한, 바로 그런 스타일이었다.

내가 둘을 초대한 날, 이루다는 이성한에게 이것저것 말 붙이면서 애교 있게 대화를 이끌어갔다.

이성한은 의외로 이성 쪽엔 면역이 없는지, 이루다의 그런 살가움에 좀 쑥스러워했다. 이건 정말 새로운 발견이긴


했다.

그리고 이성한이 앞에서는 툴툴거리면서도 뒤에서는 챙겨주는 타입 아니던가. 의자를 빼주거나 담요를 챙겨주는
등, 이성한이 말없이 사소한 배려를 해줄 때마다 이루다는 살짝 볼을 붉혔다.

내가 부엌에서 요리하는 동안 식탁에선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렇게 꽃이 피고 있던 거였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내가 사랑의 오작교가 된 셈이라고나 할까.

떨떠름하진 않았고, 그냥 보기 좋았다. 청춘이다― 싶고.

아무튼 말이 좀 샜는데, 그동안 그런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감독님, 선배님. 여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나는 김건과 심미애를 식탁에 앉히고 앞치마를 두르며 물었다.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나는 아무거나 괜찮아.”

“저도요.”

그래서 나는 일단 술안주로 먹기 괜찮은 메뉴들을 하기로 했다.

내가 요리하고 있는 동안 김건과 심미애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들려왔다.

“거의 ‘고운 바 bar’네.”

“벌써 연예계 쪽엔 유명해. 요리도 잘하거든.”

“정말? 이거, 기대 되는데.”

그런 가벼운 칭찬에서 그쳤다면 모르겠는데, 김건은 갑자기 내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미애 너도 촬영장에서 보니까 알겠지만, 얘가 진짜 독종이거든. 연습해야 한다고 일주일 내내 24 시간 칼질을


하고 있더라니까. 졸면서도 손을 움직일 정도였어, 아주.”

김건의 말은 사실이긴 했다.

그러나 김건의 말하는 폼이 뭐랄까, 소개팅 주선자가 상대의 칭찬을 늘어놓는 것 같은 모양새와 닮았다.

“알지, 고운 씨 열심히 하는 거.”

심미애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듯 했으나, 나는 눈짓으로 김건에게 그만하라고 타박했다.

나 참, 뭐하는 거야. 20 년 전도 아니고. 나야 그렇다 쳐도 심미애는 이미 결혼하지 않았던가. 이건 그녀에게도


실례였다.

내 꾸짖는 눈빛에 김건이 머쓱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마 김건도 반쯤은 무의식중에 그런 듯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는 옛날에도 나와 그녀를 이어주고 싶어서 은근히
그런 말들을 많이 던지곤 했었다.

옛날엔 김건이 우리의 사랑의 오작교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지금은 적절치 못했다.

내가 그것을 일깨우자 김건도 반성하는 듯 얼른 말을 돌렸다.

“그보다 남편이랑은 요즘 어때. 잘 지내?”

그런데 그때, 심미애가 뭔가 깨달은 표정을 했다.

“아, 내가 아직 말 안했구나.”

그녀가 살짝 웃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나 그 사람이랑 갈라섰어. 지금 이혼 조정 기간이야.”

덜컥.

나는 들고 있던 프라이팬을 놓쳤는데, 그것이 가스레인지 위에 떨어지느라 조금 큰 소리가 났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신경 쓰지 못했다.

나와 김건의 눈이 마주쳤다. 우리 둘 다 당황하고 있었다.


······으응?

해피엔딩과 배드엔딩
74.

<천의 맛>의 촬영이 시작된 지 어언 2 주 정도 흘렀다.

오늘도 촬영준비가 한창이었다.

나는 대본을 팔락거리며 대사를 눈에 담았다.

그러나 생각은 조금 딴 데에 가 있었다.

―잘해 봐!

김건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귀에 울렸다.

일주일 전쯤, 우연히 심미애의 이혼 사실을 알았을 때 김건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못내 즐겁다는 듯 구경꾼의
태도로 그는 히죽거렸다.

―다시 잘 해볼 기회네. 아, 재결합 가나요?

나는 속으로만 투덜거리듯 대꾸했다.

‘잘해보긴 뭘 잘해봐.’

이미 말했듯, 벌써 10 년도 더 전의 일이다. 한때 그녀를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은 그저 친한 친구


같은 감정뿐이다.

‘하여간 김건 걔는 늘 오바라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괜히 좀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왜 막상 당사자는 생각이 없는데 옆에서 호들갑 떨면 ‘어라 그런가?’하게 되는 마음이랑 비슷하달까.

그때, 생각의 고리를 끊듯 차의 운전석 문이 열리며 매니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고운아, 이제 촬영 들어가야지.”

“네, 형.”

나는 대본을 내려놓고 외투를 껴입으려 하는데, 매니저가 그런 날 빤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무슨 고민 있어?”

“네?”

“고민 있는 것 같아서. 대본 말이야. 아까도 그 페이지였는데, 지금도 그 페이지잖아. 왜, 대사가 잘 안 외워져?


아니면 고민 때문에 대본이 눈에 안 들어와?”

확실히 유능한 매니저라 그런지 소속 배우의 미묘한 변화도 금방 캐치한다.

간파당한 것에 살짝 당황했지만, 나는 곧 익숙히 표정을 갈무리하며 아무렇지 않게 웃어보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대본은 이미 다 외웠어요.”

“응? 진짜?”

“네, 그럼요.”

나는 직접 매니저에게 확인시켜주었다.
매니저가 대본을 갖고 갔고, 나는 방금까지 보고 있던 씬의 대사를 줄줄 읊어주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대사를 뱉자 매니저가 ‘진짜네’ 했다.

“하긴, 고운이 네가 대사를 안 외웠을 리가 없지.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그의 말대로다.

대사를 안 외워서 촬영장에 오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가사를 숙지하지 못하고 무대를 오르는
가수랑 비슷하다. 프로가 아니란 소리였다.

아무리 내 개인적인 고민이 있다고 해도 공적인 자리까지 끌고 올 수는 없다. 촬영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더욱 그러하다.

대사는 이미 어제 다 외웠다. 그럼에도 촬영 직전까지 보고 있는 건 그냥 더 완벽하게 준비하고자하는 습관 같은


것뿐이었다.

“그러면 이거 외우려고 계속 보고 있던 거였어? 다른 고민이 뭐 있는 건 아니고?”

매니저가 감탄 반 의아함 반인 표정으로 대본을 돌려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으며 대답했다.

“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재빨리 덧붙였다.

“오늘 중요한 장면 찍는 날이잖아요. 그래서 약간 긴장한 것뿐이에요.”

내 말에 매니저가 그제야 납득한 듯 했다.


“아, 그렇겠네.”

오늘 찍는 장면은 감정을 터트리는 장면으로, 드라마 전개 상 꽤나 중요한 장면 중 하나였다.

여태 하던 연기가 힘을 좀 뺀 코메디 연기라면, 오늘은 절절한 감정이 필요한 정극 연기랄까.

매니저가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 나를 다독였다.

“고운이 너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니까, 평소 하는 대로만 하면 돼. 걱정 말고.”

“네, 감사해요.”

살짝 웃으며 벤에서 내렸다. 그리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나는 일단 오늘 찍을 장면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한편 먼저 와서 이전 씬을 촬영을 하던 심미애는 촬영장비가 재정비 되는 동안 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왕 PD 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내가 자기 감정 잡고 있는 데 방해한 거 아니지?”

“아니에요. 무슨 일이세요?”

“아니 별 건 아니고··· 롱테이크 진짜 괜찮은지 물어보려고. 자기 너무 힘들까봐.”

왕 PD 는 일전에 이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을 것이다 말한 적 있었는데, 이제 와서 약간 걱정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장면은 비를 맞으면서 찍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겠다고 하면 심미애는 계속


비를 맞으면서 촬영을 해야 하는 셈이다.

즉, 힘든 촬영이다 이 말이다.

어차피 일이지 않냐고? 다른 배우들이었다면 모를까, 무려 심미애지 않은가.

촬영장에서 아무리 감독이 갑이고 배우가 을이라지만 심미애처럼 연차 높은 배우라면 말이 다르다. 왕 PD 같은


고참 피디도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심미애는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저 제 유명세 과시하려고 드라마 찍는 거 아닌 거 아시잖아요. 연기하려고 나온 거지.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다른 배우들이랑 똑같이 대해주세요. 그리고 전 오히려 좋은 연기 나올 것 같아서 기대되는걸요.”

“자기······.”

왕 PD 가 찡 하니 감동 받은 듯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았다.

그가 고마움과 사랑을 한껏 쏟아낸 후 돌아갔고, 심미애는 그제야 가만히 감정을 잡았다. 그리고 달달 외운
대사를 입속으로만 다시 한 번 중얼거리며 복기했다.

왕 PD 에게 한 말처럼, 비를 맞는 것 자체는 문제 되지 않는다. 감정을 잡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비를 맞으면 자연히 체온이 떨어지고, 그러면 근육이 딱딱하게 경직되어서 대사가 씹히는 일도 많이
일어난다.

그러기 위해서 입을 계속 풀어두는 것이었다.

심미애는 딕션이 좋기로 유명한 배우였다. 공백기가 길긴 했지만, 그것을 이유로 실력이 느슨해졌다는 평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같이 출연하는 배우가 백고운처럼 연기를 잘하는 신예 배우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비교될 수야 없지.’

약간의 부담이 주는 가벼운 긴장이 느껴졌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 가벼운 긴장은 촬영에 대한 기대감을 주기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가 오래 기다렸던 연기지 않은가.

야간 촬영이라 대기 시간이 길었다. 해가 지고 골목이 어둑어둑해졌다.

살수차가 설치되고, 백고운도 곧 도착해서 대기했다.

촬영 스탠바이가 끝난 후, 심미애와 백고운은 카메라 앞에 섰다.

오늘따라 백고운의 말수가 적은 것 같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 역시 감정선을 잡느라 그렇겠거니 하면서
심미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좋아요, 그러면 갑니다. 씬 12 테이크 1, 레디 액션!”

이번 장면은 오늘따라 고단한 하루를 보낸 ‘독고희’가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김리오’에게 그만 못 참고


짜증을 터트리는 장면이다.

살수차에서 물이 쏟아졌고, 심미애가 독고희로 분한 채 골목을 성큼성큼 걸었다.

차가운 빗물이 옷을 적셨다. 뼛속까지 시렸다.


그때 김리오(백고운)가 골목을 뛰어가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멈춰 섰다. 그는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책가방으로 비를 가리고 집으로 뛰어가던 도중이었다.

“기자님, 괜찮으세요?”

자심도 쫄딱 젖어 교복 와이셔츠가 피부에 달라붙은 주제에 그는 독고희(심미애)를 걱정했다.

“감기 걸려요. 저, 잠시만 이리로 오세요.”

김리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곧 지붕이 있는 처마를 발견했다. 일단 급한 대로 비를 피하기 위해서 그가


그녀를 그쪽으로 부르려 했다.

평소라면 어이없어하면서도 순순히 끌려가줬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 사소한 것에도 짜증이 솟았다.

독고희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필요 없어. 넌 네 갈 길 가.”

뾰족한 말에 김리오는 놀라지만, 그럼에도 상처 받는 대신 계속 그녀를 따라왔다. 그리고 젖으면 안 된다고


안절부절 못하며 종알거렸다.

심지어 안에 흰 티를 받쳐 입었다며 비가림막을 해주기 위해 제 와이셔츠라도 벗을 태세였다.

독고희는 결국 못 참고 화를 쏟아냈다.

“넌 내가 장난치는 것처럼 보이니? 내가 재밌어?”

자신은 직장에서 온갖 힘든 일을 다 겪는데. 이미 자신은 신경 쓸 게 너무 많아 피곤한데.


그런데 저 어린 철부지는 마냥 행복해 저 좋다고 따라다니는 게 괜히 귀찮고 짜증났다.

이게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분풀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그녀도 알았다. 그럼에도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바탕 짜증을 쏟아내고 나자 뒤늦게 번쩍 정신이 들었다.

자신이 멋진 어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애한테 이렇게 막무가내로 감정의 배설물을
쏟아낼 만큼 저질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독고희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못난 모습을 들킨 것 같아 더 얼굴이 굳어졌다.

“······따라오지 마.”

독고희는 빗속에 김리오를 내버려두고 등을 돌려 먼저 걸어갔다.

카메라가 그녀의 뒤를 잠시 묵묵히 따라갔을 때였다.

백고운이 다시 카메라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심미애의 앞을 막았다.

“······!”

그녀는 그가 상처 받고 갔을 줄 간 줄 알았기에 깜짝 놀랐다. 그런데 그가 들고 온 건 우산이었다. 그는 그


사이에 편의점을 갔다가 그것을 사온 것이었다.

그가 우산을 펼쳐 그녀의 머리 위에 씌웠다.

“···이거, 쓰고 가세요. 이미 다 젖었지만······ 그래도 더 비 안 맞고 가셨음 해서요.”


그의 손이 덜덜 떨렸지만 그는 용기를 냈다. 그가 우산을 억지로 심미애의 손에 쥐어주었다.

“······.”

“······.”

둘의 눈이 잠시 마주쳤을 때였다.

백고운이 뭔가를 발견하고 살짝 망설였다.

그리고 불쑥 손을 뻗어 살짝 흘러내린 심미애의 옷깃을 추슬러주었다.

“······추워요.”

심미애는 아닌 척 했지만 내심 놀랐다.

그저 옷깃을 추슬러주는 것뿐이지만, 그 손길에서 감정이 절절히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김리오’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소년이다. 원래 그의 성격이라면 이렇게 불쑥 신체접촉을 해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사랑을 얻고 싶어서 약간 떳떳하지 못한 짓(그러니까 오대수에게 몸을 빌려주는 짓)까지 불사


할 정도로 감정의 온도가 높은 친구다.

사춘기 남고생 특유의 서툴면서도 묘하게 직진인 구석이 있는 그런 태도가 방금의 손짓으로 잘 느껴졌다.

역시 연기 잘하네, 라고 생각하면서 심미애가 백고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약간 당혹스러우면서도 울렁이는 듯한 표정 연기에 신경 쓰면서.


이 장면은 나중에 드라마에서 ‘독고희’가 처음으로 ‘김리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여는 장면으로 기억된다.

촬영장에는 비가 억수같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때, 왕 PD 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듯 끼어들었다.

“컷, 좋아요!”

나와 심미애는 꿈에서 깨는 것처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연기에 과하게 몰입하다보면 종종 장면이 끝나고도 잠시 멍할 때가 있었다.

우리 둘은 잠시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수고했어요.”

심미애가 친근하게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방금 연기했던 캐릭터의 감정의 잔열이 아직 남아 있어서일까.

나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충동적으로 그녀를 부르려 했다.

그때, 나보다 한 발 먼저 한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미애 씨.”

“어?”
심미애가 그쪽을 돌아보고 환하게 웃었다.

촬영장 한쪽엔 한 중년 남자가 서 있었는데, 그가 심미애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언제 왔어요?”

심미애는 그에게 다가갔고, 둘은 잠깐 몇 마디 나눴다.

멀리서만 봐도 둘이 화기애애한 게 느껴졌다.

세상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아마 둘은 서로를 조심스럽게 알아가는 단계일 것이다. 최소, 그와 비슷한 관계처럼 보였다.

“······.”

서운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가슴 속에 남아있던 묘한 감정이 그제야 깨끗하게 사라졌다.

미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오히려 누가 딱 정의를 내려준 것처럼 명쾌한 기분이었다.

나는 옅게 픽 웃었다.

‘그래, 아무래도 그런 건 진짜 드라마지.’


나는 지금 백고운이지, 더 이상 김철수는 아니었다. 나 역시 내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내가 새로운 삶을 얻은 것처럼, 이혼한 심미애 역시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을 것이다.

함께 같은 길을 걸었던 때도 있지만, 지금은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해야 할까.

갈라진 길을 죽 걷다보니 어느새 서로는 저만치 멀어졌지만, 그게 꼭 비극이란 뜻은 아니었다. 인생사는 드라마와
달리 해피엔딩과 배드엔딩 둘로만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비록 잠깐 헷갈리기는 했다만 말이다.

그건 어느 정도 김건의 탓도 있었고, 타이밍이 공교로운 탓도 있었다.

하필 심미애와 내가 로맨스 드라마를 찍게 됐으니까. 평소 배역의 감정에 너무 깊게 빠져들지 않게 노력하는데,


이번엔 조금 헷갈렸다.

그러나 지금은 흐렸던 구름이 개인 듯한 기분이었다. 비로소 좀 시원했다.

나는 중요한 장면을 잘 소화했다는 뿌듯함과, 감정이 명쾌해진 만족감으로 어깨를 살짝 폈다.

전생의 인연을 터놓는 건 김건 하나로 족하자.

지금은 옛 친구를 순수하게 응원하기로만 했다.

막내 온 탑
75.

어느 날, 이성한에게서 연락이 왔다.


―큼, 촬영 때문에 많이 바쁘냐?

“응? 아니, 아직 드라마 방영 전이라 그렇게 바쁘지는 않아. 왜?”

―잘 됐네. 나도 오랜만에 쉬는 날이라서 놀러 나갈까 하는데, 너도 나와라.

이성한이 먼저 놀자고 얘기해온 건 처음이었다.

마침 스케줄도 없는 날이고 해서, 나는 그가 일러준 곳으로 나갔다.

그리고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놀랐다.

“어? 루다?”

“아하하··· 오빠 안녕하세요?”

거기엔 이성한과 함께 이루다도 있었다. 이루다는 조금 민망한 듯이 내게 인사했다.

그러고 보니 이성한이 전화했을 때, 그는 동행이 있을 거라고 말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 동행이 이루다였을 줄이야.

‘아하.’

나는 그제야 상황을 완벽히 파악했다.

아무래도 남녀 둘이 놀러나가면 데이트니 뭐니 오해받을 위험이 많지만, 셋부터는 친구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이성한도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아마 자기 속내가 뻔히 보인다는 걸 느낀 듯 했다.


나는 몰래 픽 웃었다.

어찌 보면 날 이용한 셈이었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둘 다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이라 그런가. 그냥 조카들의 연애담을 보는 것처럼 조금 귀여웠다.

우리는 식당으로 걸어갔다.

웃긴 건 나는 이미 이 모임의 목적을 눈치 챘는데, 이성한과 이루다는 그걸 계속 숨기려 했다는 것이다.

둘은 날 사이에 두고 걸었는데, 둘 다 계속 내게만 말을 걸뿐, 둘끼리는 전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묘하게 서먹하고 어색한 걸 보니 둘 다 쑥스러움을 어지간히 타는 것 같았다.

‘보아하니, 사귀고 그런 건 아닌가 보네.’

하긴 이미 그 정도 관계로 발전했다면 그냥 남들 눈 안 띄는 데에 가서 둘이 놀았을 것이다.

지금 둘 다 서로 마음은 조금 있는데 눈치를 보느라 괜히 내 얘기를 꺼내서 만난 것 같았다. 얼굴만 봐도 좋을


때라, 풋풋하네.

어쨌거나 둘 다 티내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아서 일단 나도 모른 척 했다.

“요즘 촬영하느라 많이 바빠요?”

“촬영장에서 뭐 없었어?”

둘은 내게 이야기를 재촉했다. 뭔가 이야깃거리를 찾는 듯 했다.


그러나 정말로 촬영만 하는지라 재밌는 이야기가 없었다.

“음······.”

난처함에 눈을 굴리다가 문득 며칠 전의 일이 생각났다.

“아 맞다. 나 차였어.”

나는 가볍게 말했다.

사정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으므로(내가 백고운인 이상 심미애를 두고 ‘옛 여자친구를 작품에서 다시


만났는데···’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냥 뭉뚱그려서 ‘차였다’고 에둘러 표현했다.

그것을 말한 건 별 뜻이 없었다. 그냥 ‘이런 일도 있었다?’라고 지나가는 투로 말한 것뿐이었다.

실제로 그건 해프닝에 가까웠다. 내가 좀 착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나중에 떠올리면 민망함 반과 우스움 반을 담아 ‘그땐 그랬었지’하고 장난스럽게 추억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이성한과 이루다가 화들짝 놀랐다.

“······!!”

둘이 서로의 눈치를 봤다. 둘의 얼굴에 죄책감이 어렸다.

마치 친구가 괴로운 일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자기들끼리만 하하호호해서 미안해하는 것 같은 얼굴이랄까.


심지어 그런 친구를 자신들의 애정사에 이용하려 해서 더욱 양심에 콕콕 찔려하는 표정이었다.
둘이 갑자기 시무룩해지더니 급하게 사과했다.

“······미안.”

“죄송해요, 오빠.”

응?

한편 그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던 나는 당황했다.

어라, 나 잘못 말한 건가?

이거, 어째 눈치를 준 것 같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볼을 긁적였다.

그건 다른 방향으로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게 됐다.

“네? 예능이요?”

윤성광은 이성한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면서 설명했다.

“네. 성한 씨가 이번에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가는데, 고운 씨도 같이 나와 줄 수 있냐고 섭외가 왔어요.


일종의 절친 특집 같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조금 의아했다.
“의외네요. 걔가 그런 성격이 아닌데······.”

이성한은 나와 저를 두고 ‘어머, 둘이 친하네’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곧장 ‘안 친하거든?!’하고 대꾸하는


스타일이었다. 솔직하지 못해서 쑥스러운 마음에 괜히 까칠하게 표현하는 성격이라고 할까.

그런 이성한이 인터뷰처럼 내밀한 자리라면 모를까, 전국에 방영되는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 우리 사이를
자랑한다고 날 부를 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아니, 애초에 걔가 그런 예능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의외의 일이었다. 낯선 사람들 많이 있는 자리 싫어하지


않나?

그때, 내가 뜸을 들이는 걸 예능에 대한 부담감이라고 생각했는지 윤성광이 말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 프로그램이 힐링 예능이거든요. 왜, <삼시세끼>가 히트 치고 나서 그


비슷한 예능 포맷이 유행인 거 알죠?”

“아, 네. 알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는 토크 중심의 예능이나, 게임 위주의 버라이어티 예능이 많았다.

그런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자극적인 이야기나 과장된 퍼포먼스를 잘하는 개그맨들이 활약을 떨쳤다.

그런데 요즘엔 리얼리티 예능이라고, 그저 한적한 곳으로 여행 가서 밥 해먹는 게 다인 예능들이 새롭게


급부상했다.

종편 채널로 이적한 한 예능 PD 가 처음 시도한 포맷으로, 처음엔 실험적이란 평이 많았는데 의외로 엄청 히트를


쳤다.

그 이후 유행이 번져서 이제는 지상파에서도 많이 시도하고 있는 예능 포맷이었다.


윤성광이 이어서 말했다.

“요즘 드라마 촬영 때문에 많이 바빴잖아요. 요리 연습이다 뭐다 하면서 쉴 틈도 없었고. 어차피 여행가서 밥


먹고 오는 게 다니까, 촬영이지만 쉬고 온다는 생각으로 한 번 나가봐도 될 것 같아요.”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드라마 홍보 겸 갔다 오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음, 그럴까요?”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네, 그러면 그럴게요. 한 번 나가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그리하여 나는 예능 <여행을 떠나요>에 이성한과 함께 게스트로 출연하게 됐다.

나와 보니 왜 이성한이 날 불렀는지 어렴풋이 눈치 챌 수 있었다.

이성한은 오프닝 때부터 유독 내게 친절했는데, 그건 카메라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내 기분을 살피는 것에 가까웠다.

그제야 나는 저번에 이성한을 만났을 때, 내가 차였다느니 뭐니 했었다는 걸 떠올릴 수가 있었다.

‘그게 신경 쓰였던 거구나.’


어쩐지. 이성한이 이럴 놈이 아닌데 왜 이러는 걸까 했다.

평소에는 있는 대로 까탈은 다 부리더니. 막상 내가 뭔 일이 생겼다고 하니까 답지 않게 눈치를 살살 보는 게


은근히 웃겼다.

아무튼 이성한 덕분에 오랜만에 일만 하던 루틴에서 벗어나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됐으니, 고마운 부분이었다.

MC, 그리고 다른 고정 출연자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한적한 시골에 도착했다.

MC 가 말했다.

“이제 여기서 재료를 직접 구해야 하거든요. 야채 팀이랑 고기 팀으로 나눠야 하는데, 성한 씨랑 고운 씨는 어떤


게 더 좋으세요?”

이성한이 먼저 대답했다.

“고기면 물고기를 잡는 거죠? 저는 그쪽으로 할게요. 야채 종류를 잘 몰라서 아마 몸 쓰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이성한이 이어서 내게 물었다.

“너도 고기 팀으로 갈 거지?”

이성한은 내가 야채 종류에 대해서는 잘 모를 거라 자연스럽게 전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MC 와 고정 출연자, 그리고 이성한과 나를 합해서 모두 일곱이었는데, 그 중 내가 가장


어렸다.
편견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신세대일수록 도회적일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으니까 그런 듯 했다.

그러나 나는 빙긋 웃고 대답했다.

“저는 야채 팀으로 할게요.”

“오, 괜찮겠어?”

내 자신감에 몇몇은 나더러 아무거나 뽑아오면 안 된다고 놀렸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야채 팀 멤버들과 함께 텃밭으로 갔을 때 쏙 사라졌다.

“이건 쪽파고, 이건 마늘이에요. 저건 무고, 이건 상추에요.”

나는 텃밭에 있는 야채들을 단번에 맞췄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랐다.

“고운이 이런 걸 어떻게 다 알아? 주말 농장이라도 했었어?”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나중에 나이 들면 제 텃밭을 가꾸고 싶단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사실 생각에 그친 게 아니라, 실제로 한 적도 있었다.

전생에서 내가 얼굴에 화상을 입고 은퇴했을 때, 나는 주로 집에만 있었다. 집에서 특별히 할 것이 없다보니


자연히 취미가 그런 쪽으로 많이 쏠렸다.

왜, 은퇴한 아버지들이 화초 가꾸기에 공을 들이게 되는 것과 비슷한 거였다.

텃밭에서 직접 야채를 따고 뽑다보니 어느새 바구니가 가득 찼다. 멤버들과 나는 촬영장인 민박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곧 고기 팀도 도착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한 마리도 못 잡고 허탕 쳤다.

사실 숙련된 낚시꾼이 아니고서야 초보자가 먹을 만큼 고기를 낚아 올리기는 어렵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도 사실 이런 예능 프로그램이 다 그러하듯, 분량만 뽑으면 되는 거였다. 다행히 근처에 어시장이 있어서
고기는 거기서 조달해왔다.

이제는 요리를 해야 할 차례였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사온 물고기와 낙지가 아직 살아 있어서 꿈틀거린다는 거였다.

사실 내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는데, 다른 멤버들에겐 어지간히 심각한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다들 비늘과 빨판에 손을 대기만 해도 자지러지면서 기겁했다. 아무도 쉽사리 손을 못 대고 처치곤란인 얼굴로


그것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또 한 번 나서게 됐다.

“저, 제가 할까요?”

“진짜? 고운이 이거 할 수 있어?”

“네. 제가 작품 때문에 요리 아카데미 다닌 적 있거든요.”

“아! 맞네. 이번에 찍는 드라마에서 쉐프 역 맡았지?”

사람들의 놀라움 속에 나는 칼을 잡았다. 아무렇지 않게 재료를 손질할 때마다 등 뒤에서 감탄사가 연달아 터졌다.

일이 그렇게 되다보니 자연스레 내가 일일 집도 요리사가 되었다.


나는 요리를 했고, 일곱 명이 먹을 만한 훌륭한 식사가 나왔다.

이미 예전에도 사람들을 초대해 요리해 먹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반면 멤버들은 그런 내가


신기한 듯 했다.

“와, 진짜 맛있네. 원래 요리가 취미였어?”

“취미는 아니었는데, 배우고 하다보니까 익숙해졌어요.”

“그것도 대단한데? 아직 스물넷이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벌써 이런 걸 다 잘하다니, 놀랍다.”

보통 혼자 오래 여유롭게 살다보면 어느 정도 살림에 익숙해진다. 나는 그저 그 기간이 길었을 뿐이었다. 요리는


작품 덕을 많이 봤고.

어쨌거나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이것저것을 척척 잘해내다보니 나를 다재다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심지어 밤에는 작은 미니게임을 했는데, 거기서도 내가 퀴즈를 싹쓸이 했다.

원래 이런 데서 하는 게임이란 뻔한 데가 있다.

나라의 수도를 알아맞히는 게임을 먼저 했고, 옛날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노래의 제목을 맞추는 게임을 이어
했다.

대본을 외우고 그러다보니 기억력은 좋은 편이라 수도 게임은 어렵지 않았고, 옛날 작품의 제목을 알아맞히는
게임은 내가 그 시대를 직접 건너왔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어렵지 않았다.

멤버들이 입을 떡 벌렸다.

“고운이 못하는 게 뭐야? 얼굴도 잘생겨, 키도 커, 연기도 잘해, 머리도 좋은데, 요리까지 잘해. 완전 막내 온
탑이네.”

“원래 요즘은 막내가 다 잘하잖아.”


그들의 칭찬에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춤은 잘 못 춰요.”

“아, 춤이야 좀 못 춰도 되지! 그거까지 잘하면 안 돼!”

멤버들이 호들갑 떨며 내게 손을 저었다.

그런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무르익어가는 분위기 속에 우리는 화기애애했다.

사실, 공통점이 많으면 대화하기 편한 법이다.

그리고 나는 일단 몸은 어렸지만, 실제로는 멤버들과 비슷한 나이 또래였다. 그러니 대화가 잘 통할 수밖에.

내 활약에 오프닝 때 나더러 ‘예능 초보’라고 챙겨주겠다던 이성한만이 꿀 먹은 사람 마냥 당혹스러워할


뿐이었다.

심미안
76.

밤이 깊어갔다.

슬슬 오늘 치 촬영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가고 있었다.

우리는 마루 평상에 둘러앉아서 토크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때 MC 가 말을 꺼냈다.

“그러면 성한 씨는 뭐 개인기 같은 거 없어요?”

오늘 촬영에 대한 소감을 나누다가 이성한이 ‘활약을 못해서 분량 걱정이 좀 드네요’라는 농담을 던진 이후의
말이었다.
MC 가 웃으면서 이성한을 부추겼다.

“모창이나 성대모사 같은 거 연습한 거 있지 않아요? 한 번 해봐요.”

짓궂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분량을 챙겨주겠다는 배려이기도 했다.

기실, 배우나 가수할 것 없이 연예인이라면 필연적으로 장기자랑을 해야 할 자리가 꽤 생긴다. 싫든 좋든 말이다.


그래서 연예인들은 따로 개인기를 한두 개씩은 꼭 연습하곤 했다.

이성한 역시 아예 준비한 것이 없는 건 아닌지, 조금 쭈뼛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몇 개만 해보겠습니다.”

그가 목소리가 개성적인 배우들의 성대모사 몇 개를 선보였다.

“봉골레 파스타 하나―.”

“오오, 똑같다!”

멤버들이 감탄했다. 다행히 이성한은 성대모사에는 꽤 소질이 있었다.

다른 멤버 중 몇몇이 자기들도 같은 성대모사 할 수 있다고 따라 나섰다. 그러나 형편없는 싱크로율에 금방 다른


멤버들에게 빈축을 샀다.

하지만 원래 이런 데에서 하는 개인기란 싱크로율이 안 높아도 분위기만 띄우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설픈
성대모사도 나름의 웃음을 줄 수 있는 법이었다.

모두들 와르르 한바탕 웃은 다음, MC 가 이어서 내게도 물었다.


“혹시 고운 씨도 장기 있어요?”

“음, 저는······.”

나는 잠시 말을 끌었다.

사실 나 역시 남을 따라하는 데에는 자신 있었다.

이번 <천의 맛> 드라마에서도 나는 조상경의 말투와 몸짓, 습관 등을 똑같이 따라 해서 연기하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들이라고 따라하지 못할까.

하지만 앞서 이성한이 성대모사를 잘 했는데, 굳이 나도 같은 걸 선보여서 그를 기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내 장기는 그것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웃으며 말을 부드럽게 돌렸다.

“성대모사 말고, 노래는 어떨까요? 아까 보니까 저기에 기타가 있던데요.”

“기타 칠 줄 알아요?”

“네, 조금요.”

멤버들이 ‘오오’하고 반응을 보였다. 다행히 이것도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타를 잡았다.

일전에 <운명의 표현>을 찍었을 때, 회식자리에서 버스킹으로 즉석에서 부족한 회식비를 채웠던 적이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춤은 못 춰도 노래에는 자신이 있단 뜻이었다.


나는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원래 이런 야유회 같은 곳에서 부르려고 외워둔 연주였으므로, 어찌 보면 오늘 소기의 목적을 이룬 셈이었다.

내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멤버들은 손을 모아 오른쪽 왼쪽으로 흔들거리며 장단을 맞췄다.

그리고 노래와 연주가 끝났을 때, 박수가 짝짝짝 터져 나왔다.

“와, 고운이 노래도 엄청 잘하네. 진짜 못하는 게 뭐야?!”

나는 웃으며 살짝만 어깨를 으쓱였다.

멤버들의 과장 섞인 반응이 싫지 않았다.

나와 이성한이 나온 <여행을 떠나요> 회차는 2 주 뒤에 방영되었다.

당연히, 가장 반응이 뜨거운 건 단연 내 팬클럽이었다.

[우니 예능 나온 거 처음이지 않아? 실화냐?]

[소원 성취했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소속사가 고운이 신비주의 컨셉 버렸나? 암튼 품 매니지먼트 감사합니다 어디 계신지 모르겠지만 대충


동서남북으로 절하고 있음]

[ㅋㅋㅋㅋ나도임... 앞으로도 자주 좀 예능 출연도 시켜주고 그러세요... 제발...]

몰랐는데, 내게 신비주의라는 별명이 있었더랬다. 내가 SNS 도 따로 안 하고 예능에도 잘 안 나가서 그런 별명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러다보니 내 예능 출연 소식에 팬들은 열광했다.

[우리 배우님 못 하는 게 대체 뭐야!! 요리도 잘하고 똑똑하고 와중에 노래까지 잘해!!]

[노래 레알 잘한다 ㅜ 이거 팬미팅 때 들을 수 있는 각?]

[요리할 때 팔에 핏줄 돋은 거 봤음?? 너무 섹시해 ㅠㅠ 이거 짤 있나요?? ㅜㅜ]

[↳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
scode=mtistory2&frame=httpsFEdX98vA84IL9%1ima.gif ^^]

[↳감사합니다 ㅠㅠㅠㅠㅠ]

[↳엇 나도 보내주려고 했는데 한 발 늦었다 쩝]

[↳이미 있는 짤이지만 또 저장합니다... ㄱㅅㄱㅅ... 같은 짤을 보정만 다르게 몇 개씩 저장하는지 모르겠음...


ㅎ]

[↳헐 나돈데ㅋ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ㅋ]

[와 우니 이번 작품 쉐프로 나오지 않아? 저 모습을 앞으로 계속 볼 수 있단 거잖아. 미친... 내가 심장마비로


죽으면 범인은 백고운 때문이야....]

약간 낯간지러운 반응이 많았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해줘서 다행이었다.

앞으로도 자주 예능에 나오면 좋을 것 같았다. 원래의 작품 홍보도 톡톡히 한 듯 하고.

대중들의 반응 역시도 좋은 편이었다.

[백고운 진짜 다재다능하다;;;]

[원래 별 생각 없었는데 은근히 호감이다... 뭐야 나 감겼나?]

[좀 잘생기면 하나 정도는 부족해야 인간미 있고 이런 거 아닌가? 저 얼굴에 연기도 잘하는데 인성까지 좋음?
하.. 인생 ㅈㄹ 불공평하네.. 백고운 혼자만 인생 2 회차임 ㅅㅂㅠ?]

의외로 본질을 꿰뚫는 댓글도 발견할 수 있었다.

살짝 뜨끔했다.
그런 해프닝을 제외한다면 내 첫 예능 출연은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셈이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예능에 출연했던 사건은 또 다른 연쇄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네? OST 요?”

촬영장에 갔더니, 우리 드라마 음악 감독이 갑자기 날 불렀다. 그리고 하는 말이 OST 작업에 참여해보지
않겠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내가 놀라 되묻자 음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에 <여행을 떠나요> 거기 나온 거 봤거든. 근데 노래 엄청 잘하던데? 노래를 그렇게 잘하는지


몰랐거든.”

“아······.”

나는 잠시 망설였다.

물론 요즘은 배우들이 직접 OST 녹음에 참여하는 일이 심심찮게 있기도 하고, 내가 나오는 드라마니까
의미적으로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비전문가인 내가 작품의 분위기를 망치지는 않을까 우려스럽기도 했다.

나보다 더 잘 부르는 가수가 많은데, 그 분들이 더 작품에 어울리는 노래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때, 음감이 내 걱정을 알아차린 듯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단독 타이틀곡은 아니고 수록 트랙으로 들어갈 곡이야. 기존에 있는 OST 의 커버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원래 미애 씨 테마 곡 있잖아? 그걸 남녀 성별을 바꿔서 개사한 버전으로 곡 하나를 더 만들까 생각하고 있었거든.
나는 그걸 고운이 네가 불러도 좋을 것 같거든.”

아, 나는 그제야 음감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4 년 전쯤인가.

<시크릿 가든>이라는 드라마에 <그 여자>라고 유명한 OST 가 있었는데, 그 노래의 남자 버전인 곡 <그 남자>
라는 OST 를 남자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분이 직접 불렀었다.

요즘은 한국 드라마가 해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한류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배우들이 직접 OST 를
부르는 일이 많아졌다.

왜냐하면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 아예 OST 콘서트를 단독으로 여는 일이 꽤 있는데, 그런 곳에 배우들이 직접


가서 노래를 부르면 팬 서비스도 되고 하니까 말이다.

말하자면 음악 감독은 지금 팬 서비스에서 넣을 곡을 내가 불러주면 좋겠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것이라면 부담이 덜했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그렇게 할게요.”

물론 그렇다고 바로 녹음을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일반 사람들 기준에서는 내가 노래를 잘한다 하지만, 노래를 직업으로 삼는 가수들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윤성광은 내 얘기를 듣고 선뜻 말했다.

“그렇다면 보컬 트레이너를 붙여줄게요. 안 그래도 마침 잘 가르치는 사람을 내가 한 명 알거든요.”

“네, 부탁드릴게요.”

우리 소속사는 가수 배우 할 것 없이 키우는 연예전문기획사가 아니라 배우만 전담하는 소속사였다. 그래서 회사


내부에 관련된 음향 설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직접 보컬 트레이너 선생님에게 레슨 받으러 갔다.

매니저가 차를 세우며 나를 깨웠다.

“고운아, 일어나. 도착했어.”

“헛, 네.”

나는 퍼뜩 잠에서 깨서 일어났다. 그리고 작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쫙 폈다.

어제 새벽 촬영을 한 터라 아직 졸음이 묻어났다.

작품에 한 번 들어가면 워낙 바쁜 강행군이 이어지다보니, 어쩔 수 없이 대기 및 이동 시간마다 틈틈이 쪽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매니저는 레슨실 안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비어있을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연습실에는 사람이 꽉 차 있었다.


보컬 트레이너 선생님이 안쪽에서 나오더니 미안한 듯 거듭 사과했다.

“미안해요. 혹시 십 분 정도만 기다려줄 수 있을까요? 지금 다른 팀 레슨 중인데, 아직 안 끝나서요.”

나와 매니저는 안쪽을 흘금 쳐다보았다.

10 대 혹은 20 대로 보이는 남자 아이들이 연습실 안에 우르르 있었다. 남자 아이돌 그룹 같았다.

매니저가 나한테 속삭였다.

“저 그룹, ‘태양의 아이들’이잖아. 왜, 그 유명한.”

“아―.”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누군지 알아들은 건 아니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나는 요즘 아이돌을 잘 몰랐다.

다만 아이돌이 맞다는 내 추측을 확인했을 뿐이다.

나는 너그러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아요. 잠깐 쉬고 있죠, 뭐.”

촬영이 있어 바쁠 때라면 모를까 오늘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게다가 아직 졸음이 안 가신 터라, 겸사겸사 쪽잠도
좀 더 자면 되고.

보컬 트레이너 선생님은 고마워하면서 다시 레슨실 안으로 들어갔다.


매니저는 담배 핀다고 잠깐 나갔고, 그 사이 나는 밖에 있는 대기용 소파에 앉아 잠시 꾸벅 졸았다.

그런데 잠시 뒤, 누군가 옆에 조심스레 앉는 것 같았다. 사람의 기척에 나는 잠에서 깼다.

곧바로 사과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죄송해요. 저 때문에 깨셨어요?”

나는 옆을 돌아보다가 웬 준수한 청년을 발견했다. 그 청년이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나는 재빨리 손을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 백고운 배우님이시죠? 드라마 재밌게 봤어요.”

청년이 예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저······.”

나는 약간 말을 끌었다. 그러자 그 청년이 눈치 빠르게 제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저는 ‘태양의 아이들’의 임시운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미안해요. 제가 요즘 아이돌을 잘 몰라서.”

“뭘요.”

통성명도 했고, 잠도 대충 깼기 때문에, 나는 그와 가벼운 잡담을 나눴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에 대해서 꽤 알게 됐다.


알고 보니 시운은 요즘 흔히 말하는 ‘연기돌’이었다. 아직 많은 작품에 출연한 건 아니지만 앞으로도 계속 연기
생활을 할 예정이란다.

그런 얘기를 하는 도중,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눈치 채고 물었다.

“무슨 고민 있어요?”

“사실······.”

그는 머뭇거리다가 털어놓았다.

“실은, 지금 시나리오 두 개가 들어왔는데, 둘 중 뭘 들어갈지 모르겠어서요. 배우한테 작품 고르는 눈이 정말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

그건 사실이었다. 작품을 고르는 ‘심미안’이 연기력만큼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고운 선배님은 작품을 어떻게 고르세요?”

그는 내게 조언을 구하는 투로 물어보았다.

나는 그가 왜 그렇게 묻는 건지 알았다. 나는 들어가는 작품마다 성공한 케이스였으니까.

하지만 나라고 특별히 비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건 그냥 말 그대로 감에 가까웠으니까.

굳이 비법을 설명해야 한다면, 많은 작품을 보느라 데이터베이스가 이미 구축되어 있어 비교적 재미있는 작품을
잘 고르게 된다는 것 정도?
그러나 당장 어떤 시나리오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운에게 그건 적절한 답이 아니리라.

나는 물었다.

“혹시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을까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임시운은 바르고 건실한 청년 같았고, 연기에 대한 자세도 진지했다. 나는 이 청년에게 호감을 느꼈고,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다.

그는 선뜻 설명해주었다.

“하나는 공중파 드라마의 서브남주 역할이고, 하나는 종편 드라마의 메인 주연 역할이에요.”

그는 고민의 이유를 밝혔다.

“요즘은 종편 드라마가 잘 나온다고는 하지만, 제가 들어갈 작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어서요. 그래도 주연


자리니까 종편을 택하는 게 나을까요?”

“음··· 작품의 제목이 뭔데요?”

그는 먼저 지상파 드라마의 작품 제목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종편 드라마는 tvM 에서 하는 <미생―물>이라는 드라마에요.”

할 수 있다 자신하고, 보란 듯 해내다
77.

이어서 임시운은 두 작품의 줄거리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것을 주의 깊게 들었다.
“음, 저는······.”

나는 눈을 한 번 도륵 굴렀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말하기로 했다.

“저는 뒤의 <미생―물>이라는 드라마가 더 재밌을 것 같아요.”

임시운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일단 줄거리만 들었을 때는 그 드라마를 더 먼저 보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드네요. 물론 작품이 줄거리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요.”

작품성을 결정짓는 요소는 단순하지 않다. 흥미로운 소재와 줄거리, 매력적인 캐릭터, 배우의 연기력, 감독의
연출력 등등······.

게다가 흥행이란 또 미묘해서 작품성이 높다고 해서 또 꼭 흥행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확률적으로는, 재밌고 좋은 작품이 흥행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배우는 좋은 작품에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것이고.

임시운은 볼을 긁적였다.

“실은, 저도 처음 봤을 때 그 작품에 더 눈이 가더라고요. 근데 주위에 물어봤는데 의견이 정말 반반으로 갈려서


고민이 됐거든요. 근데 선배님 말씀 덕에 마음이 확 기우네요. 확실히 결정이 선 것 같아요.”

그가 나를 향해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제가 뭘 했다고요.”
나는 겸손히 말했다.

비록 내가 작품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서 결정적인 조언을 주었다 해도, 결국 어떤 작품을 선택할지 결정하는 건


본인 몫이다.

내가 한 건 그저 불안감에 망설이는 그의 등을 살짝 밀어준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임시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거듭 말했다.

“무슨 소리세요. 저도 소문 들었어요. 선배님이 고른 작품은 무조건 잘 된다고, 선배님한테 신기(神氣) 있다는
말까지 있는 걸요.”

응? 그런 소문이 있었다고? 전혀 몰랐다.

내가 의아해하자 그가 진짜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러면서 흡사 ‘믿습니다!’하는 투로 말했다.

“제가 선배님 안목은 믿잖아요. 지금 엄청 든든한 걸요.”

어째, 사이비 교주나 무당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조금 멋쩍어졌다.

“그, 그래요?”

뭐,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마침 레슨실 문이 열리고 임시운의 동료 멤버들이 나왔다. 이제 끝난 모양이었다. 보컬 트레이너가 내게


손짓했다.

“고운 씨, 많이 기다렸죠? 미안해요. 이제 들어오면 돼요.”


“네, 지금 가겠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짧게 목례했다. 임시운에게도 인사했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또 봐요.”

“네. 나중에 잘 되면 꼭 답례할게요.”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럼 응원할게요.”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몰랐다.

내가 골라준 그 <미생―물>이란 작품이 2014 년 하반기에 엄청난 인기를 끌며 히트작이 된다는 걸 말이다.

그것이 나와 임시운의 첫 인연이었다.

추후에 그 인연은 마치 나비효과처럼 또 다른 예상치 못한 일을 불러오게 된다.

그러나 그건 아직 다가오지는 않은, 조금 미래의 일이었다.

보컬 트레이닝을 받는 동안 나는 의외로 내가 노래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왜냐면 트레이너 선생님이 옆에서 쉼 없이 감탄했기 때문이다.


“아니, 고운 씨 노래 진짜 잘하는데? 예전에 노래 배운 적 있어? 응? 없다고? 그러면 타고 났네, 타고났어.”

발성과 호흡 등 몇 가지 기초를 배우고 연습을 하면서 나는 일주일을 보냈다.

준비가 됐다 싶을 때, OST 녹음 작업에 참여하는 날이 왔다.

녹음실에 들어오자 음악 감독님이 밖에서 말했다.

“고운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해. 노래도 연기랑 똑같아. 감정을 담는 거니까. 목소리로 연기하는 거라
생각하면 편할 거야. 이해했니?”

“네!”

그의 말대로 나는 연기하듯 감정을 잡으며 노래를 불렀다.

몇 번 더 더블링을 치고 나서야 그럴싸한 곡이 완성됐다.

녹음실에 구경 온 왕 PD 가 호들갑을 떨었다.

“너무 좋은데? 자기 나중에 뮤지컬 해도 되겠다.”

왕 PD 의 전매특허인 오바라고 생각했지만, 음악 감독까지 만족한 듯 연신 좋다는 평을 남겨주었다.

어쨌든, 재밌는 경험을 해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어느덧 <천의 맛> 촬영이 중후반부로 접어들었다.


<천의 맛>은 사전 제작 드라마였다. 즉, 촬영이 끝나갈수록 방영일이 가까워진다는 소리였다.

편집은 일찍 들어갔고, 1-2 화 분량은 이미 완성본까지 나왔다. 그리고 OST 를 비롯한 다른 준비들 역시 착착
진행되었다.

한편 백고운은 다시 연기자로 돌아와 연기에 집중했다.

오늘 찍을 장면은 백고운의 단독 씬이었다.

촬영이 들어가기 전, 왕 PD 는 백고운을 찾아가 가볍게 물었다.

“자기, 오늘 찍을 씬이 뭔지 알지?”

“네, 그럼요.”

<천의 맛>은 초반부를 지나 중반부에 들어서면서부터 남주 ‘김리오’와 여주 ‘독고희’가 천천히 썸을 타기


시작한다.

연애전선에도 훈풍이 불어오는 한편, 김리오의 커리어 역시도 돛을 단 듯 순조롭다.

김리오는 요리경연대회에 참가하는데, 빙의된 ‘오대수’ 덕에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예선전을 통과한다.

이제 본선만 남은 상태로, 여기서 상을 받으면 쉐프의 꿈에 성큼 다가가게 된다.

그런데 본선 당일, 김리오는 수군거리는 관계자들 사이에서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듣는다.

경연대회의 심사위원인 독고희의 집에 스토커가 난입하는 바람에 경찰이 출동했고, 그 때문에 그녀의 경연대회
참석이 불가피하게 어려울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어느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까.


김리오는 그 이야기를 듣고 당장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려 한다.

그러나 그것을 막아서는 건 바로 그의 몸에 들어가 있는 오대수였다.

얼른 쉐프 소리를 듣고 승천해 떠나는 것이 목표인 오대수로서는 이번 경연대회를 포기할 수가 없다.

김리오에게는 경연대회보다 독고희가 중요했고, 오대수에게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

때문에 김리오와 오대수는 대립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이전까지는 한 몸을 두고 두 개의 인격이 번갈아 활동할 뿐, 동시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씬에서 처음으로 이번엔 두 인격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둘 다 몸의 주도권을 포기하지 못해서
충돌하는 것이다.

둘의 의지가 모두 강력했기에 그 접점은 치열했다.

대본상에는 이 장면에 대해 [1~5 초 마다 인격이 확확 바뀐다]라고 지문이 적혀 있었다.

즉, 백고운은 아주 빠른 시간 안에 김리오와 오대수를 확확 번갈아가면서 연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렇듯, 이 장면은 꽤나 연기력이 필요한 씬이었다.

그래서 왕 PD 는 배려하는 마음으로 백고운을 것이었다.

찾아온

“내가 생각한 게, 아무래도 한 번에 두 인물 연기를 왔다 갔다 하면 힘들잖아. 어차피 컷을 인물마다 끊어도


편집할 때 붙이면 되니까 한 테이크에 고운 씨가 두 인물을 번갈아 할 필요 없을 것 같거든. 그러니 한 테이크에
‘김리오’를 쭉 가고, 다음 테이크에 ‘오대수’를 쭉 가고, 이런 식으로 할까 싶은데.”

그런데 백고운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아, 저는··· 전 그냥 원래대로 가도 괜찮습니다.”

“응? 괜찮다고?”

“네. PD 님이 괜찮으시다면요.”

왕 PD 야 물론 원래의 방식이 좋긴 했다.

편집 때 이어붙이면 된다지만, 원래 의도한 연출은 한 테이크로 쭉 보여주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자기 힘들지 않겠어?”

“저는 괜찮습니다.”

백고운은 담담히 빙그레 웃어보였다.

침착했지만, 동시에 자신 있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미소였다.

왕 PD 는 유쾌해졌다.

연출자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미소였다.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미소라고 해야 할까.

“그래. 그럼 한 번 가보지, 뭐!”

그리하여 백고운은 카메라 앞에 섰다.


백고운은 가볍게 입을 ‘아에이오우’ 벌리면서 얼굴 근육을 풀었다. 그리고 준비됐다는 표시를 했다.

스태프들이 숨을 죽이자 촬영장이 조용해졌다.

왕 PD 는 메가폰을 잡고 시작하란 신호를 보냈다. 백고운이 연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좁은 복도에 있었는데, 하얀 조리복을 입은 ‘김리오(백고운)’이 벽을 짚으며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왔다.

“······이건 내 몸, 이라고!”

김리오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 간간히 ‘기자님한테 가야 해’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때, 그의 다리가 풀썩 꺾이더니 허리를 푹 숙였다.

그러나 1 초도 안 되어 그가 벌떡 일어났다. 이번엔 ‘오대수(백고운)’였다.

그가 굵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거 진짜 어지간히 미친놈일세. 여자한테 빠졌다고 꿈을 망쳐? 야, 너처럼 여자한테 푹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놈이 나중에 여자 떠나고 나면 땅 치고 후회하는 거야. 좀만 지나봐라. 지금은 내가 원망스러워도 나중엔 나한테
고마워할 거다.”

오대수가 쯧쯧 혀를 찼다.

오대수는 눈매 자체가 김리오와 달랐다. 김리오일 때는 눈꼬리가 순하게 축 처져있다면, 오대수일 때는 눈에 힘을


딱 주고 부라리는 눈이었다고 할까. 목소리 톤도 확연히 달랐고.
왕 PD 는 그 모습을 찍으며 감탄했다.

분장이나 의상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표정과 목소리로만으로도 다른 인격으로 교체되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다니, 새삼 백고운의 연기력이 놀라웠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대수로 분한 백고운은 다시 경연장으로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오대수는 몇 걸음 뛰지 못했다.

“윽······!”

왜냐면 무거운 중력이 덮친 것처럼 그의 몸이 천천히 느려졌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다리가 무거워졌고, 그 다음엔 몸과 팔이 움직임을 멈췄다.

백고운은 완전히 우뚝 섰다. 그때, 안 보이는 힘에 의해 억지로 돌려지는 것처럼 백고운의 몸이 삐그덕삐그덕
돌아갔다.

“이, 이게 진짜······!”

앞으로 가려는 힘과 뒤로 가려는 힘이 충돌하는 것처럼 백고운은 몸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때, 누군가 조종하는 것처럼 백고운의 오른손이 삐거덕거리며 저절로 주먹을 쥐었다.

이후 백고운은 그 주먹으로 자신의 얼굴을 쳤다. 연기라지만 ‘퍽’ 소리가 날 정도로 큰 타격이었다.

백고운이 휘청거리는 몸의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든 그의 표정에 떠오른 건 오대수가 아니라 김리오였다.

김리오는 몸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일부러 주먹으로 자신을 때린 거였다. 물리적인 고통을 가하면 정신이 번쩍
드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순했던 양이 화난 것처럼 그가 물기 어린 눈으로 식식거렸다.

“아저씨는 한 풀고 저승으로 떠나면 그만이지만, 이 몸으로 계속 살아야 하는 건 나예요! 그리고 나한테 더


중요한 건 대회가 아니라 기자님이에요. 그러니까 오늘은 내 마음대로 할 거예요! 마음에 안 들면 아저씨가 다른
몸 찾던가!”

그러곤 그가 다시 반대방향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김리오의 승기도 오래 가지 못했다.

이번엔 오대수의 방해공작이 있었다. 김리오가 발이 걸려 넘어진 것이었다.

유령은 물질세계의 사물을 건드릴 수 없지만, 원한이 아주 강하면 가끔 사물을 움직일 수 있단 속설이 있지
않은가. 그것과 비슷했다.

김리오는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왼발이 마치 어디에 묶인 것처럼 꼼짝을 안 했다. 오대수가 김리오의 발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리오는 자신의 발을 빼내기 위해 끙끙거렸다. 그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둘이 한 치도 물러나지 않자, 둘이 빠르게 몸을 차지했다 빠져나갔다 하면서 치열한 접점을 벌였다.

“제발 그만······!”
“너야말로······!”

백고운의 표정이 스위치처럼 확확 바뀌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미친놈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백고운은 실감나게 연기했고, 그래서 더 기괴했다.

‘와 미쳤다······.’

근처에 있던 스태프 하나가 소름이 쫙 돋았는지 팔을 문질렀다.

분명 백고운은 혼자서 안간힘을 쓰면서 연기하고 있을 뿐인데, 꼭 정말로 두 명이 싸우는 것처럼 실감났다.
물리적인 양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더 놀라운 건, 김리오와 오대수를 오갈 때마다 표정과 목소리만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백고운은 김리오일 땐 오른손을 썼지만, 오대수일 땐 왼손을 썼다. 비록 아주 찰나에 가까워서 그렇게 티 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디테일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김리오와 오대수의 싸움은 무승부로 끝났다. 두 인격을 동시에 받아내느라 무리한 몸이 먼저 퓨즈가 끊긴 것이다.

백고운이 픽 쓰러졌고, 그제야 왕 PD 가 ‘컷, 오케이!’를 외쳤다.

스태프 몇몇이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며 혀를 내둘렀다. 모두 백고운의 연기에 압도된 것이었다.

한편 왕 PD 는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희열감과 만족감이 가득 찼다.

처음에 왕 PD 는 우려했었다.
그러나 백고운은 할 수 있다 자신했고, 보란 듯 해냈다.

그 단순해보이지만 단순하지 않은 문장이 엄청난 쾌감을 주었다.

보통, 배우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은 반비례 관계와 같다. 배우가 연기로 구현해낼 수 없는 것을 연출로 매우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불가능할 것 같은 걸 배우가 아무렇지 않게 연기해내면 연출자는 딱히 할 게 없어진다는 소리였다.

역설적이지만, 연출자로서 별달리 할 수 없게 된 이 상황이 그는 정말로 즐거웠다.

왕 PD 는 백고운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정말 대단한 배우라니까.’

진짜 생일
78.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한여름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배우와 스태프가 4 개월 정도 동고동락하며 촬영하던 드라마 <천의 맛>이 드디어 방영을 시작했다.

첫 회부터 반응은 뜨거웠다.

무려 심미애의 10 년 만의 컴백 작품이었다. 이슈가 안 될 수가 없었다.

[와 역시 심미애. 연기력 쩐다]

[대박 심미애는 나이 안 먹음? 무슨 얼굴이 10 년 전이랑 똑같아? 방부제 수준;;]


[독고희 너무 매력적임 ㅠㅠ 냉미녀 너무 좋아 ㅠㅠ 연상의 독고희에게 상냥하게 혼나고 싶다 ㅠㅠ]

사람들은 심미애의 컴백을 열렬하게 반겼다. 뭐라 해도 그녀는 한국의 명실상부 톱 배우였으니까.

사람들은 심미애가 멋진 연기를 보여줄 거라 기대했고, 그녀는 대중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드라마 <천의 맛>은 첫 방영부터 시청률 15 프로를 찍으며 순조롭게 시작했다. 그리고 매 회차가 지날수록 그
시청률은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백고운에 대한 반응 역시 심미애 못지않게 많았다.

[백고운 연하남 역할 진짜 잘 어울리네]

[리오야 ㅠㅠㅠㅠㅠㅠ 리오 너무 귀여워ㅠㅠㅠㅠㅠㅠㅠ]

[오대수 같은 마초남 실제로 보면 좀 짜증나는데 ㅋㅋㅋ 백고운이 연기하니까 왤케 귀엽고 웃기냐 ㅋㅋㅋ]

[어제 오대수가 독고희한테 들이대는 장면 너무 웃겨서 숨 못 쉴 뻔. 여기 코미디 맛집이네 ㅋㅋ]

<천의 맛>이 6 화 정도 방영 되었을 때였다.

드라마의 고정 팬층이 생겼을 무렵, 한 커뮤니티에서 게시글 하나가 떴다.

[제목: 천의 맛 백고운 말이야... (스압주의)]

[드라마 <천의 맛> 모두 알지? 심미애랑 백고운 나오는, 요즘 완전 인기 있는 그 드라마 ㅇㅇ

나붕 지금 그 드라마에 미쳐서 몇 번이나 돌려보고 있는데, 보다가 뭔가를 발견했음.


(이미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는 거라면 호들갑 떨어서 ㅈㅅㅈㅅ)

처음 발견한 건 이거임.

(사진 첨부)

김리오일 때, 오대수일 때 글씨 쓰는 장면임.

처음엔 글씨체 다른 거에만 집중했었거든? 참 자기 성격 묻어나오게 글씨 쓰네 ㅎㅎ <<이런 감상뿐이었음.

근데 자세히 보니까 손 방향이 다르더라고. 김리오일 때는 오른손인데, 오대수일 때는 왼손임.

처음엔 손만 대역 쓴 줄 알았음. 왜냐면 찾아보니까 백고운 평소 쓰는 손이 오른손이더라고. 아래 메이킹 영상


스샷 첨부.

(사진 첨부)

근데 다시 드라마를 돌려보니 백고운이 오대수에 빙의됐을 때는 이미 왼손을 쓰고 있더라고. 아래 사진 첨부했음.

(사진 첨부)

즉, 김리오는 오른손잡이, 오대수는 왼손잡이인 듯.

그리고 그 둘 다 연기하는 백고운은 양손잡이인 것 같음. 그래서 둘 다 연기할 수 있는 듯?

이미 팬들은 알고 있는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붕은 처음 알아서 엄청 놀랐음.

어쨌든 이게 감독의 디렉션인지, 아니면 백고운 본인이 일부러 다르게 연기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좀 쩌는 듯.
결론: 백고운 연기 존나 잘한다.

+) 댓글보고 추가해서 더 씀.

백고운이 연기한 오대수랑 조상경이 연기한 오대수랑 완전 똑같다는 제보가 들어와서 직접 찾아봤음.

1. 자리에 앉을 때 버릇 똑같음. 한 번 옷깃 털고 앉는 거.

(사진 첨부)

2. 고민 있거나 생각에 잠기면 미간 긁는 거.

(사진 첨부)

3. 요리 시작 전에 손목 스트레칭하는 거.

(사진 첨부)

결론 222: 백고운 연기 무슨 일.. 소오름...

++) 이렇게 반응 좋을 줄 몰랐음... 팬들도 몰랐던 거였구나... ㅋㅋㅋ

많은 관심 땡큐 ㄱㅅㄱㅅ 나붕 관종이라 ㅎ 어쨌든 모두 다들 <천의 맛> 보셈!!]

[댓글 75 개]

[↳ㅇㅇ: ㅁㅊㅁㅊ 나 백고운 팬인데 전혀 몰랐음 울 오빠 양손잡이였어??]


[↳ㅇㅇ: 역시 한국 네티즌 수사대... 관찰력 오진다...]

[↳ㅇㅇ: 와 이거 보고 드라마 다시 보니까 진짜 달리 보인다.. 안 그래도 김리오랑 오대수 진짜 같은 사람이


연기하는 건데 같은 사람 같지 않아서 쩐다고 생각했는데.. 백고운 연기력 무슨 일이야..]

[↳ㅇㅇ: 백고운 연기 잘하는 걸로 원래 유명하잖아 ㅠㅠ]

[↳ㅇㅇ: 제보함. 천의 맛에서 백고운이 연기한 김리오랑 오대수 자세히 비교 분석한 블로그 글이 있음. 링크:
https://blog.naver.com/dramaggwang/29240919402839]

[다른 댓글 더보기]

<천의 맛> 촬영이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드라마에 대한 반응이 좋았기 때문에 자연히 촬영장의 분위기도 좋았다.

그리고 오늘은 조금 특별한 이벤트도 있는 날이었다.

촬영장으로 가자 심미애가 나를 발견하고 놀란 듯 물었다.

“응? 고운 씨? 오늘 촬영 있어요?”

오늘은 심미애의 단독 촬영 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내 방문에 조금 의아한 듯 보였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아무것도 아니란 표정을 지었다.

“아뇨, 없어요. 그냥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오다가 들렀어요.”

심미애는 내 말을 믿은 듯 했다. 출연 배우가 자신의 촬영이 없어도 촬영장에 들르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촬영이 시작됐고,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 왕 PD 가 ‘수고했어요’라고 말하며 오늘의 스케줄이 다 끝났음을 알렸다.

심미애도 고개를 꾸벅이며 수고했다고 말하려 할 때였다.

그때, 숨어있던 내가 케이크를 들고 안쪽에서 걸어 나오면서 노래를 불렀다.

“생일 축하합니다―.”

심미애가 깜짝 놀랐다.

그랬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독고희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다른 스태프와 배우들이 입 맞춰 노래를 불렀고, 왕 PD 가 개구지게 씩 웃었다.

“미애 씨, 생일 축하해!”

“어머 무슨 일이야. 진짜 감사해요.”

그녀는 감동한 듯 볼을 붉혔다.

원래 촬영 당일에 배우의 생일이 겹치는 일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이렇게 촬영장 식구들이 생일을 축하해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늘 심미애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촬영 끝날 때 쯤 축하해주자고 미리 제작진 측과 이야기를 맞춘 터였다. 그게


내가 촬영이 없는데도 여기 발걸음한 이유였다.

케이크는 제작진 측에서 준비했다. 심미애 캐릭터가 그려진 디자인 케이크였고, 독고희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나도 조그마한 봉투를 건넸다.

“선배님, 여기 선물이요.”

“뭐? 선물도 있어요?”

사실, 사적으로 뭘 챙겨주는 것이 그녀 입장에서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고민이 많았다.

그래도 나는 챙겨주고 싶었다. 비록 지금은 백고운이지만, 김철수인 시절 그녀는 내 각별한 친구였으니까.

나는 쑥스럽게 손을 저었다.

“별 건 아니에요. 그냥 작게 준비했어요.”

“풀어 봐도 돼요?”

“그럼요.”

심미애는 봉투 안의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 했다. 그 안에 든 건 미사포였다.

그녀가 두 번째로 깜짝 놀랐다.

“내가 천주교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는 모태신앙으로, 독실한 신자였다. 다만 주변에 티를 내지 않아서 그녀와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잘 모르는
사실이기도 했다.

실은 나도 김철수였던 시절에 알았던 거였다. 그렇지만 진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어서 대충 둘러댔다.

“저번에 딸 이름이 ‘은혜’라고 하셔서요.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그걸로 알았다고요? 와, 고운 씨 진짜 섬세하다.”

스쳐지나가듯 한 얘기를 내가 귀담아 들었다는 것에 그녀는 놀랐고, 왕 PD 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놀란 듯 했다.

나는 멋쩍어서 말을 돌렸다.

“은혜 선물도 그 안에 있어요.”

저번에 심미애가 나더러 싸인 하나만 해달라고 부탁한 적 있었다. 딸이 내 팬이라서 부탁했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선물을 챙기는 겸, 소속사에 있는 내 굿즈 몇 개랑 싸인, 그리고 은혜에게 보내는 편지도
챙겨주었다.

심미애는 고마운지 내게도 물었다.

“그러면 고운 씨는 생일 언제에요?”

왕 PD 가 끼어들었다.

“몰랐어 자기? 고운 씨 생일 12 월 25 일이잖아.”

“성탄절이에요?!”

천주교 신자인 심미애 입장에서는 놀랄 만도 했다. 그러나 나는 손을 얼른 저었다.

“아. 사실, 그 날이 제 진짜 생일은 아니에요. 주민등록상의 생일이거든요.”

그 말은 심미애 뿐 아니라 왕 PD 까지 깜짝 놀라게 했다.


“네?”

“응?”

그리고 1 초 뒤, 둘 다 무슨 말인지 깨달은 듯 했다. 내가, 그러니까 백고운이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걸 그제야
상기한 모양이었다.

나도 나중에 알게 된 건데, 12 월 25 일은 백고운이 보육원에 버려진 날이란다. 그날 원장님은 문 앞에 버려진


백고운을 발견했고, 그날을 생일로 삼아서 호적에 올렸단다.

딱히 숨기는 사실도 아니라 나는 전혀 대수롭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보육원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말이다.

백고운의 성장 배경은 진짜로 내가 겪은 일이라기보다는 건너들은 남 일처럼 느껴졌다. 뭐, 엄밀히 말하면


실제로도 남 일이기도 했고.

그래서 나는 태연했다.

하지만 심미애와 왕 PD 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둘이 뭔가의 눈짓을 주고받았다.

오늘은 <천의 맛>의 공식적인 마지막 촬영 날이었다.

로맨스 드라마가 그렇듯, <천의 맛> 역시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중간에 김리오가 오대수를 이용했단 게 들키면서 독고희가 실망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김리오는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힘으로 노력해 경연대회에서 우승하고, 독고희와의 사랑도 이룬다. 그리고
오대수는 소원을 이루고 승천한다. 모두에게 해피엔딩인 결말이었다.
드라마는 몇 년 뒤 성장한 김리오가 자신의 주방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나는데, 공교롭게도 마지막 촬영
역시 바로 그 장면을 찍으면서 끝났다.

왕 PD 가 컷을 외치며 말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수고했다고 고개를 꾸벅거리며 인사하고 있을 때였다.

“여기 주목!”

갑자기 안쪽에서 누가 외치더니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고, 스태프들은 웃음을 머금은 채 손뼉을 치며
합창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그리고 안쪽에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튀어나온 건, 김건이었다.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 갑자기 마지막 촬영 날짜가 이 날짜로 밀렸다고 연락이 왔었다.

그리고 오늘은 나의, 그러니까 김철수인 진짜 나의, 생일이기도 했다.

보통 촬영 기간이 반 년 정도 된다는 걸 감수할 때, 1 년에 한 번 있는 생일을 촬영장에서 맞이하는 건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촬영이 월화수목금토일 매일 있는 건 아니기에, 작품에 들어가 있다 하더라도 비번일 때 생일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일부러 생일인 날로 촬영 일자를 미루니까 너무 티가 났다는 말이다. 눈치를 안 챌래야 안 챌 수가


없었다.

다만 어떻게 내 진짜 생일 날짜를 알았을까 궁금하기는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김건이 있었다.

저번에 심미애는 김건과 함께 내 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김건과 친하다는 그때의 얘기를
떠올리고 슬쩍 김건에게 물어봤나 보다.

김건이 생일 케이크를 내밀면서 초를 불라 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고운 씨, 안녕하세요.”

“어, 곽 쉐프님?”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이 찾아왔다. 곽시우였다.

“오늘이 고운 씨가 정한 생일 날이라면서요? 오늘은 제가 생일상 차려드리려고 왔죠.”

무슨 말인고 하니, 오늘 마지막 촬영이니까 회식 겸 생일 축하 겸 해서 그가 음식을 대접해주겠다는 소리였다.


마침 촬영장 장소가 곽시우가 빌려준 레스토랑이기도 하니 말이다.

알고 보니 곽시우와 김건이 의기투합한 거였다.


일전에 내 지인들이 내게 밥차를 조르르 보내준 적 있었는데, 비-연예인인 둘은 나중에야 그 소식을 들었다.

둘은 내 인맥에서 자기들이 빠질 수 없지 않겠냐면서 같이 오늘 회식 자리를 준비했단다. 내 생일을 축하해줄 겸


해서.

물론 김건에게는 심미애가 연락했고, 곽시우에게는 왕 PD 가 연락했고 말이다.

덕분에 우리 <천의 맛>팀은 마지막 촬영 날 호화로운 회식을 즐길 수 있었다. 오랜 고생을 끝내서 기쁜데,
맛있는 것까지 먹으니 기분이 얼마나 좋겠는가.

그날 최고로 많이 웃은 것 같았다.

백고운의 몸으로 들어온 지 벌써 4 년이 흘렀다. 그동안 적지 않은 작품을 했고, 그러면서 생일을 촬영장에서
맞이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 진짜 생일을 축하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왕 PD, 그리고 심미애와 함께 했던 드라마 <천의 맛>은,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특별히 잊지 못할 작품이 될 것
같았다.

배우라면 응당
79.

<천의 맛> 막방이 2 주를 남겨두고 있었다.

사람들은 김리오와 독고희를 보내줄 수 없다며 벌써부터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몇몇은 20 부작으로
늘려달라며 울부짖기도 했다.

한편, 바깥 상황이 뜨거운 것과 상관없이 나는 촬영이 끝났기 때문에 오랜만에 평화로운 한때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거실에 나른하게 앉아서 내 앞으로 도착한 시놉과 시나리오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건 여러 방송국과 제작사 쪽에서 이전부터 보낸 것들이었다. 촬영할 때는 바빠서 영 들춰보지 못했다가, 이젠
좀 여유가 나서 한숨 돌리며 살펴보는 중이었다.

다만 미뤄뒀던 그동안 꽤 양이 쌓였는지 읽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것들을 겨우 다 훑어보고 나니 벌써


반나절이 훌쩍 지나있었다.

나는 소파에 풀썩 누웠다. 그리고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앓는 소리를 냈다.

“음······.”

그때, 김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 쾌활한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여, 뭐하냐?

“시놉이랑 시나리오 보는 중.”

―오, 벌써 차기작 들어가게?

“응, 그러려고 했는데······.”

나는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아직 딱 ‘이거다’ 싶은 게 없네. 이전과 좀 다른 배역을 해보고 싶은데.”

나는 연달아 로맨스 드라마를 두 개 찍었다. 그래서일까 들어온 시나리오의 장르가 대부분 로맨스로 비슷비슷했다.

물론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는 액션 로맨스였고, <천의 맛>은 코미디 로맨스였지만, 어쨌거나 같은 궤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나는 이제는 로맨스 말고 좀 색다른 걸 해보고 싶었다.


내 설명을 들은 김건이 ‘아―’하고 알겠다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가 가볍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 회사 와서 구경해볼래? 우리 쪽도 시나리오 작업하고 있는 거 몇 개 있는데. 로맨스 장르는


아니거든.

김건은 영화감독이기도 했지만, 따로 영화 제작사도 하나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농담을 던졌다.

“그거 감독은 너야?”

―아냐, 난 다른 프로젝트 맡아서 바빠. 왜, 나랑 영화 하고 싶어? 네가 원하면 내 영화 참여시켜 주고. 엄청


굴려 줄게.

김건이 키득거렸다.

이건 우리가 자주 던지곤 하는 장난이었다.

나는 배우, 김건은 감독이지 않은가. 같은 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보니 우리는 가끔 공적인 업무로 만날 때가


있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할 때 쯤, 나와 김건은 업계에서 최대한 만나지 말자고 예전에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약속했었다.

친구끼리 괜히 공적인 업무로 얽혀서 감정 상하지 말자는 것이 첫째 이유였고, 둘째 이유는 이미 나와 그는 대학


때 어울려 다니면서 많은 작품을 함께 했다는 거였다. 서로에게 좀··· 질릴 만큼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영화 <친구들> 같은 경우는 내가 그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참여한 거니 예외로 쳐야 하고 말이다.


김건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진짜 올 거야? 아니면 너 바쁘면 이메일로 보내줄까?

“아냐, 내가 지금 그리로 갈게.”

고전적일지 모르겠으나, 대본이나 시놉은 종이로 봐야 그 느낌이 제대로 느껴졌다. 아날로그 인간이라 어쩔 수
없었다.

금방 가겠다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는 옷을 꿰어 입고 충무로로 향했다.

차를 주차장에 대고 건물로 올라가자 김건이 날 반겼다.

“왔어?”

그는 자기 제작사에서 디벨롭 하고 있는 시나리오 몇 개를 소개해줬다.

“원래 아무나 캐스팅하지 않지만, 그래도 네 인지도면 우리가 손해는 아니니까. 이미지 어울리는 것 같으면
고려해볼게.”

그가 짐짓 새침데기처럼 말했지만, 사실 이건 그가 날 배려해주는 거였다.

캐스팅은 원래 제작사 고유의 권한이다. 그리고 배우가 아무리 인지도가 높아도 정말로 시나리오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일종의 친구 찬스를 쓰고 있는 거랄까.

나는 고마움을 표하고 책상에 널려있는 시나리오를 구경했다.


그런데 하나를 다 읽고 내려놓을 때, 책상 끄트머리에 있는 것 하나가 내 눈에 띄었다.

[한여름 作]

작품 제목인 줄 알았는데, 작가 이름이었구나.

나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대충 보니 미스터리 장르 같았다.

가볍게 훑어볼까 하는 마음에 뜻 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치웠다. 흡입력이 대단했다.

미완성 본이긴 했지만, 이 정도면 꽤나 가능성이 높은 극본이란 소리였다.

나는 곧바로 김건에게 물었다.

“이거, 너희 거야?”

김건은 다른 일을 하고 있다가 내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그가 내가 들고 있는 극본을 확인했다.

“응?”

김건은 극본의 제목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아, 아―’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뜻밖의 소리를 내뱉었다.

“그거 우리 쪽에 들어온 건 맞는데, 우리가 작업할 건 아니야.”

“아니라고? 왜? 재밌던데.”

“보면 알겠지만, 그거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더라고. 작가가 잘못 보낸 모양이야.”


아, 나는 그제야 왜 대본이 중간에 끊겼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미완성 본이 아니라, 1 화 대본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재밌던데. 각색 생각은 안 해봤어?”

내가 재밌어 했을 정도면 김건도 재밌어 했을 것이다. 그는 나와 예전부터 취향이 잘 맞곤 했으니까.

그런데 김건이 곤란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사실 나도 그 생각은 했어. 근데 투자자를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작가가 어디 이력이나 필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첫 작품이더라고. 게다가 우리가 그런 추리 장르 쪽에 특화된 제작사도 아니고. 더 좋은
제작사를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답장할 참이었어.”

그런 경우야 쉽게 있다. 좋은 아이템인 건 맞지만, 역량이나 이러저러한 사정 등으로 인해 우리 쪽에서 할 수


없어서 아쉽게 반려하는 경우.

이것도 그런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아까웠다. 다른 좋은 제작사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보통 이런 경우


다른 곳에서도 퇴짜 당하다 흐지부지 사라질 확률이 높다.

그때, 문득 머릿속에 누군가 떠올랐다.

“그 사람한테 보내보면 어떨까? 조종석 PD.”

“아, 종편으로 옮겨간 그 사람? 지금 용 스튜디오, 거기 소속이던가?”

“응. 거기서 만드는 장르 드라마가 요즘 잘 되고 있잖아. 매니아 층도 탄탄하고.”

용 스튜디오는 tvM 이 자회사로 두고 있는 제작사인데, 조 PD 는 거기로 이적한 뒤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고
있었다.
조종석 PD 는 원래도 추리나 스릴러 장르의 드라마를 잘 연출하는 걸로 유명했다. 그런데 그쪽으로 옮겨간
후부터는 만드는 작품마다 잘 되어서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김건이 물었다.

“그런데 그 사람한테 어떻게 컨택하게?”

당연한 말이지만, 무작정 보낸다고 그 사람이 읽을 리 없다.

이 작품이 최소한 어디 수상작이라는 타이틀만 있어도 관심을 보일 텐데. 작가 쪽엔 수상 이력이 없고, 김건은
조 PD 와 친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 친분이 있지만, 그것도 김철수 시절의 얘기였다. 백고운인 지금은 나만 일방적으로 아는 사이였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진 않을 것 같아.”

나는 방법을 얘기했다. 마침 극본도 딱 4 년 쯤 된 작품이었다.

김건은 내 설명에 ‘나쁘지 않네’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약간 의아한지 물었다.

“근데 그 작품이 그렇게 하고 싶어?”

왜 그렇게 애를 쓰냐는 말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내 안목을 시험해보고 싶어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가벼운 마음이었다.

어차피 조 PD 에게 한 번 보내보는 것 자체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물론, 그가 그 작품을 정말 좋다고 생각하면 괜찮은 작품 하나 살리는 셈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한 번 해봐도 나쁠 것 없는 시도였다.

조 PD 는 기획 회의에 들어가기 전,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건 작은 택배 상자였다.

“응? 이거 누가 올려놓은 거야?”

조연출이 대답했다.

“아까 다른 택배랑 같이 왔더라고요. PD 님 이름 앞으로 되어 있길래 제가 갖다 놨습니다.”

“그래? 뭐지? 뭐 올 거 없는데.”

조 PD 는 고개를 갸웃한 뒤, 일단 뜯어서 안을 살폈다.

안에서 나온 건 또 다른 서류 봉투 하나와 편지지 하나였다.

조 PD 는 일단 편지를 먼저 살폈다.

“김건?”
이름만 건너건너 들어 알 뿐, 친분은 없는 영화감독에게서 온 편지였다. 처음에는 왜 그가 자신에게 이걸
보냈는지 의아했다.

그건 곧 편지를 읽은 후에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조종석 PD 님.

4 년 전, 세상을 떠난 故 김철수 배우와 막역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철수가 생전에 조 PD 님께 보내려던 소포를 발견했습니다.

4 년이나 지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중요한 무언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뒤늦게라도 동봉해
보내드립니다.]

과연 봉투에는 김철수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조 PD 는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추억이었다.

조 PD 는 故 김철수와 젊었을 때 두어 개의 작품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김철수는 개인적으로 그가 참 좋아하는


배우였다.

그가 은퇴한 후엔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주기적으로 안부를 주고받았을 정도로는 친했었다.

그런데 4 년 전 갑작스러운 그의 부고 소식을 들었었다. 장례식장에 찾아갔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그랬던 그가 죽기 직전에 자신에게 남긴 게 있었다고?

약간 호기심이 들었다.
조 PD 는 봉투를 뜯었다. 거기에 있는 건 두꺼운 대본 하나와, 김철수의 필체로 적힌 한 통의 편지였다.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좋은 대본 하나를 발견했는데 조 PD 가 좋아할 것 같아서 보낸다는 얘기였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 좋은 게 있으니 한 번 보라는 제의는 엄청 많이 받는다.

그래서 어지간한 로비로는 조 PD 의 우선순위 안에 들지 못했다.

하지만 보내는 사람이 김철수라면 말이 달랐다.

조 PD 는 다른 것을 다 제쳐두고 그것을 제일 먼저 읽었다.

그리고 딱 한 시간 뒤.

조 PD 는 마지막 장을 덮으며 한 마디 했다.

“응? 좋은데?”

4 년 전 작품이라기에 좀 옛날 감성인가 했더니, 의외로 시대를 안 타는 작품이었다. 옛 작품이라기엔 세련되기도


했고.

조 PD 는 조연출에게 말했다.

“이거, 작가가 누군지 좀 알아볼래?”

내가 생각한 방법이란, 내 이름을 파는 것이었다.


사람의 심리란 게, 처음에는 유명인사(혹은 지인)의 추천을 듣고 그것에 관심을 가져도, 막상 내용물을 다 본
후에는 누가 그것을 추천했는지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법이다.

어쨌거나 관심을 끌어서 내용물을 펼쳐보게만 만들면, 포장지에는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해야 할까.

조 PD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처음에는 내 이름을 듣고 그 대본을 읽기 시작했으나, 일단 그 대본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에는 더 이상 내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

뭐, 어떻게 내가 그 대본을 얻었는지 궁금해 하더라도,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인데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면에는 그런 잔꾀도 있었다.

한편 김건은 한여름 작가에게 정중하게 편지를 보냈다.

자신의 제작사에서는 이 작품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미안하다, 하지만 대신 다른 제작사의 PD 에게 보여주었으니


긍정적인 얘기가 있길 바란다, 참 배우 백고운이 대본에 관심을 보이더라, 와 같은 얘기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작가 쪽에서 내게 연락이 왔다.

보아하니 조 PD 가 작가에게 연락했고, 얘기가 잘 되어서 어느새 기획 단계까지 간 모양이었다.

작가는 나를 캐스팅 하고 싶다고 말했고,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김건은 그런 나를 두고 혀를 내둘렀다.

“너 이렇게 보니 좀 무섭다. 뒤에서 조종해서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 배후 세력 같아.”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런 거 가지고.”

배우라면 응당 하고 싶은 작품이 들어오길 무작정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작품을 쟁취해내기도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고운이는 계획이 다 있구나?


80.

조종석 PD 가 연출을 맡고, 한여름 작가가 극본을 맡은 tvM 드라마 <기라성과 기린아>가 본격적으로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이 드라마는 주인공이 두 명인데, 한 명은 동생이고 한 명은 형이다.

내게 들어온 배역은 메인 주인공인 동생 ‘기라성’ 역할이었다.

내 상대역이자, 형 ‘기린아’ 역할은 지정수라는 배우로 최종 캐스팅 되었다.

지정수는 최근에 성황리에 종영한 드라마 덕에 인지도가 높아진 배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 신인은 아니고, 무명생활이 조금 있었단다. 어쨌거나 인기가 많아진 건 최근이었기에 많은
대중들에겐 뉴 페이스나 다름없었다.

나 역시 이번에 지정수를 처음 알게 되었다. 지정수의 캐스팅 소식이 뉴스로 떴을 때, 그제야 그의 얼굴을 처음


보았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누군지 정확히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 주 뒤.

주요 롤이 다 정해진 후, 조 PD 는 미팅을 잡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얼굴도 트고 인사도 하자는 자리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지정수를 처음 실물로 만났다.

“안녕하세요. 배우 지정수에요.”

그가 빙긋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마주 인사하려다가 잠깐 멈칫했다.

지정수의 얼굴이 상당히 낯익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단 그의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백고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머릿속은 재빨리 굴러가고 있었다.

‘내가 저 사람을 어디서 봤지?’

기시감은 드는데 내가 대체 그를 어디서 봤는지가 도저히 기억이 안 났다. 깊게 아는 사이가 아니라, 어디서
스치듯 본 사람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며칠 뒤, 김건과 만났을 때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도중, 어쩌다가 지정수에 관한 화제가 나왔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나는 물었다.

“건아, 너 지정수란 배우 원래 알았어?”

“아니? 몰랐는데, 왜?”

“아니, 저번에 처음 봤을 때 묘하게 얼굴이 낯익더라고. 혹시 너랑 관련된 일에서 만난 사람인가 해서.”

“글쎄. 나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됐는데.”

김건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사람 지금 몇 살이지? 우리보다 열 몇 살 정도 어리지 않나?”

“응. 지금 정확히 스물아홉이래.”

나는 덧붙였다.

“그리고 대한중, 한국고 나왔대.”

그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김건이 뭔가 떠오른 듯 ‘아아!’하고 소리쳤다.

“그러면 혹시 한국고에서 봤나? 왜, 나 십 년 전쯤에 거기에 특강하러 간 적 있었잖아. 그때가 나 영화 <평화의


밤> 찍고 난 직후니까, 아마 그때가 맞을 거야. 십 년 전이면 그 친구도 열아홉 뭐 이럴 때니까 시기적으론 맞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 김건이 나한테 말했다.

“왜, 너도 그때 너도 거기로 왔었잖아. 나 입봉한 거 축하해준다고. 그래서 특강 끝나고 너랑 만나서 같이 바로


밥 먹으러 갔던 것 같은데. 거기서 그 친구를 본 거 아니야?”
그때, 내 머릿속에서도 반짝 불이 켜졌다.

김건의 말을 듣고 나 역시 내가 어디서 그를 보았는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김건이 말한 대로, 그는 십 년 전쯤 그곳에 특강하러 간 적이 있었고, 나 역시 김건을 만나러 그 학교에


방문했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나는 지정수를 만났었다.

······약간 안 좋은 의미로 말이다.

그러니까 대략 십 년 전쯤의 일이다.

“여긴가?”

나는 모자챙을 살짝 들어 올리고 고개를 젖혔다. 교문에 걸린 한국고등학교라 적힌 명패가 보였다.

수업 중인지 학교는 한산했다. 나는 교정을 가로지르며 적당한 벤치를 찾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 특강을 온
김건과 끝난 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학교의 뒤뜰로 다가갔을 때였다.

“저번에 내가 말했잖아. 돈이 없으면 어떻게든 만들어서 가져오라니까?”

나는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안쪽을 쳐다보았다.


으슥한 건물 안쪽에서 아이들이 몰려 있었다.

몇몇은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몇몇은 히죽거리면서 건들거리고 있었다. 껌을 짝짝 씹거나 담배를 피는
아이들도 보였다.

딱 봐도 질이 안 좋은 그룹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아이들 사이에는 왜소한 몸집의 한 아이가 위축된 채 서 있었다.

한 양아치가 그 아이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위협하고 있었다.

“너 내가 다음에 돈 안 가져오면 뭐라고 했어, 어?”

금방이라도 폭력 사태가 벌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분위기였다.

나는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선생님 비슷한 분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군가를 불러오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외부인인 내가 나서봤자 ‘아저씨, 갈 길 가세요’ 소리나 들을 것 같았고.

나는 난처히 눈을 굴리다가 결국 목소리를 큼큼 다듬었다.

나는 엄지와 검지로 입가를 찢은 후 호루라기 소리를 ‘휘!’ 냈다. 그리고 발을 크게 굴리며 걸걸한 목소리로
냅다 호통 쳤다.

“이 자식들! 이런 곳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내가 못 찾을 거라 생각했어?! 어?!”

누군가 ‘불이야!’하고 갑자기 소리치면 그것의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듣는 사람은 일단 혼비백산하는 법이었다.
마찬가지로 학생들이라면 기본적으로 선생님의 권위를 무서워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선생님처럼 거짓말을 했다. 이 정도 연기는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학생 주임 선생님이 나타난 줄 알았는지, 지레 놀란 양아치 애들이 반사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야, 튀어!”

그러고 몇몇 아이들이 골목에서 재빨리 뛰쳐나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슬쩍 몸을 나무 뒤에 숨겼다.

그리고 그때, 나는 도망치려는 양아치 중 한 학생의 얼굴과 명찰을 똑똑히 보았다.

젖살은 안 빠졌지만 얼굴이 날카롭게 생겼고, 그 학생의 명찰에는 [지정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내가 그 학생의 얼굴과 이름을 정확히 기억한 건, 첫째론 그 아이가 제법 잘생겼기 때문이었고, 둘째론 내가 그
이름을 보고 ‘지정수? 지정(指定)된 물(물 수水)인가?’하는 아재개그를 실없이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기억이란 건 묘한 데가 있어서 사소한 에피소드가 있을 때 더욱 잘 기억되곤 한다.

내가 십 년이 지난 지금,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릴 수 있던 건 바로 그때의 에피소드 덕분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식으로 그 놈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내 말을 들은 김건은 ‘헐’하면서 눈을 찌푸렸다.


“그러면 걔가 학교 폭력을 했단 뜻이야?”

“내 생각엔 그런 것 같아.”

“쓰레기 새끼였네.”

김건이 거침없이 독설을 날렸다. 나는 일단 말렸다.

“혹시나 내가 착각한 거일 수도 있어. 그 친구가 지정수가 아닐 수도 있고.”

내 기억을 백 퍼센트 확신하기에는 너무 옛날의 일이었다. 김건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실, 우리 둘 다 찝찝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며칠 뒤, 이성한을 만났을 때 혹시나 하고 물었다.

“너 혹시 지정수 선배 알아?”

그러자 이성한이 미적지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이번에 들어가는 드라마 상대역 배우 분 말하는 거지? 알긴 아는데······ 아주 잘 알지는 않고. 그냥 내


친구가 그 선배의 학교 후배야. 그래서 얘기만 건너건너 들은 정도인데. 왜?”

난 잠시 망설였다. 뒷담화처럼 느껴질까봐였다. 이 바닥이 좁은 만큼 누가 누구의 흉을 보았다는 소문도 빨리


퍼지니까.

그때,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성한이 먼저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

“왜, 그 선배가 너한테 뭔 짓 했어?”


이성한의 말에 딱 촉이 왔다. 뭔가 있구나. 나는 곧바로 물었다.

“그 선배, 혹시 소문이 좀 안 좋아? 과거가 안 좋다거나.”

원래 비밀이란 건 그렇다.

비밀의 내용을 모르는 상대에게는 선뜻 말하기 어렵지만, 이미 알고 있는 상대에게는 안도하고 술술 말할 수


있었다.

게다가 대뜸 흉을 보는 건 뒷담화지만, 상대도 그 흉의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정보 교환인 법이다.

이성한은 나 역시 뭔가를 눈치 채고 있단 걸 깨달은 듯, 말을 아끼던 방금과 달리 곧바로 털어놓았다.

“너도 들었구나?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 그 선배 과거 진짜 안 좋거든. 내 친구가 한국고 다녔다고


했잖아? 거기서 아주 일진으로 유명했다고 하더라고. 돈 뺏는 건 예사고, 심하면 구타도 했었대. 내 친구도 몇
번 찍혀서 괴롭힘 당하다가 결국 중간에 못 견디고 전학 갔고.”

이성한이 쯧 혀를 찼다.

“연예계 들어온 후엔 이미지 관리한다고 자제하는 것 같은데, 그 성격이 어디 가겠어? 나도 예전에 그 선배랑 한
번 작품 해봤는데, 성질 꽤 더러워. 스태프한테 어찌나 갑질을 하던지, 저거 지금 무명이라서 티가 안 나는 거지,
유명해지면 곧바로 터지겠구나 싶더라니까.”

이성한이 불쾌한 듯 투덜거렸다.

“최근에 좀 떠서 이제 곧 터지나 싶었는데, 아직도 잠잠하더라고. 어떻게 그런 사람이 버젓이 멀쩡하게


돌아다니지? 하기야, 세상엔 별별 쓰레기들이 다 있고, 그 사람들이 다 인과응보 당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덕분에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됐다.


지정수의 과거가 생각보다 더 심각하단 것이었고, 그의 과거를 폭로할 증인들이 많다는 것.

“흠.”

나는 짧은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좀 골치 아플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이성한에게 부탁해 일단 그의 친구를 만났다.

지정수의 후배로, 한국고 재학 당시 지정수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바로 그 친구 말이다.

중간에 전학을 갔다지만, 그는 아직도 그 당시의 일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기꺼이 지정수의
만행을 얘기해주면서 분통을 터트렸다.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까봐 걱정돼서 그렇지, 그것만 아니라면 언제든 그 새끼의 실체를 까발리고 싶다니까요.
내 학창시절을 지옥으로 만들어놓았으면서, 막상 자기는 행복한 게 말이 되나요? 저는 TV 채널을 돌리다가 그
자식 얼굴을 마주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해요. 그런데 그 자식은 그렇게 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잖아요.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나는 돌아와 김건에게 피해자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내 얘기를 들은 후, 뜻밖에도 김건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지정수를 옹호하는 건 아닌데, 너무 위험하지 않아?”

“뭐가?”
“이미 그 사람은 드라마에 캐스팅 됐잖아. 좋으나 싫으나 너랑 한 배를 탄 거라고. 드라마에 문제 생기면
너한테도 타격이 있을 거야.”

김건은 그러면서 덧붙였다.

“게다가 그 사람이 꼭 지금 당장 터지란 법도 없잖아. 6 개월은 금방 가.”

나는 김건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았다.

당장 2 주 뒤가 드라마 크랭크 인이었다.

이제 와서 그의 캐스팅을 무르기에는, 너무 얽힌 이해관계가 많았다.

방송은 한 명이 만드는 게 아니라 수십 명이 다 같이 만드는 것이었다. 한 명이 문제가 생기면, 그와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피해가 간다.

그렇기에 김건은 그냥 들쑤시지 말고 조용히 있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거였다. 촬영을 하고 방송이 나갈,
딱 반 년 동안만.

지금부터 6 개월 뒤 정도까지만 아무 문제없다면, 드라마도 순탄히 끝날 것이다.

어차피 그 뒤에는 남과 다름없고, 그 후에 터지든 말든 드라마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된다.

김건은 아마 날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이성한의 말에 의하면, 지정수의 인지도가 조금 높아진 지금, 그에 대한 폭로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끌어안고 가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소리다.

물론 폭로가 언제 터질지는 다 운이기 때문에, 김건의 말대로 반 년 동안 조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운에 맡기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게다가······.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나한테 방법이 다 있어.”

드라마 하차
81.

크랭크 인이 들어가기 전, 한동안 나는 바빴다.

왜냐면 윤성광에게 내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실장님, 예능 스케줄을 더 많이 잡을 수 있을까요? 드라마 홍보 차 나가면 좋을 것 같아서요.”

“예능이요? 웬일이에요? 원래 예능 잘 안 나가잖아요.”

“그냥요. 드라마 홍보 되면 좋잖아요.”

나는 그저 싱긋 웃었다.

윤성광은 갑작스러운 내 심경 변화에 약간 의아한 듯 보였지만, 어쨌거나 좋은 건 좋은 거니까 알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많은 곳에 얼굴을 비추며 열심히 드라마를 홍보했다.

당연히 나 혼자는 아니었다. 또 다른 주연 배우인 지정수도 그 일정에 함께 했다.

우리는 토크쇼부터 버라이어티 예능까지, 수많은 예능에 나가면서 한 마디로 ‘열일’했다.


예능에 나갈 때마다 나는 지정수에게 살갑게 굴었다. 그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 방송됐다.

방송 속 우리는 꽤나 친해보였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드라마 속 우리의 케미스트리도 기대하기 시작했다.

조종석 PD 를 비롯한 제작진들은 좋아했다. 아니,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드라마 홍보를 위해
배우들이 자발적으로 수고해주고 있는데 말이다.

반면 김건은 내 행동에 입을 떡 벌렸다. 내 행동이 내 목적과 정반대처럼 보였기 때문이리라.

나는 일전에 ‘나한테 생각이 다 있으니까 그저 나를 믿으라’고 했었다.

그래서인지 김건은 딱히 내 행동에 태클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하루는 도저히 의아함을 못 참겠는지 내게
물어왔다.

“너 뭐하는 거야? 한시라도 일찍 선 그어도 모자랄 판에 왜 친한 척 굴고 있어?”

나는 그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일부러 이러는 거야.”

“뭐?”

“지정수를 풍선이라고 생각해 봐.”

점점 커지는 풍선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어느 순간 못 이기고 터져버리는 것처럼, 지정수를 가만히 내버려두면
인기가 많아지다 언젠가는 알아서 빵 터질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시기가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점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전에 풍선에 바늘을 갖다 대서 인위적으로 터트려야 하는 거야. 그런데 풍선은 빵빵할수록
터질 때 큰 소리가 나잖아? 반대로, 충분하지 않으면 맥없는 소리만 날 거고.”

김건도 내 말을 알아들은 눈치였다.

“그러면 너는 지금······ 일부러 지정수를 띄우고 있단 거야? 나중에 논란이 터졌을 때 그만큼 화제가 되게?”

“바로 그렇지.”

사람이란 게, 잃는 게 많아야 타격이 큰 법이다.

즉, 나는 지금 잃을 게 많아지도록 지정수에게 땔감을 넣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내 의도는 잘 먹혀들어가고 있었다. TV 에 얼굴을 자주 비출수록 지정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는 게


시시각각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으니까.

김건은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뻐끔거리다, 곧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표정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물었다.

“무슨 생각해?”

김건은 곧바로 답했다.

“마냥 착한 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생각. 허실거리는 놈이 한 번 작정하니까 진짜 무섭네. 너한테


밉보이면 안 되겠다. 저기, 혹시 내가 너한테 실수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해줄래?”

김건이 자못 연극적인 투로 굽실거렸다. 나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가 환기된 후, 김건이 다시 물었다.


“네 의도는 이제 알겠어. 그런데 최소한 드라마 크랭크 인 전에 터트려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이후는 피해가
너무 심할 텐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사람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걱정 마. 이미 그것도 손 써놓았으니까.”

일주일 전쯤. 가나일보 본사.

표영범 기자가 사무실 안으로 털레털레 들어왔다. 후배가 그를 불렀다.

“표 기자님, 낮에 택배가 하나 왔는데요.”

표영범은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미안, 좀 나중에. 아, 오늘 너무 힘들었어.”

표영범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마자 등받이에 퍼질러 기댔다. 후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태릉 갔다 오신 거죠? 왜요, 다들 말 안하려고 해요?”

“뭐, 그렇지. 연예부 아니라 사회부라고 하니까 대번에 얼굴색이 바뀌어선······.”

표영범이 이번에 파고 있는 아이템은 체육계에 만연한 폭력 문화였다.

아니, 더 정확히는, 한국 사회 저변에 깔린 태움(괴롭힘) 문화라고 할 수 있었다. 의료계나 문화계 등,


폐쇄적인 곳이라면 어디를 막론하고 언제나 태움 문화가 있으니까.

표영범은 그것들을 엮어서 커다란 기획 기사를 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침 한 달 뒤면 새해다. 입학식 시즌인
이맘때는 과도한 신고식 문화로 매년 하나씩 문제가 터진다. 시기적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큰 그림을 그렇게 그려놓은 상태로, 표영범은 우선 체육계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몇몇 피해자들과의 증언은 일찍이 따 놓은 상태였지만, 좀 더 이슈몰이를 할 건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체육계에서 태움 문화가 이슈가 되면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 다른 곳에서도 연쇄적으로 문제가 터질 테니까.

물론 취재가 쉬울 리 없었다. 아직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인지, 피해자를 더 찾아보려 해도


대부분 표영범을 불편해했다.

표영범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나마 체육계가 유명인이 많아서 이쪽부터 시작한 건데, 영 쉽지 않네.”

표영범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곤, 곧 으챠 하고 몸을 일으켰다.

“쉬운 일은 아닐 거라 예상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어쨌든, 일 얘기는 여기서 끝. 나 퇴근하는 길에 잠깐 짐만


가지러 온 거야.”

그가 짐을 챙기며 흥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아까의 일이 생각났는지 그가 물었다.

“참, 택배 왔다 했지? 누구한테서 온 건데?”

후배가 택배에 붙어있는 전표를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음··· ‘김철수’라는데요? 표 기자님 맡은 취재 건 중에 김철수라는 사람한테서 연락 올 거 있었나요?”

“김철수? 아니? 그런 사람이 있었나?”

표영범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도 평범한 이름이라 대번에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딘지 귀에 익기는 한데······.

그런데 그때, 퍼뜩 누군가가 머릿속에 스쳤다.

표영범은 옷을 입다 말고 우뚝 굳었다. 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김철수?! 이리 줘봐!”

표영범이 후배의 손에서 택배를 재빨리 가져왔다. 그리고 나가려고 준비하던 것도 잊고 그 자리에 앉아서 택배를
뜯었다.

후배가 당황했다.

“급, 급한 거였나요?”

“아니, 그건 아닌데. 내가 아는 김철수는 딱 한 명뿐인데, 그 사람은 죽었거든. 4 년 전에.”

흡사 공포 괴담 같은 말에 후배가 입을 떡 벌렸다.

“예?! 그럼 유령한테서 소포가 온 거라고요?”

“그럴 리는 없겠지. 동명이인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김철수 배우 이름으로 보냈다거나······.”

표영범이 혼잣말로 추측하며 택배를 거침없이 뜯었다. 후배도 궁금해져선 고개를 쑥 빼고 택배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개봉된 택배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편지였다.

둘은 그것을 펼쳐 읽었다.

[저는 2004 년에 한국고를 졸업한······, 배우 지정수를 고발하고자······.]

쭉 보니, 그건 배우 지정수의 학교 폭력 과거를 폭로하는 고발문이었다. 편지 말미에는 편지를 쓴 사람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이런 류의 투서 같은 것들이 신문사로 날아오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이해가 안 되는 건······.

표영범이 택배를 이리저리 뒤집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름을 ‘김철수’로 보냈지?”

“그 배우랑 알던 사이거나 한 게 아닐까요? 생전에 표 기자님 얘기를 전해 듣고 도움을 청한 걸지도 모르죠.”

“그럼 그냥 자기 이름으로 보내도 됐잖아.”

“자기 이름으로 보내면 모르는 사이니까 표 기자님이 안 볼 거라 생각해서였을 수도 있죠.”

표영범이 ‘그런가?’하며 갸우뚱거리다가 곧 스스로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철수 씨 성격이라면 피해자한테 자기 이름 대고 나한테 보내라고 했을 수도 있어. 워낙 사람이 좋은


배우였거든.”

후배가 물었다.
“기사 내보내시게요?”

표영범이 후배를 보며 씩 웃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마침 이번에 내가 캐던 게 딱 이런 거였잖아. 그리고 요즘 지정수 TV 에 많이 보이던데,


시기도 적절하니 괜찮고.”

이슈가 필요하던 시점이었는데,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잘 되었다.

표영범은 외투를 마저 입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아니어도 기사 내보냈을 거야. 예전에 철수 씨한테 빚진 게 있거든.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그 빚 갚기도 전에 철수 씨가 교통사고로 떠난 거라서. 나중에라도 갚는 셈 치지, 뭐.”

“그렇군요. 그럼 퇴근은 오늘 늦게 하시겠네요.”

“어쩔 수 없지. 호박이 알아서 굴러 들어왔는데 그냥 바로 퇴근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표영범이 핸드폰으로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면서, 손만 흔들거려 인사했다.

“그럼 내일 봐.”

표영범은 바쁘게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 전화 받은 상대에게 ‘네, 네. 지금 바로 인터뷰 가능할까요?’


라고 물으면서 말이다.

후배는 그런 표영범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표영범은 앞뒤 안 재는 정의파 기자로 유명했다. 상대가 누구든 무서워하지 않고 달려드느라, 오죽하면 별명도
표범 기자라고 붙었을까.

후배는 자신의 선배를 아무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팩트 체크를 하려면 일주일 정도가 걸릴 것이다.

다음 주면 뉴스가 또 떠들썩해지겠구나, 생각하며 후배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드라마 크랭크 인 3 일 전.

[<단독> 배우 지정수 학폭 의혹, 피해자 측 “3 년 내내 구타당했다”]

가나일보에서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나왔다.

“역시 표 기자님이네.”

나는 그 기사를 확인하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내가 아는 표영범은 그런 투서를 받았을 때 망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성한의 친구를 설득해 고발문을 보낸 날, 늦어도 일주일 뒤쯤에는 기사가 뜰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래, 내가 선택한 건 표영범 기자였다.

피해자가 직접 커뮤니티에 올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게다가 진실공방이 지지부진 이어지면 드라마 일정이 촉박하므로 곤란하기도 했다. 하지만 표영범이 나선다면
최소한 그건 팩트가 검증되었다는 뜻이었다.
고발문을 보낼 때 이름을 누구로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나는 내 이름을 한 번 더 팔았다. 어차피 조 PD 에게도 한
번 팔았는데 두 번이라고 못 팔까하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일전에 개인적인 일로 그에게 도움 준 적도 있고 말이다. 표영범은 은혜를 무시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가 시기적절하게 터트려준 덕에 연예계와 방송계에 난리가 났다. 지정수의 소속사 측에서는 곧바로 의혹을
부정하며 법적 대응을 할 것이라 밝혔다.

그러나 그건 단순히 시작일 뿐이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지정수의 동창이라 밝힌 수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 마디씩 증언을 보탰다.

일이 점점 커지자 학폭 사실을 부정해봤자 눈 가리기 아웅이란 걸 깨달은 건지, 결국 배우 측에서 사실을


인정한다는 입장문이 나왔다.

그리고 우리 드라마는 발 빠르게 그의 하차 소식을 통보한 참이었다.

[tvM “<기라성과 기라민> 지정수 하차 결정······ 새 배우 캐스팅 예정”]

사실 지정수의 입장문이 나오기 전, 조종석 PD 는 그의 하차를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얽힌 것도 많은데 그냥 안고


가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설득했다.

차라리 일찍 손절하는 게 장기적으로 봤을 땐 드라마에 더 이득이라고. 하차 결정이 빠를수록 우리는 비윤리적인


일을 눈 감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고, 그것이 드라마에 긍정적인 이미지가 될 거라고 말이다.

결국 조 PD 는 내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거의 곧바로 지정수의 학폭 인정 입장문이 나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결정이 맞은 셈이었다.
사람들도 우리 드라마의 발 빠른 대응에 만족해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지정수의 자리를 대체할 배우를 캐스팅 하는 것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첫째, 당장 내일 모레 촬영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스케줄이 없는 배우를 찾아야 했다.

둘째, 이미 지정수의 하차 건으로 포스터나 티저 재촬영 등등의 손해비용이 발생했다. 새로운 대체 배우를 구할
여윳돈이 많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지금 스케줄이 없어 여유로우면서도, 당장 대사를 외우고 촬영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실력이 좋아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값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이 대체 어디 있느냔 말이지.”

조 PD 가 난감해했다.

그때, 내가 나섰다.

“저, 제가 적당한 사람을 알고 있는데. 한 번 연락해 볼까요?”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
그리고 몇 시간 뒤.

“고운 씨가 절 먼저 찾는 건 처음이네요.”

오용호가 날 보며 빙그레 웃었다.

기라성과 기린아
82.

오용호를 염두에 둔 건, 사실 꽤 오래전이다.

어쨌거나 지정수를 드라마에서 하차시킨다면 누군가는 그 자리를 대체해야 했다. 적임자가 누굴까 생각하다가
오용호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오용호만큼 적임자가 없었다.

내가 알기론 오용호는 지금 들어간 작품이 없었고, 그의 실력은 말해봐야 입 아팠다.

뭣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명예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떤 배우라도 자신이 누군가의 대체품이 되는 걸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오용호는 그런 점에 있어서는 걱정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원하는 것은 나와 작품을 하는 것, 오직 그뿐이었으니까.

오용호라면 지정수가 하차한 자리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개의치 않아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이런 생각을 그 역시 똑같이 했던 모양이었다.

왜냐면 그는 내가 여기 온 이유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듯 했으니까 말이다.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거, 처음으로 입장이 반대가 되어 보네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까부터 어째 의기양양한 것 같더라니, 그래서였나.

매번 오용호가 내게 작품 해달라고 매달리기만 했지, 이번엔 처음으로 내가 그에게 부탁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돼요.”

미안하지만, 배우를 구해야 하는 게 내 의무는 아니다.

원래 배우를 찾고 구하는 건 작가나 감독의 몫이었다. 나는 그저 오용호를 추천했고, 얘기를 꺼내보기 위해 온


것뿐이다. 그가 안 된다고 한다면 작감이 곤란하지 내가 곤란하겠는가.

내 태도에 오용호는 금방 꼬리를 말았다.

“제가 언제 안 한다고 했나요. 그냥 고운 씨가 먼저 날 찾아오는 날도 다 있네, 한 거였지.”

그는 참 특이한 놈이었다.

자기 자신의 연기력에 대한 확신이 높을 때는 거만한 놈인가 싶다가도, 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몸을 굽힐 때면


자존심은 의외로 없나 싶을 때도 있다. 목표를 위해선 다른 건 상관없다 주의인가?

어쨌거나 나는 확답을 듣기 위해 되물었다.

“그럼 한다는 뜻인가요?”

“당연하죠. 제가 할 거 이미 알고 온 거 아녜요?”

뭐, 그건 그렇지만.

“드디어 또 같은 작품으로 만나게 됐네요. 잘 해봐요.”

오용호가 쾌활히 악수를 건넸다. 나는 그 손을 맞잡았다.

알다가도 모를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오용호가 지정수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는 뉴스는 금방 떴다.

[<기라성과 기린아> 학폭 의혹 ‘지정수’ 하차한 자리에 ‘오용호’로 교체··· “촬영 일정 변동 없어”]

그리고 어디서 시작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소문도 돌았다.

내가 평소 친분이 있던 오용호를 설득했고, 오용호가 의리로 낮은 개런티만 받고 출연을 결심했다는 소문이었다.

실제로 오용호가 적은 개런티로 출연을 결심한 건 맞았다. 하지만 ‘의리’라니?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약간의 오해는 있었지만, 특별히 해 되는 소문은 아니라서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조금 웃기긴 했다.

의리라는 단어만큼 오용호에게 안 어울리는 단어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평소에 팬들에게는 그런 이미지인가?
뭐, 나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거나, 오용호의 출연이 결정되고 나서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사실 지정수의 인기가 요즘 높아졌다고 해도, 절대 오용호와 비교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정수를 대체할
자리에 훨씬 높은 몸값의 오용호가 오게 되었으니 당연히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똥차 가고 벤츠 온 격이랄까.

그리고 그건 제작진 측에서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조금 우려하던 시선도 막상 첫 촬영 날 오용호가 의상을 입고 촬영장에 등장하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와, 진짜 잘 어울리네···.”

“원래부터 저 배역이었던 것 같은데?”

사람마다 의견이 갈릴 주제이기는 하지만, 보통 배우마다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배역이 있고 아닌 배역이 있다고
한다.

아무리 분장과 연기력이 받쳐준다고 해도, 외모나 피지컬 자체가 배역과 어울릴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오용호의 경우가 그러했다. 지정수도 나쁘진 않았지만, 오용호가 같은 옷을 입고 나오는 순간부터
지정수가 연기했던 기린아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조 PD 도 은근히 만족한 눈치로 말했다.

“좋아요, 그러면 스탠바이하겠습니다.”

드라마 <기라성과 기린아>의 간단한 줄거리는 이러하다.

동생인 ‘기라성(나)’과 형인 ‘기린아(오용호)’는 아주 사이좋은 형제였다. 어릴 적, 그들의 가족은 화목했고


평안했다.

그러나 한 가족의 행복이 깨지는 날은 우연히 찾아온다.

차를 타고 여행 가던 어느 날, 커다란 트럭이 중앙선을 침범해 그들의 차를 덮친다.

차는 전복되고, 기라성의 부모는 차 안에서 즉사한다.

그리고 형인 기린아는 차에서 튕겨나가 하필 바로 옆인 비탈길로 굴러 떨어진다.

나중에 출동한 경찰이 비탈길과 그 인근 지역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그들이 발견한 건 기린아의 신발 한 짝뿐이었다.

경찰은 기린아가 비탈길 바로 아래에 있는 강에 떨어져 쓸려갔을 거라고 추측했다. 경찰은 시신을 강에서 찾지는
못했지만, 정황상 살아있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보았다.

그랬기에 뒷자석에 있던 기라성만이 홀로 살아남은 셈이었다. 그는 병원으로 실려 갔고, 머리 쪽에 큰 수술을


겪은 후 한참 뒤에 겨우 회복한다.

그리고 한 가족을 파탄시킨 트럭의 주인은 도망쳤다.


운전자는 기라성네 차를 치고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도망쳤고, 두려웠는지 아예 트럭을 근처에 버려두고
본인마저도 도망쳤다.

전국에 수배지가 뿌려졌지만, 결국 잡지는 못했다.

홀로 살아남은 기라성은 생각했다.

‘그 운전자를 찾아낼 거야. 아무도 못 찾는다면, 내 손으로라도 꼭.’

그건 뜨거운 복수심이었을까, 아니면 차가운 사명감이었을까?

그렇게 20 년이 흘렀다.

기라성은 검사가 되었고, 우연한 기회에 그 운전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시체로 변한 모습으로 말이다.

누가 보아도 살인의 흔적이 뚜렷했다. 누가 그 사람을 죽였을까?

용의자가 몇 있었다. 기라성은 용의자를 차례대로 만났다.

그리고 그러던 도중, 자신의 형― 기린아를 만나게 된다.

형이 살아있었다는 걸 20 년 만에 알게 되어 기뻐할 틈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자신의 형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되기 때문이었다.

형에게는 강력한 동기가 있었으니까.


기라성 그 자신이 검사가 되어서 그 운전자를 찾아내려 했던 것처럼, 형인 기린아 역시 운전자를 찾아내 사적
복수를 한 것일 수도 있었다.

동생보다 한 발 먼저 말이다.

운명은 참으로 얄궂었다. 20 년 만에 동생과 형이 검사와 용의자로 만나게 되었으니.

그러나 더욱 얄궂은 것은, 형이 범행을 부인했다는 것이었다.

“검사님, 나는 안 죽였어요.”

심지어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정체마저 부인했다.

“기린아? 그건 내 이름이 아닌데요. 제 이름은 이현명입니다.”

여기까지가 드라마 <기라성과 기린아>의 간략한 줄거리이다.

흥미로운 것은, 형이 진짜 범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는 것이다.

기라성은 형이 범인이라 생각해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증거들은 가끔 다른 용의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드라마는 그렇게 16 화 내내 형이 진범인지 아닌지 끝까지 숨기면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오늘 찍을 장면은 바로 그 장면으로, 형제가 20 년 만에 다시 조우하는 씬이었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터닝 포인트이기도 한 장면이었다.

나는 카메라 앞에 섰다.
가만히 감정을 잡으며 천천히 표정을 지웠다.

‘기라성’은 어렸을 때 당한 교통사고로 머리 쪽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의 영향 때문인 건지, 수술을 받고


회복한 이후 감정이 무뎌졌다.

내가 이 작품을 선택한 건 그러한 주인공의 캐릭터성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이전에 <천의 맛>에선 ‘김리오’와 ‘오대수’, 즉 두 명의 배역을 연기해야 했다. 그래서 이번엔
과잉되지 않은 연기를 해보고 싶었다.

이전에는 얼마나 많은 감정 연기를 할 수 있을지 도전해본 것이라면, 이번엔 반대로 철저히 적은 폭의 감정으로
어디까지 연기할 수 있을지 도전의식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스탠바이가 끝나자 조 PD 가 시작을 알렸다.

“레디, 액션!”

계장 역을 맡은 배우가 문을 빼꼼 열고 첫 대사를 뱉었다.

“기 검사님, 이현명 씨 도착했는데요.”

나는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 하세요.”

그리고 곧이어 오용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우리의 시선이 부딪혔다.


*

오용호를 보자마자 백고운이 벌떡 일어났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극본을 쓴 한여름 작가는 촬영장 한쪽에 서서 생각했다.

‘죽은 줄 알았던 형을 20 년 만에 만난 건데, 충격을 안 받았을 리가 없지.’

반면 오용호의 표정은 평온했다.

‘형은 동생이 담당 검사인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동생의 이름이 워낙 특이하니까 처음 담당 검사 이름을 봤을


때 모를 리가 없겠지. 물론 처음에는 놀랐겠지만, 동생과 달리 표정을 갈무리할 시간이 있었으니까.’

한여름은 속으로 사족을 붙여가며 둘의 연기를 지켜보았다.

인물들의 행동에 감정을 계속 설명하려고 하는 이런 습관은, 그녀의 오랜 버릇이었다.

오용호는 태연하게 자리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곤 물었다.

“참고인 조사 받으러 왔는데, 시작 안 하나요?”

백고운은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잠시 생각하는 눈치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는, 곧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한여름은 또 한 번 습관처럼 생각했다.


‘처음에는 확신하지 못하는 거지. 아무래도 20 년 동안 떨어져있었으니까. 어릴 때 외모는 커서 많이 변하기도
하고.’

백고운과 오용호는 형식적인 말을 주고받았다.

“3 월 10 일 오전 11 시 경,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때라면 정비소에서 일하고 있었겠죠. CCTV 에 찍혀있을 텐데요.”

“CCTV 는 그날 고장이 난 상태였습니다.”

“이런. 그랬어요?”

“몰랐다는 겁니까?”

“전혀 몰랐죠.”

“우연치곤 너무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고작 그 이유로 내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비약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둘은 한 마디도 안 지고 빠르게 대사를 주고받았다.

한여름은 그때만큼은 사족을 덧붙이는 것도 잊고 감탄했다.

‘리딩도 같이 안 했는데, 합이 엄청 좋네.’

백고운과 오용호가 잠시 말싸움을 멈추었다.

이어 오용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봐요, 검사님. 나는 안 죽였어요. 오히려 궁금하네. 왜 내가 죽였을 거라 생각해요?”

“······동기가 있으니까요.”

“동기? 나는 죽은 그 사람 처음 보는데요?”

“그럴 리가요. 그 사람, 당신의 부모님을 죽인 사람이잖아요.”


오용호가 눈썹을 치켰다.

백고운이 오용호의 손을 담담히 턱짓했다.

“내 형은 어릴 때부터 긴장하면 손가락 관절을 꺾는 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도 내 형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거든요.”

조사하는 그 사이에 기라성은 형의 손을 관찰하고 있던 것이었다.

한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하기 위해서 일부러 빠르게 압박 조사를 한 거야. 그리고 이제 확신을 한 거지.’

오용호는 주먹을 쥐어 손끝을 말았다.

“······.”

“······.”

백고운이 오용호를 빤히 바라봤고, 오용호 역시 그 시선을 지지 않고 마주했다.

긴장감이 차올랐고, 공기가 팽팽해졌다.

백고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제 인정하지 그러십니까? ······기린아 씨.”

원래 대본 속, 여기의 기린아의 대사는 이랬다.


[기린아? 그건 내 이름이 아닌데요. 제 이름은 이현명입니다.]

그런데, 그때 한참을 말없이 있던 오용호가 살짝 대사를 바꿔 답했다.

“내 이름은 이현명이야. 기린아가 아니라. 이름은 제대로 불러야지.”

그러곤 그가 친근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라성아.”

내용 자체는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말투였다.

대본과 다른 오용호의 애드리브에 촬영장이 술렁일 법도 했으나―.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단 것처럼 조 PD 가 헤드폰을 바짝 귀에 댔고,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줌인했다.

한여름도 생각했다.

‘드디어 시작했구나.’

감정 과잉, 감정 결핍, 그리고 제 3 의 연기


83.

그러니까 그건 두어 달 전쯤의 일이었다.

리딩이 시작되기 전, 백고운이 작가 한여름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제가 맡은 배역에 관련해서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한여름은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네, 편하게 물어봐주세요.”

이번 작품은 그녀의 첫 작품이자 데뷔작이다. 작가 지망생이었을 때, 캐릭터에 대해서 배우와 의견을 주고받는
이런 것을 남몰래 상상했었다.

꿈이 실현된 것 같아 기쁘기도 하고, 또 약간 긴장되기도 했다.

백고운이 물었다.

“라성이 설정에, 어렸을 때 교통사고를 당하고 머리를 다쳐 큰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어서요. 혹시 그
수술 때문에 감정이 거세된 건가요? 아니면 하루아침에 가족 모두를 잃은 충격으로 감정이 무뎌진 건가요?”

기라성은 감정이 없는 차가운 캐릭터이다.

백고운의 말은 그 캐릭터성이 ‘물리적’으로 야기된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정신적’인 충격 같은 것


때문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한여름 역시 대본을 쓸 때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그녀는 작가의 말이 너무 정답처럼 받아들여지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말하는 대신 백고운의 의견을
먼저 물었다.

“혹시 고운 씨는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백고운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저는 기라성이 가족을 잃은 충격으로 감정이 무뎌진 거라고 생각했어요. 완전히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면,
억울함도 느끼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기라성은 부모를 죽인 운전자를 찾아내기 위해 검사가 되기까지
했잖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복수심이 추동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한여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놀랐다.

왜냐하면 백고운의 해석은 한여름의 해석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라성을 완전히 무감각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대본을 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맞고, 너는 틀려’라는 감정이 든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한여름은 백고운의 해석도 설득력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일단 저는 감정이 완전히 거세된 느낌을 생각하고 썼어요. 하지만 고운 씨 생각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혹시 괜찮다면 본 촬영 전에 고운 씨가 말해준 그런 느낌의 연기를 한 번 보여줄 수 있을까요?”

백고운은 물론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래서 지금 찍고 있는 건 일종의 B 컷인 셈이었다. 조 PD 와도 이미 얘기가 된 내용이었다.

예정과 달라진 게 있다면, 상대역이 지정수에서 오용호로 바뀌었다는 점뿐이었다.

일전에 지정수와는 리딩을 해서 합을 맞춘 적은 있었지만, 오용호와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오용호는 확실히 숙련된 배우였다.

시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제작진들의 의도를 듣고 곧바로 능숙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오용호가 라성아, 라고 부른 직후였다.

백고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딱 봐도 동요한 티가 나는 얼굴이었다.

그가 먹먹한 목소리로 그리운 단어를 내뱉었다.

“······형.”

한여름은 그 연기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건 저번에 고운 씨가 말한 느낌. 훨씬 인간적으로 느껴지네.’

이건 보통의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서 죽은 줄 알았던 형제를 20 년 만에 다시 만났다고 했을 때, 대부분은 이런 느낌을 생각할


것 같았다.

한여름이 생각했던 기라성 캐릭터보다 조금 더 감성적이었지만, 20 년 만에 가족을 다시 만난 장면 아닌가.


상황의 특수성을 이해한다면 아주 허용되지 못할 범위는 아니었다.

조 PD 가 알렸다.

“좋아요, 두 번째 테이크 갈게요.”


한 번 끊은 후, 같은 장면을 두 번째로 찍었다.

이번에는 완전히 감정이 거세된 연기를 보여줄 차례였다.

대부분이 아까와 똑같았다.

다만 오용호가 처음 안으로 들어왔을 때, 백고운은 형을 알아봤음에도 살짝 눈썹만 꿈틀거렸을 뿐 별다른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백고운은 차분한 태도로 오용호를 앉히고 나서 마찬가지로 조사를 시작했다.

압박 조사를 할 때 빠르게 대사를 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나른하고 맥이 좀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문제의 대사가 또 다가왔다.

“이제 인정하지 그러십니까? 기린아 씨.”

아까 오용호는 일부러 기라성을 자극하기 위해 애드리브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번에는 대본에 쓰여 있는


대로 평범하게 부정했다.

“기린아? 그건 내 이름이 아닌데요. 제 이름은 이현명입니다.”

물론 그가 진짜 형이란 사실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남도 아는 정보였다. 시청자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등장인물 소개 자체에 ‘기린아/이현명’이라고 적혀 있으니 말이다.

뻔뻔한 형의 부정에 백고운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일 뿐이었다.


백고운은 건조하게 받아쳤다.

“형 맞잖아.”

“아닙니다. 조사는 이만 끝났죠? 그러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오용호가 먼저 일어났다.

“그러면 나중에 또 기회가 있다면 봅시다.”

그는 제멋대로 인사한 후, 방을 빠져나갔다.

백고운은 그런 오용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한여름은 촬영장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건 또 너무 건조하긴 하네.’

꼭 형이 아니라 완전히 모르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 같다.

리딩 때는 이렇게 삭막한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본 촬영과 리딩은 차이가 또 많이 나니 그런 듯


했다.

조 PD 가 컷을 말했다. 그가 잠시 한여름과 상의하기 위해서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백고운이 갑자기 물었다.


“저, 감독님. 혹시 한 번만 더 해봐도 되나요?”

“응?”

“방금이랑 비슷한데 조금 다른 방식으로도 해볼까 해서요.”

백고운의 말에 조 PD 와 한여름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조 PD 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뭐, 시도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까.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촬영 현장은 워낙 유동적이라 애드리브를 하는 건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뭔가 좋은 생각이 났나?’

한여름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백고운은 상대역인 오용호에게 어떻게 할 건지 미리 귀띔하려 했다.

그런데 오용호는 씩 웃더니 의외의 말을 뱉었다.

“그냥 바로 해도 돼요. 어떻게 하든 맞춰드릴 수 있으니까.”

사실 백고운과 오용호는 예전에 레미제라블 공연 때 합숙 연습을 가서 완전히 애드리브로만 합을 맞춘 적이 있었다.

폭설 때문에 섬에 갇혔을 때, 마을 회관을 빌리기 위해 그곳 어르신들의 앞에서 <레미제라블> 공연을 보여드렸다.

그런데 어르신들이 공연을 어려워하느라 멜로드라마적으로 개작한 <레미제라블>을 오용호와 즉석에서 꾸며냈었다.

말하자면, 둘은 꽤 합이 잘 맞는 파트너란 뜻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조 PD 와 한여름은 조금 놀랐다.

반면 백고운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럼 바로 할게요.”

조 PD 가 다시 메가폰을 잡았고, 카메라가 다시 돌아갔다.

백고운이 세 번째 연기를 시작했다.

세 번째 연기는 두 번째 것과 비슷했다.

백고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분하게 오용호를 조사했다.

연기가 이어진 후, 아까처럼 백고운은 ‘형이 맞지 않느냐’고 묻고, 오용호는 ‘아니다’ 부인하고 일어났다.

그런데 이번에 백고운은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는 대신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오용호가 문고리를 잡기 전, 슬쩍 몸으로 그의 진로를 막았다.

오용호가 우뚝 멈춰서고, 둘이 대치했다.

백고운이 바로 말을 꺼내지 않자, 오용호가 먼저 물었다.

“뭡니까?”

그런데 백고운은 대답 대신 뜬금없이 물었다.


“형이 죽였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전 그쪽 형도 아니고, 그 사람도 안 죽였습니다.”

그러나 백고운은 계속 제 할 말만 계속 했다.

“왜 죽였어?”

“이봐요, 검사님······,”

“왜 죽였냐고.”

둘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부딪혔다.

형의 입매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가셨다.

오용호는 똑똑한 배우였다. 아무리 애드리브라지만 여기서 멋대로 범행을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건
드라마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실이었다.

이 장면에서 밝혀진 건 그가 형이라는 사실뿐이다.

그래서 그는 말을 하는 대신, 그냥 무시하는 쪽을 택했다.

오용호가 몸을 비켜 백고운 뒤에 있는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그때, 백고운이 반쯤 열린 그 문을 손으로 짚어 ‘쾅!’ 닫았다.

둘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

“······.”
백고운은 그저 오용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까와 비슷한 무뚝뚝한 얼굴이었으나, 긴장된 분위기 때문인지
훨씬 딱딱한 인상을 주었다.

한편, 한여름은 눈을 크게 뜬 채 그런 백고운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그녀는 인물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속으로 계속 설명하는 게 습관이었다. 마찬가지로 백고운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그녀는 금방 알아차렸다.

‘화를 내고 있는 거구나.’

20 년 동안 꽁꽁 숨어 있다가 불현듯, 그것도 용의자로 제 앞에 나타난 형에게 그는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첫 번째처럼 센티멘탈한 반응도 아니고, 두 번째처럼 무미건조한 반응도 아니다.

하지만 이해가지 못할 감정은 아니었다. 어쩌면 가장 합리적인 반응 같기도 했다.

그러나 한여름이 놀란 건,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부분은 아니었다.

그녀는 백고운이 표현하고 있는 감정 연기가 아주 섬세하다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기라성은 감정이 거세된 차가운 캐릭터이다. 어떤 감정 연기를 해도 과하게 하면 어색해진다.

그리고 ‘분노’라는 감정은 기본적으로 뜨거운, 과잉된 감정이다.

그런데 지금 백고운의 얼굴에 서린 건 그야말로 차가운 분노였다.


그는 다른 대사나 표정 연기 없이, 오직 문만 세게 닫았을 뿐이다. 그런데 분위기가 180 도 변했다.

백고운은 아주 작은 동작으로 자신이 화났다는 사실을 과하지 않게 표현해냈다.

한여름은 그것이 놀라웠던 것이다.

백고운이 문을 쾅 닫은 후,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나 곧 그는 아무렇지 않게 문을 짚은 손을 내려 문손잡이를 잡았다.

백고운이 문을 연 후 건조하게 인사했다.

“다음에 또 봅시다.”

그의 얼굴에 어려있던 차가운 분노는 어느새 완벽하게 갈무리 된 후였다. 마무리까지 깔끔하다. 기라성다운
태도였다.

조 PD 가 말했다.

“컷, 좋아요.”

별다른 말은 안 했지만 흡족한 표정인 것이, 그도 방금 이 장면이 썩 마음에 든 눈치였다.

그때, 한여름에게 좋은 생각이 났다.

그녀는 조 PD 와 몇 가지를 상의한 후 백고운을 불렀다.


“고운 씨, 잠깐 볼 수 있을까요?”

한여름은 백고운에게 말했다.

“제 생각은 이래요. 첫 번째는 너무 기라성 캐릭터랑 어긋나는 것 같아요. 두 번째는 그에 비하면 너무


건조하고요.”

말하자면,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양 극단에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하나는 너무 과잉되어 있고, 하나는 너무
결핍되어 있다.

백고운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들었다.

“그러면 마지막 톤으로 갈까요?”

마지막은 딱 그 스펙트럼에서 중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여름은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이 마음에 안 든단 소리가 아니었다. 백고운의 연기를 보고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드라마란 건, 결국 주인공이 성장하고 바뀌는 이야기잖아요? 저는 그 셋을 시간 순서대로 보여주면 어떨까 해요.


초반엔 좀 냉혈한처럼 보이다가, 점차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식으로요.”

그냥 쉽게 말하자면, 셋을 다 섞고 싶다는 뜻이다.

한여름이 물었다.
“혹시 가능해요?”

그리고 백고운의 대답은 시원했다.

“그럼요, 물론이죠.”

세상에 이런 일이
84.

“참, 형. 로케 촬영하러 가는 날이 언제였죠?”

나는 대본을 외우다가 불현듯 든 생각에 앞좌석에 앉은 매니저에게 물었다.

매니저가 차를 부드럽게 돌리면서 대답했다.

“다다음 주야. 그래서 저번에 여권도 만들었잖아.”

그랬다. 이번 드라마에서는 해외에서 찍는 로케 촬영이 있었다.

저번에 여권도 만들었는데, 요 며칠 정신없이 촬영 하느라 잠시 깜빡 했다.

매니저가 웃으면서 말했다.

“고운이 너는 이번에 해외로 처음 나가보는 거니까 많이 설레겠네.”

김철수일 때는 많이 나가봤지만, 백고운의 몸으로는 처음이었다.

어쨌거나 남들 눈에는 내가 해외여행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으로 보일 테니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네, 많이 기대돼요. 영국 가는 데에 오래 걸리겠죠?”

“거의 12 시간 걸릴걸.”

“······벌써 걱정되네요.”

젊었을 땐 오랜 이동시간을 버티는 것도 거뜬했는데, 조금 나이 든 후에는 한 곳에 앉아서 조금만 오래 있어도


좀이 쑤셨다.

그래도 지금은 다시 젊어졌으니 괜찮으려나?

매니저가 와하하 웃었다.

“벌써 그렇게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면 어떡해? 비행기 타는 거 설레거나 그러지 않아?”

“하하··· 네, 설레요.”

“참. 비행기 탈 때 신발 벗고 타야 하는 거는 알지?”

“······.”

가끔 매니저는 나보다 더 재미없는 농담을 하곤 한다.

나는 매니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푸른 하늘이 보였다. 마침 비행기 하나가 비행운을 그리며 하늘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사실, 많이 익숙한 척 했지만 조금 설레기는 했다.

비행기 타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상당히 오랜만이기는 하니까.

김철수였던 시절, 화상입고 은퇴한 후에는 거의 집에서 칩거하느라 해외는커녕 집밖에도 잘 못 나갔다. 그 시절이
7 년. 그리고 백고운으로 깨어난 후에는 또 촬영하느라 바빠서 5 년. 합치면 거의 10 년 만 아닌가.
조금쯤은 기대돼는 게 사실이었다.

나는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슬그머니 매니저에게 물었다.

“······형, 신발 벗고 탄다는 거 농담 맞죠?”

10 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시간인데, 설마 그 사이에 비행기 타는 법이 바뀌었다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슬그머니 치켜든 불안에 조심스레 묻자, 매니저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매니저가 타고난 마당발이라는 사실을 잠시 깜빡했다.

매니저의 장난에 한 번 속아 넘어간 것뿐인데, 촬영장엔 어느새 내가 비행기란 신문물을 처음 접해본 사람이란
소문이 쫙 퍼졌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 이후 어째 사람들이 나를 귀여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착각이려나?

어쨌거나 그런 소소한 해프닝이 있은 후, 드디어 로케 촬영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드라마 팀이 다 같이 가는 거라, 나는 사람들과 함께 출국 수속을 밟았다.

12 시간 비행을 잘 버틸 수 있을까 살짝 걱정했었지만, 자리가 넓은 퍼스트 클래스라 그런지 오히려 꽤 편하게


갔다. 그동안 촬영하느라 바빠서 미뤄왔던 작품들을 몰아보면서 오랜만의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그리고 물론,
당연한 말이겠지만, 비행기 탈 때에 신발을 벗을 일은 없었다.

오랜만의 비행은 꽤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건 딱 입국하고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였다.

우리는 새벽에 도착해 짐만 겨우 풀고 잠들었는데,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촬영 강행군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오전과 낮에는 런던 도심지에서 몇 장면을 찍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외곽 지역으로 넘어갔다. 낯선 외국의 풍경을
즐길 시간도 없이 바쁜 일정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로케 촬영은 원래 여유로울 수가 없다. 최대한 짧고 한정된 시간 안에 찍어야 할


분량을 모두 다 찍어야 하기 때문에 스케줄이 빡빡할 수밖에.

그래서인지 다들 약간 지쳐 있었다. 나 역시 시차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움직이다보니 피곤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더 힘들 걸 뻔히 알았기 때문에 힘을 냈다.

조 PD 도 다른 사람들을 독려했다.

“이거 찍고 나면 오늘 일정은 끝입니다. 모두 힘들겠지만 힘냅시다.”

“네!”

마지막 촬영지는 관광 장소로, 워낙 배경이 예쁜 탓에 많은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곤 하는 촬영 스폿이었다.

나도 김철수인 시절, 이 근처 지역에서 촬영하러 온 적이 있었다. 물론 아주 오래전이라 주변 풍경은 많이


달라졌긴 했지만.

촬영 장비를 설치하고 잠시 해가 저물길 대기하고 있는 때였다.

오늘 하루 무난히 찍나 싶었더니, 막판에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Q#T$Y^$Y@#!V&&*$&V$CW!EDC!!”

갑자기 들려온 날카로운 외국어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거기엔 한 외국인 남자가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며 뭐라뭐라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처음엔 워낙 말이 빨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뻔 했으나, 그래도 영어라 주의 깊게 들으니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조 PD 에게 설명했다.

“장사에 방해되게 여기서 뭐하느냐고 하는 것 같아요.”

물론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터였다. 곳곳에 널린 촬영 장비가 빤히 보였으니, 더 정확히 말하면 꺼지란 뜻에


가까울 것이다.

촬영 때문에 골목을 막아놓았는데, 그것 때문에 그런 듯 싶었다.

조 PD 가 억울한 듯 헛숨을 뱉었다.

“아니, 이미 다 허락받고 찍는 건데 무슨.”

그때, 오용호가 나섰다.

“제가 한 번 대화해볼게요.”

그는 그 남자에게 다가가 사정을 설명했다.


멀리서 들리긴 했지만, 그의 영어는 유창했다.

우리는 새삼 감탄했다. 사실 오용호는 영국에서 꽤나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여기서 시즌제 드라마도 찍은 적


있었다.

조 PD 가 약간의 기대를 담아 누구에게랄 것 없이 속삭였다.

“여기에서 용호 씨 얼굴 알아보는 사람도 꽤 있었는데. 저 사람도 알아보지 않으려나? 왜, 얼굴이 익숙한 스타가
있으면 좀 유해지잖아.”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니었다.

오용호는 다시 돌아오더니 고개를 저었다.

“촬영 중이라고 설명했는데도, 막무가내네요.”

그러나 그 사람이 아무리 화를 낸다고 해도 촬영을 무를 순 없었다. 촬영이란 게, 누가 비키라고 하면 ‘아, 네


알겠습니다’하고 접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 외국인 아저씨는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 외국어로 욕설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우리는 무시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먼저 지쳐서 알아서 조용해지겠지, 라는 심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아저씨를 얕봤다.

우리가 여전히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촬영 준비를 하고 있자, 그 아저씨가 자신의 가게로 들어가더니 잠시 뒤 다시


나왔다.

손에 양동이 하나를 들고서 말이다.

“······!!”
우리가 어쩌기도 전에 그 아저씨가 양동이 안에 있는 것을 이쪽으로 냅다 던졌다.

음식물 쓰레기가 시멘트 바닥에 철퍽 떨어졌다.

다행히 촬영 장비나 사람에게 던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모션만으로도 모욕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스태프와 배우들이 얼굴을 와락 찡그렸고, 촬영장 분위기는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

“······.”

심지어 바닥에 흩뿌려진 음식물 쓰레기에서 흘러나온 오물이 이쪽으로 천천히 흘렀고, 악취도 났다.

조용한 가운데 아저씨가 내뱉는 욕설만이 크게 들렸다. 거기엔 인종 차별적인 욕설도 있었다.

어쩌지?

여기서 촬영을 더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무시하고 촬영을 강행하려 해도, 저 아저씨가 계속 소음을 일으킨다면 애초에 촬영이 불가능했다. 야외 촬영은
주변의 협조가 없으면 진행이 어려운 것이 단점이었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나기에는, 우리에게도 일정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여기가 한국이었다면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해외 로케 촬영이었다.

나중에 다시 와서 찍으려면 그만큼 시간이 지체되고, 그러려면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촬영팀 식구들의 숙박도 하루
더 잡아야 한다.
숙박뿐이랴, 비행기 표도 바꿔야 하고 귀찮은 일이 꽤 많이 생긴다. 귀찮은 것에 그치면 다행이지만, 문제는
거기에 돈이 든다는 것이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한국 같았으면 경찰 부르고 좀 실랑이하면 해결 될 텐데. 하지만 여기는 해외였다. 경찰을 부른다 해도 우리에게
협조적일지 알 수 없었다. 여기에서 이방인은 우리였으니까.

진퇴양난인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구도 선뜻 의견을 못 내고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가게 안에서 한 외국인 여자가 뛰어나오더니, 화내고 있는 남자를 붙잡고 그만하란 투로 말렸다. 아마 남자의
아내로 보였다.

모두가 상황이 좀 나아질까 은근히 기대하는 투로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나는 홀로 깜짝 놀랐다.

왜냐면 그 여자의 얼굴이 낯익었기 때문이었다.

내 이름에서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온 건, 거의 반쯤은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리사?”

사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놀라웠다. 내가 그녀를 만난 건 거의 십 년도 훨씬 전의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여자 역시 낯선 이방인에게 이름이 불리고 나서 깜짝 놀란 듯 날 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아내의 이름이 불린 외국인 아저씨와, 촬영팀 식구들까지 말이다.

모두가, 심지어 이름이 불린 장본인인 리사까지도, 내가 어떻게 그녀를 알고 있는지 궁금해 했다.

그건 그러니까 십 오 년 전쯤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한창 느와르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영화 촬영 차 이 근처에 온 적이 있었다. 바로 그때 리사를


만났다. 그녀는 촬영지 바로 옆에 있던 가게의 젊은 사장이었다.

여기까지였다면, 평범하게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십오 년 전 리사는 임산부였고, 하필 우리가 촬영하던 그날 예정보다 일찍 그녀의 양수가 터졌다.

당연히 종업원들이 난리가 났는데, 그 난리가 바로 옆에서 촬영하고 있던 우리에게까지 들려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우연의 우연으로, 우리는 촬영 때문에 경찰차 한 대를 빌린 상태였다.

촬영이 막 끝난 상태이기도 했고, 들어보니 리사의 남편은 하필 출장 간 상태라고 하기도 하고, 종업원들이
택시를 잡으려고 시간이 지체되는 게 불안해보이기도 해서, 어쩌다 우리가 그 경찰차로 그녀를 태우고 병원까지
데려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어쩌다 하게 된 일이었다.

왜, 길을 가다가 누군가 갑자기 쓰러지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도와주지 않는가. 그런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날도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면서 ‘해외에 오니 시트콤 같은 일을 다 겪어보네’라고 농담을 나눴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때의 인연을 지금 여기서 말할 수는 없었다. 십오 년 전 그 당시에 있었던 건 백고운이 아니라
김철수였으니까.

나는 조 PD 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 잠시 저 분과 얘기 좀 하고 올게요.”

그리고 리사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얼굴이 더 잘 보였는데, 십오 년 전의 그때 그녀가 확실히 맞았다. 시간이 지나도 사람
얼굴은 잘 안 바뀌니까.

촬영팀 식구들이 조금 떨어져 있다는 걸 확인한 후, 나는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혹시 십오 년 전, 이 근처에서 촬영하던 사람들을 기억하시나요? 경찰차에 당신을 태워서 병원으로 갔던


사람들 말이에요.)”

“(오, 그럼요! 그분들 덕에 내가 딸 제니를 무사히 낳을 수 있었죠. 그런데 당신이 그때의 일을 어떻게 알고
있죠? 그때 계셨나요?)”

십오 년 전에 그 장소에 있기엔 지금 내 나이가 너무 젊을 것이다. 리사 역시 그것이 걸렸는지 조금 의아해보였고.

나는 뭐라 변명해야 하나 눈을 굴렸다. 내가 김철수라 할 수도 없고.

그때, 내 눈에 마침 오용호가 보였다.

동시에 그가 예전에 내 정체를 추측하며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때 계셨던 배우 분이 제 아버지거든요. 아버지 앨범에서 당신과 함께 찍은 사진을 봤어요. 물론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오용호는 그때 내가 김철수 아들이냐고 물었었다. 지금 생각나는 변명이 그것밖에 없어서 급조 좀 했다.

리사가 놀란 듯 ‘리얼리?’를 외쳤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기막힌 우연이지만, 뭐. 여기는 한국이 아니니까.

나는 뻔뻔하게 맞다고 어깨를 으쓱였다.

악센트 연기
85.

내 정체를 듣고 난 뒤, 리사는 얼른 자신의 남편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는 화들짝 놀랐다.

하기야 어떻게 보면 내가 은인인 셈 아닌가. 그것도 모르고 꺼지라고 욕설을 내뱉었으니 그의 입장에서야
미안하기도 할 터였다.

그의 태도는 한순간에 180 도 바뀌었다. 그가 쩔쩔매며 사과했다.

“(세상에! 정말로 미안합니다.)”

그는 한참이나 미안해하며 말을 이었다.

나를 몰라봤다, 덕분에 딸을 무사히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내게 엄청 고마워하고 있다, 당신은 우리의


은인이다, 무례를 부디 용서해 달라,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짜고짜 모욕을 당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가 태도를 갑자기 바꾼다 한들 기분이 미묘한
것이었다.

결국 내가 리사와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그는 계속 우리를 무시했을 것 아닌가. 특히 인종차별 당한 부분은


여전히 찝찝했고.

하지만 어쨌거나 상황이 좋게 풀린 건 다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따져서 얼굴을 붉히는 대신 그냥 군말 없이 사과를 받아들였다.

뭣보다 리사를 다시 만나서 나도 마음이 좀 너르게 된 것도 있었다. 십여 년 전의 인연을 우연한 기회로 다시


만나게 되니 사람이 좀 감상적이 된다고 해야 할까. 리사를 봐서 그냥 나는 주인아저씨의 무례를 용서했다.

아무튼 리사와 나는 화기애애하게 딸 제니에 관한 얘기를 잠깐 나눈 후(그녀는 아픈 데 없이 잘 자랐단다), 다시


우리 촬영팀 식구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잘 해결됐어요. 더 이상 뭐라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스태프들도 멀리서 나와 리사가 대화하는 걸 지켜보면서 대충 좋은 방향으로 얘기가 풀리고 있다는 걸 눈치로
알아챘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확인시켜주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사의 남편은 아까 자신이 던진 음식물 쓰레기를 다시 주워 담아 치워주었고,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손짓을 해보였다.

어쨌거나, 기막힌 우연이긴 하지만 리사를 만난 덕에 일은 잘 풀렸다.

촬영은 다시 무사히 재개됐다.


중간에 어지간히 미안했는지 주인아저씨가 야식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촬영장 식구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던
일화가 있기도 했다.

그때쯤엔 제법 분위기가 괜찮아져서 우리는 감사를 훈훈하게 주고받을 수 있었다.

내가 한 것은 별로 없는데, 촬영장 식구들은 간간히 ‘고운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며 내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것 참, 민망스럽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한편 리사의 가게 안.

백고운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리사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한 명이 더 있었다.

그 한 명은 바로 리사의 남동생인 톰이었다.

“(······저 배우가 그때 누나를 도와줬던 사람의 아들이라고?)”

“(그렇다니까. 세상 진짜 좁지 않니?)”

톰은 다시 한 번 창밖을 바라봤다. 2 층이라 조금 떨어진 촬영장이 한 눈에 보였다.

그는 그 가운데에 선 잘생긴 한 남자를 주시했다. 그 남자가 바로 리사가 말한 백고운이란 배우였다.

리사가 물었다.

“(혹시 유명한 사람이야? 나는 몰라도 너는 영화 관계자니까 알 법도 하잖아.)”


톰은 잘 모르겠단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어쩐지 낯이 익기도 했다.

어쩌면 톰은 백고운이 나온 영화를 이미 봤을 수도 있다. 톰의 일은 영화를 보는 것이니까. 그것도 아주 많이.

그 리스트 중에 혹시 백고운이 나온 영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도


영화를 많이 보는 터라 주의 깊게 기억해두지 않으면 배우들은 잘 헷갈린다.

게다가 톰은 영화를 볼 때 배우보다는 감독을 더 기억해두는 편이기도 하고 말이다.

곧 리사가 늦은 저녁을 갖다 주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톰은 식사를 마친 후 다시 한 번 밖을 흘깃거렸다. 그때까지도 촬영은 계속 되고 있었다.

톰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리사는 그런 그를 향해 물었다.

“(이제 집에 가려고?)”

“(아니, 구경 좀 하다 가려고. 혹시 또 모르잖아. 좋은 작품 하나 발견할지.)”

톰이 가리키는 건 밖의 촬영장이었다. 리사가 못 말리는 영화광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한국 영화도 자주 봐?)”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누나는 아예 본 적 없어? <설국열차> 몰라? 크리스 에반스가 나왔던. 그게 한국
영화잖아.)”

“(크리스 에반스? 그게 누군데?)”

“(뭐? <어벤져스>에 나온 배우잖아.)”

“(얘, 내가 그런 영화 싫어하는 거 알잖아.)”


가족이라고 해서 꼭 취향이 통하는 건 아니다. 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후, 대화를 대충 마무리 지었다.

“(그럼 다음에 또 올게.)”

톰은 밖으로 나간 후 바로 옆의 촬영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촬영에 방해되지 않게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구경했다.

행인 몇몇도 이방에서 온 영화인들이 궁금했는지 지나가는 길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서성거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흥미를 잃고 자리를 떴다.

톰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은 여기 사람들에게는 너무 낯선 나라이기는 했다.

‘(사실 나도 잘 모르는 건 마찬가지지. 몇 년 전에 <강남스타일>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아는 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톰은 기꺼이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다. 때로는 이런 우연한 기회에 낯선 것을


만나는 것도 신선하니 좋았기 때문이었다.

곧 촬영장이 조용해졌다. 촬영이 시작된 것 같았다.

누나가 말했던 백고운이란 배우가 드디어 움직였다.

그는 손전등 같은 걸 들고 뭔가를 조사하는 것처럼 가게 대문을 여기저기 비췄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F$%ERTB&$HEWRW%&&B.”

그러나 한국어를 모르는 톰의 귀에는 외계어나 다름없었다.

무슨 대사를 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대충 심각한 분위기 정도라는 것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그때, 영국인으로 보이는 엑스트라 한 명이 카메라 안으로 걸어왔다. 백고운은 그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엑스트라가 떨떠름하게 멈춰 섰고, 백고운은 그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이번엔 대사가 영어라서 톰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백고운이 방금 손전등으로 비추었던 가게가 최근에 문을 안 열기 시작했다는데, 정확히 그게


언제부터인지 묻는 내용이었다.

‘(수사물 장르인가?)’

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백고운의 질문을 들은 엑스트라가 대답은커녕 ‘나는 모른다’라는 뉘앙스로 뚱하니 고개를 젓더니, 그냥 훽
가버렸다.

백고운은 그런 엑스트라의 뒷모습을 보기만 할 뿐, 당황해하지도 않고 짜증내하지도 않았다. 맡은 배역이 꽤나


무감각한 캐릭터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두 번째 엑스트라가 또 나타났다. 그 엑스트라 역시 지나가는 행인 역할이었다.

백고운이 또 한 번 그 엑스트라에게 말을 붙였다.

“(실례합니다. 뭣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톰은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백고운의 영어 악센트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백고운이 첫 번째 엑스트라에게 말을 붙였을 때는 완벽한 미국식 발음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엑스트라에게 말을 붙였을 때는 완벽한 영국식 발음이었다. 주로 posh 억양이라 불리는 영국


표준 발음(RP:received pronunciation) 말이다.

미국식 발음과 영국식 발음은 말투에서부터 차이가 확실히 있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처음엔 백고운이 미국식으로 발음하기에, 그냥 미국 사람에게 배웠나 보다 했다.

그러나 영국식으로도 발음하는 것을 보니, 일부러 발음에 차이를 두고 연기하는 것 같았다.

사실 영국인 배우에게 악센트 연기는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계급 문화가 아직 남아 있는 영국은 계급에 따라 악센트가 나뉘기 때문에, 영국 배우들은 대부분 자신의 발음을
표준 발음으로 교정한다.

하지만 외국인이 그것을 의식하고 연기하는 건 왠지 처음 보는 것 같아, 조금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그러나 놀라기엔 아직 일렀다.

잠깐 쉬는 시간 뒤, 백고운은 새로운 의상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깔끔한 양복을 입었던 아까와 달리 이번엔
비교적 후줄근한 차림이었다.

다시 촬영이 시작되자, 그는 주머니에 손을 푹 쑤셔 넣고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그때, 세 번째 네 번째 엑스트라가 나타나 그들끼리 빠르게 대사를 주고받으며 길을 지나갔다.


“(여기 주인 말이야, 실종된 게 아니라며?)”

“(어떻게 알아?)”

“(정크가 며칠 전에 부둣가에서 그 사람을 봤대.)”

그때 백고운이 그들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확실해?)”

엑스트라들이 당황해 되물었다.

“(넌 뭐야?)”

“(누구긴. 여기 주인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이지. 며칠 전부터 안 보여서 내 돈 갖고 튄 줄 알았어. 젠장, 당장


돈이 급한데. 이봐, 아까 그 사람을 어디서 봤다고?)”

톰은 이번에 또 한 번 놀랐다.

백고운이 지금 내뱉는 말투는 코크니 억양으로, 런던의 노동자 계급이 주로 쓰는 언어였다.

셜록 홈즈가 정보를 얻으러 거리의 하층민들과 대화할 때 바로 저 코크니 억양으로 대화했다고들 한다.

아마 이 장면도 그것에서 모티브를 따온 듯했다. 엑스트라는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보이는 백고운에게
금방 정보를 건네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장면을 구상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연기할 수 있는 건 매우 다르다.

우선 악센트에 차이를 둘 수 있도록 연기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아마 전문 배우가 아니라면 본토 사람들도


어려워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어려운 것을 타지의 외국인이 아무렇지 않게 하니 톰이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미국식 발음, 영국식 표준 발음, 그리고 코크니 발음. 세 악센트를 모두 할 수 있다니, 대단한데. 혹시 이쪽
출신인가?)’

인종이 다르다고 해도 여기서 태어나 나고 자란 영국인일 수도 있다.

혹시 저 배우도 그런 경우인 걸까? 호기심이 치켜들었다.

그래서 톰은 쉬는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쩍 다가가 백고운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리사의 동생 톰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톰은 일부러 백고운의 발음을 확인하기 위해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백고운은 성실히 대화에 임했다.

그런데 연기가 아닌 사적으로 대화를 해보니, 백고운은 발음이 아까와 전혀 달랐다.

아주 못 알아 들을 정도는 아니지만, 외국인이란 것이 확 느껴지는 영어라고 해야 할까. 최소한 영국인이거나


미국인은 아닌 것 같았다.

톰은 놀랐고, 그래서 묻고 말았다.

“(아까 연기 했을 때랑 발음이 전혀 다르네요.)”

그러자 백고운은 대답했다.

“(아, 그건 연기하기 위해 그 대사만 연습한 겁니다.)”


“(악센트도요? 셋 다 다르던데요.)”

백고운이 멋쩍게 웃었다.

“(이런, 역시 본국 사람에게는 숨길 수가 없네요. 네이티브가 보기엔 많이 서툴죠?)”

톰은 펄쩍 뛰었다.

“(그럴 리가요! 아주 완벽했어요. 저는 당신이 영국인인 줄 알았습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연습한 보람이 있네요.)”

“(그게 연습으로 가능한 거라고요?)”

“(물론, 엄청나게 연습하기는 했죠.)”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봤는데 안 믿을 수도 없었다.

톰은 문득 깨달았다. 이 사람, 연기를 엄청 잘하는 배우구나.

톰은 충동적으로 악수를 건넸다.

“(멋진 연기였습니다. 나중에 또 봅시다.)”

나중에 또 보자고? 백고운은 조금 의아한 듯 보였지만 어쨌거나 손을 마주잡았다.

“(네, 다음에 또 볼 수 있길 바랍니다.)”

그때 때마침 감독이 다시 백고운을 불렀고, 그가 톰에게 인사한 후 다시 촬영하러 떠났다.

톰도 몸을 돌려 촬영장을 떠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떠나기 전 품에서 수첩을 꺼내 거기에 백고운의 이름을 적었다. 집에 들어가서 그가
나온 영화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사실, 방금 전 인사했을 때 톰이 다음에 또 보자고 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칸 영화제의 수석 프로그래머였기 때문이었다.

칸 영화제에 초청할 작품을 찾아보고 고르는 것이 바로 그의 일이었다.

‘(이번에 찍는 게 드라마라고 하던데. 다음엔 부디 영화를 찍어주었으면 좋겠군.)’

톰은 수첩을 탁 닫고 씩 웃었다.

오래지 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예감이 강렬하게 드는 밤이었다.

화재 촬영
86.

한편, 톰의 정체가 누군지 꿈에도 몰랐던 나는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호텔로 복귀했다.

그 뒤 로케 촬영은 일주일 정도 더 이어졌는데, 촬영은 순조로웠고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힘든 일도 재밌는 일도 많았던 로케 촬영은 일주일 뒤 막을 내렸다.

*
드라마 <기라성과 기린아>는 이제 3 분의 2 정도 촬영을 마쳐갔다.

비록 사전제작이긴 하지만, 그동안 촬영하느라 다들 많이 지쳐있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뒤, 우리는 수고했다는 의미로 짧은 휴식을 선물 받았다. 물론 배우들뿐 아니라
스태프들까지 포함해서 모두 말이다.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과, 연인이 있는 사람은 연인과, 친구가 있는 사람은 친구와 시간을 보내러 갔다.

나 역시 오랜만에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백고운의 몸으로 새로 사귄 친구들, 그리고 소속사 사람들에게 영국에서 사온 기념품을 건네자 그들은 좋아했다.

그리고 당연히 마지막으로는 김건을 만났다.

건이에게는 면세점에서 산 술과 화장품을 건넸다.

“이건 네 꺼, 이건 선희 씨 꺼. 더 좋은 걸 사왔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쇼핑하러 갈 시간이 없었거든.”

김건은 환호하며 내가 가져온 술을 받았다.

“로얄 살루트잖아! 그것도 38 년산!”

나는 술을 그리 자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김건은 애주가였다. 양주를 선물해주면 좋겠다 싶어서 골랐다.

“물어보니까 추천해주더라고. 여러 개 있었는데 그게 제일 나을 것 같아서. 그래도 영국을 갔다 왔으니까.”

면세점 직원이 말해주기로, 그 술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2 세 여왕의 대관식에 헌정된 술로 그때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위스키란다.
“취향에 맞는 술일지는 모르겠네.”

“모르는 소리네. 나는 비싼 술이면 다 취향이야.”

김건이 키득거리며 선물을 받아갔다.

“아무튼 정말 땡큐. 잘 먹을게. 이건 와이프 꺼라고 했지?”

“응. 화장품도 잘 몰라서 그냥 좋은 거 달라고 했어.”

“고마워. 선희도 좋아할 거야. 하여간, 내가 친구 하나는 잘 뒀네.”

“이럴 때만?”

내가 농담을 던지자 김건이 얼른 장난스럽게 받았다.

“어우,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까. 당연히 아닙죠.”

우리는 짧은 꽁트를 한 후, 다시 일상적인 대화로 넘어갔다.

“그나저나 걔는 요즘 어때?”

“누구?”

“누구긴. 네 껌딱지지.”

“아, 오용호?”

“그래. 걔. 이번엔 네가 먼저 걔랑 작품하자고 했다며. 그거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어쩔 수 없었어. 알잖아. 주연 배우 하차하고 나서 대체할 배우를 얼른 캐스팅해야 했던 거. 오용호가 그


자리에 적격이었거든.”

“그거야 알지. 어쨌거나 그 이후론 괜찮나 보네? 뭔 얘기가 없는 걸 보니. 이전처럼 귀찮게 하지는 않고?”

김건의 말을 듣고 새삼 생각해보니, 요즘 오용호는 의외로 잠잠했다.


그동안 맞부딪히는 장면도 꽤나 여러 번 찍었는데, 그때마다 오용호는 비교적 조용히 찍을 장면만 찍고 곧바로
넘어갔다.

예전에는 본 촬영 전에 몇 번이고 같이 연습하자면서 달라붙고 그랬는데 말이다.

막상 작품을 같이 하게 되니까 심드렁해졌나?

나는 잘 모르겠다고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걔 속을 어떻게 알겠어. 워낙 알다가도 모르겠는 놈이잖아.”

“그거야 그렇지.”

어쨌거나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고 우리는 같이 어깨를 으쓱였다.

선물 같던 짧은 휴식 이후, 우리 <기기>팀은 다시 촬영장에 복귀했다.

나는 스태프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촬영장 한쪽에서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얼굴 근육과 입을 풀었다.

오늘 찍을 장면은 꽤나 고된 장면으로, 전체 내용에서도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촬영도 거의 하루


종일로 꽤 길었다.

그래도 며칠 쉬고 온 탓인지 아직 지치기보다는 기대감이 먼저 들었다.

조 PD 가 물었다.

“고운이 준비 됐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빙그레 웃었다.

“네, 물론입니다.”

드라마 <기라성과 기린아>는 살인사건의 진범이 형인 기린아의 짓인지 아닌지 계속 시청자를 헷갈리게 하면서
내용이 전개 된다.

그리고 동생인 기라성은 형이 범인일 거라 생각하며 그 증거를 찾는 한편, 참고인 조사 이후 모습을 감춘 형을


찾아내기 위해 형의 뒤를 쫓는다.

한편 검찰 쪽 사람들은 기라성과 용의자가 형제 관계라는 걸 나중에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다.

그들은 기라성을 걱정한다.

“기 검사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수사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그들은 기라성이 힘들어할까봐 걱정했다.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친형을 자신이 잡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 힘든 일이 아니던가. 가족의 죄를 자신이


직접 까발리는 셈이니까.

그러나 그 말을 듣고 기라성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괜찮습니다. 형은 제가 잡아야 하니까요.”

검사들은 그 말을 결자해지쯤으로 받아들였다.


가족이 죄를 지었다면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가족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에게 더 피해가 가기 전 동생인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 뭐 그런 뜻으로 말이다.

하지만 기라성이 하고자 하는 말은 전혀 다른 뜻이었다.

“형은 상당히 교활하고 잔꾀가 많습니다. 상황 파악도 빠르고, 주변을 이용하는 장악력도 대단하죠. 범죄 흔적을
남기거나 하지도 않고, 자신에게 불리한 짓도 절대 하지 않고요.”

“네?”

“그런 형을 잡으려면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덫을 놔야 하죠. 미끼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미끼는
저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를 테면 형이 기라성을 보고 감정적으로 멈칫 할 때, 경찰과 검찰이 그 때를 놓치지 않고 형을 붙잡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검사들은 말문을 잃었다.

‘가족 맞아? 누가 보면 완전 원수인 줄 알겠네. 하긴, 연수원 때부터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이미지이긴 했지.’

처음에 기라성의 불행한 상황에 동정심을 표했던 사람들은, 나중에는 기라성이 냉혈한이라며 혀를 찼다.

그러나 기라성이 형을 증오했다거나 한 건 아니다.

아니,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반대였다.

드라마의 12 화쯤에서 기린아가 유력 용의자로 좁혀지는 가운데 새로운 피해자가 발생하게 된다. 살인수법은
처음과 똑같았다. 경찰은 연쇄살인 사건으로 인정한다.
즉, 형이 범인이 맞다는 소리였다.

반신반의하던 것도 끝났다. 경찰의 모든 인력이 도주 중인 기린아를 쫓기 위해 동원 되었다.

그리고 기라성은 형이 간 곳을 추리하다가 그의 은신처를 발견하게 된다. 기라성은 그 은신처를 기습한다.

하지만 뛰는 동생 위에 나는 형이 있었다.

형은 마치 동생이 올 줄 알았다는 듯, 암흑 속에서 곧바로 동생을 제압한다.

형제는 잠시 암흑 속에서 대치했다.

둘 다 조용한 가운데, 밖에서는 사이렌 소리가 삐용삐용 들렸다. 경찰차가 바로 근처 골목길을 누비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형인 기린아였다.

“오랜만이네, 동생. 잘했다고 칭찬해야 하나? 여기까지는 못 찾을 줄 알았는데.”

“······결국 형이 살인자가 맞았네.”

그렇게 중얼거리는 기라성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형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계속 그렇게 믿고 있던 거 아니었어? 내가 아니라고 할 때도 안 믿었으면서.”

기라성은 여태 확신하고 처음부터 형을 진범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새삼 충격 받았느냐는 말이었다.


그러나 기라성이 담담하게 내뱉는 말은 의외의 대답이었다.

“내심 아니길 바랐으니까.”

그제야 밝혀지는 기라성의 속내였다.

사실 그가 열심히 수사했던 이유는 형이 진짜 진범이라고 믿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형이 제발 진범이 아니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형의 유죄를 입증하려고 했던 무수한 노력들은 기실, 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노력과 다름 아니었다.

무뚝뚝한 동생이 처음 내보이는 날것의 진심이었다.

말문이 막혔는지, 형은 잠시 조용했다. 기라성도 잠시 숨만 색색 내쉬었다.

“······.”

“······.”

침묵만이 가득한 가운데, 싸이렌이 불길하게 울렸다.

이번에 입을 먼저 연 것은 동생인 기라성 쪽이었다.

“예전에 말이야. 정말로 형이 범인이면···, 명백히 형이 범인이라고 밝혀지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한


적이 있어.”

그래,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거의 몇 달을 고민한 끝에, 결국 기라성은 거기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렸다.


자신은 형을 붙잡을 수 없었다.

많이 미웠지만, 그래도 형은 자신의 가족이었다. 그것도 유일한 가족. 아주 어렸을 적 부모를 한 순간에 잃고
천애고아가 된 그에게는 형이 필요했다. 비록 범죄자에 도망자일지라도.

그랬기에 기라성은 예의 그 담담한 투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는······.”

기라성은 형을 놓아주려고 했다. 그래서 막 도망가라고 말할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형이 기라성의 입을 재빨리 막았다.

“쉿.”

그리고 형은 조심스럽게 기라성의 바지 주머니에서 손을 쑤셔넣더니, 무언가를 꺼내어 기라성에게 보여준다.

기라성은 놀란다.

“······!”

왜냐면 형의 손에 들린 건 자그마한 도청기였기 때문이다.

그건 기라성네 사람들이 그에게 몰래 붙여놓은 도청기였다. 혹시나 기라성이 용의자인 형을 놓아줄까봐 말이다.
한 발만 늦었어도 기라성은 범인을 도와준 혐의를 얻을 뻔 했다. 형이 재빨리 기라성의 입을 막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때, 창문 밖에서 ‘이쪽이다!’하는 경찰들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그리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기라성의 등을 짓누른 힘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변은 깜깜했지만, 형이 도망가고 있단 걸 기척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기라성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뒤돌아본 곳에 형은 없었다.

방금 전 형이 읊조린 말이 환청처럼 남아 있었다.

―미안, 라성아.

그게 형의 마지막 말이었다.

기라성은 처음에 그 사과가 ‘범죄를 저질러서 미안하다’라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진실은 나중에 밝혀진다.

간단하게만 밝히자면, 사실 진범은 형이 아니었다. 그리고 형은 진범이 누군지 알았다.

형이 진범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진범은 자신에게 수사의 그물망이 뻗쳐온다면 담당 검사라고 해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놈이었다.

때문에 형은 일부러 자신이 유력 용의자로 몰리면서, 동생이 진범의 눈에 띄지 않게 한 것이었다.

형은 진범과 한판승부를 하게 되고, 불타는 집에서 범인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나쁜 놈을 끌어안고 같이 죽는


논개 작전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지금 찍는 장면이 바로 그 장면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불타는 집을 보고 기라성인 내가 넋을 놓는 씬이었다.

그런데 내가 한 가지 몰랐던 것이 있었다.

“······네? 진짜로 불을 붙인다고요?”

조 PD 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바닥에만 살짝 붙일 거라서 괜찮아. 미리 소방차도 불러놨고. 어차피 가까이 다가갈 일은 없으니까 그냥
세트라 생각하면 돼. 멀리서 찍은 후 바로 꺼버릴 거거든.”

조 PD 의 말을 듣자니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촬영인 듯 했다.

그러나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조 PD 가 이상함을 눈치 챈 듯 내게 되물었다.

“왜, 혹시 무서워서 그래?”

“아. 아니에요. 그냥 좀 놀라서요. 문제없습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과연 조 PD 의 말대로 위험하지 않은 촬영이었다.

바닥에 불을 붙이는 화재 촬영은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에서도 한 번 한 적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촬영과 이번 촬영이 좀 다르게 느껴진다고 하면 이상한 말일까?

어디가 다르냐면······ 그때는 우선 화재 장소가 집이 아니라 궁이었다. 그리고 그 화재로 누가 죽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찍는 장면은 불타는 집에서 가족이 갇혀 죽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연기해야 했다.

기라성이 되어 잠시 감정을 잡고 있자 곧 조 PD 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디, 액션!”

나는 불타오르는 집, 아니 세트장을 바라봤다.

문득―

7 년 전, 아니 이제는 10 년도 더 넘은 옛날이 떠올랐다.

나는 집으로 귀가하던 길에 불타는 내 집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거기로 뛰어 들어갔고, 아버지는 구할 수 없었지만 어머니만이라도 업고 나왔고, 얼굴에 화상을 입어


연예계에서 은퇴했다.
붉은 불빛이 어둠 속에서 넘실댔다. 그 불빛이 내 동공 속에서도 춤을 췄다.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발을 떼었을 때였다.

뒤에서 누가 내 팔을 잡아챘다.

사람보다 중요한 작품은 없다


87.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오용호가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건 촬영장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컷. 용호 씨, 왜 그래?”

조 PD 가 오용호를 향해 물었다. 오용호는 금방 표정을 바꾸고 조 PD 에게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아까 누가 고운 씨에게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는데, 제가 그걸 깜빡했습니다. 잠깐만 얘기 좀


하고 와도 될까요? 급한 연락 같아서요.”

이런 일 때문에 촬영을 중간에 멈추는 일은 드물었다. 경우에 따라서 감독이 조금 불쾌해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용호는 원래 촬영장에서 갑질을 하는 류의 배우가 아니었고, 오히려 상당히 협조적인 배우였다.

때문에 조 PD 는 오용호의 말에 불쾌해하기는커녕 선뜻 허락했다.

“그래, 그럼.”
촬영을 잠시 중단할 정도로 어지간히 급한 일이겠구나, 라고 납득한 듯 했다. 사람이 원래의 행실이 중요한
이유였다.

조 PD 는 스태프들에게 잠시 쉬겠다고 알렸고, 나는 오용호를 따라 나섰다.

사람이 드문 쪽에 도착했을 때, 오용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잠시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했다.

“급한 연락 없는 거 압니다. 괜찮으니까 말해도 돼요.”

오용호가 날 빤히 바라보더니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우리가 한 <레미제라블> 공연 다음에 영화 <레미제라블>이 개봉된 거


말입니다.”

갑자기?

이 대화의 흐름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휴 잭맨이랑 앤 해서웨이가 출연한 뮤지컬 영화 말하는 거죠? 물론 알고 있죠. 영화관에서 봤는걸요.”

“앤 해서웨이가 팡틴 역을 연기하는 동안 실제로 우울증에 걸렸다고 해요.”

나는 그제야 오용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 챘다.

오용호는 사례를 더 들었다.


“스탠릭 큐브릭 감독이 만든 <샤이닝>도 알고 있죠? 거기 나온 셜리 듀발이 영화 찍을 때 엄청 힘들어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지금은 정신병을 앓고 있고요.”

그건 최근에 밝혀진 이야기였다.

스탠리 큐브릭은 세계적인 거장 감독이고, 영화 <샤이닝>은 공포 영화의 바이블이라고 할 만큼 유명한 고전


영화다.

그러나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 영화 뒷면에는 어두운 이야기가 있었다.

감독은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었고, 카메라 속 배우의 공포가 연기가 아니라 진짜이길 바랐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여주인공인 셜리 듀발을 소외시키고, 100 번도 넘게 테이크를 찍게 하는 등 그녀를 정신적으로


몰아붙였다.

은퇴 후, 최근의 한 매체에서 그녀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모습이 공개되어 대중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문가들은 <샤이닝>에서 받은 정신적 학대가 그 원인이 되었을 거라고 말했다.

오용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셀리 듀발의 경우는 감독의 문제가 크긴 했지만요. 어쨌거나 배우들이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긴 하죠. 원인이
뭐가 됐든, 우울하고 힘든 배역을 연기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그 감정에 잡아먹히기 쉬우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건 배역에 몰입하는 것, 그게 우리 일이니까 말이다.

“뭐,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걸로 칸이나 오스카 같은
곳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을 수 있다면요. 하지만 고운 씨는 이런저런 면에서 나랑 생각이 많이 다른 편이니까요.
그래서 나랑 다른 견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용호가 짐짓 모른 척 말을 끝맺었다.

“그냥 그 얘기를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다 했어요.”

결국 그나 나나 비슷한 사람이다.

나는 우리 둘 다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처음으로 나는 말을 놓았다. 내 반말에 오용호는 조금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되물었다.

“왜 그래?”

“그냥······ 진짜 선배가 맞았구나 싶어서요.”

“뭐야, 이미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입으로 듣는 거는 다르잖아요.”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진짜로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의심을 한 건 꽤 됐어요. 근데 그게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니까, 여태 긴가민가했죠.”

“그러면 언제 확신했는데?”

“아까 컷 들어가고 선배 팔 잡았을 때요. 선배 표정 보고 선배 맞구나 싶었죠.”

“나인 거 모르고 붙잡은 거였어?”

“음··· 솔직히 말하면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갔어요. 감이 시켰다고 해둘게요. 제가 좀 촉이 좋잖아요.”

오용호가 짓궂게 씩 웃었다.


처음으로 나는 편하게 미소 지었다. 모든 비밀이 다 밝혀지고 나니 차라리 그를 대하기 쉬웠다. 그 역시 좀 더
스스럼없이 날 대하기도 했고 말이다.

뭣보다 ‘선배’거리는 오용호라니. 옛날의 그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지 않은가.

그 역시 나랑 비슷한 심정인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이것저것 묻고 싶단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이 촬영 중이란 사실을 잊지 않았다. 나는 오용호의 팔을 친근하게 툭 쳤다.

“아무튼, 고맙다. 신경 써 줘서.”

“촬영 그대로 할 거예요?”

그가 갑자기 날 이리로 끌고 온 뒤, 연기하다가 정신적인 병을 얻은 배우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야 뻔했다.

나는 화재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적이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 촬영하는 장면은 그때의 상황과 매우 비슷했으니까.

그는 김철수인 내게 트라우마가 있지 않을까 추측했던 거다. 혹시라도 그때의 안 좋은 기억이 상기 되어 내가


정신적인 후유증 같은 걸 앓지는 않을까 하고.

어쩌면 그의 추측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순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원래는 그냥 하려고 했는데, 오용호의 말을 듣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다행이네요. 선배가 고집 부릴까봐 걱정했는데.”


“뭐? 나 참. 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무슨. 비록 몸은 어려졌지만 정신 연령도 어려진 건 아니거든?”

“그런 말이 아니라, 선배는 스스로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잖아요. 제가 선배를 한두 번 봐요?”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다가, 어쩐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서 그냥 말았다.

연기에 한창 미쳐있을 때, 주변에서 그런 소리를 몇 번 듣기는 했었다. 왜 그렇게 연기를 극기 연습처럼 하냐고.
아마 거지 배역을 한다고 직접 굶었을 때 들었던 말이었을 거다.

하지만 촬영장으로 복귀하기 전, 오용호에게 딱 한마디는 했다.

“너도 모르는 게 있는데 나는 신체적인 부분에서만 그러거든?”

나는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안전제일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하여간, 스토커 자식. 자기라고 나에 대해서 다 알지는 못한다, 이거야.

나는 후배에게 걱정 받은 것에 대한 민망함을 그런 뻔뻔함으로 눙치기로 했다.

촬영장에 돌아온 후, 나는 조 PD 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트라우마를 얻게 된 경위를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예전에 비슷한 사고를 겪은 적 있다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다.

그는 내 사정을 이해해주었다. 오히려 그런 일이 있는 줄 몰랐다고 그는 사과까지 했다.

다행히 그는 스탠릭 큐브릭 같은 감독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어쨌거나 지금은 21 세기지 않은가.

예전에야 작품이란 숭고한 가치를 위해 배우나 스태프들이 갈려 나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게 잘못된 것이란 걸 모두 알고 있다.

아무리 위대한 작품을 만든다고 해도 그게 사람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나 역시 그렇게 믿는다.

문제의 화재 장면은 CG 처리하기로 했고, 나는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그 일은 그런 소소한 해프닝을 남기며 그렇게 지나갔다.

드라마 <기라성과 기린아>의 촬영이 거의 끝나갈 때쯤, 첫 화가 방영됐다.

장르물 드라마라서 그런지, 첫 화만에 반응이 바로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어서 2 화, 3 화가 차례차례 방영되자, 우리 드라마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시청률이 조금씩


높아졌고, 사람들은 우리 드라마를 두고 ‘웰메이드’라고 칭했다.

그리고 드라마가 궤도에 올라선 후에는 본격적으로 전개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매 화 마지막에 충격적인 비밀이 밝혀지거나, 용의자가 뒤바뀌었다. 내용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저녁이면 SNS 실시간 트렌드에 우리 드라마 관련 검색어가 올라왔다.

사람들은 다양하게 우리 드라마에 대한 반응을 보였다.


[마지막에 등장한 그 손 분명 기린아다 내 손목 건다]

[일주일 또 어떻게 기다려ㅠㅠㅠ 당장 다음화 내놔ㅠㅠㅠㅠ]

[라성아... 아... 아... (가오나시.jpg)]

범인을 추리하는 사람도 있었고, 드라마에 푹 빠져서 앓는 사람도 있었고, 드라마 캐릭터를 가지고 2 차 창작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두 번째 범행이 일어나고 범인이 기린아라고 거의 확정된 회차가 방영되자, 사람들은 ‘진범이 기린아가 맞을
것이다’와 ‘그래도 뭔가 반전이 있을 것이다’라는 의견으로 갈려서 뜨겁게 논쟁했다.

다양한 추측성 글들이 쏟아졌고, 나 역시 주변인들에게서 결말을 제발 스포해달라는 애원을 많이 받았다. 물론


나는 절대 함구했다.

장르물은 매니아 층이 워낙 두꺼운 편이었다. 드라마가 후반부로 치닫자, 팬들은 자연스럽게 시즌 2 도 내달라고
성토했다.

[나 시즌 2 나올 때까지 무조건 존버함]

[기린아 죽으면 방송국 앞에서 똥 쌀 거임. 나 지금 궁서체다.]

[지금 기린아 사망각 선 거 실화? ㅠㅠㅠㅠㅠ 이럴 수 없어 ㅠㅠㅠㅠ 점 찍고 다시 살려내도 모른 척 할 테니까


제발 방송국 놈들아!!]

재미있는 일화도 있었다.

어느 날, 한 커뮤니티에 나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제목: <기라성과 기린아> 백고운 연기가 좀 아쉽

내용: 감정이 전혀 없어 보이네요...]

그 글 자체보다는, 그 글에 댓글이 주르륵 달리면서 그 글이 화제가 되었다.


[↳ 그런 역이에요 ㅋㅋㅋ]

[↳ 잘 보셨네요]

[↳ 연기를 잘했네요 백고운이]

[↳ 빙고 사고로 감정이 없어진 역할입니다]

[↳ 완벽하게 소화 중 ㅎㅎ]

그걸 보고 실없이 피식 웃은 건, 나만 아는 소소한 비밀이었다.

한편.

밖에서 우리 드라마로 불타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게, 나는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한 작품이 끝나면 으레 그러듯이 나는 김건을 만나 술자리를 가졌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그 만남에 오용호도 추가되었다는 것 정도이려나.

김건은 그것이 못내 못마땅한 모양이다.

“이 자식,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던 거야?”

오용호는 뻔뻔하고 심드렁한 예의 그 태도로 대답했다.

“사실 감독님 덕이에요. 저번에 SNS 에 올라온 사진 봤거든요. <천의 맛> 촬영장에 친구 생일 축하하러
간다면서요. 심미애 선배님의 생일은 그때가 아니니까 남은 건 남자 쪽밖에 없죠. 그런데 그 날짜가 공교롭게도
원래 김철수 선배 생일이고, 또 하필 남자 배우는 제가 옛날에 철수 선배 아들이라고 의심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김건은 나지막하게 '젠장'이라고 읊조렸다. 자기 때문에 내 정체가 들키게 된 게 어지간히 분했나보다.

둘은 '이젠 하다하다 내 SNS 까지 염탐하냐 이 스토커 자식아'와 'SNS 에 업로드한 거면 보라고 공개해놓은 거
아니냐 비공개 계정을 해킹해서 본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라고 입씨름을 했다.

어째, 예전에 이성한과 김건이 나를 두고 투닥거렸던 그때의 데자뷰 같았다.

나는 그 둘을 중재시켰다.

"둘 다 그만. 나도 말 좀 하자."

오늘 둘을 부른 건 이유가 있었다.

내 말에 둘이 투닥거리는 걸 멈추고 날 봤다. 내가 막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 주머니에서 핸드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확인해보니 윤성광이었다.

무슨 일이지? 나는 잠깐 양해를 구하고 전화부터 받았다.

"네, 실장님."

그리고 잠시 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화를 끊은 후 둘이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이에요, 선배?"

나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내··· 어머니가 나타났다고 하네"

둘이 동시에 반응했다.

"···네?"

"뭐?!"

직업정신
88.

“지금 당장 가봐야겠어.”

나는 외투를 챙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건이 엉거주춤 따라 일어나며 다급히 물었다.

“어디로 가는데?”

“소속사. 거기로 찾아오셨대.”

아마 내가 연예인이니까 연락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대신 소속사로 찾아왔고, 윤성광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내게 연락한 것이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예전부터 생각은 해왔다.

내가 들어온 이 몸의 주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 그를 낳은 사람이 있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비록 태어나자마자 보육원에 버려졌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주 무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버린 자식이라도 행방을 예의 주시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사람이란 게, 독한 결심을 해도 나중에는 마음이 약해질 수도 있으니까. 시간이 흐르고 사정이 좀 나아지면
자식을 찾아가 ‘내가 네 엄마/아빠다’라고 밝히고 싶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갑작스럽긴 했지만, 아주 예상하지 못한 등장은 아니었다.

나는 침착히 짐을 챙겼다. 그때, 김건이 물었다.

“같이 가줘?”

“뭐? 아냐, 괜찮아.”

그의 얼굴을 보고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상황에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김건의 걱정 어린 표정이 퍽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진짜 가족 상봉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게 아니라··· 아, 모르겠다. 그냥 좀 쫄려서. 네 정체 들키면 어떡해.”

아, 그쪽을 걱정하고 있던 건가.

“괜찮을 거야.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도 아니고. 갓난아기 때 버렸다고 하니까 그쪽도 나랑 초면인 건
마찬가지잖아.”

한편 오용호는 아까부터 조용했다.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세상엔 별별 일이 많으니까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는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는 내 어머니라 주장하는 사람이 사기꾼일지도 모르니 조심하란 뜻을 에둘러 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단 어머니라고 하니 섣불리 나쁜 소리를 내뱉지는 않았지만, 오용호는 의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역시 오용호는 나와 비슷한 지점이 많았다.

사실 나 역시 윤성광에게서 전화로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의심부터 들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의심을 안 하고 싶지만, 오용호의 말대로 세상엔 별별 일이 많고 별별 사람도 다 있는 법이었다.

특히 배우나 가수들 중에는 그런 케이스가 꽤 있기도 했다. 유명해진 딸이나 아들을 이용해 가족이나 주변인들이
계속 돈을 요구하는 경우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어쨌거나 지금은 만나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소속사로 향했다.

*
소속사에 거의 도착했을 때, 뒤늦게야 생각이 났다.

내가 김건과 오용호를 부른 원래 용건이 있었다는 걸 말이다.

타이밍 좋게 윤성광에게서 전화가 오느라, 거기에 그만 완전히 정신 팔려 버렸다.

“뭐··· 별 일은 없겠지?”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렇게 큰일은 아니고, 내 정체를 알게 된 사람이 둘로 늘었으니 각별히 조심해달라고 다시 한 번 당부할


생각이었다.

오용호가 비정상적으로 감이 좋은 거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김건이야 원래 좀 덜렁거리는 면이 있었고, 오용호는 그런 성격은 아니었지만 계속 ‘선배’라는 호칭을 꼬박꼬박


붙이는 것이 왠지 좀 불안해서 말이다.

어쨌거나 그것에 대해선 나중에 얘기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나는 주차를 마치고 소속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도착했다고 연락하자 매니저가 나를 마중 나왔다.

“일단은 미팅실에 안내해드렸어. 실장님이 같이 계시고. 바로 만나뵈러 갈 거지?”

그렇게 말하는 매니저 역시 이 상황에 조금 당황한 듯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미팅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을 때, 안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윤성광과 한 중년 여자가 보였다. 둘도 마찬가지로 날 쳐다봤다.

중년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선, 감격한 표정으로 대뜸 날 꽉 껴안았다.

“고운아! 보고 싶었단다!”

목소리가 제법 큰 사람이구나. 그것이 그녀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그녀와 내가 닮지 않았다는 데에는, 윤성광도 매니저도 동의했다.

그것뿐 아니라 성격도 많이 달랐다. 자살을 선택할 정도로 유약했던 아들과, 호방하고 목소리도 큰 어머니의
조합은 영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 그 공간에 있던 우리 셋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조금 수상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친자 확인 결과에서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친어머니가 맞다고요?”

“그렇대. 사실 나는 아닐 줄 알았는데. ······뭐, 고운이 너는 아버지 쪽을 닮았나 보지.”

매니저 역시 조금은 떨떠름한 듯, 그러나 친자 확인 결과가 그렇게 나왔는데 믿지 않으면 어쩔 수 있겠냐는 듯,


약간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여러 사람에게 썩 좋은 인상을 심어주진 못한 모양이다.


“흠······.”

뭐, 나도 아직 조금 미심쩍긴 했지만, 결과가 확실하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다른 사람보다는 조금 더 그녀에 대해 유한 입장이었다.

만약 그녀가 진짜로 백고운의 어머니라면, 나는 그녀의 아들 몸을 빼앗아 쓰고 있는 불청객 입장 아닌가. 비록


내가 백고운의 자살 시도에서 그를 살린 셈이긴 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내 정체를 털어놓을 건 아니지만, 그녀가 만약 진짜 백고운의 어머니라면 나는


최소한 아들의 도리 정도는 충실하게 할 생각이었다.

때마침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번에 너무 짧게 보느라 아쉬웠다고, 괜찮다면 좀 더 이야기하고 싶다는 메시지였다.

나는 알겠다고 회신을 보냈다.

“고운이 왔구나.”

그녀는 저번보다는 좀 더 차분하게 나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어머, 벌써 어머니라 불러주는 거니?”

“그럼요.”
나는 빙긋 웃었다.

오늘의 만남에서 내가 맡은 배역은 ‘착한 아들’이었다. 별로 어려운 역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육원에 맡겨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동안 나를 꾸준히 지켜봤다 덧붙였다.

그리고 그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스크랩북을 보여주었다.

과연 거기엔 내가 출연한 작품에 대한 기사나, 잡지나 신문에 실린 내 인터뷰들이 빼곡하고도 꼼꼼하게


스크랩되어 있었다.

그것을 가짜로 준비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 내 데뷔작인 <운명의 표현> 영화 때부터 스크랩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무려 5 년 전이다. 그때의 신문을 지금 와서 다시 구하려면 무리가 있었다. 그 당시에 직접 신문기사를 보고


거기서 잘랐다는 것이 타당했다.

게다가 스크랩된 종이들은 모두 낡고 바래있었다. 특히 5 년 전 스크랩은 갱지에 손때가 많이 묻어서 벌써


너덜너덜해진 게 눈에 띄었다.

나는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조금 감동 받아서(어쨌거나 그건 내가 출연한 작품들이었으니까) 스크랩북을 찬찬히


살폈다.

그런데 그때, 나는 뭔가 툭 튀는 점을 발견했다.

“그런데 어머니. 딱 <천의 맛>까지만 스크랩이 되어 있네요.”

영화나 드라마 할 것 없이, 심지어 광고 CF 까지 내 모든 필모그래피가 다 꼼꼼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기록은 <
천의 맛>에서 끊겨 있었다.
그런데 그 작품 뒤에 나는 <기라성과 기린아>라는 드라마를 찍었지 않은가.

그리고 그 드라마는 지금 한창 방영되고 있고 말이다.

딱히 이상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보자면 이상하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살짝 당황해서, 그러나 조금은 머쓱하게, 대답했다.

“아, 이런. 들켰구나. 미안하다. 실은······ 딱 그때쯤 이제는 이걸 모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일 년 전에 마음먹었거든. 멀리서 지켜보는 대신 네 앞에 나서야겠다고.”

납득하지 못할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도 이 상황과 자연스러웠다. 자신의 허술한 구멍을 들킨 사람들이 보일 법한 당황스러움과
멋쩍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뭔가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아귀가 딱 맞지 않고 살짝 어긋날 때 같은 기분이었다. 혹은 옷에 보푸라기가 툭 튀어나온 것 같은


거슬림이라고 해야 할까.

동시에, 기묘한 기시감도 함께 들었다.

그게 뭘까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그것의 정체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건······ 동류를 만난 것 같은 기시감이었다.

그래,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그건 촬영장에서 다른 배우들과 연기할 때 느껴지는 익숙함이었다.

그것도, 연기는 잘 하는 편이지만 내가 보기엔 약간 서투름이 느껴지는 신인 배우들과 함께 할 때의 익숙함.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그러면 꽤 오래 걸리셨네요. 1 년 전에 결심하셨으면 그때 바로 오시면 되셨을 텐데.”

어머니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거의 표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는 숙련자처럼 웃어 넘겼다.

“얘는. 요즘 검사 역을 맡더니 그 흉내를 내는 거니?”

그리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동안은 네게 조용히 연락할 방법을 찾느라 늦어졌지. 네가 워낙 유명하잖니. 내가 나타나면 너한테 피해가 갈
것 같았거든. 결국 못 찾아서 소속사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보다, 차 더 마실래?”

그녀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연기자나 사기꾼이나, 결국 거짓말을 하는 직업이란 점에선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포인트는, 얼마나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그리고 ‘순발력 있게’ 치느냐 일 것이다.

이건 예전에 극단 왕국에서 쳤던 즉흥 연기 오디션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표정 연기도 중요했고, 그 와중에 모순이 없는 애드리브도 잘 쳐야 하며, 상대와의 호흡도 중요하다.

나는 그때의 최호랑처럼 허를 찔렀고, 그녀는 제법 훌륭하게 방어했다.


‘음, 나쁘지 않네.’

나는 마치 점수를 매기는 연기 선생님처럼 속으로만 체크했다.

여기서 더 파고들면 내가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걸 그녀가 알아챌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며, 나는 순순히 물러났다.

그리고 이 주 뒤.

나는 새로운 친자 확인 결과 검사지를 들고 있었다.

사실 그녀와의 만남이 있었던 날, 내가 그녀의 빈틈을 몇 번 찌른 뒤 쉽게 물러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원래 사람은 몇 번 방어에 성공했다고 느끼면 그 다음에는 자신감이 생겨서 은연중에 마음을 놓는 법이었다.

헤어지기 전, 나는 그녀와 포옹하는 척하며 그녀의 옷에 묻은 머리카락을 슬쩍 집어왔다.

나를 완전히 속였다고 믿고 있는 그녀는 내 행동에 이상함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나는 그대로 새로운 연구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을 샘플로 건네고 다시 한 번 검사를 부탁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오늘 나온 검사지에는 결과가 명백히 찍혀 나왔다. 그녀는 백고운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사기꾼일 거란 모두의 예상이 들어맞은 셈이었다.

나는 가볍게 웃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는 생각 못 했겠지.

“흠, 그나저나 진짜 어머니는 있다는 건데···.”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면 스크랩북이나, (사기꾼이 자기 머리카락 대신 건넸을) 친자 확인 검사에 사용된 머리카락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진짜 어머니가 있다는 증거였다.

아마 진짜 어머니는 사기꾼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친구, 내지는 지인 관계였겠지.

사기꾼은 우연히 그녀에게서 내 얘기를 듣고 사기 칠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내 앞에 등장한 것이고.

그나저나 참 재밌는 분이었다.

어떻게 사기를 치려고 하면서 소품을 준비할 생각도 않아? 스크랩북이 그녀의 패착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스크랩북이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들켰을 것 같긴 했다.

애초에 그녀는 백고운의 어머니라는 캐릭터랑 너무 안 어울렸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모두가 의심했을
정도니까.

연기를 하려면 더 성의가 있었어야 할 것 아닌가.

만약 나였다면 훨씬 철저하게 준비를 했을 것이다. 내가 작품에 들어가면 배역을 위해 여러 레퍼런스를 참조하고,


연습을 하고, 필요하다면 기술까지 익히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그녀의 경우는, 나처럼 가상의 배역을 구현해내는 것도 아니고 실제 백고운의 어머니란 모델도 옆에
있었을 것 아닌가. 그걸 따라 하기만 해도 반은 먹고 갔을 텐데.

나는 쯧 혀를 찼다.

하여간 요즘 사기꾼들은, 직업정신이 배우보다 없다니까.

(수정) 오디션 체질
89.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김건이 물었다.

내 어머니라며 등장한 사람이 사기꾼이란 걸 그에게 알린 후, 김건은 팔팔 뛰면서 화를 냈다.

그런 사기꾼은 잡아 족쳐야 한다고. 다시는 남의 등골 빼먹고 살지 못하게 따끔한 법의 철퇴를 받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오용호 역시 비슷한 의견이었다.

다만 그는 좀 더 ‘어떻게 족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을 자세하게 내놓았다.

“아예 방송을 태워보는 건 어때요? 요즘 어머니랑 같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 많잖아요. 일단 대중적으로


유명해지게 만든 다음, 사기꾼이라고 고발해서 전국민적 범죄자 되게 만들어버리는 거죠.”

그건 내가 드라마 <기라성과 기린아>에 막 캐스팅 되었을 때 한 번 써먹은 방법이었다.

그때 나는 상대역 배우가 학교 폭력을 저지른 과거가 있단 걸 우연히 알게 됐다. 나는 그를 하차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했다.

“나도 그런 방법을 안 생각해본 건 아닌데······.”

오히려 법으로 처벌하는 것보다, 전국민을 배심원으로 해서 마녀재판을 받게 만드는 게 더 강력한 효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그녀를 사기꾼으로 고발하려면 실질적인 피해를 증명해야 하는데, 나는 피해입기 전 그녀가 사기꾼이란 걸
알아차렸기 때문에 아무런 경제적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녀를 법정에 세워도 그다지 형량이 많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 대중들에겐 좀 더 감정적인 호소가 가능했다.

유교국가인 한국에서 가족은 일종의 성역이다. 넷 상에서 싸움을 벌여도 부모님을 욕하면 ‘선 넘었다’고 여기는
게 우리나라였다.

그런 대중들에게 다른 뭣도 아니고 부모인 척해서 돈을 빼먹으려고 하는 사기꾼은 그야말로 ‘짐승만도 못한 새


끼’였다. 그것도 부모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자식의 여린 마음을 이용하려고 한 거니까 더더욱 감정적인
가중처벌이 가능했다.

그 모든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무서운 소리를 내뱉는 오용호에게 마저 대답했다.

“그냥 이번에는 그러지 않으려고.”

둘은 의아해보였다.

“아니, 왜?”

“왜요?”
나는 손을 꼽으며 이유를 설명했다.

“우선, 대중의 관심이 내 과거 쪽으로 쏠리면 불리한 건 오히려 나야. 혹시라도 옛날에 나랑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그 여자 케이스를 방송으로 보고 나한테 연락해올지도 모르고. 그 여자는 사기꾼이었지만, 진짜로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나한텐 불리하지.”

그리고 자잘한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었지만, 마지막 이유는 결국 이것이었다.

“뭣보다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일이 커지고 난 후 사기꾼으로 고발하면 완전히 적대적으로 돌아설 텐데,
그 여자는 백고운의 생모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잖아. 스크랩북을 갖고 있는 걸 보면 물건도 갖고 있는 것 같고.
혹시라도 보복심에 정보를 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아, 생모.”

김건은 미처 그것에 대해선 생각하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그런데 그 분은 왜 안 나타나는 걸까?”

그 사기꾼이 내게 접근한 걸 알았다면, 자기가 진짜 어머니라고 주장하며 나타날 법도 한데 말이다. 왜 그러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나는 내가 추측한 의견을 내놓았다.

“내 생각엔 아마도······ 이미 돌아가신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

스크랩북이 1 년 전 뚝 끊긴 것도 그렇고, 연락이 아예 없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사기꾼 같은 잡범이 살인 납치 같은 중범죄를 저질렀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병사 내지는 사고사로 돌아가셨을 것


같았다.
김건도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용호도 일단 내 의견을 지지한다는 뜻을 표했다. 그러나 조금 마지못해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물론 아예 조용히 넘어간단 말은 절대 아니고.”

나는 김건과 오용호에게 변호사를 추천받았다.

그리고 나는 변호사와 함께 사기꾼을 찾아갔다.

그녀는 처음에 발뺌 했지만, 새로 검사한 친자 검사 결과지를 내밀자 금방 인정했다.

“더 문제 삼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언제라도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하세요. 특히, 뒤에서 제


이름을 팔다가 걸리면 선처는 절대 없을 겁니다.”

나는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태도는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그녀가 쩔쩔매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당신 어머니는 원래 내 남편 식당에서 일하던 이모님이었어요. 그 친구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나한테 당신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딱히 뭘 부탁한 건 아니었지만, 그 친구가 딱하기도 하고, 내가 괜한
오지랖이 들어서···. 그 친구가 가고 난 후, 당신에게 연락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저번에 말했던 그건 진짜입니다. 원래는 그저 유품을 건네주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내가 잠깐, 순간
미쳤는지, 눈이 멀었나 봐요. 정말 미안합니다.”

그건 어쩐지 연기 같지는 않았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냥, 연기자의 감이라고 해두자.

어쨌든 친모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과 유품을 건네받은 걸로 그녀와의 만남은 마무리했다.

다만 혹시라도 같은 일이 다음에 또 생길지도 몰라, 공적인 지면에 못 박아두었다.

나는 한 인터뷰에서 자연스럽게 말을 흘렸다. 내 친부모를 찾게 됐다고, 그리고 이미 돌아가신 분이었다고 말이다.

내가 내 생모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단 걸 공표했으니, 더 이상 비슷한 레파토리로 접근하는 사람은 한동안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백고운의 생모가 안치된 납골당 주소를 전해 받았다. 거기엔 그녀의 사진이 작게 있었다. 백고운과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아마도 내 몸의 주인은 어머니쪽 유전자만 받은 모양이다.

나는 그날부터 내 부모님(그러니까 내 진짜 부모님)의 기일과 함께 그녀의 기일도 함께 챙겼다.

결국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타인과 마찬가지라지만, 그래도 만약 백고운이 살아있었다면 이렇게 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건 그의 삶을 이어받고 있는 내가 해야 할 도리 같았다.

그리고 어쨌거나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기사를 스크랩하고 지켜봤을 사람은 나인 셈이었으니까.

나는 그녀를 조금 특별한 팬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생모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 됐다.

일주일 뒤.
나는 다시 백고운의 삶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런 내게 찾아온 건 오랜만의 반가운 연락이었다.

“임시운 씨?”

나는 뜻밖의 발신자에 놀라움을 담아 물었다.

“오랜만이에요. 웬일이세요?”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우리는 안부를 가볍게 주고받았다. 임시운이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차기작 대본 봐주셨잖아요. 덕분에 좋은 작품 잘 들어갔어요. 한 번 밥 사드리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세요?

물론 괜찮고 말고였다. 인성 좋은 후배가 잘 되는 것만큼 보기 좋은 것이 없었다.

나는 흔쾌히 약속 자리에 나갔다.

그동안 있었던 이런저런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좀 더 친해졌다.

우리는 나잇대도 비슷하기도 하고 말도 잘 통해서, 서로 말을 놓기로 했다. 그가 백고운보다 몇 살 더 많아서


일단 나는 그를 형이라 불렀다.

분위기가 유해진 후, 그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혹시 고운이 너, 다음 차기작 정했어?”

“아니, 아직. 왜?”

“실은 제안 받은 작품이 하나 있는데, 나는 사정상 그걸 못 하거든. 컴백 일정 때문에 스케줄을 뺄 수가 없어서.


그때 딱 네 생각이 났거든. 혹시 생각 있어?”

뜻밖의 이야기였다.

벌써 1 년 전 일에 새삼 밥을 산다고 그래서 뭔가 전화로 말하기엔 어려운 용건이 있구나 짐작하긴 했다. 그런데
설마 이런 내용일 줄이야.

“감독님이 누군데?”

친한 사람이 추천한다고 해서 아무 작품이나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내가 작품을 결정하는 제일 첫 번째 기준은 시나리오였다. 이름값이 유명한 감독이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당장 시나리오를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일단 감독이 누군지 이름을 물어본 것이었다.

시나리오의 퀄리티와 감독의 이름값이 언제나 꼭 정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는 상관관계가 어느
정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제이크 킴 감독님이야. 들어본 적 있지?”

당연히 들어봤다마다.

그는 세계적인 거장까지는 아니어도, 할리우드에서는 꽤 유명한 감독이었다.


그는 특히 한국에서 인지도가 높았는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가 한국계 미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산드라 오, 존 조, 스티븐 연처럼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할리우드 배우들과 인지도가 거의 비슷할
정도였다.

그가 만든 영화들은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 개봉했고, 양 국가에서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 중 한 작품은 누적 관객수 천만을 달성해, 몇 안 되는 한국의 ‘천만 영화’에 영광스러운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한국계이긴 하지만, 주로 활동하는 무대는 할리우드였다. 내가 알기론, 한국을 무대로 찍은 영화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임시운이 또 한 번 놀라운 말을 전해주었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이번에 그 감독님이 한국에서 영화를 찍는대. 특이하게도 이번 장르는 뮤지컬 영화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노래도 되고 연기도 되는 배우들 중심으로 찾고 있나 봐. 아직은 확정된 건 아니지만,
오디션을 볼 생각이신 것 같아. 소속사에서는 처음에 나를 준비시키려고 했는데, 스케줄 확인해보니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서 접었거든. 참, 몇몇 관계자만 아는 사실이니까 너도 어디 가서 소문내면 안 돼, 알았지?”

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임시운이 아직 엠바고가 걸린 소식을 비밀리에 이렇게 얘기해주는 건, 나더러 생각 있으면 일찍 준비해보라는


말을 전해주기 위해서인 듯 했다.

오디션 공고가 뜬 후에 준비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 이를 테면 가수와 배우를 겸업하는 사람들이나 뮤지컬


배우들에게 밀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 주전공이 노래가 아닌데 덥석 뮤지컬 영화에 도전해도 괜찮을까?

나는 조금 볼을 긁적였다.
“일찍 준비한다고 내가 경쟁이 될까?”

나도 욕심이 나긴 한다. 제이크 킴이라니! 돈을 주고서라도 그와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배우는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 분수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주 전공이 아닌 배역에 도전해서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도


여러모로 민폐고. 영화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임시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생각했을 땐 너도 노래 잘해. 저번에 음원 나온 것도 들은 적 있고. 보컬 선생님도 엄청 칭찬하던데?”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어차피 오디션으로 뽑는 건데 뭐 어때? 물론 준비하는 데 노력과 시간이 들기는 하겠지. 그래도 최소한
한 번 속는 셈치고 도전해볼 만큼은 되지 않아? 무려 제이크 킴 감독이잖아!”

나는 그의 말에 수긍했다. 설득력 있는 얘기였다.

마음은 어느새 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오디션.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였다.

데뷔 초에는 많이 했지만, 연차가 찬 뒤에는 거의 오디션을 본 적이 없다. 대부분 PD 님이나 광고주가 먼저 컨택


했었고 말이다.

나는 체질이 오디션 체질인 듯 했다. 벌써 심장이 뛰는 걸 보면 말이다.


나는 완전히 결정한 후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먼저 말 꺼내 줘서 고마워, 형.”

기꺼이 하겠다는 뜻이었다.

봉사와 앉은뱅이
90.

기사가 본격적으로 나기 전 임시운이 먼저 내게 귀띔해주긴 했지만, 제이크 킴 감독이 워낙 유명하지 않은가.

엠바고가 풀리자마자 기다렸단 듯 기사가 쏟아졌다. 대중들은 그가 처음으로 한국을 무대로 영화를 찍는다는
사실에 열광했다.

그가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감독이기도 했지만, 뭣보다 그가 이번에 찍는 영화가 시즈니 영화사의 작품이란 점이
한몫했다.

시즈니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미국의 영화사인데, 요즘에는 옛날 애니메이션을 리메이크 한 실사화
버전 영화들도 많이 찍고 있었다.

제이크 킴이 찍는 이번의 영화 역시 그런 실사화 영화였다.

다인종 국가인 미국답게, 시즈니는 여러 문화권을 무대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유럽계, 아랍계,
아시아계······.

그리고 드물게 아시아 쪽 문화를 배경으로 한 시즈니의 애니메이션 중, 유일하게 한국을 배경으로 한 것이 있었다.

다만, 심청전이나 흥부전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는 아니고, 약간은 생소한 내용일 수 있는 민담 ‘봉사와
앉은뱅이’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영화였다.

눈이 안 보이는 봉사와, 혼자서는 걷기 힘든 앉은뱅이가 힘을 합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모험을 떠난다는


것이 영화의 주요 골자다.

그러나 사실, 캐릭터만 따왔을 뿐 시즈니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내용은 원래의 민담 내용과 전혀 달랐다.

그런 부분도 있고, 꽤 옛날에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기도 해서, 개봉 직후 한국에서는 오리엔탈리즘 영화라는 일부
비판의 시선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지나지 않았는가. 적어도 옛날보단 인종차별에 대한 경각심과 자정의 목소리도 높아졌고.

시즈니에서는 옛 영화를 실사화하면서 일종의 설욕을 하고 싶어 하는 듯 했다. 파격적으로 감독도 한국계


미국인인 제이크 킴에게 맡긴 걸 보면 말이다.

그가 시즈니 영화 <봉사와 앉은뱅이>를 찍는다는 소식이 한국에도 알려진 뒤, 주인공 역을 오디션으로


캐스팅하겠다는 기사가 떴다.

[제이크 킴 감독, 파격 오디션 예고해······ “지원 자격은 특별히 없다. 배역과 어울리고 실력이 있다면
일반인이라도 뽑을 생각이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곧, <봉사와 앉은뱅이> 공고가 대한민국의 모든 소속사와 극단에 떴다. 그가 미리 예고한 대로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건너 듣기론, 서류 모집만 2,000 명이 접수됐다고 했다. 엄청난 경쟁률이었다.

하기야, 국적에도 조건이 없었으니 그다지 이상한 건 아닐 것이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이주민들도 지원했을 테니 말이다.

물론 나 역시 지원했고 말이다.

하루는 김건이 날 놀렸다.


“만약 네가 뽑히면 2,000 대 1 로 뽑힌 거겠네? 2,000 대 1 의 사나이라니, 너무 멋진데?”

“김칫국도 너무 이르다. 아직 안 뽑혔거든?”

경쟁률이 엄청난 만큼, 오디션의 심사 기준 역시 매우 깐깐할 것이었다.

솔직히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으나, 뽑힐 것이라고 장담은 할 수 없었다. 그걸 확신하면 너무 거만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김건이 내 팔을 툭 쳤다.

“힘내란 뜻이지. 원래 사람이 믿는 대로 된다고 하잖아.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네가 뽑힐 것 같은


예감이 딱 드는데? 대한민국 원탑 배우가 안 뽑히면 누가 되겠어?”

과장이 심했지만, 친구가 날 북돋우려 하는 걸 알았다. 나도 가볍게 픽 웃었다.

“서류 결과가 오늘 나온다 했나?”

“응. 총 3 번 심사하는 거야. 예선이 두 번 있고, 마지막엔 본선이 있는 거. 1 차 예선은 그냥 외모만 보는


거라고 하더라.”

드라마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를 찍을 때도 느낀 거지만, 원작이 있는 작품은 배우의 외모 싱크로율이 아주


중요하다.

영화 <해리포터>의 일화가 단적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감독은 어린 다니엘 레드클리프가 오디션 장에


들어오자마자 ‘해리포터’가 방으로 들어오는 줄 알았다고 느꼈다 술회했었다.

솔직히, 나는 이 1 차 예선인 서류 심사가 제일 떨렸다.

노래나 연기 같은 건 내 노력으로 실력을 키울 수 있지만, 외모는 그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제작진들 눈에 내 외모가 주인공 역과 안 어울린다고 생각되면, 그대로 탈락이었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나가서 실력을 보여줄 기회 자체가 없는 셈이었다.

김건 역시 그걸 알았기 때문에 기꺼이 나와 시간을 보내주겠다고 하면서 찾아왔다. 나는 영화 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결과를 기다리는 게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어쨌거나 탈락 되면 그건 그냥 내 배역이 아닌가 보다


생각해야지 뭐 별 수 있나. 나이가 들면 이런 점에는 좀 담담해지는 편이다. 김철수로 따지면 거의 내 나이가 쉰
다 되어 가는데, 50 살은 지천명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나는 마음을 편하게 가졌다.

그리고 얼마나 그렇게 친구와 세상살이에 대한 담소를 나누고 있었을까.

따르릉―!

전화가 왔다.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나는 깜짝 놀랐다. 전화는 매니저에게서 온 것이었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네, 형. 네, 네. 네. 아··· 정말요? 아, 네. 네. 그럴게요.”

옆에서 김건이 더 긴장된 표정으로 내 전화통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김건이 조급히 물었다.

“뭐래? 됐대?”

나는 친구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나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됐대.”
“야, 씨! 축하한다! 이제 2 차 예선이네?!”

“그렇지. 이주 뒤에 있대.”

“시간이 꽤 촉박한데? 지금부터 준비하려면 빡세겠는데?”

나는 살짝 뜸들이다가 고백했다.

“실은 2 차 예선 준비는 시작한 지 좀 됐어.”

만약 내가 1 차에 합격한다면, 그때 가서 준비하면 시간이 부족하니까 떨어지든 아니든 미리 준비하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다. 준비는 철저해도 언제나 나쁘지 않으니까.

김건이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그래, 그래야 내가 아는 친구답지.”

이주 뒤. 영화 <봉사와 앉은뱅이>의 캐스팅 오디션 현장.

감독 제이크 킴은 2 차 예선 현장에서 심사를 하고 있었다.

1 차 서류 심사 예선을 통과한 사람은 약 200 명 남짓. 거의 10 분의 1 로 줄어든 수였다.

1 차는 오직 외모만 보고 추려내느라, 지루한 서류 작업에 가까웠다. 그냥 누구를 시켜도 되는 단순 노동이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삘’이 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제이크 킴은 모든 오디션 과정에
참여해야만 했다.

지루한 서류 작업, 그것도 2,000 개 넘는 서류 작업을 하다 보니, 제이크 킴은 차라리 이 현장 오디션이


반가웠다.
2 차 예선은 바로 노래 실력을 보는 것이었다. 주제곡은 원래의 애니메이션에 삽입된 곡이었다.

그 노래를 듣고 기본적인 본선에 갈 사람을 추려내면 된다.

‘200 명도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할 만하지.’

그래서 그는 아침 일찍부터 의욕 있게 오디션 심사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작할 때의 마음가짐이었다.

심사가 반절 정도 넘어갈 때, 제이크 킴은 벌써 지쳐가고 있었다.

곡이 아무리 짧아도 3 분이다. 200 명이 3 분씩 노래를 부른다 친다면 600 분이다. 60 분이 1 시간이니까,
순수하게 노래만 들어도 최소 10 시간 걸린다는 뜻이었다.

‘나눠서 오디션을 본다고 할 걸 그랬나.’

제이크 킴은 그런 생각을 잠깐 했지만, 형평성 문제가 있을 수도 있어서 사실 그건 불가능했다.

그가 그런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 108 번 참가자의 노래가 끝났다.

‘흠.’

나쁘진 않았지만, 아주 눈에 띄는 실력은 아니었다.

자신의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인 것도 있지만, 뛰어난 실력의 참가자는 심사위원이 지친 상태라도 그걸 잊게 할
정도로 확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저 참가자는 그 정도는 아니란 뜻이다.

옆에 있던 음악 감독도 제이크 킴과 마찬가지의 생각인지, 건조하게 서류에 X 자를 그리는 게 옆 눈으로 보였다.

‘이럴 때 좀 눈에 띄는 사람이 나타나면 좋은데.’

아무래도 그저 그런 평범한 참가자들만 계속 상대하다보면 지루해지는 면이 있게 된다. 이럴 때 좀 리프레쉬 될


만한 실력자가 나오면 분위기가 환기 되는 게 있는데 말이다.

그런 것을 기대하며 제이크 킴이 다음 순서를 불렀다.

“109 번 참가자. 나와 주세요.”

오디션 장 안으로 한 사람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그 참가자의 낯익은 얼굴을 보고 제이크 킴은 깜짝 놀랐다.

‘109 번이 백고운 배우였어?’

그는 뒤늦게 서류를 보고 백고운이 맞다는 걸 확인했다.

제이크 킴이 백고운을 알고 있는 건, 그가 나온 영화를 봤기 때문이었다.

사실, 백고운이 나온 영화를 보게 된 건 모두 친구의 추천 덕분이었다. 제이크 킴의 친구 중에는 칸 수석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어메이징’한 한국 배우가 있다며 영화 몇 개를 보라고 추천(이라 쓰고 강요라 읽는)


했다.
그렇게 본 영화 중 인상적인 것이 <운명의 표현>였다. 특히, 그 영화의 주인공이 시각 장애인이었는데, 연기를
정말로 놀랍게 잘하더라.

제이크 킴은 그때 때마침 시즈니에서 <봉사와 앉은뱅이> 영화의 감독 자리를 제안 받은 상태였다. 어떻게 영화를
연출할지 구상하고 있던 차에 그 영화는 제이크 킴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한국에 들어와 서류 모집을 했는데 그 배우가 지원한 걸 발견했다. 그러니 그가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백고운은 두 주인공 중 ‘봉사’ 역이 아니라 ‘앉은뱅이’ 쪽에 지원했다.

그것이 제이크 킴의 호기심을 더 불러일으켰다. 한 번 했던 역이 아니라 다른 역에 지원한 것이, 안전한 길로


가지 않고 새로운 역에 도전해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읽혀 더욱 마음에 들었고 말이다.

다른 참가자였다면 바로 노래를 부르라고 시켰을 텐데, 제이크 킴은 어쩐지 말을 걸어보고 싶어졌다.

“백고운 씨. 본업은 배우 맞죠? 노래에 자신 있나요?”

본업은 가수지만 연기를 잘해서 배우를 겸업하는 사람도 있고, 본업은 배우지만 노래를 잘해서 뮤지컬 쪽으로
진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 참가자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백고운의 경우는 둘 다 아니었다. 서류만 봤을 땐, 노래 쪽 이력은 거의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들었다.

백고운은 담담히 대답했다.

“가수들만큼은 못하겠지만,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정석인 대답이지만, 어쩐지 묘한 자신감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그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한편으론 너무 기대가 크면 실망하기 마련이라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았다.

제이크 킴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시작하세요.”

그리고 그때였다.

백고운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이크 킴은 잠깐 놀랐지만, 금방 이해했다.

일부러 배역에 맞게 앉아서 노래를 부를 셈인 모양이었다.

앞의 참가자 중 한두 명 정도도 앉아서 노래를 불렀다.

······시도가 그리 좋진 못했지만 말이다.

앉아서 부르면 배가 눌려서 호흡에 방해되는 건 둘째 치고, 아무래도 시선 뺏길 부분이 없어 자연스럽게 노래


자체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아주 훌륭한 실력이 아니라면 꽤 지루해졌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나 이미 MR 은 흘러나왔고, 백고운은 앉은 상태였다.

백고운이 음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냐고? 보면 몰라? 나는 앉은뱅이지―.”


이 노래는 ‘앉은뱅이’가 영화 초반에 자기를 익살스럽게 소개하는 노래였다.

백고운이 첫 소절을 부르는 거기까진 평범했다.

그런데 그때, 백고운이 갑자기 팔로 바닥을 짚고는 힘을 줘 쭉 폈다. 그러자 앉은 다리가 바닥과 살짝 떴다.

그리고는 백고운은 돌연 팔로만 땅을 짚으며 옆으로 향했다.

마치 게걸음치듯 말이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심사위원들이 깜짝 놀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디션에 임하는 프로의 자세


91.

백고운이 노래하다 말고 갑자기 팔로 몸을 번쩍 들어서 모두가 깜짝 놀랐지만, 곧 그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다들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지―. 하지만 내가 움직일 수 없단 생각은 말아. 나는 팔 힘이 아주 세니까.


일어나는 것 빼고 나는 모든 걸 할 수 있어―♪”

그러면서 그는 몸을 옆으로 이동시키더니, 바로 옆에 소품처럼 놓인 의자를 잡았다. 그리곤 팔에 힘을 주더니 눈


깜짝할 새에 그 위로 폴짝 올라갔다. 곡예라도 부리는 것처럼.

제이크 킴은 순간적으로 오디션 보는 중이란 것도 잊고 감탄했다.

왜냐면 그건 팔의 힘이 어지간히 받쳐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철봉에 매달려 풀업 할 때와


똑같은 것이었다. 팔의 근육이 없으면 그런 동작은 불가능했다.
심지어 백고운은 아빠다리 하고 있는 하체가 무겁기는커녕, 마치 상반신에 달린 작은 혹이라도 되는 듯 가볍게
움직이지 않았는가.

꼭 자신이 진짜 앉은뱅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 백고운은 지금 노래 가사에 맞춰서 동작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끔 궁금하지, 마을 밖 저 너머 세상에는 무엇이 있을지. 내 꿈은 마을 밖을 나가보는 것―. 밖은


분명 멋진 것들로 가득 차 있겠지. 보물, 친구, 모험, 마법, 악당―. 아, 분명 멋질 거야! 상상 속에서 나는
나그네도 되고, 뱃사람도 된다네―♬”

뱃사람이 돛대 위에서 몸을 내미는 것처럼, 백고운은 의자의 등받이를 잡고 팔을 쭉 뻗었다. 그리고 한 손으론
손차양을 하고 밖을 구경하는 몸짓을 했다.

그의 얼굴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백고운이 뿜어내는 활력 넘치는 생기가 그들에게도 생생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주인공 앉은뱅이의 설렘도 충분히 잘 느껴졌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가사에 맞춰 손동작을 하던 백고운의 몸이 노래 막바지에 다다르자 차츰 느려졌다. 우렁찼던 그의 목소리도 점차


낮아졌다.

곧이어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악당을 물리치고 나면 마법사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일까? 만약 진짜 그런 일이 내게도


일어난다면, 나는 딱 한 가지만 빌 거야. 그러면 내게도 다리가 생기겠지―♩”
그러면서 그가 조심스럽게 다리를 의자에서 내렸다.

백고운의 발끝이 바닥에 닿기 전이었다. 그의 몸이 우뚝 멈추었다.

망설임과 불안함이 잘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마치 인어공주가 자신에게 새로 생긴 두 다리를 믿지 못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백고운의 발끝은 바닥에 툭 닿았고, 그가 매끄럽게 몸을 일으켰다.

백고운이 두 발로 온전히 선 뒤, 허공을 바라보며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노래했다.

“그게 바로 내 꿈―.”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연출인지, 아니면 애드리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사소한 부분 덕에 호소력이 훨씬 짙어졌다.

제이크 킴 역시 어느 순간부터 백고운이 연기하는 작은 연극 한 편에 푹 빠져있었다.

노래가 천천히 페이드아웃 했다.

그것에 맞춰 백고운은 몸을 빙글 돌면서 자연스럽게 주저앉았다. 나사가 부드럽게 돌아가며 바닥에 박히듯이
말이다.

그리곤 마치 이전에 노래했던 것은 모두 상상의 나래였다는 것처럼, 그는 멀끔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처럼 바닥에 앉은 채 첫 소절의 음을 반복하며 노래를 불렀다.


“나는 앉은뱅이라네―♬”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말이다.

그와 동시에 노래가 완전히 끝났다.

깔끔한 마무리였다.

제이크 킴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이 박수를 짝짝짝 쳤다. 대체로 표정들이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만족했다는
의미였다.

제이크 킴 역시 만족해서 가볍게 박수를 쳤다.

방금 백고운이 보여준 건, 오디션이라기보단 하나의 작은 공연 같았다.

‘똑똑한 친구네.’

노래 경연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심사위원들이 ‘뮤지컬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라고 평하는 무대들이 있었다.

그건 노래에서 ‘서사’를 느꼈을 때 주로 그러하다.

아주 훌륭한 가수들은 오직 노래 실력과 목소리의 완급만으로 그런 서사를 느끼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정도까지는 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은 춤과 연기를 곁들이는 하는 방식으로 무대를 서사적으로 연출한다.

백고운이 방금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백고운의 노래 실력은 평균 이상이지만, 그렇다고 비욘세만큼 잘 부른다고는 할 수 없었다. 노래는 그의 주
전공이 아니다.

때문에 백고운은 노래로 승부하는 대신, 자신의 주 전공인 연기를 살려서 정말로 하나의 ‘뮤지컬’ 공연처럼
무대를 꾸렸다.

못 하는 걸 잘하려 노력하기보다, 이미 잘 하는 걸 더 보여주려고 한 것이었다.

아직 스무 살 중반이라고 한 것 같았는데. 어린 친구인데도 노련함이 느껴졌다.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제이크 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백고운은 정중하게 인사한 후 밖으로 나갔고, 심사위원단은 바로 다음 참가자를 부르는 대신 잠깐 쉬는 시간을


가졌다.

제이크 킴이 옆의 음악감독에게 물었다.

“전 괜찮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저도 좋았어요. 볼거리가 많다는 점이 일단 매우 좋았어요. 흥이 일단 나잖아요.”

그저 노래를 잘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뮤지컬은 춤과 연기, 노래가 모두 필요한 종합예술이었으니까.

그래서 노래를 잘하는 더 잘하는 참가자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음악감독은 깐깐하게 구는 대신 너그러이 합격점을
주었다.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그렇게 몸을 움직이는데도 음정이 안정적이더군요. 기본기는 있는 것 같아요. 그건 확실히 플러스


점수죠. 그리고 열심히 준비한 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제이크 킴은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확실히 프로라는 느낌이 확 있었죠.”

그가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깐 잠겼다.

사실, 관객들 앞에서 노래를 하는 건 3 분짜리 ‘공연’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록 그게 오디션장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게 다른 참가자들과 백고운의 다른 점이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주로 노래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치


선생님 앞에서 과제를 심사받는 학생처럼 말이다. 그건 절대 공연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백고운은 본질적으로 태도가 달랐다. 그는 선생이 아니라 관객 앞에 선 아티스트의 태도로 임했다.

멋진 공연을 준비했고, 보여주었고, 그리하여 심사위원들을 순식간에 극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그가 중간에 일어나는 부분에서 새삼스럽게 조금 놀랐을 정도였다. 그가 진짜 앉은뱅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두 다리가 멀쩡하단 걸 이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영화 <오아시스>에서 중증 뇌성 마비 장애인을 연기한 배우 분이 두 발로 걷기 시작했을 때, 외국인 관객들이


깜짝 놀랐다는 일화처럼.

그만큼 연기가 실감났단 뜻이리라.


‘연기도 잘하고, 태도랑 성의도 괜찮고. 마음에 드네.’

제이크 킴은 그렇게 종합적으로 백고운에 대한 평가를 마치곤, 고개를 들었다. 그가 다시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럼 다음 참가자 들어오라고 할까요?”

“네, 좋죠.”

심사위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쳐있던 아까와 달리 약간의 활기가 느껴지는 얼굴들이었다.

마음에 드는 참가자가 한 번 지나가고 나면 확실히 이렇게 분위기가 환기되는 게 있었다.

리프레쉬 된 그들은 마저 오디션 심사를 이어갔다.

2 차 예선 결과 합격 발표가 나왔다. 200 명 중 20 명이 본선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내 이름은 거기에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관문만 남은 셈이었다.

2 차 예선을 통과했단 소식을 들었을 때, 나보다 오히려 주변에서 더 좋아했다. 소속사에서는 벌써 축하파티를 할
기세였다.

“고운이 너 이 자식! 될 줄 알았다!”

“고운 씨, 정말 잘했어요!”
기태성과 윤성광이 한 마디 씩 했다. 나도 기쁘기는 했지만, 너무 들뜨지는 않으려 했다.

“감사해요. 운이 좋았죠.”

“어허, 겸손도 그 정도로 하면 기만이야.”

“그럼요. 고운 씨가 열심히 노력한 거 우리 모두가 다 아는데요, 뭘.”

윤성광이 내 팔을 쿡 찔렀다.

“봐요. 이게 그 증거죠. 팔 둘레 사이즈가 거의 두 배가 되었잖아요.”

그는 내 팔 근육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임시운에게서 제이크 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팔 운동에 집중했었다.

팔로만 몸의 하중을 끌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팔 근육을 키웠고, 다리를 허공에 띄운 채 팔굽혀펴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허리의 코어 근육을 단련했다.

앉은 상태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서였고, 고증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실제로, 수동 휠체어를 타는 신체 장애인 분들은 바퀴 휠을 직접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팔의 힘이 세진다고들


한다.

물론 내가 열심히 노력하기는 했지만, 임시운 덕에 일찍 오디션 소식을 알아서 준비 시간이 더 많았던 것도 분명


영향이 있었다.

하지만 더 겸손을 떠는 대신 그저 감사하다고 웃어보였다.

이번 오디션을 위해 춤 연습도 했어야 했는데, 안무가를 붙여주고 전적으로 지원해준 것이 윤성광이었으니까.


그때, 기태성이 물었다.

“이제 본선만 남은 거지? 이주 뒤라고 했나?”

“네.”

“마지막은 뭘 보는지 알아?”

“아뇨. 아직 공지가 없었어요. 일단은 마지막 본선은 합숙 오디션이라는 것만 알고 있어요.”

특이하게도 본선 오디션은 2 박 3 일 워크숍 일정이었다. 밀착 오디션이라나.

왜,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그런 식으로 종종 하지 않은가. 인적적성 검사를 위해 아예 지원자들을


합숙을 시키면서 자세하게 감시하는 식으로 말이다.

어떤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기대가 되었다.

기대에 부푼 만큼, 남은 이주는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본선 날 아침이 밝아왔다.

<봉사와 앉은뱅이> 캐스팅 오디션의 마지막 본선 장소는 경기도 양평시에 위치한 한 리조트였다.

아침 9 시.

리조트 로비에는 대략 마흔 명 정도의 인원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봉사’와 ‘앉은뱅이’로 두 명이었다. 제작진들은 이번 오디션에서 두 배역을 동시


모집했었다.
여태 예선은 두 배역에 지원한 지원자들을 따로 심사했었다. 그러나 예선과 달리 본선은 특별히 두 배역에 지원한
지원자들을 함께 심사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1 차 2 차 예선을 거쳐 각각 20 명씩 뽑힌 지원자들이 지금 여기, 함께 모여 있는 것이었다.

경쟁률이 쟁쟁했던 만큼 뽑힌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현역에서 프로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나 가수들이었다.

그러나 그 분위기 속에서도 모두가 아닌 척 흘금거리게 되는 유명인사는 있기 마련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백고운이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 중 대중적 인기로만 따지자면 백고운이 제일 높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백고운은


잘생겼고, 연기 실력도 좋았다.

그래서일까. 솔직히, 다들 입 밖에 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인정하고 있었다. 백고운이 유력 우승 후보라고


말이다.

기대와 설렘, 그리고 약간의 그런 술렁거림을 안고 지원자들이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드디어 제이크 킴이 내려와 그들 앞에 섰다. 로비가 조용해졌다.

제이크 킴은 가벼운 인사를 건넨 후,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2 박 3 일이란 긴 시간 동안 이런 외지에서 뭘 시험 칠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지원하신 배역이 있죠? 직접 그 배역이 되어서 이곳에서 지내면 됩니다. 돌아가는 내일 모레 아침까지
말입니다.”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

1 차 때 외모, 2 차 때 노래, 그러니 3 차에서는 연기를 볼 거라고 모두들 어림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연기’를 이런 방식으로 볼 줄은 몰랐다.

그리고 모두가 충격 받아 술렁거리는 가운데.

한쪽에 서 있던 백고운만이 그 공지를 듣고 홀로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본능에 저항하는 연기
92.

지원자들은 일단 각자의 숙소에 짐을 푼 후, 레크레이션용 강당에 모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봉사’와 ‘앉은뱅이’ 역으로 분했다. 20 명은 눈을 감았고, 20 명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본선 방식을 공지 받고 술렁거렸던 조금 전과 달리, 지금은 다들 상황을 받아들였는지 비교적 침착했다.

제이크 킴은 단 위에 올라가 말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본선 오디션이 시작된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배역에 벗어나서 편하고 자유롭게
움직이실 수 있는 건 저녁 식사 시간 직후부터 그 다음날 아침 식사 전까지입니다.”

그는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낮에는 여러분에게 과제가 주어지거나, 혹은 시험이 주어질 겁니다. 그것들은 공식적으로 주어지기도 하지만,
갑작스럽게 주어지거나 비밀스럽게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여러분은 한 가지만 하시면 됩니다. ‘각자의
배역에 몰입해서 이곳에서 3 일을 버틸 것.’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리조트 곳곳에 있는 스태프들을 불러주면 됩니다. 도움을 적게 청한다고 해서
가산점이 주어지는 건 아니니 편하게 불러주세요. 오디션도 중요하지만, 결국 안전이 제일 중요하니까요.”

그가 부드럽게 말하면서 공식적인 첫 번째 임무를 주었다.

“그러면 첫 번째 과제입니다. 제게 와서 식권을 받아 점심을 드세요. 제게 오는 방식은 자유고, 시간제한은


없습니다.”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첫 과제라 그런지 모두들 조금씩 삐걱대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곧, 용기 있게 도전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눈을 감은 지원자들은 제이크 킴의 목소리가 들렸던 쪽으로 더듬거리며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으니 비교적 움직임이 소심했다.

그리고 바닥에 앉은 지원자들은 제이크 킴 쪽으로 곧장 향했지만, 다리가 자유롭지 못해 엉덩이를 미는 식으로
엉금엉금 움직였다.

제이크 킴은 자신의 위치를 박수로 계속 알려주면서 지원자들의 움직임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그리고 지원자들을 한 바퀴 훑은 그의 시선은 백고운에게 향했다. 2 차 예선 때 인상 깊었던 터라, 본선 때도


그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가 됐다.

과연 백고운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백고운은 다른 지원자들처럼 혼자 움직이는 대신, 바로 옆에 서 있는 지원자의 다리를 툭툭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앉은뱅이 역으로 지원한 백고운입니다. 혹시 저를 업어주실 수 있나요? 대신 제가 방향과
장애물이 눈앞에 있는지 알려드릴게요. 어떠세요?”

“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봉사 역의 지원자는 흔쾌히 몸을 굽혀 백고운을 업었다. 백고운은 네비게이션처럼 그에게 방향과 장애물을


알려주었다.

‘역시 똑똑한 친구야.’

제이크 킴은 흡족히 웃었다. 백고운은 자신의 배역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봉사와 앉은뱅이는 있고 없는 게 정확히 반대다. 봉사는 다리가 있고, 눈이 없다. 반면 앉은뱅이는
다리가 없고, 눈이 있다.

그래서 둘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도와주면서 불편을 해결한다. 그것이 영화의 주요 줄거리다.

게다가 제이크 킴은 자신에게서 식권을 받아가는 방식도 자유라고 언급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혼자 움직이는 것을 먼저 택했다. 백고운만이 곧바로 옆의 지원자와 힘을 합칠


생각을 했고 말이다. 그러니 똑똑한 친구라고 생각할 수밖에.

덕분에 백고운 팀은 가장 먼저 제이크 킴에게 다가와 식권을 받아갔다.

그리고 다른 지원자들 역시 백고운 팀의 대화를 듣고는 적극적으로 그 아이디어를 이용했다. 짝을 찾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부산스럽게 들렸다.

지원자들은 조금 우당탕탕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모두 제이크 킴에게서 식권을 받아갈 수 있었다. 모두가 시간
차이만 있을 뿐, 성공한 것이었다.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그러나 그건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지원자들은 옆의 식당으로 가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고 느지막이 그들은 다시 강당으로 돌아왔다. 다음 과제가 있기 전까지는 잠깐 쉬는 시간이었다.

어쨌거나 공식적으론 오디션 보는 중이기 때문에 눈을 뜨거나, 혹은 다리를 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삐용삐용―.

갑자기 싸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지원자들이 깜짝 놀랐다.

눈을 감고 있는 지원자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답답했고, 앉아 있는 지원자들은 창밖을 내다 볼 수


없어 답답했다.

“경찰인가?”

“아니, 이건 구급차 소리 같은데요.”

“누가 다쳤나?”

“설마 넘어져서 다쳤나? 왜, 눈이 안 보이는 분들은 어디 걸려서 넘어졌을 수도 있잖아요.”

“헐, 진짜 그런가?”
술렁거리는 대화들과, 배경으로 울리는 싸이렌 소리가 비상시라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예로부터 ‘비상시’라 함은 ‘원래의 규칙과 금기가 잠시 해제되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예외적 상
황’과 동일한 뜻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게다가 결정적인 한 방은 누군가의 마지막 말이었다.

“스태프 아무도 없어요. 모두 밖에 있는 것 같은데. 뭔 일 있나 봐요.”

그 말이 모두의 심리적 장벽을 낮춰주었다.

지원자들이 저도 모르게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 건, 그저 인간적인 본능을 따랐다는 점에서 보자면 당연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원자들이 다 함께 창문을 열어서 밖을 내다본 순간, 그들에게 보인 건 정면으로 서 있는 스태프들


얼굴이었다.

스태프들은 커다란 스피커와 빨간 빛으로 번쩍거리는 경고등을 들고 있었다. 당연히, 구급차는 없었다.

그제야 지원자들은 상황을 파악했다.

방금은 일종의 기습 테스트였고, 그들은 속아 넘어갔단 걸 말이다.

기다렸단 듯 문이 열렸고 제이크 킴이 나타났다.

감독과 눈이 마주친 봉사 역 지원자들, 그리고 슬그머니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 지원자들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제이크 킴도 빙그레 웃었다.


“제가 시작했을 때 말씀드렸죠? 과제나 시험이 공식적으로, 혹은 갑작스럽게 주어지거나 비밀스럽게 주어질 수도
있다고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들은 오디션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슬슬 감을 잡아가고 있었다.

제이크 킴이 일찍 말했듯, 그들은 어쨌거나 정해진 시간 내에선 딱 한 가지만 하면 되었다.

‘각자의 배역에 몰입해 있을 것.’

비록 응급차 소리가 울리더라도 말이다.

제이크 킴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물론 화재경보기가 울리면 오디션이고 뭐고 바로 도망치셔야 합니다.”

그는 지원자들을 속이기 위해 화재경보기를 택하지는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건 안전을


위협하는 방식이었으니까.

대신 응급차 소리는 호기심을 자극할 뿐, 지원자들의 불안감을 이용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지원자들은 뭐라 투덜거릴 수도 없었다. 이건 그들의 자승자박이 확실히 맞았으니까.

그래도 한국엔 한 가지 관습이 있지 않은가. 바로 첫 판은 ‘연습게임’이란 거 말이다.

용기 있는 몇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저, 감독님. 이번 것도 점수에 들어갑니까?”


그들이 몰라서 그랬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봐 달라, 그런 뜻이 담긴 애교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제이크 킴은 어깨를 으쓱였다. 딱딱하게 굴 생각은 없었지만······.

“저도 생각은 했습니다. 만약 모든 분이 다 배역과 모순된 행동을 했다면 무효로 하자고요. 그런데 아닌 사람이
있으니, 무효로 돌리면 그 사람에게는 불공평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고?

지원자들의 의문에 찬 표정을 지었고, 제이크 킴은 대답해주듯 한쪽을 돌아봤다. 다른 사람들의 고개도 함께
돌아갔다.

그 시선의 끝엔 백고운이 있었다.

“여러분들은 몰랐겠지만 여기 구석에는 관찰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고요.


그리고 백고운 씨만이 배역의 설정을 지켰더군요.”

그러고 보니 백고운은 홀로 창문 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곳에서 평온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걸 눈치 챈 다른 지원자들이 조그맣게 감탄했다.

백고운의 연기력에 관한 얘기는 다른 배우들도 들어본 적 있었다. 과연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백고운 혼자 설정을 지킨 탓에 무효로 돌아가지 않아 솔직히 조금 아쉽기도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남이 뛰어난 것 가지고 뭐라 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다른 지원자들이 쩝 혀를 다셨다.

*
2 박 3 일은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다.

시간은 쏜살 같이 지나갔고, 어느새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아왔다.

그동안 지원자들은 각자 열심히 오디션을 치러주었다. 첫날에는 우왕좌왕한 모습도 많이 보여주었지만, 그래도
오래지 않아 다들 금방 적응해서 괜찮은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들은 프로 배우였다. 오디션 방식을 미리 공지해주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자신들의 배역에
맞게 실제 장애인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준비해왔다. 나중에는 그 연습의 성과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제이크 킴은 제작진 스태프들과 일찍 아침을 먹은 후, 지원자들이 집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한 스태프가 물었다.

“감독님, 그런데 왜 본선 오디션으로 이런 방식을 택하셨어요?”

그저 의도가 궁금할 뿐, 다른 뜻은 없다고 그가 덧붙였다.

제이크 킴은 왜 스태프가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았다.

좀 특이하게 보이긴 하겠지. 그냥 촬영장에서 카메라 앞에 설 때만 연기 잘하면 되지, 뭘 2 박 3 일 내내 그


흉내를 잘 해야 하나 싶을 수도 있을 거고.

“본능에 저항하는 연기에 적응을 좀 시켜주고 싶어서. 익숙한 감각이 차단된다는 건 생각보다 상당히 불안하거든.
앞에 아무것도 없는 걸 알아도, 눈을 감으면 행동이 절로 조심스러워지는 게 사람 본능이야.”

그는 한 텀 쉰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지. 처음엔 불편해도 나중엔 그것에 익숙해지게 되어 있어. 그리고 일단
그것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카메라 앞에서도 훨씬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물론, 다른 이유도
있고.”

“다른 이유요?”

“응. 캐릭터를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나 궁금해서.”

스태프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지막엔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캐릭터를 얼마나 이해하는지를 보겠다니? 무슨
뜻일까?

제이크 킴이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대신 시계를 확인하고 일어났다.

“시간이 다 된 것 같군. 이제 가볼까?”

그들은 함께 로비로 향했다.

지원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백고운을 뺀 나머지가 모두 모여 있었다.

“백고운 씨는 어디 있습니까?”

지원자들은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이크 킴이 막 스태프더러 백고운 방을 다녀오도록 시키려 할 때였다.

문이 벌컥 열렸고, 백고운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오디션이 공식적으로 끝나는 타임 리미트 이전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온 것이었다.

백고운의 옷은 헝클어져 있었고, 머리도 수더분했다. 어딘가를 바쁘게 다녀온 모양이었다.


제이크 킴은 가볍게 박수쳐서 일단 모두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자, 좋습니다. 모두 눈 뜨고, 다리를 펴도 좋습니다.”

백고운도 그제야 일어나 숨을 고르며 로비 안으로 들어왔다. 다른 지원자들이 찌뿌듯한 몸을 풀었다. 다들


개운하고 시원한 표정이었다.

제이크 킴이 백고운에게 물었다.

“하마터면 늦을 뻔했던데. 어디를 다녀왔습니까?”

백고운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도 마지막 장소를 다녀왔습니다.”

그 뜬금없는 말은 다른 지원자들을 어리둥절해하기 충분했다. 갑자기 웬 지도?

그리고 오직 제이크 킴만이 홀로 씩 웃었다.

“마지막 과제를 해결했나 보네요.”

그 말에 백고운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마지막 과제? 그런 게 있었다고?

대체 언제부터?

캐릭터의 요소
93.

“갖고 나와 주세요.”

제이크 킴의 말에 백고운이 지도를 갖고 나왔다. 정확히는, 팸플릿 지도였다.

그리고 ‘앉은뱅이’ 역의 지원자들 중 몇몇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저거는······.

왜냐면 그들은 바로 그것을 어디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이크 킴이 궁금증을 금방 해결해주었다.

“몇 분은 이 팸플릿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 지도는 앉은뱅이 지원자 분들 숙소에 모두 있었으니까요. 혹시나


발견하신 분?”

많은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손을 들었다. 그 팸플릿은 숙소 테이블 한가운데에 있었기에, 못


발견하기가 더 어려웠다.

“펼쳐 보신 분?”

손 든 사람들 중 한 명 정도가 손을 내렸을 뿐이었다.

즉, 그 팸플릿을 발견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펼쳐서 지도란 걸 확인했지만, 그것의 진짜 의미를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제이크 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바로 앉은뱅이 역 지원자에게 주어진 마지막 과제였습니다.”

“그게 어떻게 과제죠? 그건 그냥 지도 아닌가요?”

“맞습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건 지도죠. 정확히는, 우리가 지금 머물고 있는 바로 이 리조트의


안내지도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나요?”

제이크 킴이 팸플릿을 펼쳐서 지도를 직접 보여주었다. 지도 중간 중간에는 ‘?’라고 적힌 흰 박스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렇게 대놓고 물음표 표시가 있었죠.”

한 지원자가 이의를 제기했다.

“여기 리조트에서 자체적으로 여는 이벤트 같은 거로, 저희 오디션과는 상관없는 건 줄 알았습니다. 게다가 그


팸플릿에는 어떤 안내도 없었는데요.”

만약 그게 과제라면 ‘이렇게 저렇게 하시오’ 같은 지령이 뚜렷이 적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무언의


항의였다.

제이크 킴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그렇죠. 하지만, 저는 분명히 여러분께 3 일 전에 본선을 시작하겠다고 하면서 정확히 말했죠.”

‘각자의 배역에 몰입해서 이곳에서 3 일을 버틸 것.’

모두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떴다.

감독의 말대로, 그들은 각자의 배역에 맞게 3 일 동안 있지 않았는가? 눈도 못 뜨고 다리도 못 펴면서 말이다.


그러나 제이크 킴이 말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그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간과한 것 같군요. 제 말의 의미는, 영화 속 ‘앉은뱅이’ 캐릭터로 분해서 지내란 뜻이었습니다.


단순히 신체 장애인으로서 지내란 말이 아니라요.”

모두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그들은 슬슬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갔다.

“장애라는 신체적인 특징은, 캐릭터의 요소 중 하나긴 하지만, 그게 그 캐릭터의 전부는 아닙니다. 여기 모인


분들 대부분이 배우니까 설명을 길게 안 해도 되겠죠? 모두 아시다시피, 캐릭터란 성격이죠. 그러나 여러분은
오직 ‘어떻게 장애인의 행동을 잘 연기할까’에만 집중하고, 영화 속 주인공의 성격을 연기해야겠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한 것 같더군요.”

제이크 킴이 팸플릿을 펼쳐들었다.

“만약 주인공이 이 지도를 봤다면, 그는 곧바로 이 지도에 적힌 물음표를 궁금해 했을 것입니다. 알다시피, 영화
속 앉은뱅이 캐릭터는 호기심이 많은 캐릭터이니까요. 그는 언제나 자신이 머무는 곳 너머를 궁금해 하고, 밖으로
나가서 모험하기를 꿈꾸는 캐릭터입니다.”

제이크 킴이 지도를 살짝 팔랑거렸다.

지금 보니 그건 상당히 보물지도를 닮아 있었다. 어떻게 못 알아차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지원자들은 그제야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얼굴을 붉혔다.

감독의 말이 맞았다. 지원자들 중 아무도 그 캐릭터의 성격을 연기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였을까? 제이크 킴이 정해진 시간 내에는 배역에 몰입해 있어야 한다고 분명히 명시했는데도 말이다.

설마하니 2 박 3 일이라는 긴 시간 때문이었을까? 그 긴 시간 내내 몰입해야 한다고는 설마 생각하지 못해서?


그게 아니라면, ‘장애’라는 신체적 특징에 신경이 너무 쏠려서 그랬던 걸까?

사람들은 특히 소수자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으니까.

한 개인을 구성하는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도 그 특징 중에 소수자성이 하나라도 있다면, 사람들은 그


개인을 대할 때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이라기보다는 소수자 그 자체로 받아들이곤 하니까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소수자에 대한 선입견 같은 거였다. 개별적인 인간을 그저 장애인, 비-백인, 여자, 퀴어로만
인식해버리고 마는 거다.

그 사람의 고유한 성격적 특징, 이를 테면 그 사람이 소심한지 용감한지, 더러운지 깔끔한지, 소문에 관심이
많은지 아닌지······ 기타 등등 그런 것들에 대한 것을 모두 무시하고 말이다.

그런 선입견들은 우리 모두의 무의식 속에 깊이 잠재한 것들이라, 많은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저지르곤 하는


실수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들은 제이크 킴의 말대로 차마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고, 그건 그들의 잘못이 맞았다.

게다가 감독은 ‘갑작스럽게, 혹은 비밀스럽게’ 과제나 시험 따위가 주어진다고 미리 공지한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제이크 킴이 정리했다.

“마지막 과제는 이 지도를 보고 물음표가 적힌 곳에 가서 도장을 모아오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러면 앉은뱅이 역


지원자 중에 이 지도를 갖고 온 사람은 더 없습니까?”

로비는 조용했고, 손 든 사람은 없었다.

즉, 마지막 과제는 백고운 혼자만이 해결했다는 것이었다.


오직 그만이 제이크 킴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호기심 넘치는 ‘앉은뱅이’ 캐릭터를 제대로 연기했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감탄하면서 백고운을 흘금거렸다.

저번에 싸이렌 때도 놀랐지만, 확실히 똑똑한 배우였다.

그리고 그건 연기를 잘한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했다. 왜냐면 사실, 연기를 잘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똑똑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곤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디션 결과는 오래지 않아 나왔다.

매니저가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외쳤다.

“고운아, 네가 됐대!!”

나는 소속사 사람들에게 한껏 축하를 받은 후, 주변 지인들에게서도 많은 축하를 받았다.

기사도 대대적으로 나왔다.

[<봉사와 앉은뱅이> 캐스팅 오디션 2000 대 1 경쟁률 뚫고······ 백고운 발탁!]

사실이 맞기는 했지만, 어쩐지 좀 멋쩍은 면은 있었다.


그래도 확실히 기분은 좋았다.

배역에 대한 기대도 많이 됐고,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도 많이 됐다. 내가 언제 할리우드에서 연기해보겠는가.

내가 캐스팅 되었다는 소식이 나간 뒤, 이러저러한 일로 꽤 바빴다.

나는 정식 대본을 받았고, 본격적으로 대본 연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광고도 꽤 들어왔고, 벌어들인 돈으로 더 좋은 곳으로 이사도 할 수 있었다.

거취는 한남동으로 정했는데, 지리적으로 좋아서였다.

일단 그 동네는 연예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길을 지나다닐 때 좀 더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근처에


청담동도 있어서 샵 들리기도 편하기도 했고 말이다.

게다가 뭣보다, 바로 근처에 김건이 살고 있어서 그와 이웃사촌이 된 게 가장 좋은 점이었다.

실은··· 애초에 김건이 추천해준 집이었다.

처음엔 조금 고민 했었다. 내겐 너무 넓은 집 같았기 때문이었다.

“건이 너야 가족이 있지만, 나는 혼자 살잖아. 이렇게까지 넓을 필요가 있나? 청소하기도 번거롭고.”

그러나 김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뭘 몰라서 그래. 집은 무조건 클수록 좋아. 게다가 요즘엔 집을 공개하는 예능 프로그램들이 많잖아. 너도
거기 나가지?”

“게스트로 출연하기는 하는데······.”


“그런 것도 어느 정도 연출인 거야. 연예인은 사생활을 셀링하는 직업이니까. 너만큼 유명한 자식이 검소하게
사는 것도 안 좋아. 대중은 부자에게서 기대하는 게 있다고. 사람들은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 질투도 하지만,
대리만족도 하는 법이거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윤성광이나 매니저도 청담동 집을 강력하게 추천하기에 나는 그냥 그들 뜻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내게 따로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업에 투자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내게 돈 나갈 구석은 기부 정도였는데, 주기적으로 큰돈을 내놓아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돈은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그 집을 샀고, 이사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확실히,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죽마고우와 가볍게 동네에서 술 한 잔 걸칠 수 있는 건 좋았다.

<봉사와 앉은뱅이> 영화에 캐스팅 된 것도 좋은 소식이었고, 이사 역시 좋은 소식이었다.

그런데 경사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뭐? 건이 네가 프로듀서로 합류한다고?”

어느 날 김건이 말해온 소식에 나는 깜짝 놀랐다.

김건이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오더라고. 왜, 이번 영화가 엄밀하게 말하면 판타지 사극인 거잖아?”

“그렇지.”
“그런데 제이크 킴 감독은 미국인이잖아. 게다가 사극을 찍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

나는 그제야 대충 알아차렸다. 내가 김건을 가리켰다.

“그런데 너는 사극 영화도 많이 찍었고, 대학원도 사학과를 나왔으니까?”

김건은 학부 때 연영과를 다니면서 사학과를 복수 전공했는데, 나중에 대학원도 그쪽으로 갔더랬다. 영화감독은
가방끈이 길어야 한다나 뭐라나 하면서. 김건 본인도 그쪽으로 흥미가 많기도 했었고.

김건이 자랑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지. 자문도 하고, 여러 잡일도 도와주고. 그러기로 했어.”

잡일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뭣보다 중요한 일들이었다.

나야 제작진이 아니니 잘은 몰라도, 제이크 킴에겐 이러저런 고충이 많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본국(미국)이
아닌 외국(한국)에서 외국(한국)을 주제로 하는 영화를 찍는 셈이니까. 한국에 알고 있는 친분이나 연줄도 잘
없을 테고.

아마 김건은 그런 것들을 전반적으로 케어해줄 모양이었다.

김건과 나는 ‘공적으론 얽히지 말자’ 주의였지만, 이번엔 좀 예외였다.

나도 할리우드와 작업해보는 건 처음이라, 아는 사람이 우리 제작팀에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정을 주었다.

우리는 웃으며 잘 해보자고 술잔을 부딪쳤다.

김건이 술을 쭉 들이켠 후,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어쨌든, 그래서 첫 업무로 음악감독 소개시켜주기로 했어.”

“응? 거기 음악감독 이미 있지 않아?”

“있는데, 미국인이 한국 정통 음악은 모를 거 아니야. 협업할 한국 음감이 필요하대. 일단 제이크 킴 쪽에서


원하는 사람은 있는데,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라서. 일단 연락처를 찾아 봐야지. 혹시 너도 알려나?”

김건이 스마트 폰으로 프로필을 검색하면서 설명했다.

“제이크 킴이 음감이 참여한 사극 영화를 하나 봤나 봐. 꼭 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음감 필모가


특이해. 원래 전통음악 쪽 전공은 아니고 클래식 전공이었는데, 나중엔 그쪽으로 작업을 많이 했더라고. 새롭고
특이한 프로젝트도 많이 했고. 나도 작업물을 들어봤는데 나이가 젊어서 그런가, 확실히 트렌디한 느낌이 있데.”

그러면서 그가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놀랐다.

“응?”

김건이 보여준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잘, 말이다.

며칠 뒤.

나는 미팅 장소인 카페로 들어갔다.

거기엔 이미 김건과 음악감독이 앉아 있었다. 음악감독 쪽이 고개를 들고 날 발견했다.


“어, 고운 씨! 오랜만!”

이초희가 활짝 웃으며 날 반겼다.

덤앤더머와 버디의 차이
94.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이초희가 조잘거리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동안 서로 바빠서 못 보던 기간이 길어서 서로 할 말이 많았다. 그나마 나는 작품을 찍으니까 그녀 입장에서 내


근황은 알지만, 나는 그녀의 근황을 알 길이 없지 않았겠는가.

못 보던 기간 동안 그녀는 정말 많은 일을 했더랬다. 특히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것이 제일 신기했다.

원래 그녀는 클래식 전공이었는데, 어느 날에 갑자기 전통국악의 매력에 풍덩 빠졌다.

관심 있는 것이 생기면 그게 무엇이든 망설임 없이 도전하는 것이 그녀의 성격이었다. 그녀는 음악감독 일도 잠시


미뤄두고 새로운 음악 장르를 배우는 데에 시간을 쏟았다.

“그래서 사물놀이 패에 들어가서 전국 투어까지 했다고요?”

“그랬다니까. 캠핑카 같은 버스를 빌려서 거기서 먹고 자고 했지. 진짜 재미있었어.”

이초희는 털털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본업으로 돌아와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사극 영화와 드라마 작업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이초희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열정 넘치는 사람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었다.


게다가 옛날의 내 생각도 나고 좋았다. 나 역시 가진 것 없지만 열정은 넘치던 이십 대 때, 무대 소품을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극 공연을 하곤 했었다. 불러주는 데가 없어도 직접 찾아가면서 말이다.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참 이런저런 회포를 즐겁게 푼 뒤, 우리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이초희가 먼저 말했다.

“안 그래도 고운 씨가 그 시즈니 영화에 최종 캐스팅 되었다는 기사는 봤어. 그런데 나한테도 연락이 올 줄은
몰랐네.”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실은 당분간은 작업 들어갈 생각이 없었거든. 그런데 고운 씨가 하는 영화인데, 내가 발 뺄 수야 있나.”

그녀가 ‘널 봐서 일을 맡겠다’라는 듯이 눈을 찡긋해보였다. 허락의 의미였다.

그 뒤는 김건과 이초희 둘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갔다. 몇 가지 계약서를 나눈 뒤, 이초희가 먼저 일어났다.

“그럼 나중에 봐, 고운 씨.”

“네, 다음에 또 봐요.”

그리고 그녀가 나간 뒤, 김건이 그제야 감탄한 얼굴로 날 돌아봤다.

“와 이렇게 쉽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다행이다. 네 덕에 잘 풀렸네. 고맙다, 짜식.”

“무슨, 내가 뭘 했다고.”
나는 그냥 김건이 영입하려고 하는 음감이 이초희란 걸 알고, 그녀에게 먼저 안부인사 연락을 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초희 역시 내가 김건과 친하다는 걸 들은 후 그러면 미팅 자리에서 한 번 보자고 말 꺼낸 것뿐이고.


오랜만에 이야기도 나눌 겸 해서 말이다.

그러나 김건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소문 들었는데 저 친구 집이 워낙 부자라고 하더라고. 일을 취미로 해서 안 내키면 그냥 안 하는 걸로


유명하대. 그런데도 능력도 좋아서 같이 작업하고 싶은 사람들이 줄을 서는 모양이더라고.”

음, 그게 사실이기는 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나와의 친분이 어느 정도 그녀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수는 있었겠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뭘 특별히 한 건 아니고, 사람의 인연이 신기하게 좋게 이어진 것뿐이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짐짓 말했다.

“그럼 밥 사든지.”

“그건 아니고.”

우리는 그런 농담을 던지며 짧게 낄낄 웃었다.

<봉사와 앉은뱅이>의 첫 리딩 현장.

주요 출연진과 제작진들이 모두 모였다.


제이크 킴을 비롯한 제작진 쪽의 인사가 끝난 후, 내가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앉은뱅이 ‘철수’ 역을 맡은 백고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캐스팅 된 후 배역의 정확한 이름이 정해졌다. 원래의 원작 영화에는 이름 없이 그냥 앉은뱅이라고만 나오는데,


이번 리메이크 영화는 아무래도 실사 영화니까.

정해진 이름은 ‘철수’로 공교롭게도 내 옛 이름과 똑같았다. 뭐, 워낙 평범한 이름이라 별로 특이할 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박수를 짝짝짝 쳤고, 이어서 봉사 역을 맡은 배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봉사 ‘영수’ 역을 맡은 배정원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배정원이란 배우가 사람 좋게 인사했다. 나는 그를 본선 오디션 때 리조트에서 본 적이 있었다.

봉사 역의 배우들은 앉은뱅이를 업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피지컬이 좋았는데, 게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으로


훤칠했던 사람이라 기억에 남아 있었다.

내겐 뉴 페이스였는데, 원래는 가수로 이번에 연기로 데뷔하는 신인이란다.

투톱 주인공인 우리 둘이 인사를 마치자 이어서 조연들도 일어나 인사를 했다.

그리고 조연들 중에는 뉴페이스도 있었지만, 나와 친분이 깊은 사람들도 꽤 있었다.

“안녕하세요, 투덜이 역을 맡은 이성한입니다.”

이성한이 자리에서 인사한 뒤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약간 긴장한 듯,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짓으로만 짧게 아는


척 인사했다.
사실 이성한은 내 덕에 캐스팅 된 케이스였다.

가끔 한 작품에서 주연 배우가 출연 확정이 될 경우, 해당 배우의 소속사 측에서 감독에게 조연 역을 하나 더


달라고 하는 은근히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그 소속사의 다른 배우를 출연하게 하도록 말이다.

흔히 말하는, 끼워 팔기라고 해야 할까.

이성한은 몇 달 전 계약이 만기 되어 우리 소속사로 이적했다. 그리고 우리 소속사에서는 이성한을 밀어주기 위해


나와 함께 영화에 조연으로 집어넣었다.

물론 이성한이 끼워 팔기로 캐스팅 될 짬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스케일이 할리우드이지 않은가.

그러나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은 이성한뿐만이 아니었다.

“앉은뱅이의 아버지 역을 맡은 기태성입니다.”

“어머니 역을 맡은 심미애입니다.”

둘이 연이어 일어나서 인사했다. 둘 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보였다.

그랬다. 이번 영화엔 기태성과 심미애도 캐스팅 되었다.

둘은 제이크 킴 감독이 원해서 콜 캐스팅했다 들었다. 기태성과 심미애야, 한국에서 워낙 유명한 배우 중


하나니까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나와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긴장되기 보다는 오히려 편안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배우들이 다 실력자이기도 했기에 걱정할 부분도 크게 없었다.


내 파트너 역을 맡은 신인 배정원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연차가 10 년을 훌쩍 넘어가는 배우들이었다. 이성한이나
기태성, 심미애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나 역시 김철수였던 때까지 합치면 이제 거의 30 년 가까이 되어 가니까.

오죽했으면 캐스팅 롤이 전부 발표되었을 때, ‘초호화 캐스팅’이라는 타이틀로 기사가 나갔을까.

그리고 아직 엠바고가 걸린 극비 정보이긴 하지만, 카메오로 오용호까지 잠깐 등장할 예정이었다.

우리 둘이 찍은 <기라성과 기린아> 드라마가 워낙 히트치지 않았는가. 일종의 한국 팬을 위한 서비스 컷 같은


거였다. 물론 오용호는 우정으로 의리 출연 해주기로 했다.

아무튼, 쟁쟁한 배우들이 많이 나오다 보니 세간의 관심도 높아졌다는 뜻이었다.

김건은 이런 캐스팅 소식을 모두 들은 후, 우리 팀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와, 이거 완전 어벤져스네.

실은,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수많은 출연진들의 인사가 끝난 후, 감독인 제이크 킴이 박수를 딱 쳤다.

“좋습니다. 이제 그러면 리딩을 시작해보겠습니다.”

리딩 현장이 조용해졌고, 배우들이 집중했다.

신인인 배정원이 약간 긴장한 낯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백고운은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제이크 킴은 백고운이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가 됐다.

두 달 전쯤, 본선 오디션에서 봉사 쪽 지원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또 다른 것이었지만, 그들 중 그것을 통과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감독은 전반적인 연기와 다른 요소(노래와 신체적 조건)을 보고 배정원을 뽑았다.

달리 말하자면, 백고운은 본선의 모든 참가자를 통틀어 유일하게 마지막 과제를 통과한 사람이란 뜻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리딩이 시작됐고, 투탑 주인공인 백고운과 배정원이 대사를 주고받으며 연기를 이어갔다.

백고운이 먼저 말했다.

“아니, 이쪽으로 가야지.”

“‘이쪽’이 어딘데?”

앉은뱅이가 먼저 방향을 알려주지만, 듣는 봉사 입장에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익숙하지 않은 소통 때문에


둘은 투닥거린다.

“아니아니,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라니까? 아오, 답답해.”

“야, 내가 더 답답하거든?”

“뭐야?”

“뭐야?!”

처음 받은 인상은, 원작과 비슷하단 것이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번 영화는 원작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영화이기 때문에 원작과 비슷해야 했다. 크게
어긋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하지만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했던 제이크 킴에게는 백고운의 연기가 조금 심심하단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라, 잠깐만?’

제이크 킴은 어느 순간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원작이랑 미묘하게 느낌이 다르네?’

원래의 원작에서는 봉사와 앉은뱅이의 캐릭터가 덤앤더머에 가까웠다.

그래서 일부러 이름도 ‘철수와 영수’로 지은 거였다. 패트와 매트 같은 느낌이 나도록 말이다.

이런 덤앤더머 관계는 보통 두 사람이 비슷하게 그려진다. 원래 한 덩이였던 걸 두 덩이로 나눈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유하자면, 젓가락의 양쪽 짝 같은 거랄까.

이 영화는 코미디 영화이기 때문에 두 주인공이 덤앤더머 같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면서 웃음을 이끌어낸다.

처음엔 철수와 영수(그러니까 백고운과 배정원)의 느낌이 둘 다 비슷비슷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차 그 느낌이 변했다.

‘덤앤더머’라기보다는 뭐랄까······ ‘버디’에 가깝다고 해야 옳았다.

물론 버디도 덤앤더머랑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아주 미묘한 차이로 둘은 달랐다.


버디는 두 주인공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결국 결정적으론 다르다는 것이 포인트였다.

원래 한 덩이였던 것을 두 덩이로 나눈 게 아니라, 각자 다른 두 덩이가 힘을 합쳐서 공동의 행동을 하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유하자면, 숟가락과 젓가락 같은 관계랄까.

그리고 그 느낌의 차이는 바로 백고운의 연기 톤에서 기인했다.

백고운은 바보스러운 느낌을 덜어내고 명료하고 또렷하게 목소리를 냈다. 가끔은 카랑카랑하게 대사를 뱉기도
했다.

그러자 비슷했던 두 캐릭터가 순식간에 정반대의 느낌을 갖게 됐다.

앉은뱅이 철수가 좀 더 깐깐한 캐릭터가 되자, 대비 효과로 봉사인 영수는 좀 더 맹한 캐릭터의 느낌을 주었다.

재미있는 건, 그럼에도 균형이 잘 맞았다는 것이다.

사실, 원래 전혀 정반대인 캐릭터의 조합일수록 버디로서 잘 어울리는 법이었다. 공부벌레와 장난꾸러기, 정파와
사파, 이성파와 감성파······ 등등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럴까, 백고운이 조금 색다르게 연기하자 원작보다 훨씬 개성 있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느껴졌다. 봉사와
앉은뱅이, 두 캐릭터 모두 말이다. 좋은 해석과 빌드업이었다.

백고운의 저런 연기는 의도한 것일까? 아니면 얻어걸린 걸까?

제이크 킴은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가 픽 웃었다.


의심했던 것이 스스로도 우스웠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백고운의 저런 섬세한 연기는 의도하지 않고서는 애초에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제이크 킴은 씩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기대만큼 잘 하네.’

리더쉽이 있는 친구
95.

시간은 빠르게 흘러서 영화 <봉사와 앉은뱅이>의 첫 촬영 날이었다.

벌써 20 년 넘게 영화를 찍어왔던 제이크 킴에게도 이번 촬영은 참 특별했다. 왜냐면 한국에서 처음으로 찍는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대해 많이 알고는 있다고 자부했으나, 확실히 처음 겪어보는 특이한 문화도 있기 마련이었다.

영화 시작 전 고사를 지내는 것 역시 그 중 하나였다.

고사(告祀)는 액운이 없길 바라면서 음식을 차려 놓고 신에게 비는 제사였다. 영화 전에 고사를 지내는 것 역시


무사고를 기원하며, 궁극적으로는 영화가 잘 되기를 비는 것이었다.

이런 샤머니즘을 따로 믿는 건 아니었지만, 한국에 오면 한국의 법을 따르는 게 옳지 않겠는가.

때문에 제이크 킴은 고사를 생략하는 대신 지내기로 했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상이 차려졌다.

주연 배우들이 차례로 절을 했고, 제이크 킴은 마지막에 앞으로 나갔다. 그는 돼지 머리에게 절을 하면서 따로


소원을 빌었다.

‘마무리하는 그날까지 부디 사이좋게 영화를 찍을 수 있길.’

사실, 한국계 미국인 감독으로서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이 다인종 국가라지만, 아직도 백인 이외의 인종은 인종차별 당하는 게 현실이었으니까.

특히 유명한 배우들(백인) 중엔 가끔 감독인 제이크 킴을 무시하거나 기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물론, 이번 작품은 그런 면에서는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한국인이거나, 한국계


미국인이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제작진이나 스태프들은 대부분의 비율로 미국인들이었다. 한국인도 있었지만 소수였다.

제이크 킴은 바로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백인 배우가 자신에게 시비를 건다면 그래도 어떻게 해볼 수 있었다. 제이크 킴은 감독이었고, 그 권위로
컨트롤이 가능했으니까. 게다가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으면서 생긴 내공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자신과 배우 간이 아니라, 스태프들과 배우들 간에 기분 상할 일이 생기면 그건 자신이 어떻게 해보기가


어려웠다.

원래 중간에 낀 사람들이 더 어렵다고들 하지 않은가.

그래서 제이크 킴은 제발 영화 찍는 동안 다들 사이가 좋기를 빌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원래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걱정했던 바로 그 일은, 아니나 다를까, 일어나고야 말았다.

밥 차가 와서 다 같이 밥을 먹고 있던 도중이었다.

“(역겨워.)”

한 스태프가 주연 배우들이 모여 있는 쪽을 지나가면서 툭 혼잣말을 뱉었다. 하필 조용할 때라 그 말을 들은


사람이 꽤 많았다.

백고운을 비롯한 주연 배우들 몇 명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대화가 뚝 끊겼고,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그리고 제이크 킴 역시 그것을 목격했다.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어쨌거나 생긴 이상 제이크 킴이 해결해야 했다.

그는 감독으로 촬영장 물 흐릴 일을 사전에 제거해야 했다. 게다가 윤리적으로도 인종차별 하는 사람을 묵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즉각 나서서 그 스태프를 불렀다.

“(샘, 방금 그게 무슨 말이지?)”

샘이라고 불린 그 스태프는 천연덕스럽게 들고 있는 식판을 들어보였다.

“(음식 얘기였어요. 안 좋아하는 음식이라서요.)”

누가 봐도 빤한 변명이었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발뺌을 하는데 거기에다가 대고 추궁하기에도 그랬다. 실제로도


샘의 식판에는 음식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냥 이대로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 제이크 킴은 엄하게 말했다.

“(남들은 다 잘 먹는 음식에다가 대고 역겹다고 말하는 것 역시 실례야. 알겠나?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해.)”

“(네, 죄송합니다.)”

일단 샘은 고분고분하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 태도가 진짜 반성이 아니라 그저 ‘척’에 불과했다는 건 금방 밝혀졌다.

샘은 그 사건 이후로도 계속 틱틱거리며 비협조적으로 굴었다. 그는 계속 한국인들에게 퉁명스러웠고, 제이크 킴


감독이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그저 남들 눈이 안 보이는 곳에서 더 투덜거리기나 할
뿐이었다.

제이크 킴은 골치가 아팠다.

아직은 샘 한 명만 그럴 뿐이었지만, 한 명이 물을 흐리면 다른 사람들도 같이 동화되는 면이 있기 마련이었다.

즉, 배우(한국인)와 스태프(미국인)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 전에 해결해야 하는 건 분명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에도 백고운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감독님, 제가 샘과 얘기해 봐도 괜찮을까요?”

“응? 고운 씨가?”

제이크 킴은 걱정됐다.
보통 이런 인종차별 문제는 대화와 설득으로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풀릴 문제였으면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오히려 백고운이 나섰다가 면전에서 더 심한 혐오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백고운은 괜찮다고 연신 말했다.

“실은, 짐작 가는 바가 있어서요.”

“그게 뭔데요?”

“아직 추측이라서 말씀드리기엔······ 죄송해요.”

제이크 킴은 속는 셈 치고 그를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샘이 머무는 방 호수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였다.

‘어라?’

제이크 킴은 촬영장에서 백고운과 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우연히 둘의 대화도 듣게 되었다.

“(고맙다. 넌 좋은 한국인 같네.)”

“(다른 사람들도 좋은 사람들이야. 네가 먼저 말해줬다면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도와줬을걸.)”

“(······하긴 네 말도 맞네. 저번엔 미안했다. 사과할게.)”

백고운은 사과를 받아들였고, 샘도 조금은 멋쩍게 웃은 후 갔다.

제이크 킴은 깜짝 놀랐다. 샘의 태도가 이전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마침 백고운이 제이크 킴을 발견해 인사하며 다가왔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고운 씨. 어떻게 된 거야?”

백고운이 샘과 대화해본다고 한 건 알았지만, 무슨 대화를 나눴기에 샘이 저렇게 돌변해서 진심으로 사과까지


하게 된 거지?

백고운은 싱긋 웃으며 그제야 일의 전말을 알려주었다.

“사실 알고 보니 별 것 아니었어요. 생활 방식 차이 때문이더라고요.”

“생활 방식 차이라고요?”

“네. 샘이 저번에 밥을 거의 남긴 거 기억하시죠? 보니까 고기 메뉴더라고요. 혹시나 싶었는데, 물어보니까


역시 채식주의자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희 식사 메뉴엔 거의 고기가 많잖아요. 배려가 없다고 느꼈나 봐요.”

“······!”

제이크 킴은 놀랐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백고운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외국은 한국보다 개인주의적 문화가 있잖아요. 샘은 회식이 많은 것도 힘들었는데, 회식 갈 때마다


고기집이라서 더 힘들었나 봐요. 그래서 조감독님께 그런 건의가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배려해주시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샘도 불편한 게 있으면 그런 식으로 성질부리지 않고 똑바로 말해주기로 했어요.”

제이크 킴은 감탄했다. 그러나 백고운은 그저 1:1 로 진솔하게 대화한 게 다일 뿐이라고 겸손히 손을 저었다.

어쨌거나 백고운 덕에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회식은 줄었고, 음식 메뉴는 선택할 수 있도록 그 폭이
다양해졌다.

처음엔 낯설어하는 배우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금방 적응했다.


또한, 스태프들 중엔 아닌 척 했지만 샘과 비슷한 불편함을 느꼈던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얼굴빛이 밝아진
친구들이 몇몇 있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백고운이란 소문이 퍼졌는지, 촬영장에 갈 때마다 한국 배우고 외국 스태프들이고 할
것 없이 백고운과 친근하게 어울리는 것이 보였다.

사실, 백고운은 원래도 사람들의 중심에 있는 편이었다.

비단 주연 배우라서가 아니라, 친분이 있는 배우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기태성이나 심미애처럼 나이가 많은


배우건, 이성한처럼 적은 배우건 간에 할 것 없이 그와 친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저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백고운 주변에 모이는 것이 아니었다.

백고운은 리더쉽이 있는 친구였다.

타인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도 있었고, 개개인을 존중하는 배려심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주변으로 모이는
것이었다.

‘어린 친구가 대단하네.’

심지어 외국에서 나고 자란 제이크 킴 자신보다 백고운이 생활 방식 차이 또는 문화 차이에 익숙하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거 반성해야겠네.’

그렇다고 패배감이 든다거나, 뭐 이런 건 아니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일을 해결했을 때 느껴지는 얼떨떨함과 유쾌함 같은 감정에 더 가까웠다.


하여간. 연기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 쪽으로도 잘 하는 배우였네.

제이크 킴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봉사와 앉은뱅이> 촬영은 계속 이어졌다.

얼굴 붉힐 뻔한 일이 있었지만, 내가 샘을 찾아가 얘기를 나눈 후론 잘 풀렸다.

그 뒤에는 특별한 별일 없이 순조롭게 촬영이 이어졌다.

그런데 촬영 중반부에 들어섰을 때, 이번엔 배우인 배정원에게 문제가 생겼다.

심각한 건 아니고, 연기의 문제였다.

이번에 찍는 씬은 꽤나 어려운 씬으로, 봉사 캐릭터인 ‘영수’가 괴물을 만나서 쫓기는 장면이었다.

그는 뒤에서 달려오는 괴물을 피해 피난처로 들어가야 하는데, 문제는 곳곳에 장애물들이 있다는 거였다.

물론 영수는 앞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장애물들을 알아서 피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이미 피난처에 들어간 앉은뱅이 ‘철수’가 영수의 상황을 보고 소리쳐서 장애물이 있는 방향을 대신
알려준다. 영수는 그걸 듣고 뛰어가는 것이었다.

이 장면에서 작가님과 감독님이 의도하고 있는 건 명확했다. 철수와 영수의 끈끈한 유대감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영수는 넘어져서 다칠 수도 있지만 철수를 믿기 때문에 그의 말에 몸을 맡기고 뛴다. 물론 그 시도는 성공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애니메이션이라면 어렵지 않게 가능한 연출이겠지만, 실제 사람이 하기에는 고난이도의 연기였다.

짧은 씬 동안, 눈 감고 걷는 것 정도는 배정원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롱테이크로, 눈 감고 뛰는 것은 아직 어려웠다.

넘어질까 봐 두려운 건 둘째 치고, 우선 눈을 감으면 방향 감각이 사라지기 때문에 연습을 한다 해도 동선이


정확하게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몇 번의 NG 와 시도 끝에, 제이크 킴이 카메라를 멈췄다.

마지막 시도에서 배정원이 상자에 걸려 넘어질 뻔하자 감독도 더 이상 장면을 찍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배정원이 죄송하다 연신 사과했다.

“제가 더 연습을 해야 했는데······.”

“아니, 내가 문제죠. 배우 안전이 1 순위니까.”

제이크 킴은 연출을 좀 다르게 해서 찍을 생각인지 다른 사람들과 상의하려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촬영장 한쪽에서 지켜보다가 문득 물었다.

“저, 감독님. 아니면 제가 뛸까요? 짧은 거리라면 제가 장애물들을 붙잡고 움직이는 식으로 뛸 수는 있을 것


같아서요.”

제이크 킴이 깜짝 놀란 듯 나를 바라봤다.
1 분 15 초
96.

촬영장에 있는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백고운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앉은뱅이는 다리를 못 쓰는 캐릭터이지 않은가. 이번 장면은 전속력으로 뛰어야 하는 장면이고.


그런데 어떻게 앉은뱅이가 그걸 할 수 있다는 말이지?

그러나 2 차 예선과 본선 오디션 장소에 있었던 제이크 킴 감독을 비롯한 몇몇 제작진들은 백고운이 허세가 아니라
진담으로 하는 말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백고운이 팔로만으로도 주변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모습을 직접 본 사람들이었으니까.

제이크 킴은 물었다.

“완전히 손으로 뛰겠다는 말이 아니라 장애물을 붙잡고 넘는 식으로 해보겠단 말이죠? 그런데 할 수 있겠어요?
그때랑 이번은 좀 다를 텐데.”

그때야 의자 위에 올라가는 정도였지만, 지금 찍는 장면은 그보다 더 높고 불편한 장애물들이 훨씬 더 많았다.

백고운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말했다.

“음··· 잘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 해볼까 싶어서요.”

그때, 백고운이 생각해둔 바가 있었는지 촬영장 세트를 가리켰다.

“아니면 장면을 조금 바꿀 수 있다면, 위로 가는 건 쉬울 것 같아요. 수직으로 뛰는 건 어렵지만, 클라이밍처럼


돌출물을 붙잡고 지붕 위로 올라가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거든요.”
그건 의외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쁘지 않은 대안책이기도 했다.

앉은뱅이의 장기는 팔 힘이다. 그렇다면 팔로 땅을 짚어가면서 뛰는 것보다는, 팔로 무언가를 잡고 올라가는 것이


더 그림이 괜찮을 것이다.

제이크 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괜찮겠네요. 한 번 해볼래요?”

둘은 의견이 척척 통했다. 몇 가지를 빠르게 상의하던 그들은 어느새 뜻을 맞추더니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제이크 킴이 세트장을 조금 수정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동안, 백고운은 계획대로 실행해보기 위해 팔을 스트레칭
했다.

그리고 배정원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전개되어가고 있는 이 상황에 당황했다.

왜냐면 뛰는 것이 어렵다고 위로 올라가는 건, 쉬운 걸 못해서 더 어려운 걸 하겠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라. 보통 사람들에게는 나무 오르는 것보다 그냥 뛰는 것이 더 쉽지 않겠는가?

물론 앉은뱅이의 입장에서야 다르겠지만, 어쨌거나 그걸 연기하는 백고운은 진짜 앉은뱅이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고 하니, 듣는 사람 입장에서야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촬영장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진짜 가능할까?’

모든 사람들의 이목 속에 백고운이 리허설을 해보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백고운은 안전을 위해서 와이어(와이어는 이 다음 장면을 찍기 위해 준비되어있던 것이었다)를 허리에 찬 뒤,


동선을 제이크 킴과 상의했다.

대충 들어보니, 쌓여진 나무 상자를 계단 삼아서 올라간 뒤, 거기에서 대들보를 붙잡고 올라가겠다는 내용 같았다.

상의를 마친 뒤, 감독은 뒤로 물러났고 백고운은 자리에 주저앉으며 준비 자세를 잡았다.

백고운이 첫 시작으로 자신의 가슴팍보다 높이 있는 상자 위를 턱 잡았다. 그러더니 그가 어렵지 않게 팔에 힘을


주어 상자 위로 올라갔다.

그는 그런 식으로 상자 위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보고 있던 사람들이 도리어 깜짝 놀랐다.

“······!”

걱정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백고운은 너무 쉽게쉽게 움직였다.

백고운이 팔 힘을 써서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게 아니라, 사실 와이어에서 위로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백고운은 상자의 제일 꼭대기로 올라간 뒤 대들보를 잡았다. 그리고는 대들보를 마치 구름사다리라도 되는 것


마냥 척척척 잡아가며 이동했다.

그가 대들보 끝에 도착했다. 그는 몸의 무게중심을 추처럼 앞으로 붕― 흔들더니 지붕 위에 턱 몸을 걸쳤다.


반쯤 접힌 몸을 푼 뒤 백고운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 순간이 백고운이 그나마 가장 길게 쉬던 순간이었다.

그 뒤, 그는 팔로 수키와를 잡고 밀어내면서 뒤로 슬금슬금 올라가며 마저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해서 백고운은 눈 깜짝 할 새에 지붕 맨 꼭대기에 도착해 있었다.

그야말로 곡예에 가까운 액션이었다.

배우 개인이 했다기보다는, 서커스 공연이나 스턴트 훈련을 봤다고 하는 게 더 현실성 있을 정도였다.

촬영장에 있는 모두가 놀라서 멍하니 백고운만 올려다봤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 모두들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던 도중, 스태프 중 한 명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백고운이 시작하기 전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고 있으란 오더를 받아서 그렇게 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재빨리 스톱워치를 눌러 삑 종료시켰다. 그가 스톱워치를 확인하곤 숨을 헉 삼켰다.

“세상에··· 1 분 15 초······.”

그 말에 주변의 스태프와 배우들이 모두 입을 떡 벌렸다.

눈으로 봤을 때도 진짜 순식간이라는 감상이긴 했지만, 그것을 숫자로 보니까 얼마나 짧은 순간이었는지 실감이
났다.

스태프가 조금 뒤늦게 스톱워치를 눌렀단 걸 감안한다면, 백고운은 거의 1 분 안에 방금의 액션을 돌파한


것이었다.

1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땅바닥에서 기왓집 지붕 위로 올라가다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촬영장에 있는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며 수군거렸다.

“와, 대단하네.”

“스턴트 맨 출신은 아니지?”

“그건 아니고, 저 배역 연기하려고 팔 운동을 엄청 했대.”

“진짜인 듯. 지금 백고운 씨 팔 근육 봐. 완전 팔만 성나 있잖아.”

“나는 사실 순간적으로 저기만 중력 없는 줄 알았잖아.”

“억, 나도 그 생각했는뎈.”

그리고 제이크 킴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여러 번의 오디션을 거치면서 백고운이 워낙 대단한 배우란 걸 이미 체감해서 알고 있었다.

이번 장면도 이렇게 빠르게 할 줄은 몰랐지만, 해낼 줄은 알았다. 그래서 남들보다는 비교적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가 목소리를 높여서 지붕 위에 있는 백고운에게 물었다.

“백고운 씨,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장갑 끼고 해서 별로 안 다쳤어요.”

“이거 한 번 더 찍어야 할 텐데, 또 할 수 있겠어요?”

그때, 백고운이 와이어를 타고 아래로 붕 내려왔다.


그가 가볍게 땅에 착지한 뒤 제이크 킴을 향해 웃어보였다.

“네, 그럼요.”

그렇게 말하는 백고운의 이마에는 땀방울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가뿐한 몸 풀기였다는 듯 말이다.

하여간에, 정말 못 말리는 배우라니까.

그는 참··· 매번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제이크 킴은 기분 좋게 픽 웃었다.

문제의 촬영은 그렇게 해서 잘 끝났다.

원래의 장면에서는 괴물이 달리는 봉사를 쫓아오는 걸로 그려진다. 그러나 바뀐 장면에서는 위로 도망치는
앉은뱅이를 잡으려 손을 뻗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도망 루트가 수평에서 수직으로 바뀌었다고 해야 할까.

원래의 예정과 그림이 좀 달라지기는 했지만, 어차피 괴물은 후 작업 때 CG 로 그려질 예정이라서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개운히 촬영을 마쳤다.

그런데 끝나고 생각하고 보니 내가 배정원의 분량을 뺏은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뒤늦게 들었다.


혹시나 기분이 상했을까 싶어 촬영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나는 따로 그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배정원은 기겁하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소리세요! 저야말로 너무 감사하죠. 하마터면 저 때문에 촬영이 망할 뻔 했는데 선배님 덕에 잘 끝난 걸요.
그리고 너무 멋졌습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연기는 정말 어렵네요.”

나보다 머리 한 통은 더 큰 배정원이 투박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언제쯤 용감하게 연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는 약간 의기소침해보였다.

사실, 예전에 그는 지나가는 말로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봉사 연기를 하면서 두려움을 많이 극복했다고 생각은 했는데, 아직도 눈 감고 행동할 때마다 주춤주춤하는 걸
스스로도 느낀다고 말이다.

아마 본인이 덩칫값을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말했다.

“왜요. 봉사가 꼭 용감한 캐릭터는 아니잖아요. 오히려 덜렁거리는 캐릭터죠. 지금도 충분히 잘 연기하시고
계세요. 주변에서도 정원 씨가 제일 배역에 잘 어울린다고 하는 걸요.”

그건 사실이었다.

그는 생김새 자체가 원작의 봉사 캐릭터와 똑 닮았다. 그의 캐스팅이 정해졌을 때, 대중들도 싱크로율 높은


배우를 캐스팅했다고 한창 떠들썩했더랬다.
게다가 그는 덩치가 커서 그런가, 맹한 연기를 하면 더욱 맹한 느낌이 났다.

왜, 덩치가 크면 둔하다는 느낌을 흔히 받곤 하지 않은가. 우리가 곰을 볼 때처럼 말이다. 물론 그런 느낌 역시


편견이지만(실제로 곰은 아주 빠르다고 한다).

배역과 배우 본인의 캐릭터가 비슷한 경우가 있고, 전혀 다른 경우가 있다. 이번 작품에서 내가 후자라면,
배정원은 전자인 경우였다.

그래서 나는 그냥 편하게 해도 된다고, 뭘 해도 배역과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아, 물론 그렇다고 정원 씨가 덜렁거린다는 말은 아니고요.”

오해할까봐 얼른 덧붙였는데, 걱정이 필요 없던 모양이었다. 배정원은 내 말에 적잖이 감동받은 눈치였다.

“선배는 진짜 좋으신 분 같아요.”

그는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지 그날 이후로 내게 자주 연락했다.

나야 성격 좋은 후배를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그런 그와 자주 어울렸다.

우리는 사적으로 종종 만나 같이 놀곤 했는데, 우리의 우정은 내게 뜻밖의 플러스를 갖다 주었다.

하루는 화보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매니저가 핸드폰을 하다가 내게 물었다.

“고운이 너 정원 씨랑 자주 놀고 그러나 봐?”

“응? 네? 아, 네. 어떻게 알았어요?”

“정원 씨 개인 인스타가 있거든. 거기에 너랑 찍은 셀카 자주 올라오니까 알았지. 꼬박꼬박 네 인스타 계정


아이디 태그하거든. 요즘은 정원 씨 속한 그룹의 멤버들보다 네가 더 자주 보이던데?”
딱히 스마트폰과 친하지는 않지만, 요즘은 1 인 1 스마트폰 시대지 않은가. SNS 는 무조건 있어야 한다고 하도
주변에서 그래서 나도 내 계정을 예전에 하나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운영하는 건 아니고 소속사에서 대신 업로드 하는 식으로 관리해주고 있었다. 보통은 매니저가
내 촬영 현장 스틸 컷을 올려주었다.

오늘도 내 매니저가 SNS 를 관리하기 위해서 들어갔다가 발견한 모양이었다.

매니저가 ‘직접 봐봐’하면서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매니저의 말대로, 확실히 배정원의 최신 업로드 사진에 내가 많이 보였다.

배정원은 약간 단순한 성격으로, 평소에도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라는 태도였다. 약지 않은 성격이라고
할까.

그는 평소에도 나를 잘 따르는 편이었는데, 업로드 된 사진 속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도 그러한 감정이 잘


나타났다.

······역시 사람이 좀 순박하다니까.

나는 픽 웃었고, 매니저는 이어서 내 계정도 보여주었다.

“왜 정원 씨네 그룹이 요즘 해외에서 잘 나가잖아. 덕분에 네 계정 팔로워도 꽤 늘었어.”

원래 팔로워가 얼마인지 몰랐으니 매니저의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댓글창에 영어가 많이


보였다.

아마 배정원의 글로벌 팬들이 호기심을 갖고 넘어온 모양이었다.


이런 목적으로 배정원과 친해진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매니저는 좋은 일이라면서 나와 그 친구의 우정을
응원했다.

그런 얘기를 마쳤을 즈음, 스태프가 대기실에 들어왔다.

“지금 스탠바이 하실게요.”

“네. 가겠습니다.”

나는 잠시 자리를 뜨고 화보 촬영을 다녀왔다.

이번 화보는 상반신 탈의가 컨셉이었는데, 윤성광이 특별히 밀어붙인 스케줄이었다.

<봉사와 앉은뱅이> 촬영 덕에 상반신을 벌크업했는데, 한창 몸 만들어놨을 때 얼른 찍어야지 언제 또


찍겠느냐면서 말이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참 촬영을 한 뒤, 중간 쉬는 시간에 나는 대기실로 다시 돌아왔다.

매니저는 잠시 나갔는지 대기실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몇 분 뒤였다.

매니저가 대기실로 돌아오더니 나를 보고 말했다.

“고운아, 방금 제이크 킴 감독님한테서 전화가 왔거든. 너한테 상의할 게 있다고 하시는데?”

상의?

방금 하고 온 상의 탈의의 상의는 당연히 아닐 테고.


무슨 일이지?

나는 지금도 충분해
97.

“어, 고운 씨 왔어요?”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한쪽에 앉아 있던 제이크 킴이 나를 반겼다.

자리에는 제이크 킴 외에도 음악감독과 프로듀서 등 주요 제작진 몇 명이 더 앉아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상의하실 게 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 생겼나요?”

일단 장소만 보면 캐주얼한 자리처럼 보였지만, 혹시라도 무슨 심각한 일이 있어서 이렇게 모여 있던 것인지


걱정됐다.

제이크 킴이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이크 킴이 어떻게 운을 떼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로 잠시 멋쩍게 눈을 굴리다가, 곧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고운 씨, 혹시 직접 노래하면서 연기도 할 수 있어요?”


그가 설명했다.

“원래 우리가 녹음을 먼저 땄잖아요. 그런데 우리끼리 얘기하다가 방식을 좀 바꿀까 싶어서 말이에요.”

“어떤 식으로요?”

“다른 뮤지컬 영화 중에는 촬영 현장에서 직접 노래를 부르고 그걸 그대로 삽입하는 방식을 쓰기도 하거든요.
그게 더 감정선을 더 살릴 수도 있고, 좋을 것 같아서 말이죠.”

아하. 나는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우리 영화는 원래 수록곡을 먼저 녹음한 뒤, 그 다음에 그 노래에 맞춰서 연기를 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말하자면, 촬영 당일에는 그냥 립싱크만 하는 거랄까.

그런데 그 방식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다.

영화를 찍기 전에 먼저 노래를 불러야 하다 보니, 노래의 감정선이 제대로 안 살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 찍기 전에 리딩도 하고, 리허설도 하니까 대략 어떤 느낌으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는 대충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상상을 열심히 하더라도, 직접 촬영을 할 때의 느낌을 따라잡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촬영을 하면서 배역의 감정에 내가 점점 녹아드는 것도 있고, 영화 속 장면이 실제로 구현된 촬영장이란 장소
자체가 주는 울림이 또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촬영 전에 부르는 것보다는 촬영장에서 직접 연기하면서 부를 때 노래에 더 감정선이 살게 된다.

실제 영화를 볼 때, 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방식의 문제점은 아무래도 음질일 것이다.

뮤지컬 영화이니만큼 나중에 사람들이 OST 를 찾아 듣는 경우가 많을 텐데, 그 OST 가 라이브 음원이라면
아무래도 녹음실에서 녹음한 음원보다는 질이 떨어지게 들릴 테니까.

각 방식에 장단점이 있으니 뭐가 더 낫다고 표현할 수는 없다. 우리 영화는 그저 먼저 녹음하는 방식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제이크 킴은 지금 그 방식을 바꾸자고 묻고 있었다.

나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가 갑자기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부담스러우면 솔직하게 얘기해줘도 괜찮아요.”

“네? 아뇨, 전 괜찮아요.”

감독님이 왜 그러는지 몰라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가 나는 금방 깨달았다.

아, 아무래도 내가 가수가 아니니까 좀 부담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여긴 건가?

세심한 편이시구나. 나는 픽 웃곤 정말로 괜찮다고 연신 말했다.

제이크 킴도 마음이 편해졌는지 시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결정.”

*
그렇게 해서 노래 삽입 방식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촬영 전도 아니고, 이미 크랭크 인에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어찌어찌 쉽게 수정 결정이 났다.

하지만, 알고 보니 제이크 킴에게도 다 생각이 있었다.

예전에 녹음했던 원곡은 버리는 대신, OST 앨범을 릴리즈할 때 따로 특별 앨범을 하나 더 내는 방식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게다가 노래가 삽입되는 장면들은 후반부에 몰아서 찍기로 스케줄이 짜여 있기도 했고 말이다.

아무튼, 어쨌거나 저쨌거나.

시간은 빨리 흘렀고, 어느덧 클라이맥스 장면을 찍는 날이 오늘로 성큼 다가왔다.

“고운 씨 준비 됐어요?”

“네.”

리허설을 마친 후 나는 카메라 앞에 섰다.

“준비 됐나요?”

제이크 킴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엔 내게 물은 게 아니었다.

그는 촬영장에 있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향해 물은 것이었다.

오늘은 노래를 직접 하면서 연기를 할 예정이기 때문에, 반주자들 역시 촬영장에 대기하고 있었다.
수많은 관현악 연주자들이 카메라 옆쪽에 앉아있었고, 그랜드 피아노도 촬영장 한쪽에 준비 되어 있었다.

연주자들이 악기를 몇 번 켜보면서 음을 조율했고, 자리를 정돈했다.

“네, 준비 되었습니다.”

모두 준비된 것을 확인한 후, 제이크 킴이 시작하자는 싸인을 보냈다.

촬영장이 조용해졌고, 카메라가 돌아갔다.

나는 이번 장면에 내가 연기해야 하는 철수의 감정선을 가만히 떠올렸다.

우리가 찍는 이번 영화는 전형적인 영웅모험담 플롯을 갖고 있다.

영수와 철수, 즉 봉사와 앉은뱅이는 영화 초반에 만난 후 함께 모험을 떠난다.

그들은 소원을 이뤄준다는 마법의 구슬이 있다는 정보를 얻는다.

그들은 그 구슬을 얻기 위해서 잠자고 있는 괴물의 둥지로 들어간다.

그러나 구슬을 빼앗는 과정에서 괴물을 깨우게 된다. 그들은 성난 괴물에게 쫓기게 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봉사인 영수는 ‘괴물을 없애달라는 소원을 빌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지만, 앉은뱅이인 철수는 자신에게
쥐어진 이 소원의 기회를 그렇게 허무하게 날려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모험을 떠나기 전부터 마법 구슬을 얻으면 다리를 고쳐달라는 소원을 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의
오랜 염원이자 꿈이었다.
망설이던 철수는 결국 욕망에 지고 만다.

철수는 영수의 만류를 뿌리치고 구슬에 다리를 고쳐달라는 소원을 빌게 된다.

―다리만 멀쩡해지면, 저 괴물쯤은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어!

그렇게 홀로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구슬은 철수의 소원을 이뤄준다.

철수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두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는 걸 느낀다. 철수는 처음으로 두 발을 땅에 딛고


일어서게 된다.

그러나 감격과 기쁨은 잠시였다.

철수는 기세 좋게 괴물에게 맞서려 했지만, 괴물은 철수 혼자서 없앨 수가 없었다.

게다가 처음 얻은 다리는 계속 어색했다. 한 번은 발이 꼬여서 넘어지는 바람에 바보 같은 실수까지 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영수까지 위험에 처하게 된다. 철수는 그 짧은 순간 고민에 휩싸인다.

두 다리를 얻었으니 그대로 도망쳐서 괴물과 영수를 잊어버리면 자신은 멀쩡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간 평생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고민은 짧았다. 철수는 결국 영수를 구하기 위해서 괴물에게 달려든다.

대가는 처참했다.

괴물은 커다란 앞발을 영수를 향해 내리찧었고, 그 앞발은 영수를 붙잡고 몸을 구른 철수의 다리에 내리꽂혔다.
―악!

철수의 다리는 끔찍한 모양새로 부러졌다.

일단 철수와 영수는 도망쳐 겨우겨우 몸을 피했다. 그곳에서 주변인의 도움으로 철수는 다리를 치료받는다.

하지만 그는 두 번 다시 걸을 수는 없을 거라는 절망적인 대답을 듣게 된다.

소원은 결국 헛되이 쓰인 꼴이었다.

괴물을 없애달라는 소원을 빌었다면 다리는 고치지 못했더라도 적어도 괴물은 없앨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철수는 다른 소원을 빌었고, 결국 괴물도 물리치지 못했으며 겨우 얻은 멀쩡한 두 다리도 다시 망가지고
말았다.

철수는 제 손으로 모든 것을 망쳐버린 셈이 되었고, 그래서 절망했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영웅모험담 플롯에서는 항상 ‘위기의 순간이 바로 곧 기회’이지 않은가.

진정으로 바닥까지 내려가 봐야 그 바닥을 발판삼아 밀고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에 찍는 장면은 바로 이 장면이었다.

이 장면에서 철수는 처음엔 절망하지만, 영수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다시 한 번 희망과 용기를 노래한다.

“레디, 액션!”
감독의 큐싸인이 들렸고, 나는 앉은뱅이 역인 ‘철수’로 분해 연기를 시작했다.

적막한 가운데 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다시 한 번 소원을 빌 수 있다면 시간을 돌려달라고 하고 싶어.”

자기혐오감, 죄책감, 후회와 절망으로 나는 창틀에 엎어져서 흑흑 울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영수(배정원)’가 들어왔다. 그가 지팡이로 짚어가며 안으로 들어오더니 내 옆자리에
슬쩍 앉았다.

그가 꺼낸 말은 뜻밖에도 감사였다.

“그때, 구해줘서 고마웠어. 그리고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돼서 미안해···.”

“뭐?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나 때문이야.”

나는 내밀한 고백을 쏟아놓았다.

예전부터 나는 쓸모가 없었다고, 집안에서도 늘 천덕꾸러기 신세였다고, 그래서 언제나 한 사람 몫을 해내고


싶었다고.

하지만 결국 나는 모든 걸 망쳐버렸다고, 사람들 말대로 나는 못난 사람이 맞다고.

그런데 영수는 화드득 놀라며 부정했다.

“무슨 말이야. 넌 못나지 않아.”

그리고 그 역시 고백한다.
“실은 너한테 말 못한 게 있어. 나는 네가 다리를 고쳐달라는 소원을 빌지 않았으면 싶었어. 괴물 때문이
아니라······ 네가 멀쩡한 다리를 갖게 되면 더 이상 나랑 친구해주지 않을 것 같았거든.”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너도 네 소원을 빌고 싶어서 날 말리려는 줄 알았어. 너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아?”

“나는 이제 괜찮아.”

영수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그는 내 덕에 이젠 더 이상 눈이 안 보이는 게 불편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눈을 뜬 것만큼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편한 덕분에 친구가 생겨서 오히려 이제는 그 불편이 좋아졌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너는 네가 천덕꾸러기라고 했지만, 난 항상 네가 멋졌어. 나랑 달리 너는 강인하잖아. 똑똑하고,


끈기도 있고, 호기심도 많고, 겁도 별로 없고. 게다가 너는 날 살리려 달려와 줬잖아. 나한텐 네가 영웅이야.”

“하지만······ 하지만, 이제는 소원을 빌 구슬도 없잖아. 나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괴물을 물리칠 수도 없다고.
내가 모든 걸 망쳤잖아.”

“그건 아직 모르는 거잖아. 너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 팔 힘이 강한 걸? 다리를 움직이지는 못해도 너는 활도 잘


쏘고, 창도 잘 던지잖아.”

그 말에 철수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그 동안은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어야만 괴물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는 영웅들은


언제나 두 다리로 땅을 단단하게 딛고 선 웅장한 모습이었으니까.

그래서 여행 내내 철수는 자신이 갖지 못했던 것을 가지고 싶었고, 자신을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결핍을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영수는 철수에게 ‘너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맞았다.

생각해보면, 두 다리를 얻었을 때 정말로 편했던가? 처음 가져본 다리가 어색하고 불편하진 않았던가?

철수는 깨달았다. 지금의 상태가 자신의 원래 모습인 그대로 온전하다고 느끼고 있음을 말이다.

나는 천천히 입을 떼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연주자들이 악기를 켰고, 웅장한 음이 깔렸다.

그건 2 차 예선 오디션 때도 불렀던 노래와 같은 곡조의 노래로, 앉은뱅이 철수가 자신을 소개하는 노래였다.

나는 영화의 첫 시작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소개를 읊었다. 팔 힘이 강하고, 호기심이 많고, 꿈이 많은


사람이라고.

다만 달라진 건, 더 이상 다리를 얻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지 않았다는 것뿐.

“나는 지금도 충분해―!”

나는 노래의 클라이맥스 때 고음을 내질렀고, 음악도 마찬가지로 폭발했다.

충만한 벅참이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영화의 교훈이었다. 자신을 긍정하는 것.


음악이 사그라들었고, 나는 빙긋 웃으며 영수를 향해 ‘자, 이제 괴물을 무찌르러 가자!’고 말했다.

원테이크 장면이 드디어 끝났다.

제이크 킴이 길었던 호쾌히 외쳤다.

“오케이, 컷!”

Two Freak
98.

길게만 느껴지던 촬영도 어느덧 마무리되고, 어느덧 영화는 후반작업에 들어갔다.

그 사이 영화의 개봉 날짜가 정해졌고, 예고편이 공개되었다.

신작이 결정되었다는 뉴스가 뜰 때도 대중이 관심을 가지지만, 보통은 영화에 관심 있는 씨네필 정도가 뜨겁게
반응하는 정도다.

하지만 제작사가 예고편처럼 실제적으로 실체가 있는 것을 내놓았을 때는 말이 다르다.

그때는 ‘진짜로’ 영화가 곧 개봉된다는 뜻이지 않은가(워낙 영화는 제작 확정이 되었다가 엎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다).

당연히 씨네필뿐 아니라 대중들 역시 뜨겁게 반응하게 된다.

<봉사와 앉은뱅이>은 개봉 전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당연히 한국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할리우드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한국 작품!
흔히 ‘국뽕’이라 말하는 것이 안 생기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대주의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도 그런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시장규모나 문화자본이나 그런 것은 결국 한국보다 미국이 더 크니까. 언제나 문화를 수입만 하던 입장에서


이제는 문화를 수출할 수 있는 입장까지 올라왔단 뜻이니, 좀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져도 그다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 이유는, 배급사에서 엄청나게 홍보를 했기 때문이었다.

TV 광고는 물론이요, 도심가에 있는 커다란 전광판에도 거의 24 시간 내내 우리 영화를 홍보하는 광고가 걸려


있었다.

“와, 거대 자본의 힘인가.”

우리들은 역시 자본이 좋긴 좋다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나에겐 좀 감회가 새로웠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화상 자국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밖으로 나가지


못했는데, 지금은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 한가운데에 대문짝하게 내 얼굴이 걸려 있으니 말이다.

그런 걸 보는 경험도 참 색달랐다. 물론, 좋은 쪽의 의미였다.

세 번째 이유는, 우리 드라마가 뮤지컬 영화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원작이 애니메이션인 뮤지컬 영화.

흥의 민족이라서 그런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래를 정말 좋아한다. 물론 뮤지컬 영화도 매우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외국의 경향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은 애니메이션 영화를 어린아이들만 보는 영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편에 가까웠다.
그보다는 연인, 가족, 친구끼리 다 같이 보기에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경우에 더 가까웠다. 휴일에 가볍게
놀러 나와서 보기에 적합한 영화라고 해야 할까. 취향도 그리 타지 않고 고루고루 모두가 즐겁게 볼 수 있는 그런
영화.

길게 말하자면 끊임없이 길게 말할 수 있지만, 짧게 말하자면 우리 영화 <봉사와 앉은뱅이>는 많은 관심 속에


개봉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 걸맞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개봉 첫날에 박스 오피스 1 위를 차지했고, 연일 매진이라는 기록적인 일이 일어났다.

한쪽에선 전략이 좋았다는 평도 있었다.

우리 영화는 가족이 다 같이 볼 수 있는 코미디 드라마를 표방하는 만큼 추석 연휴를 노리고 개봉되었는데,


당연히 그만큼 관객수를 많이 모을 수 있었다.

물론, 영화 자체가 그럴 힘이 없었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나온 영화라서 빈말을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우리 영화는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내 눈이 대중들의 트렌드와 다르지 않았는지, 사람들도 영화를 보고 나와선 재미있었다는 호평을 많이 남겼다.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의 반응도 좋았다.

우리 영화는 전 세계 동시 개봉했는데, 영어 제목은 <Two Freak>이었다.

‘Freak’은 기형, 장애를 뜻한다.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사용되었던 단어이지만, 최근에는 장애인들이
자신들을 긍정하는 단어로 사용되는 추세였다.

동성애자를 멸시하는 뜻을 가졌던 퀴어(Queer: 이상한, 괴상한)가 마찬가지로 이제는 그저 동성애자를 뜻하는
단어가 된 것처럼 말이다.

사실, 처음엔 미국 쪽엔 큰 기대가 없었다.

아니,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라 감독인 제이크 킴이 본인 입으로 밝힌 것이었다.

“아무래도 워낙 마이너 하잖아요. 한국인들만 나오는데다가, 대놓고는 아니어도 어쨌거나 장애가 주제이니까요.
미국 본토가 사랑할 만한 대중적인 영화는 아니죠.”

나는 그의 말이 엄살이라고 생각했다.

제이크 킴은 워낙 할리우드에서도 유명한 감독이지 않은가.

그는 미국 히어로 영화 시리즈에 꾸준히 참여해서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적도 있고, SNS 도 활발하게 해서


미국 내에서는 인플루언서이기도 했다.

실제로 영화 성적도 좋았고 말이다.

나는 반박했다.

“흥행 성적은 좋잖아요.”

“아, 물론 그건 나쁘지 않죠. 내 말은, 상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였어요.”

아, 나는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하기야, 흥행과 수상이 언제나 같이 가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까.

지금이야 시즈니의 후광을 입어 미국 내에서도 반응이 꽤 좋은 편이었지만, 그게 꼭 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말은 아니었다.
특히 미국처럼 소수 인종 국가의 문화에 대해서 배타적인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다.

그러나 모든 일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다고 하지 않던가.

그 일 역시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오스카(아카데미)는 로컬이니까요.”

제이크 킴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내뱉은 문장이었다.

이번 영화로 수상을 기대하느냐는 인터뷰어의 짓궂은 질문에, 제이크 킴은 ‘만약 받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특별히 기대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라는 답변을 했었다.

인터뷰어가 이어서 왜 그러느냐는 질문을 했고, 거기에 대해 제이크 킴이 바로 문제의 그 문장을 말했었다.

“오스카(아카데미)는 로컬이니까요.”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의 이번 영화가 한국이란 지역적 성격이 짙고, 그래서 아무래도 미국의 영화제에는 못
끼지 않을까― 하는 말이었다.

그가 일전에 내게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이었지만, 조금 순화된 표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게는 순화된 표현으로 들렸던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꽤나 시원한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제이크 킴의 그 말은 SNS 에서 퍼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았다.


전 세계 사람들이 제이크 킴의 말에 공감하면서 미국 영화제의 보수적인 성격에 대해 한 마디씩 말을 뱉었다.

제이크 킴은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직접 해명했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는 그런 효과를 낸 셈이었다.

졸지에 인종차별적인 영화제란 오명을 쓰게 될 위기에 처해서일까.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리 영화가 골든 글로브에 노미네이트 된 것이었다.

그것도 무려 작품상, 감독상, 외국어영화상 세 부문에서 말이다!

외국어영화상은 그러려니 할 수 있었지만, 한국 영화가 작품상과 감독상에까지 노미네이트 된 건 처음 있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오스카(아카데미) 직전에 열리기 때문에 ‘미리 보는 아카데미’ 또는 ‘아카데미 전초


전’이라는 별명이 있다.

즉, 골든 글로브에서 수상할 경우, 오스카에서도 상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한국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다.

[미친;; 실화냐? 연말에 국뽕 제대로 맞네;;]

[이대로 가면 진짜 오스카에서 상 탈 수도 있을 듯 ㅎㄷㄷ]

[난 오히려 안 받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음. 무려 시즈니 작품이잖아. 흥행도 초대박 쳤는데 솔직히 못 받는 게


더 이상.]

[로컬 발언에 제대로 버튼 눌렸나 본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보여주기 식인가? 노미네이트에서 끝나지 않고 상까지 받으면 좋겠는데 ㅠㅠ]

그 외에도 여러 반응 있었다.
[헐 칸은 못 갔나? 아쉽다 ㅠㅠ]

[↳ 칸은 미개봉작만 출품 가능하니까 ㅜ 어쩔 수 없지...]

[↳ 아마 감독도 예상 못했을 듯...]

칸에 대한 언급도 있었고.

[솔직히 감독의 로컬 발언이 제일 컸겠지만, 이건 케이팝 영향도 있는 듯. 배정원이 있는 그룹 VVV 가 올해


빌보드 차트 1 위 했잖슴.]

[↳ 케이팝이 무슨 만능도 아니고;; 좀 억지인 듯]

[↳ ↳ 아님. 나 캘리포니아에서 현재 학교 다니고 있는 유학생인데, 진짜로 케이팝 열풍 피부로 느낌. 체감 상


예전 한국 드라마 막 수출되고 한류 열풍 불었던 때보다 더 강한 듯. 학교에서도 심심찮게 VVV 노래 들리고,
콘서트 장에 사람도 ㅈㄴ 많음. 한국어 배우는 사람도 정말 많음;; 찐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 아마
그러니까 이런 것도 가능한 것 같음.]

어떻게 한국 영화가 이런 위상을 갖게 됐는지에 대한 얘기들도 있었다.

우리가 상을 받을 것인지, 영화가 노미네이트 된 이유가 무엇인지, 뭐 그런 심도 깊은 이야기가 설왕설래하는


하는 가운데 우리 영화 팀은 미국행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골든 글로브 시상식이 열리는 1 월.

우리는 정말로 시상식에 와 있었다.

“와······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내 오른쪽에 있던 김건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내 왼쪽에 있던 이성한이 마찬가지로 얼빠진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그도 그럴 것이, 톰 행크스나 케이트 윈슬렛 같은 유명한 해외 연예인들이 실제로 눈앞에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둘의 고개는 얼굴이 익숙한 해외 연예인들이 지나갈 때마다 저절로 돌아갔다. 무슨 미어캣처럼 말이다.

나는 그런 둘의 모습에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신 차리세요, 둘 다.”

김건이 억울한 듯 ‘넌 안 신기하냐?’라면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물론 나라고 안 신기할 리가 있나.

나 역시 여기 있다는 것이 안 믿기고 감격스러웠다. 내가 아무리 연기 인생이 길다지만 이런 자리에 초대되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포커페이스하면서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중인 거였다.

게다가 같이 온 영화팀의 다른 사람들도 침착한 편이라 나도 덩달아 그런 척 하려고 했고 말이다.

제이크 킴은 여기가 본토다보니 꽤 침착했고, 나와 투톱 주인공을 맡은 배정원은 빌보드 차트 1 위를 하기도 했던


인기 보이 그룹 출신이라 그런지 이런 곳에는 비교적 익숙한 듯 보였다.

기태성이나 심미애는 워낙 연기 인생이 길었던 대배우이지 않은가. 그들은 우아하게 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수상에 대한 기대감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이지만, 우리 영화팀은 일단 큰 기대 없이 초대된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생각하고 자리를 즐기기로 했다.

김건과 이성한 역시 나중에는 조금 침착해져서 차분히 돌아다니곤 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건 잘한 선택이었다.

우리 영화팀은 세 개 부문에서 노미네이트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외국어영화상’ 한 부문에서만 상을 받았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기쁜 소식이었지만, 작품상이나 감독상까지 노려봤기에 조금 아쉽기도 했다.

왜냐면 여태 작품상이나 감독상 같은 본상에 비영어권 작품이 올라간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컬 발언도 있고.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상을 줄 줄 알았는데.

역시 로컬은 로컬인가 보다. 여전히 외국어영화상에 머물러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이번 골든 글로브에서 본상에 오르면 오스카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무리일 것


같았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거라도 어딘가’하는 기쁨과 축하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제이크 킴이 말했다.

“그래도 오스카 노미네이트 결과가 곧 나오는데, 그거는 보고 가자.”

골든 글로브 시상식과 오스카 후보작 발표날 모두 1 월에 있었기 때문에, 좀 더 머물러 있다가 발표를 듣고
돌아가자는 말이었다.
우리는 그러기로 했다.

그리고 발표날.

“(작품상 후보는, ······와, ······와, 그리고······.)”

우리 영화팀은 숨을 죽였다. 이어서 사회자가 말했다.

“(<Two Freak>)”

우리가 진짜 오스카에 가게 됐다.

오스카 시상식
99.

오스카 시상식은 한 달 뒤였다.

우리가 노미네이트된 것을 확인한 후, 우리 영화팀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니, 정확히는 미국이 고향인 감독과 스태프들은 거기에 남았다. 한 달 뒤 다시 모이자고 약속한 후,
배우들만이 잠시 고향에 들렀다 복귀하기로 한 것이었다. 일종의 짧은 휴식이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김건이 물었다.

“돌아가면 스케줄 많지?”

“평소랑 똑같지 뭘.”

“평소랑 똑같지는 않지. 지금은 오스카 초대 된 배우잖아.”

그가 실실 웃으며 날 놀렸다. 나는 눈썹을 긁으며 곤란하게 웃었다.


그의 말대로, 노미네이트 소식을 들은 후 핸드폰이 불타고 있었다. 오고가면서 얼굴만 본 사이부터 친한
사람들까지 축하 메시지가 쏟아졌다.

축하 메시지뿐이랴. 이 다음 차기작을 함께 하자는 제안들 역시 쏟아졌다.

함께 온 매니저가 실시간으로 알려줬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상 받고 나면 몸값이 올라갈 테니, 최대한 그 전에


먼저 차기작을 계약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돌아가면 인터뷰며 화보며 이런저런 공식 스케줄도 많을 테고, 그 외에도 축하하자는 명목으로 만나자는 술자리도
많을 것이다.

김건은 그런 것을 예상하며 날 놀리고 있는 것이었다. 인기 배우라고.

그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농담처럼 말했다.

“바빠도 나랑 술 먹을 시간은 남겨놔야 한다?”

“안 바쁘니까 걱정 마셔. 매니저한테 말해서 스케줄도 최소한으로 잡았고, 축하 술자리도 다 나중으로 미뤘어.”

내 말에 김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왜?”

“그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노미네이트된 것뿐이잖아. 너무 요란스럽고 싶지 않아.”


처음에 노미네이트되었단 소식을 들었을 땐 얼떨떨했고, 곧 기뻤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다 그러하듯, 수상 후보에 오르면 그 다음엔 상을 받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 기대감은 사람의 기분을 좋아지게도 하지만, 그 반대이기도 했다. 기대감이 큰 만큼, 나중에 그 기대가
배반당할 때 실망도 커지니까.

나는 기대 때문에 발생하는 불안과 걱정으로 괜한 감정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면 분명 떠들썩한 분위기일 텐데, 거기에 동화되다보면 더 기대가 커지지 않겠는가. 김칫국은 아직까지는
사양하고 싶었다.

“하여간 겸손한 자식.”

김건은 웃긴 놈이란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한 달 동안 차기작도 안 들어가고 술자리도 안 가고, 뭘 할 건데?”

김건은 내게 물었다. 어째 조금 실망한 투였다.

사실, 김건은 최근 캠핑과 낚시 같은 아웃도어 활동에 취미를 들였다. 그는 영화 끝나면 내게도 같이 가자고 몇
번 졸랐는데, 나는 와이프랑 같이 가라고 대꾸하며 은근히 돌려 거절하던 참이었다.

김건이 밖에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면, 나는 집에 콕 박혀서 하는 활동을 좋아했다. 원래 상 받을 예정이


없었다면 나는 밀린 영화나 드라마 같은 작품을 오랜만에 몰아볼 생각이었다.

우리 둘의 유일하게 비슷한 취미가 있다면, 술 마시기 정도라고 해야 할까. 술이야 밖에서도 마실 수 있고


집에서도 마실 수 있으니까.

나는 그런 그를 흘긋 보다가 곧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글쎄, 너만 안 바쁘면 너랑 놀려고 했는데. 캠핑 갈 곳 봐둔 데 있다며.”

김건이 내 말에 놀란 듯 하더니, 금방 환해졌다.

“그렇게 튕기더니, 짜식!”

그가 어지간히 신이 난 듯 사랑한다 뭐다 하면서 내게 치댔다. 낯간지럽게 굴긴. 나는 김건의 얼굴의 쭉


밀어냈다.

안 그래도 자기 와이프도 캠핑이나 낚시가 취향 아니라고 해서 혼자 다니고 있는데 얼마나 심심한지 모르겠다고―
김건이 그렇게 투덜투덜 종알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생각했다.

뭐, 오랜만에 새로운 취미도 즐기면서 자연 풍경도 구경하고 그러다보면 적당히 정신 팔리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좋겠지.

한 달은 적당한 속도로 흘렀다.

그리고 드디어 한 달이 흘러 오스카 시상식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왔어요?”

“안녕하세요, 감독님.”

숙소 로비에서 나는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오랜만에 본 제이크 킴은 표정이 유해졌고, 예전보다 살은 살짝 오른 듯 했다. 그동안 좋은 휴식을 취한


모양이다.

그건 나도 다르지 않은지 그가 웃으면서 물었다.

“고운 씨는 살이 좀 탄 것도 같네요. 그동안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왔어요?”

“아, 티 나나요? 친구랑 캠핑을 자주 했더니······.”

멋쩍게 하하 웃었다.

우리는 가벼운 스몰토크를 나눴다. 근황을 주고받은 후, 자연스럽게 이야기 주제는 곧 있을 오스카 시상식으로
흘렀다.

“어때요, 고운 씨 생각엔 우리가 상 받을 것 같아요?”

제이크 킴이 조금 짓궂게 물었다.

“감독님은요?”

“나야 물론 받고 싶죠. 확신은 못 하겠지만.”

“걱정 마세요. 분명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제이크 킴이 날 가만히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어째, 솔직한 버전의 대답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

눈치도 빨랐다. 내가 머쓱한 웃음을 흘리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편안하게 대답했다.


“그냥, 저는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좋아서요. 저야 좋은 경험 했다 싶어서요.”

후보로 올라간 건 작품상이기 때문에 만약 상을 받는다면 영화 자체에 주어지는 상이다. 내가 남우주연상 후보로
올라간 것도 아니니, 수상 욕심이 있는 건 나보단 감독인 그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가 정곡을 찔렀다.

“안 아쉬워요? 영화를 나 혼자 만든 건 아니잖아요. 영화가 좋은 결과가 있으면 어쨌거나 다른 데에서 고운 씨가


수상할 가능성도 더 많아질 텐데.”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상은 오스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한국에는 청룡도 있고 백상도 있다.

그러니 나라고 욕심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기대감을 누르려 한국 돌아가서도 요란스럽게 지내지
않았던 것이고.

하지만 한국에 가 있는 그동안 나는 새삼스레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건 내 주변이 참 많이 바뀌었단 것이다.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고 할 수 있었지만, 내 말은 백고운이 되기 직전의 일을 말하는 거였다.

얼굴에 화상을 입고 반강제로 은퇴해 연기도 못 하고 집에 처박혀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아주 분에 넘치게 살고 있지 않은가. 주변에 동료와 친구들도 많아졌고, 좋아하는 연기도
맘껏 할 수 있다. 그때에 비하면 너무도 감사한 삶이다.

나는 지금이 충분히 좋았다. 순간순간이 즐겁다.

상을 받으면 물론 좋겠지만, 상을 못 받았다고 해서 내가 거쳐 온 삶이 무용한 것이 되어버리는 건 아니다.


게다가 삶은 길고, 어려진 만큼 미래도 많이 남았다. 상이야 또 탈 수도 있고.

욕심은 부릴 것이지만, 조바심 내진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그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쉽긴 해도 속상하진 않을 것 같아요. 충분히 좋은 경험이었거든요.”

내 태도에 제이크 킴이 하하 웃었다.

“예전부터 느낀 건데, 가만 보면 고운 씨 가끔 인생 두 번 산 것 같은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는 농담을 던졌다.

그게 아주 농담이 아니어서 뜨끔했다는 건 나만 아는 비밀이었다.

오스카 시상식 당일이 되었다.

늘 그렇듯이, 시상식은 로스엔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이뤄졌다.

이전보다는 우리 팀 배우들도 여유롭게 자리를 즐겼다.

본격적인 시상식 전에 가볍게 담소를 나누는 파티 자리에서 나는 많은 외국 배우들과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리고 다시 우리 팀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데, 어째 동료들의 눈이 심상치 않았다.

‘왜요?’하고 눈으로 묻자 기태성이 히죽 웃었다.

“우리 고운이, 글로벌하게 인기 많네.”

무슨 소리를 하는지 금방 알아들었다.

방금 전, 한 외국 여배우가 팬이라면서 셀카를 먼저 요청해왔다. 나 역시 즐겨보던 영화에서 자주 보던 얼굴이라


팬이라고 화답하며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곤 셀카를 찍고 왔다.

아마 동료들이 그걸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워낙 장난기 많은 선배이긴 했지만, 시상식 자리니 평소보다 좀 점잖게 굴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건수를 잡자마자
날 놀리기부터 한다.

기태성이 스타트를 끊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씩 말을 얹었다.

“잘 어울리던데요, 뭘.”

이건 빙그레 웃는 심미애였고.

“오―, 형.”

이건 내 팔을 툭툭 치는 배정원이었으며.

“저 사람 그 사람 아니야? <맥시멈>에 나오고, 연기 엄청 잘하던.”

이건 나만큼이나 헤비 영화 리뷰어인 이성한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있는 김건이 말했다.

“도둑이네, 이거 완전.”

그는 예전부터 내가 젊은 친구들과 같이 있기만 하면 은근히 이런 식으로 놀렸다. 백고운이란 신체 나이로만


따지면 20 대지만, 어쨌거나 김철수의 입장으로는 40 대니까.

하여간, 뭔 말을 못한다.

“다들 그만해요. 그런 거 아니에요.”

김건이 굳이 안 저래도 어차피 젊은 친구들은 연애 상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내 신체 나이가 이십 년 가까이


어려졌다지만, 그것과 별개로 젊은 친구들은 여전히 어리게만 보인다.

물론 뻔뻔하게 스무 살 어린 친구랑 만날 수도 있겠지만······. 내 양심이 영······.

나는 손을 저으며 일축했다.

“게다가 당장 연애 생각도 없고요.”

기태성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아직은 일이 더 좋아요.”

그건 진심이었다. 김건이 남몰래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어련하겠어. 대학교 때부터 한결같이 워커 홀릭이라니까, 워커 홀릭.”

다른 사람은 듣지 못했지만, 나는 김건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김건의 옆구리를 조금 세게 쿡 찔렀다.

그런 시답잖은 얘기들을 나누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렀다.

본격적인 시상식이 시작되어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인생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고, 시상식은 아는 만큼 재미있는 법이다.

몇 시간 동안 조용히 가만히 앉아서, 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는 영화나 배우들이 상 받는 걸 구경하면 당연히


재미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근 한 달 동안 틈틈이 노미네이트 된 영화들을 미리 몰아본 참이다. 내가 알기론 이성한도 비슷한 것 같았다.

우리 둘은 시상식이 진행되는 동안 누가 받을 것 같느냐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본 상이라고 할 수 있는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그리고 작품상 차례가 다가왔다.

우리 영화는 감독상과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되어 있었다.

그 직전에 음악상도 받았지만, 감독상이나 작품상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아까까지 주절대고 있던 이성한과 나의 입이 모두 합 다물렸다. 남에 대해선 실컷 떠들 수는 있어도 막상 우리의


일에 대해서는 긴장 돼서 떠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솔직히 받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봉사와 앉은뱅이> 영화가 그동안 오죽 흥행했던가?

칸 영화제처럼 소수 심사위원이 수상을 선정하는 영화라면 모를까, 오스카는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 AMPAS)에 속해있는 수많은 회원들이 표를 던져서
선정하는 시상식이다. 때문에 오스카가 칸보다는 조금 더 대중적인 영화가 선정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봉투를 까기 전까지는 속단할 수는 없는 법. 우리 영화 팀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 사회자가 막 감독상의 수상자를 발표하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고, 곧 사회자가 시원하게 외쳤다.

“(······<Two Freak>의 제이크 킴!)”

와아―! 함성과 박수가 터졌다. 우리 팀은 일제히 흥분해서 벌떡 일어났다.

제이크 킴이 기쁜 듯 앞으로 나섰다. 그가 뭐라뭐라 수상 소감을 남겼는데, 솔직히 잘 들리지는 않았다.

왜냐면 우리 모두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보통 감독상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작품상도 같이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100 퍼센트는 아니기에 아주 속단할 수는 없었다.

이어서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 발표되었다. 미안한 말이었지만, 귀에 들리지는 않았다.


꽤 수상 소감이 길었는데도 체감 상으론 3 초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어느새 시간이 또 훌쩍 흘러, 대망의 작품상 발표만이 남았다.

아까와 다른 사회자가 앞으로 나왔고, 그가 봉투를 열었다.

양 옆에 있던 다른 배우들이 슬쩍 손을 잡는 게 느껴졌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꽉 잡았다.

아주 잠깐 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았고.

“(······<Two Freak>!)”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백상예술대상
100.

돌아오는 길은 그야말로 금의환향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공항에는 정말로 수많은 기자들이 있었다.

“와, 눈 멀 뻔 했네.”

공항을 빠져나와 차에 탈 때, 매니저가 그제야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몇 분 전, 입국심사대를 거치고 빠져나오자마자 플래시 사례가 터졌었다. 매니저는 뒤쪽의 일행과 함께


나왔음에도 그 플래시 사례를 조금 경험한 듯 했다.
매니저가 짐을 챙기며 물었다.

“고운이 너 눈은 괜찮아? 그러게, 내가 선글라스 끼라니까.”

그는 입국심사대에서 미리 선글라스를 끼는 게 좋겠다면서 하나 챙겨주려 했다. 그걸 거절한 건 나였다.

“아, 저는 괜찮아요.”

일부러 거절한 건 그래도 맨 얼굴을 노출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노미네이트 이후도 아니고, 상을 받은 다음에 돌아오는 길이다. 이번에는 대놓고 기뻐하는 티를 낼 수 있었다.
대중이 원하는 그림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그러니 최대한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게 좋았다. 선글라스는 그래서 일부러 끼지 않았다.

매니저에게 그런 얘기를 하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플래시 정도는 이제 괜찮아요.”

플래시 사례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웃어 보이는 것이 연예인의 프로 의식이 아니던가.

그가 이번엔 다른 의미로 혀를 내두르며 내게 말했다.

“고운이 너는 참··· 순수한 것 같다가도, 가끔 이렇게 보면 무슨 인생 2 회차 같을 때가 있어. 알아?”

나는 머쓱히 웃으며 그러냐고 대꾸했다.

실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길에 이성한이 오랜 비행시간으로 너무 피곤해 보이기에 ‘힘들어도 공항 빠져나가기


전까지만 웃어라’라고 말해주면서 나도 새삼 의식한 것이었다.
오지랖이 아니라, 괜히 표정이 안 좋으면 이성한의 의도와 상관없이 여러 말이 나올 수 있어서 그랬다. 안
그래도 이성한은 예민한 친구니, 그런 건 사전에 방지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싫든 좋든, 연예인이란 직업은 대중에게 계속 노출될 수밖에 없는 직업이고, 어느 정도는 노출되는 그 부분을
꾸며낼 수도 있어야 했다.

가식적으로 구는 건 내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20 년 가까이 연예인으로 생활하면서 체득한 직업 정신이랄까


그런 건 있었다.

어느 직업이든 그렇지만, 이 직업에도 장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단점들까지도 포함해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한다.

“그보다 형, 뭐 들어온 거 없어요?”

나는 말을 돌리며 매니저한테 물었다. 짐짓 눈을 초롱초롱 뜨면서.

실장님에게 지령 받았다면서, 매니저는 미국에 있는 동안 내게 차기작에 대한 얘기를 입 하나 뻥긋하지 않았다.

오스카 시상식이 있기 전, 한 달 동안 나는 섣불리 다음 차기작을 정하는 대신 김건과 취미 활동을 즐기면서


최소한의 스케줄만을 활동했었다. 그런데 그걸 두고 윤성광이 어떻게 오해했는지, ‘쉬고 싶은 사람 불러다가
억지로 일하게 시켰다’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래서 미국에 있을 때만큼은 절대로 일 얘기를 하지 말라고
시켰단다.

“이제 한국이잖아요. 혀엉.”

안 하던 애교까지 부리면서 매니저에게 치댔다. 백고운으로 살아온 지 벌써 몇 년 째다. 이제는 어린 친구


흉내도 제법 뻔뻔하게 낼 수 있었다.
“너 그러다가 일 중독 된다.”

매니저가 혀를 쯧 찼다. 하지만 이미 김건에게도 귀에 딱지가 나도록 자주 듣는 말이기에 별 타격은 없었다.

결국 내 끈질긴 회유와 부탁에 먼저 진 쪽은 매니저였다. 그가 못 이기는 척 이야기를 풀었다.

꿈같던 시상식 시즌이 끝난 후, 드디어 다시 돌아온 일상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달리 꿈같은 시상식 시즌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네?”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그러자 윤성광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아주 흥분한 투로 말이다.

“고운 씨가 백상 남자최우수에 노미네이트되었다고요!”

TV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들은 매년 연말에 공중파 3 사에서 자체적으로 열리는 연기대상을 통해 상을 수여받는다.

그렇다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어디서 시상 받는가?

흔히 한국에선 백상, 청룡, 대종상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러니 영화인이라면 백상을 받고 싶은 게 당연했다.

백상예술대상은 청룡영화상과 달리 TV 드라마와 영화 모두를 심사하지만 어쨌거나 청룡만큼 유명한 건 사실이다.

청룡과 대종상을 비롯해 TV 연기대상까지, 대부분의 시상식은 주로 연말에 열린다. 그러나 백상예술대상만은
특이하게 5-6 월에 열린다.

작년 추석 즈음에 개봉했으니 나 역시 연말에 청룡과 대종상에 참석했지만, 아쉽게도 노미네이트에서만 그칠 뿐


남우주연상은 받지 못했다.

사실,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같이 노미네이트 된 후보들이 모두 나(그러니까 백고운)보다 나이며 연차며 훨씬 많았던 것이다.

실제의 김철수야 연기 생활만 20 년이 훌쩍 넘었지만, 백고운으로서의 나는 아직 몇 년차에 불과한 배우다. 벌써


남우주연상은 아직 이른 감이 있었다.

대부분 남우주연상은 배우의 필모그래피에서 ‘아, 이제쯤 받을 때가 됐는데’ 싶을 때 주는 경우가 있다. 그


배우가 그 해 출연한 영화의 유명세와 상관없이 말이다.

20 대에 남우주연상을 받는 사례는 드문 편이란 뜻이었다. 보통 그 나잇대의 배우는 아무리 잘해도 신인연기상을


받지, 남우주연상을 받지는 않았다.

때문에 나 역시 근시일 내에 남우주연상을 노리지는 않았다.

나 역시 그걸 알고는 있는데······.

“이번엔 느낌이 왠지 다르다니까!”

김건이 침을 튀기며 열변했다. 그의 말은 이랬다.


“작년 시상식은 <봉사와 앉은뱅이>가 오스카에서 작품상 받기 전이었잖아. 그런데 지금은 얘기가 다르지! 솔직히
오스카에서 상 받고 돌아온 영화면 당연히 백상 작품상은 따 놓은 당상이고. 그런데 그 영화 원톱 주인공인 네가
남자최우수를 안 받으면 누가 받겠어?”

나는 정정해주었다.

“우리 영화 원톱 아니야. 투톱 주인공이야.”

김건은 사소한 오류 따위는 지나가자면서 손을 휘저었다.

“말이 그렇다 이거지. 그리고 배정원 씨는 신인이잖아. 원래 가수였다가 이번에 배우로 처음 데뷔하는 거기도
하고.”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김건의 추측도 나름 설득력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회의적이었다.

김철수였던 시절에도 남우주연상은 삼십대가 되어서야 받았었다. 그 직후에 화상 입느라 가장 정점에 이르렀을 때
은퇴한 셈이 되었지만.

나는 등받이에 느슨히 기대면서 ‘에이’하고 어깨에 힘을 뺐다.

“몰라. 아직은 생각하지 않을래. 뭐, 받으면 받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나로선 급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그냥 계속 연기하다보면 언젠가 받겠지 싶은 심정 정도였다.

일찍 받아봐야 무슨 이득일 게 있겠는가? 정점에 이르면 그 다음엔 내리막길 밖에 더 있겠는가?


트라우마 뭐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인생 곡선이 그렇잖은가. 옛날, 아버지 말씀이 ‘인생 망치기 제일 좋은 게
20 대에 성공하는 거다’였다. 조급해하지 말란 뜻에 가까웠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 나는 김건과 대화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심드렁하니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어느덧 흘러 백상 시상식 당일.

“누가 나한테 커피 먹였어?”

내 말에 옆에 있던 이성한이 날 이상한 눈으로 돌아봤다. 나는 매니저에게도 물었다.

“형, 혹시 아까 음료수에 카페인 들어 있었어요?”

“뭐? 그럴 리가.”

매니저가 이온 음료에 카페인이 들어가 있을 리 없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김건이 그런 날 보며 낄낄 웃었다.

“왜? 고운이 심장 뛰어?”

원래라면 감독인 제이크 킴이 참석해야 했지만, 그는 일정상 시간을 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김건이 참석해
있었다.

나는 김건을 향해 대꾸할 힘도 없었다. 아까부터 심장이 계속 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건이 날 놀렸다.

“와, 난 고운이 이런 모습 처음 본다.”

“······그러게 말입니다.”
인정해야 했다. 답지 않게 긴장이 좀 됐다.

김건만 이런 내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겠는가? 나 역시 이런 내 모습은 처음 보는 거다.

김건은 날 실컷 놀리더니 뒤늦게 좀 걱정됐는지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너 진짜 괜찮냐?”

나는 적당히 괜찮다는 투로 몸짓해보인 후, 역시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나 예전에는 태연했냐?”

“몰라, 그때 나 시상식에 참석 안 했잖아. 네가 더 잘 알겠지.”

기억을 되짚어 보니, 그것도 그렇다.

지금 생각해보니 김철수였던 때도 남우주연상 노미네이트 된 자리에서 그렇게 태연하지는 않았던 것도


같고······. 약간 기억이 미화되었나?

그때, 이성한이 옆에서 내 상황에 공감한단 듯 말했다.

“사실 오스카 때는 감독님이 상 받은 거지 우리 개인이 노미네이트 된 게 아니잖아. 나도 좀 떨린다.”

아무래도 이성한이 말한 이유가 맞는 듯 했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대화를 간간히 나누는 동안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다행히 중간부터는 오히려 반대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정신 뺏길 것이 많은 덕이었다.


중간에 공연하러 온 가수가 이루다였는데 오랜만에 보느라 반가웠다. 또, 남자조연상에 이성한이 호명되는 것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박수도 쳤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영화 남자최우수연기상 차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진정한 줄 알았던 심장이 다시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수상 발표를 위해 한 사람이 무대 안쪽에서 앞으로 나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안쪽에서 나온 건 최호랑이었다.

초대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설마 지금 나올 줄은 몰랐다. 그는 내게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내가 후보로 있는 수상 발표를 최호랑이 하게 된다니. 어딘지 재미있는 우연 같아 나도 모르게 절로 미소가 빙긋
지어졌다.

“올해는 정말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많았죠. 우선 후보로 오른 모든 배우 분들에게 모두 축하한다는 말씀


전합니다. 후보로 오른 분들 중 누가 수상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가 준비한 멘트를 친 후,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가며 봉투를 열었다.

“하지만 그래도 발표는 해야겠지요? 바로 발표하겠습니다. 제 XX 회 백상영화대상 영화 부문 남자최우수연기상


수상자는······.”

그가 말을 끌면서 봉투 속 안 내용을 확인했다.

최호랑의 입꼬리가 위로 휘어졌다.

그가 앞을 보았다.

그 찰나의 순간, 그럴 리 없을 텐데도,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최호랑이 시원하게 외쳤다.

“<봉사와 앉은뱅이>의 백고운 씨, 축하합니다!”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때의 기분을 뭐라 해야 할까.

1 초도 안 되는 순간을 슬로우모션으로 길게 늘려놓은 것 같았다.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말이다.

그 순간의 공기마저 피부로 생생히 감각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주변의 모든 풍경이 눈꺼풀 아래 망막에 오롯이
아로새겨졌다.

아무튼······ 비현실적인 기분이었다.

내 정신을 일깨운 건 주변 사람들이었다.

“고운 씨, 축하해요!”

그제야 나는 환하게 웃으며 우리 영화 팀 식구들과 포옹했다. 그들은 곧 얼른 나가보라며 웃음 띤 얼굴로 내 등을


떠밀었다.

단상에 올라가자 최호랑이 보였다. 그가 트로피를 건네며 씩 웃었다.

“어느새 이렇게 컸군 그래. 정말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단장님.”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단장님 소리였다. 그가 그리운 호칭을 오랜만에 들은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내 등을 친근하게 툭툭 친 후 수상 소감을 하라면서 물러났다.

나는 무대 위에서 장내를 가볍게 훑어봤다.

“안녕하세요, 백고운입니다.”

인사를 건네며, 나는 첫 운을 떼었다.

다시, 일상 (完)
101.

몇 시간 전, 매니저가 수상 소감을 준비하라고 하도 닦달을 했더랬다. 그래서 대충 초안 정도는 생각해두었는데,


막상 무대에 올라오니 뭣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입술을 혀로 살짝 쓸었다.

“제가 받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 기분이 묘하네요. 우선, 너무 감사드립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기쁨과 흥분, 그리고 약간의 긴장. 그런 것 때문이었다.

긴장해서 나쁘단 건 아니고······ 그냥 조금 멍한 기분?

나는 잠시 말을 고르느라 멈췄는데,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장내에서 누가 소리치는 게 들려왔다.

“고운아, 떨지 마!”

“어, 들켰나요?”
내가 얼른 말을 받아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사람들이 작게 하하 웃었다.

어쨌거나 덕분에 조금 실감이 났다.

예전에 나는, 정상에 올랐을 때 수상소감을 길게 하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나는 살짝 숨을 들이켠 후,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천천히 하기 시작했다.

“실은······ 예전에, 연기를 포기할 뻔했던 적이 있습니다.”

김철수일 적의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얼굴에 화상을 입어 연예계에 은퇴했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을 말끔히 버리지 못했었다.

미련처럼 남은 한 줌 재를 쥐고선, 털어버리지 못하고 다시 불 피우지도 못하고― 말 그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더랬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7 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남들은 다 앞으로 나서는데 나 혼자만이 홀로 고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슬픈 건 아니었다.

그 순간에도 내게 가장 슬펐던 건 연기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다지 오래 전 일은 아닌데도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연기를 그만둬야 하나 싶었을 때, 기적적으로 다시 한 번 시작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우연히 나는 자살하려는 한 청년을 살렸고, 그 청년의 몸으로 들어왔다.


그게 바로 백고운이었다. 나는 그가 되면서 새 삶을 얻었다. 모든 것이 뒤바뀌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의 이 순간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오로지 내 능력만으로 여기 오게 된 건 아니었다는 뜻이다.

“만약 그 기회가 없었다면 저는 여기 서있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이후, 저를 발견하고 지지해주신 많은
분들이 없었다면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정말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겸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과분한 상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란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오만과 자만은 사람을 무너뜨리기 제일 쉬운 감정이다.

그러나 그런 점에서 나는 남들보다는 유리했다.

나는 한 번 정상에 올랐다가 불의의 사고로 추락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얻게 된 지금이 남들보다 훨씬


더 소중했다. 한 번 모두 잃어봐야 이전에 자신이 가졌던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알게 되는 법이니까.

나는 또박또박 내뱉었다.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대합실에 앉아 선생님이 건네준 극본을 보며 처음으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던 그 어린 날의 꼬마처럼.

그 마음가짐으로 말이다.
소회를 풀고 나니 시원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커다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수상 뒤에도 식순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찍은 영화 <봉사와 앉은뱅이>는 영화 대상과 영화 작품상을 동시에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다.

이어진 뒤풀이 자리가 축제 분위기였다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다.

건배사를 하기 전, 우리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제이크 킴를 위해 영상통화를 걸었다. 그는 먼저 소식


들었다면서 상 받은 배우들에게 축하를 건넸다.

―나도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우리는 입 모아 외쳤다.

“그러니까요! 너무 아쉽습니다. 감독님은 지금도 일하는 중이세요?”

―아뇨, 나도 지인들과 함께 소소한 파티를 즐기기로 했어요. 지금은 가족들이랑 아침 먹는 중이에요.

“아, 시차가······.”

우리는 머쓱해져서 죄송하다고 급히 사과했다. 아침부터 전화 걸어 요란스럽게 굴었다는 자각이 그제야 든


탓이었다.
제이크 킴은 아니라고 하하 웃으면서 대신 건배사를 해주기로 했다.

―그럼 짧고 굵게 갈게요. 오늘은 마음껏 즐기자!

“즐기자!”

우리는 잔을 부딪치면서 즐겁게 외쳤다. 그리곤 제이크 킴에게 감사를 표한 뒤, 그의 어린 아들에게 손 흔들어
인사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건배를 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술 파티가 시작됐다.

처음엔 분명 우리 영화 팀끼리 술을 마시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원래 이런 자리가 그러하듯, 처음에는 몇몇 소수인원만 모여도 나중에는 점점 커지는 법이었다.

사실 연예인들끼리는 겹치는 지인들도 많고, 건너건너만 아는 사람들도 이런 자리를 통해 소개받으면서 친해지고


하는 거였다.

술 마시다가 한두 사람이 ‘참, 너도 걔 알지? 걔도 부를까?’하면서 각자 아는 지인들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지인들이 ‘그래, 갈게!’하면서 하나둘 늦게 합류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그냥 파티에 가까운 모양새가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참석했다.

“안녕하세요오―.”

“어, 루다 왔어?”

이루다가 스케줄이 끝났는지 편안한 차림으로 종종거리며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군데군데에서 ‘헉, 여자
아이돌이다!’하면서 숨을 삼키는 게 보였다.
“여기 앉아.”

이성한이 이루다에게 아는 척 하면서 자리를 마련했다. 이루다는 살갑게 웃으며 그 자리에 앉았다. 주변 사람들도
그러려니 하는 눈치로 넘어갔다.

사실, 이성한과 이루다 둘은 연애를 시작한 지 벌써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비밀연애라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연예인들의 사생활이야 대중들만 모를 뿐 대충 이 바닥 사람들끼리는 알고 있는 편이다.

나한테 까칠하게 굴던 놈이 어느 새 애인까지 만들고. 참 많이 컸다 싶다.

괜히 아련한 눈빛으로 이성한과 이루다를 보고 있자, 이성한이 시선을 느꼈는지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냥, 감격스러워서.”

“······묘하게 기분 나쁜데.”

이성한의 얼굴이 단박에 뚱해지면서 떨떠름해졌다. 나는 킥킥 웃었다.

뒤이어 온 건 표류였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그였다.

“고운 씨, 오랜만이에요.”

“감독님!”

“뭐야, 언제적 호칭이야.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부르라니까요.”

“하하, 그럴게요.”

나는 그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를 부른 건 음악감독인 이초희였다. 둘은 제작진 쪽에 앉아서 다른 영화 관계자들과 하하호호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제법 이야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이어서 최호랑도 그 제작진 테이블에 뒤늦게 합류했다. 영화 관계자들이 부른 모양이었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나 인사하려 했지만, 그가 그냥 앉아 있으란 듯 손으로 나를 말리며 가볍게


눈짓으로만 인사했다.

극단에서는 언제나 무섭고 딱딱한 모습을 고수하는 그였지만, 이렇게 사석에서 보니 이미지가 많이 달랐다.

그는 푸근하고도 따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괜히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합류했다. 우리에게 술집이란 장소를 제공한 곽시우도 지나가는 길에 들렀고(그는 이제
레스토랑 뿐 아니라 여러 프랜차이즈에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다), 배정원에게 연락 받고 온 임시운도 있었다(
둘은 아이돌 출신이었다가 연기 데뷔한 것으로 꽤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었다).

한편 옆에서는 기태성과 심미애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 선배는 그래서, 아직 좋은 사람 없어요?”

“어이구, 내가 이팔청춘도 아니고 이 나이에 무슨.”

“나이가 뭐 어때서요. 저도 시집 다시 가는 마당에.”

기태성이 자긴 됐다고 손을 휘저었다. 독신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면서 말이다.

“그보다, 미애 너 딸 이름이 인혜였던가?”

“은혜요. 안 그래도 은혜가 삼촌 언제 오냐고 물어보던데. 한 번 놀러 와요.”

“오, 좋지. 고운이 너도 같이 갈래?”

기태성이 나를 향해 물었고, 심미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고운 씨도 오면 은혜가 너무 좋아하겠네.”

나는 흔쾌히 기태성과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다. 내 은인 같은 선배와, 내 옛 친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기분 좋기 마련이다.

“그런데, 용호도 온다고 하지 않았나? 아직 안 왔······, 아, 저기 오네!”

누군가 손을 술집 입구 쪽으로 손을 들면서 아는 척 해보였다.

오용호는 일전에 우리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영화 팀 배우들과 대부분 안면이
있었다. 사람들이 오용호를 제법 반겼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용호는 멀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이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 영화 팀 식구들이 저마다 자기 쪽에 앉으라고 그에게 손짓했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오더니 털썩


앉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대놓고 반말을 쓸 수 없던 나는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웬 일이야?”

워낙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당연히 이런 자리도 별로 안 좋아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빙긋 웃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선배가 있는데 와야죠.”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건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증스러운 스토커 자식······.”

오용호는 잠깐 주변에 듣는 귀가 없단 걸 확인한 후 태연하게 대꾸했다.

“감독님 계속 여기서 선배랑 술 마셨죠? 나이 차이도 있는데 너무 막역하게 지내시면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챌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게 하다하다 우리 사이를 질투하네. 야, 네 ‘선배’ 소리나 그만 둬. 누가 알아채기라도 하면 어떡할래?”

“남들 앞에서야 당연히 안 그러죠. 저는 감독님과 달리 철저하게 행동해요.”

“와, 저게! 야, 오늘 결판을 내자. 좀 이따 옥상으로 따라 나와.”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건물엔 옥상 없어요.”

“비유거든?!”

하여간 만나면 개랑 고양이처럼 싸우는 녀석들이다. 나는 ‘어휴’ 한숨 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둘을 말렸다.

“둘 다 그만해. 계속 그러면 나 다른 테이블 간다?”

둘이 얼른 그 말에 화제를 돌렸다.

오용호는 안 싸웠다는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면서 자기 몫의 술잔을 가져왔고, 김건은 오용호의 잔에 술을 따라준
뒤 술이나 마시자고 부산을 떨었다.

“자, 자. 마시자고!”

나는 속으로만 피식 웃었다. 이러나저러나, 둘 다 내가 김철수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고, 나를


아끼고 챙겨주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술잔을 들었다. 김건과 오용호도 마주 들었다.

“짠―!”

술잔 세 개가 허공에서 경쾌하게 부딪혔다.

그날 술자리는 그렇게 즐겁게 보냈다. 나와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 복작복작 모인 터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김철수로 죽었던 날도 딱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이 있던 때였다.

그날 나는 맥주를 사기 위해 편의점으로 나왔고, 김건이 그런 날 찾아왔다. 우리 둘은 편의점 앞에서 술을


마셨고, 나는 잠깐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백고운을 발견해서 차도로 뛰어들었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고―.

그렇게 옛날 일 같지 않았는데데, 지금 돌이켜 보니 새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따지면 5 년 약간 넘었을까? 그런데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180 도 다른 모습이지 않은가.

참, 인생사가 재밌었다.

아무튼 백상에서 내가 남자최우수연기상을 받은 그날 이후로 시간이 또 꽤 흘렀다. 안팎으로 축하 인사를 받느라


정신없던 것도 한때였다.

그 시간은 곧 지나고 어느덧 나는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소소한 일화도 있었다.


“<봉사와 앉은뱅이>가 받을 줄 알아서······.”

나는 핸드폰으로 기사를 보고 있었다.

사실 백상 시상식 당일, 다른 사람들이 상을 받을 때마다 저 말을 서두처럼 뱉어서 나중엔 모두 하하하


웃었더랬다.

그런데 그게 우리만 웃긴 게 아니었는지 어느새 기사까지 나있었다. 백상이 낳은 유행어라나 뭐라나. 아무튼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꿈 같이 재밌었던 그날의 기억을 잠시 떠올리고 있던 나는 멀리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고운아, 감독님이 부른다!”

매니저가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새로 들어간 차기작 촬영장에 있었다. 스탠바이가 길었는데, 이제


촬영이 시작될 모양이다.

“네, 갈게요!”

나는 소리쳐 답한 후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몸을 훌쩍 일으켰다.

그리고 가뿐히 발을 옮겨 그쪽으로 뛰었다.

내가 사랑하는 연기를 하기 위해서.

어느덧―

다시, 일상이었다.

YB
102.

“고운아, 기사 봤어?”

나는 집중한 채 대본을 보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매니저가 핸드폰을 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나를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네? 아뇨? 뭔 일 있어요?”

매니저가 괜히 저런 말로 서두를 꺼낼 때마다 심장이 철렁한다. 또 뭔 일 터졌나 싶어서 말이다.

평소 행실과 상관없이, 연예인이라면 대부분 ‘기사 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사소한
정황적 상황으로도 스캔들이 터지곤 하는 게 이 바닥이며, 왜곡된 기사와 한 순간의 오해로 이미지가 실추되는 건
매우 쉬우니까.

그러나 다행히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는지, 매니저가 얼른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 아니야. 내가 오해하게 말했네. 별 건 아니고.”

“아. 깜짝 놀랐어요, 형.”

그제야 한숨을 놓자, 매니저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고운이 너, 방금 표정 진짜 웃겼다.”

“제가요?”

“응. 꼭 여자 친구한테 ‘오빠 나 뭐 바뀐 거 없어?’라는 말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어.”


매니저가 장난스럽게 ‘헉’하는 표정을 과장하며 지어보였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저렇게 사색인 표정을 짓지는 않았는데······. 게다가 비유도 왜 하필
여자친구?

그때, 매니저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운이 너 뭐 나한테 숨기거나 그런 거 없지? 그래서 기사 떴다고 깜짝 놀란 건 아니지? 혹시라도 뭐 있으면


말해줘야 돼, 알았지? 나도 고운이 네 사생활 간섭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한창 중요한 작품 들어가잖아. 괜히
구설수 오르지 않는 게 좋지.”

그제야 나는 매니저가 날 잠깐 떠봤다는 걸 깨달았다. 왜 여자친구 운운하나 했네. 어쩐지, 여자친구란 단어를
내뱉으면서 내 표정을 잠깐 살피는 것 같더라니.

아마 내가 기삿거리에 오를 만한 일을 매니저 몰래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형. 저 진짜 그런 거 없어요. 저 못 믿으세요?”

이번엔 매니저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이, 당연히 믿지. 그냥 나는―. 고운이 네가 벌써 나랑 함께 한 지 8 년이나 됐는데, 한 번도 여자친구


사귄 걸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지. 이때쯤 한 번 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어서.”

“말했잖아요. 저 연애에 관심 별로 없다고요.”

“근데 그게 가능하냐? 가끔 보면 난 고운이 네가 수도승인가 싶다니까?”

매니저가 금방 사적인 호기심을 드러내기에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예요. 그래서 연애를 하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아, 물론 고운이 네 매니저 입장으로 말하자면, 안 하면 좋겠지. 근데 그냥 형으로서 궁금하다 이거지.”

나는 짐짓 투정부렸다.

“연애할 시간을 줘야 하죠. 형. 이번 주 스케줄 보니까 잠 잘 시간도 없던데. 네?”

나는 은근히 압박하듯 웃는 얼굴로 매니저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리고 바로 그 스케줄을 만드는 데에 일조한
매니저가 또 한 번 뜨끔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야, 야. 내가 옛날에 아이돌 로드매니저 할 때 보니까, 스케줄이 바빠도 연애 할 놈은 하더라니까······.”

그는 변명했지만, 찔린 바가 있는지 금방 애교스럽게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내 헤드락을 걸면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8 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제법 친해져서 이 정도 장난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킥킥 웃은 뒤, 나는 그제야 본론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래서, 무슨 기사가 떴다는 거예요?”

매니저가 아, 하면서 말했다.

“고운이 너 배정원 씨랑 친하지? 정원 씨 군대 간다던데. 알아? 입대 날짜 정해졌다고 방금 기사 떴더라고.”

아, 그거. 매니저 말대로 나는 그에게 미리 전해들은 바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네, 안 그래도 오늘 저녁에 정원이랑 다른 애들이랑 다 같이 술 먹기로 했어요.”

빡빡한 스케줄이 끝난 후, 매니저는 배정원 네 집 앞까지 차를 태워다 주었다.

미리 전해 받은 아파트 호수로 올라가 벨을 누르자 문이 금방 열렸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인사대신 물었다.

“다 왔어?”

그러자 안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어, 고운 형 왔나 보다!”

배정원의 취한 목소리가 들렸고.

“야, 야, 술 쏟는다, 쏟아!”

배정원이 뭔가를 했는지, 그를 말리는 임시운의 다급한 목소리도 들렸다.

곧 이성한이 현관 앞까지 나왔다.

“왔어?”

“응. 늦어서 미안.”

“나도 금방 왔어. 정원 씨는 이미 많이 마신 것 같긴 하지만.”

그런 대화를 나누며 이성한이 내 손에서 비닐봉투를 받아갔다. 이성한이 부탁하기에 오는 길에 내가 사온


안주들이었다. 이성한은 비닐봉투가 아직 따끈따끈한 걸 확인하고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코트를 벗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로 가자 배정원과 임시운이 먼저 보였고, 그들 앞에 펼쳐져 있는
술판도 보였다.

둘은 먼저 와서 마셨다고 하더니, 근처에 널려 있는 술이 제법 꽤 되었다.

“고운 형!”

배정원은 많이 취한 듯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져 있었다. 그가 나를 애교스럽게 부르더니 마치 금방이라도 날


껴안기라도 할 것처럼 양 팔을 활짝 벌렸다.

그리고 그 조심성 없게 휘둘러진 팔에 탁자 위에 있던 술병이 부딪혀 바닥으로 팍 굴렀다.

“야!”

임시운이 옆에서 기겁했다. 그가 술병을 얼른 주웠다. 다행히 다 먹은 병인지 바닥에 쏟아진 술은 없었다.

임시운은 어휴 한숨을 내쉬면서 탁자 위에 있는 것들 중 다 먹은 병은 아예 배정원의 손이 닿지 않을 쪽으로


완전히 치워놓았다. 아까부터 배정원을 케어하고 있었는지 임시운의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난리도 그런 난리통이 따로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멈춰 서 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취한


당사자인 배정원은 아랑곳 않았다. 그가 왜 안 안아 주냐는 듯 팔을 흔들거리며 칭얼거렸다.

“고운 형―!”

“으, 응······.”

좋아해주는 건 고마운데, 취한 사내놈의 주정은 좀 부담스럽다. 나는 떨떠름하게 배정원을 마주 껴안아주곤,


얼른 임시운을 향해 물었다.

“얘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군대 가는 거야 일찍이 정해진 사항이었다. 그때 배정원 본인도 우울해하긴 했지만 어차피 몇 년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거라 타격이 그렇게 크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냥 가벼운 술자리가 될 줄 알고 온 거였는데······.

그런데 그때 임시운이 덤덤하게 말했다.

“오늘 여친이랑 헤어졌대. 군대 때문에.”

“······아.”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배정원의 일반인 여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몇 번 들은 적 있었다.

나는 애도의 뜻으로 옆에 있는 소주를 하나 더 까서 조용히 배정원의 술잔에 따랐다.

한편 이성한은 옆에서 배정원이 술에 취하건 말건 신경도 안 쓴단 듯 부엌에서 내가 사왔던 안주를 그릇에


담아왔다. 그러면서 한 입 먹고는 만족한 미소를 씩 지었다. 그러고 보면 저 녀석도 참 마이웨이다.

“혀엉······.”

여자친구 얘기를 꺼낸 게 실수였는지 배정원은 이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어이고야. 주정도 이런 주정이 더 없군.

나는 내 술잔에도 술을 따른 뒤 배정원에게 재촉했다.

“자, 자, 마셔.”

잔을 부딪치고 쭉 들이켜는 시늉을 했다. 배정원이 ‘응? 으, 응’하면서 얼결에 나를 따라 술을 마셨다.


나는 거의 입술만 축이고 술잔에 있는 술을 몰래 슬쩍 버렸다. 친구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내일도 촬영이 있기
때문에 술을 막 마실 순 없었다. 관리 중인 연예인들에겐 식단 조절도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자, 자, 더 마시자고.”

나는 표정을 숨기고 빙긋 웃은 채 배정원에게 술을 계속 권했다. 이렇게 된 거 아예 술을 계속 먹여서 떡이 되게


만들 생각이었다.

배정원은 한참이나 내 페이스에 맞춰서 얼떨결에 계속 술을 들이켰다. 뭐 한 마디만 할라 치면 내가 ‘마셔,


마셔’하면서 술을 들이부었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임시운과 이성한은 그런 나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가끔 보면 쟤가 제일 무섭다니까.”

“잔 빼는 기술은 대체 어디서 배워온 거야? 고운이 쟤는 저렇게 보면 가끔 진짜 오십 대 아저씨 같아, 참.”

내 노련한 손짓에 감탄하던 둘은 각자 술과 안주를 홀짝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닌 척 했지만 내가 오기


전까지 배정원을 대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가 주정뱅이를 전담마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한 가지 간과한 실수가 있었다.

그건 배정원이 여기서 더 취하면 잠드는 게 아니라 주정이 더 심해진다는 거였다. 나는 그걸 몰랐고.

술이 머리꼭지까지 오른 배정원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드디어 자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내 착각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바보처럼 헤실헤실 풀어진 웃음을 흘리던 배정원은 갑자기 울먹거리더니 본격적으로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형은 군대도 안 가고··· 훌쩍, 연애도 관심 없고······ 나두, 나두 그렇고 싶은데······ 흑,
부러워······.”

그제야 나의 실수를 깨달은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옆에서 임시운과 이성한도 ‘······허’하는 헛숨을
흘렸다.

이성한이 좀 닥치란 의미로 얼른 안주를 배정원의 입에 쑤셔 넣었다.

“배고프지? 자, 얼른 먹자. 먹고 정신 차리자.”

이성한은 아까까지만 해도 그 안주를 자신이 독차지할 것처럼 굴더니, 이제는 내 눈치를 보면서 아낌없이
배정원의 입에 넣어줬다.

사실 이성한이 내 눈치를 보는 이유야 뻔했다. 내가 군대를 안 가는 이유는 내가, 그러니까 백고운이 고아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배정원의 투정은 무신경한 발언에 가까웠지만, 어차피 취한 상태에서 내뱉는 소리란 걸 알기 때문에
진지하게 마음 상하진 않았다.

배정원은 입에 끊임없이 들어오는 것을 반사적으로 우물우물 먹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울음이 그치게 됐다.

한참 뒤, 좀 진정했는지 배정원이 갑자기 또 생뚱맞은 소리를 내뱉었다.

“나 노래 부를래!”

“노래방 가자고? 이 야밤에?”

타박을 놓으면 또 어떤 주정을 부릴지 몰라 어지간하면 들어주고 싶긴 했다. 그러나 노래방은 좀 곤란하지
않을까···. 보는 눈도 있을 테고···.

그러나 그때, 임시운이 빙긋 웃었다.


“걱정 마. 노래방은 1 초 만에 갈 수 있으니까.”

무슨 소리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배정원의 집 안 쪽 어느 방문을 열자 방음시설이 완벽하게 설치된 작은 방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얘 가수였지.

배정원이 방 안쪽의 기계를 가리켰다.

“짜잔― 우리 집에는 노래방 기계가 있지요!”

집 안에 노래방 기계를 놓는 사람도 있다던데, 그게 배정원일 줄은 몰랐다. 나는 피식 웃었다. 하여간 웃긴


놈이다.

어쨌거나 덕분에 우리는 2 차를 여기서 즐기기로 했다.

우리는 신나게 놀았다. 배정원과 임시운이 찢어져서 팀을 나눠 노래 점수 내기까지 했다.

물론 승리는 나와 임시운의 팀에게 돌아갔다. 배정원이 취했다는 핸디캡도 있고, 내가 뮤지컬 영화에 출연했던
적이 있다는 어드밴티지도 있던 덕분이었다. 비록 임시운은 내 노래 취향이 너무 옛날이라면서 투덜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다음날 아침.

나는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나는 깔깔한 목을 가다듬으며 물을 찾았다. 술을 마셨기 때문은 아니고, 어젯밤 노래를 하도 부른 탓에 목이
살짝 쉰 것이었다.

꿀꺽꿀꺽.

생수를 마시면서 나는 가볍게 거실을 훑었다. 배정원의 집 곳곳에 널브러진 친구들이 보였다. 다들 어젯밤
새벽까지 노래 부르고 술 마시고 놀다가 지쳐서 각자 쓰러지듯 잠이 들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다가 조금 우습기도 하고 평화롭기도 한 마음에 비식 웃었다.

비록 내가 연애에 관심 없고, 남들 눈엔 일만 많이 하는 걸로 보인다 해도 뭐 어떤가.

이렇게 친구들이 있고, 가끔 이렇게 YB 끼리 모여서 노는 게 즐거우면 그만이지.

만족스러운 일상 중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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