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essional Documents
Culture Documents
1.
빵,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들렸다. 하정우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찼다. 그는 기쁜
얼굴로 일어나서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후.”
짧은 한숨을 쉬고 리모컨을 들어 TV 를 꺼버렸다. 입이 썼다. 친분이 있던 동료 배우의 성공에 기쁘기도 했지만,
동시에 질투심과 초라함 역시 선명하게 느껴졌으니까.
술이라도 마실까 싶어서 냉장고를 열었지만 반쯤 마신 생수밖에 없었다. 나는 외투와 마스크를 챙기고 집밖으로
나섰다.
딸랑.
“안녕히 가세요.”
맥주가 담긴 비닐봉지를 달랑거리며 편의점에서 나오고 있을 때였다.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부르르 울렸다.
―여. 김철수.
“왜 미리 연락 안 하고?”
“아직 밤은 좀 쌀쌀하네.”
“그래? 난 딱 괜찮은데.”
그런 잡다한 얘기를 나누는 동안 건이가 자연스럽게 내 비닐봉지를 자기 쪽으로 끌어가서는 맥주 하나를 꺼냈다.
그가 캔을 딴 후 자기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곤 ‘크’하면서 입가에 묻은 거품을 손으로 훔쳤다. 내가 퉁을
놓았다.
“···어디서 들었대.”
“알아. 대신 이 다음 술은 네가 사.”
“3 차도 네가 쏘는 거야, 임마.”
“어머니는······.”
“그래. 알지. 남들 다 말리는데 네가 부득불 들어가 불길 속에서 어머니 모시고 나온 것도 알고, 하반신을 못
쓰게 된 네 어머니 병수발 네가 다 든 것도 알지. 그것도 자그마치 6 년이나. 네 효심이 그렇게 깊은 줄 내가
그때 처음 알았지. 아후, 나라면 못한다. 간병인을 붙이면 붙였지.”
그때 마침 편의점 문이 열리고, 알바생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화상 자국을 숨기듯 턱까지 내린 마스크를 살짝 끌어당겼다.
집으로 돌아오던 나는 불타고 있는 집을 목격했고, 모두 말리는 걸 뿌리치고 집으로 뛰어 들어가 어머니를 모시고
나왔다. 아버지는 구할 수 없었지만 어머니 목숨만은 구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대가는 컸다.
큰돈을 들여 치료도 받았지만, 완벽하게 옛날의 얼굴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다른 직종이라면 모를까,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는 직업인 배우에게 화상 자국은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그 사고로 배우로서의 내 커리어, 미래도 잃어버렸다. 한때 충무로의 기린아, 블루칩, 유명한 모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불린 적도 있었지만, 다 옛날 일이었다.
“술 더 마실까? 내가 사올게.”
“두 말 하면 잔소리지. 얼른 사와라.”
뜨끈해진 볼에 차가운 맥주 캔을 갖다대 식히고 있는데, 열린 편의점 문 사이로 흐릿하게 박수 소리가 들렸다.
아마 알바생이 DMB 로 백상예술대상을 시청하고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오지랖 넓기는.”
“너마안 하겠냐?”
김건이 저주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웅얼거리며 플라스틱 의자에 철푸덕 앉았다. 그러더니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뻗어버렸다.
요의가 느껴져서 잠깐 화장실을 다녀왔다. 건물에서 나오며 파라솔 쪽을 쳐다보자, 알바생이 궁시렁거리며 건이
발치에 쌓인 맥주 캔을 치우는 게 보였다. 김건은 아직도 불콰한 얼굴로 색색 잠들어 있었다.
김건은 아까 말했다.
담배가 당겼다. 나는 편의점 쪽으로 가는 대신 잠깐 몸을 돌려 골목길 쪽으로 갔다. 주머니를 뒤지자 담뱃갑이
만져졌다. 다행히 마지막 남은 돛대가 있었다.
“응?”
멀지 않은 대로변 쪽에 한 청년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소년에 더 가까워 보이는
청년이었다.
‘뭐지?’
“이봐요!”
청년은 도로와 매우 가까이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였다. 저러다가 사고가 날 텐데.
나는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 젊은 친구!”
하지만 사람이 묘한 생물인 건, 남들이 그렇다고 여겨주면 정말 제 자신이 그런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건은 나더러 더 이상 착하지 말라고 꾸짖듯 말했지만, 그 말은 도리어 나를 움직이게 했다. 뭐, 누가
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내가 이렇게 미련하고 멍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
동시에 옆에서 커다란 경적음이 들렸다. 나는 눈을 홉뜨고 고개를 훽 돌렸다. 트럭 하나가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빠아앙―.
긴 경적음과.
“철수야!!”
골이 울리는 커다란 충격과 함께 몸이 으스러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시야가 붕 뜬다고 여겨졌을 때, 나는 가벼운
짐 덩이처럼 바닥에 처박혔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늘어졌다. 뒤통수에 뜨겁고 축축한 것이 흘렀다. 가물가물한 시야로 밤하늘과
초승달이 보였다.
삐―.
운명의 표현 오디션
3.
“참. 혹시 어디 갈 데 있니?”
“어디 갈 데 없으면······.”
“저 복지사 님.”
내가 그의 말을 끊고 물었다.
“어?”
“응, 그럼.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려고 했어. 일단 우리 단체에서 일시적인 자립지원금은 지급될 거야. 그
이후론 많지는 않지만 달마다 조금씩 지원이 들어올 거고.”
대답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너무 당연한 거였으니까. 백고운으로 눈을 뜬 순간부터, 얼굴에 화상 자국이 없단
걸 알았을 때부터 이미 그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 그래? 그렇구나. 음···. 그럼······. 아, 아까 방을 잡겠다고 했지? 정해둔 데 있니? 데려다 줄게.”
“노량진으로 가려고요.”
당장 방송국에 출근할 일은 없더라도, 그 근처에서 머물다보면 관련 정보도 훨씬 빠르게 접하기 쉬웠고 추후에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었다.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서울의 풍경이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후론 집밖을 거의 나가지 않으며
생활한데다, 부득이하게 나가는 일이 있어도 선글라스와 마스크, 모자 없이는 활보하지 못했으니까.
반드시.
*
복지사는 이것저것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이주 정도 지난 오늘.
나는 중양대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등에는 야무지게 백팩을 메고, 손에는 프린트한 대본을 들고서.
나는 조금 멋쩍게 물었다.
“예술대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원래는 이쪽에 있었던 것 같은데······.”
“예술대가 작년에 건물을 옮겼거든요. 저 건물 보이죠? 저기까지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로 나와요.”
“아, 감사합니다.”
백고운은 연기학원을 다닌 적도, 예고를 다닌 적도 없었다. 남들이 보기엔 막 연기를 시작한 햇병아리처럼 보일
게 뻔했다.
그들의 작업물은 독립영화제나 단편영화제 같은 곳에 자주 출품되기 때문에 관계자들에게 얼굴을 알리기에 좋았다.
<운명의 표현>이라는 독립영화였는데 중양대 연영과 4 학년생이 만드는 졸업작품으로, 60 분짜리 장편영화였다.
구하는 배역도 주연 롤이었고, 대상도 10 대 후반에서 20 대 초반인 남성이라 딱 지금의 내 조건과 맞았다.
게다가 특별히 서류를 받지 않고 곧바로 오디션을 보는 방식으로 캐스팅을 한다고 했다. 오직 마스크랑 연기만
보겠다는 뜻이었다.
정문에서 친절한 후배가 길을 가르쳐 준 덕에 나는 오래 헤매지 않고 예술대 건물에 도착했다. 그리고 물어물어
연영과 학회실을 찾아 갔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이름이?”
“백고운입니다.”
“재미없거든?”
“그래? 난 재밌는데.”
“카메라 테스트를 위해서 우리 조연출이 동영상을 좀 찍을 건데, 오디션 이후에는 다 지울 거니까 초상권은 걱정
마시고요.”
“음악은 제가 틀어드릴 겁니다. 원래 피아노가 있어야 하지만, 피아노를 가져올 수는 없어서 대신 전자 키보드를
빌려왔어요. 소품이 좀 소박하죠, 하하. 그래도 연기자분들이니까 전자 키보드를 그랜드 피아노처럼 보이게
연기해주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음악을 틀자 리스트가 편곡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왔다. 익숙한 음인 ‘빠바바밤―’이
학회실을 울렸고, 지원자가 연기를 시작했다.
“백고운 씨. 나와 주세요.”
백고운이란 앳된 청년이 나왔다. 이름만큼이나 고운 외모였다.
그가 키보드 앞에 앉더니 눈을 감았다. 손을 키보드에 얹은 채 음악이 나오면 연기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거기까진 다른 지원자들과 비슷했다.
‘흠.’
“시작하겠습니다.”
백고운이 손을 움직였다.
몇 초가 흘렀을까.
그는 발견한 것이었다.
“잠깐만요.”
백고운이 연기를 시작한 지 몇 초 지나지도 않았는데 표류가 흐름을 끊자, 백고운이 눈을 뜨고 의아한 듯 표류를
바라보았다. 다른 지원자들도 어리둥절한 듯 이쪽을 쳐다보았다.
“연습했다고요?”
“네.”
“네, 알겠습니다.”
표류는 전자 키보드의 전원을 연결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연기를 시작하란 신호를 보냈다.
그의 연주는 아주 매끄러웠다. 전공자의 입장에서는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지만, 비전공자의 입장에서 들었을 땐
충분히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더 기막힌 건.
그러나 백고운은 지금 바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 단순히 연주하는 법을 외워온 것이 아니라, 엄청난 연습을 해
왔다는 뜻이었다.
표류는 그 이유를 알았다. 백고운이 눈썹을 치켜 올린 그 순간, 음 하나가 미세하게 엇나갔기 때문이었다.
표류는 그것이 백고운의 연주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그것이 백고운의 의도된 연기라는 걸
알아차렸다.
백고운이 다시 처음부터 연주를 시작했는데 훨씬 손짓이 성마르고 조급해졌다. 그리고 그는 똑같은 파트에서 또
한 번 실수를 했다. 이번에는 다른 지원자들도 명백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음이탈이었다.
긴장감이 훅 고조되었다.
음이 아무렇게나 파열했다.
“흐, 으······.”
‘······!!!’
“······좋습니다.”
“네, 맞습니다.”
“일부러 눈 감고 칠 수 있도록?”
“네.”
표류는 재차 물었다.
“제목이 <운명의 표현>이고 주인공이 시력을 잃은 피아니스트였으니까요. 그래서 당연히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찾아보니까 원래 교향곡이란 게 피아노 버전이 없는 거더라고요. 대신 리스트가 편곡한 피아노 버전이
있다고 해서 그 악보를 구해 연습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연한 말을 뱉었다.
나는 이 작품을 꼭 하고 싶었다. 연기를 하고 싶단 갈망이 크기도 했고, 뭣보다 연기학원이나 예고를 다니지
않는 나는 남들보다 주어진 기회가 훨씬 적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꼭 그 기회를 잡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요. 멋진 연기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아노를 잘 친다는 칭찬도 좋긴 했지만, 나는 연기자였기 때문에 연기에 대한 칭찬이 더욱 기꺼웠다.
둘이 나갔고 학회실에 남겨진 지원자들은 조금 멀뚱하고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표류가 쉬는 시간이라고 했지만
여기서 대기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말 같긴 했다.
오디션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캐스팅이 결정되었다고 모두 돌아가라고 하는 건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긴 했다.
그래서 표류와 조연출이 입씨름을 한 모양이었다.
모두가 ‘수고하셨습니다’하면서 가방을 챙기며 주섬주섬 일어났다. 그때 표류가 지나가듯 나를 콕 집어 불렀다.
음, 기뻤지만 옆의 지원자들의 눈치는 조금 보였다. 보통은 지원자들의 체면도 있고 성의도 있고 해서, 이렇게
남들이 다 있는 앞에서 대놓고 캐스팅하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축하해요. 영화 챙겨볼게요.”
“아. 감사합니다.”
지원자들은 당연한 결과를 납득한 듯 선선한 반응이었다. 몇몇은 내게 장난스레 엄지를 치키며 응원하고 가기도
했다.
표류의 눈에 신인 감독의 패기, 열정, 뜨거움 같은 것이 보였다. 그리고 원하던 배우를 만난 감독들이 가지는
특유의 맹수 같은 눈빛 역시 어려 있었다.
그의 뜨거움이 내게로 옮아왔다. 7 년 만에 다시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새삼스러울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그래,
이제 비로소 다시 시작이었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 역시 그 손을 맞잡았다.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음악감독 이초희
5.
<운명의 표현>은 주인공 원탑 영화였다. 타이틀 롤을 연기할 배우가 구해지자 그 뒤의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조단역의 캐스팅도 얼추 끝마쳤고, 스태프들도 구했다. 장소도 대여해놨고, 이제는 촬영에만 들어가면 되었다.
“반가워서 그랬지. 너 학교에서 보는 거 오랜만이니까. 아무튼. 오바하긴 했는데 제의는 진심이야. 나 이번에
졸작 찍는 거 알지? 거기 음악감독 좀 해주라.”
“어쩌냐. 나 요즘 너무 바쁜데.”
“뭐?”
“류야, 그냥 솔직하게 말해라. 너 나 부려먹으려고 하는 거잖아. 졸작이면 뭐, 제작비도 부족한 저예산일 텐데.
네가 나 무상으로 써 먹은 거 한두 번도 아니고. 이번에도 그런 수작인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하기야 이전만 해도 그랬다. 그녀는 한국 최고의 예고라 불리는 대한예고 음악과에 차석으로 입학한 인재였다.
여러 콩쿠르에서 상을 휩쓸어 가장 주목받는 청소년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릴 정도였다.
결국 영화를 배우다 ‘역시 음악이 좋긴 하다!’면서 음악 감독으로 또 한 번 진로를 선회하긴 했지만, 지금은
직업 만족도가 좋은지 나름 꾸준히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와중에도 능력은 좋아서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였지만.
“초희야. 페이를 챙겨줄 수는 있어. 그래도 이번엔 제작비가 아예 부족하진 않거든. 뭐, 네 마음에 들 정도는
아니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네가 공짜라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 아니야. 이번엔 진짜로 네가
필요해. 나 이번에 찍는 거 클래식 영화거든. 클래식 전공했던 음악 감독으로는 너만 한 사람이 없잖아.”
“······이거 진심이네.”
“백고운 씨라고 신인이야. 오디션 보고 뽑았어. 아직 필모는 없는데 연기가 장난 아니야. 글쎄, 일주일 만에 눈
감고 피아노 칠 수 있도록 연습을 해왔더라고. 대단하지 않아? 이번 영화의 주인공이 시각 장애인
피아니스트거든.”
표류는 이초희가 관심을 보일까 싶어서 열심히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콜. 대신, 본 후에도 내가 별로라고 생각해서 거절하면 더 이상 질척대지 않기. 물론 내가 거절했다고 삐지지도
않기.”
표류는 씩 웃었다.
“오케이, 콜.”
그 주 금요일.
이초희는 여유롭게 촬영장으로 도착했다. 가정집 안으로 들어가자 스태프들이 부산스레 촬영 장비를 설치하고
있었다.
전해 듣기론 그 배우가 여기서 나이도 가장 어리고, 이걸로 데뷔하는 신인이라 했다. 그러면 누구보다 일찍 와서
촬영장 분위기도 좀 보고, 스태프한테 인사도 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벌써부터 연예인 병 걸려서 감독보다
늦고 그러는 건가?
사람 사이란 게, 작은 주전부리라도 선물이 오고가면 기분이 말랑하게 풀어지는 법이다. 촬영장 분위기가
훈훈하게 좋아졌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이초희가 싱긋 웃었다.
“아하하, 안녕하세요.”
표류가 끼어들었다.
“고운 씨. 농담이 아니라 오늘 연기 진짜 파이팅해서 제대로 보여줘야 돼요, 알았죠? 우리 영화에 초희가 없으면
안 되는데, 아 글쎄 얘가 고운 씨 연기하는 거 보고 결정한다 했거든요. 리딩 때처럼만 하면 걱정 없으니까 나
고운 씨 믿고 있을게요.”
이초희는 한쪽 구석에 비켜 앉았다. 그리고 촬영이 스탠바이 되는 것을 구경하면서 65ml 요구르트 그 조그마한
것을 빨대로 쪽쪽 마셨다.
그러나 이초희가 보기엔 백고운은 평범했다. 인상적이지 않다고나 할까. 그나마 특별한 게 있다면 그 나잇대
남자들보다 조금 더 곱상하게 생긴 것 정도?
표류는 이초희에게 백고운이 일주일 만에 연주를 외웠다느니 천재 같다느니 했지만, 사실 그것도 이초희에겐
감흥이 없는 말이었다.
아마 그녀 자신도 일주일의 시간을 준다면 눈 감고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수 있을 터이다. 그래서 더더욱 표류의
칭찬이 와 닿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초희에게 감명을 남기려면 백고운은 피아노 연주가 아니라 오직 연기 그 자체를 보여줘야 했다.
“액션!”
비발디 사계 여름 3 악장
6.
카메라 화면 속.
백고운이 방 한 구석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곧 중년의 여자가 들어와 쟁반을
조심스럽게 상 위에 내려놓았다.
“······.”
“······먹고 힘내셔야죠.”
그가 중얼거린 건 한참 뒤였다.
“······힘?”
그는 힘없이 조소했다. 그리고 넋 나간 사람처럼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가 더듬더듬 주변을 짚으면서 체념한 듯 흥얼거렸다. 그런데 그가 앞으로 나아가다가 근처에 있던 협탁에 그만
발이 걸리고 말았다.
‘오.’
넘어지는 연기가 제법 리얼했다. 스태프들 중 몇몇이 ‘아이고 아프겠다’라는 표정으로 눈썹을 살짝 찡그렸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가 점점 더 대중적이 되면서, 연기 경향도 섬세한 표정 연기나 감정선을 중요시 하는 쪽으로
옮겨갔다.
뭐, 얼굴 근육이든 몸 근육이든 어쨌거나 신체를 쓴다는 점에선 똑같지만 말이다. 배우란 자신의 신체를 통제해
연기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초희가 표류를 훽 쳐다보았다. 표류는 촬영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시선이 느껴졌는지 이쪽을 흘금 봤다.
연기의 기본은 감정 전달이었다. 기술적으론 훌륭해도 왜인지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연기가 있고, 반면 투박해도
어쩐지 가슴을 울리는 연기가 있다. 둘 중 하나를 골라야한다면 역시 후자다.
그래. 사실, 삐뚜름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그녀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저 백고운이란 친구는 허울 좋은
알맹이가 아니라 진짜로 원석일 것이다. 그런 예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자, 얼른 보여주라고.’
“익―!”
카메라는 미디엄 쇼트로 백고운의 등을 잡은 채 주인공의 심리를 대변하듯 불안히 흔들렸다. 장면이 한순간에
급박하게 변했다.
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팔로 서랍장 위를 거칠게 쓸었다. 액자나 상패, 트로피 따위들이 와르르 바닥으로
넘어졌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여기에는, 그래―.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 악장이 딱이었다. 그녀의 귓가엔 벌써 째지는 바이올린 선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아, 하···.”
그가 책장에 꽂힌 파일들을 닥치는 대로 뽑아 던졌다. 파일에서 낱장의 악보가 튀어나와 바닥에 흩날렸다.
“아악!!”
그때, 악보를 찾아서 바닥을 더듬던 그의 손에 가위가 닿았다. 아까 책장에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낼 때 떨어진
거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
백고운이 앉아있는 바로 뒤엔 책상이 있었다. 그 책상 위 끄트머리에 쟁반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원테이크가 아니었다면 조금 덜 리스크가 컸겠지만, 백고운의 연기를 믿기도 했고 리허설도 많이 맞춰봤기 때문에
욕심을 좀 부렸다. 이쪽이 훨씬 그림이 멋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잘 찍히고 있었고. 그런데 막판에 이런
돌발 상황이 생길 줄은 몰랐다.
‘제발!’
표류는 그 쟁반이 조금만 더 버텨주길 절박하게 기도했다.
‘안 돼!’
갑자기 제 머리에 축축한 게 떨어졌으니 흠칫 놀라 연기가 깨졌을 줄 알았다. 모두가 그렇게 예상했다. 그게
당연한 반응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니었다.
백고운은 감독이 컷 소리를 내기 전까지는 그 가상의 무대에서 먼저 내려올 수 없단 듯, 주인공에 몰입한 채
고집스럽게 거기 앉아있었다.
“······!”
그건 마치 월드컵 축구 경기가 2:1 로 이어져 관중들이 다 졌다고 체념한 순간, 막판 1 분 남겨두고 갑자기
동점골이 터져 승부차기로 이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랑 비슷한 분위기였다.
김치가 백고운의 머리 위에 떨어진 건 돌발 상황이었지만 그림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반찬을 뒤집어쓴
모습이 주인공의 비참함을 더 부각시켰다.
이제 남은 건 시간뿐이었다.
‘조금만 더······!’
위기를 잘 넘겼나 했더니, 배춧잎 끝에 아롱거리듯 매달려 있던 김치 국물이 중력을 못 이기고 백고운의 이마를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눈꺼풀에 닿았다.
“······!!!”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촬영장은 고요함에 휩싸였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 것만 같았다.
“······컷!!!”
표류는 방금 찍은 장면을 다시 돌려보면서 모니터링 했다. 일단 어찌어찌 끝까지 찍긴 했지만 혹시라도 중간에
눈치 채지 못한 실수가 있어 다시 찍어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아니, 오히려 자신이 원래 찍으려던 것보다 더 좋은 그림을 건진 듯 했다. 손으로 가위를 내리찍는 연기도
셌지만, 한쪽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된 채 내리찍으니까 훨씬 더 이미지가 강렬했다.
분장 담당이 백고운의 얼굴을 닦아주고 눈을 살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는 듯 했다. 안약을 넣어 눈물을
흘리게 해 주자 그의 눈은 다시 멀쩡히 돌아왔다.
백고운은 분장 담당에게 말하며 실없이 웃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다시없을 강렬한 연기를 보여줬던
그는 어느새 순한 얼굴로 되돌아가 있었다.
김치가 떨어지질 않나, 설상가상 김치 국물이 눈에 들어가지 않나. 명백히 NG 일 줄 알았다. 그런데 백고운은 눈
하나 깜빡 하지 않고 연기를 계속했다. 그리고는 그 위기를 아예 더 좋은 그림으로 바꿔버렸다.
이건 정말··· 천재 아닌가?
“야, 표류!”
뒤를 돌아보자 이초희가 보였다. 어찌나 촬영에 집중했는지, 표류는 그녀가 여기에 있단 것도 깜빡했다.
“나 이거 한다. 이건 백 프로 대박이야!”
“당연하지!”
렛잇비와 댄싱퀸
7.
“아니, 거기서 반찬이 고운이 머리 위로 툭 떨어지는데 심장이 덜컹! 이걸 계속 찍어야 해 말아야 해 하는데 컷
소리는 안 들려오지, 고운이는 계속 연기하고 있지. 나도 에라 모르겠다 하고 계속 찍은 거지. 올 때 혹시나
몰라서 청심환 하나 먹고 왔는데, 이야, 그게 진짜 신의 한 수였다니까. 거기서 카메라 흔들렸어봐. 그 명장면을
내 손으로 날릴 뻔 했잖아!”
촬영감독의 흥분 섞인 말에 스태프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나 안 소심하거든?!”
촬영감독이 손과 혀를 모두 내둘렀다.
“아무튼 고운이는 내가 보기엔 열여덟 아니야. 그럴 수가 없어. 분명히 속에 연기 고수인 아저씨가 들어가 있을
거야. 어떻게 거기서 연기를 이어갈 생각을 하냐고.”
스태프들이 큭큭 웃었고, 나도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속으론 약간 뜨끔했다. 의외로 가장 진실에 접근한
추측이었으니까.
스태프들이 인정한단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열렬히 박수 쳤다. 몇몇은 ‘호우!’하면서 테이블을 요란히 두드렸다.
표류는 이어서 ‘우리 소심이 촬감님께도 안 떨어주셔서 감사하다고 박수!’하고 장난스레 외쳤다. 촬영감독이
발끈했다가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지자 머쓱하고 부끄러운 듯 고개를 꾸벅거렸다.
“옙―!”
“근데 고운 씨, 정말 괜찮겠어요?”
“네?”
“초희 말이에요.”
“라스트 씬에 삽입되는 곡이 뭔지는 알아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 번 3 악장이에요. 들어본 적 있어요?”
“어······ 아뇨.”
사실 나는 음악의 음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악보만 겨우 볼 줄 안다고나 할까. 그것도 따로 배운 건 아니고
초등학교 음악 시간 때 배운 거였다.
“음······.”
“아무튼 내 말은, 거절해도 된단 뜻이에요. 어차피 라스트 씬엔 대역 쓰거든요. 배우는 연기를 해야지. 안
그래도 고운 씨, 촬영에 알바에 지금도 바쁜데 거기에 피아노 연습한다고 더 힘들면 쓰나.”
“그럴게요.”
“야 어쩌냐. 나도 안 지갑 안 들고 왔는데.”
둘이 투닥거렸다.
“아무래도 그래야겠는데.”
“이런. 진짜 어쩌냐.”
“감독님, 잠시만요.”
“······네?”
“<운명>이라도 치려고요?”
“네. 맞아요.”
“응? 그러면······.”
배우든 가수든 기본적으로는 남 앞에 서는 직업이다. 나는 무대에 올라선 것처럼 평소의 내 성격과는 다른 자아를
뒤집어썼다.
“사실 제가 지금 무척 곤란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계산을 하려고 보니까 지갑을
잃어버렸더라고요.”
아까 표류와 조연출이 주고받았던 농담을 살짝 각색해 말하자 사람들이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저기 뭐 하는데?’하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뻔뻔하고 능청맞은 내 말에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빙긋 웃어 보였다. 적절한 타이밍의 농담은
사람들의 흥미를 확 끌어당기는 데에 좋은 법이었다.
악기를 빌려주신 분들이 바람잡이처럼 박수를 짝짝 쳤다. 관중들도 기대와 응원을 담은 박수를 짝짝 쳤다.
분위기가 단번에 업 되었다.
나는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간 중간 박수를 치면서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거나 후렴구를 같이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호흡을 조절했다. 무대란 관객과 소통하는 끈을 놓지 않는 게 제일 중요했다.
양이 많아 우리는 그 길거리에 쪼그려 앉아 한참이나 돈을 세야만 했다. 그리고 총 액수를 확인한 순간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입을 벌렸다. 정확히 238,520 원. 회식비를 채우기는커녕 아예 회식을 한 번 더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전리품을 들고 가게로 돌아가자 스태프들이 우리의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는 환호하면서 외쳤다.
“2 차 가자!!”
욕심을 더 내게 만드는 배우
8.
노량진의 어느 편의점.
편의점 점장이 부르자 백고운이 돌아보았다. 점장은 음료수 하나를 내밀며 푸근히 웃었다.
일을 제대로 못 할까 걱정, 무슨 사고를 치지는 않을까 걱정. 사람을 구해도 늘 그런 불안이 한구석에 있었다.
그러나 백고운은 완벽하게 일했다. 지각 한 번 한 적이 없었고, 출근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물건을 정리했으며,
심지어는 새벽 타임이 떠넘기고 간 청소도 점장이 출근하기 전에 다 해놓곤 했다. 정산 실수도 한 번 일으키지
않았고, 손님 응대도 몇 년 일한 베테랑처럼 능숙했다.
그래, 백고운은 여태 점장이 고용했던 모든 알바생을 통틀어 가장 성실하고 빠릿빠릿했다. 게다가 성격도 착하고
사람이 건실하기까지 해서 보고 있으면 괜히 흐뭇했다.
“하하, 네. 감사합니다.”
점장은 미리 빼놓은 폐기용 도시락에 간식거리를 얹어주었다. 사람이 이렇게 열심히 사니까 뭐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당연했다.
누군가 그때 점장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면, 막내아들보단 손자에 가깝지 않겠냐고 정정해주었겠지만 말이다.
“이것 좀 드실래요?”
이초희는 레슨실에 도착하자마자 백고운이 내미는 젤리를 보고 ‘허’ 웃었다. 이번엔 젤리인가?
“네?”
“무슨 먹을 걸 그렇게 맨날 들고 다녀? 저번엔 사탕, 저저번엔 초콜릿, 저저저번엔 쿠키, 저저저저번엔 웬
맥반석 계란. 주전부리를 되게 좋아하나 봐. 한창 먹고 클 때라 그런가?”
그녀는 백고운이 내미는 봉지에서 젤리를 하나 꺼냈다. 기다란 지렁이 모양의 젤리가 쭉 뽑혀 나왔다.
그녀는 조금 떨떠름해졌다. 왜 젤리를 지렁이 모양으로 만드는 걸까? 딱히 지렁이가 맛있어 보이는 생김새도
아닌데. 알 수가 없었다.
독일에 갔을 때 하리보 본점에 가서 곰 모양 젤리를 먹어본 적은 있어도 지렁이 젤리는 처음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젤리를 조금 씹었다.
“네.”
“흐음···.”
정대영은 이초희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라스트 씬에 들어갈 곡을 연주해줄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의 부탁으로
겸사겸사 백고운의 레슨까지 맡아주기로 했었다.
정대영은 그녀의 쿵짝에 맞춰주듯 짐짓 겁을 주었다. 백고운은 그저 아하하 웃으며 ‘열심히 할게요’라고 대답할
뿐이긴 했지만.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프로인 이초희가 연주를 날카롭게 들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디렉션을 했다.
“고운 씨, 거기선 조금 더 감정을 담아야 돼. 좀 더 애처롭고, 슬프고, 그런 떨림이 느껴지면 좋겠는데. 그리고
잇단음표 신경 써주고.”
주인공은 처음엔 조심스럽게 연주를 시작하다가 점점 무아지경에 빠지게 되고, 나중엔 모든 것을 폭발시킨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 번 3 악장의 총 길이는 9 분 남짓 되고, 백고운은 거기서 앞부분인 2 분-3 분 정도만
친다. 그 뒤는 정대영이 이어받아 급박하고도 몰아닥치는 연주를 할 것이다.
같은 곡이라도 치는 연주자마다 느낌이 천차만별인 법이다. 이초희의 목적은 그 간극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이 치지만 어쨌거나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 한 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백고운이 정대영의 연주를 카피하듯 따라해야 했다. 연기란 본질적으로 흉내 내기니까, 말하자면
이건 아주 고난이도의 연기인 셈이었다. 단순히 피아노 치는 폼만 따라하라는 게 아니라 곡에 묻어나는 연주자의
특징까지 따라하라고 주문한 셈이었으니까.
능력이 안 되는 배우라면 애초에 부탁을 하지도 않았다. 가능성이 많으니까 무리한 주문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래, 백고운은 감독으로 하여금 욕심을 더 내게 만드는 배우였다. 그건 감독이 배우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나 다름없었다.
“야, 나도 좀 쉬자.”
정대영이 작게 타박하며 물을 마셨다.
이초희와 정대영이 녹음실 밖에서 잠깐 그렇게 백고운의 연주를 지켜보는데, 정대영이 문득 말했다.
“······아마 연기가 아니라 피아노를 했어도 잘했을 거야. 확실히 재능이 있어. 피아노를 배운 적 없다던데
저렇게까지 따라오는 거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거거든. 가르치는 재미가 있는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이초희와 정대영은 스타일이 정반대였다. 그녀가 뭐든 쉽게 해내는 천재에 가까웠다면, 그는 노력파 수재에
가까웠다.
조별과제가 있다면 이초희는 닦달하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조원들을 끌고 가려 노력할 사람이었고, 정대영은
애초에 포기하고 혼자 모든 걸 할 사람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렇기에 남에게 관심이 적은 정대영 입에서 타인의 칭찬이 나왔다는 건 정말로 잘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초희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근데 왜 이렇게 열심히 가르쳐? 보니까 내 연주를 똑같이 따라 치게 만들려 하는 것 같던데. 그러면 굳이
고운 씨가 쳐야 할 필요 없잖아. 어차피 동시 녹음이 아니라 후시 녹음으로 들어갈 거라며.”
주인공은 처음엔 자신이 잘 칠 수 있을까 두려움과 걱정을 담고 연주를 시작한다. 그러나 정대영이 처음부터 다
치면 아무리 서툰 척을 하려 해도 연주가 능숙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이젠 좀 듣기 괜찮나요?”
“두 분이 잘 도와주셔서 그렇죠.”
보통 레슨은 두 시간 정도면 끝났다. 그러나 오늘은 라스트 씬 촬영이 바로 내일모레다보니 셋 다 투지가 불타는
바람에 평소보다 조금 더 늦게 끝났다.
“초희야 나, 갈게.”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둘 다 잘 가―.”
그래서였다. 이초희가 백고운의 이마에 살짝 보이는 그 땀이 평소보다 훨씬 열심히 연습을 한 탓이라 여긴 것은.
그리고 일이 터진 건 그날 아침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아, 실수했다.’
하긴 요 며칠 꽤 무리하긴 했지. 촬영에, 알바에, 피아노 연습까지. 그래도 몸 상태는 봐가면서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진동으로 전화벨이 울렸다.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표류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죄송해요. 혹시 무슨 일 있나요?”
물론 나는 대답했다.
“당연히 촬영 해야죠. 심한 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오늘은 대사가 없어서 목소리를 낼 씬도 없고. 촬영에는
지장 없습니다.”
“네, 그럴게요.”
꿈이 영화였다면 그 목소리가 바로 오프닝을 알리는 나래이션이었을 것이다. 전경이 페이드 인하면서 천천히
눈앞에 차올랐다.
―······.
막 국민학교에 부임한 선생님은 이 상황이 조금 당혹스럽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아이들이 종종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막상 자신이 맡은 반 아이가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소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역에서 서성이고 있었는지도 몰랐고.
소년의 가족은 한 달 전쯤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 왔다. 그러나 소년은 도통 서울에 적응하지 못했다. 커다란
건물들도, 차가운 표정의 사람들도, 소년에게는 너무 낯설었다. 그리고 그의 부모는 소년의 외로움을 챙겨주기엔
너무 바빴다.
선생님은 슬퍼 보이는 소년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뭔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날, 그녀는 뜻밖에 소년에게 책 한
권을 건넨다.
소년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친 건지 한동안 깨닫지 못하고 얼떨떨해 있다. 소년의 여운을 깨트린 건 역무원의
말이다.
―아니요. 그냥······.
―책을 읽고 있었어요.
다음날 소년은 역으로 가는 대신 학교로 간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가서 빌렸던 책을 내민다. 잘 읽었다고,
조금은 멋쩍게 말하며.
그날을 기점으로 선생님과 소년의 묘한 유대가 이어진다. 선생님은 매번 새로운 희곡을 건넸고, 소년은 단숨에
그것들을 읽어치웠다. 대화체로 이루어진 희곡은 어린 소년이 읽기에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희곡이 2 차원의 세계라면, 연극은 3 차원의 세계였다. 희곡이 상상으로 구현되는 세계라면, 연극은 그 상상이
실제가 되는 세계였다.
소년은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연극의 재미에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는 표현은
그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괜찮아요, 고운 씨?”
대한예고는 표류의 모교였다. 그래서 외부인에게는 개방하지 않는 곳이지만 졸업생 권한으로 특별히 하루만 빌릴
수 있었다.
나는 표류의 말을 끊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옅게 웃었다.
“괜찮아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대 가운데로 걸어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피아노에 손을 올린 채 촬영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홀이 조용해졌다.
클래퍼보드의 슬랩스틱이 부딪혔고, 카메라가 돌아갔다. 공연장에서처럼 부스럭거리는 소리,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은 후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쿵, 내리치듯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며 연주를― 아니,
연기를 시작했다. 미리 녹음을 딴 곡이 한쪽에서 함께 흘러나왔다.
나는 초점을 비스듬히 맞춘 채 피아노 건반을 응시하며 손을 놀렸다. 빠르고 음산한 선율이 귓가를 가득 채웠다.
―책을 읽고 있었어요.
즉―, ‘열정’
김철수였던 전생에서 화상 때문에 연기를 그만둬야 했던 건, 어쩌면 그 뜨거운 불꽃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려다
데여버린 걸지도 몰랐다.
바로 지금의 이 순간처럼.
“······!”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거추장스러운 감각은 필요 없단 듯 눈까지 감아버리고 행위에 순수하게 몰입해있는
저 사람은, 바로 그들이 영화 내에서 구현하려고 했던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홀이 완전히 고요해졌다.
그리고 둘은 발견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관객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에게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와 홀을 뒤덮었다.
그야말로, 전율(戰慄)이었다.
애드리브가 되는 배우
10.
카메라가 돌아가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 번 <열정>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앞의 3 분 정도는 백고운이
치고, 나머지 뒷부분은 정대영이 친 바로 그 곡이었다.
정대영은 곧 깜짝 놀랐다.
그 손의 위치가 심지어 정확한 걸 보니, 아마 정대영이 연주하는 걸 눈여겨보고 폼을 외워두었다가 따라한 것으로
보였다.
어쩐지 자신이 연주할 때 옆에서 빤히 보고 있더라니. 그냥 구경하는 줄 알았는데 연기에 써먹기 위해서인 줄은
몰랐다.
‘대단하네.’
자신은 연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저 피아노 치는 것에만 어느 정도 조예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고운이 대단하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후반부에는 화면에 백고운의 얼굴만 클로즈업된다. 카메라가 백고운의 맞은편에서 찍기 때문에 그가
연주하는 손은 피아노에 가려 나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백고운은 카메라에 잘 나오지 않는 디테일마저도 저렇게 신경을 써가며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정대영은 백고운의 저 짧은 연기에서 그것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니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 박수가 원래 대본에 있는 액션이긴 했다. 그러나 이렇게 크게 칠 필요는 없다. 어차피 후시 녹음으로
들어가니까.
엑스트라들은 일반인이었으니 피아니스트인 정대영만큼 백고운의 디테일을 알아보지는 못했을 테지만, 그들도
본능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백고운의 연기가 훌륭했다는 걸.
그러나 백고운이 피아노를 전공했다면 인재가 하나 탄생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역시 아깝다―. 내심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날 촬영은 큰 무리 없이 잘 끝냈다.
극한의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이 난다는 속설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 열로 의식이 흐릿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온
에너지를 다 쏟아 부어 연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유증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표류가 ‘고운 씨 컷은 다 땄으니까 이제 병원 가 봐요’라고 말하자마자
배터리가 방전된 듯 의식이 픽 나갔으니까.
우리는 편의점 앞 파라솔 의자에 앉아서 이초희가 산 것들을 나눠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컨디션 관리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하죠. 촬영도 괜히 저 때문에 일찍 끝난
것 같고······.”
표류가 얼른 손을 저었다.
표류가 말을 돌렸다.
서울의 어느 한 사무실.
유명한은 소설가 출신의 영화감독으로,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영화를 찍는 것으로 이름이 높은 감독이었다.
최호랑은 한때 연극판을 주름잡던 대배우였으나, 이제는 현장에서 물러나 자신의 후배를 양성하는 것에만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유명한과 최호랑이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유명한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발견은 무슨. 그런 사람을 어떻게 찾아. 배우에게 의존하는 실험적인 영화를 찍고 싶으니까 애드리브가 되는
배우를 찾아달라고? 말이야 쉽지. 영화 하나를 애드리브 통으로 채워달라는 부탁이나 다름없는데, 그런 배우가
세상에 어디 있어.”
유명한이 변명했다.
“내가 언제 배우의 애드리브로 영화를 채운다고 했어. 커다란 틀 안에서 배우들이 자유도 있게 움직이는 걸 찍고
싶은데, 되도록 애드리브가 되는 배우였으면 좋겠다고 했지.”
“그게 그 말이지.”
그래서 흔히 연극판부터 올라간 배우가 매체 배우로 시작한 배우보다 기초가 탄탄하다고들 한다. 사실 어느
정도는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얘기였다.
하지만 유명한은 만들어진 감동 신파는 딱 질색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감독이 노력한다 해도 대본을 이미 만드는
순간부터 그런 작위성의 덫을 피할 수가 없었다.
최호랑이 코웃음쳤다.
그러나 유명한이 구하고자 하는 배우는 고도로 연기를 잘해서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고 움직여줄 사람이지, 연기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알았어, 일단 내가 더 찾아볼게.”
그들은 다시 다른 얘기로 돌아가 술잔을 기울였다. 몇 분 뒤, 이번엔 최호랑 쪽에서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어이구, 꿈도 꾸지 마셔.”
7080 바이브
11.
그는 이렇게 급하게 연락을 줘서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했다. 나는 괜찮다고, 시간이 있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주말에는 아르바이트가 없었으니까.
“······근데 그건 뭐죠?”
표류가 멋쩍게 아하하 웃었다. 의심이 확신이 된 순간이었다. 어쩐지 추가 촬영이라면서 대본도 안 주더라니.
“맞아, 고운 씨. 이건 내가 쏘는 거야.”
하지만 표류가 챙겨온 술 박스가 하나인 걸 보니 그렇게 마셔댈 생각은 아닌 듯 했다. 저건 기껏해야 스태프 한
명에게 하나씩 돌아가는 수준일 테니까.
나는 안심했다.
그건 몇 분 전의 일이었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표류와 조연출이 박스를 뜯더니, 버스에 앉아있는 스태프들에게
일사분란하게 술을 돌렸다. 그리고 스태프들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안줏거리로 먹을 과자를 품에서 부스럭거리며
꺼냈다.
“아이쿠, 하나 둘!”
“아뇨, 저는······.”
“그때 고운 씨 뭐 불렀어?”
“렛잇비랑 댄싱퀸.”
이초희가 당장이라도 신청할 듯 노래방 기계를 들었다. 여기서 더 빼기도 뭣해 결국 나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슬쩍 말을 꺼냈다.
“아뇨, 저는 그거 말고······.”
그건 기타 치려고 외워둔 노래들이었고, 좋아하는 노래들은 따로 있었다. 이초희와 표류, 그리고 조연출과 다른
스태프들까지 나를 기대감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그 앞에 대고 나는 말했다.
말하면 말할수록 어쩐지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내 목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표류가 어색히 아하하
웃었다.
“고운 씨 옛날 노래 좋아하구나. 그런데 음··· 아이돌 곡은 몰라요? 뭣하면 HOT 나··· 핑클이나···
서태지라거나···.”
“아, 발라드.”
표류가 깨달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조연출이 ‘발라드 좋죠······’하고 옆에서 중얼거렸다. 표류가
애썼다.
“좋죠!”
그리고 그날 내 별명은.
“어, 연어 씨!”
연어가 되었다. 강산에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을 불렀더니 이렇게 되었다.
“연어 씨 어디가요?!”
“···화장실이요.”
이상한 일이었다. 그 노래 정도면 충분히 신나는 노래인 것 같은데. 그런데 그 노래를 선곡하자 사람들이 갑자기
다 빵 터지더니, 급기야 나중에는 연어 씨, 하면서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쏴아아―.
“송골매 쿵쿵따!”
“매니저 쿵쿵따!”
“저팔계 쿵쿵따!”
“계, 계, 계······.”
“아,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쭉!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늦은 밤이라 밖은 깜깜했다. 곳곳의 가로등이 산책로에 불을 밝히고 있었고, 날벌레가 전구를 휘돌며 윙윙 날고
있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나는 평상에 앉아 외투 안주머니에 있던 프린트를 꺼냈다. 그냥 심심풀이로 읽고 있는 대본이었다.
“감독님은요?”
“네?”
“왜, 이름에 ‘배우’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잖아요. ‘백’과 끝의 ‘운’에서 받침만 빼서 붙이면 ‘배우’
이니까.”
“정말이네요. 신기하네.”
“사람이 이름 따라 간단 말도 있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표주박?”
“······.”
“표고버섯?”
“······”
“······.”
“······혹시 진심이에요?”
“······죄송해요.”
나는 멋쩍게 사과했다.
좀 썰렁했나. 농담이었는데.
쩝.
부산국제영화제 GV
12.
표류가 중얼거렸다.
“제가요?”
“예. 사실 고운 씨가 좀 모범생 이미지잖아요. 매사에 열심이고 성실하고, 예의바르고 건실하고 착하기까지 해.
근데 또 연기할 때는 완전히 딴 사람처럼 미친 것 같고······ 아, 물론 좋은 뜻이에요. 그러니까 인성도 되고
재능도 되는, 너무 완벽하단 거죠.”
“아, 감사합······.”
표류가 키득거렸다.
“일이요?”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번 작품, 감독님의 자화상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요. 주인공 이름도 ‘표현’이잖아요. 그래서 영화 제목도 <
운명의 표현>인 거고. 처음엔 그 표현하다의 그 표현에서 따온 줄로만 알았는데, 감독님 이름과 비슷한 걸
보니까 뭔가 의미가 더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표류가 웃었다.
“역시 고운 씨 똑똑하네요. 맞아요. 옛날에 피아노 전공했어요. 그래서 초희랑은 고등학교에서 만나기 전에도
이미 알던 사이였어요. 아, 내가 말한 적 있나? 초희도 대한예고 졸업생이에요. 걔는 음악과, 나는 연영과. 나
영화 공부하는 거 보고 애가 흥미보이더니 자기도 영화 찍겠다고 바이올린 때려 치고 대학도 연영과 온 거거든요.
뭐, 암튼 그 얘긴 여담이고.”
“뭘요. 그리고 제 생각엔, 그건 꿈을 포기한 게 아니라 약간 모습이 달라진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결국 감독님은
이번 영화를 통해서 언젠가 꿈꿨었던 모습을 그려 보인 거잖아요. 피아노를 계속 치는 주인공.”
사람들은 자신에게 남은 미련을 어떻게든 해소하고자 한다. 표류는 자신이 관둬야 했지만 내심 원했던 모습을
영화로 대신 표현해 승화시키고자 한 것뿐이다. 그것이 가치가 낮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그럼에도 꿈을 계속 이뤄나가는 사람이 있고, 방향을 트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 그건 다름이지 틀림이 아니었다.
“야, 거기 둘! 뭐해?!”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고, 밤늦도록 놀았다. 이초희의 공격적인 술 게임에 표류는 몇 잔 더 마시더니 오래지 않아
뻗어버렸다.
나는 비식 웃으며 맞장구쳤다.
“잘 됐으면 좋겠네요.”
“누구야, 이런 시간에······.”
“나 잠깐 전화 좀.”
“누구?”
“여동생.”
이초희가 졸린 건지 하품을 쩍 했다. 벌써 한밤중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이초희가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주섬주섬
일어났다.
벌컥―.
“모두 기상!!”
“뭐?!?!”
믿기지 않아 급기야 표류를 의심하던 스태프들도 오래지 않아 진짜 그들이 부국제에 초대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이 손에 손 잡고 방방 뛰며 환호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꽃은 단연 GV 이다.
아르바이트가 있는 나는 나중에 부산으로 향하기로 했고, 표류와 이초희를 비롯한 촬영팀 식구들은 먼저 내려가
있었다.
셔츠에 검은색 슬랙스. 이 정도면 아주 무난한 차림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정장은 돈이 없어서 구매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대충은 격식 있는 차림새로 보이게 입고 온 건데.
이초희가 흐흐 웃었다. 얼굴 만면에 신난 기색이 완연했다. 그리고 그건 표류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벌써부터
흥분으로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둘이 왜 그러는지 뻔히 알았기 때문에 나는 모른 척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제법 많은 일이 있었다.
어디서 이야기가 퍼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운명의 표현>이 부국제 관계자들에게 꽤나 깊은 인상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우리 영화가 이번에 상을 받을 유력한 경쟁작이라는 소문이 알음알음 돌았고, 그 입소문 덕분에 우리 영화는 표가
열리자마자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옷을 갈아입지는 않았으나, 이초희의 성화에 결국 머리단장까지는 받았다. 그러고 우리는 함께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관에는 빼곡히 관람객이 차 있었고, 앞 열에는 간간히 카메라를 든 기자들도 보였다.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광경이었다.
GV 는 영화를 다 같이 관람한 후에 이어지는 게 순서였다. 극장이 어두워지고 조용한 가운데 영화가 시작됐다.
영화 편집이 저예산답지 않게 아주 매끄러웠고, 삽입된 음악도 극장에서 커다란 사운드로 들으니 훨씬 풍부했다.
그리고 드디어 GV 가 시작됐다. 나와 표류가 앞으로 나섰고, 사회자가 우리를 소개했다. 박수소리와 셔터소리가
연신 터졌다.
“네, 그렇습니다. 촬영에 안정적으로 임하기 위해서 따로 연습을 했었습니다. 그 외에 피아노 치는 연기를
위해서 피아노 연습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가 떠벌였다.
내가 한 발 더 빨랐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13.
하지만 최호랑은 영화감독이 아니라 연기자였다. 그것도 한 극단을 이끌고 연기자를 양성하는 단장.
그는 영화 내에서 세상 서럽게 울기도 했고, 강렬하게 분노를 터트리기도 했으며, 또 그러다가도 완전히 텅
비어버려 껍질만 남은 멍한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아주 잠깐 동안 최호랑 자신도 컨택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로 데뷔했으니 연극엔 그다지 관심이 없을
것 같아 보이니 그쪽은 아니었고.
영화관 내부의 분위기가 살짝 싸늘해졌다. 몇몇이 불편한 헛기침을 내뱉었고, 사회자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보다 백고운이 한 발 빨랐다. 백고운이 마이크의 소리를 키고 담담히 말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시각 장애인‘처럼’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예?”
“뿐만 아니라, 눈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영화에서 제가 연기했던 것처럼 눈에 변형이 온 시각 장애인도 있지만,
눈의 변형이 없어서 겉보기엔 다른 사람과 별 다른 차이 없는 시각 장애인들도 있습니다. 때문에 ‘
시각장애인처럼’ 이라는 말로는 기자님이 정확히 뭘 뜻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장애의 경우가 워낙
다양해서요.”
그러나 두 번째 말은 달랐다.
백고운은 지금 타인의 장애를 단순히 구경거리, 흥밋거리를 위해 재현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는 얼굴을 붉혔지만 화를 낼 순 없었다. 백고운이 저렇게 부드럽게 나오는데 이 상황에서
자신이 화를 낸다면 나쁜 쪽은 그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무안스럽게 사과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도 살짝 불편한 듯
얼굴을 씰룩거렸지만, 더 이상 분위기를 깨지는 않았다.
그러니 관객들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고운 옆에 앉아있는 표류 역시 흐뭇하고 뿌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저거······ 물건이네.’
GV 는 무난히 끝났고, 우리는 관객과 사회자에게 감사하단 인사를 표하곤 밖으로 나왔다.
“네, 안녕하세요.”
특히 케이엔터는 가능성 있는 신인들을 영입해 꾸준하고 성실히 작품에 출연시켜 결국은 배우를 띄우는 방식으로
유명했다. 사기꾼들이 워낙 많은 이쪽 바닥 특성상 드물게 신뢰도 높은 회사라고 할 수 있었다.
부국제에서 얼굴도 알렸겠다, 이르면 빠른 시일 내에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올 거라 생각하긴 했다. 그래서 일부러
아마추어 작업의 오디션을 찾아다니는 대신 부국제 날까지 기다렸다.
물론 그렇다고 당장 결정을 내릴 순 없었다. 일주일 정도면 연락할 곳은 다 연락해올 테니, 그 이후에 선택해도
된다.
그런데 그때였다.
“잠시만.”
“백고운 배우?”
“최호랑 선배님?!”
“오. 혹시 나를 알고 있나?”
모를 리가!
최호랑이 누군가. 연극판을 한 번이라도 거친 사람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중견 연극 배우였다.
나 역시 대학생 때 연극부 활동을 한 적 있었다. 그때 공부하겠다고 최호랑이 나오는 연극을 얼마나 많이 봤던가.
그는 80-90 년대에 연극계를 주름잡았었고, 2000 년대 초에는 영화나 드라마에 조연으로 얼굴을 비추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은퇴해서 극단 단장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가 운영하는 극단 ‘왕국’은 한국에서 제일 커다란
극단이었다.
“말 놓아도 되나?”
“그래. 유명한 감독이라고 알지? 그 감독이 나더러 청소년 배우 하나 좀 구해달라고 했는데, 연기력이 많이
필요한 배역이라 지금 좀 까다로운 상태거든. 그 친구는 연극판 쪽에서 배우를 구하고 싶어 하고 있고. 그래서
일단은 내 단원들을 대상으로 한 달 동안 1 차 오디션을 보고 괜찮은 사람을 추려서 유 감독에게 프로필을 넘길
생각인데. 혹시 관심 있다면 백고운 배우도 한번 참여해보지 않겠나?”
다짜고짜 에이전시와 오디션 둘 중에 양자일택 하라는 최호랑의 말은, 확실히 그다웠다. 그는 이름만큼 무서운
사람으로 연극배우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깐깐하고 고집 센 성격 탓이었다.
에이전시는 안전한 선택이었다. 에이전시에 들어가면 조연이긴 하지만 작품에 당장 들어갈 수 있다. 물론 그
이후로도 꾸준히 작품에 출연할 수 있을 테고.
하지만······.
나는 즉답하며 최호랑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이어서 박 실장에게도 명함을 돌려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박 실장은 몰아닥치듯 정해진 이 상황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로써 내가 케이엔터와 인연을 맺게 될
일은 이제 사라진 셈이었다. 대놓고 면전에서 거절했는데 심기가 편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떨떠름한 얼굴의 박 실장이 떠나고, 만족한 얼굴의 최호랑도 연락처를 준 뒤 떠났다.
하지만 나는 빙긋 웃었다.
나는 뒷말을 삼켰다.
왕자와 거지
14.
김철수가 죽은 지 6 개월 남짓 지났다.
김철수에겐 친척이 따로 없었기에 김건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그의 장례를 치르고 잡일들을 처리했다.
부조금 정리, 납골당 안치, 유품 처리, 유언장에 따라 고인의 재산을 화상 치료 아동을 후원하는 민간단체에
기부하는 일 등등―.
그리고 오늘 김건은 자신의 아내와 함께 김철수의 집을 청소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향했다. 자잘한 가재도구나
생활품들은 아직 집에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동산은 처리하는 데에 시간이 걸려서 그 동안은 일부러 건드리지 않았으나, 이제는 그의 집도 팔렸기 때문에
이것들도 정리해야만 했다. 즉, 이건 고인의 주변을 정리하는 일 중 가장 마지막의 일이었다.
“그럼 힘내볼까?”
기계적이고 단순한 노동을 반복하다보니 생각이 많아질 틈이 없었다. 그런데 한참 바쁘게 몸을 움직이던
도중이었다.
“여보. 이거 당신 아니에요?”
“응?”
그쪽으로 가자 아내가 청소하다말고 커다란 앨범을 무릎에 펴놓고 구경하고 있었다. 김건도 호기심이 생겨서
고개를 쑥 빼 그녀가 보고 있는 걸 들여다보았다.
“앨범?”
“철수 씨 앨범 같은데. 이건 당신, 그리고 이건 철수 씨 맞죠?”
“맞아. 보니까 정기공연 때네. 아마 우리가 대학교 2 학년 때인가 그랬을 거야. 우리 과에선 축제 때마다 1, 2
학년들이 연극 공연을 올려야 했거든. 나는 극본을 맡았고, 철수는 주인공 역을 맡았지.”
“무슨 역할이었는데요?”
김건이 키득거리며 아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사진을 가볍게 쓸었다.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마 이때였을 거야. 철수가 천생 연기자구나, 그걸 처음 느꼈을 때가. 원래 연기를 좋아하고 잘하는 놈인 걸
알고는 있었는데, 그렇게까지 연기에 미친 독종인 줄은 이때 처음 알았지.”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음, 이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주말 오후, 부부는 대청소 도중 휴식을 취하며 때 아닌 추억 여행을 떠났다. 이야기꾼은 김건이었고, 관객은
그의 아내였으며, 이야기의 주인공은 김철수였다.
“정기공연에서 배우들은 다 1, 2 학년이지만 총책임자는 고학번 선배가 맡는 게 전통이었거든. 당연히 그때 <
왕자와 거지>의 연출이랑 지휘를 맡은 선배도 우리보다 몇 학 번 위 선배였지. 그런데 그 선배가 하필 똥군기로
엄청 유명한 선배였던 거야.”
“아이고.”
김건은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그 선배가 김철수에게 뭐라고 했는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너는 그 몸짓이랑 말투가 진짜 거지라고 생각해? 아니, 아니. 네 연기엔 거지의 영혼이 없어. 거지의 애환,
절박함, 굶주림, 끔찍한 고통! 그런 게 없단 말이야.
―하기야, 너네 같은 애들이 뭘 알겠니. 너희가 민주화 운동하다가 곤봉으로 맞아보길 했니, 잡혀가서 고문을
당해보기라도 했니. 안전하게 자라서 겉멋만 들었지.
당시에도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더 어이가 없었다. 아내도 김건의 생각에 동의했다.
“굶었어.”
“응. 선배가 철수더러 거지의 영혼이 없다고 한 날, 걔가 그날부터 집에도 안 들어가고 말 그대로 거지처럼 사는
거야. 잠은 과방에서 자고, 운동부 애들 씻는 샤워실에서 간간이 몰래 씻고. 돈은 한 푼도 없으니까 과방에
굴러다니는 남은 음식 집어먹고.”
솔직히 선배로서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연기를 잘하고 싶어서 직접 그 배역처럼 살아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막말로, 그런 논리라면 살인자 배역을 맡은 사람은 연기를 하기 위해 살인을 저질러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세상에······.”
그때 느꼈던 소름이 다시 생생하게 떠올라, 김건은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부르르 떨었다. 이야기를 듣던 아내도
그 상황이 상상이 가는지 닭살이 돋은 팔뚝을 문질렀다.
아내는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웃긴 놈이지? 이걸 천재라고 해야 하나, 노력형이라고 해야 하나. 고민 많이 했다니까. 타고난 재능이 있으니
천재 같은데, 그럼에도 매 순간순간 노력해. 심지어 그걸 또 즐기면서 해. 그런 놈은 처음 봤어. 아마 내가 본
인간 중에 제일 특이한 놈일 거야, 걔는.”
“그래, 그게 더 가능성 있네. 김철수 걔는 신이 예뻐할 만 하니까. 재능이 그렇게 많으면서도 늘 겸손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착했거든. 애가 뭐, 흠 잡을 데가 없는 놈이었지. 아, 아니네. 딱 한 가지 흠이 있네.”
“이성에게 관심이 없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지. 철수네 부모님이 걔더러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성화였는데,
끝까지 좋은 짝을 못 만났거든. 하도 돌부처라서 우리끼린 너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막 놀리고
그랬다니까.”
아내가 까르르 웃었다.
김건은 짐짓 입술을 쭈욱 내밀고 아내의 볼에 뽀뽀하려다가, 아내가 앨범으로 때리는 통에 재빨리 사과했다.
“주책은, 정말!”
“주책이라니! 나 아직 젊거든?!”
“미쳤나봐, 이 사람!”
김건이 능글맞은 눈빛을 던지자 아내가 질색을 했지만, 은근히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시각.
자신의 친구가 자신의 집에서 그런 음담패설을 나누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김철수― 아니 이제 백고운이 된 한
남자는 극단 ‘왕국’의 연습실에 서 있었다.
그가 단원들을 휘 둘러보며 인사했다.
“자, 모두 집중.”
“일전에 미리 말했듯, 유명한 감독이 이번에 들어가는 영화가 있다. 그리고 그 영화 주인공을 우리 극단의 배우
중에서 고르고 싶어 하고.”
“유 감독이 구하는 배역은 청소년이다. 성별은 상관없고. 그래서 10 대 중후반인 단원들 대상으로 일종의
오디션을 보기로 했다. 물론 그게 너희들이고. 다른 단원들에게는 너무 안타까운 소식이겠지만, 너희에게는 행운
같은 기회겠지.”
단원들이 모두 ‘네!’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즉흥 연기라는 말에 긴장한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설렘이 더 큰 표정들이었다.
“네!”
“준비한 거 가져와.”
오래지 않아 그는 곧 간이 행거를 돌돌돌 끌고 왔다. 거기에는 색색의 의상이 걸려 있었다. 피터팬 의상이나
백설공주 같은 드레스도 있었고, 하와이안 셔츠나 정장 자켓처럼 비교적 평범한 옷도 있었다.
최호랑이 말을 이었다.
한 단원이 손을 들고 말했다.
“순발력입니다!”
“정답. 그런데 순발력이 있되 센스도 있어야 한다. 일단 담대하게 행동하는 건 좋지만, 기본적으로 센스가
없으면 애드리브가 재미가 없는 법이다. 모두들 작년 월말평가 때 파트너랑 짝 지어서 대본 없는 즉석 콩트를
해본 적 있지? 그때 얼마나 재미없는 극이 많이 나왔는지도 알 거고.”
여기 극단에서 그런 것도 했던 모양이었다. 단원들은 추억을 떠올리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즉, 오늘은 각자 의상을 하나씩 골라 1 인극을 해볼 것이다. 각자의 의상을 토대로 캐릭터와 스토리를 즉석에서
구상해 발표하면 된다. 이것이 이번 오디션의 첫 번째 시험이다. 질문 있는 사람?”
“1 분에서 3 분 정도다.”
단원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생각보다 높은 난이도에 당황한 것이리라.
1-3 분이면 정말 짧고 굵게 핵심만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 안에 나름의 기승전결이 있어야 했고. 멋진
걸 보여주겠다고 너무 욕심을 냈다간 시간이 오버되어 흐지부지 극을 마무리할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단원들과 달리 나는 오히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가벼운 긴장이 불러일으키는 흥분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더 질문 없지? 그러면 앞쪽의 오른쪽부터 앉은 순대로 1 번, 2 번··· 이렇게 간다. 임의 순번이니까 자신의
번호를 외우도록. 자, 1 번부터 나와서 의상을 골라라.”
제일 첫 번째의 사람이 우물쭈물 일어나 의상을 골랐다. 앞의 순번이 된 단원들은 의상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어서 비교적 얼굴빛이 밝았다.
의상은 연극에나 쓸 법한 의상부터 일상에서도 입을 법한 옷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의상보단 소품에 가까운
목도리, 가면, 안경까지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특징이 강한 의상이 메리트가 있을 것 같았다. 이를테면 피터팬 의상 같은 경우 피터팬이란
캐릭터나 스토리가 정해져 있으니까 대사만 구성하면 될 것이다.
소곤거리던 사람들이 뜨끔한 표정으로 입을 합 다물었다. 하지만 최호랑의 말대로 그들이 아주 불리한 것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에 뒷번호 사람들의 표정이 그나마 풀렸다. 대신 앞의 순번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표정으로 머리를 재빨리 굴리기 시작했다.
“······18 번, 19 번, 20 번.”
그리고 20 번이 나와 마지막 남은 의상을 집어가자 행거가 완전히 텅 비었다. 최호랑은 우리를 돌아보았다.
“다 챙겼지? 그럼 바로······.”
반장은 하얗게 질려선 ‘아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디서 내 몫이 누락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원래의 인원이 20 명으로 딱 떨어졌다면 깜빡할 법도 했다.
연습실 공기가 바짝 얼어붙었다. 반장은 입술이 파랗게 질리도록 꾹 물었다. 그러나 그는 괜히 반장이 된 건
아닌지, 제법 빠릿빠릿하게 대책을 말했다.
의상실에 다녀온다고 시간을 지체하면 확실히 즉석연기라 볼 수 없기 때문에 형평성에 어긋날 테고, 그렇다고
다시 싹 걷어서 새로 의상을 선택하게 한다면 지금의 선택에 만족한 단원들은 불만을 가질 것이다.
최호랑이 결심한 듯 물었다.
최호랑의 말에 단원들이 눈짓만 주고받았다. 분명 반장의 잘못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튀어나온 객원
때문에 원래 기존 멤버였던 그가 피해를 보는 것이 약간 본능적으로 마뜩찮은 듯 했다.
“네, 괜찮습······.”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손을 들었다.
나는 최호랑에게 말했다.
“아뇨.”
“······!!”
“좋다. 그러면 객원인 고운이는 상의를 벗는 것을 의상으로 치지. 단, 이번 시험은 그 의상을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의를 벗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도록 즉흥 연기를 해야 한다. 맨몸뚱이라고 해서 마임 연기를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백고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했다.
“네, 알겠습니다.”
1 인극이니 당연히 캐릭터나 스토리를 모두 독백으로 보여줘야 했다. 게다가 소품도 의상 하나로 한정되어 있었고,
심지어 그것을 활용하기까지 해야 했다.
미리 말한 대로 단순히 연기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순발력, 발상력, 연출력 모두를 갖춰야 했다.
19 번은 모범생이란 캐릭터는 있었지만 스토리는 없어서 심심했고, 20 번은 스토리는 있었지만 캐릭터가 보이지
않아 밋밋했다.
캐릭터성과 스토리는 함께 가야 했다. 캐릭터만 있고 스토리가 없으면 안 되었고, 반대로 스토리만 있고 캐릭터가
안 보이는 것도 안 됐다.
제일 좋은 건 스토리에 캐릭터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래야 조화가 어우러지면서 인상적인 연기가 된다. 물론
그게 제일 어려운 연기였지만.
모두들 자신의 발표가 끝났기 때문에 여유롭게 백고운의 연기에 관심을 가질 수 있던 것이기도 했지만―.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연극은 연기 환경이 많이 달랐다. 당연히 발성이나 호흡, 연기 톤과 같은 것들뿐 아니라
각자 잘하는 연기도 달랐다.
최호랑이 떠올릴 수 있는 상상력은 ‘상반신을 드러내고 남성적 야성미를 뽐내며 마당일을 하는 돌쇠 캐릭터’
정도였다.
예상한 그대로를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또 한 번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며 놀라움을 선사할 것인가?
“그래. 알겠다.”
“······.”
“······.”
한참이나 그 상태로 말이 없기에 하마터면 최호랑은 백고운이 연기를 시작했다는 것도 못 알아차릴 뻔했다.
“윽!”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백고운이 커다란 신음을 내며 상체를 크게 들썩였다. 꼭 무형의 채찍에 등을 맞은 것처럼
말이다.
“······!”
‘이것 봐라.’
최호랑은 눈을 반짝 빛냈다.
“읏······.”
아까보다 신음 소리는 작았다. 백고운이 입술을 꽉 깨물고 소리를 참은 탓이었다. 상체도 아까보단 덜 흔들렸다.
최호랑은 백고운의 어깨와 팔의 근육이 긴장으로 바짝 딱딱해진 것을 면밀히 관찰했다. 사람은 다가올 아픔을
예감하면 본능적으로 몸을 굳히는 편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말하자면 이건 돌발 상황이었다.
“윽, 악!”
사람은 다 끝났다고 생각한 시점에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고통을 불시에 받게 되면, 훨씬 당황해 크게 반응하는
법이다. 백고운은 그 연기마저 제대로 보여주었다.
백고운이 팔을 축 늘어뜨린 상태에서 쿨럭쿨럭 기침을 내뱉었다. 그가 밭은 숨을 하아, 하아, 내뱉더니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땀에 젖은 그의 얼굴이 보였다.
“대한··· 독립······.”
정적이, 말 그대로 압도적인 정적이 연습실에 내려앉았다. 모두가 백고운의 연기에 얼어붙었다.
“좋아, 그만.”
최호랑은 끝을 알렸고, 백고운은 그제야 후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이마와 상반신엔 땀이 흥건했다.
게다가 그의 연기는 최호랑이 의도했던 것과도 부합했다. 의상을 활용한 1 인극을 구상하는 것. 고문 받는 장면을
연출했으니 상의를 헐벗은 게 당연했다.
“무슨 일인데요?”
“왜, 왜. 뭔데?”
나와 이초희도 옆에서 고개를 들이밀어 화면을 봤다. 기사들 중 마지막 기사의 헤드라인이 썩 좋지 못했다.
“아니, 이게 뭐야?!”
표류와 이초희 둘은 ‘기레기는 정의의 철퇴를 받아야 한다’며 척척 죽이 맞더니, 갑자기 의기투합해서 기사의
댓글을 내 칭찬으로 도배해 버릴 거라며 팔을 걷어붙였다.
그런데 기세 좋던 둘이 멈칫했다.
“그래요?”
[GV 갔던 사람인데 그 상황 다 직접 봤거든요. 기사가 좀 왜곡된 부분이 있네요 ㅎ; 실제로는 백고운 배우님
되게 부드럽고 정중하게 거절했어요. 연기도 정말 잘하셔서 놀랐는데 어쩜 생각도 그리 깊은지. 정말 멋졌고,
덕분에 팬 됐습니다. 앞으로도 응원할게요^^]
“나 쫌 감동.”
나 역시 옛날에 얼굴에 화상을 입어서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타인의 장애를 가지고 포즈 운운
하는 기자의 말에 욱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분하게 얘기하긴 했지만 나도 모르게 비꼬는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뭐, 물론 금방 정신을 차리고
예의바르게 거절하는 멘트를 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초희가 쯧쯧 혀를 찼다.
“연친놈? 그게 뭐에요?”
이초희가 끼어들었다.
“네, 좋아하죠. 감각적이고, 영상미가 있잖아요. 그리고 뭣보다 유명한 감독은······ 유명하잖아요.”
나는 중얼거렸다.
고무공 연기
17.
앞에 나선 최호랑이 말했다.
단원들의 눈이 반짝였다. 아무래도 모두가 같은 소품으로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평성이 더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발표순서는 상관없다. 먼저 아이디어가 생각난 사람은 먼저 나와서 연기를 보여주면 된다.”
누군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러자 단원들의 얼굴에 살짝 낭패감이 스쳤다. 생각보다 추상적인 소품이라 당황한 것 같았다.
최호랑이 우리를 휘 둘러보며 물었지만, 단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서 묘한 일이 일어났다. 어째서인지, 단원들이 하나같이 나를 흘금거리더니 종래엔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린 것이었다.
으응?
“고운이가 해 본다고?”
“네,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콧노래를 흥겹게 허밍하며 내 앞에 있는 고무공을 신기하고 재밌다는 듯 쳐다봤다. 그리고 즉석으로 떠오른
대사를 내뱉었다.
아마 내 시도가 신선하게 보이긴 할 것이었다. 하지만 최호랑은 공으로 연기를 하라고 했지, 그 공을 ‘진짜
공’으로만 국한해서 연기하란 말은 없었다.
“나비야, 우리 밖에 나가 산책할까?”
“엇!”
나는 진짜로 고양이가 내 품에서 뛰쳐나간 것처럼 당황해 소리쳤다. 공은 내 품에서 벗어나 바닥에서 떨어졌고,
바닥에 부딪히자마자 탄성 있게 위로 튀어 올랐다.
나는 그것을 잡으려는 시늉을 하면서 공이 어깨 너머로 넘어가도록 했다. 마치 고양이가 내 품에서 계속 벗어나
폴짝 폴짝 뛰는 모양새로 말이다.
“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공을 손등과 팔을 타고 반대편 쪽으로 넘겼다. 리듬체조 선수가 볼을 가지고 놀면서 유연하게 몸을
움직이듯, 나 역시 공을 팔등이나 가슴팍 그리고 등으로 몇 번 흘려보냈다. 고양이가 몸을 타고 요리조리
움직이는 것처럼.
“어, 어······!”
나는 아래로 빠르게 낙하하는 공을 품에 받으면서 뒤로 풀썩 넘어졌다. 위에서 떨어진 고양이의 무게를 못 이기고
나동그라진 것처럼.
양 팔로 X 자를 그리듯 공을 꽉 끌어안았다.
“······.”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러나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용히 한 손으로 공을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나는 다정히 키득거렸다.
그가 고무공 연기를 시작했을 때 민하나는 머리 위에 번개가 내리꽂힌 듯한 충격을 받았다. 공으로 고양이를
표현하다니. 자신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발상이었다.
그리고 공을 튕기거나 던지거나 하면서 연기하는 방식. 공이란 소품 자체가 활동성을 특징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슬랩스틱 코미디 연기를 보여주기가 편했다.
그리고 민하나는 그 두 가지 모두를 배합한 연기를 할 생각이었다.
이 구상에서 공은 일종의 성차별을 나타내는 상징이 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 공을 차면서 연기할 셈이니 활동적인
느낌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녀는 자신의 구상이 제법 마음에 들었고 즉흥적으로 떠올린 것 치곤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백고운은 고양이와 기 싸움하는 어린아이를 연기했는데,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표정을 놓치지 않고 연기하는
동시에 고양이의 움직임 또한 놓치지 않고 훌륭하게 재현해냈다.
특히 마지막에 백고운의 품으로 뛰어드는 고무공은 순간적으로 정말 고양이처럼 보였다. 민하나는 제가 환각을
봤나 싶어 눈을 비볐을 정도였다.
그리고 심지어 그는 본능적인 스토리텔링 센스도 갖추고 있었다. 공, 그러니까 고양이를 받아낸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곧바로 깔깔 웃거나, 투덜거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부러 죽은 척 휴지(休止)를 주어 극의 긴장감을 끌어 높이고, 인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게
만들도록 했다. 그는 관중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법을 태생적으로 아는 듯 했다.
단장인 최호랑은 엄격한 만큼 어지간하면 모두가 있는 앞에서 좋은 소리를 내뱉지도, 만족한 표정을 짓지도 않는
편이었다.
덕통사고
18.
“그게 뭐야?”
“영화야. 못 들어봤어?”
“어. 유명해?”
“웬일? 너 영화 좋아했냐?”
“실은 저번에 남친이랑 영화관 갔는데 시간대가 맞는 게 없더라고. 저번 주에 개봉한 <김종욱 찾기> 그건
관객석이 꽉 차서 볼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냥 아무거나 자리 널널한 거 보려고 들어갔지. 근데 그게 <운명의
표현> 그 영화였어. 독립영화인데, 뭐라더라, 어디 영화제에서 상 받았다고 하더라고. 근데 진짜 재밌더라.”
“으응···.”
솔직히 말하면 송정열은 심드렁했다. 친구의 조잘거리는 말에 형식적인 대꾸를 하긴 했지만, 관심도 없었고
흥미도 없었다.
송정열 그녀는 이름만큼 정열적인 삶을 사는 여자였다. 그 정열을 바치는 대상이 다름 아닌 연예인이긴 했지만.
하지만 그녀는 떳떳했다. 원래 덕질은 성인이 되어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다. 돈도 있겠다, 통금도 없겠다.
그것만큼 연예인 좋아하기 좋은 환경은 없다.
“······근데 주인공 맡은 배우가 딱 정열이 네가 좋아하게 생겼더라고. 게다가 인터넷 찾아보니까 미담도
많더라고. 어떤 기자가 막 무례한 질문 했는데, 그 배우가 아닌 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더라. 멋지지 않아?
난 연예인 별로 관심은 없지만 이런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더라.”
“연예인 인성 좋아봤자 소용없어. 난 이제 그런 거 안 믿기로 했어. 앞에서 팬들한텐 다정해도 뒤에서 거지같이
구는 사람이 세상에 많더라고.”
“뭐?”
“그리고 친구야 미안한데 난 이제 연예인 안 좋아할 거야. 내가 또 팬질하면 송정열이 아니라 개다, 개.”
갑자기 평소와 다르게 돌변한 송정열의 태도에 친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송정열은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너 그 라면 다 익지 않았을까?”
친구는 컵라면에 물을 부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송정열이 3 분이 넘었을 거라 알려주자 친구가 ‘아, 그러네’
하면서 그제야 주의를 돌렸다.
그런데 그때, 친구 놈이 손이 미끄러졌는지 컵라면을 들다가 떨어트렸다. 바닥으로 컵라면이 떨어졌고, 식겁한
친구는 몸을 재빨리 뺐다.
“읏!”
“괜찮으세요?”
사고를 쳐도 제대로 친 친구가 울먹거리며 알바생에게 연신 사과했다. 친구는 차마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정말 죄송해요.”
“뭘요. 이게 제 일인 걸요.”
“어······?”
배우? 친구의 말에 송정열의 귀가 쫑긋 반응했다. 그녀는 짐을 챙기고 있다가 고개를 훽 돌려 알바생을 쳐다봤다.
‘배우라고? 얼굴은 낯선데. 뭐지, 무명인가? 아니, 백 프로 무명이지. 그러니까 편의점 알바를 하는 거겠지.’
그가 뒷머리를 긁으며 머쓱하게 웃자, 단번에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곱상하게 생겼는데 웃으니까 인상이 훨씬
귀여워졌다.
‘좀······ 괜찮네.’
빠순이로 오랫동안 살아온 송정열에게 팬이 되느냐 아니냐 하는 건 그만큼 아주 까다로운 기준을 요구했다.
아무렴, 자신의 온 열정을 바치는 일인데 함부로 결정하고 그럴 수야 없었다.
팬이 된다는 건 단순히 김치찌개를 좋아한다는 것처럼 취향의 문제도 아니었고, 점심식사로 김치찌개를 먹겠다는
결정처럼 쉬운 사안도 아니란 소리였다.
“여기서 일하세요?”
“앗, 저 그럼······.”
그때, 뒤에 멀뚱멀뚱 서서 기다리고 있던 송정열이 그런 친구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리고 하지 말라고 친구에게
눈치를 줬다.
송정열에게도 나름의 철칙은 있었다. 배우나 아이돌의 사생활 공간에서는 사진이나 싸인을 요구하지 말 것. 그게
개념 있는 팬이라면 지켜야 할 일종의 도리였다.
“왜?”
백고운이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친구가 먼저 편의점을 나갔고, 송정열도 뒤따라 나가려 할 때였다.
“아, 저 잠시만요.”
“네?”
‘어? 나?’
“······.”
어딘지 얼빠진 송정열의 모습에 친구가 그녀의 이름을 재차 불렀다. 그때 그녀가 친구의 말을 끊고 멍하니 물었다.
“어?”
“어?”
“뭐?!”
자신의 친구는 며칠 전에 그 영화를 봤다고 했다. 그러니 벌써 내려가진 않았을 것이다. 독립영화라니 상영관이
적긴 하겠지만, 그거야 수도권 내에 있으면 지하철 타고 찾아가면 되니까 별 문제는 아니었고.
“뭐? 대체 무슨 소리야?”
“나 저 배우한테 빠진 것 같아. 심장이 움직였어. 확실해. 인성도 좋고, 페이스도 좋고. 연기도 잘하겠지?
궁금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지금 바로 확인하러 가야겠어.”
그러나 송정열은 벌써 지하철 쪽으로 성큼성큼 가고 있었다. 친구가 그녀의 뒤에다가 대고 소리쳤다.
휑한 거리에 친구만이 홀로 남았다. 친구는 갑자기 휘몰아치듯 벌어진 이 사태에 어리벙벙한 듯 눈을 끔뻑거렸다.
이 개새야······.
몸을 쓰는 연습
19.
그래도 표류는 영화 관계자들에게 눈도장을 톡톡히 찍었고, 나 역시 덕분에 최호랑의 눈에 띄어 오디션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이초희의 말대로 <운명의 표현>이 극장에 걸리니까 알아보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주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아주 가끔 있는 정도였는데, 아르바이트 하는 편의점에서 누가 날 알아본 건 처음이었다.
‘팬이라.’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찬찬히 읽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어느새 다시 연기를 하고 싶어졌다. 그래, 7 년 동안
연기란 꿈을 놓지 못했던 이유에는 어느 정도 팬의 존재 때문도 있었다.
문득, 나는 생각했다.
“점장님!”
아주 빈말은 아니었다. 점장님은 내 사정을 많이 봐주셨고, 어린 학생이 건실하다며 이것저것 살뜰히 챙겨주셨고,
뭣보다 돈을 넉넉하게 주셨다.
돈 떼먹는 점주도 심심찮게 있는 게 이 바닥인데, 점장님은 최저시급을 살짝 웃도는 월급을 늘 정확한 날짜에
입금해주셨다. 덕분에 고시원 방세를 안 밀릴 수 있었고.
하지만 이제는 당장의 생활비가 급하지 않았다. <운명의 표현>이 상을 받으면서 표류가 인센티브 개념으로 조금
떼어준 몫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최호랑의 오디션이 막바지로 치달아가면서 하루를 통으로 빼야 하는 일이 많아졌다. 연기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기로 했다.
“아하하, 감사합니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점장님은 한사코 더 괜찮다 했다. 그래서 결국 유니폼을 벗고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내게 지지를 보내주시는 고마운 분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절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극단 ‘왕국’의 연습실.
점장님의 배려로 평소보다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시간이 남았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옆얼굴에 닿는
은근한 시선들이 따끔따끔했다.
“······?”
연기를 계속 하다보면 주위에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도 생기지만, 반대로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생기는 법이다.
고개를 돌리자 꽁지머리를 한 여자가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소개했다.
“아, 안녕하세요.”
“네?”
나는 살짝 당황했고, 그녀 역시 당황했다.
“아, 아니에요.”
나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이렇게 솔직한 타입은 좋아한다. 게다가 열심히 하려는 사람은 언제나 보기 좋은
법이다.
“네, 그럼요. 호흡, 발성 등등······ 그런 기본적인 것들은요. 하지만 고운 씨처럼 그렇게 즉흥 연기를 막 잘
하지는 못해요. 뭐가 문제일까요?”
아웃풋의 퀄리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아웃풋이 탁월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재능의 영역이고.
배우에게 몸을 사용한다는 건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배우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인격이 되는 일이었다.
당연히 사람마다 몸을 쓰는 게 다른 법이다.
누군가는 느리게 걷고, 누군가는 빠르게 걸으며, 누군가는 어깨를 움츠리고 걷고, 누군가는 펴고 걷는다. 사람의
성격은 몸에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배우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꾸며낼 수 있어야 했다.
액터 스쿨에 다니면서 화상 입은 사람처럼 얼굴을 반쪽만 움직이는 연습이라거나, 팔다리를 꺾어 좀비처럼 보이는
연습 같은 것도 했었다. 눈알을 따로 움직이는 시각 장애인 연기도 그때 배운 것이었다.
“몸을 쓰는 연습이요······.”
한편 추상적이라 느껴졌는지 민하나가 말을 흐렸다. 나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줬다.
“제 귀 한 번 보시겠어요?”
“예를 들자면 이런 거예요. 몸의 근육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 연습하란 뜻이었어요. 하다보면 물론 이런 것도
가능하게 될 거구요. 그러면 어떤 배역을 하든 훨씬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져요.”
“하하, 네. 응원할게요.”
‘벌써 저런 걸 알다니.’
당장 발상력은 떨어지더라도 몸을 사용하는 연습을 지금부터 해놓은 배우들은 기초가 되기 때문에 나중에 언제든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
실력이 월등한 사람을 만나면 당연히 열등감이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열등감에 매몰되면 절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법이다.
하물며 이 바닥에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다. 계속 연기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실력 좋은
사람들을 계속 마주치게 된다. 그때마다 매번 시기와 질투로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부을 순 없는 법이다.
최호랑은 그런 면에서 민하나를 높이 쳤다. 원래도 제법 연기를 잘하는 야무진 친구였는데, 더 높이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집합!”
벌써 오디션이 3 주나 지나갔다. 몇몇은 지친 듯 했지만 여전히 의욕을 보였고, 몇몇은 다 포기한 듯 얼굴이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흰 천 연기
20.
“오늘은 저번에 이어 지정 소품으로 즉흥 연기를 할 것이다. 오늘의 지정 소품은 바로 이 천이다.”
최호랑은 말을 이었다.
“규칙은 저번과 똑같다. 하고 싶은 사람이 먼저 나와서 보여주면 된다. 소재는 겹쳐도 되지만, 되도록 겹치지
않는 쪽으로 노력해주고.”
“네? 아, 네. 알겠습니다.”
비록 백고운이 에이스란 건 이제 거의 기정사실되긴 했지만, 그래도 나머지 단원들의 연기도 제대로 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일부러 백고운의 차례를 가장 뒤로 미뤘다.
“자, 먼저 할 사람?”
다들 저번에 백고운이 공으로 고양이를 표현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품이 꼭 그 소품 그 자체만으로 한정될
필요가 없다는 걸 이미 자신들의 눈으로 봤다.
그들은 주로 천을 몸의 어딘가에 묶거나 걸치면서 소품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단원들이 상상력을 발휘할
때마다 천이란 단일한 소품은 무궁무진하게 모습을 바뀌었다.
모두 전반적으로 저번보다 개성적인 발상을 보여주었다. 소재가 겹쳐도 된다고 했는데 하나도 겹치지 않았다.
단원들도 스스로의 연기에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백고운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선 즐겁게 연기를 감상하고 있었다. 가끔은 소리 죽여 박수를 소심히 치는 것이,
가식이 아니라 정말로 단원들의 연기를 즐기는 듯했다.
‘진짜 물건이군.’
“자, 그럼 마지막.”
“뭐지?”
“아뇨,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 확실히 마지막에 하라고 고운이만 예외적으로 순번을 고정시킨 건 불리하긴 했지. 어떡할까. 형평성에
맞게 하려면 고운이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나?”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지. 여러 개 하고 싶다면 여러 개 해도 좋다. 대신 앞에 나왔던 소재와 하나라도 겹치지
않아야 한다. 가능하겠지?”
“네, 알겠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헛차헛차’ 스트레칭 했다. 그가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더니 손을 바닥에 문질렀다.
그리곤 손바닥을 치면서 모래 터는 시늉을 했다.
그가 일순간 몸을 젖히듯 일으키며 허공의 줄을 꽉 잡아당겼다. ‘땅’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환청으로 들리는
듯 했다.
“영차, 영차!”
단원들은 ‘역시 잘하네, 쟤’하는 투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최호랑은 표정 없이 담담히 팔짱만 꼈다.
표현력 자체는 좋았다. 그러나 딱 그것뿐이었다. 백고운의 방금 연기엔 캐릭터도 없고, 스토리도 없었다. 딱
단편의 이미지만을 가져와 재현해냈다. 다른 단원들과 비슷비슷한 방식이었다.
‘게다가 너무 짧아. 1 분이나 됐나? 아무래도 여러 개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시간을 타이트하게 잡은
모양이군. 차라리 한 가지만 택해서 더 길게 보여줬다면 더 나았을 텐데. 욕심이 너무 컸어.’
그리고 자켓 카라를 양 손으로 탁탁 잡아당기며 씩 웃었다. 그리고 자켓의 아랫부분을 손으로 펄럭이면서 몸을 훽
돌렸다.
‘설마······.’
그리고 백고운이 세 번째 연기를 이어 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백고운의 의도를 완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백고운은 흰 천을 팔에 완장처럼 묶고선 어둑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건 뚜렷한 하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상주(喪主)의 모습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구나···. 내가 학교에 입학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내 아들이 입학하더니,
이제는 내 손주가 입학할 나이가 되다니······. 인생이 참으로 한 순간이야. 너무 빨리 지나가. 무상할 정도로.
하지만······.”
정적이 내려앉았다.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
단원들은 꿈에서 깬 표정들을 했다. 연극을 보던 관객들이 막이 내려왔을 때 비로소 무대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장면에 알맞게 흰 천은 백팀을 상징하는 끈이 되었다가, 넥타이가 되었다가, 상주 완장이
되었다가, 죽음을 상징하는 수의가 되기도 했다.
‘놀라워, 정말 놀라워.’
가장 마지막에 발표를 시키면 핸디캡 때문에 수준 낮은 연기를 보여주지 않을까 했던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래, 백고운이 보여준 건 아마추어의 발표라기보다는 프로가 보여주는 하나의 짧은 시범 연극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무언가를 결심했다.
몰입력 테스트
21.
“백고운, 잠깐 나 좀 보고 가지.”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최호랑은 본능적으로 예감할 수 있었다. 이번 시기가 지나면 백고운에게는 온갖 러브콜이 쏟아질 것이다. 그때
잡으려 하면 놓친다. 그 전에 먼저 이 탐나는 인재를 선점해야 했다.
그리고 최호랑은 이 정도는 말을 꺼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연이 물론 영화나 드라마만큼 대중적 파급력이 세진
않지만, 내년 말에 올릴 공연은 극단 왕국의 50 주년 공연으로 매우 특별하게 기획하고 있는 공연이었다.
게다가 백고운이 최종적으로 유명한 감독의 눈에 든다면(사실 반쯤은 이미 거의 확신하고 있긴 하지만), 최호랑이
그 중간에 다리를 놔준 공도 있지 않은가. 그 캐스팅 디렉터 값으로 이 정도의 이익은 취하려 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었다. 백고운이 거절한다면 최호랑도 깔끔하게 물러날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최호랑은
덧붙였다.
“그래, 고맙다.”
최호랑은 만족스레 웃었다. 내년 말이면 아직 멀었지만, 벌써부터 백고운과 함께 할 공연이 기대가 되었다.
*
“그래서, 오디션 보다가 공연 캐스팅 제의까지 받았다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셋은 지금 표류의 자취방에 모여서 도란도란 과일을 나눠먹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 어느새 내일이 마지막 시험이었는데, 표류와 이초희가 응원해줄 겸 찾아온다고 그랬다.
그런데 내가 있는 고시원은 방음도 안 되고 손님을 초대할 여력도 안 되어서 대신 표류네 집에 모인 것이었다.
“팬들이요?”
“이거 혹시 두 분 중 한 명이 만든 건 아니죠?”
“우리가 아무리 고운 씨 팬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기엔 우리가 좀 낯부끄럽지 않겠어······? 우리 아니야.
우리 영화 보고 고운 씨 팬 된 사람이 만든 거야. 봐봐, 매니저란 이 분. 벌써 우리 영화만 7 번 봤대.”
“어, 그러네요.”
나는 멈칫했다.
정열을 바치다 할 때 그 정열인 것 같은데, 어쩐지 이름처럼 느껴지는 게 어디서 비슷한 이름을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뭘요, 우리 사이에.”
“야! 고운 씨 오해하잖아!”
“아하하.”
“고운 씨, 초희 좀 말려 줘요!”
“어디가, 이리 안 와?!”
아, 이 딸기 진짜 맛있네.
최호랑은 앞에 서서 말을 꺼냈다.
그가 잠시 텀을 둔 뒤 말을 이었다.
“네!”
“좋아.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배역에 얼마나 몰입할 수 있는지, 몰입력이 얼마나 좋은지 테스트하는 시험을 할
거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당연히 높아야 하지. 두루두루 파악하기 위한 거라 생각하면
된다. 자, 모두 이쪽으로 오도록.”
최호랑은 우리를 데리고 연습실 반대편으로 향했다. 거기엔 매트리스와 테이블, 그리고 소품 따위가 있었다.
연습실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것들이 이미 거기에 세팅되어 있기에 뭔가 싶었더니, 시험을 위한 간이 세트장이었나
보다.
“너희들에게 생소할지는 모르겠지만, 1960 년대에 장 뤽 고다르나, 프랑수아 트뤼포와 같은 프랑스 감독들이
있다. 그 감독들은 실험적인 영화를 많이 찍었는데, 특히 배우들에게 즉흥적으로 연기를 시켜서 그것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400 번의 구타>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교도소 심리분석가에게 질문을 받는데, 실제로 감독은
그 주인공을 맡은 배우에게 질문 내용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배우는 오직 그 배역의 입장에서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한 거지.”
“거기에서 착안해서 오늘의 시험을 짜 봤다. 오늘은 모두 한 명씩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될 거다. 내용은
간단해. 그저 자신이 맡은 배역에 몰입해서 무대에 있으면 된다. 시간은 10 분 정도. 그때까지 그 인물로
버티기만 하면 통과다.”
“······!!”
그런데 무대 위에서 호흡을 맞추는 배우로 마주한다? 그것도 애드리브로만 상대해야 한다고? 기 안 눌리고 대사를
내뱉을 수나 있으면 다행일 것이다.
“참, 오늘은 마지막 시험이니까 카메라로 기록도 할 거다. 저쪽에 있는 카메라 보이지? 그런데 카메라를
의식하지는 말고. 오늘은 너희가 얼마나 배역에 몰입할 수 있는지를 보는 거지, 얼마나 극을 짜임새 있게
이끌어갈 수 있는지 연출력을 보는 건 아니니까.”
의식해야 할 시선이 있으면 당연히 부담감이 높아지고, 배우가 연기에 집중하기도 어려워진다.
최호랑이 의도한 건 그것이었다. 일부러 방해물을 많이 갖다 놓은 상황에서 얼마나 잘 배역에 몰입할 수 있는지
보려고.
‘일부러 의식할 만한 부담감은 팍팍 주고, 그러면서 의식하지 말라고 강조하시다니. 오늘은 난이도가 높네.’
하지만 나는 연기에 한해선, 난이도가 높을수록 승부욕이 불타는 편이었다. 흥분으로 벌써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최호랑이 앉아있는 단원들 사이로 걸어가며 주머니를 내밀었다. 단원들은 거기에 손을 집어넣고 뒤적거리며
쪽지를 하나씩 뽑았다.
“너 뭐 뽑았어?”
“나 조울증. 너는?”
[강박증]
나는 그 단어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럭키. 좋은 걸 뽑았다.
스승과 제자
22.
“모두 뽑았지? 생소한 병명도 있을 테니 각자 검색하고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뭘 뽑았지?”
“실어증입니다.”
“좋아. 준비 됐나?”
“네.”
“강일운, 지금 몇 시지?”
“네?”
“······!”
그리고 그건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너무도 간단하게 벌어진 사태에 모두가 숨을 헉 죽였다. 최호랑이 눈썹을
꿈틀했다.
모두들 그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이 시험이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살벌하단 걸 말이다.
최호랑은 단원들의 연기에 개입할 때마다 매번 단원들의 허를 찌르는 대사를 뱉거나 행동을 했다.
몇몇 단원들은 자신의 설정을 잊지 않고 반응했으나, 몇몇 단원들은 당황해 자신의 설정과 모순되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물론 최호랑은 일부러 그걸 노리고 의도적으로 대사를 치는 것이었다. 모두 그 방식을 알았기에 후반부로 갈수록
남아 있는 단원들은 더욱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순서는 어느새 백고운 근처까지 다가왔다. 민하나가 백고운보다 앞이었기에 먼저 앞으로 나갔다.
“네.”
그가 대답하며 일어섰다.
“뭘 뽑았지?”
“강박증입니다.”
“쯧.”
그는 깐깐한 표정으로 눈을 찌푸리더니 협탁 위에 놓인 휴지를 뭉텅으로 뽑았다. 대부분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그는 휴지 몇 장으로 협탁 위를 닦기 시작했다.
그는 홀로 중얼거리며 한참이나 청소에 열중했다. 일단 무대에 들어가자 배역에 완전히 몰입한 듯 주변은 신경
쓰지 않는 태도가 아까의 민하나랑 비슷했다.
백고운이란 배우는 언제나 자신의 예상을 보기 좋게 배반하고 훨씬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만다는 걸.
“고운아!”
그러자 백고운이 최호랑을 돌아보았다. 그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먼저 아는 척 하지도 않고 신중히
최호랑의 다음 대사를 기다렸다.
그러니까 이건 최호랑이 다른 단원들에게 했던 것처럼 허점을 찌르려 한 공격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백고운은
진짜 배역에 완전히 몰입한 것처럼 모순되지 않은 행동을 보여준 것이었고.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하지만 이건 가상의 설정이었고, 최호랑은 그저 갈등 상황을 만들어보려는 것이었다. 갈등이 있어야 배우들 간에
대사와 행동이 오고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백고운이 최호랑을 빤히 보더니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최호랑을 붙잡더니 그의 셔츠를 직접 쑤셔
넣기 시작했다.
“······!”
그래.
‘허, 이거 진짜 놀라운걸.’
그러나 최호랑이 밀린다고 밀리는 호락호락한 사람이었다면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좋아, 해보자고.’
최호랑은 눈을 빛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들은 더 이상 스승과 제자가 아니었다. 같은 무대에 올라선 동등한 배우일 뿐이었다.
때마침 백고운이 최호랑의 소매를 내리고 셔츠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가 만족스러운 듯 ‘후’ 숨을 내쉬며 몸을
떼었다.
백고운이 경악했다.
“이게 아빠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아빠가 널 괴롭히려고 이래? 어? 다 널 위해서 이러고 있는 거지!”
“아악!!”
그가 사자후를 토해내더니 길길이 날뛰며 최호랑의 몸을 강하게 밀쳐댔다. 그 힘이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기에,
최호랑 역시 이를 악물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힘겨루기의 승자는 결국 백고운이 되었다. 최호랑이 이불을 실수로 놓쳤고, 백고운이 그 사이에 그것을 확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그는 금방 돌아왔다.
이번의 힘겨루기의 승자는 최호랑이었다. 백고운은 포로처럼 팔과 다리가 묶였고, 최호랑은 땀으로 푹 젖은 몸을
일으켰다.
하아, 하―.
헉, 헉―.
백고운은 붉어진 눈을 부릅뜨곤 최호랑을 노려보았다. 증오에 찬 그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연기라지만 확실히
오싹한 모습이었다.
‘음, 여기까지인가.’
해수 오디션
23.
“······!”
그 시선의 중심에 있는 백고운은 다른 사람이 지켜보건 말건 아랑곳 않고 자신의 행위에만 집중했다. 울고 있다가
문득 장판의 먼지를 발견하고, 금방 거기에 신경이 팔려서 다시 청소에 집중하게 된 것 같았다.
최호랑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내가 졌군.’
그러나 배우가 아니라 진짜 청소 강박증 환자의 눈으로 보기엔 바닥의 장판의 먼지라도 거슬릴 수 있는 법이었다.
그래, 백고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본인 자신이 아니라 인물로서 행동했다. 그것도 완벽하게.
“좋아, 그만.”
최호랑은 비로소 연기의 종료를 알렸고, 백고운도 행위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끝났나요?”
“그래.”
“수고했다.”
“단장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최호랑은 깨달았다.
그건 무대에 올라간 배우들이 막이 끝나고 내려왔을 때, 동료 배우들에게 느끼는 전우애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런데 설마 이 기분을 이렇게 오랜만에, 그것도 이렇게 어린 친구와 연기의 호흡을 맞춘 것으로 다시 느껴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정말 못 당해내겠군.’
최호랑은 스승이었지만, 그 이전에 연기자였다. 오랜만에 연기자로 연기를 해서 그런가. 오늘은 백고운에게
가벼운 질투가 들었다.
그럼에도 자못 유쾌한 것이, 제법 후련하게 즐거운 기분이었다. 최호랑은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충무로의 어느 영화 제작사.
신선한 마스크 중에 그런 사람을 구하고 싶어 일부러 공개 오디션을 열고, 또 최호랑에게 부탁해 연극판 쪽에서도
수소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가다가는 결국 기성 배우 쪽에서 타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고작 두 명이라고 실망하지는 않았다. 최호랑은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최호랑의 안목은 워낙
엄격해, 그가 선별한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조감독은 책상에 노트북을 내려놓았다. 스페이스 바를 누르자 화면에 영상이 보였다.
최호랑의 시험 형식이 독특해서 첫째로 놀랐고, 즉흥극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두 후보의 연기가 괜찮았기에
둘째로 놀랐다.
똑똑.
“유 감독님!! 이게 얼마만이야.”
“아, 기 배우 왔어?”
“에이, 당연히 유 감독님이 부르는 건데 와야지. 게다가 보내준 시나리오랑 기획의도도 좋고. 근데 이거 진짜로
찍을 수 있겠어? 상당히···.”
기태성은 말을 골랐다.
기태성은 손사레를 치면서도 빙그레 웃었다. 저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인 줄은 알지만 확실히 기분은 좋았다.
배우로서 유명한은 같이 작업하기 까다로운 감독은 아니다. 사람도 좋은 편이었고, 현장에서 배우를 혹독하게
굴리는 타입도 아니었으니.
내용도 좋았고, 실험적이긴 했지만 재밌을 것 같았다. 게다가 뭣보다 주연 롤이다. 기태성이 바로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호오―.”
이건 좀 의외였다. 하기야 유명한 감독의 이름값에, 기태성 자신의 이름값도 있으니 상대역 한 명쯤은 신인이어도
괜찮을 것이다.
“둘 다 반가워요.”
유명한은 말했다.
“아주 간단하게 줄거리 설명을 하자면, ‘래원’이라는 형사가 10 년 만에 유괴범의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쫓아 도착한 산 속 컨테이너에서 10 년 전 납치된 ‘해수’라는 아이를 발견하게 돼요. 래원은
유괴범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해수와 함께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해수는 래원과 함께 지내면서 점점 인간
생활을 배우고, 그러면서 한발 성장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에요.”
과제의 실마리
24.
민하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백고운과 나란히 뽑힌 것은, 자신이 그와 비슷하게 연기력이 높아서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민하나에겐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가수가 꿈이라 연습생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다이어트 압박을 심하게 받았는지 어느 순간 거식증 때문에 힘들어 했었다. 물론 지금은 연습생을 그만두고 치료
받아 다시 건강하게 나아졌다.
민하나는 그 친구가 거식증을 앓았을 때의 모습을 지켜봤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 시험에서 비슷한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요령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뭣보다 ‘해수’라는 캐릭터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막상 봉사하러 와보니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는 노동이 대부분이라 한가롭게 연기에 대해서 생각할 틈이 없었다.
“네!”
그녀는 원장님이 건네준 개밥을 들고 뒷마당으로 나갔다. 몇몇 봉사자들이 개들과 함께 있는 게 보였다. 민하나도
막 그들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컹, 컹!
민하나는 깜짝 놀라 움찔 멈춰 섰다.
“밥 주러 온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봉사자들이 민하나가 들고 온 개밥을 건네받았다. 그녀가 고개를 꾸벅이곤 다시 컨테이너 안으로 돌아왔다.
원장님이 벌써 끝냈냐고 놀라기에 민하나는 방금의 일을 설명했다. 그러자 원장님이 아하, 하고 웃었다.
“네?”
“그렇군요···.”
“네, 그럴게요.”
원장님은 안쪽에서 포메라니안 한 마리를 데려와 목줄을 민하나에게 건넸다. 그 개는 약간 낯을 가리는 듯 했지만,
짖지는 않았다.
“쫑이에요. 성대수술 받아서 짖지는 못 해요. 가정집에서 자란 것 같은데 국도변에 버려져서 떠돌고
있더라고요.”
안 짖는 게 아니라, 못 짖는 거였구나. 괜히 더 안쓰러웠다.
민하나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쫑이가 낑낑거리며 몸을 바짝 움츠렸다. 그녀는 그제야 쫑이가 도로에 유기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민하나는 덜덜 떠는 쫑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나 쫑이는 오히려 그녀의 손길을 위협이라
생각했는지 그녀의 손을 콱 물었다.
“윽.”
아직 몸집이 작아서 크게 아프진 않았지만, 따끔하긴 했다. 그녀는 신음을 삼키며 잠시 참았다.
가만히 기다리자, 오히려 쫑이가 민하나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슬쩍 벌렸다. 그리곤 얌전해져서 제가 깨문 상처
자국을 혀로 삭삭 핥았다.
민하나는 그렇게 잠시 쉬는 시간을 갖다가 ‘이제 돌아갈까?’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는 왔던 길 대신, 좀 더
멀리 돌아가지만 차가 안 다니는 인도 길을 택했다.
어느덧 길었던 해가 저물고, 봉사가 끝나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민하나가 원장님에게 막 헤어지는 인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근처에 쫑이가 들어가 있는 우리가 있었는데, 철조망 근처로 쫑이가 다가왔다. 그리곤 민하나를 올려다봤다.
민하나는 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과 달리 이제는 그녀가 손을 뻗어도 놀라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쫑이가 유순히 민하나의 쓰다듬을 받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게 꼭 인간으로 따지자면 잘 가란 듯한 손짓 같았다.
처음엔 그렇게 겁먹고 두려워했던 애가 한나절 같이 있었다고 이렇게 마음을 연 게 뭐랄까··· 뭉클하고 그랬다.
“다음에도 꼭 올게요.”
“그래요. 또 봐요.”
원장님이 사람 좋게 민하나와 다른 봉사자를 배웅했고, 민하나는 시내로 돌아와 돌아갈 차편을 구했다.
원래는 ‘해수’라는 인물을 어떻게 연기할지 힌트를 얻기 위해 유기견 보호센터에 봉사하러 온 것이었다.
민하나는 뒤늦게 오늘 있었던 일을 반추했다. 대형견이 짖어서 그녀가 놀랐던 것. 그리고 소형견인 쫑이와 함께
산책 갔던 것. 그리고 쫑이가 경계하다가 나중에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
‘······잠깐만.’
그리고 그 시각.
“잘 가, 고운 씨.”
민하나가 유기견 보호센터에 갔다는 걸 몰랐지만, 나 역시도 과제를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며칠 전에 주변에 개를 키우는 사람이 있느냐 물었고, 다행히 이초희는 자신이 리트리버를 키운다고 했었다.
오늘은 바로 그 개를 구경하러 왔다. 그리고 지금은 이제 돌아갈 참이었다.
유명한이 간단히 카메라 화면을 체크하고 있는데,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감독이 문득 물었다.
그러나 유명한은 일부러 그것을 공개하지 않았다. 백고운과 민하나에게는 물론, 기태성에게도 미완성 버전인
러프한 시나리오만 보여줬을 뿐이었다. 왜냐면―.
“어떤 걸 보여줄지 궁금하잖아.”
유명한은 영화의 기획 의도와 맞게 최대한 배우의 자유도를 끌어낼 수 있도록 이번 비공개 오디션을 기획했다.
물론 그건 최호랑이 보내준 시험 영상을 보고 힌트를 얻은 것이긴 했다.
“규칙은 알고 있죠? 씬 마지막 부분만 지켜주면, 그러니까 래원과 함께 컨테이너를 나가는 것으로 끝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 전까지는 뭘 해도 상관없고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갑자기 신고 있던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그 신발을 아무렇게나 치워두었다.
그녀의 맨발 투혼에 유명한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모두 잠깐 놀랐다. 곧 유명한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한편 민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저에게 쏠리건 말건, 오로지 해수에 몰입할 준비를 했다.
그건 감동이었다.
“손들어!”
“젠장, 역시 없나.”
“······!”
“······.”
“너 설마······ 혹시 해수니?”
사정은 이랬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유괴범에겐 두 살짜리 아들(딸)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식을 사고로 잃고 미쳐버린
것이었다.
유괴범은 자신의 아들(딸)이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현실을 부정한 나머지 다른 집의
아이를 유괴해 자신의 아이로 삼으려 했다.
문제는 아이들이 연약했다는 점이었다. 유괴범은 첫 번째 범행 때 아이를 납치해 가방에 넣고 운반했는데, 그러던
도중 아이는 산소 부족으로 질식사 했다.
그리고 유괴범은 여섯 번째 아이를 마지막으로 유괴한 후 종적을 감추었다. 그 마지막 아이가 바로 ‘해수’였다.
유괴범은 자신이 납치한 아이가 죽은 이후에야 다른 아이를 유괴했기 때문에, 해수가 사라진 이후 그의 범행이
멈췄을 때 해수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기태성은 민하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는 아예 컨테이너의 구석으로 도망쳐버렸다. 딱 겁먹은 동물 같았다.
민하나는 아무런 반응 없었다. 그러자 기태성은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하고 중얼거리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건 조그마한 초코파이였다.
둘은 그 상태로 한참 대치했다.
그리고 한참 뒤, 민하나가 슬쩍 움직였다. 그녀는 주춤주춤 초코파이 쪽으로 다가가 그것을 이빨로 물더니 다시
뒤로 도망쳤다.
“······!”
“맛있지?”
아직은 좀 성급한가? 기태성은 항복하듯 양 손을 옆으로 들었다. 그리고 ‘알았어, 알았어’하고 뒤로 물러났다.
“어쩐다······.”
그때 그녀가 우물쭈물하면서 입을 내밀었다. 뭔가를 물고 있었다. 기태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손바닥을 피자,
그녀가 손바닥에 그것을 떨어트렸다.
“나 먹으라고?”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민하나는 가타부타 말없이 다시 재빨리 뒤로 도망쳤다. 기태성은 제 몫으로 남겨진
초코파이를 바라보다 옅게 웃었다.
“고맙다.”
“자. 같이 나가자.”
기태성이 끈질기게 기다리자 곧 민하나가 머뭇머뭇 다가왔으니까. 부축을 받으며 나가는 민하나의 얼굴에 설렘과
긴장, 두려움 등이 스쳐지나갔다.
*
유명한은 둘의 연기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유명한은 기태성과 호흡이 좋다는 점, 그리고 캐릭터 이해도가 높다는 점에서 민하나에게 점수를 주었다.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바로 시작하세요.”
“네.”
‘과연 어떤 걸 보여줄까?’
그런데 그때였다. 백고운도 대뜸 신발을 벗더니 맨발로 섰다.
“네? 아뇨?”
사실 당연했다. 유명한은 두 후보 간의 사전회의나 참관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그러니 백고운이 민하나의 연기를
카피하거나 컨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네, 알겠습니다.”
백고운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스튜디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는 심심한 듯 기지개를 피다가 벌러덩 누웠다.
일단 첫 시작은 아까의 민하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모두가―유명한을 비롯한 스태프들, 그리고 심지어 기태성마저도― 백고운이 놀라 컨테이너 구석으로 도망칠 거라
생각했다. 아까의 민하나처럼.
그런데 아니었다.
“마!”
백고운은 활짝 미소 지으며 기태성 쪽으로 우다다 달려가더니 냉큼 그를 덮쳤다. 마치 집주인이 오랜만에 돌아온
걸 반기듯이, 꼬리라도 흔드는 것처럼 말이다.
갑자기 달려든 백고운 때문에 기태성은 ‘어, 어’하고 당황한 채 뒤로 기우뚱 넘어갔다. 그는 결국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
그가 기태성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자신이 다른 누군가와 착각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챈 듯 흠칫하면서 뒤로
재빨리 물러났다.
“······?”
“자, 같이 나가자.”
그때였다.
테니스공이 도르르 굴러와 기태성의 발치에 툭 닿았다. 그리고 백고운이 뒤이어 달려오더니 기태성 바로 앞에
쪼그려 앉아선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뭐, 놀아달라고?”
기태성은 황당히 되물었고, 백고운은 아예 테니스공을 입으로 물어서 내밀었다.
그러나 기태성은 곧 한숨을 쉬곤 ‘어쩔 수 없지’라는 투로 어깨를 으쓱이며 공을 던졌다. 그러자 백고운이 기쁜
듯 헥헥 뛰어가더니 그것을 다시 입으로 물어 갖고 왔다.
그러나 기태성은 잠시 뒤 백고운이 갖고 온 테니스공을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그리고 주의를 돌리듯 ‘자’
하고 말했다.
“야, 그만해!”
기태성이 백고운의 잡아 말리려 했다. 그런데 백고운이 기태성의 자켓 자락을 입으로 물더니 확 잡아당겼다.
기태성이 다시 한 번 ‘악!’하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허?’
그러나 백고운은 훨씬 어려웠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예상이 안 갔고, 하는 행동도 뜬금없기 그지없었다.
호흡을 맞추는 상대 배우가 아니라, 진짜로 멋대로 구는 낯선 아이를 돌봐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백고운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기태성은 조금 유치한 성격이란 것이었다. 어린 아이가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부리면, 자신도 같이 누워서 떼를 부리는 성격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때였다.
······응?
헥, 헥.
상대를 밖으로 끌어내도록 해야 할 사람과, 상대에게 이끌려 끌려 나갈 사람이 어느새 뒤바뀌어버려 있었다.
기태성이 백고운을 데려갈 의지를 안 보이니까, 백고운은 일부러 먼저 나오는 방식으로 선수친 듯 했다.
“끝났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백고운의 연기를 지켜본 유명한은 놀라서 말문이 막힌 상태였다.
아까 민하나와 기태성의 호흡이 사전에 협의된 것처럼 스무스했다면, 백고운과 기태성의 호흡은 사전에 협의된
것이 아니란 걸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불퉁불퉁했다.
그런데 뭐랄까.
“왜죠?”
“사람에게 데여본 경험이 있어야 겁먹을 텐데, 해수에게 그런 경험이 없지 않을까 싶어서요.”
“유괴범은 해수를 학대하기 위해서 납치한 게 아니라, 자신의 아이로 키우기 위해 데려온 거니까요. 서툴긴 해도
해수에게 잘 해줬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왜 유괴범이 해수를 떠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랜만에 사람이 왔다면 주인이 돌아왔다 여기고 반길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이나 동물들은 맹목적인 면이 있으니까요.”
“······!”
역주행
26.
―아, 그건 괜찮아요.
어떤 감독은 배우가 자신의 대본에 있는 그대로 따라 하길 원한다. 그러나 반면 어떤 감독은 배우의 의견을
수용하는 것에 훨씬 유연했다.
그리고 유명한은 명백히 후자였다. 그는 실험적인 걸 좋아하는 감독이었다. 애초에 이 영화의 기획 의도가
그러하지 않은가.
영화는 전반적으로 묵직하고 감동을 주는 스토리이기 때문에 밝은 느낌을 주는 인물이 있긴 해야 했다. 그래야
영화의 균형이 맞는다.
그러나 나는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두운 컨셉으로 캐릭터를 잡으면, 더욱 칙칙한 그림이 될 수도 있었다. 같은
성별의 페어라면 성격이 확실히 대조적인 게 좋았다.
내가 선택되었다는 뜻이었다.
민하나는 결과를 통보받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연기했고, 그렇기에 미련은
없었다.
서로가 연기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민하나는 백고운이 어떤 해수를 연기했는지 궁금했다.
조연출은 유명한에게 허락받곤 민하나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 민하나는 자신의 연기 영상과, 백고운의 연기
영상을 꼼꼼히 지켜본 후, 고개를 꾸벅이며 조연출에게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백고운이 경계심이 많고 까칠한, 그래서 훨씬 날카로운 연기를 보여줄 거라 막연히 예상했었다. 저번에
강박증 연기를 했을 때 최호랑과 격렬히 부딪히고 고함을 질러댔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백고운은 이번에도 민하나의 기대를 보란 듯 배반했다. 그는 그녀가 생각한 것과 완전히 다른 방향성으로
연기했다. 그리고 그건 훨씬 더 좋아보였다.
그건 뭐랄까···. 자신이 애초에 따라잡지 못할 재능임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생기는 후련함
같은 것이었다.
사실 백고운 안에 김철수가 있고, 그는 연극판에서부터 시작해 매체에 조단역으로 데뷔해 차근차근 하나씩 올라간,
그야말로 산전수전공중전 다 겪으면서 모든 장르의 연기에 능숙해진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그건 민하나가 모르는
진실이었기 때문에 생긴 나름의 오해라고 할 수 있었다.
민하나는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복도에서 우연히 백고운을 만났다. 그녀는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려요, 고운 씨.”
“아, 하나 씨.”
그건 진심이었다. 훌륭한 실력자가 옆에 있으면 질투가 나지만, 또 그만큼 자극받고 배우는 게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러자 백고운이 의외의 말을 내뱉었다.
민하나는 깜짝 놀랐다.
사람은 원래 라이벌을 통해 성장하는 법이었다. 민하나의 경우, 라이벌이라기보단 혼자만의 일방적인 동경에 더
가깝기는 했지만.
*
송정열은 턱을 괴고 마우스 스크롤을 내렸다. 모니터 화면을 눈으로 훑던 그녀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약 한 달 전쯤 <운명의 표현> 영화를 보고 백고운 배우에게 빠졌다. 연기도 잘하고, 외모도 잘생겼고,
근데 성격도 좋다. 안 빠지고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주구장창 <운명의 표현>만 N 번 째 관람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당장 팬질을 관두진 않겠지만, 심심한 건 어쩔 수 없다. 팬이란 팬질로 인생의 기쁨을 느끼는 존재인데, 앓고
열광할 게 없으니 인생의 낙이 없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송정열은 이것저것 생각하다 쯧 혀를 차며 노트북을 닫아버렸다.
그런데 책에 집중한 지 한 시간이나 겨우 지났을까.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더니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정열아 너 기사 봤어?]
송정열이 실시간 검색어에서 ‘백고운’이라는 이름을 발견한 것과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한 건 동시였다.
[실시간 검색어]
[1 위: 유명한 감독]
[2 위: 기태성 복귀작]
[3 위: 백고운]
[4 위: 영화 해수]
[5 위: 백고운 누구]
간단히 말하면 유명한 감독의 신작 영화가 결정이 되었다는 내용인데, 거기에 캐스팅 된 배우들 리스트가
공개되어 화제가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명한 같은 감독이 완전히 처음 보는 신인을 주연으로 발탁하면 누구라도 당연히 궁금해할 것이다.
‘파격 캐스팅’, ‘괴물 신인’, ‘유명한의 뮤즈?’, ‘충무로에 혜성처럼 등장한 배우’와 같은 수식어들이
뜨문뜨문 보였다.
“미친!!”
이거, 자신이 스타를 일찍이 알아봤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하루아침에 일약 스타덤에 오를 배우인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바로, 박스오피스에서 완전히 내려가고 있던 <운명의 표현>이란 영화의 순위가 갑자기 역주행하기 시작하더니,
개봉된 지 몇 개월 만에 1 위를 차지하게 되는 전무후무한 기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었다.
첫 대본 리딩
27.
기사가 나간 후, 첫 대본 리딩 날.
몇몇은 백고운을 보며 ‘아, 이분이구나’하면서 연기를 얼마나 잘하기에 바로 유명한 감독의 눈에 들었을까
궁금해 했고, 그 사이 <운명의 표현> 영화를 본 사람들은 ‘연기 진짜 잘하긴 하더라’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오디션 장에서는 반쯤 반신반의긴 했다. 일단 센스도 있고, 개성도 있고, 기태성을 상대하면서 주눅 들지도
않을 담대함도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신인이었으니까.
유명한은 백고운의 신선한 감각과 뻔하지 않은 연기를 높이 쳤지만, 호흡을 직접 맞추는 기태성에게는 그보다는
기본적인 연기력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백고운은 미팅실에 도착한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인사를 건넸는데, 분량이 적은 조연이나 말단 스태프까지
차별 없이 대했다.
백고운에겐 하루아침에 라이징 스타 된 사람들 특유의 거만함이나 우쭐함 같은 것이 없었다. 적당히 예의바르고
적당히 살가운 게, 어딜 가든 예쁨 받을 타입으로 보였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네, 모두 기사를 보고 오셨죠? 아주 우리 영화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요. 나랑 많이 손발을 맞춰본 사람도 있고,
처음 뵙는 사람도 있는데. 아무튼 모두 반가워요. 우리 멋진 영화 하나 만들어봅시다.”
유명한을 제외하면 여기서 기태성이 제일 나이도 많고, 연차도 높았다. 다른 사람들이 괜히 기태성을 어렵게
생각할 수도 있었기에 그는 이런 식으로 먼저 농담을 던지는 것이었다.
“네!”
그건 대본이 러프한 탓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백고운의 대사가 거의(아니 사실은 아예)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늑대아이란 설정이다 보니 그는 대사보단 눈빛, 동작, 행동, 따위의 비언어적인 연기를 더 많이 하게 될 터였다.
그래서 사실 이번 리딩에도 백고운이 참여할 여지가 많이 없었다. 유명한이 백고운더러 농담처럼 리딩에 참여 안
해도 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크르르.”
그 장면은 해수가 래원을 경계하는 장면이었는데, 백고운은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그 부분에 그런 소리를 낸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백고운은 대사는 없었지만, ‘해수가 즐거워한다’ 혹은 ‘해수가 슬퍼한다’ 따위의 추상적인
행동지문에서도 저 나름 해석을 더해 ‘컹컹’이나 ‘으르렁’ 같은 짐승 울음소리를 냈다. 그게 어찌나
리얼했는지 유명한이 드물게 칭찬했을 정도였다.
‘역시 잘하네.’
“네, 알겠습니다.”
“여기서는 좀 더 가벼운 느낌이 살았으면 좋겠어. ‘해수와 래원이 투닥인다’, ‘해수와 래원이 논다’ 같은
행동지문이 적혀 있는 부분들은 배우들이 자유롭게 애드리브로 채워주되 약간 티키타카가 느껴지게. 무슨 말인지
알지?”
“네!”
특정 씬의 연기 톤을 조정하기도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주변이 활기차게 부산스러워졌다. 기태성도 오랜 시간 앉아있던 탓에 찌뿌둥한 등을 쫙 피며 기지개를 켰다.
이거, 분위기도 좋고 배우도 좋고 시나리오도 좋다. 어쩌면 꽤나 대박일 영화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리딩이 끝난 후, 기태성은 유명한과 비슷한 연배의 조연 배우 몇몇과 함께 주차장 한쪽에서 잠깐 담배를 폈다.
“잘하지?”
“아니, 그건 아니고.”
유명한은 최호랑 단장이 부국제에서 백고운을 발견해 데려와 시험을 쳤다는 이야기를 짤막히 들려주었다. 그는
백고운이 예고나 학원에서 연기를 배운 것도 아니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뭐, 진짜로?”
“응. 보육원에서 자라서 심지어 지금은 혼자 고시원에서 살고 있대. 알바하면서 영화 찍었다고 하더라고.”
“와, 대견하네.”
“에이,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때, 뒤늦게 백고운이 건물에서 나왔다. 일찍 와서 일손을 도왔던 것처럼, 늦게까지 남아 청소와 정리를 도운
모양이었다.
“어, 고운아.”
유명한은 괜찮으면 같이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말할 참이었다. 그런데 백고운이 뜻밖의 이야기를 내뱉었다.
“응? 왜?”
“그게······.”
그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그때, 둘의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기태성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이야 결혼해 집에 가족이
있다지만, 기태성은 아직 혼자 살고 있었다.
존경하던 선배
28.
김철수였던 시절, 그러니까 내가 막 조단역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알음알음 얼굴을 비추고 있었을 햇병아리 신인
시절 때였다.
단순히 조단역을 홀대하는 것이라면 꿋꿋이 버텨냈을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못 견뎠던 것은 촬영장 분위기가
조단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그저 소품으로 대했다는 것이었다.
주연 배우였다면 시키지 않았을 위험한 연기도 서슴없이 시켰고(왜냐하면 안전장치를 설치하는 것에도 다 돈이
드니까), 열악한 환경에서 대기만 몇 시간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니 기태성이 자기 집에서 머물지 않겠느냐 제안했을 때 잠깐 놀랐지만,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영화 <해수>의 첫 촬영 날.
촬영 장소는 양평의 한 세트장이었다. 이번에 찍을 장면은 해수와 래원이 처음 만나는 씬으로, 오디션 봤던 바로
그 장면이었다.
“해수 시선이랑 카메라가 동일하게 갈 거거든. 테이블을 빙 돌아서 곧바로 현관으로 가서 문구멍에 눈을 갖다
대면 돼.”
“네, 알겠습니다.”
“씬 3 테이크 1 갑니다.”
“컷, 오케이.”
“네. 원래 개나 고양이들은 바닥의 장애물들 안 건드리고 막 뛰어넘기도 하잖아요. 거기에서 착안해 유연하게
움직이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때 기태성이 으스대며 끼어들었다.
‘나 참.’
나는 작게 헛웃음 지을 뿐이었다.
―······아니, 그냥 저 혼자 해도 되는데요.
이초희네 개를 참조하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갔을 때, 일차적으로 이초희가 내 모션을 봐주긴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녀는 연기자가 아니었기에 기태성의 지적이 더 섬세한 건 당연했다.
“해수야, 손!”
“왕!”
“어이쿠!”
그가 깜짝 놀라 손을 휙 빼더니 곧 낄낄거렸다.
알았다면 내가 기태성의 장난을 일방적으로 받아주고 있는 거라 해명했을 법한, 나로선 꽤나 억울한 오해였다.
컨테이너 씬(해수와 래원이 처음 만나는 장면), 그리고 숲 씬(해수가 산에서 뛰노는 과거 회상 씬)을 로케에서
다 찍은 후 이제 촬영지는 서울로 넘어왔다.
“네, 알겠습니다.”
“왁!”
방금의 몸놀림은 거의 인간이 아니라 개나 고양이의 그것이었다. 몸이 유연하고 가벼운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백고운의 피나는 노력이 기본적으로 받쳐주었기 때문에 저런 연기가 가능할
것이었다.
‘좀 독종인 면이 있다니까.’
사실 그건 이전부터 느꼈었다.
―괜찮아요.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했으면 힘이 없이 비실거릴 법도 한데, 막상 카메라 돌아가고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또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몸무게가 줄어서 그만큼 훨씬 날렵하고 가벼워 보일 정도였다.
“컷, 오케이.”
당연히 당사자인 백고운도 그렇게 여기리라 생각하며 그 둘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놀랐다.
······응?
연기 장인
29.
그래서 나는 유명한 감독에게 괜찮다면 3 일만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느냐 물어본 것이었다. 굳이 3 일이라 꼽은 건
딱 그 정도가 촬영에 지장 가지 않는 선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영화는 드라마와 달리 빨리 촬영을 뽑아야 할 필요가 없어서 비교적 여유로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정이
정해진 로케 촬영은 초반부에 마쳤기에 스케줄이 좀 유동적인 덕도 있었다.
“안 쓰는 별장······?”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내려가자, 드넓은 논과 밭이 펼쳐진 외곽 지역이 나왔다. 이초희는 벌써 별장에
도착해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 왔어? 간단하게 청소는 했는데, 워낙 넓어서 다는 못 했어. 근데 진짜로 안 쓴 지 오래된 별장이라 많이
불편할 텐데. 괜찮겠어? 관리비가 많이 드는데 팔리지도 않아서 그냥 방치하고 있는 곳이었거든. 말이 별장이지,
거의 폐가야. 수도는 다행히 안 끊긴 것 같은데, 전기는 끊긴 것 같더라고. 그리고 밥은 또 어쩌게.”
이초희가 어두운 얼굴을 했다가, 짐짓 털어버리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그녀가 자기 옛날 전적을
농담처럼 들려줬다.
그는 스태프들에게 살갑게 인사를 하면서 자잘한 일손을 도왔는데, 그 모습이 평소와 똑같았다.
감독인 유명한과 상대 배우인 기태성은 백고운의 자율성을 존중했기 때문에, 백고운이 시간을 좀 달라고 했을 때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음향 감독인 예민음은, 솔직히 말해서, ‘굳이?’라는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저번에 찍었던 장면은 재촬영에 들어갔고, 예민음 음향 감독은 집중했다. 야외 촬영이 아니라 잡음이
들어갈 확률은 낮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액션!”
“잠시만 기다려.”
‘왜 안 움직이지?’
모두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을 때였다.
백고운은 끈질기게 빤히 그쪽을 바라봤고, 자연히 다른 스태프들도 긴장한 채 조용히 그를 지켜봤다. 촬영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틱, 탁, 틱, 탁.
그건 바로 시계 초침소리였다.
비록 예민음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백고운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자연히 상상되는 소리가 있었다.
냉장고를 여닫는 소리. 래원이 생수통 뚜껑을 까는 소리.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 난방이 조용히 윙 돌아가는
소리.
도시의 소리.
그건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백색 소음이었다. 그러나 배경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모두가 인식하지
못하는 소리들이기도 했다.
“······!”
이곳은 인공적으로 꾸며진 세트장이기에 당연히 생활 소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백고운은 그저 시선을
옮기고 귀를 쫑긋하는 아주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그 소리들을 환청처럼 들리게 만들었다.
그러자 아주 찰나였지만, 일순간 이 촬영장이 인공적인 세트장이 아니라 정말로 래원의 집처럼 느껴졌다. 삼차원
(3D)의 공간이 사차원(4D)의 공간으로 전환되는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컷, 오케이!”
“유 감독님!”
백고운은 이번 장면에서 저번처럼 리모컨을 누르고 화들짝 놀라는 연기를 똑같이 보여주었다.
이 장면은 해수의 호기심과 경계심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었는데, 저번에는 호기심이 더 강하게 표현되었다면
이번에는 경계심이 좀 더 강하게 표현되는 느낌이었다.
그 작은 차이가 미세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훌륭한 작품은 그런 사소한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진짜··· 연기 장인이네.’
그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기량을 십분 발휘하다
30.
시골은 비교적 조용한 자연의 소리만 들린다. 시냇물 소리, 새 소리, 바람 소리 등등.
그러자 훈훈한 표정들로 내 연기를 칭찬하고 있었던 유명한과 다른 스태프들이 눈빛이 확 달라져선 날 훽 돌아봤다.
“뭐?!”
······응?
“선배님, 돼지 말고 소죠?”
“···물론이지!”
“네, 알겠습니다.”
기태성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 담뱃불을 탁탁 붙이려 했다. 그러다가 백고운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접이식
책상 앞에 앉아서 눈만 꿈뻑꿈뻑 뜨고 있었다.
기태성이 턱짓했다.
백고운이 알아듣지 못하자, 기태성은 한숨을 푹 쉬곤 담배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가 소파를
내려와 무릎만 굽혀 쪼그려 앉았다.
기태성이 먼저 천천히 시범을 보였다. 백고운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조금은 어색하고 서투르게 따라했다. 기태성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
“······에휴.”
“안 ㄷ······!”
그리고 그 눈빛을 발견한 기태성이 불안한 예감을 느끼고 ‘안 돼’를 외치려 했지만, 그러기도 전 백고운은
까르르 웃으며 이미 연필을 온갖 곳에 죽죽 그어버렸다.
펼쳐진 학습지는 물론, 접이식 책상이며 거실 바닥까지 연필로 아무렇게나 그은 낙서로 더러워졌다.
“야, 야! 그만!”
어이쿠야. 기태성은 백고운의 손에서 연필을 빼앗으려 했고, 백고운은 연필을 안 뺏기려고 힘을 주었다.
둘이서 뒤엉켜 낑낑 힘겨루기를 했고, 그 난장을 찍던 유명한이 ‘컷’ 소리를 낸 뒤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네, 괜찮나요?”
“좋네. 더 가능해?”
“네, 물론요.”
소품을 정리한 뒤, 다시 한 번 테이크를 갔다.
그런데 이번엔 백고운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가 학습지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갑자기 종이를 북 뜯어
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태성이 기겁해선 이번에도 백고운을 말리려 했다. 백고운이 우물우물 입을 움직였고, 기태성은 황급히 백고운의
입을 억지로 벌렸다.
꿀꺽―.
뜨악한 기태성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거기서 한 번 또 컷으로 끊겼다. 제법 웃긴 장면이었는지 스태프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운이, 괜찮아?”
“뭐? 아하하!”
아주 미묘한 차이일 수 있으나, 백고운은 그 차이를 의식하고 아주 의도적이고 계산적으로 연기를 한 것이다.
하나 확실한 건, 열정이 저리 넘치는 후배랑 같이 합을 맞추다보니 자연스럽게 저 자신도 자극이 된다는 것이었다.
기태성은 픽 웃은 뒤 장난스럽게 백고운의 목에 헤드락을 걸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헤집듯 거칠게 흩트렸다.
곧 분장팀 막내가 ‘머리 만지면 안 되세요!’하며 곤란한 눈치로 뛰어오자 백고운이 조금 미안해하듯 웃으며
사과했다.
기태성이 가슴을 쫙 펴고 항구의 냄새를 기분 좋게 들이켰다. 12 월의 바닷가치고 추위가 그다지 매섭지 않았다.
“안 그래, 감독님?”
“아니, 왜?”
“왜긴. 오늘 찍을 장면이 장면이니까 그렇지.”
영화 <해수>의 전반부는 따듯하고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해수’를 납치한 유괴범의 정체가 밝혀지는 후반부에
들어서면 분위기가 확 바뀐다.
처음엔 비교적 가벼운 형이었지만, 죄가 쌓이고 쌓여 나중에는 가중처벌로 형이 더 불어났다. 그것이 유괴범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형기는 언젠간 끝이 난다. 형을 다 살고 나온 유괴범은 석방되고, 곧바로 자신의 아이― 해수를 찾으러
집에 간다. 그러나 이미 그곳엔 아무도 없다.
유괴범은 주변 이웃들의 증언을 통해 형사가 아이를 데려갔음을 알아챈다. 분노한 유괴범은 곧바로 래원을 찾아가
해수를 데려오려 한다.
그 과정에서 래원과 유괴범이 난투를 벌이게 되고, 래원은 유괴범을 기절시켜 수갑을 채우는 데에 성공하지만
자신도 치명상을 입게 된다.
영화의 제목처럼 주인공이 해수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해수의 성장과 홀로서기를 다룬 이야기였고, 그렇기 때문에
유사 아버지인 래원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날씨도 컨디션도 다 너무 좋아서 비극적인 분위기가 안 나오지 않을까 몰라. 비도 좀 내려주고 날씨도 좀
얼어붙게 추워야 배우들이 슬픈 연기하기에 좋을 텐데. 안 그래?”
“그런데 마지막 씬을 고운이한테 다 맡겨도 되겠어? 아무리 고운이가 애드리브를 잘한다지만 이전 장면들과
마지막 씬은 중요도 자체가 다르잖아.”
기태성은 어깨만 으쓱였다. 감독이 그렇게 한다는데 배우인 자신이 뭐라 하겠는가.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물론 속으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생각했다. 하여간 감독들은 이상한 데서 예술병이 꼭 있다니까.
“그럼 스탠바이 해주시고.”
이름이 가지는 의미
31.
유명한 감독은 아까 전, 백고운에게 자율적으로 마지막 씬을 연기해주면 된다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
“액션!”
래원이 죽는 마지막 장면이 펼쳐졌고,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시작하고 있는 백고운은 완벽히 ‘해수’로 분해
있었다.
유명한과 스태프들 모두 조용히 숨을 죽였고, 피 분장을 한 기태성(래원)은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서 쿨럭 기침을
터트렸다.
“하아, 하···.”
밭은 숨을 몰아쉬던 기태성은 옆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눈을 떴다. 그리고 백고운(해수)을 발견하곤 겨우 미소를
지어보였다.
“해수······ 구나.”
“해수야. 기억··· 해. 네 이름은 해수, 라고. ‘해수’, 너는 해수야. 절대 그걸··· 잊어버리지··· 마.”
아이는 제 부모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나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불리며
사랑받고, 살아가게 된다.
지금 이 순간, 해수의 원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줄 이는 래원이 유일했지만, 그 래원마저도 머지않아 죽게 된다.
이제는 해수 스스로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야만 한다.
“······.”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즐거운 듯 기태성이 쓰러지자 그 근처를 돌며 까르르 웃었다. 아직 죽음에 대한 개념을
모르는 사람이 할 법한 반응이었다. 그는 그저 기태성이 재밌는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있을 것이다.
“······.”
백고운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이 가셨다. 그가 우뚝 제자리에 멈추었다. 그리고 눈을 끔뻑거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백고운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기태성의 몸을 툭 쳤다. 기태성은 미동하지 않았다. 백고운이 다시 한 번 더
기태성의 몸을 두드렸다. 기태성은 그래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다시 유명한 감독이 뷰파인더를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는 해수가 래원의 죽음을
알아차리고 오열할 차례였다.
죽지 마? 가지 마?
“해······ 수.”
백고운은 모두의 예상을 배반하고 제 이름을 말하더니, 다시 빤히 기태성을 바라봤다. 기태성이 움직이지 않자
백고운은 안절부절 못하더니 다시 제 이름을 불렀다.
“해수우······.”
그렇게 백고운은 한참이나 자신의 이름을 내뱉었다. 띄엄띄엄, 말을 배우는 아기가 처음으로 입을 떼듯이.
힘겹게. 기를 쓰고.
“해애··· 수. 해수으···.”
그리고 어리둥절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유명한 감독은 한순간 백고운이 뭘 하고 있는지 벼락같이 깨달았다.
“······!!”
이전에도 래원은 해수에게 단어를 가르치기 위해 여러 번 같은 발음을 반복해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해수가
그것을 따라할 듯 입을 옴싹거리면 ‘그래, 그래! 그거야!’하면서 반응했었다.
이전처럼.
종래엔 백고운이 몸을 멈추고 기태성의 몸에 엎어졌다. 원망과 서러움이 담긴 울음이 커졌다. 무력한 자신에 대한
미움과, 왜 이렇게 했는데도 깨어나지 않느냐는 듯의 서글픔이 뒤섞였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없는 적막한 거리. 한 소년이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흐느끼는 소리가 그렇게 한참동안 항구에 울려
퍼졌다.
“······컷, 오케이.”
그러나 보통 오케이 싸인이 나면 스태프 사이에서 울릴 법한 기쁨의 소리가 그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촬영장
분위기는 전례 없이 무겁게 내려앉아있었다.
백고운이 보여준 눈물 연기에 촬영장 분위기가 동화된 탓이었다. 스태프 중 몇몇은 눈물을 몰래 조용히 훔쳐냈다.
“다시 갈 필요 없나요?”
“응, 괜찮아.”
“대박나자!”
몸이야 미성년자였다지만 정신은 이미 성인인지라 성인이 된다는 것이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감회가 조금 남다르긴 했다.
한 작품의 한 캐릭터를 맡아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일 년 가까이 몰입해 연기를 하다보면 당연히 작품이 끝났을
때 그 여운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로서 느끼는 감정인지, 아니면 자신의 감정인지
헷갈릴 때도 많고.
“역시 그렇지?”
“풉!”
“고운이 이런 개그 좋아해?”
“네, 완전 웃긴데요.”
“그지? 완전 웃기지?!”
그리고 우리 둘은 흡사 어깨동무를 하고 주거니 받거니 농담을 던지고 우리끼리 폭소했다.
“둘이 아주 잘 맞네···.”
품 poom 매니지먼트
32.
다음날 아침.
“으······.”
나는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어젯밤 영화 <해수>팀 사람들과 술을 거나하게 먹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론 필름이 끊겨 있었다.
그래도 기태성의 집에서 깨어난 걸 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최소한 길바닥이나 경찰서에서 깨지는
않았으니.
나는 주섬주섬 일어나 손님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거실 바닥에 시체처럼 쓰러져 자고 있는 기태성을
발견했다.
“선배님···, 일어나세요.”
그리고 대략 한 시간 뒤.
“넵, 잘 먹겠습니다.”
“···아무래도 안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마셔놓고도 또 마시고 싶다니. 주당이란 얘기는 건너 건너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술을 좋아할 줄이야.
그리고 처음엔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려던 기태성도 곧 내 표정이 진심이란 걸 알아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얘기를 유 감독님 입에서 들었다면 모를까, 고운이 네 입에서 들으니 좀 묘하게 들리긴 하다, 야.”
“지금이야 아직도 시나리오가 들어오기는 한다지만, 언제까지나 감독이나 대중이 날 찾아줄리란 보장도 없고.
주변에서 하도 권하기도 하니까. ······아니, 됐다. 내가 이 얘길 왜 너한테 하고 있는 건지.”
“에이, 선배님도 엄살은 참. 여든에도 정정하게 연기하시는 대(大)원로 배우 분들도 많으신데, 그거에 비하면
선배님은 엄청 젊으신 거죠.”
심지어 나는 백고운의 몸으로 들어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중에 의료 기술이 좋아져서
피부를 새로 이식받을 수 있다면 늦은 나이라도 다시 연기를 시작할 거라고.
그러니 연기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열정이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연기는 언제까지고 할 수 있었다.
“하긴, 그건 또 그러네.”
기태성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로 가만히 있더니, 곧 기분 전환이 됐는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리곤 호쾌하게
외쳤다.
기태성은 정말로 소주를 딱 두 잔에만 따른 후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나더러 ‘짠’만 해달라며 하나를
쥐어주었다.
우리는 허공에서 소주잔을 부딪쳤고, 맑은 소리가 짠― 울렸다. 기태성은 그것을 쭉 들이켠 후 ‘크으’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픽 웃었다. 어쨌거나 기태성의 기분이 나아진 듯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러더니 그가 날 불렀다.
“너 우리 소속사 안 올래?”
그리고 다시 두 시간 뒤.
“자, 자. 얼른 들어와.”
이런 걸 보면 기태성은 상당히 기분파에 행동파였다. 이런 타입이 사업을 벌인다고 사람을 잘못 만나면 딱 그날로
사기를 당하기 쉬운데.
“응? 뭐라고?”
기태성은 로비부터 구경을 시켜주며 자기 소속사 자랑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내가 이미 아는 내용이었다.
나는 부국제에 다녀온 이후로 의도적으로 소속사에 들어가는 것을 미뤄왔다. 처음에는 최호랑의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절했고, 유명한의 영화에 참여하게 된 직후에는 괜찮은 회사가 없는지 간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상대가 어리고 신인인 배우일수록 더 그랬다. 배우가 계약에 어두울수록 회사는 자신들이 유리한 쪽으로
계약하기 쉬우니까.
소속 연예인이 자기 소속사에 대해 칭찬을 한다? 그러면 진짜로 좋은 회사일 확률이 높았다. 직장인으로 따지면
자기 회사에 만족한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기태성은 이전까지 여러 소속사를 전전했는데 여기에 이적하고는 십 년 가까이 회사를 옮기지
않았다. 그걸 보면 이 회사가 배우를 잘 케어하고 있단 건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조금 일이 휘몰아치듯 결정되고 있기는 했는데, 그래도 기회란 원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이었다. 게다가
기회는 잡아야만 하는 타이밍이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선배님. 저더러 여기 오라고 한 게 선배님 개인적인 의견인 건 아니에요? 여기서 저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물론 기태성은 부정했다.
“마침 저기 오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봤다.
······어라? 저 사람은?
기태성이 먼저 그를 소개했다.
전생前生의 인연
33.
요지는 간단했다. 소속사 얘기를 꺼냈다고, 구경시켜준다는 명목으로 데려갈 테니 자연스럽게 꼬드길 준비를 하란
말이었다.
유명한 감독의 영화 주인공으로 발탁되어 하루아침에 뜬 슈퍼 루키.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내밀어진
에이전시를 모두 거부한 만만찮은 놈.
―애가 진짜, 연기를 잘해. 처음엔 유 감독이 웬 듣도 보도 못한 친구를 주인공으로 세우나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니까. 애가 무슨, 평생 연기만 하고 산 사람처럼 연기를 하더라고.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놈이. 내가
장담해. 걔는 다른 거 상관없이 오직 연기력 하나로 최정상에 설 놈이야.
윤성광은 제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해수> 촬영장에 몰래 가봤고, 거기서 백고운이란 그 친구를 직접 봤다.
‘······?’
윤성광은 당황했다.
왜냐면 백고운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쩐지 묘했기 때문이었다. 낯익은 사람을 아주 오랜만에 재회했을 때와
같은 눈빛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감회에 젖어 있었다.
윤성광, 그는 바로 내 옛날 매니저였다.
그런데 윤성광만이 내가 퇴물 배우가 된 후에도 꾸준히 계속 연락을 해왔다. 원래부터 친한 친구였던 김건은
논외로 친다면 말이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그가 새로운 회사로 이직했다는 얘기는 들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회사가 바로
여기였다니. 그리고 이렇게 또 만나게 되다니.
“네, 맞습니다. 여기 서서 이러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아, 부담 드리려는 건 아니에요. 커피만
드시고 가셔도 괜찮아요.”
상대가 어리다고 무시하지 않고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미팅 실에 마주 앉았다.
윤성광이 오기 전부터 반쯤 마음을 정한 나는 그가 오면서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그렇기 때문에 더 볼 것도 없이
곧바로 직구로 말했다.
“실은 제가 올해 하반기에 들어갈 작품이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극단 왕국에서 올라갈 연극인데, 거기 최호랑
단장님과 구두로 약속을 맺었습니다. 제게 은인인 분이나 다름없어서 함부로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입니다. 조건을 그렇게 따로 걸지 않으셔도 저희 소속사에서는 언제나 배우의 의견을 존중해서 결정하고
있습니다. 상호협력적인 파트너 관계로 오래 가는 것이 저희 소속사가 추구하는 방향이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신
바가 무엇인지 알겠으니 따로 계약서에 명시하겠습니다. 혹시 더 원하시는 건 따로 없으신가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며칠 동안 나는 꽤 분주했다.
굳이 표류랑 이초희랑 만난 것도 실제로 도움 받기보다는 겸사겸사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를 풀기 위함이 더 컸다.
집을 구한 뒤 우리는 가볍게 술을 걸치며 근황을 나누었는데, 표류는 드디어 첫 상업영화를 찍는다 했다.
이초희는 최근 영화를 넘어 드라마 쪽으로 발을 넓혀보고 있었는데 좋은 일거리가 들어왔다고 했다.
윤성광은 신인이 흔히 보이는 태도라 생각했는지, 휴식을 취하라고 말리는 대신 내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그래요. 안 그래도 그럴 것 같아서 그 동안 고운 씨 앞으로 시나리오 몇 개 받아봤어요. 한 번 구경할래요?”
“네!”
다만 가용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영화는 주연급이 많았지만 드라마는 조연급이 많았다.
“배역의 크기를 생각하면 영화가 좋긴 하지만, 드라마도 괜찮을 거예요. 조연이라고 꼭 나쁜 건 아니니까요.
드라마는 영화랑은 또 다르니, 새로운 경험도 될 테고.”
나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면 저는···.”
어?
나는 그것을 꺼냈다.
윤성광은 내가 꺼낸 시나리오를 보더니 ‘아차’한 표정을 지었다.
“저 이걸로 해도 괜찮을까요?”
그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요?”
나는 씩 웃었다.
[김건 연출]
바로 내 죽마고우의 이름이.
아메리카노와 카페모카
34.
김건이 이번에 찍는 영화는 학교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장르로, 두 소년의 우정을 다룬 이야기였다.
간단히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전학 온 주인공이 왕따를 당하는 학생을 도와주려다가 같이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둘은 힘을 합쳐 함께 그 일진 무리를 처치한다.
캐릭터가 강렬해서 인상적이란 느낌을 받았지만, 롤 자체는 조연이었고 호감형 캐릭터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럴까. 기태성도 그렇고 윤성광도 그렇고, 내가 굳이 그 시나리오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약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해수’랑 이미지가 정반대니까. 해수는 순수한 이미지가 강하잖아. 대중들이 그런 이미지로 고운이
널 기억하고 있을 텐데 바로 다음 차기작에서 일진 역을 하면 좀··· 그렇지 않을까?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약을 빠는 캐릭터라니······.”
기태성이 자기는 별로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윤성광도 비슷한 이유로 우려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걸 하고 싶었다.
특정 이미지는 배우를 대중에게 인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 그러나 그 이미지가 너무 고착될 경우
비슷비슷한 시나리오만 들어오게 되면서 배우는 계속 한정적인 연기를 하게 될 수밖에 없다.
“뭐, 이렇게 말했지만 김건 감독님이 저를 안 뽑으실 수도 있잖아요. 우선 오디션만 볼게요. 그리고 캐스팅이 안
되면 다른 작품 찾죠, 뭐.”
그리고 나는 주변에서 이런 반응이 돌아오면 기가 죽기는커녕 더 승부욕이 불타오르는 편이었다. 연기에 한해서는
말이다.
‘이거, 꼭 내가 따고 싶어지네.’
며칠 뒤 충무로의 어느 제작사.
“······.”
김건이 조연출을 지그시 노려봤다. 조연출은 그러거나 말거나 심드렁히 할 일을 처리하고 있었지만.
“칭찬 감사합니다.”
“져 드려요?”
“됐거든!”
오디션 당일.
“생각보다······.”
“생각보다 잘생겼네요.”
“으악!”
“······그래?”
“뭐, 그렇다 치고. 근데 배역에는 딱히 안 어울릴 것 같은데. ‘태웅’은 양아치인데, 얼굴이 저래 순해서
어울릴지 모르겠네.”
“그러게요.”
김건이 불쑥 물었다.
“근데 누굴 좀 닮은 것 같지 않아?”
“누구요?”
“아니, 그건 아닐 텐데······.”
백고운의 정체가 자신의 친구 김철수란 걸 꿈에도 알 리 없는 김건은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김건은 그제야 정신 차리고 몸을 바로 했다. 백고운이 누굴 닮은 것 같든, 역할에 안 어울리는 것 같든, 어차피
지금 당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김건은 지원자들의 연기를 심사했다. 지원자들은 한 명씩 들어와 지정연기와 자유연기를 차례로 펼쳤다.
“딱 반 남았습니다.”
“그러면 한 타임 쉬고 가자.”
“어, 땡큐.”
“아, 네. 맞아요.”
“어? 아, 그래.”
김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금은 얼떨떨했다. 모범생 같이 생겨선 낯을 꽤 가릴 것 같았는데, 의외로 사교성이
좋다.
백고운이 계산대에서 주문을 하고 있었기에 김건은 그의 뒤에 서서 잠깐 기다렸다. 백고운이 주문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감독님, 여기요.”
“······응?”
“나? 나 먹으라고?”
“네. 감독님 이렇게 드시지 않으세요? 당이랑 카페인 동시에 충전해야 한다고 늘 카페 모카에 샷 추가해서
드시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닌가요?”
“어, 맞긴 한데···.”
김건은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백고운이 자신의 취향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둘째 치고, 왜 이걸 자신에게 주는
거지?
근데 백고운의 다음 말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어?”
배우로서 감독과 친해지고 싶다는 건 이상하게 들릴 일은 아니었다. 감독에게 잘 보여 두면 작품에 출연할 기회가
더 많아지니까.
근데 그들은 완전히 초면이지 않은가. 좀 은근하게 돌려 말하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건 보통 아니지 않나?
앗.
순식간에 도리어 머쓱해진 건 김건이었다. 김건은 속으로만 제 입을 팍팍 때리며 ‘아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아, 네. 잠 좀 깨려고요.”
“아뇨, 연기하려고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리고 김건이 저를 좀 뜨악한 눈으로 보고 있든 말든, 백고운은 그 곱상하고 단정한 얼굴로 차분하게 미친
소리를 내뱉었다.
“이주 전에 실험해보니까 5 일 정도는 밤을 새워야 정신이 오락가락 하더라고요. 젊어서 그런가. 예전엔 3 일이면
됐는데. 아무튼 그래서 5 일 동안 밤새우고 오늘 여기 왔어요.”
그러면서 빙긋 웃는 것이었다.
김건은 생각했다.
······이거 약간 또라이인가?
약 빤 연기
35.
그래서일까. 오디션 장 한쪽에는 관계자들― 즉, 김건과 조연출, 그리고 제작사 쪽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대부분은 백고운의 등장에 흥미를 보였다.
단, 김건만 빼고 말이다.
바로 30 분 전에 김건은 백고운을 커피숍에서 우연히 마주쳤었다. 그리고 김건은 백고운에 대한 인상을 정정했다.
그는 연기를 잘 할지는 몰라도··· 조금 이상한 놈 같았다.
조연출이 지시했다.
“바로 지정 연기 보여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백고운은 5 일 동안 밤새우고 카페인을 들이켠 것 치곤 제법 멀쩡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연기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주인공들을 괴롭힌 이유를 독백으로 주절주절 설명하는 파트였는데, 대부분은 태웅의 자기변명과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말들이었다.
사실 이 대사는 직접적인 씬으로 들어가지 않고 나래이션으로 처리할 예정이었다. 장면화 할 부분이 없는, 순수한
대사들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백고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웃음을 푸하하 터트리더니,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미쳤나?’
하지만 그건 아니란 건 곧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백고운이 이어서 내뱉는 대사는 대본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으니까.
물론 이미 백고운이 제정신이 아니란 걸 알고 있는 김건은 아까 전부터 백고운이 보여주는 연기의 의도가 무엇인지
진작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초점이 사라져 있었고, 얼굴 근육은 축 가라앉아 있었다. 분장을 따로 한 것도 아닌데, 단순히
표정연기만으로 인상이 음울하게 확 바뀌었다.
그가 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면서 손가락을 달달달 떨었다. 그리곤 불안하고 초조하게 서성거리며 대사를 계속
내뱉었다.
“악!!”
‘······!’
그가 쇼크가 온 것처럼 눈을 뒤집어 까더니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는 경련을 히끅히끅 하더니 일순간 숨을
멈추고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
‘뭐 저런 게 다 있지?’
첫째로는 약을 처음 빨아본 사람의 하이 high 해진 상태, 둘째로는 중독자의 피폐하고도 불안해하는 상태,
셋째로는 주변인에게 공격성을 표출하는 상태, 넷째로는 쇼크사까지.
독백 연기는 보통 지루하기 쉬운데, 거기다가 길기까지 하면 어지간하게 잘 살리지 않으면 관객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긴 독백이란 것 자체가 커다란 핸디캡인 셈이다.
그러나 백고운은 오히려 길다는 바로 그 점을 이용해 한 중독자의 변화를 시간 흐름대로 보여준 것이었다.
한편.
‘말도 안 돼.’
백고운의 연기를 보면서 김건은 팔에 오도도 소름이 돋아 있었는데, 그 감각이 어쩐지 낯익었다.
김건은 김철수를 대학에서 알게 되었는데, <왕자와 거지>라는 연극을 함께 하면서 처음으로 그의 천재성을 실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백고운의 연기를 본 지금, 김건은 그때와 똑같은 경악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녀가 물었다.
“하하, 아닙니다.”
“오기 전에 술 마신 것도 아니고요.”
“그렇군요.”
조연출은 아마 진짜로 백고운이 약을 하고 오지 않았는지 진지하게 물었을 테고,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백고운의
연기가 실감났다는 말이었다.
그건 뭐랄까. 이런 느낌이었다.
자신의 친구가 제일 연기를 잘한다고 은근히 자부심과 자랑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을 정면으로 도전받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태클 걸 듯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렇게 말해두면 감독님이 저를 심사할 때 훨씬 몰입해서 봐주실 것 같았거든요. 아무래도 제 상태가 이상하다는
인식을 하고 보시면 더 리얼하게 느끼실 것 같아서요.”
김건은 입을 떡 벌렸다.
“······!!!”
미친!
제작사 관계자들까지 떠나 오디션 장에 김건과 조연출 둘만이 남았을 때였다. 김건이 책상에 왈칵 엎어졌다.
“아악, 분해!”
“그거 무를 순 없나?”
“아니, 내 맘대로 캐스팅도 못하면 대체 왜 내가 감독인 거야? 응? 감독이 이렇게까지 권한이 없어도 되는
거야?”
“아니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짓말은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왜 사람을 속이냐고, 어? 사람을 속이길 왜
속여.”
김건은 우울하게 중얼거리다가 결국 ‘쳇’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전투적으로 핸드폰을 두드려 연락을
넣었다.
한류스타 이성한
36.
2 년 동안 기다린 팬들은 그의 작품을 목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테고, 제작사나 투자자 쪽에서도 이것을 마케팅에
이용하길 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그러나 후반부의 클라이맥스에선 주인공인 이성한과 강하게 부딪히는 장면이 있었다. 태웅이 몰락한 후 홧김에
약을 하고 주인공을 찾아가 화를 내는 장면이었다.
나는 미친 듯 웃었다가 화를 냈다가 하면서 대사를 내뱉었고, 이성한도 기죽지 않고 사납게 내 대사를 받아쳤다.
김건이 우리의 연기에 조금 멍해진 듯 벙쪄 있다가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렸다. 김건이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네―.”
“아, 감사합니다.”
“하긴 유명한 감독님 작품도 찍었는데, 왜 아니겠어. 참, 그 영화는 언제 나온다고 했지? 올해 하반기였나?”
“네, 감사합니다.”
“······?”
영화 <친구들>의 첫 촬영 날.
“안녕하세요.”
나는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성한에게 인사했다. 이성한이 대본에 고개를 파묻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날
봤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가 내게 짧게 인사 한 뒤 다시 대본을 쳐다봤다.
“네?”
“······.”
“······재미없었나요?”
“···네?”
“네, 지금 가겠습니다.”
“여기 도시락.”
“아, 감사합니다.”
“음··· 아마도요.”
“왜? 별로야?”
“아뇨, 그건 아니고.”
“······고운이 너 또 그거 했니?”
물론 나는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연예인이 신인일수록 오히려 매니저는 경력직이 붙는 게 좋았다. 왜냐면 신인들은 방송국이나 촬영장에서
쭈뼛거리기 쉬웠고, 그만큼 매니저가 뒤에서 서포트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이 바닥은 일거리가 거의 인맥으로 오고간다. 그렇기 때문에 연예인의 생명은 매니저가 구해오는
일감에 달렸다는 말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니저가 사교성이 좋고 서글서글하면 그 가수나 배우들은 카메라에 얼굴
한 번 더 비출 기회를 많이 얻게 된다.
우리 매니저가 이성한 매니저에게 이성한에 관련된 얘기만 듣고 왔겠는가. 당연히 내 얘기도 했겠지. 애가 착하고
연기도 잘하고, 그러니까 대충 잘 부탁한다 뭐 이런 류의.
나는 만족했다.
“고운이 잘 하고 와!”
“짜식. 착하기는. 매니저 챙겨주는 배우는 너밖에 없을 거다. 그래, 고맙다. 너도 파이팅!”
“넵!”
우리는 코를 찡긋했다.
“성한이 어디 갔지?”
“그래, 같이 오면 되겠네.”
“네.”
잠시 기다렸다.
“······.”
‘뭐야, 안에 있잖아.’
“이성한 씨?”
“······?”
이성한이 그것을 재빨리 숨기고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그것을 알아봤는지 눈치 보는 표정이었다.
그건 수면 유도제였다.
“······.”
“······.”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같이 밥이나 먹자
37.
그리고 그럴수록 오히려 더더욱 다음 작품을 선택할 수가 없어졌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군대는 어차피 가야 하는 거니까. 자신은 노는 게 아니라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므로 어쨌거나 2 년 동안은
일하지 않고 정당하게 쉴 수 있다 여겼다.
처음에 그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모두들 울면서 군대를 간다지만, 이성한은 차라리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했다.
자신이 군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또래의 동료 배우들이 하나둘 씩 잘 되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러자
조급증이 들었다.
처음엔 도피할 수 있는 핑계가 돼주었던 군대는, 어느 순간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답답한 굴레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군대를 가느라 생긴 2 년의 공백만큼 더 잘해서 얼른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덧붙여지면서, 강박은
이전보다 훨씬 크고 거대해졌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심각해졌을 즈음, 이성한은 수면제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수면 유도제에.
처음에는 한두 알만 먹어도 잠이 쏟아졌다. 좋았다.
하루는 약을 비타민처럼 먹어대는 이성한을 보다 못해, 매니저가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어떠냐고 넌지시 물었었다.
그러나 이성한은 극구 거부했다. 정신과에 드나드는 모습을 파파라치에게 찍히기라도 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이성한은 이미 악플에 시달릴 만큼 시달렸고, 지금도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자신의 약점을 하나 더
대중에게 던져주고 싶지 않았다.
“신경 꺼.”
아까 대기실에서 있을 때는 그래도 좀 귀엽게 까칠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까칠하기가 사포의 그것과 같네.
이게 원래 성격인가 보지?
참고로 수면제는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지만 구매할 수 있지만, 수면 유도제는 의사의 처방 없이도 약국에서 구매
가능하다.
“안 찍히면 되잖아.”
“그게 가능할 것 같냐? 요즘 파파라치 얼마나 지독한데. 하다하다 집 앞에 밥 먹으러 가는 것까지 감시한다고.”
그런가?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왜, 너 친구 없어?”
흐음―.
며칠 뒤.
“아악, 왜 하필 걔야?!”
왜 하필 약을 먹고 있단 사실을 들킨 게 백고운이었을까.
이성한은 연기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이 심했고, 그런 그에겐 백고운의 존재 자체가 자극제였다. 아무도 둘을
비교하지 않았는데도 이성한은 백고운이 연기력으로 칭찬을 받을 때마다 괜히 열등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성한 자신이 보기에도 백고운은 객관적으로 연기를 꽤 잘했다. 그래서 더 분했다.
촬영장에서 이성한은 긴장감 때문에 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고, 그것을 티내지 않기 위해 언제나 많은
에너지를 들여야 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네, 여보세요?”
이게 대체 무슨 대화란 말인가.
혹시나 자신이 약 먹는 얘기를 꺼내면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날카롭게 반응하고 있을 때였다.
―나오라고. 밥 먹게.
“뭐?”
그는 당황했다.
아, 설마.
“······.”
뭐, 뭐라는 거야. 얘?
[안 갈 거야!]
백고운 역시 금방 답장 왔다.
[6 시까지야.]
[안 간다고!!]
아니, 얘는 뭐 이리 마이웨이야?
“안 온다더니. 왔네.”
타코와 곱창
38.
“선, 선배님?!”
아, 아니, 그가 왜 여기에?
“네? 네!”
“얘들아 벨트 꽉 붙잡아라.”
“윽!”
그때부터 기태성은 차로 기예를 부리듯 요리조리 차를 비틀며 운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기태성은 그런 거친
운전을 좋아하는 건지 차가 튕기듯 ‘부앙’ 속도를 내기도 했다.
‘살아야 한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다 따돌렸어요?”
“그냥 밥 먹으러 가는 거니까 기자가 따라와도 상관은 없는데, 네가 싫어하는 것 같아서. 선배님 운전이 좀
거칠었지? 불편했다면 미안.”
다짜고짜 사람을 불러내기에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얘, 의외로 꽤 괜찮은 놈일지도······.
“여기가 그 타코 집이야?”
“응. 들어가자.”
백고운과 기태성, 그리고 이성한은 나란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탄 후, 자연스럽게 4 층 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백고운이 그런 이성한을 막더니 5 층을 눌렀다. 이성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4 층이었던 것 같은데.”
“알아. 5 층에 먼저 들를 일이 있어서.”
“······뭐?”
이성한은 완벽주의 기질 때문에 성격이 예민하고 까칠한 편이었다. 그래서 친구가 많이 없었다.
“난 그냥 네가 한 번쯤은 방해받지 않고 선택할 기회가 있었으면 했어. 사진 찍힐까 봐 정신과 안 간다고 했잖아.
근데 지금은 기자들 없어. 나랑 선배님이 따돌렸으니까. 그러면 지금이라면 아무 문제없지 않아?”
“······!”
예상 밖의 말에 이성한의 눈이 커졌다.
“너한테 막무가내로 나오라 그러고, 여기까지 데려온 건 미안해. 하지만 나는 딱 여기까지만 할게. 이 다음은
온전히 네 선택이야. 한 번 가볍게 상담 받아 봐도 되고, 영 싫으면 그냥 아래층 내려가서 타코나 맛있게 먹고
헤어져도 돼. 물론 난 네가 뭘 선택하든 존중할 거고.”
“······.”
방금 백고운이 했던 말이 귀에 어른거렸다.
여태 이성한은 백고운의 저 ‘남의 시선이 어떠하든, 자기는 신경 안 쓴다’라는 마이웨이적이고 여상한 태도를
참 이상하게 여겼었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뒤.
“수고했어요. 다음 주에 봐요.”
“끝났어?”
“······응.”
그는 약간 얼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뭐랄까. 꼭, 세탁기로 탈탈 돌려진 후 따듯한 햇볕에 건조되어 바짝
마르면서도 보송보송해진 느낌 같았다.
이성한의 고민이 뭐인지는 나야 모르지만, 그래도 하나는 알았다. 사람은 때론 고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훨씬 나아진다는 것을 말이다.
하루는 이성한이 그렇게 말하며 대사 좀 쳐달라고 부탁해왔다. 그래서 나는 대본을 가지고 와서 그의 연습을
도와줬다.
나름 중요한 장면의 대사인데,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가 많은 탓에 제 생각만큼 딕션이 명확하게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
그런데 그때, 이성한이 내가 말해준 대로 따라하며 순순히 대사를 쳤다. 그러자 이번엔 대사도 안 밀렸을 뿐더러,
발음도 훨씬 안정되게 나왔다.
“네 말대로네.”
“······고맙다, 흥.”
나는 모른 척 물었다.
“······뭐, 싫진 않아.”
1 년 만의 재회
39.
“응, 확실히.”
마침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조연출이 말해왔고, 김건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모두 괜찮다고 하는데 주인공인 이성한이 만족하지 못해 몇 번이고 계속 찍다보면, 당연히 주변의 분위기
역시 지치고 어색해지기 쉬웠다.
“좋네. 잘하는데?”
“원래도 잘 했거든.”
“넵!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점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전보다 사람이 좀 밝아진 게 확연히 느껴졌다. 좋은 변화였다.
‘저 백고운이 같지.’
좋은 경우는 배우들 대부분이 또래 친구처럼 친해지는 경우였고, 나쁜 경우는 아이들이 질투와 시기 등등으로
멘탈이 흔들려 촬영 전체에 영향이 가는 경우였다.
연기력도 연기력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성격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백고운은 작업하기 편한 배우임엔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아··· 혹시···.”
“빠르지.”
그 주 일요일.
이곳은 원래 김철수의 부모님을 안치한 곳이었는데, 그의 아들인 김철수도 1 년 전 세상을 뜨면서 여기에 같이
안치해 놓았다.
“잘 지냈냐?”
“···또 올게.”
고작 그런 말이나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응?
“고, 고운이?”
“감독님, 안녕하세요.”
“나 보러 왔다고? 왜?”
김건은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불현듯 미간을 좁히고 허공을 쳐다봤다. 그가 의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그럴 것 같긴 했어.”
어째 익숙한 데자뷰다.
“······?”
“어, 그러니까 고운이 네가··· 철수라 이거지? 음······ 고운아. 이게 지금 무슨 연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그것도 여기서 나한테 하기엔 별로 상황이 적절하지 못한 것 같다.”
게다가 백고운은 저번에도 이미 한 번 김건을 속인 전적이 있다. 그러니 지금 이것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장난은 진짜, 재미없었다. 이건 오디션 장에서 밤을 샜다고 거짓말 좀 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때였다.
“이상하지 않아? 김철수가 안치된 납골당이 어딘지는 너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 말고는 모를 텐데, 내가 여길
어떻게 찾아왔는지 말이야. 하지만 내가 바로 김철수니까 안 거야. 우리 부모님을 내가 여기다가 모셨으니까.
그리고 내 친구 김건이라면 나를 우리 부모님 옆에 놓았을 거라 생각했지. 그래서 네가 납골당을 간다고만 했을
때 여기로 오겠구나 안 거야.”
“······!”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김철수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기껏해야 상조회사 직원들 몇몇, 김건, 그리고
자신의 아내 정도다.
무리한 가정이긴 하지만, 김철수가 여기에 안치되었다는 걸 알아낼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여기
납골당 직원이나 상조회사 직원이 정보를 유출했을 수도 있고.
사고가 있던 그날 밤의 일은 김건과 김철수 둘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남에게 들었다고 하기엔 백고운이 밝히는
내용이 너무 상세했다. 그날 둘이 했던 대화까지 타인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우리는 납골당 한쪽에 비치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내 흑역사 뭐야.”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술 먹고 전화로 선희 씨한테 고백한 거. 그리고 뻗어서 경찰서 유치장 갔는데, 경찰이 제일 최신 통화 목록에
있는 선희 씨가 친구인 줄 알고 부른 거.”
“얼른!”
“······거니거니.”
나는 체념했다.
“내 몸에 점은 몇 개야.”
몇 번째 같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대답해주었다.
나는 비식 웃었다.
“이젠 믿나 보네.”
1 년 만의 재회였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장면
40.
“여기서 혼자 사는 거야?”
“아이고. 좋은 곳에 갔을 거야.”
“그러길 바랄 뿐이지.”
그래. 자신의 친구가 살기 위해 타인이 죽어야 한다면, 김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친구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가 정말로 살아서 제 앞에 돌아와 있다. 감격에 가까운 감정이 또 주체를 모르고 차올랐다.
결국 김건은 옛 친구에게 와다다 달려들어 헤드락을 걸었다.
“뭐? 네가 왜 형인데?”
“나 참.”
“그런 셈이지.”
“와, 배신이다 진짜···. 어떻게 그 사이에 나한테 연락을 안 할 수 있어? 난 진짜 너 죽은 줄로만 알았단
말이야. 장례식장에도 왔다며. 그때 말할 수도 있었잖아!”
친구가 멀쩡히 살아있는 줄도 모르고 지난 1 년 동안 혼자 삽질했다고 생각하면 아직도 간간히 원망스러운 마음이
울컥 차오르긴 했지만···.
“아, 어떡하냐.”
“왜?”
“그냥···.”
“······빈 말 아니지?”
“응. 아니야.”
그런데 그때, 그렇게 말하면서 백고운은 한 번 눈을 굴렸다. 김건은 그 표정을 기가 막히게 눈치 챘다.
“아냐, 그런 거.”
그리곤 그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냥, 별 건 아니고······.”
김건은 태웅의 기괴한 모습이 강조되는 게 좋으리라 생각했다. 더구나 이 장면에서 태웅은 약까지 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요 전날.
그는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주인공과 태웅이 대립할 때 ‘이런 식으로 태웅의 캐릭터를 보여주면 어떨까?’라고
조금 색다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오늘 찍을 장면이 바로 그 장면이었다.
이성한은 눈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너 때문에···,”
극 중에서 태웅은 국회의원의 아들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폭로로 인해 그의 아버지는 비리가 밝혀져 감옥에 잡혀
들어가고, 그의 집은 쫄딱 망하게 된다.
다만 그때는 백고운이 미친 것처럼 실실 웃다가 화내다가 했지만, 지금은 그저 분노만 터트리고 있단 게 유일하게
다른 점이었다.
“······.”
“······.”
그런데 그때였다.
부릅뜬 눈으로 이성한을 죽일 듯 노려보던 백고운이 이어서 한 행동은 선빵도, 도망도 아니었다.
털썩―.
이성한이 경악했다.
“무슨······!”
백고운이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가더니 도로 옆의 흙탕물 쪽으로 향했다. 그 흙탕물은 매연으로 인해 새까맸고,
담배꽁초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
이성한과 구경꾼들 모두가 백고운의 서슬 퍼런 안광에 얼어붙었다. 모두가 경악한 가운데 백고운만이 실실 웃었다.
“······!!”
그리고 한편.
이성한이 이를 악물었다.
“이딴 짓을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아니, 애초에 나한테 이럴 필요도 없어. 난 너한테 사적인 복수심으로
이러는 거 아니니까. 너는 그저 죄를 지었고, 그래서 정당하게 처벌받는 거야.”
“그만 해, 이태웅!”
“야, 정신 차려!”
충혈 된 그의 눈에 핏발이 올라왔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컷! 오케이!”
김건이 외쳤다.
출연 배우들, 스태프들이 참았던 숨을 그제야 내쉬었다. 아무도 먼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방금 자신들이
뭘 본 거지?
―비애?
처음에 김건은 그게 원래의 ‘태웅’ 캐릭터와 반대되는 모습이라 생각했다. 태웅은 고작 몰락한 것으로 타인에게
용서를 구할 성격이 아니었다.
―태웅이 참회한 모습을 보여주자는 얘기가 아니야. 내 말은, 인물이 자신의 성격과 반대되는 짓을 할 때 그
인물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인다는 얘기였어. 한 번도 누구 앞에 무릎 꿇어본 적 없는 태웅이 완전히 몰락해서
무릎까지 꿇는다면, 완전히 밑바닥에 떨어진 모습을 훨씬 잘 보여줄 것 같거든.
그게 백고운이 말한 ‘비애’였다.
그리고 그의 말이 맞았다.
‘그래, 저게 바로 내 친구 김철수지!’
포문을 열어젖히다
41.
거장 유명한 감독의 차기작이라는 이름값도 한몫 했지만, 영화 자체도 대중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었다. 따듯한
감동 스토리인데, 마지막에는 과하지 않게 눈물을 짜낼 신파도 있었다. 인기가 없기가 어려웠다.
영화를 보고 온 대중들은 인터넷에 높은 평점을 남겼고, 영화의 누적 관객수는 매일매일 기록을 경신했다.
그만큼 백고운이 보여준 약 빤 연기는 모두의 뇌리에 남을 정도로 강렬했다. 그야말로 씬 스틸러였다.
―[인터뷰] 충무로에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배우 백고운, 인기의 비결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 좋은 기회 주신
분들 덕분.”
대중들의 반응 역시 뜨거웠다.
[님들 영화 <해수> 대부분이 배우들 애드리브래. 감독님 인터뷰 보다가 깜짝 놀랐음. 기태성이야 짬이 있으니
그렇다 치는데, 백고운 얘는 데뷔한 지 1 년도 안 되지 않았음? 진짜 미친 듯;;]
2011 년.
“고운이는 아직인가?”
둘 사이가 많이 좋아졌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촬영장에 가보니 갑자기 둘이서 무슨 10 년 된 친구처럼 사이가 좋아져 있었다.
둘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뭐, 자세한 이유야 모르겠지만 지켜보는 조연출 입장에서야 심심하지는 않았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고 해야
할까.
“여기야, 여기!”
“아, 감독님.”
아무리 배우와 감독이 친해도 보통은 약간의 위계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나이 차이가 큰 경우라면 더더욱.
그런데 김건을 대하는 백고운의 태도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지금도 보라. 백고운은 스스럼없이 김건의 아내의
이야기를 꺼내고, 김건 역시도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고 있지 않은가. 무슨 진짜 동갑내기 친구처럼 말이다.
‘참 신기하다니까.’
“어, 백고운?”
이성한이 손을 닦으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딱 백고운이 도착한 타이밍에 잠깐 화장실을 가느라 자리를 비웠던
모양이었다.
“왔냐?”
“어, 왔다.”
“일로 와. 너 자리 잡아놨어.”
결과적으로 김건과 이성한이 둘 다 백고운에게 자신의 테이블에 앉으라고 러브콜을 보낸 그림이 됐다.
조연출은 한가롭게 생각했다. 밖에서도 인기 있더니, 안에서도 인기가 많네. 백고운의 선택은 어느 쪽이려나.
“······어?”
“······응?”
‘얼씨구.’
그 둘의 모습은 꼭 뭐랄까··· 인기 많은 한 친구를 두고 유치한 꼬마 둘이서 자기랑 놀자고 신경전 벌이는 모습
같았다.
한편 조연출은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잘 이해가 안 되었지만, 어쨌거나 김건이 하도 툴툴거리기에 기분을 풀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정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얘기는 처음 듣는 건데.
배우가 그 소문을 듣고 그들에게 프로필을 한 번이라도 더 내밀면 작품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도 하니까.
“걔가 온대.”
나는 놀라 눈을 끔벅였다.
······뭐?
*
평일 낮, 인천공항.
그가 바로 오용호였다.
“저 사람 오용호 아니야?”
그들은 긴가민가했지만, 배우 오용호가 혼자 비밀리에 입국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가자, 늦었다’하면서 바삐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영화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남자― 포스터 한가운데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완전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때 지나가던 여자 관광객이 그 포스터를 보며 ‘꺅’, ‘백고운 배우네’하면서 잠깐 호들갑을 떨었다.
꽤 인지도 있는 배우인가?
오용호는 중얼거렸다.
“많이도 바뀌었네.”
오용호
42.
“고운 씨, 안녕하세요!”
“에이, 저는 그 동안 고운 씨 많이 봤어요.”
“네?”
저번에 헤어질 때 민하나는 같이 무대 서자는 말을 꽤나 비장하게 했다. 그래서 어딘지 그러지 않았을까 어림잡아
추측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요. 저도 놀랐잖아요.”
<레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가 1862 년에 출간한 소설로, 내년인 2012 년에 정확히 150 주년이 된다.
그러니 2011 년인 겨울인 지금부터 작품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2012 년에 누구보다 빨리 <레미제라블>의 150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레미제라블>의 150 주년을 준비하는 건 우리 공연계 뿐만은 아닐 것이다. 출판계나 영화계
쪽에서도 바쁠 것이다. 올해 완역서를 낸다거나 리메이크를 찍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라인업이 대단해요. 1 군 배우 쪽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외부에서 섭외된 배우가 기대주거든요.
고운 씨가 하나고, 나머지 한 명이···. 아. 고운 씨도 알고 계시겠구나.”
“고운 씨, 혹시 긴장하셨어요?”
모여서 저마다끼리 담소를 나누고 있던 극단 소속 배우들이 대화를 멈추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그때였다.
“······.”
“······.”
뭐야, 설마 벌써 들킨 건 아니겠지?
*
―전 선배님과만 하고 싶은데요.
오용호는 말해주기 전까지는 물러나지 않겠단 태도였고, 김철수는 결국 대충 떠오른 대로 말한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나 한국에선 아무리 유명한 배우라고 해도, 동양인이 외국에서 곧바로 비중 있는 역을 맡기는 어려웠다.
오용호의 선택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오용호는 그 다음 시즌에도 참여했고, 외국의 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몇 년을 버티며 외국의 영화
관계자들에게 얼굴을 알렸다.
그리고 드라마가 끝난 후에는 한국에 오고 싶지 않았다. 한 가지 목표만 보고 달렸는데 그 목표가 갑자기 사라진
느낌이었다.
세상은 넓었고, 외국으로 시선을 넓히자 김철수의 말대로 연기 잘하는 사람은 꽤 많았다. 그 생각은 다시 새로운
동기가 되어주긴 했다. 그러나 마음 속 한 구석에는 아직도 헛헛함이 남아 있었다.
그때, 소속사 측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에 극단 왕국에서 <레미제라블>을 올린다고. 너 여기 주연 해보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고.
그래, 그건 맞았다.
자신은 그 영화를 안 봤는데 소속사 사장님이며 주변에서 계속 저 배우가 그렇게 연기를 잘한다고 떠들어댔다.
오랜만에 오용호 그의 호적수가 나타났다면서.
모작과 원작
43.
다만 이번엔 스케일이 큰 공연이니 만큼 외부 쪽에서도 최호랑이 섭외한 배우들이 있기에 그들은 이미 캐스팅이
내정된 줄 알았다.
이를 테면 백고운이라든가, 오용호라든가.
최호랑은 미리 종이를 붙여놓은 벽을 가리켰다. 각각의 종이에는 ‘장발장’, ‘팡틴’, ‘코제트’, ‘자베르’
따위의 롤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배역을 고르라는 최호랑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용호는 곧바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장발장’ 앞에 섰다.
그러나 대부분의 배우들은 자신과 어울릴 법한 배역을 고르는 경향을 보였다. 방금 전 최호랑은 연기력만 본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사람 심리란 게 있으니까.
아마 그 단원은 장발장이란 캐릭터의 나이가 있으니 자신이 유리할 거라 여긴 모양이었다. 그래도 오용호와
경쟁하는 걸 택했단 점에서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백고운은 뭘 고를까?’
그러나 백고운의 나이대에 맞는 배역은 ‘마리우스’ 정도였다. 비중이 적다고는 하기에 뭣하나, 주연 캐릭터는
아니다.
그러나 서른인 오용호까지는 어떻게 장발장을 연기해본다 쳐도, 이제 막 스무 살인 백고운이 장발장을 하기엔
너무 무리가 있지 않은가?
“······!”
장발장 역이었다.
그리하여 주인공인 장발장 자리를 두고 백고운, 오용호, 그리고 50 대 중견배우의 3 자 대결이 시작된 셈이었다.
오디션 볼 배역을 정한 바로 다음 날.
‘레미제라블이라······.’
감동에 한동안 빠져있던 우리는 <레미제라블> 공연을 우리가 직접 연극으로 재연해보자고 충동적으로 뜻을 모았다.
그 나이대에 할 법한 행동이었다.
김건이 각색을 맡았고, 나는 주인공인 장발장을 맡았다. 우리의 행동에 관심을 보인 동기 몇몇이 합류했다.
그렇게 소규모의 동아리가 즉흥적으로 결성되었고, 우리는 학교의 작은 공연장을 빌려 자비 공연을 올렸다.
그날의 그 공연은 찍어서 비디오 테이프로 동아리원 모두가 나눠가졌는데, 나는 화재로 그것을 잃어버렸고,
김건은 신혼집으로 들어갈 때 버렸단다.
이제와 다시 찾으려고 김건을 시켜 연락을 돌려보니, 유일하게 그것을 갖고 있는 동아리원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어?”
“응?”
“아, 네. 안녕하세요.”
이건 동아리 규모의 자비 공연이었을 뿐이고, 오리지널 공연은 시중에서 영상을 구할 수 있을 텐데. 연습하려면
그런 걸 보는 게 더 낫지 않나?
궁금해서 묻자, 오용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응? 진짜?
내가 김철수인 시절, 오용호는 내가 롤 모델이라면서 졸졸 따라다니긴 했다. 그런데 개인사를 알 정도로 친하지는
않아서 이 무대가 계기였을 줄은 몰랐다.
‘신기하네.’
재밌는 우연이다.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조용히 비디오를 시청했다. 장발장을 연기하는 풋풋한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일주일 뒤.
오늘은 저번에 각자 골랐던 배역의 오디션을 보는 날이었다.
‘착각이 아니었어.’
며칠 전 모교에 연락해서 “고(故) 김철수 배우가 학창시절 <레미제라블> 공연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혹시
영상 기록이 있을까요?”하고 물어서 찾아갔었다.
오용호는 이미 김철수의 모작 연기를 보고 그 다음에야 원작 연기를 봤다. 당연히 기시감과 더불어 묘하게
심심하단 인상을 받았을 수밖에 없었다.
최호랑이 그를 불렀다.
오용호의 라이벌은 예전부터 오직 김철수 하나였으며, 그가 없어진 지금은 오용호 바로 그 자신이 유일한
경쟁자였다.
장발장 연기
44.
( *작중에서 등장하는 ‘원작’은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이 아닌, <돌아온 천재배우>에서 언급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 오리지널팀의 공연’임을 밝힙니다. 또한 이 뮤지컬 <레미제라블> 역시 실제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는 매킨토시의 뮤지컬 <레미제라블>과는 상관없는 가상의 뮤지컬임을 밝혀둡니다.)
이번 연극을 위해 각색한 장발장의 서사는 간략히 이러하다.
가상의 무대의 시공간은 미리엘 신부네 저녁 식사 자리다. 신부 역시 풍족하지는 않지만 손님인 장발장을
대접하기 위해 정성껏 준비했다는 설정이다.
그리고 신부가 잠시 자리를 비운 그때. 오용호의 눈이 식탁 가운데에 있는 은촛대에 닿았다. 그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였다.
“이봐요!”
오용호가 퍼뜩 몸을 멈추고 낭패감 어린 눈으로 돌아봤다. 그의 얼굴엔 두려움이 스치지만, 동시에 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
오용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가 그것들을 바닥에 툭 떨어트리고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참을 바들바들 떨었다.
‘······완벽하다.’
민하나는 감탄했다.
물론 이야기 전개는 원작과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실제로는 은식기를 훔친 장발장이 순경에게 잡히고, 미리엘
신부가 자신이 은식기를 준 것이라고 말하면서 은촛대를 얹어준다. 그러나 이번 연극은 러닝타임 때문에 각색이
많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릭터 자체는 원작 그대로의 장발장 느낌이었다.
대사도 별로 없었는데 표정만으로 장발장의 고뇌와 괴로움이 다 느껴졌다. 원숙한 감정 표현 연기가 훌륭했다.
오용호는 완벽하게 장발장의 모습을 연기해냈고, 50 대 단원은 그와 비슷한 장발장을 흡사하게 구현해내긴 했지만
조금 밋밋했다.
한편 나는 좀 놀랐다.
아마 원작의 프로듀서가 봤다면 오용호를 한국어판 공연에 그를 캐스팅 했을 것이다. 그만큼 오용호는 장발장
같았다.
그때 최호랑이 날 불렀다.
“다음은 백고운이.”
“고운이 긴장했나?”
나는 빙그레 웃었다.
최호랑이 ‘준비 됐나?’라고 물었고, 나는 ‘네’하고 대답했다. 최호랑이 입을 떼며 천천히 미리엘 신부의
대사를 쳤다.
“차린 건 없지만···.”
그의 얼굴 근육이 축 쳐졌고, 동공에 빛이 사라졌다. 그러자 한순간에 피곤하고 음울한 얼굴이 되었다.
“···고맙소.”
모두가 깜짝 놀랐다.
“······!”
그러나 배우와 성우는 연기를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지만, 그래도 둘은 다르다. 특히 배우는 성우처럼
목소리의 음역대를 완전히 바꾸면서 연기하지는 못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말이다.
그러나 아까의 오용호가 굶주린 듯 빵을 우걱우걱 먹은 것에 비해, 백고운은 먹는 속도가 현저히 느렸다. 마치
체력이 떨어져 씹는 행위 자체가 매우 힘겨운 듯 보였다.
“이봐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는 미리엘 신부에게 들킨다. 허나 신부는 장발장에게 은촛대 말고 더 가져가라고 말한다.
그가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곧 그도 아까의 오용호처럼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그는 양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얼굴을 푹 숙였다. 콩
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잠시 바르르 떨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
오용호는 놀랐다.
다른 단원들 역시 백고운이 보여준 색다른 장발장의 모습에― 그러나 어쩐지 매력적인 장발장의 모습에 충격에
빠져 있었다.
“좋아, 그만.”
최호랑은 같은 질문을 곧바로 오용호에게도 던졌다. 그리고 오용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오용호는 한 템포 쉬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미리엘 신부를 만나서 장발장은 처음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걸 직시했을 것 같았습니다. 그가 훔친 건
부자들의 물건이 아니라, 가난하고 착한 신부의 물건이었으니까요. 정당화할 무엇도 없었죠. 장발장은 처음으로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꼈을 겁니다. 심지어 그는 감옥살이를 한 후에도 또 도둑질을 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새
사람이 되려고 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속죄의 의미로요.”
그래서 오용호의 장발장은 수도자(修道者) 같은 이미지였던 것이다. 자신의 죄를 십자가처럼 지고 묵묵히 속죄의
길을 가는 사람. 그게 그의 장발장이었다.
백고운이 이어 말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신부님이 따듯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저는 장발장이 진심으로, 마음 깊숙한 곳에서 감화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울었나?”
“네. 처음으로 느껴본 선의가 너무 따듯해서요. 감사함이 곧 존경이 되고, 동경이 되어 그 자신도 신부님처럼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을 것 같았습니다.”
둘 다······ 천재 아냐?
리허설 공연
45.
‘후회는 없어.’
이번에 나만의 장발장을 연기한 건 튀어 보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오용호를 의식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와 차이점을 두려고 일부러 노력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답이 이것이었다.
시간여행을 할 수는 없지만, 이건 옛날의 내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 같은 것이었다.
최호랑이 말했다.
“오용호 씨.”
오용호가 특별히 기쁜 표정도 없이, 당연하단 듯한 얼굴로 뚜벅뚜벅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장발장이 적힌 이름
쪽으로 향해 가서 섰다.
다른 배역들 중에서도 더블 캐스팅이 많았기에, 이상한 그림은 아니었다. 모두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 역시 감사한 마음으로 발을 떼려고 했다.
네?
“또한 둘의 연기력을 비교했을 때 우위를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나는 원래 보기로 했던
연기력 외에 다른 것― 다른 배우들과의 합, 전체적인 조화, 무대 위의 장악력 등등을 함께 볼 생각입니다.”
“······.”
“······.”
음,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최호랑은 임의로 두 팀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백고운과 오용호가 대본을 숙지할 수 있도록 2 주의 시간을 넉넉히
주었다.
그리고 오늘.
“어? 고운 씨?”
“하나 씨. 일찍 왔네요.”
안에는 백고운이 있었다. 그는 무대 위에 서 있었는데, 허리를 굽히고 뭔가를 하고 있다가 민하나를 발견하고
허리를 폈다.
민하나는 조금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드레스 리허설도 아니고, 연습용 공연에 불과했다. 아니, 사실 공연이라고 하기도 뭣하고, 그냥
연습하는 모습을 남이 와서 구경하는 것에 가까웠다.
연기할 땐 독백이 아닌 이상에야 상대 배우가 대사를 받아쳐줘야 한다. 때문에 이번 오디션에서 보는 건 백고운과
오용호가 장발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하는 모습일 뿐이고, 다른 배우들은 그저 대사를 받아주는 역할에
불과하다. 그래도 너무 어설프게 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대략적인 동선 정도는 짰지만.
그런데도 백고운은 꼭 본 공연이라도 되는 것처럼 열심이었다. 나이가 적고 연차도 적다지만, 인지도로만 따지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상전일 텐데.
“고운 씨는 참 부지런하시네요.”
“저 때문에 다들 수고해주시는 건데 이 정도는 해야죠.”
그랬다.
왜냐하면 코제트 역에는 민하나 혼자 캐스팅 되느라 두 팀 모두에 참여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민하나는
2 주 동안 두 팀을 왔다갔다하면서 연습했다.
백고운 팀은 확실히 분위기가 좋았다. 팀원들 모두가 사이가 좋았고, 연습 역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진행됐다.
백고운은 연극판에서 몇 십 년은 굴러본 것처럼 능수능란하게 연습을 진두지휘 했고, 그러면서도 전혀 권위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팀원들 입장에선 자기들은 이미 캐스팅이 확정된 마당에 추가적으로 이런 연습을 하는 것이 불만스러울
수도 있었다.
백고운은 그걸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의식하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팀원들에게 꼬박꼬박 감사를 표했고,
너무 잘하고 있다고 끊임없이 칭찬과 감탄을 남겼다.
그러니 처음엔 미적지근했던 팀원들도 나중에는 이 연습이 그저 순수하게 즐거워졌는지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좋다보니 연습 준비도 상당히 스무스하게 진행되었으며, 그 퀄리티도 당연히 좋았다.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는 방법을 모른다기보다, 애초에 친해질 노력 자체를 안 한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고운 씨, 저도 도와드릴게요.”
몇 시간 뒤.
두 팀의 배우들이 모두 모였다.
그리고 최호랑을 비롯한 임시 심사단도 도착했다. 이번 공연을 기획한 프로듀서, 제작사 관계자들, 그리고
연극계 인사 몇몇이 참석했다.
“그럼 시작하죠.”
최호랑이 말했고, 백고운 팀이 먼저 시작했다.
“내가 너를 꼭 책임지마.”
그러자 전반적으로 진짜 공연 같은 느낌이 살았다. 여기서 의상과 분장, 조명만 있다면 거의 본 공연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백고운의 차례가 끝나고 이어서 오용호의 차례가 되었다. 그의 팀이 무대에 올랐고, 오용호가 연기를 시작했다.
‘어라, 이거······.’
앞선 백고운 팀 배우들은 대부분 대본을 보지 않았는데, 오용호 팀은 오용호를 제외한 전원이 대본을 들고 연기를
했다. 심지어 오용호 팀의 팀원 몇몇은 대본을 보고 읽는 것에 불과했는데도 대사를 더듬기까지 했다.
오용호의 연기에는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았고, 팀원이 버벅거리건 말건 저 자신만 잘하면 된다는 태도로
시원시원하게 연기를 계속 했다.
그는 코제트를 구출할 때 훨씬 무거운 목소리로 “내가 너를 꼭 책임지마”라고 대사를 쳤다. 아이를 떠맡게 된
것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묵직한 책임감을 받아들이는 목소리였다.
어째야 하나 싶을 때였다.
합숙 연습
46.
그런 타입은 아닌가?
그런데······.
“마지막, 백고운.”
“······!”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단장님.”
오용호였다.
그가 손을 들고 있었다.
“무슨 역으로?”
“자베르 역을 하고 싶습니다.”
그건 재미있는 상대를 만난 사냥꾼의 눈빛이었다. 거기엔 흥미로움과 투지, 호승심 같은 것이 뒤섞여 있었다.
‘······이런.’
굳이 백고운이나 오용호의 이름값이 아니어도, 공연계 쪽에서 극단 왕국의 인지도는 매우 높았다. 극단 왕국이
올리는 정기공연은 유명 뮤지컬 못지않게 매번 전석 매진을 달성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런데 이번에 올리는 공연이 <레미제라블>이라고 하니 당연히 반응이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공연보다 드라마나 영화에 더 익숙한 일반 대중들도 백고운과 오용호가 참여한다는 얘기를 듣고 관심을
보였다.
백고운이나 오용호의 팬들은 인터공원에 미리 회원가입을 해놓는 등 티켓팅을 할 준비를 미리 마쳐놓고 있었다.
“2 박 3 일 동안 합숙 연습을 갈 예정이다.”
그래서 오늘.
“······?”
“아, 네. 그러세요.”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성격이랄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이 저를 어떻게 보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기사 봤는데,”
그가 하던 말을 계속 이었다.
“아··· 네.”
손해라.
그러나 나는 이미 최호랑에게 공연에 오르겠다 약속을 했고, 그것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올리는 공연이
<레미제라블>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나 역시 이것을 꼭 하고 싶었고.
내가 완전히 무명일 시절에는 카메라에 한 번이라도 더 나오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인기를 얻고 싶어서라기보다
인지도가 높아지면 작품 제의가 많이 들어오니까. 결과적으로 더 많고 다양한 연기를 할 수 있게 되고.
하지만 이런 얘기들을 구구절절하기엔 조금 귀찮았고, 솔직히 말하면 오용호가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뭘 보고 연기하는데요?”
뭘 그런 걸 묻지?
나는 당연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가치관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건 아마도 서로를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절대로 좁혀지지
않을 터였다.
약간 서먹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버스가 서해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조용히 각자 시간을 알아서 보냈다.
굳이 섬까지 들어간 이유는 단순했다. 겨울이라 바다에 들어가서 놀 수도 없는데, 그러면 배라도 한 번 타보면
좋지 않겠냐 하는 이유였단다.
여자들의 숙소와 남자들의 숙소는 나뉘어 있었고, 우리는 각자의 숙소에 짐을 부렸다.
“어? 눈?”
처음엔 싸락눈에 불과했는데, 시장에서 먹거리를 사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어느새 눈발이 굵어져 있다.
대부분의 단원들은 그저 즐거워했다. 그들은 눈 쌓이면 눈싸움 하자, 눈사람을 만들자, 이런 얘기를 했다.
‘아차.’
“백고운 씨, 대사 연습 저랑 한 번 맞춰보실래요?”
장발장과 자베르
47.
‘제법 하는데?’
‘꽤 하는데?’
물론 김철수만큼은 절대 아니었지만, 오용호는 그와 연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애초에 오용호가 이 연극에 출연하려 결심한 것도 옛 추억의 <레미제라블>을 해보면 다시금 의욕이 솟아날까
싶어서였을 뿐이었다.
이 연극 자체에 대해선 오용호는 어떤 감흥도 없었다. 오용호가 먼저 매달릴 만큼 대단한 감독의 작품도 아닌데다,
같이 연기하는 단원들 대부분도 다 거기서 거기라 오용호의 흥밋거리에 미치지 못하고 말이다.
어차피 미련이 없던 자리였기에 오용호는 주인공 배역을 고집하기보다 백고운과 연기를 대결해볼 수 있는 자베르
역으로 바꿨다.
그러나 대화를 통해 오히려 오용호는 백고운이란 사람 자체에 대해서 빠르게 흥미가 식었다.
그것보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때마침 눈이 왔고, 백고운 역시 연극 속 ‘그 장면’을 떠올린 게 분명한
표정을 지었다.
오용호는 백고운에게 가서 직구로 같이 한 번 합 좀 맞춰 달라 말했다.
“네, 그러죠.”
백고운은 의외로 선선히 기다렸단 것처럼 말했다. 내심 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자베르 경감은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마들렌 시장의 정체를 의심하며, 그가 장발장이란 죄수임을 밝혀내기
위해 집요하게 그의 뒤를 쫓는다.
그 다음날 자베르는 강에서 시체로 발견되는데, 자신이 평생 믿어온 가치관이 잘못됐다는 것에 대한 충격과
회한으로 투신자살한 것이다.
눈이 땅에 수북이 쌓이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눈싸움을 하자거나 눈사람을 만들자고 말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재밌는 것이 이제 막 시작되려고 하는데 눈싸움이나 눈사람이 웬 말인가.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당사자들, 백고운과 오용호는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
그러나 이번 연극에서는 여기서부터 내용이 달랐다. 각색된 내용에서 자베르는 한 번 더 강하게 장발장을
몰아붙인다.
그가 비아냥거렸다.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
오용호의 말은 신랄했다.
“······.”
“······.”
그리고 그가 한 선택은······.
“이게 내 선택이오.”
“······뭐?”
“여기서 내가 죽으면 당신을 죽일 필요가 없지 않겠소? 그리고 당신이 잡으려고 하는 범죄자는 나 하나뿐 아니오?
내가 죽고 나면, 당신은 선량한 시민인 저 청년을 길바닥에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니 결과적으론 내
죽음으로 저 청년을 구하는 셈이 되잖소.”
“······!”
“무슨······.”
“내가 위선적이라면, 당신은 지금 위악을 부리는 것이니까 말이오. 당신의 본성은 선하다고, 나는 믿소.”
탁―.
그리고 장발장은 한 발 뒤에야 깨닫는다. 자베르가 건넨 총에는 애초에 총알이 없었다는 것을.
애초에 이건 장발장을 시험하기 위한 함정이었을 뿐이었다. 자베르는 진짜로 죽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이 장면의 전부였다. 이 다음에 장발장은 마리우스를 업고 뚜벅뚜벅 걸어가고, 자베르는 그런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우뚝 서 있다.
원래의 무뚝뚝한 장발장 캐릭터보다 훨씬 부드러운 장발장 캐릭터라서 그런가. 백고운은 연기는 잘했지만, 상대를
압도할 정도로 강렬하지는 않았다.
자베르는 장발장을 몰아붙이고, 장발장은 자베르의 시험에 말리지 않고 자신만의 제 3 의 선택을 하면서 꼿꼿하게
반박한다.
그러나 백고운은 계속 차분한 톤으로 대사를 쳤고, 그래서인지 장면 자체의 긴장감이 덜한 것 같았다.
“······!”
그러나 오용호는 저도 모르게 백고운을 도와주고 말았다. 방금까지 사납게 장발장을 몰아붙였던 자베르의
태도로는 옳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당신은 천성이 착한 사람이라고. 지금도 그렇지 않소. 아무튼, 고맙소. 덕분에 넘어지는 걸 면했구려.”
둘의 연기를 보고 있던 단원들은 감탄을 뱉으며 빨개진 손으로 박수를 짝짝짝 쳤다. 추위를 잊고 몰입했을 정도로
둘의 연기는 훌륭했다.
야외에서, 그것도 바람소리가 시끄러운 와중에도 둘의 성량은 풍부했고 딕션은 정확했다. 감정 연기는 또
어떠하고.
게다가 눈 내리는 환경이 그들의 연기를 방해하기보다, 오히려 척박하고 삭막한 극 중의 상황과 어울려 그들의
연기를 더욱 실감나게 만들었다. 그러니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편.
약간 묘한 것을 쳐다보는 눈빛이었다.
손발이 맞는 페어
48.
‘······들킨 건 아니겠지?’
나 역시 연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연기를 순수하게 즐기는 사람과 같이 하는 게 좋지, 연기를 경쟁의 도구로
여기는 사람의 상대의 장단에 맞춰주는 건 조금 피곤한 일이었다.
게다가 내가 여자도 아니고. 저런 시커멓고 커다란 사내놈이 날 따라다닌다고 내가 좋아할 이유가 없잖은가.
오용호가 이성한처럼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만 더 같이 해줄 수 있나요?”
이튿날 우리는 섬을 한 바퀴 돌며 구경을 하기도 했고, 밤새 내린 눈으로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들면서
놀기도 했다.
오용호만 빼고 말이다.
“어라, 또 눈이 오네?”
“······근데 눈이 좀 많이 오는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 치 앞의 시야가 구분되지도 않을 정도로 눈이 쏟아지고 있는데, 본격적으로 바람도 거칠게
불기 시작했다.
“눈 쌓인 거 실화야?”
모두 경악했다.
나머지 단원들은 숙소 안에서 기다렸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지만, 모두가 설마하면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말이
씨가 될까봐 그랬다.
그리고 삼십 분 정도 흘렀을까.
숙소는 최호랑이 해결했으니, 식량과 생필품을 더 구해야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근처 슈퍼마켓에서 조달할 수
있을 것 같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보다, 이 고립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하며 기다리고 있기엔 조금 뭣했다.
게다가 이리 온 것 역시 명목상으론 ‘합숙 연습’이지 않은가.
누가 먼저 슬그머니 말을 꺼냈을까.
“여길 빌려달라고?”
최호랑이 다시 한 번 부탁했다.
“오래 쓰지는 않겠습니다. 뭣하시면 새벽에 연습해도 괜찮고요. 문만 열어주시면 조용히 연습하고 뒷청소
깔끔하게 하고 나가겠습니다. 불편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장님은 최호랑의 그런 태도에 조금 신뢰가 가는지 약간 흔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선뜻
빌려주기엔 아직도 마뜩찮은 의심이 좀 있는 듯도 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최호랑은 뭔가가 생각난 듯 표정이 밝아졌다. 그가 재빨리 이장님께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어르신, TV 수리 기사가 올 때까지 심심하지 않으세요? 저희가 이번에 연극을 하나 올립니다. 그 공연을
어르신들께 보여드리고, 그 대신 회관을 며칠만 조금 빌려 쓸 순 없을까요?”
“······연극 공연?”
의외로 이장님은 솔깃한 듯했다.
안에는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계셨는데, 이장님 말씀을 들어서 그런지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들이었다.
어르신들이 숙덕거렸다.
“이 사람들이 연극쟁이들이라고?”
아직 본공연 연습은 시작도 안 했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한 번 리허설 공연을 해본 적이 있었다. 장발장 캐스팅
때문에 나와 오용호가 겨뤘을 때 팀을 나눠서 하지 않았는가.
“음······.”
공연의 초중반을 넘어갔을 때, 어르신들이 하나 둘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었다. 이장님 표정도 약간 떨떠름한
것이, 기대하던 것과는 좀 다른 눈치였다.
그리고 당황스러운 건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미가 없나?’
급기야 어르신들 중 몇몇은 자리를 먼저 뜨기도 했고, 그러느라 부산스러워지면서 더 공연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공연이 취향에 안 맞을 순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르신들을 만족해야 우리가 연습할 장소를 얻을 수 있단
점이었다. 이러다간 다시 쫓겨날 게 뻔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레미제라블> 자체가 프랑스 혁명을 다루고 있으며, 주인공인 장발장은 ‘죄의식’으로
고뇌하는 캐릭터이다. 그러니 이런 정극에 익숙하지 않다면 우리 공연이 재미 없을 수도 있었다.
민하나가 물었다.
“네,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우리 둘이 다는 아니었다.
나는 오용호를 돌아보았다.
“오용호 씨.”
오용호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 나는 여태 그를 피해왔으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일단 급한
불은 꺼야하지 않겠는가.
그가 조용히 날 쳐다봤다.
나는 물었다.
“할 수 있죠?”
“물론이죠.”
당당한 대답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둘이 먼저 시작합시다.”
나와 오용호.
우리 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대 위로 폴짝 올라갔다.
멜로드라마
49.
물론 나는 막장을 비하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막장’이라는 것만큼 인간의 감정을 원초적으로 건드리는
훌륭한 플롯이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에야 셰익스피어 작품이 고전으로 취급받지만, 옛날엔 셰익스피어 작품도 아주 대중적인 작품이었다. 아니,
사실 셰익스피어야말로 멜로드라마의 원형이 아닌가.
“아까의 공연을 재미없어하시는 것 같아 지금부터 새로운 공연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럼 다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르신들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약간 어리둥절한 듯, 그러나 일단은 장단에 맞춘다는 듯 어정쩡하게 박수를 다시
짝짝짝 쳤다.
―주인공 이름도 친숙하게 한국인 이름으로 바꾸면 좋을 것 같아요. 심순애와 이수일처럼, 이름을 번안하면 훨씬
더 친근하게 다가오니까요.
―그리고 내용 자체를 장발장의 사랑과 배신, 그런 치정극으로 바꾸면 좋을 것 같아요. 장발장과 팡틴이
애정관계였다는 식으로요.
장발장은 굶어가는 팡틴을 위해 빵을 훔치려 한다. 그러나 운 나쁘게 들키는 바람에 감옥으로 붙잡혀 들어간다.
장발장은 사랑하는 팡틴을 위해 몇 번이고 탈옥하려 하지만 번번이 걸리고 만다. 그래서 장발장의 형은 그만 19
년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차라리 팡틴이 저를 기다리다가 죽었다면, 슬프지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끝났을 것이다.
처음엔 많았던 돈도 빠르게 사라지고, 그녀는 나중엔 뼈 빠지게 일해서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런 그녀에게 감사할 줄도 모르고 술독에 빠진 채 첩을 끼고 살았다.
그리고 오용호는, 똑똑한 친구답게, 내 독백에서 본인의 캐릭터 설정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내가 영희를 가로챘다니, 말이 심하네. 엄밀히 말하면 영희가 그렇게 된 건 다 네 탓 아닌가? 네가 애초에 잘
했더라면 영희가 나한테 오진 않았겠지.”
그가 이죽거렸고, 나는 분노했다.
“개자식!”
“뭐, 그럴 것 같군.”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난 코제트를 데려오는 대신 값을 치렀고, 이로써 우리의 거래는 끝난 것이었다.
그런데 테나르디에 부부는 아예 삭제되고 완전히 새로운 인물― 팡틴의 남편이란 놈을 등장시켰는데도, 결국
장발장이 코제트를 데려온다는 큰 줄거리는 똑같게 이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개연성 역시 즉석에서 생각했다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러니 민하나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민하나는 관객석― 그러니까 어르신들이 모여 있는 쪽을 흘끔 바라봤다.
그러나 지금은 아까와 달리 관객석 쪽은 아주 조용했다. 모두가 백고운과 오용호가 있는 쪽의 무대를 바라보며
연극에 집중하고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백고운이 아까 내용을 멜로드라마로 바꾸자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민하나는 반신반의 했다.
꼭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관객이 고전극을 백 프로 이해 못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내용을 바꾸면서까지
공연이 친절해야 하는 걸까?
그들 앞에 있는 어르신들은 공연을 보러 일부러 찾아온 관객들이 아니라, 반대로 단원들이 공연을 봐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손님들이었다.
그러니 공연에 관객의 눈높이를 맞추려 하는 게 아니라, 공연이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 접근해야 하는 것이 더
옳은 방향이었다.
예전에 영화 <해수>를 위해 오디션 봤을 땐 즉흥 연기를 단원들 앞에서만 펼쳤다. 그러나 지금은 타인인 관객들
앞에서 즉흥 연기를 펼쳐야 했다.
눈이 갑자기 많이 내려 이 섬에 고립된 것도, 그래서 연습할 장소를 얻기 위해 공연을 갑자기 펼치게 된 것도,
또 그 공연을 전면 개작해서 완전히 새로운 공연을 펼쳐야 하는 것도 말이다.
뜻밖의 비일상이 주는 즐거움이라고 해야 할까. 익스트림한 놀이기구를 즐기면서 타는 사람의 심리와 비슷할 것
같았다. 약간은 다를지 모르겠지만.
“네, 그럴게요.”
그녀는 장발장이 어머니의 옛 남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가 자신을 구해주기 위해 데려온 것 역시 몰랐다.
거기다 더해 마리우스는 코제트의 의심에 불을 붙인다. 장발장이 진짜 코제트를 딸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결혼을
반대하느냐고, 돈으로 그녀를 산 것에는 모종의 변태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장발장은 사라진 코제트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처음엔 그녀가 그녀의 친아버지에게 돌아간 줄 알았기에
그쪽을 먼저 찾아간다.
그러나 장발장은 이 사실을 일부러 코제트에게 숨긴다. 왜냐면 자신은 죄를 저지른 과거가 있었고, 지금은 자베르
때문에 수배자가 됐기 때문이었다. 장발장은 그가 받는 비난을 딸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발장은 병에 걸려 시한부가 된다. 친아버지란 사실을 밝히면 코제트가 자신을
돌본다고 고생할 게 뻔했기 때문에 장발장은 홀로 칩거한다.
그리고 한편 코제트는 마리우스와 함께 행복하게 살다가 다시 우연한 계기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녀는 장발장의 머리맡에서 오열하고, 마리우스는 이웃의 소문만 믿고 장발장을 오해한 것에 대해 참회한다.
그리고 자베르는 장발장을 조사하다가 그가 나중에 선행을 베풀고 살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자신이 한
가정을 망가뜨렸다는 괴로움에 그는 강에 투신자살한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저께 저녁 백고운이 오용호의 부탁으로 연기를 맞춰줬을 땐 어쩐지 심심하다 싶더니, 지금 보니 그때는 일부러
힘을 빼고 한 모양이었다.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백고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대사와 스토리를 꾸며내서 연기했다. 그것도 1 시간가량
말이다.
오용호와 민하나가 합을 맞춰주고 도와줬다고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주인공 장발장의 원맨쇼와 다름없는
극이었다.
즉, 백고운 혼자서 이 극을 이끌어간 것과 다름없었다. 분장도, 의상도, 조명도, 음악도 없이. 오직 연기력
하나만으로. 관객의 시선을 휘어잡으면서.
그리고 그들이 그런 얘기들을 하고 있는 동안, 오용호는 한쪽에 가만히 비켜서서 얘기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백고운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였다.
“이봐···,”
“단장님.”
“응?”
“괜찮죠?”
다른 사람들이 배역을 맡으면 1 인 다역을 했던 오용호가 배역을 양보하는 수밖에 없었다.
괜히 1 인 다역을 하면서 주의를 분산시키기보다 한 배역만 맡아 연기에 집중하는 게 더 백고운과 겨루기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네, 그럼요.”
그 후, 3 일이 흘렀다.
오용호는 기대하고 있었다. 다른 단원들 몇몇도 무대에 함께 올라와 있긴 했지만 그 사람들은 자신의 알 바가
아니었다.
할머님의 목소리는 조용한 공기를 단번에 깨트렸다. 대사를 뱉고 있던 단원이 깜짝 놀라 졸지에 멈췄다.
“어여 이리 와서 앉어.”
분위기가 부산스러워져서 공연이 잠시 멈췄다.
새로 들어온 할머님이 자리를 잡아 앉았다. 소란이 조금 잦아든 것 같아 백고운과 오용호가 공연을 이어하려 할
때였다.
“그게 뭔 소리당가?”
“아 그러니께······.”
어르신들이 주고받는 목소리는 괄괄했다. 연극을 도저히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분위기가 흐트러졌다.
그러나 관객들이 집중해주지 않는 소란스러운 곳에서 연기를 계속하다보면 배우들의 몰입마저도 깨지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중간에 할머님이 들어오면서 대사가 끊긴 단원은 지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분명 당황해서 대사를
까먹고 고장 난 것일 터였다.
“······.”
“······.”
맥락과 상관없는 뜬금없는 그의 대사에 다른 단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오용호를 바라봤다. 그들은 오용호가
뭘 하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한 듯 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적 없습니다.”
처음부터 본 관객이라면 이미 공연 앞부분에 제시된 정보라 둘의 독백이 장황하고 불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관객에게는 꼭 필요한 정보였다.
저 캐릭터가 어쩌구, 저 캐릭터는 어쩌구, 둘 사이는 원래 어쩌구, 이렇게 관객이 설명해주면 할머님은 무대에
집중하지 못한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우, 또 봐도 재밌네!”
그때, 아까 할머님이 중간에 갑자기 들어오느라 무대 위에서 대사를 까먹었던 단원이 오용호에게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 아까 고마웠습니다.”
“수고했어요.”
“아까 진짜 대단하던데요?”
백고운이 한발 먼저 말을 꺼냈다.
재밌었느냐고?
지금 이 감정은 뭐랄까······.
하지만 아까 돌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오용호는 즉석에서 대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백고운은 오용호와 생각이
통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대사를 받아주었다. 그 순간 둘은 마치 오래 손발을 맞춰서 서로에게 익숙했던
파트너 같았다.
······하지만 썩 유쾌했다.
이전에 버스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백고운은 그때 뭘 보고 연기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네, 재밌었어요.”
웃긴 놈일세
51.
그 이후 두 달 간 정기 공연 연습이 이어졌다.
평소에도 인기가 많았던 극단 왕국의 공연이었는데, 백고운과 오용호까지 출연하자 티켓팅은 그야말로 피
(blood)켓팅을 방불했다.
심지어 단원들은 오용호에게도 “마셔요, 마셔!”하면서 친근하게 굴었고, 오용호는 조금 마지못한 듯 굴면서도
의외로 순순히 그들과 함께 어울려주었다.
합숙 연습을 가기 전의 오용호의 모습과 비교하면 그건 놀라운 변화였다. 원래의 그라면 애초에 이런 뒤풀이에
끼지도 않고 혼자 집에 갔을 것이다.
처음엔 우리들과 영 안 친해질 듯 도도하게 굴더니. 반 년 가까이 함께 공연 연습을 하더니 그래도 제법 우리에게
마음을 열었나 보다.
그때 내 앞에 앉아 있던 단원들이 내게 물었다.
“물론이죠! 건배!”
그리고 몇 시간 뒤.
술에 뻗은 몇몇은 테이블에 엎어져 쿨쿨 잠들었고, 몇몇은 담배를 피우러 포차 밖으로 나갔다. 아직 멀쩡한
몇몇은 담소를 도란도란 나누었다.
그리고 그가 툭 말을 던졌다.
“김철수 씨.”
“······.”
“······.”
나는 생각했다.
‘······감 좋은 놈.’
나는 그가 이렇게 물어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일부러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경계를 풀지도
않았다.
“뭐예요, 그게 끝? 대사 더 안 쳐요?”
“대사요?”
“김철수 씨?”
······그게 난데.
“······네?”
그건 내가 예상하던 말과 전혀 다른 말이었다.
오용호는 손을 저었다.
나는 말을 더듬거렸다.
“아니, 왜 그런 오해를······?”
“뭣보다 내가 알기론 철수 선배만큼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대한민국엔 없거든요. 근데 백고운 씨도 철수 선배만큼
잘해서. 혹시나 아들이라 유전자를 물려받았나 했죠. 그리고 딱히 조사하려던 건 아닌데 어쩌다 백고운 씨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음, 그건 미안합니다.”
소문? 아.
그런데 사생아라니. 허, 참.
‘가만 보면 진짜 이상한 놈이네, 얘는. 매번 나더러 롤 모델이라느니 뭐니 하면서 따라다녀 놓고는. 대체 그동안
날 어떻게 본 거야?’
“그건 그냥 드라마죠!”
내가 내뱉자 오용호는 뻔뻔하게 말했다.
이 자식 봐라. 진짜 웃긴 놈일세?
우리는 함께 술을 쭉 들이켰다.
“싫습니다.”
“아니, 내가 뭔 말을 할 줄 알고 그럽니까?”
보나마나 뻔하지 뭐.
때문에 오용호가 이렇게 물어올 거라고 예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내가 체념했다고 해서 그의 부탁에
순순히 따라준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뇨, 없어요.”
“그러면···.”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저랑 연기하고 싶으면 저랑 같은 작품에 출연하세요. 그 외에는 오용호
씨와 따로 안 해요.”
나는 제법 쌀쌀맞게 대답했다. 이렇게 말하는 건 취향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다. 오용호는 이런 식으로
말해도 끈질기게 졸라오기 때문이다.
“아, 싫어요!”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생각을······.”
며칠 뒤.
“응? 아, 네. 없어요.”
“진짜죠?”
“······?”
윤성광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나는 그제야 빙긋 웃었다. 그는 입이 무거운 남자니 그런
점은 믿어도 좋을 것이다.
제목이 제일 먼저 보였다.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
오, 사극?
내 눈이 반짝 빛났다.
원작 소설
52.
윤성광은 말을 이었다.
여주인공은 다행히 도망칠 수 있었으나, 자신의 부모가 정치적인 이유로 무고하게 숙청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여주인공은 그것이 기회라고 여긴다. 그녀는 남장을 풀고 어엿한 여자의 모습으로 왕세자비 후보에 도전한다.
그리고 궁에 들어가 여러 시험을 거친 후 어찌어찌하여 왕세자비가 된다.
그러나 로맨스 소설답게, 여주인공의 복수는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면 여주인공은 그저 이용하려고만 했던
왕세자와 진짜로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죠? 원작을 어떻게 구현할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원작이 히트친 작품이니만큼 기본적인 시청률도 나올
거예요. 게다가 요즘은 또 남장여자 드라마가 유행이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랬다. <커피프린스 1 호점>을 필두로 <바람의 화원>, <미남이시네요>, <성균관
스캔들> 등등이 모두 히트를 쳤으니 말이다.
“남자 주인공인 왕세자 캐릭터에요. 방송국 쪽에서 고운 씨를 꼭 캐스팅하길 원하더라고요. 어때요, 생각 있어요?
제 생각에는 이번에 로맨스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여태 로맨스는 한 번도 안 찍어봤잖아요.”
“그건 그렇죠.”
윤성광이 씩 웃었다.
이럴 때 이성한이 도움이 되다니. 역시 사람은 많이 사귀고 볼 일이었다. 이렇게 팔아먹어서 미안하긴 하지만.
그리고 며칠 뒤.
“차라리 날 팔아먹지.”
나는 오랜만에 김건과 만나 식사하고 있던 중이었다.
“넌 영화만 찍지, 드라마는 한 번도 찍어본 적 없잖아.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너 저번부터 유독 성한이 얘기만
나오면 뾰족하게 굴더라. 둘이 뭐 있었어? 영화는 같이 잘 찍었잖아.”
친구관계란 미묘해서 친구의 성공과 인기를 언제나 축하하는 마음으로 보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 역시 질투심
때문에 김건 앞에 떳떳이 나서지 못할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감정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문제였지. 그리고 이렇게 솔직한 김건의
태도는 건강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한차례 웃었다. 그리고 그제야 김건이 말을 돌렸다.
“서점? 뭐, 책 사게?”
‘어라, 이거······?’
그리고 한참 뒤.
“왜 그래?”
“아니, 별건 아니고······.”
각색한 드라마의 1 화 대본만 봤을 땐 몰랐다. 그런데 원작 소설을 읽으며 줄거리 전체를 다 보고 나니 다르게
보이는 게 있었다.
“저는 괜찮은 것 같아요. 나이가 좀 어리긴 한데··· 페이스가 성숙하니까 여주인 루다 씨랑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응, 왜?”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서 작가는 조금 불안해졌다. 설마, 안 한다는 얘기일까?
물론 백고운이 거절하면 다른 배우를 구하면 되지만, 백고운만큼 인지도가 높으며 연기도 잘하는 20 대 남자
배우가 드물었다.
대체할 후보는 몇몇 있었는데 하필 지금 대부분 작품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것도 경쟁사인 KBC 와 SBC 에 말이다.
윗선에서는 이 드라마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고, 그런 만큼 캐스팅 라인업이 빵빵하길 원했다. 백고운은 윗선에서
언급한 캐스팅 5 순위 안에 드는 배우였다. 그래서 제일 먼저 연락한 것이었고. 만약 백고운이 캐스팅을 거절하면
문제는 안 생겨도, 조금 골치는 아플 것이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글쎄, 백고운 씨가 원작 소설을 읽었대요. 그리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대요. 원래 하기로 했던 남주가 아니라
서브남주로 배역을 바꾸고 싶다고 하네요. 이거, 어떡하죠?”
“······네?”
서브남주
53.
한 배우가 어떤 배역의 오디션을 봤는데, 제작진 측에서 그 배우는 다른 배역에 더 어울릴 것 같다고 판단해 다른
배역으로 캐스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배우의 외적인 이미지와 캐릭터의 싱크로율이 얼마나 높으냐를 따져서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남주와
서브남주의 급 차이가 꽤나 크다는 점에 있다.
서브남주는 주연 롤이기는 하나, 엄밀하게 말해선 서브주연일 뿐이다. 당연히 남주와 인지도 차이가 있어야 한다.
백고운과 남주를 맡을 미정의 1 티어 배우를 같이 캐스팅한다면 당연히 개런티로 나가는 제작비가 많아진다.
김 PD 는 어깨를 으쓱였다.
성격적으로도 남주는 차분하고 이성적인 캐릭터인 반면, 서브남주는 호쾌하고 능글맞은 캐릭터였다.
어린 배우란 이미지도 있었고, 백고운의 외모 자체도 곱상하고 준수한 편이지 않은가. 그래서 서브남주보다는
남주 쪽에 먼저 캐스팅 제의를 한 것이었다.
그런 의문이 가장 먼저 들었다.
김 PD 가 먼저 아이디어를 번뜩 떠올렸다.
“그러면 이건 어떨까요?”
문득 서 작가는 궁금했다.
“글쎄요. 저도 그건 못 들어서요.”
거기에 대한 내 답은 간단했다.
“네,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원작소설을 다 읽고 보니, 전체적인 이야기에서 서브남주가 얼마나 매력적인 캐릭터인지가 확 다가왔다.
물론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니고, 가볍게 한번 생각해달라는 의미로 연락드렸다. ‘다른 배역을 더 해보고 싶은데,
피디님과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느낌으로.
“서브남주가 액션이 많이 필요한데 할 수 있겠냐고 하네요. 액션은 물론 활쏘기랑 말 타기도 잘해야 한다고요.
일단은 할 수 있다 대답했더니, 그러면 한 번 테스트를 해보자고 하네요. 고운 씨 괜찮겠어요? 활쏘기야 배우면
되고, 액션도 조금만 익히면 대역이나 편집으로 어떻게든 될 텐데, 말 타기는 아마 직접 해야 할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씩 웃었다.
그 열 번의 출연 동안 내가 활과 말을 아예 안 다뤄봤을까?
설마.
오늘 백고운의 피부는 평소보다 훨씬 구릿빛이었다. 그 사이에 여름휴가라도 다녀왔나? 그래서 저렇게 단기간에
탔나?
그래, 백고운은 그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일부러 이미지 메이킹을 하고 왔다. 선크림을 안 발라 피부가 탔다고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면서 말이다.
“이 친구 이름은 라이트썬더에요. 품종은 서러브레드로, 경주마 출신인데 은퇴하고 여기로 왔죠. 사극 촬영에
자주 출장 나가는 녀석입니다. 사람을 좀 가리지만 훈련이 잘 된 녀석이라 타기엔 이만 한 놈이 없죠. 일단 한번
만져보시겠어요?”
사람을 가린다기에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말은 백고운의 손길을 유순히 받아들였다. 코치가 껄껄 웃었다.
“아이구, 썬더가 배우님을 엄청 좋아하네요. 잘생긴 사람을 알아보나 봅니다. 썬더는 암컷이거든요.”
처음 말을 타보는 사람은 안장에 올라서는 것부터 어려워한다. 그래서 코치는 당연히 백고운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를 잡아주려 했다.
“읏차.”
그러나 코치가 도와주기도 전, 백고운은 몸에 힘을 싣고 훌쩍 말 위로 올라탔다.
“아뇨, 처음이에요.”
“그러면 한 바퀴 돌아볼게요.”
코치가 앞에서 고삐를 잡으며 걸었고, 거기에 맞춰 말이 움직였다. 백고운은 그저 말 위에 앉아서 흔들거렸다.
그러나 백고운은 뻣뻣하지도, 긴장하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지상에 앉아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좋아요, 그러면 한 바퀴만 혼자서 돌아봅시다. 힘을 빼고 있으면 썬더가 알아서 돌 겁니다. 그 다음엔 뛰는
것에 적응해봅시다.”
그런데 그때였다.
빵!
푸르릉―.
“안 돼!”
말이 투레질하면서 콧김을 슉슉 뿜어내더니 앞발을 쳐들고 굴렀다. 백고운이 고삐를 붙잡고 버텼지만 몸이 뒤로
아슬아슬하게 젖혀졌다.
“꺅!”
“백고운 씨!!”
울타리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던 서 작가가 비명을 지르며 입을 틀어막았고, 김 PD 와 윤성광이 백고운을 부르며
벌떡 일어났다.
승마에 대해서 잘은 몰라도, 말에서 낙마하면 크게 다친다는 상식 정도는 모두 알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건 꼭 마법 같았다.
그리고 한참 뒤.
“워워―.”
백고운이 안심시키는 목소리로, 그러나 흥분의 기색이 아직 남아있는 듯 약간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백고운의 모습은 그들이 구현하고자 했던 서브남주의 모습과 완벽히 똑같았다는 소리였다!
아이디어 뱅크
54.
한 이미지에 고정되어 매 작품마다 비슷비슷한 캐릭터를 맡는 배우가 있고, 반대로 매 작품마다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해 ‘완전히 다른 사람 아니야?!’라는 느낌을 주는 배우가 있다.
그리고 백고운은 명백히 후자였다.
서 작가는 백고운이 남성적인 매력이 강한 배역과는 안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게으른 착각이었다.
포털 사이트에 좀 검색해보면 어색한 점이 없어서 도리어 놀라웠다는 관객들의 후기를 여러 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서 작가의 강력한 추천으로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의 서브남주 배역은 백고운이 맡기로 결정됐다.
남주와 여주, 그리고 서브남주까지 다 결정되고 보니, 처음부터 이게 가장 베스트였겠다 싶을 정도로 밸런스가
좋았다.
백고운이 서브남주 쪽으로 내려가면서 결과적으로 아주 화려한 캐스팅 라인업이 완성되었고, 윗선은 흡족해하며
제작비를 턱턱 내놓았다.
기대가 높아질수록 부담도 높아졌지만, 어쨌거나 지원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좋았다. 좀 어부지리
같긴 했지만.
“저희 드라마 장르는 액션 로코입니다. 원작의 로맨스 라인을 잘 살리면서도, 드라마만이 보여줄 수 있는 화려한
액션도 넣기 위해 노력했으니 재미있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남주와 여주, 서브남주의 액션에서 캐릭터 차이가 확실히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왕세자인 남주는 정석적이고
반듯한 검술을 썼으면 좋겠고, 여주는 왕을 암살하려고 하는 자객이니까 민첩한 닌자 같은 느낌을 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서브남주는······.”
서브남주는 좀 더 복잡했다.
그래서 그는 머리가 조금 굵어질 때부터 공부를 게을리 하면서 하위계층 사람들과 어울렸다.
“서주는 남주와 여주의 중간 정도의 느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정파와 사파의 느낌이 동시에 있는 그런
느낌으로요.”
늦가을의 어느 날.
“저번에 감독님이 액션에 캐릭터성을 넣으라고 해서 생각한 게 이거거든. ‘서주’는 여유롭고 뺀질거리는
성격이잖아. 그래서 최대한 동작을 간결하게 짰거든. 움직이기 귀찮아서 경제적으로 싸운다는 느낌이랄까?”
“네, 알 것 같아요.”
“네, 이해했습니다!”
처음에 달려드는 놈은 이렇게 손을 꺾어서 제압하고, 다음에 달려드는 놈은 이렇게 발을 걸어서 쓰러트리고, 그
다음부터 달려드는 놈들은 검집으로 이렇게 찔러서 쓰러트리고······.
김 PD 가 강철중에게 말을 걸었다.
“강 감독님, 검을 없애고 낫이나 가래처럼 주변의 소품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바꿔도 동작에 무리가 없을까요?”
“어······ 왜요?”
“액션은 지금 매우 좋은데, 캐릭터가 좀 더 드러났으면 좋겠어서요. 즉석에서 주변 소품을 이용하면 좀 더
여유로운 느낌이 들지 않을까요?”
“글쎄요,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러면 약간 동작이 어색한 부분이 있을지도 몰라요. 기본적으로 장검을
전제하고 짠 액션이라서요.”
“응? 사과?”
사과는 그저 덤일 뿐 무기는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액션이 변경될 일이 없었다. 또 싸우는 도중에도 자기 할 일
(그러니까 사과 먹는 행위)를 계속 하니까 여유롭다는 느낌이 확 살았다.
모두가 만족할 그림을 얻고 있을 때였다.
김 PD 와 강철중이 혀를 찼다.
“연희구나. 이름 예쁘다. 연희야, 삼촌이 중간에 이 사과를 연희에게 패스하고 싶은데, 혹시 연희가 받을 수
있을까?”
“제가요?”
“응. 한 번 해볼래?”
“어······ 네.”
백고운은 아이를 안심시키듯 빙긋 웃은 후 먼지가 묻은 사과를 닦았다. 그리고 그것을 살짝 던졌다. 캐치볼 하듯
말이다.
비록 자그마한 역할이지만, 그런 사소한 역할이라도 부여받으니 꼬마애가 덜 도구적으로 쓰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 전까지는 돈을 빼앗긴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앵글 내에서 조금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느낌이 있었다.
김 PD 는 속으로만 감탄했다.
‘아이디어가 좋네.’
많은 배우들이 그렇게 연기하지 않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지만, 의외로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여하간 백고운은 확실히 열정이 넘치는 친구였다. 그가 촬영장 와서 이렇게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니까 김 PD 도
괜히 으쌰으쌰 하게 됐다. 열정이란 흔히 전염되는 것이니까.
그들은 몇 번 더 액션의 합을 맞추며 카메라 리허설을 했다. 그리고 촬영 준비가 끝났을 때 김 PD 가 힘차게
말했다.
“넌 뭐야?”
백고운(서주)는 하품을 쩍 하더니 귀찮은 듯 귀를 팠다. 그리고 나른히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지금이라 애한테 돈을 돌려주지? 어른이 추잡하게 애들 돈이나 뺏고. 꼴사납지
않아?”
그러나 백고운은 한 손으론 여전히 사과를 베어 물면서, 오직 나머지 다른 손으로만 왈패의 손을 간단하게
꺾어버렸다.
백고운이 사과를 가볍게 던졌다가 받으면서 빙글거리며 놀렸다. 열 받은 왈패들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
그런데 김 PD 가 NG 를 말하기도 전, 백고운이 검집을 든 손을 재빨리 바꾸더니 허공에 뜬 사과를 반대편 손으로
잽싸게 턱 잡았다. 날렵한 반사 신경이었다.
‘오?’
김 PD 는 일단 더 지켜봤다.
“어이쿠, 조심.”
“좀 걸리적거리네. 얘, 이거 잠깐 좀 맡기자.”
한쪽에 멀뚱히 서 있던 연희에게 백고운이 사과를 부드럽게 던졌고, 연희가 그것을 턱 받았다.
“자, 계속 하지?”
백고운이 NG 를 낸 줄 알고 잠깐 멈추고 있던 스턴트맨들은 그 말에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어쨌거나 감독의 컷
소리가 나오지 않았기에 테이크는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기합을 넣으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대충 모든 액션이 끝난 후.
“자.”
연희는 조금 멍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연기를 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아!’한 얼굴로 허둥지둥 엽전을
받았다.
“감, 감사합니다!”
백고운이 픽 웃었다.
“나야말로 고맙다.”
“네, 네?”
“진짜 감사합니다!”
소설이든 만화든, 원작이 이미 있는 것을 드라마화한 작품은 필연적으로 싱크로율의 강박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싱크로율이 높으려면, 기본적으론 배우의 외모가 캐릭터와 닮아야 한다. 그 다음엔 헤어스타일이나 분장, 의상
등으로 싱크로율을 높일 수 있다. 사람의 이미지란 의외로 그런 것에 많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연기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외모든 분장이든 아무리 싱크로율이 높다한들 다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백고운의 저 연기는 정말 서주와 똑같았다. 오죽하면 ‘원작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 같다’라는 표현을
쓰게 만들까.
처음엔 백고운이 서브남주 캐릭터를 맡고 싶다고 했을 때 의아했다. 자신이 어떤 배역에 더 어울리는지 잘 모르는
배우인가? 그런 생각도 했었다.
‘참 똑똑한 배우야.’
“컷, 오케이!”
배우의 루틴은 일반적인 회사원과 다르다. 회사원은 주중에 일하고 주말에 쉰다. 반면 배우는 활동기에 일하고
휴식기에 쉰다.
달리 말하자면, 배우는 한 작품에 들어가면 그 작품이 끝나는 때까지 계속 일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소리였다.
비록 촬영이 없는 날이라도 말이다.
오늘 나는 헬스장에 와 있었다.
“후······.”
“아이고, 죽겠다.”
“스물다섯···. 후······.”
“아, 그거 힘들지.”
나는 픽 웃었다. 기태성은 그렇게 엄살을 부리면서도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 자체가 연기에 대한
그의 열정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아우, 저는 좀 속상하잖아요.”
“왜? 괜찮던데?”
“그게 문제지. 배우한테 잘 된 필모가 있으면 좋긴 한데, 그 작품의 배역 이미지로 굳혀지기도 하니까. 그게 참
양날의 검이야.”
“그러니까요. 그래도 드라마 방영되면 그런 소리가 쏙 들어갈 거예요. 저번에 액션 씬 찍었는데 촬영장에서
감독님이랑 다들 얼마나 칭찬 했는데요. 원작의 서주랑 완전 똑같다고. 드라마가 빨리 방영되면 좋을 텐데,
그렇다고 감독님을 조를 수도 없으니까 괜히 속상한 거죠.”
그러나 당사자인 나는 막상 별 생각 없었다.
“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시간이 지나고 드라마가 방영되면 없어질 반응이라지 않은가. 그렇다면 괜히 지금 초조해 할 필요는
없었다.
기태성이 씩 웃더니 손짓으로 매니저를 불렀다. 그리고 다가온 매니저의 귀에 뭔가를 속닥거렸다.
“······!”
나는 그런 둘을 보다가 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그나저나, 그건 그렇고.
“형, 그건 뭐예요?”
운전석에서 내린 매니저는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부터 조수석에 있던 거였는데, 여간
신경 쓰여야지 말이지.
사실 그가 뭘 할지 대충 예상은 갔다.
메이킹 영상
56.
그녀는 우리 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 된 배우였다. 원래는 가수로 활동하던 친구였는데, 이번 드라마를
통해 배우로 처음 데뷔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요. 루다 씨도 촬영 들어갔죠?”
그러나 오늘은 우리가 같이 나오는 장면을 찍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그녀와 내가 처음으로 같이 찍는 촬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로에게 검을 겨눈 채로.
우리는 진지한 얼굴로 검을 겨눈 채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고, 우리 사이엔 긴장된 바람이 흘렀다.
홀로 도망쳐 살아남은 그녀는 산을 타다가 지쳐서 쓰러진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발견한 건 아버지의 옛 벗이다.
그는 옛날에 장수로 이름을 날렸으나 정치적 이유로 유배를 당한 후, 지금은 시골에 은둔해서 살고 있다. 여주는
바로 그에게서 무예를 익히며 부모의 복수를 다짐한다.
서주는 주기적으로 스승이 은거한 초가집으로 찾아가 무예를 배우는데, 어느 날은 가 보니 자기와 엇비슷한
또래의 남자애가 스승 집에 얹혀살고 있는 걸 발견한다.
그 또래의 남자애는 남자애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앳된 얼굴의 미소년인데, 물론 이 아이는 남장한 여주이다.
그리하여 서주는 여주와 같은 스승 아래에서 검술을 익히게 된다. 말하자면 둘은 같은 동기(同期)인 셈이다.
몇 분 전 김 감독님은 말했다.
―알고 있겠지만, 여기는 어렸을 때 싸우던 장면이랑 성인이 되었을 때 싸우는 장면이랑 오버랩 되면서 장면이
전환 돼. 시간이 흐르면서 루다가 성장했다는 걸 한눈에 보여줬으면 좋겠거든. 그래서 처음엔 루다가 밀리다가,
마지막엔 루다가 딱 한 방을 날리면서 서주를 확 제압하는 느낌으로. 알겠지?
“핫!”
이루다가 기합을 넣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우리의 검이 챙 부딪혔다. 진검은 아니었지만 가벼운 충격이 칼자루를
쥔 손으로 느껴졌다. 좋은 타격감이었다.
우리는 몇 번 더 합을 나눴다.
깡―.
“······!”
그러나.
“······!!”
뒤늦게 몸을 제어한 이루다가 우뚝 멈췄다.
“······.”
“······.”
‘나도 너무 과했나?’
“고운이 괜찮아?!”
한바탕 그런 소란이 있었다. 감독님은 내가 괜찮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휴 내쉬었다.
여기엔 내 매니저도 있었다. 내 매니저는 소속사에 들어온 후 내가 액션 스쿨을 다니지 않았다는 걸 누구보다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어색히 눈을 굴렸다.
실제로 내가 타고났다기보다는 옛날에 오랫동안 훈련한 탓이었는데, 내 정체를 숨기다보니 타고난 운동신경처럼
보이게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일주일 뒤.
“오늘요?”
내가 알기로 오늘 뭐 뜨는 거 없었는데···.
“어, 이거?”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매니저의 말이 맞았다.
공교롭게도 이루다가 실수를 해줘서 내 액션 장면이 더 극적으로 보이긴 했다. 훨씬 내 능력이 부풀려져서 포장된
느낌?
심지어 언제 인터뷰를 딴 건지, 서주 캐릭터 영상의 말미엔 강철중 무술 감독의 짧은 코멘트도 실려 있었다.
매니저 형도 씩 웃었다.
나는 힘차게 대답했다.
“네, 물론이죠!”
사랑스러운 강아지
57.
“응?”
“나 치킨 못 먹는데. 지금 식이 중이라서.”
“뭐? 왜?”
“나 내일 상의 탈의 씬 있거든. 드라마에서.”
“뭐?”
김건은 처음에 입을 떡 벌리고 놀라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물론, 그건 전적으로 백고운의 몸으로 들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전의 김철수 몸이라면 불가능했겠지.
“그러면 너보다 스무 살이나 어리잖아! 로맨스 연기가 되냐? 아니, 연기자는 그런 거 안 따지······나? 뭐,
하기야 연기는 실제랑 다르긴······ 하니까.”
그러나······.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다음 날.
그러나 연이는 어릴 때부터 남장을 하고 자신의 정체를 숨겨왔다. 당연히 그녀는 같은 스승 아래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서주에게도 제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운이는 연이의 남자 버전 이름이었다.
허나 오래 집을 비우면 서주가 수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연이는 지금 막 “조선 팔도를 유람하기
위해서 떠나려고 합니다”라고 말한 참이었다.
왜냐면 그녀는 왕을 암살한 후 자결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복수를 꿈꾸던 옛날부터 그녀는 오래 살 생각이
없었다.
김 PD 도 하하 웃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응?
그랬다.
몰입이 어려운 배역과 설정에도 그럴 듯하게 연기하는 것이 배우의 훌륭한 미덕이긴 했지만, 배우가 실제라고
몰입할 때 가장 그럴듯한 연기가 나오는 것 역시도 사실이었다.
오늘도 하루 종일 촬영이라 중간에 대기도 해가면서 해가 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주변이 어둑어둑해지자 드디어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가 왔다.
김 PD 의 말에 촬영 현장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때, 누군가 그 둘을 공격한다. 연이가 아닌 제 3 자가 왕세자를 노리고
있던 것이다.
연이는 그 자객을 무찌를 수는 있지만 하필 왕세자비의 옷을 입고 있느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왜냐면 자신의
정체를 들키면 여태의 노력이 다 헛수고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변복하고 따라 나왔던 호위무사들이 자객을 상대하고, 하필 그 호위무사 중 하나였던 서주가 자객의
칼에 당한다(이 시점에서 연은 이미 예전에 서주를 알아봤지만, 서주는 여자인 그녀의 모습을 몰라본 눈치라
그녀가 안심하고 있었단 설정이다).
남주는 위험하기 때문에 연이더러 얼른 궁으로 돌아가자 재촉하지만, 연은 쓰러진 서주가 신경 쓰여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레디, 액션!”
서주 앓이
58.
“괜찮습니까?”
연은 정신이 없던 나머지 왕세자비인 척 해야 한다는 사실도 그만 까먹는다. 그녀는 원래 서주를 대하던 것처럼
저도 모르게 존대를 한다.
물론 이루다는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녀는 상처를 제대로 보기 위해 내 옷깃을 잡곤 망설임 없이 확 벌려 젖혔다. 피 분장을 한 내 상반신이
드러났다.
“······!”
“윽―.”
한가롭게 눈물을 쏟을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한복을 거침없이 북 찢는다. 그리고 그것을 붕대 삼아
서주의 상처에 감으려 한다.
붕대를 상대의 몸에 감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끌어안는 자세를 취해야만 한다. 그리고 신체가 가까이
맞닿으면 당연히 섹슈얼한 텐션이 생기게 된다. 설령 그 상황이 불가피한 위급 상황일지라도 말이다.
그녀가 사부작거리며 내 몸에 천 조각을 열심히 둘렀고, 나는 웃음기를 거두고 그런 그녀를 말없이 쳐다봤다.
나는 땀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오고 있으니··· 마마는 얼른 궁으로 돌아가십시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상기시켰다.
“······!!”
이루다가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언제부터······.”
그녀가 말을 더듬거렸다.
동료들의 발소리는 가까워져 오고, 서주와 연이 이렇게 무람없이 대화할 수 있는 시간도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짝사랑만 하던 서주가 처음으로 연에게 진심을 토해내는 이 부분은 드라마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애틋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카메라와 조명에 둘러싸인 채 나와 이루다는 극에 몰입해 연기 중이었고, 스태프들과 감독님도 조용히 집중하고
있었다.
사위가 조용했다.
‘어?’
그러나 내가 만약 진짜 서주였다면―.
나는 잠시 텀을 둔 뒤, 옅게 웃으며 속삭였다.
“너······ 참 곱고 예쁘다.”
한편 그 모습을 찍고 있던 김 PD 역시 놀란 상태였다.
‘좋은데?’
백고운이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니면 순간 디렉션을 잊어버려서 자의적으로 행동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았다.
“컷.”
“······.”
“······.”
그러나 어떤 배우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캐릭터 본연의 매력이 반도 못 표출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그 매력이
그 두 배가 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제 곧 방송 시작합니다!”
조연출이 목소리를 높이며 드라마가 곧 시작한다는 것을 알렸다. 시간을 확인하니 정말 10 시 직전이었다. 즐겁게
노느라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난 줄도 몰랐다.
“그럼 틀겠습니다!”
“어떡해요, 저 너무 떨려요!”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1 분 30 초 같은 1 시간 30 분이 흘렀다.
“오빠도 봐 봐요!”
진짜였다.
[6 위. 백고운]
서브남주인 내 배역의 분량은 별로 없었고, 특히나 성장한 모습의 서주, 즉 그러니까 내가 1 화에서 실제적으로
등장한 건 딱 한 씬 뿐이다. 성장한 연이 서주와 검술을 겨루는 모습, 그러니까 저번에 메이킹 영상이 공개된
바로 그 장면이었다.
나와 이루다는 드라마 홈페이지로 들어가 시청자 반응을 확인했다. 서주에 대한 평이 간간히 보였다.
[우리 서주를 영상으로 보게 되다니 감격ㅜㅜ 백고운 배우님 처음엔 안 어울릴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찰떡이다ㅜㅜ 으른미 넘쳐ㅜㅜ 흐엉]
[몰랐는데 나 서주 좋아하네...]
[윗댓 2/nnnnnnnn]
나는 웃었다.
사람들이 좋아해줘서 기뻤고, 원작소설을 읽고 서브남주를 택했던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단 걸 인정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허나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시청자들의 이런 반응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는 걸 말이다.
몇 주 뒤, 드라마가 중반부로 접어들 때부터 대중들 사이에서 ‘서주 앓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유행은 변하는 법
59.
그는 도회적인 미남상이었는데, 그 때문에 옛날부터 꾸준히 주연 역할을 맡아왔다. 로맨스 드라마의 전형적
캐릭터인 재벌 남주에 딱 어울리는 외모라고 해야 할까.
아예 팔리지 않는 것보다는 팔리는 게 낫다. 그것도 남주 같이 굵직한 주연으로만 팔리는데, 어찌 기분이 나쁠까.
이제는 그것도 자신의 개성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취향?”
“근데 요즘엔 대중들이 다정한 순정파 남주도 좋아하더라고요. 이번 드라마도 그런 거랑 비슷한 걸 거예요.”
유행이 완전히 바뀐 건 아니란 소리였다. 그저 로맨스 드라마에서 고정적이던 캐릭터 조형이 다양해지면서 그
지평이 넓어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차영원이 너무 불안해할 이유는 없었다. 매니저의 말처럼, 클래식은 영원한 법이었으니까.
차영원은 괜히 더 투덜거렸다.
“심지어 이루다도 나보다 백고운 그 친구랑 더 친하게 지낸다니까? 촬영장에서 어찌나 고운 오빠, 고운 오빠,
하면서 졸졸졸 따라다니는지. 어째 나한테 하는 것보다 더 살가워. 나한텐 아직도 꼬박꼬박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말이야.”
게다가 차영원은 이루다와 연기할 때마다 은근히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참견을
하는데, 아무리 후배의 연기 지도를 도우려는 선배의 선의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이루다의 입장에선 차영원이 좀
으스대는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이루다가 자신을 그저 미숙한 후배로 대하는 차영원보다, 동등한 연기자로 대우하는 백고운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
차 안에서 매니저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땐 사실 별 생각이 없이 넘어갔다.
편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백고운이 연기를 잘하니 같이 연기하기에 편하다는 뜻인가? 아니면 말 그대로 성격이 좋아서 편하단 뜻인가?
그런데 왜 이루다도 그렇고, 대중들도 그렇고, 왜 다 저보다 백고운을 더 좋아하는 느낌이 드는 걸까?
매력이 덜 한 캐릭터를 자신이 맡게 된 것도 순전히 운이고, 이루다가 우연히 백고운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것도
순전히 운일 수 있었다.
백고운에게 ‘아, 역시’하고 감탄할 만한 특별한 것이 있었다면 모를 터였다. 차라리 그랬다면 차영원도
인정했을 것이다.
“알겠어, 갈게.”
그가 의상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였다. 근처에서 대본을 읽으며 연습하고 있는 백고운과 이루다가 보였다. 봐라,
또 둘이서 아주 사이가 좋다.
“안 어두워?”
“선배님, 오셨어요?”
“약간 긴장 돼요.”
“오늘 찍을 것 때문에?”
“어머.”
“안녕하세요, 해야지.”
“죄송해요. 애가 낯을 좀 가려서요.”
어머니가 미안한 듯 말했다.
“아뇨, 괜찮아요.”
그런데 몇 분 뒤였다.
“안 갈래.”
조연출은 일단 말했다.
“······.”
어머니가 계속 다인이의 마음을 되돌리는 데에 실패하자, 이번엔 아이를 좋아하는 다른 스태프들 몇몇이 다가와
다인이를 어르는 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아역이라고 해도, 결국은 그냥 아이에 불과할 뿐이다. 성인도 아닌 아이에게 프로페셔널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네? 아, 네.”
“다인이, 혹시 불이 무섭니?”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부터 계속 횃불 쪽을 보고 있더라고요.”
“아, 그렇구나.”
그때, 백고운이 주변을 죽 훑어봤다. 그리곤 잠시만 사람들에게 몸을 비켜달라고 하더니 손을 겹쳐 모으곤 들었다.
“다인아, 이거 보여?”
응? 뭐가 보인다는 거지?
“여우다!”
다인이가 손으로 가리킨 곳으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러나 거긴 땅바닥이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니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땅바닥에 그림자가 있었다.
손 그림자 놀이와 구연 동화
60.
“······토끼에요.”
“이 친구는?”
“음··· 늑대?”
“맞았어!”
백고운은 ‘자―’하고 말을 끌면서 모두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 날, 이 다인이 토끼 앞에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늑대가 나타났어요. 힘없고 약한 토끼는 그대로 늑대한테
잡아먹힐 운명이었죠. 그때, 꾀 많은 여우가 뿅 하고 나타나 늑대를 가로막았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죠.”
“······그렇게 늑대는 문제를 맞히지 못했고, 토끼와 여우 둘 다 놓아줄 수밖에 없었어요. 늑대는 그제야
자신이 여우의 꾀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이 식식 났어요. ‘용서 못해! 여우 이 놈을 내가 언젠가는
혼쭐을 내겠어!’ 늑대는 그 뒤로 호시탐탐 여우를 잡아먹을 기회를 노렸어요.”
백고운은 연기를 곁들여 캐릭터의 대사를 쳤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손으로 그림자를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기회가 왔어요. 늑대는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여우가 살고 있는 집을 기습해 덮치기로
했어요. 그런데 이런, 여우는 그 사실을 모르고 쿨쿨 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연히 그 사실을 토끼가 알게
됐어요. 토끼는 은혜를 갚고자 여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로 했어요.”
‘······!’
어째 이야기가 묘하게 익숙하다 했더니, 이 이야기는 <왕세자비이지만 자객입니다>의 드라마 내용을 비유하고
있었다.
다인이는 극 중에서 엑스트라인 심부름꾼 역할이었는데, 나름의 백스토리가 있었다.
단순히 불에 대한 두려움을 잊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배역과 동화돼 자연스럽게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수 있도록,
백고운은 다인이의 힘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루다는 감탄했다.
하기야 다인이에게 아무리 극 중 내용을 설명하면서 ‘너는 이러이러한 연기를 해야 돼’라고 설명한다 해도 딱히
몰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토끼와 여우, 늑대로 비유하니 내용이 간단해지면서 몰입이 확 됐다.
어린 아이의 고집을 그저 투정이라 치부하지 않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백고운의 다정한 성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처음에 백고운은 다인이와 몇몇 사람들 앞에서 손 그림자놀이를 곁들이며 구연동화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백고운이 뭘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른 스태프들이 호기심에 기웃거리다가, 본인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서
그대로 눌러앉았기 때문이었다.
답은 ‘아니’였다.
주어진 대본으로 연기를 하는 거라면 몰라도, 차영원은 저렇게 즉석에서 이야기를 창작해 사람들을 몰입시킬 만큼
실감나게 연기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차영원 그 자신은 저기에 설 일도 없다. 기회는 아까부터 있었는데도, 차영원은 그저 남일
구경하듯 한 발 떨어져 수수방관하고만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루다뿐 아니라 스태프들, 그리고 나아가 대중들까지도 백고운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아역이든 대선배든, 같이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 모두를 동료라고 생각했다. 누가 잘 나가고 못
나가고를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멋진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다 같이 으쌰으쌰 했었는데.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인기와 결과에만 연연하게 되었을까? 후배를 끌어주지는 못할망정 질투로 흉이나 보고
말이다.
“자, 이제 다인이가 토끼라고 생각하면 돼. 늑대로부터 여우를 구하러 가야하는 거지. 할 수 있겠니?”
“응, 할 수 있어요!”
다인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짓 비장한 표정인 것이, 어느새 사명감마저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갈까?”
“네!”
종방연.
그것의 사전적 의미는 ‘한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등의 방송이 완전히 끝난 뒤, 그것을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
여는 잔치’이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이루다가 보였는데, 그녀는 내가 여기에 도착했을 때부터 날 발견한 듯 날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옛날에야 시청률 40, 50% 나오는 게 우스웠지만, 요즘엔 시대가 변했지 않은가.
종합편성 채널이 생기면서 경쟁자는 늘었고,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다시보기를 할 수 있으니 본방 사수하는
시청자는 줄었다.
자연히 시청률이 높게 나오기 어려웠고, 요즘엔 10% 중반만 되어도 선방한 드라마라는 말이 많았다.
비치된 핑거 푸드를 먹으며 도착한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자 속속히 다른 사람들도 도착했다.
“어?”
드라마의 극본을 맡았던 서 작가가 우리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누군가를 발견한 듯 문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팀장님 아니세요?”
“어머, 언제 왔어요?”
누굴까?
운전면허
61.
“안녕하세요.”
이 팀장이 인사했고, 그제야 우리들도 ‘아―’하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우리 테이블엔 대부분 배우들만 있었기에 우리가 그녀를 몰랐던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드라마 기획 단계인 미팅
자리에는 보통 제작진들이 들어가지, 배우들이 들어가지는 않으니까.
“윤 작가님은 같이 안 왔어요?”
이 팀장이 말했다.
몇 줄 아래로 내려가니, 그 뒤에는 배우들에게 보내는 감사 인사도 쓰여 있었다. 연기를 잘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이야기였다.
[특히 서주는 백고운 배우님 덕에 더욱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인연이 된다면 다음 작품에도 또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아, 그건 작가님 사심이 맞을 겁니다. 사실 작가님이 드라마 챙겨보시면서 백 배우님 팬 됐다고 저한테 계속
말하셨거든요. 상당히 인상 깊게 보셨나 봐요.”
그러면서 덧붙였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이 놀란 듯 나를 돌아봤다.
농담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언급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랄 만한 일이긴 했다. 다른 주연 배우들도 있는데
굳이 나를 콕 집어서 그렇게 말했으니까.
“네, 그럴게요. 작가님이 좋아하실 거예요. 아참, 싸인 하나만 해주실 수 있을까요? 작가님이
부탁하셨거든요.”
“아, 네. 그럼요.”
이루다는 이제 날 놀리고 싶은 건지 ‘오―’하고 추임새를 넣었고, 뒤늦게 이쪽으로 다가온 차영원은 편지를
확인하고 그저 말없이 샴페인만 홀짝였다.
감독님과 서 작가님은 ‘고운이 마성의 남자네’하는 소리나 하면서 껄껄 웃을 뿐이었다.
“루다 씨도 싸인해요.”
“어, 저도 해도 되나요?”
“그럼요.”
당연히 작품이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어쩔 수 없이 지치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연기를 좋아하더라도 물리적인 과로
앞에서는 장사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종방연까지 마치고 난 후 나는 오랜만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사실 운전면허는 백고운의 몸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일찍 따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계속 작품에
들어가느라 통 짬이 안 나서 여태 미뤄왔다.
그런데 어쩌다 운전면허를 따겠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이성한에게 하게 됐는데, 그때 이성한이 반색하며 말했다.
“아니, 나는 그냥 바로 시험 보려고.”
“응? 아, 누가 가르쳐줬어?”
“아니, 그건 아닌데······.”
“내 말은, 아직 가르쳐줄 사람을 구하고 있단 뜻이었어. 기태성 선배님한테 부탁해볼까 생각 중이긴 한데. 너도
같이 배울래?”
“네!”
“저는 그동안 부모님께 기능을 조금 배웠어요. 아직 잘은 못하기는 하는데, 저번엔 주차도 성공했어요.”
하기야 이성한에게 기태성은 까마득한 선배이지 않은가.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비록 기태성이 나한테는 죽이 잘
맞는 형이나 삼촌 같은 느낌이 컸지만 말이다.
기태성도 칭찬했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나는 학원을 다니지도 않았고, 운전을 가르쳐줄 부모가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기태성은 날 완전 초보라고 가정한
채 맨 처음부터 하나하나 꼼꼼히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이성한은 기태성의 칭찬을 들은 후 조금 우쭐해졌는지, 아니면 나름 운전에 있어서 자기가 선배라고
생각을 한 건지, 그런 기태성 옆에서 몇 마디 거들었다. 여기는 이렇게 하는 게 좋다, 저기는 저렇게 하는 게
좋다, 하면서 말이다.
“혼자? 벌써?”
“······?!”
“아니, 처음인데.”
“글쎄, 나도 좀 타고 났나봐.”
“뭘요. 운이 좋았죠.”
“와, 고운 씨가 그렇게 운전을 잘하는 줄 몰랐네요. 어쨌든 축하해요. 그러면 이제 운전면허증은 있으니까 차만
있으면 되겠네요?”
광고?
나는 바로 물었다.
“어떤 게 들어왔는지 알 수 있을까요?”
뉴 월드 게임 광고
62.
“오, 진짜 많이 들어왔는데?”
“어, 그러게요.”
윤성광이 싱긋 웃었다.
기태성도 놀란 눈치였다.
“정말? 근데 그 친구 최근에 뭐 찍은 거 없던 것 같은데. 바로 작품 들어가지 않았어?”
“네, 그건 맞아요. 일부러 광고 들어온 거 다 거절했대요. 뭐라더라, 초심으로 돌아가 연기에 집중하고 싶다나?
뭐, 그렇대요. 거기도 뭔 일이 있었나 보죠.”
“게임이요?”
나는 어색히 웃었다.
“어쨌든 거기 회사에서 이번에 <뉴 월드>라는 새로운 RPG 게임을 출시하거든요. 들어온 제의는 그 게임의
광고에요. 근데 컨셉이 좀 특이해요.”
“컨셉이요?”
색다른 분야의 광고이기도 했지만, 뭣보다 컨셉을 들으니 재미있을 것 같아서 더욱 흥미가 생겼다. 특히 연기를
해야 하는 광고라는 점에서 더 매력적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싱긋 웃었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옥상에서 빈 담배만 질근질근 씹고 있으려니까, 팀원이 걱정되었는지 다가와 물었다. 황미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손만 대충 휘저었다.
“응.”
“그렇지 뭐.”
황미나는 <뉴 월드>의 기본 스토리 설정이 ‘유저가 가상현실 게임 속에 들어가 용사가 된다’라는 것에 주목했다.
그래서 그녀는 ‘3 분 남짓의 패러디 웹드라마 형식으로 광고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팀원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고, 그 기획은 그대로 통과되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유행과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는 게 바로 광고였기에, 황미나는 당연히 그 배우를 제 1 순위로 섭외하고자 했다.
드라마에서 백고운은 야성적인 매력이 있는 캐릭터를 연기했었는데, 그 이미지가 딱 <뉴 월드> 게임과 어울렸다.
게다가 이번 광고는 다른 때와 달리 연기력도 필요했다. 그러니 모델이 아니라 전문 배우를 섭외해야만 했다.
결국 광고 모델로 백고운 배우가 최종 결정되었다.
“아무렴. 당연하지!”
“오케이. 지금 갈게.”
황미나는 힘차게 내려와 미팅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백고운 배우와 그의 매니저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백고운입니다.”
“아하하, 감사합니다.”
플레이어는 1 인칭 시점으로 이동하면서 NPC 와 대화할 수 있고, 전투를 할 수도 있으며, 아이템을 줍거나 의상을
바꿀 수도 있었다.
황미나는 한 번 더 강조했다.
기본적으로 패러디는 원작보다 조잡한 법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패러디가 너무 어설프면 그 재미가 떨어진다.
그런데······.
“난 카트라이더 말고 다른 게임 해 본 적 없어.”
그러면서 그는 열심히 키보드를 눌렀다. 간간히 ‘이건 쉬운데’하고 혼잣말로 투덜거리는 걸 보니, 약간 심술이
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이쪽은 내버려두기로 하고, 반대쪽을 들여다보았다. 이루다가 막 컴퓨터 부팅을 끝내고 무슨 게임을
선택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루다 씨는 게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자, 이제 하면 돼요.”
“고마워요.”
이루다가 생긋 웃었다.
나도 편하게 웃어보였다.
나도 말을 놓고 나니 나 역시 그녀가 훨씬 편해졌다.
RPG 게임들의 캐릭터들은 묘하게 움직임이 비슷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거칠게 말하면, 그들의 움직임은 로봇의
움직임과 비슷했다.
“어때요, 감 좀 잡았어요?”
나는 씩 웃었다.
게임 캐릭터 연기
63.
“네, 알겠습니다.”
음악을 듣고 있는 걸까?
십 분 뒤, 황미나가 손짓했다.
“고운 씨, 준비해주세요.”
“네.”
‘흠, 꽤 괜찮은데?’
로봇은 기계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일 때도 관절만 뚝뚝 각지게 움직일 뿐이다.
백고운이 연기를 잘한다는 사실은 업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보니까 확실히 잘하긴
잘한다.
백고운은 처음 시작한 동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제 자리에서 가만히 몸을 흔들었다. 표현하자면, 이건 게임
캐릭터의 ‘대기’ 자세였다.
황미나는 잠시 뒤 또 놀랐다.
‘디테일이 대단한데?’
백고운은 우뚝 멈추곤, 좌향좌 하듯 몸을 비틀어 45°로 몸의 방향을 비틀었다. 그리고 이번엔 앞으로 쭉 뛰었다.
살짝 무릎을 구부린 채로 흔들거리며 대기하기. 앞으로 천천히 걷기. 앞으로 빠르게 뛰기. 좌우로 방향을 바꾸기.
‘와, 정말 잘하네.’
“컷! 좋아요.”
“저, 괜찮았나요?”
“팔이나 다리를 정확한 각도로 계속 움직이는 건 괜찮았는데, 문제는 계속 일정한 속도로 몸을 흔드는 게
어렵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지거나 느려지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메트로놈을 키고 연습했어요. 그
박자를 완전히 외울 때까지 몸에 익히는 게 좀 시간이 걸렸죠.”
“······네?”
“BPM 몇으로요?”
“네, 물론이죠.”
오차라니. 그런 표현은 기계한테나 쓰는 말이지, 사람의 몸동작에 쓰는 표현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확신에 찬
것처럼 들렸다.
‘에이, 설마.’
똑, 딱, 똑, 딱―.
속으로 박자를 세고 있다고 해도, 중간중간 걷거나 뛰거나 하다보면 집중이 흐트러지기 마련이었다.
새삼 백고운이 달리 보였다.
게다가 고작 3 분짜리 연기를 위해 극기에 가까운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저 열정도 놀라웠지만―,
“네. 알겠습니다.”
“됐나요?”
“어, 저요?”
감독님은 살짝 당황하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듣고 보니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게임이니까 연령층이 어리죠? 그러면 좀 더 편안한 말투로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B 컷을 하나 더 딸까요?”
“음······.”
나는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야, 너도 용사 될 수 있어.”
딱―!
내 말이 끝나자마자 황미나가 손가락을 부딪치고 시원하게 외쳤다.
노미네이트
64.
2013 년 겨울, 어느 날.
황미나는 TV 뿐 아니라 버스나 지하철에 설치된 LED 모니터에도 광고를 걸어놓는 등 공격적인 홍보를 펼쳤다.
사람들은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릴 때, 보통 시간을 때울 겸 근처의 아무것에나 시선을 두곤 한다. <뉴 월드>의
광고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타겟팅 했다.
백고운은 컴퓨터를 켰다가 게임 속에 떨어지고, 이리저리 골목을 돌아다니며 NPC 와 대화하며 자신이 용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NPC 에게 퀘스트를 받은 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다른 NPC 들에게 대화를 거는데,
그러면서 의외의 사실을 마주하기도 하고 소소한 반전이 밝혀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모니터에 흘러나오는 <뉴 월드> 광고에 뜻 없이 시선을 두다가, 그 광고의 묘한 매력에 금방
빠져들었다.
3 분은 짧지만, 동시에 꽤 긴 시간이다.
사람들은 그 광고를 보다가 버스나 지하철이 와서 중간에 끊기면, 거기서 잊어버리는 대신 각자의 핸드폰으로
광고를 검색해봤다.
온갖 뉴스가 쏟아졌다.
그런 요청이 많았는지, 정말로 문월 측에서 <뉴 월드> 게임에 백고운 커스텀 패키지를 한정 상품으로 내놓았다.
그건 의외의 결과를 낳기도 했는데, 게임 마니아뿐 아니라 백고운 팬들도 <뉴 월드>에 유입 된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기존의 게임 마니아들은 백고운 덕에 게임이 흥행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백고운이 계속 광고
모델 해주길 바랐다.
[내 말이 222]
백고운은 든든한 파트너가 생겨서 좋고, 문월 측은 긍정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어서 좋았다.
2013 년 연말.
“싫은데? 나 원래 양심 없는데?”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친한 친구가 번듯하게 사회 생활하는 광경을 우연히 목격한 사람처럼, 김건이 옆에서 ‘와,
저거 형이라 하는 거 봐’하면서 날 가증스럽게 쳐다봤다.
나는 깜짝 놀랐다.
“뭐?! 야! 축하한다!”
2013 년 12 월 30 일.
두구두구―.
옆에 앉아 있던 이루다가 제일 먼저 벌떡 일어났다.
“오빠, 축하해요!”
“축하해요, 고운 씨.”
“축하해!”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왜 이렇게 짧게 했어요.”
‘다만······.’
왕중왕 PD
65.
아니나 다를까, 시상식이 마무리 될 때쯤엔 우리 팀이 2013 MBS 연기대상을 싹쓸이 했다는 기사가 떴다. 정말
요즘 기자들은 발 빠른 것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오빠, 기사 떴어요?”
“응, 떴어.”
그쪽도 비슷하게 끝났을 테니 이제 슬슬 기사가 뜨거나, 아니면 우리 쪽 관계자들 중 소식통인 누군가가 알려줄
텐데······.
그러자 오용호의 연락은 뚝 끊겼는데, 며칠 뒤 갑자기 오용호가 KBC 쪽 사극에 들어갔다는 기사가 떴었다.
어쨌거나, 웃긴 놈이었다.
‘자기는 대상 받아놓고선.’
김철수였을 때야, 내가 그의 선배였고 롤 모델이었다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일단 겉으로 보기엔 내가
그보다 10 살 가까이 어리지 않은가.
그래도 이상하게 밉지 않은 놈이었다. 귀찮긴 해도, 가끔은 내 뒤를 졸졸 좇아오는 어린애 같기도 하고.
그 사이에 <뉴 월드> CF 도 찍었으니까 완전히 쉬었다고 하기는 뭣하지만, 그래도 작품에 오래 들어가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다고나 할까.
돌아가는 길에 뭐 들어온 거 없는지 매니저한테 운이라도 띄워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막 시상식을 나오던 때였다.
“고운 씨? 고운 씨!”
“······?”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깜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왕 PD 님.”
“어머, 자기 나 아는구나.”
‘여전하시구나.’
“아유, 히트작 제조기는 무슨. 부끄럽다. 운이 좋은 거지. 드라마를 나 혼자 만드나. 배우님이랑 작가님이랑 다
같이 만드는 거지. 자기도 참, 사회생활 잘하는구나?”
왕 PD 가 ‘그보다’하면서 눈을 반짝 빛냈다.
“고운 씨 잠깐 시간 돼?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그럼요. 물론입니다.”
왕 PD 와 나는 로비 테이블에 앉았다.
그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아뇨, 없습니다.”
아무리 연출력이 좋다고 한들, 어떻게 매번 히트작을 찍겠는가. 기본적으로 극본의 힘이 좋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네, 재미있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나는 싱긋 웃었다.
“어서 오세요.”
1 만 시간의 법칙
66.
남자가 왕 PD 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PD 님.”
왕 PD 는 이어서 그를 내게 소개시켜주었다.
일단 첫인상은 좋았다.
통, 통, 통―.
오, 괜찮았나?
“연습이 좀 더 필요하시겠는데요?”
“채 썬 거 보시면 간격이 일정하지 않아요. 그리고 속도도 더 빨라야 하고요. 팔을 이용하니까 속도가 느린 건데,
기본적으로 팔이 아니라 손목을 이용한다는 생각으로 해야 해요.”
그러나 빠르기에만 집중하니 어떻게든 비슷한 속도는 낼 수는 있었는데, 문제는 결과물이 이전보다 훨씬 처참했다.
잠시 고민하던 왕 PD 가 불쑥 물었다.
“제가요?”
그때, 내가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는 작품에서 1 인 2 역을 하게 되는데, 원래 주인공인 남주, 그리고 그 남주에게 빙의되는 귀신, 이렇게 둘이다.
그는 너르게 웃었다.
나는 생각했다.
“네, 그럼요.”
“······이게 다······?”
그는 곽시우에게 연락을 받았다며, 준비할 내용은 자신이 안내해줄 거라고 했다. 나는 그를 따라갔다.
수많은 요리재료들이었다.
“다요?”
“네, 다요.”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할게요.”
나는 곧바로 팔을 걷어붙였다.
그 상태에서 비장히, 그리고 의욕적으로 물었다.
“뭐부터 썰면 될까요?”
최근 들어 방송에 나와서 훈남 쉐프로 대중에게 알려진 거지, 본 성격은 훈훈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면 고집을 좀 꺾을 만도 하건만, 그는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듯 내 주방에 왔으면 내 말을 따라야
하지 않겠냐’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배우라고 차별을 두지 않는 곽시우도 대단했지만, 이 수많은 업무량에 질리지 않고 묵묵히 따르는 백고운도
대단했다.
사실 정성해는 백고운이 금방 도망 갈 거라고 생각했다.
“저, 좀 도와드릴까요?”
곽시우가 오늘 안에 하라고 가라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융통성은 있을 것이다. 백고운이 진짜 요리사
지망생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연기계가 재자 하나를 얻은 거죠
67.
놀란 것은 비단 정성해뿐이 아니었다.
‘진짜로 하고 있네?’
그러나 굳이 자신 아래에서 배우겠다고 온다면, 그 정도 각오와 성의 정도는 보여야 곽시우로서도 가르칠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네, 그럴게요.”
그리고 다음날.
‘일찍 갔나 보네.’
그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켰다.
원래의 빈 박스와 포대자루는 차곡차곡 접혀 근처에 놓여 있었고, 칼과 도마는 깨끗이 설거지 되어 있었다.
한 번 하기로 한 것은 기어이 해내고야 마는 백고운의 의지도 마음에 들었지만, 백고운이란 사람 자체도 마음에
쏙 들었다.
‘완전히 잘못 알았네.’
썩 기분 좋은 재평가였다.
어제 그렇게 열심히 썰어놓은 것이 무색하게도 식재료들은 어제와 똑같이 쌓여 있었다. 그 사이에 곽시우가 새로
갖다 놓은 모양이었다.
“응?”
보아 하니 곽시우가 갖다 놓은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한 달 간 꾸준히 곽시우의 아카데미에 나가면서 꾸준히 썰고, 베고, 자르고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나마 속도가 빨라졌다 뿐이지, 내 칼솜씨는 여전히 ‘통, 통, 통’에 멈춰 있었다. 곽시우나 다른
수강생들처럼 ‘토도도도동’하고 빠르게 써는 건 여전히 불가능했다.
이전에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자르는 느낌이라면, 손놀림에 달라진 후에는 눈으로 인식하기 전에 손이 먼저
나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일전에 곽시우는 임계점을 넘으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게 될 거라고 말한 적 있었는데, 그게 정말이었구나
실감했다.
‘진짜 신기하네.’
“네?”
“보니까 가끔 감으로 때려잡는 일이 몇 번 있던데. 아녜요?”
구정이 지날 때쯤, 유명한 주조연 배우들이 우리 드라마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가 속속히 뜨기 시작했다.
다만 아직 여주인공 자리만 공석이었는데, 왕 PD 는 생각해둔 사람이 있다면서 이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우리 작품 해달라고 꼬시고 있는 중인데, 사정이 좀 있어서 말이야. 설득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리네. 그래도
거의 넘어오고 있으니까 자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 기대나 하고 있으라구. 내가 누굴 섭외했는지 알게
되면 진짜 깜짝 놀랄 테니까, 호홍.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내게 기어코 말해주지 않았다. 깜짝 놀래주고 싶다나 뭐라나.
아마 그녀가 책임지고 기획한 프로젝트가 성공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그동안 우리 CF 반응이 꽤 좋았으니까
말이다.
이 주 전쯤, 황미나는 스토리보드를 전해오며 이런 내용이니 추가적으로 이러이러한 연기를 준비해달라고 특별히
부탁해왔었다.
그리고 나는 지난 시간 동안 요리 연습을 하면서도 틈틈이 그 연기를 준비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캐리커쳐
68.
<뉴 월드> 게임은 일정 레벨 이상이 되면 ‘전직’이라고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데, 그 직업은 매우 다양했다.
소품이 활로 교체되었다.
반대쪽 손으로 화살을 걸었지만 아직 쏘지는 않고, 다만 금방이라도 활을 치켜들고 쏠 듯한 자세로, 나는 차분히
숨을 몰아쉬었다.
마법사의 경우 커다란 지팡이 같은 스태프를 들고 허공에 마법진 같은 걸 그리는 시늉을 했고, 암살자의 경우
짧은 단도류를 들고 날렵한 포즈를 취했다.
내가 특별히 돈을 좇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굴러오는 돈까지 일부러 찰 필요는 없지 않은가? 돈이란 있으면
좋은 게 사실이니까.
여기는 특히 배우에게 호의적인 곳으로, 왜곡 없이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옮겨주는 것으로 배우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신뢰도가 높은 곳이라 나는 기꺼이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나는 볼을 긁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녀가 자기 볼을 툭툭 두드렸다.
그때 박 기자가 쿡쿡 웃었다.
“잘생김이 묻었네요.”
1 초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이해하고 빵 터졌다.
“저도 썰렁 개그 좋아하거든요.”
나는 내가 출연한 <운명의 표현>, <해수>, <레미제라블>, 그리고 최근의 드라마 <왕‧자>를 중심으로 주요
에피소드들을 이야기 했고, 박 기자는 간간히 리액션을 하면서 내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박 기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 아직 못 봤어요.”
“음, 네. 그런 것 같아요.”
“저는 배우에게 관찰력이 필수라고 생각해요. 배우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흉내 내는 직업이잖아요. 사람들을
오래 관찰하다보면, 모든 사람들에게 다 개성적인 특징이 있다는 게 보여요. 연기는 그 특징을 살리는 거라
생각해요.”
“······라고 말하며 백고운은 자신만의 연기 철학을 밝혔다. 그는 평소 애늙은이라 놀림을 받는다며 웃었지만,
사실 그건 성숙한 사람들이 흔히 듣는 수식어가 아니던가.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나는 그의 원숙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녹취록을 풀어쓰는 지금, 그와 인터뷰 했던 그 당시를 떠올리고 있는데 어쩐지 나무의 이미지가
생각난다. 아마 그건 나무의 이미지에서 기인하는 느낌이 아닐까 싶다. 동네에 하나 쯤 있는 커다란 나무
있잖은가. 보기엔 다른 나무들과 비슷해 보여도 알고 보면 나이가 천 년이 훌쩍 넘는 그런 나무. 올해 스물넷이
된 백고운은 요즘 가장 인기 있는 핫한 배우이지만, 나는 감히 예상해본다. 그는 앞으로 더 큰 배우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김건은 <디 액터> 3 월 호에 실린 내 인터뷰를 또박또박 읽은 뒤 잡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아, 미안미안.”
나는 다시 재료를 썰기 시작했다.
토도도도도도동―.
“신기하네.”
따르릉―.
왕 PD 님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 네. PD 님. 말씀하세요.”
“······!”
나와 김건은 깜짝 놀랐다.
나와 김건의 눈이 마주쳤다.
“······.”
“······.”
여자 김철수
69.
드라마 <천의 맛>은 음식 평론가인 연상녀와 요리사 지망생인 연하남의 매콤달콤한 사랑 이야기이다.
“아··· 일찍 눈이 떠져서요.”
“어머, 자기 긴장했구나?”
“음··· 네, 조금요.”
왕 PD 는 심미애가 대(大)배우긴 하지만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라며, 긴장할 것 없다고 날 다독였다.
그는 헛다리를 짚고 있었지만, 사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기도 했다. 내가 살짝 긴장한 건 사실이니 말이다.
그런 종류의 긴장은 아니긴 했지만.
“안녕하세요.”
“미애 씨 왔어요?”
‘거의 10 년 만인가?’
예전엔 그래도 둘 다 작품을 하니까 오가며 소식은 들었는데, 나도 화상을 입고 은퇴하고 그녀 역시 결혼하고
육아에 전념한 뒤엔 서로 소식을 들을 길이 별로 없었다.
왕 PD 는 내게 그녀를 소개했다.
“고운 씨는 미애 씨 처음 보지?”
“네.”
심미애가 작게 웃었다.
“어우, 귀엽겠다.”
나는 볼을 살짝 긁었다.
게다가 오늘은 가볍게 만나 얼굴이나 익히고, 그 김에 겸사겸사 리딩도 하자는 자리여서 더욱 금방 끝났다.
심미애가 불쑥 내게 말을 걸어왔다.
“고운 씨.”
“네?”
“그거였구나. 상경 씨, 자기 고향 어디야?”
조상경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저 서울 토박이에요.”
놀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 아무래도 제가 상경 선배님의 오대수를 연기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최대한 같은 사람처럼 보이게
연기해봤습니다.”
목소리 그 자체는 지문과 같아서 완전히 똑같이 따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말투는 어느 정도 따라할 수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자주 쓰는 어휘와 문장구조가 있고, 거기에 억양이나 말버릇이 있으면 더욱 특징적이
되니까 말이다.
왕 PD 와 조상경은 살짝 놀란 듯 했다.
“네, 잘 부탁드려요.”
그러나 오늘 보니 그건 기우였다.
인맥 왕
70.
포스터 촬영 날이었다.
몇 분 전.
“근데 그 리스트에 곽시우 쉐프님 레스토랑도 있었거든요. 아직 거기엔 연락 안 해보긴 했는데 혹시······.”
“그래도······.”
“시우 씨가 자기 찾는데?”
나는 어리둥절했다. 저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래.
“그럼요. 당연하죠.”
뭣보다 왕 PD 가 제일 놀랐다.
“진짜야? 자기?”
곽시우가 덧붙였다.
―대신 부탁 하나 있어요.
“어, 네. 말씀하세요.”
나는 살짝 긴장했다.
“······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곽시우가 다시 왕 PD 에게 말했다.
―그러면 PD 님, 레스토랑으로 전화주세요. 언제언제 촬영하시는지 알려주시면 최대한 맞춰서 빼드릴게요. 자세한
일정은 매니저랑 얘기하면 될 것 같아요. 제가 따로 말 해놓을게요. 참, 촬영 당일에 그래도 제가 레스토랑에
나가보는 게 좋긴 할 텐데, 아마 못 갈 수도 있어요. 제가 요즘 너무 바빠서요. 미리 죄송해요.
“아냐,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우리가 부탁하는 입장인데. 아무튼 너무 고마워 자기. 은혜는 꼭 갚을게.”
다른 주조연 배우들이 소소하게 커피차를 보냈고, 그렇게 한 사이클이 돌아서 이제 대충 마무리 되겠거니 하던
시점이었다.
“네? 밥차요?”
그러나 아니었다.
두 번째는 이루다였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서주 사형, 언제나 응원합니다! - 연이’라는 현수막을 달아 커피차를 보냈다.
지금은 콘서트 투어를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던데. 그런 시기에 이렇게 날 챙겨주기까지 하다니, 고마웠다.
‘그래도 이제 진짜 끝이겠지.’
그러나 나는 한 명을 잊고 있었다.
오용호는 이번에도 내 차기작을 기사로 접했는데, 그 이후 왕 PD 에게 자기도 출연하고 싶다고 은근히 접촉해왔다.
그러나 왕 PD 는 자신이 생각한 이미지에 맞지 않으면 배우가 아무리 유명해도 절대로 쉽게 캐스팅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용호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끈질기네.’
왕 PD 가 다시 한 번 내게 감탄하며 말했다.
“와, 자기 진짜로 인맥 왕이다.”
글씨체와 왼손잡이
71.
똑똑―.
김만래가 벌떡 일어났다.
“어, 배우님.”
오대수가 김리오의 몸을 차지했을 때 거기에다가 일기를 쓰면, 다음날 김리오가 그 일기를 보면서 자신이
오대수였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는 방식이랄까.
다만 덧붙이긴 했다.
“근데 분량이 좀 많아서요.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럼요.”
“네, 맞아요.”
그리고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드디어 다 했는지, 백고운이 몸을 일으키며 빙그레 웃었다.
“아뇨, 뭘요.”
“네, 들어가세요.”
사람이란 게 자주 얼굴을 보다보면 이름 정도는 외우게 되니까. 촬영 끝나고 나면 어차피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
해도.
백고운이 뭘 한 번 들으면 단번에 외워버리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건지, 아니면 섬세한 타입이라 말단
스태프들의 이름까지 외워두려고 일부러 노력하는 건지, 김만래는 아직 몰랐다.
방송국에 카스트제도가 있다면 말단 스태프는 아마 불가촉천민 정도일 것이다. 물론 꼭대기에는 감독이 있겠지.
스태프들은 그런 것도 없다.
“어, 감독님.”
“잘 준비 되어가고 있나 한 번 들렀지.”
“아, 그건······.”
“흐음······.”
“자기, 이거 한 번 볼래?”
그가 공책을 펼치더니 김만래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김리오’ 글씨체야. 확실히 학생 같지 않아? 남고생 필체가 있다면 딱 이런 느낌일 것 같잖아.”
왕 PD 는 동의했다.
“왜 그러세요?”
“별 건 아니고······.”
왕 PD 가 후후 웃었다.
크랭크 인 직전.
그리하여 첫 촬영 날인 오늘.
“네.”
그리고 촬영장 한쪽에 물러서서 조상경의 연기를 보던 나는 뭔가를 발견했다.
‘······어라? 설마?’
“저, 선배님.”
“응?”
“혹시 원래 왼손잡이셨나요?”
그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
조상경은 감탄했다.
조상경이 놀랐다.
“네, 저도 왼손 쓸 수 있어요.”
“아, 고운이 너도 원래 왼손잡이였니? 저번에 보니까 오른손 쓰는 것 같던데. 혹시 나처럼 나중에 교정한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원래 오른손잡이에요.”
“응? 그럼 어떻게······.”
나는 살풋 웃었다.
“선배님이 교정한 거랑 비슷해요. 예전에 왼손잡이 역할을 맡느라 왼손 쓰는 걸 나중에 연습해서 익혔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양손잡이에요.”
그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삼박자를 다 갖춘 친구
72.
그래서 조상경은 백고운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왕 PD 가 허락만 한다면 그렇게 하자고 말이다.
‘정말 그게 가능할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보통은 불편한 소수자 쪽이 다수자 쪽의 규칙에 맞추려 한다.
“상경 씨도 왔네?”
하지만 조상경은 백고운이 어떻게 연기할지 궁금했다. 방송으로 확인해도 되겠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참기
어려웠다고나 할까.
“씬 12 테이크 1, 액션.”
“음, 다 익었나?”
감독님과 작가님이 요리사 지망생이라면서 김리오를 요리 못하는 캐릭터로 설정한 것도 사실 의도적인 이유가
있었다.
“고운 씨 준비 됐지?”
“어디, 그럼 해볼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손의 방향을 헷갈리지 않았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왼손잡이였던 것처럼 그 모든
동작들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조상경은 감탄했다.
“······!!”
“컷!”
“자기야, 방금 그거 뭐야?!”
“네?”
“아니, 방금 칼을 이렇게 이렇게 했잖아!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아, 이거요?”
백고운은 덧붙였다.
왕 PD 와 스태프들은 얼이 빠졌다.
그런데 백고운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구니까 그의 대단한 능력에 놀라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어이가 없어야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왕 PD 였다. 그가 호들갑을 떨었다.
칼을 손 안에서 돌리는 퍼포먼스를 할 줄 안다니, 저건 단순히 왼손을 잘 쓴다의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첫째, 센스.
꼼꼼한 시청자가 아니라면 배역마다 백고운의 손쓰는 방향이 다른지 아닌지 보통 관심도 없고 눈치도 못 챌 것이다.
왼손잡이 연기를 하고 싶다고 왼손 쓰는 연습을 한다는 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건 어지간한
열정으로 되지 않는 일이었고.
‘삼박자를 다 갖춘 친구였구나.’
센스가 있을 만큼 머리도 좋고, 열정도 많아 남들보다 배로 노력할 줄 알고, 그러면서 타고난 신체 능력까지
좋다.
자신이 했던 걱정은 다 기우에 불과했다. 백고운은 자신이 한가하게 걱정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이미 백고운은 조상경보다 훨씬 뛰어난 배우였다.
백고운이 저렇게 멋지게 오대수를 연기했는데, 조상경 역시 그 오대수를 마찬가지로 연기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사랑의 오작교
73.
그러면서 한 가지 더 덧붙인다.
그 말에 김리오는 솔깃 한다.
그러나 오대수는 굴하지 않는다. 그는 끈질기고도 뻔뻔하게 무작정 들이댄다. 그 방식이 좀 옛날 방식이라
촌스럽기는 했지만.
그리고 촬영하는 동안 백고운은 ‘약간 올드하지만 호탕한 쾌남’과 ‘수줍어하는 연애 쑥맥 소년’을 오가며
탁월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스태프들에게 수고했다고 고개를 꾸벅이며 촬영장을 나왔다. 그때, 촬영장 한쪽에 서 있는 김건을 발견했다.
“어?”
“김 감독님? 여긴 어쩐 일로······.”
“오빠도 참.”
“응? 아.”
“그래 보여?”
“그럴까?”
내가 불쑥 끼어들었다.
“저, 선배님, 감독님.”
우리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김건이 속닥거렸다.
나는 ‘뭐래’하는 투로 피식 웃곤 일축했다.
어차피 그녀와 있었던 과거는 다 옛일이니 이제와 서먹해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김철수란 것도 조심하면
들키지 않을 것이고.
“하하, 감사합니다.”
마침 지인들이 밥차를 보내주고 그럴 때라서 겸사겸사 그동안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답례하는 느낌으로 말이다.
오랜만에 표류와 이초희도 왔고, 기태성과 윤성광 등 소속사 식구들도 왔고, 오용호와 민하나 등 <레미제라블>
식구들도 왔었다.
그리고 이성한이 앞에서는 툴툴거리면서도 뒤에서는 챙겨주는 타입 아니던가. 의자를 빼주거나 담요를 챙겨주는
등, 이성한이 말없이 사소한 배려를 해줄 때마다 이루다는 살짝 볼을 붉혔다.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나는 아무거나 괜찮아.”
“저도요.”
그러나 김건의 말하는 폼이 뭐랄까, 소개팅 주선자가 상대의 칭찬을 늘어놓는 것 같은 모양새와 닮았다.
“아, 내가 아직 말 안했구나.”
덜컥.
해피엔딩과 배드엔딩
74.
―잘해 봐!
일주일 전쯤, 우연히 심미애의 이혼 사실을 알았을 때 김건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못내 즐겁다는 듯 구경꾼의
태도로 그는 히죽거렸다.
‘잘해보긴 뭘 잘해봐.’
‘하여간 김건 걔는 늘 오바라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괜히 좀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고운아, 이제 촬영 들어가야지.”
“네, 형.”
“무슨 고민 있어?”
“네?”
“응? 진짜?”
“네, 그럼요.”
나는 직접 매니저에게 확인시켜주었다.
매니저가 대본을 갖고 갔고, 나는 방금까지 보고 있던 씬의 대사를 줄줄 읊어주었다.
그의 말대로다.
대사를 안 외워서 촬영장에 오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가사를 숙지하지 못하고 무대를 오르는
가수랑 비슷하다. 프로가 아니란 소리였다.
“네, 그런 거 아니에요.”
“네, 감사해요.”
“아니에요. 무슨 일이세요?”
즉, 힘든 촬영이다 이 말이다.
“자기······.”
왕 PD 가 찡 하니 감동 받은 듯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았다.
그가 고마움과 사랑을 한껏 쏟아낸 후 돌아갔고, 심미애는 그제야 가만히 감정을 잡았다. 그리고 달달 외운
대사를 입속으로만 다시 한 번 중얼거리며 복기했다.
그렇지만 비를 맞으면 자연히 체온이 떨어지고, 그러면 근육이 딱딱하게 경직되어서 대사가 씹히는 일도 많이
일어난다.
심미애는 딕션이 좋기로 유명한 배우였다. 공백기가 길긴 했지만, 그것을 이유로 실력이 느슨해졌다는 평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같이 출연하는 배우가 백고운처럼 연기를 잘하는 신예 배우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비교될 수야 없지.’
오늘따라 백고운의 말수가 적은 것 같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 역시 감정선을 잡느라 그렇겠거니 하면서
심미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기자님, 괜찮으세요?”
평소라면 어이없어하면서도 순순히 끌려가줬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 사소한 것에도 짜증이 솟았다.
독고희는 결국 못 참고 화를 쏟아냈다.
자신이 멋진 어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애한테 이렇게 막무가내로 감정의 배설물을
쏟아낼 만큼 저질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따라오지 마.”
“······!”
“······.”
“······.”
둘의 눈이 잠시 마주쳤을 때였다.
“······추워요.”
사춘기 남고생 특유의 서툴면서도 묘하게 직진인 구석이 있는 그런 태도가 방금의 손짓으로 잘 느껴졌다.
“컷, 좋아요!”
“수고했어요.”
“미애 씨.”
“어?”
심미애가 그쪽을 돌아보고 환하게 웃었다.
“언제 왔어요?”
“······.”
미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오히려 누가 딱 정의를 내려준 것처럼 명쾌한 기분이었다.
나는 옅게 픽 웃었다.
갈라진 길을 죽 걷다보니 어느새 서로는 저만치 멀어졌지만, 그게 꼭 비극이란 뜻은 아니었다. 인생사는 드라마와
달리 해피엔딩과 배드엔딩 둘로만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막내 온 탑
75.
“어? 루다?”
“아하하··· 오빠 안녕하세요?”
‘아하.’
“촬영장에서 뭐 없었어?”
“음······.”
“아 맞다. 나 차였어.”
나는 가볍게 말했다.
“······!!”
“······미안.”
“죄송해요, 오빠.”
응?
어라, 나 잘못 말한 건가?
“네? 예능이요?”
나는 조금 의아했다.
“의외네요. 걔가 그런 성격이 아닌데······.”
그런 이성한이 인터뷰처럼 내밀한 자리라면 모를까, 전국에 방영되는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 우리 사이를
자랑한다고 날 부를 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아, 네. 알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덧붙였다.
“음, 그럴까요?”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MC, 그리고 다른 고정 출연자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한적한 시골에 도착했다.
MC 가 말했다.
이성한이 먼저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빙긋 웃고 대답했다.
“오, 괜찮겠어?”
그래도 사실 이런 예능 프로그램이 다 그러하듯, 분량만 뽑으면 되는 거였다. 다행히 근처에 어시장이 있어서
고기는 거기서 조달해왔다.
“저, 제가 할까요?”
사람들의 놀라움 속에 나는 칼을 잡았다. 아무렇지 않게 재료를 손질할 때마다 등 뒤에서 감탄사가 연달아 터졌다.
원래 이런 데서 하는 게임이란 뻔한 데가 있다.
나라의 수도를 알아맞히는 게임을 먼저 했고, 옛날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노래의 제목을 맞추는 게임을 이어
했다.
대본을 외우고 그러다보니 기억력은 좋은 편이라 수도 게임은 어렵지 않았고, 옛날 작품의 제목을 알아맞히는
게임은 내가 그 시대를 직접 건너왔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어렵지 않았다.
멤버들이 입을 떡 벌렸다.
“고운이 못하는 게 뭐야? 얼굴도 잘생겨, 키도 커, 연기도 잘해, 머리도 좋은데, 요리까지 잘해. 완전 막내 온
탑이네.”
“춤은 잘 못 춰요.”
심미안
76.
밤이 깊어갔다.
오늘 촬영에 대한 소감을 나누다가 이성한이 ‘활약을 못해서 분량 걱정이 좀 드네요’라는 농담을 던진 이후의
말이었다.
MC 가 웃으면서 이성한을 부추겼다.
“네, 그럼 몇 개만 해보겠습니다.”
“오오, 똑같다!”
하지만 원래 이런 데에서 하는 개인기란 싱크로율이 안 높아도 분위기만 띄우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설픈
성대모사도 나름의 웃음을 줄 수 있는 법이었다.
“음, 저는······.”
나는 잠시 말을 끌었다.
“기타 칠 줄 알아요?”
“네, 조금요.”
일전에 <운명의 표현>을 찍었을 때, 회식자리에서 버스킹으로 즉석에서 부족한 회식비를 채웠던 적이 있었다.
[↳https://img1.daumcdn.net/thumb/R1280x0/?
scode=mtistory2&frame=httpsFEdX98vA84IL9%1ima.gif ^^]
[↳감사합니다 ㅠㅠㅠㅠㅠ]
[백고운 진짜 다재다능하다;;;]
[좀 잘생기면 하나 정도는 부족해야 인간미 있고 이런 거 아닌가? 저 얼굴에 연기도 잘하는데 인성까지 좋음?
하.. 인생 ㅈㄹ 불공평하네.. 백고운 혼자만 인생 2 회차임 ㅅㅂㅠ?]
살짝 뜨끔했다.
그런 해프닝을 제외한다면 내 첫 예능 출연은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셈이었다.
촬영장에 갔더니, 우리 드라마 음악 감독이 갑자기 날 불렀다. 그리고 하는 말이 OST 작업에 참여해보지
않겠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아······.”
나는 잠시 망설였다.
물론 요즘은 배우들이 직접 OST 녹음에 참여하는 일이 심심찮게 있기도 하고, 내가 나오는 드라마니까
의미적으로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있었다.
나보다 더 잘 부르는 가수가 많은데, 그 분들이 더 작품에 어울리는 노래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때, 음감이 내 걱정을 알아차린 듯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단독 타이틀곡은 아니고 수록 트랙으로 들어갈 곡이야. 기존에 있는 OST 의 커버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원래 미애 씨 테마 곡 있잖아? 그걸 남녀 성별을 바꿔서 개사한 버전으로 곡 하나를 더 만들까 생각하고 있었거든.
나는 그걸 고운이 네가 불러도 좋을 것 같거든.”
4 년 전쯤인가.
<시크릿 가든>이라는 드라마에 <그 여자>라고 유명한 OST 가 있었는데, 그 노래의 남자 버전인 곡 <그 남자>
라는 OST 를 남자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분이 직접 불렀었다.
요즘은 한국 드라마가 해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한류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배우들이 직접 OST 를
부르는 일이 많아졌다.
“네, 부탁드릴게요.”
“헛, 네.”
“아―.”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촬영이 있어 바쁠 때라면 모를까 오늘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게다가 아직 졸음이 안 가신 터라, 겸사겸사 쪽잠도
좀 더 자면 되고.
“아뇨,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저······.”
“뭘요.”
나는 직감적으로 눈치 채고 물었다.
“무슨 고민 있어요?”
“사실······.”
그는 머뭇거리다가 털어놓았다.
굳이 비법을 설명해야 한다면, 많은 작품을 보느라 데이터베이스가 이미 구축되어 있어 비교적 재미있는 작품을
잘 고르게 된다는 것 정도?
그러나 당장 어떤 시나리오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운에게 그건 적절한 답이 아니리라.
나는 물었다.
임시운은 바르고 건실한 청년 같았고, 연기에 대한 자세도 진지했다. 나는 이 청년에게 호감을 느꼈고,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다.
그는 선뜻 설명해주었다.
할 수 있다 자신하고, 보란 듯 해내다
77.
나는 그것을 주의 깊게 들었다.
“음, 저는······.”
임시운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작품성을 결정짓는 요소는 단순하지 않다. 흥미로운 소재와 줄거리, 매력적인 캐릭터, 배우의 연기력, 감독의
연출력 등등······.
하지만 최소한 확률적으로는, 재밌고 좋은 작품이 흥행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배우는 좋은 작품에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것이고.
임시운은 볼을 긁적였다.
그가 나를 향해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제가 뭘 했다고요.”
나는 겸손히 말했다.
“무슨 소리세요. 저도 소문 들었어요. 선배님이 고른 작품은 무조건 잘 된다고, 선배님한테 신기(神氣) 있다는
말까지 있는 걸요.”
“그, 그래요?”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몰랐다.
내가 골라준 그 <미생―물>이란 작품이 2014 년 하반기에 엄청난 인기를 끌며 히트작이 된다는 걸 말이다.
“고운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해. 노래도 연기랑 똑같아. 감정을 담는 거니까. 목소리로 연기하는 거라
생각하면 편할 거야. 이해했니?”
“네!”
편집은 일찍 들어갔고, 1-2 화 분량은 이미 완성본까지 나왔다. 그리고 OST 를 비롯한 다른 준비들 역시 착착
진행되었다.
“자기, 오늘 찍을 씬이 뭔지 알지?”
“네, 그럼요.”
경연대회의 심사위원인 독고희의 집에 스토커가 난입하는 바람에 경찰이 출동했고, 그 때문에 그녀의 경연대회
참석이 불가피하게 어려울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이전까지는 한 몸을 두고 두 개의 인격이 번갈아 활동할 뿐, 동시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씬에서 처음으로 이번엔 두 인격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둘 다 몸의 주도권을 포기하지 못해서
충돌하는 것이다.
찾아온
“응? 괜찮다고?”
“네. PD 님이 괜찮으시다면요.”
“저는 괜찮습니다.”
왕 PD 는 유쾌해졌다.
“······이건 내 몸, 이라고!”
그가 굵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거 진짜 어지간히 미친놈일세. 여자한테 빠졌다고 꿈을 망쳐? 야, 너처럼 여자한테 푹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놈이 나중에 여자 떠나고 나면 땅 치고 후회하는 거야. 좀만 지나봐라. 지금은 내가 원망스러워도 나중엔 나한테
고마워할 거다.”
오대수가 쯧쯧 혀를 찼다.
“윽······!”
백고운은 완전히 우뚝 섰다. 그때, 안 보이는 힘에 의해 억지로 돌려지는 것처럼 백고운의 몸이 삐그덕삐그덕
돌아갔다.
“이, 이게 진짜······!”
그때, 누군가 조종하는 것처럼 백고운의 오른손이 삐거덕거리며 저절로 주먹을 쥐었다.
이후 백고운은 그 주먹으로 자신의 얼굴을 쳤다. 연기라지만 ‘퍽’ 소리가 날 정도로 큰 타격이었다.
김리오는 몸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일부러 주먹으로 자신을 때린 거였다. 물리적인 고통을 가하면 정신이 번쩍
드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유령은 물질세계의 사물을 건드릴 수 없지만, 원한이 아주 강하면 가끔 사물을 움직일 수 있단 속설이 있지
않은가. 그것과 비슷했다.
김리오는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왼발이 마치 어디에 묶인 것처럼 꼼짝을 안 했다. 오대수가 김리오의 발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발 그만······!”
“너야말로······!”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미친놈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백고운은 실감나게 연기했고, 그래서 더 기괴했다.
‘와 미쳤다······.’
분명 백고운은 혼자서 안간힘을 쓰면서 연기하고 있을 뿐인데, 꼭 정말로 두 명이 싸우는 것처럼 실감났다.
물리적인 양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백고운은 김리오일 땐 오른손을 썼지만, 오대수일 땐 왼손을 썼다. 비록 아주 찰나에 가까워서 그렇게 티 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김리오와 오대수의 싸움은 무승부로 끝났다. 두 인격을 동시에 받아내느라 무리한 몸이 먼저 퓨즈가 끊긴 것이다.
스태프 몇몇이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며 혀를 내둘렀다. 모두 백고운의 연기에 압도된 것이었다.
처음에 왕 PD 는 우려했었다.
그러나 백고운은 할 수 있다 자신했고, 보란 듯 해냈다.
보통, 배우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은 반비례 관계와 같다. 배우가 연기로 구현해낼 수 없는 것을 연출로 매우기
때문이다.
진짜 생일
78.
그리고 수많은 배우와 스태프가 4 개월 정도 동고동락하며 촬영하던 드라마 <천의 맛>이 드디어 방영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심미애가 멋진 연기를 보여줄 거라 기대했고, 그녀는 대중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드라마 <천의 맛>은 첫 방영부터 시청률 15 프로를 찍으며 순조롭게 시작했다. 그리고 매 회차가 지날수록 그
시청률은 점점 높아졌다.
[오대수 같은 마초남 실제로 보면 좀 짜증나는데 ㅋㅋㅋ 백고운이 연기하니까 왤케 귀엽고 웃기냐 ㅋㅋㅋ]
처음 발견한 건 이거임.
(사진 첨부)
(사진 첨부)
(사진 첨부)
어쨌든 이게 감독의 디렉션인지, 아니면 백고운 본인이 일부러 다르게 연기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좀 쩌는 듯.
결론: 백고운 연기 존나 잘한다.
+) 댓글보고 추가해서 더 씀.
백고운이 연기한 오대수랑 조상경이 연기한 오대수랑 완전 똑같다는 제보가 들어와서 직접 찾아봤음.
1. 자리에 앉을 때 버릇 똑같음. 한 번 옷깃 털고 앉는 거.
(사진 첨부)
(사진 첨부)
3. 요리 시작 전에 손목 스트레칭하는 거.
(사진 첨부)
[댓글 75 개]
[↳ㅇㅇ: 제보함. 천의 맛에서 백고운이 연기한 김리오랑 오대수 자세히 비교 분석한 블로그 글이 있음. 링크:
https://blog.naver.com/dramaggwang/29240919402839]
[다른 댓글 더보기]
<천의 맛> 촬영이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드라마에 대한 반응이 좋았기 때문에 자연히 촬영장의 분위기도 좋았다.
“응? 고운 씨? 오늘 촬영 있어요?”
심미애는 내 말을 믿은 듯 했다. 출연 배우가 자신의 촬영이 없어도 촬영장에 들르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일 축하합니다―.”
심미애가 깜짝 놀랐다.
“미애 씨, 생일 축하해!”
원래 촬영 당일에 배우의 생일이 겹치는 일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이렇게 촬영장 식구들이 생일을 축하해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케이크는 제작진 측에서 준비했다. 심미애 캐릭터가 그려진 디자인 케이크였고, 독고희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나도 조그마한 봉투를 건넸다.
“선배님, 여기 선물이요.”
나는 쑥스럽게 손을 저었다.
“별 건 아니에요. 그냥 작게 준비했어요.”
“풀어 봐도 돼요?”
“그럼요.”
그녀는 모태신앙으로, 독실한 신자였다. 다만 주변에 티를 내지 않아서 그녀와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잘 모르는
사실이기도 했다.
나는 멋쩍어서 말을 돌렸다.
저번에 심미애가 나더러 싸인 하나만 해달라고 부탁한 적 있었다. 딸이 내 팬이라서 부탁했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선물을 챙기는 겸, 소속사에 있는 내 굿즈 몇 개랑 싸인, 그리고 은혜에게 보내는 편지도
챙겨주었다.
“그러면 고운 씨는 생일 언제에요?”
왕 PD 가 끼어들었다.
“성탄절이에요?!”
“응?”
그리고 1 초 뒤, 둘 다 무슨 말인지 깨달은 듯 했다. 내가, 그러니까 백고운이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걸 그제야
상기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태연했다.
중간에 김리오가 오대수를 이용했단 게 들키면서 독고희가 실망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김리오는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힘으로 노력해 경연대회에서 우승하고, 독고희와의 사랑도 이룬다. 그리고
오대수는 소원을 이루고 승천한다. 모두에게 해피엔딩인 결말이었다.
드라마는 몇 년 뒤 성장한 김리오가 자신의 주방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나는데, 공교롭게도 마지막 촬영
역시 바로 그 장면을 찍으면서 끝났다.
왕 PD 가 컷을 외치며 말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여기 주목!”
갑자기 안쪽에서 누가 외치더니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고, 스태프들은 웃음을 머금은 채 손뼉을 치며
합창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저번에 심미애는 김건과 함께 내 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김건과 친하다는 그때의 얘기를
떠올리고 슬쩍 김건에게 물어봤나 보다.
“고운 씨, 안녕하세요.”
“어, 곽 쉐프님?”
덕분에 우리 <천의 맛>팀은 마지막 촬영 날 호화로운 회식을 즐길 수 있었다. 오랜 고생을 끝내서 기쁜데,
맛있는 것까지 먹으니 기분이 얼마나 좋겠는가.
그날 최고로 많이 웃은 것 같았다.
백고운의 몸으로 들어온 지 벌써 4 년이 흘렀다. 그동안 적지 않은 작품을 했고, 그러면서 생일을 촬영장에서
맞이한 적도 있었다.
왕 PD, 그리고 심미애와 함께 했던 드라마 <천의 맛>은,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특별히 잊지 못할 작품이 될 것
같았다.
배우라면 응당
79.
사람들은 김리오와 독고희를 보내줄 수 없다며 벌써부터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몇몇은 20 부작으로
늘려달라며 울부짖기도 했다.
한편, 바깥 상황이 뜨거운 것과 상관없이 나는 촬영이 끝났기 때문에 오랜만에 평화로운 한때를 맞이하고 있었다.
“음······.”
―여, 뭐하냐?
나는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
나는 연달아 로맨스 드라마를 두 개 찍었다. 그래서일까 들어온 시나리오의 장르가 대부분 로맨스로 비슷비슷했다.
나는 농담을 던졌다.
김건이 키득거렸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할 때 쯤, 나와 김건은 업계에서 최대한 만나지 말자고 예전에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약속했었다.
고전적일지 모르겠으나, 대본이나 시놉은 종이로 봐야 그 느낌이 제대로 느껴졌다. 아날로그 인간이라 어쩔 수
없었다.
“왔어?”
“원래 아무나 캐스팅하지 않지만, 그래도 네 인지도면 우리가 손해는 아니니까. 이미지 어울리는 것 같으면
고려해볼게.”
캐스팅은 원래 제작사 고유의 권한이다. 그리고 배우가 아무리 인지도가 높아도 정말로 시나리오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여름 作]
“이거, 너희 거야?”
“응?”
김건은 극본의 제목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아, 아―’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뜻밖의 소리를 내뱉었다.
“아니라고? 왜? 재밌던데.”
“사실 나도 그 생각은 했어. 근데 투자자를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작가가 어디 이력이나 필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첫 작품이더라고. 게다가 우리가 그런 추리 장르 쪽에 특화된 제작사도 아니고. 더 좋은
제작사를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답장할 참이었어.”
이것도 그런 모양이었다.
용 스튜디오는 tvM 이 자회사로 두고 있는 제작사인데, 조 PD 는 거기로 이적한 뒤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고
있었다.
조종석 PD 는 원래도 추리나 스릴러 장르의 드라마를 잘 연출하는 걸로 유명했다. 그런데 그쪽으로 옮겨간
후부터는 만드는 작품마다 잘 되어서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김건이 물었다.
이 작품이 최소한 어디 수상작이라는 타이틀만 있어도 관심을 보일 텐데. 작가 쪽엔 수상 이력이 없고, 김건은
조 PD 와 친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 친분이 있지만, 그것도 김철수 시절의 얘기였다. 백고운인 지금은 나만 일방적으로 아는 사이였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진 않을 것 같아.”
조연출이 대답했다.
조 PD 는 일단 편지를 먼저 살폈다.
“김건?”
이름만 건너건너 들어 알 뿐, 친분은 없는 영화감독에게서 온 편지였다. 처음에는 왜 그가 자신에게 이걸
보냈는지 의아했다.
그건 곧 편지를 읽은 후에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조종석 PD 님.
다름이 아니라,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철수가 생전에 조 PD 님께 보내려던 소포를 발견했습니다.
4 년이나 지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중요한 무언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뒤늦게라도 동봉해
보내드립니다.]
그가 은퇴한 후엔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주기적으로 안부를 주고받았을 정도로는 친했었다.
약간 호기심이 들었다.
조 PD 는 봉투를 뜯었다. 거기에 있는 건 두꺼운 대본 하나와, 김철수의 필체로 적힌 한 통의 편지였다.
그리고 딱 한 시간 뒤.
“응? 좋은데?”
조 PD 는 조연출에게 말했다.
김건은 그런 나를 두고 혀를 내둘렀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런 거 가지고.”
조종석 PD 가 연출을 맡고, 한여름 작가가 극본을 맡은 tvM 드라마 <기라성과 기린아>가 본격적으로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 신인은 아니고, 무명생활이 조금 있었단다. 어쨌거나 인기가 많아진 건 최근이었기에 많은
대중들에겐 뉴 페이스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 주 뒤.
“안녕하세요. 배우 지정수에요.”
나는 일단 그의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백고운입니다.”
기시감은 드는데 내가 대체 그를 어디서 봤는지가 도저히 기억이 안 났다. 깊게 아는 사이가 아니라, 어디서
스치듯 본 사람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나는 물었다.
나는 덧붙였다.
“여긴가?”
수업 중인지 학교는 한산했다. 나는 교정을 가로지르며 적당한 벤치를 찾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 특강을 온
김건과 끝난 후 만나기 위해서였다.
몇몇은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몇몇은 히죽거리면서 건들거리고 있었다. 껌을 짝짝 씹거나 담배를 피는
아이들도 보였다.
딱 봐도 질이 안 좋은 그룹처럼 보였다.
나는 엄지와 검지로 입가를 찢은 후 호루라기 소리를 ‘휘!’ 냈다. 그리고 발을 크게 굴리며 걸걸한 목소리로
냅다 호통 쳤다.
누군가 ‘불이야!’하고 갑자기 소리치면 그것의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듣는 사람은 일단 혼비백산하는 법이었다.
마찬가지로 학생들이라면 기본적으로 선생님의 권위를 무서워할 거라 생각했다.
“씨발!”
“야, 튀어!”
젖살은 안 빠졌지만 얼굴이 날카롭게 생겼고, 그 학생의 명찰에는 [지정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내가 그 학생의 얼굴과 이름을 정확히 기억한 건, 첫째론 그 아이가 제법 잘생겼기 때문이었고, 둘째론 내가 그
이름을 보고 ‘지정수? 지정(指定)된 물(물 수水)인가?’하는 아재개그를 실없이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엔 그런 것 같아.”
“쓰레기 새끼였네.”
“너 혹시 지정수 선배 알아?”
원래 비밀이란 건 그렇다.
이성한이 쯧 혀를 찼다.
“연예계 들어온 후엔 이미지 관리한다고 자제하는 것 같은데, 그 성격이 어디 가겠어? 나도 예전에 그 선배랑 한
번 작품 해봤는데, 성질 꽤 더러워. 스태프한테 어찌나 갑질을 하던지, 저거 지금 무명이라서 티가 안 나는 거지,
유명해지면 곧바로 터지겠구나 싶더라니까.”
“흠.”
이거, 좀 골치 아플 수도 있을 것 같다.
중간에 전학을 갔다지만, 그는 아직도 그 당시의 일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기꺼이 지정수의
만행을 얘기해주면서 분통을 터트렸다.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까봐 걱정돼서 그렇지, 그것만 아니라면 언제든 그 새끼의 실체를 까발리고 싶다니까요.
내 학창시절을 지옥으로 만들어놓았으면서, 막상 자기는 행복한 게 말이 되나요? 저는 TV 채널을 돌리다가 그
자식 얼굴을 마주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해요. 그런데 그 자식은 그렇게 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잖아요.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뭐가?”
“이미 그 사람은 드라마에 캐스팅 됐잖아. 좋으나 싫으나 너랑 한 배를 탄 거라고. 드라마에 문제 생기면
너한테도 타격이 있을 거야.”
그렇기에 김건은 그냥 들쑤시지 말고 조용히 있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거였다. 촬영을 하고 방송이 나갈,
딱 반 년 동안만.
이성한의 말에 의하면, 지정수의 인지도가 조금 높아진 지금, 그에 대한 폭로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끌어안고 가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소리다.
게다가······.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드라마 하차
81.
나는 그저 싱긋 웃었다.
조종석 PD 를 비롯한 제작진들은 좋아했다. 아니,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드라마 홍보를 위해
배우들이 자발적으로 수고해주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김건은 딱히 내 행동에 태클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하루는 도저히 의아함을 못 참겠는지 내게
물어왔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뭐?”
점점 커지는 풍선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어느 순간 못 이기고 터져버리는 것처럼, 지정수를 가만히 내버려두면
인기가 많아지다 언젠가는 알아서 빵 터질 것이다.
“그러면 너는 지금······ 일부러 지정수를 띄우고 있단 거야? 나중에 논란이 터졌을 때 그만큼 화제가 되게?”
“바로 그렇지.”
“무슨 생각해?”
표영범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마자 등받이에 퍼질러 기댔다. 후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표영범은 그것들을 엮어서 커다란 기획 기사를 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침 한 달 뒤면 새해다. 입학식 시즌인
이맘때는 과도한 신고식 문화로 매년 하나씩 문제가 터진다. 시기적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표영범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도 평범한 이름이라 대번에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표영범이 후배의 손에서 택배를 재빨리 가져왔다. 그리고 나가려고 준비하던 것도 잊고 그 자리에 앉아서 택배를
뜯었다.
후배가 당황했다.
“급, 급한 거였나요?”
흡사 공포 괴담 같은 말에 후배가 입을 떡 벌렸다.
표영범이 혼잣말로 추측하며 택배를 거침없이 뜯었다. 후배도 궁금해져선 고개를 쑥 빼고 택배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개봉된 택배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편지였다.
둘은 그것을 펼쳐 읽었다.
다만 이해가 안 되는 건······.
후배가 물었다.
“기사 내보내시게요?”
“그리고 아니어도 기사 내보냈을 거야. 예전에 철수 씨한테 빚진 게 있거든.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그 빚 갚기도 전에 철수 씨가 교통사고로 떠난 거라서. 나중에라도 갚는 셈 치지, 뭐.”
“그럼 내일 봐.”
표영범은 앞뒤 안 재는 정의파 기자로 유명했다. 상대가 누구든 무서워하지 않고 달려드느라, 오죽하면 별명도
표범 기자라고 붙었을까.
드라마 크랭크 인 3 일 전.
“역시 표 기자님이네.”
이성한의 친구를 설득해 고발문을 보낸 날, 늦어도 일주일 뒤쯤에는 기사가 뜰 거라고 예상했었다.
게다가 진실공방이 지지부진 이어지면 드라마 일정이 촉박하므로 곤란하기도 했다. 하지만 표영범이 나선다면
최소한 그건 팩트가 검증되었다는 뜻이었다.
고발문을 보낼 때 이름을 누구로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나는 내 이름을 한 번 더 팔았다. 어차피 조 PD 에게도 한
번 팔았는데 두 번이라고 못 팔까하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일전에 개인적인 일로 그에게 도움 준 적도 있고 말이다. 표영범은 은혜를 무시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가 시기적절하게 터트려준 덕에 연예계와 방송계에 난리가 났다. 지정수의 소속사 측에서는 곧바로 의혹을
부정하며 법적 대응을 할 것이라 밝혔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지정수의 동창이라 밝힌 수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 마디씩 증언을 보탰다.
하지만 그건 내가 설득했다.
결국 조 PD 는 내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거의 곧바로 지정수의 학폭 인정 입장문이 나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결정이 맞은 셈이었다.
사람들도 우리 드라마의 발 빠른 대응에 만족해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둘째, 이미 지정수의 하차 건으로 포스터나 티저 재촬영 등등의 손해비용이 발생했다. 새로운 대체 배우를 구할
여윳돈이 많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지금 스케줄이 없어 여유로우면서도, 당장 대사를 외우고 촬영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실력이 좋아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값싸야 한다는 뜻이다.
조 PD 가 난감해했다.
그때, 내가 나섰다.
*
그리고 몇 시간 뒤.
“고운 씨가 절 먼저 찾는 건 처음이네요.”
기라성과 기린아
82.
어쨌거나 지정수를 드라마에서 하차시킨다면 누군가는 그 자리를 대체해야 했다. 적임자가 누굴까 생각하다가
오용호가 떠올랐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참 특이한 놈이었다.
“당연하죠. 제가 할 거 이미 알고 온 거 아녜요?”
뭐, 그건 그렇지만.
실제로 오용호가 적은 개런티로 출연을 결심한 건 맞았다. 하지만 ‘의리’라니?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의리라는 단어만큼 오용호에게 안 어울리는 단어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평소에 팬들에게는 그런 이미지인가?
뭐, 나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사실 지정수의 인기가 요즘 높아졌다고 해도, 절대 오용호와 비교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정수를 대체할
자리에 훨씬 높은 몸값의 오용호가 오게 되었으니 당연히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똥차 가고 벤츠 온 격이랄까.
“와, 진짜 잘 어울리네···.”
사람마다 의견이 갈릴 주제이기는 하지만, 보통 배우마다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배역이 있고 아닌 배역이 있다고
한다.
아무리 분장과 연기력이 받쳐준다고 해도, 외모나 피지컬 자체가 배역과 어울릴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오용호의 경우가 그러했다. 지정수도 나쁘진 않았지만, 오용호가 같은 옷을 입고 나오는 순간부터
지정수가 연기했던 기린아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조 PD 도 은근히 만족한 눈치로 말했다.
나중에 출동한 경찰이 비탈길과 그 인근 지역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그들이 발견한 건 기린아의 신발 한 짝뿐이었다.
경찰은 기린아가 비탈길 바로 아래에 있는 강에 떨어져 쓸려갔을 거라고 추측했다. 경찰은 시신을 강에서 찾지는
못했지만, 정황상 살아있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보았다.
그렇게 20 년이 흘렀다.
동생보다 한 발 먼저 말이다.
“검사님, 나는 안 죽였어요.”
나는 카메라 앞에 섰다.
가만히 감정을 잡으며 천천히 표정을 지웠다.
나는 이전에 <천의 맛>에선 ‘김리오’와 ‘오대수’, 즉 두 명의 배역을 연기해야 했다. 그래서 이번엔
과잉되지 않은 연기를 해보고 싶었다.
이전에는 얼마나 많은 감정 연기를 할 수 있을지 도전해본 것이라면, 이번엔 반대로 철저히 적은 폭의 감정으로
어디까지 연기할 수 있을지 도전의식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레디, 액션!”
“들어오라 하세요.”
“3 월 10 일 오전 11 시 경,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런. 그랬어요?”
“몰랐다는 겁니까?”
“전혀 몰랐죠.”
“······동기가 있으니까요.”
“동기? 나는 죽은 그 사람 처음 보는데요?”
“······.”
“······.”
“라성아.”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단 것처럼 조 PD 가 헤드폰을 바짝 귀에 댔고,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줌인했다.
한여름도 생각했다.
‘드디어 시작했구나.’
이번 작품은 그녀의 첫 작품이자 데뷔작이다. 작가 지망생이었을 때, 캐릭터에 대해서 배우와 의견을 주고받는
이런 것을 남몰래 상상했었다.
백고운이 물었다.
“라성이 설정에, 어렸을 때 교통사고를 당하고 머리를 다쳐 큰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어서요. 혹시 그
수술 때문에 감정이 거세된 건가요? 아니면 하루아침에 가족 모두를 잃은 충격으로 감정이 무뎌진 건가요?”
그녀는 작가의 말이 너무 정답처럼 받아들여지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말하는 대신 백고운의 의견을
먼저 물었다.
왜냐하면 백고운의 해석은 한여름의 해석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라성을 완전히 무감각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대본을 썼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일단 저는 감정이 완전히 거세된 느낌을 생각하고 썼어요. 하지만 고운 씨 생각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혹시 괜찮다면 본 촬영 전에 고운 씨가 말해준 그런 느낌의 연기를 한 번 보여줄 수 있을까요?”
시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제작진들의 의도를 듣고 곧바로 능숙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형.”
조 PD 가 알렸다.
“형 맞잖아.”
오용호가 먼저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였다.
“응?”
한여름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백고운은 상대역인 오용호에게 어떻게 할 건지 미리 귀띔하려 했다.
그런데 어르신들이 공연을 어려워하느라 멜로드라마적으로 개작한 <레미제라블>을 오용호와 즉석에서 꾸며냈었다.
세 번째 연기는 두 번째 것과 비슷했다.
연기가 이어진 후, 아까처럼 백고운은 ‘형이 맞지 않느냐’고 묻고, 오용호는 ‘아니다’ 부인하고 일어났다.
“뭡니까?”
“왜 죽였어?”
“이봐요, 검사님······,”
“왜 죽였냐고.”
오용호는 똑똑한 배우였다. 아무리 애드리브라지만 여기서 멋대로 범행을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건
드라마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실이었다.
둘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
“······.”
백고운은 그저 오용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까와 비슷한 무뚝뚝한 얼굴이었으나, 긴장된 분위기 때문인지
훨씬 딱딱한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인물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속으로 계속 설명하는 게 습관이었다. 마찬가지로 백고운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그녀는 금방 알아차렸다.
‘화를 내고 있는 거구나.’
“다음에 또 봅시다.”
그의 얼굴에 어려있던 차가운 분노는 어느새 완벽하게 갈무리 된 후였다. 마무리까지 깔끔하다. 기라성다운
태도였다.
조 PD 가 말했다.
“컷, 좋아요.”
말하자면,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양 극단에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하나는 너무 과잉되어 있고, 하나는 너무
결핍되어 있다.
한여름이 물었다.
“혹시 가능해요?”
“그럼요, 물론이죠.”
세상에 이런 일이
84.
“거의 12 시간 걸릴걸.”
“······벌써 걱정되네요.”
“벌써 그렇게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면 어떡해? 비행기 타는 거 설레거나 그러지 않아?”
“하하··· 네, 설레요.”
“······.”
김철수였던 시절, 화상입고 은퇴한 후에는 거의 집에서 칩거하느라 해외는커녕 집밖에도 잘 못 나갔다. 그 시절이
7 년. 그리고 백고운으로 깨어난 후에는 또 촬영하느라 바빠서 5 년. 합치면 거의 10 년 만 아닌가.
조금쯤은 기대돼는 게 사실이었다.
나는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슬그머니 매니저에게 물었다.
매니저의 장난에 한 번 속아 넘어간 것뿐인데, 촬영장엔 어느새 내가 비행기란 신문물을 처음 접해본 사람이란
소문이 쫙 퍼졌다.
오전과 낮에는 런던 도심지에서 몇 장면을 찍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외곽 지역으로 넘어갔다. 낯선 외국의 풍경을
즐길 시간도 없이 바쁜 일정이었다.
조 PD 도 다른 사람들을 독려했다.
“네!”
나는 조 PD 에게 설명했다.
“제가 한 번 대화해볼게요.”
“여기에서 용호 씨 얼굴 알아보는 사람도 꽤 있었는데. 저 사람도 알아보지 않으려나? 왜, 얼굴이 익숙한 스타가
있으면 좀 유해지잖아.”
그 외국인 아저씨는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 외국어로 욕설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우리는 무시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먼저 지쳐서 알아서 조용해지겠지, 라는 심정으로 말이다.
“······!!”
우리가 어쩌기도 전에 그 아저씨가 양동이 안에 있는 것을 이쪽으로 냅다 던졌다.
“······.”
“······.”
심지어 바닥에 흩뿌려진 음식물 쓰레기에서 흘러나온 오물이 이쪽으로 천천히 흘렀고, 악취도 났다.
조용한 가운데 아저씨가 내뱉는 욕설만이 크게 들렸다. 거기엔 인종 차별적인 욕설도 있었다.
어쩌지?
무시하고 촬영을 강행하려 해도, 저 아저씨가 계속 소음을 일으킨다면 애초에 촬영이 불가능했다. 야외 촬영은
주변의 협조가 없으면 진행이 어려운 것이 단점이었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나기에는, 우리에게도 일정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여기가 한국이었다면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해외 로케 촬영이었다.
나중에 다시 와서 찍으려면 그만큼 시간이 지체되고, 그러려면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촬영팀 식구들의 숙박도 하루
더 잡아야 한다.
숙박뿐이랴, 비행기 표도 바꿔야 하고 귀찮은 일이 꽤 많이 생긴다. 귀찮은 것에 그치면 다행이지만, 문제는
거기에 돈이 든다는 것이다.
한국 같았으면 경찰 부르고 좀 실랑이하면 해결 될 텐데. 하지만 여기는 해외였다. 경찰을 부른다 해도 우리에게
협조적일지 알 수 없었다. 여기에서 이방인은 우리였으니까.
가게 안에서 한 외국인 여자가 뛰어나오더니, 화내고 있는 남자를 붙잡고 그만하란 투로 말렸다. 아마 남자의
아내로 보였다.
나는 홀로 깜짝 놀랐다.
“리사?”
모두가, 심지어 이름이 불린 장본인인 리사까지도, 내가 어떻게 그녀를 알고 있는지 궁금해 했다.
당연히 종업원들이 난리가 났는데, 그 난리가 바로 옆에서 촬영하고 있던 우리에게까지 들려왔던 것이었다.
촬영이 막 끝난 상태이기도 했고, 들어보니 리사의 남편은 하필 출장 간 상태라고 하기도 하고, 종업원들이
택시를 잡으려고 시간이 지체되는 게 불안해보이기도 해서, 어쩌다 우리가 그 경찰차로 그녀를 태우고 병원까지
데려갔었다.
왜, 길을 가다가 누군가 갑자기 쓰러지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도와주지 않는가. 그런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날도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면서 ‘해외에 오니 시트콤 같은 일을 다 겪어보네’라고 농담을 나눴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때의 인연을 지금 여기서 말할 수는 없었다. 십오 년 전 그 당시에 있었던 건 백고운이 아니라
김철수였으니까.
나는 조 PD 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 잠시 저 분과 얘기 좀 하고 올게요.”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얼굴이 더 잘 보였는데, 십오 년 전의 그때 그녀가 확실히 맞았다. 시간이 지나도 사람
얼굴은 잘 안 바뀌니까.
“(오, 그럼요! 그분들 덕에 내가 딸 제니를 무사히 낳을 수 있었죠. 그런데 당신이 그때의 일을 어떻게 알고
있죠? 그때 계셨나요?)”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때 계셨던 배우 분이 제 아버지거든요. 아버지 앨범에서 당신과 함께 찍은 사진을 봤어요. 물론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악센트 연기
85.
그는 화들짝 놀랐다.
하기야 어떻게 보면 내가 은인인 셈 아닌가. 그것도 모르고 꺼지라고 욕설을 내뱉었으니 그의 입장에서야
미안하기도 할 터였다.
스태프들도 멀리서 나와 리사가 대화하는 걸 지켜보면서 대충 좋은 방향으로 얘기가 풀리고 있다는 걸 눈치로
알아챘을 것이다.
한편 리사의 가게 안.
“(그렇다니까. 세상 진짜 좁지 않니?)”
리사가 물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이제 집에 가려고?)”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누나는 아예 본 적 없어? <설국열차> 몰라? 크리스 에반스가 나왔던. 그게 한국
영화잖아.)”
그는 손전등 같은 걸 들고 뭔가를 조사하는 것처럼 가게 대문을 여기저기 비췄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F$%ERTB&$HEWRW%&&B.”
“(말씀 좀 묻겠습니다.)”
‘(수사물 장르인가?)’
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백고운의 질문을 들은 엑스트라가 대답은커녕 ‘나는 모른다’라는 뉘앙스로 뚱하니 고개를 젓더니, 그냥 훽
가버렸다.
그리고 톰은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백고운의 영어 악센트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계급 문화가 아직 남아 있는 영국은 계급에 따라 악센트가 나뉘기 때문에, 영국 배우들은 대부분 자신의 발음을
표준 발음으로 교정한다.
잠깐 쉬는 시간 뒤, 백고운은 새로운 의상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깔끔한 양복을 입었던 아까와 달리 이번엔
비교적 후줄근한 차림이었다.
“(어떻게 알아?)”
“(확실해?)”
“(넌 뭐야?)”
톰은 이번에 또 한 번 놀랐다.
셜록 홈즈가 정보를 얻으러 거리의 하층민들과 대화할 때 바로 저 코크니 억양으로 대화했다고들 한다.
아마 이 장면도 그것에서 모티브를 따온 듯했다. 엑스트라는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보이는 백고운에게
금방 정보를 건네주었으니 말이다.
‘(미국식 발음, 영국식 표준 발음, 그리고 코크니 발음. 세 악센트를 모두 할 수 있다니, 대단한데. 혹시 이쪽
출신인가?)’
“(아. 안녕하세요.)”
톰은 일부러 백고운의 발음을 확인하기 위해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백고운은 성실히 대화에 임했다.
톰은 펄쩍 뛰었다.
톰도 몸을 돌려 촬영장을 떠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떠나기 전 품에서 수첩을 꺼내 거기에 백고운의 이름을 적었다. 집에 들어가서 그가
나온 영화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톰은 수첩을 탁 닫고 씩 웃었다.
화재 촬영
86.
한편, 톰의 정체가 누군지 꿈에도 몰랐던 나는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호텔로 복귀했다.
*
드라마 <기라성과 기린아>는 이제 3 분의 2 정도 촬영을 마쳐갔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뒤, 우리는 수고했다는 의미로 짧은 휴식을 선물 받았다. 물론 배우들뿐 아니라
스태프들까지 포함해서 모두 말이다.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과, 연인이 있는 사람은 연인과, 친구가 있는 사람은 친구와 시간을 보내러 갔다.
백고운의 몸으로 새로 사귄 친구들, 그리고 소속사 사람들에게 영국에서 사온 기념품을 건네자 그들은 좋아했다.
면세점 직원이 말해주기로, 그 술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2 세 여왕의 대관식에 헌정된 술로 그때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위스키란다.
“취향에 맞는 술일지는 모르겠네.”
“이럴 때만?”
“그나저나 걔는 요즘 어때?”
“누구?”
“누구긴. 네 껌딱지지.”
“아, 오용호?”
“그거야 알지. 어쨌거나 그 이후론 괜찮나 보네? 뭔 얘기가 없는 걸 보니. 이전처럼 귀찮게 하지는 않고?”
“그거야 그렇지.”
나는 스태프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촬영장 한쪽에서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얼굴 근육과 입을 풀었다.
조 PD 가 물었다.
“고운이 준비 됐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빙그레 웃었다.
“네, 물론입니다.”
드라마 <기라성과 기린아>는 살인사건의 진범이 형인 기린아의 짓인지 아닌지 계속 시청자를 헷갈리게 하면서
내용이 전개 된다.
“형은 상당히 교활하고 잔꾀가 많습니다. 상황 파악도 빠르고, 주변을 이용하는 장악력도 대단하죠. 범죄 흔적을
남기거나 하지도 않고, 자신에게 불리한 짓도 절대 하지 않고요.”
“네?”
“그런 형을 잡으려면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덫을 놔야 하죠. 미끼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미끼는
저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처음에 기라성의 불행한 상황에 동정심을 표했던 사람들은, 나중에는 기라성이 냉혈한이라며 혀를 찼다.
드라마의 12 화쯤에서 기린아가 유력 용의자로 좁혀지는 가운데 새로운 피해자가 발생하게 된다. 살인수법은
처음과 똑같았다. 경찰은 연쇄살인 사건으로 인정한다.
즉, 형이 범인이 맞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뛰는 동생 위에 나는 형이 있었다.
둘 다 조용한 가운데, 밖에서는 사이렌 소리가 삐용삐용 들렸다. 경찰차가 바로 근처 골목길을 누비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형인 기린아였다.
“······.”
“······.”
많이 미웠지만, 그래도 형은 자신의 가족이었다. 그것도 유일한 가족. 아주 어렸을 적 부모를 한 순간에 잃고
천애고아가 된 그에게는 형이 필요했다. 비록 범죄자에 도망자일지라도.
“나는······.”
그런데 그때였다.
“쉿.”
기라성은 놀란다.
“······!”
그건 기라성네 사람들이 그에게 몰래 붙여놓은 도청기였다. 혹시나 기라성이 용의자인 형을 놓아줄까봐 말이다.
한 발만 늦었어도 기라성은 범인을 도와준 혐의를 얻을 뻔 했다. 형이 재빨리 기라성의 입을 막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때, 창문 밖에서 ‘이쪽이다!’하는 경찰들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그리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본 곳에 형은 없었다.
―미안, 라성아.
그게 형의 마지막 말이었다.
조 PD 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바닥에만 살짝 붙일 거라서 괜찮아. 미리 소방차도 불러놨고. 어차피 가까이 다가갈 일은 없으니까 그냥
세트라 생각하면 돼. 멀리서 찍은 후 바로 꺼버릴 거거든.”
“레디, 액션!”
문득―
뒤에서 누가 내 팔을 잡아챘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컷. 용호 씨, 왜 그래?”
하지만 오용호는 원래 촬영장에서 갑질을 하는 류의 배우가 아니었고, 오히려 상당히 협조적인 배우였다.
“그래, 그럼.”
촬영을 잠시 중단할 정도로 어지간히 급한 일이겠구나, 라고 납득한 듯 했다. 사람이 원래의 행실이 중요한
이유였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했다.
갑자기?
감독은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었고, 카메라 속 배우의 공포가 연기가 아니라 진짜이길 바랐다.
“셀리 듀발의 경우는 감독의 문제가 크긴 했지만요. 어쨌거나 배우들이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긴 하죠. 원인이
뭐가 됐든, 우울하고 힘든 배역을 연기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그 감정에 잡아먹히기 쉬우니까.”
“뭐,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걸로 칸이나 오스카 같은
곳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을 수 있다면요. 하지만 고운 씨는 이런저런 면에서 나랑 생각이 많이 다른 편이니까요.
그래서 나랑 다른 견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용호가 짐짓 모른 척 말을 끝맺었다.
결국 그나 나나 비슷한 사람이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왜 그래?”
“뭐야, 이미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언제 확신했는데?”
“아니.”
연기에 한창 미쳐있을 때, 주변에서 그런 소리를 몇 번 듣기는 했었다. 왜 그렇게 연기를 극기 연습처럼 하냐고.
아마 거지 배역을 한다고 직접 굶었을 때 들었던 말이었을 거다.
예전에야 작품이란 숭고한 가치를 위해 배우나 스태프들이 갈려 나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게 잘못된 것이란 걸 모두 알고 있다.
매 화 마지막에 충격적인 비밀이 밝혀지거나, 용의자가 뒤바뀌었다. 내용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범인을 추리하는 사람도 있었고, 드라마에 푹 빠져서 앓는 사람도 있었고, 드라마 캐릭터를 가지고 2 차 창작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두 번째 범행이 일어나고 범인이 기린아라고 거의 확정된 회차가 방영되자, 사람들은 ‘진범이 기린아가 맞을
것이다’와 ‘그래도 뭔가 반전이 있을 것이다’라는 의견으로 갈려서 뜨겁게 논쟁했다.
장르물은 매니아 층이 워낙 두꺼운 편이었다. 드라마가 후반부로 치닫자, 팬들은 자연스럽게 시즌 2 도 내달라고
성토했다.
어느 날, 한 커뮤니티에 나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 잘 보셨네요]
[↳ 완벽하게 소화 중 ㅎㅎ]
한편.
“사실 감독님 덕이에요. 저번에 SNS 에 올라온 사진 봤거든요. <천의 맛> 촬영장에 친구 생일 축하하러
간다면서요. 심미애 선배님의 생일은 그때가 아니니까 남은 건 남자 쪽밖에 없죠. 그런데 그 날짜가 공교롭게도
원래 김철수 선배 생일이고, 또 하필 남자 배우는 제가 옛날에 철수 선배 아들이라고 의심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김건은 나지막하게 '젠장'이라고 읊조렸다. 자기 때문에 내 정체가 들키게 된 게 어지간히 분했나보다.
둘은 '이젠 하다하다 내 SNS 까지 염탐하냐 이 스토커 자식아'와 'SNS 에 업로드한 거면 보라고 공개해놓은 거
아니냐 비공개 계정을 해킹해서 본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라고 입씨름을 했다.
나는 그 둘을 중재시켰다.
오늘 둘을 부른 건 이유가 있었다.
"네, 실장님."
"왜, 무슨 일인데?"
나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내··· 어머니가 나타났다고 하네"
둘이 동시에 반응했다.
"···네?"
"뭐?!"
직업정신
88.
“지금 당장 가봐야겠어.”
“어디로 가는데?”
사람이란 게, 독한 결심을 해도 나중에는 마음이 약해질 수도 있으니까. 시간이 흐르고 사정이 좀 나아지면
자식을 찾아가 ‘내가 네 엄마/아빠다’라고 밝히고 싶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같이 가줘?”
“괜찮을 거야.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도 아니고. 갓난아기 때 버렸다고 하니까 그쪽도 나랑 초면인 건
마찬가지잖아.”
특히 배우나 가수들 중에는 그런 케이스가 꽤 있기도 했다. 유명해진 딸이나 아들을 이용해 가족이나 주변인들이
계속 돈을 요구하는 경우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나는 소속사로 향했다.
*
소속사에 거의 도착했을 때, 뒤늦게야 생각이 났다.
“뭐··· 별 일은 없겠지?”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말하는 매니저 역시 이 상황에 조금 당황한 듯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미팅실로 향했다.
“고운아! 보고 싶었단다!”
그것뿐 아니라 성격도 많이 달랐다. 자살을 선택할 정도로 유약했던 아들과, 호방하고 목소리도 큰 어머니의
조합은 영 어울리지 않았다.
“친어머니가 맞다고요?”
“고운이 왔구나.”
“안녕하세요, 어머니.”
“그럼요.”
나는 빙긋 웃었다.
그것을 가짜로 준비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 내 데뷔작인 <운명의 표현> 영화 때부터 스크랩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나 드라마 할 것 없이, 심지어 광고 CF 까지 내 모든 필모그래피가 다 꼼꼼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기록은 <
천의 맛>에서 끊겨 있었다.
그런데 그 작품 뒤에 나는 <기라성과 기린아>라는 드라마를 찍었지 않은가.
“아, 이런. 들켰구나. 미안하다. 실은······ 딱 그때쯤 이제는 이걸 모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일 년 전에 마음먹었거든. 멀리서 지켜보는 대신 네 앞에 나서야겠다고.”
납득하지 못할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도 이 상황과 자연스러웠다. 자신의 허술한 구멍을 들킨 사람들이 보일 법한 당황스러움과
멋쩍음이었다.
“그동안은 네게 조용히 연락할 방법을 찾느라 늦어졌지. 네가 워낙 유명하잖니. 내가 나타나면 너한테 피해가 갈
것 같았거든. 결국 못 찾아서 소속사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보다, 차 더 마실래?”
연기자나 사기꾼이나, 결국 거짓말을 하는 직업이란 점에선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포인트는, 얼마나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그리고 ‘순발력 있게’ 치느냐 일 것이다.
그리고 이 주 뒤.
원래 사람은 몇 번 방어에 성공했다고 느끼면 그 다음에는 자신감이 생겨서 은연중에 마음을 놓는 법이었다.
나는 그대로 새로운 연구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을 샘플로 건네고 다시 한 번 검사를 부탁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사기꾼은 우연히 그녀에게서 내 얘기를 듣고 사기 칠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내 앞에 등장한 것이고.
어떻게 사기를 치려고 하면서 소품을 준비할 생각도 않아? 스크랩북이 그녀의 패착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백고운의 어머니라는 캐릭터랑 너무 안 어울렸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모두가 의심했을
정도니까.
나는 쯧 혀를 찼다.
(수정) 오디션 체질
89.
김건이 물었다.
오히려 법으로 처벌하는 것보다, 전국민을 배심원으로 해서 마녀재판을 받게 만드는 게 더 강력한 효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그녀를 사기꾼으로 고발하려면 실질적인 피해를 증명해야 하는데, 나는 피해입기 전 그녀가 사기꾼이란 걸
알아차렸기 때문에 아무런 경제적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녀를 법정에 세워도 그다지 형량이 많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유교국가인 한국에서 가족은 일종의 성역이다. 넷 상에서 싸움을 벌여도 부모님을 욕하면 ‘선 넘었다’고 여기는
게 우리나라였다.
둘은 의아해보였다.
“아니, 왜?”
“왜요?”
나는 손을 꼽으며 이유를 설명했다.
“우선, 대중의 관심이 내 과거 쪽으로 쏠리면 불리한 건 오히려 나야. 혹시라도 옛날에 나랑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그 여자 케이스를 방송으로 보고 나한테 연락해올지도 모르고. 그 여자는 사기꾼이었지만, 진짜로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나한텐 불리하지.”
“뭣보다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일이 커지고 난 후 사기꾼으로 고발하면 완전히 적대적으로 돌아설 텐데,
그 여자는 백고운의 생모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잖아. 스크랩북을 갖고 있는 걸 보면 물건도 갖고 있는 것 같고.
혹시라도 보복심에 정보를 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아, 생모.”
그리고 나는 백고운의 생모가 안치된 납골당 주소를 전해 받았다. 거기엔 그녀의 사진이 작게 있었다. 백고운과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아마도 내 몸의 주인은 어머니쪽 유전자만 받은 모양이다.
그리고 어쨌거나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기사를 스크랩하고 지켜봤을 사람은 나인 셈이었으니까.
일주일 뒤.
나는 다시 백고운의 삶으로 돌아왔다.
“임시운 씨?”
“오랜만이에요. 웬일이세요?”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뜻밖의 이야기였다.
벌써 1 년 전 일에 새삼 밥을 산다고 그래서 뭔가 전화로 말하기엔 어려운 용건이 있구나 짐작하긴 했다. 그런데
설마 이런 내용일 줄이야.
“감독님이 누군데?”
시나리오의 퀄리티와 감독의 이름값이 언제나 꼭 정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는 상관관계가 어느
정도 있으니까 말이다.
당연히 들어봤다마다.
심지어 그는 산드라 오, 존 조, 스티븐 연처럼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할리우드 배우들과 인지도가 거의 비슷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중 한 작품은 누적 관객수 천만을 달성해, 몇 안 되는 한국의 ‘천만 영화’에 영광스러운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한국계이긴 하지만, 주로 활동하는 무대는 할리우드였다. 내가 알기론, 한국을 무대로 찍은 영화는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이번에 그 감독님이 한국에서 영화를 찍는대. 특이하게도 이번 장르는 뮤지컬 영화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노래도 되고 연기도 되는 배우들 중심으로 찾고 있나 봐. 아직은 확정된 건 아니지만,
오디션을 볼 생각이신 것 같아. 소속사에서는 처음에 나를 준비시키려고 했는데, 스케줄 확인해보니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서 접었거든. 참, 몇몇 관계자만 아는 사실이니까 너도 어디 가서 소문내면 안 돼, 알았지?”
나는 조금 볼을 긁적였다.
“일찍 준비한다고 내가 경쟁이 될까?”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어차피 오디션으로 뽑는 건데 뭐 어때? 물론 준비하는 데 노력과 시간이 들기는 하겠지. 그래도 최소한
한 번 속는 셈치고 도전해볼 만큼은 되지 않아? 무려 제이크 킴 감독이잖아!”
봉사와 앉은뱅이
90.
엠바고가 풀리자마자 기다렸단 듯 기사가 쏟아졌다. 대중들은 그가 처음으로 한국을 무대로 영화를 찍는다는
사실에 열광했다.
그가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감독이기도 했지만, 뭣보다 그가 이번에 찍는 영화가 시즈니 영화사의 작품이란 점이
한몫했다.
시즈니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미국의 영화사인데, 요즘에는 옛날 애니메이션을 리메이크 한 실사화
버전 영화들도 많이 찍고 있었다.
다인종 국가인 미국답게, 시즈니는 여러 문화권을 무대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유럽계, 아랍계,
아시아계······.
그리고 드물게 아시아 쪽 문화를 배경으로 한 시즈니의 애니메이션 중, 유일하게 한국을 배경으로 한 것이 있었다.
다만, 심청전이나 흥부전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는 아니고, 약간은 생소한 내용일 수 있는 민담 ‘봉사와
앉은뱅이’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영화였다.
그러나 사실, 캐릭터만 따왔을 뿐 시즈니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내용은 원래의 민담 내용과 전혀 달랐다.
그런 부분도 있고, 꽤 옛날에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기도 해서, 개봉 직후 한국에서는 오리엔탈리즘 영화라는 일부
비판의 시선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지나지 않았는가. 적어도 옛날보단 인종차별에 대한 경각심과 자정의 목소리도 높아졌고.
[제이크 킴 감독, 파격 오디션 예고해······ “지원 자격은 특별히 없다. 배역과 어울리고 실력이 있다면
일반인이라도 뽑을 생각이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하기야, 국적에도 조건이 없었으니 그다지 이상한 건 아닐 것이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이주민들도 지원했을 테니 말이다.
물론 나 역시 지원했고 말이다.
솔직히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으나, 뽑힐 것이라고 장담은 할 수 없었다. 그걸 확신하면 너무 거만하지 않겠는가.
따르릉―!
나는 전화를 받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김건이 조급히 물었다.
“뭐래? 됐대?”
“응, 됐대.”
“야, 씨! 축하한다! 이제 2 차 예선이네?!”
“그렇지. 이주 뒤에 있대.”
나는 살짝 뜸들이다가 고백했다.
곡이 아무리 짧아도 3 분이다. 200 명이 3 분씩 노래를 부른다 친다면 600 분이다. 60 분이 1 시간이니까,
순수하게 노래만 들어도 최소 10 시간 걸린다는 뜻이었다.
‘흠.’
자신의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인 것도 있지만, 뛰어난 실력의 참가자는 심사위원이 지친 상태라도 그걸 잊게 할
정도로 확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저 참가자는 그 정도는 아니란 뜻이다.
제이크 킴은 그때 때마침 시즈니에서 <봉사와 앉은뱅이> 영화의 감독 자리를 제안 받은 상태였다. 어떻게 영화를
연출할지 구상하고 있던 차에 그 영화는 제이크 킴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본업은 가수지만 연기를 잘해서 배우를 겸업하는 사람도 있고, 본업은 배우지만 노래를 잘해서 뮤지컬 쪽으로
진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 참가자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좋습니다. 그럼 시작하세요.”
그리고 그때였다.
그런데 그때, 백고운이 갑자기 팔로 바닥을 짚고는 힘을 줘 쭉 폈다. 그러자 앉은 다리가 바닥과 살짝 떴다.
마치 게걸음치듯 말이다!
뱃사람이 돛대 위에서 몸을 내미는 것처럼, 백고운은 의자의 등받이를 잡고 팔을 쭉 뻗었다. 그리고 한 손으론
손차양을 하고 밖을 구경하는 몸짓을 했다.
심사위원들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백고운이 뿜어내는 활력 넘치는 생기가 그들에게도 생생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내 꿈―.”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것에 맞춰 백고운은 몸을 빙글 돌면서 자연스럽게 주저앉았다. 나사가 부드럽게 돌아가며 바닥에 박히듯이
말이다.
그리곤 마치 이전에 노래했던 것은 모두 상상의 나래였다는 것처럼, 그는 멀끔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깔끔한 마무리였다.
제이크 킴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이 박수를 짝짝짝 쳤다. 대체로 표정들이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만족했다는
의미였다.
‘똑똑한 친구네.’
노래 경연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심사위원들이 ‘뮤지컬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라고 평하는 무대들이 있었다.
때문에 백고운은 노래로 승부하는 대신, 자신의 주 전공인 연기를 살려서 정말로 하나의 ‘뮤지컬’ 공연처럼
무대를 꾸렸다.
“좋습니다.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저 노래를 잘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뮤지컬은 춤과 연기, 노래가 모두 필요한 종합예술이었으니까.
그래서 노래를 잘하는 더 잘하는 참가자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음악감독은 깐깐하게 구는 대신 너그러이 합격점을
주었다.
그가 덧붙였다.
비록 그게 오디션장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백고운은 본질적으로 태도가 달랐다. 그는 선생이 아니라 관객 앞에 선 아티스트의 태도로 임했다.
제이크 킴은 그렇게 종합적으로 백고운에 대한 평가를 마치곤, 고개를 들었다. 그가 다시 본업으로 돌아왔다.
“네, 좋죠.”
2 차 예선을 통과했단 소식을 들었을 때, 나보다 오히려 주변에서 더 좋아했다. 소속사에서는 벌써 축하파티를 할
기세였다.
“고운 씨, 정말 잘했어요!”
기태성과 윤성광이 한 마디 씩 했다. 나도 기쁘기는 했지만, 너무 들뜨지는 않으려 했다.
“감사해요. 운이 좋았죠.”
윤성광이 내 팔을 쿡 찔렀다.
“네.”
<봉사와 앉은뱅이> 캐스팅 오디션의 마지막 본선 장소는 경기도 양평시에 위치한 한 리조트였다.
아침 9 시.
그 중 하나가 바로 백고운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
1 차 때 외모, 2 차 때 노래, 그러니 3 차에서는 연기를 볼 거라고 모두들 어림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다.
본능에 저항하는 연기
92.
“지금 이 순간부터 본선 오디션이 시작된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배역에 벗어나서 편하고 자유롭게
움직이실 수 있는 건 저녁 식사 시간 직후부터 그 다음날 아침 식사 전까지입니다.”
그는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낮에는 여러분에게 과제가 주어지거나, 혹은 시험이 주어질 겁니다. 그것들은 공식적으로 주어지기도 하지만,
갑작스럽게 주어지거나 비밀스럽게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여러분은 한 가지만 하시면 됩니다. ‘각자의
배역에 몰입해서 이곳에서 3 일을 버틸 것.’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리조트 곳곳에 있는 스태프들을 불러주면 됩니다. 도움을 적게 청한다고 해서
가산점이 주어지는 건 아니니 편하게 불러주세요. 오디션도 중요하지만, 결국 안전이 제일 중요하니까요.”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첫 과제라 그런지 모두들 조금씩 삐걱대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
눈을 감은 지원자들은 제이크 킴의 목소리가 들렸던 쪽으로 더듬거리며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으니 비교적 움직임이 소심했다.
그리고 바닥에 앉은 지원자들은 제이크 킴 쪽으로 곧장 향했지만, 다리가 자유롭지 못해 엉덩이를 미는 식으로
엉금엉금 움직였다.
영화 속에서 봉사와 앉은뱅이는 있고 없는 게 정확히 반대다. 봉사는 다리가 있고, 눈이 없다. 반면 앉은뱅이는
다리가 없고, 눈이 있다.
그래서 둘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도와주면서 불편을 해결한다. 그것이 영화의 주요 줄거리다.
지원자들은 조금 우당탕탕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모두 제이크 킴에게서 식권을 받아갈 수 있었다. 모두가 시간
차이만 있을 뿐, 성공한 것이었다.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그러나 그건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공식적으론 오디션 보는 중이기 때문에 눈을 뜨거나, 혹은 다리를 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삐용삐용―.
지원자들이 깜짝 놀랐다.
“경찰인가?”
“누가 다쳤나?”
“헐, 진짜 그런가?”
술렁거리는 대화들과, 배경으로 울리는 싸이렌 소리가 비상시라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예로부터 ‘비상시’라 함은 ‘원래의 규칙과 금기가 잠시 해제되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예외적 상
황’과 동일한 뜻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스태프들은 커다란 스피커와 빨간 빛으로 번쩍거리는 경고등을 들고 있었다. 당연히, 구급차는 없었다.
감독과 눈이 마주친 봉사 역 지원자들, 그리고 슬그머니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 지원자들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들은 오디션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슬슬 감을 잡아가고 있었다.
용기 있는 몇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저도 생각은 했습니다. 만약 모든 분이 다 배역과 모순된 행동을 했다면 무효로 하자고요. 그런데 아닌 사람이
있으니, 무효로 돌리면 그 사람에게는 불공평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고?
지원자들의 의문에 찬 표정을 지었고, 제이크 킴은 대답해주듯 한쪽을 돌아봤다. 다른 사람들의 고개도 함께
돌아갔다.
백고운의 연기력에 관한 얘기는 다른 배우들도 들어본 적 있었다. 과연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
2 박 3 일은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다.
그동안 지원자들은 각자 열심히 오디션을 치러주었다. 첫날에는 우왕좌왕한 모습도 많이 보여주었지만, 그래도
오래지 않아 다들 금방 적응해서 괜찮은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들은 프로 배우였다. 오디션 방식을 미리 공지해주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자신들의 배역에
맞게 실제 장애인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준비해왔다. 나중에는 그 연습의 성과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한 스태프가 물었다.
“본능에 저항하는 연기에 적응을 좀 시켜주고 싶어서. 익숙한 감각이 차단된다는 건 생각보다 상당히 불안하거든.
앞에 아무것도 없는 걸 알아도, 눈을 감으면 행동이 절로 조심스러워지는 게 사람 본능이야.”
그는 한 텀 쉰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지. 처음엔 불편해도 나중엔 그것에 익숙해지게 되어 있어. 그리고 일단
그것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카메라 앞에서도 훨씬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물론, 다른 이유도
있고.”
“다른 이유요?”
마지막엔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캐릭터를 얼마나 이해하는지를 보겠다니? 무슨
뜻일까?
지원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백고운 씨는 어디 있습니까?”
지원자들은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이크 킴이 막 스태프더러 백고운 방을 다녀오도록 시키려 할 때였다.
대체 언제부터?
캐릭터의 요소
93.
“갖고 나와 주세요.”
“어?”
저거는······.
“펼쳐 보신 분?”
“그건 그렇죠. 하지만, 저는 분명히 여러분께 3 일 전에 본선을 시작하겠다고 하면서 정확히 말했죠.”
“만약 주인공이 이 지도를 봤다면, 그는 곧바로 이 지도에 적힌 물음표를 궁금해 했을 것입니다. 알다시피, 영화
속 앉은뱅이 캐릭터는 호기심이 많은 캐릭터이니까요. 그는 언제나 자신이 머무는 곳 너머를 궁금해 하고, 밖으로
나가서 모험하기를 꿈꾸는 캐릭터입니다.”
왜였을까? 제이크 킴이 정해진 시간 내에는 배역에 몰입해 있어야 한다고 분명히 명시했는데도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소수자에 대한 선입견 같은 거였다. 개별적인 인간을 그저 장애인, 비-백인, 여자, 퀴어로만
인식해버리고 마는 거다.
그 사람의 고유한 성격적 특징, 이를 테면 그 사람이 소심한지 용감한지, 더러운지 깔끔한지, 소문에 관심이
많은지 아닌지······ 기타 등등 그런 것들에 대한 것을 모두 무시하고 말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제이크 킴의 말대로 차마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고, 그건 그들의 잘못이 맞았다.
제이크 킴이 정리했다.
그리고 그건 연기를 잘한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했다. 왜냐면 사실, 연기를 잘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똑똑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운아, 네가 됐대!!”
“네가 뭘 몰라서 그래. 집은 무조건 클수록 좋아. 게다가 요즘엔 집을 공개하는 예능 프로그램들이 많잖아. 너도
거기 나가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응.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오더라고. 왜, 이번 영화가 엄밀하게 말하면 판타지 사극인 거잖아?”
“그렇지.”
“그런데 제이크 킴 감독은 미국인이잖아. 게다가 사극을 찍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
김건은 학부 때 연영과를 다니면서 사학과를 복수 전공했는데, 나중에 대학원도 그쪽으로 갔더랬다. 영화감독은
가방끈이 길어야 한다나 뭐라나 하면서. 김건 본인도 그쪽으로 흥미가 많기도 했었고.
나야 제작진이 아니니 잘은 몰라도, 제이크 킴에겐 이러저런 고충이 많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본국(미국)이
아닌 외국(한국)에서 외국(한국)을 주제로 하는 영화를 찍는 셈이니까. 한국에 알고 있는 친분이나 연줄도 잘
없을 테고.
나도 할리우드와 작업해보는 건 처음이라, 아는 사람이 우리 제작팀에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정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놀랐다.
“응?”
그것도 아주 잘, 말이다.
며칠 뒤.
덤앤더머와 버디의 차이
94.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리고 그녀는 다시 본업으로 돌아와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사극 영화와 드라마 작업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초희가 먼저 말했다.
“안 그래도 고운 씨가 그 시즈니 영화에 최종 캐스팅 되었다는 기사는 봤어. 그런데 나한테도 연락이 올 줄은
몰랐네.”
“무슨, 내가 뭘 했다고.”
나는 그냥 김건이 영입하려고 하는 음감이 이초희란 걸 알고, 그녀에게 먼저 안부인사 연락을 한 것뿐이었다.
음, 그게 사실이기는 했다.
“그럼 밥 사든지.”
“그건 아니고.”
“어머니 역을 맡은 심미애입니다.”
―와, 이거 완전 어벤져스네.
신인인 배정원이 약간 긴장한 낯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백고운은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제이크 킴은 백고운이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가 됐다.
달리 말하자면, 백고운은 본선의 모든 참가자를 통틀어 유일하게 마지막 과제를 통과한 사람이란 뜻이었다.
백고운이 먼저 말했다.
“‘이쪽’이 어딘데?”
“야, 내가 더 답답하거든?”
“뭐야?”
“뭐야?!”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번 영화는 원작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영화이기 때문에 원작과 비슷해야 했다. 크게
어긋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하지만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했던 제이크 킴에게는 백고운의 연기가 조금 심심하단 인상이었다.
‘······어라, 잠깐만?’
그래서 일부러 이름도 ‘철수와 영수’로 지은 거였다. 패트와 매트 같은 느낌이 나도록 말이다.
이 영화는 코미디 영화이기 때문에 두 주인공이 덤앤더머 같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면서 웃음을 이끌어낸다.
백고운은 바보스러운 느낌을 덜어내고 명료하고 또렷하게 목소리를 냈다. 가끔은 카랑카랑하게 대사를 뱉기도
했다.
앉은뱅이 철수가 좀 더 깐깐한 캐릭터가 되자, 대비 효과로 봉사인 영수는 좀 더 맹한 캐릭터의 느낌을 주었다.
사실, 원래 전혀 정반대인 캐릭터의 조합일수록 버디로서 잘 어울리는 법이었다. 공부벌레와 장난꾸러기, 정파와
사파, 이성파와 감성파······ 등등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럴까, 백고운이 조금 색다르게 연기하자 원작보다 훨씬 개성 있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느껴졌다. 봉사와
앉은뱅이, 두 캐릭터 모두 말이다. 좋은 해석과 빌드업이었다.
리더쉽이 있는 친구
95.
특히 유명한 배우들(백인) 중엔 가끔 감독인 제이크 킴을 무시하거나 기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백인 배우가 자신에게 시비를 건다면 그래도 어떻게 해볼 수 있었다. 제이크 킴은 감독이었고, 그 권위로
컨트롤이 가능했으니까. 게다가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으면서 생긴 내공도 있었고 말이다.
밥 차가 와서 다 같이 밥을 먹고 있던 도중이었다.
“(역겨워.)”
그는 감독으로 촬영장 물 흐릴 일을 사전에 제거해야 했다. 게다가 윤리적으로도 인종차별 하는 사람을 묵과할
수는 없었다.
“(샘, 방금 그게 무슨 말이지?)”
“(네, 죄송합니다.)”
일단 샘은 고분고분하게 넘어갔다.
“응? 고운 씨가?”
제이크 킴은 걱정됐다.
보통 이런 인종차별 문제는 대화와 설득으로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풀릴 문제였으면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실은, 짐작 가는 바가 있어서요.”
“그게 뭔데요?”
‘어라?’
“생활 방식 차이라고요?”
“······!”
백고운은 말을 이었다.
제이크 킴은 감탄했다. 그러나 백고운은 그저 1:1 로 진솔하게 대화한 게 다일 뿐이라고 겸손히 손을 저었다.
어쨌거나 백고운 덕에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회식은 줄었고, 음식 메뉴는 선택할 수 있도록 그 폭이
다양해졌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백고운이란 소문이 퍼졌는지, 촬영장에 갈 때마다 한국 배우고 외국 스태프들이고 할
것 없이 백고운과 친근하게 어울리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저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백고운 주변에 모이는 것이 아니었다.
타인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도 있었고, 개개인을 존중하는 배려심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주변으로 모이는
것이었다.
‘이거 반성해야겠네.’
그는 뒤에서 달려오는 괴물을 피해 피난처로 들어가야 하는데, 문제는 곳곳에 장애물들이 있다는 거였다.
때문에 이미 피난처에 들어간 앉은뱅이 ‘철수’가 영수의 상황을 보고 소리쳐서 장애물이 있는 방향을 대신
알려준다. 영수는 그걸 듣고 뛰어가는 것이었다.
이 장면에서 작가님과 감독님이 의도하고 있는 건 명확했다. 철수와 영수의 끈끈한 유대감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영수는 넘어져서 다칠 수도 있지만 철수를 믿기 때문에 그의 말에 몸을 맡기고 뛴다. 물론 그 시도는 성공하고
말이다.
마지막 시도에서 배정원이 상자에 걸려 넘어질 뻔하자 감독도 더 이상 장면을 찍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이크 킴이 깜짝 놀란 듯 나를 바라봤다.
1 분 15 초
96.
그러나 2 차 예선과 본선 오디션 장소에 있었던 제이크 킴 감독을 비롯한 몇몇 제작진들은 백고운이 허세가 아니라
진담으로 하는 말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제이크 킴은 물었다.
“완전히 손으로 뛰겠다는 말이 아니라 장애물을 붙잡고 넘는 식으로 해보겠단 말이죠? 그런데 할 수 있겠어요?
그때랑 이번은 좀 다를 텐데.”
둘은 의견이 척척 통했다. 몇 가지를 빠르게 상의하던 그들은 어느새 뜻을 맞추더니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제이크 킴이 세트장을 조금 수정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동안, 백고운은 계획대로 실행해보기 위해 팔을 스트레칭
했다.
대충 들어보니, 쌓여진 나무 상자를 계단 삼아서 올라간 뒤, 거기에서 대들보를 붙잡고 올라가겠다는 내용 같았다.
“······!”
“세상에··· 1 분 15 초······.”
눈으로 봤을 때도 진짜 순식간이라는 감상이긴 했지만, 그것을 숫자로 보니까 얼마나 짧은 순간이었는지 실감이
났다.
“와, 대단하네.”
“억, 나도 그 생각했는뎈.”
이번 장면도 이렇게 빠르게 할 줄은 몰랐지만, 해낼 줄은 알았다. 그래서 남들보다는 비교적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백고운 씨, 괜찮아요?”
“네, 그럼요.”
그렇게 말하는 백고운의 이마에는 땀방울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가뿐한 몸 풀기였다는 듯 말이다.
제이크 킴은 기분 좋게 픽 웃었다.
원래의 장면에서는 괴물이 달리는 봉사를 쫓아오는 걸로 그려진다. 그러나 바뀐 장면에서는 위로 도망치는
앉은뱅이를 잡으려 손을 뻗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원래의 예정과 그림이 좀 달라지기는 했지만, 어차피 괴물은 후 작업 때 CG 로 그려질 예정이라서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무슨 소리세요! 저야말로 너무 감사하죠. 하마터면 저 때문에 촬영이 망할 뻔 했는데 선배님 덕에 잘 끝난 걸요.
그리고 너무 멋졌습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연기는 정말 어렵네요.”
봉사 연기를 하면서 두려움을 많이 극복했다고 생각은 했는데, 아직도 눈 감고 행동할 때마다 주춤주춤하는 걸
스스로도 느낀다고 말이다.
나는 말했다.
“왜요. 봉사가 꼭 용감한 캐릭터는 아니잖아요. 오히려 덜렁거리는 캐릭터죠. 지금도 충분히 잘 연기하시고
계세요. 주변에서도 정원 씨가 제일 배역에 잘 어울린다고 하는 걸요.”
그건 사실이었다.
배역과 배우 본인의 캐릭터가 비슷한 경우가 있고, 전혀 다른 경우가 있다. 이번 작품에서 내가 후자라면,
배정원은 전자인 경우였다.
그러나 내가 직접 운영하는 건 아니고 소속사에서 대신 업로드 하는 식으로 관리해주고 있었다. 보통은 매니저가
내 촬영 현장 스틸 컷을 올려주었다.
배정원은 약간 단순한 성격으로, 평소에도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라는 태도였다. 약지 않은 성격이라고
할까.
“네. 가겠습니다.”
그런데 몇 분 뒤였다.
상의?
나는 지금도 충분해
97.
“어, 고운 씨 왔어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우리가 녹음을 먼저 땄잖아요. 그런데 우리끼리 얘기하다가 방식을 좀 바꿀까 싶어서 말이에요.”
“어떤 식으로요?”
“다른 뮤지컬 영화 중에는 촬영 현장에서 직접 노래를 부르고 그걸 그대로 삽입하는 방식을 쓰기도 하거든요.
그게 더 감정선을 더 살릴 수도 있고, 좋을 것 같아서 말이죠.”
영화를 찍기 전에 먼저 노래를 불러야 하다 보니, 노래의 감정선이 제대로 안 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촬영을 하면서 배역의 감정에 내가 점점 녹아드는 것도 있고, 영화 속 장면이 실제로 구현된 촬영장이란 장소
자체가 주는 울림이 또 있으니까 말이다.
뮤지컬 영화이니만큼 나중에 사람들이 OST 를 찾아 듣는 경우가 많을 텐데, 그 OST 가 라이브 음원이라면
아무래도 녹음실에서 녹음한 음원보다는 질이 떨어지게 들릴 테니까.
각 방식에 장단점이 있으니 뭐가 더 낫다고 표현할 수는 없다. 우리 영화는 그저 먼저 녹음하는 방식을 택했을
뿐이었다.
“좋아, 그럼 결정.”
*
그렇게 해서 노래 삽입 방식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예전에 녹음했던 원곡은 버리는 대신, OST 앨범을 릴리즈할 때 따로 특별 앨범을 하나 더 내는 방식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게다가 노래가 삽입되는 장면들은 후반부에 몰아서 찍기로 스케줄이 짜여 있기도 했고 말이다.
“고운 씨 준비 됐어요?”
“네.”
“준비 됐나요?”
오늘은 노래를 직접 하면서 연기를 할 예정이기 때문에, 반주자들 역시 촬영장에 대기하고 있었다.
수많은 관현악 연주자들이 카메라 옆쪽에 앉아있었고, 그랜드 피아노도 촬영장 한쪽에 준비 되어 있었다.
“네, 준비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슬을 빼앗는 과정에서 괴물을 깨우게 된다. 그들은 성난 괴물에게 쫓기게 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봉사인 영수는 ‘괴물을 없애달라는 소원을 빌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지만, 앉은뱅이인 철수는 자신에게
쥐어진 이 소원의 기회를 그렇게 허무하게 날려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모험을 떠나기 전부터 마법 구슬을 얻으면 다리를 고쳐달라는 소원을 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의
오랜 염원이자 꿈이었다.
망설이던 철수는 결국 욕망에 지고 만다.
두 다리를 얻었으니 그대로 도망쳐서 괴물과 영수를 잊어버리면 자신은 멀쩡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간 평생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대가는 처참했다.
괴물은 커다란 앞발을 영수를 향해 내리찧었고, 그 앞발은 영수를 붙잡고 몸을 구른 철수의 다리에 내리꽂혔다.
―악!
일단 철수와 영수는 도망쳐 겨우겨우 몸을 피했다. 그곳에서 주변인의 도움으로 철수는 다리를 치료받는다.
괴물을 없애달라는 소원을 빌었다면 다리는 고치지 못했더라도 적어도 괴물은 없앨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철수는 다른 소원을 빌었고, 결국 괴물도 물리치지 못했으며 겨우 얻은 멀쩡한 두 다리도 다시 망가지고
말았다.
이 장면에서 철수는 처음엔 절망하지만, 영수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다시 한 번 희망과 용기를 노래한다.
“레디, 액션!”
감독의 큐싸인이 들렸고, 나는 앉은뱅이 역인 ‘철수’로 분해 연기를 시작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영수(배정원)’가 들어왔다. 그가 지팡이로 짚어가며 안으로 들어오더니 내 옆자리에
슬쩍 앉았다.
그가 꺼낸 말은 뜻밖에도 감사였다.
그리고 그 역시 고백한다.
“실은 너한테 말 못한 게 있어. 나는 네가 다리를 고쳐달라는 소원을 빌지 않았으면 싶었어. 괴물 때문이
아니라······ 네가 멀쩡한 다리를 갖게 되면 더 이상 나랑 친구해주지 않을 것 같았거든.”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이제 괜찮아.”
하지만 불편한 덕분에 친구가 생겨서 오히려 이제는 그 불편이 좋아졌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제는 소원을 빌 구슬도 없잖아. 나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괴물을 물리칠 수도 없다고.
내가 모든 걸 망쳤잖아.”
그래서 여행 내내 철수는 자신이 갖지 못했던 것을 가지고 싶었고, 자신을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결핍을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맞았다.
생각해보면, 두 다리를 얻었을 때 정말로 편했던가? 처음 가져본 다리가 어색하고 불편하진 않았던가?
철수는 깨달았다. 지금의 상태가 자신의 원래 모습인 그대로 온전하다고 느끼고 있음을 말이다.
그건 2 차 예선 오디션 때도 불렀던 노래와 같은 곡조의 노래로, 앉은뱅이 철수가 자신을 소개하는 노래였다.
“오케이, 컷!”
Two Freak
98.
신작이 결정되었다는 뉴스가 뜰 때도 대중이 관심을 가지지만, 보통은 영화에 관심 있는 씨네필 정도가 뜨겁게
반응하는 정도다.
그때는 ‘진짜로’ 영화가 곧 개봉된다는 뜻이지 않은가(워낙 영화는 제작 확정이 되었다가 엎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당연히 한국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할리우드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한국 작품!
흔히 ‘국뽕’이라 말하는 것이 안 생기기 어렵다는 뜻이다.
세 번째 이유는, 우리 드라마가 뮤지컬 영화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원작이 애니메이션인 뮤지컬 영화.
흥의 민족이라서 그런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래를 정말 좋아한다. 물론 뮤지컬 영화도 매우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외국의 경향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은 애니메이션 영화를 어린아이들만 보는 영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편에 가까웠다.
그보다는 연인, 가족, 친구끼리 다 같이 보기에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경우에 더 가까웠다. 휴일에 가볍게
놀러 나와서 보기에 적합한 영화라고 해야 할까. 취향도 그리 타지 않고 고루고루 모두가 즐겁게 볼 수 있는 그런
영화.
내 눈이 대중들의 트렌드와 다르지 않았는지, 사람들도 영화를 보고 나와선 재미있었다는 호평을 많이 남겼다.
‘Freak’은 기형, 장애를 뜻한다.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사용되었던 단어이지만, 최근에는 장애인들이
자신들을 긍정하는 단어로 사용되는 추세였다.
동성애자를 멸시하는 뜻을 가졌던 퀴어(Queer: 이상한, 괴상한)가 마찬가지로 이제는 그저 동성애자를 뜻하는
단어가 된 것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워낙 마이너 하잖아요. 한국인들만 나오는데다가, 대놓고는 아니어도 어쨌거나 장애가 주제이니까요.
미국 본토가 사랑할 만한 대중적인 영화는 아니죠.”
나는 그의 말이 엄살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반박했다.
그 일 역시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오스카(아카데미)는 로컬이니까요.”
이번 영화로 수상을 기대하느냐는 인터뷰어의 짓궂은 질문에, 제이크 킴은 ‘만약 받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특별히 기대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라는 답변을 했었다.
인터뷰어가 이어서 왜 그러느냐는 질문을 했고, 거기에 대해 제이크 킴이 바로 문제의 그 문장을 말했었다.
“오스카(아카데미)는 로컬이니까요.”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의 이번 영화가 한국이란 지역적 성격이 짙고, 그래서 아무래도 미국의 영화제에는 못
끼지 않을까―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순화된 표현으로 들렸던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꽤나 시원한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그 외에도 여러 반응 있었다.
[헐 칸은 못 갔나? 아쉽다 ㅠㅠ]
칸에 대한 언급도 있었고.
“와······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그러니까 말이에요······.”
그도 그럴 것이, 톰 행크스나 케이트 윈슬렛 같은 유명한 해외 연예인들이 실제로 눈앞에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둘의 고개는 얼굴이 익숙한 해외 연예인들이 지나갈 때마다 저절로 돌아갔다. 무슨 미어캣처럼 말이다.
기태성이나 심미애는 워낙 연기 인생이 길었던 대배우이지 않은가. 그들은 우아하게 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수상에 대한 기대감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이지만, 우리 영화팀은 일단 큰 기대 없이 초대된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생각하고 자리를 즐기기로 했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과 오스카 후보작 발표날 모두 1 월에 있었기 때문에, 좀 더 머물러 있다가 발표를 듣고
돌아가자는 말이었다.
우리는 그러기로 했다.
그리고 발표날.
“(<Two Freak>)”
오스카 시상식
99.
아니, 정확히는 미국이 고향인 감독과 스태프들은 거기에 남았다. 한 달 뒤 다시 모이자고 약속한 후,
배우들만이 잠시 고향에 들렀다 복귀하기로 한 것이었다. 일종의 짧은 휴식이었다.
돌아가면 인터뷰며 화보며 이런저런 공식 스케줄도 많을 테고, 그 외에도 축하하자는 명목으로 만나자는 술자리도
많을 것이다.
“안 바쁘니까 걱정 마셔. 매니저한테 말해서 스케줄도 최소한으로 잡았고, 축하 술자리도 다 나중으로 미뤘어.”
“아니, 왜?”
“그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기대감은 사람의 기분을 좋아지게도 하지만, 그 반대이기도 했다. 기대감이 큰 만큼, 나중에 그 기대가
배반당할 때 실망도 커지니까.
돌아가면 분명 떠들썩한 분위기일 텐데, 거기에 동화되다보면 더 기대가 커지지 않겠는가. 김칫국은 아직까지는
사양하고 싶었다.
사실, 김건은 최근 캠핑과 낚시 같은 아웃도어 활동에 취미를 들였다. 그는 영화 끝나면 내게도 같이 가자고 몇
번 졸랐는데, 나는 와이프랑 같이 가라고 대꾸하며 은근히 돌려 거절하던 참이었다.
안 그래도 자기 와이프도 캠핑이나 낚시가 취향 아니라고 해서 혼자 다니고 있는데 얼마나 심심한지 모르겠다고―
김건이 그렇게 투덜투덜 종알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생각했다.
뭐, 오랜만에 새로운 취미도 즐기면서 자연 풍경도 구경하고 그러다보면 적당히 정신 팔리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좋겠지.
“왔어요?”
“안녕하세요, 감독님.”
멋쩍게 하하 웃었다.
우리는 가벼운 스몰토크를 나눴다. 근황을 주고받은 후, 자연스럽게 이야기 주제는 곧 있을 오스카 시상식으로
흘렀다.
“감독님은요?”
눈치도 빨랐다. 내가 머쓱한 웃음을 흘리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후보로 올라간 건 작품상이기 때문에 만약 상을 받는다면 영화 자체에 주어지는 상이다. 내가 남우주연상 후보로
올라간 것도 아니니, 수상 욕심이 있는 건 나보단 감독인 그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나라고 욕심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기대감을 누르려 한국 돌아가서도 요란스럽게 지내지
않았던 것이고.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아주 분에 넘치게 살고 있지 않은가. 주변에 동료와 친구들도 많아졌고, 좋아하는 연기도
맘껏 할 수 있다. 그때에 비하면 너무도 감사한 삶이다.
나는 그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는 농담을 던졌다.
아마 동료들이 그걸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워낙 장난기 많은 선배이긴 했지만, 시상식 자리니 평소보다 좀 점잖게 굴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건수를 잡자마자
날 놀리기부터 한다.
“잘 어울리던데요, 뭘.”
이건 빙그레 웃는 심미애였고.
“오―, 형.”
이건 내 팔을 툭툭 치는 배정원이었으며.
“도둑이네, 이거 완전.”
하여간, 뭔 말을 못한다.
나는 손을 저으며 일축했다.
“왜?”
“아직은 일이 더 좋아요.”
그리고 드디어 본 상이라고 할 수 있는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그리고 작품상 차례가 다가왔다.
아주 잠깐 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았고.
“(······<Two Freak>!)”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백상예술대상
100.
“와, 눈 멀 뻔 했네.”
“아, 저는 괜찮아요.”
노미네이트 이후도 아니고, 상을 받은 다음에 돌아오는 길이다. 이번에는 대놓고 기뻐하는 티를 낼 수 있었다.
대중이 원하는 그림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그러니 최대한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게 좋았다. 선글라스는 그래서 일부러 끼지 않았다.
싫든 좋든, 연예인이란 직업은 대중에게 계속 노출될 수밖에 없는 직업이고, 어느 정도는 노출되는 그 부분을
꾸며낼 수도 있어야 했다.
“······네?”
아주 흥분한 투로 말이다.
TV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들은 매년 연말에 공중파 3 사에서 자체적으로 열리는 연기대상을 통해 상을 수여받는다.
청룡과 대종상을 비롯해 TV 연기대상까지, 대부분의 시상식은 주로 연말에 열린다. 그러나 백상예술대상만은
특이하게 5-6 월에 열린다.
나 역시 그걸 알고는 있는데······.
나는 정정해주었다.
“말이 그렇다 이거지. 그리고 배정원 씨는 신인이잖아. 원래 가수였다가 이번에 배우로 처음 데뷔하는 거기도
하고.”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김철수였던 시절에도 남우주연상은 삼십대가 되어서야 받았었다. 그 직후에 화상 입느라 가장 정점에 이르렀을 때
은퇴한 셈이 되었지만.
“뭐? 그럴 리가.”
김건이 그런 날 보며 낄낄 웃었다.
원래라면 감독인 제이크 킴이 참석해야 했지만, 그는 일정상 시간을 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김건이 참석해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인정해야 했다. 답지 않게 긴장이 좀 됐다.
“너 진짜 괜찮냐?”
“나 예전에는 태연했냐?”
그가 앞을 보았다.
그 순간의 공기마저 피부로 생생히 감각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주변의 모든 풍경이 눈꺼풀 아래 망막에 오롯이
아로새겨졌다.
“고운 씨,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단장님.”
“안녕하세요, 백고운입니다.”
다시, 일상 (完)
101.
입술을 혀로 살짝 쓸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고운아, 떨지 마!”
“어, 들켰나요?”
내가 얼른 말을 받아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사람들이 작게 하하 웃었다.
김철수일 적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7 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남들은 다 앞으로 나서는데 나 혼자만이 홀로 고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슬픈 건 아니었다.
“만약 그 기회가 없었다면 저는 여기 서있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이후, 저를 발견하고 지지해주신 많은
분들이 없었다면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정말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나는 또박또박 내뱉었다.
그 마음가짐으로 말이다.
소회를 풀고 나니 시원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우리가 찍은 영화 <봉사와 앉은뱅이>는 영화 대상과 영화 작품상을 동시에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다.
우리는 입 모아 외쳤다.
“아, 시차가······.”
“즐기자!”
우리는 잔을 부딪치면서 즐겁게 외쳤다. 그리곤 제이크 킴에게 감사를 표한 뒤, 그의 어린 아들에게 손 흔들어
인사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참석했다.
“안녕하세요오―.”
“어, 루다 왔어?”
이루다가 스케줄이 끝났는지 편안한 차림으로 종종거리며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군데군데에서 ‘헉, 여자
아이돌이다!’하면서 숨을 삼키는 게 보였다.
“여기 앉아.”
이성한이 이루다에게 아는 척 하면서 자리를 마련했다. 이루다는 살갑게 웃으며 그 자리에 앉았다. 주변 사람들도
그러려니 하는 눈치로 넘어갔다.
사실, 이성한과 이루다 둘은 연애를 시작한 지 벌써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비밀연애라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연예인들의 사생활이야 대중들만 모를 뿐 대충 이 바닥 사람들끼리는 알고 있는 편이다.
괜히 아련한 눈빛으로 이성한과 이루다를 보고 있자, 이성한이 시선을 느꼈는지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냥, 감격스러워서.”
“······묘하게 기분 나쁜데.”
“고운 씨, 오랜만이에요.”
“감독님!”
“하하, 그럴게요.”
극단에서는 언제나 무섭고 딱딱한 모습을 고수하는 그였지만, 이렇게 사석에서 보니 이미지가 많이 달랐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합류했다. 우리에게 술집이란 장소를 제공한 곽시우도 지나가는 길에 들렀고(그는 이제
레스토랑 뿐 아니라 여러 프랜차이즈에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다), 배정원에게 연락 받고 온 임시운도 있었다(
둘은 아이돌 출신이었다가 연기 데뷔한 것으로 꽤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었다).
오용호는 일전에 우리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영화 팀 배우들과 대부분 안면이
있었다. 사람들이 오용호를 제법 반겼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대놓고 반말을 쓸 수 없던 나는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웬 일이야?”
“비유거든?!”
둘이 얼른 그 말에 화제를 돌렸다.
오용호는 안 싸웠다는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면서 자기 몫의 술잔을 가져왔고, 김건은 오용호의 잔에 술을 따라준
뒤 술이나 마시자고 부산을 떨었다.
“자, 자. 마시자고!”
“짠―!”
참, 인생사가 재밌었다.
그런데 그게 우리만 웃긴 게 아니었는지 어느새 기사까지 나있었다. 백상이 낳은 유행어라나 뭐라나. 아무튼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네, 갈게요!”
어느덧―
다시, 일상이었다.
完
YB
102.
“고운아, 기사 봤어?”
나는 집중한 채 대본을 보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매니저가 핸드폰을 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나를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평소 행실과 상관없이, 연예인이라면 대부분 ‘기사 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사소한
정황적 상황으로도 스캔들이 터지곤 하는 게 이 바닥이며, 왜곡된 기사와 한 순간의 오해로 이미지가 실추되는 건
매우 쉬우니까.
“고운이 너, 방금 표정 진짜 웃겼다.”
“제가요?”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저렇게 사색인 표정을 짓지는 않았는데······. 게다가 비유도 왜 하필
여자친구?
그제야 나는 매니저가 날 잠깐 떠봤다는 걸 깨달았다. 왜 여자친구 운운하나 했네. 어쩐지, 여자친구란 단어를
내뱉으면서 내 표정을 잠깐 살피는 것 같더라니.
나는 짐짓 투정부렸다.
나는 은근히 압박하듯 웃는 얼굴로 매니저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리고 바로 그 스케줄을 만드는 데에 일조한
매니저가 또 한 번 뜨끔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다 왔어?”
“어, 고운 형 왔나 보다!”
“왔어?”
“고운 형!”
“야!”
임시운이 옆에서 기겁했다. 그가 술병을 얼른 주웠다. 다행히 다 먹은 병인지 바닥에 쏟아진 술은 없었다.
“고운 형―!”
“으, 응······.”
“얘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군대 가는 거야 일찍이 정해진 사항이었다. 그때 배정원 본인도 우울해하긴 했지만 어차피 몇 년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거라 타격이 그렇게 크진 않았다.
“······아.”
“혀엉······.”
여자친구 얘기를 꺼낸 게 실수였는지 배정원은 이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어이고야. 주정도 이런 주정이 더 없군.
“자, 자, 마셔.”
“자, 자, 더 마시자고.”
“가끔 보면 쟤가 제일 무섭다니까.”
그러나 내 착각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바보처럼 헤실헤실 풀어진 웃음을 흘리던 배정원은 갑자기 울먹거리더니 본격적으로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형은 군대도 안 가고··· 훌쩍, 연애도 관심 없고······ 나두, 나두 그렇고 싶은데······ 흑,
부러워······.”
그제야 나의 실수를 깨달은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옆에서 임시운과 이성한도 ‘······허’하는 헛숨을
흘렸다.
이성한은 아까까지만 해도 그 안주를 자신이 독차지할 것처럼 굴더니, 이제는 내 눈치를 보면서 아낌없이
배정원의 입에 넣어줬다.
사실 이성한이 내 눈치를 보는 이유야 뻔했다. 내가 군대를 안 가는 이유는 내가, 그러니까 백고운이 고아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배정원의 투정은 무신경한 발언에 가까웠지만, 어차피 취한 상태에서 내뱉는 소리란 걸 알기 때문에
진지하게 마음 상하진 않았다.
배정원은 입에 끊임없이 들어오는 것을 반사적으로 우물우물 먹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울음이 그치게 됐다.
“나 노래 부를래!”
타박을 놓으면 또 어떤 주정을 부릴지 몰라 어지간하면 들어주고 싶긴 했다. 그러나 노래방은 좀 곤란하지
않을까···. 보는 눈도 있을 테고···.
아, 그러고 보니 얘 가수였지.
물론 승리는 나와 임시운의 팀에게 돌아갔다. 배정원이 취했다는 핸디캡도 있고, 내가 뮤지컬 영화에 출연했던
적이 있다는 어드밴티지도 있던 덕분이었다. 비록 임시운은 내 노래 취향이 너무 옛날이라면서 투덜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다음날 아침.
꿀꺽꿀꺽.
생수를 마시면서 나는 가볍게 거실을 훑었다. 배정원의 집 곳곳에 널브러진 친구들이 보였다. 다들 어젯밤
새벽까지 노래 부르고 술 마시고 놀다가 지쳐서 각자 쓰러지듯 잠이 들었었다.
만족스러운 일상 중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