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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애초에, 그 아이를 믿지 않았으니


“혹여, 위협하는 적을 만나게 된다면…….”

“…….”

“저는 목숨을 바쳐, 나리를 지킬 것이어요.”

예상치 못한 말에 결은 잠시 묘한 눈빛으로 단이를 보았다.

당장 전장에라도 나갈 것처럼 비장한 표정을 보니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리께서는 무예 실력이 출중하시니 제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으시겠지만,


그래도 싸우시다 보면 갑자기 안 보이는 곳에서 적이 올 수도 있고, 또 그 적을 제가 먼저
발견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제가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말을 이어갈수록 본인도 이상하다 생각했는지 목소리가 개미처럼 기어들어 갔다.

결국 눈치를 살피다 끝내 입을 합 다무는 단이였다.

은장도를 받고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기에 제법 강단이 있는 아이라 생각하긴 했다.

기껏해야 자결 정도를 생각하나 했거늘.

저를 지키겠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에 하마터면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차칼을 쥐고서도 도적 하나 어찌하지 못하던 아이가 북방 귀신으로 이름을 떨치는 저를


지킨다니.

하룻강아지가 여우로부터 범을 지킨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어찌 보면 맹랑하였고, 또 어찌 보면 기특하였다.

조금은…… 귀여운 것도 같고.

순간 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어…… 웃으셨다.’

찻물 끓이는 연기처럼 찰나에 스친 미소가 단이의 눈에도 들어왔다.


미소라곤 짓는 법조차 모르는 분일 것 같았거늘.

혹시 헛것을 본 건가 싶을 만큼 단이는 얼떨떨하였다.

순식간에 감정을 지운 결은 다시금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이 되었다.

그럼에도 희미하게 남은 미소의 잔상이 눈앞에 아른거려, 단이는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하였더랬다.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나리는 더 좋은 분일지도 모르겠다고.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미소는 그만큼 따스하였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것에 건 순진한 기대였을까.

“가소롭구나.”

결은 단이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냉정한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너는 너 자신이나 지키거라. 나는 내가 지킬 터이니.”

네가 바라는 따스함 따위 이곳엔 없다고.

한순간 멀리 내쳐진 듯한 기분에 단이는 그만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예, 나리.”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하니, 결은 용건이 끝났다는 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오늘은 일찍 자두어라. 내일부턴 하루가 일찍 시작될 터이니.”

“예.”

단이는 꾸벅 허리를 숙이곤 결의 방을 나왔다.

닫힌 문을 등진 채 눈을 두어 번 끔뻑이던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창피해…….’

괜히 함부로 입을 놀렸나.

무예의 ‘무’ 자도 모르는 조그만 계집이 건방을 떨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너무 앞뒤 생각 없이 호기롭게 내뱉었나 싶다.

민망함에 입술을 꾹 깨문 단이는 시무룩하게 제 방으로 돌아갔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단이는 제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마솥에 바삭하게 눌어붙은 누룽지로 끓인 눌은밥과 각종 산나물 반찬, 푹 익은 김치와


감칠맛 나는 각종 장.

거기에 물보다 건더기가 더 많은 고깃국까지!

심 다점에서도 배곯으며 산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상이 꽉 차게 먹은 적은 없었다.

아침부터 이렇게 거한 식사를 해도 되나 싶을 만큼 호화로운 밥상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제 것만 이런 게 아니라 이 집의 가노들은 죄 같은 것을 먹고 있었다.

아랫것들의 먹을 것까지 살피는 결의 배려였다.

“자, 식기 전에 얼른 먹거라.”

조그만 얼굴에 정말 이것을 먹어도 되는지 망설임이 보인 터라.

옆에 있던 덕원이 괜찮다며 손녀 대하듯 단이에게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단이는 그제야 배시시 웃으며 숟가락을 꼭 쥐었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덕원 할아버지.”

“오냐.”

단이는 숟가락으로 눌은밥을 듬뿍 퍼서 한가득 물었다.

뜨끈한 눌은밥에 짭짜름하게 간이 밴 나물 반찬이 어우러지자, 턱 아래가 뻐근해질 만큼


침이 솟았다.

거기에 고소하고 기름진 고깃국이 부드럽게 혀를 감싸니.

세상에 이처럼 기쁜 맛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단이는 처음으로 이 집에 온 것이 행운처럼


느껴졌다.
수십의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서 먹는 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건 이토록 감사한 일이었다.

그렇게 배불리 식사를 마치고 난 후.

단이는 덕원을 따라 어딘가로 향했다.

밥을 먹은 곳에서부터 한참을 걸어 들어가니, 이윽고 커다란 별채 하나가 나타났다.

제가 머무는 방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넓고 커다란 건물이었다.

‘다신당(茶神堂)…….’

굵은 필체로 힘 있게 쓴 현판이 단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결은 집 안에 다옥(茶屋)까지 따로 마련해 두었던 것이다.

주인이 변방에 나가 있어 오랫동안 쓸모가 없었을 곳이건만.

다신당은 마치 어제까지 활발히 사용했던 것처럼 외관이 깨끗하였다.

“이제부턴 조반을 먹고 나서 여기로 바로 오면 된단다. 보선 어멈이 이곳에서 너를


가르칠 것이야.”

“네.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배우도록 할게요.”

“그래. 그런 마음이면 된다.”

단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덕원이 들어가 보라며 손짓했다.

단이는 긴장과 설렘으로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은 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무거운 나뭇결의 소리와 함께 다신당이 활짝 열렸다.

“와아…….”

안을 들여다본 단이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온갖 종류의 찻잎부터 시작해 각종 다구, 거기에 차를 마실 때 함께 피울 향과 질 좋은


숯까지.
그야말로 시작부터 끝까지 차를 위한 공간이었다.

“왔구나.”

그리고 그 가운데, 이 모든 것을 일시에 얼려버릴 듯한 보선 어멈이 있었다.

홀린 듯 다신당의 향에 취해 있던 단이가 얼른 허리를 숙였다.

“느, 늦어서 송구하옵니다.”

“알면 되었다.”

보선 어멈은 단단히 응집된 눈으로 단이를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내일부턴 늦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야.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건 자질이 없다는


뜻이니.”

“……명심하겠습니다.”

시작부터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에 단이는 몸이 바짝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잘못했다간 정식 다비가 되기 전에 보선 어멈에게 먼저 내쳐질 판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어.’

단이는 황망한 마음을 서둘러 다잡으며 보선 어멈의 말에 집중하였다.

“오늘부터 달포 간, 도련님께 차를 올리는 법을 알려줄 것이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신속하게 가르칠 것이니, 행여 흘려듣는 것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 어멈님.”

단이가 말한 호칭에 보선 어멈이 눈썹을 찌푸렸다.

‘어머님’이라기엔 단이가 공들여 발음한 ‘멈’ 자가 귀에 쏙 박혀 들어왔던 것이다.

도련님께서 이 아이를 여연에서 데려왔다고 듣긴 했다만…….

‘북쪽 지방에선 이런 별스러운 호칭도 다 있다던가.’


보선 어멈은 굳이 혼자서 또 작게 멈, 멈 거리다 갸웃하는 단이를 한심하게 보며 말했다.

“그 요상한 호칭 말고, 그냥 편하게 아주머니라 부르거라.”

“아, 네! 보선 아주머니.”

보선 어멈은 마뜩잖은 시선으로 단이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다점을 운영했다지.”

“네. 저희 할아버지께서 남겨주신 작은 다점이었습니다.”

“그럼 얼추 기본적인 것들은 알겠구나.”

“겨우 장사치 수준이라 아직 미흡하옵니다. 뭐든 열심히 배울 테니 많이


가르쳐주시어요.”

긴장하던 단이가 제법 또박또박한 말씨로 예를 갖춰 말하였다.

눈을 반짝이며 싹싹하게 말하는 것이, 그저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인 듯 보였다.

그래도 배우려는 의지는 충만한 것 같아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저 야무진 다짐이 얼마나 갈지는 앞으로 두고 봐야 알겠지만.

“우선 차를 만지기 전엔 늘 손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 너의 작은 향취라도 차에


스며들지 않도록 해야 해.”

“예, 보선 아주머니.”

단이는 보선 어멈의 지시에 따라 쌀뜨물에 손을 씻고, 물로 헹구고, 팥가루로 거품을 내고,


또다시 물에 헹구는 일을 반복하였다.

네 번째 물로 헹굴 때엔 이러다 손이 완전히 녹아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보선 어멈이 되었단 말을 했을 땐 손이 얼얼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단이는 다신당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수십 가지의 산차와 떡차 등에는 각각 이름과 만든 날짜가 적혀 있었는데,
작년 봄에 만든 것도 보관이 잘 되어 있어 향과 빛깔이 햇차에 비교해도 나쁘지 않을
정도였다.

“다음은 네가 사용해야 할 차제구다.”

보선 어멈은 어제 단이가 결의 방에서 보았던 다구들을 가져와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거기엔 어제 난생 처음 보았던 맷돌도 함께였다.

“듣기론 어제 차 맷돌을 쓰지 않고 손으로 차를 짓이겼다 하던데.”

“그게…… 제가 사용하던 것과 다르게 생겨 사용법을 알지 못합니다. 송구하옵니다.”

“꾸짖는 것이 아니다. 네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를 알아야 가르칠 수 있으니 물어보는


것뿐.”

보선 어멈은 요상하게 생긴 차 맷돌의 사용법을 손수 보여주었다.

뭉툭한 바퀴 아래 동전 모양의 떡차 한 개를 넣고 양옆으로 난 손잡이를 잡아 굴리니,


그륵그륵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곱게 갈려 나왔다.

“네가 한번 해 보거라.”

“네.”

단이는 얼른 쇠 맷돌 앞에 서서 보선 어멈이 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했다.

이후로도 가르침은 폭포수 쏟아지듯 넘쳐난 터라.

단이는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배우고 익혔다.

배우는 내내 머릿속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결에게 좋은 다비가 되어주고 싶다고.

제가 우린 차로 인해 얼어붙은 그의 마음이 조금은 녹아내렸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어제 보았던 그 미소를, 다시 한 번 보고 싶다고.

***
휙!

대나무가 우거진 넓은 초야 위로 붉은 적운검이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결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사나운 바람이 일었고, 그가 발을 옮길 때마다 눈 덮인 설원이


거친 바닥을 드러내었다.

공기마저 베어버릴 듯한 날카로운 검날에 결의 움직임이 한층 더 예리해졌다.

휘익, 휙!

거친 숨결조차 날에 스쳐 사라지면 그 뒤엔 어김없이 검의 서러운 울음이 따라왔다.

마치 주인의 마음을 대신 헤아린다는 듯.

그렇게 시린 울음이 사방으로 흩어지길 한참.

수련을 마친 결이 검을 갈무리하니, 근처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진위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결은 이미 진위가 왔음을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땀을 닦으며 말했다.

“왔으면 바로 인사하지 않고.”

“수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장군의 검술에 순간 넋을 빼앗겨 몰래 훔쳐보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진위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에 결은 그저 옅은 실소만 보였다.

진위는 결을 위해서라면 제 모든 걸 내바칠 만큼 충성스러운 부하였다.

처음 무관의 꿈을 키운 것도 결의 명성에 반해서였고, 매 순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북방의


체탐자로 지원한 것도 순전히 결을 한 번이라도 만나 뵙고자 함이었으니.

진위가 이토록 결의 검술을 흠모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대나무 밭을 걸었다.

주위를 가득 메운 대나무 향과 아득히 새 지저귀는 소리, 그리고 마른 대나무 잎 사이로


내리쬐는 겨울 햇살이 참으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한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아직도 새벽마다 간간이 눈을 떠서 주변을


경계하곤 합니다.”
“수년을 그리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고쳐질 리가.”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결의 뒤를 따르던 진위는 대나무가 빽빽하게 드리워진 하늘을 보며 흘리듯 말하였다.

“몸은 편해졌는데, 마음은 어찌 그때에 남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그때에 남아 있다, 라.

어쩐지 가슴 깊이 침전하는 그 말에 결의 눈빛도 더욱 어두워졌다.

마치 제 삶을 가리키는 말 같아서.

뒤늦게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진위가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데려오신 아이는 괜찮으십니까.”

결은 대답 대신 시선으로 무슨 뜻이냐 물었다.

진위는 사뭇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출신이 불분명한 아이를 너무 급하게 들이신 것은 아닐까 염려됩니다.”

심 다점은 엄연히 조선 국경 밖에 위치한 곳이었다.

이름조차 없는 설원에서 오랑캐의 옷을 입고 오랑캐의 문자를 쓰던 여인이니, 그녀가 말한


대로 군역으로부터 도망친 조선인이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감히 주제넘게 드리는 말씀이지만, 그 여인을 너무 믿지는 않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결이 서서히 발걸음을 멈췄다.

고요가 내려앉은 자리엔 묘하게 날선 긴장이 흘렀다.

“그 아이가 조선인이든, 혹은 이방인이든.”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대숲 바닥의 저변으로 깊이 깔렸다.


“다른 뜻을 품은 것이 발각되는 즉시, 어차피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

그 서늘한 음성에 눈 덮인 초야가 더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한없이 짙어진 검은 눈동자가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단이의 정체는 처음부터 제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 아이를 믿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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