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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0.

11.

12.

13.

14.

15.

16.

10.

바람이 불 때마다 산의 낙엽이 후둑후둑 져 내렸다.

산중을 헤매는 일선의 마음은 심란했다.

진리를 추구하는 불자의 몸으로 가슴에 번뇌를 품은 것을 탓하며, 홀로 천축으로 가는 수행 길에 올라 오래도록


산속을 헤매어도 번뇌는 가라앉지 않았다.

일선은 그가 품에 안았던 나긋한 여인의 몸뚱이를 생각했다.

귓가에 녹아드는 달콤한 목소리도 생각했다.

‘일선스님.’

일찍이 출가하여 대덕의 법계를 얻을 때까지도 여인을 모르고 정갈했던 몸이었다.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광대 패의 북치기로 떠돌다 큰스님과의 연으로 불가에 몸을 담았을 때는, 속세에 그
어떤 미련도 없었다.

그의 생김이 몹시 못나고 우락부락해, 여인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 평생 여자와는 연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상대는 오래도록 수절하고 살아온 과부였다.

미처 첫날밤을 올리기도 전에 남편이 요절하여, 그 나이까지 처녀의 몸으로 살아온 가엾은 여인네였다.
일선은 차라리 그 몸뚱이를 불쌍히 여겨 품에 안았더라면 좋았을 거라 생각했다.

여인의 유혹에 마지못해 넘어가 순간의 충동과 육욕으로 안았더라면, 이리도 힘들진 않았을 거라고.

허나 외로움을 달래려 부처님께 의지해 드나들던 그 여인을 언제부터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무엇을 비는지 늦은 밤까지 이슬을 맞으며 탑돌이를 하고, 날이 밝도록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마음에 품은 것이 얼마나 크기에 쉬이 털어내지 못하고 날마다 부처님을 찾는 것인지 의문스러웠고, 자신이 그
고민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으면 싶었다.

오가며 한마디씩 나누던 인사가 길어지고,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일이 잦아지자 일선은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면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았다.

속세의 인연과 마음에 매이지 않는 것이 불제자의 도리이고 수행이거늘.

일선은 뒤늦게 처음으로 느낀 연심에 당혹감을 느꼈다.

그 여인을 잊고자 참선했지만 하면 할수록 마음이 비기는커녕 아리따운 얼굴만이 아른거렸다.

결국, 일선은 수행을 핑계 삼아 절을 떠나려 했다.

한데, 일선이 떠나기 전날 밤.

부인이 찾아와 이리 말했다.

‘이런 마음을 스님께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으나, 어느새 스님을 마음 깊이 연모하게 되었습니다. 단 한


번만, 단 한 번만 저를 안아주실 수는 없는지요. 다른 여인네들이 전부 누리며 사는 것을 오늘 하룻밤만 제게
베풀어 주실 수는 없는지요.’

일선은 애원하는 그녀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품에 안았다.

새벽이 밝기도 전에 절을 떠나와 천축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하여 벌써 수십 번 뜨고 지는 해를 보았거늘, 그


하룻밤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일선을 괴롭혔다.

지금 당장에라도 이 가사를 벗고 평범한 사내로 돌아가 그 여인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허나 설령 그런다 하더라도 파계승과 과부가 함께 산다는 것은 사람들의 지탄을 피할 길이 없을 테고, 그것을


여인이 기꺼워할 것 같지 않았다.

수절과부로 많은 존경을 받는 여인네인데, 보통 사내도 아니고 스님을 꾀어 서방으로 모시고 산다는 손가락질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하룻밤의 정사로 마음의 심화를 떨쳐버렸는지 모른다.

그 하룻밤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모든 것을 비우고 큰 깨달음을 담아야 할 마음속에 한 여인네에 대한 정염만이 가득하니 괴로웠다.


계율을 어긴 자신이 가사를 입고 있는 것조차 죄가 되는 것 같으니, 일선은 자신이 천축으로 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도망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도 다니지 않는 숲을 헤치며 걷던 일선은, 상념에 잠겨 숲의 구덩이에 생긴 늪을 발견하지 못했다.

무심코 발을 내디뎠다가 몸이 쑥 꺼지는 느낌에 억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팔을 휘저어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지푸라기뿐이었다.

순식간에 가슴팍까지 잠긴 진흙탕에서 벗어나려 허우적거렸으나 몸은 발이 닿지 않는 늪 속으로 끌려 들어갈


뿐이었다.

일선은 목까지 잠겨 버둥거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살려주시오! 누, 누가 나 좀…….”

허나 그 소리도 늪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일선은 자신이 죽는가 했다.

스님의 몸으로 여인을 안고 마음에 정념을 품은 죄인 것인가 그리 생각했다.

늪에 머리끝까지 잠기기 일보 직전, 일선은 희끄무레한 햇빛을 가리며 나타난 큰 그림자를 보았다.

* * *

눈을 뜨니, 일선은 어두운 집 안에 벌거벗고 누워 있었다.

움집인 듯 사방의 벽면은 흙이었고, 나지막한 서까래 위에 짚으로 만든 지붕이 얹어져 있었다.

천장엔 말린 고기와 풀 다발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으며, 한쪽에 화덕과 돌로 쌓은 부뚜막 같은 곳이 있었다.

연기가 빠지는 곳인 천장의 한구석과, 밖으로 길게 나 있는 입구로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일선은 몸을 일으키며 자신이 짚더미로 만들어진 침상과 털가죽으로 만들어진 이부자리에 누워 있던 것을 알았다.

벽 한쪽에 세워진 도끼나 낫과 비슷한 날붙이 등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사냥꾼의 움막인가 싶었다.

일선은 자신의 가사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아, 이부자리 곁에 잘 개켜진 옷을 주워 입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움집 밖으로 고개를 내미니, 둥그런 뜰에서 자신의 가사를 빨랫줄에 널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이보십시오, 여기가 어딥니까.”


그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일선은 순수한 감탄을 느꼈다.

상투를 틀지 않은 채 머리를 묶은 남자는 자락이 짤막한 옷차림을 하고 맨발로 서 있었지만 몹시 고왔다.

반듯한 이마에 가지런한 이목구비, 짧은 소맷자락 밑으로 드러난 팔다리가 무척 가늘어 자칫하면 여인네로 착각할
법한 얼굴이었다.

그 사람이 입을 열었을 때 일선은 두 번째로 감탄했다.

천한 사람처럼 아무렇게나 입은 옷차림에도 남자의 어투가 정갈하고 우아한 것이, 꼭 글 줄 읽은 선비 같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여 인사하고는 말했다.

“깨어나셨습니까, 스님. 산에서 사고를 당하시어 많이 놀라셨을 터인데 괜찮으신지요?”

“아닙니다. 꼼짝없이 죽는가 했는데 이리 무사하여 불자님을 뵈니 마음이 놓입니다. 저는 일선대덕이라 합니다.”

“아직 젊으신 나이에 대덕이라니, 수행의 정도가 높으신 모양입니다.”

남자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에 일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소승은 그저 번뇌를 떨치려 발버둥 치는 어리석은 불제자일 뿐입니다.”

남자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는데 그 모습이 아주 신비롭고도 처연한 것이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비록 지금은 번뇌에 시달리는 일개 중이라고는 해도, 대덕의 법력을 지닌 일선은 남자를 사로잡은
어두움을 볼 수 있었다.

“저는 송가의 지언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드문 산중인지라, 이런 인연으로라도 귀하신 분을 뵙게 되니 마음이


흐뭇하고 기쁩니다. 곧 해가 질 터이니 오늘은 이곳에서 묵으시고 내일 길을 떠남이 어떠신지요.”

“그리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움집 안으로 자리를 옮겨 흙바닥에 깔린 돗자리에 앉았다.

송지언은 말린 찻잎을 넣은 따뜻한 차를 내주었는데, 다기가 아닌 투박한 질그릇에 담긴 것일지언정 고소하고


맛있었다.

일선이 차를 마시며 자세히 살펴보니, 날씨가 차가워지는지라 부르터있기는 하나, 산중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손이 고왔다.

“한데 불자께서는 어이하여 이 산중에 홀로 살고 계신 겁니까? 말투나 행동거지로 보아하니 본디 산사람은 아닌


듯한데.”

“저는…….”

송지언은 입을 열었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산중에 있는 이유를 설명치 못하고 대신 다른 답을 했다.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같이 기거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 부인입니까?”

움집에 여인네의 흔적이라고는 없어서 혼자 살고 있다 생각했는지라 일선은 그리 되물었다.

“아니요. 저는 혼자 몸입니다. 같이 거하고 있는 자는 사내입니다. 그자가 늪에 빠진 스님을 구했습니다.


지금은 장작거리를 마련하러 잠시 산에 나간 것이고요.”

송지언의 대답을 듣고서야 일선은 멍청한 자신을 질책했다.

송지언의 가는 손목으로는 벽에 걸린 날붙이조차 들지 못할 것 같으니 그가 사냥꾼일 리는 없는 것이다.

일선은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던 큰 그림자를 기억해냈다.

“그렇군요. 그분이 오시면 꼭 감사의 인사를…….”

그때 입구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 그림자가 누구인지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장대한 체구에 머리가 지붕을 뚫고 나갈 것처럼 큰 키, 억지로 붙들어 묶고 있음에도 산발인 머리와 안광이
번뜩이는 부리부리한 눈동자.

한겨울임에도 상반신은 벌거벗고 있는데, 아래에 걸친 바지가 더 안 어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내에게선 사람에게 느낄 수 없는 위협적이고 무감한 기운이 풍겼다.

일선은 왠지 모르게 돋아난 오싹한 소름을 쓸어내렸다.

산 중에 가다가 호랑이라도 마주친 양 섬뜩한 느낌이었다.

일선은 문득 맡아지는 냄새에 미간을 모았다.

사냥꾼이라 그런지 사내에게서는 피 냄새가 짙게 났다.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일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며 사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무아미타불, 소승을 구해주셨다 들었습니다.”

일선의 인사에도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별처럼 불타는 눈으로 일선을 묵묵히 쏘아보더니, 화덕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품에 안고 온 장작개비를 쏟아놓았다.

가만히 앉아있던 송지언이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스님께서 인사하시지 않소이까.”

사내가 일선을 힐끔거렸다.

일선이 다시 합장을 하자, 그것이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는 듯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렸다.


송지언이 대답 없는 사내를 향해 다시 말했다.

“늪에 빠져 정신을 잃은 사람을 통째로 물에 담그면 어쩌오. 하마터면 익사하실 뻔했지 않소.”

그 말을 듣고 일선은 깜짝 놀랐다.

깨어났을 때 벌거벗겨져 있기에 누군가 늪에 빠진 자신을 씻겼나 했는데 통째로 물에 담갔다니.

송지언의 그 말에 사내는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그대로 데려오면 온 데가 진흙 범벅이 될 것 같아서 그랬다.”

“기절한 사람일수록 잘 다뤄야지 물건처럼 다루면 안 되오.”

일선은 두 사람의 대화가 이상함을 느꼈다.

송지언은 마치 혼잣말을 하듯 사내를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고, 사내는 자신을 나무라는 송지언을 바라보지


못하고 애꿎은 일선만을 쏘아보았던 것이다.

그 눈동자가 이글이글한 게 괜히 주워왔다는 분위기라 일선은 찔끔했다.

그는 나서서 말했다.

“그만하십시오.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제대로 표하지도 못했는데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무안합니다.”

일선의 만류에 송지언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소리에 사내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덩치도 산만하고 무시무시한 자가, 자기 덩치 반밖에 안 되는 송지언의 말에 그리 행동하는 것을 보고 일선은


적잖이 놀랐다.

말투도 조용조용하고 얼굴도 고운 송지언을 보고 개가 주인을 따르듯 행동하는 것이다.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입을 다물어버린 송지언 때문에 일선도 더 이상 말을 늘어놓지 못했다.

사내는 묵묵히 벽에 걸린 고깃덩어리를 꺼내어 그것을 잘라 불에 굽고 밥을 짓기 시작했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화덕 앞에 웅크리고 앉은 모양새가 처량 맞아 우습기까지 했다.

그동안 송지언은 밖에서 일선의 가사를 걷어와 뜯어진 부분을 꿰매었다.

헌데 송지언의 바느질 솜씨가 어찌나 신통치 않은지, 옷을 꿰매는 건지 자기 손가락을 꿰매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에 바늘과 골무 따위가 안 어울리기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일선이 자신이 하겠다고 바늘을 달라 했지만, 송지언은 자신이 꿰매주겠다며 꿋꿋하게 고집을 피웠다.

삐뚤삐뚤 지네가 기어가는 바늘땀을 아연한 기분으로 보고 있는데 문득 옆통수가 따가웠다.

시선을 돌리니 사내가 눈초리를 뾰족하게 세우고 일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이 명백한 질투라, 일선은 매우 당혹했다.

마침내 저녁 식사가 차려지고, 세 사람은 야트막한 밥상을 두고 둘러앉았다.

밥상은 매우 단출하면서 또한 거나했는데, 잡곡이 섞인 보리밥과 소금만으로 간을 한 산나물 두 가지, 그리고


산더미 같은 고기가 올라왔던 것이다.

어떤 것은 속도 제대로 익지 않아 시뻘겠다.

일선이 젓가락도 들기 전에 사내가 덥석 손을 뻗자, 송지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손님이 수저도 들지 않았는데…….”

그 말에 사내가 얼른 손을 움츠렸다.

일선은 당혹하여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아닙니다, 스님. 어서 드시지요.”

일선이 수저를 들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속이 덜 익은 커다란 고깃덩이를 입속에 쑤셔 넣고 우적우적 씹던 사내는, 잘 굽힌 고기 한 점을 송지언의 숟가락


위에 올려놨다. 그러자 송지언이 무심히 그것을 고기 접시 위에 되돌려 놓았다.

사내는 송지언이 고기를 되돌려 놓는 것을 보고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고기 접시를 자신 쪽으로 당겨,
먹을 것을 뺏기지 않으려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살점을 뜯기 시작했다.

그 기운이 어찌나 살벌한지 일선은 그쪽으로 손을 뻗으면 물릴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고기를 저 혼자 죄 먹고 나서야 사내는 밥그릇에 손을 댔다.

허나 학처럼 우아하게 젓가락을 놀리며 식사를 하는 송지언과는 달리 그자는 수저질이 매우 서툴렀다.

숟가락질조차 어려워 밥알이 사방에 튀고 입에서 흘러내리며 야단도 아니었다.

갓 숟가락 드는 법을 배운 세 살짜리가 수저질을 하는 것 같았다.

사내가 젓가락을 들어 올려 산나물을 집으려 했을 땐, 일선까지 저도 모르게 애를 썼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사내는 용을 쓰며 나물을 집으려 했지만 그 작대기 두 개가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결국, 사내가 울화통을 터트리며 젓가락을 집어 던졌다.

젓가락이 상에 부딪쳐 떨어지고, 사내는 손으로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송지언이 탁, 하고 수저를 밥상 위에 내려놓더니 눈을 내리깔고 싸늘한 어조로 내뱉었다.

“손가락이 없는 짐승도 아닌데 어째서 수저로 식사하지 않는 것이오.”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 표정은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울기 일보 직전의 어린애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이를 드러낸 채 주먹을 움켜쥐고 한참 밥그릇을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다시 수저를 집었다.

숟가락질을 하는 손이 익숙지 않아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일선은 가엾다 생각했지만, 송지언은 무표정한 얼굴로 식사를 계속했다.

밥상을 치운 뒤 세 사람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송지언과 일선이 이야기를 좀 나눌라치면, 사내가 불만스러운 듯 어수선하게 계속 움집을 들락날락했기 때문이다.

잠자리에 앉았다 일어났다가, 괜히 불을 헤집었다가 말았다가 하면서 앉아있는 송지언과 일선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일선과의 대화를 어떡하든 중단시키고 싶은 기색이 역력해, 결국 일선이 피곤하다 말했고 그만 자자고 이야기가
되었다.

허나 세 사람은 또 잠자리를 가지고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움집에는 잠자리가 하나뿐이었는데, 널찍하니 보통 사람 셋이 누워 뒹굴어도 될 법했지만 사내의 덩치가 크다


보니 그와 송지언이 누우면 딱 알맞은 크기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본디 거기서 함께 자는 듯했다.

사내와는 같이 누울 간담이 없고, 혼자서 그 잠자리를 다 차지하고 잘 수는 없으니 일선은 자신이 바닥에서 혼자
잔다 했다.

헌데 송지언이 만류했다.

“손님을 바닥에서 재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아래서 자겠습니다.”

그러자 사내가 불쑥 끼어들었다.

“바닥에 자면 고뿔 걸린다.”

송지언은 그를 외면하고는 대꾸했다.

“하룻밤인데 상관없소.”

“난 저 까까머리와 자기 싫다.”

“그럼 당신이 바닥에서 주무시오.”

“그건 더 싫다!”

송지언이 일선과 함께 자겠다니 사내는 벌컥 화를 냈다.

송지언이 손님을 바닥에서 재울 수 없으니 양보하라고 하자, 사내는 절대 안 된다며 눈초리를 곤두세웠다.
결국 일선이 스님은 남의 집에서 잠자리를 뺏으면 안 되는 계율이 있다고 거짓말을 지어내고, 사내가 화덕 가까운
곳에 모아둔 털가죽을 풀어 툭툭한 잠자리를 만들었을 때야 문제가 해결되었다.

사내는 일선이 외따로 눕자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잠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어 송지언이 불씨를 단속하고 자리에 누웠고, 주위가 어두워지자 일선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내가 나를 달가워하지 않으니 내일 아침 해가 뜨는 대로 서둘러 떠나야겠다.’

* * *

일선이 고른 숨소리를 내자, 송지언과 나란히 누워 있던 사내가 몸을 뒤척였다.

바로 누운 송지언 쪽으로 몸을 돌린 그는, 흘러내린 송지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송지언이 눈을 뜨지 않고 가만히 있자, 그는 멈칫거리다 송지언의 어깨로 손을 내밀었다.

사내의 손이 닿기 직전, 송지언은 몸을 돌려 사내를 등지고 누웠다.

그는 자신의 등 뒤에서 오락가락하는 사내의 손을 느낄 수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한참을 망설이다 으르릉하며 불만족스러운 신음을 내뱉은 사내는,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 탓에 유일하게 허락된
곳에 코를 묻었다.

뒤로 흩어진 송지언의 머리칼에선 말린 청포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나려던 일선은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어젯밤 사내가 눈이 내리니 마니 궁시렁거리더니 그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눈을 보고 송지언이 떠나려는 일선을 만류했다.


“큰 눈이랍니다. 당분간은 그치지 않을 테니 이곳에 머무르셔야겠습니다. 가장 가까운 인가가 꼬박 이틀 거리니
자칫 잘못하면 산에서 얼어 죽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뜨고 싶었던 일선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송지언이 침울한 낯빛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누추한 데다 무서운 것까지 있으니 한시라도 바삐 떠나고픈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사람과 말을 섞은 지가 오래된
저를 위해서라도 조금 더 계셔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일선은 그제야 송지언이 이런 산골에서 사람 같지도 않은 사내와 단둘이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일선이 일어났을 때 이미 사내는 움집을 비우고 없었다.

“어제도 이 말을 물은 것 같습니다만, 선비로 보이는 분이 어쩌다 이런 산중에 저런 사내와 단둘이 살게 된


겁니까. 보통 사연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그것이…….”

송지언은 한동안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정 말씀하시기 어려우면 안 하셔도 됩니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것을요.”

“송구합니다.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고, 저도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얘기라.”

말끝을 흐리는 송지언을 보고 일선은 또다시 무거운 업보를 느꼈다.

잘나고 총명한 선비가 이런 곳에 저런 사내와 사는 것이 보통 사연일 리 없다.

더군다나 이곳을 누추하다 말하며 사람을 그리워하는 송지언은 이런 생활이 달갑지 않은 것이 뻔했다.

만약 죄를 짓고 이런 곳에 숨어 사는 것이라면 다른 이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지 말아 달라 부탁할 텐데 그런


말도 없으니 연유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일선은 눈이 그칠 때까지 별수 없이 머무르게 되었으니, 그동안 자신을 말벗으로 생각해주면 고마울 거라 말했다.

그들은 눈을 피해 집으로 들어갔다.

“헌데 스님께서는 어디로 가는 중이셨습니까? 이런 겨울에 산중을 지나는 사람은 좀체 볼 수 없는데.”

“소승은 부처님의 진리를 알고자 천축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도천승이셨군요. 천축은 굉장히 머나먼 곳으로 알고 있는데 그곳까지 홀로 갈 결심을 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그 말에 일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사실 부처님의 진리를 구하는 것에 장소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깨달음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요.”

일선의 말에 송지언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얼굴로 일선을 바라보더니, 문득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제 마음속에는 언제나 고통밖에 없습니다.”

송지언의 뒤에서 어른거리던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제가 저지른 죗값을 치르고자 이곳으로 왔습니다만, 가끔은 이것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덧 이런 사람답지 못한 삶에 익숙함이 느껴지고, 이곳을 편안하다 느낄 때면 이것을 선택한 것이 다만
죽음을 회피하고 싶었던 안이한 생각이 아니었는지 의심됩니다.”

송지언은 고개를 떨어트리고 중얼거렸다.

“어찌하여 제가 이런 곳에 사는지 궁금하다 하셨지요. 저와, 저와 함께 살고 있는 사내는 서로가 저지른 죗값을


치르기 위해 붙어 있는 겁니다. 함께 있으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테니,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감으로써 자신을 벌주려 이곳에 있는 겁니다.”

침통한 어조에 고통스러움이 그대로 배어 나와, 일선은 무어라 위로를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삶으로 속죄받아야 할 죄라니, 소승은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질 않습니다.”

“사내를 볼 때마다 저는 제 죄를 상기합니다. 증오와 미움으로 가슴이 들끓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어쩌다…아주


어쩌다 평안함과 만족감을 느낄 때조차 그것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죗값을 치르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하는 겁니다. 헌데 사람이라는 것이 간사해서, 삶의 모든 것이 고통스러울 순 없는 모양입니다. 이제는 이
속죄가 타성이 되어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송지언의 비통한 말 속에서 일선은 자초지종을 알 수 없으나 그가 자신의 삶 자체를 형벌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늘이라는 것이 무심하여, 때로 천벌조차 내리지 않고 죄를 방기해두는데 일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것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송지언의 죄가 큰 탓도 있겠지만, 그의 이상과 마음이 남들보다 고결하고 높은 탓인 듯했다.

일선은 합장을 하고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죄를 저지르는 것도 사람이오, 그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도 사람이겠지요. 허나, 그 죄를


용서하는 것 역시 사람입니다. 제아무리 하늘이 용서하고 다른 사람이 용서한다 해도, 본인이 용서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송지언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무릎 위에 놓은 손을 주먹 쥐었다.

“허면 제가 저를 용서하지 못하면 어찌해야 합니까.”

“다른 이를 용서하고 거기에서 용서를 구하십시오.”

송지언은 갑자기 왈칵 소리쳤다.

“다른 이를 용서하라니요? 저를 이런 상황에 빠트리고 죄를 짓게 만든 그자를 용서하란 말입니까?”

함께 죄를 저질렀다기에 일선은 송지언이 말하는 그자가 바로 사내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송지언은 파르르 몸을 떨더니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절대 용서 못 합니다! 그런 안이한 용서로 편해지려는 자신 역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홀로 남은 일선은 송지언이 짊어진 커다란 업보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합장했다.

“나무아미타불. 허나 끝끝내 안식을 얻을 수 없다면 죗값이 무슨 소용이고 속죄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고통받으려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고자 뉘우치는 것을요.”

* * *

눈 오는 산을 헤쳐 뛰며 송지언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저런 땡중을 붙잡고 자신을 용서하려 시도한 자신을 질책했다.

‘고통받기 위해 삶을 택하지 않았느냐! 헌데 벌써 편해지고 싶은 거냐! 그렇다면 죽는 것이 무서워 삶을 택한


것과 다를 바가 무어냐! 내 곁에 있는 것은 죄인일 뿐이고, 내 죄를 용서해줄 사람은 나의 죄를 책망할 틈도
없이 이승을 떴는데 누가 나를 용서하겠는가! 내가 나를 용서해? 우스운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안이하고
더러운 소리다!’

정신없이 뛰던 송지언은 낯익은 절벽 위에 이르렀다.

칼바람 속을 헤치고 뛴지라 뺨의 피부가 하얗게 일어나고 손발이 빨갛게 곱았다.

헐떡거릴 때마다 허연 입김이 쏟아지고 폐를 가르는 찬 공기가 뛰어들었다.

까마득히 높은 벼랑 아래를 바라보며 그는 어젯밤 자신의 머리칼에 코를 묻고 있던 사내를 생각했다.

송지언은 중얼거렸다.

“넌 결코 용서받을 수 없어…….”

* * *

눈이 내리는데 한참 동안 벼랑 위에 서 있었던 송지언은 고뿔에 걸렸다.


움집으로 돌아온 그는 내도록 콜록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사내는 걱정이 되는지 안절부절못했다.

일선은 사내에게 기침에는 뜨거운 증기가 좋으니 화덕에다 내내 물을 끓이라 일러주었다.

좁은 움집에 뜨거운 김이 들어차자 송지언의 기침 소리는 조금 잦아들었지만, 이번엔 열을 내기 시작했다.

송지언이 그리 뛰쳐나갔던 게 자신의 말 탓인가 싶어 일선은 송지언의 머리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주며 말했다.

“소승이 괜한 소리를 한 거라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러자 송지언이 고개를 모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로 조금이라도 편해져 보고자 꾀를 부린 제 탓입니다.”

저녁 무렵 송지언이 잠이 들자, 숨을 죽이고 침상 발치에 앉아있던 사내는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다 물었다.

“저놈은 툭하면 고뿔에 걸린다. 몸이 약한 거 같은데 뭘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으음, 보약이라도 해 먹이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잉어 같은 것이라도 잡아서 달여주면 좋을 터인데.”

움집에 돈이 있어 보이진 않고, 한겨울이라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만 날이 풀리면 잉어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리 말하자 사내가 눈을 번쩍했다.

“넌 달일 줄 아냐?”

“예에? 달이는 거야, 내장을 빼고 솥에 푹 삶으면 되는 것이니 어렵지 않습니다만.”

“좋아.”

사내는 벌떡 일어나더니 일선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일선을 털가죽으로 둘둘 말아 옆구리에 꼈다.

“잉어 잡으러 가자.”

* * *

일선은 어지럽게 스치는 주변의 풍경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신이 사람의 옆구리에 낀 것인지 호랑이 등짝에 올라탄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사내는 바위를 박차고 나무를 떨치고 벼랑 위를 날아오르며 내달렸다.


눈 덮인 숲을 그리 달려가는데, 바람 같기도 하고 벼락같기도 했다.

한참을 달려 사내는, 산 중에 꽝꽝 얼어붙은 못에 이르렀다.

사내의 옆구리에서 내려진 일선은 칼바람에 찔찔 흘러내린 눈물과 콧물이 허옇게 얼어붙어 벌벌 떨고 있었다.

일선이 요란하게 기침을 했지만 사내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한겨울이라 단단히 얼어붙은 못 위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일선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보시오. 이런 겨울에 어찌 잉어를 구한단 말입니까. 낚시라도 하려면 얼음을 깰 도끼라도 있어야 하는데
…….”

사내는 일선의 우려를 그야말로 박살 냈다.

못 중앙에 선 사내가 주먹을 말아 쥐고, 산이 우르르 울리는 것 같은 기합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몸을 뛰어 그것을


내질렀을 땐 저 사람이 자신을 돌덩이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했다.

헌데, 꿍-! 하고 주먹이 얼음에 부딪치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와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얼음이 쩍


갈라졌던 것이다.

일선은 말 그대로 튀어나올 듯 눈을 크게 떴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사내는 다시 한 번 훌쩍 뛰어 발을 굴렀다.

그러자 얼음이 산산조각이 나며 뒤집혔다.

얼음이 요동치는 바람에 저수지의 물이 일어나며 못 가에 선 일선의 발을 적셨다.

그 차가움에 그는 기겁을 하며 뒤로 후다닥 물러섰다.

괴력을 발휘한 사내는 깃털처럼 사뿐하게 얼음을 딛고 땅 위로 올라왔다.

필시 미끄러지거나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얼음과 함께 물속으로 빠져야 말이 되거늘,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일선은 눈앞의 이 사내가 사람이 아닌 신령이나 요괴가 아닌가 싶었다.

처음부터 사람임이 의심쩍었으나, 그에게서 틀림없는 사람의 감정이 느껴졌기에 다른 무엇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방금 눈앞에 벌어진 일을 목격하고 나니 생각이 바뀌려 했다.

사내는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서 있었다.

곧, 얼음이 깨지고 난리가 난 탓에 놀라 기절한 물고기들이 시퍼런 수면 위로 둥둥 떠올랐다.

단순무식하고 지극히 파괴적인 방법이었지만 실로 대단했다.

입을 쩍 벌리고 감탄하던 일선은 커다란 보자기를 펼쳐놓은 양 둥둥 떠오른 큰 배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사내는 긴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오더니, 그것으로 그 둥그런 배를 쿡쿡 찔러 못 가로 당겼다. 그리고 수면 위로
드러낸 배지느러미에 손을 뻗쳐 그것을 끌어냈다.

일선은 순간 눈이 부셨다.

그야말로 사람 몸통만 한 잉어의 비늘은, 찬란한 오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이 못의 주인임을 알아볼 수 있는 영물이었다.

사내는 으랏차, 하고 그것을 어깨에 짊어졌다.

귀한 생물이라는 생각에 일선은 표정을 흐렸다.

“그……그것을 삶을 참이십니까?”

사내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것 때문에 예까지 온 게 아니냐.”

“허나 함부로 잡아먹으면 안 될 영물인 것 같은데.”

일선이 그리 말하자 사내는 콧방귀를 팽 꼈다.

“물고기가 물고기지 영물이고 나발이고가 어디 있어.”

“그렇지만…….”

“말이 많다.”

사내는 일선을 다시 옆구리에 꼈다.

“고놈이 깨겠다.”

* * *

다시 움집으로 돌아오니 송지언은 아직까지 자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에 얼음물이 뚝뚝 흐르는 잉어를 짊어지고 온 사내는, 잉어가 너무 커서 솥에 다 들어가지 않자


마당에서 그것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어 토막을 내 솥에 넣고 삶았다.

곧 움집 안에 잉어 삶는 냄새가 가득 들어찼고, 일선도 송지언이 빨리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비늘과


껍데기를 걸러냈다.

송지언이 잠에서 깨어났을 땐 온 집에 잉어 달이는 냄새가 가득했다.


“깨어나셨소?”

송지언은 식은땀이 흥건한 몸을 일으키더니 이마를 쓸어 넘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냄샙니까.”

그때 밖에서 잉어를 해체하느라 젖은 뜰을 갈아엎던 사내가 불쑥 들어왔다.

사내는 일어나 있는 송지언을 보고 얼굴을 확 피더니, 송지언의 손을 덥석 붙잡고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그것은 영물인 잉어가 몸에 품고 있던 진주였다.

진주는 찬란하던 잉어의 비늘만큼이나 영롱한 오색 빛을 뿜었다.

헌데 송지언은 그것을 물끄러미 보더니 툭, 하고 손에서 놓았다.

진주가 바닥에 떨어져 데구르르 굴렀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비린내.”

사내는 턱에 주름이 지도록 꾸욱 입을 다물었다. 그런 뒤 말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사내가 잉어를 예까지 짊어지고 온 데다가 그것을 해체하기까지 했으니 몸에 비린내가 등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허나 이 추운 겨울날, 먼 곳까지 가서 잉어를 잡아와 몸을 보신하라 하고 귀한 진주를 쥐여주는데 어찌 그런


반응을 보이나 싶었다.

송지언을 결코 매정하거나 쌀쌀한 사람으로 생각지 않았던 일선은 충격마저 받았다.

일선은 송지언이 떨어트려 버린 진주를 주워 올리며 말했다.

“이보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당신을 생각해 이리 행동하는 사람에게 어찌 그리 구는 겁니까. 집에서
기르는 개조차 주인을 보고 꼬리를 흔들면 예쁘다 해주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아껴주는 것을
매몰차게 대하다뇨.”

송지언은 서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를 위한 겁니까.”

“당신을 위한 겁니다.”

송지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잉어탕이 끓는 솥의 손잡이를 붙잡아 올렸다. 그러더니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안 좋은 예감에 일선이 왜 그러냐 말했지만 미처 말리기도 전에, 송지언은 잉어탕을 죄 쏟아버렸다.

촤아악!
일선은 외마디 소리를 쳤다.

“앗!”

마당에선 사내가 벌거벗은 채 길어다 놓은 물동이 앞에서 벅벅 몸을 문지르고 있었다.

비린내가 난다는 송지언의 말에 몸을 씻던 중인가 보았다.

이리 한겨울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사내의 몸에선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그것은 뜰에 쏟아진 잉어탕 역시 마찬가지였다.

뎅그렁, 송지언은 빈 솥을 던져버리고 도로 움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엔 굳어 있는 사내와 자신이 놀라고 미안하여 얼어버린 일선, 그리고 못 먹게 되어버린 잉어탕 냄새만이
가득했다.

일선은 무어라 위로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저이가,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봅니다.”

일선은 말해놓고 자신을 책망했다.

고작 그것을 위로, 혹은 변명이라 주워섬기나 싶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듯싶어서였다.

허나 사내는 춥지도 않은지 물동이의 물을 뒤집어쓰더니,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다가와 시무룩하게 말했다.

“물고기는 별론가 보다. 다른 건 없냐?”

일선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송지언의 모질기 짝없는 냉대에도 어찌 저리 기분 나쁜 표정 한 번 짓지 않을 수 있나 신기했다.

저자 마음속에 부처가 있나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곁에서 말리지 못한 자신이 이리 무안할 정도인데.

“응?”

일선은 채근하는 사내의 물음에 더듬더듬 말했다.

“그……산에서 구할 수 있는 영약이라면, 사, 산삼 같은 것?”

“산삼? 아, 그 심마니들이 찾아다니는 그거 말이냐? 그게 진짜 좋으냐?”

“땅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영약 아닙니까.”

사내는 턱을 괴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래서 녀석들이 제사를 지내고 갖은 수선을 피우며 그 풀뿌리를 찾아다니는 거구만.”


심마니들의 유난스러운 미신과 관습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발견하기 어렵고 귀한 물건이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한 뿌리만 있으면 심마니들은 팔자를 고치고
죽어가던 사람도 목숨을 건진다니 말입니다. 듣자 하니 정기가 흐르는 곳에서 자란 오래 묵은 삼은 산의 혼이
머문다고도 합니다.”

“흐음.”

사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내일은 산삼 캐러 가자.”

* * *

일선이 움집으로 들어가자 송지언은 등을 돌리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누워 있었다.

일선은 그의 발치에 주저앉아 나무아미타불을 읊조렸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송지언이 불쑥 말했다.

“스님도 제 행동이 모질다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모질다 생각하면 모진 것 아니겠습니까.”

송지언은 또 얼마간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뾰족하게 가시 돋친 말투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모질지 않습니다. 저자가 내게 한 짓에 비하면야, 새 발의 피지요. 암요.”

그리 곱씹는 말 속에서 일선은 송지언이 사내에게 느끼는 미움과, 또 그와는 상반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사내가 싫고 밉다 해도 그 역시 사람이니, 자신에게 그리도 지극정성인 사내를 보고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을 리 없다.

허나 예전에 말한 그 죗값 때문에 송지언은 그 감정을 부정하는 듯했다.

일선은 말했다.

“그래서 좋으십니까?”

“저를 비난하시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저 사내를 냉대하고 박하게 대하는 것이 좋으십니까?”


송지언은 한참 대답이 없었다.

“좋지 않습니다…….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한데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것이 옳고 맞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좋고 기쁜 것 따위, 우리에게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요. 인륜을 져버리고 천벌을 지은 자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기쁘게 여길 수 있단
말입니까.”

“서로를 상처 주고 고통받는 것이 속죄라 생각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허면 왜 속죄하십니까?”

등을 돌리고 누워 있던 송지언이 몸을 일으키고 일선을 바라보았다.

“왜라니요, 죄를 지었으니까 속죄하는 것이 아닙니까.”

일선은 가만히 웃었다.

“불자께선 주객전도를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예?”

“사람이 속죄하는 이유는, 그 죄를 벗고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헌데 상처받고 고통 주며 그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삶을 사는 것이 속죄라니요. 고통이 속죄의 도구가 될지언정, 속죄가 될 수는 없는 겁니다.”

송지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선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은 속죄가 아닌, 자기만족이 아닙니까? 저 사내를 상처 주고 괴롭히는 것으로 자신의


기분을 달래려는 것이 아닙니까.”

송지언은 입을 벌렸다.

마치 비명을 치고 싶은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뻐끔거렸다.

일선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무어라 반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속죄.

송지언은 그것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속죄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선은 눈을 제대로 뜨기도 전에 사내에게 납치당했다.

사내가 일선이 덮고 자던 털가죽 채로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또다시 길을 나섰던 것이다.

사내의 옆구리에 끼여 일선은 눈을 비볐다.

“산삼 캐러 가는 것입니까?”

“응.”

“산삼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니.”

사내는 잠시 걸음을 멈춰 세우더니 조금 곤혹스러운 얼굴로 일선을 내려다보았다.

“산삼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것한테 물어보러 간다. 헌데, 고놈은 그것을 질색하니까 내가 갔었다는 말은 하면 안
된다.”

알겠느냐? 라고 눈을 부라리니 일선은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다시 날래게 달리기 시작했다.

산삼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사람은 꽤 멀리 사는지 전보다 훨씬 더 먼 거리를 가야만 했다.

일선은 사내의 옆구리에 끼어 있는 것도 피곤해 죽을 맛이었는데 사내는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어지러우니 잠시 멈췄다 가자는 일선의 말도 무시하고 쉬지 않고 달려, 오후 무렵 햇볕이 들지 않는 계곡 바닥에


도착했다.

폐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듯 싸한 안개가 가득 들어찬 계곡에는 귀기가 가득 흘렀다.

차갑고 어둡고 습한 기운이 그 골짝에 가득한 것 같았다.

안개를 헤치고 입을 쩍 벌린 시커먼 동굴이 나타났을 때는, 풍겨오는 음산한 피 냄새에 일선은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사내에게서도 늘 피 냄새가 났지만 송지언을 대하는 지극한 태도가 사람보다 더 정이 있어 별 거리낌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 동굴에서 풍겨 나오는 피 냄새는 달랐다.

그냥 피 냄새가 아닌 피가 썩어가는 냄새인 듯 역겹고 고약했다.

사내는 일선을 바닥에 내려놓았고, 잠시 휘청하다 바로 서자 안에서 누군가가 부스럭거리더니 모습을 드러냈다.

소복을 입은 여인네였다.
희고 긴 머리채를 드리우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일선은 법력으로 뾰족한 주둥이와 날카로운 이,
그리고 노란 눈과 치마 밑으로 삐져나온 아홉 개의 꼬리를 볼 수 있었다.

일선은 외마디 비명을 치며 물러났다.

“구, 구미호!”

구미호는 일선을 보더니 입을 히쭉 벌렸다.

“네놈이 또 무슨 일인가 했는데, 이번에 부탁할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가 보구나. 구하기 힘든 중놈을
잡아오다니. 법력이 꽤 높은 것이 먹으면 아주 힘이 솟겠어.”

일선은 새파랗게 질려서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요, 요망한 구미호야! 너에게 내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 잡아먹는 습성을


버리고 수행하면 네게도 사람으로서의 길이 열릴진대 어찌 그런 소릴 하느냐!”

일선의 말에 구미호는 아르르 이를 드러냈다.

“캭! 귀 아프니 염불 같은 거 외우지 말고 입 닥쳐라! 수행 같은 소리 좋아하시네! 너 같은 인간에게 속아 천


년 동안 도력을 모아온 구슬도 잃고 이 모양 이 꼴이 되었거늘, 누가 사람 따위가 되고 싶다는 거냐!”

사내가 다투는 둘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안 됐지만 먹으라고 데려온 게 아니다.”

“그럼 저런 땡중은 대체 왜 가지고 온 거냐!”

사내가 씩 웃었다.

“산삼 있는 데나 좀 말해봐라.”

구미호가 눈을 뾰족하게 세웠다.

“그걸 네가 알아서 뭣 하려고!”

“내가 좀 쓰려고 그런다.”

“안 돼! 내가 그걸 점찍어 둔 게 몇 년인데 네놈한테 내준단 말이야? 보나 안 보나 그 여우 같은 놈 때문에


그러는 모양인데 절대 안 돼! 저 땡중을 준다 해도 안 돼!”

“정말 안 되냐?”

“안 돼!”

“진짜 안 되냐?”

“안 된대도!”

“알았다.”
사내는 구미호의 딱 자르는 앙칼진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몸을 날렸다.

바람이 휙 일어나 일선은 뒤로 물러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뭔가가 알 수 없는 것이 눈앞에서 휙휙 날아다니더니, 큰 바람을 일으키며 번쩍거렸다.

다음 순간, 일선은 구미호의 목을 손에 쥐고 선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사내의 가슴팍에 길게 손톱자국이 남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인간의 탈을 벗고 꼬리가 아홉 개 달린 흰


여우 모습이 된 구미호가 그의 손에 붙잡혀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카앙! 캥! 캥!”

“산삼 어디 있냐?”

구미호는 자신의 목을 조른 사내의 손을 박박 긁어댔다.

그래도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디 있느냐니까.”

뭍에 잡혀 올라온 고기처럼 퍼덕퍼덕 구미호가 요동을 쳤다.

털이 곤두섰다가 말았다가 꼬리가 엉켰다가 풀렸다가 했다.

이윽고 눈이 시뻘겋게 변하면서 혀가 길게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사내는 구미호를 잡고 몇 번 짤짤 흔들었다.

“그러게 버티기를 왜 버텨.”

사내가 구미호를 집어 던지자, 허공에서 제비를 넘은 구미호는 곧 여자의 몸으로 변신해서 내려앉았다. 목에는
사내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여자는 눈을 퍼렇게 붉히고는 바락바락 외쳤다.

“네 이놈! 이 은혜도 모르는 놈! 내 너한테 이런저런 도움을 얼마나 주었는데 내가 이런 신세가 되었다고 이리
괄시해?”

“도움은 무슨. 늘 대가를 꼬박꼬박 챙겨갔잖아.”

“아이고! 저놈이 여우 같은 놈이랑 붙어살더니 세 치 혀를 간악하게 놀리는 재주만 늘었구나! 아이고! 그래,
내가 그랬다 치자. 그런데 아무 대가도 없이 그 귀한 산삼을 가져가려느냐? 이제 그 여우 같은 것 눈치 보느라
사람도 잡아다 주지 못하면서 네가 무슨 수로 산삼을 가져가겠다는 게야!”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봐라.”

사내의 말에 훌쩍훌쩍 울어대던 구미호는 빨간 눈을 번뜩이더니 이를 드러냈다.

“네놈 몸이라도 주겠다고 약속해라!”


사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언제는 냄새나서 줘도 안 먹는다더니.”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네놈이 죽으면 네놈 시체는 나에게 주겠다고 약속해! 어차피 땅에 묻으면
흙으로 돌아갈 거 아무 소용도 없잖아!”

일선은 기겁하며 말렸다.

“관두십시오, 아무리 시신이라고는 하나 어찌 요괴에게 그걸 준단 말입니까. 후일 당신이 죽으면 슬퍼할


사람들을 생각해야지요. 시신조차 남지 않아 무덤도 쓰지 못하면 남아있는 사람이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사내는 일선을 보고 툭 말을 던졌다.

“없어.”

“예?”

“내가 죽는다고 슬퍼할 사람 같은 건 없어. 무덤을 써서 돌봐줄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괜찮아.”

사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몸을 원한다면 그리해라. 약속할 테니까 산삼 있는 데나 빨리 말해. 해지기 전엔 돌아가야 한단 말이다.”

“이, 이보십시오!”

구미호가 그 대답을 듣고서는 냉큼 대꾸했다.

“이 골짝을 따라가 지네 바위를 넘어가면 폭포가 나온다. 그 폭포 벼랑 위에 큰 소나무가 있는데, 그 소나무


아래 붉은 열매를 매단 파란 풀이 보일 거다. 지금은 겨울이라 그것 말고는 푸른 게 없을 테니 찾기 쉬울 게다.
허나 조심하는 게 좋아. 본디 그 소나무와 산삼은 신선의 것이니까, 산삼을 뽑아오다 들키면 아주 혼쭐이 날
게야.”

“알았다.”

사내는 일선을 옆구리에 끼고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고자 몸을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구미호가 재차 다짐을
받았다.

“약속을 잊지 마라!”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훌쩍 띄워 올려 바위를 타 넘기 시작했다.

산삼 자체도 아니고 다만 산삼이 어디 있는지 알기 위한 대가로 시신을 넘기겠다 한 사내의 약속 때문에 일선은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사내의 옆구리에서 말했다.

“이보십시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사내는 일선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런 말을 어찌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집에 계신 불자님이 당장 목숨이 극에 달해 산삼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고뿔에 걸린 것뿐인데 이런 무리한 약속을 해가면서까지 산삼을 구해야 할 필요가 있냐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제 생각에는 이렇게 해서 산삼을 구해준다 하더라도 불자님이 크게 기뻐할 것 같지 않습니다. 일전의
잉어탕도 그냥 내버리지 않았습니까.”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말에 그렇게 했다.

송지언은 사내가 무슨 호의와 애정을 바치든 간에 받고 싶지 않은 게 뻔했다.

헌데 이 사내는 그걸 모를 리 없음에도 헛된 짓을 계속한다.

일선은 그것이 안쓰러워 마음이 쓰였다.

“별로, 무리한 게 아니다. 구미호 말마따나 내 몸뚱이 같은 거야 죽으면 흙이 될 텐데 무슨 상관이냐.”

“그러니, 당신이 죽고 그 시체가 구미호에게 물려가도 불자님이 정말 아무 상관 않으시는 분이라면, 당신 역시


이럴 필요가 있냐는 말이지요. 당신이 아무리 이래 봤자 고마워하지 않으실 것 아닙니까.”

일선은 그 말을 하면서 품에 안았던 여인을 생각했다.

마음 같아선 처음으로 가슴 속에 생겨난 연정을 아낌없이 부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자신만의 만족일까 걱정스러웠다.

존경받는 수절과부가 이런 못나고 능력 없는 파계승의 애정을 받아 무엇 할까.

중인 자신과 관계하면 비밀이 새어나갈 염려가 없으니 그리했을 뿐, 일선은 사모한다 한 그 여인의 말을 믿지
못한 자신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여인에게로 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네 말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고놈은 저 구미호가 아니다.”

사내는 그런 대답으로 잠시 우울한 상념에 잠겨있던 일선을 현실로 끌어냈다.

송지언은 구미호가 아니라는 말에, 일선은 어렵사리 사내가 자신과 송지언은 서로 대가를 주고받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내가 이러고 싶으니까 이러는 것일 뿐이다.”

“당신이 이러는 이유는 상대가 그것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이러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 주면 나야 좋겠지.”

“이런 당신의 행동을 상대가 싫어한대도 말입니까?”

“고놈이 내가 이러는 걸 싫어하는 것은 맞지만…….”

사내는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을 했다.


“난 그런 건 잘 모른다. 고놈이야 내가 뭔 짓을 하던 다 싫다 할 거야. 왜냐하면 그게 고놈이 좋아하는
거거든.”

말을 하고 보니 앞뒤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사내는 머리를 긁적긁적했다.

“아무튼 어떻게 해도 같다면, 내가 좋은 일을 하는 거다. 두 사람 다 싫은 것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좋은 게


낫잖아.”

일선은 자기까지 머리가 헝클어지는 느낌에 미간을 찡그렸다.

어떻게 해도 싫은 관계라면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서로가 붙어 있을 이유가 없다.

헌데 그럼에도 붙어 있는 것은, 송지언이 그것을 속죄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고 소모적일 뿐이다.

가만히 있어도 소모적일진대 이 사내는 그 소모에 소용없는 짓을 더 하고 있다.

몸과 마음을 바쳐서, 홀로 노력하고 있다.

사내는 그저 자기가 좋은 일을 할 뿐이라며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사내가 갖은 애를 써가며 이러는 것은


소용없고 소모적인 관계를 되돌리기 위해서인 것이다.

일선은 속으로 혀를 찼다.

‘당신이 아무리 애를 쓴대도 그분에겐 더 큰 고뇌와 힘겨움을 안겨줄 뿐입니다. 애를 쓰면 쓸수록 그분도
당신에게 더 많은 상처를 줄 것이고, 그럼으로써 더 힘들어지겠지요. 차라리 체념하십시오. 저처럼 모든 것을
단념하고 놓아버리는 것이 당신을 위한 길일 겁니다.’

일선은 그렇게 사내가 아닌 자신을 위로했다.

그곳을 떠나 도망친 것이 자신이나 그녀를 위해 전부 바람직한 일이었노라 그렇게.

허나 일선은 상처받길 두려워하지 않는 사내를, 자신이 부러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 *

사내와 일선은 이윽고 폭포에 다다랐다.

높다란 벼랑을 타고 흘러내리는 폭포의 물줄기는 겨울인지라 얼어붙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고드름으로 쌓은 산과도 같았다.

돌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수정의 산.

그 벼랑 위에 고아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은 소나무는 양옆으로 구불구불한 가지를 늘어트리고 있었고, 그것은 마치 신선을 위한
가마처럼 보였다.

일선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벼랑 위 소나무 아래 흔들리는 두 개의 작은 이파리를


찾아내었다.

“저것인가 보다.”

일선을 아래에 기다리게 하고, 사내는 벼랑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맨손과 맨발로 벼랑을 기어오르는 사내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이기 그지없었다.

벽을 타고 오르는 뱀처럼 능란하게 움직이고 있긴 했지만, 벼랑이 미끄럽게 얼어붙은 데다 차가운 칼바람까지
부니 아차 하고 떨어지는 것은 잠깐일 것이다.

아래조차 차가운 돌덩이뿐이니 떨어지면 크게 다칠 것이라 일선은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사내를 지켜보았다.

마침내 사내는 무사히 벼랑 위에 두 팔을 얹었다.

그가 상체를 걸친 채로 소나무 아래 피어 있는 푸른 풀줄기에 손을 뻗치려는 순간, 갑자기 어디에서 호통이


들려왔다.

- 감히 어디다 손을 대느냐!

일선조차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형체를 볼 수는 없었지만 산삼에 손을 뻗은 사내의 손등을 무언가가 호되게 후려쳤다.

그것 때문에 사내는 벼랑에서 손을 놓았고, 아래로 떨어졌다.

사내는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일선이 외마디 비명을 뱉었다.

11.

송지언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깥을 서성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몸이 좋지 않아 자다 말다 자다 말다 했는데, 내내 사내와 일선스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사내가 일선스님을 끌고 어디론가 갔나 본데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으니 무슨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사내야 들어오든 말든 별 관심 없지만 스님을 끌고 가서 무슨 봉변을 당하게 할까 걱정스러웠다.

밖에 서서 연방 기침을 콜록콜록하던 송지언은 결국 추위를 참지 못하고 다시 움집 안으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요 며칠 사람이 하나 늘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온종일 혼자 있으려니 유독 집안이 휑하고 썰렁했다.

몸이 아파서 그런가 외로움을 타는 것을 느끼며 송지언은 눈을 감았다.

* * *

사내와 일선스님이 돌아온 것은 한밤중이었다.

옅게 잠이 들었던 송지언은, 뜰에서 뭔가 쿵 하는 소리가 나기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간 송지언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뜰에 사내가 쓰러져 있었고, 그를 부축하려다가 같이 넘어진 일선스님이 사내의 아래에서 기어 나오며 소리쳤던
것이다.

“도와주십시오!”

송지언은 달려가 일선의 손을 붙잡고 그를 사내의 밑에서 끌어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이분이 다치셨소!”

일선은 끙끙거리며 사내의 몸을 뒤집으려 했지만 워낙 덩치가 큰 자가 늘어져 있으니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송지언이 일선을 도와야 했다.

사내를 뒤집자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고 어디가 부러지기라도 했는지 다리가 팅팅 부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송지언은 놀랐다.

어디 내놔도 다치진 않을 것 같은 사내였는데, 걱정스럽다기보다는 그냥 이놈도 다치는구나 싶어서 놀랐다.

“벼랑에서 떨어지고 말았지 뭡니까. 무언가 호되게 후려친 것처럼 맥없이 떨어졌습니다. 거리도 너무 먼 데다
소승이 힘이 없어, 다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분께 의지해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힘들 텐데
돌아온다고 무리를 했으니 이를 어쩜 좋습니까.”

송지언은 곧 놀란 감정을 지우고 사내를 살폈다.


“일단 안으로 들입시다.”

완전히 뻗어버린 사내를 집안에 누이는데 두 사람은 악전고투를 해야 했다.

송지언은 아팠던지라 힘을 못 쓰니 일선 혼자서 거의 용을 썼다 보면 될 것이다.

사내는 부러진 다리가 많이 아픈지 기절한 채로도 인상을 쓰며 끙끙 앓고 있었다.

일선은 일단 송지언의 이마 위에 올려놓았던 물수건으로 사내의 깨진 이마를 닦았다.

다친 부위가 이마인지라 피가 많이 흘렀지만 이미 피는 멎어 있었고 상처 자체도 크지 않았다.

문제는 부러진 다리인 듯했다.

일선이 조금 굽은 다리를 펴자 몹시 아픈지 사내가 몸을 푸드득 떨었다.

일선은 부러진 다리를 짚어보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뼈가 그리 깨끗하게 부러진 것이 아니라 낫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잘못 붙으면 평생 다리를 절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내를 살피는 일선을 바라보던 송지언은 대꾸했다.

“그냥 놔두십시오.”

“예?”

놀란 일선이 돌아보자 송지언은 눈썹을 내리깔고 싸늘하게 사내를 바라보았다.

“놔둬도 알아서 낫겠지요.”

“뼈가 잘못 붙으면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해도 자기 탓 아니겠습니까.”

일선은,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이 사내가 왜 이리되었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송지언은 일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가운 눈을 번뜩였다.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고뿔에 걸린 당신을 위해 산삼을 캐 주려다 다친 게 아닙니까! 일전 당신이 그 잉어탕을 쏟아버리지만 않았어도


사내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겁니다!”

“전 그러라고 한 적 없습니다. 다 저 좋아서 한 일 아닙니까. 아니, 어쩌면 제가 싫어하는 짓을 하며 절


괴롭히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절 이런 꼴로 만든 주제에 상냥한 척, 저를 더 나쁘게 만들려는
겁니다. 그러잖아도 무거운 죄책감에 더 큰 죄책감을 짊어지우려는 것이라고요.”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곁에서 보는 제가 이리도 잘 알 수 있는데, 당사자인 당신이


모를 리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정말 사내가 싫다면 그와 이리 사는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속죄요?
일방적으로 상처를 주는 그 행위 말입니까?”

일선의 비난에 송지언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일방적이라뇨! 보십시오, 저놈이 불쌍한 척을 하니까 스님마저 절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시지 않습니까! 제


행동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저놈도 저 못지않게 제게 상처를 주고 있단 말입니다!”

“무엇을요? 사내에게 상처를 주고, 그것으로 본인 역시 상처 입히는 것은 바로 당신이지 않습니까!”

송지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피가 나도록 그것을 질근질근 깨무는 송지언을 보고 일선은 자신이 흥분해서 말이 과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책했다. 사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겹쳐보고 그를 부러워한 나머지 송지언이 야속해져 버렸다. 그래서
사내와 송지언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느끼는 바대로 내뱉었다.

수행을 하는 중이면서 이 속된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래서야 불제자라 할 수 있겠는가.

흥분이 가라앉자 그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제가 말이 지나쳤습니다.”

송지언은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그것이 본심이시지 않습니까.”

“이리 떠들 때가 아니지요. 일단 이분의 다리를 맞추고 부목을 좀 대야겠습니다. 이분을 잡아주시겠습니까?”

송지언은 사내의 머리 쪽으로 가 그의 어깨를 누르고 몸을 고정했다.

일선은 사내의 나머지 다리를 깔고 앉아 발버둥 치지 못하도록 한 다음 다리를 맞추었다.

부서진 뼈를 맞추는 것이 고통스러운지 사내의 입술에서 으으으 하는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일선은 적당한 길이의 작대기를 몇 개 만들어 천을 휘감아 다리를 단단히 고정했고, 사내는 곧 잠이 들었다.

잠시 후, 일선은 송지언과 늦은 저녁을 차려 앉은뱅이 상을 마주 보고 앉았다.

헌데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무척 껄끄러웠다.

송지언의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아무리 자세한 연유를 모른다 해도 사내를 그리 대하는 송지언을
좋게 생각할 수 없었던 일선도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묵묵히 젓가락을 들어 올리며 일선은 말했다.


“저분이 좀 나으실 때까지 며칠 더 머무르며 돌봐드려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말벗이 되어달라며 일선을 청할 때와는 달리 냉랭한 목소리였다.

허나 걷지 못하도록 단속을 제대로 해야 하는데, 송지언 혼자 두면 사내를 돌보지 않을 것이 뻔해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일선은 불편함을 무릅쓰고 며칠을 더 머물기로 마음먹었다.

방해하는 사내도 없건만,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 * *

하루 종일 여러 가지 일을 겪은 터라 곤히 잠든 일선과는 달리, 송지언은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낮에 열이 남아 계속 잤기 때문인 탓도 있지만, 일선이 한 말이 그의 마음을 헤집었기 때문이다.

시뻘겋게 속을 드러내며 갈라지고 굳어 엉망진창이 된 지라, 차마 그것을 건드려 고름을 짜내고 딱지를 벗겨
치료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마음을.

헛된 자기만족.

속죄가 아닌 헛된 자기만족.

송지언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곁에 누운 사내를 바라보았다.

잠든 사내의 얼굴은 마치 어린애같이 무구했다.

자신에게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삶을 주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치 무해해 보였다.

사내는 송지언이 곁으로 돌아온 뒤 무엇도 요구하지 않으며 송지언이 요구하는 것만을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옷을 입고, 곡기를 먹고, 식기를 썼다.

사람으로서 당연한 그 일들이 사내에겐 당연하지 않을 테니 힘들었을 것이다.

허나 짐승이 되기를 강요받았던 자신만큼 괴로울까?

그것은 아닐 테지.

송지언은 얼굴에 잔인한 미소를 떠올렸다.


아직 멀었다.

그 죄를 평생에 걸쳐 갚으려면,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좀 더 고통 주고 좀 더 상처 주고 좀 더……, 더…….

송지언은 저도 모르게 사내의 목으로 손을 뻗쳤다.

사내의 두텁고 굵은 목은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았다.

송지언은 그의 위에 올라타 사내의 목을 두 손에 쥐고 지그시 힘을 주었다.

사내는 깊이 잠들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송지언은 손에 점점 더 힘을 가했다.

그때였다, 사내의 눈이 뜨였다.

사내는 무표정과도 비슷한 묘한 표정으로 송지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어떤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송지언은 움찔, 놀랐으나 손아귀의 힘을 빼지 않았다.

문득 그의 입술이 달싹이는 게 보였다.

“해라.”

사내는 다시 눈을 감았다.

“괜찮다.”

송지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마에서 비지땀이 새어 나왔다.

목을 누른 손아귀에 체중을 실으려는 순간, 그는 언제 이런 살의를 느꼈었는지 기억해냈다.

그 벼랑에서 사내를 보는 순간 이런 증오를 참을 수 없었다.

그를 좀 더 상처 주고 망가트려 자신처럼 파괴하고 싶다는 생각에 자신은……, 자신은…….

송지언은 손에서 힘을 뺐다.

송지언의 손이 목에서 스르륵 풀려나가자, 사내가 눈을 떴다. 그 눈동자가 말하는 것은 명백했다.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송지언이 편해질 수만 있다면 그래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죽는다고 슬퍼할 사람도, 무덤을 만들어 줄 사람도, 그것을 지켜줄 사람도 없을 테니까.
자신이 살아있을 땐 송지언을 곁에 묶어둘 수밖에 없지만, 차라리 죽는다면 그가 떠나도 모를 테니까.

허나 송지언에게 사내의 그런 감정은 중요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당신 때문에 또 살인자가 될 수 없소.”

송지언은 사내의 위에서 내려와 곁에 누웠다.

무표정한 얼굴로 본디 송지언이 있던 허공을 바라보던 사내는, 몸을 돌려 송지언의 등 뒤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쥐어 올려, 그곳에 입 맞추었다.

그 숭배는 너무나 보잘것없이 처량했다.

아침을 사랑하는 새벽처럼, 새벽을 사랑하는 밤처럼.

* * *

다음 날.

밖에서 얼굴을 씻고 들어온 송지언은 아침부터 옥신각신 시끄러운 사내와 일선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걸으시면 안 된 대도요! 지금 다리가 부러졌는데 대체 어딜 가겠다는 겁니까?”

“난 할 일이 많다. 당장 오늘 불을 지필 장작개비도 없지 않냐.”

“그런 건 제가 모아오겠습니다!”

“물도 길어다 놔야 하고, 사냥도 해야 하고, 곡식도 구해 와야 한다.”

“제가 어떻게든 할 테니 제발 가만히 좀 계십시오.”

“너같이 비리비리한 놈에게 뭘 믿고 일을 맡기냐? 내가 하겠다! 내가 해야 한다!”

그때 송지언이 끼어들었다.

“당신은 누워 있으시오.”

사내와 일선의 고개가 돌아가는 가운데 송지언이 말했다.

“내가 할 테니 누우시오.”
“하지만…….”

설마 송지언이 나설 줄은 몰랐던 사내는 놀라서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틈을 타 일선이 얼른 사내를 다시 밀어 눕혔고, 송지언과 자신이 일하겠으니 꼼짝도 하지 말라 신신당부를


했다.

허나 사내는 송지언이 그리하라고 해도, 난처한 얼굴로 계속 걱정했다.

“날씨가 많이 차갑다. 고뿔도 걸렸는데 네가 어찌 그런 일을 하냐.”

“나도 사내요. 팔다리 다 멀쩡하게 붙어 있는데 못할 것은 뭐가 있소. 나도 당신한테 일방적으로 신세만 지는 건


아니란 말이오.”

“그렇지만…….”

“그렇게 떠들 시간 있으면 괜한 일을 하려다 다쳐 사람을 성가시게 만든 것에 대해서나 반성하고 있으시오.”

송지언의 질책에 사내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일단 불을 피울 장작개비를 모으고 물을 길어오려고 송지언과 일선은 밖으로 나갔다.

물통을 들고 눈 덮인 산길을 걸으며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분위기가 어색하고 불편해 그리되었다기보다는, 발이 푹푹 빠지거나 미끄럽게 얼어붙은 산길을 걷는 것이


힘들어서였다.

못까지 가며 일선은 중얼거렸다.

“맨손으로 가는 길도 이리 험한데 물을 길어 가는 것은 더 힘들겠습니다.”

마침내 못에 도착하니 다행히 흐르는 물이라 얼음을 깨트려야 하는 힘겨운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허나 물통 두 개에 물을 채우는 것만으로도 손이 빨갛게 곱아 버렸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가운데 송지언과 일선은 물통을 하나씩 나눠 들고 다시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랜 사문 살이로 이런 노동이 몸에 익은 일선은 그럭저럭 산길을 오를 수 있었으나, 본디 몸 쓰는 일과는 상관이


없는 데다 건강마저 그리 좋지 않은 송지언은 한걸음 옮기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물통이 무거워 팔은 빠질 것 같았고 찬 공기를 들이켜 목이 따가웠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은 발걸음을 붙잡았고, 그나마 디딜만한 바윗돌은 미끄럽기 짝이 없으니 악전고투가 따로


없었다.

결국 움집까지 반도 오지 못해 물통의 물을 절반이나 쏟아버려, 일선이 물통을 빼앗아 들었다.

“그냥 제가 들겠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는 제가 들겠습니다.”


“이러다 집에 도착하면 물통의 물이 하나도 없겠습니다. 제게는 익숙한 일이니 이건 그냥 제가 들기로 하고,
불자님께서는 장작개비를 모아주십시오.”

결국 송지언은 물통을 포기하고, 일선을 먼저 집으로 보낸 뒤 홀로 장작개비를 모았다.

사내는 아무렇게나 금방 그것을 모아왔던 것 같은데, 뜻밖에 적당한 크기의 나뭇가지가 딱히 눈에 보이지 않아
그럭저럭 불을 지필만큼 모으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장작개비를 가지고 움집으로 돌아갔지만, 눈이 온지라 장작개비가 죄 젖어서 불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좁은 움집에 연기만이 가득 차, 결국 불 피우기를 관두고 일선이 젖지 않은 마른 장작개비로 다시 주워와야만


했다.

덕분에 거의 해가 중천에 이르러서야 불을 피우고 아침도 점심도 아닌 식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거기다 송지언이
밥에 물조차 맞추질 못해 그것조차도 일선이 다 해야만 했다.

사내는 밥도 먹지 않고 계속 잠만 잤다.

일선이 억지로 깨워 밥을 몇 술 뜨게 했으나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곧장 다시 누워버렸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곰 같았다.

그날 아침 그들이 먹은 곡기가 집에 있는 곡식의 마지막이었기에, 상을 치우고 나서 두 사람은 사내가 그동안


사냥을 하면서 모아둔 털가죽을 곡식으로 바꾸려 다시 움집을 나섰다.

“털가죽을 어디서 곡식으로 바꾸는지는 아십니까?”

일선의 물음에 송지언은 고개를 저었다.

일선은 그럴 거라 짐작하기는 했지만 예상대로의 대답에 한숨을 억눌렀다.

한숨을 억누른 건 송지언도 마찬가지였다.

송지언이 다시 돌아온 뒤로 사내가 그를 위해 곡식을 가져다 밥을 지어주긴 했지만 어디서 어떻게 그것을
가져왔는지, 고기만 먹던 사내가 밥하는 법은 어찌 배웠는지, 아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송지언은 속죄를 하러 돌아왔다 했지만, 저도 모르게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사내의 곁에 있는 것으로 모든 죄를 탕감하려 했던 것이다.

‘속죄하고자 나는 무슨 노력을 했었나.’

송지언은 걸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안이하다. 자신을 용서하라는 그 말보다, 이러는 내가 더.’


* * *

산을 내려가던 송지언과 일선이 발걸음을 멈춘 것은, 예전 송지언이 달아나려 했던 건너편 산의 길마루였다.

길을 한참 걷는데 그 길마루에 웬 사내 두엇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다닌 지 오래된 길이라, 그들은 서로를 보고 놀랐다.

헌데 그들이 송지언과 일선이 짊어진 털가죽을 보고 먼저 말했다.

“엇, 혹시 곡식을 바꾸려고 온 사람들이오?”

송지언이 별 대꾸가 없어 일선이 먼저 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소이다.”

“평소에 오던 그 사내는 어디 가고 당신들이 온 게요? 거기다 한 사람은 스님이잖소? 나 원. 약속된 날이


오늘인데 오질 않아서 그냥 가려던 참이었소. 누누이 말하지만 이 산에는 구미호가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
위험하단 말이오.”

그래서인지 남자 중 하나는 옆구리에 칼을 차고 있었고, 떠드는 것은 장사치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짊어진


지게에서 짐을 풀어 내리며 계속 투덜거렸다.

“깊은 산 중에 사는지라 애써 여기까지 나와 주는 것인데 제때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곤란하오. 그 사내랑 아는


사이 같으니 담부터는 여기 말고 제발 이 산 밑에서 만나면 안 되겠느냐고 말해주시오. 산 밑에서 만나면 수고를
더니 내가 곡식을 좀 더 많이 바꿔주겠다 말을 해도 도통 들어먹어야지. 그냥 하룻밤 장터에서 묶고 다음 날
돌아가면 저도 편하고, 나도 편할 것을 꼭 해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나더러 예까지 나오라 한단 말이오.”

남자의 속사포 같은 말을 들으며 송지언과 일선은 등에 짊어지고 온 털가죽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남자는 털가죽을 헤집으며 이것 말고 수달이나 족제비 같은 것은 없냐고 또 한바탕 투덜거렸다.

자신들의 지게로 털가죽을 옮겨 실은 그들은, 털가죽의 대가로 곡식 한 자루를 내밀었다.

“여기 있소이다.”

송지언이 아무 생각 없이 받으려는 것을 일선이 중간에서 가로채 자루를 열어보았다.

자루에는 쌀보다 보리와 귀리가 더 많이 섞여 있었고, 그 양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무리 일선이 스님이라 세상 물정에 어둡다고 해도, 저리 수북한 털가죽 한 뭉치의 대가가 고작 이런 것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사내가 산중에 살다 보니 순진한 것을 약아빠진 장사치가 이용해먹고 있는 듯했다.


그럼 되었소? 하고 몸을 돌리려는 장사치를 일선은 붙들었다.

“이보십시오. 어찌 이것만 달랑 주고 그냥 가려는 겁니까.”

“뭐가 어때서 말이오? 평소보다 더 많이 넣었구먼.”

장사치는 뻔뻔스럽게 배짱을 부렸다.

“저리 많은 가죽을 가져가면서 고작 대가가 잡곡 한 자루란 말입니까? 한 달도 채 먹을 수 없는 양인데, 어찌


이리 부당하게 거래를 한단 말이오.”

“아니? 부당하다니! 단 한 명과 거래하려고 칼잡이까지 고용해가며 위험을 무릅쓰고 예까지 찾아오는 게 쉬운


일인 줄 아시오? 여기까지 찾아와 곡식을 가져다주면 고맙다 해야 할 것이지 이 땡중이 나를 사기꾼 취급하려
드네!”

장사치는 도리어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다.

일선은 기가 막혔다.

“저자를 데려온 것도 혼자서는 짊어지고 가기 힘들만큼 많은 털가죽을 받기 때문이잖습니까. 여태까지 찾아오던


사내가 아무것도 모른다 하더라도 장사의 도의가 있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는 거래할 수
없으니 그 사람에게도 당신과 거래하지 말라 하겠습니다. 이 곡식을 돌려줄 테니 털가죽을 돌려주십시오.”

“뭐요?”

장사치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화를 냈다.

이미 끝난 거래니 돌려줄 수 없다느니, 그럼 다음부터 거래는 없을 거라느니, 내가 거래하는 건 사내지 땡중


당신이 아니라느니, 다음부터는 사내와도 거래할 수 없을 거라느니, 장사치와 일선 사이에 한 치 물러섬 없는
치열한 입씨름이 오갔다.

오래도록 절에서 수행만 해온 중이라 할지라도, 일선은 어릴 적 북치기로 속세를 떠돌며 갖은 고생을 했다.
덕분에 아무리 닳고 닳은 장사치라 할지라도 그를 당해내기 어려웠다.

결국, 장사치는 계속 거래를 이어가는 것을 대가로 쌀 한 자루와 소금, 고춧가루와 깨를 더 내놓아야만 했다.

일선은 엄중히 경고했다.

“당신도 그 사내를 봐서 알겠지만 그는 힘이 장삽니다. 아마 당신이 자신을 속였다는 걸 알면 매우 화가 나


잡으려 들 겁니다. 내가 오늘 가서 잘 말해 줄 테니 다시는 그를 속일 생각하지 말고 정당하게 거래하시오.
당신도 이런 털가죽을 이 값으로 어디 가서도 구할 수 없으니까 예까지 오는 게 아닙니까.”

“에잉! 중인 줄 알았더니 완전히 날강도구만! 날강도!”

장사치는 억울하다며 일선을 계속 날강도라 욕했다.

산마루를 넘어 길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도 계속 궁시렁거렸다.

일선은 뭔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며 쌀과 소금 등을 송지언과 나눠 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털가죽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보통 사냥꾼이 잡기 힘들다는 족제비나 여우의 털가죽도 있었단 말입니다.
그리 값진 것을 고작 잡곡 한 자루에 바꿔오다니……참 내. 그동안 그 짐승들을 어디서 다 잡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사내는 본디 곡기를 먹지 않으니 그것은 전부 송지언을 위한 일이었다.

장사치를 예까지 불러들인 것도 밤에 송지언을 혼자 두지 않으려 그리했던 것이고, 장사치가 저리 불평을 하며


무례하게 굴어도 참았던 것 역시 송지언이 먹을 곡식을 위한 것이리라.

일선이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송지언 역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속죄를 하려 한 것은 송지언이었는데, 정작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사내가 전부 다 했다.

송지언이 서로를 상처 입히는 것만을 궁리하며 죽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려 했을 때, 사내는 상처를


치유하고 사람다운 삶을 위해 노력해왔던 것이다.

다시 되돌아 산길을 걸어가면서 송지언은 말이 없었다.

일선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 * *

미처 산을 건너오기 전에 해가 기울었다.

사위가 어두워지자 걸음을 서둘렀지만, 사내에 비하자면 느려터지기 짝이 없는 두 사람의 걸음으로는 서둘러
봤자였다.

산중에서 밤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다친 몸으로 혼자 움집에 있을 사내 때문에 야숙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달이 밝아 걷지 못할 지경은 아니었다.

송지언이 지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어 일선은 잠시 쉬어가자 말했다.

하지만 송지언은 고개를 저으며 도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산의 주인이 처녀 구미호라 들었습니다. 처녀인 데다 도력이 높은 구미호라 밤에 이 산에서 어슬렁거리면


몹시 위험합니다.”

“처, 처녀 구미호? 구미호가 또 있단 말입니까?”

일선은 얼른 입을 다물었지만, 송지언은 반문했다.


“구미호가 또 있다는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그, 그것이…….”

결국 일선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실은 산삼의 위치를 알고자 찾아갔던 것이 구미호라 하자, 송지언이 인상을 구겼다.

“그 구미호가 공짜로 그런 것을 알려줄 리 없습니다. 설마 대가로 스님께 무언가를 요구하기라도 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대신 사내가 죽으면 그 몸을 갖겠다 했습니다. 제가 말려보았지만 어차피 자신이 죽으면
슬퍼할 사람도 없다며 그리한다지 않습니까.”

송지언은 혀를 차며 혼자 중얼거렸다.

“멍청한 짓을.”

달빛이 휘영청 녹지 않은 눈을 비추었다.

눈이 반사하는 달빛 때문에 사위는 밝았고, 세상은 몽환적인 빛으로 물들었다.

뽀드득뽀드득, 발아래 밟히는 눈 소리가 송지언과 일선의 행적을 뒤따랐고, 그들을 내려다보는 밤하늘은 별들의
군무로 어지럽게 반짝였다.

한겨울 밤, 숲을 걷는 것은 꿈결을 걷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점점 짙어지는 밤안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느샌가 사위는 희디흰 안개에 자욱이 잠겼다.

일선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앞서 걷던 송지언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그를 불렀다.

“불자님! 어디 계십니까! 앞에 계신 겁니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메아리처럼 일선의 목소리만이 안갯속을 웅웅 울렸을 뿐이다.

일선은 문득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름도 아닌데 이 겨울에 웬 안개란 말인가?

거기다 안개가 주는 그 축축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안갯속을 걷는다기보다는 마치 자욱한 연기 속을 걷는 듯했다.

“불자님! 불자님!”

목청을 돋우자, 저만치 앞서 누군가가 보였다.


그것이 송지언이라 생각한 일선은 걸음을 빨리해 그 사람에게 다가갔고, 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돌아보았다.

일선의 눈이 커졌다.

* * *

그때 송지언도 짙은 안갯속을 헤매고 있었다.

주위가 온통 안개로 자욱해서 일선 보고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말하려 등 뒤를 돌아보니, 이미 일선은 보이지


않았다.

송지언은 당황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헌데 걸어도 걸어도 일선은 보이지 않고, 걷고 있는 이 길이 아까 왔던 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일선을 불러 봐도 되돌아오는 건 메아리뿐이라, 송지언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두려움을 느끼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었을 뿐인데, 완전히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

자신이 어느 방향에서 걸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송지언은 오도 가도 못하고 한동안 서 있었다.

그때, 저만치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사람 말소리 같았다.

송지언은 일선인가 싶어 그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헌데 들려오는 말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지…어요.’

‘……냐?’

‘네……속, 계속, 함께…….’

저편으로 걸어가는 두 개의 인영을 보고 송지언은 우뚝 섰다.

마치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온몸이 싸해졌다.

저만치 앞서 걷고 있는 두 개의 인영은 크고 작았다.


하나는 사내였고, 하나는……아이였다.

사내의 허벅지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어린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사내의 검지를 움켜쥐고 뭐라 뭐라
재잘거리며 걷고 있었다.

송지언은 홀린 듯이 그들을 따라서 걸어갔다.

주변의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저만치 초가를 얹은 작은 집 한 채가 보였다.

그들이 사는 집인 듯했다.

그 집의 마당에서 비질을 하고 있던 사람이 허리를 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서 희미하지만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나갔다.

미소 짓는 그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이제 오느냐.’

‘아버지!’

무뚝뚝한 인사에 아이가 달려나가 안겼다.

자신의 품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 모습을 보고 사내가 입이 귀에 걸릴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지극히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었다.

‘얼른 들어와서 저녁 먹어라. 밥이 식겠구나.’

‘예!’

그리 말하고 자신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몸을 돌리자, 아이가 다시 사내에게로 달려와 그의 큰 손을


잡아끌었다.

‘아바, 얼른 들어가요.’

그러자 사내가 몸을 숙여 아이에게 속삭였다.

‘아버지한테는 나랑 장에 가서 엿 사 먹었다고 말하면 안 된다. 틀림없이 혼난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아이의 볼을 사내가 꾹 꼬집었다.

아이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송지언은 자신의 두 눈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 안개가 끼나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송지언은 젖어드는 눈을 문질렀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려는 찰나였다. 다시 고개를 빼꼼 내민 아이가, 너무도 예쁘게 생긋 웃어 보였다.

‘아버지, 거기 서서 뭐해요? 어서 이리 오세요.’

송지언은 눈을 깜박여 눈물을 털어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그러자 거기 송지언 말고 누가 더 있냐는 듯 까르륵 웃으며 아이가 손짓했다.

‘어서 이리 오세요.’

* * *

일선을 돌아본 것은 송지언이 아니었다.

바로 일선이 마음에 품었던 그 여인이었다.

여인은 젖은 눈으로 일선을 돌아보고는 옷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어찌 그리 매정하십니까.’

일선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어찌하여 그녀가 이곳에?

그녀는 원망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그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스님을 찾아갔던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제 순결을 바쳐서라도 스님을
붙잡고 싶어서였습니다. 헌데 마음을 돌리지 않으시고 어찌 그리 떠나실 수 있단 말입니까.’

‘미, 미안하오. 난……난 당신이 날 원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소. 수절과부와 파계승이 붙어산다는 손가락질을
달가워하지 않으리라고.’

‘그런 것을 겁냈더라면 스님을 찾아가지도 않았을 겁니다. 너무하시어요, 정말 너무하시어요.’

일선은 자신의 품에 뛰어드는 여인을 안았다.

품에 안기는 나긋한 여인의 몸이 그날 밤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일선의 품 안에서 아름다운 얼굴을 들고 그녀는 교태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젠 저를 떠나지 마셔요.’

일선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아, 이 말을 자신이 얼마나 바랐던가!

어째서 자신은 그리도 용기 없었단 말인가.

적어도 그 새벽, 떠나오기 전 물어보기라도 했어야 하는 것인데.

내가 당신의 곁에 있어도 되겠느냐,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줘도 되겠느냐고.

하지만 일선은 그녀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것이 두려워 묻지 않았다. 거부당할 것이 두려워 그녀의 의사조차
물어보지 않고 거절을 지레짐작하여 떠나왔다.

단 한마디만, 자신을 원하느냐 단 한마디만 물어보았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었을 터인데.

이런 후회를 안고 무슨 진리를 보고 무슨 깨달음을 얻는단 말인가?

일선은 말했다.

‘떠나지 않겠소. 만일 당신이 나를 원한다면, 평생 떠나지 않겠소.’

‘기뻐요.’

여인은 그리 말하며 일선을 끌어안으려 했다.

그렇지만 일선은 그녀의 어깨를 밀어냈다.

의아함이 떠오르는 그 얼굴을 향해, 일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허나 이 말을 들어야 할 것은 네가 아닌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다.”

여인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일선은 외쳤다.

“어서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까!”

* * *

송지언은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고 싶었다.

어쩌면 자신이 얻었을지도 모를 그 풍경 속으로.

허나 송지언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 강보를 벼랑에 던져버렸다.

그런 자신에게 저런 것이 허락될 리 없다.

있을 수 없는 풍경이다.

이것은 거짓이다.

송지언은 뒷걸음질 쳤다.

그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무작정 달아나기 시작했다.

눈물이 쏟아져서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 달렸다.

오래도록 무시하고 외면하려 했던 목소리가 송지언에게 외쳤다.

‘저것이 네가 버린 미래다!’

송지언은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소리쳤다.

“아니다! 난 모른다! 난 모른다!”

그때 누군가가 송지언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송지언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악다구니를 쓰며 발버둥 쳤다.

죄책감과 감당할 수 없는 후회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아주 마음 깊은 곳에서 바라왔을지도 모를 것을 목격하고, 다시는 그것을 얻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고통스러워 참을 수 없었다.

“불자님! 불자님! 정신 차리십시오!”

“놔! 모른다! 모른다!”

“불자님!”

송지언은 자신을 거세게 뒤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에 일선의 얼굴이 보였다.

송지언은 귀를 틀어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뗐다.

“일선스님?”
일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몰라 송지언은 눈물에 젖은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들은 달빛이 비치는 산길에 주저앉아 있었다.

사방에 안개 같은 것은 없었고, 송지언이 본 초가집이나 사내, 그리고 아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웃는 얼굴들이 너무나 생생했다.

“이, 이게 도대체.”

일선이 송지언을 일으켜 세웠다.

“아무래도 이 산에 산다는 구미호의 요사한 술법에 걸려 환상을 본 것 같습니다.”

“환상…….”

“산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을 보여주어 홀리는 것 같습니다. 하마터면 저도 깜박 속을


뻔했지 뭡니까. 허나 이젠 괜찮습니다. 제가 그 요물을 쫓아버렸습니다.”

가장 원하는 것.

일선이 무심코 한 말이 송지언의 가슴을 쿡 찔렀다.

송지언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고는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그렇군요…….”

“괜찮으십니까?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송지언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걸음이 휘청휘청했다.

일선은 도대체 송지언이 환상 속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저러는지 걱정스러웠다.

일선은 계속 괜찮냐고 연거푸 물었지만 송지언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새벽에 가까워서 움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송지언은 넋 빠진 사람처럼 그랬다.

* * *

일선의 걱정이 무색하게, 사내는 나흘 만에 완쾌되었다.


실로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는 회복력이었다.

걸어 다니는 사내를 보고 일선이 기겁을 하다못해 그샐 못 참고 다니냐고 짜증을 내자, 사내는 멀쩡한 다리를
내밀어 보였다.

부기가 가라앉은 것만으로는 알 수 없어, 일선은 다리가 덜 여물었으니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해댔다.

하지만 사내는 자신의 몸은 자신이 잘 안다며 일선의 걱정을 일축했다.

예전에 산영감과 싸울 땐 이보다 더 다쳤는데도 일주일 만에 나았다고, 실은 송지언이 혹시 걱정이라도 해줄까


싶어서 꾀병 좀 피워보았노라 일선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눈도 녹았고 사내도 나았으니, 일선이 움집을 떠날 때가 되었다.

밥덩이를 뭉쳐 간단히 도시락을 싸고 다시 가사를 걸친 일선은 움집을 떠나기 전 송지언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합장을 하며 그리 말하자 송지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어리석은 제 사정으로 인해 스님께 많은 염려를 끼쳐드린 것 같아 송구합니다.”

“고민하고 번뇌하니 사람인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그것 역시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고, 진정


사람다운 삶이라 생각합니다.”

일선은 잠시 염주를 만지작거리다 말을 이었다.

“사실, 천축으로 간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송지언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일선은 그 얼굴을 보고 살짝 웃어 보였다.

“천축으로 간다는 것을 핑계로 한 여인에게서 도망친 것뿐입니다. 여자를 알지 못하고 부처님께 귀의한 뒤 사람이
사람을 향해 가지는 감정을 모른 채 살아왔습니다. 대덕의 법계를 받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나름대로
부처님의 진리에 가까이 다가갔다 생각했으나,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자신을 알 수 없게 돼버렸지요.”

일선은 눈을 감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그렸다.

자신을 사모한다 말하던 그 여인의 얼굴을.

그래, 육욕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나, 적어도 그녀를 품에 안은 일선은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 마음이 진정일진대, 무엇이 두려우랴.

혹여 그 고백이 거짓말이었다 하더라도, 누군가를 연모하고 귀히 여기는 마음을 알았으니 그에 따르는 아픔마저
진리가 아니겠는가?

“그 고백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사람을 보지도 않고 절을 떠나왔습니다만, 사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겁났던 건 나일지도 모릅니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도망친 겁니다. 허나 저 사내를 보며 깨달았습니다. 진리란
것은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는다 해서 얻어지는 것도, 속죄를 하고 고행을 하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요. 자신의 감정과 마음에 최선을 다하고, 진정 행복해지려는 것이 사람의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어떤 아픔이나 고난에도 그 기쁨을 놓지 않는 게 진정한 해탈일 겁니다.”

송지언은 일선을 마주 보고 있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 얼굴은 묘했다.

무표정과도 비슷한 얼굴에 머물러 있는 것은 일상이 되어버린 죄책감과 죄의식, 고통과 아픔이었다.

허나 일선은 그럼에도 사람이기에 버릴 수 없는 아주 작은 희망 한 조각을 그 얼굴에서 보았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그자를, 또한 저를 용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송지언은 다시 시선을 들어 일선을 바라보았다.

“허나 그 말씀만큼은 수긍합니다. 용서받기 위해 속죄한다는 것을요. 먼 훗날에, 아주 먼, 먼 훗날에……,


만일 그런 날이 오게 된다면.”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 저녁 햇살이 내려앉은 초가집. 장에 갔다 돌아오는 사내와 아이. 그리고
그것을 맞이하는 자신…….

그것은 그저 환상일 뿐이었고 그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지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자신뿐이라면


그것만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조차 하기 힘든 미래였지만, 결코 평생 오지 않을 것 같은 때였지만, 그래도 그것이 가능한 날이 오게


된다면…….

눈이 시리도록 파란 겨울 하늘을 가르며 매가 날았다.

올봄에 태어나 갓 비행을 시도한 매일까. 허공으로 자신을 내던진 매의 비행은 위태로워 보였다.

허나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본능으로 매는 날갯짓을 했다.

에이는 칼바람도 눈을 찌르는 햇볕도 매의 비행을 막진 못했다.

매는 날고자 태어났으니까.

본래부터 자신이 지닌 날개였지만 어린 매는 오늘 진정으로 날개를 얻었다.

어린 매가 숲 저편으로 사라지자 송지언과 일선은 고개를 내리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숲의 나뭇가지마다 눈이 녹은 눈부신 이슬방울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겨울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치 온화했다.

길 떠나기 좋은 날씨였다.

일선은 송지언에게 합장을 해 보이며 작별인사를 했다.


“나무아미타불. 부디 불자님의 마음속에 평온함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송지언의 물음에 일선은 미소 지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야지요. 그녀가 원한다면 파계하고 그 사람을 위해 살겠습니다. 허나 파계한다고 해서 자신이


부처님의 진리에서 멀어진다 생각지는 않습니다. 삶 속에서 계속 수행하며 저 나름의 깨달음을 얻어가야겠지요.”

송지언은 마주 웃어 보였다.

“일선스님이시라면 틀림없이 깨달음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송지언은 오래도록 산의 길목에 서서 멀어져가는 일선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자신 나름의 확신을 얻은 일선의 뒷모습은 가볍고 희망차 보였다.

송지언은 그런 일선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일선의 모습이 사라지고도 한참, 그 길목에서 발길을 떼지 못했다.

움집으로 돌아오니 사내는 화덕에서 재를 치우고 집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송지언이 들어가자 사내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내뱉었다.

“까까머리는 갔냐.”

“가셨소.”

“무슨 배웅을 그리 오래 하냐. 또 고뿔 걸리려고.”

투덜거린 사내가 물을 길어오려고 물통을 들었다.

헌데 송지언이 물통 하나를 들어 올렸다.

사내가 왜 저러나 하고 의아하게 바라보자, 송지언이 말했다.

“나도 물 긷는 것을 도와주겠소.”

“엉?”

사내는 자기가 잘못 들었나 했다.

“물 긷는 것을 돕겠다잖소.”

송지언은 사내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사내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로서는 갑자기 송지언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송지언의 시선이 매우 당혹스러웠다.

무슨 말을 해도 그와는 좀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던 그였다.

마주친다 하더라도 그 눈에는 언제나 복잡한 미움과 원망의 감정이 떠돌아 사내도 송지언의 눈을 마주 보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 그를 바라보는 송지언의 눈동자는 맑았다.

그 눈동자가 너무도 평이해서, 사내는 마음이 몹시 이상했다.

한참 넋을 빼고 있던 사내는, 송지언이 먼저 밖으로 나가자 서둘러 쫓아나가 물통을 빼앗아 들었다.

“내, 내가 할 수 있다. 내가 하는 게 더 빨라.”

송지언은 순순히 물통을 내주었지만, 대신 이리 말했다.

“그럼 장작개비는 내가 주워 모으겠소.”

사내가 물을 길어 돌아오니, 송지언은 자신의 말마따나 장작개비를 모아다 놨다.

그것도 일선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운 것인지 젖은 것이 아닌 마른 것으로 제대로 주워왔다.

저녁을 할 때도 사내가 불을 피울 동안 송지언이 쌀을 씻었고, 사내가 고기를 구울 동안 송지언이 밥을 안쳤다.

상을 마주 보고 앉을 때까지도 사내는 벙벙한 기분이었다.

그가 송지언의 눈치로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젓가락을 손에 쥐자, 송지언이 젓가락을 까닥거렸다.

“검지와 중지로 젓가락 하나를 움직이고, 약지로 아래 젓가락을 받친 후에 엄지로 그것을 움직이는 것이오. 잘
보시오, 이렇게 하는 거요.”

언제나 송지언의 젓가락질을 힐끗힐끗 훔쳐보며 흉내 내었을 뿐인데, 사내는 송지언의 설명과 시범에 따라
난생처음으로 젓가락을 올바르게 쥐었다.

천천히 찬을 뜨는 그 움직임을 따라 찬을 떴다.

여전히 젓가락을 제 마음대로 놀릴 수는 없었지만, 어찌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흉내 내는 것보단 나았다.

고깃국을 먹을 때도 사내가 수저질이 서툴러 국물을 질질 흘리자, 송지언이 그릇을 들고 먹으라 말했다.

그릇을 들고 입 가까이서 국물을 떠먹는 게 익숙해지면, 상에 그릇을 내려놓고 먹으면 된다 가르쳐주었다.

오늘의 송지언은 이상했다.

까까머리가 신기한 요술이라도 부려놓고 갔나 싶었다.

그래서 잠자리에 누웠을 때 사내의 가슴은 미친 듯 두근거렸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이미 기대감이라는 것이 눈덩이처럼 부풀었다.


송지언이 재를 단속하고 잠자리에 누우려 하자, 사내는 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밤에 어디 가려는 거요.”

그리 묻는 것조차 너무 이상스러웠다.

사내가 어딜 가든 신경도 쓰지 않는 송지언이었는데.

사내는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네가 이상해서 오늘 밤은 머리카락으로는 만족 못 할 것 같다.”

“…….”

“함께 누우면 못 견디고 널 가질 것 같으니 난 밖에 나가 자겠다.”

송지언은 자리에 누우며 다소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이 한겨울에 밖에서 잘 수 있겠소?”

“그럼 바닥에서 자겠다.”

“스님이 가셔서 잠자리도 치웠는데 그냥 누우시오.”

그 말에 사내는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자리에 누웠다.

꼼짝없이 자리에 누워 움집의 서까래만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사내가 힐끔 곁 눈짓을 하니, 송지언은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사내는 조심스럽게 떨리는 손을 송지언에게로 가져갔다.

사내의 손이 닿기 직전, 송지언은 몸을 돌렸다.

사내의 손은 애꿎은 허공을 스쳤고,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송지언의 머리칼을 쥐었다.

손안에 휘감기는 매끄러운 감촉, 아련한 청포 향기.

사내는 송지언의 머리칼을 입에 넣고 씹으며 중얼거렸다.

“만지고 싶다.”

잡아당기지도 못하고 머리칼만 끊어져라 움켜쥔 채 중얼거렸다.

“널 만지고 싶어 죽을 것만 같다.”

사내는 자신이 이런 소릴 하면 더더욱 만지지 못하게 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허나 그리 말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치솟는 마음 때문에 뱃속이 뜨겁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픔과도 닮은 그 감각이 사내를 괴롭혔다.

송지언을 곁에 둔 이상 평생 이래야 할 테지만, 그가 곁에 없는 것보다 나았다.

사내는 자신이 욕심을 부림으로써 잃어야 했던 것을 생각했다.

그것으로 자신의 고통스러운 욕망을 참아냈다.

사내가 송지언의 머리칼을 휘감은 손가락을 풀어내려던 찰나였다.

“후회하시오?”

나를 곁에 둔 것을 후회하시오?

사내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갈등했다.

- 차라리 나를 놓아주는 것이 나았노라, 그리 매일 매일을 후회하며 상처와 고통뿐인 마음을 이어가시오.

그리 말했던 송지언이었으니, 후회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니라고 해야 할까.

사내는 대답했다.

“미안하다, 후회하지 않는다.”

아마도 송지언이 무슨 짓을 하든 사내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은 것이 아니나,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허면 상처 주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상처 주는 헛된 짓을 관두고 용서받기 위한 진정한 속죄를 하려면,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송지언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고, 사내를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용서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속죄에 한 발 더 다가간 느낌이었다.

마침내 얻을 자유와 평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죄스러우면서, 그것을 위한 속죄라는 말 한마디가 깊고 차가운
우물에 빠진 송지언에게 내려진 실낱같은 끈이었다.

그리고 그 끈의 저편은 바로 사내가 잡고 있다.

우물 밖 단단한 땅이 아닌, 진창에 빠져 자신처럼 필사적으로 그 끈을 잡고 있는 사내가.

송지언은 말했다.

“춥소.”

사내가 숨을 죽이는 소리가 송지언에게까지 들렸다.


송지언은 한 번 더 말했다.

“춥소.”

사내의 떨리는 손이 송지언의 어깨에 와 닿았다.

그 강압적이고 거칠던 손길이 송지언을 조심스레 끌어당겼다.

송지언의 등에 자신의 가슴을 붙이고, 그의 귓전에 코를 부볐다.

사내의 체온은 높았고 그 품은, 뜨거웠다.

* * *

다음 날 아침.

사내는 자신의 품에서 일어나는 송지언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눈처럼 흰 등을 내보이며 앉은 송지언이 가만히 아랫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사내는 눈을 비비고 송지언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왜 그러냐?”

송지언의 얼굴은 다소 멍해 보였다.

아직 새벽이라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탓이라 생각하고 사내는 그를 도로 눕히려 했다.

한데 갑자기 송지언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어젯밤 꿈을 꿨소.”

“꿈?”

꿈을 꾼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벼랑에……, 벼랑에 서 있는데 호랑이가…….”

어젯밤 꿈속에서 송지언은 그 벼랑 위에 서 있었다.

사방엔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바람도 불지 않고 춥지도 않았다.

뽀드득뽀드득 발아래 눈 밟히는 감촉이 선연했지만 발도 시리지 않았다.


벼랑 아래서 무엇이 부르는 것 같아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뭔가가 휙 뛰어올라 그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흰, 눈처럼 희고 큰 호랑이였다.

송지언은 문득 한 손을 들어 얼굴을 묻었다.

이것은 무엇일까.

천벌도 내려주지 않던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는 것일까?

그는 원망스러움을 느꼈다.

도대체 어째서, 나더러 어쩌라고.

또다시 그런 죄를 저지르면 어떡하라고.

자신은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사내를 용서하지도, 자신을 용서하지도, 그런 날이 오기나 할는지도 모르겠는데.

송지언은 기쁘지 않았다.

다시는 오리라 생각지 못한 날이 왔어도 기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뱃속에 깃든 무언가가 예전처럼 끔찍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고마운지도 모르겠다.

꿈에서 호랑이가 나타나 널 잡아먹기라도 했느냐고 물으려던 사내는, 뜬금없이 송지언이 하는 말에 이번엔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 이름이 뭐요.”

그가 부르려고 물은 것이 아니었다.

장차 뱃속에 든 것이 태어나면, 그 아이에겐 사내의 이름을 가르쳐주어야 할 테니까.

대답을 하며 자신을 끌어당긴 사내의 품에 안긴 송지언은 사내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함께 박동하는 뱃속의
소리를 들었다.

12.

하늘이 너무 맑아서 눈이 아팠다.

봄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따스한 하늘이었다.


비치는 햇살을 가린 손이 희게 빛났다.

잠시 그 눈부심에 넋을 놓고 섰는데, 펼친 손가락 사이로 제비가 날아갔다.

벌써 제비가 남쪽에서 돌아올 때가 되었구나 생각하며 송지언은 고개를 내렸다.

헌데 무언가가 불쑥 그의 앞에 디밀어졌다.

산딸기였다.

사내의 커다란 손안에 여린 열매들이 새빨간 얼굴을 하고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새콤한 향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이게 뭐냐는 듯 고개를 드니, 사내가 어려운 얼굴을 하고 송지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괜찮소.”라고 말하며
한걸음 물러서도 꼭 그만치 따라온다.

딸기나무 가시에 긁혀 엉망인 손을 하고 사내는 미간을 모으며 곤란한 표정을 했다.

“오래 두면 뭉개진다.”

“당신이 드시오.”

“난 이런 거 안 먹는다.”

“그런데 왜 딴 거요.”

자신 먹으라고 땄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송지언은 사내의 손안에 담긴 열매를 외면했다.

사내는 열매를 물끄러미 보다가 툭, 말을 뱉었다.

“심을까.”

그리고 송지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심으면 언제 날까.”

“열매가 나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거요.”

“몇 해나 기다려야 할까.”

“나도 모르겠소.”

그냥 몸을 돌려 걷는데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날이 풀려 산책 한번 하겠다는데 왜 굳이 따라와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별말 없이 조용히 따르기만 하는 사내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가셨다.

그를 좀체 혼자 두지 않으려는 사내이니, 사실 별스러운 행동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지언은 아랫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것 때문인가.’

송지언은 임신 사실에 대해 이렇다 말을 하지 않았다.

극렬한 혐오는 없었지만 안도나 기쁨도 느끼지 못했기에 그의 행동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다만 뱃속에 뭐가 있다 생각하니 행동이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 몸 깨끗이 하려고 찬물을 뒤집어쓰는 일도 없어졌고 괜스레 높은 곳에 나가 찬바람을 맞는 일도 없어졌다.

몸이 노곤해져서 눕는 일이 잦아지긴 했지만 표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사내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사내의 그런 태도가 송지언의 마음을 편하게 한 건 사실이었다. 사내가 걱정을 하든 기뻐하든
복잡한 심경일 테니까 말이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고는 하나 아직은 바람이 차가운 탓에 오래 걷기는 힘들었다.

적당히 햇볕을 쬔 것 같아서 송지언은 사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고뿔에 걸릴까 봐 걱정한 사내가 차를 끓여 주었다.

차를 마시면서 보니 열매를 담았던 사내의 손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산딸기를 어쩌지 못하고 한참 동안 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까 뜰에서 뭔가를 하던데, 심기라도 한 것일까?

송지언의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사내가 말했다.

“곧 싹이 날 거다.”

그 소릴 들으니 또 괜스레 맘이 불편했다.

차를 마시고 잠시 앉아있던 송지언은 곧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밤에 꼬박 자고 낮에 또 자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누우라는 사내의 말도 무시하고 앉아서 졸았다.

‘…….’

송지언은 자신의 몸이 들리는 것을 느꼈다.

겨드랑이와 무릎 뒤에 탄탄한 팔을 끼우고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그러다 송지언의 팔이 툭, 하고 떨어지자 움찔 놀란다.

송지언은 잠결에 속으로 생각했다.

‘그냥 깨우지.’
사내는 숨소리마저 죽이고 잠자리에 송지언을 눕혔다.

무릎 뒤에서 조심조심 팔을 빼고, 겨드랑이를 안은 팔을 뺄 차례가 되었는데 움직이는 기척이 없다.

사내는 잠시 그대로 송지언을 안고 있었다.

어쩌면 오래 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내는 가만히 송지언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있다 문득 한숨을 쉬었다.

그 숨결에 속눈썹이 간지러웠다.

송지언이 속눈썹을 떨자, 사내의 입술이 머뭇거리다 떨어져 나갔다.

송지언을 온전히 눕히고 이부자리를 여며주었지만, 그는 좀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송지언이 깰까 봐 겁나는지 더 이상 건드리진 못하고 장승처럼 우뚝 서서 계속 바라만 보고 있었다.

헌데 곁에서 손이 오가는 것보다 그 시선이 더 신경 쓰였다.

송지언은 돌아누워 자리를 비키며 잠결에 중얼거렸다.

“그리 섰지 말고……, 당신도 눕고 싶으면 누우시오.”

한참 후에야 그 곁에 눕는 기척이 느껴졌다.

사내는 곁에 누워 송지언의 등에다 가만히 이마를 대었다.

더 이상의 접촉은 없었지만, 송지언은 깨고 보면 사내의 품에 파묻혀 있을 자신을 알고 있었다.

* * *

뜰의 나무에 제비 한 쌍이 집을 지었다.

어느 날부턴가 지지배배 시끄러워 살펴보았더니, 언제 부화했는지 모를 제비새끼 네 마리가 머리보다 큰 입을


벌리고 짹짹거리고 있었다.

부모들이 제 새끼들을 먹이느라 쉴 새 없이 오갔고, 둥지 아래는 희게 새똥이 쌓여 있었다.

송지언이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사내가 시끄러워 그런다 생각했는지 “치울까?” 하고 물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시끄러운 건 맞지만 바지런히 사는 제비들이 보기 좋았다.


짝을 맞아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고 겨울이면 남쪽으로 돌아가는, 그네들의 당연한 삶이 부러웠다.

새끼가 네 마리나 되다 보니 먹이를 고르게 먹이지 못했는데, 송지언은 그중에서 제일 큰놈만 먹이를 받아먹어
다른 새끼들이 배를 곯지나 않을까 괜한 걱정을 하기도 했다.

한날은, 새끼들이 짹짹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날카롭게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가보았더니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나무를 오르고 있었다.

둥지의 새끼를 노리고 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오르는데 애가 탄 제비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며 난리였다.

송지언이 나뭇가지를 가져와 구렁이를 나무 아래로 떨어트려 쫓아버리자 사내가 그것을 몹시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그러냐?”

“왜냐니, 새끼들이 잡아먹히면 가엾잖소. 제 부모들이 저리 애를 쓰는데.”

“구렁이도 가엾지 않나.”

사내의 대꾸에 송지언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갓 허물을 벗은 듯 비늘이 매끄러운 구렁이었으니, 몹시 배가


고팠을 것이다.

먹고 먹히는 것이 당연한 자연에서 구렁이가 제 식사를 못 하도록 방해한 것은 안 좋은 처사였는지도 모른다.

송지언은 중얼중얼 변명했다.

“그래도 일단 우리 집 뜰에 사는 것은 제비들이고……. 당신은 옛날이야기도 모르오. 제비는 은혜 갚는


동물이라잖소.”

“은혜를 갚아?”

되묻는 사내에게 송지언은 박씨를 물어다 준 제비 이야기며 종을 친 제비 이야기 같은 것을 해주었다.

사내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이렇게 물었다.

“정말 제비가 그러냐.”

“설마 정말 그러겠소.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오.”

헌데도 사내는 혹시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 주려나 싶어 한 며칠간은 괜히 나무 밑을 서성거렸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이번엔 구렁이를 쫓아내는 바람에 대대로 저주받은 집안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또 한 며칠 잠을
설쳤다.

그렇게 송지언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은 이후 사내는 심심한 밤이면 종종 그것을 졸랐다.

송지언은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옛날이야기냐며 타박을 놓고 모른 척했지만, 사내랑 단둘인데 멀뚱히 앉아 서로를
외면하기도 힘이 들고, 그렇다고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가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많은 이야기를 아는 것도 아니고 내용이 가물가물한 게 많아 송지언의 옛날이야기는 엉성했다. 하지만 사내는


그것을 말하는 송지언의 낭랑한 목소리만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하루는, 말을 하던 도중에 뒷이야기가 정확히 생각나지 않았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였는데, 선녀가 아이 셋을 데리고 하늘나라로 올라간 것까지는 기억나거늘 그 뒤에 있는


나무꾼 이야기가 정확하지 않았다.

송지언은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으면 으레 그렇듯 대충 결말을 얼버무리고 잠자리에 누우려 했다.

헌데 사내가 송지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그래서 그 선녀와 나무꾼은 어찌 되었냐?”

“다음에 이야기해주겠소.”

“말해봐라, 궁금하다. 아이를 셋 낳고 두 사람은 잘살았냐?”

평소엔 이야기가 대충 끝나도 뒤를 궁금해하지 않던 사내였으나, 오늘따라 유독 결말을 채근했다.

송지언은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자식이 셋이나 생겼으니 이제 선녀가 떠나지 않으리라 생각한 나무꾼은, 어느 날 선녀가 딱 한 번만 날개옷을
입어보고 싶다고 애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말았소. 선녀는 날개옷을 입자마자 아이들을 전부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고 하오. 이 뒤에 이야기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잘 나지 않는구려.”

“돌아갔단 말이냐? 자식까지 전부 데리고?”

사내의 반문에 송지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고 알고 있소.”

“그럼 나무꾼은 어떻게 되었냐?”

“그건 잘 모르겠소.”

갑자기 사내가 송지언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콱 주었다.

“재미없는 이야기다.”

실컷 들려 달라 해놓고 재미없다니.

살짝 어이가 없었지만 송지언은 그러려니 하고 누웠다.

사내는 한참 동안 말없이 송지언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답답해서 그만 좀 놓아 달라 하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사내가 갑자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송지언의 양손을
붙잡아 일으켜 앉혔다.

“뭐 하는 거요.”

사내는 말없이 송지언의 왼손을 당겨, 입술을 눌렀다.


사내의 입술은 화인을 찍듯 뜨거웠다.

다시 오른손을 당겨, 입술을 꾹 누른다.

그리고 그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부빈다.

송지언의 손끝에 사내의 떨리는 속눈썹이 스쳤다.

송지언은 묵묵히,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애달파하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놓아주시오.”

사내는 눈을 내리깐 채로 말없이 송지언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의 발 아래로 내려가 발등에 입 맞추었다.

송지언의 눈이 조금 커졌고, 얼굴이 곧 화톳불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왜 이러는 거요.”

송지언은 발을 빼려고 했지만, 발목을 두 손으로 그러쥔 사내가 그것을 놓아주지 않았다. 복사뼈에 입 맞추며
발등을 핥더니, 발가락을 입 안에 품었다.

송지언은 깜짝 놀라 무릎을 움츠렸지만 움츠린 만큼 사내도 따라왔다.

아무리 씻었다고는 하나 흙바닥에서 생활하는지라 흙이 묻은 발인데, 사내는 아랑곳 않고 혀를 내밀어 샅샅이


핥았다. 그리고 발가락 하나하나를 제 입에 소중한 듯 품었다.

발에서 느껴지는 그 축축함과 간지러움, 뜨거움과 안타까움에 송지언은 이부자리를 그러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사내의 입술이 얇은 피부 위를 스칠 때마다 온몸에 힘이 바싹바싹 들어가고 식은땀이 났다.

사내가 그를 벌거벗기고 농락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보다 더하면 더 했지 부끄럽기가 덜하지 않았다.

송지언은 자신의 발을 입으로 씻어 내리는 사내를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꾹 감았다.

“놓아주시오.”

목소리가 떨렸다.

“놓아……주시오.”

송지언의 목소리가 울 듯 애걸하자, 마침내 사내는 송지언의 발을 놓아줬다. 그러고는 툭 하니 마음속에 고여


있던 생각을 뱉어냈다.

“나무꾼이 어리석었던 거다. 나라면 아예 그 날개옷을 찢어버렸을 텐데.”

그제야 송지언은 사내가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듣고 불안을 느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작 그런 이야기 때문에 이랬던 것인가.


송지언은 침울한 표정을 한 사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건 그저 옛날이야기일 뿐이오.”

“그럼 넌 어디 안 가는 거겠지?”

송지언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사내는 대답을 졸랐다.

“날개옷이 몇 벌이나 있다고 해도, 안 가는 거겠지?”

“곁에 있겠다고 하지 않았소. 이제 와 내가 어딜 간단 말이오?”

“거짓말 마라.”

송지언은 자신의 다리를 콱 끌어안는 억센 팔을 느꼈다.

도드라진 무릎뼈에 코를 묻고 그는 중얼거렸다.

“넌 날개옷이 있으면 그냥 날아가 버릴 거다.”

송지언은 당신 역시 날개옷 같은 건 남겨둘 위인이 아니잖느냐고 대답하려다 말았다.

실제 있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말다툼하는 것이 우습게 느껴져서였다.

하지만 자신이 여전히 사내를 보고 편한 마음으로 웃지 못하듯, 사내 역시 자신이 떠날까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자신이 그의 곁에 머무는 것이 당연하지도, 쉬운 일도 아님을 사내가 알아주는 것 같아서였다.

* * *

날씨가 더워지면서 부쩍 입맛이 없고 몸에 기운이 빠졌다.

처음엔 더위와 뱃속에 든 것 때문이려니 하고 예사롭게 생각했다.

허나 사내는 자꾸 살이 빠지고 쉬이 지치며 자는 시간이 늘어나는 송지언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살폈다.

하루는 열이 올랐다. 한여름에 웬 고뿔인가 여상스럽게 생각하며 누워 한잠 푹 자고 일어나면 좀 낫겠거니 하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오후 무렵 잠들었다 깨 보니 주변이 어둑한 게 해가 진 것 같았다.

내가 늦게까지 잤나 하고 고개를 돌리자, 자신의 손을 붙잡은 사내가 침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게 보였다.

처음엔 사내가 조는 줄 알고 사내의 손에서 가만히 손을 빼려던 송지언은 갑자기 사내가 몸을 움찔 떠는 걸


느꼈다. 그래서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워서 주무시오.”

사내는 빠져나가려는 송지언의 손을 도로 꼭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헌데 그 표정이 매우 이상했다.

걱정과 우려, 안도와 기쁨이 마구 범벅된 표정이었다.

“왜 그런 표정을 하는 거요?”

송지언이 묻자, 사내가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손을 붙잡은 사내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네가……, 사흘이나 잤다.”

송지언은 눈을 크게 떴다.

사흘이라니.

자신의 느낌으로는 잠시 낮잠을 잤을 뿐인데.

“사흘이나?”

송지언마저 놀라는 얼굴을 하자 사내가 표정을 무너트렸다.

그는 고개를 숙여 송지언의 손에 이마를 댔다.

그리고 사흘 동안의 걱정과 초조함을 담아 말했다.

“놀랐다.”

단순한 고뿔로 사흘 동안이나 정신을 잃었을 리 없다.

송지언은 자신의 몸에 이상을 느꼈지만 사내에게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고뿔이 심했던 모양이라고 주워섬기고는 사흘 동안 땀에 젖어 있던 몸을 씻고 식사를 했다.

사내는 그런 송지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살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송지언의 어디가 잘못되기라도 한 건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후, 며칠이 지나도록 특별한 문제 없이 멀쩡해서 송지언 역시 정말 그땐 고뿔이 심해 열이 내리느라 그랬던


거라 생각했다.

허나 열흘이 지났을 때, 평소와 같이 잠자리에 누웠던 송지언은 다시 사흘 만에 깨어났다.

아니, 정확히는 사흘 만에 잠시 깨었지만 정신이 몽롱하고 졸음이 쏟아져 곧장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다시


사흘이 지난 후에야 제정신을 차렸다.

송지언이 무의식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한잠도 자지 못하고 그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리던 사내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퀭해진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냐. 어디 아프냐?”

묻는다고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고뿔이 아닌 것 같다고만 말할 수밖엔.

그저 열이 나 몸이 노곤하여 누우면 잠이 쏟아졌고 그럼, 열이 내릴 때까지 깨어나지 못했다.

이유를 알지 못하니 치료조차 쉽지 않아, 사내가 산에서 온갖 것을 구해다 먹여도 별 효과가 없었다.

이윽고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드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깨어 있을 때조차 기운이 없어 누워 있거나, 먹는 것도 시원찮아 아무래도 병에 걸린 듯했다.

사실, 딱히 무슨 병이 있는 게 아니더라도 남자의 몸으로 아기를 가졌으니 그 몸이 온전할 수 없었다.

구미호의 동굴에서 끔찍한 일을 당해 앓아눕고 난 뒤로 계속 건강이 좋지 않던 송지언이었는데, 뱃속에 생긴 것


때문에 완전히 나빠진 듯했다.

송지언은 그런 몸 상태에 대해 짐작했지만 사내에게 말해봤자 낫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원망만 하게 될 것


같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덕택에 속이 타고 미칠 것만 같은 것은 사내였다.

* * *

사내는 묵묵히 폭포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얼어붙어 있었던 지난겨울과 달리 무수한 물줄기가 끊임없이 아래로 떨어져 작은 용소를 부수고 있었다.

그 벼랑 위에는 가지가 멋들어지게 펼쳐진 소나무 아래 빨간 열매를 매단 산삼이 있었다.

사내는 폭포의 벼랑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물이 튀겨 사내의 얼굴과 가슴을 적시고 손을 미끄럽게 만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떨어져 다친 기억이 있음에도 그는 주의 깊고 날렵하게 튀어나온 바위를 붙잡고 위로 기어 올라갔다.

허나 전처럼 벼랑 위에 손을 걸치자마자 산삼으로 손을 뻗치진 않았다.


이 산삼엔 주인이 있는 것이다.

사내가 절벽 위에 올라 고개를 들자, 소나무에 무언가가 앉아있었다.

그것은 커다란 학처럼 보였다.

하늘하늘 날리는 흰 도포 때문인지 모른다.

아랫부분만 검게 물든 특이한 머리칼 때문인지도 모르고, 붉은 이마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소나무에 앉은 학처럼 보이는 여인네가 부채를 부치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똑같이 흰옷을 입었음에도 늙은 구미호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여인네는 사내를 보더니 미간을 팍 구기고 말했다.

“또 너냐.”

여인네는 사내에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산삼을 달라는 말을 하러 온 거라면 소용없다. 요물 따위와 거래하는 놈과는 말도 섞기 싫다.”

사내는 툭 내뱉었다.

“뭘 원하냐.”

“뭐?”

여인네가 눈을 치뜨고 되묻자 사내는 묵묵히 말했다.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마. 시체든, 산 살덩이든, 원하는 대로 주마.”

“내가 그런 것이 왜 필요하단 말이냐? 난 네게 원하는 것이 없다.”

눈을 가늘게 뜬 여인네는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네가 이러는 이유는 필경, 네가 구미호와 거래하게 된 이유 때문 아니냐? 네가 들인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온


산에 짜하다. 허나 넌 이걸 알아야 한다. 산삼은 만병통치약이 아니야. 제 명이 다해 죽는 거라면 세상의 어떤
영약도 소용없을 거다. 그리고 애초에 이런 결과쯤은 각오하고 있었어야지. 요물과 거래할 때에는 반드시 뒤탈이
따른다.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 온전치 않음을 알고 있으면서 왜 그랬지?”

사내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너 같은 것들은 모른다.”

“하! 그렇겠지. 알고 싶지도 않다. 아무튼 내게 산삼을 청하는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내어주지도 않을 거고,
이것을 가지고 가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까. 산삼은 그저 기운을 돋우는 영약일 뿐이지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야. 산삼이 만병통치약이라면 세상에 병들어 죽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사내는 여인네의 말이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송지언의 병이 무언가 몸에 좋은 것을 먹는다고 해서 나을 게 아니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인네의 말마따나 이치를 거스르면 반드시 대가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송지언을 가지고픈 욕심에 일을
치른 자신의 탓이었다.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받았으면서도, 곁에 둘 수 없고 만질 수 없다면 그러는 게 낫다는 생각에


그리했다.

그 덕에 영영 그의 마음을 잃고, 두 눈으로 혹독한 대가를 확인하지 않았던가.

송지언이 돌아온 뒤로는, 그가 계속 자신을 미워해도 좋으니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생각했다.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지켜 가려 했다.

헌데 일선이 다녀간 뒤로 무엇인가가 달라진 송지언이었다.

여전히 자신을 보고 웃지도,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지만 독을 품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이 없어졌다.

그것조차 너무 기뻐 이것이 꿈인가 생신가, 평생토록 이러기만 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사내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여인네가 느낄 리 없는 동정심이라도 느꼈는지 말했다.

“그리 방도를 모르겠다면 의원에게라도 보여 봐라. 그것은 사람이니 사람이 낫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 *

곽가의 시공이라는 자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된 사람이었다.

의원이던 아버지 밑에서 어릴 적부터 의술을 배운 그는, 어려운 사람에게도 아낌없이 의술을 베풀고 재산을 쪼개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을 지어주던 제 아비를 존경했다.

치료비조차 제대로 받지 않아,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웠지만 상관없었다. 아버지에게 치료를 받고자 먼 길


마다하고 많은 환자가 모여들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니, 그것이 자랑스럽고 보기 좋아 자신도 그리 살리라
다짐하고 의술에 매진했다.

그런 의욕과 환경에 있다 보니 병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아, 지금은 고을 너머까지 용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의원이 되었다.

그에게 치료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마당과 대문을 넘어 마을 입구까지 줄을 이룰 지경이었다.

덕분에 제대로 자고 먹고 할 시간조차 없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업이라 생각하며 곽시공은 성심껏 환자들을
돌보았다.

환자를 받을 때도 돈 없고 가난한 자를 우선시해, 아무리 많은 돈을 준대도 양반이나 귀인을 우대하는 법이


없었다.
한때 영의정을 지냈던 대감이 그를 청했을 때도, 그를 모시러 온 하인에게 “줄을 서시라고 전해드리시오.”라고
말한 그의 일화는 유명했다.

그에게 치료를 받으려면 노비에서 양반까지 전부 줄을 서야 하는 것이 그의 소신이고 신념이었다.

허나 그의 그런 신념도 깨지고 만 날이 왔는데, 그의 신념을 무너트린 것은 어느 댁 대감도 나라님도 아닌 웬


산적 같은 사내였다.

여름이 지나가려는 어느 날이었다.

가을의 초입에서 날씨가 조금 선선해지자, 곽시공은 더위에 시달리던 환자들이 한결 편해지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환자들을 돌보기가 편해지겠다는 달가운 심정으로 길어진 밤을 맞이했다.

이윽고 지치고 늙은 몸을 씻고 자리에 눕자, 고단했던 탓인지 곧장 곯아떨어졌다.

그렇게 얼마를 잤을까.

잠결에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고 눈을 뜬 곽시공은 외마디 비명을 쳤다.

어두운 방의 허공에서 두 개의 번쩍거리는 안광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잔광을 남기며 자신을 콱 덮쳐들어 곽시공은 버둥거렸다.

허나 버둥거림도 잠시.

무언가가 옷깃을 콱 틀어잡더니 곽시공을 종잇장처럼 끌고 갔다.

“어억!”

마당으로 던져져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그것이 다시 자신을 들어 올리더니 날쌔게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담을 넘어 허공으로 뛰어올라 모여 있는 마을의 지붕을 밟고 내달렸다.

그 움직임이 바람처럼 날래고 가벼워 곽시공은 자신이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나 했다.

허나 바람 같다는 것은 자신을 끌고 가는 자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고, 솟구쳤다 뛰어내리며 오르내리는데 늙은


곽시공은 몇 번이나 숨이 멎을 뻔했다.

마을을 한달음에 가로질러 징검다리가 놓인 개천을 넘고 숲으로 들어간 무엇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수풀을
헤치고 능선을 훌쩍 넘어 고갯길을 가로지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산 몇 개를 넘었다.

곽시공이 자신을 납치한 자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은 동이 훤히 터 목적지에 다다라 그자가 발걸음을
멈췄을 때였다.

큰 바윗돌이 있는 동그란 뜰에 멈춰 선 사내는 곽시공을 던지듯 내려놓았고, 채 어지럼증을 달래기도 전에 뜰을


끼고 있는 움집으로 그를 끌고 가려 했다.

그제야 정신이 든 곽시공은 사내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사내가 홱 돌아보자, 그 무시무시한 시선에 곽시공의 간담이 졸아들었다.

매우 기운이 장대하면서도 사나운 사내였다.

벌거벗다시피 한 몸에는 무수한 흉터가 아로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로 강력한 힘을 내포하고 있는 근육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야만스럽기까지 한 생명력이 온몸에 흘렀다.

의원으로서 무수한 사람을 봐온 곽시공으로서도 처음 보는 대단한 남자였다.

비록 압도적인 풍채에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그는 곧 자신을 찾았다. 그리고 소신을 지켜온 나이 든 사람의


옹고집으로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오. 일언반구도 없이 이런 곳으로 끌고 오다니. 만일 급한 환자가 있다 하더라도 안 될


말이오. 급한 사정이 당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거늘.”

곽시공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는지 그는 다시 손을 뻗어 다짜고짜 멱살을 잡고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곽시공은 짚단처럼 끌려갔다.

무슨 이런 무례한 자가 다 있나 기가 막혔지만 그가 이러는 이유를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어둑한 움집 안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허나 기운이 넘쳐 보이는 사내와 달리 그 사람은 눈으로 보지 않으면 기척을 못 느낄 정도로 매우 기운이


미약했다.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낮게 호흡하며 죽은 듯 잠든 그 모습은 척 봐도 병중인 사람의 모습이었다.

사내는 곽시공의 멱살을 놓고 누워있는 사람에게로 등을 떠밀었다.

“아프다.”

이리 깊은 산중에서 병에 걸렸으니 자신을 데려온 건가 싶었다. 마땅히 누워있는 사람이 안쓰러웠지만, 곽시공은
사내에게 납치당하는 바람에 오늘 하루 종일 보지 못할 수많은 환자를 생각했다.

제멋대로 행동한 사내 때문에 멀리서 찾아온 환자들이 고통 속에서 하루를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기에 곽시공은 몸을 돌렸다.

“치료를 받고 싶거들랑 이 사람을 데리고 내 집으로 찾아와 줄을 서시오.”

사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당장에라도 곽시공을 후려칠 듯 주먹을 콱 쥔 사내는 이를 드러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보면 되잖냐.”
“모든 일에는 순서와 차례가 있는 법. 아무리 아픈 사람 때문이라고는 하나 당신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끌려
왔으니 다른 환자들이 또 하루를 기다려야 되지 않소. 나는 이런 식으로는 진료를 보지 않소이다. 나를 돌려보내
주고 이 사람을 데리고 오시오.”

사내가 이를 우득 갈더니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이 움집의 벽에 부딪혀 꿍, 하는 소리를 냈고, 그러자 벽이 울리며 서까래가 흔들거렸다. 동시에 짚으로
엮은 지붕에서 지푸라기가 푸석푸석 떨어졌다.

사내는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곽시공을 쏘아보다 입을 열었다.

“부탁이다.”

험악한 말이 쏟아져 나올 거라 생각했던 곽시공은 눈을 크게 떴다.

사내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주먹을 펴고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바닥을 짚은 사내의 손에 힘줄이 돋았다 말았다 했다.

“부탁이다.”

곽시공은 한숨을 쉬었다.

제 성을 억누르고 이토록 간곡히 부탁하는데 계속 거절하기 어려웠다.

예외를 두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끌려 왔으니 일단 보기나 하자는 생각에 곽시공은 누워있는
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색을 보니 오랫동안 열에 시달린 듯 창백했고 식은땀을 잔뜩 흘리고 있었다.

곽시공은 남자의 맥을 짚어보기 전에 물었다.

“어쩌다 이리된 거요.”

사내는 주저하다 대꾸했다.

“모른다. 여름 들어 갑자기 이런다. 열이 올라 자리에 누우면 좀체 깨질 못한다. 이제는 정신이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다.”

곽시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의 맥을 짚었다.

한참을 짚었다.

점점 곽시공의 얼굴에 곤혹스러움과 당혹감이 번져나갔다.

맥이 아주 이상했다. 회임한 여인네의 것과 비슷한 맥이 잡히는데, 누운 것은 아무리 곱다 한들 사내인지라


곽시공은 자신이 맥을 잘못 짚은 것인가 의심마저 들었다.

손목을 놓고 이불을 열어 배를 여기저기 짚어보니, 역시나 회임한 여인의 그것과 비슷하긴 한데 뭔가 달랐다.

속에서 장기가 뒤틀려 울혈이 모인 듯도 한데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아, 대체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병의 원인도 뚜렷지 않고 치료방법도 모르는데 남자의 기운이 매우 쇠하여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곽시공이 손을 치우고 다시 이불을 덮자, 초조함에 몸이 달은 사내가 물었다.

“어떠냐? 어찌하면 낫겠느냐?”

곽시공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다 말하는 것이 자존심도 상하고, 사내를 좌절시키는 말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모르겠소. 맥을 짚어 봐도 모르겠고, 몸을 살펴도 모르겠으니 도리가 없소. 몸 안에 울혈이 쌓여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아 아픈 것 같긴 한데, 이상한 맥이 잡히고 장기가 어찌 뒤틀렸는지 알 수 없으니 침을 어찌 놔야 할지도
막막하오. 이상한 말이지만 회임한 여인네 같은 맥이 잡히니 함부로 약을 쓰기도 그렇소.”

“그게 무슨 소리냐.”

“한마디로 나로선 방법이 없다는 거요.”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곽시공은 누운 사람을 내려다보며 침울하게 말했다.

“거기다 기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오.”

사내의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송지언이 있다는 것도 잊고 고성을 내질렀다.

놀란 곽시공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사내는 눈앞의 곽시공을 때려죽이지도 못하고 눈을 시뻘겋게 붉혔다.

용하다는 의원이라 해서 애써 잡아왔더니, 한다는 소리가 모르쇠뿐이다.

이자가 멍청해서 그런 모양이다 마구 화를 내고 싶었지만, 진짜 이유를 알고 있는 사내는 그럴 수 없었다.

욕심의 대가는 아직 다 치르지 못한 것인가.

눈앞이 캄캄했다.

곽시공은 제 분과 슬픔을 참지 못해 고함을 친 사내가, 망연한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것을 보고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무표정한 그 얼굴에서 지독한 아픔이 배어 나와 곽시공은 자신이 큰 잘못이라도 한 것만 같았다.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위안해 봐도, 사내의 망연한 얼굴이 의원이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했다.
그동안 숱한 환자들을 봐왔지만 모든 환자를 고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환자는 치료의 때를 놓쳐서, 어떤 환자는 약재를 구하지 못해서, 어떤 환자는 병을 이겨내지 못해서
죽어갔다.

그때마다 일일이 슬퍼하며 자책하기엔 자신은 돌봐야 할 환자들이 더 많았다.

허나 병명조차 알 수 없는 환자라니. 곽시공은 큰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그분이 떠오른 것은.

“이보오.”

곽시공이 불러 봐도 사내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손을 뻗어 어깨를 흔들흔들해도, 허수아비처럼 그냥 흔들렸다.

누운 사람 따라 그냥 죽어버리기라도 할 듯, 넘치던 그 기운은 다 어딜 가고 혼이 빠진 사람 같았다.

“이보오. 내가 혹시나 하여 말해보는 것인데, 혹시 새의라는 분을 들어보셨소?”

사내는 답이 없었다.

곽시공의 말을 듣고는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곽시공은 계속 사내를 흔들며 말했다.

“그분이 환생한 화타라 불리시는 대단한 명의요. 보통 사람이 아니라 도인이신데…….”

대단한 명의라는 말에 사내의 눈빛이 돌아왔다.

사내는 자신의 어깨를 짚은 곽시공을 올려다보았다.

“명의라고?”

“그렇소. 사실 의원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라, 헛된 희망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한 번도 말해본


적은 없지만 사실 내가 딱 한 번 그분을 실제로 뵌 일이 있다오.”

그것은 곽시공이 어릴 때였다.

곽시공의 부친이 의원을 운영하고 있던 시절, 부친이 천한 자부터 가난한 자까지 가리지 않고 병을 봐준다는 말에
마을 입구까지 환자가 길게 늘어섰는데, 그때 마침 길 지나가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 부친을 찾아와 다짜고짜
꾸지람을 늘어놓았다.

‘네놈이 정신 나간 게 아니냐. 의원이라는 것이 측은지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거늘. 저 많은 환자를 무슨 수로


다 받아주려는가? 지금처럼 이리하다간 일찍 명이 닳고 만다.’

놀랍게도 그 사람은 수염조차 나지 않은 어린 소년이었다.

허나 그 사람의 범상치 않음을 알아본 부친은 어리다 하여 무시하지 않고 답했다.


‘제 한 몸 보신하려면 의원이라는 업을 택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제 명이 아니라 어찌하면 좀
더 많은 환자를 돌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쯧쯔,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정당한 대가를 받고 환자를 돌보는 제대로 된 의원들이 욕을 먹는 거다.


어리석구나.’

허나 소년은 며칠 동안 머무르며 부친이 고치지 못하던 병의 치료법과 알려지지 않은 약초들의 효능을 일러주어
부친에게 큰 도움을 줬다.

그리고 왔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그때 그자의 이름이 바로 새의였다.

“너보다 더 용하냐?”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명의셨소. 부친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분을 억지로라도 붙들어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배웠어야 한다고 한탄하셨을 정도니 말이오. 혹 그분이라면 이 사람의 병명을 알고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르오.”

“그놈은 어디 가면 찾을 수 있냐?”

곽시공은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문제요. 정체를 몰라 인적을 찾을 수 없으니, 가끔 홀연히 나타나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의원들에게 가르침을 내려준다고는 하는데 종적이 묘연하다오.”

사내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제아무리 명의라도 이놈을 보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냐.”

허나 곧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아니, 아니야. 찾고야 말 거다.”

파리한 송지언의 얼굴을 보며, 확언처럼 되뇌었다.

“찾고야 말 거다.”

* * *

곽시공은 사내에게 자신도 새의의 행방을 알아봐 주겠노라 약조했다. 그리고 자신을 마을로 데려다준 사내에게
열을 내리는 약재를 쥐여주고 달여 먹이라 했다.
이것을 다 먹이고 나면 다시 찾아와 약재를 받아가며 새의의 행방을 물으라고 하자, 사내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고맙다.”

다시 돌아와 정신없이 환자들을 돌보는 와중에, 곽시공은 각지의 유명한 의원들에게 서찰을 써 새의의 행방을
물어보았다.

자신도 새의의 행방이 궁금할뿐더러, 산 중에 그리 원인 모를 병으로 앓아누워있는 사람이 신경 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이 죽으면 따라 죽을 듯 크게 상심하던 사내의 모습이 밟혀 마음이 쓰였다.

돌아오는 답장들에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어, 곽시공은 자신이 괜한 말로 사내의 기대감만 부풀려 놓은 것이
아닌가 적잖게 걱정했다.

이대로 새의를 찾지 못하면 그 좌절과 실망감이 배로 클 터인데 어쩌면 좋단 말인가.

허나 다행히도, 저어기 팔도의 끝 산골짝에서 몇 달 만에 돌아온 답신에 좋은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좋은 이야기라고 만은 할 수 없는 소식이었지만 그래도 새의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 한 가닥은 찾은 셈이다.

헌데 사내가 털가죽과 고기를 한 아름 갖다 주고 약재를 받아간 지 며칠 되지 않은지라, 곽시공은 이 소식을 어찌


전하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사람을 보내 알리기도 멀고 사실 그곳이 어딘지도 잘 알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런데 대체 어찌 알았는지 서신이 도착한 다음 날, 별일도 없는데 사내가 곽시공을 만나러 왔다.

* * *

늦은 밤.

간신히 환자들을 전부 보고 처소로 돌아가던 도중, 곽시공은 마당 한구석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소스라쳤다.

“소식이 왔냐.”

“헉! 까, 깜짝이야.”

돌아보니 사내였다.

곽시공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투덜거렸다.

“좀 평범하게 올 수 없는 거요. 요전에도 불쑥 나타나 털가죽과 고기를 말도 없이 가져다 두고 사라지더니,


오늘도 이리 놀래키기오.”

사내는 곽시공의 불평을 씹어버리고 다시 물었다.


“소식이 왔냐.”

곽시공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저기 위쪽 강척이라는 골짝에 의원을 하는 사람이 답장을 해주었소. 몇 년 전 그 마을에 새의로 짐작되는 어린
소년이 나타나, 앞을 보지 못하는 대감댁 아이의 눈을 고쳐주고 쌀 삼백 석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뒤
사라졌다 하오.”

“그래서 어디로 갔다냐?”

“그것이.”

곽시공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저 좋은 소식이라 할 수만은 없는 게, 몇 년 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소리가 전부인지라 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얻은 소식은 그것뿐이외다.”

“무슨 마을이랬냐.”

“강척이오.”

사내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정보만으로도 만족한 듯했다.

알았다고 말하며 곧장 몸을 돌리려는 사내를 보고 곽시공은 물었다.

“대체 어떻게 그를 찾으려고 그러오?”

사내는 짤막하게 내뱉고 훌쩍 담을 넘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지.”

* * *

송지언은 열에 잠겨 몽롱한 눈을 들어 올렸다.

흐린 눈을 몇 번이고 깜박여,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깼냐.”

“…….”

송지언은 입을 열려다가 목이 메말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사내가 물그릇을 입에 가져다 대주며 몸을 받쳤다.

송지언은 사내의 품에 안겨 물을 조금 받아 마시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내가 또 얼마나 잔 거요.”

사내는 고개를 떨구었다.

“모르겠다.”

하긴, 정신을 잃고 있는데 날이 가는 것을 알아봤자 무슨 소용인가.

사내는 다시 고개를 들어 송지언의 눈을 바라보더니 손을 내밀어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제대로 먹지 못한 지 오래됐다.”

송지언은 솔직하게 답했다.

“배가 고프오.”

그 말에 사내가 반색했다.

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화덕 근처에 올려둔 뚝배기를 가지고 왔다.

뚜껑을 여니 송지언이 좋아하는 닭죽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송지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언젠가 자신이 굶주리는 와중에도 이것만은 먹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으면서, 이것을 먹고 어찌했는지는
잊어버린 것 같은 사내가 우스워서였다.

그런 송지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뜨거운 뚝배기에 담긴 닭죽을 수저로 떠서 후후 불어 송지언의
입에 대주었다.

닭죽을 삼키니 입안이 깔깔하여, 진흙을 삼키듯 아무 맛이 없었다.

사내가 몹시 기뻐하여 마지못해 몇 술을 더 떴지만, 속이 메슥거려 도무지 더 이상은 먹을 수 없었다.

송지언이 고개를 돌리자 안달 난 사내가 좀 더 먹으라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시 누울 테냐?”

사내가 그리 물었지만 오래도록 씻지 못해 찝찝한 몸과 땀으로 눅눅한 이부자리가 느껴졌다.

오래도록 집안에만 머물러 있어 답답하기도 했다.

송지언은 사내에게 바람을 쐬고 싶다 말했다. 그러자 사내가 이제 바람이 차갑다며 걱정했다.

허나 송지언이 계속 나가고 싶다 말하자 그를 털가죽에 돌돌 싸안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에 나간 송지언은 벌써 가을이 깊어 겨울이 가까운 것을 보고 놀랐다.

온 산이 노랗고 붉게 물들어 있었고 낙엽이 지천이었다.

사내의 품에 안겨 뜰을 지나치는데 뜰 한구석에 잡초처럼 돋아난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송지언이 누워있는 새 사내가 심었던 산딸기가 싹을 틔우고 그만치 자란듯했다.

허나 열매를 맺을 만큼 자라려면 오랜 세월이 지나야 할 것이다.

송지언은 생각했다.

내가 과연 저 나무에 맺힌 열매를 먹어볼 수 있을까.

사내는 사박사박 낙엽을 밟고 산 중을 걸었다.

그 언젠가 송지언을 데리고 갔던 산꼭대기의 분지에 이르러, 들국화가 가득 핀 수풀에 그를 안은 채로 앉았다.

송지언이 내려달라 했지만, 바닥이 차갑다며 사내가 허락해주지 않았다.

사내의 품에 안긴 채로 송지언은 코끝을 스치는 쌀쌀한 가을바람을 느꼈고 손을 뻗으면 파랗게 물들어 버릴 듯한
푸른 하늘을 보았다.

그 어떤 그림이나 병풍도 따라올 수 없는 풍경을 두 눈에 담으며 사치를 누렸다.

문득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부드러운 입술이 송지언의 이마에 닿았다가 눈썹을 스쳤다.

속눈썹을 문지르고 콧잔등을 지나쳐 입술에 닿은 입술이 가만히 와 닿았다 떨어졌다.

다시 다가와 붙어 조심스레 입술을 가르고 혀가 파고든다.

송지언은 조용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사내의 따뜻한 혀가 송지언의 혀를 끌어내 가더니 흉터가 남은 곳을 핥았다.

호되게 깨물었던 탓에 그 부분만 희게 돋아나 있었다.

아직도 만지면 지끈거리는 그곳을 상냥하게 빤 뒤 혀가 빠져나갔고, 사내의 입술이 송지언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물고는 떨어졌다.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숨이 찼던 송지언은 하아, 하고 숨을 토해냈다.

뺨을 지나 귓전으로 옮겨간 입술이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참지 못해 귓불을 지분거렸다.

귓속으로 스미는 사내의 숨결이 간지러웠다.

송지언이 어깨를 움츠리자 곧 사내는 입술을 떼고 물었다.

“추우냐?”
“간지럽소.”

그러자 사내가 송지언의 정수리에 코를 묻더니 중얼거렸다.

“나도 간지럽다.”

뭐가 간지럽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보다는 감지 않은 머리에 코를 박은 것이 더 신경 쓰였다.

씻지 않은 지 오래라며 사내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여전히 송지언의 긴 머릿속에 얼굴을 파묻고 부비댔다.

“네 냄새가 많이 나서 좋다.”

자신의 병으로 오래도록 근심했을 사내가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여 그것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송지언 자신이 모처럼 정신이 맑아 기분이 좋았던 탓도 컸다.

송지언은 홀씨들이 파르륵 날아오르는 허공을 보며 평온함에 잠겼다.

‘이런 최후도 나쁘진 않다.’

사내에겐 내색하지 않았지만 송지언은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벌써 팔다리가 앙상하게 말라 제 힘으로는 몸을 일으키기도 어려웠다.

그냥 있어도 몸이 싸늘하게 차가웠고 손끝과 발끝은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아 감각이 없었다.

사내조차 손을 쓰지 못하니 죽을 날이 머잖았다는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숱한 것들이 스쳐 갔다.

사내가 주었던 고통과 격정이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린지라 그의 가슴은 허허로웠다.

산으로 왔을 때 이미 모든 것을 버렸으니 이승에 어떤 미련도 없었다.

죄를 피해 도망가는 것이 아닌, 달가운 최후로서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황홀한 황혼을 자아내며 지는 해를 보며, 송지언은 홀로 자신의 삶을 정리했다.

바알간 해의 끄트머리가 검은 산의 물결 속에 잠기자,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하는 어둠을 닮은 목소리로 송지언은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오.”

* * *
그날 밤, 사내는 데운 물에 수건을 적셔 송지언의 몸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모처럼 머리도 감고 눅눅한 잠자리도 갈고 자리에 누우니 몹시 노곤하고 졸렸다.

누운 송지언을 품에 안은 사내는, 좀체 그를 재우려 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깬 송지언이 반가워서였을까, 아니면 다시 잠들면 깨지 못할 것만 같아서였을까.

사내는 송지언이 피로한 것을 알면서도 옛날이야기를 졸랐다.

“다음에……다음에 해주겠소.”

“오늘 듣고 싶다. 오늘 해줘라.”

이야기를 해주기 전에는 계속 잠들지 못하게 할 것 같아, 송지언은 잠에 겨운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옛날 옛날에…….”

<옛날 옛날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나무꾼이 있었다.

나무꾼은 효심이 지극하여 어머니를 잘 모셨으나 늘 가난하여 생계를 걱정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무를 하고 돌아가던 길에 그만 호랑이와 마주쳤다.

호랑이는 어흥! 하고 말했다.

“배가 고프니 널 잡아먹어야겠다.”

홀어머니를 두고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꾀를 낸 나무꾼은 얼른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형님! 아이고, 형님. 이런 곳에서 형님을 만나 뵙게 되다니. 산으로 사라지신 지 오래되어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호랑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형님이라니? 너는 사람이고 나는 호랑이인데 어찌 우리가 형제란 말이냐?”

“형님께서 산 중에 오래 계시다 보니 그런 겁니다. 형님은 틀림없는 제 형님이십니다. 형님과 함께 놀던 기억이


이리도 생생한 것을요. 어머니께서 형님에 대한 걱정이 얼마나 많으신지 모릅니다. 낮이고 밤이고 형님 생각에
눈물 마를 날이 없으십니다.”

나무꾼이 그렇게 말하며 꺼이꺼이 울자 호랑이는 그만 그 말을 믿어버렸다.

“미안하다, 난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어머니는 잘 계시냐?”

“형님이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계신 어머니는 병환이 더욱 나빠지셨…….”


나무꾼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울자 호랑이는 죄스러운 마음에 산짐승을 한 마리 잡아 그에게 주었다.

“어머니에게 고기반찬이라도 해드리거라.”

나무꾼은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고기를 대접하고 그 이야기를 해드렸다.

어머니는 효자가 둘이나 생겼다며 좋아하셨고, 그 이후 나무꾼의 집에는 매일같이 토끼며 꿩이며 산 짐승들이
한두 마리씩 놓여 있곤 했다.

호랑이의 지극한 효심으로 나무꾼의 어머니는 장수했지만 결국 많은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호랑이는 크게 상심했다.

하여 어머니의 무덤 곁을 지키며 시름시름 앓다가, 3 년 상을 다 치르곤 죽었다고 한다.>

다음 날, 사내는 지게를 구해 와 거기다 송지언을 앉혔다.

춥지 않도록 털가죽으로 꽁꽁 싸 잘 여며두고, 쌀과 말린 고기, 그리고 털가죽을 팔아 모아둔 돈을 가지고 길을


나섰다.

사내는 대답 없는 송지언을 돌아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꼭 함께 돌아오자.”

12.

가을의 절정에 놓인 숲은 풍요로웠다.

노랗고 빨갛게 물든 단풍잎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후둑후둑 떨어졌고, 지천에 널린 것이 밤과 도토리, 으름과
다래였다.

노란 은행나무 아래 은행이 잔뜩 떨어져 있어, 다람쥐 한 마리가 그곳에 옹그리고 열심히 단단한 껍질을 까고
있었다.

바로 곁을 누군가가 지나가도 다람쥐는 개의치 않았다. 사내가 자신처럼 조그만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물이 줄어든 계곡을 건너, 끊어질 듯 이어진 희미한 길을 따라 산을 넘었다.

능선을 넘어 수풀을 헤치자, 사람들이 다니는 선명한 산길이 나타났다.


산길을 한참 걷다 보니, 절과 함께 작은 샘터가 보였다.

그곳에서 쉬며 점심을 먹을 요량으로 사내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절에서 기르는 개들이 뛰쳐나와 사내를 보고 미친 듯이 짖기 시작했다.

“왈왈왈! 아르르르……!”

“컹컹컹!”

사내는 개들을 보고 시끄러운 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소리로 일갈했다.

“-!”

개들은 혼비백산했다. 놀라 주저앉더니, 꼬리를 말고 오줌을 지리며 달아났다.

사내는 흠, 하고는 말했다.

“이제 조용하군.”

사내는 샘터에 지게를 내려놓았다.

바가지를 들어 손을 씻은 뒤, 그것을 바지춤에 닦아 말리고 조심조심 지게에 앉힌 송지언을 품에 안았다.

송지언은 미동이 없었다.

꽁꽁 여민 털가죽 사이로 눈을 꼭 감은 흰 얼굴만이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송지언을 안은 채 사내는 샘터 가장자리 느티나무 아래 앉아 보퉁이에 든 말린 고기를 꺼내 질겅질겅 씹었다.

절의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땡그렁, 땡그렁 하는 소리를 냈다.

사내는 그 소리가 듣기 좋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자기 집 처마에도 저런 것을 걸어놓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쉰 사내는 다시 길로 내려가 고개를 넘었다.

고개를 넘자 저만치 산 아래 자리한 마을의 풍경이 보였다.

사내가 막 마을의 입구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마을 입구 언저리에 서 있는 커다란 당산나무 아래서, 등짐장수 하나가 제 등에 짐을 올리지 못해 낑낑거리고


있었다.

지게의 끈이 끊어지는 바람에 짧게 묶었더니 팔에 꿰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그는 지나는 사내를 보고 말했다.


“이보오, 이보오! 이것 좀 도와주시오.”

사내는 처음엔 그냥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저놈을 거들어주고 마을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내는 다가가 등짐장수의 지게를 어깨에 끌어올려 주었다.

마침내 지게를 지고 자리에서 일어난 등짐장수는 사내를 보고 감사를 표했다.

“이것 참, 고맙소. 당신은 뭘 팔러 온 거요?”

등짐장수는 털가죽으로 싸인 큰 짐이 지게 위에 있는 것을 보고 사내가 자신 같은 장사꾼이라 여겼다.

“이건 짐이 아니다.”

그럼 뭔가 하고 들여다보던 등짐장수는 곧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게에 앉힌 것을 보고 연유를 추리한 그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아는 체했다.

“그렇지, 이 근방에 사람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돌봐준다는 의원이 있다더니, 그 사람을 찾아가는 모양이구려.
그 의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지금 가면 내일까지 기다려야 할 텐데.”

“그자에게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럼 어디로 가는 거요?”

“강척으로 간다.”

눈치 빠른 등짐장수는, 인상이 꽤 험악한 이 사내가 왜 자신을 도와주고 질문에 꼬박꼬박 답하는지 깨달았다.

사내는 강척으로 가는 길을 묻고 싶은 것이다.

“이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가면 강을 낀 사리라는 큰 고을이 있는데, 그 고을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강척으로 갈 수 있소. 내가 마침 사리까지 가는 길인데, 동행하지 않겠소?”

사내가 덩치도 크고 힘이 세 보여 같이 길을 가면 안심이 되겠다는 생각에 등짐장수는 제의했다.

아픈 사람을 데리고 있으니 허튼짓도 못 할 테고, 혼자보다는 여럿 다니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다.

사내가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여, 그는 서둘러 덧붙였다.

“같이 움직이면 방값도 아낄 수 있고 위험도 덜 수 있으니 여러모로 좋지 않소. 나는 부상이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 여행길에 밝소이다. 술을 공짜로 주는 주막도 알고 있고 지름길도 알고 있소. 내 사리에 도착하면
강척으로 가는 배편도 알아줄 터이니 손해 보는 이야기는 아닐 거요. 어떻소?”

사내는 곰곰 생각하다가, 자신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길잡이가 있는 쪽이 편할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등짐장수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조갑돌이오. 당신 이름은 뭐요?”


사내가 문득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지게에 앉은 사람을 돌아보더니 툭 내뱉었다.

“그런 건 없다.”

이름이 없을 리가 있나 싶었지만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은가 하여 조갑돌은 물었다.

“그렇다면 난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되오?”

“네 맘대로 불러라.”

참으로 무뚝뚝한 남자였다.

조갑돌은 이왕 같이 갈 거 쾌활하고 재미난 사람이면 좋을 텐데 하고 입맛을 다셨다. 허나 워낙 장사로 잔뼈가


굵어 사교성이 좋고 말이 많은지라 혼자서도 잘 떠들었다.

실은, 어떻게 하면 이자에게 물건을 하나라도 팔아볼까 싶어서 열심히 떠들었다는 게 옳을 것이다.

“등에 있는 사람은 걷지도 못하는 것을 보니 많이 아픈 것이 아니오? 의원에게 보여야 할 텐데 강척까지 데리고


가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소?”

“이미 보였다.”

“아이고, 이곳 의원이 자신은 못 고친다 했소? 하긴, 내 듣기로도 강척에 용한 의원이 있다 했소. 그 사람에게
보이면 나을지도 모르니 너무 걱정 마시오. 환자를 보이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텐데 돈은 좀 가지고 있소?
강척까지 가는 여비만 해도 만만찮을 텐데. 뭐, 나에게 맡겨주시오. 내 노잣돈을 아끼는 것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오. 사실 이 등짐장사라는 게 매일 나다니다 보니 이문보다 여기저기 나가는 돈이 더 많거든. 지친 발걸음
쉬어가려면 묵어야 하고, 먼지 들이킨 목축이려면 마셔야 하고, 고픈 배 채우려면 먹어야 하니 어쩌겠소? 특히
나는 요령이 없어 이문을 그다지 남기지 못하는 편이라 늘 곤란하다오. 뭐, 내 비록 장사꾼이지만 나름의 신념이
있어,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쳐서 비싸게 팔 바에야 그냥 내가 좀 아끼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 내가
물건을 얼마나 값싸게 파는지 알면 놀랄게요. 이 마을에서 두 냥이나 하는 대추나무 수저 한 쌍을 한 냥밖에 안
받는단 말이오! 그뿐인 줄 아시오? 짚신 한 묶음도 한 냥밖에 안 받는다오. 이 짚신을 삼은 사람이 저 아래
우마골에 사는 사람인데, 그 손이 매우 신통하여 그 사람이 삼은 짚신을 신으면 발이 아주 편하고 쉬 헤지지
않는단 말이오.”

그리 말하며 당신 짚신이 해졌으니 한 묶음 사면 오랜 여행길에 좋을 거라며, 어딜 가도 이 가격에 짚신 한


묶음은 무리라고 강조하려던 조갑돌은 입을 다물었다.

사내는 맨발이었던 것이다.

뭘 좀 팔아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조갑돌은 곧 좌절에 빠졌다.

그가 파는 것은 대부분 집에 놓고 쓰는 생필품인지라 먼 길을 여행하는 객에게 팔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거기다 사내의 차림이 먼 길 떠나는 사람답지 않게 매우 단출하여 무언가를 떠넘기기 힘들어 보이는 탓도 있었다.

과거를 보러 가는 과객도 아니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객도 아니니 이거야 원.

허나 사리에 도착하기 전에 무언가 꼭 하나는 팔겠다고 다짐하며 조갑돌은 의지를 불태웠다.


마을에 들어 해가 기울자 조갑돌은 이 마을에 오면 항상 들리는 주막으로 사내를 데리고 갔다.

주막에 드나드는 사내들에게 항상 꼬리를 치는 주모가 뛰쳐나와 조갑돌을 반겨 맞았다.

“아유, 왔소?”

“오랜만이오, 주모.”

“곁의 이 사람은 누군가?”

“오다 만난 객이오.”

조갑돌은 자신보다 사내에게 더 관심을 보이는 주모를 보고 내심 비웃었다.

사내의 체구가 범상찮고 얼굴이 멀끔하니 혹하는 심정도 이해 갔지만, 주막의 주모가 기웃거려 볼 만한 남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내는 주막에 들어서자 지게를 내려놓고 거기 앉혀둔 사람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조갑돌은 얼핏 그 사람을 보았는데, 얼굴이 몹시 희고 고와 여인이라 생각했다.

부인이 아픈가 보다 싶어 안쓰럽다는 생각에 조갑돌은 물었다.

“부인이 많이 아픈 게요? 안색이 영 좋질 않소. 식사는 할 수 있겠소?”

사내가 부인을 품에 안고 흔들어 보았으나 깨는 기척이 없었다.

일단 부인을 먼저 방에 눕히라는 말에 사내는 안으로 들어갔다.

부인을 감싸놓은 털가죽을 벗기고 이부자리에 눕히는데, 조갑돌은 깜짝 놀랐다.

당연히 여인네고 사내의 부인일 거라 생각했건만 웬일인지 사내였던 것이다. 상투를 틀지 않은 채 긴 머리를 풀고
있어 더 그렇게 보였다.

형제인가 생각하려 해도 사내와 닮은 구석이 전혀 없어, 조갑돌은 의아함을 느꼈다.

“대체 누구기에 아픈 이를 데리고 강척까지 가려는 것이오?”

“그곳에서 사람을 찾는다.”

“사람?”

의원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누굴 만나게 해주려는 것인가 싶어 되물었다. 그러자 사내가 답했다.

“새의라는 사람이랬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은 이름에 조갑돌은 고개를 갸웃했다.

강척이라면 그도 장사를 하러 가끔 드나드는 곳이었기에 아는 사람이 몇 있었다.

낯익은 이름이라면 자신이 아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조갑돌은, 몇 년 전에 그곳에 홀연히 나타났다가 선행을 하고 사라진 도인에 대한 것을 어렵사리
떠올렸다.

“아! 혹시 그, 그 도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대감댁의 눈먼 손자를 고쳐주고 쌀 삼백 석을 푼 도인 말이오.


내 의원만을 생각하여 쉬이 떠올리지 못했소. 강척에서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 대대손손 회자될 굉장한
얘깃거리였소. 헌데 그것은 몇 년 전의 이야기고, 그 도인은 이미 그곳을 떠난 지 오래라 들었는데…….”

“알고 있다.”

아마 강척에서 그 도인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는 모양이었다.

이미 의원에게 보였다 했으니, 보통 의원에게 보여도 소용이 없어 도인을 찾는 게지 싶었다.

누운 남자를 보니 죽은 이처럼 기척이 없는 게 중병이라 절박한 듯했다.

“아무래도 가족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사람의 식구는 어디 가고 당신이 데리고 가는 거요? 뭔가 매우 깊은 사연이


있는 듯싶소.”

궁금하여 그리 물었으나 사내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냥 죽은 듯 누운 사람을 처연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조갑돌은 사람 인생사란 게 들여다보면 이야기 한 편 안 나올 사람이 어디 있겠나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병으로 사람을 잃는 것이 드문 일도 아니었다. 조갑돌도 일찍이 어린 자식을 병으로 잃은 적 있었다.

자식을 잃는 것만 하겠느냐만, 그래도 사내의 슬픔이 짐작되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운 사내나 앉은 사내나 젊은 나이에 안 좋은 일을 겪고 있으니 참 불쌍했다.

누운 사람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사내를 억지로 달래 국밥을 먹이고, 아픈 사람이 있으니 군불을 뜨끈하게
때워 달라 주모에게 당부한 뒤 조갑돌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자려고 짐을 베고 누웠는데 앉은 사내가 당최 잘 생각을 안 했다.

눈만 감고 누운 사람을 뭐 저리 바라보나 싶어 여러 번 누울 것을 권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제가 알아 눕겠지 싶어 조갑돌은 더 이상 사내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 * *

사내는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소리를 들었다.

이곳의 소음은 숲의 소음과는 달랐다.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 소가 여물을 씹는 소리, 아궁이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 자다
깬 아이 우는 소리까지 온통 낯선 소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숲의 호곡과 바람의 신음, 계곡의 울음은 소음이라 인지하지 못하는 사내였지만 이곳의 소리들은 소음으로 들렸다.

그리하여 사내의 집중을 방해했다.

송지언의 낮고 희미한 숨소리에 청각을 곤두세우는 것을.

사내는 많은 소리들 중에서 송지언의 숨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낮고 작은 숨소리가, 아직 희망을 말하는 것을 들으며 불안과 근심을 잊으려 했다.

허나 그것은 어려웠고, 덕분에 사내는 밤이 깊도록 눕지 못한 채 홀로 애써야 했다.

* * *

다음 날 새벽.

눈을 뜬 조갑돌은 깜짝 놀랐다.

어젯밤 앉아있던 자세 그대로 사내가 새벽의 푸른빛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조갑돌은 입가의 침을 닦으며 일어나 물었다.

“이보오, 자긴 잔 거요? 어째 잔 기척이 없소.”

“다 잤냐.”

“나는 푹 잤소만.”

“그럼 가자.”

조갑돌은 길을 재촉하는 사내 때문에 마시듯이 국밥을 밀어 넣고 사내와 함께 돈을 모아 방값을 치렀다.

장사꾼의 기질로 사내의 돈주머니를 슬쩍 살핀 조갑돌은, 그것이 꽤나 가볍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 노자로
강척까지 갈 수 있으려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누운 사람을 싸 지게에 앉힌 사내와 길을 가면서, 조갑돌은 말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아픈 사람이 있으니 매일 야숙을 할 수도 없을 테고 강척까지 가려면 여비가 많이 들 텐데


괜찮겠소? 나야 장사를 하며 가는 몸이니 그날 벌어 그날 쓰면 된다지만, 당신은 아픈 사람 때문에 여비를
벌면서 가는 것은 힘들지 않겠소.”
“괜찮다.”

조갑돌은 사내가 꿍쳐둔 돈이라도 있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하긴, 아무 대책도 없이 혼자도 아니고 아픈 이를 데리고 나왔을 리 없다.

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니 자신의 물건을 사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 조갑돌은, 길을 가는 내내 떠들며


물건을 팔아보려고 애썼다.

허나 사내는 그의 말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필요한 대화가 아니면 무엇을 물어봐도 묵묵부답이거나, 모른다로
일관했다.

침묵을 유지하며 걷는 사내의 걸음이 매우 빠른지라 매일 길을 걸어 걸음이 빠른 조갑돌도 쫓아가기 벅찼다.


걸으면서 떠들려니 더 벅찼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일찍 다음 마을에 도착한 조갑돌은, 주막에 사내와 아픈 이를 데려다 놓고 자신은 장사를 하러 나섰다.

“놋그릇, 나무그릇, 수저, 소쿠리, 뚝배기, 짚신, 나막신, 반짇고리, 보자기, 없는 게 없소-!”

그리 외치며 마을의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작은 마을이라 한 바퀴 도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나, 생각보다 많은 물건을 팔아 기분이 좋았다.

해가 지고 돌아온 조갑돌은 아픈 사람을 안고 주막의 툇마루에 걸터앉은 사내에게 자랑을 했다.

“며칠의 여비를 벌었으니 사리까지 가는 데는 문제 없겠소. 사리까지 가면 물건을 전부 팔아치우고 겨울에는 나도


고향으로 돌아가야겠소.”

사내는 불쑥 물었다.

“나도 팔고 싶다.”

“뭘 말이오?”

뭘 팔아 여비를 마련하려는 구나 싶던 조갑돌은, 사내가 품에서 주섬주섬 꺼낸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사람 눈알만 한 커다란 진주였다.

오색영롱하면서도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조갑돌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헉! 그, 그런 건 함부로 내어놓으면 안 되오! 어서 품에 넣으시오, 어서!”

“왜 그러냐?”

“길가는 객이 그런 귀한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변을 당하기 십상이외다!”

“보여야 팔 수 있지 않느냐.”

“어차피 이 마을에서 그런 걸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요. 사리까지 가야 팔든 말든 할 수 있을게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주를 다시 품에 넣었다.

진주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아까의 충격과 경악이 지나가고, 조갑돌은 곧장 후회했다.

너무 값진 물건을 보고 놀란 나머지 그냥 솔직하게 말해버린 것이다.

아무렇게나 진주를 내보이는 것 하며, 이런 곳에서 저걸 팔겠다고 하는 것 하며, 사내는 진주의 값어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허니 시침을 뚝 떼고 싼값으로 자신에게 팔라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조갑돌은 땅을 치고픈 기분이었다.

인생을 한방에 바꿀 기회를 날려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낙심한 조갑돌은 침울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자리에 누웠다.

헌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저런 값진 물건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사내가 어디서 저런 것을 얻었을까?

어디서 훔치기라도 한 게 아닐까?

조갑돌은 이불을 걷고 일어나 물었다.

“이보오, 당신은 그걸 어디서 구한 거요?”

오늘도 꼼짝없이 누운 사람을 보고 앉은 사내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잉어 뱃속에서.”

“잉어 뱃속이라니?”

“잉어를 잡아 배를 갈랐더니 나오더라.”

사내가 거짓을 말하는 것인가 했지만, 덤덤한 얼굴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상당히 배가 아팠다.

아무 노력도 않고 우연히 얻은 게 아닌가.

저 사내는 무슨 운수가 있어 저런 귀한 것을 쉽게 얻었나 싶어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잉어를 잡은 곳이라도 가르쳐달라고 말해볼까 하다가 조갑돌은 그냥 누웠다.

뱃속에 진주를 품은 잉어가 흔할 리도 없고, 사내가 고단수라 시침을 뚝 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차라리 훔친 것이라면 자신이 저 진주를 다시 훔친다 하더라도 미안하지 않을 텐데.

아니, 어차피 우연히 얻은 거라면 그걸 다시 잃는다 하더라도 크게 억울할 것 없잖은가?


조갑돌은 어느새 자신이 진주를 훔칠 궁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갑돌은 악인이 아니었지만, 견물생심이라고 욕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잠깐 양심을 저버리는 것으로 팔자를 고칠 수 있다면 그깟 양심이 대순가.

그래도 나름대로 자신이 양심적이라고 생각하는 조갑돌은, 진주의 대가로 강척까지 가는 여비 정도 남겨주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새의라는 도인을 찾는 여정이 더 길어질지도 모르고, 저 사람을 고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

조갑돌은 마음이 심란해지는 기분에 얼른 그 생각을 잊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람.

자신과 연관 있는 사람도 아니고, 길 가다 만난 객일 뿐인데 그런 것까지 걱정해줘야 할 의무는 없잖은가?

초짜 여행객이 길 가다 도둑을 당하거나 강도를 당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세상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법이니, 설령 사내가 진주를 잃어 아픈 사람을 고치지도 못하고


객지에서 고생하게 된다 해도 자신의 탓이라고 만은 할 수 없다.

그런 말들을 스스로 주워섬기며 털 난 양심을 추스른 조갑돌은, 본격적으로 진주를 훔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사내가 허술해 보이는 사람이 아닌지라, 품에 품고 다니는 진주를 훔칠 수 있을지 걱정됐다.

키가 크고 체구가 장대하니 훔치다가 들키면 그야말로 경을 칠지도 몰랐다.

다행히도 고향이 어딘지 말하진 않았으니, 쥐도 새도 모르게 훔쳐 몰래 떠나면 길을 잘 아는 자신을 쫓아오긴


힘들 것이다.

아예 이번 겨울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숨어 지내며 흔적을 지우고, 내년쯤에나 진주를 팔아치우고 먼 곳으로
이사해버리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자는 척하고 누워 홀로 음모를 세우는 조갑돌의 심장이 두 근 반 세 근 반 했다. 한데 갑자기 사내가 말을 해,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비명을 칠 뻔했다.

“눈 좀 떠봐라.”

조갑돌은 숨소리를 죽였다.

다행히 자신이 깨어 있는 것을 알고 말을 건 것은 아니었다.

누운 사람을 바라보는 사내가,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널 보고 싶다. 눈 좀 떠봐라.”

그리 말 없고 무뚝뚝한 사내의 혼잣말은 쓸쓸하고 가여웠다.


누운 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는데, 사내는 대답을 기다리듯 그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조갑돌의 마음이 싸하니 젖어들었다.

자신도 저런 적이 있었다. 아이가 다시 눈을 뜰까 싶어, 이미 죽은 아이를 망연히 불러본 적이 있었다.

허나 아이는 눈을 뜨지 않았고, 자신은 눈물을 흘렸던가.

조갑돌은 억지로 떠오르는 기억과 죄책감을 억눌렀다.

* * *

다음 날 아침.

사내가 잠시 뒷간에 간 사이 조갑돌은 누운 사람을 우두커니 지키고 있었다.

어젯밤 심란한 마음에 한숨도 자지 못한 터라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이미 진주를 훔치기로 마음먹었고 그리할 생각이거늘, 어째서 이리 심장이 울렁거리고 불편한지 모르겠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거라고 진주를 훔치는 것에만 성공하면 이런 불안감은 사라질 거라 자신을 위안했지만, 당장
심장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긴장과 불안을 달래려 크게 심호흡을 하던 조갑돌은 누운 사람의 얼굴을 보고 무심코 감탄을 흘렸다.

‘캬- 곱다. 어찌 사내가 이리 여인보다 더 고울꼬. 사내는 맞는 것일까.’

옷자락을 들어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다 생각하던 조갑돌은 문득 의심을 느꼈다.

‘헌데 산 사람이 어찌 이리 꿈쩍도 않을까. 아무리 아파도 그렇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물이라도 마시고
오줌이라도 누고 그러는 법인데.’

고개를 숙여 귀를 가까이 대어 봐도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춤 손을 내밀어 피부를 살짝 만져보니, 아무 온기가 느껴지지 않고 차가웠다.

‘설마…….’

혹, 시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소름이 쫙 끼쳐 올랐다.

저 사내가 너무 큰 슬픔에 미쳐 시체를 껴안고 다니며 이러는 게 아닐까?

조갑돌은 덜덜 떨며 누운 사람의 코 밑으로 손가락을 가져가려 했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사내가 들어왔다.


사내가 눈을 험악하게 모으며 말했다.

“뭐 하는 거냐.”

“아, 난, 저……, 그냥…….”

사내는 조갑돌을 밀어내고 그를 품에 안았다.

손엔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 있었다.

누운 사람을 품에 끌어당겨 안고 조심조심 그 얼굴을 닦는데, 그 손길이 하도 정성스러우면서 애틋해 보고 있는


조갑돌까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마치 남의 정사라도 훔쳐보는 듯, 묘하게 낯이 뜨거웠다.

조갑돌은 고개를 돌리고 큼큼,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헌데 그 누운 사람은 어찌 그리 미동이 없는 거요.”

사내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 얼굴을 닦고 어루만지는데 몰두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말은 그렇지만, 살아는 있는 것이오?”

사내가 얼굴을 들어 자신을 보자, 조갑돌은 찔끔하는 기분에 뒤로 몸을 물렸다.

사내는 부리부리하게 눈을 뜨고 조갑돌을 노려보았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살아있지 않으면.”

“그러니까 그것이, 설라무네, 혹 죽은 것이 아닌가 하고…….”

조갑돌은 그리 말하다 말꼬리를 흐렸다.

사내의 욕설이나 고성이라도 날아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사내는 고개를 가로지르며 조용히 부정했다.

“안 죽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그러모으며 중얼거린다.

“죽었을 리가.”

사내가 안 죽었다 주장하는데 어째 조갑돌의 귀에는 죽었다는 말로 들리는 것일까.

소름이 오도독 돋고 등골이 써늘한 게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시체를 품고 혼잣말을 하는 놈이라니.


사내가 미친 것 같다는 의혹이 뭉게뭉게 커졌다.

당장에라도 짐을 싸서 사내와 헤어지고 싶었지만 진주 생각이 퍼뜩 났다.

섬뜩하고 소름 끼쳤지만 죽은 사람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죽은 사람을 치료할 돈이 필요할 리도 없을 테고 미친 사람에게 큰돈이 무슨 소용이랴.

차라리 강도를 당하기 전에 훔쳐 주는 것이 사내에게도 이득일 것이다.

양심에 털 난 조갑돌은 그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해버렸다.

혹시라도 누운 사람이 죽은 걸 깨닫고 제정신을 차리기라도 하면, 진주를 훔치는 것이 어려워질까 봐 조갑돌은
사리에 가면 자신도 새의의 소식을 알아보겠다느니, 도인이니 죽은 듯이 아픈 사람도 고칠 수 있을 거라느니
떠들어댔다.

다시 길을 떠난 다음 날.

두 사람은 소낙비를 만났다.

가을인지라 비가 몹시 찼고, 서둘러 여관을 찾았지만 이미 쫄딱 젖은 뒤였다.

사내는 자신이 젖은 것은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죽은 사람이 젖은 것을 몹시 걱정했다.

어차피 죽은 사람인데 비를 맞아 냄새를 풍기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조갑돌은 생각했다. 그러나 덤덤하던 사내가
워낙 안절부절못하여 목욕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다 달라 했다.

짐짓 아픈 이를 걱정하는 척하며 뜨거운 물에 몸을 데우라 하고, 자신은 사내가 벗어둔 옷을 뒤져 진주를 훔칠


작정이었다.

사내가 죽은 이를 안고 목욕간으로 사라지자, 조갑돌은 재빨리 사내의 짐과 옷가지를 뒤졌다.

허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역시 벗은 옷에 있는 것인가 하고 목욕간을 살폈다.

나무를 세운 벽 사이로 안을 훔쳐보는데, 목욕통 안에 죽은 이를 끌어안고 들어가 있는 사내가 보였다.

조갑돌은 눈을 크게 떴다.

사내가 죽은 사람을 애무하듯 어루만지며 입술로 그 얼굴을 더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같은 사내를, 아니 무엇보다 죽은 사람을 안고 저게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조갑돌은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흰 어깨를 드러낸 죽은 이가 시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사내의 얼굴에 서린


간절함이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얼이 빠져 있던 조갑돌은 곧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벌렁거리는 심장이 좀체 진정 되질 않았다.

진주를 훔칠 생각은커녕, 사내가 죽은 이를 안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을 때도 한동안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형제도 아닌 이를 끌어안고 다니기에 무슨 사연인가 했더니, 살아생전 같은 사내인지라 연을 이루지 못한 한
때문에 저러는 모양이었다.

같은 사내를 좋아하는 것 역시 정상이 아닌지라, 저리 시체에 집착하는 것을 보니 정말 미친 것 같았다.

그날 밤 자려고 누워 눈을 감은 조갑돌은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시체에 집착하는 사내의 모습이 자꾸만 옛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죽어서 누운 아이, 망연히 그 아이를 부르던 자신. 그리고…….

- 아이가 죽다뇨, 그럴 리가 없잖아요?

조갑돌은 떠오르는 기억을 지우려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다 지난 일이다. 그런 사연 한둘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 별스러울 것 없다.’

* * *

다음 날은 추적추적 늦가을 비가 내려 두 사람은 발이 묶였다.

조갑돌은 방문을 열어놓고 턱을 괴고 앉아 멍하니 비를 바라보았다.

방 안에서 죽은 이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그 얼굴을 바라보고 앉은 사내를 보느니, 가을비 내리는 풍경을 보는
쪽이 백배는 나았기 때문이다.

조갑돌은 애초에 자신이 동행을 잘못 선택한 거라고 한숨을 푹 쉬었다.

동행하자고만 하지 않았어도, 죽은 이를 끌어안고 저러는 사내를 보고 마음이 어수선하지도, 진주를 훔칠 생각에


불안하지도 않았을 텐데 싶어 괜한 원망을 느꼈다.

‘진주만 훔치면 된다. 진주만 훔치고 나면 저런 진절머리 나는 광경도 더 이상 볼 일 없다.’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자신을 달래던 조갑돌은 갑자기 사내가 외친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봤냐!”

“응? 뭘 말이오?”

사내가 눈을 크게 뜨고 품에 안긴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조갑돌을 보았다.

“방금……, 방금 눈을 떴어.”

“에?”
“방금 눈을 떠 잠시 나를 바라보았단 말이다.”

조갑돌이 다가가 살폈지만 죽은 이가 눈을 뜰 리 없었다.

여전히 파리한 얼굴을 하고 두 눈을 굳게 닫고 있을 뿐이었다.

가을이니 망정이지 여름이면 벌써 시체 썩는 내가 푹푹 났을 거라 생각하며 조갑돌은 혀를 끌끌 찼다.

“잘못 본 게 아니오.”

“아니다! 틀림없이 눈이 마주쳤다!”

“그럴 리가 있소이까. 이자는…….”

조갑돌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그를 덮쳐든 기시감 때문이었다.

‘죽었다니, 그럴 리 없어! 당신이 뭘 잘못 안 거예요. 우리 아이는 살아 있어요. 살아 있다고요! 용한 의원에게


보이면 틀림없이 나을 거예요!’

조갑돌의 어두운 표정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내는 매우 기뻐했다.

죽은 이의 뺨을 쓸며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새의라는 놈만 찾으면 싹 나을 테다. 조금만 기운 차려라.”

그리 말하는 사내를 보는데 형언할 수 없이 가슴이 울렁거리고 기분이 불편했다.

대체 무슨 애꿎은 인연이 있어 내가 이런 놈을 만났나 싶고 진주고 나발이고 그냥 다 포기하고 사내 곁을 떠나고


싶었다.

허나 팔자를 고칠 기회를 코앞에 두고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시험받고 있다는 기분마저 들었지만, 조갑돌은 오늘 밤 진주를 훔쳐 달아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 * *

“자! 드시오!”

사내는 자신의 앞에 놓인 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상에는 조갑돌이 거금을 써서 산 삶은 닭과 술 한 병이 놓여 있었다.


“밥은 방금 먹었잖냐.”

“밥 배와 술 배가 따로 붙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오? 자자, 한잔 쭉 드시오.”

조갑돌은 사내의 잔에 술을 넘치도록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그득 따랐다.

잔을 들어 쭉 들이켠 뒤 크아- 외치고 뽀얀 속살을 드러내고 다리를 벌린 닭을 쭉 찢었다.

“어서어서 드시오. 뭘 그리 멀뚱히 보고만 있는 거요. 이건 내가 사는 것이니 걱정 마오.”

사내는 밥을 먹었는데 또 먹을 것을 권하는 조갑돌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튼 먹으라고 주는 것이라 술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쓰다.”

“아니, 술이 쓰다니 사내가 맞는 게요? 술이 쓴 듯해도 그 맛으로 세상 시름을 잊는 것이 아니겠소. 계속 마시다


보면 꿀보다 달콤한 걸 느낄 수 있을 거요. 내 요즘 당신이 적잖이 쓸쓸하고 힘들어 보여 이러는 것이니 부디
거절치 말고 드시오.”

조갑돌은 자신은 마시지 않고 자꾸만 사내에게 술을 권했다.

사내는 주절주절 떠드는 조갑돌의 시끄러운 말과 어지러운 행동에 휩쓸려 여러 잔을 마셨다.

독한 술이라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조갑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헌데 어째 사내의 얼굴은 취할 기미가 없었다.

사내를 취하게 하여 진주를 훔쳐 달아난다는 계획이었는데, 신통찮은 계획인가 보았다.

이대로 가면 사내보다 자신이 먼저 취해 나자빠지겠다 싶어 조갑돌은 정신을 좀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 볼일 좀 보고 오겠소.”

마당으로 나가자 걸음이 휘청휘청 흔들려 조갑돌은 혀를 찼다.

이래서야 진주를 훔친다 하더라도 달아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조갑돌은 마당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오줌을 싸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다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멀쩡한 줄로만 알았던 사내가, 모로 누워 있는 게 아닌가!

조갑돌은 쓰러진 사내를 피해 살금살금 들어갔다.

허리를 숙여 그 얼굴 앞에 손을 흔들어 보아도 감은 눈꺼풀에 미동이 없었다.


표시가 나지 않을 뿐이지 적잖이 취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동안의 여행길에서 사내가 누워 자는 꼴을 본 적이 없는 데다 술이 들어갔으니 쓰러지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갑돌은 쾌재를 부르며 사내의 품으로 손을 뻗었다.

‘어라?’

헌데 아무리 더듬어도 진주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돈주머니를 끌러보고 소매를 뒤지고 바지춤을 흔들어 보아도 단단한 게 없었다.

짐을 다시 뒤져봐도 보이지 않아, 불길한 예감이 끼쳐 올랐다.

‘설마, 저 시체 품에 넣어놨나?’

시체를 만질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치고 식은땀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갑돌은 한참을 망설이다 죽은 이에게로 손을 뻗었다.

흉측하게 썩은 것도 아니고 신선한 시체니 괜찮다고 스스로 달래며 그 옷깃 속에 손을 넣으려 했다.

그때.

조갑돌은 비명을 쳤다.

아니, 치려고 했다.

그런데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죽은 이의 옷깃 속으로 파고들려던 그의 손을 사내가 덥석 붙잡았던 것이다.

조갑돌은 진땀을 흘리며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누워 있던 사내가 언제 깼는지 형형한 안광을 하고 조갑돌을 쏘아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

취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조갑돌은 눈썹을 일그러트리고 입술을 덜덜 떨며 말했다.

“뭐, 뭐요. 자지 않고 있었던 거요?”

사내는 이를 드러냈다.

“다른 사람과 이놈을 한 방에 두고 잘 순 없지.”

“허, 허면 왜 자는 척한 거요? 설마 날 시험한 거요?”

세상 물정 모를 것 같던 사내가 자는 척하며 영악한 꾀를 부렸다는 생각에 조갑돌은 분을 느꼈다.


자신 같은 장사꾼에게 그런 귀한 물건을 내보였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농락하기 위함인가 싶었다.

그는 소리쳤다.

“이런 법이 어디 있소? 그런 물건을 내보여 나를 욕심 나게 만들어 내가 어쩌려는지 두고 보려는 거였소? 맞소!


내가 그 진주를 탐냈는지도 모르오. 헌데 내가 아니라도 그런 것을 보고 욕심을 가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소?
애초에 그걸 잘 숨겨 보이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지 않소! 사실 이 누운 사람이 정말 산 사람이라면 진주를
훔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요. 허나 죽은 사람이잖소! 죽은 사람을 위해 헛돈을 쓰느니 내가 값지게 쓰는
것이 낫지!”

사내는 조갑돌이 뭐라 떠드는지 알지 못했다. 그냥 시끄러운 와중에 죽은 사람이라는 말만 귓속에 박혀 들었다.

그는 조갑돌을 붙잡아 송지언에게서 떨어트려 놓은 뒤 물었다.

“죽은 사람이라니. 누가 죽었다는 거냐.”

“저 사람 말이오! 저 누운 사람! 딱 봐도 꼼짝없이 누운 게 죽은 꼴이지 않소!”

“죽긴 누가 죽었다는 거야. 멀쩡히 숨소리가 들리는데.”

“숨소리는 무슨 숨소리란 말이오! 의원이 아니라도 알 수 있겠수다. 산 사람이 어찌 저리 꼼짝없이 누웠단


말이오. 죽은 게요. 믿고 싶지 않은 마음에 착각하고 있는 거란 말이오.”

“아니다. 일전엔 눈을 뜨기까지 했단 말이다!”

사내가 소리치는데 조갑돌은 기가 막히고 답답했다.

그의 부인도 꼭 이랬다.

아이가 죽은 뒤 한동안 망연하여 정신을 못 차리더니만, 죽은 아이를 끌어내 품에 안고는 소리쳤다.

‘죽었다니, 그럴 리 없어! 당신이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우리 아이는 살아 있어요. 살아 있다고요! 용한


의원에게 보이면 틀림없이 나을 거예요!’

아무리 아이가 죽었다고 말해도 부인은 죽은 아이를 놓지 않았다.

시체를 놓아주지 않으니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지금처럼 날씨가 차가운 것도 아니고 여름이었던 데다 병에 걸려 죽은 아이의 시신은 곧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기 시작했다.

돈이 없어 아이를 의원에게 보이지 못하고 죽인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그렇게 시신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부인을 보는 것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이 부인을 묶어두고 시신을 떼어 내 장례를 치렀다.

묘비도 없는 작은 무덤이 뒷산에 생겼거늘, 부인은 매일같이 온 마을을 헤매고 다니며 제 아이를 찾았다.

‘어디 있는 거야, 아가. 많이 아플 텐데. 얼른 의원에게 보여야 할 텐데. 아가, 아가…….’


아무리 아이가 죽었다고 뒷산의 무덤을 보여줘도 믿지 않았다. 그런 소리 말라며 원망만 할 뿐이었다.

조갑돌은 자식을 그리 보낸 데다 미쳐 돌아다니는 부인을 도저히 볼 수 없었다.

결국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홀어머니에게 부인을 맡겨두고 고향을 떠나 등짐장수가 되었다. 정처 없이 방황하는
삶을 살며 그 기억을 지우려 했다.

허나 겨울이 되어 고향 집으로 돌아갈 때면, 아직까지 아이를 찾는 부인의 헛소리에 고통스러운 기억이
반복되었다. 겨울임에도 언제나 집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맴돌았다.

자신이 지금 사내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조갑돌은 소리쳤다.

“저이는 죽었소! 이제 곧 썩기 시작할 시체를 잡고 왜 이러는 거요! 이제 그만 받아들이시오!”

사내는 그렇게 소리치는 조갑돌의 말에 분노했다.

당장에라도 그를 후려칠 것 같은 살기를 뿜어냈다.

그래도 조갑돌은 그치지 않고 계속 외쳤다.

어느 사이엔가 그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죽은 아이의 시체를 끌어안고 계속 죽지 않았다 우기던 부인의 모습이 선연했다.

“죽었소! 죽었단 말이오!”

그해 흉년만 들지 않았더라면.

아이가 병에 걸리지만 않았더라면.

의원에게 보일 돈만 있었더라면.

아이가 죽지만 않았다면.

“죽었소……!”

조갑돌은 크흐흐흑 하는 울음소리를 뱉으며 주저앉았다.

오래도록 묵은 상처가 쩍 벌어져 피가 흘렀다.

사내는 송지언이 죽었다 우기며 우는 조갑돌을 어째야 할지 몰랐다.

조갑돌이 그리 통곡하며 말하니 진짜 송지언이 죽은 것 같았다.

사내는 우는 조갑돌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기척 없이 누운 송지언을 바라보았다.

꼭 감은 눈.

미동 없는 몸.
싸늘하게 식은 사지.

매일 밤 자신이 놓치지 않으려 했던 낮은 숨소리는 착각이었던 걸까?

사내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사내는 송지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보았다.

허나 두꺼운 피부 위엔 얕은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내는 고개를 숙였다.

송지언의 가슴 위로 고개를 숙여 그 심장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허나 그 소리가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린지 송지언의 심장이 뛰는 소린지 알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슬픔이 북받친 조갑돌이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사내는 조갑돌보고 닥치라고 하고 싶었다.

그런 뒤 다시 귀를 기울여 송지언의 숨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다.

이곳은 너무 시끄러웠다.

가슴속에서 날카로운 불안감이 솟구쳐 올랐다.

사내는 송지언의 어깨를 쥐었다. 그리고 그를 안고 흔들었다.

사내의 움직임에 따라 힘없는 송지언의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힘을 주면 바스라질 것 같은 몸을 쥐고 사내는 애원했다.

“안 죽었지 않느냐.”

송지언은 대답이 없었다.

“안 죽었다. 눈을 좀 떠봐라.”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사내는 미칠 것만 같았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천길 벼랑으로 떨어지듯 아찔했다.

사내는 송지언을 품에 끌어안고 소리쳤다.


“눈 좀 떠봐라!”

그때였다.

“…….”

아주 작은 웅얼거림이었다.

조갑돌이 눈을 크게 떴다.

“어엇!”

사내는 퍼뜩 그를 품에서 떨어트려 송지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허나 송지언은 여전히 눈을 감고 표정 없는 얼굴을 한 채였다.

사내는 대답을 구하듯 조갑돌을 돌아보았다.

그가 소리를 쳤다.

무언가 본 것이다.

무언의 채근에, 조갑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뜬 눈에서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뇌까렸다.

“……그, 그럴 리가…….”

틀림없이 죽었다 생각했는데.

조갑돌은 자신이 본 게 진짠가 싶었다.

사내가 죽었다고 생각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까지 전염되어 헛것을 본 건가 싶었다.

허나 그게 진짜였든 거짓이었든 보았다.

사내의 울부짖음에 그의 어깨 위에 얹혀 있던 죽은 이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뜨였다가 다시 감긴 것을.

조갑돌은 간절히 대답을 바라는 사내의 눈동자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해야 할지.

거짓을 말해야 할지.

아이를 찾아 계속 헤매는 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을 떴었소…….”

조갑돌은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눈을 떴었소…….”

사내는 정말이냐며 확인하진 않았다.


그저 그 말이면 되었다는 듯, 그 말에 몹시 안도했다는 듯,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모를 사람을 품에 끌어안고
그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눈을 감은 아름다운 남자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13.

“저곳이 사리요.”

조갑돌과 사내는 강을 끼고 있는 큰 고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에는 그물을 드리우고 사람과 짐을 실어 옮기는 배들이 여러 척 오갔으며, 많은 집들이 보였고 그 중엔 큰


저택도 여러 채 있었다.

번잡스러우면서도 활기찬 풍경에 조갑돌은 사내를 힐끔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저기 보이는 저 나루터에서 배를 타면 곧장 강척이오.”

“그렇군.”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갑돌은 사내의 지게에 얹힌 사람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 뒤 저 사람은 눈을 뜨지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도 않았다.

조갑돌은 여전히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허나 사내가 저자를 살았다 믿고 싶다면 그냥 그리 믿게 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저 시체가 썩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 하더라도 저 사내의 눈에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 스스로 죽음을 납득하기 전에는 누구도 마음속에 살아있는 이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저기엔 방물장수도 많이 오가고 양반님 네도 많이 살고 있으니 진주를 팔만한 곳을 찾을 수 있을 거요. 내가


적당한 곳을 알아보겠수다.”

조갑돌은 사내에게서 진주를 훔치는 것은 포기했다.

도덕적 회의나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흉년이 드는 바람에 돈이 없어 살리지 못한 아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자신이 본 것이 헛것이라서 사실 지게 위의 사람은 죽은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이제 그런 것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그냥 자신도 저 사람이 살아있었으면 싶고, 나았으면 싶었다.

진주를 훔쳐 팔아 큰돈을 벌어봤자 이미 아이는 죽고 없는데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다.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 늙으신 노모를 돌보고 아내를 품에 한 번 안아나 보고 싶었다.

아이가 죽었다고 역정을 내는 대신, 잠시 어디 놀러 나갔는가보다 곧 돌아올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 말해주고


싶었다.

이때 사내가 불쑥 말했다.

“넌 필요 없냐?”

“나……? 말이오?”

“그래.”

팔 사람을 알아보고 하는 게 귀찮아서, 어차피 조갑돌이 장사꾼이니 진주를 사서 제가 팔면 안 되나 하는 생각에


사내는 물었다.

조갑돌은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깜짝 놀랐다.

그는 차마 덥석 그러마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고민했다.

한동안 그러더니, 허리춤에서 돈주머니를 모조리 끌러 사내에게 주었다.

소맷자락에 넣어둔 동전들과, 짐 속에 만일을 위해 꿍쳐둔 은전까지 모조리 꺼내, 아주 탈탈 털어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사겠소.”

조갑돌이 일 년 내 모은 것이라 돈주머니는 꽤 묵직했다.

이거라면 강척까지 갈 여비는 걱정 없겠다는 생각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품속에서 진주를 꺼내 건넸다.

조갑돌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고맙소.”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 * *
조갑돌이 부두에서 배편을 알아다 봐줄 동안 사내는 주막에 앉아있었다.

사리가 큰 고을이고 하니 오가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그물을 지고 가는 사람, 장옷을 쓰고 가는 여인네, 소리 높여 물건을 파는 장사꾼, 강아지와 함께 뛰어가는


아이들까지.

사방은 뒷간에서 피어오르는 오물 냄새와 음식 냄새, 사람들의 체취, 비린내와 재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참으로 시끄럽고 냄새 나는 곳이구나 생각하며 사내는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다 생각했다.

사람들이 품에 송지언을 꼭 안고 앉아있는 사내를 힐끗거리며 지나쳤다.

그럴 법도 한 것이, 맨발에 헐벗은 몸을 하고 앉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내에게선 천함이 아닌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법한 압도적인 기운이 풍겼기 때문이다.

수많은 흉터가 돌덩이 같은 근육을 장식하고 있었으며 떡 벌어진 강인한 어깨 위로 검은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우뚝 솟은 코 양옆의 눈동자는 독수리마냥 부리부리했고 얼굴 생김 어디에서도 허술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자가 품에 안고 있는 것이 긴 머리를 늘어트리고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니 적잖이 눈에 띄는


풍경이었다.

사내는 마침내 다가오는 조갑돌의 냄새를 맡고 고개를 들었다.

부두에서 남은 짐을 다 팔았는지 빈 지게를 지고 온 조갑돌은 사내의 곁에 앉아 물로 목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내일 진시에 강척으로 가는 배가 뜬다 하오. 뱃삯은 내가 이미 치르고 왔으니 그냥 가서 타면 될 거요. 그리고


강척에 묵을 곳이 없거들랑 그 마을에 만장수라는 사람을 찾아가 내 이름을 말하시오. 나에게 신세를 진 적 있는
사람이니 그리하면 방을 내 줄 거요.”

“알겠다.”

“그리고 내가 누비옷과 여행길에 필요한 물건을 몇 가지 사 왔소. 당신은 그다지 추위를 타지 않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이제 겨울인 데다 아픈 사람은 다르잖소. 당신 체구가 커서 맞을만한 옷을 찾는 것이 어려웠소.”

조갑돌은 솜을 넣고 기운 누비옷과 가죽을 마름질해 만든 짧은 겉옷을 사내에게 입으라 건네줬다.

휴대하기 좋은 작은 솥과 솥 걸이, 부싯돌과 숯, 간 곡식과 말린 과일, 지게 끈 같은 것들을 봇짐에 싸서 지게에


묶어주고 움직이지 않아 동상의 위험이 있을 송지언의 발과 손을 위해 소매가 막힌 겉옷을 입히라 했다.

그 외에도 돈 계산이 서툰 사내에게 보통 방값은 얼마고 목욕값은 얼마고 식삿값은 얼마 정도니 바가지 쓰지 말라
신신당부를 하고, 그러다 제 말에 취해 돈 깎는 법이랑 장사꾼들의 속임수를 간파하는 방법까지 줄줄이 말했다.

사내가 그 이야기를 다 제대로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야 조갑돌의 마음이 편했다.

다음 날, 조갑돌은 부두에서 배에 올라타는 사내와 지게 위의 남자를 배웅했다.

“무사히 강척까지 가서 도인을 찾길 바라오. 나는 진주를 살 사람을 알아보러 먼저 가보겠소.”


사내는 고개를 끄덕하고 배에 올랐다.

조갑돌은 배 끄트머리에 커다랗게 앉은 사내와 지게 위의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 곧 몸을 돌렸다.

* * *

진시에 간다던 배는 사람과 물건을 싣느라 좀체 출발하지 않았다.

지루함에 사내는 하품을 쩍 하고 품 안의 송지언을 살폈다.

늘 삐죽이 나와 있곤 해서 신경이 쓰이던 손끝이 소매 안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이 흐뭇했다.

사내는 고개를 숙여 송지언의 냄새를 킁킁거리고 맡다가, 귓전과 뺨에 코끝을 부볐다.

피부는 싸늘했지만 여전히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웠다.

하루라도 빨리 따뜻한 송지언을 품에 안고 치뜬 눈을 마주 보고 싶다 생각하며 배가 얼른 안 가나 생각했다.

그때, 부두에 서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양옆으로 갈라서기 시작했다.

뭐가 오나 싶어서 고개를 들었던 사내는 저만치서 거드름을 피우며 팔자걸음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높은 갓을 쓰고 뒷짐을 진 채 안 그래도 불룩한 배를 더 불룩하게 내밀고 걸어오는 사람은 도포를 입은


양반이었다.

보석을 꿴 갓끈을 단 것을 보아하니 꽤나 지체 높은 인물인 듯했다.

양반은 길을 비키며 자신에게 굽실거리는 사람들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부두에 도착하자 사공이 쫓아와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이게 강척으로 가는 배렷다?”

“그렇습니다.”

“내 강척에 친우가 있어 가보려 한다.”

“아이고, 얼른 올라타십시오.”

그는 사공에게 뱃삯도 치르지 않고 엣헴, 헛기침을 요란하게 했다.

그러자 그에게 좋은 자리를 내주려고 미리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도로 배에서 내렸다.


내리지 않은 객은 사내와 송지언 뿐이었다.

양반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엣헴! 다시 요란하게 기침을 해봐도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냥 신기한 것을 본다는 듯 눈조차 내리깔지 않고 멀뚱히 양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양반은 뿔이 났다.

그자는 사릿골 대부분의 땅을 가진 지주 윤대복이라는 자였다.

그가 소작농을 부리는 방법이 악독해 종이 되느니 윤대복의 소작농은 되지 말라는 소문이 돌 지경이었다.

허나 고리대금도 같이 하고 있어 한 번이라도 그에게서 돈을 빌린 사람은 결국 이자를 갚지 못해 그의 소작농이


되곤 했다.

덕분에 이 사릿골에서는 두려울 것이 없는 자였다.

헌데 뒤에서 욕할지언정 앞에서는 굽실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저리 뻔뻔스럽게 구는 자를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윤대복은 사내에게 다가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이 건방진 놈! 이 몸이 누군지 알고 버티고 앉았느냐! 썩 일어나지 못할까?”

사내는 미간을 찡그렸다.

“왜?”

“이, 이놈이! 척 보니 상놈 같은데 당장 일어나 예를 차리지는 못할망정 어디서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고
반말이냐! 양반이 오면 자리를 비키는 게 당연한 법 아닌가!”

사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리 많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게 답답하여 윤대복은 소리를 꽥 질렀다.

그 말을 잠시 생각한 사내는 말했다.

“내가 먼저 왔다.”

그러자 부두에 서서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킥, 하는 숨죽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윤대복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눈앞의 이놈 때문에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다니 참을 수 없었다.

윤대복은 거품을 물 듯 발을 동동 구르며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상놈이 감히 양반을 우롱해! 이 몸을 모독하고도 멀쩡할 줄 아느냐! 봉팔아! 봉팔이 네 이놈!”

“예이, 주인마님.”

윤대복을 모시는 종이 허리를 숙이자 윤대복은 종을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며 애꿎은 종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당장 관아로 뛰어가서 포졸을 불러오지 못할까! 양반을 모독한 죄로 저놈을 처넣으라 해라!”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노려보자, 사람들이 얼른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했다.

사내는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는 저 뚱땡이에게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손끝으로 톡 치면 자빠져서 데굴데굴 구를 것 같은 못생긴 놈일 뿐인데.

윤대복이 사내에게 갖은 악담을 퍼붓는 사이 관에서 포졸들이 달려 나왔다.

윤대복이 “저놈이다! 저놈이 날 욕 보였어!” 하고 마구 소리치자 포졸들이 배에 올라타 사내에게 다가왔다.

그제야 사내는 안 좋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는 송지언을 안은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까이 오지 마라.”

사내가 안광을 번뜩이며 그리 말하자 포졸들은 겁을 먹었다.

그러잖아도 관아를 우습게 보는 윤대복 때문에 출동하여 마음이 좋지 않은데, 상대까지 덩치가 크고 무시무시한
자이니 의욕이 나지 않을 만도 했다.

비록 포졸들은 육모 방망이로 무장하고 있었고 사내는 맨손이었지만, 그들은 사내를 잡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차라리 사내가 도망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주춤거렸다.

허나 안타깝게도 이곳은 배 위였다.

결국 용기를 낸 한 포졸이 말했다.

“수, 순순히 우리를 따르시오.”

“난 강척에 가야 한다.”

“그럴 수 없소. 당신은 관아에 가야 하오.”

“왜.”

이유를 물으니 양반모독죄라는 애매한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사실 윤대복이 무슨 벼슬아치도 아닌데 우스운 죄목이었다. 욕설을 퍼부은 것도 아니고, 손찌검을 한 것도 아니다.

사내는 그냥 앉아있었을 뿐이었다.

허나 지주인 윤대복이 자신을 욕보였다 펄펄 뛰니 그들로서는 사내를 잡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포졸들은 시선을 교환하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들은 몽둥이를 고쳐 쥐며 사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들이 위협적으로 보이기를 빌며 말했다.

“아무튼 같이 가시오!”

* * *

“으아아악!”

풍덩!

부두에 서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사람에게 날개가 달렸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포졸의 멱살을 틀어쥔 사내가, 무슨 짚단 던지듯 휙 하고 팔을 휘두르니 포졸이 높은 곳을 날았던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듯 한참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허공에 머물러 있던 포졸은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며 곧
추락했다.

사람이 날 수는 없는 것이다.

곧 물거품이 크게 솟아올랐고, 사내가 남은 포졸을 돌아보자 포졸은 히익!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곧 쑥 뻗쳐온 손에 멱살을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동지와 마찬가지로 던져졌다.

겁을 집어먹은 윤대복이 배에서 후다닥 내리더니, 부두 저 끄트머리로 도망가서는 소리쳤다.

“저놈이 포졸들을 죽이려 든다! 저 흉악한 놈을 봐라!”

사람들이 허우적거리는 포졸들을 건져내었다.

곧, 부두의 소란에 관아에서 포졸들이 한 무더기로 나왔다.

그들은 이제 윤대복을 모독한 죄뿐만이 아니라 포졸들을 물에 집어 던지고 소란을 일으킨 죄로 사내를 잡아넣으려
하고 있었다.

적잖게 당황한 사내는 이를 드러내고 배를 점령한 채 닥치는 대로 포졸들을 모조리 물에 처넣었다. 허나 달려드는
포졸들의 수가 끝이 없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사내는 잠시 송지언을 배에 내려놓고 몸을 훌쩍 날려 사공을 붙잡고 으르렁거렸다.


“얼른 배를 움직여라!”

“아이고, 알겠소. 살려만 주시오!”

사내는 사공을 끌고 다시 배에 오르려 했다.

헌데 사내가 사공을 붙잡느라 잠시 눈을 돌린 사이, 그의 등 뒤에서 포졸 하나가 소리쳤다.

“당장 사공을 놓아주고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

뒤를 돌아본 사내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물을 뚝뚝 흘리는 포졸의 품에 송지언이 힘없이 안겨 있었던 것이다.

사내와 마찬가지로 이래서야 안 되겠다 싶었던 포졸들이 꾀를 내어, 헤엄을 칠 줄 아는 포졸을 보내 배에


기어오르게 한 뒤 송지언을 붙잡게 했던 것이다.

송지언이 다른 자의 손에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사내의 머리털이 쭈삣쭈삣 곤두서고 이가 이득이득 갈렸다. 입술이
들썩거려 송곳니가 번쩍였고 근육들이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 움찔거렸다.

그는 마치 화살 맞은 맹수 같았다.

그 모습이 무서워 붙잡힌 사공은 오줌을 지렸고 송지언을 붙잡은 포졸은 사색이 되었다.

얼마나 사내의 모습이 무시무시했던지 그 포졸은 내가 왜 헤엄을 배웠나 하는 후회까지 했다.

허나 다행히도 사내는 팔을 풀어 사공을 놓았고, 주저앉은 사공은 엉금엉금 기어 사내를 벗어났다.

사공을 놓아주었어도 포졸들은 사내에게 섣불리 다가갈 생각을 못 하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러자 사내가 으르렁거리는 건지 말하는 건지 모를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놈은 이리 내라.”

* * *

송지언을 꼭 끌어안은 사내를 붙잡아 관아에 데리고 왔을 때는, 포졸들이 하나같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생쥐 꼴일 뿐만 아니라 물도 진탕 먹어 배가 빵빵했다.

사내를 붙잡으려다 죄 물에 던져졌고,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건져지면 다시 덤비다가 또 던져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내가 감옥에 들어서자, 다른 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호기심을 잔뜩 드러냈다.

“이보오, 이보오. 당신은 무슨 죄로 잡혀 들어온 거요?”


“대체 어쨌기에 포졸들이 하나같이 젖은 꼴이오.”

사내는 “모른다.” 내뱉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강척으로 가는 길이 지연되니 기분이 좋지 못했다.

그것도 웬 두꺼비 같은 놈 때문에 이리되었다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당장에라도 알량한 감옥을 죄 때려 부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송지언 때문이었다.

아까도 그 난리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남의 품에 안기기까지 했던 그이니, 다시는 험한 일로 품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사내는 송지언을 끌어안고 묵묵히 앞을 쏘아보기만 했다.

사내가 별다른 대답을 해주지 않아 좀이 쑤신 죄수들은 옥사를 지키고 선 포졸들을 졸랐다. 그들은 대부분 도박을
했거나 빚을 갚지 못했다거나 남의 개를 훔쳐 먹었다거나 한 경범죄자들이라 간수도 개의치 않았다.

포졸은 사내를 힐끔 돌아보더니 말했다.

“저자가 배에서 일어나지 않아 윤대복이를 화나게 했지 뭔가. 윤대복이가 양반모독죄라며 펄펄 뛰어 별수 없이


포졸들이 출동했지. 저자가 고분고분 잡혀 오면 좋았을 것을, 포졸들을 물에 집어 던지며 난리를 피워 관아의
포졸들이 죄 출동했네. 헌데 또 힘이 장사라 그들을 모조리 빠트렸으니 쫄딱 젖은 게야.”

“오오-”

심심하고 무료했던 죄수들은 감탄사를 흘리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포졸은 사내의 품에 안긴 송지언을 턱짓했다.

“저자가 신줏단지처럼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잡아오지도 못했을 거다.”

“헌데 저 사람은 산 거요, 죽은 거요? 왜 저리 꼼짝을 않나?”

“내가 아나. 설마 시체를 데리고 다니진 않을 테니 산 사람이겠지.”

“어디가 아픈 것 아니오? 이런 감옥에 뒀다가 죽기라도 하면…….”

죄수들이 쑥덕거리자 포졸이 대꾸했다.

“헌데 저 사람을 살펴보고 싶어도 저자가 놓아주어야 말이지. 죽어도 제가 소란을 피워 이리된 것이니
어쩌겠어.”

사람들이 그 말에 포졸을 비난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죄목으로 사람이 죽으면 큰일이잖소!”

“암, 윤대복이 그자가 지랄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그저 모른 척할 것이지!”

“캬악 퉤! 나 원 더러워서. 귀신은 윤대복이 그자는 안 잡아가고 뭐 하는가 몰라.”


“아무튼 또 윤대복이 때문에 사또나리만 골치 아프겠군. 보나 안보나 곤장을 때리라고 난리를 부릴 텐데 그걸
어찌 말리냔 말이다.”

다들 윤대복의 이름을 멋대로 부르며 한마디씩 해댔다.

윤대복이 얼마나 이 마을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있는지 알 만한 광경이었다.

“사또나리도 좋으신 분인데 어쩌다 이 마을에 오셔서 윤대복 같은 놈에게 들볶이는지.”

“어휴, 그런 소리 말게. 그나마 사또나리가 버티고 계시니 윤대복의 횡포가 이 정도인 거지, 사또나리마저
뇌물이나 받아먹는 악독한 놈이면 마을 꼴이 어찌 되겠는가?”

“그리 고마우신 분의 따님이 아프다니 참 안됐어.”

“용한 의원도 병의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지?”

“쯧쯔, 예전에 그 강척에 나타났던 도인이라도 와 주시면 좋을 텐데.”

“아! 쌀 삼 백석을 풀어놓고 간 명의 말이지? 이름이……, 이름이…….”

“새의.”

잠자코 있던 사내가 불쑥 내뱉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사내는 고개를 들고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그자를 찾고 있다.”

사람들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다가, 사내의 품에 안긴 송지언과 강척으로 가려는 연유 등등을 추리하고는 곧


측은한 시선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강척에 나타난 것도 몇 년 전으로 그 행적을 아는 이가 없다 하오.”

“사또나리께서도 따님의 병을 낫게 하려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별 소득이 없는 모양이던데.”

“어디더라? 그 어디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냈으나 이미 떠난 뒤였다지 않소.”

사내는 새의가 강척에서 사라진 이후 어딘가에 나타난 적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그게 어디냐.”

그것을 말한 사람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기억을 더듬었지만,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이 나도 주워들은 이야기라 정확히 모르겠소. 하지만 사또나리라면 알지 않겠소?”

“그놈은 어디 있나.”

“어디냐니, 이 관아에 계시지 않소.”

사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주먹을 말아 쥐더니 옥사의 창살을 꿍! 때렸다.


감옥이 흔들리며 두터운 창살이 우지직, 소리를 냈다.

그것을 보고 감옥을 지키고 있던 포졸이 기겁했다.

“뭐, 뭐 하는 짓이오! 당장 그만두시오!”

사내가 다시 주먹을 내지르려 하자, 놀란 죄수들까지 그를 말렸다.

“이보오! 관두시오! 어차피 이렇게 나가봤자 또 포졸들이 막을게요! 사또나리께 무언가를 여쭈려면 이런 식으로
굴어서야 되겠소? 간절히 부탁해도 모자랄 판국에!”

“어차피 내일이면 사또나리께서 자넬 부르실 텐데 그때 만나 뵐 수 있지 않소! 제발 그만두시오!”

“…….”

사람들의 아우성에 사내는 팔을 내렸다.

이곳에서는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 짜증 났지만, 그는 송지언을 위해 애써 참았다.

사내가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죄수와 포졸이 전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이 요령 없는 사내가 안타까웠는지 말했다.

“이곳 사또나리께서는 마음씨 좋은 분이니 오늘의 소동은 무엇을 몰라 그랬다면 봐주실 게요.”

“아픈 이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 그랬다 하시오. 윤대복이는 사또나리도 싫어하는 사람이니 편들어주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잘못했다 빌고 사또나리께 그 도인의 행방을 여쭤보면 되지 않소. 사또나리께서도 계속 그 도인을 찾고


계시는 듯하니 뭔가를 알고 계실지도 모르오.”

사내가 별 대꾸를 않자,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시 윤대복의 욕으로 넘어갔다.

나오는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악독하고 나쁜 것들뿐이었다.

고된 소작을 견디지 못해 병을 얻은 사람도 한둘이 아니고, 빚 대신에 딸자식이 끌려가고 아들이 머슴으로
팔려가는 일도 드물지 않다, 윤대복의 눈 밖에 난 자는 마을에 살 수조차 없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떠들어 댔다.

윤대복의 부인도 성격이 고약하여 마을 사람을 전부 제 종 부리듯이 하고, 딸마저 성격이 고약하여 저보다 예쁜
계집아이들의 얼굴을 흉 지게 한다며 혀를 끌끌 찼다.

그 일가가 언젠가는 천벌을 받을 거라 죄 악담을 하는데 그 말들에 진심이 절절했다.

포졸까지 가세하여 윤대복의 욕을 하니, 욕을 먹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이야기가 참말이라면 윤대복은 평생 죽지


않을 모양이었다.

* * *
찬 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던 죄수는, 추위에 욕설을 궁시렁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바닥에 깔린 지푸라기를 좀 더 그러모아 누우려는데, 옥사를 지키는 포졸도 앉아서 정신없이 졸고 있었다.

큰소리라도 쳐서 놀래킬까 생각하며 키들키들 웃다가 그자는 깜짝 놀랐다.

사내가 갇혀 있던 옥사에, 웬 커다란 호랑이가 한 마리 앉아 있었던 것이다.

죄수는 믿기지 않은 광경에 소리도 치지 못하고, 눈만 휘둥그렇게 떴다.

호랑이의 전신엔 늠름하고도 현란한 줄무늬가 고르게 흩어져 있었고. 그 가슴 털이 어둠 속에서도 희게 반짝였다.

둥근 귀 끝은 먹물에 반쯤 담갔다 꺼낸 듯 검었고, 갈라진 미간의 줄무늬 사이와 둥그렇게 솟아난 뺨 양옆으로
강철 같은 수염이 돋아나 있었다.

호랑이는 두툼한 앞발로 따뜻해 보이는 털 속에 아픈 이를 감싸고 길게 누워 있었다.

고요히 품에 누운 자를 바라보던 호랑이는, 죄수가 자신들을 돌아보자 머리를 들어 올렸다.

보석 같은 두 눈동자가 지그시 그자를 응시했다.

그 시선을 받자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호랑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반디 같은 은은한 빛이 품은 사람을 보호하듯 감싸고 있었다.

희고 고운 얼굴을 하고 눈을 꼭 감은 그 사람의 검은 속눈썹과 긴 머리칼에서, 솜털 같은 빛 알갱이들이 알알이


굴러떨어졌다.

그 포근하고 신비로운 광경에, 죄수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

호랑이는 조용히 하라는 듯 귀를 눕히며 코를 찡그리고는, 다시 큰 머리를 숙여 품은 이의 목덜미에 코끝을


부볐다. 그리고 분홍빛 혀를 내밀어 정성스레 뺨을 핥고 알을 품듯 제 쪽으로 깊이 끌어당겨 폭 안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추위도 잊혀지고, 가물가물 잠이 왔다.

찬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도 모른 채, 죄수는 모로 누워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사내를 동헌 앞으로 불러낸 사릿골의 원(員) 하성백의 낯빛은 좋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가뜩이나 딸자식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데 윤대복의 횡포가 끊이지
않아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

어제도 별일 아닌 일로 부두에서 소란이 일어나, 강척으로 가야 하는 배가 가지 못하고 포졸들이 죄 물을


먹었으니 그마저 드러누울 지경이었다.

거기다 아침부터 윤대복이 관아로 쫓아와 당장 사내를 끌어내 곤장을 치라 야단을 부려, 딸자식 얼굴 한번
들여다보지 못했다.

동헌 앞에 끌려 나온 사내를 보고 하성백은 잠시 시름을 잊었다.

그자의 키가 몹시 크고 체구가 장대하며 기운이 범상치 않은 것이, 어제 관아의 포졸들을 죄다 물리칠 만했기
때문이다.

사내가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데다 사람을 죽일 마음이 없어서 그렇지, 그 손에 칼이라도 들려 있었다거나


살의가 있었다면 포졸들이 물을 먹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하다못해 그가 품에 끌어안은 저 누군가만 없었다면 더 큰 난리가 났을 것이다.

사내를 옥사에서 끌고 나온 포졸들이 그를 꿇어 앉히려 했지만, 사내는 버티고 섰다.

그 모습을 보니 왜 윤대복이가 난리를 피운 건지 알 것 같았다.

윤대복은 사또를 보고도 뻣뻣한 사내를 보자 손가락질을 하며 팔딱팔딱 뛰었다.

“저 무례한 놈 좀 보시오! 어제 저놈이 날 모욕주고 배에서 난동을 부려 포졸들을 상하게 하였소! 당장 곤장을
매우 쳐 거적에 말아버리시오!”

하성백은 시끄럽게 구는 윤대복을 조용히 노려보며 말했다.

“그리 정할 일이 아니오. 차분히 시시비비를 가려 벌을 내리겠소.”

“허! 시시비비라니! 그럼 내가 뭔가를 잘못했단 말이오?”

말꼬투리를 잡는 윤대복을 보고 하성백은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윤대복과 말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포졸들을 물러서게 하고 서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묻는 말에 바로 답하면 억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어제 일의 자초지종을 고해라.”

사내는 윤대복을 힐끗 쳐다봤다.

“난 앉아있었을 뿐이다.”

“날 우롱하지 않았느냐! 이놈이 날 웃음거리로 만들었소!”

사내는 툭 내뱉었다.
“우습게 생겼잖아.”

윤대복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뒷목을 잡고 쓰러지려는 윤대복을 보니 하성백마저 너털웃음이 나오려 했다.

확실히 윤대복이 배가 볼록 나오고 얼굴에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어 꼭 두꺼비같이 우습게 생기긴 했다.

사내에게나 윤대복에게나 올바른 이야기를 들을 수 없겠다고 판단한 하성백은 어제의 증인으로 사공을 불러들였다.

하성백의 명에 따라 사공은 고개를 조아리고 어제 일의 자초지종을 고하기 시작했다.

“어제 쇤네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강척으로 가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윤대복 나리께서 부두로 납시셨지요.
윤대복 나리께서 강척으로 가신다기에 오르시라 하였습니다. 하여 나리께 자리를 비켜드리려고 사람들이 전부
배에서 내렸는데…….”

이 대목에서 하성백은 눈살을 찌푸렸다.

단지 마을의 지주라는 이유만으로 고관대작처럼 구는 그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뱃삯조차 내지 않았음이 뻔했다. 장에서도 제 것처럼 마음대로 물건을 집어가는 윤대복이었다.

“저 사내만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윤대복 나리께서 성을 내시며.”

“내, 내가 언제 성을 냈다는 거냐! 저 뱃놈이 나를 잡으려 드네!”

하성백은 사공의 말을 가로막는 윤대복을 보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증인이 증언을 하는데 어찌 그 말을 가로채며 끼어드는 거요.”

“아니, 저놈이 거짓말을-!”

“그것이 거짓인지 참인지는 내가 판단하오. 계속 말해보거라.”

사공은 윤대복의 눈치를 힐끔 보고는 말을 이었다.

“예, 윤대복 나리께서 썩 일어나라 소리치니 저자가 이유를 물었고, 윤대복 나리께서 본인이 양반이라 그렇다
말씀하셨습니다. 허나 저자가 다른 곳에도 자리가 많으니 일어날 수 없다 했습니다.”

하성백은 사내에게 물었다.

“저 말이 맞느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고, 윤대복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성백은 윤대복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당신은 저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을 모욕이라 생각하여 포졸을 부른 거요?”

그 물음에 고작 그런 일로 포졸을 불렀느냐는 분위기가 담겨 있어 윤대복은 얼굴을 붉혔다.


뭔가 그것만은 아니었는데, 말로 정리하니 이유가 그것뿐인지라 윤대복은 불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성백은 그런 윤대복에게 말했다.

“그럼 나도 지금 모욕을 당하는 것이겠군. 저자가 내게 허리조차 숙이지 않고 저리 서 있으니 말이오.”

윤대복은 하성백의 말에 반색하며 소리쳤다.

“그렇소! 저자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태를 보시오! 저런 놈은 곤장을 매우 쳐서 호된 맛을 보여줘야지-”

“헌데 난 별로 내가 모욕 받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이다.”

윤대복은 입을 딱 벌렸다.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뻐끔거렸으나 말이 나오질 않았다.

고을의 사또나리가 아무렇지 않다는데 아무리 마을의 지주고 양반이라 해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 우길 수가 없었다.

당혹해하는 윤대복을 보고 하성백은 쐐기를 박았다.

“아무래도 저자가 무엇을 몰라 저러는 모양인데,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수는 있으나 모욕을
줄 수는 없는 법이오. 모욕을 주는 것은 그것을 모욕이라 느끼는 스스로가 아니오? 아니면, 내가 아둔하여
모욕을 모욕이라 느끼지 못하는 게요?”

윤대복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모두가 작당하고 자신을 욕보이는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알량한 관직을 믿고 번번이 자신을 우스운 꼴로 만드는 하성백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평소에도 눈엣가시였는데 이번엔 정말 분통이 터졌다.

윤대복은 전답을 팔아 벼슬아치에게 뇌물을 바쳐서라도 하성백을 반드시 몰아내겠다고 다짐하며 이를 득득 갈았다.

하성백은 사내를 보며 말했다.

“허나 사람 사이에는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법. 예의를 모른 것이 죄라 할 수 없으나 그것을 탓하지 않을 순


없다. 그저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굽히는 것만으로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된다는 법을 너는 알아야 할
것이다.”

사내는 하성백의 지루한 잔소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새의의 행방이었다.

“궁금한 게 있다.”

하성백은 끝까지 반말을 하는 사내를 보고 그가 자신의 충고를 귓등으로 들었음을 깨달았지만, 얼른 윤대복과 이
사내를 치우고 싶은 마음에 모른 척 물었다.

“무어냐?”
“네가 새의란 놈의 소식을 알고 있다 들었다.”

“너도 그분을 찾고 있느냐?”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새의를 찾으며 숱한 좌절을 겪고 이제 거의 포기 상태에 이른 하성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분을 찾는 건 포기하는 게 좋을 게야. 나도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느니라.”

“뭘 원하냐?”

사내가 되묻는 말에 하성백은 미간을 찡그렸다.

“뭘 원하냐니?”

하성백이 새의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 것이, 누군가와 거래할 땐 늘 그랬듯 대가가 필요해서라고 생각한 사내는
잠시 주변을 훑어보고는 내뱉었다.

“넌 새의가 필요 없잖냐. 누군가가 아픈 건 이 집에 있는 다른 것 때문이다.”

하성백은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치워주면 새의에 대해 알려 달라.”

“알았다. 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해 주겠다. 원한다면 그분을 찾는 것도 도와줄 테니 방법이 있다면 알려다오!


딸의 병만 낫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윤대복은 사내의 말과 그 말에 매달리는 하성백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저런 천한 것의 말을 듣고 혹하는 하성백의 절박한 심정이 초라하고 우습게 보였던 것이다.

허나 용하다는 의원은 물론이거니와 굿까지 여러 차례 해본 하성백은 딸의 병만 낫게 해준다면 무슨 헛소리든 들을


용의가 있었다.

설령 헛짓일 뿐이라도 혹시 모르는 것 아닌가.

사내는 잠시 품에 안은 사람을 어깨에 걸머지더니 외동헌을 지나 하성백의 식구들이 기거하는 내동헌으로 갔다.

하성백이 그를 쫓아갔고 포졸들과 윤대복, 사공까지 그 일을 구경하러 따랐다.

딸아이가 앓아누운 방 앞에 선 사내는, 허리를 숙여 마루 밑에 팔을 집어넣더니 헤집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쑥 끌어냈다.

“으아아악!”

“으허억!”

사람들이 그야말로 질겁하며 흩어졌다.


하성백은 너무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 쳤고, 윤대복은 아예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공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허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그에 신경 쓰지 못했다.

사내의 손에 끌려 나온 것은 커다랗고 시커먼 구렁이였다.

그 구렁이가 얼마나 큰지, 그 똬리가 집채만 했다.

도대체 저런 것이 어떻게 마루 밑에 들어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고, 어찌 알지 못했는지 기이한 일이었다.

구렁이는 햇살이 눈부시다는 듯 허연 배를 까뒤집으며 뒤척이더니, 자신의 꼬리를 잡아 끌어당긴 사내를 보고


입을 짝 벌리며 샤아-! 고음을 토해냈다.

사람 팔뚝만 한 송곳니와, 끝이 갈라진 자줏빛 혀가 날름거리는 것을 보고 심약한 포졸 몇이 기절했다.

사내가 꼬리를 놓자, 구렁이는 비늘을 바싹 세우고 사내를 휘감으려 했다.

구렁이는 감히 자신을 끌어내 이런 대낮에 정체를 드러내게 한 웬 놈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그러잖아도 요즘 정기를 빨아들이던 것의 기운이 약해져 배가 고프던 찰나라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소도 한입에 삼킬 듯 커다랗게 벌려진 주둥이가 사내를 덮쳐들었다.

사람들이 그 구렁이에게 삼켜질 끔찍한 사내의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거나 비명을 질렀다.

그래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높은 산 아래로 떨어지듯 귀가 먹먹해지더니, 무언가 몸을 뒤트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처마 끝의


기왓장이 깨지며 와르륵 떨어졌다.

바람도 아닌 이상한 기운이 한바탕 휘몰아쳐 떠밀린 사람들은 전부 주저앉거나 자신 옆의 사람을 붙들며
버둥거렸다.

잠시 후, 거짓말처럼 주위가 조용해져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내 발치에 작은 구렁이 한 마리가 몸을 비틀고


있었다.

물론 작다는 것이 진짜 작다는 것이 아니라 아까에 비해 작다는 말이었다.

구렁이는 여전히 사람 키만 한 길이에 사내의 팔뚝처럼 굵었지만, 그래도 나름 평범한 뱀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사내는 맨손으로 구렁이의 목을 틀어잡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윤대복과 눈이 딱 마주쳤다.

윤대복은 불길한 기분에 엉금엉금 뒤로 기었지만, 사내는 주저 없이 구렁이를 휙 던졌다.

“저놈이 더 좋다.”

구렁이는 유독 탐욕이 많아 기운이 넘치는 자를 발견하고 그것에 달라붙었다.

윤대복은 자신의 목을 휘감는 구렁이를 보고 미친 듯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거렸으나 구렁이는 금세 똬리를 틀었다.
목을 칭칭 감은 구렁이를 매달고 윤대복은 눈을 까뒤집으며 관아 밖으로 뛰쳐나갔다.

얼이 빠져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는 하성백에게로 다가가 말했다.

“치웠으니 말해라.”

“그, 그, 그것이.”

하성백은 자신이 옷자락이 다 뒤집힌 흉한 몰골로 주저앉아 말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벌떡 일어서서 황급히 매무새를 가다듬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워낙 놀라운 것을 본 탓에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런 엄청난 일을 해치우고서도 사내의 얼굴이 무표정하고 심드렁하기까지 한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때, 사내가 구렁이를 끌어낸 방문이 열리더니,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버지.”

이에 하성백이 기뻐하며 달려갔다.

“얘야!”

딸의 얼굴을 바라본 하성백은, 언제나 딸 주변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이 사라진 것을 보았다.

부인도 잃고 애지중지 길러온 딸마저 잃어버리나 했는데, 이마를 짚어보니 이제 열도 내리고 눈동자도 맑았다.

“아버지, 무슨 일인가요. 소란스러워 깨보니 이상하게 아프지 않아요.”

하성백은 딸을 끌어안고 기어이 눈물을 쏟았다.

그 감동적인 광경에 마을 사람들은 아까의 충격을 잊고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다만 사내만이 송지언을 다시 품 안에 고쳐 안고는 투덜댔다.

“대체 언제 가르쳐줄 거냐.”

* * *

하성백은 마음 같아서는 사내를 며칠이라도 머물게 해 대접하며 은혜를 갚고 싶었다.

허나 사내는 그런 하성백의 말을 딱 잘라 거절하고 새의의 행방만을 원했다.

아픈 이 때문에 그런 모양이니 더 붙잡지도 못하고 하성백은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의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 올봄인데, 사실 그것이 그 도인 분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소이다.
강 아래쪽에 솔석이라는 마을이 있소. 그곳에 고기 잡는 사람이 강가에서 낚시하는 사람을 보았다 하오. 어부가
그 사람에게 올해는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으니 소용없을 거라 투덜거리자, 낚시하던 사람이 산에 잘못 난
구멍 때문이라 말해줬다는 구려. 혹시나 해서 고기 잡는 사람이 작년에 산사태로 무너져 구멍이 난 곳을 찾아가
보았는데, 그곳에서 흘러나온 흙물이 강에 섞여들어 고기를 쫓아냈던 것이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서
산사태로 무너진 구멍을 막고 나무를 심자 조금씩 고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구려. 그 낚시하던 사람이 녹색
도포에 삿갓을 쓴 어린 소년이었다오. 내가 알기에는 새의라는 도인이 그런 차림을 즐긴다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하성백은 허겁지겁 사내를 붙잡고 말했다.

“내 사공에게 부탁해 오늘 바로 솔석까지 데려다 주라 하겠소. 꽤 머니 배를 오래 타야 할 거요. 혹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관아로 가 내 이름을 말하고 도움을 받으시오.”

“알겠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말 고맙소. 꼭 새의님을 만나 아픈 이가 낫게 되길 바라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공과 함께 서둘러 부두로 갔다.

벌써 오후가 넘은 시각이었고, 배는 강물에 비치는 황혼을 부수며 미끄러져 갔다.

송지언을 안은 사내의 마음은 좋지 않았다.

이런저런 시끄러운 일로 일정이 지체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어째 점차 품에 안은 송지언이 싸늘해지는 것


같아 불안했다.

그런 사내의 불안을 대변하듯, 황혼이 지고 밤이 찾아오자 강 위에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안개가 자욱이


끼었다.

축축한 안개를 가르며 나아가는 배가 마치 황천을 건너는 듯했다.

뱃전에 부딪히는 찰박거리는 물소리만이 안개가 자아내는 몽환을 쫓아주었다.

사내는 송지언을 안은 팔에 굳건히 힘을 주었다.

14.

다음 날 정오, 솔석에 다다른 사내는 사공의 도움으로 그때 새의를 보았다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허나 그 사람의 말은 하성백이 한 말과 한 치 다름이 없어, 이렇다 할 소득을 얻지 못했다.


사공이 돌아가고 혼자가 된 사내는 강가에 앉아 송지언을 끌어안은 채 앞으로 어찌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차라리 산중이었다면 냄새가 오래도록 남아 어떻게든 쫓아갈 수 있을 터인데, 강가인지라 계절이 두 번 바뀌는 새
냄새는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생각을 한다고 앉았으나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노라니 멍해졌다. 텅 빈 의식 속에 숨어 있던 생각이 떠오른다.

이대로 깨지 않으면 어쩌지.

숨이 멎으면 어쩌지.

차가워지면 어쩌지.

굳어버리면 어쩌지.

어둡고 시커먼 마음이 뭉클뭉클 커져 머릿속을 점령한다.

독에 잠기듯 심장이 까맣게 젖어든다.

‘이러지 마시오……. 이러지 마시오…….’

멀리서 송지언이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네가 너무 예뻐서다.’

그런 소리를 외면하는 자신의 소리도 들렸다.

‘왜……, 왜 이리 어리석은 거요. 내 몸뚱이 따위 하찮다 하지 않았소. 헌데 그 하찮은 몸뚱이를 붙들어두려 날


이리 만든 거요!’

사내는 눈앞이 어둑해지는 기분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강물은 여전히 고요하게 흘러가고 있었으며 그 위를 새들이 한가로이 떠갔다.

앞서 가던 어미 새가 자맥질 하자, 새끼 새도 그것을 따라 자맥질을 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파문이 점점이 흩어져갔다.

사내는 어둠이 내리고 바람이 차가워질 때까지 계속 강가에 앉아 있었다.

어두운 하늘엔 달빛 대신 검은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길고 긴 겨울의 시작인 것이다.

눈을 맞고 앉아있던 사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품 안의 송지언을 당겨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러난 송지언의 뺨이 얼음장 같았다.

황망한 마음에 너무 오래도록 넋을 빼고 있었다.

사내는 묵을 곳을 찾기 위해 발길을 옮기려 했다.


그때, 인적이 끊긴 강가 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강가의 수풀 사이 사람이 밟아 다진 오솔길을, 작은 초롱을 들고 아이처럼 자그마한 것이 걸어오고 있었다.

뾰족한 귀 하며, 튀어나온 주둥이 하며, 얼룩진 검은 눈 밑 하며 꼭 너구리 같았다.

아니, 두 발로 걷는 너구리였다.

너구리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사내의 앞에 멈춰 섰다.

너구리는 사내에게 허리를 숙여 보이더니, 흠흠, 헛기침을 하고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사내에게 그것을 내미는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사내가 고함이라도 치면 당장 기절할 태세였다.

사내는 너구리가 건네주는 것을 받아들었다.

너구리는 그것을 건네자마자 초롱도 던져버리고 줄행랑을 쳤다.

너구리가 준 것은 이 계절에 있을 리 없는 반디였다.

사내가 그것을 들여다보자, 사내의 손 안에서 반디는 빛을 뿜으며 날아올랐다.

잠시 사내의 주위를 맴돌던 반디는 곧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고, 사내는 그 반디를 따라 걸었다.

* * *

사내는 산길을 걷고 있었다.

반디는 사내를 산속으로 인도했고, 점점 굵어지는 눈발 사이로 어지럽게 날고 있었다.

눈발이 거세지자 반디의 여린 빛이 잘 보이지 않았고, 사내는 점점 걷기가 어려운 것을 느꼈다.

등에 업은 송지언을 추스르며 계속 걸었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힘이 빠졌다.

한 번도 지친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온 사내였는데…….

사내는 잠시 발길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다시 걸으려 고개를 든 사내는, 갑자기 주변의 풍경이 바뀐 것을 보았다.

그의 산이었다.

자신은 한 마리 짐승이 되어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몸이 가뿐했다.

사내는 자신이 너무 오래 이 산을 떠나있었음을 깨닫고 마음껏 내달렸다.

날아오르기라도 할 듯 네 발이 가볍고 몸이 날랬다.

익숙한 바윗돌과 나무 등걸, 낙엽과 자갈을 박차고 벼랑을 날아 산꼭대기에 서서, 크게 울부짖었다.

사방으로 그 울음소리가 진동하며 번져나갔다.

메아리쳐 되돌아오는 수많은 응답이 환호성처럼 들려 사내를 만족하게 했다.

신나게 달리고 났더니 배가 고픈 것을 느끼고 사내는 몸을 돌려 다시 산을 내려갔다.

산을 내려가다 보니 통통하게 살이 오른 사슴이 보여, 오물오물 풀을 뜯는 그것을 한동안 노려보다 덤벼들었다.

사슴은 긴 다리를 박차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달아났지만, 아무리 빠르대도 사내의 발을 따를 수 없었다.

사내는 발톱을 세워 사슴의 등짝에 달라붙었고, 여린 목덜미에 이를 박자 뜨끈한 피가 새어나왔다.

사슴은 쓰러져 경련했다.

그 마저도 몇 번 목을 물고 흔드니 곧 잠잠해졌다.

사내는 고개를 박고 가죽을 찢어 그 속에 든 신선한 살을 뜯어 먹었다. 향기로운 피를 마시고 내장을 빨았다.

사슴의 뱃속을 샅샅이 발라먹은 사내는 입가를 핥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포만감을 안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물이 고인 못으로 다가가 고개를 처박고 물을 삼켰다.

그 물이 달고 시원하여 그는 아예 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장구를 치고 꼬리를 휘저으며 핏물을 씻은 뒤, 햇살이 비치는 바윗돌에 올라앉아 젖은 몸을 정성스레 핥았다.

배도 부르고 몸도 개운하고 기분이 아주 좋았다. 떨어지는 햇살에 노곤함이 밀려왔다.

꾸벅꾸벅 졸던 사내는, 문득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달처럼 둥글고 큰 얼굴과 솟아난 검은 귀, 양옆으로 갈라진 수염과 넓적한 콧등이 보였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구슬 같은 두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는데 저만치 산 아래 자리한 마을이 보였다.

사내는 호기심이 생겨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가 지나는 중이었다.

아이가 무어라 떠들며 제 어미의 손을 잡았고 어미는 그것을 보고 기쁜 듯이 웃어 보였다.


앞서 걷던 남자가 아이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에 돌아보았다.

헌데 도포를 입고 삿갓을 쓴 남자의 얼굴이 굉장히 낯익었다.

낯익을 뿐만 아니라 넋을 놓을 만큼 예뻤다.

재잘거리는 아이나, 고운 얼굴을 한 여자보다 그 남자의 얼굴이 더 눈을 사로잡았다.

아이의 질문에 답해주고, 가만히 웃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지끈했다.

그들은 마을로 돌아갔다.

마을엔 그 아름다운 남자의 부모도 있고, 친구도 있었다.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그의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툭, 하고 떨어지는 팔에 사내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방금 전까지 그가 바라보던 남자가 파리한 얼굴로 업혀 있었다.

굳게 감은 두 눈과 핏기 없는 얼굴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

그 얼굴에 드리운 싸늘한 죽음의 기운 때문에 사내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사내는 여전히 송지언을 업은 채 눈 오는 산길을 걷고 있었다.

눈발 섞인 바람이 차갑고 거세어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다.

그를 인도하던 반딧불도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고, 사방은 흰 암흑과 검은 혼란으로 들어차 있었다.

휘잉휘잉, 사납게 이를 드러낸 바람이 사내의 머리칼을 거칠게 찢었다.

사내는 송지언을 돌려 안았다. 가슴을 열어 차가운 그의 얼굴을 당겨 안고 시린 손끝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눈보라에 한걸음 한걸음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자신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을에서 평범하게, 그가 원하는 삶을 선택하여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송지언이었는데.

자신이 이리 만들었다.

요물과 거래하여 그 몸을 찢고 강제로 임신시켜 자기 아이를 벼랑에 버리도록 내몰았다.

고향으로 돌아갔어도 온전하지 못하여,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평생을 죄책감과 고통과 미움 속에서 살도록 자신의 곁에 붙들었다.

이윽고 그 육신마저 이리 아프게 했다.

사내는 그저 그가 예뻤고, 좋았으며,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짐승처럼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했다.

그것으로 송지언을 가질 수 있으면 족했다.

사랑스런 몸뚱이를, 어여쁜 미소를, 달콤한 연심을. 허나 영영 그 마음을 잃었고, 이제는…….

그러니 이리 보낼 수는 없다.

하찮다 생각했던 몸뚱이, 허나 간절했던 이 몸뚱이 하나만은 절대 놓아줄 수 없다.

이것마저 없다면 무슨 수로 살아간단 말인가.

자신의 마음은 이미 옛날에 빼앗겼다.

빈 가슴 속에 들어찬 것은 이것뿐이니, 그가 없으면 안 된다.

사내는 신음하며 눈밭을 걸었다.

문득, 발밑이 쑥 꺼졌다.

사내는 반사적으로 송지언을 한 팔로 끌어안고 한 팔을 내밀어 무언가를 붙잡았다.

세운 손가락에 눈과 자갈, 흙과 지푸라기가 어지럽게 긁혔다.

미끄러지던 사내는 간신히 튀어나온 바윗돌 하나를 잡고 멈출 수 있었다.

갈라진 바윗돌 틈 벼랑에 매달린 사내는 까마득한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날리는 눈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위를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희어 먹먹했다.

사내는 숨을 내뱉으며 품에 안긴 송지언을 바라보았다.

힘없는 그의 몸이 자꾸만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사내는 생각했다.

그냥, 이 손을 놓고 함께 죽을까.

흰 허공을 베어 먹으며 동그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눈 속에 눈이 들어간 사내는 눈을 깜박였다.

눈이 녹아내려 눈가로 흘러내렸다.

사내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총총히 땋은 머리를 늘어트리고 나이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 냉소적인 표정을 한 소년이었다.


소년이 몸을 눕혀 벼랑에 매달린 사내에게로 팔을 뻗었다.

안긴 송지언을 먼저 끌어올리려는 듯 그에게로 손을 내밀었지만 사내는 안은 팔을 풀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년이 말했다.

“죽을래?”

“…….”

사내는 송지언을 위로 들어 올렸다.

소년이 송지언을 붙잡고 힘겹게 끌어당겼다.

사내는 소년이 그를 떨어트리기라도 할까 봐 매우 조마조마했다.

어렵사리 송지언을 바닥에 둔 소년은 후―하고 이마를 닦더니 사내를 끌어올리려 몸을 돌렸지만, 사내는 벌써
벼랑 위에 손을 짚고 올라오고 있었다.

제 한 몸은 가볍게 끌어올린 사내는 눈밭에 누운 송지언을 일으켜 안고는 말했다.

“네가 새의냐.”

소년은 대답 없이 어깨에 묻은 눈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사내는 묵묵히 소년을 따라 걸었다.

소년을 따라 걸으니 눈발이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눈이 완전히 멈추고, 두터운 눈구름 사이로 달빛이 고개를 내밀었다.

갓 쌓인 보송보송한 눈 위에 달빛이 구름그림자로 그림을 그렸다.

적막하기까지 한 고요에 세상이 잠겼다.

사박사박 눈 밟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

소년은 눈 쌓인 대숲으로 들어갔다.

빽빽하게 자란 대숲을 헤치고 들어가 한참을 걷자 얼핏 보면 모를 정도로 작은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소년은 안으로 쏙 들어갔지만 사내는 자신의 몸이 끼지나 않을까 걱정해야 했다.

그는 큰 몸을 잔뜩 웅크리고 어렵사리 좁은 입구를 지나쳤다.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 외로 넓은 지하 동굴이 보였다.

동굴의 천장을 이룬 바위벽이 일부 갈라져 공기와 빛을 들이고 있었다.

맑고 시린 지하수가 흐르는 길을 지나, 말린 짚자리가 깔린 둥근 방에 이르러서야 앞서 걷던 새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높은 바윗돌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무릎에 손을 얹었다.

새의의 외모는 얼핏 보기엔 열대여섯 정도의 소년으로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어리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병적으로 새하얀 피부, 굴곡 없이 호리호리하고 가는 몸에 풀빛의 옷을 걸치고 있으니 바람이 불면 휙 날아갈
풀벌레처럼도 보였다.

사내를 응시하는 두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매가 길고 가늘었다.

새의는 사내의 정체를 간파하듯 그를 한동안 살폈고, 사내 역시 그를 한동안 살폈다.

“나를 찾았나.”

새의의 말에 사내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품에 안은 이를 내보였다.

새의는 사내가 내민 송지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송지언의 감긴 두 눈은 단단하게 얼어붙어 마치 사람이 아닌 얼음조각처럼 보였다.

그만큼 생기가 없었다.

“숨은 붙어 있는데 몸속에 있어야 할 혼이 이미 명부로 갔다. 본인이 돌아올 마음이 없으면 치료해도 소용없어.”

가사상태에 빠져 서서히 죽어가는 송지언을 보고 새의는 그렇게 선고했다.

사내는 그 말을 듣고서도 미동이 없었다.

한참을 송지언을 내보인 자세 그대로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주춤하더니 송지언을 다시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
황망히 서 있었다.

사방에 어둠이 내릴 때까지도 그대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동굴이 캄캄해지자 새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밝혔다.

초나 기름을 태운 것이 아니라 소맷자락에서 반디를 꺼내 벽에 붙어 놓았다.

반디는 날아가지 않았고, 그 꼬리에서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이 동굴을 희미하게 밝혔다.

또다시 눈이 내리는지 동굴의 갈라진 틈 사이로 눈발이 흘러들어왔다.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동굴의 갈라진 틈바구니를 헤집었다.

대나무들이 그 바람을 견디지 못해 휘청거리는 소리가 동굴 곳곳에 울렸다.

그 스산한 소리와 푸르스름한 빛 속에 송지언을 안고 서 있는 사내의 분위기는 기묘했다.

무정물 같은 정적이 그 주변을 싸고돌았다.

예까지 새의를 찾아온 절박함이나 힘겨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혼이 떠난 몸을 붙잡고 있는 그 절망감-

변함없이 하루해가 뜨고 지는, 어떤 슬픔이나 고통에도 상관없이 움직이는 싸늘한 이치에 대한 절망감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동굴 한쪽 벽에 수북한 말린 약초 다발을 정리하던 새의는 문득 들려오는 진동음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쯧,


하고 혀를 찼다.

사내가 송지언을 안은 채 동굴의 낮게 내려온 천장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바위가 쪼개질 정도로 사정없는 자해에 이마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흘렀고 바위에도 흥건히 묻었다.

그럼에도 사내의 표정은 고통스럽거나 아파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슨 짓을 당하는지도 모르는 백치 같은 얼굴로 표현치 못하는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다.

두 명이나 송장 치우긴 싫다는 생각에 새의는 다가가 사내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만 해라. 한번 보기는 해볼 테니.”

그제야 천천히 새의를 돌아본 사내는 송지언을 한번 내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새의는 송지언을 말린 짚자리가 깔린 평평한 곳에 반듯이 눕히게 했다.

그 몸을 살피기 좋도록 옷을 모두 벗기고 손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송지언의 손목을 쥐고 맥을 짚었다.

아니나 다를까.

보통 의원이라면 이미 죽었다 생각할 만큼 맥이 약했다.

코 밑으로 손을 가져가도 싸늘한 냉기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리 얕은 맥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 새의는 송지언의 몸을 구석구석 만졌다. 장기가 자리한 곳을 더듬어


만져보고 눌러보니 송지언의 뱃속이 뒤틀리고 울혈이 고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장기들을 밀어내고 무언가가 자리 잡은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것이 들었다는 생각에 바지를 벗기고 다리 사이를 살펴본 새의의 눈이 커졌다.

“…….”

몸속에 뭔가를 집어넣고자 비부를 찢었으니, 그 고통이 어떠했을지 짐작조차 어려웠다.

도대체 무얼 넣으려 이리했던 것인가.

배를 눌러 살피던 새의는 그것이 일종의 아기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자가 아기를 낳게 하려고 이 꼴로 만든 모양이다.


새의는 송지언에게서 손을 떼고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매우 찝찝한 것을 만졌다는 듯 손을 주무르며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 길고 가는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어려 있었다.

분노와 질책, 비웃음이 서린 냉엄한 표정이었다.

“왜 온 거냐.”

사내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새의는 누운 송지언을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냐.”

요사한 술수로 이치를 깨트리고 이리 만들었으니 이 몸이 죽는 것도 당연하다.

사내 역시 그것을 짐작치 못했을 리 없다.

이미 혼은 고통 받는 육을 떠나 자유로워졌으니 찢기고 더럽혀져 너덜너덜한 몸을 원하는 것은 이제 사내뿐이었다.

‘널 놓아주느니 네가 죽는 게 낫다.’

사내는 멍한 눈동자를 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 끄덕, 했다.

그리고 곧 갸우뚱했다.

그는 품속의 송지언을 내려다보았다.

죽여서라도 갖고 싶었던 사랑스러운 몸이 안겨 있었다.

사내는 문득 송지언의 귓불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자각했다.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돋아난, 아주 예쁜 귀였다.

둥글고 뽀얀 귓불이 매우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귓바퀴 속으로 말려들어 가는 붉은 속살을 핥는 것이 좋았다.

귀를 내준 채 눈을 질끈 감고 온몸을 떠는 그 모습이 애간장을 녹였다.

사내로선 어찌할 수 없는 욕망이 텅 빈 마음속에 차올랐다.

사내는 눈앞에 보이는 송지언의 귓불을 씹어 삼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목덜미에 이를 박고 여린 피부를 꿰뚫어 남은 생명을 취하고 싶었다.

저승사자가 빼앗아 가기 전에 달콤한 살 속에 숨은 혼을 가져 영영 하나가 되고 싶었다.

먹어버릴까, 그렇게 해서라도 가질까.


어느새 사내의 숨소리가 사나워졌다.

사내는 갈고리 같은 손을 내밀어 송지언의 앞머리를 움켜쥐고 삼키려 했다.

그때 동굴의 갈라진 틈 사이에서 들어온 바람 한줄기가 문득 송지언의 머리칼을 스쳐, 사내의 손은 허공을 쥐었다.

작은 눈송이 하나가 날려 송지언의 푸른 이마에 앉았다.

곧 바람이 사라지고 눈송이도 녹아 사라졌다.

사내의 빈손만이 남았다. 허무한 빈손만이 남았다.

먹어버리면, 다신 볼 수 없다.

먹어버리면, 다신 만질 수 없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차분한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숲을 헤치고 걷는 여린 갈대 같은 뒷모습도 볼 수 없다.

저녁 햇살에 물드는 그 아름다운 옆얼굴도 볼 수 없고, 해가 지면 차갑게 식는 손끝을 쥐어볼 수도 없다.

젓가락을 놀리는 그 몸짓을 볼 수 없고, 그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다는 말도 할 수 없다.

그 표정.

곤혹스러운 듯, 괴롭다는 듯, 어렵다는 듯, 무언가 생각에 잠긴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복잡한 표정.

떠올리기도 힘들고 말로는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 표정도 다시는…….

콱, 하고 차가운 송곳니가 사내의 심장을 꿰뚫었다.

질긴 근육과 여린 점막과 뜨거운 피를 헤치고 찾아드는 고통에 사내는 신음을 흘렸다.

사내는 아픈 심장을 움켜쥐었다.

너무 아파서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송지언은 그저 고요히 누워 있을 뿐인데, 그의 심장을 잔인하게 찢어발기고 있었다.

사내는 가슴을 움켜쥔 채 홀로 평안한 얼굴을 바라보며 애원했다.

“이러지 마라.”

허나 송지언은 대답이 없었다.

사내는 안온하고 고요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얼굴에 의문을 품었다.

‘……당신 곁에 있겠소. 평생 당신의 곁에서 고통 받을 테니, 당신도 내 곁에서 고통 받으시오.’

송지언은 고통을 말했지만 사내는 그것이 무슨 고통인 줄 몰랐다. 그저 곁에 있어준다는 말에 무엇이든 괜찮다고
생각해버렸다.
‘날 죽여서 나를 자유롭게 해달란 말이오! 나는 이제 더 못 견디겠소! 더 이상 그것이 짐승인지 사람인지
생각하는 것도 끔찍하고, 생각하려 애쓰는 것조차 고통스럽단 말이오!’

그것이 이런 고통이었나?

이런 끔찍한 고통이었단 말인가?

사내는 신음처럼 물었다.

“……너도 이런 거냐?”

싫다고 울며 소리쳤다.

밉고 증오스러워 견딜 수 없다 했다.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고 싶다 했다.

그랬기에 지금 평온한 것인가.

기쁘거나 행복하기는커녕, 한번 웃어보지도 못하고 지쳐, 그냥 평온함을 택해 버린 것인가.

‘그런데 궁금하다. 너는 웃을 줄 모르는 게냐?’

‘나를 웃지 못하게 만든 것은 바로 당신이오.’

당신이오.

“그래도 안 된다…….”

사내는 가슴을 움켜쥔 채 송지언을 꽉 안았다.

“싫다.”

싫다.

* * *

또다시 밤새 눈보라가 쳤다.

눈보라가 미친 듯 산과 계곡을 헤집고 골짜기를 파헤쳤다.

대나무의 거친 가지들과 꼿꼿한 가지들이 그 바람을 못 견뎌 흐느꼈다.

너무 춥고 슬프고 아파서 흐느꼈다.


이윽고 비명이 되어버린 소리가 울렸지만 그 소리마저 눈보라에 묻혀버렸다.

하늘을 찢어발기고 산봉우리를 깨부수고 나무의 뿌리를 뒤흔들며 거센 눈보라는 미친 듯 날뛰었다.

그 아수라장이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듯했다.

푸른빛이 어른거리는 동굴 안에도 그 소리가 웅웅 들어찼다.

눈보라가 고함치는 사이로 숲이 통곡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호곡이 가슴을 에었다.

허나 침묵의 밤이었다.

긴 밤이 그렇게 지났다.

* * *

바윗돌에 앉아 밤새 가부좌를 튼 채로 앉아 있었던 새의는, 새벽빛이 눈꺼풀을 툭툭 두들기자 그것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앞엔 여전히 가슴을 움켜쥔 채 송지언을 끌어안은 사내가 있었다.

긴 밤 동안 꼼짝없이 그러고 있었을 사내는 마치 화석과도 같았다.

세월의 흐름과 부식 속에서 제 안에 굳어버린 것을 놓지 못하는, 돌중에서도 아집에 찬 돌을 바라보는 듯했다.

“돌아가라.”

새의가 툭, 내뱉은 말에 사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여전히 미동 않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새의는 일어서서 몸을 돌렸다.

헌데 그런 그의 소맷자락을 사내가 붙잡았다.

새의는 차갑게 그를 돌아보았다.

“살려다오.”

새의는 하마터면 실소를 흘릴 뻔했다.

살려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리될 줄 몰랐다는 변명을 받아들일 그가 아니었다.


죽여서라도 갖고 싶은 몸뚱이를 가졌으면 되었지, 억지는 왜 쓰나 싶었다.

새의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를 놓아주면 살려주겠다.”

사내의 표정은 기묘했다.

봉사 같고, 백치 같은 표정이었다.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 안의 짐승 같은 표정이었다.

열린 새장을 보고도 창살 밖으로 보이던 푸른 하늘로 날아가야 할지 맛있는 먹이와 포근한 잠자리가 있는 새장에
있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새 같은 표정이었다.

“살려다오.”

혼란스러움에 그 눈동자가 이지러지다 이윽고 갈라진다.

깨어진다.

조각난다.

흩어진다.

“살려다오.”

알 수 있는 것이 오로지 그것뿐이라, 사내는 그 말만을 했다.

새의는 비소를 머금었다.

사내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이 어쭙잖게 깨달은 욕심뿐이라는 사실이 그를 비소하게 하였다.

정말 원하는 것은 품에 안은 몸뚱이 따위가 아니거늘.

“후회하느냐?”

‘후회하시오?’

송지언이 물었다.
‘미안하다, 후회하지 않는다.’

사내는 그렇게 답했다.

겁간하고, 얽매고, 고통 주고, 이윽고 제 곁에 메어놓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무슨 방법이든, 어떤 모양이든 지금 송지언이 그의 곁에 있으니까.

못 가질 바에야 죽는 것이 낫다 생각했던 사람을 드디어 가졌다 싶었으니까.

사랑스럽던 몸뚱이.

눈에 보이고 손에 닿는 실체.

자신이 알 수 있는 모든 것.

헌데 그것마저 차갑다.

없어지려 하고 있다.

‘후회하시오?’

사내는 다시 답했다.

“……후회한다.”

너를 이리 만든 것을 후회한다.

겁간하고, 얽매고, 고통 주고, 이윽고 제 곁에 메어놓은 것을 후회한다.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은 모양으로라도, 곁에 두려 한 것을 후회한다.


못 가질 바에야 죽는 것이 낫다 생각했던 것을 후회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했던 것을 후회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그의 감정을 헤아리려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송지언을 안은 손이 덜덜 떨렸다.

죄책감과 두려움이 해일처럼 사내를 덮쳤다.

덜덜 떨리는 팔 안에서 송지언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더 이상 그를 안고 있지 못해 사내는 송지언을 내려놓고 뒷걸음질 쳤다.

까무러치도록 아픈 가슴을 움켜쥐고, 사내는 방금 전까지 송지언을 안고 있었던, 허나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빈손을 바라보았다.

놓아주라니? 가진 게 없는데.

붙잡을 잔상조차 없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오로지 가슴 아픈 얼굴뿐.

웃는 그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가 있었다.

잠든 그 얼굴을 바라보며 이 얼굴이 웃으면 얼마나 예쁠까 상상하는 것이 좋았다.

헌데 그것마저 못하는 건 너무 힘들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어딘가에서 웃고 있을 그를 바랄 수조차 없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송지언이 죽고 없어, 그런 상상의 여지조차 빼앗기고 홀로 남겨지는 고통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허니 꼭 자신에게 웃어주는 것이 아니라도 좋다.

이 가슴의 고통이 안겨주는 형벌보다는 차라리 달갑다.

사내는 오랫동안 흐른 물방울에 이윽고 구멍 뚫린 돌멩이 같은 얼굴을 했다.

줄곧 흘러내린 빗줄기에 쪼개진 바윗돌 같은 얼굴을 했다.

물살에 구르고 또 굴러 둥글게 되어버린 자갈 같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 애초에 자신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무수한 모래 알갱이들 중 하나가 되었다.

‘널 놓아주느니 네가 죽는 게 낫다.’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틀렸다.
“살려다오.”

* * *

끼이익, 끼이익.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송지언은 노 젓는 소리에 깨어났다.

누워 있던 배에서 일어나 보니, 사방에 붉은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조각배 위에 올라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송지언은 배 끄트머리에서 검은 옷을 입고 노를 젓고 있는 사공을 보고 물었다.

“이보오, 지금 어딜 가는 거요?”

사공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노만 저을 뿐이었다. 사공의 뒷모습과 주변의 풍경이 익숙하여 송지언은 어딘가로 가겠거니 하고 더
묻지 않았다.

붉은 안개와 검은 강이 주는 고요가 그를 평안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안 해본 적이 언제더라.

송지언은 배에 앉아 무릎에 팔을 올리고 멍하니 망중한을 즐겼다.

문득 저 멀리서 흐느낌 소리가 들려와, 송지언은 고개를 돌렸다가 안개 저편을 지나는 또 다른 배를 보았다.

그 배에도 검은 옷을 입은 사공과 객이 앉아있었는데 그 객은 구슬픈 울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눈물이 뱃전으로 떨어져 검은 강물과 섞여 흘러갔다.

그 모습은 곧 붉은 안개에 가려졌고, 송지언은 대체 뭐가 저리 슬플까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사공이 화를 내며 투덜거렸다.

“매달려 있는 놈 때문에 무겁다.”

매달려 있다니? 뭐가 있나 싶어 송지언은 뱃전을 살폈다.

헌데 뱃전으로 고개를 내밀자 수면에 송지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낯익은 듯 낯선 사람의 얼굴이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무척이나 공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송지언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자, 사공이 노를 내밀어 수면을 휘저어버렸다.

“에이잇. 떨어져라, 떨어져.”

몸을 돌린 사공을 보니 검은 도포를 입고 검은 삿갓을 쓰고 푸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송지언은 한 번 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요한 검은 강, 붉은 안개. 검은 옷을 입은 사공…….

‘아, 이곳이 황천이구나.’

그것을 떠올리자 수면에 비친 사람이 누구인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내였다.

자신을 겁탈하고 억류하여, 타락시키고 짐승으로 만들어 이윽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도록 만든 자였다.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 죽기 전에는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자였다.

송지언은 다시 뱃전을 내다보았으나 사내의 얼굴은 비치지 않았다.

거기에는 비릿한 웃음을 짓는 자신의 얼굴이 보일 뿐이었다.

이것은 무슨 웃음일까?

드디어 사내가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도망쳐 얻은 자유에 대한 만족감일까?

아니면 사내에 대한 복수를 이런 식으로라도 이룬 승리자의 얼굴인 것일까?

자신의 외면도 냉대도 미움도 달갑게 받아들였던 사내지만, 죽음만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혼자 남아 결국은 자신을 가질 수 없었다는 사실에 슬퍼하며 죽을 때까지 고통 받을 것이다.

허나 송지언은 자신의 웃음이 무슨 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끼이익, 끼이익.

안개를 가르며 배는 계속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안개가 흩어지며 강 건너편이 보이기 시작했다.

흰 들꽃이 가득 핀 지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 말고는 외로워 보이는 빈 나루터만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저승사자가 노를 나루터 다리에 걸고 배를 당겨갔다.

송지언은 내릴 채비를 하며 두고 간 것이 없나 살폈다. 그러다 어차피 다 버리고 가는데 가지고 갈 것이 뭐가


있나 생각했다.
헌데 문득 배 뒤쪽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강보였다.

아기가 태어나면 싸라고 사내가 가져다 둔 것이었다.

송지언은 아, 저건 챙겨가야지 하고 그것을 주워들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아랫배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댔다.

자신의 죽음에도 아무 감흥이 없던 송지언이었지만, 조금 슬픈 것 같았다.

이 아이는 또 태어나지 못하겠구나.

* * *

새의는 동굴 안에 누운 송지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옷을 남김없이 벗기고 반듯하게 눕혔다.

사내는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동굴 안에서 희게 빛나는 송지언의 나신을 눈동자에 새길 듯 바라보고 있었다.

송지언의 몸을 만지기 전, 새의는 잠시 바윗돌에 걸터앉아 자신의 기운을 골랐다.

환자를 고치는 것에 전력을 다하고자, 사내의 존재도 송지언의 사정도 전부 잊고 명상했다.

이윽고 마음이 가라앉고 생각이 비어, 내재된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일렁거리는 기운의 형상이 꼭 발이 여러 개 달린 큰 뱀 같았다.

이윽고 새의는 눈을 뜨고 송지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찢긴 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헝클어진 장기를


제자리에 찾아 넣었다.

시커먼 울혈 덩어리가 바닥에 투둑투둑 떨어져 내렸고, 송지언의 몸이 꿈틀꿈틀 떨렸다.

새의에게서 번져 나오는 푸른 기운이 송지언의 몸을 감싸 육체의 고통 때문에 멀어지려는 혼과의 연결을


붙들어두고 있었다.

송지언의 몸 안에 든 이물질을 빼내려 손을 움직이던 새의는,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송지언의 기운 자체가 워낙 약하여 미처 알지 못했다.


뱃속이 마구 헝클어지고 죽은 피가 들어찬 곳에 웅크리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비록 뱃속에 여러 달 들어 있었지만 그것은 아직 작은, 작디작은 점에 지나지 않았다.

송지언의 몸이 아프다 보니 하나도 자라지 못한 것이다.

새의는 갈등했다.

뱃속의 이것은 송지언의 생명을 갉아먹을 뿐 아니라 정신마저 좀먹을 존재였다.

어차피 사내의 곁을 떠날 거라면 이런 것은 없는 쪽이 좋을지 모른다.

형체조차 없어 생명이 머무르고 있는지 역시 의심스러우니 떼어내면 울혈과 다를 바 없다.

새의는 그것을 죽일까 생각했다.

허나 선택할 수 없었다.

사내만의 아이라면 죽였을 것이다.

허나 이 아이는 송지언의 아이이기도 했다.

자신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몸을 온전하게 하려면 몸에 든 불순물을 끄집어내는 쪽이
좋았다.

이것을 그대로 남겨두고 송지언을 고칠 수 있을는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기에 새의는 곧 오기가 생겼다.

살리려고 마음먹었고, 알고 보니 하나가 아닌 둘이다.

치료를 할 때는 오로지 치료만을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 그였기에 그런 갈등은 곧 잊었다.

죽은 피를 모두 쏟아내고 장기를 제자리에 돌린 뒤 아기방을 최대한 적당한 위치에 놓고 그는 손을 뺐다.

죽은 피가 워낙 많이 나와 새의의 녹색 옷자락과 팔뚝이 온통 시커멓게 젖어 있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전부 다 했다.

이제는 송지언의 문제였다.

빈 몸을 붙들고 애써봤자 송지언의 혼이 떠나면 헛수고인 것이다.

송지언이 다시 돌아올지 의문이었지만, 새의는 기운을 전부 쏟아 부으며 점점 희미해지는 혼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도록 매달렸다.

‘돌아와라.’
* * *

“내려라.”

노를 내려놓은 저승사자가 그리 말하는데 송지언이 물었다.

“이보오, 이 아이는 어찌 되는 것이오?”

“아이라니?”

“내 뱃속에 든 것 말이오.”

저승사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내의 뱃속에 무언가 들었을 리가. 가기 싫어 그러는 거라면 틀렸다. 내 죽기 싫어하는 자들의 오만가지
변명을 들어보았으나 그런 괴이쩍은 소리는 처음 들어본다.”

송지언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런 답답한 저승사자를 보았나. 저승사자라면서 내 뱃속에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단 말이오.”

“나 참. 그러니까 그럴 리가 있느냔 말이다. 설령 네 뱃속에 진짜 무엇인가가 들었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이름이 없어 살생부에 적히지 않았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빨리 내리기나 해라.”

저승사자가 길을 재촉하려는 듯 송지언을 잡아끌었다.

딸려가던 송지언의 움직임이 덜컥 멎었다.

무언가 그의 다리를 잡아당기고 있어 돌아보니, 웬 푸른 실 한 가닥이 그의 발목에 묶여 있었다.

실 끝이 강 저편으로 팽팽히 당겨져 보이지 않았다.

“이건 또 뭐냐.”

가지가지 귀찮게 한다는 듯 저승사자는 혀를 찼다.

그는 짜증을 부리며 허리를 숙이고 송지언의 발목에 묶여 있는 실을 풀어내려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데 아까 저승사자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야.’

아무 일도 없었다니?

그토록 숱한 일들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얼마나 고통 받고 힘들었던가.


차라리 죽고 싶다 얼마나 많이 생각했는지 모른다.

허나 죽음이 아닌 삶을 택했던 것은 속죄 때문이었다.

그것을 위해 사내의 곁에 남았다.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였으니 평생 죄책감과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단지 죽기 싫어 그랬을 뿐인가 하는 의혹까지 느끼곤 했으니까.

‘고통 받으려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고자 속죄하는 것을요.’

일선스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지만 용서를 위한 속죄란 대체 어떤 것인지 자신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말에 작은 위안을 얻었고, 언젠가는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의 때가 이르렀을 때, 도피로서가 아닌 진정한 안식으로서 그것을 맞이했으면 좋겠다고 그리
희망했다.

그리되었다고 생각했다.

헌데 나는 용서받았던가? 혹은, 용서해주었던가?

저승사자는 실의 매듭이 좀체 풀리지 않자 결국 화를 내며 소맷자락을 뒤지더니 가위를 꺼냈다.

진작 이럴 걸 그랬다고 투덜거리며 실에 가위를 댔다.

날카로운 날이 닿자마자 실은 힘없이 끊어졌고, 곧 휙 당겨져 강 저편으로 사라졌다.

저승사자는 다시 가위를 소맷자락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 됐다. 가자.”

저승사자가 나루터에 올라서 손을 내미는데, 송지언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저승사자가 뭐하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 돌아가야겠소.”

저승사자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또 무슨 괴상한 소리냐?”

송지언은 고개를 들어 저승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무엇도 끝내지 못했소.”

저승사자는 아주 골치가 아팠다.

이리 짜증나는 객은 참 오랜만이라 생각하며 혀를 차고는 품속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살생부라 적힌 그 책을 파라락 넘겨 어느 곳을 펼친 저승사자는, 무수한 이름이 적힌 가운데 하나를 짚어 보이며


말했다.

“끝나긴 뭐가 안 끝나? 자, 잘 봐라. 너는 벌써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오래전에 끝났을 사람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자꾸 괜한 소리들로 귀찮게 하지 말고 가자!”

송지언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보니 확실히 알겠소. 맞소. 난 죽으려면 벌써 죽었을 거요. 죽는 수를 몰라 못 죽은 것이 아니오.


죽음으로썬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기에 스스로 힘든 삶을 택했던 것이란 말이오. 난 아직 용서받지 못했소.
용서해주지도 못했소. 그렇게 어렵사리 선택해놓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대로 갈 순 없소.”

“무슨 소리냐! 너 때문에 내가 이 황천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는지 알고 있냐? 가자! 다시 헛수고할 수는


없다!”

송지언은 도로 자리에 주저앉아 강경하게 뱃전을 틀어쥐었다.

“싫소. 나는 못 가오.”

“가자니까!”

“안 되오. 제발 배를 돌려주시오.”

송지언은 간곡하게 부탁했으나 저승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계속 다그쳐도 송지언이 꿈쩍할 생각을 않자 송지언의 옷깃을 콱 틀어쥐고 잡아당겼다.

송지언은 뱃전을 붙잡고 버티려 했으나 저승사자의 힘이 어찌나 센지 그럴 수가 없었다.

버둥거리는 송지언을 나루터로 끌어올리자 배가 저 혼자 스르륵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를 놓아주려던 저승사자는 다급해진 송지언에게 그만 손을 깨물리고 말았다.

“아얏!”

저승사자가 비명을 치며 송지언을 떨쳤다.

그에 밀쳐진 송지언은 좁은 나루터에서 균형을 잡지 못했다.

저승사자가 깜짝 놀라 그를 붙잡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몸이 먼저 넘어갔고, 송지언은 큰 물소리와 함께 강에


빠졌다.

풍덩!
낭패한 저승사자의 얼굴이 수면으로 얼룩지더니, 물거품이 부그르르륵 끓어올라 모든 것을 가렸다.

송지언은 팔다리를 휘저으며 헤엄치려 했으나 꼭 아래서 무언가가 끌어당기듯 가라앉을 뿐이었다.

계속, 계속.

이윽고 수면의 희미한 빛조차 멀어지고, 모든 것이 새카만 암흑에 잠겨 들었다.

* * *

“-!”

새의는 외마디 신음을 내뱉고 풀썩 쓰러졌다.

어렵사리 닿은 혼과의 연결이 강제적으로 끊어지자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송지언의 몸과 새의의 몸을 뒤덮고 있던 푸른 기운이 훅 꺼졌고 새의는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사내는 새의마저 정신을 잃자 놀라 송지언을 바라보았다.

흰 나신을 드러내고 누운 송지언의 몸은 파르랬다.

어둑한 동굴 속에서 그의 몸만이 희게 떠올라 있었다.

아까처럼 여전히 아름다운 몸이거늘 달랐다.

그것은 그냥 빈껍데기일 뿐이었다.

사내도 여실히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내는 쓰러진 새의를 붙잡아 올렸다.

정신을 놓은 그의 뺨을 찰싹찰싹 후려치며 뒤흔들었다.

“어찌 된 거냐!”

허나 뺨이 부어오르도록 때리고 목이 빠지도록 흔들어 봐도 새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찌 된 거냐고!”

풀썩, 그를 뒤흔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자 결국 사내는 새의를 놓았다.

그는 멍청한 얼굴로 송지언을 돌아보았다.

희고 창백한 얼굴을 손끝으로 쓸어보다, 그 차가움에 어깨를 떨었다.


손을 내밀어 아무리 뺨을 문질러 봐도 따뜻해지지 않았다.

품에 끌어안아 봐도 얼음장처럼 차가워, 미약한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옷자락을 끌어당겨 덮어주어도 온기는커녕, 그를 안은 사내의 손가락까지 시려올 지경이었다.

사내가 갖고 싶었던 건 이런 빈껍데기가 아니었다.

송지언을 안은 사내의 손가락이 희게 돋아났다.

그 껍데기를 부서트릴 듯 움켜잡고 사내는 신음했다.

“놓아준다잖느냐…….”

마침내 그를 이해하고, 이제야 그가 바라던 대로.

“놓아준다는데…… 왜.”

왜!

알 수 없는 비통한 소리에 대숲 전체가 부르르 떨렸다.

눈 속에 숨어 있다 놀란 산짐승들이 뛰쳐나가고, 댓잎 위에 아슬아슬하게 앉아있던 눈들이 전부 쏟아져 내렸다.

높은 바윗돌에 산더미처럼 올라앉아 있던 눈덩이가 떨리다 쩍 쪼개져 쏟아져 내리자 쌓인 눈들이 우르르릉 굉음을
뿜으며 무너졌다.

눈들이 산비탈 한쪽을 완전히 깎아 먹으며 골짜기를 깨부수고 계곡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눈사태가 그쳤을 땐 정적이 찾아들었다.

허나 그 정적은 도리어 귀를 먹먹케 했다.

* * *

새의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사방은 조용했다.


그는 어찌 된 일인가 눈을 깜박였다.

기운을 전부 쏟아부어 간신히 그 혼을 붙잡았다 생각했는데, 실낱같은 연결이 갑자기 끊겨 그 충격에 자신도
넘어지고 말았다.

새의는 인상을 찡그리다 뺨이 몹시 아픈 것을 깨닫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이유 없이 부은 뺨을 붙잡고 몸을 일으키니 송지언을 끌어안고 엎어져 있는 사내의 커다란 등짝이 보였다.

무정물을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새의는 놀라 어깨를 떨었다.

사내마저 죽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의는 손을 뻗어 사내의 어깨를 만져보았다.

아직 따뜻했지만 움직이는 기색은 없었다.

이번엔 흔들어 보았다.

허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덕분에 송지언도 살펴볼 수 없었다.

혼을 잡은 느낌에 혹시나 했는데 그른 것 같았다.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내의 모습만 봐도 초혼이 실패했다는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새의가 아무리 명의고 도인이라지만 그 역시 세상의 이치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을
다 살릴 수는 없었다.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었지만 씁쓸했다.

송지언 하나가 죽음으로서 세 사람이 죽는 꼴이다.

사내는 아직 살아있지만 저런 것을 살아있다고 볼 수는 없었다.

다시는 기쁠 일도, 웃을 일도, 즐거울 일도 없는 것을 삶이라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새의는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나갔다.

간신히 그쳤다 싶은 눈발이 다시 날리는 것을 보니, 눈이 쉬이 그치지 않고 오래도록 내릴 모양이었다.

대숲을 지나 눈 쌓인 바윗돌까지 나간 새의는, 문득 자신의 손과 팔이 피투성이라는 것을 깨닫고 허리를 숙여


눈을 집어 문질렀다.

흰 눈에 검은 피가 묻어 나갔다.

차가운 눈에 피부가 빨개지도록 문지르고 또 문지르며, 그는 죽음을 잊으려 애썼다.

실컷 눈을 맞은 새의가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 이미 그곳은 비어 있었다.

송지언의 시신도, 사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큰 발자국 하나만이 대숲에 점점이 남아, 눈밭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 * *

온 세상이 희었다.

산의 능선이 전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산은 색깔이란 것을 잃어버린 듯했다.

분홍빛 봄과 푸른 여름과 알록달록한 가을의 죽음을 애도하며 흰 수의를 입었다.

검은 것은 오로지 눈밭을 걷는 사내와 그 품에 안긴 송지언 뿐이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헤치고 사내는 망연히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찌해야 할지도 몰라 그저 걷고만 있었다.

허나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 때문에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사내는 곧 눈 속에 두 발이 다 빠져 송지언을 안은 채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푹, 하고 눈 속에 파묻혔다.

눈 속에 몸을 묻은 채 사내는 침묵했다.

사방은 정적에 찬 듯했으나, 귀를 기울이면 사락사락, 눈 쌓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겨울이 우는 소리였다.

사락사락.

사락사락.

사내의 머리와 어깨와 등, 펼쳐진 다리에 눈들이 쌓였다.

눈들이 흰 눈밭에 생긴 얼룩을 지우듯 사내를 덮어갔다.

차가운 바람이 한 줄기 불어 사내를 스치자,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품 안에 갇혀 눈 속에 파묻힌 송지언을 바라보았다.

흰 눈과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에 엉켜 있었다.

사내는 곱은 손을 내밀어 머리카락을 걷어 귀에 걸었다.


드러난 얼굴이 고요했다.

영영 안식을 얻은 그 표정이 참으로 평화로워, 어찌 보면 미소 짓는 듯도 보였다.

사내는 손가락 끝으로 송지언의 입가를 더듬었다.

창백하게 언 입가를 더듬어 만지며, 그 입가가 초승달처럼 올라가 미소 짓는 것을 그려 보았다.

얼마나 예쁠까.

심장이 터져버리겠지.

그리고 자신 역시 그 입술을 따라…….

사내는 얼어붙었던 얼굴을 누그러트렸다.

그 표정 그대로 송지언을 당겨 안았다.

그 몸에 몸을 겹치고 누워, 그와 체온을 맞췄다.

자신의 체온을 나누고 또 나누어, 따뜻해지지 않으면 자신도 같이 차가워질 작정이었다.

눈 속에 무덤을 만들어, 영원히 썩지도 변치도 않고 같이 있을 참이었다.

그럼 언젠가 이 가슴속의 고통도 얼어붙어,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지.

나도 너처럼 평화로울 수 있겠지.

그런 사내의 바람을 들어주듯 흰 눈이 끝없이 내렸다.

둥근 무덤을 만들 듯 사내를 덮었다.

* * *

송지언은 귀가 먹먹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너무 어두워서, 자신이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좌우나 위아래도 구분이 가질 않았다.

그저 어두웠다.

여기가 어딘가.
내가 왜 이런 곳에…….

생각을 더듬어 보려 했으나 생각이란 것 자체가 몹시 희미했다.

송지언은 스스로에 대해 떠올리기 위해 무던 애를 써야 했다.

아주 어릴 적 느꼈던 별것 아닌 일에 대한 억울함과, 유독 길었던 어느 하루와, 어느 순간부터 희미해진 시간을


떠올렸다.

보잘것없는 유년기와 별 볼 일 없는 청년기를 거쳐, 틀에 갇힌 듯 평범하고 무난하게 흘러가던 삶이 평생 이어질


줄 알았다.

허나 송지언은 곧 그런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뒤흔들렸던 것을 기억해 냈다.

과거에 낙방하고 낙심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때 온몸을 두들기며 내렸던 폭우.

사방을 둘러싼 산을 보며 느꼈던 막막함, 지치고 힘들어 점멸했던 시야.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처음 사내를 만났을 때 그를 보고 느꼈던 기묘한 이질감과 두려움.

피 냄새를 닮은 체취와 표정을 읽을 수 없던 눈동자. 그리고…….

송지언은 생각을 멈췄다.

그 뒤에 이어질 기억들이 너무 힘들어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니, 서서히 시야가 밝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문득 어디선가 향기로운 냄새가 나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등 뒤에 탐스러운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린 도원이 있었다.

그곳에서 풍기는 복숭아 향기가 참으로 향기롭고 그 풍경이 아름다웠다.

‘저곳에서 모든 시름을 잊고 맛있는 과실을 배불리 먹은 뒤 낮잠이나 한숨 자면 좋겠구나.’

송지언은 그곳으로 가려다가, 자신이 무언가에서 등을 돌리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앞을 보았다.

저 앞에는 산딸기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다.

그것은 아직 어렸다.

가느다란 줄기에 보잘것없는 이파리 몇 개를 단 나무였다.

얼핏 이파리 뒤에 붉은 것이 보여 고개를 기울인 송지언은, 나뭇잎 뒤에 가린 새빨간 열매 하나를 볼 수 있었다.

딱 하나였다.
핏방울을 떨어트린 듯 붉은 열매 하나.

그 알량한 것을 지키려고 나무는 파란 가시를 뾰족하게 곤두세우고 있었다.

송지언은 그 산딸기와 도원을 번갈아 보았다.

허나 송지언의 발길을 잡아끈 것은 붉은 열매 하나였다.

송지언은 산딸기나무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러다 가시에 손이 찔렸다.

따끔한 아픔에 그는 손을 들어 상처를 살폈다.

붉은 핏방울이 솟아났다.

송지언은 그것을 입에 넣고 빨았다.

씁쓸한 쇠 맛이 혀를 적셨다.

그는 다시 손을 내밀어 열매를 땄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금방 으스러질 것 같은 열매를 입에 넣었다.

그 열매조차 무작정 달지 않았다.

달콤함보다는 시큼함이 입안을 맴돌았다.

그렇지만 그 시큼함 속에 숨은 아릿함을 맛보고 나니, 혀가 저릴 듯 달콤하고 즙이 뚝뚝 떨어질 복숭아를 먹을


생각은 사라져 버렸다.

붉은 열매의 맛이 너무 강렬했던 탓이다.

송지언은 허리를 숙여 땅을 팠다.

흙을 헤집고 여리고 작은 나무의 옅은 뿌리를 조심스럽게 들어냈다.

흙을 털어 가시가 찌르는 것도 아랑곳 않고 그것을 품에 안았다.

이미 만들어진 풍요로운 도원보다 아직 어린 가시나무가 그는 더 좋았다.

키우기 힘들고 가시에 찔려 아프더라도 언젠가는 붉은 열매를 조롱조롱 맺을 이 나무를 키우고 싶었다.

자신이 선택했다.

그 열매는 달지 않고 실테지만, 그래도 자신이 맺은 결실이니까.

송지언은 가시나무를 안고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사방이 캄캄했지만 이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송지언은 명쾌하게 걸어갔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땐, 세상이 너무 희어서 눈이 아팠다.

눈이 욱신 하는 느낌에 송지언은 도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흰 빛 말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송지언은 그 빛이 눈에 익숙해질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눈이 아리고 귀가 먹먹한 풍경이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먼저 느껴진 것은 피부에 와 닿는 차가운 눈의 감촉이었다.

콧등에도 이마에도 뺨에도 눈꺼풀에도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다음으로 느낀 것은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였다.

희미한 그 소리가 흰 세계를 쓸쓸하지 않게 메우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느낀 것은 자신을 품에 안은 사내였다.

사내는 얼어붙은 돌덩이처럼 미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송지언에게 보였던 것은 사내 어깨 너머의, 눈이 내리는 흰 하늘이었다.

송지언은 더 이상 눈이 아프지 않은 것을 느끼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꺼풀에 자꾸만 매달리는 눈송이를 뿌리치느라 몇 번이고 그것을 깜박여야 했다.

허리를 꽉 안고 엎어진 사내 때문에 송지언은 입술을 열었다.

“무겁소.”

사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사내의 어깨에 쌓여 있던 눈덩이가 파삭하고 떨어졌다.

답답함에 송지언이 후, 하고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얇은 피부 밑에 진동하는 맥박이 느껴졌다.

자그맣게, 하지만 북소리처럼 자신을 때리는 심장의 박동을 깨달았다.

품 안에, 체온이 고이고 있었다.

맞닿은 가슴에서 퍼지는 열기가 따스하게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그 따스함에 자각치 못하고 있던 눈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무겁다는데도 사내는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키라고 말하려던 송지언은, 자신을 안은 사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깨달았다.

품 안에 고이기 시작한 체온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귓전에 들리는 호흡소리가 거짓이 아니냐는 듯, 모든 것이 다


두렵고 무섭다는 듯 그렇게.

송지언은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또다시 눈꺼풀에 달라붙는 눈송이 때문에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이윽고 그것도 포기하고 그냥 눈을 감았다.

조용히 눈 쌓이는 소리를 들으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생각했다.

사락사락.

사락사락.

속눈썹에 맺힌 눈송이들이 송지언의 체온에 녹아 흘러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어깨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녹아내린 눈 때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젖은 어깨는 뜨거웠기 때문이다.

송지언은 뭐라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대신, 손을 들어 사내의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툭툭 털었다.

털어도 쌓일 눈이지만 사내는 그것을 만류하지 않았다.

품 안의 따뜻한 송지언이 있는 한, 눈은 전부 녹아버릴 테니까.

눈이 가지는 차가움은 이 따뜻함에 비할 수 없을 테니까.

그 따뜻함을 시샘하듯 눈이 자꾸 내렸다.

이제 그만 비켜서 그 따뜻함 좀 보여 달라며 눈들이 자꾸만 쌓였다.

허나 욕심 많은 사내는 그 따뜻함을 내어줄 맘이 없었다.

더욱더 품에 깊이 안을 뿐이었다.

15.
송지언은 멍하니 눈 덮인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폭설로 산은 커다란 솜이불을 둘러쓴 듯했다.

햇살이 내리비치는 그 솜이불은 은사로 수를 놓은 듯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마른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며 까치 한 쌍이 먹을 것을 찾는 중이었다.

뭐라도 있나 흰 눈밭으로 내려온 까치들이 꽁지깃을 기우뚱거리며 돌아다녔다.

덕분에 눈밭 위에 나뭇가지로 찍은 것 같은 발자국이 점점이 남았다.

“춥다.”

까치들은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날아갔다.

송지언이 돌아보니 사내가 저 멀찍이 서서 고개를 모로 돌린 채 서 있었다.

송지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봐도 사내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지 않아, 추우니 들어가자고 말하는 사내를 무시할까
생각했다.

허나 어른답지 못한 것 같아서 그는 대답했다.

“들어가오.”

송지언이 그리 말하고 나서야 사내는 가까이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와서도 여전히 눈을 맞추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한 팔을 내밀었다.

전 같으면 싫다고 밀어내어도 파고들었을 팔이거늘.

송지언이 스스로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팔의 거리는, 참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오늘, 햇볕을 쬐고 싶다는 말에 사내는 송지언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그를 데려다주고 사내는 곧 모습을 감췄다.

모습을 감췄다고는 해도 시선이 느껴져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곁에 딱 붙어 뚫어져라 바라보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앞에 나타나도 눈을 맞추려 들지 않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접촉조차 꺼리니 사내는 아무래도 자신에게
거리를 두려는 모양이었다.

송지언은 사내의 팔을 붙잡고 일어섰다.

팔에 기대어 불편한 몸을 추슬러 대숲 안에 있는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 안에서 약을 달이고 있던 새의가 돌아오는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상처가 야물게 붙지 않았으니 어지간하면 걷지 마라.”

송지언이 누워 지내는 짚자리에 그를 앉힌 사내는 송지언이 손을 놓자 얼른 물러섰다.

주춤주춤 몇 발짝 뒷걸음질 치더니 그대로 동굴입구의 우묵한 곳에 주저앉았다.

그곳이 사내의 자리였다.

송지언이 누운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바깥쪽.

그것 역시 언제나 송지언의 곁에 붙어 자던 전과는 다른 태도였다.

새의는 달인 약재를 삼베 천에 걸러 탕약을 짜냈다.

맛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시커먼 것을 그릇에 부어 송지언에게 내밀었다.

몹시 고약한 냄새가 피어올라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면서도 송지언은 미간을 모았다.

대체 무엇을 넣었는지 알 수 없는 약은, 쓸 뿐만 아니라 맛이 매우 기묘했다.

느끼하고 미끈미끈하다고 해야 하나.

선지를 들이켜도 이리 고약하진 않을 거라 매번 진저리를 치곤 했다.

주는 탕약을 거절할 수도 없어 송지언은 사약 받는 심정으로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눈을 꾹 감고


한 번에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미끄덩한 감촉이 괴상했고, 입안에 남는 뒷맛이 끔찍했다.

송지언이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하려 하자 새의가 무섭게 말했다.

“도로 뱉어내면 가만 안 둔다.”

송지언은 입을 틀어막고 구역질을 참았다.

입안에서 침이 잔뜩 솟아났다.

간신히 구역질이 가라앉아 새의가 물을 떠 주었고, 그것으로 입안을 헹구고 나서야 살 것 같았다.

송지언에게 약을 먹인 새의는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새의는 송지언의 약을 달이고 그 몸을 진찰할 때 외에는 동굴에 붙어 있지 않았다.

어디서 지내는 건지 밤 동안엔 모습을 감추었고, 아침나절에 잠시 들릴 땐 송지언이 먹을거리를 조금씩 들고 왔다.

어느 날은 밤이나 고구마이기도 했고, 어느 날은 말린 나물이나 열매이기도 했는데, 가끔은 도대체 어디서


구해오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들려있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오늘 아침 가져온 복숭아가 그렇다. 한여름에 나는 과일이 겨울에 보이니 송지언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디서 이런 걸 가져 오냐 물어보면, 새의는 산 너머 어느 골짝에서, 계곡 위쪽 산등성이에서, 이런 식으로
대답했기 때문에 어딘지 알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나갈 채비를 하고 지팡이를 손에 든 새의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동굴 한구석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서책이었다.

“이제 몸을 좀 추슬렀으니 심심하겠지. 오래된 것이지만 이거라도 읽으며 무료함을 달래라.”

새의의 마음 씀씀이가 새삼 고마워 송지언은 고개를 숙였다.

“살려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이리 챙겨주시니 감사한 마음을 표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살리려 했어도 네가 살 마음이 없었더라면 소용없는 짓이었다. 허니 내게 감사할 필요 없다.”

태도가 무심하고 다정한 말은 없을지언정 정성으로 돌봐주고 있단 걸 누구보다 송지언이 잘 느낄 수 있었다.

가족이라 한들 하루 두 번 약을 달이고 그 몸을 보살피며 먹는 것과 심심한 것을 다 챙겨주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새의는 별다른 대꾸하지 않고 지팡이를 짚어 동굴 밖으로 나갔다.

새의가 사라지자 송지언은 그가 주고 간 서책을 펼쳐 들었다.

산으로 들어온 뒤 처음 보는 서책이었다.

아니, 사내를 만난 이후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는 서책이었다.

서책은 짧은 산문과 시, 그리고 서신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작자를 알 수 없었다.

문장이 오래되고 책 또한 낡은 것이 상당한 옛것이었다. 작자가 직접 쓴 것 같아 송지언은 흥미를 가지고 서책을


보았다.

새의가 쓰기라도 한 걸까?

한참 서책을 들여다보던 송지언은 문득 옆통수가 따끔따끔한 것을 느꼈다.

그래서 고개를 드니 사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다시 서책으로 시선을 내린 송지언은, 또 옆통수가 따가운 것을 느끼고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또 사내는 자기가 언제 쳐다보았냐는 듯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몇 번 반복되자, 송지언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볼 테면 보고, 말 테면 말 것이지 장난치자는 것도 아니고.

“이보오.”

송지언의 부름에 사내는 딴청을 피웠다.


괜히 손가락을 내밀어 흙바닥을 직직 그었다.

“이보오. 왜 그러는 거요?”

흙바닥에 그리는 모양이 어지러워진다.

“내가 뭘.”

“왜 내 눈을 피하는 거냔 말이오.”

“안 피했다.”

“피했잖소.”

“안 피했다.”

고개를 돌리고 대꾸하는 사내의 어조가 몹시 고집스러워, 추궁해봤자 계속 안 피했다고 우길 것 같았다.

이대로는 신경 쓰일 게 뻔했고, 대체 왜 저러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송지언은 꾀를 내어, 서책을 놓고 배를 움켜잡으며 아픈 척했다.

“아야…….”

송지언의 신음에 사내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배를 감싸고 몸을 수그린 송지언을 보니 어디가 아픈 것 같아 사내는 사색이 되었다.

곧장 그의 옆으로 가 안절부절못하며 송지언을 봤다.

“왜, 왜 그러냐? 어디 아프냐? 새의를 불러오랴?”

송지언은 갑자기 사내의 팔을 탁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사내를 똑바로 쳐다봤다.

팔을 붙잡힌 사내는 불시에 시선도 붙잡히고 말았다.

그대로 송지언의 맑은 눈에 사로잡혀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왜 일부러 피하는 거요?”

사내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아주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송지언의 눈동자에 넋을 잃은 듯도 했고, 사랑스럽다 생각하는 듯도 했고, 그것이 슬픈 듯도 했고, 심지어는


무서운 듯도 했다.

그는 한참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다 어렵사리 말했다.

“……일부러는 아니다.”
송지언은 미간을 모았다.

뭔가 더 물으려 하자 사내는 그의 손에 붙잡힌 팔을 빼냈다.

그리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책 봐라. 난 나가 있겠다.”

“이보오, 신경 쓰여서 그러지 말라는 것만이 아니라……. 이보오, 이보오.”

송지언이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사내는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나가버렸다.

혼자 뎅그러니 남은 송지언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밖은 추울 텐데.”

* * *

서책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엔 좋았으나 그리 재밌진 않았다.

서책의 내용이 별로라기보다 송지언이 글줄에 재미를 못 느낀 탓이다.

평생 책을 읽으며 살아왔는데 책에 재미를 잃다니.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의무적으로 책을 읽어오긴 했으나 진정 그 책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그다지 없는


것 같았다.

송지언은 책을 다 읽자 피곤해져서 잠시 낮잠을 잤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사내가 불을 피우고 솥에다 곡기와 호박, 밤을 넣고 죽을 끓이고 있었다. 새의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동굴이 고소한 냄새로 가득 들어차자, 송지언은 허기를 자각했다.

곧 죽을 접시에 담아 가지고 온 사내가 그것을 휘저어가며 먹기 좋을 정도로 식혀 내밀었다.

송지언은 수저를 들다가, 늘 혼자뿐인 식사에 미약한 불만을 느꼈다.

누군가와 같이 먹어야 입맛도 돌고 그러는 법인데 혼자 먹으니 심심하고 쓸쓸했던 것이다.

“당신은 저녁을 들지 않는 것이오?”

송지언에게 물을 떠다주던 사내는 그 말에 답했다.


“난 나중에 밖에서 먹으면 된다.”

“아직 먹지 않았다면 같이 들면 되잖소. 죽도 남은 것 같던데.”

사내는 잠시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건 그냥 네가 먹는 게 좋겠다. 난 저런 걸 먹어도 맛을 모른다.”

이상한 소리에 송지언은 되물었다.

“맛을 모른다니?”

“난 익히고 소금에 간한 음식은 맛을 모르겠다. 그러니 내가 먹어도 아까울 뿐이다.”

송지언은 처음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송지언을 겁간하고 붙들어 두었을 땐 오로지 고기만 먹던 사내였다.

송지언이 날것은 못 먹으니 익힌 것을 주었지만, 사내는 거의 날 것에 가까운 고기를 먹곤 했다.

그렇다 해도 산중의 습관이라 생각했지 음식의 맛을 몰라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여태껏 송지언과 함께 식사하고 수저를 쓰기까지 했던 건 모두 그에게 맞췄던 것이다.

사내가 좋아하는 식사는 사냥한 즉시 가죽을 찢고 살을 뜯고 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피 냄새조차 싫어하는 송지언이기에 그동안 말하지 않았지만, 사내는 이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몸이 다 나으면 송지언은 마을로 돌아갈 것이고, 자신은 산으로 돌아갈 테니까.

사내가 그리 말하니 송지언은 더 권하지 못했다.

사내는 더 이상 자신 따윈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동굴 밖으로 나가버렸다.

배가 고팠고 호박과 밤이 들어간 죽은 달았지만 송지언은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배를 채우기 위해 의무적으로 하는 식사가 즐겁지 않았던 탓이다.

* * *

다음 날.

동굴로 돌아온 새의는 새끼줄에 엮은 굴비를 한 마리 들고 왔다.

산중에 민물고기도 아니고 바닷고기를 구해오다니 송지언은 저 사람의 발에 날개라도 달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구워주든지 하라고 사내에게 굴비를 던져준 새의는, 약재를 불에 올려놓고 송지언의 몸을 살폈다.

일단 맥을 짚고 아랫배를 만져본 그는 오늘따라 다리 사이를 보이라 했다.

상처를 보기 위함임을 알고 있지만 치부를 드러내는 일인지라 몹시 창피했다.

그나마 사내가 곁에서 쳐다보지 않는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사내는 새의가 송지언의 몸을 살필 때면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늘 동굴 밖으로 나가 있곤 했다.

바지를 벗기고 송지언의 상처를 살핀 새의는,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이제 거의 다 아물었다. 무리하여 걸으면 상처가 터질 수 있으니 행동을 조심해야겠지만 약을 잘 먹은 효과가


있는지 빨리 나았다. 그래도 아직 장기는 성치 않으니 가끔은 죽은 피가 나올지도 모른다.”

송지언이 옷차림을 갖추고 앉자, 새의는 평소처럼 약을 살피는 대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그를 보았다.

“하실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송지언의 말에 새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네 뱃속에 있는 것 말이다.”

“아…….”

송지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살아……있습니까?”

거의 죽다 살아난 데다 의원인 새의가 별말을 않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있던 송지언이었다.

허나 새의가 저리 말하는 것을 보니 죽지 않은 모양이다.

“저놈의 자식이라 그런지 명이 질기구나. 아직 살아는 있다만, 사실 심장조차 생기지 않은 작은 핏덩이일 뿐이니
살았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울혈이 모이고 순환이 막히는 와중 아이가 생겼으니 기력이 쇠해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던 거다. 틀어진 장기를 바로잡았으나 이물질은 빼내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어, 사실 네 몸이 온전하게
나았다고는 할 수 없다.”

송지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보고 새의는 말을 이었다.

“다시 무리하게 상처를 벌려 이물질을 꺼내느니 놓아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는 이야기가 또 다르다.
그것이 점점 자라면 몸의 부담이 커질 테니 말이다.”

“그렇습니까.”

“허니 없애려면 지금 없애라. 어느 정도 기력이 돌아왔으니 약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저 핏덩이만 좀 나올 테고


큰 고통이나 어려움은 없을 것이야.”

“…….”
송지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뱃속의 아이를 속죄의 도구나, 하늘의 기회 운운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미 깃든 생명을 자연스러운 죽음도 아니고
인위적으로 없앤다는데 쉽게 답할 수 없었다.

그런 송지언의 갈등을 알아차린 듯 새의가 말을 이었다.

“너를 치료해주는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아느냐.”

송지언은 산삼의 위치를 알려주는 대가로 사내가 자신의 시체를 넘기기로 약속했었단 말이 떠올랐다.

설마 자신의 목숨 대신 그의 목숨을 바치기로 하여 요사이 태도가 이상했던 것인가 싶어 송지언은 물었다.

“모릅니다. 설마, 저 대신으로 말도 안 되는 약속을 해버린 것은…….”

“그런 건 아니다. 내가 널 치료해주는 대가로 요구했던 것은, 널 놓아주는 것이었다.”

송지언은 순간 멍해졌다.

“저를…….”

“널 놓아주는 것 말이다.”

“그럴 리가.”

송지언은 중얼거렸다.

그런 조건을 사내가 응했을 리 없다.

가지지 못하느니 죽는 게 더 낫다고 말하던 사내였다.

억지로 이 몸을 찢고 아이를 갖게 해서라도 붙들어 두려던 사내였다.

헌데 그런 사내가.

“그러니 저놈 같은 건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땐 강제로 널 이렇게 만들어 놓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을 게야.


더군다나 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면 뱃속에 든 것은 짐이 될 거다. 그래서 네 몸을 치료하면서 내가
죽일까도 했다만, 네 아이기도 하니까 그러지 않았다. 허니 네 결정대로 해주마.”

그것은 매우 달콤한 말이었다. 송지언이 무엇보다 원했던 것이기도 했다.

허나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왔다.

이미 모든 것을 버렸고, 원했더라면 마음 편한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것조차 마다하고 여기에 있는 이유는, 도망치지도 피하지도 않을 작정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진정 용서하고 용서받는 날이 영영 오지 않더라도,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고통과 아픔을 저승까지
짊어지고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이젠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송지언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말했다.

“낳겠습니다.”

새의는 그를 바라보다 짧게 한숨 쉬었다.

“어려운 길을 가는구나.”

* * *

그날도 두 번이나 그 고약한 약을 송지언에게 먹이고 새의는 동굴을 나갔다.

해가 지자 사내가 불을 피우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흰 죽을 끓이고 굴비를 구웠는데, 달리 부탁하지 않아도 먹기 좋게 가시를 발라내고 그것을 찢어놓아 송지언은
놀랐다.

처음엔 희멀건 고깃국밖에 내놓을 줄 모르던 사내였는데 지금은 이렇게나 달라졌다.

자신 쪽으로 가지런히 놓은 수저를 보면서 송지언은 느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땐 자신이 사내처럼 짐승같이 변한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사내가 자신을 닮아
변해가고 있었다.

할 줄 아는 음식이 늘고, 수저를 쓸 수 있게 되었으며,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안다.

침식된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다.

사내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극과 극의,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물과 기름이었음에도 수많은 상처와 고통에 닳아, 이윽고 서로 비슷해져 가는


것이다.

“오늘도 함께 먹지 않을 거요.”

송지언이 그리 말하자 사내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말했잖냐.”

“맛을 느끼지 못해 먹는 것이 고역이었던 거요?”

자신의 강요로 그동안의 식사가 힘들었던 건가 하고 묻자,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지 힘들진 않다.”


“그럼 이리 와서 앉아주시오.”

송지언은 시선을 외면한 사내를 보며 부탁했다.

“혼자 먹기 쓸쓸하오. 같이 들어주시오.”

사내는 그 말에 송지언을 돌아보며 당혹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송지언의 시선과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송지언이 일어나 수저를 하나 더 가지고 오고, 솥 바닥을 삭삭 긁어 죽 한 그릇을 더 뜨자 머뭇거리는 몸짓으로


다가와 앉았다.

흰 죽에 굴비를 얹어 먹으니 짭짤하니 맛있었다. 산 중에서는 귀한 것이라 더 그런 건지도 모른다.

송지언이 굴비를 사내의 수저 위에 얹어주자, 사내가 말까지 더듬으며 거절했다.

“나, 나는 어차피 맛을 모른다잖냐. 너나 많이 먹어라.”

“그래도 어찌 나만 먹소. 드시오.”

사내가 굴비를 송지언의 그릇으로 옮겨놓아도 송지언이 다시 되돌려놔, 몇 번이고 어린애 같은 실랑이를 해야
했다.

결국 사내는 굴비를 입에 넣고 씹었다.

사내에게는 비린내만 느껴졌을 굴비지만, 송지언이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의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다.

그 맛이 입안으로 번지자 이상하게 목이 꽉 메었다. 그래서 입안에 든 것을 쉬이 삼키지 못하고 한참을


우물거리다 간신히 넘겼다.

추운 것도 아닌데 코끝이 시큰거려, 코를 훌쩍거리고 사내는 말했다.

“……맛있다.”

그 말에 담긴 여러 가지 의미를 느꼈지만 송지언은 별말 하지 않았다.

“그렇소.”

다시 죽을 뜨던 송지언은 사내가 수저를 내려놓고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자 고개를 들었다.

사내가 똑바로 송지언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정면에서 시선을 받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헌데 그 표정이 이상해서 송지언은 또 왜 저러나 하고 생각했다.

사내는 흡사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새의의 이야기를 들었다.”


송지언은 자신이 사내의 곁에서 아이를 낳기로 했다는 것을 새의가 말했나 보다 생각했다. 그래서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이젠 괜찮다더라. 아직은 조심해야겠지만 상처가 거의 아물었다고.”

“그렇다고 하더이다.”

“허니 내가…….”

사내는 무릎 위에 둔 주먹을 웅크렸다.

“내가…….”

사내의 검은 눈이 일렁였다.

그것이 부풀어 올라 포도알처럼 툭 하고 떨어질 것 같았다.

허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사내가 고개를 떨어트렸기 때문이다.

“내가 더 있을 이유가 없는 것 같다.”

“…….”

송지언은 그제야 새의가 자신의 몸이 나았다는 이야기만 했을 뿐이란 걸 깨달았다.

치료를 대가로 놓아줄 것을 요구했다면서, 자신이 남는 것을 사내에게 말하지 않은 그 심보가 얄미웠다.

그러잖아도 어려운 길 가는 사람 더 어렵게 만드는구나 싶어 송지언은 한숨을 쉬었다.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슬퍼 말을 잇지 못하는 사내를 내버려두고, 그는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사내가 자신이 좋아 그런다고 섣부른 오해를 하지 말았으면 싶었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것을 용서받았다는 착각은 용납할 수 없었다.

“내 몸을 낫게 해주는 대가로 날 놓아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들었소.”

사내는 답하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을 놓아준다 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주먹을 말아 쥐고 고개를 떨군 채 이별의 선고를 견뎌내려 하고 있었다.

송지언은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놓아주겠다는 그 말을 얼마나 바랐던가.

헌데 그것을 거절하게 되다니.

놓아주겠다는 말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자신은…….


아니, 후회는 소용없지.

송지언은 곧 고개를 저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려면 끝이 없다.

그날 벼랑 위에 서지 않았더라면,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사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과거에 낙방하지 않았더라면,


더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그러다 보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사람의 생이다.

“누구 맘대로 날 놓아주겠다고 한 거요.”

사내는 송지언이 그런 말을 꺼내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기뻐하거나, 설령 기뻐하지 않고 원망을 비추더라도 늦은 것에 대한 원망일 줄 알았는데.

사내가 고개를 드니 송지언이 차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엔 한 점의 의혹도 망설임도 없었다.

시월의 하늘처럼 맑고 개운했다.

“당신은 언제나 내 문제를 당신 마음대로 해결하려 하는구려. 놓아준다니? 그런 건방진 말이 어디 있소. 나는


달아나려면 달아날 수 있는 사람이오. 당신이 아무리 끈질기다 하더라도 죽어서까지 따라올 수야 있겠소? 허니 내
거취를 결정하는 건 내 마음이외다. 난 내가 택하여 이 자리에 있는 거요. 용서받고 싶다 생각하니까, 혹은
용서해주고 싶다 생각하니까.”

사내는 송지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말이 어렵고 단박에 이해가 되질 않아, 아니, 사실은 믿기지가 않아 자신의 생각과 송지언의 의도가 맞는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사내는 조심스레 물었다.

“내 곁에 있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느냐. 난……, 이제 그것은 싫다.”

“고통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오. 여전히 당신이 밉고 싫소. 하지만 계속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힘드니 관두고 싶을 뿐이오. 그러고자 당신 곁에 있겠다는 거요.”

그리 들어도 알 수 없었다. 사내는 혼란스러운 눈을 했다.

“그런 말……. 이상하다. 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송지언은 한숨을 쉬었다.

“모르면 됐소.”

송지언은 일어나 빈 그릇을 치웠다.

송지언이 왔다갔다 할 동안 사내는 앉은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송지언이 한 말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송지언이 다시 자리에 앉자 물어보았다.

“내가 널 놓아도, 가지 않는 거냐?”

“그렇소.”

“어째서?”

송지언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까 실컷 말하지 않았소.”

사내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갸웃했다.

“다시 말해봐라.”

“모르면 됐다지 않소.”

말 안 통하는 사람과 입씨름하기 싫어 일어나려는 그를 사내가 붙들었다.

“다시 말해봐라.”

“…….”

“다시 말해봐라.”

송지언이 돌아보자, 사내는 간절한 얼굴을 했다.

“제발, 부탁이다.”

송지언은 한숨을 후 쉬었다.

“한 번만 말하겠으니 더 묻지 마시오. 당신이 놓아주든 말든 난 당신 곁에 있을 거요. 더 이상 증오와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 싫으니까. 당신을 용서하고 나도 용서받고 싶으니까. 정말 그런 날이 오기는 할는지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내가 택했으니 있겠다는 거요.”

송지언은 이제 됐소? 하고 사내의 팔을 떨치려 했다.

헌데 떨치기는커녕 벌떡 일어나 잡아당기는 품에 끌려갔다.

사내는 송지언을 품에 가둔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곁에 있는 거구나. 내가, 내가 붙잡지 않아도.”

“그렇소.”

“그리 곁에 있어도 고통스럽자고 그러는 게 아니구나.”

“그렇소.”
“내가, 기뻐해도 되는 거겠지?”

송지언은 사내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다.

“알아서 하시오.”

“기뻐하는 게 안 된다면 말해주라. 기뻐하지 않도록 애써보겠다.”

“기쁘면 기쁜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기뻐하지 않도록 애써보는 건 또 뭐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끄덕끄덕 거렸다.

“그래, 그건 뭐냐. 말이 안 된다. 이렇게 기쁜데 그걸 어찌 참냐.”

사내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신의 가슴을 밀어내는 송지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일렁일렁 빛나는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 기쁜 걸 어째야 되냐.”

“…….”

“기쁜 걸 좀 표현해도 되냐.”

16.

송지언은 새벽이 밝아오기도 전 잠에서 깨어났다.

어젯밤 제대로 자지도 못했는데 일찍 깨어난 것은 이런 꼴을 새의에게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허리에 둘러진 묵직한 팔을 치우고 송지언은 걱정스럽게 몸을 내려다보았다. 자국을 남기지 말라고 악을 썼는데
어떤지 모르겠다.

사내는 송지언을 안았다기보다는 그저 어루만지고 핥고 빨고 깨물었다.

마음속에 솟구치는 기쁨과 행복감을 참지 못해, 그리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양. 그동안 안 만지고 어찌
참았는지 모를 만큼 어린애 찰흙 가지고 놀 듯하다가 딱 붙어 잠이 들었다.

그 체온과 피부가 따뜻해서 송지언 역시 깜빡 잠들었다가, 퍼뜩 깨어난 것이다.

옷을 입으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사내의 밑에 자신의 저고리가 깔려 있는 걸 발견했다.

그것을 빼내려 낑낑거리고 잡아당기다 무심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송지언이 아팠던 뒤로 자본적 없는 사내는 세상모르고 깊이 잠든 듯했다.


눈을 감은 얼굴엔 살기마저 잦아들게 할 평온함만이 가득해 기분이 묘했다.

문득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송지언은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걷어 올려주는데 미약하게 속눈썹이 떨렸다.

깨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퍼뜩 손을 치우자,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누가 들으면 어디 떡 방앗간이라도 있나 생각할 법한 소리였다.

쿵덕, 쿵덕, 쿵덕.

그제야 머리칼을 쓸어준 걸 사내가 눈치 챘다는 사실을 송지언은 깨달았다.

무심코 그런 건데 무슨 의미로 생각했을지 상상하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저고리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옷을 찾아 입으려 했다.

허나 몸을 돌리진 못했다.

사내가 그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이에 송지언이 그를 돌아보았으나 사내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속눈썹이 떨리는 게 잠에서 깨어난 것이 훤히 보이는데도 사내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붙잡은 것마저 잠결에 그리했다는 듯 시침을 뚝 떼고 있었다.

송지언은 사내에게 붙잡힌 손을 흔들었다.

“놓아주시오.”

사내는 계속 모른 척했다.

이젠 얼굴 전체가 꿈틀꿈틀 떨리는데 계속 자는 체한다.

송지언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가 싶어서 머리카락을 집어 사내의 코를 간질였다.

사내는 눈썹을 찡그리려다 재빨리 펴고 간지러움을 참았다.

턱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간지러워 죽을 맛인데도 애써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내는 꽤 오래 버텼다. 허나 작정하고 코를 간질이는 걸 참아내진 못했다.

결국, 푸헤취! 기침을 요란하게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코를 마구 문질렀다.

“…….”

그러다 움직임을 뚝 그쳤다.

송지언은 사내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봐 의아해했다.


아까의 간지럼은 까맣게 잊은 듯 사내는 멍한 얼굴이었다.

왜 저러나 하고 무심히 생각하는데 사내가 툭 내뱉었다.

“방금…….”

송지언은 미간을 모았다.

방금 뭐? 코를 간질인 것 말인가?

“방금…….”

“방금 뭐요?”

송지언이 답답하다는 듯 되묻자, 사내가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웃었다.”

누가? 하고 물으려던 송지언은 이곳에 사내와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사내와 자신밖에…….

송지언은 얼굴을 확 붉혔다.

자는 척하면서 버티다가 간지럼을 참지 못해 재채기를 하는 사내를 보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조금 끌어올렸다.

그 어이없는 꼴이 우스워 순간 입가가 느슨해졌다.

그뿐이다.

웃은 게 아니다.

절대 아니다.

송지언은 몸을 홱 돌리며 소리쳤다.

“안 웃었소!”

사내가 송지언의 팔목을 잡았다.

송지언은 그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려 했다.

헌데 사내가 뱉은 말에 붙잡히고 말았다.

“지언아.”

송지언은 우뚝 멈춰 섰다.

자신이 웃었다는 소리만큼이나, 방금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뭔가를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송지언은 뒤돌아 의혹에 가득 찬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뭐라고…….”

사내는 그를 끌어당기며 다시 불렀다.

송지언은 그 부름에 맥없이 끌려갔다.

사내가 송지언의 머리칼을 상냥하게 넘기며 이마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송지언은 그 부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자신의 이름인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주박에라도 걸린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사내가 이마에 붙인 입술을 눈가로 가져갔다. 아주 잠시 반짝였던 그 눈꼬리를 입술로 비볐다.

뺨에 입술 도장을 찍은 뒤, 좋아하는 귓전으로 갔다.

귓불을 가볍게 물었다 놓고, 귓바퀴를 훑으며 후, 하고 간지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꽁꽁 묶었다.

“지언아.”

사내의 큰 손이 등을 안았다. 도드라진 날개뼈 사이의 매끈한 등줄기를 쓸어내려 가며 허리를 끌어당겼다.

혀가 아닌 뜨거운 호흡으로 귀를 농락한 입술이 목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하아, 달아오른 숨결이 날씬한 목을 내달려 패인 쇄골에 고였다.

사내는 살며시 둔부를 쥐고 송지언을 자신의 허벅지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고약하고 간사한 주문에 묶여
멍해진 송지언의 팔을 열고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그때 가슴에 맺힌 유두가 보였다.

사내는 마르고 따뜻한 입술에 작고 동그란 그것을 품었다.

따뜻한 입김이 유두를 감싸자 송지언은 허리가 저릿했다.

사내를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것이 엉덩이를 만지는 뜨거운 손 때문인지, 아니면 예민한 성감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입김 때문인지, 아니면
반항했다가 언제 또 튀어나올지 모를 자신의 이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습한 혀끝이 유두를 꾹 누르자 송지언의 등줄기가 흠칫 굳었다.

사내는 혀끝에 남은 기억을 쫓아 유두를 둥글리며 누르고 문질렀다.

어느새 유두가 축축이 젖었다. 사내는 바싹 솟아오른 이것이 두 개였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올려 다른 쪽 가슴을
어루만졌다.
손끝에 그것이 걸리자 손바닥으로 감싸 긴장을 풀라는 듯 따뜻하게 데웠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미끄러트려
중지와 검지 사이에 걸고는 반대쪽 유두를 비비는 혀와 함께 위아래로 부드럽고 움직였다.

그 애무에 따라 송지언의 몸이 조금씩 흔들렸다.

사내는 송지언의 허리가 휘청거리는 것을 깨닫고 그를 조심스레 눕혔다.

“아…….”

자신의 위에 사내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상황을 알아챈 송지언이 울상을 했다.

그는 달아나고 싶은 듯 고개를 돌렸다.

허나 사내가 그의 턱을 붙잡아 돌려 자신을 보게 했다.

놓아줘도 떠나지 않겠다 했으니 송지언이 마땅히 받아야 할 쾌감이었다.

사내는 송지언의 턱밑에 입 맞추었다. 드러난 목덜미를 이로 긁고 혀로 핥고 여린 피부를 마음껏 빨아들이며


지분거렸다.

흰 피부 위에 열꽃이 피어올랐다.

그 붉은 빛깔이 사내를 만족하게 했다.

가슴을 따라 점점이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으며 내려갔다. 그리고 송지언의 팔을 들어 올려 겨드랑이 안쪽을
쓸어내려 가 마른 옆구리를 만졌다.

오랜 병으로 앙상한 갈비뼈가 손끝에 걸려 마음이 아팠다.

꺼져 들어간 배와, 그곳에 생겨난 우물 속에 혀끝을 파묻고 누볐다.

간지럽다고만은 할 수 없는 감각에 송지언의 허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우물에 샘물이 넘치도록 만들어놓은 사내의 입술이 더 아래로 내려갔다. 송지언의 두 손을 깍지를 껴붙들고
음모에 코를 파묻었다.

송지언의 체취와 함께 희미한 풋내가 났다. 그 냄새가 발정기의 짐승이 풍기는 냄새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사내는 그럭저럭 참을만했던 욕정이 잔뜩 부풀어 올라 터질 지경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을 음모와 성기와 다리 사이에 비비며 그는 마음껏 송지언의 냄새를 묻혔다.

깍지를 낀 송지언의 손가락에 힘이 가득 들어가 부러질 듯했다.

반쯤 일어선 성기를 소중히 입안에 품어 주었을 때는 손톱이 사내의 손등을 긁었다.

“하아-.”

송지언의 허리가 떠올랐다 내려앉았다.

목구멍까지 집어넣었다 혀로 한번 훑자 돋아 오른 성기가 다디단 꿀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내는 입술을 모으고 그것을 빨아 마셨다.

사내의 목울대가 요동칠 때마다 송지언의 허리도 함께 요동을 쳤다.

“아-! 아-!”

어째야 할지 모르는 신음소리가 몇 마디 터져 나오자 그것만으로도 욕망을 참을 수 없었다.

터지기 일보 직전의 환희가 다리 사이에 가득 고였다. 그리고 꼭 그만큼의 허기가 뱃속을 긁어댔다.

사내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 송지언의 흔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성기를 삼켰다.

입 안에 송지언의 체액이 퍼지는 순간, 사내는 만족감을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흐읏.”

쾌감을 수습하는 울먹임 소리가 사랑스러웠다. 사내는 아래를 깨끗이 빨고 핥은 후 입술을 뗐다.

여운이 가시지 못한 분홍빛 성기가 아직까지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이 못 견디게 귀여워 자신에게
그 몸을 붙여 안았다.

아까보다 훨씬 촉촉하고 따뜻하게 달아오른 피부가 가슴과 겨드랑이에 감겼다.

하아, 하아, 가쁜 호흡을 내뱉는 숨결을 입술로 훔치고 마른 등을 꼬옥 안았다.

동그란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는데 긴장으로 상처가 덧나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사내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프냐?”

송지언은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고 고개를 도리 저었다.

상처가 아프진 않지만 사내의 것을 받아들이는 건 무리라는 소리였다.

그것만으로도 사내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사내는 송지언을 돌려 눕히고 팔에 그의 허리를 걸었다. 그리고 몸을 내려 엉덩이를 살짝 들게 하자 아직 붉게


갈라진 상처를 볼 수 있었다.

사내는 그곳에 혀를 댔다.

송지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축축하고 말캉한 살 옆에 도사린 송곳니가 무서웠다. 허나 상처를 찢는 대신 딱지와 진물을 깨끗하게 핥아주는
것이 기분 좋았다.

상처와 성감대가 함께 맞물려 있는 곳이 축축하게 젖어들자 기분이 이상했다.

젖은 살이 피부와 아릿한 상처를 스칠 때마다 발가락이 오그라들고 그러모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상처를 깨끗하게 핥아준 사내는 송지언의 허리를 놓고 제자리에 누워 그를 품에 바로 안았다. 그리고 저도 모를
자극으로 또다시 일어선 송지언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미끄러운 체액으로 젖은 자신의 성기와 함께.

성기와 성기가 맞닿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송지언은 사내의 어깨에 달라붙었다. 허나 맞닿은 촉감이 선연하여
비음이 나왔다.

송지언은 신음을 참으려 사내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그러자 그곳 말고 이곳이라는 듯 사내의 턱이 그의 이마를
밀어 들어 올렸고, 입술이 그의 입술을 덮었다.

“음-”

송지언은 눈을 꼭 감았다.

사내의 입술로 신음과 불규칙한 호흡이 딸려 들어갔다.

맞닿아 부벼지는 아래가 뜨거웠다.

송지언은 사내의 어깨를 붙잡고 그 뜨거움을 견뎌냈다.

“응.”

잠시 입술이 떨어지고 얽혔던 혀가 풀리며 입술 밖으로 빠져나왔다.

사내는 그 분홍빛 혀끝을 할짝할짝 핥았다.

붉게 젖은 송지언의 눈가만큼 그것도 떨렸다.

혀끝에 맺힌 체액을 달게 받아 마시고 가볍게 깨문 뒤, 받은 신음의 대가라는 듯 속삭임을 들려주었다.

“지언아.”

등줄기로 소름과 닮은 뭔가가 쫙 내달렸다.

“아!”

그것이 치달아 송지언은 사내의 손에 정액을 쏟아냈다.

곧, 사내의 것 역시 뜨끈하게 젖어들었다.

* * *

며칠 뒤, 송지언에게 그 고약한 탕약을 먹인 새의는 아주 반가운 소리를 했다.


“이제 이 약은 그만 먹어도 되겠다.”

“그렇습니까?”

얼굴이 확 피는 송지언을 보고 새의가 혀를 쯧쯧 찼다.

“이게 그리 맛없더냐.”

“다시는 입에 대고 싶지 않을 맛입니다.”

송지언이 혀를 내두르며 그리 말하자 그릇에 묻은 탕약을 손가락으로 훑어 맛을 본 새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송지언이 할 말이 있는 듯하자 새의가 그를 바라보았고, 송지언은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그에게 절했다.

“그간의 모든 일들이 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런지요.”

“그 자세는 상처에 좋지 않다.”

“괜찮습니다. 이제 몸이 다 나은 것 같으니 허락해주신다면 돌아갈까 합니다.”

“아직 긴 여행은 무리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 이곳에 머무는 게 어떠냐?”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온 뒤 동굴을 내주고 새의가 매일같이 밖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마음 쓰이던 송지언이었다.

일방적인 도움을 받고 있으면서 제집처럼 동굴을 차지한 게 몹시 송구스러웠던 것이다.

“또한, 아이가 태어나도 먼 길을 가기 힘들 테고 사내 둘이서 아기를 데리고 다니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 테니


여러 가지가 걱정됩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겠군.”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송지언 혼자 아일 낳게 하는 것은 무리다 싶었던 새의는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그리해라. 아이가 태어날 때쯤 네가 있는 곳에 들르겠다.”

“여태껏 진 신세도 갚지 못했는데 어찌 또…….”

“기껏 살려놓았는데 또 죽을 참이냐? 내 잠자리는 따로 마련할 필요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송지언은 고맙다는 말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 한 번 더 절했다.

새의는 갈라진 천장 틈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고 말했다.

“때 이른 폭설이었으니 한동안은 눈이 내리지 않을 것 같다. 날씨가 풀렸으니 가려면 서두르는 게 좋겠군.”


* * *

사내는 집으로 가자는 송지언의 말에 몹시 기뻐했다.

당장 떠날 듯 짐을 챙기고 부산을 떨었지만 사실 거의 맨몸으로 온지라 챙길 것은 몸밖에 없었다.

정작 짐을 준비하고 떠날 채비를 해준 건 새의였다.

두툼한 가죽신과 장갑, 모자와 방한복은 물론이거니와 말린 고기와 어포, 환약과 연고를 챙겨주고 주의해야 할
것과 가려먹어야 할 것, 증상에 따른 대처법 등을 꼼꼼히 적어주었다.

그리고 사내에게 엄청난 잔소리를 퍼부었다.

약 달이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해 고른 식단을 신경 써야 한다는 둥, 마음을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는 둥,
너무 싸고돌아 운동하지 못하게 하면 안 된다는 둥, 불결한 환경이 나쁘다는 둥 다다다 쏟아냈다.

사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송지언은 그가 그것을 다 기억할지 의문이었다.

짐을 싸고 떠날 채비를 갖춘 다음, 떠나기 전날은 일찍 잠들었다.

송지언을 안고 누운 사내는 설레는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갈 생각을 하니 좋다.”

송지언은 추운 겨울에 여행할 것을 생각하니 힘들 것 같아 걱정이었지만 사내는 그런 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여기나 거기나 같은 산인데 사내에겐 그곳이 고향이라 더 좋은 듯했다.

그때 사내가 송지언의 손을 꼭 잡았다.

“너와 함께 돌아가서 좋다.”

송지언은 그 말에서 아픈 자신을 데리고 집을 떠나오며 사내가 느꼈을 불안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혼자 돌아오게 될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헌데 둘이서 함께 돌아가는 것이다.

아니, 이젠 셋이다.

그제야 사내의 기쁜 마음이 이해되어, 송지언도 말해주었다.

“나도 좋소.”
* * *

다음 날, 새의가 돌아와 함께 아침을 먹고 두 사람은 길을 떠났다.

대숲의 입구에서 인사를 받은 새의는 두 사람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지도 않고 제가 떠나는 사람마냥 몸을 휙


돌려 사라졌다.

새의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송지언은 사내의 지게에 올라탔다.

오래 걸을 수 없는 그였기에 오늘 아침 새의가 지게를 구해왔고, 그 위에 짐을 얹은 후 푹신한 자리를 깔아


송지언이 앉기 좋도록 해주었다.

짐에다 송지언까지 짊어졌는데도 사내의 몸은 가벼웠다.

흰 눈이 질척하게 녹은 산길에서도 그 걸음이 경쾌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달려 얼른 집에 가고 싶었지만 송지언을 생각해 조심스레 걸었다.

한참을 걷는데 등 뒤의 사람이 조용해서 사내는 그를 불러보았다.

“지언아.”

“…….”

사내는 불러놓고 싱글거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붉어진 그 귓불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에 송지언이 보이는 반응이 참 신기했다.

다른 말엔 곧잘 대꾸도 하고 저항도 하는 그가 그 말 한마디엔 얼굴을 물들이며 눈을 내리깐다.

그 얼굴이 어찌나 예쁜지, 뒤를 돌아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즐거워 보이는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송지언은 물었다.

“왜 갑자기 그리 부르는 것이오.”

“부르라고 있는 이름이잖냐.”

“여태까진 부르지 않았잖소.”

사내는 딱히 대답을 찾지 못했다.

이름을 부르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송지언을 남과 공유하는 것 같아서였지만 사내는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말했다.

“이리 부르니까 좋다.”


그리 말하는 사내를 보자 예전 이름이 뭐냐는 물음에 사내가 답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그런 게 없다.’

그리고 사내의 곁에 머무르겠다는 말에 새의가 했던 말도 떠올랐다.

‘그렇다면 말릴 권한은 없다만, 한 가지만 더 말하겠다. 여자의 몸으로도 어려운 것이 아이를 낳는 것이니,
남자의 몸으로는 두말할 나위 없다. 몸이 상한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 무리하게 아이를 낳으면 그러잖아도
짧은 수명이 더 줄어들 것이다. 유한한 것이 사람의 목숨이라고는 하나 너보다 훨씬 더 긴 삶을 살아갈 저놈이
그것을 견딜 수 있겠냐? 네가 가려는 길이 어려운 길이 아닌 헛된 길이 아닐지 잘 생각해 봐라.’

송지언은 불쑥 말했다.

“그런 말을 알고 있소?”

“무슨 말 말이냐?”

돌아보고 싶은 듯 기웃거리는 머리통을 보며 송지언은 말을 이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 말이오. 내가 말하려는 것과는 다른
의미지만…….”

사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죽는데 뭐가 남냐.”

“사람의 수명은 자연물에 비해 짧을지도 모르오. 긴 세월이 비하자면 한 사람의 생이야 찰나의 꿈과 같을 거요.
허나 그것이 허무하지 않은 것은 사람의 삶이 이름뿐만 아니라 추억을 남기고, 자식을 남기고, 그렇게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오.”

“계속 이어진다고?”

“그렇소.”

송지언은 살짝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만일 우리에게 자식이 태어난다면…….”

그리고 살며시 배를 감싸 안았다.

“내가 죽고 없어도 당신은 그 아이에게 내 이름을 가르쳐줄 수 있을 거요. 네 아버지 중 한 사람은 송지언이라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말이오. 그럼 그 아이 속에서 나는 계속 살아있는 거요. 나를 기억하고 있는 당신이 죽어
사라져도, 그 아이가 다시 자식에게 내 이름을 말하면 또 그 아이 속에서 나는 살아있는 거란 말이오. 이렇게
계속 이어져 간다는 소리요. 그리고 당신 역시…….”

송지언은 말꼬리를 흐렸다가 다시 말했다.

“주고 싶은 것이 있소.”

사내의 심장이 펄떡 뛰어올랐다.


“나에게?”

송지언은 가만히 긍정했다.

사내는 혹시나 송지언이 그 말을 무를까 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몸도 마음도 추억 한 톨 준 적 없는 송지언이었다.

빼앗으려 해도 무엇도 내주지 않던 고집스런 그였다.

헌데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준다고 한다.

그것이 길가의 돌멩이든 모래밭의 조개껍데기든 상관없었다.

뭔가를 준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뭘 준다는 거냐?”

송지언이 말했다.

“내가 이름을 지어줘도 괜찮겠소?”

사내는 고개가 떨어져 나갈 듯 끄덕거렸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둥실둥실 부풀어 올라 뻥 터질 것 같았다.

송지언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던 커다란 호랑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검은 어둠 속에서 홀로 달빛을 받는 듯 그 모습이 요요했다.

흰 갈기에 둘러싸인 얼굴은 신령스럽고, 검은 무늬로 둘러싸여 일렁이는 두 눈은 마치 별 같았다.

하늘을 날자 밤이 찾아오듯 사방이 어두웠다.

“당신의 이름은……”

언젠가 아이가 태어나면 송지언은 사내의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다.

송지언이 죽으면 송지언의 이름이 사내와 아이에게 회자될 것이고, 또다시 세월이 흘러 사내가 죽으면 사내와
송지언의 이름이 아이에게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다시 아이를 낳으면, 사내와 송지언에 대해 말할 것이고, 그 아이가 다시 자라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옛날 옛날에, 산에 홀로 살던 호랑이가 지나는 객을 물어갔어. 객이 호랑이에게 어찌하여 갈 길 바쁜 사람을


잡아온 거냐고 물으니, 호랑이가 너무 외로워 그랬대. 산중에 이름도 없고 짝도 없이 혼자 있으니 너무 외로워서
그랬다며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 그랬지. 허나 선비는 집에서 기다리는 부모님과 부인 때문에 그러마 할 수
없었어. 그래서 그 호랑이에게 말했대. 곁에 있어주지는 못하지만 누군가 널 불러줄 수 있도록 이름을
지어주겠노라고. 그리고 호랑이에게 아주 멋진 이름을 지어주었지. 호랑이는 그 이름이 매우 마음에 들었대.
그래서 선비가 돌아가고 다시 혼자가 되었어도 외롭지 않았다는구나. 계속, 계속, 혼자였어도 누군가 불러줄
이름이 있었기에 외롭지 않았다는구나.’

<완>

짐승 2

지은이 : 이순정

제작일 : 2016.12.15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이혜원

표지 : 곡률

주소 : 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로 191, 502 호(증산동, 두빌)

전자우편 : golem8182@gmail.com

※ 본 작품은 (주)고렘팩토리가 저작권자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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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013-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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