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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스님.’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광대 패의 북치기로 떠돌다 큰스님과의 연으로 불가에 몸을 담았을 때는, 속세에 그
어떤 미련도 없었다.
미처 첫날밤을 올리기도 전에 남편이 요절하여, 그 나이까지 처녀의 몸으로 살아온 가엾은 여인네였다.
일선은 차라리 그 몸뚱이를 불쌍히 여겨 품에 안았더라면 좋았을 거라 생각했다.
여인의 유혹에 마지못해 넘어가 순간의 충동과 육욕으로 안았더라면, 이리도 힘들진 않았을 거라고.
허나 외로움을 달래려 부처님께 의지해 드나들던 그 여인을 언제부터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무엇을 비는지 늦은 밤까지 이슬을 맞으며 탑돌이를 하고, 날이 밝도록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마음에 품은 것이 얼마나 크기에 쉬이 털어내지 못하고 날마다 부처님을 찾는 것인지 의문스러웠고, 자신이 그
고민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으면 싶었다.
오가며 한마디씩 나누던 인사가 길어지고,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일이 잦아지자 일선은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면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았다.
수절과부로 많은 존경을 받는 여인네인데, 보통 사내도 아니고 스님을 꾀어 서방으로 모시고 산다는 손가락질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살려주시오! 누, 누가 나 좀…….”
늪에 머리끝까지 잠기기 일보 직전, 일선은 희끄무레한 햇빛을 가리며 나타난 큰 그림자를 보았다.
* * *
움집인 듯 사방의 벽면은 흙이었고, 나지막한 서까래 위에 짚으로 만든 지붕이 얹어져 있었다.
천장엔 말린 고기와 풀 다발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으며, 한쪽에 화덕과 돌로 쌓은 부뚜막 같은 곳이 있었다.
일선은 몸을 일으키며 자신이 짚더미로 만들어진 침상과 털가죽으로 만들어진 이부자리에 누워 있던 것을 알았다.
벽 한쪽에 세워진 도끼나 낫과 비슷한 날붙이 등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사냥꾼의 움막인가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움집 밖으로 고개를 내미니, 둥그런 뜰에서 자신의 가사를 빨랫줄에 널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반듯한 이마에 가지런한 이목구비, 짧은 소맷자락 밑으로 드러난 팔다리가 무척 가늘어 자칫하면 여인네로 착각할
법한 얼굴이었다.
“아닙니다. 꼼짝없이 죽는가 했는데 이리 무사하여 불자님을 뵈니 마음이 놓입니다. 저는 일선대덕이라 합니다.”
그러나 비록 지금은 번뇌에 시달리는 일개 중이라고는 해도, 대덕의 법력을 지닌 일선은 남자를 사로잡은
어두움을 볼 수 있었다.
일선이 차를 마시며 자세히 살펴보니, 날씨가 차가워지는지라 부르터있기는 하나, 산중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손이 고왔다.
“저는…….”
“아, 부인입니까?”
장대한 체구에 머리가 지붕을 뚫고 나갈 것처럼 큰 키, 억지로 붙들어 묶고 있음에도 산발인 머리와 안광이
번뜩이는 부리부리한 눈동자.
별처럼 불타는 눈으로 일선을 묵묵히 쏘아보더니, 화덕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품에 안고 온 장작개비를 쏟아놓았다.
“늪에 빠져 정신을 잃은 사람을 통째로 물에 담그면 어쩌오. 하마터면 익사하실 뻔했지 않소.”
그 말을 듣고 일선은 깜짝 놀랐다.
그는 나서서 말했다.
보다 못한 일선이 자신이 하겠다고 바늘을 달라 했지만, 송지언은 자신이 꿰매주겠다며 꿋꿋하게 고집을 피웠다.
어떤 것은 속도 제대로 익지 않아 시뻘겠다.
그 말에 사내가 얼른 손을 움츠렸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사내는 송지언이 고기를 되돌려 놓는 것을 보고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고기 접시를 자신 쪽으로 당겨,
먹을 것을 뺏기지 않으려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살점을 뜯기 시작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사내는 용을 쓰며 나물을 집으려 했지만 그 작대기 두 개가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송지언과 일선이 이야기를 좀 나눌라치면, 사내가 불만스러운 듯 어수선하게 계속 움집을 들락날락했기 때문이다.
일선과의 대화를 어떡하든 중단시키고 싶은 기색이 역력해, 결국 일선이 피곤하다 말했고 그만 자자고 이야기가
되었다.
사내와는 같이 누울 간담이 없고, 혼자서 그 잠자리를 다 차지하고 잘 수는 없으니 일선은 자신이 바닥에서 혼자
잔다 했다.
헌데 송지언이 만류했다.
“바닥에 자면 고뿔 걸린다.”
“하룻밤인데 상관없소.”
“난 저 까까머리와 자기 싫다.”
“그건 더 싫다!”
송지언이 손님을 바닥에서 재울 수 없으니 양보하라고 하자, 사내는 절대 안 된다며 눈초리를 곤두세웠다.
결국 일선이 스님은 남의 집에서 잠자리를 뺏으면 안 되는 계율이 있다고 거짓말을 지어내고, 사내가 화덕 가까운
곳에 모아둔 털가죽을 풀어 툭툭한 잠자리를 만들었을 때야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어 송지언이 불씨를 단속하고 자리에 누웠고, 주위가 어두워지자 일선은 속으로 생각했다.
* * *
한참을 망설이다 으르릉하며 불만족스러운 신음을 내뱉은 사내는,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 탓에 유일하게 허락된
곳에 코를 묻었다.
* * *
다음 날.
“누추한 데다 무서운 것까지 있으니 한시라도 바삐 떠나고픈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사람과 말을 섞은 지가 오래된
저를 위해서라도 조금 더 계셔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것이…….”
더군다나 이곳을 누추하다 말하며 사람을 그리워하는 송지언은 이런 생활이 달갑지 않은 것이 뻔했다.
일선은 눈이 그칠 때까지 별수 없이 머무르게 되었으니, 그동안 자신을 말벗으로 생각해주면 고마울 거라 말했다.
“도천승이셨군요. 천축은 굉장히 머나먼 곳으로 알고 있는데 그곳까지 홀로 갈 결심을 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아닙니다. 사실 부처님의 진리를 구하는 것에 장소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깨달음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요.”
“제가 저지른 죗값을 치르고자 이곳으로 왔습니다만, 가끔은 이것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덧 이런 사람답지 못한 삶에 익숙함이 느껴지고, 이곳을 편안하다 느낄 때면 이것을 선택한 것이 다만
죽음을 회피하고 싶었던 안이한 생각이 아니었는지 의심됩니다.”
침통한 어조에 고통스러움이 그대로 배어 나와, 일선은 무어라 위로를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삶으로 속죄받아야 할 죄라니, 소승은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질 않습니다.”
송지언의 비통한 말 속에서 일선은 자초지종을 알 수 없으나 그가 자신의 삶 자체를 형벌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송지언은 중얼거렸다.
“넌 결코 용서받을 수 없어…….”
* * *
송지언이 그리 뛰쳐나갔던 게 자신의 말 탓인가 싶어 일선은 송지언의 머리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주며 말했다.
“넌 달일 줄 아냐?”
“좋아.”
* * *
자신이 사람의 옆구리에 낀 것인지 호랑이 등짝에 올라탄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사내의 옆구리에서 내려진 일선은 칼바람에 찔찔 흘러내린 눈물과 콧물이 허옇게 얼어붙어 벌벌 떨고 있었다.
일선이 요란하게 기침을 했지만 사내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한겨울이라 단단히 얼어붙은 못 위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 이보시오. 이런 겨울에 어찌 잉어를 구한단 말입니까. 낚시라도 하려면 얼음을 깰 도끼라도 있어야 하는데
…….”
사내는 다시 한 번 훌쩍 뛰어 발을 굴렀다.
처음부터 사람임이 의심쩍었으나, 그에게서 틀림없는 사람의 감정이 느껴졌기에 다른 무엇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방금 눈앞에 벌어진 일을 목격하고 나니 생각이 바뀌려 했다.
일선은 순간 눈이 부셨다.
“그……그것을 삶을 참이십니까?”
“그렇지만…….”
“말이 많다.”
“고놈이 깨겠다.”
* * *
“이게 무슨 냄샙니까.”
그리고 중얼거렸다.
“비린내.”
사내가 잉어를 예까지 짊어지고 온 데다가 그것을 해체하기까지 했으니 몸에 비린내가 등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보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당신을 생각해 이리 행동하는 사람에게 어찌 그리 구는 겁니까. 집에서
기르는 개조차 주인을 보고 꼬리를 흔들면 예쁘다 해주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아껴주는 것을
매몰차게 대하다뇨.”
“저를 위한 겁니까.”
“당신을 위한 겁니다.”
송지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잉어탕이 끓는 솥의 손잡이를 붙잡아 올렸다. 그러더니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촤아악!
일선은 외마디 소리를 쳤다.
“앗!”
마당엔 굳어 있는 사내와 자신이 놀라고 미안하여 얼어버린 일선, 그리고 못 먹게 되어버린 잉어탕 냄새만이
가득했다.
일선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응?”
“그만큼 발견하기 어렵고 귀한 물건이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한 뿌리만 있으면 심마니들은 팔자를 고치고
죽어가던 사람도 목숨을 건진다니 말입니다. 듣자 하니 정기가 흐르는 곳에서 자란 오래 묵은 삼은 산의 혼이
머문다고도 합니다.”
“흐음.”
* * *
그리 곱씹는 말 속에서 일선은 송지언이 사내에게 느끼는 미움과, 또 그와는 상반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일선은 말했다.
“그래서 좋으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허면 왜 속죄하십니까?”
“예?”
송지언은 입을 벌렸다.
마치 비명을 치고 싶은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뻐끔거렸다.
속죄.
* * *
다음 날 아침.
“산삼 캐러 가는 것입니까?”
“응.”
“아니.”
“산삼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것한테 물어보러 간다. 헌데, 고놈은 그것을 질색하니까 내가 갔었다는 말은 하면 안
된다.”
안개를 헤치고 입을 쩍 벌린 시커먼 동굴이 나타났을 때는, 풍겨오는 음산한 피 냄새에 일선은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사내에게서도 늘 피 냄새가 났지만 송지언을 대하는 지극한 태도가 사람보다 더 정이 있어 별 거리낌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 동굴에서 풍겨 나오는 피 냄새는 달랐다.
사내는 일선을 바닥에 내려놓았고, 잠시 휘청하다 바로 서자 안에서 누군가가 부스럭거리더니 모습을 드러냈다.
소복을 입은 여인네였다.
희고 긴 머리채를 드리우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일선은 법력으로 뾰족한 주둥이와 날카로운 이,
그리고 노란 눈과 치마 밑으로 삐져나온 아홉 개의 꼬리를 볼 수 있었다.
“구, 구미호!”
“네놈이 또 무슨 일인가 했는데, 이번에 부탁할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가 보구나. 구하기 힘든 중놈을
잡아오다니. 법력이 꽤 높은 것이 먹으면 아주 힘이 솟겠어.”
사내가 씩 웃었다.
“산삼 있는 데나 좀 말해봐라.”
“정말 안 되냐?”
“안 돼!”
“진짜 안 되냐?”
“안 된대도!”
“알았다.”
사내는 구미호의 딱 자르는 앙칼진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몸을 날렸다.
“카앙! 캥! 캥!”
“산삼 어디 있냐?”
“어디 있느냐니까.”
사내가 구미호를 집어 던지자, 허공에서 제비를 넘은 구미호는 곧 여자의 몸으로 변신해서 내려앉았다. 목에는
사내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네 이놈! 이 은혜도 모르는 놈! 내 너한테 이런저런 도움을 얼마나 주었는데 내가 이런 신세가 되었다고 이리
괄시해?”
“아이고! 저놈이 여우 같은 놈이랑 붙어살더니 세 치 혀를 간악하게 놀리는 재주만 늘었구나! 아이고! 그래,
내가 그랬다 치자. 그런데 아무 대가도 없이 그 귀한 산삼을 가져가려느냐? 이제 그 여우 같은 것 눈치 보느라
사람도 잡아다 주지 못하면서 네가 무슨 수로 산삼을 가져가겠다는 게야!”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네놈이 죽으면 네놈 시체는 나에게 주겠다고 약속해! 어차피 땅에 묻으면
흙으로 돌아갈 거 아무 소용도 없잖아!”
“없어.”
“예?”
“내가 죽는다고 슬퍼할 사람 같은 건 없어. 무덤을 써서 돌봐줄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괜찮아.”
“이, 이보십시오!”
“알았다.”
사내는 일선을 옆구리에 끼고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고자 몸을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구미호가 재차 다짐을
받았다.
“약속을 잊지 마라!”
산삼 자체도 아니고 다만 산삼이 어디 있는지 알기 위한 대가로 시신을 넘기겠다 한 사내의 약속 때문에 일선은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중인 자신과 관계하면 비밀이 새어나갈 염려가 없으니 그리했을 뿐, 일선은 사모한다 한 그 여인의 말을 믿지
못한 자신을 깨달았다.
송지언은 구미호가 아니라는 말에, 일선은 어렵사리 사내가 자신과 송지언은 서로 대가를 주고받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당신이 이러는 이유는 상대가 그것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이러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 주면 나야 좋겠지.”
‘당신이 아무리 애를 쓴대도 그분에겐 더 큰 고뇌와 힘겨움을 안겨줄 뿐입니다. 애를 쓰면 쓸수록 그분도
당신에게 더 많은 상처를 줄 것이고, 그럼으로써 더 힘들어지겠지요. 차라리 체념하십시오. 저처럼 모든 것을
단념하고 놓아버리는 것이 당신을 위한 길일 겁니다.’
* * *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은 소나무는 양옆으로 구불구불한 가지를 늘어트리고 있었고, 그것은 마치 신선을 위한
가마처럼 보였다.
“저것인가 보다.”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맨손과 맨발로 벼랑을 기어오르는 사내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이기 그지없었다.
벽을 타고 오르는 뱀처럼 능란하게 움직이고 있긴 했지만, 벼랑이 미끄럽게 얼어붙은 데다 차가운 칼바람까지
부니 아차 하고 떨어지는 것은 잠깐일 것이다.
아래조차 차가운 돌덩이뿐이니 떨어지면 크게 다칠 것이라 일선은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사내를 지켜보았다.
- 감히 어디다 손을 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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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옅게 잠이 들었던 송지언은, 뜰에서 뭔가 쿵 하는 소리가 나기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뜰에 사내가 쓰러져 있었고, 그를 부축하려다가 같이 넘어진 일선스님이 사내의 아래에서 기어 나오며 소리쳤던
것이다.
“도와주십시오!”
“어찌 된 일입니까?”
“이분이 다치셨소!”
일선은 끙끙거리며 사내의 몸을 뒤집으려 했지만 워낙 덩치가 큰 자가 늘어져 있으니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송지언이 일선을 도와야 했다.
사내를 뒤집자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고 어디가 부러지기라도 했는지 다리가 팅팅 부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송지언은 놀랐다.
“벼랑에서 떨어지고 말았지 뭡니까. 무언가 호되게 후려친 것처럼 맥없이 떨어졌습니다. 거리도 너무 먼 데다
소승이 힘이 없어, 다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분께 의지해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힘들 텐데
돌아온다고 무리를 했으니 이를 어쩜 좋습니까.”
“그냥 놔두십시오.”
“예?”
“절게 된다 해도 자기 탓 아니겠습니까.”
“모릅니다.”
피가 나도록 그것을 질근질근 깨무는 송지언을 보고 일선은 자신이 흥분해서 말이 과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책했다. 사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겹쳐보고 그를 부러워한 나머지 송지언이 야속해져 버렸다. 그래서
사내와 송지언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느끼는 바대로 내뱉었다.
“송구합니다. 제가 말이 지나쳤습니다.”
일선은 적당한 길이의 작대기를 몇 개 만들어 천을 휘감아 다리를 단단히 고정했고, 사내는 곧 잠이 들었다.
송지언의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아무리 자세한 연유를 모른다 해도 사내를 그리 대하는 송지언을
좋게 생각할 수 없었던 일선도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 * *
시뻘겋게 속을 드러내며 갈라지고 굳어 엉망진창이 된 지라, 차마 그것을 건드려 고름을 짜내고 딱지를 벗겨
치료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마음을.
헛된 자기만족.
속죄가 아닌 헛된 자기만족.
사내는 송지언이 곁으로 돌아온 뒤 무엇도 요구하지 않으며 송지언이 요구하는 것만을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그것은 아닐 테지.
좀 더 고통 주고 좀 더 상처 주고 좀 더……, 더…….
송지언은 손에 점점 더 힘을 가했다.
“해라.”
사내는 다시 눈을 감았다.
“괜찮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자신이 죽는다고 슬퍼할 사람도, 무덤을 만들어 줄 사람도, 그것을 지켜줄 사람도 없을 테니까.
자신이 살아있을 땐 송지언을 곁에 묶어둘 수밖에 없지만, 차라리 죽는다면 그가 떠나도 모를 테니까.
* * *
다음 날.
밖에서 얼굴을 씻고 들어온 송지언은 아침부터 옥신각신 시끄러운 사내와 일선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건 제가 모아오겠습니다!”
그때 송지언이 끼어들었다.
“당신은 누워 있으시오.”
“내가 할 테니 누우시오.”
“하지만…….”
“그렇지만…….”
마침내 못에 도착하니 다행히 흐르는 물이라 얼음을 깨트려야 하는 힘겨운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가운데 송지언과 일선은 물통을 하나씩 나눠 들고 다시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냥 제가 들겠습니다.”
사내는 아무렇게나 금방 그것을 모아왔던 것 같은데, 뜻밖에 적당한 크기의 나뭇가지가 딱히 눈에 보이지 않아
그럭저럭 불을 지필만큼 모으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장작개비를 가지고 움집으로 돌아갔지만, 눈이 온지라 장작개비가 죄 젖어서 불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거의 해가 중천에 이르러서야 불을 피우고 아침도 점심도 아닌 식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거기다 송지언이
밥에 물조차 맞추질 못해 그것조차도 일선이 다 해야만 했다.
사내는 밥도 먹지 않고 계속 잠만 잤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곰 같았다.
송지언이 다시 돌아온 뒤로 사내가 그를 위해 곡식을 가져다 밥을 지어주긴 했지만 어디서 어떻게 그것을
가져왔는지, 고기만 먹던 사내가 밥하는 법은 어찌 배웠는지, 아는 것이 없었다.
“그렇소이다.”
“여기 있소이다.”
아무리 일선이 스님이라 세상 물정에 어둡다고 해도, 저리 수북한 털가죽 한 뭉치의 대가가 고작 이런 것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선은 기가 막혔다.
“뭐요?”
오래도록 절에서 수행만 해온 중이라 할지라도, 일선은 어릴 적 북치기로 속세를 떠돌며 갖은 고생을 했다.
덕분에 아무리 닳고 닳은 장사치라 할지라도 그를 당해내기 어려웠다.
결국, 장사치는 계속 거래를 이어가는 것을 대가로 쌀 한 자루와 소금, 고춧가루와 깨를 더 내놓아야만 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 * *
미처 산을 건너오기 전에 해가 기울었다.
사위가 어두워지자 걸음을 서둘렀지만, 사내에 비하자면 느려터지기 짝이 없는 두 사람의 걸음으로는 서둘러
봤자였다.
“그, 그것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대신 사내가 죽으면 그 몸을 갖겠다 했습니다. 제가 말려보았지만 어차피 자신이 죽으면
슬퍼할 사람도 없다며 그리한다지 않습니까.”
송지언은 혀를 차며 혼자 중얼거렸다.
“멍청한 짓을.”
뽀드득뽀드득, 발아래 밟히는 눈 소리가 송지언과 일선의 행적을 뒤따랐고, 그들을 내려다보는 밤하늘은 별들의
군무로 어지럽게 반짝였다.
“불자님! 불자님!”
일선의 눈이 커졌다.
* * *
사람 말소리 같았다.
‘……지…어요.’
‘……냐?’
사내의 허벅지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어린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사내의 검지를 움켜쥐고 뭐라 뭐라
재잘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들이 사는 집인 듯했다.
미소 짓는 그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이제 오느냐.’
‘아버지!’
‘예!’
‘아바, 얼른 들어가요.’
다시 안개가 끼나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송지언은 젖어드는 눈을 문질렀다.
‘어서 이리 오세요.’
* * *
‘어찌 그리 매정하십니까.’
‘제가 그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스님을 찾아갔던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제 순결을 바쳐서라도 스님을
붙잡고 싶어서였습니다. 헌데 마음을 돌리지 않으시고 어찌 그리 떠나실 수 있단 말입니까.’
‘미, 미안하오. 난……난 당신이 날 원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소. 수절과부와 파계승이 붙어산다는 손가락질을
달가워하지 않으리라고.’
일선은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일선은 그녀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것이 두려워 묻지 않았다. 거부당할 것이 두려워 그녀의 의사조차
물어보지 않고 거절을 지레짐작하여 떠나왔다.
일선은 말했다.
‘기뻐요.’
일선은 외쳤다.
* * *
허나 송지언은 알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풍경이다.
이것은 거짓이다.
그는 몸을 돌렸다.
‘저것이 네가 버린 미래다!’
송지언은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소리쳤다.
“불자님!”
“일선스님?”
일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이, 이게 도대체.”
“환상…….”
가장 원하는 것.
“그렇군요. 그렇군요…….”
* * *
걸어 다니는 사내를 보고 일선이 기겁을 하다못해 그샐 못 참고 다니냐고 짜증을 내자, 사내는 멀쩡한 다리를
내밀어 보였다.
부기가 가라앉은 것만으로는 알 수 없어, 일선은 다리가 덜 여물었으니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해댔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송지언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천축으로 간다는 것을 핑계로 한 여인에게서 도망친 것뿐입니다. 여자를 알지 못하고 부처님께 귀의한 뒤 사람이
사람을 향해 가지는 감정을 모른 채 살아왔습니다. 대덕의 법계를 받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나름대로
부처님의 진리에 가까이 다가갔다 생각했으나,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자신을 알 수 없게 돼버렸지요.”
그래, 육욕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나, 적어도 그녀를 품에 안은 일선은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다.
혹여 그 고백이 거짓말이었다 하더라도, 누군가를 연모하고 귀히 여기는 마음을 알았으니 그에 따르는 아픔마저
진리가 아니겠는가?
그 얼굴은 묘했다.
무표정과도 비슷한 얼굴에 머물러 있는 것은 일상이 되어버린 죄책감과 죄의식, 고통과 아픔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 저녁 햇살이 내려앉은 초가집. 장에 갔다 돌아오는 사내와 아이. 그리고
그것을 맞이하는 자신…….
올봄에 태어나 갓 비행을 시도한 매일까. 허공으로 자신을 내던진 매의 비행은 위태로워 보였다.
매는 날고자 태어났으니까.
길 떠나기 좋은 날씨였다.
송지언은 마주 웃어 보였다.
“까까머리는 갔냐.”
“가셨소.”
“나도 물 긷는 것을 도와주겠소.”
“엉?”
“물 긷는 것을 돕겠다잖소.”
사내는 입을 뻐끔거렸다.
마주친다 하더라도 그 눈에는 언제나 복잡한 미움과 원망의 감정이 떠돌아 사내도 송지언의 눈을 마주 보는 것이
두려웠다.
“검지와 중지로 젓가락 하나를 움직이고, 약지로 아래 젓가락을 받친 후에 엄지로 그것을 움직이는 것이오. 잘
보시오, 이렇게 하는 거요.”
언제나 송지언의 젓가락질을 힐끗힐끗 훔쳐보며 흉내 내었을 뿐인데, 사내는 송지언의 설명과 시범에 따라
난생처음으로 젓가락을 올바르게 쥐었다.
고깃국을 먹을 때도 사내가 수저질이 서툴러 국물을 질질 흘리자, 송지언이 그릇을 들고 먹으라 말했다.
그리 묻는 것조차 너무 이상스러웠다.
“…….”
“만지고 싶다.”
“널 만지고 싶어 죽을 것만 같다.”
“후회하시오?”
나를 곁에 둔 것을 후회하시오?
사내는 대답했다.
허면 상처 주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마침내 얻을 자유와 평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죄스러우면서, 그것을 위한 속죄라는 말 한마디가 깊고 차가운
우물에 빠진 송지언에게 내려진 실낱같은 끈이었다.
송지언은 말했다.
“춥소.”
“춥소.”
* * *
다음 날 아침.
“왜 그러냐?”
“어젯밤 꿈을 꿨소.”
“꿈?”
흰, 눈처럼 희고 큰 호랑이였다.
이것은 무엇일까.
그는 원망스러움을 느꼈다.
꿈에서 호랑이가 나타나 널 잡아먹기라도 했느냐고 물으려던 사내는, 뜬금없이 송지언이 하는 말에 이번엔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부르려고 물은 것이 아니었다.
대답을 하며 자신을 끌어당긴 사내의 품에 안긴 송지언은 사내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함께 박동하는 뱃속의
소리를 들었다.
12.
헌데 무언가가 불쑥 그의 앞에 디밀어졌다.
산딸기였다.
이게 뭐냐는 듯 고개를 드니, 사내가 어려운 얼굴을 하고 송지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괜찮소.”라고 말하며
한걸음 물러서도 꼭 그만치 따라온다.
“오래 두면 뭉개진다.”
“당신이 드시오.”
“난 이런 거 안 먹는다.”
“그런데 왜 딴 거요.”
“심을까.”
“심으면 언제 날까.”
“몇 해나 기다려야 할까.”
“나도 모르겠소.”
‘이것 때문인가.’
극렬한 혐오는 없었지만 안도나 기쁨도 느끼지 못했기에 그의 행동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사내의 그런 태도가 송지언의 마음을 편하게 한 건 사실이었다. 사내가 걱정을 하든 기뻐하든
복잡한 심경일 테니까 말이다.
“곧 싹이 날 거다.”
‘…….’
‘그냥 깨우지.’
사내는 숨소리마저 죽이고 잠자리에 송지언을 눕혔다.
* * *
뜰의 나무에 제비 한 쌍이 집을 지었다.
새끼가 네 마리나 되다 보니 먹이를 고르게 먹이지 못했는데, 송지언은 그중에서 제일 큰놈만 먹이를 받아먹어
다른 새끼들이 배를 곯지나 않을까 괜한 걱정을 하기도 했다.
송지언이 나뭇가지를 가져와 구렁이를 나무 아래로 떨어트려 쫓아버리자 사내가 그것을 몹시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그러냐?”
“은혜를 갚아?”
그 모습이 우스워서 이번엔 구렁이를 쫓아내는 바람에 대대로 저주받은 집안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또 한 며칠 잠을
설쳤다.
송지언은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옛날이야기냐며 타박을 놓고 모른 척했지만, 사내랑 단둘인데 멀뚱히 앉아 서로를
외면하기도 힘이 들고, 그렇다고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가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송지언은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으면 으레 그렇듯 대충 결말을 얼버무리고 잠자리에 누우려 했다.
“다음에 이야기해주겠소.”
“자식이 셋이나 생겼으니 이제 선녀가 떠나지 않으리라 생각한 나무꾼은, 어느 날 선녀가 딱 한 번만 날개옷을
입어보고 싶다고 애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말았소. 선녀는 날개옷을 입자마자 아이들을 전부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고 하오. 이 뒤에 이야기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잘 나지 않는구려.”
“그랬다고 알고 있소.”
“그건 잘 모르겠소.”
“재미없는 이야기다.”
실컷 들려 달라 해놓고 재미없다니.
답답해서 그만 좀 놓아 달라 하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사내가 갑자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송지언의 양손을
붙잡아 일으켜 앉혔다.
“뭐 하는 거요.”
“……놓아주시오.”
“왜 이러는 거요.”
송지언은 발을 빼려고 했지만, 발목을 두 손으로 그러쥔 사내가 그것을 놓아주지 않았다. 복사뼈에 입 맞추며
발등을 핥더니, 발가락을 입 안에 품었다.
발에서 느껴지는 그 축축함과 간지러움, 뜨거움과 안타까움에 송지언은 이부자리를 그러쥔 손에 힘을 주었다.
“놓아주시오.”
목소리가 떨렸다.
“놓아……주시오.”
그제야 송지언은 사내가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듣고 불안을 느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넌 어디 안 가는 거겠지?”
“거짓말 마라.”
하지만 자신이 여전히 사내를 보고 편한 마음으로 웃지 못하듯, 사내 역시 자신이 떠날까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 * *
내가 늦게까지 잤나 하고 고개를 돌리자, 자신의 손을 붙잡은 사내가 침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게 보였다.
“누워서 주무시오.”
헌데 그 표정이 매우 이상했다.
“왜 그런 표정을 하는 거요?”
“네가…….”
송지언은 눈을 크게 떴다.
사흘이라니.
“사흘이나?”
“놀랐다.”
송지언이 무의식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한잠도 자지 못하고 그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리던 사내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왜 그러냐. 어디 아프냐?”
이유를 알지 못하니 치료조차 쉽지 않아, 사내가 산에서 온갖 것을 구해다 먹여도 별 효과가 없었다.
* * *
얼어붙어 있었던 지난겨울과 달리 무수한 물줄기가 끊임없이 아래로 떨어져 작은 용소를 부수고 있었다.
하여튼 소나무에 앉은 학처럼 보이는 여인네가 부채를 부치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또 너냐.”
사내는 툭 내뱉었다.
“뭘 원하냐.”
“뭐?”
“너 같은 것들은 모른다.”
“하! 그렇겠지. 알고 싶지도 않다. 아무튼 내게 산삼을 청하는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내어주지도 않을 거고,
이것을 가지고 가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까. 산삼은 그저 기운을 돋우는 영약일 뿐이지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야. 산삼이 만병통치약이라면 세상에 병들어 죽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여인네의 말마따나 이치를 거스르면 반드시 대가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송지언을 가지고픈 욕심에 일을
치른 자신의 탓이었다.
“그리 방도를 모르겠다면 의원에게라도 보여 봐라. 그것은 사람이니 사람이 낫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 *
의원이던 아버지 밑에서 어릴 적부터 의술을 배운 그는, 어려운 사람에게도 아낌없이 의술을 베풀고 재산을 쪼개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을 지어주던 제 아비를 존경했다.
덕분에 제대로 자고 먹고 할 시간조차 없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업이라 생각하며 곽시공은 성심껏 환자들을
돌보았다.
가을의 초입에서 날씨가 조금 선선해지자, 곽시공은 더위에 시달리던 환자들이 한결 편해지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허나 버둥거림도 잠시.
“어억!”
마당으로 던져져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그것이 다시 자신을 들어 올리더니 날쌔게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을 한달음에 가로질러 징검다리가 놓인 개천을 넘고 숲으로 들어간 무엇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수풀을
헤치고 능선을 훌쩍 넘어 고갯길을 가로지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산 몇 개를 넘었다.
곽시공이 자신을 납치한 자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은 동이 훤히 터 목적지에 다다라 그자가 발걸음을
멈췄을 때였다.
벌거벗다시피 한 몸에는 무수한 흉터가 아로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로 강력한 힘을 내포하고 있는 근육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아프다.”
이리 깊은 산중에서 병에 걸렸으니 자신을 데려온 건가 싶었다. 마땅히 누워있는 사람이 안쓰러웠지만, 곽시공은
사내에게 납치당하는 바람에 오늘 하루 종일 보지 못할 수많은 환자를 생각했다.
제멋대로 행동한 사내 때문에 멀리서 찾아온 환자들이 고통 속에서 하루를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지금 보면 되잖냐.”
“모든 일에는 순서와 차례가 있는 법. 아무리 아픈 사람 때문이라고는 하나 당신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끌려
왔으니 다른 환자들이 또 하루를 기다려야 되지 않소. 나는 이런 식으로는 진료를 보지 않소이다. 나를 돌려보내
주고 이 사람을 데리고 오시오.”
주먹이 움집의 벽에 부딪혀 꿍, 하는 소리를 냈고, 그러자 벽이 울리며 서까래가 흔들거렸다. 동시에 짚으로
엮은 지붕에서 지푸라기가 푸석푸석 떨어졌다.
“부탁이다.”
“부탁이다.”
예외를 두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끌려 왔으니 일단 보기나 하자는 생각에 곽시공은 누워있는
사람의 곁으로 다가갔다.
한참을 짚었다.
손목을 놓고 이불을 열어 배를 여기저기 짚어보니, 역시나 회임한 여인의 그것과 비슷하긴 한데 뭔가 달랐다.
모르겠다 말하는 것이 자존심도 상하고, 사내를 좌절시키는 말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뭐?”
눈앞이 캄캄했다.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위안해 봐도, 사내의 망연한 얼굴이 의원이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했다.
그동안 숱한 환자들을 봐왔지만 모든 환자를 고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환자는 치료의 때를 놓쳐서, 어떤 환자는 약재를 구하지 못해서, 어떤 환자는 병을 이겨내지 못해서
죽어갔다.
“이보오.”
사내는 답이 없었다.
“명의라고?”
곽시공의 부친이 의원을 운영하고 있던 시절, 부친이 천한 자부터 가난한 자까지 가리지 않고 병을 봐준다는 말에
마을 입구까지 환자가 길게 늘어섰는데, 그때 마침 길 지나가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 부친을 찾아와 다짜고짜
꾸지람을 늘어놓았다.
허나 소년은 며칠 동안 머무르며 부친이 고치지 못하던 병의 치료법과 알려지지 않은 약초들의 효능을 일러주어
부친에게 큰 도움을 줬다.
“너보다 더 용하냐?”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명의셨소. 부친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분을 억지로라도 붙들어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배웠어야 한다고 한탄하셨을 정도니 말이오. 혹 그분이라면 이 사람의 병명을 알고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르오.”
“그놈은 어디 가면 찾을 수 있냐?”
“찾고야 말 거다.”
* * *
곽시공은 사내에게 자신도 새의의 행방을 알아봐 주겠노라 약조했다. 그리고 자신을 마을로 데려다준 사내에게
열을 내리는 약재를 쥐여주고 달여 먹이라 했다.
이것을 다 먹이고 나면 다시 찾아와 약재를 받아가며 새의의 행방을 물으라고 하자, 사내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고맙다.”
다시 돌아와 정신없이 환자들을 돌보는 와중에, 곽시공은 각지의 유명한 의원들에게 서찰을 써 새의의 행방을
물어보았다.
돌아오는 답장들에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어, 곽시공은 자신이 괜한 말로 사내의 기대감만 부풀려 놓은 것이
아닌가 적잖게 걱정했다.
그런데 대체 어찌 알았는지 서신이 도착한 다음 날, 별일도 없는데 사내가 곽시공을 만나러 왔다.
* * *
늦은 밤.
간신히 환자들을 전부 보고 처소로 돌아가던 도중, 곽시공은 마당 한구석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소스라쳤다.
“소식이 왔냐.”
“헉! 까, 깜짝이야.”
돌아보니 사내였다.
“저기 위쪽 강척이라는 골짝에 의원을 하는 사람이 답장을 해주었소. 몇 년 전 그 마을에 새의로 짐작되는 어린
소년이 나타나, 앞을 보지 못하는 대감댁 아이의 눈을 고쳐주고 쌀 삼백 석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뒤
사라졌다 하오.”
“그것이.”
“무슨 마을이랬냐.”
“강척이오.”
“무슨 수를 써서든지.”
* * *
“깼냐.”
“…….”
“모르겠다.”
그리고 말했다.
“제대로 먹지 못한 지 오래됐다.”
“배가 고프오.”
그 말에 사내가 반색했다.
그 언젠가 자신이 굶주리는 와중에도 이것만은 먹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으면서, 이것을 먹고 어찌했는지는
잊어버린 것 같은 사내가 우스워서였다.
그런 송지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뜨거운 뚝배기에 담긴 닭죽을 수저로 떠서 후후 불어 송지언의
입에 대주었다.
“다시 누울 테냐?”
송지언은 생각했다.
사내의 품에 안긴 채로 송지언은 코끝을 스치는 쌀쌀한 가을바람을 느꼈고 손을 뻗으면 파랗게 물들어 버릴 듯한
푸른 하늘을 보았다.
아직도 만지면 지끈거리는 그곳을 상냥하게 빤 뒤 혀가 빠져나갔고, 사내의 입술이 송지언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물고는 떨어졌다.
“추우냐?”
“간지럽소.”
“나도 간지럽다.”
“네 냄새가 많이 나서 좋다.”
자신의 병으로 오래도록 근심했을 사내가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여 그것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만 돌아가오.”
* * *
그날 밤, 사내는 데운 물에 수건을 적셔 송지언의 몸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다음에……다음에 해주겠소.”
이야기를 해주기 전에는 계속 잠들지 못하게 할 것 같아, 송지언은 잠에 겨운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옛날 옛날에…….”
“형님! 아이고, 형님. 이런 곳에서 형님을 만나 뵙게 되다니. 산으로 사라지신 지 오래되어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효자가 둘이나 생겼다며 좋아하셨고, 그 이후 나무꾼의 집에는 매일같이 토끼며 꿩이며 산 짐승들이
한두 마리씩 놓여 있곤 했다.
호랑이의 지극한 효심으로 나무꾼의 어머니는 장수했지만 결국 많은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꼭 함께 돌아오자.”
12.
노랗고 빨갛게 물든 단풍잎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후둑후둑 떨어졌고, 지천에 널린 것이 밤과 도토리, 으름과
다래였다.
노란 은행나무 아래 은행이 잔뜩 떨어져 있어, 다람쥐 한 마리가 그곳에 옹그리고 열심히 단단한 껍질을 까고
있었다.
바로 곁을 누군가가 지나가도 다람쥐는 개의치 않았다. 사내가 자신처럼 조그만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왈왈왈! 아르르르……!”
“컹컹컹!”
“-!”
“이제 조용하군.”
사내는 처음엔 그냥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저놈을 거들어주고 마을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건 짐이 아니다.”
“그렇지, 이 근방에 사람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돌봐준다는 의원이 있다더니, 그 사람을 찾아가는 모양이구려.
그 의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지금 가면 내일까지 기다려야 할 텐데.”
“그자에게 가는 것이 아니다.”
“강척으로 간다.”
눈치 빠른 등짐장수는, 인상이 꽤 험악한 이 사내가 왜 자신을 도와주고 질문에 꼬박꼬박 답하는지 깨달았다.
“그런 건 없다.”
“네 맘대로 불러라.”
실은, 어떻게 하면 이자에게 물건을 하나라도 팔아볼까 싶어서 열심히 떠들었다는 게 옳을 것이다.
“이미 보였다.”
“아이고, 이곳 의원이 자신은 못 고친다 했소? 하긴, 내 듣기로도 강척에 용한 의원이 있다 했소. 그 사람에게
보이면 나을지도 모르니 너무 걱정 마시오. 환자를 보이려면 돈이 많이 필요할 텐데 돈은 좀 가지고 있소?
강척까지 가는 여비만 해도 만만찮을 텐데. 뭐, 나에게 맡겨주시오. 내 노잣돈을 아끼는 것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오. 사실 이 등짐장사라는 게 매일 나다니다 보니 이문보다 여기저기 나가는 돈이 더 많거든. 지친 발걸음
쉬어가려면 묵어야 하고, 먼지 들이킨 목축이려면 마셔야 하고, 고픈 배 채우려면 먹어야 하니 어쩌겠소? 특히
나는 요령이 없어 이문을 그다지 남기지 못하는 편이라 늘 곤란하다오. 뭐, 내 비록 장사꾼이지만 나름의 신념이
있어,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쳐서 비싸게 팔 바에야 그냥 내가 좀 아끼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 내가
물건을 얼마나 값싸게 파는지 알면 놀랄게요. 이 마을에서 두 냥이나 하는 대추나무 수저 한 쌍을 한 냥밖에 안
받는단 말이오! 그뿐인 줄 아시오? 짚신 한 묶음도 한 냥밖에 안 받는다오. 이 짚신을 삼은 사람이 저 아래
우마골에 사는 사람인데, 그 손이 매우 신통하여 그 사람이 삼은 짚신을 신으면 발이 아주 편하고 쉬 헤지지
않는단 말이오.”
거기다 사내의 차림이 먼 길 떠나는 사람답지 않게 매우 단출하여 무언가를 떠넘기기 힘들어 보이는 탓도 있었다.
“아유, 왔소?”
“오랜만이오, 주모.”
“오다 만난 객이오.”
사내의 체구가 범상찮고 얼굴이 멀끔하니 혹하는 심정도 이해 갔지만, 주막의 주모가 기웃거려 볼 만한 남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당연히 여인네고 사내의 부인일 거라 생각했건만 웬일인지 사내였던 것이다. 상투를 틀지 않은 채 긴 머리를 풀고
있어 더 그렇게 보였다.
“사람?”
의원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누굴 만나게 해주려는 것인가 싶어 되물었다. 그러자 사내가 답했다.
“새의라는 사람이랬다.”
“알고 있다.”
누운 사람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사내를 억지로 달래 국밥을 먹이고, 아픈 사람이 있으니 군불을 뜨끈하게
때워 달라 주모에게 당부한 뒤 조갑돌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 * *
숲의 호곡과 바람의 신음, 계곡의 울음은 소음이라 인지하지 못하는 사내였지만 이곳의 소리들은 소음으로 들렸다.
* * *
다음 날 새벽.
눈을 뜬 조갑돌은 깜짝 놀랐다.
“다 잤냐.”
“나는 푹 잤소만.”
“그럼 가자.”
장사꾼의 기질로 사내의 돈주머니를 슬쩍 살핀 조갑돌은, 그것이 꽤나 가볍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 노자로
강척까지 갈 수 있으려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허나 사내는 그의 말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필요한 대화가 아니면 무엇을 물어봐도 묵묵부답이거나, 모른다로
일관했다.
덕분에 일찍 다음 마을에 도착한 조갑돌은, 주막에 사내와 아픈 이를 데려다 놓고 자신은 장사를 하러 나섰다.
“놋그릇, 나무그릇, 수저, 소쿠리, 뚝배기, 짚신, 나막신, 반짇고리, 보자기, 없는 게 없소-!”
사내는 불쑥 물었다.
“나도 팔고 싶다.”
“뭘 말이오?”
“왜 그러냐?”
“보여야 팔 수 있지 않느냐.”
아무렇게나 진주를 내보이는 것 하며, 이런 곳에서 저걸 팔겠다고 하는 것 하며, 사내는 진주의 값어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헌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잉어 뱃속에서.”
“잉어 뱃속이라니?”
사내가 거짓을 말하는 것인가 했지만, 덤덤한 얼굴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뱃속에 진주를 품은 잉어가 흔할 리도 없고, 사내가 고단수라 시침을 뚝 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자신이 양심적이라고 생각하는 조갑돌은, 진주의 대가로 강척까지 가는 여비 정도 남겨주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새의라는 도인을 찾는 여정이 더 길어질지도 모르고, 저 사람을 고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
그게 무슨 상관이람.
그런 말들을 스스로 주워섬기며 털 난 양심을 추스른 조갑돌은, 본격적으로 진주를 훔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예 이번 겨울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숨어 지내며 흔적을 지우고, 내년쯤에나 진주를 팔아치우고 먼 곳으로
이사해버리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눈 좀 떠봐라.”
“널 보고 싶다. 눈 좀 떠봐라.”
* * *
다음 날 아침.
이미 진주를 훔치기로 마음먹었고 그리할 생각이거늘, 어째서 이리 심장이 울렁거리고 불편한지 모르겠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거라고 진주를 훔치는 것에만 성공하면 이런 불안감은 사라질 거라 자신을 위안했지만, 당장
심장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긴장과 불안을 달래려 크게 심호흡을 하던 조갑돌은 누운 사람의 얼굴을 보고 무심코 감탄을 흘렸다.
‘헌데 산 사람이 어찌 이리 꿈쩍도 않을까. 아무리 아파도 그렇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물이라도 마시고
오줌이라도 누고 그러는 법인데.’
‘설마…….’
“뭐 하는 거냐.”
손엔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 있었다.
“안 죽었다.”
“죽었을 리가.”
혹시라도 누운 사람이 죽은 걸 깨닫고 제정신을 차리기라도 하면, 진주를 훔치는 것이 어려워질까 봐 조갑돌은
사리에 가면 자신도 새의의 소식을 알아보겠다느니, 도인이니 죽은 듯이 아픈 사람도 고칠 수 있을 거라느니
떠들어댔다.
다시 길을 떠난 다음 날.
어차피 죽은 사람인데 비를 맞아 냄새를 풍기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조갑돌은 생각했다. 그러나 덤덤하던 사내가
워낙 안절부절못하여 목욕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다 달라 했다.
조갑돌은 눈을 크게 떴다.
* * *
방 안에서 죽은 이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그 얼굴을 바라보고 앉은 사내를 보느니, 가을비 내리는 풍경을 보는
쪽이 백배는 나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자신을 달래던 조갑돌은 갑자기 사내가 외친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봤냐!”
“응? 뭘 말이오?”
“방금……, 방금 눈을 떴어.”
“에?”
“방금 눈을 떠 잠시 나를 바라보았단 말이다.”
“잘못 본 게 아니오.”
조갑돌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죽은 이의 뺨을 쓸며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자! 드시오!”
“쓰다.”
“내 볼일 좀 보고 오겠소.”
‘어라?’
‘설마, 저 시체 품에 넣어놨나?’
그때.
“뭐 하는 거냐.”
사내는 이를 드러냈다.
그는 소리쳤다.
그의 부인도 꼭 이랬다.
지금처럼 날씨가 차가운 것도 아니고 여름이었던 데다 병에 걸려 죽은 아이의 시신은 곧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기 시작했다.
돈이 없어 아이를 의원에게 보이지 못하고 죽인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그렇게 시신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부인을 보는 것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묘비도 없는 작은 무덤이 뒷산에 생겼거늘, 부인은 매일같이 온 마을을 헤매고 다니며 제 아이를 찾았다.
결국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홀어머니에게 부인을 맡겨두고 고향을 떠나 등짐장수가 되었다. 정처 없이 방황하는
삶을 살며 그 기억을 지우려 했다.
허나 겨울이 되어 고향 집으로 돌아갈 때면, 아직까지 아이를 찾는 부인의 헛소리에 고통스러운 기억이
반복되었다. 겨울임에도 언제나 집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맴돌았다.
그해 흉년만 들지 않았더라면.
의원에게 보일 돈만 있었더라면.
“죽었소……!”
꼭 감은 눈.
미동 없는 몸.
싸늘하게 식은 사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보았다.
이곳은 너무 시끄러웠다.
“안 죽었지 않느냐.”
“안 죽었다. 눈을 좀 떠봐라.”
사내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
아주 작은 웅얼거림이었다.
조갑돌이 눈을 크게 떴다.
“어엇!”
그가 소리를 쳤다.
무언가 본 것이다.
“……그, 그럴 리가…….”
“눈을 떴었소…….”
“눈을 떴었소…….”
13.
“저곳이 사리요.”
“그렇군.”
도덕적 회의나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흉년이 드는 바람에 돈이 없어 살리지 못한 아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때 사내가 불쑥 말했다.
“넌 필요 없냐?”
“나……? 말이오?”
“그래.”
그리고 말했다.
“내가 사겠소.”
이거라면 강척까지 갈 여비는 걱정 없겠다는 생각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품속에서 진주를 꺼내 건넸다.
“고맙소.”
* * *
조갑돌이 부두에서 배편을 알아다 봐줄 동안 사내는 주막에 앉아있었다.
사방은 뒷간에서 피어오르는 오물 냄새와 음식 냄새, 사람들의 체취, 비린내와 재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흉터가 돌덩이 같은 근육을 장식하고 있었으며 떡 벌어진 강인한 어깨 위로 검은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알겠다.”
“그리고 내가 누비옷과 여행길에 필요한 물건을 몇 가지 사 왔소. 당신은 그다지 추위를 타지 않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이제 겨울인 데다 아픈 사람은 다르잖소. 당신 체구가 커서 맞을만한 옷을 찾는 것이 어려웠소.”
그 외에도 돈 계산이 서툰 사내에게 보통 방값은 얼마고 목욕값은 얼마고 식삿값은 얼마 정도니 바가지 쓰지 말라
신신당부를 하고, 그러다 제 말에 취해 돈 깎는 법이랑 장사꾼들의 속임수를 간파하는 방법까지 줄줄이 말했다.
* * *
뭐가 오나 싶어서 고개를 들었던 사내는 저만치서 거드름을 피우며 팔자걸음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그렇습니다.”
“아이고, 얼른 올라타십시오.”
양반은 뿔이 났다.
그가 소작농을 부리는 방법이 악독해 종이 되느니 윤대복의 소작농은 되지 말라는 소문이 돌 지경이었다.
“왜?”
“이, 이놈이! 척 보니 상놈 같은데 당장 일어나 예를 차리지는 못할망정 어디서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고
반말이냐! 양반이 오면 자리를 비키는 게 당연한 법 아닌가!”
“자리 많다.”
“내가 먼저 왔다.”
“예이, 주인마님.”
윤대복을 모시는 종이 허리를 숙이자 윤대복은 종을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며 애꿎은 종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당장 관아로 뛰어가서 포졸을 불러오지 못할까! 양반을 모독한 죄로 저놈을 처넣으라 해라!”
“가까이 오지 마라.”
그러잖아도 관아를 우습게 보는 윤대복 때문에 출동하여 마음이 좋지 않은데, 상대까지 덩치가 크고 무시무시한
자이니 의욕이 나지 않을 만도 했다.
비록 포졸들은 육모 방망이로 무장하고 있었고 사내는 맨손이었지만, 그들은 사내를 잡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난 강척에 가야 한다.”
“왜.”
사실 윤대복이 무슨 벼슬아치도 아닌데 우스운 죄목이었다. 욕설을 퍼부은 것도 아니고, 손찌검을 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몽둥이를 고쳐 쥐며 사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들이 위협적으로 보이기를 빌며 말했다.
“아무튼 같이 가시오!”
* * *
“으아아악!”
풍덩!
과거의 기억을 더듬듯 한참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허공에 머물러 있던 포졸은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며 곧
추락했다.
사람이 날 수는 없는 것이다.
곧 물거품이 크게 솟아올랐고, 사내가 남은 포졸을 돌아보자 포졸은 히익!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곧 쑥 뻗쳐온 손에 멱살을 붙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이제 윤대복을 모독한 죄뿐만이 아니라 포졸들을 물에 집어 던지고 소란을 일으킨 죄로 사내를 잡아넣으려
하고 있었다.
적잖게 당황한 사내는 이를 드러내고 배를 점령한 채 닥치는 대로 포졸들을 모조리 물에 처넣었다. 허나 달려드는
포졸들의 수가 끝이 없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송지언이 다른 자의 손에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사내의 머리털이 쭈삣쭈삣 곤두서고 이가 이득이득 갈렸다. 입술이
들썩거려 송곳니가 번쩍였고 근육들이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 움찔거렸다.
그는 마치 화살 맞은 맹수 같았다.
그 모습이 무서워 붙잡힌 사공은 오줌을 지렸고 송지언을 붙잡은 포졸은 사색이 되었다.
“그놈은 이리 내라.”
* * *
송지언을 꼭 끌어안은 사내를 붙잡아 관아에 데리고 왔을 때는, 포졸들이 하나같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생쥐 꼴일 뿐만 아니라 물도 진탕 먹어 배가 빵빵했다.
당장에라도 알량한 감옥을 죄 때려 부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송지언 때문이었다.
사내가 별다른 대답을 해주지 않아 좀이 쑤신 죄수들은 옥사를 지키고 선 포졸들을 졸랐다. 그들은 대부분 도박을
했거나 빚을 갚지 못했다거나 남의 개를 훔쳐 먹었다거나 한 경범죄자들이라 간수도 개의치 않았다.
“오오-”
“헌데 저 사람을 살펴보고 싶어도 저자가 놓아주어야 말이지. 죽어도 제가 소란을 피워 이리된 것이니
어쩌겠어.”
“어휴, 그런 소리 말게. 그나마 사또나리가 버티고 계시니 윤대복의 횡포가 이 정도인 거지, 사또나리마저
뇌물이나 받아먹는 악독한 놈이면 마을 꼴이 어찌 되겠는가?”
“새의.”
잠자코 있던 사내가 불쑥 내뱉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사내는 고개를 들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게 어디냐.”
“그놈은 어디 있나.”
“이보오! 관두시오! 어차피 이렇게 나가봤자 또 포졸들이 막을게요! 사또나리께 무언가를 여쭈려면 이런 식으로
굴어서야 되겠소? 간절히 부탁해도 모자랄 판국에!”
“…….”
“이곳 사또나리께서는 마음씨 좋은 분이니 오늘의 소동은 무엇을 몰라 그랬다면 봐주실 게요.”
“아픈 이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 그랬다 하시오. 윤대복이는 사또나리도 싫어하는 사람이니 편들어주지 않을
것이오.”
고된 소작을 견디지 못해 병을 얻은 사람도 한둘이 아니고, 빚 대신에 딸자식이 끌려가고 아들이 머슴으로
팔려가는 일도 드물지 않다, 윤대복의 눈 밖에 난 자는 마을에 살 수조차 없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떠들어 댔다.
윤대복의 부인도 성격이 고약하여 마을 사람을 전부 제 종 부리듯이 하고, 딸마저 성격이 고약하여 저보다 예쁜
계집아이들의 얼굴을 흉 지게 한다며 혀를 끌끌 찼다.
* * *
찬 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던 죄수는, 추위에 욕설을 궁시렁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바닥에 깔린 지푸라기를 좀 더 그러모아 누우려는데, 옥사를 지키는 포졸도 앉아서 정신없이 졸고 있었다.
호랑이의 전신엔 늠름하고도 현란한 줄무늬가 고르게 흩어져 있었고. 그 가슴 털이 어둠 속에서도 희게 반짝였다.
둥근 귀 끝은 먹물에 반쯤 담갔다 꺼낸 듯 검었고, 갈라진 미간의 줄무늬 사이와 둥그렇게 솟아난 뺨 양옆으로
강철 같은 수염이 돋아나 있었다.
* * *
다음 날.
사내를 동헌 앞으로 불러낸 사릿골의 원(員) 하성백의 낯빛은 좋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가뜩이나 딸자식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데 윤대복의 횡포가 끊이지
않아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
거기다 아침부터 윤대복이 관아로 쫓아와 당장 사내를 끌어내 곤장을 치라 야단을 부려, 딸자식 얼굴 한번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자의 키가 몹시 크고 체구가 장대하며 기운이 범상치 않은 것이, 어제 관아의 포졸들을 죄다 물리칠 만했기
때문이다.
“저 무례한 놈 좀 보시오! 어제 저놈이 날 모욕주고 배에서 난동을 부려 포졸들을 상하게 하였소! 당장 곤장을
매우 쳐 거적에 말아버리시오!”
“난 앉아있었을 뿐이다.”
사내는 툭 내뱉었다.
“우습게 생겼잖아.”
확실히 윤대복이 배가 볼록 나오고 얼굴에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어 꼭 두꺼비같이 우습게 생기긴 했다.
사내에게나 윤대복에게나 올바른 이야기를 들을 수 없겠다고 판단한 하성백은 어제의 증인으로 사공을 불러들였다.
“어제 쇤네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강척으로 가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윤대복 나리께서 부두로 납시셨지요.
윤대복 나리께서 강척으로 가신다기에 오르시라 하였습니다. 하여 나리께 자리를 비켜드리려고 사람들이 전부
배에서 내렸는데…….”
묻지 않아도 뱃삯조차 내지 않았음이 뻔했다. 장에서도 제 것처럼 마음대로 물건을 집어가는 윤대복이었다.
“예, 윤대복 나리께서 썩 일어나라 소리치니 저자가 이유를 물었고, 윤대복 나리께서 본인이 양반이라 그렇다
말씀하셨습니다. 허나 저자가 다른 곳에도 자리가 많으니 일어날 수 없다 했습니다.”
“저 말이 맞느냐?”
윤대복은 입을 딱 벌렸다.
고을의 사또나리가 아무렇지 않다는데 아무리 마을의 지주고 양반이라 해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 우길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저자가 무엇을 몰라 저러는 모양인데,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수는 있으나 모욕을
줄 수는 없는 법이오. 모욕을 주는 것은 그것을 모욕이라 느끼는 스스로가 아니오? 아니면, 내가 아둔하여
모욕을 모욕이라 느끼지 못하는 게요?”
윤대복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윤대복은 전답을 팔아 벼슬아치에게 뇌물을 바쳐서라도 하성백을 반드시 몰아내겠다고 다짐하며 이를 득득 갈았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새의의 행방이었다.
“궁금한 게 있다.”
하성백은 끝까지 반말을 하는 사내를 보고 그가 자신의 충고를 귓등으로 들었음을 깨달았지만, 얼른 윤대복과 이
사내를 치우고 싶은 마음에 모른 척 물었다.
“무어냐?”
“네가 새의란 놈의 소식을 알고 있다 들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새의를 찾으며 숱한 좌절을 겪고 이제 거의 포기 상태에 이른 하성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뭘 원하냐?”
“뭘 원하냐니?”
하성백이 새의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 것이, 누군가와 거래할 땐 늘 그랬듯 대가가 필요해서라고 생각한 사내는
잠시 주변을 훑어보고는 내뱉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사내는 잠시 품에 안은 사람을 어깨에 걸머지더니 외동헌을 지나 하성백의 식구들이 기거하는 내동헌으로 갔다.
“으아아악!”
“으허억!”
사공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허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그에 신경 쓰지 못했다.
사람들이 그 구렁이에게 삼켜질 끔찍한 사내의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거나 비명을 질렀다.
바람도 아닌 이상한 기운이 한바탕 휘몰아쳐 떠밀린 사람들은 전부 주저앉거나 자신 옆의 사람을 붙들며
버둥거렸다.
구렁이는 여전히 사람 키만 한 길이에 사내의 팔뚝처럼 굵었지만, 그래도 나름 평범한 뱀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저놈이 더 좋다.”
윤대복은 자신의 목을 휘감는 구렁이를 보고 미친 듯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거렸으나 구렁이는 금세 똬리를 틀었다.
목을 칭칭 감은 구렁이를 매달고 윤대복은 눈을 까뒤집으며 관아 밖으로 뛰쳐나갔다.
“치웠으니 말해라.”
“그, 그, 그것이.”
하성백은 자신이 옷자락이 다 뒤집힌 흉한 몰골로 주저앉아 말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버지.”
“얘야!”
부인도 잃고 애지중지 길러온 딸마저 잃어버리나 했는데, 이마를 짚어보니 이제 열도 내리고 눈동자도 맑았다.
* * *
“알겠다.”
14.
다음 날 정오, 솔석에 다다른 사내는 사공의 도움으로 그때 새의를 보았다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차라리 산중이었다면 냄새가 오래도록 남아 어떻게든 쫓아갈 수 있을 터인데, 강가인지라 계절이 두 번 바뀌는 새
냄새는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숨이 멎으면 어쩌지.
차가워지면 어쩌지.
굳어버리면 어쩌지.
아니, 두 발로 걷는 너구리였다.
잠시 사내의 주위를 맴돌던 반디는 곧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고, 사내는 그 반디를 따라 걸었다.
* * *
그의 산이었다.
익숙한 바윗돌과 나무 등걸, 낙엽과 자갈을 박차고 벼랑을 날아 산꼭대기에 서서, 크게 울부짖었다.
사슴의 뱃속을 샅샅이 발라먹은 사내는 입가를 핥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포만감을 안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물이 고인 못으로 다가가 고개를 처박고 물을 삼켰다.
물장구를 치고 꼬리를 휘저으며 핏물을 씻은 뒤, 햇살이 비치는 바윗돌에 올라앉아 젖은 몸을 정성스레 핥았다.
달처럼 둥글고 큰 얼굴과 솟아난 검은 귀, 양옆으로 갈라진 수염과 넓적한 콧등이 보였다.
굳게 감은 두 눈과 핏기 없는 얼굴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
그를 인도하던 반딧불도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고, 사방은 흰 암흑과 검은 혼란으로 들어차 있었다.
자신 때문이다.
자신이 이리 만들었다.
그러니 이리 보낼 수는 없다.
위를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희어 먹먹했다.
사내는 생각했다.
그냥, 이 손을 놓고 함께 죽을까.
“죽을래?”
“…….”
어렵사리 송지언을 바닥에 둔 소년은 후―하고 이마를 닦더니 사내를 끌어올리려 몸을 돌렸지만, 사내는 벌써
벼랑 위에 손을 짚고 올라오고 있었다.
“네가 새의냐.”
새의의 외모는 얼핏 보기엔 열대여섯 정도의 소년으로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어리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병적으로 새하얀 피부, 굴곡 없이 호리호리하고 가는 몸에 풀빛의 옷을 걸치고 있으니 바람이 불면 휙 날아갈
풀벌레처럼도 보였다.
“나를 찾았나.”
“숨은 붙어 있는데 몸속에 있어야 할 혼이 이미 명부로 갔다. 본인이 돌아올 마음이 없으면 치료해도 소용없어.”
한참을 송지언을 내보인 자세 그대로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주춤하더니 송지언을 다시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
황망히 서 있었다.
혼이 떠난 몸을 붙잡고 있는 그 절망감-
변함없이 하루해가 뜨고 지는, 어떤 슬픔이나 고통에도 상관없이 움직이는 싸늘한 이치에 대한 절망감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바위가 쪼개질 정도로 사정없는 자해에 이마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흘렀고 바위에도 흥건히 묻었다.
아니나 다를까.
“…….”
“왜 온 거냐.”
‘널 놓아주느니 네가 죽는 게 낫다.’
그리고 곧 갸우뚱했다.
그때 동굴의 갈라진 틈 사이에서 들어온 바람 한줄기가 문득 송지언의 머리칼을 스쳐, 사내의 손은 허공을 쥐었다.
먹어버리면, 다신 볼 수 없다.
먹어버리면, 다신 만질 수 없다.
그 표정.
“이러지 마라.”
송지언은 고통을 말했지만 사내는 그것이 무슨 고통인 줄 몰랐다. 그저 곁에 있어준다는 말에 무엇이든 괜찮다고
생각해버렸다.
‘날 죽여서 나를 자유롭게 해달란 말이오! 나는 이제 더 못 견디겠소! 더 이상 그것이 짐승인지 사람인지
생각하는 것도 끔찍하고, 생각하려 애쓰는 것조차 고통스럽단 말이오!’
그것이 이런 고통이었나?
“……너도 이런 거냐?”
싫다고 울며 소리쳤다.
밉고 증오스러워 견딜 수 없다 했다.
당신이오.
“그래도 안 된다…….”
“싫다.”
싫다.
* * *
허나 침묵의 밤이었다.
긴 밤이 그렇게 지났다.
* * *
“돌아가라.”
“살려다오.”
봉사 같고, 백치 같은 표정이었다.
열린 새장을 보고도 창살 밖으로 보이던 푸른 하늘로 날아가야 할지 맛있는 먹이와 포근한 잠자리가 있는 새장에
있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새 같은 표정이었다.
“살려다오.”
깨어진다.
조각난다.
흩어진다.
“살려다오.”
“후회하느냐?”
‘후회하시오?’
송지언이 물었다.
‘미안하다,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스럽던 몸뚱이.
눈에 보이고 손에 닿는 실체.
자신이 알 수 있는 모든 것.
헌데 그것마저 차갑다.
없어지려 하고 있다.
‘후회하시오?’
사내는 다시 답했다.
“……후회한다.”
너를 이리 만든 것을 후회한다.
송지언을 안은 손이 덜덜 떨렸다.
놓아주라니? 가진 게 없는데.
그리고 애초에 자신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무수한 모래 알갱이들 중 하나가 되었다.
‘널 놓아주느니 네가 죽는 게 낫다.’
그건 틀렸다.
“살려다오.”
* * *
끼이익, 끼이익.
누워 있던 배에서 일어나 보니, 사방에 붉은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조각배 위에 올라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이보오, 지금 어딜 가는 거요?”
그저 묵묵히 노만 저을 뿐이었다. 사공의 뒷모습과 주변의 풍경이 익숙하여 송지언은 어딘가로 가겠거니 하고 더
묻지 않았다.
이렇게 평안 해본 적이 언제더라.
문득 저 멀리서 흐느낌 소리가 들려와, 송지언은 고개를 돌렸다가 안개 저편을 지나는 또 다른 배를 보았다.
그때 사공이 화를 내며 투덜거렸다.
사내였다.
자신을 겁탈하고 억류하여, 타락시키고 짐승으로 만들어 이윽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도록 만든 자였다.
이것은 무슨 웃음일까?
자신의 외면도 냉대도 미움도 달갑게 받아들였던 사내지만, 죽음만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끼이익, 끼이익.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안개가 흩어지며 강 건너편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보였다.
* * *
새의는 갈등했다.
허나 선택할 수 없었다.
자신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몸을 온전하게 하려면 몸에 든 불순물을 끄집어내는 쪽이
좋았다.
정말 필요한 것은 전부 다 했다.
‘돌아와라.’
* * *
“내려라.”
“아이라니?”
“내 뱃속에 든 것 말이오.”
“사내의 뱃속에 무언가 들었을 리가. 가기 싫어 그러는 거라면 틀렸다. 내 죽기 싫어하는 자들의 오만가지
변명을 들어보았으나 그런 괴이쩍은 소리는 처음 들어본다.”
“이런 답답한 저승사자를 보았나. 저승사자라면서 내 뱃속에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단 말이오.”
“이건 또 뭐냐.”
아무 일도 없었다니?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의 때가 이르렀을 때, 도피로서가 아닌 진정한 안식으로서 그것을 맞이했으면 좋겠다고 그리
희망했다.
그리되었다고 생각했다.
“또 무슨 괴상한 소리냐?”
“싫소. 나는 못 가오.”
“가자니까!”
“안 되오. 제발 배를 돌려주시오.”
“아얏!”
풍덩!
낭패한 저승사자의 얼굴이 수면으로 얼룩지더니, 물거품이 부그르르륵 끓어올라 모든 것을 가렸다.
송지언은 팔다리를 휘저으며 헤엄치려 했으나 꼭 아래서 무언가가 끌어당기듯 가라앉을 뿐이었다.
계속, 계속.
* * *
“-!”
“어찌 된 거냐!”
“어찌 된 거냐고!”
“놓아준다잖느냐…….”
“놓아준다는데…… 왜.”
왜!
높은 바윗돌에 산더미처럼 올라앉아 있던 눈덩이가 떨리다 쩍 쪼개져 쏟아져 내리자 쌓인 눈들이 우르르릉 굉음을
뿜으며 무너졌다.
* * *
기운을 전부 쏟아부어 간신히 그 혼을 붙잡았다 생각했는데, 실낱같은 연결이 갑자기 끊겨 그 충격에 자신도
넘어지고 말았다.
새의가 아무리 명의고 도인이라지만 그 역시 세상의 이치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을
다 살릴 수는 없었다.
흰 눈에 검은 피가 묻어 나갔다.
* * *
온 세상이 희었다.
푹, 하고 눈 속에 파묻혔다.
눈 속에 몸을 묻은 채 사내는 침묵했다.
겨울이 우는 소리였다.
사락사락.
사락사락.
얼마나 예쁠까.
심장이 터져버리겠지.
* * *
그저 어두웠다.
여기가 어딘가.
내가 왜 이런 곳에…….
송지언은 그곳으로 가려다가, 자신이 무언가에서 등을 돌리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앞을 보았다.
그것은 아직 어렸다.
딱 하나였다.
핏방울을 떨어트린 듯 붉은 열매 하나.
붉은 핏방울이 솟아났다.
씁쓸한 쇠 맛이 혀를 적셨다.
키우기 힘들고 가시에 찔려 아프더라도 언젠가는 붉은 열매를 조롱조롱 맺을 이 나무를 키우고 싶었다.
자신이 선택했다.
“무겁소.”
사락사락.
사락사락.
송지언은 뭐라 해야 할지 몰랐다.
더욱더 품에 깊이 안을 뿐이었다.
15.
송지언은 멍하니 눈 덮인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춥다.”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봐도 사내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지 않아, 추우니 들어가자고 말하는 사내를 무시할까
생각했다.
“들어가오.”
앞에 나타나도 눈을 맞추려 들지 않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접촉조차 꺼리니 사내는 아무래도 자신에게
거리를 두려는 모양이었다.
입안에서 침이 잔뜩 솟아났다.
간신히 구역질이 가라앉아 새의가 물을 떠 주었고, 그것으로 입안을 헹구고 나서야 살 것 같았다.
어디서 지내는 건지 밤 동안엔 모습을 감추었고, 아침나절에 잠시 들릴 땐 송지언이 먹을거리를 조금씩 들고 왔다.
예를 들자면 오늘 아침 가져온 복숭아가 그렇다. 한여름에 나는 과일이 겨울에 보이니 송지언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디서 이런 걸 가져 오냐 물어보면, 새의는 산 너머 어느 골짝에서, 계곡 위쪽 산등성이에서, 이런 식으로
대답했기 때문에 어딘지 알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것은 서책이었다.
“내가 아무리 살리려 했어도 네가 살 마음이 없었더라면 소용없는 짓이었다. 허니 내게 감사할 필요 없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이보오.”
“내가 뭘.”
“왜 내 눈을 피하는 거냔 말이오.”
“안 피했다.”
“피했잖소.”
“안 피했다.”
“아야…….”
“……일부러는 아니다.”
송지언은 미간을 모았다.
“책 봐라. 난 나가 있겠다.”
“밖은 추울 텐데.”
* * *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사내가 불을 피우고 솥에다 곡기와 호박, 밤을 넣고 죽을 끓이고 있었다. 새의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맛을 모른다니?”
송지언은 처음 아는 사실이었다.
피 냄새조차 싫어하는 송지언이기에 그동안 말하지 않았지만, 사내는 이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 * *
다음 날.
산중에 민물고기도 아니고 바닷고기를 구해오다니 송지언은 저 사람의 발에 날개라도 달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구워주든지 하라고 사내에게 굴비를 던져준 새의는, 약재를 불에 올려놓고 송지언의 몸을 살폈다.
“네 뱃속에 있는 것 말이다.”
“아…….”
“살아……있습니까?”
“저놈의 자식이라 그런지 명이 질기구나. 아직 살아는 있다만, 사실 심장조차 생기지 않은 작은 핏덩이일 뿐이니
살았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울혈이 모이고 순환이 막히는 와중 아이가 생겼으니 기력이 쇠해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던 거다. 틀어진 장기를 바로잡았으나 이물질은 빼내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어, 사실 네 몸이 온전하게
나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시 무리하게 상처를 벌려 이물질을 꺼내느니 놓아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는 이야기가 또 다르다.
그것이 점점 자라면 몸의 부담이 커질 테니 말이다.”
“그렇습니까.”
“…….”
송지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뱃속의 아이를 속죄의 도구나, 하늘의 기회 운운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미 깃든 생명을 자연스러운 죽음도 아니고
인위적으로 없앤다는데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송지언은 산삼의 위치를 알려주는 대가로 사내가 자신의 시체를 넘기기로 약속했었단 말이 떠올랐다.
송지언은 순간 멍해졌다.
“저를…….”
“널 놓아주는 것 말이다.”
“그럴 리가.”
송지언은 중얼거렸다.
헌데 그런 사내가.
허나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왔다.
서로를 진정 용서하고 용서받는 날이 영영 오지 않더라도,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고통과 아픔을 저승까지
짊어지고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낳겠습니다.”
“어려운 길을 가는구나.”
* * *
흰 죽을 끓이고 굴비를 구웠는데, 달리 부탁하지 않아도 먹기 좋게 가시를 발라내고 그것을 찢어놓아 송지언은
놀랐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땐 자신이 사내처럼 짐승같이 변한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사내가 자신을 닮아
변해가고 있었다.
사내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오늘도 함께 먹지 않을 거요.”
“말했잖냐.”
사내가 굴비를 송지언의 그릇으로 옮겨놓아도 송지언이 다시 되돌려놔, 몇 번이고 어린애 같은 실랑이를 해야
했다.
사내에게는 비린내만 느껴졌을 굴비지만, 송지언이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의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다.
“……맛있다.”
“그렇소.”
“그렇다고 하더이다.”
“허니 내가…….”
“내가…….”
사내의 검은 눈이 일렁였다.
허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슬퍼 말을 잇지 못하는 사내를 내버려두고, 그는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말이 어렵고 단박에 이해가 되질 않아, 아니, 사실은 믿기지가 않아 자신의 생각과 송지언의 의도가 맞는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모르면 됐소.”
“그렇소.”
“어째서?”
“다시 말해봐라.”
“다시 말해봐라.”
“…….”
“다시 말해봐라.”
“제발, 부탁이다.”
“그렇소.”
“그렇소.”
“내가, 기뻐해도 되는 거겠지?”
“알아서 하시오.”
“이 기쁜 걸 어째야 되냐.”
“…….”
16.
허리에 둘러진 묵직한 팔을 치우고 송지언은 걱정스럽게 몸을 내려다보았다. 자국을 남기지 말라고 악을 썼는데
어떤지 모르겠다.
마음속에 솟구치는 기쁨과 행복감을 참지 못해, 그리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양. 그동안 안 만지고 어찌
참았는지 모를 만큼 어린애 찰흙 가지고 놀 듯하다가 딱 붙어 잠이 들었다.
허나 몸을 돌리진 못했다.
“놓아주시오.”
사내는 계속 모른 척했다.
“…….”
“방금…….”
방금 뭐? 코를 간질인 것 말인가?
“방금…….”
“방금 뭐요?”
“웃었다.”
사내와 자신밖에…….
그뿐이다.
웃은 게 아니다.
절대 아니다.
“안 웃었소!”
“지언아.”
송지언은 우뚝 멈춰 섰다.
“……지금, 뭐라고…….”
그리고 꽁꽁 묶었다.
“지언아.”
사내의 큰 손이 등을 안았다. 도드라진 날개뼈 사이의 매끈한 등줄기를 쓸어내려 가며 허리를 끌어당겼다.
사내는 살며시 둔부를 쥐고 송지언을 자신의 허벅지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고약하고 간사한 주문에 묶여
멍해진 송지언의 팔을 열고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그것이 엉덩이를 만지는 뜨거운 손 때문인지, 아니면 예민한 성감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입김 때문인지, 아니면
반항했다가 언제 또 튀어나올지 모를 자신의 이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유두가 축축이 젖었다. 사내는 바싹 솟아오른 이것이 두 개였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올려 다른 쪽 가슴을
어루만졌다.
손끝에 그것이 걸리자 손바닥으로 감싸 긴장을 풀라는 듯 따뜻하게 데웠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미끄러트려
중지와 검지 사이에 걸고는 반대쪽 유두를 비비는 혀와 함께 위아래로 부드럽고 움직였다.
“아…….”
흰 피부 위에 열꽃이 피어올랐다.
가슴을 따라 점점이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으며 내려갔다. 그리고 송지언의 팔을 들어 올려 겨드랑이 안쪽을
쓸어내려 가 마른 옆구리를 만졌다.
우물에 샘물이 넘치도록 만들어놓은 사내의 입술이 더 아래로 내려갔다. 송지언의 두 손을 깍지를 껴붙들고
음모에 코를 파묻었다.
송지언의 체취와 함께 희미한 풋내가 났다. 그 냄새가 발정기의 짐승이 풍기는 냄새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하아-.”
“아-! 아-!”
터지기 일보 직전의 환희가 다리 사이에 가득 고였다. 그리고 꼭 그만큼의 허기가 뱃속을 긁어댔다.
“흐읏.”
쾌감을 수습하는 울먹임 소리가 사랑스러웠다. 사내는 아래를 깨끗이 빨고 핥은 후 입술을 뗐다.
여운이 가시지 못한 분홍빛 성기가 아직까지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이 못 견디게 귀여워 자신에게
그 몸을 붙여 안았다.
“아프냐?”
축축하고 말캉한 살 옆에 도사린 송곳니가 무서웠다. 허나 상처를 찢는 대신 딱지와 진물을 깨끗하게 핥아주는
것이 기분 좋았다.
성기와 성기가 맞닿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송지언은 사내의 어깨에 달라붙었다. 허나 맞닿은 촉감이 선연하여
비음이 나왔다.
송지언은 신음을 참으려 사내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그러자 그곳 말고 이곳이라는 듯 사내의 턱이 그의 이마를
밀어 들어 올렸고, 입술이 그의 입술을 덮었다.
“음-”
송지언은 눈을 꼭 감았다.
“응.”
“지언아.”
“아!”
* * *
“그렇습니까?”
“이게 그리 맛없더냐.”
“다시는 입에 대고 싶지 않을 맛입니다.”
“저…….”
“그러고 보니 그렇겠군.”
두툼한 가죽신과 장갑, 모자와 방한복은 물론이거니와 말린 고기와 어포, 환약과 연고를 챙겨주고 주의해야 할
것과 가려먹어야 할 것, 증상에 따른 대처법 등을 꼼꼼히 적어주었다.
약 달이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해 고른 식단을 신경 써야 한다는 둥, 마음을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는 둥,
너무 싸고돌아 운동하지 못하게 하면 안 된다는 둥, 불결한 환경이 나쁘다는 둥 다다다 쏟아냈다.
송지언은 그 말에서 아픈 자신을 데리고 집을 떠나오며 사내가 느꼈을 불안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이젠 셋이다.
“나도 좋소.”
* * *
“지언아.”
“…….”
사내는 불러놓고 싱글거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붉어진 그 귓불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르라고 있는 이름이잖냐.”
이름을 부르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송지언을 남과 공유하는 것 같아서였지만 사내는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난 그런 게 없다.’
‘그렇다면 말릴 권한은 없다만, 한 가지만 더 말하겠다. 여자의 몸으로도 어려운 것이 아이를 낳는 것이니,
남자의 몸으로는 두말할 나위 없다. 몸이 상한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 무리하게 아이를 낳으면 그러잖아도
짧은 수명이 더 줄어들 것이다. 유한한 것이 사람의 목숨이라고는 하나 너보다 훨씬 더 긴 삶을 살아갈 저놈이
그것을 견딜 수 있겠냐? 네가 가려는 길이 어려운 길이 아닌 헛된 길이 아닐지 잘 생각해 봐라.’
송지언은 불쑥 말했다.
“그런 말을 알고 있소?”
“무슨 말 말이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 말이오. 내가 말하려는 것과는 다른
의미지만…….”
“죽는데 뭐가 남냐.”
“사람의 수명은 자연물에 비해 짧을지도 모르오. 긴 세월이 비하자면 한 사람의 생이야 찰나의 꿈과 같을 거요.
허나 그것이 허무하지 않은 것은 사람의 삶이 이름뿐만 아니라 추억을 남기고, 자식을 남기고, 그렇게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오.”
“계속 이어진다고?”
“그렇소.”
“내가 죽고 없어도 당신은 그 아이에게 내 이름을 가르쳐줄 수 있을 거요. 네 아버지 중 한 사람은 송지언이라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말이오. 그럼 그 아이 속에서 나는 계속 살아있는 거요. 나를 기억하고 있는 당신이 죽어
사라져도, 그 아이가 다시 자식에게 내 이름을 말하면 또 그 아이 속에서 나는 살아있는 거란 말이오. 이렇게
계속 이어져 간다는 소리요. 그리고 당신 역시…….”
“주고 싶은 것이 있소.”
몸도 마음도 추억 한 톨 준 적 없는 송지언이었다.
“뭘 준다는 거냐?”
송지언이 말했다.
“당신의 이름은……”
송지언이 죽으면 송지언의 이름이 사내와 아이에게 회자될 것이고, 또다시 세월이 흘러 사내가 죽으면 사내와
송지언의 이름이 아이에게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다시 아이를 낳으면, 사내와 송지언에 대해 말할 것이고, 그 아이가 다시 자라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완>
짐승 2
지은이 : 이순정
제작일 : 2016.12.15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이혜원
표지 : 곡률
전자우편 : golem8182@gmail.com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ISBN : 979-11-6013-2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