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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끔찍한 땅
생각지도 못한 단이의 행동에 진위를 비롯한 군사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기함할 듯한 표정으로 이 기상천외한 장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사이 단이는 두 번째 머금은 물을 결에게 먹이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진위가 단이를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당장 떨어지지 못해?!”

진위는 결에게서 단이를 떼어내려 하였다.

행여 물을 억지로 마시게 했다가 결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걱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진위가 어깨를 밀어내려던 찰나.

단이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였다.

그녀는 여전히 결과 입술을 맞닿은 채였다.

미간을 구기던 진위는 단이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이내 놀란 얼굴이 되었다.

“……말도 안 돼.”

툭 불거져 나온 결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일렁이고 있다.

단이가 입으로 흘려보내주는 물을 받아 마시고 있다는 뜻이었다.

모두가 쉬쉬하고 있었지만, 실은 누구도 모르지 않는 사실.

바로 그들의 수장이자 북방 귀신이라 불리는 결이 물을 마시지 못한다는 것.

정확히는 맑고 투명한 물을 마시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혹자는 그저 취향이라 하고, 혹자는 건강을 위해서라 한다. 또 누구는 정신 수련의


일부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끔찍한 저주에 걸린 것이라고.


너무 많은 죄의 업보를 짊어진 까닭에 생명이나 다름없는 물에서 피 비린내를 느껴, 독한
다향으로나마 그것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라고.

그를 방증하듯 결은 냇물이든 샘물이든 할 것 없이 투명한 생수만 보면 얼굴이 굳어


고개를 돌리곤 하였다.

술도 빛이 맑은 건 가까이 하지 않았다.

마실 수 있는 건 오로지 다동이 눈앞에서 손수 내린 짙은 색의 차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결이, 지금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여인에게 안겨 물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입으로 흘려보내주는 물을.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장면에 그들은 바보처럼 눈만 끔뻑였다.

그 사이 단이는 몇 번이고 물을 머금어 결의 입속으로 흘려보냈다.

그때마다 결은 거부감 없이 그 물을 전부 받아마셨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것을 마시는 것처럼.

“하…….”

표주박에 든 물을 모두 비운 단이가 뭉친 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결을 다시 바닥에 뉘이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조심스럽게 닦아주니, 낮게 숨을 몰아쉬던 결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장군! 괜찮으십니까?”

결이 무사히 눈을 뜨자 진위와 군사들이 안도하여 외쳤다.

하지만 해갈을 마친 검은 눈동자는 오롯이 눈앞의 여인에게만 고정되었다.

“…….”

한없이 어둡고 시린 눈동자에 일순 묘한 감정이 스쳤다.

의문인 듯도 하였고, 경계인 듯도 하였고, 또 고마움인 듯도 하였다.

곁에서 본 이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였다. 곧 시선을 거둔 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지.”

“조금 더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희들 앞에서 면목 없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군.”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장군의 안위가 저희의 안위입니다.”

“더 발이 묶이기 전에 이만 출발하자.”

“예.”

결은 언제 쓰러졌었냐는 듯 훌쩍 흑마 위에 올라탔다.

그러곤 정면을 응시한 채 진위에게 말했다.

“단이는 네 말에 태우거라.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예, 장군.”

진위는 그때까지 바닥에 앉아있던 단이를 일으켜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진위의 뒤를 따라가던 단이는 잠시 멈춰 결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찰나보다 더 짧은 순간, 그의 눈 속에서 보았던 수많은 것들 중 이유를 알 수 없는 것 하나.

‘나를…… 원망하셨어.’

단이는 아랫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셨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떠오르는 답은 없었다.

함부로 입을 대어서? 아니면 차가 아닌 그냥 물을 마시게 해서?

그러나 답을 갖고 있는 이는 나를 외면하듯 등만 보일 뿐이었다.

“이랴!”
결국 의문에 대한 답은 얻지 못한 채, 단이는 다시 그들을 따라 한양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

한양에 도착했을 땐 사방이 어두컴컴한 한밤중이었다.

말 위에서 꾸벅꾸벅 졸던 단이는 워워, 말을 멈추는 진위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깼다.

옆을 보니 심 다점 크기만 한 대문이 보였다.

끔뻑끔뻑, 졸린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단이가 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장군의 댁이다.”

그 말에 졸음이 그득그득 묻어나오던 눈이 크게 떠졌다.

담벼락만 해도 끝이 없어 보이는 집의 규모에 단이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아도 결은 보이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건 오로지 그녀와 진위, 두 사람뿐이었다.

“저, 그…… 장군께선 어디 계세요?”

“장군께선 잠시 일이 있어 다른 곳으로 가셨다.”

“어디로요?”

“그것까진 네가 알 것 없고.”

진위는 여전히 그녀가 마음에 안 드는지 퉁명스럽게 답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행랑아범이 알아서 필요한 것을 마련해줄 거라 하셨다. 이후부턴 네


알아서 하거라.”

행랑아범? 그건 또 누구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단이를 향해 진위가 못 미더운 눈초리로 말을 이었다.


“목숨이 아깝다면 도망칠 생각 따윈 하지 말고.”

도망칠 생각이라니! 나를 뭐로 보고…….

억울함에 단이가 불퉁하게 입술을 비죽였다.

아무리 이곳이 낯설고 무섭다 할지라도, 목숨 구해준 은혜를 저버릴 만큼 배은망덕하진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위는 순식간에 그녀를 말에서 내려주곤 말머리를 돌려버렸다.

잠깐만.

정말 이렇게 혼자 두고 가버린다고?

“저, 저기요! 정말 저 혼자 들어가요? 들어가면 뭐라고 해야 하는데요? 괜찮으시면


대문 안까지만이라도…… 저기요? 저기요오!”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진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허어……. 저 매정한 사내 보소. 혼자 남겨진 단이는 앓는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으리으리한 대저택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아……. 허허벌판에 뚝 떨어져도 이것보단 덜 막막하겠네.”

답답한 마음에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저 문 너머에는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상상조차 감히 어려웠다. 하지만 밤중에 언제까지고 밖에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단 들어가 보자. 행랑아범이란 사람이 날 도와준다 했으니.’

단이는 비장한 표정으로 대문을 두드렸다.

쿵쿵. 두꺼운 손잡이를 잡고 두어 번 두드리니, 과연 문 너머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들려왔다.

끼이익,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린 문 너머로 머리와 눈썹이 회색빛인 노인이 나왔다.

아무래도 이 사람이 진위가 말한 행랑아범인 듯했다.


“무슨 일로 문을 두드린 게냐?”

점잖은 목소리에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단이이옵니다.”

꼴깍, 마른침을 삼킨 단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 저를 거두어주신다 하여 왔어요.”

“누가 말이냐?”

“서결 장군님이요.”

결의 이름에 행랑아범이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련님께서, 도련님께서 오셨다고?”

단이는 행여 결이 없는 것을 보고 거짓이라 여길까,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뇨! 장군께서는 일이 있어 다른 곳으로 가셨고, 저는 진위 장군께서


데려다주셨어요.”

“허…….”

그 말에 행랑아범이 맥 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이내 주름진 눈으로 단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이전에 결에게 들은 것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생년이 어떻게 되느냐?”

“신묘년이옵니다.”

“흠…….”
행랑아범은 뜻 모를 신음을 작게 내뱉더니 곧 들어오라며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잔뜩 긴장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늦은 밤인데도 웬 사람들이 옹기종기 나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꼭 신기한 것을 구경하듯이.

‘뭐지. 나 얼굴에 뭐 묻었나.’

말 위에서 자다가 침이라도 흘렀나 싶어 입가를 더듬는 사이.

앞서가던 행랑아범이 그녀를 불렀다.

“이리 오거라.”

그를 따라간 곳은 어느 별채 앞이었다.

“너는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면 된다.”

“여기서요?”

단이가 토끼처럼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심 다점 부지를 전부 합쳐놓은 것만큼 넓은 방이었다.

“일단 도련님께서 오실 때까지 쉬고 있으려무나.”

“도련님……이 서결 장군님 맞나요?”

“그래.”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행랑아범이 말을 이었다.

“너는 그냥 나리라 부르는 것이 낫겠구나.”

“예. 알겠습니다.”

옷차림을 보고 단이가 멀리서부터 왔음을 짐작한 걸까.

행랑아범은 세숫물과 함께 깨끗한 이불과 요, 그리고 갈아입을 옷을 마련해주었다.


그러곤 어느새 몰려든 다른 이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러잖아도 온몸이 천근만근 같았는데. 이것저것 캐묻거나 바로 일을 시키지 않아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옷도 살짝 헐렁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단이는 신기한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사용한 흔적이 있는 장과 농이 있었고, 구석에는 아주 오래 되어 보이는 서탁도


보였다.

‘이전에 일하던 사람이 쓰던 방인가.’

여긴 한낱 종에게도 이런 좋은 방을 주나 보다.

동창으로 번져오는 달무리를 빛 삼아 방을 구경하기도 잠시.

“하암……. 너무 피곤하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길게 하품이 나오며 눈꼬리에 찔끔 눈물이 달렸다.

단이는 행랑아범이 가져다준 이불을 펴고 그 위에 웅크려 누웠다.

눕는 게 황송하게 느껴질 만큼 무척이나 향긋하고 폭신한 이불이었다.

춥고 불편한 막사에서만 자다가 깨끗한 옷에 이토록 부드러운 이불에 누우니, 꼭 구름에


오른 듯 행복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이 캄캄했는데…….’

따듯한 바닥과 푹신한 이불에 고민도, 걱정도 한 줌 연기처럼 흐릿해진다.

단이는 보들보들한 이불을 쓰다듬다 문득 품안에 있는 대나무 통을 떠올렸다.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그녀에게 남긴 유일한 물건.

긴 거리를 이동해오는 동안 한 시도 품에서 떼어놓지 않던 것이었다.

단이는 품속에서 대나무 통을 꺼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뚜껑 한가운데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조그마한 표식이 음각된 대나무 통.

그 낡은 흔적 위로 달빛이 흘러내려 은은한 빛을 내었다.


뚜껑을 열자 안에는 오래된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그저
누렇게 바랜 종이가.

한 구석에 새겨진, 역시나 뜻 모를 문양만이 종이가 품은 유일한 것이었다.

대나무 통에 새겨진 것과 무늬가 다른 것을 보면 통과 편지의 주인이 각각 다른 것도


같았다.

‘어머니는 대체 무슨 이유로 이것만 남기고 떠나신 걸까.’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지만, 영원히 답을 얻지 못할 질문이었다.

세 살배기의 기억은 이미 머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기에.

단이는 다시 통을 품에 꼭 끌어안으며 조용히 물었다.

“엄마. 저 이곳에서도 잘 지낼 수 있겠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상상으로나마 그럼, 하는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천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내일 고민은 내일 하자.

미리 걱정해봐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단이는 곧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어둠이 깊이 내린 벽에 사람의 그림자가 작게 일렁였다.

이선 앞에 사배를 올린 결은 정중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드디어 그대가 나의 곁으로 왔구나.”

이선은 그런 결을 보며 흡족한 얼굴을 하였다.

결이 한양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체 없이 맞이할 준비를 한 그였다.

“그간 그대의 고초가 적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과인이 무능한 죄로 그대를 너무 오랫동안 떠돌게 하였어.”

“그저 제 가문의 업을 이어받은 것뿐이옵니다. 어찌 전하께 책을 돌리겠나이까.”

결의 대답에 이선의 눈빛이 흐려졌다.

세자 시절, 역모라는 이름 아래 몰락하는 서 씨 가문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서 씨 가문은 대대로 조선을 지켜온 무인 가문이라. 서현덕이 역모을 도모했다는 사실은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극구 부인하던 현덕의 입은 그의 방에서 나온 편지 한 장으로 가로막히고 말았다.

측근들에게 보내려던 것으로 추정되는, 자신이 키운 사병 부대로 역모를 일으키자는


내용의 편지였다.

필체와 인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현덕의 것이었다.

하필 국경 지역의 부족한 군사력을 보강하기 위해 실제로 사병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거기에 매수된 사병의 거짓 증언까지 더해졌으니.

결국 현덕에겐 곧장 사약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현덕이 죽은 지 닷새 만에 그의 죄가 누명이었음이 밝혀졌다.

편지를 위조했다는 사내가 나타났던 것이다.

난데없이 나타나 직접 현덕의 필체를 모방하여 보여주고 모든 죄를 고백한 그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평소 어진 성정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무수히 돕던 현덕인지라.

한때 그의 은혜를 입었던 것이 양심의 가책으로 남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거짓 증언한 사병 역시 이틀 후에 죄를 자백하고 자결하였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사주한 사람은 밝혀지지 않아 한동안 조정은 살얼음판이었다.


게다가 끔찍하게도, 현덕의 누명이 벗겨진 지 채 며칠 되지 않아 그의 가족들까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날, 그 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로지 결뿐이었다.

누명은 벗겨졌으나 이미 세상은 서 씨 가문을 버린 뒤라.

결국 결은 평안도 병마절도사인 외숙부를 따라 변방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현덕의 무죄를 믿었던 이선은 자신의 무예 스승이 죽고, 또 그의 어린


아들이 변방으로 나가 살 동안 아무 힘도 되지 못하였음에 늘 마음이 무거웠다.

옳지 않음을 알았으나 옳지 않다 말할 수 없었고, 죄 없는 자를 알았으나 그를 구할 수


없었다.

조정 대신들을 상대하기에 자신은 그저 아무 힘없는 세자일 뿐이었다.

하여 즉위한 뒤, 이선은 곧바로 결을 한양으로 부르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기다림 끝에 비로소 계획을 이룰 수 있었다.

“이제 과인은 그대를 계속 곁에 둘 것일세.”

“…….”

“아직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훈련원 판관 자리가 최선이지만, 내 그대의 공을


치하하여 품계만은 어모장군(御侮將軍)에 올릴 것이야.”

품계를 높여준다는 왕의 약속에도 결은 아무 대답 않고 그저 바닥만 응시하였다.

그의 눈빛은 전보다 한층 더 어두워져 있었다.

한양은 그에게 있어 1 년에 딱 한 번, 아버지와 가족들의 제사가 있을 때에만 돌아오는


곳이었다.

이번 어명만 없었어도 그는 아마 죽을 때까지 변방만 돌았을 것이다.

피의 땅. 죽음의 터.

가족을 모두 잃은 이곳에 다시 묶이게 된 심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찌 끓어오르는 이 감정을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있을까.

애통? 원망? 아니면 복수심?


어떤 단어로도 감히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짙고, 단단하며, 또 서러운 것이었다.

결코 해소되지 못할 끝없는 갈증처럼.

어둠 속에서 이를 드러낼 때를 기다리는, 다치고 지친 맹수처럼.

그러니 어찌 품계 따위로 이것을 다스릴까.

이 나라를 모두 뒤엎는다 한들 사그라들지 않을 것인데.

“부디 과거의 일은 모두 잊고, 이곳에서 나를 위해 애써주게.”

결은 작은 호흡마저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도록 흔들림 없이 내쉬었다.

그러곤 모든 것을 깊이 감추며 몸을 엎드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그가 감춘 것이 무엇인지는, 오로지 본인만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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