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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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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

모든것이 부서지는 밤이었다.


넓은 홀은 피냄새와 시체로 가득했고 그 가운데 은색의 가면을 쓴 남자가 웃음기 어린 투로
말했다.

“벤 하일즈는 황족을 능멸하고 군사기밀을 적국에 넘긴 죄로 작위를 박탈하고 노예로


강등할거야.
그래줄 수 있겠어? 어린폐하?”

황제는 있었지만 우습게도 이곳에서 모든 결정을 내리는건 가면을 쓴 남자였다. 그렇게


저지른 적도 없는 죄목으로 작위를 빼앗겼다.
남자는 노예중에서도 가장 최하위인 성노의 낙인을 회음부에 찍으라 명했다.
보통 성노의 인장은 골반에 새기게 마련인데 아주 예외적으로 다리 사이에 새기기도 한다.
고급 창부들이 주로 그렇다.
그 의미를 모를리 없는 벤 하일즈가 이제 하나뿐인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뼈마디가 으스러진 몸으로 그가 할 수 있는 반항이랄건 없었다.

억지로 옷이 벗겨지고 벌어진 다리 사이로 수치스러운 낙인이 찍힌다.


여린살에 새겨지는 고통보다 홀에 가득한 귀족들의 시선이 비수보다도 더 날카롭게 와박혔다.
그 가운데에는 그의 노예이자 애완동물이던 검은머리의 재규어도 있었다.
무관심한 듯 검은눈동자엔 이렇다할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무기력한 제 모습에 시선을
떼어내진 않는다.
그것이 더 끔찍했다.
끝내 다리 사이에는 붉은 꽃이 피어났고 가면을 쓴 남자는 입술을 비틀며 조롱을 아끼지
않았다.

-거봐. 창부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그랬잖아.

화끈 거리는 다리 사이의 감각보다 뼈에 사묻치는 수치에 이를 악물고 덜덜 떨었다.


주체못할 모욕감에 머리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이런 지독한 모욕은 생에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가면을 쓴 사내. 지하굴의 칼튼은 이미 반항도 할수 없는 자신을 검은머리의 재규어에게
던져주었다.
이제부터 그가 내 주인이라고.

개자식!
냄새나고 더러운 동물따위가 어떻게 인간의 주인따위가 될 수 있다고.

새빨갛게 충열된 눈으로 남자에게 살기를 드러냈지만 돌아오는건 내장을 헤집는 끔찍한 고통
뿐이었다.
아아악!! 참지 못한 비명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살을 파고드는 손을 피해 하얀 몸뚱이가 경련을 일으키며 흔들린다.
지하굴의 칼튼은 그 악명답게 손속에 자비가 없었다.
의뢰인일땐 그토록 살갑더니 적으로 돌아서자 저항도 못할만큼 철저히 짓밟는다.
온몸을 파헤치는 생경한 감각에 벤 하일즈는 드물게 공포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살려달라 매달릴 만큼 절박하진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릴지 언정.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주위에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검은머리의 재규어만이 그의 지척에 다가와 앉아 있을 뿐.
턱을 쥐고 위에서 내리 깔보듯 시선을 맞춘다.
그 시선은 전과 달리 꽤나 고압적이기 까지 했다.

“들었습니까 대령? 이제부터 당신은 제 노예라 합니다.”

아아, 살다보니 이런날도 다 있군. 벤 하일즈는 하나 남은 자줏빛 눈동자를 허망히 굴렸다.


귀족으로 태어났고 타고난 재능으로 이른 나이에 대령이란 직위까지 거머쥐었던 사내였다.
그런데 한순간 모든걸 잃고 이제는 동물따위가 제 주인행세를 하려든다.

밤처럼 어둡고 새카만 눈동자는 무관심 대신 서늘하고 난폭한 기운이 서렸다.


순종적이진 않았어도 감히 반항은 꿈도 꾸지 않던 검은 재규어가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냈다.
그 적의는 목덜미가 서늘할정도로 노골적이다.

벤 하일즈가 위였기에 참고 참았던 감정을 칼튼이 그를 노예로 전락시키며 무너트린 것이다.


더 이상 둘 사이에 고정된 상하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
“저는 지금부터 당신이 가장 경멸해 왔던 수인족들에게 그 몸을 범하라 명할겁니다.
당신이 모멸감에 죽고 싶어할 얼굴이 벌써부터 기대되는군요.”
나른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에 벤 하일즈는 찢어지고 헤진 입술을 벌려 웃음소리를 내었다.
역겨운 동물 냄새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마른 소리를 내던 그는 비참하게 자비를 구하느니 차라리 제 몸을
포기하는 방향을 택했다.
시야가 하얗게 점멸한다. 모든것이 뒤바뀐 날. 그리고 그건 지옥의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했다.

<-- 창부가 되다. -->


                             

-1 편-

하얀꽃씨가 바람을 따라 허공에 너울거렸다.


사막의 건조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황궁에는 인공적으로 심은 여러가지의 나무와 가지각색의
꽃들이 정원을 가득 채웠다. 용이 부린 마법이었다.
물론 물질적인 것 외엔 관심없는 벤에게는 전부 쓸모없는 풀쪼가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벤은 최근 이곳을 자주 찾았다.
중앙에 위치한 가장 커다란 나무위에는 어김없이 검은머리의 소년이 있었다. 대체 저 높은
곳은 어찌나 잘 기어 올라가는지. 벌써 몇번을 봐도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다.
사박. 걸음이 멈추자 불어온 바람이 벤의 뺨을 스치고 화사한 은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벤님?"]

듣기 좋은 미성이었다. 귀가 밝은 소년은 읽던 책을 덮었다. 밤처럼 까만 시선이 쏟아져


내린다. 상대를 확인한 소년이 나무를 미끄러지듯 내려와 반가운 얼굴로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벤님."]

반듯하게 굽혔다 펴지는 허리. 어려 보이는 꼬마치고는 여느 귀족 못지 않게 웃는 모습이


고아하다. 눈빛은 여전히 길들지 않은 야생동물의 그것 같지만.
벤은 인사를 받아주는 것 대신 나무맡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의 무시가 익숙한 소년은 쪼르르 달려와 그 옆을 차지했다. 손에는 탑의 학자들이나
읽을법한 고대서적이 들려있다.
지난번에는 요리관련 서적을 읽더니. 취향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딴게 재미있나?"]
["지식이란건 배워도 배워도 모자름이 없으니까요."]
벤 하일즈는 나직히 코웃음쳤다. 그래봤자 지루한 샌님밖에 더 되나.
모름지기 사내라면 검이다. 찌르고 베고.
찢어지는 비명과 사방이 피로 적셔진 대지만큼 황홀한 것도 없다.

["책 오래보면 눈 버리고 목 버린다. 척추가 휘어버릴거야."]

나름대로 생각해서 진지하게 충고했더니 검은머리의 소년은 말없이 웃고만 만다. 눈가의 점이
어린놈 주제에 지독하게 야하다.
가끔은 이대로 잡아먹고 싶을 만큼.
그러나 벤 하일즈는 음험한 속내를 숨기고 커다란 나무를 등받이 삼아 몸을 기대었다.
따사로운 볕이 쏟아지는 나른한 오후였다.

깜빡..

"...기분나쁜 꿈을 꿨군."

뻑뻑한 두 눈을 문지르며 벤은 잠에서 깨어났다.


어릴적의 재규어라니.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 중 하나였다. 그나마 최근의 모습이
아닌게 불행중 다행인가.
그나저나 잠자리가 왜 이렇게 뒤숭숭한가 했더니 이제보니 그럴만도 했다.
다리 사이와 복부에 끈적한 정액이 바짝 메말라 굳어 있었다.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역시 지난밤에 두놈을 동시에 상대한 것은 아무리 저라도 무리였다.
벤 하일즈는 짜증스레 머리칼을 헝클이다 몸을 일으켰다.
깔끔함을 선호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남의 체액을 오래 담고 싶진 않았다. 발을 딛자 밤새
시달린 허벅지가 당기고 발목이 욱신 거렸지만 걷는데에 무리는 없었다.

달칵. 욕실로 들어선 벤은 벽에 기대어 앉아 숨을 골랐다.


이곳에선 자신의 뒤처리를 해줄만큼 친절한 손님도. 시종도 없다. 모든것은 자신이 스스로
해야만 했다.
붓다 못해 찢어지고 상처난 구멍을 손가락으로 벌리자 선뜩한 고통이 밀려든다.
따끔따끔한 통증을 참아내고 손가락을 세우자 안에 고여있던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 익숙해질법도 하지만 아직도 수치스러운 작업 중 하나였다.

"..적당히 좀 싸질러 놓을것이지."


다음번에 만나면 쓸모없이 컸던 두놈의 성기를 꺾어버리겠다. 그리 생각하며 내벽을 긁던
손가락을 빼냈다.
대충 긁어내긴 했지만 워낙 깊은곳에 사정을 한데다 시간이 지나 안에서 말라붙었는지
이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고민하던 벤은 떨리는 손을 들어 벽에 걸린 호스를 끌어왔다. 이것만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호스의 끝은 금속으로 여타 일반적인 것과 다르게 남자의 성기모양이다. 크기만 해도 보통
성인의 발기한 정도는 된다.
밑을 가득 채울 이물감은 그렇다 쳐도 물을 틀게 되면 미지근한 온도일테니 마치 정액을
계속해 받는 더러운 기분이 든다. 이젠 하다 못해 호스따위에게 능욕이라니.

과거 자신이 저지른 짓보다 더한 재규어의 작태에 치가 떨렸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남의


정액을 담고 있다 배앓이를 하는건 자존심이 상할 뿐더러 손님놈들이 아픈 상태의 저를
배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 더러운걸 좋아하거나 관장에 재미를 붙인 가학적인 놈이라도 만나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귀두를 닮은 끝부분만 넣어서는 물도 나오지 않으니 참고 끝까지 단번에 밀어넣었다.
내벽을 밀고 들어온 호스는 그것만으로도 벌써부터 배가 가득 찬 기분이 든다.

"큭..."

짧게 신음을 한 벤이 온도를 맞추고 꼭지를 틀었다. 뜨근미지근한 물이 곧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안을 비우는 것만으로도 체력의 반을 소진한 벤은 비척비척 하얀 침의 하나를 걸친채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 자신의 침구위에 앉아있는 누군가를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깨에 다다른 차분한 검은 머리에 그와 같은 색의 검은 눈동자. 키가 큰 남자는 언제나처럼
몸에 딱 맞춘 정장차림 이었다.

"준비를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벤. 마침 씻는건 끝난 모양이로군요."


"......"

빌어먹을 재규어자식.
사나워지는 눈초리에도 아랑곳 않고 다가온 검은머리의 신사는 벤의 허리를 잡아 침대로
이끌었다.
반항없이 끌려가 앉자 그가 손을 뻗어왔다.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자 오늘은 때릴생각이 없다며 상냥한투로 속삭인다.
모멸감에 떨리는 손을 가만히 움켜쥐자 검은머리의 남자. 헤일런은 벤을 침대위에 눕히고
침의를 옆으로 젖혔다. 근래 햇빛을 못본 탓인지 드러난 나신은 눈처럼 새하얗기만 했다.

가느다랗지만 수많은 실전으로 단련된 육체는 여느 기사못지 않게 단단했다.


헤일런은 그 위로 마사지 하듯 향유를 고루 펴발랐다.
커다랗고 서늘한 손이 목덜미와 가슴. 단단한 복근과 사타구니를 지났다. 그러다 성기를
쥐었을 땐 움찔 몸이 튀어 올랐다.

"쉬이..가만히."

급소나 다름없는 부위를 남에게 내맡기고 있으려니 불쾌함과 불안함이 동시에 엄습했다.
고의라고 생각할 만큼 다리 사이를 느릿하게 배회하던 손이 상처가득한 비부에 이르렀다.
질척. 향유와는 다른 끈적한 액체가 주름을 문질렀다.
날카로운 살기가 금방이라도 그를 향할듯 꿈틀 거렸지만 벤은 인내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가 구멍을 비집고 들어와 내벽을 훑었을 땐 저도 모르게 토악질이 나왔다. 살의는
눌러참았지만 생리적인 반응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벌어진 두 다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그제야 배려없이 안을 휘젓던 손가락이 쑥 빠졌다. 갑작스러운 배설감에 아랫배가 저릿했다.

"이제 일어나 앉아 보십시오."


"..하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가쁘게 쉬다 후들거리는 허리를 간신히 세워 앉았다.


등 뒤로 선 헤일런은 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그러모았다.
사락. 결 좋은 머리카락을 위로 잡아 올리고 붉은색의 머리 장식을 꽂는다. 가운데에 박힌
다이아가 유독 반짝였다.
벌어진 침의를 다시 입히고 허리의 끈까지 단정하게 조이고 나서야 헤일런은 손을 떼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만든 세공품을 보듯 벤의 모습을 감상했다.

"아름답군요. 내 노예. 손님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을겁니다."


"..그거 고맙군."

정중하지만 조롱과 다름없는 투는 언제 들어도 신경에 거슬린다. 속으로는 이를 갈면서도 벤


하일즈는 익숙해진 창부의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퇴폐적이지만 지독하게도 농염한.
기진맥진한 몸이 강제로 일으켜 세워졌다. 이로써 치장이 끝났다.

<-- 창부가 되다. -->


                             

-2 편-
벤 하일즈.
그는 하일즈가의 삼남으로 그리 대단한 권력가의 자제는 아니지만 나름 건국초부터 존재해온
유서깊은 귀족가문의 혈통이었다.
위로는 형이 둘. 아래로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지만 형제들과의 사이는 오히려 타인보다 못할
정도였다. 훗날 벤이 귀족에서 노예로 전락했을 때조차 모른척 외면했을 정도이니 알만했다.

벤은 어릴적부터 어딘가 비틀린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생명을 경시했고 무언가를 보호하고 아끼기 보단 파괴하는 것에 만족감을 얻었다.양심의
가책같은건 당연히 없었다.
그 비틀린 이면은 특히 자신보다 아래라 생각하는 이들을 향해 거리낌 없이 표출되었다.
이를테면 시종들이나 노예의 행동에 종종 트집을 잡아 벌을 주곤 했는데 그 방법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가학적이고 잔혹했다.
성격도 워낙에 포악했던 지라 바로 위의 두형제까지 동생인 벤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그
밑의 여동생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찍이 제 윗형제를 제치고 가문의 후계가 될 수 있었다. 당시


벤의 나이는 고작 13 살.
모두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건 스스로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던 영리함도 있었지만, 그의
재능이 다른 형제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적 감각도. 금전감각은 물론 학업성적도 언제나 상위권에 머물렀고 검술 역시


발군이었다.
다만 그가 관심을 보인것은 전략과 전술 뿐이라 후계가 된 이후에는 필요한것 외에는 전부
기본소양만을 익혔다.
한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점은 장점이기도 했지만 그의 단점이기도
했다.

벤은 특히 전략을 짜는 것이 즐거웠다. 사람의 목숨을 제 손아귀에 올려놓고 체스말 처럼


움직이는건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전율이 올라왔다.
지금은 단지 상상일 뿐이지만 실제로 전쟁터에 나가면 어떨까.
분명 장난감 따위로는 느낄 수 없는 생동감이 전해질 것이다. 맥박치는 심장박동과 온몸을
휘젓는 뜨거운 열기. 대지를 적시는 붉은 피와 자신의 손짓 한번으로 사그러드는 타인의 숨결.
생명의 경시가 그릇된 사고임은 벤 스스로도 잘알았다.
때문에 날이 갈수록 전쟁터에 대한 열망이 깊어졌다.
어릴적에는 주위의 눈치를 보느라 그 욕구를 고작 동물따위로 밖에 풀지 못했지만 전쟁터는
그에게 합법적인 살인을 가능케 해줄것이다.
그는 홀로 즐기고 있던 체스판의 위를 손으로 쓸어냈다. 와르르, 하얀색의 체스말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게 전부 진짜 사람이었으면 좋았을텐데.
벤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런 생각을 했다.

* *
헤일런에게 떠밀리다 시피 들어온 방에서 벤은 또 다시 손님을 받았다.
허리가 아프고 밑이 부어 따끔한 통증까지 밀려왔지만 헤일런이 그의 몸 상태를 신견써줄리
만무하다. 벤 그 스스로도 아쉬운 소리를 뱉어낼 남자는 아니었고.

아래를 파고드는 묵직한 살덩이에 벤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제 익숙해질법도 한데 언제 겪어도 남성의 성기가 제 아래를 채우는 감각은 진저리가 날
만큼 치가 떨린다. 그의 자존감이 갉아 먹히는 기분이다.
괄약근이 빠듯하게 벌어지고 내벽이 거칠게 쑤셔졌다. 들어오려면 아예 깊은곳까지 밀어
넣던지 길이가 짧은지 어중간했다.
큭, 입밖으로 튀어 나오려는 신음과 욕설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자니 커다란 손이 그의
등허리를 은근히 쓸어왔다.
거부감에 소름이 돋고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하아..하. 예쁜아. 살냄새가 왜 이렇게 향긋하지?"

목덜미에 헉헉 뿌려지는 숨결이 불쾌함을 가중시켰다. 잘도 예쁜이니 뭐니.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자신을 알아보고 겁에 질려 아무것도 못하더니 세번째쯤 되니
잘도 창녀 취급이다.
하기야 이때 아니면 언제 나를 깔아 보겠나 싶지만.
벤은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그보다 좀 더 깊게 넣어봐. 이렇게 작아서야 내가 만족이나 하겠나. 손님."


"읏.."

손님을 기쁘게 받들어야할 창부의 목소리 치고는 지나치게 오만했다.


목소리도. 눈빛도.
뺨을 툭툭 치는 손길에 남자는 모욕이라도 받은양 얼굴을 붉혔다가 거칠게 추삽질을 했다.
퍽퍽! 커다란 몸뚱이가 거칠게 부딪쳐왔다. 크기도 작지 요령도 없어서 그저 아프기만 한
관계에 벤은 미간을 좁혔다.
덜컥 덜컥 엉망으로 흔들리다 혀까지 깨물 뻔 했다.
안되지.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죽음은 사양이다.
자신을 바닥으로 처박은 지하굴의 칼튼과 재규어의 목을 딸때까진 절대 죽어줄 수 없지.

"하아..하. 아주 엉망이군. 이래서야 만족은 커녕 감질맛만 나겠어. 차라리 내가 박아줄까?


응?"
"이, 입 다물어."

조롱하는 투에 남자는 씨근덕 거리며 벤의 입을 거칠게 틀어 막았다.


두터운 손바닥이 힘을 주고 눌러오자 벤이 혀를 내밀었다. 할짝. 축축한 혓바닥이 손바닥
안쪽을 핥아오자 남자가 움찔했다.
벤의 자주색 눈동자가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 속에서 경멸을 읽었는지 이윽고 커다란 손이 뺨을 내쳤다.
철썩!!!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입술끝이 따끔거렸다.
아. 하고 눈을 깜빡거리자 남자가 머리채를 억세게 쥐어왔다.

"건방진 창부놈..아직도 네가 귀족인 줄 아나. 천한 노예주제에."


"......"
"허튼 생각말고 얌전히 다리나 벌리란 말이다. 네 주인에게 다시 돌려보내기 전에."

벤의 약점이자 치부를 들춰내는 말에 머리가 차게 식었다.


아무래도 첫날 자신이 재규어의 협박에 못이겨 고분고분 따라주었던 일을 떠올리고
기세등등한 모양이었다. 아아. 참아야 하는데.

"가끔은 이런 취급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난단 말이지.."

지옥에 떨어진 그날로부터 벌써 반년이 지났다. 어릴때 부터 총명하단 소리를 질리도록


들어왔는데 아직도 창부일에 한해선 배움이 좀 더디다. 아니 이건 그냥 인내심 부족인가.
벤 하일즈는 눈을 곱게 접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움찔. 남자의 손에서 힘이 풀리자 머리에 꽂힌 빨간머리장식을 잡아 빼냈다.
어깨위로 사르륵 떨어지는 은발에 남자의 눈은 홀린듯 초점이 흐려졌다. 속내야 어쨌근
외양만큼은 그림으로 그린듯 아름다웠으니까.

"그 무...컥!!"
"내가 못죽인게 아니라 안죽이고 있던걸 알아야지.."

날카로운 비녀가 남자의 목덜미를 순식간에 꿰뚫었다. 그륵 거리며 남자가 손목을 떼어내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제약이 있어 이전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순 없지만 단련되지 않은 일반인 정도라면야 손 쉽게
해치울 수 있다.
하물며 오늘은 이런 도구까지 있는데. 고맙게도.
콰직!!!
마지막으로 벤이 감흥없는 눈으로 남자의 시체를 내려 보았다. 크게 뜨여진 동공. 주르륵
시트를 적신 붉은 핏덩이.
저런. 또 저질러 버렸군.
이로써 체벌이 있겠지만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난처하긴 하나 희미한 만족감을 지워내지 못한 벤은 그대로 침대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 창부가 되다. -->


                             
-3 편
벤은 어릴때 부터 동물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싫어하는 편에 속했다.
말귀가 통하지 않는것은 물론 동물 특유의 냄새와 털아귀는 더욱 질색이었다. 저택에서
기르던 강아지나 고양이를 종종 난도질하여 불로 태워버린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물론 제
가학적인 욕구를 풀기 위함도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최악은 수인족. 세키아 제국은 테오제국과 달리 수인족의 개체가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그 대부분이 성노예나 혹은 애완동물로 쓰여지긴 했지만. 인간도 아닌것들이 인간의 탈을
쓰고 돌아다니는 꼴을 볼때면 자근자근 밟아 그들의 위치를 새겨주고 싶다. 미물은
미물다워야지 감히.
그 불쾌함은 어느순간 부터 벤에게 뿌리깊은 혐오로 새겨졌다.
결정적인 계기는 역시..

촤악!!!

"윽!"

가슴을 후려갈기는 날카로운 채찍에 상념이 깨졌다.


잠을 자다 말고 지하로 끌려온 벤은 천장과 바닥에 팔다리가 고정된 채로 체벌을 받는
중이었다.
벌써 수십대가 오간덕에 가슴과 등은 붉게 부어 오르다 못해 찢겨져 피로 범벅이었다.
입가를 비집고 흘러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참아내고 고개를 들자 구석지에 앉아 여유로이
책따위나 읽어대고 있는 검은 사내가 보였다.
실내에서조차 벗지 않는 모자에 반듯한 정장.
헤일런은 벤을 노예로 거둔 후부터 딱 한번을 제외하곤 늘 이와같은 식이었다. 명령은 내리되
결코 체벌에 직접 가담한 적은 없다.
그러면서도 같은 공간을 벗어나진 않는다. 그저 무심하게. 그러다 가끔은 제가 당하는 모습을
즐기듯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물론 벤의 입장에서는 둘 모두 모욕감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헤일런의 시선은 언제나 그와 뒤바뀐 관계를 상기시켰으므로.

"대장을 볼 여유가 있는가 보지?"


"읏!"

허벅지와 고간을 스치는 채찍에 헉 입이 벌어졌다.


예민한 부위인지라 맞은 부위가 불이 붙는 듯 뜨거웠다. 식은땀이 이마를 적시고 손끝이 덜덜
떨렸지만 이를 악물고 소리를 삼켰다.
헤일런이 주인행세를 하자 그 밑의 하찮은 것들까지 저를 무시한다.
눈을 사납게 치켜뜨며 살기를 풍기자 어딜 노려보냐며 다시 같은 곳을 얻어 맞았다.
사심이 잔뜩 들어간 만큼 매서운 고통이 작렬했다.
눈앞에 늑대의 귀와 꼬리를 가진 짙은 갈색머리칼의 남자는 과거의 일로 벤에게 남다른
적의를 가진 이들 중 하나였다.
물론 이곳에서 누가 자신에게 호의적이겠냐만. 그는 유독 저를 못잡아 먹어 안달인 수인족 중
세번째 안으로 꼽혔다.
그래선지 체벌은 대부분 저 늑대수인족이 맡고 있기도 했고.

"그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의식이 희미해질 무렵 나직한 목소리가 체벌의 중단을 알려왔다. 동시에 사납게 내리치던
채찍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하아, 하.
그제야 벤은 반쯤 감았던 눈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온 몸이 다 땀과 피로 축축하게 젖어서는
손가락 하나 까닥일 힘도 없었다.
난도질을 해 놓은 가슴과 등짝엔 이렇다할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탁. 책을 덮은 검은머리의 사내가 몸을 느긋하게 일으켰다. 늘어져 있던 몸은 대단히 길고
유연했다.
이윽고 벤의 앞까지 다가온 헤일런이 수통을 들어 그의 입가에 물을 흘려 넣어 주었다.

꿀꺽. 꿀꺽.
반사적으로 목울대를 넘기자 차가운 생수와 비릿한 피냄새가 입안을 가득 메웠다.
그래도 마른목을 축이기엔 충분했다.

"벤. 이번이 벌써 일곱번째 입니다. 최근엔 그래도 많이 자제하시는 듯 하더니 제가 없을 때


마다 이렇게 사고를 치시는 군요."
"...헉. 허억. 내가 못참을걸 알고 일부러 자리를 비우는건 아니고?"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저는 일이 많습니다. 고작 노예의 잠자리 시중따위를
감시할 여유같은게 있을리가요."
"......"

벤도 비꼬는 말투를 자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 말투를 고스란히 배운 헤일런만은 못했다.


다른 놈들은 아무렇지 않게 흘려 들을 수 있는데 유독 놈의 정중한 말투는 그의 심기를
긁어댔다.
빙긋 눈가를 접으며 상냥하게도 웃어보인 검은 재규어가 장갑을 낀 손으로 벤의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그래서 반성은 좀 하셨습니까?"


"네 눈엔 어떻게 보이지?"
"이런. 대답은 벤이 하셔야지요. 대답 여하에 따라 반성의 기미가 있다면 손해를 복구하는
차원에서 이대로 손님을 하나 더 받는거고. 아니라면.."

잠시 말을 멈춘 헤일런의 까만 동공이 벤의 두 눈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 안에서 언뜻 기대감을 발견한 벤은 섬뜩함에 목덜미가 다 서늘해졌다.
의식도 못한새 손끝이 덜덜 떨렸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후 벌어질 일에 겁을
집어 먹었다.
차라리 조금전처럼 기절할 때까지 맞는거라면 아파도 견딜만 할텐데.
"아니라면 훈육이 조금 더 길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뭐든 원하시는 대로."
"빌어먹을 자식."
"노예 주제에 그런 버릇없는 말투를 쓰면 됩니까. 예의를 모르는 노예따윈 혓바닥을 잘라야
한다고 늘상 말씀해 주셔놓고서는."

벌어진 입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협박이라도 하는마냥 제 혓바닥을 뭉근히 눌렀다.


대답을 기다리는 헤일런에 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실수였다."짓씹듯 뱉어낸 말에 재규어는 만족한듯 웃으며 손을 빼냈다.
제 잘못을 인정하는 정도만 해도 기대 이상의 변화였던 탓이다.

"예. 응당 그러셔야 지요. 그럼 다음 손님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 죽지는 않겠지."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벤으로선 순순히 따르는 수 밖에는 없었다.


여기서 더 반항하기엔 자신의 처지가 그리 좋지가 않았다. 이쯤에선 적당히 숙여줘야만 했다.
아직은 그래야만 했다.

철그렁.
드디어 손과 발을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
후들 거리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휘청거리자 헤일런이 그를 자연스레 받아 들었다.
불쾌함에 어깨를 잡고 밀어내자 뒤로 물러난 헤일런이 벤에게 입힐 옷을 가져왔다.
이윽고 상처위에 와닿는 천의 감촉에 벤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상처는? 설마 이대로 가란건가?"


"다녀 오시면 치료해 드리지요. 벤 말대로 죽지는 않을테니까요. 이 예쁜 얼굴과 아래구멍도
멀쩡하고."
"......"

귀중한 손님이니 잘 대접하라는 말에 당장에라도 저 반반한 낯짝을 짓이기고 싶었지만 벤은


그저 사납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는 대장이 당신을 이렇게 멀쩡히 살려두는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벤을 손님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늑대수인족이 대뜸 그런 말을 해왔다.


숍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문앞에서 멈추어 서기에 이번 손님은 대단한 귀족인가 보군. 하고
실없는 생각을 하던 벤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멀쩡히 살려뒀다고?
딱히 동물따위와 말을 섞고 싶진 않았지만 퍽 억울한 감상인터라 속이 뒤틀렸다.
"멀쩡히라. 네놈 눈에는 내가 멀쩡해 보이나?"
"아닙니까? 팔다리 멀쩡하고. 망가진 눈에 의안까지 박아 넣어 주셨잖습니까."
"단순해 빠진 동물놈의 시각따위. 어차피 크게 기대도 안했다."

이런 처지가 되어서도 한결같이 수인족을 제 아래로 깔보는 태도에 남자는 벤의 멱살을 잡아


벽에 밀쳤다. 쾅!!
으르릉. 벌어진 입술새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당신 정말로 기분나빠. 대장만 아니었더라면 당장에 죽여 버렸을거야."

등뒤의 상처가 터져 하얀 침의가 다시 붉게 물들었지만 벤의 얼굴엔 동요조차 없었다.


푸른색의 의안과 자주색 눈동자 역시 잔잔한 수면처럼 고요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제 목을 감싸쥔 손을 잡아떼며 이죽거렸다.

"할 수 있다면 얼마든."

그 전에 네 목이 먼저 떨어져 나가겠지만. 뒷말은 혼잣말처럼 작았지만 청각이 좋은 수인족이


듣지 못했을리는 없다.
등뒤로 쏟아지는 난폭한 기운에도 불구하고 벤은 돌아서는 일 없이 문을 열었다.
저벅.
확실히 특실은 특실인지 맨발에 와닿는 카펫의 감촉부터가 틀렸다.

문득 조소에 가까운 웃음이 튀어나왔다.


남자에게 몸 팔러 가는 주제에 이따위 감상이라니. 동물하고 섞여살다 보니 갈데까지 간
모양이었다.
부아가 치밀어 올라 빠득 이를 갈았지만 벤은 금세 평정을 찾았다.
..기다리다 보면 때가 오겠지. 그 하나만으로 버텨온 만큼 감정을 갈무리 하는것도 빨랐다.

너덜거리는 몸을 이끌고 긴 복도를 지나 침실에 다다르자 헤일런이 말한 귀족 손님이 먼저


자리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혼자 술이라도 마시는 모양인지 원형의 테이블 위에는 잔과 술병이 놓여져 있었다.
길게 내려진 주렴 사이로 어스름한 그림자가 얼핏 보였다. 상대가 다시 잔을 채웠다.
절도 있지만 어딘가 우아함마저 느껴지는 동작에 벤은 상대가 제대로된 귀족임을 알아봤다.
성취향은 또 어떨런지 모르겠다만.

벤은 손을 뻗어 남자를 가리고 있던 주렴을 걷어냈다.


찰랑 찰랑. 줄에 꿰인 가지각색의 구슬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이윽고 시야에 들어온건 허리를 뒤덮은 붉은 머리와 노란색의 홍채. 벤의 얼굴이 점차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무심한듯 하지만 날카로운 기세가 묻어나는 얼굴은 분명 그가 잘 알고
있는 누군가의 것이었다.

"...너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남자 역시 마찬가지로 벤을 마주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지간히 놀라긴 했는지 언제나 무표정에 가깝던 얼굴에 빗금이 갔다.
그가 뒤늦게야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벤..하일즈?"

붉은 머리칼에 답답한 성격을 그대로 내보이듯 단추를 목까지 꼼꼼히 채운 검은색의 제복.
남자는 반년전만 해도 벤과 사사건건 부딪치던 사관학교 동기. 쟈엘 칸 대령이었다.

<-- 창부가 되다. -->


                             

4편

벤 하일즈는 지금껏 자신의 지위를 밑바탕으로 무서운 것 없이 제멋대로 살았지만 그에게도


나름 지켜야할 선은 있었다. 자신과 동급. 혹은 위인 존재는 피할 것. 그는 승산 없는 싸움은
과감히 포기할 줄도 알았다.
그 예로 벤은 결코 두명만큼은 손을 대지 않았다. 그 첫번째가 드래곤의 마지막 후예인
그리슨 대공.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능력에 황족의 생사여탈까지 손에 쥔 그를 상대하는건 제 아무리
벤이라도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두번째가 바로 그와 성향이 정 반대에 있던 쟈엘 칸 대령. 사관학교시절 벤의 유일한


적수였다.
벤은 쟈엘과의 대련에서 단 한번도 져본적이 없지만 반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머쥔 적도
없었다. 알려지기야 화려한 생김새와 싸움광으로 소문난 벤이 좀 더 유명했지만 단순히
실력만 따지고 본다면 누가 더 뛰어나다 판가름이 나지 않았다.

적어도 검술이나 전략에서 만큼은 스스로가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던 만큼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의 충격은 아주 대단했다.

당장에 없애 버리고 싶은 지독한 살의. 지금에야 전쟁을 수도없이 겪은 자신의 실력이


미세하게나마 더 우위일 거라 짐작하지만 적어도 그땐 그랬다.

그러나 쟈엘은 제국의 내로라 하는 다섯 가문중 하나인 칸 가문의 가주이자 벤이 가장


꺼려했던 그리슨 대공의 하나뿐인 친우이기도 했다. 문제가 생기면 그까지 함께 얽혀 버리기
때문에 제 아랫사람 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대령이 된 이후 시시때때로 그와 의견이 엇갈려도 굳이 죽이려 하지 않은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생각해보면 자신을 이런 밑바닥에 처박은 칼튼도 그런 부류였는지도 모른다. 장사치라고


무시할 남자가 아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갚을 빚이 있으니 꼬리를 말고 도망갈 수 없지만.
"......"
"......"

허리를 뒤덮은 붉은 머리카락에 노란 홍채. 벤 자신도 그리 작지 않은 키인데 눈앞의 사내는


그보다 한뼘은 더 컸다.
단단한 체구와 전체적으로 서늘해 보이는 인상.
흐트러짐 하나 없는 제복까지 차례로 살핀 벤은 허탈함에 웃음이 났다.
하.
설마하니 이 남자를 이런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어디 상상이나 했겠나. 창부와 손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서로 침묵하던 와중에 쟈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벤 하일즈. 대체 네가 왜 여기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만.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겠군. 이곳에 발을 들일 이유야
뻔하지."
".....오해다."

오해는 무슨. 벤의 빈정거리는 말에 순간 쟈엘이 표정을 딱딱히 굳혔다.


사관학교 시절부터 인기는 많았어도 여태껏 염문설 한번 뿌리는 꼴을 못봐서 성기능에 문제가
있는건 아닌가 의심했는데 이런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여태 성욕을 풀고 있었나 보다.
벤의 생각을 짐작했는지 쟈엘이 다시한번 오해임을 피력했다. 물론 신뢰는 가지 않았다.
이곳을 찾는 놈들이 어떤 부류인 줄은 벤이 더 잘 알았다. 성취향이 말도 못하게 더럽거나
눈앞의 쟈엘처럼 더러운 뒷소문을 염려하는 지체높은 귀족들. 저 금욕적인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이해못할 일도 아니다.

"네놈도 사내인건 당연한데 뭘 그리 부끄러워 하나."


"아니, 나는 그저 술상대로만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절대 다른 의도는.."
"그러시겠지."
"......"

쟈엘이 벤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있다면 바로 말솜씨 였다.


이전부터 말주변이 없던 그는 매번 벤의 날카로운 언변에 도통 맥을 못췄다. 지금만 해도
반박할 수가 없어 입을 다물지 않았던가.
뭐 인간관계가 협소한 그리슨 대공의 친우이니 오죽하겠냐만은. 쟈엘은 정도가 심한 편이라
귀족회의에도 항상 대리인을 끼고 다닐 정도였다.

어쨌거나 뜻하지 않은 만남이라도 벤은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상대가 누가 되었던 일은


끝내야만 했다.

"대화는 그쯤하고 이만 눕지."


"사양하겠다."
"이제와서 뺄건 뭐야.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한번 내 봉사를 받아 보겠어."

가벼운 말투와는 달리 이미 속은 뒤틀렸다.


쟈엘과의 사이를 굳이 말하자면 재규어 만큼은 아니더라도 가히 최악이라 이를 수 있다.
일단 둘은 성향부터가 극과 극이었다. 틀에 박힌 고지식한 귀족이란 점도. 전쟁을 반대하던
평화주의의 방식도. 수인족 보호에 힘을 보태는것 마저도 벤과는 정 반대의 사고였다.
전쟁이 마무리되고 자신이 수인족 전담이 되었을 땐 그 갈등이 좀더 바같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기껏 과거를 모른척 덮어두고 몸을 내어주려는데 이 남자는 끝까지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 창부를 사러 온 주제에 이제와 거절이라니.

"너는 자존심도 없는건가? 아무리 노예가 되었다고 해도 어떻게 내게.."


"창부가 의외로 내 적성에 잘 맞는 모양이지."
"......"

쟈엘의 비난어린 시선이 꽂혔지만 벤은 불쾌해 하기 보단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오히려 그가 이런 적나라한 이야기를 싫어하는걸 알기 때문에 더 천박한 단어들을 골랐다.

"남자 좆을 품는거 처음이야 어렵지. 반년 가까이 같은일을 반복하다 보니 숨쉬는 것


만큼이나 익숙해졌다. 이젠 사내새끼 좆물없인 잠드는 것 조차 힘들정도거든."
"...그만."
"구멍이 작긴 하지만 조이는건 잘하니까 걱정말고."

자존심. 물론 처음엔 자신도 아등바등 지키려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 자존심도 결국 살아야


지킬 수 있는거다.
침대위로 남자를 눕히며 그 위로 올라탔다. 그러자 하얀색의 침의가 벌어지며 매끄러운
허벅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언뜻 보이는 단단한 가슴팍은 채찍의 흔적이 여실했다. 유두
바로 위를 가로지든 상처에는 아직도 핏방울이 고스란히 맺혀있다.
벤은 야살스럽게 웃으며 쟈엘의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크게 뜨여진 동공에 밑바닥의
밑바닥 까지 처박힌 자신의 볼품없는 모습이 비춰졌다.
뽑아 버리고 싶군.

그러나 내심과는 다르게 벤은 나긋하게 그의 중심위에 엉덩이를 부볐다.

"그러니 손님. 날 좀 예뻐해 주겠어?"


"그만. 난 이만 일어서겠다."

턱. 강한 힘으로 벤을 밀어낸 쟈엘이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아도 서늘한 얼굴이 더욱 차게


느껴졌다. 성욕은 커녕 거부감만 가득했다. 일어나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는 모습에 벤은
입술을 비틀었다. 창부는 좋지만 나는 아니라 이거지.

"....끝까지 고고한척. 깨끗한척. 나는 사관학교 시절부터 네놈이 정말 싫었다."


"그거 유감이군.."
쟈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고 나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벤은 그대로 주저앉아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폐부에서 부터 깊게 차오르는 웃음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다.

"하..하하. 아하하하. 하하."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리가 없다. 자신의 동기이자 적수였던 사내의 앞에서 예뻐해 달라
유혹질이라니. 옷을 전부 벗는것만 못한 차림으로 그 앞에 섰을 때 느낀 수치심과 모욕감.
당장에라도 꺼지라고 소리치며 덤벼들고 싶은 충동을 얼마나 참아냈는지 모를 것이다.
스스로를 깎아 내린것도 그의 동정과 구경거리 보듯 하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버린 위치가 비참할 정도로 피부에 와닿았다. 헤일런은 그런 의도에서
자신을 쟈엘에게 보냈을 것이다.
속에서 울컥 울컥 튀어오르는 감정에 눈앞이 뜨끈하게 달았다.

죽여버리고 싶어. 죽이고 싶어.


벤은 웃음을 멈춘채로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그의 살기가 쏟아지는 대상은
언제나와 같았다.

"손님께서 화를 내고 돌아가시더군요. 만족스럽게 봉사해 드리지 않으셨나 봅니다."


"......"
"반성의 기회를 이렇게 또 한번 날리시다니. 역시 가벼운 체벌같은걸론 당신의 버릇을 고칠
수 없는 모양입니다."

긴 장의자에 앉아 책을 넘기며 검은머리의 남자가 말했다.


당연하지만 벤은 쟈엘이 도망가버린 그길로 헤일런의 앞까지 끌려갔다.

반성?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에 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헤일런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가 들고있던 책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가 헤일런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개자식. 일부러 그 놈을 내게 보낸거지."


"서로 안면이 있으니 당연히 반가워 하실 줄 알았습니다. 설마 두분 다 이렇게 불쾌해 하실
줄이야."
"..쟈엘은 기뻐할 줄 알았나 보군."
"예.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기뻐하며 당신을 짓밟았다면 꽤 볼만했을텐데요."

속이 뒤집혔다.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은데 벤은 유독 헤일런의 도발에 흥분을 많이 했다. 가학심만을
자극했던 이전과는 또 다른 의미로. 내가 왜 너까짓놈 때문에 그런 수모를 당해야 하나.
목을 꽉 조이는 힘에 헤일런이 소리없이 웃으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

수인족 특유의 악력에 신음이 절로 나왔다.

"윽!"
"이런. 아직은 무립니다 벤. 이렇게 반항하시면 전처럼 사지를 묶어두고 손님을 받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손목이 부러질듯한 통증보단 귓가에 울리는 나직한 협박에 몸이 움찔 굳었다. 애초에 벤이


창부일을 제 스스로 받아들인것도 그 구속이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애시당초 자존심 강한 벤이 처음부터 이 일에 응했을리가 없다. 다만 그렇지 않으면 사지가


속박된 채 밤낮도 알 수 없는 작은 독방에서 사내들에게 범해져야만 했다.
입에는 재갈을. 손과 발목에는 쇠사슬을. 그야말로 우리에 갇힌 동물과도 같았다. 식사나
생리현상 마저도 제자리에서 이루어졌기에 모든것을 전부 헤일런에게 맡겨야만 했다.
그렇게 버티던 것도 보름정도였다. 그 이상은 벤 스스로가 미쳐버릴 것 같았기에 헤일런이
다시 기회를 주었을 때 지키던 자존심을 내려놓고 굴복하고야 말았다.
물론 그러고 나서도 적응할 때까진 몇번인가 난동을 부리긴 했지만.

헤일런에게서 손을 떼어낸 벤이 입술을 한번 질끈 물었다.


후일을 기약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몸이 통제를 벗어났을 때의 지독한 상실감은 두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벤은 다소 독기가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대답을 강요하는 헤일런의 까만 눈동자에 굴욕감이 전신을 휘어감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얌전히 있겠다."
"착하군요. 말만 잘 따르신다면 최소한의 자유는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인간인 당신과
다르니까요."
"...내가 뭘 해야 하지?"
"내일 저녁에 있을 파티에 참여해 주시면 됩니다. 벌이니까 힘들건 당연히 각오해 두십시오."

난교군. 자신을 몰아넣을 파티라면 그 정도 밖에는 없었다.


어지간하면 둘 이상은 받지 않는데 목을 졸랐다고 심기가 많이 상한 모양이다.
싫다고 해봤자 어차피 도망도 못갈테고.
벤은 반쯤 체념해서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이리 오십시오. 그 전에 치료는 해드리겠습니다."
"병주고 약주나?"
"병만 주던 당신에 비하자면 친절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감사인사를 받아야지요."

벤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다가온 헤일런이 그의 침의를 직접 벗겼다.


찢어진 상처위에 연고가 닿자 거품이 생기면서 시큰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고맙군. 하고
빈정거리자 헤일런은 당연하다는 듯 받아 들였다.

"별 말씀을."

뻔뻔한 짐승 새끼 같으니. 못마땅하게 헤일런을 보던 벤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 창부가 되다. -->


                             
-5 편-

세키아의 전쟁영웅. 그것은 벤 하일즈를 이르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지금에야 평화로운 휴전이 이어지고 있지만 불과 4 년전만 해도 세키아는 테오제국과의
영토분쟁으로 전쟁이 한창이었다.
그러던 와중 국경선을 침범당한 것을 기점으로 세키아의 연이은 패전이 거듭될 때.
전투에 새로이 합류한 벤 하일즈는 빼앗긴 서부전선을 되찾고 나아가 난공불락이라 불리는
리요크 요새를 함락시키며 승부를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
사관학교 출신의 이 어린 지휘자는 뛰어난 전술과 과감한 행동력으로 점차 많은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그를 탐탁치 않아하던 상관들은 전시라는 상황을 이용해 교묘히 제거하거나
제 뜻대로 움직이게 했다.
그리하여 지상전은 물론 해전에 이르기까지. 승전보가 잇달아 울렸다.
테오제국에서 가장 경계하던 기사. 무패신화의 주인.
19 세라는 어린 나이에 대령직을 거머쥐게 된것도 그런 공적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벤이 전쟁광이라 불리며 몇 년간 전쟁터를 배회한건 알량한 충섬심이나 정의 때문은 아니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였다. 벤은 전쟁을 빌미로 학살을 즐기면서 사로잡은
포로로 가학적인 성욕을 충족하기도 했다. 때로는 상대의 목을 조르면서. 때로는 신체의
일부를 자르면서. 시간도 마다하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면 비윤리적이다 지탄받아 마땅했겠지만 전쟁터에서는


모든것이 용납되었다.
더군다나 테오제국과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가던 차라 거리낄 것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벤의 즐거움은 그리 오래도록 이어지지 못했다. 양국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던
것이다.
벤은 당연히 휴전에 반대하며 길이 날뛰었지만 황제의 결정에 반할 수 없으니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이 마무리 되어지자 뜻하지도 않게 벤은 자국에서 전쟁영웅이라 추앙받고 있었고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귀국했다. 그리고 딱 그맘쯔음 이었다. 그가 헤일런을 처음 만난것은.

* *

일반적으로 대륙의 동물이라 함은 짐승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하고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는


수인족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곳 세르카 제국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유난히 수인족이 많았다. 보편적으로 그들은 인간의
애완동물이나 혹은 노예로 취급되어졌는데 얼굴이 예쁘장한 것들은 성노예. 관리가 안된
잡종은 실험체. 그리고 그중 동물로 변이가 가능한 종들은 잡종이라도 최상급으로 쳤다.

간혹 수인족 가운데 이능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도 있었는데 그와 같은 경우에는 희귀성을


이유로 황실에 등록이 된후 황가의 관리하에 놓이게 된다. 일반인들의 소유를 엄격히 금하기
위함이다. 애당초 이능이란 인간들 사이에서도 축복받은 소수의 전유물로 취급지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비공식적인 기록을 제한다면 이능이 가능한 수인족이 등록이 된건 제국이 건립된
이례 고작 두 차례에 불과했다.

헤일런은 바로 그 두차례 중 하나였다.


그의 이능은 얼음을 다루는 것이다. 원소계열 중 물에 가까운 희귀능력으로 특징은 살상력이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그러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헤일런은 제 처지에 순응했다. 어릴때 부터 받은 교육탓에
인간에게 반항을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주인이었던 벤 하일즈가 그를
억압할 만큼 강한 사내이기도 했고.

벤은 황궁내에서 헤일런의 관리를 도맡아 하면서 전쟁으로 풀지 못한 가학적인 욕구를 모두


그에게 쏟아냈다.
수인족은 그에게 노예만도 못한 존재였기에 죄책감 따윈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을 벤의 손에서 장난감처럼 굴려졌을까.
폭력적인 정사와 고문과도 같은 괴롭힘을 견디다 못한 헤일런은 2 년전쯤 삼엄한 감시를 뚫고
도주에 성공한다.
이후 그는 황실에 반하는 수인족들을 끌어모아 나름의 세력을 갖추게 되는데 그것이 지금의
반란군이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불온한 세력이라 일컫어지며 수배령이 붙었지만 황제가 바뀐


이후에는 별다른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다. 은연중 행해진 거래와 사업 파트너인 지하굴의
칼튼의 도움이 컸다. 그 덕에 최근엔 인간과의 사업도 확장하고 있는 상태였고.

수인족만으로 목표를 이루기엔 한계가 있음을 헤일런 본인도 잘 알았기에 그간 고수해오던


방식을 달리한 것이다.
"대장! 대장!"

나무위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던 헤일런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아래를 내려다 보자 짧은 갈색머리카락에 체격이 좋은 남자가 삼각형의 뾰족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헤일런의 수하이자 오른팔인 늑대 수인족 윌로스였다.

윌로스는 20 대 초반의 젊은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눈밑의 흉터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헤일런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수인족이긴 하나 돌연변이의 인자를 타고 나서 여러가지
특이점이 많았다.
이능을 가진게 그 첫번째고 두번째로는 수인족의 특징인 귀와 꼬리를 감출 수 있었다.
때문에 단순히 겉모습만 본다면 인간과 다른점이 없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인간에게
무한한 애정과 순종을 타고난 수인족의 본성을 뒤로하며 반기를 들었다.

긴 속눈썹 아래 뜨여진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길들지 않은 야생동물의 그것과 같았다.


길고 유연한 다리를 쭉 펴며 나른하게 미소짓자 윌로스가 멍하니 넋을 잃고 그를 보다
헛기침을 했다.

"큼. 대장. 파티가 벌써 한창 진행중인데 안 가보셔도 됩니까?"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습니까."
"예. 말씀하신대로 일단 벤 하일즈에게 약을 먹이긴 했는데 그걸로 고분고분 해졌을지는."
"없겠지요. 별로 기대는 안하고 있습니다."

헤일런은 지위와 나이여부를 막론하고 말투와 태도가 정중했다. 검은 신사라고 불리는 이유가
달리 있는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습관은 전주인인 벤하일즈에게 영향이 컸다. 의외로 귀족적인 그는
예의범절에 꽤나 민감해서 제 아랫것들의 실수를 결코 용납치 않았다.
군인출신이다 보니 위계질서를 무너트리지 않기 위함도 있었을 테지만.

"그런데 대장. 벤 하일즈는 언제까지 살려두시는 겁니까?"


"왜요. 죽이고 싶습니까?"
"..위험하지 않은가 해서. 물론 저는 전적으로 대장의 뜻을 따를겁니다."
"위험하지요. 사실 맹수를 다루는 기분입니다."

약과 일종의 수술을 통해 제어를 하고 있지만 벤 하일즈는 온 몸이 흉기인 사내다. 그 예쁜


얼굴과 낭창한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는 몰라도 그는 무기없기도 숙련된 솜씨로
사람을 죽였다.
과거만 못하다 해도 언제 어떻게 헤일런의 목을 노릴지 몰라 경계를 늦추진 못했다.

윌로스는 그럴바엔 차라리 손이나 다리를 잘라 불구로 만들라고 했지만 그건 헤일런이


싫었다. 심미안적으로도 나쁘고 이왕 망가지려면 육체가 아닌 정신쪽이 좋았다.
"사실 조금만 분풀이를 하다 죽일 예정이긴 했습니다만. 생각보다 즐거워서요. 지독한 사내지
않습니까. 그 오만한 사내가 제게 보복을 하기 위해 천한 창부의 행세를 하는것이."
"......즐기시는 겁니까?"
"뭐 그것도 있고."

위험을 썩 즐기는 편은 아니었는데 적당한 긴장감과 시기각각 변해가는 벤의 행동을


지켜보는건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어떻게 복수를 할까 기대가 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죽일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왕 뒤바꾼거 저도 주인님 소리는 들어봐야지요."


"......"

윌로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절대적으로 무리라는 눈빛에 헤일런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반년째 갖은 폭력을 통해 제법
그럴듯한 창부 흉내는 내지만 그가 결코 타협하지 단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마치 그것만이
그의 마지막 자존심인양.
물론 벤의 성격상 앞으로라고 달라질건 없겠지만 그냥 소소한 바람이라는 거다.

"그런데 왜 하필 창부였습니까?"
"칼튼씨가 제게 그를 넘겨주며 그런 조언을 하더군요."

반년전. 헤일런은 칼튼을 도운 보답으로 벤 하일즈를 건네 받았다.


지하굴의 칼튼. 자칭 뒷세계의 1 인자인 그는 헤일런의 좋은 거래상대였다. 이번 얼음사업과
사창가 운영을 함께 하면서 제법 많은 부도 축적했고.

그는 인간들 중에선 보기 드물게 호감이 가는 남자였는데 그건 제 밑의 수하들도 마찬가지라


낯을 많이 가리는 윌로스조차 칼튼은 제법 잘 따르는 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조언이라고 하니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나저나 대장. 이만 내려오시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아.."

높은 곳을 좋아하는 헤일런은 딱히 아래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한참을


미적거렸다.

낮잠을 더 자지 못한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늑장을 부렸다간 벤 하일즈가 또


무슨 난동을 부릴지 몰랐다.

-
지하굴의 칼튼은 확실히 장사치로서 수완이 좋았다. 비록 방법이 지저분 하긴 하나 귀족들을
이용하는 방법을 잘 알았다.
헤일런은 벤의 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인지 도덕적인 관념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따라서 현재 벌어지는 파티 역시 자금벌이 중 하나로만 생각될 뿐이었다.

"...윽. 대장. 아무래도 넬을 불러야 겠습니다."

"......"

헤일런이 도착했을 때 이미 파티는 한창 무르익어 있었다.


낯뜨거운 신음소리와 이리저리 뒤엉킨 살색의 무리.
헤일런은 경멸어린 눈으로 저들끼리 붙어먹는 인간들을 보며 입가를 틀어 올렸다. 가면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기 때문인지 보통때 보다도 하는짓이 난잡했다.
짐승보다도 못한 인간들 같으니.

그들은 수인족인 자신들을 동물이라며 천시하지만 세상엔 그보다 못한 인간들이 더 많았다.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동족을 해치는 것도. 배신도. 오로지 인간만이 행하는 일이었다.
그 오만한 사내들의 정점에 있던 벤은 이제 같은 인간들에 의해 희롱당하고 엉망으로
짓이겨졌다.

아름답고 우아하던 육체는 온갖 난잡한 체액이 들러 붙었고 드높은 자존심으로 빛나던 눈은


이지를 잃었다. 아래로 드나드는 성기가 둘인데도 고통스러워 하기는 커녕 숨만 간신히
내뱉고 있다. 상태는 윌로스가 의사인 넬을 찾을 만큼 최악이었다.

"고작 여기까지 인가.."

그날 이후로 가장 심하게 몰아 붙이긴 했지만 저런 무기력한 모습이라니.


헤일런은 어쩐지 맥이 빠져 벤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도 희열을 느끼지 못했다. 처음엔 자신의
위에 군림하던 절대자가 제 명령 하나에 좌지우지 되는것이 마냥 신선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를 알수 없기에 헤일런은 더욱 그를 구석으로 몰아갔다. 때로는 폭력으로 또 때로는
성적인 학대로. 그러나 그가 아무리 바닥을 기어도 만족감은 희미했다. 원하는 것은 역시
주인님 이었나.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헤일런은 옆에 선 윌로스에게 벤을 데려오라 명령했다.


허탈한 심정이야 어쨌든 몸 상태가 심각해 보였으니 일단 의사인 넬에게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큭!"

쨍그랑. 날카로운 소음에 고개를 돌리자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벤이 윌로스의 목을 한팔로


휘어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검은 또 언제 빼앗았는지 후들 거리는 왼팔로 잘도 지탱하고
있다.
윌로스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껏 벤을 구해내던 중에 당한 봉변이 아닌가.
헤일런 역시 이 뜻밖의 상황에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그런 와중에 미약을 먹고 제정신이 아닌 인간들만이 살을 섞는데 여념이 없었다. 멀뚱히
보고만 있는 헤일런이 우스웠던지 벤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조롱했다.

"헉..허억. 어차피 인간은 백날 죽여봐야 네게 통하지도 않겠지."


"...역시 전주인님이라 그런지 저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거래를 하자. 이 수인족 새끼의 목을 걸고."

버둥거리는 윌로스의 명치를 몇번이고 주먹으로 내려쳐 반항을 잠재운 벤이 그의 목끝에


날카로운 검을 들이 밀었다. 이것이 단순히 협박이 아니란건 헤일런이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자주색 눈동자와 이제는 그와 색을 달리하는 푸른색의 의안.


온몸이 너덜거리고 다리 사이가 헐다 못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헤일런을 노려보는
눈은 타오르는 불처럼 뜨거웠다.

뒤바뀐 관계에 있어서도 변하지 않는 오만함. 반년간 그렇게 기를 죽이기 위해 애를 썼건만


그는 여전히 헤일런을 제 아래에 두고 있었다.

아아.
도저히 꺾이지 않는 고집에 헤일런은 눈가를 깊이 휘며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 이래야 당신답지."

스스로의 몸을 희생해서 기회를 만들줄이야.


아직 망가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헤일런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 창부가 되다. -->


                             

-6 편-

테이블 위에 음식처럼 진상된 몸에 열댓은 넘는 남자들이 그를 향해 게걸스레 달려 들었다.

비밀스런 파티를 즐기기 위함인지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섬뜩한 가면이 걸렸다.

"허벅지가 아주 야들하군. 먹음직 스럽겠어."


"예쁘게도 하지. 이런 미인은 난생 처음이군."
이어지는 품평에 이가 바득 갈렸다.
약에 취해 꼼짝도 못하는 몸을 짓누르고 다리를 벌린다. 조금의 애무도 없이 들어오는
고통이야 익숙하다지만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큭! 짧게 내뱉어지는 신음에 남자들은 더욱 흥분해 몸을 더듬었다.

커다란 손들이 몸을 주무를 때마다 벌레가 기는마냥 소름이 끼쳤다. 그들은 본능에 충실했던
동물새끼들 보다 더 포악하고 잔인했다.
유두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강한 마찰이 있고 성기로는 넣어서는 안될 물건이 사출을
가로막았다. 온갖 도구들이 사용되어졌다.

그만.
벌어진 입으로 누군가가 우악스럽게 성기를 밀어넣었다. 안을 가득채운 살덩이에 숨이 턱턱
막혀 괴로워 했지만 창부의 사정을 봐줄이가 있을리 만무했다.

"컥..허억. 읍."
"잘 받아 먹어야지. 흘리면 다시 가득 싸넣어주마. 하하."

찢어진 구멍에 화끈한 통증과 함께 어느순간 간질간질한 감각이 전해졌다. 쾌감이었다.

끔찍하다. 끔찍했다.
사내들에게 유린 당하는 것이 이번 처음은 아니었지만 약에 취한 몸으로. 마찬가지로 약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십수명에게 용변기처럼 사용되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 몸이 통제를 벗어난 것도 견딜 수 없는데 천박하게 구른 몸뚱이는 이 행위에 쾌락마저
느끼고 있었다.

복수를 생각할 만큼 상황은 여유롭지 않았다. 푹푹 사정없이 내벽을 찔러오는 성기와 이내


흩뿌려지는 뜨거운 액체에 벤은 점차 머리가 하얗게 비어갔다.

* *

"거래를 하자. 이 수인족 새끼의 목을 걸고."

벤은 가물가물한 의식을 다잡으며 검을 틀어 잡았다. 가까스럽게 기회를 잡았는데 아무것도


확답받지 못한 상태에서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다.

아직 미약의 효과가 전부 가시지 않았는지 온몸이 후끈거리고 머리가 지독하게 아파왔다.


파티장에서 얼마나 많은 사내의 성기를 받고 그들의 정액을 아래와 위로 먹었던가. 각오를
했음에도 순간 순간 이성을 잃고 신음을 내지를 정도로 말못할 쾌감이 그의 몸을 잠식했다.
약을 이따위로 많이 처먹이다니.

한계에 다다랐음에도 여전히 자극을 원하는 육체에 벤은 피가 배어날 정도로 입술을 짓씹었다.

헤일런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손끝이 덜덜 떨렸다. 평온을 가장하고는 있지만 긴장감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래서 거래조건은 뭡니까? 당연하지만 무리한 조건은 받지 않습니다."

역시나 수인족을 인질로 삼은게 효과가 있는지 헤일런은 크게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벤은 그제야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그 역시도 지나친 조건을 내세울 생각은 없었다.

거래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수지가 맞아야 성사가 되는 것이다.


즉 헤일런이 조건을 승락해도 손해는 크지 않고 수인족을 돌려받기에 무리가 없는 정도.

"창부일에 제한을 두지."


"?"
"거부하겠다는건 아니다. 다만, 창부짓은 한명으로 족해."
"그러니까 손님을 한명만 받겠단 겁니까?"

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더 이상 난교따위에 참석했다가는 정신이 남아나질 않겠다. 그날의


기억 때문인지 숫자가 많아지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나고 두려움에 몸이 굳는다. 조금전만
해도 비명을 지르지 않고 버틴게 고작일 정도로. 손끝은 그 여파로 아직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쟈엘을 대접하지 못함 벌이라고 했던가.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스스로
이런 말을 입에 담을리는 없을테니.

"너..."
"예. 말씀하십시오."
"네 창부가 되어주겠다."
"......"

제안이 아니라 명령조에 가까운 말투. 오만한 성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태도였다.
벤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 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게 복수하려는 거잖아. 굳이 다른 사람에게 돌릴것 없이 네가 직접해."


"제게 원할 때 마다 다리를 벌려주시겠다는. 그런 말씀입니까?"
"그래. 언제든지."

헤일런은 그저 웃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에 초조함이 밀려든다.

이제 한계에 다다라 눈꺼풀이 반쯤 감겨졌다. 칼날을 손으로 쥐며 정신을 차린 벤은 곧


이어질 헤일런의 대답을 기다렸다.

"확실히 그런 식이라면 창부가 아닌건 아니니까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 동료를 인질로 삼고도 그 후환은 두렵지 않은 모양이지요?"
"......"
"혹은 당신을 속일수도 있는 일이고."
검은색의 눈동자를 마주하던 벤이 그와 마찬가지로 웃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럴리가. 네놈은 나랑 다르잖아?"


"...언제 어떻게 제 목을 노릴지 모르는 당신을 곁에 둬야 한다니. 제가 손해 보는것 같은
거래이긴 합니다만."

동물놈 주제에 영리하긴. 사실 그런 의미에서 제안한 것이기도 했고.


벤은 손에서 힘을 뺐다. 이윽고 날붙이가 떨어지는것과 동시에 헤일런이 그의 거래를 받아
들였다.

"좋습니다. 앞으로는 저만을 위한 창부가 되어주십시오. 벤."

벤 하일즈가 헤일런은 처음 만난것은 황궁이었다. 원치않는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입궁했을 때였다.

[이 꽃밭은 뭐야. 쓰잘데기 없이.]

몇년만에 찾은 황궁은 이전과 다르게 정원이 온통 풀과 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사막의 건조한
기후에서 쉽게 볼수 없는 가지각색의 식물에 눈이 다 아파왔다.
벤의 불만어린 투에 곁에선 시종이 설명을 덧붙였다. 대공께서 직접 가꾸신 것들이라고.
어울리지 않게 식물키우기 따위에 취미가 있다더니 황궁에도 그 솜씨를 선보인 모양이다.

벤은 황제를 알현하기 전 잠시 정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실용성은 없긴 했지만 마력을 통해


자라난 식물들이 신기하기는 했다.

나무 위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검을 뽑아들며 위를 올려다 보자 검은머리의 작은 소년이


보였다.

10 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이의 체구는 몹시도 작았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귀족인가?

마주친 새카만 눈동자가 이질적이다 싶을 정도로 깊었다. 길들지 않은 야생동물을 보는 기분.


아이가 방긋 웃었다.

[...안녕?]

[......]

초면에 대뜸 반말부터 갈기는 검은머리의 꼬마를 보며 벤은 미간을 좁혔다.


-

"안녕."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벤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때마침 헤일런과의 첫만남을 꾸고


있던 참이라 더욱.
몇번인가 눈을 깜빡이자 뿌옇게 흐려졌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눈앞에는 하얀 수의를 입고있는 더벅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머리위로는 둥그스름한 귀가.


늘어진 노란 꼬리는 검은 줄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헤일런의 수하중 벤이 가장 싫어하는 수인족이 눈앞에서 손을 휘휘저었다. 그는 맹수류인


호랑이의 피가 섞여 있는데 하는 일은 어울리지 않게 의사였다.

"이거 몇개?"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을텐데."
"그럼 발로 치료해도 돼?"
"......"

어눌하게 흘러나온 말투에 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장난인듯 하지만 진심이라는건 이제 잘


알았다.
볼때마다 생각하지만 저 더벅머린 동물새끼라 그런지 특히 지능이 모자라 보였다. 저런
주제에 의사라니. 누굴 가릴 처지가 아니긴 하지만 불안해서 도저히 자신의 몸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반말하지 말랬을텐데 건방진 호랑이새끼."


"내 이름은 넬이야. 멍청한 벤."
"...누가 누구더러 멍청하다는 거냐."
"이름을 몇번이나 알려줘도 모르니까. 그리고 노예한테는 원래 반말하는 거랬어. 그런 상식도
없어?"
"......"
"머저리. 머리나쁜 노예. 성격도 나빠. 그러니까 맨날 혼나지."

침묵하며 무시하려 해도 무미건조한 투로 툭툭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굉장히 신경에


거슬렸다.
놀리는 투가 아니라 정말로 벤을 바보취급하는 것이었다.
이래서 이 돼먹지 못한 호랑이 새끼와는 얼굴도 마주 보고 싶지 않았는데.

살기어린 눈으로 노려보자 겁은 또 많아서 찔끔하며 뒤로 물러난다.

"못됐네. 상처 치료해줬는데 은혜도 모르고."


"그런것 치고는 아직도 몸이 뜨거운데."
"아. 미약이라면 치료 못해. 내가 만든게 아니라 칼튼님네 닥터가 만들어서 해독제가
없거든."
"그럼 이건.."
황망해서 보자 수인족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배시시 웃는다.

"응응. 그냥 평소처럼 손님한테 엉덩이 몇번 내주면 될거야. 한 두명? 뒷구멍은 내가


깨끗하게 치료했으니까 걱정말고 마음껏 박히면..왁! 때리지마! 대장한테 이른다!"

벤은 주위에 있는 물건들을 내던지다 지쳐서 바닥에서 헉헉 거렸다.


호랑이 주제에 움직임이 쥐새끼 처럼 빠르다.
..벤 하일즈. 정말 갈데 까지 갔군.
이전이었다면 감히 자신에게 저런 막말을 지껄이는 수인족 따윈 없었을것이다.

"운 좋은줄 알아라. 내가 몸만 괜찮았다면 네 놈의 혀부터 뽑았다."


"..와, 다행이다. 너 몸은 평생 고쳐주지 말아야지."

수인족이 다시 특유의 무덤덤한 얼굴로 돌아와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듣고있던 벤은


속에서 끓어 오르는 분노에 숨이 거칠어졌다.
그러고 보니 벤의 몸이 이전과 같은 악력을 낼 수 없는건 저 모자란 의사놈이 손을 댔었기
때문이었다.
벤이 손끝을 바르르 떨며 주위에 그럴듯한 흉기를 찾아 헤매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건 헤일런 이었다.

"자. 그만. 치료끝나면 돌아가시라니까 또 벤을 자극하시고 있군요."


"어서와 대장. 근데 이거 내가 어지른거 아냐. 저 멍청이 노예가 행패부린거야."

멍청이란 말에 어색하게 웃어보인 헤일런이 알겠다며 넬을 밖으로 내보냈다.


넬은 아쉬운듯 벤쪽을 보더니 "급하면 대장한테 해달라 그래."하고 마지막까지 신경을 긁고
나가버렸다.
쾅!! 손에 들린 물건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벤이 침대위에 드러누웠다.
화가 나서 얼굴이 발갛게 달아 오르고 숨이 찬 줄 알았는데 그보단 약의 후유증인 것 같았다.
지하굴에서 가져온 약이라면 벤도 사용해 봤듯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준은 아니었다.

"이런. 많이 괴로우신가 봅니다."


"헉..허억. 알면, 좀 어떻게 해봐."
"이거 원. 창부라면 당신이 제 성욕을 풀어줘야 하는거 아닙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헤일런이 벤의 옆에 앉았다. 벤은 몸에 걸쳐진 거추장스러운 침의를


벗어 던졌다.
벤은 의식을 잃기 전 거래가 성사된걸 기억한다. 때문에 구태여 다른 사람을 불러 달라 하지
않고 이제 그가 몸을 내어줄 유일한 이를 붙들었다.

수치스러움은 잠시뿐. 어차피 앞으로는 줄기차게 안길텐데 미리 익숙해 져야만 했다.


그래. 암컷을 보듯 정욕이 뚝뚝 묻어나는 시선을 던지는 인간들보단 차라리 증오를 받는게
나았다.
"...정말 해도 됩니까?"

그러나 막상 다가온 헤일런은 선뜻 손이 가지 않는지 경계를 내비추었다. 벤을 여럿에게


돌려먹게 하긴 했지만 실제로 헤일런이 그를 안는건 이번이 고작 두번째다. 첫번째도 사실
섹스라기 보다는 서열을 가르는 마운팅에 가까웠고.
숨을 몰아쉬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보던 벤은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다. 그는 대답 대신
헤일런의 옷자락을 잡고 자신의 위로 확 잡아 끌어당겼다.
 

<-- 창부가 되다. -->


                             
-7 편-

"왜. 이제와 네가 직접 하려니 겁이라도 나나 보지?"

겁이 나면 처음부터 시작을 말았어야지.


자줏빛 눈동자와 그와 다른 푸른색의 눈동자가 헤일런을 도발하듯 올려다 보았다. 밑에 깔려
미약의 효과로 몸이 달아있는 주제에 태도는 여전히 오만하기 짝이없다. 유혹이라도 하듯
온몸에 흘러넘치는 색기에 헤일런은 의외라는 듯 벤을 가만히 응시하다 손을 들었다.

짜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얼굴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벤은 인상을 찌푸리며 얼얼한 뺨을
손으로 만졌다.
입안이 터졌는지 비릿한 피맛이 혀끝에 닿았다. 이제와서 이정도는 별달리 굴욕이랄것도
없지만 상대가 헤일런일 때는 사소한것 마저도 기분이 나빴다.

"좀 살살 다룰수는 없나?"


"혀를 자르지 않은걸로도 감사해야지요. 벤."
"......"

헤일런이 학습능력이 월등히 뛰어난건 알고 있었지만 이럴때는 달갑지가 않다. 벤이 입을


다물자 헤일런은 뺨을 감싸고 있던 손가락을 얽어 밑으로 내리게 했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손이 몸을 가리고 있던 침의를 끌러 내렸다. 어깨를 타고 내려가는 옷에
예민해진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런 자신의 반응에 벤이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원.. 진짜 창부가 따로없군.
참고있던 뜨거운 숨을 뱉어내며 벤은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허벅지가 벌어지며 조금의 배려도 없이 단단하고 커다란 성기가 아래를 꿰뚫고 들어왔다.
짐승의 섹사에는 배려가 없었다. 배를 가득히 채운 살덩이가 연약한 내벽을 무참히 짓이겼다.
벤의 방식에 몇년간 강제로 노출되었기 때문인지 헤일런은 그만큼 하는 방식이 난폭했다.
개자식. 좀 천천히..!
찢어진 입구에서 줄줄 흐르는 피를 윤활유 삼아 헤일런의 움직임이 조금전 보다
매끄러워졌다. 정작 당하는 벤의 입장에선 이러나 저러나 죽을 맛 이었지만.
질척.

퍽! 아랫배가 그대로 꿰뚫릴것 같은 아찔함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너무 컸다.


그나마 인간의 모습인지라 안도하긴 했지만 이마저도 결코 작은 크기는 아니었다. 배가
터질것 같아 몸이 웅크러 들자 헤일런이 그를 저지하듯 거칠게 허리를 퍽퍽 쳐올렸다.
살이 타는듯한 아픔에 식은땀이 절로났다. 아무리 익숙해졌다 하더라도 신체자체가
받는쪽으로는 원활하지 못한 터였다.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가 다시 검게 물들기를 반복했다. 막연히 아프기만 하던 행위가 미약에
자극받아 이따금 쾌감으로 번졌다.
기분나쁘고 더러워도 지하굴에서 뿌려지는 약이 얼마나 지독한지 아는 바. 지칠때까지 몸에
쌓인 열기를 내보내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그나마 한차례 뒹굴었던 지라 파티에서
처럼 무작정 쾌감에 휘둘리진 않았다.

헤일런이 느릿하게 고개을 숙였다.


콰득! 순간 날카로운 송곳니가 목덜미를 물어뜯듯 박혔다.

"읏!"

그대로 경동맥을 찢을까 긴장한 나머지 시트를 좀 더 꽉 움켜쥐었다. 자연스레 하복부에 힘이


들어가 헤일런의 성기가 꽉 조여졌다.
죽음을 앞둔 아슬아슬한 섹스에 심장이 아래위로 빠르게 날뛰었다. 공포인지 흥분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하.
흐려지는 이성에 벤은 이미 헤져버린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상처난 목덜미를 괴롭히듯 같은 자리를 집요하게 물어대자 화끈하게 올라오는 감각에
등허리가 떨린다.

"큿! ...아."

축축하게 젖은 혓바닥이 상처를 핥아 올렸다. 할짝.


까슬한 돌기가 지나치게 선명하게 느껴져 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뜨겁다. 질꺽 질꺽.
벌어진 다리 사이로 두꺼운 살덩이가 쉴새없이 오가며 벤의 내부를 채웠다.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아래를 헤집는 감각에 몸의 통제를 놓칠것만 같았다.
한계치로 벌어진 허벅지가 잘게 경련했다.

이미 파티에서 정욕에 휩싸여 구를만큼 굴렀지만 헤일런의 앞에서는 짐승처럼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먼저 도발한 주제에 우습게도. 자존심을 온전히 내려놓기가 힘들었다.
헤일런은 그다지 경험이 크게 없으리란 예상을 깨고 벤을
능숙하게 안았다.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짐승의 감인지 자신이 느낄만한 부근을 사정없이 들쑤셨다.
"지난번에는 제대로 느낄새도 없었지만 당신을 안는다는건 이런 느낌이군요.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혹한 사람이라 뭔가 다를까 했는데 제것을 가득 품은 안은 보통의 인간처럼 부드럽고
뜨겁습니다."
"하..아. 하, 내 몸이 제법 마음에 들었나 보지?"

땀이 뚝뚝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선을 들자 거칠게 정욕을 풀어내던 것과 달리 헤일런의


두 눈은 생각외로 담백했다.
그래봤자 같은 사내의 몸이다.
그간 제대로된 체력단련은 물론 살이 많이 빠진탓에 몸이 가늘어지긴 했지만 기본골격은
사내의 그것이었다.
여성과 같은 풍만한 몸매도 아닐 뿐더러 부대끼는 뼈가 아플정도로 단단한.
그러나 헤일런은 벤의 잘록한 허리를 손바닥으로 매만져 내리며 입술끝을 올렸다.

"나쁘진 않습니다. 조금만 더 순종적이면 바랄게 없기는 합니다만."


"헛소리."
"저도 크게 기대는 안했습니다."

날카롭게 쏘아부치는 한마디에 헤일런은 벤의 땀에 젖은 은발을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정중하기 그지 없는 손길에 벤은 심사가 뒤틀렸다. 이제와서 누굴 조롱하는 것도 아니고.
철썩!!!
헤일런의 손을 힘껏 쳐낸 벤이 치를 떨었다.
동물따위에게 귀염받고 싶은 생각 없으니 차라리 성욕이나 마음껏 풀라고.
그의 눈에 위험스럽기 빛난다 싶었을 땐 아차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뱉은 말을 주워 담기엔
이미 늦은감이 있었다.

"좋습니다. 원하시는대로 범해드리겠습니다."

이후에 이어진 정사는 일전보다 더 거칠었다. 골반이 아플 정도로 다리가 크게 벌어지고


무릎이 구부러졌다.

"아..아윽!"

콱콱 밀어 붙이는 힘에 몸이 덜컹덜컹 힘없이 흔들렸다. 꽉 잡혔던 허벅지와 엉덩이에 멍이


올라올 만큼 손아귀 힘이 대단했다.
철썩!
퍽!
안에서 힘껏 부풀어 오른 성기가 안을 쿵 들이 박았다. 마치 뜨거운 대못이 내부에 박힌마냥
강한 충격이 몸 전체를 흔들었다. 고개를 뒤로젖힌 벤이 숨을 할딱였다.
목대에 핏줄이 설만큼 악으로 참고 있음에도 헤일런은 쉴새없이 그를 몰아세웠다.
다리에 힘이 풀려 조금이나마 밑으로 내려가면 뺨이나 허벅지에서 불이났다.
감각이 없을만큼 얼굴이 퉁퉁 붓고 여럿에게 돌려지는냥 정신이 쏙 빠졌다.

"어헉...학! 그, 그만!"
보통의 인간과는 체력과 근력이 달랐다.
내장이 위로 뚫고 올라올 만큼 강한 움직임에 견디다 못한 벤이 몸무림을 쳤다. 이것은
쾌락으로도 덮을 없는 오로지 고통을 주기위한 행위였다.
도망가려는 먹잇감에 흉폭해진 짐승이 그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으르릉..
귓가에 전해지는 섬뜩한 짐승의 울음소리에 벤은 도망가려던 것도 잊고 몸을 움츠렸다.
이번엔 확실히 공포로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하얗게 질린 손끝이. 악물린 턱이 그의
심정은 대변하듯 엉망으로 떨렸다.
그를 기민하게 알아챈 헤일런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허리를 곧게 폈다.
살기어리던 눈빛이 천천히 사그라 들었다.

"심장소리가 아주 요란하군요."
"......하아..하."
"확장된 동공. 빨라진 호흡. 수축된 근육까지. 마치 겁이라도 먹은것 같습니다."

서서히 가슴에 기울어진 헤일런의 얼굴에 벤은 그를 당장에 밀어내고 싶었지만 공포에 억눌린
몸이 제 마음대로 따라주질 않았다. 피가 얼어붙는 것 기분이었다.
두근 두근.
몸이 가까이 붙어 있을수록 떨림은 더해갔다. 표정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으나 신체의
변화까지 숨기기는 어렵다. 재미있다는 듯 헤일런이 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떼어냈다.
위에서 벤을 여유로이 내려다 보는 모습이 마치 사냥감을 앞에둔 포식자 같았다.
어둠속에서 번뜩이는 노란 맹수의 눈동자 때문에 특히나 그런 감상을 떨칠 수 없었다.
신사같은 얼굴로. 그와 같은 말투로 헤일런이 벤의 엉망이된 뺨을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렀다.

"이제부턴 당신이 봉사하십시오. 내 아름다운 창부."

수인족 따위에게 겁을 먹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벤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언젠간 반드시 네 목을 비틀어 주겠어."


"당신이 내게 저지른 일의 대가치고는 싼편인데. 그마저도 분합니까?"

당연히 분하고 말고. 원래 수인족의 용도는 인간의 욕구를 풀기 위함 아닌가.


대답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나직히 웃은 헤일런이 몸을 일으켜 제 다리 사이에 벤을 앉혔다.
푹! 뿌리 끝까지 처박힌 성기에 벤의 허리가 덜컹 흔들렸다.

"하악..!"

굴욕적인 자세에 분노하기에 앞서 아랫배를 뚫고 나올것 같은 묵직함에 숨이 턱 막혔다.


얼굴만큼이나 처참하게 망가진 아래에서 핏물이 고여들었다.
여기서 헤일런이 멋대로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최소 장파열이다. 차라리 스스로 하는게 낫지.
이를 바득 사려문 벤이 무겁게 늘어진 팔을 가까스럽게 들어 헤일런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아..하.
숨을 가쁘게 내뱉으며 벤은 그에게 반쯤 쉬어버린 목소리로 일렀다.

"...움직이지 마라. 만족할 만큼 봉사해줄테니."


"그거 기대되는군요."

언제나 분노하는 기색없이 단조로운 투는 벤의 신경을 긁었다. 지금도 제게 저지르는 짓들이


단순히 복수라기 보다는.. 아니 됐다. 벤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 위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창부가 되다. -->


                             

하루 반나절을 술만 퍼마셔도 멀쩡한 자신인데 중간부터는 기억이 뚝 끊겼다.


지금껏 인내해왔던 것이 무색하게 그저 본능에 충실했다. 천박하게 허리를 놀리고 안을
쑤셔대는 성기에 신음하며 그렇게 쾌락에 젖었다.
그리고 안을 가득히 적셨던 뜨거운 정액. 그리도 혐오했던 짐승의 씨가 제 안에서 두번이나
사출을 했다. 물론 당시엔 그마저도 기분이 좋아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자신도 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묘하게 내려다보던 검은눈동자.

"......"

침대위에 널브러진 벤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일어나니 이미 하루가 지났다.


깜빡.
정신이 좀 들고나니 얼굴이며 팔이며 어디하나 아프지 않은곳이 없다.
그런 가운데 유독 지끈거리는 허리와 다리 사이의 감각에 벤은 어젯밤 무슨일이 있었는가를
되짚어 보았다. 드문드문이긴 하지만 머릿속에 남은 잔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제 아무리 성에 개방적이고 문란한 생활에 익숙한 벤이라지만 헤일런에게 매달린 추태는
머릿속에서 당장에 지워버리고 싶을만큼 부끄러운 기억이다.
약만 아니었으면. 하다못해 정량만 투여했어도.

"일어나셨군요."

멀지 않은곳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검은머리의 청년이 보였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
가증스럽게도 매번 귀와 꼬리를 감춰 겉으로는 인간과 다를바 없는 모습이다.
남을 이꼴로 만들어 놓은 주제에 여유롭기도 하기도 하지.
"....너 이자식."

아픈 하반신에도 불구하고 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륵 다리 사이에서 아직 처리하지


않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자괴감에 분을 참지 못하고 덤벼들자 헤일런이 찻잔을 내려놓고
손을 뻗었다.
콰앙!!!!
머리채를 휘어잡혀 그대로 딱딱한 테이블에 사정없이 머리를 부딪치자 순간 시야가 두어개로
나뉘어 흔들렸다.
윽!
몸을 들썩이자 다시 한번 쿵 이마가 그대로 내리 박혔다. 강한 충격이 뇌를 흔들었다. 살갗이
찢어졌는지 이마부터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바르작 거리던 움직임이 멎자 헤일런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버릇없게. 노예주제에 주인이 차를 마시는걸 방해하시면 됩니까."

머리 위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벤을 짓눌렀다.


놓으라고 짓씹듯 뱉어내자 철컹, 목에 쇠와 같은 차가운 무언가가 덧씌워졌다.
뭐야.. 의아해서 손을 가져다 대자 철그렁, 하고 강한힘에 목이 끌어 당겨졌다.

"커헉!!"

숨이 막혀 피가 얼굴로 쏠렸다. 그럼에도 헤일런은 아랑곳 않고 목에 걸린 줄을 조여왔다.

"여러차례 생각을 해봤습니다만. 당신은 노예치고는 너무 고압적입니다. 창부일은 약속한


것이 있으니 제한적으로 두겠으나.."
"큭, 이거 놓으.."
"교육도 필요할 듯 합니다. 물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조차도 제 손으로 직접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야 헤일런은 목의 줄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컥! 쿨럭.


황급히 숨을 몰아쉰 벤이 욱신거리는 제 목을 두손으로 주물렀다.
목에 만져지는 쇳덩어리는 마치 개의 목줄을 닮아 있었다. 어느정도 안정이 된 이후 고개를
들어 올리자 헤일런은 손에 감아쥐고 있는 사슬을 슬슬 감아쥐며 말했다.

"지난번의 벌로 이제부터는 아침마다 산책을 할겁니다."


"쿨럭..쿨럭. 뭐?"
"주제를 모르는 노예한테는 자존심을 내려놓는 훈련만큼 좋은게 없지요. 혹 반항하실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대신 그 뒷감당은 온전히 벤 당신이 해야겠지만."

당연히 거부했다. 목에 개목걸이 따위를 차고 산책이라니. 미친게 틀림없다. 창부짓은


하라면야 얼마든 하겠지만 저를 동물처럼 취급하는건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못들은척 고개를 돌리자 헤일런이 강한힘으로 벤의 몸을 테이블 위에 엎어트렸다.
쿵!
벤은 욱신거리는 상처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다시 머리채를 휘어잡히는가 싶어 긴장했지만
예상과 달리 다리가 벌어졌다. 아무래도 폭력보다는 성욕을 풀고 싶은 모양이다.
발정난 짐승새끼 같으니.
찢어지고 퉁퉁 부은 제 상태를 떠올린 벤이 호흡을 크게 들이켰다.

"윽!"

다가올 고통을 기다리던 와중 그보다 작은것이 아래에 닿자 움찔 어깨를 떨었다.

짤랑.
방울 소리와 함께 구멍이 벌어지며 작은 이물질을 단번에 삼켜버렸다.
이게 무슨?

놀라 몸이 경직되자 헤일런은 힘을 빼라며 둔부를 잡아 벌렸다. 그는 또 다른 구슬을 다시


입구에 문질렀다. 이윽고 둥그런 구체가 주름을 가르자 상처난 부위가 쓰라려 신음이 흘렀다.

으윽. 느릿하게 밀려든 두번째 구슬이 먼저 자리잡고 있던 다른 구슬을 더 깊게 밀어넣었다.


그 이후로도 하나 둘.. 순식간에 총 다섯개의 방울이 내부를 채웠다. 성기가 아닌 다른
장난감이 처음은 아니지만 아직 정액도 고여있던 탓에 거북함이 더했다.
하아..하.
아랫배가 묵직하니 무거워서 가쁜 숨만 들이켰다.
헤일런은 벤에게서 손을 떼고 옷장에서 하얀 가운을 하나 가져왔다.
그는 옴짝달싹도 못하는 벤을 일으켜 옷을 꿰어 입힌 후 허리끈을 느슨하게 묶었다.
가슴부근이 벌어져 울긋불긋해진 맨살이 고스란히 보이자 벤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헤일런은 특유의 조용하고 나긋한 투로 의견을 물었다.

이번에도 산책은 거절이냐고.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려던 벤은 입술을 닫고 대답을 삼켰다.

거절한다면 이보다 더한 수치를 주려하겠지.

"....좋아. 다녀오지. 산책."


"이런 아쉽군요. 이번엔 귀와 꼬리를 달아 줄 생각이었는데. 특별히 당신이 싫어하는
고양이과로."
"......"

장난감 꼬리와 귀라는 말에 언뜻 칼튼의 형제가 떠올라 이가 부득 갈렸다.


인간 주제에 장난감 꼬리와 귀따위를 착용해서는 벤을 혼란케 했던 남자. 보기드문 금발에
푸른눈동자는 물론 얼굴마저도 수인족을 웃도는 바람에 감쪽같이 속아버렸다.
덕분에 기절한채로 저택으로 돌아가는 수모도 겪었고.
벤은 칼튼에게 원한이 많았지만 그의 형제들에게도 만만치 않은 유감이 있었다.
하나는 겉가죽은 멀쩡해서 수인족 행세에. 또 다른 하나는 그와 닮아서는 심장을 찔리고도
멀쩡히 되살아나는 기행을 보이기 까지 했고. 그들과 접전이 있던 당시에 전투의지가 꺾인건
이 둘의 영향이 컸다.

어쨌거나. 벤은 그 남자를 떠올리게 하는 저런 수치스러운 것들을 제 몸에 착용하고 싶진


않았다.
사슬이 꾹 잡아당겨지는 것에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헤일런이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뭐 때문에 저러는가 미간을 좁히자 무릎뒤를 걷어차였다.


휘청.
미처 방어하지 못하고 벤이 그대로 무릎을 꿇자
헤일런이 어깨를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자세를 고정 시켰다.

"두발이 아니라 네발입니다. 예. 이 자세로요."


"......!"

경악해서 올려다 보자 헤일런은 아랑곳 않고 웃었다. 모욕감에 땅을 딛은 팔이 후들 거리며


떨렸다. 이따위 짓으로 자존심을 짓이길 생각인가 본데..

벤은 습관처럼 주먹을 한번 쥐었다 펴며 태연하게 몸을 움직였다. 결코 모욕감에 일그러진


표정따윈 겉으로 내보이지 않은채.

산책이라고 해봤자 복도를 지나 정원 근처를 도는것니 전부였다. 다행이랄까 주위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벤은 지난 반년간 이 침침한 건물에만 갇혀 지냈다. 햇볕이래야 가끔 창문 사이로 비치는
것을 쬐는게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의 행색으로는 바같공기에 기뻐할 여력이 없었다.

딸랑.
귓가에 울리는 수치스러운 소리에 한걸음 한걸음 떼는 것이 고역이었다. 참아야지.
인내해야지 하고 억지로 걸음을 떼어보았지만 짐승처럼 엎드려 기는것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차라리 얻어 맞고 다리를 벌리는게 더 나을만큼.
결국 벤은 얼마 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반항적인 눈빛에 옆구리에 사정없는 발길질이 이어졌다. 커헉. 기침을 하며 벤이 몸을
웅크렸다. 쇳덩이에 얻어 맞은마냥 한순간 숨이 안쉬어졌다.

"벤. 움직이셔야지요."
"......"

그러나 차라리 맞고 버티는걸 택할만큼 벤은 고집스럽게 발을 떼지 않았다.


헤일런 역시 폭력으로는 벤을 꺾기가 쉽지 않다는걸 깨닫고 방법을 달리했다.

"지켜보는 시선이 많은 걸 좋아하십니까? 전 나름 나쁘진 않았지만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뭐?"
"더 움직이지 못하겠다면 이곳에 제 동지들을 불러 모은뒤 당신이 제 밑에 깔려 헐떡이는
모습을 보일겁니다. 다들 즐거워 하겠지요."
자신을 동물새끼들의 구경거리로 만들겠다 이건가.
헤일런을 택한게 과연 옳았을까. 난교를 버티기도 힘들었을 뿐더러 가까이 있으면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째선지 이전보다 버티기가 더 힘들었다.
자신을 잘 아는만큼 헤일런은 벤의 취약한 부분을 잘 알았다.
벤은 뒤늦은 회의감에 속에서 들끓는 열기를 식혔다.

입술만 잘근 거리기를 한참. 후들 거리는 팔을 내딛자 헤일런이 칭찬하듯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 질색을 하는 벤을 즐기는 건지 경멸의 시선이 여지없이 쏟아지는데도
꿋꿋하다.

자근자근 밟혀버린 자존심에 가슴부근이 지끈거렸다.

**

정원을 돌아오는 일은 정신적인 타격도 컸지만 신체적으로도 힘에 부쳤다. 도중부터는


배앓이도 있어 움직임이 더뎌지기도 했고.

정원 한바퀴를 전부 돌았을 때는 팔 다리가 퉁퉁 부어 더이상 움직일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지난날 약물투여와 여러차례의 수술로 장시간의 움직임은 그에게 독이다.

헉헉..
비오듯 땀을 흘리다 그대로 널브러지자 다가온 헤일런이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 가파르게 오르락 거리는 가슴과 가운 사이로 보이는 가느다란 허벅지.
툭툭. 어깨를 치다 쇠사슬을 당겨도 반응이 없자 헤일런은 여태껏 함부로 굴린것과 다르게
벤을 조심스레 품에 안아 올렸다.

"욕실부터.."

기다렸다는 듯 색색 거리는 숨 사이로 입에 밴 명령조가 흘러나왔다. 그게 우스운지 또 다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있었지만 일일히 신경쓸 틈은 없었다.
헤일런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음? 지금은 화를 안 내시는군요."


"..지쳐서 화낼 기운도 안 나는군."
"......"

벤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검은눈동자가 기이하게 반짝였다. 마치 몰랐던 사실을 깨달은마냥.


벤은 어쩐지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 창부가 되다. -->


                             
한때는 벤도 헤일런과 사이가 좋았던 때가 있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를 귀족가의 꼬맹이.
이름외엔 뭐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사실은 없지만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그저 이따금씩
황궁 정원에서 만나 같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벤이 그늘진 곳에 누워 낮잠을 자면 헤일런은 나무위에 올라가 책을 읽었다. 이렇다할 대화가
오고간 건 아니었지만 벤은 그 시간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벤님.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어느날은 연애소설 따위에 푹 빠져 책을 읽어대던 헤일런이 그런 시덥잖은 질문을 해왔다.


하여간 궁금한 것도 많은 꼬맹이다. 지난번에는 고양이는 왜 상자를 좋아하는 알고 싶다며
네모난 상자안에 들어가서 한나절을 보내더니.
벤은 심드렁한 얼굴로 헤일런을 보았다. 아이의 질문은 무시할 때가 더 많기는 하지만 이따금
기분이 내키면 대답을 해주곤 한다. 바로 지금처럼.

["글쎄. 소유와 구속 정도인가."]

대답이 돌아온 것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헤일런이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어쩐지


의심가득한 눈초리에 벤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게 무슨 말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사실 그런 실체가 없는 개념은 사람마다 정의가


다른 법이지."]
["벤님도 좋아하시는 분이 있는지 궁금해요"]
["있지. 매번 퇴짜맞고 있긴 하지만."]

전쟁광에 학살에만 취미를 붙인 벤이었지만 그도 호감을 가진 상대정도는 있었다. 물론


뜻대로 손에 넣지는 못했다.
백작씩이나 되는 자신이 정부로 삼아 준다고까지 했는데도 얼마나 질색을 하던지. 하여간
콧대만 높아서는.
기분이 저조해져서 인상을 찌푸리자 헤일런이 손에 든 책을 팔랑팔랑 넘겼다.
["그럼 책에서처럼 벤님도 기다리시는 건가요?"]
["기다려? 그러다 다른 놈이 채갈지도모르는데 내가 왜?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가 본데.
자고로 맛있는건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인거다. 네놈도 마음에 드는 상대가 생긴다면
소중하게 지켜줄 생각보단 일단 먹고 봐라. 나머지는 그 후에 차차 생각해도 늦지않아."]
["신사적이지 않은것 같은데요."]

어린놈이 신사타령은. 뭐든 과정보다는 결과지. 어떻게든 소유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러기 위해 자신도 조만간 어떻게든 손을 쓸 작정이긴 하다. 벤은 목이 말라 가져온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애주가인 그는 술을 전쟁만큼이나 굉장히 좋아했다. 그런데다 일찍이 술에
취한경험이 없을만큼 주량이 대단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오는 화끈함에 만족하며 병을 기울였다.
이를 지켜보던 헤일런은 새카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또 다시 호기심을 드러냈다. 맛이 궁금한
눈치였다. 벤은 입술을 혀로 축였다. 아직 10 살가량의 꼬마가 마시기에는 지나치게 독한
술이긴 하지만..

["흐음. 마셔볼테냐?"]

손에 들린 호리병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헤일런의 눈동자도 함께 흔들렸다.


벤은 젖은 입술을 엄지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뭐 어린나이에 어른의 경험을 겪어보는 것도 인생에 도움이 될거다.
그런 근거없는 믿음 아래 벤은 들고있던 술병을 통채로 넘겼다.

"흐악! ...읏! 아!"


높은 신음과 함께 허리아래가 덜컹덜컹 흔들렸다. 등뒤로 겹쳐진 단단한 육체가 벤을
속박하며 아래를 거칠게 들쑤셨다.
벌써 반나절 이상을 시달렸던 탓에 구멍이 퉁퉁 붓고 허벅지와 두 다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지만 행위는 쉼없이 이어졌다.
엎드린채로 시트만 구겨쥐며 벤은 뒤에서 퍽퍽 쳐올리는 감각에 숨을 헐떡였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온몸이 멍이 든마냥 욱신거리고 아팠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아쉬운 소리를 입밖에 내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정말 한계였다.
순간 내벽을 가득 채운 성기가 크게 부풀었다. 사정의 전조에 놀란 벤은 없던힘까지 끌어
올려 몸을 앞으로 기었다. 그러나 골반을 움켜쥐는 손길에 그것은 시도로만 그쳤을 뿐이다.

"윽..기다려. 밖에다가..!"
"싫습니다."
..죽일 짐승새끼!
벤은 욕지거리를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뱃속으로 뜨끈하게 퍼지는 정액에 말못할
모욕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한방울 까지 다 밀어 넣고야 말겠다는 듯 줄줄이 쏟아지는 액은
성기에 막혀 흘러내리지도 않았다. 악 다물린 턱이 덜덜 떨렸다.
뒤를 내어주는 것까진 그간의 경험으로 이제 그럭저럭 참아 넘길 수 있다. 하지만 동물따위의
씨물이 제 뒤를 채울때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산산 조각나는 기분이 든다. 상대가 한때 제
성노예였던 헤일런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좀더 뿌리 깊은 곳까지
뒤흔들었다.

커다란 손이 쇄골을 스치고 뼈가 도드라진 옆구리를 느리게 매만졌다.

"...빼."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뱉어내자 이번엔 가슴을 배회하던 손이 잠시 멈추어섰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여기서 더 하겠다고?"

“예.”

몸이 반대로 돌려졌다.
이번엔 서로 마주보는 정상위의 체위였다. 성기를 빼내지 않은채라 전해진 충격에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아래를 쇠몽둥이 따위가 빙글 헤집은 느낌이었다.

하아..학. 벤은 질린 얼굴로 헤일런을 노려보았다.

검은머리의 청년은 뭔가 문제냐는 듯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신사처럼 단정한 생김새


치고는 하는 말은 파렴치 하기 그지없다.

누가 짐승 아니랄까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고도 더 할 체력이 있는 모양이다. 벌써 열흘 째다.

해일런이 벤을 방에 가둬놓고 틈만 나면 그의 몸을 탐하는 것이.

게다가 오늘은 잠은 물론 식사마저 거르고 침대에만 누워 있던 참이었다.


다시 자세를 잡고 다리를 벌리자 벤은 한숨부터 뱉어냈다.
현기증에 머리가 어질거리고 뱃가죽은 등짝에 달라붙은 것 같다.
“…거절할 처지가 아니긴 한데 양심적으로 좀 먹여가면서 해야 하는거 아닌가?”

“안됩니다. 그러면 당신이 지치지 않지 않습니까.”

“내가 지쳐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대답은 없었다.

어쩐지 요근래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간다 싶더니 그런 속셈이 있었던 건가. 지치게 해서 뭘
얻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그렇게 묻자 헤일런은 잠시 고민하다 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슬슬 두피를 어루만져오자
미간을 좁힌 벤이 그의 손을 탁 쳐냈다.

최근들어 틈만 나면 제 머리를 만지면서 조롱을 하는데 반응을 하고 싶지 않아도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인다. 단순히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를 길들이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건방진 동물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어딜 사람머리에 앞발따위를 올려. 모욕감에 이가 다


갈린다.

"......"

허공에 붕 떠버린 손을 헤일런이 뚫어지게 보자 벤 하일즈는 모른척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밥은 주겠지. 그러나 다시금 퍽 들어 찬 성기에 꼼짝도 못하고 붙들릴
수 밖에 없었다.

"윽!"
"역시 아직 끝낼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뭐, 뭐..
벤이 당황하던 말던 헤일런은 다리를 잡아 올리며 다시 추삽질에 몰두했다. 퍽퍽, 안을
거칠게 박아대는 살덩이에 벤은 혀를 깨물뻔 하다 가까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시야가 두 갈래로 나뉘어 흔들린다. 허기는 지고 아래는 폭력적으로 들쑤셔 대서 이제 아프다
못해 감각도 희미해졌다.
이 몰상식한 놈이 이짓으로 날 죽일 셈이구나. 벤은 가물가물해 지는 의식속에 그런 생각을
했다.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행히 모든게 끝났는지 벤의 몸은 침대위에 곱게 눕혀져 있었다.


언뜻 이마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침대맡에 앉아있던 헤일런의 손이었다. 벤은 멍하니
자줏빛 눈동자를 깜빡이다 닿은 손을 툭 밀어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만 아무래도 놈은 자신을 만지는 것에 재미가 들린 듯 했다. 단순히 몸을
원하는 거라면 내어주겠지만 그의 정신적인 만족감을 채워줄 생각은 없었다.
고집스럽다 싶을 정도로 단호한 거부에 헤일런은 순순히 손을 내리며 물었다.

"제 손이 그렇게 더럽습니까?"


"차라리 그냥 내 몸을 마음껏 가지고 놀아. 그편이 견딜만 하니까."

초췌해진 얼굴로도 웃는 얼굴은 요염하며 또한 지독하게 퇴폐적이다. 몸을 반쯤 일으키자


가슴가를 지난 은발이 부드럽게 출렁였다.
잔혹하고 성격과는 별개로 벤의 얼굴은 분명 미형에 가까웠다. 마르고 상처가 많았지만 그의
몸 또한 여느 창부들 처럼 안기에는 최적화 되어 있었다.
차양처럼 길게 드리운 긴속눈썹 아래 짙은 음영이 졌다.
요사스러운 자줏빛 눈동자와 그와 대조되는 서늘한 푸른색의 눈동자는 전과 다른 기묘한
인상을 풍겼다.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헤일런의 뺨을 가만히 감싸쥐었다.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검은재규어의 모습에 벤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웃고는 있지만 날이 선듯 살기가 듬뿍 묻어난 목소리가 그를 향해 쏟아졌다.

"멍청한 재규어 새끼. 장담컨대 이런 폭력따위로는 절대 날 못 길들여."


"......"

가만히 몸을 내어준다고 굴복했다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벤은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는


있지만 단 한번도 진심으로 헤일런이 제 위를 차지한 포식자라 인정하진 않았다.

침묵하던 헤일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뺨에 닿은 손가락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움찔.
벤은 잡힌 손을 빼내려다 저를 바라봐 오는 고요한 눈동자에 묶여 버린듯 몸이 움직여 지지가
않았다.
조금전과는 정 반대의 입장이 되자 벤이 입술을 즈려물었다. 헤일런은 긴장한 그와 달리
태연스레 말을 이어갔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할수 있는만큼 계속 버텨주십시오."


"...그럼 대체 요 며칠 왜 그렇게.."
"말씀 드렸잖습니까. 당신을 지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요."
"나를 지치게 해서 얻는게 뭐지?"

글쎄요. 하고 모호하게 웃어넘긴 헤일런이 벤의 어깨를 붙들어 다시 침대위로 눕혔다.

"당신이 관심없는 것에는 백치보다 못한 기억력을 가진게 제겐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그나저나 아직 멀쩡한걸 보니 더 굴러도 되겠군요. 자, 쉴만큼 쉬었으니 벌리십시오."

분노하기에 앞서 허벅지를 눌러오는 힘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몸 상태는 당연하지만 이보다 더 최악일 수가 없었다. 다리가 벌어지는 것만으로도 골반이
바늘에 찔리는 마냥 날카로운 통증을 동반한다. 처참히 찢어지고 헐어버린 아래야 그중에서도
가장 상태가 나빴고.
아니 대체 저 놈의 기준에서 지쳤다는건 어느정도 수준인건데? 기절로는 부족한 건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올려다 보자 헤일런은 그 사이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고


있었다.

머릿속이 분주한 터라 이번만큼은 내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헤일런은 만족한 듯 허벅지를


누르던 무릎에 힘을 뺐다.

"벤의 정력이 대단한건 알고 있었는데 받는쪽도 꽤 오래 버티시는군요."


"...뭐?"
"오늘은 이만하겠습니다. 식사를 들이겠으니 드시고 쉬십시오."

꿀꺽. 수치스럽지만 이 순간 벤은 내심 안도부터 했다. 하나만 상대하게 되면 체력소모가


적을 줄 알았는데 이건 뭐 하루에 손님 둘을 동시에 상대한 것 보다 더 힘에 부친다. 아니
몇명을 받았어도 하다가 죽을뻔한 감상이 든건 헤일런이 처음이었다.
계속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복수는 커녕 자신이 먼저 말라 죽을지도 몰랐다.
진심으로 제 몸의 안위를 걱정하던 벤은 헤일런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급하게 팔을 뻗었다.
가긴 어딜 가려고.
옷깃이 꽉 잡히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벤이 후들 거리는 팔다리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명령했다.
"몸은 씻겨주고 나가."
"노예에게 명령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럼 부탁하지 헤일런."

이런 말뿐인 부탁이야 몸이 편할수만 있다면 자존심이 상할것도 없다. 실제로도 말만


부탁이지 표정이나 어조는 여느때 처럼 오만하다.
그럼에도 이름을 불린건 의외인지 헤일런은 벤을 묘한 시선으로 내려보다 안기라는 듯 팔을
뻗었다.
그쯤에서 벤은 주춤했다.
품에 안기는게 딱히 처음은 아닌데 막상 스스로 안기려니 영 내키지가 않았다.
벤이 자리에서 꿈쩍도 않자 헤일런은 어깨를 으쓱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로선 아쉬울 것이
없었다. 덕분에 벤만 조바심이 났다.
그가 이대로 가버리면 뒤처리는 자신 혼자 감당해야 하는데.. 이 근육통으로 욱신 거리는
팔다리로는 또 한나절이 걸릴게 자명하다.
결국 벤은 자진해서 헤일런의 품에 매달려 안겼다. 허리와 엉덩이를 받쳐든 검은 재규어는
원하던 먹이라도 얻은마냥 배부른 얼굴을 했다.

"......"

희롱도 없고 겨우 그것뿐인데 왜 진것같은 기분이 드는지 벤은 알 수가 없었다.

<-- 창부가 되다. -->


                             
타인에게 맨몸을 보이는 것 자체는 벤에게 크게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귀족들은 대게
어릴적부터 시중을 받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와 마찬가지로 헤일런에게 몸을 드러낸 것에
거부감은 없다.

다만.

“큭!”

뒤를 비집고 들어온 차가운 금속에 벤은 지지대를 잡고 숨을 들이켰다. 정액따위 손으로 대충


긁어도 좋을 것을 헤일런은 기어이 벤이 질색 하는 호스를 밀어 넣었다. 쏴아아, 배를 가득
채우는 물에 지지대를 잡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입구를 꽉 막은 성기모양의 호스에 물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고 안에서 양을 늘리기만
했다. 복부는 금세 팽창했고 벤은 헛구역질이 나는 것을 간신히 참고 숨만 헐떡였다. 기껏
씻으러 왔더니 체력 소모만 더한 것 같다.

물이 멈추는 소리는 들렸지만 안을 틀어막은 호스가 빠지지는 않았다.


배가 터질것 처럼 아팠다.
평소보다도 더디게 느껴지는 시간에 벤이 손톱을 세워 벽을 긁자 헤일런이 그쯤에서 뒤를
막은 것을 빼내어 주었다.
주름이 벌어지며 뒤를 막을 새도 없이 줄줄 흘러내린 물에 눈을 찡그렸다. 수치스러운 작업에
몸을 떨고 있자 헤일런은 감상이라도 하듯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 벤이 직접 몸을 일으켰을
때에야 물을 끼얹어 주었다.

“이리 오십시오.”
“…….”

벤을 끌어 안아 욕조에 넣어준 뒤 헤일런은 거품을 내어 그의 몸을 깨끗이 씻겼다. 벤은 그


때만큼은 고분고분 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지치기도 했고.
오래전부터 벤의 수발에 능숙한 헤일런은
따로 요구를 하지 않아도 그가 불편하지 않게끔 시중을 들었다. 요 며칠 시달렸던 뻐지근한
팔 다리를 펴자 그 마저도 정성껏 주무르며 뭉친 근육을 풀어 준다.
오랜만에 받는 편안한 목욕시중에 벤이 나른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뒤늦게서야
아차 싶은 헤일런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자신의 손을 빤히 응시했다. 스스로도 자각이 없던
만큼 그는 허탈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노예 근성이 배었나. 지금 누가 주인이고 노예인지."


"이봐. 이왕이면 머리도 같이...웁!"

순간 머리채를 휘어잡힌 그대로 물에 풍덩 얼굴이 처박혔다. 씻다말고 난데없는 잠수에 귀와


코로 물이 잔뜩 들어왔다. 숨이 막혀 허우적 거렸지만 머리를 누르고 있는 힘이 사라지진
않았다.
보글보글. 수면위로 기포가 올라오고 한참이 지나서야 헤일런은 벤을 물에서 건져 주었다.
벤은 먹은 물을 뱉어내며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커헉! 컥! 대체 뭐..쿨럭."
"건방지게. 자신의 처지를 좀 자각하십시오 벤. 저까지 헷갈리지 않습니까."
"컥. 흐읍..하아. 하."

머리가 어질 거릴정도로 산소가 부족했던 탓에 입만 벌리고 있던 찰나. 다시 얼굴이 수면


아래로 처박혔다.
풍덩!
허읍. 벌린 입과 코로 물이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벤은 눈을 질끈 감은상태로 숨을 최대한
참았다. 잠시후. 이번에는 처음보다 빠르게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공기가 와닿자 벤은 본능적으로 숨을 폐부 깊이 들이켰다. 몸이 경직되고 놀란 심장이
요란하게 날뛰었다. 얼굴을 흠뻑 적신 물방울이 뺨을 타고 턱끝에 매달렸다.

"푸합! 하악..하. 윽. 하."


"대답."
"......"

대답? 대체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알길이 없다. 자신이 요구한 것이라고는 머리를 감겨달라는
것 뿐이었는데.
심지어 말도 다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그것에 대해 머리 박고 사죄라도 하라는 건가 뭔가.
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뭘 또 거슬리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뜬금없는 분풀이에
기분이 확 상했다. 패고 싶은거였으면 차라리 그렇다고 말을 하던지.
한껏 날카롭게 벼려진 기세에 헤일런은 다시 물고문을 이어갔다.
첨벙!!
물에 처박히고, 또 들어 올려지고.
괴롭게 물을 뱉어내면서도 곧죽어도 잘못했다는 말이 없자 헤일런은 잡은 머리채를
놓아주었다.

웩! 폐에 물이 한가득 든것처럼 숨을 쉬는게 힘들었다. 벌어진 입에서는 물인지 타액인지


모를것이 줄줄 흘렀다. 허억. 헉. 벤이 정신없이 토악질을 하고 숨을 가다듬는 동안 헤일런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물속에 손을 담궜다.

"그렇군요. 설명이 부족했던가요?"


"하아. 뭐?"
"별것도 아닌일로 고집을 피우시니 저도 괜히 지고싶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이건
벌입니다."

귀가 먹먹한 와중 선명히 들리는 말이라곤 '벌'이라는 그 한글자였다.

벌어진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이 찢어진 구멍안을 벌렸고 이내 안을 차가운


무언가가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아, 흐아악!!"

놀란 벤이 반사적으로 몸을 뺐으나 뒤는 욕조로 막혀 있었고 두 다리는 헤일런에게 붙잡힌


채였다.
내부에 전해지는 소름끼치는 감각에 벤은 진저리를 쳤다. 아니 정확히는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파고든 것 뿐이었지만 벤의 입장에선 뱃속깊이 퍼지는 서늘함에 장기까지 얼어붙는 듯 했다.
머리카락은 물롬 온몸의 털이 쭈뼛서는 기분이었다.
처음 겪는 생소한 고통에 발버둥을 쳤지만 헤일런은 벤을 쉽게 제압했다.
위에서 내리보는 밤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잊고 계셨을 것 같습니다만. 제 이능은 얼음을 다루는 겁니다. 쉽게는 사물을. 나아가
대기를 얼리기도 하고."
"아, 으윽. 그, 그만!"
"이런건 사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만. 칼튼씨가 이런저런 다양한 방법을 알려주시더군요.
그는 참 배울게 많은 사람입니다."
"허억..!"

안에 들어찬 얼음이 부피를 늘리고 쩌적. 쩍. 주위의 물까지 얼어붙어 가는 가운데 공포는
극에 달해갔다. 입김이 나올만큼 기온이 낮아지자 벤은 숨도 제대로 뱉어내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엄습하는 추위와 내부를 찌르는 얼음덩어리가 목구멍을 뚫고 나올것만 같았다.

"하으..으윽. 헤, 헤일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으로 노예의 본분을 벗어난 명령조의 말투는 삼가주십시오.
아시겠습니까?"
"......"
"대답."

꾸욱. 강요하듯 안을 쳐올리는 얼음덩어리에 뒤가 얼얼하다 못해 아프고 시렸다.


반년간 창부로서 지내긴 했지만 벤은 노예의 부당한 대우에는 면역이 없었다.
보통의 노예라면 제 잘못이 아닌일이라도 주인이 잘못이라 규정한다면 그것에 대해 응당
용서를 빌어야만 했다. 어떠한 반론도 용납치 않았다. 노예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소유물로 살아생전 그들의 권리는 모두 주인이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같은 처분 역시 불합리하게는 보여도 노예라면 당연히 감당해야만 하는 일이다.
실제로 벤이 귀족이었을 당시엔 이보다 더한 횡포도 부려봤고.

그러나 이해와 직접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자신은 노예이지만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울컥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벤은 겨우겨우 입을 열어 답했다.

"...유념하지."

빌어먹을 노예. 그보다 더 빌어먹을 재규어 새끼. 벤은 수면위에 일렁이는 제 처참한 모습에
욕조끝을 부서져라 쥐었다.

*
*
벤은 그날 이후 오랜만에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보름 가까이 붙어 있던 헤일런도 일이 바쁜지 며칠 전부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벤으로서는 몸도 편하고 정신적으로도 지칠일이 없어 이편이 훨씬 반가웠다.

상처는 아직 별다른 차도가 없었지만 창부일을 그만뒀고 헤일런조차 찾지를 않으니 그


이상으로 덧날일은 없었다.

그가 갇혀있는 방은 이전에 머물던 지하실보다 넓기는 했으나 창문이나 이렇다할 장식품도


없이 침대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심미안이 극도로 높은 벤의 눈에는 이래저래 못마땅한 것 투성이다.

저기에 그림 한점을 걸고. 저 반대편에는 둥그런 모양의 티테이블을 올려둬도 한결 보기


좋을텐데. 그리고 그 위엔 금촛대를 장식해도 근사하겠군.
침대위를 뒹굴 거리던 벤은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부스스한 은발을 대충 휘적 거리며 그는
느릿하게 눈을 꿈뻑였다.

휴식도 좋은데 너무 무료하다. 역시 자신은 활동적인게 더 적성에 맞는다. 이럴때는 검을


쥐고 대련이라던가..
아니지. 그보다는 살아있는 생명체를 베고 찌르는 쪽이.

"대자앙!"

벌컥.
이어지던 생각은 난데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에 의해 뚝 끊겨버렸다. 갈색머리의 늑대 수인족.
벤은 날이 선 목소리로 상대를 꾸짖듯 말했다.

"뭐냐. 무례하게."
"..여기 우리 대장 안오셨습니까?"

없어.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다시 침대위에 드러눕는데 따가운 시선이 얼굴을 찔렀다.


볼일이 끝났으면 나갈 것이지.
단호한 축객령에 늑대 수인족 윌로스가 벤을 향해 으르렁 거렸다.

"제게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없다만."
"이 뻔뻔한 인간놈! 그 때 날 두드려 패놓고!!"

패다니.

"내가?"
"그래. 당신이!"
"몰라. 기억안나."

기억을 떠올리려는 시늉조차 않은 벤이 심드렁한 투로 대답하자 윌로스는 약올라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약에 취해서 헤롱대는걸 건져 와준 사람을 인질로 삼아 협상한게 누군데.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둘러 올것 같은 기세에 벤은 귀찮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저까짓 놈 상대하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간만의 휴식을 드잡이질로 보내고 싶진 않았다.

"흥분하지 말고. 그럼 이렇게 하지. 네 대장이 있을만한 장소를 일려주는 대신에 그 일은


없던걸로 하는거다."
"당신이 무슨 수로 대장이 있는 곳을 압니까?"
"그러니까 알려주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거다."

윌로스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헤일런의 위치를 알수 있다는 생각에 분노를 억눌렀다.


찾으면 좋은거고 못찾으면 자신이 맞았던 것처럼 벤의 명치를 한대 쳐주면 그만이다.

"일단 근처 나무위는?"
"정원은 샅샅히 뒤져봤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벤은 힐끔 벽에 걸린 시계를 통해 시간을 가늠해 봤다.

"지금 시간이 점심이니 낮잠자기 딱 좋을 시간이군. 그렇다면 놈의 방으로 가봐라."


"거기야 당연히 제일 먼저 가봤습니다만."
"침대 밑이나 가구 밑을 뒤져봐. 빛이 안드는 구석지에 수인모습으로 변해서 낮잠따윌 즐기고
있을테니까."
"......"

누가 헤일런의 부하 아니랄까 사람이 말을 해도 불신어린 눈으로 미적거린다.


벤은 휙 돌아누워 손을 대충 휘저었다.

"일단 가봐. 가서 못찾으면 다시 오던가."

없기만 해보라고 형형한 짐승의 눈으로 경고한 윌로스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그리고 그날 하루 윌로스가 벤의 방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헤일런을 찾았다는 말은
굳이 전해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거봐. 짐승놈이 움직이는 범위야 뻔하지.


눈으로 보지 않고도 짐작해낸 벤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뭐가 그리 즐겁습니까?"
"......"
날이 저문 느즈막한 시간. 열흘만에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벤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렇다할 기척도 없이 들어온 검은머리의 청년이 바로 코앞에서 두눈을 부드러이 휘고 있었다.
벤은 경련하는 입꼬리를 바로 내리며 불쾌한 낯을 했다.

늑대 수인족이 돌아오지 않은건 좋지만. 그렇다고 저놈이 대신 오길 바란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 창부가 되다. -->


                             
벤 하일즈는 제국 내에서 전쟁영웅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또 다른 이면에선 그와 달리 전쟁광.
학살자라 불리었다.
벤은 천성적으로 생명을 천시하는 경향이 밑바탕에 깔린 자였다. 적군을 비롯해 그가 노예
취급도 않는 수인족들을 죽일 때면 그 잔혹성은 더 도드라졌다.
그의 부관을 비롯해 친형제들 마저도 벤에게 사람의 마음이란게 있을까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다른 이들과 달리 특별히 귀애하는 상대정도는 있었다.

["벤 하일즈 대령. 누누히 말씀 드리지만 저는 당신의 주치의가 아닙니다."]

자신만큼이나 미인상인 얼굴에 하얀 실험복이 몹시도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그는 언제나


처럼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기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는데 그 속에는 미묘한 반가움도 비쳤다.
오늘따라 어깨에 닿는 머리를 조여 묶었는지 뒷머리가 참새 꼬리를 닮았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웃자 남자가 벤을 노려보려다가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뺨을
붉힌다.
벤은 턱을 괸채로 눈웃음을 쳤다.
매번 불만스레 저를 맞이하긴 하나 그가 제 얼굴에 약한걸 모르진 않는다. 과거엔 이
계집같은 생김새가 늘 불만이었는데 의외로 쓸모가 많은걸 알고난 뒤엔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사람을 현혹하기 좋은 아름다운 껍데기는 적을 방심시킬때와 이렇게 누군가의 환심을 살때도
참 적절하게 사용되어지곤 한다. 이윽고 자줏빛의 요사스러운 눈동자가 남자를 부드럽게
재촉했다.

["그래서 치료는 안할 건가. 주치의?"]


["...이리 내십시오."]

예상한 대답에 거추장 스러운 코트를 등받이에 대충 걸쳐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가 쟈엘대령과의 대련으로 다친 팔을 내밀자 남자는 못마땅한듯 혀를 차고는 소독약과
붕대를 들어 치료를 시작했다.
매번 찾아오지 말라며 벤을 볼때마다 시큰둥한 얼굴을 하지만 정작 내침을 당해본적은 없다.
그건 자신의 지위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 남자가 그리 모질지 못한 심성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말투만 거칠다 뿐 상처를 매만지는 손은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그와의
첫만남도 지금과 비슷했다. 아니 그때는 저쪽에서 먼저 다가와 상처를 치료해 줬었지.

["이제 슬슬 내 제안을 받아 줄 때도 된거 같은데."]


["정부라면 죽어도 안합니다."]

남자가 쓰던 안경을 내려놓고 단호히 말했다. 벤은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이해못할 얼굴을


했다.
애초 백작인 자신이 남자를 부인으로 맞을수는 없으니 정부라면 평민 출신의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극상의 대접이었다. 문란한 밤생활을 즐기기는 했지만 지금껏 이렇다할 애인이나
파트너도 둔적이 없었으니 제대로된 관계의 제안이라면 단연 그가 처음이었다.
정부가 대체 뭐가 어때서? 아내를 들이긴 하겠지만 여자는 그야말로 씨받이 그 이상도
아닐터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끝났다며 붕대를 매듭 지었다.
거참 모르겠다.
이렇게 제 얼굴이 좋아 시선을 떼지 못하는게 빤히 보이는데도 막상 가까이 가면 늘
한발자국씩 물러난다.
아아. 너라면 정말로 예뻐해 줄 자신이 있는데.
벤은 아쉬움을 감춘 채 치료가 끝난 팔을 가볍게 휘둘러 보았다.

["하여간 네 놈은 너무 인생을 힘들게 살아. 앞으로도 분명 남의 뒷바라지만 하며 고생할게


틀림없어."]
["악담하지 마십시오. 정부로 성공하려고 했으면 제가 이런 개고생을 왜 합니까. 지금껏
노력한것이 억울해서라도 저는 제 실력으로 이뤄낼겁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멍청한 연구원 나부랭이."]
["자꾸 그러시면 다음부터는 치료 안 해드립니다."]

저를 무서워 하면서도 신기하다 싶으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늘 똑바르게 해온다. 특별해서


그런가. 평소의 그였다면 주제를 모른다며 남자의 혓바닥 부터 단죄했겠지만 이상하게
건방지다는 생각이 안 든다. 그나저나 다음에도 치료해줄 마음이 있긴했나 보군. 짓궂게
놀리자 남자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화를 냈다.
그 모습을 즐기며 벤은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가져야 겠다고.

* *

"...곁에 오래도록 두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예?"
헤일런의 위에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던 벤이 대뜸 그런말을 해왔다.
헤일런의 위에서 직접 허리를 움직이며 만족시켜야 했던 탓인지 그는 평소보다 다소
지쳐보였다.
벤은 숨을 가늘게 내뱉으며 단단한 가슴팍 위에 뺨을 올렸다. 피부가 워낙에 서늘한 편이라
그런지 뜨겁게 달아 올랐던 열기가 차차 식어갔다. 피로함에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감자
시야가 까맣게 뒤덮였다.
찌꺼기 처럼 떠오르는 기억은 쾌감에 잠식되어 뿌옇게 흐려졌던 정신을 일깨웠다.
달이 기울던 이른 새벽. 갈기갈기 찢긴 고양이의 시체를 보며 저를 경악어린 눈으로 보던
남자. 부서진 빙판위에 선 마냥 위태롭게 떨리던 손끝과 빨라지던 맥박.
그렇게 들킬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하자면 운이 없었다. 뚝뚝. 지면을 적시는 붉은 핏빛에
벤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덮어쓰고 있던 가면은 그렇게 산산조각 났다.

"인간을 죽였을땐 아무렇지도 않아 했는데 제가 아끼던 동물을 죽이니까 기겁을 하고


달아나더군. 그때 나를 보던 그 눈빛. 그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달콤하고 간지럽던 애정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두려움과 혐오만이 가득 차올랐지. 그건 익숙하면서도 또한 생경한
광경이었다."
"......"
"한때는 나도 누군가를 아끼게 되면서 이런 평범함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때 그 눈빛을 보면서 내가 뭘 느꼈는지 아나?"
"글쎄요."

무관심한 헤일런의 말에도 벤은 당시를 상기하며 입술을 혀로 축였다.


상처입고 두려움으로 범벅이된 남자를 본 순간 심장이 쿵 내려 앉았다. 그 놀라움은 곧
환희로 번졌다. 척추를 타고 오르는 그것은 분명 쾌감과도 같이 저릿했다. 봉오리가 꽃을
피우듯 평화에 물들어 잠시 잊고있던 파괴적인 욕구가 다시 싹을 틔웠다.

"나는 놈의 눈을 보며 흥분했어. 전율까지 일더군. 사로잡아서 뒤를 엉망으로 쑤시고 울리고


싶은걸 간신히 참았어.
어차피 내것으로 만든다면 언제고 원할때 마다 다리를 벌릴 수 있는걸. 그래서 보내주었지."
"......"

벤은 전쟁을 좋아했다. 압도적인 힘만으로 모든것이 좌지우지 하는 그 절대성이.


남자의 위에서도 그렇게 군림하고 싶었다.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 찬 그 눈이 벤을 향할 때야
비로서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귀애하는 누군가가 생겨도 결코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애정을
나누어 줄 수 없다는 것을. 그가 느끼는 충족감은 상대의 고통과 파괴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남자는 모종의 사건으로 탑을 나와 행적이 묘연해졌다.
자신을 피해 도망간건 아닐테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지금은 살아나
있을까 모르겠다. 또 어디서 남의 뒷바라지나 안하면 다행이고.
문득 헤일런이 손을 들어 올려 벤의 뒷머리를 가만히 쓸어 내렸다.

기분나빠. 스멀스멀 벌레가 기는 느낌에 당장에라도 내치고 싶었으나 벤은 어깨만 움찔할 뿐


그를 뿌리치진 않았다.
"...당신도 사람에게 애착을 가질 수 있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나는 나름 네게도 애착을 가져던 사람이야. 음, 그래. 지금도. 그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지만."

벌어진 입술 사이로 건조한 웃음이 새었다. 그 이전엔 단순히 필요에 의해 애착을 가졌다면
지금은 순수한 증오만이 전부였다. 그 이전에도 없을 만큼 벤은 헤일런에 대한 살의만으로
악착같이 이 지옥같은 나날들을 견뎠다.
지하굴의 칼튼에게도 만만치 않은 원한을 가졌지만 자신이 갈고있는 칼날은 오로지
헤일런만을 향했다.
자신이 겪은 이 치욕과 모멸감은 그로 인해 파생되었기에.
경멸하던 동물 따위가 제 위에 올라서 주인 행세를 하려 했던것은 벤에게 뼈아픈 수치였고.
자긍심에 상처를 입혔다.
벤에게 있어 헤일런은 여전히 하잘것 없는 노예였다. 자신이 그에게 저지른 일은 당연히
여기면서도 반대의 경우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뼛속부터 오만한 그의 천성 때문이기도 했고. 보수적인 귀족 혈통인 탓도 있었다.
자라온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오늘따라 답지 않게 말씀이 많으십니다."


"아아. 너도 궁금해 하지 않았나. 그래 내게 늘 물었잖아.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왜, 왜.
어째서요 벤님. 하고."

순간 헤일런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벤은 단조로운 투로 그가 결코 달갑지 않아할 기억을 끄집어냈다.
귀애하던 남자가 눈앞에서 사라진 어느날. 황제는 벤의 앞으로 검은머리의 소년을 데려왔다.
아니, 그쯔음엔 소년이 아니라 청년이었다.
바로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
벤은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알던 헤일런과 닮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성장속도에 의아해 하자 황제는 그를
소개했다.
이능을 가진. 제국에 단 둘 뿐인 수인족이라고.
인간의 모습을 흉내내도 귀와 꼬리가 드러나지 않은 것은 헤일런이 돌연변이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수인족에 대한 경멸이 멈출길 없이 쏟아졌다.

"동물이라서. 나를 속이고 인간인척 한것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습니까.."
"분풀이었지. 내가 일평생 처음으로 아끼던 남자를 고작 동물따위 때문에 놓쳐버렸거든.
그런데 황제께서는 네가 수인족이라잖아. 마침 내가 수인족 전담이란 이유로 교육을
부탁했고.."
"그만."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에는 경고가 스몄다. 흥분의 기색이 비치자 오싹한 기분에 등골이
서늘했다.
주인이 된 벤은 헤일런을 가혹하게 다루었다.
채찍으로 살을 찢고 뼈를 부러트리며. 때로는 강간도 서슴치 않았다. 그는 고통에
헐떡이면서도 끊임없이 이유를 알고 싶어했다.
이유.
굳이 말하자면 제 밑바닥에 있던 동물이기 때문에. 노예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분풀이의
대상이 되었을 뿐.

"거창한건 없어. 단지 그뿐이다. 전쟁에서 풀지못한 내 욕구를 마음껏 쏟아냈지. 수인족은


튼튼하기도 했고. 너는 내가 뭘 어떻게 해도 감내하던 착한 노예였으니까. 길들여지지 않은
눈을 하면서도 반항은 없었어. 그건 왜 였을까? 내가 네놈보다 강해서?"

질문을 던지고도 벤은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몸을 반쯤 일으켜 어둡게 일렁이는 눈을 보며


이죽거렸다.
아니지 아니야. 그게 전부는 아니었잖아.

"그만 하십시오. 대령."

벤은 둔하지 않았다. 그는 타인의 감정을 잘 읽어냈다. 특히 그것이 호의에 가까운


감정일수록.

"날 좋아했거든. 주제도 모르고 "

그것은 아마 경애에 가까웠으리라 생각한다. 헤일런이 황궁에서 가장 가까이 지내던 인간이


벤이었으니.
제 아무리 돌연변이라 해도 그 역시 수인족이었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호의, 맹목적인
사랑이 밑바탕에 깔린.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 그 이전의 과거에서는 그러했다.
씩 입꼬리를 비틀며 웃는 말에 헤일런의 동공이 크게 흔들린다. 나른한 듯 언제나 느긋해
보이던 얼굴에 금이 갔다.
벤에게는 그 찰나의 빈틈으로도 충분했다.

“쉬, 흥분하지 말고.”


"크윽!!"

머리맡에 숨겨 두었던 비수를 꺼낸 벤이 그것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질렀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도 불구하고 헤일런은 짐승 같은 반사 신경으로 급소를 피했다. 푹,
심장을 아슬하게 빗겨나간 비수에 벤은 조금 아쉬워 하며 혀를 찼다.
손끝으로 힘껏 날을 밀어 넣으려 했지만 헤일런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벤은 재빨리 비수를
빼내며 침대 밑으로 몸을 굴렀다.
주륵. 손톱에 뺨을 긁힌 것만으로도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내렸다.
예전 같았다면 무기 따위에 구애받을 것 없이 육탄전을 벌였겠지만 지금은 피하는 것 정도가
고작이다.
헤일런은 벤을 쫓으려다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비수에 묻혀둔 마비독이 작용한
것이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런. 어디에서 이런걸 구해오셨습니까."


"머리 장식이 꽤 쓸만하더라고. 그러게 무슨 배짱으로 날 열흘이나 방치했나."

안 그런척 했지만 헤일런은 벤에 대한 경계가 대단했다. 아무리 전만은 못하더라도 그의


무력은 결코 얕볼것이 아니었다. 일례로 머리 장식만으로도 일반인의 목 정도는 빠르게
꿰뚫었을 정도였으니까. 작은 펜조차도 그에게는 흉기가 될 수 있다.
열흘간의 방치는 분명 헤일런의 실수가 맞았다. 기껏해야 식사를 가져다 주는 시중인들에게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했겠지. 게다가 조금전엔 틈을 내보이기 까지 했다.

헤일런이 후들 거리는 손을 들자 주위로 냉기가 퍼졌다. 이미 예상한 바.


벤은 손에 든 머리장식을 꽉 움켜쥐며 그를 향해 겨누었다.

"허튼 수작 부리지마. 네가 이능을 사용 못하게 하는건 간단하니까. 할 수만 있다면 좀 더


괴롭히면서 죽이고 싶은데 그럴 여유가 없으니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것 부터 해야겠지."
"지금 그 몸으로 말입니까?"
"물론. 이 벤 하일즈를 얕보지 말라고. 재규어. 내게도 학습능력이란게 있거든."

도주를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간의 시도는 항상 실패로만 끝이 났다. 때문에


벤은 체념이라도 한 마냥 한동안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헤일런도 방심했을는지 모르겠다.


벤은 뒷걸음을 쳤다. 마비독이 온 몸에 퍼지는 시간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5 분 남짓. 하지만
수인족의 경우엔 그보다 조금 더 길다.
죽을 각오로 덤벼든다면 치명상은 입힐 수 있지만 목숨을 앗을 자신은 없었다.
그리고 벤은 도박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과거 무수히 많은 전쟁에서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로.
따라서 심장을 찌르지 못한 이상 기회는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옳았다.

헤일런은 침대 맡에 걸터 앉은채로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예기치 못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크게 분하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어디 잡히지 않게 꼭꼭 숨어보십시오. 이번에 잡히시면 다음은 없을테니까요."

잡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놓아준다는 투였다. 언제 흔들렸냐는 듯 다시 침착하게 변한


표정에 속이 뒤틀렸다.
어디서 치솟는 자신감인지는 모르겠다만.
"좋을대로."

도발하듯 웃어보인 벤은 긴 은발을 높이 틀어 올린 후 헤일런을 찔러 피가 범벅이 된


머리장식을 꽂았다. 장식을 제게 주면서 이렇게 쓰일줄은 어디 상상이나 했을까.
조롱하며 벤은 저를 억압하고 가둬두었던 문을 활짝 열었다.

<-- 창부가 되다. -->


                             
당연하지만 벤은 문을 닫자 마자 발걸음을 빨리했다. 팔과 다리가 후들거렸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 크게 맥박쳤다. 벤은 긴장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태연한 척
하긴 했지만 금방이라도 헤일런이 자신을 붙들어 올까 신경이 곤두섰다.

지금도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하아..하."

그리 오래 뛰지도 않았는데 벌써 부터 숨이 차고 근육이 경련하며 피로를 호소했다.


막 정사를 마친 참이기도 했고 지나치게 쇠약해진 몸은 정신적인 압박과 장시간의 움직임을
견뎌내지 못했다.
도주를 하다 늘 붙잡혀 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짧은 시간의 폭발력은 가능하지만 일정
이상이 되면 육체가 비명을 내지른다.
식은땀이 이마를 적시고 턱끝에 고이자 벤은 머리장식에 보석대신 끼워 두었던 약 하나를
꺼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아주 잠시겠지만 몸의 고통을 잊게해 주는 역할을 할것이다.
힘겹게 방 한칸에 도달한 벤은 적당한 가발과 드레스를 꺼내들어 몸에 걸치기 시작했다.
헤일런이 운영하고 있는 이곳에는 대게 여자 창부가 많았던지라 여성용품이 많았다.
착용은 어렵지 않았다. 성욕을 풀기엔 남자가 제격이긴 했지만 여성도 많이 접했던 관계로
옷을 벗기고 입히는 일은 익숙했다. 보는 안목이 뛰어나서 악세사리나 옷을 선물하는걸
즐기기도 했고.

벤은 산양의 부드러운 털로 뒤덮인 숄을 어깨에 올리고 움직이기 편한 신발도 갖추어 신었다.


가발을 꼬아 올리자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가 어깨가에서 흔들렸다. 그것만으로도 인상이 확
변했다. 키만 보통 여성보다 비교적 컸을 뿐 그를 남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원체 미인이었던 얼굴에 간단한 화장과 장신구까지 걸치자 그는 전에 없이 요염하고 귀족
특유의 우아함까지 갖춘 아름다운 여성이 되었다.

그래봤자 이곳에선 창부에 지나지 않겠지만.


하..
살다보니 내 평생 이런 우스꽝스러운 짓까지 해보는군. 벤은 긴 앞머리로 한쪽 눈을 가린 후
마지막으로 제 냄새를 맡지 못하게 독한 향수를 몸 곳곳에 뿌렸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나가자 멍청하고 순진한 동물놈들을 자신을 알아 보지 못하고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주었다. 인간여성에게는 조금의 경계도 품지 않는 듯 했다. 본래도
그들에게 암컷이란 존재는 부서질듯 연약해서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는 이상한 본능같은게
있었다. 이렇게 쉬운것을 그동안 그렇게 고생을 해왔다니.
벤은 조소하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리석은 수인들. 그들이 저지른 큰 실수라면 단순한
사업이라도 인간들을 가까이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겠어."

헤일런에게서 탈출한지도 약 이틀이 지났다.


굽이진 길을 가까스럽게 해치고 나와 인적이 많은 도시에 도착한 벤은 눈앞에 비치는 생소한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고작 반년이다.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또 짧은. 그러나 그 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그 예로 화려한 도시에는 이제 수인족들이 대놓고 활개를 치고 있었다.
보통의 수인족은 노예로써 대부분 그 주인들이 그들과 함께했지만 지금은 어째선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몇몇은 상인행세까지 하며.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구나.


벤은 혀를 차며 이제는 바뀌어버린 어린 황제의 무능함을 비난했다.

하기야 제위조차 범죄조직의 손을 빌렸으니 정치감각이 어떤지는 알만했다. 그나저나 탐탁치


않은건 않은거고 일단 몸부터 잠시 추슬러야겠다. 벌써 이틀째 식사는 커녕 추적을 피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는 가까이 보이는 식당가에 들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림새 때문인지 눈에 띄는 외모


때문인지 시선이 그에게로 한데 모여 들었다. 벤은 물로 입가심을 하며 자신이 움직여야할
동선을 생각해 보았다.

헤일런은 이제 벤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는 조직력을 갖춘 상태다. 그렇다면 조력자가


필요하다는 건데.

수인족으로 구성된 전투부대를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있을까.

"..황군을 제한다면 고작해야 그리슨대공. 지하굴. 후작정도의 귀족들이겠군."

모래늪의 대저택에서 은거하다 시피 모습을 감춘 그리슨 대공은 만나기도 쉽지 않거니와


세상사에 무관심한 그가 벤을 선뜻 도울리가 없었다.
지하굴은.. 지부가 곳곳에 있긴 하나 워낙에 칼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직이니 아예 제외.

벤의 형제들 역시 정계에서 활약하고 있긴 하나 워낙에 사이가 안 좋은 관계로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남은건 후작 정도의 귀족인데 그 중에 자신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으면서 헤일런과 척을


질만한 이가 누가 있을까.

벤은 대인관계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이 많은 편도 아니었다.

다만 그가 아는 대부분이 이해관계로 얽혔을 뿐이라 필요가 다한 지금은 그들을 아군이라


생각할 수도 없다.

이해관계로 맺어진 관계는 자르기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더 나은 조건만 있다면 금세 돌아설
위험을 감안해야 한다. 그건 이번일로 아주 뼈져리게 깨닫지 않았던가.

그렇다보니 벤으로선 상대를 고르는데 보다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었다.

"손님 계산을 하시고 나가셔야 합니다만."


"아.."

식사를 마친 후 벤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쳤다. 식사후 치러야할 금액을 전혀 생각지


못했다. 곁에는 수행원이 있지도 않았고 벤 본인도 가진것이라곤 목에 걸린 싸구려 장신구
뿐이었다.

그러다 마침 자신을 넋 놓고 보고있는 제복차림의 기사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흐음.
이제는 익숙한 창부의 요염한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유혹하듯 휘어진 자줏빛 눈동자가
지독하리만큼 퇴폐적이었다.

벤은 아주 손쉽게 남자를 유혹했다. 아주 잠깐 웃음을 판 대가로 식사는 물론 잠자리까지


제공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제 아름다운 외양을 이용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다만.

"저, 그럼 올라가실까요?"
"뭐?"

이쯤에선 벤도 망설임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노예로 추락하면서 몸을 팔기야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의가 아닌 타의였고. 여장한 상태로 남성과 잠자리에 드는 건 당연히 용납못할
일이다.

물론 금전을 지불한 대가로 몸을 요구하는걸 이해 못할바는 아니지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만들어야 하나. 아니면 뿌리치고 달아나야 하나. 벤은 제 손목을
붙잡고 늘어진 남자를 심드렁히 바라보며 그런 고민을 했다.

"어어. 전 이렇게 비싼데 안 데리고 와주셔도 되는데요."


"시안이 여길 좋아해서. 이번에 신세도 진겸 맛있는거 사줄테니까 부담스러워 하지마. 나 돈
많거든."
"와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오늘따라 칼튼님의 우중충한 가면도 멋있어 보이네요."

......?!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순간 벤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런곳에서
마주칠거라 생각지 못한 둘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키가 훤칠하니 큰 청년은 얼굴의 반 이상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바로 지하굴의 칼튼.


한때는 그의 사업장을 자주 애용하며 친분을 쌓은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저 둘도 없는 원수일
뿐이다.
벤의 눈 한쪽을 빼앗고 헤일런에게 노예로 넘긴게 바로 칼튼이었으니 원한이 깊은건 당연하다.

그리고 옆의 더벅머리는 헤일런의 수하 중 벤이 가장 싫어하는호랑이 수인족.

얼음처럼 딱딱히 굳은 벤은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둘의 모습을 보았다.

원한을 가진 놈이 하나. 말도 섞고 싶지 않을정도로 싫은 동물새끼가 하나.


하필 마주쳐도 저 둘이라니.

"근데 카시안은 어딜 갔길래 이렇게 안와. 뱃가죽이 늘러붙겠...응? 호랑아 뭐 봐?"


"호랑이 아니고 넬이요. 칼튼님도 기억력 안 좋으.. 아야!"
"죽을려고 누구더러 머리 나쁘대. 근데 뭐 보냐니까?"
"저 여자 눈매가 못돼먹게 생긴게 저희 대장님 노예랑 똑닮아서요. 변장하고 탈출했나?"
"응? 헤일런 노예? 아아. 어디봐봐."

구경이라도 난마냥 벤의 앞에 딱 멈춰선 둘이 그의 얼굴을 바쁘게 훑었다.


가면너머로 보이는 녹색눈동자에 벤은 가슴을 바짝 졸였다. 간단한 화장과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못알아 보지 못하리란 법도 없다.

쿵쿵.
심장이 입밖으로 튀어나갈듯 요란하게 맥박쳤다.

알아보면..
여기서 들키면 어쩌지. 또 도망나오자 마자 잡혀서 돌아가게 되나.
칼튼이라면 죽이진 않더라도 분명 헤일런에게 가져다 바칠 가능성이 용이했다. 벤은 땀에
젖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의심어린 눈초리로 그를 보던 칼튼이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무슨 소리야. 하나도 안 닮았어. 그리고 이런 눈은 도발적이라고 하는거다. 색기 넘치는게
남자 한둘 홀려본게 아니겠어. 내가 임자만 없었다면 하룻밤 정도는 어울려 줬을텐데."
"..아닌데 닮았는데."

호랑이 수인족이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벤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벤은 움찔했지만 주먹을 꽉 움켜쥐며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를 지켜 보던 칼튼이 히죽거리며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근데 난.. 모르는 사람이 나를 저런 눈으로 보면 눈알을 뽑아주고 싶긴 하더라."

그의 손가락 끝에서 붉은 빛이 어른거렸다.


문득 그에게 뽑혔던 왼쪽 눈이 불에 타는 듯 뜨거웠다. 의안임에도 칼튼을 마주하고 있어선지
그날의 고통이 생생히 되살아 났다.
헤일런에게 느꼈던 모멸감과 수치는 없었지만 머리가 뜨끈할 정도의 분노가 치밀었다.
벤은 살기로 범벅이 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 홱 고개를 돌렸다.

분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칼튼따위에게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덤빈다고 해도 지금의


몸으론 이길 가능성이 전무했다. 그는 허술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무력도 어지간한
이들보다는 강한데다 이능으로 따지자면 제국에서도 다섯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실력자다.

가장 까다로운건 언제 어떻게 튈지 모르는 변덕스러운 행동.


그 돌발적인 행동이야 말로 벤같은 전략가에게는 가장 상대하기가 난해했다.

"어? 자, 잠깐! 기다리십시오! 원하시는건 전부 드렸는데 그냥 가십니까?"

기사가 당황해서는 어깨를 붙잡았지만 벤은 간단히 뿌리쳤다. 이깟놈과 실랑이를 한 덕분에


만나지 말았어야할 놈들을 마주하지 않았던가.

"오. 먹튀다 먹튀."


"오. 흥미진진하네요."

뒤따라 들리는 소리들을 무시한 채 다급히 발을 놀렸다.


이 자리에 더 머물렀다간 나중을 기약할 것도 없이 공격을 가할지도 몰랐다.
지금도 울컥울컥 치미는 분노에 손끝이 떨릴 정도였으니.

복수라면 좀 더 승산이 확실할 때 해도 늦지 않았다.

그것이 이성적으로 옳다는 것은 알지만 벤은 인내가 힘들었다.


당장에라도 검을 휘둘러 칼튼의 내장을 휘젓고 얄밉게 웃던 그 목에 칼날을 박아 버리고
싶었다. 거칠어진 숨에 어깨가 오르락 내리락 거렸다.
"기다려! 이 계집이 먼저 유혹할땐 언제고!"
"......"

뒤따라 붙던 기사가 기어코 벤의 앞길을 막아섰다. 벤은 후,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눈앞의 기사를 향해 눈을 곱게 접어 보였다.
소리없이 웃는 얼굴은 마치 그림으로 그린듯 아름다웠다. 화려하면서 사람의 음심을
자극한다. 그에 홀린듯 남자가 입을 벌린 채 얼굴을 붉혔다. 벤은 몸을 돌려 그의 품안에
안겼다.

푹, 살을 꿰뚫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제복 한가운데가 붉게 물들었다.

타닥. 탁!

벤은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휘적 거리며 거리를 달리는 중이다.


이유라면 그가 지난밤 죽여버린 기사 때문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라 물불을 가리지
않고 손을 썼는데 당시 목격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때문에 그는 헤일런의 수하와 함께 기사들에게도 쫓기는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빌어먹을. 정말이지 되는일도 없지.

"헉..허억. 헉."

골목길을 돌아선 벤은 지끈 거리는 심장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더는 무리였다.


구해놓은 약은 바로 지난밤 동이 났고 잊고 있던 통증이 해일처럼 몰려와 팔 다리가 경련을
했다.

어느샌가 거리를 좁혀온 기사들이 뒤를 에워쌌다. 쉬익.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에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숄이 툭 떨어졌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바람에 흩날렸다.

"멈춰라! 이 요녀!!"
"길거리의 창부 주제에 감히 기사를 시해하다니!"
"......하."

벤은 멈춰서서 뒤를 힐끔보고 다시 앞을 보았다. 맞은편에선 검은색의 신사모를 쓴 사내


하나가 있었다.
도박은 정말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이대로라면 기사들에게 잡혀 죽어버릴 판국이다.
부디 쫓기는 자신을 도와줄 선한 남자이길 바라며.

꾹 입술을 악문 벤은 마지막 힘을 짜내며 뛰었다. 풀석. 남자는 덮치듯 안겨든 벤을 단단히


받쳐 들었다. 반사적이었는지 몸이 닿고 나서야 움찔하며 놀란 기색이 느껴졌다.

"도, 도와.."

도움을 청하려 고개를 든 벤은 이윽고 마주한 얼굴에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놀란듯 하면서도 무심한듯 자신을 내려다 보는 노란색의 홍채. 붉은 머리와 얼음처럼 차가운
무표정이 대단히도 인상적인 남자였다.

...쟈엘 칸 대령.
벤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정말이지 되는 일 하나 없다고.

<-- 창부가 되다. -->


                             

운도 없지. 하필이면 쟈엘 이라니.


벤은 수치심에 이를 악물었다. 어째선지 쟈엘의 앞에서는 유독 꼴사나운 모습을 많이 보였다.
지난번에는 그를 접대할 창부로. 이번엔 여장이라니.
상대가 사관학교 시절 동기였던데다 앙숙이었기 때문에 자존심이 더 상했다.
그나저나 들킨건가. 아니면 몰라보는 건가.
칼튼도 전혀 못 알아보던데 쟈엘은 어떨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
눈썰미가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닌데다 설마하니 자신이 여장을 하고 기사들에게 쫓겨
다닐거라고 어디 생각이나 했을까.
힐끔. 눈동자를 굴려도 그의 표정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쟈엘은 벤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다 이내 그에게 다가오는 기사들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인가?"

주춤.
나직히 울리는 목소리에 다가오려던 기사들이 서로 고개를 돌려 눈치를 보았다.
곁에 따라 붙은 수행원은 없지만 남자의 차림새와 분위기가 귀족으로 보였던 탓이었다.
그들이 머뭇거리며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사이 쟈엘이 먼저 쓰고있던 모자를 내리며 얼굴을
드러냈다.

"수인족 전담의 쟈엘 대령이다. 소속과 직위를 고하라."


"시, 실례했습니다. 대령!"
그를 알아본 기사 몇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를 알아본 기사 몇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속을 밝히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2 기사단.
어쩐지 기사놈 치고는 밝힌다 했더니 샤렌놈 휘하였군. 벤은 쟈엘과 눈이 마주치자 슬쩍
고개를 숙였다.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자 쟈엘은 또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 보다 기사들을 물렸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내가 데리고 가서 심문을 해보지."


"예?"
"너희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녀 나름대로의 사정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이 일은 내게 맡기고 너희는 이만 각자 맡은 구역으로 돌아가도록."
"그, 대령. 하지만.."

큰 키에 얼음처럼 서늘한 눈빛. 분위기에 압도당한 기사들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하고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상명하복이 절대적인 군 내부의 규율도 있지만 쟈엘은 후작의 작위도 가진 고위 귀족이다.
같은 대령급이라 해도 그가 부담스러운 마당에 일개 평기사들이 항명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남용하지 않을 뿐이지 쟈엘에게는 즉결처분의 권한도 있었다.
기사들이 분한 얼굴로 벤을 노려보다 시야에서 멀어지자 쟈엘은 제 품에 안긴 그를 조심스레
밀어냈다.

"가십시오. 죄는 묻지 않겠습니다."
"......"

벤은 고개를 들었다.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무심한 얼굴은 여전히 감정을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지독한 자식.
저 딱딱한 태도와 절제된 감정은 사관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하게 없다. 그리슨 대공과
어울려 다녀서 그런가. 가끔은 그 역시도 사람이 맞나 의심이 갈때가 있다.
그나저나 말만 심문이지. 막상 쟈엘은 이렇다할 질문조차도 없이 벤을 놓아주었다.
돌아서는 뒷모습에 벤은 손을 뻗어 그의 코트자락을 꽉 붙잡았다.

멈칫. 그 자리에 멈춰서게 된 쟈엘이 한숨을 쉬고는 자신에게 용건이 있느냐며 나직히 물었다.
벤은 그의 몸을 자신쪽으로 잡아 돌렸다. 노란홍채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단지 그뿐이었지만
어떤 확신에 입술끝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정말 모르는건가? 아니면 알면서 굳이 모른척 하는건가?"


"......"

쟈엘은 침묵했다. 그것은 곧 긍정을 뜻하기도 했다.


역시 전자가 아니라 후자였군.
어쩐지 답지않게 기사를 죽인 중죄인을 그냥 보낸다 싶었다.
이런 몰골로 쫓겨다니던 내가 불쌍해 보인건가? 벤은 기분이 저조해져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이런 배려는 전혀 고맙지도 않다고 빈정거리려던 찰나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윽,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뒤에서 쟈엘이 아슬하게 받아낸 덕에 뒤따르는 고통은 없었다.
팔다리가 저릿거리고 숨을 쉴때마다 한껏 무리한 폐가 찢어질듯 아파왔다. 몸상태가 한계에
다다르자 벤은 자신이 자존심을 내세울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도망갈 체력도 없거니와 이
상태라면 한발자국도 걸음을 떼기가 어렵다.
그럼 다시 돌아온 기사들에게 보복을 당하던가 헤일런의 수하들에게 발견되어 다시 그
냄새나는 동물천지의 소굴로 끌려들어가겠지.
그건 싫다. 절대로.

벤이 반쯤 상체를 숙인 쟈엘의 깃을 두 손으로 잡아 당겼다.

"..네게 이런말을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만."

의아하다는 듯 깜빡이는 눈동자. 옷자락에 틀어쥔 손가락에 땀이 습하게 배었다. 벤은 이를


한번 악물었다가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

"도움을 받고싶다. 쟈엘."

* *

의외로 쟈엘은 벤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고 그를 자신의 저택에 들였다.


물론 거동이 불편했던 터라 그에게 안기는 수치는 면하지 못했지만 그동안 당해온 일에
비하자면 이정도는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그의 저택에 도착하자 집사를 비롯해 그의 수하들 사이에 카다란 파문이 일었다.
평소 동물외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던 제 주인이 이성을 품에 안고 왔기 때문이다. 꼼꼼히
살펴본 결과 머리위에 쫑긋거리는 귀는 물론 꼬리까지 보이지 않자 그들은 소리없는 탄성을
내질렀다
벤은 느껴지는 시선들이 처음엔 거슬렸지만 이내 심술이 삐죽 솟아 보란듯 쟈엘의 가슴팍을
파고 들었다.
다시 술렁술렁. 덩달아 쟈엘까지 놀랐는지 벤을 안고 있던 손을 툭 놓쳐 버렸다.

"윽!"
"아, 미안하다. 그게 좀 놀라서.."
"......됐다. 혼자 일어설 수 있어."

그래 뭐 기분 나쁠수도 있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도움을 거절한 벤이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쟈엘은 멀뚱히 선 채로
그런 벤을 바라보다 그보다 앞서 걸어나갔다.
도착한 방은 생각보다 크고 화려했다. 이런 사치는 안 부릴 줄 알았는데 온갖 명화며
조각상이 방안 곳곳에 즐비해 있었다.
벤은 그가 안내한 방으로 들어가자 마자 일단 입고있던 거추장 스러운 여자 옷부터 훌훌 벗어
던졌다.

허리를 조이고 있던 끈을 푸르고 가슴에 손을 넣어 솜뭉치를 아무렇지 않게 빼냈다.


당연하지만 이런 우스운 꼴로 대화를 나누고 싶진 않았다.

"이봐. 일단 씻고나서 이야기를.."


고개를 들자 당황한 쟈엘이 빙글 몸을 돌아세웠다. 설마 하고 살피자 언뜻 귓가가 붉어진
것이 보였다.
벤은 옷을 벗다말고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하, 저게 지금 나를 보고 부끄러워 한거
맞지?

"이봐 쟈엘 칸. 옷차림이 이렇다고 내가 계집으로 보이나?"


"......"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쟈엘이 손으로 작은 문 하나를 가리켰다. 그곳이 욕실인 모양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여자 하나 사귀어 보지 않은 놈이라 촌스럽게 군다고 짐작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창부를 사러 사창굴도 드나든 주제에 이제와 순진한 척 이라니.
중얼거린 말에 움찔한 쟈엘은 무언가를 항변하려다 벤의 희끗한 어깨를 보고 다시 황급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렇게 질색을 하면 괜히 한번 건드려 보고 싶어지는데..

벤은 턱을 쓸어 올리며 불쑥 치미는 충동에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는 천성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며 희열을 얻는 성격이었다. 다만 상대가 쟈엘 대령인데다
상황도 상황인 만큼 득볼것 없는 즐거움은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탁. 욕실 문을 열자 쟈엘이 안도하며 밖으로 나가려는 모습이 보였지만 벤은 모른척 해주었다.

"궁금한게 많을텐데 왜 아무것도 묻지 않지?"

더러워진 몸을 대충 씻어내고 욕의 하나만을 걸친 벤은 침대에 대충 엉덩이를 걸터 앉았다.


길게 내려온 은발이 물에 흠뻑 젖어 뚝뚝 침대보를 적셨다.
최근에는 헤일런이 곁에서 머리카락을 말려주었기에 습관처럼 그대로 나와 버린 것이다.
문득 떠오른 재규어 생각에 벤은 짜증스레 머리를 털어내고 쟈엘의 대답을 기다렸다.
급박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얌전히 쟈엘을 따라오긴 했지만 자신을 저택까지 데려온 그의
의도를 알고 싶었다.
이제와 앙갚음을 할 성격은 아니지만 단순히 친분만으로 도움을 줬다기에도 무리가 있다.

크게 부딪친 일은 없더라도 분명 쟈엘과 벤의 사이는 빈말로라도 썩 좋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같은 수인족 전담의 대령직을 맡았다고는 하나 벤은 그들을 사살하고 강압적으로 짓누르는
겅경파였고 반대로 쟈엘은 수인족을 아끼고 보살피는 온건파였다. 서로가 서로의 방식을
탐탁치 않아 했음은 분명하다.

"그다지. 나는 네가 무슨 일을 겪었든 관심없다."


"그럼 내쪽에서 질문을 해야겠군. 관심도 없으면서 왜 선뜻 나를 돕겠다고 한거지?"
"...일말의 양심 때문이라고 해두지."
"나를 끌어내리는데 협조라도 한 모양이군."
"......"

불리하면 대답을 집어 삼키는 쟈엘의 버릇에 확신을 가진 벤은 사납게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역시 저 놈도 한패였군.
크게 예상치 못한일도. 이해를 못할 일도 아닌지라 배신감 따윈 없었지만 속이 울컥하긴 했다.
자신은 쟈엘을 죽이고 싶어도 그의 지위와 그리슨 대공 때문에 손도 대지 못했는데.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벤은 속이 꼬여서 손을 쥐었다 피며 이내 머리를 차분히 식혔다.

"후, 좋아. 그보다는 좀 더 실리적인 대화로 넘어가지."


"?"
"그래서 내가 네 양심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부분은 어디까지지? 지금 당장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는 있나?"
"그건 무리다. 주인이 놓아주지 않는 이상은 황제라도 네 신분을 되돌려주진 못해. 다만
저택이라면 얼마든지 머물러도 좋다. 물론 네 소유주가 이곳을 찾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지만."

그렇다면 실상 도움을 받을 부분은 그리 크지 않다는 말이 된다.


벤은 낮게 혀를 찼다. 도피처도 제대로 제공할 마음이 없다니.

".....양심이 아주 쥐꼬리만 하시군."


"너야말로.."

매번 말에 눌리는게 억울했는지 기어코 한마디를 뱉어내긴 했지만 말주변 없는 쟈엘에겐 그게


전부다.
벤은 코웃음을 치며 왼쪽 다리를 반대쪽으로 올렸다. 욕의 아래 늘씬하게 잘 빠진 종아리가
유독 희게 보였다.

"내 양심은 그 정도로 충분해. 그래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네게 다른걸 요구할 수 있지."
"다른것?"
"사람 하나만 만나게 해줘."

애초에 자신의 일에 쟈엘을 끌어 들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사람 하나만 만날 수 있게


해주면 충분하다.
쟈엘은 미심쩍은 얼굴을 했지만 벤은 필요 이상의 말은 삼갔다.
헤일런에게 다시 잡혀 들어갈 생각은 없지만 만약을 대비해 그 다음정도는 생각해 둬야하지
않겠나.
   

<-- 창부가 되다. -->


                             
헤일런에게서 도망을 나온지도 어느덧 열흘남짓.
벤은 넓직한 침대에 누워 흰천장을 멀겋게 쳐다만 봤다. 반년넘게 지하에 처박혀서 하루를
멀다하고 같은 사내들에게 유린당하며 몸을 혹사당했기에 이 여유로운 시간이 조금
낯설기까지 했다.
이 얼마간은 찾아오는 손님도 없고. 얼굴에 뿌려지는 역겨운 정액도 없었다. 창부노릇을
벗어난건 좋지만 역시 이 평온함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파괴욕만 불러일으킬 뿐. 벌써부터 피가 보고 싶어 손이 간지럽다.

'벤.'

귓가에 울리는 차분하면서 나직히 깔리는 목소리에 벤은 눈을 크게 떴다.


익숙한 검은 잔상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어두운 밤이면 노랗게 빛나는 짐승의 눈. 보통
사람들보다 체온이 낮은 손이 그의 머리를 쓸고 귓가를 만졌다.
움찔하며 움츠러드는 벤을 보며 헤일런은 목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귓가를 매만지던 손이 어깨를. 그 아래로 허리와 엉덩이를 차례로 쓸어 내리다 이내 다리를
벌린다. 치욕감에 몸이 떨리지만 벤은 반항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나의 창부. 다른 생각은 마십시오. 당신은 그저 내 말에 따라 사내들에게 다리나


벌리시면 됩니다.'

다리 사이로 뜨겁고 커다란 살덩이가 밀려든다.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내부를 가득 채워갔다.
환영임이 틀림 없음에도 그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헉. 소스라치게 놀란 벤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벤 하일즈?"
"아.."

맞은편에서 자신을 의아하게 보는 쟈엘에 벤은 정신을 차렸다. 저도 모르게 호흡이


흐트러졌고 목덜미는 식은땀으로 젖어 축축했다.

벤은 안도와 분노섞인 숨을 뱉어내며 이마를 짚었다. 아랫배가 불덩어리를 삼킨 듯 뜨겁고


다리 사이가 뻐지근 했다.

"씻어야 겠다."

뚝뚝 떨어진 물방울이 침구를 적셨다.


이번역시 치렁치렁한 은발을 내버려 둔채 욕실에서 나온 벤을보며 쟈엘은 표정 변화 없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내 침구를 적시려고 매번 그렇게 나오는건가?"
"별로. 그냥 습관이 되었을 뿐."

목욕시중을 들이는게 가장 편했지만 함부로 사람을 들일수는 없었다. 자신의 얼굴이 워낙에
유명했던 터라 소문이 새어나갈 위험이 있다. 여자인 줄 알고 들인 사람이 실은 남자였다고
알려지는 것도 쟈엘의 평판을 깎는 일이었고. 물론 그의 평판이 깎이는 정도야 벤은 아무래도
상관없긴 했다.

"지난밤 헤일런에게 연락이 왔다."

테이블 한쪽에 마련된 차를 입가에 대고 있는데 문득 쟈엘이 그런 말을 해왔다. 뭐?

"널 데려가고 싶다고 하더군."


"......그래서? 지금 날 더러 나가라는 건가?"
"아니. 나는 아무런 답신도 주지 않을테니 안심해도 좋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아무리
헤일런이 근래 세력을 넓히고는 있다해도 내 저택을 함부로 들쑤실 수는 없을 테니까."
"지난번 하고 말이 다른데."
"......"

쟈엘은 필요한 말만 하고서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벤은 가늘어진 눈으로 그의 의중을 살피려다 이내 포기하고야 말았다.


저 철벽같은 얼굴에서 감정을 읽는 것만큼 어려운 난제도 없다.

그나저나 헤일런이 벌써 이곳을 알아냈다면.. 이제 슬슬 장소를 옮겨야겠군.

쟈엘은 든든한 방어벽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믿을만한 인물도 아니다. 벤은 이제


그 누구도 함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보다 배가 고프지는 않나? 식사를 들일까?"


"좋을대로."

벤의 식사는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만큼 쟈엘이 꼬박꼬박 챙겨주고 있다.


그렇다고 방안에서 까지 여장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았고.

쟈엘은 의외로 귀찮은 기색 없이 벤을 살뜰히 보살폈다.


그런데 기분탓인가. 어째 다친 동물을 돌보듯..
쟈엘이 밖으로 나간사이 그런 의심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기류가 느껴졌다.

벤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별안간 방 한쪽의 공간에 균열이 생겼다. 쩌적. 쩍.

"!"

벤은 벌떡 일어나 주위에 있던 은촛대를 집어 올렸다. 이런 기괴한 현상이라면 분명 이능의


발현. 드물지만 이능자들 중에선 공간을 이동하는 능력도 있었다.
그는 숨을 죽이며 걸음을 옮겼다. 누구지? 이윽고 비틀린 구멍을 비집고 하얀 손이 뻗어져
나왔고 벤은 빠른 몸놀림으로 들고있던 촛대를 쑤셔 박았다.

아니 박으려 했으나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 사내가 대수롭지 않게 촛대를 튕겨냈다.


보이지 않는 막에 반걸음 물러선 벤이 고개를 들었다.

"이것도 환영 인사인가? 쟈엘."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흑발. 황금을 박아넣은 듯 화려한 금색의 눈동자. 그러나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긴 동공.
커다란 장신의 남자는 넓은 실내에 덩그라니 선채로도 존재감이 뚜렷했다. 이 권태로운 얼굴.
압도적인 분위기.
뜻밖의 인물에 벤은 긴장을 누그러 트린 대신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리슨 대공."
"..너는 쟈엘이 아니군. 그대는 그러니까.."
"......"
"학살자?"

기억이 나지 않는지 슬핏 미간을 좁히는 대공에 벤은 무의식중에 제 이름을 말했다.

"벤 하일즈."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무미건조한 투로 대답한 대공이 일그러진 구멍틈에서 무언가를 잔뜩 끌어다 내려 놓았다.

조각품이며 액자까지. 그 가운데에는 값비싸 보이는 보석도 있었다. 벤은 들고있던 촛대를


내리며 그의 행동을 빤히 주시했다.

지상에 존재하는 용의 마지막 핏줄.


이전에도 그랬지만 세상에 무관심한 용은 가끔 벤이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을 일삼곤
했다.
예컨대 답지 않게 식물 가꾸기를 좋아한 그는 황궁 곳곳에 마력을 쏟아부어 꽃과 나무로
뒤덮기도 했고. 반짝 거리는 황금이나 보석에 눈이 멀어 황궁에 장식된 금붙이들을 모조리
가져가 소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듣기론 예술품에도 관심이 많다고 하더니만.
아무래도 쟈엘의 호화로운 방도 저 그리슨 대공의 작품인 듯 했다.

그가 물품들을 정리하는 사이 쟈엘은 식사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섰다.

놀랄거라 짐작한 벤의 예상과 다르게 쟈엘은 이미 익숙한지 힐끔 대공을 보며 자연스레 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외출을 나왔나 보군. 네 강아지는?"


"저택에 잠시 재워두고 왔다. 간만에 경매장에 들렀던 참이라. 그런데 학살자는 왜 이곳에
있는거지? 그의 존재가 거슬려서 대령직을 박탈해 가면서 쫓아낸것 아니었나?"
"......"

그랬군.
벤은 새삼스러울것도 없어 다시 침묵만 하는 쟈엘에게 덤덤히 말하며 그에게서 식사를 받아
들었다.

쟈엘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의 친우를 응시했지만 크게 티가 나지 않기 때문인지 대공은


갸우뚱 하다 자신이 가져온 액자를 벽 한가운데에 턱하니 걸고 대단히 만족스러워 했다.

쟈엘은 허탈함에 어깨를 축 늘어 트렸지만 그래도 자신을 위해 선물을 바리바리 가져온


대공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잊지 않았다.

풀벌레 소리마저도 사그라든 늦은 새벽. 벤은 자신을 찾아온 불청객에 눈을 떴다. 예민한


청각은 수인족과 견주어도 모자르지 않을 정도다.
그는 어둠속에서도 유독 환히 빛나는 금안을 발견하고 입꼬리를 매끄럽게 올렸다.

그래. 찾아올 줄 알았지.


눈앞에 선 장신의 사내는 권위적인 얼굴로 벤을 내려다 보았다.

훌러내리는 검은흑발은 언뜻 헤일런을 떠올리게 했지만 서로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이곳에 오래 머물지 말고 떠났으면 한다. 쟈엘은 그대를 부담스러워 해."

흘러나온 목소리는 높낮이 없이 일정했으나 벤은 그 안에서 위협을 읽어냈다.


"어련할까."

애초에 찾아온 목적은 선물이 아니라 자신때문 이었는지 모른다. 저 권태로운 용은 세상일에
관심은 없지만 반대로 자신이 애정을 품은것엔 집착이 대단했다.

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쟈엘에게는 얻을것도 얻은만큼 더 이상 신세질 생각도 없었다.


무엇보다 대공과는 더이상 마주치고 싶지도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인간을 초월한 만큼 그는
존재 자체가 거북했다.

"빚은 이걸로 끝낸다고 대신 전해 주십시오. 인사는 뭐.. 우리사이에 굳이 남길 필요가


없어서 그냥 간다고도."
"...그러지."

대답을 듣자마자 벤은 이미 준비해 두었던 짐더미를 들어 어깨에 짊어 메었다. 대공이 공간을


일그러트리자 그 너머로 낯익은 거리의 풍경이 보였다.
언뜻 날이 밝았을 때 자신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쟈엘이 보일 반응이 궁금했다.
얼마동안 쟈엘의 저택에서 머물면서 깨달았지만 그는 확실히 좋은 사람이었다. 잠자리를
돌봐주고 식사는 물론. 제 심술도 무던히 넘겨주기까지. 자신이 그와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바닥에 처박힌 신세를 조롱하며 진작에 내쫓았을 것이다.
그래서 네 놈이랑 나는 상극이라는 거겠지.

벤은 짧게 웃고는 다리를 움직였다. 저택을 나서는 발걸음엔 당연하지만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

<-- 창부가 되다. -->


                             

벤은 어릴때부터 선하고 정의를 부르짖는 이들을 극히 혐오했다. 가식적이고 역겨운 위선자들.


그런면에서는 지하굴의 칼튼만큼 잘맞는 장사치도 없었는데 한순간의 모욕을 참지 못해서
사이가 틀어져 버렸다.

아쉽게는 하나 이미 지나간 일. 그가 철천지 원수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지금이다."

손을 들자 활 시위가 팽팽히 당겨졌다. 벤은 길목을 서성이는 수인족 둘을 발견하고는 곁에


선 용병들에게 명령했다.
"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십대의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벤은 쟈엘의 저택을 나오자 마자 돈으로 사람을 샀다. 쟈엘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의 저택에
굴러다니는 보석 몇개를 가져왔더니 제법 쓸만한 정도의 금액이 되었다.

그렇게 사람을 산 뒤엔 역으로 자신을 쫓는 수인족들을 사냥했다. 최상의 방어는 공격.


언제까지 숨을 죽이며 도망만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 죽이지는 못해도 머릿수라도 줄여야지.


함정에 빠진 수인족들이 용병들에게 붙들려 팔과 다리가 꺾였다. 찢어질듯한 비명소리에 벤은
손끝이 저렸다. 아아, 내가 직접 난도질 했으면.

흥분한 얼굴로 수인족이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변의 곁으로 덩치가 큰 용병


하나가 다가왔다.

"오오. 우리끼리 할때엔 한참 애를 먹었는데 당신 말대로 하니까 쉽구만. 혹시 수인족 사냥이


전문이오?"
"글쎄, 나는 사람사냥을 더 즐긴다만."

입꼬리를 올리며 서늘하게 웃자 순간 섬뜩해진 남자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벤의 겉모습은 여전히 화려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굽이치는 적발에 마른몸을 부각시키는 검은


드레스. 은발은 눈에 띄기도 할 뿐더러 제 모습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어 모습을
보이기가 곤란했다.

처음에는 제 겉모습에 혹해 꼬여드는 날파리들이 몇 있긴 했지만 본보기로 몇놈을 다져줬더니


-글자 의미 그대로- 이젠 알아서들 몸을 사리고 있다. 역시 세상은 돈과 힘이면 부족할게
없다.

"그나저나 연락은?"
"왔습니다. 하셀에 있는 아란드의 사탑에서 보자고 합니다."

아아. 그럼 그렇지.
벤은 담벼락 위에 앉아 깃이 달린 부채를 흔들며 뒷정리를 지시했다. 헤일런의 실수는 자신을
살려둔 것과 필요에 의해 인간과 손을 잡았다는 점이다.

세상에 인간만큼 교활하고 잔인한 생물도 없다. 그렇게 당하고도 헤일런은 멍청한 짓을
반복한다. 여느 수인족들이 그러하듯. 동물들의 한계다.

차르르. 탁. 챠르르.
손에 들린 검붉은 부채가 활짝 펴지고 다시 좁혀지길 반복했다.
헤일런의 생각을 지우고 다음으로 움직일 경로를 머리속으로 그려보는데 별안간 한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붉은빛이 골목 어귀를 밝혔다.

"이것봐라? 누구 허락받고 내 구역에서 수인족을 사냥해."


"칼튼님. 경매상품 빼앗겼다고 괜한 화풀이는 하지 마십시오."

벤은 낯익은 목소리와 이름에 고개를 돌렸다. 칼..튼?


후끈 거리며 주위를 뒤덮은 열기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용병들이 주춤 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설마하고 돌아본 곳에는 가면을 쓴 청년과 화려한 금발의 청년이 함께 있었다.
젠장. 이곳이 지하굴의 영역이었나.
낭패감에 입술을 짓씹은 벤은 당장에 도주로 부터 살폈다. 당연하지만 이정도 숫자로 그를
상대하는건 어림도 없다.
게다가 곁에는 방심했었다고는 해도 벤을 기절시켰던 금발의 남자도 있었다.
대체 얼마나 운이 없으면 이 넓은 땅덩이에서 그 보기힘든 지하굴의 우두머리를 또 마주한단
말인가.

"...벤 하일즈?"
"......"

알아본것은 금발의 남자, 카시안이 먼저였다.


칼튼의 형제라고 했던가. 이로써 세번째 보지만 지독히도 잘난 낯짝이다. 금발과 저 하늘빛
눈동자도 희귀했을 뿐더러 눈코입의 조화가 마치 조각으로 빚은 듯 흠잡을 데가 없다. 주위에
수인족이 많았던 만큼 빼어난 용모는 많이 봐왔지만 벤이 얼굴만으로 순수하게 감탄한건 저
남자가 단연코 처음이다. 그를 처음봤을 때 수인족으로 착각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당시엔 장난감 귀와 꼬리까지 착용했었으니.

그러나 외모와는 별개로 그는 칼튼과 마찬가지로 원한이 깊은 상대 중 하나다.


모든 사건의 원흉. 애초 저 금발만 아니었다면 칼튼과의 사이가 틀어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벤은 사납게 그를 노려보며 지난 과거를 되짚어 보았다.

1 년전쯤인가. 벤은 평소 자주 애용하던 숍에서 카시안과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다. 당시엔


그가 칼튼의 형제임을 몰라봤다. 전혀 알려진 바도 없었을 뿐더러 칼튼은 항상 가면을
착용하여 얼굴을 가리니 눈치채지 못했던것도 당연하다. 빌미를 제공한건 주인없는 수인족
행세를 한 카시안이다. 벤이 그를 펫취급한건 당연했고 자존심이 상한 카시안은 검을 들었다.
곧 싸움이 붙었다.
그때 방심한 댓가로 벤은 난생처음 기절을 당하고 다리가 부러졌다.
그리고 그 사이 기껏 잡아놓은 헤일런이 도주를 감행했다.

그 두가지 만으로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는데 칼튼의 숍은 벤을 문전박대 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생전 처음겪는 수모에 이성을 상실한 벤은 때 마침 칼튼을 제거하려던 황제에게 합류했고...
곧 패배했다. 죽고 죽이는 전쟁터였다면 벤이 승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권력과 사람을
다루는 일은 칼튼이 한수 위였던 것이다.
황제는 바뀌고. 손을 잡았던 귀족들은 등을 돌렸으며. 벤은 작위를 빼앗겨 헤일런에게 노예로
넘겨졌다.
벤은 인정하기 힘든 참담한 현실에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다 떴다.

"벤 하일즈 대령입니다. 왜 저런 차림인지는 모르겠지만."


"잉? 그럴리가. 하나도 안 닮았는데?"
"확실합니다."

카시안은 드레스와 가발따위로 모습을 바꾼 벤을 잘도 알아보고 확신어린 어조로 말했다.


칼튼은 여전히 긴가민가한 눈초리다. 지난번에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카시안이 옆에서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건 칼튼님이 눈썰미가 없어서..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한대 얻어 맞은 금발이 앓는 소리를 냈다.


....분명 칼튼의 형님이라고 하지 않았나? 존댓말이야 칼튼의 조직내 지위가 있으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벤 자신도 제 윗형제를 업신여기긴 했으나 저정도는 아니었다.

맞은게 아픈지 카시안이 서럽다는 눈빛을 하자 칼튼은 뒤늦게야 미안했는지 제 형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고 달랬다. 저럴거면 때리지나 말것이지. 하여간 하는짓을 보면 성격은
자신보다 더 나쁜것 같다.

벤은 한쪽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용병들을 뒤로 물린 뒤 담벼락에서 뛰어내렸다.

때마침 칼튼은 카시안을 달래고 난 후였다.

"야아. 오랜만이다 벤!"


"......"

활짝 웃으며 손까지 방방 흔들어 대는 모습에 살의가 불쑥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이꼴로 만들어 놓은 주제에 퍽 열렬한 환영인사다. 비웃는게 아니라 정말로 그 전일은
전부 잊은마냥 해맑아서 속이 더 뒤틀렸다.

칼튼은 벤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의아함을 내보였다.

"헤일런한테 도망쳤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꼴이 왜 이래? 여자처럼 생겼다고 진짜 여자라도


되려고? 물론 잘 어울리긴 하네. 창부생활 하더니 아주 색기가.."
"..입 닥쳐."
"우와. 탈주노예 주제에 패기봐라."
"좋을대로 비웃어라. 언젠가는 네 놈에게도 나와같은 지옥을 맛보게 해줄테니."

안광을 빛내며 벤이 적대감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비록 지금은 물러서지만 칼튼에 대한 살의 역시 잊은건 아니다. 불리한 상황에서 도발은
어리석었지만 뺀질거리는 태도가 얄미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벤의 위협에 분노를 한건 칼튼이 아니라 그 옆의 카시안 이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바로 검을 빼어 벤의 목에 겨누었다.

"그꼴을 당하고도 반성을 모르는군."


"워워. 시안 진정해 진정. 내 노예도 아닌데 건방 좀 떨라 그러지 뭐. 얼굴이 예쁘잖아."
"예? 예쁘.."

하늘빛 눈동자에 순간 동요가 어렸다.


카시안이 경악하며 휙 돌아보자 칼튼은 그저 벤을 보며 히죽 웃었다. 도발에는 도발이라
이건가.

벤은 탁 트인 드레스 한쪽을 걷어 올렸다. 세르카 제국인 치고 하얀 살결이 고스란히


드러나자 침삼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그는 천박하지만 야살스럽게 웃어보였다.

"이참에 내 손님이 되어보는건 어때? 극진히 모셔주지."


"그거 참 구미가 당기긴 하네. 야한 창부가 내 취향이긴 한데."
"카, 칼튼님!!"

이유는 모르겠지만 카시안이 불안해하며 낑낑거리자 칼튼은 무척이나 즐거운 듯 했다. 벤이


죽어가는 사람을 볼때와 마찬가지로 조금은 심술궂고, 흥분까지 섞인.. 하지만 그와 다르게
어딘가 간지러운 감정까지.
알듯 말듯 묘한 기류에 벤은 미간을 좁혔다. 어떤 의혹같은 것이 생겼지만 깊게 파고들기를
포기했다. 말장난도 이쯤하기로 했다.

칼튼역시 장난 이었는지 자신을 침대에서 죽여줄 사람은 하나로 족하다며 금발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엉덩이를 움켜잡았다가 놓기까지 했다. 뿌리칠 줄 알았던 카시안은 그에게
밀착하며 가슴에 뺨을 댔다. 형제라고 하기엔 농밀한 접촉들.

벤은 감이 좋았다. 이로 하여금 제 짐작이 맞았음을 알고 혀를 찼다.


하여간 기분나쁜 형제들 같으니.

챠르륵.
왼쪽손에 들린 부채가 넓게 펴져 얼굴을 반쯤 가렸다.

그는 용병들을 돌려세우며 칼튼을 지나쳐갔다. 여기서 부딪쳐봤자 득보단 실만 클테고.


분해도 별 수 없이 한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칼튼 역시 굳이 붙잡지는 않았다.
애정행각이 더 바쁜지 카시안을 끌어안고 대놓고 이마에 키스까지 하며 손을 흔든다.

"만나서 반가웠어 벤. 이젠 원한도 별로 없으니까 또 보자."


"다음은 네 목을 가져갈때 일거다. 나는 아직 원한이 많거든."
"대신 실패하면 나한테 살려달라고 빌지마. 그때는 안살려 줄거니까."
황궁에서 사로잡힌 그때도 살려달라고 빌었던 기억은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거고.

수다스러운 칼튼은 아직도 할 말이 남았는지 또 다시 입을 놀려댔다.

"아, 근데 그리로 가려고? 탈주까지 한 너를 위해 한마디 조언하자면 그쪽으론 가지마.


이번에 잡히면 빼도박도 못하게 노예가 될테니까."
"...잘도 날 위했겠군."
"진짠데. 너 그러다 후회한다?"

후회할텐데.
그 의뭉스러운 한마디가 가슴을 술렁이게 했지만 벤은 코웃음치며 그를 무시했다. 칼튼의
말을 더럭 믿고 돌아서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저놈이 무슨 의리로 제게 도움이 될 조언을
할까. 차라리 그 반대면 몰라도.

그러나 오래지 않아 벤은 칼튼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허억..헉. 빌어먹을. 잘도 날 가지고 노는군."

놈은 분명 자신이 그의 말을 믿지 않을것을 예상하고 던진 말이었을 것이다.

용병들이 하나 둘 죽어가는 모습에 벤은 다친 다리를 절면서 재빨리 뒷골목 사이에 숨어


들었다. 조금전 끈질기게 따라붙는 수인족 하나를 죽이면서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빌어먹을 동물새끼들.
지금까진 장난이었다는 듯 길목마다 함정을 깔아두고 포위를 좁혀왔다. 그리고 하나 둘.
동료들을 죽이며 벤을 고립시켰다.

마치 벤이 수인족들을 사냥했던 방식을 고스란히 본뜬것처럼.

그들의 손에는 인간들이 쓸법한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인간을 답습하는 것이었다.


소름끼치게도.

"이 근처에서 핏자국이 끊겼으니 멀리가진 못했을 거다."

움찔.
스쳐지나가는 검은그림자에 벤은 숨을 죽였다. 놈들은 주변을 탐색해 나갔다.
다행히 근처가 전부 피로 범벅되어 있어선지 벤을 쉽게 찾지는 못했다.

벤은 자신이 사냥감이 되었다는 사실에 피가 거꾸로 솟을것 같은 분노를 느꼈지만 달리


방책이 있지도 않았다.
온몸을 조여오는 긴장감에 숨이 빨라지고 근육이 수축했다. 벤은 최대한 몸을 웅크리며
소리가 새지않게 입을 막았다.
그러다 문득 제 모습이 우스워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숨어만 있어서 어쩔건데.

놈들이 바라는건 자신이 겁을 집어먹어 스스로 막다른 구석까지 몰리는 일일터.


원하는 대로 해줄수는 없지.

"어? 잠깐. 거기 너 뭐야?"


"......"

골목에서 나온 벤의 모습에 수인족 하나가 민감하게 반응하며 다가왔다. 여자의 모습이라


그런지 크게 공격적이진 않았다. 벤은 빠르게 몸을 짓쳐 들었다.
푹. 가슴팍에 박힌 단도를 비명을 채 지를 틈도 없이 비틀었다.
꿈틀거리는 육체의 숨을 끊기 위해 검을 빼냈다 다시 한번 박아 넣었다. 크게 뜨여진 동공.
벌어진 입에선 검붉은 피가 주륵주륵 쏟아졌다.
바닥을 적시는 피를 건조하게 바라보던 벤이 검을 뽑았다.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툭 바닥에
처박혔다.

자신이 조심해야 하는건 헤일런이나 그의 바로 밑인 늑대나 호랑이 같은 맹수과의 수인족들


뿐이다. 그 외엔 차라리 정면돌파가 나았다.

수인족을 여럿 만났을 때는 제 겉모습을 이용해 방심시키고 포위를 뚫었다. 다리가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늘어지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체력적인 한계가 드러나자 괜한 오기가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하아..하."

벤은 지나가던 이를 붙잡아 강제로 옷을 바꿔 입은 뒤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시로 숨어 들었다.


도시 하셀은 무역교역로 중 하나로 장이 많이 들어서고 인구가 밀집된 곳이다. 이중에
섞여들면 찾기 힘들겠지. 그런데다 아란드의 사탑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벤은 근처에 수인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아 날카롭게 곤두세웠던 신경을 조금 누그러트렸다.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까지는 완전히 방심하지 않았다.

인파에 밀려 비틀 거리던 벤은 등뒤에 있는 누군가와 몸을 부딪쳤다. 툭.


신경질적으로 돌아보려다 어떤 감으로 벤은 멈칫 고개를 멈춰 세웠다.

두근..

"......"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건.. 분명 놈이라고.
피가 얼어붙고 모골이 송연한 느낌. 벤은 조여오는 심장을 억누르며 차분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머리채를 움켜쥐는 손에 몸이 뒤로 끌려갔다.
덮어썼던 가발이 떨어지고 벤 본연의 은발이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좀 더 꼭꼭 숨어계셨어야지요 벤. 이렇게 죽은자들의 냄새를 몸 곳곳에 묻혀서야."


"......!"
"눈을 감아도 당신의 체취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귓가에 나른하니 흘러드는 목소리. 이윽고 허리를 끌어안는 단단한 팔에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이런! 벤은 반사적으로 품안에 숨겨두고 있던 단도를 휘둘렀다. 채앵!!
공격은 가볍게 막혔다. 이윽고 손목이 붙들리고 칼이 떨어졌다. 뒤로 다리를 찍어 공격하려
했으나 헤일런은 이조차 예상한듯 간단히 벤을 제압했다.
수인족의 완력에서 벗어나는건 지금의 벤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겁먹은채로 숨는데엔 재능이 없었죠. 그 끝은 언제나 공격. 기다리면


알아서 나와주실것 같았습니다."
"헤, 일런.."

손가락과 손가락이 진득하게 맞물린다. 입에 천뭉치가 물려졌다. 심장이 보다 빠르게 뛰었다.


의미하는 바를 알아챈 벤이 이를 악물었다. 벤이 언젠가 도망친 헤일런을 붙들고 가장 먼저
했던 일. 이윽고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아찔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으욱..!
맞잡힌 손가락이 하나 하나 꺾이자 벤의 몸이 덜컹 흔들렸다.

"..차라리 쟈엘대령에게 몸을 의탁했으면 좋았을텐데 나의 벤은 같은 인간조차도 믿지


못하지요. 불쌍하게도."

식은땀을 흘려대는 벤을 바짝 끌어안으며 헤일런이 귓가에 입술을 붙여 낮게 웃었다.

"그래서 제가 드린 마지막 자유는 마음껏 즐기셨습니까?"


 

<-- 부서지다 -->


                             
벤에게 있어 헤일런의 존재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해 줄 수 있는 노예. 장난감. 수인족임을
알았던 그날부터 그의 가치는 그것이 전부였다. 불과 반년전까지만 해도.

..
벤은 바르작거리는 검은남자를 짓누르고 손바닥에 날카로운 단검을 박았다. 피부를 찢고
근육마저 파헤치는 칼날에 검은 눈동자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러면서도 차마 비명은
지르지 못하고 이를 악문다. 철저히 제게 순응하는 모습에 발끝부터 저열한 쾌감이 올라왔다.

그렇게 다른 왼쪽손 마저 단검으로 박고나면 남자는 마치 핀에 고정된 곤충처럼 꼼짝도


못하고 창백히 질린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 보게 된다.

벤은 침대에서 언제나 이 각도의 체위를 선호했다. 상대보다 자신이 우위라는. 누군가를


짓누르고 지배하는 형태가 그에게 만족감을 선사했다.

["크윽..!"]

벌어진 다리사이로 단단한 성기를 밀어넣자 야한 눈매가 반으로 접히며 파르르 떨렸다.
좁은 구멍은 언제나 처럼 뜨거웠고 벤의 것을 기다렸다는 듯 조여 물었다.

몇번의 추삽질에 칼날이 박힌 손등은 크게 피로 뒤덮였다. 뼈나 신경에 문제가 있을수도


있었지만 벤은 개의치 않았다.

하아. 하..
가쁜 숨을 삼키는 남자의 눈가가 빨갛게 충혈되어 물기를 적셨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듯한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고여있기만 했다.

벤은 손을 뻗어 눈가에 찍힌 눈물점을 문질렀다.


창백하게 질려있는 하얀 얼굴에 흐트러진 검은머리와 그와 같은색의 눈동자.

어릴때와 같지만 아이는 그사이 청년이 되었고 작고 여린 몸도 벤만큼이나 크고 단단해졌다.

["..대령."]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벤을 불렀다.


언제가 부터 이름을 부르지 않는 헤일런은 그의 직함을 대신 입에 담았다.

벤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거칠게 휘갈겼다. 철썩, 실내가 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둔탁한


소리와 함께 헤일런의 얼굴이 반쯤 돌아갔다.

희게 질렸던 뺨은 금세 실핏줄이 터지고 붉게 부어 올랐다.

["건방지긴. 내가 네놈에게 가르친 말은 따로 있을텐데."]


["......"]
["불러봐. 뭐라고 했지?"]
["주인님."]
헤일런은 얌전한 노예였다. 짐승같은 눈빛은 여전하지만 제 차지에 순응하고 별다른 반항없이
무릎을 꿇고 벤의 발아래 납작 엎드린다.
처음 보였던 충격이나 허탈한 감정도 이제는 체념에 묻혔는지 지나치게 차분하기만 하다.

때때로는 그게 거슬려서 더욱 잔혹하게 굴기도 하지만 그의 반응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좋아. 말해봐."]

벤은 헤일런의 밤처럼 깊은 흑발을 쓰다듬었다.


눈앞의 수인족은 귀와 꼬리가 드러나지 않았기에 기실 인간과의 차이는 없었다. 늘 헤일런을
찾고 곁에 두는 이유도 다른건 아니었다. 인간의 모습인데다 누구보다 튼튼하고 회복력도
빠르니 가지고 놀기에 용이했다. 헤일런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마른 입술을 떼었다.

["주인님. 목이 마릅니다."]
["아아, 하긴. 벌써 이틀째니까."]

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에 찔러넣었던 성기를 빼내었다. 순순한 반응이 의아한 듯 검은


눈동자가 그를 올려 보았고 벤은 빼낸 성기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그저 명령했을
따름이다. '벌려'하고.

* *

웃고있는 헤일런의 얼굴에 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지금까지는 잡히면 잡히는 대로. 혹은


체력이 다하면 그대로 체념하고 말았지만 지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수가
없었다. 기분나쁜 기시감이 등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잡히면 안돼, 이 섬뜩한 감각은
언젠가도 한번 겪은적 있었다.

초조한 마음에 멀쩡한 다른 한손으로 공격을 가했지만 곧 명치를 얻어 맞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벤은 몸을 일으키다 말고 해일처럼 덮쳐오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온몸의


근육이 유리조각 따위에 갈기갈기 찢긴 기분.
손부터 팔. 그리고 다리가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마치 부러지기라도 한마냥.

그런데다 복통까지 밀려들어 벤은 숨을 들이켰다. 시선을 내리자 평소보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배가 보였다. 다리 사이로는 투명한 호스가 길게 늘어졌다. 상황을 짐작하기까진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깨어나셨습니까? 조금 더 주무시고 계셨을 편이 좋았을텐데."

벤의 머리맡쯤에 의자를 두고 앉아있던 헤일런이 여상한투로 읽고있던 책을 덮었다.

"흐으..그, 그만둬."

밑으로 물이 한가득 담겨지고 있었다. 이미 한계치로 부풀어 오른 배임에도 마련되어 있는


물은 아직 반이나 남아있다. 바같으로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깊게 파고든 모양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헉. 헉. 헛구역질이 올라와 벤이 괴로워 하자 다가온 헤일런이 봉긋하니 솟은 배를
손바닥으로 만졌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금방이라도 팽창한 복부를 누를듯 꾹 힘을 주자 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관장을 처음 겪는건 아니었지만 이번엔 도가 지나쳤다.

헤일런은 그런 반응에도 차분한 투로 입을 열었다.

"고작 반이 들어갔을 뿐입니다. 저는 한때 이걸 전부 넣었던 걸로 기억하니 제 전주인님도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크윽...윽!"

뱃가죽이 찢어질듯한 늘어나고 내장이 온통 물로 가득찬 느낌이었다. 발버둥을 치며 몸을


뒤집고 싶어도 부러지고 비틀린 팔다리는 마음대로 움직여 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만
가중될 뿐이었다.

커다란 구체가 물이 새지 않게 뒤를 막고 있음에도 어느새 허벅지 사이로 투명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만둬. 하지마.
벌어진 입으로 금방이라도 뱉고 싶은 말이었지만 벤은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흠뻑젖고 벌어진 다리가 경련하듯 떨려왔을 쯔음 고문과도 같은 행위가


끝이났다.

속이 메스꺼워 벤은 연신 욱, 토악질을 하며 숨을 헐떡였다.

"헉..하윽. 하.."
"흐음. 구멍이 작아서 그런가 이정도 크기로는 제대로 뒤가 막아지지 않는군요."
"뭘 하려고, 윽!"
뒤를 막고있던 동그란 구가 빠져 나갔고 이어 물이 새어나가기도 전에 그보다 더한 크기의
물건이 안을 사정없이 파고 들었다. 아래가 이미 가득찬 상황에 일전보다 커다란 모형이 퍽,
쳐올리자 눈이 충격으로 크게 뜨여졌다.

"으아, 아악!!!"

입구가 찢어지고 밀려드는 배설감에 벤은 악다문 턱을 부들부들 떨었다. 배, 배가.. 팔을


꿈틀 움직이다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자 절로 욕설이 튀어나갔다.

당장에라도 밑을 틀어막은 기구를 빼고 싶었다. 비정상적으로 부푼 배와 출렁이는 물의


감각이 못견디게 아프고 끔찍했다.

이정도로 사람이 죽지 않는건 알지만 경험하는 벤으로선 정말로 죽을것만 같았다.

"빼...!"
"보기 좋지 않습니까? 새끼를 밴 암컷같은 모습입니다만."

빼, 빌어먹을. 빼란..말이야!
자신을 조롱하는 말에 일일히 귀를 기울일 수 없을 정도로 벤의 신경은 모조리 아래로 쏠려
있었다.
헉..허억. 헉.

그런 와중에도 벤이 그에게 애원하는 일은 없었고 잘못을 구하는 일도 없었다. 지독한


자존심이었다.

헤일런은 그의 눈동자가 반쯤 풀려 정신이 나갈때 쯔음에야 손을 뻗어 밑을 막고 있던 물건을


빼내 주었다. 크게 벌어진 구멍으로 그간 막혀있던 물이 기다렸다는 듯 뿜어져 나왔다. 제
아무리 벤이라도 지극히 당연히 생리현상까지 의지로 참아내진 못했다.

시트가 온통 아래에 담고있던 물으로 흥건히 젖었다.


헤일런은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 벤의 다리를 양쪽으로 크게 벌렸다.

뭐..
놀랄틈도 없이 아래 구멍을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이 혹사당한 안을 무자비하게 쑤셨다.

"!"

추삽질을 하듯 거칠게 퍽퍽 내벽을 들쑤시자 내부에 고여있던 물이 출렁거리다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벤은 다리도 오므리지 못한채 그 감각을 견뎌야만 했고 그후로도 몇번. 헤일런은
안을 자극하며 물을 깨끗히 비워냈다.

수치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몸을 잠식했던 지나친 고통때문인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슴이 크게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들숨과 날숨을 반복했다. 이성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벤은 몸을 일으키려다 허리 아래부터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곧 포기했다. 자신의 몸이 무슨짓을
한걸까.
전쟁을 치르면서 팔 다리가 부러져 본적도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지금처럼 근육과 뼈
마디마디 마저 유리조각에 헤집어지는 고통이 느껴지진 않았다.

"내게, 무슨짓을 한거야."


"글쎄요. 저는 그저 명령을 해뒀을 뿐입니다. 당신의 신체에 칼을 박아넣은 것 같은 고통을
안겨달라고. 그래도 자르진 않을테니 걱정마십시오."

벤은 지쳐 널브러진 채로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도주한게..하. 그렇게 분노할 일이던가? 아니면 널 공격했던게 분했나."


"화가 난것 같습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포기하지 않았단것 쯤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것 치고는 나를 다루는게 평소보다 심한데."

첫시작이 이정도라면 이 뒤야 말할것도 없다. 하지만 헤일런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말처럼 분노의 기색은 드러나지 않았다.
정말로 아닌건지 숨긴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른게 아니라 도주하는 노예를 언제까지 두고볼 수만은 없어서 교육을 하려는 겁니다.
단순한 편의의 문제지요."
"......"
"기억나십니까? 당신이 그런말을 했었죠. 머리나쁜 짐승은 매로 가르쳐야 한다. 잘못된
행동을 반복한다면 그것에 대한 대가를 몸으로 체득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벤은 인간이지만
그 이전에 노예이니 짐승처럼 다뤄도 이의는 없겠지요?"

헤일런의 손이 어깨에 닿았다. 인상을 찡그리다 곧 살갗을 파고든 날카로운 손톱에 헉 숨을


삼켰다.
마주본 헤일런의 동공은 평소와 달리 마치 고양이의 그것처럼 세로로 길어졌다.

변이의 과정이었다.
벤은 얼어 붙은 듯 몸을 굳혔다. 떠오르는건 모든 것이 뒤바뀌었던 그날의 기억.

어둡고 비좁은 지하실. 자신을 둘러싼 짐승들. 코를 마비시킬것 같았던 악취. 무력했던 자신.
비참하게 흔들리던 육체.
귓가에 흩뿌려졌던 발정난 짐승의 숨소리.

어떤 고문이나 폭력에도 굴하지 않던 벤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동요를 보였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혐오와 선명한 공포였다.
덜덜 떨리는 나신에 헤일런은 만족한 웃음을 덧그렸다. 그 웃음은 언젠가의 벤과 꼭 닮아
있었다.

"몇번이고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저항할 마음도 들지 않게 부수고 또 부수다 보면.


당신도 언젠가는 체념하게 될겁니다."
"아, 안돼. 하지마!!!"

비명처럼 내질러진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벤을 짓누르는 무게가 사라지진 않았다. 이윽고 그


자리엔 헤일런이되 헤일런이 아닌 다른 존재가 검은눈동자를 빛내며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 부서지다 -->


                             
벤이 칼튼에게 패배하고 헤일런의 노예가 되었던 그날. 벤은 좁은 지하실에서 동물들에 의해
윤간을 당했다. 아니 정확히는 수간.
노예보다도 천대하던 짐승들에게 짓눌려 무력하게 휘둘렸다.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그때의 참담함이란.

마지막으로 벤을 범한건 재규어로 수인화를 한 헤일런이었다.


검은색의 몸체가 커다란 재규어는 전에 없이 사납게 벤을 압박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저항을 누르고 거세게 몰아부쳤다.
그의 행위는 하루고 이틀이고. 벤의 살기어린 눈동자에 공포가 선명히 새겨질때 까지
계속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서열확인과 같았다.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의 위라는.
제 아래로 여기던 상대가 반대로 자신을 위에서 내려본다는 것에 벤은 끔찍한 모멸감을
느꼈다. 하물며 헤일런은 실제로 그의 밤노예 였었다. 수치심. 살의. 증오. 종전의
짐승들에게 느끼지 못한 수많은 감정들이 휘몰쳤다.

의식과도 같았던 그날 이후 벤은 백치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조각나버린 자존심. 자긍심.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하룻밤만에 바뀌어 바린 현실역시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그러나 헤일런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벤의 몸을 걸레처럼 돌렸다.

그 와중에 정신을 차린 벤이 독기만 남아 아득바득 저항하자 이번엔 같은 수인이 아니라


약으로 눈이 번들거리는 수캐 몇마리를 데려왔다.

범해지기도 전부터 치미는 거부반응에 벤은 발작하듯 몸을떨며 토악질을 했다. 헤일런으로


하여금 무의식중에 새겨진 공포가 다시금 그를 덮친것이다.

막 삽입이 이루어지기 직전 다행히도 헤일런은 개를 거두었고 아무말도 없이 돌아섰다. 그


나름의 경고였다.
이후의 일은 지금과 같다.
벤이 여태껏 창부생활에 순순히 적응하고 헤일런의 말에 나름 고분고분 따랐던 것은 제 몸의
안위와 실리적인 복수를 위해서 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악몽같던 기억이 밑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치 암묵적인 합의처럼 벤이 어느정도 수그러들자 헤일런도 더이상 수간을 명령하진 않았다.

가끔 벤이 성질을 못이겨 난동을 부릴때 조차 체벌따위로 대가를 치르게 했을 뿐.

"하아..하."

가늘에 뱉어지는 숨소리에는 미묘한 떨림이 묻어났다.


자줏빛 눈동자에 담긴 검은 재규어는 인간의 모습에 비해 크고 길었다.
우아하게 뻗은 팔과 다리.
몸을 덮은 융처럼 부드럽고 까맣게 빛나는 털. 유연한 허리와 길게 뻗은 꼬리. 그를 내려다
보는 동공은 이제 완연한 동물의 그것이었다.
누군가는 그를 보고 근사하다 감상을 뱉을 법도 하나 벤은 두번다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윽!"

거대한 재규어의 앞발이 어깨를 짓눌렀다. 벤은 희게 질린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한입에 삼킬듯 쩍 벌어지는 짐승의 주둥이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눈에 띄었다.

할짝..

돌기가 돋아난 까슬한 혓바닥이 목덜미를 핥아오자 바짝 얼어붙은 벤은 비명도 흘리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심장마저도 멈춘 기분이었다. 어둠속에서는 노란빛을 내는 눈동자가 그를 제
앞발 사이에 두고 먹이처럼 사로잡았다.

솔직한 말로 그는 헤일런에 대한 혐오와 함께 자신의 정체성마저 앗아갈 이 행위에 극한


두려움을 느꼈다. 할짝 목덜미를 몇번인가 핥던 헤일런이 이를 세워 연약한 피부를
잘근거렸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흐르는 피에 벤이 흠칫 놀라자 헤일런이 그르릉 목을 낮게 울렸다.
발정한 모양인지 그의 하체가 다리사이에 달라붙어 노골적으로 비벼왔다.

이윽고 아래를 뭉근히 눌러오는 거대한 성기에 벤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떼었다.

"하지마."
"......"
"하지마..하지마. 더러운 짐승주제에, 더 이상 내게 손대지 말란 말이다."
노려보는 눈동자와 명령조의 말투는 여전하지만 그것은 어쩐지 애원을 닮아 있었다.

그러나 헤일런의 성기는 자비없이 구멍을 파고 들었고 짐승의 몸이 완전히 겹쳐지는 순간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으, 욱.."

끔찍하다는 듯. 질겁을 하며 벤이 고개를 저었다. 검은눈이 그런 벤을 무심하게 내려다


보았다.
마지막으로 헤일런의 수인화를 봤을 때 보다 그 존재감이 더 크게만 느껴지는건 그에 대한
공포가 모르는사이 더욱 자라났다는걸 의미했다.

공포라는 감정은 한번 체득하고 나면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 전쟁터를 휘젓고 다니며


타인의 나약함을 즐기던 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무저갱이나 다름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들러붙어 육체를 집어삼키고 이성을
마비시킨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겪고나면 무뎌지고 익숙해지겠지만. 그 익숙해 지는 과정에서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안돼. 이런걸 어떻게 견뎌.. 나는.

"아아, 악!! 아악!!"

투둑. 툭.
여린살이 찢어지며 뭉툭하고 커다란 것이 안을 단번에 뚫고 들어왔다. 앞서 관장을 빙자한
고문보다 더한 고통이 하반신을 관통했다.
수인화한 재규어의 성기는 인간의 것보다 뜨겁고 단단했다. 크기야 말할것도 없었다. 흥분한
짐승의 숨소리. 맥박치는 핏줄까지. 모든것이 예민하게 와닿아 더 괴로웠다.
벤은 저를 붙잡고 가두는 재규어의 품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단순히 아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의 근본을 부수는 이 행위가 싫었다. 그러나 망가진
몸은 무력하여 주먹하나 제대로 오므리지 못했다.

그만해. 싫다. 죽어버려. 역겹고 더러운 짐승새끼..할수만 있다면 네 심장에 칼을 박고 전부


찢어버릴텐데.
터져나오는 비명에는 밑바닥 까지 추락한 자신과 그에 대한 경멸이 가득 쏟아졌다.

"헉..허억. 크흑..윽."
벤은 그 순간 옴짝달싹도 못하게 붙들린 사냥감이었다. 교미를 위해 흔들리는 한 마리의
암컷이었다.

굵고 뜨거운 것이 내부를 휘저을 때 마다 눈 앞이 아찔했다.


뜨거운 불덩이로 안을 지지는 마냥 퍽, 퍽 쳐올리는 성기는 마치 흉기와 다를바가 없었다.
날카롭지만 둔중하기도 했다.
허리와 그 아래에서 치미는 고통과 정신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은 기분에 눈앞이 하얗고
검게 물들기를 반복했다. 생각이 이어지질 않는다.

몸이 뒤집히고 허리가 붙잡혔다. 제게 올라탄 헤일런의 반복된 추삽질에 벤은 그와


마찬가지로 짐승처럼 헐떡였다.
아팠다. 묵직한 체중에 억지로 꿇려진 다리와 매달릴 곳 없이 내팽개쳐진 팔이 아팠다.
신경이 조각조각 칼로 후벼지는 듯 날카로운 고통이 오가고 철썩 철썩. 음란한 마찰음이
메아리쳤다.

쿵,
순간 장기가 전부 위로 처박히는 감각에 토기가 치밀어 오른 벤이 입을 벌렸다.

"흐으..아..악!"

귓가에 뿌려지는 뜨거운 숨소리에 진저리가 쳐졌다. 몸이 잔뜩 경직되어 그의 것을 잔뜩 물고


늘어진 주름이 꽉 조여들었다.

엉덩이 사이로 퍽퍽퍽, 인간이 아닌것의 성기가 쉴새없이 짓쳐들고 몸뚱아리가 힘없이
흔들렸다. 아아. 벤은 문득 자신이 갈고리에 걸린 고깃덩어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덜미와 등가죽이 할퀴어지고 찢겨 시트가 붉게 물들었다. 이어 더러운 짐승의 좆물이 내장


깊숙한 곳에 가득 퍼졌다.
줄줄 흘러들어가는 소름끼치는 감각에 벤이 우윽,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이것이 싫었다. 마치 자신마저도 저 더러운 것들과 함께 인간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는 것
같아서. 씻어내지 못할 모욕감이 그의 정신을 갉았다.

눈을 감고 경련하는 몸으로 뒤로 느리게 빠지던 성기가 다시 강하게 처박혔다.

"흐악! 아, 아아!"

커다랗지만 인간이 아닌것이 제 등에 밀착한다.


찢어지고 부어올랐던 입구가 주름하나 없이 팽팽히 늘어났다. 우윽!
뒤따라 밀어붙이는 힘에 숨이 모자랐다. 가슴이 꽉 눌리고 익숙치 않은 부피감에 배가
묵직했다. 체내에 받아들인 정액이 질꺽질꺽, 추삽질이 이어질 때 마다 피와 섞여 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푸욱!, 이내 헤일런의 성기가 더이상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 가장 깊은곳 까지 꿰뚫었다
하아..하. 하아.
시트도 움켜쥐지 못한 손가락이 부러진 더듬이처럼 꿈틀 작게 경련을 하다 말았다.
의연하게 견디며 이따위로는 자신을 억압하지 못한다고 비웃고 싶었지만 그저 고개를
시트위에 처박은 채 신음을 흘리는게 전부였다.

저항은 커녕 공포에 사로잡힌 몸은 잔뜩 움츠러 들어 농락당했다.


금이간 자존심이 숨막히도록 아팠다.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악몽의 재림.

끔찍해.
종내엔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이 순간 만큼은 분노도 치욕도 증오도 그 무엇도 붙들고
있을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번인가 짐승의 욕정을 받아내다 벤은 어느순간 의식이 끊겨 버렸다.

....

철썩,
귓가를 올려붙이는 강한 통증에 벤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팔 다리는 여전히 망가진 인형처럼 툭 늘어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엉망이었다. 무리한


삽입으로 연신 욱신 거리는 배와 다리 사이도. 뺨을 맞고도 분노조차 하지 못하는 제 상태도.
희미하게 보이는 시야에 검은머리의 청년이 보였다. 신사처럼 잘 차려입은 검은 정장에
단정하지만 눈물점이 야한 얼굴.
저를 범하던 검은 재규어의 모습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인간의
형태라는데 안도감이 먼저 들어 벤은 헛웃음이 나왔다.

"입 벌리십시오."
"......"

아무말도 하지 않는 벤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주르륵. 차가운 액체가 흘려 넣었다.


갈증으로 목울대를 넘기는 순간 헤일런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가 벤을 향해 말해왔다.

"끔찍합니까?"
"......"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합니다. 당신은 제 노예이니까요. 내겐 당신을 지배하고
가르칠 권리가 있습니다."
"..인정할 수 없다. 인정안해."

지치고 한풀 기가 꺾여 독기어린 목소리는 없었지만 그가 지켜야할 부분은 아직 부서지지


않았다. 자신은 인간이다. 설사 짐승따위와 몸을 섞고 그의 지배하에 놓여진다 해도. 절대
그것 하나 만큼은 지켜야만 했다.
헤일런은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벤의 고집정도야
어느정도 짐작했던 터.
"아직 시간은 많으니 좋으실대로. 다만 이제부턴 최대한의 배려로 당신도 즐길 수 있게 도와
드리겠습니다."
"뭐?"
"당신의 못된 버릇은 고쳐야 겠고. 그런데 폭력이 통하지 않으니 방법을 달리할 밖에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벤은 손가락을 굽히려다 찌릿 올라오는 통증에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 끔찍하게 아프군.
여러차례 고문을 당해보긴 했지만 지금처럼 통증 때문에 옴짝달싹도 못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헤일런이 벤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넣고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그 잠깐의 접촉만으로도 벤의 얼굴은 단번에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심장이 술렁이며 불안하게
뛰었다. 헤일런에게 접질린 손가락이 주체할 수 없을만큼 떨렸다. 단순히 고통만이 그 이유는
아니었다. 그러나 헤일런은 의외로 순순히 손을 놓아주고 호랑이 수인족을 불러 벤의 다친
부위들을 간단하게나마 치료하게 했다.
벤은 제 몸의 반 이상이 연고 투성이가 되고 붕대에 감길때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이제 아프지만은 않을테니까요."

벤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곧 긴장한 몸을 축 늘어트렸다.


제 아무리 자신이라도 역시 충격이 크긴 했는지 더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쉬고싶었다.

<-- 부서지다 -->


                             
교성에 가까운 신음이 쉴새 없이 쏟아졌다.
자신의 몸이 통제를 잃고 멋대로 허리를 흔들고 행위를 조르지만 벤으로서는 멈출 수 있는
방도를 몰랐다.

그는 헤일런이 말한 '즐길 수 있다는 것'의 의미를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약물에 의한 강제적인 성교.


몸을 장악한 뜨거운 열락이 이성을 앗아가고 나면 벤은 그저 본능만이 남는다.

헤일런의 말처럼 고통은 없었다. 오히려 눈앞이 아찔할 정도의 쾌감만이 그를 지배했다.

손끝이 닿는 부위가 제 멋대로 움찔 거리다 이내 불에 덴듯 화끈하게 달아 올랐다.


밭은 숨을 뱉어내고 고개를 들면 검은짐승이 그의 위를 덮쳐온다. 묵직한 중압감에 벤은
조금의 저항도 하지 못했다. 피가 식어버릴 정도의 공포는 여전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짐승의 거대한 성기가 깊게 파고들었다. 입구를 벌리고 내부를 가득
채우는 부피감은 지난날과 달리 벤의 성감대를 자극했고, 그에게 고통과는 다른 감각을
선사했다.
짐승따위에게 뒤를 파헤쳐 지면서 느껴서는 안될.

"흐악..! 아, 아아!!"

뿌리 끝까지 들어찬 성기는 대단히 길고 굵어 그의 목구멍까지 뚫고 들어올것 같았다.

색색의 불꽃들이 튀고 척추를 타고 저릿한 감각이 해일처럼 밀려든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발정하는 몸은 지나치게 수치스럽고 모욕적이다. 몸이 아닌 정신을


능욕당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곧 까무룩 침몰해가는 의식속에 묻혀 버릴터.
퍽, 퍼억! 내장까지 밀어 올릴듯 강한 추삽질이 이어졌다. 안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는 그의
움직임에 허리가 멋대로 튕겨 올랐다. 다물지 못한 입가로 타액이 흘렀다.
벤은 할딱거리며 손가락을 꽉 쥐었다. 아직 아물지 못한 손가락은 녹슨 쇠처럼 움직임이
둔했다.

"하아..하. 흐으..! 윽."


"어떻습니까? 당신도 이제 제법 즐기시고 계신것 같은데."

묵직한 무게가 줄고 어느샌가 사람으로 변한 헤일런이 귓볼을 혀로 핥았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등줄기가 바르르 떨렸다. 그가 사타구니를 추어 올리자 퍽 하고 충격이 가해진 내벽이
얼얼한 고통과 함께 진한 쾌감을 안겼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분명 뒤의 자극만으로 벤의 성기는 빳빳히 서서 끈적한 액을
흘려대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꺼덕거리는 앞을 매만지며 조롱한다. 음경을 어루만지고
종내엔 흠뻑 젖어버린 귀두끝을 문지른다.

벤을 내려다 보는 검은눈동자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말로하지는 않았지만 전해오는 바는


명확하다. 참을 수 있다면 어디 그 잘난 자존심으로 한번 참아보라고.

아아..
알면서도 발작하듯 덜덜 떨리는 몸은 그에게 더한 자극을 원했다. 수치를 모르고 뻐끔거리며
개폐하는 구멍이 짐승의 성기를 게걸스레 탐한다. 들러붙고 있는 힘껏 빨아당겼다.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맛있습니까?"

낮게 웃음소리를 낸 헤일런이 힘차게 오르락 거리는 벤의 가슴에 얼굴을 대었다.


어딘가를 더듬거리며 어루만지는 손길이 있었지만 선명하진 않았다. 그는 엉덩이살을 아프게
쥐기도 했고 때로는 머리칼 사이로 손을 넣어 가볍게 흐트러 놓기도 했다.

헤일런은 속도를 한층 더 높였다.


질척. 퍽, 퍽, 퍽!!!
사정없이 몰아치는 난폭한 성교에 불꽃이 튀어 올랐다. 중추신경을 타고 번지는 불길에
오금이 절로 오므라 들었다. 사지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약의 효과라면 지난번 난교파티에서 먹었던 일회용과는 차원이 달랐다. 강도에서의 차이는


물론 중독성 마저 있어 사람의 식욕이나 수면욕구 마저도 잊게했다.

"흐, 아악...!"

절정이 임박해 왔다. 들썩들썩 허리를 흔들다 사정을 마치자 내장 깊숙한 곳에 그의 정액도
줄줄이 쏟아졌다. 임신이라도 시키는 끝도없는 양에 아랫배가 가득차 포만감 마저 들었다.
바르작 거리며 벤이 신음했다. 헤일런은 그가 다른 생각에 빠질 여력을 주지 않았다.
사정직후의 예민한 몸을 제 위에 얹고 다시 아래를 부풀렸다. 하아..하. 땀이 얼굴을 흠뻑
적시며 떨어졌다.

더러워. 더러워. 그런데도 이 미칠것 같은 쾌감은 뭐란 말인가.


상대가 헤일런임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다리가 그의 허리를 꽉 감싸 안고 행위를 조른다. 아직
부족했다. 자신은 좀 더 거칠고 깊게 휘저어 주었으면.

아, 아냐. 안돼..그만둬.
뒤늦게야 제 행동을 깨닫고 고개를 저어보지만 먼저 움직인 쪽은 헤일런 이었다.
지나친 쾌락의 물결에 벤은 또 다시 이성을 놓고야 말았다.

이후의 기억은 언제나처럼 흐릿했다.

“…하아. 하..”

창 하나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벤은 낮과 밤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날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그리고 지금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잠이 들었을때나 눈을 떴을때나 곁에는 언제나 헤일런이 있었고 자신은 의식할 새도 없이


다리를 벌린 채 성욕에 헐떡인다.

가끔은 식사를 하다 말고 발정이 나서 그에게 먼저 덤벼든적도 있었고. 욕실에서 몸을 씻다


말고 엎드린채 꿰뚫린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기억은 엉망으로 뒤엉켜 하나로 이어지지
못했다.

욱신. 지나친 약물복용으로 두통이 찾아왔다. 그런데도 몸은 여전히 뜨겁고 각인된 쾌락을
쫓는다.

짐승도 이런 짐승이 없군.


간혹 정신을 차릴때 벤은 그런 생각을 하곤 하지만 이조차도 오래가진 못할것이다.
하루 이틀은 강도가 남달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지만 기억조차 흐려질 쯔음에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헤일런은..
저 머리좋은 짐승은 벤을 약에 절여 미치게 만들 작정인 듯 했다.

"흐윽...큿!"

그런 속셈이라면 가히 성공적이었다.
이성이 사라지고 동물처럼 본성만이 남는 기분은 생각보다 비참하고 끔찍했다.
짐승의 모습으로 범해지는 것보다 더한 고문이 있을줄이야.
내가 내 자신이 아니게 되는 기분. 이건 자아의 상실과도 같았다.

이 모습이야 말로 육욕의 노예이자 그를 위해 다리를 벌리는 바람직한 창부의 모습이 아니고


뭘까.

섹스가 끝난 뒤 헉헉 숨만 몰아쉬는 벤의 입에 문득 잔이 기울여졌다.


차가운 액체가 스며드는 느낌에스라치게 놀라 그것을 뱉어냈다.

웩, 목구멍에 손가락까지 집어넣어 토해낸 벤이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왜 근래에는 약을 먹는 기억조차도 없는가 했더니 행위 도중에 틈틈히 먹였던 모양이다.

"왜 그러십니까 벤? 목이 마르실텐데요."


"집어치워!!"

벤이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 세운채 몸을 뒤로 물렸다. 사납게 쏘아지는 눈초리.


경계하며 명백히 거부의 반응을 보이자 헤일런은 그저 웃고만 말았다.

벤은 헬쓱해진 얼굴로 이를 빠득 갈았다. 얼마만에 돌아온 정신인데 또 약에 휘둘릴 수는


없었다.

지하굴에 성노를 길들이기 위해 제조된 약이 있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써본적이 없어 그


효과가 이렇게나 지독할 줄은 몰랐다.
벤은 취향상 이지를 상실한 인간은 병든 짐승마냥 다뤘다.

"싫다. 먹기싫어. 먹지 않을거다."


"안됩니다. 이걸 먹을 때의 당신은 제게 증오를 드러내는 일도 없고. 도주를 시도할 생각도
하지 않는걸요."
"......"

그 말마따마 시간개념도 사라진 벤으로선 도주는 커녕 헤일런에 대한 증오도 되새길 여유가


없었다.

헤일런은 바짝 얼어붙은 벤의 턱을 잡아챘다. 어마어마한 악력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요즘은 이렇게 쾌락에만 빠져사는 당신을 보는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놔..."
"무엇보다 노예로서 자세가 너무 건방집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좀 더 간절히 부탁해
보십시오."

그건 곧 제 위에 있을 헤일런의 존재를 인정하란 말과 다름없었다.


모멸감에 이를 악문 턱이 덜덜 떨렸다. 그는 벼랑끝에 몰린 기분이었다. 도망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 단 한순간만 참자. 그러고 나서 뒤를 생각해도 충분하다. 이런 상태로는 자신을


추스리는 것조차 불가능 하니 그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정신이 피폐해진 벤이 드물게 타협을 고려했지만 결국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윽고 헤일런이 벤의 몸을 붙잡아 침대위에 눕혔다. 제 몸이 다치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저항을 시도했으나 약해진 몸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목구멍으로 쏟아지는 그 지독한 약을 벤은 강제적으로 삼켰고 어두운 수렁텅이에 빛은


보이지 않았다.

<-- 부서지다 -->


                             
얼마전 헤일런은 벤이 자신을 찌르고 도주한 일에 대해 지하굴의 칼튼에게 조언을 구했다.
안부인사는 겸사겸사.
답장은 아주 빠르게 도착했다.
헤일런의 편지에 담긴 종이를 돌돌 펴보며 글을 읽었다. 내용은 아주 간결했다.

[도망이란 단어조차 잊게 만들면 되지. 이건 실험용.]

추신도 붙어 있었다. 너는 절대 예쁜것에 애정을 품지 말라고.


헤일런은 뜬금없는 말에 조금 웃고 말았다. 그가 함께 동봉해온 작은 유리병에는 가루로
만들어진 약이 가득 담겨 있었다.
조만간 약속대로 그의 얼음창고에 가서 얼음이나 가득 채워줘야 겠다.

그날 이후 헤일런은 벤에게 하루 한번 꼬박 약을 먹였다. 벤은 그것을 미약인지 흥분제인지..


그 비슷한 종류의 약이라고 짐작했다. 먹고 얼마후면 바로 발정난 짐승처럼 온몸에 열이
들끓었으니까. 그리고 그 짐작은 사실이 맞았다.
헤일런은 어느덧 한달 가까이 그를 약에 중독시키고 있었다. 벤 스스로는 시간개념이랄게
없어져 눈치 채지 못하고 있지만.
벤이 약을 먹고 욕정에 앓기 시작하면 헤일런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안았다. 가끔은 수인족의
형태이기도 했지만 그 대부분은 인간의 형태였다. 공포에 익숙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약에 중독된 벤은 전에없이 본능에 솔직했고 음탕하기까지 했다.

"하아..학. 흣."

오늘도 마찬가지. 벌어진 다리 사이로 축축한 향유가 뿌려졌다. 겨우 그 뿐이었는데도 벤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몸을 뒤틀었다.
그는 얼마전 발목을 다쳐 부목을 대었는데 약을 먹은 상태에서는 고통을 인지 못하고
움직이려 들기 때문에 족쇄로 사지를 단단히 고정시켜 놓은 상태였다.
헤일런의 얇지만 단단한 손가락이 허벅지를 주무르다 사타구니 사이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단순한 접촉만으로도 벤의 허리가 작게 들썩였다. 빠르게 뱉어지는 호흡에는 기대감이
뒤섞였다.

깜빡. 느리게 감겼다 뜨인 자줏빛 눈동자가 이를데 없이 요사스러웠다. 음영지는 긴 속눈썹


조차도 사내를 유혹하는 듯 했다.
창부로 부리면서도 과연 가능할까 했지만 칼튼의 말처럼 타고난 얼굴이다. 퇴폐적이면서도
음심을 동하는 무언가가 있다.
헤일런은 잠시 머뭇 거렸지만 계속해 손을 미끄러트렸다. 어차피 행위 도중에 일어난 기억은
벤에게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남아있다해도 별반 상관은 없다.
약을 먹으면 또 다시 쾌락에 흠뻑 젖어 아무런 생각도 이어지지 않을테니까.
벤은 의외로 약에 대한 면역이 적은 편이었는데 하물며 이것은 지하굴에서 직접 건네온
약이다. 양에 따라서는 단순히 즐기는 용도를 넘어서 사람 하나 폐인으로 만드는건 일도
아니라고 자신하더니 과장된 소문만은 아니었다.

벤은 금세 무너졌다. 약물은 지나칠 정도로 잘들어 이제는 손가락으로 뒤를 헤집기만 해도


성기를 바짝 세우곤 한다. 이전부터 미약종류는 입도 대지 않았던건 이런 이유에서 였는지도
몰랐다.
반년이 넘도록 굴복시키지 못했던 벤의 정신을 고작 약 따위로 망가트리고 나자 기쁘기
보다는 그저 얼떨떨 하기만 했다.
오히려 너무 쉬워서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흐읏! 아..!"

엉덩이 사이에 머무른 손가락이 주름을 배회하자 벤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쾌감이나 고통을 참을 때면 꼭 손가락을 오므리곤 한다.

"쉬, 아픈건 아닙니다. 이제 익숙하잖습니까?"


"으..."

향유를 덧바른 손가락이 안을 부드럽게 비집고 들어갔다. 잠시 앓는 소리는 있었지만 윤활유


덕에 삽입은 어렵지 않았다. 부드럽고 체온으로 덥혀진 뜨거운 속살이 손가락을 진득하게
조여 물었다.
늘 공격적이고 날을 세우는 남자지만 그 안은 달랐다. 질척.
입구를 넓히기 위해 추삽질을 하며 내벽을 동그랗게 훑자 벤의 허벅지가 파들거리며 경련을
했다.
이물감에 미간이 좁혀진 벤의 얼굴에도 변화가 보였다.
여태껏 벤을 가혹하게 다루기는 했지만 헤일런은 기본적으로 부드러운 성품의 사내다.
폭력이나 피를 보는 일에 망설임은 없지만 필요 이상을 사용하진 않았다. 공격적인 벤의
아래에서 지낸 노예치고는 지나치게 유순한 사고방식 이었다.
그럼에도 유독 벤에게만 모질었던 것은 노예를 길들이는 방식이라곤 그에게 배운것 밖에
없기도 했고. 최근엔 벤의 폭력적인 성향을 꺾고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벤이 자신만의 창부가 되기 이전까지 수하들에게 체벌을 대신 맡긴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당한게 하도 많다보니 중간중간 분풀이가 아주 없었던건 아니지만.
애초 복수같은건 꿈꾼적도 없다. 헤일런은 오히려 선택권이 쥐어졌을 때 그를 단숨에
죽여주고자 했다. 그것으로 그간의 감정을 잘라낼 생각이었다.

"아, 아아...!"
"좋습니까?"

손가락이 어느덧 세개가 되고 깊은 곳을 푹 찔러 올리자 그의 몸이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퍼득 튀어 올랐다.
벤의 입구는 굉장히 좁은 편이라 사실 원만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충분히 공을 들여
풀어줘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지금은 어느정도 친절을 베풀어줘도 좋으리라.
손가락을 빼내고 발기된 성기를 단번에 끝까지 밀어넣자 헉 외마디의 비명과도 같은 숨이
토해졌다.
벤은 언제나 삽입을 할때면 입술이 찢기고 헤질때까지 물며 신음을 참는 편이었는데 버릇이
들었는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가끔 그럴때가 있었다.

"하악...읏, 흐으..!"
"좀 더 소리 내셔도 됩니다. 어차피 또 잊혀질 테니까요."

가슴까지 얼굴을 내린 헤일런이 딱딱해진 그의 유두를 혀로 핥아 올렸다. 예민해진 몸은 이제


어디를 만져도 쾌락에 떨었지만 가슴부위를 특히 더 좋아하곤 했다. 최근 애무에 집중하게
된건 그의 반응이 나름 보는 재미가 있던 탓도 있다.
가슴을 빨아주자 그의 하얀나신이 금세 빨갛게 달아 올랐다.
간간히 흘리는 신음소리가 지나치게 색기로 범벅이 되어 듣는 헤일런 마저 아랫배가 뻐지근할
정도였다.
입술을 혀로 축이자 꽉 감겨있던 자줏빛 눈동자가 꿈결을 헤매듯 몽롱하게 젖어 헤일런을
올려다 보았다.

그래. 이 눈.. 처음만났던 그날에도, 그리고 벤에 대한 모든걸 포기한 그때도 자신을


홀린것은 이 아름다운 자수정빛 눈이었다. 모든이를 내리 깔보듯 오만하며 때론 고고하기까지
했던. 그 드높은 자존감이 눈부셨다.
비록 눈동자 중 하나가 다른 색으로 대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휘두른 빛 자체가
허물어지진 않았다. 이지를 상실해도 보석같은 색채다.
"한번도 말씀 드린적은 없지만.. 저는 당신의 얼굴이 굉장히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하아..하."

헤일런은 상기된 뺨에 손을 가만히 얹었다가 내렸다. 예전이라면 결코 있을수도 없는일


이었지만 지금은 가능하게 되었다. 아름답다는 말 또한 그랬다.

사실 벤 하일즈는 잔혹한 성격에 가려졌을 따름이지 외양자체는 대단한 미인에 속했다.


푸른 호반위에 떠오른 달처럼, 혹은 눈덮인 설원처럼 깨끗하고 시린 은발. 깎아 지른듯한
턱선에 높은 콧대. 눈썹은 시원스레 뻗었고 항상 비틀린 웃음을 머금은 입술은 입을 맞추고
싶을만큼 선이 고왔다.
눈빛 때문에 분위기가 다소 퇴폐적이긴 하나 그조차도 그에겐 잘 어울렸다.
몸은 말할것도 없다. 양측이 균일하게 잘 발달된 승모근과 탄탄한 가슴근육. 길고 늘씬한
종아리와 허벅지까지. 늘씬하게 잘 빠진 체형이면서도 전쟁에서 실전으로 다져진 몸이다.
헤일런은 벤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넣었다. 뼈마디는 두껍지만 왠만한 여성못지
않게 우아하고 가늘다.
그러나 이 얇은 손가락이 사람 목 하나쯤은 가볍게 비틀어 버릴수 있다는것을 헤일런은 잘
알고있다. 그는 온 몸이 살인무기였다. 힘을 잃기 전의 그는 수인족인 헤일런마저도 압도할
만큼 강한 사람이었다.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던 수컷. 그때라면 이런 취급은 꿈도 못
꿔봤겠지.

헤일런에게 벤은 한때 경애의 대상이었다. 처음으로 애정을 가져본 인간.


폭군처럼 자기 멋대로에 난폭하기 까지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 화려한 색채에 눈이
멀었었다.
물론 벤에게서 도망을 결심했을 때 그 감정은 전부 사라진지 오래지만.
지금은 그저 제 손안에 쥐어진 벤이 흥미로울 뿐이다. 당신은 과연 어디까지 버틸까. 내게
어떤식으로 복수를 해올까.

질꺽.
허리를 뒤로 물려 성기를 느릿하게 뽑아내자 젖은 소리와 함께 벤이 고개를 흔들었다.

"윽. 싫어. 좀더. 깊게..읏."


"말로도 행위를 조를줄도 알고. 이제야 좀 창부답습니다."

쾌감에 솔직한 벤은 꽤 즐길만 했다.


헤일런은 그의 몸을 훑어내리다 회음부에 새겨진 붉은꽃의 인장에 시선을 못박았다.
사실 헤일런이 벤의 죽음 대신 그를 노예로 들어 앉힌 계기는 간결하다.
언제까지나 자신의 위라고 생각했던 절대자의 추락.
귀족중의 귀족인 벤 하일즈가 강제로 노예의 인장이 찍히며 굴욕에 떠는 모습을 보며 일말의
흥미가 생겼다.
그런데다 칼튼이 말했던 이제는 그가 자신의 노예라는 말이 그 순간엔 심장이 터질것마냥
근사하게 들렸었다.

저 자줏빛 눈동자가 헤일런이 그랬듯 경애의 눈으로 올려다보면..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런 아름다운 이가 노예가 되어 제게 복종한다면 반대로 주인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수하들에겐 분풀이라고 말했지만 이게 진심이었다.
물론 현실성도 없고. 그 과정도 험난하지만.
헤일런은 몸을 숙여 벤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도드라진 핏대를 혀로 핥았다.
"윽..읏. 흐윽 악..!"

제정신도 아닌 상대를 안는것으로 정복욕 같은건 들지 않는다.


이전보다 좋은 점이라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적의. 불필요한 감정소모. 도망은 칼튼의
말처럼 아예 생각조차 못했다.
헤일런은 몇번인가 더 허리를 움직이다 그의 안에 사정을 마쳤다. 비슷하게 벤 역시 몸을
떨며 절정에 다다랐다.

"...하아, 하아."
"후.."

절정의 여운에 잠시 숨을 고르다가 벤을 묶고있던 구속구들을 풀어주었다.


헤일런은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며 벤의 은발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이게 뭐라고. 어릴적엔
그렇게 만져보고 싶었더랬다.

지친듯 자줏빛 눈동자가 두어번 내리 감겼다 떠진다. 긴속눈썹이 날개처럼 팔랑였다.


헤일런이 웃으며 팔을 뽇자 인형처럼 늘어져 있던 벤이 두팔로 그의 목을 부둥켜 안아왔다.
그가 의식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물부터 먹여 갈증을 해소해주고 헤일런은 약을 가지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지난번


부터는 약효를 더 강화시키기 위해 체내에 주사를 놓던 참이었다.

챙그랑..!
실수로 테이블을 친 덕에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찰나의 순간이었다. 눈빛이 돌변한 벤이 몸을 숙여 재빨리 유리조각을


손에 쥐었다.

"놓으십시오. 지금의 상태로는 제게 아무런 위협도 끼치지 못합니다."


"......"

유리가 살갗을 파고들고 피를 냈지만 그의 눈빛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예상과 달리 공격은 없었다.
그는 약물로 인한 흥분을 고통으로 가라앉힐 뿐이다. 하..
헤일런은 헛웃음을 뱉었다. 지독한 사람.
다가가자 유리조각을 쥔 손이 바들바들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는 것이 보였다.
헤일런은 손쉽게 그에게서 유리조각을 빼앗았다. 있는 힘껏 움켜쥐었는지 상처가 제법 깊었다.

"...그만."

멈칫. 반쯤 잠긴 목소리가 목언저리에 머물쯔음 헤일런은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


하지만 아랑곳 않고 손을 뻗어 약을 가져왔다. 괴롭다면 부탁을 하라 했지만 결코 굽히지
않을 자존심인걸 안다.
"이제, 그만해.."

젖은 숨소리와 함께 다시 흐려지는 눈동자에 물기가 번졌다.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로 벤이


그의 팔뚝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말로하지 않았지만 그가 할수 있는 최대한의 애원이며
호소였다.
헤일런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가 다시 수축했다.
지금껏 가해진 고문이나 폭력. 혹은 갖은 난폭한 성교에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다.

"이상하군요. 쾌락에 빠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편이 당신에게 괴롭지 않을 텐데. 백치처럼


휘둘리는 일이야 말로 당신을 더 절망케 했던걸까요."
"......지켜야 할것 마저 사라지니까."
"하지만 제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깁니다."

잡은 손을 떼어내며 팔뚝에 바늘을 꽂자 그를 묵묵히 지켜보던 벤이 지친듯 눈을 감았다.


이지경이 되어서도 스스로가 한 행동에 일말의 후회도.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악인. 그런
사람인걸 알기에 인간적인 감정은 기대조차 안했다.
지금은 독기나 살기가 보이지 않았지만 약에 취한 이때 뿐이란것을 모르진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이런 얼굴이 보고 싶었던 걸까. 이렇게 망가진 노예로 족하는가.. 답은


금방 나왔다.

아니.
전혀 만족스럽지 않아. 이런걸 원한건 아니었다. 하지만 제 손에 인형처럼 얌전히 안겨있는
벤의 모습에 적당히 타협하는 자신이 있다. 이것도 괜찮겠다고. 원하는 만큼 머리를
쓰다듬어도 적의는 없었다.
포기는 익숙하다. 어차피 바라고 또 바라도 벤은 들어주지 않을것이고 자신은 항상 그러하듯
체념할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만이라도..

* *

검은색 제복을 입고 긴 은발을 흩날리는 벤 하일즈의 모습은 아직도 그린듯 선명하다.


황궁정원에 놓여진 커다란 나무. 그 위에서 책을 읽는 자신과 지루한 얼굴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는 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과거의 잔상.

바뀐듯 하지만 실상 근본적으로 바뀐것은 없다. 온갖 방법으로 그 자존심을 꺾어보려 했고


정신마저 망가트렸지만 당신에게 나는 여전히 더러운 짐승일 뿐이겠지. 그 견고한 벽은
영원히 깨부술 수 없을것이다.
주륵. 벤의 눈가에 고였던 물방울이 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흰뺨이 눈물로 젖어들었다.
헤일런은 밤하늘처럼 어둠에 깊게 잠긴 눈으로 벤을 지켜보다 이내 손에 쥐고 있던 주사기를
내려놓았다. 애초 유리병은 지난밤을 마지막으로 텅 비어있었다.

 
<-- 부서지다 -->
                             
머리가 어질거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린 벤은 멍하니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긴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의 긴공백이 생겼다.

움찔. 손가락을 까닥 움직이자 그 감각이 제 몸이면서도 어쩐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아직은


모든것이 흑백처럼 흐릿했다. 그렇게 얼마나 늘어져 있었을까.

"일어나셨습니까?"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벤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또 다시 자신을 집어삼킬 열기에 긴장하며 보자 헤일런이 그 자리에 서서 손짓을 했다.

"식사전에 먼저 씻어야 하니 이리오십시오."

"......"

경계하며 침을 삼키던 벤이 천천히 침대에서 발을 내려놓고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긴


시간동안 침대를 벗어나지 못한 다리는 몇발자국을 걷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결국 가까이 다가온 헤일런이 그를 추슬러 품에 안아 들었다.
그 품이 지나치게 익숙해서 엉겁결에 목덜미를 끌어 안으려던 벤이 흠칫 행동을 멈췄다. 아..
덕분에 그는 갈길 잃은 두 손을 허공에 띄운 채 욕실로 옮겨지게 되었다.

쏴아아, 욕실은 금세 뿌연 수증기로 가득찼다.


헤일런은 착실히 벤을 씻기는 데에만 몰두했다. 손으로 만져오는 희롱도 없었으며 성욕을
자극하는 일도 없었다.

보통은 물줄기나 거품에 의해서도 발정하기 때문에 잔뜩 어깨를 움츠렸지만 몸은 예상외로


멀쩡했다. 심지어 정신마저도 맑게 갠 하늘처럼 또렷하다.

때문에 벤은 조금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뭐지. 오늘따라 유난히 몸이 멀쩡한데. 의아해 하는 사이 헤일런은 이미 벤의 머리카락까지


감기고 물기를 짜내는 중이었다.

헤일런이 시중에 능숙하기 때문인지 자신의 신경이 다른데 팔려서였는지 씻고 말려지는건


순식간이다.

마지막으로 하얀 가운까지 걸쳐놓고 헤일런은 벤을 안아 침대위에 올렸다.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는데 지금보니 다리 한쪽에 부목이 대어져 있었다. 기억에 없는 상처에
눈을 가늘게 뜨자 헤일런이 그를 알아채고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말했다.

"제가 아닙니다."
“뭐?”
“제가 아니라 당신이 무리하게 움직이다 침대에서 떨어진겁니다.”
"......"

네 놈이 약 따위로 정신만 빼놓지 않았으면 그럴일도 없다. 그렇게 한마디를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벤은 괜히 제 입으로 약을 언급하기가 꺼려졌다. 간만에 찾은 이성을 또 잃기는
싫었다.

불쾌하긴 했지만 얌전히 입을 다물자 헤일런은 하던일에 마저 집중을 했다.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헤집었다.
그는 벤의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고 나서도 한참을 만지작 거렸다.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제 머리카락에 집착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벤은 필요이상의 접촉에는 과민하게 반응하는
편이었으나 지금만큼은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뒀다. 질리기도 하고 워낙에 험한 일을
당해선지 고작 이정도로는 화는커녕 거부감도 생기지 않았다.

그 결과 하나로 얼키설키 땋인 은발을 벤은 착잡한 얼굴로 내려다 보았고 헤일런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식사를 가져왔다.

허기는 졌지만 식사는 내키지 않았다. 늘 그렇듯 약이 섞여 있을 것 같았다.

“별로 먹고 싶지 않은데.”
“저는 벤이 식사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벌써부터 험한꼴을 당하고 싶으신게 아니라면.”
“…협박하는 솜씨가 나날이 느는군.”
"별 말씀을요."

아무렇지 않게 받아친 헤일런이 묽은죽을 한숟갈 떠서 벤에게 내밀었다. 벤은 창백히 굳은


얼굴로 그가 내민 죽을 노려보았다. 마음같아선 전부 다 집어던지고 싶지만 소용 없는
짓이라는건 이미 경험으로 알고있다. 어차피 먹어야 한다면 괜한 기력소모는 사양이다.
후, 한숨을 내쉰것으로 분기를 다스린 벤이 느릿하게 입을 벌렸다. 물론 인내 하느라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헤일런은 자신이 협박을 해놓고도 자신이 순순히 입을 열자 조금 묘한 기색을 보였다. 적어도


벤의 손으로 직접 먹겠다고는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벤은 제 행동의 다른점을 느낄새도 그가 내민 죽을 답삭답삭 다 받아먹었다. 체할것 같은
기분이었다.

"욱..."
먹은게 전부 약이라고 생각하니 아래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원흉인 헤일런이 다 비운
그릇을 한쪽으로 치워두고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그 손길을 받던 벤은 그제야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이럴때면 건드리지 말라고 뿌리쳐야 했는데 이상하게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필요성을 못느꼈다. 기나긴 잠의 여파일까. 아니면 학습된 공포의 여파인가. 헤일런에 대한
감정이 어딘가 둔해지고 누그러진 느낌이다.
그러니까 이건 마치...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너, 내게 무슨짓을."
"예? 등을 두드려 주었습니다만."
"그걸 물은게..아니. 됐다."

사납게 다그치려던 벤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일시적인 거겠지. 자신은 기억나지 않는 오랜시간 동안 약에 취해 있었고 이제야 깨어났다.
손가락이 제 뜻대로 움직이는 감각조차도 낯설었는데 하물며 혹사당한 정신이야 말할것도
없다. 둔감해져 있다 해도 이해못할 현상은 아니다.
그래. 그런거겠지. 아직 약기운이 남아있는 거다. 다른 이유일리가 없다.

벤은 더 이상 깊게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축 늘어져서 가슴가에


어설프게 땋인 제 머리카락을 보고있는데 헤일런이 대뜸 책한권을 들고 그 옆에 앉았다. 미간
사이가 절로 좁혀졌다.

"..좁다."
"별로요. 전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다고. 내가.
헤일런은 벤이 못마땅한 얼굴로 쏘아보던 말던 책장을 하나씩 넘겼다.

아무리 봐도 비켜나지 않을 기세에 벤은 아예 시트밑으로 몸을 푹 구겨넣었다.


기가 한풀 꺾였다고 해야하나. 조금 지쳤다고나 할까. 쓸데없는 일에 괜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약의 효과를 경계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벤이 지금껏 어떤 폭력이나 수치에도 굴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자부심에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를 잃는 다는건 벤이 지키던 최소한의 것마저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그건 그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초조함에 꽉 말아쥔 손가락 사이에 습기가 배어났다.

하지만 어째선지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도 몸은 멀쩡했다. 반응이 있다면 벌써 왔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식사에는 약을 쏟아붓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째서?
자신이 겁을 집어먹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독서를 하느라
약을 먹이는걸 잊은건가?
급기야 벤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시트위로 얼굴만 빠끔히 내민 채 헤일런에게 묻기까지
했다.
"약은..안먹이는 건가."
"먹고 싶습니까?"
"......"
"또 도망가실 겁니까? 그럴 마음이 있다면 저로서도 먹일 도리밖에요."

벤이 침묵하자 헤일런은 보던 책을 내려놓았다.

"다시 묻겠습니다. 제게서 도망가실 겁니까?"

제 위로 쏟아지는 검은 눈동자가 소름끼칠 만큼 깊고 어두웠다.


일전에야 자존심 때문에 고집스레 버텼다지만 그 후폭풍이 어땠는지를 떠올린 벤은 쉽사리
그렇다고 답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도 자신을 지킨 후에나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놓게 되면 그 모든것이 하등


쓸모가 없게된다.

결국 벤은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에도 불구하고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어주었다.

"됐다. 널 죽이는 건 포기 못하지만 도망은 이제 관두지."


"기뻐해야 하는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그렇다고 하시니 이제 더는 약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믿어지지는 않지만 이런말로 벤을 속일 남자도 아니다. 벤이 도망만 치지 않는다면 그 역시도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래..뭐. 스스로를 지키는 대가로 자유 하나 정도는 포기해도 괜찮겠지.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나니 도주 욕구가 그리
절실하지도 않았다.

긴장이 풀리자 몸이 나른해졌다. 간만에 찾아온 휴식. 곁에 있는 누군가의 온기. 그것은 마치


섹스 후의 노곤함을 닮았다.
상대가 헤일런 이라는건 언짢았지만 사실 그가 벤의 노예였을 적에도 종종 한침대를 쓰긴
했었다.

피곤함에 눈꺼풀이 느릿하게 내려가자 머리카락 위로 커다란 손이 와닿는다.

..치워.
반사적으로 한 마디를 뱉어내려다가도 그 손길이 꽤나 익숙해서 입을 벙긋거리다 말았다.
대체 정신을 놓고 있을 때 얼마나 만져댔으면 이 따위 더러운 기분이 드는거냔 말이다.

가늘게 뜨인 눈으로 노려보고 있노라니 이번엔 다른손이 그의 눈가를 덮었다.


"피곤할텐데 얌전히 주무십시오. 제가 지금의 결정을 후회하기 전에.."
"......"

목소리 자체는 평온하나 어쩐지 아쉬움이 진득히 묻어났다. 불안해서 잠이 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시야가 차단되자 졸음이 더 몰려왔다.
확실히 협박하는 솜씨가 늘긴 했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벤은 밀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 부서지다 -->


                             

허억. 잠에서 깨어난 벤은 황급히 몸을 일으키다 이내 멀쩡한 자신의 사지에 깊이 안도부터


했다. 약을 하지 않는것에 아쉬워 하는 헤일런 때문인지 팔 다리가 묶인 채 검은 구덩이에 푹
잠겨드는 꿈을 꿨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몸은 무겁게 가라앉고 주위는 온통 새카만 어둠
뿐이고.

후.. 손등으로 이마에 찬 땀을 닦아내며 벤이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망할 짐승놈. 얼마나 괴롭혀 댔으면 전쟁에서도 꾸지 않은 악몽에 시달린단 말인가.

"엇? 대장. 탈주노예 일어났다."

벤은 불쾌함이 절로드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돌아본 후였다. 그곳엔 헤일런을 포함한 늑대수인족
윌로스와 호랑이수인족 넬이 원형 테이블을 두고모여 앉아 있었다. 손에는 각기 카드 몇장을
쥔채.
그중 벤에게 인사를 건넨건 덥수룩한 노란 머리를 가진 넬이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탈주노예."


"뭐?"
"엇. 표정 장난 아니다. 방금 나 썰어버릴것 같은 얼굴이었어."

대장. 대장. 대장네 노예 깨어났는데?


신경에 거슬리는 온갖 단어를 주절거린 넬이 카드에 한껏 집중하고 있는 헤일런을 건드렸다.

헤일런은 마침 제 차례라 카드를 한장 내려놓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잘 주무셨습니까? 미인은 잠꾸러기라 하던데 그 말이 영 틀린말도 아닌가 봅니다."
"......"

다가온 헤일런은 대답없이 노려보는 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옷을 단단히 여매준 그가 벤을 품에 끌어안아 올렸다.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던지라 멍하니 있던 벤이 뒤늦게서야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혼자 걸을 수 있다만."
"아. 죄송합니다. 습관이 되서."

짧게 사과를 하지만 내려놓을 생각은 없는지 벤을 안고 있는 팔에서 힘을 빼지는 않았다.

결국 벤은 테이블 근처에 놓인 장의자로 옮겨졌다. 그러자 바로 앞에 앉아있던 넬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럼 온김에 잠시 진찰 좀 합시다. 환자님."


"!"

뻗어진 손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거부감을 느껴 살기를 온전히 드러내자 그를


정면으로 받은 넬이 움찔했다. 많이 약해졌다고는 해도 전쟁에서 구를만큼 구른 남자다.
위협적인 기세에 헤일런이 뒤에서 그를 꼭 끌어안아왔다. 마치 진정이라도 시키듯 귓가를
입술로 문지르며 다독이자 치솟았던 살기가 확실히 가라앉긴 했다.
그로인해 기분은 더 상했지만 벤은 조금전 처럼 날을 세우진 않았다.
안도한 호랑이 수인족이 벤의 동공과 혀. 맥박 등을 통해 간단히 몸 상태를 살폈다.

"오. 많이 좋아졌네. 혹시 두통이 아직도 있어? 속이 메스껍다거나 몸이 좀 나른한건?"

상태를 아는건 제게 나쁠것이 없는지라 벤은 순순히 답해주었다.

"몸이 나른한건 조금."


"으음 그 정도면 양호해. 약은 중단하긴 했지만 워낙에 중독성이 강한거라 한동안은 후유증이
좀 있을거야. 틈틈히 해독약이야 처방하겠지만은 남은건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해. 정
못참겠으면 육체적인 결합도 좋아. 오히려 그편이 해독은 잘되거든."

한번에 치료가 안되는 건가? 납득할만도 하지만 어쩐지 무능력해 보이기도 해서 벤은


못마땅한 얼굴로 비난했다.

"돌팔이 의사같으니."
"은혜도 모르는 약쟁이 노예같으니."
넬도 지지않고 말했다. 그쯤에서 벤은 심기가 확 비틀렸다.
약쟁이? 도저히 좌시할 수가 없었다. 반말도 거슬리는 마당에 감히 내게 뭐라고? 건방진
짐승새끼. 이를 털어주지.
벤이 험악한 얼굴로 주먹을 치켜들자 기다렸다는 듯 넬이 뒤로 물러섰다.

"폭력반대. 이럴줄 알고 내가....으억?!"

피했다는 것에 기뻐하던 넬은 바로 뒤에 있던 의자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쿠당탕 소리와 함께 엄살섞인 비명이 들려오자 벤은 입꼬리만 비틀어 웃고는 장의자에
비스듬히 누웠다. 멍청한놈. 내가 설마하니 피할걸 예상 못 했을까.

벤의 비웃음에 이 광경을 모조리 지켜본 늑대수인족 윌로스가 진짜 교활한 인간이라며 혀를


찼다. 어째서 반년이 지났는데도 성격이 저 모양이냐며 비아냥 거리는 말에 슬쩍 눈썹을 치켜
올리자 문득 어깨를 톡톡 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시선을 들자 헤일런이 나긋하게 웃어보이며 벤의 앞에 과자따위가 가득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카드게임이 끝날때 까지 잠시 드시고 계십시오."


"......얌전히 있으라 이건가?"
"달리 할일도 없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하란대로 얌전히 있으려니 자존심이 상한다. 먼저 건드린건 저놈들인데.

벤은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케이크와 타르트등이 담긴 접시를 한번. 그리고 헤일런까지


번갈아 보다 짜증섞인 명령조로 한마디를 툭 내던졌다.

"홍차도 가져와."

* *

오독.

"......"

오도독.

벤은 비스듬히 장의자에 누워 동그란 모양의 쿠키를 이로 잘게 부수어 씹었다.


의외로 단것을 즐겨먹는 벤의 입맛을 아는 만큼 간식들은 전부 그가 좋아할만한 것 투성이다.
실내에는 나름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벤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들이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수인족들이 모여앉아 카드게임을 하는 진귀한 광경은 그로써도 처음이다.
돈 내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는지 한쪽엔 제법 금화가 잔뜩 쌓여있다. 벤이 보기에도 판돈이
제법 컸다.

그나저나 돌아가는 판세를 짐잔컨대 헤일런의 패가 가장 우세한듯 하다. 아니나 다를까


평온한 얼굴의 헤일런에 비해 넬이나 윌로스의 얼굴엔 어둑한 그림자가 졌다.

"큰일났다. ..대장. 좀 봐줘. 나 이거까지 잃으면 이제 거지란 말이야. 한달동안 고기도


못먹고 풀만 뜯어야 해."

넬이 자기는 육식동물이라며 노란 머리를 부스스 흐트러트리며 동정을 구해왔다. 헤일런이


곤란한듯 웃자 대신 다음 차례인 윌로스가 그를 재촉하며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 역시도 초조하다는 증거였다.

"빨리하십시오. 넬. 낼게 없으면 아무거나 버리시던가요."


"기다려봐. 이 돈독오른 늑대야."

넬이 멍한 얼굴로 상대의 신경을 긁는건 비단 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넬이 우물쭈물 하다 카드 한장을 내밀자 다음 차례인 윌로스가 긴장한 듯 눈을 쉴새 없이


굴렸다.
흠. 벤은 몸을 반쯤 일으키고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들을 엄지손가락으로 대충 문질러 닦았다.
그는 승패를 알 수 없는 도박같은건 그리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즐기지 않았을 뿐이지
경험자체가 없는건 아니다. 고위귀족들 끼리 모임을 가졌을 때 빠지지 않는게 또 이런
유흥거리 아닌가. 물론 그 때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 걸려있긴 했지만.

"그 옆의 다이아 퀸."


"예?"
"어차피 넌 이번판이고 다음판이고 그거 아니면 수가 없어."
"......"

갑자기 끼어든 벤의 목소리에 셋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집중되었다. 벤은 믿거나 말거나


알아서 하라며 홍차로 입가심을 했다.

"음.."

윌로스는 본인이 내려했던 카드와 고심하다 의외로 벤의 말을 따랐다. 벤에게 별달리 좋은


감정이 없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당당하다 못해 오만한 벤의 분위기에 홀랑 넘어간 것이다.
궁지에 몰렸던 그로서는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었던 심정이기도 했다.

그 결과. 카드가 돌고 돌아 그의 차례가 되었을 때. 믿기지 않게도 판세에 조금 변화가


일어났다.

윌로스가 이번엔 오른쪽에 있는 두개의 카드를 만지작 거리자 벤이 다시 한번 지시했다.


"오른쪽 맨 끝."
"......"
"......"

눈치를 보던 윌로스가 오른쪽 끝의 카드를 내자 헤일런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벤은 타르트를 한입 베어물고 생크림 위에 올린 달콤한 과일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지쳐버린


정신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그는 쉴새없이 먹어댔다.

아아. 여기에 술만 있으면 딱일텐데.


조금 아쉬워 하는 사이 카드게임은 어느새 끝이 났고 승자는 막판 뒤집기로 아슬아슬하게
배열을 맞춘 윌로스였다.

평소 무뚝뚝하던 늑대의 얼굴에 환희가 번졌고 그에 자신의 한달치 식비가 몽땅 날아가게


생긴 넬이 반박하며 따지고 들었다.

"이건 무효. 쟤가 도와줬잖아!"


"비겁한 수를 쓴것도 아닌데 뭐 어떻습니까. 싫으셨으면 처음부터 안된다고 하셨어야죠. 제가
이기니까 이제와서 무효라는건 남자답지 못합니다. 게다가 선택은 결국 제가 했으니 판에
직접적으로 끼어든것도 아닙니다."
"와. 돈독오른 늑대는 무섭구나. 동료고 인정이고 이제 양심까지 다 팔았어."

비난을 하던 말던 윌로스는 들뜬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꼬리를 홱홱 돌려쳤다.


넬이 이건 악몽이라며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꿍얼거리더니 밀려드는 우울함에 둥그런 귀를 축
늘어트렸다.

벤이 도움을 준 이상 윌로스가 이기는건 당연했다. 단순히 운으로 승패가 가려지는게 아닌


정해진 숫자의 카드를 전제로한 게임이다.
게다가 헤일런에게 카드를 가르쳤던건 벤이다. 따라서 그의 패턴이라면 눈에 훤히 들어왔다.

그렇게 정리가 되어가는 분위기에 벤은 찻잔을 마저 비우고 다 이긴판에 날벼락을 맞은


헤일런을 힐끔 살폈다.

그는 예상과 달리 딱히 분하지도 혹은 억울해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럴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생각보다도 더 대수롭지 않아 하는 얼굴이라 오히려 벤쪽에서
김이 새버렸다.

헤일런이 이기는게 못마땅해서 일부러 없는 오지랖까지 부려가며 윌로스를 이기게


해주었던건데.

"벤."

옆에 다가와 앉은 헤일런이 다과를 치워내며 그의 허리를 가까이 끌어 당겼다.


......?

"카드게임도 끝났으니 이젠 벤과의 볼일만 남았군요."


"볼..일?"

의아해 하자 벤의 가운 안으로 손을 비집어 넣은 헤일런이 그의 귓가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흘렸다. "예컨대.."
허리를 매만진 손이 불연듯 엉덩이살을 꽉 움켜쥐자 벤이 흠칫해서 몸을 딱딱히 굳혔다.
뒤로 피하려 하자 무게로 짓누르며 가운을 허벅지 위로 아슬하게 들어 올린다. 치부가 보일듯
말듯.
가볍지만 수치스러운 희롱에 눈살을 찌푸리자 검은 눈동자가 진득하게 그를 훑으며 마저 말을
덧붙였다.

"이런 어른들만의 놀이 말입니다."

막 돈을 다 챙겨든 윌로스가 이상한 분위기를 읽고 허둥지둥 넬의 목덜미를 잡아 끌었다.


물론 눈치는 있지만 나름 야한걸 좋아해서 관음증까지 살짝 있는 넬이 낑낑 거리며 테이블
다리를 붙잡았다.

"우리대장 다 이긴거 져서 삐쳤나 보다. 잠깐만 윌. 나 이것 좀 구경하고 갈게!"


"나오십시오 넬."

윌로스는 나름 벤에 대한 은혜를 갚을 생각인지 넬을 기어코 질질 끌어 밖으로 나갔다.


쿵 하고 닫힌 문이 닫히자 벤은 제 위에 올라탄 헤일런을 보고 버릇처럼 손을 한번 쥐었다
폈다. 안그런척 하지만 어째 눈빛에 심술이 섞인 듯도 했다.

....그러니까 쪼잔하게 화풀이 같은건가. 하, 설마.

<-- 부서지다 -->


                             

우습게도 정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위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벤의 몸을 짓누르고


사로잡았다. 목덜미를 물린 사냥감처럼 근육이 경직되고 심장소리가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요란하게 뛰었다. 귓가에 들리는 거친 숨소리. 살 거죽을 긁어대던 날카로운 송곳니.
떠오르는 기억은 뒤죽박죽 섞였지만 지나치게 선명해 손끝이 차게 식는다. 폐부까지 차오른
숨이 그의 목을 졸랐다.

그 반응을 즐기는 건지 어쩐지 헤일런은 침묵하며 벤을 가만히 내려다 보기만 했다.

식은땀이 흐르고 작은 벌레같은 것이 신경을 갉기 시작한다. 초조함과 불안. 그리고 공포가


뒤섞이자 마침내 인내가 다한 벤이 사납게 쏘아 붙였다.
"비켜. 지금 나랑 뭐하자는 거냐."

"기분이 나빠서요. 제 주인 편도 안드는 발칙한 노예를 어떻게 혼을 내야 하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

벤은 황당한 나머지 미간을 찡그렸다. 가져다 붙인 핑계가 지나치게 조악하다. 약을 어디


백번이고 천번이고 먹여봐라. 네놈 편을 들어주나. 헤일런 역시 본인이 말하고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픽 바람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듯
하다 곧 검은눈동자에 약간의 기대가 스쳤다.

"잘못했다고 빌어보십시오. 그럼 벌은 없는걸로 하겠습니다."

"......"

점점 더 가관이다. 이왕 헛소리를 지껄인김에 막나가보자는 심보였을지도 몰랐다. 벤은


서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노예니 벌이니 용서를 구하란 말까지.
단순한 농담이라도 듣기에 영 거슬리는 단어들 뿐이다.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자 입고있던 가운의 끈이 주륵 풀렸다. 벌어진 앞섶 사이로 보이는


가슴과 그 아래로 보이는 허리. 그리고 길고 가느다란 종아리.

벤은 훤히 드러나는 자신의 나신을 묵묵히 바라보다 몸에 힘을 풀었다. 결국 하고 싶어서


였나. 고작 이정도로 부끄러워할 자신도 아니고 오므리고 있던 다리마저 순순히 벌리자
헤일런이 이채를 보였다.

그의 손이 사타구니 사이를 파고들어 중심을 손안 가득히 쥔다.

"이제 말을 하지 않아도 천박하게 다리를 벌리시는군요."

"칭찬으로..흣. 알지."

"아아.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혹 바같으로 나갔을 때도 이 몸을 마음껏 굴려먹었습니까?"

"……."

벤이 창부로 전락한 것은 맞지만 정말로 사내새끼들한테 몸을 내어주며 이 생활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헤일런은 알면서도 벤의 자존심을 자극했고. 벤 역시 뻔히 보이는
수작임을 알면서도 그 도발을 쉽게 넘기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서 제게 나쁠건 없는데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는 또 반발심이 생긴다.
제가 생각해도 이렇다할 기준이 없는 이상한 자존심이었다. 벤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리는 손으로 헤일런의 뺨을 감싸쥐며 야살스럽게 웃었다.

"그래. 보호를 대가로 쟈엘 새끼하고도 붙어 먹었지."

헤일런만의 창부가 되어주겠다고 했지만 사실상 이 몸은 누구든 가질 수 있다는 말을 돌려


말한것이나 다름없다.

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헤일런은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그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이런. 벌을 받아야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요."

* *

욕실의 벽을 두손으로 짚은 채로 벤은 허벅지와 둔부를 사정없이 후려 맞았다.

처음 둔부를 맞을 때는 무게가 제법 나가는 둔중한 막대였지만, 허벅지부터는 도구가


바뀌었다.

짜악...!

짝!

얇고 긴 회초리는 물에 불려져 있어 가해지는 고통이 평상시 보다 날카로웠다. 이미 수십대를


맞은 허벅지는 살이 찢겨져 피가 고였다. 짝, 다시 한번 허벅지에 번지는 통증에 벤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했던 체벌에 비하면 장난 같은 수준이긴 하나 수십분 째 같은 행동이
반복되자 다리가 후들 거리며 떨렸다.
날카로운 칼날에 살이 저며진 느낌. 일부러 인지 유독 한곳만 집중적으로 때리는 덕에
견디기가 더 힘들었다.

벽에 올려진 손가락은 얼굴만큼이나 하얗게 질려 마디마디가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이런. 자세가 또 흐트려 졌습니다. 정말이지 말귀를 못 알아 듣는군요.”

“큭!”

철썩 하는 마찰음과 함께 보기좋게 달은 둔부가 좌우로 흔들렸다. 자세를 교정하기 위해 종종


가해지는 손바닥 체벌엔 묘하게 수치심까지 들었다.
그런데다 조금전 부터는 맞은 부위에서 묘하게 통증과는 상반되는 감각이 느껴졌다.
얼마동안인지는 모르겠지만 벤의 이성조차 앗아갔던 뜨거운 열기.
쾌감.
빌어먹게도 아랫배가 욱신거리며 성기가 꿈틀 거리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하아...하."

자신이 맞으면서 세웠던 기억은 없으니 이건 넬이 말했던 후유증 일지도 몰랐다.


벤은 되도록 제 상태를 가리기 위해 몸을 최대한 욕조에 밀착했다. 하지만 입술새로 가쁘게
새어나오는 숨소리를 숨기는 것은 어려웠다.
이것으로는 모자랐다. 약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육체는 좀 더 자극적인 것을 원했다.
이보다 더 고통을 주어도 좋을성 싶지만 그보다는 둔부 사이에 감춰진 제 은밀한 곳을 지난날
처럼 마구 헤집어 주었으면 했다.
더 깊은 곳을 꿰뚫리고 낭떠러지에 처박힐것 같은 아찔한 쾌감. 몸 곳곳에 새겨진 그
강렬했던 감각이 벤을 부추겼다.
...아냐.
벤은 멍해진 머리를 흔들며 겨우겨우 정신을 지탱했다. 방심하는 순간 다시 수치도 모른 채
헤일런에게 매달려 짐승처럼 제 욕망만 채울 것 같았다.
그럴때 헤일런이 후끈 거리는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주무르며 제안했다.

“견디기 힘들다면 한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잘못했다고.”

“…….”

“역시 당신에겐 이런 장난같은 체벌로는 벌이 되지 않는가 봅니다.”

그 의미심장한 말에 벤은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기분이 되었다. 맞는 것 따위야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참으면 그만이었지만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

자, 잠깐.

다급하게 뒤를 돌자 기다렸다는 듯 헤일런이 나긋하게 웃어 보인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검은눈동자가 그의 옷차림과 더불어 신사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벤에겐 그저 위협적으로 보일
뿐이었다.

거짓말이라도 잘못 했다고 빌기는 싫은데 그 대가로 다른것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벤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목구멍 깊숙히 처박히려는 말을 간신히 끄집어냈다.

“…그거 말고는.”
“일어서십시오.”

벤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순순히 반쯤 무너졌던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이윽고 주위공기가 서늘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한층 낮아진 온도에 피부위로 오돌도돌한


소름이 돋아났다.
하.. 그 사이 뿌연 입김까지 맺히자 차오르던 불안함은 한층 더 깊어졌다.

그냥 한번만 굽히면 될것을 또 스스로 무덤을 판 기분이다. 하지만 헤일런만 보면 유독


감정적이 되는것도 사실이라..

"아, 흐윽?!"

비부 사이에 와닿는 차가운 감촉에 놀라 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틀었다.

<-- 부서지다 -->


                             
"가만히. 움직이지 마십시오 벤."
"흐으...읏."

단지 그 말한마디 뿐이었는데 주박이라도 걸린 듯 몸이 묶여 버렸다.


그 사이 비부를 누르던 차가운 무언가는 내부를 가르며 깊게 밀어넣어지고 있었다.

차, 차가워.
엄습하는 한기에 허리를 덜덜 떨자 헤일런이 부가적인 설명을 붙였다.

"제것을 그냥 밀어넣으면 상처가 날테니. 그 전에 조금 풀어두려 하는겁니다."


"윽...피, 필요 없...악!"

단번에 내부를 가득 채워온 비명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일전에 한번 경험해 본바 이것이 얼음이란건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다만 그때는 내부에 손가락을 넣어 아예 얼릴 지경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무언가가 들어찬 것 같았다.

입구가 팽팽히 늘어날 정도로 부피감도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헤일런이 다른 한손을 펴
보이며 제 안에 들어간 것과 똑같은 것을 만들어냈다. 벤은 눈을 크게 떴다. 성기모양을 본뜬
얼음. 자신이 노예가 되기 이전이었다면 기발하다 칭찬했을 정도로 정교했지만 지금은 이능을
왜 저런데다 낭비하는가 못마땅할 뿐이었다.
그러나 헤일런 본인은 만족한 얼굴이다.
"얼음으로 만든 장난감은 제 마음대로 크기나 길이의 조절이 가능해서 사용하기가 제법
편리합니다."
"윽..아!"

차가운 얼음 때문에 내부에는 시리고 아린 통증이 지속되었다. 하반신이 얼어붙는 듯 했다.


헤일런이 손을 뻗어 얼음 덩어리를 움직였다. 물기 하나 없는 속살이 쩍쩍 들러붙자 벤은
비명을 참기위해 서리가 낀 벽을 손끝으로 긁어댔다.
다행히 안의 열기 때문인지 물기가 생겨 추삽질이 조금 원활해졌다.
그러다 간혹 얼음이 미끄러져 내릴라 치면 그의 손바닥이 탁. 내부를 쳐올려 장기를
뒤흔들었다.

읏. 입술을 깨물며 숨을 헐떡이는데 헤일런이 다른 손을 뒤로 옮겼다.

"만든게 아까우니 이것도 마저 넣어볼까 하는데."

뭐?
벤이 경악해서 고개를 돌리자 헤일런은 아랑곳 않고 또 하나의 얼음을 물에 적셔 이미 들어갈
자리도 없는 밀부사이를 꾹 찔렀다.

미친...
지금 상태로 그런게 들어갈리가 없다.

침입을 막듯 엉덩이에 힘을주자 헤일런은 꽉 조여진 주름의 틈을 손가락으로 벌리며 얼음의


끄트머리를 끝끝내 밀어넣었다.

동공이 확대되고 입이 크게 벌어졌다.


성교에 익숙해진 벤이라 해도 둘은 아직도 버거웠다. 하물며 사람의 살덩이도 아니고
딱딱하고 차가운 얼음이다.

"아..으윽!! 아아악! 그, 그만!"

벤은 숨이 막힐듯한 고통에 정신이 없었다. 아팠다. 헤일런이 수인으로 변해 제 뒤를 쑤셨던


때 만큼이나 안이 꽉 차버렸다.
차가운 한기에 몸이 덜덜 떨리고 한계까지 벌어진
입구가 결국 찢어져 피가 주륵 흘렀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감각이 유일하게 뜨거웠기에 알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어째선지 도망은 불가능했다.
크윽.. 벤이 괴로워 하며 자세를 무너트린 순간 헤일런이 억지로 비집어 넣고 있던 얼음을
빼내었다.
쑤욱. 묵직하고 커다란 부피감이 사라지자 벤은 그제야 뒤가 얼얼하다 못해 불에 지진듯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젖어버린 눈가가 물로 흥건했다.

"흐음. 역시 두개는 무리인가."


".....하아. 하. 으.."
"자 벤. 이래도 아직입니까?"
반쯤 녹초가 된 벤은 대답을 할 겨를도 없었다.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헤일런은 포기한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바뀐게 없는 분이군요. 후, 약으로 중독시켰을 때가 확실히 고분고분하긴 했는데.


추울테니 일단 이리 오십시오."
"......"

벤은 흐려진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 몸을 일으켰다.


비틀 거리면서도 익숙한 품을 찾아가는 스스로를 깨달을 새도 없이 뜨거운 온기가 그를
감쌌다.
평소엔 보통 사람보다 서늘한 체온이라 해도 지금처럼 추위에 노출되고 나니 헤일런의 품이
유독 따듯할 정도였다.

헤일런은 그를 이끌어 욕조끄트머리에 앉았다.


바지만 살짝 끌러 속옷을 젖힌 헤일런이 그 상태로 벤을 제 무릎위에 잡아 내렸다.

다리 사이에 뜨거운 것이 닿고 다시 입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한차례 거대한 것이


꿰뚫었던 지라 삽입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리를 좀 더 벌리셔야지요."
"흐읏..아. 윽!"

밑으로 꾸역꾸역 들어차는 성기에 벤은 낮게 쉬어버린 목소리를 내며 그의 어깨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뜨거웠다. 추위에 잠시 식었던 욕구가 다시 슬금슬금 피어오르고 있었다.
배가 꽉 차는 이물감이 진저리나게 싫은데 몸은 또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물조물 조여대는 제 내벽의 움직임이 선명히 읽혀질 정도로. 머리가 다시 뿌연 안개로 꽉
들어차서 다른 생각이 더 이어지지 않았다.

삽입만으로도 기립한 제 중심에서 끈적한 액이 줄줄이 쏟아졌다.


하아..학. 하.
반쯤 상체를 그에게 기대고 있자 헤일런이 그 상태로 가슴가에 손을 얹었다.

이윽고 돌기를 잡아 비트는 움직임에 몸이 펄쩍 뛰어 올랐다. 물론 밑에서 말뚝처럼 박혀있는


성기에 바르작 거리는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여긴 아직도 좋으신가 봅니다."


"윽!"
"굳이 약을 통해 바뀐거라면 민감해진 몸 정도겠습니다. 듣기로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면 이
후유증이 평생 가기도 한다던데."

퍽, 하고 골반을 잡고 쳐올리자 뒤가 절로 조여들었다.

"흐앗...아!"
"분발해 보십시오. 벤."

구멍을 들쑤시고 가슴가를 간지럽히는 쾌감에 벤은 정신없이 신음을 토해내며 헤일런의


어깨에 머리를 부볐다. 마치 좋아죽겠으니 더 해달라고 조르는 마냥. 실제로도 척추가 찌르르
울리고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기분이 좋기는 했다.
...빌어먹을 미약.
일전에 약에 취했을 때와 다른점이라면 제 행동을 인식은 하고 있으나 통제가 불가능 하단
점이었다. 이런 후유증이 평생 지속될 수 있다니.
이러다간 강제가 아니라 자의로 창부생활을 즐기게 될 날이 올지도 몰랐다. 위기감을 느낀
벤은 입술을 짓씹으며 제 스스로 허리를 움직였다.

제대로된 치료 방법이 이런것 밖에 없다면 싫다고 거부할 때가 아니었다.

"좀 더..흐윽. 더 세게..!"


"...예?"
"분발해 보라 하지 않았나. 네놈도 협조하시지."

쾌락에 사로잡혀 흐려졌던 자줏빛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났다. 힘겨워 하면서도 비굴함이나
굴욕감은 없었다.

부시고 또 부셔도 차오르는 드높은 자존심.


그를 마주 보던 헤일런이 귀끝을 손으로 매만지며 웃었다.

"....그렇다면야 감사히."

첨벙. 욕조 가득히 담겨있던 찬물에 몸이 뒤로 넘어가 버렸다.

철퍽. 철퍽. 수면위로 물방울이 거칠게 튀어 올랐다. 벤을 내려다 보는 흰 얼굴은 다정한듯


하면서 묘하게 위압적이었다. 물기에 젖은 셔츠와 뺨에 달라붙은 검은색의 머리카락.
허리를 쳐대다 사정을 하면 나른하면서도 깊게 휘어지는 눈매.
늘씬하면서도 우아한 육체는 그의 본체인 재규어의 모습과 흡사했다.
어릴때도 귀티나 보이는 생김새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건 지금도 다를바가 없다.
뜨거운 숨소리와 함께 뺨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벤의 입술 위로 떨어졌다.

...

"하아..하."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차가운 물속에서 두번의 절정을 맞을 때까지 헤일런은 벤을 놓아주지


않았다.
덕분에 엄청난 추위속에서 그와 대조적으로 뜨거운 섹스를 했다.
그러나 우스운건 추위에 하얗게 질린건 헤일런도 마찬가지였단 사실이다. 얼음을 다루는
이능을 가진 주제에 추위를 타다니. 벤은 참 무쓸모한 육체라며 속으로 비난했다. 하지만
남말할게 아닌게 자신역시 고작 세번의 사정에 온몸이 다 후들거려서 일어서는 것 조차 힘에
부친다. 받는 쪽이라 체력소모가 컸는지도.
벤이 물에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지자 그새 옷차림을 정돈한 헤일런이 커다란 타월로 그의
몸을 감싸주었다.

"저는 제가 복수를 위해 당신을 괴롭히는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가끔 도를 지나친 행동에


몰입하고 있노라면 딱히 그런것 같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모른척 묻어두고 있었던 걸지도요."
"...다행이군. 나만 너를 증오했다면 그것도 미안한 일이었을텐데."
"입 조심."

뒤를 철썩 갈기는 손길에 벤이 움찔하며 헤일런의 어깨를 붙들었다.


멍이 든것같은 엉덩이와 살이 찢어진 허벅지가 뒤늦게야 고통을 호소해 왔다.

평소와 다를바 없이 자존심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벤은 사실 조금 낭패스러운 기분이었다.


설마 하며 무시했던 제 변화를 이번 일로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의식 중에 행해지는 복종. 그건 단순히 약 때문만은 아니다. 처음 정신이 들었을 때야


그렇게 생각했지만 쉴새없이 떨리는 몸은 분명 헤일런에 대한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심지어
잦은 접촉에도 불구하고 거부감은 커녕 오히려 익숙함까지 느끼지 않았던가.

혐오해도 모자랄 판에 익숙함?

"하.."

터져나오는 웃음에 헤일런이 의아한듯 그를 보았지만 벤은 정말로 제 상황이 우스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도저히 있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 기가 꺾였다.


그래. 정신과는 별개로 몸은 그에게 굴복한 것이다. 공포가 새겨지고 폭력에 익숙해 지며
마치 싸움에 진 개마냥 그를 제 상위의 포식자로 인식했다. 인정하는 것이 뼈 아프지만
눈앞의 남자는 더이상 벤이 그토록 무시하고 천하게 여기던 동물로 보이지 않았다. 깨닫고
나니 그 짙은 혐오와 경멸에 가깝던 무시가 씻은듯 사라졌다.
벤은 웃음을 뚝 멈추고 표정을 굳혔다.

이제보니 부서진것은 자존심 같은게 아니었다. 자신의 정체성은 지켰지만..

쯧 혀를 차면서도 벤은 생각보다 담담한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아니라고 바락바락 부정하면 그 또한 패자의 발악처럼 보일것 같았다.

포기와 체념은 제게 거리가 먼 단어지만 이미 꺾인 투지는 다시 되살아 나지 않았다. 버티는


것도 지치긴 했다. 물론 지금의 이 굴욕은 곧죽어도 놈에게 알려줄 생각이 없다.
벤은 시선을 떨어트렸다.
증오가 무뎌진 것은 아니다. 다만 두려움을 알았을 뿐. 조금 더 가늠해 봐야 알겠지만 극복할
수 없다면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아십니까?"
"?"

문득 들리는 말에 살기가 흩어졌다. 생각에 빠져있던 벤이 멀뚱히 눈만 굴리자 헤일런이 그의


몸을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돈을 잃은건 아깝지 않지만. 카드는 당신하고 몇년전 했던 이후로 처음 잡아 봤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랬다는 겁니다."
"......"

몸이 허공에 붕 뜬채로 침대로 옮겨졌다.


헤일런은 벤과의 카드게임에서 단 한차례도 승리를 얻어낸 적이 없었다.
벤은 가만히 생각하다 의미하는 바를 알아채고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러니까 결국
화풀이였다는 것이다. 다른건 다 핑계였고 그저 처음으로 승리를 거머쥘수 있던 게임에 져서.
고작 그런 이유로 나를..

어쩐지 억울함이 밀려와 부들 거리는 턱을 들었지만 이미 헤일런은 푹 쉬라며 이불까지


덮어주고 나간 직후였다.

<-- 부서지다 -->


                             
헤일런은 벤에게 투여하던 약을 끝내 멈추기로 했다. 벤이 무너지는 모습이 마냥 유쾌하지도
않았고 마침 칼튼이 선물했던 유리병도 밑바닥을 드러낸 참이었다.
그러나 정신이 들자마자 다시 오만함의 극치를 보이는 벤을 보며 헤일런은 안도하기도 한편
아쉽기도 했다. 고분고분 했을때가 다루기는 확실히 쉬웠던 터라.
그래도 욕실에서 크게 당한 이후 경각심이 생겼는지 벤은 요며칠 제법 얌전하게 굴었다. 그
일에 원한이 있는지 이따금 헤일런을 죽일듯 노려봐 오긴 했지만 이 정도의 시선이야
하루이틀도 아니고 익숙했다. 물론 익숙하다 뿐이지 워낙에 무서운 사람이라 가끔은 간담이
서늘하다.

"벤. 식사를 다 하셨으면 이리로."


"......"

오늘은 산책을 시키면서 붉은색의 목줄을 한번 메어봤다.


가슴과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가운에 붉은줄은 그의 퇴폐적인 외모와 잘 어울렸다. 벤은
식사를 깔끔히 마친후 느긋하게 누워 있는 헤일런의 근처로 다가와 앉았다.

까닥. 목줄을 잡아 당기자 불쾌한듯 눈썹끝이 올라갔다. 거리가 가까워 질수록 긴장이 되어
손바닥 사이사이에 땀이 배어났다.
헤일런은 나름 이 팽팽한 긴장감을 즐겼다. 위험한 일이 설레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은
이전에 벤의 밑에 있었을 때의 영향같았다.

더 가까이. 하고 명령하자 그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기울인다. 헤일런이 반정도 묶고 남은


머리카락이 사륵 어깨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이제 벤은 헤일런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마음대로 가꿔 놓아도 크게 거부하지는 않는다.


처음엔 손가락도 하나 까닥 못하게 몰아 붙였을 때나 지쳐 가만 내버려 두었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이다.

약에 중독되었던 벤은 이전에 비해 내어주는게 많았는데 이것도 그중 하나였다. 이지를


상실하는게 어지간히 끔찍했었나 보지. 헤일런은 여상히 생각하며 벤의 머리채를 쥐어 제
밑에 엎드리게 했다.

"크윽!"
"그만. 발버둥 치지 마시고."

벤은 뒤로 하는 체위를 굉장히 굴욕적으로 생각한다. 짐승처럼 보이기도 하고 전쟁때에도


누군가에게 뒤를 내보이는걸 가장 수치스럽게 여겼던 사람이라 그러했다. 엉덩이를 덮은 하얀
가운을 위로 들어 올리자 속옷조차 입지 못하는 벤의 하체가 고스란히 내보여졌다.

치료를 하지 않아 빨갛고 파랗게 멍이든 둔부와 딱지가 생긴 허벅지의 상처들.

헤일런이 손가락을 대자 그가 움찔 하며 몸을 비틀었다. 그것을 제지하기 위해 목줄을 잡아


당기자 순간적으로 목이 졸린 벤이 쿨럭 기침을 토해냈다.

"가만히 계십시오. 일단 붓기를 먼저 가라 앉힐겁니다. 이곳도 이렇게 많이 부어서는."


"필요없다. 됐으니까 그냥 넣...!"

엄지한마디 크기의 얼음덩어리가 맨살에 닿자 벤이 중간에 말을 삼키고 몸을 떨었다.


헤일런은 만들어진 얼음으로 멍이 든 엉덩이 위를 몇번 문지르다 그 사이의 골에
미끄러트렸다. 일부러 며칠간 치료를 하지 않았더니 뒤가 많이 찢어지고 부어 있었다.
얼음이 반쯤 삽입되자 허리와 바닥을 지탱한 팔다리의 근육이 팽창하며 힘이 잔뜩 실렸다.
벤은 숨소리를 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 했지만 헤일런은 가파르게 오르락 내리는 어깨의
움직임으로 이미 그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욕실사건 이후 그는 얼음만 가져다 대면 이렇게 온몸으로 거부반응을 보이곤 한다.

흐음. 확실히 많이 괴롭히긴 했지. 하지만 언제나처럼 고고히 서 있는 벤을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다뤄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되버린다. 주인님 소리를 듣기에 이 정도는 너무
약한가 싶기도 하고.

기어코 구멍 속으로 얼음 한덩이를 밀어넣은 헤일런이 그의 엉덩이 살을 양옆으로 당겼다. 헉


하고 숨을 삼킨 벤이 무의식적으로 몸에 덜 무리가 가도록 하체를 들어 올렸다.
"후읏..윽!"

벌어진 사이로 제 성기를 꾹 밀어넣자 벤이 짧게나마 억눌린 신음을 뱉어냈다. 덜컹 흔들리는


몸은 뼈다 도드라져 이전보다 야윈듯도 보였지만 여전히 강인한 것도 사실.
팔 다리를 끊어 놓지 않는한 이 경계는 결코 사라지지 않겠지.
헤일런은 이내 제것을 뿌리까지 한번에 박아 넣었다.
벤의 육체는 처음엔 고통으로. 그러나 익숙해 지는 순간 뜨거운 열기에 집어 삼켜졌다.

* *

질꺽. 성기를 빼내자 엉덩이 사이로 미처 삼키지 못한 붉은선혈과 뿌연 정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거친 추삽질을 도중에 견디지 못하고 자세가 무너진 벤은 반쯤 구겨진 상태로
숨만 헐떡였다.
기껏 단정히 묶어 두었던 은발이 땀에 젖어 엉망으로 흐트러 졌다.
처참하다면 처참한 몰골인데도 이상하게 동정은 생기지 않았다. 그건 헤일런 본인이
악독해서라기 보다는 벤이 이런 취급에도 필요이상으로 의연해서 였다.

지금만 해도 그는 후들 거리는 팔로 땅을 짚어가며 기어코 혼자의 힘으로 몸을 일으켰다.


헤일런을 올려다 보는 눈동자는 쾌락에 젖어 몽롱하긴 했지만 비참함도. 어두운 절망도
없었다.

"...다 끝났나?"

막 잠에서 깨어난듯 나른하면서도 반쯤 잠겨있는 목소리였다.


벗겨지다 시피 양옆으로 헤쳐진 가운에 정액으로 범벅이 된 나신. 그럼에도 은발을 길게
늘어트린 그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창부로써의 벤은 성욕이 크게 없는 헤일런 마저도 자극할 만큼 지독한 색기를 풍겼다.
관능적이고 요염하며 때론 귀족과 같은 고고함까지 서려있다. 십수년을 구른 창부도 이와
같은 분위기는 내지 못할 것이다.
헤일런은 그의 턱을 움켜쥐었다. 입술 사이로 보이는 빨간 혀가 시선을 잡아 끌었다.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어 다리를 벌리자 벤은 차양같이 긴 속눈썹을 깜빡이다 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번민에 휩쓸린 얼굴로 몇번인가 거듭 고민하던 그가 겨우 입술을 열었다.

"..오늘은 한번으로 끝내주었으면 하는데."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군요. 시작과 끝을 제가 정하는건 암묵적인 룰 아닙니까?"
"......"
"왜요? 도저히 못견디겠습니까?"
힘들다고 온정을 구한다면 여기서 그만두지 못할 것도 없다. 그래서 부탁을 해보라고 말했다.
헤일런은 벤에 한해 거칠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부탁에 약한 신사였다.

하지만 그 말이 그렇게 어려웠는지 벤은 결국 침묵을 지키며 후들 거리는 다리를 벌렸다.

"늘 생각하지만 참 이상한 자존심입니다."


"이상할게 뭐 있나. 네놈한테 굽힐 자존심 같은게 없을 뿐인데."
"그러시겠죠."

벤의 자존심은 기준이 없다. 어느 순간에는 얌전히 복종을 하는듯 하다가도 정말 사소한


부분에서는 굽히지 않고 자존심을 내세웠다.

하지만 경험상 헤일런이 원하는 대답이나 행동에는 타협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숙인다.

그답다 생각하며 헤일런은 다시금 벌려진 다리 사이에 제것을 깊이 묻었다. 아직 식지 않은


정액탓인지 달구어진 몸 때문인지 그의 안은 오늘따라 더욱 뜨겁게만 느껴졌다.

행위를 끝마치고 최소한의 예의로 몸을 씻겨준 헤일런은 벤을 끌어다 침대에 앉혔다. 벤은


고작 두번만으로 지쳤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욕실에서도 꾸벅꾸벅 졸더니 그건 밖으로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젖은 머리카락을 뽀송하게 말린 헤일런이 그를 물끄러미 보다 한마디를 했다.

"별로 어울리는 표현같진 않은데. 지금 모습은 꼭 병든 병아리 같습니다."


"정말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표현이군."

가당치도 않다는 듯 비웃던 벤은 이내 침대위로 몸을 기대어 누웠다. 하얀 나신은 온통 푸른


멍과 붉은 생채기로 가득했다. 헤일런은 그런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몸을 일으켰다. 몸을
겹치는 일은 잦아졌지만 그와 함께 잠이 드는건 여전히 꺼려진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깊은 수면을 취할 수 없다는게 그 이유였다.
벤은 그 사이 잠이 들었는지 눈을 감고 고른 숨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단 한번도
헤일런을 두고 불안해서 잠들지 못한적이 없다. 분명 목숨줄을 쥔건 자신인데 상황은 그
반대다.
한숨을 쉰 헤일런이 잘자라는 인사를 남긴 채 그대로 침실을 빠져 나왔다.

-
그리고 이튿날. 시각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붉은 목줄을 챙겨 산책을 나가려던 헤일런은
평소와 달리 침대위에 축 늘어져 꼼짝도 안하는 벤을 보고 심장이 내려앉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 그는 엎드려 있는 벤의 어깨를 붙잡았다.

움찔.
그제야 기척을 느낀듯 반응을 보이는 벤에 헤일런은 스스로도 이해못할 안도를 하며 그를
잡았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느릿하게 몸을 돌려 누운 벤이 숨을 색색 몰아쉬면서 눈꺼풀을 들었다.

약에 취했을 때처럼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가 간신히 헤일런의 얼굴을 잡았다.

"...뭐야. 벌써 산책 시간인가?"
"벤.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갛습니까?"
"…모르겠다만. 그 빌어먹을 약의 후유증인가 보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벤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다리를 내리는데


휘청, 그대로 넘어질듯 앞으로 상체가 기울어져 헤일런의 품에 그대로 안겨버렸다.

얼결에 벤을 안아든 헤일런은 당황한 나머지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벤이 바르작 거리며 헤일런에게 파묻다시피한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는 이 모든 원흉이


헤일런에게 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헤일런은 평소보다 뜨겁게 느껴지는 체온에 그를 침대에 올려 앉혔다.

호흡이나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흡사 약의 후유증과 유사하긴 했지만.. 미묘하게 무언가가


달랐다. 게다가 지난밤의 정사로 당분간은 몸이 멀쩡할텐데.

혹시, 하는 생각에 헤일런은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벤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

"……?"

이어지는 침묵과 여러차례 이마를 짚었다 내렸다 끝내는 이마까지 맞대는 헤일런에 벤은 이게
뭐하는 짓인가 미간을 좁혔다.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든 헤일런이 무언가 못볼것을 본마냥 황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열이 있는것 같습니다."


“…….”
마찬가지로 뜻밖의 말을 들은 벤은 그를 노려보는 것도 잊고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 부서지다 -->


                             
헤일런은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이렇다할 잔병치레 한번 앓지 않았던 벤이 몸살이라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다시한번 머리를 부여잡고 이마를 대었지만 뜨끈뜨끈한 열기는
고스란히 느껴졌다.
뜨거워..
바뀌지 않는 현실에 반쯤 넋을 놓자 이를 지켜보던 벤이 헤일런의 이마를 잡아 밀어냈다.

"...뭐 하는 짓이냐."
"열이 있다고 제가 당신을 배려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산책은 그대로
다녀올겁니다."
"좋을대로."

이정도로 약한 소리를 할까, 오히려 비웃기까지 하는 벤의 모습에 헤일런은 비로소 평정을


찾았다. 예상치 못하긴 했지만 죽을 정도로 심각한 질병도 아니다. 보통 이정도로 사람이
죽는건 보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헤일런의 주위엔 몸살감기를 앓을만큼 몸이 약한 사람은
없었다.
그중에서도 벤은 이런 질병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벤 본인도 어리둥절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하지만 원체 강한 사람이니 이정도는 아무렇지..

휘청.

"......"

침대에서 고꾸라질뻔 한 벤이 인상을 한번 찡그리고 상체를 일으켰다.


헤일런은 어쩐지 뒤숭숭한 기분이 되어 가만히 그의 뒤를 따랐다.
아슬아슬해 보였던 것이 착각은 아닌지 그는 오래지 않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자리에 멈춰
섰다.

"왜 뼈마디까지 이렇게 욱신대고 시리지.."

벤은 제 몸 상태가 이해가 되지 않는지 후들후들 떨리는 팔을 들어 올렸다. 그의 시선이


원흉을 찾아 절로 뾰족해 졌다.
헤일런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지난밤 필요 이상으로 괴롭히긴 했어도 그의 몸이 아픈건
순전히 열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말해도 벤은 불신했지만 그 오해를 굳이 풀여줘야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 했다.
어쨌거나 몸 상태가 어지간히 최악이긴 한지 그는 평소의 반도 채 못가고 숨을 헐떡였다.
어느샌가 목덜미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벤이 더는 못가겠다며 휴식을 청해왔지만 헤일런은 그를 묵묵히 내려다 볼 뿐이었다.

"질질 끌려와도 상관없다면 좋을대로 하십시오."


"......"

언뜻 들으면 다정한 어투였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정말로 개처럼 질질 끌 생각으로


목에 감은 줄을 당기자 이를 악문 벤이 덜덜 떨리는 팔과 다리를 겨우 움직였다.
속이 갑갑할 정도로 느린 동작이었지만 헤일런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산책을 다녀온 이후를 기점으로 벤은 본격적으로 앓기 시작했다.

* *

"넬이요? 넬은 약품을 받을게 있다고 도시로 나가서.. 삼일은 있어야 돌아올 겁니다만."

부하인 윌로스의 말에 헤일런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헤일런은 벤의 열이 높아지자 곧장 의사인 넬을 찾았다. 벤의 상태를 진찰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넬의 공간엔 있어야할 의사는 없고 먹다 남은 군것질거리와
허물처럼 벗어놓은 옷가지들 만이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선반위에 여러 가지의 병들이 진열되어 있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헤일런은 약품엔 전혀 조예가
전혀 없었다. 그가 아는 약이라곤 간단한 진통제와 상처치료에 좋은 연고들 뿐.
하지만 이런것들이 질병에 좋을 것 같진 않았다.
혹시나 윌로스는 알까 싶어 상황을 설명하며 물었지만 그 역시 못 들을 것이라도 들은마냥
생소해했다.

"감...기요? 글쎄요. 수인족들이 감기에 걸린 경우는 드물고. 그런 질병에 앓는 인간도


못봐서. 그런데 정말 그 악독한 인간이 겨우 그런걸로 앓는다는 말씀입니까?"
“이마가 불처럼 펄펄 끓습니다.”

아직도 손 끝에 남은 열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당황해 하는 헤일런과 다르게 윌로스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내버려 두면 금방 나을걸 왜 약까지 찾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오히려 약해진 지금이 무릎꿇릴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그런데 대장은 마치 그 인간놈을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난번에 약을 중단한 것도 그렇고. 설마 벌써 원한을 다
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런게 아니라 저는 다만.”

헤일런은 왜 자신이 변명을 하고 있어야 하나 회의가 들었지만 윌로스가 드물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해를 풀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원한같은건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만. 윌로스의 정신건강을 위해 있는것으로 해두자.

"저는 그가 약해보이는게 싫은겁니다."


"어째서요?"

해일런은 시선을 내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몇번을 거듭 생각해도 결론은 같았다.

"...그건 벤 하일즈가 아니니까요."

**

헤일런은 꼬박 반나절이 지나서야 벤이 있는 침실을 찾았다. 침대에 드러누워 앓고 있는 벤은


머리에서 열이 펄펄 끓다 못해 이제는 두통까지 호소했다.
속이 메스껍다며 식사조차도 거부하고 잠이 들었음에도 차도가 있기는 커녕 상태만 더욱
악화되는 중이었다.
손을 뻗어 머리에 얹자 잠시 움찔 하는 기색이 있긴 했지만 그뿐이다.
땀에 젖은 이마. 색색 가쁘게 흘러나오는 숨소리.
그 어떤 고문을 해도 기절할지 언정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벤이 지금은 아픔을 여과없이
내보였다.
아무런 강제없이도 벤은 무력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 낯섬이 헤일런은
몹시도 불안하고 초조했다.
헤일런의 세계에서 벤 하일즈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최상위의 포식자였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다는걸 알았지만. 그렇다해도 그 고고한 기개와 자존심은 여전히
건재했다. 헤일런은 단 한번도 그가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심해 본적이 없다.

"벤."
"..하아. 하."
"벤 하일즈. 제게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시면 곤란합니다."

그도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헤일런에게 예상외로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영원히
변치 않을 진실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깨어진 기분.
몇번을 불러도 벤에게서 대꾸가 없자 입술을 짓씹던 헤일런이 결국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짜악..!
안돼. 당신은 고작 이정도로 굴복해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렇게 누워있지 말고 어서
일어나서 저항해봐.
짐승따위가 감히 누구 얼굴에 손을대냐고 무시하고 조롱해. 내게 보통 사람과 다른것을
보여달란 말이다.

내장을 파헤치지도 않았고 사지를 잘라낸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나약하게 구는건지
헤일런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건 벤 하일즈 답지 않았다.

짝!

여러차례의 강한 폭력에 벤의 얼굴이 반대쪽으로 크게 돌아갔다.


윽. 하고 신음을 흘린 그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콜록. 뭐야."
"벤. 내 창부. 아프다고 해야할 일을 거르시면 곤란합니다."
"......"

몽롱하니 열에 흐려진 눈동자가 몇번인가 눈꺼풀 사이로 잠겨들었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얼얼한 뺨을 짚었다.

"..무리다. 오늘은 좀 쉬고 싶은.."


"아니오. 고작 이정도로 약한 소리 마십시오. 어울리지 않습니다."

머리카락을 잡아채 바닥에 팽개치자 쿵. 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벤의 몸이 종이짝처럼


나뒹굴었다. 콜록하고 기침소리가 연신 쏟아졌다.
헤일런은 넘어진 그의 몸위를 올라타 가운을 풀어헤쳤다. 언제고 끈 하나로 벗길 수 있는
옷은 이런 편리함이 있었다.
이윽고 다리 사이의 구멍에 손가락을 찔러넣자 벌려진 허벅지가 파드득 떨려왔다.
마른 구멍은 윤활유가 없어 뻑뻑했고 만져지는 내벽은 그의 열기를 짐작할 수 있을만큼
뜨거웠다.

"큿!"

단지 손가락으로 쑤셔질 뿐인데도 벤은 못견뎌 하며 숨을 헐떡였다. 얼굴이 홍시만큼이나


빨갰는데 헤일런이 보기에도 이 몸으로 관계를 갖기에는 무리였다.
기절한 그를 헤일런 홀로 박아대면 또 모를까.
한숨을 내쉰 헤일런이 그의 몸에서 내려와 침대위에 걸터앉았다.
헉. 허억. 벤은 옷을 추스릴 틈도 없이 어질거리는 정신을 다잡고 헤일런을 올려다 보았다.

"빠십시오."
"...뭐?"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이걸로 타협해 드리겠다는 겁니다."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제 다리 사이에 벤을 앉혔다. 이불을 벗어나면서 땀이 식었는지 그의


나신은 미세하게 떨림을 보였다.

"어서 끝내지 않으면 이 주위를 모조리 얼음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방에서 주무시고 싶은건 아니시겠죠?"

주위를 얼려가는 서늘한 공기에 벤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갔다. 고민은 짧았고 벤은 순순히
헤일런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어떻게 하나 지켜보던 헤일런은 놀라 표정을 굳혔다. 열에 들떠 정신이 없어서 였는지 단순히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또한 예상치는 못한 일이었음은 분명했다.

할짝..

타액으로 축축히 젖은 붉은 혀가 기둥을 천천히 핥아 올렸다. 복종하듯 길게 내리깔린


속눈썹. 숙여진 은발. 지나칠 정도로 외설스러운 광경이었다.
읏. 곧 뜨거운 점막이 헤일런의 성기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간의 경험이 허튼것은 아니었는지
그는 부은 목구멍으로도 헤일런의 것을 충분히 조였다. 허리가 찌릿 울리는 감각에 벤의
머리카락을 꽉 쥐어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헝클어진 은발이 뒤엉켰다.
헤일런이 벤의 입으로 봉사를 받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위험성이 있었기에 그동안은 미뤄왔던 일이었는데 자극을 하려했던 일에 순순히 응해올
줄이야.
하지만 달아오른 몸과는 다르게 기분은 영 좋지 않았다.
분명 성기는 반응을 했고 이윽고 그의 입안에서 정액까지 뿌렸지만.

"...콜록. 콜록. 이..제 된건가?"


"......"

대수롭지 않아 하는 얼굴. 그러나 여전히 고열에 시달려 휘청거리는 연약한 몸.


헤일런은 입안이 바짝 말랐다. 조금 더. 조금 더 괴롭히면 평소와 같이 화를 낼까? 그러나
손을 뻗기도 전에 벤은 이미 그대로 픽 고꾸라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이마에 열이 드글드글 끓었고. 숨소리 마저도 어쩐지 미약하게만 느껴졌다.
원래 인간이 걸리는 감기란게 이런건가.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할만큼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것 같다.

"......"

윌로스의 말처럼 내버려 두면 나을것이다. 아파서 앓는 모습같은건 더 이상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보통 사람과 다르니까. 옷을 정돈한 헤일런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 부서지다 -->
                             
그러나 헤일런은 오래 가지도 못하고 복도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추고야 말았다.

늦은 새벽 시간은 누구 하나 깨어있는 이 없이 고요하고 적막했다. 헤일런은 멍하니 어둠속


너머를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어떤 무형의 기운이 들러 붙기라도 한 듯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정말 이대로 돌아서도 되는걸까? 어느날 읽었던 의학서적에 의하면 열이 일정 이상으로


높아지면 죽음에 이를수도 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벤은 이대로 죽을 수도 있는건가? 다른 무엇도 아닌 고작 질병 따위로? 단지 상상만


했을 뿐인데 숨이 턱 막혔다. 눈앞의 어둠이 더 짙어진 것만 착각이 들었다.

벤의 죽음에 대해선 이미 여러차례 생각해 보았다. 칼튼에게 차라리 죽이라고 말을 했을 때만


해도 오히려 담담했고.
하지만 이런 식의 죽음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아파서 시들시들 말라가는 벤이라니.

이성적으로는 이대로 죽는다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가 그동안 저지른 죄의


대가라고 납득하라지만 감정은 그렇지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싶다는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이런 방법은 정말로 내키지가 않았다.

뭐라해도 한때는 정말로 존경하고 좋아했던 사람이니까.

"...억울하게도 말이지."

분명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벤은 자신과 달리 무신경 했을텐데.

결국 걸음을 돌려세운 헤일런은 다시 벤이 있는 침실로 돌아갔다. 벤은 아직도 내팽개쳐진


그대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헤일런은 그를 올려 침대에 눕힌 후 깨끗한 물을 담아왔다.


입가에 아직도 진득하니 말라붙은 정액을 깨끗히 닦아주고 옷을 마저 벗겼다. 일단은 이
뜨거운 열부터 내릴 생각이었다. 자칫하다 고열로 신체에 이상이 생기거나 백치라도 되어
버리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곤란했다.

찬물을 적신 수건으로 몸의 열기를 내리다 헤일런은 뒤늦게서야 벤의 입술이 찢어지고 뺨이


부어 오른것이 보였다.

자신이 만들어낸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그것은 어쩐지 지난날처럼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지워지지 않을 멍울처럼 지독히도 선명해 보였다.
"...벤."

하얀 얼굴을 내려다 보며 헤일런은 그의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누구의 침범도 허용치 않았던 고고한 절대자. 오로지 제 흥미만을 위해 움직이며 피도 눈물도
없이 잔혹했던 사내. 그러나 헤일런은 때때로 그 오만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다.
벤 하일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필요이상의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강한 사람이니까 망가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약에 중독되고서도 무서운 집념으로 후유증을
이겨내고 있듯.

"하아..으.."
"......"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벤의 신음에 헤일런은 움찔해서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다행히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뒤척 거리기만 하는 그에게 헤일런은 마른 입술 사이로
물을 흘려 보내주었다.

반년전에 비해 가늘어진 몸과 곳곳에 자리잡은 흉터. 의식하지 않아서 몰랐을 뿐이지 그는


이미 망가지고 있었다.

헤일런은 생각했다. 인간은 나약하다. 그리고 벤도 인간이었다. 이런 가벼운 질병따위로


목숨을 잃기도 하는. 그는 헤일런의 생각만큼 무적은 아니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헤일런은 이제야 알았다.

하기야 세상은 찰나의 순간 많은 것이 변한다. 그의 몰락에 자신은 숨겨두었던 적의를


보이기도 했으며 과거라면 차마 바라보지도 못한 지배욕도 생겼다. 영원히 군림할 것만
같았던 벤은 제 밑에서 다리를 벌리고. 지금은 고작 질병따위에 앓기도 한다.

깨닫고 나니 그를 구성하던 세계가 단번에 뒤집혔다. 그래. 당신도 결국은 나와 다를게


없었구나.
심장이 하나고 붉은 피를 가진. 마음이 있고 상처를 받기도 하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중에 자신과 그는 다른 존재라고 선을 그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당신에게 나는 여전히 더러운 짐승에 불과하겠지만."

헤일런은 수건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눈처럼 시리고 고결하기까지 한 은빛이


이제는 만지면 닿을 거리에 있다.
흐트러진 은발을 가만히 쓰다듬고 또 쓰다듬던 그는 울컥 차오르는 어떤 뜨거운 감정에 눈을
감았다.

벤이 정신을 차린건 그로부터 시간이 더 흘러 해가 중천에 떴을 쯔음이었다.

"..왜 이제와 친절이지."

콜록. 기침을 하는 벤의 목소리는 끔찍하리 만큼 낮게 쉬어 있었다. 지난밤의 일을


기억하는지 벤이 가늘어진 눈으로 헤일런을 경계했다.

헤일런은 손을 뻗어 묵묵히 그의 입술을 물로 적셨다.


그것만으로도 안색이 창백해 지는 모습에 헤일런은 새삼 자신이 어지간히 폭력적으로
굴었구나 싶었다.

안심하라는 의미에서 헤일런은 그 이상의 접촉은 하지 않았다.


이제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따지고 보면 무척이나 불쌍한 사내가 아닌가. 귀족으로 자라
평생을 타인의 위에서 군림하며 살아온 남자인데 지금은 제 말 한마디 하나에 다리를 벌려야
하는 창부로 전락했다.
같은 귀족들에게는 배신을 당하고 피를 이은 가족들 마저도 외면을 당하니 이제는 도움을
청할곳도 없다.

그날. 자신이 칼튼의 제안에 혹하지 않고 죽여주었다면 그가 이런 수모를 겪을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노예로 부리던 이에게 반대로 노예로 부려지다니.
자존감이 비교적 낮은 자신이야 아무래도 순응했을지 모르는 일이나 벤에게는 수치심과
모욕감이 상당했을 것이다.

벤 하일즈 같은 독종이나 복수심에 불타오르지 다른 이였다면 진작에 혀를 물고 자살을


했을지도 몰랐다.

그가 그동안 저지른 악행은 윤리적으로 도를 지나친 행위인 것은 분명하나 실상 법에


저촉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벤 본인으로선 이 처지가 퍽 억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가 아픈 이후로는 제법 인간적으로 느껴져서인가 없던 동정심이 생겼다.

"헤일런?"

부르는 목소리에 헤일런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벤은 아무런 의미없이 뱉은 말이지만 사실 헤일런은 그 목소리가 들려주는 제 이름을 꽤
좋아했다. 그러다 보면 어릴때의 그가 종종 떠오르곤 해서.
그러나 헤일런은 감정을 능숙하게 감추며 그의 의문에 답을 주었다.

"친절이라기 보단. 아직 주인님 소리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벌써 죽일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입에 습관처럼 배어버린. 그러나 이건 그를 살려두는데 나름 결정적이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벤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꿈깨라. 네놈은 죽는순간까지 절대 듣지 못할거니까."

예상했던 단호한 거절 이었다.

그래 안다. 당신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건 결코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헤일런은 쓰게 웃으며


그저 젖은 수건을 벤의 머리위에 올려두었을 뿐이다.

이틀하고 삼일이 지날때까지 헤일런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목까지 잠긴


상의를 입히고 하의까지 갖추어 그의 체온을 유지시켰고 삼키기 쉬운 죽을 만들어 정성껏
떠먹였다.

윌로스가 또 노예근성이 되살아 났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헤일런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괴롭히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려면 우선 그의 몸부터 회복시켜야 했다.

그 정성이 통했는지 사흘이 되었을 쯔음 벤은 드디어 열감기를 완벽히 떨치고 일어났다.


살면서 질병따위로 앓는일 한번 없던 그에게 나름 혹독한 신고식이었던 셈이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벤이 아팠던 이후 나름 평온하게 흐르던 일상이었다.


헤일런은 침대에서 막 일어난 벤의 시선이 쭈욱 자신에게 향하기에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가 잔에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그거, 설마 술인가?"
"예. 맞습니다만."

오늘 막 돌아온 넬이 선물이라며 가져다준 어느 지방의 특산물이었다.


그다지 술을 즐겨하는 편은 아니나 맛이나 볼까해서 한잔씩 홀짝였는데 생각보다 먹을만은
했다.

술을 확인한 벤의 시선이 보다 탐욕적으로 변했다. 숨길 생각은 애초에 없는 듯 아주


노골적이었다. 헤일런은 음, 하고 고민하다 물었다.

"한잔 드릴까요?"
"......"

고민의 기색도 없이 벤은 고개를 냉큼 끄덕였다. 설마하니 이렇게 바로 반응을 보일 줄


몰랐던 헤일런은 조금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벤은 귀족사회에서 소문난 애주가였다. 쉽게 취하지 않는 체질이라 한번


마실때엔 그 양도 어마어마 했다.
실제로 그의 저택 중 방 한켠이 전부 이런저런 다양한 술로 채워져 있기도 했고.

그런 그가 반년이 넘게 입에 술잔 한번 대지 못했으니 이렇게 달가워 하는것도 무리는 아니다.

헤일런은 한잔이라도 먹어보라며 잔을 내밀다 슬쩍 팔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눈앞에서 먹이를 빼앗긴 마냥 벤의 얼굴에 미세하지만 초조함과 짜증이 뒤섞였다.

"...뭐냐. 이제와 말을 바꿀셈은 아니겠지."


"저는 드린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권유만 했을 뿐이지.
"......"

벤이 짧게 혀를 찼다. 날카로워지는 시선에 헤일런은 반대쪽으로 꼬아올린 다리에 팔끔치를


대어 얼굴을 받쳤다. 그럴때 답지않게 문득 장난기 같은것이 생겼다.

"무릎이라도 꿇고 부탁해 보십시오. 물론 존댓말로. 그러면 한잔이 아니라 한병을 드리죠."

당연하지만 정말로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헤일런은 벤이 그 앞에서 스스로 무릎을 굽혔을 때


들고있던 잔을 놓칠뻔 했다.

벤이 허리를 숙였다.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이고 나머지 역시 연이어 바닥에 굽혀졌다.

낮아진 그의 시선에 헤일런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번만큼은 그도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벤이 덤덤한 얼굴로 그답지 않게 두 손을 공손히 내밀었다.

"부탁합니다. 제게 술을 주세요."
"!!?"
아..
입도 제대로 다물지 못하는 헤일런의 반응이 우스운지 벤이 픽 웃음을 흘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도 어쩐지 왕좌에 앉은냥 오만해 보였다.

"뭘 기대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자존심 따위가 뭐라고. 술을 내팽개 칠 순 없지."


"......"

자존심 보다는 술인가.. 전혀 짐작도 못했던 충격적인 사실이다.


헤일런은 마른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그, 그..렇다면.

"...주인님 이라고도 한번 불러 보십시오."


"적당히 놀리시지. 이번엔 말을 바꾼게 맞는것 같은데."
"......"

아무리 술이 좋다해도 여기까지는 양보하지 않을 듯 했다. 아쉽긴 했지만 약속은


약속이었으니 헤일런은 느릿느릿 들고있던 술병을 통채로 건넸다.
그러자 벤은 전쟁에서 적을 도륙할때나 짓던 환한 미소를 만면에 퍼트리며 병을 낚아채갔다.
그리곤 재빨리 침대위로 올라가 술을 병채로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맛있는건 아끼기보다
일단 입에 털어놓고 보자는 그의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난 행동이었다.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지켜보던 헤일런이 입을 열었다.

"그거 아십니까?"

묻자 꽤나 행복한 얼굴로 술을 콸콸 들이마시던 벤이 흘깃 헤일런을 보았다. 붉은 입술과


갸름한 턱선에 물방울이 맺혔다.
그는 마치 짐작이라도 가는 마냥 혀끝으로 입술을 훔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안다. 기준없이 이상한 자존심이라는거."

스스로도 인정은 하지만 개의치는 않는 듯 했다. 그다운 태도였다.

헤일런이 원하는 행동을 벗어난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협박을 하고 겨우 술 하나에


무릎을 꿇고 존댓말까지 서슴치 않고 하다니. -물론 그게 정말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였는가는
제쳐놓고-

..하지만 이해가 아주 안가는 것도 아닌게 그는 옛날부터 좋아하는것엔 맹목적이 되는


사람이었다. 원하는게 있다면 그 하나에 집중하고 그것만이 전부인냥 쫓았다. 귀족사회에서
애주가로 유명했던것도. 전쟁영웅이란 호칭도 그랬기에 얻어졌던 것이고.

하, 입술새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하하, 도저히 참아내지 못한 유쾌한 웃음에 벤이


멈칫하며 헤일런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그는 벌써 바닥을 드러낸 술병을 아쉬워 하며 입맛을 다셨다.
아아. 정말이지. 사람성격이 이렇게 한결 같을수 있을까.
상황이 이렇게나 달라졌지만 본질적인 것은 변함이 없다. 바뀐게 있다면 오히려 이제야 벤을
동등한 선에서 마주보게 된 헤일런에게 있다.

부수려고 했던건 벤의 자존심과 그가 수인족에게 가진 우월감 이었는데 정작 부서진건 자신이


벤에게 무의식적으로 두르고 있던 벽이었다.

"..원한건 이런게 아니었는데."

예쁜것에 애정을 품지 말라던 칼튼의 말이 언뜻 떠올랐지만 텅빈 병을 기어코 집어 던지는


벤의 모습에 그의 경고는 물거품처럼 머리속에서 사라지고야 말았다.
   

<-- 뒤바뀐 나날 -->


                             
열감기를 만만히 봤다 된통 고생한 벤은 이제 얼음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했다.
이제껏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건강했던 자신이 이렇게 앓았던건 분명 그 때문일 공산이
컸다. 갇혀지내면서 면역력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애초에 이 더운 사막에서 추위에 떨 정도로
얼음으로 고문을 당했으니 몸이 남아날리가.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며 원한을 곱씹는 벤에게 헤일런은 사막에서 단비를 뿌리듯 반년만에
처음으로 술을 맛보게 해주었다.

하지만 역시 한병정도로는 터무니 없이 부족했다.

아쉬움을 떨쳐내지 못하는 벤을 아는지 이튿날 헤일런은 몇병의 술을 더 가져왔다. 벤은


어제까지만 해도 속으로 담아두었던 원한을 깡그리 잊고 병을 세기 바빴다.
한병. 두병.. 세병. 하나를 제외하면 그저그런 도수의 와인에 불과했지만 이전에 즐겨 먹던
것들이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니 이 판국에 가릴게 뭐가 있겠냐만은.

"속 다버립니다. 이것도 드시죠."

아팠던 자신을 괴롭혔던 보상인지 헤일런은 그에게 사막에서 구하기 힘든 과일까지 안주로
내어 주었다. 의도야 어쨌든 일단 먹고 보자 싶어서 침대맡에 등을 기대고 앉자 헤일런이
얇게 잘라낸 오렌지 하나를 포크로 찍어 내민다. 그것을 벤이 자연스럽게 받아 먹으며 병을
기울였다. 동그란 잔에 차오르는 술이 몹시도 감질맛났다.
"그게 그렇게 맛있습니까?"

맛있다 마다. 이 맛있는걸 그간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동안은 사실 술을 떠올릴


만큼 여유가 없기도 했고.

기분이 넉넉해진 벤이 한모금을 입안에 머금고 헤일런의 타이를 꽉 끌어당겼다. 둘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검은색의 동공이 전에 없이 크게 확장되었다.

"!"

놀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술을 흘려넣자 그것은 헤일런이 무의식중에 꿀꺽 삼켰다.


벤은 전부 목구멍 사이로 넘기고 나서야 맞대고 있던 입술을 떼어냈다.

헤일런의 목울대가 긴장한듯 느리게 아래위로 꿈틀 거렸다.

"감상은?"
"아....."
"하기야. 이정도로 네놈이 뭐 간에 기별이나 가겠냐만은."

벤은 시큰둥한 얼굴을 하며 헤일런의 손등을 쿡 찔렀다. 과일을 달라는 재촉에 그가 뒤늦게야


표정을 수습했다. 놀란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나빠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뭐 알바는
아니지만. 그러고 보면 사실 술은 자신보다 헤일런이 더 잘 마셨다. 좋아하지 않아서 입에 잘
대지 않을 뿐이지 말 그대로 밑빠진 독이라 함께 마시면 오히려 먼저 취하는건 벤 쪽이었다.

아니. 딱 한번 헤일런이 취한 모습을 본적이 있긴 하다. 그가 어릴적. 그러니까 처음으로


벤이 술을 권했던 그 때 였던가.

["벤님."]
"벤."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에 벤은 흠칫해서 고개를 들었다. 아. 방금 무언가가 떠오를 듯도


했는데. 하지만 관심없는건 금방 잊는 주의라 벤은 자신을 부른 헤일런에게 시선을 던졌다.
헤일런은 포크를 내려놓고 또 어색한 솜씨로나마 벤의 머리카락을 손질했다.

"한병까지만 마시고 잠시 저와 나가시죠. 넬에게 진찰도 받을겸."


"진찰?"
"예. 고열을 앓았으니 혹시 모를 후유증이 있을수도 있고."
"친절도 하시군. 이게 따지고 보면 다.."
"벤이 노예의 본분을 벗어났기 때문이죠. 말만 잘들었다면 벌을 받을 이유도 없잖습니까."
"......"

그야..

벤은 뭐라 반박을 하려다 괜히 속이 타서 술만 연거푸 마셨다. 쓸데없이 말솜씨만 늘어가지고.


한풀 꺾인 모습이 흡족스러운지 헤일런이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왔다.
기껏 다듬어 놓고 흐트러트리는건 또 무슨 심보인지. 쯧 혀를 차면서도 벤은 딱히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 *

헤일런은 벤을 호랑이 수인족에게 맡기고 언제나처럼 두꺼운 책한권을 펼쳐 들었다.


반듯한 검은 정장에 차분한 외모. 그리고 손짓하나 하나에 여느 귀족못지 않은 우아함과
기품이 서렸다. 자신이 가르치긴 했지만 분위기는 사실 타고난 것 같기도 했다.

"오으엉? 튼튼한데? 문제없어. 아무래도 우리 대장이 잘 보살폈나봐."

간만에 외출을 다녀왔다던 넬은 벤의 몸을 꼼꼼히 살피고 몇가지 증상을 확인하더니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벤은 진찰이 끝남과 동시에 손이 닿았던 부근을 툭툭 털어냈다.
평소 결벽증 같은건 없지만 역시 수인족은 닿는건 불쾌했다. 그런 의미에서 접촉을 허락하고
있는 헤일런은 정말 극히 예외였지만. 별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수인족 보단 사람으로
인식되는 지라.

넬이 의료도구를 정리하다 말고 벤을 따라하듯 소매를 툭툭 흔들었다.

"우와. 재수. 왕재수. 나도 너 싫어 이 난폭한 노예야."


"네놈은 혓바닥이 아깝지도 않는가 보군.."

무미건조한 투로 사람을 자극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금방이라도 혓바닥을 썰어


버릴듯한 벤의 눈길에 넬이 이크 하며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보다 대장. 근데 내가 밖에 다녀오면서 이상한 얘길 좀 들었는데."


"예. 뭡니까?"
"근데 이거 쟤 앞에서 말해도 되나? 별로 좋은 얘기는 아닌데."
아닌척 해도 이런 부분에서 벤에 대한 경계가 드러났다. 벤은 자리에서 일어나 헤일런이 앉은
넓은 장의자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어 누웠다.

헤일런은 도통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앉아 쉴만한 곳은 그의 옆자리 밖에 없었다. 호랑이


놈의 옆은 아예 처음부터 논외였고.

자릴 잡은 뒤엔 배게삼아 헤일런의 무릎에 머리를 얹었다. 인정하는게 기분나쁘긴 하지만


역시 편하긴 하다. 하기야 잠자리만 벌써 몇년인데.

이대로 잠이나 한숨 잘까 싶어 뒤척이자 헤일런이 커다란 손바닥으로 뺨을 덮었다. 뿐만


아니라 성적인 의도없는 담백한 손길로 귓볼을 매만지기도 했다.

귀찮아서 힐끗 쳐다보자 헤일런은 그저 눈을 곱게 접으며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어? 대장. 위험..그러다 손 물어 뜯길라."


"괜찮습니다. 말씀 하시죠."
"어어? 응. 근데 나 손가락 물어 뜯기는건 못 고치는데."

누굴 식인 취급하는건지. 아무리 살육에 능한 자신이라도 사람 생살을 뜯거나 하진 않는다.


물론 먹지 않을 뿐이지 초반엔 좀 물어뜯긴 했다. 이빨을 죄 뽑아 버린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그만두긴 했지만.
어쨌거나 헤일런에게 익숙해지니 이제 잠까지 솔솔 밀려왔다.

나태해지니 늘어나는건 잠뿐이다.

"누군가 나리넬 상단의 지분을 가로채려고 지하굴에 의뢰를 넣었던 모양이야."


"그런것 정도라면 걱정 마십시오. 영역이 겹쳐지는 의뢰라면 칼튼씨는 먼저 계약을 했던
저희를 배반하지 않을 겁니다."
"응.. 그렇지만 칼튼님도 결국 인간이고. 너무 맹신하지는 마."

그래도 헤일런 주변에 제대로된 수인족 하나쯤은 박혀 있는 모양이다. 벤의 입장에선 아쉬운


일이지만.

그나저나 나리넬 상단이라면 제국에서 두번째 손가락안에 들만큼 큰 상단이다.


그곳의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게 그리슨 대공인 만큼 규모가 큰건 당연했지만. 헤일런이
그곳의 지분까지 소유하고 있다니.

"얼마나?"

문득 던져진 질문에 헤일런과 넬이 잠시 시선을 벤에게 두었다.


벤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한번 물었다.
"상단 지분 말이다.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고."

벤 역시도 금전적인 감각이 뛰어난 편이라 작게나마 지분을 소유하긴 했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부를 축적했을 정도니 그 가치를 더 말해 뭐할까. 물론 지금이야 먼지
처럼 흩어져 귀족놈들이나 황족놈들이 다 나눠가졌겠지만.

헤일런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일단은 순순히 답해주었다.

"글쎄요.. 이번에 칼튼씨에게 넘겨 받은것 까지 합하면 15 퍼 정도는 될겁니다."


"......상단의 지분은 그게 단가?"
"그럴리가요. 최근 저희가 사업을 많이 벌이고 있다는 것 정도는 벤도 알지 않습니까. 다른
상단의 지분도 조금씩은 있습니다."

그야 당연히 안다. 알았기 때문에.. 아니. 중요한건 이게 이니고.

"질문을 바꾸지. 이건 단순히 궁금해서 묻는거다만. 네가 가진 자산이 총 얼마정도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굶어 죽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그럼 그렇지. 하고 괜히 관심을 보였다 싶은 벤이 시큰둥한 얼굴을 하자 넬이 고개를 저었다.

"이잉? 굶어 죽지 않을 정도라니. 우리 대장 돈 진짜 많아. 이번에 얼음사업으로 얻은


수익금에. 로센티 상단 인수하고 하웰 상단 지분이 반에. 정확한건 윌로스가 더 잘 알지만
가진 재산만 본다면 적어도 제국에선 열손가락 안에 들정도는 된다고 봐. 생각해봐. 사막에서
얼음창고를 원하는 만큼 만들 수 있는데 이게 돈이 안되겠어?"
"......"

얼음창고는 백작위를 가지고 있던 벤조차 없던 부의 상징이자. 최고위의 귀족들만이 가질 수


있는 전유물이다.
지금이야 얼음하면 끔찍하다 뿐이지만.

어쨌거나 벤은 자신이 받은 충격을 애써 외면한 채 색이 다른 두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가


어릴적 전쟁 외에 꾸준히 관심을 둔것 중에 하나가 금전이다. 자신의 취미에 돈이 없어선
곤란하기도 했고.

때문인지 헤일런이 생각보다 부유하다는 사실을 알고나니 어쩐지 사람이 달라 보이기 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별달리 관심이 없어 몰랐는데 입고 있는 옷부터 시계까지. 전부 값비싼 명품들
뿐이다. 저 오른쪽 주머니에 든 회중시계는 얼마더라. 저것만 팔아도..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별로."

흘깃 저도 모르게 헤일런을 훑어보던 벤이 심드렁한 투로 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정말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순간 놈이 황금처럼 반짝여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물질적인 것에 잠시 현혹되었던 것 뿐. 부러워 할게 뭐 있나. 벤은 개인적으로 약탈이란
단어도 꽤 좋아했다.

   

<-- 뒤바뀐 나날 -->


                             

벤이 크게 앓았던 그날 이후 헤일런의 행동에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그는 가끔 뜻모를 눈으로 벤을 바라보는 일들이 잦아졌고 행동이 전에 비해 몹시 신사적으로
변했다.
이를테면 잠자리를 할 때에는 반드시 향유따위를 동반한다던가 필요이상으로 벤을 자극하는
말은 자제한다거나.
처음엔 편해서 좋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기분이 미묘하게 나빠졌다. 그래서 결국 참지 못하고
왜 그러는 거냐 물었는데 그때 헤일런이 대답했던 말이 참 가관도 아니었다.

"당신도 인간인걸 알았으니까요. 인간은 약하지 않습니까. 정도를 지키는 것 뿐입니다."

한마디로 약한 자신을 위한 배려였다는 것이다. 고작 감기 한번 앓은걸로 헤일런에게 툭 치면


쓰러질 병약한 인간으로 취급되자 벤은 자존심이 이만저만 상한게 아니었다.
때문에 아주 오랜만에 헤일의 목을 따버리겠다는 살심에 덤벼 들었다가.. 오히려 된통
얻어맞고 2 주를 넘게 침대신세를 졌다.
약해서 정도를 지켜야 한다고 했던 놈 치고 손속이 지나칠 정도로 과했다.

온몸이 전부 아파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벤은 자신이 먼저 덤벼들고도 심사가 뒤틀려


그를 비난했다.

"잘도 정도를 지킨거군. 이게."


"벤은 똑똑한 듯 하지만 간혹 멍청하게 굴때가 있어서. 꼭 한번쯤은 행동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된통 당하고 나면 그 다음엔 조금 자제를 하거든요."
"......!"

뭐?
벤이 굴욕감에 부들부들 떨면서 노려보자 헤일런이 달래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연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힘든 벤은 뿌리치지도 못했다.

속이 울컥해서 입술을 깨물려 하자 헤일런이 그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벤은 멈칫하다 이내 날카로운 송곳니로 그를 인정사정 없이 물었다. 살점이라도 물어


뜯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헤일런은 예상한 듯 손가락을 내어준 채로 말을 이었다.

"..역시 뽑았어야 했을까요."


"......"

치아를 노골적으로 만져대는 손가락에 등골이 오싹했다.


당연하지만 헤일런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벤은 슬쩍 턱에서 힘을 풀었다. 무서운건
아니지만 치아를 뽑힐경우 그 이후에 자신이 감당해야할 불편이 자존심을 억눌렀다.

벤은 감정적이면서도 이런부분에선 지나치게 현실적인 사내였다. 헤일런이 손가락을 빼내


움푹 패인 자국을 살폈다.

"저는 당신처럼 가학적인 행동으로 쾌감을 얻는 취미는 없습니다. 물론 지금의 당신은


피가학적인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것 같지만."
"하고 싶은 말만 해라."
"똑똑하게 구시란 겁니다. 절 정말로 죽이고 싶다면."

한때 벤이 지배했던.
아니. 당시에도 몸은 길들여진 짐승은 아니었었지. 그렇다고는 해도 그때의 헤일런은
이렇게까지 고압적인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 보진 않았다. 벤은 흐트러진 숨소리를 간신히
정돈하며 헤일런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성적으로야 헤일런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안다. 자신 역시 이전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고.


왠만해선 고분고분 굴려고 노력을 했다.

다만 정말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긁혔을 때는 자제가 어려웠다.


그래도 약에 중독되면서 헤일런에 대한 경멸이 부서지긴 해서 그 전처럼 제 몸이 어떻게 되든
덤빌 정도로 무모하진 않았다. 헤일런도 이 이상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어 보였고.

"어려운게 아닙니다. 벤. 당신이 사고를 좀 더 유연하게 바꾸면 될일. 제 배려는 연약함에


대한 동정이 아닙니다. 존중이지."
"......"

그가 신사적인 웃음을 머금고 대답은? 하고 물었다.


얼굴만 신사일 뿐이지 약간의 강박을 느낀 벤이 마른침을 삼켰다. 본의 아니게 무기력과
공포가 몸에 학습되긴 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대답, 대답 말이지.

"...노력해 보지."

벤은 언제나처럼 비틀린 웃음으로 마주대했지만 속내는 이전과 조금 달랐다. 헤일런에 대한


증오는 여전하다.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도 변하지 않았고.
다만 경멸이 사라진 만큼 어느정도의 타협은 가능하게 되었다. 이게 좋은점인지 나쁜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에도 벤은 간혹 헤일런의 지나친 배려가 거슬릴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의 친절을


적당히 넘길 수 있는 인내를 길렀다.
사실 나쁠건 없았다. 덕분에 몸은 더 이상 고되지 않았고 그의 일상은 제법 평화롭게
흘러갔다.
다만 너무 평화롭다 못해 지루한 나머지 살인욕구 같은게 비집고 올라올 때가 있었는데
그럴때는 그를 귀신같이 알아챈 헤일런이 정신없이 몸을 범해왔다.

효과는 있었다. 확실히 몸을 겹치고 있으면 살인욕구보다는 쾌감이 머리속을 지배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약의 후유증인지 어쩐지 거칠게 관계를 갖을수록 벤의 몸은
더 예민하게 반응을 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어떤 충동.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죽인게 밖에 나갔을 때였나.."

벤은 기본적으로 가학적인 성향이 짙은 남자였다. 그것은 천성이었다. 다만 헤일런에게


사로잡힌 뒤에는 워낙 정신없이 굴려졌기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지. 평온한
일상에서는 온갖 잡생각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래선지 벤은 가끔 전쟁터가 몹시도 그리웠다. 사람의 목을 잘라내던 촉감. 쏟아지는 뜨거운
피. 절규..

손끝이 저릿하고 떠올리기만 해도 흥분과 전율이 머리끝까지 뒤덮는다. 역시 벤은 세상에서


전쟁터만큼 사랑스러운 것이 없었다.
이럴때의 욕구는 보통 수인족을 통해 풀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주변에는 벤보다 약한 수인족이
없었다.

호랑이 넬 조차도 싸움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그쪽에서 피할 뿐이지 맹수과의 동물이다.

한숨을 내쉰 벤이 넓직한 침대 위에 등을 뉘였다.


이제 몸은 전부 나았다. 아직도 멍이 좀 남아있긴 하지만 헤일런이 가져온 약으로 찢어진
상처는 더 없었다. 그런데도 침대에만 종일 처박혀 있으려니 좀이 다 쑤셨다.

"실례하겠습니다."

똑똑, 하고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갈색 머리카락의 키가 훤칠한


남자. 늑대수인족인 윌로스였다.

벤은 몸도 일으키지 않은 채 말했다.

"네 대장이라면 여기 없어."


"압니다. 당신에게 용건이 있어서 찾아온 겁니다."
"내게?"

별 희안한 소리를 다 듣는다 싶던 벤이 이내 픽 웃으며 턱을 괴었다.

"왜? 나랑 한번 자고 싶나?"

가운 하나만을 입은 채 무릎을 세우자 그 사이로 늘씬한 종아리 부터 허벅지 안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몸짓은 교태롭고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어진 눈매는 제법 요염하기까지 했다.

순간 얼굴을 왈칵 일그러트린 윌로스가 미쳤습니까?!하고 눈에 선명한 혐오를 드러냈다.

벤은 질색팔색 하는 윌로스를 보며 쯧 혀를 찼다.


저건 동물 주제에 시각적으로 혹하지는 않는가 보군. 하기야 가능성이 있었다면 예전에 꼬셔
봤을 것이다. 헤일런 옆에 있는 최측근이라면 그를 배신하기에도 용이했을 테니. 물론 수인족
치고 배신하는 놈들을 본적이 없어서 아예 시도조차 안했지만.

"농담이다. 나도 수인놈들 하고 몸 섞는건 역겹다고."


"됐습니다. 다른게 아니라.."
"헤일런 찾아 달라는 얘기라면 다른데 알아봐. 귀찮다."

용건을 대충 짐작한 벤이 휙휙 손을 젓고는 조금 전과 달리 나태하게 뒹굴 거리자 윌로스가


말했다.

"술을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런데?"
"아샬로 100 년산 입니다. 전 있어봤자 먹지도 않고. 대장을 찾는걸로 맞바꾸기엔 나쁘지
않을텐데요."
"......"

듣는둥 마는둥 대꾸해주던 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살펴보니 그의 품에는 확실히 그 귀한게


들려있기는 했다.
윌로스는 확인이라도 시켜줄 생각인지 가까이 다가와 마개를 땄다.
휙, 코끝에 머무르는 진하고 톡쏘는 향이 분명 벤이 알고있는 아샬로와 유사했다. 진짜 100
년산인지는 마셔봐야 알겠지만.

벤이 홀린듯 무의식중에 손을 뻗자 그가 냉큼 뒤로 물러섰다.

"찾아서 데려오시면 그때 드릴겁니다."


"...내가?"
"예. 저는 따로 할일이 있어서. 가능하면 해가 지기 전까지 부탁드립니다."
"뭐, 어려울 건 없지."

코웃음친 벤이 호언장담하며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렸다. 해가 지기전까지 시간끌게 뭐 있나.


그를 찾아내는덴 30 분이면 충분하다.

벤은 뛰어난 사냥꾼이다. 특히 수인족전담을 맡았던 만큼 그들의 습성을 훤히 꿰뚫고 있었고.


헤일런의 행동 패턴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시간대에 짐작가는 장소는 둘.

조금전 연못가에는 없었으니 정원에 놓여진 가장 큰 나무에 올라타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와 가까워 질수록 군데군데 족적도 남아있다.

벤은 다가가 나무에 등을 툭 기댔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 상황 어딘가 좀 익숙하다.


황궁에서였나. 그 때도 종종 나무 맡에서 만나곤 했다.

그는 오랜만에 떠오른 옛 기억에 미간을 좁혔다. 따지고 보면 벤에게는 별달리 좋은 기억은


아니다.
헤일런이 수인인 것도 모르고 꽤 호감을 갖었던 때니까. 앙큼하게 귀와 꼬리만 숨기지
않았어도 그런 멍청한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봐."

건조한 목소리가 고요한 정원을 한번 울리고 다시 내려 앉을 때 까지 이렇다할 대꾸는 없었다.


건방진 놈. 어릴적에는 제 기척만 들어도 귀신같이 반겼던 주제에.

"헤일런."
다시금 이름을 불렀을 때. 바람 한점 불지 않았는데 바로 위에서 나뭇잎이 파스스 떨어졌다.

탁. 나뭇가지가 크게 한번 흔들리는가 싶더니 꽤 높은 곳에서 검은 형체가 벤의 바로 앞에


내려 앉았다.

밤처럼 빛한점 들지 않는 새카만 눈동자에 늘씬하게 뻗은 팔과 다리. 우아하지만 위압적인


검은 재규어의 모습에 벤은 자신이 그를 불러놓고도 움찔 몸을 굳혔다.

<-- 뒤바뀐 나날 -->


                             

벤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쩐지 동공이 세로로 긴 새카만 눈을 보고 있자니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호흡이 가팔라 졌고 손가락 끝이 절로 굽어졌다. 팽팽히 당겨진 근육과 등뒤를 적시는 식은땀.
인정한다. 벤은 극복할 수 없었다. 헤일런의 본체가 주는 공포에 이지가 먹혀버렸다.

그렇지만 굳이 이겨내려 노력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죽이면 다시는 누군가에게


공포를 느낄일도 없을 터.

"네 부하가 찾던데."

가까스럽게 입술을 열었으나 흘러나온 목소리는 형편 없었다. 벤은 애써 태연한 척 말을


뱉어두고는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공포를 느낀다고 해서 등을 내보일 생각은 없었다.
크릉. 낮게 목을 울린 검은재규어가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좁아질 수록 벤은 짙은 경계를
내비추었다.

헤일런은 긴꼬리를 한번 휘두르고 그 앞에 다가와 몸을 낮추었다.

"...뭐."
"......"

올라타란 건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런 기색이 읽혀 묻자 재규어의 머리가 아래위로 작게 끄덕였다.
물론 순순히 움직여줄 벤이 아니라 모른척 외면하며 뒤로 물러났다. 자신이 왜 짐승의 위에
올라 타야..
"자, 잠깐!"

순간 몸을 일으킨 재규어가 저를 덮쳐 오는 모습에 벤이 놀라 숨을 훅 들이켰다. 아니 그것


좀 외면했다고 이를 드러낼것 까진 없지 않나.

기어코 벤을 드러눕게한 헤일런이 눈깜짝 할 사이에 허리를 물어 올렸다. 정확히는


옷깃이지만.

새끼를 물어 나르듯 그대로 껑충 나무를 딛고 뛰어 오르자 벤이 기겁을 한건 당연한


일이었다. 상체가 붕 뜨자 벤은 허겁지겁 두 다리를 몸체에 휘어감았다.

수치스러운 자세는 둘째치고. 이 옷은 제 무게를 지탱하기에 용이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위태롭다.

"아, 알았다. 알았으니까 좀 내려놔!! 이러다 떨어지겠어!"

다행히 말을 알아들은 재규어가 바로 첫번째 가지에서 벤을 내려 주었다.

하아..하.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놀란 벤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럽게 나뭇가지 위에 올라섰다.
동의도 없이 저를 제멋대로 끌고 올라온 헤일런을 향해 절로 사나운 목소리가 나왔다.

"무례한 짐승놈이."
"......"
"기다려! 얌전히 올라타 줄테니까 옷은 물지마!"

빌어먹을 놈이 이젠 별의 별 수로 자신에게 수치를 준다.

벤은 찡그린 얼굴로 헤일런을 한번 노려보고 그의 등 위로 조심스레 엎드려 탔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에 긴장을 풀고 두 팔로 목을 슬며시 끌어안자 그제야 헤일런이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마치 화살이 쏘아지듯 날렵하게 나무위를 타고 오르자 그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 저절로 힘이


실렸다.

어쩐지 어릴때 부터 그 높은 곳을 잘도 오르락 내리락 거리더니만.

과거에는 해보지도 않았던 그런 생각을 하며 벤은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시야에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높은 곳을 무서워 하는건 아니지만 이렇게 빠른 속도로 나무를 탄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애초에 사막은 나무를 보기 어려운 환경이기도 했고. 이 또한 자연적으로 자라난 것은 아닐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간혹 작은 나뭇가지 같은것이 살갗을 긁기도 했다. 파삭.
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려는 걸까, 벤은 어느순간 밑을 내보며 가늠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이윽고 헤일런이 움직임을 멈췄을 때에야 벤은 드디어 감았던 눈을 뜰 수 있었다.

"...나를 아주 나무 꼭대기에 올려다 놨군."

황망한 얼굴로 중얼거린 벤은 까마득한 아래에 정신이 아찔해져 헤일런을 좀 더 꽉 끌어


안았다. 무의식중에 나온 생존본능이었다.

차라리 아예 몰랐으면 좋을 것을 설마하니 정말로 이 높은곳까지 오를줄은 몰랐다. 워낙


오르는 속도가 눈깜빡할 정도로 빠르기도 했고.

벤이 멍하니 있는 사이 헤일런이 꼬리로 그를 등에서 떨궈내 굵은 나뭇가지에 앉혀두었다.

점점 뒤로 밀어 붙이는 힘에 벤이 미간을 좁혔다.

"대체 나랑 여기서 뭘 하자는..어이, 잠깐만. 설마 아니지?"


"......?"
"그만둬. 이건 정말 미친짓이다."

벤의 등을 나무기둥에 붙이게 한채 헤일런은 그의 허리춤에 묶인 매듭을 손톱으로 살살 잡아


당겼다. 스륵. 어깨를 타고 내려가는 옷깃을 벤이 당황하며 붙잡았다. 헤일런은 아무래도
여기서 하고 싶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나무 꼭대기 위에서 벌이는 섹스라니. 이런건 해본적도 상상해 본적도 없다.
벤은 드물게 주위를 둘러보며 도망갈 구석을 찾았지만 갈곳이라곤 떨어지면 머리가 박살날 것
분명한 저 까마득한 아래 뿐이었다.
검은 재규어의 머리가 가슴안쪽으로 밀고 들어와 가운을 양쪽으로 벌렸다. 윽. 벤이 질색하며
거절했지만 헤일런이 그 말을 곧이 곧대로 즐어줄리는 만무하다. 당연하지만 약간의 몸싸움이
벌어졌다.
나무 위에서의 재규어는 특유의 균형감각까지 더해져 도저히 벤이 이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벤은 있는 힘껏 저항하며 허리를 비틀었다. 때는 못가려도 장소는 좀 가려야지.

"못한다. 여기서는 절대..읏?!"

순간 팔이 주륵 미끌어 지며 균형을 잃은 상체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어딘가를 붙잡을 틈도


없었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이었다.


...이게 뭐야.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고? 이 내가? 복수는 커녕 몸만 진탕에서 구르다가?
짧은 시간동안 수십가지의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벤은 저도 모르게 헤일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새카만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담기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가 벤의 팔뚝을 강하게
휘어감아왔다.
헤일런의 꼬리였지만 그것을 확인할 정신까지는 없었다.
세상이 뒤집혔다. 튕기듯 몸이 다시 가지위에 얹혀졌고 벤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한번에
뱉어냈다.

"헉, 허억. 헉.."

살면서 이렇게나 위험천만한 순간은 또 처음이었다. 전쟁중 베리타의 절벽을 오를때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높이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 자체가 위험천만이다.

기진맥진 해서 축 늘어지자 곁으로 다가온 헤일런이 마치 생사를 확인하듯 벤의 등을 꾹꾹


눌렀다. 발톱을 감춘 말랑한 발바닥이었다.

반응이 없자 헤일런은 정말로 할 생각이었는지 엎드린 벤의 가운을 위로 올렸다. 슬슬 끌어


올려진 가운에 치부마저 드러나자 이제 반항은 글렀다 싶었다. 그러나 막상 다리 사이로
부드러운 털이 닿자 벤은 정신을 추스릴 겨를조차 없이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차라리 사람 모습을 하던지!!!"


"......"
"사람. 사람이 낫겠어. 굳이 하겠다면."

어차피 제 고집대로 할거라면 적어도 거부감을 덜 느끼는 쪽이 나았다.


숨을 헐떡 거리며 대답한 벤이 입술을 즈려 물었다.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몸을 가늘게
떨자 고개를 갸웃한 헤일런이 반대쪽으로 사뿐히 건너와 앉았다.

톡.다시한번 헤일런이 벤의 몸을 건드렸다.

"장난이 조금 과했습니까?"

머리 위에서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에 벤은 숙였던 고개를 쳐올렸다. 장난? 속에서 뜨거운
것이 확 끓어 올랐다.

"너, 이...!"
"이제보니 흥분도 잘하고. 겁도 많고."

웃음소리와 함께 약간은 서늘한 온도를 가진 손가락이 벤의 뺨에 와닿았다. 움찔.


예상하지 못한 접촉에 어깨를 움츠리자 손가락이 조심스레 움직였다. 이내 두 뺨이 커다란
손바닥 안에 폭 파묻혔다.
어느새 검은털로 뒤덮여 있던 팔과 다리는 인간의 것으로 변했고 벤의 앞엔 재규어 대신
검은머리의 청년이 있었다. 당연하지만 옷한꺼풀 입지 않은 나신이다. 단단하면서도 유려한
몸.
흰 얼굴에 눈가의 점이 유독 색기어린 남자가 벤과 호흡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눈꼬리를 환히 접었다.

조롱하며 비웃을 거라고 짐작한 다음 말은 조금 의외의 것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당신을 그렇게 닿지 못할 존재라고 생각했을까요."


"......"

마주친 검은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그는 이전처럼 그저 쉽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
뻔뻔한 놈이라고 한마디를 하려던 벤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어째선지 잊혀졌던. 기억 저편에 묻고있던 그의 어릴적 모습이 현재 헤일런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그건 꽤나 이상한 기분이었다.
반갑지도. 혹은 불쾌하지만도 않은. 이성을 앗아갈 만큼 격렬한 감정이 이내 차분하게 가라
앉았다.

벤은 자신의 뺨을 감싸쥔 손을 붙잡아 내리며 서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이 높은 곳까지 나를 끌고온 진짜 이유는 뭐지."

그 질문에 헤일런은 대답대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벤은 그제야 처음으로 주위를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다.
벤은 아, 하고 감탄을 터트렸다.
언제 어디서도 볼 수 있는 하늘이었다. 그러나 조금은 특별하기도 했다. 전쟁터를 연상케
하듯 먼 끝자락에서 부터 화려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황금빛의 석양. 탁 트인 전경. 저녁놀에 물든 작은 세상이 한눈에 가득 담겼다. 그것은 마치
한폭의 그림과도 같았지만 그보다 더 생동감이 넘쳤다.

스스로가 감상적인 성격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아름다운 것 자체는 가치가 있었다.

반년만에. 아니 정말 아주 오랜만에 감상하는 저녁노을이다. 감상이 남다를 밖에.


정신없이 하늘구경에만 바쁜 벤에게 헤일런이 말했다.

"기회가 닿는다면 당신에게 꼭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어릴적에는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고."
"......"

그러고 보면 헤일런은 종종 나무위에 올라가 해가 질때까지 내려오지 않곤 했다.


작게 웃어보인 헤일런은 벤을 돌아 보지 않은 채 마찬가지로 먼 하늘에 시선을 던졌다.
황혼이 내려앉은 그는 이 아름다운 전경속에 위화감 없이 녹아 들었다.
수인족은 외모가 보통의 인간들 보다 뛰어난 편이다.

아찔한 높이에 영향을 받아서 인가 아주 잠깐. 심장이 꽉 조여 드는 느낌을 받았다.

오래지 않아 다시 검은재규어의 모습으로 변한 그는 벤의 옆에 느긋하게 몸을 걸치고 앉았다.


유연하게 움직인 꼬리가 손을 붙잡아 제 몸통위에 올려놓는다.

느릿하게 얹어진 손이 부드러운 털 위에 안착했다. 그것을 뿌리치려다 때마침 아래를 보게된


벤은 질린 얼굴로 냉큼 그를 붙잡았다. 한번 떨어질뻔 한 이후로 불안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놈 때문에 생긴 공포증이 이로써 셋이다.


수인공포증에 얼음공포증. 이젠 웃기지도 않는 고소공포증까지 생길것 같다.
아무튼 제 심장에 결코 좋지 않은 경험인건 분명하다. 여러모로.

그나저나 되도록 해가지기 전까지 헤일런을 데리고 와달라고 했는데..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올라온거 이대로 내려가는 것도 조금 아쉽기는 할터.

"뭐. 찾기는 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무책임하게 중얼 거린 벤이 조금 더 자세를 편히 하며 헤일런을 끌어안았다. 이편이 하늘을


내다보기엔 안정적이었다.
손에 와닿는 감촉은 생각만큼 그렇게 끔찍하지는 않았다. 목덜미로 옮겨진 손에 힐끗 저를
올려다보는 검은눈동자가 있었지만 벤이 다시 정면을 보자 그 역시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부드러운 미풍이 귓가를 스치고 무성한 나뭇잎사귀를 흔들었다. 그것은 어느
음유시인의 노래만큼이나 듣기좋은 선율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둘은 땅거미가 내려 빛이 사그라들때까지 꽤 오래도록 그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 뒤바뀐 나날 -->


                             
헤일런은 신사적인 외모와 차림새와 달리 조금 게으른 구석이 있다. 아니. 게으르다기 보다는
여유있는 생활을 즐겼다. 그말인 즉 일을 팽개치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시간이 일정하단 것은 아니다.

오늘도 헤일런은 윌로스의 눈을 피해 호수에서 헤엄을 치기에 한창이다.

재규어의 종특인지 그는 나무를 타고 오르는 일도 좋아했지만 헤엄 역시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에 비해 벤은 무척이나 따분한 얼굴로 물에 담근 발을 참방거렸다. 그는 이곳에 도착했을


때 자신에게도 안으로 들어올 것을 권했지만 벤은 사양하고 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헤일런은 얼마전 윌로스가 종종 술을 미끼로 벤의 도움을 받는 사실을 알고 부터 도주 하는


때때로 벤을 끌고다녔다.
덕분에 팔자에도 없이 나무를 타질 않나. 좁은 골방에 갇혀 책에 파묻히질 않나.
이제는 호숫가에서 물장구까지 치고 있다.

"벤."

조용히 제 처지를 비관하고 있을 무렵 불쑥 검은 머리가 수면 위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촤악, 주변으로 비산하는 물방울에 벤이 미간을 찡그리자 헤일런이 가볍게 사과를 건네며
아예 뭍으로 올라왔다.

그렇게 상처를 많이 냈건만 이렇다할 흉터하나 없이 말끔한 몸에 벤은 가만히 턱을 괴었다.


과연 수인족의 치유력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

헤일런은 한쪽에 마련해둔 타월로 몸을 닦고 옷을 차례차례 입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젖은


머리를 타월로 털어내며 벤에게 시선을 던졌다.

"잠시 외출을 할 생각인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나가는건 좋지만. 내가 도망갈 거란 생각은 안하나?"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고개를 젖힌채 입매를 비틀어 올리자 헤일런 역시 그와 닮은 미소를


그렸다.

"좋을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당신에겐 추적장치를 심어둬서 어디에 있든 찾을 수 있습니다."


"....뭐?"
"그러니까 또 혼쭐나고 싶지 않거든 얌전히 따라오십시오. 노예님."

톡. 놀리듯 손가락으로 벤의 코끝을 아프지 않게 튕긴 헤일런이 앞서 걸어나갔다.


순간 사고가 정지할 정도로 충격적인 말을 남긴 주제에 당사자는 지나치게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벙쪄서 색이 다른 두 눈동자만 깜빡이던 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야 그거.. 농담이지?"

몸에 추적장치를 박아 두는게 실현 불가능한 일은 이니었고. 그동안 도주를 하는 족족


발각되었던 경험 때문인지 벤은 이를 쉽게 흘려 들을수가 없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어디
도주가 가당키나 할까. 신체 어느 부위에 있는지 조차 모르니 자르는 것도 불가능 하고.
걸음을 빨리한 벤이 헤일런의 뒤를 바짝 따라 붙어 그게 정말이냐고 진실을 요구했지만 그는
그저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일 뿐.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았다.

* *

오랜만에 도시로 나온다고 벤은 한껏 옷을 차려 입었다. 아니 정확히는 입혀진거지만.


헤일런은 벤의 아름다운 외모를 가꿔주는걸 즐기는 편이었다. 덕분에 오기 전에도 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미 한참을 시달린 터였다.

목까지 꽉 잠기는 형태의 겉옷은 마치 벤이 한때 대령직에 머물렀을 때 입은 제복과 흡사한


형태였다. 다리선이 부각되는 바지나 복숭아뼈 위로 올라오는 군화까지.
색마저 온통 까만색이라 가슴에 마크가 새겨진 뱃지만 없을 뿐이지 겉으로 보기엔 제복과
크게 다를것도 없었다.
오히려 이걸 노린건가 싶기도 하다.

이전의 모습을 한 자신을 무릎꿇려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서라던지. 아니 뭐 그런거야 아무렴.

"그래서 진짜냐고 묻지 않나. 정말로 내게 추적장치를 단건가?"

오는 내내 다른 의미로 함께 시달린 헤일런이 한숨을 내쉬며 벤의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


트렸다.
그는 평소처럼 세련된 검은정장을 빼 입었는데 외출이랍시고 검은색의 신사모와 머플러를
목에 휘감았다.
이 더운 사막날씨를 상기하자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꽁꽁 싸맨 차림이었다.

"끈질기시군요. 그렇게 의심되면 도망가 보십시오. 대신 이번에는 정말 백치가 될 각오정도는


하시는게 좋을겁니다."
"......"

입을 다문 벤은 발에 채이는 돌멩이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도망을


갈 수 있을리가. 애초 약에 된통 당한 후부터 도망은 깔끔히 포기한 상태다. 아직도 그
후유증으로 틈만 나면 몸에 열기가 솟구치는데 이런 끔찍한 경험은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도망갈 가능성조차 차단 당한건 못내 억울하기 까지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이런 악랄한 짓까진 안 했는데. 게다가 이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정말
멍청한 짓을 사서 한것이다. 빠득. 이를 갈자 헤일런이 위로랍시고 한마디를 던졌다.
"벤이 멍청한건 아닙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은것 뿐이지."
"멋대로 독심술까지 하지마라."
"말장난이 제법 느셨군요. 그리고 바른말로 벤은 사냥감을 쫓는 쾌감이 좋아서 추적장치를
달지 않은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절 그렇게 둘도 없는 악당보듯 하면 곤란합니다."

뒷말을 삼킨 벤은 그를 잔뜩 노려보다 실수를 가장해 발길질을 했지만 민첩함은 헤일런이


한수 위였다. 덕분에 듣지 않아도 될 경고까지 들은 벤은 심기가 단단히 상해버렸다.

그런와중 누군가와 툭, 어깨를 부딪치고야 말았다. 품안에 온통 새빨간 장미를 한가득 안은


사내였는데..

마침 잘 걸렸다 싶어 손을 뻗던 벤이 상대를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마찬가지로 인상을


찌푸렸던 남자 역시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지천에 깔리고 깔린 흔한 갈색머리카락에 녹안이었다.


그런데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선한 눈매와 시원스럽기 까지한
입매. 벤이 지금껏 봐온 이들중 가장 빼어난 외모를 가진건 칼튼의 형제인 카시안과 그의
사촌이지만 굳이 이상형을 따지자면 단연 이쪽이었다. 잠자리의 의미가 아니라 벤이
생각하기에 가장 이상적이다 싶은 외모. 거기다 타제국 사람인지 분위기가 조금은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남자가 벤과 헤일런을 번갈아 보다 씩 웃었다. 웃는것 마저 그 수려한 낯과 썩 잘 어울어졌다.

"실례."

짧게 사과하며 뒤돌아 서는 남자를 벤은 애써 잡지 않았다. 답지 않은 자비에 놀란건 오히려


헤일런 쪽이었다.

"예상외로 그냥 보내시는 군요."


"잘 생겼잖아."
"예?"

헤일런이 당황해 되묻자 벤은 어느새 기분이 풀려 말을 덧붙였다.

"저처럼 취향에 딱 맞는 얼굴은 또 처음이라."

여건만 되었다면 자신의 방에 박제를 해두고 싶을 만큼.


그러자 해일런은 해괴한 것이라도 들은 마냥 굉장히 복잡미묘한 얼굴을 했다. 그는 난처한듯
모자의 챙을 몇번인가 매만지다 조심스레 물었다.

"...저 분이 누군지 모르십니까?"


"처음보는데. 아는 얼굴인가?"
표정을 보니 그런듯 하다. 의아해 하자 잠시 침묵한 헤일런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당신은 모르는 편이 좋을지도요."

싱겁기는.

* *

그 뒤로는 간단히 시내 구경을 마치고 숙소를 잡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헤일런은


느긋하게 벤의 옷 단추를 하나씩 끌러내렸다. 주춤 거리며 뒤로 밀리다 자연스럽게 침대위로
눕혀진 벤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익숙함이란 이래서 무서운 것이었다. 옷이 벗겨지고 가슴에 입술이 닿을 때 까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제는 크게 거부감도 없이 아래에 깔린 벤이 그를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헤일런은 습관적으로 웃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돌이켜 보면 헤일런은 제게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도.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에도 이와


같은 미소를 짓고는 했다.
그때는 비굴한 기색 하나 없는 그 얼굴이 그렇게 거슬렸는데. 지금에 와선 오히려 의문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왜 화를 안 내지?"
"예?"
"한번도 네가 화를 낸걸 본적이 없는것 같아 읏. 하는 말이다."

불쾌해 하거나 기분이 상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있지만 그것이 표정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수인족이란 이유로 핍박할 때에도 슬퍼했을지 언정 분노를 보이진 않았다. 아무리
수인족이라 해도 희노애락은 느낄텐데.

헤일런은 벤의 목덜미를 잘근 거리며 잇자국을 만들다 음..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아직 그정도로 격렬한 감정은 느낀적이 없어서."


"그렇다면 한번 쯤 시도해 볼만한 일이군."
"기대하죠."

도발적인 벤의 어투에도 검은 눈동자는 부드럽게 휘어지기만 했다. 아무래도 좋다는, 헤일런


특유의 느긋한 얼굴에 도리어 벤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붉은 순흔이 남은 목덜미를 혀로 핥아낸 헤일런은 손을 아래로 내려 벨트를 끌렀다. 바지와


속옷이 무릎 아래에 걸리자 그가 상의안에서 윤활제를 꺼내 들었다.
벤은 윤활제를 못마땅한 심정으로 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저런 친절이 처음에는
굴욕적이고 치욕스러웠지만 지금은 이것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있기는 했다. 이전에는
쓰는 일이 없어 몰랐지만 확실히 윤활제의 도움을 받으면 삽입도중 상처가 나는 일이 적고
고통이 줄어든다. 다음날의 운신 역시 수월했고.

이 편의를 굳이 자존심 때문에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래를 비집고
들어오는 이물감은 여전히 기분이 더럽다.

하다보면 쾌감을 느끼기야 하지만 거듭 생각해도 자신은 받는쪽보다는 넣는쪽이 좋았다.


자신이 아픈 것보다도 상대가 아픈게 즐거웠고.

"큭.."
"벤. 입술..깨물지 마시고."

괄약근이 벌어지는 뻐근한 감각에 입술을 깨물며 견디던 벤이 하, 낮은 한숨과도 같은 신음을


뱉어냈다.
길고 뼈마디가 두꺼운 손가락이 푹, 푹 내벽을 깊이 휘젓자 날이 갈수록 민감해진 몸은 금세
열기를 띄었다.
반면 밑을 헤집는 손가락은 보통 사람보다 서늘했는데 그 상반된 온도가 벤에겐 더욱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하아. 하.
몸을 겹칠수록 약의 후유증이 사라진다고 하더니 어째 자신이 속은것 같은 기분도 든다.
아니라면 왜 날이 갈수록 몸이 민감해지고 헤일런과의 행위에 거부감이 사라지겠는가. 역시
그 돌팔이 호랑이가 제게 수를 쓴것이 분명하다.

질척 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은 금세 두개가 되고 세개가 되었다. 이제 구를 만큼


굴렀는데도 여전히 입구가 작은 벤은 손가락 세개조차 받는것이 버거웠다.
이윽고 안에 들어찼던 손가락이 빠져 나가자 벤은 그 다음을 예상하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크게 벌렸다. 이 편이 삽입이 쉽다는건 경험으로 알고있다.

그러다 문득 아직 하의를 벗지도 못한 헤일런을 보고 벤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 뒤바뀐 나날 -->


                             

"내 옷차림이 흥분되나 보지?"

아닌게 아니라 헤일런의 아래춤은 한눈에 봐도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몸 상태를 지금에야 깨달았는지 조금 놀란듯 하다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의도로 입힌건 아닌데. 부정할 수는 없군요."


"왜? 이전에 내가 생각나서? 네 주인이었던 내가 이런 꼴로 다리를 벌리니 희열이라도
느껴지나."

저열한 짐승놈.
그의 심정이 이해가지 않는건 아니지만 이럴때 마다 기분이 저조해지는건 별 수 없는 일이다.
단추가 다 풀린 셔츠와 겉옷을 갈기갈기 찢고 싶은 심정이다.

사나워 지는 벤의 기세에 헤일런이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어왔다.

"진정하시고. 그런 우월한 감정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 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당신은 제복차림이 가장 잘 어울리니까요. 그저 흐트러진 모습이 예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답니다."
"......"

벤은 허탈한 얼굴로 웃었다. 촌스럽긴. 계집아이를 꼬셔도 그보다는 번지르르하게 말하겠다.


기분은 여전히 저조했지만 날카롭게 곤두섰던 신경은 조금 누그러져 벤은 제 머리위에 닿은
그의 손목을 잡아 자신쪽으로 끌어당겼다.

빛조차 들지 않는 까만 동공위로 야살스레 웃고 있는 창부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를 유혹하는


음탕한 창부.

"짐승주제에 보는 눈은 있어서. 이왕이면 경계를 늦출 정도로 혹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럼 당장에 목에다 예쁜 칼이라도 하나 박아줄텐데.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처럼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를 흘리자 헤일런이 벤의 손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사양하겠습니다. 아직 제 목을 건네드릴 정도는 아닌지라."

그 말처럼 헤일런은 잠자리에서 조차 좀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아쉬워 하는 사이 옷을 전부 벗어버린 헤일런이 몸을 겹치며 벤의 안으로 삽입을 해왔다.
오밀조밀 모여든 주름이 입을 벌려 길고 굵은 기둥을 조금씩, 착실히 삼켜내기 시작했다.
거칠지는 않았지만 거대한 이물감이 안을 채우는 감각에 벤은 헉 거친 숨을 토해냈다.
꿈틀대는 내벽과 느리게 들어오는 만큼 귀두의 생김새와 울룩불룩 돋은 핏줄이 지나치게
선명히 느껴졌다.

"아, 윽..!!"

입구가 빠듯했다. 이윽고 아래가 두쪽으로 갈라지는 고통에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전보다야
확실히 나아지긴 했지만 처음 삽입시의 통증이 아예 없을수는 없었다.
헤일런의 몸은 전반적으로 체온이 서늘한 편이지만 유독 아래만큼은 불기둥처럼 뜨거웠다.
긴장감에 등근육이 팽팽이 당겨지고 시트를 움켜쥔 손끝이 하얗게 질리자 헤일런이 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할짝. 할짝.
까쓸한 혀끝이 가슴에 붙은 유실을 쓸어 올리자 벤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가슴을 딱히
성감대로 여긴 적은 없었는데 언젠가 부터 가장 민감한 부위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그것을 알고있는 헤일런은 행위를 할때 마다 종종 가슴을 자극시키고는 한다.

"하으..읏."

춥. 추웁. 부드러운 점막이 유두를 강하게 빨아 당기자 저릿한 전율이 척추를 따라 올라왔다.
혀끝이 돌기를 꾹 짓눌렀다. 애무가 짙어질수록 벤의 눈가가 야하게 일그러졌다.
수치스럽기야 하지만 좋은게 좋은거라고. 몸이 아픈것보다야 낫다며 벤은 애써 합리화 하는
중이다. 지금만 해도 위에서 가해지는 기분좋은 쾌감덕에 아래의 통증은 어느정도 잊혀지고
있었다.

"하아..하. 이정도면 충분..하니, 움직여."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가슴에서 얼굴을 떼어낸 헤일런이 벤을 위압적으로 내려다 보았다. 부드럽게 웃고는 있지만
어딘가 단호한 기색이 어린 눈동자다. 뒤늦게야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퍽, 하고 거칠게
안을 찔러올리는 성기가 먼저였다.
주르륵. 밀려 올라간 그의 것이 장기마저 밀어 올릴 듯 했다.

큭! 고개를 뒤로 젖히며 충격에 몸을 떨자 안을 깊게 파고든 헤일런이 연달아 허리를


쳐올리며 내벽을 쿵쿵 두드렸다. 전신을 두드려 맞는 감각에 발가락이 곱아들고 시트를 쥔
손등에 뼈마디가 도드라졌다. 아래를 꿰뚫린 채로 벤이 할 수 있는 반항이랄건 딱히 없었다.
아래를 들쑤시는 성기에 전립선을 퍽퍽 강하게 자극 당하고 나면 벤은 무력하게 숨만 헐떡일
뿐이었다. 머리가 아찔했다.

"흐악! 아, 아아..!"

눈앞에서 연달아 팍 터지는 색색의 불꽃에 벤이 이를 악물었다. 다리 사이가. 그리고


중추신경이 녹아들것 같은 강렬한 쾌감이다. 아직도 약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몸은
이런 행위에 더 맥을 못췄다. 허리를 흔들며 제가 원하는대로 이끌려 해도 어느순간 보면
헤일런에게 엉망으로 휘둘리고 있다.
끈이 풀린 은빛의 긴 머리가 마치 비단처럼 침대위로 흩뿌려졌다.
윽, 읏. 학! 뒤로 빠졌다가 단숨에 뿌리 끝까지 처박는 헤일런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쾅,
쾅. 쉴새없이 들이박는 추삽질에 내장까지 범해지는 것 같았다. 배가 아릿했다. 팽팽하게
솟구친 성기에서 울컥 끈적한 액이 줄줄이 쏟아졌다.

퍽!

그러나 사정감에 늘어지기도 전에 다시 전립선을 자극당해 성기가 바짝 일어섰다.

헤일런의 손이 질척하게 젖은 벤의 중심을 부드럽게 감아 쥐었다. 고환을 문지르며


엄지손가락 끝으로 귀두를 살살 긁자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쾌감이 폭력에 가까워지자 벤이 슬슬 몸을 뒤로 물렸다. 이런건 고통보다 더 견디기가


버겁다. 그러나 이미 하반신이 단단히 붙잡힌 그가 피할 수 있는 곳이란 요원했다. 오히려
추삽질만 더 빨라졌다. 질꺽. 질꺽.
성기가 안을 거칠게 긁고 나가며 하반신을 뜨겁게 달궜다. 열기가 몸 곳곳에 번졌다.

허리가 반으로 접히는 무리한 체위로 내리꽂혀 안으로 뜨거운 것이 콸콸 쏟아진다.

"흐으.."

약에 취했을 때처럼 오로지 쾌감만을 쫓는 몸뚱이. 그러나 다른건 자신의 기억이 어느때보다
선명하다는 점이었다.
허둥대던 두 팔이 헤일런의 목에 둘러졌다. 몸이 일으켜진 채로 안기자 삽입은 더욱 깊어졌다.
쿨쩍.
맞닿은 육체는 매끄럽고 유려하면서도 그가 안겨도 무리가 없을만큼 단단했다. 골반을
붙들린채 아래 위로 내리 박히자 즈윽. 흥분한 성기가 그의 탄탄한 복근에 비벼졌다. 탁탁탁.
젖은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대단히 음란했다.

윽. 그, 그만.
아파서라기 보다는 너무 느껴서 괴로웠다.
참다 못해 결국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가 나오고 나서야 무지막지하게 몰아 붙이던 섹스에
휴식이 찾아왔다.

헤일런은 이제 잠자리에서도 곧잘 신사적으로 벤을 대하기는 하지만 아니다 싶은 부분은


확실히 짚어가며 벌을 주듯 아주 혹독히 괴롭히곤 한다. 바로 지금처럼.

"명령조가 입에 밴건 알지만 이제 잠자리에선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읏."
"노예는 부탁을 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벤."

왜 잠자리에서만 유독 이런일로 괴롭히는지 모르겠다만.


차라리 술로 꼬셔서 부탁을 하라 했다면 말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긴 손가락이 벤의 후끈하게 달아오른 뺨을 감싸쥐며 자신쪽을 돌아보게 했다. 비릿한
수컷의 내음. 쾌감에 흐려진 초점이 어느정도 잡히자 땀에 젖은 재규어의 모습이 보였다.
신사처럼 다정한 가운데 웃음기를 띈 검은눈동자만이 지독한 색향을 띄었다. 어릴때 부터 이
눈물점이 그렇게 야하더니만.
그러나 그 모습을 밑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또 감상이 달랐다. 언제부터 저런 지배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더라.

헤일런이 허리를 움직일때 마다 노골적인 소리와 함께 잦은 마찰로 뒤가 욱신거리고


화끈거렸다.
그러나 우스운건 섹스 자체가 거칠어도 전처럼 고문수준까지 몰아 붙이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하아..학. 벤은 쾌감에 절어 헐떡 거리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놈도 놈이지만
고집이라면 벤이 한수 위였다.

"큿! 나는 네..흐읏. 노예따위가 아냐."


"창부인건 인정하면서 노예는 왜 부정하시는지 모를 일입니다만."

헤일런은 화음부에 새겨진 붉은색의 꽃잎을 손가락 끝으로 찬찬히 매만졌다. 단지 그 뿐인데
오싹한 소름이 돋아 허벅지가 경련을 했다.
"여기. 이곳에 제 흔적을 새겨두면 당신이 좀 더 고분고분해 질까요?"

웃는 얼굴에 등뒤로 식은땀이 다 났다. 손가락이 닿는 부분이 불에 지져진듯 뜨겁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곳에 헤일런의 문장이 새겨진다 해도 벤이 내어줄 대답은 변하지 않는다.
보란듯 뒤를 꽉 조이면서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퍽도."
"그럴것 같긴 합니다."

애초에 기대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헤일런은 옅게 웃으며 벤의 안에서 토정했다. 안을


뜨겁게 적시는 그의 씨물이 이제는 일상처럼 익숙해 졌단 생각에 벤은 분해하기 보다는
나른한 얼굴로 몸을 축 늘어 트렸다. 그 자신도 그쯔음엔 또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 *

후들 거리는 다리로 겨우겨우 침대에 걸터 앉은 벤은 탁자위에 놓인 잔을 들어 반쯤 쉬어버린


목을 축였다. 뒤로 받는게 취향은 아니라지만 어쨌든 만족스러운 섹스를 하긴 했다. 정말
정신없이 흔들렸으니까.

이제 방안에 남은건 벤 혼자였다.


헤일런은 몸을 씻겨주는건 물론 제가 싸질러 넣은 정액까지 말끔히 처리하고 잠시 볼일이
있다며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추적장치가 정말 거짓은 아닌지 저를 떼어 놓고 가는것에 일말의 고민도 없었다. 물론 벤
자신도 도망갈 생각따윈 없었지만 대놓고 이런 취급을 받으니 또 청개구리 같은 심보가 불쑥
올라왔다.

하. 애새끼도 아니고.
벤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다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하지만 그도 잠시. 예민한 그의 신경에 무언가가 걸렸다.

찍.

"왠 쥐새끼가.."

문틈 사이로 기어 들어온 회색빛 생물에 벤이 불쾌한 얼굴로 낯을 일그러 트렸다. 그는


불결한건 질색인 성격이었다.
귀족으로 태어나 쥐새끼 따위를 본건 전쟁터에서가 전부였는데. 그 마저도 주위를 불로
싸그리 태웠던 기억이 난다.
하필 숙소를 잡아도 왜 쥐새끼 따위가 나오는 곳을.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날붙이를 찾는데
문득 쥐새끼가 침대 맡에 무언가를 떨어트리고 줄행랑을 쳤다.

데구르르 굴러온건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그리고 그 유리병안에는 돌돌 말려진 작은 종이가


있었다.
"......"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보던 벤이 주위에 있던 장식물로 유리를 깨트렸다.


이윽고 말려진 종이를 빠르게 훑어낸 벤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 뒤바뀐 나날 -->


                             
헤일런은 단정한 차림새를 선호하여 늘 단추를 끝까지 채우곤 하지만 벤은 그와 반대로 조금
넉넉한 옷을 좋아했다.
그는 갑갑한 단추 두어개를 푸르고 겉옷을 어깨에 둘렀다. 목덜미에 바로 조금전 정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과 섹스의 여운으로 나른하게 풀린 얼굴은 그 특유의 퇴폐적인
분위기를 더 짙게 만들었다.
벤은 종이에 쓰여진 대로 바로 옆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쾅.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예상했던 인물 하나와 예상치 못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키가 훤칠한 사내는 벤과 유사한. 그러나 가슴에는 대령의 직위를 뜻하는 마크가 정확히
새겨진 제복을 입고 있었다.
단정하게 묶인 붉은머리칼에 노란 홍채. 쟈엘 칸 대령.

"뭐야. 네 놈이 왜 여기에 있지."


"..그건."

쟈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어쩐지 난처한 기색을 엿보이며 입을 우물거렸다.


그가 대답을 미루자 그 곁에 앉아있던 다른 사내가 먼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왔다.

"간만에 보는군. 벤 하일즈 대령. 아, 이제는 대령이 아니시던가."

귀밑을 가리는 짧은 보랏빛 머리칼에 가느다란 눈매.


그 역시 키는 큰편이었지만 상대적으로 큰 쟈엘의 곁에 있다보니 다소 작아 보이는 감이
있었다.

사내가 입에 물고있던 긴파이프를 뱉어내자 메케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벤은


능청맞게 웃는 남자에게 대충 고개짓을 하며 근처에 있는 의자를 하나 빼와 앉았다.

바로 조금전까지 헤일런과 격렬한 정사를 치렀기에 몸에 무리가 많이 갔던 터였다.


"이미 다 아는 처지에 인사는 생략하고. 왜 뒤늦게 연락을 해왔지?"
"별로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뿐. 알다시피 나같은 장사치는 승산이 없으면 시도조차
안하잖아? 헤일런한테 잡혀가길래 그대로 죽었는 줄 알았지."
"망할놈이 지켜만 봤군."
"햐아. 정말 의외였어. 역시 수인족이라 그런가. 나라면 너같은 놈을 노예로 뒀으면 일단
다리 힘줄 부터 끊어 놨을텐데. 하는짓이 물러 물러. 고작 성노가 뭐야."

베로니츠 가문의 장자인 알렉. 그는 백작가의 자제이면서도 일찍이 장사치가 되어버린


변종이었는데
벤이나 쟈엘과 같이 우수한 성적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한 동기이기도 했다.
셋 모두 학교를 다닐땐 저마다 다른 의미로 유명인사이긴 했어도 서로간에 접점은 전혀
없었다.
다만 벤 같은 경우에만 성인이 되고 그와 종종 거래를 텄을 뿐이다. 필요에 의한 관계. 둘의
관계를 굳이 정의하자면 그러했다.

벤이 그를 택한건 이 철저한 이해관계 때문이기도 했다.


이 욕심많은 장사치라면 분명 헤일런이라는 먹음직 스러운 먹이를 놓치지 않을테니.

일전에도 말한바 있지만 헤일런이 인간과 교류를 시작한건 크나큰 실수다.


다른것은 철저히 배척한다. 그것은 고대적 부터 변하지 않는 인간의 특성이다.
그런데다 같은 인간 끼리도 제 밥그릇을 빼앗는 상대는 견제하기 마련인데 하물며 헤일런은
노예로 취급되는 수인족. 그가 급부상 할수록 손해가 커진 상인이나 귀족들이 이를 잠자코
두고 볼리가 없다. 그리고 그건 알렉도 마찬가지.

정치판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지 벤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이해관계에 대해선 잘 알았다.


하지만 제 처지가 처지여서 그런가. 태도가 영 시건방지다.

"이전에도 내가 시건방진 놈들의 혀는 잘 썰어냈는데. 어디 직접 당해보는건 어떻지?"


"워어. 진정해 진정. 도움 받아야할 처지에 그렇게 고자세로 나오면 쓰나. 난 솔직히
쟈엘대령만 아니었다면 너를 다시 만날 생각 따윈 안했을걸."
"쟈엘?"

그러고 보니 쟈엘 칸은 왜 알렉과 함께 있는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벤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침묵을 지키던 쟈엘이 그제야 말을 꺼냈다.

"얼마전 엘리.. 아니 그리슨 대공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사실을 알기 전까지 나는 네가


자의로 저택을 나갔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와주겠다. 네가 노예에서 벗어나도록."

이건 또 의외의 말이었다. 벤은 의심쩍은 듯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유심히 살피며 왼쪽


다리를 오른쪽 위로 얹었다.
도와주겠다니. 왜?
분명 나쁘지 않은 제안이기는 한데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들을만큼 벤은 순진하진 않았다.

그야 물론 저택에 얼마든 머무르라 제안한건 쟈엘이었다.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제 친우에


의해 벤을 내보내게 되었으니 죄책감을 느낄만도 하지만. 애초 쟈엘은 벤을 도와야할
의리같은게 없는 사이다.

때문에 벤도 그의 저택을 나오면서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고.

하지만 그의 생각은 벤과 달랐던 모양이다.

"대공의 일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
"아니 그 외에도. 아무리 네가 나와 뜻이 다르다고는 하나 없는 죄까지 뒤집어 씌운건 도를
지나쳤다. 변명같지만 나는 칼튼에게 대령직을 박탈한다는 것 까지만 들었다. 그 이후에
대해선 전혀 생각지도 못했지."

귀신같이 딱딱한 얼굴은 그대로지만 나름대로의 사과라는건 알겠다.


벤은 떨떠름한 심정으로 꼬았던 다리를 내렸다.
역시 세상은 넓고 넓다. 물론 칼튼과 손을 잡고 자신을 대령직에서 쫓아낸 쟈엘이 괘씸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벤의 입장이다. 쟈엘의 입장에선 크게 잘못된 일도 아니다.

게다가 이 부분은 이미 한차례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이미 잊은지 오래였는데.

"그리슨 대공이 다른말은 안 하던가?"


"무슨 말?"
"......"

빚은 이걸로 됐다는 그 말은 아무래도 전해지지 않은 듯 하다.

잠시 고민하던 벤이 빙긋 웃었다.

"그래. 도와주는데 야박하게 거절 할 수는 없지. 이정도로 용서하겠다."

사소한 부분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쟈엘과 다르게 벤은 제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
진실을 숨길 수 있는 교활한 사내였다.

용서를 받은 쟈엘은 그제야 한시름을 덜었다는 얼굴로 안도하다 돌연 한가지를 덧붙였다.

"다만 헤일런을 죽이는 일엔 동참할 수 없다."


"뭐?"
"대다수의 귀족과 상인조합이 헤일런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그를 죽여야할 이유는
될 수 없지. 내가 돕는건 어디까지나 네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벤은 이를 으득 갈았다. 돕겠다면서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솟구치는 짜증을 간신히 억누르며 벤이 물었다.

"헤일런을 안 죽이면 뭘 어떻게 해서 날 빼낼 생각이지?"


"...그러니까 그의 재산을 모조리 압수하는 방식으로. 상인들끼리의 싸움이라면 딱히
수인족을 핍박하는 것도 아니고."
"......"

쟈엘은 수인족을 아끼고 보호하지만 직접적인 폭력이 아니라면 그것을 폭력이라고 정의하지
않는다.
애초에 수인족이란 보호의 대상이었지 헤일런의 경우처럼 주인에게서 자립해 인간과 동등한
선에 자리한 선례는 없었다.

벤은 더 이상의 말씨름을 포기했다. 쟈엘은 그와 사고가 극과 극인 인물이다.

지난 몇년간 수없이 부딪친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던가.


그를 설득한다는 것은 쓸데 없는 기력 낭비다. 꿈쩍도 않는 바위에 몸을 부딪치는 것과
다를게 뭘까.

고민을 하던 벤이 "좋아." 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쟈엘은 조금 의아해 하면서도 제


뜻을 알아줘 고맙다는 말을 했다.

둘의 대화가 끝나자 뻐끔 거리며 허공에 연기를 동그랗게 말던 알렉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건 개인적인 호기심인데 말이야. 헤일런이 밤일을 그렇게 잘 하나?"


"뭐?"

찌푸린 채로 돌아보자 알렉이 벽면을 손등으로 퉁, 가볍게 두드렸다.

"들으니 아주 자지러지게 울더만."

..다 들었단 소리군.


힐끗 돌아보니 눈이 마주친 쟈엘이 민망함에 귀끝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입술끝이 파들
거리며 경련했지만 벤은 이내 두눈을 곱게 접으며 말했다. "그래. 지금도 아래가 잔뜩
쑤셔지는 것 같으니까."
다리를 살짝 양쪽으로 벌리며 그 사이에 제 손을 얹었다.
색에 절어 한층 농염해진 몸짓에. 붉은 혓바닥이 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파탄에 가까운 성질머리야 어쨌든 뭐라해도 미인이었던 벤의 얼굴에 색에 약한 쟈엘은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고 놀려먹으려던 알렉마저 말문을 잃었다.
*

당연하지만 서로 볼일이 끝난 척 돌아선 알렉이 홀로 다시 방을 찾아왔다.


똑똑, 시답잖게 입으로 노크소리는 낸 알렉이 침대위에 걸터앉은 벤을 보며 시시덕 거렸다.

"역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어. 그래 그래. 우리 볼일은 이제부터지."

후우. 손에 든 파이프를 입에 물고 그가 연기를 뱉어내자 벤은 바로 용건을 꺼냈다.


헤일런이 언제 돌아올지 모를 마당에 놈의 시답잖은 장난을 받아줄 용의는 없었다.

"헤일런을 살리겠다건 당연히 쟈엘 칸 혼자겠지?"


"그러엄. 수인족의 인권이니 뭐니 하는 놈들이 여럿 나타나니 고지식한 양반들이야 그 중심에
있는 헤일런을 아주 못죽여 안달이지. 물론 대령 앞에서는 꺼낼 수 없었지만. 그래서 말인데
네가 그 곁에 있으니까 몸으로 꼬시던 어쩌던 헤일런의 주위에서 다른 수인족들을 다
떼어놨으면 하는데."
"아니."
"응?"
"죽이는건 내가 한다. 네놈들은 적당히 힘만 빼놔."

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부터 시선을 끌던 파이프를 알렉에게 빼앗아 들었다.

이걸 입에 물고 빨아 들이는건가. 훕, 하고 들이킨 벤이 곧 쿨럭 거리며 기침을 했다.

뭐가 이렇게 독해..
몇번인가 시행착오가 있긴 했지만 벤은 곧잘 알렉이 그러했듯 금세 뿌연 연기를 입술새로
뱉어낼 수 있었다.

머리가 몽롱해지고 코끝이 찡할 만큼 지독하게 쓴 향이 그의 입맛에 딱 맞았다.

"제법 맛있군."
"그렇지? 죽이지? 이번에 테오제국에서 수입해 온건데 중독성이 대단하단 말이지.
그나저나 죽이는걸 네가 한다는건 좀 곤란한데. 넌 헤일런 밑에서 구르느라 몸이..윽!"

순식간에 목덜미를 낚아채여 침대에 엎드리게 된 알렉이 급히 숨을 들이켰다.

벤은 그의 허리에 걸터앉아 제 무게로 그의 반항을 억누르며 입에 물고있던 파이프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놓으라며 발버둥 치는 알렉의 귓가에 벤이 웃음기 어린 투로 속삭였다.
"그래도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건 일도 아니지."
"으, 으..으아.."

연기가 모락 피어오르는 부근을 귓가에 들이대자 후끈한 열기에 알렉이 바들거리며 반항하던
행동을 멈췄다.

장사꾼 나부랭이 주제에.


벤은 조소를 감추지 않고 파이프를 귓볼에 가져다 댔다. 치익.
발갛게 달아오른 쇳덩이에 살이 지져지자 알렉이 펄쩍 몸을 튕겼다. 악, 터져 나오는 비명에
파이프를 뗀 벤이 다시 연기를 한모금 들이켰다.

그는 붉게 달아오른 귓가를 손가락으로 아프게 문지르며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귀병신이 좋을까..아님. 눈을 하나 가져갈까."

눈 바로 옆에 뜨거운 재가 툭툭 떨어지자 알렉이 기겁을 하며 고개를 틀었다.


으악. 아. 새된 비명소리가 벤을 즐겁게 했다. 간만에 되살아난 가학적인 심성이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체가 제 손아귀 아래에서 벌레처럼 꿈틀대는게 좋았다.

"혀를 지져서 못쓰게 할수도 있고. 아아. 그러고 보니 네놈. 내 신세를 꽤나 부러워 하던데."
"자, 잠깐만! 뭘하는..힉!"
"뭘 하긴. 뒷구멍으로도 한번 맛보라는 거지. 입으로 먹었을 땐 맛있었잖아."

순간 알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단지 말로만 끝나지 않고 하의까지 벗겨 내리자 더는 견디지


못한 알렉이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꽥!!! 자, 자, 잘못했어! 벤 하일즈!! 노, 놀려서 미안해! 내가 지나쳤어!"


"흐응.."
"그냥 장난한거야! 원하면 네가 죽여! 나야 사실 누가 죽이던 헤일런이 가진 상권만 빼앗으면
그만이니까. 악! 뜨거. 진짜야. 네가 다 해!! 다 하세요!"

마음같아선 정말로 처넣고 싶었지만 벤은 이정도만 하기로 했다. 이 맛있는걸 그 더러운것에


쓰기도 아깝고.

짓누르고 있던 손을 치우고 몸을 일으키자 알렉은 엎드린 그대로 숨만 헐떡였다.

어찌나 겁에 잔뜩 질렸는지 하의가 반쯤 벗겨진 추한 몰골임에도 그는 비맞은 생쥐처럼


파들파들 떨기만 했다. 단정했던 머리카락이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헉, 허억. 헉.. 지독한 자식. 가진것도 없으면서 뭘 믿고 날 이리 함부로 대해."


"내가 뒷감당을 생각하고 움직이는 놈이었던가."
"...맞아. 그랬다면 칼튼 그 또라이 놈하고 척을 졌을리가 없지."
기분나쁜 이름에 미간을 찡그리자 주섬주섬 옷을 정리한 알렉이 실수, 하고 다시 능청을
떨었다.
그러나 그는 내심 자신의 호위들을 밖에 내버려 두고 벤과 단둘이 만난것을 몹시 후회하는
중이었다.

지하굴의 칼튼도 칼튼이지만 사실 벤도 그 못지 않은 미친놈인걸 잠시 잊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홀린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벤은 메케한 연기를 알렉의 얼굴에 후, 뱉어내곤 눈을 나른히 떴다.

"쓸데없는 말은 관두고. 신호는?"


"그런건 없으니 네가 눈치껏 알아서 해. 어차피 마주치는건 전투중이 될테니까. 날짜는
앞으로 두달 후. 대충 그쯤이 되겠군."

더 자세한건 알아봤자 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그는 이만 몸을 일으켰다. 가져간다는


말도 없이 파이프를 빼앗긴 알렉이 쯧 혀를 차다 벤을 불러세웠다.

"이봐. 벤 하일즈."
"왜."
"나야 그런 수인족 따위 아무래도 좋지만. 너는 그래도 꽤 오래 알아왔는데 죽이는건 아쉽지
않겠어? 여러모로."

걸음을 멈춘 벤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쉽지 않겠느냐고. 글쎄. 무작정 죽일 생각뿐이긴


했는데 또 막상 눈앞에서 사라질것을 상상하니 망설임이 생겼다. 죽음이란건 복수치고 너무
쉽지 않나.
언뜻 떠오르는 헤일런의 얼굴에 벤은 파이프를 입에 한번 대었다가 내렸다.

"그래. 어쩌면 그럴것도 같군."

긴속눈썹 아래 자줏빛 눈동자와 그와 색이 다른 푸른 눈동자가 침잠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말을 번복하는 일 없이 벤은 문을 열고 걸음을 옮겼다.

* *

"그건 뭡니까?"

콜록. 콜록.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헤일런이 실내에 가득찬 뿌연 연기에 연신 기침을 해댔다. 그는
수인족이라 후각이 굉장히 예민한 편이었다. 벤이 대꾸없이 후, 연기만 뿜어대자 다가온
헤일런이 파이프를 빼앗아갔다. 그는 자신을 멍하니 올려다 보는 벤은 본척도 하지 않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압수입니다. 어디서 이런 독한걸.."
"압수라니. 그건 내것이다."

표정을 굳히며 손을 내밀었지만 헤일런은 간단히 묵살했다.

"노예가 무슨 주인에게 소유권을 주장합니까. 벤의 것은 제것. 제것은 제것."


"......"

뭐 저런 억지가.. 대체 누구한테 뭘 배웠는지 날이 갈수록 하는짓이 독재에 가까워 진다.


자신은 순종밖에 가르친 기억이 없는데. 기어코 파이프를 창밖으로 던져 버리는 헤일런에
벤은 파르르 떨며 생각했다. 역시 저놈은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한다고.

"이런것 대신 좋아하시는 술을 드리겠습니다. 그만 기분 푸시죠."

외출을 하며 사온 모양인지 헤일런이 벤의 뺨에 술병을 가져다 댔다. 그것을 확인한 벤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누굴 술에 환장한 놈으로 아는지. 이딴것..
다정하게 눈웃음 짓는 헤일런의 얼굴에 병을 그대로 집어던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술은 죄가 없었다. 벤은 못마땅한 눈으로 흘깃 헤일런을 보다 그의 손에서 병을 통채로 넘겨
받았다.

<-- 뒤바뀐 나날 -->


                             

일은 예기치 못한 순간, 그리고 갑자기 터졌다. 아니, 갑자기 라고 하기엔 전조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저는 적이 많습니다. 이전에는 단순히 현상금을 노린 사냥꾼들이 그 주가 되었다면. 이제는


제 존재 자체를 불유쾌하게 여기시는 분들이 그 주가 되겠군요."

헤일런은 분명 숙소에서 그런 말을 했었다.


단지 벤의 경우엔 당사자가 자신이 아니고 이미 알고있던 사실이라 대충 흘려 들었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숙소에서 하룻밤을 쉰 바로 이튿날부터 벤은 다시 헤일런과 길을 떠났다. 이윽고 날이 저물고
어두운 밤하늘에 노란 달 한조각이 걸렸다. 휘잉. 차가운 칼바람이 사막의 모래를 휩쓸며
벤의 뺨을 할퀴었다.

소름끼치는 추위에 벤은 부들 떨면서 두 팔을 움켜잡았다.


사막의 밤은 낮과 다르게 뼈가 아릴 정도의 추위가 몰려왔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바같 외출이 너무 오랜만이었던 걸까. 귀찮다고 오는길에
오아시스에 던져버린 겉옷이 무척 절실해졌다.

벤이 파랗게 질린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걸음을 옮기자 이를 지켜보던 헤일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성격상 춥다고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을건 뻔한 일. 따라서 헤일런은 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고생을 사서 하느나는 타박대신 목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끌러내렸다. 그는
끌러낸 머플러를 벤의 목에 돌돌 감싸고 쓰고있던 모자를 머리위에 얹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벤은 그를 거부하지 않고 멀뚱히 보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왕이면 그 코트도."
"...조금은 고마워 하셔도 저는 굉장히 감격할텐데 말입니다."
"굉장히 고마워 하는 중이다만."

뻔뻔하다 못해 오만한 태도에 헤일런은 졌다는 듯 쓰게 웃으며 입고있던 겉옷마저도 벤에게


둘러 주었다.

그제야 벤은 추위가 조금 가시는 것 같아 걷는것이 한결 편해졌다.

그나저나 빨리 쉬고 싶은데 도시는 왜 이렇게 보이질 않는건지. 낮부터 쉴새없이 쭈욱


걸었는데도 아직도 갈길이 먼것 같다.

결국 오래지 않아 벤은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게 그만 돌아가자니까.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네 저택이잖나."


"나온김에 잠시 얼음창고를 들러야 해서 말입니다."
"....거긴 또 왜."

불안함에 벤이 미간을 찡그렸다. 얼음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 가서 또 제게 무슨짓을


하려고. 되도록이면 따라가지 않으려고 방책을 골똘히 생각하던 벤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며 잠시 쉬어갈 것을 제안했다.

그 말에 고민하던 헤일런이 곧 그러자며 긍정의 답을 내주었다.


헤일런이 말을 바꿀까 싶어 급히 자리를 알아보던 벤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걸음을 멈춰 세우자 덩달아 헤일런 역시 걸음을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방금.."

아디선가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느냐 묻자 헤일런이 전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심장은 여전히 기분나쁘게 자신의 숨통을 조여왔다. 예민한 감이 위험을 알렸다.
아니, 분명 뭔가가..
말끝을 흐린 벤이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쉬익. 날카로운 무언가가 가슴에 틀어 박혔다.
피하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퍽. 하고 둔중한 충격이 몸을 때리자 벤은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다시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커헉.."
"벤!"
"윽. 왠 화살이.."

빠르게 쏘아지는 화살이 벤의 목과 복부를 노렸다. 콰직. 퍽!


그 짧은 시간. 단순히 감만으로 피한다고 피했지만 이번엔 허벅지와 배를 하나씩 더 꿰뚫렸다.
예상했던 공격도 아니거니와 손에 이렇다할 무기도 들리지 않았던 탓에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화살의 촉이 살을 파고든 느낌이 꽤나 적나라했다.
쿨럭. 목구멍에 모래가 걸린듯 이물질이 느껴져 기침을 하자 붉은피가 입술새로 주륵 흘렀다.
장기를 맞았나?

아슬아슬하게 심장은 피해갔다지만 상태가 좋지는 않아 보였다.

벤은 손등으로 턱을 훔치고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헤일런은 저보다 더 놀란듯 충격에
굳은 얼굴로 벤을 내려다 보고 있을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저 멍청한 놈이.
벤은 몰려오는 통증에 입술을 짓씹었다. 악 다문 턱끝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뭐, 하는 건가..날 보지 말고. 쿨럭. 적부터 찾아!"

서늘하지만 강한 어조에 그제야 헤일런이 움찔 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다시금 쏟아지는 화살은 조금전처럼 목표를 제대로 겨냥한 것이 아닌 막무가내식의
대량화살이었다. 언제 당황했냐는 듯 헤일런이 담담히 손을 펼쳤다. 벤은 저게 뭐 하는짓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놀라운 일은 그 다음부터 였다.
손바닥에서 줄기줄기 뻗어나간 하얀 얼음이 이내 허공을 뒤덮었다. 이윽고 얼음 줄기는
거대한 그물망이 되어 수십. 수백개에 달하는 화살을 얼어붙게 했다. 그것은 마치 거미줄에
사로잡힌 작은 먹이따위로 보이기도 했다.

투명하게 빛나는 얼음위로 달빛이 쏟아졌다. 얼음의 결정이 두 눈에 선명히 들어올 정도로
그것은 시리도록 하얗게 빛났다.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을 보듯. 그야말로 장관이라 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헤일런이 뻗은 손을 움켜쥐었다. 파챵!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허공을 메우던


얼음이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 흩어지는 얼음의 파편이 검푸른 하늘 아래 모래입자처럼
반짝였다. "아.." 벤이 나직히 감탄을 터트렸다.

사막 한가운데에 선 헤일런이 어느 한쪽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기척이 안 느껴지는건 아닌데. 제가 방심을 했군요."


"젠장. 옷차림이 비슷해서 착각을 했어. 네놈이 헤일런 이었을 줄이야."

모습을 드러낸 적들을 보며 벤은 괘씸함에 이를 갈았다. 그러니까 착각을 해서 자신에게


화살을 쐈다 이건가. 벤의 원망은 곧 헤일런에게도 미쳤다.

따지고 보면 저 놈이 문제다. 왜 이곳저곳에 원한을 사서.

"유감이긴 하나 의뢰를 받았으니 죽어줘야 겠다!"

가까이에 숨어있던 검은 복면의 남자가 셋. 그리고 거리가 멀리 떨어진 곳에 줄지은 병사들이


백여명.
저들이 숙련된 살수라면 기척을 느끼지 못할만도 했다. 벤이 때려 맞췄던건 경우엔 순전히
전쟁에서 얻은 감이었다.

복면인들은 이내 날카로운 날붙이들을 꺼내들고 헤일런을 향해 달려 들었다.

하지만 저렇게 해서는 헤일런을 잡을 수 있을리가 없다. 분명 이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수인족이라 만만히 봤겠지.

"이래뵈도 현상금으로는 한손가락 안에 들 정도인데. 저를 너무 얕보시는군요."

유연하게 허리를 휘며 공격을 피한 헤일런이 상대의 목덜미를 잡아 바닥에 내리 꽂았다. 그


사이 다른이들이 짓쳐 들어왔다.

헤일런이 가볍게 웃었다. 쿵, 발을 구르자 그를 시작으로 바닥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복면인 들이 놀라 땅을 박차 올랐지만 얼음은 순식간에 그들의 발을 붙잡았다.
그의 능력은 단지 그 뿐이었지만 영향력은 대단했다. 순식간에 주위가 온통 얼음 투성이었다.
이제는 사막이라기 보다는 북쪽에 위치한 어느 차가운 대륙을 떠올리게 했다.
헤일런은 발이 얼어붙어 꼼짝도 못하는 복면인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자, 잠깐. 흐, 으아..으아아!!"

비명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아니 이어질 수 없었다. 마치 박제라도 하듯 얼음속에서


절규하듯 갇혀버린 사내들의 모습에 헤일런이 손을 떼어냈다.

그는 평소 다정한 신사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무심한 얼굴로 얼음의 겉면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퉁, 투웅.

세번째로 두드렸을 때 투명한 얼음위에 균열이 생겼다. 쩍, 쩌적. 콰각! 균열은 점차 커지다
이내 그대로 부서져 버렸다.

눈 깜짝할 새에 얼음이. 아니 사람이 산산조각 났다.

"저, 저게 뭐야. 이건 말이 다르잖아!"


"난 못해! 저런놈을 무슨수로 죽여?"

이를 지켜보던 병사들이 우왕좌왕 하며 걸음을 물렸지만 끝없이 펼쳐진 얼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절규섞인 비명이 허공을 가르다 점점 잦아 들었다. 헤일런의 이능은 닿는 즉시 모두
살아있는 얼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모든것이 부서졌다. 살인을 기피하는 헤일런이라지만 필요할 때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콰직. 얼음파편이 가루처럼 바람에 날렸다. 주위는 고요했고 벤과 헤일런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가 숨을 거두었다. 이 순간 이곳은 검은재규어의 존재감만이 가득했다.

"......"

소름이 머리끝까지 돋았다.


실로 전율이 일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피한방울 조차 흘리지 않았지만 그 비현실적인
면이 오히려 벤을 흥분케 했다.

두근, 두근.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숨이 멎을만큼 강한 충격이었다.
몇번인가 헤일런이 능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이런식으로 자신의 힘을 전부
내보인적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벤은 그가 이능을 사용할 수 없게 봉한 뒤 육탄전으로 제압을 했으므로.

이렇게 눈앞에서 직접 보고 나니 과연 살상에 능하다 칭해질 정도의 이능이긴 했다. 반쯤


넋을 놓고있던 벤이 몸을 일으키려다 윽,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 헤일런의 이능따위를 구경할 처지가 아니었다.


"하아..망할."

가슴부근에 손을 얹자 축축한 피가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쿨럭.

입밖으로 뱉어낸 피는 이제 검기까지 했다. 독인가? 몇번인가 연달아 기침을 하던 벤이 몸을


굽히다 그대로 모래위로 얼굴을 처박았다.

"벤!!"

그제야 헤일런이 다급한 소리를 내며 벤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아..하. 벤이 거친 숨을 뱉어내자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벤의 상처 부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시큰 거릴만큼 차가운 감각이 밀려 들었지만 사실 통각은 어느순간부터 둔해진지
오래였다.
긴 속눈썹 아래 색이 다른 두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였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사그라드는
생명력에 헤일런이 벤의 이름을 불렀다. 안색이 창백하다.
조금전 무표정하게 인간을 죽이던 남자와는 다르게 초조함과 다급함이 엿보였다. 저렇게
겁먹은 얼굴은 또 처음인데..이것도 나름.

벤은 그런 시답잖은 감상을 하며 이내 지친 눈꺼풀을 감았다.

<-- 뒤바뀐 나날 -->


                             
헤일런은 벤의 아래에 있을 때 반항조차 없는 순한 노예였다. 길들지 않은 눈은 그대로였고
이따금 도망을 치긴 했어도 했어도 제게 발톱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자신은 왜 헤일런을 그리 잔혹하게 대했던가. 한때 호감이 있던 라엘이 수인족을 좋아했기


때문에? 아니.
벤은 그저 수인족이란 존재를 노예보다 하찮게 여겼을 뿐이다. 설사 사실을 모르기 전까지
헤일런에게 호감이 있었다 해도. 상하관계는 분명했고 벤은 제 아랫것에게는 인정이 없는
사내였다.

["저는 이제 당신에게 기대를 포기하겠습니다."]

피투성이로 널브러진 헤일런이 벤에게 그런말을 했다. 벤은 마시던 술병을 내려놓으며 그의


턱끝을 들어 올렸다. 검은 눈은 원망한점 없이 고요했다. 다만 체념만이 있었을 뿐. 애정이
사라진 그의 눈은 마치 시체의 그것처럼 침잠했다. 그가 벤의 손을 감아쥐며 다시금 말했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

화살에 몸이 꿰뚫리면서도 벤은 이대로 죽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죽을수도


있다는 의심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아. 하.
열감기를 앓았던 그때처럼 뜨거운 숨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몸이 뜨거웠다.
벤은 간간히 정신이 들었지만 그 시간이 그리 오래도록 유지되지는 못했다.

희뿌연 시야 사이로는 늘 헤일런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입을 연다. 하지만 그 말은 벤에게


닿지 않았다.

아니 들리지 않았다.

"벤."

가물가물한 정신 사이로 들리는 말이라곤 오직 하나 뿐이었다. 자신의 이름.

"벤."

짜증스러울 만큼 놈은 벤의 이름은 애타게 불렀다. 먹먹히 젖은듯도 하고. 원망이 묻어


나기도 하고.

온갖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듣는 벤이 오히려 괴로울 정도였다. 벤은 귀를 틀어 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아파..아프니까 좀 쉬게 내버려 둬라. 귀찮은 재규어 새끼야.

몸은 뜨겁고 머리는 어지러울 만큼 울려대는데 그의 부름은 끊임이 없다.

"벤 하일즈.."

모른척 귀를 닫으려던 벤은 결국 그 집요함에 두손두발을 다 들었다.


고집이라면 벤도 만만치 않지만 정말이지 귀찮은건 딱 질색이다. 차라리 대답해 주고 말지.
원하는 대로 해주면 은근히 마음이 약해빠진 헤일런은 그를 괴롭히는걸 종종 멈추곤 하니까.

다시한번 불리는 이름에 벤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그만 좀. 불러."
"벤?"

무겁게 닫혀있던 눈꺼풀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벤의 눈 앞에는 예상했듯 헤일런이 있었다. 까만머리에 까만 눈동자.
귀족처럼 단정한 얼굴. 어쩐지 오랜만인 듯한 그 얼굴은 조금 초췌해 보이기는 했지만 수인족
특유의 수려함은 여전하다.
살아있음을 확인이라도 받고 싶은마냥 검은눈동자가 가만히 따라붙었다. 벤이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힘겹게 움직였다.

"머리 울린다..적당히 해."


"......"

겨우 몇마디를 뱉었을 뿐인데 목구멍이 찢어질 듯 아팠다. 시야는 차츰 선명해졌지만 꿈을


꾸듯 몽롱하던 머리는 아직 그대로였다. 검은색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멍하니 자신을
보는 헤일런은 그렇게 저를 애타게 찾아 부른 주제에 막상 눈을 마주하니 꿀먹은 벙어리 처럼
이렇다할 말이 없었다.
기뻐하진 않아도 안도는 할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딘가. 의아해진 벤은 뻑뻑한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폈다. 어둡고
울림이 큰 공간이나 종유석등이 달린 천장을 보니 동굴 같기도 했다.

벤이 느릿느릿 기억을 되짚어 보려는 찰나 문득 뺨에 무언가가 닿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 그러나 모순되게도 감촉은 어느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얇고 긴 손가락이 주저 하다
뺨을 감싸왔다.

벤은 열기를 식히는 시원한 손바닥에 저도 모르게 뺨을대었다.

헤일런은 그상태로 의미없이 몇번이고 뺨을 쓸었다.

"벤."
"......듣고있으니 말해."

다시 보게된 헤일런은 얼굴이 창백했고 입술은 파랗기 까지 했다.

추위를 느끼는지 몸이 가늘게 떨리는 모습도 보였다.


아아. 그러고 보니 헤일런은 이능은 얼음을 다루는 주제에 추위는 벤보다 더 잘탔더랬다.

그런 주제에 목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나 코트등은 전부 벤에게 덮어준 것이다. 화살을 맞고


쓰러지기 직전과 똑같이.
그렇다고 고맙다거나 감동스러울건 없었다. 그런 낯간지럽고 인간적인 감정같은건 어릴때에도
없던 것이다.
벤을 흔들리는 시선으로 내려보던 헤일런이 별안간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평소와 같지만
어딘가 맥이 빠진 웃음이었다.

그가 입술을 벌려 벤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나 이 거리에서조차 들리지 않을만큼 작은 목소리에 벤이 다시 되물었다.

"콜록. 뭐?"
"...예쁜것엔 애정을 품지 말라고 했는데. 저는 당신말처럼 멍청하고 어리석은 짐승이라.."

순간 차가운 물방울이 벤의 얼굴위로 떨어졌다. 뺨을 타고 미끄러진 물방울이 입술을 적시자


짭짜르한 소금기가 느껴졌다.
천장에서 떨어진 물일까.
힐끗 시선을 올리자 헤일런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어주며 벤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떨리는
손이 애틋할 정도로 느리게 뒷머리를 쓰다듬어왔다.
짐승이 멍청한거야 당연하지만 원래 예쁜것엔 애정을 품게 마련이다. 벤이 핏빛으로 가득한
전쟁터나 술을 좋아하듯.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지.
목덜미 부근에서 헤일런의 뜨거운 숨이 쏟아진다. 어깨가 습기에 축축히 젖는것도 같았다.

"제가 당신과 같은 인간이었다면 좋았을텐데.."

목이 메인듯 무언가에 꽉 틀어쥔 목소리였다. 귓전에서 흩어지는 그 말들이 어쩐지 쓸쓸하게


울리다 사라졌다.
물론 자신이 알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다 벤은 곧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장소가 헤일런의 저택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벤의 몸도 이미


완벽하게 치료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기억이 드문드문 하긴 하지만 전해 들은 바로는 화살을 맞은 그날로부터 벌써 열흘이


지났다고 한다.

호랑이 수인족은 벤이 운신이 가능한 상태가 되자 몸을 한번 점검하고는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좋아 완전히 완치됐어. 너 이번에야 말로 진짜 죽을뻔 했는데 나랑 대장한테 감사하라고."

자신이 화살 따위로 죽을리가 없잖는가.


벤은 코웃음 치며 셔츠에 팔을 꿰어 넣었다. 그래도 가슴이나 복부에 상처자국 하나 없는건
정말이지 칭찬 해줄만 했다. 상처가 다 아물어서 그런가 오늘따라 몸이 더 가뿐한 것도
같았다. 벤이 근육을 풀며 목을 젖히자 넬이 말했다.
"하긴. 욕 많이 얻어 먹으면 오래 산다더라. 그런 의미에서 넌 장수할걸?"
"......"

무미건조한 투로 사람 자극하는건 정말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벤이 노려보자 넬은 화들짝


놀란척을 하며 후다닥 방을 빠져나갔다.

일어나자 마자 신경이 박박 긁혀 짜증은 났지만 한두번도 아니고. 벤은 머리를 헝클어 트리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보여야할 인물이 보이지 않는 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며 걸음을
옮겼다.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발길은 자연스레 헤일런을 찾고 있었다.

사박.
인공적으로 심어놓은 잔디를 밟아가며 벤이 멈춰선 곳은 정원에 우뚝 박혀있는 커다란
나무였다.

놈이 있을 장소야 뻔했다. 벤은 나무에 머리를 툭 기대며 맨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왜 살렸지? 죽게 내버려두는게 어쩌면 네놈한테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만."

헤일런은 화살을 맞고 쓰러진 자신을 향하 다급한 얼굴로 달려왔었다. 그 겁에 질린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기뻐하진 않아도 담담히 지켜볼것만 같았는데.
의외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과연 그 아니면 누가 또 자신의 죽음을 그렇게 봐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바람에 흔들린 나뭇잎이 바스락 거리며 벤의 머리위에 내려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무 위에서 검은형체가 벤의 바로 옆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지난번 그가 재규어의 모습을 하고 옷자락을 물어제낀 좋지 않은 경험탓인지 벤은 흠칫하며


경계어린 눈을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헤일런은 검은정장에 사람의 모습으로 벤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절 죽이겠다고 호시탐탐 기회나 노리는 당신인데."


"......"

알렉과의 거래를 알고 하는 말일까. 모르고 하는 말일까.


뜨끔한 벤이 입을 다물자 헤일런은 언제나처럼 상냥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눈을 휘었다.

그 얼굴에 벤은 언뜻 자신이 사경을 헤매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다 흘려듣기는 했지만.
"그런데 지난번에 동굴에서 내게 했던말은 무슨 의미지?"
"당신에겐 대수롭지 않은일 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거고."

헤일런의 팔을 뻗어 헝클어진 벤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 넘겼다. 동굴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손길에서 애틋함이 전해져 왔다. 벤은 침묵하며 자줏빛 눈동자로 그를 빤히 응시했다.

이 위화감. 이 익숙한 눈빛.


아아. 순간 벤은 무엇이 달라진지 알것도 같았다. 제 아무리 헤일런이 감정을 감추는데에
익숙해 졌다해도 이것만큼은 완벽히 숨기지 못했다.

"..너란 놈은 학습능력이 없는 모양이야."

한심함에 혀를 차자 검은 재규어는 그저 웃고만 말았다.


하지만 벤은 그가 그 이상은 바라지도. 혹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둘 사이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 헤일런은 여전히 벤을 노예로 대할것이고. 벤 역시 그를 죽여야할
대상으로만 여길 것이고. 그 예상대로 고즈넉한 바람만이 불어왔을 뿐 헤일런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 뒤바뀐 나날 -->


                             

눈부신 햇살에 문득 잠에서 깨어난 벤은 부스스한 상태로 가만히 눈만 끔뻑거렸다. 긴속눈썹


아래로 자수정빛의 눈동자가 초점을 잡지 못하고 흐려졌다.
무리한 정사로 새벽 늦게 잠이 들었기 때문에 비몽사몽한 벤은 무의식적으로 옆을 더듬거렸다.

그는 곧 익숙한 형태의 몸을 제 품에 가둔 채 이마를 댔다. 따끈하기 보다는 약간 서늘한


체온이 느껴졌지만 벤 스스로가 체온이 높은 편이었기에 그정도가 딱 적당했다.

한결 편해진 숨을 뱉자 가슴가에서 난처한 목소리가 들렸다.

"..곤란합니다. 벤. 오늘은 중요한 손님이 방문할 예정이라 더 지체할 수가 없는데."

알게 뭔가. 잠에 취한 벤은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다시한번 제 품에 안긴 몸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두팔에 힘을 가득 실었다.

-
눈을 떴을 때. 벤은 어느샌가 침대위에 홀로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언제 빠져 나갔지.
벤은 허전한 옆자리를 돌아보며 두 손을 어색하게 굽혔다 폈다.
벤이 사경을 헤매다 정신을 차렸을 무렵부터 헤일런은 꼬박꼬박 벤의 곁에서 잠을 자고
깨어나길 반복했다.

그러다 아주 오랜만에 옆자리가 비어있는걸 보니 기분이 이상하게 묘하다. 익숙하다는건


이래서 무섭다는 거다. 몸을 일으키려던 그는 곧 휘청거리는 다리에 다시 침대위로
엎어지고야 말았다.

몸 이곳저곳이 둔기에 후드려 맞은듯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허리부터 시작해 골반 그리고
허벅지 사이에도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제 밑을 내주는건 그럭저럭 잘 참아 낼 수 있는데 그 후유증은 여전히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뒷처리는 말끔히 해주었는지 정액이 가득 찬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중요한 손님이라고 그랬던가.


약간의 호기심이 생긴 벤이 뻐지근한 몸을 풀며 침대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산책이라도 하고
와야겠다.

"안됩니다. 대장이 오기 전까지는 못나갑니다."


"이상하군. 내 접근을 막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

문밖에 서 있던 갈색머리의 수인족, 윌로스에게 길을 가로막힌 벤이 눈을 가늘게 떴다.


보통 헤일런이 저택에 있을 땐 움직임에 제한이 없는데 오늘은 그렇지가 않았다.
문가에 기대어 말끄러미 입술끝을 올리자 윌로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벤이 한차례 더 빨랐다.

"아직 대화도 안 끝났는데. 예의없이."


"들어가시죠."
"묻는말에 대답부터."
"나는 당신의 명령에 응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이 앞에서 계속 나와 말씨름을 한텐가?"

고집스러운 벤의 태도에 윌로스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사업과 관련해 당신 가족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래도 만나실 겁니까?"


"......"

가족. 현재 벤의 가족이라 할 정도는 위의 형제들과 아래의 누이. 그중 사업에 뛰어들 정도의


머리를 가진건 여동생 정도려나. 아마 올해로 열일곱인가 여덟인가 쯔음 되었을 것이다. 벤은
입술끝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다 고개를 들었다.
"만나보고 싶은데."

그 대답에 윌로스는 침묵하다 이내 그러라는 듯 먼저 걸음을 옮겼다. 생각외로 순순한


반응이었다.

윌로스가 안내한 응접실에 도착하자 그의 예상처럼 낯익은 여자가 앉아있었다.

헤일런은 벤의 등장에 이채를 보이긴 했지만 굳이 막아서진 않았다.

"......오라버니."
"......"

귀족영양 특유의 정숙함과 우아함이 배어난 옷차림.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에 벤 보다 조금 더 짙은 보라색에 가까운 눈동자. 성별과
분위기만 다를 뿐 놀라울 정도로 벤과 닮은 얼굴이었다.
잘록한 허리에 큰 키. 보기좋게 올라온 젖가슴까지. 못보던 새에 소녀에서 아름다운 숙녀로
자라난 그녀는 분명 벤과 혈연으로 이어진 그의 친동생이었다.
마지막으로 본것이 부모님이 돌아가신 5 년전이었으니 아마 올해로 열일곱인가 열여덟쯤이
되었을 것이다.
셀리아는 시종일관 차분한 얼굴로 벤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노예가 되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런것 치고는 잘 지내고 계신가 보네요. 주인이 좋은사람
이라 그런가."

물론 오랜만에 건네는 인사치고는 영 불쾌했지만.

"입 조심해야지 예쁜아. 이 오라버니가 늘 말했잖아. 입 잘못놀리면 혀를 뽑아간다고."


"저는 이제 그런 협박에 겁을 먹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손에 쥔 부채를 펼치며 도발하는 그녀는 과연 어릴적과 다르긴 했다. 그래. 이전에도


셀리아는 제 형들과 다르게 담이 크고 총명하긴 했었지.
형들이 단순히 벤이 눈으로 보여준 폭력적인 행태에 겁을 집어 먹었다면 그녀는 벤의 본성
자체를 두려워 하곤 했으니까. 아끼던 하인 하나가 제 손에 찢겨 죽은 이후로 특히나 그랬다.

그래도 그땐 적의라도 잘 감추더니만.


"미리 말씀 드리자면 제게 도움을 기대하지는 마세요. 저는 칼튼이 이전에 찾아왔을 때 부터
그의 손을 잡았으니까요."
"..이 미친 계집이. 내가 이꼴이 되었다고 네 목하나 못 비틀거 같나."

이어진 말에 벤이 손을 뻗자 난폭한 기세에 호위로 짐작되는 낯선 사내둘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셀리아는 호위를 물리며 담담히 벤과 시선을 마주해왔다.

"이러니 아무도 당신은 도우려 들지 않지."


"뭐?"
"오라버니는 달라진게 없군요. 여전히 포악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수인족인 저들보다도 더
인간적이지가 않아. 언제나 그렇게 죽음을 쉽게 논해."

보랏빛 눈동자는 심판을 내리는 중재자처럼 차갑고 매서웠다.

"저는 이전부터 당신의 이유없는 학살이 잔인하고 끔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생명이
스러지는 순간순간이 그저 유희에 불과했겠지만.."

그 말처럼 벤에게 죽음이란 그저 잠시 타오르다 꺼지는 촛불과 같았다.


바람 한줄기에도 위태롭게 일렁이며, 한순간에 수많은 빛들이 사그라 들기도 한다.
죽음이란 이처럼 언제 어디서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것에 일일히 가치를 두는건 소모적인 일이었다. 전쟁터를 기꺼워 한것도.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조차 무덤덤했던건 그래서였다.

"당신도 누군가를 잃는다는 상실감을 절절히 느꼈으면 좋겠어. 자책하고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하지만 그땐 이미 늦었겠지."

마지막 말은 여태 감추어 두었던 감정이 터졌는지 저주처럼 쏟아졌다.


이상한 일이지. 분명 같은 부모의 배를 빌어 태어나고 같은 교육을 받았는데도 벤은 제
형제들과 달랐다. 저런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사고에 동조가 되지 않았다. 상실감? 후회? 자책?
하. 벤이 큭 소리내어 웃자 여지껏 둘을 지켜만 보던 헤일런이 그녀를 저지했다.

"그만하시죠. 레이디 셀리아."


"그러죠. 저도 이 이상의 볼일은 없으니 그리 노려보지 마세요."

언제 감정이 폭발했냐는 듯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온 셀리아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호위에게 둘러싸여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벤은 그녀에게 딱히 이렇다할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어떻게 자라났나 그 점이 궁금했는데. 과연. 벤은 팔짱을 낀채로 혀를 찼다.

"계집아이가 겁을 상실한 채 자라났어."


"상처받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왜. 혈연이란 관계도 내겐 똑같이 의미가 없는데."

가족들이 벤을 버린건 이미 알고있었던 사실이다. 물론 칼튼과 관련된건 몰랐지만. 어쨌거나


의미가 없으니 무슨 말을 듣는다 해도 상처받지 않는다.
그저 저랑 닮은 얼굴로 캉캉 짖어대는게 가소로워 들어줬을 뿐이지.

헤일런은 알만 하다는 얼굴로 쓰게 웃다 벤의 손목을 당겨 자신의 옆에 앉혔다.

벤은 순순히 앉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툭 얹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어 왔다. 상처를 받은건 없는데 가슴이 조금 헛헛하기는 했다.

살갑게 대하지 않을건 알았지만 저도 사람이라고 아주 조금 기대는 했던거 같다. 어릴때는


그래도 여자아이라고 고사리 같은 손에 작은 막대사탕 따위를 들려주기도 했는데. 5 년만에
만난 제 형제에게 그런 원망어린 눈이라니.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다.

후에 자신이 이 지긋지긋한 창부생활을 정리하면 제 윗형제를 우습게 여기는 저 오만방자한


태도부터 꺾어버려야지.

벤은 느리게 시선을 내리다 헤일런의 무릎위를 긴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그나저나 지금 좀 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데."


"...별일이군요. 당신이 그런말을 다 하고."

의외라는 듯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벤 역시 동감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제 입으로 놈과


하고 싶다는 말이 나올줄이야,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다. 심지어 아직도 허리와 아래구멍이
아린데 박고 싶은것도 아니다.

정말 갈때까지 갔구나. 자조어린 기분이 들었지만 뇌가 녹을 정도로 격렬하게 몸을 섞고


싶다는 충동도 거짓은 아니었다. 어딘가가 뻥 뚫린듯 허기가 졌다. 그 빈자리를 채워야겠다.

"위로라고 생각하던지."
"그럼 주인님이라고 불러 주실겁니까?"

멍청한 재규어 같으니. 거래라는건 그와 상응할만한 대가가 주어졌을때나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를 지탱하는 내 모든걸 고작 이따위에 팔아 버릴수는 없지.
픽 소리내어 비웃은 벤은 헤일런의 무릎위에 올라타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손으로
끌러내렸다.
 

<-- 뒤바뀐 나날 -->


                             
하루하루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지만 벤의 일상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헤일런만의 창부. 밤낮 구별없이 안기고 식사도 그와 함께한 침실에서 이루어졌다.
때로는 윌로스를 피해 그와 함께 나무위를 오르기도 했고. 아무도 없는 호수 인근에서
발가벗겨진 채로 다리가 벌려지기도 했다.

벤은 순간순간에도 여전히 무언가를 찢고 피를 보고 싶은 파괴적인 욕구가 있었지만 그러한


충동은 의외로 헤일런에게 몸이 혹사당할때면 차차 가라 앉고는 했다.

정확히는 몸이 지쳐버리니 아무런 생각도 들지가 않는것이다.

벤은 부스스 몸을 일으켜 손을 얹었다. 창문틈으로 하얀 서리가 끼었다. 겨울이 왔다.

세르카 제국은 13 월의 반이 여름이지만 그 끝에는 테오제국과 같은 겨울이 존재했다.

물론 같은 겨울이라해도 그보다는 기온이 높은 편이었지만.

"일어나셨습니까?"

벤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구부렸던 길게 폈다. 그러자 어느샌가 벤이 덮고 있던


이불안으로 헤일런이 들어왔다.
으음?
약간은 서늘한 몸이 벤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이윽고 가운 안으로 파고든 손이 맨살을
만져대자 벤은 어깨를 조금 비틀었다.

"뭐야. 오자 마자 하자는 거냐."


"오랜만 아닙니까. 이렇게 얼굴을 보는것도 사흘만 인것 같은데요."
"바쁜건 너지. 내가 아냐."

최근의 헤일런은 이래저래 사업이 바쁜지 자주 자리를 비웠다. 그 증거로 헤일런과 함께


다니는 윌로스의 경우는 벌써 열흘째 얼굴한번 보지를 못했다.
자세한 내막이야 모르겠지만 벤은 그저 알렉이 말한 두달이 가까워 졌음을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어쨌거나 귀찮아서 허리를 만져대는 손을 빼내자 헤일런이 동작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
집요하게 밑으로 내려온 손이 엉덩이살을 꽉 틀어쥐는 통에 벤은 윽, 하고 옅은 신음을
흘렸다.
방금 일어난 터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제대로 반항도 못하겠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와 돌이키면 재물이 다 뭐라고.."

다른 반대쪽 손이 가슴가를 더듬거리다 작게 솟은 유두를 손끝으로 짓누르자 허리가


반사적으로 튕겨 올랐다.

돌기를 만지작 거리며 잡아 당기고 꾹꾹 아플정도로 눌러오는 통증이 아랫배를 단단하게 했다.
엉덩이 살을 만져대던 손은 어느덧 그 사이의 구멍을 지분거렸다. 이윽고 주름 사이사이를
긁어대는 손톱에 등골이 오싹오싹해졌다.
그러다 오늘따라 윤활유조차 바르지 않은 메마른 손가락이 안을 파고 들자 불편한 이물감보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절로 마른 숨이 토해졌다.

"하윽..!"

점점 안으로 깊게 들어오는 손가락에 오금이 저리고 허벅지가 바들거리며 떨렸다. 벤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불을 꽉 쥐었다.

꾸욱. 마디 끝까지 들어온 긴 손가락이 익숙하게 내벽을 헤집어 대며 구멍을 늘렸다. 요


얼마간 몸을 섞지 않았다고 유난히 안이 뻑뻑했다.

"으읏."
"몸에 힘 좀 풀어 보십시오. 오늘은 좀 아프게 할 생각인데."

그래도 최근엔 몸에 상처는 내지 않은터라 절로 긴장이 되서 근육이 수출되었다.

경고를 해도 갑자기 이러면..

"아, 아아. 윽!!"


"참으십시오."

유두를 난폭하게 쥐어뜯는 손길에 벤은 이를 악물었다. 아파. 뒤를 파고든 손가락은 어느덧


하나가 더 늘어났다. 늘어난 주름이 버겁게 두개의 손가락을 오물거리며 씹어댔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락 거리는 가슴에 벤은 어이가 없었다. 전에는 이조차도 풀어주지 않고 들어오는게
다반사였는데 신사적인 섹스에 익숙해졌다고 겨우 이정도에도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푹! 푸욱, 거칠게 안을 들쑤시는 감각에 벤이 눈을 질끈감았다. 뜨거운 불꼬챙이가 안을


찌르듯 뒤가 쓸리고 아팠다. 그러나 여전히 아파도 애원을 모르는 벤은 그저 하얗게 질린
손으로 이불자락만 움켜쥐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세번째 손가락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을 땐 기어코 아, 하고 앓는 소리가 새어나갔다.

윤활제를 안쓴것만으로도 이미 네개째를 받아 들인것 같은 통증이 밀려들었다.

"죄송합니다. 그러고 보니 윤활제를 가져오지 않아서.."


"하아..하."

알면 쓰라고..
감았던 눈을 뜨며 그런 눈짓을 하자 별안간 헤일런이 몸을 일으켰다.

"?"
"빠십시오."
"......"

순간 벤은 그가 말한 의미를 단번에 알아들은 스스로의 비상한 눈치를 원망했다.

이런것 따윈 몰라도 좋은데 말이야. 벤은 찌푸린 얼굴로 헤일런은 쏘아 보다 이내 몸을


뒤집었다. 하란대로 하지 않았다가 이대로 삽입이라도 하면 저만 손해였다.
엎드린 채로 기어 올라간 벤이 그의 바지춤을 내려 사타구니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펠라야 자주 시키지는 않아도 종종 해왔던 탓에 전처럼 큰 거부감은 없었다. 다소
수치스럽기야 하지만.

"하아..음."

수컷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벤은 익숙하게 혀를 내어 귀두부터 살살 핥았다.


예전이었다면 천하의 벤 하일즈가 같은 남자. 아니 수인족의 성기를 구음해 줄거라곤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고자 하면 그렇게 못할일도 아니었다. 1 년을 넘게 창부짓을
하다보니 입으로 빨아주는 것 정도야.
할짝. 춥.. 할짝.
외설스러운 소리와 함께 벌어진 입술 사이로 검붉은 살덩이가 밀려 들어갔다.
혓바닥 위로 기둥의 세세한 주름과 굵직하게 돋은 핏줄까지 고스란히 그려졌다.

흡, 하아..읏.
뜨거운 숨을 흘리며 입을 조이자 헤일런이 벤의 머리칼 사이를 헤집으며 머리를 좀 더 깊게
밀어넣었다.

"읍..컥."

제멋대로 목구멍을 콱콱 찔러오는 성기에 숨이 막혔다. 아래가 아니라 윗구멍이 범해지는


기분이 들정도로 거친 추삽질과 유사했다. 흥분한듯 구음을 받는 헤일런의 숨소리가 전에없이
거칠어졌다. 버둥대던 손이 그의 무릎을 짚었다.
생리적으로 눈물이 고이자 그것을 발견한 헤일런이 눈가를 손끝으로 메만졌다.
이윽고 크게 부풀어오른 성기가 벤의 목구멍 깊숙이 비릿한 액을 쏘아냈다.
그러고도 모자라 입안에 남은 정액에 벤이 눈꺼풀을 떨었다.
꿀꺽.

목구멍을 열어 끈적한 점액을 겨우겨우 삼켜내자 헤일런이 벤의 머리채를 잡아 위로 올렸다.


그리곤 웃는 얼굴로 개소리를 지껄여댔다.

"그걸 삼키시면 어떻게 합니까. 윤활제로 쓸거였는데."


"뭐?"
"다시. 이번엔 삼키지 마시고 입에 물고만 계십시오."
"뭐야. 오늘따라 왜 이래.."
"벤."

머리카락을 억세게 쥐어 올리는 바람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드물게 흉흉한 기세에 벤은 몸을 굳혔다. 자신을 내려보는 까만눈동자가 사납게 으르렁 대자
반사적으로 심장이 쿵 내려 앉았다.

뭐라해도 벤은 아직까지 헤일런의 수인화에 두려움을 느꼈다. 언젠가 부터는 아예 수인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 잊고 있긴 했지만.

항의하려던 벤이 입술을 다물자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은 제가 하라면 그냥 잠자코 하시면 되는겁니다."


"......"

뭐에 기분이 이렇게 뒤틀려서 화풀인가.


벤은 힐끗 헤일런을 살피다 잠자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일이 자주 있는것도 아니고
한번쯤은 장단을 맞춰 줄 용의는 있었다.
벤 자신도 과거에 심기가 불편하거나 하면 헤일런을 가혹하게 대하고는 했으니까.

결국 그의 말처럼 다시한번 구음을 하고 정액을 입에 담고만 있자 헤일런은 다소 기분이


누그러진 얼굴로 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잘 하셨습니다. 내 창부. 이제 뱉어 보시죠."

내밀어진 손에 청개구리 심보가 불쑥 올라오긴 했지만 벤은 인내했다.


퉤, 하고 머금고있던 정액을 뱉어내자 체액이 길게 늘어졌다. 헤일런이 그것을 벤의 뒷구멍에
치덕 거리며 발랐다.
손가락이 들어와 꼼꼼히 내벽까지도 정액이 덧발라지자 벤은 간만에 느낀 수치에 손끝을 꽉
말아쥐었다. 뭔데 이렇게 괴롭히는거야. 속으로 불만을 토해냈지만 이내 예고도 없이 안을
꿰뚫는 성기에 생각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
하아..하.

벤은 침대위에 늘어져 숨을 헐떡 거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딱 죽기전까지


몰아부쳐졌다. 헤일런과는 여러차례 정사를 나누었지만 이번만큼 힘이 들었던 것도 처음이다.
결국엔 벤이 더는 못하겠다고 몸을 뒤로 뺄정도였으니.
침대위에 아무렇게 널브러진 몸은 온통 정액 범벅이었고 울긋불긋 누군가에게 물어 뜯긴듯
붉은 자국이 곳곳에 남았다. 전부 헤일런의 작품이었다.

애무가 지나쳤던 유두는 여자의 그것처럼 부풀어 올라있고 허벅지나 엉덩이도 손자국이
벌겋게 남았다.

두꺼운 성기에 수없이 쑤셔졌던 아래 구멍이야 더 말할것도 없다. 와중에 피를 보지 않은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화풀이는 다 끝났나?"

잔뜩 쉰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벤의 무릎을 접어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던 정액을 도로


밀어넣던 헤일런이 눈을 나른하게 휘었다.

"그냥 단순한 심술이라고 생각해 주시죠. 그래도 다 받아 주실줄은 몰랐는데."


"아아. 나도 이제 요령이 늘어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벤은 아직도 손장난을 하는 헤일런을 툭 걷어찼다.


적당히 희롱해라. 이만큼 받아줬으면 충분하지. 임신도 못하는데 어딜 자꾸 넣어대.

"벤."
"......"

대답없이 시트로 몸을 돌돌 말자 헤일런이 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복잡한 눈으로 몇번이고 벤의 머리카락을 만져대던 헤일런이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노예에서 해방시켜 드릴테니 저와 단둘이 한적한 숲에서 사는건 어떻습니까? 전 동물사냥도


잘하고 물고기도 잘 건져 올리니 그럭저럭 굶기지는 않을 수 있는데요."
"뭐?"
"지금처럼 풍족하게는 안되겠지만 불편하지는 않게.."

벤은 더 듣지도 않고 말을 뚝 잘랐다.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미쳤나? 내가 그런데서 어떻게 살아. 아니 무엇보다 너랑 단둘이라니. 농담이라고 해도


끔찍하군."
"예. 그렇게 대답하실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호사스러운 삶을 좋아했으니까요."

이미 예상을 했다면서 굳이 물어본 저의는 뭔지 모르겠다.


당연히 농담이겠지. 자신이 저를 죽이고 싶은걸 모를리도 없고.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헤일런은 허탈한듯 웃으면서도 누워있는 벤을 한번 꼭 끌어안아 주곤
몸을 일으켰다.

"쉬십시오. 이제 이런 여유같은건 없을테니까요."

그의 말대로 헤일런과 함께인 시간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뒤바뀐 나날 -->


                             

["벤님.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언젠가 헤일런이 그런 질문을 해온적이 있었다. 그때 벤은 그에게 무어라 답했더라.


소유와 구속 정도라고 했던가. 아아 그랬던 것 같다.
그러자 기대했던 대답은 아닌지 헤일런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해왔다.

["내게 무슨 말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사실 그런 실체가 없는 개념은 사람마다 정의가


다른 법이지."]
["벤님도 좋아하시는 분이 있는지 궁금해요"]
["있지. 매번 퇴짜맞고 있긴 하지만."]

전쟁광에 학살에만 취미를 붙인 벤이었지만 그도 호감을 가진 상대정도는 있었다. 물론


뜻대로 손에 넣지는 못했다.
돌이켜 보면 방법이 잘못되었던 걸까. 그는 결국 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야 말았다.

["그럼 책에서처럼 벤님도 기다리시는 건가요?"]


["기다려? 그러다 다른 놈이 채갈지도모르는데 내가 왜?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가 본데.
자고로 맛있는건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인거다. 네놈도 마음에 드는 상대가 생긴다면
소중하게 지켜줄 생각보단 일단 먹고 봐라. 나머지는 그 후에 차차 생각해도 늦지않아."]
["신사적이지 않은것 같은데요."]

벤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소유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벤은 목이 말라 가져온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애주가인 그는 술을 전쟁만큼이나 굉장히
좋아했다. 그런데다 일찍이 술에 취한경험이 없을만큼 주량이 대단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오는 화끈함에 만족하며 목울대를 넘겼다.
이를 지켜보던 헤일런은 새카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또 다시 호기심을 드러냈다. 맛이 궁금한
눈치였다. 벤은 입술을 혀로 축였더. 아직 10 살가량의 꼬마가 마시기에는 지나치게 독한
술이긴 하지만..

["흐음. 마셔볼테냐?"]

손에 들린 호리병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헤일런의 눈동자도 함께 흔들렸다.


벤은 젖은 입술을 엄지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뭐 어린나이에 어른의 경험을 겪어보는 것도 인생에 도움이 될거다.
그런 근거없는 믿음 아래 벤은 들고있던 술병을 통채로 넘겼다.
한모금. 두모금.
헤일런은 어린 주제에 술을 제법 잘 마셨다. 보는 벤이 놀랄 정도로.

["..이런걸 무슨 맛으로 먹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쓴맛으로 먹지.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를만도 하다만."]

어리다는 말이 내심 기분이 나빴던 걸까. 헤일런은 뚱하니 호리병을 내려 보다 이내 병채로


술을 넘기기 시작했다.
저런.
돌발 행동에 놀라면서도 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벤이 가만히 턱을 괸채 지켜보자 헤일런이
마저 술을 깨끗히 비우고 그것을 흔들었다.

["한병 더요."]

얼굴에 붉은기 하나 없이 당돌하게도 술을 요구하는 헤일런에 벤은 이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흥미위주의 삶을 살아가는 벤에게 보통의 윤리의식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는 지나가던 시녀를 붙잡아 술을 몇병 더 가져오게 했고 그것은 헤일런이 헤롱거리며 벤의
품에 안겨올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때가 바로 헤일런이 취한 최초이자 마지막 모습이었다.

["벤님."]

흰 얼굴에 붉은기가 가득 올라왔다. 베실 거리며 백치같은 웃음을 흘린 헤일런이 벤의 가슴에


뺨을 부볐다.
술주정인지 이제야 그나이 또래로 보이는 웃음과 얼굴에 벤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철딱서니 없는 아이는 딱 질색인데. 괜히 술을 먹였군. 벤은 헤일런이 혹여 제 품에 침이라도
흘릴까 아이의 이마를 손끝으로 꾹 밀어냈다. 저리 떨어져.
그러나 밀어내기 무섭게 헤일런이 다시 엉겨붙어 왔다.

["벤니이임."]
["왜."]
["벤 하일즈."]

건방지게 이게 어디서 함부로 이름을 불러.


벤이 확 눈을 사납게 뜨자 헤일런이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를 살갑게 휘며 말했다.

[".....하고 싶어요."]

뭘? 혀가 말려들어가는 목소리에 벤이 다시금 되물었다. 뭘 하고싶다고?

["벤님."]

"벤."

목소리가 다시 웅웅 거리며 울렸다. 하지만 어릴적에 듣던 앳된 음성과는 다른. 나직하고


부드러운.

"그만 일어나십시오."
"......!"

놀란 벤은 번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몇번인가 눈을 깜빡거리자 그제야 흐릿한 시야가


선명히 잡히며 눈앞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깨를 지나 지금은 단정히 묶어둔 검은 흑발에. 두터운 털 코트로 몸을 무장한 청년.
화사하게 웃는 눈밑에는 색기어린 점하나가 콕 박혀 있었다.

"뭘 하고 싶다고?"

벤을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하니 어린놈이 그때부터 제 몸을 노렸을리는 없고.

"예?"
"..아니다. 꿈을 좀 꿔서."

잊고 있던 기억들인데 최근 꿈속에는 헤일런이 자주 나왔다.


그 대부분이 그들의 사이가 완벽히 틀어지기 전으로. 헤일런은 10 세 전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끔은 지금의 모습으로 벤의 아래에서 신음하기도 하지만. 뭐 어쨌든. 그만큼
과거의 기억들이 선명히 떠올랐다. 물론 그 당시가 헤일런에게 호의적인 감정들이 가득했던
때라 썩 유쾌하진 않지만.
벤은 머리를 흔들어 잠을 쫓아내고 뒤늦게야 헤일런의 옷차림을 지적했다.
"...곰이라도 잡으러 가는 모양이지?"
"제가 추위를 잘 타지 않습니까. 그런 이유입니다."
"벌써 도착했나?"
"아니오. 다만 혼자 있기에는 적적해서요."

그런 이유로 잘 자고 있는 자신을 깨웠다 이건가. 벤이 인상을 찌푸리자 헤일런이 빙긋


웃으며 그를 끌어안아왔다.
그래도 겨울이라고 옷을 두둑히 겹쳐 입고있어선지 몸이 난로처럼 따끈따끈했다.
알렉과 모의를 하고 두달이 지난 지금. 헤일런은 귀족들의 탄압에 최근 전투가 굉장히
잦아졌다.
이제는 저택에서조차 은신이 불가능해져 아예 밖으로 몸을 피한 상황.
듣기로는 동쪽에 위치한 이란타 사막에서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 했다.

"어이. 뭐하는 거냐."

벤의 허리를 끌어안던 헤일런이 그를 아예 제 밑에 깔아 눕혀 버렸다.


묵직한 무게에 인상을 찌푸리며 올려보자 헤일런이 별안간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평소의 신사처럼 절제된 웃음이라기 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짓궂은.
촉.
입술에 맞닿은 말랑한 감촉에 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뭐..."

다시 한번 촉. 가볍게 부딪치는 입술에 벤이 아연해진 얼굴로 그를 보았다.


순간 얼굴을 고정시킨채 입술 사이로 말캉한 혀가 들어왔다. 놀란 벤은 숨을 흡 삼키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게 어디서 주둥이를 들이밀..
이윽고 뜨거운 살덩이가 벤의 여린 점막을 헤집고 물고기처럼 활개를 쳤다. 격렬하게 혹은
난폭하게 안을 헤집는 그의 혓바닥에 차양처럼 길게 내리깔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자줏빛 눈동자와 그와 색이 다른 눈동자에 황망함이 떠올랐다. 깨물고 말고 밀어낼 틈이
없었다. 뻣뻣한 벤의 혀를 잡아챈 헤일런이 그것을 능숙하게 얽었다.
그가 가지런한 치아를 흁고 입천장을 긁자 등골이 오싹하고 척추가 저릿저릿 떨려왔다.
춥. 음란하게 젖은 소리와 함께 혀끝이 빨리자 허리와 그 아래가 노골노골하게 녹아내렸다.
낯선 쾌감이 파도 처럼 넘실거렸다.
혀의 돌기가 맞비벼지는 감각이 간지럽고 야했다. 자신의 것인지 헤일런의 것인지 모를
타액을 꿀꺽 삼키자 목구멍이 타는듯 뜨거웠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헤일런을 밀어내려던 벤은 욕망에 충실해 도리어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그러자 헤일런이 좀더 깊게 입을 맞추며 허리와 그 아래의 엉덩이를 더듬어
만졌다. 노골적인 움직임에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예상 못한 강한 자극이었다.

그르릉 목울대를 울리며 낮은 신음이 입술새로 흩어졌다. 야릇한 흥분감이 열기를 지폈다.

"..으, 하아."

벤은 한번도 이렇듯 입을 맞추며 관계를 이어간 적은 없었다. 가볍게 입술이 맞닿은 정도야
있었지만.
애초에 벤은 타인과 타액을 나눌 정도로 진득한 행위는 그리 달가워 하지 않았다. 헤일런과의
입맞춤도 따지고보면 지금이 처음이었다. 숨이 모자라 가슴이 크게 부풀어 쯔음에야 헤일런은
벤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헉..허억. 참았던 숨이 한번에 터져 나왔다.
타액으로 범벅이되어 윤이 나는 입술. 언뜻 그안으로 비치는 발간 혀가 지나치게 선정적이다.
쾌감에 젖어 흐려진 두 눈. 전에 없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 헐떡이자 배부른 짐승마냥
만족해하던 헤일런이 그의 머리를 다독거렸다.

"내 창부는 키스에는 영 소질이 없는 모양입니다. 설마 첫키스는 아니시겠죠?"


"너, 이..파렴치한."

파렴치하다는 말이 우스운지 헤일런이 소리내어 웃었다.


기가막혀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지르며 보자 헤일런은 벤의 흐트러진 옷을 정리해 주었다.
그러다 고작 키스 한번에 발기한 제 성기를 발견했을 땐 제 아무리 벤이라도 민망함을 숨길
수 없었다.
이게 뭐라고 몸을 섞는것 보다 더 음란한 것 같았다.

"만져 드립니까?"
"......"

결국 마차 안에서 헤일런의 손을 빌어 한발 뽑아낸 벤은 반쯤 지쳐 그의 품에 안기다


시피했다. 키스란건 생각외로 체력소모가 큰 행위였다.
헤일런은 뒤늦게야 다시 엉망이된 옷을 가다듬어 주었지만 구겨진 바짓단은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대충 해도 될것을 그는 꼼꼼하게 머플러까지 둘러주고 긴 머리는 높이 올려 장식이
화려한 비녀를 꽂았다. 내치는 것도 지친 벤은 자신이 인형처럼 꾸며지고 있어도 가만히 몸을
맡겼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하나 생겼다. 피할 수 있음에도 굳이 인간과 반목하는 이유.

"대체 넌 뭘 위해서 이런 지지부진한 싸움을 이어 가는거지? 정말로 수인족의 인권이니


그런것 때문인가?"
질문이 의외였는지 머리를 만지던 손길을 멈춘 헤일런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제 목표는 단 하나입니다. 벤에게 주인님이라고 듣는것."
"웃기지마. 넌 죽을때까지 내게서 그 말을 듣지 못할테니까."

벤은 오만하게 턱끝을 올린채로 코웃음을 쳤다.


이젠 일일히 대꾸해 주기도 귀찮은데 헤일런은 질리지도 않는지 틈만 나면 주인타령이다.
그러나 이번엔 어쩐일로 체념의 기색이 읽혔다. 그는 이전처럼 벤을 조르는 대신 흐리게
웃었다.

"...아쉽군요. 한번쯤은 들어보고 싶었는데."

중얼거린 헤일런은 그래도 무언가 미련이 남는듯 벤을 불렀다. 왜, 하고 답하자 그가 팔을


길게 뻗었다. 움찔 뒤로 물러나자 얇지만 단단한 손가락이 느릿하게 움직여 벤의 얼굴 윤곽을
더듬었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마치 그 형상을 손에 남기기라도 할것처럼.
순간 가슴이 술렁일 정도로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밤하늘과 같은 검은눈동자가 애틋한
빛을 띄우며 벤의 얼굴을 담았다.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늘 그렇듯 부드럽고 나직했다.

"벤."
"......"
"벤 하일즈. 내 아름다운 창부."

반복되는 부름에 왈칵 짜증이 났다.

"불렀으면 말을.."

벤은 마저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를 돌린 순간 다시 한번 헤일런이 입술을 맞부딪쳐


왔으므로.
그러나 지금의 키스는 조금전처럼 성욕을 자극하거나 격렬하지는 않았다. 아니 이건 키스라기
보다는 입술만 맞대는 정도였다. 뜨거운 숨이 교차했다.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를 대하는냥 조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가슴이


아릴정도로 절절하고 애달팠다. 그러나 벤을 내려다 보는 검은 눈동자는 온기가 가득했다.
무심한듯 동요없이 헤일런을 보던 벤이 가만히 눈꺼풀을 감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래야만 할것 같았다.
숨막힐듯 고요한 정적이 둘의 공간을 가득 채웠다. 영원과 같은 시간. 길게 이어질것만
같았던 입맞춤은 다소 짧게 끝이났다.

“…….”

입술에 맞닿았던 온기가 사라지고 뺨을 감싸던 손이 느리게 떨어졌다. 진득히 따라붙던


헤일런의 시선도 그제야 벤을 빗겨갔다.
적나라히 읽혀버린 감정. 그러나 벤은 그 감정을 침묵으로 외면했다.
이윽고 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마차는 어느덧 사막 한가운데에 도착해 있었다.

<-- 뒤바뀐 나날 -->


                             
발치에 쥐한마리가 얼쩡거렸다.
벤은 혐오섞인 눈으로 그것을 내려보다 눈에 이채를 보였다.
아아. 그러고 보니.
잠시 볼일을 본다고 헤일런에게서 벗어난 벤은 되도록 사각이 생기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 이곳은 오아시스가 있었기에 수풀이 많았다. 파삭. 인기척과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벤 하일즈."
고개를 돌리자 눈에익은 검은제복이 보였다. 칼에 찔려도 변하지 않을것 같은 무뚝뚝한 표정.
큰키에 붉은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사내는 벤의 앙숙이자 지금은 조력자로 돌변한 쟈엘 칸
이었다.
그의 뒤에는 셔츠차림에 코트 하나를 어깨위에 걸친 알렉이 보였다. 알렉은 벤과 눈이
마주치자 그 언젠가 빼앗겼던 파이프를 입에서 떼며 손을 휘휘 흔들었다.

"거참. 따로 만나기 힘드네. 어째 헤일런이 곁에서 널 떼어두질 않는구만."


"그전에 그 쥐새끼는 불결하게 왜 계속 보내는거지?"
"아아. 그거? 내가 밑의 수인족이 동물을 부리거든. 그래서 염탐이라던지 수신호를
전달하기엔 아주 적절하지. 다만 전에 칼튼 그 미친놈이 슬럼가 하나를 다 태운 후에는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이 적어져서 그게 안타깝지만."

지금도 칼튼네 구역에선 있어도 무서워서 사용을 못한다고 알렉이 한창 불만을 토로했다.
벤도 칼튼이 이전에 슬럼가 하나를 박살 내놓은건 알지만 그게 쥐 때문 이었는지는 몰랐다.
하여간 골때리는 새끼.

"용건만 간단히 해라."


"아아. 그래 전해줄게 있어서 왔지. 자 받아. 너도 스스로를 지킬 호신용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어?"

그가 건네준 것은 검집에 쌓여진 날카로운 단도였다. 쟈엘이 있기 때문에 에둘러 호신용이라


포장하긴 했지만 실질적은 용도는 헤일런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벤은 머뭇거리다 검집에서
검을 빼내어 보았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검날 부분에는 아마 독이 발려 있을 것 같았다.
품안에 검을 넣자 알렉은 그럼 나중에 보자며 훌쩍 몸을 돌렸다. 이제 남은건 쟈엘 칸
뿐이었다.

"벤 하일즈. 잠시.."


"내게 따로 볼일이 있나?"

가까이 다가온 쟈엘은 말을 고르는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입을 열었다.

"생각을 해 보았는데. 굳이 헤일런 곁에 남아 있을게 아니라 지금 나와 도망을 가는건


어떤가."
"뭐냐 그건. 청혼인가?"
"......"

농담을 모르는 고지식한 대령은 눈에 띄게 굳은 얼굴로 침묵했다.


벤은 질린 얼굴로 혀를 찼다.
"아아. 됐다 됐어. 네 뜻은 알겠지만 나도 내 손으로 마무리를 지을게 있어서 말이지."
"그렇군. 그렇다면 그 후에는 따로 갈곳이 있나?"
"왜. 네놈이 대신 먹여 살려주려고?"
"원하다면. 이전에는 다르다고 배척만 해서 미처 몰랐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늦었지만 나는 지금이라도 벤 하일즈 너와 좋은 친우로 남고싶다."

저택에서 지냈던 그 짧은 시간으로 쟈엘은 벤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던 모양이다.


물론 그로 인해 벤 역시도 쟈엘이 아주 상종못할 인간이 아니란걸 알긴 했지만 그뿐이다.
간간히 놀리는 재미가 있다해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친우라니. 벤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사양하지. 네놈은 역시 나와 맞지 않아."


"....유감이군."

벤은 별달리 유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쟈엘 칸은 사람이 좋긴 하지만 곁에 두기엔 피곤한


남자다. 아니 비단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벤은 필요이상으로 타인을 제 가까이에 두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이 꼴이 나긴 했지만.
자조 하면서도 벤은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후회는 없었다.

"여기서 부터는 잠시 헤어졌다가 집결지에서 만나도록 하죠. 효율성을 생각한다면 저는 혼자


움직이는게 좋겠습니다."

마침 헤일런은 지도 하나를 펼쳐들고 제 수하들을 각각 다른 장소로 보내는 중이었다. 이로써


벤이 굳이 수를 쓸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다.
윌로스가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따라 붙으려 했지만 헤일런은 그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다른 수인족들을 통솔할 이가 윌로스 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였다. 숫적인 열세도 있고
결국 그는 헤일런의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수인족들이 뿔뿔히 흩어지긴 했지만 벤은 헤일런과 함께 움직였다. 이제는 벤에 대한
위기감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걸 기뻐해야 하는지 불쾌해야 하는지.

"난리도 아니군."

쾅! 사나운 모래바람과 함께 한쪽에서는 벌써부터 병장기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저러나 소규모 전투라고는 해도 방관만 해야 한다는 사실은 다소 아쉬운 일이다.
자신이 여건만 된다면 이 상황에 걸맞는 전략을 짜내고 전쟁터를 마음껏 누빌텐데.
벤은 자신이 겪은 지난 전투들을 떠올렸다. 죽고 죽이는 삶의 경계아래서 내비치는 광기.
붉은 선혈. 손짓 한번에 아스러지는 수많은 생명은 여전히 피가 들끓을 만큼 흥분되는
일이다. 그 증거로 단지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즐거워 입술끝이 절로 올라갔다.
벤은 홀로 즐거워 하다 힐끔 제 옆에서 여유로이 걷고있는 헤일런을 보았다. 귀족연합에 쟈엘
칸 대령까지 합세 했다면 이쪽이 불리할 것 같은데도 행동은 태연하기 그지 없다.
걷는 와중 귀족들의 사병이 보이면 가차 없이 죽이면서도 그게 전부다. 눈에 보이면 죽이되
그들을 직접 찾아 나서진 않는다.

뭘 어쩌려는 작정인지. 혹여 변수가 있을까 생각하다 벤의 시선이 문득 헤일런의 귀에 시선이


닿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과 구분할 수 없는 외양.

"그러고 보니 너는 왜 귀나 꼬리를 보이지 않지? 감출 수 있는건 알지만 드러내 보이는 쪽이


편한것 아닌가."
"글쎄요."

산책이라도 하듯 유유히 걸음을 옮기던 헤일런이 말끝을 흐리다 이내 그가 쓰고 있는 모자를


매만졌다.

"그냥 습관입니다."
"......"

웃고는 있지만 별달리 대답하고 싶어하는 얼굴은 아니라 깊게 파고들진 않았다.


헤일런의 뒤를 따라가며 벤은 새삼 여러 가지 복잡한 상념에 젖어 들었다.
저 멍청한 재규어는 자신이 죽을 곳을 제 발로 찾아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을까. 어쩌면 이게
마지막 일지도 모르는데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는지 불안한 기색도 읽히지 않는다.
벤은 품안에 손을 넣어 단검을 가만히 쥐었다. 이것으로 결정적일 순간 찌르기만 하면 된다.
분명 그럴 예정이었는데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자 망설임이 생겼다.

…굳이 죽일 필요까지야 있을까? 목숨만은 살려서 예전처럼 자신의 노예로 거둬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간의 수치를 되갚는것이 꼭 죽음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증오가 돌연 증발한 것은 아니다. 모멸감과 수치를 잊지는 않았다. 다만 방법을 달리할 뿐.
헤일런과 함께한 평온한 일상에 녹아 들었는지 벤은 이런 매일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그에겐 돌아갈 곳도 없었다. 가족도 자신을 버렸고 대령직으로 복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를 살리는건 고려할만 하다. 놈이라면 배신 같은건 모를테고.
도시 생활에 익숙하긴 하지만 자신이 다시 주인이 된다면야 일전에 헤일런이 말했던 한적한
숲에서 살아줄 용의도 있다. 물론 벤의 욕구는 종종 그가 채워줘야 겠지만. 그래, 이정도라면.

“벤.”

불리는 이름에 벤은 흠칫해서 고개를 었다. 상념에 잠겨 있느라 그는 자신이 제자리에


멈춰서서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몰랐다.
어느샌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헤일런이 장갑을 벗고 벤의 뺨에 손을 얹었다. 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벤을 살폈다.

“뺨이 찹니다. 많이 춥습니까?”


“아니. 그런게 아니라..”
쾅!!
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모래바람이 시야를 가렸다. 헤일런은 반사적으로 벤을 제 뒤로
밀어내고 자신의 이능을 사용했다.
엄습하는 한기와 함께 주변이 하얀 얼음으로 꽁꽁 뒤덮이기 시작했다.
뿌연 연기가 걷히자 헤일런은 자신의 품에서 작은 알약 하나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이런. 이쯤에서 매복이 있을건 알았는데 쟈엘대령까지 계셨을 줄이야."

검은제복을 입은건 쟈엘 칸 한명 뿐이었다. 그 외에는 전부 귀족들의 개인 사병. 쟈엘은


이러한 일에 제 수하들을 끌어들이고 싶진 않았는지 그 혼자만이 움직인 것이다. 헤일런은
흘깃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발견하고 나른히 눈을 휘었다.
눈 앞에 무력으로는 벤 하일즈와 비견되는 대령이 있어도 별달리 긴장한 기색은 아니다.

"절 수인화 하려는 생각이시라면 소용없을 겁니다. 가스에 대한 대비라면 이미 끝냈습니다."


"......괜한 저항하지 마라. 항복하면 더 이상의 피해는 없을 거다. 약속하지."
"그럼 목숨을 건지는 대가로 제가 가진 모든 재물은 전부 인간들이 나눠 갖습니까?"
"......"

말문이 막힌 쟈엘은 침묵을 지켰다. 이전에도 언급한바 있듯 그는 언변엔 도통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다. 단숨에 설득을 포기한 쟈엘이 한숨을 쉬며 허리춤에서 검을 꺼냈다.
그리곤 먼저 사병을 함께 움직이려는 알렉을 막아섰다. 한사람을 상대로 비겁하게 여럿이서
덤벼들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니 자신을 돕겠다고 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지.

뒤로 물러난 벤은 못마땅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래서 저 답답한 인사와는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지나치게 정직하다.

"미안하군. 해일런 네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만. 너 하나만 제압하면 피해는 대폭


줄어들테니."
"뜻은 알겠지만 이대로 물러나진 못합니다. 억울하잖습니까. 제 소유를 빼앗기는 이유가 단지
수인이기 때문이라면."

손끝에서 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왔고 그것은 쟈엘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위협스레 그의 목을 노렸지만 별안간 허공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늘 검만 사용해서 잊고 있었지만 쟈엘 역시 이능의 소유자였다. 이능의 소유자가 다른 이능을
제압하기 위해선 한쪽의 마력이 더 우세하거나. 혹은 이길 수 밖에 없는 조합일 때.

쟈엘의 경우는 염력을 다루었는데 헤일런과 상반되는 능력은 아니므로 결국 마력의 양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이다.

-콰콰쾅!!!!

바닥이 움푹 파이면서 모래먼지가 회오리쳤다. 공기를 짓누르는 무형의 기운에 헤일런은 벤을


흘깃 돌아보았다.
“벤. 제 보호는 필요 없겠지요?”
“날 우습게 보는것도 정도껏 하지.”
“다행이로군요. 그렇다면 다치지나 마십시오.”

다정한 투로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헤일런이 이내 고개를 돌려 걸음을 옮겼다. 둘의 거리가


점차 멀어진다. 벤은 초조한 기분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마주쳐 버렸다. 그리고 곳곳에 보이는 사병들의 움직임.


싸움의 여파에 멀찌감치 물러서곤 있지만 그들의 손에는 여전히 위협적인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만약 벤이 헤일런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처리할 것은 자명하다. 헤일런이 죽고
나면 쟈엘에게는 실수라고 변명할테지.
주위를 얼려가는 차가운 공기에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주위는 온통 모래인데 마치 설원위에
선 기분이었다. 헤일런의 이능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쟈엘이 염력으로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미처 방어하지 못한 남은 파편은 사병들의 살을 찢고
피를 흩뿌렸다.
쩌적, 쟈엘의 발을 붙잡아 두려던 얼음이 반으로 갈라져 그대로 부서졌다.
이능으로는 싸움이 쉽게 결판이 나지 않자 쟈엘이 검을 휘둘렀다. 길게 풀어헤친 붉은
머리카락이 마치 사자의 갈기 같았다.
둘의 신형이 맞붙었다.

-콰콰쾅!!!

강한 폭발과 함께 그를 받아친 헤일런이 뒤로 몸이 밀려났다. 발자국이 깊게 패였다.


패도적인 기운이 폭사되듯 쏟아졌다. 유한 성격과 달리 쟈엘은 벤 만큼이나 강한 무력으로
상대를 밀어붙이는 성향이 있었다.
그에 비하자면 헤일런의 공격은 수인족의 장점이 고스란히 묻어나 대단히 빠르고 날카로웠다.
우아하고 날렵한 몸에 순간적인 도약력은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쟈엘의 검이 사선을 그리며 복부를 베어내려 했지만 그것은 헤일런의 손에 가로막혔다.
정확히는 길게 돋아난 손톱. 수인족의 손톱은 본래 검만큼이나 단단하고 예리했기에 무기를
대신해 사용되어 지기도 했다.
실력은 객관적으로 쟈엘이 조금 더 우세했다. 다만 쟈엘의 경우에는 생포가 목적이었고
헤일런의 경우엔 상대를 죽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다는 점이 그 차이를 좁혔다. 헤일런은
필요없는 살생을 내켜하지 않을 뿐이지 필요에 따라선 얼마든 잔인해 질 수 있었다.

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쟈엘과 헤일런이 동시에 모래 바닥에 처박혔다.

“…하아. 하. 큭..”

비틀 거리며 일어난 쟈엘의 꼴은 조금전과 달리 엉망이었다. 단정했던 제복이 걸레처럼


찢기고 팔 어딘가를 다쳤는지 떨어지는 핏물이 웅덩이처럼 고였다.
그렇다고 헤일런이 멀쩡 했다는 것은 아니다.

“과연 쟈엘 칸 대령. 벤의 유일한 적수답습니다. 쉽지가 않네요.”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은 헤일런이 다리 한쪽을 절뚝 였다. 입술끝이 찢어져 피가 맺히고


허리부근에도 상처가 있었다.
굽혔던 몸을 펴며 나른하게 웃는 얼굴은 전과같이 우아하고 차분했다. 더 없이 정중하고
다정한 신사지만 그에게서는 야생의 길들여지지 않은 날선 분위기가 함께 공존한다.
검은 신사. 다른 이들이 그를 그렇게 부르는 이유를 알것도 같았다.
벤과는 반대쪽에 자리한 알렉이 눈짓을 보냈다. 이때라고.
그 의도를 알면서도 벤은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죽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두가지의 선택지가 여전히 그를 혼란케 했다.


일단 팔 다리를 망가트리고 물어볼까. 다시 내 노예가 되겠느냐고. 그리고 그가 긍정하면
살려두는 것이다.
사박. 마음을 정한 벤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벤은 품안에서 검을 빼들었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자국이 푹푹 패였다. 헤일런이 조금이라도 지친 지금이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과연 헤일런은 자신이 저들과 한패인 사실을 알고나면 처음으로 분노를 드러낼까. 언제나처럼
체념어린 눈으로 웃을까. 벤은 생각했다. 이왕이면 분노한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고.

"......"

그러나 막상 뒤를 잡힌 헤일런은 그저 웃었다.


....설마 알고 있었나? 한번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벤은 긴장한 채 검을 다시 쥐었다.
의외로 무덤덤한 헤일런은 손을 적신 핏물을 털어내며 손톱을 길게 빼냈다. 그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원망도 없었고 체념조차도 없었다. 애초에 기대조차도 하지 않은듯 초연한 얼굴이었다.
싱거운 반응에 오히려 반응을 기대했던 벤이 맥이 빠질 정도였다.

"잠시 눈만 떼면 못된짓이나 벌이고. 이 일에 대한 벌은 각오해 두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벌이라는 말에 속이 비틀리긴 했지만 태도가 평소와 다를게 없어 되려 긴장이 풀렸다.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헤일런에 벤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몸을 움직이면서 벤은 위화감을 느꼈다. ...이상하다. 땅을 딛은 종아리와 허벅지에 차례로
힘이 실리고 근육이 팽창했다.

뜨겁게 들끓는 피에 열이 오르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검을 강하게 휘어 잡았다.


이상해. 벤은 생각하면서도 본능처럼 팔을 움직였다.

쩌엉!!!!
검과 그의 손톱이 맞부딪치며 몸이 튕겨져 나갔다. 비틀 발을 헛디뎠다가 균형을 잡았다.
지금까지는 이렇다할 싸움이 없어 몰랐는데 몸이 지나치게 가볍다. 어딘가 둔중했던 근육대신
온 몸에 힘이 가득 실렸다. 이건 마치 넬이 수작을 부리기 전의 온전한 육체 같았다.

잠시 거리를 벌렸던 헤일런이 다시금 위협적으로 달려들자 벤 역시 검을 꽉 움켜쥐며 그를


막아섰다.
그리 강한 공격은 아니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정도의 공격.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건
헤일런이 손을 거둬 들였다는 점이다. 시선이 마주친 그 찰나의 순간 헤일런은 웃었다.
그리고 벤을 맨몸으로 힘껏 끌어안아 왔다. 벤은 눈을 크게 떴다.

푸욱!

"...!"

콰직. 살이 꿰뚫리는 섬뜩한 감촉이 선명하게 손을 타고 전해졌다.


이전이었다면 전율에 몸서리 쳤을 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와 다른 의미에서 몸이 떨렸다.
깊숙하게 박힌 검날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

놀람에 기인한 억눌린 목소리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채 제 품에 안긴 헤일런을 내려 보았다.

"뭐야. 너..왜."
"..글쎄요. 당신에게 졌다가 또 노예로 살고 싶지 않기도 했고. 뭐 이유야 아무렴 벤에겐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

검은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부벼졌다. 헤일런은 두팔로 벤을 꽉 끌어안았다. 낮은 신음과 함께


숨을 한차례 고른 그가 입을 열었다.

"..귀를 감춘것 말입니다."


"......"
"사실.. 당신과 같은 인간이 되고 싶어서 였습니다. 아닌건 알고 있지만 그렇게라도 보이고
싶어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조근조근 쏟아졌다. 검에 찔렸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이


평온하기까지 했다.
벤은 무언가에 묶인양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마르는 기분. 어깨를 잡고
몸을 뗀 헤일런이 벤을 마주보았다. 하아, 추운 날씨에 하얀 입김이 피어 올랐다.
피에 흠뻑젖은 손이 벤의 은발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런 죽음은 예상치 못했는데..쿨럭. 쿨럭!"

벌어진 입술새로 왈칵 왈칵 피가 쏟아진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심장이 욱신하고 아프게


조여왔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다친곳이라고는 작은 생채기 정도가 다인데 아프다. 아파.
아파.
그의 손가락이 벤의 뺨을 더듬다 끝으로 입술에 닿았다. 톡. 다시한번 톡.

"..당신은 제가 죽어 기쁘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잠시 말을 멈추었던 헤일런은 이내 평소와 같이 검은 눈을 다정히 휘었다.

"네. 저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스스로의 죽음이 나쁘지 않다는 말일까.


그 말을 끝으로 눈꺼풀이 감기고 헤일런의 몸은 그대로 무너졌다. 모래위에 널브러진 몸은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가슴에 깊게 박힌 검. 흐르는 검붉은 피.

벤은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느껴지지 않아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죽, 었나?"

정말 죽었어? 어렵사리 입술을 열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요한 정적이 내려


앉았다. 벤은 시린 무표정으로 헤일런의 시체를 내려다 보았다.

아아. 그렇군. 죽은 모양이야. 내가 손을 쓸 필요도 없이.

입가가 비틀리며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죽어 버렸다면 더는 별 수없지. 묵묵히 생각하면서도 움켜쥔 두 손은 아직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뼈를 빗기고 살을 꿰뚫던 감각. 깊숙히 심장을 헤치던 날카로운 칼날. 흘러내리던 피. 우욱,
떠올린 순간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입을 틀어막은 벤이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웃음이 멎었다. 믿을 수 없지만 익숙한 살인에


처음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벤 하일즈. 뭐 하는거야. 확인사살 까지는 해야지!"


"......"
"못하겠다면 비켜. 우리가 죽일..컥!"

벤은 다가온 알렉의 목을 콱 움켜 쥐었다. 헤일런에게 가까이 다가서려는 것을 깨닫자 밑도


끝도 없는 살심이 차올랐다.
켁켁, 목이 졸린 알렉이 숨을 헐떡이며 허공에서 손을 저었다. 목에 핏대가 솟고 안색이
검붉게 변했지만 벤은 개의치 않았다.

"건드리지 마."

죽음이란건 언제 어디서 누구나가 겪을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것.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이별이기도 했다. 삶의 마지막. 죽음에 다음은 없다.

이제 살아 숨쉬는 헤일런을 더는 볼 수 없다. 더는 함께 잠자리에 들지도. 호수에서 헤엄을


치는것도. 나무위에서 해질녘의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손에서 힘이 빠졌다. 털썩. 겨우겨우 목숨을 건진 알렉이 기침을 하며 숨을 몰아 쉬었고


쟈엘이 벤을 향해 덤벼들려는 사병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벤의 눈은 그들이 아닌 헤일런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속이 엉망으로 뒤틀렸다. 이건 아닌데. 내가 원한건..

["벤님."]

환청처럼 목소리가 들려왔다. 떠오르는건 구름 한점 없는 푸른 하늘. 커다란 나무.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그리고 그 아래에 보이는 익숙한 둘의 모습. 따분하다는 듯 몸을 기댄건 벤 자신이었고 그
옆은 지금보다 앳된 얼굴의 헤일런이다.
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왜 하필 지금일까.

"왜.."

["벤 하일즈."]

미처 꿈에서 보지 못했던 기억이 헤일런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 때문에 떠올라 버렸다.


술에 취해 얼굴이 온통 빨갛게 달아오른 헤일런.
어디서 함부로 이름을 부르냐며 사나운 기세를 보이던 벤에게 그때도 헤일런은 까만 눈동자를
살갑게 휘었다.

["사랑이 하고 싶어요."]

그렇게 좋아하던 책을 품안에 가득 끌어안고. 꿈을 꾸듯 격앙된 어조로.

["목숨을 다 바칠 정도로 사랑을 하고 싶어요. 저는 언젠가 있을 그사람을 위해 그렇게


죽을거에요. 그게.."]
"......"
["그게 내 사랑의 정의예요. 벤님."]

하고 싶다던 것은 고작 그런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 뒤바뀐 나날 -->
                             

협상이 결렬되자 은색의 가면을 쓴 청년. 칼튼이 턱을 괸채로 그런말을 했다.

"그거 알아? 벤 하일즈는 알렉하고 손을 잡고 널 죽이려 할거야."

언제적 소릴 하는건지.
이미 알고 있다는 헤일런의 담담한 말에 가면속의 녹안이 가늘게 뜨여졌다.
언젠가 벤이 입가에 물고있던 파이프. 그것은 알렉의 상점이 막 입수한 수입품으로 시중에는
아직 유통이 되지 않은 것이었다. 또한 알렉은 벤과 친분이 있었던 백작가의 귀족. 거기에
벤의 성향을 접목하면 이미 답은 나왔다.
벤이 헤일런을 잘 알듯 헤일런도 그를 잘 알았다.
그럼 어째서 먼저 죽이지 않느냐는 칼튼의 질문에 그저 웃었다. 그러자 칼튼이 못마땅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두 손은 답답하다는 듯 철제 테이블을 마구 두드렸다.

"호구새끼! 애인한테 집은 물론 장기까지 홀랑 털릴 헤구같으니!"

헤구는 또 무언가 했더니 자신의 이름과 호구를 합친말이란다.


헤일런은 그 비난에 멋쩍게 뺨을 긁었다. 예전부터 자주 호구라고 놀리더니 그래도 장기는
조금 비약이 심하다.

"야. 근데 너 진짜 얼음창고 풀어버릴거야? 그러지 말고 나랑 독과점 하자니까."

징징거리다 애교까지 섞는 칼튼의 태도에도 헤일런은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와는


되도록 좋은 관계로 남고 싶었지만.

"죄송합니다. 제 노예는 물욕이 좀 많아서요."

칼튼은 입을 떡 벌렸다. 황당한듯 입을 뻐끔뻐금 거리던 그가 뒤에 선 금발의 미남자를


붙잡았다.

"헐, 방금 뭐야. 시안 들었어 저 헤구 말하는거? 우와 이쁜거 한테 홀리면 답이 없다더니.


수인족도 똑같네! 얌마 너 그러다 뒤통수에 칼 맞아! 걘 잘해줘 봤자 소용없어! 전쟁터에
내보내주면 모를까."
"...큼, 그만 하시죠 칼튼님."
"아니 시안. 내 말좀 들어봐. 내가 얼음창고 때문이 아니라 진짜 답답해서 이래. 쟤 죽으려고
환장 했나봐! 야 가지마 이 미친 재규어놈아아악."
거참 악담을 해도. 돌았냐며 왁왁 거리는 칼튼에게 헤일런은 조용히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의 말처럼 헤일런은 언젠가부터 벤을 위해 재물에 욕심을 부렸다.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자신을 노리는 것을 알았지만 이제와 발을 빼내기엔 늦은감이 있다. 애초 약삭빠르지도 못한
주제에 인간과 교류한것 부터가 문제였을까.

하..
헤일런은 한숨을 내쉬며 제 이마를 짚었다.
그제야 상대에게 장기를 털어 줄거라는 칼튼의 말이 그리 심하지 만은 않은걸 알았다.
....

그래도 벤의 수작질은 괘씸해서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물론 그마저도 요원치는 않았다.


티를 내진 않아도 아파하는 얼굴을 보니 차마 더 밀어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벤에게는 언제나 한수 물러나고 마는 헤일런은 결국 그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밤 헤일런은 그에게 넌지시 한가지 제안을 했다. 자신과 단 둘이 한적한 숲에서
살지 않겠냐고. 헤일런의 가장 이상적인 바람.
하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말을 꺼내기 무섭게 거절당했다.
혹여 그가 긍정한다면 이 너저분한 싸움도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화려한 도시 생활에 익숙한
벤에겐 역시 무리였던 모양이다. 벤 다운 대답이었다.

허탈하기야 했지만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헤일런은 쉽게 단념했다.

애증은 죽음앞에서 연민과 죄책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을 헤일런은 벤이 사경을 헤맬때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아, 나는 또 멍청한 짓을 반복하겠구나. 하지만
마음이란건 때때로 생각과 다르게 흘러갈때가 있었고 사람에 대한 애정도 그랬다. 이미
한차례 버렸던 애정이 또 싹을 틔울줄이야. 그 끝을 알면서도 헤일런은 멈추질 못했다.

그해 겨울. 끝내 상인연합과 충돌이 일어났다. 칼튼이 등을 돌린 마당에 전세가 불리한건


확실 했지만 딱히 죽어 줄 생각따윈 없었다. 헤일런은 보란듯 알렉과 그외 귀족들을
굴복시키고 제 위치를 공고히 다지려 했다.

제게 검을 들이미는 벤을 보기 전까지는.

"......"

입가에 습관적으로 웃음이 떠올랐다.


이렇게나 내가 미운걸까. 역시 저지른 짓이 있으니 별 수 없나. 헤일런은 그저 배운대로
되갚았을 뿐이지만 그를 벌레보다 못하게 취급했던 벤에게 그것은 크나큰 치욕이 되었을 터.

칼튼의 경고가 옳다는 것에 화가 나기 보다는 슬펐다. 서글프고 가슴이 아팠다.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이 간극이 절망스러웠다.

세상엔 어떤 노력으로 불가능한 일들이 있다. 태어나길 수인족으로 태어난 자신이 그와 같은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토록 자신을 죽이고 싶다면.. 그래. 그의 손에 순순히 죽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었다.

어차피 벤은 얼마전 제약을 걸어두었던 몸을 전부 회복시켜 주었기에 전력을 다한다 해도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나마 자신이 벤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건 이게 전부였다. 우스웠다. 벤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 죽일까 흥미로워 했었는데 결국 제 스스로 죽어주다니.

아주 어릴적 연애소설 따위에 흠뻑 빠져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싶다고 했는데


정말 그말처럼 되버렸다.

하지만 사실 사랑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저 지쳐버린것 같다. 인간과 같은 외형을


가졌더라도 근본적인걸 바꿀수는 없을테니까.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자신이라고 원해서 수인족으로 태어난건 아닌데.

"잠시 눈만 떼면 못된짓이나 벌이고. 이 일에 대한 벌은 각오해 두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인간은 아니지만 자신도 화를 낼줄 알고 기뻐할 줄 하고 때로는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상처는 쌓이고 또 켭켭이 쌓여 체념이 되었고. 끝내는 모든것이 부질없어 졌다. 재물도
목숨도. 이제는 그저 바라보는 것 마저도.

카앙!

잠시 거리를 벌렸던 헤일런이 위협적으로 달려들자 벤이 검을 휘둘렀다.


그리 강한 공격은 아니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정도의 공격. 하지만 헤일런이 손을 거둬
들였다. 그는 죽음을 각오한 채 벤을 맨몸으로 힘껏 끌어안았다. 벤이 눈을 크게 떴다.

헤일런은 그 모든 과정에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푸욱!

"...!"
가슴을 파고든 날카로운 검이 아프고 소름끼쳤다. 살을 찢고 근육을 헤집었다. 컥, 절로
비명이 터졌지만 헤일런은 벤을 꽉 끌어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생각지 못했던 제 행동에 벤은 조금 놀란듯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웅덩이 처럼 고여 들었다.
그는 이유를 물었지만 헤일런은 답하지 않았다. 이유따윈 벤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에겐 아무래도 좋을.

욱신, 욱신. 상처 때문인지 심장이 아프게 저며왔다.


헤일런은 온기가 느껴지는 목덜미에 가만히 머리를 부볐다. 이 품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애틋함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벤은 체온이 높은편이라 헤일런은 이렇게 안겨있는걸 사실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서 노예였을


땐 잠자리가 끝나고 그가 종종 이렇게 안아 주었을 때 아주 잠깐의 위로를 얻곤했다.

새삼 옛기억이라니. 확실히 죽음이 임박하긴 했나 보다.

하아, 추운 날씨에 하얀 입김이 피어 올랐다. 펼쳐진 사막의 하늘은 우울할 정도로 짙은


잿빛이다. 눈이라도 오면 좋겠는데.

헤일런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런 와중에 벤은 달빛이 녹아 내린듯 화사하고 고결했다.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었던 그의 자존심처럼. 헤일런은 피에 흠뻑젖은 손으로 벤의 은발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더러운 피가 묻는다 질색할 남자는 의외로 얌전했다. 사락. 손가락 사이사이를 스치는
머리카락의 감촉에 다소 들뜬 기분이 되었다.

그래도 어릴때 부터 소망하던 한가지는 이뤘다.


당신은 알까. 자신이 이 머리카락을 얼마나 좋아했고 또 만져보고 싶어했는지. 때문에 시간이
지나 머리카락을 만지는데 거부조차 보이지 않았을 땐 얼마나 설레고 기뻤는지 모른다.
헤일런이 그의 머리카락을 시도때도 없이 건드렸던건 그런 이유도 있었다. 만질 수 있을 때
실컷 만지고 싶었다.
사실 이건 쓸데없는 씨름에 지친 벤이 양보를 해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쿨럭..쿨럭!"

죽음은 예상치 못했지만 차라리 이게 나았다.

혹여 패배라도 해서 그의 노예가 되는건 이제 죽어도 할 수 없다. 아픈것도 싫었고 다시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달콤한 과실을 맛보았다.

덕분에 나무위에서 함께 황혼을 보기도 했고 호수에서 헤엄을 치기도 하지 않았나. 그는 별로


달가워 하지 않았지만.

...벤.
벌어진 입술새로 왈칵 왈칵 피가 쏟아진다. 통증에 숨이 가빠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마지막으로 주인이라고 한번쯤은 듣고 싶었지만 미련은 버렸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은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아무것도 바라는게
없다. 그저..
손을 올려 벤의 뺨을 만졌다. 하나 하나 눈에 담고싶어 조심스럽레 매만지다 끝으로 입술에
닿았다.

자신이 키스했던 예쁜 입술.


항상 고집스럽고 제 마음에 상처만 내는 못된 입.

톡.
손가락을 움직여 다시한번 톡.

처음으로 한 입맞춤이 이별의 키스가 될줄은 몰랐는데.

"..당신은 제가 죽어 기쁘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처음 보았던 그때처럼 여전히 오만하고 아름다운 벤. 창부가 되었다 한들 그 빛은 바라지


않았고 그건 자신이 죽은 후에도 변함 없을 것이다.
울컥 차오른 핏물에 잠시 말을 멈추었던 헤일런은 이내 평소와 같이 눈을 휘었다. 끝까지
모진 사람.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에 그를 가슴깊이 새겼다.

...아마 지금도 당신은 나를 죽이고 싶을만큼 미워하고 경멸하겠지만.

"네. 저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나는 당신을 사랑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

그의 어디가 좋았냐 묻는다면.. 글쎄.


어릴때는 그냥 다 좋았다. 조금의 자비도 없던 잔혹함과 모든 사람을 제 밑으로 보는 오만.
부서지지 않을것 같은 단단함을 경애했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도 다를건 없었다.


야하고 퇴폐적인 웃음도. 단단한 정신과 자존심도. 다 좋았다. 돌연변이라고는 해도 자신도
결국 수인족이라 인간을 좋아하는덴 맹목적 이었다. 본성이 착한 사람인가 혹은 악한
사람인가 그런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경애하는 나의 벤. 하나뿐인 나의 노예.. 내 아름다운 창부.


헤일런은 종종 용건도 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곤 했는데 그럴때 마다 벤은 여과없이 짜증을
냈다.

벤.
벤..
벤 하일즈.

["뭐야. 불렀으면 말을 해."]

이렇게 벤이 미간을 찡그린 채로 노려봐 올때면 헤일런은 그저 웃고 말았다. 좋아한다는


고백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 뒤바뀐 나날 -->


                             

하고 싶다던 것은 고작 그런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사랑. 예상치는 못했지만 납득은 간다.


어린날의 그는 몽상에 가까운 이상한 책들에 잘 휘둘리곤 해서.
벤은 실성한듯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그래서였나. 내 검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든
이유가.

말을 하진 않았어도 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멍청하고 어리석은 짐승은 또 다시 벤을 좋아해 버린걸. 알고는 있었지만
헤일런은 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 이상을 바라오지 않았고 벤은 그 감정을
이용할 수 없다면 차라리 외면하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목숨까지 내던질 줄은 미처 몰랐다. 상상도 해본적이 없다. 이젠 철없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

비웃으려 입술을 끌어 올렸지만 얼굴 근육이 잔뜩 굳어 경련했다. 목이 졸리고 눈가가 시큰


거렸다.
정말이지 희극같은 일이다.
벤은 단한번도 스스로가 감성적인 인간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슬픔 동정 연민.
그런 단어는 그와 어울리지 않았고, 그는 언제나 흥미위주의 삶에 충실했다.

그렇기 때문에 벤은 지금의 감정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왜? 어째서? 벌써 수십 수백의 질문이


돌고 또 돌았다.
마지막에야 망설이긴 했지만 분명 죽이고 싶어했던 놈이 아닌가.
대체 내 증오는 어디로 갔지? 수인족따윈 벌레만도 못하다 여기던 비정함은?
부모의 죽음조차 의미가 없던 나였는데. 왜 네가..너 따위가.

제자리에 주저 앉은 벤은 헤일런의 얼굴을 하염없이 노려보다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순간. 콰앙..! 귓가를 찢는 굉음과 함께 병장기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가까이 들리는 인기척에 벤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예감이 안 좋아서 따라왔는데. 결국 당신이 대장을 죽이고 말았어."

갈색머리에 갈색 눈. 늑대 수인족인 윌로스가 그곳에 무덤덤히 서서 벤과 그 앞에 누워있는


헤일런을 보고 있었다.

"..알면서도 어째 반응이 담담하군."


"이럴것 같았으니까. 어쩐지 다른 수인족들을 다 흩어져 보내는가 했어. 결국 대장은 혼자
짊어질 생각이었던 거야."
"……."
"좋겠어. 벤 하일즈. 네 뜻대로 우리 대장이 죽어버려서."

이죽거리는 말에 벤은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인간은 망각의 생물이다. 죽음은 찰나고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게 되어있다. 헤일런의 죽음이
의외로 벤에게 타격을 주긴 했지만 이 또한 잠시일 뿐이다. 벤은 전쟁에서 많은 죽음을
봐왔고 제 손으로 그들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다. 그 또한 같다고 생각하면 될일이다.

이 순간만 모른척 하면 살아갈 수는 있겠지. 아무렇지 않아지겠지.


하지만 이제와 헤일런이 없는 삶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당장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죽을것
같은 상실감이 밀려 들었다. 막연히 죽이겠다고만 마음먹었지 벤은 한번도 그 이후를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동정은 아니다. 새삼 지난날의 후회와 자책도 아니다.


그런데 도저히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조금전의 기억들이 너무나도 선명했기에 더욱 더.

"안 죽었어.."

죽지 않았어. 벤은 기듯이 움직여 헤일런의 옷을 움켜잡았다.


수인족이라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조차 못해 차라리 목숨을 내어준 그는 그 순간 조차도
웃었다. 주인이란 말을 그렇게 듣고 싶어했는데 그마저도 결국 체념해 버렸다. 그 애틋한
입맞춤은 결국 이별을 예감하고 했던 키스였을까.
..
무표정을 가장했던 얼굴이 점점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헤일런."
"......"
"...아냐. 정말로 죽이려던건 아니었어. 이제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단 말이다."

떨리는 목소리에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창백한 헤일런의 얼굴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렀다. 흐르는 핏줄기가 눈에 밟혔다.
심장이 너무 아파 숨이 막혔다. 온몸이 칼로 난도질 되는 고통이었다.

이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은 처음이었다.

"네 말마따라 한적한 숲도 괜찮겠다고..."

툭, 투둑.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며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뺨을 타고 턱을 미끄러져 내리며


모래위를 적신다. 흘러내리고 또 흘러내리고 쉼없이. 입술끝에 짠맛이 났다. 언젠가
동굴에서의 그날처럼.

벤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 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평소 경멸하던 감정들이 절망이 되어 그를 집어 삼켰다. 동생의 저주처럼 벤은 잃고나서야
헤일런의 존재에 대해 되새겼다. 수인족이어서 경멸했고 함부로 다루었다.
하지만 여태 죽이지는 않았다. 수 많은 노예들은 목을 자르고 심장을 파헤쳤는데. 헤일런에겐
늘 여지를 남겼다. 이전에 비수로 그를 죽이려 했을 때 조차.

"그만해라. 벤 하일즈. 그는 이미.."


"닥쳐. 아무말도 하지마."

쟈엘이 보호하듯 서서 현실을 일깨웠지만 벤은 아무런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숨을 헐떡인 벤이 차게 식은 헤일런의 손위에 덜덜 떨리는 제 손을 얹었다. 온기가 사라져
가는 피부에 섬뜩한 감각이 그를 덮쳤다. 눈앞이 까마득해져 갔다.

안돼.
..안돼.

더는 체온이 식지 않게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또 다른 불청객의 난입은.

"오오. 다들 여기 모여서 뭐해? 바글바글 하네."

키키 크고 옷차림이 화려한 청년이었다.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린 은색의 가면에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유쾌한 목소리. 뒤로는 낯익은
금발과 로브를 눌러쓴 그의 수하 몇이 더 있었다. 지하굴의 칼튼.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짧게 감탄을 터트렸다.


"벤 하일즈에. 쟈엘 칸. 알렉에 어이쿠 수인족까지. 근데 저 피투성이는 누구야? 헤일런인가?
와, 왜 쟤는 볼때마다 저렇게 다 죽어가는거야."

아..벤은 고개를 들었다. 절망속에 희망이 움텄다. 그가 이곳에 왜 있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살려줘."
"응? 뭐야. 너 울..아니 그전에 그거 나한테 하는 말?"
"너라면 헤일런을 살려줄 수 있잖아. 지하굴의 약은 다 죽어가는 시체도 살릴 수 있다고
들었다. 전에 네 사촌이란 놈도 내 칼에 맞고 살아나지 않았나."

붙잡을 유일한 존재가 자신을 이지경으로 밀어넣은 칼튼이란 사실이 못내 우스웠지만 벤에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원한이야 어쨌든 헤일런부터 살리고 봐야했다. 일단은 그것부터.

칼튼은 제 주위로 다가오는 몇몇 사병들을 불로 지져버리고는 좀 더 거리를 좁혀왔다.

"뭐. 그 좀비의 경우엔 대공의 힘을 빌린거지만. 근데 아무리 나라도 죽은놈을 살리진 못해.
읏차 어디 보자."

헤일런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칼튼은 벤이 차마 확인하지 못했던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곤 오래지 않아 손을 떼어냈다.

"그래도 수인족이라고 미약하긴 한데 숨은 붙어있네. 꼭 동면 중 같이. 뭐 이마저도 내버려


두면 곧 죽겠지만."
"그렇다면 살려줘."

칼튼이 그말에 히죽 얄밉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싫어. 내가 왜?"

벤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상대였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상황이


나빴다. 그럴 여유도 없었고.

"헤일런은.. 너와 사이좋은 사업 파트너가 아니었나?"


"그랬지. 하지만 죽어도 별로 상관은 없어. 더군다나 요새는 의견충돌도 좀 있어서. 그러니까
원하면 어디 제대로 부탁해봐. 성의있게. 내가 그럴마음이 들도록 보다 정중하게."
"......"
"에이 싫으면 관두던가. 아쉬운건 너지 내가 아냐."

이전의 벤이 그러하듯 칼튼 역시 다른 이의 목숨을 벌레처럼 하찮게 여겼다.


칼튼은 이제 어쩔꺼냐는 듯 삐딱하게 서서 그를 내려다 보았다. 말이야 그렇게 하면서도 벤이
굽힐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듯 했다. 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굽혔다.
두 다리가 바닥에 닿고 머리가 숙여졌다.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엔 자존심이 필요 없었다.

"…살려줘."
"응?"
"살려줘. 부탁이니까, 헤일런을 살려줘.."

생에 처음 노예처럼 자신을 낮췄지만 비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순간엔 수치도


모욕감도 없었다.
중요한건 제 자존심도 체면도 아니었다. 단 하나.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벤은 점점
더 절박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허, 진심이야 이거?"


"그래. 나는 네게 지금 자비를 구걸하는 거다."

설마하니 정말로 빌줄은 몰랐는지 놀란듯 당황한 얼굴로 벤을 내려다 보던 칼튼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자비를 구하는 것 치곤 태도가 당당하긴 했지만 벤이 무릎을 꿇었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신선한 것이었다.

"하하 으하하하하!! 사람 목숨을 벌레처럼 알던 전쟁광이 별일이네. 재미있어. 이왕이면 더


빌어봐. 더. 아, 시키면 신발도 핥냐?"

여차하면 머리라도 짓밟을 기세였다. 그의 신이 난 웃음소리에 벤은 빠득, 이를 갈았고


뒤따라 칼튼의 일행과 쟈엘이 질린 얼굴을 했다.

"하여간 저거 성질머리 하고는. 벤 하일즈 대령을 두고 잘도 저러네. 내가 보기에 여기서


최고 악당은 분명 저놈이야."
"아직 원한이 있는 겁니다. 말로는 이미 다 끝난 일이라지만 사람이 좀 쪼잔해야지."
"...심하군."

벤은 부들부들 떨다 바닥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었다. 웃음은 연신 이어졌다. 한시가 급한데


저 망할놈은 제 약점을 쥐고 그저 놀려먹을 생각으로 보였다.
지금 그런게 문제가 아닌데..!

아무래도 과거에 벤이 그의 지하굴을 습격해 수하들을 죽이고 그가 아끼던 수인족을 해쳤던


일에 아직 원한이 남은 모양이다.
치사하고 졸렬하지만 아쉬운건 어디까지나 벤 쪽이었다. 불안함에 안절부절 못하던 벤이
사나운 눈으로 칼튼을 노려보았다.

"뭘 원하지? 원하는건 다 하겠다. 그래. 내 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지. 그럼 남은


한쪽도 뽑아 줄테니.."
"거참 이해가 안되네. 헤일런은 왜 살리려는 건데? 보아하니 보복 때문은 아닌거 같고. 사실
그는 네게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정말로 남은 눈 한쪽 마저 뽑아 주려던 벤이 그 질문엔 조금 머뭇거렸다.

헤일런..은 내게.
내게...

목구멍 끝에 한마디가 걸렸다.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웠다.


둘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 와중에 떠오른건 때때로 제게 주인이라
불러달라던 헤일런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또 다시 거부하고 외면하기엔 그가 심장을 내주던
순간이 망설임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벤은 이내 모든걸 내려놓은 얼굴로 말했다.

"...주인."

응? 칼튼이 다시 되물었다.

"내 주인이야. 그러니 그를 살려줘.."

이미 헤일런의 죽음을 당당히 바라보지 못한것 부터가 계획에 어긋난 일이다. 벤은 그제야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스스로 내던졌다.
폭력이나 협박따위에 굴복한 것이 아니다. 이건 온전한 그의 선택이었다.

헤일런을 동등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지만 그렇다 해도 그가 수인족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이 노예가 되어 밑바닥으로 떨어지면 그만이다.
목숨을 건 그의 고백이 철벽같던 벤의 마음을 무너트렸다. 남은 하나마저 버리자 이제 자신이
소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공허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감정은 애정일까? 제 감정인데도 확실한건 아무것도 없다. 그게 라엘에게 품었던 감정과


달랐다.
자신이 당한 치욕을 잊은건 아니다. 다만 죽음앞에 남은게 절박함 뿐이었다. 다른건 전부
부질 없어졌다.

원하는건 명료하다. 그가 살아있는것.


벤의 손이 헤일런의 뺨을 천천히 매만졌다. 검은머리. 눈가의 점. 이 애착이 단순히
익숙함에서 왔다해도 상관없었다.

하, 헤일런 너는 알까. 내가 네놈을 위해 원수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한걸. 다른


누구도 아닌 널 위해. 그건 감사하고 기뻐해도 좋았다.

"흐응. 뭐 눈은 필요없고 뭐든 다하겠다는 말 그거나 지켜. 그리고 치료라면 아까 했으니까


나머지는 닥터가 알아서 할거야."
헤일런을 살피는척 이미 상처를 치료해 놓고 벤이 초조해 하는 모습을 즐겼다는 것이다.
악랄하게도.
후드를 눌러쓴 칼튼의 수하가 눈치를 보다 헤일런의 몸을 살폈다.
벤은 뒤늦게야 자신이 속았다는걸 알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엇보다 사소한 일에
일일히 분노하기엔 정신적으로 지쳐버렸다.

"..그런말 함부로 하는거 아닌데."

금발의 남자가 언뜻 그런말을 해왔지만 당장에 벤은 헤일런을 살리는 것 외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 完 -->
                             

칼튼의 뛰어난 의사덕에 헤일런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적절한 시기의 치료와 수인화를
막기위해 먹었던 넬의 약이 가장 치명적이었던 독을 중화시키는 작용을 한것이다.
하지만 목숨만 건졌다 뿐이었지 의식까지 돌아오지는 않았다.

멍하니 기대어 있던 벤은 눈앞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검은머리에 단정한 눈썹.
콧대. 입술.
언제나 봐오던 익숙한 모습인데도 이상하게 익숙하지가 않았다.

"일어나."

맥없는 목소리가 허공을 부유하다 이내 사그러졌다. "헤일런." 이름을 불렀지만 그가 눈을 떠


벤을 바라봐 오는 일은 없었다.
하루. 그리고 또 하루. 기약없는 기다림이 계속 이어졌다.

〈完結〉

컴컴한 어둠이 의식을 집어삼키고 헤일런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의 과거.

헤일런은 자신의 부모를 몰랐다. 태어났을땐 푸른호수가 있던 한적한 숲이었다.


어릴적의 그는 자신이 다른 수인족과 다르다는 사실을 크게 인지하지 못했다. 귀를 감추고
꼬리를 감추고. 가르침도 없이 얼음을 다루었지만 수인족이라면 누구나나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능을 가진 수인족은 제국내 굉장히 희귀한 경우였고, 오래지 않아 그것을 인간에게
들킨 헤일런은 황족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그는 곧 황궁으로 끌려와야 했지만 황궁에서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나쁘지 않았다.


원체 환경에 잘 적응하는 성격이기도 했고 대우도 좋은편이라 불만이랄게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헤일런은 아름다운 정원에서 아주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다.

큰 키에. 검은 제복. 허리에서 흔들리는 화사한 은발.


예쁜 얼굴에 비틀린 웃음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요요한 자수정빛 눈동자엔 상대를 내리보는 오만함이 서렸지만 그 또한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타인을 짓밟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리라.

늘 나무 위에서 적적히 지내던 헤일런의 눈에 처음으로 이채가 서렸다. 바스락. 자신쪽을


돌아보며 검을 세우는 그에게 헤일런이 입을 열었다.

[...안녕?]

대뜸 이어진 인사에 예쁜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헤일런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것이 둘의 첫만남이었다.

이후 자신이 수인족임을 들키기 전까지는 나름 즐거웠던 과거.


그래서 당시로 돌아가고 싶은가 묻는다면 헤일런은 단호히 말할 수 있었다.

-아니.

증오를 받더라도 헤일런은 지금이 좋았다. 그의 옆자리가 허락되고 그와 맞닿을수 있는.


설사 그로인해 죽음을 맞는다 해도 변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 *

계절이 바뀌었다. 축축히 젖은 흙냄새.


타닥 탁. 예민한 청각에 소리가 잡혔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섞여 들렸다.

환한 빛에 못이겨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을 때 헤일런은 아주 긴긴 잠을 자고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득하고 먼. 때문에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그가 환상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반짝이는 은발. 헤일런의 코앞에서 반쯤 엎드린채 곤히 숨을 내쉬는건 분명 벤이었다.
숨소리에 따라 솟아오른 등이 높이 솟았다 가라 앉았다.

헤일런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뻑뻑한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다 반쯤 몸을 일으켜


앉았다.
녹이슨 쇠처럼 움직이는게 여간 힘이 든게 아니었지만 헤일런은 천천히 팔을 뻗어 그의
머리위에 손을 얹었다.

환상이어도 좋았다.
부드러운 감촉에 헤일런이 한번. 그리고 엎드려 있던 벤이 한번 움찔 어깨를 들썩였다.
놀란듯 그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
"......"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먼저 입을 떼는 이는 없었다. 고요한 정적. 타닥 탁. 경쾌하게


쏟아지는 빗줄기.

헤일런은 습관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자줏빛 눈동자와 그와 색이 다른 푸른 눈동자가 정처없이 흔들렸다.
흔들리고 또 흔들리고. 이윽고 하얗고 매끄러운 뺨위로 투명한 물줄기가 주륵 흘러내렸다.

아. 나직한 탄성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무표정한 얼굴.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 놀랍게도 벤은 그를 보며 울고 있었다.


헤일런은 이조차 현실감이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먼저 움직인 것은 벤쪽이었다. 두 팔이 힘있게 헤일런을 끌어당겼다.

그대로 그의 품에 안긴 헤일런은 멍한 정신으로 눈꺼풀만 내리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젖은


숨소리가 목덜미에 닿았다. 어깨부근이 축축히 젖어갔다.

그렇게 얼마를 끌어안겨 있었을까.

"....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헤일런은 청각을 곤두세웠다. 그가 집중하자 벤이 다시 한번 말했다. 조금전 보다 크고
명확해진 소리로.

"..주인님."
"!"
심장이 덜컹 떨어질 만큼 헤일런은 크게 놀랐다. 귓가의 울림이 이명처럼 번졌다. 맞닿은
체온은 따듯한데 상황은 점점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키길
반복하는 헤일런에게 벤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정해. 네가 이겼어."
"......"
"정신을 차리고 몇번이고 목을 부러트리려 했는데, 도저히 죽일수가 없었다..그게 안됐어.
안되더라고."

둘러진 팔이 으스러질듯 헤일런을 조여왔다.


이건 꿈일까. 현실일까.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낸 망상일까. 그전에 사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조차 확신이 없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뜨거운 피가 혈관을 타고 올라 심장이 제 의지와 다르게 뒤죽박죽 엉망으로 날뛰었다. 쿵.
쿵. 이런 감각은 또 지나치게 현실감 있는데.

헤일런은 머뭇 거리다 그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희고 아름다운 얼굴. 시린 무표정 위로


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유리창을 가로 지르는 빗물처럼. 왜 울고 있는지 도무지 표정이
읽히지가 않았다. 그러나 보고 있는 내내 가슴이 지끈거렸다. 애잔했다.
그가 슬픔을 알리 없는데 그 감정이 자신에게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주인이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전부 가져. 몸도 마음도. 다 줄테니까."

무미건조하게 이어진 말에 그의 눈가를 닦아주려던 손이 우뚝 허공에 멈춰섰다.


헤일런은 그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러다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가 부터 의심이 되었다.

"다시."
"......"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십시오. 방금 제게 뭐라고.."

잠겨버린 목소리에 큼 목을 가다듬고 시선을 올렸다.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말들이라 헤일런은 숨을 죽였다. 믿기지가 않았다. 연이은 충격에
머리가 백지처럼 하얗게 비어갔다.

그에 반해 벤은 비교적 담담한 시선으로 헤일런을 내려보았다. 손이 맞잡혔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매끄러운 은발이 동선을 따라 미끄러져 내렸다. 의아해 하는 사이 그의
입술이 곧 헤일런의 손등위에 깃털처럼 내려 앉았다. 경애를 뜻하는 입맞춤 이었다.

..

"주인. 이젠 네가 내 주인이다. 헤일런."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결말이라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저지른 죄들. 아니 그 이전에
그와의 사이엔 메꿀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죽음외엔 답이 없을 관계.
그가 고개를 들었음에도 크게 뜨인 검은눈엔 아직 혼란이 채 가시지 않았다. 헤일런은
마른침을 삼켰다.
입술이 닿았던 손등이 불에 데인듯 뜨거웠다. 심장이 어수선한 가운데 그의 목소리만이
선명히 들렸다.
자신이 그의 주인이라고. 하지만 몸에 밴 오만함과 귀족 특유의 고고함은 여전해서
아랫사람이 아닌 윗사람에게 존중받는 기분이었다.

그는 전에 없이 헤일런을 똑바로 직시했다. 경멸과 혐오대신 자리한건 그에게 바라본적 없는


온기였다.

하...하하.
헤일런은 웃었다. 현실치고는 지나치게 달콤했고 꿈이라면 다신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벤."

소리내어 웃던 헤일런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그가 한껏 젖어든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상했던 증오는 없었다. 그의 변화가 새삼 연민이나 죄책감에서 비롯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벤 하일즈."
"그래. 듣고있으니 말해."

잡히지 않은 다른 손은 벤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헤일런은 손가락에 휘감기는 긴 머리카락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달빛이 녹아든 아름다운 색이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꿈이건 현실이건 영원히 오지 않을것 같았던 순간인데, 조금쯤은 기대해도 될까?
마주친 시선이 얽혀 들었다. 그리고..

쏴아아아,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요란해졌다.


그날. 길고 긴 잠에서 깨어난 헤일런의 세계는 이전과 달랐다.

진실로 모든것이 뒤바뀐 날이었다.

-뒤바뀐 나날 마침-

<-- 외전 -->
                             
02、그들의 사정.
“…….”
“…….”

하일즈가의 장남 세버트와 차남 록시는 예상치 못한 인물에 바짝 얼어붙어 창백한 얼굴로


눈동자만 굴렸다.
그들의 시선이 닿아있는 것은 식탁에 앉아 우아하게 고기를 썰고 있는 은발의 미인. 벤
하일즈.
이제 더는 볼일 없을거라 생각했던 그들의 무서운 동생이었다.

대령 직에서 쫓겨남은 물론 황족을 시해 죄로 노예로 전락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설마하니


그가 버젓히 자신들의 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뭐야, 약속이 다르지 않나. 분명 도와만주면 자신들을 보호해 준다고 해놓고.


겁 많은 형제는 자리에 있지도 않은 지하굴의 칼튼을 원망하며 테이블 아래에서 다리를 덜덜
떨었다.

이 숨 막히는 공기. 익숙한 압박감.


초식 동물인 그들은 눈앞의 벤이 지루해서 하품이라도 할라치면 과거처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여야만 했다. 견디다 못한 두 형제는 벤 대신 백작 위를 물려받은 제 여동생에게
눈짓으로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다.
그나마 셋 중 가장 강단 있는 사람은 셀리아 그녀였기 때문이다.

오라비의 자존심 같은 건 무시무시한 벤 앞에 다 접어뒀다.

-살려줘! 리아. 벤이 우릴 다 죽일 거야. 난 오체분시되기 싫어.

첫째 세버트의 절절한 마음속 외침이었다.

-쫓아내줘 제발!

이것은 둘째 록시의 우는 소리.

하지만 당황하기는 넷째 셀리아 역시 마찬가지 였다. 벤과 몹시도 닮은 외양으로 눈살을


찌푸리던 셀리아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제가 초대한 사람은 지하굴의 칼튼인데, 오라버니. 당신이 왜 여기에 있습니까?”

경계가 짙게 묻어나는 음성에 벤은 나이프 질을 잠시 멈추고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아. 고용주 그 놈이라면 금발하고 떡치기 바빠서 내가 대신 왔다.”


“예?”
“요새 칼튼놈과 일을 하나 같이 하는 중인데. 필요에 따라선 내가 이렇게 움직이기도 하지.
마침 상대는 내 형제들이기도 하고.”
“…….”
“그나저나 오랜만인 것 치곤 표정들이 안 좋군? 특히 리아. 버르장머리가 굉장히 나빠졌어.
형님들에게 맡겼더니 교육이 부족했던 모양이야.”

접시를 나이프로 긋자마자 챙 하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유리가 반으로 깨끗하게 갈렸다.

“이런. 힘이 너무 과했나.”

대놓고 이어진 무력시위에 형제둘이 시퍼렇게 질려 오들오들 떨었고 셀리아는 불쾌한 듯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흠, 순간 벤의 날카로운 나이프가 손위에서 빙글빙글 돌다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행동에
세버트와 록시는 헉 비명성을 내질렀고 셀리아는 미처 대응조차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벤.”

우뚝.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누군가의 목소리에 벤의 나이프가 셀리아의 눈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추었다. 믿을 수 없지만 정말로 그 한마디에 벤의 행동이 멎은 것이다. 아쉬운듯 짧게 혀를
찬 벤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반듯한 검은 정장에 신사모를 쓴, 나른하고 고요한 분위기의 청년이 서있었다. 먼저
입을 뗀 건 벤쪽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늦을 것 같다고 하더니만.”


“심기가 불편한 상태로 혼자 보냈다가는 벤의 형제들이 위험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안 죽여.”
“예. 대신 신체 하나 정돈 망가트리셨겠지요.”
“죽이지만 않으면 된 거지. 잔소리는.”

굉장히 무서운 대화가 오갔다. 벤은 상대를 헤일런이라고 불렀다.


록시와 세버트는 헤일런의 얼굴을 잘 몰랐다. 한때 수배지가 이곳저곳에 붙긴 했지만 관심도
없었고. 그래도 이름정도는 알았다. 그리고 그가 벤을 노예로 거두었다는 것도.
하지만 벤의 성격상 평소 경멸하던 수인족에게 순종할일은 없을 터.
그래서 형제는 벤이 아예 망가지거나 혹은 그가 주인을 죽인 후 탈주 정도를 예상했다. -그중
탈주 가설이 그럴듯 해지자 불안함을 느낀 둘은 한동안 밤잠을 설치고 호위를 대폭 늘였다. -
어쨌거나 생각만큼 분위기는 살벌하지 않았다. 그러나 뒤이어 헤일런이 벤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땐 경악한 나머지 귀족으로서의 체면도 잊은 채 입을 벌려야만 했다. 당연히
손목을 잘라내 피를 볼 거란 예상과 달리 벤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손길을 받아 들였던
탓이었다. 하물며 인간도 아닌 수인족의.
“헉.”

맙소사. 자신들이 지금 뭘 보고 있는 건가. 멍하니 눈도 깜빡이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검은머리의 청년. 헤일런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레이디 셀리아. 그리고 두 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헤일런 입니다.”

이번엔 벤이 헤일런의 허리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덧붙였다.

“내 주인님이지.”

그 태연자악함엔 잠시 굳어있던 셀리아마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형제들은 먹는 것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앞에있는건 무려 벤


하일즈다. 자신들의 배신에 분노할 악랄하고 자비 없는 전쟁광.
그들은 어릴 때부터 벤을 상대하는 것이 무섭고 불편했다. 딱히 해코지를 받은 기억은 없지만
그의 잔혹함 때문인지 항상 동생이라기 보단 윗사람을 대하는 기분이었다. 벤은 얼굴만
예뻤지 심성은 그렇지가 않았다.
저녁만찬은 여느 때보다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형제들은 힐끗 눈치를 살폈다. 수인족과의
겸상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무례하다고 꾸짖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자연스레 벤의 옆자리에 앉은 헤일런은 좌중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식사를 했다. 예절에는
조금의 흠도 없었다. 오히려 흐트러짐 없는 자세나 손짓 하나하나가 귀족보다 더 우아했다.

그런데다 보통의 수인족과 다르게 귀와 꼬리가 보이지 않아 몰랐다면 당연히 인간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외양. 위화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누가 주인이라고?”
“아….”

벤의 옆에서 이것저것 시중을 들어주던 헤일런이 순간 멈칫했다. 스스로도 의식을 못했던


모양인지 와인을 따라주던 자신의 손을 지그시 바라본다. 마찬가지로 당연히 시중을 받던
벤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쪽이 주인 맞아. 설마하니 형님. 내 주인이 수인족이라 무시하는 건 아니시겠지?”


“아, 아니.”
“그럼 내가 노예라는걸 이런 식으로 확인 받고 싶었던 거라던 지.”
점차 서늘해지는 목소리에 형제 둘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장남 세버트는 생각했다. 저런 무서운 노예는 듣도 보도 못했다고.
차남 록시도 생각했다. 벤의 손에든 나이프와 포크가 너무 위협적이라고.
겁에 질린 두 초식동물의 반응을 즐기듯 벤의 입 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는 타인을
괴롭히는데서 희열을 느끼는 가학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헤일런이
한숨을 쉬며 벤의 뺨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

입술이 맞닿는 간지러운 소리에 자색과 그와 색이 다른 푸른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그를


보며 헤일런이 나른하게 웃었다.
분명 옷차림이나 생김새는 더 없이 단정하고 반듯한 신사였는데 웃는 얼굴은 그와 달리
색기가 흘러 넘쳤다. 검은 눈동자 바로 밑에 찍힌 눈물점이 그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벤. 저러다 두 분 숨 넘어 가겠습니다. 심술은 이쯤으로 하시죠.”


“…이게 단가? 애도 아니고.”
“형제분들 앞에서 이 이상의 진도를 나갈 수는 없으니까요.”
“별로. 난 상관없는데.”

벤이 마찬가지로 웃으며 얇고 긴 손가락으로 헤일런의 가슴팍을 쓸었다. 이쪽은 헤일런과 또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좀 더 검고 진득한 웃음. 제 동생에게 쓸 만은 아니지만 닳고 닳은
창부에게서 볼 법한 퇴폐적인 분위기가 배어났다. 어릴 때부터 벤은 저런 식으로 제 외모를
이용해 사람 마음을 이용하는데 탁월하긴 했다.
하지만 지켜보는 두 명의 형제와 여동생에겐 충격과 공포의 연속이었다. 지금 저거 유혹이지?
갖고 놀려는 게 아니라?
알게 모르게 분위기가 끈적끈적하게 흘러가자 유일한 여성인 셀리아가 크흠, 기침을 했다.

“헤일런. 사업 얘기부터 했으면 좋겠습니다만.”


“아. 실례했습니다.”

뒤늦게야 용건이 떠오른 헤일런은 칼튼에게 전해 받은 이야기를 셀리아에게 전해주었다.


마지막으로 한 장의 계약서까지 건네받은 셀리아가 다시 식사를 하려다 짙은 보랏빛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그런데 …뭔가 좀 변한 듯 하군요.”


“예. 저와 벤의 세상이 뒤바뀌었거든요.”
“?”

헤일런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묘한 미소만 흘리곤 말았다.


노예가 되었다고 하지만 벤은 변한 게 없었다. 이전과 같이 포악했고 제 형제들을 발밑으로
내려 보는 오만함도 그대로였다. 변한게 있다면 헤일런과 벤의 관계. 그 뿐이었다. 그렇게
식사시간은 언제 뭘 먹었는지 모를 정도로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 끝이 났다. 벤에게 적의가
남다른 셀리아 조차 말문이 막혀 할말이 없었다.
칼튼의 전언과 식사가 용건의 전부였는지 둘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형제들은 내심 안도하며 그 뒤를 따랐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해를 끼치려고 온건 아닙니다. 벤이 아닌 척 해도 형제분들을 많이 보고 싶어 했어서.”


“날 배신해 놓고 얼마나 잘 사나 그게 궁금했지. 물론 내 쪽도 부족함 없이 잘 살고 있다고
보여주는건 덤.”

그보다는 그저 화풀이를 하러 온 것 같다만.


정이 있던 없건 동생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것은 사실이라 두 형제는 숨을 삼켰다. 성격이 안
닮았다 뿐이지 기본적인 성향은 벤과 빼다 박은 두 형제에게 사실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보복을 당할까 무섭기만 할 뿐이지. 다행히 아직까지는 칼을 빼어들 생각은 없어보였다.

“셀리아.”

벤의 부름에 셀리아가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담담한 보랏빛 눈동자에 벤은 가볍게


빈정거렸다.

“안타깝지만 네 저주는 반만 통한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회와 자책은 모르겠지만.”


“…….”

벤은 헤일런의 손을 끌어 자신의 손가락에 얽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상실감은 이제 좀 알 것 같거든."

씩 이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은 여전히 오만하다. 그러나 그녀가 보았던 벤의 모습 중 가장


인간적이기도 했다. 헤일런을 보는 자줏빛 눈동자에는 그에게 결코 없으리라 생각했던
감정들이 묻어났다. 그것이 보편적인 따듯하고 간지러운 종류의 애정은 아니었지만. 셀리아는
나름 납득했다.

그렇군. 오라버니 당신에게도 드디어 소중한 것이 생긴 모양이야. 죽는 그 순간까지 홀로


고고히 살아갈 폭군이라 생각했는데 단 한명에게 만큼은 자신의 곁을 허락한 모양이다.
그녀는 벤에 대한 인간성에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이 조그만 변화가 그의 많은 것을
바뀌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
한편. 놀라면서도 흡족해 하던 셀리아와 다르게 두 명의 형제는 서로를 붙잡고 공포감에 몸을
떨었다.

“오 맙소사. 세상이 멸망할 징조인가 봐. 나 방금 소름 돋았어.”


“혀, 형님. 쟤 불안하게 왜 저렇게 웃고 간답니까?
조만간 칼 꽂으러 온다고 경고한 거 맞죠?”
“보면 몰라? 당장 호위부터 늘리자.”
쯧. 셀리아는 한심함에 혀를 차며 두 오라비를 밀치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벤의 뒤바뀐
처지에 대한 공포와 충격은 남은 형제의 몫이었다.

그리고.

“…….”
“…….”

늑대 수인족 윌로스와 덥수룩한 머리로 눈을 가린 호랑이 수인족 넬은 눈앞에 보이는 기괴한


장면에 말문이 턱 막혔다. 헤일런이 의식을 찾으면서 벤과의 사이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 것은
알았다. 하지만.

“나 무서워. 저번에는 저 성질 못된 노예가 대장한테 존댓말 쓰는 거 까지 봤어.”


“…그거 환청 아니었습니까?”
“응. 아냐. 현실 부정하고 싶은 건 아는데 진짜야.”

수인화한 헤일런을 끌어안고 낮잠을 즐기고 있는 은발의 미인은 전에 없이 태평해 보였다.


잠시 외출을 다녀온 후부턴 저렇게 꼭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최근엔 계속 그랬다. 곁에 없으면 잠도 못 이루고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신경까지 곤두세우고.
달큰한 애정표현까진 아니지만 아무리 봐도 수인족이라면 경멸하고 하찮게 여기던 그 벤을
상상할 수가 없다. 물론 넬이나 윌로스에 대한 태도는 그대로지만.
윌로스는 불현듯 기분이 나빠져서 뒤로 늘어진 꼬리를 홱 돌려 쳤다.

“저는 솔직히 아직도 벤 하일즈라는 인간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대장을 죽이려 했던
것도 그렇고.”
“나도 쟤 별로. 근데 우리가 끼어들 틈이 없잖아.”

어깨를 으쓱이는 넬의 말에 윌로스를 침묵을 지켰다. 옳은 말이다. 애정과 증오로 점철된


감정도 결국 당사자들 간의 이야기. 그리고 안그런척 자기 멋대로인 헤일런이 자신들의
조언을 귀담아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본인도 저런 벤의 집착을 꽤 즐기고 있었고.

“그래도 제 눈앞에서는 저런 낯선 모습은 자제해 주었으면 하는군요. 적응이 안돼서.”


“그러게.”

넬이 무미건조한 투로 동의했다. 둘의 변화는 왜 지켜보는 자들이 더 곤욕스러운 진 도통


모를일이었다.
 45 편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ㅅ;! 오랜만이에여 ㅜㅜ! 이제 뒤.날 외전은 다 썼습니다. 편집도 다
끝났습니다. 오타만 한두번 더 살펴보고 곧 공지와 함께 올게요! 다만....아니에여.
다음 공지에 말씀드릴게옄 ㅜㅋㅋ

**후원쿠폰 주신 소중한돼지님 어마어마해님 오크녀님 사과냥이님 만인의여신님 쑤운님


rwitch 님 초록문지기님 비아테님 은으찌님 --님 홋야님 사랑히님 1000 의님
XyD 님 라야소류나님 노란곰탱푸우님 이루어지다님 페인레비님 응뎅뿡님 이드그라슈느님
Ksein 님 모두 감사드려요! 〉〈 추천*쿠폰* 코멘 주신분들도 전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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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마지막 편이니 추천 꾹꾹! 감상글도 남겨주시면 더 기쁠것
같아옄ㅋㅋ// 후기는 다음편에 남길게요. 코멘에 특수문자를 남겨주시면 리코멘 해드릴게요!
혹시 궁금한거 있으시면 같이 해주세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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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저는 언제나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소설을 씁니다. 헤일런과 벤의 마지막도 제 기준의
이상적인 형태에요ㅎㅎ 그래서 그 끝은 여러분이 바라시는것과 다소 다를수 있습니다. 제
취향이 모두의 취향일수는 없으니까요.
p. 계속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우리 헤구 안죽어여ㅜㅜㅋㅋ 완결과 그 후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40 편을 인내했는데. 숨이 멎었다고 하기 전까진 살아있는겁니다(!) 쨌든, 드디어 이소설도
마지막편만 남겨두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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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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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추천&쿠폰&코멘&후원쿠폰 감사합니다. 가시기 전에는 추천 꾹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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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가시기 전엔 추천 꾹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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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p. 저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t; 이제 마지막 에피소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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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 가시기 전에는 추천 꾹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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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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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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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ㅎㅎㅎ 늦었지만 여러분도 복 많이 받으세여!
후원 쿠폰도 감사합니닼〉〈♥
p. 아... 그리고 완결은 사실 얼마 안 남았어옄ㅋㅋㅋ 한 10 편 이내? 에피소드가 생각외로
길어지지 않으면 대충 40~50 편 사이에 완결이 나지 않을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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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한편더 올렸는뎈 그냥 가시면 아니되어여ㅋㅋㅋ!
p. 벤의 눈동자는 자주색과 푸른색입니다. 한쪽은 의안이구요.
칼튼과 벤이라..S 와 S 의 만남인가옄ㅋㅋ 얘네는 이 성격을 유지하려면 수직관계로 가면
큰일나고 배틀로 가야할듯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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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벤 흑역사 제조중__ㅋㅋ 벤이 잘생겼다 한 저 남자가 누군지는 아시겠져?ㅋㅋ
p. 방화는 안됩니닼ㅋㅋ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허규, 후원쿠폰 많이 주셔서 ㄷㄷ..


무튼 감사드리고, 〉〈모두 설 잘 보내세요!, 가시기 전엔 추천 꾹꾹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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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예정했던건 이게 아니지만 다음으로 미뤄야겠어여(..) 가시기 전엔 추천꾹꾹〉ㅡ
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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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
가시기 전에는 추천 꾹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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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무기력증이ㅋㅋㅋ...한편 쓰는게 힘드네옄/ 완결은 이미 우울한 나날부터 정해놨는데
갑자기 손가락이 느려져 가지고ㅋㅋㅋ

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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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여러분벤을장애인으로만들지맙시다....x22222
이번편 쓰다가 코멘보고 당황ㅋㅋ 저렇게까지 할 예정은 없던지라ㅋㅋ..
p. 소중한 돼지님 항상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다른분들도 감사해요!
추천&코멘&쿠폰 다 사랑해옄:) 오타는 오후에나 수정할게옄// 가시기 전엔 추천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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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열감기 우습게 봤다가 (마음&몸)고생, 하는 둘(..)
-큽, 이번편에 열감기 파트는 다 끝내고 싶었는데 ..ㅜㅡㅜ.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오타는 내일 수정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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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헤리둥절&벤리둥절(...)
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p. 아차... 조이님 이북은 부크크에서 팔긴 하는데 현재는 2 개밖에 없습니다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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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추천*코멘*쿠폰,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ㅁ;!!
p. 재미있게 봐주시는건 좋지만 한달결제 노놐ㅋㅋㅋㅋ, 날씨 많이 춥져 ㅜㅜ 여러분도 감기
조심하세요!
p. yemara 님 주신 그림 작품설정과 뜰에 올려두었습니다! 감사해여! 넘 이뻐옄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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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
나머지는 자정에? 혹은 내일 봐옄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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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ㅁ;!**
p. 결말에 대해선 노코멘트 하겠씁니닼(;!)
근데 코멘에 왜케 눙물이 많졐ㅋㅋㅋ 지난편은 살살 했는데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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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 나름 쉬어가는 타임 입니다(:

지난편은 말씀해 주신것처럼 구르는건 벤인데 짠내나는건 헤일런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도 몇분은 알아주셨군요! (;ㅁ;!)
아, 그리고 낙인위치 ㅋㅋㅋ 감사합니닼ㅋㅋ!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수정했습니다!
혹시 수정안된 부분 있으면 알려주세요!
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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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후원쿠폰도 감사해여!
#저도 봐주시는 모든분들 애정해옄♡:) 가시기 전엔 추천 꾹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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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쓰면서 숨막혀 보긴 처음이네옄): 다음편까지만 참읍시다!
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더보기에 작품설정 보시면 벤이랑 헤일런 캐릭터 선물받은게
있어영! 〉_귀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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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쿠폰 주셨다니 주섬주섬 열심히 써왔어영..
p. 아직 씬은 끝나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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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p. 다음편 수간주의! 별로 취향은 아니지만 설정상(..) 근데 낯설어서 좀 짧을거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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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드디어 잡혔다!!! ㅜㅜ 헤일런 찾으신분 있는데 이번편에 나와서 어쩝니까ㅜ

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후원쿠폰도 감사합니다! ㅜㅜ!


p. 경고 **다음편 부터는 심약자 노약자 임산부 금지ㅋㅋ, 쿠크심장님들은 씬 끝나고
보세옄ㅋㅋ** 제 기준으론 좀 하드할예정. 지금까지는 사실 헤일런하고 딱히 했다고 할만한
씬은 없지 않았나옄?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스포가 될것 같아 그냥 갑니다.): 굿밤// 가시기
전엔 추천〉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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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v;
p. 우날을 보시면 좀 더 상황이 잘 이해가 되긴 하죠ㅋㅋ
p. 저는 결말이 일공일수가 되면 서브라는건 사실 의미가 없어서 기재를 안해옄//
그런고로 이어지는건 하납니다. 그래서 쟈엘이 서브인가 하면은..써봐야지 알것 같아옄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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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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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벤의 도주는 의외로 짧아영. 뒤바뀐 나날이 총 1,2,3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시 잡혀
들어가면서 2 장 돌입합니다.
지난편은 여러분이 코멘을 다시 달아주셔서 위로가 되었어옄ㅋㅋ
그나저나 이거때문에 결제하지 마세옄ㅠㅋㅋ 저의 연재일은 일정치 못하옄ㅜ 부디 다른거
보시면서 겸사겸사 보시길ㅋㅋㅋ
p. 추천&코멘&후원쿠폰 감사합니다. ㅜ!
p. 칼튼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은 [우울한 나날] 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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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어흐으으윽... 1 월 1 일부터 이런 대참사가 ㅠㅠㅠ
핸드폰으로 오타 수정 하다가 화면이 작아서 그 옆의 삭제를 눌러버렸어영...이게 아닌데
싶지만 오늘따라 빨리 넘어가버린 화면. 내 코멘트들 ㅠㅠ
으헝....
그래도 여러분은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그렁그렁..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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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크,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한편 더 가지고 왔어영):ㅅ;!
추천&코멘&쿠폰 다 감사합니다. 〉〈 그래도 읽을만 하신거 같아 다행이에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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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추천&쿠폰&코멘 감사합니다!
몰랐는데 한분이 후원쿠폰을 굉장히 많이 주셨네영, 드릴게 다음편밖에 없네옄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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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헤일런은 깨달음을 얻었다.


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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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랜섬웨어라고 아시나옄ㅋㅋㅋ.. 확장자가 vvv 로 바뀌어서 텍스트나 사진등등이 안열리는 건데
제 컴퓨터가 주말에 이거에 병들었습니다. 알약이나 왠만한 백신으론 치료가 안된다네요.
외국바이러스라 한글파일은 영향을 안 받는다고 해서 다른건 괜찮은데..뒤바뀐 나날만 하필
메모장으로 써서 다 날림ㅜㅜ 그래도 앞부분은 조아라에 남아있어서 사실 잃은건 얼마
안되지만 포맷하느라 힘들었네영. 여러분도 조심하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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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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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ㅎㅎ 가시기 전에는 추천 꾹꾹!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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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아직 이쪽 연재는 가끔씩만(...);ㅁ;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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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응?ㅋㅋ 생각보다는 긍정적으로 봐주시는것 같아 다행이네요ㅎㅎ
추천&코멘&쿠폰 감사합니다.
수정은 내일 할게영): p. babe 는 제 소설 아임니다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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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 여기까지가 맛보기 정도네옄/
+ 일단 선작만 해두시고 연재는 소장본작업 끝나고 시작합니다〉
오월동주 버린건 아니에옄ㅋㅋㅋ!
그걸 중심으로 이건 서브로 연재할 계획이긴 한데.. 사실 쓰다가 몰입되는 쪽이 더 연재가
빠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울한 나날을 먼저 끝내고 말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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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 〉〈 일단 맛뵈기만!
쓰다보면 분위기는 늘 바뀌지만, 일단 설정상 밝은 분위기는 아닙니당!ㅁ!
주인수나 주인공이나 모럴 x,
주의사항은 많지만 다 나열하기 힘드므로 보시다가 취향 아니다 싶으시면 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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